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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6.13 도심 속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동대문구 천장산 연화사~청량사 (연화사에서 먹은 초파일 절밥) 2
  2. 2017.05.24 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원찰로 지었다고 전하는 회기동 연화사 ~~~ (월계동 기원사)

도심 속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동대문구 천장산 연화사~청량사 (연화사에서 먹은 초파일 절밥)

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회기동 연화사, 청량리 청량사)



' 부처님오신날 도심 사찰 나들이 ~ 동대문구 연화사, 청량사 '

천장산 연화사

▲  천장산 연화사

연화사 관세음보살상과 천수관음도 청량사 동별당

▲  연화사 관세음보살상과
천수관음도

▲  청량사 동별당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이 다가왔다. 그날만 되면
'석가탄신일 사찰 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며 내가 살고 있는 서울 장안을 중심으
로 열심히 절 투어를 벌이고 있는데, 이번 초파일에는 예전에 1번 찾았던 연화사와 그 부
근에 미답(未踏)으로 버젓히 남아있던 청량사를 주메뉴로 정했다.
청량사는 연화사보다 더 오래된 절로 그 이름은 익히 듣고 있었으나 나를 몸살 나게 만들
정도의 늙은 유물이 없어 계속 발걸음을 미루다가 이번에 그를 꺼내 들었다.

둥근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1시에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1호선 전철을 타고 회기역
에서 내려 경희대 옆에 자리한 회기동(回基洞) 연화사를 찾았다.



 

♠  경희대 그늘에 자리한 오래된 절,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던
~ 천장산 연화사(天藏山 蓮華寺)

▲  활짝 열린 연화사 일주문(一柱門)

경희대병원 서쪽에는 연화사란 조그만 절이 둥지를 틀고 있다. 천장산(141m) 남쪽 자락에 자
리한 이곳은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1499년 폐비윤씨의 묘역인 회묘(懷墓)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회묘는 원래 경희대병원 자리에 있었는데, 억울하게 죽은 어미를 위해 연산군은 1504년 회묘
를 회릉(懷陵)으로 높여 석물을 심고 회묘를 지키는 절을 세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연화사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절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어미를 향한 연산군의 사무친 마음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덧없이 아작이 나버렸고
, 연산군 자신도 교동도(喬桐島)로 추방되어 바로 그해 겨울,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회
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어 방치되었으며, 절도 이때 풍비박산이 난 것으로 보인다. 반정파들은
연산군과 관련된 모든 것을 철저히 깔아뭉갰기 때문이다.

이후 터만 아련히 전해오다가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의 능인 의릉이 인근 석관동(石串洞
)에 터를 닦으면서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영조(英祖)가 1725년에 절을 지어 의릉의 원찰로
삼은 것이다. 허나 그 원찰의 이름도 야속하게도 전하지 않는다.
1870년대에 이르러 승려 묘련(妙蓮)이 절을 중수했는데, 그는 성품이 좋아서 인기가 대단했다
. 하여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 절을 묘련사(妙蓮寺, 또는 묘련암)라 부르니 이때부터 절의
이름 3자가 역사에 나타난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파괴된 것을 1883년에 승려 정담(淨潭)이 남화(南化), 완허(玩
虛)의 도움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이때 궁인(宮人) 박씨와 상궁(尙宮) 최씨, 김씨 등이
시주해 여러 탱화를 제작했다. 그렇게 중건이 마무리 되자 1884년 10월에 '천장산 묘련사 중
건기(重建記)'를 남겼다.
이후 절은 연화사로 이름이 갈렸는데, 그 시기가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1993년 자음(慈音)이
지은 '천장산 연화사 삼성각 상량문(上樑文)'에는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머무는 곳이 연화장(蓮華藏) 세계이고, 중생의 근본적 자성(自
性)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아 절 이름을 연화사라 했다'
고 적고 있어 연화
장 세계에서 이름을 따왔음을 귀띔해 준다.

1950년대까지 절 주변은 자연에 묻힌 싱그러운 곳으로 그때는 영휘원<永徽園,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의 묘역>에서 오솔길을 따라 절로 들어섰다. 허나 1955년에
종로1가에 있던 경희대(옛 신흥대학)가 이곳으로 오면서 절 옆에 학교 건물이 들어섰고 덩달
아 주거지까지 조성되면서 절 주변 풍경화는 180도 달라지게 되었다.
하여 절은 경희대에 완전히 포위된 외로운 모습이 되었으며, 연화사의 첫 후광(後光)이던 회
묘는 경희대에 떠밀려 1969년 고양시 서삼릉(西三陵)으로 이전되었다. 또한 절 주변에 가득했
던 숲도 겨우 서북쪽에 일부가 남아 가늘게 천장산과 손을 잡고 있다.

1990년대까지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미륵전(彌勒殿), 대방(大房), 종각 등의 기와집들
이 경내를 이루었으며, 극락보전 앞에는 뜨락이 닦여있었고, 경내 뒤에는 약간의 소나무가 운
치를 이루었다. 허나 건물이 낡고 터가 좁아 1993년부터 크게 중수를 벌여 기존의 건물을 부
시고 집약적인 공간인 2층짜리 대웅보전과 삼성각을 새로 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미륵전 상
량문'과 '묘련암 중수기(1875년)'가 발견되어 절의 숨겨진 역사 일부가 속살을 드러냈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무애당, 관음전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
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2호)와 칠성도, 천수관음도, 신
중도, 지장시왕도, 산신도, 목각석가여래설법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4호), 산신도가 있다.
이중 아미타괘불도(阿彌陀掛佛圖)는 1901년 10월 28일에 제작되어 다음달 11월 20일에 점안된
것으로 대은 돈희(大恩 頓喜)를 중심으로 계은 봉법(啓恩 奉法), 한봉 응작(漢峰 應作), 보암
긍법(普庵 亘法) 등이 참여해 조성했다. 아미타3존불을 비롯하여 가섭존자, 아난존자, 사자와
코끼리를 탄 문수/보현동자상까지 등장시켰는데, 이는 19세기 중반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
했던 괘불 양식이다. 날이 날인지라 괘불의 화려한 외출을 기대했으나 이번에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밖에 1880년에 제작된 독성도가 있으며, 지방문화재 탱화들은 괘불을 제외하고 삼성각과 대
웅보전 1층, 관음전에 포진해 있어 찾기는 쉽다. (그들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경내로 인도하는 짧은 숲길
봄이 푸르게 붓질을 한 숲길에 고운 빛깔의 연등이 허공을 가득 메우며
부처님오신날 분위기를 한껏 드높인다.


훤칠하게 솟은 일주문을 들어서 찰라와 같이 짧은 숲길을 지나면 바로 대웅보전 앞이다. 오색
찬란한 연등이 연화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메우며 부처님오신날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연화사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좁게 경내를 이루고 있는데, 그 동쪽에 삼성각과 무애당, 관음
전이 있고 서쪽에는 불교용품과 공양미, 전통차를 파는 건물이 있다. 석가탄신일을 즐기러 나
온 수많은 사람들로 좁은 경내는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절은 초파일 특수로 즐거운 비명
을 지른다.


▲  오색 연등이 그늘을 드리운 대웅보전 뜨락
대웅보전 뜨락에는 행사용 천막을 주렁주렁 지어 전통차 시음과 다도(茶道) 체험,
연등 만들기, 불교용품 판매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나는 전통차 1잔을 섭취했음)

            ◀  삼성각(三聖閣)
대웅보전 뒷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
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친
숙한 산신과 독성, 칠성의 보금자리이다.
1993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건물 바로 뒷쪽에
콘크리트로 다져진 언덕이 있는데, 그 언덕에
경희대 건물이 높이 자리하여 절을 대놓고 살
펴본다.


▲  삼성각 석가여래상과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3호)

삼성각 중앙에는 평온한 미소를 머금은 금동석가여래상과 고색이 역력한 칠성도가 자리해 있
다.
칠성도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칠
성불(七星佛), 칠원성군(七元星君), 노인성(老人星), 삼성(三星) 등 칠성 식구들이 복잡하게
담겨져 있는데,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이 땅의 토속신앙으로 머물
러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 때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면서 그를 다루지 않는 절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연화좌(蓮花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칠성도의 주인, 치성광여래는 금륜(金輪
)을 들고 있는데,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있으며, 좌우 협시보살은 연화좌 위
에 반가좌(半跏坐) 형태로 앉아 본존불을 향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그리고 머리에 쓴 관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 원과 하얀 원이 그려져 있고, 치성광여래
주위로 좌우 대칭되게 배치된 칠성불은 합장한 채 본존불 쪽으로 몸을 향해 있으며, 칠원성군
은 각기 홀을 들거나 합장한 채 치성광여래를 향해 서 있다.

이 탱화는 대한제국 시절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활약한 한곡 돈법(漢谷 頓法)을 중심으로 한
명 환조(漢明 幻照), 두삼(斗三), 태호(太湖), 창호(昌湖) 등이 동참하여 1901년에 그린 것으
로 이때 아미타괘불도와 지장시왕도, 신중도, 천수관음도가 같이 제작되었다.


▲  삼성각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6호

칠성도 우측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 산신 가족을 머금은 산신도가 걸려있다. 칠성도만큼
이나 고색이 깃들여져 있으나 그와 달리 등장 인물이 단출해서 보기는 좋다. 언제 제작되었는
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923년에 문성(文性)이 산신각을 짓고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
어 이르면 1880년대 후반, 적어도 칠성도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진다.

그림을 살펴보면 가운데에 붉은 옷을 걸친 산신 할배가 커다랗게 표현되어 있는데, 머리에 모
자 모양의 두건을 쓰고 있고, 까무잡잡한 얼굴은 둥근 넓적하며 포근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
본다. 왼손에는 깃털로 된 부채를 들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그의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산신 오른쪽에는 그의 비서인 동자 2명이 자리해 있는데, 모두 기물을 들고 있으며, 왼쪽에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민화(속화)풍으로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런데 시
중에 돌고 있는 어느 유명한 민화(民畵)의 호랑이와 많이 닮아서 혹 그를 참조하여 그린 것은
아닐까 싶다. 하여튼 옛 사람들은 호환(虎患)이라 하여 두려움의 대상인 호랑이를 고양이처럼
친근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짙었다.

산신 뒤에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있는데, 노송과 길게 떨어지는 폭포를 그려 심산유곡(深山
幽谷)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  삼성각 독성도(獨聖圖)

칠성도 좌측에 자리한 독성도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를
담은 탱화로 아줌마 자세로 편안하게 앉은 백발의 독성 할배와 그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
려져 있다.
비단 바탕에 채색된 것으로 1880년에 제작되었으며, 삼성각에 깃든 3개의 탱화 중 가장 늙은
존재로 보존 상태도 양호하나 이상하게도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  연등을 두룬 대웅보전

연화사의 법당인 대웅보전은 1993년에 지어진 지상 2층, 지하 1층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하
는 선방(禪房)과 공양간, 2층은 대웅보전, 1층은 강당(講堂)으로 작은 절에 걸맞게 집약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를 보고 싶다면 1층을 기웃거리면 되며 시장기
를 단죄하고 싶다면 지하로 내려가면 된다.

▲  관음전에서 바라본 대웅보전

▲  대웅보전(2층) 내부

대웅보전 2층 불단에는 금동 피부의 석가여래상이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자리해 있다.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비롯한 후불탱 3점이 그들을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으며, 그들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떡과 과일 등으로 불단이 내려앉을 지경이다.


▲  연화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5호

강당으로 쓰이는 대웅보전 1층에는 연화사의 보물인 신중도와 지장시왕도가 액자에 소중히 깃
들여져 있다.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과다하여 정신을 쏙 빼놓는
다. 주로 법당을 지키는 용도로 신중도(신중탱)를 많이 거는데,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 위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좌우측에 대칭으로 자리한 제석천과 범천은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뒤에 두루고 머
리에 보관(寶冠)을 눌러쓴 채, 두 손으로 꽃을 들고 있으며, 그림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
로 칼로 무장한 팔부중(八部衆)이 있고, 제석천과 범천 주위로 일월대신(日月大神) 등의 천신
(天神)과 산개(傘蓋) 등을 받쳐든 천동(天童),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天女)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901년에 수화원 한봉 응작(漢峰 應作)을 비롯해 대은 돈희(大恩 頓喜), 계은 봉법
(啓恩 奉法), 보산 복주(寶山 福珠), 보암 긍법(普庵亘法), 재겸(在謙) 등 12명의 화승(畵僧)
이 그린 것으로 이중에서 계은 봉법, 보암 긍법, 돈법(頓法), 두삼(斗三) 등은 20세기 초 경
기도 지역에서 활약한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과 교류를 가진 화승들이다.
그림의 구도와 형태, 필선, 채색 등이 깔끔하게 처리되었으며, 세부묘사가 정교해 19세기 중
반 이후 화풍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연화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6호

신중도 옆에 있는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
者),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신중도만큼이나 정신이 없는
이 그림은 연화사 탱화가 대거 조성되던 1901년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의 주인공인 지장보살은 수미단(須彌壇) 위에 마련된 연화좌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
아있으며, 투명한 흑색 두건을 쓰고 오른손에는 보주(寶珠), 왼손에는 육환장(六環杖)을 들고
있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고, 지장보
살의 신광 좌우로는 온갖 모습의 시왕이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는데, 시왕 뒤에는 8곡병(曲屛
)이 둘러져 있으며 광배는 금박을 붙여 장식했다.
이렇게 광배를 금색으로 처리한 수법은 대한제국 시절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했던 것으
로 그림의 인물 표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두옥졸(牛頭獄卒)과 마두옥졸(馬頭獄卒) 등
인물 상호에 표현된 음영법이다. 이 음영법은 19세기 이후 서울, 경기 지역 불화에서 많이 보
인다.

이 그림은 1867년에 경선당 응석이 그린 낙산 보문사(普門寺, ☞ 관련글 보기)의 지장시왕도
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낙산 청룡사(靑龍寺, ☞ 관련글 보기) 지장시왕도와 유사하며, 대
한제국 시절 서울, 경기 지역 지장시왕도의 도상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작품으로 채색 및
인물 표현에서도 19세기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하여 이를 통해 서울 지역 불화유파(佛畵
流派)의 사승(師僧)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대웅보전 1층 앞에는 초파일을 맞아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된
관정대(灌頂臺)에 우뚝 자리해 중생들의 인사
를 받고 있다.
관불의식 수요가 많아서 여기서는 참여를 하지
않고 1층 안에서 살짝 사진에 담았는데, 중생
들이 껴얹은 물을 맞은 아기부처의 표정이 잠
시 환해진 듯 싶었다.
허나 햇님이 퇴근하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에
봉인되어 1년을 기다려야 되니 오늘 냉수마찰
을 실컷 받아야 여한이 없을 것이다.
예전 초파일에는 대웅보전 2층 앞에서 관불의
식을 했었는데, 그때 절에서 의식에 참여한 사
람들에게 손수건을 나눠주는 인심을 베풀었다.
(그 손수건은 아직도 가지고 있음)


▲  관음전(觀音殿)

대웅보전 옆구리에 자리한 관음전은 무애당(無礙堂) 머리에 올려놓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경내가 좁다 보니 새로 건물을 닦지 못하고 무애당의 허전한 머리를
활용해 관음전을 닦았는데, 이곳에는 대웅보전에 있던 관세음보살상과 천수관음도가 봉안되어
있다.


▲  연화사 천수관음도(千手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4호

관음전이란 새로운 둥지를 마련한 천수관음도는 1901년에 한봉 응작, 보산 복주, 청암 운조(
淸菴 雲照) 등이 그렸다. 지금이야 천수관음(千手觀音)을 다루는 그림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
만 정작 늙은 천수관음도는 매우 드물게 남아있어 그 희소성이 크다. 그런 그림이 무려 연화
사에 소중히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바다 가운데에 봉긋 솟은 연화좌 위에 천수관음이 붉은색 바탕의 옷을 걸치며 앉아있다. 그는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과 경책(經冊)을 받쳐 든 4비(臂) 등 40비를 갖추고 있는데, 그의 커다
란 광배 안에는 무려 1,000개의 손과 눈을 그려 놓아 관세음보살의 위엄을 한층 드높였다. 신
중도와 달리 등장인물은 달랑 1명이지만 그의 찬란한 광배로 인해 이 그림 또한 보는 이의 혼
을 쏙 빼놓는다.

연화사 천수관음도는 고려와 조선 전기 천수관음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수
월관음도(水月觀音圖)의 도상까지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1925년에 제작된 대산사 천수
관음도가 연화사 천수관음도에서 계승을 받으니 그 가치는 꽤 크다. 특히 관세음보살의 얼굴
은 살이 많고 이목구비가 단정해 경선당 응석의 영향을 조금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보전 앞뜨락
(관음전에서 바라본 모습)

▲  연화사 북쪽에 있는 선동호(仙洞湖)

나무가 우거진 경내 서북쪽에는 경희대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 서쪽에는 경희초등학교가 있고
, 동쪽은 경희여고와 경희대 교내로 연화사 주변을 180도 변형시킨 경희대이지만 천장산 자락
에 자리한 잇점을 살려 자연보호를 크게 여기면서 다른 대학교보다 녹지 비율이 엄청 높은 편
이다. 그러다보니 봄에는 봄꽃 명소, 늦가을에는 단풍 명소로 크게 추앙을 받는다.

주차장 북쪽에 무언가 낌새가 느껴져 가보니 조그만 호수가 숲에 무성히 감싸여 그림 같은 풍
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곳에 아름다운 호수가 감쪽 같이 숨어있었다니.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본 것인가?'
나 자
신도 크게 놀라 뒤로 자빠질 정도였는데, 그는 경희대 교내 서쪽 끝에 자리한 선동호로 숲속
에 깊히 묻혀 있어 서울이 아닌 먼 지방의 산골 호수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이런 곳이라면 선녀(仙女) 누님도 흔쾌히 내려와 목욕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그걸
의식하여 호수 이름도 선녀의 동네를 뜻하는 선동호가 되었다.

호수 주변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며, 봄 풍경과 늦가을 풍경이 아름다워 연화사에 왔다면 경
내 북쪽으로 조금 벗어나 이곳까지 둘러보길 권한다. 호수를 둘러싼 나무와 꽃, 햇님과 달님,
구름 등 하늘을 장식하는 식구들까지 호수를 거울로 삼아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여기서
잠시 망중한에 잠겨보는 것도 괜찮다.


▲  연화사 공양밥의 위엄

연화사는 10분이면 능히 다 볼 정도로 조그만 절이지만 그곳에 깃든 문화유산과 신이 나는 초
파일 분위기, 거기에 생각도 못 했던 선동호까지 겯드리니 1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초파일 절투어의 으뜸 백미(白眉)는 뭐니뭐니해도 먹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공양밥과 국수,
과일, 떡, 전통차 등이 풍부하게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눈과 마음을 실컷 호강시
켜주었으니 이제는 입과 뱃속을 달래줘야 지친 몸에 활력을 주어 다음 일정을 수월하게 진행
할 수 있다.

대웅보전 지하층에 공양간이 있는데, 이미 사람들로 만원이다. 절에서 준비한 공양밥과 미역
냉국, 그리고 후식용 절편을 받아 빈 자리에 앉아 즐겁게 공양에 임했는데, 공양밥은 호박과
김치, 콩나물 등 갖은 나물을 밥에 넣고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이 땅에 흔한 공양밥 스타일이
다. 시장기가 강해서 그야말로 꿀맛이 따로 없었는데, 폭풍 흡입으로 불이 나기 직전인 목구
멍을 미역냉국으로 시원하게 진정을 시켰고, 절편은 청량사로 이동하면서 후식으로 섭취했다.
그렇게 연화사의 풍성한 초파일 인심을 확인하고 다음 인연을 기약하며 청량사로 이동했다.

* 연화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109-1 (경희대로3길 56 ☎ 02-962-6186)



 

♠  청량리 뒤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천장산 청량사(淸凉寺)

▲  청량사 대웅전(大雄殿)

연화사를 나와서 빼곡히 들어찬 회기동 주택가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가면 삼육초등학교 남쪽
이자 영휘원 동남쪽에 자리한 청량사가 뒷통수를 보인다. 담장 너머로 청량사가 기와집 머리
를 보이고 있으나 정작 경내로 들어서는 문이 바로 나타나지 않아 나를 잠시 답답하게 만든다
. 그래서 골목길(제기로31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그제서야 문이 모습을 비추었고
, 그 문을 들어서면 대웅전을 비롯한 청량사 경내가 펼쳐진다.

이번에 처음 인연을 지은 청량사는 서울의 동쪽 철도 관문인 청량리역 북쪽이자 영휘원 동남
쪽으로 천장산 남쪽 끝자락에 안겨져 있다. 연화사가 경희대에 감싸여 있다면 청량사는 주택
가와 삼육초교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데 간신히 경내 동쪽과 남쪽에 숲 일부가 남아있어 산
사의 분위기를 아주 약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무려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다고 내세우고 있다. 허나 신빙성은 전혀 없으며 처음에는
북한산(삼각산)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최근까지 '삼각산 청량사'를 칭했다. 고려 예종(
睿宗)이 1117년 9월 학자이자 승려인 식암 이자현(息庵李資玄, 1061~1125)을 불러 청량사에
머물게 했다는 내용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나오는데, 그가 머문 절이 과연 이곳인지도
심히 의문이다.
성종실록(成宗實錄) 1471년 부분에 삼각산 청량사 승려에 대한 기록이 나오며, 신증동국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삼각산에 청량사가 있다고 나온다. 그리고 조선 초기 문신인 김정
(金淨)이 1504년에 청량사에 머문 인연이 있다.

이후 절은 홍릉수목원 자리로 이전되었으며,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 자리를 물색했
는데, 공교롭게도 청량사 자리가 명당의 정혈이라 하여 그곳에 능을 쓰기로 했다. 상황이 그
리 되자 절은 강제로 제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어 현 자리로 절을 옮겼다.
일부에서는 돌곶이승방인 석관사(石串寺)를 청량사의 전신(前身)으로 보기도 하나 김정호(金
正浩)가 만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홍릉수목원 자리에 청량사가 표시되어 있고, 임업시
험장 쪽에 석관사(돌곶이절)가 따로 나와있어 별개의 절이었음을 알려준다. 허나 홍릉을 조성
하면서 절은 이곳으로 옮겨졌고, 돌곶이절도 청량사에 합쳐지면서 자연히 돌곶이승방의 역사
를 계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돌곶이승방은 서울 주변 4대 비구니 승방의 하나이다.
그렇게 두 절이 합쳐지자 비구니 남채백(南彩白)이 1895년 석관사에서 법당과 칠성각을 가져
와 대니승방(大尼僧房)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이후 김봉학, 신자영, 장동일, 정부연, 신원삼
비구니의 불사가 계속 이어졌다.

이곳은 연화사처럼 완전 숲속의 절이었다. 주변 풍경이 고와서 왜정(倭政) 때는 서울 근교 경
승지이자 휴양지, 집회 장소로 유명해 많은 이들이 찾았는데 특히 애국지사와 고승들의 발걸
음이 많았다.
별건곤(別乾坤) 제23호(1929년 9월)에는 청량사 절밥이 명물이라는 내용이 있고, 개벽(開闢)
에서도 청량사에 소풍을 갔다는 내용이 많이 나오며, 개벽 제38호(1923년 8월)에는
'청량사라고 하면 시원하게 들리지만 그다지 청량하지 않고 인근 홍릉의 수림(樹林)이 있고
교통이 편해서 군중이 몰리는 것이다'
평가하고 있다.

또한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 현장으로도 바쁘게 살았는데, 1929년 왜경은 청량사를 수색하여
폭탄을 제조한 청년들을 검거했고, 1930년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원 수십 명을 체포했으
며, 경성농업전문학교(현 서울시립대학교) 학생 10여 명이 1930년에 여기서 철기단(鐵騎團)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1931년 경성제대(서울대) 학생들의 연구회 조직이 여기서
자주 모임을 가졌고, 1938년 연희전문(연세대) 동지회 흥업구락부가 자주 집회를 가졌다.
만해 한용운(韓龍雲)도 한때 이곳에 머물렀으며, 1939년 8월 29일(음력 7월 1일)에 그의 회갑
연이 여기서 열렸는데, 이광(李珖), 김관호(金觀鎬),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안종
원(安鍾元) 등 20여 명의 애국지사들이 참여해 그의 회갑을 축하하면서 망국의 한과 자주독립
의 의지를 다졌다. 불교 학자인 박한영(朴漢永)도 이곳에 머물렀으며, 대방에 걸린 청량사 현
판은 그의 글씨이다.
1970년대 이후 계속 절을 손질했으며, 1988년 전통사찰 5-2호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절
은 연화사보다 넓은 편으로 생각보다 규모가 좀 크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보전, 무량수전, 동별당, 칠성각, 관음전 등 10동 정도
의 건물이 있으며, 경내를 크게 대웅전 구역과 동별당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지정문화재는
아직 없는 실정이나 1871년에 제작된 신중탱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며, 그 외에 1938년
에 조성된 후불탱과 신중탱, 칠성탱 등을 지니고 있다.

청량리의 이름이 바로 청량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 현장을 이제서야 가본다. 절의 인지도가
낮아서 연화사보다 찾는 이는 좀 적으나 한때 서울 근교 경승지이자 애국지사들의 활동터로
바쁘게 살았던 현장이라 다시 왕년의 위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청량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61 (제기로31길 10-3, ☎ 02-962-7390)


▲  대웅전 앞에 닦여진 관불의식의 현장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80년에 지어졌다. 내부에는 금동석가여래
좌상을 중심으로 1938년에 그려진 후불탱과 신중탱 등 여러 탱화가 들어있으며, 건물 앞에는
관불의식의 현장이 차려져 아기부처가 곱게 꽃단장이 된 연화대에서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대웅전 뜨락에는 쉼터를 닦아 절을 찾은 이들에게 커피와 시원한 음료수를 제공하고 있고 연
등 만들기 등의 행사도 열리고 있었다. 나는 시원한 커피 1잔을 받아 쉼터 의자에서 목구멍에
깃든 갈증을 단죄하며 5분 정도 쉬었다.


▲  곱게 연등 옷을 걸친 대웅전 앞 소나무

약 70~80년 정도 묵은 잘생긴 소나무에 오색 연등을 달아놓았다. 낮에는 조용히 웅크리고 있
다가 햇님이 칼퇴근을 하고 땅꺼미가 짙어지면 연등은 일제히 몸을 불사르며 환상적인 연등
야경을 드러낸다.


▲  늠름하게 생긴 대웅전 석가여래상과 뒷쪽에 걸린 후불탱(1938년 작)

▲  대웅전 독성탱과 산신탱

▲  1938년에 제작된 대웅전 신중탱


▲  천장산 청량사 대법전 건립탑(大法殿 建立塔)
1996년 10월 28일에 세워진 것으로 특이하게 8각형 부도탑(승탑)
스타일로 지어졌다.

▲  극락보전 앞에 차려진 관불의식의 현장

보통 석가탄신일 관불의식의 현장은 경내에 1곳 또는 2곳을 두기 마련이나 청량사는 대웅전과
극락보전 앞, 무량수전 옆구리 등 무려 3곳이나 닦아 놓았다. 하여 사람들 눈치 없이 정말 여
유롭게 아기부처에게 냉수욕을 시켜주었다.


▲  극락보전(極樂寶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대웅전과 무량수전 사이에 자리한다.

▲  극락보전 아미타3존상과 후불탱
조그만 덩치의 아미타불이 훤칠한 외모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며 아미타3존상을 이룬다. 그들 뒤쪽에 걸린 후불탱도 제법
고색이 있어 보이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극락보전 신중도(신중탱)

이곳 신중탱은 청량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무려 1871년에 조성되었다. 지방문화재감으로 전
혀 손색이 없어 보이나 아직까지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으니 절에서 문화재 신청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  한 지붕 두 가족, 산신각(山神閣)과 칠성각(七星閣)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산신과 칠성이 봉안되어 있다. 그들은 각각
산신탱과 칠성탱 간판을 내걸고 있으나 원래 이름은 칠성각이다.

▲  칠성각 산신탱과 칠성탱(오른쪽)
칠성 식구를 가득 머금은 칠성탱은 1938년에 그려졌다.

▲  밑에서 바라본 무량수전(無量壽殿)

동별전 구역 북쪽 높은 곳에 들어앉은 무량수전은 앞서 극락전처럼 아미타불의 거처이다. 이
미 극락전이 있어 그를 봉안했음에도 뜻도 비슷한 별도의 무량수전까지 두어 그의 공간을 또
마련했다. 아마도 나중에 아미타도량를 칭하고자 미리 밑밥을 닦아놓는 모양이다.


▲  무량수전 옆 3층석탑과 관불의식의 현장
하얀 피부의 키 작은 3층석탑 앞에도 관불의식의 현장이 차려졌다. 대웅전과
극락전은 사람이 조금 있었으나 여기는 조금 구석이라 썰렁했다.

▲  무량수전 아미타3존상과 붉은 닫집

▲  동별당(東別堂)


▲  관음전에서 바라본 동별당 방향
기와집이 첩첩히 둘러진 동별당은 청량사가 동쪽으로 확장되면서 닦여진
공간으로 요사, 선방, 공양간 등을 지니고 있다.

▲  관음전
2층짜리 팔작지붕 집으로 건물 외벽을 돌로 견고하게 장식했다.
관음전 공간은 2층이며, 1층은 요사(寮舍) 등으로 쓰인다.

▲  관음전 내부

청량사 경내를 30분 정도 말끔하게 둘러보니 다시 시장기가 피어오른다. 이미 연화사에서 배
부르게 공양밥을 섭취했는데도 말이다. 하여 이곳의 초파일 인심도 확인할 겸, 공양밥 섭취를
문의하니 동별당 지하층으로 가라고 그런다. (처음에는 대웅전 주변에 있는 줄 알았음)
하여 그곳으로 내려가니 공양시간은 20분 전에 끝났다고 그런다. (그때가 14시 20분) 허탈해
하며 발을 돌리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남은 백설기를 1개 건네준다. 하여 그것으로 이곳의 인
심을 조금 느끼고, 관음전을 잠시 둘러본 다음 청량사와의 짧은 첫 인연을 마무리 지었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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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원찰로 지었다고 전하는 회기동 연화사 ~~~ (월계동 기원사)

 


' 석가탄신일에 즐긴 사찰 나들이 ~ 서울 연화사, 기원사 '

▲  연화사 대웅보전

▲  연화사 천수관음도

▲  기원사 대웅전

 


 

평소에도 답사와 출사, 산책 등으로 많은 절집을 들락거리고 있지만 석가탄신일(사월 초파
일, 이하 초파일)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사찰 투어를 벌인다. 그날 하루를 온전히 절
투어에 쓴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도는 아니다. (나는 무교임)
그럼에도 초파일을 챙기는 것은 초파일의 흥겨운 분위기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 공
양밥과 과일, 떡 등 갖은 먹거리까지 풍성하여 그 흥겨움을 더해주며, 특히 평소에는 개방
을 꺼리거나 외지인에게 배타적으로 대해 답사쟁이의 카메라를 무력화시키는 절<주로 문화
유산을 간직한 인지도가 별로인 현대 사찰과 오래된 절들~>도 이날만큼은 대부분 경계심을
푼다. 하여 이때를 이용해 그런 절을 찾아가 문화유산을 아낌없이 친견하고 사진에 담는다.

초파일이 코앞에 아른거리자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울 장안에서 아직 발자국을 남기
지 못한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품은 현대 사찰을 대상으로 정처(定處)를 물색하였다. 초
파일에는 굳이 멀리 나가지 않고 마음 편히 집에서 가까운 서울 시내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들보다 몇 배 이상으로 서울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기 때문에 그런 미답지(未踏地
) 사찰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몇 남지 않은 미답지 사찰을 열심히 쥐어짜니 적당한 절 두 곳이 걸려들었다. 바로
경희대 옆에 자리한 연화사와 월계동의 기원사이다.
연화사는 연산군 시절에 세워진 절로 그 이름은 익히 들었지만 오래된 볼거리가 없는 절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곳에 있는 탱화 여러 점이 2013년에 무더기로 지방문화재로 지정
되면서 관심도 없던 그곳에 슬슬 구미가 오른 것이다.
또한 월계동 기원사는 1980년에 창건된 사찰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가 2점이나 있다.
하여 이들을 먼저 살펴보고 예전에 갔던 오래된 절 여러 곳을 추가로 둘러보기로 했다.


 

♠  경희대 그늘에 자리한 오래된 절집,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던
~ 회기동 천장산 연화사(天藏山 蓮華寺)

▲  활짝 열린 연화사의 정문, 일주문(一柱門)

경희대학교 병원 바로 서쪽에는 연화사란 조그만 절이 자리해 있다. 바로 옆에 큰 덩치를 자랑
하는 경희대 병원 건물이 있다보니 절 건물은 거의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인데, 마치 큰 바위에
붙은 조그만 들꽃 같은 모습이다.

지금은 경희대에 완전히 포위된 외로운 공간이 되었지만 1950년대까지만 하여도 이곳은 소나무
가 무성한 한적한 숲속이었다. 그때는 청량리(淸凉里) 북쪽 영휘원<永徽園, 고종의 후궁인 엄
비의 묘역>에서 오솔길을 따라 절로 들어섰으며, 절 북쪽에는 천장산(141m)이 자리해 연화사와
의릉<懿陵, 조선 20대 군주인 경종의 능>을 감쌌다. 그래서 연화사는 자연히 '천장산 연화사'
를 칭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1955년 종로1가에 있던 경희대(옛 신흥대학)가 이곳으로 오면서 절 바로 옆에 학교 건
물이 들어서게 되었고, 덩달아 주거지까지 조성되면서 절 주변 풍경화는 강제로 180도 달라지
게 되었다. 게다가 연화사를 품었던 천장산은 경희대로 인해 서로 끊어졌고, 절 사방으로 경희
대(경희여중고, 경희대병원)에 완전히 감싸여 외부에서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조계종(曹溪宗) 소속인 이 절은 1499년 폐비윤씨의 묘역인 회묘(懷墓)의 원찰(願刹)로 창건되
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폐비윤씨는 바로 연산군(燕山君)의 어머니로 그 이름을 아주 요란하게
남긴 여인이다.
회묘는 원래 경희대 병원 자리에 있었는데, 억울하게 죽은 어미를 위해 연산군은 1504년 회묘
를 회릉(懷陵)으로 높여 석물을 심고 회묘를 지키는 절을 세웠다. 허나 아쉽게도 연화사의 시
작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원찰의 이름은 아쉽게도 전하지 않는다. (절이 매우 작았던 모양임)

어미를 향한 연산군의 사무친 마음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덧없이 아작이 나버렸고,
연산군 자신은 강화 교동도(喬桐島)로 추방되어 바로 그해 겨울,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어 방치되었고, 연화사 역시 이때 풍비박산이 난 것으로 보인다. 반
정파들은 연산군과 관련된 모든 것을 철저히 깔아뭉개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터만 아련히 전해오다가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의 능인 의릉이 인근 석관동(石串洞)
에 터를 닦으면서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영조(英祖)가 1725년 절을 지어 의릉의 원찰로 삼
은 것이다. 허나 그 원찰의 이름도 전하지 않는다.
1870년대에 이르러 승려 묘련(妙蓮)이 절을 중수했는데 그는 성품이 좋아 인기가 대단했다. 그
래서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 절을 묘련사(妙蓮寺, 또는 묘련암)라 부르니 이때부터 절의 이
름이 역사에 나타난다.

1882년 임오군란 때 파괴된 것을 1883년에 승려 정담(淨潭)이 남화(南化), 완허(玩虛)의 도움
으로
다시 일으켰으며, 이때 궁인(宮人) 박씨와 상궁(尙宮) 최씨, 김씨 등이 시주하여 여러 불
화를 제작했다. 그렇게 중건이 마무리 되자 1884년 10월 '천장산 묘련사 중건기(重建記)'를 남
겼다.
이후 절은 연화사로 이름이 갈렸는데, 그 시기가 정확하지 않다. 다만 1993년 자음(慈音)이 지
은 '천장산 연화사 삼성각 상량문(上樑文)'에는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머무는 곳이 연
화장(蓮華藏) 세계이고, 중생의 근본적 자성(自性)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
아 절 이름을 연화사라 했다'고 적고 있어 연화장 세계에서 절 이름을 따왔음을 귀띔해준다.

1950년대까지 절 주변은 자연에 묻힌 싱그러운 곳이었으나 경희대가 절 옆에 터를 닦으면서 도
심 속의 절이 되어버렸으며, 연화사의 첫 후광(後光)이던 회묘는 1969년 경희대에 밀려 서삼릉
(西三陵)으로 강제 이전되었다.
1990년대까지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미륵전(彌勒殿), 대방(大房), 종각 등의 기와집 건
물이 경내를 이루었으며 극락보전 앞에는 뜨락이 닦여있었고, 경내 뒤에는 약간의 소나무가 운
치를 이루었다. 허나 건물이 낡고 터가 좁아 1993년부터 크게 중수를 벌여 기존의 건물을 부시
고 집약적인 공간인 2층짜리 대웅보전과 삼성각 등을 새로 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미륵전 상
량문'과 '묘련암 중수기(1875년)'가 발견되어 절의 숨겨진 역사 일부가 속살을 드러냈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무애당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2013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칠성도, 천수관음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산신도, 아미
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2호) 등이 있다.
이중 아미타괘불도(阿彌陀掛佛圖)는 1901년 10월 28일에 제작해 다음달 11월 20일에 점안된 것
으로 대은 돈희(
大恩 頓喜)를 중심으로 계은 봉법(啓恩 奉法), 한봉 응작(漢峰 應作), 보암 긍
법(普庵 亘法) 등이 참여해 조성했다. 아미타3존불을 비롯해 가섭존자, 아난존자, 사자와 코끼
리를 탄 문수/보현동자상까지 등장시켰는데, 이는 19세기 중반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했던
괘불 양식이다. 날이 날인지라 괘불(掛佛)의 화려한 외출을 기대했으나 아쉽게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밖에 1880년에 제작된 독성도가 있으며, 지방문화재 불화들은 괘불을 제외하고 상당수 삼성
각과 대웅보전 1층에 포진해 있다.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경내로 인도하는 짧은 숲길
봄이 푸르게 붓질을 한 숲길에 고운 빛깔의 연등이 허공을 메우며
초파일 분위기를 한껏 드높인다.


훤칠하게 솟은 일주문을 들어서 찰라와 같이 짧은 숲길을 들어서면 바로 대웅보전 앞이다. 오
색찬란한 연등이 연화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메우며 초파일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연화사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좁게 경내를 이루고 있는데 그 동쪽에 삼성각과 무애당이 있고
서쪽에는 불교용품과 전통차 등을 파는 건물이 있다. 초파일 분위기를 즐기러 나온 수많은 사
람들로 좁은 경내는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절은 초파일 특수로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  대웅보전 뜨락에서 펼쳐진 초파일 오후 법회

▲  시장통을 이루고 있는 대웅보전 뜨락

대웅보전 뜨락에는 행사용 천막을 가득 지어 전통차 시음과 다도(茶道) 체험, 연등 만들기, 불
교용품 판매, 간식과 음료수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안그래도 좁은 터에 사람까지 많
은데 천막까지 주렁주렁 지었으니 마치 콩나무시루의 버스나 교실을 보는 듯, 공간이 좀 답답
하다.
전통차는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데 조그만 청자 찻잔에 차를 따라준다. 무슨 차였는지는 벌써

터 기억이 가물가물하나 1잔 들이키니 속이 좀 맑아지는 것 같다. 그리고 팝콘은 공짜로 제공
하고 있어 그 기나긴 줄에 동참하여 1봉지를 챙겼다. 그 외에 연등만들기와 다른 간식류는 돈
을 받고 있었다.

▲  무애당(無礙堂)
종무소와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  1993년에 새로 지어진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식구들 <왼쪽부터 산신, 칠성(치성광여래), 독성(나반존자)>

대웅보전 뒷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친숙
한 산신과 독성, 칠성의 보금자리이다. 건물 바로 뒷쪽에는 콘크리트로 다져진 언덕이 있는데
경희대 건물이 높이 자리해 절을 대놓고 엿본다.

삼성각에는 산신과 독성, 칠성을 담은 3개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중 칠성도와 산신도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허나 독성도는 그들보다 나이가 더 많음에도 아직 지정문화
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니 그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그렇다고 독성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도 아니다.


▲  삼성각 석가불과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3호)

삼성각 중앙에는 평온한 미소를 머금은 금동석가불과 고색이 역력한 칠성도가 자리해 있다. 내
가 좋아하는 것이 바로 고색(古色)의 향기이니 내가 그 향기에 이끌려 이제서야 이곳 연화사에
발을 들인 것이다.

칠성도는 치성광여래
(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 칠성
불(七星佛), 칠원성군(七元星君), 노인성(老人星), 삼성(三星) 등 칠성의 주요 식구들이 복잡
하게 담겨져 있다.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이 땅의 토속신앙으로 머
물러 있었는데, 조선 때 불교의 일원으로 쿨하게 흡수되면서 그를 봉안하지 않은 절이 거의 없
을 정도이다.

연화좌(蓮花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칠성도의 주인, 치성광여래는 금륜(金輪)
을 들고 있는데, 양어깨를 덮은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있으며, 좌우 협시보살은 연화좌 위에
반가좌(半跏坐) 형태로 앉아 본존불을 향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그리고 머리에 쓴 관
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 원과 하얀 원이 그려져 있고, 치성광여래 주위로 좌우 대칭되게
배치된 칠성불은 합장한 채 본존불 쪽으로 몸을 향해 있으며, 칠원성군은 각기 홀을 들거나 합
장한 채 치성광여래를 향해 서 있다.

이 그림은 구한말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활약한 한곡 돈법(漢谷 頓法)을 중심으로 한명 환조(
漢明 幻照), 두삼(斗三), 태호(太湖), 창호(昌湖) 등이 동참하여 1901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때
아미타괘불도와 지장시왕도, 신중도, 천수관음도가 같이 제작되었다.


▲  삼성각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6호

칠성도 우측에는 산신(山神)과 호랑이, 동자 등 산신 가족을 머금은 산신도가 자리해 있다. 칠
성도만큼이나 고색이 끼어있으나 그와 달리 등장 인물이 단촐해서 보기는 좋다. 언제 제작되었
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923년에 문성(文性)이 산신각을 짓고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
어 이르면 1880년대 후반, 적어도 칠성도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진다.

그림을 살펴보면 중앙에 붉은 옷을 걸친 산신 할배가 크게 표현되어 있는데, 머리에 모자 모양
의 두건을 쓰고 있고, 까무잡잡한 얼굴은 둥근 넓적하며 포근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왼
손에는 깃털로 된 부채를 들고 있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그의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산신 오른쪽에는 그의 비서인 동자 2명이 그려져 있는데, 모두 기물을 들고 서 있으며, 왼쪽에
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민화(속화)풍으로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런데
시중에 돌고 있는 어느 유명한 민화(民畵)의 호랑이와도 많이 닮아있어 혹 그를 참조하여 그린
것이 아닐까 싶다. 하여튼 옛 사람들은 호환(虎患)이라 하여 두려움의 대상인 호랑이를 고양이
처럼 친근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짙었다.

산신 뒤에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있는데, 노송과 길게 떨어지는 폭포를 그려 심산유곡(深山
幽谷)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  삼성각 독성도(獨聖圖)

칠성도 좌측의 독성도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를 담은 그
림으로 아줌마 자세로 편하게 앉은 백발의 독성 할배와 그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려져 있다.
비단 바탕에 채색된 것으로 1880년에 제작되었으며, 삼성각에 깃든 3개의 탱화 중 가장 오래되
었다.


 

♠  연화사의 심장부, 대웅보전(大雄寶殿)

▲  연등을 두룬 대웅보전

연화사의 법당인 대웅보전은 1993년에 지어진 지상 2층, 지하 1층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하
는 선방(禪房)과 공양간, 2층은 대웅보전, 1층은 강당(講堂)으로 작은 절에 걸맞게 집약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를 보고 싶다면 1층을 기웃거리면 되며 시장기
가 있다면 지하로 내려가면 된다.


▲  대웅보전(2층) 내부

석가불이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좌우로 대동하며 자리해 있고, 영산회상
도(靈山會相圖)를 비롯한 후불탱 3점이 그들을 든든하게 받쳐준다. 그들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떡과 과일 등 온갖 음식들로 상다리가 아작날 지경인데, 음식을 쳐다보며 입맛만 다실 뿐, 먹
을 수도 손을 댈 수도 없다. 그러니 음식 모두 승려와 신도의 뱃속으로 고스란히 들어간다. 하
여 때만 잘맞으면 저 음식들을 얻어먹을 수 있다.
허나 이번에는 그런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승려와 절에서 일하는 신도의 허락 없이
마구 집어먹지는 말자~~! 그건 제사음식을 마구 집어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연등이 알록달록 그늘을 드리운 대웅보전(2층) 앞부분
대웅보전 가운데 칸 앞에서는 아기부처에게 물을 끼얹는 관불(灌佛)의식이
열리고 있었다.

▲  관불의식을 기다리는 사람들

대웅보전 2층 앞에는 초파일을 맞아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된 관
정대(灌頂臺)에 우뚝 서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관정대 옆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줌마 신도가 관정을 도와주고 있는데 날도 날인지라 한
번 관정을 해봐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하여 기나긴 관불의식 행렬에 동참하여 아기부처를 시
원하게 냉수마찰을 시켜주었다. 물을 맞은 그의 표정이 잠시 빙그레 환해진 듯 싶었는데 햇님
이 퇴근하고나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에 봉인되어 내년 초파일까지 기나긴 잠을 자야된다. 그
러니 오늘 실컷 냉수마찰을 받아야 여한이 없을 것이다.

다른 절에서도 관불의식을 많이 해봤지만 이곳
은 의식을 거행한 사람들에게 손수건을 하나씩
나눠주는 미덕을 보여주었다. 수건에는 연화사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빨간 바탕과 파란 바탕
2가지가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적지않은 절(성당과 교회도 그렇고)들이
사세 확장과 돈 벌기에 지나치게 혈안이 되어
있어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데, 절이란 중생을
위해 헌신하며 속세를 위해 모든 것을 베푸는
존재가 되야 한다. 더러운 속세를 정화시키는
한 송이 연꽃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로 초파일
주인의 뜻이며 절의 이름값을 하는 것이다.

 ◀  꽃밭에 선 아기부처, 관불의식의 현장
하얀 코끼리 위에 홍련(紅蓮) 모양의 관정대를
얹히고 그 위에 오른손을 치켜든 아기부처를
세웠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보전 앞뜨락

▲  대웅보전 1층 금동석가3존불과 금동후불목각탱
금동으로 지어진 닫집 안에 금동 피부를 한 석가불이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대동하여 앉아 있고, 그 뒤로 금동으로 도배된 후불목각탱이 자리해 있는데
너무 화사한 나머지 두 눈이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  연화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5호

대웅보전 1층은 강당으로 쓰이고 있다. 중앙에는 금동(金銅)으로 치장된 석가3존불과 후불목각
탱이 자리해 있고, 그 우측 벽에 연화사의 주요 보물인 신중도와 천수관음도, 지장시왕도가 액
자 안에 나란히 담겨져 있다.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과다해 정신을 쏙 빼놓는다.
주로 법당을 지키는 용도로 신중도(신중탱)를 많이 거는데,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위
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좌우측에 대칭으로 자리한 제석천과 범천은 동그란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뒤에 두루
며 머리에 보관(寶冠)을 쓴 채, 두 손으로 꽃을 들고 있으며, 그림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
로 칼로 무장한 팔부중(八部衆)이 있고, 제석천과 범천 주위로 일월대신(日月大神) 등의 천신(
天神)과 산개(傘蓋) 등을 받쳐든 천동(天童),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天女) 등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901년에 수화원 한봉 응작(漢峰 應作)을 비롯해 대은 돈희(大恩 頓喜), 계은 봉법(
啓恩 奉法), 보산 복주(寶山 福珠), 보암 긍법(普庵亘法), 재겸(在謙) 등 12명의 화승(畵僧)이
그린 것으로 이중 계은 봉법, 보암 긍법, 돈법(頓法), 두삼(斗三) 등은 20세기 초 경기도 지역
에서 활약한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과 교류를 가진 화승들이다.
그림의 구도와 형태, 필선, 채색 등이 깔끔하게 처리되었으며, 세부묘사가 정교해 19세기 중반
이후 화풍 흐름을 잘 보여준다.


▲  연화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6호

신중도 옆에 자리한 지장시왕도는 가운데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
道明尊者),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신중도 만큼이나 정신없
어 보이는 이 그림은 언제 그려졌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연화사 불화가 대거 조성되던 1901년에
슬쩍 제작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림을 살펴보면 지장보살은 수미단(須彌壇) 위에 마련된 연화좌에 결가부좌로 앉아있으며, 투
명한 흑색두건을 쓰고 오른손에 보주(寶珠), 왼손에 육환장(六環杖)을 들고 있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고, 지장보살의 신광(身光)
좌우로는 온갖 모습의 시왕이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는데 시왕 뒤에는 8곡병(曲屛)이 들러져
있으며 광배는 금박을 붙여 장식했다.
이렇게 광배를 금색으로 처리한 수법은 구한말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그림의
인물표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두옥졸(牛頭獄卒)과 마두옥졸(馬頭獄卒) 등 인물의 상호에
표현된 음영법이다. 이 음영법 역시 19세기 이후 서울, 경기 지역 불화에서 많이 보인다.

이 그림은 1867년에 경선당 응석이 그린 낙산 보문사(普門寺, ☞ 관련글 보기)의 지장시왕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서울 청룡사(靑龍寺) 지장시왕도와 유사하며, 구한말에 서울, 경기 지
역 지장시왕도의 도상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작품으로 채색 및 인물 표현에서도 19세기 양식
이 잘 반영되어 있다. 하여 이를 통해 서울 지역 불화유파(佛畵流派)의 사승(師僧)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  연화사 천수관음도(千手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4호

대웅보전 1층에서 특히 눈여겨볼 그림은 바로 천수관음도이다. 지금이야 천수관음을 담은 그림
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정작 오래된 천수관음도는 이 땅에 매우 드물게 남아있다. 그 희귀한
그림이 무려 연화사에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한봉 응작, 보산 복주, 청암 운조(淸菴 雲照) 등이 1901년에 그린 것으로 바다 중앙
에 봉긋 솟은 연화좌 위에 천수관음이 붉은 색 바탕의 옷을 걸치며 앉아있다. 그는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과 경책(經冊)을 받쳐든 4비(臂)를 비롯해 40비를 갖추고 있는데, 그의 커다란 광배
안에는 무려 1,000개의 손과 눈을 그려놓아 관음보살의 위엄을 한층 드높였다. 신중도와 달리
등장인물은 달랑 1명이지만 그의 찬란한 광배로 인해 이 그림 또한 혼을 다 빼놓는다.

연화사 천수관음도는 고려와 조선 전기 천수관음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수월
관음도(水月觀音圖)의 도상까지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1925년에 제작된 대산사 천수관음
도가 연화사 천수관음도에서 계승을 받으니 그 가치는 꽤 크다. 특히 관음보살의 얼굴은 살이
많고 이목구비가 단정해 경선당 응석의 영향을 조금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  옆에서 바라본 천수관음도의 위엄

▲  대웅보전 1층 천정을 가득 수놓은 조그만 연등의 앙증맞은 물결

▲  연화사 공양밥의 위엄

연화사는 절이 조그만하여 정말 5분이면 다 보고도 남겠지만 이곳에 깃든 문화유산과 신이 나
는 초파일 분위기에 너무 취해있다 보니 1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다시는 안와도 될 정도로 경
내를 살폈지만 만나기가 꽤 까칠한 괘불을 친견하지 못했으니 그를 보기 위해서라도 나중에 또
인연을 지어야 될 것 같다. 그래도 그를 제외하면 계획한 바를 모두 누렸으니 오늘은 이 정도
로 충분하다.

초파일에 절에 왔다면 공양밥은 반드시 먹어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지금까지 눈과 마음을 지겹게 호강시켜주었으니 이제는 입과 뱃속을 달래줘야 된다. 시간
도 점심 시간을 지난 상태라 뱃속에선 밥달라며 난리를 친다. 그래서 공양(供養)을 먹고자 공
양간이 있는 대웅보전 지하로 내려갔다.
방에는 이미 사람들로 거의 만원, 연화사에서 정성을 다해 준비한 공양밥 1그릇을 들고 적당한
곳에 앉아 즐겁게 공양에 임한다. 이곳 공양밥은 호박과 김치, 무생채 등 갖은 나물을 밥에 넣
고 고추장으로 비벼먹는 이 땅에 흔한 공양밥 스타일이다. 딱히 개성은 없으나 절을 열심히 둘
러보고 먹는 밥이라 정말 꿀맛이다.
그렇게 공양을 마치고 잠시나마 정든 연화사를 나왔다. 나에게는 그날 연화사가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 회기동 연화사 찾아가기 (2017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경의중앙선 회기역(1번 출구)에서 동대문구 마을버스 01번을 타고 의료원입구
  4거리 하차<거리가 가까워 도보로 가도 상관없음, 도보 9분>  길 맞은편(서쪽) '경희대로3길
  '로 들어서 쭉 가다가 CU경희스타점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연화사이다.
* 서울시내버스 201, 273번을 타고 경희대입구 하차, 도보 7분 (경희대병원 서쪽에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109-1 (경희대로3길 56 ☎ 02-962-6186)


 

♠  법등의 역사는 매우 짧으나 오래된 보물 2점을 간직한
조그만 절집 ~ 월계동 영축산 기원사(祈願寺)


▲  기원사 정문

연화사를 둘러보고 젊은 층으로 번잡한 경희대 주변을 벗어나 회기시장으로 나왔다. 여기서 광
운대역(옛 성북역) 부근에 있는 기원사를 가고자 서울시내버스 261번(석관동↔여의도)을 타고
월계3거리에서 하차, 월계동(月溪洞) 주택가를 가로질러 오르막길을 오르면 그 길(광운로17길)
의 끝에 기원사가 문을 활짝 열며 중생을 맞는다.

기원사는 일주문을 두지 않고, 절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기와 담장에 정문을 내어 마치 교외
에 자리한 별장이나 커다란 한식당에 들어선 기분이다.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창고와 해우
소를 갖춘 기와집이 있고, 정면에 뜨락과 팔작지붕을 지닌 2층 기와집이 있다. 그 건물은 요사
와 선방, 종무소, 공양간을 갖춘 복합 공간으로 그 앞에서 오른쪽(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보이
지 않던 대웅전이 고개를 내민다.
대웅전 뒷쪽으로 가면 수풀이 우거진 쉼터와 석굴 모양의 삼성각이 있는데, 여기가 경내의 끝
이다. 절의 규모는 꽤 조촐하나 앞서 연화사보다 터가 좀 너르며, 건물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고 주변이 확 트여있어 체감상 더 넓게 보인다. 반면 연화사는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주
변이 경희대 건물에 포위되어 있어 좀 답답한 구조이다.


▲  기원사에서 바라본 월계동 지역

월계동 주택가 뒷쪽이자 영축산(靈鷲山)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기원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비
구니 절집이다. 이 땅에 흔한 현대 사찰의 하나로 없는 것이 없다는 인터넷 조차도 고개를 갸
우뚱거릴 정도로 정보도 거의 없고 인지도도 낮다. 서울을 거의 꿰고 산다는 나도 기원사의 존
재를 안 것은 채 몇 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 절을 내가 이렇게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 2점을 보기 위함이다.
그들의 소환(?)을 받아 발을 들인 기원사는 그런데로 절집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바로
뒤에 월계근린공원으로 포장된 영축산이 있어 산사의 분위기도 어느 정도 풍기고 있다. 주택가
와 영축산 숲이 경계를 이룬 곳에 절이 둥지를 튼 것이다.

그렇다면 기원사는 언제 창건되었을까? 인터넷에 관련 정보가 좀처럼 걸려들지를 않아 나중에
기원사를 다시 찾아 창건송덕비를 살펴보았다. 그것이 바로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이 절은 1980년에 함경남도 성천군(成川郡) 출신인 한혜숙(당시 60대)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지었다. 그러니 그가 기원사의 창건주(創建主)가 된다. 절이 세워지자 승려 지연(知淵)이 주지
승이 되어 절을 꾸렸으며, 오래된 독성도와 산신도를 입수하여 절의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
았다.
현재 법당인 대웅전을 위시해 요사, 삼성각 등 4~5동의 건물이 경내를 채우고 있으며, 비구니
절이다보니 경내가 정갈하고 깔끔하다.

기원사를 품은 산의 이름은 영축산이다. 해발 96m의 조그만 동네 뒷산으로 월계동 한복판에 벌
러덩 누워있는데, 그 이름이 공교롭게도 불교에서 매우 좋아하는 산 이름이다. 부처가 설법을
했던 산이 바로 영축산(영취산)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름의 산에는 절이 꼭 있기 마련이라<통
도사(通度寺)를 품은 산 이름도 영축산> 혹시 기원사가 이름이 전하지 않는 옛 절터에 지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다.
오래된 절도 없는 산이 왜 영축산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원사가 들어선 이
후 절에서 그 산을 '영축산'으로 부르면서 그것이 자연히 퍼져 얼떨결에 산의 이름으로 정착된
것이 아닐까 싶다.


▲  남쪽을 바라보는 기원사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그 주변을 돌난간으로 둘렀다. 겉으
로 보면 1층이지만 엄연한 2층으로 밑층을 반지하 형태로 먼저 깔고 그 위를 돌로 덮어 대웅전
을 올렸다. 밑층에는 신도들의 공간과 창고가 있다.

▲  영축산 기원사 창건 송덕비(頌德碑)
창건주 한혜숙을 기리는 송덕비이다.

▲  대웅전 뒷쪽에 마련된 그늘진 쉼터
자연에 둘러싸인 포근한 공간이다.


▲  대웅전 계단 옆에 마련된 관불의식의 현장

불교의 큰 대목인 초파일임에도 경내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보니 관불의식 현장도 꽤
나 한산했는데 다른 절들은 그 의식의 현장을 하나만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계단 좌우로 2개나
배치했다.
꽃에 감싸인 아기부처는 물기가 마를 정도로 따분한 시간을 보내며 아까운 초파일 시간을 부질
없이 죽이고 있지만 천진난만한 미소만큼은 잃지 않았으며, 그의 곁에는 하얀 피부의 보시함이
놓여져 애타게 돈을 원한다.


▲  대웅전 석가불과 붉은 색채의 석가후불탱
붉은 닫집 밑으로 이글거리는 모습의 광배(光背)를 두룬 석가불이 홀로 앉아
미소를 머금으며 중생들이 헌상한 음식을 바라본다.

▲  하늘에 칠해진 4가지의 색깔, 대웅전 뜨락을 가득 채운 네모난 연등
다른 절들은 보통 동그란 연등을 매달지만 이곳은 네모난 연등으로
절의 하늘을 훔쳤다. (정문과 요사 주변은 동그란 연등을 달았음)

▲  연등이 주렁주렁 매달린 대웅전 옆구리 돌담길
돌담 너머는 영축산 숲으로 경내에서 산으로 넘어가는 길은 없다.

대웅전 뒷쪽에 숨겨진 삼성각은 2004년에 지어
졌다. 지형을 이용하여 다진 석굴(石窟) 모양
의 돌집으로 건물 내부와 천정, 문은 나무로
손질했으며 문 앞에는 머리를 2갈래로 묶은 조
그만 문수동자상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삼성각
을 지킨다.

건물 내부 중심에는 산신이, 방 좌우에는 독성
과 칠성이 한 자리씩 차지하며 중생들의 인사
를 받고 있는데, 산신의 공간이 유독 넓고 그
위로 높게 동그란 천정을 내어 산신이 사실상
삼성각의 주인임을 알려준다. 바로 이 건물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산신도와 독성도가 있으
니 꼭 살펴보도록 하자.

▲  삼성각과 귀여운 문수동자상


▲  기원사 독성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2호

독성도는 천태산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을 담은 그림이다. 소나무 밑에 앉은 독성은
시선을 오른쪽(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향해 있는데 오른손은 무릎에 놓았으며, 그의
허전한 머리 뒤에는 하얀 광배가 그를 비춘다.
그는 빨간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법의(法衣)를 입었는데, 옷 끝단에는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으
며, 그의 오른쪽에는 나무 밑둥치가 있고 바로 그 위에 세발향로가 얹혀져 있다. 소나무 그늘
위로 하얀 구름이 흘러가며 그 사이로 푸른 하늘과 붉은 햇님이 살짝 모습을 비춘다.

그림 우측 하단에 화기(畵記)가 있지만 푸른 안료로 덧칠을 하는 통에 판독이 불가능하게 되었
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조성되었는지는 오리무중(五里霧中)에 감싸인 상태로 '供養(공양)','
圓(원)' 등 몇 자만 겨우 확인이 가능하다. 허나 붉은색과 녹색을 주조로 하얀색과 청색을 같
이 사용하는 색채감과 구도는 19세기 중반 이후 불화에서 많이 나타나 19세기 중/후반에 조성
되었음을 귀띔해주고 있으며, 제자리를 잃고 이리저리 떠돌다가 20세기 후반에 기원사에 안착
하여 이곳의 듬직한 후광이 되었다.


▲  기원사 산신도와 석조 산신상

▲  기원사 산신도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5호

독성과 칠성은 그림만 걸려있지만 산신은 그림 외에 돌로 만든 산신상까지 갖추고 있어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어흥~! 거리는 호랑이를 옆에 끼고 앉은 석조 산신상 뒤에는 독성도와 더불
어 이곳의 오랜 보물인 산신각이 걸려있다.

그림 중앙에는 붉은 도포와 푸른 두건을 걸친 산신이 하얀 부채를 들고 앉아있다. 머리는 좌우
만 조금 남은 대머리로 수염이 무성하며, 그 옆에는 산신의 비서인 동자와 여인이 주전자와 찻
잔을 들며 서 있다. 보통 산신도에는 동자만 나오기 마련인데, 산신의 마음을 읽었는지 여자까
지 등장을 시켰다. 호랑이는 산신 맞은편에서 산신을 바라보며 어흥~! 거리고 있는데, 아마도
산신이 제때 밥을 주지 않아 항의하는 모양이다. 보통 호랑이가 산신 뒤나 옆에 있기 마련이지
만 여기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산신 옆에는 소나무가 있고 구름과 해가 소나무를 감싸고 있는데, 굵은 줄기에 태점을 찍고 옅
은 수묵을 사용하여 줄기를 표현해 오래된 노송의 질감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명도가 높은 청
색을 사용하고 손발에 음영법이 쓰이는 등 19세기 말 이후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독성도와 달리 그림 밑부분 좌측에 화기가 남아있어 그의 정보를 소상히 알려준다.
화기에 따르면 을유년(1885년) 5월 1일에 조성되어 전라남도 나한산 사태암(어딘지 모르겠음)
에 봉안되었다. 그런데 전라남도란 명칭은 1896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니 아마도 화기를 그 이
후에 작성하거나 수정한 것 같다. 1885년에는 전북, 전남, 제주도가 모두 전라도였기 때문이다.
금어 우곡(雨谷)과 수산 근혜(守山謹惠) 등이 그림을 그렸고, 시주는 식성(湜惺) 등이 했으며,
어찌된 영문인지 제자리를 잃고 천하를 방황하다가 기원사에 흘러들어와 안착을 하였다.

◀  나이가 한참 어린 칠성도
독성도와 산신도에만 한참 눈이 가있다 보니
칠성도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  기원사 공양밥의 위엄

열심히 경내를 둘러보니 다시 시장기가 엄습한다. 부지런히 일을 마쳤으니 공양 1그릇 들고 가
야 되겠지. 하여 이곳의 인심도 확인할 겸, 요사 공양간을 찾았다. 시간이 15시가 넘었지만 밥
은 아직 제공되고 있었다.
밥그릇에는 갖은 나물이 버무려져 있었는데, 밥주걱이 부러지도록 밥을 담고 고추장을 푼 다음
오뎅국이 든 그릇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절에서 차려준 공양 자리는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서 자리가 여의치 않았으나 비구니의 배려로 요사 1층에 들어가 다시금 즐거운 공양
시간을 가진다.

이곳 공양밥도 연화사와 마찬가지로 비빔밥이다. 밥과 콩나물, 무생채, 고사리 등 온갖 나물에
고추장을 넣어 빨갛게 해먹으면서 되는데, 특이하게 무와 오뎅, 미역이 든 오뎅국도 제공해 주
었다. 그렇데 공양을 마치고 그릇을 반납하니 뜨락에서 음료수와 솜사탕, 얼음 슬러시를 제공
하고 있었다. 그래서 슬러시 1컵 받아 먹으며 후식까지 채웠다.
이렇게 기원사의 훈훈한 인심을 체험하고 잠시나마 정든 그곳을 뒤로 한 채, 유독 짧아보이는
초파일의 낮을 원망하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콩 볶듯 길을 움직였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 월계동 기원사 찾아가기 (2017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광운대역(1,2번 출구)에서 광운대 방면으로 가면 월계3거리이다. 3거리를 건너
  서 광운대 쪽으로 직진하면 기원사를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나온다. 그 이정표를 따라 들어
  가다가 광운로17길로 진입하여 직진하면 그 길의 끝에 기원사가 있다. 단 길이 조금 복잡해
  초행인 경우 햇갈릴 수 있으니 감이 잡히지 않으면 주민들에게 문의한다.
* 서울시내버스 261, 1017, 1137, 1140번 시내버스를 타고 월계3거리 하차, 도보 6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1동 392-106 (광운로17길 48-47, ☎ 02-918-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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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5월 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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