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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4.19 조선 최초의 왕릉, 정릉 봄꽃 나들이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
  2. 2013.07.09 정릉 봉국사
  3. 2013.06.03 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늘씬한 숲길과 많은 보물을 간직한 고색의 절집, 정릉 경국사

조선 최초의 왕릉, 정릉 봄꽃 나들이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

조선 최초의 능, 정릉



' 정릉 봄맞이 나들이 '

정릉
▲  정릉

정릉 금천교 정릉 숲길

▲  정릉 금천교

▲  정릉 숲길

 



 

봄이 겨울 제국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어루만지던 4월의 한복판에 조선 최
초의 능인 정릉을 찾았다.
서울 장안에는 도봉산(道峯山)부터 호암산(虎巖山)에 이르기까지 봄꽃 명소들이 무지하
게 많지만 역사와 자연이 오지게 어우러진 조선시대 왕릉(정릉, 의릉, 태강릉, 선정릉,
헌인릉 등)도 봄꽃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다. 하여 간만에 왕릉 봄 산책이
나 즐길 겸, 적당한 곳을 찾다가 집에서 가까운 정릉으로 길을 잡았다. 정릉은 이미 3~
4번 인연을 지었으나 다들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  정릉(貞陵) 입문

▲  정릉 세계문화유산 표석 앞 갈림길

정릉과의 첫 인연은 중학생 시절인 1990년대 초반이다. 지금이야 이정표가 잘 되어있고 인터
넷 지도가 아주 훌륭하여 지독한 길치가 아닌 이상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우이신설선 정릉역
2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정릉 이정표가 있음) 그때는 이정표가 너무 부실하여 찾기가 어려웠
다.
하여 2번에 시도 끝에 정릉동 골짜기에서 태연하게 숨바꼭질을 즐기던 정릉을 찾아내 술래 신
세를 면하게 되었다. 그 시절 정릉은 지금처럼 입장료를 받던 공개 구역이었으나 인지도가 낮
아 탐방객은 별로 없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정릉의 존재감은 슬슬 커져갔고 탐방객도 정
비례로 늘어갔다.

정릉 정문에 이르니 매표소가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본다. 정릉이 성북구 영역이라
성북구 주민은 50%를 깎아주나 나는 도봉구 사람이라 그 혜택을 전혀 받을 수가 없어 입장료
전액을 지불하여 유료의 공간, 정릉으로 들어섰다. (도봉구는 1973년 7월 성북구에서 분리되
었음)


▲  정릉 재실 앞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2호

정릉으로 들어서니 왼쪽(남쪽)으로 재실과 보호수로 지정된 큰 느티나무가 눈짓을 보낸다. 정
릉에는 서울의 다른 조선 왕릉에는 없는 2가지가 있어 눈길을 끄는데, 바로 보호수 나무와 약
수터이다. (약수터는 지금 사라지고 없음)
보호수는 2그루가 있는데, 재실 앞 느티나무는 나이 약 380년, 나무 둘레 360cm, 높이 21m로
정릉에 있는 나무 중 가장 크고 늙었다. 4~5월에 황록색 꽃이 핀다고 하나 봄 햇살이 정릉 구
석구석을 넓게 어루만지는 4월의 한복판임에도 아직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꽃은커녕 잎
도 없다. 이미 다른 나무와 꽃들은 봄의 향연에 한참인데 말이다.


▲  정릉 재실(齋室)의 행랑 외곽 모습

재실은 정릉을 관리하는 능참봉(陵參奉)의 생활공간이자 능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대문 좌우로 창고와 하인 방, 마구간, 집사방(執事房)을 갖춘 행랑(行廊)이
나오고, 안쪽 기와문을 들어서면 제사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재실 본채가 있다.

정릉 재실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12년에 발굴조사를 벌여 2014년에
복원했다. 그러다 보니 고색은 채 여물지 못했다. 비록 복원은 되었으나 딱히 놀려두기도 뭐
하여 다례체험 등 여러 전통교육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  대문과 다양한 공간이 있는 행랑

▲  재실과 제기고로 인도하는
안쪽 기와문

▲  2칸짜리 제기고(祭器庫)
제사도구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  재실 본채
정면 6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능을 지키는 능참봉의 거처이자
영(令)이 능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  관리사무소 앞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7호

관리사무소 앞에 있는 보호수 느티나무도 앞서 보호수처럼 벌거숭이 상태이다. 추정 나이 200
년, 높이 17m, 나무 둘레 320cm로 정릉에서 2번째로 크고 늙은 나무인데, 계절 감각이 둔해진
것인지 아니면 게을러진 것인지 모르겠다. 어여 겨울에서 깨어나 봄의 향연에 동참했으면 좋
겠다. (느티나무는 5월 초까지도 벌거숭이인 경우가 있음)


▲  금천교(錦川橋)

정릉 중심부로 들어서려면 계곡에 걸린 금천교를 건너야 된다. (금천교가 아니더라고 계곡은
꼭 건너야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음)
금천교는 속세와 성역(聖域)의 경계 역할 및 능으로 인도하는 돌다리로 현종(재위 1659~1674)
시절 정릉을 손질하면서 지어졌다. 다리 좌우 끝에 석축을 다지고 그 사이에 묵직하게 돌기둥
을 세운 다음 길쭉한 통돌을 걸쳐 놓은 단출한 형태로 다리 피부에는 세월이 입혀놓은 고색의
때가 자욱하여 고풍스런 멋을 한층 올려준다.


▲  금천교 주변 계곡

조선 왕릉과 궁궐에는 금천의 역할을 하는 물줄기가 꼭 있기 마련이다. 정릉은 북악산길(북악
스카이웨이) 북쪽에서 발원한 계곡이 그 역할을 담당하여 정릉을 촉촉히 어루만지고 있는데,
정릉 중심부 북쪽을 거쳐 바깥으로 흐른다. 허나 정릉 동쪽에 빼곡히 들어찬 주택가로 능 정
문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한 채, 정릉천으로 흘러가며, 북한산(삼각산) 정릉계곡에서 나온 정
릉천 또한 정릉2동부터 어둠의 경로로 흐르다가 종암동(鍾岩洞)에서 다시 햇살을 본다.

정릉 계곡은 크기는 작지만 바위와 암반이 적당히 섞여있고 흙이 많아서 어린이들이 놀기에는
아주 좋다. 허나 문화유산인 정릉 내부이니 요란하게 노는 행위는 절대 삼가하기 바라며, 손
만 담구는 정도에서 멈춰야 될 것이다.

▲  붉은 피부의 홍살문

▲  홍살문 옆에 닦여진 배위(拜位)

금천교를 건너면 길은 오른쪽으로 급하게 꺾인다. (정면 길로 가면 관리사무소) 그 길을 들어
서면 쌀쌀맞게 생긴 붉은색 홍살문이 나타나 나그네로 하여금 절대 엄숙을 강조한다. 그는 왕
릉과 관아, 향교, 왕족과 사대부의 사당과 묘역 등 권력과 관련된 곳에 세우는 비싼 존재로
그를 들어서면 비로소 정릉 중심부에 이르게 된다.

홍살문 옆에는 돌로 다져진 네모난 배위<판위(板位)>가 누워있다. 이곳은 정릉을 찾은 제왕이
능 주인에게 절을 하는 곳으로 보통 4번 절을 했으며, 이를 국궁사배(鞠躬四拜)라고 한다. 현
재는 정릉 제향일에만 반짝 쓰이고 있어 꽤 한가해졌다.

그럼 여기서 잠시 정릉과 이곳 주인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정릉 정자각 주변 (수라간, 수복방 등)

정릉은 서울의 영원한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으로 정릉2동 서쪽 골짜기에 넓
게 누워있다. 능역(陵域) 동쪽과 남쪽은 정릉2동 주택가와 맞닿아있고, 북쪽은 정릉의 원찰(
願刹)이었던 봉국사(奉國寺, ☞ 관련글 보기) 남쪽에 이르며, 서쪽은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
이)과 정릉3동에 닿는다.
주택가와 매우 가깝지만 겉보기와 다르게 깊은 산골로 짙은 숲을 지니고 있으며 조촐한 계곡
과 그림 같은 숲길, 그리고 늙은 보호수도 2그루를 지녔다.

정릉의 주인은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1396)이다. 고종(高宗)
이 1897년 황제 위에 오르면서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높여졌으며, 태조는 태조고황제(太
祖高皇后)로 올려졌다. (정릉 안내문에는 '신덕고황후'라 나와있음)

신덕왕후 강씨(이하 강씨)는 곡산강씨(또는 신천강씨) 집안으로 판삼사사(判三司使) 강윤성(
康允成)의 딸이다. 강씨의 숙부인 강윤충(康允忠)은 이성계의 큰아버지인 이자흥(李子興)의
사위로 두 집안은 제법 가까웠는데, 드넓은 동북면(東北面, 함경도와 길림성, 연해주 지역)
지역을 장악했던 이성계(李成桂)가 고려 조정에 출사하면서 강씨를 2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그때 강씨는 이성계보다 약 20살 정도 연하였다고 한다. (에구 부러워라~~)

이성계와 강씨의 첫 만남 설화는 꽤 유명한데 내용은 이렇다.
어느 평화로운 날, 사냥에 나섰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아리따
운 여인이 있었는데(아마 빨래를 했던 모양임) 그에게 물 한 바가지를 청하니 여인이 바가지
에 물을 담아 버들잎 하나를 물 위에 띄워주었다. 이성계는 이상하여 이유를 물으니
'급하게 마시면 탈이 날까봐 천천히 드시라고 그랬습니다'
답을 했다.
그 말에 이성계는 무한 감동을 먹었고, 마침 여인의 미모도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던 터
라 그녀를 2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것이다.

허나 로맨틱한 설화와 달리 강윤성은 이성계의 미래를 크게 보고 딸과의 혼인을 적극 추진했
고, 이성계 또한 개경(開京)에 마땅한 기반이 없는 상태라 사돈관계에 있고 개경 귀족들과 두
루 가까웠던 강씨 일가의 힘이 필요했다. 즉 두 집안과의 결속 강화와 미래에 대한 투자 차원
에서 혼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성계는 개경에 있을 때 강씨 집에 머물렀다. 그가 요동반도에 있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
군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강씨는 포천 철현(鐵峴)에 있는 전장(田莊)에 머물렀고, 만약을
대비해 동북면과 가까운 이천(伊川)의 한충(韓忠)집으로 거처를 옮겨 상황을 지켜보았다.
1392년 3월, 이성계가 해주(海州)에서 말을 타다가 떨어져 크게 다치자 정몽주(鄭夢周)는 이
때다 싶어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강씨는 이방원(李芳遠)을 급히 해주로 보내 이성계를 개경
으로 오게 했으며, 이방원이 조영규(趙英珪)를 보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를 살해하자
이성계가 크게 노발대발한 것을 강씨가 무마시켰다. 이렇듯 강씨는 이성계를 힘껏 도와 조선
개국을 이끌어냈으며, 이성계의 첫 부인인 한씨가 조선 건국 1년을 앞두고 세상을 뜨자 조선
의 첫 왕후<현비(顯妃)>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  비각에서 바라본 정릉 능침(陵寢)

강씨는 태조와의 사이에서 경순공주(敬順公主, ?~1407)와 무안대군 이방번(撫安大君 李芳蕃,
1381~1398), 의안대군 이방석(宜安大君 李芳碩, 1382~1398)을 두었다. 그녀는 권력욕이 너무
커서 태조의 최측근인 정도전(鄭道傳)과 연합해 태조를 설득하여 장남도 아닌 막내 이방석을
왕세자(王世子)에 앉히게 했다.
이렇게 후처 소생의 차남을 세자로 책봉하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제대로 뚜껑이 열렸다. 하
여 그들은 이방원<정안대군(靖安大君)>을 중심으로 강씨와 정도전 세력과 팽팽히 대립하게 된
다.

1396년 음력 8월 13일 강씨는 40대의 한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태조는 크게 애통하여 도성
한복판에 능을 쓰게 하고 능호(陵號)를 정릉, 존호(尊號)를 신덕이라 했으며, 개국공신들의
건의로 공신수능제(功臣守陵制)를 받아들여 개국공신 이서(李舒)에게 능 지킴이를 맡겼다.
또한 정릉 곁에 원찰인 흥천사(興天寺)를 크게 지어 매일 같이 찾아가 명복을 빌었으며, 흥천
사의 아침 종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아침 수라를 들었다. 그때 정릉은 덕수궁(경운궁) 북쪽에
닦여진 것으로 여겨지며, 정릉 때문에 정동(貞洞)이란 지명이 생겨났다.

1398년 정도전이 크게 방심한 틈을 노려서 이방간(李芳幹)과 이방원이 난을 일으켰다. 궁궐을
접수한 그들은 이복 동생인 이방번, 이방석 형제와 경순공주의 남편을 처단했고, 형제의 맏이
인 이방과(李芳果, 정종)를 왕위에 올렸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1차 왕자의 난이다. (경순공
주는 이후 비구니가 되었음)
그리고 1400년 이방간의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이방원은 형 이방과의 왕위를 물려받아 꿈에
그리던 옥좌(玉座)를 차지하게 된다.

이방원은 의붓어머니 강씨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태조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크게
정릉을 건드리지 않았으나 1406년 정릉이 너무 넓다는 의견이 있어 정릉 100보 밖까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때 하륜(河崙) 등 권력가들이 너도나도 정릉 숲에서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니 그것이 정릉 수난의 시작이었다.
1408년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바로 이빨을 드러내며, 정릉 탄압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1409년 의정부(議政府)는 왕의 비위를 맞추고자 정릉이 도성 안에 있는 것이 말이 안되며 명
나라 사신이 묵는 숙소와 가까워 도성 밖으로 옮겨야 된다고 하였다. 굳이 그런 것이 아니더
라도 도성 한복판에 능이 넓게 자리한 것도 솔직히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태종은 의정부의 갸륵한 뜻을 받아들여 정릉을 도성 밖 사을한(沙乙閑)곡으로 추방시켰고, 능
의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지기 바쁜 광통교(廣通橋)를 돌다리로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동원했다. 이는 단순히 광통교 복구가 아닌 백성들이 정릉 석물을 밟고 지나가게 하
여 강씨를 길이길이 욕보이고자 함이었다. 또한 정자각과 일부 석물을 소환하여 태평관(太平
館, 명나라 사신의 숙소)을 짓는데 썼으며, 봉분을 깎아 무덤임을 알아볼 수 없게 하고 석인
(石人)은 생매장시켰다.

능의 제례 또한 폐지되고 봄, 가을 중월제(中月祭)로 격하시켰으며, 서모(庶母)의 기신제(忌
晨祭)의 예에 따라 삼품관이 제사를 지내게 했다. 또한 후궁으로 격하시켜 후궁의 예로 제를
올리게 하였다. 강씨가 지하에서 크게 통곡을 했는지 능이 파괴되던 날, 폭우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 울음 소리가 들렸다고 전한다.


▲  수라간에서 바라본 정릉 능침과 소전대(燒錢臺, 밑에 보이는 석물)

태종 사후로도 정릉의 고통은 계속되었고 정릉의 존재는 속세의 뇌리 속에서 거의 잊혀져 갔
다. 겨우 후손들이 살짝살짝 제사를 챙겼을 뿐이다.
그러다가 1581년 강씨의 후손인 강순일(康純一)이 선조(宣祖) 임금이 행차하는 수레 앞에 나
가 엎드리면서
'소인은 판삼사사 강윤성의 후손입니다. 지금 군역에 배정되어 있으니 국묘(國墓)에 봉사(奉
祀)하는 사람들의 군역을 면제하는 전례에 따라 면제시켜 주십시요'
하소연했다. 즉 정릉을
지키고 있으니 군역 면제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거의 잊혀졌던 정릉의 존재감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때 삼사(三司)에서는
신덕왕후의 시호와 존호, 정릉을 회복하자는 의견을 올렸으나 수용되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계
속 논의를 벌이다가 송시열(宋時烈)에 의해 싹 마무리가 되었다.
송시열은 태종의 잘못된 조치로 정릉이 고통을 당했음을 바로 말하기가 애매해 그 시절 신하
들의 실수로 그렇게 되었다고 돌려 말하며, 정릉과 흥천사기문(興天寺記文)이 있음을 지적하
여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현종은 그의 뜻을 받아들여 1669년 태조의 왕후로 인정하여 종묘(宗廟)에 봉안했으며, 순원현
경(順元顯敬)이란 시호를 올리고 능을 복구했다.
이때 정릉에서 강씨의 넋도 달랠 겸, 성대하게 제를 지냈는데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내려서
사람들은 이를 두고 '강씨의 원한을 씻는 비'라고 하였다.

정릉 석물은 17세기 후반 것들이나 4각형 장명등(長明燈)과 혼유석(魂遊石)을 받치는 고석(鼓
石) 2개, 그리고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는 옛 정릉 것들이다. 즉 14세기 후반 것들로 조선 왕
릉에 설치된 석물 중 가장 늙은 존재들이 된다. 그리고 정자각과 비각 등은 모두 17세기 이후
것들이다.

태조를 도와 조선 건국을 이끌어냈던 강씨, 허나 지나친 권력욕으로 끝내 자식을 잃고, 남편
의 말로를 비참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자신의 묘까지 태웠으니 인생무상, 권력무상이 따로 없
다. 왕후가 되면서 거기서 딱 절제를 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그게 안되었던 것이다. 물론 한씨
소생의 왕자(이방원, 이방과 등)들이 자신의 소생들을 지켜준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방원 형제
들과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나마 똘똘했던 막내를 세자로 세워 자식들의 불투명한 미래
를 지켜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궁궐은 그만큼 무서운 곳이니 말이다.
허나 강씨와 그의 친자식들은 결국 패배자가 되어 오랫동안 고통을 당해왔으니 역사의 패배자
가 어찌된다는 것을 아주 몸서리치게 보여준다.

정릉은 중구 정동의 지명 유래가 되기도 했지만 이곳 정릉동의 유래도 된다. 그래서 2개의 지
명이 정릉으로 인해 생겨났다.



 

♠  정릉 중심부

▲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향로(香路)와 어로(御路)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박석이 입혀진 향로와 어로가 닦여져 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참
도(參道)라고 하는데, 어로는 제왕이 걷는 길이며, 왼쪽에 조금 높은 향로<신도(神道)>는 제
향 때 향과 축문(祝文)을 들고 가는 길이다.
이곳 참도는 중간에서 'ㄱ'자로 90도 꺾이는데, 이는 지형 탓으로 정자각 정면에서 금천까지
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직선으로 홍살문을 두기에는 좀 비좁아 보인다. 하여 나름 융통성
을 발휘한 것이다.


▲  정자각(丁字閣)

참도의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정자각이 있다. 싹둑 잘 다듬은 돌로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는데 그 모습이 '丁'처럼 생겨서 정자각이란 쉬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정자각은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제왕은 좌측 계단으로 올라가 제사를 치르고 반대쪽 우측 계
단으로 내려갔다. 건물 안에는 제향에 쓰이는 여러 상(床)들이 있는데, 거의 황색 피부를 지
니고 있다. 황색은 황제와 황후를 상징하는 색깔로 고종이 신덕왕후를 신덕고황후로 높이면서
제사상의 피부 색깔도 변하였다.

▲  신좌(神坐)
신, 즉 정릉의 주인이 제향 때 머무는
추상적인 자리이다.

▲  관세상(盥洗床)
제관이 손 씻을 물을 올려놓는 상이다.
여기서 관은 대야를 뜻한다.

▲  제물을 올려놓는 상
(정자각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

▲  정자각 좌측 계단
왼쪽 계단은 정릉 주인의 혼과 참배를 온
제왕이, 그리고 오른쪽 계단은 신하와
아랫 사람들이 이용했다.


▲  수복방(守僕房)
정자각을 중심으로 좌측에 수복방과 비각이, 우측에는 수라간이 있다.
수복방은 능을 지키는 수복(守僕)이 근무하는 건물로
2칸짜리 맞배지붕 집이다.

▲  정릉 비각
정릉의 주인을 알려주는 비석의 거처이다.

▲  정릉 비석
'대한(大韓) 신덕고황후 정릉'이라 쓰여있다.

     ◀  수복방과 마주보고 있는 수라간
수복방과 비슷한 2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제
향 때 제사 음식을 데우거나 손질하던 곳이다.
터만 아련하게 있던 것을 근래 복원하여 채워
넣었다.

능침 밑부분에 소전대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가 있다. 소전대란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오
로지 이곳 정릉과 태종의 헌릉(獻陵),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에만 있는 희귀한 존재이다. 태
종 이후, 소전대가 사라지고 '예감'이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정릉 소전대는 정릉이 이곳으로 추방되면서 같이 왔는데 오랫동안 정릉약수터 주변에 찌그러
져 있던 것을 정릉관리소 김용욱 소장이 발견하여 고증을 통해 이곳에 두었다. 정릉을 옮기는
과정에서 태종의 지시로 능 주변에 두지 않고 고의로 계곡에 처박아둔 것으로 여겨진다.
정릉의 한낱 석물에게까지 화풀이를 한 태종, 그만큼 의붓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컸던 것이며,
정릉이란 존재 자체도 그야말로 눈에 가시와 같았다.


▲  확대해서 바라본 정릉 능침

소나무숲에 감싸인 정릉 능침에는 커다란 봉분(封墳)을 중심으로 문인석 1쌍, 망주석(望柱石)
1쌍, 장명등 1기, 혼유석, 여러 석호와 석양이 배치되어 있다. 이중 장명등은 고려 양식을 이
은 14세기 후반 것이며,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 2개도 옛 정릉 출신이다.
예전에는 능 옆구리까지 접근이 가능했으나 이제는 통제구역으로 묶여 능침 자체를 올라갈 수
없다.


▲  정릉 북쪽 산책로에서 만난 넓적한 바위 (바위 이름은 없음)

▲  봄이 깊어가는 정릉 북쪽 산책로

정릉의 젖줄인 계곡(금천)을 따라 그림 같은 산책로가 서쪽으로 이어져 있다. 이 길을 쫓아가
면 정릉 주변을 도는 2.5km의 숲길이 펼쳐지니 정릉 중심부만 살피지 말고 꼭 1바퀴 둘러보기
바란다. 즉 정릉 외곽을 도는 것으로 산책로 안팎이 모두 정릉 능역(陵域)이다.


▲  생태계가 살아있는 정릉 계곡(금천)

▲  봄 속으로 인도하는 산책로
따뜻한 기운이 소리 없이 내리면서 푸른 잎과 온갖 꽃들이 기지개를 켠다.
그런 봄에 물들고 싶어서 저 속으로 나를 숨기러 간다.



 

♠  정릉 산책로 돌기

▲  정릉 북쪽 산책로 (정릉 정자각 계곡 건너편)

정릉 숲길은 정릉 중심부와 맞닿은 북쪽 산책로만 평지이고 나머지는 모두 산길이다. 능이 첩
첩한 산골에 묻혀있기 때문에 숲길을 거닐다 보면 자연히 약간의 등산도 하게 된다. 허나 경
사가 그리 각박하지 않고 길이 잘 닦여져 있어서 두 다리만 멀쩡하면 어린이와 노인도 거뜬히
1바퀴 돈다.


▲  정릉 북쪽 산책로 (옛 정릉약수터 주변)

▲  이제는 과거가 되버린 정릉약수터(정심약수터)

정릉 서쪽에는 정릉약수터가 있었다.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약수터까지 갖
추고 있던 정릉에서 특별히 맛볼 수 있는 자연산 수분으로 물이 졸졸 알아서 나오는 약수가
아니라서 직접 챙겨 먹어야 된다. 능 제사에 쓰이는 물은 모두 여기서 가져왔으며, 정릉2동
사람들이 많이 물을 떠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음)


▲  서남쪽으로 꺾이는 정릉 산책로

▲  봄꽃의 마지막 물놀이 현장 (정릉 계곡)
4월 초를 짧게 주름잡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훔쳐갔던 벚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계곡에서 생애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계곡은
저들의 인생을 정리하는 조그만 블랙홀인 모양이다.

▲  정릉 서쪽 숲길

▲  산길로 변한 정릉 서쪽 숲길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전까지는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  산길로 변한 정릉 서쪽 숲길

▲  지그재그 율동을 부리는 정릉 서쪽 숲길

▲  동그란 석축에 뿌리를 내린 벚꽃나무 (정릉 서남쪽 숲길)

▲  정릉 서남쪽 숲길 ①

▲  정릉 서남쪽 숲길 ②

정릉 서남쪽 끝에는 서울의 대표 지붕길인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이 흐르고 있다. 정릉에
는 북악산길을 향해 2개의 소방문을 내고 있는데 이들은 업무와 비상용 문이라 관람객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 하여 둘이 맞닿아 있음에도 철책을 사이에 두고 서로 금지된 땅 보듯 해야
된다. 현재 정릉은 정문으로만 통행이 가능하여 무조건 그곳으로 오가야 되는데, 북악산길도
서울의 주요 꿀명소인만큼 비상용문 하나를 따고 매표소를 두어 서로 왕래가 가능하게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정릉~북악산길~성북동(길상사, 삼청각, 간송미술관 등)/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부암동/북한산(삼각산)'으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나들이/도보 코스가 만들어진다.

서울시청과 성북구청, 문화재청 철밥통들은 거지 같은 탁상행정으로 세금이나 빼먹지 말고 저
런 것들도 적극 검토해 추진해주었으면 좋겠다.


▲  북악산길(오른쪽)과 맞닿은 정릉 서남쪽 숲길 ①
북악산길을 지나는 차량들의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린다.

▲  북악산길(왼쪽)과 맞닿은 정릉 서남쪽 숲길 ②
북악산길을 코앞에 두고 입맛만 다셔야 되니 은근히 아쉽기만 하다.
서로를 잇는 것이 천하통일만큼이나 어려운 것일까?

▲  정릉 남쪽 숲길 ①
북악산길까지 올라온 숲길은 다시 내리막으로 변신한다.

▲  정릉 남쪽 숲길 ②

▲  정릉 남쪽 숲길 ③

▲  정릉 능침 바로 윗쪽 쉼터

정릉 남쪽 숲길은 중간에 3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서쪽)으로 가면 앞서 서쪽 숲길로 빠
지며, 오른쪽(동쪽)으로 가면 정릉 정문, 그리고 직진(북쪽)하면 위와 같은 쉼터가 나온다.
허나 그 쉼터는 막다른 곳으로 다시 갈림길로 나와야 된다. 허나 쉼터 주변으로 철책이 없어
서 자칫 숲으로 막 내려갈 수도 있는데 여기서 북쪽 숲으로 내려가면 바로 정릉 능침이다. 능
침 주변은 금지된 구역이니 굶주린 공비들처럼 숲을 막 헤집고 들어가서는 안된다. 그냥 쉼터
에서 얌전히 쉬다가 갈림길로 그냥 사라져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  정릉 남쪽 숲길에서 서쪽 숲길을 잇는 사잇길

갈림길에서 바로 정문으로 내려가기는 다소 아쉬워서 서쪽 숲길로 향하는 사잇길로 우회해서
갔다. 정릉 북쪽 산책로를 거쳐 정릉 정문을 나오면서 2시간에 걸쳐 아주 여유롭게 진행된 정
릉 봄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 정릉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산 87-16 (아리랑로 19길 116, ☎ 02-914-5133)
* 정릉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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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 봉국사

* 정릉 봉국사 - 북한산 남쪽 정릉동에 자리한 봉국사는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가 창건하여 약사사라 했다고 전한다.

조선 현종 때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복원하고

다시 제를 지냄으로써 인근 경국사와 함께 정릉의 원찰로 삼았는데,

이때 봉국사로 이름을 갈았다.

 

* 벼랑에 자리한 독성각

* 천불전과 성북구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된 느티나무

 

* 봉국사의 법당인 만월보전 - 조선 후기 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 범종루와 천왕문 (2층은 범종루, 1층은 천왕문)

 

 

* 일주문의 뒷모습

 

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늘씬한 숲길과 많은 보물을 간직한 고색의 절집, 정릉 경국사

 


' 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정릉 경국사(慶國寺)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경국사 숲길


올해도 변치않고 찾아온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을 맞이하여 설레는 마음을 다독
이며 순례(巡禮)를 가장한 초파일 절 나들이에 나섰다.
우선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미답(未踏)의 절을 하나라도 지우고자 수유리에 있는 본원정사(本
願精舍, ☞ 관련글 보러가기)를 둘러보고 맛있는 점심 공양으로 배를 두둑히 충전한 다음 정릉
동(貞陵洞)에 있는 경국사로 발길을 향했다.

본원정사에서 경국사까지는 10리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임에도 차편이 시원치가 못하다. 그래서
절 인근에서 바퀴를 돌리는 강북구 마을버스 02번(본원정사↔수유역)을 타고 일단 화계사(華溪
寺)로 나왔다. 화계사는 봉은사(奉恩寺)와 조계사(曹溪寺), 도선사(道詵寺), 진관사(津寬寺)와
더불어 서울 굴지의 사찰이라 폭풍처럼 몰려드는 사람과 수레로 그야말로 대혼돈이었다.
수레들로 완전 마비가 된 화계사입구(한신대)4거리를 간신히 뚫고 화계사종점으로 이동해 서울
시내버스 152번(화계사↔경인교대,삼막사4거리)을 타고 길음역에서 143번 시내버스(정릉↔개포
동)로 환승하여 경국사(정릉4동 주민센터)에 두발을 내린다
(152번을 타고 삼각산동SK아파트 반대편 정류장에서 1166번으로 환승하면 바로 정릉4동으로 넘
어갈 수 있으나 배차간격이 20~30분임;;)

버스에서 내려 북쪽(북한산 방면)을 바라보면 경국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 지시에 따
라 왼쪽 길로 들어서면 정릉천에 걸린 극락교가 나오는데, 그 다리를 건너면 조그만 주차장과
함께 일주문이 모습을 비춘다. 앞서 둘러본 본원정사는 초파일 대목이라 사람들이 무지 많았는
데, 경국사는 오늘이 초파일인지 물음표를 던질 정도로 한산했다.


▲  속세와 경국사를 이어주는 유일한 다리 극락교(極樂橋)

▲  경국사와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정릉천(貞陵川)

북한산 정릉계곡에서 발원해 큰 세상으로 흘러가는 정릉천은 가뭄의 갈증에 신음하고 있다. 하
천의 물은 누가 죄다 마셨는지 온데간데 없고 돌과 모래만이 가득해 속세처럼 황량하기만 하다.
무게가 아리송한 번뇌를 정릉천에 쿨하게 내던지고 싶은데 액체는 커녕 고체만 보이고 있으니
아무리 던져봐야 소용도 없을 것 같다, (물론 던져도 마찬가지)


♠  경국사 숲길에서 번뇌를 훌훌 털다

▲  경국사 일주문(一柱門)

극락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향하면 바로 눈앞에 경국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한다. 문이 바로
코앞에서 나를 뚫어지라 굽어보니 안그래도 큰 문이 더욱 장대하게 보여 단단히 주눅을 들게 만
든다. 돌로 만든 굵직한 기둥에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섬세하게 새겨
져 있어 문의 위엄을 더욱
돋구고 있으며, 지붕 밑에는 '삼각산 경국사'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
어 이곳의 정체를 밝힌다.

  극락교 가설기념비(架設記念碑)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있다.


▲  경국사의 싱그러운 보물, 경국사 숲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산내음이 진동하는 푸른 숲길이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경국사의 첫
이미지를 긍정으로 인도하고 속세에서 오염된 안구에 한줄기 감동을 선사하는 이 숲길은 이곳의
자랑이자 싱그러운 보물로 비록 거리는 짧으나 서울에 있는 숲길 중의 갑(甲)으로 쳐주고 싶다.
이 숲길은 300년 묵은 소나무까지 100m 정도 곧게 펼쳐져 있고 거기서 서쪽으로 100도 정도 꺾
여 경내로 이어진다. 숲길의 길바닥은 다행히 콘크리트로 밀지 않고 박석(薄石)을 깔아 숲길의
운치를 전혀 해치지 않았다. (흙길이었으면 더 좋으련만..)

숲길에 들어서니 속세(俗世)에서 오염되고 피로감에 찌든 두 눈이 싹 정화되면서 단단히 호강을
누린다. 하늘로 늘씬하게 솟아 하늘과 해를 가린 나무들이 저마다의 빼어난 자태를 뽐내며 앞다
투어 갖은 청정한 기운을 베푸니 머리와 마음마저 어느 정도 정리되는 것 같다. 경국사가 경내
를 앞에 두고 이런 멋드러진 숲길을 내민 것은 극락교와 일주문에서도 살아남은 번뇌와 속세의
기운을 자연의 힘에 의지해 모두 털고 경내에 임하라는 뜻이다.

▲  정처가 없는 내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 경국사 숲길
집으로 몰래 가져와 나 혼자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숲길이다. 허나 조물주가 아닌 이상
그건 불가능하니 사진으로 대신 품으련다. 이 숲길은 봄도 아름답지만 나무들이
처절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늦가을이 단연 백미(白眉)이다.


▲  300년 묵은 소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11호

숲길이 서쪽으로 100도 구부러지는 곳에 숲길의 최고 고참인 소나무가 있다. 나이가 무려 300년
이 넘었다는 오래된 나무로 몸매도 매우 준수하여 키가 무려 20m를 넘는다. 제아무리 잘난 인간
이나 4발 수레도 그의 앞에서는 거의 개미에 불과하다.

하늘을 떠받들며 숲길을 다스리는 이 나무는 매우 지극한 나이임에도 그 흔한 보호수 등급이 아
닌 겨우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등급에 머물러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편
의상 지정하는 등급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 싶겠지만 서울에서는 100~150년이 넘는 나무 가운데
지방기념물 이상의 지위를 가지지 못한 나무들은 거의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300년
이면 100% 보호수로 지정되고도 남을 연세인데 그에 상응하는 적당한 등급을 매겨야 되지 않을
까 싶다. 소나무 앞에는 수레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다.


♠  경국사를 빛낸 큰 승려의 승탑을 만나다

▲  승탑(僧塔)과 탑비들의 보금자리

소나무 북쪽에는 승탑 2기와 비석(碑石) 3기로 이루어진 너른 공간이 있다. 다들 고색의 때가
얇은 존재로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냥 지나치기 쉽다. 허나 이들 승탑은 우리나라 현
대 불교 발전에 크게 빛을 선사한 승려 2명의 사리탑으로 경국사에서도 매우 비중이 큰 인물들
이다. 그러니 한번 더듬고 가길 권한다.
비석 가운데 가장 왼쪽에 있는 큰 존재가 경국사의 오랜 내력이 담긴 사적비(事蹟碑)로 1995년
에 지관이 만든 것이다.


▲  자운대율사 계주원명사리탑(戒珠圓明舍利塔)

모난 넓은 기단 위에 마치 범종(梵鍾)이 그대로 돌로 굳어버린 듯한 모습의 석종형 승탑은 자
운대율사(慈雲大律師, 1911~1992)의 사리탑으로 탑 이름은 계주원명사리탑이다.

자운대율사는 왜정(倭政) 이후 계율을 무시하고 아내를 맞이해 가정을 꾸리며, 심지어 고기까지
먹는 등, 불교가 타락의 끝으로 추락하는 모습에 크게 발끈하여 불교 중흥과 율풍(律風) 진작에
팔을 걷어부쳤다.
그는 1940년부터 서울 도심에 있는 대각사(大覺寺)에 머물며 율장과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매
일 도시락을 싸들며 국립중앙도서관을 들락거렸다. 그래서 만속장경(卍續藏經)에 수록된 오부율
장(五部律藏)과 그 주소(註疏)를 모두 필사해 연구했으며, 1948년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처
음으로 보살계(菩薩戒) 수계법회를 열었다.

1949년에는 천화율원 감로계단(千華律院 甘露戒壇)을 설치해 대각사에서 범망경(梵網經), 사미
율의(沙彌律儀), 사미니율의(沙彌尼律儀), 비구계본(比丘戒本) 등의 간행을 준비했으나 6.25전
쟁으로 모두 분실하고 만다. 허나 이에 굴하지 않고 부산에서 다시 율문(律文)을 준비하여 한문
본(漢文本) 25,000권을 포함해 총 48,000권을 간행해 불교의 법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1981년부터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에 추대되어 1991년까지 많은 승려에게 계를
주었으며, 1992년 2월 7일 해인사(海印寺)의 부속암자인 홍제암(弘濟庵)에서 바쁘게 살아온 삶
을 마무리 지었다.
자운이 세상을 뜨자 그와 인연이 있던 경국사에서 그의 승탑을 만들었는데, 2년 동안 공을 들여
2005년에 완성을 보았다. 승탑은 그의 명성과 업적에 걸맞도록 특별하게 계단형(戒壇形)으로 만
들어 두고두고 그의 업적을 기린다.

자운대율사 사리탑 뒤쪽에 자리한 고운 맵시의 승탑은 보경보현대종사(寶鏡普賢大宗師)의 사리
탑으로 정토사지(淨土寺址)에 있던 고려시대 승탑인 홍법국사실상탑(弘法國師實相塔)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승탑 바로 옆에 자리한 보경의 행적비는 1991년 지관이 찬(撰)을 하고
세운 것으로 그의 일대기가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보경은 1916년 이곳 주지가 되어 60여 년 동안 경국사를 꾸린 인물로 교학(敎學)과 선지(禪智)
를 두루 익혔고, 계율에도 무지 철저해 승가의 귀감이 되었다. 특히 불화(佛畵)를 잘 그려 화승
(畵僧)으로도 널리 활동을 했는데, 경국사의 불화 상당수는 그의 손길에서 탄생한 것이다.


▲  펼쳐진 책 모양의 불교대사림(佛敎大辭林) 편찬발원문

불교대사림(불교대사전)은 지관이 오랫동안 추진한 편찬 사업으로 10여 권을 편찬했다. 이 발원
문은 지관이 정성을 들여 작성한 것인데, 그 내용에서 그의 지성이 제대로 우러나온다.


▲  경국사 샘터
자연이 내린 샘물의 보금자리로 깊이가 좀 있어서 바가지를 들고 한참 팔을
뻗어야 물에 닿는다. 샘터 위에는 광배(光背)를 갖춘 조그만 석불입상 3개가
있고, 그 뒤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 쓰인 표석 3개가 나란히 자리한다.

▲  경내로 인도하는 오르막 숲길 (샘터 주변)

◀  보리수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12호
 (나무 너머로 보이는 건물은 관음성전)

주차장에서 서쪽으로 휘어진 오르막길을 오르면
숲속에 숨겨진 경국사가 모습을 비춘다.
경내 앞에는 넓은 공터가 펼쳐져 있는데, 초파
일 행사가 막 끝났는지 천막과 의자로 어수선하
다. 공양밥도 바로 여기서 제공했는데, 본원정
사에서 공양을 먹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지
만 다시 시장기가 밀려와 공양 여부를 물어보니
벌써 마감되었다고 그런다.

이곳에는 3갈래로 솟은 커다란 나무가 있는데,
그는 불교에서 매우 중요시 여기는 보리수나무
이다. 나이는 200년에 이른다고 하며, 앞에 소
나무처럼 보호수 등급도 아닌 성북구의 아름다
운 나무 등급에 머물러 있다. 서울에 거의 흔치
않은 오래된 보리수인데도 말이다.


♠  경국사 관음성전(觀音聖殿)

▲  관음성전의 정면
담장 너머 윗쪽이 관음성전, 천막이 있는 밑쪽이 공양간이다.


▲  관음성전의 뒷모습

보리수나무 뜨락에서 관음성전 좌우로 나있는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경내에 이르는데, 가장 먼
저 중생을 반기는 건물은 보리수나무를 바라보고 선 관음성전이다. 이 건물은 흔히 말하는 관음
전(觀音殿)으로 이 절은 유난히 '聖'과 '寶' 돌림을 좋아하는지, 그 글자가 첨가된 건물이 많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관음성전은 옛 무량수각(無量壽閣) 자리에 2000년대에 새로 지은 'ㄷ'모양
의 건물로 관음보살의 거처이다. 건물이 워낙 넓어 큰방이라 불리기도 하며, 법회와 강의 장소
로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밑에는 넓게 자리를 파고 공양간으로 삼으면서 졸지에 2층이 되
버렸다.

관음성전 정면에는 불당에서 흔치 않은 툇마루가 있어 두 다리를 잠시 쉬어갈 수 있으며, 연병
장처럼 넓은 건물 안에는 목관음보살좌상과 아미타후불탱, 감로도 등의 여러 탱화를 비롯해 중
생들의 시주로 만들어진 무수한 원불(願佛)이 일제히 금빛 물결을 이루며 내부를 장엄한다. 또
한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쓴 '화엄회(華嚴會)', '법화회(法華會)' 현판과 이
승만이 쓴 '경국사' 현판이 걸려있다.


▲  관음성전의 중심부

▲  경국사 목관음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8호

관음성전 불단에는 이 건물의 주인인 관음보살좌상이 자리해 있다. 어린 동자승이 관음보살 누
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의 보관(寶冠)과 복장, 장식물을 슬쩍 착용한 것일까? 아니면
잠시 관음보살 체험을 하는 것일까?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해맑고 천진난만하다. 게다가 덩치도
쥐방울만하니 귀여움도 가득 묻어나 나도 모르게 쓱쓱 쓰다듬고 싶다.

이 불상은 원래 경국사 것이 아니었다. 1703년 전남 영암 도갑사(道岬寺)에서 조성된 것으로 도
갑사의 부속암자인 견성암(見性庵)에 있었다. 청신(淸信)이 화주가 되어 만든 것으로 어찌어찌
하여 서울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는데,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다. 덕분에 경국사의 오랜 문화유
산이 하나 더 늘었으니 경국사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지, 그가 경국사에 들어온 이후에는 한동안
극락보전 우측에 있던 것을 관음성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불상의 높이는 60cm에 조그만 크기로 그의 뱃속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에 따르면 색난(色難
)을 수조각승(首彫刻僧), 순경(順瓊)을 부조각승으로 하여 행원(幸垣), 대원(碓遠), 일기(一機),
대유(大裕) 등이 같이 조성했다고 한다. 색난은 조선 후기에 호남지역에서 활약한 불상 전문 승
려이다.

앳된 표정이 묻어난 얼굴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데,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으며, 눈은 살
짝 뜨고 있는 것 같다. 코는 끝이 오똑하고, 입은 굳게 다물고 있으며, 머리에는 화려하면서 신
라 금관(金冠)처럼 무거워 보이는 보관을 썼는데, 귀 옆까지 관대자락이 내려와 보관의 수려함
을 더욱 드높인다. 그런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삐죽 나와있는데, 이마 중간에는 백호가
찍혀 있으며, 볼살은 두툼하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신체는 그런데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작은 어깨에는 법의(法衣)가 걸쳐져 있는데, 목 뒷부분
이 약간 접혀있고, 법의의 왼쪽은 어깨를 완전히 가리고 어깨부터 무릎까지 내려오면서 무릎 위
에 놓인 왼손을 손목부분까지 완전히 덮고 있다. 그리고 법의 오른쪽은 어깨를 덮은 뒤 오른쪽
팔꿈치 아래로 하여 배 부근으로 내려가 왼쪽에서 내려온 법의 안쪽으로 여며진 모습이다. 이런
착의법은 넓게 트인 가슴과 수평 혹은 연꽃형의 군의 표현과 함께 조선 후기 불상의 가장 전형
적인 모습이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고 첫째 손가락과 3째 손가락을 마주잡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에 대고 그
의 필수품인 정병(政柄)을 살짝 쥐고 있다. 앉은 폼은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오른쪽 발이 훤히
드러나 있으며, 무릎 앞쪽으로는 옷자락이 물결치듯이 좌우로 유려하게 흘러내렸다.

조선 후기 목조보살상의 양식을 잘 드러낸 불상으로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혔으며, 그의 뒤에
는 아미타불이 중심이 된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한 후광이 되어준다. 이 후불탱은 1924년에 보경
이 그린 것이다.


▲  경국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1호

관음성전 우측 벽에는 고색의 기운이 제법 넘치는 매우 복잡한 그림이 하나 있다. 이 그림은 죽
은 이의 극락왕생을 염원하고자 만든 감로도로 19세기 중/후반에 서울,경기 지역에서 크게 유행
한 감로왕도(甘露王圖)의 하나이다.
그림을 보면 밑부분은 극락왕생을 못해 방황하는 영가(靈駕, 죽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 중간
에는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이 있다. 그리고 가장 윗쪽에는 극락으로 들어간 영가의 환
희가 담겨져 있다.

무수히 많은 인물의 표현과 생동감있는 자세 연출로 조금의 공백도 허용치 않고 알차게 채우고
있으며, 서울,경기와 강원도에서 활동했던 화승(畵僧)인 축연과 철유가 상궁(尙宮)들의 시주로
1887년경에 그린 것으로 왕실의 불화 발원 사례를 잘 보여준다. 조선이 비록 대내외적으로는 불
교를 배척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적지 않게 불교를 옆구리에 낀 것이다. 특히 19세기부터 1910년
이전까지 상궁은 물론 왕비와 후궁의 시주로 그려진 불화가 서울과 경기도 사찰에 상당히 존재
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경국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자칫하면 그냥 넘어갈 뻔 했다.

★ 정릉의 원찰이자 현대 불교의 큰 승려들이 주석했던 북한산 경국사(慶國寺)
북한산(삼각산)의 제일 남쪽, 정릉천을 낀 숲속에 둥지를 튼 경국사는 1325년(고려 충숙왕 12년
)에 자정율사(慈淨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절 위치가 북한산 청봉(靑峰) 밑이라 절 이
름을 청암사(靑岩寺)라 했으며, 1330년 무기(無奇)가 이곳에 머물러 천태종(天台宗)의 교풍을
크게 떨치고, 1331년에는 채홍철(蔡洪哲, 1262~1340)이 절을 증축해 승려들의 수행을 도왔다고
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공식적인 기록이나 유물이 없어 신빙성은 떨어지며, 명부전에 있는 요나라에
서 넘어왔다는 철조관음보살좌상이 경내의 유일한 고려 때 유물이다. 하지만 고려 때는 절이 우
후죽순 들어서던 시기라 그 시류를 타고 고려 후기에 문을 열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조선이 들어서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서서히 기울다가 결국 중종(中宗) 시절에 풍비
박산이 나고 터만 남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545년(인종 원년) 왕실의 도움으로 쓰러진 절을
일으켜 세웠고, 1546년에는 조선의 여제(女帝)로 악명을 날린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지원에 힘
입어 크게 중창을 벌였다. 이때 문정왕후에 잘보이고자 부처의 가호로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을
기원하는 뜻에서 경국사(慶國寺)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1669년(현종 10년) 오랫동안 잊혀지고 철저히 파괴된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
씨의 능인 정릉(貞陵)이 복원되자 근처에 있던 봉국사(奉國寺, 국민대 근처)와 흥천사(興天寺,
관련글 보러가기)와 함께 정릉을 지키는 원찰이 되었다. 이때 경국사로 이름을 갈았을 가능
성도 있다. 어쨌든 정릉의 원찰(願刹)이 되어 망할 일은 없게 된 경국사는 이후 탄탄대로를 누
비게 된다.

1698년 연화승성(蓮華昇城)이 절을 중수하고 천태성전(天台聖殿)을 세웠다. 천태성전은 독성각
의 다른 이름으로 당시의 상량문이 남아있다. 1737년에는 낙암의눌(洛巖義訥)이 주지로 부임하
여 절을 손질했고, 1793년에는 천봉태흘(天峰泰屹)이 크게 중수했다.
1855년에는 예봉평신(禮峰平信)이 법당을 다시 세웠고, 1864년에는 고종(高宗)의 즉위를 축하하
는 재를 열어 왕실에 더욱 굽신거렸다. 그리고 1868년에 칠성각과 산신각을 새로 짓고 호국대법
회를 열었는데 이때 왕실에서 범종(梵鍾)을 하사했다. 1870년에는 큰방을 수리했다.

1878년에는 함홍치능(涵弘致能)이 고종의 지원으로 요사를 중수하고, 철종의 왕비인 철인왕후(
哲仁王后) 김씨의 49재를 지냈으며, 1887년에는 석찬(碩讚) 등이 팔상도(八相圖)와 지장시왕도,
신중도, 현왕도, 감로도 등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어둠의 시절에는 기송석찰(其松錫察)이 1914년에 극락보전을 다시 세웠고, 1917년 정릉천에 반
야교를 놓았다. 1921년부터는 그 유명한 보경(寶鏡)이 주지로 머물면서 절을 크게 일으켜 세웠
는데, 그는 직접 건물에 단청을 입히고 큰방에 아미타후불탱과 구품탱 등을 그렸으며, 1930년에
는 영산전과 산신각, 큰방을 중수하고, 1936년에는 영산전에 석가모니후불탱과 신중탱, 18나한
탱 4폭, 범종을 조성했다. 그리고 1939년에는 삼성보전에 약사탱, 칠성탱을 봉안했다.

6.25전쟁 이후에는 이승만 전대통령이 이곳에 들렸는데, 보경의 인격에 크게 감동을 먹어 참다
운 승가(僧伽)의 모범이 이곳에 있다면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인연으로 경국사의 단골이
되어 여러 차례 보경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1953년 11월 닉슨 미국 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
하자 이승만이 한국문화의 참모습이 경국사에 있으니 한번 가자며 그를 끌고 오기도 했다. 이때
닉슨은 경국사에서 참배했던 경험이 한국 방문 일정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밝히며 경국사
를 단단히 추켜세우기도 했다.

보경이 사라진 이후, 현대의 큰 승려로 일컬어지는 지관(智冠)이 주지로 머물면서 관음전과 삼
성보전, 영산전, 산신각, 환희당 등 대부분의 건물을 중수해 경국사를 더욱 반석 위에 올렸다.
또한 1989년에는 극락보전을 크게 넓혔으며, 1991년에 보경의 행적비를 세웠다. 이후 사적비를
세우고, 삼성보전과 관음성전을 새로 만들었으며, 자운의 부도인 계주원명사리탑을 세웠다.
최근에는 2012년 1월 지관이 입적하면서 그의 사리를 공개했는데, 이때 많은 중생이 몰려와 그
를 애도하며 사리를 친견했다.

북한산(삼각산)에 안겨있다고는 하지만 거의 주택가에 둘러싸인 형태로 다행히 절 주변이 수목
들로 삼삼해 심산유곡의 산사에 파묻힌 기분이다. 또한 정릉천이 바로 앞에 흘러 속세와 적당히
경계를 이루며, 도심 속의 조그만 오아시스처럼 포근하고 그윽하기만 하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다. 그때는 학생이라 그런지 수상한 짓도 안했음에
도 승려가 나가라고 성을 냈다. 당시의 기억 때문에 경국사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는데, 그래도
뭔가 끌렸는지 이듬해 초파일에 다시 찾은 적이 있다. 허나 또 쓸데없는 잔소리를 들을까 겁이
나 관음성전 앞에서 발길을 돌렸고, 이후 2004년 초파일에 다시 찾아 경내를 둘러보았다. 그때
까지만해도 일주문 앞에 외지인은 들어오지 말라는 차가운 푯말이 있었다.
수행도량의 명성을 누리는 것은 좋으나 대신 외지인에게는 배타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이
유명한 곳도 아니고 관광지도 아니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허나 그런 경국사도 지정문화유산
이 늘어나고 점차 이름이 드러나 답사객의 발길이 조금씩 늘면서 외지인에 대한 배타적인 마음
도 조금은 허물어진 듯 싶다.

청정한 승가의 본가임을 자처하는 이곳에는 극락보전과 관음성전, 삼성보전, 무우정사, 명부전,
영산전, 산신각 등 10여 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을 비롯해 팔상도(八相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2호), 괘불도(
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4호) 등 지방문화재 6점을 간직하고 있다. (괘불도와 팔상도는
관람이 어려움) 그외에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철조관음보살좌상과 보경이 그린 여러 불
화 등이 전한다.
건물들은 죄다 근래에 새로 손질하여 고색의 멋은 없지만 그 속에는 많은 문화유산들이 고색의
기운을 피우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해준다.

※ 경국사 찾아가기 (2013년 5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길음역(3번 출구)에서 110, 143번 시내버스나 성북06번 마을버스를 타고 경국사
  (정릉4동주민센터) 하차, 성북06번은 크게 돌아간다.
*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62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과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1020번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3동 753 (☎ 02-914-5447)


♠  경국사 극락보전(極樂寶殿) 주변

▲  경국사 극락보전

경국사의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관음성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있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이 건물은 뜨락보다 한 3m 높은 기단(基壇) 위에 자리해 있
어 자못 웅대해 보이는데, 198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한 것이며, 한때는 건물 앞쪽에 1칸
정도 보태어 공간을 넓혔으나 나중에 철거했다.

법당 앞에는 으례 있어야 될 석탑이나 석등은 없고, 그냥 빈 뜨락만 있으며, 그 좌우로 명부전
과 종무소, 삼성보전 등이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  화려하게 속살을 비춘 극락보전 불단과 닫집
극락보전 속에 또다른 건물인 닫집(불단 위에 떠 있는 붉은 피부의 장식물)에는 하늘을
나는 극락조와 공작, 백학과 여의주를 문 2마리의 용, 그리고 연꽃봉오리가 조각되어
극락세계를 장엄하게 재현한다. 저런 극락이라면 한번은 가볼만하지 않겠는가?

▲  경국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 보물 748호

극락보전 불단에는 눈을 매우 부담스럽게 만드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하 목각탱)과 조그만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3존불은 근래에 만든 거지만 그 뒤에 든든하게 자리한 목
각탱은 경국사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며 자랑하는 이곳의 제일 가는 보물이자 이곳 최초의 지
정문화재로 서울에 거의 유일한 조선 후기 후불목각탱이다.

이 목각탱은 나무를 조각하여 금색을 입힌 것으로 겉으로 보면 꽤 복잡해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구조는 단순하다. 탱화 중앙에는 극락전의 주인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가 두손을 무릎에 댄
이른바 설법인(說法印)을 취하고 있는데, 앙련(仰蓮)이 새겨진 여러 층으로 된 대좌(臺座)에 앉
아있다. 그런데 탱화의 주인공임에도 그를 둘러싼 인물들보다 덩치가 작아 귀여운 인상을 풍긴
다. 그래도 그들과 달리 주형광배(舟形光背)를 달아주어 그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고, 광배의
위,아래가 비슷한 폭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양식이다. 또한 광배 안에는 연꽃을 새기
고 일정한 너비의 주연(周緣), 밖으로는 화염(火焰) 무늬를 생겼는데, 그 무늬는 위로 솟구치고
있고, 그 안쪽에 조그만 불상이 4구 정도 있다. (눈에 잘 띄지는 않음)
 
아미타여래의 옷무늬는 통식(通式)으로 조선시대 양식이며, 그의 좌우에는 아미타8대보살을 각
각 4명씩 배치했다. 그들 가운데 지장보살을 제외히고 모두 가지각색의 보관(寶冠)을 쓰고 연꽃
을 들고 있으며, 앙련 위에 앉아있다. 그 밑의 좌우 끝에는 사천왕(四天王)의 하나인 증장천왕
(增長天王)과 지국천왕(持國天王)을 배치해 아미타불의 호위를 부탁했고, 보살들 바깥 좌우에는
나한상(羅漢像) 1구씩 두었다.

탱화의 양식으로 보아 18세기 중반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몇 안되는 조선 후기 목각
탱화이자 서울에 거의 유일한 고색의 목각탱화로 그 가치는 대단하다.


▲  경국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3호

극락보전 좌측 벽에는 호법신장(護法神將)들이 빼곡히 그려진 신중도가 자리해 있다. 이 그림은
1887년 상궁들의 시주로 혜산 축연(惠山 竺演) 등이 조성한 것으로 중앙에는 동진보살(童眞菩薩
)과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이 있고, 그 좌우에 명왕(明王)와 신장(神將) 등이 배치되어 있
다. 이들은 인도의 토속신으로 범천은 무려 힌두교의 창조신인데, 불교에서 이들을 모두 영입해
부처의 세계를 지키는 신장으로 꾸몄다. 특이한 것은 산신(山神)과 조왕신(竈王神) 등 우리나라
의 토속신이 위태천(韋太天)의 협시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극락보전을 서성이고 있으니 마침 아줌마 보살이 부처에게 봉양한 길쭉한 떡을 가져와 중생들에
게 나눠준다. 나도 하나 먹었는데, 부처를 거쳐서 온 떡이라 그런지 맛이 좀 다른 거 같다.


▲  삼성보전(三聖寶殿)과 범종각이 하나가 된 현장

극락보전 좌측에는 삼성보전과 범종을 비롯한 사물(四物)을 담은 범종각이 하나가 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삼성보전은 산신과 독성, 칠성을 봉안한 삼성각(三聖閣)의 다른 명칭으로 생각했다. 허나 이곳
은 전혀 엉뚱하게도 약사여래(藥師如來)을 중심으로 미륵불(彌勒佛), 치성광여래(칠성)를 협시
로 배치한 약사3존불을 봉안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명부전 뒤에 산신각과 천태성전을 두면서
산신과 독성을 그곳으로 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빈 자리에 약사여래와 미륵불을 배치했고 따
로 거처가 없는 칠성(七星)만 이곳에 두어 약사여래의 협시로 삼았다.

하얀 피부의 약사3존불 뒤와 좌우에는 1939년에 보경이 그린 약사회탱과 칠성탱, 미륵탱이 뒤를
받쳐준다.

▲  삼성보전 내부 (가운데가 약사회탱,
왼쪽이 미륵탱, 오른쪽이 칠성탱)

▲  관음성전 북쪽에 자리한 종무소 겸
요사(寮舍)


▲  극락보전 뜨락에 마련된 관불(灌佛) 의식의 현장

관불 현장에는 곱게 차려입은 아줌마 신도가 자리를 지키며 의식을 도와주기 마련인데, 여기는
셀프서비스인 모양이다. 각자 알아서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아기부처에게 부어주면 된다.
1년 만에 외출을 나와 한참 초파일 환희(歡喜)에 잠긴 그도 저물어가는 해가 무척 아쉬울 것이
다. 오늘이 가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로 들어가 1년을 갇혀야 되니 말이다.


♠  경국사 명부전, 영산전 주변

▲  북쪽을 바라보는 명부전(冥府殿)

극락보전 우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조촐한 건물 내부
에는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위해 헌신하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하여 시왕(十王)과 판관 등 명부(
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지장시왕도와 사자탱, 시왕탱 등이 걸려있고.

좌측에는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의 철조관음보살좌상이 있다.


▲  명부전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과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0호

푸른 머리의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서 있다.
이들은 보경이 흙으로 직접 빚어서 만든 것으로 그들 뒤에 든든하게 자리한 그림이 지방문화재
로 지정된 지장시왕도이다.
이 그림은 1870년에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에 있는 지장시왕도를 참고 삼아
혜산 축연(惠山 竺
演)이 그린 것이다. 혜산은 구한말에 강원도와 서울,경기에서 활동하던 화승으로 서울에는 흥천
사와 경국사를 비롯해 그의 불화 20여 점이 전한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릴 때 수화사(首畵師)로
활동하면서 불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림을 보면 선악동자를 함께 그린 전형적인 지장시왕도 형식으로 유난히 가늘고 긴 눈과 아주
작은 입 등 얼굴 한 가운데로 몰려있는 이목구비, 좁은 미간, 눈 주위와 코/뺨 부분에 음영을
표현해 얼굴의 골격을 강조한 점은 다른 지역의 불화와 구별되는 서울,경기 지역 조선 후기 불
화의 특징이다.


▲  명부전 우측의 시왕상과 시왕탱

▲  명부전 좌측의 시왕상과 시왕탱, 철조관음보살좌상

지장보살상 불단 좌우에는 죽은 이를 심판하는 저승의 10왕이 각각 5왕씩 앉아있다. 복장은 다
비슷하지만 손짓이나 얼굴,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은 서로 다르다. 그들 뒤에는 시왕탱이 있는데,
역시 1왕당 1폭씩 배치하여 총 10폭을 이룬다.

명부전 좌측 벽에는 앉아있는 모습의 커다란 철불(鐵佛)이 있는데, 여기서는 철조관음보살좌상
이라 불린다.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11세기에 거란족의 나라인 요(遼)나라에서 조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요나라의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는 않으나 고려와 조선의 불상과는 확연히 차
이를 보이고 있어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것은 확실하며, 언제 무슨 일로 여기까지 들어왔는지는
자세한 사연이 없어 모르겠다.
 
의자에 사람처럼 앉아있는 이 불상은 성인 남자 키 정도 되는데, 얼굴은 그냥 무표정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는데, 손가락에는 특이하게 반지가 끼여져 있다. 적의
(翟衣) 형태의 옷에는 용과 새, 사자 등이 새겨져 있고 보관에는 모란꽃무늬를 매우 정교하게
나타냈다. 그리고 정병(政柄)까지 새겨져 있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여겨지나 정병은 근래
에 손질한 것이라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허나 경국사에서는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시
절부터 관음보살로 받들고 있어 한때 관음전에 있기도 했으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임에
도 아직까지 지정문화재 등급을 얻지 못하고 있다.


▲  가운데 문을 열어둔 경국사 영산전(靈山殿)

명부전에서 서쪽으로 난 계단길을 오르면 부처와 그의 열성제자 나한들의 공간인 영산전이 모습
을 비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말에 지어진 것을 1930년에 보경이 중
수했다. 어칸 위에 달린 영산전 현판은 해강 김규진이 쓴 것으로 필체가 무척 돋보인다.


▲  영산전 석가3존불과 석가모니후불탱

현란한 보관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거느린 석가불의 표정이 후덕해 보
인다. 이들 3존불은 보경이 흙으로 직접 빚어서 도금을 입힌 것으로 뒤에 있는 석가모니후불탱
은 1935년에 그가 그린 것이다. 주지승이 직접 불상을 만들고 불화를 그리는 경우는 흔치 않은
데 그림과 조형에 능한 보경이 주지로 있으면서 불상을 조성하고 그림까지 그리니 제작 비용은
크게 절약되었을 것이다.

▲  영산전 18나한상과 18나한탱. 신중도

▲  영산전 18나한상과 18나한탱

영산전 석가3존불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제자인 나한상(羅漢像)과 나한탱이 배열되어 있다. 하얀
피부의 나한상은 좌우에 각각 9개씩 18나한을 이루고 있는데, 16나한은 지겹도록 봤지만 18나한
은 생소하다. 경국사를 찾은 중생처럼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그들 뒤에는 나한탱이 2폭씩, 4
폭이 자리해 있는데, 나한과 동자가 어울려 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보경이 만든 것으로 왼쪽에 1폭은 1966년에 다시 그렸고, 우측 벽 구석에 있는 신
중탱은 1966년에 제작된 것이다.


♠  경국사 마무리

▲  경국사 산신각(山神閣)
극락보전 뒷쪽 언덕에서 경내를 굽어보고 있는 산신각은 산신(山神)을 봉안한
공간으로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촐한 건물이다.

▲  산신각 산신탱

소나무와 산을 배경으로 한 산신탱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童子) 등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진
하게 우러나온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그곳에 꿀단지나 아리따운 처자
라도 있는 것일까? 보는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다. 이 그림은 1980년에 덕문(德文)이 조성한 것
으로 그 앞에 산신의 탈을 쓴 애기 같은 산신상은 근래에 봉안된 것이다.


▲  담장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천태성전(天台聖殿)

산신각, 영산전보다 1단계 더 높은 곳에 천태성전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건물로 보통은 산신각이나 삼성각이 제일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데 반해 이곳은 천태성전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건물 이름이 조금 낯설긴 하지만 천태(天台)란 이름에서 이미 답은 나왔다.
바로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이다.

독성의 거처는 독성각(獨聖閣)이란 흔한 이름을 쓰지만 북한산 진관사(津寬寺)의 독성전(獨聖殿
)이나 삼천사(三千寺)의 천태각처럼 다른 이름을 쓰기도 하며, 경국사는 그의 거처를 크게 높여
천태성전이라 부른다.

경내의 다른 건물과 달리 담장을 두르고 있어 특별한 이미지를 선사하지만 담장 안에 담긴 천태
성전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건물이다.


▲  담장을 두룬 천태성전

▲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
독성탱은 1980년에 덕문이 조성한 것으로 그 앞에 있는 독성상은 근래에 봉안했다.

▲  무우정사로 인도하는 문수원(文殊院) 기와문

▲  무우정사(無憂精舍)와 3층석탑

종무소에서 해우소(解憂所)로 가다보면 종무소 바로 뒷쪽에 무우정사가 있다. 문수원이란 현판
을 인 기와문을 들어서면 극락보전 앞에도 없는 3층석탑이 나오는데, 그 탑을 중심으로 북쪽에
는 무우정사가 있고, 탑 좌우로 승려들이 생활하는 요사가 좁은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다소 고급 분위기가 풍기는 무우정사는 주지승이 거주하는 건물로 가운데 칸이 반칸 정도 앞뒤
로 삐죽나와 '十'모양의 구조를 이룬다. 지관이 설계하고 지은 것으로 현관에는 금강반야대(金
剛般若臺)란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뜨락에 자리한 3층석탑은 석가탑(釋迦塔)을 그대로 모방
하여 맵시가 고운데, 경국사의 유일한 석탑으로 근래에 만든 것이다. 왜 극락보전을 놔두고 이
곳에 탑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법당보다 주지승의 거처가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무
우정사 주변을 문수원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중생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참고로 무우정사의 무우(無憂)는 무우수(無憂樹)에서 유래된 말로 아수가수(阿輸迦樹)를 한자로
번역한 이름이다. 부처는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 밑에서 태어났고 과거 1불인 비바시불도 이 나
무 아래에서 성도(成道)했다고 하며, 보리수와 더불어 불교에서 소중히 여기는 나무이다.


▲  경국사를 뒤로하며

오랜만에 발을 들인 경국사를 1시간 반 정도 누비며 문화유산도 괘불도와 팔상도를 빼고는 모두
눈에 넣었다.
경국사를 둘러보고 속세로 나갈 때까지 절을 찾은 중생의 수는 앞서 본원정사보다 훨씬 적었다.
사람은 거의 2~3분 간격으로 꾸준히 들어오긴 했지만 그 수가 적었던 것이다. 흥이 나고 사람들
로 만원을 이루는 초파일 분위기도 좋지만 너무 번잡한 것도 그리 좋지는 않다. 이곳 초파일 분
위기는 기대치에 절반도 안되는 수준이었지만 대신 그리 번잡하지가 않아 울창한 숲에 묻힌 산
사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제대로 누려서 좋았고 사진을 찍으며 살피기에도 크게 곤란하진 않았다.

이렇게 하여 석가탄신일 경국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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