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9.09.27 고즈넉한 한옥마을 속으로, 북촌한옥마을 구석구석 나들이 ~~ (북촌문화센터, 가회동 이준구가옥, 북촌4~7경, 맹사성집터)
  2. 2018.03.08 대학로의 뒷골목을 거닐다. 명륜동 골목 산책 ~~~ (장면 가옥, 북묘 하마비, 흥덕사터, 우암 송시열집터) 4
  3. 2016.12.07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서촌의 끝자락을 더듬다 ~~~ (인왕산 한양도성, 딜쿠샤, 행촌동은행나무, 홍난파가옥 등)
  4. 2016.08.22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서촌 제일의 경승지 ~~ 인왕산 수성동계곡 (인왕산길, 기린교)
  5. 2016.02.06 서울 도심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을 거닐다 ~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돌담길, 송시열집터, 북묘터)
  6. 2015.08.13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계곡 (백석동천)
  7. 2014.05.20 도심과 가까운 첩첩한 산중의 오랜 절집 ~ 북한산 승가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8. 2014.05.06 오색영롱한 연등의 향연 속으로 ~ 서울 연등축제 (조계사, 청계천 연등거리, 광통교)

고즈넉한 한옥마을 속으로, 북촌한옥마을 구석구석 나들이 ~~ (북촌문화센터, 가회동 이준구가옥, 북촌4~7경, 맹사성집터)

 


'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북촌 나들이 '

▲  북촌5경 골목길


 

♠  조선 후기 한옥을 개조하여 북촌을 안내하는 공간으로
새로 태어난 북촌문화센터 - 등록문화재 229호

▲  북촌문화센터 대문과 바깥채

여름 제국이 조금씩 숙성되어가던 6월의 첫 무렵에 후배 여인네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
촌(北村, 북촌한옥마을)을 찾았다. 이번에 찾아간 북촌 명소들은 이미 여러 번씩 기봤던 곳들
로 복습 차원에서 또 찾게 되었다. 북촌과 인연을 지은 횟수도 벌써 60회가 넘어 이제는 지겨
울 법도 하지만 그곳에 퐁당퐁당 빠진 상태라 뒤돌아서면 또 가고 싶어진다.

이번 북촌 산책의 시작은 북촌문화센터<3호선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3~4분>로 북촌 초행
이라면 이곳부터 인연을 짓고 북촌 나들이에 임하기 바란다.
북촌문화센터로 쓰이는 기와집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양반가로 고종(高宗) 시절 민씨 세도
가(勢道家)의 하나이자 왜정 때 탁지부(度支部) 재무관(財務官)을 지낸 민형기의 집이다. 한
때 '계동마님댁'으로 장안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집 구조는 안채와 바깥채, 앞행랑채, 뒷행랑채, 사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계동마님이
사라진 이후 크게 쇠락하고 만다. 그러다가 2002년에 서울시에서 북촌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
로 매입하여 기존 한옥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말끔히 몸단장을 시켜 그해 10월 북촌을 안
내하는 북촌문화센터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대문을 들어서면 'ㄷ'자형 안채와 'ㄱ'형 행랑채가 나오고, 중문을 지나면 'ㄱ'자
형 안행랑채(별당)가 나온다. 안채는 안방과 부엌을 개조하여 서울시청 한옥조성과 사무실과
한옥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상담하는 상담실을 두었으며, 회의실과 주민들의 사랑방을 갖추고
있다.

뒷행랑채는 전부 터서 북촌홍보전시관으로 삼아 북촌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여러 자료로 다
루고 있는데, 영상물도 준비하여 북촌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하는 한편, 북촌안내책자와 지도도
여기서 얻을 수 있다. 이곳을 지나면 집의 뒷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에 2칸 규모의 아담한 정
자가 있다. 원래 사당이었던 것을 정자로 개조하여 두 다리를 쉬어가는 쉼터로 삼았으며, 서
울 도심에서는 흔치 않은 이색 공간으로 다른 건물과 달리 기단(基壇)이 높아 예전에 사당이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 한다.
정자를 지나면 안행랑채라 불리는 별당(別堂)이 나오는데, 이곳은 온갖 공예와 예절과 다도(
茶道), 전통주 만들기, 민화(속화) 그리기 등 다양한 전통문화 강좌를 연다. (자세한 것은 북
촌문화센터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05 (계동길 37 ☎ 02-2133-1371)
* 북촌문화센터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대문을 들어서면 중문과 'ㄷ'자형 안채가 나온다.

▲  중문과 안채 서쪽

▲  안채 동쪽 (회의실과 사랑방)


▲  중문과 짧은 담장
중문 담장은 다른 담장과 이어지지 않고 안채 가운데 기둥에서 끝을 맺는다.

▲  북촌홍보전시관으로 탈바꿈한 뒷행랑채
북촌의 역사와 현재, 한옥의 구조에 대한 관련 자료들이 하얀 벽을
조촐하게 채운다.

▲  뒤쪽에 자리한 2칸짜리 정자
원래 사당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누구나 발을 멈추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정자 뒤쪽에는 외부로 나가는 문이 있는데 늘 닫혀있다.

▲  안행랑채(별당)와 뒷간(왼쪽)

▲  대청마루로 쓰이는 안행랑채 동쪽

정자 동쪽에 자리한 안행랑채는 툇마루를 갖추고 있는데, 여기선 다양한 전통문화를 배울 수
있다. 그 곁에는 뒷간이 있는데, 겉은 한옥이지만 속은 현대식 시설로 무장하고 있어 화장실
걱정은 안해도 된다. 그들 뒤로 현대식 건물들이 이곳을 굽어보고 있으니 과거와 현재가 서로
를 조금씩 인정하며 보듬어주는 북촌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  북촌4경 주변

▲  가회동 김형태 가옥(嘉會洞 金炯泰 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30호

안국역(3호선) 2번 출구에서 북촌의 주요 간선로인 북촌로를 따라 감사원(監査院) 방면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가회동성당을 지나서 검은 피부의 문화재 안내판이 '잠시 나좀 보고 가소'
발길을 잡는다. 그 안내문 바로 윗쪽에 기와집이 있는데, 그 집이 안내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가회동 김형태 가옥이다.

이 집은 19세기 후반 또는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사랑채와 안채,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
다. 안채는 문간채를 포함하여 'ㄷ'자 모양, 문간채는 'ㅡ'모양, 사랑채는 'ㄹ'자 모습으로
팔작지붕의 5량가 가구(樑架 架構)의 기와집이다. 비록 집은 다르지만 이 자리에서 명성황후
(明成皇后) 민씨가 태어났다고 전하며, 집 동쪽은 북촌로와 살을 마주 대고 있는데, 석축이
높게 닦여져 있다. 이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집 동쪽 부분이 잘려나가 그렇게 된 것이다.

현재 김형태란 사람이 소유하고 있으며, 문화
재청에서 그의 이름을 붙여 문화재 명칭으로
삼았다.
엄연히 사람이 사는 집이라 내부 관람은 거의
어렵고, 그냥 바깥에서 얌전히 바라보는 것으
로 만족해야 된다.
또한 집을 보면 19세기 후반 집이 아닌 최근
에 지어진 것처럼 너무 화사한데, 이는 2011
년 후반에 종로구청의 지원을 받아 해체/보수
했기 때문이다. 보수도 좋지만 그로 인해 고
색의 내음은 죄다 증발해버렸다. 오히려 지방
문화재 등급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16-8
(북촌로 67-4)

▲  굳게 입을 봉한 김형태 가옥 대문

 

재동초교와 김형태가옥 중간에는 돈미약국이
있다. (북촌한옥마을 입구 마을버스 정류장)
여기서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안쪽으로 인
도하는 '북촌로11길' 골목길이 있는데, 북촌
나들이에서 그 길은 꼭 둘러보기 바란다.
이곳에는 북촌4경과 5경, 6경, 7경, 8경, 이
준구 가옥, 북촌동양문화박물관 등 북촌의 주
요 꿀단지들이 숨겨져 있고 북촌의 다른 부분
의 비해 한옥의 밀도가 아주 높다.

이곳은 북촌이 뜨던 초창기부터 관광객과 나
들이객들의 발길이 많았고 지금도 늘 미터지
지는데, 안국역에서 가장 빠르게 삼청동길을
이어주는 길이기도 하며, 나도 북촌에서 처음
거닐던 곳이 바로 이 북촌로11길 주변이었다.

▲  북촌로11길에 있는 오래된 회화나무

 

돈미약국에서 북촌로11길을 3분 정도 가면 하늘 높이 솟은 회화나무(회나무)가 마중을 한다.
그는 200년 정도 묵은 이곳의 정자나무로 높이는 약 20m 정도 되는데, 나이가 지긋함에도 그
흔한 보호수 등급도 받지를 못했다. 게다가 그는 집 뜨락이나 조금은 독립적인 공간이 아닌
집과 집 사이에 비좁은 틈에서 샛방살이처럼 지내고 있어 숨이나 제대로 쉴련지 뿌리나 기둥
이 마음껏 자랄 수나 있을련지 걱정이 들 정도이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계속 직진하면 북촌5/6/7경으로 이어지고, 왼쪽 좁은 길로 가
면 북촌4경으로 이어진다. 북촌5/6/7경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지만 4경은 발길도 적고 한
적한 편이다.
북촌4경은 가회동 31번지 언덕으로 그곳 골목길은 매우 좁다. 허나 지대가 조금 높아 북촌5/
6/7경과 가회동 일대 한옥들의 지붕이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은 그런데로 괜찮으며, 특히 지
방문화재로 지정된 이준구 가옥(북촌6경 동쪽)의 모습을 유일하게 살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4경 골목은 북쪽으로 향했다가 동쪽으로 90도 휘어지고(여기서 직진하면 막다른 골목) 남쪽으
로 다시 90도 휘어져 회화나무와 북촌5경 남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4경으로 들어가는 입구
에서 4경 골목길로 들어가지 않고 서쪽으로 조금 경사가 각박한 고개를 넘어가면 북촌로5나길
로 이어지는데. 그 고갯길 남쪽에는 높다란 석축과 철책이 둘러져 있다. 그 철책 너머가 바로
정독 도서관이다.


▲  북촌4경 입구에서 삼청동길, 북촌로5나길로 넘어가는 고개
(왼쪽 축대와 푸른 철책 너머가 바로 정독도서관)

▲  북촌로11다길 주변 기와집들 ①

▲  북촌로11다길 주변 기와집들 ②

▲  북촌4경 골목길 (가회동 31번지 주변)
이곳에서 오른쪽 담장 너머로 펼쳐진 한옥의 끝없는 물결을 조용히 살펴보자.
(북촌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므로 정숙과 청결을 지키기 바람)

▲  북촌4경에서 바라본 북촌 가회동 한옥들 ①
과거와 현재가 각각 2/3, 1/3씩 사진 화면을 채운다

▲  북촌4경에서 바라본 북촌 가회동 한옥들 ②
여기도 완전 한옥 투성이이다. 그런데 저 멀리 보이는 푸른 지붕은 무엇일까?

▲  푸른 지붕의 주인공, 이준구(李俊九) 가옥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2호

북촌6경 동쪽 언덕 위에 푸른 지붕의 집이 있다. 한옥의 고풍스런 물결이 넝실거리는 북촌의
한복판에 뜬금없이 이질적인 양옥이 있어 두 눈과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는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이준구 가옥이다.

이 가옥은 1938년에 지어진 2층 양옥으로 집을 짓는데 쓰인 재료는 매우 비싼 것을 사용했다.
개성(開城) 송학에서 신돌(화강암)을 들여와 지었으며, 프랑스산 기와로 푸른색의 뾰족 지붕
을 입혔다. 딱 봐도 상류층의 냄새가 역하게 풍기는 서양식 부잣집 가옥으로 이 정도의 집을
지을 정도면 꽤나 돈을 주무르던 사람일 것이다. 그의 대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
지만 제발 친일 관련 졸부가 아니기를 바란다.

집을 둘러싼 벽은 벽돌식으로 모양을 냈고, 출입문은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의 아치형으로 만
들었다. 그리고 여러 곳에 격자무늬 창을 내었고, 높이 굴뚝을 내어 멀리서 보면 오래된 성당
처럼 보이기도 하며, 뜨락에는 정원수와 석탑을 세워 집을 수식한다.
현재 이준구란 사람이 소유하고 있어 문화재 지정 명칭도 그의 이름을 넣었으며, 이 집 주변
에 여러 채의 건물을 두었다. 또한 건물을 포함한 대지가 넓고, 밑에는 차고(車庫)까지 두고
있는데, 집 대문은 졸부의 폐쇄성이 드러난 듯, 거의 작은 성문(城門) 만하다. 또한 언덕 위
에 자리하여 북촌 한옥들을 바라보고 있어 자리도 매우 좋다. 단 개인 집이다보니 내부 관람
은 거의 불가능하며, 앞서 둘러본 김형태 가옥은 길가에서도 대충 보이긴 하지만 이곳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북촌4경 장소가 아니면 집을 보기도 힘들다. 또한 북촌 금싸라기 땅에 있어
집값도 거의 수십 억을 호가할 것이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이 집은 조금은 세련되고 양호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2호라는 괜찮은 등
급을 지녔다. 지정번호가 1호 다음인 2호로 인지도와 상징성도 꽤 큰 편인데, 굳이 이 집이 2
호로 지정될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정 번호는 가치별로 매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일
련번호로 숫자에는 별 의미는 없지만 그만큼 가치를 일찍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무슨 기준으로 그리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집은 2호란 숫자가 어울리지는 않아 보인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31-1 (북촌로11가길 49)


▲  북촌4경 동쪽 골목길


 

♠  북촌5,6,7경, 북촌로5나길 주변

▲  북촌5경

북촌5경과 6경은 같은 골목길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5경은 밑에서 6경이 있는 윗쪽을 바라보
는 것이고, 6경은 윗쪽(이준구 가옥 서쪽)에서 5경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는 것이다. 5/6/7경
구역은 북촌에서 한옥이 제일 많고 또한 한옥 비율이 가장 높은 곳으로 이 주변은 죄다 한옥
이다.

5/6경은 북촌이 속세에 널리 알려진 초창기 시절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았던 곳으로 옛 골목길
과 한옥의 경관이 잘 남아있어 북촌에서 꼭 발자국을 남겨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
다는 이곳의 제일가는 명소이다. 천하의 사람을 싹 모아놓은 듯, 늘 관광객들로 미어터져 사
람이 없는 한산한 풍경을 찍는 것은 거의 어렵다.


▲  북촌6경

북촌5경의 반대가 북촌6경이다. 5경에서는 언덕진 골목길을 중심으로 6경 주변 한옥만 보였지
만 6경은 5경보다 조금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이 조금은 좋다. 골목길을 사이로 양쪽에
자리한 한옥 지붕 사이로 천하 최대의 대도시 서울 도심의 전경이 펼쳐지며, 처마 끝 사이로
보이는 도심의 전경은 이곳의 백미로 북촌 관련 자료에 꼭 등장하는 유명 명소이다.


▲  북촌6경에서 이준구 가옥으로 이어지는 골목

▲  이준구 가옥 앞에서 바라본 북촌6경
이준구 가옥은 성곽처럼 높다란 석축 위에 숨겨져 있는데, 석축에는 담쟁이덩굴을
비롯한 온갖 덩굴들이 서로 협동심을 발휘하며 완전한 녹색 벽으로 만들었다.

▲  이준구 가옥에서 북촌5경으로 내려가는 골목길

▲  북촌7경 골목길 (가회동 31번지)
북촌7경은 북촌5,6경의 골목길보다 조금은 좁은 소박한 골목으로 마치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어놀던 동네 골목길을 떠오르게 한다.

▲  북촌7경 골목길 (위에서 바라본 모습)

▲  대나무를 지닌 북촌7경의 어느 기와집
대문 옆에 조촐하게 보금자리를 닦은 대나무들이 인상적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비록
크기는 작지만 이렇게 대나무밭을 보다니 두 눈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  북촌동양문화박물관 앞에 심어진 맹사성(孟思誠) 집터

조선 초기에 황희(黃喜)와 더불어 청백리(淸白吏)를 다투었던 맹사성(1360~1438)의 집이 동양
문화박물관 서쪽에 있었다. 그는 신창(新昌)맹씨로 고향은 아산이며, 자는 자명(自明)과 성지
(誠之), 호는 동포(東浦), 고불(古佛)로 고려시대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을 지낸 맹희도(盟
希道)의 아들이다. 또한 고려의 마지막 보루 최영(崔瑩)의 손서(孫婿)이기도 하다.

1386년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해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이 되었으며, 전의시승(典
儀寺丞), 기거랑(起居郎), 사인(舍人) 등을 지내고 수원판관(水原判官)을 거쳐 내사사인(內史
舍人)이 되었다.

조선으로 강제로 하늘이 바뀐 후,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되었고, 정종(正宗) 때 간의우산기상
시(諫議右散騎常侍). 태종 때에 좌사간의대부(左司諫議大夫), 동부대언(同副代言), 이조참의(
吏曹參議)를 지냈으며, 1407년에는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어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
에 가는 세자(양녕대군)의 시종관(侍從官)으로 따라갔다.
1408년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태종의 사위인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의 죄를
묻고자 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잡아 족친 사건이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태종은 크게 뚜껑이
폭발하여 맹사성을 죽이려고 했으나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죽음은 간신히 면하고 파면당했
다.

1411년 다시 기용되어 판충주목사(判忠州牧使)가 되었는데, 마침 예조(禮曹)에서 그가 음률(
音律)에 정통해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는 작업에 필요하다며 서울로 부를 것을 건의했으
며, 하륜(河崙)도 음악에 정통한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해 악공을 가르치도록 건의했다.

1416년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고, 이듬해에 생원시(生員試)에 시관(試官)이 되어 100명을
뽑았으며, 그해 부친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청했으나 태종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역마(驛馬
)와 약을 내리며 호조판서로 삼았다. 허나 그래도 사직을 원하자 왕은 그의 고향을 고려해 충
청도 관찰사(觀察使)를 제소하여 부친을 봉양하게 했다.

1419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고, 1421년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역임하였으며,
1427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우의정을 지낼 때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 감관사(監館事)
가 되어 태종실록을 감수했다.
실록이 완성되자 세종(世宗)이 한번 읽어보고 싶다고 청했다. 허나 그는 '전하께서 실록을 보
시고 그 내용을 고친다면 후대 왕들이 이를 본받게 되니 사관(史官)들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뢰니 세종은 할 수 없이 고집을 꺾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432년 좌의정(左議政)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은퇴했다. 허나 나라에 중요
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를 찾아 자문을 구했다.

맹사성은 성격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그리 엄하진 않았다고 한다.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
도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서 맞아들였으며, 윗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가 돌아갈 때
도 공손하게 배웅하고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집으로 들어왔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늙은 부친을 위해 벼슬을 사직하려고 했고, 청백하고 검소한 것은 타
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살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식량은 녹봉으로 받는
쌀로 때웠으며, 고향인 아산에 내려갈 때나 외출을 할 때는 소를 타고 다녔는데, 의복도 남루
하여 그를 몰라보고 함부로 대했다는 일화가 여럿 전해온다. 그럴 때는 맹사성은 그저 웃으며
'맹고불(자신을 일컫는 말)이 소를 타고 고향에 가오' 그러며 지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으며,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는 과단성이 있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그저 평범한 골목 같은 북촌로11다길 주변
이렇게 하여 초여름에 벌인 북촌 산책은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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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9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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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의 뒷골목을 거닐다. 명륜동 골목 산책 ~~~ (장면 가옥, 북묘 하마비, 흥덕사터, 우암 송시열집터)


 

' 대학로의 뒷골목을 거닐다, 혜화동~명륜동 나들이 '

▲  송시열 집터에 남아있는 증주벽립 바위글씨


 

 

천하의 절반을 차지한 겨울 제국(帝國)이 한참 전성기를 누리던 1월의 한복판, 후배 여인
네와 대학로 북쪽 동네인 명륜동(明倫洞)을 찾았다.
이번 겨울은 제대로 약을 먹었는지 툭하면 강추위에 폭설이 강림해 며칠 전 내린 눈이 아
직도 세상을 덮고 있었다. 하여 햇님의 반격에 겨울의 기세가 조금은 누그러진 14시에 혜
화동로터리에서 그를 만나 장면총리 가옥을 찾았다. 그곳은 혜화동로터리에서 서울과학고
, 성북동 방향으로 3~4분 정도 가면 된다.


 

♠  명륜동 장면(張勉) 가옥 - 등록문화재 357호

▲  장면 가옥 외경

명륜동에 자리한 장면 가옥(장면총리 가옥)은 서울에 서려있는 현대사의 주요 현장이다. 바로
제1,2공화국 시절 정치/외교가로 활동했던 장면(장면 총리, 장면 박사라고 많이 불림)이 살던
집으로 속세(俗世)의 때가 조금씩 묻어가던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4.19와 한 덩어리로 국사
관련 시험에 단골로 등장했던 귀찮은 인물이다. 그나마 다행은 외우기가 참 쉬운 이름이었다
는 것인데 그것도 외우기 어렵다면 대중음식의 하나인 짜장면(자장면)이나 영화의 한 장면이
란 식으로 외우면 연상도 쉽게 된다.

이 집은 장면이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 시절에 지은 것으로 건축가 김정희가 한옥과 양옥의
장점을 뽑아서 지은 개량 한옥의 일종이다. 1930~40년대 서울 중산층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종로구에서 인수하여 가옥 손질을 거쳐 2012년 12월 실외가 우선 개방되었다.
이후 건물 내부를 손질하고 장면의 유물 중 괜찮은 것을 선별하여 2013년 4월 19일, 사랑채와
안채 내부가 장면기념관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날짜를 4월 19일로 잡은 것은 이승
만의 자유당(自由黨)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4.19혁명과 장면의 정치개혁 의지
를 기리고자 함이다.


▲  활짝 열린 장면 가옥 대문

▲  장면 가옥 등록문화재 필증

▲  장면의 흉상(胸像)

돌로 1m 높이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다진 장면 가옥은 안채(92.56㎡)를 중심으로 사랑
채(56.2㎡), 경호원실(9.92㎡), 수행원실(6.61㎡) 등 4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고위관료
까지 지낸 사람이라 집이 클 줄 알았더만 두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조촐하여 썩은 내가 진동
하는 권력층과 졸부들의 고래등 저택에 비해 거부감도 별로 없고 정감도 많이 간다. <같은 시
대를 누볐던 자유당의 우두머리 이기붕(李起鵬)의 집은 저택급이었음>
가옥을 둘러싼 담장은 남쪽과 서쪽은 하얀 피부, 동쪽은 붉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담장
의 높이는 2m 정도이다. 가옥 서쪽에는 키다리 아파트가 자리해 가옥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동
쪽에는 혜화로가 나있다.

가옥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대문은 주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문으로 개방시간에 한해
문짝 하나를 열어둔다. 문 높이는 담장만큼 낮으며 문 우측 기둥에는 주소가 쓰인 패가 있고,
좌측 기둥에는 5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옛 주인 장면의 이름 2자가 한자로 쓰여 있어 혹 문
을 두드리면(초인종은 없음) 그 장면이 스르륵 달려나와 우리를 맞이해 줄 것 같은 기분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담장이 집 안채를 가리며 길을 막아서는데 여기서 가족과 친척, 친분이
두터운 사람은 왼쪽, 언론기자와 기타 손님은 오른쪽으로 갔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사랑채에
딸린 대기실이 나오며,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옆칸에 있는 응접실에서 장면을 접견했다.
대문에서 왼쪽으로 가면 조그만 경호원동과 앞마당으로 이어진다. 경호원동은 장면의 경호원
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안에 3㎡ 정도의 좁은 지하가 있다. 현재는 이
곳을 지키는 관리인이 머물고 있으며, 건물 우측에는 2012년에 조성된 장면의 흉상이 서 있고
좌측에는 장면이 심었다는 높이 7~8m의 작은 나무 1그루가 주인이 가고 없는 집뜨락에 조촐히
그늘을 드리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장면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운석 장면(雲石 張勉. 1899~1966)
장면은 옥산(玉山) 장씨로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에서 장기빈(張箕彬)의 맏아들로 태
어났다. 장기빈은 왜정 때 부산세관장을 지낸 관리로 집안 살림은 넉넉한 편이었다.
8살에 인천성당이 운영하는 박문학교(博文學校)에 들어가 한학(漢學)을 배웠고, 1917년 수원
고등농림학교(서울대 농생대의 전신)를 졸업, 1919년 서울기독교청년회관 영어학과를 수석으
로 마쳤다.
이후 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 자격으로 미국 맨해튼 카톨릭대 문과에 들어가 1925년에 졸업을
했으며, 로마교황청에서 열린 '한국79위 순교복자 시복식(諡福式)'에 참석했다. 그리고 귀국
하여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근무하다가 동성상업학교에 들어가 교편을 잡았고, 1936년 그곳의
교장이 되었다. 또한 계성학교의 교장까지 겸임해 1945년까지 교육계에서 일했고, 천주교청년
회연합회 회장이 되어 '구도자의 길','조선천주공교회약사' 등을 출간했다.

1946년 정계에 진출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과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을 역임했으며, 우익의 일
원이 되어 좌익세력과 싸웠다. 또한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한 정책 수립 등의 활동을 벌이기
도 했다.
1948년 서울 종로 을(乙)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되었고, 그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조병옥(趙炳玉)과 함께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
라는 국제적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 특사로 로마교황청을 방문했고 귀국 길에 미
국 맨해튼대학에 들려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가 되어 2년 동안 외교관 생활을 했고, 6.25전쟁이 터지자 미국을 설득
해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1951년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귀국했으나 바로 이듬해 물러났
으며, 야당의 일원이 되어 이승만/이기붕의 자유당 독재정권과 싸우기 시작했다.
1955년 신익희(申翼熙), 조병옥과 민주당을 결성해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6년 대선 때 신익
희가 대통령 후보에, 장면이 부통령(副統領) 후보로 나가 정권 교체를 노렸다. 이때 자유당은
8년 이상이나 대통령을 해먹은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야망이 쓸데없이 컸던 이기붕이 부통
령 후보로 나섰다.

백성들의 지지에 힘입어 열심히 유세를 벌이던 신익희는 호남으로 내려가던 중, 열차 안에서
돌연 급사를 하면서 정권교체의 꿈은 물 건너갔다. 다행히 신익희 사망에 따른 동정표로 장면
이 이기붕을 여유롭게 따돌리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6년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자유당 정치깡패인 최훈과 김상붕에게 저격을 당했으나 다행
히 경상으로 그쳤으며, 1957년 미국 시튼홀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1959년 민주당 최
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 대선 때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유세 도중 위암으로 사망해 정권교체의 기
회를 잃었으며 장면은 또다시 부통령 후보에 나섰다. 그리고 그 유명한 3.15부정선거로 이기
붕이 억지로 당선되자 뿔이 단단히 난 민중들이 봉기하여 마산과 대구에서 독재정권/부정선거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서울에서 4.19가 터지면서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은 길거리에 나앉게 된
다.

4.19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의 민주당은 의원내각제(議院內閣制)를 실시했고, 장면은 제5
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됨과 동시에 제2공화국 국무총리가 되어 국정을 이끌게 되었다. 허나
장면 정권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백성들이 피를 흘리며 내려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욕심과 이해관계에 얽혀 혼란에 빠졌다. 그 와중에 민주당의 구파가 떨어져나가 신민당을
창당했고, 그렇게 1년을 소비하다가 1961년 5.16으로 장면 내각은 모두 털리고 만다.

5.16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은 장면을 연금시켰고, 이주당(二主黨)사건인 반혁명음모사건에 연
루시켜 징역 10년을 선고했으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이후 5년간 집에 틀어박혀 신앙생활
에 몰두하다가 1966년 6월 4일, 간염으로 67년의 인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는 국민장(國民
葬)으로 거행되었으며, 경기도 포천 카톨릭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면은 미국 대사로 2년 가량 외국에 나가있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 집에서 살았다. 그
러니 거의 27년 동안 살았던 셈이다. 집 구석구석 장면의 손때가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
가 심은 나무가 어엿하게 성장해 주인의 빈자리를 지킨다. 이렇게 보면 장면이 꽤 옛날 인물
처럼 비춰지기도 하겠지만 그는 나와 아주 가까운 시대의 인물이다. 그가 사망하고 12년 뒤에
내가 이 세상에 억지로 나왔고 부모 세대들은 장면의 모습과 이름 2자를 모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  경호원동과 나무 1그루

▲  앞마당에 있는 작두펌프(우물펌프)
▼  안채 동쪽에 자리한 장식용 장독대

그리 넓지 않은 앞마당에는 소나무 1그루와 작두펌프가 있다. 작두펌프는 우물펌프, 옛날펌프
, 무쇠펌프, 작두샘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1980년대까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기구
였다.
이 기구는 장면과 그의 가솔(家率)들, 경호원들이 쓰던 것으로 지하에 관정(管井)을 묻고 지
하수를 끌어올리는 공기압의 원리를 이용한 수동식 펌프이다. 패킹이 낡거나 펌프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공기의 압이 빠져 지하수를 끌어올릴 수 없게 된다. 이때 정신줄을 놓은
프를 깨우고자 붓는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  장면 가옥 안채 (장면기념관)

남쪽을 바라보고 선 안채는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장면 가족의 생활공간이다. 장면기념관의 중
심으로 거실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 우측에 건너방이 자리해 있고, 안방 북쪽에
는 부엌, 건너방 북쪽에는 욕실이 있다. 대청마루 북쪽과 남쪽에는 미닫이문을 냈으며, 2013
년 4월 19일 금지된 집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대청마루 남쪽 미닫이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되는데 실내화가 넉넉히 준비되어 있어 신발
을 벗고 그것으로 갈아신으면 된다. 대청마루와 안방, 건너방에는 장면의 체취가 서린 온갖
문서와 사진,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문서 같은 경우 상당수가 복제품이라 아쉬움을 준다.
장면 외에도 그의 부인 김옥윤이 쓰던 유품도 같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 정치인 가족의 생활상
을 아련히 알려준다.


▲  안채 대청마루 (오른쪽이 사랑방, 북쪽이 부엌)

▲  장면의 유품이 깃든 안채 사랑방

▲  장면의 유품이 깃든 안채 건너방

▲  1948년 9월 6일에 발급된 대한민국 외교관 1호 여권 (복제품)

이 여권은 1948년 '유엔 파견 대한민국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부여 받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
초의 외교관 여권이다. 그러니 눈여겨 보기 바란다.(복제품이란 것은 함정) 그는 대한민국 최
초의 외교관이기도 하며, 미국과 프랑스 등의 입국사증이 찍혀 있다.


▲  유엔총회 연설문(복제품)과 바티칸 교황청 훈장 (오른쪽)

유엔총회 연설문은 1949년 12월 7일,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대한민국 독립 승인을 요구하는 영
어 연설문의 한글 번역본이다. (장면이 직접 썼음) 연설 직후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
로 한국 독립 승인이 통과되었다. (반대한 쓰레기들은 주로 공산주의 국가임)


▲  영어로 쓰인 유엔총회 대한민국 승인서 (복제품)
유엔에서 찬성 48표를 얻어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은 그 순간을 기록한 문서로
미국 국무부 고문 달레스의 친필 사인이 담겨져 있다.

▲  바티칸 교황청에서 선사한 훈장 (진품임)
1951년 5월 22일 국무총리 재직 중에 교황청에서 선물로 준 훈장이다.

▲  재외국인등록증 (복제품)
장면의 50대 사진이 담긴 문서로 주미국대사 재직시(1949년 10월 16일)에 발급
받은 것이다. 양력 대신 단기(檀紀)를 쓰고 있는 점이 무척 이채롭다.
(1960년대 초까지 단기를 많이 썼음)

▲ 주미대사 신임장 (복제품)
1949년 3월 25일 장면 초대 대한민국 주미특명 전권대사가 당시 미국 대통령인
트루먼에게 제정한 신임장(信任狀)이다. 이 문서에도 단기가 쓰여 있다.

   ▲  장면이 사용했던 영문 타자기 (진품임)
 
2년 동안 주미 대사를 지냈을 때 이용했던 타
 자기이다. 지금이야 한가롭게 있지만 그 시절
 에는 정말 불이 날 정도로 바쁘게 뛰었다.

▲  장면이 번역했던 천주교 서적들 (진품)
왼쪽은 제임스 기본스가 1876년에 저술한
'교부들의 신앙'으로 장면이 1944년에
번역판을 내놓았다.


▲  장면이 사용했던 기도서와 십자가 목걸이 (진품)
1921년 성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한 후 얻은 것으로 장면은 이 책을 늘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기도서 위에 있는 십자가 목걸이 역시 그가 기도를
할 때 쓰던 것이다.


▲  장면이 썼던 실크모자 (오른쪽에 실크모자를 쓴 장면의 사진이 있음)

장면이 1949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 취임식 때 썼던 모자이다. 그저 말로만 듣고 바보상자에서
만 보았던 그 실크모자를 여기서 처음 그 실물을 접하니 모자가 은근 멋있어 보인다. 나도 한
번 써보고 싶은데 어째 안될까?


▲  무늬만 남은 안채 부엌

안채 부엌은 전통 부엌 양식에 서양식이 더해진 형태로 타일을 깐 아궁이와 부엌 벽, 그리고
그릇과 음식을 씻는 일종의 싱크대까지 갖추고 있다.
장면과 그의 가솔, 경호원들은 이 부엌에서 만들어진 밥과 온갖 음식의 힘으로 혼란했던 20세
기 중반을 살아갔다. 허나 장면 가족이 집을 떠난 이후, 현역에서 물러나 이제는 그 껍데기만
남은 채, 모락모락 밥 연기와 국 연기를 뿜어내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장면이 부통령 당선 기념으로 받은 놋그릇(왼쪽)과 바깥 활동 때
늘 가지고 다녔던 동그란 도시락통 (오른쪽)

▲  장면이 손님 접대용으로 사용했던 그 비싼 신선로(神仙爐)
장면 일가의 넉넉했던 형편을 보여준다.

▲  장면, 김옥윤 부부의 약력과 기도문이 담긴 카드와
김옥윤이 사용했던 옥비녀와 옥반지

▲  김옥윤이 사용했던 안경과 반짇고리, 그리고 이쁜 꽃신
바느질을 하는 김옥윤의 사진도 같이 있다. 조그만 꽃신에서는 그의 파릇파릇했던
젊은 시절의 향수가 불어오는 듯 하다.

▲  장면이 쓰던 돋보기와 명함, 그의 싸인, 손목시계, 만년필, 수표책

▲  장면의 조촐한 쉼터, 안락의자와 거북선 마크 베게

거북선이 그려진 노란색 베게는 그가 애용했던 물건으로 안락의자와 함께 그의 숙면을 인도해
주었다. 국정(國政)으로 늘 잠이 부족했던 그에게 저 의자와 베게는 소중한 쉼터였으리라.


▲  3대가 다 모인 장면의 가족 사진

▲  안채 뒤쪽에 자리한 비좁은 수행원동

▲ 수수하게 보이는 안채 뒤쪽


▲  눈으로 햐얀 지붕을 이루고 있는 장면 가옥 사랑채

앞마당 동쪽에 자리한 사랑채는 사랑방, 응접실, 대기실로 이루어져있다. 사랑채는 장면이 손
님을 접대하거나 민주당과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회의나 다과를 하거나, 기자회견을 하던 그
의 공무(公務) 공간으로 현재는 그의 유품과 여러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내부 관람 가능)


▲  1956년 부통령 선거 때 쓰인 장면 포스터와 약력

그 당시 민주당 구호는 이랬다. '배고파서 못살겠다. 죽기 전에 갈아보자', 그에 대응하는 자
유당 떨거지들의 구호는 '갈아봤자 별 수 없다. 사탕발림에 속지 말자'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정권 교체는 이루지 못했지만, 장면이 이기붕
을 여유있게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런데로 체면은 세웠다.


▲  장면이 4대 부통령 시절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그에 대한
이승만의 답신 (복제품)

▲  1956년 장면을 저격했던 최훈과 김상붕이 장면에게 보낸
참회의 편지 (복제품)


장면은 1956년 자유당에서 사주한 최훈과 김상붕의 총격을 받아서 왼쪽 손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들은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국무총리가 된 장면은 그들의 감형을 주선하여 사형만은 면하게
했다. 이에 최훈은 1964년 7월 27일 장면에게 1통의 봉함 엽서를 보내 자신의 심경을 드러냈
다.
'인간에게 가장 귀하다는 생명마저 빼앗겼던 저희들은 4.19가 일어난 그해 10월, 관대하신 은
총으로 생명이 부활되었고, 그해 12월 친히 오셔서 주신 따뜻한 털내의로 몸을 녹이며 살아온
불초 소인은 하루라도 그 은총을 잊을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조차 효도한 기억이 없는 제가
왜 조석으로 박사님의 온정을 못잊어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박사님께서 원수를 사랑하
라는 예수의 사상을 친히 시범하신 사도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탓입니다'


장면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저격범까지 관용의 정신을 베풀어 살려주는 등, 그의 넉넉한 마음
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범인(凡人)은 감히 따라하기 어려운 그 넓은 마음을 말이다. 물론 정
치적인 다른 이유도 조금은 섞여 있겠지. (자세한 것은 당사자만 알 뿐임)


▲ 왼쪽은 1960년 8월 27일 민의원에서 열린 제2공화국 국무총리 취임사에서
장면이 발표한 6개항의 시정 방침을 밝힌 시정 연설문 (복제품)
오른쪽은 5.16쿠데타 이후 나온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서 (복제품)

▲  손님을 맞이했던 사랑채 응접실 (왼쪽 에어컨은 2012년 이후에 설치됨)

▲  장면이 주로 머물렀던 사랑채 사랑방 (이불장, 가구 등이 있음)

▲  1999년 8월 13일, 장면에게 추서된 대한민국 건국훈장 (복제품)

▲ 자신의 일대기를 직접 저술한 친필 연보 (복제품)
어린 시절부터 1965년까지 자신의 일생을 친필로 정리한 일기이다. 자신의 가족과
국내에서의 행적은 물론 자신이 직접 겪은 국제 정세도 소상히 기재해 놓았다.

▲  한자로 쓰인 자신의 좌우명(왼쪽, 복제품), 장면이 서거한지 8달 뒤
(1967년 2월)에 발간된 그의 기고문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 장면 가옥 찾아가기 (2018년 2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를 나와서 대학로를 따라 2분 정도 걸으면 혜화동로터리이다.
  여기서 정면으로 길을 건너 혜화동우체국을 끼고 북쪽으로 난 2차선 도로(혜화로)를 3분 정
  도 가면 길 왼쪽에 장면 가옥이 있다.
*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3번 출구), 4호선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8번을
  타고 혜화초교에서 내리면 길 건너로 장면 가옥이 보인다.
* 관람시간 : 9시 ~ 18시 (겨울은 17시까지) / 입장료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1가 36-1 (혜화로5길 53, 장면박사 기념관 ☎ 070-8239-
  1063)
* 장면박사 기념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문과 복도로 이어진 사랑채 내부


 

♠  명륜동 구석에서 만난 소소한 명소들

▲  흥덕사(興德寺)터 표석과 북묘(北廟) 하마비(下馬碑)

명륜동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에서 북서쪽으로 난 골목길(성균관로17길)을 들어서면 북묘 하마
비와 함께 흥덕사터를 알리는 표석이 마중을 한다.

나의 돌머리 속에는 전혀 데이터가 없던 명륜동 흥덕사는 1401년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그의
옛집 일대를 회사해서 만든 절이다. 세종 때 불교를 선교(禪敎)와 교종(敎宗)으로 통폐합하면
서 교종의 도회소(都會所)로 삼았으며 왕실의 사찰로 번영을 누렸으나 연산군(燕山君) 시절
폐사되어 그 흔적조차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 있던 불상과 탱화들은 인근 절로 흩어졌으나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하며, 조선 효종 때
송시열이 이곳에 집을 짓고 서식하면서 그가 살았던 동네란 뜻에 송동(宋洞)이라 불리기도 했
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자 명성황후가 충주(忠州)로 줄행랑을 치면서 답답한 마음
에 도중에서 만난 이씨 무녀(巫女)에게 환궁 시기를 물었다고 한다. 과연 무녀의 말대로 그
시기에 환궁하게 되자 황후는 너무나 기뻐 그에게 바라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이에 무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관우(關羽) 사당을 지어줄 것을 청했고, 1883년 이곳에 그 사당을 지어주면
서 방향을 따져 북묘라 하였다.

관우는 중원대륙의 허접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주요 인물로 촉(촉한)을 세운 유비
(劉備)의 의제이자 부하이다. 유비(劉備), 장비와 돈독한 의형제의 의리를 보이며 대륙을 누
빈 장수로 무예도 뛰어나고 머리도 좀 있었으나 워낙 교만한 성격 탓에 219년 조조와 손권의
공격에 크게 털려 형주(荊州) 지역을 말아먹고 끝내 손권(孫權)에게 잡혀 처단되었다. 그때
관우 사냥에 나섰던 장수는 조조 수하로 뛰어난 무예를 자랑했던 조인, 서황과 뛰어난 전략가
인 손권의 부하 육손, 여몽이었다.

손권은 유비의 창끝을 돌리고자 관우의 목을 조조에게 바쳤으나 관우에게 호감이 있던 조조는
오히려 크게 은혜를 베풀어 관우의 묘와 사당을 지어주었다. 이후 관우 신앙이 백성들 사이에
서 싹트기 시작했고 그게 들불처럼 쓸데없이 번져나가 문(文)에 공자(孔子), 무(武)에 관우라
고 할 정도로 대륙의 대표 민간신앙으로 흥하게 된다.
그 신앙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조선이 명나라에 원군을 요구하자 명은 수
만의 허접 군사를 보내 갖은 민폐를 아끼지 않았는데 명나라 군사 중에 관우 열성 신자가 많
았다. 특히 진인(陳寅)이란 장수는 그 신앙이 매우 두터웠으며, 1598년 울산성(蔚山城) 전투
에서 부상을 당해 서울 남대문 밖에 집을 짓고(선조 임금이 집을 내려준 듯) 쉬고 있었다. 그
때 거처에 관우 사당을 지으니 그 사당이 이 땅 최초의 관우 사당, 남묘(南廟)가 되겠다.

왜란이 끝나자 명나라 군주, 신종(神宗)은 관우의 혼이 도와 전쟁이 끝난 거라고 격하게 우기
며 금 4,000냥을 보내와 남대문 밖에 관우 사당을 지어달라고 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 그곳에
이미 사당이 있으니 다른 곳이 좋겠다며 동대문 밖에 세우게 되니, 이것이 국립 관우 사당 1
호이자 지하철 역에도 있는 그 유명한 동묘(東廟)이다.
17세기 이후 전국 주요 고을에 관우 사당이 지어졌으며, 관우신앙이 민간에도 널리 퍼지면서
민간신앙의 하나로 조촐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1883년에 지어진 북묘는 그 이듬해(1884년)에 벌어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마무리하는 현장
이 되면서 크게 이름을 남겼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일을 벌인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당(開化黨)은 왜
군과 협조하여 고종(高宗)과 왕실을 호위하며 창덕궁(昌德宮)에 들어갔으나 청나라군의 공격
을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후원 북장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일이 그르쳤음을 깨달은 김옥균
과 박영효, 서재필(徐載弼) 등은 왜군을 따라 왜국 공사관(公使館)으로 36계를 쳤고, 그들과
작별한 홍영식(洪英植)과 박영교(朴泳敎)는 장교 7명과 왕을 호위하며 북묘에 들어갔으나 곧
들이닥친 청군에게 살해되면서 갑신정변은 허무하게 막을 내린다.
이후 고종은 1887년, 갑신정변 당시 허벌나게 고생했던 일을 떠올리며 민영환(閔泳煥)에게 글
씨를 쓰게 하여 북묘에 비석을 세우니 그것이 북묘비(北廟碑)로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북묘는 1902년 관왕묘(關王廟)에서 관제묘(關帝廟)로 다른 관우사당보다 격이 높아졌다. 하지
만 1908년 순종(純宗)의 칙령으로 국립 사당과 제단을 정리하면서 동묘에 싹 통합시켰고, 왜
정 때 비어있는 북묘 건물과 토지를 민간에 팔면서 이곳에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과 동
광학교(東光學校)가 들어섰다.
불교중앙학림은 1917년 북묘터에 불교전수학교를 세웠으며, 바로 동쪽에는 수송동(壽松洞)에
서 넘어온 보성고등학교가 뿌리를 내렸다. 1930년 불교전수학교는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인가되
었으며, 1946년 동국대로 이름을 갈아 남산 동북쪽으로 이사를 갔다.
그 빈 자리에는 조양보육대학이 들어섰고, 1963년에 문을 연 은석초등학교(서울 장안동에 있
음)도 그 자리의 일부를 쓰다가 모두 다른 데로 가면서 주택가와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 들
어섰다.

옛 북묘터를 유일하게 지키고 있는 하마비는 왕릉과 궁궐, 사당, 향교, 서원 앞에 세우는 비
석으로 그의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있다. 이는 높고 낮은 사람
모두 닥치고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북묘가 있던 시절에야 지엄한 하마비의 명령이 통했지
만 이제는 사람들이 발로 차고 괴롭혀도 하소연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국가나 서울
시에서 관리하는 지정문화재도 아니니 찬밥 신세는 더하다.
왕년의 시절을 그리며 우수에 젖은 그 옆에 역시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흥덕사터를 알리는 표
석이 세워져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집터. 증주벽립(曾朱壁立) 바위글씨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7호

북묘 하마비에서 주택가로 2분 정도 더 들어가면 길 왼쪽 바위에 또렷하게 새겨진 '증주벽립
(曾朱壁立)' 4자의 바위글씨를 만나게 된다. 이 바위글씨는 송시열이 새긴 것으로 그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 집이 얼마나 넓었는지 동쪽은 북묘 하마비를 넘어 서울과학고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증주벽립이란 '증자(曾子)와 주자(朱子)의 뜻에 따라 높은 절벽이 온갖 비바람에 꿋꿋이 버티
듯 의로운 나의 길을 가겠다'
는 아주 의연한 뜻으로 글씨가 근래에 새겨진 듯 필체가 너무나
선명하고 패기가 넘쳐 흐른다. 그의 바위글씨는 이것 말고도 서울과학고 교정에 '금고일반(今
古一般,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과 '영반(詠盤, 올라앉아 시를 지은 바위)' 등 2개가 더
있다.

송시열이 골로 간 이후, 증주벽립 드변은 송시열이 살았던 동네란 뜻의 송동(宋洞)이라 불렸
으며, 골짜기가 깊고 꽃나무가 많아 숙정문(肅靖門) 남쪽과 더불어 도성 봄꽃놀이 장소로 인
기를 누렸다. 특히 앵두꽃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1883년에는 이곳에 북묘가 들어섰으며, 왜정 때는 불교전수학교와 보성고등학교가 뿌리를 내
렸다. 이후 여러 학교를 거쳐 주택가로 변하면서 참으로 아름다웠던 정취는 죄다 한 토막 전
설처럼 사라지고 글씨가 깃든 바위 주변은 물론 그 머리까지 개념 없이 집들이 들어차 보기에
도 정말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명세기 유서 깊은 바위인데 1960년대 이후 무자비
하게 자행된 개발의 칼질이 이 바위에 콘크리트 칼을 씌워 죄인 아닌 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콘크리트 칼을 강제로 뒤집어 쓴 바위글씨와 문화유산이 서울에 꽤 있음..)
지금은 힘들겠지만 나중에 서울시나 종로구에서 바위 주변 집들을 모두 매입해 부시고 바위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개발의 칼질로 다친 부분을 치료한 다음, 주변에 앵두나무를 심고 소박
하게 공원(공원 이름은 '송시열공원'이나 '송동공원'이 좋을 듯)으로 닦았으면 좋겠다. 허나
아마 안될꺼야. 왜 이곳은 상식이 통하지 않고 불의(不義)가 판치는 대한민국이니까. 만약 지
방문화재로 지정되지도 못했다면 저 글씨도 진작에 돌가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원래 '우암구기 각자증주벽립(尤庵舊基刻字曾朱壁立)'이었으나
이름이 무지 어렵다하여 '우암 송시열 집터'로 가볍게 명칭을 갈았다.


▲  증주벽립 바위글씨의 위엄

※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참으로 기나긴 인생
송시열은 이율곡(李栗谷)의 학풍을 계승한 노론(老論)의 우두머리로 17세기에 조선의 정치와
사상을 주름잡던 조선 최대의 유학자였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화양동주(華陽洞主)로 1607년 충북
옥천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유학과 사상에 쓸데없이 타고
난 재능을 보였으며, 이후 논산 노성으로 집을 옮겨 김장생(金長生)의 배움을 받았다.

1633년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바로 때려치웠으며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의 스승이 되어 1년 동안 그를 가르켰다. 1636년 12월 병자
호란이 터지자 인조(仁祖)를 호종하여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불이나
게 도망쳤으며, 결국 인조가 송파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淸太宗) 앞에 보기좋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자 너무 열받은 나머지 고향으로 내려갔다.

1649년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예전 스승과 제자의 인연으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청나라에
우호적이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다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허나 김자점이
파직되면서 다시 관직으로 돌아왔으나 김자점이 홧김에 조선이 청나라 정벌을 준비한다고 청
나라 조정을 들쑤시는 바람에 그와 관련된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청나라의 압박으로 떨려난다.
그래서 낙향하여 후진을 기르다가 1658년 다시 관직에 나가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며,
조선의 마지막 대외정벌 프로젝트이자 효종의 야망인 청나라 정벌 계획, 이른바 북벌(北伐)을
도왔으나 아쉽게도 1659년 왕이 승하하면서 북벌 프로젝트는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

현종(顯宗) 시절,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
題)가 발생하자 기년설(朞年說, 만1년)을 주장하며 3년 설을 주장한 남인(南人)을 쫓아내 권
력을 잡았다. 이렇게 서인(西人)의 우두머리가 되어 좌참찬(左參贊)이 되었으나, 효종의 장지
(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비난을 받고 다시 낙향을 했고, 1668년 다시 돌아와 우의정이 되었으
나 좌의정(左議政) 허적(許積)과의 다툼으로 또 사직했다. 허나 1671년 다시 우의정으로 복귀
했으며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하자 다시 자의대비(장렬왕후)의 복상문제가 거론되어 대공
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했다. 허나 이번에는 남인(南人)이 주장한 기년설(만1년)이 채택되
면서또 떨려나 평안도 덕원(德源)을 시작으로 여러 곳을 유배투어를 했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떨려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었으며, 1683년
에 벼슬을 사직하여 봉조하(奉朝賀, 특별 명예직)가 되었다. 이후 남인에 대해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胄)를 지지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고, 그 사건으로 아끼던 제자 윤증(尹拯)
과 감정 싸움이 격해지면서 서인은 윤증의 소론(少論) 패거리와 송시열의 노론(老論) 패거리
로 분열되었다.

이후 관직에서 은퇴하여 속리산 화양동(華陽洞)에 팔자좋게 집을 짓고 제자를 기르다가 1689
년 숙종이 희빈장씨(禧嬪長氏)의 소생(후에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를 쌍수 들고
반대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로 떨려났다. 그리고 국문 때문에 서울로 소환되던 중,
정읍(井邑)에서 숙종이 내린 쓰디쓴 사약을 1사발 쭉 들이키고 82세의 나이로 강제로 생을 마
감했다. 이후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고향인 충북 옥천을 시작으로 충남 논산, 서울 명륜동, 대전 가양동, 속리산 화양동 등
참으로 많은 곳에 서식지를 짓고 살았다. 개다가 유교(성리학)의 새로운 역사를 쓴 인물로 제
자가 쓸데없이 많았다. 그래서 송자(宋子)로 추앙을 받았으며, 그를 배향한 서원이 전국에 즐
비하다.
저서로는 송자대전(宋子大全), 우암집(尤庵集), 송서습유(宋書拾遺),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
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등 방대하며, 그의 제자들이 정리하여 세상에 공개했다.

죽음에 임해서 제자들에게 명나라 군주 신종과 의종(毅宗)을 제사지내는 사당을 만들 것을 유
언했는데 그래서 생긴 것이 그 악명 높은 만동묘(萬東廟)이다. 그가 이런 개미친 유언을 남긴
것은 우리의 사촌 민족인 만주족(여진족)의 청나라에 대한 강한 반감도 있겠지만 성리학의 영
향으로 사대부와 유생들을 중심으로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꼴통 사대주의(事大主義)가 팽배했
고, 거기에 임진왜란 이후 재조지은(再造之恩)까지 가세하여 명나라에 대한 존재가 경외의 수
준으로 커진 탓이다.
명이 망하고 구한말까지(심지어 왜정 때까지도) 명의 마지막 군주, 의종의 연호인 숭정(崇禎)
을 두고두고 우려먹었으며,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명의 재건을 간절히 바라던 지배층의 문구가
많이 등장한다. 게다가 조선 왕실도 명나라 군주의 사당인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매년 적
지 않은 세금을 축내며 제사를 지내니 참으로 할말을 잃게 한다. 명이 백제와 고구려, 백제와
부여국(夫餘國) 관계처럼 조선의 조상 나라라면 이해라도 하지만 둘은 전혀 관련도 없다. <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고려 사람이라는 설이 있긴 함, 그의 어머니도 고려 출신이라는 설이
있음>
어쨌든 정도전(鄭道傳)과 율곡 이이(李珥), 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와 중농학파(重農學派)
계열 등 몇몇 깨어있는 이들을 제외한 조선 지배층의 우둔함은 결국 부국강병을 멀리하고 민
생을 외면했으며, 쓸데없이 유교 교리만 앞세워 헛소리만 주구장창 떠드니 발전은 커녕 점점
퇴보하여 결국 우리의 옛 속방인 왜국에까지 밀리게 되었다. (조선 중기부터 밀리기 시작함)
그래서 결국은 아시아의 진정한 호구 국가가 되었으니 그 고통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굴레처
럼 남아있으며, 약소국의 비애를 두고두고 누리게 만든다. (제삿밥도 아까운 조상들이 많아서
후손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님) 기분 같아서는 저 증주벽립 바위글씨를 깨부시고 싶지만 저
글씨가 무슨 잘못이 있으랴? 게다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어 나보다 높은 신분의 존
재라 감히 해코지하기도 어렵다

※ 북묘 하마비, 우암 송시열 집터 찾아가기 (2018년 2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3번 출구), 4호선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8번을
  타고 국민생활관 하차, 또는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7번을 타도 된다.
  국민생활관 정류장에서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서쪽 길(성균관로17길)을 따라 2분 정도 가면
  북묘 하마비이며, 여기서 왼쪽으로 더 들어가면 송시열집터 증주벽립 바위글씨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1가 5-99 (성균관로17길 37)


▲  서울과학고에서 바라본 명륜동 증주벽립(송시열집터) 방향
정면에 보이는 주택가 속에 증주벽립이 숨어있다. 이 일대에 흥덕사와 송시열 집,
북묘 등이 있었고, 도심 경승지로 앵두꽃이 유명했다고 하니 정말 상전벽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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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2월 2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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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서촌의 끝자락을 더듬다 ~~~ (인왕산 한양도성, 딜쿠샤, 행촌동은행나무, 홍난파가옥 등)

 


' 서촌의 끝자락을 거닐다. (사직동, 행촌동, 송월동 지역) '

▲  한양도성 (인왕산 남쪽 기점 ~ 사직터널 구간)


 

♠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 인왕산 남쪽 기점~사직터널 구간

▲  무악동과 행촌동 뒤쪽으로 울퉁불퉁 흐르는 한양도성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2번 출구)에서 독립문초등학교와 무악현대아파트를 지나 가파른 오르막
길(통일로18나길)을 지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S'라인 비슷한 굽이길이 나
온다. 그 길을 지나면 한양도성과 만나는 해발 130m의 고개 정상이다. 이곳이
인왕산(仁王山)
남쪽 기점으로 북쪽으로 각박하게 펼쳐진 성곽길을 따라 올라가면 인왕산 정상이고, 남쪽으로
펼쳐진 성곽길을 내려가면 사직터널 위쪽과 교남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성곽이나 인왕산에
관심이 전혀 없다면 고갯길을 그대로 넘어가자. 그러면 도심 속의 산악도로인 인왕산길이 마중
을 나올 것이다.

인왕산 남쪽 기점에서 만난 한양도성은 북쪽으로 인왕산 주능선을 따라 정상(338m, 또는 340m)
을 거쳐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으로 이어지며, 성곽은 온전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인
왕산 정상에서 한 갈래의 성곽이 조심스럽게 북쪽으로 내려가는데, 그 성곽은 탕춘대성
(蕩春臺
城)으로 홍제천(弘濟川)에 자리한 홍지문(弘智門)
을 거쳐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이어진다.
또한 이곳 남쪽은 인왕산의 완만한 줄기를 타고 사직터널까지 1리 정도 이어지는데, 그 줄기는
경희궁(慶熙宮) 옆구리까지 이어진다. 허나 성곽은 사직터널 위쪽에서 그만 끊기며, 그 이남은
집들이 가득 들어차 성곽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나마 월암근린공원에서 잠시 근래에 복원된
성곽이 펼쳐지긴 하지만 그것도 얼마 흐르지 못하고 끊기고 만다. 이후로 한참 가야 나오는 남
대문에서 간의 기별도 안갈 정도로 성곽이 나오고 남산 백범광장에 들어서야 그나마 속 편하게
성곽이 가슴을 핀다.
끊어진 남대문과 월암근린공원 사이에 있던 서대문<西大門, 돈의문(敦義門)>과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
義門)>은 고약한 왜정(倭政)의 의해 모두 사라져 정확한 자리조차 아리송한 실정이다.
그럼 여기서 서울 도심의 든든한 갑주였던 한양도성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1388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란 그 유명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몸담던 고려 왕조를 싹
갈아엎고 조선이란 비리비리한 왕조를 세운 이성계(李成桂), 그는 1394년 남경(南京)이라 불리
던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의 도성 천도 프로젝트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
가로 명망이 높던 정도전(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는데,
1395년까지 경복궁,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시가지 등을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
에 들어갔다.
한양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인 북악산(北
岳山, 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 길
이는 59,500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는 작은 수준
이며,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천하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
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집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 다시 79,400명을 콩볶듯이 동원,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도성 축조는 마무리 되었다.


▲  한양도성 산책로
두툼하게 만든 여장 너머로 성밖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시키기로 마음
을 먹었다. 하여 1422년 1월, 무려 32만 2천명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하여 보수 작업
에 들어갔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하니 보수 작업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
지를 가늠케 해주며, 이때 동원 규모는 가히 조선 최대였다.
허나 아무리 현군(賢君)으로 추앙받는 세종이라지만 공사를 너무 닥달했는지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으며, 그 공사 결과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곳, 곡
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한 도성이 되었다. 그리고 1426년 수성금화도
감(修城禁火都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케 했는데, 성곽을 워낙 단단히 지은 탓에 20세기까지 스
스로 붕괴된 적이 없으며,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되거나 전쟁 폭격을
받은 것은 제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하여
도성은 왜군에게 아주 허무하게 무혈점령되고 만다. 그런 꼬라지를 막아보고자 온갖 욕을 들어
가며 단단하게 지었건만 오늘날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소위 윗대가리들의 무능으로 눈을 뜨
고 적군이 도성 안에 들어오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치열한 수성전(守城戰)이 없어서
성곽과 성문은 피해가 없었다.

1704년(숙종 30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
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 했는데, 그 안에 행
궁(行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갖춘 조그만 도시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탕춘
대성(蕩春臺城)을 쌓아 도성의 수비력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한양(서울)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드러내던 한양도
성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1899년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사람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콜
브란은 고종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거둥하라며 전차(電
車)의 필요성을 건의,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凉里)까지 이
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문의 양쪽 성
벽을 싹둑 자르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겨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나갔
다. 허나 그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제는 1905년 이후이다.


▲  한양도성과 주택가 사이를 가르는 행촌동 인왕산로1길 (경희궁 방향)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왜국은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그 소속으로 1908년 '
성벽처리위원회'라는 해괴한 기관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1910년 이
후 서소문<소의문(昭義門)>과 서대문<돈의문(敦義門)>은 물론 동소문<혜화문(惠化門)>까지 밀
어버리면서 망국(亡國)의 서울을 욕보인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
발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
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겨우 남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손질하기 시작하여 광희문과 숙정문을
복원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
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
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 (인왕산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은 못감) 다만 성곽이 사라진 부분<사직터널 윗쪽~월
암근린공원, 서울시교육청~남대문, 남대문~남산육교, 장충단고개~옛 타워호텔 남쪽, 장충체육
관 고개~광희문, 광희문~동대문, 동소문고개~성북쉼터>
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
칭이 바뀌었다. 허나 서울성곽이란 이름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며, 한양성곽이라 불리기도 한
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한양을 둘러싸던 성곽이니 서울성곽, 한양성곽이라 불러도
크게 상관은 없다. (본글에서는 한양도성으로 통일함)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
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며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데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글쎄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이 쌓여져 있었다.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 쌓인 자리에 성
곽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
았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이 땅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대
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  한양도성 밖 행촌동 인왕산로1길 (인왕산 방향)

인왕산 남쪽 기점에서 남으로 1리 가면 사직터널 윗쪽(사직동)에 이른다. 그 중간에는 성 밖으
로 나가는 조그만 암문(暗門)이 나오는데, 이는 동네 주민들의 통행을 위해 만든 것이다. 여기
서 성밖은 교남동(행촌동) 산동네 주택가, 안쪽은 성곽길과 인왕산 숲이다.

인왕산에서 힘차게 내려온 한양도성은 한국사회과학자료원 남쪽(송월1길)에서 잠시 그 길이 끊
기고 만다. 성곽이 있어야 될 자리에는 집들이 우후죽순 들어차 달릴 공간 조차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서울시에서 도성을 완전히 복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하니 철저히 고증하여 그 주변
에 첩첩이 들어찬 집들을 밀어내고 (물론 보상과 이주는 넉넉히) 복원을 했으면 좋겠다.

※ 한양도성 인왕산 남쪽 ~ 행촌동 구간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2번이나 3-1번 출구를 나오면 무악현대아파트로 가는 도로가 나온다.
  그 길로 들어서 무악현대아파트 직전에 윗쪽으로 오르는 계단길이 나오는데 그 계단을 올라
  무악어린이집에서 왼쪽으로 가면 1굽이 지난 곳에 오른쪽 오르막길이 있다. 그 길로 오르면
  한양도성이 보이면서 인왕산 남쪽 기점에 이른다. (독립문역에서 도보 15분)
* 사직단 버스정류장<연세대, 무악재 방면 정류장 : 171, 272, 606, 706, 7025번 시내버스 정
  차 / 광화문 방면 정류장 : 171, 272, 601, 606, 700, 707, 7025, 9703번 정차> 바로 서쪽에
  돌담을 옆구리에 낀 인왕산길이 있다. 그 길을 3분 정도 가면 단군성전이 나오는데, 여기서
  광화문아트홀 방면 왼쪽 길(인왕산로1길)로 4분 가면 한양도성이 나온다.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3번 출구)이나 3호선 독립문역(3번 출구를 나와서 행촌의원 앞에 정
  류장이 있음)에서 한국사회과학자료원에서 내리면 바로 한양도성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행촌동, 교남동


▲  은행나무가 가로수를 이루고 있는 송월1길 (왼쪽이 한양도성)


 

♠  서촌(西村)의 끝자락 행촌동(杏村洞)에서 만난 숨겨진 명소들

▲  행촌동 은행나무 (늦가을 사진) - 서울시 보호수 1-10호

사직터널 윗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의 끝을 잡은 행촌동은 조금은 빛바랜 산동네이다. 그렇다
고 옛날 달동네처럼 주황색 기와를 지닌 허름한 집들이 즐비한 그런 곳은 아니다. 온갖 빌라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찬 서울의 흔한 동네로 그 주택가 속에 행촌동 은행나무와 권율장군의 집
터, 그리고 딜쿠샤란 명소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딜쿠샤 곁에 자리한 행촌동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420년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행촌동의 오
랜 터줏대감이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덧없는 양분과 동네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높이 23m, 둘레 6.8m에 이르는 큰 나무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
이 이곳까지 미치면서 그의 보금자리는 크게 좁아졌고, 이렇게 주택 사이에 비좁게 자리해 마
치 강제 샛방살이로 비쳐질 정도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건강은 양호하며, 자신의 둥지를 침범한 건방진 인간들을 미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우수한 품질의 그늘과 은행잎을 선사해 넉넉한 마음을 드러낸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이자 이곳에 살았던 권율이 손수 심었다고 전하며, 주인은 오래 전
에 갔지만 그의 사연을 끈질기게 붙잡으며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이 나무 때문에
동네 이름이 행촌동(은행나무 마을)이 된 것이다. 참고로 은행나무는 태반이 사람이 심은 것이
며 자연적으로 싹을 내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서울 장안에서 오래된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꼽으라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와 성균관(문묘)
은행나무(대성전 은행나무 포함), 당산동 은행나무 그리고 이곳 은행나무를 내세우고 싶다.


▲  은행나무 밑에 누운 권율(權慄) 장군 집터 표석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권율(1537~1599)의 집터로 인근 필운동(弼雲洞) 배화여고에도 그의 집이
있었다. 필운동 집은 그의 사위이자 오성과 한음으로 격하게 유명한 오성 이항복(李恒福)에게
물려주었으니 그 집이 바로 필운대(弼雲臺)이다. (현재 필운대란 바위글씨가 남아있음)
그렇다면 임진왜란의 영웅, 권율(權慄)은 누구일까?

권율은 안동 권씨로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과 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
이다. 1582년 식년시 문과(式年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쟁에서 크
게 활약한 것으로 보아 무예도 제법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와 전적(典籍)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使)와 예조정랑(禮曹
正郞), 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을 지냈으며, 1591년 평안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으나 업
무상 과실로 파면되었다.
허나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급히 경기도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달려갔
으며 전라도 순찰사(巡察使) 이광(李珖)과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군사 4만을 모아 서울로 올라오자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었다.
이광과 곽영은 수원과 용인에 각각 진을 치고 주변에 있는 왜군을 토벌하려고 했다. 이에 권율
은 주변에 조금씩 흩어진 적들을 치지 말고 임진강(臨津江)에서 그들의 서진(西進)을 막아 군
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다음, 적의 빈틈을 노리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냈다. 허나 뇌에 주름이 가득한 이광은 그 말을 무시, 오로지 머릿 수에 의지
해 용인에 있는 왜군을 공격했다.

이광의 군사는 4만(왜국은 10만이라고 주장함)에 이르나 태반이 칼과 창도 제대로 못잡는 오합
지졸이었다. 그에 반해 용인에 머물던 왜군은 왜열도에서 나름 알아주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
坂安治)로 수백 명의 정예 기병으로 저항을 했다.
허나 조선군은 그 수백에 불과한 왜군에게 완전히 박살이 나고 싸움에 서툴렀던 선봉장 이시지
(李詩之)와 백광언(白光彦)이 전사하는 등,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했다. 허나 권율은 이를 직감
하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휘하 군사를 잃지 않고 광주로 물러나 후일을 도모했다.

1592년 가을, 전라도 남원으로 내려가 1,000명의 군사를 모집해 동복현감(同福縣監, 전남 화순
동복면)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전주(全州)로 진출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
의 왜군을 막았다. 초반에 황진이 조총에 맞아 부상을 입으면서 군사의 사기가 잠시 떨어졌으
나 권율이 군사를 독려하여 왜군을 격퇴하고 승리를 거뒀다. 그렇게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
으며, 그 공으로 전라도 감사(監事)로 승진되었다.
1592년 12월, 서울 수복을 위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천안 직산(稷山)에서 머물렀는데, 체찰사
(體察使) 정철(鄭澈)이 그 많은 인원을 먹일 군량이 없으니 돌아가서 관내를 지키는 것이 좋겠
다고 편지를 보냈다. 허나 행재소(行在所)에서 북상하라는 명이 떨어지면서 곧바로 군을 이끌
고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 들어가 진을 쳤다.

한편 권율이 독성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왜장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과 차단될 것
이 두려워 서울에 있던 군사를 이끌고 독산성을 선제 공격했다. 허나 권율은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만 할 뿐이라 왜군의 피해는 나날이 늘어갔다.
뚜껑이 열린 우키타는 사람을 보내 독산성의 약점을 탐지한 결과 물이 부족하다는 정보를 입수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로 성 밑에 큰 못을 파니 과연 성 안에 물이 마르면서
조선군의 식수에 비상이 걸렸다.
허나 권율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범한 인물답게 명쾌한 꾀를 낸 것이다. 그래서 동이 트는 이
른 아침에 왜군이 잘보이는 곳에 말을 세워놓고 쌀을 부어 말을 씻기는 시늉을 벌였다. 그것을
본 단순한 왜군은 성 안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 거짓임을 알고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 바로
그때를 이용해 공격을 가하자 발작한 우키타는 영책(營柵)을 불지르고 서울로 줄행랑을 쳤고,
정예 기병 1,000명을 미리 보내 퇴로를 차단하고 왜군 수천을 죽였다.

1593년 1월, 서울 수복을 위해 조경(趙儆)을 보내 근교에 마땅한 곳을 물색하다가 행주산성(幸
州山城)으로 들어가 목책(木柵)을 쳤다. 그곳은 서울과도 가깝고, 한강을 끼고 있으며, 조망도
좋고, 인근에 여러 요새와 함께 연합 작전을 펴기에 아주 좋은 위치였다. 허나 석성(石城)이
아닌 야트막한 토성(土城)이라 수비전에는 썩 유리한 편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서둘러 목책을
엮었다.
목책이 완성되자 독산성에 병력 일부를 남기고 모두 불러들였으며, 별도로 4,000명을 뽑아 전
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를 시흥 호암산(虎巖山, ☞ 관련글 보러가기)으로 보내 후방
을 돕도록 했다. 그때 처영(處英)이 이끄는 승병(僧兵) 1,000명이 행주산성에 합류했다.

권율은 소수의 군사를 보내 서울을 공격했고, 고양 혜음령(惠陰嶺)에서 왜군에게 박살난 명나
라군을 도와 그들의 전멸을 막아주었다. 이렇게 권율의 활약에 적지않게 염통이 쪼그라든 왜군
은 그가 있는 행주산성을 쓸어버리기로 마음 먹고, 앞서 독산과 인근의 군사를 싹 긁어모아 무려 3만의 대군으로 1593년 2월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그때 행주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승병을 합해서 겨우 약 2,800명, 그외에는 군사들을 도우러 성
에 들어온 밥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아낙네들과 지역 사람들이 있었다.

왜군은 7부대로 나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행주산성이 견고한 성이 되지 못하다보니 여
러번 위기가 있었으나 권율의 뛰어난 통솔력과 군사와 백성들의 강인한 협동심으로 다들 일당
백의 위엄을 드러내며 적들을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다. 또한 화차(火車)와 비격진천
뢰(飛擊震天雷)란 신식 무기가 열심히 나래를 펼쳐 왜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밥할머니의 행주치마 부대는 치마로 돌을 나르고 군사들의 밥을 나르는 등, 서로가 단결하니
왜군은 결국 1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수천 명의 전사자 시신을 불태우며 도망쳤다.
이 싸움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니 권율과 조경, 처영, 조선군과 승군, 밥할머
니의 아낙네들, 지역 사람들이 빚어낸 대작품이었다.

이후 파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薲)과 함께 후방을 지켰으며, 전라도
로 내려갔다가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都元帥)로 승진해 경상도에 주둔했다. 1596
년에 도망친 병사를 즉결처분한 것으로 잠시 해직되기도 했으나 바로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임
명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와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성에서 크게 패한 우키타가 서울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밥버러지 명나라군과 함께 왜군이 머무는 울산성(蔚山城)
을 공격했다. 허나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부실하여 겁에 질려 도망치는 바람에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순천으로 자리를 옮겨 순천 예교(曳橋)에 머물던 왜군을 공격했으나 역시나 병든 닭
새끼 같은 명나라군의 비협조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7월 장대한 인생
을 마감하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선조(宣祖)는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했으며,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삼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봉해 그의 공을 기렸다.

권율은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명장으로 바다에 이순신(李舜臣)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鄭起龍)과 곽재우(郭再祐), 그리고 권율이 있었다. 비록 초창기 용인 싸움에서 어리버리한 상
관들 때문에 졌고, 정유재란 때는 밥버러지 명나라군 때문에 적지 않은 고생을 했지만 그외에
는 모두 대승을 거두었다. 특히 행주대첩은 적은 군사로 10배 이상의 왜군을 물리친 우리 전쟁
사의 길이 빛나는 장쾌한 대첩이다. 그의 활약과 공훈에 대해서는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
란 책이 1권 전하고 있다. 그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있으나 인근이 유원지화되어 늘 시
끄러우니 편하게 잠이나 주무실지는 모르겠다.


▲  근대 건축물인 딜쿠샤(Dilkusha)

행촌동 은행나무 서쪽에는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2층 건물이 자리해 있다. 딱 봐도 20세기 초
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로 지금은 원형을 조금 잃었지만, 한참이나 후배인 건물들 사이에서 의
연함을 잃지 않으며 중후한 멋을 드러낸다.

이 건물은 '딜쿠샤'란 이름의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붉은 벽돌집이다. 1923년 미국 사
람 알버트 테일러(Albert Taylor)가 금광과 언론 특파원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지은 고래등 집
으로 여기서 딜쿠샤는 '이상향', '행복한 마음','희망의 궁전'을 뜻하는 인도 힌두어이다.

테일러는 금광엔지니어이자 UPI통신사 프리랜서 특파원으로 이 땅에 들어왔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천하에 널리 알린 인물로 유명하며, 독립운동가들과 자주 어울리고 그들을 흔쾌히 도와
주었다. 그러다보니 왜정은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계속 감시를 하다가 1942년 독립운동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6개월간 감옥살이를 시켰다가 가족과 함께 추방시키고, 딜쿠샤는 왜정이 몰
수해 민간에 팔아먹었다. 그렇게 강제로 이 땅을 떠난 그는 1948년 미국에서 숨을 거두었고 그
의 유해는 이 땅으로 다시 건너와 서울 합정동(合井洞)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딜쿠샤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존재와 사연을 망각한 채, 그저 왜정 때 지어진 근대 건
축물의 하나로 조용히 살아왔다. 사람들이 각 방마다 들어와 살면서 원형도 조금씩 깎여나갔고,
집도 낡아 개발의 칼질로부터 위협을 받을 정도였으나 다행히 2006년 알버트의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가 64년만에 이 땅을 방문하면서 베일에 가려진 건물의 비밀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되
었다. 브루스는 바로 이 집에서 이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딜쿠샤의 사연이 알려지자 그에 대한 시선과 팔자는 180도 달라졌으며, 2008년에는 서울시에서
브루스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해 그의 부친을 기렸다.


▲  딜쿠샤의 어수선한 뒷모습

알버트 테일러의 사연을 머금은 유서 깊은 건물이지만 아직 그 흔한 지방문화재나 등록문화재
의 지위도 얻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만약 딜쿠샤의 사연이 계속 묻혀있었다면 분명 개발
의 칼질이 이 건물을 진작에 난도질했을 것이다. 우울하지만 그것이 이 땅의 천박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이곳을 거쳐갔고 또한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어 원형도 조금 잃었고 다소 어수
선한 분위기긴 하지만 상당수는 원형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또한 유서가 깃든 곳인만큼 지
정문화재로 삼아 보호를 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행히 서울시가 이 건물의 복원과 개방 및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으며, 2016년 가을에 미국에 있는 테일러의 손녀에게 테일러의 유품
300점을 전해받아 테일러 전시전을 열 계획이다. 그리고 건물을 튼실히 손질하여 3.1운동 100
주년이 되는 2019년 3월 1일 속세에 개방할 예정이라고 하니 그때를 기다려보자.

※ 행촌동 은행나무, 딜쿠샤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3번 출구)을 나와서 독립문역4거리에서 남쪽으로 길을 건너 사직터널
  방면으로 가면, 터널 직전에 터널 위로 올라가는 '사직로2길' 골목길이 나온다. 그 골목을
  오르면 3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딜쿠샤와 은행나무가 있다.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4번 출구)을 나와서 3분 정도 직진하면 정동4거리이다. 여기서 왼쪽(
  송월로) 길로 5분 정도 들어서면 한양도성이 나오면서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월암근린공
  원 방면(송월1길)으로 들어서 홍난파가옥을 지나 계속 직진하면 은행나무와 딜쿠샤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89 (사직로2길 17)


 

♠  1930년대에 지어진 근대 가옥으로 친일파 홍난파가 말년을 보낸 곳
홍파동 홍난파 가옥(紅把洞 洪蘭坡 家屋) - 등록문화재 90호

행촌동 은행나무와 딜쿠샤에서 '송월1길' 골목길을 타고 남쪽으로 3분 가면 길 왼쪽 높은 곳에
붉은 피부의 벽돌과 지붕, 그리고 담쟁이덩굴까지 멋지게 두룬 별장 같은 아담한 주택이 두 눈
을 부여 잡는다. 그 집이 바로 홍파동 홍난파 가옥이다.

이 집은 지상 1층, 지하 1층으로 지하라고는 하지만 가파른 경사에 자리한 탓에 서쪽과 남쪽이
바깥에 노출되어 햇볕을 보고 있으므로 거의 2층이나 다름이 없다. 이곳에는 원래 구한말에 양
기탁(梁起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도와 항왜
(抗倭) 언론을 주도했던 영국 사람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년, 한
국 이름은 배설(裵說)>의 집이 있었다.
배설은 1909년 5월, 37세의 짧은 나이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떴는데, 그에게 원한이 깊던 왜국
은 쪼잔한 마음을 드러내며 그의 집을 강제로 밀어버렸다. 다만 토지는 몰수하지 않고 그의 부
인인 '메리 모드 베델'(Mary Maud Bethell)이 계속 가지고 있다가 1920년대 이후 매각한 것으
로 전한다.

1920년대 후반, 이 일대가 여러 지번으로 분할되었는데, 송월동과 홍파동 지역에는 독일 양이(
洋夷)들이 많이 서식해 그들의 주택이 많이 들어섰다. 홍난파 가옥도 바로 그 과정에서 1930년
대에 태어났다. 허나 그 집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뀌어 집 자신도 정신이 없을 정도였는데, '불
놀이'를 쓴 시인으로 친일 행적이 요란한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부인, 최선복의 이름이
먼저 올라와있다.
그 다음에 들어온 사람은 홍어길(洪魚吉)로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의 조카딸인 신수옥에게
장가들어 여기서 보금자리를 폈다. 그는 배화여학교 선생으로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했으며, 철
학박사로 서울에 철학연구사를 세웠던 한치진(韓稚振, 1901~?)이 다음 타자로 들어와 잠시 머
물렀다. 그는 1944년 왜정의 패망을 예견하는 시국답을 논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살기도
했다.
바로 그 다음에 들어온 이가 홍난파로 1935년 이 집을 사들여 말년을 보냈다. 그 연유로 홍난
파 가옥(홍난파의 집)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  골목에서 바라본 홍난파 가옥

예전에는 집 앞에 마당이 있었으나 담장을 허물고 조그만 야외무대를 닦았으며, 1968년 4월 10
일에 난파기념사업회에서 세운 홍난파의 흉상이 옛 마당을 지킨다. 이 흉상은 김경승이 조각하
고, 김충현이 글씨를 썼으며, 윤석중이 흉상 기단(基壇)에 글을 새겼다. 또한 골목 쪽에는 담
장과 대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담장 일부만 남았으며, 1층 현관을 통하여 가옥 내부로 들어서면
된다. 현재는 종로구청에서 관리한다.

집 지붕은 다른 서양인 선교사의 집보다 경사가 가파르고, 거실에는 양옥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벽난로가 있다. 현관과 이어지는 복도를 사이로 서쪽에 거실을, 동쪽에 침실을 두었으며, 거실
밑에는 지하실을 두어 공간을 알뜰하게 활용하던 서양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2007년에 홍난파 기념관 및 소공연장으로 손질하고자 보수 공사를 벌여 1층에 있던 침실 2개를
하나로 합쳤으며, 음향시설 등을 달아 50명 규모의 공연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유품과 자
료를 전시하여 기념관의 역할을 하도록 했고, 지하에는 시청각실을 만들었다.

      ◀  홍난파의 그 잘난 흉상(胸像)
이 땅의 현대 음악을 발전시키고 꾸려나간 업
적만 본다면 동상도 아깝지 않겠으나 말년에
보인 추잡스런 친일 행적을 생각하면 흉상은
커녕 기념비도 아깝다. 그 더러운 면판이 달린
흉상은 좀 치워버리고 기념비만 두는 선에서
끝냈으면 좋겠다. 그 이상은 그에게는 과분하
다.

우리 귀에 무척 익은 홍난파, 그 자는 누구일까?
홍난파(洪蘭坡, 1898~1941)는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시 남양(南陽)에서 태어났다. 본명
은 홍영후(洪永厚)로 난파는 일종의 호가 되며, 본관은 남양홍씨이다. 왜정 때 매우 잘나갔던
음악가이자 우리 현대 음악의 중추적인 존재로 '봉선화','성불사(成佛寺)의 밤','옛 동산에 올
라' 등으로 유명하다.

5살에 서울로 올라와 1912년 YMCA 중학부에 들어갔으며, 음악에 자꾸 손과 마음이 가면서 내면
에 숨겨진 자신의 소질을 알게 된다. 그래서 1913년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전문학교인 조선정악
전습소(朝鮮正 樂傳習所)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1년 동안 김인식(金仁湜)에게 바이올린을 배웠
으며, 1918년 창가 '야구전'을 작곡, 발표하고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음악학교에 진학, 음악과
문학, 미술을 배우며 문예의 꿈을 키웠다. 그러다가 1919년 유학생들이 벌인 독립운동에 가담
하면서 학업을 그만두고 귀국했다.

귀국하여 경성양악대 제1회 연주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린 연주
자란 기록을 세웠다. 대한매일신보 기자로도 잠깐 일하다가 1920년 '처녀혼'이란 첫 작품을 냈
는데, 봉선화는 처녀혼 첫머리에 나오는 애수(哀愁)라는 곡명으로 발표된 것이다.
1922년에는 서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해 음악 교육에 나섰으며,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음
악 잡지인 '음악계(音樂界)'를 창간했다. 그리고 1926년 다시 왜열도로 넘어가 동경고등음악학
교를 졸업하고 동경신교향악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1929년 '조선음악백곡집'과 '조선동요백곡집'을 발표하고 1933년에는 '조선가요창작곡집' 등의
작품을 냈으며, 현제명(玄濟明)과 함께 '봄노래'를 발표했다. 그 외에 바이올린독주곡인 '애수
의 조선','동양풍의 무곡','로망스' 등이 있고, '관현악곡 즉흥곡','관현반주 붙은 즉흥곡','
명작합창곡집','특선가요선집' 등을 냈는데, 그는 우리나라 선율의 요소를 작곡에 반영해 서정
적인 분위기를 그려내고자 했다. 그의 의도는 그의 평론에서도 잘 나타나며, 1930년대 이후 우
리나라 현대 음악 창작의 패턴을 정립한 음악가로 널리 찬양을 받았다.

1931년 바이올린을 더 배우고자 미국으로 넘어가 셔우드(Sherwood)음악대학을 다녔으며, 1933
년 졸업 기념으로 독주회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리고 경성보육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
악을 가르치고, 1936년 경성방송 현악단 지휘자 및 빅터레코드의 양악부장을 지냈으며, 이영세
(李永世)와 난파트리오를 조직해 실내악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1938년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면서 '음악만필'을 냈으며, '백마강의 추억' 등 14곡의 가요를 나소운(羅素雲)이
란 예명으로 발표했다.

이렇게 우리나라 현대 음악 발전에 크게 공헌을 하며, 주옥같은 작품으로 민중의 마음을 달랬
던 그였지만 그의 말년은 그 초심을 잃으며 추악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친일파로 노선을 바꾸
며 민중의 뒷통수를 제대로 쳤던 것이다.
1937년 독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 회원이라는 이유로 검거된 이후, 그해 4월 조선총독부 학무
국(學務局)에서 결성한 친일 단체인 '조선문예회'에 가입하여 왜정 정책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내선일체를 강조하였고 '지나사변(支那事變)과
음악','희망의 아침' 등 친일 성향의 악취나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끊임없이 왜정을 찬양했다.
허나 다행히도 하늘이 보우하사 변절한지 4년 만인 1941년 8월 30일 43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가 마지막 4년 동안 보여준 속절없는 친일 행적은 20~30대 시절에 일구어낸 온갖 업적과 공
로에 제대로 똥칠을 하기에 충분했다. 50년도 채우지 못한 그 짧은 인생, 무슨 영달을 더 누려
보겠다고 그 추잡함을 보였던 것일까? 그것만 아니었다면 참 착했을 것을 심히 좋지 않은 뒷끝
을 보이고 말았다.
왜정 시절 이 땅의 나약한 지식인들의 끝없는 변절과 방황, 그도 결국 그 재능과 인격 때문에
나락의 길인지도 모르고 바로 앞에 놓인 꿀에 속아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던 것이다. 그래도 다
행히 해방 이전에 한참 나이로 자체 폐기가 되었으니 나라와 민중을 배신하고 친일을 벌인 그
대가는 톡톡히 받은 것으로 보면 될까? 그렇게 홍난파에게 실망한 대중을 위로해 본다. 내 학
창시절에 봉선화부터해서 그의 노래가 음악책과 문학책에 지겹도록 실려 참 머리 아프게 했는
데, 그의 친일 행적은 나의 마음까지도 심히 아프게 만든다.

그런데 홍난파 가옥에서 다루고 있는 그의 일생과 그곳에서 배부하는 홍난파 자료, 그리고 홍
난파 흉상 기둥에는 친일 행적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오로지 찬양 일색이다. 심지어는 '우리
는 홍난파 선생님에게 신세를 너무 많이 졌습니다~~ 홍난파 선생님은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이
며 우리는 홍난파 선생님의 후손입니다'
라는 식의 암을 유발하는 해괴망측한 구절도 있다.
종로구청의 실수인지 아니면 난파기념사업회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으나 지나친 찬양은 오히려
역겨움과 정신건강 해악만 가져올 뿐이다. 홍난파가 어떤 인물인지는 내가 직접 겪어보질 않아
서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그도 개념이 있다면 후학들의 이런 말장난에 지하에서 눈물을 머금을
것이다. 기릴 것은 기리고 깔 것은 과감히 까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홍난파의 후학들이 세운 난파기념사업회는 1968년 난파음악상을 제정해 매년마다 적당한 음악
인을 골라 상을 주고 있다. 상을 받은 이는 정경화, 정명훈, 금난새, 조수미 등 이름 3자만 들
어도 거의 알법한 인물인데, 2013년에 일대 이변이 생겼다. 수상자로 선정된 작곡가 류재준씨
가 수상을 거부했던 것이다. 거부 사유는 친일파의 이름으로 된 상을 받기 싫다는 것이다. 그
의 업적은 인정하나 실수 또한 거대하다며 그의 친일행적을 꼬집은 것이다.
그의 개념찬 행동에 천하 사람들은 많은 찬사를 보냈고, 난파기념사업회는 그냥 음악가로서의
홍난파를 기리고 상을 줄 뿐이라며 말도 안되는 변명만 늘어놓다가 오히려 욕만 죽어라 얻어먹
었다.

근래에 들어 민족문화연구소는 홍난파 가옥의 이름을 변경하자며, 이곳에 살았던 여러 인물의
삶과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공간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안내문을 수정하고 가옥 내부의
공간 구성을 바꾸는 방안을 종로구에 제시했다. 비록 홍난파가 이곳에 쓸데없이 오래 살긴 했
어도 그 작자를 너무 치켜세우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니 홍난파 유물은 크게 줄이거나 갖다버
리고 독립운동을 했던 한치진과 홍어길을 기리는 공간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홍난파도 음악에 공이 적지 않으니 쥐꼬리만큼 기려주자. 또한 집 이름은 지역 이름만 따
서 '홍파동 가옥' 또는 '홍파동 근대 가옥'으로 바꾸는 것이 적당해보인다.

가옥 내부를 둘러보려고 현관을 기웃거렸으나 이미 관람시간은 끝난 상태. 그래서 다음을 기약
하며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 홍난파 가옥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4번 출구)에서 직진하면 정동4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송월길로
  들어서 5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이 보이면서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송월1길로 진
  입하여 월암근린공원을 지나면 그 공원의 끝에 홍난파가옥이 있다.

★ 홍난파 가옥 관람정보 (2016년 12월 기준)

* 관람시간 : 평일 11시부터 17시까지 (11~3월은 16시까지) / 주말, 공휴일은 휴관
* 관람비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2-16 (송월1길 38) (☎ 070-8112-7901)


▲  홍난파 가옥 1층 거실
이곳의 백미인 붉은 벽난로를 비롯해 홍난파의 흉상과 의자, 피아노, 바이올린 등이
놓여져 나라를 배신한 그의 음향(音香)을 느끼게 한다.

▲  홍난파 찬양 공간으로 변질된 가옥 1층 동쪽 (옛 침실 공간)
홍난파의 유품과 음악 문서들, 그리고 그의 일생과 음악을 정리한 내용들이
벽을 가득 채운다. 이 공간은 소공연장으로 쓰이기도 한다.

▲  월암근린공원에 다시 세워진 한양도성
헌돌과 새돌이 어색한 조화로 보이며 다시 성곽을 이루었다. 장대한 시간이 흐르면
하얀 피부의 돌도 밑에 깔린 어른 돌처럼 고색이 짙어질 것이다.


홍난파가옥 남쪽에는 월암근린공원이 자리해 있다. 여기서 남대문(숭례문)과 사직터널 윗쪽에
서 끊긴 한양도성이 짧게나마 모습을 비추는데 그 성곽 밑에 월암(月巖)근린공원이 넓게 자리
를 닦았다.

이곳 성곽은 근래에 복원된 탓에 피부가 온통 하얗고, 성곽 밑도리에 고색의 때를 머금은 성돌
이 일부 끼어있을 뿐이다. 그래서 오래된 도성(都城)의 무게감보다는 대충 얹힌 촬영세트장이
나 모조품처럼 가볍게 보인다.
상황이 이리 우울하게 된 것은 왜정이 사직터널부터 남대문 사이에 성곽을 아주 철저하게 뭉개
버렸기 때문이다. 성곽이 가고 없는 자리에는 집과 건물이 가득 들어찼는데, 도성 복원 계획으
로 이 일대를 밀어버리면서 땅 속에 묻힌 성돌이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고, 성곽을 복원하면
서 그들을 끄집어내 성돌의 역할을 부여했다. 그리고 숨통이 크게 트인 성곽 서쪽에는 공원을
닦아 휴식처로 삼았는데, 월암이란 이름은 인근에 숨겨진 '월암동(月巖洞)' 바위글씨에서 비롯
되었다.
성곽 안쪽에는 서울기상관측소와 서울복지재단, 서울시 교육청이 자리해 있으며, 그 동쪽에는
경희궁(慶熙宮)이 오욕의 세월을 견디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곽 북쪽은 주택들이 첩첩하게 들어차 재개발을 하지 않는 이상은 복원이 거의 어렵다. 사직
터널까지 200m 정도만 다시 이으면 되는데, 현실의 벽 앞에 어림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남쪽
또한 건물과 도로 등으로 손을 대기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 허나 도성 복원 계획은 끊어진 성
곽이 모두 이어지는 그 순간까지 끈기를 가지고 추진된다고 하니 내 생애 언젠가는 반드시 복
원이 마무리 될 것이라 믿는다.


▲  복원된 성곽 북쪽 끝(서울기상관측소)에 성곽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  서울기상관측소 남쪽 성곽길 (북쪽에서 본 모습)
재현된 성곽의 길이가 매우 짧기 때문에 저 길의 끝은 아직 막혀있다.
그래서 다시 돌아나와야 된다. 일종의 똥개훈련~~

▲  서울시 교육청 옆 성곽길 (남쪽에서 본 모습)

▲  서울시 교육청 서쪽 성곽
서울시 교육청 서쪽 성곽은 성벽은 완성이 되었으나 아직 여장은 달지 못했다.
경원선과 경의선 철마가 우리의 잃어버린 북쪽 대륙으로 달리고 싶듯이
한양도성은 끊어진 구간을 넘어 다시금 서울 도심을 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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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서촌 제일의 경승지 ~~ 인왕산 수성동계곡 (인왕산길, 기린교)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계곡이자 옛 경승지
~ 인왕산 수성동계곡 '

▲  인왕산 수성동계곡 (사모정 주변)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

▲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

▲  기린교

 


 

여름 제국이 무더위로 천하 만물을 핍박하던 7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들과 인왕산 수성
동계곡을 찾았다.

오전 11시,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그들을 만나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북악산 백
사실계곡<백석동천(白石洞天), 백사골 ☞ 관련글 보러가기>을 제일 먼저 찾았다. 속세에
찌든 꼬질꼬질한 두 발을 계곡에 담구며 막걸리 1잔 걸치다가 도심 속의 두멧골, 능금마
을(뒷골마을)을 거쳐 부암동(付岩洞) 산복도로를 따라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으로 내려
갔다.

창의문에서 윤동주(尹東柱)시인의 언덕(☞ 관련글 보러가기)에 자리한 서시정(序詩亭)에
서 잠시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다가 인왕산(仁王山) 동쪽 허리를 가르는 인왕산길을 따
라 남쪽으로 넘어갔다.
인왕산길은 사직공원에서 창의문까지 이어지는 산악도로로 북악산길과 서로 이어져 있다.
4발 수레를 위한 2차선 도로와 뚜벅이를 위한 도보길이 공존하고 있어 서로의 눈치 없이
거닐기 좋으며 주변 풍경도 아름다워 지루할 틈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런 인왕산길에
단단히 홀린 듯 정신없이 따라가니 어느덧 석굴암(石窟庵) 입구에 이른다.
여기서 석굴암 약수를 마시고자 잠시 인왕산의 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무더운 날씨로
인해 반대 여론이 거세 인연을 짓지 못하고 동쪽으로 난 조그만 산길을 따라 수성동계곡
으로 내려갔다.
이 산길은 석굴암 부근에서 발원한 계곡과 나란히 속세로 내려가는데, 그 계곡은 수성동
계곡의 상류가 된다.


 

♠  수성동계곡 상류

▲  숲속에 묻힌 수성동계곡 상류

인왕산에서 수성동계곡 공원으로 이어지는 계곡 상류는 복원된 계곡 중심부와 달리 거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자연산 바위와 온갖 돌들이 좁은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
사이를 인왕산이 베푼 계곡물이 숨을 죽이며 흘러간다. 계곡 옆에는 시멘트를 발라놓은 산길이
이어져 있는데, 그냥 흙길이었으면 매우 좋았을 것을 시멘트길이라 촉감이 그리 착하지가 않다.
계곡 일대는 숲이 무성하여 강렬한 여름 제국의 햇살도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피해가며 계곡
상류 산길을 2~3분 정도 내려가면 바로 수성동계곡 공원이다.


▲  계곡 산길과 조그만 나무 다리 (석굴암 입구 방향)

▲  계곡 상류에서 만난 조그만 폭포

이 계곡은 청계천의 주요 발원지로 수질이 양호하여 도룡뇽과 가재, 개구리, 버들치 등이 조용
히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좁은 계곡이지만 그들에게는 이만한 보금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계곡에서 괜히 물놀이를 하거나 그들을 탄압하는 행위는 하지 말자. 그들이 사
라지면 그 다음 차례는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우리 인간이 될 지
도 모른다.


▲  수성동계곡 상류의 아랫부분 (수성동계곡 공원의 제일 서쪽)

▲  수성동계곡 공원 가장 윗쪽에 닦여진 황토색 산책로
계곡 일대를 두 눈으로 살피며 거닐 수 있다. 계곡 복원에 걸맞게 흙길이면 좋았을 것을
길을 현대식으로 밀어버린 점이 상당히 아쉽다.

▲  수성동계곡 공원 윗쪽 계곡

▲  수성동계곡의 또다른 상류
숲속에 숨겨진 가느다란 폭포를 타고 수성동계곡으로 살짝 숟가락을 내민다.
폭포 주변에는 수풀을 걸친 벼랑과 흙과 돌이 섞인 자갈밭이
조촐하게 펼쳐져 있어 1폭의 수채화를 자아낸다.

▲  협곡을 그리며 내려오는 수성동의 또다른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계곡)


수성동의 상류는 대략 3개 정도로 석굴암에서 내려온 계곡과 그 남쪽에서 내려오는 계곡, 인왕
천약수터에서 내려오는 계곡이 서로 상류를 자처하며 수성동으로 내려온다. 수성동은 이들에게
서 인왕산의 맑은 물을 공급받고 서울 도심으로 청계천으로 흘려보낸다.

인왕산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인왕천약수터도 손을 내밀며 수성동에 아낌없이 물을 보태고 있
는데 이 물줄기는 거의 90도 각도가 진 암벽 사이의 좁은 공간을 타고 내려와 그 풍경이 나름
절경을 이루며, 조그만 폭포 앞에는 얕은 못과 모래밭이 있어 어린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물놀
이를 하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다.
모래 옆과 다리 주변에 돌로 쌓은 인공의 흔적이 조금 끼여있어 약간의 어색함을 주지만 그 외
에는 예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수성동 상류의 원초적 모습을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  수성동계곡 서남쪽 산책로


 

♠  옛 한양도성의 오랜 경승지,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었으나 2012년
복원되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도심 속에 흔치 않은 계곡 ~~~
인왕산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 서울 지방기념물 31호

인왕산 동쪽 자락이자 서촌(西村, 경복궁 서쪽 지역) 서쪽에 자리한 수성동계곡은 서울 도심에
이름난 경승지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와 한경지략(韓京識略) 등에
서울의 오랜 명승지로 절찬리에 소개된 곳이다. 이곳 계곡을 예로부터 수성동(水聲洞)이라 하
였는데, 이는 계곡 밑에 걸린 기린교란 돌다리 밑에 물소리가 청아하고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
여 물소리가 좋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거대한 돌산으로 제대로 된 계곡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인
왕산이지만 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계곡이 많음에 놀라게 된다. 수성동을 비롯해 청풍
계(淸風溪), 청계동천(淸溪洞天), 송석원(松石園), 백운동(白雲洞) 등 이름난 계곡이 많이 있
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개발의 칼질에 죄다 사라지고 수성동만 옥인아파트의 압박 속에 간신
히 숨쉬고 있었다. (백운동과 청계동천은 일부만 살아남음) 그외에 환희사계곡(큰절골)과 몇몇
약수터 주변에 조그만 계곡이 있으나 볼품은 별로 없다.

수성동은 도시와 먼 첩첩한 산주름 속이 아닌 도성(都城) 속에 자리해 있어 접근성이 매우 착
했다. 게다가 경복궁(景福宮)과 귀족들이 주로 살던 북촌(北村)과 서촌과도 바로 지척이다. 그
래서 왕족과 사대부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계곡의 풍경을 즐겼는데, 이곳에 단단히 반한 이들은
아예 집이나 별장 등을 지어 머물기도 했다. 이곳에 처음으로 집을 지은 이는 세종의 3번째 아
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으로 계곡 밑 기린교 부근에 비해당(匪懈堂)을 지어 머물렀다.
 
영조(英祖) 시절에는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모델로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남기
면서 수성동을 비롯한 장동8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수성동 그림은 계곡 복원에 아주 큰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그 그림에는 기린교를 건너는 선비 3명과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1명이 계곡
상류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끼가 낀 바위와 질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비오는 날에 이곳을 찾아 '수성동 빗속에서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 雨中觀瀑)'란 시를 지어 수성동을 찬양했다.
도시와 가까운 탓에 중인과 평민들도 많이 발걸음을 했는데, 인근 송석원과 더불어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평민/서얼들이 주도하는 문학활동)의 성지(聖
地)로도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 (기린교 돌다리가 그려져 있음)

이렇게 인왕산을 든든한 후광으로 두르며 서울 장안의 경승지로 초절정 인기를 누렸던 수성동
은 1960년대 이후 서울 도심에 개발의 칼질이 정신없이 그어지면서 아작나기 시작했다.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동이 건방지게 수성동계곡을 깔고 앉았던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아름답고 착
했던 수성동의 경관은 99% 망가졌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인근 청풍계나 옥류동처럼 계곡이 거의 증발되는 꼴은 면했지만 아파트로
인해 계곡 폭도 줄어들고 아파트 사이를 마치 버려진 하천처럼 흘러가면서 완전 천덕꾸러기 신
세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아파트 9동 앞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두컴컴한 지하를 거쳐 역시
나 생매장된 청계천으로 서글프게 흘러가야 했다. 그렇게 도시 개발과 생활 편의를 내세운 인
간의 욕심 속에 서울 도심에 많은 경승지는 꽃잎처럼 지고 말았다.

그 이후 수성동의 이름 3자는 속인(俗人)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시들어가고 동네 사람들만 세
월의 저편으로 잊혀져 가던 계곡의 이름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서울 전문을 자처하는 본인
역시 수성동의 존재를 안 것은 2011년, 그 이전에는 인왕산에 이런 곳이 있는 것도 몰랐고 그
런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존재감이 밑바닥을 기었던 것이다.
 
옥인시범아파트에 강제로 깔린 채, 40년 가까이 수난의 세월을 보냈던 수성동계곡. 개발의 칼
질에 빼앗긴 계곡에도 과연 봄이 올 것인가? 이러다가 수성동 이름 3자가 영구히 지워지는 것
은 아닐까?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계곡을 해방시킬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수성
동에게는 절망의 시절이었다.

▲  기린교

▲  사모정 북쪽 산책로

허나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서 거의 자연이 이기듯, 수성동에게도 좋은 소식이 날라왔다. 옥인
아파트가 2008년 재난안전위험시설 C급으로 지정되면서 철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수성동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는 이번 기회에 아파트를 싹 밀어버리고 계곡을 복원하기로 의견
을 모으고 우선 2010년 10월 21일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 일대를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
아 늦게나마 문화유산으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후 인왕산을 가리며 계곡의 목을 조르던 옥인아파트는 2011년에 모두 철거되었으며, 아파트
주변을 통제하고 1년의 복원공사를 벌여 2012년 7월 마무리가 되었다.

계곡 복원을 위하여 전문가와 사회단체, 문화재청에 자문을 구했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적극
참조했다. 또한 옛 경관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자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수리나무, 참나무, 산철
쭉 등 우리 고유의 나무 18,477그루를 심었으며, (그중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제일 많음) 돌단
풍과 바위취 등 다양한 화초를 심어 주변과의 조화를 꾀했다. 그리고 계곡을 크게 넓혀서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아 암석 지형을 최대한 회복하고자 했으며, 계곡 중간에 전통식
정자를 세워 옛 사람들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느끼도록 했다.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곳으로 여겨지는 계곡 아랫쪽에 관람공간을 닦아 정선의 눈으로 계
곡을 바라볼 수 있게끔 배려하였고, 계곡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닦아 인왕산과 어
우러진 시민공원의 성격도 겸하게 했다.

수성동계곡 공원에는 복원된 계곡을 비롯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유일한 오래된 존재인 기린
교가 있으며, 옥인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공원 북쪽에 아파트의 잔재를 일부 남겨두어 수성
동을 거쳐간 개발 지상주의의 그릇됨을 일깨우게 했다. 상류 부분과 사모정 주변은 계곡 출입
이 그런데로 가능하나 계곡 하류와 기린교 주변은 통제하고 있으며, 계곡을 복원했다고는 하지
만 완전한 옛날 모습은 아니다. 게다가 여전히 비슷한 자리(옛 옥인아파트 9동 자리로 지금은
관람 공간으로 바뀜)에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해 청계천으로 흘러간다.
청계천까지 이어지는 전 구간을 모두 끄집어내 복원하면 참 좋겠지만 이미 시가지가 꽉차게 들
어앉아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계곡이 생매장되는 부분은 계곡이 상당히 밑으로 내려간 상태
이고, 주변 바위들도 날카로운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다. 기린교 같은 경우
는 계곡이 3m 밑에 흐르고 있으므로 조금 아찔하다.

도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된 수성동은 인간 중심의 개발의 난도질이 무조건 능사가 아님을 보여
준다. 안그래도 사람도 허벌나게 많고, 빌딩도 많고, 차도 많고, 공기도 탁한 서울 도심에 마
음 편히 의지할 수 있는 공간이 1개 더 생겼으니 그 가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비슷하다 할 것
이다.
비록 옛 모습 그대로 100%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노력했고 복원
공사를 벌이는 중에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그래서 인왕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아 계곡을 재현했으니 어설프게 재현되어 전기와 세금만 잔뜩 축내는 청계천
과는 차원이 다른 살아있는 계곡이다.

※ 인왕산 수성동계곡 찾아가기 (2016년 8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
  서 종로구마을버스 09번을 타고 수성동계곡 종점 하차.
*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자하문로를 거치거나 1번 출구에서 사직공원 못미처에 나오는
  필운대로를 거쳐 수성동계곡까지 가볍게 걸어가도 된다. (17~20분 소요)
* 수성동계곡 관람공간 동쪽에 주차공간이 있으나 충분치는 않다.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79-1, 185-3외


 

♠  수성동계곡 둘러보기

▲  수성동계곡 사모정 주변

몇년 전만 해도 밋밋한 성냥갑 아파트 사이로 그들의 눈치를 보며 눈물처럼 흘러야했던 수성동
계곡은 이제 누구의 눈치도 없이 가슴을 피며 당차게 흘러간다. 소나기가 지나간 이후라 계곡
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어린이와 여중생으로 보이는 애들이 계곡 주변을 서성이며 발을 담
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  수성동의 풍경을 한껏 수식해주는 구수한 양념 - 사모정

수성동계곡 한복판에는 달랑 1칸에 불과한 조그만 정자, 사모정이 맵시를 드러내고 있다. 사모
정이란 네모난 정자를 뜻하는 것으로 새색시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
는 옛날부터 이곳을 스쳐갔던 정자는 아니며 계곡을 복원하면서 장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정선이 그린 그림에도, 수성동 관련 기록에도 정자의 존재는 나오지 않음)
허나 계곡과 나무만 있는 계곡에 전통 양식의 정자(亭子)를 하나 두니 수성동의 미소와 풍경이
한층 더 살아나는 것 같다.

정자 안에는 한 무리의 아줌마들이 진을 치고 놀고 있었다. 계곡 바람과 인왕산 바람이 앞다투
어 선선한 바람을 선사하고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솔내음을 불어주는 명당 자리라 저곳에
들어가 낮잠 한숨 청하면 정말 꿀맛일 것 같다.


▲  사모정 동쪽 계곡
계곡과 돌을 대충 배치한 듯 조금은 어색한 모습이다.

▲  사모정과 사모정 북쪽 산책로
산책로 너머로 인왕산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  공원 북쪽 산책로
저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옛 옥인아파트의 초췌한 흔적이 나온다.

▲  공원 북쪽 산책로에서 만난 바위글씨
동그라미 안에 중(中) 또는 신(申)으로 보이는 글씨가 문신처럼 박혀있다.
조금은 오래된 티가 풍기긴 하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다.
(수성동에 바위글씨가 있다는 정보는 듣지 못했음)

▲  공원 북쪽에 자리한 옛 옥인아파트의 잔재 ▼

수성동계곡 북동쪽에는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이 흔적은 아파트 7동의 1
층으로 2008년 철거가 결정되자 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계곡과 조금 떨어진 7동의 아랫도리
일부만 남겨 이곳의 기념물로 삼았다.

한때 계곡을 깔고 앉아 감히 인왕산을 가리던 옥인아파트의 최후로 이곳을 요란법석 거쳐간 엄
연한 역사의 흔적이다. 아파트를 말끔히 밀어버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일부라도 남겨 개발의 난
도질의 희생된 수성동의 서글픈 과거를 보여주고, 무분별한 개발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교육의 장으로 삼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또한 이곳 아파트에 살았던 사람들의 향수(鄕愁
)와 추억도 조금은 배려하였다.
흔적을 모두 없앤다고 이곳에 40년 가까이 둥지를 틀었던 옥인아파트의 존재와 수성동의 그늘
이 완전 지워지는 것은 아니며,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20세기 후반 서울 지역 아파트의 양
식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인정되어 등록문화재나 지방문화재 등의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
게 될 수도 있다.

계곡에 둥지를 틀었던 인간의 흉한 창조물은 그 자리를 계곡과 자연에게 다시 내주었고 이제는
그들 눈치를 살살 보며 공원 한쪽 구석에 찌그러진 신세가 되었다. 인간이 아무리 용을 쓰고
만들어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역시나 일개 모래성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파트의
남겨진 흔적은 마치 예비군훈련장의 시가전 훈련장이나 전쟁의 폭격으로 주저앉은 건물처럼 보
인다. 그렇다 대자연의 보복 폭격의 옥인아파트는 저렇게 주저앉은 것이다.


▲  주름진 바위들로 가득한 수성동계곡 (사모정과 기린교 사이)

▲  기린교 서쪽에서 바라본 수성동계곡과 인왕산

▲  한굽이 쉬어가며 조그만 폭포를 빚은 수성동계곡


 

♠  수성동계곡의 오랜 상징 ~ 기린교(麒麟橋)

▲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돌다리 - 기린교

넉넉한 폭으로 흐르던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이전에서 급격히 좁아지고 하얀 피부의 포근한 반
석들도 무시무시한 낭떠러지를 계곡 쪽에 빚으면서 제법 날카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 낭떠러지
바위 사이에 우리네 인생처럼이나 짧은 돌다리가 고색의 때를 간직하며 놓여져 있는데, 그 다
리가 바로 수성동의 오랜 명물인 기린교이다.

기린교는 달랑 길쭉한 통돌 2개로만 이루어진 아주 단촐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다리 남쪽에 다
리를 보조하는 커다란 돌 여럿을 둔 것이 전부이다. 다리 폭은 1m 남짓, 길이는 3m로 언제 조
성되었는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겸재 정선의 수성동 그림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7세기에 놓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계곡을 찾은 귀족들의 통행 편의를 위해 가설된 듯
싶은데 벼랑으로 이루어진 이 부분이 계곡 가운데 가장 위험하기 때문이다.


▲  높은 벼랑 위에 걸쳐진 기린교

서울 도심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는 누가 뭐
래도 광통교(廣通橋, 광교)이다. 그외에 수표
교(水標橋)와 창경궁(昌慶宮) 옥천교(玉川橋)
도 2위, 3위에 들어간다.
(중랑천 살곶이다리는 도심이 아니므로 제외)
수표교는 청계천 생매장 때 제자리를 떠나 장
충단공원에 둥지를 틀었고, 광통교는 비록 자
리는 지켰지만 생매장의 치욕을 겪다가 청계천
엉터리 복원 때 약간 서쪽으로 옮겨졌다.
그에 반해 기린교는 그들보다 한참 후배이지만
제자리를 지키며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게다가 통돌로 만든 다리 가
운데 가장 긴 편이다.

인왕산이 빚은 제일 가는 경승지인 수성동계곡
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된 것도 어찌보
면 기린교 덕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계곡
이 아무리 잘났어도 딱히 오래된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계곡은 복원되
었을 망정, 지방문화재까지 지정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  옆에서 바라본 기린교

▲  바로 앞에서 본 기린교
다리 너머로 수성동계곡의 생매장 현장이 보인다.

▲  멋드러진 반석이 잔뜩 널린 기린교 주변
대자연이 칼로 싹둑 손질을 했는지 바위들이 90도 절벽을 이루며 무시무시한
모습을 드러낸다. 저 밑으로 떨어지면 정말 나오기도 힘들다.

▲  기린교 동쪽에 마련된 수성동계곡 관람공간 (계곡 동쪽 광장)

수성동계곡 동쪽에는 잘다져진 평평한 광장이 있다. 이곳은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위치로
여겨지는 곳에 넓게 터를 다진 것으로 그 당시 정선의 눈높이가 되어 수성동계곡과 인왕산의
모습을 바라보도록 지어졌다.
이곳에서는 계곡 상류를 제외한 수성동계곡 일대와 인왕산이 흔쾌히 바라보이는데 보통은 높은
곳에 전경(全景)을 바라보는 자리를 두지만 이곳은 반대로 계곡 밑에 그 자리를 둔 것이 특징
이다.

인왕산이 빚은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밑을 지나 낭떠러지 밑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관람공간 밑
에서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하수구를 통해 어두컴컴한 지하로 생매장된다. 계곡을 복원했다고
는 하지만 옛 옥인아파트 주변만 재현된 것이며, 이후 서촌을 가로질러 세종로 서쪽을 거쳐 청
계천으로 흘러간다. 이 구간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복잡한 시가지로 땅을 열기도 힘들다. 이곳
도 마저 끄집어낼려면 수많은 건물과 도로를 싹 밀어야 되나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하긴 수성동계곡만 그렇겠는가? 삼청골(삼청천)이나 청풍계, 창덕궁 빨래터에서 나오는 냇물도
그렇고 기타 북악산과 인왕산, 남산에서 발원한 수많은 물줄기도 근대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어
대부분 생매장을 당했다.


▲  유연하게 구부러진 수성동계곡 동북쪽 산책로

인왕산길에서 수성동 상류로 내려와 계곡 구석구석을 천천히 둘러보니 어느덧 1시간이 훌쩍 흘
러가버렸다. 보통 20분이면 충분히 둘러볼 장소를 뭐 그리 세세히 보겠다고 두 다리를 바쁘게
부렸는지 3배 이상의 시간을 투자한 것이다. 그래도 혹 빠진 것은 없는지 모르겠다.

2012년 복원 이후, 시작부터 싹수를 보이며 도심의 인기 명소들을 긴장시켰다. 서촌의 인기와
인왕산의 인기, 그리고 서울 도심에 흔치 않은 계곡이란 타이틀로 나날이 인기가 높아져 이제
는 도심의 주요 경승지이자 서촌 나들이 때 필수로 들려야 직성이 풀리는 서촌 지역의 꿀단지
로 완전히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성동계곡을 겯드린 도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서울은 내가 서
식하고 있는 곳이라 지방과 달리 달랑 1번이 아니라 계속 찾는 경우가 빈번하다. 일부를 빼고
는 지겹도록 찾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수성동계곡의 가을과 봄 풍경을 담아 소소하게 글로 남
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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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을 거닐다 ~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돌담길, 송시열집터, 북묘터)

 


' 창덕궁 후원 뒷길, 명륜동(明倫洞) 겨울 나들이 '

▲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 ~
창덕궁(昌德宮)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  층층이 이어진 후원 돌담

북촌의 지붕이라 할 수 있는 감사원(監査院)로터리에서 동쪽 길로 들어서면 고려사이버대학교와
중앙중고교 후문이 나온다. 이들을 지나면 길이 서서히 경사를 이루기 시작하는데, 기와가 얹혀
진 창덕궁 후원 돌담이 오른쪽으로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며 펼쳐져 있다.
이 돌담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란히 제 갈 길을 가는데, 그 사이에 소
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들이 경계선 역할을 하며, 동쪽으로 갈수록 돌담의 해발 높이도 높아진
다. 또한 담 너머로 삼삼한 숲의 후원이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며, 도심의 속된 기운을 정화한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입구를 지나면 길이 얼핏 끊긴 듯 보여 '과연 넘어가는 길이 있을까?' 주
저하게 된다. 허나 그런 걱정은 곱게 접어 후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버리고 계속 길을 재
촉하길 바란다. 이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비밀의 숲길(산책로), 창덕궁 후원 뒷길(후
원 뒷길, 후원 돌담길)이다.


▲  후원 뒷길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부근)

▲  북악산(백악산)의 물을 받아들이는 후원 돌담 수구문(水口門)

▲  새롭게 손질된 돌담 - 오래된 돌담 사이에서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넓은 길이 끝나는 곳에 너른 공터가 펼쳐져 있는데, 여기서 정면에 보이는 계단을 올라 오른쪽
으로 가면 나머지 후원 돌담길이 펼쳐지고 (직선으로 가도 상관 없음) 왼쪽으로 가면 옥류정과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이다.

이곳 돌담길은 야트막한 고개로 흙길이라 상태라 조금 울퉁불퉁하다. 돌담 바로 옆구리로 돌담
을 어루만지며 갈 수 있는데, 그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바로 내리막 길이 펼쳐지고, 돌담 너
머로 도심의 허파인 창덕궁 후원이 살짝 속살을 비춘다. 숲 너머 동쪽에는 성균관대(成均館大)
건물이 진하게 보이는데, 그 길을 내려가면 돌담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성균관대 서쪽 부분인 법
학관과 주차장, 대운동장에 이르게 된다.

후원(後苑) 뒷길은 중앙중고 후문을 기준으로 성대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까지 1리 남짓 거리다.
바로 감사원에서 성북동(城北洞)으로 넘어가는 와룡고개 밑부분으로 도심에서 그리 흔치 않은
조촐한 오솔길이다. 겨울이 깊어가는 시점에 와서 그렇지 봄이 무르익은 4월 이후나, 여름의 한
복판, 늦가을의 한복판에 왔더라면 걸쭉하게 그려진 수채화 속의 주인공처럼 아름다운 산길이다.
 
내가 후원 뒷길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2011년 말, 그 이전에는 이런 숲길이 있다는 것도 몰랐
다. 후원 북부에 워낙 통제구역이 많다 보니 와룡고개와 후원 사이 무성한 숲에는 국가의 예민
한 시설들이 숨겨져 있어서 출입이 금지된 것으로 알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호기심이 강한 나
도 그 공간은 애써 들어갈 생각을 못했는데, 알고 보니 언제든 안길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에
내심 놀라고 말았다. 허나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나 외에도 많을 것이다.
한때 비원(秘苑)이라 놀림 받았던 창덕궁 후원은 3살짜리 어린 애도 다 아는 대중적인 명소이지
만 후원 뒷길은 아는 이가 거의 없다. 서울 도심을 두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고갯길, 와룡고개도
사람과 차량의 통행은 많지만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


▲  후원 뒷길 고개 - 여기서는 돌담을 손으로 더듬으며 갈 수 있다.
이곳은 후원의 가장 최북단이자 제일 높은 곳이기도 하다.

▲  성균관대 쪽으로 급격히 내려가는 후원 돌담

창덕궁의 보이지 않는 뒤쪽을 가리며 숨겨진 후원 돌담은 근래에 보수를 하여 무너지거나 낡은
부분은 새로 만들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후원 북쪽 구역은 후원 특별 관람 때 들어갈 수 있
는 비싼 구역으로 대운동장 주차장에서 후원의 북쪽을 장식하는 태극정(太極亭) 구역이 보이고,
후원 북문인 북문(북장문)도 볼 수 있다. (북문과 태극정 주변 숲은 통행 불가)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에 이르면 사각사각 밟고 지나간 흙길은 밋밋한 시멘트 길로 바뀌며, 후원
돌담과도 바다 너머의 섬을 보듯 멀어져 간다. 게다가 주차장부터 학교 돌담이나 철책이 생기면
서 둘 사이에 깊숙한 틈이 생기는데, 이는 성대가 교내를 넓히면서 후원 돌담보다 높게 또는 비
슷한 높이로 터를 다지는 바람에 그리 된 것이다. 비슷한 높이인 경우에는 후원 돌담에 접근하
지 못하도록 돌담의 북쪽 언덕을 끊어 멀리서만 보게끔 했으며, 둘 사이에 생긴 틈은 마치 휴전
선이나 성곽(城郭) 주위에 두룬 해자를 보는 듯 하다.


▲  성균관대 쪽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후원 뒷길

▲  가파른 길을 내려가면 평탄한 길이 부드럽게 펼쳐진다.

▲  궁궐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후원 돌담

▲  성대 법학관 앞 후원 뒷길

▲  후원 돌담과 성대 돌담, 그 사이에 생긴 틈
사람이 다가서기 힘든 틈 속에는 낙엽이 가득 널려 그들의 마지막 세상을 열어간다.

▲  후원 담장 너머로 애타게 바라보이는 후원 태극정(太極亭)
태극정 부근에 소요정(逍遙亭)과 옥류천(玉流川)이 있다.

▲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北墻門)

후원 북문(북장문)은 후원 북쪽에서 유일하게 속세로 통하는 문으로 보통 궁궐의 문은 암문(暗
門)이라 할지라도 팔작지붕을 얹혀 문의 형식을 갖추는데 반해, 이곳은 담장 중간에 여닫는 문
짝을 만든 것이 고작이다.

북장문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막바지 현장으로, 정변 3일 째(양력 1884년 12월 6일), 창덕궁
에서 고종을 호위하며 머물던 개화당(開化黨)과 왜군은 명성황후가 소환한 청군의 공격에 후원
을 거쳐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왜국공사는 꼬랑지를 내리며 군사를 이끌고 급히 후원 뒷
길을 거쳐 도망쳤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들을 따랐다. 단 홍영식
과 박영교, 그들을 따르는 군인 7명은 고종을 호위하며 북묘로 들어갔다.

※ 창덕궁 후원 뒷길 찾아가기 (2016년 1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3-1, 8번 출구)이나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2번
  을 타고 감사원 하차, 고려사이버대학교 쪽으로 쭉 들어간다. 안국역에서 도보 20분
* 성대입구(명륜3가) 정류장에서 성균관대 교내를 거쳐 법학관과 대운동장 쪽으로 가도 된다.
* 후원 돌담은 굳이 넘으면 안되며, 북장문 주변 돌담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명륜동/와룡동


 

♠  명륜동(明倫洞)에서 만난 조촐한 명소들

▲  흥덕사(興德寺)터 표석과 북묘(北廟) 하마비(下馬碑)

명륜동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에서 북서쪽으로 난 '성균관로 17길'을 따라가면 하마비와 함께 흥
덕사터를 알리는 표석이 나란히 반긴다.

내 정보에는 전혀 없는 명륜동 흥덕사는 1401년(태종 1년) 태조 이성계가 옛집 일대를 회사해서
만든 절이다. 세종 때 불교를 선교(禪敎)와 교종(敎宗)으로 통폐합할 때, 교종의 도회소(都會所)
로 삼으면서 크게 성장했으며, 왕실의 사찰로 법등(法燈)을 두툼하게 유지했으나 연산군(燕山君)
시절 폐사되어 그 흔적을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 있던 불상과 유물은 인근 절로 흩어졌으나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하며, 조선 효종 때 송
시열이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그가 살았던 동네란 뜻에 송동(宋洞)이라 불리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명성황후가 충주(忠州)로 줄행랑을 치면서 답답한 마음에 도중에
서 만난 이씨 무녀(巫女)에게 환궁 시기를 물었다고 한다. 과연 무녀의 말대로 그 시기에 환궁
을 하게 되자 황후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에게 바라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이에 무녀는 머리
를 조아리며 관우(關羽) 사당을 지어줄 것을 청했고, 그 이듬해 1883년 이곳에 사당을 지어주면
서 방향을 따져 북묘라 하였다. 그가 관우 사당을 요청한 걸 보면 아마도 관우를 중심 신으로
받들었던 모양이다.

관우는 중원대륙의 오래된 허접 소설, 삼국지(三國志)에 주요 인물로 촉나라를 세운 유비(劉備)
의 의제이다. 의형과 의제(장비)를 따라 사내들간의 돈덕한 의리를 남기며, 대륙을 누빈 인물이
나 220년 손권(孫權)의 수하인 여몽, 육손에게 보기 좋게 패해 그가 지키던 형주(荊州) 지역을
모두 잃고 그 자신은 손권에게 처단되고 만다.
이후 관우 신앙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점차 유교에 버금갈 정도로 대륙의 주요 민간신앙
으로 흥행했는데, 그 신앙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조선이 명나라에 원군을 요
구하자 명은 수만의 허접 군사를 보내 갖은 민폐를 아끼지 않았는데, 명나라 군사 중에는 관우
열성 신자가 많았다. 특히 진인(陳寅)이란 장수는 그 신앙이 매우 두터웠으며, 1598년 울산성(
蔚山城)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서울 남대문 밖에 집을 짓고(아마도 선조 임금이 집을 내려준 듯
) 쉬고 있었다. 그때 거처에 관우 사당을 지으니 그 사당이 이 땅 최초의 관우 사당, 남묘(南廟
)가 되겠다.

왜란이 끝나자 명나라 군주, 신종(神宗)은 관우의 혼이 도와 전쟁이 끝난 거라고 격하게 우기면
서 금 4,000냥을 보내 남대문 밖에 관우 사당을 지어달라고 했다. 이제 조선 조정은 그곳에 이
미 사당이 있으니 다른 곳이 좋겠다며 장소를 급히 물색하다가 동대문 밖에 세우게 되니, 이것
이 국립 관우 사당 1호이자 지하철 역에도 있는 그 유명한 동묘(東廟)이다.
17세기 이후 전국 주요 고을에 관우 사당이 지어졌으며, 관우신앙이 민간에도 널리 퍼지면서 민
간신앙의 하나로 조촐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  북묘 하마비

1883년에 명성황후가 지은 북묘는 그 이듬해인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마무리하는 현장이
되면서 크게 이름을 남겼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일을 벌인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당은 왜군과 협조
하여 고종(高宗)과 왕실을 호위하며 창덕궁(昌德宮)에 들어갔으나 청나라군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후원 북장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일이 그르쳤음을 깨달은 김옥균과 박영효, 서
재필(徐載弼) 등은 왜군을 따라 북촌을 거쳐 왜국 공사관(公使館)으로 36계를 치고, 그들과 작
별한 홍영식(洪英植)과 박영교(朴泳敎)는 군사 7명과 고종을 호위하며 북묘에 들어갔으나, 곧
들이닥친 청나라군에게 살해되면서 갑신정변은 막을 내린다.
이후 고종은 1887년, 갑신정변 당시 허벌나게 고생했던 일을 떠올리며 민영환(閔泳煥)에게 글씨
를 쓰게 하여 북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것이 북묘비(北廟碑)로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북묘는 1902년 관왕묘(關王廟)에서 관제묘(關帝廟)로 다른 관우사당보다 격이 높아졌다. 하지만
1908년 순종(純宗)의 칙령으로 국립 사당과 제단을 정리하면서 동묘에 싹 통합시켰고, 왜정 때
비어있는 북묘 건물과 토지를 민간에 팔면서 이곳에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과 동광학교(東
光學校)가 들어섰다.
불교중앙학림은 1917년 북묘터에 불교전수학교를 세웠으며, 바로 동쪽에는 수송동(壽松洞)에서
옮겨온 보성고등학교가 뿌리를 내렸다. 1930년 불교전수학교는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인가되었으
며, 1946년 동국대로 이름을 갈아 남산(南山) 북쪽으로 이사를 갔다. 그 빈 자리에는 조양보육
대학이 들어섰고, 1963년에 문을 연 은석초등학교(현재 서울 장안동에 있음)도 그 자리의 일부
를 쓰다가 모두 다른 데로 가면서 현재는 주택가와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 들어섰다.

옛 북묘터를 유일하게 지키고 있는 하마비는 왕릉이나 궁궐, 사당, 향교, 서원 앞에 세우는 비
석으로 그의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있다. 이는 높고 낮은 사람 모
조리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북묘가 있던 시절에야 지엄한 하마비의 명령이 통했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발로 뻥차고 괴롭혀도 하소연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국가나 서울시에서 관
리하는 지정문화재도 아니니 찬밥 신세는 더하다.
왕년의 시절을 생각하며 우수에 젖은 그 옆에 역시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흥덕사터를 알리는 표
석이 있어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집터에 새겨진 증주벽립(曾朱壁立) 바위글씨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7호

북묘 하마비에서 주택가로 2분 정도 들어가면 길 왼쪽 바위에 또렷하게 새겨진 '증주벽립(曾朱
壁立)' 4자의 바위글씨를 만나게 된다. 이 바위글씨는 송시열이 새긴 것으로 그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 집이 꽤나 넓었는지 동쪽은 북묘 하마비를 넘어 서울과학고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바위에 새겨진 증주벽립이란 '증자(曾子)와 주자(朱子)의 뜻에 따라 높은 절벽이 온갖 비바람에
꿋꿋이 버티듯 의로운 나의 길을 가겠다'
는 아주 의연한 뜻으로 4자의 글씨가 근래에 새겨진 듯
필체가 너무나 선명하고 패기가 넘쳐 흐른다. 그의 바위글씨는 이것 말고도 동쪽에 있는 서울과
학고등학교 교정에 '금고일반(今古一般,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과 '영반(詠盤, 올라앉아
시를 지은 바위)' 등 2개가 더 있다.
송시열이 간 이후, 증주벽립 바위글씨 주변은 송시열이 살았던 동네란 뜻의 송동(宋洞)이라 불
렸으며, 골짜기가 깊고 꽃나무가 많아 숙정문(肅靖門) 남쪽과 더불어 도성 봄꽃놀이 장소로 인
기를 누렸는데, 앵두꽃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1883년에는 이곳에 북묘가 들어섰으며, 왜정 때는 불교전수학교와 보성고등학교가 뿌리를 내렸
다. 이후 여러 학교를 거쳐 주택가로 변하면서 아름다웠던 정취는 죄다 한 토막 전설처럼 사라
지고, 글씨가 새겨진 바위 주변은 물론 그 머리까지 개념 없이 집들이 들어차 보기에도 정말 딱
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명세기 유서가 깊은 바위인데.. 1960년대 이후 무자비하게 자행
된 개발의 칼질이 이 바위에 보기도 흉한 콘크리트 칼을 씌워 죄인 아닌 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콘크리트 칼을 강제로 뒤집어 쓴 바위글씨와 문화유산이 서울에 꽤 있음..)
지금은 힘들겠지만 혹여 나중에 서울시나 종로구에서 바위 주변 집들을 모두 매입해 부시고 바
위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개발의 칼질로 다친 부분을 치료한 다음, 주변에 앵두나무를 심고
소박하게 공원(공원 이름은 '송시열공원'이나 '송동공원'이 좋을 듯)으로 닦았으면 좋겠다. 허
나 아마 안될꺼야. 왜 이곳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대한민국이니까.. 만약 지방문화재로 지정되
지 못했다면 저 글씨도 진작에 돌가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원래 '우암구기각자증주벽립(尤庵舊基刻字曾朱壁立)'이었으나 이
름이 무지 어렵다하여 '우암 송시열 집터'로 가볍게 명칭이 바뀌었다.


▲  가까이서 본 증주벽립 바위글씨

※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참으로 기나긴 인생
송시열은 이율곡(李栗谷)의 학풍을 계승한 노론(老論)의 우두머리로 17세기에 조선의 정치와 사
상을 주름잡던 조선 최대의 유학자였다.

그의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 호는 우암(), 화양동주()로 1607년 충
북 옥천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유학과 사상에 쓸데없이 타고
난 재능을 보였으며, 이후 논산 노성으로 집을 옮겨 김장생(金長生)의 배움을 받았다.

1633년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경릉참봉()이 되었으나 바로 그만뒀으며, 1635
년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의 스승이 되어 1년 동안 그를 가르켰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인조(仁祖)를 호종하여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불이나게 도망쳤
으며, 1637년 1월 인조가 송파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淸太宗) 앞에 항복하자 열받은 나머
지 고향으로 내려갔다.

1649년 봉림이 왕위에 오르자 예전 스승과 제자의 인연으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청나라에 우호
적이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다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허나 김자점이 파직되
면서 다시 관직으로 돌아왔으나 김자점이 홧김에 조선이 청나라 정벌을 준비한다고 청나라 조정
을 들쑤시는 바람에 그와 관련된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청나라의 압박으로 떨려난다.
그래서 낙향하여 후진을 기르다가 1658년 다시 관직에 나가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며, 우
리나라의 마지막 대외정벌 프로젝트이자 효종의 야망인 청나라 정벌 계획인 북벌(北伐)을 도왔
으나 아쉽게도 이듬해 왕이 승하하면서 북벌 프로젝트는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

현종(顯宗) 시절,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 자의대비()>의 복상문제(
)가 발생하자 기년설(: 만1년)을 주장하며 3년 설을 주장한 남인(南人)을 쫓아내 권력을
잡았다. 이렇게 서인(西人)의 우두머리가 되어 좌참찬(左參贊)이 되었으나, 효종의 장지(葬地)
를 잘못 옮겼다는 비난을 받고 다시 낙향을 했고, 1668년 다시 돌아와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
정(左議政) 허적()과의 다툼으로 또 사직했다. 1671년 다시 우의정으로 복귀하고 이듬해 좌
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다시 자의대비(장렬왕후)의 복상문제가 거론되어 대공설
(: 9개월)을 주장했다. 허나 이번에는 남인(南人)이 주장한 기년설(만1년)이 채택되면서
또 떨려나 평안도 덕원(德源)을 시작으로 여러 곳을 유배투어를 했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떨려나자 중추부영사()가 되었으며, 1683년에
벼슬을 사직하여 봉조하(奉朝賀, 특별 명예직)가 되었다. 이후 남인에 대해 과격한 처벌을 주장
한 김석주(金錫胄)를 지지하여 비난을 많이 받았고, 그 사건으로 아끼던 제자 윤증(尹拯)과 감
정싸움이 격해지면서 서인은 윤증의 소론(少論) 패거리와 송시열의 노론(老論)패거리로 분열되
었다.

이후 관직에서 은퇴하여 속리산 화양동(華陽洞)에 팔자좋게 집을 짓고 제자를 기르다가 1689년
숙종이 희빈장씨(禧嬪長氏)의 소생(후에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를 쌍수 들고 반대
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로 떨려났다. 그리고 국문 때문에 서울로 소환되던 중, 정읍
(井邑)에서 숙종이 내린 쓰디쓴 사약을 1사발 쭉 들이키고 82세의 나이로 강제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고향인 충북 옥천을 시작으로 충남 논산, 서울 명륜동, 대전 가양동, 속리산 화양동에 집
을 짓고 살았으며, 유교(성리학, 주자학)의 새로운 역사를 쓴 인물로 제자가 참 많았다. 그래서
송자(宋子)로 추앙을 받았으며, 그를 배향한 서원이 전국에 즐비하다. 저서로는 송자대전(宋子
大全), 우암집(尤庵集), 송서습유(),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 등 방대하며, 그의 제자들이 정리하여 세상에 공개했다.

죽음에 임해서 제자들에게 명나라 군주 신종과 의종(毅宗)을 제사지내는 사당을 만들 것을 유언
했는데, 그래서 생긴 것이 그 악명 높은 만동묘(萬東廟)이다. 그가 이런 허무맹랑한 유언을 남
긴 것은 우리의 사촌 민족인 만주족(여진족)의 청나라에 대한 강한 반감도 있겠지만 성리학의
영향으로 사대부와 유생들을 중심으로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꼴통 사대주의(事大主義)가 팽배했
고, 거기에 임진왜란 이후 재조지은(再造之恩)까지 가세하여 명나라의 대한 존재가 경외의 수준
으로 커진 탓이다. 동아시아의 약소국이자 호구 국가였던 신라(新羅)도 당나라에 저렇게까지 하
지는 않았는데, 조선은 명나라를 아버지 이상으로 떠받들었던 것이다.
명이 망하고 구한말까지(심지어 왜정 때까지도) 명의 마지막 군주, 의종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두고두고 우려먹었으며,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명의 재건을 간절히 바라던 지배층의 문구가 많이
등장한다. 게다가 조선 왕실도 명나라 군주의 사당인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매년 제사를 지
내니 참 할말을 없게 한다. 명이 백제와 고구려, 또는 백제와 부여국(夫餘國)처럼 조선의 조상
나라라면 이해라도 하지만 둘은 전혀 관련도 없다.
어쨌든 정도전(鄭道傳)과 율곡 이이(李珥), 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와 중농학파(重農學派) 계
열 등 몇몇 깨어있는 이들을 제외한 조선 지배층의 우둔함은 결국 부국강병을 멀리하고 민생을
외면했으며, 쓸데없이 유교 교리만 앞세워 헛소리만 떠드니 발전은 커녕 점점 퇴보하여 결국은
섬나라 왜국에까지 밀렸다. (조선 중기부터 밀렸다고 보면 됨) 그래서 결국은 아시아의 진정한
호구 국가가 되었으니, 그 휴유증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굴레처럼 남아있으며, 약소국의 비애
를 두고두고 누리게 만든다. 기분 같아서는 저 증주벽립 바위글씨를 깨부시고 싶지만 저 글씨가
무슨 잘못이 있으랴? 게다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나보다 높은 신분의 존재이니 감
히 해꼬지는 어렵다

※ 송시열집터, 북묘 하마비 찾아가기 (2016년 1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3번 출구), 4호선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8번을
  타고 국민생활관 하차, 또는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7번을 타도 된다. 국
  민생활관 정류장에서 내려서 왼쪽(종로 08번 하차 기준, 종로07번은 오른쪽임)으로 올림픽기
  념국민생활관 서쪽 담장길(성균관로17길)을 따라 2분 정도 가면 북묘 하마비이며, 여기서 왼
  쪽으로 2분 더 들어가면 송시열집터 증주벽립 바위글씨가 나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1가 5-99 (성균관로17길 37)


▲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정문 곁에 있는 송시열집터 표석
송시열 집이 쓸데없이 넓었던 모양이다. 증주벽립에서 여기까지 200m나 되니 말이다.
아니면 표석의 위치가 어긋나있을 수도~~ (위치가 틀린 옛터 표석도 은근히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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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1월 2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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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계곡 (백석동천)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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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무더운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위엄을 부리던 7월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와 북악산 백석동

천(백사실, 백사골)을 찾았다. (본글에서 '백사실=백사골'임)
이곳은 서울 장안에서 내가 가장 흠모하는 곳으로 2005년 5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
며 처음 발을 들인 이래 매년 6~8회 이상 발걸음을 한다. 그렇게 많이 찾았으면 진짜 질릴
만도 할텐데 그에게 단단히 퐁당퐁당 빠진 상태라 어제 갔어도 오늘 또 가고 싶은 곳이다.

이번 백사실 나들이는 공교롭게도 나들이의 1등 방해꾼, 비와 함께 하게 되었다. 오후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좀 일찍 찾았는데, 이미 그 시간대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는 것
이다. 다행히 우산은 가져왔으나 비가 따라붙으니 정말 귀찮기 그지 없다. 허나 다행히 비
는 약한 수준이었고 비 덕분에 한여름에도 사람이 거의 없어 오랜만에 고적한 백사골의 풍
경을 누리게 되었다. 이곳은 무려 50번 이상 발걸음을 하였지만 비가 오는 날에 찾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  혜문사입구 골목길에서 바라본 서울의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산악 분지이다.


♠  서울 도심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 작지만 멋드러진 하얀 반석이
인상적인 백사폭포(白沙瀑布, 동령폭포)

▲  피서의 성지 자격이 충분한 백사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현통사(玄通寺) 대문 밑에 새하얀 반
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매끄러운 바위 피부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 백사폭포가 수줍은 모습으로 별천지를 꿈꾸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
시 들었다 놓는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백사폭포는 높이 3m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수려한 멋은 거의 없다. 그저 수수하게 생긴 조
촐한 폭포로 하얀 피부의 반석(盤石)과 잘 어우러져 수려한 멋을 자아내며 백사골에 대한 첫 인
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하는 동시에 그곳에 대한 기대감마저 크게 불러일으키게 한다.
서울 도심에서 거의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로 나름 가치가 높은데, 만약 설악산이나 주왕산 등
폭포가 많은 명산(名山)에 있었다면 그리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나 폭
포나 때와 자리를 잘 잡아야 된다.
백사폭포란 이름은 내가 백사골의 이름을 따서 임의로 지은 것인데, 원래 이름은 동령폭포라고
한다. 허나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폭포는 그만 자신의 이름 마저 떠내려보내고 말았다.

폭포를 품은 너른 바위는 돗자리를 피고 한숨 청하고 싶은 잘생긴 반석으로 청정한 계곡물이 끊
임없이 바위를 타고 내려와 1폭의 수채화를 자아낸다. 근래 비가 많이 와서 비의 희롱에 단단히
노했는지 폭포수 소리가 천하를 뒤흔들 정도로 패기가 대단하다.


▲  옆에서 본 백사폭포 - 거의 45도 각도를 이루는 바위 미끄럼틀을 타고
백사골 냇물은 아래로 흘러간다.

 
▲  백사골의 냇물과 낙엽을 속절없이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아랫 못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 냇물은 큰 세상을 꿈꾸며 졸졸졸~♪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못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다리 밑에 있는 못으로 내려가 심호흡을 한 다음 정든
고향을 등지며 큰 세상을 향한 장대한 여정을 떠난다. 한번 폭포를 내려왔으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기에 오로지 앞만 보고 흘러갈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아랫폭포를 타고 홍제천으로 내려가
한강(漢江)으로, 다시 서해바다로 종점이 없는 여행을 떠난다.

늦가을이 되면 겨울 제국의 핍박으로 나무에서 버림 받은 낙엽들이 계곡으로 떨어져 폭포를 타
고 밑으로 내려가거나 그 주변에서 저항하며 고향으로의 컴백을 꿈꾼다. 허나 대자연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아래로 떠내려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
런 낙엽의 발악을 보면서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여름의 절정을 누리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열심히 매
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저들의 푸른 아름다움 뒤에는 늦가을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있고,
그 뒤에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  급하게 흘러가는 백사골 하류 (백사아랫폭포)

폭포 아랫 못 너머에 펼쳐진 백사골 하류 폭포는 거의 30도 경사가 진 바위를 타고 아주 숨가쁘
게 내려간다.
바위를 타고 경사를 이루며 흐르니 엄연히 폭포는 폭포다. 아직은 이름이 없어서 백사폭포(동령
폭포) 밑에 있다는 뜻에서 백사아랫폭포란 쉬운 이름을 살짝 지어주었다. 폭포의 길이는 100m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려 수량이 많으면 그 흐르는 소리가 멀리서까지 귀를 때린다.

폭포가 흐르는 바위는 넓게 반석을 이루며 제법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데, 폭포 주변을 가득 메
운 주택만 없었다면 정말 설악산이나 금강산(金剛山) 못지 않은 풍경을 자랑했을 것이다.


▲  백사골의 생매장 현장 ~ 자하주택 북쪽(세검정로6길)

서울 제일의 경승지인 백사골은 자하주택 북쪽에서 어두컴컴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한다. 지하에
묻힌 백사골은 약 150m 정도 숨죽여 흐르다가 홍제천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자연이 빚은 얼
큰한 작품, 백사골이 이런 수모를 당하게 된 것은 물불 가리지 않고 자행되는 개발의 난도질 때
문이다. 나무와 계곡만 있던 이곳까지 주택들이 밀고들어올 줄 누가 생각을 했으랴? 

애시당초 주택가를 들이밀지 말고 한때 서울 제일의 피서지로 명성이 높았던 인근 세검정(洗劍
亭)과 연계하여 서울 도심 제일의 경승지로 가꾸었다면 더욱 빛이 발했을텐데, 개발의 난도질은
그런 여유도 주지 않고 백사폭포 밑까지 올라온 것이다. 다행히 개발의 난도질은 폭포 앞에서
뚝 멈추었지만 나중에 꼭 2012년 여름에 복원된 인왕산 수성동(水聲洞) 계곡처럼 계곡 주변 집
들을 밀어버리고 옛 모습을 꼭 되찾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백사폭포에서 홍제천과 만나는 곳까
지는 말이다. 그러고보면 이 땅에서 자행되는 개발의 칼질은 너무나 생각도, 자비도 없다. 그
칼질에 목이 떨어져 나간 서울의 자연 명소가 어디 한둘이랴...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폭포를 굽어보며 백사골 밑에 둥지를 튼 현통사는 근래에 지어진 조그만 산사(山寺)로 정확
한 내력(來歷)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의 하나였던 일붕(一鵬)이 머물렀던 절로 백사골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딱 1번이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
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만들만한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골의 시원한 산바람이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한
풍경소리가 주변의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산신
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전 아래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덩어리로 몰려있다.


♠  백사골의 속살로 들어서다

▲  소나무가 마중하는 백사골 산길

간만에 백사골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아가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청정한 내음
과 솔내음이 두루 나래를 펼치는 백사골 숲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1폭의 수묵담
채화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곳 풍경을 완벽히 표현한다는 것은 힘들 것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
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백사골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숲에 깃들여진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기운을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
길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운 도
롱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사라져 가고 이곳은 이제 그들의 마지막 낙원이 된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  여름이 깃들여진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 속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청정함을 자랑하는 백사골(백사실계곡) <현통사와 별서터 중간>

▲  사진 정면에 보이는 큰 바위에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만들 때 돌을 떼던 흔적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 자
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저런 무
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보기가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마치 서울 도심의 별천지처럼
청정함과 순수함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백사실은 백사실계곡, 백석동천, 백사골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별 상관은 없
다. 정식 명칭은 백사실, 백사실계곡으로 이곳 지명이 백사실이며,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줄여
쓴 이름이다. 또한 백석동천은 이곳에 반한 선비와 양반들이 붙인 칭호이다.


▲  별서터 연못 옆을 지나는 백사골 (별서터 징검다리)

백사실 안내도와 자연보호 안내문이 있는 별서터 직전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나 돌다
리를 건너면 바로 사랑채터와 연못이 있는 백석동천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
리트로 계곡에 둑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별서 주인이 돌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백석동천 돌다리 - 별서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통돌 2개로 이루어진 단촐한 모습이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를 코 앞에 두고 오른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면 언덕 정상에 커다
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잘 살펴보면 글씨
같은 것이 박혀있는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가운데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백석동천 별
서터(연못터 주변) 바로 서쪽 산자락에 자리해 있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숲에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늦가을 후반이나 겨울에
는 눈동자를 잘 굴리다보면 우연히 눈에 들어오기라도 하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나마도 잘 눈
에 띄지 않는다.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만들어 그 안에 월암(月巖)을 새
겼다. 이 바위글씨는 18세기에 백사골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
씨로 추정되나 정확한 것은 아니며,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습은 가히 명
필 중에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한잔 걸치러 이곳에 놀러온
선비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광
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
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
으며 함께 잔을 걸치고 싶다.


♠  북악산에 숨겨진 비밀의 별천지, 북악산(北岳山)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전경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지나면 여기가
서울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수려한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암동(付
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北岳山)과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안
긴 분지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 산간 마을이나 산골에 묻힌 조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이다. 도심
이 바로 지척임에도 도심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산 속에 자리한 지형 탓도 있겠
지만 나라의 예민한 곳이 동네 주변에 많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부근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던 부암동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서(別墅, 별장)
및 피서지로 인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武溪
精舍)를 비롯해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서울 제일의 피서지로 명성이 높던 세검
정, 연산군(燕山君)이 사냥과 여가의 장소로 만든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 백사실 계곡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
장이 있었다 하여 백사실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으며, 백사골과 별서터를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하얀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붙여진 것으로
동천(洞天)이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부여되는 경승지의 명예로운 칭호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별서 돌담의 흔적

▲  백사골 중류

백석동천 별서는 19세기 초반(1830년 경)에 지어진 600평 규모의 별서이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전해오는 것은 없으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이곳을 매입하여 머물렀다는 기록이 발견되
어 그의 손때를 조금 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해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안채는 4
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 집 한쪽이 기
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게
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마 주춧돌과 석
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 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 전쟁 때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마저 고자가 되
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장의 흔적, 바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
석동천의 옛 정취를 아련히 전해주고 있으며, 이 정도의 별장을 짓고 소유할 정도면 재력이 상
당한 양반이었을 것이다. 추사도 이곳을 거쳐갔으니 말이다.

백석동천과 관련된 첫 기록으로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 1720~1783)의 이
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 그 책에는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
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이 있어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조그만 별장이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던 백석동천은 2006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 사람들만 찾아오던 동
네 사람들의 숨겨진 피서지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아무리 숨바꼭질을 하고 있어도 휼륭한 재주나 좋은 명소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
처럼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2005년에 문화재청에서 이곳에 대해 조선 별서의 구
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이 땅의 휼륭한 전통 정원임을 인정하
여 무명에서 바로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에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제대로 된 안내문과 변변한 이정표조차도 없었으며,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
내문과 이정표를 설치했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발굴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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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터

▲  백사골 산길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
와 여름의 녹음, 가을 단풍, 겨울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경승지이다.
그중에서 늦봄과 여름에는 도심 속의 조촐한 피서지로 아주 그만이다. 숲이 매우 무성하여 강렬
한 여름 햇빛도 고개를 숙이며, 나무가 베푼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골의 졸졸졸~♪
교향곡을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나, 독서를 하거나, 돗자리를 피고 낮잠을 청하면 정말
꿀피서가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유적을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고자 했던 옛 사람(주
로 지배층들)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을 배워보고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2006년 이후 이곳의 존재가 널리 퍼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이 늘어나 고적한 분위
기는 좀 떨어졌다. 게다가 정신줄을 놓은 사람까지 불순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돌에 낙서를 남
기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계곡을 뒤집고 수목을 괴롭히는 행위가 늘어나면서 이곳의 건강도
적지 않게 위협을 받고 있어 대책이 절실하다. 아직은 멀쩡하다 해도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고
첩첩한 산주름 속에 있으니 언제 더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이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내
곁에 남았으면 좋겠다. 또한 근래에 종로구에서 별서터를 복원하겠다며 이곳을 들쑤실 생각을
하고 있는데, 괜히 복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었으면 한다. 비록 폐허가 되었어도
지금의 모습이 더 운치가 강하며,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 있기 때문이다. 괜
히 어설프게 나서지 말고 그냥 두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찾아가기 (2015년 8월 기준)
* 백사실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장
  쉽고 가까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이며, 하림각은 경사가 각박하고, 창의문은 거리가 길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AW컨벤션센터) 건너편 길가에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다. 그 길은 경사
   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면 길 끝에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내
   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자하문터널 방면)으로 좀 가면 백석동천 이
   정표가 있다.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 → 홍제천에 걸린 신영교를 건너 백사실 이정표를 따
   라 '세검정로6다길'로 쭉 올라감 → 혜문사입구 → 현통사 → 백사골(백석동천)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2호선
   신촌역(1,6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버스 / 4호선 길음역(7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3번 버스 이용 → 세검정초교 하차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가면 창의문교차로이다. 여기서 오른
   쪽으로 꺾어서 북악산길로 인도하는 2차선 찻길로 가지 말고 왼쪽 골목길(백석동길)로 들어
   서면 부암동 산복길이다. 산모퉁이와 G하우스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백
   석동2길)으로 진입하여 초소를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왼쪽으로 가도 되나 오른쪽 길을 추천
   함) 그 길의 끝에는 뒷골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가면 백석동천이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백사골까지 접근도 힘들고 주차 장소도 마땅치 않다. 대중교통이 진리이다.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물
  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일대


♠  백석동천 사랑채터

▲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있는 언덕

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검은 피부의 백석동천 안내문이 마중한다.
안내문 너머로 사랑채터가 있는 언덕과 그곳으로 인도하는 돌계단이 있는데, 장대한 세월의 태
클로 계단 돌이 좀 헝클어져 있지만 경사가 완만해 계단의 역할은 그리 녹슬지 않았다. 반면 연
못 쪽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을 계단처럼 얹혀놓았는데, 높이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다소 진땀을 빼야 된다. 어쨌든 돌계단을 오르면 주춧돌만 앙상하
게 남은 사랑채터가 나온다.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ㄱ' 구조의 5량집 사랑채를 만들었는데, 아쉽게도 1970년경에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남아있으나 2010년 발굴조사로 새롭게 드러
난 흔적을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산뜻하게 정비했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누마루로 주춧돌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선 별서 주인
이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穀茶)를 대
접하여 1잔씩 주고 받았을 것이다. 사랑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이 남아있다.


▲  윤곽이 진하게 남은 사랑채터

▲  석축 위에 세워진 사랑채터 누마루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터 옆에 자리한 네모난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 때 발견된 것으로 연못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잡초와
약간의 고인 물이 그런데로 연못티를 낸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과 주춧돌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스란히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잡초와 낙엽이 서로 보듬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리
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는데,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생매장을 당했다. 별서터의
건강을 위협하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대를 발굴하면
서 갈아 없앴으며, 땅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습했다. 이
후 2011년 3월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다시 묻었으며,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
자락에는 돌담의 흔적인 석축이 여럿 남아있다.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채의 기품과 분위
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사랑채 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에 잠겼을 별서의 주인을
머리 속에 그려보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사랑채터와 안채터 일대
이곳에 있었을 건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백석동천 별서터의 운치를 말아먹을 수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헝클어진 서쪽 돌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


▲  사랑채 뒤쪽의 석축과 돌담

사랑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서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된다. 석축 윗쪽에는 별서의 경계를 가르던 돌담이 길게 이어
져 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허물어지고 지금은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동쪽까지 돌담의 밑
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헝클어진 채 남아있는 돌담의 흔적


♠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  대자연에 의해 잠시 연못의 기능을 회복한 연못

백석동천 별서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못은 둘레가 약 100m 정도 되는 보름달처럼 큰 못이
다. 별서 주인은 많은 돈을 쏟아부어 장안에 솜씨 좋은 목공과 석공을 불러 별서를 만들고 사대
부의 지위를 이용해 인근 백성을 동원하여 연못을 팠을 것이다.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둥그런 연못을 수시로 채웠으며, 정자터 부근에 계곡 물을 끌여들이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물이 팔자좋게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서쪽에 수로를 파 계속 물갈이가 되
도록 유도했다.
연못과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지나가던 해와 달도 그 연못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을 것이요.
주변 나무와 꽃들도 연못을 거울 삼아 매무새를 다듬고, 별서 주인은 벗을 불러 곡차와 차 1잔
의 여유를 누리며 상팔자를 누렸을 것이다.

그들이 팔자 좋게 놀던 시절은 세상이 한참 아비규환에 젖어있던 19세기로 백성들의 삶은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민초(民草)들은 지금처럼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의 가혹한 세금과 양반
들의 수탈에 죄다 털려 힘들게 살아가고 있건만 별서 주인은 다른 나라 이야기마냥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별서의 주인과 이곳을 매입했던 추사 김정희가 가고 여러 대를 거치면서 풍류의 현장이던 이곳
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고, 천하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게 묻힌 이곳까지 총탄을
선사해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강제로 고자가 되었다. 연못 주변에 두른 석축과 정자의 주
춧돌은 이곳이 예전 연못임을 아련하게 귀뜀해줄 뿐이다.

6.25이후 연못은 연꽃이나 물고기, 수초 대신 잡초와 잡석의 공간이 되었고, 늦가을에는 나무들
이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털어낸 낙엽들이 가득 연못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막 보금자리이자
누런 연못이 된다.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연못의 구성원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  정자터 남쪽에서 본 연못과 별서터 일대

세월의 무상함을 진하게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백석동천 연못은 비록 그 기능은
잃었지만 자연의 생명력은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고 있다. 또한 여름의 제국 시절이나 비가
많이 오는 경우 연못에 물이 많이 담겨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찾기도
한다. 그러니까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이지는 못하고 자연이 내린 비에 의지해 연못의 티를 되찾
는 것이다. 마침 오늘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면서 간만에 만수(滿水)의 기쁨을 누린다.
수면 위에는 물을 먹고 자란 풀들이 무성하게 돋아나 초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그
만 생명체의 또다른 세계를 빚어내고 있다. 마치 늪지대 같은 분위기라 다가서기가 좀 껄끄럽다.
연못에 물이 많이 모였다고는 하나 서쪽에 뚫어놓은 수로로 물이 빠져나갈 정도의 수량은 아니
고 물의 깊이도 겨우 성인 무릎에 닿을 정도이다. 이곳에 담긴 물은 자연에 의해 증발할 때까지
머문다.
연못이 제법 넓기 때문에 물만 더 채운다면 조그만 조각배를 하나 띄워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였다면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기고 싶다.

연못을 비롯한 별서터 일대는 숲이 울창해 한여름에도 뜨거운 햇볕이 마음 놓고 내려오기가 힘
들다.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삼삼한 숲은 이곳을 찾
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의 정
도는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  옆에서 바라본 정자터

▲  연못터 옆에 자리한 돌다리
통돌 2개로 이루어진 단촐한 다리이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허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마음으로 그 허전함을 달래주고 싶구나~! 그
렇다고 정자를 복원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
꽃을 바라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아는 자라면 기생들도 불러 정자 안에서 얼씨구~ 춤과 노래,
시를 즐겼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부러울 뿐.. 이래서 권력층이 되야 되고 부자가 되
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일 뿐이고 상상으로만 끝나버린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키가 약 20m에 이르는 장대한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나이
는 약 150~200년 정도로 여겨진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또는 매입 기념으로 심었을지
도 모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
원을 꾸민 이 땅의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노비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를 한
탄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나 올련지...?


▲  별서터에서 수습된 길쭉한 통돌로 조촐하게 이루어진 쉼터
이곳에서 수습된 돌로 대충 의자와 탁자를 흉내냈는데, 그 모습이 참 수수하고
정겹기만 하다. 잠시 앉아 행동식을 먹기에도 별로 불편함이 없다.


▲  연못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늦가을)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계단식 산길

백석동천 별서터 계곡 윗쪽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물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허나
통제의 줄이 느슨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히 여름에는 피서객들로 봐글
봐글하여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우회하여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이 있는데, 2012년에 주변 산길
을 정비하고 산불방제 장비를 갖춘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을 심어 소소한 볼거리를 선사한
다. 허나 솟대 돌탑은 백사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이다.

돌탑을 지나면 소나무숲과 푸른 잎을 지닌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
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별서터 입구에 세워진 오리 솟대 돌탑
예로부터 오리 등의 새는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중간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소도(蘇塗)에서 비롯된 솟대 꼭대기에는 오리 모양을 달아두어
하늘과의 연락을 꾀했다.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몫 돕고 있는 소나무숲길

▲  백석동천(白石洞天) 바위글씨를 간직한 집채만한 바위

은행나무숲에서 오른쪽 산길로 가면 이곳 이름인 '白石洞天'이란 문신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백석동천 바위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월암과
비슷한 시기가 아닐 듯 싶은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고
자 했던 옛 사람들(선비와 지배층들)은 경관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와 그 기념으로 저렇게 낙서
를 남기곤 했는데, 백사골 역시 그들의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 풍경이 그들의 마음을
통 크게 훔쳐갔기 때문이다.


▲  여름에 잠긴 백사골의 그림 같은 숲길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하리라.. 비록 짧은 거리지만 푸르게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잘생긴 바위들이 파노라마를 이루는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길을 조금 가면 잠시 떨어졌던 백사골 상류가 나
온다. 하얀 피부의 넓은 반석부터 이끼 옷을 입은 바위까지 줄줄이 이어지면서 탄사를 자아내게
하는데, 비록 설악산이나 금강산 등 쟁쟁한 큰 산의 계곡만은 못해도 서울 도심에 저런 계곡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꿀단지나 다름이 없다.
때묻지 않은 냇물이 바위를 타고 흘러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내며, 이렇게
순수함을 지닌 물은 백사아랫폭포부터 속세의 기운을 강제로 받기 시작하면서 점차 속물로 변해
간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간직한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하겠
는가?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의 탄압현장이 되고, 시민들이 소풍/나들이로 이곳에 들
어와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  우리가 잠시 머물며 속세에 찌든 발을 정화시키던 백사골 상류
30분 정도 머물며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본다. 정말 오랜만에 흙으로
계곡에 토목공사(?)도 해보았지. 어린 시절 흙장난 정말 재밌었는데
다시 해보니 역시 재밌다.

▲  좁은 바위 틈을 비집고 흐르는 백사골 냇물의 패기

 백사골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는 외나무다리

백사골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도 정
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2개의 나무 목재를 엮
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좁
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하지만 다리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요
는 없다.
사람 많고, 수레 많고, 빌딩 많고, 복잡하고 각박하기만 한 서울 도심 속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백사골은 그 존재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계 같다.

외나무다리를 지나면서 길은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1~2m 정도로 폭이 좁아진다. 계곡 오른쪽에
는 생뚱맞게도 비닐하우스와 밭, 과수원이 펼쳐져 두 눈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들을 지나
면 집들이 나오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분명 이곳은 서울 도심의 한복판 종로구인
데, 이런 두멧골이 있었다니?? 그곳은 바로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
이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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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과 가까운 첩첩한 산중의 오랜 절집 ~ 북한산 승가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석가탄신일 맞이 산사 나들이 ~ 북한산 승가사(僧伽寺) '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승가사 약사전 (석조승가대사좌상) 승가사 호국보탑

▲  승가사 약사전

▲  호국보탑


높은 바위 산길은 험한데, 지팡이 짚고도 등라(藤蘿) 휘어잡네
처마가엔 가던 구름 머물고, 창앞엔 쏟아지는 폭포 많을세라
차를 끓이니 병에서 가는 소리나고, 물을 길으니 우물에 작은 물결지네
두어명 높은 스님 있어 공(空)한 것 보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네

* 조선 초기 문신 정인지(鄭麟趾)가 승가사에서 지은 시


 

5월 공휴일의 하나인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이 드디어 코앞에 다가왔다. 이번 초파일은 주말
과 겹쳐서 자연스럽게 여러 날 연휴가 형성되었는데, 초파일이 그 연휴의 끝이었다. 그래서 초
파일 전날에 사전 몸풀기용으로 서울에 있는 적당한 고찰을 물색하다가 가본지 20년이 넘은 북
한산(삼각산) 승가사를 찾기로 했다.

해가 조금씩 고개가 꺾이던 오후 2시에 길음역에서 후배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7211번(진관차
고지↔신설동)을 타고 북악터널, 평창동을 지나 구기동(舊基洞)에서 발을 내린다. 여기서 졸부
들의 집과 빌라로 경관이 꼬질꼬질해진 구기동계곡을 20분 정도 오르면 구기탐방지원센터가 나
오며, 이곳을 지나면 비로소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들어서게 된다.
구기동은 옆동네인 평창동(平倉洞)과 더불어 북한산 자락에 안겨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게다가
명당(明堂)의 기질도 있다고 전해져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졸부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와 살았는
데, 문제는 그들의 욕심이 끝이 없어 쥐처럼 계속 북한산(삼각산)의 살을 갉아먹고 괴롭힌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경관이 적지 않게 유린을 당했다.
더 이상 졸부들로 인해 북한산이 망가지지 않도록 신축/증축을 금하는 한편, 기존 집들도 모두
밀어버려 서울의 영원한 허파이자 진산(鎭山)인 북한산의 숨통을 확 트이게 했으면 좋겠다.

구기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졸부들의 집과 무자비한 개발의 칼질에 기가 죽은 구기동계곡도 슬
슬 본성을 되찾아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게다가 숲도 더욱 짙어져 때이른 더위를 잊게 만
든다. 그런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구기갈림길인데, 여기서 직진하면 문수암(文殊庵)과 북한
산성(北漢山城)으로 이어지며, 왼쪽으로 가면 승가사와 비봉이다.
우리는 아직 점심을 먹지 못해 여기서 속세에서 사온 김밥과 과자, 음료수 등으로 배를 채운다.
하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 그런지 꿀을 바른 듯 죄다 꿀맛이다. 우리가 사온 김
밥은 모두 5줄인데, 이중 4줄을 먹었고, 과자와 음료수도 절반 정도 처리하니 포만감의 행복이
일파만파로 몰려와 우리를 희롱한다. 그 희롱에 잠시 무방비로 있다가 자리를 싹 털고 다시 길
을 재촉했다. 승가사까지는 30분을 더 가야되기 때문이다.

구기갈림길에서 승가사까지는 경사가 좀 각박한 편이나, 구기동계곡의 상류인 승가사계곡이 바
로 옆에서 시원한 바람과 냇물로 응원하고 있어 그리힘들지는 않다. 그 산길을 25분 정도 오르
면 승가사 갈림길에 이른다.


▲  승가사 갈림길 - 왼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모두 승가사로 통한다.
(사람은 왼쪽 계단길 추천, 오른쪽 길은 수레를 위한 길)


♠  승가사 입문

▲  청기와로 치장된 승가사 일주문(一柱門)

승가사갈림길에서 왼쪽 계단길을 오르면 승가사의 내력과 가람배치도가 담긴 안내문과 함께 무
려 청기와로 머리를 장식한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이 문은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승가사 주변이 국립공원 건축제한구역이라 여러 번 강제 철거
를 당했던 비운의 문이기도 하다. 간신히 국립공원관리공단을 설득하여 지금의 문을 두었으며,
평방(平枋)에는 원담(圓潭)이 쓴 '三角山 僧伽寺'란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  경내로 인도하는 청운교 계단길

일주문을 지나면 호국보탑까지는 숨가쁜 계단길의 연속이다. 연등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오르면
청운교(靑雲橋)라 불리는 장대한 계단이 기를 질리게 만드는데 계단 앞 좌우에는 용조각이 입을
벌리며 혹시 모를 나쁜 기운을 경계한다. 계단 중간 오른쪽에는 승가사의 내력이 담긴 사적비(
事蹟碑)가 있으며, 그 계단의 끝에는 승가사의 새로운 명물인 호국보탑이 자리해 있다.


▲  청운교 계단길 (내려갈 때 찍은 모습)
계단 왼쪽에 이수(螭首)를 갖춘 비석이 승가사 사적비이다.

▲  감실 불당까지 갖춘 호국보탑(護國寶塔)

끝없이 펼쳐진 계단에 기가 질린 중생은 그 계단의 끝에 서 있는 호국보탑 앞에서 다시 한번 주
눅이 든다.
인도나 동남아의 불탑(佛塔)처럼 생긴 호국보탑은 승가사가 예로부터 호국기도 도량이었음을 속
세에 강조하면서 조국 통일도 염원하고 절의 위세도 크게 강조하고자 많은 돈을 들여 만든 것이
다. 그러다보니 호국보탑이란 참 아름다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가 세워짐으로서 탑이 없
던 허전함을 제대로 극복하게 되었다. (정식 이름은 '민족통일호국보탑')

장엄한 모습의 이 탑은 절 밑의 바위와 나무를 싹 밀어버리고 지반을 다져서 만든 것으로 1987
년에 짓기 시작하여 1994년에 완성을 본 승가사의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탑의 높이는 무려 25m
로 9층석탑이며, 탑신(塔身) 밑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경주 석굴암(石窟庵)을 조금씩 재현했
고 사방(四方)에 문을 냈다.
감실 안에는 석굴암처럼 본존불(本尊佛)과 11면(面) 관세음보살상, 10대 제자상을 돋음새김으로
배치하고 연꽃장식 덮개를 씌웠으며, 바깥쪽에는 사천왕(四天王)을 배치해 본존불과 탑을 지키
도록 했다. 감실이 매우 좁기 때문에 승려만 들어가서 예불을 올리며, 탑 주위로는 문수/보현동
자상과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빼곡히 배치했다.

탑신에는 인도 정부에서 기증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1과와 청옥와불(靑玉臥佛) 1좌, 나한(羅漢)
의 사리 2과, 패엽경(貝葉經) 1질, 무구정광다라니경 경판 1질, 철제9층탑 99기, 화엄경(華嚴經
) 9질을 봉안했다.
조그만 감실 불당까지 갖춘 매우 이형적(異型的)인 큰 탑으로 지금이야 과시용이다 뭐다해서 이
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지만 몇백년 이후에는 한국미술사 20세기 석탑 부분에서 크게 이름을 날릴
유명 인사로 등극할 지도 모르니 미리 봐두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민족통일호국보탑 공덕비

▲  위에서 바라본 호국보탑의 위엄


▲  호국보탑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北岳山, 사진 중앙에 엷게 보이는 산줄기)과 인왕산(오른쪽), 그들 너머로
서울 도심이 어렴풋이 바라보인다.

▲  산자락에 요새처럼 자리한 승가사 - 호국보탑에서 올려다본 모습

호국보탑에서 경내까지는 2갈래의 길이 있다. 왼쪽 계단길로 가는 길은 호국보탑을 만들면서 새
롭게 닦은 길이고, 오른쪽에 조금 가파르게 형성된 길은 옛길이다. (옛길로 가면 포대화상을 만
날 수 있음)


♠  북한산 제일의 고찰이자 서울 근교 명승지로 명성이 자자했던 곳,
고려시대 보물 2개를 간직한 북한산(삼각산) 승가사(僧伽寺)

▲  산신각에서 바라본 승가사 경내 (대웅전 구역)

북한산(삼각산)의 주요 봉우리이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국보 3호)가 서있던 비봉(碑峰)
동쪽 450m 고지에 둥지를 닦은 승가사는 빼어난 경관으로 예로부터 많은 문인(文人)들이 찾아와
안긴 명소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쪽의 진관사(津寬寺), 남쪽의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동쪽의
불암산 불암사(佛巖寺)와 더불어 서울 근교 명승 사찰로 꼽혔는데, 승가사는 그 북쪽으로 그들
가운데 단연 갑(甲)으로 찬양을 받았다.

북한산 제일의 고찰로 손꼽히는 승가사는 756년(신라 경덕왕 14년) 수태(秀台)가 창건했다고 전
한다. 그는 당나라 고종(高宗) 시절에 중생들로부터 생불(生佛)로 칭송 받던 승가대사(僧伽大師
)의 행적에 감명을 받아 그를 기리는 뜻에서 승가사라 했으며, 동문선(東文選)에는 1107년에 이
예(李預)가 쓴 중수기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낭적사(狼跡寺) 스님 수태가 승가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
리를 정해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새기니 대사의 어진 모습이 더욱 우리나
라에 비추었다. 나라에서 천지의 재변과 홍수와 한발 등의 재난이 있으면 기도를 드려 물리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언제나 효험이 있었다'

고려의 천하로 바뀐 이후, 1024년(현종 15년)에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했고, 1090년에
는 구산사(龜山寺) 주지였던 영현(領賢)이 선종(宣宗)의 칙령(勅令)을 받아 중수했다. 1099년(
숙종 3년)에는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숙종(肅宗)과 함께 세검정에 있던 장의사(藏義
寺)와 승가사에 들렸는데, 이때 불상을 개금하고 불당을 중수했다.

1422년 세종(世宗)이 전국의 사찰을 통합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2개로 나누자 선종에 속하
게 되었으며, 그 시절 고승(高僧)으로 이름을 날린 함허(涵虛)가 여기서 수행을 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으나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여기까지 기어올라온
청나라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어 150년 가까이 폐허로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1780년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이던 성월선사(城月禪師)가 절터에 뒹굴던 돌을 골라
건물을 재건했으며, 구한말에는 명성황후와 엄귀비의 후원으로 절을 수리했다.

1941년 도공(道空)이 중수를 벌였고, 비구니 도원(道圓)이 절을 꾸려나갔으나 6.25때 모두 파괴
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러다가 1957년 도명(道明)이 산신각과 향로각, 동정각, 대방, 요사 등을
지어 절을 다시 일으켰고, 1971년에는 상륜(相侖)이 주지로 부임, 마애여래좌상으로 오르는 108
계단을 대리석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절 진입로를 확장하는 한편, 전기를 가설했다.
1976년에는 범종을 만들어 동정각에 봉안했고, 7년 동안 갈고 닦아 1994년에 호국보탑을 지어올
리는 등, 왕년의 위엄을 되찾고자 열심히 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각박한 산자락에 터를 닦았지만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신없이 건물을 지었으며, 비
록 겉으로 보이는 고색의 내음은 거의 말라버렸지만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영산전,
향로각, 산신각, 동정각, 적묵당, 승가굴을 개조한 약사전 등 10여 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메
우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고려시대에 거대한 마애불인 구기동 마애여래좌상과 역시 고려 때 조성된
석조승가대사좌상 등 보물 2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밖에 옛 석탑의 부재(部材)와 비좌(碑座),
그리고 경내 동쪽에 조선 후기 승탑 등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승가사는 비구니 사찰로 북한산 제일의 선원(禪院)을 칭하고 있으며, 주변 풍경이 빼어나 고려
와 조선의 많은 문인들이 문이 닳도록 찾아와 시와 글을 남겼는데, 고려 고종(高宗)의 스승이던
유원순(兪元淳)은 이곳의 풍경을 8줄의 시로 표현하고 있다.

기구한 돌다리에 구름을 밟고 올라가니 좋은 집 높이 있어 조화의 고장 같아라.
가을이슬 가늘게 떨어지니 천리 안계(眼界) 상쾌하고
석양이 멀리 잠기니 저 강물이 밝게 빛난다.
공중에 오락가락 가는 아지랑이 향불 연기에 이었고
골짜기에서 우는 한가한 새소리 풍경소리를 대신하네.
그보다 부러운 일은 높은 스님의 생각하는 일인 것이
인간세상의 명리에는 도무지 마음에 없다네


구름도 잡힐 듯한 높은 산중에 묻혀 있고 하늘과도 가까워 제아무리 무거운 번뇌라도 감히 따라
오기 힘들며, (번뇌는 절 밑에서 기다리고 있음, 결국 해탈은 꿈임) 속세와도 적당히 거리를 두
고 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진하다. 또한 절을 둘러싼 숲이 삼삼하여 공기도 청정하며, 서울
도심과도 가까워 멀리 갈 것도 없이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거나 마음을 싹둑 가다듬고
싶을 때 언제든 와서 안기고 싶은 곳이다. 거기에 보물급 문화재를 2점이나 품고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며, 비구니의 낭낭한 불경소리를 듣고 있으면 잠시나마 해탈의 기분마저 들게 한다.


▲  나무 장작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는 서래당 공양간 부뚜막
이제는 시골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그리운 풍경으로 서울에서 저런 풍경을 만나니
무지 신선하고 반갑다. 쇠솥 안에서 모락모락 익고 있는 국의 맛은 어떨까?
나도 모르게 입 안에 군침이 고인다.


※ 북한산(삼각산) 승가사 찾아가기 (2014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1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6호
  선 역촌역(3번 출구)에서 7212번 시내버스(수색,은평차고지↔옥수동)를 타고 구기동 현대빌라
  나 승가사입구 하차, 승가사까지 도보 약 70분, 현대빌라에서 구기동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것
  이 좀 무난하며, 승가사입구에서 비봉4길(건덕아파트)과 승가산림초소를 거쳐 가는 수레길은
  경사가 좀 각박하다.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시내버스(은평차고지↔이북5도청)를 타고 현대빌
  라나 승가사입구 하차
* 승가사까지 수레길이 닦여 있으나 길이 험하고 상태가 넉넉치 못하며, 일반 차량은 출입을 통
  제한다. (승가사와 국립공원 차량만 통행 가능)
* 승가사 셔틀차량을 이용하면 보다 편리하게 승가사까지 올라갈 수 있다. <승가사입구 정류장
  에서 동북쪽으로 난 비봉4길(승가사 방면)을 오르면 셔틀 타는 곳이 있음, 운행 정보는 승가
  사에 문의 요망>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1 (☎ 02-379-2996)


▲  연등이 허공을 가득 메운 대웅전(大雄殿) 뜨락

동정각의 아랫도리를 들어서면 경내의 핵심인 대웅전 구역이다. 대웅전 뜨락을 중심으로 서쪽에
는 서래당(西來堂), 동쪽에는 적묵당(寂默堂)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뜨락에 들어서니 서래당
앞에서 연등 주문을 받는 아줌마 보살이 밝은 표정을 내비치며 연등 하나 다시라고 그런다. 허
나 연등 시주에는 그리 관심이 없어 가난한 중생이라 돈이 없다고 답을 하니 표정이 180도 싹
바뀐다. 결국 여기도 돈이 갑 중의 갑(甲)이던가? 잠시나마 씁쓸한 기분이 나를 엄습한다.

승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7년에 지어서 1980
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 좌우벽과 뒷쪽에는 부처의 전생(全生)을 그린 전생도와 심우도가 그
려져 있는데, 그림 옆에 해석을 달아놓아 이해를 돕게 했다.

뜨락 서쪽에 자리한 서래당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86년에 중창되었다. 겉
으로 보면 1층이지만 엄연한 2층으로 뜨락에 노출된 부분은 종무소(宗務所)와 주지실로 쓰이며
호국대탑에서 경내로 오르는 길목인 아랫층에는 공양간이 있다. 공양간은 장작으로 땐 밥과 국
을 공양(供養)으로 제공하는데, 산꾼과 답사객, 신도 등 누구나 먹고 갈 수 있다.
서래당 맞은편에 자리한 적묵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비구니의 선방(禪房)
이다. 1985년에 중창되어 매년 100여 명의 비구니가 수행 안거(安居)를 하고 있는데, 내부에는
소조여래좌상 1구와 1966년에 제작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전 뜨락과
그 끝에 자리한 동정각(動靜閣)

대웅전 맞은편에는 범종(梵鍾)의 보금자리인 동정각이 마치 천상(天上) 세계의 누각처럼 높다랗
게 들어앉아 속세를 굽어본다. 동정각은 2층 규모로 아랫층은 경내와 속세를 이어주는 통로이며,
윗층은 범종각으로 기존 범종각과는 다른 6각형 정자(亭子)식 건물인 점이 눈길을 끈다.

동정각에 고이 간직된 범종은 1976년에 봉안된 것인데, 그 종을 운반할 때 15명이 꼬박 매달려
무려 1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때는 4발 수레가 감히 올라올 수도 없었던 산속이라 종 밑에 나
무 토막을 깔고 밀어올리는 옛 방식으로 종을 운반했기 때문이다. 아침 4시와 저녁 6시가 되면
비구니가 잠든 종을 깨우며 종소리를 속세로 흘려보내는데, 그 종소리가 매우 은은하다.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불과 후불탱화

대웅전 내부는 모조리 개금(改金)을 한 목각(木刻)탱화들로 두 눈이 부실 지경이다. 불단에 봉
안된 석가불은 꽤나 단련을 했는지 어깨가 쩍 벌어져 있으며, 두터운 얼굴은 다소 경직된 표정
을 머금고 있다. 그의 좌우에는 그 흔한 협시불(夾侍佛)도 없지만 대신 뒷쪽에는 호화로운 금동
후불탱을 배치하여 그를 든든히 받쳐준다.
후불탱(後佛幀)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그를 바라보고 있으며, 8대
보살과 아난, 가섭(迦葉)이 그를 에워싸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습이다. 붉은 지붕의 닫집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으며, 극락조(極樂鳥)와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  나한의 일원으로 천태산(天台山)에서
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가
새겨진 독성탱(獨聖幀)

▲  칠성탱(七星幀)과 신중탱(神衆幀)
이들은 김광한, 김광열 형제가 1985년과
1986년에 만든 것이다.

▲  대웅전 좌측 벽에 그려진 전생도의 일부 - 해석은 각자 알아서 ~~


▲  대웅전 계단 우측에 누운 석조(石槽)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통이지만 첩첩한 산골이다보니 물사정이 너그럽지 못해
거의 항상 비워둔다. 물을 마시려면 꼭지를 틀어 바가지에 받아 마시면 된다.


♠  승가사 산신각, 약사전 주변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1년에 중창되었다. 석가3존불을 비롯해 석
가후불탱, 16나한탱, 신중탱 등이 있는데, 대웅전의 탱화들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모조리 금색을
입혀 등장인물이 다른 것 빼고는 거기서 거기 같고, 너무 찬란함에 치중한 나머지 거부감과 식
상함마저 적지 않게 들게 한다. (지나친 화려함은 오히려 소박함보다 못함)
이들 탱화는 1987년 김광한, 김광열 형제가 조성했다.


▲  영산전 불단
석가불과 미륵불(미래불), 제화갈라보살(과거불)이 3존불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무려 경주 옥석(玉石)으로 만들었다.

▲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이 새겨진 16나한탱


▲  산신각(山神閣)

영산전 좌측 높은 벼랑 위에 산신을 봉안한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과 측면이 달랑 1칸 밖
에 안되는 조촐한 건물로 화재로 무너진 것을 1984년에 다시 지었으며, 그때 서쪽을 바라보고
있던 건물을 남향(南向)으로 조정했다. 내부에는 1986년에 김광한/김광열 형제가 만든 산신탱이
이 있는데, 역시 금칠로 도배를 해놓았다.

산신각에 올라 동쪽(좌측) 밑을 잘 살펴보면 길쭉한 석종형(石鐘形) 승탑과 비석 1기가 눈에 들
어올 것이다. 이들은 1780년에 쓰러진 승가사를 재건한 성월선사(城月禪師)의 탑과 탑비로 비문
에는 '朝鮮國 正憲大夫 城月堂 碑銘竝序(비명병서)'라 쓰여 있어 승탑의 주인을 알려주고 있는
데, 승려임에도 정헌대부의 지위를 받은 것이 이채롭다. 그리고 '嘉慶 七年 壬戌 八月日立' 이
란 내용도 있어 1802년 8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  산신과 호랑이, 동자 2명, 나무 등이 묘사된 산신탱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우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약사전과 마애여래좌상으로 인도하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1단
계 오르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봉안한 명부전을 만나게 된다.
대웅전과 약사전 사이에 자리한 이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불전(佛殿)으로 1972
년에 착공해 1975년에 완성을 보았다. 1년 정도면 능히 만들고도 남을 규모지만 궁색한 산중이
라 공사가 더뎌 3년이나 걸린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특이하게도 지장보살상 등의 독립적인 불상은 없고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
의 주요 식구를 한데 몰아 넣은 지장탱화가 전부이다. 이 탱화는 1983년에 김원각, 김석담이 조
성한 것으로 다른 건물의 탱화와 마찬가지로 금칠로 도배를 했다. 다만 다른 것은 지장보살의
머리만 푸른 색을 입혔다는 것이다.


▲  명부전 지장탱화 - 명부전에서 지장탱화만 달랑 있는 경우는 처음 본다.

▲  약사전 앞에 놓인 옛 석탑의 흔적

명부전에서 1단계 더 올라서면 약사전이 나온다. 약사전 앞에는 옛 석탑의 흔적이 우수에 잠긴
채 놓여져 있는데, 두툼하게 생긴 지붕돌과 탑신(塔身)이 겨우 한 덩이씩만 남았다. 탑신이 지
붕돌보다 큰 것을 보면 아마도 제일 아랫층 탑신이었을 것이다.
그들에 대한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이 땅에 흔한 3층석탑이 아닐까 싶
은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절이 파괴되면서 같이 비극을 맞았을 것이며,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참담했는지를 저들이 온몸으로 증명해준다.
이후 일부만 남은 채, 버려진 것을 비좌와 함께 수습하여 약사전 앞에 두었으며, 탑의 사라진
부분이 많아서 복원까진 엄두도 못내고 그저 승가사의 옛 유물로 한가로운 여생을 보낸다.


▲  나는 누구일까?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좌(碑座)

향로각 앞에는 비석을 받치던 비좌가 초췌하게 누워있다. 고색의 때로 가득한 이 비좌는 화강암
으로 3단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넓직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무슨 비석의 아랫도리인지는 밝혀진 바는 없으나 고려 중기 승려인 탄연(坦然, 1070~1159)이 쓴
승가굴 중수비(重修碑)가 아닐까 여겨지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때
윗도리가 몽땅 사라져 비석의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고, 비좌 자신도 그 당시의 충격으로 기억
조차 상실했다.
 
사라진 비신과 이수(螭首)는 경내와 그 주변을 싹 뒤집으면 일부라도 나오질 않을까 싶은데, 그
작업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  자연산 석굴인 승가굴에 터를 닦은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큰 바위 밑에 자리한 자연산 석굴(石窟)이다. 승가사를 세웠다는 수태가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승가대사상을 새겼다는 창건 설화가 서린 오래된 굴로 승가굴(僧伽窟)이
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고려 중기에는 탄연이 이곳에서 수행하면서 정체가 아리송한 승가
굴 중수비를 남기기도 했으며, 조선 세종 때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의 쾌유
를 빈 인연으로 약사전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하니 아마도 쾌유가 됐던 모양이다.

1960년대 이후 석굴을 크게 손질하여 안과 바깥에 돌로 벽을 쌓고, 승가대사상의 불단과 연화대
를 만들었으며, 그 앞에 기도를 올리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등을 대사상 좌측에 배치해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석굴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스하다.


▲  석조승가대사좌상(石造僧伽大師坐像) - 보물 1000호

약사전에는 승가사의 주요 보물인 석조승가대사좌상이 홀로 봉안되어 있는데, 정작 약사전의 주
인인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은 없고, 승가대사상이 약사불의 자리와 직무를 대신하고 있다.

약사전의 주인인 승가대사(僧伽大師)는 인도의 승려로 당나라로 넘어가 활약했다. 그의 덕이 대
단했던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화신으로 널리 추앙을 받았으며, 그의 인기가 신라까지 전해져
승가사를 세운 수태가 그의 상을 만들어 이곳에 봉안했다고 한다.
허나 이 석상은 전설과 달리 신라 후기가 아닌 1024년(현종 15년)에 지광(智光)이 동량이 되고
광유(光儒) 등이 조각을 했다. 조성 관련 내용은 광배 뒤쪽에 새겨져 있어 고려 초에 만들어진
확실한 조각품으로 당시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석상 높이는 76cm, 광배 높이는 130cm이다.


▲  인등의 강렬한 빛을 즐기고 있는 석조승가대사좌상

승가대사상은 하얀 피부의 석상으로 중간에 호분을 입힌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
고 있어 지장보살의 이미지를 주고 있으며, 손자/손녀를 맞는 할머니와 같이 포근하고도 정이
넘치는 인상으로 그의 표정을 보면 속세에서 상처받은 눈와 마음도 보기좋게 정화될 것만 같고
그 앞에 다가서면 '아이고 힘들지?' 손으로 어루만지며 다독거려 줄 것 같다.

그의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살짝 뜨며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오똑하고
입술은 무척 붉으며, 볼살이 많고 광대뼈가 나왔다. 귀는 두건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고, 몸에
걸친 옷은 목 부분을 빼고는 노출된 부분이 없는데, 부처나 보살의 복장과 비슷하다.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蓮花臺, 근래에 만든 것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오른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으며, 충북 제천 빈신사지(頻迅寺址)에 있는 4사자3층석탑의 석상과도 유사한 면을
보인다. 또한 상체가 길고 무릎이 넓어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철불(鐵佛)과도 비슷한 특징을 가
지고 있다.

대사상 뒤에 자리한 광배(光背)도 꽤나 명품이다. 커다란 배의 모양을 한 이른바 주형거신광배
(舟形擧身光背)로 신광(身光)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머리 뒤쪽인 두광(頭光)은 신광과
일부 교집합을 이루면서 둥근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앙증맞은 모습의 연꽃잎을 무늬로 두르고 그
바깥쪽을 덩굴무늬와 모란꽃 무늬로 치장했다. 또한 광배 외곽 부분에는 불꽃무늬를 정교하고
실감나게 새겨 광배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이 땅에 흔치 않은 오래된 승려상으로 약 1,000년의 지긋한 나이와 오랜 세월 어두컴컴한 석굴
에서 일광욕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았지만 건강과 피부만큼은 젊은 불상이나 석상에 못지
않게 양호하여 대단한 노익장을 과시한다. 조선 중기에 일어난 2차례에 큰 전란으로 절은 사라
지기 바뻤지만 마애여래좌상과 함께 온전하게 살아남아 자리를 지켰고 이렇게 승가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지 꿀단지로 변함없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석상은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2호였으나 나중에 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아 보물
로 승진했다. 그런데 지정 번호가 우연히도 딱 1,000호이다. 보물 등급 외에는 아직 1,000까지
간 문화재 등급이 없는데 (국보가 300, 사적이 500, 서울 지방유형문화재가 300단위) 매우 흔한
숫자이지만 결코 쉽게 꿰찰 수 없는 번호를 차지한 것이다. 외우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좋고,
게다가 이 땅의 사람들이 많이 쓰는 숫자이니 이런 우연이 참 어디에 있을까 싶다.


♠  고려 초기에 조성된 거대한 마애불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 보물 215호

▲  마애불로 올라가는 108계단의 위엄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약사전을 나와서 향로각 앞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장대하게 펼쳐진 계단이 마음을 놀라게 만
든다. 그 계단은 절에서 좋아하는 숫자인 108계단으로 그 계단의 끝에 승가사의 꿀단지인 구기
동 마애여래좌상이 집채만한 바위에 둥지를 틀었다.

연화교(蓮花橋)란 볼록 튀어나온 조그만 다리를 건너 108계단에 임하면 되는데, 그렇게까지 각
박한 경사도는 아니어서 그리 힘들지는 않다. 속세의 부질없는 삶처럼 서두르지 않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곱게 접어 천천히 한 계단씩 임하다보면 멀리 보이던 마애불이 마치 해가 떠오르듯 크
고 웅장하게 솟아오르고, 계단의 끝에 이르면 마애불의 거대한 위엄에 다시 한번 눈과 마음을
놀라게 만든다.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의 위엄

승가사 북쪽에 자리한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하 마애불)은 경내와도 1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
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승가대사상과 더불어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의 하
나지만 지정 명칭은 '승가사 마애여래좌상'이 아닌 지역 이름을 딴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다.
보통은 그 불상을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절의 이름을 앞에 붙이기 마련인데, 경내와 약간의 거리
를 두고 있고, 승가사의 소유가 아닌 국가 소유로 되어 있어 지역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지정
명칭은 몇년 전까지만 해도 '구기동 마애석가여래좌상'이었으나 지금은 마애여래좌상으로 무려
2글자나 줄였다. (정식 지정 명칭은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이 마애불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서울에서는 삼천사지(三千寺址) 마애여래입상 다음으로
(또는 비슷한) 연세가 높은 마애불(磨崖佛)이다. 승가대사상과 더불어 승가사의 장대한 내력을
과시하는 산증인으로 승가대사상은 조성 관련 글씨라도 있지만 이 불상은 그것 마저 없어서 누
가 더 형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승가대사상이 1살은 더 오래 살지 않았을까?)

직각을 이루며 솟아난 거대한 바위의 남쪽 피부에 얇게 홈을 파고 돋음새김으로 도드라지게 결
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불상을 새겼는데, 그의 건강을 위해 전실(前室, 보호각)을 만들고
머리 위에 8각의 머릿돌을 끼어 얼굴을 보호했다. 그러다보니 건강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피부
도 얼굴 일부를 빼고는 하얀 편이다. 거의 20년 만에 만난 그였지만 여전히 정정한데 반해 나는
10대 꼬마에서 30대의 한복판으로 적지 않게 늙어있었다.

그의 갑옷과 같던 보호각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사라지고 보호각을 끼던 구멍 4개만
윗쪽과 중간에 아련하게 남아있다. 조선 중기 전란 때 파괴된 것이 아닐까 싶지만 마애불에 적
당한 외상이나 불에 그을린 흔적이 없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거나 자연재해로 무너진 것
으로 보인다.


▲  마애여래좌상의 얼굴 (양쪽에 보이는 구멍 4개가 보호각의 흔적)

마애불의 얼굴은 후덕한 인상의 승가대사상과 달리 조금 경직되고 근엄한 표정 같다. 이마 중간
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진한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러져 있으며, 두 눈은 감겨 있어 눈
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입술은 두꺼우며,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있는지 빨
간 기운이 조금 남아있다. 귀는 중생의 소리를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내려왔으며, 볼살
이 좀 많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껍게 솟아 있는데, 바로 위에 8각의 머릿돌을 끼워넣어
앞으로 크게 노출시켜 그의 모자로 삼았다. 모자가 큰 덕분에 얼굴에는 세월이 훈장처럼 달아준
검은 여드름이 여럿 있는 것 외에는 멀쩡하며, 피부도 하얗다. 그리고 모자 밑부분에는 연꽃 무
늬를 새겼다.
몸통과 머리를 잇고 있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어깨는 꽤나 단련을 했는지 당당하
고 듬직한 모습이다. 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 어깨와 가슴, 젖꼭지를 속시원히
드러내고 왼쪽 어깨를 옷으로 가린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옷 스타일을 하고 있는데, 우
견편단은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이 단연 으뜸으로 신라 후기부터 고려시대 불상에 많이 나타난다.
몸에 걸친 옷은 얇은 편으로 왼쪽 어깨와 배, 두 다리를 가리고 있으며, 왼팔에 묘사된 옷주름
은 세로로 그어져 있어 기하학적인 추상성(抽象性)을 드러내고 있다.


▲  마애불의 가슴과 아랫부분, 그리고 연화대(蓮花臺)

가슴을 비롯한 상반신은 아주 묵직한 모습으로 거대한 마애불의 위엄을 더욱 드높인다. 허리는
밑부분이 쏙 들어가 괜찮은 몸매를 보이고 있으며, 팔은 강철처럼 매우 두꺼워 보인다. 그리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배꼽 밑에 두어 이른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제스쳐를 취했
다. 또한 오른쪽 발바닥은 하늘을 향해 있는데, 발바닥을 훤히 드러낸 불상이 흔치가 않다.

불상이 앉아있는 연화대좌(蓮花臺座)는 꽃잎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앙련(仰蓮)이 윗쪽에, 반대
로 꽃잎이 땅을 향한 복련(伏蓮)이 밑에 있는데, 연꽃무늬가 2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꽃잎도 너무 화사하기 그지 없어, 적당하게 색만 입히면 진짜 연꽃이 따로 없을 듯 싶다.

기존 전통의 불상 양식에서 추상성을 조금 보태어 웅장하게 만든 마애불로 고려 초기의 대표적
인 마애불이자 준수한 작품으로 일찌감치 인정받아 북한산에 있는 불교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먼
저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받았다.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과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는 1980년
대에 지정됨) 게다가 상태도 양호하고 선각(線刻)도 선명하여 조성된 지 얼마 안된 따끈따끈한
불상 같다.

고려 초/중기에는 전국적으로 커다란 마애불과 석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이는 지방 세력의 일종
의 세력(勢力) 과시용으로 비슷한 모습이 아닌 지역마다 다른 색을 보여 개성도 강하다. 구기동
마애불 역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당시 서울 지역 세력의 지원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기도 하며,
승가사가 고려 왕실과도 적지 않은 인연이 서린 절이라 제왕과 왕실의 지원으로 수준 높은 석공
들을 투입하여 조성했을 가능성도 높다. 당시 서울은 남경(南京)이라 불리는 고려의 주요 도시
의 하나였고, 고려의 제왕들이 종종 순행을 했던 곳이다. (남경의 중심지는 서울 종로구의 경복
궁, 청와대 일대로 여겨짐)

마애불을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고려 초기에는 지금처럼 장비와 기술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
다고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 좋게 일부러 드러누웠던 것도 아니다. 줄을 매달고 올라가 일일히
정을 대고 쪼아야 되는데, 그것도 그리 쉽지가 않다. 거의 몇년에서 10년 이상은 족히 걸렸을
것이며,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고려 석공(石工)의 뛰어난 능력과 정성,
그들이 공사에 전념하게끔 뒤를 받쳐준 승가사와 지원 세력이 합작으로 이루어낸 대작품이라 할
것이며 이런 명품급 마애불이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마애불이 있는 바위 밑에는 근래에 돌로 벽을 쌓았고, 그 앞에 향로와 용이 휘감고 있는 돌기둥
을 만들어 단(壇)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앞을 돌출시켜 양쪽으로 계단을 내었으며, 기도는 그
앞에 마련된 공간에서 하면 된다. 또한 바위 주변은 문화재 보호를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
으니 괜히 바위 꼭대기에 오르거나 불상을 만지는 짓은 하지 않도록 하며, 매일 오전 10시부터
11시(시간은 변경 가능)까지는 승가사에서 기도를 올리는 관계로 출입을 금하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2-1


▲  마애불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  승가사 마무리

▲  12지신상이 새겨진 동쪽 옛길
(경내 바로 밑쪽)

▲  12지신상의 하나로 어디론가 터벅터벅
가고 있는 말

마애불을 20분 정도 둘러보고 대웅전과 산신각 주변에서 조금 머물다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
음을 기약하며 등을 돌렸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절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내려갈 때는 호국보탑으로 바로 내려가는 계단길 대신 동쪽 옛길로 갔다. 옛길은 조금 돌아가는
편이지만 예전에 승가사에 갈 때 꼭 거쳤던 길로 어차피 둘 다 호국보탑으로 이어진다.


▲  쌀가마니를 축내는 쥐새끼들 - 이 땅의 우울한 현실을 제대로 묘사한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
포대화상은 원래 호국보탑 부근에 있었다. 그러다가 호국보탑이 생기면서
옛길 중턱으로 터전을 옮겼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행복에 겨운 모습이
애를 여럿 둔 뚱보 엄마 같다.

▲  소나무가 숲을 이루는 승가산림초소 주변

▲  승가산림초소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길

절을 둘러보고 나오니 배가 슬쩍 고프기 시작한다. 그래서 남은 김밥과 과자, 물을 모두 꺼내서
싹 섭취를 하고 올라올 때와 다르게 수레길로 내려왔다. 수레길은 4발 수레를 위해 닦은 길로
경사가 가파르고 울퉁불퉁해 오르기가 쉽지 않은 길인데, 중간에 승가사 셔틀차량이 노인들을
여럿 태우고 뒤뚱거리며 지나간다. 아무리 수레를 위한 길이라도 경사가 급하고 노면 상태가 고
르지 못해 운전도 꽤 쉽지가 않을 것이다.

수레길을 20분 정도 정신없이 내려가니 승가산림초소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잠시 소나무가 송림
(松林)을 이루는데, 그들이 아낌없이 불어주는 솔내음에 정신과 마음이 약간이나마 개운해진다.
산림초소에서 5분 정도 내려가면 혜림정사란 조그만 절과 함께 빌라와 주택들이 시야를 가린다.
자연에서 아비규환의 속세로 완전히 내려온 것이다. 여기서 빌라를 끼고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구기동계곡이 나오며, 계곡 끝에서 비봉길로 들어서면 구기터널3거리로 이어진다.

비록 찰라와 같은 짧은 코스였지만 엄연히 등산도 했고 시간도 18시가 넘었으니 근사하게 저녁
뒷풀이를 해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디서 먹을까 고심하다가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
옛날민속집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두부음식으로 유명한 식당으로 구기터널에서 신영3거리로 가
는 길목에 있다.


▲  옛날민속집에서 먹은 보리밥의 위엄

무엇을 먹을까 즐거운 고민을 하다가 오랜만에 보리밥을 먹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보리밥을 먹
은 지도 꽤 되었다. 그리고 잠깐이긴 하지만 산도 탔으니 동동주로 목을 시원하게 축여야 밥맛
이 더욱 날 것읻. 그래서 동동주도 1병 주문했다.

5분 정도 지나자 제일 먼저 동동주와 밑반찬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밑반찬이 예전보다 많
아졌네? 알고보니 오른쪽의 전과 김치, 하얀 묵 등 6가지는 원래 밑반찬이고, 왼쪽 5그릇은 보
리밥에 비벼먹을 나물로 콩나물과 당근, 생채, 상추 등 7가지에 이른다. 그래서 찬이 많아진 것
이다.
그리고 잠시 뒤 저녁 식사의 주인공인 보리밥과 비지찌개가 등장한다. 보리밥은 커다란 양은 냄
비에 담겨져 있는데, 담긴 양은 냄비가 아까울 정도로 적다. 보리밥 외에 구수한 된장찌개와 콩
비지가 따라 나왔는데, 이들은 모두 보리밥용으로 보리밥에 딸려 나오는 나물과 찌개가 많으니
가격에 비해 본전 뽑기는 좋다. (단 고기는 없음)

보리밥에 나물 7가지와 콩비지, 된장찌개를 넣고 고추장으로 버무리니 어엿한 비빔밥이 되었고
적어보이던 밥도 그들이 더해져 양이 남부럽지 않게 늘었다. 거기에 누런 동동주까지 겯드리니
정말 제왕의 밥상이 부럽지 않다. 열심히 먹고 보니 밥그릇은 맨바닥을 드러냈고, 나물과 반찬
도 겨우 일부분만 남았을 뿐이다.
식사가 끝나자 누룽지와 수정과가 후식으로 제공되었다. 누룽지는 맛이 구수했고, 수정과는 맛
이 달고 시원해 단숨에 그릇을 비웠다.

이렇게 기분 좋게 저녁을 마치고 신영3거리로 나왔다. 시간은 어느덧 19시 반, 여기서 길음역으
로 넘어가 후배들과 작별을 고하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니 이리하여 북한산(삼각산) 승가사 나
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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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영롱한 연등의 향연 속으로 ~ 서울 연등축제 (조계사, 청계천 연등거리, 광통교)

 


' 서울 연등축제 야경 즐기기 (조계사, 우정국로, 청계천 연등거리) '

서울연등회 연등

▲  서울 연등축제에서 활약한 연등의 위엄

청계천 연등 (광교4거리) 청계천 연등 (광통교 주변)

▲  청계천 연등 (광교4거리)

▲  청계천 연등 (광통교 주변)


♠  서울연등회 저녁 연등놀이 (조계사, 우정국로)

▲  연등놀이 행렬의 선봉인 사천왕(四天王)의 위엄 ▼
사천왕들이 중생들의 환영을 받으며 안국동4거리를 거쳐 인사동으로 들어간다.
인사동에 잠입한 나쁜 기운들이 그날따라 똥줄 좀 제대로 탔을 것이다.

계절의 여왕으로 널리 칭송을 받는 5월(4월 말 포함)에는 많은 축제와 볼거리가 천하 곳곳에서
열린다. 그중 단연 갑(甲)은 내 기준이긴 하지만 서울연등회와 석가탄신일, 그리고 간송미술관
(澗松美術館) 특별전이 아닐까 싶다.

서울연등회(연등축제)는 서울 및 불교 축제의 으뜸으로 이제는 천하 제일의 축제로 단단히 자리
를 굳혔다. 보통 석가탄신일 1주 전 금/토/일에 열리는데, 주말 전날인 금요일부터 조계사(曹溪
寺)와 강남 봉은사(奉恩寺), 청계천(청계광장에서 광교4거리 구간)에서 연등 전시회가 그 서막
으로 열리며. 초파일 당일까지 오색영롱하게 불을 밝힌다.
그리고 축제의 중심인 토요일이 되면 장충동 동국대(東國大) 운동장에서 어울림마당이 16시 30
분부터 18시까지 열리는데, 이 마당은 연등행렬을 위한 몸풀기 행사로 관불의식을 비롯해 흥겨
움을 유발하는 다채로운 전통 공연이 펼쳐진다. 그 공연이 끝나면 19시부터 서울연등축제의 갑
이라 할 수 있는 연등행렬(제등행렬)이 장엄하게 진행된다.
연등행렬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옛 동대문운동장)을 출발하여 동대문과 종로를 거쳐 조계사에서
끝을 맺는데, 진행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이며, 조계사를 비롯하여 서울과 전국 사찰, 불교단체
/학교에서 준비한 온갖 연등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때 선보이는 등은 무려 10만 개가 넘는다
고 하니 가
히 연등의 성지(聖地)라 할만하며, 그 연등도 모두 똑같은 것이 아니라 매년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여 전혀 식상하지가 않다. (연등행렬시간에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부터 조계사까지
도로를 통제함)
햇님이 지평선 너머의 그만의 공간으로 쏙 사라지고 땅꺼미가 짙어지면 행렬에 나온 연등은 어
둠을 걷어내고자 일제히 빛을 발산하면서 종로는 고운 연등빛에 잠기며, 연등행렬이 조계사에
모두 모이면 그 뒷풀이로 회향(廻向)한마당이 23시까지 펼쳐져 다시금 어깨를 들썩거리게 한다.
또한 그날 행군한 연등의 일부는 조계사와 우정총국 주변, 종로1가 스탠다드차타드은행(옛 제일
은행) 앞에 두어 자정까지 못다한 불을 밝힌다.

다음 날 일요일은 정오부터 조계사와 우정국로 일대에서 전통문화마당과 공연마당이 열린다. 불
교와 관련된 갖은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고, (체험비를 받는 코너가 많음) 각가지 전통 놀이
공연, 영산재 등을 구경하면서 허기가 지면 곳곳에 마련된 먹거리 코너에서 불교 음식과 떡, 음
료수 등을 사마시면 된다. 그리고 연등 만들기와 도자기 체험, 다도(茶道) 체험, 사찰/전통 음
식 체험을 비롯해 다른 불교 국가의 불교 문화까지 두루 만날 수 있어 이때만큼은 완전히 천하
불교의 성지가 된다.
축제는 19시까지 진행되는데, 17시부터 슬슬 자리를 정리하여 19시부터 다시 연등놀이를 연다.
이는 전날에 벌이는 연등행렬의 축소판으로 조계사를 출발해 인사동을 1바퀴 돌고 다시 조계사
로 돌아오는 짧은 코스로 진행되며, 조계사에 모이면 모두 함께 신명나게 춤을 추고 어울리는
시간을 갖다가 21시에 모두 마무리를 짓는다.
서울연등축제는 연등회(燃燈會)란 이름으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122호로 지정되었으며, 서
울 뿐만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와 사찰, 그리고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도 연등축제가 열린다. 그
렇다면 이 연등회는 과연 언제부터 열리기 시작했을까?

연등회의 시초는 확실하지 않으나 관련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조
에 나온다. 당나귀 귀로 유명했던 경문왕은 정월 대보름에 황룡사(皇龍寺)로 행차해 연등을 간
등(看燈, 등을 구경하다)했다고 하며,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도 그랬다. 그런 것을
보면 신라 말에 이미 절에서 연등을 밝혀 축제 비슷하게 했음을 가늠케 한다.
그런 연등회는 고려로 넘어오면서 국가적인 행사로 거듭난다. 태조 왕건(太祖 王建)은 그의 훈
요10조(訓要十條)를 통해 팔관회(八關會)와 함께 연등회를 중요시하라 했고, 무려 연등도감(燃
燈都監)이란 관청까지 두어 연등회를 담당했다. 이때 연등회는 매년 2회, 음력 정월 대보름과 2
월 보름에 개최하여 만백성이 즐겼고, 연등을 며칠 동안 밝혀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고 한다.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에 본격적으로 연등회를 벌인 것은 의종(毅宗, 재위 1147~1170) 때로 백
선연(白善淵)이 초파일에 연등회를 연 것이 그 시초로 여겨지며, 1245년(고종 32년) 최씨 정권
의 2대 실력자인 최이<崔怡, 최우(崔瑀)>도 초파일에 밤새도록 연회를 벌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선은 고려와 달리 불교를 탄압하면서 나라 주도의 연등회는 사라졌으나 백성들은 계속 연등회
를 즐겼다. 저녁에는 등을 들고 나오는 관등(觀燈)놀이가 성행했고, 이종가(二從街) 관등은 한
양8경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왜정 때도 연등 풍습을 여전했고, 초파일이 다가오면 절과 불교
단체에서 연등을 만들어 종로 거리에 걸었다.

1955년 초파일에는 조계사 부근에서 연등행렬을 벌이면서 현대 연등축제의 서막을 열었고, 1976
년부터는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연등행렬을 벌이기에 이른다. 이후 1996년부터는 동대문운동장
(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조계사로 코스를 크게 수정했고, 이제는 5월(4월 하순)만 되면 손
꼽아 기다리게 되는 천하 제일의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 서울연등회 일정과 행사 내용, 연등은 매년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음


▲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普賢童子)와 사자를 탄 문수동자(文殊童子)가
사천왕의 뒤를 따르고 있다.

전통문화마당의 후속편으로 진행되는 연등놀이는 19시에 조계사를 출발하여 인사동을 거쳐 다시
조계사로 돌아와 모두 신명나게 어울린 후 21시에 마무리를 짓는다. 이날 활약하는 연등은 전날
연등행렬에서 몸을 푼 연등으로 조계사와 우정총국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고 짧은 행군에 임한다.
햇님이 꽁무니를 뺀 시간이라 몸을 마음껏 불사르며 중생들의 환호 속에 도심을 누빈다.

연등놀이 시간이 저녁 때다 보니 시장기가 연등처럼 불타오른다. 자고로 부하들의 논공행상(論
功行賞)과 시장기는 미루지 말라는 명언이 있다.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모두 뒷탈이 나기 때문
이다. 그래서 연등놀이는 일단 관심에서 꺼두고 저녁을 먹고자 북촌(北村)으로 들어가 어느 기
와집 식당에서 떡국과 만두로 시장기를 잠재우고 슬며시 조계사로 나왔다.

시간은 어언 21시. 연등놀이 행렬은 마무리되고 거리를 달군 연등은 조계사와 우정국로 곳곳에
포진하여 중생들의 사진 모델로 다시금 바쁜 시간을 보낸다.


▲  우정국로를 장악한 긴 지느러미의 목어

▲  연등 빛깔에 황홀하게 물든 조계사의 야경

▲  극락을 향한 중생의 몸부림 ~ 반야용선(般若龍船) 연등
관음보살이 용머리 배에 중생을 태우고 고통의 바다를 헤치며
극락으로 향한다.  

▲  노루, 소나무가 그려진 연등과 윤장대(輪藏臺) 연등

▲  두광(頭光)을 두룬 다양한 모습의 관음보살 연등

▲  푸른 피부의 범종 연등

▲  종로1가(종각역4거리)를 주름잡은 연등들 ▼


♠  서울연등축제의 마무리 ~ 청계천 연등거리 (전통등 전시회)


▲  광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광장 방향)

서울 도심의 어설픈 젖줄인 청계천(淸溪川)도 서울연등축제의 일원이 되어 한참 연등빛으로 물
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은 4~5월에는 서울연등회 전통등 전시회의 현장으로, 11월에는 서울등축
제의 현장이 되는 명실상부한 천하 등축제의 성지인데, 청계천 연등은 청계광장에서 청계2가까
지로 조그만 연등이 청계천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고, 광통교(廣通橋)와 청계광장 사이에는 커
다란 등을 두둥실 띄워 연등축제의 분위기를 한층 돋구고 있다.
특히 이 땅의 불교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담은 큰 등이 여럿 있으며, 그 옆에 관련 해설을 붙여
놓았다.


▲  광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2가 방향)

▲  광통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광장 방향)

▲  광통교(사적 461호)와 석가탑(釋迦塔) 연등

청계천에 놓인 다리 가운데 제일 오래된 다리는
광통교이다. 청계천이 한양도성 가운데를 가르
며 흐르다보니 그것을 경계로 자연히 북촌(北村
)과 남촌(南村)으로 나눠졌고 이를 왕래하고자
광통교부터 영도교(永渡橋)까지 많은 다리를 놓
았다. 이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광통교와
장충단공원으로 자리를 옮긴 수표교(水標橋)가
고작이며 나머지는 모두 없어졌다.

청계천 다리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광통교
'대(大)광통교','광교(廣橋)'라 불리기도 하
며, 다리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광통방에서 비
롯되었다. 원래는 광교4거리에 있었으나 청계천
복원 때 기존 자리를 되찾지는 못하고 무교동(
무교동4거리~광교4거리 중간)에 재현되었으며,
다리 이름은 광교(광통교)지만 기존 광교4거리
와 햇갈릴 우려가 커 광통교로 거의 못박은 상
태이다.

이 다리는 청계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만큼 기구한 사연도 적지않다. 연등축제 글에 맞지 않
게 광통교 보따리를 푸는 것이 좀 그렇겠만 기왕 이곳에 왔으니 간단하게 한번 끄집어 보도록
하겠다.

광통교는 조선 태조(太祖) 때 흙과 나무로 대충 지은 나무 다리로 시작되었다. 그러다보니 홍수
때마다 거의 남아나지를 못하여 20년 가까이 도성(都城)의 우환거리로 있었는데, 태종(太宗)이
돌다리로 업그레이드시키면서 그 우환은 비로소 해소되었다. 그렇다면 다리 석재(石材)는 어디
서 충당을 했을까? 그 석재는 정릉(貞陵)의 석물을 차출하여 충당했는데, 정릉은 비록 친어머니
는 아니지만 의붓어머니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이다. 그렇다면 왜 의붓어미 능의 석물
을 불손하게도 석재로 썼을까? 이는 그들의 오랜 악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종 이방원(李芳遠)은 태조의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의 5번째 아들이다. 한씨는
정종과 이방간(李芳幹) 등 6남 2녀로 두었는데, 좋을 날을 1년 앞둔 1391년에 병사하고 말았다.
그래서 태조의 후실인 신덕왕후 강씨(1356~1396)가 자연히 부인이 되었는데 조선이 개국되면서
는 현비(賢妃)로 책봉되었다. 현비는 왕실 내명부(內命婦)의 정1품으로 거의 왕비(王妃)로 보면
되겠다.

신덕왕후는 곡산(谷山)강씨 집안으로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강윤성
은 많은 무공(武功)을 세워 중앙에 진출한 이성계(李成桂)를 높이 평가하며 강씨 집안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 딸을 그에게 시집을 보냈다. 일종의 정략 혼인인 셈이다. 이렇게 이성계
는 무려 21세 연하를 2째 부인으로 두며 개경(開京)에 머물 든든한 공간을 마련하게 된다.
강씨 집안은 토지도 넓고 재정도 풍족해 이성계는 그 덕을 톡톡히 봤다. 강씨는 이성계를 잘 내
조하며 한씨 소생의 자녀와도 가깝게 지냈고, 조선 개국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조선이 건국되자 현비로 책봉되어 사실상 조선 최초의 왕후가 되었는데, 왕의 지극한 총애를 믿
으며, 권력에 대한 숨겨진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 자신의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을 왕세자로 앉
히고자 정도전(鄭道傳)고 남은(南誾) 등, 왕의 최측근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방원 등 한씨 소생
왕자들과 갈등을 빚는다. 그러다가 1396년 8월 이방원이 소란을 일으키자 병을 얻어 죽으니 그
의 나이 40세였다.
자신의 숨통을 조이던 강씨가 죽자, 이방원과 이방간(李芳幹) 등은 기회를 엿보다가 1398년 그
유명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나라를 한참 반석 위에 올리고 있던 정도전과 남은 등을 살해
하고 강씨 소생의 이방석. 이방번 형제를 때려 죽인다. 이에 충격을 먹은 태조는 왕위를 내버리
고 함흥(咸興)으로 내려갔으며, 이방원은 2째 형을 왕위에 올리니 이가 곧 정종(靖宗)이다.

이어 1400년, 이방간이 박포(朴苞)와 함께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자신의 아우인 이방원을
공격하나 오히려 손쉽게 진압된다. 애시당초 왕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정종은 이때다 싶어 그에
게 서둘러 왕위를 넘기니 그가 바로 조선 3대 군주인 태종(太宗)이다.

드디어 꿈꾸던 왕위를 차지한 태종 이방원은 신덕왕후에 대한 증오를 풀고자 그를 후궁으로 격
하시켰고, 강씨를 왕후로 인정하는 기록을 모두 없애거나 왜곡했다. 그리고 도성 안 정동(貞洞)
에 버젓히 자리한 강씨의 정릉을 1409년 지금의 정릉동(貞陵洞)으로 추방시키고 그것으로도 모
잘라 봉분(封墳)을 훼손하고 정자각(丁字閣)을 뒤엎으며 애궂은 석물을 생매장시켰다.
그러다가 상국(上國)인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태평관(太平館)을 보수할 필요가 제기되자 태종
은 정릉에 쓰인 나무와 석재를 동원하여 태평관 보수에 사용했다. 그리고 홍수 때마다 떠내려가
말썽이 많던 광교를 돌다리로 만들기로 작정하고, 12지신상을 비롯한 정릉의 석물을 모조리 끌
어다가 광교의 석재로 사용했다.

그 이후 정릉의 존재를 영구히 은폐시킬 생각으로 수묘인(守墓人)을 두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
으며, 관료와 사대부들도 태종의 눈치로 스스로 강씨의 대한 기록을 지우고 심지어는 족보에서
도 그 존재를 지웠다. 그렇게 태종의 바램대로 강씨와 정릉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완전히 잊
혀져 간 것이다.
그러다가 선조(宣祖) 시절, 선조가 수레를 타고 행차하던 중, 신덕왕후의 후손인 강순일(康純一
)이 수레 앞에 엎드려 자신은 그의 후손이라며 군역을 면제해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그래서 변
계량(卞季良)이 쓴 문서를 참조하여 능을 다시 찾았으며 현종(顯宗) 때 송시열(宋時烈)의 건의
로 드디어 제대로 된 능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광통교는 이방원의 의붓어머니에 대한 악감정에서 태어난 존재로 그 감정의 정도를 가늠
케 한다. 정릉을 때려 부시고 그 석재로 광통교와 태평관을 손질하면서 태종은 희열이 넘치는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반면 신덕왕후는 지하에서 피눈물을 흘렸겠지.. 역사의 패배자는 어떻게
되는지를 다시 한번 몸소리치게 해주는 현장으로 강씨를 파멸시킨 승리자 태종은 후실(첩)의 소
생이 설치지 못하도록 적서(嫡庶)차별 제도를 시행하게 된다.

정릉의 희생으로 돌다리로 거듭난 광통교는 도성에서 가장 큰 다리로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숭례
문(崇禮門, 남대문)을 잇는 통로였다. 다리 주변에는 시전(市廛)이 늘어서 있었고, 숭례문을 통
해 도성 밖으로 나가는 제왕의 어가 행렬도 반드시 이곳을 건넜다. 또한 명/청나라 사신도 이
다리를 건넜다.
지금은 제자리를 떠난 수표교와 더불어
매년 정월 보름에 연날리기, 다리밟기 등의 축제가 펼쳐
졌고, 4월 초파일에는 연등행사가 열려 연등이 주렁주렁 달렸다.

영조
(英祖) 시절에 청계천을 크게 정비하면서 노원구 지역에서 돌을 운반해 광통교를 크게 손보
았으며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도심의 골치꺼리인 청계천을 생매장시키면서 수표교를 장충단공
원으로 강제로 옮겼다. 허나 광통교는 옮기지 않고 그냥 생매장을 시킨 어리석음을 범했다. 그
래서 40년 가까이 청계천 수레길 밑에 깔려 어둠의 시간을 보내다가 2003년 청계천을 밖으로 끄
집어내면서 다시 햇살을 보게 된 것이다.
긴 세월 햇살의 어루만짐을 받지 못해 많이 초췌해진 모습으로 다가온 광통교는 창덕궁과 탑골
공원 등지에 흩어진 다리의 석재를 찾아내어 복원에 활용했으며, 부족한 부분은 새로 돌을 맞추
어 끼워놓았다. 허나 기존 자리는 이미 수레의 왕래가 빈번하여 복원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기존
광교4거리에서 서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복원을 했다.

다리의 모습은 수표교와 많이 비슷하며, 조선 초기 돌다리 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인정
되어 2005년 수표교와 오간수교(五間水橋) 등 다른 돌다리 흔적과 더불어
사적 461호로 지정되
었다.
다리 기둥에는 계사년(癸巳年)에 다리를 보수했다는 글씨가 여럿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계사년
은 1413년이다. 그리고 능의 석물로 만든 탓에 다리 북쪽과 남쪽 밑에는 구름무늬가 많은데, 그
사이로 신장상(神將像)이 합장을 선보이며 단아하게 서 있고, 반면 거꾸로 박힌 인물상도 보여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 인물의 정체는 불상이라고 한다. 왜 거꾸로 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2003년 다리 복원을 대충해서 그리 되었다는 말부터 태종 시절부터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광통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광장 방향) ▼


▲  신라 문무왕 시절 문두루비법으로 당나라군을 격퇴했다는
명랑법사(明朗法師) 이야기 연등

▲  황룡사9층목탑과 원효대사 연등

▲  청게천 팔석담(八石潭)을 물들인 연등

청계천 연등거리를 유유자적하니 시간은 어느덧 23시가 넘었다. 이제 1시간만 지나면 그날은 재
생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성황리에 열린 서울연등축제도 그렇게 막을 내리고, 조계사와 봉은
사, 청계천 연등은 초파일 당일까지 불을 밝히면서 연등축제의 대미(大尾)를 잡는다. 특히 청계
천 연등(전통등 전시회)은 달 밑에서 종일 불을 밝히는 것이 아닌 자정까지만 불을 밝히며, 연
등의 위엄에 눌려 뒤로 밀려난 달은 그 이후부터 제대로 어깨를 피며 천하를 비춘다.
이렇게 하여 서울연등축제 저녁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서울연등회 연등축제장 (조계사 주변, 청계천) 찾아가기 (2014년 5월 기준)
조계사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2번 출구에서 도보 5분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에서
   도보 5분
② 청계천 연등 거리(광통교)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에서 도보 2~3분 /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2번 출구)에서 도보 3~4분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에서 도보 4~5분
* 서울연등축제 홈페이지는 바로 아랫 사진(합장인과 법륜 연등)을 클릭한다.
* 서울연등축제 청계천 연등 거리, 광통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 중구 무교동
* 조계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 02-768-8600)


▲  합장인과 법륜(法輪) 연등 (그 오른쪽에 승려가 춤을 추는 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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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4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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