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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2.06 서울 도심의 북현무를 거닐다. 북악산 한양도성 나들이 <창의문, 백악마루, 청운대, 숙정문, 말바위>
  2. 2021.11.29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을 거닐다. 평창동~백사실계곡~부암동 늦가을 산책 (평창동 소나무, 응선사, 창의문)
  3. 2018.12.04 시문학의 성지이자 도심 속의 상큼한 언덕, 청운동 윤동주시인의 언덕 ~~~ (윤동주소나무,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4. 2015.11.26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 늦가을 나들이 (숙정문~백악마루~창의문)
  5. 2014.04.09 풍경과 조망이 일품인 서울 도심의 상큼한 명소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서울 도심의 북현무를 거닐다. 북악산 한양도성 나들이 <창의문, 백악마루, 청운대, 숙정문, 말바위>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

북악산(백악산)

▲  북악산(백악산)

말바위에서 바라본 서울도심 북악산 청운대

▲  말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북악산 청운대

 



 

가을이 늦가을로 한참 숙성되어 가던 11월의 첫 무렵, 서울 도심의 북현무(北玄武)인 북
<北岳山, 백악산(白岳山)>을 찾았다.

북악산은 내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구석구석 찾고 있는데, 이
번에는 한양도성이 흐르는 주능선(창의문~말바위)을 복습하기로 했다. 이미 지겹도록 복
습한 곳이지만 돌아서면 또 생각나고 몸살 나게 그리워지니 내 전생이 아마도 북악산 고
양이나 산짐승이었던 모양이다.


 

♠  북악산 창의문~백악마루 구간

▲  창의문(彰義門) - 보물 1,881호

북악산(백악산) 주능선의 서쪽 관문이자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경계에 자리한 창의문은 자
하문고개를 오랫동안 지켜온 성문이다.
성밖 부암동(付岩洞)의 계곡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서울 도심을
둘러싼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의 8개 성문의 하나이자 4소문(小門)의 하나이다. 여기
서 4소문이란 동소문<東小門, 혜화문(惠化門)>과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南
小門, 광희문(光熙門)>, 그리고 창의문으로 혜화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각각 동소문. 서소문,
남소문이라 불렸으나 유독 창의문은 북소문(北小門)이라 불린 적이 거의 없다.

창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닦으면서 조성된 것으로 문의 이름인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1413년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1416년 문을 닫아걸었다. 다만 1422년 군인들의 통로로 사용되었고, 1617년 창덕궁
을 보수할 때 이 문을 통해 석재를 운반했다. 또한 문 북쪽인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지역
에 왕족과 양반사대부들의 별서와 그들이 즐겨 찾던 경승지가 즐비하여 그들의 은밀한 통행로
로 쓰이기도 했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은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으며 역적질을 모의,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
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앞세워 도성에 쳐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른바 인조
반정(仁祖反正)을 저질렀다. 그때 그 반역도당들이 부시고 들어간 문이 바로 창의문이다. 그
래서 문루에는 인조반정을 저지른 작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문이 백성들에게 전격 개방된 것은 1741년이다. 그때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라며 성문을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문루를 다시 세
울 것을 건의해 지금의 문루가 지어졌다.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소문은 왜국 통감부(統
監府)가 만든 성벽처리위원회에서 1908년에 무단 철거하여 정확한 위치조차 아리송하고 동소
문은 왜정 때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지었다. 남소문인 광희문은 성문만 늙었을 뿐, 문루와
성곽은 1970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그에 비해 창의문은 6.25 때도 총탄이 알아서 비켜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1958년에
중수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함을 과시한다. 바로 그런 점이 인정되어 2015년 12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비록 일찌감치 국보와 보물 1호의 지위를 누린 남대문(숭례문), 동
대문(흥인지문)에 비해 다소 늦은 감도 있고 늦게 빛을 본 서글픔도 있지만 역시나 인생은 끝
까지 살아남고 봐야 된다.

▲  창의문에 걸린 인조반정
반역자들의 명단 현판

▲  창의문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
(혹은 닭)과 구름무늬


1960년대 이후 자하문고개를 밀어내고 신작로를 닦았는데, 그 과정에서 문 서쪽 50m 남짓 성
곽이 끊어지게 되었다. 하여 끊어진 반대쪽<현재 윤동주시인의 언덕과 청운공원이 들어서 있
음>
을 애타게 바라보는 인왕산 쪽 성곽이 견우와 직녀를 보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끊어진 구
간은 도로 위에 성벽을 세우지 않는 이상은 복원은 어려우며, 창의문 바로 앞에는 북악산길이
지나가 시야를 제대로 방해한다.

창의문은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문의 모습이라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그만의 매력이자
특징이 2가지가 있다. 그러니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눈여겨 봐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우선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문루 바깥 쪽에 설치된 1쌍의 누혈(漏穴) 장식이 있다. 이것은 연
꽃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성문의 매력을 수식해주고 있으며, 성문 천정에는 화려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봉황(鳳凰) 1쌍이 그려져 있는데 속설에는 봉황이 아닌 닭이라고 한다. 성문 밖 부암
동의 지형이 지네를 닮았다고 해서 비보풍수에 일환으로 그 천적인 닭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
림을 가만히 보면 머리와 목, 날개는 닭을 많이 닮았고, 몸통과 꼬리는 닭과는 거리가 먼 봉
황의 모습 같다.
봉황이 1마리가 아닌 둘이 있는 것을 보면 암수 1쌍일 것이다. 그들 주변으로 와운문(渦雲紋)
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
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하다.

* 창의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산1-1 (창의문로 118)


▲  늦가을에 잠긴 창의문 안쪽(남쪽) 숲길

창의문을 둘러보고 마치 국경 검문소 같은 창의문안내소를 들어서면 북악산(백악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시작되어 방심하기 쉽지만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성곽길은 점차 각박한 모
습을 보인다. 하여 쉬엄쉬엄 가라며 돌고래쉼터와 백악쉼터 등 2곳의 쉼터를 두었다. 가쁜 숨
을 내쉬며 발을 움직여야 되지만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는 초급 코스라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으며, 그 거리도 그리 길지가 않다.


▲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창의문~돌고래쉼터 구간 (백악마루 방향)

▲  돌고래쉼터와 돌고래바위

성곽길이 슬슬 흥분기를 보일 쯤에 돌고래쉼터가 모습을 비춘다. 쉼터 바로 옆에 돌고래처럼
생긴 바위가 누워있어 돌고래쉼터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이름도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닌 북악산 주능선을 개방하고 이곳에 쉼터를 닦으면서 붙인 이름이다.
바위가 돌고래를 닮았다며 거의 주입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내 눈에는 물개
처럼 보인다. 바위 동쪽에는 약간의 틈이 있는데, 거의 입처럼 생겼고 그 위에 눈처럼 보이는
자국도 있다. 가만 보면 물개가 꼬랑지를 흔들며 움직이는 모습 같아 차라리 물개바위라고 했
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에게는 이름을 갈아치울 힘이 없다.

돌고래바위는 통제구역이라 그냥 난간 너머로 보기 바라며, 바위 주변으로 소나무가 그윽하게
운치를 자아낸다. 그런 소나무 사이로 서울 도심이 살짝 바라보인다.


▲  힘차게 흘러가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창의문 방향)
성 안쪽은 종로구 청운동(淸雲洞), 바깥은 부암동 지역이다.

▲  정상을 향해 숨가쁘게 이어지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돌고래쉼터~백악쉼터 구간)

▲  돌고래쉼터~백악쉼터 구간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 평창동 지역, 북악산길,
북한산(삼각산) 향로봉과 비봉능선, 문수봉 등


눈이 시리도록 맑은 푸른 하늘 밑으로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북악산과 북한산(삼
각산)을 빚었고,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은 그 틈에 평창동
과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 부암동 같은 동네를 닦았다.
사진 왼쪽 동네가 홍지동(弘智洞)과 부암동, 신영동이며, 중앙과 오른쪽은 이 땅에 0.1%가 산
다는 평창동(平倉洞)으로 졸부들의 고래등 저택과 고급 빌라가 즐비해 보는 눈이 썩 즐겁지가
않다.


▲  백악마루입구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부암동과 홍지동, 구기동, 평창동 지역과 북악산 북쪽 자락,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창의문에서 백악마루입구 구간 중에서 '돌고래쉼터~백악마루입구' 구간이 가장 경사가 각박하
다. 안그래도 힘든 가파른 길이 여기서 크게 흥분기를 보이는데, 그도 그럴 것이 백악마루에
서 창의문 구간 산세가 거의 급경사를 보이기 때문이다. 하여 산에 대한 자존심을 곱게 접고
천천히 한 발자국씩 딛다 보면 나올 것 같지 않던 백악마루가 알아서 모습을 드러낸다.


▲  북악산 정상 바위 (백악마루)

창의문안내소에서 20여 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342m)에 이르게 된
다. 여기서 마루는 순수 우리말로 정상, 산꼭대기를 뜻하는데,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현장으로 정상 한복판에 백악산 정상 비석과 북악산 옛모습 복원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정상 북쪽에 사람 키보다 2배 남짓 높은 크고 견고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꼭대기가 실질
적인 북악산의 머리이다. 그러니 정상 인증을 하려면 무조건 바위에 올라가기 바란다.

정상 남쪽에는 소나무와 진달래가 우거져 있으며, 정상 바위와 난간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고
사진을 찍어야 된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숨겨진 산길이 있으나 아주 비싼 길이라 출입을 통제
하고 있으며, 난간 너머는 나라의 예민한 구역이니 애써 넘어가지 않도록 한다.
여기서는 북쪽으로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동쪽은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 및 동부 지역, 서
쪽은 부암동과 인왕산, 남쪽으로 서울 도심과 남산, 멀리 관악산(冠岳山)과 호암산까지 두 눈
에 들어와 조망도 일품이다.

천하 최대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아래 두고 굽어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으로 서
울 도심을 둘러싼 뫼 가운데 가장 높고 오랜 세월 서울을 지켜온 북현무로서의 면모와 위엄이
느껴진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북악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27

▲  백악산 정상 표석

▲  북악산 정상부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白岳山)> - 국가 명승 67호
서울 도심 북쪽에 가파르게 솟은 북악산(342m)은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駱山, 낙타산),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남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지키는 4대 산의 하나이다. 이들을 내사산
(內四山)이라 부르는데, 그들 중 북악산이 맏형이며, 낙산은 막내 동생이다.
서울 도심의 지형은 내사산에 감싸인 분지(盆地)로 조선 태조 때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국도
(國都)를 옮기면서 이들 산을 따라 18.2km의 도성(都城)을 구축했다. 그리고 풍수지리에 따라
북악산을 북현무(北玄武)로 하여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삼았으며,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남산을 남주작(南朱雀)으로 삼았다.

북악산의 옛 이름은 백악산으로 서울 도심(종로구, 중구)에서는 어디서든 그가 바라보이는데,
오랫동안 서울을 상징하는 뫼로 남쪽 자락에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닦고, 그
북쪽(현재 청와대)에는 넓게 경복궁 후원을 두었다.
북악산 주능선에는 한양도성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정상 동쪽에는 북문인 숙정문
이 있고, 인왕산과 경계를 이루는 자하문고개에는 창의문(자하문)이 고색의 모습으로 고개 중
턱을 지킨다.
북악산 남쪽 자락인 삼청동(三淸洞)과 청운동(淸雲洞)은 한양도성의 북쪽 변두리로 숲이 무성
했으며, 북악산이 베푼 삼청동계곡과 대은암(大隱巖)계곡, 백운동(白雲洞)계곡, 청송당(聽松
堂)계곡 등이 있었고, 풍경이 아름다워 조선 초기부터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 및 풍류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숙정문 남쪽 주변은 사대부 여인들의 봄꽃놀이 명소로 바쁘게 살았다.
한양도성과 법흥사(法興寺)터, 대은암계곡 바위글씨, 만세동방성수남극 바위글씨 등 여러 문
화유적이 있으며, 북악산 북쪽 자락 백사실계곡에는 백석동천이란 별서(別墅) 유적이 전하고
있다.

북악산은 북쪽으로 북한산(삼각산)과 이어져 있고 숲이 짙어서 예로부터 호랑이가 자주 나타
났다. 그들은 툭하면 궁궐 후원과 북촌까지 침투했는데, 태종(太宗)이 경복궁 후원을 거닐다
가 호랑이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북악산 호랑이는 다른 호랑이와 달리 곶감은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하며, 대신 수진궁(壽進宮)
귀신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하여 인왕산과 북악산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
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왕족의 사당임)

1968년 1.21사태 이후 굳게 닫힌 북악산은 북악산길과 주택가와 접한 일부 산자락만 겨우 출
입이 가능했으나 2000년대 초반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이 개방되었고, 2006년 4월 1일 홍련사
에서 숙정문, 촛대바위 구간이 해방되면서 굳게 잠겼던 북악산 주능선의 자물쇠가 드디어 열
리기 시작했다.
하여 2007년 4월 5일 말바위에서 창의문까지 주능선 구간(4.3km)이 싹 해방되었으며, 2009년
에 북쪽 능선의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이 열렸고, 삼청공원~말바위 구간 등이 해방되었다가
2020년 11월 '북악산길~청운대쉼터','북악산길~곡장' 구간이 추가로 열렸다. 그리고 2022년
봄에 '삼청공원~청운대쉼터','삼청공원~법흥사터~숙정문','칠궁/춘추관~백악정' 등이 더 열려
지금에 이른다.
이렇듯 북악산의 금지된 속살이 많이 열렸지만 그렇다고 이곳의 예민한 성격까지 가라앉은 것
은 아니다. 하여 여전히 금지 구역은 적지 않으며, 북악산 주능선과 주능선으로 인도하는 길,
청와대 주변 길(칠궁/춘추관~백악정)은 탐방시간에 제한이 있다.

북악산은 예로부터 소나무가 유명하여 조선 조정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했으며, 왜정
(倭政)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로 지금은 주능선 일대에 주로 남아있다. 또한 오랫동
안 금지된 곳으로 엄격히 묶여있던 탓에 나무와 식물들이 마음 놓고 뿌리를 내려 숲이 원시림
마냥 울창해 서울 도심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숙정문 주변에는 팔배나무가 군락을 이루
고 있어 새들이 많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아차산, 관악산 등과 더불어 대자연이 서울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
자 꿀단지로 앞으로도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삼삼한 자연의 공간으로 쭉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산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많으니 개발의 칼질 또한 그 눈치로 마음껏 칼질을 할 수는 없
다.

북악산(백악산)은 '서울 백악산 일원'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며, 지정된 면
적은 3,598,127㎡에 이른다.

* 북악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부암동, 삼청동, 명륜동 / 성북구 성북동 (창
  의문안내소 ☎ 02-730-9924, 숙정문안내소 ☎ 02-747-2152, 말바위안내소 ☎ 02-765-0297)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관악산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서대문구, 은평구 지역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악산 동쪽 자락과 성북동,
성북구, 동대문구, 서울 동부 및 동북부 지역


 

♠  북악산 청운대~말바위 구간

▲  청운대(靑雲臺) 표석의 위엄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에서 동쪽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청운대(293m)가 마중을 한다. 난쟁
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키의 청운대 표석이 이곳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는데, 공간이 넓
고 의자가 넉넉히 있어서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특히 말바위나 숙정문, 삼청공원, 북악산길
에서 올라왔다면 여기서 코앞에 보이는 백악마루에 입맛을 다시며 잠시 두 다리를 쉬기 마련
이다.
여기서는 성북동과 북한산(삼각산), 서울 동북부 및 동부 지역, 서울 도심, 남산 등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아주 일품이다.


▲  청운대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 주능선과 동쪽 자락, 성북동, 성북구, 강북구 등 서울 동북부와
동부 지역,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등이 흔쾌히 시야에 잡힌다.

▲  시원스럽게 뻗은 한양도성 청운대~곡장입구 구간 (동쪽 방향)

성곽 바깥 길 북쪽에는 철책이 꽁꽁 둘러져 마치 휴전선이나 국경선을
거니는 쫄깃한 기분이다.

▲  청운대쉼터
북악산 주능선에서 가장 너른 쉼터로 군부대 운동장을 개조해 나그네들의
쉼터로 삼았다.

▲  한양도성 촛대바위~곡장입구 구간
성곽을 따라 이어진 북악산의 명물, 소나무의 푸른 물결과 향긋한 솔내음

▲  촛대바위와 그에게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숙정문 서쪽에는 촛대바위가 있다. (숙정문과 곡장입구 사이에 있음) 아마도 촛대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듯 싶은데, 바위 남쪽 밑에서 봐도 그다지 촛대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바위 남쪽 밑 탐방로는 2022년 봄에 해방되었으며, 바위 정상부는 여전히 금지구역임)

천하가 북악산 촛대바위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왜정이 이 땅의 혈을 끊고자 무식하게 쇠말
뚝을 박았던 추악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왜정은 1920년대에 경복궁과 일직선이 되는 이곳에 말뚝을 꽂았는데, 사람으로 친다면 머리의
정수리가 되는 부분이다. 즉 조선의 머리 부분을 아작 내어 이 땅을 영원히 뜯어먹겠다는 의
도를 드러낸 것이다. 다행히 그 말뚝은 제거되었으나 말뚝의 휴유증 때문일까? 이 땅은 아직
도 혼돈에 잠겨있다. 친일매국노와 그런 것을 추종하는 잡것들이 권력과 부를 챙기고 이 땅을
이간질시켜 나라의 기본부터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언제쯤 촛대바위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까?
그때가 되면 주름진 나라 사정도 좀 펴지겠지.
(왜정의 쇠말뚝에 대해서는 측량용이란 말도 있으나 설령 측량용이라고 해도 그건 일부에 불
과함. 대부분은 추악한 의도로 꽂은 것들임)


▲  숙정문 서쪽에서 바라본 성북동(城北洞)
산자락에 포근히 감싸인 동네가 평창동과 더불어 이 땅에 0.1%가
산다고 하는 성북동이다.

▲  한양도성 숙정문(肅靖門) - 사적 10호
숙정문 앞은 바로 각박한 산비탈이라 성문을 지키기에는 아주 그만인 곳이다.


촛대바위를 지나면 북쪽을 향해 입을 연 숙정문이 마중을 한다. 이곳은 한양도성의 북문(北門
)으로 남대문(숭례문), 동대문(흥인지문), 서대문(돈의문)과 함께 도성 4대문의 일원이다. 하
여 북문, 북대문(北大門)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가파른 산능선에 자리해 있고 규모가 작아 도
성의 대문이라기 보다 산성의 조촐한 성문 분위기가 진하다.

문의 이름인 숙정(肅靖)은 엄숙히 다스린다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가운데 1자만 다른 숙청문(
肅淸門)이었다. 1396년 지금보다 약간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1413년 풍수학자인 최양선이 태
종에게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건의해 이들 문을 꽁꽁 닫아걸고 소나무를 잔뜩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 연유로 무늬만
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숙정문을 품은 북악산 주능선은 도성 내부와 바깥이 훤히 바라보이는 예
민한 위치로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출입을 거의 통제했고,
설령 이 성문을 나와도 이어지는 곳은 숲이 무성한 북악산 북쪽 능선과 북한산, 성북동이 고
작이었다. <성북동은 동소문(東小門)을 통해서 갈 수도 있음>
그리고 평소와 비가 많이 올 때는 숙정문을 닫아 걸고 가뭄이 심할 때 남대문을 닫고 이 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1416년에 제작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따라서 북쪽은 음
(陰). 남쪽은 양(陽)을 상징하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통행문으로서의 존재
감보다는 도성 수비와 풍수지리적인 존재감이 훨씬 컸던 것이다.

1504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숙청문이 언제 숙정문으로 이름이 갈렸
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1523년부터 숙정문 이름이 등장한다. 숙정문 외에도 북정문(北靖門)
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들 명칭이 같이 쓰이다가 언제부턴가 숙정문으로 통합되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북악산 대부분과 숙정문이 금지된 구역이 되었으며, 1976년 북악산 일
대 성곽을 손질하면서 문루를 세워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숙정문 문루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능선과 성북동 일대가 바라보이며, 높은 곳에 자리한 것
은 분명하지만 문 남쪽은 울창한 수목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고, 북쪽도 겨우 성북동과 삼청각
, 북악산 북쪽 능선이 전부라 조망은 생각보다 별로이다.
매년 봄에는 사대부 여인들이 숙정문 남쪽에서 봄꽃놀이를 즐겼다고 하며, 그거 외에는 딱히
숙정문 주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시(詩)나 문구(文句)는 전하는 것은 없다.

* 숙정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5-22


▲  한양도성 숙정문~말바위 구간

▲  북악산 말바위

말바위안내소를 나와 동쪽으로 조금 가면 성 밖으로 넘어가는 계단길이 있다. 무지 귀한 몸인
성곽 여장을 부시고 길을 낼 수가 없어 부득이 성곽 위로 높게 나무다리를 내어 성밖으로 통
하는 길을 냈다.
다리 북쪽에는 전망대를 설치해 도심 속의 전원 마을인 성북동을 굽어보게 했는데, 삼청각과
길상사(吉祥寺), 북악산 북쪽 능선을 비롯해 성북구, 종로구 동부,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 성동구, 수락산~불암산, 아차산~용마산 등이 훤히 망막에 들어와 조망도 진국이다. 특히 여
기서는 성북동 대부분이 시야에 들어와 성북동전망대라 해도 손색이 없다.

여기서 성곽길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말바위란 크고 견고한 돌덩어리가 마중을 한다. 그
는 북악산(백악산)의 오랜 명소로 조선 때 문인(文人)과 관료들이 말을 타고 이곳으로 올라와
시문(詩文)을 짓거나 바람을 쐬며 쉬었다고 한다. 하여 말을 타고 올라왔다는 뜻에서 말바위
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는데, 북악산 산줄기가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그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 했다는 설도 덧붙여 전한다. 즉 말처럼 생겼다고 해
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 것이다. (바위가 말처럼 생기지도 않았음)

1968년 1.21사건 이후 말바위는 금지된 바위가 되어 속세에서 잠시 그 모습이 지워졌다가 39
년에 시간이 흐른 2007년 4월에 다시 공개가 되었고 관람 통제가 심한 북악산 주능선 구간과
달리 이곳은 아침과 저녁에도 접근이 가능하다.
말바위 옆에는 소나무가 바위 쪽으로 가지를 뻗어 바위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서로의
끈끈한 정을 자랑한다.

말바위에서 성곽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오른쪽(남쪽)으로 길이 90도 꺾인다. 성곽과 더 함께
하고 싶어도 군사시설로 길이 완전히 막혀 별수 없이 남쪽 길로 내려가야 되는데, 소나무가
무성한 그 길을 내려가면 북악산 남쪽 자락에 넓게 깃든 삼청공원(三淸公園)이다.

삼청공원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나와 취운정(翠雲亭)터 표석이 있는 감사원교차로에서 왼쪽(북
쪽) 길로 가면 성북동과 성대후문으로 인도하는 와룡공원 고갯길(와룡고개)이 펼쳐진다. 이곳
은 도심과 성북동을 바로 이어주는 지름길로 마치 뱀의 허리에 올라탄 듯, 지그재그로 굴곡의
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숲도 삼삼하고 경치도 아름다우며, 특히 벚꽃이 살랑거리는 봄과 단풍
의 향연이 우울한 마음을 부여잡는 늦가을 풍경은 이곳의 갑(甲)으로 꼽힌다.
게다가 여기서 바라보는 도심 조망과 야경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걸작이다. 길 밑에
는 도심에 숨겨진 뒷길인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너른 숲
이 펼쳐져 있는데, 이들은 서울의 동궐(東闕)인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이다.

이렇게 하여 북악산(백악산) 나들이는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와룡공원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
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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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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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을 거닐다. 평창동~백사실계곡~부암동 늦가을 산책 (평창동 소나무, 응선사, 창의문)

늦가을 평창동, 부암동 나들이



' 서울 도심 속의 두멧골, 평창동~부암동
늦가을 나들이 '
부암동에서 만난 늦가을 풍경
▲  부암동에서 만난 늦가을 풍경
 



 

늦가을이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어루만지던 11월 첫 무렵, 늦가을 풍경을 즐기고자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평창동(平倉洞)~부암동(付岩洞) 지역을 찾았다.

평창동은 성북동(城北洞), 한남동(漢南洞)과 더불어 서울의 1급 부자 동네로 이 땅의 0.1
%가 산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들의 고래등 저택과 고급빌라들이 즐비하다. 이
곳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사이에 깃든 산골로 경관이 아름답고 녹지 비율이
높으며,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다. 게다가 명당 중에서 아주 최고로 친다는 대부대귀
(大富大貴)의 명당인 교쇄명당의 자리라고 한다.
교쇄명당(交鎖明堂)이란 톱니바퀴가 엉키듯 교차하면서 혈(穴)을 감싸주는 명당으로 북한
산과 북악산이 서로 잘 교차하면서 에워싸는 명당을 말한다. 그래서 돈 꽤나 만지는 것들
과 권력층들이 그 냄새를 킁킁 맡고 몰려들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것이다.

내가 평창동을 찾은 것은 북한산과 북악산의 소중한 살을 난도질하며 들어앉은 졸부의 고
래등 집을 보고자 함이 아니라 그곳에 깃든 오래된 소나무와 백사실계곡(백석동천), 부암
동을 거닐고자 함이다. 이들은 내가 믿고 가는 즐겨찾기 명소들로 백사실계곡과 부암동은
1년에 3~4회 이상은 꼭 찾는다.


▲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으로 파고드는 평창8길 골목길



 

♠  북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늙은 소나무, 평창동 소나무

▲  평창동 소나무 앞 오솔길 (백사실 능선 방향)

평창동 소나무를 찾으려면 화정박물관에서 묘각사(妙覺寺)로 인도하는 '평창8길' 골목길로 들
어서면 된다. 박물관 남쪽 주택가를 지나면 숲에 감싸인 오르막길이 늦가을 정취를 솔솔 불어
대는데, 그 골목길 끝에 외딴 두멧골처럼 자리한 주택들이 보일쯤 해서 오른쪽(서쪽)으로 백
사실(백사골)로 인도하는 오솔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둥근 햇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한 숲에 감싸인 그 오솔길은 평창동에서 백사실을 이어주
는 지름길로 동네 사람들과 아는 사람들만 기웃거리는 도심 속의 숨겨진 숲길이다. 콘크리트
포장도 씌우지 않은 흙길로 길 남쪽에는 밭과 양봉까지 펼쳐져 있어 이곳이 정녕 서울 한복판
인지? 머나먼 지방의 산골인지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그런 밭과 평창동 너머로 북한
산(삼각산) 남쪽 줄기가 시샘을 하듯 이곳을 쳐다본다.

그 오솔길을 2분 정도 들어서면 3~4m 높이로 닦인 석축이 비슷한 높이로 길게 이어져 있어 옛
산성(山城)이 아닐까 싶은 기대감을 안긴다. 허나 그 석축은 산성도 아니고 건물터 등의 문화
유적도 아니다.
자세한 사연까지는 모르겠으나 군부대나 체육시설 등을 만들면서 넓게 땅을 다지고 석축을 쌓
은 것으로 지금은 배드민턴장과 쉼터가 있어 동네 주민들의 조촐한 휴식처 역할을 한다. 바로
저 안에 오래된 소나무가 있다.


▲  석축 윗쪽에 넓게 터를 다진 배드민턴장

▲  평창동 소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7호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평창동 소나무는 280년 정도 묵은 늙은 나무이다. 그의
신상이 간단히 적힌 안내문에는 보호수 지정일 기준으로 230년이라 나와있는데, 그가 보호수
로 지정된 것은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인 1968년 7월 3일이다. 그 이후 50여 년이 무심하게
흘렀으니 약 280년(길게 잡으면 290년) 정도로 보면 된다.
무한리필로 쏟아지는 세월을 든든한 양분으로 삼아 높이 13m, 둘레 2.24m의 어엿하고 기품 넘
치는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생김새가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정2품송(正二品松)과 좀 비슷
하여 그리 낯설지는 않은 모습이다.

서울에서 100~150년 이상 묵은 나무 중, 소나무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은행나무와 느티나
무, 회화나무, 향나무가 대부분을 이룬다. 특히 보호수(保護樹)나 문화재로 지정된 소나무는
서울에서 이곳과 여기서 가까운 석파정(石坡亭) 소나무 정도이며 서울에서 가장 늙은 소나무
라 봐도 무리는 없다.

▲  서쪽에서 바라본 평창동 소나무

▲  오솔길에서 올려다본 소나무

하늘에 대한 경외심 때문일까?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30~40도 정도 고개를 숙였다. 벼도 익으
면 고개를 숙인다고 이 나무 역시 나이를 먹으면서 그렇게 고개를 꺾은 모양이다. 그만큼 숙
성될수록 겸손을 차리라는 대자연 형님의 심오한 뜻이 담긴 것은 아닐까 싶다. 자연물은 그
뜻을 받들고 잘 지키는데,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며 지구와 자연에
갖은 민폐를 아끼지 않는 인간들은 왜 단순한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인간은 신
이 아닌 늘 애매한 존재로 남아있는 모양이다.

* 평창동 소나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248-1


▲  서쪽에서 바라본 소나무와 배드민턴장

평창동 소나무와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다시 오솔길로 나왔다. 배드민턴장 서쪽 끝이 바로
오솔길과 연결되어 있지만 철책으로 막혀있어 홍길동이 아닌 이상은 넘어가기가 힘들고, 소나
무 남쪽 3~4m 높이의 석축에서 오솔길로 뛰어내리기도 좀 그렇다. 그래서 급하면 돌아가라는
크고 아름다운 진리에 따라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 나갔다.


▲  평창동 소나무 밑 오솔길 (백사실 방향)

▲  평창동 소나무 밑 오솔길 (평창동 화정박물관 방향)

오솔길을 거닐면 백사실 동쪽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이 나온다. 벌써부터 누렇게 뜬 낙엽이 주
변에 잔뜩 쌓여 있는데,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단풍도 그리 많이 남지가 않았다. 아직은 늦가
을의 한복판이라 방심하고 있었건만 겨울 제국(帝國)의 보이지 않는 마수는 벌써부터 내 곁에
다가와 밑작업을 하고 있었다.

귀를 접고 쓸쓸히 누운 낙엽을 보니 올해도 이제 다되었구나~! 싶은 우울감이 밀려온다. 늦가
을과 연말에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이 기분, 허나 산바람이 살포시 나를 스치면서 그 우울감
을 조금이나마 털어간다. 오늘은 그저 나들이와 출사에만 열중하라는 듯이...


▲  소나무가 무성한 백사실 동쪽 능선

백사실 동쪽 능선은 북악산길에서 시작되어 백사실약수터, KT기지국, 평창동조망점까지 내려
가듯 이어진다. 백사실의 동쪽 지붕으로 중간중간에 현통사와 백사실(백석동천), 평창동으로
내려가는 산길을 늘어뜨렸으며, 소나무를 비롯한 갖은 나무들이 짙게 우거져 있다.


▲  울퉁불퉁 이어진 백사실 동쪽 능선길

▲  백사실 백석동천 별서터 서쪽 계곡

백사실 동쪽 능선을 조금 올라가면 백석동천으로 인도하는 길이 오른쪽(서쪽)에 나타난다. 그
길을 내려가면 바로 19세기에 조성된 백석동천(白石洞天) 별서유적으로 별서의 안채터와 사랑
채터가 마중을 하며, 이어서 동그란 연못과 6각형 정자터, 백사실계곡(백사골)이 나타난다.
백사실계곡은 북악산(백악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과
백사실(백석동천), 현통사, 백사폭포를 거쳐 홍제천(弘濟川)으로 흘러가는 작은 계곡이다. 서
울 도심에 몇 안되는 제대로 남은 자연산 계곡으로 개구리와 맹꽁이, 도룡뇽 식구가 서식하고
있으며, 푸른 이끼가 마음 놓고 뿌리를 내리는 청정한 곳이라 이곳에서만큼은 잠시 서울을 잊
어도 좋다. 서울이 아닌 머나먼 산골이라고 우겨도 손색이 없으니 말이다.
(백석동천 별서터와 백사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는 생략하며 따로 별도의 글을 링크
함 ☞ 관련글 보기)


▲  백석동천 별서터 서쪽에 세워진 오리 솟대 돌탑
예로부터 오리 등의 새는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중간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소도(蘇塗)에서 비롯된 솟대 꼭대기에는 오리 모양을 달아두어
하늘과의 연락을 꾀했다.
 

백석동천별서터 계곡 윗쪽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물을 위해 출입을 금하고 있다. 허나
통제의 줄이 느슨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히 여름에는 피서객들의 칩
입이 빈번해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에서 계곡을 피해 백사실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이 있는데, 2012년에 주변 산길을 정비
하고 산불방제 장비를 갖춘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을 심어 소소하게 볼거리를 선사한다.
솟대 돌탑을 지나면 황금잎 흩날리는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는데, 그 숲을 지나면 갈림길
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가면 백사실 상류와 능금마을, 북악산길로 이어지고, 오른
쪽(남쪽)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와 백사실 남쪽 입구(응선사, 부암동)로 이어진다.


▲  백사실 소나무숲 (백석동천 별서터에서 능금마을, 부암동 방향)
솔내음이 그윽한 소나무 그늘에 의자 등의 쉼터가 닦여져 있다.

▲  백사실 소나무숲 (능금마을과 부암동 방향 갈림길 직전)

▲  백사실 남쪽 입구 산길

백사실(백석동천)에서 백사실 남쪽 입구로 오르는 남쪽 길은 경사가 완만하다. 백석동천 바위
글씨를 지나 느긋하게 이어진 숲길을 오르면 그동안 숲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햇님과 푸른 하
늘이 방긋 모습을 비춘다.
그들과 함께 부암동 주택들도 덩달아 시야에 들어오는데, 남쪽 입구 양쪽에는 고급지게 지어
진 양옥이 위세를 뽐낸다. 부암동도 부자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은근히 고급 주택이 많다.


▲  늦가을이 짙게 서린 백사실 남쪽 입구
백사실 안쪽은 늦가을의 농도가 많이 떨어졌지만 이곳은 아직 그 농도가 진하다.



 

♠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  부암동 응선사(應禪寺) - '응선사' 현판을 내건 문이 일주문이다.

백사실 남쪽 입구에는 응선사란 조그만 절이 둥지를 틀고 있다. 그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
어진 현대 사찰로 대웅전과 일주문(一柱門)으로 쓰이는 기와집이 전부인데, 대웅전은 겉으로
보면 1층 같지만 그 밑에도 공간이 있어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공양간 등으로 쓰이고 있
으며 대웅전 앞에는 불교용품과 전통차를 파는 공간과 쉼터가 있다. (상황에 따라 차 시음도
가능함)

내가 법등(法燈)의 역사도 무지 짧은 응선사를 기웃거린 것은 대웅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산신도가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백사실을 드나들던 예전부터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외
부인에게 조금 까칠하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계속 방문을 미루다가 이번에 한번 들려 보았다.


▲  문짝이 달린 일주문에서 바라본 응선사 내부 (쉼터와 불교용품 매점)

▲  응선사 대웅전에 걸린 산신도(왼쪽)와 칠성도, 신중도(오른쪽)

▲  응선사 산신도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4호

산신도는 대웅전 동쪽 벽에 칠성도(七星圖), 신중도(神衆圖)와 나란히 걸려있다. 그들 가운데
자리한 칠성도는 근래에 조성된 것이고, 호법신(護法神)들이 정신 없이 담긴 신중도는 산신도
만큼이나 늙어보여 2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신중도와 산신도는 모두 다른 곳
에서 업어온 것으로 법등의 역사가 짧은 이곳의 소중한 꿀단지이다.

산신도는 1914년 음력 10월 8일에 조성된 것으로 이제 100년이 조금 넘었다. 처음에는 경성부
(서울) 고양군 삼각산 안양암(安養庵)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안양암은 종로구 창신동(
昌信洞)의 안양암으로 짐작된다. (이곳은 '삼각산 안양암'을 칭하고 있음) 그런데 '고양군'이
란 3글자가 마음에 영 걸려 북한산(삼각산) 어딘가에 있던 절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연응 정순(淵凝 淨旬)을 증명으로 하고 양학 효신(養鶴 孝信)이 별좌(別座) 겸 화주(化主)가
되어 조성했는데, 금호 약효(錦湖 若效)와 향암 성엽(香庵 性曄), 연암 경인(蓮庵 敬仁) 등 3
명의 화승이 제작에 참여했다.

그림에는 주인공인 산신 할배를 비롯해 호랑이와 동자 4명, 소나무, 폭포, 산 등이 그려져 있
는데, 붉은 도포를 입은 산신은 금색의 옷잠이 꽂힌 족두리 같은 것을 쓰고 왼손에는 파초선(
芭蕉扇)을 들고 있다. 산신 뒤에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귀여운 모습으로 꼬랑지를 살랑
거리고 있고, 산신 좌우에는 비서인 동자 4명이 복숭아나 공양물 등의 물건을 들고 있다.
그림 밑부분에는 붉은 색으로 된 화기(畵記)가 있어 제작 시기와 제작자, 최초 봉안 장소, 시
주자 명단 등의 정보를 소상히 알려준다. 바로 이 화기를 통해 20세기 초반 산신도의 양식과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화기를 남겨준 제작자의
소소한 배려가 그림의 가치를 높여준 것이다.

그림 제작에 참여한 승려 중 금호 약효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에
서 활동했던 화승으로 70여 점의 그림이 남아있다. 그는 단아한 불신(佛身)과 섬세한 인물 묘
사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이 산신도에도 그의 스타일이 깃들여져 있었다.

* 응선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95-13 (백석동길 227 ☎ 02-396-2476)


▲  부암동의 지붕길, 백석동길(부암동 산복길) - 응선사 남쪽

응선사 앞을 지나는 골목길은 부암동의 지붕길인 '백석동길'이다. 이는 백석동천에서 따온 이
름으로 창의문교차로에서 산모퉁이와 응선사를 거쳐 AW컨벤션센터(하림각) 건너편까지 이어지
는데, 그중 창의문~산모퉁이~응선사 구간을 나는 부암동 산복길이라 부른다.
이 길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길이기도 한데, 부산(釜山)의 산복길보다는 좀 못해도 나름 아
름다운 굴곡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지대가 높아 부암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이며, 그 너머로
인왕산(仁王山)이 가까이에 아른거린다. 비록 산동네긴 해도 서민과 가난이 연상되는 달동네
와는 완전히 차원이 틀리며, 개성이 강한 집들이 많고, 아름다운 뜨락이나 정원을 갖춘 집도
적지 않다.
게다가 길 주변에 숲과 나무도 우거져 있고, 밭도 있으며, 바로 뒤에 북악산(백악산)이 든든
한 후광처럼 자리해 부암동을 보듬고 있어 1폭의 수채화나 풍경화 같은 모습을 자아낸다.

이처럼 이곳이 서울 도심 지척임에도 산골마을 풍경을 진하게 지니고 있는 것은 나라의 예민
한 부분을 많이 품은 북악산 자락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미도 몰라본다는 천박한 개발의 칼
질도 마음 놓고 칼춤을 추지 못한다. 건물을 지어도 다 낮게 지을 수 밖에 없고, 가파른 산자
락이라 집을 지을 공간도 그리 넉넉치 못하다.
허나 요즘 들어 부암동이 관광지로 뜨면서 산복길 주변에 새로 지어진 집이나 리모델링을 하
는 집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상당수 집이 까페나 식당, 미술관 등의 상업 목적임) 다행
히 그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고 예민한 북악산 주변의 특성상 크게 개발될 일은 없지만 그저
돈 욕심으로 일어난 소소한 변화가 계속 이루어지다 보면 그 역시 무시할 수가 없다. 나는 지
금의 산복길 풍경이 너무 좋은데, 지금 선에서 더 이상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부암동 산복길(백석동길) 갈림길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응선사, 동쪽으로 가면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백사실을
가고자 한다면 어느 길로 가든 크게 상관은 없지만 능금마을 방면이
조금 지름길이다.

▲  잠시 서울을 잊고 산골 마을을 거니는 기분
부암동 산복길 (산모퉁이 부근)

▲  부암동 산복길 (산모퉁이, 은행나무숲 직전)

▲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은행나무 숲길 (백석동1길)

부암동 산복길을 따라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쪽으로 가다보면 정면에 북악산이 보이면서 길
이 크게 선을 그리며 동쪽(왼쪽)으로 구부러진다. 그쯤에 조촐히 우거진 은행나무숲이 있는데
, 숲 옆에 내려가는 숲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얼핏 보면 끊어진 길처럼 보이나 저 밑에 보이
는 주택가까지 엄연히 이어진 길로 '백석동1길'이란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능금마을이나 백
사실계곡(백석동천, 백사골), 산모퉁이에서 창의문으로 내려갈 때 산복길(백석동길)로 쭉 가
는 것보다 이 길로 갈아타면 조금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

산복길 길가에 소소하게 우거진 은행나무숲은 황금빛 은행잎을 흩날리며, 늦가을의 향연을 즐
기고 있다. 은행잎은 노란색의 정석을 보여주며 한참 물이 올라 있고, 주변 숲과 어우러져 눈
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절경을 자아낸다. 이것이 진정한 늦가을의 풍경이지. 아직은 은행잎이
많이 붙어있지만 이제 10여 일만 지나면 거의 7~8할 이상은 낙엽으로 추락될 것이다.
늦가을의 커텐을 열었던 은행나무는 죽음 앞에 처절한 아름다움을 불사르며 슬슬 늦가을의 막
을 닫을 준비를 한다.


▲  늦가을이 소리없이 깃든 부암동 산복길 은행나무 숲
숲은 매우 작지만 은행잎의 농도는 넓고 진하다.

▲  밑에서 바라본 은행나무 숲길 (백석동1길)

은행나무숲 남쪽에는 밭이 펼쳐져 있다.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포근히 깃든 부암동
에는 산자락 곳곳에 밭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데, 특히 능금마을(뒷골마을) 같은 곳은 오이
나 상추, 배추, 여러 과일을 심어서 시내에 내다팔고 있다.
서울하면 그저 키다리 빌딩과 번잡한 거리, 수많은 인파와 차량들만 생각하는 대다수의 사람
들에게는 다소 충격과 공포와 같은 풍경이라 적응이 가질 않겠지만 서울 안에도 논과 밭, 과
수원이 제법 많다. 다만 그들이 그릇된 고정관념에 빠져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당장 도심과
가까운 부암동과 평창동, 서촌 서쪽, 성북동만 가도 그런 고정관념에 망치질을 할 수 있다.


▲  늦가을이 그린 한 폭의 수채화
감나무와 밭두렁이 어우러진 부암동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

▲  백석동1길 윗쪽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

▲  늦가을 절정에 잠긴 창의문(자하문) 안쪽 숲길
평창동~부암동 나들이는 창의문에서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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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의 성지이자 도심 속의 상큼한 언덕, 청운동 윤동주시인의 언덕 ~~~ (윤동주소나무,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 서울 도심의 신선한 명소, 윤동주 시인의 언덕(청운공원) ~~~

▲  윤동주시인의 언덕 소나무


 

♠  청운공원에 마련된 새로운 명소, 문향(文香)이 깃든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언덕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상에 세워진 서시 시비(詩碑)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序詩)


서울 도심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자하문(紫霞門)고개 정상에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도심
을 굽어보고 있다.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남쪽에 둥지를 튼 이곳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
늘과 가까운 공원이자 인왕산 동쪽 자락에 조성된 청운공원(淸雲公園)의 일부로 2009년 6월,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고자 공원에서 가장 높은 북쪽에 조촐하게 자리를 닦았다.
언덕의 이름이 그의 이름에 걸맞게 매우 시적(詩的)이면서도 서정적이라 가슴에 꽤 와닿는데
그 이름은 '윤동주 문학사상선양회'의 회장을 맡았던 박영우씨가 지은 것이다.

윤동주 언덕이라 하여 크게 특별한 것은 없다. 높다란 언덕에 잔디를 입히고, 소나무와 여러
키 작은 나무를 심었으며, 윤동주의 시를 머금은 비석을 여럿 세운 그저 평범한 공원이다 성
곽과 소나무 사이로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바람에 속세에서 오염된 머리와 마음이 정화되며,
앞뒤로 보이는 조망(眺望)도 가히 명품이다. 게다가 공원의 분위기도 조용하고 차분하여 절로
시 한 수 읊고 싶은 마음을 솟구치게 하는 그야말로 시상(詩想)의 공간이다. <언덕의 이름도
시상을 크게 적지 않게 돋구고 있음>

이곳이 윤동주의 언덕이 된 사연은 대략 이렇다.
윤동주는 1941년 누상동(樓上洞)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연희전문대학(현 연세대) 후배
인 정병욱(鄭炳昱)과 하숙생활을 했다. 그는 하숙집에서 가까운 자하문고개와 지금의 청운공
원 일대를 수시로 찾아와 시를 짓고 구상을 했다고 하는데, '별헤는 밤'과 '서시'를 바로 이
언덕에서 지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윤동주기념사업회에서 서울시와 종로구청의 협조를 얻
어 언덕을 조성한 것이다.

그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고자 했는데, 그 서문(序文)으로 지어진 것이 바로 서
시로 출간까지는 하지 못하고, 3부를 필사하여 이양하(李敭河)와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했다.
이후 세상이 좀 진정되면서 정병욱이 보관하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세상에 공개하였다.


▲  윤동주의 초상화 -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을 초상화한 것이다.

※ 윤동주(1917~1945년)의 간략한 생애
윤동주는 왜정 때 대표적인 시인으로 그의 이름 3자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중/고
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서시를 비롯한 그의 굵직한 작품들이 정말 지겹게 나오니 말이다.
지금도 이름이 또렷한 윤동주는 1917년 12월, 두만강(豆滿江) 이북인 북간도(北間島) 명동촌(
明洞村)에서 윤영석()과 어머니 김룡()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대랍자()학교를 다니던 중 용정(龍井)으로 이사를 가면
서 1933년 그곳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다가 1935년 본토로 넘어와 평양 숭실(崇
實)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왜정(倭政)에 의해 강제로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다
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 문과에 진학하여 1941년에 졸업했는데, 학교 기숙사의 식사
가 부실해지면서 후배 정병욱과 누상동에 하숙집을 얻어 잠시 살다가 그해 5월 그믐날에 다른
하숙집을 알아보고자 옥인동을 기웃거리던 중,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있던 하숙집 광고 쪽지를
보았다.
그래서 혹시나해서 그 집을 찾아가니 문패에는 '김송(金松)'이라 쓰여 있었다. 마침 그는 소
설가 김송을 존경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 김송?' 생각하며 문을 두드리니 글쎄 그 김송이 나
타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김송 집에서 4개월 정도(1941년 5월~9월) 하숙을 했으며, 저녁 식사가 끝나면 김
송 가족과 대청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거나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고, 때로는 성악가인
김송 부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기도 했다.

김송 집에 머무는 동안 인근 자하문고개를 수시로 올라가 시를 구상했다고 하며 그 현장이 바
로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다. 또한 이때 많은 시가 쓰여졌는데, 마음을 주고 받는 후배가 곁에
있었고, 자신이 존경하는 이의 집에 머물며 그의 가족에게 호의를 받으니 마음도 즐겁고 덩달
아 작품 구상도 잘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붓과 머리가 흥분하여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은 자명
한 것이다.

1941년 9월, 김송과 작별하고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東京) 릿쿄(敎)대학 영문과에 들어갔으
며, 1942년 도시샤대학(同學) 영문과로 자리를 옮겼다. 허나 1943년 7월 학업을 멈추고
잠시 고향으로 가려다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왜경에 급히 체포되었다.
왜경은 그에게 변론의 기회도 제대로 안주고 무조건 징역 2년형을 때려 후꾸오카 형무소에 집
어넣었는데 거기서 잔인한 생체 실험의 희생자가 되어 결국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2월, 회
한의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8세였다. 목격담에 따르면 그는 정체를 아리
송한 주사를 계속 강제로 맞았다고 하니, 결국 왜국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천재시인 윤동주는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고 강제로 눈을 감게 된 것이다.

윤동주는 조부(祖父)의 영향으로 시에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했다. 그의 동생인 윤일주(
)와 당숙인 윤영춘()도 시인이었다고 하니, 그의 집안은 문학적 소질이 다분한 지식인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15살에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첫 작품은 '삶과 죽음'과 '초한대'이다. 이후 '병아리(
1936년 11월)','빗자루(1936년 12월)','오줌싸개 지도(1937년 1월)','무얼 먹구사나(1937년 3
월)','거짓부리(1937년 10월)' 등을 간도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카톨릭소년' 잡지에 소개했
다.
연희전문대학 시절에는 조선일보에 '달을 쏘다'를 냈고, 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자화상',
'새로운 길' 등을 실었다. 그리고 '쉽게 쓰여진 시'가 1946년 경향신문에 실렸다.

누상동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하던 1941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
려고 했으나 내지 못하고 대신 3부를 필사해 정병욱과 이양하에게 1부씩 주었다. 바로 그 시
집의 서문(序文)으로 지어진 것이 그 유명한 서시로 해방 이후 1948년에 이르러 정병욱과 윤
일주에 의해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시는 청소년 시절에 지은 시와 성년 이후의 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청소년기에 쓰여진
시들은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고 대체로 어린 시절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
다. 대표작으로는 '겨울'과 '버선본' 등이 있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자아성
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왜정 시절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시가 주류를 이루니 '서
시','자화상','또 다른 고향','별헤는 밤'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 시로 어둠의 시절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
면 세계를 표현했다.

그는 비록 뜻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나보다 더 창창한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그의 시는 우
리나라 뿐 아니라 왜열도와 중원대륙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그가 다닌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 해마다 많은 이
들이 헌화를 하고 그를 기린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아시아를 뛰어넘는 세계 문학계
의 큰 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세상을 뜨자 그의 시신을 간도 용정으로 가져와 묘를 썼다. 허나 그 무덤도 한때 위
치를 몰라 방황하다가 연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온 왜인 교수의 노력으로 간신히 묘비를 찾았
다. 이후 우리나라와 중원대륙의 공산당 정부가 국교를 맺자 가족들은 봉분을 단장하고 묘비
도 새로 세웠으며, 그의 명동촌 생가는 199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그가 다닌 명동소학교는
윤동주 관련 단체의 지원으로 옛 건물을 복원하여 윤동주기념관으로 거듭났다.

우리나라에는 굵직한 시인들이 꽤 많지만 윤동주만큼 인기와 사랑이 대단한 시인도 손에 꼽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넘어 다른 나라에서도 그의 팬들이 많으니 말이다. 비록 왜의 잔악무도한
만행으로 일찍 눈을 감게 되었지만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혼은 우리들 마음 속에 길이길이
깃들여져 있으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는 영원한 문학신(文學神)이다.


▲  언덕 정상에 박힌 윤동주시인의 언덕 표석

윤동주시인의 언덕은 그 이름만 들어도 마음의 여유가 생길 듯한 느긋한 언덕으로 생각하기가
쉽지만 현실은 조금 가파른 언덕이다. 서울을 지키는 인왕산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이 만
나는 자하문고개에 있다보니 그런 것인데, 고갯길에서 언덕 동쪽으로 오르는 길이 경사가 좀
각박하지만 지름길이며, 윤동주문학관 뒷쪽으로 오르는 길과 청운공원으로 가는 길(자하문로
35길)을 이용하는 것이 언덕의 날카로운 기세를 피하기가 좋다.


▲  늦가을 햇살 속에 한가롭게 졸고 있는 야외 공연장

푸른 잔디와 나무들이 아낌없이 수식하고 있는 언덕 정상에는 언덕의 이름을 드러낸 두툼하게
생긴 표석이 누워있고, 조그만 야외 공연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윤동주 시 낭송회와 백일장,
문예 관련 여러 행사와 공연이 열린다.


▲  시비 앞면을 장식하는 '서시'

▲  시비 뒷면을 장식하는 '슬픈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초기에 쓴 것으로 어둠의 시절
속에서 살아가는 민족의 슬픈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흰색은 백의민족인 우리를 뜻한다고 하며,
삶과 밝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언덕 정상 남쪽에는 서시가 적힌 커다란 시비가 있는데, 대부분은 앞면만 보고 지나친다. 허
나 뒤에도 시가 숨겨져 있으니 시비의 속임수에 속지 말자. 뒤에 새겨진 시는 슬픈족속이다.


▲  늦가을도 잠시 길을 멈춘 윤동주 시인의 언덕 북쪽 산책로
<오른쪽에 보이는 건 한양도성(사적 10호)>


언덕 북쪽에는 옛 한양도성의 성곽(城郭)이 길게 둘러져 있다. 이 언덕은 성곽 안쪽으로 성곽
을 따라 길이 나 있는데 서쪽으로 인왕산과 이어지나 인왕산길로 잠깐 끊기며, 동쪽으로 자하
문과 이어지지만 문 서쪽에 언덕을 깎고 자하문로를 뚫으면서 서로가 끊겨버렸다. 그래서 윤
동주 언덕의 성곽은 양쪽이 끊어진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소나무 (윤동주 소나무)

언덕 성곽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청청한 소나무 1그루가 마치 성곽을 지키는 군사처럼 서 있
다. 나무 곁에 서면 성곽 여장 너머로 도성 밖 경승지이자 도심 속의 전원(田園)마을인 부암
동과 평창동(平倉洞)이 앞다투어 두 눈 아래 펼쳐지고 그 너머로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
(삼각산)이 든든한 모습으로 서울을 살핀다.

이 나무는 윤동주가 시를 구상하던 곳이라고 하며, 일명 윤동주 소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흔
히 볼 수 있는 소나무지만 어둠의 시절, 민족을 향한 독야청청(獨也靑靑)한 그의 얼이 깃들여
진 듯 청초하고 고고해 보이며,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주변을 보는 모습도 예사롭지가 않아 보
인다. 정말 그가 저 나무 그늘에서 시를 구상했는지 낮잠만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윤동주 언덕
을 상징하는 의미 깊은 나무로 나름 분주한 삶을 살고 있다.


▲  윤동주 소나무에서 바라본 천하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둥지를 튼 부암동과
홍지동(弘智洞) 일대, 그리고 저 멀리 북한산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  윤동주 소나무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인왕산길

▲  윤동주 영혼의 터

야외공연장에서 창의문 쪽으로 내려가면서 오른쪽 잔디밭을 유심히 살펴보면 땅에 박힌 표석
이 하나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 표석은 윤동주 영혼의 터로 서시 시비의 뒷면처럼 많이들 지
나치는데, 이곳은 간도 용정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 흙 한줌을 가져와 뿌린 곳으로 그 위에 표
석을 박았다. 즉 그의 소소한 가묘(假墓)가 되는 셈이다. 영혼의 터라고 하니 조금은 오싹한
기분도 들긴 하지만 그만큼 근사한 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서시정(序詩亭)

언덕 서쪽 밑에는 서시정이라 불리는 단촐한 모습의 정자가 도심을 굽어보고 있다. 2009년 언
덕을 꾸미면서 지은 것으로 윤동주의 서시를 따서 서시정이라 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정자로 이곳에 몸을 들여 남쪽을 보면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의 심장부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특히 야경이 멋짐)


 

♠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시민공원
청운공원(淸雲公園)

▲  가을옷을 곱게 걸친 청운공원과 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웃대)의 북쪽 끝이자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청운공원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
은 공원이다. <산 전체 또는 대부분이 공원으로 지정된 남산과 안산(鞍山), 낙산공원은 제외>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란 새로운 꿀단지를 동쪽에 달고 있는 이곳은 인왕산 동쪽 자락으로 청운
동 주택가와도 약간 거리를 둔 자연 지대이다. 인왕산길이 공원의 북쪽과 서쪽을 지나가며 자
하문고개에서 북악산길로 간판을 갈고 북악산 뒷쪽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공원을 가로지르는
골목길(자하문로35길)은 윤동주문학관에서 공원을 지나 청운동 주택가를 거쳐 자하문로로 내
려간다.

청운공원은 평범한 시민공원으로 산자락에 조성된 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인왕산 돌을 모아 일종의 돌아파트를 지었고, 2009년 이후 공원 동쪽에 윤동주시인
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이 들어서면서 예전보다 인기가 늘어졌다. 윤동주언덕도 엄연히 청운
공원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공원이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서울 도심과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그런
데로 일품이며, 북악산과 인왕산의 청정한 기운이 늘 깃들여져 있어 공기도 맑다. 게다가 서
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성지(聖地)로 매년 1월 1일에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각종 꽃
들이 울창하여 봄에는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가 봄의 향연을 열고, 가을에는 오색영롱한 단풍
잎이 늦가을의 향연을 베푸는 도심 속 경승지이다.

청운공원에 가려면 자하문고개(교통편은 아래 윤동주문학관 참조)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자하문터널 남쪽에서 자하문로35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도 있는데, 그건 경사가 좀 각박
하다. 그리고 청운동 안쪽에 자리한 유진인재개발원 정문 못미쳐에 청운공원으로 오르는 산길
이 가늘게 이어져 있고, 사직공원과 수성동(水聲洞)계곡에서 인왕산길을 타고 접근하는 것도
괜찮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늦가을 단풍이 한참 절정을 이루던 때라 진한 붉은색과 노란색, 녹색 등으로 단단히 물들었다. 겨울 제국(帝國)의 시련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남은 끼와 기력을 모두 발산하는 나무들과 죽
음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무지개처럼 짧은 삶을 원망하는 나뭇잎들.. 인간은 그
들을 보며 늦가을의 정취를 즐기면서도 '올해도 이제 저물었구나, 좀 있으면 강제로 1살을 더
먹네' 늦가을과 연말 우울증에 한숨을 쉰다.


▲  청운공원 서부 (오른쪽에 보이는 동그란 존재가 '꿈의 분수')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일몰 직전의 하늘

청운공원 서쪽에는 꿈의 분수라 불리는 바닥분수와 넓은 운동장이 있다. 꿈의 분수는 매일 2
번 정도 조촐하게 분수쇼를 선보이는데, 그리 현란한 편은 아니며, 그냥 주변을 시원하게 해
주는 정도이다. 가동기간은 4월부터 10월까지로 1차는 11시에서 13시까지, 2차는 15시부터 16
시까지이며, 겨울에는 무조건 쉰다. (가동 시간은 변경될 수 있음)
분수쇼는 전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분수와 어울려 물놀이를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그러
니 그냥 눈으로만 보기 바란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남쪽에 자리한 인왕산 호랑이상

천하 호랑이의 대명사이자 하늘 아래 제일 무서운 존재였던 인왕산 호랑이, 이제는 숱한 설화
만을 남긴 채, 우리들 뇌리에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그들을 그리며 만들었다는 인왕산 호랑이상, 어린이들이 울고 갈 정도로 매섭게 좀 만들 것이
지 너무 순둥이처럼 만들어 졸지에 호랑이 탈을 쓴 인왕산 고양이상이 되어버렸다. 곶감도 씹
어먹었다는 천하 제일의 인왕산 호랑이인데 그들을 제대로 모욕한 셈이다.


▲  인왕산 돌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인왕산 돌아파트)'

서시정에서 윤동주문학관으로 내려가면 돌의 거대한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2007년
서울시에서 추진한 '서울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인왕산과 그 주변
에서 주운 돌들을 정리하여 그들의 조촐한 아파트로 만들었다. 


 

♠  윤동주 언덕 밑에 자리한 윤동주문학관

▲  화려한 나비를 꿈꾸는 윤동주 문학전시관(윤동주문학관)

윤동주시인의 언덕 밑이자 자하문고개 정류장 부근에 시인 윤동주를 집대성한 '윤동주문학관'
이 심플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곳에는 원래 청운동 수도가압장 건물이 있었는데 빈 채로 버려져 있던 것을 2009년 윤동주
의 언덕을 만들면서 우선 급한데로 문학관으로 손질하여 정신적 영혼의 가압장이 되었다. 속
은 문학관일지 몰라도 겉은 문학과는 담을 쌓은 우울한 모습이었는데,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에서 서울시와 종로구청의 지원을 받아 오랜 번데기 생활 끝에 2012년 7월 25일 지금의 모습
으로 화려하게 태어났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2011년 3월로 그해 연말까지 여러 번 발걸음을 했는데, 당시 내
부는 좀 어수선했다. 공개시간이 있긴 하지만 평일에는 일찌감치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으며,
처음에는 정문 옆에 조그만 문으로 입장을 해야 했다. 그런 공간이 이제는 윤동주를 닮은 세
련된 문학적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번데기를 탈피한 이 문학관은 2012년 대한민국 공공건축 부분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았으며 우
리나라 현대건축 Best 20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화려하다 못해 눈부신 나비로 태어난
셈이다. (2014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받았고, 2015년에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됨)

문학관은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있는데, 제1전시실(시인채)에는 윤동주의 손때가 진하게 담
긴 친필 원고와 온갖 문서와 서적들, 사진, 윤동주 모교의 의자와 등사기(謄寫機), 떡판 등
그의 유품 133점이 전시되어 있고, 제2전시실(열린우물)은 옛 가압장의 물탱크 윗부분을 개방
하여 중정(中庭)으로 만들어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그리고 제3전시실(닫힌
우물)은 물탱크를 원형대로 보존하면서 그 안에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담은 동영상을
상영한다. 그 외에 '별뜨락'이란 쉼터를 만들어 서울 도심을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문학관에 진열된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주목을 끄는 존재가 하나 있는데, 그건 그의 생가에서
가져온 나무 우물이다. 우물의 목판은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회장인 박영우씨가 직접 간도 용
정에서 가져온 것으로 땅을 깊게 파고 그 우물을 보호하고자 나무 판을 4단으로 얹힌 점이 특
징이며, 이곳에 안착한 우물은 이제 우물 기능은 상실되고 무늬만 남은 늙은 우물이 되었다.
전시관 안이다보니 깊게 땅을 뚫을 수도 없고, 마땅한 수맥도 없기 때문이다.


▲  윤동주문학관에 진열된 그의 유품과 초상화들 (2012년 이전)

▲  윤동주의 모교에서 가져온 조그만 의자 (2012년 이전)

요즘 초등학교에서 저런 나무 의자를 쓸까? 내 초등학교 시절(1~3학년)까지만 해도 저거와 똑
같은 의자에 앉았는데, 기억도 흐릿한 그 시절의 추억을 잠시나마 소환해준 정겨운 의자이다.


▲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

윤동주가 교토 도시샤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학교 친구들과 우지강<우지천(宇治川), 요도가와
강> 강변으로 마실을 나가 찍은 사진이다. 이때 왜인 친구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하자 그
는 아리랑을 우수에 찬 모습으로 불렀다고 한다.
허나 그때까지만 해도 윤동주나 그의 친구들이나 그것이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
다. 얼마 뒤 그는 왜경에 끌려가 후꾸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으로 비온 뒤 잠깐 모습을 드
러낸 무지개처럼 짧은 인생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그가 불의의 죽음을 당하자 그의 친구들은 크게 통곡하며 그를 애도했다.


▲  윤동주 생가에서 수습해온 나무 우물
우물 위에 두룬 나무판을 가져와 복원한 것이다. 대략 100년 정도 묵었다고 하며.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져 중후한 멋을 풍긴다.
 

※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 찾아가기 (2018년 1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윤
  동주 문학관)에서 하차, 길 건너편에 윤동주문학관과 언덕이 있다.
*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1020,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윤동주문학관 관람정보 (2018년 11월 기준)
* 문학관 관람시간 : 10시 ~ 18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 추석은 쉼)
*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관람시간 제한이 없는 열린 공간이다.
* 입장료 없음. 문학관 해설사 운영
* 매년 5월에 윤동주문화제가 열린다. (시낭송회와 백일장, 윤동주상 시상식, 문학콘서트, 문
  학둘레길 걷기대회 등의 행사가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3-100 (창의문로 119 ☎ 02-2148-4175)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8년 11월 9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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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 늦가을 나들이 (숙정문~백악마루~창의문)


'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北玄武), 북악산(백악산) 나들이 '

북악산 한양도성길 (백악쉼터 부근)

▲  북악산 한양도성길

숙정문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  숙정문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가을이 한참 절정을 누리던 11월 한복판,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을
찾았다.
오후 2시,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1111번(번동↔성북동)을 타고 성북동 명
수학교 종점으로 이동했다. 서울 도심 속의 전원(田園)마을로 일컬어지는 성북동(城北洞)은
나의 즐겨찾기 명소로 정말 지겹도록 찾은 곳이건만 매년 10번 이상 발을 들일 정도로 나의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 곳이다.

성북동 종점에서 만국기(萬國旗)가 펄럭이는 '우정의 공원'을 지나 삼청각으로 인도하는 조
그만 길로 들어선다.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도심을 비웃듯 산골 풍경을 여실히 비춘
다. 길 왼쪽에는 진하게 숲이 우거져 있고, 북악산이 베푼 조그만 계곡이 졸졸졸~~♪노래를
하며 흘러가는데, 그는 성북천이란 간판을 달고 속세로 흘러간다.
울긋불긋 타오른 나무들은 늦가을의 절정을 누리고 있고, 그들이 뿌려놓은 은행잎과 단풍잎
은 귀를 접고 누워 있다. 은행잎은 누가 쓸었는지 가장자리로 수습되어 자연산 황금빛 카페
트를 자아낸다.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함께 약간의 오르막 길이 펼쳐지는데,
그 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삼청터널은 성북동에서 도심을 이어주는 터널인데,
겨우 2차선 크기로 폭이 좁으며, 4발 수레의 왕래가 빈번해 삼청각(三淸閣) 앞에 닦여진 횡
단보도에서 보행자용 신호 버튼을 눌러 파란불을 소환해 건너는 것이 좋다. 물론 수레의 눈
치를 적당히 보며 건너가도 된다.

길을 건너면 홍련사(紅蓮寺)로 가는 길과 북악산으로 가는 길이 나란히 나타난다. 초행자는
자칫 햇갈리기가 쉬운데, 오른쪽 평탄한 길이 홍련사로 가는 길이며, 왼쪽 계단길이 북악산
과 김신조루트로 가는 길이다. 홍련사로 가는 길은 단지 홍련사만 이어줄 뿐, 다른 곳과 이
어지지 않으며, 절 입구에 정열적으로 타오른 단풍나무가 정처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앗아간
다. 저 길로 들어서면 나도 저들처럼 붉게 물드는 것은 아닐까?


▲  늦가을에 잠긴 삼청각, 숙정문안내소 가는 길

▲  늦가을이 화사하게 불을 질러놓은 붉은 단풍이 마중하는
홍련사(오른쪽) 입구와 북악산, 숙정문 입구(왼쪽)


 

♠  북악산(백악산) 입문

▲  북악산으로 오르는 산길 (숙정문안내소 직전)

북악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을 오르면 2007년에 북악산 개방 기념으로 조림(造林)한 것을 기리
고자 세운 표석이 있고, 그 표석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북악
하늘길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로 이어지며, 직진을 하면 북악산 주능선의 주요 관
문인 숙정문안내소이다.


▲  북악산의 관문이자 검문소, 숙정문안내소

숙정문안내소에서 출입신청서를 작성하여 신분증과 함께 제출하면 출입 허가를 알리는 목걸이용
패찰을 준다. 물론 신분증도 돌려준다. 단 신분증이 없으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들어가지 못하
며, 입장시간(9~16시, 겨울은 15시까지)이 지나면 이 역시 출입이 불가능하다.

숙정문안내소를 지나면 속세살이처럼 가파른 길이 숙정문까지 이어진다. 시작부터 힘든 길이니
북악산이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님을 느끼게 한다. 허나 다행히 북악산을 정비하면서 목조
계단길을 만들어 통행이 조금은 편해졌으며, 가파르기로 이름난 북악산 주능선과 비교하면 이
정도는 간단한 시험 수준이다.


▲  숙정문으로 오르는 산길 (숙정문안내소 이후)

▲  숙정문으로 오르는 계단길

※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北岳山, 백악산(白岳山)> - 명승 67호
서울 도심 북쪽에 가파르게 솟아난 북악산(342m)은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 관련글 보러가기)
, 동쪽의 낙산(駱山, 낙타산, ☞ 관련글 보러가기),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남산)과 더불어 서
울 도심을 지키는 4대 산의 하나이자 이들의 맏형이다. 이들 4개의 산은 서울의 안쪽을 둘러싸
고 있어 내사산(內四山)이라 불린다.

서울 도심의 지형은 내사산에 감싸인 분지(盆地)로 조선 태조 때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국도(
國都)를 옮기면서 이들 산의 능선을 따라 18.2km의 도성(都城)을 쌓았다. 그리고 풍수지리에 따
라 북쪽의 북악산을 북현무(北玄武)로 하여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삼았으며, 인왕산을 우백호(
右白虎),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남산을 남주작(南朱雀)으로 삼았다.
이렇게 도성을 만들고 한강 남쪽에 솟은 관악산(冠岳山, 629m)을 신하의 산이란 뜻의 조산(朝山
)으로 삼았는데, 문제는 주산인 북악산보다 훨씬 높고 산세가 우람해 거의 신하가 왕을 누르고
있는 형세였다. 게다가 관악산과 그 서쪽에 자리한 호암산(虎巖山)이 각각 활활 타오르는 불의
모습과 호랑이의 모습으로 서울을 응시하고 있는지라 조선 위정자들은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
환으로 서울 북쪽에 있는 북한산(삼각산)을 서울을 지키는 진산(鎭山)으로 삼아 북악산을 보조
하게 하고 관악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했다. 북한산이 관악산보다 키도 높고 산세도 훨씬 장대하
기 때문이다.

북악산은 하얀 바위가 많아 원래 백악산(白岳山)이라 불렸으며, 종로구에서는 어디서든 그가 보
인다. 마치 제주도 어디서나 한라산(漢拏山)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조선시대부터 서울을 상징하는 산으로 남쪽 자락에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세웠
으며, 그 북쪽(지금의 청와대)에는 넓게 후원을 두었다. 지금은 청와대(靑瓦臺)와 국무총리공간
이 둥지를 틀고 있어 이 땅의 정치, 행정 1번지의 역할은 변함이 없다.

북악산 주능선에는 한양도성(漢陽都城)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정상 동쪽에는 도성
의 북문인 숙정문이 있고, 인왕산과 경계를 이루는 자하문고개에는 창의문(彰義門)이 고색의 모
습으로 고개 중턱을 지킨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요충지로 해방 이후까지 주능
선과 북쪽 능선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으나 1968년 1.21 사건 이후 북악산 대부분
이 금지된 땅이 되고 말았다.

주능선과 조금 떨어진 삼청동(三淸洞)과 청운동(淸雲洞)은 한양도성의 북쪽 변두리로 숲이 무성
했다. 삼청동계곡과 대은암(大隱巖)계곡, 백운동(白雲洞)계곡, 청송당(聽松堂)계곡 등이 흘렀으
며, 풍경이 매우 고와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 및 풍류(風流)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또한 삼청공
원과 숙정문 남쪽은 서울 여인들의 봄꽃놀이 장소로 유명했다고 전한다. 대은암계곡 바위글씨를
비롯해 당시의 여러 문화유적이 아련히 남아있으며, 북악산 북쪽 백사골(백사실)에는 백석동천
이란 별서(別墅)유적이 남아 있다.

북악산은 북쪽으로 북한산과 이어져 있고 숲이 무성하다보니 예로부터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다.
그들은 궁궐 후원과 북촌(北村)까지 침투했는데, 태종(太宗)이 경복궁 후원을 거닐다가 호랑이
의 습격으로 위기를 겪은 적도 있었다. 또한 다른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았
다고 하며, 대신 수진궁(壽進宮) 귀신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그래서 인왕산과 북악산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왕족의 사
당임)

1968년 이후 빗장을 철저히 닫아걸던 북악산은 2006년 4월 1일 홍련사에서 숙정문을 거쳐 촛대
바위까지 부분 개방되었으며, 그것도 인터넷 예약을 통해 1일 4회만 출입이 가능했다. 이후 전
면 개방을 위해 쉼터와 의자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어 2007년 4월 5일, 말바위부터 북악산 정상
을 거쳐 창의문까지 전 구간이 부분 개방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2009년 북쪽 능선인 북악하늘길
(김신조루트)이 활짝 열려 시민의 품으로 돌아어왔다. 특히 이 길은 약간의 통제구역이 있긴 하
지만 제약이 심한 주능선과 달리 시간 제약이 없다.

북악산은 예로부터 소나무가 유명하여 조선 조정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했으며, 왜정(
倭政)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로 지금은 주능선 일대에 좀 남아있다. 그 외에는 간간히
소나무가 목격된다. 또한 오랫동안 금지된 곳으로 있다보니 식물들이 마음 놓고 뿌리를 내려 숲
이 원시림마냥 매우 울창하다. 숙정문 주변에는 팔배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수목이 무성
하여 새들이 많이 산다.
그러다보니 서울 도심의 하늘을 정화시켜주는 허파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인왕산과
북한산, 관악산과 더불어 대자연 형님이 서울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자 꿀단지로 앞으로도 지금
의 모습 그대로 삼삼한 자연의 공간으로 서울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산 주변에 국가의 예
민한 시설이 많으니 도읍을 옮기지 않는 이상은 개발의 칼질도 자유롭게 산을 범할 수 없을 것
이다.


▲  북악산 북쪽 산줄기 남마루에서 바라본 북악산 주능선(가운데 산줄기)

※ 북악산 주능선과 한양도성길
2006년 4월부터 순차적으로 개방된 주능선은 창의문에서 정상을 거쳐 말바위, 와룡공원으로 이
어지는 4.3km 구간으로 숙정문 안내소와 말바위 안내소, 창의문 안내소를 통해 입장할 수 있다.
그외에는 절대 출입금지이다. 또한 탐방구간(말바위안내소~창의문안내소)을 절대로 벗어나면 안
되며 도처에 군인이 지키고 서 있으니 엉뚱한 마음을 품으면 곤란하다. (말바위안내소~말바위~
삼청공원/와룡공원 구간은 완전 개방된 구간으로 시간 제한 없음)

주능선에서 만날 수 있는 명소로는 숙정문과 1.21사태소나무,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촛대바위
, 청운대 등이며, 군사시설이 옥의 티처럼 널려 있어 북악산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실감케 한
다. 만약 서울이 수도가 아니었다면 북악산은 꽤나 자유로웠을 것이다.

북악산 정상과 청운대에서는 서울 도심이 두 눈 아래로 펼쳐져 조망(眺望)이 천하 일품이며, 숙
정문과 말바위에서는 성북동과 성북구 서북부 지역이 보이고, 한양도성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평창동(平倉洞)과 부암동, 인왕산, 북한산이 차례대로 보여 그야말로 움직이는 조망대이다.

※ 북악산 한양도성 찾아가기 (2015년 11월 기준)
① 창의문 안내소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윤동주문학관) 하차, 창의문 옆에 바로 안내소가 있다.
② 숙정문 안내소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종점에서 하차, 도보 15분
③ 말바위 안내소 - 지하철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성대후문
   (와룡공원)에서 하차, 성북동 방면으로 3분 걸으면 한양도성이 있는 와룡공원이다. 여기서
   성곽 북쪽 자락길을 10분 정도 가면 말바위로 오르는 나무 계단이 나오며, 계단을 올라 서쪽
   으로 가면 말바위안내소이다. 또는 4호선 혜화역(1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8번을 타
   고 명륜동 종점에서 2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 이들 안내소는 주차시설이 없으며, 부근에 딱히 수레를 세울 곳이 없으므로 대중교통을 이용
  하기 바란다.

★ 북악산 관람정보 (2015년 11월 기준)
* 북악산(한양도성) 입장시간은 9시부터 16시까지이며, 동절기(11~3월)는 10시부터 15시까지다.
  퇴장은 무조건 18시(동절기는 17시)까지 마쳐야 된다.
* 쉬는 날 -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화요일에 쉼) / 입장료 없음
* 탐방구간
① 창의문 ~ 북악산 정상 ~ 청운대 ~ 숙정문 ~ 말바위안내소 ~ 삼청공원/와룡공원/성북동
② 숙정문안내소 ~ 숙정문 ~ 청운대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 창의문
* 북악산 탐방 유의사항
① 지정된 코스를 절대로 벗어나면 안된다. 잘못하면 총 맞을 수 있다.
② 탐방로 전 구간은 금연, 금주, 애완동물 출입 제한
③ 안내소(창의문, 숙정문, 말바위)에서 출입신고서를 작성해야 되며,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
   야 된다. 신분증이 없으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못들어간다.
④ 안내소 외에는 딱히 편의시설이 없다. 해우소는 안내소에만 있으며, 간단한 먹거리는 안내소
   주변이나 산길 곳곳에 마련된 쉼터에서 먹으면 된다.
⑤ 사진 촬영은 숙정문과 촛대바위, 청운대, 북악산 정상, 백악쉼터, 1,21사태소나무, 돌고래쉼
   터, 창의문에서만 가능하다. (그 밖에 장소는 곤란함)
* 문화유산 해설 : 3~11월까지 문화유산 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매일 2회<10시(11월은 10시
  30분), 14시> 운영하며, 각각 말바위와 창의문을 출발하여 곳곳을 설명해준다. 별도의 신청은
  받지 않으며, 출발시간까지 집결지에 모인 탐방객에 한해 가이드를 해준다.
* 안내소 연락처 (북악산 한양도성 홈페이지는 이곳을 클릭한다)
① 말바위 (☎ 02-765-0297~8, 팩스 02-765-0296)
② 숙정문 (☎ 02-747-2152, 팩스 02-747-2153)
③ 창의문 (☎ 02-730-9924~5, 팩스 02-730-9926)


 

♠  한양도성의 북문이자 오랫동안 통제구역으로 묶인 금지된 성문,
숙정문(肅靖門) - 사적 10호

숙정문안내소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숙정문이 모습을 비춘다. 북악산 주능선에 자리한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북문(北門)으로 남대문<숭례문(崇禮門)>, 동대문<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돈의
문(敦義門)>과 함께 한양 4대문의 하나였다. 북대문(北大門), 북문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가파른
산능선에 자리해 있어 도성의 대문이라기도 보다는 산성(山城)의 조촐한 성문 분위기가 강하다.

문의 이름인 숙정(肅靖)은 엄숙히 다스린다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 1396
년 지금보다 약간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1413년(태종 13년) 풍수학자인 최양선(崔揚善)이 태종
에게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地脈)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
다'
건의하여 이들 문을 닫아걸고 소나무를 잔뜩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무늬만 문이
된 것이다.
허나 숙정문을 품은 북악산 주능선은 도성 내부와 바깥이 훤히 바라보여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출입을 거의 통제했고, 주변이 첩첩한 산주름 속이라 교통의
기능은 별로였다. 겨우 성북동과 북악산 북쪽 능선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옛날 성북동은 산
지에 선잠단(先蠶壇) 같은 국가 제단만 있었음>
그리고 평소 때와 비가 많이 올 때는 숙정문을 닫아 걸다가 가뭄이 심할 때 남대문을 닫고 이
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1416년(태종 16년) 제작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따라
북쪽은 음(陰). 남쪽은 양(陽)을 상징하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통행문으로서
의 존재감보다는 도성 수비와 음양의 원리를 따지는 풍수지리적인 존재감이 더 컸던 것이다.

1504년(연산군 10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숙청문이 언제 숙정문으로
간판을 갈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1523년부터 숙정문 이름이 등장했다. 숙정문 외에도 북정문(
北靖門)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들 명칭이 같이 쓰이다가 숙정문으로 통합되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북악산 대부분과 숙정문 일대가 금지된 땅이 되었으며, 1976년 북악산 일
대 성곽을 손질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문루는 비록 새 건물이지만 성벽을 이루는
성돌에는 고색의 때가 만연해 중후한 멋을 보인다.
매년 봄이 되면 서울 여인들이 숙정문 남쪽에서 봄꽃놀이를 즐겼다고 전하며, 그거 외에는 딱히
숙정문 주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시(詩)나 문구(文句)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2006년부터 다시 속세에 개방되어 제한적이긴 하지만 성문 관람이 가능하다. 허나 문 좌우 성벽
과 숙정문안내소 방면만 통행이 가능하며, 남쪽에는 삼청동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지만 금줄이
쳐져 있어 절대로 갈 수 없다.

숙정문 문루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능선과 부자 동네로 콧대가 드센 성북동 일대가 훤히 바라
보이며, 대자연이 스케치한 가을 단풍이 산자락을 곱게 수 놓아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자
아낸다. 다만 문 남쪽은 울창한 수목이 시야를 방해하여 조망은 크게 떨어진다.
(숙정문은 사적 10호로 지정된 '한양도성'의 일원임)


▲  숙정문의 수수한 뒷모습

▲  세상을 향해 활짝 문을 연 숙정문
다른 성문과 달리 천정에 그림이 없다. 그냥 맨들맨들한 성돌만 보일 뿐이다.

▲  숙정문 동쪽 협문

▲  서쪽에서 바라본 숙정문 문루


▲  숙정문에서 바라본 천하 (1) 성북동 지역
눈이 시리게 맑은 가을 하늘 아래로 북악산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성북동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왼쪽에 보이는 기와집이 삼청각)

▲  숙정문에서 바라본 천하 (2) 울긋불긋 타오른 북악산 북쪽 능선
북악산길이 흐르는 북악산 북쪽 능선이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사진 왼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기와집이 북악산길의 상징인 북악팔각정이다.

▲  힘차게 뻗은 숙정문 서쪽 성벽
서울 수비를 향한 굳건한 마음이 뭉쳐 단단한 성벽이 되었다.
성곽을 따라 북악산으로 오르면 시야에 범위도 점차 넓어진다.


 

♠  북악산 촛대바위와 청운대

▲  촛대바위

숙정문에서 서쪽으로 10분 정도 오르면 왼쪽에 촛대바위가 있다. 아마도 촛대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듯 싶은데, 현실은 바위의 북쪽과 동쪽 면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곳에서 보
면 촛대처럼 보이지도 않아 그저 그런 바위로만 보인다. 그를 제대로 보려면 바로 정면인 남쪽
에서 봐야 되는데, 남쪽은 통제구역이라 발도 못들이게 하니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바위 정상
역시 금지된 곳이니 괜히 바위 위에 올라타는 일이 없도록 한다.

촛대바위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서려있다. 바로 왜정이 이 땅의 혈을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
던 추악한 곳이기 때문이다.
왜정은 1920년대 경복궁과 일직선이 되는 이곳에 말뚝을 꽂았다. 사람으로 치면 머리의 정수리
가 되는 부분이다. 즉 조선 땅의 머리 부분을 아작 내어 이 땅을 영원히 통치하려는 의도를 심
은 것이다. 다행히 그 말뚝은 제거되었다.


▲  촛대바위와 그에게로 인도하는 나무길
나무 난간 너머와 바위는 감히 발도 들일 수 없는 금지된 구역이다.

▲  촛대바위에서 청운대로 오르는 성곽
성곽을 따라 이어진 북악산의 명물인 소나무의 푸른 물결

▲  촛대바위와 청운대 중간의 성곽 바깥 길

촛대바위를 지나면 길의 경사가 점점 각박해지면서 암문(暗門)이 하나 나온다. 여기서 암문 밖
으로 나가서 곡장이라 불리는 높은 곳까지 성곽 바깥 길을 이용해야 되는데, 이는 성곽에 군대
시설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 그렇게 길을 낸 것이다.
길 옆에는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그 너머로 북한산, 평창동 등이 바라보여 마치 휴전선 너머의
미지의 땅을 보는 듯 하며, 저 길의 끝에 이르면 성 안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나온다. 거기서
다시 성곽길이 이어진다.


▲  청운대(靑雲臺) 표석 (해발 293m)

촛대바위에서 성 바깥, 안쪽을 들락거리며 20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에서 2번째로 높은 곳인 청
운대에 이른다.
청운대는 푸른 구름의 지대란 뜻으로 근래에 붙여진 이름인 듯 싶다. 이곳은 공간이 넓고 의자
가 마련되어 있어 잠시 두 발을 멈추고 쉬어가기에 좋으며, 북쪽으로 성북동과 북한산, 남쪽으
로 남산과 서울 도심이 바라보여 조망 또한 괜찮다. (도심 쪽이 괜찮음)


▲  소나무가 짧게 그늘을 드리운 청운대

▲  청운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  청운대에서 바라본 북악산 정상

▲  여장 성돌에 새겨진 빛바랜 글씨들

청운대를 지나면 안내문이 하나 나오는데, 그 안내문에 따라 여장을 잘 살펴보면 글씨들이 희미
하게 아른거릴 것이다. 이 글씨들은 도성을 축조하면서 새긴 공사 구역 표시와 공사 담당 고을,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으로 이런 것이 새겨진 성돌이 한양도성에 여럿 있다.

1396년 한양도성을 만들 때 성곽 전구간을 600자(약 180m) 단위로 끊어 97구간으로 구획하고 천
자문(千字文) 순으로 공사 구역을 표시했다. 북악산 정상에서 천(天)으로 시작해 지(地), 현(玄
)... 순으로 해서 북악산 정상 동쪽에서 조(弔)로 끝나며, 구역 다음에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
자의 직책, 이름을 새겼다. 이런 공사 실명제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 되었다. 이곳 성돌에는 의
령시면(宜寧始面)이라 쓰여 있어 의령(경남) 시작 지점을 뜻한다.


▲  남북분단의 쓰라진 비극 - 1,21사태 소나무

청운대를 지나면 성돌 글씨와 함께 1.21사태 소나무라 불리는 소나무를 만나게 된다. 북악산하
면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1968년 김신조 공비 패거리의 서울 침공 사건인 이른바 1.21사태로
그들과 총격전을 주고 받은 현장이다. 북악산에는 그와 관련된 쓰라린 장소가 많은데, 이 소나
무와 호경암이란 바위에는 총탄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호경암이 있는 북쪽 능선에는 김신조 일
당이 도망쳤다고 전하는 김신조루트(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가 있다.

때는 1968년 북한은 김신조 일당 31명을 보내 청와대를 공격케 했다. 임진강을 건너 파주와 양
주의 여러 산과 북한산 서쪽 자락, 창의문을 거쳐 1월 21일 도심까지 용케 들어온 김신조 패거
리는 청와대를 코앞에 둔 청운동(淸雲洞)에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1932~1968)이 이끄
는 경찰에게 저지를 당했다.
경찰이 검문을 한다며 그들의 길을 막자 공비들은 순간 발작하여 외투 속에 감춘 기관단총을 꺼
내 먼저 공격을 가했다. 불행히도 최서장은 가슴과 배에 관통상(貫通傷)을 입어 쓰러지고 '끝까
지 청와대를 사수하라!!'
명령을 내리며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서장의 죽음에 애끓는 복수심에 불탄 경찰은 더욱 반격의 속도를 올려 공비들 상당수를 벌집으
로 만들었으며, 이때 김신조를 비롯한 살아남은 공비들은 목을 붙잡고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줄
행랑을 쳤는데, 그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바로 이 소나무 부근에서 격전이 일어나 15발이 나무
에 박혔다.

이후 북악산 북쪽 능선인 호경암에서 격전이 있었고, 1월 21일 이후 14일의 토벌 끝에 김신조와
도주 1명을 제외한 29명을 사살했다. 도주 1명은 북한까지 도망을 쳤으며, 토벌된 공비의 시신
은 파주시 적성면 적군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김신조는 투항해 이 땅 어딘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김신조 일당의 난입 사건을 1.21사태라 부르며, 이 사건을 계기로 단단히 뚜껑이 폭발한
박정희 대통령은 바로 그해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군작전도로인 북악스카이웨이를 콩
볶듯 급히 닦게 했다. 예비군 창설로 인해 이 땅의 남자들은 군제대를 하고도 8년이나 예비군훈
련을 받아야 되는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북악산에 널린 수많은 소나무의 하나이지만 이제는 북악산의 명물로 단단히 자리매김을 하였다.
허나 좋은 뜻에서 그리 되면 모르지만 호경암과 함께 1.21사건 같은 우울한 사건으로 명물이 된
것이니 소나무 자신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름 없는 소나무로 조용히 묻히는 것
이 좋았을 것이다. 어쩌다가 안좋은 쪽으로 명물이 되었는지 참. 나무나 사람이나 운과 시간을
잘 만나야 된다.
게다가 호경암처럼 당시에 총탄 흔적까지 진하게 안고 있으니 서로 총을 겨누며 대치하는 남북
분단의 비정한 현실을 전율이 일도록 안겨주는 유쾌하지 못한 곳이다.


▲  1,21사태 소나무의 총탄 흔적
그때 총탄이 박힌 자리에 빨간색과 흰색으로 흉하게 표시를 해두었다.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에서 창의문까지

▲  북악산 정상에 박힌 바위

청운대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에 이르게 된다. 백악마루는 해
발 342m로 마루는 순수 우리말로 정상을 뜻한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북악산 정상은 청운대보다 공간이 조금 넓으며, 정상 중앙에
는 백악산의 정상 비석과 북악산 옛모습 복원 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정상 북쪽에는 사람 키보
다 2배 정도 높은 굵직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꼭대기가 실질적인 북악산 정상이다.

정상 남쪽에는 청운대와 마찬가지로 소나무가 가득해 그윽한 솔내음을 전해주며, 지정된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이고 사진을 찍어야 된다. 테두리를 넘으면 절대로 안된다. 여기서는 동서남북 어
디든 촬영이 가능하며, 북쪽으로는 평창동과 북한산, 동쪽으로는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지역, 서
쪽은 부암동과 인왕산, 그리고 남쪽으로 서울 도심과 남산이 속시원히 바라보여 조망이 가히 천
하일품이다. 이곳에 올라 저 발아래 펼쳐진 천하를 보고 있자면 그 천하가 마치 내 것이 된 듯,
잠시나마 제왕(帝王)마냥 즐거운 기분이 밀려온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세계 최대의 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아래 두고 굽어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으로 이곳만
큼 조망이 좋은 곳도 없다. 서울 도심을 둘러싼 산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이고 오랜 세월 서울 땅
을 지켜온 북현무로서의 면모와 위엄이 느껴진다.


▲  하얀 돌로 다듬은 백악산 정상 표석

▲  북악산 정상에서 소나무 너머로 보이는 서울 도심과 남산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 지역
산속에 묻힌 동네가 성북동이고, 그 산 너머로 성북구와 강북구, 노원구 등
서울 동북부 지역이 앞다투어 바라보인다.

▲  북악산 꼭대기 바위에서 바라본 정상부
정상부는 대머리처럼 아무 것도 없고, 그 주변에 소나무와 여러 식물을 심었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북악산을 받쳐주는 서울의 듬직한 진산, 북한산이 북악산을 굽어본다.
그 남쪽 산자락에 부자 동네 평창동이 둥지를 틀었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
인왕산 너머로 은평구, 서대문구 등의 서울 서북부 지역과
서울/고양시 경계를 이루는 산들이 보인다.

▲  백악쉼터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
늦가을 오색 단풍의 물결이 부암동 일대를 화사하게 물들였다.


북악산 정상에서 창의문으로 가는 길은 북악산에서 가장 고달픈 구간으로 각박한 속세살이만큼
이나 가파르다. 내려갈 때는 올라가는 것보다야 부담이 적겠지만 급하게 펼쳐진 성곽길에 아찔
함마저 일 정도이다. 반면 창의문에서 올라갈 때는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성곽길에 저걸 어떻
게 올라가나 정말 까마득하다. 거의 30~40도 경사의 야속한 성곽길을 올라야 되니 말이다.
그래서 등산이 딸리거나 노인과 어린이들은 가급적 숙정문이나 말바위에서 오르길 권한다. 어차
피 거기도 힘들긴 마찬가지지만 서서히 경사가 급해지는 구간이라 덜 힘들다.

정상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백악쉼터라 불리는 조촐한 쉼터가 나온다. 여기는 북악산 개방을
위해 만든 공간으로 역사적인 의미는 없다. 이곳에서도 사진 촬영은 가능하나 쉼터 자체는 찍을
거리가 없으며, 성곽과 성밖에 펼쳐진 천하를 찍으면 된다.


▲  백악쉼터에서 바라본 북악산 북쪽 줄기와 평창동, 그리고 북한산의 위용
북악산 북쪽 줄기는 늦가을이 질러놓은 단풍에 산불마냥 활활 타오르고 있다.
너무 곱게 타올라 깜깜한 밤에도 모두 보일 것만 같다.

▲  힘차게 내려가는 한양도성 (백악쉼터에서 창의문 방향)

▲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한양도성길 (백악쉼터에서 정상 방향)

▲  백악쉼터 성곽 너머로 바라본 천하
북악산 북쪽 줄기와 북한산, 평창동과 부암동

▲  돌고래쉼터와 돌고래바위

백악쉼터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돌고래쉼터가 나온다. 왜 북악산과 전혀 관련도 없는 돌고래
를 쉼터 이름으로 삼았는지 아리송했으나 그곳에 가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바로 돌고래처럼
생긴 바위가 누워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고래쉼터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 그 이름도 원래부
터 있던 것이 아닌 북악산을 개방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돌고래라고는 하지만 내 눈에는 물개처럼 보인다. 바위 동쪽에는 약간의 틈이 있는데, 거의 입
처럼 생겼고 그 위에 눈처럼 보이는 자국도 있다. 가만 보면 물개가 꼬랑지를 흔들면서 움직이
는 모습과 같은데, 차라리 물개바위라고 했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돌고래쉼터 주변은 촬영이 가능하나 찍을 만한 것은 돌고래바위와 성곽 너머로 보이는 풍경 뿐
이다. 돌고래바위는 통제구역이라 그냥 난간 너머로 봐야 되며, 바위 주변에도 소나무가 그윽하
게 운치를 자아낸다. 그런 소나무 사이로 서울 도심이 살짝 속살을 비친다.


 

♠  북악산의 서쪽 종점이자 옛 한양도성의 성문
창의문<彰義門 = 자하문(紫霞門)> - 사적 10호

▲  창의문 바깥쪽 (부암동 쪽)
자하문고개를 밀어 만든 신작로(新作路)에 밀려 성문으로의 기능은 다소 떨어졌지만
왕년에 도성 성문으로서의 위엄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서울 도심과 부암동을 잇는 자하문고개에 옛 한양도성의 성문인 창의문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킨다. 창의문은 성밖 부암동에 있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창의문보다는 자하문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문은 한양도성의 8개 성문의 하나이자 4소문(小門)의 하나인 북소문이다. 4소문은 동소문<東
小門, 혜화문(惠化門)>,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南小門, 광희문(光熙門)>, 그
리고 이곳 창의문으로 혜화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각각 동소문. 서소문, 남소문이라 불리나 유
독 창의문은 북소문이라 불린 적이 거의 없다.


▲  창의문 안쪽 (도심 쪽)

창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만들 때 조성된 것으로 문의 이름인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
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1413년(태종 13년)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
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1416년 문을 닫아걸었다. 다만 1422년 군인들의 통로로 사용되었고, 1617년(광해군 9
년) 창덕궁을 보수할 때 이 문을 통해 석재를 운반하는 등, 철저히 나라 일에만 문을 열었으며,
성 밖 부암동에 귀족들의 별장과 놀이터가 즐비했고, 부암동을 드나들던 귀족들이 많은 점으로
볼 때 그들의 은밀한 통행로로 쓰였다. 즉 국가와 귀족들의 문이었던 것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
괄(李适) 등은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으며 역적질을 모의,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던 얼
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앞세워 도성에 쳐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른바 인조반정을
저질렀다. 그때 그 반역도당들이 부시고 들어간 문이 바로 창의문이다. 그래서 문루에는 인조반
정(仁祖反正)을 저지른 작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창의문이 백성들에게 전격 개방된 것은 1741년(영조 17년)이다. 그때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
이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라며 성문을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문루
를 다시 세울 것을 건의하여 지금의 문루가 지어졌다.


▲  창의문안내소에서 바라본 창의문 문루와 협문(夾門)
하얀 추녀에 잡상(雜像)과 용머리가 걸터앉아 성문을 지킨다. 창의문이 무탈했던 것도
아마 저들의 굳은 직업정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  문루에 자랑스럽게 걸린 인조반정 반역자들의 명단 현판
기분같아서는 저 현판을 떼서 장작으로 쓰고 싶다. 저들의 우매한 권력투쟁과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 국제정세에 우둔함으로 얼마 뒤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삼전도
(三田渡) 굴욕의 대치욕을 당하게 되고 그것도 성에 안차 동아시아의 호구 국가로
이리 저리 털리다가 결국 나라마저 몽땅 말아먹게 된다.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소문은 왜국 통감부(統監
府)가 만든 성벽처리위원회에서 1908년에 무단 철거하여 정확한 위치조차 아리송하고 동소문은
왜정 때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지었다. 남소문인 광희문은 성문만 오래되었을 뿐, 문루와 성
곽은 1970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그에 반해 창의문은 6.25 때도 총탄이 알아서 비켜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1958년 중
수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함을 과시한다. 바로 그 점이 인정되어 2015년 10월 문화재
청에서 국가 지정 보물로 지정 예고되었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절차를 거쳐 별다른 일이 없는
한 11~12월 중에 보물로 지정될 예정이다.


▲  창의문안내소에서 바라본 창의문 안쪽과 서울 도심
이곳은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공비들이 침투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도성 성문의 하나로 성문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으나, 1960년 이후 자하문고개를 밀어내고 신작
로를 닦으면서 성문의 통행 기능을 잃게 되었다. 요즘이야 산꾼과 답사꾼들로 심심치는 않지만
그래도 예전 같지는 못하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뒷전에 물러나 앉
은 모습은 정말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문 서쪽에 신작로를 내면서 한양도성은 50m 남짓 끊어져 있다. 끊어진 반대쪽<현재 윤동주(尹東
柱)시인의 언덕과 청운공원이 들어서 있음>
을 애타게 바라보는 인왕산 쪽 성벽이 견우와 직녀를
보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끊어진 구간은 도로 위에 흙을 덮어 성벽을 세우지 않는 이상은 복원
은 어렵다. 또한 창의문 바로 앞에는 북악산길이 지나가 시야를 제대로 방해한다. 문루에 올라
가 북쪽 전방을 뚫어지라 바라봤자 북악산길에 가려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별로 없다.


▲  창의문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혹은 닭)과 구름무늬

창의문은 흔히 볼 수 있는 성문의 모습이라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만 그만의 매력이자 특징이 2
가지가 있다. 그대로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눈여겨 보기 바란다.
우선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문루 바깥 쪽에 설치된 1쌍의 누혈(漏穴) 장식이 있다. 이것은 연꽃
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성문의 매력을 수식해주고 있으며, 성문 천정에는 화려하게 날개짓을 펼
치는 봉황(鳳凰) 1쌍이 그려져 있는데 속설에는 봉황이 아닌 닭이라고 한다. 성문 밖 부암동 지
형이 지네를 닮았다고 하여 비보풍수에 일환으로 그 천적인 닭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을 가만
히 보면 머리와 목, 날개는 닭을 많이 닮았다. 허나 몸통과 꼬리는 닭과는 거리가 먼 봉황의 모
습이다.

봉황이 1마리가 아닌 둘이 있는 것을 보면 암수 1쌍일 것이다. 그들 주변으로 와운문(渦雲紋)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센 소용
돌이를 보는 듯하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북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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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조망이 일품인 서울 도심의 상큼한 명소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 서울 도심의 신선한 명소, 윤동주 시인의 언덕 '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윤동주시인의 언덕 소나무


♠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 터를 닦은 서울의 새로운 명승지
문향(文香)이 가득 깃들여진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언덕'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상에 심어진 서시 비석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序詩)


서울 도심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자하문(紫霞門)고개 정상에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도심을 굽
어보고 있다. 옛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성문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서쪽에 둥지를 튼 이곳
은 인왕산 동쪽 자락에 조성된 청운공원의 일부로 2009년 6월, 천하의 큰 시인 윤동주를 기리고
자 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인 북동쪽에 자리를 닦고 그의 이름을 따서 '윤동주시인의 언덕'(이하
윤동주 언덕)이라 하였다.
언덕 이름이 그의 이름에 걸맞게도 무척 시적(詩的)이면서도 서정적인데, 그 이름은 지금의 윤
동주 언덕을 있게 한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의 회장 박영우씨가 지은 것이다.

하늘과 맞닿은 윤동주 언덕은 천하에서 가장 큰 윤동주의 유적 겸 기념지이자 38선 이남에서 거
의 유일한 윤동주 기념터로 그의 시를 머금은 비석과 그의 혼이 깃든 영혼의 터, 그를 집대성한
윤동주문학관이 있으며, 야외공연장과 정자(서시정), 벤치 등도 갖추었다. 언덕 좌우는 북악산(
北岳山)과 인왕산(仁王山)으로 막혀있지만, 대신 남북으로 뻥 뚫린 형태로 북악산과 인왕산, 북
한산(삼각산)의 산바람이 모여들며, 앞뒤로 바라보이는 조망(眺望)은 가히 천하 명품급이다. <
특히 도심 야경이 갑(甲)> 게다가 공원의 분위기도 조용하고 차분하여 시 한 수 절로 생각나게
하니 그야말로 시상(詩想)의 공간이다. <언덕의 이름도 제법 시상을 돋군다>

그럼 어째서 이곳이 윤동주의 언덕이 되었을까?
윤동주는 이곳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았다. 다만 1941년 누상동(樓上洞)에 있던 소설
가 김송의 집에서 연희전문대학(현 연세대) 후배인 정병욱(鄭炳昱)과 하숙 생활을 했는데, 이때
하숙집에서 가까운 자하문고개와 청운공원을 수시로 찾아와 시를 구상했다고 하며, '별헤는 밤
'과 '서시'를 바로 이 언덕에서 지었다고 한다.
바로 그 인연으로 윤동주기념사업회에서 서울시청과 종로구청의 협조를 얻어 그의 언덕을 닦게
된 것이다.

그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고자 했는데, 그 서문(序文)으로 지어진 것이 바로 서시
이다. 허나 출간은 하지 못하고, 3부를 필사하여 이양하(李敭河)와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했으
며, 해방 이후 정병욱이 보관하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세상에 공개하였다.


▲  윤동주 형님의 초상화 -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을 초상화한 것이다.

※ 윤동주(1917~1945년)의 간략한 생애
윤동주는 왜정 시절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그의 이름 석자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중/
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서시를 비롯한 그의 굵직한 작품들이 정말 지겹게 나오니 말이다.
숙성이 덜 되던 학창 시절, 나는 시를 싫어했다. 무조건 외우면 장땡인 암기 위주의 잘못된 교
육의 폐해 탓일 것이다. 그런 일그러진 교육과 나의 굳건한 돌머리 앞에서 시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국어/문학 선생이 무조건 가르친 내용대로 외워야 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20세기에 활약했던 윤동주나 김영랑(金永郞), 이육사(李陸史) 등의 유명
문학가들의 이름과 그들의 작품을 보면 정말 이가 갈리곤 했다.
허나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흐르고 나이도 강제로 더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시에 대한 관심이 커지
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시의 내용도 조금씩 이해를 하게 되었고 김광섭(金珖燮)의 '성북동비둘
기'란 시가 무척 땡겨 그 시가 태어난 성북동 성락원(城樂苑, 명승 35호)에 걸터앉아 그 시를
읊고 싶은 생각까지 했었다. (성락원 비공개로 아직까지 실현하지 못했음) 비록 머리가 돌 수준
이라 시를 완벽히 외우지는 못하지만 즐겨찾는 관심사의 하나가 된 것은 분명하다.

학창 시절 그렇게나 나를 괴롭혔던 윤동주는 1917년 12월, 두만강(豆滿江) 이북인 북간도(北間
島) 명동촌(明洞村)에서 윤영석()과 어머니 김룡()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대랍자()학교를 다니다가 용정(龍井)으로 이사가면서 1933
년 그곳 은진()중학교에 들어갔다.

1935년 조선 본토로 넘어와 평양 숭실(崇實)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왜정(倭
政)에 의해 강제로 학교가 문을 닫았다. 그래서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
를 졸업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 문과에 진학하여 1941년에 졸업했다.
그때 누상동 김송의 집에서 정병욱과 하숙생활을 했었다.
학문의 열기가 뜨거웠던 그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東京) 릿쿄(敎)
대학 영문과에 들어갔으며, 1942년 도시샤대학(同學) 영문과로 옮겼다.

1943년 7월 학업을 멈추고 잠시 고향에 가려고 했으나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왜경에 체포되
었다. 왜경은 그에게 변론의 기회도 제대로 주지 않고 징역 2년형을 때려 후꾸오카 형무소에 집
어넣었는데 거기서 잔인한 생체실험의 희생자가 되어 결국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2월,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8세였다. 목격담에 의하면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
를 계속 강제로 맞았다고 하니, 결국 왜국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천재시인 윤동주는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고 강제로 눈을 감게 된 것이다.

윤동주는 그의 조부(祖父)의 영향으로 시에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했다. 그의 동생인 윤일주(
)와 당숙인 윤영춘()도 시인이었다고 하니, 그의 집안은 문학적 소질이 다분한 지식
인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15살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첫 작품은 '삶과 죽음'과 '초한대'이다. 이후 '병아리(1936
년 11월)','빗자루(1936년 12월)''오줌싸개 지도(1937년 1월),'무얼 먹구사나(1937년 3월)','거
짓부리(1937년 10월)' 등을 간도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카톨릭소년'이란 잡지에 소개했다.
연희전문대학 시절에는 조선일보에 '달을 쏘다'를 냈고, 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자화상','
새로운 길'등이 실렸다. 그리고 '쉽게 쓰여진 시'가 1946년 경향신문에 실렸다.
앞서에서 언급했던 누상동 하숙 시절,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고 했으나 내지 못했다. 그때 그가 남긴 시들은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
해 1948년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시는 청소년 시절에 지은 시와 성년 이후의 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청소년기에 쓰여진 시
들은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고 대체로 어린 시절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대표작으로는 '겨울'과 '버선본' 등이 있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왜정 시절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시가 주류를 이루니 '서시','자
화상','또 다른 고향','별헤는 밤'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
표 시로 어둠의 시절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비록 뜻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그의 시는 우리나
라 뿐 아니라 왜열도와 중원대륙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그가 다닌 왜열도의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 해마다 많은
이들이 헌화를 하고 그를 기린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아시아를 뛰어넘는 세계 문학계
의 큰 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세상을 뜨자 그의 시신을 간도 용정으로 옮겨 묘를 썼다. 허나 그 무덤도 한때 위치를
몰라 가족들이 방황하다가 연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온 왜인 교수의 노력으로 간신히 묘비를 찾
았다. 이후 우리나라와 중원대륙의 공산당 정부가 국교를 맺자 가족들은 봉분을 단장하고 묘비
도 새로 세웠으며, 그의 명동촌 생가는 199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그가 다닌 명동소학교는 윤
동주 관련 단체의 지원으로 옛 건물을 복원하여 윤동주기념관으로 거듭났다.

우리나라에 참으로 굵직한 시인들이 많지만 윤동주만큼 인기와 사랑이 큰 시인도 손에 꼽을 것
이다. 우리나라를 넘어 다른 나라에서도 그의 팬들이 많으니 말이다. 비록 왜의 잔악무도한 만
행으로 일찍 눈을 감게 되었지만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혼은 우리들 마음 속에 길이길이 깃들
여져 있으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는 영원한 문학신(文學神)이다.


▲  인왕산길 바로 옆에 자리한 윤동주시인의 언덕

서울의 새로운 꿀명소이자 문학의 성지(聖地)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윤동주시인의 언덕은 그 이
름만 들어도 마음의 여유가 생길 듯한 느긋한 언덕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현실은 세상처럼
가파른 언덕이다.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자하문고개에 있다보니 그런 것인데, 고갯길에서
언덕 동쪽으로 오르는 길이 경사가 좀 각박하지만 지름길이며, 윤동주문학관 뒷쪽으로 오르는
길도 있다. 언덕의 날카로운 기세를 좀 피하고 싶다면 청운공원으로 가는 길(자하문로35길)을
이용하여 서시정으로 조금 우회하는 것도 괜찮다.


▲  늦여름 햇살 속에 한가롭게 졸고 있는 야외 공연장

푸른 잔디와 키 작은 나무들이 아낌없이 수식하고 있는 언덕 정상에는 언덕의 이름을 밝힌 두툼
하게 생긴 표석과 야외 공연장이 있다. 공연장에서는 윤동주 시 낭송회와 백일장, 문예 관련 여
러 행사와 공연이 열린다.


▲  언덕 정상에 박힌 윤동주시인의 언덕 간판 표석

▲  시비 앞면을 장식하는 '서시'

▲  시비 뒷면을 장식하는 '슬픈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초기에 쓴 것으로
어둠의 시절 속에서 살아가는 민족의 슬픈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흰색은 조선 민중과
삶, 밝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언덕 정상 남쪽에는 서시가 적힌 커다란 시비(詩碑)가 있는데, 대부분은 앞면만 보고 지나친다.
허나 뒤에도 시가 숨겨져 있으니 시비의 속임수에 속지 말자. 뒤에 새겨진 시는 슬픈족속이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북쪽을 장식하는 한양도성 성곽길 (사적 10호)

언덕 북쪽에는 옛 한양도성의 성곽(城郭)이 길게 둘러져 있다. 이 언덕은 성곽 안쪽으로 성곽을
따라 길이 나 있는데, 서쪽으로 인왕산과 이어지나 인왕산길로 잠깐 끊기며, 동쪽으로 자하문과
이어지지만 문 서쪽에 언덕을 깎고 창의문로를 뚫으면서 서로가 끊겨버렸다. 그래서 윤동주 언
덕의 성곽은 양쪽이 강제로 끊긴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소나무 (윤동주 소나무)

언덕 성곽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청청한 소나무 1그루가 마치 성곽을 지키는 군사처럼 서 있다.
나무 곁에 서면 성곽 여장 너머로 도성 밖 경승지이자 도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인 부암동(付
岩洞)과 평창동(平倉洞)이 앞다투어 두 눈 밑에 펼쳐지고 그 너머로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
산(삼각산)이 든든한 모습으로 서울을 살핀다.

이 소나무는 윤동주가 시를 구상하던 곳이라 하여 일명 윤동주 소나무라 불린다. 흔히 이 땅에
서 볼 수 있는 소나무이지만 어둠의 시절, 독야청청(獨也靑靑)한 그의 얼이 깃들여진 듯 청초하
고 고고해 보이며,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주변을 보는 모습도 예사롭지가 않아 보인다. 정말 그
가 저 나무 그늘에서 시를 구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윤동주 언덕을 상징하는 의미 깊은 나무로
나름 분주한 삶을 살고 있다.


▲  윤동주 소나무에서 바라본 천하
인왕산과 북악산, 북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둥지를 튼 부암동과 홍지동(弘智洞)을
비롯하여 북한산 남쪽 봉우리들도 바라보인다.

▲  윤동주 영혼의 터

야외공연장에서 자하문 쪽으로 내려가면서 오른쪽 잔디밭을 유심히 살펴보면 땅에 박힌 표석 하
나가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 표석은 윤동주 영혼의 터로 서시 시비의 뒷면처럼 많이들 지나치
는데, 이곳은 간도 용정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 흙 한줌을 가져와 뿌린 것으로 그 위에 표석을
박았다. 즉 그의 소소한 가묘(假墓)가 되는 셈이다. 영혼의 터라고 하니 조금은 오싹한 기분도
들긴 하지만 그만큼 근사한 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서시정(序詩亭)

언덕 서쪽 밑에는 서시정이라 불리는 단촐한 모습의 정자가 도심을 굽어보고 있다. 2009년 언덕
을 꾸미면서 지은 것으로 윤동주의 대표작인 서시를 따서 서시정이라 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
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정자로 이곳에 몸을 들여 남쪽을 보면 천하 제일의 도시로 콧대가 이만
저만이 아닌 서울의 심장부가 두 눈 밑에 그림처럼 펼쳐진다. (특히 야경이 멋짐)


♠  서촌의 지붕이자 윤동주 언덕을 옆구리에 낀 시민공원
청운공원(淸雲公園)

▲  가을옷을 곱게 걸친 청운공원과 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의 북쪽 끝이자 인왕산 자락 동북쪽에 청운공원이 넓게 자리를 닦았다. 이곳은 청운동 주택
가와도 제법 거리를 둔 자연 지대로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란 신선한 꿀단지를 옆구리에 품고 있
다. 인왕산길이 공원의 북쪽과 서쪽을 지나가며, 이 길은 자하문고개에서 북악산길로 간판을 바
꾸고 북악산 뒷쪽을 통해 성북구로 달려간다. 그리고 공원을 가로지르는 골목길(자하문로35길)
은 윤동주문학관에서 공원을 지나 청운동 주택가를 거쳐 자하문로로 내려간다.

청운공원은 인왕산 품에 조성된 시민공원으로 산자락에 조성된 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인왕산 돌을 모아 일종의 돌아파트를 지었고, 2009년 이후 공원 동쪽에 윤동
주시인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이 자리를 닦으면서 예전보다 더 값비싼 존재가 되었다.
공원이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서울 도심과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일품이
며, 북악산과 인왕산의 청정한 기운이 늘 깃들여져 있어 공기도 맑다. 게다가 서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성지(聖地)로 매년 1월 1일에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각종 꽃들이 울창하여 봄에
는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가 봄의 향연을 열고, 가을에는 오색영롱한 단풍잎이 가을의 향연을
베푸는 도심 속의 경승지이다.

청운공원에 가려면 자하문고개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자하문터널 남쪽에서 자하문로
35길을 따라 올라가는 방법도 있는데, 그건 경사가 제법 각박하다. 그리고 청운동 안쪽에 자리
한 유진인재개발원 정문 직전에 청운공원으로 오르는 산길이 가늘게 이어져 있고, 사직공원과
수성동(水聲洞)계곡에서 인왕산길을 타고 접근하는 것도 괜찮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늦가을 단풍이 한참 절정을 이루던 때(11월 초)라 나무들이 진한 붉은색과 노란색, 녹색 등으로
단단히 물들었다. 겨울 제국(帝國)의 시련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남은 기력을 모두 발산하는 나
무들.. 죽음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무지개처럼 짧은 삶을 원망하는 나뭇잎들.. 인
간은 그들을 보며 늦가을의 정취를 즐기면서도 '올해도 이제 저물었구나, 좀 있으면 강제로 1살
을 더 먹네' 늦가을과 연말 우울증에 부질없는 한숨을 쉰다.


▲  청운공원 서부 (꿈의 분수 주변)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일몰 직전의 하늘

▲  공원 서부에 자리한 청운공원 꿈의 분수

청운공원 서쪽에는 꿈의 분수라 불리는 바닥분수와 넓은 운동장이 있다. 꿈의 분수는 매일 2번
씩 조촐하게 분수쇼를 선보이는데, 그리 현란한 편은 아니며, 그냥 주변을 시원하게 해주는 정
도이다. 가동기간은 4월부터 10월까지로 1차는 11시에서 13시까지, 2차는 15시부터 16시까지이
며, 겨울에는 무조건 쉰다.
분수쇼는 전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분수와 어울려 물놀이를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그러니
그냥 눈으로만 보기 바란다.


▲  고양이 같은 인왕산 호랑이상

천하 호랑이의 대명사이자 하늘 아래 제일 무서운 존재였던 인왕산 호랑이, 이제는 숱한 설화만
을 남긴 채, 우리들 뇌리에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그들을 그리며 만들었다는 인왕산 호랑이상, 어린이들이 울고 갈 정도로 매섭게 좀 만들 것이지
순둥이 비슷하게 만들면서 졸지에 호랑이 탈을 쓴 인왕산 고양이상이 되어버렸다. 곶감도 우습
게 봤다는 천하 제일의 인왕산 호랑이를 제대로 모욕한 셈이다.


▲  인왕산 돌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

서시정에서 윤동주문학관으로 내려가면 돌의 거대한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2007년 서
울시에서 추진한 '서울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인왕산과 그 주변에서
주운 돌을 정리하여 그들의 조촐한 아파트로 만들었다.


♠  윤동주 언덕 밑에 마련된 윤동주문학관

윤동주시인의 언덕 밑이자 자하문고개 정류장 부근에 시인 윤동주를 집대성한 '윤동주문학관'이
심플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곳에는 원래 청운동 수도가압장 건물이 있었는데, 빈 채로 버려져 있던 것을 2009년 윤동주의
언덕을 만들면서 우선 급한데로 손질해 문학관으로 삼으면서 우리네 정신적 영혼의 가압장이 되
었다. 속은 문학관일지 몰라도 겉은 문학과는 담을 쌓은 우울한 모습이었는데, 윤동주문학사상
선양회에서 서울시청과 종로구청의 지원을 받아 오랜 번데기 생활 끝에 2012년 7월 25일 지금의
모습으로 화려하게 태어났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2011년 3월로 그해 연말까지 여러 번 발걸음을 했는데, 당시 내부
는 좀 어수선했다. 공개시간이 있긴 하지만 평일에는 일찌감치 문을 걸어잠군 경우가 많았으며,
처음에는 정문 옆에 난 조그만 문으로 입장을 해야 했다. 그런 공간이 이제는 윤동주를 닮은 세
련된 문학적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번데기를 탈피한 이 문학관은 2012년 대한민국 공공건축 부분에서 무려 국무총리상을 받았으며,
우리나라 현대건축 Best 20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화려하다 못해 눈부신 나비로 태어난
셈이다.

문학관은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있는데, 제1전시실(시인채)에는 윤동주의 손때가 담긴 친필
원고와 온갖 문서와 서적들, 사진, 윤동주 모교의 의자와 등사기(謄寫機), 떡판 등 그의 유품
133점이 전시되어 있고, 제2전시실(열린우물)은 옛 가압장의 물탱크 윗부분을 개방해 중정(中庭
)으로 꾸미면서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그리고 제3전시실(닫힌우물)은 물탱크
를 원형대로 보존하면서 그 안에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담은 동영상을 상영한다. 그외에
'별뜨락'이란 쉼터를 만들어 서울 도심을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문학관에 진열된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그의 생가에서 가져온 나무 우물이 있다. 우물의 목판은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회장인 박영우씨가 직접 간도 용정에서 가져온 것으로 땅을 깊게 파고 그
우물을 보호하고자 나무 판을 4단으로 얹힌 점이 특징이다. 허나 이곳에 안착하면서 우물의 기
능은 상실되고 무늬만 남은 늙은 우물이 되었다. 전시관 안이다보니 깊게 땅을 뚫을 수도 없고,
더군다나 마땅한 수맥도 없기 때문이다.


▲  번데기 속을 헤매던 윤동주문학관 예전 모습 (2011년)

▲  윤동주문학관에 진열된 그의 유품과 초상화들

▲  윤동주 모교에서 가져온 조그만 의자
내 초등학교 시절(1~3학년)까지만 해도 저거와 똑같은 의자에 앉았는데,
기억도 흐릿한 그 시절의 추억을 잠시나마 소환해준 정겨운 의자이다.

▲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

윤동주가 교토 도시샤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학교 친구들과 우지강<우지천(宇治川), 요도가와강
> 강변으로 마실을 나가 찍은 사진이다. 이때 왜인 친구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하자 그는 아
리랑을 우수에 찬 모습으로 불렀다고 한다. 허나 그때까지만 해도 윤동주나 그의 친구들이나 그
것이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얼마 뒤 그는 왜경에 끌려가 후꾸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으로 비온 뒤 잠깐 모습을 드러낸 무지개처럼 짧은 인생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그가 불의의 죽음을 당하자 그의 친구들은 크게 통곡하며 그를 애도했다.


▲  윤동주 생가에서 수습해온 나무 우물
우물 위에 두른 나무판을 가져와 복원한 것이다. 대략 100년 정도 묵었다고 하며.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하여 중후한 멋을 풍긴다.


※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 찾아가기 (2014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윤동
  주문학관) 하차, 길 건너편에 윤동주문학관과 언덕이 있다.
* 지하철 1호선 종각역(1번 출구)과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1020,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 관람정보 (2014년 4월 기준)
* 문학관 관람시간 : 10시 ~ 18시 (매주 월요일, 1월 1일, 추석과 설날 연휴는 쉼)
* 윤동주 언덕과 청운공원은 관람시간 제한이 없는 열린 공간이다.
* 입장료 없음. 문학관 해설사 운영
* 매년 5월에 윤동주문화제가 열린다. 시낭송회와 백일장, 윤동주상 시상식, 문학콘서트, 문학
  둘레길 걷기대회 등의 행사를 가지며, 문학둘레길 걷기는 인사동 남인사마당을 출발하여 만해
  당(한용운 가옥), 시인마을 보안여관, 이상(李霜)의 집, 윤동주 하숙집터, 세종대왕 생가터,
  정철집터 등을 거쳐 윤동주 언덕까지 걷는 4시간 코스이다.
* 윤동주시인의 언덕(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다음 까페 ☞ 보러 가기
* 연세대 윤동주기념사업회 ☞ 보러 가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3-100 (창의문로 119, 문의 ☎ 02-2148-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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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니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와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4년 4월 3일부터
 
* 글을 보셨다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바로 밑에 있는 네모난 박스 안의 손가락 View on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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