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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10.11 함평 모악산 용천사, 목포 갓바위 늦봄 나들이 (용천사 꽃무릇공원, 목포 달맞이공원)

함평 모악산 용천사, 목포 갓바위 늦봄 나들이 (용천사 꽃무릇공원, 목포 달맞이공원)

함평 용천사, 목포 갓바위



' 함평 용천사, 목포 갓바위 늦봄 나들이 '
함평 용천사
▲  용천사 대웅전과 석등(오른쪽)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끝 무렵, 일행들과 1박2일 일정으로 전남 서남해
지역을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4시간 정도를 달려 전남 함평에 이르렀다. 함평읍내 동부
에 자리한 함평오일시장 주변에 육회비빔밥을 다루는 식당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한 곳
에 들어가 점심으로 육회비빔밥을 섭취했다. 비빔밥에는 선지국이 딸려나왔으나 그리
입맛이 맞지 않아(선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음;) 비빔밥만 후다닥 먹고 자리를 나왔는
데, 후식용 커피로 밀려온 졸음을 단죄하고 함평(咸平) 북쪽 끝자락에 자리한 모악산
용천사로 이동했다. 그곳이 이번 나들이의 첫 답사지이다.



 

♠  꽃무릇의 성지이자 함평 제일의 고찰, 용천사(龍泉寺) 입문

▲  용천사 숲길 (주차장 직전)

모악산(母岳山) 남쪽 자락에 자리한 용천사는 산 북쪽에 있는 영광 불갑사(佛甲寺, ☞ 관련글
보기
)와 더불어 꽃무릇<상사화(相思花)>의 성지(聖地)로 유명하다. 꽃무릇은 8~9월에 황홀하
게 붉은 입술을 드러내는 아리따운 꽃으로 절 주차장(사천왕문 서쪽) 주변과 꽃무릇공원에 둥
지를 틀고 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꽃무릇철이 아닌지라 꽃잎 대신 짙은 녹색 잎을 드러낸
꽃무릇이 3달 앞으로 다가온 향연을 숨죽이며 준비하고 있었다.
사천왕문 밑 주차장에는 200년 정도 묵은 큰 느티나무가 짙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바로 그
의 고품격 그늘 덕에 이곳의 꽃무릇이 유난히도 아름답게 기지개를 켜는 모양이다.


▲  용천사의 첫 관문, 사천왕문(四天王門)

주차장에서 동쪽 계단길을 오르면 맞배지붕을 지닌 사천왕문이 마중을 한다. 부처의 경호원인
4명의 천왕,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여기서 그들의 검문을 거쳐 다시 계단길을 오르면
사상루가 마중을 나온다.

▲  밑에서 바라본 사상루

▲  사상루(思想樓)의 앞 모습

사상루는 맞배지붕을 지닌 2층 건물로 1층은 통로, 2층은 강당(講堂)과 행사 장소로 쓰인다.
절 바깥에서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가 노출되지 않도록 꽁꽁 가리고 있는데 그의 밑도리를 통
해 안으로 들어서면 꽃무릇으로 크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용천사 경내가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용천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자.

모악산 용천사는 함평 제일의 고찰로 장성 백양사(白羊寺, ☞ 관련글 보기)의 말사(末寺)이다
. 백제 후기인 600년에 행은존자(幸恩尊者)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산 너머 불갑사에도 마라
난타(摩羅難陀) 창건설 외에 640년 행은의 창건설이 전하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시
기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이 전혀 없는 실정이라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645년에 각진(覺眞)이 중수했다고 전하며 1275년에 각적국사(覺積國師)가 중수했다고 하니 어
쩌면 13세기에 각적국사 또는 행은이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용천사란 이름은 대웅전 밑에
있는 용천이란 샘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의하면 서해로 통하는 이
샘에 용이 살다가 승천을 했다고 한다. 하여 용천이라 불리게 되었고 그 곁에 지은 절이라 자
연히 용천사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조선 세조(世祖)와 명종 때 중수를 거치면서 제법 큰 사찰의 면모를 지녔는데 '용천사 대웅전
현판단청기'에 의하면 왕년에는 무려 3,0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한다. 하지만 정유재란
(1597년) 때 그 모든 것이 파괴되어 1600년에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1632년 법당을 새로 짓고 1638년과 1705년에 중건을 하고 '단청기'를 남겼으며, 1938년 다시
중수를 했으나 1950년 6.25 때 북한군이 불의의 방화를 저질러 절은 다시 잿더미가 되고 만다
. 이때 석등과 해시계를 제외한 대부분의 문화유산이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1964년 옛 보광전(普光殿) 자리에 대웅전과 요사채를 지었으며 1996년 대웅전을 새로 지
어 지금에 이른다.

넓직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지장전, 산신각, 사상루, 요사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
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독특한 자태의 석등이 있다. 그 외에 6.25 때 사라졌다가
1980년 흙더미 속에서 발견된 해시계가 있는데 두께 14cm, 가로와 세로가 39cm의 정사각형 모
습으로 겨우 절반만 남아있으나 묘시(卯時, 5~7시)부터 유시(酉時, 17~19시)까지 남아있어 낮
에 사용하는데 별 지장은 없다. 그리고 18세기에 조성된 탱화가 있었으나 2000년에 도난을 당
해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다.

▲  대웅전 뜨락 우측의 정묵당(靜默堂)
요사 및 선방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맞배지붕을 지닌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의 거처로 정묵당과 마주보고 있다.


용천사는 자연물인 꽃무릇에 크게 집중하여 이제는 꽃무릇의 성지로 우뚝 섰다. 꽃무릇이 한
참일 때 꽃무릇 축제를 열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꽃무릇의 즐거운 향연을 구경한다.

* 용천사 소재지 :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415 (용천사길 209 ☎ 061-322-1822)

▲  사상루 옆에 자리한 샘터
모악산이 베푼 물이 쉼없이 쏟아져 나와
나그네의 목을 아낌없이 축여준다.

▲  지장전 지장보살입상
관세음보살 누님 못지않은 아름다운 용모로
중생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는다.



 

♠  용천사 둘러보기

▲  용천사의 법당인 대웅전(大雄殿, 대웅보전)

대웅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곳에는 보광
전이 있었으나 6.25때 사라졌으며 1964년 그 자리에 대웅전을 세웠다. 현재 건물은 1996년에
새로 손질된 것이다.
용천사의 강한 자신감이 담긴 건물로 20세기 중반 이후에 조성된 석가3존상과 탱화들이 봉안
되어 있으며 대웅전 앞 가운데 계단은 옛날 것으로 고색이 꽤 묻어있다. 바로 그 앞에는 '용
천'이란 샘이 누워있고, 건물을 받쳐든 석축 밑도리에는 고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기단석(
基壇石)이 가득 들어 있는데 그 윗도리에는 새 돌이 입혀져 있어 늙은 돌과 새 돌이 다소 어
색한 조화를 보인다.


▲  대웅전 석가3존상과 후불탱, 닫집의 위엄

▲  고색이 깃든 대웅전 가운데 계단

▲  대웅전 그늘에 자리한 용천(龍泉)

대웅전 앞에는 절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는 용천이란 조그만 샘이 있다. 옛날 이 샘은 서해바
다로 통했다고 하는데 이곳에 살던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허나 여기서 바다까지는 30리가 넘는 거리이며, 샘 또한 작고 바닥이 바로 보일 정도로 얕다.

용천에는 물이 모여있으나 여기 물은 마시지 못하며 대신 사상루 옆구리에 동그란 석조(石槽
)를 닦아 샘터로 삼았다. 그러니 거기서 물을 마시면 된다.


▲ 툇마루를 지닌 산신각(山神閣)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의 공간이다. 건물에 단청이
입혀져 있지 않아 마치 서원이나 양반가의 기와집 같은 조금은
수수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산신각 현판

▲  산신각 산신탱


▲  용천사 석등(石燈)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84호

대웅전 옆구리에는 이곳의 오랜 보물이자 상징과 같은 석등이 묘한 자태를 부리고 있다. 용천
사가 아무리 오래된 절이라고 하지만 그 장대했던 흔적이 전쟁의 참화로 싹 사라진 상태라 이
석등의 값어치는 대단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다른 석등과 완전히 차별화된 모습을 지니고
있고 조성 관련 문신까지 새겨져 있어 그 가치는 실로 상당하다. 그러니 이곳에 왔다면 석등
은 꼭 눈여겨 살펴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는 쑥돌로 지어진 키 2.37m의 석등으로 바닥돌에 하대석(下臺石)을 놓고 그 위에 밑으로 연
꽃잎을 펼친 복련(伏蓮) 무늬를 새겼으며, 가운데 기둥<간석(竿石)> 받침 상단 네 모서리에
거북을 새겼다. 기둥은 8각으로 앞쪽에 '강희(康熙) 24년 을축(乙丑) 6월일'이란 명문이 있어
1685년 6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석등을 만든 옛 사람들의 작은 배려 덕에 그의
탄생 시기와 시주자 등의 정보를 흔쾌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화사석(火舍石)은 4각 형태로 면마다 둥근 창을 두었으며 그 밑도리에 위로 연꽃잎을 펼친 앙
련(仰蓮)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지붕돌은 팔작지붕 모습으로 마치 지붕이 그대로 돌로 굳은
듯하다.
조선시대 4각 석등 중 꽤 우수한 작품으로 크기나 짜임새가 투박하고 정감이 있으며, 다른 곳
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하여 국가 보물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 보이나 어
찌된 영문인지 아직까지 지방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석등 옆에는 시멘트가 발라진 바닥돌 위에 3층 탑신과 머리장식을 지닌 하얀 피부의 3층석탑
이 있다.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의 그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그 모습이 남원 백장암(百丈庵)에 있는 3층석탑과 조금 닮아보인다.

▲  앞에서 바라본 석등

▲  기둥에 새겨진 조성 관련 글씨들

       ◀  맞배지붕의 천불전(千佛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가여
래와 미륵불, 아미타불의 3존불과 조그만 금동
(金銅) 천불이 장엄하게 금빛 물결을 이루고
있다.
건물 현판은 정면은 물론 측면까지 내걸어 이
곳의 정체를 강하게 알려준다.

▲  천불전 내부를 가득 채운 불상들

▲  천불전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길


▲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꽃무릇들

▲  녹음(綠陰)에 잠긴 용천사를 뒤로하며

용천사를 나오면서 뭔가 10% 부족한 느낌이 들어 정신을 차려보니 글쎄 석등과 더불어 이곳의
값비싼 존재인 해시계를 빠트렸다. 분명 통제구역을 제외한 경내 상당수 부분을 살펴보았는데
해시계 같은 것은 전혀 두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신변보호를 위해 내부 공간에
꽁꽁 숨겨둔 모양이다. 그렇게 해시계와는 인연을 짓지 못하고 다음 장소로 쿨하게 넘어갔다.



 

♠  대자연이 빚은 심오한 작품이자 입암반조(笠岩返照)의 현장
 목포 갓바위 - 천연기념물 500호


▲  야경에 잠긴 갓바위 주변 (갓바위 산책로)

우리는 무안(務安)을 거쳐 호남선의 종점인 목포(木浦)로 이동했다. 하당신도시 동부에 홍어
삼합으로 이름난 식당이 있어 거기서 홍어삼합과 막걸리로 배불리 저녁을 섭취하고 근처 적당
한 모텔에 들어가 차를 세우고 여장을 풀었다.
먼 길을 오느라 여독이 두둑히 쌓여있지만 잠자리에 들기에는 아직 시간이 일렀다.(19시) 하
여 근처에 있는 갓바위의 야경을 후식으로 보고자 택시를 잡아타고 갓바위의 동쪽 입구인 달
맞이공원으로 이동했다. 공원 남쪽에는 하당신도시와 서해바다의 경계를 긋고 잇는 해안 산책
로가 닦여져 있는데 저녁 산책과 나들이를 나온 시민들로 제법 붐볐다.

달맞이공원에서 바다 위에 닦여진 나무데크 산책로를 들어서면 갓바위로 이어진다. 갓바위가
해안 벼랑에 있다보니 육지에서는 그의 뒷통수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천상 배를 타고
봐야 했었지. 바로 그런 고충을 덜고자 2008년 4월에 298m 길이의 해안보행교를 닦은 것이다.
갓바위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다리 형식이지만 갓바위 앞은 수면 위에 두둥실 띄워놓은 형태라
밀물 때는 바닷물을 따라 1m 정도 육지쪽으로 올라갔다가 썰물이 지면 바닷물을 따라 내려간
다. 그러다보니 바다의 기분에 따라 조금씩 모습을 달리한다. 게다가 조명을 설치해 통행편의
는 물론 갓바위의 환상적인 야경까지 보너스로 선사하고 있다.

이 산책로는 서쪽으로 목포자연사박물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목포해양유물전시관과 이어지
는데, 예전 갓바위와 첫 인연을 지었을 때는 서쪽으로 들어가 동쪽(하당신도시)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동쪽에서 들어와서 다시 동쪽으로 나갔다. 숙소가 동쪽 하당신도시에 있기
때문이다.


▲  바다에 떠있는 갓바위 산책로 (하당신도시 방향)

갓바위 산을 뜻하는 입암산(笠岩山) 남쪽 바닷가 벼랑에 자리한 갓바위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
을 두고 빚은 철학적인 작품이다. 허나 그의 작품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며 지금도 계속 자
연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굼벵이 속도로 손질되고 있어 몇백 년 후에는 지금과는 조금 다
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갓바위는 갓을 쓰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여 갓바위란 단순한 이름을 지
니게 되었다. 보면 볼수록 감탄만 자꾸 더하게 하는 그는 2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왼쪽
(서쪽) 바위는 모자가 달린 외투나 옷을 껴입은 모습처럼 보여 사오정 시리즈로 유명한 귀머
거리 사오정과 비슷해 보이며, 오른쪽(동쪽) 바위는 철모를 쓴 군인 같다. 예전에야 갓처럼
보였겠지만 그동안 모진 풍파가 더해지면서 저런 모습으로 서서히 변했을 것이다. 겉으로 보
면 시멘트가 떨어져 나간 듯한 모습이라 사람들이 건드린 것은 아닐까 싶지만 저게 모두 순수
자연 현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  울퉁불퉁하고 괴상한 피부를 지닌 갓바위 동쪽 벼랑
마치 끌 같은 도구로 바위 피부를 후벼판 것 같다. 허나 저것은 모두
자연 현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갓바위가 이런 모습이 된 것은 이곳이 바닷물과 담수가 만나는 곳으로 암석 표면에 파도가 치
거나 안개가 끼면 소금기를 머금은 물에 젖었다가 마르기를 되풀이한다. 그 와중에 수분에 들
어있던 실리카 성분이 침전되면서 용해된 부분은 조직이 이완되고 강도가 낮아져 모자 모양의
경질부와 아랫쪽이 움푹 패인 벌집 모양의 풍화혈(風化穴)이 형성된 것이다. 파도와 해류, 바
다 바람에 의해 바위가 변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현장으로 다른 풍화혈에서는 찾기
힘든 희귀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삿갓이 동남쪽을 향한 것은 햇볕의 영향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곳을 물든 저녁 노을과 갓바위와 해안 벼랑에서 반사되는 노을빛이 무척 아름다워 예로부터
목포8경의 하나인 입암반조(笠岩返照)의 현장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파도와 바닷바람에
의해 바위가 이렇게도 성형이 될 수 있음을 실감나게 하는 현장으로 2009년 국가 천연기념물
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지금은 목포9경의 제3경임)


▲  입암산의 끝을 잡고 있는 갓바위의 옆 모습
바다에 돌출된 모자 끝부분을 손으로 만지면 가루처럼 뚝 부러질 것만 같다.
정말 만져보고 싶은데 위치가 저러니 그 미련을 쿨하게 접어야 된다.


▲  갓바위 형제와 수면에 비친 그들의 모습
바다에도 그들을 닮은 갓바위가 하나 더 있다.


이렇게 개성이 넘치는 바위에는 옛 사람들이 붙여놓은 그럴싸한 전설 보따리가 꼭 담겨져 있
기 마련이다. 오랫동안 목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갓바위 역시 그 예외는 아닌데, 그들
이 붙여놓은 전설은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가 수염을 태워먹던 어느 옛날,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청년이 있었
다. 그는 소금을 팔아서 생계를 꾸렸는데 살림살이는 늘 궁핍했으나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
하여 동네 사람들의 칭찬이 마를 날이 없었다.
허나 소금 장사로는 생계가 어려워 부득이 부잣집에 머슴으로 들어갔으나 주인은 돈도 주지도
않고 그저 부려먹기만 하는지라 1달 만에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보니 심상치 않
은 기운이 있어 방문을 열어보니 글쎄 아버지의 손과 발이 이미 식어있는 것이 아닌가. 청년
이 집을 비운 사이 그는 힘겹게 유지했던 숨줄을 놓은 것이다.

청년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양지바른 곳에 묫자리를 잡고 관을 가지고 가던 중, 그만
실수로 관을 바다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어떻게 빠뜨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전설은 그냥 그렇
게만 나와있음)
이 어이없는 고통에 청년은 다시 한번 불효를 통회(痛悔)하며 울부짖다가 하늘을 바라보고 살
수 없다고 자책하며 평생 갓을 쓰고 관이 빠진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다. 이후 그곳에 2개의
바위가 불쑥 올라왔는데 사람들은 큰 바위를 아버지 바위, 작은 바위를 아들바위라 불렀다.

다른 전설로는 부처가 나한(羅漢)을 이끌고 영산강을 건너 이곳에서 잠시 쉬었는데, 그때 모
르고 놓고 간 삿갓이 바위로 변했다는 것이다. 하여 갓바위 대신 중바위란 이름도 지니고 있
다.
앞 전설이 효도를 소재로 한 것이라면 뒷 전설은 불교를 소재로 한 것으로 효행사상을 장려하
고자 갓바위를 이용해 어설프게 이야기를 엮은 선비들과 이곳에 오지도 않은 부처와 나한을
내세워 바위를 포교의 소재물로 삼은 승려들의 투철한 영업 정신이 교차된 현장이다.


▲  조명에 의지해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갓바위 야경의 위엄

칼퇴근의 달인, 햇님이 그만의 공간으로 쏙 사라지고 달이 어둠을 가져와 천하를 장악하자 인
간이 설치한 조명이 전기에 의지해 일제히 빛을 뿜어내며 갓바위 주변의 어둠을 몰아냈다. 그
렇게 갓바위의 환상적인 야경은 태어났다. 예전에는 낮에 봤고 이번에는 야경을 봤으니 그의
낮과 밤, 두 얼굴을 모두 본 셈이다.

바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와 벌써부터 설치고 있는 여름 제국(帝國)의 기운을 단죄하고 있으
며, 갓바위 앞 산책로는 수면 위에 둥둥 띄워놓은 형태라 파도에 따라 조금씩 몸을 움직인다.
갓바위 앞으로 더 다가가 그의 피부를 만져보고 싶지만 다리를 그 자리에 고정하여 그러지도
못한다.
그렇게 갓바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21시, 다시 하당신도시로 나와 곡차 1잔 걸친 다음 숙소로
돌아가 다음 날을 위해 고된 몸을 뉘었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갓바위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용해동 산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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