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1.03.01 우리나라 3대 용문사의 일원이자 화려한 늙은 윤장대로 유명한 예천 용문사 (용문사 성보박물관)
  2. 2018.08.14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관악산에서 제일 맵시가 좋은 계곡, 과천 문원계곡 둘러보기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4
  3. 2012.11.27 늦가을 산사 나들이 ~ 남해 용문사 (미국마을, 남해바다)
  4. 2012.11.13 늦가을 산사 나들이 ~ 천년 묵은 은행나무로 유명한 양평 용문사 (용문산)

우리나라 3대 용문사의 일원이자 화려한 늙은 윤장대로 유명한 예천 용문사 (용문사 성보박물관)

예천 용문사


' 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 예천 용문사 '
우측 윤장대좌측 윤장대
▲  용문사의 자랑, 윤장대

용문사에 다시 오니 산이 깊어 세속의 소란함이 끊어졌네
상방(上方)에는 중의 평상이 고요하고 옛 벽에는 부처의 등불이 환하다.
한 줄기 샘물 소리는 가늘고 일천 봉우리 달빛이 나뉜다
고요히 깊은 반성에 잠겨지니 다시 이미 나의 가졌던 것까지 잃어버린다.

조선 초기 학자인 서거정(徐居正)이 용문사에서 지은 시


 

♠  용문사(龍門寺) 입문

▲  회전문을 지키는 사천왕(四天王)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증장천왕(增長天王)

▲  회전문을 지키는 사천왕
광목천왕(廣目天王)과 다문천왕(多聞天王)


늦가을이 아쉬움 속에 저물고 겨울이 제국의 기틀을 닦던 연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일행들과
경북 예천(醴泉)을 찾았다.
예천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용문사를 그날의 마지막 메뉴로 찾았는데, 주차장에 차를 세우
고 경내로 들어서니 일주문(一柱門)이 제일 먼저 마중을 나온다. 
 
용문사 일주문은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따르면 1608년에 시작된 대대적인 중창의 마
지막 불사로 81년 뒤인 1689년에 세울 예정이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80여 년의 장대한 계획
을 세우고 중창에 임한 듯 싶다. 당시의 계획대로 81년 뒤에 세웠는지는 모르지만 공포의 조
각 수법이나 장식이 18세기 후반 양식이 강해서 1767년 대장전 중창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1938년에 보수를 했다.
문 현판에는 '소백산(小白山) 용문사'라 쓰여있어 이곳의 이름을 밝혀주며, 용문사를 직접 품
고 있는 용문산(龍門山)보다는 거리가 조금 있는 소백산을 칭하고 있으니 이는 소백산이 훨씬
명성이 높고 웅장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소백산의 영역을 좀 늘려보면 용문산도 그 범주에 들
어가기는 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삼삼한 숲길이 중생을 맞는다. 늦가을의 절정을 누렸던 나무들은 마치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낸 중생 마냥 벌거숭이가 되어 겨울 제국(帝國)의 눈치를 받는다. '올해도 다
저물었구나. 이제 곧 강제로 나이 1살이 얹혀지겠군'
싶은 생각이 거친 파도처럼 몰려와 나그
네들을 잠시 우울쟁이로 만들어버린다. 숲이 아무리 청량한 바람을 불어 속세에서 꾸리고 온
번뇌를 싹 단죄한다고 해도 그런 우울한 생각까지 악성바이러스처럼 심어놓으니 심기가 별로
이다. 간신히 번뇌를 일주문 부근에 내던지고 경내로 발길을 향한다.

그렇게 길을 재촉하다보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든 용문사에는 이르나 두 발로
가는 경우에는 산사의 정취에 어울리게 오른쪽 돌계단으로 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절을 다
둘러보고 나올 때는 경내 서쪽 주차장(제3주차장)을 거쳐 잘 닦여진 찻길로 내려오면 된다.

돌계단을 오르면 경내로 인도하는 2번째 관문인 회전문(回轉門)이 마중을 한다. 그는 석가여
래의 경호원인 사천왕의 보금자리로 흔히 천왕문(天王門)이라 불린다. 여기서 그들의 간단한
검문을 받고 경내로 들어서면 되는데, 사천왕의 표정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섭다기보다는
느긋하고 친숙한 표정 같다.


▲  용문사 해운루(海雲樓)

회전문을 지나면 바로 조급한 게단이 숨도 고를 틈도 주지 않고 펼쳐진다. 다행히 계단은 짧
은데, 그 계단의 끝에는 해운루가 수미산(須彌山)에 높이 선 누각 마냥 물끄러미 천왕문을 통
과한 중생을 굽어본다.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인 해운루는 경내로 향하는 3번째 관문으로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경내
를 가리고 있다. 1984년 대화재 때 불탄 것을 다시 지었으며, 이 누각을 지나면 대장전과 보
광명전이 정면에 나타나면서 비로소 경내에 이르게 된다.
그럼 여기서 잠시 용문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해우소에서 바라본 용문사 외경

예천군 용문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용문사는 양평(楊平) 용문사, 남해(南海) 용문
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용문사의 하나로 꼽힌다. 다들 쟁쟁한 역사와 보물을 지니고 있어
우열을 가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한번 가려보라면 바로 예천 용문사가
단연 갑(甲)이 아닐까 싶다.
양평 용문사는 이 땅 최대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0호)로 유명하나 6.25때 죄다 파괴되어 고
색의 깊이가 얕고, 남해 용문사는 딱히 두드러지는 것은 없지만 고색이 깊고 문화유산이 많다.
허나 예천 용문사는 그곳의 상징이자 천하에서 거의 유일하다는 오래된 윤장대를 간직하고 있
고, 조선 중기 건물인 대장전을 비롯해 무수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어 성보박물관까지 따
로 장만할 정도이다. 1984년 불의의 큰 화재를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대단했을 것인데,
천하의 시샘 때문인지 화재로 많은 것을 잃었다.

예천의 대표급 관광지로 몸값을 올린 용문사는 870년에 두운선사(杜雲禪師)가 당나라에서 귀
국하여 지은 조그만 암자인 두운암(杜雲庵)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 초막을 짓고 머물고 있었는데, 920~930년경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경상도를 정벌하러 하늘재를 넘어 예천 땅을 지나다가 두운의 이름을
듣고 그를 보러 찾아갔다.
허나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헤매고 있다가 어디선가 청룡(靑龍) 2마리가 바위 위에 나타나 길
을 인도했다고 한다. 그래서 산 이름을 용문산이라 했다고 하며, 두운을 위해 용문사를 창건
했다고 한다. 이때 절을 짓는데, 나무 둥치에서 무게 16냥의 은병(銀甁)이 나와 공사비로 썼
다고 전한다.
전설에 나오는 청룡은 진짜 용은 아닐테고 아마도 지역 사람들이나 지방 세력의 격한 환영을
받거나 도움을 받은 것을 과대포장하여 그렇게 표현한 듯 싶으며, 은병 16냥은 예천의 지방
세력이나 백성들의 지원을 뜻하는 것 같다.

태조는 이곳에 머물며 장차 천하를 평정하면 큰 절로 지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936
년 오랜 숙원인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자 약속대로 그해에 칙명(勅命)을 내려 절을 크게 중
건하고 매년 150석의 쌀을 내렸다. 그 쌀은 지역에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충당했다.

1165년에 의종(毅宗)의 칙명으로 중수했으며, 1171년에 명종(明宗)의 태자(太子)의 태를 절의
왼쪽 봉우리에 묻으면서 창기사()로 이름을 바꾸고 축성수법회()를 열어 낮
에는 금광명경(金經)을 읽고, 밤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의식을 항규()로 삼았다.
그 법회가 끝나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승려 500명을 불러 50일 동안 담선회()를 열었
으며, 그때 산청 단속사(斷俗寺)의 승려인 효돈()이 전등록(傳錄), 인악집(仁集), 설
두집
(雪集) 등을 강의했다.
그리고
1173년 무신정권에 대항하는 김보당(金甫當)의 난이 일어나자 3만 승재()를 여는
한편 1180∼1182년에 대법회를 열었다.

▲  용문사 보광명전

▲  용문사 명부전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많은 절들의 법등(法燈)이 간당간당하던 조선 때도 용문사는 승
승장구하여 세조(世祖)가 이곳 승려의 잡역(雜役)을 감하거나 면제하라는 교지(敎旨)를 내렸
으며, 1478년에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태실을 봉안하고 1480년에 세조의 왕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중수하여 성불산(成佛山) 용문사라 했다.

임진왜란 때는 다행히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왜군은 절 입구인 초간정(草澗亭)에서 돌아갔다
고 한다. 그 기나긴 왜란 동안 용문사에서 짚신을 짜서 전국 승군(僧軍)들에게 보급하는 한편,
승병을 훈련시켰다.
1783년에는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태실을 봉안하고 소백산 용문사로 이름을 갈았으며, 1835년
에 불이 나자 열파(), 상민(), 부열() 등이 힘을 모아 1840년대에 공사를 마쳤다.

6.25때도 별 피해를 입지 않는 등, 전화(戰禍)도 피해가는 명당(明堂) 자리로 명성을 날렸으
나, 1984년 뜻하지 않은 화재로 보광명전과 해운루, 강원, 요사 등 대부분의 건물을 날리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허나 다행히도 화마(火魔)는 대장전과 윤장대, 자운루 등은
털끝도 건드리지 못했으며, 이후 대대적인 보수를 벌여 주변의 나무를 베어내고 뜨락을 넓게
다졌다.
또한 용문사와 인근 사찰의 문화유산 관리를 위해 경내 우측에 성보박물관을 세웠으며, 구식
해우소를 폐쇄하고 샤워장을 갖춘 신식 해우소를 갖추어 중생과 승려의 편의를 고려했다.


용문사에는 3가지의 믿거나 말거나 이적(異蹟)이 있는데, 하나는 태조 왕건이 두운을 찾았을
때 용이 나와 영접한 일이고, 둘째는 절을 지을 때 은병이 나와 공사비로 충당한 일이며, 3째
는 절 남쪽에 9층 청석탑(靑石塔, 지금은 없음)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할 때 4층 위로 오색구
름이 탑 둘레를 돈 일이다.

경내에는 오랜 내력과 명성에 걸맞게 법당(法堂)인 보광명전을 비롯해 대장전, 극락보전, 명
부전, 자운루, 원통전, 산신각, 해운루, 성보박물관 등 20동의 건물이 경내를 한가득 메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이곳의 대표 보물인 대장전과 윤장대를 위시해 세조의 감역교지,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영산회괘불탱, 천불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 국가 국보 1점과 국
가 보물 7점, 중수용문사기비 등의 약간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  영남제일강원(嶺南第一講院)

▲  성보박물관에 있는 독성상과 지장보살좌상

깊숙한 산자락에 묻혀 있어 아무리 질긴 번뇌라도 쫓아오다 제풀에 졸도하며, 절을 감싼 숲이
삼삼하여 서거정의 시처럼 속인들의 마음을 정화해 준다. 거기에 고색이 깊은 경내에 발을 들
이면 나도 모르게 속세를 잊고 잠시나마 번뇌가 끊어지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예로부터 4계절이 아름다운 경승지라 선비와 문인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이곳의 아름다움을 시
와 문장으로 남겼으며, 20세기에는 출세를 위해 공부하러 절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행정, 법조계, 경찰 쪽으로 크게 출세한 이들이 많아 공부의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다.

대장전과 자운루를 제외하고는 1984년 이후에 다시 지어진 것이라 부분에 따라 고색의 질감이
다르다. 허나 윤장대를 비롯하여 이곳의 깊은 내력을 가늠케 해주는 늙은 유물이 많아 경북
북부권에서 영주 부석사(浮石寺) 다음 급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예전에 이곳 승려인 청
안이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란 광고 문구로 유명한 모 핸드폰 통
신사 TV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 용문사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391 (용문사길 285-30 ☎ 054-655-1010)
* 용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용문사 대장전과 그 주변



 

♠  용문사 경내 둘러보기

▲  보광명전(普光明殿)과 3층석탑

해운루를 통해 경내로 들어서면 흙이 입혀진 너른 뜨락과 함께 석탑 2기를 거느린 보광명전이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아 중생을 맞는다.

보광명전은 대장전 다음급의 건물로 1984년 대화재로 쓰러진 것을 새로 지었다. 정면 3칸, 측
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철조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봉안했으며, 앞뜨락에는 하얀 피부
의 맨들맨들한 석탑 2기가 나란히 솟아 있는데, 우측 탑은 5층, 좌측 탑은 3층으로 층수를 달
리했다. 둘은 높이가 조금 차이가 날 뿐, 모습이 비슷하여 층수를 같게 하고 높이를 맞췄으면
보기에도 자연스러웠을텐데, 그 점이 좀 아쉽다.


▲  성보박물관에서 바라본 보광명전 뜨락

▲  보광명전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광명전 불단(佛壇)에는 이곳의 주인인 비로자나불이 그만의 특허 제스쳐인 지권인(智拳印)
을 선보이고 있다. 얼굴이 너무 부어있어 통통한 인상을 주는데, 그의 좌우에는 소조(塑造)
로 만든 석가여래상과 약사여래상이 협시(夾侍)로 자리를 지킨다. 허나 주불(主佛)보다 덩치
가 지나치게 작아 마치 어른과 아이가 앉아있는 듯 하다. 그런 불단을 둘러싸고 중생들의 소
망이 한아름 담긴 연분홍 연등이 천정을 가리며 허공을 가득 메운다.


▲  보광명전 좌측에 있는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

똥배하면 속인들은 만병의 근원이라며 다들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낸다. 하여 똥배를 출렁이고
다니는 모습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보기도 한다. 허나 포대화상만큼은 예외이다. 다 같은 똥
배인데도 말이다. 역시나 사람은 출세하거나 성인(聖人) 반열에 오르면 속인들이 흔히 안좋게
보는 것도 모두 좋게 보는 모양이다.
똥배는 그의 상징으로 사람들은 소원을 빌고 그의 배를 문지른다. 무척이나 두꺼운 얼굴과 축
쳐진 가슴은 그의 비만이 꽤 심각함을 여실히 보여주나 그걸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
려 두꺼우면 두꺼울 수록 그의 인기가 올라간다.


▲  진영당(眞影堂)

대장전 좌측에 자리한 진영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681년에 희인대사(希
仁大師)가 세웠다고 전한다.
진영당은 이름 그대로 용문사를 거쳐간 조사(祖師)들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건물로 1934년과
1935년에 주지 이광하가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이곳에 깃든 진영들은 모두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무늬뿐인 건물의 이름과 달리 주지승의 집무실 및 종무소(宗務所)로 쓰이
고 있다.

주지승 집무실에는 목각탱화처럼 무늬가 복잡하고 현란한 의자들이 놓여있는데, 마치 부유층
집안의 거실이나 대기업 회장 사무실, 고위관료 접대실 같은 분위기라 조금은 이질감이 든다.
절에 어울리게 소박한 의자를 두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  호화로움이 묻어난 진영당 주지승 집무실

▲  용문사 명부전(冥府殿)

진영당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
낸다.
이 건물은 1682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며, 불단에는 지장보살
(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
며 양쪽에 서 있다. 그 좌우에는 시왕상(十王像)이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앉아 중생을 굽어보
고 있는데, 이들은 명부전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실적(實籍)과 신경(神鏡) 등이 만
들었다고 전한다.


▲  명부전 지장보살과 명부(저승) 식구들

▲  용문사 자운루(慈雲樓)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476호

영남제일강원 남쪽에 맞배지붕 누각인 자운루가 속세를 바라보고 있다. 이 건물은 1166년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1561년과 1621년에 중수를 했고, 1979년에 보수를 하여 지금에 이른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쓸 짚신을 만들어 보급하던 의미 깊은 현장으로 조선 중/후기 건축 기
법을 지니고 있으며, 절에서 큰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행사장이나 공양 장소로 쓰인다.

자운루 옆구리를 통해 경내를 벗어나면 바로 2층 규모의 옛 해우소가 나온다. 재래식 화장실
로 신식 해우소가 세워지면서 지금은 문을 닫아 걸고 한가로운 노후를 보낸다.


▲  용문사에서 만난 정겨운 풍물시(風物詩)
영남제일강원 뒤쪽에는 보기만 해도 장맛을 돋구는 장독대들이 5열로 늘어서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저 안에는 온갖 전통 먹거리들이 숙성의 과정을
밟으며 햇볕을 볼 그날을 꿈꾼다.

▲  원통전(왼쪽)과 산신각(오른쪽)

경내의 중심인 대장전과 보광명전 뒤쪽 높은 곳에 원통전(圓通殿)과 산신각(山神閣)이 있다.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관세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는데, 문이 가운데
칸에만 달려있다. 그 뒤쪽 높은 곳에는 1칸짜리 산신각이 원통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있는
데, 산신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로 산령각(山靈閣)이라 불리기도 한다.


▲  보광명전, 대장전 뒤쪽 산책로

▲  극락보전(極樂寶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극락보전이 넓게 자리를 잡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
붕 건물로 1984년 이후 경내를 크게 정비할 때 장만했는데, 원래는 천불전(千佛殿)이었으나
근래에 극락보전(극락전)으로 이름을 갈아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로 삼았다.
허나 예전 천불전의 성격은 여전하여 하얀 피부의 조그만 불상 1,000개가 아미타3존불을 빼곡
히 둘러싸며 장관을 이룬다.


▲  극락보전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아미타3존불과 조그만 천불의 물결

▲  극락보전에서 바라본 경내 (정면에 보광명전의 뒷통수가 보임)

▲  성보박물관 좌측에 자리한 샘터
용문산에 베푼 물이 나무로 만든 수로를 타고 석조(石槽)로 내려간다.


 

♠  용문사의 상징, 대장전(大藏殿) - 국보 328호

대장전은 용문사의 으뜸 건물이자 대표 보물이다. 만약 그와 윤장대가 없었다면 용문사를 찾
는 이는 지금보다 적었을 것이고, 명성도 다른 용문사에 비해 낮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용
문사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크다. 작게는 절의 보물이나 크게는 나라의 귀한 보물로 절
에서도 그들을 특별히 옆구리에 두어 온갖 정성을 들인다. 화마(火魔)가 한바탕 할퀴고 지나
간 1984년에도 대장전은 띠끌의 피해도 없이 살아 남았으며, 그 이후 화재방지를 위해 보존처
리를 가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조그만 맞배지붕 집으로 얕은 석축에 막돌 주초를 놓고 민흘
림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안과 밖을 모두 2출목(出目)으로 짜고 기둥 사이마다 공간포(空間
包)를 두었으며, 주심도리가 대들보보다 높은 위치에 있어 지붕이 높아진 만큼 기둥이 짧아
보인다. 단청은 금단청(錦丹靑)을 입혀 내부를 화려하게 치장했으며, 천정의 반자틀에도 화려
하게 단청을 입히고 대들보와 종보 사이의 화반(花盤)에 풀무늬를, 대들보 위의 용은 물고기
를 몰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천정 곳곳을 화려하게 수식해 건물의 품격을 드높였다.

이렇게 화려한 대장전은 1173년에 자엄대사(資嚴大師)가 세웠다고 한다. 허나 그때 세워진 대
장전이 지금의 건물은 아니다. 자엄은 인도의 고승인 구담(瞿曇)이 대장경(大藏經)을 용궁(龍
宮)에 소장했다는 옛 이야기에 따라 용이 나타났다고 하는 용문사에 나라의 호국(護國)을 기
원하고자 대장경을 보관하고 건물 이름을 대장전이라 했으며, 나중에 그런 연유를 잘 상징하
고자 천정에 용과 물고기 장식을 만든 것이다.

그 이후 1467년과 1534년, 1597년, 1665년(또는 1670년)에 중수했으며, 1684년에 아미타3존불
과 목각탱화를 만들어 봉안했다. 그리고 1767년에 중수를 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
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해체수리를 하면서 19세기에도 보수가 있었음이 밝혀졌으며, 기단 공
사를 위해 간이시굴조사를 벌이던 중, 현재 기단 속에서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이 모습을 드러
냈는데, 이는 대장전의 창건 당시의 흔적으로 보인다.

건물 내부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중앙 뒷쪽에 불단을 두고 그 좌우에 윤장대를 1개씩을 설치
해 서적을 두었다. 내부 구조 양식은 조선 중기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으나, 외부는 고려
건축양식을 띄고 있는데, 가까운 안동의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과도 좀 비슷해 보이
기도 한다.

▲  우측에서 본 대장전

▲  좌측에서 본 대장전


▲  붉은 무늬 현판에 쓰여진 대장전 3글자의 위엄

▲  온갖 무늬가 그려진 대장전 우물천정

▲  대장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 보물 989-1호
뒤에 보이는 후불탱화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 보물 989-2호


용문사 대장전하면 다들 윤장대가 생각날 것이다. 허나 윤장대보다 명성과 시대가 조금 떨어
지지만 불단을 지키고 앉은 목조아미타3존상과 그 뒤에 걸린 아미타후불탱화도 그에 못지 않
은 귀중한 보물이다.

두툼한 붉은 방석에 앉아 중생을 위로하는 아미타3존상은 나무로 만들어 금색 피부를 입힌 것
으로 아미타불이 자비로운 인상으로 가운데에 앉아있고,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
菩薩)이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쓰며 그 좌우를 지킨다. 뒤에 있는 후불탱화와 더불어 17세
기 후반 숙종(肅宗) 시절에 조성된 것이다.

그들 뒤로 목각아미타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걸려있는데, 그는 1684년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나
라에 널린 목각후불탱 가운데 가장 늙은 것이다. 후불탱화가 너무 화려해 가히 눈이 부실 지
경으로 기본 구조는 상하가 긴 직사각형이지만 더듬이처럼 생긴 하얀색의 구름무늬 광선을 표
현하여 금색과 흰색의 어색한 조화를 이루며 탱화의 수려함을 더욱 돋게 만든다.

탱화 중앙에 본존불은 얼굴을 앞으로 숙여 속세를 살피고 있으며,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
렸는데 왼손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두꺼운 편이며, 간략한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
을 구분했다.

본존불을 둘러싼 나머지 불상은 상,중,하 3줄로 배치했다. 아랫줄에는 사천왕상이 본존의 대
좌(臺座) 좌우로 2구씩 1렬로 서 있으며, 가운데줄과 윗줄에는 각각 좌우 2보살씩 8대 보살이
배치되었고, 윗줄의 보살 좌우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모습의 2대 제자인 아난(阿難
)과 가섭(迦葉)을 배치했다. 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며, 본존불과 보살상 사이
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하여 여백을 빼곡히 채웠는데, 너무 빼곡하여 솔직히 눈이 어지럽
다. 또한 탱화를 지탱하고 있는 양쪽 나무 기둥에는 용무늬 같은 것이 새겨져 장엄함을 드러
낸다.

▲  용문사 윤장대(輪藏臺) - 국보 328호

용문사에 왔다면 대장전에 깃든 윤장대는 꼭 한번 만져봐야 된다. 예전에는 돌리는 것도 가능
했으나 이제는 연로한 탓에 돌릴 수는 없고, 대신 성보박물관에 마련된 윤장대를 돌리면 된다.
불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1개씩 배치되어 있는데, 이 땅의 수많은 고찰 가운데 유일하게 있는
늙은 윤장대로 그 명성이 저승에까지 전해졌는지 윤장대를 못보고 저승에 가면 꾸중을 듣는다
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도 있다.

윤장대는 원래 서적이나 장경판(藏經板)을 넣어두던 일종의 장경각(藏經閣)이다. 장경각은 쉽
게 말하면 책장이다. 법회 때는 경전을 넣고 손잡이를 잡아 돌리며 염불을 했는데, 옛날에는
일반 백성들 상당수가 까막눈이었고, 설령 한자(漢字)를 알아도 불교 경전이 좀체 어려운 것
이 아니다. 하여 '윤장대를 1번 돌리면 경전을 1번 읽은 것과 같다 / 경전을 이해한 것과 같
다 / 소망이 이루어진다 / 윤장대를 못보고 저승에 가면 혼난다'
는 식으로 속인들에게 영업을
했던 것이다.

이들 윤장대는 높이 4.2m, 둘레 3.37m 크기로 양쪽에는 손잡이가 있어 그를 잡고 돌리면 되며,
기둥을 마루 밑에 있는 문둔테에 박아 회전식으로 돌아가게 만들었고, 8각원당형의 굴도리식
모양의 책장을 만들었다. 책장을 여닫는 문은 8개로 우측 윤장대의 문창살은 가지각색의 문양
으로 아름다움을 더하며, 좌측 윤장대는 그냥 소박한 빗살로 서로 대조를 이루는데, 이는 음
양의 조화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 또한 문 위쪽에는 연꽃과 보살 등이 그려져 있어 안그래도
포식하는 두 눈을 더욱 배부르게 만든다.

윤장대의 조성시기는 1190년이라고 하며, 두운이 절을 세울 때 용궁에 보관된 대장경을 보관
하고자 대장전에 윤장대를 만들고 7일 동안 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윤장대 때문
에 그를 간직한 건물 이름이 대장전이 된 것이다.


▲  좌측 윤장대 윗부분

▲  우측 윤장대 윗부분

지붕과 촘촘하게 짜여진 공포덩어리는 그가 그냥 책장이 아닌 법당의 축소판 같은 느낌을 던
져주며 좌측 윤장대의 처마와 공포는 금을 칠한 듯, 너무나 화사하다. 이렇듯 윤장대는 세밀
하고 뛰어난 조각품으로 우리나라 불교 미술의 또 다른 정화이다.

      ◀  책이 담긴 윤장대 가운데 부분
대장전 윤장대는 돌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그걸 무시하고 억지로 돌리려고 해도, 밑에 단
단하게 고정을 시켜버려 돌려지지도 않는다.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와 내 책장으로 삼고 싶
은 윤장대, 나중에 윤장대 모양의 책장을 하나
만들어 대리만족으로 옆에 두고 싶다.

(대장전은 원래 국가 보물 145호, 윤장대는
가 보물 684호
였으나 2019년 12월 '용문사 대
장전과 윤장대'란 이름으로 국보 328호로 특진
되었음)


 

♠  용문사의 보물을 간직한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경내 서쪽에는 용문사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성보박물관이 넓게 터를 닦았다. 2010년에 문
을 연 이곳은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로 용문사의 보물을 비롯해 주변 사찰에서 맡긴 문화유
산 등 315점이 전시/보관되고 있다. 내부 촬영은 상업성이 아니라면 가능하며, 대장전과 더불
어 필수로 봐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는 윤장대를 돌리는 코너도 있으니 꼭 살펴
보길 권한다.
마음 같아서는 박물관의 유물을 모두 다루고 싶으나 내용이 너무 길어질 수 있어 일부 중요한
유물만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른 유물은 직접 가서 눈에 담기 바란다.
 
* 성보박물관(☎ 054-655-8695) 관람시간은 9:30~17:30 (11~2월에는 10시부터 17시까지) 매주
  월요일과 설날, 추석연휴는 문을 닫아걸고 쉰다.

       ◀  영산회괘불탱 - 보물 1445호
괘불은 석가탄신일이나 주요 법회 때만 잠깐씩
등장하는 비싼 존재이다. 이 괘불은 1705년에
승려 92명과 신도들의 시주를 받아 조성되었는
데, 석가여래가 영축산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
華經)을 설법하는 영산회를 표현했다.
초록색 두광(頭光)을 갖춘 석가여래 좌우에 붉
두광을 두룬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자리해
있으며, 그 위에 석가여래의 제자인 아난과 가
섭이 합장인을 선보이고 있다. 그림 하단에는
왕실의 평안을 기원하는 내용이 있고, 테두리
하단부에 그림과 관련된 화기(畵記)가 있다.
이 괘불의 특징이라면 그림 상단에 하늘색 바
탕으로 하늘을 표현한 점과 석가여래가 연꽃가
지를 들고 있는 것으로 다른 괘불과는 다른 새
로운 모습이다.


▲  용문사 천불도(千佛圖) - 보물 1644호

이곳 성보박물관의 탱화 중 크게 두드러지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천불도가 아닐까 싶다. 천
불을 봉안한 천불전이란 건물은 많이 있지만 정작 천불을 그린 늙은 그림은 천하에 딱 2개 밖
에 없는 희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탱화는 1709년에 화승(畵僧) 도문(道文)과 설잠(雪岑), 계순(戒淳), 해영(海英) 등이 제작
한 것으로 붉은 바탕에 조그만 1,000개의 불상을 질서정연하게 그려넣었다. 이 땅에 전해오는
천불도는 1754년에 그려진 선운사(禪雲寺) 천불도 5폭과 이곳 용문사가 전부로 18세기 초기
천불신앙(千佛信仰)과 당시의 불화 양식을 잘보여준다고 하여 국가 보물로 대접받고 있다.


▲  극락암 지장시왕탱 (1812년 제작)
용문사의 부속 암자인 극락암에서 가져온 그림으로 중앙에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명부(저승)의 시왕(十王)과 주요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극락암 지장시왕탱 복장 발원문(發願文)과 복장유물

▲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동자입상(童子立像)과 사자입상(使者立像)

동자입상은 용문사 명부전에 있던 것으로 시왕의 심부름을 하는 비서이다. 원래 동자상 10개
가 각각 시왕(十王) 곁에 있었으나 관리소홀로 지금은 달랑 1개만 남아 성보박물관으로 옮겼
다.
오른쪽 눈에 안타깝게도 크게 금이 가서 애꾸눈처럼 되었지만 동자에 걸맞게 그의 표정에는
귀여운 티가 배여 있으며 양손에는 시왕의 물건을 들고 있는데, 물건을 숨기며 장난을 칠 것
같은 천진난만함이 묻어나온다.

동자입상 옆에는 응진전에서 가져온 사자상(使者像)이 나란히 서 있는데, 동자상과 달리 머리
에 모자를 쓰고 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조그만 독성좌상(獨聖坐像)

독성이 그려진 독성도(獨聖圖)는 많이 봐왔지만 늙은 독성상은 흔치 않다. 이 독성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상(塑造像)으로 원래 응진전 내부 정방형 감실(龕室)에 홀로 봉안되어 있었다.
왼손에는 게이트볼에서 공을 칠 때 쓰는 것과 비스므리하게 생긴 긴 장대를 들고 있는데, 조
선 후기에 신경대사가 시왕상과 금당의 판불(板佛)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여 승려들이 축수
전(祝壽殿) 서쪽에 별도로 감실(龕室)을 만들어 신경대사의 진영을 안치했다는 기록이 '속용
문사적기'에 나와있어 그의 상이라는 의견도 있다.


▲  너그러운 표정의 지장보살좌상

독성상 옆에 자리한 지장보살좌상은 원래 강원(講院)에 있었다. 15~16세기에 나무로 만든 목
불(木佛)로 도금을 입혔으며,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지그시 눈을 감은 둥근 얼굴에는 온화함
이 물씬 배여나와 중생들에게 희망을 선사한다. 목에는 화려한 목걸이가 있는데, 두건과 수인
(手印)이 아니라면 관세음보살 누님으로 착각하고도 남을 모습이다.

강원 불단에 있던 그는 1984년 대화재로 강원이 불타면서 응진전으로 옮겨졌으며, 화재로 인
해 어깨 부분과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에 그을음이 생겨 당시의 참담함을 증언한다. 다행
히도 재빨리 구조한 탓에 이렇게 살아있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  봉인사(奉印寺) 부도암(浮屠庵) 신중탱 복장낭(腹臟囊, 복장주머니)과
복장물

봉인사는 경기도 남양주시 사릉(思陵) 인근에 있는 절로 광해군(光海君) 시절부터 왕실의 원
찰(願刹)로 지원을 받았다. 1867년 상궁의 시주로 신중탱과 복장물을 만들었는데, 1887년 봉
인사가 불에 타면서 이들을 다른 곳으로 옮겼으며, 이리저리 떠돌다가 결국 용문사에 안착하
게 되었다.
복장주머니에는 한글로 쓰인 발원문이 있으며, 이 주머니에서 각종 다라니경과 약초, 금과 은
이 나오기도 했다.


▲  전패(殿牌)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전패로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으나 경내에 1884년 6월에 궁궐 상궁(尙
宮)의 지원으로 만든 탱화가 있어 그 시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패 중앙의 붉은 부분에는 '황실삼전하수만세(皇室三殿下壽萬歲)'라 쓰여 있어 제왕(帝王)의
장수를 기원하는 전패임을 보여주며, 여기서 삼전하는 당시 제왕인 고종과 명성황후, 세자 순
종(純宗)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돋보이는 것은 왕실이 아닌 황실로 썼다는 것이다. 하여 고종
이 황제를 칭한 1897년 이후에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제왕을 폐하(陛下)가 아닌 전하로
칭하고 있어 앞뒤가 맞지를 않는다.

이 전패는 8각형의 높은 대좌(臺座) 위에 패를 올렸으며, 발원 내용을 적은 가운데 부분에는
연화좌(蓮花座) 위에 화려한 꽃장식을 채웠다. 머리 부분에는 2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고, 채
색은 좀 희미해졌지만 용과 꽃무늬 장식을 갖춘 화려한 모습으로 왕실을 위한 전패임을 알려
준다. 그리고 조선 때 만들어진 전패나 위패(位牌), 불패(佛牌)는 많지만 이렇게 대좌부터 머
리까지 완벽하게 남은 것은 흔치 않다.

             ◀  업경대(業鏡臺)
조선 후기에 나무로 만들어 채색을 입힌 것으
로 저승의 염라대왕이 심판할 때 쓰는 거울이
라고 한다. 거울을 보면 생전의 죄업이 싹 비
친다고 하며, 그 경량에 따라 지옥으로 갈지,
극락으로 갈지가 정해진다고 한다.
이 업경대는 원래 명부전에 있었는데, 아랫부
분을 수미산(須彌山) 형태로 조각했다. 이는
죄업(罪業)을 쌓지 않고 깨달음을 통해 극락으
로 갈 수 있다는 업경(業鏡)의 상징성을 강조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죄업을 비추는 거울
인 업경은 불꽃 형태로 조각된 원형의 놋쇠로
만들었다.
나도 만약 저세상에 가서 업경대를 본다면 과
연 어떻게 나올까? 궁금함보다는 왠지 두려움
이 앞선다.


▲  화엄칠조탱(華嚴七祖幀) - 19세기 탱화

화엄7조탱은 화엄종(華嚴宗)의 정통을 계승한 7명의 승려를 담은 탱화이다. 다들 열심히 화엄
경책을 보고 있는데, 모두 머리에 초록색 두광(頭光)을 지니고 있어 그들을 높이고 있다.
화엄7조는 인도의 마명(馬鳴, 50~150)부터 시작하여 용수(龍樹, 150~250), 중원대륙의 법순두
순(法順杜順. 557~640), 지상지엄(至相智儼, 602~668), 현수법장(賢首法藏, 643~712), 청량징
관(淸凉澄觀. 738~839),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로 그들을 순서에 따라 배치했다.

상단 중앙에는 마명이, 그 좌측에는 용수가 앉아있고, 우측에는 두순을 앉혀 3명이 기나긴 세
월을 뛰어넘어 같은 경상에 앉아있다. 그 옆에 지엄과 현수가 있으며, 하단 좌우에 막내인 청
량과 종밀이 따로 앉아있다. 용수와 마명은 후대에 보살로 격이 높아져, 보살의 얼굴처럼 표
현되었으며, 다른 조사들은 거의 비슷비슷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킨다. 조사 옆에는 그들의 법
호(法號)와 생애를 함축한 글이 적혀있으며, 각자의 저서가 놓여져 있다.
그래서 마명이 앉은 경상에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 있고, 종밀의 경상에는 '대방광불
원각경(大方廣佛圓覺經)'이 놓여 있다. 또한 마명 앞에는 앞발을 들어 힘차게 달려가는 말이
그려져 눈길을 끈다.

이 탱화는 원래 진영각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화엄종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7조탱이 제작되어
봉안된 것은 용문사가 유일하다. 또한 19세기 화엄사상을 중시했던 용문사의 노선이 잘 반영
되어 있다.


▲  묘법연화경 변상도(妙法蓮華經 變相圖) - 조선 후기

▲  묘법연화경 권제1
1635년에 인쇄된 것으로 용문사에는 묘법연화경 27책이 전하고 있다.

▲  대장전기일록(大藏殿忌日錄)
대장전에서 사용한 서적으로 용문사 승려들이 그들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  문수사리설마가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說摩訶般若波羅密經)과
백유경(百喩經) 1,2,3,4권
기나긴 이름부터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반야바라밀경과 백유경은
고려 고종 때 간행된 8만대장경에 수록된 경전의 하나로 여기의 것은
조선 후기에 간행되었다.

▲  고색의 때가 자욱한 감역교지(減役敎旨) - 보물 729호

감역교지(면역사패교지)는 1457년 8월 14일에 세조가 용문사에 내린 교지이다. 큰아버지인 효
령대군(孝寧大君, 세종의 둘째 형)과 함께 불교를 믿었던 세조는 용문사를 비롯하여 여러 절
에 교지를 내려 승려의 잡역을 면제시켜주는 한편,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 교지에

'경상도 예천 용문사를 경상도 감사와 예천 수령에게 이미 알린데로 더욱 살펴 한층 완호(完
護)하고 잡역을 영구히 면제해줄 것'
이란 내용과 함께 국왕의 친필 수결(手決)이 있으며, 교
지를 담던 봉투에는 '교지함(敎旨函)','어압(御押)'이라 적혀 있다. 그리고 천안 광덕사(廣德
寺)와 화순 쌍봉사(雙峯寺)에도 비슷한 시기에 교지를 내렸는데, 용문사보다 4일 전에 내린
것이다. 허나 대상 사찰명과 발급일자만 틀릴 뿐, 문장과 체제는 똑같다.


▲  용문사를 빛낸 고승들의 진영(眞影)
절을 창건했다는 두운선사를 비롯해 고승 16명의 진영이 걸려있다. 이들은
원래 진영각에 있던 것으로 보관을 위해 성보박물관 지하로 옮겨졌다.

▲  경내에서 제3주차장으로 인도하는 돌담길
(밑에서 본 모습,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성보박물관)


성보박물관을 끝으로 2시간에 걸친 용문사 관람은 정말 배부르게 마무리가 되었다. 경내에서
속세로 나갈 때는 돌계단이 있는 회전문 대신 제3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담장(토담)길과 숲길을
거쳐 일주문 옆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담장길에는 아무렇게나 생긴 큼직한 박석이 깔려 토
담과 함께 한줄기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근처에서 우두커니 있던 번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피해
다시 절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들을 강제로 껴앉고 나의 제자리로 향했다. 이래서
정말 해탈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이리하여 윤장대로 빛나는 고찰, 용문사 관람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예천 용문사를 끝으로
우리나라 3대 용문사는 모두 인연을 지은 셈인데, 이들 용문사 중 가장 작성하기 힘들었던 곳
이 예천 용문사가 아닐까 싶다. (작성하기 쉬운 곳은 양평 용문사)
(양평 용문사 ☞ 보러 가기  / 남해 용문사 ☞ 보러 가기)


▲  일주문으로 내려가는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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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관악산에서 제일 맵시가 좋은 계곡, 과천 문원계곡 둘러보기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 관악산 문원계곡 여름 나들이 '


▲  문원하폭포

▲  관악산 일명사지

▲  보광사 문원리3층석탑



 

여름이 한참 깊어가던 7월 초에 일행들과 관악산(冠岳山, 632m) 문원계곡을 찾았다. 예전
에는 관악산의 품에 자주 안기곤 했으나 그에 대한 마음이 시들시들해졌는지 기껏 가봐야
그의 외곽만 겉돌 뿐, 그곳 정상<연주대(戀主臺)>을 오른지도 어언 10년이 넘어가 버렸다.
연주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간만에 관악산과 인연을 짓고자 여름에 걸맞은 정처를 물색하다
가 과천(果川)에 있는 문원계곡을 찾기로 했다. 이곳은 관악산에 몇 남지 않은 미답처(未
踏處)이자 대표적인 피서의 성지(聖地)로 관악산 뒷통수에 자리해 있는데, 문원폭포와 문
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등의 명소가 숨겨져 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1시에 정부과천청사역(4호선)에서 일행을 만나 관악산의
품으로 들어선다. 넓게 깔린 교육원로를 가다보면 국사편찬위원회가 나오는데, 그곳을 지
나면 오른쪽에 2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비좁은 길이 나온다. 그 길이 문원계곡으로 인도하
는 길로(이정표가 있음) 길 양쪽에는 철책이 둘러져 답답함을 안겨준다.
그런 길을 4분 정도 들어가면 산림초소가 나오면서 비로소 관악산 산길이 펼쳐진다. 여기
서 서쪽으로 가면 백운사(용운암)란 절이 나오고, 직진하면 바위에 새겨진 승려 얼굴상이
, 동북쪽으로 가면 문원계곡 산길이다.


▲  관악산 문원계곡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
두 행정관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짓눌려 좁고 각박한 길이 되어버렸다.
관악산 탐방객을 위해 길을 조금 트여주면 좋으련만..


 

♠  문원계곡(文原溪谷) 입문

▲  문원계곡의 생매장 현장

문원계곡은 관악산을 수식하고 있는 주요 계곡의 하나이다. 관악산에는 바로 근처에 있는 자
하동천(紫霞洞天) 계곡을 비롯해 관악산계곡(서울대 서쪽), 관음사계곡(남현동), 삼성천계곡
(안양예술공원)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단조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반해 문원계곡은
아기자기한 변화도 좀 보이고 있고, 높이도 제법 되는 자연산 폭포를 2개나 간직하고 있다.

정부과천청사역에서 문원계곡으로 가는 길목에는 식당이나 가게가 전혀 없다. 그들 사이에는
지체높은 정부청사와 여러 공공기관이 단단하게 자리하여 그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막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번잡하지 않아서 좋음) 그러니 먹거리를 사거나 간단하게 요기를 하려면
정부과천청사역 10번이나 11번 출구로 나가거나 KT과천지사 정류장에서 내리기 바란다. 그곳
이 과천의 중심지로 식당과 가게가 많다.

문원계곡은 관악산 남쪽에서 발원하여 정부청사 서쪽으로 흐르는데, 옛 기술표준원 북쪽에서
그만 강제 생매장을 당한다. 강제로 지하에 묻히는 계곡의 한이 얼마나 깊은지 물소리가 귀신
을 쫓아낼 정도로 우렁찬데 아무리 공공기관이라도 계곡이 그리 크지도 않거늘, 계곡에 대한
부족한 배려가 참 아쉽다. 허나 다행히 생매장 구간은 짧아서 옛 기술표준원을 지나면 교육원
로 남쪽에서 다시 햇살을 본다. (기술표준원은 충북혁신도시로 이전되었음)

산림초소를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문원
계곡 하류가 나온다. 생매장 직전인 이곳에 폭
포 2개가 연달아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는데 이
들은 자연산이 아닌 지형을 이용하여 다듬은
인공폭포이니 속지 말자. 문원계곡의 알짜배기
폭포는 여기서 더 들어가야 된다.

▲  인공(人工)이 가해진 문원계곡 하류 폭포

 


▲  각세도의 성지(聖地), 신계 이선평(晨鷄 李善枰)의 묘역

인공폭포를 지나면 산길 오른쪽으로 소나무 그늘에 묻힌 무덤과 안내문이 손짓을 한다. 전혀
정보가 없는 무덤이라 안내문을 기웃거리니 각세도(覺世道)를 세운 이선평의 묘역이다. 각세
도에서는 그를 도조(道祖)로, 그의 묘는 성묘(聖墓)라 추앙하며 애지중지하고 있다.

이선평(1882~1956)은 황해도 문화군(文化郡) 태산촌(泰山村)에서 태어났다. 조선 2대 군주인
정종(定宗)의 16대손으로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에 정진했는데, 평양 근교에서 '천하대보 정
진무외(天下大寶 正眞無外)'라는 글귀가 하늘에 나타난 것을 보고 각세(覺世)의 진리를 깨달
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향 인근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가 10여 년 동안 도를 닦으면서 의술과
복점(卜占), 풍수지리서를 익혔다고 한다.

수도를 마치고 잠시 세상으로 내려와 군의(軍醫)가 되기도 했으나 1907년 군대해산으로 실업
자가 되자 다시 수도를 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 1913년 비봉산(飛鳳山)에 들어가 1,000일 기도
에 돌입했다.
기도를 벌인지 488일째 정오에 남쪽 하늘에서 황금색으로 쓰인 각세도 3자가 나타났다. 그리
고 다음날에는 서쪽 하늘에 '원각천지 무궁조화 해탈사멸 영귀영계(圓覺天地 無窮造化 解脫死
滅 永歸靈界)'란 16자의 주문이 나타났다고 하며 그 이후 초하루부터 매일 1자씩 하늘에서 글
씨를 받아 30계명과 도기(道旗), 각세훈사(覺世訓詞) 등을 얻었다고 한다. 그렇게 1,000일을
채우고 속세로 내려와 자신이 깨달은 것을 가르치니 그것이 각세도의 시작이다.

왜정(倭政) 말기에는 신도가 3만에 이르렀고, 해방 이후에는 10만까지 늘어났으며, 이선평은
문원계곡 하류에 세심정(洗心亭)이란 초막을 지으며 포교를 벌이다가 마땅한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1956년에 세상을 떴다. 그래서 후계자를 둘러싸고 분열이 일어나 여러 갈래로 갈라지
게 된다. (이선평과 각세도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하겠음)

이선평의 묘는 1976년부터 2년 동안 성역화 사업을 벌였으며,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망주석(
望柱石) 1쌍, 묘비, 봉분(封墳)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존재를 대충 덤으
로 챙기고 서둘러 문원계곡으로 들어섰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문원계곡 산길

▲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 문원계곡 중류
한여름에는 피서의 성지로 추앙을 받으며, 피서객들의 욕탕이 되버린다.

▲  문원계곡 바위 산길 - 보호 난간이 등산객의 발길을 지켜준다.

문원계곡 산길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느긋하다. 산길과 계곡과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
다가 바위 산길(이선평 묘역과 문원하폭포 중간)에서 잠시 멀어지는데 바위 벼랑 밑으로 아득
하게 계곡이 보인다.


▲  바위 산길에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숲 너머로 과천 시내와 청계산(淸溪山)이 두 눈에 들어온다.

▲  문원계곡을 건너는 나무 다리
바위 산길을 지나면 잠시 멀어진 계곡과 다시금 가까워진다. 그 상태는
문원폭포까지 쭉 이어져 서로의 끈끈한 정을 과시한다.

▲  나무다리 주변 문원계곡 중류


 

♠  문원계곡의 꿀단지, 문원하폭포와 문원폭포

▲  관악산 제일의 폭포, 문원하폭포(文原下瀑布)

산림초소에서 천천히 30분 정도 오르면 계곡 상류에 걸린 문원하폭포(이하 하폭포)가 마중을
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를 문원폭포로 알고 있었으나 이는 답이 아니었다. 그 문원폭포는 여
기서 더 올라가야 되며, 그 폭포 밑에 있다고 해서 문원하폭포라 불린다. 허나 외모는 문원폭
포보다 하폭포가 훨씬 잘났다. 그래서 문원폭포보다는 하폭포가 이곳의 중심 폭포이자 관악산
제일의 폭포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 차라리 하폭포를 문원폭포라 하고, 문원폭포를 문원상
폭포나 윗폭포로 칭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하폭포는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명주 자락을 늘어뜨린 듯 하얀 물보라를 쏟아내는데, 위에
서 바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거의 20도 정도로 구부러졌다가 다시 바위
를 타고 힘차게 내려온다. 폭포의 높이는 약 20m 정도로 폭포 밑에는 물놀이 하기에 좋게 얕
은 수심의 못이 형성되어 있으며, 폭포 남쪽에 산길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폭포가 있는
바위는 안전을 위하여 하얀 금줄을 쳐놓았으나 어기는 산꾼이 적지 않다.

관악산은 산세와 바위는 참 일품이지만 문원계곡과 관악산 제일의 경승지로 추앙받던 자하동
천을 빼면 계곡도 평범하고 폭포도 거의 없다. 그나마 문원계곡이 좀 아기자기한 편이고, 그
곳에 빚어진 하폭포와 문원폭포가 관악산에서 제일 화끈하게 폭포의 패기를 보여준다.


▲  위에서 바라본 하폭포

▲  반석으로 이루어진 하폭포 윗쪽

하폭포 옆구리를 통해 폭포 위쪽으로 오르면 계곡을 둘러싸고 넓게 펼쳐진 반석이 나온다. 문
원계곡을 찾은 산꾼들이 많이 쉬어가는 쉼터로 여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으로
난 마당바위를 오르면 일명사지와 연주암으로 이어지고,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문원폭포
가 나온다. 그리고 서북쪽 길로 오르면 육봉과 팔부능선으로 이어지는데 정상(연주대)이 목적
이라면 북쪽 마당바위로 오르면 된다.


▲  하폭포 윗쪽에 자리한 마당바위

▲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 정경백(鄭景伯) 바위

마당바위 꼭대기에는 큰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걸터 앉아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살짝 밀면 당
장이라도 때굴때굴 굴러떨어질 것 같은 기세인데, 그의 피부에는 한자로 큼지막하게 '정경백'
이라 쓰여 있다. 바로 그 바위글씨 때문에 '정경백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정
경백은 사람 이름으로 뭐하던 양반인지는 모르겠으나 글씨의 폼을 보니 구한말이나 왜정 때
새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을 찾은 정경백은 문원계곡의 뛰어난 절경에 퐁당퐁당 빠지면서 마당바위 피부가 아닌 이
바위에 이름 3자를 낙서로 남겼다. 인명사전이나 인터넷 검색에도 그의 정보가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면 그저 평범한 선비거나 글 좀 아는 백성인 듯 싶으며, 바위에 이름을 남긴 인연으로
비록 그의 정체는 몰라도 그의 이름은 바위와 함께 지금까지 남게 되었고, 관악산의 주요 바
위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관악산에 널린 바위 가운데 사람 이름을 취한 바위는 이
것이 유일하다.


▲  정경백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과천과 의왕시내, 청계산, 광교산)

  하폭포에서 문원폭포로 인도하는 산길

   ◀  그늘에 숨겨진 문원폭포(文原瀑布)
하폭포에서 계곡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면 그
늘에 묻힌 문원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폭
포는 위성지도에도 나올 정도로 그 위용을 속
세에 드러내고 있지만 문원폭포는 숲 그늘 속
에서 수줍게 물보라를 피운다.
폭포의 높이는 10m 정도로 하폭포에 비해 볼
품도 많이 떨어지고 물소리도 차분하다. 거의
90도 각을 이룬 윗부분을 빼면 경사도 거의
40~50도 정도로 물이 미끄럼을 타듯 부드럽게
내려와 착지를 한다.
폭포 옆에는 벼랑이 있는데 그 벼랑 밑에 비
와 눈을 피할 정도로 움푹 들어간 공간이 있
다.
거의 석모도 보문사(普門寺)의 눈썹바위와 좀
비슷한 모습으로 그곳에 태극기를 비롯해 기
도나 굿에 사용하는 물건과 그것을 보관하는
공간이 있어 굿이나 기도터로 몰래 쓰이고 있
음을 알려준다.


▲  시원찮게 떨어지는 문원폭포 윗도리

▲  문원폭포 옆 기도처
깎아지른 벼랑 밑도리에 움푹 들어간 예사롭지 않은 공간이 있어 기도나 굿터로
암암리에 쓰이고 있다. 아마도 이곳의 지기(地氣)가 높거나 지형상의 이유로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승려와 참선하는 사람들의 수행 공간이나
산악신앙의 현장으로 바쁘게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문원폭포 아랫 계곡 (왼쪽은 폭포 옆
기도터로 인도하는 길)


 

♠  하늘과 가까운 곳에 숨겨진 옛 절터, 관악산 일명사지(逸名寺址)
- 경기도 지방기념물 191호

▲  동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육봉일명사지)

▲  서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

하폭포에서 마당바위를 지나 각박한 산길을 6~7분 정도 오르면 긴 석축이 나온다. 그 석축이
바로 옛 일명사터로 석축 앞에 관련 안내문이 서 있어 등산객들의 관심을 호소한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일명사터는 육봉(六峰) 밑에 있다고 해서 육봉일명사터라 불리기도 한
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육봉일명사지') 절터의 면적은 400평 정도 되는데, 이곳에 대한
정보가 남아있는 것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의 비밀을 캐려는 집념으로 1999년 절
터를 뒤집은 결과 연꽃잎이 새겨진 연화문대석(蓮花紋臺石) 2점과 석탑(石塔)의 잔재 1기, 우
물 2곳이 나왔고, 조선시대 암막새기와 조각 20여 점이 나왔다. 또한 범어(梵語)가 새겨진 기
와와 무늬가 없는 조그만 기와 등 신라 후기 기와도 여럿 나와 신라 후기에 법등(法燈)을 켰
음을 짐작케 한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절터의 입을 강제로 열면서 그동안 밝혀진 사실을 정리하면,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다가 고려 중기나 후기에 망한 것으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4세기 후반에 다시
중창되어 그런데로 절을 꾸리다가 17세기 후반에 완전 문을 닫고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재정 악화와 주변 사찰과의 경쟁 등이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 무리한 조세와 공납(貢納), 고적한 곳에 위치한 지리적 불리함 등으로> 만약 산사태 등의 자
연재해로 망했다면 절터가 좀 온전하지 못해야 되는데 절터는 너무 선명하다.

절터에는 건물터와 석축, 연화문대석이 있는데, 절이 망한지 꽤 되었음에도 절터가 원형을 잃
지않고 잘 남아있어 관악산 불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관악산에는 이곳 외에도 연
주암의 전신(前身)으로 여겨지는 관악사(冠岳寺)터가 있으며, 관악산과 삼성산은 신라 후기부
터 절이 많이 생겨나 북한산(삼각산)과 더불어 수도권 불교의 성지로 일컬어진다. 특히 연화
문대석은 관악산에 남아있는 옛 석조물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칭송받고 있어
일명사도 왕년에 꽤 잘나갔음을 가늠케 한다.
그 잘나가던 절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가늠할 수 없는 전설이 되었고, 건물을 받쳐들던 주춧돌
만 앙상하게 남아 하늘을 받들고 있으니 참 인생무상이 아닐 수 없다. 일명사는 스스로를 태
우며 그 위대한 진리인 인생무상 4자를 우리에게 진하게 일깨워 주고 있다. 허나 그러면 뭐하
나. 인간은 동물과 신(神) 사이에 어정쩡하게 들어앉은 존재라 그것을 죽기 전에나 깨달으니
말이다.

일명사터는 하폭포에서 연주암 가는 길목에 있어 찾기는 쉽다. 연화문대석 2기는 절터 한복판
에 박혀있어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하며, 석탑의 잔재와 우물은 절터 인근 수풀에 묻혀 있다.
석탑은 고려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산11


▲  일명사터 석축

▲  여름 햇살을 즐기고 있는 일명사터 중앙 건물터
다른 건물터와 달리 규모가 크고 절터 중앙에 자리해 있어 절의 중심 건물인
법당(法堂)으로 여겨진다.

▲  일명사터 동쪽 건물터
조그만 건물이 여럿 뿌리를 내렸던 곳으로 산신각(山神閣)이나 명부전(冥府殿),
요사채 자리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

▲  화석처럼 박힌 연화문대석 형제
이들은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석불 대좌(臺座)의
일부로 여겨진다. 관악산의 몇 안되는 옛 석조물 가운데 가장 정교하게
새겨진 것으로 천하에 짧게나마 주목을 받았다.

▲  절터 북쪽 석축과 돌다리

절터 북쪽과 동쪽에는 조그만 물줄기를 두어 산에서 내려온 시냇물을 아래로 흘러보낸다. 이
렇게 배수 시설까지 갖추어 식수를 해결하고 언제 문을 두드릴지 모를 화마(火魔)의 공습에도
대비를 했는데, 석축 북쪽에는 통돌을 깔아 조그만 돌다리까지 두었다.

일명사터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내려갔다. 기분 같아서는 오랜만에 연주암까지 오
르고 싶었지만 거까지 가려면 1시간 이상 각박한 산길을 올라야 되고, 날씨도 무지 덥다. 하
여 쿨하게 포기하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오늘 인연도 아님에도 억지로 인연을 짓는 것은 그렇
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문원계곡 하류인 산림초소로 내려와서 바로 속세로 향가지 않고 근처에 있는 마애승용군을 찾
았다. 그곳은 산림초소와 매우 가까운데, 이정표가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고 있어 찾기는 쉽다.
오르는 길도 그리 힘든 편은 아니라서 2분 정도 수고하면 바위 2개와 소나무가 마중을 나오는
데, 소나무 서쪽 바위에 '용운암 마애승용군'이 자리해 있다.


▲  바위에 새겨진 용운암 마애승용군(磨崖僧容群) - 과천시 향토유적 4호

이름도 참 생소한 마애승용군(이하 승용군)은 과연 무엇일까? 여기서 승용(僧容)은 승려의 얼
굴을 뜻한다. 그러니 쉽게 풀이하면 바위에 새겨진 승려 얼굴상이 된다. 승용군 앞에 붙은 용
운암은 부근에 자리한 절 이름으로 예전에는 승용군 주변에 있었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홍촌(洪村) 마애승용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산 밑에 홍촌이란 마을이 있어서 유래된 것이
다.

보통 불상이나 보살 등을 바위에 새겨 마애불(磨崖佛)로 삼지만 그들 대신 승려의 얼굴을 새
긴 경우는 천하에서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 바위 윗도리에 얼굴 3구가 새겨져 있고, 밑도리에
2구가 간결하게 스며들었는데, 얼굴이 하나 같이 동자승처럼 밝고 귀여운 표정이다. 3명은 정
면을, 2명은 측면(側面)상을 하고 있으며,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불상도 아닌 승려 얼굴을 새겼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해답은 없다. 승려
를 귀족처럼 받들던 고려 때 관악산의 이름 있는 승려를 기리고자 얼굴을 새겼을 가능성도 있
으나 이 역시 부질없는 추측일 뿐이다. 참고로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관악산 서쪽 자락인 안
양예술공원에 마애종(磨崖鍾)이 새겨져 있는데, 범종과 이를 치는 승려가 조각되어 있다. 이
역시 이 땅의 하나 밖에 없는 존재로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새겨진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관악산에만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존재가 1종류도 아닌 2종류가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롭
다.


▲  바위 윗도리를 장식하고 있는 승려 얼굴상 3구
가운데와 오른쪽 승려는 정면을 보고 있고, 왼쪽 승려는 옆을 보이고 있다. 눈썹과
살짝 감긴 눈, 코, 입, 귀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표정이 하나같이 앳된
동자승이나 원숭이처럼 해맑기 그지 없다.

▲  바위 밑도리를 장식하고 있는 승려 얼굴상 2구
귀마개나 이어폰을 낀 것 같은 왼쪽 승려는 정면을, 오른쪽 승려는 옆을 보고 있다.
승려 얼굴 상 외에도 정체가 아리송한 문양들이 여럿 새겨져 있다.

▲  승용군 바위 뒤에 깨알처럼 새겨진 글씨들
이곳에서 예불을 올린 사람들이 남긴 것으로 근래까지 불공 장소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오래된 마애미륵불이 있다.


 

♠  법등의 역사는 짧지만 문화유산 3점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과천 보광사(普光寺)

▲  보광사의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

관악산 문원계곡을 뒤로하고 속세로 나오다가 과천중앙고 서쪽에 자리한 보광사에 잠시 발을
들였다.
교육원3거리에서 교육원로를 따라 6~7분 정도 걸으면 길 왼쪽(남쪽)에 보광사를 알리는 이정
표가 손짓을 하는데 그의 손짓에 맞춰 다리를 건너면 바로 보광사가 모습을 비춘다.

이 땅의 흔한 절 이름의 하나인 보광사, 서울과 수도권에만 우이동(牛耳洞) 보광사, 파주 보
광사(☞ 관련글 보러가기), 남양주 보광사, 그리고 이곳까지 60년 이상 묵은 절만 쳐도 최소
4곳이 넘는다.

관악산 남쪽 자락이자 정부과천청사를 바라보고 선 과천 보광사는 1946년에 창건되었다. 이때
법당 6칸과 요사 1동이 닦았는데 현재의 가람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이룩된 것으로 2001년
에 극락보전을 새로 지어 법당으로 삼았고, 삼성각과 명부전, 설법전 등을 세워 지금에 이른
다.
법등(法燈)이 켜진 역사는 고작 70년 남짓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싹트지도 못했다. 허나 인
근 문원동 절터에서 오래된 3층석탑과 석조보살입상을 업어와 마땅히 내세울 것이 없는 이곳
의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았고, 1993년에는 조선 후기 불상까지 새로 영입하면서 매우 짧
은 법등에 비해 오래된 문화유산을 3개나 간직하게 되었다. 비록 보광사와 관련이 없는 것들
이지만 바로 그들 때문에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현대에 지어진 그저 그
런 사찰의 하나로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절의 규모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크기로 북쪽을 바라보고 선 극락보전을 비롯하
여 명부전과 설법전, 삼성각, 요사, 범종각 등 6~7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설법전(說法殿)
과 요사(寮舍) 같은 경우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밑에도 공간을 만들어 2층을 이루고 있다.

▲  2002년에 지어진 보광사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칠성, 독성의 보금자리이다.

▲  보광사 설법전

◀  관악산이 베푼 물로 늘 만조를 이루는
보광사 샘터과 이끼 옷을 살짝 걸친
석조(石槽)


▲  보광사 경내 동부 <3층석탑과 명부전(冥府殿), 석조보살입상>

▲  보광사 문원리 3층석탑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39호

툇마루를 간직한 주지실 앞에 조그만 3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은 관문동 절터(어딘지는 모르
겠음)에서 가져온 것으로 하얀 피부를 지닌 커다란 바닥돌 위에 얹혀져 있는데 2중의 기단(基
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인 보주(寶珠)로 마무리를 한 맵시 좋은 탑이다.
이중 바닥돌은 시멘트로 지은 것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1층 탑신에는 2중으로 새겨진 자물쇠가 새겨져 있으며, 지붕돌 밑에는 얇게 만든 3단의 받침
이 있고, 지붕돌의 처마 끝은 살짝 올려져 약간 경쾌감을 준다. 기단과 지붕돌의 모습을 통해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탑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시흥 문원리 3층석탑'이다. 허나 과천은 어엿한 시(市)로 시
흥군에서 분리된지도 30년이 넘었고, 그 문원리도 문원동이 되었건만 명칭은 아직도 30여 년
전에 머물러 있다. 그 쾌쾌묵은 이름을 현실에 맞게 다듬어 '보광사 3층석탑'이나 '과천 문원
동 3층석탑'으로 갈아야 될 것인데 말이다. 국가지정문화재는 그래도 시대와 지역에 맞게 이
름이 많이 바뀌고 있으나 지방문화재는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다.


▲  문원리사지 석조보살입상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77호

명부전 앞에는 오래된 석조보살입상이 서 있다. 이 석불은 문원동 15-166번지에서 가져온 것
으로 높이 1.7m 정도 되는 돌에 얇게 선각으로 새기고 그 위에 둥근 갓을 씌우는 선에서 아주
간단히 처리했다. 허나 세월의 태클로 그 선각도 희미해져 자세히 안보면 석불인지 다른 석상
(石像)인지 햇갈릴 정도이다.

갓으로 머리가 가려진 얼굴은 둥근 편으로 눈썹과 눈, 입, 코를 새겼으나 거의 표정이 지워진
상태이고 목은 짧지만 두껍다. 돌을 제대로 깎지 않고 그냥 선각만 했기 때문이다. 왼손은 가
슴에 대어 연꽃 봉오리를 잡고 있고, 오른손은 밑으로 내리고 있는데, 옷은 양쪽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見)의 법의(法衣)이다.
많이 부실해 보이는 이 석불은 납작한 얼굴과 짧은 어깨, 간략화된 옷주름 등 도식화된 모습
을 통해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보광사 목조여래좌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62호

극락보전 불단(佛壇)에는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그중 아미타불(阿彌陀佛)로 삼고 있
는 불상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여래좌상이다. 그 좌우에 자리한 존재들은 대세지보살(大
勢至菩薩)과 관음보살로 2001년에 조성되었다.

포근한 표정을 지으며 중생의 하례를 받고 있는 목조여래좌상은 나무로 만들어서 금칠을 입힌
것으로 원래는 양평 용문사(龍門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있었다고 한다. 6.25가 터지자 어
느 신도가 여주(驪州)로 피신시켰고, 그렇게 개인이 가지고 있다가 1993년 이곳에 기증하여
보광사의 보물을 하나 더 늘려주었다.

불상의 얼굴은 크고 둥근 편인데, 눈썹이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지그시 뜨며 북쪽을 바라
본다. 코는 작고 오똑하며, 붉은 입술 위에 검은 수염이 살짝 그려져 있다. 얼굴이 크다보니
볼살도 많아 보이며, 두 귀는 거의 어깨에 닿는다. 저리 귀가 크니 중생의 민원은 하나도 누
락됨이 없이 잘 들어줄 것이다. (민원도 잘 처리해주는지는 모르겠음)
머리는 나발로 두툼하게 무견정상이 솟아 있으며,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다. 가슴과 배 사
이에는 연꽃이 새겨진 허리띠가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따로 만들었는데, 가운데
손가락과 약지 손가락을 구부렸다. 불상의 양식을 보아 조선 초기 또는 조선 초기 양식을 간
직한 조선 중기 불상으로 여겨진다.

* 보광사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산126-21 (교육원로 41, ☎ 02-502-2262)


▲  극락보전 앞에서 바라본 관악산
절은 작지만 관악산을 앞뜰로 품고 있어 앞뜰 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보광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반이 넘었다. 칼퇴근의 달인 햇님도 뉘엿뉘엿 그만의
공간으로 꽁무니를 빼고, 장대한 관악산도 어둠의 커텐 속으로 사라질 채비를 한다. 이렇게
하여 관악산 문원계곡 여름 나들이는 저물어가는 햇님처럼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관악산 보광사, 문원계곡(문원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찾아가기 (2018년 7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정부과천청사역 6번 출구를 나오면 정부청사입구 교육원3거리이다. 여기서 국
  가공무원인재개발원으로 인도하는 교육원로를 6~7분 가면 왼쪽에 보광사가 있으며, 15분 정
  도 가면 오른쪽에 관악산 문원계곡으로 인도하는 조그만 길이 나온다. 여기서 마애승용군까
  지는 6~7분, 문원하폭포까지는 35~40분, 일명사터와 문원폭포는 40~45분 정도 걸린다.
* 441, 502, 540, 541, 542, 1-1, 9, 9-3, 11-1, 11-2, 11-3, 11-5, 103, 777, 3030번 시내버
  스를 타고 정부과천청사나 과천주공2,3단지 하차
* 문원계곡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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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산사 나들이 ~ 남해 용문사 (미국마을, 남해바다)

 

' 늦가을 산사 나들이 ~ 남해 용문사(龍門寺) '
남해 호구산
▲  용문사를 품고 있는 호구산(虎丘山, 617m)


겨울의 제국(帝國)이 강한 패기를 보이며 가을을 몰아내던 11월 끝자락에 경남 남해를 찾았다.
우선은 노량포구에 있는 남해대교와 이순신 장군이 처음 안장되었던 충렬사(忠烈祠)를 둘러보
고 남해대교 남단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남해읍(南海邑)으로 이동했다.

남해터미널에 이르니 용문사를 거쳐 가천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대기하고 있어서 바로 표를 구
입하고 그 버스에 나를 담았다.
가천행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를 달려 용문사 밑에 자리한 용소리(龍沼里)에 발을 내린다. 이
곳은 절 밑에 둥지를 튼 마을로 마을 남쪽에는 쪽빛을 띈 남해바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
여 속세에 찌든 마음을 시원하게 씻겨준다.

용소리에서 내린 것까지는 좋으나 정작 절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같
이 내린 노공(老公)에게 문의하니 바로 서쪽으로 보이는 고개에 길이 있다고 그런다. 마침 버
스에서 내린 곳에서 산으로 가는 길이 있어 이 길로 가도 되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그런다. 그
래서 고개까지 안가고 바로 마을에서 올라갔다.

마을을 벗어나 계단식 논을 여럿 지나니 고개에서 시작된 길과 만난다. 여기까지는 대략 10분
정도 걸렸다. 경사가 완만한 오르막길을 조금 오르면 하얀 피부의 석장승 1쌍이 미리 나와 마
중을 한다. 물론 그들의 목적은 절 수호이다. 그들을 지나 5분 가면 일주문이 나오는데, 남쪽
아래로 주차장이 바라보인다.

일주문을 지나면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길의 경사가 조금 급해진다. 경내에 이르기까지 중간중
간에 부도(浮屠)의 무리와 남근석 등이 눈을 심심치 않게 해주며, 길 우측으로 청정한 용문사
계곡이 바다를 향해 길을 재촉한다. 허나 가을 가뭄이 극성이라 수량은 답답할 정도며 겨울의
제국이 도래하고 있는 시절이라 나무들 모두 우수에 젖으며 몸을 사리고 있다.

일주문에서 10분 정도 발품을 팔면 드디어 내부를 제대로 가린 용문사의 모습이 나타난다. 우
선은 절을 지키는 오랜 장승의 거처인 조그만 기와집과 천왕교(天王橋)란 돌다리가 있는데 이
들 바로 우측에 돌을 높이 쌓고 터를 다진 곳에 절이 둥지를 텄다. 기와집에서 경내까지는 다
리를 건너서 경내로 가도 되고 조금은 돌아가지만 수레길을 이용해도 된다.

경내를 살펴보기 전에 우선 용문사의 내력(來歷)을 간추려 짚어보도록 하자.


▲  꽉 차게 들어선 용문사

* 지장도량(地藏道場) 용문사의 내력
용문사는 남해에서 가장 큰 절로 호구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안겨있다. 호구산(虎丘山, 617m)
은 호랑이가 누워있는 모습의 산으로 절을 끼고 바다로 흐르는 용문사 계곡은 남해 제일의 계
곡으로 일컬어진다. 용문사를 후광으로 속세에 조금씩 알려진 호구산은 남해군 지정 군립공원
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은 신라 중기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남해의 명산(名山)인 금산(錦山)에 세웠다는 보광
사(普光寺)의 후신(後身)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 이를
증명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또한 창건 이후 1660년까지 이렇다 할 내력이 전해오지 않는 점
도 절의 내력에 상당한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본격적으로 절의 사적(事績)이 전하는 것은 1660년이다. 그 당시 절은 남해읍에 있었는데, 남
해향교(南海鄕校)와 마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불교를 싫어하던 남해 유생들이 절을 다른 곳으
로 옮기라고 징징거리자 그들의 징징거림에 귀가 따갑던 백월당(白月堂)은 용소마을 위쪽, 지
금의 자리로 절을 옮겨 용문사라 했다고 한다. 용문사란 이름은 절 아래쪽에 있는 용연(龍淵)
위에 둥지를 텄다고 해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1661년 탐진당(探眞堂)과 적묵당(寂默堂)을 세웠는데, 세우고 보니 이곳이 터가 너무 좋던 것
이다. 그래서 1666년 읍내에 남아있던 대웅전과 봉서루를 죄다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1708
년 부속암자인 염불암(念佛庵)을 중창했으며 관음암(觀音庵)과 백운암(白雲庵)을 고을 사람들
의 발원으로 세웠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숙종(肅宗) 임금은 임진왜란 때 용문사 승려가 승군(僧軍)에 참여하여 왜군과 싸운 점을 크게
치하하며 이곳을 나라의 수국사(守國寺)로 정하고 왕실(王室)의 안녕을 기원하는 축원당(祝願
堂)을 세웠다. 또한 연옥등(蓮玉燈) 2개와 촉대 1개를 하사했는데 왜정(倭政) 때 그것에 군침
을 흘린 왜인들이 훔쳐갔다.
어쨌든 왕실과의 인연에 힘입어 남해 제일의 사찰로 성장했으며, 그 이후로 별탈없이 지내 지
금에 이른다. 왜정 때는 용성(龍城)이 이곳 백운선원(白雲禪院)에 1년 가량 머물기도 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영산전, 용화전, 적묵당, 요사, 봉서루, 천왕각 등 10여
동의 건물이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 1446호인 괘불탱을 위시하여 대웅
전과 명부전, 천왕각, 용화전석불, 목조지장시왕상, 목조(구유), 부도군, 건륭25년명운판, 목
조아미타3존불좌상, 동종 등 무려 20여 점의 지방문화재를 품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용문
사 승려가 사용했던 삼혈포(三穴砲), 축원당에 걸어두었던 궁중매듭인 번(幡), 경릉관(敬陵官)
과 익릉관(翼陵官)이 발급한 수국사금패(守國寺禁牌)가 전하고 있다. 용문사의 유일한 국가지
정문화재인 괘불탱(掛佛幀)은 사월초파일이나 절 행사 때만 구경할 수 있으며, 금패와 번, 삼
혈포는 관람이 어렵다.

호구산 남쪽 자락 깊숙한 곳에 둥지를 트고 있어 아늑하고 호젓한 산사의 분위기를 마음껏 누
릴 수 있으며, 남해바다가 가까이에 바라보여 마음마저 시원하게 해준다. 속세를 잠시 등지거
나 마음을 싹 정화하고 싶을 때 안기고 싶은 절로 예로부터 지장도량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경내 뒤쪽에는 남해자생식물단지가 있어 또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바다의 푸른 물결처
럼 펼쳐진 차밭은 가히 장관을 이룬다.

※ 용문사 찾아가기 (2012년 11월 기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남해행 직행버스가 60~9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수원터미널에서 1일 2회, 대전복합(동부)터미널에서 1일 3회 떠난다.
* 부산서부터미널에서 남해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나며, 진주에서는 20~40분 간격
  으로 떠난다. (마산/창원에서는 1일 10회 정도 운행)
* 남해터미널에서 이동 경유 남면, 가천방면 군내버스(1일 9회 운행)를 타고 용문사입구(미국
  마을)에서 도보 30분.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남해고속도로 → 진교/하동 나들목을 나와서 남해방면 → 남해대교 → 남해읍 → 신전3거리
에서 우회전 → 용소리 → 용문사입구/미국마을에서 우회전 → 용문사
② 남해고속도로 → 사천나들목을 나와서 삼천포 방면 3번 국도 → 삼천포시내 → 삼천포/늑도
대교 → 창선면 → 창선대교를 건너 우회전 → 이동(무림)에서 미조방면 좌회전 → 신전3거리
에서 우회전 → 용소리 → 용문사입구/미국마을에서 우회전 → 용문사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용문사 템플스테이(Temple Stay)는 '행복한 미소'란 이름의 정규 프로그램과 그냥 자유롭게
  하루 머물다가는 휴식형 2가지가 있다. 행복한 미소는 사찰 예절과 차담(茶啖), 바다 산책,
  저녁/새벽/사시 예불 등을 한다. 휴식형은 요일에 상관 없이 언제든 찾아와 1박 2일 머물다
  가는 것으로 공양시간과 예불시간, 취침/기상 시간 정도만 지키면 된다. 행복한 미소는 5만
  원, 휴식은 1박2일에 4만원이다. (자세한건 용문사 홈페이지와 전화로 문의 요망)
* 용문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하거나 바로 밑에 있는 석장승 사진을 클릭한다.
* 소재지 -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 (☎ 055-862-4425)


♠  용문사 가는 길 (석장승 ~ 일주문 ~ 부도군)

▲  절에서 멀리감치 나와 중생을 맞이하는 석장승 1쌍
그들의 검문을 통과하면 속세에서 그저 멀어만 보이는 산중의 절집,
용문사가 그만큼 가까워진다.

▲  늦가을의 끝을 잡은 용문사 가는 길
추운 북쪽과 달리 따뜻한 남국(南國)의 땅이라 늦가을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다.

▲  용문사 일주문(一柱門)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짝이 없다. 속세의 어느 존재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일주문은
중생을 걱정하는 부처의 마음이다. 인간들이 일주문의 마음의 절반만 따라한다면 이 세상은 그
런데로 아름다울텐데 인간이란 짐승과 신(神)의 중간에 들어앉은 어정쩡한 존재라 그러지를 못
한다. 그런 주제에 만물의 영장을 칭하며 이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악을 행하니 그러다 자
연의 대보복을 제대로 받을 것이다.


▲  이것은 무엇인고? ㅋㅋㅋ

일주문을 지나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면 중간에 낯이 많이 익은 묘한 돌을 보게 된다. 바로 남
근석이다. 마치 그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솟은 남근석은 정말 그대로의 모습으로 화석(化石)
으로 굳은 것 같아 절을 찾은 중생들의 관심을 제대로 끈다. 이런 돌은 옛날부터 성기신앙(性器
信仰)의 대상물로서 금욕(禁慾)을 중시하는 절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것이 무척 이채롭다. 절에
득남(得男)을 기원하러 다니던 여인네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았던 이 돌은 오늘도 남녀노소
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자리를 지킨다.


▲  용문사의 오랜 역사가 담긴 부도군(浮屠群)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25호

남근석을 지나 2분 정도 오르면 오른쪽 높은 곳에 터를 닦은 승탑(僧塔, 부도)의 보금자리가 보
인다. 이들은 승려의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조선 중기 이후에 지어진 석종형(石鐘形)부도가 주
를 이루는데, 한결같이 작고 소박한 모습으로 주변과 잘 어우러진 모습이 꽤 인상적이다.


▲  바위에 새겨진 바위글씨와 위에 심어진 비석


♠  용문사 장승 ~ 천왕각 ~ 봉서루
▲  장승의 조촐한 보금자리

경내로 인도하는 천왕교 좌측에는 조금은 낡아보이는 1칸 짜리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그 안에
는 나무로 만든 오랜 장승이 서 있는데, 이 건물은 바로 그를 위한 거처이다. 건물 곁에는 요상
하게 생긴 돌이 하나 놓여져 있는데, 아마도 남근석인듯 싶다.

이 장승은 용문사가 이곳에 뿌리를 1661년 이후
에 절을 수호하려는 목적으로 천왕각 입구에 세
운 것이다. 나무로 만들어서 돌로 만든 것 보다
는 건강은 조금 좋지 않지만 건물 안에 갇힌 모
습이 너무 답답하고 안스럽다. 그의 건강을 위
해서인지 그에게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문에 창
살까지 만들어 마치 감옥에 갇혀있는 모습이다.

장승 주위로 중생들이 던지고 간 동전과 1,000
원짜리 지폐가 수두룩한데, 절에서 오랫동안 수
거를 하지 않아서 지폐고 동전이고 다들 상태가
안좋다. 장승은 안에 있는 것 보다는 아까전 석
장승처럼 밖에 서 있어야 자세와 위엄이 나오는
법이다. 그를 위하는 것도 좋지만 저렇게 두는
것 보다는 밖으로 빼서 햇살이라도 받게 해주
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절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저렇게 가뒀으니 절에 놀러온 악
기(惡氣)를 어떻게 쫓아서 막겠는가..?


▲  천왕각(天王閣)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150호

천왕교를 건너면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인 천왕문(天王門)이 중생을 맞는다. 그런데 여기서
는 특이하게도 문이라고 하지 않고 각이라 칭하여 천왕각이라 부른다. 허나 그렇게 부른다고 해
서 천왕문과 크게 다르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명칭만 '각(閣)'으로 했을 뿐이다. 이 문은 1702
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천왕은 인도의 토속신(土俗神)으로 나중에 부처의 경호원으로 영입되었다. 보통은 악귀를 발
로 짓밟고 있는 모습이지만 이곳은 악귀(惡鬼) 대신 부정한 양반이나 관리를 보기 좋게 밟고 있
어 눈길을 끈다. 그 이유는 절이 읍내에서 이곳으로 밀려나게 만든 양반(향교 유생들)과 관리들
의 대한 감정, 그리고 절을 찾는 중생 대부분은 지배층의 수탈을 받는 백성들이라 양반으로 대
체한 것이다.

▲  천왕각을 지키는 목조(木造)사천왕상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28호

왼쪽부터 비파를 든 지국천왕(持國天王), 칼을 든 증장천왕(增長天王), 여의주를 들고 있는 광
목천왕(廣目天王), 삼지창을 든 다문천왕(多聞天王)이다. 지국천왕의 표정은 온후해 보이며, 나
머지는 장비(張飛) 마냥 눈을 크게 부릅 떴을 뿐 오금이 저릴 정도의 무서움보다는 익살스러움
이 강하게 배여난 표정이다.
이들은 천왕각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목조 사천왕으로 그들이 시원하게 밟아주고 있는 양반(
지배층)의 모습도 사진에 담았어야 했는데, 사천왕에게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그러지를 못해 못
내 아쉽다. 나라를 말아먹고 백성들을 도탄에 밀어넣으며 자기네들 이익 챙기기에 급급한 이 땅
의 쓰레기 권력자들을 으스러지게 밟아주었으면 좋으련만..


▲  용문사 봉서루(鳳棲樓)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394호

천왕각을 지나면 길은 오른쪽으로 꺾이면서 다시금 다리를 건너게 한다.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속세의 번뇌를 말끔히 계곡에 흘러보내라는 의미이다. 허나 계곡의 수량이
별로 없으니 번뇌가 남해바다 멀리 떠내려 갈 수 있을련지 모르겠다.

계곡을 건너면 계단이 나오면서 육중한 모습의 길쭉한 누각이 중생의 눈을 압도한다. 바로 봉황
이 산다는 뜻의 봉서루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에 이르는 용문사에서 가장 큰 건물로 1720년에
지어져 1833년에 중창한 것으로 전해진다. 절의 강당(講堂) 역할을 하고 있으며, 경내가 외부에
보이지 않도록 단단히 가리고 있어 경내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키며, 1층 동쪽에는 종무소(宗
務所)가 자리해 있다. 봉서루의 중앙 아랫도리를 거쳐 경내로 올라가도 되고 종무소를 거쳐 진
입해도 된다.


▲  용문사 목조(木槽, 구유)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27호

봉서루 1층 왼쪽에는 거대한 나무 통이 누워있어 경내로 향한 눈길을 잠시 돌리게 만든다. 바로
구유(구시통)라 불리는 목조이다. 얼핏 보면 말이나 소, 돼지가 밥을 먹을 때 사용하는 나무통
으로 오인 할 수 있다. 허나 이 통은 사람들이 먹을 밥을 담던 밥통으로 1,000명분의 밥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이 저 통에서 밥을 먹었다고 하며, 그 이후에는 불사(佛
事)나 법회 때 사용했다.
구유 가운데 바닥에는 통을 설거지를 할 수 있도록 5.5cm 크기의 원공이 뚫려있으며, 절이 한참
잘나가던 시절(지금도 잘 나가고 있음)의 소중한 보물로 이제는 밥풀 대신 먼지만이 수북해 아
련히 옛날을 그리워한다.


▲  중생의 목을 시원하게 축여주는 옥계수로 가득한 석조(石槽)
파란 바가지에 물을 담아 입에 넣으면 마음의 떼가 싹 내려간 듯,
목구멍이 즐겁다고 쾌재를 부른다,


♠  용문사 대웅전(大雄殿)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85호

봉서루를 들어서면 대웅전과 부속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얀 돌이 정갈하게 깔린 대웅전 뜨
락을 중심으로 북쪽에 대웅전이 위엄을 갖추고 있고, 적묵당(寂默堂)과 요사(寮舍)가 그 좌우를
메운다. 또한 대웅전 좌우로 영산전과 명부전, 용화전, 칠성각 등이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을
정도로 가득히 들어서 포근함이 일 정도이다.

용문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봉황이 시원스레 날개
짓을 하는 것 같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空包)가 다닥다닥 붙어있고, 기둥의 머리부분인 주두(
柱頭) 마다 용머리가 달려있어 웅장하고 화려함을 더해주며, 기둥과 문짝에는 고색의 떼가 가득
하여 중후한 멋을 선사한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법당 건축으로 내부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목조아미타3존불과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377호인 동종(銅鍾)이 있으며, 대웅전 중앙 계단 좌우
로 괘불을 걸 때 사용하는 2쌍의 석주(石柱)가 심어져 있다. 이들 석주는 17~1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  대웅전 목조아미타3존불좌상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46호
그 뒤쪽에 영산회상탱화(靈山會上幀畵)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347호

대웅전 우측 문으로 내부를 들어서니 현란한 아미타3존불좌상과 여러 불화(佛畵)가 눈을 부시게
만든다. 불단(佛壇)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은 17세기 불상으로 다른 데이터에는 석가3존불로 나
오는데 반해, 문화재청에는 아미타3존불로 나와있다. 아미타불로 나온 것은 아마도 그의 수인(
手印)이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취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석가불(釋迦佛)이 아미
타수인을 취한 것은 조선시대 불상에서 흔히 나타난다. 이들 불상에는 복장공(腹臟空)이 열려있
으며, 그 안에 들어있던 복장유물은 거의 도난을 당했다고 한다. 온후한 표정으로 중생을 맞이
하는 가운데 본존불(本尊佛) 좌우로 수려한 보관(寶冠)을 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
賢菩薩)이 각자의 제스쳐를 취하며 자리를 지킨다.

그들 뒤로 든든하게 자리한 후불탱화(後佛幀畵)는 석가불이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을 하는 장
면을 그린 영산회상탱화이다. 1897년에 그려진 것으로 문성(文性)을 비롯하여 연호 봉선(蓮湖奉
宣), 연파 화인(蓮波華印), 범해 두안(帆海斗岸), 장원(章元), 태일(太一), 문형(文炯), 영주(
永柱), 상조(尙祚), 긍엽(亘燁) 등 남부지방에서 활약했던 화승(畵僧)들이 대거 참여했다.


▲  대웅전 우측 벽의 건양2년신중탱화(建陽二年神衆幀畵)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353호

1897년(건양 2년, 여기서 건양은 고종의 연호)에 그려진 것으로 후불탱화 제작에 참여한 화승들
이 그렸다. 무기를 갖춘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12신이 배치되었고, 위쪽에 범천(梵天)과 제석천(
帝釋天)을 중심으로 좌우에 천동(天童), 천녀(天女)가 자리해 있다.


▲  대웅전 좌측 벽의 삼장보살탱화(三藏菩薩幀畵)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352호

후불탱화와 더불어 1897년에 그려진 것으로 중앙에 천장보살(天藏菩薩)을 두고, 좌우에 지지보
살(持地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배치했다. 삼장탱화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불화로 지장보
살을 받드는 지장신앙(地藏信仰)이 유행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여겨진다.


♠  대웅전 주변

▲  용문사 명부전(冥府殿)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151호

대웅전 바로 좌측에는 맞배지붕의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정확한 건축 시기는 전해지는 것이 없
으나 19세기 이후로 여겨지며, 지장보살을 비롯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10왕상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보살과 목조시왕상은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26호이다.


▲  용문사 용화전(龍華殿)

▲  용화전에 봉안된 용문사 석불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38호

명부전 뒤쪽에는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용화전이 있는데, 그 안에는 유난히도 하얀 불상이 봉
안되어있다. 이 불상은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하며 17세기 후반에 지금의 절을 짓다가 땅 속에
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하얗게 도배를 하여 백불(白佛)로 만들면서 원래의 모습을 확인
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허나 불상의 양식을 보아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
겨진다.
거의 네모에 가까운 얼굴에는 따로 미소는 드리워있지 않으며, 표정은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 듯,
다소 멀뚱해 보인다. 볼에 살이 많으며, 머리에는 근래에 얹힌 보관(寶冠)을 얹혔다. 머리칼은
하얀 몸과 달리 검은색을 칠했다. 왼손에는 연꽃모양의 동그란 병을 들고 있는데, 예로부터 미
륵보살로 일컬어졌으나, 보관이나 왼손에 든 병을 통해 관음보살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  봉서루 뒤쪽에 심어진 석대(石臺)
석대에 고인 물에는 낙엽 몇몇이 의지하여 인생의 마지막을 지낸다.
석대의 물은 저들의 인생을 정리하는 블랙홀인가 보다.

▲  적묵당 뒤쪽의 영산전(靈山殿)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어칸(가운데칸)에 하나 뿐이다.
양쪽 칸은 벽으로 막아 조그만 창문을 낸 특이한 모습이다.

▲  차밭을 뒤로하며 경내를 굽어보는 칠성각(七星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칠성각은 영산전처럼 근래에 지어졌다. 꼭 닫힌 내부에는 칠
성탱화와 산신탱화, 독성탱화가 걸려있으며, 이들은 각각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칠성신)와 산
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가 그려져 있다. 그중에서 독성탱화와 산신탱화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각각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410호411호로 지정되었다.


♠  용문사의 또 다른 볼거리 ~ 남해자생식물단지

▲  용문사 뒤쪽에 넓게 터를 닦은 남해자생식물단지

용문사를 둘러보고 있으면 경내 뒤쪽으로 푸른 물결이 넘쳐 흐르는 차밭이 보일 것이다. 처음에
는 절에서 관리하고 가꾸는 차밭으로 여겼는데, 그 서쪽에도 무슨 식물원 같은 곳이 있다. 이들
은 바로 남해군에서 2007년에 조성한 남해자생식물단지이다. 왜 절 뒤쪽에 터를 닦었는지는 모
르겠지만 아마도 절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덕분에 새로운 볼거리가 생겨
절을 찾은 중생에게 자연의 아름다움까지 가득 누리게 한다. 용문사 입장에서는 그리 손해보는
것은 아니다. 볼거리가 하나 생겼으니 말이다.

식물단지는 약용식물원과 자생식물원, 삼자원(三子園)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삼자원에는 남해의
3자인 비자(榧子), 치자(梔子), 유자(柚子)가 가득 자리를 메운다. 여름이나 가을에 왔다면 식
물단지에 깃들여진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텐데, 겨울의 제국이 도래하는 시점에 찾아
오는 통에 차밭과 삼자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벌거숭이가 되었다.


▲  보성 차밭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남해자생식물원 차밭

▲  자생식물원

▲  중생들이 쌓아놓은 무수한 돌탑들

남해자생식물원을 지나면 바로 용문사의 부속암자인 백련암(白蓮庵)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은
그다지 구미가 땡기지 않아 가지 않았고, 그곳으로 넘어가는 계곡 다리 부근에 무수히 널린 돌
탑만을 사진에 담아 발길을 돌렸다.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인 이들 돌탑에는 중생의 조촐한 소망이 담겨져 있다. 아무렇게나 생
긴 돌로 쌓은 멋없는 탑이지만, 그들의 소망을 하나씩 품으며, 겨울의 시련을 견디는 그들이야
말로 정녕 아름답고 거룩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겉멋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  용문사를 뒤로하며 ~

▲  용문사 주차장 동쪽에 자리한 호수
호구산에서 용문사를 거쳐 바다로 흘러가는 계곡물을 모아놓은 호수이다.
호수 주변으로 나무들이 호수를 거울 삼아 자신의 초췌해진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용문사와 남해자생식물원을 정신없이 둘러보니 거의 2시간에 시간이 흠뻑 흘러갔다. 이제 용문
사와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며, 다시 속세로 길을 돌린다. 내가 있어야 될 것은 절이 아닌 아비
규환의 속세이기 때문이다.

내려갈 때는 올라갈 때와 달리 일주문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호젓한
산길로 겨울의 제국 앞에 나무들이 앞다투어 벌벌 긴다. 그들을 보니 '이제 올해도 저물었구나~
곧 나이 1살이 누적되겠군' 생각이 잔뜩 일어나 우울한 마음을 한층 더해준다. 산길에는 귀를
접고 처량히 누운 낙엽이 인생의 부질없음을 보여준다.

산길을 5분 정도 내려가면 수레 하나 없는 썰렁한 주차장이 나타난다. 수레로 경내까지 오를 수
있지만 남해 제일의 관광지다 보니 이곳에 따로 주차장을 두었다. 피서철과 휴일에는 이곳도 수
레들로 넘쳐날 것이다. 주차장에서는 쪽빛의 남해바다가 시원스레 바라보여 아까전의 우울함을
어느 정도나마 털어주며, 주차장 한쪽에는 선비의 기개가 느껴지는 선비의 동상이 하나 있는데,
누구의 동상인지는 모르겠다.


▲  용문사 주차장 너머로 보이는 남해바다

▲  속세로 내려가는 길에서 바라본 남해바다

▲  이국적인 분위기의 미국마을 ▼

용문사 주차장에서 5분 정도 내려가면 이국적인 분위기의 마을이 나타난다. 길을 중심으로 좌우
에 질서정연하게 들어선 이국적인 집들, 바로 미국마을(American Village, 예전에는 '아메리칸
빌리지'라고 불렸음)이다. 남해 동쪽 물건리에 있는 독일마을과 더불어 남해군에서 조성한 이국
적인 마을로 재미교포를 위해 조성한 것이다. 

이 마을은 미국식 가옥 21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당수 민박을 겸하고 있으며, 호구산과 용
문사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 정면에는 논과 함께 남해바다가 바라보이는 배산임수(背山
臨水)의 자리에 터를 닦아 꽤 아늑하고 탐이 나는 마을이다. 마을 주민 상당수는 재미교포나 외
지인으로 나도 나중에 나이가 들면 이런 곳에 집 하나 마련하여 살고 싶은 마음 굴뚝 같다.


▲  바다와 모래의 속삭이는 소리만이 가득한 용소리 해변

미국마을에서 남해바다는 눈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로 도로에서 3분 정도만 들어가면 바로 바다
앞이다. 바다 파도가 살며시 모래를 어루만지며 서로의 정을 속삭이는 현장으로 나의 발자국 소
리가 미안할 정도로 고요하다.


▲  썰물로 모습을 진하게 드러낸 남해 갯벌

▲  비단처럼 곱다는 금산(錦山)이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  금평 앞바다에서 바라본 호구산의 위엄
좌우로 길게 누운 모습이 누워있는 호랑이를 좀 닮은 것 같다.
이렇게 하여 남해 용문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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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산사 나들이 ~ 천년 묵은 은행나무로 유명한 양평 용문사 (용문산)

 


' 늦가을 산사 나들이 ~ 양평 용문산 용문사(龍門寺) '
용문사 정지국사탑
▲  용문사 정지국사탑


여름의 제국을 몰아내고 잠시나마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가을은 겨울제국의 등쌀에
떠밀려 우리 곁을 떠나려고 한다. 차디찬 바람은 겨울의 도래를 알리고 늦가을의 향연을 즐긴
단풍잎은 그 이름도 우울한 낙엽으로 화하여 화려한 윤회(輪廻)를 꿈꾼다. 세상만물을 우울쟁
이로 돌변시키는 늦가을과 겨울의 길목에 친한 이들을 이끌고 양평 용문사를 찾았다.

용문사(龍門寺)는 우리나라에 3곳이 있는데(근래에 지어진 절 제외) 양평 용문사와 예천 용문
사, 남해 용문사가 그것이다. 이들을 묶어서 세상에서는 3대 용문사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의
특징은 내력이 깊이가 대단하고 문화유산을 적당히 지니고 있으며 속세에 널리 알려진 명물을
1가지는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평 용문사는 이 땅에서 제일 오래되고 크다는 은행나무로
명성을 누리고 있고, 예천(醴泉) 용문사는 불가(佛家)의 사치품으로 꼽히는 윤장대(輪藏臺)가
유명하다. (남해 용문사는 문화유산은 허벌나게 많지만 딱히 대표적인 것은 없음)
양평 용문사는 그 문턱인 용문까지 수도권 전철이 들어오면서 서울과의 접근성이 한층 좋아져
예전보다 훨씬 편하고 저렴하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용문산(龍門山)을 찾는 주말
등산객이 제법 늘었다.

1호선과 중앙선이 만나는 회기역에서 일행들을 만나 용문행 중앙선 전철을 타고 1시간을 내달
려 용문(龍門)에 발을 내린다. 용문행은 배차간격이 거의 30분이라 1대를 놓치면 그야말로 치
명적이다. 기다리다 지쳐 졸도(?)할 수도 있다.

용문역에서 인근 용문터미널로 이동하니 마침 용문사행 군내버스가 출발을 하려고 한다. 버스
는 용문산 등산객들로 이미 초가축수송 상태, 버스의 네 바퀴가 뭉개질 지경이다. 허나 그 차
를 보내면 무작정 30~40분 이상을 기다려야 된다. 그리되면 환승할인(33분)도 받지 못하고 일
정에도 약간 차질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인정사정 없이 버스에 올라 짐짝 수송에 흔쾌히 일
조하며, 간신히 앞문에 매달려 용문사까지 고행의 길을 자처했다.

용문에서 용문사까진 차로 15분 거리로 가깝다. 허나 힘들게 가는 상황이니 그 거리도 지나치
게 멀게만 느껴진다. 정말 서울에서 묘향산(妙香山)을 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좀처럼 나오
지 않는 종점을 원망하며 가까스로 손잡이에 매달려 몸을 지탱했다.

용문사 종점에 이르니 가축 수송으로 숨도 못 쉬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하차를 하면서 다시 한
번 대혼란을 겪는다. 게다가 환승할인과 경기도 버스 거리비례제 때문에 무조건 하차단말기와
승차단말기에 카드를 대야 되니 (카드를 안대고 내리면 다음에 1,100원의 패널티 요금을 강제
로 뜯기야 됨~) 자연히 하차 시간은 길어질 수 밖에 없다. 그 줄이 엉키고 설키니 오죽하겠는
가? 그야말로 버스는 아비규환 속세의 축소판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해탈의 경지를 누린 듯 이제서야 숨을 제대로 쉴 것 같다. 버스 안에는 대략
90명 정도가 타고 있던 듯 싶으며, 그들이 싹 내리니 찌그려져 있던 버스 바퀴의 표정도 씨익
밝아진다.

시간이 점심 때를 약간 넘긴 터라 우리는 점심을 먹고자 용문산중앙식당에 자리를 폈다. 용문
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용문산 주막촌에는 많은 주막과 숙박업소가 있지만 그 집의
이름은 예전에 들은 바가 있어서 그 집을 골랐다. 물론 맛은 옆집이나 앞집이나 비슷하다.

우리는 산채비빔밥과 도토리묵, 파전 등 정말 두루두루 시켜 뱃속의 불만을 잠재운다. 그렇게
배불리 먹고 동동주 1잔 걸치니 정말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스하니 졸음
이 배 깔고 한숨 자라며 나를 희롱하려 든다.


▲  점심으로 먹은 산채비빔밥

점심을 먹고 잠시나마 쉬었던 두 발을 다시 움직였다. 주막촌을 지나면 관광안내소와 함께 용
문사매표소가 나타난다.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보는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확인해보
니 성인은 무려 2,000원... 혹여 단체할인이 안될까 싶어서 할인을 요청했으나 인원이 부족하
다고 절대로 안된다고 그런다. 다른 곳은 적정 인원을 못채워도 10명만 넘으면 눈치껏 해주던
데, 여기는 그렇지 않은 듯 하다. 꿩 대신 닭을 잡을 겨를도 없이 소정의 입장료를 내고 안으
로 들어선다.


♠  용문사 가는 길 (일주문, 은행나무)

▲  용문사매표소에서 용문사로 인도하는 길

매표소를 지나면 드넓은 광장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놀이시설이 있는 용문산관광단지
가 나오고, 직진을 하면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과 용문사로 통한다. 광장 주변은 조촐하게 공원
으로 꾸며져 있다. 오래 전에 왔을 때는 주막촌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새 이것저것 심
어 놓아 위락관광단지로 번잡하게 만들어 놓았다.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을 지나면 용문사 길은 말끔히 포장된 수레길과 흙길인 산길로 갈린다. 여
기서 빠르고 편하게 가고자 한다면 수레길로 가면 된다. 이 길이 용문사로 가는 주된 길로 매표
소에서 용문사까지 수레길로 가볍게 걸어도 20분이면 족하다. 또한 경사도 무척 낮아 누구나 쉽
게 오를 수 있다. 반면 산길은 끝없는 오르막의 연속으로 약간의 등산을 요하지만 운치가 진하
게 깃들여져 있으며, 소위 말하는 친환경적인 흙길이다. 수레길에 비해 인적도 많지 않아 잠시
나마 한적한 산행을 누릴 수 있으며, 용문사의 보물인 정지국사탑비와도 이어진다.

수레길로 접어들어 다리를 건너면 (산길은 다리
건너기 직전에 있음) 용문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중생을 마중한다.
이 문은 1986년에 세운 것으로 여의주를 머금은
용머리가 달린 기둥 2개 위에 평방(平枋)을 두
어 절의 이름이 담긴 현판(懸板)을 달고 맞배지
붕으로 마무리했다.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짝은 없다. 누구든 맞아들여 보듬어 주겠다는
부처나 자연의 마음이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일주문처럼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면
이 세상은 정말 극락이 따로 없을터인데 신과
동물 사이에 들어앉은 애매한 존재다 보니 전혀
그러지를 못하는 것 같다.

▲  용문사 일주문(一柱門)

 


▲  겨울제국이 눈치챌라 물 흐르는 소리도 조용한 용문사계곡

일주문을 지나면 은행과자를 파는 가게가 나온다. 이곳은 용문사에서 운영하는 집으로 은행나무
의 은행 열매를 넣어 만든 과자를 판매한다. 과자의 생김새는 호두과자와 같으며, 과자 안에 호
두 대신 은행이 들어있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5천원과 1만원 단위로 판매하는데, 과자를
만드는데 시간이 조금 걸려서 어쩔 때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된다. 20분을 기다린 끝에 겨우
5천원치 은행과자를 샀는데, 맛은 호두과자와 비슷한 것 같다. 양이 20개 남짓으로 일행이 많다
보니 금세 동이 난다.

일주문을 지나 15분을 들어가면 찻집과 기념품점을 겸하는 전통다원이 나오고, 용문사의 명물인
은행나무가 장대한 모습으로 눈 앞에 나타난다.

◀  용문사를 상징하는 대명사이자 동양
최대의 은행나무, 용문사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30호

이 은행나무는 용문사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애지중지하는 이곳의 꿀단지이자 듬직한 밥줄
이다. 이 나무가 없었다면 지금의 용문사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최대의 은행나무이자 동양 최대의 은행나무란 지위까지 지지고 있는 고품격의 나무로
높이가 무려 42m, 가슴높이 줄기둘레 14m, 가지퍼짐은 동쪽 14.1m, 서쪽 13m, 남쪽 12m, 북쪽
16.4m, 뿌리부분 둘레는 15.2m이다. 추정 나이는 약 1,100년을 헤아리며, 줄기 아래쪽에 큰 혹
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나무가 너무 큰지라 경내 어디서든지 그가 흔쾌히 보인다.

이 나무는 신라(新羅)의 마지막 자존심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신라의 재건을 꿈꾸며 경주(慶州)
를 버리고 금강산으로 가던 중에 심었다고 전한다. 신라가 935년 10월에 쿨하게 망했으니 태자
가 무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은 적어도 935년 11월 정도 될 것이다. 그러면 나무의 나이와
대충 맞아 떨어진다. 허나 전설처럼 태자가 과연 이곳에 들렸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용문사가
10세기 초반에 양평함씨(양근함씨)의 지원으로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함씨(咸氏) 세력
이나 절에서 심은 것이 아닐까 싶다.
다른 전설로는 7세기에 활약하던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꽂은 지팡이가 자라났다고 하는데, 이는
나무의 나이나 그 당시 상황을 봐도 전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조선 세종 때는 당상관(堂上官) 품계를 받아 정삼품송(正三品松)이라 불리기도 하며, 절이 수차
례 불타고 재건되기를 반복했으나 이 나무는 별탈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특히 사천왕전(四天王
殿)이 불탄 이후에는 절을 지키는 천왕목(天王木)으로 받들었다고 하며,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마다 소리를 내어 세상에 알렸다고 전한다.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순 재변(災變)
투성이인데도 근래는 한번도 소리를 안낸 모양이니 참으로 이상하다. 너무 소리를 내서 이제는
낼 소리조차 없는 것은 아닐까?

1907년 왜군이 의병 토벌을 구실로 용문사를 불질렀는데, 이 나무만 타지 않았다고 하며, 왜정(
倭政) 때는 왜군이 나무를 자르려고 용을 쓰다가 벼락을 맞아 줄행랑을 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걸 증명하듯 그 당시의 도끼자국이 아련히 남아있어 우리의 아픈 역사를 비추게 한다.

은행나무는 녹음(綠陰)이 깃드는 여름에도 멋있고 시원하지만 아무래도 황금빛으로 물드는 늦가
을의 자태가 단연 으뜸이다. 바로 그 절정을 보려고 왔지만 너무 늦게 와서 은행잎은 커녕 굵은
가지만 남은 그의 앙상한 모습만 눈에 넣고 말았다. 아무리 잘나가는 나무라 해도 겨울의 제국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가지만 가련히 남은 모습은 누구나 같기 때문이다. (동백나무 등의
친겨울계 나무나 소나무, 향나무는 제외)
늦가을의 절정을 누리는 은행나무의 모습을 담지 못해 그 아쉬움을 달래고자 문화재청에 올려진
사진을 아래 첨부하니 안구정화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늦가을 용문사 은행나무의 위엄 (문화재청 사진)

▲  땅바닥에 떨어져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하는 은행잎들

▲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용문사 경내
탑 너머로 보이는 용문산 산줄기

▲  경내로 조심스레 인도하는 돌계단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간략하게 용문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은행나무로 유명한 양평 용문사의 굵직한 내력
용문산 남쪽 자락에 안긴 용문사는 913년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다른 설로는 신라의 마지막 군주,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이 친히 행차하여 세웠다고 한
다. 허나 당시 신라는 고려와 백제, 여러 지방세력에게 영토 대부분을 빼앗기고 간신히 경주 일
대만을 지키던 상황이었다. 그런 지경에 어찌 머나먼 용문산까지 와서 한가롭게 절을 짓겠는가?
게다가 그럴 재정도 없었다.
또한 양근(楊根)이라 불리던 양평 일대는 고려의 영역으로 양평함씨 세력의 본거지로 고려에 투
항한 그들이 신라의 떨거지 왕이 와서 설치는 것을 그냥 팔짱만 끼고 보고 있을 리도 없기 때문
이다. 아마도 은행나무를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전설 때문에 그의 부왕(父王)이 등장한 듯 싶다.
그것 말고도 649년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가 중창했다는 설도 있으니 이 역
시 신뢰성이 없다.

절의 창건 시기를 알리는 최초의 기록은 조선 세조 때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용문사기(龍門寺
記)'와, 1493년 임사홍(任士洪, ?∼1506)이 쓴 '용문사중수기(龍門寺重修記)'가 있다. 이들 기
록에는 '신라 때 창건된 나라의 이름 있는 절','경기도의 이름 있는 절로 오래 되었다'고 쓰여
있을 뿐이며, 1927년 안진호(安震浩)가 쓴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와 권상로(權相老)의 '
한국사찰전서'에는‘신라 신덕왕 2년(913)에 대경대사가 창건했다. 일설에는 경순왕이 친히 거
둥하여 절을 창건하고 손수 공손수(公孫樹)를 심었다고 하나 증명할 기록은 없다'
라 되어있어
대경대사 창건설에 무게를 잔뜩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용문사는 절 앞에 있는 은행나무를 통해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중에 창건된 후삼국시대
절은 확실하다. 절을 창건했다는 대경대사는 용문사 창건 10년 뒤인 923년에는 용문산 서북쪽이
자 양평함씨의 성지인 함왕혈(咸王穴) 인근에 사나사(舍那寺. ☞ 관련글 보기)를 세운 것을 보
면 양평함씨의 후원을 업은 승려가 분명하며, 그들의 지원에 힘입어 창건된 절이 확실하다.

창건 이후 1378년(우왕 4년) 정지국사(正智國師) 지천(智泉)이 개성 경천사(敬天寺)에 있던 대
장경(大藏經)을 가져와 대장전(大藏殿) 3칸을 지어 보관했다고 하며, 1395년 중창을 벌였다.
1447년(세종 29년)에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모후(母后)인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위해 중수를
벌이면서 왕실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57년(세조 2년) 왕명으로 절을 크게 불려 '동국(東國)
제일가는 사찰'이라 불릴 정도로 호황을 맞는다.

1480년(성종 11년)에는 처안(處安)이 중수를 하고 1890년 봉성(鳳城)이 신정익황후(神貞益皇后)
조씨<조대비(趙大妃)>의 지원으로 중창했고, 1893년 다시 중창을 했다. 봉성은 조대비에게 극진
한 예우를 받았는데, 1891년 대비의 권유로 양주 견성암(見聖庵)에서 용문사로 넘어왔다.

이렇게나 잘나가던 용문사는 1907년 왜군들이 용문산에 머물던 의병(義兵)을 토벌한다는 이유로
불을 지르면서 그 영화로움은 순식간에 한줌의 재가 되고 만다. 이때 같은 산에 안긴 사나사와
상원사(上院寺)도 불타고 말았다.

1909년 취운(翠雲)이 큰방을 다시 짓고, 1938년 태욱(泰旭)이 대웅전과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 등을 중건하며 다시 재흥을 꿈꾸었으나 6.25전쟁으로 상당수가 불타고, 대웅전과
관음전만 간신히 남았다. 1983년 범종각과 지장전을 중건했고, 끊임없이 불사(佛事)를 벌여 지
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지장전, 삼성각, 독성각 등 약 10동의 건물이 있으며, 경
내에 깃들여진 고색의 향기는 죄다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허나 1,100년 묵은 은행나무와 정
지국사탑비, 금동관음보살좌상 등의 문화유산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용문사는 용문산과 한덩어리로 오래 전부터 수도권 유명 관광지로 명성을 누렸다. 특히 중앙선
전철이 뚫린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용문사는 등산객과 관광객들로 늘 북새통을 이루어 아늑하
고 적막한 산사의 향기를 누리는 것은 조금은 힘들 듯 싶다. 다만 은행나무 아래쪽에 전통다원
이란 찻집이 있어 산사에서의 차 1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또한 용문산 등산로 길목에 있어
절을 둘러보고 상원사나 윤필암터, 용문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으며, 근래에는 템플스테이를 운
영하면서 산사 체험을 누릴 수 있다.

동양 최대라는 은행나무의 아름다움과 용문산의 삼삼한 숲이 어우러진 산사로 한번은 안기고 싶
은 그런 절집이다.

※ 용문사 찾아가기 (2012년 11월 기준)
* 용문행 중앙선 전철(용산~용문)을 타고 용문역 하차(30분 간격), 중앙선과 환승이 가능한 전
  철역은 용산역(1호선), 이촌역(4호선), 옥수역(3호선), 왕십리역(2/5호선, 분당선), 회기역(1
  호선), 상봉역(7호선, 경춘선), 망우역(경춘선)이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용문 경유 홍천 방면 직행버스 이용 → 용문 정류장에서 용문터미널이나 용
  문축협까지 도보로 이동(터미널은 10분 정도, 축협은 5분)하여 용문사행 군내버스 이용
* 용문터미널(군내버스만 정차)과 용문역에서 용문사행 군내버스가 거의 50~60분 간격으로 다닌
  다. (휴일에는 30~50분 간격으로 운행)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서울 → 홍천 방면 6번 국도 → 용문사나들목을 나와서 331번 지방도 → 용문사주차장
② 중부고속도로 → 하남나들목 → 팔당대교 → 6번 국도 → 용문사나들목을 나와서 331번 지방
   도 → 용문사주차장

★ 용문사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2,000원 (30인 이상 단체 1,800원) / 청소년과 군인 1,400원 (30인 이상 1,200
  원) / 어린이 1,000원 (30인 이상 800원)
* 주차비 : 승용차 3,000원 / 버스 5,000원
* 용문사 템플스테이는 주말에 하는 1박 2일 프로그램과 평일에 자유롭게 머무는 휴식형 프로그
  램이 있다. 참가비는 어른 5만원, 학생(대학생 포함) 4만원. 자세한건  ☞ 용문사 홈페이지
  참조 또는 전화로 문의요망 (☎ 031-775-5797)
* 용문사에서 상원사까지 산행 1시간, 장군약수가 있는 운필암은 2시간 30분 정도 걸리며, 정상
  까지는 3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운필암을 거쳐 사나사나 연수리 방면으로 내려갈 수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 (☎ 031-773-3797)


♠  용문사 경내 둘러보기

▲  용문사 대웅전(大雄殿)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으로 법당(法堂)인 대웅전과 마주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
붕 건물로 1983년에 새롭게 지은 것이다. 대웅전 현판은 서울 봉은사(奉恩寺)에 있는 추사 김정
희(金正喜)의 글씨를 번각(飜刻)한거라 한다.

◀  용문사3층석탑

대웅전 뜨락에 심어진 3층석탑은 1989년에 주지
이선걸이 만든 것이다. 저 탑이 있기 전에는 용
문사에는 이렇다 할 탑이 없었다. 불국사 석가
탑(釋迦塔)을 빼닮은 탑의 풍채가 제법 돋보인
다.


▲  용문사 삼성각(三聖閣)

대웅전에서 산령각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삼성각은 1985년에 지은 것으로 단청은 박정원이 했
다. 같은 해에 조성된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
지붕 건물이다.


▲  삼성각 칠성탱(七星幀) - 1985년 제작
색상이 진해서 그런지 그려진 인물이 많음에도 그리 번잡해 보이지가 않는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령각(山靈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최근에 지어진 산령각과 독성각이 자리해 있다. 경내를 굽어보며 자
리한 이들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정말 조촐한 건물이다.
산령각은 산신(山神)을 봉안한 건물로 아래 삼성각에서 산신을 모시고 있음에도 그만의 별도 공
간을 두었다. 건물의 정체를 밝히는 현판은 가로로 걸려 있으며, 건물은 비록 작지만 제법 품격
이 서려 보인다.


▲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과 산신상

산령각에는 산신 가족이 그려진 산신탱과 호랑이와 같이 있는 산신상이 있다. 산신탱에는 흰 수
염의 산신할배를 비롯해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와 앳된 동자(童子)가 그려져 있으며, 소나무와
산이 뒷배경이 되어준다. 산신탱 앞에 자리한 산신상은 지팡이를 들고 앉아 있으며, 오른쪽에는
호랑이가 귀여운 표정으로 으러렁거리며 산신의 곁을 지킨다.


▲  산령각과 이웃한 독성각(獨聖閣)

산령각 이웃에 자리한 독성각은 삼성(三聖)의 하나인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이다. 역시나
삼성각에서 그를 다루고 있음에도 별도로 그만의 공간을 지어 중생들의 하례를 받게 했다. 독성
전과 산령각 앞에는 넓게 예불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조그만 독성각에는 독성이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이 있으며, 앞가슴을 시원스레 드러내고 아줌
마 자세로 앉은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 얼굴에는 뭔가 수심에 잠긴 듯, 오른쪽을 바라보며 편치
않은 표정을 짓는다.


▲  독성각의 주인 독성상


▲  중생구제를 향한 부처의 아련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梵鍾)

지장전 맞은편에는 범종의 보금자리인 범종각이 자리해 있다. 범종각에는 보통 범종을 비롯하여
목어(木魚)와 운판(雲版), 법고(法鼓) 등 사물(四物)이 담겨있게 마련이다. 허나 이곳은 오로지
범종만을 두어 중생 구제를 향한 부처의 메세지를 용문산에 울려 보낸다.

범종각은 1986년에 조성되었으며, 다른 절과 달리 중생들에게도 종을 칠 수 있게 하였다. 물론
불전함에 돈을 넣고 쳐야 된다. 그냥 치면 눈치가 보일 수 있으니...


▲  청기와를 입힌 지장전(地藏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지장전은 1993년에 세워졌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비롯하여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하고 있으며, 특별히 청기와를 입혀 건물의 품격을 높였다. 지장전의
편액은 서예가로 유명한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이 1973년에 남긴 것이다.


▲  용문사 약수

▲  연못에 가라앉은 무심한 동전들

지장전 좌측에는 동그란 연못과 약수터가 있다. 산사에는 필수적으로있는 약수터, 용문산이 내
리는 옥계수가 마를 날 없이 흘러 나와 중생들의 목을 축여준다. 용머리 밑에 꽂힌 대나무통에
서 흘러나온 물은 동그란 석조에 머물다가 어느 정도 물이 차면 밑에 있는 조그만 석조로 떨어
지고, 역시 같은 원리로 연못으로 흘러간다.
연못은 수심이 얇아 바닥이 보일 정도로 인간들이 심심풀이로 내던진 동전들이 수북히 쌓여있어
마치 보물선이 침몰한 자리를 연상시킨다. 수면 밑에서 빛을 발하며 잠들어 있는 동전들의 물밑
세상, 저기 깔린 돈은 과연 얼마나 될까? 겉으로는 10원짜리나 50원, 100원이 주류라 얼마 되겠
나 싶지만. 티끌도 모아지면 태산이 된다고 상상 이상의 금액이 될 것이다. 저들을 손수 수거하
여 세상에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보는 이목들이 많으니 그림의 떡처럼 그저 바라볼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  6각형의 관음전(觀音殿)

용문사 경내를 이루는 건물들은 죄다 네모이다. 허나 경내 동쪽에 자리한 관음전만큼은 독특하
게도 6각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어 눈길을 잡아 맨다.

관음전은 관음보살의 거처로 원래는 대웅전 우측 툇마루를 지닌 선방(禪房)이 관음전이었다. 그
러다가 최근에 동쪽에 터를 닦고 새롭게 관음전을 지어 올렸다. 내부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금동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72호

불단에 홀로 앉은 관음보살은 수려한 보관(寶冠)에 누님처럼 인자한 표정, 찬란한 장식으로 보
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머금게 한다.
그는 조선 초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원래부터 용문사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왔
는지는 알 수 없다. 불상의 건강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으로 얼굴은 작고 동그랗고 볼살이 좀
있어 보인다.

머리를 장식하는 화려한 보관은 나무로 만들었으며, 리본처럼 묶은 머리가 어깨까지 흘러 내린
다. 원만하고 볼살이 있는 얼굴에는 조촐한 얼굴 크기처럼이나 눈과 코, 입이 소소하게 표현되
었으며, 상체는 약간 뒤로 젖혀져 있다. 특히 유난히도 구슬장식이 많이 달려 있어, 귀족적 분
위기도 느껴진다.
양 어깨에 걸친 옷은 목 부분에서 한번 접혀 양 팔로 자연스럽게 내려오고 있으며, 오른쪽 소매
자락은 배 부분의 옷자락 사이에 끼워져 곡선을 형성하고 있다. 발목 부분에서는 부드럽게 접힌
'八'자형의 옷주름을 이루며 두 무릎을 덮는다.

불상의 구슬장식과 왼쪽 가슴에 있는 금으로 된 세모 장식 등은 14세기 보살상(菩薩像) 양식으
로 고려 후기 보살상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촐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 불상
은 금동(金銅)인데. 이는 근래에 입힌 것이다.


▲  금동관음보살좌상과 건물 외벽에 빙 둘러진 관음후불탱화
관음보살을 주위 3면에는 관음보살이 주인공인 후불탱화가 있다.
탱화의 색채가 매우 밝고 고운지라 관음보살상과 잘 조화를 이루며
관음전 내부를 눈부시게 밝혀준다.

▲  관음전 내부를 수식하는 하얀 피부의
 지장보살상 - 마치 '반지의제왕'에 나오는
 회색 간달프를 보는 듯 하다.

▲  옷주름을 휘날리며 푸른 정병을 들고
 선 관음보살상 (석가탄신일용 장엄등)


▲  관음전에서 바라본 용문사 경내

▲  부도군(浮屠群)
고색의 떼로 가득한 조선 후기 승탑(僧塔, 부도)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을 넘나들며 한 자리에 모인 승탑들의 보금자리이다.


♠  용문사 정지국사탑/비(正智國師塔/碑) - 보물 531호

▲  정지국사탑

용문사를 찾은 사람들의 상당수는 은행나무와 경내만 둘러보고 다봤다면서 그냥 돌아간다. 허나
이는 큰 실수이다. 경내에서 동쪽으로 300m 가량 떨어진 산자락에 보물로 지정된 정지국사탑/비
가 있기 때문이다. 은행나무야 원래 유명한데다 경내 앞에 떡 있으니 보고 싶지 않아도 무조건
보고 가야 되는 존재이고 절에 왔으니 대웅전을 위시한 경내를 보고 가야 된다. 허나 정지국사
탑/비는 경내와 다소 떨어진 산모퉁이에 있고 속세에 노출 정도가 낮아서 많은 이들이 모르고
지나친다.

정지국사탑비를 가려면 경내에서 부도전 뒤쪽으로 난 산길을 이용하면 된다. 이정표는 있으므로
헤맬 염려는 없다. 겨울이 깃들여진 산길은 경사가 없는 평지라 부담은 없다. 그 길을 5분 정도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의 가파른 계단길로 오르면 정지국사탑/비가 나온다. 탑은
그 길의 끝에 있고, 비석은 그 중간에 있는데, 비석 같은 경우는 안내문이 없어 자칫 지나치기
가 쉽다. 게다가 지형을 이용해 나무로 엮은 계단들이 키다리들에게 맞춰졌는지 계단의 높이가
상당히 높아 오르기가 좀 힘들어 키 작은 사람이나 어린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쥐약이다.

허나 오르는 길이 힘들다 한들 각박한 속세살이보다는 쉽다. 자존심을 곱게 접고 차근차근 길을
임하면 나올 것 같지 않던 그들이 나타나 반갑게 맞이해 줄 것이다.


▲  네모난 기단 위에 심어진 정지국사탑(부도)

넓은 네모난 기단 위에 자리한 정지국사탑은 바닥돌과 하대석(下臺石)이 네모로 지붕돌과 탑신(
塔身)은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큰 기단(基壇) 한복판에 네모난 바닥돌을 두고 연꽃이 새겨진 하대석(下臺石)과 중대석(中臺石)
을 두었으며, 그 위로 8각의 탑신(塔身)을 두었는데, 문짝 모양이 얇게 새겨져 있다. 고색의 검
은 떼가 서린 지붕돌은 밑에 3단 받침이 있고, 처마 밑에는 모서리마다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
돌 위에는 지붕선이 있고, 하늘을 향한 앙련(仰蓮) 장식으로 꼭대기를 마무리했다.

탑에 묻힌 정지국사(1324~1395)는 고려 후기 승려로 황해도 재령(載寧) 출신이다. 명나라 연경
(燕京)으로 건너가 유학을 하며 구법승(求法僧)으로 생활했다. 1356년(공민왕 5년)에 귀국하여
전국을 돌면서 오로지 수도에 임했으며, 속세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며 거의 은둔생활을 했다.
말년에는 용문사에 들어와 절을 중창하며 머물다가 1395년 7월 7일 열반에 들었다.
그를 다비(茶毘)하면서 찬연한 사리들이 많이 나오자,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正智國師)란
시호를 내렸으며, 부도와 탑비를 세웠다.

탑의 크기는 고려 때와 비교하면 대체로 작은 편이고, 그다지 수려하지도 않다. 장식이라고 해
봐야 연꽃무늬와 문짝무늬가 고작이기 때문이다. 허나 고색의 떼가 적당히 입혀 있고 조촐하고
소박한 모습이 은근히 마음에 든다. 사람들로 시장통을 이루는 경내와 달리 인적도 별로 없어
적막감이 진하게 감싸 흐른다. 가끔씩 들려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나 메아리 소리, 바람의
소리만이 살짝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  소박한 스타일의 정지국사탑비

정지국사탑으로 오르는 길목에 조그만 비석이 하나 있다. 마땅한 안내문도 없고 흔한 모습의 비
석이라 지나치기 쉬우나 그는 정지국사탑과 한 덩어리인 탑비(塔碑)이다. 다만 비석이 이수(螭
首)와 귀부(龜趺)를 기본적으로 갖추는 고승(高僧)의 비석치고는 너무 궁색한 모습이라 나그네
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바위 위에 세워진 이 비석은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머리 부분 양쪽 모서리를 종이 끝이 접혀진
듯 깎았다. 글씨가 새겨진 주위에는 가는 선이 그어져 있으며, 비문(碑文)에는 정지국사의 생애
가 20행의 880자로 빼곡히 적혀있다. 뒷면에는 조성자의 명단이 적혀있으며, 비문은 조선 초기
이름을 날린 권근(權近, 1352~1409)이 썼다.

비석은 처음에는 정지국사탑 20m 아래 바위에 있었는데, 바위에서 뽑혀나와 경내에서 이리저리
뒹굴고 있던 것을 1970년경에 지금의 자리에 안착을 시켰다. 비석의 모습이 평범한 수준에 머문
것은 정지국사가 고승이긴 하나 딱히 알려진 인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부도와 탑비
를 화려하지 크지도 않게 적당한 선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정지국사탑으로 올라가는 길
보기와 달리 제법 가파르다. 길 중간
왼쪽에 정지국사탑비가 있음

▲  용문사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산길

정지국사탑/비를 둘러보고 산길을 거쳐 속세로 나왔다. 수레길과 달리 한적하기 그지 없는 산길
은 흙길이다. 산에 왔으니 흙은 밟아봐야 되는 법~~ 산길의 경사는 그리 급하진 않다. 수레길과
일정한 간격을 두며 진행되던 산길은 결국 일주문 부근에서 수레길과 합쳐진다.


▲  용문사 입구에 지어진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용문사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2007년 10월에 문을 연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이 자리해 있다. 양평
의 역사와 문화, 농업, 자연, 용문산을 아낌없이 담은 박물관으로 이름이 좀 길다. 그냥 간편하
게 양평농업박물관이나 양평박물관으로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박물관은 2층 규모로 전시실은 2층에 있다. 양평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제1전시관과 농업과 자
연을 담은 제2전시실, 양평의 역사를 담은 역사실과 다양한 테마의 기획전시실이 있으며, 2층
실외 한쪽에 누각(樓閣)을 두어 관람객에게 조촐히 쉼터를 제공한다.
용문산관광단지의 한 획을 장식하는 문화 공간으로 볼거리도 많이 있으므로 용문사나 용문산에
왔다면 꼭 둘러보기 바란다. 입장료도 공짜이니 경제적 부담도 없으며, 2012년 1월부터 용문사
에서 위탁관리하고 있다.

우리가 이곳에 이른 시간은 오후 4시, 폐장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박물관을 가볍게 둘러
보았다. 박물관에 대한 내용은 2장의 사진으로 간단히 마무리를 짓는다.

★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관람정보 (2012년 11월 기준)
* 관람시간 : 하절기(3~10월) 9시 ~ 18시 / 동절기(11~2월) 9시 30분 ~ 18시 (입장은 폐장 30분
  전까지)
* 입장료 공짜
* 휴관일 :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 추석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508-10 (용문산로 670) <☎ 070-7715-3796>
* 박물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박물관 2층 로비에 놓인 기이한 장식물
나무 장작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무슨 의미가 있을 듯 싶은데 ;;

▲  제1전시관에서 담은 차정첩(差定帖)
차정첩은 공공기관에서 사무를 맡기는 임명장의 하나로 1815년 양평현감이
김치성(金致聲)에게 권농별유사(勸農別有司)의 임무를 맡긴 내용이다.
별유사는 관청에서 호적 등의 사무를 보는 직책이다.


용문사에서 속세로 나가는 길도 정말 만만치가 않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200m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휴일에 증회 운행을 한다고 떠들어도 배차간격이 길기는 마찬가지, 사람들이
몰리는 시간대에는 10분 내외 간격으로 투입하여 등산객 수요를 바로바로 처리했으면 좋겠다.

15분 정도를 기다리자 버스가 나타났다. 버스 바퀴가 뭉개질 정도로 금세 콩나물시루가 되었지
만 운전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사람들을 태운다. 더 이상 공간이 없음에도 말이다. 승객들
은 그만 태우고 빨리 가자고 소리치지만 운전사는 출발시간이 되지 않았다며 손사래를 친다. 이
건 무슨 버스 승차 기네스북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 점심 때 용문사로 올 때 보다 더 심하게 태
운다. 길이 10.6m의 버스 안에 100명은 넘게 탄 듯 싶다. 다시 한번 아비규환이 된 버스..

드디어 버스는 시동을 걸고 인원초과로 초죽음이 된 바퀴를 굴린다. 손잡이를 간신히 붙잡고 용
문역까지 가던 15분의 시간은 정말 150분처럼 길고 고통스러웠다. 용문역에서 지옥과 같던 버스
에서 해방되어 전철을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리하여 늦가을 용문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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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11월 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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