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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3.31 도봉산의 숨겨진 명소 ~~ 방학동사지(절터),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윗무수골 나들이 (귀록계산 바위글씨, 자현암) 1
  2. 2019.10.29 서울 북쪽 끝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산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역, 무수골)

도봉산의 숨겨진 명소 ~~ 방학동사지(절터),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윗무수골 나들이 (귀록계산 바위글씨, 자현암)

도봉산 방학동사지,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무수골(자현암)



~~~~~  도봉산 방학동사지,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무수골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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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방학동사지

▲  도봉산 방학동사지

귀록계산 바위글씨 윗무수골 숲길

▲  귀록계산 바위글씨

▲  윗무수골


 

서울의 북쪽 지붕인 도봉산(道峯山, 720m)은 내가 서식하는 도봉구(道峰區)의 듬직한 뒷
동산이다. 그의 그늘에 묻혀 산지가 어언 20년 남짓, 비록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그의
품을 찾곤 한다. 도봉산을 거의 손바닥 보듯 돌아다니는 본인이지만 그것을 깨는 신선한
존재들이 가끔 나타나 나를 놀래키니 그런 것을 보면 도봉산이 내 손바닥이 아니라 오히
려 내가 그의 손바닥 안에서 재롱을 떠는 것 같다.

도봉동 집과 가까운 도봉산 방학동(放鶴洞) 구역에 늙은 바위글씨와 절터 유적이 있음을
근래 알게 되었다. 집 근처에 아직도 그런 미답처(未踏處)들이 숨겨져 있었다니 내심 놀
랐는데, 다른 곳은 몰라도 서울의 미답처는 정말 참을 수가 없다. 하여 여름 제국(帝國)
의 기운이 슬슬 꺾이던 늦여름에 그들을 찾아 나섰다.

집과도 가까우니 슬슬 걸어가면 된다. 신도봉4거리에서 우이동(牛耳洞) 방면으로 이어지
는 시루봉로를 따라 20분 정도 걸어가면 신방학중학교이다. 여기서 '방학동 전형필(全鎣
弼) 가옥' 옆길로 들어서면 그 길의 끝에 택시 회사가 있는데, 그 옆에 방학동계곡을 낀
산길로 들어서면 바로 도봉산의 품이다.


 

♠  방학동계곡에서 만난 한줄기 바위글씨

▲  도봉산 방학동계곡 산길

방학동계곡 산길은 시루봉과 방학동사지,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로 인도하는 숲길이다. 방학
동 주민의 소중한 산책 코스로 왕래가 빈번해 산길 또한 잘 닦여있는데, 길과 가깝게 거리를
두고 방학동계곡이 졸졸졸~♪ 교향곡을 선사하며 흘러간다.


▲  숲에 묻힌 방학동계곡 (바위글씨 윗쪽)

방학동계곡은 도봉산 최남단에 자리한 조그만 계곡으로 방학천과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
다. 숲이 짙은 계곡 중류에는 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싹둑 다듬은 각이 진 바위와 반석이
즐비해 경관도 괜찮은데, 서울 시내와 가까운 이런 계곡에는 옛 사람들이 남긴 풍류 흔적과
낙서가 거의 있기 마련이다. 그 예상대로 이곳에도 그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숨겨져 있다.
허나 그들을 알리는 어떠한 안내문도 없기에 계곡을 더듬으며 알아서 숨바꼭질을 해야 된다.
다행히 숨바꼭질의 난이도는 낮으며 계곡을 따라 한문이 새겨진 바위만 찾으면 술래는 끝이
다.


▲  각이 진 바위와 반석이 많은 방학동계곡
자연이 칼로 싹둑 다듬은 것일까? 유난히 각이 지고 반듯한 암반이 많다. 비록
골짜기는 작아도 이 정도의 경치면 충분히 옛 사람들이 반할만하다.

▲  암반 사이를 잔잔히 흐르는 방학동계곡
바위 피부에 푸른 이끼들이 가득해 이곳이 속세의 때를 덜 탄
청정한 곳임을 알려준다.

▲  바위글씨가 서린 조그만 폭포 주변

바위글씨와 숨바꼭질을 벌이며 계곡을 더듬으면 조그만 폭포가 나온다. (산길에서 조금 떨어
져 있음) 사실 폭포라 하기도 좀 민망한 수준인데 그래도 계곡물이 완만하게 누운 바위를 타
고 아래로 미끄러지니 엄연한 폭포이다. 바로 이 폭포 주변에 나를 이곳으로 소환한 바위글씨
2개가 서려있다.


▲  바위에 의연하게 깃든 귀록계산(歸鹿溪山) 바위글씨

폭포 옆에 90도로 각을 진 바위 피부에는 귀록계산 바위글씨가 선명하게 깃들여져 있다. 바위
에 네모나게 홈을 파고 행서체(行書體)로 글씨를 새겼는데, 그 홈 크기는 77x28cm이다. 그 4
자를 단순히 풀이해보면 사슴이 산과 계곡으로 돌아간다는 뜻인데, 여기서 귀록(歸鹿)은 그
뜻이 아니라 방학동과 인연이 깊은 귀록 조현명(趙顯命, 1691~1752)의 호이다. 그러니까 조현
명의 산과 계곡, 즉 그의 조그만 세상이란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조현명은 누구일까?

조현명은 풍양조씨로 조인수(趙仁壽)의 아들이다. 자는 치회(稚晦), 호는 녹옹(鹿翁), 귀록(
歸鹿)으로 모두 '사슴록(鹿)'자가 들어가는데, 이중 귀록은 1731년 이후 2번이나 파직과 복직
을 당했을 때 사용했다고 한다.
1713년 진사(進士)가 되고, 1719년 증광시 문과(增廣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관직
에 진출했다. 1721년 경종(景宗)이 숙종(肅宗)의 아들이자 숙빈최씨의 소생인 연잉군(延礽君)
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내세워 소론(小論)의 공격으
로 힘들어하던 왕세제를 지켰다. 그 연잉군이 바로 영조(英祖)이다.

1728년 영조를 부정하는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
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했고, 반란이 진압되자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
(豊原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대사헌(大司憲)과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
가 되어 영남 남인(南人)을 다독거리며 백성을 보살폈다.
1731년 경상도에서 가장 큰 섬인 대마도(對馬島)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자 대마도주가 급히 지
원을 애걸했다. 하여 조정에서 쌀을 내리려고 했으나 이를 반대하자 파직을 당했으며, 1733년
전라도관찰사로 다시 기용되면서 공조참판(工曹參判)과 총융사(摠戎使), 어영대장(御營大將)
을 지냈다. 허나 1736년 예조판서 시절에 형정(刑政)의 불공평을 상소하다가 또 파직을 당했
다.
다행히 1738년 복직되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 등을 역임했고, 1740년
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1743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왔으며, 1746년 우의정(右議政)
이 되면서 문란해진 양역(良役)을 손질하고자 군액(軍額)과 군역부담자 파악에 착수, 1748년
에 양역실총(良役實總)을 간행하여 왕에게 올렸다.
1749년 청나라에 다시 사신으로 갔다왔고, 이듬해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으며, 균역법의 제정
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했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으로 영돈녕
부사로 물러났다.

조현명은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을 적극 지지하며 양역의 개혁과 온갖 세금의 개선책을 제시
했다. 그리고 많은 문인과 교류를 했는데, 그중에서 김재로(金在魯), 박문수(朴文秀)와 친분
이 깊었다. 그가 남긴 책으로는 '귀록집(歸鹿集)'이 있고, 해동가요(海東歌謠)에 그의 시조 1
수가 전하며,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  아직도 뚜렷한 귀록계산 바위글씨의 위엄
300년 가까운 세월이 덧없이 흘렀건만 글씨는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은 정정한
모습이다.

  바위에 비스듬히 누운 와운폭(臥雲瀑) 바위글씨 (25x94cm 크기로 행서체)

조현명이 방학동계곡과 인연을 맺은 것은 처음 파직을 당한 1731년 이후로 여겨진다. 벼슬에
서 떨려나자 아버지가 묻힌 방학동에 들어와 잠시 머물렀는데 그 묘역이 바로 전형필가옥 뒷
쪽에 있다. (시루봉로 길가 북쪽 언덕) 그때 묘역과 가까운 이 계곡에 홀딱 반해 별서(別墅)
를 짓고 '귀록계산'과 '와운폭' 바위글씨를 남긴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글씨를 굳이 조현명과 연관 짓는 것은 그가 시루봉 주변 어딘가에 별서를 지은 적이 있
고, 귀록이란 호를 사용했으며, 그의 '귀록집'과 귀록집 권3에 실린 '와운폭우증가련(臥雲瀑
又贈可憐)','와운폭'이란 시가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의 글씨로 100%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
으며, 그의 후손이나 후학들이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계곡 주변에 있었다는 그의 별서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흔적 조차 더듬을 수 없지만 1744년 별
서 후원에 명오정(名吾亭, 귀록정)을 짓고 소기영회(小耆英會) 벗들을 불러 시문을 짓고 술을
마시며 놀았으며, 등산을 좋아하여 종종 도봉산과 우이암(관음봉) 부근 원통사(圓通寺)에 올
라가 몸을 풀었다.
또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와운폭'이란 시를 남겼는데, 이 와운폭을 두고 당시 함경도 함흥
(咸興)의 유명한 늙은 기생과 시를 몇 수 주고 받았다. 그때 기생에게 보낸 시 1수를 보면 다
음과 같다. 정리하면 즉 인생무상... 인간의 인생은 결국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다.


功名文武前身事 - 문무의 공명은 모두 전생의 일만 같고
歌舞繁華一夢間 - 번화한 가무는 한바탕 꿈결처럼 지나갔다
大笑相看頭似雪 - 크게 웃는다 서로 쳐다보고 머리가 새하얗게 센 것을
空山斜日水流閑 - 공산에는 해 기우는데 강물은 유유히 흘러가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0-1


▲  장수주말농장 옆 산길

방학동계곡에 깃든 2개의 바위글씨를 둘러보고 방학동사지를 찾고자 도봉산의 품으로 더 파고
들었다.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과 만나는 곳에서 계속 직진하면 너른 밭두렁이 나타나 사람을
놀라케 하는데, 그곳은 장수주말농장으로 도봉동과 방학동에 흔한 주말농장의 하나이다.

푸르게 익어가는 밭을 보니 우울했던 마음이 잠시나마 봄이 된 기분이랄까? 수많은 사람과 회
색빛 빌딩숲, 번잡함이 연상되는 서울에서 이렇게 밭두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곳이 그만큼
서울 변두리란 소리이다.


 

♠  도봉산에 숨겨진 옛 절터, 방학동사지(放鶴洞寺址)

▲  방학동사지 2단과 3단 석축

장수주말농장에서 산속으로 더 들어가면 숲속에 묻힌 체육시설이 마중을 한다. 이곳은 방학동
주민들이 결성한 장수산악회가 약수터 주변에 운동시설을 닦아놓은 것으로 단순히 보면 도시
뒷산에 널린 운동시설과 공원으로 보고 지나치기 쉽지만 문제는 그 운동시설이 자리한 곳에
돌로 쌓은 심상치 않은 석축(石築)이 요란하게 널려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석축을 이루고 있
는 돌도 꽤 고색이 깊어보여 이곳에 무슨 사연이 있음을 살짝 속삭인다.

이곳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이곳은 오래된 절터이다. 이곳에
둥지를 틀었던 절의 이름과 창건 시기, 망한 시기에 대해서는 전혀 전하는 내용이 없어 안타
까울 따름인데, 절터에 남아있는 석축과 맷돌은 마지막 날의 충격이 참 대단했던지 여전히 입
을 굳게 닫고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인근 계곡에 별서를 지었던 조현명의 기록에도 절은
나오지 않는다. 이처럼 절의 모든 것이 수수께끼에 덮여있어 지역 이름을 따서 편의상 '방학
동사지'라 부른다.

이 미지의 절터에는 돌을 거칠게 다듬어 쌓은 석축 3단이 남아있다. 가장 위에 있는 1단 평탄
지는 길이 60m, 너비 17m로 20~120cm 크기의 장방형 석재를 5단 정도로 쌓아서 구축했다. 터
가 가장 넓어서 법당(法堂) 같은 건물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1단 밑에는 2단을 두
었는데, 평탄지 길이 15m, 너비 5m 이며, 석축 길이는 10m, 높이 1.5m로 15~95cm 크기의 석재
를 6단 정도로 쌓았다. 3단 석축 평탄지는 길이 14m, 너비 6m이다. 석축 앞에는 완만하게 내
리막 경사가 펼쳐져 있고, 바위와 온갖 돌들이 널려 있다.

3단의 석축 외에 맷돌과 우물이 있으며, 서울역사박물관이 2003년에 1,100㎡를 조사하면서 어
골문(魚骨文)과 종선문(縱線文), 사선문, '官'이 새겨진 기와, 청자 양각 접시, 청자와 백자,
기와, 토기 파편 등을 건졌다. 이들 유물을 통해 적어도 고려 후기 이전에 절이 세워진 것으
로 여겨지며, 조선 중기나 후기에 홀연히 망한 것으로 보인다.


▲  절터 2단 석축 (석축 서편은 시멘트와 현대 벽돌이 섞여 있음)

절이 망한 이유는 억불정책으로 인한 경영 악화도 있을 것이고, 주변에 도선사(道詵寺)나 천
축사(天竺寺) 등의 쟁쟁한 절도 많았으며, 계곡을 낀 숲속이라 자연재해도 늘 도사리고 있으
니 충분히 상상과 추측은 가능하다.
절이 사라진 이후, 터만 황량하게 전해오다가 1970년대 이후 장수산악회에서 이곳에 체육시설
을 닦으면서 크게 훼손되었고, 아직까지도 문화유산으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해 관리의 손
길마저 부실한 실정이다. 그래도 절터 석축과 맷돌이 간신히 남아있으니 눈썰미가 좀 있다면
금세 이곳이 절터였음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  돌들이 헝클어진 절터 1단 석축

방학동사지는 서울에 거의 남지 않은 제대로 된 절터 유적으로 그 희소성이 크다. 허나 그 가
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무책임하게 버려져 있으니 실로 안타깝다. 그 외에 북한산(삼
각산) 향림사지(香林寺址), 화곡동(禾谷洞)사지, 대모산(大母山) 절터 등이 희미하게 전하고
있다.


▲  절터에 남은 약수터
옛날 이곳에 있던 절 사람들의 식수로 절과 승려는 온데간데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물은 쏟아져 나와 대자연의 넒은 마음을 보여준다.

▲  형태만 남은 절터 맷돌
어처구니가 바쁘게 돌아가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저 맷돌을 통해 절 사람들은 음식을 만들고 공양을 했다.

▲  절터 1단 석축 평탄지에 조성된 무심한 체육시설들

터가 너른 1단 석축에는 법당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있었을 법당과 주변 건물 모습
은 어떠했을까? 법당 좌우에는 삼성각(三聖閣)이나 명부전(冥府殿)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고
건물 크기도 다 고만고만했을 것이다. 이렇게 머리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이름도 전하
지 않는 옛 절터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차피 정답은 없다.

절터를 무심히 짓누르고 있는 체육시설과 의자를 싹 밀어버리고 이곳 일대를 싹 뒤집어 조사
를 벌였으면 좋겠다. 혹시 아는가 도봉사 영국사(寧國寺)터로 여겨지는 도봉서원터처럼 이곳
의 놀라운 비밀이 드러날지도. 지금까지는 그저 간보는 수준의 조사만 벌였기 때문에 토기나
도자기 파편 정도만 수습된 것이다.

▲  크고 작은 돌로 이루어진 1단 석축

▲  맷돌 주변 절터 석축과 주춧돌


▲  절터에 있는 마애불(磨崖佛)과 불상복원비

절터 서쪽 바위에는 체격도 늠름하고 잘생긴 마애불이 깃들여져 있다. 이 석불은 옛 방학동사
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로 동네 주민들이 장수산악회를 조직하면서 그 기념으로 1973년
5월에 마련한 것이다. 절도 아니고 산악회에서 자체적으로 마애불을 만들어 봉안한 점이 이채
로운데, 그들은 이곳이 절터였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마애불은 이곳의 상징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켰으나 기독교 애들이 불상에 해코지를 하며 훼손
시키는 만행을 저지르자 산악회 회장이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1993년 음력 4월에 복원하고 불
상복원비를 세웠다.


▲  가까이서 대한 마애불의 위엄

마애불을 살펴보면 윗쪽에 비를 막아줄 보개(寶蓋) 같은 것이 두툼히 씌워져 있다. 머리와 몸
통에는 각각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두텁게 달려있어 그를 윤기나게 빛내주고 있으며, 머
리는 민머리 스타일로 머리 정상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두 눈은 지그시 감았으며, 코는 약간 오똑하고, 다물
어진 입술에는 그런데로 미소가 피어나 있다. 볼살은 풍만하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들의 소리만큼은 정말 잘 들을 것 같다.

불상의 체격은 매우 당당해보이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냈다. 손에는 보주(寶珠) 같은 것을 들
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었으며, 연꽃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명상에
임한다. 대좌 밑에는 법륜(法輪) 2글자가 굵직하게 쓰여 있다.

* 방학동사지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58-1


▲  1단 석축 윗쪽에 쌓여진 석축들
절터에서 나온 온갖 돌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다.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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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동계곡에 서린 바위글씨와 절터를 둘러보고도 시간이 많이 남아 방학동길을 타고 무수골
로 넘어가기로 했다.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북한산둘레길19구간)은 무수골에서 정의공주묘역까지 이어지는 3.1km
의 산길이다. 짙은 숲속을 거니는 그림 같은 숲길로 오르락 내리락이 다소 있을 뿐, 살방한
코스이며, 경사도 그리 각박하지 않다. 북한산둘레길의 서울 구간 상당수는 주택가와 산림 사
이를 오가지만 이 코스는 남쪽 구간 일부를 제외하면 시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금은 깊은
산길이며, 북쪽인 무수골에서 도봉옛길(북한산둘레길18구간)로 간판을 바꾸고, 정의공주묘역
에서는 왕실묘역길(북한산둘레길20구간)로 간판을 갈고 우이동으로 흘러간다.

방학동길에서 만날 수 있는 명소로는 연산군묘 북쪽에 자리한 정의공주(貞懿公主)와 안맹담(
安孟聃) 묘역, 무수골, 둘레길을 닦으면서 만든 쌍둥이전망대가 있으며, 둘레길과 좀 거리는
있지만 방학동사지와 귀록계산/와운폭 바위글씨가 있다. 방학동길이란 이름은 방학동을 지나
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수해(樹海)와 속삭임 ~ 방학동길

▲  쌍둥이전망대

방학동길이 흐르는 무수골 남쪽 언덕에 똑같이 생긴 쇳덩어리 구조 2개로 이루어진 쌍둥이전
망대가 있다. 둘레길을 닦으면서 심어놓은 것으로 회전 계단을 오르면 전망대 윗쪽에 이르는
데, 이곳에 서면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도봉구와 노원구 지역이 그런데로 시야에 박힌다.


▲  하늘과 보다 가까이, 쌍둥이전망대 윗쪽
꼭대기로 올라가보니 그저 그런 하늘 아래 전망대더라..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 방학동 구역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동과 노원구, 수락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안개가 극성이었다.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 산줄기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방학동, 쌍문동, 강북구 지역

▲  무수골 직전, 야트막한 고갯길 (방학동길)


 

♠  서울 속의 별천지, 도봉산 무수골 (윗무수골)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서울 속의 산골마을이자 도봉산의 숨겨진 비경이며 도봉산의 3대 계곡의 하나로 추앙받는 무
수골은 근심이 없는 계곡이란 뜻이다.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
도 있으며,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 초기까지는 대장장이가 많이 살아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
'이라 불렸는데, 그 무쇠골이 영해군(寧海君)이 묻힌 이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이야
기도 있다. 그리고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한다.
15세기에 세종 9번째 아들인 영해군이 무수골 명당자리에 묻힌 이후, 그의 후손(전주이씨)들
이 터를 닦았고, 이후 안동김씨와 함열남궁씨, 진주류씨, 개성이씨 등이 이곳에 무덤을 쓴 인
연으로 들어와 오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러다보니 골짜기에 영해군파묘역과 함열남
궁씨묘역, 진주류씨묘역,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 1379~1457년)과 그의 부
인인 태조의 서장녀(序長女) 의령옹주(義寧翁主, ?~1466) 묘역 등 조선시대 무덤이 많이 깃들
여져 있다.

방학동길 북쪽 종점에서 서쪽으로 들어가면 무수골의 속살이 나온다. 그 전에 성신여대 난향
원 돌담길을 지나야 되는데, 길 좌우로 돌담이 둘러져있어 비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
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진 것 같은 난향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골
초행이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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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르게 익은 윗무수골 논

난향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온
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삼삼한 숲속에 자리한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첩한 산골에 무려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속세와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지만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너른 편이다. 마치
강원도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만
논이 펼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2~3개의 논두렁이
있다.
이들 논두렁이 무수골의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
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이란 이름
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  윗무수골 숲길

논두렁을 지나면 250년 묵은 느티나무가 나타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느티나무가든 문패를
내건 문을 들어서 직진하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뼈를 묻었다는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
내외의 묘역이 있고, 오른쪽으로 식당을 가로 질러 숲속으로 들어서면 무수골의 오랜 주인인
영해군 묘역(영해군파묘역)이 있다.

반면 느티나무에서 왼쪽으로 가면 자현암, 원통사, 우이암(관음봉)으로 이어지는데, 하늘을
가리며 쭉쭉 뻗은 나무들이 아름드리 숲길을 이루어 마치 강원도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아름
다운 숲길 100선은 아니더라도 200선에 넣어도 손색이 없는 품질인데, 성신여대 난향원 일부
가 이곳에 자리해 있어 길 옆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또한 숲을 타고 흐르는 무수골 계곡은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한여름 피서의 성지로 손색이 없다.


▲  수해(樹海)의 파도 속을 거닐다~~ 윗무수골 숲길

▲  자현암입구 갈림길 (무수골공원 지킴터)

▲  윗무수골에 자리한 자현암(慈賢庵)

윗무수골 가장 안쪽에 조그만 비구니 암자인 자현암이 조용히 둥지를 틀고 있다. 첩첩한 산주
름 속에 제대로 묻힌 산사(山寺)로 1943년에 승려 김혜향(金慧香)이 이름이 전하지 않은 절터
에 세웠다.
혜향은 자현(慈賢)의 3대 제자의 하나로 스승의 이름을 절 이름으로 삼았는데, 1991년 요사채
를 새로 짓고 2011년에 범종각을 갖추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 범종각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며, 고색이 피어나
지 못한 상태라 문화유산은 없다. 딱히 볼거리는 없으나 바깥에 석불과 보살상을 많이 만들어
놓았고, 요사채 옆에 노천 부뚜막을 설치해 나무장작으로 밥과 국을 만든다.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 그런 부뚜막을 갖추고 있으니 밥맛 하나는 좋을 것 같다.

* 자현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86-2 (도봉로169길 500 ☎ 02-954-2578)

▲  솥뚜껑도 갖춘 부뚜막

▲  대웅전(大雄殿)과 7층석탑

▲  석불과 김혜향 공로비(오른쪽 비석)

▲  칠성과 산신, 독성이 봉안된 삼성각


▲  정헌대부(正憲大夫) 남궁숙 신도비(神道碑, 왼쪽에 보이는 비석)와
후손들이 사는 집과 재실


자현암 못미쳐 무수골공원지킴터에서 남쪽 길로 조금 가면 마치 먼 지방의 깊은 산골에 들어
선 듯, 숲에 감싸인 조촐한 공간이 나온다. 그야말로 숲과 하늘만 보이는 이런 두메산골에 2
채의 집과 너른 텃밭이 펼쳐져 있는데, 한쪽에 근래에 지어진 남궁숙(南宮淑, 1491~1553) 신
도비가 있다.
신도비 뒷쪽 숲에는 남궁숙과 그의 자손들이 묻힌 함열남궁씨 제1묘역이 있는데, 이들은 16세
기 이후에 조성된 묘역으로 그 입구에 철책과 철문을 둘러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하긴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존재도 아니고, 묘역도 다소 젊어져서 철문을 뚫으면서까지 살필 생각은 없
다. 그냥 여기서 길을 접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신도비 주위로 후손이 사는 집과 재실(齋室)
이 있으며, 주변 텃밭은 주말농장으로 개방하고 있다.

함열남궁씨는 무수골과 도봉동 토박이의 일원으로 그들의 묘역은 이곳 외에 무수골 하류인 도
봉초교 뒷쪽(함열남궁씨 제2묘역)에도 있다.

이렇게 하여 늦여름에 벌인 도봉산 동네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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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3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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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쪽 끝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산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역, 무수골)

 


' 도봉산 봄나들이 '

▲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윗무수골)

▲  능원사 용화전

▲  도봉사

 


 

도봉산(道峯山, 739.5m)이 뻔히 바라보이는 그의 포근한 그늘, 도봉구 도봉동(道峰洞)에서
15년이 넘게 서식하고 있지만 그에게 안긴 횟수는 의외로 매우 적다. 그가 집에서 멀면 모
르지만 버젓히 그의 밑에 살고 있음에도 이렇다. 그렇다고 내가 산을 싫어하거나 돌아다니
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며, 도봉산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상하
게도 손과 발이 잘 가질 않았다. (도봉산 밑도리까지 포함하여 1년에 2~3번, 많으면 4~5번
정도 찾는 편임)
그래도 우리 동네의 듬직한 뒷동산이자 꿀단지 같은 존재인데, 가끔은 가줘야 도봉산도 서
운해 하지 않겠지? 하여 거의 1년 여 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해가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3시에 집을 나서 서울시내버스 142번(도봉산↔방배동)을 타
고 도봉산 종점으로 이동했다. 거리는 불과 정류장 4개. 때가 때인지라 내려오는 산꾼들의
행렬이 마치 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온다. 거센 파도에서 아슬아슬하게 요트를 타듯 그들을
뚫고 북한산둘레길 안내도가 있는 통일교에 이른다.
여기서 직진을 하면 도봉서원(道峰書院), 천축사(天竺寺), 도봉산 정상, 포대능선, 만월암
(滿月庵) 방면으로 이어지고, 왼쪽 통일교를 건너면 능원사와 도봉사로 이어지는데 북한산
둘레길은 여기서 '도봉옛길'이란 부속 간판을 달고 남북으로 힘차게 흘러간다.
마음 같아서는 정상까지 가고 싶으나 늘 시간을 구실로 정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능원사
, 도봉사 방면 도봉옛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 길을 5분 정도 오르면 황금색으로 치장한 능
원사가 마중을 한다.


▲  능원사, 도봉사로 인도하는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구간)


 

♠  황금사원을 꿈꾸는 현대 사찰, 도봉산 능원사(能園寺)

도봉사 동쪽에 둥지를 튼 능원사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창건된(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음) 따끈
따끈한 산사(山寺)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도 못했다. 나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에는 무뚝뚝한 편이라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문화유산을 간
직한 절을 제외하면 딱히 눈길도 주지 않지만 동양 최대의 황금 사원으로 유명한 서울 구산동
수국사(守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로 황금 사원으로 꾸몄다는
점이 꽤나 끌렸다. 솔직히 인간 가운데 황금을 싫어하는 사람이 고려의 마지막 보루(堡壘)인
최영(崔榮)장군 등을 빼고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도봉산 능원사는 여주 능원사의 말사(末寺)로 그들 모두 미륵불(彌勒佛)을 내세운 미륵도량이
다. 근래 지어진 절이라 딱히 볼거리도, 내세울 것도 없지만 불교와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황금을 테마로 황금색 단청(丹靑)을 모든 건물에 입혀 찬란한 황금사원임을 속세에 진하게 어
필하고 있다. 절 앞을 지나던 산꾼들도 황금색 건물에 매료되어 자연스레 경내를 기웃거리니
능원사의 마켓팅은 크게 성공한 셈이다.

황금 단청은 중원대륙에서 문을 열거나 대륙을 장악했던 나라의 궁궐에서 즐겨 애용했던 것으
로 그들은 하나 같이 황제(皇帝)를 칭했는데, 황색이 바로 황제를 상징한다. 하여 황금색 단
청과 지붕을 선호했다. (그게 중원대륙의 법칙이기도 했음) 반면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배
달 민족은 황금색 단청과 기와를 즐겨하지 않고 다양한 색채를 입힌 이른바 컬러풀(colorful)
한 단청을 선호했다.
근래 들어 수국사와 여수 향일암(向日庵) 원통보전(圓通寶殿), 그리고 이곳 능원사에서 황금
색 단청을 선보이며 단청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 이렇게 부처를 향한 절대적인 존경심이 금
빛찬란한 단청미를 탄생시켰고, 현대 사찰에 무정한 나를 황금을 미끼 삼아 이곳으로 낚은 것
이다.

능원사는 경내로 인도하는 일주문부터 황금색 단청을 입혀놓아 벌써부터 황금 사원의 냄새를
진동시키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곧게 깔린 짧은 길이 펼쳐지고 바로 법음각과 용화전, 철웅
당 등이 모습을 비춘다. 경내는 법당(法堂)인 용화전을 비롯해 법음각. 철웅당(鐵雄堂) 등 5~
6동의 건물이 전부인 조촐한 규모이나 건물에 죄다 황금색 떡칠을 하여 마치 조그만 황궁(皇
宮)
같다.

▲  능원사 일주문(一柱門)

▲  일주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길

▲  범종을 머금은 법음각(法音閣)
그 흔한 범종각 대신 부처의 소리를 뜻하는
법음각을 칭했다. 건물의 모습도 4각형이
아닌 6각형을 취했다.

▲  용화전 뒷쪽에 숨겨진 샘터
능원사에는 2곳의 샘터가 있어 중생들의
목마름을 아낌없이 해소해준다.


▲  능원사 용화전(龍華殿)
지붕 용마루 양쪽 끝에는 무려 용을 잡아먹는다는 금시조(金翅鳥)를 배치하여
화마 등 악귀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능원사의 중심 건물인 용화전은 용화세계의 주인공이자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
륵불의 거처이다. 이곳이 미륵도량이다보니 자연히 용화전이 법당의 역할을 도맡게 되었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단청과 커다란 지붕을 받치는 공포(空包)는
거의 황금색 일색이라 사치와 장엄함의 깊이를 더욱 짙게 해준다.
건물 내부에는 미륵불을 중심으로 석가세존불, 약사여래불, 관세음보살이 봉안되어 있으며,
다들 자애로운 표정으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들 뒷쪽에는 헤아림이 무색할 정도로 조
그만 금동불(金銅佛)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니 건물 전체가 그야말로 금색 투성이다.


▲  용화전 불단에 봉안된 미륵불(가장 큰 불상)과 석가여래(제일 오른쪽),
약사불(미륵불 왼쪽), 관세음보살<가장 왼쪽에 보관(寶冠)을 쓴 보살상>

▲  황금색으로 치장된 용화전 현판과 단청, 공포, 수막새의 위엄

공포와 단청이 죄다 황금색으로 도배된줄 알았더만 가까이서 보니 붉은색, 녹색, 파란색 계열
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어 단청의 고유 맛은 그런데로 살렸다. 용화전 가운데 칸 좌우 기둥
윗쪽에는 봉황을 배치하여 지붕 용마루에 배치된 금시조와 함께 만약에 모를 화마(火魔)의 공
습에 대비한다.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황금색에 눈이 먼 나머지 불지르기 아깝다
고 판단하여 그냥 돌아서지는 않을까?


▲  용화전의 경쾌한 뒷모습

▲  용화전 뜨락에 세워진 하얀 피부의 5층석탑
근래에 지어진 탑으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의 매끈함을 자랑한다.

▲  용화전 주차장 - 숲 너머로 수락산(水落山, 638m)이 바라보인다.

▲  능원사의 또다른 샘터

용화전 밑에는 석조를 갖춘 샘터가 놓여져 있다. 앙련(仰蓮)이 새겨진 반원 모양의 석조에는
도봉산이 베푼 물이 호수를 이루고, 그 옆에는 용과 구름무늬 등이 새겨진 네모난 석조가 있
는데, 동그란 여의주(如意珠)를 단단히 물고 있는 용머리 조각이 인상적이다.
용이 되려면 여의주가 있어야 되고 그래야 승천이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석조에 새겨진 무늬
를 보면 용의 손에 여의주로 보이는 동그란 존재가 눈에 띄어 마치 여의주 획득 기념으로 하
늘로 요란하게 비상하는 용의 모습을 담은 듯 하다.

* 능원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02 (도봉산길 87 ☎ 02-954-6060)


▲  여의주를 문 용머리

천하에 무려 300곳이 넘는 절을 돌아다니며 많은 샘터를 보았고 샘터에 달린 용머리, 거북이
조각도 무수히 보았지만 이곳처럼 여의주까지 문 용머리는 처음 본다. 아마도 능원사의 원대
한 꿈을 저 여의주를 문 용머리로 간략하게 표현한 듯 싶은데, 너무 겉모습과 돈에만 연연하
지 말고 부처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어디선가 숨어서 직무유기를 일삼으나 마음만큼은 속
세 걱정에 잠 못이루는 미륵불의 마음처럼 철저하게 속세를 위하는 공간이 되기를 주문해본다.


▲  능원사에서 도봉사로 올라가는 숲길 (도봉옛길)


 

♠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도봉산의 오래된 고찰 ~
도봉사(道峰寺)

능원사를 둘러보고 도봉옛길을 따라 서쪽으로 2~3분 가면 도봉산의 이름을 그대로 딴 도봉사
가 슬그머니 모습을 비춘다.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자리한 도봉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고려 초인 968년에 혜거국사
(惠居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971년 혜거가 광종(光宗)의 초청으로 궁궐 원화전(元和殿)
에서 대장경(大藏經)을 강의하자 감동을 먹은 광종은 칙령(勅令)을 내려
'국내 사원 중에 오직 3곳만은 머물러 두어 움직이지 말 것이며, 문하의 제자들이 주지를 상
속하여 대대로 단절되지 않도록 이를 규정하라'
하였다.
이때 고달원(高達院, 여주 고달사)과 희양원(曦陽院, 문경 봉암사), 도봉원(道峰院)을 특별선
원으로 삼았는데, 그 도봉원이 바로 도봉사로 여겨진다.

1010년 요(遼)나라(거란) 성종이 강조(康兆)의 난과 목종(穆宗)의 폐위를 이유로 40만의 대군
을 휘몰아 고려를 침공했다. 당시 고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강조는 직접 30만 군사를 이끌
고 검차(劍車)와 잘 훈련된 군사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만 방심하는 통에
크게 패하고 만다. 강조는 포로로 잡혀 처단되고 거란군은 그 기세로 폭풍 질주하자 현종(顯
宗, 재위 1009~1031)은 눈물을 머금고 피난길에 올랐다.

현종은 채충순(蔡忠順, ?~1036)의 호위를 받으며 임진강을 건너 창화현(昌化縣, 의정부)에 이
르렀는데, 야밤에 적의 습격을 받자 왕을 시종하던 이들은 뿔뿔히 도망치고 채충순과 지채문(
智蔡文, ?~1026) 등이 적을 격퇴하여 왕을 지켰다.
지채문이 왕의 말고삐를 잡고 지름길로 도봉사에 들어가 여기서 잠시 국정을 살폈으며, 거란
군이 계속 추격하자 한강을 건너 멀리 나주(羅州)까지 내려가게 된다. 이렇게 도봉사에서 잠
시 머문 인연으로 현종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6천 권 상당수를 그곳에서 제작하게 했다.
또한 고려 중기 때 정각국사 지겸(靜覺國師 志謙, 1145~1229)은 1170년 승과(僧科)의 선선(禪
選)에 급제했는데, 그의 이름은 전학돈(田學敦)이다. 바로 그해 삼각산(북한산)을 찾아 도봉
사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꿈에서 산신(山神)이 나타나
'화상(和尙)의 이름은 지겸(志謙)인데 왜 지금의 이름을 쓰는가?'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쿨
하게 지겸으로 이름을 갈았다.

2012년 서울문화유산연구원은 도봉사 바로 북쪽 산너머에 있는 도봉서원(道峰書院)을 복원하
고자 기존 건물을 부시고 터를 정비하면서 5개월 정도 발굴조사를 벌였는데, 뜻밖에도 옛 영
국사(寧國寺) 시절의 고려 때 유물 77점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2014년 8월 21일 국립고궁
박물관 강당에서 공개되었는데 그중 '도봉사'라 쓰인 청동제기가 있어 도봉사에서 빌려오거나
(또는 가져오거나) 또는 영국사의 옛 이름이 도봉사인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영국사는 도
봉서원에 있던 도봉산의 대표 사찰로 1573년 유림들이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서원을 깔았다.

여기까지 보면 도봉사는 고려 때 꽤나 잘나갔던 절임을 알 수 있다. 허나 13세기 이후 근대까
지 적당한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다. 그냥 단순히 전쟁과 화재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고 나올
뿐이다. 13
세기 이후 이렇다할 내력이 없는 것을 보면 13세기 중반 몽골(원)의 지긋지긋한 침
공에 때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현재 도봉사는 장대한 내력의 걸맞지 않게 고색의 내음이 전
혀 없고, 오래된 유물도 기껏해야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치성광여래3존도가 고작이다. 하여
고려 때 도봉사가 이곳이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으며, 도봉서원에 있던 영국사가 도봉사란
의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도봉서원터에서 발견된 도봉사라 쓰인 청동제기는 그런 의
견에 크게 부채질을 한다.

한참 동안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도봉사는 19세기 후반에 벽암(碧巖)이 현 자리에 절을 세우고
도봉사를 칭하면서 그 이름이 다시 살아났다.
한때 산사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를 열어 절의 명성을 아낌없이 드날렸으나 종파 간의 갈등과
주지승의 재정 낭비로 2006년에 절 전체가 경매에 나오는 불상사까지 발생했다. 절이 북한산
국립공원 내부에 있어 경매 수요가 없다가 다행히 적당한 임자를 만나 조금씩 불사를 벌여 지
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2층짜리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정사, 산신각, 선방 등 약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
장문화유산과 오래된 유물은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치성광여래삼존도(熾盛光如來三尊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9호
, 관람이 거의 어려움)가 고작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 151호
지정된 철불좌상(고려 초기 불상)도 가지고 있었으나 2006년 절 경매 이후 한국불
교미술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애당초 도봉사와 관련이 없는 존재로 왜정 말기에 왜
인(倭人)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해방 이후 종로구 청운동(淸雲洞)에 있던 자명사가 가지고 있
다가 자명사가 철거되자 도봉사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그밖에 부처의 사리를 담은 뿌리탑과 빈자일등상(貧者一燈像), 심우도 등의 소소한 볼거리가
있고, 절 앞에는 비록 짧지만 메타세콰이어 숲길이 닦여져 있다.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이 절
앞을 지나가고, 경내가 숲에 포근히 감싸인 푸른 지대로 도심이 지척임에도 공기도 청정하다.

도봉산 그늘에 산지 15년이 넘었고, 서울에 흩어진 오래된 절 상당수에 발도장을 찍었지만 도
봉사는 이번이 첫 인연이다. 2005년 석가탄신일에 인연을 지으려고 했지만 무리한 사찰 순례
일정으로 찾지 못하고 이제서야 격하게 인연을 짓는다.


▲  활짝 열린 도봉사 정문

도봉사는 그 흔한 기와집 일주문(一柱門)이 없다. 대신 절과 산길의 경계에 여닫이식 철제 정
문을 두어 일주문의 역할을 담당한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는 문이 일주문을 흉내내며 활
짝 열려있지만 달님의 세상이 되면 미련 없이 문을 꽁꽁 걸어잠궈 열린 마음의 일주문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정문 앞 우측에는 금동을 씌운 지장보살상이 육환장(六環杖)을 쥐어들며 중생을 맞이하고 정
문 좌측 담장 벽에는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다.


▲  정문 옆 담장에 그려진 심우도
심우도는 방황하는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야생 소를 길들이는 것에 비유하여 10단계로 표현한 그림이다. 10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어 십우도(十牛圖)라 불리기도 하며 보통
법당 바깥 벽에 많이 그려둔다.

▲  정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연등길

정문을 들어서면 뿌리탑까지 곧게 오르막 길이 펼쳐져 있다. 길 좌우로 요사(寮舍), 선방(禪
房) 등으로 쓰이는 건물들이 뿌리를 내렸는데, 그 길의 끝에 이르면 뿌리탑과 대웅전이 모습
을 드러낸다.

▲  계단 옆 경사면에 꽃으로 다듬은
커다란 절 마크

▲  경내 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3층석탑과
여러 공덕비들


▲  도봉사의 명물, 뿌리탑

대웅전 앞에는 불교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머금은 뿌리탑이 장대한 모
습으로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진신사리를 봉안한 절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1990년대 이후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
여 이제는 너무 흔해졌다. 서울만 하더라도 도봉사와 삼천사(三千寺), 승가사(僧伽寺), 조계
사(曹溪寺) 등이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부처의 사리가 수만 과가 넘는다고 하더니만 아직도
나눠줄 수량이 많은 모양이다. (상당수 인도와 동남아에서 가져온 것임)

1982년 3월 한국외대 부총장 최창성 교수가 태국(타이) 국립사원 홧벤짜마버핏의 종정(宗正)
프라풋타부이윙을 초빙해 원각회(圓覺會)에서 법회를 연 적이 있었다. 이 인연으로 태국에서
진신사리 3과를 얻게 되었고, 부총장은 도봉사에 이를 기증했던 것이다.

탑의 기단은 특이하게 계란처럼 동그란 모습인데, 이는 공(空)을 뜻한다고 한다. 그 위에 5층
의 몸돌을 세웠으며, 1층 몸돌은 유난히 두텁다. 그 안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고, 동쪽에 관
세음보살, 남쪽에 석가불, 서쪽에 아미타불, 북쪽에 지장보살상을 새기고 그 주변에 16나한상
을 둘렀다. 탑 주위로 12지신을 새긴 난간을 둘렀고, 탑 위에는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를
두었다.

탑의 전체적인 모습은 이 땅에 흔한 탑이 아닌 특이한 모습의 이형탑(異形塔)으로 탑 밑에는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을 본따서 만든 석가불이 당당한 체격으로 앉아있으며, 그 앞
에는 석등 2기가 서 있다. 그들 좌우로 뿌리탑과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늘어뜨렸는데,
이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뿌리탑의 장엄함을 마음껏 드러낸다.


▲  도봉사 대웅전(大雄殿)

뿌리탑 뒷쪽에 자리한 대웅전은 도봉사의 법당으로 이 땅에 흔치 않은 2층짜리 목조 불전(佛
殿)이다. 근래에 지어진 건물로 겉모습은 2층이지만 속은 1층이며, 불단에는 관세음보살과 지
장보살, 석가불로 이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불 자리에는 원래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철불좌상이 앉아있었으나 그가 절을 떠나자 새로 금동석가불을 만들어 본존불의 자리
를 채웠다.

▲  우측에서 바라본 대웅전

▲  좌측에서 바라본 대웅전과 6층석탑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 좌우에는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각자의 상징물인 육환장과 꽃을 쥐어들며 자애로운
표정으로 서 있고, 그들 사이에 석가불이 연꽃대좌(臺座)에 앉아 중생을 굽어본다. 그들 뒤에
는 그 흔한 후불탱 대신 바퀴 모양의 금동 전륜(轉輪)이 두광(頭光)처럼 떠있다.

▲  대웅전 지장탱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대웅전 내부 좌우 벽에는 지장탱과 신중도, 석가불도 등의 탱화 4점이 걸려있다. 이중 지장탱
과 신중도는 빛바랜 때가 좀 낀 것으로 보아 20세기 초~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나머
지 탱화들은 20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여물지 않았다.


▲  대웅전 양쪽에 배치된 가릉빈가 운판(雲版)과 6층석탑

운판은 범종, 법고, 목어와 더불어 불교 의식에 쓰이는 4물(四物)의 일원으로 보통 범종과 같
은 방을 쓰기 마련이다. 허나 도봉사는 절의 필수품인 범종(梵鐘)이 없어서 운판을 범종 대신
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대웅전 좌우에 일주문 축소판 모양의 건물을 세우고 커다란 운판을 북
처럼 걸어두어 아침 3시 새벽예불과 오후 6시에 도봉산에 은은하게 운판 소리를 울린다. 운판
피부에는 불교의 새인 가릉빈가<迦陵頻伽, 극락조(極樂鳥)>를 새겨 조촐하게 조형미를 고려했
다.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극락정사
(極樂精舍, 극락전)

▲  극락정사의 주인인 금동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  빈자일등상(貧者一燈像)
대웅전 우측에는 빈자일등상이라 불리는 생소
한 이름의 석물이 자리해 있다. 처음에는 보이
는 모습 그대로 코끼리 등에 용과 연꽃무늬 등
이 새겨진 대좌를 얹히고 그 위에 선 관세음보
살 누님 상이라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가난한 자의 등불 하나'를 뜻하는 빈자
일등상이었다.
빈자일등상은 현우경(賢愚經)의 빈녀난타품(貧
女難陀品)에서 비롯된 것으로 다음의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인도 사위국(舍衛國)에 난타(難陀)라는 가난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주로 구걸로 삶을 연명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나라에 석가모니가
찾아왔다. 인도의 대중스타가 된 그의 방문 소
식에 나라 사람들은 앞다투어 몰려가 공양과
등불을 올리며 그를 환영했는데, 난타도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궁색한 형편이
라 그에게 줄 선물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몇푼이라도 벌기 위해 거리로 나가 구걸을 했으나 겨우 1푼 정도의 돈을 마련하
는데 그쳤다. 그 돈을 들고 기름 장수를 찾아가 기름을 청했으나 당시 1푼으로는 어림도 없었
다. 기름 장사도 코웃음을 치며 거절했던 것이다.
그러자 난타가 눈물로 단장의 심정으로 호소하니 기름 장수도 이내 태도를 바꿔 돈하고 상관
없이 많은 양의 기름을 그녀에게 내주었다. 이에 단단히 감동을 먹은 난타는 절을 100번 이상
올리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등불을 들고 석가모니를 찾아가 다른 사람들이 갖다 놓은 등불들
사이에 정성스럽게 놓았다. 마치 그가 보아주기를 바라듯이..
그런데 다음 날 이상한 일이 생겼다. 등불의 밥줄인 기름이 말라 감에 따라 하룻밤 사이에 등
불이 죄다 꺼졌으나 이상하게도 난타의 등불만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등불
은 더욱 밝고 힘차게 타오르는 것이다. 그 등불을 본 석가모니는 난타의 사연을 전해 듣게 되
었고 결국 그를 여자 승려인 비구니(比丘尼)로 받아들여 제자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빈자일등의 사연이다. 즉 물질과 풍요로움보다는 빈약하나 정성과 정신이 더 소
중하다는 의미가 되겠다. 돈님을 숭배하고 사는 오늘날 인간들에게 제대로 귀감이 되는 내용
이지만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것이 인간인지라 빈자일등은 여전
히 외면을 받고 있고, 부자1등만 찬양을 받는 것이 현재의 세태이다. (종교도 예외는 아님)
코끼리는 부처의 법을 상징하며, 인도에서 많이 살고 있는 동물이다. 또한 그 위에 있는 여인
은 관세음보살 누님이 아닌 바로 빈자일등의 주인공, 난타이다. 도봉사에서 빈자일등상을 세
운 것도 그 교훈을 닮겠다는 것인데, 지나치게 겉모습과 돈에만 치중하지 말고 비록 소박하더
라도 중생을 위하는 아름다운 공간이 되기를 염원해본다.


▲  가건물로 이루어진 산신각(山神閣)

대웅전 우측 높은 곳에는 가건물로 이루어진 허름한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
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산신각은 그 이름 그대로 산신을 봉안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산신
과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같은 자리에 봉안했다. 산신각은 절에 따라 독성 외에 칠성(七聖,
치성광여래)까지 봉안해 삼성각(三聖閣)의 역할을 하기도 하며, 도봉사의 유일한 지정문화재
인 치성광여래3존도가 여기에 있나 싶어 기웃거려 보았으나 값비싼 존재라 이곳에는 없었다.
하긴 도봉사에서 가장 비싼 몸인데, 이런 가건물에 봉안할 리는 없겠지.


▲  산신각 산신과 독성

호랑이 등을 의자 삼아 앉아있는 산신, 그 곁에는 하얀 머리의 독성이 나란히 앉아 마치 경로
당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록 그들이 앉은 방석은 다르지만 이렇게 산신과 독성이 같은 자리에
봉안된 것을 여기서 처음 본다. 그들 뒤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소나무, 산이 그려진 산신
탱이 걸려있다
.

* 도봉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494-2 (도봉산길 89, ☎ 02-954-7743)


 

♠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사 앞에 펼쳐진 메타세콰이어 숲길

능원사와 도봉사를 차례대로 둘러보고 그들 앞
을 지나는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을 타고 무수
골로 넘어갔다.
도봉옛길은 다락원에서 광륜사, 도봉동문(道峰
洞門) 바위글씨,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
역, 윗무수골을 거쳐 무수골 세일교로 이어지
는 3.1km의 산길로 거의 느긋한 수준이며, 통
행이 좀 어려운 곳에는 나무데크길 닦아 통행
의 편의성을 높였다.
게다가 도봉사와 광륜사 등의 오래된 절과 도
봉동문 바위글씨, 진주류씨묘역, 광륜사 느티
나무 등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볼거리도 산재
해 있어 역사의 향기도 진하다.
옛날 서울에서 도봉산과 도봉서원으로 가던 산
길이라 도봉옛길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다락원에서 '다락원길'로 간판을 바꾸어 북쪽
으로 흘러가고, 무수골에서는 '방학동길'로 간
판을 갈고 남쪽으로 흘러간다.

도봉사 앞에는 비록 짧지만 늘씬하게 솟은 메타세콰이어가 조촐하게 숲길을 이루며 하늘과 이
른 무더위를 긴장시킨다. 메타세콰이어는 은행나무와 더불어 천하에서 매우 오래된 화석나무
로 2차 세계대전 시절에 중원대륙에서 발견되었다.
이 나무에 단단히 매료된 아메리카와 유럽 양이(洋夷)들은 그 나무를 가져가 그들 나라에 심
었고, 이렇게 서양식 이름표를 달며 천하에 보급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1950년대에 미국산
나무가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메타세콰이어 하면 다들 전남 담양(潭陽)에 있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을 떠올릴 것이다. 그
곳은 이제 담양을 넘어 천하의 메타세콰이어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받고 있는데, 시작은 단
순히 도로 가로수였으나 점차 관광지로 몸값이 높아지면서 이제는 담양 꿀단지로 단단히 자리
를 잡았다.
도봉사 메타세콰이어 숲길은 조성된지 얼마 안된 것으로 나이는 비록 적지만 훤칠한 키를 자
랑하며, 늘씬하게 솟은 모습이 시원스럽기 그지 없다. 참고로 서울에서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이곳 외에 서남물재생센터공원과 용산가족공원, 안산자락길, 하늘공원 등
이 있다.


▲  도봉옛길 도봉사 서쪽 관문

▲  무덤을 잃은 채, 약간 기울어진 문인석(文人石)

도봉옛길을 굳이 2개로 나눈다면 다락원~도봉사 구간과 도봉사~무수골의 남쪽 구간으로 구분
할 수 있다. 도봉사~무수골 구간은 다락원~도봉사 구간보다 완만한 산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간에 조선 전기에 조성된 진주류씨묘역이 자리해 있다. 도봉산 자락이 명당(明堂) 자리로
이름이 높았고, 서울과도 가까워 왕족과 사대부(士大夫)의 무덤 자리로 인기가 높았다. 하여
도봉산 자락인 방학동(放鶴洞)과 도봉동에 조선시대 상류층의 무덤이 즐비하다.
그중 도봉옛길 남쪽에 자리한 무수골에 전주이씨 영해군파(寧海君派)묘역(☞ 관련글 보기)과
과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묘역, 함열남궁씨묘역, 도봉옛길에 자리한
진주류씨묘역 등은 후손들의 지극정성으로 잘남아있지만 관리 소홀로 인해 자연의 일부로 녹
아든 묘도 적지 않다.
도봉사에서 도봉옛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문인석 1기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무덤을 잃
고 홀로 남아있다. 그는 고된 세월에 매우 지쳤는지 옆으로 좀 기운 상태로 이를 안스럽게 본
어떤 사람이 나뭇가지를 세워 문인석의 등을 받쳐들게 했다.
허나 문인석이 아무리 우울한 처지라고 해도 몸을 지탱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지만 무
덤을 잃고 버려진 자신에게 그런 배려를 한 점에서 문인석도 적지 않게 고마움을 느꼈을 것이
다. 문인석이 지켰을 무덤은 그 주변을 파보면 아마 나올 것이다.


▲  무덤이 졸지에 조그만 언덕이 되버린 현장

문인석 부근에는 버려진 무덤이 하나 있다. 무덤 밑에 석축까지 있는 것을 보면 지체 높은 양
반가의 무덤이 분명해 보이는데, 무덤이 버려지면서 봉분(封墳)에는 공자(孔子) 무덤처럼 무
려 나무까지 자라났다. 앞서 문인석이 이 무덤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나 문인석이 입을 열지
않으니 낸들 알 도리가 없다.


▲  도봉옛길 고갯길 (진주류씨묘역 북쪽)

▲  도봉옛길 (진주류씨묘역 부근)

▲  진주류씨묘역 류양 신도비(柳壤 神道碑)

도봉옛길 남쪽 구간 중간에는 진주류씨묘역이 자리해 있다. 산길 좌우에 자리해 있어 만나기
도 매우 쉬운데 산길 가에 이 묘역의 제일 어른인 류양 신도비가 있다.
이곳은 진주류씨 류양 일가의 묘역으로 15세기에 활약했던 류양이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
) 이후 무덤 자리로 매입했다. 그 토지에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 류양이 제일 먼저 묻혔고,
그의 아들인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류첨정
(柳添汀), 류첨정의 아들인 좌의정(左議政) 류보(
柳溥)와 진양군(晉陽君) 류영(柳濚), 류영의 아들인 진명군(晉溟君) 류사기(柳師琦), 류보의
아들인 사헌부 감찰 류사상(柳師尙) 묘 등이 자리한다. 이들은 15~16세기에 활약했던 인물로
근래에 무덤에 다소 손질을 가하긴 했으나 조선 전기 무덤 양식을 그런데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무수골에는 진주류씨의 제각(祭閣)이 있다.

북한산둘레길 이전에는 한가한 산골로 산꾼의 왕래도 드물었으나 둘레길이 개척되면서 산꾼들
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둘레길이 묘역 중앙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북한산둘레길로 그 존재가
드러난 명소의 하나로 묘역은 다행히 개방되어 이들을 둘러볼 수 있으나 몇몇 몰지각한 산꾼
들이 묘역에 자리를 피고 밥이나 간식을 먹거나 나물을 캐는 행위 등을 벌이고 있어 묘역을
개방한 진주류씨 집안의 뜻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이들 묘역은 그들 조상의 무덤이자 소중
한 문화유산으로 무덤을 둘러보거나 답사를 하는 것 외에 행위는 무조건 삼가해야 된다.
묘역 사진은 본인의 귀차니즘으로 담지는 않았고 최근에 만든 류양 신도비만 담는 선에서 끝
냈다. 도봉산 자락에 널린게 조선시대 상류층의 무덤이다보니 그리 끌리지는 않았다.


▲  도봉옛길 윗무수골 관문

진주류씨묘역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가면 윗무수골 관문이 나온다. 그 관문을 지나면 윗무수
골로 무수골 윗쪽에 자리해 있어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곳은 도봉산 자락에 묻힌 산
골마을로 밭과 계곡이 펼쳐져 있고, 숲이 무성해 이곳이 정녕 서울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
든다. 갑자기 지방의 어느 시골로 순간이동을 한 기분이다.


▲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 ①

▲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 ②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은 무수골 세일교까지 1차선 크기의 시골길이
펼쳐져 있다. 서울에서 거니는 시골길의 맛은 참 담백하다.

▲  윗무수골과 무수골이 만나는 세일교 주변

윗무수골 관문에서 7분 정도 시골길을 거닐면 무수골과 만나는 세일교이다. 여기서 도봉옛길
은 묵은 이름을 버리고 방학동길로 간판을 바꾸어 연산군묘 방면으로 흘러간다. 세일교를 건
너 무수골 안쪽으로 들어가면 무수골의 주인인 영해군파묘역이 나오며, 산골을 무색케하는 너
른 논이 펼쳐져 있어 이곳이 꿈인가 생시인가 의심될 정도로 고개를 또 갸우뚱하게 만든다.


본글은 여기서 끝, 무수골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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