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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4.16 서울 도심의 꿀명소, 인사동~북촌한옥마을 나들이 (천도교중앙대교당, 관상감관천대, 정독도서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종친부 경근당옥첩당)
  2. 2013.05.14 시간도 느릿느릿 걸음을 멈춘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 ~ 북촌한옥마을 산책 (재동, 가회동, 정독도서관..)

서울 도심의 꿀명소, 인사동~북촌한옥마을 나들이 (천도교중앙대교당, 관상감관천대, 정독도서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종친부 경근당옥첩당)

서울 북촌 나들이



' 서울 도심의 한복판, 북촌 나들이 '

소격동 비술나무

▲  소격동 비술나무

천도교 중앙대교당 종친부 경근당

▲  천도교 중앙대교당

▲  종친부 경근당

 



 

♠  안국역 주변 명소들

▲  천도교 중앙대교당(天道敎 中央大敎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호

서울 도심 한복판에 넓게 자리한 북촌(北村)은 청계천 이북 동네를 일컫는다. 한옥(기와집)이
많이 몰려있는 안국역(3호선) 이북 동네(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흔히 북촌한옥마을이라 부
르고 있으며, 내 즐겨찾기 목록에도 일찌감치 등록되어 이미 200번 넘게 발걸음을 했다.
오랜 세월 지겹도록 찾다 보니 이제는 두근거리는 마음도 예전만은 못하나 그래도 잊지 않을
정도로 가끔씩 발걸음을 하여 나의 변함없는 마음을 비추고 있다.

이번 북촌 산책은 조계사(曹溪寺)에서 시작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마무리를 지었는
데, 이미 여러 번씩 복습을 했던 곳이라 이제는 눈 감고도 그들을 그려내고 찾아갈 정도이다.
하지만 좋은 곳은 자꾸 가도 질리지 않는 법, 그들이 잘 있나 확인도 할 겸 해서 겸사겸사 북
촌 마실에 나섰다.


▲  옆에서 바라본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위엄
한참 후배들인 현대식 고층건물 속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으며
100년 묵은 고색의 향기를 마음껏 뿜어댄다.


운현궁(雲峴宮) 서쪽 맞은편에는 천도교의 중심 건물인 수운회관과 붉은 피부를 지닌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중앙대교당은 종교의식과 행사를 치루는 천도교의 중심 교당으로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
孫秉熙)가 세웠다. 그는 300만 교인에게 1가구당 10원씩을 목표로 돈을 거둬 무려 22만원의
거금을 장만해서 지었는데, 설계는 왜인(倭人)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시공은 중
원대륙에서 온 장시영(張時英)에게 시켰다. 1918년 12월에 공사를 시작했으나 1919년에 일어
난 3.1운동으로 다소 지체되었다가 1921년 2월에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처음에는 400평 규모로 크게 지으려고 했지만 조선총독부가 교당이 너무 크고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개소리를 떠들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부득이 지금의 규모로 축소
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붉은 피부의 벽돌과 화강석으로 다져진 지상 2층, 중앙탑부 4층, 연면적 280.68평 규모로 아
르누보(Art Nouveau)의 한 부류인 비엔나 세제션(Vienna Secession)풍으로 지어 외형이 견고
하고 이색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은 212평, 2층은 45.6평, 3층은 14.44평, 4층은 7.84
평이며, 정면 좌우대칭으로 뒷면에 강당을 연결한 'T'자형 구조를 취하고 있다.

강당 지붕은 맞배지붕 형태로 종탑의 바로크 형식 지붕과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외벽은 대부
분 붉은 벽돌을 쓰고 부분적으로 화강석을 썼다. 중앙 현관부는 화강석으로 반원아치를 들여
쌓았는데 고딕 양식의 성당 출입문과 비슷하며, 현관 양쪽 끝에는 화강석의 부축벽을 세워 장
식했다.
정면 1층 창은 사각형으로 머리 부분에 3개의 화강석, 2층 반원형 아치창에는 7개의 화강석을
넣어 조형미를 갖추었으며, 탑 중앙부에도 반원아치의 큰 창과 그 위로 3개의 작은 반원아치
창을 내었다.

내부는 기둥이 없어 넓은 공간을 이루고 있는데, 천도교의 중심 교당임에도 딱히 장식이 없어
소박하고 썰렁한 모습이다. 내부와 외부 공간에는 우리 겨례를 상징하는 박달나무꽃과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으나 그리 화려하지는 않으며, 비록 조선총독부의 개소리 태클로 작게 지어
졌지만 왕년에는 명동성당(明洞聖堂), 조선총독부 청사와 더불어 서울 시내 3대 건축물로 꼽
혔던 위엄 돋는 건물이다. 또한 1920년대를 대표하는 근대 건축물로도 가치가 높다.

이곳은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바쁘게 살기도 했으며,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931)이
중심이 된 어린이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 천도교 중앙대교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88 (삼일대로 457, ☎ 02-735-7579)


▲  천도교 중앙대교당 내부
위엄 돋는 겉모습과 달리 1층 속살은 생각보다 조촐하다. 내부 관람은 가능하나
종교의식과 행사가 있을 경우 제한될 수 있으며, 2~4층은 아무나
올라갈 수 없으니 함부로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  늦가을에 잠긴 천도교 중앙대교당 뜨락 은행나무들
은행나무 너머로 보이는 한옥은 친일 매국노로 악명을 떨친 민영휘(閔泳徽)가
아들인 민병옥에게 지어준 '경운동 민병옥 가옥'이다.

▲  현대빌딩 그늘에 묻힌 관상감 관천대(觀象監 觀天臺) - 보물 1,740호

안국역(3호선)에서 창덕궁(昌德宮)으로 가는 길목에 하늘 높이 솟은 현대빌딩이 있다. 그 앞
에는 현대빌딩의 위엄에 눌려 초췌해 보이기까지 하는 견고한 돌덩어리의 늙은 존재가 손짓을
하고 있으니 그가 조선 때 천문과 기상을 담당했던 관천대(觀天臺)이다.

관천대란 돌로 만든 시설로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은 물론 일식과 월식, 비와 눈 등의 기상현
상을 두 눈으로 살피던 관상감의 관측시설이다. 관천대는 우리나라에 딱 2개 남아있는데, 하
나는 창경궁(昌慶宮)에 깃든 관천대(보물 851호)로 조선 숙종(肅宗) 때 만들어졌고, 다른 하
나가 바로 이곳이다.

이 관천대는 1434년에 설치되었으며, 원래는 현대빌딩 동쪽 부분과 그 동쪽에 있는 언덕(현대
원서공원)에 있었다. 높이 4.2m, 가로 2.8m, 세로 2.5m 크기로 대(臺) 위에 돌난간이 둘러져
있고 그 안에 화강석대(花崗石臺)가 놓여 있으며, 여기에 소간의(小簡儀)와 해시계 등의 천문
기기를 올려 24시간 하늘의 눈치와 표정을 살폈다.
소간의를 올려 놓는 곳이라 소간의대(小簡儀臺)라 불리기도 하며, 별을 관측하는 곳이라 하여
첨성대(瞻星臺)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데, 가만 살펴보면 경주 첨성대와도 조금은 닮았다.

원래는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없으며, 현대
빌딩 자리에 휘문고보(휘문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그 교정으로 옮겨졌다. 이후 1978년 학교
가 강남으로 건너가면서 1983년 지금의 현대빌딩이 들어섰고, 1984년에 현재 자리에 지금의
모습으로 해체/복원되었다.

관천대를 복원할 당시, 원래 있던 자리와 땅의 높이를 맞추고자 평지에 2단의 석축을 닦아 대
를 만들고 그 위에 올려놓았는데, 바로 뒤에 현대빌딩이 공룡처럼 버티고 있으니 마치 햇님과
달님의 부질없는 격차를 보는 듯 하다. 원래 자리에 두기가 힘들다면 현대원서공원으로 옮기
면 좋으련만 개발의 칼질은 그것마저 용납하지 않고 있다.
현역에서 물러난 천문시설의 옛 원로로 현대빌딩 그늘에 가려져 천문관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며 하늘을 살피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서 물러
나 앉은 모습은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대 동쪽에는 관천대로 오르는 계단이 있으며, 처음에는 국가 사적 296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
었으나 2011년 7월 국가 보물로 승진되었다.

* 관상감 관천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40-2 (율곡로 75)

▲  경우궁(景祐宮)터 표석

▲  계동궁(桂洞宮)터 표석

참고로 현대빌딩 자리에는 관상감과 휘문고등학교 외에 경우궁이 빌딩 북쪽에, 남쪽에는 계동
궁이 있었다.

경우궁은 제왕을 낳은 후궁이나 제왕의 친할머니를 봉안한 왕실의 사친묘(私親廟)로 순조(純
祖)의 생모이자 정조가 가장 사랑했던 수빈박씨(綏嬪朴氏)의 사당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이
터진 날(양력 1884년 12월 4일), 개화당(開化黨)의 재촉으로 고종과 명성황후 등이 경복궁을
나와 경우궁에서 하루 머물렀는데, 날씨도 오지게 춥고, 사당이다 보니 편의시설도 부족해 다
음 날, 그 남쪽에 있던 계동궁으로 옮겼다. 계동궁은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인 이재원(李載元)
의 집이다.

갑신정변으로 크게 고생을 했던 고종은 개화당 역적들이 침범하여 더럽혀졌다며, 1886년에 경
우궁을 인왕산 동쪽으로 옮겼으며, 1908년에 국가 제단과 사당을 정리하면서 육상궁(毓祥宮)
에 통합되었다. 경우궁의 건물 일부는 왜정 때까지 남아있었으며, 휘문고보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면서 경우궁과 계동궁, 관상감이 모두 학교 부지에 들어갔다.



 

♠  정독도서관(正讀圖書館)과 감사원 주변

▲  정독도서관으로 거듭난 구 경기고등학교 - 국가 등록문화재 2호

북촌한옥마을 한복판인 화동(花洞)에는 서울 사람들의 지식 쉼터인 정독도서관이 있다. 화동
은 화개동(花開洞)의 줄임말로 조선 때 과일과 화초(花草)를 관장하고 궁궐에 조달하던 장원
서(掌苑署)란 관청이 있었다.

정독도서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1900년 10월 고종
의 칙령(勅令)으로 개교한 관립중학교(官立中學校)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원래는 김옥균(金玉均)과 서재필(徐載弼)의 집이 있었으나 갑신정변 이후, 나라에서 모두 몰
수했으며, 1900년 관립중학교 부지에 포함되면서 집은 사라졌다. 개교(開校) 때 지은 건물의
정면 삼각지붕 벽면에 태극기를 교차하여 그린 것으로 유명했으며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06년 관립한성고등학교로 개편되고 왜정 때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으며, 본관 뒤
쪽에 있던 을사5적의 하나인 박제순(朴齊純)의 집을 땅을 바꾸는 조건으로 매입하여 평탄작업
을 벌였다. 이때 기존 3,000평에서 11,000여 평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도서관 건물로 쓰이고 있는 옛 경기고교 건물은 1938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기고가 1976년 청
담동(淸潭洞)으로 둥지를 옮기자 서울시에서 그해 1월 옛 건물과 땅을 사들여 1년 간 손질을
거쳐 1977년 1월 4일 서울시립 정독도서관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현재 50여 만 권의 서적과 2.7만점의 비도서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도서관 남쪽 건물을 손
질하여 서울교육박물관으로 삼았다.

서울에서 어느 정도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은 꼭 거쳐갈 정도로 역사와 유서가 깊은 서울 제일
의 도서관으로 단골이 많으며, 평일과 휴일 가리지 않고 자리를 잡기 힘들 정도이다. 나 역시
여러 번 이곳에서 공부를 한답시고 책을 펴놓고 엉뚱하게 꿈나라만 허우적거린 얇은 추억이
있다.
다른 도서관과 달리 뜨락이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우며, 나무가 무성하여 굳이 공부나 서적 대
출이 아니더라도 산책이나 나들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하여 북촌의 주요 꿀단지로 관광객
들의 발길이 상당해 이 땅에서 처음으로 관광지화된 도서관이기도 하다. 게다가 보호수로 지
정된 늙은 회화나무와 여러 역사의 현장들, 오래된 우물 등이 있어 옛 볼거리도 넉넉하다.
예전에는 종친부터에서 넘어온 경근당과 옥첩당도 있었으나 2013년 말에 제자리로 돌아가 지
금은 빈 자리만 있다.

관광객들이 많다 보니 시끄러워서 과연 공부와 독서가 되겠는가 싶겠지만 도서관 분위기가 고
즈넉하고 차분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도서관이니 만큼 고성방가나 독서를 방
해하는 행위는 절대 삼가기 바란다.

* 정독도서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2 (북촌로5길 48 ☎ 02-2011-5799)

* 정독도서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늦가을도 흔쾌히 머물다 가는 정독도서관 산책로
햇님이 커튼을 치고 달님이 세상을 검게 만들어도 자신을 처절하게 불태우는
단풍나무의 배려에 나무 주변은 대낮처럼 밝을 것이다. 즉 낮과 밤을
가리지 말고 열심히 책을 보라는 자연의 뜻인 모양이다.

▲  정독도서관 정문 밑에 자리한 화기도감(花器都監)터
임진왜란 이후 조총과 화포(火砲)를 만들고자 화동에 조총청(鳥銃廳)을 설치했다.
이후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 북벌(北伐)을 위해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개편해 육성했으나, 효종(孝宗)이 승하한 이후 완전 흐지부지되고 만다.

▲  화기도감터 표석 부근에 자리한 성삼문(成三問)집터 표석
사육신(死六臣)의 하나로 명성을 날린 성삼문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

▲  중등교육발상지 표석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학교인 경기고 자리를 알리는 표석이다.

▲  정독도서관 정원에 있는 김옥균 집터

갑신정변을 일으켜 역적으로 몰렸던 김옥균과 홍영식, 어윤중(魚允中), 서광범(徐光範) 등은
1910년 7월 시호가 내려지면서 역적의 굴레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이때 김옥균의 연시예식(延
諡禮式)이 옛 집터이던 한성고등학교에서 열렸는데, 김옥균의 부인인 유씨가 옛 집터를 돌려
줄 것을 청원했으나 거절당했다.

          ◀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이 나무는 3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높이 11m,
둘레 3.6m의 덩치를 지니고 있다.
이곳을 거처간 건물과 인물이 한둘이 아니라
정신이 없지만 회화나무만은 그 자리를 계속
지키며 이곳에 깃든 이야기 보따리를 마음껏
풀어준다. 또한 시원한 그늘까지 드리우며 독
서를 장려한다.
(서울시 보호수 1-7호)


▲  정독도서관에 전하는 늙은 우물

정독도서관 본관(1관)과 2관 사이에는 조금은 생뚱 맞은 늙은 우물이 하나 있다. 우물이 있는
자리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하나로 꼬질꼬질한 이름을 남긴 평제(平齊) 박제순의 저택이 있
던 곳으로 1900년 집 정원을 손질하다가 이 우물돌을 발견했다. 의외의 유물이 튀어나온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는지 시 1수를 짓고 돌 피부에 24자를 새겼는데, 그 내용을 풀이하면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도 전조(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메어져 흔적이 없고, 다만 돌만 우
뚝하구나. 광무(光武) 4년(1900년) 겨울, 평제(박제순)가 적다'

그때도 우물돌에 낀 고색의 때가 짙었는지 막연히 고려 때 우물 같다고 그랬는데 고려까지 갈
것도 없이 조선 초나 중기에 쓰였던 것 같다. 허나 그에 대한 정보는 박제순의 시 외에는 아
무 것도 없으니 그저 딱할 따름이다.


▲  우물 피부에 새겨진 24자의 또렷한 글씨

매국노 박제순의 글씨가 자신의 피부에 박힌 것에 꽤 불쾌했던지 우물의 표정이 다소 일그러
져 보인다. 그렇다고 저것을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참고로 박제순의 손자인 박승유(朴勝裕, 1924~1990)는 친조부와 아버지의 더러운 매국노 행위
를 수치스럽게 여겨 20살에 몸 담고 있던 왜군에서 탈영, 광복군(光復軍)에 들어가 많은 활약
을 했다.
그 공로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아 집안의 죄업을 조금이나마 씻었으며, 음악 교수
및 성악가로도 절찬리에 활동했다.


▲  감사원 옆에 심어진 취운정(翠雲亭)터 표석

북촌의 지붕이라 할 수 있는 감사원 길가에는 취운정터를 알리는 표석이 누워있다. 이곳은 북
악산(백악산)을 등진 높은 곳으로 북촌 일대와 도심이 두 눈에 바라보여 도성(都城) 안 경승
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다. 특히 제왕이 경복궁에서 종묘(宗廟)나 창덕궁으로 또는 그 반대
로 행차했을 때, 백성들의 번거로움을 덜하고 이목을 피하고자 인적이 드문 이곳을 많이 거쳐
갔다.

미끄러지듯 펼쳐진 도심을 정원으로 삼고 북악산을 베게로 삼은 취운정은 1870년대 중반에 민
씨 패거리의 하나인 민태호(閔台鎬, 1834~1884)가 지은 정자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開化
黨) 인물들이 여기서 자주 모임을 가지며 갑신정변을 논의했다고 전한다.
명성황후가 소환한 청나라군의 공격으로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싱겁게 막을 고하자, 창덕궁
북장문으로 쫓겨나온 왜국 공사와 왜군, 그리고 개화당 인물들은 창덕궁 후원 뒷길과 취운정
을 거쳐 경운동에 있던 왜국공사관으로 줄행랑을 쳤다.

한편 정변 소식을 들은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1885년 미국에서 귀국하자, 정변과 관련
된 인물로 찍혀 체포되고 말았다. 당시 포도대장(捕盜大將)이던 한규설(韓圭卨)의 도움으로
다행히 풀려나긴 했으나 대신 7년 동안 조그만 취운정에 갇혀 지내는 시련을 감당해야 했다.
1885년 12월부터 시작된 그의 연금생활은 1892년 11월에 마무리가 되었는데, 길고 긴 그 시간
동안 지루함을 달래고자 그 이름 돋는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썼다. 서유견문은 1889년에 완
성되어 1895년에 정식 출판되었다.


▲  취운정터 부근에 있는 백록정(白鹿亭)터 표석

취운정터 인근에는 도심의 경승지였던 백록정터가 있다. 백록정은 18세기에 경기감사(京畿監
司)를 지냈던 심상훈(沈相薰)이 세운 정자로 취운정과 함께 개화당 인물들이 자주 모여 정변
을 모의하던 곳이다.
빼어난 경승을 자랑했던 취운정과 백록정, 그들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개발의 칼질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 터를 알리는 표석만이 그들의 이름 3자를 아련히 속삭일 뿐이다.



 

♠  옛 종친부(宗親府)터 주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주변)

▲  종친부 경근당(敬近堂)과 옥첩당(玉牒堂) - 보물 2,151호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동쪽에는 2013년 11월에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하
서울관)이 자리해 있다. 지금은 현대미술을 다루는 미술관이 들어서 있지만 그곳은 원래 조선
때 관청인 종친부의 옛터이다.
종친부는 제왕의 어보(御寶)와 영정을 보관하고, 제왕 내외의 의복을 관리하며, 왕족들의 관
혼상제와 봉작(封爵), 벼슬 등의 인사문제, 기타 그들과 관련된 업무를 보던 관청이다. 처음
에는 제군부(諸君府)였으나 1433년에 종친부로 이름을 갈았으며, 1864년에는 종부시(宗簿寺)
와 합쳐졌고. 1894년에 종정부(宗正府)로 개편되었다.

1907년 순종(純宗)의 칙령(勅令)으로 황실과 국가의 주요 문서를 보관하던 규장각(奎章閣)으
로 쓰였으며, 왜정은 이곳에 있던 서적들을 경성제국대학(서울대)으로 모두 옮겼다. 그리고
이승당(貳丞堂)과 천한전(天漢殿), 아재당(我在堂) 등 상당수의 건물을 부셔버리고 종친부의
중심 건물인 경근당과 옥첩당 등 달랑 2동만 남겨 망국 황실을 제대로 욕보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이곳에는 국군서울병원(기무사)이 들어서 통제구역으로 꽁꽁 묶였으며, 경
근당과 옥첩당은 그런데로 자리를 유지했으나 1981년 전두환 정권이 기무사에 테니스장을 지
으면서 죄없는 그들을 추방해버렸다. 하여 가까운 정독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30년 이상 샛
방살이를 하게 된다.
기무사는 2012년 다른 곳으로 흔쾌히 이전되었고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서
게 되었는데, 미술관을 짓기에 앞서 발굴조사를 벌여 옛 종친부 건물의 주춧돌과 기초 시설이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경근당을 중심으로 좌측에 이승당, 우측에 옥첩당이 익랑(翼廊)
으로 이어져 나란히 배치되었으며, 경근당 앞에는 돌로 다진 월대(月臺)가 있었다는 옛 기록
과 같은 형태의 기초 유구가 나온 것이다.
하여 문화재청은 정독도서관에 있는 경근당과 옥첩당을 제자리로 돌리기로 결정, 37억의 돈을
들여 기초 유구가 발견된 자리에 그대로 갖다 놓아 2013년 12월에 완성을 보았다. 그리고 국
립고궁박물관에 가있던 경근당과 옥첩당의 옛 현판도 손질을 거쳐 제자리로 돌렸다.


▲  남쪽에서 바라본 옥첩당과 경근당

서울관 동쪽 뜨락에 자리하여 경복궁을 바라보고 있는 경근당은 종친부의 중심 건물로 정면 7
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그 앞에는 마치 칼로 싹둑 다듬은 듯, 반듯하게 지어진 월
대가 1단 낮은 높이로 누워있으며, 그 옆에는 부속건물인 옥첩당이 익랑으로 연결되어 왕족과
궁궐 일을 돌보던 관청의 위엄을 보여준다.
옥첩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저들을 정독도서관에서 보던 것이 정말 엊그
제 같은데, 이렇게 제자리로 돌아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휼륭한 장식물이 되었다. 비록
그들이 이곳의 원래 주인이나 조선이 망하고 세상이 여러 번 엎어지면서 주인과 부속물이 완
전히 바뀐 것이다.

이들은 서울관 경내에 있으나 주변에 따로 담장을 두르지 않은 열린 공간이라 24시간 언제든
둘러볼 수 있다.


▲  경근당 옆에서 날개짓을 하는 옥첩당
경근당과 옥첩당은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으나
2021년 12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  종친부 이승당터 표석
경근당 좌측에 있던 이승당은 고약한 왜정에 의해 사라지고, 이곳이 속세에
완전히 해방된 2013년 이후, 표석을 세워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진
그를 붙잡는다.

▲  종친부터 소나무 - 서울시 보호수 1-31호

기무사 이전으로 옛 종친부 자리가 해방되면서 그곳에 깃든 늙은 소나무와 비술나무, 우물터
등도 모두 속세에 공개되었다.
이승당터 주변에 푸르게 솟은 소나무는 12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높이 4.5m, 나무둘레 1.9m이
다. 위치를 보아 종친부 관리들이 심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옛날에는 종친부 뜨락, 기무사 시
절에는 기무사 뜨락, 그리고 지금은 서울관 뜨락에 꾸준하게 솔내음과 그늘을 베푼다.


▲  종친부터 우물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3호

소나무 부근에 종친부터 우물이 동그랗게 누워있다. 그는 1984년 기무사 뜨락 공사 때, 지하
3m에서 발견된 것으로 왜정 때 종친부가 크게 고통을 당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
다.
우물 윗도리의 화강암 2개가 전부로 그것을 현재 위치로 옮겨 붙여넣었는데, 돌 상부에 네귀
가 조출(彫出)되어 있으며 우물 내부는 자연석을 쌓아 둥글게 쌓았다. 물받이 돌로 사용되었
을 구조물 1점이 우물 안에 놓여져 있는데 그는 네 귀가 조출되어 있지 않다.
이 우물처럼 화강암 2덩이를 동그랗게 이어 붙인 우물은 창덕궁과 운현궁 이로당(二老堂) 후
원에도 있으며, 그의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개화기 이전에 조성된 우물로 여겨진다. 또한
위치한 곳이 종친부 자리라 조선시대 관청 우물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비록 우물이긴 하나 제자리를 잃었고 그 윗도리만 수습해 놓은 것이라 완전히 죽은 우물이다.
그 안에는 물 대신 잡석만 가득 들어있는데, 저리 우울하게 둘 것이 아니라 밑부분을 좀 파서
우물 티는 내게 했으면 좋겠다. 옛날처럼 물을 내지는 못해도 겉모습 정도는 챙겨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 종친부 경근당, 옥첩당, 우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 165-10 (삼청로 30)


▲  소격동 비술나무 3형제 - 서울시 보호수 1-23, 1-24, 1-25호

서울관 서쪽에는 늙은 비술나무 3형제가 나란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기무사 시절에는 아무
나 볼 수 없던 나무였으나 이제는 해방되어 마음껏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시대가 많이 변하긴 변했다.

비술나무란 존재가 꽤 생소한데, 그는 느릅나무과의 큰키나무로 우리나라와 우리의 옛 땅인
중원대륙과 몽골, 연해주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주로 중부 이북의 평지
와 하천 주변에 분포하고 있는데, 지리산(智異山) 등 남부지역에도 드물게 자란다. (영어식
학명은 'Ulmuspumila L.)
추위와 공해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어 가로수와 녹음수, 공원수로 드물게 쓰이며, 경북 영
양군 주남리의 비술나무 숲이 '영양 주사골 시무나무와 비술나무숲'이란 이름으로 국가 천연
기념물 476호
로 지정되어 있다.
3~4월에 잎이 나기 전에 양성화가 피며, 열매는 5~6월에 익는데, 잘 자란 나무는 높이 20m,
둘레 2m까지 성장한다. 음지나 양지에서 모두 잘 자라며, 토심이 깊고 배수가 양호한 사질양
토(沙質壤土)에서 생육하지만 건조에는 약하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느릅나무과 식물들 중에서 잎이 가장 작은 편에 속하며, 잎 뒷면에 털
이 없다. 또 나무껍질은 느릅나무와 달리 세로로 깊게 갈라지며, 어린 가지가 아주 많은 특징
을 가진다.
늦가을에 잎이 떨어지고 나면 가지가 회백색으로 변하며, 회백색이 된 가지는 약효가 있어 한
방에서 통증, 대소변불통 등의 치료제로 쓰인다. 그리고 수피(樹皮) 및 근피(根皮)는 유백피(
楡白皮), 잎은 유엽(楡葉), 꽃은 유화(楡花)라 하여 약용으로 쓰인다.
유백피는 보통 나무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잘 말린 뒤 달여 복용하는데, 이수(利水), 소종(
消腫), 통림(通淋)에 효능이 있으며, 유엽은 석림(石淋)을 치료하는데 쓰이고, 유화는 소아의
간질(癎疾), 소변불리(小便不利), 상열(傷熱) 치료제로도 쓰인다. 비술나무의 어린잎은 국으
로 끓여 먹기도 한다. 목재는 건축재나 가구재, 선박재 등으로 이용된다. (비술나무는 함경북
도 방언으로 다른 이름은 비슬나무임)

이곳 비술나무 3형제는 서로가 너무 붙어있어 애정이 돈독한 형제처럼 보이는데, 1996년 8월
16일에 모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그때 추정 나이가 15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170여
년 정도 된다. 높이는 17m, 18m, 19m, 나무둘레는 190cm, 240cm, 210cm으로 정자나무 용으로
심어진 듯 싶다.

이곳까지 오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햇님은 퇴근을 서두르고 땅꺼미는 서서히 짙어진다. 햇님
의 퇴근을 붙잡으며 더 출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자칫 햇님의 노여움을 살 수 있어 지구
의 안전을 장담하기 어렵다. 햇님이 수틀리면 지구 하나 사라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래서
그를 고이 보내주고 나도 북촌 산책을 마무리 지으며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에 벌인 북촌 산책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남쪽에서 바라본 소격동 비술나무 3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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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도 느릿느릿 걸음을 멈춘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 ~ 북촌한옥마을 산책 (재동, 가회동, 정독도서관..)

 


'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북촌(北村) 산책
(재동, 가회동, 정독도서관, 안국동 일대)'

▲  북촌문화센터


북촌(北村)은 서울 도성(都城)의 북쪽 지역으로 경복궁(景福宮)과 창덕궁(昌德宮) 사이를 일
컫는다. 이 지역은 가회동(嘉會洞)을 중심으로 삼청동(三淸洞). 계동(桂洞), 안국동(安國洞)
, 재동(齋洞), 소격동(昭格洞), 팔판동(八判洞), 원서동 등에 걸쳐있으며, 경복궁 서쪽은 따
로 서촌(西村)이라 불렀다. <청계천 남쪽은 남촌(南村)이라 불림>

북촌 지역은 조선시대 때 왕족과 사대부(士大夫)를 비롯하여 돈 꽤나 주무르던 부자들이 주류
를 이루며 살던 오늘날의 강남(江南) 같은 곳이다. 조선 초기부터 형성되었지만 조선 초/중기
시절에 한옥은 남아있는 것이 없고, 조선 후기(19세기~20세기 초반) 한옥을 시작으로 왜정(倭
政) 시절에 지어진 개량 한옥과 해방 이후의 한옥에 이르기까지 약 1,200여 채의 한옥이 진하
게 남아있어 그야말로 거대한 한옥박물관을 이룬다.

북촌 한옥은 민속촌과 달리 대부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어 대부분 내부 관람이 어려운 함정
이 존재한다. 관람이 가능한 한옥은 북촌문화센터를 비롯해 공방(工房)과 박물관 등의 문화/
예술공간, 전통체험공간, 숙박업소로 쓰이는 한옥 정도이며, 북촌문화센터와 몇몇 공방과 문
화/예술공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소정의 돈이나 연줄이 필요하다.

북촌은 높다란 빌딩과 콘크리트 일색의 밋밋한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여 크게 돋보이며,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宮闕)과 함께 도심 속의 박힌 보석과 같은 소중한 곳이다. 한옥과
근대 건물, 현대식 건물이 서로 시간을 초월하여 얼굴을 맞대고 공존하고 있으며, 빛의 속도
로 빠르게만 변해가는 서울에서 시간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발을 멈춘 듯, 옛 모습을 많
이 지키고 있는 도심 속의 이색 공간이다. 이 시대를 사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무작정 앞만 보고 뛰느라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북촌은 바로 그런 여
유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북촌도 나날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북촌 답사의 기점은 3호선 안국역(2/3번 출구)로 잡는 것이 좋다. 북촌 초보라면 북촌문화센
터로 일단 달려가 북촌안내책자를 손에 쥐고 북촌에 대한 기초 지식을 읽은 다음에 나들이에
임하기 바란다. 그리고 정독도서관 입구와 재동초교에 북촌관광안내소가 있으니 거기서 지도
와 안내책자를 얻어도 된다.
북촌 골목길이 워낙 복잡해 길치들은 헤매기가 아주 좋으며 관광객 상당수는 북촌8경으로 꼽
히는 사진 찍기 좋은 곳과 정독도서관 주변, 북촌의 주요 도로인 가회로와 삼청동길, 계동길,
북촌길 등 널리 알려진 곳에만 잔뜩 몰려있을 뿐, 별로 알려지지 않은 많은 명소와 미로처럼
얽혀진 조그만 골목길은 사람이 별로 없다. 별처럼 무수히 흩어진 수많은 박물관과 문화유적
/전통체험공간 상당수는 골목 속에서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는데, 이를 놓치고 유명한 곳들만
둘러보는 것은 북촌의 겉만 도는 것과 같다. 본인이 강조하건데 북촌의 매력은 크고 작은 골
목길을 구석구석 돌면서 숨겨진 명소를 찾는 것이다. 그들을 찾으며 술래에서 벗어난 기분은
정말 형용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성북동(城北洞)과 부암동(付岩洞)만큼이나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북촌을 지금까지 수
십 번이나 들락거렸지만 아직도 미답지가 여럿 있다. 북촌이 서울에서 가장 작은 지방자치구
역인 중구보다 훨씬 작은데도 말이다. 남들은 '그렇게 다녔으면 북촌을 다 둘러봤겠네요?'말
을 꺼내지만 여태까지도 개척하지 못한 골목길과 명소가 적지 않다.
지금도 계속 북촌의 숨겨진 속살을 찾고 있는데, 새로운 곳을 발견하면 '이런 곳이 있었구나.
왜 이제서야 알게 된 걸까?' 정말 내심 놀란다. 겉은 작지만 신대륙 이상으로 신세계와 보물
을 품은 꿀단지가 바로 북촌이다.

북촌에는 밤하늘을 장식하는 별처럼 한옥이 많지만 민속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된 고택(古宅)
처럼 완전한 전통 한옥은 그리 많지 없다. 대부분은 왜정 이후에 지어졌고 시대와 편의에 맞
게 개량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두고 안좋게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시대가 지나면 한옥도 바뀌는 법이다. 특
히나 이곳 한옥은 민속촌에 있는 전시용 한옥과 달리 태반이 주거용이며 공방 등의 작업실과
숙박시설로 쓰이는 집도 적지 않다. 그러니 편의에 맞게 변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직까
지 꺼림칙한 재래식 화장실을 쓰고, 부엌 부뚜막에서 밥을 지으며, 나무와 숯으로 불을 뗀다
면 불편해서 어떻게 살고 머물겠는가? 다 시대에 맞게 변하는 것이다. 그렇게 변화한 한옥은
후손들이 알아서 평가해 줄 것이다.

본글에서는 2013년 1월에 올렸던 북촌 글에 이어서 재동과 가회동, 정독도서관 주변 명소 일
부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북촌 계동, 원서동, 창덕궁길 보러보기 (클릭)


♠  재동길 주변 (재동백송, 재동초교)

▲  재동 백송(白松) - 천연기념물 8호

헌법재판소 경내 북쪽에는 하얀 줄기의 큼직한 노송(老松)이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며 자리해 있
다. 바로 소나무의 일종이자 천하에서 매우 희귀한 나무인 백송이다. 백송은 10년에 겨우 50cm
밖에 자라지 않는 느림보 나무로 하얀 피부의 줄기로 인해 백송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 나무는 중원대륙이 고향이나 거기선 오래 전에 이미 씨가 말라버렸으며, 조선시대에 대륙에
서 넘어온 백송 일부가 살아남아 옛 기록이나 화석(化石)으로나 봐야되는 비운을 간신히 면하고
있다.
현재 목숨이 붙어있는 오래된 백송은 재동 백송을 비롯하여 조계사에 있는 '수송동(壽松洞) 백
송', 고양시에 '송포 백송', 이천에 있는 '신대리 백송', 예산 추사고택의 백송이 전부로 그만
큼 희소성이 매우 크다.

우리나라 백송의 으뜸은 경복궁 서쪽의 통의동(通義洞) 백송으로 천연기념물 4호의 지위를 가지
고 있었다. 허나 1990년 9월 가을 폭우의 괴롭힘에 결국 운명을 하고 말았다. 그가 비참하게 세
상을 뜨자(그의 죽은 몸뚱이는 남아있음) 그에게 주어진 천연기념물 지위는 소멸되었으며, 그의
후배인 재동 백송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백송의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재동 백송은 600년 가량 묵은 오래된 나무로 15세기에 명나라를 다녀온 사신이 가져와 심은 것
이다. 높이는 15m, 면적은 230㎡로 줄기가 2갈래로 갈라져 'V'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나무 껍
데기는 비늘처럼 벗겨져 얼룩무늬처럼 보인다. 특히 밑둥 빛깔이 하얗기로 유명하며, 우리나라
에서 제일 큰 백송이기도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백송으로도 꼽히기도 한다.

백송은 그것을 가꾼 사람의 영화(榮華)에 비례해 껍대기 피부가 하예졌다 덜해졌다 한다는 속설
을 가지고 있는데, 재동 백송은 얼마만한 영화를 보아왔길래 저렇게 새하얀 피부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백송이 있는 이곳은 조선 영조 때 풍양조씨의 우두머리인 조상경(趙尙絅)의 집이 있었다. 그는
영조 시절에 판서를 9번이나 했다고 하며, 그의 아들인 조돈(趙暾)은 이조판서(吏曹判書), 조카
는 조고집과 고구마로 유명한 조엄(趙嚴)이다. 그 이후 조대비(趙大妃)로 유명한 신정황후(神貞
皇后)까지 배출하면서 그야말로 안동김씨를 뛰어넘는 세도가가 되었다. 그러니 백송의 뽀얀 피
부는 더욱 더 빛을 발했을 것이다.


▲  약간 옆에서 본 재동 백송의 위엄

▲  박규수 선생 집터 표석

▲  제중원(광혜원)터 표석

풍양조씨의 공간이던 이곳이 언제부턴가 박규수(朴珪壽, 1807~1876)에게 넘어갔는데, 그 시기와
이유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조부(祖父)는 그 유명한 연암 박지원(朴趾源)으로 인근 계동 제
비바위 아래 외진 곳에서 검소하게 살았으며, 박규수는 그 집에서 태어났다.

박규수는 개화파의 선두적인 인물로 평양(平壤)에서 있던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년)을 계기로
서양 문물의 단물을 취하도록 설득하면서 개화와 부국강병을 주장했다. 허나 흥선대원군(興宣大
院君)이 쇄국정책만을 고집하면서 그의 주장은 허공의 메아리로 끝나고 만다. 우둔한 쇄국정책
의 결과 1876년 강화도(江華島)에서 왜국과 그것도 강제적인 불평등조약을 맺게 되는데, 바로
그해 박규수는 병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집에는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개화파 인물을 비롯하여 개화사상에 관심이 많은 젋은 선비들
이 자주 찾아와 삼가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박규수가 세상을 뜨자 집은 친일파로 악명높은 이윤용(李允用, 1854~1939)에게 잠시 넘어갔다.
이윤용은 이완용(李完用)의 형인데, 형제가 쌍으로 비열한 매국노(賣國奴)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리고 그 옆집에는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의 주역인 홍영식(洪英植)이 살았는데,
갑신정변이 그 유명한 3일 천하로 싱겁게 끝을 맺자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은 패주하는 왜국
공사(公使)를 따라 왜국공사관을 거쳐 왜열도로 도망을 치고, 홍영식은 끝까지 남아 고종을 호
위하며 북묘(北廟)까지 따라갔으나 거기서 청나라군에게 살해되고 만다.

갑신정변으로 허벌나게 고생한 고종은 정변의 주역을 역적으로 간주하고 홍영식의 집을 몰수했
다. 그러다다 1885년 알렌에게 하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원인 광혜원<廣惠院, 제중원(濟衆
院)>이 들어섰다. 알렌은 갑신정변이 일어날 때 개화당에게 제일 먼저 난도질을 당해 저승 코
앞까지 갔던 민영익(閔泳翊)을 살린 인물로 그 인연으로 광혜원 원장이 된 것이다.

광혜원(지금의 세브란스병원)은 1887년 을지로2가로 둥지를 옮겼고, 1910년 관립한성고등여학교
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그 학교는 1945년 10월 정동으로 이전되고, 1949년 창덕여중이 들어와
나중에 창덕여중/여고로 분리된다. 허나 그 학교는 강동 개발이 한참이던 1989년 땅값 차익을
두둑히 챙기며 둔촌동(遁村洞)으로 둥지를 옮겼고, 그 자리에는 1993년 경운궁(慶運宮, 덕수궁)
뒤쪽에 있던 헌법재판소가 들어서게 되었다.
참고로 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는 1882년 12월에 세워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
務衙門, 줄여서 외아문(外衙門)이라고 함>이란 긴 이름에 관청이 있었으며, 그 이전에는 명성황
후 집안인 민태호(閔台鎬)의 집이 있었다. 외아문은 1886년 광화문 육조거리로 이전되었다.

백송을 둘러싼 집과 토지의 주인을 계속 바뀌었지만 백송은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이곳을 지키
고 있다. 명나라에서 건너온 백송이지만 이곳 토양에 적응해가며 저렇게 커 간 것이다. 게다가
세도가의 집안을 비롯하여 지배층의 집안이 두루 거쳐갔고,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원인 광혜원,
그리고 사법의 중심지, 헌법재판소까지 앞다투어 그의 그늘을 받았으니 참 대단한 나무가 아닐
수 없다.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를 나오면 헌법재판소이다. 백송은 건물 북쪽에 있음 (정문 관
  리실에 허가를 받고 들어가면 된다. 낮에 가면 왠만하면 다 들여보내줌)
* 재동 백송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 35 (헌법재판소 내)


▲  재동 백송의 후예
재동 백송의 후예를 기르고자 1977년 그의 종자(種字)를 채집하여 문화재청 소속
사릉 전통수목 양묘장에서 발아시켜 30년 동안 관리하다가 2008년 3월 7일
이곳으로 옮겼다. 재동 백송의 유일한 혈손이자 희망과 같은 존재다.

▲  재동 백송 북쪽에 꾸며진 조그만 공원
헌법재판소의 딱딱하고 경직된 분위기를 조금은 풀어주는 공간이다.
공원 서쪽의 전통담장 너머로 기와집이 보이는데, 이들은 북촌 한옥의
제일이라 일컬어지는 윤보선가이다.

▲  11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재동초등학교

가회로와 북촌길이 만나는 곳에 재동초등학교가 자리해 있다. 북촌 사람들이 유년시절을 보내던
초등학교로 1895년 7월 고종이 발표한 칙령(勅令) 145호 29조 '소학교령(小學校令)'에 따라 문
을 열었다. 처음에는 인근 계동에 자리하여 계동소학교라 불렸으며, 그해 9월 지금의 자리로 옮
겨져 재동소학교로 이름을 갈았다. 

1906년 '보통학교령(普通學校令)'의 공포로 4년제 관립 재동보통학교로 개명되고 1910년에 재동
공립보통학교로 변경되었다. 이후 1938년 재동심상소학교, 1941년 재동공립국민학교로, 1946년
재동국민학교(현재는 재동초등학교)가 되었으며, 1969년 11월 인근에 있던 삼청초등학교가 폐교
되어 이곳에 통폐합되기도 했다. 초등학교가 사라지는 것은 그저 시골의 일로만 여겨졌는데, 서
울 도심 한복판에서 그런 현상이 생긴 것이다. 이는 도심공동화(都心空洞化) 현상과 북촌의 쇠
락이 큰 원인이다.
현재는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인 교동초교와 함께 신입생수가 나날이 줄어들어 간신히 2자리
를 채우고 있다. 북촌과 종로구 도심에서는 아무리 쥐어짜도 신입생 수요가 신통치가 않으니 별
수 없이 타 지역으로 눈을 돌려 다양한 특성화 교육을 내걸며 학생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참고로 유진오(兪鎭午), 백두진(白頭眞), 김상만(金相万) 등이 이 학교를 나왔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210 (☎ 02-763-1812)

◀  재동초교 교문 앞에 심어진 진단학회
(震檀學會)터 표석
진단학회는 우리의 역사와 문학, 언어를 연구
하고자 1934년 5월에 설립된 학술단체이다.


▲  가회동 백인제(白麟濟) 가옥 바깥채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22호

▲  철문 너머로 백인제 가옥의 대문이 보인다.

정독도서관 동쪽에 자리한 백인제 가옥은 1874년 한상룡이 지은 집으로 압록강(鴨綠江) 흑송(黑
松)을 가져와 지은 상류 주택이다. 행랑채와 안채,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는
한 동으로 이어진 것이 특징이다.

이곳은 왜정 때 우리나라 외과 의술(醫術)의 1인자였던 백인제(白麟濟)가 1920년대부터 6.25전
쟁 시절 납북되기 이전까지 살던 집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民立) 공익법인 백
병원을 설립했으며, 백병원과 그 계열인 인제대학교(경남 김해)는 바로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
이다.

현재 백인제의 후손들이 집을 소유하고 있으며, 숨이 막힐 듯한 커다란 검은 철제대문을 설치하
여 내부를 꽁꽁 가리고 있다. 물론 내부 관람은 연줄이 없는 이상은 거의 불가능하다.

  ◀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집터 표석
조선 후기 정치가이자 왜정 때 독립운동가로 신
간회(新幹會) 초대회장을 지냈다. 그의 장례는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뤄졌다.


♠  가회동 11번지(북촌3경) 주변
북촌3경 골목길
▲  복촌3경 골목길 (위에서 바라본 모습)

▲  복촌3경 골목길 (밑에서 바라본 모습)

▲  가회민화박물관(가회민화공방)

가회동 11번지에 자리한 북촌3경은 한옥이 밀집된 조그만 골목길이다. 이곳에는 여러 공방과 박
물관이 둥지를 틀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예전에 가봤던 가회민화박물관(가회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백성들의 삶과 소망이 담긴 민화(民畵)와 부적을 테마로 한 박물관이다. 북촌에 뿌
리를 내린 박물관답게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002년에 문을 열었다. 250점의 민화와 750점
의 부적, 150점의 서적, 기타 민속자료 250점 등 1,500여 점의 유물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중에
서 100점 정도만 속세에 공개하고 있다.

박물관이 작고 그에 반해 입장료가 미운 수준이라 처음에는 실망할 수 있으나 그런데로 둘러볼
만하다. 게다가 전시실 서쪽 공간에는 차를 즐기며 쉬어가는 공간이 있으며, 시원한 녹차를 무
한으로 제공한다. 또한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방이라 아무데나 털썩 주저 앉아 안내문이나 책을
읽으며 이야기 꽃도 피울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11-103 (☎ 02-741-0466, Fax 02-741-4766)
* 관람료 : 일반 3,000원 (30인 이상 단체 2,000원) / 고등학생 이하 2,000원
* 관람시간 : 10시 ~ 18시 (매주 월요일 휴관)
*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감사원 방면으로 500m 가면 전통병과교육원과 가회박물관을 알리
  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의 안내로 골목을 1분 정도 들어가면 길 왼쪽에 있다.

* 가회민화박물관 홈페이지는 이곳을 클릭 , 박물관 답사기는 ☞ 이곳을 클릭


▲  가회민화박물관 내부

▲  한상수 자수박물관(刺繡博物館)

북촌3경 북쪽에 자리한 한상수 자수박물관(한상수 자수공방)은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80호인 자
수장(刺繡匠) 기능보유자 한상수 선생이 운영하는 공방 겸 박물관이다. 한상수의 작품을 비롯하
여 조선 후기 자수품(刺繡品)과 복식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체험 학습도 가능하다. 박
물관의 구조는 앞에서 언급한 가회민화박물관과 비슷하며,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 관람에 임
하면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11-32 (☎ 02-744-1545)
* 관람료 : 일반 3,000원 / 고등학생 이하 2,000원 (20인 이상 단체는 20% 할인)
* 관람시간 : 10시 ~ 17시 (매주 월요일 휴관)
* 한상수 자수박물관 홈페이지는 위의 사진을 클릭한다.


♠  옛 경기고등학교에 둥지를 튼 시민과 학생의 지식 쉼터
정독도서관(正讀圖書館) 주변


▲  정독도서관으로 거듭난 화동 구 경기고교 - 등록문화재 2호

감고당길과 북촌길이 만나는 화동(花洞)에 지식의 마르지 않는 샘인 정독도서관이 자리해 있다.
화동은 화개동(花開洞)의 줄임말로 조선 때 과일과 화초(花草)를 관장하고 궁궐에 조달하던 장
원서(掌苑署)란 관청이 있었다.

정독도서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1900년 10월 고종의
칙령(勅令)으로 개교한 관립중학교(官立中學校)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원래는 김옥균과 서재
필(徐載弼)의 집이 나란히 있었으나 갑신정변 이후, 나라에서 몰수했으며, 1900년 관립중학교
부지에 포함되면서 집은 사라졌다. 개교 당시에 건물 정면 삼각지붕 벽면에 태극기를 교차하여
그린 것으로 유명했으며,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06년 관립한성고등학교로 개편되고 왜정 때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으며, 본관 뒤쪽
에 있던 을사5적의 하나인 박제순(朴齊純)의 집을 땅을 바꾸는 조건으로 매입해 평탄작업을 벌
여 기존 3,000평에서 11,000여 평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도서관 건물로 쓰이고 있는 옛 경기고 건물은 1938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강남 개발이 한참이던
1976년 청담동(淸潭洞)으로 둥지를 옮겼다. 서울시의 권고라고는 하지만 학교 입장에서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곳 땅값이 상당하며, 당시 청담동은 매우 저렴했다. 그
래서 쏠쏠하게 땅값 이득을 챙기고 쿨하게 강남으로 넘어간 것이다.
경기고가 떠나자 서울시에서는 그해 1월 옛 건물과 땅을 사들여 1년 간 손질을 거쳐 1977년 1월
4일 서울시립 정독도서관으로 세상에 내놓았으며, 현재 50여 만 권의 서적과 1만 7천여 점의 비
도서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또한 남쪽 건물을 손질하여 서울교육박물관으로 삼았다.

서울에서 어느 정도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은 꼭 거쳐갈 정도로 역사와 유서가 깊은 서울 제일의
도서관으로 단골이 꽤 많으며, 평일과 휴일 가리지 않고 자리 잡기가 힘들 정도다. 나 역시 여
러 번 이곳에 와 공부를 한답시고 책만 펴놓고 꿈나라를 허우적거린 얇은 추억이 있다.
다른 도서관과 달리 정원이 깔끔하고 아름다우며, 나무가 무성해 굳이 공부나 서적 대출이 아니
더라도 산책이나 나들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또한 도서관 동쪽에는 한때나마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종친부의 옛 건물이 있었고, 300년 정도 묵은 회화나무와 본관 뒤에 정체가 묘한 오래된
우물과 여러 석물이 있어 소소하게 고색의 볼거리를 선사한다.
북촌이 서울 관광의 성지의 부상하면서 그 한복판에 박힌 이곳 역시 그 후광을 입어 북촌 나들
이에서 필수로 가야되는 명소가 되었다. 그래서 공부나 책 때문에 오는 사람보다 나들이/출사로
온 사람이 더 많을 정도이며, 우리나라 도서관 가운데 유일하게 관광지화가 되었다. 
관광객들이 많아 공부가 되겠는가 싶겠지만 고즈넉하고 조용한 북촌의 일부라 도서관 분위기도
차분하여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도서관이니만큼 건물 내부와 열람실에서 고성방
가를 자행하거나 공부/독서를 방해하는 행위는 마땅히 삼가해야 될 것이다.

※ 정독도서관 관람정보 (2013년 5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를 나와서 안국동로터리에서 감고당길로 도보 10분
* 시내버스 이용시 안국역(종로경찰서)이나 안국동(조계사)에서 내려서 도보 10분
* 도서관 이용시간 : 평일 9시~22시 / 주말 9시~17시 (1,3주 수요일 휴관)
* 서적 대출은 정독도서관 홈페이지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자료실에 신분증을 들고 찾아가면 대
  출회원증을 발급해준다. 대출 기간은 2주이며, 1회에 한해 연장 가능하다.
* 서적 대출 및 도서관 이용비는 공짜 (서울시 교육청에서 운영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2 (북촌로 5길 48, ☎ 02-2011-5799)
* 정독도서관 홈페이지는 아래나 위의 사진을 클릭한다.


▲  정독도서관 4거리 - 이곳에 북촌관광안내소가 있다.

▲  서울교육박물관

정독도서관 남쪽에 자리한 서울교육박물관(서울교육사료관)은 옛 경기고 건물을 활용한 붉은 벽
돌의 중후한 건물이다.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옛날부터 가깝게는 내 학창시절의 이르기
까지(1980~90년대) 교육 관련 유물과 서적(내 학창시절 초등학교 교과서와 일기, 학용품, 장난
감, 중/고등학교 명찰, 소풍 관련 디오라마 등) 1만 2천여 점과 디오라마와 교육 현장 등이 재
현되어 있다.
특히 특별전시장에는 우리네 학창시절 학교 앞 구멍가게와 문방구, 1990년대 이전 초등학교 교
실 등이 재현되어 아련한 옛 추억으로 인도한다. 먼 시절도 아니고 바로 내 어린 시절이다. 이
렇게 쓰면 내가 나이가 꽤 많은 것처럼 오인하기 쉽지만 난 아직 30대의 한참을 달리고 있는 중
이다. 또한 교복과 모자, 교련복을 입고 기념 촬영을 하는 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북촌에 별처럼 널린 박물관 대부분은 야박한 가격의 입장료를 받아 손이 매우 후들거리는데 반
해 이곳은 시립이라 공짜다. 우리나라 교육 박물관의 성지로 이 땅의 30대 이상은 물론 아이를
둔 사람들도 꼭 들려볼만한 유익하고 영양가 높은 곳이다.

* 관람시간 : 9시~18시 (토요일과 일요일은 17시까지)
* 1,3째 주 수요일과 법정공휴일은 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2 (☎ 02-736-2859)
* 서울교육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어린 시절에 절찬리에 쓰던 장난감들
요즘 애들도 저런거 가지고 노는지?

▲  초등학교 교과서
나도 저런 교과서로 공부했는데..

        ◀  김옥균(金玉均) 집터 표석
갑신정변으로 역적으로 몰렸던 김옥균과 홍영식,
어윤중(魚允中), 서광범(徐光範) 등은 1910년 7
월 시호가 내려지면서 역적의 굴레에서 벗어났
다. 이때 김옥균의 연시예식(延諡禮式)이 옛 집
터이던 한성고등학교에서 열렸는데, 김옥균의
부인인 유씨가 옛 집터를 돌려달라고 청원을 했
으나 거절당했다.


▲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宗親府 敬近堂/玉牒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호

정독도서관 동쪽 구역에 고색이 창연한 기와집 2채가 익랑(翼廊)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들은 종
친부 건물인 경근당과 옥첩당이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가 있음)

종친부(宗親府)는 경복궁 건춘문(建春門) 동쪽(옛 국군서울병원)에 있었는데, 조선 역대 제왕(
帝王)의 어보(御寶)와 영정을 보관하고, 제왕 내외의 의복을 관리하며, 왕족들의 관혼상제와 봉
작(封爵), 벼슬 등의 인사문제, 기타 그들과 관련된 업무를 보던 관청이다. 처음에는 제군부(
)였으나 1433년에 종친부로 이름을 갈았으며, 1864년(고종 1년)에는 종부시(簿)와 합쳐
지고 1894년 종정부()로 개편되었다.
1907년 순종(純宗)의 칙령(勅令)으로 황실과 국가의 주요 문서를 보관하던 규장각(奎章閣)으로
쓰였다가 1910년 이후 왜정은 이곳에 있던 서적들을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으로 옮기고 건물
도 상당수 부셔버리면서 달랑 경근당과 옥첩당만 살아남게 되었다.

이후 이곳에 국군서울병원(기무사)이 들어서면서 통제구역이 되었다가 1981년 경근당과 옥첩당
이 정독도서관으로 강제로 이전되었으며, 그들의 건강을 위해 주위로 얕은 철책을 둘러 속인들
의 출입을 막고 있다. 또한 우물(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3호)은 뚜껑이 닫힌 채 종친부터를 지키
고 있다.
2011년 이후 국군병원은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고,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2013년 11
월 개관 예정)을 짓고 있다. 그래서 31년 동안 도서관에 얹혀살던 종친부 건물을 2012년 후반에
원자리로 옮겼으며, 도서관의 옛 종친부 자리는 현재 대머리처럼 텅 비어있다. 그래도 제자리로
돌아갔으니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개관되면 우물과 같이 있게 될
종친부 건물을 보게 될 것이다.


▲  경근당(敬近堂) -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규모가 크다.

▲  옥첩당(玉牒堂) -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  정독도서관 동쪽에 뿌리를 내린 회화나무
300년 정도 묵은 지긋한 나무로 높이 11m, 둘레
3.6m에 이른다. 이곳을 거처간 건물이나 인물이
한둘이 아니라 정신이 없지만 회화나무만은 그
대로 그 자리를 지키며 이곳에 깃든 이야기 보
따리를 마음껏 풀어준다. 또한 시원한 그늘까지
드리우며 속인들에게 독서를 장려하고자 애쓴다.

서울시 보호수 1-7호


▲  도서관 본관과 2관 사이에 있는 오래된 우물돌

정독도서관 본관(1관)과 2관 사이에는 조금은 생뚱 맞은 외의의 유물이 하나 있다. 도서관을 찾
은 사람들은 그를 죄다 지나치기 일쑤인데, 그는 정독도서관 내부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인 동그
란 우물돌이다.
우물이 있는 이 자리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하나로 그 꼬질꼬질한 이름을 떨친 평제 박제순(
平齊 朴齊純, 1858~1916)의 저택이 있었다. 그는 1900년에 집 정원을 손질하다가 뜻밖에 이 우
물돌을 발견했는데, 의외의 유물이 나온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는지 시 1수를 짓고 돌 피부에
새겼다. 그때 새긴 24자가 진하게 남아있는데, 그 내용을 풀이하면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도 전조(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메어져 흔적이 없고, 다만 돌만 우뚝
하구나. 광무(光武) 4년(1900년) 겨울, 평제(박제순)가 적다'
그때도 우물돌의 낀 고색의 때가 짙어보였는지 막연히 고려 때 우물 같다고 그랬는데, 고려까지
갈 것도 없이 조선 초나 중기에 쓰였던 것 같다. 허나 그에 대한 정보는 박제순의 시 외에는 아
무것도 없으니 그저 딱할 따름이다.


▲  우물 피부에 새겨진 24자의 박제순의 글씨

매국노의 글씨가 자신의 피부에 문신처럼 새겨진 것에 꽤 불쾌했던지 우물의 표정이 다소 일그
러져 보인다. 그렇다고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참고로 박제순의 손자인 박승유(朴勝裕, 1924~1990)는 친조부와 아버지의 매국노 행위를 수치스
럽게 여겨 20살에 몸담고 있던 왜군에서 탈영, 광복군(光復軍)에 들어가 많은 활약을 했다. 그
공로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아 집안의 죄업을 조금이나마 씻었으며, 음악 교수 및 성
악가로도 유명했다.

▲  정체가 묘연한 네모난 돌덩이
어떤 구조물을 받치고 있던 좌대(座臺)로
여겨진다.

▲  디딜방아의 일부로 보이는 확돌
동그랗게 파인 부분에는 겨울의 제국이 내린
얼음이 진을 치고 있다.

우물돌에서 조금 옆으로 가면 2개의 아리송한 돌덩이가 나온다. 하나는 디딜방아의 일부로 여겨
지는 확돌이며, 다른 하나는 네모난 돌덩이이다. 이들 모두 도서관 일대에서 나온 유물로 앞의
우물돌처럼 정체가 묘연해 은근히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참고로 이곳은 조선 세종(世宗) 때 청
백리(淸白吏)로 명성을 날린 맹사성(孟思誠) 집안의 살던 곳으로 맹씨들이 사는 언덕이라 하여
맹동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  서울에서 제일 큰 기와집, 안국동 윤보선가(尹潽善家) - 사적 438호

▲  굳게 입을 봉한 윤보선가 솟을대문의 위엄

안국역 1번 출구를 나와서 바로 나오는 오른쪽 골목길로 쭉 들어가면 커다란 솟을대문과 길다란
담장을 두룬 기와집이 나온다. 이곳이 북촌에서 유일하게 사적으로 지정된 한옥이자 한때 99칸
을 자랑했던 안국동 윤보선가이다. 사적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서울 지방민속자료 27호였다.

이 집은 1870년(고종 6년)에 민씨 일가에서 지은 조선 후기 한옥으로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친일
파로 더러운 이름을 날린 박영효(朴泳孝)가 왜정 때 귀국하여 잠시 머물기도 했다.
1910년경 윤보선의 아버지인 윤치소(尹致昭)가 매입했으며, 윤보선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부터
쭉 살았다. 그는 1960년 4.19혁명으로 대통령이 되면서 청와대가 아닌 이곳에서 국정(國政)을
살폈다.

서울 지역 상류층의 가옥으로 대지가 매우 넓으며, 양반가의 최대 칸수인 99칸을 자랑했으나 바
깥사랑채와 안사랑채, 안채, 대문, 행랑채, 창고만 남았다. 전통 한옥 양식에 청나라 건물 양식
을 더했으며, 서양식 가구를 갖추는 한편, 각 건물마다 현판이 걸려있는데, 진충보국(盡忠報國)
이란 현판은 김옥균이 썼다고 한다. 그리고 사랑채 뒤뜰에는 연못이 있고, 매화(梅花)와 향나무
를 비롯한 다양한 나무가 심어져 근대 조경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정원은 서양식으로 꾸며져
있으며, 실생활에 맞게 개조된 안채와 서양식 채양 등은 근대 한옥의 변화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정당인 한국민주당의 산실 역할을 하였고, 1950년대부터 1970
년대에 이르기까지 야당의 중심지였으며, 민주운동의 본부이자 피난처로 사용된 한국 정치사의
중요한 현장이다. 비록 개인 소유라고 해도 그런 뜻깊은 현장이 철저히 비공개로 일관하고 있어
그저 솟을대문과 담장을 넋빠지게 바라봐야 되니 한편으로는 아쉽기만 하다. 겉으로 보이는 모
습도 참 상당한데, 그 속살을 직접 본다면 정말 고래등 기와집이란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대단
할 것이다. 우리 같은 백성들은 언제 저런 집에 한번 살아보려나? 그곳에 대한 호기심과 빈부격
차의 서러움이 교차하는 현장이다.

참고로 윤보선가는 동쪽으로 재동백송이 있는 헌법재판소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재
동백송에서 담장 너머로나마 그곳에 들어있는 일부 기와집의 머리가 보이며, 서울시에서 이 집
을 매입하여 신익희(申翼熙) 가옥이나 고희동(高羲東) 가옥, 장면(張勉) 총리 가옥처럼 속세에
돌려줄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8-1


▲  윤보선가 (문화재청 사진)

▲  윤보선가 솟을대문 북쪽 담장길
담장 안쪽 나무들이 바깥에 조금씩 손을 내밀고 있다.

◀  윤보선가 솟을대문 남쪽의 옥의 티
대문 옆에 벽을 약간 허물고 수레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  윤보선가 북쪽에 자리한 갤러리 담 (☎ 02-738-2745)
담쟁이덩굴로 외벽의 절반을 치장한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갤러리 현관에는 문인석(文人石) 2기가 나란히 손님들을 맞이한다.

     ◀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터 표석
왜정 때 우리 말을 지키고 연구하고자 1921년에
설립된 조선어학회가 있던 곳이다. 1942년 조선
어학회 사건으로 문을 닫았다가 해방 이후 한글
학회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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