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자방아'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0.03.20 삼일절과 6월이면 생각나는 그 사람, 예산 윤봉길의사 유적 나들이 (저한당, 도중도, 충의사, 보부상유품전시관)
  2. 2019.01.17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 (양주성 금속비, 용궁사, 소원바위, 백운산둘레길)
  3. 2015.12.12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강원도의 지붕, 정선 나들이 (아라리촌, 정선5일장, 아우라지)

삼일절과 6월이면 생각나는 그 사람, 예산 윤봉길의사 유적 나들이 (저한당, 도중도, 충의사, 보부상유품전시관)

 


'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나들이 '


▲  윤봉길이 태어난 광현당

▲  저한당

▲  윤봉길이 남긴 글씨들

 


 

차디찬 겨울 제국과 따스한 봄의 팽팽한 경계선인 3월 초의 어느 평화로운 날, 충남 홍성
과 예산(禮山)을 찾았다.
충남의 금강산으로 추앙받고 있는 용봉산(龍鳳山, 381m)을 둘러보고 덕산(德山)으로 나와
늦은 점심으로 얼큰하게 육개장을 섭취했다. 용봉산을 크게 1바퀴 돌아 몸이 좀 피곤했으
나 일몰까지는 시간이 넉넉하여 수덕사(修德寺)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윤봉길 의사 유적(
충의사)의 문을 두드렸다.

윤봉길(尹奉吉) 의사 유적은 그가 자란 저한당을 비롯해 도중도의 광현당과 부흥원, 윤봉
길 의사 기념관, 충의사, 그의 부인인 배용순 여사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에
윤봉길과는 관련은 없지만 보너스로 보부상유품전시관도 있다.

윤봉길 의사 유적은 통째로 사적 229호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예산 윤봉
길 의사 유적이다. 이곳을 둘러보는 순서는 각자의 취향대로 하면 되나 나는 저한당을 시
작으로 도중도와 부흥원, 윤봉길의사 기념관, 보부상유품전시관, 충의사, 배용순 여사 묘
역 순으로 둘러봤다.


▲  옛 국도변에 자리한 저한당 서쪽 돌담길


 

♠  윤봉길 의사(義士)가 성장기를 보냈던 저한당(狙韓堂) 주변

▲  저한당

저한당은 윤봉길(1908~1932) 의사가 1911년부터 1930년 봄까지 살았던 집으로 1911년에 가족
을 따라 도중도에서 저한당으로 이사를 왔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이듬해 3.1
운동이 터지면서 왜정(倭政)의 식민지교육을 거부하며 학교를 그만두었다. 하여 동생인 윤성
의(尹聖儀)와 함께 한학(漢學)을 공부했는데, 워낙 영특하여 15살 때 천재로 칭송을 받았다.
(나는 그 나이 때 뭐했나...?)
1921년부터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계속 한문학을 익혔으며, 1926년에 집에 서당을 차
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새로운 문물을 틈틈이 익혔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공동묘지 묘표(墓
標) 사건이 발생하니 사연은 다음과 같다.

서당에서 평화롭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어느 날, 글을 모르는 청년 하나가 마을 인근 덕
숭산(德崇山) 공동묘지에 있는 팻말을 모조리 뽑아들고 와서 자기 아비의 묘비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부탁에 묘비를 찾아주긴 했으나 문제는 그 청년이 아버지 묘비는 물론이고 다른
묘비까지 아무런 표시도 남기지 않은 채, 죄다 뽑아 온 것이다. 그러니 어찌 묘비의 위치를
알 수 있겠는가?
이에 큰 충격을 먹은 윤봉길은 아이들보다 청년들의 교육이 시급함을 깨닫고 야학회(夜學會)
를 창설해 지역 주민들의 문맹퇴치에 나섰다. 또한 민족의 경제자립이 자주독립의 지름길임을
인식하고 구매조합(購買組合) 조직과 양계(養鷄), 양돈(養豚) 등을 장려하여 농촌 경제자립운
동을 펼쳐나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18세에 불과했다. 나는 그 나이 때 학교에서 잠만
열라게 잤는데, 역시 위인은 떡잎부터가 다르긴 다른 모양이다.

1927년에는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짓고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였으며, 1929년에는 도중도에
부흥원(復興院)을 만들고 매월 14일에 계몽강연회(啓蒙講演會)를 개최하여 농촌계몽에 발벗고
나섰다. 그리고 그해 2월 18일에는 부흥원 주관으로 학예회(學藝會)를 열고 촌극(寸劇)인 '토
끼와 여우'를 공연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와 구경하면서 매우 성공리에 막을 내렸
다. 바로 이 연극 때문에 왜정은 그를 은밀히 감시하게 된다.
1929년에는 월진회(月進會)란 농민 단체를 만들어 회장이 되었고, 수암체육회(修岩體育會)를
조직해 농민의 단결과 애국사상 고취에 나섰다. 허나 왜정은 그런 행동이 독립운동이라며 쓸
데없이 꼬투리를 잡았다. 하여 왜경(倭警)에 여러 차례 불려가 조사를 받았는데, 윤봉길은 독
립운동이 아닌 단순한 교육이라고 했지만 왜정은 무조건 독립운동이라며, 더 이상 하지 말라
고 강요했다. 농민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것까지 왜정이 쓸데없이 태클을 거니 그는 이곳에서
의 활동도 한계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다.
그래서 1930년 3월 6일, 그 유명한 7글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는 집을 나
가서 그 뜻을 이룰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이란 시를 남기고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윤봉길은 부인과 2남 1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1932년 상해 의거(義擧) 이후 왜정의 감시와 탄
압 속에 눈물과 독립에 대한 의지로 이 집을 지켰고, 해방 이후에도 계속 이곳에 살다가 1972
년 윤봉길 의사 유적을 몽땅 국가 사적으로 삼으면서 국가에서 집을 매입해 성역화 작업에 들
어갔다. 그래서 그해 8월 유족들은 정든 집을 떠나 인근으로 이사갔으며, 1974년 집을 중수했
다. 지금도 관리가 지극정성이라 마치 여인네들이 살고 있는 듯, 집이 매우 깨끗하다.

남쪽을 바라보며 선 저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초가(草家)로 오래된 마을과 민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가이다. 1911년에 지어진 것으로 창고와 부엌으로 쓰이는 'ㄱ' 모양의 건
물과 방 2개가 딸린 건물 등 부속 건물 2채(담장 밖에 뒷간을 포함하면 3채)를 거느려 총 3채
가 한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제법 규모가 있는 집이다.
건물에 딱히 특별한 부분은 없으나 윤봉길의 오랜 손때가 묻어있고 그의 독립의식과 민족의식
이 담긴 터전으로 유서가 깊으며, 그의 유가족이 오랫동안 살았던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집의 이름인 저한당(狙韓堂)은 한국을 건져낸다는 뜻이니, 즉 우리나라를 왜정에서 건져
내 독립을 이루고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담겨 있다.

* 저한당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5 (덕산온천로 182-10)


▲  돌담에 둘러싸인 저한당 외경

▲  저한당으로 인도하는 대문
두 부속건물 사이로 조촐하게 담을 만들고 문을 내어 정겨운 모습을 자아낸다.

▲  방 2개와 광으로 이루어진 부속건물

▲  창고와 부엌

▲  저한당 뒤쪽 장독대

▲  뒷간과 소나무

▲  글씨가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저한당 현판

▲  주인이 가고 없는 저한당 방


▲  저한당에 봉안된 잘생긴 윤봉길 의사의 영정

▲  윤봉길 의사 동상

▲  윤봉길 의사 의거 기념탑

저한당 주변에는 오른쪽 주먹을 쥐며 독립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윤봉길 의사의 동상과 1965
년에 세워진 의거 기념탑, 교육관 등이 있으며 나무가 많고 잔디가 곱게 깔려 정갈한 분위기
를 자아낸다. 그리고 그 주변을 기와 돌담으로 빙 둘러 속세와 성역의 경계를 그었다.


▲  저한당 주변
심술쟁이 겨울도 그를 흠모하는 것일까? 저한당에서 좀처럼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천하만물을 위해 빨리 떠나주면 좋으련만~~

▲  도중도로 이어지는 저한당 동쪽 돌담길
지긋한 전통마을의 돌담길처럼 정겹기 그지 없다.


 

♠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고 농민계몽을 위해 힘쓰던 현장
도중도(島中島)

▲  도중도 광현당 정문

저한당을 둘러보고 남쪽으로 나오면 대치천이라 불리는 개천이 나온다. 그 개천에 걸린 '도중
도교'를 건너면 윤봉길이 태어나고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도중도 구역에 들어서게 된다.

도중도는 윤봉길의 증조부 때부터 정착해 살던 곳으로 1908년 6월 21일 광현당에서 윤황(尹璜
)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경주김씨인 김원상(金元祥)이며, 본관은 파평 윤씨, 본명은
우의(禹儀)이다. 봉길이란 이름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梅軒)이다.

그는 여기서 1911년까지 살다가 북쪽 저한당으로 이사를 갔으며,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야학
회를 비롯해 계몽강연회,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도중도란 이름은 '조선반도 속의 섬, 조선
반도 가운데의 섬으로 왜인(倭人)이 절대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란 뜻에서 윤봉길이 지은 것
으로 예전에는 순 100% 섬이었지만 도중도교 서쪽 개천에 흙으로 둑을 닦아 그 밑으로 물을
흘려보내면서 99% 섬이 되버렸다. 큰 강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고 조촐한 개천 안에 이런 커
다란 섬이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할 뿐이다.

도중도에는 윤봉길의 체취가 서린 광현당과 부흥원이 있고, 무궁화(無窮花)를 비롯해 온갖 야
생화를 심은 무궁화학습원이 부흥원 동쪽에 있다. 하늘을 향해 곧게 솟아난 전나무길이 곳곳
에서 운치를 자아내며, 섬 동쪽에는 씨름장과 그네, 급수대, 쉼터를 갖춘 넓은 잔디밭이 있어
소풍이나 나들이로 잠시 쉬었다 가기에 좋다.
또한 섬 주변을 개천이 둘러싸고 있으며, 섬 남쪽에는 물을 모아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었
다. 하여 여름에 오면 연꽃의 화려한 향연에 그야말로 두 눈이 환장할 지경이다.

* 도중도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80-1 (시량부흥길 21)


▲  넓은 공원 분위기의 도중도 내부

▲  광현당 서쪽에 자리한 매헌 윤봉길 유허비(遺墟碑)

▲  광현당(光顯堂)

도중도 가운데에 자리한 광현당은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곳으로 저한당과 마찬가지로 초가이
다. 이 집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정착한 증조부(曾祖父)인 윤자 때부터
살았다고 하며, 조선 후기 초가로 광현당이라 불리는 본당 외에 3채의 건물을 거느리고 있다.

윤봉길은 여기서 1911년까지 살다가 북쪽에 새롭게 장만한 저한당으로 이사를 갔고, 이후 그
의 친척이 잠시 살다가 버려진 이후 나라에서 매입하여 1974년에 복원해 지금에 이른다. 저한
당과 마찬가지로 관리가 잘되어 있어 마치 사람이 살고 있는 듯 깨끗하며, 광현당이란 이름은
윤봉길을 빛으로 비유해 그의 태어남을 높이는 뜻에서 지어진 것이다.

▲  광현당 대문과 펄럭이는 태극기

▲  적막이 감도는 광현당

▲  광현당 부엌
부엌이 양쪽으로 개방되어 있다.

▲  광현당 현판의 위엄
글씨가 마치 물이 흐르는 듯 생기가 넘쳐
보인다.

▲  담장을 두른 광현당 뒷모습

▲  우진회기공비(禹進會記功碑)

우진회는 1944년 2월 15일 윤봉길의 4촌과 6촌, 제자들이 만든 단체로 윤봉길이 만든 월진회
를 계승했다. 1946년 4월 29일 월진회로 이름을 갈았으며, 2011년 4월 29일 윤봉길 문화축제
때 우진회의 업적을 기리고자 광현당 앞에 기공비를 세웠다.


▲  부흥원 옆에 자리한 연자방아
윤봉길이 농촌계몽운동 때 사용했던 연자방아로 지금은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신세가 되었다.

▲  윤봉길이 농촌계몽운동 때 사용한 여러 농사 도구들

▲  부흥원 뒤쪽에 그림처럼 펼쳐진 전나무 숲길

▲  부흥원(復興院)

광현당 동쪽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자리한 부흥원은 1928년에 윤봉길이 세웠다. 공동묘지 묘
표사건에 크게 충격을 먹은 윤봉길은 야학당을 만들어 저한당 사랑방에서 운영했는데, 참여
인원이 늘어남에 따라 도중도에 부흥원을 만들고 1928년 2월 25일에 자필로 대들보에 글씨를
새겨 상량식(上梁式)을 가졌다. (대들보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있음)
그는 이곳을 3대 목표운동의 장으로 삼았는데, 그 3대란 무지 타파, 가난 타파, 단결이다. 무
지(無知) 타파를 위해 야학과 독서회, 학예회를 벌였고, 가난 타파를 위해 농촌 공동구매와
저축, 생활 개선을, 단결을 위해 월진회와 수암체육회, 공동작업과 공동식수 작업을 벌였다.
그의 개혁적인 활동에 왜정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태클을 걸자 바로 여기서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으며, 상해 의거 이후 폐허가 되었다가 1974년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  부흥원 현판의 위엄
부(復)가 마치 도(渡)처럼 보인다.

▲  아직은 황량한 무궁화학습원

▲  겨울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그네

▲  도중도 남쪽에 조성된 연꽃 연못


 

♠  윤봉길 의사 기념관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앞 (왼쪽에 보이는 집은 보부상유품 전시관)

충의사 남쪽(저한당 북쪽 길 건너편)에 자리잡은 윤봉길 의사 기념관은 1973년부터 1977년까
지 진행된 윤봉길 유적 성역화 사업 때 관리사무소와 함께 세워졌다. 이후 2001년 기념관 옆
에 윤봉길의 어록(語錄)을 담은 윤봉길어록탑을 만들었으며, 2002년에 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그해 12월에 속세에 문을 열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는 윤봉길의 손때가 자욱한 유품 28종 56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윤봉길
일가에서 쓰던 그릇과 서적, 벼루를 비롯하여 그의 찰나(刹那)와 같은 인생을 다룬 영상관과
매직비전 11대, 다오라마 등이 그의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특히 그의 유품(遺品) 중에
회중시계와 지갑, 중국화폐, 도장, 손수건, 안경집, 일기, 월진회창립취지서, 농민독본, 형틀
대, 편지 등은 '윤봉길의사 유품'이란 이름으로 '보물 568-2호, 568-3호'로 지정되었다.

* 윤봉길의사 기념관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19-5 (덕산온천로 183-5, ☎
  041-339-8233)
* 윤봉길의사 기념관 홈페이지는 아래 그릇, 수저, 놋대야 사진을 클릭한다.

▲  윤봉길 일가가 사용했던 그릇과
수저, 놋대야 - 보물 568-3호

▲  윤봉길이 읽은 명심보감과 그가
사용한 벼루와 등잔대 - 보물 568-3호

▲  윤봉길의 글씨 (해석은 각자 알아서)
- 보물 568-3호

▲  윤봉길이 쓴 온갖 서적들
보물 568-3호


▲  윤봉길이 직접 그린 월진회 깃발 - 보물 568-3호
팔방미인이던 윤봉길은 지식 소양도 대단할 뿐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한다.
깃발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무궁화는 마치 뭉개구름 속에서 방긋
피어나는 태양처럼 찬란해 보인다.

▲  부흥원 대들보 - 보물 568-3호
옛 부흥원의 유물로 1928년 2월 25일 부흥원 상량식 때 윤봉길이
대들보에 기념 메세지를 남겼다.

◀  윤봉길이 1930년 만주로 망명할 때 가족들
에게 남겼다는 7글자의 시 - 보물 568-3호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는 집
을 나가서 그 뜻을 이룰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
다)' 물이 흐르듯 유연한 곡선의 서체에 그의
비장함이 엿보인다.


▲  월진회 창립취지서(보물 568-2호)와 통장(보물 568-3호)

1929년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월진회를 만든 윤봉길은 창립 취지서(趣旨書)를 남겨 그 뜻을 천
하에 밝혔다. 월진회 통장은 저축운동을 위해 그가 회원들에게 나눠준 것으로 그가 직접 만들
었다고 하며,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21살이었다. (지금 21살이면 완전 애기인데...)


▲  윤봉길이 1929년에 쓴 기사년일기(己巳年日記) - 보물 568-2호

▲  농민독본(農民讀本) - 보물 568-2호

1927년 농민들을 대상으로 야학당을 운영했을 때 그가 직접 편저한 책으로 모두 3권으로 이루
어져 있다. 지금은 2권과 3권 일부만 남아있으며, 왼쪽 책은 세월의 녹이 검게 그을려져 있다.
책에 수록된 우리나라 지도가 무척 인상적인데, 부산과 왜열도 사이를 조선해협이라 표시했다.


▲  위친계취지서(爲親契趣旨書) - 보물 568-3호
윤봉길이 부모의 상사(喪事) 등을 위해 친척을 중심으로 조직한 위친계의 취지서이다.
나라의 독립과 경제 부흥에 대한 생각이 잘 나타나 그의 높은 의식을 보여준다.

▲  우리의 옛 땅 동북아를 누빈 윤봉길의 위엄
지도에 나온 동북아 일대는 우리의 옛 땅으로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필히
차지해야 될 땅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  윤봉길이 중원대륙에 있을 때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복제품)

▲  윤봉길이 1932월 1월 30일 상해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복제품)
그해 1월에 벌어진 왜군의 상해 침략에 대한 내용이 소상히 나와있다. 왜군이
상해를 공격하자 장개석(蔣介石)의 중국군이 1달 동안 저항했으나
결국 상해를 빼앗기고 많은 중원 사람들이 도륙을 당했다.


1930년 3월 6일, 윤봉길은 가족에게 장엄한 각오가 서린 7자의 시를 남기고 만주로 홀로 길을
떠났다. 그가 떠났다는 소식에 간이 쫄깃해진 왜경은 몰래 미행을 붙이면서 평안북도 선천(宣
川)에서 붙잡고 만다. 하여 45일 동안 옥고(獄苦)를 치르고 바로 만주로 넘어가 그곳에서 그
와 뜻이 같은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을 만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허나 제대로 된 독립운동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이라 1930년 12월 홀로 산동반도 청도(靑道, 칭
따오)로 넘어가 1931년 여름까지 세탁소에서 일을 하며 적당한 자리를 물색했으며, 여기서 번
돈 대부분을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청도도 적당한 곳이 아님을 깨달은 그는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있는 상해로 가야만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1931년 8월 상해로 갔다. 상해에 있는 프랑스 조계(租界)인
샤비루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蒲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머물며 박
진(朴震)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영어를 익혔다. 그렇게 주경야독(
晝耕夜讀)을 하다가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활동을 했고, 그해 겨울 드디어 백범 김구
(白凡 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의 밑에 들어가게 되었다.


▲  윤봉길이 홍구공원 의거 2일 전에 김구에게 보낸 자신의 이력서들
이력서 옆에는 사진에는 빠져있지만 상해에서 사용한 중국제 수첩이 있다.

▲  윤봉길이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면서 찍은 증명사진
(오른쪽은 자필로 쓴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문)

▲  조금은 어설프게 재현된 홍구공원 의거 현장

1932년이 되자 왜국은 왜인 승려 처단 사건을 구실로 상해 사변을 일으켰다. 장개석이 1달 동
안 저항을 했으나 결국 상해를 내주고 말았으며, 상해를 점령한 왜군이 승리에 도취해 왜왕(
倭王) 생일인 4월 29일에 왜왕 생일 축하 및 전쟁 승리 축하 기념식을 상해 시내에 있는 홍구
공원(虹口公園)에서 갖기로 했다.

그 소식을 접한 윤봉길은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김구와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
始榮), 조소앙(趙素昻)에게 자신의 거사 계획을 밝히고 거사를 구상했다. 성공적인 거사를 위
해 채소장사로 가장해 기념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신분을 세탁했으며, 김홍일(金弘一)이
만든 유명한 도시락 폭탄을 준비하고 폭탄 던지는 법을 배워 실수가 없게끔 자신을 채찍질했
다.
드디어 4월 29일 아침, 그는 물통 모양의 폭탄 1개와 자결용 도시락 폭탄 1개를 가지고 기념
식장으로 들어갔다. 공원을 지키던 왜군이 검문을 했으나 왜인이라고 속이니 그냥 들여보내주
었다.
왜인들만의 즐거운 잔치였던 그 행사가 거의 막을 내릴 무렵, 1만 명의 군중 사이에 묻혀있던
그는 기념식 단상 앞을 지키던 기마헌병 앞까지 들어와 물통폭탄을 단상을 향해 힘껏 던졌다.
그 물통이 단상에 떨어지는 순간 굉장한 폭음을 내면서 식장에서 오만을 띈 미소로 행사를 치
르던 왜인 고위층 7명이 모두 꼬꾸라졌다. 단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행사를 구경
하던 관중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목을 붙잡고 도망치느라 바뻤다. 왜군 또한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니 충분히 빠져나와 다음 거사를 준비할 틈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윤봉길은 피신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왜군은 그를 체포했다.

윤봉길이 준 크나큰 선물에 감동하여 기절한 7명의 왜인 고위층 중에, 상해 왜인 거류민(居留
民) 두목인 가와바다 사다쯔구(河端貞次)는 사경을 헤매다가 다음날 바로 폐기되었다. 그리고
1932년 1월 상해 사변을 일으켜 전공(戰功)을 세운 왜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는 5월
에 폐기되었다. 또한 제3함대 두목인 노무라 요시사부로(野村吉三郞)은 중상을 입고 눈병신이
되었으며, 주중일본공사 시케미쓰(重光癸)는 우측 다리가 절단되어 다리 병신이 되었다. 기타
2명도 막심한 중상을 입었다. 즉 2명이 폐기되고 5명이 병신이 된 것이다. 그 5명은 왜국 백
성들이 바친 세금이나 갉아먹으며 식충이처럼 살다가 골로 갔다.


▲  의거 이후 연행되는 윤봉길 사진
기념식장을 흔쾌히 아수라장으로 만든 물통 폭탄과 폭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업혀가는 왜군 장수 사진도 있다.

▲  상해 의거 관련 왜국 조일신문 보도
왜국은 상해 폭탄변사(爆彈變事)라고 표현했다. 하긴 그들 입장에서는 변사겠지~~
윗사진은 폭탄에 아작이 난 기념식장, 아랫 사진은 왜군에게 잡혀 호송되는
윤봉길 의사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왜국 군법회의로 넘겨져 이유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사형을 선고받
았다. 그를 심문하던 왜군은 그가 상해사변에 앙심을 품은 대륙 사람인줄 알았으나 조선 사람
이란 사실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상해 왜군 헌병대에 갇혀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던 그는 그해 11월 18일 왜열도로 호송되었으
며, 20일 오사카(大阪) 위수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다시 가나자와(金澤)로 옮겨져 거기서 12
월 19일 총살형을 받으니 그의 나이 겨우 24세였다.

한편 상해 사변에서 개망신을 당해 절치부심에 빠진 중화민국(中華民國) 지도자 장개석(장제
스)은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특히 상해사변을 일으킨 원흉들이 대거 폐기되었다는
소식은 겁 많은 중원대륙 지도층을 비롯한 대륙 민중들까지 모두 환호하게 만들어 한국에 아
주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장개석은 '쓸데없이 머릿수만 많은 4억 대륙인이 해내지 못한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
고 두고두고 격찬했으며, 1933년 5월 그의 제의로 남경
(南京)에서 김구와 회담을 했다.
여기서 장개석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터이니 서로 돕고 지내자며 손을 내밀었고, 임시정
부와 중원대륙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광복군은 장개석의 지원과 비호를 받으며 독립활동을 전
개했다. 그리고 왜국이 패망할 때까지 서로 상부상조했다. 윤봉길의 의거로 잠시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이 크게 고취되었고, 우리의 독립활동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  윤봉길의 최후 장면과 그가 갇혀있던 가나자와 형무소

▲  장개석이 윤봉길의 동생 윤남의에게 보낸 친필서한과 기념사진

▲  장개석이 윤봉길 의사 전기문을 낸 곽상훈에게 보낸 축하 친필 서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윤봉길의 시신은 가나자와 노다산(野田山) 공동묘지에 13년 동안 매장
되었다. 왜국이 패망하자 임시정부유해발굴단과 가나자와에 거주하던 박동조, 서성민으로 이
루어진 발굴단이 1946년 3월 4일 발굴을 시작해 6일에 시신을 발견했다.
그의 유해는 이봉창(李奉昌), 백정기(白貞基)의 유해와 함께 그해 5월 부산에 도착해 공설운
동장에서 추도식이 열렸으며, 7월 7일 서울운동장(지금은 없어진 동대문운동장)에서 최초로
국민장(國民葬)이 거행되어 효창공원(孝昌公園)에 안장되었다. 또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
국장이 추서되어 그의 의거를 영원히 기리고 있다.


▲  윤봉길이 날린 그 유명한 도시락/물통 폭탄 (모형)
공원을 지키던 왜군을 감쪽같이 속이고 임무를 완수한 도시락/물통 폭탄의 위엄
겉은 그저 흔한 도시락과 물통이지만 그 속에는 무시무시한 폭탄이 들어있다.

▲  윤봉길 의사의 유품 (안경집부터 대륙 화폐까지) - 보물 568-2호
윤봉길을 사형시킨 왜국은 그의 몸에서 나온 유품을 덕산에 있는 유가족에게
보내주며 은근히 악어의 눈물을 보였다.

▲  윤봉길이 상해 의거 때 지녔던 지갑과 대륙 화폐 - 보물 568-2호

▲  윤봉길이 죽기 전까지 사용했던 손수건
손수건에 점처럼 찍힌 빨간 것은 그의 거룩한 피이다.

▲  회중시계(懷中時計)와 도장

윤봉길의 유품 중에 회중시계가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이 시계는 원래 김구 주석이 쓰
던 것으로 상해 의거를 벌이던 4월 29일 아침, 김구와 마지막으로 만나면서
'선생님의 시계가 많이 녹슬었군요. 제 시계는 이제 쓸 일이 없으니 제 시계와 바꾸시지요'
제안을 하여 서로의 시계를 바꾼 것이다. 그의 시계를 받은 김구의 마음은 참 착잡했을 것이
다. 솟구쳐 나오려는 사나이의 눈물을 서로가 억지로 참아가며 시계를 서로의 정표로 바꿔야
했던 그 참담한 현실을..


▲  1962년 우리나라 정부가 윤봉길에게 바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윤봉길이 마지막으로 짊어진 형틀대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의 몸을 묶었던 형틀
대이다.
가로목과 세로목이 있는데, 세로목은 두 팔을
묶었고, 가로목은 머리부터 허리까지 묶었다.
이 형틀대는 그가 묻힌 노다산 공동묘지에서
시신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세로목만 나왔으며
이후 이 땅에 들어와 윤봉길의사 기념관에 안
착하여 보물 568-2호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보물급 문화재 가운데 가장 비
참하고 쓰라린 존재가 아닐까 싶다.


▲  윤봉길 의사의 흉상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옆에 자리한 윤봉길어록탑


 

♠  충의사(忠義祠)

▲  충의사로 인도하는 홍살문

윤봉길 의사 유적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충의사는 윤봉길의 충혼이 깃든 사당으로 1968년에
지어졌다. 1978년 4월에 사당과 삼문을 증축하고 주변을 정비했는데, 사당과 충의문의 색이
그 흔한 사당 건물의 색깔이 아닌 베이지색을 띄고 있다. 이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그리된 것으로 그 시절 성역화시킨 모든 사당은 모두 베이지색으로 떡칠을 했다. 이유는 그가
좋아하는 색이기 때문이라나..?
어쨌든 1979년 이후 많은 사당이 본연의 색깔을 되찾았으나 이곳은 아직 베이지색을 고수하고
있다.


▲  2마리의 사자가 문을 지키는 충의문(忠義門)의 위엄
가운데 문은 사당 주인이 이용하는 문이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굳게 닫아 둔다.

▲  충의사 본전(本殿)

▲  충의사에 봉안된 윤봉길의 영정 (정우성 화백의 그림)

그에게 있어 저렇게 편안히 앉아있던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에
저런 영웅이 여럿 나타나 세상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하건만 이젠 그런 것도 무뎌딘 것일까..?
윤봉길 같은 이가 나라의 주인이 된다면 나라와 백성이 많이 편안해질텐데 너무 젊은 나이에
숨진 것이 상당히 안타깝다.

그의 영정에 머리를 조아리며, 참배록에 '봉길이 형님 나 다녀갔소. 잘 봐주시오!'의 뜻으로
나의 보잘것 없는 이름을 살짝 남겨본다.


▲  늦은 오후의 무료함을 달래는 연못의 조촐한 분수대
충의사와 배용순 여사 묘소 중간에 연못을 두어 성역(聖域)의 딱딱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덜어낸다.

▲  윤봉길의 부인인 배용순(裵用順) 여사의 묘역

충의사와 연못 서쪽에 소나무가 우거진 언덕이 있다. 바로 그곳에 윤봉길의 부인인 배용순 여
사의 묘역이 조용히 자리하여 남편의 사당을 바라본다.
배용순은 1922년 그와 혼인하여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상해 의거 이후 왜정의 감시로 적
지않은 마음 고생을 겪으며 저한당을 지켰고, 1974년 성역화 사업에 따라 나라에서 유적 일대
를 매입하면서 인근으로 이사가 여생을 보내다가 1988년에 적지 않은 나이로 별세했다. 그녀
와 유족의 마음 같아서는 남편(윤봉길)의 무덤 곁에 있고 싶겠지만 멀리 서울 효창공원에 가
있으니 그것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사당이 바라보이는 서쪽 소나무 숲에 무덤을 쓴 것이다.


▲  보부상(褓負商) 유품 전시관

윤봉길 의사 기념관과 충의사 사이에 팔작지붕을 지닌 기와집이 하나 있다. 겉으로 보면 윤봉
길과 관련이 있는 집이겠지 생각을 하겠지만 현실은 그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보부상 유품 전
시관이다. 윤봉길 유적에 왠 뜬금 없이 보부상 유품 전시관이 있는 것일까? 신라시대 문화유
산으로 도배가 된 경주(慶州)에서 고구려 호우를 보는 것 마냥 꽤 이채롭다.

보부상 유품 전시관은 예산과 덕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보부상의 조직적 단체인 예덕상무사(禮
德商務社)의 유품을 머금은 공간이다. 보부상은 일종의 행상(行商)으로 보상(褓商)과 부상(負
商)을 합친 말인데, 보상은 부피가 가볍고 돈이 나가는 물건을 짊어지며 팔았고, 부상은 부피
가 크고 값이 싼 생활용품과 먹거리를 지게에 이고 다녔다.

보부상은 고려 후기에 여진족과 싸우다가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한 이성계(李成桂)를 부상 백
달원이 발견해 치료해 준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상업을 천시했던 조선 조정도 보부상에게는 조금 관대하여 여러 혜택을 주었고, 곳곳에서 보
부상이 조직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밥벌이를 하였다. 그들은 나라가 위급에 처했을 때는 쌀
이나 무기를 짊어지고 아군을 도왔는데,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幸州山城)을 지키던 권율에게
쌀을 날라주었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갇힌 인조와 군사들에게 쌀과 먹을 것
을 날라주었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보부상을 중심으로 황국협회(皇國協會)가 결성되어 어용단
체로 활동하기도 했다.

예산/덕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예덕상무사는 조선 후기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서와 유
물을 남겼는데, 그 유물을 전시하고 보관하는 공간을 윤봉길 의사 유적에 세운 것이다.
아무래도 윤봉길과 관련이 없는 곳이다 보니 관람객들의 발길이 조금 적은 편인데, 우리나라
상업의 역사가 담긴 공간이니 잠시 둘러보는 것도 정신적으로도 지식적으로도 매우 유익할 것
이다. 결코 손해될 것은 없다.


▲  예덕상무사 시절의 문서와 도장들

▲  보부상들이 팔던 양반용 물건들 - 삿갓과 부채 등

보부상 유품 전시관에 전시된 예덕상무사 유물(인장 6개, 인궤 1개, 청사초롱 2개, 공문서 16
점)은 '보부상 유품'이란 이름으로 국가민속문화재 30-2호로 지정되었다. 스크롤의 압박이 상
당한 본글의 사정상 보부상 유품은 2장만 담았으며, 예덕상무사와 유품에 대한 내용은 생략한
다.

이리하여 윤봉길 의사 유적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끝으로 윤봉길을 폄하하고 테러
라고 치부하는 꼴통 매국노들과 뇌가 없는 머저리들이 여럿 있는데, 이런 것들은 정말 산소와
물이 아깝다. 테러와 의거의 차이부터 공부하길 권한다. 왜인이 저렇게 말하는 건 이해를 하
겠으나 그것도 우리나라 사람이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정말 이해 불가이다. 이는 이승만 시
절에 친일매국노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해 일어난 잔혹한 결과이다.
윤봉길이나 안중근(安重根),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같은 걸출한 인재나 영웅이 많이 나와서
이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매국노를 말끔히 청산하고 처단하여 역사를 바로 잡는 그날이
오길 간절히 고대한다. 역사 청산이 없는 이상 이 땅의 미래도 없다.

* 보부상유품 전시관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20-6 (덕산온천로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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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 (양주성 금속비, 용궁사, 소원바위, 백운산둘레길)

 


'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용궁사) '

용궁사 느티나무

▲  용궁사 느티나무

백운산 정상 백운산 산길

▲  백운산 정상

▲  백운산 산길

 


 

여름이 한참 물이 오르던 7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인천(仁川) 앞바다에 떠있는 영종도를
찾았다.
영종도(永宗島)는 천하 제일의 국제공항으로 찬양을 받는 인천국제공항을 품은 큰 섬으로
공항을 닦고자 영종도와 용유도(龍游島) 사이의 너른 갯뻘을 매립하고 삼목도(三木島) 등
의 여러 섬을 엮으면서 섬이 커졌다. 하여 영종도하면 기존의 영종도 외에 용유도와 삼목
도를 포함해서 일컬으며, 이들을 묶어 영종▪용유도라 부르기도 한다.

영종도에는 백운산이란 뫼와 용궁사란 오래된 절이 있는데 그곳에 살짝 마음이 가서 겸사
겸사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공항전철(서울역↔인천공항2터미널)을 타고
운서역이나 영종역에서 접근하는 것이 제일로 좋지만 운서역과 영종역은 환승할인 무적용
역이라 나 같이 서민들에게는 조금 부담이 된다. (공항전철의 영종도 구간은 수도권 환승
할인이 되지 않음)
그래서 집 앞에 있는 1호선을 쭉 타고 동인천역까지 이동하여 인천좌석버스 307번을 타고
영종도로 들어갔다. 시간도 좀 걸리고 영종도 강제투어가 조금 심하긴 하지만 환승할인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조금 일찍 부지런을 떨면 된다.

영종도에 진입하여 백운산 그늘에 자리한 전소에 두 발을 내렸다. 전소는 영종동행정복지
센터와 초등학교, 고등학교, 우체국, 아파트 등을 갖춘 오래된 마을로 서쪽에는 백운산이
, 동쪽과 남쪽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 평지에 한참 개발의 칼질이 춤을 추고 있음)
백운산 나들이는 바로 이곳 전소에서부터 시작된다.


 

♠  전소마을에서 만난 오래된 비석 무리들

▲  전소마을 비석 무리들

전소에서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서 백운산을 잠시 접어두고 마을 북쪽에 있는 구립하늘어
린이집을 찾았다. 그 앞에는 오래된 비석들이 3열로 각각 4기씩, 총 12기의 비석이 늘어서 있
는데, 이들은 영종도 곳곳에서 수습한 옛 영종진(永宗鎭) 첨사(僉使)의 비석으로 주로 선정비
(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가 주류를 이룬다.
선정비는 첨사의 착한 행정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고, 불망비는 첨사의 덕을 기리고자 세운 것
인데, 백성들이 진심으로 세운 것도 있겠지만 선정은 쥐뿔도 없음에도 첨사가 강제로 세운 것
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저런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돈을 뜯어가
자신의 배때기를 채운 관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종진은 조선시대에 영종도에 설치된 군사 기지로 처음에는 남양부(南陽府, 화성시 남양) 소
속이었다가 1875년 운양호(雲揚號) 사건으로 된통 당하면서 인천부(仁川府)로 넘어갔다. 이후
영종진이 폐지되면서 섬 전체가 부천군(富川郡) 소속이 되었다가 이후 옹진군(甕津郡) 관할로
바뀌었으며, 1989년 인천 중구(中區)에 편입되어 인천의 그늘에 있게 되었다.

이들 비석 중에 제일 우측에 유리막에 감싸인 조그만 철비(鐵碑)가 있는데, 그것이 나를 이곳
으로 오게한 양주성금속비(梁柱星金屬碑)이다. 돌로 만든 비석은 참 많지만 철이나 금속으로
만든 비석은 흔치가 않은 편으로 수도권에서도 철비는 이것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러다보
니 다른 석비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 철비에만 자꾸 눈길이 간다.


▲  비석 무리의 홍일점, 양주성 금속비 - 인천 지방기념물 13호

이 철비는 높이 91cm, 폭 31cm, 두께 3cm로 황동(놋쇠)을 녹여서 만든 것이다.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영종진이 큰 피해를 입자 흥선대원군은 인천부를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시키고 영
종진을 인천부 소속으로 넘겨 양주성을 영종진첨사<첨절제사(僉節制使)>로 파견했다.
양주성은 파괴된 진과 건물을 손질하고 방비를 튼튼히 했으며 전쟁으로 혼란해진 민심을 수습
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떠나게 되자 백성들은 크게 아쉬
워하며 놋그릇을 모아 1877년 9월에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냥 석비(石碑)도 아닌 놋그
릇을 모아 철비를 세울 정도면 양주성의 선정이 제법 대단했던 모양이다.

▲  옆에서 바라본 비석 무리

▲  비석 무리 부근에 자리한 연자방아


▲  속세를 향해 길을 늘어뜨린 용궁사 숲길 ▼

비석 무리를 둘러보고 용궁사로 길을 향했다. 전소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용궁사로 인도하
는 숲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용궁사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오르막길
이긴 해도 경사는 느긋하며, 숲이 매우 삼삼해 햇볕도 들어오기 힘들다.


 

♠  백운산에 안긴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 용궁사(龍宮寺)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15호

백운산(白雲山, 256m)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용궁사는 개발의 칼춤 소리로 요란한 영
종도의 별천지 같은 곳이다. 바로 절 밑에까지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어 온갖 개발 소음이 난
무하지만 용궁사는 백운산의 비호로 그 소음을 거의 모르고 살 정도로 산자락에 푹 묻혀있다.

용궁사는 영종도의 몇 안되는 문화유적으로 670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원효는 그 시절 왕경<王京, 경주(慶州)>에 머물며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상
대로 불교 대중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 원효의 창건설은 속세살이만큼이나 참 부질
없는 소리이며, 그의 창건설을 밝혀줄 기록이나 유물도 전혀 없다.
게다가 절에서는 1,300년 묵었다는 느티나무를 증거로 천년 고찰(古刹)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나무의 나이도 정확한 편이 아니며, 나무가 꼭 절 창건과 관련이 있다는 보장이
없다. 나무를 제외하면 오래된 것이라고 해봐야 요사와 관음전 정도로 19세기 중/후반에 조성
된 것이 고작이다. 또한 창건 이후 19세기까지 이렇다할 내력도 남기지 못해 오랜 내력에 의
구심을 던지게 한다. 다만 백운산 봉수대 관리와 바다 조망을 구담사(舊曇寺) 승려가 담당했
는데 그 구담사가 바로 용궁사의 옛 이름이며, 옥불 전설에는 옛 이름의 하나인 '백운사(白雲
寺)'가 등장해 그것을 통해 적어도 고려나 조선 초에 조촐하게 법등(法燈)을 켰던 것 같다.

절의 사적(事蹟)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중반으로 그것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과의 인연 덕분에 남게 된 것이다. 대원군은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부인 민씨(閔氏)가 불
교 신자라 자연히 절 출입이 잦았다. 하여 서울과 경기도의 여러 절(화계사, 흥천사, 수락산
흥국사, 안성 운수암 등)과 흔쾌히 인연을 맺으며 기도를 하고 여러 승려와 교분을 쌓았는데,
용궁사도 그런 절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 되는 섬인데도 어떻게 인연을 지었는지 이곳을 찾아 기도를 올렸다고 하
며, 1854년에 절을 중창했다. 이때 용궁사로 이름을 갈게 하면서 현판을 써주었는데 이는 관
음전 옥불이 바다 용궁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권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대원군은
고종(高宗)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약 10년 동안 이곳에 머물며 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용궁사와 대원군과의 인연은 요사에 걸린 그의 현판이 모든 것을 대변해주니 창건설은
몰라도 대원군 중창설은 더 이상 왈가왈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원군 이후 딱히 적당한 내력은 없으며, 영종도가 인천에 편입되자 절과 경내에 있는 느티나
무가 인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칠성각, 용황각, 요사채 등 6~7동의 건
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수월관음도 등이 있다. 절 자체는 지방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절과 느티나무 때문
이다. (그것도 아니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음)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로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며 그렇게 깊은 골짜기는 아니지만 절을 둘
러싼 숲이 삼삼하여 바쁘게 변해만 가는 영종도에서 이곳만큼은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다. 숲
이 속세의 소음을 걸러주니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그윽하며, 절이 조촐한 규모라 눈에 쏙 넣
고 살피기에도 별 부담이 없다.
근래에 절에서 백운산 정상을 잇는 산길을 손질하여 백운산 둘레길로 삼았는데 절을 둘러보고
둘레길을 따라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백운산 정상에 이른다. 절만
둘러보고 가면 많이 허전할 것이니 백운산도 같이 겯드린다면 영종도 여로(旅路)를 더욱 알뜰
하게 꾸며줄 것이다.

※ 영종도 용궁사 찾아가기 (2018년 12월 기준)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중구 지선 3번, 4번을 타고 용궁사입구 하차. 이 방법이 제
  일 최적이나 배차간격이 허벌나게 길고 영종역에서 서로 타는 곳이 틀리다.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203번, 598번 시내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598번은 크게 돌
  아가므로 203번이 나음)
* 서울 1호선 동인천역(4번 출구)에서 307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인천 1호선 동막역(3번 출구)에서 304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승용차
①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 금산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교차로에서 우회
   전 → 용궁사입구에서 우회전 → 용궁사 주차장
② 인천대교 → 영종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로 → 전소 → 용궁사입구에
   서 좌회전 → 용궁사 주차장
* 소재지 :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동 667 (운남로 199-1 ☎ 032-746-1361)


▲  용궁사 샘터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샘터가 마중한다. 산사에 으레 있는 샘터이건만 요즘처럼 더울 때
는 보물급 문화유산보다 100배 더 반가운 존재이다. 네모난 석조(石槽)에는 백운산이 내린 약
수가 가득 담겨져 있는데,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해진
다.

▲  용왕의 공간, 용황각(龍皇閣)

▲  용황탱과 관음보살탱화

샘터를 지나면 석축 위에 세워진 용황각이 나온다. 용황각이란 이름은 여기서 처음 만나는데
일반적인 용왕(龍王)을 용황으로 격을 높여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왕을 황제로 높인 것
과 같은 이치~) 아무래도 섬이다보니 바다를 터전으로 삼은 섬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우상인
용왕을 봉안한 것인데 용왕을 용황으로 높여 특별 대접을 하며 주민들의 용왕신앙을 돕고 있
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용황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로 밑에는 약수터가
있는데, 이 샘터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샘터 위에 석축(石築)을 다지고 건물을 세운 터라 주
춧돌의 키가 높으며, 북쪽에 트인 문을 통해 용황각으로 들어서면 된다. (동쪽 문 바깥은 허
공이라 추락 주의 요망)
용황각 불단에는 용황이 담긴 용황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용황의 머리에는 두광(頭光)이 반짝
반짝 윤을 내고 있으며, 용황탱 옆에는 관음보살(觀音菩薩) 누님이 그려진 탱화가 나란히 자
리해 있다.


▲  용궁사 느티나무(할아버지나무) - 인천 지방기념물 9호

요사 앞에는 용궁사의 오랜 자연산 보물이자 이곳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 2그루가 넓게 그늘
을 드리우고 있다.
이들 나무 가운데 요사 동쪽에 자리한 나무는 나이가 무려 1,300년을 헤아린다고 한다. 나무
의 덩치가 참 크긴 하지만 1,300살로는 보이지 않고 훨씬 젊어보이는데, (한 600~700살 정도)
요즘 하도 거품이 많은 세상이라 나이 재측정이 필요해 보인다. 실제 예로 서울에서 가장 오
래된 나무로 손꼽히던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도 나이가 830년을 호가한다고 했지만 2013년
에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면서 다시 나이를 재본 결과 600년 정도 된 것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230년 정도의 적지않은 거품이 끼어있던 셈이다.

요사 동쪽 느티나무는 높이 20m, 나무둘레 5.63m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여기서는 할아버지
나무라 불린다. 그리고 요사 북쪽 느티나무는 할머니나무라 불리는데 덩치는 할아버지나무보
다 작으며, 그 나무보다 후대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할아버지나무는
할머니 나무쪽으로만 늘 가지를 뻗는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옛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
낙네들의 치성 장소로 애용되었는데, 절이 있기 전부터 기자(祈子) 신앙의 현장으로 널리 쓰
인 듯 싶다.
이후 절이 들어서면서 예불을 먼저 올리고 용황각 밑의 약수를 마신 다음 할아버지나무에 기
원을 하는 순서로 변경되었으며,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낳는다고 전한다.

▲  서쪽에서 바라본 느티나무
(할아버지나무)

▲  요사 북쪽에 자리한 느티나무
(할머니나무)


▲  용궁사 요사(寮舍)

두 느티나무 그늘에 자리한 요사는 대원군이 1854년에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관음전과 더불
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승려의 생활공간 및 공양간,
대중방(大衆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건물 동쪽에는 툇마루 2칸을 두었으며, 서쪽을 제외한 나머지는 벽으로 막았다. 정면 가운데
칸에는 용궁사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절 이름을 용궁사로 바꿀 것을 제
안하며 친히 써준 것으로 그의 호인 석파(石坡)가 쓰여있어 대원군과의 진한 인연을 가늠케
한다. 그는 어찌하여 바다 건너 이곳까지 애써 인연을 지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  흥선대원군이 1854년에 남겼다는 '용궁사' 현판의 위엄
용궁사에서 느티나무 다음으로 애지중지하는 존재로 이 현판이 없었다면
대원군 중창설도 자칫 신뢰를 잃을 뻔 했다.

▲  두목 포스가 느껴지는 묘공(猫公)의 위엄

요사에는 용궁사에서 기르는 누런 털의 묘공(고양이)이 있었다. 요사와 할배나무 주변을 순찰
하면서 여름 오후를 보내고 있는데,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니 묘공 특유의 관심 소리를 내며
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하여 잠자리를 잡아서 조공(?)으로 바칠려고 했으나 이곳 잠자리는
눈치가 100단인지 하나도 잡지 못했다. 한때 외갓집이 있는 단양(丹陽) 시골의 잠자리 씨를
거의 마르게 할 정도로 잠자리를 잘 잡았는데, 이젠 나도 늙은 모양이라 오히려 그들에게 희
롱을 당할 판이다.

묘공 하나가 요사 툇마루에 앉아있다가 더운지 아랫 돌에 벌러덩 누워 강렬한 포스를 보이니
마치 두목 포스 같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경내를 지키는 그들이 있기에
용궁사는 오늘도 무탈하다.


▲  대웅보전(大雄寶殿)

용황각 뒤쪽에는 가건물로 된 대웅보전이 있다. 이곳은 관음도량을 칭하는지라 정식 법당(法
堂)은 관음전으로 2000년 이후 합판으로 대웅보전을 지어 새로운 법당으로 삼았으나 건물의
볼품은 많이 떨어진다.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지장보살상, 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우측 부분은 종무소(
宗務所)로 쓰이고 있다.

▲  포근한 인상의 석가3존불

▲  조금은 빛바랜 신중탱(神衆幀)

▲  한참 몸단장 중인 관음전(觀音殿)

▲  관음전 뒤쪽에 자리한 석조관음보살입상

요사 바로 뒤쪽에는 이곳의 법당인 관음전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관음전은 대원군
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요사와 함께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보수공사 중으로 불단에 있던 관음보살상은 칠성각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으며, 김규진(金圭鎭
)이 쓴 주련(柱聯)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관음전에는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玉佛)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사연이 아련하게 전해온
다.
때는 조선 중기(또는 후기)의 어느 평화로운 날, 영종도 월촌에 어부(漁夫) 손씨(또는 윤씨)
가 살고 있었다. 거의 매일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로 입에 풀칠을 하며 살고 있었는데, 그날도
바다로 나가 그물을 치며 대어를 기대했다. 허나 원하는 물고기는 없고 왠 옥불 하나가 걸려
든 것이 아닌가? 이에 어부는 단단히 흥분하여
'물고기는 하나도 없고 왠 이런 게 걸리고 앉았냐!'
투덜거리며 옥불을 바다에 내던지고 다시 그물을 쳤다. 그런데 그물을 건져올리니 아까 옥불
이 또 걸려든 것이다. 그래서 육두문자 요란하게 내뱉고 다시 내던졌으나 이후에도 계속 옥불
만 그물에 걸려든다. 이에 어부는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불상을 백운사(白雲寺, 지
금의 용궁사)에 넘겼다.
그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백운사 앞을 말이나 소를 타고 지나가면 무조건 멈춰서 움직
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절 앞을 지날 때는 말과 소에서 내려서 지나갔으며,
불상의 영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주변에 퍼져 육지에서도 많은 이가 찾아와 불전함이 매일 터
져나갈 정도였다. 또한 불상을 발견하여 절에 넘긴 어부도 이후 풍어(風魚)를 누리면서 부자
가 되었다고 전한다.

19세기 중반 용궁사를 찾은 대원군은 이 사연을 전해듣고 불상이 바다 용궁(龍宮)에서 나왔으
니 절 이름을 용궁사로 고칠 것을 제안하며 현판을 써주었다. 그 현판이 바로 요사에 걸린 그
것이다.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은 인근을 지나다가 침몰한 배에 있던 것이거나 절이 파괴되면서 버려
져 바닷속을 방황한 불상으로 여겨진다. 그 옥불이 있었다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느티
나무 제외)이 되었을 것인데, 왜정(倭政) 때 도난을 당해 지금은 없으며, 새로 만든 조그만
관음보살상이 그 자리를 조금이나마 대신한다.


▲  날렵한 처마선이 인상적인 칠성각(七星閣)

관음전 옆에는 근래에 지어진 석조관음보살입
상과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칠성각은 칠성(七
星)을 봉안한 건물이지만 칠성 외에 산신(山神
)과 독성(獨聖)도 함께 담고 있어 삼성각(三聖
閣)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관음전 중수로 그곳
에 있던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가 이곳의 신
세를 지고 있었음)

칠성각에 봉안된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은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고색의 기운이
제법 역력하다.

▲  다른 산신탱과 달리 꽤 젊어보이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이 담긴 산신탱

▲  독성과 동자가 그려진 독성탱

▲  칠성 가족을 빼곡히 머금은 칠성탱


▲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76호
관음보살상 뒤에는 수월관음도가 후불탱으로 걸려있다. 그 탱화는 1880년에 축연
(竺演)과 종현(宗現)이 그린 것으로 3폭의 비단을 이어서 만들었는데 화폭
규모는 세로 135.5cm, 가로 174.3cm으로 가운데 화폭은 102.2cm, 향좌폭
29.3cm, 향우폭 33.5cm으로 화폭이 제일 넓다.

▲  경내 뒤쪽에 자리한 소원바위

용궁사의 다른 명물로는 소원바위가 있다. 관음전 뒤쪽 산자락에 있는 이 바위(바위라기보다
는 커다란 돌판~)는 소원을 빌면서 바위 위에 작은 돌을 시계 방향으로 돌려 자석에 붙는 듯
한 무거운 느낌이 들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가볍게 돌아가면 꽝~!!) 바위 앞에 하는
요령이 적혀있는데 우선 바위 뒤쪽에 놓인 불상 앞에 조공(돈)을 바치고 (역시나 돈이다~!!)
그런 다음 생년월일과 소원을 말하며 3배를 올리고 돌을 돌리라고 나와있다.
나는 조공을 바치지 않고 (절이 나보다는 경제 사정이 훨씬 좋으니~~) 그냥 소원을 빌고 3배
를 하며 돌을 돌렸다. 기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이 순간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소원이 접수된 모양이다. 하여 다시 한번 해봤는데 역시나 무거웠다. 혹여 접수 대상이 아니
더라도 돌의 무거움은 누구나 같은 것이 아닐까? 아니면 기분상일까? 과연 소원 성취가 이루
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소원이 꼭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를 잠시 들뜨게 한다. (허나
현실은 소원 성취 그딴거 없음~~~)


 

♠  안개 낀 백운산(白雲山)을 오르다.

▲  용궁사에서 백운산으로 오르는 백운산둘레길

용궁사에서 50분 정도를 머물다가 절을 등지며 백운산둘레길에 발을 들였다. 백운산 정상까지
오를까 말까 궁리를 하다가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도 넉넉하고 용궁사와 둘레길만 보고 철수하
기에는 너무 싱거워 흔쾌히 정상까지 가기로 했다.

백운산둘레길은 영종도의 지붕인 백운산 주위를 도는 산길로 4.4km 정도 된다. 시작점은 접근
성이 좋은 용궁사에서 하는 것이 좋은데, 용궁사에서 2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여기서 둘레길과 작별하고 1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대체로
경사는 느긋한 편이다. 수목이 울창하여 햇볕이 들어올 틈이 거의 없으며 산바람도 넉넉히 불
어 땀을 제대로 털어간다. 다만 약수터가 없기 때문에 용궁사에서 물배를 채우거나 물통을 채
워 산행에 임하기 바란다.


▲  쉼터로 조성된 6각형 정자 (용궁사 부근)

▲  둘레길에 왠 연자방아?
1981년 12월에 용궁사 신도가 기증한 연자방아로 왜 아무런 필요도 없는 이곳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절에 두거나 산 밑에 두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  잠시 미친 경사를 보여주는 둘레길

▲  백운산 봉수대(烽燧臺)터

둘레길과 정상 방면 산길이 갈리는 곳에 백운산 봉수대가 있었다. 이 봉수대는 서해바다의 동
태를 살피며 위급시 봉화를 피워 인천 철마산(鐵馬山)과 백운산(白雲山)에 알렸는데, 구담사(
용궁사) 승려(1명 또는 3명)와 봉수지기 2명이 봉수대를 지켰다고 한다.

서해를 지키던 당당한 모습의 봉수대는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사라진지 오래이고 이곳과 정상
으로 가는 길목에 약간의 돌무더기가 남아있다. 여기서는 두께 1cm 정도의 경질와편 등이 나
오고 있어 봉수대의 옛 흔적을 희미하게 더듬을 수 있다.


▲  정상 동쪽에 자리한 헬기장

▲  헬기장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

▲  백운산 정상 전망대

용궁사에서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백운산 정상에 도달한다. 정상
에는 전망대를 두어 조망(眺望)의 나래를 누리게 했는데,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안개가
자욱히 끼어 100m 전방도 보이지를 않는다. 보물급 조망을 기대하고 올라왔건만 서해바다가
빚은 안개의 심술에 그 기대는 산산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전망대에는 인천국제공항과 공항신도시, 용유도(龍游島), 서해바다,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섬
들이 보인다는 전망 안내문과 사진이 있지만 오리무중과 같은 안개가 그 모든 것을 다 앗아가
버려 전망 안내문이 참 무색하게 되었다.

▲  우두커니 서 있는 백운산 정상 표석

▲  백운산 정상 전망대


▲  안개 속에 몸을 가린 백운산 남쪽 봉우리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1)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2)

진한 안개에 털려 정체성을 잃은 정상 전망대를 벗어나 전소 쪽으로 내려갔다. 어차피 보이는
것도 없으니 더 머물러봐야 의미도 없고, 시간도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내려갈 때는 동남쪽 전소 방향으로 내려갔는데 이 길도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안개가 자욱해
도 전방 50m 까지는 보이기 때문에 하산에 별로 무리는 없었다. 야속한 안개를 뚫고 20분 정
도 내려가니 산속에 묻힌 집이 나오고, 군사 훈련시설을 지나니 울퉁불퉁했던 흙길은 끝나고
신작로가 앞에 펼쳐진다.

신작로를 따라 시골스러운 전소마을 서쪽을 지나면 영종자이아파트와 영종국제물류고등학교가
나오고 영종동의 주요 간선도로인 운남로가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영종도 백운산 나들이는 바다 안개를 뒤로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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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강원도의 지붕, 정선 나들이 (아라리촌, 정선5일장, 아우라지)

 


' 강원도 정선 나들이 (아라리촌, 아우라지) '
아라리촌 연자방아
▲  아리리촌에서 만난 정겨운 풍물시(風物詩) 연자방아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처럼 가을이 알차게 익어가던 추석 연휴, 강원도의 지붕인
정선(旌善)을 찾았다.
서울의 동쪽 철도 관문인 청량리역에서 선물보따리를 바리바리 짊어지며 고향으로 떠나는
귀성객에 섞여 강릉(정동진)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싣는다. 다행히 좌석이 있어
서 입석으로 가는 것은 면했다.

거의 3시간을 달려 하늘과 지척인 정선 땅에 진입, 정선의 남쪽 관문이자 태백선(太白線)
과 정선선이 갈리는 민둥산역에 두 발을 내린다. 이곳은 예전 증산역(甑山驛)으로 2009년
9월 민둥산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 이유는 증산마을 북쪽에 억새로 유명한 민둥산(1118m)
이 있어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그리 한 것이다. 허나 역 이름만 바뀌었지 마을 이름은 그
대로 증산이다.
태백선에서 사라진 새마을호 열차도 무조건 정차했던 정선 고을의 큰 마을이자 석탄 산지
였던 증산, 지금은 민둥산을 간판으로 내걸며 인근 태백(太白)과 영월처럼 관광지로 화려
한 도약을 꿈꾼다.

칼처럼 솟은 산 사이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증산은 하늘과도 불과 3자의 거리 만큼이나 가
까워 아랫 세상과는 공기부터가 확연히 틀리다. 그날은 날씨가 조금 더웠는데 고원지대라
조금은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역전으로 나가니 마침 정선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벌리며 대기
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꿩 대신 닭을 고를 권리가 없기에 무조건 그를 잡아탔다.

강원도의 지붕답게 높이 솟은 뫼 사이로 길은 구불구불 흘러간다. 근래에 도로가 많이 정
비되어 길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 대가로 정선에 아름다운 산하(山河)는 적지않게 상
처를 입어야 했다. 역시 강원도의 길은 제대로 토할 정도로 구불구불한 길이 매력인데 말
이다.

증산을 출발하여 40분 만에 정선군의 서울인 정선읍내에 들어섰다. 읍내에 들어서면서 바
로 정선아라리촌이 길 옆으로 지나간다. 그곳의 존재는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원래는 계
획에 없던 곳이라 지나치려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절대로 못지나친다고 결국 정선
역 입구에서 내려서 오던 방향을 거슬러 내려와 아리리촌의 문을 두드렸다.

 


♠  정선 지역의 전통 가옥과 풍습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강원도 스타일의
 민속촌 ~ 정선 아라리촌

▲  대문을 활짝 열어 나그네를 맞이하는 아라리촌 정문

정선읍내 동쪽 조양강(朝陽江) 강변에 터를 닦은 아라리촌은 세월의 저편으로 무심히 사라져가
는 정선의 옛 가옥을 붙잡아 재현한 민속촌이다.
정선군청에서 많은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아라리촌은 2004년 10월 7일 문을 열었으며, 면
적이 34,720㎡에 이른다. 전통기와집(1동)과 굴피집(3동). 초가(1동), 너와집(1동), 저릅집(1동
), 돌집(1동), 귀틀집(1동) 등 전통가옥 9동과 주막, 농기구 공방(工房) 1동, 육모정, 초정, 서
낭당 등의 건물이 있으며, 디딜방아와 연자방아, 통방아, 장승, 고인돌, 그네 등이 민속촌 곳곳
을 수식한다.
또한 연암 박지원(朴趾源)이 쓴 양반전(兩班傳)을 테마로 하여 양반전의 주요 장면을 재현한 조
형물 10여 개가 곳곳에 배치되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한다. 양반전은 한문소설로 그 배경이 바
로 정선이다. 중/고등학교 국어/문학 시간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이 소설은 조선 후기 몰
락하는 양반 계급의 위선과 무능력을 풍자한 것으로 쌀을 갚지 못한 가난한 양반과 양반을 꿈꾸
는 부자, 그리고 그들을 중재하는 정선현감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아라리촌은 이런 볼거리 외에도 민속촌 주막에서 토속 음식인 곤드레밥과 순두부, 메밀 관련 음
식을 사먹을 수 있으며, 가격은 다소 밉지만, 1일 숙박체험도 가능하다. 그리고 민속촌 서쪽으
로 정선의 대지를 촉촉히 어루만지는 조양강과 강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가 놓여 있으며, 강 너
머로 칼처럼 솟은 산 사이에 둥지를 튼 정선읍내가 바라보인다.

양반전 디오라마 등을 빼고는 여타 민속마을과 별 다를 것은 없으나, 강원도 고원지대에 가옥과
생활상을 두루 살필 수 있는 현장으로 정선에 왔다면 꼭 둘러볼만하며, 넉넉잡아 30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 정선의 과거가 담겨진 아라리촌을 둘러보도록 하자.

▲  청동기시대 지배자의 무덤인 고인돌
옛것이 아닌 모형이다.

▲  6각형 모양의 정자 육모정


※ 정선 아라리촌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① 대중교통
* 동서울터미널에서 정선행 직행버스가 1일 9회 떠난다.
* 청량리역에서 매일 8시 20분에 정선,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운행한다. 원주역과 제천
  역, 영월역, 민둥산역을 경유하며, 일반 여객열차가 아닌 관광열차기 때문에 운임이 좀 비싸
  다. (청량리역에서 정선역까지 어른 26,100원)
* 민둥산역에서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1일 2회 떠난다. <11:25(청량리발 열차), 15:15>
* 청량리역에서 강릉(정동진)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민둥산역에서 정선행 군내버스(1일 7회)를
  타고 아라리촌(여성회관) 하차
* 원주, 강릉, 제천에서 정선행 직행버스 이용
* 정선시외터미널에서 동면(화암), 증산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아라리촌(여성회관) 하차
* 정선역에서 도보 25분, 또는 택시 이용
② 승용차편 (주차장 있음)
* 영동고속도로 → 진부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정선방면 59번 국도 → 나전3거리에서 우회
  전 → 정선제2교 4거리에서 좌회전 → 봉양5리 교차로에서 증산 방면 우회전 → 아라리촌

★ 아라리촌 관람정보 (2015년 12월 기준)
* 입장료 : 3,000원(정선군 아리랑상품권을 지급함)
* 주차비 공짜
* 관람시간 : 9시 ~ 18시 (17시까지 입장)
* 공예 체험 : 정선 5일장(2,7,12,17,22,27일)과 주말에 도자기공예, 칠보공예, 컨츄리공예 체
  험 이벤트가 열린다. 체험비는 3,000~9,000원 정도 (겨울에는 안함)
* 아리랑학당에서 정선아리랑 소리체험을 받을 수 있다. 4~11월에 운영하며, 체험비는 무료
*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애산리 560 일대 (애산로 37, ☎ 033-560-2059)
* 아라리촌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옛 정선을 거닐다 ~ 아라리촌 둘러보기

▲  아라리촌 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길이 나온다.
여기서 직진을 하던 오른쪽으로 가던 상관은 없으나 나는 오른쪽길로 들어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았다.

▲  가장 먼저 만난 양반전 조형물 (양반전 조형물 1)

정선의 어느 가난한 양반이 살았다. 그는 독서를 좋아하고 정직한 성격으로 정선에 부임하는 군
수(郡守)들이 무조건 찾아가 인사를 할 정도로 유명했다. 허나 살림이 어려워 매년 관아의 쌀을
빌려 목구멍에 풀칠을 했는데, 계속 빌리기만 했지 갚지를 못해 그 양이 어느덧 1,000섬을 넘었
다.
그렇게 정선 사또와 관원들이 오랫동안 쉬쉬하고 넘어갔으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결국 강원
도 관찰사(觀察使, 도지사)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관찰사는 이에 노발대발하며 정선군수를 닥달
해 양반에게 빌려준 쌀을 받아낼 것을 명령했다.


▲  전통와가 ~ 양반 가옥으로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져 있다.

▲  이름도 생소한 굴피집

굴피집은 강원도 정선, 양양, 평창에서 많이 나타나는 원시형 산간지방 가옥으로 참나무(상수리
나무) 껍질인 굴피를 지붕에 씌우면 집의 보온이 잘되고 습기를 제대로 차단해 준다. 그래서 겨
울에는 매우 춥고 여름에는 비가 많은 곳에 적당하다.


▲  굴피집에 있는 양반전 조형물 (양반전 조형물 2)

정선현감은 양반에게 당장 쌀을 갚지 않으면 감옥에 넣겠다며 최후 통첩을 하였다. 아무리 조선
의 중심 계층이고 지체높은 양반이라 할지라도 관청에서 빌린 쌀을 한 톨도 갚지 않고 무대책으
로 일관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가 없었다.

통첩을 받은 양반은 땅에 힘없이 주저앉아 어찌할 바를 모른다. 축 쳐진 그를 바라보는 마누라
는 팔짱을 끼며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징하게 바가지를 긁는다. '영감~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이
요~!! 무슨 말 좀 해보시오!!'


▲  양반과 부자 상인의 거래 (양반전 조형물 3)

현감의 최후통첩에 제대로 울상이 된 양반에게 희소식이 하나 날라왔다. 바로 옆집에 사는 부자
가 그 환곡을 대신 갚아주겠다는 것이다. 그 부자는 평민으로 평소 양반을 꿈꾸며 살았다. 마침
옆집 양반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면서 이때다 싶어 자신이 환곡을 처리해줄 터이니 대신 양반의
신분을 자신에게 넘길 것을 제안한 것이다.
그의 제안에 양반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감옥에 끌려가게 될 판에 그까짓 양반 자리가 무슨
소용이랴, 당장 발등에 붙은 불조차 끄기도 벅찬데 말이다. 그래서 부자의 거래를 흔쾌히 받아
들이고 양반의 신분을 그에게 넘겼다.


▲  현감에서 절을 하는 양반 (양반전 조형물 4)

부자와 거래를 성사시킨 후, 양반은 길을 가다가 현감을 만났다. 그런데 그에게 갑자기 넙죽 절
을 하는 것이었다. 양반이나 현감이나 거의 같은 양반계급이기 때문에 아무리 벼슬이 높다고 해
도 절은 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 된다.
현감은 화들짝 놀라며 '아니 왜 이러시오. 일어나시오' 그를 일으켜 세우며 절을 한 연유를 물
었다. 이에 양반은 옆집 부자에게 양반의 신분을 팔았다면서 그 사연을 털어놓았다.


▲  아라리촌 북쪽에 자리한 소박한 모습의 초정(草亭)과
읍내 곳곳에서 수습해온 오래되지 않은 비석들

▲  가까이서 바라본 8각형 모양의 초정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초가 정자, 소박하고 단촐한 멋이 돋보인다.
이곳은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 및 길손님의 휴식처 역할을 하였다.

▲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단잠에 빠진 그네

▲  아라리촌 둑방길에서 바라본 정선읍내와 조양강
읍내 뒤로 보이는 높고 웅장한 산이 정선읍의 진산(鎭山)인 비봉산(飛鳳山)이다.

▲  강바람이 살랑살랑 귀를 간지럽히는 조양강 산책로

▲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언제나 싱글벙글인 장승 3형제

뻐드렁니와 풀어진 눈을 드러내 보이며 밝은 표정으로 나그네를 맞는 장승, 장승은 마을의 안녕
을 지키고, 이정표의 역할을 하는 존재로 보통 마을 입구에 세우며, 그들 몸통에는 그들의 정체
가 쓰여져 있다.


▲  아라리촌에 살포시 찾아온 가을

▲  주막 옆에 자리한 농기구 공방
▼  공방 내부 (왼쪽은 농기구를 불에 달구어 만들던 곳, 오른쪽은
농기구와 농사와 관련된 도구들이 진열된 공간)


▲  양반이란 실체에 대경실색하는 부자 (양반전 조형물 5)

양반의 신분을 산 부자는 현감에게 이를 인정하는 증인이 되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현감은
그 문서를 만들어 주면서 양반이 지켜야 될 행동과 권리를 설명했다. 행동은 그야말로 겉치례가
상당수였으며, 권리는 그야말로 백성들을 쥐어짜고 착취하는 도둑 수준이었다. 그것을 모두 들
은 부자는 기쁨의 표정은 싹 사라지고 표정이 하얗게 질리면서
'아이고~ 그런 것이 양반이라면 차라리 안하고 말겠소~~!!'
양반을 포기하고 줄행랑을 쳤다. 그
이후 다시는 양반 타령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  파전에 동동주 1잔 들이키고 싶은 아라리촌

아라리촌에는 주막이 장사를 하고 있다. (겨울에는 안함) 초가 주막에는 산채정식, 곤드레밥 등
을 팔며, 굴피집 주막에는 순두부와 메밀콩국수, 칼국수 등을 파는데, 가격은 조금은 미운 수준
이다. 이런 곳에 왔으면 바깥에 차려진 마루에 걸터앉아 동동주 1잔에 파전 하나 걸쳐야 기분이
나는데, 그러지를 못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  이제는 굳어버린 화석처럼 아련히 남은 외겨리
외겨리는 소 1마리로 전답에 쟁기질을 하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2마리로
하는 것을 '쌍겨리'라고 하며 척박한 산간지대 전답에서 많이 쓰였다.


▲  양반의 특혜에는 상민을 괴롭히는 몹쓸 것도 있다. (양반전 조형물 6)

현감이 말한 양반의 특혜 중에 양반이 상민의 코에 잿물을 들이붓고 머리채를 잡아 댕기며 수염
을 희롱하더라도 상민은 감히 원망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  이름도 외우기 쉬운 돌집
돌집은 정선 지역에서 많이 지어진 가옥 형태로 안방과 윗방, 사랑방, 도장방 그리고
정지와 외양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집은 얇은 판석을 두께 2cm 정도의 돌기와로
지붕을 덮어 올린 집으로, 주로 정선 지역 산지에서 나오는
청석맥을 파내 사용했다.

▲  벌거숭이 모습이 부끄러웠던지 덩굴을 걸친 돌담장

▲  산간지역에서 많이 지어진 귀틀집

귀틀집은 껍질을 벗긴 통나무를 '井' 모양으로 쌓아 벽을 만들고, 나무 틈새는 진흙으로 채웠다.
눈이 많이 와도 견딜 수 있고, 온도 유지가 용이하며, 간편하게 지을 수 있어 나무가 풍부한 산
간지대에서 많이 선호된 가옥이다.


▲  밥 생각을 간절하게 하는 귀틀집 부엌

▲  투박한 모습의 너와집

너와집은 귀틀집과 더불어 산간지대를 주름잡았던 집이다. 200년 이상 된 소나무 토막을 쪼깬
널판으로 지붕을 이었으며, 안방과 건넌방, 사랑방과 대청, 부엌, 봉담, 외양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는 정선 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화티'가 있는데, 이는 부뚜막 귀퉁이에 진흙을 쌓아 2개
의 구멍 중 위쪽은 불을 피워 음식을 하거나 내부를 밝히고, 아래쪽은 불씨 보관용으로 쓰였다.


▲  일반 초가와 비슷한 저릅집

저릅집은 정선과 삼척 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초가로 대마의 껍질을 벗기고 줄기를 이엉으로
이은 집이다. 다른 말로 겨를집이라고도 한다.

       ◀  통방아가 담겨진 삼각형 건물
통방아는 '물방아','벼락방아'라고도 한다. 확(
곡식을 넣는 돌통), 공이(찧는 틀), 수대 등으
로 이루어져 있는데. 3~5㎝ 정도의 커다란 통나
무를 이용하여 앞쪽에는 공이를 박고, 뒤쪽에는
물이 담길 수 있도록 구이통을 팠다. 그리고 귀
대를 통해 구이통 속으로 흘러 들어온 물에 의
해 공이가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확에 있는 곡식
을 찧게 된다.


▲  물레방아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물레방아는 흔히들 우리 고유의 것으로 알고 있다. 허나 그것은 조
선 후기에 청나라에서 가져온 것으로 앞서 양반전의 저자인 연암 박지원이 청에 사신으로 갔다
가 물레방아의 위력에 반해 그것을 연구하였다.
이후 안의(安義, 경남 함양)현감이 되자 안의 북쪽 용추계곡에서 물레방아를 시범 운영을 하였
으니 그것이 바로 이 땅 최초의 물레방아이며, 용추계곡은 우리나라 물레방아의 탄생지가 되었
다. 그 이후 전국으로 빠르게 보급되어 농업 생산력의 흔쾌한 증진을 가져왔다.


▲  돌탑과 장승
마을 입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승과 돌탑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의 기능과
마을을 알리는 이정표의 역할을 하였다.

▲  서낭당(성황당)

서낭당은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성황신(城隍神)의 보금자리로 시골 마을에는 꼭 1개씩은 있다.
보통은 마을 입구나 이웃 마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세웠으며 지금도 성황제(城隍祭)를 지내
는 마을이 많다. 당 주위에는 금줄과 돌담을 둘러 잡인의 출입을 금하며, 장승이나 돌탑을 주변
에 세웠다. 마을에서 가장 신성하고 중요한 곳이다 보니 이곳에 대한 정성은 정말 대단했다.


▲  서낭당에 모셔진 성황신도(城隍神圖)

성황신도는 하나지만 각각 다른 모습의 성황신 2인이 담겨져 있다. 그들 머리 뒤로 공통적으로
금색의 동그란 것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광배(光背)의 일종인 두광(頭光)이다. 푸근한 인상이
매력적인 왼쪽 성황신은 하얀 옷을 걸치고 있는데, 오른손에 지팡이, 왼손에 산삼을 거머쥐며
서 있다. 빨간 옷은 입은 오른쪽 성황신도 왼쪽만큼이나 인자함이 깃든 표정으로 있는데, 오른
손에 지팡이를, 왼손으로 귀여움이 묻어난 호랑이를 살짝 어루만지고 있다.
산신과 호랑이 외에 동자와 나무, 산 등이 담겨져 있어 산신도(山神圖)와 비슷하다.

이렇게 하여 양반전과 정선의 옛 모습을 담은 아라리촌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  느긋하게 팔자걸음을 걷는 양반 (양반전 조형물 7)
현감이 부자에게 말한 양반의 겉치례 중에는 팔자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어야
되는 내용도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은 정선 5일장이었다. 그래서 읍내로 넘어가 장터의 중심지인 중앙시
장에서 간단하게 메밀전병과 메밀전을 사먹고 여량, 아우라지로 가고자 정선터미널로 이동했다.
정선 땅은 구절양장(九折羊腸)의 험준한 산악지대라 교통이 매우 좋지가 못하다. 강원도 안에서
도 매우 첩첩한 산골이라 평창, 영월과 더불어 산다삼읍(山多三邑)이라 일컬어진다.

정선터미널에서 그나마 많이 있는 강릉행 직행버스(1~2시간 간격)를 타고 정선의 험준한 산하를
넘어 25분 만에 여량면(餘糧面)의 중심지인 여량에 이르렀다. 여량은 말그대로 식량의 여분이
있다는 뜻으로 험한 산골임에도 너른 들과 논이 있어 논농사가 가능했다. 그래서 식량이 남을
정도로 풍족했다고 전한다.

여량정류장에서 북쪽으로 가면 정선선의 실질적인 종점인 아우라지역이 나온다. 정선선의 종점
은 여기서 7.2km를 더 들어가야 되는 구절리(九切里)역이지만, 관광열차는 아우라지에서 바퀴를
접고 더 이상 들어가지 않으며, (무궁화호 열차는 폐선되고 비싼 관광열차가 대신 들어옴) 대신
레일바이크(Railbike)가 그 구간을 쑤시고 다닌다.

아우라지역은 원래 여량역이었으나 2000년에 아우라지로 간판을 갈았다. 이 역은 현재 역무원이
없는 무배치 간이역으로 역건물과 플랫폼, 철로가 전부이다. 역과 철로시설을 보호하는 담장도
없이 사방이 개방된 형태로 자유롭게 역 내부를 거닐 수 있으며, 하루에 2번 외부세계를 이어주
는 정선아리랑열차가 운행된다.

아우라지역을 지나면 두 물줄기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곳, 아우라지가 바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  정선선 아우라지역 ~ 조촐한 간이역의 모습이 너무나 정겹다.


♠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이자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정선의 제일가는 명승지, 아우라지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 장마가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몰려든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 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임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
아리랑 아리랑 아리라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정선읍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여량에는 정선아리랑의 발상지로 알려진 아우라지가 있다. 이
곳은 평창군 도암면에서 발원한 송천(松川)과 삼척시 하장면에서 발원한 골지천(骨只川)이 만나
는 곳으로 두 물줄기가 하나로 어우러진다는 뜻에서 아우라지라 불린다. 여기서 하나가 된 물줄
기는 조양강으로 간판을 바꾸고 남한강으로 흘러간다.

구름을 허리에 두르며 칼처럼 솟아난 높은 산과 시리도록 맑은 두 물줄기가 합쳐진 곳이라 경관
이 한 폭의 수묵담채화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예전에는 여량에서 강을 건널 때는 나룻배를 타
야 했으며, 섶다리를 따로 만들어 통행하기도 했으나 장마철만 되면 떠내려가기가 바쁘니 자연
히 나룻배의 의존도는 컸다. 강의 수심은 그리 깊지는 않아 두 다리로 건너도 무관하지만 그렇
다고 1년 내내 그렇게 건널 수도 없는 노릇이다.
허나 아우라지가 정선5일장만큼이나 유명해지면서 정선군은 푸른 산과 맑은 강, 강변을 가득 메
운 자갈돌, 푸른 하늘과 구름 밖에 없던 이곳을 열심히 꾸미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요란하게 꾸
민 것은 아니다. 골지천에 여량교(餘糧橋)란 다리를 놓고, 그 너머에 여송정(餘松亭)이란 2층
정자를 지었으며, 거기서 송천 너머까지 소박하게 징검다리를 놓아 조금은 돌아가긴 하지만 이
제는 배에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허나 나룻배는 이곳 아우라지의 상징, 그것을 없애는 것
은 갈비탕에서 갈비를 빼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관광용으로 남겨두어 호기심 가득한 관광
객을 실어나른다. 배삯은 편도 500~1,000원으로 저렴하다. (배삯은 변경될 수 있음)

이곳으로 흘러드는 송천을 양수(陽水), 골지천을 음수(陰水)라 하여 장마 때 양수가 많으면 대
홍수가 예상되고 음수가 많으면 장마가 끊긴다는 옛말이 전해오며, 남한강 1천리 길을 따라 목
재를 운반하던 뗏목 시발점으로 각지에서 모여둔 뗏꾼의 아라리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특히 정
선아리랑의 발상지로 유명한데, 그 애달픈 사연은 다음과 같다.

옛날 여량에 혼인을 약속한 남녀가 있었다. 총각은 뗏사공으로 나무를 팔아 돌아오면 처녀와 혼
인하기로 다짐을 하고 조양강에 배를 띄워 아우라지를 떠났다. 하지만 총각은 1년이 가도 2년이
가도 돌아오지 못했다. 아마도 가는 도중에 드센 여울에서 배가 뒤집혀 목숨을 잃은 듯 싶다.
기다림의 시간은 점점 절망적으로 변했다. 아우라지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처녀는 결국 아우라지
강에 몸을 던져 죽고 만다. 그녀가 그를 기다리며 애절한 마음을 적어 읆은 것이 바로 정선아리
랑의 시초라는 것이다. 이 전설 외에도 장마로 인해 강을 사이에 두고 만나지 못하는 남녀의 한
스러운 마음을 담은 것이 아리랑의 가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구전(口傳)으로 전해오던 아우라지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고자 여송정을 세우고, 그 옆에
처녀상을 1987년에 세웠는데, 지금의 것은 1999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또한 아우라지비를 세워
이곳이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임을 아련히 전한다.
그리고 속세에 거의 알려지진 않았지만 2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아우라지 자갈밭에서 신석기시대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유물은 어디 박물관이나 발굴을 주관한 대학교 수장고에서 잠
을 자고 있겠지만, 유적은 발굴 이후 사라져 지금은 흔적 조차 더듬을 수 없다. 이들 유적과 유
물을 통해 선사시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살짝 알려준다.


▲  아우라지역에서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왕재산(997m)

▲  단장의 사연을 담은 아우라지 노래비

▲  아우라지의 명물값을 톡톡히 하는 나룻배
예전에는 뱃사골이 직접 노를 저어서 배를 움직였으나, 지금은 강을 가로지른
굵은줄을 잡으며 배를 움직인다.


강 건너편까지 다리가 놓여져 굳이 돈 주고 느림보 나룻배를 이용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우라지
의 상징이자 이 세상에서 자꾸만 사라지고 있는 우리의 정겨운 풍물의 하나이다. 시멘트 다리에
떠밀려 나룻배는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가고 이제는 손에 꼽을 정도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다.


▲  평창에서 온 송천이 삼척에서 온 골지천과 하나가 되는 현장 ~ 아우라지

▲  조양강의 북쪽과 남쪽을 끈끈하게 붙들어 맨 여량교

초승달이 아우라지의 물을 뜨려는 달나라 토끼의 조정으로 인간 세상으로 깊히 내려오다가 그만
다리에 걸려 꼼짝달싹 못하는 것 같다.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는
아우라지의 풍경은 정말 집으로 살며시 훔쳐와 혼자서만 두고두고 보고 싶다. 이곳을 지나던 조
각구름도 아우라지의 풍경에 홀딱 반했는지 갈 길을 멈추고 한없이 머물고 있다.

▲  측면에서 본 초승달 모형
마치 날카로운 칼날을 보는 듯 하다.
저기에 손을 댔다가는 피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  아우라지의 명물, 아우라지 처녀상
오늘도 기약없는 님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녀의
모습에 처절함과 비장함이 엿보인다.


▲  아우라지를 굽어보는 여송정
1997년 주민들이 모든 1억원으로 지은 정자로 여량과 송천의 앞글자를 따서
여송정이라 하였다. 정선아리랑 설화에 나오는 총각은 여량에, 처녀는
송천 건너에 살았다고 전한다.

▲  송천을 따라 이어진 여송정 옛길
2010 정선비전 100대 시책사업의 하나로 조성된 길로 옛날부터 이곳
주민들이 이용하던 길이다.

▲  여송정에서 바라본 조양강, 그리고 정선의 산하
저 강물에 이 몸 하나 의지할 조그만 조각배를 띄우고
서울까지 흘러가 보고 싶다. 물론 위험한 짓이지만 ~~

▲  조양강 자갈밭에 조성된 돌탑들
이 주변에서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아우라지를 정신없이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아쉽지만 내가 있어야 될 서울로
돌아가야 될 시간이다. 원래는 나전과 진부를 거쳐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아우라지역에 청
량리로 가는 열차가 대기하고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아우라지에서 잠시 머문 열차는 17시 10분 외마디 기적소리로 이곳의 정적을 살짝 깨뜨리며 첩
첩한 산주름에 묻힌 아우라지를 떠난다. 이리하여 강원도의 지붕 정선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
을 걷는다.

※ 정선 아우라지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청량리역에서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매일 8시 20분에 떠난다. (민둥산역 경유)
* 민둥산역에서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매일 2회 떠난다. (11:25, 15:15)
* 강릉에서 정선행 직행버스(1~2시간 간격)를 타고 여량 하차
* 정선터미널에서 강릉행 직행버스나 여량, 임계 방면 군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갈 경우 (주차장 있음)
① 영동고속도로 → 진부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정선방면 59번 국도 → 나전3거리에서 임계
   방면으로 좌회전 → 나전 → 아우라지
* 구절리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레일바이크를 이용할 수 있다. 거리는 7.2km로 동절기에는 1일
  4회(8:40, 10:30, 13:00, 14:50), 하절기에는 16:40분이 추가되어 1일 5회 다닌다. 이용요금
  은 2인승 25,000원, 4인승은 35,000원이며, 10대 이상 단체 예약시는 10% 할인된다. 레일바이
  크 예약 및 자세한 정보는 ☞ 여기를 클릭한다 (문의 ☎ 033-563-8787)
*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여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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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니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와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5년 12월 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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