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7.05.08 푸른 동해바다를 거닐다. 부산 기장 봄나들이 ~~~ (죽성리왜성, 죽성항, 황학대, 죽성성당, 장어구이 1접시)
  2. 2016.06.17 임진왜란의 쓰라린 흔적, 울산 서생포왜성 (진하해변)
  3. 2013.07.18 바다와 해송,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해안 경승지, 부산 몰운대 (다대포해변)

푸른 동해바다를 거닐다. 부산 기장 봄나들이 ~~~ (죽성리왜성, 죽성항, 황학대, 죽성성당, 장어구이 1접시)

 


' 부산 기장 동해바다 나들이 (기장 죽성리 일대) '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리와 동해바다
(정면에 큰 나무가 죽성리해송)

▲  죽성리왜성

▲  죽성리 월전포구


 

 

지루했던 겨울이 저물고 봄이 완전히 천하를 접수했던 4월의 한복판에 겨울로부터 해방된
기분도 만끽할 겸, 그리운 얼굴도 보고자 간만에 부산을 찾았다.
부산(釜山)은 이 땅의 2번째 대도시이자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로 북쪽은 울산 울주군(蔚
州郡), 서쪽은 경남 창원과 김해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동쪽은 너른 동해바다를 품고 있
으며, 남쪽은 바다 건너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는 큰 지역이다.

부산으로 내려가던 중, 잠시 대구에서 발길을 멈추고 팔공산(八公山)에 안긴 파계사(把溪
寺)와 성전암(聖殿庵)을 둘러보며 산사(山寺)의 봄 풍경을 즐겼다. (☞ 관련글 보러가기)
그런 다음 동대구 고속터미널에서 고속버스로 부산으로 내려가 광안동(廣安洞)에 있는 친
한 형님 집에 문을 두드렸다.

저녁을 먹고자 광안리 해변 인근을 거닐다가 소금구이 닭갈비집이 눈에 띄어 그곳에 자리
를 피고 닭갈비에 소주를 여러 잔 걸치며 간만에 회포를 풀었다. 물론 1차로 끝나면 섭하
지. 하여 집으로 돌아와 2차를 하며 다음날 나들이 장소를 모의하다가 새벽 1시에 꿈나라
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부시시 잠에서 깨니 벌써 9시였다. 그
날 일정은 다소 길기 때문에 잠에서 벗어나기 싫은 게으른 몸을 억지로 끌며 세수를 하고
10시에 광안동을 나섰다. 광안역 정류장에 이르니 그의 후배 하나가 합류하여 3명이서 기
장군(機張郡) 동해바다 나들이를 떠나게 되었다.

광안역에서 부산시내버스 39번(기장읍 교리↔용호동)을 타고 수영로터리, 해운대, 송정역
, 청강리를 지나 기장읍내 한복판에 자리한 기장지구대에서 내렸다. 그런 다음 건너편 정
류장에서 죽성리로 가는 기장군 마을버스 6번을 기다리니 5분도 안되어 버스가 나타나 활
짝 입을 벌린다.
주말 나들이 수요로 조그만 마을버스는 바퀴가 가라앉을 정도로 만석을 이루었다. 우리는
재빨리 탑승하여 앉아갈 수 있었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입석 신세를 면치 못할 뻔했다. 비
록 죽성리까지 10분 정도 거리에 불과하지만 서서 가는 것은 애나 어른이나 힘든 것은 마
찬가지이다.
버스는 시간이 되자 읍내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몸을 움직였다. 죽성사거리와 기장
군청 남쪽 고개, 신천리를 지나 죽성초교에서 두 발을 내리니 바로 남쪽 언덕에 우리의 1
번째 목적지인 죽성리 해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6그루가 합심하여 하나의 거대한 나무를 이룬 오래된 소나무
죽성리해송(竹城里海松) - 부산 지방기념물 50호

▲  죽성리해송의 위엄

죽성리 두호마을 서쪽에는 얕으막한 언덕이 푸른 초원처럼 누워있다. 대부분 경작지가 이루어
진 그 언덕 정상에는 유난히도 초록 빛을 발하는 장대한 소나무가 동대해(東大海)를 굽어보고
있으니 그 나무가 바로 이곳의 오랜 명물인 죽성리 해송이다.

죽성리 해송은 소나무의 일종인 곰솔로 줄기 껍질이 다른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黑松)
이라 불리기도 하며, 바닷가 소나무란 뜻의 해송(海松)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곰솔은 남쪽
바닷가에서 많이 자라고 있는데 소금기가 서린 짠 바닷바람에도 잘 견딘다.
이 나무는 겉으로 보면 1그루로 보이지만 6그루의 나무가 한 지붕을 이룬 것으로 높이 약 10m,
나무 지름이 30~40m에 달한다. 나이는 250~300년 정도로 여겨지며 언덕에 있는 경작지를 바닷
바람의 핍박으로부터 보호하고자 심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곰솔 가족은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
며 서로를 보듬고 있으며, 거의 하나의 나무처럼 자라고 있어 안내문을 살피지 않으면 정말 1
그루의 나무로 오인하기 쉽다.
나무의 키가 훤칠하게 크고 덩치도 제법 있으며, 반경 0.5리 이내에는 키 큰 나무도 거의 없어
세상 중심에 서 있는 큰 나무처럼 웅장함을 진하게 풍긴다. 그리고 나무의 자태도 아름답고 바
다가 바라보이는 언덕 정상에 자리해 있어 사진쟁이와 그림쟁이들이 많이 찾는다.

해송의 그늘로 들어서면 나무들 사이로 조그만 당집인 국수당이 끼여있다. 나무가 제법 풍채를
드러내며 자라나자 마을 사람들이 나무 사이에 당집을 만들어 마을 성황신을 모시는 국수당으
로 삼았는데,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제물을 푸짐하게 차리고 풍어제(風魚祭)를 지낸다. 이 땅
의 어느 마을이든 마을의 안녕을 책임지는 당집이 있지만 나무 사이에 당집을 둔 경우는 별로
없다.

* 죽성리해송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249


▲  죽성리해송에서 바라본 죽성리 두호마을과 동대해

▲  해송 밑에 둥지를 틀어 마을을 지키는 국수당(성황당)
태극 문양이 그려진 국수당은 풍어제 등 당제(堂祭) 외에는 굳게 닫혀져 있다.
나무 밑도리 사이에 당집이 깃든 흔치 않은 곳으로 당집 좌우에는
돌로 벽을 만들어 내부를 보호한다.

▲  솔잎과 솔방울, 거기에 장대한 세월의 무게까지 듬뿍 더해져 가지가
거의 땅으로 내려 앉았다. <철기둥을 세워 가지가 땅에 완전히
주저앉지 않도록 막고 있음>

▲  죽성리해송 인근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기장 미역
기장은 미역이 유명하다. 이렇게 해송 인근에 널어두었으니 해송의 기운도
양념으로 듬뿍 더해져 더욱 최상품으로 끌어올려줄 것이다.


 

  죽성리에서 만난 임진왜란의 쓰라린 흔적
죽성리왜성(竹城里倭城) - 부산 지방기념물 48호

▲  죽성리해송에서 바라본 죽성리왜성 (산꼭대기에 보이는 성)

죽성리해송에서 서쪽(바다와 반대쪽)을 보면 높다란 언덕 위로 성곽 하나가 손에 잡힐 듯 가까
이에 보일 것이다. 그 성곽이 바로 임진왜란이 이곳에 남긴 쓰라린 흔적, 죽성리왜성이다.

해송에서 정겨운 시골길을 5분 정도 가면 왜성을 품은 언덕 밑에 이른다. 이곳에는 주차장, 해
우소가 있는데, 여기서 성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을 타고 2~3분 오르면 왜성의 아랫도리에 이
른다. 계단은 답사 편의를 위해 기장군에서 닦은 것으로 계단 옆에 흙길이 나란히 이어져 있으
니 개인 취향대로 움직이면 된다.
왜성 아랫도리에서 조금 더 오르면 왜성의 중심부이고, 중심부 서남쪽에 왜성 꼭대기가 있는데,
그곳에는 왜성의 본부라 할 수 있는 천수대(天守臺)터가 있다. 천수대의 모습은 왜열도 오사까
성(大阪城)에 있는 푸른 지붕을 지닌 큰 기와집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죽성리왜성은 1593년 봄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왜군과 지역 주민을 동원해 쌓은 순수
100%의 왜성(倭城)이다. 한참 북진을 하며 세를 과시하던 왜군은 1593년에 접어들어 조선의 대
대적인 토벌 작전과 왜열도에서는 맛보기 힘든 강추위로 고전하면서 순식간에 울산과 기장, 부
산, 창원 등 경상도 해안 지역으로 밀려났다.
더 이상 밀려나기 싫었던 왜군은 바다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과 언덕에 성을 쌓고 자기 집 마냥
들어앉아 장기전을 준비했다. 그들이 해안가 언덕을 선호한 것은 수비력 강화와 서로 간의 긴
밀한 연락 및 병력/군수물자 수송 편의, 그리고 위급시 신속히 줄행랑을 치고자 함이다.

이 왜성은 죽성리 뒤쪽 언덕에 자리해 있는데,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과 부산왜성 중간에 자
리해 서로를 연결하였다. 성 둘레는 약 960m, 성벽 높이 4m로 3단으로 축성되었으며, 성내(城
內) 면적은 11,776평 정도로 왜성 가운데 큰 편에 속한다. 장방형(長方形)의 크고 작은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벽은 안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진 이른바 들여쌓기 공법이다. 이 공법은 천하
제일의 축성술(築城術)을 자랑했던 고구려(高句麗)의 축성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부산왜성과 형태가 비슷하며, 왜열도에서는 기장성(機張城)이라 부른다. 지금도
왜열도에서 많이 답사를 온다고 하는데, 1598년 왜군이 도망친 이후 성이 버려지면서 천수대와
성문, 주요 시설이 사라졌고, 마을 사람들이 밭을 일구거나 집을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
다. 허나 성곽은 쓸데없이 잘 남아있어 왜성 가운데 건강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한때 사적 52호의 외람되는 지위를 누리기도 했으나 1997년 사적에서 정리되어 버려졌다가 부
산시에서 지방기념물로 수습해 죽성리해송, 죽성성당, 죽성리 해변과 한 덩어리로 묶어 기장군
의 주요 명소로 키우고 있다.

왜성 주변은 상당수 경작지로 쓰이고 있으며, 왜성 북쪽과 계단이 있는 남쪽에는 소나무가 조
금 우거져 마치 양쪽에만 머리숱이 조금 있는 대머리를 보는 듯 하다.


▲  죽성리왜성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
계단 주변은 유난히 소나무가 무성하여 이 땅을 요란하게 거치고 간 아픈 과거를
조금이나마 덮어주는 듯 하다. 그런다고 그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  풀이 잔잔히 돋아난 죽성리왜성의 아랫부분

▲  약간 비스듬히 누운 죽성리왜성의 본성(本城)

▲  왜성 외곽에서 본성으로 이어지던 성문터
왜성은 작은 산이나 언덕에 짧게 몇 겹으로 두룬 덩어리 같은 형태라 딱히
긴 성이 없다. 그나마 서생포왜성이 좀 긴 편에 속한다.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항과 두호마을
저 포구에 배를 정박해 주변 왜성과 수시로 연락을 취하며 병력과 물자를
수송했고 끝내는 저곳을 통해 줄행랑까지 쳤다.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리
평화로운 어촌 풍경에 속세에서 오염된 안구와 마음이 정화되는 듯 하다.
바닷가에 죽성리 두호마을과 월전마을(사진 오른쪽)이 형성되어 있고,
마을과 포구 주변에는 경작지가 많아 나무가 별로 없다.

▲  왜성 성곽에 뿌리를 내린 나무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애타게 열망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  왜성의 중심인 본환(本丸, 본성)

▲  연병장처럼 넓은 본환 - 잡초가 잔잔히 녹색 물결을 이룬다.

▲  죽성리왜성 서쪽에 길게 누운 봉대산(烽臺山) 북쪽 자락

죽성리왜성은 계곡이 없는 낮은 언덕에 자리해 있어 물이 나오는 곳이 없다. 왜성 서쪽에 있는
봉대산에서 식수를 운반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군이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후방이라 물 수송에
는 그리 어려움은 없었다. <봉대산에는 봉수대(烽燧臺)가 있었음>

▲  본환의 서북쪽 성곽

▲  북쪽에서 바라본 본환 내부


▲  죽성리왜성의 꼭대기인 천수대(天守臺)터

왜성 정상부에 자리한 천수대는 왜장이 자고, 먹고, 부하들을 지휘하던 공간으로 사방이 확 트
여 조망(眺望)도 일품이다. 천수대의 모습은 왜열도 오사까성이나 구마모토성 천수각의 축소판
으로 보면 될 듯 싶다. 지금은 풀만 무성하나 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자리했을 천수대의 모습이
자못 대단했을 것이며, 조선군의 공격 가능성이 적은 후방이라 왜장은 무척 편하게 지냈을 것
이다. (조선군이 서생포왜성을 점령해야 이곳을 마음 편히 공격할 수 있었음)

※ 죽성리해송, 죽성리왜성 찾아가기 (2017년 4월 기준)
① 부산시내에서 기장읍까지
* 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1/7번 출구)에서 39, 181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181번
  은 해동용궁사, 대변으로 다소 돌아감)
* 지하철 2호선 장산역(5/7번 출구 사이)에서 182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30~40
  분 간격)
* 지하철 4호선 안평역(4번 출구)에서 36, 183, 188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183,
  188번을 탔을 경우 기장중학교, 기장성당에서 내려도 됨)
* 부산대병원(1호선 토성역 9번 출구), 남포동, 부산역, 경성대 부경대역(1번 출구)에서 1003
  번 급행좌석버스를 타고 기장성당이나 기장지구대 하차
* 동해선 전철(부전↔일광)이나 동해남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기장역에서 하차, 1번 출구
  를 나와서 4분 정도 걸으면 기장중학교 정류장이다.
② 기장에서 죽성리까지
* 기장지구대, 기장중교(기장역 1번 출구), 기장성당에서 기장군 마을버스 6번(20~40분 간격)을
  타고 죽성초교 하차, 해송까지는 도보 5~6분, 왜성은 10분 정도 소요 / 황학대는 두호마을에
  서 내리면 되며, 월전마을은 월전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③ 승용차
* 부산시내(반송/해운대) → 죽성4거리에서 죽성리 방면 죽성로로 진입 → 죽성초교 → 죽성리
  해송, 죽성리왜성, 죽성성당 (왜성 밑에 주차장 있음 / 해송은 인근 길가에 주차)

* 죽성리왜성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603일원


 

  죽성리 바닷가 둘러보기 (황학대, 죽성성당)

▲  죽성항 (오른쪽에 나무가 우거진 곳이 황학대)

▲  죽성리의 오랜 경승지, 황학대(黃鶴臺)

씁쓸한 화석으로 이 땅에 남아있는 죽성리왜성을 둘러보고 죽성항(죽성포구)으로 나왔다. 죽성
리는 동대해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어촌이지만 볼거리와 해산 먹거리가 풍성하
여 생각 외로 머무는 시간을 길게 만든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죽성리해송과 왜성이 있고, 바
닷가에는 황학대와 드라마 촬영지였던 죽성성당이 있으며 마을 남쪽에는 월전마을이 있다. 먹
거리는 죽성리 북부인 두호보다는 남부인 월전이 더 많은데, 이곳은 장어구이가 유명하다.

죽성항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조촐한 바위 동산이 포구의 운치를 조금 돋구고 있다. 이 동산은
기장의 오랜 명승지인 황학대로 예전에는 거의 섬이었으나 방파제와 항만 시설이 닦이면서 육
지로 흡수되었다.


▲  황학대의 동남쪽 부분

황학대는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윤선도야 워
낙 유명한 인물이니 모르는 이는 거의 없겠지만 그가 여기서 오랫동안 유배살이를 했던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나도 여기서 처음 알았음~~

그는 1616년(광해군 8년) 광해군(光海君)을 지지하는 북인(北人) 일파의 죄상을 밝히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린 것이 원인이 되어 서울에서 2,000리 이상 떨어진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떨려
났다. 그러다가 1년 뒤, 거기서 3,000리 이상 떨어진 기장 죽성리로 이송되어 7년이나 유배생
활을 했다. 귀양살이 때문에 조선 땅을 남북으로 완전 종주를 했던 것이다. 토가 나올 정도로
그 먼거리를 강제로 이동하느라 고산도 무척 진을 뺐을 것이다.

윤선도는 백사장 건너에 있는 송도(松島)를 옛날 신선이 황학(黃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서린 양자강(揚子江) 하류의 황학루(黃鶴樓)와 견주어 황학대로 멋대로 이름을 갈고 매
일같이 찾아와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랬다.
그는 여기서 견회요(遣懷謠), 우후요(雨後謠) 등의 주옥 같은 시 6개를 남겼으며, 죽성리 뒷산
인 봉대산에 자주 올라가 약초를 캐어 병에 걸린 지역 사람들에게 약을 지어주거나 치료를 해
주니 죽성 사람들은 그를 서울에서 온 의원님이라 부르며 존경했다고 한다.

이곳에 오르던 윤선도도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20세기 후반에 방파제와 항만 공사로 백사장 또
한 이슬처럼 사라졌으며, 강제로 연륙되어 육지의 일부가 되버리면서 옛 운치도 다소 녹아내렸
다. 게다가 이곳을 덮고 있는 소나무도 1995년 수해로 뿌리가 뽑히는 피해를 입었는데, 이후로
도 계속 나무들이 말라가면서 황학대는 그야말로 세월의 무덤 같은 곳이 되버렸다.
다행히 기장군청에서 1,000만원의 돈을 들여 황학대를 살피면서 나무들이 다시 살아났고 웃음
을 잃었던 황학대의 표정도 밝아지면서 이곳의 풍경을 크게 수식해주는 꿀단지가 되었다.


▲  황학대의 정상 부분
윤선도 뿐 아니라 지역 선비들과 동네 사람들이 술 1잔의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  두호마을 당집
바다에 제를 지내는 당집으로 굳게 닫힌 문짝에 3색 태극마크가 그려져 있다.

▲  죽성항의 평화로운 풍경
바깥 세상은 아비규환처럼 숨가쁘게 흘러가건만 이곳은 모든 게 정지된 듯
그저 한가롭기만 하다. 죽성리왜성이 활용되던 임진~정유란 시절에는
왜군들의 배로 득실거렸던 현장이기도 하다.

▲  바닷가에 자리한 죽성성당

두호마을 남쪽 바닷가에는 서양 동화에나 나올법한 작은 성당(聖堂)이 있다. 이 성당은 2009년
에 방영된 드라마 '드림(Dream)'의 촬영장으로 콩 볶듯이 지어진 것으로 겉모습만 성당이다.
아담하게 생긴 성당과 주변의 해안 풍경이 아름다워 죽성리의 새로운 명소로 추앙받고 있으며,
처음에는 죽성성당이라 불리다가 드라마 이름을 따서 '드림성당'으로 바꾼 것을 다시 죽성성당
으로 갈았다. 지어진지 10년도 되지 않았건만 건물이 벌써부터 노화현상을 보여 2017년 2월 새
로 지었는데, 이때 지역 사람들이 종교적인 부분을 지워줄 것을 요청하여 마리아상과 십자가를
싹 치워버렸다. 그래서 정체가 더 아리송한 성당 아닌 성당이 되어버렸다.

▲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진 하얀 피부의
성모마리아상 (지금은 없음)

▲  옆에서 바라본 죽성성당
성당 바로 옆에 등대가 붙어있다.


▲  죽성성당 주변 바닷가에 드러누운 울퉁불퉁 바위들

▲  죽성리의 어느 장어구이집에서 먹은 장어구이

죽성리 일대를 정신없이 누비니 어느덧 13시가 넘었다. 아침도 먹지 못한 터라 뱃속은 그야말
로 폭동 직전, 하여 불만에 잠긴 뱃속을 달래고자 점심 장소를 물색하다가 월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적당한 식당이 눈에 띄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두호마을은 회와 조개, 장어구이를 다루는 식당이 여럿 있지만 장어구이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월전마을에 밀려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다. 그에 반해 우리가 들어간 식당과 월전마을의 많
은 식당들은 봐글봐글하다.

우리는 주차장이 바라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황제처럼 먹을 요량으로 남정네에게 무척
이나 좋다는 장어구이와 모듬조개구이를 주문했다. 이렇게 장어와 조개구이를 먹으니 곡차 1잔
을 겯드려야 되겠지. 그래서 동동주도 넉넉히 시켰다.


▲  모듬조개구이의 위엄

자신을 불태우는 숯불 위에 먼저 장어를 올려 모락모락 익혀 입에 넣는다. 장어는 맛이 좀 별
로였으나 장어 후속으로 구운 모듬조개구이는 맛깔스러웠다. 큰 조개 안에 조개살을 비롯해 파
와 마늘 등이 버무려져 하나의 작품처럼 나왔는데,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구우니 거기서 나오
는 육수(조개의 눈물)가 제법 끝내줬다. 그래서 서로 조개를 더 챙기려고 아우성을 떨었다.

밑반찬은 김치와 도토리묵, 상추, 산채나물 등 대략 8가지 정도가 펼쳐졌다. 밑반찬도 그런데
로 맛이 괜찮아 밥도둑이 따로 없었으며, 금세 동이 나고 더 달라고 한 것이 가히 5번은 넘을
듯 싶다. 동동주도 금세 1동이를 비워 하나를 더 불렀는데 배가 불러 간신히 2번째 동이를 비
웠고, 메밀막국수로 식사를 기분 좋게 마무리하였다.
그렇게 점심을 먹어대니 폭동 직전이던 뱃속은 며칠을 굶어도 끄떡 없을 정도로 가득 찼고, 식
곤증의 일환으로 졸음이 슬쩍 마수를 부리자 후식 커피로 그들을 쫓아내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일행들은 송정(松亭)까지 걸어가자고 했으나 여기서 거기까지는 20리가 넘는 거리이다. 하지만
일단 갈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가보기로 했다.


▲  남쪽에서 본 월전마을 (월전포구, 월전방파제)

죽성리의 남부를 이루고 있는 월전마을에서 대변까지는 3km 정도 된다. 이 구간을 운행하는 시
내버스나 마을버스는 일체 없으며, 1.5~2차선 정도의 길이 바다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이어진
다. 월전 남쪽에는 식당을 비롯해 분위기를 내세운 카페들이 뿌리를 내렸고, 그 이후 대변(大
邊) 동쪽까지는 드문드문 민가(民家)가 보일 뿐이다.
휴일이라 그런지 월전, 죽성으로 외식을 가거나 나들이를 나온 차량들이 3분이 멀다하고 지나
갔고 대변에서 월전 구간을 걸어서 이동하는 도보꾼도 종종 눈에 띈다. 바닷가는 중간에 등대
가 있는 곳을 빼고는 어디든 자유롭게 바다 곁으로 내려갈 수 있다.


내용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 이후 내용은 언젠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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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쓰라린 흔적, 울산 서생포왜성 (진하해변)

 


' 울산 왜성(倭城) 나들이, 서생포왜성 '

▲  서생포왜성 내성의 동쪽 성벽


 

 

♠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자리한 옥의 티 같은 옛 왜성 ~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 - 울산 지방문화재자료 8호

▲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서생포왜성 외성
푸른 잡초들이 임진왜란의 쓰라린 흔적을 가리느라 부산하다.
 

여름이 슬슬 기지개를 켜며 천하를 무더위로 내몰던 6월 첫 무렵에 서울에서 머나먼 남동임해
(南東臨海) 지역을 찾았다.
부산에서 먼저 볼일을 마치고 다음날 아침 울산(蔚山)으로 넘어오면서 문득 옛날에 갔었던 서
생포왜성이 생각이 났다. 하여 이유도 따지지 않고 왜성이 있는 진하로 길을 잡았다.

울산의 동남쪽 끝으머리인 서생면 진하(서생리) 뒷쪽 언덕(해발 133m)에는 임진왜란의 쓰라린
흔적인 서생포왜성이 평화롭게 누워 있다.
이 성은 규슈 구마모토(雄本) 지역의 우두머리인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군사와 지역 백성
을 들볶아서 만든 것으로 1592년 가을에 쌓기 시작하여 1593년에 완성을 본 순수 왜성 스타일
의 성이다. 성 둘레 2.5km(4.2km), 성벽 높이 2~6m, 면적은 대략 15만 2천㎡에 이르며, 이 땅
에 남아있는 왜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성을 지을 때 근처에 있던 만호진성(萬戶鎭城)을 부시고 그 돌을 가져와 축성했는데, 산 정상
에 내성을 쌓고 동쪽 경사면에 복잡한 구조로 3단의 부곽(副郭)을 두었으며, 그 동쪽 산 밑에
드넓은 외성을 설치하니 그 범위는 성내마을(진하 서쪽)까지 미친다.
성 밖에는 2중, 3중으로 호(壕)를 파서 수비에 만전을 기했으며, 외성은 바깥쪽에 돌을 쌓은
내탁식(內托式)으로, 내성은 안과 밖 모두를 돌로 쌓은 협축식(夾築式)으로 축성했다. 성벽의
기울기는 60도 정도로 왜성에서 많이 보이는 특징이며, 산 정상에는 왜장이 머무는 천수각(天
守閣)을 두었다.

함경도를 지나 무려 두만강(豆滿江)까지 건너갔던 가토기요마사는 조선군과 강추위에 형편없이
쫓겨 내려와 이곳에 틀어박혔다. 1594년 사명대사(四溟大師)가 4번이나 찾아와 왜장과 교섭을
벌였으며, 1598년 9월에는 김응서(金應瑞)와 마귀(麻貴)가 이끄는 조선,명나라 연합군이 이곳
을 점령하여 울산 왜성의 배후를 위협했다.
1599년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53명의 충신을 배향하고자 창표당(蒼表堂)을 세웠으며 견고하게
축성된 덕에 성을 버리지 않고 1895년까지 조선 수군의 동첨절제사영(同僉節制使營)으로 사용
되었다.

왜란 당시에 기장 죽도성(竹島城), 울산왜성과 봉화를 주고 받아서 봉화성(烽火城)으로도 불리
며, 16세기 왜성의 양식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산증인이라 왜열도에서도 많은 답사객들이 찾아
온다. 성의 이름인 서생(西生)은 명나라 장수 마귀가 성 서쪽 문을 가리켜 생문(生門)이라 했
는데, 그게 이름이 바뀌어 서생이 되었다고 한다.

왜정 때 사적 54호로 지정되었고, 1963년에 국가 지정문화재 목록을 다시 손봤을 때도 정리되
지 않고 그 지위를 유지했다. 허나 그 자리가 너무 외람되어 1997년 학성(울산왜성)과 더불어
사적에서 정리되었으며, 이후 울산 지방문화재로 살아가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4개에 100년이 지났지만 성곽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내성(內城)은 대부분이 남
아 있으며, 외성(外城)은 성곽의 일부가 전하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 서생포 왜성을 살펴보도
록 하겠다.

※ 서생포왜성 찾아가기 (2016년 6월 기준)
* 태화강역, 울산시외고속터미널 건너편, 학성공원, 울산광역시청, 공업탑에서 715번 시내버스
  (30~40분 간격)를 타고 서생포왜성이나 진하 하차. 진하에서 내리면 정면(서쪽)에 산성 같은
  것이 보이는 야트막한 산이 있다. 거기가 바로 서생포왜성이다.
* 공업탑 남쪽 울산대공원 동문앞 정류장에서 405, 715번 시내버스 이용
* 해운대터미널(부산2호선 해운대역 2번 출구)에서 진하행 직행버스 이용 (50~60분 간격)
* 부산1호선 노포역(1번 출구, 부산종합버스터미널)에서 부산시내버스 37번을 타고 월내초교(
  길천)에서 울산시내버스 715번이나 진하행 직행버스로 환승
* 승용차 (성 아래 조그만 주차장이 있으며, 왜성 정상까지 차량 접근 가능)
① 울산시내 → 남창 → 진하 → 서생포왜성
② 부산시내 → 좌천 → 월내 → 서생 → 진하 → 서생포왜성

* 소재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일원


▲  서생포왜성 남문터

서생포왜성은 2002년 6월에 인근에 살던 여인네와 와본 기억이 있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산산히 흩어진 그 시절의 추억을 아련히 되새기며 외성 남문터를 통해 왜성의 품으로 들
어섰다.

남문터는 문을 양쪽에서 붙잡던 성벽만이 잡초를 옷삼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거의 담장 신세
가 되버린 성벽은 멀리 보이는 산 정상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옛 위용을 희미하게 드러내고 있
는데, 성내마을에서 내성1관문까지는 넉넉잡아 15분 정도 걸린다.


▲  마을의 담장과 수풀의 수북한 보금자리로 살아가고 있는 외성

▲  남문터 부근에 심어진 조그만 비석 4기
동첨절제사영 동첨절제사의 선정비(善政碑)나 불망비(不忘碑)로 여겨진다.

▲  풍년 예감, 서생리(진하) 들판
왜성 남쪽 산이 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매뭇새를 다듬는다.


▲  서생포왜성으로 오르는 길 (마을에서 내성으로)

▲  내성 주출입구 밑 산길

▲  내성1관문(주출입구)
성내마을(진하)에서 15분 정도 오르면 내성 출입구가 나온다. 칼로 싹둑 다듬은 듯,
정연하게 쌓여진 성벽은 400년의 세월에도 여전히 건재함을 드러낸다.

▲  내성1관문 안쪽

▲  돌출형 소곽(小郭) - 내성2관문
그 우측으로 성으로 들어서는 작은 출입구가 있다.

▲  잠시 뒤를 살피는 여유 (진하해수욕장)
진하해수욕장과 동대해(東大海), 그들을 후광으로 삼은 진하(서생리) 마을이
저 밑에 바라보인다.

▲  내성3관문 성벽에 뿌리를 내린 돌탑


♠  서생포왜성 내성 부분

▲  내성 중심부로 오르는 산길

내성1관문을 지나 산내음이 가득한 산길을 하나씩 오르면 2관문과 3관문이 차례로 모습을 비춘
다. 비록 문루는 녹아 없어졌지만, 밑을 바라보고 자리했을 문루의 위용이 가히 상상이 간다.
3관문을 지나 성곽이 서로 엇물려진 이른바 엇물림형 출입구를 지나면 왜성의 중심인 산 정상
부에 이른다. 평평한 정상에는 천수각을 비롯해 왜군 숙소, 무기창고가 있었다.


▲  내성의 남쪽 성벽

▲  엇물림형 출입구
왜성의 중심인 천수각을 보호하고 적군을 효과적으로 막고자 성벽을 아주 복잡하게
짜놓았다. 수비하기에는 좋지만 공격하기에는 아주 쥐약 수준으로 만든 것이다.

▲  왜성의 정상부 ▼
녹음이 서린 나무와 잡초가 아픈 역사의 현장을 잔잔히 덮어준다.



▲  왜성의 중심인 천수각(天守閣)이 있던 곳

사진에 보이는 성곽 위에 천수각(텐슈가쿠)이 있었다. 천수각의 모습은 왜열도의 오사까성이나
구마모토성의 천수각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영주(領主) 출신인 왜장들은 그들의 특권을 여기
서도 변함없이 누리며 호화롭게 천수각을 지어 부하들과 지역 사람들을 쥐어짰는데, 그 천수각
은 오래 전에 녹아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지적측량을 위한 지적삼각점이 대신 서 있다.


▲  왜성 정상부의 북서쪽 부분

▲  왜성의 특징이 잘 드러난 내성 성벽 ▼
우리나라 성벽은 거의 80도 기울기이지만 왜성의 기울기는 거의 60~70도이다.
무거운 세월의 때와 자연의 태클에 많이 헝클어졌지만
여전히 옛 모습과 위용을 자랑한다.


▲  내성 서쪽 성벽에서 남쪽 산줄기로 인도하는 오솔길

내성의 서쪽 성벽 끝에 성 밑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있다. 길이 좀 가파르기 때문에 조심을 기
해야 되는데, 그 밑으로 내려가면 조그만 오솔길이 나오며, 그 길을 내려가면 성내마을(진하)
에 이른다.
내려가는 길목에는 약수터가 있어서 나그네의 목을 아낌없이 축여주며 정겹기 그지 없는 흙길
은 속세의 물을 먹으며 점차 콘크리트 길로 변한다.

이렇게 하여 오랜만에 들린 서생포왜성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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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해송,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해안 경승지, 부산 몰운대 (다대포해변)

 


' 부산 몰운대(沒雲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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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운대 동쪽 화손대 해변


여름의 제국이 한참 기반을 닦던 6월의 한복판에 천하 제일의 항구도시인 부산(釜山)을 찾았
다.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경북 청도(淸道)에서 잠시 가던 걸음
을 멈추고 물맞이 명소로 유명한 남산 낙대폭포(☞ 관련글 보러가기)를 만났다. 그런 다음에
다시 남쪽으로 달리는 열차에 의지해 오후 늦게 부산에 진입했다.

부산에 들어와 형님에게 연락을 취하니 남포동 국제시장(國際市場)으로 오라고 그런다. 그래
서 부랴부랴 그곳으로 가 형님을 만나고 그의 지인 3명과 함께 부산에서 꽤나 유명하다는 족
발집에서 족발에 곡차(穀茶)를 겯드리며 회포를 풀었다. 알콜이 어느 정도 누적된 우리는 인
근 파전집에서 동동주에 파전을 먹으며 2차를 치렀고, 자정이 넘자 택시를 잡아 타고 서면으
로 이동하여 바(bar)에서 3차를 즐겼다. 거기서는 맥주를 무려 5병이나 섭취했다.

새벽 2시가 넘자 술에 쩔은 몸을 택시에 담고 광안동(廣安洞) 형님 집으로 향했다. 집에 오
자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깨보니 글쎄 방바닥에 엎어진 채로 자고 있던
것이 아닌가..? 거실에 덮고 자라며 이불이 깔려져 있었는데, 왜 그 좋은 데를 놔두고 이런
차가운 바닥에서 불쌍하게 자게 된 것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는 과음으로 3시 이후 필
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거실에 들어가 이불을 똘똘 말고 몇시간을 더 취침하니 술에서 완전히
해방된 듯 정신이 개운하다. 술은 정말 떡이 되도록 과음을 했지만 부산 소주가 뒷끝이 덜하
다보니 술은 금방 깬다. (서울 소주 같으면 다음날 하루 종일 시체놀이 해야됨)

해가 중천(中天)에서 손짓할 무렵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그날 목적지인 다대포(몰운대)로 출
발했다. 여기서 다대포까지는 거리가 멀어 빠르고 편하게 가고자 급행좌석버스를 이용했는데,
광안역에서 1001번 좌석버스(청강리↔하단,동아대)를 타고 부산역에서 1000번 좌석버스(다대
포↔서면)
로 환승하여 1시간 정도에 다대포해수욕장 정류장에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서쪽 백사장이 다대포해수욕장이고, 나무가 우거진 동쪽 언덕이 바로 몰운대인데, 몰
운대는 예전에 2번이나 와본 적이 있어 결코 낯설지가 않은 곳이다. 그곳으로 가려면 횟집거
리(몰운대1길)를 지나야 되는데, 이곳은 꼼장어구이가 매우 유명하다.


▲  몰운대 서쪽에 자리한 다대포(多大浦)해수욕장
다대포해변은 곧 다가올 피서철에 대비하여 한참 몸단장 중이었다.
바다 너머 안개 속에 얇게 몸을 드러낸 산은 부산신항만 개발로
한반도의 일원이 된 가덕도(加德島, ☞ 관련글 보러가기)이다.


♠  부산 서남 해안 제일의 경승지 - 몰운대(沒雲臺)
부산 지방기념물 27호

▲  쭉쭉 뻗은 송림의 터널 - 몰운대 산책로

몰운대는 부산 본토 서남쪽 끝으머리에 자리한 해안 언덕(해발 78m)으로 남해바다와 낙동강(洛
東江) 하구가 만나는 부분에 자리한다. 울창한 송림(松林)과 기암괴석,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경승지로 해운대(海雲臺), 태종대(太宗臺)와 더불어 부산 3대(臺)로 꼽히며, 만주에서 시작된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동남쪽 종점이기도 하다.

이곳은 원래 몰운도(沒雲島)란 작은 섬이었으나 낙동강에서 떠내려 온 토사가 쌓이면서 육지인
다대포와 이어져 자연스럽게 한반도의 일부가 되었다. 육지가 된 시점에 대해서는 16세기 정도
로 여겨지며, 고구마로 유명한 조엄
(趙樟)의 해사일기(海槎日記)에는 신라 이전부터 조그만 섬
이었다고 나온다. 그는 몰운대를 두고 '아리따운 여자가 꽃 속에서 치장을 하는 것 같다'며 찬
사를 아끼지 않았다.

몰운대란 이름은 낙동강 하구에 안개와 구름이 끼면 그들에 잠겨 대(또는 섬)이 보이지 않는다
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즉
구름에 잠긴 대(또는 섬)란 시적(詩的)인 뜻이 된다. 또한 이순신(李
舜臣) 장군의 부하 장수로 여러 해전에서 이름을 떨친 정운(鄭運)이 몰운대의 이름을 듣고는 몰
운대의 운(雲)과 자신의 이름인 운(運)이 음이 같다며 아몰대(我沒臺)라 했다고 한다. 아몰대는
즉 '내가 사라지는 대'란 뜻이니 그 의미가 대충은 맞아 떨어진 것일까? 1592년 10월 1일 부산
대첩 때 전사하고 만다. 그때 이순신 수군은 바로 몰운대 앞바다에서 왜군을 격파하며 지나갔다.

몰운대 중앙 부분에는 다대포객사가 있고, 남쪽 끝으머리에는 부산대첩 때 전사한 정운의 순의
비(殉義碑)가 있다. 원래 순의비 주변 해안가를 몰운대라 일컬었다. 그리고 동쪽에는 화손대(花
孫臺)가 있는데, 이곳은 몰운대와는 별개의 장소이나 몰운대의 일원으로 묻힌지 오래되었으며,
서쪽에는 넓은 백사장의 다대포해변이 펼쳐져 있고, 육지와 연결된 북쪽에는 횟집거리와 다대1
동 아파트단지가 있다.


참고로 다대포해변과 몰운대 사이에서 신석기시대와 철기시대(鐵器時代)에 만들어진 패총(貝塚,
조개더미)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1934년 홍수로 거진 사라졌으며, 왜정(倭政) 때 발굴
된 유물은 동아대 박물관에 가 있다. 그리고 해방 이후 1966년에 발굴조사를 1차례 더 벌였다.


▲  해송(海松) 솔내음이 그윽한 몰운대 산책로
몰운대로 들어서면 해송에서 우러나오는 솔내음의 향이 후각을 즐겁게 해주며
시원한 바닷바람이 땀의 염통(간)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다.


▲  몰운대 시비(詩碑)
조선 선조 때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지낸 이춘원(李春元)이 몰운대를 찬양하며
지은 시가 담긴 표석으로 1999년 6월 사하지역발전협의회에서 세웠다.

浩蕩風濤千萬里
白雲天半沒孤臺
扶桑曉日車輪赤
常見仙人賀鶴來

호탕한 바람과 파도가 천리, 만리로 이어졌는데
하늘과 몰운대는 흰구름에 묻혔네
새벽바다 돋는 해는 붉은 수레바퀴
언제나 학을 타고 신선이 온다.

▲  다대포객사(多大浦客舍)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3호

몰운대 산책로를 따라 10분 정도 들어가면 다대포객사라 불리는 기와집이 나그네를 맞는다. 몰
운대의 중심 부분에 해당되는 곳으로 객사(客舍)란 제왕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봉안하고 출
장 나온 관리들의 숙식을 제공하던 관사이다. 고을과 규모가 큰 진(鎭)에 설치하는데, 이 객사
는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며, 1825년에 중수했다고 전한다.
원래는 다대포진(多大浦鎭)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다대초등학교 자리에 첨사청(僉使廳, 다대포
첨사가 공무를 보던 관청)과 나란히 있었으나 1904년 다대포사립실용학교(현 다대초교)가 들어
서면서 학교 건물로 쓰였다가 1970년 부산시교육위원회에 의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후
1980년 기둥과 마루를 보수했으며, 부산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객사 건물로 가치가 크다.

다대포객사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회원관(懷遠館)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런
데 객사와 관련된 자료가 부족하여 이 건물이 과연 객사(회원관)가 맞는지 여전히 의문의 꼬리
를 가지고 있다. 1970년에 첨사청 건물을 가져와 객사로 둔갑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뻥뚫려
있는 모습은 궐패를 봉안한 정당(正堂)과 좌우 익사(翼舍)를 거느린 객사라기보다는 정자에 가
까운 모습이란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부산시청에서는 '이 건물이 회원관이란 명백한 근거는 없으나 현 객사가 첨사청이
었다는 주장도 일부 주민의 이야기일 뿐, 이를 뒤집을 만한 근거는 안된다'고 해명을 했다. 또
한 객사가 뻥뚫린 모습을 하게 된 것은 1904년 이후 학교 건물로 사용되면서 벽이 개축되어 원
형을 잃었기 때문에 지붕과 기둥만 원형대로 살렸다고 그런다. 즉 이 건물이 100% 객사가 아니
라는 것이다. (첨사청일 가능성도 크지만 객사가 첨사청의 일원인 경우는 그게 그거임, 1980년
대 부산 관련 여행서적에는 다대포객사가 아닌 첨사청으로 많이 나왔음)

참고로 다대포진은 경상좌도(慶尙左道) 7진(七鎭)의 하나였다. 왜군의 공격을 막기 위한 요새로
다른 진보다 2배의 병선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대포진을 관리하는 첨사(僉使)는 정3품으로 다른
첨사보다 관등(官等)이 높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와 거의 동격인 대우를 받았다. 그만큼 다
대포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1592년 4월 14일, 왜군이 다대포를 공격하자, 당시 다대포첨사(僉使) 윤흥
신(尹興信, ?~1592)이 필사적으로 방어를 했으나 머릿수에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함락되고 만
다. 그는 첨사청(僉使廳)과 객사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마구 던지며 끝까지 분전했으나 결국 장
렬히 산화했으며, 그의 아우 윤흥제(尹興悌)도 난군(亂軍) 중에 전사했다.

객사 주변에는 보호철책을 둘러 속인(俗人)의 접근을 막았으나 근래에 개방하여 신발을 벗고 들
어갈 수 있다. (상황과 시기에 따라 통제될 수 있음) 더운 여름에 객사 마루에 누워 시원한 바
닷바람을 벗삼아 낮잠 한숨 청하면 정말 꿀맛일 거 같은데, 낮잠이나 간식을 먹는 행위는 통제
되어 있으니 결례를 범하지 않도록 한다.


▲  잘 다져진 석축 위에 안착한 다대포객사

다대포 객사를 둘러보고 앞으로 나오면 넓은 공터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가면 화손
대와 자갈마당이 나오고, 직진(남쪽)하면 몰운대 남쪽에 자리한 정운공(公) 순의비를 만날 수
있다. 허나 아쉽게도 남쪽 구역은 해군부대가 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그를 못보
는 마음이 무척 아쉽기는 하지만 어찌하리. 남쪽으로 가려는 발을 억지로 멈추고 동쪽으로 방향
을 틀었다.

정운공 순의비는 비록 출입통제구역이지만 1년에 딱 1번 들어갈 수 있다. 바로 그의 향사(享祀)
를 지내는 음력 9월 1일이다. 그날은 그가 부산대첩에서 전사한 10월 1일을 음력으로 계산한 것
으로 사하구청의 주관으로 해군의 도움을 받아 제사를 올린다. 이때 지역 주민은 물론 관광객들
도 들어가 제향과 순의비를 관람할 수 있으며, 제례에 참여하거나 구경한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
공하는데, 맛이 꽤 좋다고 한다. 다음에 그의 기일(忌日)에 맞춰 이곳을 찾을 생각이긴 한데,
그게 과연 언제가 될지는 장담 못하겠다.

정운공 순의비
▲  속세에 1년에 딱 하루 공개되는 정운공 순의비 - 부산 지방기념물 20호
(부산 사하구청 홈페이지 사진 참조)

다대포객사 공터에서 왼쪽(동쪽) 길로 2분 정도 가면 약수터가 나온다. 바닷가에 있어서 그런지
약간 짠 맛이 나지만 그래도 시원하여 마실만은 하다. 그 약수터를 지나 바다 쪽으로 길게 튀어
나온 곳으로 가니 오른쪽에 자갈마당이라 불리는 자갈밭이 펼쳐져 있다.

자갈들이 곱게 입혀진 자갈마당은 옛날에 친구와 놀았던 추억이 서린 곳으로 바닷가로 내려가는
계단이 태풍으로 망가진 것 외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자갈밭 주변 바위
와 벼랑에는 낚시꾼들이 세월을 낚듯 낚시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잡혔으려나..?

자갈밭에서 동쪽 언덕으로 올라가면 사방이 바다로 막힌 침운대(沈雲臺)가 나온다. 침운대는 구
름이 잠긴다는 뜻으로 대(臺) 정상에는 버려진 군사시설이 있다. 여러 그루의 나무가 바다를 바
라보며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분위기를 우려내고 있으며,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여기서는 구평동 두송반도와 암남공원, 멀리 영도 태종대까지 시야에
들어오며 감천항과 다대항으로 들어서는 배들이 보인다.

이렇게 자갈마당과 침운대 구역을 둘러보고 화손대 방면 오솔길을 거닐어 본다. 자갈마당에서
화손대입구까지는 약 1km, 오솔길 동쪽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길 양쪽으로 숲이 무성하다.
그 오솔길을 절반 정도 가다보면 몰운대의 명물인 구름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는 약 10m 정도
되는 조그만 다리지만 사람이 건널 때마다 흔들거려 흔들다리라는 흔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런 다리는 송도에 있는 암남공원에도 있으며, 다리 밑에는 계곡이 흐르고 있으나 말라버린 상태
이다.

구름다리를 건너서 10분 정도 가면 화손대 입구가 나온다. 화손대는 몰운대 동쪽으로 길게 튀어
나온 곳으로 낚시터로 명성이 높다. 몰운대를 지금까지 3번이나 발을 들였지만 화손대는 귀찮다
는 명분으로 가지도 않아 이번에 들어가보기로 했다.


▲  바다와 자갈의 속삭임이 살며시 들려오는 자갈마당

▲  자갈마당 너머로 보이는 큰 섬은 쥐섬, 그 옆에 작은 섬은 동호섬이다.

▲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없는 통금의 땅, 몰운대 남쪽이 보인다.

▲  침운대에서 바라본 남해바다
자연이 빚어 띄워놓은 조각배 같은 섬들(동섬, 등대섬)이 앞바다를 수식한다.

▲  등대가 자라고 있는 등대섬
바다에 잠기기 쉬운 한줌도 안되는 바위섬에 뿌리를 내린 조그만 등대.
겉모습은 보잘 것 없지만 몰운대 앞바다를 지나는 배들의 안전을 위해
오늘 밤도 밤길을 비추며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는다.

▲  동섬(왼쪽), 쥐섬(가운데), 동호섬(오른쪽) 형제
아비규환의 속세를 등지고 저런 섬에 숨어들고 싶은 마음이 종종 일어난다.
허나 현실은 그와 반대 ~~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  침운대 바위 해변
바로 가까이에 화손대가 보이고, 그 너머로 두둥실 떠있는 모자섬과 구평동 두송반도가,
저 멀리 희미하게 모습을 비춘 곳은 영도 태종대이다. 이른 피서객과
강태공(姜太公)들이 자리를 점거하며 한가로운 주말 오후를 보낸다.

▲  몰운대 흔들다리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흔들다리를 깨우면 변함없이 삐꺽삐꺽 소리로 약간의 미동을
보이며 화답을 건넨다. 그래서 흔들다리이다.


♠  몰운대의 동쪽을 도맡고 있는 화손대(花孫臺) 둘러보기

▲  화손대로 인도하는 호젓한 숲길

화손대입구에서 오른쪽(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그동안 몰운대 속의 미답지로 남아있던 화손대를
가보기로 했다. 그곳으로 가려면 제법 가파른 고개를 하나 넘어야 되는데, 나무가 삼삼하게 우
거져 거의 숲터널을 이루고 있다. 숲터널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군헬기장이 나오고, 여기서부터
내리막 길이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급하게 이어진다. 내리막 길의 끝에는 바다가 눈 앞에 보이면
서 1명 정도 갈 수 있는 해안 벼랑길이 펼쳐지며,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몰운대의 동쪽 끝인 화
손대에 이르게 된다. 벼랑길은 다소 위험하고 난간 같은 시설이 부족하므로 각별히 주의가 필요
하다.

화손대는 높다란 대(臺)나 정자가 아닌 바위로 이루어진 해안가이다. 남쪽은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고, 벼랑길 북쪽은 칼로 싹둑 다듬은 듯 넓은 반석이 펼쳐져 있다. 이곳은 낚시터로 유명하여
강태공들의 발길이 잦으며, 감성돔이 많이 잡힌다고 한다. 예전에는 숭어잡이도 쏠쏠했으나 가
덕도 개발로 이제는 구경하기 힘들다고 한다.

이곳에 이르면 다대포항과 구평동 두송반도, 다대조선소 등이 가까이에 보이며, 방파제와 이어
진 팔봉섬을 비롯하여 솔섬과 고래섬 등의 작은 섬이 주변을 수식한다.


▲  유연하게 구부러진 자연터널 숲길

▲  화손대 바라본 모자섬
쥐섬보다 작은 조그만 무인도로 작은 암초를 여럿 거느리고 있다.

▲  화손대에서 바라본 몰운대 남쪽과 침운대
몰운대가 겉으로 보기에는 작아 보이긴 하지만 이렇게 보면 은근 넓은 지역이다.
바다 건너 침운대(자갈마당)에서 화손대까지는 넉넉잡아 20분 거리이다.

▲  화손대 해변에서 바라본 모자섬
이렇게 보니 마치 고슴도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  화손대 해변에서 바라본 풍경
솔섬(사진 왼쪽)이 육지 가까이에 붙어 있고, 그 너머로 보이는 구평동 두송반도와
암남공원이 보인다. 그리고 저멀리 태종대(오른쪽에 튀어나온 부분)가
살며시 모습을 비춘다.

▲  화손대 해변으로 내려가는 벼랑길

▲  낚시삼매에 빠진 강태공들

▲  넓은 반석으로 이루어진 화손대 해변


▲  화손대 북쪽 해변
여기서 더 이상 해변을 타고 가는 건 불가능하다.
산과 바다에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  카메라 셔터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고요하기만 한 화손대
파도소리만이 철썩철썩 고요를 깨뜨리며 바위와 정을 속삭인다.

▲  화손대 앞바다
저 수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내가 꿈꾸는 무슨 세상이 감춰진 것은 아닐까?
이렇게 보면 정말 지구가 둥글긴 둥근 모양이다.

▲  몰운대 산책로 (화손대입구에서 몰운대입구 방향)
집으로 몰래 가져와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산책로이다.

▲  몰운대 산책로 (화손대입구~몰운대입구)
몰운대는 통제구역인 정운공 순의비와 화손대를 제외하고는 산책로가
잘 닦여져 있어 산책하기에 아주 좋다.

▲  몰운대 횟집거리에서 먹은 꼼장어의 위엄

몰운대를 2시간 가량 둘러보고 속세로 나오니 시장기가 무척 돋는다. 안그래도 밥을 일찍 먹고
나와서 허기가 쩔었는데, 나들이에 따른 허기짐까지 더해지니 견디기가 괴로울 지경이다. 그래
서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다가 다대포의 명물인 꼼장어구이를 먹기로 했다.

꼼장어가 나오기에 앞서 메추리알과 당근, 김치 등의 밑반찬이 깔리자 이들을 주섬주섬 먹고나
니 맵게 꾸며진 꼼장어구이가 나타난다. 조금 맵긴 해도 맛은 그런데로 괜찮았는데, 시장기가
상당하여 꼼장어와 함께 버무러진 파와 양파까지 말끔히 비웠다. 거기에 맥주 1잔 겯드리니 목
구멍이 즐겁다고 쾌재를 외친다.
꼼장어를 다 먹고 밥을 2개 볶아서 먹었는데, 이또한 맛이 일품이다. 밥까지 싹 비우고, 커피 1
잔 마시며 식곤증의 희롱을 잠시 즐기다가 길을 나섰다. 비가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그렇게 걱정
할 수준이 아니라서 서면 근처의 정묘사(鄭廟祠)로 길을 옮겼다. 이후 부분은 사정상 생략하며,
몰운대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몰운대, 다대포 찾아가기 (2013년 7월 기준)
* 부산지하철 1호선 신평역(4번 출구)에서 2, 11, 338번 시내버스를 타고 다대포해수욕장 하차
* 부산지하철 1호선 당리역(사하구청) 5번 출구에서 11번, 3번 출구에서 2번 시내버스 이용
* 부산지하철 1호선 괴정역(6번 출구)에서 96번 시내버스 이용
* 부산서부터미널(2호선 사상역 5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쪽)에서 338번 시내버스 이용
* 부산역(1호선 부산역 5번 출구)에서 2, 1000번 시내버스 이용
* 다대포해수욕장과 몰운대 입구에 주차장(488대 수용) 있음 (몰운대까지 접근 불가)

★ 몰운대, 다대포 관람정보 (2013년 7월 기준)
* 다대포해수욕장 개장시기는 7~8월
* 몰운대 남쪽 정운공 순의비는 제향일인 음력 9월 1일 낮에만 출입이 가능하다.
* 다대포의 새로운 명물인 다대포꿈의낙조분수는 음악과 조명에 맞춰 분수 물줄기가 춤을 추는
  부산 최초의 음악분수로 물높이가 최대 55m에 이르며, 시민들의 신청곡 및 사연을 접수받아
  음악분수공연에 반영한다.
* 꿈의낙조분수 공연시간 (2013년 여름 기준, 매주 월요일은 쉼)
① 체험분수 - 매일 6회 (11시, 14시, 15시, 16시, 18시, 평일 야간 음악분수 공연 후 1회 / 주
   말에는 야간 음악분수 1부 공연 후 1회, / 회당 10~20분)
② 음악분수 - 매일 20시 (주말과 공휴일은 20시, 21시로 20분씩 운영)
* 꿈의낙조분수 문의는 ☎ 051-220-5891~2 (낙조분수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
* 몰운대 소재지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144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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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7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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