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호랑이'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10.14 듬직하게 생긴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인왕산길, 한양도성, 치마바위, 기차바위)
  2. 2018.12.04 시문학의 성지이자 도심 속의 상큼한 언덕, 청운동 윤동주시인의 언덕 ~~~ (윤동주소나무,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듬직하게 생긴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인왕산길, 한양도성, 치마바위, 기차바위)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

▲  인왕산 (가운데 봉우리가 정상)


 

♠  인왕산(仁王山) 입문

▲  인왕산 만수천약수터

봄이 한참 무르익던 4월의 끝 무렵,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내 즐
겨찾기 뫼의 하나인 인왕산을 찾았다.
인왕산은 10대 시절 선바위 답사를 시작으로 50번 넘게 인연을 지었는데, 낮 뿐만 아니라 야
간(19시 이후)에도 적지 않게 올라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나의 마음을 비추고 있다. 특히
인왕산에서 바라보는 서울 도심 야경(夜景)은 아주 일품으로 꼽힌다.

경복궁역(3호선)에서 출발하여 인왕산길로 들어서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방면으로 가다보면
인왕천약수터로 인도하는 길이 살짝 손짓을 한다. 이 코스는 인왕산에서 가장 잘나가는 약수
로 추앙을 받던 인왕천약수터를 거쳐 인왕산 능선(한양도성)으로 이어지는데 길이 좀 각박하
다. 하여 그 코스는 쿨하게 통과하고 다음에 나오는 석굴암입구(수성동계곡 상류)에서 인왕산
의 깊은 품으로 들어섰다.

석굴암입구로 들어서면 바로 조촐한 모습의 정자가 나오면서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직진하면
이름도 꽤 낯이 익은 석굴암(石窟庵)이란 석굴 암자가 나온다. 허나 그곳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사실상 막혀있어 정자 옆 북쪽 산길로 올라가야 된다. (석굴암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길
이 있긴 하나 통행 금지임)
석굴암입구 정자에서 북쪽 산길을 5분 정도 오르면 160m 고지에 자리한 만수천약수터가 마중
을 한다. 인왕산에 무수히 널린 약수터의 하나로 부적합 빨간줄과 양호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어 앞날이 좀 어려워 보인다. 물론 샘터 주변을 계속 관리해주고 비도 적당량 내려주면 청
색 신호가 뜨는 것은 시간문제이나 날씨 변덕도 심하고 서울 도심이 바로 코앞이라 인왕산 지
하수에도 비상이 걸렸다.

약수터 주변은 나무가 삼삼하여 하늘이란 단어를 거의 잊게 할 정도로 덩치가 큰 바위들이 주
변에 여럿 포진해 있어 약수터의 잔잔한 장식물이 되어주고 있으며, 간단한 체육시설과 의자
등이 놓여져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어가도록 배려했다.


▲  만수천약수터 주변 풍경

큰 바위 밑에는 조그만 자연산 동굴이 있다.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게 철창을 씌웠지만 예전에
는 기도나 굿 장소로 쓰였다. 인왕산이 잘생긴 바위가 많고 기가 센 산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
배 맛을 알던 시절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자 굿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굴 앞을
지나니 동굴이 내뱉은 약간 시원한 바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  만수천약수터 뒤쪽 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과 경복궁, 종로)

만수천약수터에서 갑자기 흥분한 산길을 7~8분 정도 오르면 능선(만수천약수터 뒤쪽 능선)에
이른다. 이제부터는 숲속에 가려진 산길이 아닌 천하를 굽어보며 걷는 능선길이 시작되는 것
이다. 그 길을 10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이 흐르는 성곽길(인왕산 주능선)과 만나게 된다.

성곽길과 만나는 갈림길에서 오른쪽(동쪽)으로 내려가면 창의문과 부암동(付岩洞)으로 이어지
며, 왼쪽(서쪽)은 인왕산 정상이다. 우리야 정상이 목적이니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성곽길은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경사가 슬금슬금 각박해져 호흡마저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런
길을 10여 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성밖 계단을 내려가면 기차바위 능선이며, 성
곽길을 고수하면 정상이다. 이미 인왕산의 어깨까지 올라탄 상태라 서울 시내가 고루고루 내
려다보여 마치 하늘을 배회하는 큰 새의 등에 올라탄 기분이며,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품질도 더욱 올라간다.


▲  인왕산의 허리를 따라 흘러가는 한양도성(漢陽都城) - 사적 10호

▲  인왕산 북쪽 능선 성곽길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콧대가 높은 천하 굴지의 대도시 서울이 내 발 밑에 펼쳐져 있다. 마치 이 도시가
나의 세상이 된 듯 거만한 착각이 피어올라 잠시나마 기분이 즐거워진다.
허나 현실은 마음 편히 드러누울 땅도 제대로 없다는 것.

▲  정상 북쪽 성곽길 - 저 바위 꼭대기가 인왕산 정상이다.

기차바위로 인도하는 갈림길에서 성곽길은 잠시 진정을 되찾으나 정상을 코 앞에 두고 다시금
격한 흥분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존심을 곱게 접고 묵묵히 길을 임하면 좀처럼 닿
지 않을 것 같던 인왕산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어둠의 역사를 안고 있는 인왕산 치마바위

인왕산 정상 동쪽에 붙어있는 커다란 바위는 인왕산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치마바위이다. 병
풍처럼 넓어서 병풍바위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 바위에는 중종과 단경왕후 신씨의 슬픈 사연
이 깃들여져 있다. 그 사연은 서울 장안에서 꽤 알려진 이야기로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의 첫 부인은 신수근(愼守勤, 1450~1506)의 딸인 단경왕후(端敬
王后) 신씨(1487~1557)이다.
1506년 박원종(朴元宗)과 성희안(成希顔), 홍경주(洪景舟) 등이 반란을 일으켜 연산군(燕山君
)을 폐위시키고 그의 이복 동생인 진성대군을 익선관(翼善冠)을 씌운 채로 급히 왕위에 올리
니 그가 곧 중종이다. <이 사건을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고 부름>
단경왕후의 아비인 신수근은 반란파에 협조하지 않아 그 형제가 모두 살해되고 말았다. 그들
에 의해 얼떨결에 왕이 된 중종은 부인을 지키고자 재빨리 왕후로 봉했으나 반란파들은 역적
의 딸을 그냥 둘 수 없다며 당장 내쫓을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왕후나 그 소
생 왕자에게 보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종은 그들을 달래고자 반정 때 몰수한 연산군 측근과 반란 비협조 인물들의 재산을 나눠주
고 기녀(妓女) 300여 명을 주며 회유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유자광(柳子光)은 중종의
생모이자 대비(大妃)인 정현왕후(貞顯王后)를 찾아가
'중전 신씨를 쫓아내지 않으면 임금을 내쫓겠습니다!!'

협박을 하기도 했다. 이미 반란으로 왕을 한번 갈아치웠으니 그들에게는 그런 것은 일도 아니
었다.
상황이 점점 고통스럽게 변해가자 신씨는 울면서
'소첩이 전하(殿下)를 위해 나가겠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전하에 대한 변치 않은 마음으로 인
왕산 바위에 치마를 걸어두겠사오니. 상황이 좋아지면 꼭 찾아오세요 ㅠㅠ'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경복궁을 나가 옛날에 살았던 인왕산 동쪽 본가에 들어갔다. 그리고
는 매일마다 인왕산에 올라 중종과 같이 살던 시절, 자주 입었던 붉은 치마를 바위에 널었다.
그 소식을 들은 중종은 수시로 경회루(慶會樓)에 올라 치마바위를 바라보며 그녀에 대한 생각
에 눈시울을 붉혔다.
반란파들은 그 꼴이 보기 싫어 서둘러 새 왕비를 맞을 것을 요구했고, 그래서 장경왕후(章敬
王后) 윤씨가 새 왕비로 들어오게 된다. 또한 10여 명의 후궁까지 맞아들이면서 신씨에 대한
추억과 그녀의 존재감은 완전히 흐릿해진다.

신씨는 왕이 사직단(社稷壇)에 사직대제(社稷大祭)를 지내러 올 때를 기다려 말죽을 쑤어 사
직단 정문에서 기다렸다. 그래서 왕의 말에게 직접 먹이는 등 남편에 대한 애정을 표했지만
결국 남편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1557년 70세의 나이로 소생도 없이 한 많은 삶을 마감
하고 만다. (중종은 1544년 56세의 나이로 승하함)
신씨가 죽자 세상에서는 치마를 널었던 병풍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으며, 소년왕 단종(端宗)
의 부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와 더불어 왕실 여인들의 '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 토
막으로 두고두고 우려먹으며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치마바위 밑에는 20세기에 조성된 미륵마애불이 숨겨져 있으며, 바위 피부에는 옥의 티로 황
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와 왜왕 만세 등의 바위글씨가 요란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들 글씨
는 1939년 가을 '대일본청년단대회'가 열린 것을 기념하고자 왜정과 친일 패거리들이 지원하
여 새겨진 것으로 서울 장안 어디에서든 다 보이는 바위라 하여 이곳에 새겼다고 한다. 글씨
는 해방 이후에 죄다 쪼아 지웠으나 그 흔적은 조금씩 남아 어둠의 시절의 쓰라린 한 단면을
보여준다.


 

♠  인왕산 정상부

▲  정상 동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북쪽 자락과 북악산(백악산)
왼쪽에 보이는 바위 능선이 기차바위이다.

▲  인왕산 정상 남쪽
인왕산 정상은 오로지 남쪽으로만 진입이 가능하다. 서쪽은 성곽 바깥이고
동쪽과 북쪽은 꽤 각박한 낭떠러지기 때문이다.


인왕산은 해발 338m(또는 340m)의 바위 봉우리로 북악산(342m)과 낙산(洛山), 남산과 더불어
서울을 안쪽으로 둘러싼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동북쪽으로 자하문고개를 경계로 북악산(백악산)과 이어져있고 서쪽은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안산(鞍山, 295.9m)과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은 홍제천(弘濟川)을 통해 북한산(삼각산)과 이
어진다.
인왕산의 다른 이름으로 필운산(弼雲山)이란 명칭이 있는데, 이는 제왕이 있는 궁궐 오른쪽<
제왕이 정전(正殿)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에 있어 '군주는 오른쪽에서 모신다'
는 의미이다. 배화여고 뒷쪽에 있던 이항복(李恒福)의 집 이름인 필운대(弼雲臺)도 여기서 비
롯되었다.


경복궁 서쪽인 서촌(西村, 웃대)과 사직동, 의주로, 부암동, 홍제동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누
워있으나 동서의 폭이 좁아 남북과 달리 경사가 꽤 가파르다. 시내에서 볼 때는 산세가 작아
서 금방이면 올라갈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착시현상을 노린 인왕산의 속임수이다. 그의 품에
들어가보면 보기와 달리 넓고 장대한 모습에 놀라게 된다.
사직공원(사직단)과 독립문역에서 인왕산 정상까지 40~50분 정도 걸리며, 정상을 찍고 홍제동
환희사(歡喜寺)나 개미마을, 홍지문, 창의문 쪽으로 내려가면 보통 2시간 내외면 충분하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돌산으로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능선을 따라 선바위와 치마바위,
모자바위, 범바위, 기차바위 등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걸쭉한 바위들이 산의 장대
한 경관을 돕고 있으며, 정상을 이루는 바위 봉우리는 북악산에 버금갈 정도로 웅장해 우백호
에 걸맞는 위엄을 드러낸다. 18세기에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명성을 날린 겸재 정선(鄭敾
)은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비롯해 인왕산의 주요 명소와 장면을 그림에 담아
인왕산을 극찬했다.

돌산이다보니 물이 귀할 것처럼 보이지만 약수터가 제법 많아 곳곳에서 나그네의 목을 축여준
다. 하지만 산의 폭이 좁고 경사가 급하여 속시원한 계곡은 거의 없으며, 그나마 개발의 칼질
과 급격한 도시화로 대부분 사라져 수성동(水聲洞)계곡과 큰절골(환희사계곡)만 그나마 좀 남
아있고 청풍계(淸風溪)와 청계동천(淸溪洞天), 백운동천(白雲洞天) 등은 일부만 살아있다.


▲  인왕산 정상 바위
저 바위가 인왕산의 실질적인 정상으로 높이는 1.5m 정도 된다. 바위의 남쪽과
북쪽 피부에는 움푹 패여 하얗게 서린 곳이 많은데, 이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오가면서 생긴 상처이다.


인왕산은 1968년 1.21사건(김신조 공비 패거리 침투 사건)으로 정상 주변과 성곽 능선이 폐쇄
되면서 선바위와 환희사 주변, 인왕산길을 비롯한 산 밑도리만 겨우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
다가 김영삼 정권 때 다시 속세에 개방되었다. 허나 서울 도심을 지키는 요충지라 군부대 시
설이 성곽 능선과 산자락 곳곳에 남아있어 금지된 땅이 다소 있으며, 사진을 찍을 때도 약간
주의를 기울어야 된다.
또한 매주 월요일은 인왕산 정상 주변과 성곽 능선(인왕산 주능선)은 입산이 통제되며, 월요
일이 휴일인 경우에는 다음 날 통제된다. 다만 성곽 능선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제한이 없
다.

인왕산에는 많은 명소가 있는데, 선바위와 국사당(國師堂), 치마바위, 장안 제일의 경승지였
던 수성동계곡, 벽화로 유명해진 홍제동(弘濟洞) 개미마을, 석굴사원인 석굴암(石窟庵), 지방
문화재 불상을 2기나 간직한 환희사 등이 있다. 또한 국사당과 선바위 일대는 토속신앙과 무
속(巫俗), 불교가 어우러진 이색 현장으로 서울 지역 무속신앙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600년 동안 서울의 우백호로 있다보니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도 많이 서려있다. 태조 때 서울
을 도읍으로 정하고 궁궐 자리를 정할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북악산
과 남산을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로 삼자고 했다. 허나 정도전(鄭道傳)은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을 하여 천하를 다스렸지 동향을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태클을 걸면서 무학의 뜻은 꺾이고 만다.
이에 발끈한 무학은
'내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탄식했다고 한다.
또한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었다고 전하는 '산수비기(山水秘記)'에는
'도읍을 정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국가가 기운이 연장될 것이나 만일 정씨 성을 가진 사람
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서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터져 백성이 어
육이 될 것이다'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5대(정확히는 6대) 만에 세조(世祖)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
년)을 일으켜 조정을 갈아 엎었고, 딱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이 내용은 19세기에 편
찬된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실려있는데 아마도 불교를 배척한 정도전과 사대부의 억불숭유 정
책을 신랄하게 까고자 불교 쪽에서 그럴싸하게 지은 전설을 그대로 인용한 듯 싶다.


▲  성곽과 벼랑으로 완전히 막혀있는 정상 북쪽 성곽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역이던 이괄(李适)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
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인조는 서인 패거리를 이끌고 급히 충청도 공주(公州)로 줄
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치고자 인왕산 서쪽 안산
에 진을 치자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에 빠진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말하며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췄다. 그리고 군사<임진왜란 때 투항한 항왜(降倭)들이 많았음>
들을 이끌고 인왕산 서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하니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
고자 인왕산에 잔뜩 모였다. 그 시절 백성들은 하얀 옷을 많이 입었는데, 산을 가득 메운 그
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
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하여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걸어잠구면서
결국 도성을 버리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로 줄행랑을 쳤다. 허나 부하에게 살해되어 결국
목없는 귀신이 되었고,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금(
後金)으로 도망가 청태종(淸太宗)에게 조선을 치라고 들쑤셨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정묘호란
(丁卯胡亂)이다.

끝으로 인왕산은 호랑이들이 많았는데, 무서운 정도는 천하 제일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궁궐
에 수시로 나타나 난리를 치기 일쑤였고, 심지어 종묘(宗廟)까지 침입했다. 백성들의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란 말도 나
왔으니 인왕산은 그야말로 조선 호랑이의 성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호랑이는 온데간데 없고
그들의 먼 친척인 고양이만 종종 보일 뿐이다.
또한 북악산과 인왕산을 비롯한 서울 호랑이들은 지방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눈도 꿈쩍
안했다고 한다. 그들이 무서워한 것은 다름 아닌 수진궁(壽進宮) 귀신이었다고 하는데, 다음
과 같은 재미난 전설이 걸쭉하게 전해온다.

옛날에 북악산(혹은 인왕산) 호랑이가 먹을거리를 찾으러 경복궁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송
현(松峴)고개로 마실을 나왔다. 마침 어느 집에서 애기가 징징거리고 우는데, 그 어머니가
'문 앞에 호랑이가 왔어. 뚝!'
허나 애기는 계속 징징거린다. 그러자
'애기야 곶감 줄께. 뚝!'
곶감이란 말에 호랑이는 잠시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역시 울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곶감의 시대는 이제 갔구나. 이제 흔쾌히 식사나 해야겠다'
환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수진궁 귀신이닷!!'
외치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뚝 그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호랑이가 지례 겁을 먹으

'엥 수진궁 귀신..? 이건 말도 안돼'
꼬리를 접고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참고로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조선 왕족의 사당임)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악산과 인왕산 북쪽 능선

인왕산 정상에 올라서면 서울 도심과 서촌(웃대)를 비롯하여 서대문구, 마포구, 은평구, 여의
도, 영등포구, 강서 지역, 동작구, 강남 지역, 동대문구, 성북구, 광진구, 강동 지역, 국립현
충원, 관악산, 삼성산, 호암산, 우면산, 아차산 등 많은 존재들이 고루고루 시야에 들어온다.
높이는 338m(340m)에 불과하나 조망만큼은 한라산과 백두산이 부럽지 않다.
또한 사방이 모두 트여있어 해돋이와 일몰 풍경이 진국이며, 남산(南山)과 함께 서울 도심의
새해 해돋이 명소로 유명하다. 또한 도심이 바로 밑이라 여기서 바라보는 도심 야경 맛이 아
주 좋다. (서울 도심 야경은 인왕산을 제일로 쳐줌)

* 인왕산 정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부암동, 서대문구 홍제동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서울의 장대함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와 남산(가운데 솟은 산)
저 멀리 관악산과 삼성산, 우면산, 대모산, 남한산까지 싹 시야에 잡힌다.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안산과 서대문구, 마포구, 여의도,
영등포, 강서 지역


 

♠  인왕산 기차바위

▲  기차바위 능선

인왕산 정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기차바위 갈림길로 다시 내려와 성곽길을 버리고 기차바위로
방향을 잡았다. 철계단을 타고 성 밖으로 내려가 북쪽으로 가면 인왕산의 으뜸 바위로 추앙을
받는 기차바위가 모습을 드러낸다.


▲  인왕산의 북쪽 하늘길, 기차바위 능선 (북쪽 방향)

인왕산 바위의 갑(甲)으로 칭송을 받는 기차바위는 기차처럼 길쭉한 바위 능선이다. 그렇다고
기차처럼 생기지는 않았으며, 그저 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것 같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도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이런 구절이 있다.
그만큼 기차는 길쭉한 존재의 대명사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기차바위 능선은 약 300m 정도로 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거닐면 실감이 덜하겠지만
세검정초교에서 북악산 백사실(백사골)로 올라가는 길이나 부암동 산복길(백석동길)에서 바라
보면 꽤 두툼한 바위 능선임을 알 수 있다. 사방이 확 트여있어 조망은 1급이나 단 양쪽이 일
체의 자비도 없는 낭떠러지이니 난간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


▲  기차바위 능선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시내

가까이로 북악산(백악산)과 서촌(웃대), 경복궁, 서울 도심부부터 멀리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산줄기, 강동구 지역, 남양주와 하남, 성남 지역 산줄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와 눈 속에
서 아주 살살 녹는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평창동, 북한산(삼각산) 남쪽 산줄기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로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부암
동과 신영동, 평창동(平倉洞), 북악산 북쪽 자락과 북한산 남쪽 산줄기가 장쾌하게 시야에 들
어온다. 이렇게 보니 서울의 한복판이 아닌 산악 지방의 소도시를 보는 기분인데, 뫼를 오르
는 재미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조망 맛을 보기 위함이다.


▲  기차바위 북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정상(왼쪽)과 안산(鞍山)

▲  기차바위에서 홍제동, 환희사로 내려가는 산길

▲  옥동약수터

기차바위 능선을 지나 북쪽 갈림길에서 홍제동으로 인도하는 서쪽 길로 내려갔다. 중간에 다
시 왼쪽으로 빠져 환희사 방면으로 내려가다가 옥동약수터를 만났는데, 물이 실타래보다 적게
나오고 수질 또한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은 상태라 손을 대지 않았다. 마침 약수터에 있던 노
인이
'약수터 주변 정비를 안해서 그렇지, 마셔도 괜찮다. 난 이 물을 20년 동안 마셨다'
며 괜찮다고 그런다. 허나 부적합이란 단어가 계속 마음에 걸려 끝내 마시지는 않았다.

노인의 말로는 이곳을 관리하는 동네 노인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다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
거나 생명이 다해 거의 해체되어 관리하는 이들이 없다고 한다. 왕년에는 인왕산의 제일 가는
약수임을 자랑했으나 지금은 많이 초췌해졌다면서 서대문구청에 지속적으로 민원을 넣었지만
철밥통에 걸맞게 앵무새처럼 알겠다고만 할 뿐, 약수터 관리에 그리 신경을 안쓴다고 한다.


▲  옥동약수터 주변 동굴

옥동약수터에서 잠시 두 발을 쉬었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가다보니 또 다른 약수터를 만났
는데, 그 약수터는 아예 물이 말라버렸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들이 있고 그들
뒤로 조그만 자연산 동굴이 있는데, 그곳도 기도와 무속 행위로 말썽이 많자 아예 철조망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굴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산산이 불어와 몸을 꼬질꼬질하게 뒤덮던 땀방울을
제대로 단죄한다.

동굴을 뒤로하고 5분 남짓 내려가니 인왕산 서쪽 자락에 안긴 조그만 비구니 산사, 환희사(歡
喜寺)가 모습을 비춘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 2개를 간직한 20세기 현대사찰로 오랜만에
발을 들일까 했으나 이미 18시가 넘어서 쿨하게 통과했다. 환희사는 18시 정도가 되면 대문을
걸어잠군다.
속세애서 절까지는 차량이 마음껏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닦여져있는데, 그 길을 5분 정도 내
려가면 인왕산을 건방지게 가리고 선 홍제원현대아파트와 인왕산현대아파트가 나온다. 이제
완전히 속세로 내려온 것이다. 두 아파트 사이를 가르는 통일로34길을 내려가니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의주로(義州路)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인왕산 나들이는 다음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9월 2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시문학의 성지이자 도심 속의 상큼한 언덕, 청운동 윤동주시인의 언덕 ~~~ (윤동주소나무,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 서울 도심의 신선한 명소, 윤동주 시인의 언덕(청운공원) ~~~

▲  윤동주시인의 언덕 소나무


 

♠  청운공원에 마련된 새로운 명소, 문향(文香)이 깃든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언덕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상에 세워진 서시 시비(詩碑)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序詩)


서울 도심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자하문(紫霞門)고개 정상에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도심
을 굽어보고 있다.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남쪽에 둥지를 튼 이곳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
늘과 가까운 공원이자 인왕산 동쪽 자락에 조성된 청운공원(淸雲公園)의 일부로 2009년 6월,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고자 공원에서 가장 높은 북쪽에 조촐하게 자리를 닦았다.
언덕의 이름이 그의 이름에 걸맞게 매우 시적(詩的)이면서도 서정적이라 가슴에 꽤 와닿는데
그 이름은 '윤동주 문학사상선양회'의 회장을 맡았던 박영우씨가 지은 것이다.

윤동주 언덕이라 하여 크게 특별한 것은 없다. 높다란 언덕에 잔디를 입히고, 소나무와 여러
키 작은 나무를 심었으며, 윤동주의 시를 머금은 비석을 여럿 세운 그저 평범한 공원이다 성
곽과 소나무 사이로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바람에 속세에서 오염된 머리와 마음이 정화되며,
앞뒤로 보이는 조망(眺望)도 가히 명품이다. 게다가 공원의 분위기도 조용하고 차분하여 절로
시 한 수 읊고 싶은 마음을 솟구치게 하는 그야말로 시상(詩想)의 공간이다. <언덕의 이름도
시상을 크게 적지 않게 돋구고 있음>

이곳이 윤동주의 언덕이 된 사연은 대략 이렇다.
윤동주는 1941년 누상동(樓上洞)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연희전문대학(현 연세대) 후배
인 정병욱(鄭炳昱)과 하숙생활을 했다. 그는 하숙집에서 가까운 자하문고개와 지금의 청운공
원 일대를 수시로 찾아와 시를 짓고 구상을 했다고 하는데, '별헤는 밤'과 '서시'를 바로 이
언덕에서 지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윤동주기념사업회에서 서울시와 종로구청의 협조를 얻
어 언덕을 조성한 것이다.

그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고자 했는데, 그 서문(序文)으로 지어진 것이 바로 서
시로 출간까지는 하지 못하고, 3부를 필사하여 이양하(李敭河)와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했다.
이후 세상이 좀 진정되면서 정병욱이 보관하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세상에 공개하였다.


▲  윤동주의 초상화 -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을 초상화한 것이다.

※ 윤동주(1917~1945년)의 간략한 생애
윤동주는 왜정 때 대표적인 시인으로 그의 이름 3자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중/고
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서시를 비롯한 그의 굵직한 작품들이 정말 지겹게 나오니 말이다.
지금도 이름이 또렷한 윤동주는 1917년 12월, 두만강(豆滿江) 이북인 북간도(北間島) 명동촌(
明洞村)에서 윤영석()과 어머니 김룡()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대랍자()학교를 다니던 중 용정(龍井)으로 이사를 가면
서 1933년 그곳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다가 1935년 본토로 넘어와 평양 숭실(崇
實)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왜정(倭政)에 의해 강제로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다
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 문과에 진학하여 1941년에 졸업했는데, 학교 기숙사의 식사
가 부실해지면서 후배 정병욱과 누상동에 하숙집을 얻어 잠시 살다가 그해 5월 그믐날에 다른
하숙집을 알아보고자 옥인동을 기웃거리던 중,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있던 하숙집 광고 쪽지를
보았다.
그래서 혹시나해서 그 집을 찾아가니 문패에는 '김송(金松)'이라 쓰여 있었다. 마침 그는 소
설가 김송을 존경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 김송?' 생각하며 문을 두드리니 글쎄 그 김송이 나
타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김송 집에서 4개월 정도(1941년 5월~9월) 하숙을 했으며, 저녁 식사가 끝나면 김
송 가족과 대청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거나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고, 때로는 성악가인
김송 부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기도 했다.

김송 집에 머무는 동안 인근 자하문고개를 수시로 올라가 시를 구상했다고 하며 그 현장이 바
로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다. 또한 이때 많은 시가 쓰여졌는데, 마음을 주고 받는 후배가 곁에
있었고, 자신이 존경하는 이의 집에 머물며 그의 가족에게 호의를 받으니 마음도 즐겁고 덩달
아 작품 구상도 잘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붓과 머리가 흥분하여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은 자명
한 것이다.

1941년 9월, 김송과 작별하고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東京) 릿쿄(敎)대학 영문과에 들어갔으
며, 1942년 도시샤대학(同學) 영문과로 자리를 옮겼다. 허나 1943년 7월 학업을 멈추고
잠시 고향으로 가려다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왜경에 급히 체포되었다.
왜경은 그에게 변론의 기회도 제대로 안주고 무조건 징역 2년형을 때려 후꾸오카 형무소에 집
어넣었는데 거기서 잔인한 생체 실험의 희생자가 되어 결국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2월, 회
한의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8세였다. 목격담에 따르면 그는 정체를 아리
송한 주사를 계속 강제로 맞았다고 하니, 결국 왜국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천재시인 윤동주는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고 강제로 눈을 감게 된 것이다.

윤동주는 조부(祖父)의 영향으로 시에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했다. 그의 동생인 윤일주(
)와 당숙인 윤영춘()도 시인이었다고 하니, 그의 집안은 문학적 소질이 다분한 지식인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15살에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첫 작품은 '삶과 죽음'과 '초한대'이다. 이후 '병아리(
1936년 11월)','빗자루(1936년 12월)','오줌싸개 지도(1937년 1월)','무얼 먹구사나(1937년 3
월)','거짓부리(1937년 10월)' 등을 간도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카톨릭소년' 잡지에 소개했
다.
연희전문대학 시절에는 조선일보에 '달을 쏘다'를 냈고, 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자화상',
'새로운 길' 등을 실었다. 그리고 '쉽게 쓰여진 시'가 1946년 경향신문에 실렸다.

누상동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하던 1941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
려고 했으나 내지 못하고 대신 3부를 필사해 정병욱과 이양하에게 1부씩 주었다. 바로 그 시
집의 서문(序文)으로 지어진 것이 그 유명한 서시로 해방 이후 1948년에 이르러 정병욱과 윤
일주에 의해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시는 청소년 시절에 지은 시와 성년 이후의 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청소년기에 쓰여진
시들은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고 대체로 어린 시절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
다. 대표작으로는 '겨울'과 '버선본' 등이 있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자아성
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왜정 시절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시가 주류를 이루니 '서
시','자화상','또 다른 고향','별헤는 밤'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 시로 어둠의 시절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
면 세계를 표현했다.

그는 비록 뜻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나보다 더 창창한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그의 시는 우
리나라 뿐 아니라 왜열도와 중원대륙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그가 다닌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 해마다 많은 이
들이 헌화를 하고 그를 기린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아시아를 뛰어넘는 세계 문학계
의 큰 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세상을 뜨자 그의 시신을 간도 용정으로 가져와 묘를 썼다. 허나 그 무덤도 한때 위
치를 몰라 방황하다가 연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온 왜인 교수의 노력으로 간신히 묘비를 찾았
다. 이후 우리나라와 중원대륙의 공산당 정부가 국교를 맺자 가족들은 봉분을 단장하고 묘비
도 새로 세웠으며, 그의 명동촌 생가는 199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그가 다닌 명동소학교는
윤동주 관련 단체의 지원으로 옛 건물을 복원하여 윤동주기념관으로 거듭났다.

우리나라에는 굵직한 시인들이 꽤 많지만 윤동주만큼 인기와 사랑이 대단한 시인도 손에 꼽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넘어 다른 나라에서도 그의 팬들이 많으니 말이다. 비록 왜의 잔악무도한
만행으로 일찍 눈을 감게 되었지만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혼은 우리들 마음 속에 길이길이
깃들여져 있으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는 영원한 문학신(文學神)이다.


▲  언덕 정상에 박힌 윤동주시인의 언덕 표석

윤동주시인의 언덕은 그 이름만 들어도 마음의 여유가 생길 듯한 느긋한 언덕으로 생각하기가
쉽지만 현실은 조금 가파른 언덕이다. 서울을 지키는 인왕산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이 만
나는 자하문고개에 있다보니 그런 것인데, 고갯길에서 언덕 동쪽으로 오르는 길이 경사가 좀
각박하지만 지름길이며, 윤동주문학관 뒷쪽으로 오르는 길과 청운공원으로 가는 길(자하문로
35길)을 이용하는 것이 언덕의 날카로운 기세를 피하기가 좋다.


▲  늦가을 햇살 속에 한가롭게 졸고 있는 야외 공연장

푸른 잔디와 나무들이 아낌없이 수식하고 있는 언덕 정상에는 언덕의 이름을 드러낸 두툼하게
생긴 표석이 누워있고, 조그만 야외 공연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윤동주 시 낭송회와 백일장,
문예 관련 여러 행사와 공연이 열린다.


▲  시비 앞면을 장식하는 '서시'

▲  시비 뒷면을 장식하는 '슬픈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초기에 쓴 것으로 어둠의 시절
속에서 살아가는 민족의 슬픈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흰색은 백의민족인 우리를 뜻한다고 하며,
삶과 밝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언덕 정상 남쪽에는 서시가 적힌 커다란 시비가 있는데, 대부분은 앞면만 보고 지나친다. 허
나 뒤에도 시가 숨겨져 있으니 시비의 속임수에 속지 말자. 뒤에 새겨진 시는 슬픈족속이다.


▲  늦가을도 잠시 길을 멈춘 윤동주 시인의 언덕 북쪽 산책로
<오른쪽에 보이는 건 한양도성(사적 10호)>


언덕 북쪽에는 옛 한양도성의 성곽(城郭)이 길게 둘러져 있다. 이 언덕은 성곽 안쪽으로 성곽
을 따라 길이 나 있는데 서쪽으로 인왕산과 이어지나 인왕산길로 잠깐 끊기며, 동쪽으로 자하
문과 이어지지만 문 서쪽에 언덕을 깎고 자하문로를 뚫으면서 서로가 끊겨버렸다. 그래서 윤
동주 언덕의 성곽은 양쪽이 끊어진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소나무 (윤동주 소나무)

언덕 성곽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청청한 소나무 1그루가 마치 성곽을 지키는 군사처럼 서 있
다. 나무 곁에 서면 성곽 여장 너머로 도성 밖 경승지이자 도심 속의 전원(田園)마을인 부암
동과 평창동(平倉洞)이 앞다투어 두 눈 아래 펼쳐지고 그 너머로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
(삼각산)이 든든한 모습으로 서울을 살핀다.

이 나무는 윤동주가 시를 구상하던 곳이라고 하며, 일명 윤동주 소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흔
히 볼 수 있는 소나무지만 어둠의 시절, 민족을 향한 독야청청(獨也靑靑)한 그의 얼이 깃들여
진 듯 청초하고 고고해 보이며,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주변을 보는 모습도 예사롭지가 않아 보
인다. 정말 그가 저 나무 그늘에서 시를 구상했는지 낮잠만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윤동주 언덕
을 상징하는 의미 깊은 나무로 나름 분주한 삶을 살고 있다.


▲  윤동주 소나무에서 바라본 천하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둥지를 튼 부암동과
홍지동(弘智洞) 일대, 그리고 저 멀리 북한산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  윤동주 소나무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인왕산길

▲  윤동주 영혼의 터

야외공연장에서 창의문 쪽으로 내려가면서 오른쪽 잔디밭을 유심히 살펴보면 땅에 박힌 표석
이 하나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 표석은 윤동주 영혼의 터로 서시 시비의 뒷면처럼 많이들 지
나치는데, 이곳은 간도 용정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 흙 한줌을 가져와 뿌린 곳으로 그 위에 표
석을 박았다. 즉 그의 소소한 가묘(假墓)가 되는 셈이다. 영혼의 터라고 하니 조금은 오싹한
기분도 들긴 하지만 그만큼 근사한 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서시정(序詩亭)

언덕 서쪽 밑에는 서시정이라 불리는 단촐한 모습의 정자가 도심을 굽어보고 있다. 2009년 언
덕을 꾸미면서 지은 것으로 윤동주의 서시를 따서 서시정이라 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정자로 이곳에 몸을 들여 남쪽을 보면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의 심장부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특히 야경이 멋짐)


 

♠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시민공원
청운공원(淸雲公園)

▲  가을옷을 곱게 걸친 청운공원과 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웃대)의 북쪽 끝이자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청운공원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
은 공원이다. <산 전체 또는 대부분이 공원으로 지정된 남산과 안산(鞍山), 낙산공원은 제외>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란 새로운 꿀단지를 동쪽에 달고 있는 이곳은 인왕산 동쪽 자락으로 청운
동 주택가와도 약간 거리를 둔 자연 지대이다. 인왕산길이 공원의 북쪽과 서쪽을 지나가며 자
하문고개에서 북악산길로 간판을 갈고 북악산 뒷쪽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공원을 가로지르는
골목길(자하문로35길)은 윤동주문학관에서 공원을 지나 청운동 주택가를 거쳐 자하문로로 내
려간다.

청운공원은 평범한 시민공원으로 산자락에 조성된 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인왕산 돌을 모아 일종의 돌아파트를 지었고, 2009년 이후 공원 동쪽에 윤동주시인
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이 들어서면서 예전보다 인기가 늘어졌다. 윤동주언덕도 엄연히 청운
공원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공원이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서울 도심과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그런
데로 일품이며, 북악산과 인왕산의 청정한 기운이 늘 깃들여져 있어 공기도 맑다. 게다가 서
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성지(聖地)로 매년 1월 1일에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각종 꽃
들이 울창하여 봄에는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가 봄의 향연을 열고, 가을에는 오색영롱한 단풍
잎이 늦가을의 향연을 베푸는 도심 속 경승지이다.

청운공원에 가려면 자하문고개(교통편은 아래 윤동주문학관 참조)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자하문터널 남쪽에서 자하문로35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도 있는데, 그건 경사가 좀 각박
하다. 그리고 청운동 안쪽에 자리한 유진인재개발원 정문 못미쳐에 청운공원으로 오르는 산길
이 가늘게 이어져 있고, 사직공원과 수성동(水聲洞)계곡에서 인왕산길을 타고 접근하는 것도
괜찮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늦가을 단풍이 한참 절정을 이루던 때라 진한 붉은색과 노란색, 녹색 등으로 단단히 물들었다. 겨울 제국(帝國)의 시련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남은 끼와 기력을 모두 발산하는 나무들과 죽
음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무지개처럼 짧은 삶을 원망하는 나뭇잎들.. 인간은 그
들을 보며 늦가을의 정취를 즐기면서도 '올해도 이제 저물었구나, 좀 있으면 강제로 1살을 더
먹네' 늦가을과 연말 우울증에 한숨을 쉰다.


▲  청운공원 서부 (오른쪽에 보이는 동그란 존재가 '꿈의 분수')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일몰 직전의 하늘

청운공원 서쪽에는 꿈의 분수라 불리는 바닥분수와 넓은 운동장이 있다. 꿈의 분수는 매일 2
번 정도 조촐하게 분수쇼를 선보이는데, 그리 현란한 편은 아니며, 그냥 주변을 시원하게 해
주는 정도이다. 가동기간은 4월부터 10월까지로 1차는 11시에서 13시까지, 2차는 15시부터 16
시까지이며, 겨울에는 무조건 쉰다. (가동 시간은 변경될 수 있음)
분수쇼는 전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분수와 어울려 물놀이를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그러
니 그냥 눈으로만 보기 바란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남쪽에 자리한 인왕산 호랑이상

천하 호랑이의 대명사이자 하늘 아래 제일 무서운 존재였던 인왕산 호랑이, 이제는 숱한 설화
만을 남긴 채, 우리들 뇌리에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그들을 그리며 만들었다는 인왕산 호랑이상, 어린이들이 울고 갈 정도로 매섭게 좀 만들 것이
지 너무 순둥이처럼 만들어 졸지에 호랑이 탈을 쓴 인왕산 고양이상이 되어버렸다. 곶감도 씹
어먹었다는 천하 제일의 인왕산 호랑이인데 그들을 제대로 모욕한 셈이다.


▲  인왕산 돌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인왕산 돌아파트)'

서시정에서 윤동주문학관으로 내려가면 돌의 거대한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2007년
서울시에서 추진한 '서울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인왕산과 그 주변
에서 주운 돌들을 정리하여 그들의 조촐한 아파트로 만들었다. 


 

♠  윤동주 언덕 밑에 자리한 윤동주문학관

▲  화려한 나비를 꿈꾸는 윤동주 문학전시관(윤동주문학관)

윤동주시인의 언덕 밑이자 자하문고개 정류장 부근에 시인 윤동주를 집대성한 '윤동주문학관'
이 심플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곳에는 원래 청운동 수도가압장 건물이 있었는데 빈 채로 버려져 있던 것을 2009년 윤동주
의 언덕을 만들면서 우선 급한데로 문학관으로 손질하여 정신적 영혼의 가압장이 되었다. 속
은 문학관일지 몰라도 겉은 문학과는 담을 쌓은 우울한 모습이었는데,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에서 서울시와 종로구청의 지원을 받아 오랜 번데기 생활 끝에 2012년 7월 25일 지금의 모습
으로 화려하게 태어났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2011년 3월로 그해 연말까지 여러 번 발걸음을 했는데, 당시 내
부는 좀 어수선했다. 공개시간이 있긴 하지만 평일에는 일찌감치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으며,
처음에는 정문 옆에 조그만 문으로 입장을 해야 했다. 그런 공간이 이제는 윤동주를 닮은 세
련된 문학적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번데기를 탈피한 이 문학관은 2012년 대한민국 공공건축 부분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았으며 우
리나라 현대건축 Best 20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화려하다 못해 눈부신 나비로 태어난
셈이다. (2014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받았고, 2015년에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됨)

문학관은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있는데, 제1전시실(시인채)에는 윤동주의 손때가 진하게 담
긴 친필 원고와 온갖 문서와 서적들, 사진, 윤동주 모교의 의자와 등사기(謄寫機), 떡판 등
그의 유품 133점이 전시되어 있고, 제2전시실(열린우물)은 옛 가압장의 물탱크 윗부분을 개방
하여 중정(中庭)으로 만들어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그리고 제3전시실(닫힌
우물)은 물탱크를 원형대로 보존하면서 그 안에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담은 동영상을
상영한다. 그 외에 '별뜨락'이란 쉼터를 만들어 서울 도심을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문학관에 진열된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주목을 끄는 존재가 하나 있는데, 그건 그의 생가에서
가져온 나무 우물이다. 우물의 목판은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회장인 박영우씨가 직접 간도 용
정에서 가져온 것으로 땅을 깊게 파고 그 우물을 보호하고자 나무 판을 4단으로 얹힌 점이 특
징이며, 이곳에 안착한 우물은 이제 우물 기능은 상실되고 무늬만 남은 늙은 우물이 되었다.
전시관 안이다보니 깊게 땅을 뚫을 수도 없고, 마땅한 수맥도 없기 때문이다.


▲  윤동주문학관에 진열된 그의 유품과 초상화들 (2012년 이전)

▲  윤동주의 모교에서 가져온 조그만 의자 (2012년 이전)

요즘 초등학교에서 저런 나무 의자를 쓸까? 내 초등학교 시절(1~3학년)까지만 해도 저거와 똑
같은 의자에 앉았는데, 기억도 흐릿한 그 시절의 추억을 잠시나마 소환해준 정겨운 의자이다.


▲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

윤동주가 교토 도시샤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학교 친구들과 우지강<우지천(宇治川), 요도가와
강> 강변으로 마실을 나가 찍은 사진이다. 이때 왜인 친구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하자 그
는 아리랑을 우수에 찬 모습으로 불렀다고 한다.
허나 그때까지만 해도 윤동주나 그의 친구들이나 그것이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
다. 얼마 뒤 그는 왜경에 끌려가 후꾸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으로 비온 뒤 잠깐 모습을 드
러낸 무지개처럼 짧은 인생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그가 불의의 죽음을 당하자 그의 친구들은 크게 통곡하며 그를 애도했다.


▲  윤동주 생가에서 수습해온 나무 우물
우물 위에 두룬 나무판을 가져와 복원한 것이다. 대략 100년 정도 묵었다고 하며.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져 중후한 멋을 풍긴다.
 

※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 찾아가기 (2018년 1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윤
  동주 문학관)에서 하차, 길 건너편에 윤동주문학관과 언덕이 있다.
*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1020,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윤동주문학관 관람정보 (2018년 11월 기준)
* 문학관 관람시간 : 10시 ~ 18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 추석은 쉼)
*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관람시간 제한이 없는 열린 공간이다.
* 입장료 없음. 문학관 해설사 운영
* 매년 5월에 윤동주문화제가 열린다. (시낭송회와 백일장, 윤동주상 시상식, 문학콘서트, 문
  학둘레길 걷기대회 등의 행사가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3-100 (창의문로 119 ☎ 02-2148-4175)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8년 11월 9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8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