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3.03.28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강원도의 깊은 내륙, 양구 방산면 나들이 <수입천, 직연폭포, 양구백자박물관>
  2. 2021.10.31 강원도의 깊은 내륙이자 한반도의 배꼽, 양구 나들이 (양구근현대사박물관, 양구선사박물관, 파로호인공습지, 한반도섬)
  3. 2016.06.29 한반도 배꼽 속에 숨겨진 순박한 폭포, 양구 팔랑폭포 (팔랑계곡)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강원도의 깊은 내륙, 양구 방산면 나들이 <수입천, 직연폭포, 양구백자박물관>

양구 직연폭포, 백자박물관



' 강원도 양구 여름 나들이 '
(직연폭포, 양구 백자박물관)
양구 직연폭포
▲  양구 직연폭포
 



 

여름이 점점 깊어가던 6월의 끝 무렵, 한반도의 정중앙이자 배꼽을 자처하는 강원도 양구
(楊口) 땅을 찾았다.

양구는 거의 9년 만에 방문으로 이번이 4번째 인연인데, 양구읍내 북쪽에 있는 '양구근현
대사박물관'과 '양구 선사박물관', 선사박물관의 깜찍한 마스코트인 '가오작리 선돌', 파
로호 상류에 떠있는 '한반도섬' 등을 간만에 복습했다. 이들은 거의 한곳에 몰려 있어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편하다. (☞ 관련글 보러가기)

그들을 모두 둘러보고 양구 읍내로 나오니 어느덧 15시, 점점 흥분이 더해가는 여름 제국
의 기운과 10km에 가까운 행군으로 몸은 다소 지쳐 있었다. 읍내 다음으로 방산면 지역의
직연폭포와 백자박물관을 정처(定處)로 두고 있었으나 날도 덥고 피곤도 하려니와 하루에
너무 많은 것을 봐버리면 내 침침한 두 망막이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아서 마음을 싹 비
우고 철수하려고 했다.
그래서 양구시외터미널로 들어가 양구를 뜰 궁리를 하던 찰라, 방산(오미리)으로 가는 군
내버스가 나타나 나의 그런 태만에 빵빵 제동을 건다.
'그래! 오늘 죽더라도 방산면과 인연을 짓자' 마음을 고쳐먹고 그 버스에 올라 미답(未踏
)의 공간인 방산면으로 이동했다.

방산면(方山面)은 양구 지역의 서북부를 이루고 있는 고장으로 읍내에서 방산면 중심지인
현리까지 30여 분 정도 걸린다. 서쪽은 남북분단이 빚은 어이없는 작품, 평화의댐에 이르
고 북쪽은 미움의 선, 휴전선으로 막힌 외로운 곳으로 두타연(頭陀淵)이 있는 고방산리까
지는 오로지 북만 보고 달리다가 거기서부터 급격히 서남쪽으로 길이 꺾인다.

방산면사무소(현리)에서 내려 남쪽으로 가면 방산면의 대지를 적시며 파로호로 흐르는 수
입천(水入川)이 마중을 한다. 수입천은 휴전선 이북에 강제로 잡힌 수입면 청송령(靑松嶺
)에서 발원한 34.8km의 하천으로 두타연과 직연폭포 등의 걸출한 명승지를 간직하고 있으
며, 수질 또한 전방 지역의 특수로 인해 청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  칠전1교에서 바라본 수입천 (서쪽 방향)
방산면의 중심지인 현리 마을 남쪽을 굽이쳐 북한강으로 흘러간다.

▲  칠전교에서 바라본 칠전1교와 수입천 (서쪽 방향)

▲  칠전교에서 바라본 직연폭포 방향
멀리 보이는 다리 밑에 나를 이곳으로 부른 직연폭포가 누워 있다. 물이 얼마나
맑은지 주변 나무는 물론이고 하늘과 구름, 달까지 그를 거울로 삼으며
매뭇새를 다듬는다.



 

♠  수입천이 빚은 대작품, 직연폭포(直淵瀑布)

▲  직연폭포로 인도하는 수입천 산책로

칠전교에서 수입천 산책로를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귀신이 놀라 도망칠 정도로 소리가 요
란한 직연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금강산(金剛山) 밑에서 발원한 수입천이 두타연을 거쳐 흐르다가 바위가 팽팽하게 들어선 이
곳에서 격한 흥분을 보이며 빚은 폭포로 동면 팔랑폭포(八郞瀑布, ☞ 관련글 보기)와 더불어
양구 지역을 대표하는 자연산 폭포이다.
팔랑폭포처럼 높이는 낮은 편이나 폭포 주위로 주름진 암벽들이 기묘하게 펼쳐져 있어 마치
조그만 대협곡을 보는 듯 하며, 폭포수가 고인 못은 깊이가 무려 20m가 넘어 많은 물고기가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물이 바로 떨어지는 못이란 뜻의' 직소(直沼)폭포'라 불렸으나 19세
기에 양구현감을 지냈던 '김구현'이 이곳을 다녀가면서 '직연(直淵)'으로 이름을 갈고 인근
바위 피부에 '직연' 바위글씨를 남겼다. (그 글씨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남아있지 않음)

암벽 한복판에서 요란하게 몸을 푸는 직연폭포에는 옛 사람들이 달아놓은 그럴싸한 전설이 있
을 법도 하지만 딱히 마땅한 전설은 없다. 다만 1922년 폭포 부근 칠전리에 살던 '김왈용'이
란 사람의 6개월 된 송아지가 직연에 빠져 죽은 일이 있었는데, 3자 이상이나 되는 메기들이
그 몸뚱이를 먹어치웠다는 소름 돋는 일화가 1토막 전해온다. 1자의 크기가 30cm 정도이니 대
략 90~100cm 정도 되는 메기들이 소고기 회식을 즐긴 것이다.

폭포 위에는 다리가 닦여져 있으며, 다리 너머에는 벼랑을 깎아 지은 방산백자폭포와 전통가
마 등이 있고, 다리 북쪽에는 양구 백자박물관과 백자공원이 닦여져 있다. 백자박물관 바로
남쪽에 폭포가 있으니 이들을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된다.

* 직연폭포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칠전리


▲  층층이 주름진 암벽 사이를 패기 있게 흐르는 직연폭포

▲  대자연이 시퍼런 물감을 풀어놓은 직연폭포 못(직연)
물에 둥둥 떠있는 하얀 것은 비누 거품이 아니라 폭포에서 쏟아진 물의
자연산 거품이다. 수질이 청정하긴 하지만 워낙 깊이가 있고
시퍼런 기운이 가득해 밑바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  수풀 너머로 바라본 직연
산 속에 숨겨진 것이 아닌 주변에 훤히 드러난 곳이라 하늘나라 선녀 누님도
마음껏 놀러오지는 못할 것이다.

▲  직연폭포의 허공을 가르는 다리
폭포를 가까이서 보고 싶다면 이 다리를 이용하자. 다리 바로 밑에 폭포가
무섭게 입을 벌리며 하얀 실타래 같은 물을 풀어놓는다.

▲  다리 바로 위에서 바라본 직연폭포의 위엄

▲  다리 남쪽에서 바라본 직연폭포와 직연소

▲  직연폭포 동쪽 수입천

폭포 동쪽 보 너머에는 백사장이 닦여진 완만한 공간이 있다. 그곳은 수심도 얕은 편이라 어
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피서객들에게 아주 그만인 곳이다. (내가 갔을 당시 한 가족이 텐트
를 치고 놀고 있었음) 다만 주변에 깊은 곳이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으니 조심은 필수이다.


▲  방산백자폭포에서 바라본 직연폭포 다리와 폭포 주변

▲  방산백자폭포 앞에 축소 재현된 황포 돛배

조선시대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황포돛배를 통해 양구 지역의 백토와 여러 물자를 서울과 경기
도로 수송했다. 하지만 화천댐과 춘천댐 등 여러 댐이 북한강에 걸쳐지면서 물길이 모두 막혔
고, 도로가 닦이면서 육상교통이 그 역할을 대신하니 이제는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지기가 바
쁜 추억 속의 풍물시(風物詩)가 되어버렸다.


▲  말라버린 방산백자폭포

직연폭포 남쪽에는 또 다른 폭포인 방산백자폭포가 주름을 가득 보이며 자리해 있다. 직연폭
포가 대자연이 빚은 작품이라면 백자폭포는 인간이 지은 인공폭포로 높이만큼은 직연을 훨씬
능가하지만 나머지는 대자연 형님 작품에 모두 밀린다.
이 졸작스러운 폭포는 직연폭포 주변에 백자박물관과 백자공원, 전통가마를 닦으면서 그 수식
용으로 지은 것으로 내가 갔을 때는 물은커녕 물기조차 느낄 수 없는 우울한 상태였다. 물이
좀 흐르고 있거나 자연산 비슷하게 만들었다면 좀 봐줄 만하겠지만 꽤 어색해 보이는 주름선
만이 가득하니 주변 풍경과 너무 맞지 않는 것 같다. (서울의 홍제천인공폭포와 순창 강천산
의 여러 인공폭포를 보고 배워야 될 듯함)


▲  백자를 굽던 전통가마

백자폭포 서쪽에는 백자박물관에 딸린 전통가마가 길게 누워있다.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비바
람을 막고자 그 허공에 길쭉하게 지붕을 씌웠으며 지붕 용마루 2곳에 연기를 배출하는 장치를
달았다. (지금도 가마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

양구 지역, 특히 방산면은 고려시대부터 도자기 생산지로 명성이 높았다. 도자기 제조에 필요
한 백토(白土)와 도석(陶石)이 매우 풍부한데다 백토의 질도 매우 우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 말부터 가마터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이곳을 꽤 애지중지하
여 많은 관요(官窯)를 설치해 백자를 생산했다. 조선 초에는 분청사기(粉靑沙器), 조선 말에
는 청화백자(靑華白瓷)도 생산했으나 백자가 그 중심을 이루었으며, 양구에서 만든 백자를 '
양구백자'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양구에서 40기의 가마터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상무룡리의 9기를 빼면 모두 방산면
(장평리, 칠전리, 현리, 송현리, 오미리, 금악리)에 분포하고 있어 방산면이 그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이렇듯 풍부한 백토 덕에 반짝 흥한 것이 아닌 20세기 중반까지 600년 이상 두고두
고 도자기 산지로 위엄을 떨쳤으며 이렇게 오랫동안 도자기를 만든 현장은 천하에서 양구 방
산면이 거의 유일하다.

이곳에서 태어난 백자 등의 도자기는 한강을 통해 서울로 운송되어 상당수 왕실과 귀족들에게
납품되었는데, 서울에서 가까운 광주(廣州)에 백자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마('광주분원'이라
고 함)가 많이 설치되면서 양구와 방산 지역 가마터는 조금 한가해졌다. 그래서 지역 사람들
을 대상으로 여러 그릇과 도자기를 만들어 판매했다.
허나 나라에서는 여전히 양구 백토를 선호하여 중심 안료로 계속 인기를 누렸다. <광주 지역
수토도 적지 않게 사용했음>
양구 백토는 매년 500~550석(72~79.2톤) 정도 채굴했는데, 이를 채굴하고자 양구의 민호(民戶
) 500호가 동원되었다. 백성을 닥달하여 백토를 캐내고 거기서 괜찮은 것을 선별한 다음 한강
을 이용해 봄과 가을에 2번 운송을 했는데, 이때는 북한강 주변의 인제, 화천, 춘천, 홍천 지
역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양구 백성들도 운송에 동원되었으나 1709년 이후 빠지게 된다. 백토
채굴도 힘든데 수송까지 시켜먹으니 백성들의 고단함이 컸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지역의 백토를 쓰려고 했으나 광주분원을 관리하던 사옹원(司饔院)에서 양구 백
토가 아니면 그릇이 거칠어지고 흠이 생긴다고 하자 계속 양구 것을 썼다. 이후 백성들의 고
통을 덜어주고자 상정미(詳定米)를 나누어 주고 백토 값을 올려주기도 했다.

백토를 수송할 때는 보통 배 10척에 25석씩 나눠 실었으며 화천이 110석, 춘천 220석, 인제
60석, 홍천이 12석을 나누어 운반했다. 또한 가뭄으로 물이 마르거나 제때 수송하지 못하는
경우는 말을 이용해 육로로 수송하기도 했고, 수송비를 주고 민간업자에게 맡기기도 했다.


▲  누런 황토로 닦여진 전통가마



 

♠  양구백자와 방산면 가마터를 집대성한 양구 백자박물관

▲  양구 백자박물관

직연폭포 북쪽에는 양구군에서 세운 백자박물관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양구는 기초자치
단체(군청, 시청, 구청)에서 세운 군립(시립) 박물관이 다른 군(郡)이나 인구가 적은 시(市)
에 비해 아주 많은 편으로 이번 나들이는 기이하게도 양구의 군립박물관 3곳(근현대사, 선사,
백자)과 한꺼번에 인연을 지었다.
 
방산면 중심지(현리) 동남쪽에 자리한 백자박물관은 2006년 6월 27일에 문을 열었다. 2003년
박기병(현재 명예관장)이 수집한 양구백자 50여 점을 양구군에 흔쾌히 기증을 했는데, 그것을
계기로 양구백자를 취급할 박물관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어 양구백자의 대표 생산지인 방산
면 한복판에 그들을 전시하고 다룰 박물관을 세우게 되었다.
양구군은 박기병의 기증 이후 많은 이들의 문화유산과 자료 기증이 잇달아 그 방대한 자료로
근현대사박물관을 차리고, 선사박물관에 삼엽충(三葉蟲) 화석 전시실까지 닦았으며, 거기에
양구백자박물관까지 차렸으니 정말 기증 복은 많은 고장이다.

전시 유물은 50여 점 정도로 양구백자실과 도자역사문화실 등의 전시실 2개를 지니고 있으며,
전시실 외에 전기가마, 가스가마, 장작가마를 갖추어 도자기 체험을 선사하는 체험실, 양구
지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를 판매하는 박물관(뮤지엄) 샵, 영상실, 전통가마, 칠전리 1호 가
마터, 백자공원을 갖추고 있다.
(예전에는 입장료가 없었으나 요즘에는 어린이(8세 이상)/청소년/군인/65세 미만 성인들에게
일률적으로 3,000원을 받고 있음)


▲  백자박물관에서 직연폭포로 이어지는 하얀 길
길바닥에는 백자박물관에 걸맞게 백자 등의 도자기 파편들이 박혀있다.

▲  박물관 잔디밭에 심어진 커다란 도자기 파편들 (오래된 것들은 아님)

▲  진지하게 도자기를 빚고 있는 도공의 모형

▲  '순(順)' 글씨가 쓰인 백자 접시 파편
작살난 파편에 깨알처럼 쓰인 '순'은 태종 말엽에 잠시 있었던
'순승부(順承府)'로 여겨진다. (자세한 것은 사진 참조)

▲  새가 나무가 그려진 백자청화수명호 (조선 중기)

▲  '구(龜)'가 쓰인 백자청화 대발 (조선 후기)
거북이처럼 장수하라는 의미에서 대발 피부에 '龜'를 넣은 것 같다.

▲  여러 자연물이 그려진 백자청화초화문호의 수수한 자태

▲  양구 백토를 먹고 자란 여러 백자들

▲  천하에서 가장 좋은 백토로 꼽히는 양구 백토의 위엄
저 하얀 가루가 바로 백자를 야무지게 해주었던 양구 백토이다. 지금도 많이 나오고
있으며, 저 백토로 양구와 방산 지역 가마는 600년이 넘는 역사를 유지했다.

▲  백자박물관 바깥에 마련된 전통가마
전통 방식으로 도자기를 불에 다지는 공간이다.


전시실에서 순백의 미와 몸매를 뽐내고 있는 백자들을 구경하며 일부를 사진에 살짝 담고 영
상실에서 지친 두 다리에게 잠시 자유를 주며 양구백자 관련 영상을 시청했다. 전시실 바깥에
있는 전통가마를 구경하고 백자박물관을 마무리 지었는데, 그만 칠전리 1호 가마터를 놓치고
말았다.
야무지게 본다고 했음에도 하나를 놓치고 말았으니 아직 내공이 멀었나 보다. 그 가마터는 언
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넘기고 장평리(방산면소방서) 정류장으로 나왔다. 시간은 벌써 18시
, 햇님은 여름 제국의 눈치를 격하게 보며 아직까지 퇴근을 못해 세상은 훤하다.

백자박물관을 끝으로 양구 땅에 목적한 곳을 모두 둘러보았다. 한동안은 양구에 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버스를 기다린 지 10여 분 뒤, 양구 읍내로 가는 군내버스가 모습을 드러
내며 내 앞에서 입을 벌린다. 그것을 타고 다시 읍내로 나가 춘천(春川)으로 나가는 직행버스
에 고된 몸을 실으며 나의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양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양구백자박물관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장평리 344 (평화로 5182 ☎ 033-480-7238)
* 양구백자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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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3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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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깊은 내륙이자 한반도의 배꼽, 양구 나들이 (양구근현대사박물관, 양구선사박물관, 파로호인공습지, 한반도섬)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가오작리 선돌, 한반도섬(파로호인공습지)



' 강원도의 깊은 내륙, 양구 여름 나들이 '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한반도섬)
양구 가오작리 선돌
▲  양구 가오작리 선돌
 



 

여름이 무심히 깊어가던 6월의 끝 무렵, 한반도의 배꼽을 자처하는 강원도 양구(楊口) 땅
을 찾았다.
아침 일찍 경춘선 전철을 타고 그림처럼 펼쳐진 북한강을 벗삼으며 강원도의 중심 도시인
춘천(春川)으로 이동했다. 오랜만에 발을 들인 춘천이지만 마음은 이미 양구에 넘어간 상
태라 남춘천역 인근에 있는 춘천시외터미널에서 양구로 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
렇게 춘천을 콩 볶듯이 떠나 첩첩한 산주름 속을 50분 정도 내달려 양구읍 한복판에 자리
한 양구시외터미널에 두 발을 내린다.

이 땅에 바람직하지 않은 나쁜 선, 휴전선을 강제로 짊어지고 있는 양구 땅은 거의 8~9년
만에 방문이다. 서울보다 높은 곳에 자리한 탓에 그리 덥지는 않았으며, 공기도 확연하게
틀려 청정함마저 진하게 느껴진다. 오죽하면 양구에 오면 10년은 젊어진다고 강조까지 하
겠는가. (양구군청에서 그렇게 강조하고 있음)

양구에서는 이미 정처(定處)를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된다. 그래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이하 근현대사박물관)'으로 예전 '양구향토사료관'
이다. 이곳은 양구터미널에서 북쪽으로 2km 거리로 '양구 선사박물관(이하 선사박물관)'
바로 남쪽에 자리해 있는데, 그들은 이미 2번이나 인연을 지었지만 정처의 하나인 한반도
섬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동선상 들리게 되었다.
게다가 '근현대사박물관'으로 거창하게 이름까지 바꾼 '양구향토사료관'이 어찌 변했을까
궁금도 했고, 눈과 코, 입을 지닌 깜찍한 돌덩어리, 가오작리 선돌의 안부도 궁금했다.


▲  여름 가뭄으로 그림이 완전히 바뀐 파로호 인공습지 남쪽 부분


양구 읍내를 벗어나면 근현대사박물관으로 인도하는 길(함춘로) 서쪽으로 수풀로 덥수룩
한 너른 공간이 나온다. 마치 물이 나간지 오래된 황량한 수몰지대처럼 덥수룩하기 그지
없는데, 이곳이 양구군의 야심작이었던 파로호(破虜湖) 인공습지이다.
이 습지는 이 땅 최초의 인공습지로 읍내 북쪽에서 양구서천(西川)을 따라 한반도섬까지
이어지며 그 거리는 2km가 넘는다. 허나 오랜 가뭄으로 물은 몽땅 말라버렸고 물이 가고
없는 자리에는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졸지에 밀림과 초원 같은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하늘의 야박함으로 여러 달째 습지의 정체성을 잃은 이곳은 원래 파로호 물을 먹고 살던
경작지였다. 허나 무단 경작과 농약과 비료의 과다 사용, 쓰레기 투기, 흙/돌의 무단 채
취 등으로 수질이 악화되었고, 경관 또한 나날이 훼손되자 뿔이 난 양구군청에서 2007년
에 이곳을 싹 갈아엎고 서천과 한전천이 만나는 하류부에 저류보를 다진 다음, 수면공간
을 확보하고 습지를 조성해 2008년 말 완성을 보았다.
그렇게 태어난 습지의 면적은 약 163만㎡로 천하 최대급을 자랑하며 저수량은 300만㎥에
이른다. 또한 양구가 한반도의 배꼽임을 강조하고자 한반도 모양의 섬을 닦아 양구의 새
로운 꿀단지로 격하게 키우고 있다.
하천변에는 자전거길을 겸한 산책로를 내었으며, 강원외고 서쪽과 선사박물관 서쪽에 습
지 탐방로를 내었다.


▲  물이 가득 올랐던 예전 어느 겨울의 파로호 인공습지 (2008년)

▲  거대한 초원이 되버린 파로호 인공습지
물은 저 멀리 밀려나 겨우 형태만 유지하고 있다.

▲  정체성을 잃은 파로호 인공습지
인공습지 너머로 하리, 동수리 지역과 양구의 서쪽 지붕 사명산(四明山, 1,198m)이
시야에 들어온다.

▲  파로호 인공습지 산책로 (자전거길)
양구읍내에서 인공습지 옆구리를 따라 한반도섬까지 이어지는 호젓한 길이다.

▲  인공습지 습지식생대를 가르는 습지 탐방로 (선사박물관 서쪽)
습지에 물이 없으니 나무로 만든 습지 탐방로도 딱히 의미가 없어졌다.
그냥 들판 위에 다진 다리에 불과해진 것이다.



 

♠  양구 지역 문명시대(文明時代)의 역사와 이 땅의 근현대사를 담은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  근현대사박물관 정문 앞에 있는 쌍겨리 조형물
쌍겨리란 멍에에 소 2마리를 지어 논, 밭을 가는 것으로 1마리는 독겨리라고 한다.
쌍겨리 농법은 화전이나 단단한 땅을 갈 때 많이 이용되었다.


양구 선사박물관과 마주보고 있는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은 양구군에서 세운 군립(郡立) 박물관
으로 2002년 11월에 문을 열었다. 원래 이름은 '양구향토사료관'으로 건너편 선사박물관이 선
사시대의 양구를 다루었다면 이곳은 옛 조선(고조선)부터 20세기까지 문명시대의 양구를 다루
고 있었다.
그 시절 소장 유물은 600여 점으로 양구의 역사와 문화, 생활을 담은 작은 박물관이었으나 국
내 제1호 아리랑박사로 불리는 석우(石牛) 박민일<2011년에 10,700여 점을 기증>, 강원도민일
보 특파원을 지냈던 송광호<2012년과 2014년에 기증>, 연세대 명예교수이자 철학박사인 김형
석<2014년에 580여 점을 기증>, 독립운동가인 장준하(張俊河)의 장남이자 고려문화연구원 이
사장인 장호권 등 4명이 그들의 소장 자료와 문화유산 15,000여 점을 양구군에 흔쾌히 기증하
면서 번데기를 탈피한 나비처럼 크게 업그레이드를 하게 된다.
그 방대한 자료를 담고자 기존의 향토사료관을 2012년 7월부터 2년 동안 손질하여 2014년 9월
4일, 간판까지 바꾸어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강원도 최초의 근현대사 전문 박물관으로 박물관의 중심이 양구에서 근현대사로 맞춰졌고, 근
현대사와 기증 받은 자료의 공간이 더해져 스케일이 엄청 커졌다. 기증 유물로 인해 소장 자
료만 무려 16,000점 가까이 머금게 되었고, 눈에 착착 달라붙는 다양한 주제의 볼거리와 사라
지기가 바뻤던 옛 존재들, 과거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20세기 중~후반 볼거리까지 흥미로운
것들이 많아 침침한 두 눈과 과거를 늘 그리는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준다.

박물관은 2층 규모로 '제1전시실'에는 이 땅의 근현대사를 집대성한 '역사의 휘모리', 오래된
우표와 엽서가 전시된 '엽서관','우표관','씰관'이 있고, '제2전시장'에는 우리나라 영화의
역사와 영화 관련 자료를 모든 '추억의 영화관', 아리랑 문화의 다양한 면을 다룬 '아리랑관'
, 근현대 출판의 역사를 다룬 '창간호관'이 있다.
'기획전시실'에는 박민일, 송광호, 김형석이 기증한 자료의 일부를 다루고 있으며, 근현대사
박물관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양구향토민속자료관에는 양구의 역사와 문화, 생활을 담고 있다.
그 외에 '추억의 교실','근현대사 체험의 공간','주막'이 있고, 양구 곳곳에서 수습한 비석과
연자방아, 맷돌 등의 문화유산이 뜨락을 채우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 근현대사박물관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전시 유물 일부를 전시관 순
서에 상관없이 다루도록 하겠음)

       ◀  초가 주막(酒幕)과 물레방아
주막에서는 국밥과 도토리묵, 메밀전병과 동동
주를 팔고 있다.
주막 앞에는 연못이 닦여져 있는데, 물레방아
가 쉬지 않고 돌아가며 연못에 물을 베푼다.

◀  양구에서 발견된 구석기/청동기시대 유물
왼쪽 돌덩어리들은 구석기 유물인 '찍개', 오
른쪽 것들은 청동기 유물인 '간돌도끼'와 '간
돌화살촉'이다.


▲  검은 피부의 신라 토기들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옛 조선(고조선)이 사라진 후, 그 땅에는 고구려(高句麗)와 부여, 낙랑,
백제, 신라, 가야 등의 수많은 나라가 생겨났다. 요녕성(遼寧省) 지역인 요동(遼東)과 요서(
遼西)에서 시작된 고구려가 오랫동안 양구를 통치했고, 6세기 중반 이후에 신라가 접수 받아
양록군(楊麓郡)으로 지명을 변경하여 400년 가까이 통치했다.
이들 토기는 양구 지역에서 나온 것들로 신라 조정에서 파견된 양록군 태수(太守)나 양구 지
역 세력가들이 사용했을 것이다.


▲  고려시대 청동 수저와 청동 사발

9세기 말, 신라의 영역이 크게 3개로 쪼개지면서 양구는 후고구려(태봉, 마진)를 세운 궁예(
弓裔)의 지배를 받는다. 이후 918년 왕건(王建)의 고려가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춘주(春州,
춘천)의 속현(屬縣)이 된다.
이들 청동 수저와 그릇은 지역 세력가나 관리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숟가락이 지금보다 훨씬
커 그들의 왕성했던 식성을 보여준다.


▲  푸른 꽃이 그려진 백자 청화초화문 항아리 (조선 후기)
백자 피부에 깃들여진 꽃이 무척 곱다.

▲  왜정 때 만들어진 하얀 그릇과 '양구군 함춘리 이임명' 글씨가
새겨진 검은 피부의 놋그릇

▲  1950년대 이후 양구 군인들이 사용했던 수통과 수류탄 등잔,
군용 반합과 숟가락, 피복바구니

▲  이 땅의 경제를 이끌었던 20세기 지폐들

개인적으로 오른쪽 줄의 자주색 1,000원권과 점선이 있는 10,000원권, 그리고 1980년대에 사
라진 500원권에 크게 마음이 간다. 이들을 손에 쥐며 사용했던 것이 정말 엊그제 같은데 새
지폐에게 모두 밀려나면서 대부분 불살라지고 말았다.


▲  추억이 되버린 다양한 전화카드(위)와 서민들을 희망고문시켰던
여러 복권들(아래)

▲  옛 초등학교 교과서와 가방 (1970~80년대)
나도 어렸을 적에 저런 책으로 공부를 했었지. 근데 '보건'이란
교과서는 처음 본다.

▲  방산초교(방산국교)를 졸업한 어떤 이의 솔직한
생활통지표와 졸업 수료증(1978년)
내 초등학교 시절(그때는 국민학교)에도 저런 생활통지표가 쓰였다. 나의
교과학습 성적표에는 늘 '양'과 '가'만 가득했었지. '수'와 '우'는
가뭄에 콩나듯 나왔던 걸로 ㅠㅠ


▲  1960년대 강원도 미인들의 위엄 (미스 강원 선발대회)
빛바랜 흑백사진에 나온 미인들, 지금은 70~80대 할머니가 되어 세상 어딘가에서
살고들 있을 것이다. 파릇파릇한 저들이 설마 백발 할머니가 될 줄은
누가 알았으랴.

▲  고종(高宗)이 관리를 임명하면서 내린 칙명(勅命) <광무 7년, 1903년>

▲  네모난 구멍이 파인 옛 동전들
위에 조그만 동전은 송나라(1107~1110년) 동전인 대관통보 당십전(代官通寶 當十錢)이고
밑에 3개는 조선 후기에 널리 쓰인 상평통보(常平通寶)이다.

▲  왜정 시절 결전식기(決戰食器)와 궁성요배(宮城遙拜) 전단

돌다리와 붉은색 해가 담겨진 윗 사진은 왜열도 동경(토쿄)에 있는 황거(皇居, 코쿄)이다. 황
거란 왜열도 백성들의 영원한 등골브레이커 왜왕(倭王)과 그 떨거지들이 서식하는 곳으로 20
세기 전반기 왜국 군국주의의 상징과 같은 곳이다. 왜정은 저런 것들을 통해 이 땅의 사람들
에게 충성과 협조를 강요했다.


▲  의친왕 이강이 1914년 초가을에 쓴 글씨 (가운데 유물)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1955)은 고종의 5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인 장씨이다. 이곳
에 그의 글씨가 1점 전시되어 있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끝없이 펼쳐진 대륙은 그 드넒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산은 솟고 물은 흐르며 온갖 경계는 높
고 낮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그 밝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구름은 모이고 달은 숨으며 온갖 물
상은 같은 것이 없다. 이것이 하늘과 땅이 크다고 하지만 오히려 아쉬운 것이 있다.

아아! 인생만사 잠시라도 그 높고 낮은 산수와 변화무쌍한 구름과 달에서 그것을 즐기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명(命)을 아는 사람은 산에 가면 산과 함께 높아지고, 물을 만나면 반드
시 물과 함께 맑아지고, 구름과 마주치면 반드시 구름과 함께 치사(致辭)하고, 달을 만나면
달과 함께 숨어서 그 오는 것에 나를 맡길 뿐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그 안은 비워두고 그 바깥은 채우며, 그 날카로운 끝을 무디게 하고 그 등지
는 것을 벗어나야 한다. 쓰이게 되면 행하여 그 능력을 팔지 않으며 버려지면 숨어서 그 몸을
치욕스럽게 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세상에 처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  김형석 교수가 기증한 조선시대 백자들
김형석은 2012년 양구에 '시와 철학의 집'을 개관한 인연으로 자신이 수집했던
백자와 청자, 서화(書畵) 등 580여 점을 양구군에 기증했다.

▲  고고한 푸른 빛을 드러낸 고려 청자들
저 청자로 마시는 차와 곡차(穀茶)의 맛은 어떠할까? 아무리 맛없는 곡차나
쓴 차라고 해도 저들을 통하면 달달한 맛으로 바뀔 것 같다.

▲  고려 상감청자(象嵌靑瓷) 사발

▲  조선 분청사기(粉靑沙器) 사발

▲  조선 백자 사발

▲  조선 후기 청화백자

▲  북한에서 넘어온 상감청자(1990년 작)

▲  빛깔이 고운 청자상감과초화문 꽃병
(1990년 북한)

양구 지역이 북한과 살을 대고 있는 현장이다보니 북한에서 넘어온 존재들이 여럿 담겨져 있
다. 이들은 송광호 기자가 시베리아와 북미대륙 등에서 수집한 것을 양구군에 기증한 것으로
북한을 코 앞에 둔 곳이라 그런지 꽤 남달라보인다.


▲  북한의 소액 화폐들 (50전, 1원, 50원짜리)

▲  북한의 중/고액 화폐들 (1원, 10원, 100원, 200원, 500원)

▲  20세기 중/후반 영화 포스터들

▲  20세기 영화포스터와 여러 잡지들

▲  조촐하게 재현된 옛 극장 출입문


▲  옛 초등학교 교실을 재현한 추억의 교실 (박물관 세미나실)

나도 저런 교실에서 초등학교(국민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에는 저 의자와 책상이 딱 사
이즈에 맞았었는데 이제는 어떻게 저기에 앉아서 공부를 했는지 고개가 갸우뚱할 정도로 좁다.
그만큼 나의 면적이 넓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뚱뚱한 것은 아님)
이곳은 전시용 외에도 강연과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교육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다.


▲  추억의 교실 한복판에 놓여진 난로

내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는 겨울마다 저 난로를 교실 한복판에 두어 난방을 했었다. 담당
주번은 학교 시설물을 수리하는 곳이나 창고에서 장작을 가져와 난로에게 먹였는데, 비록 오
늘날 난방기구만은 못해도 저 난로가 몸을 푸는 동안은 그런데로 따스했던 것 같다. 가끔 난
로에 도시락을 올려서 따끈하게 덥혀서 먹기도 했고 라면을 끓여먹기도 했었지.

허나 세월이 흐르면서 도시가스나 전기로 대체되었고 그로 인해 저런 난로와 장작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저 난로의 온기를 받으며 교실에서 겨울잠을 잤던 본인으로서는 조금 아
쉽기는 하지만 어찌하랴. 그것 또한 변화의 과정이거늘, 이제는 정겨운 풍물시(風物詩)가 되
어 이런 곳에서나 만날 수가 있다.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뜨락과 가오작리 선돌

▲  근현대사박물관 뜨락 (장독대, 연자방아)

햇살이 내리쬐는 근현대사박물관 뜨락에는 양구 곳곳에서 가져온 비석과 연자방아, 맷돌, 돌
절구, 항아리 등의 문화유산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양구향토사료관 시절부터
있던 것이라 꽤나 낯이 익은데, 문화유산을 기증하여 박물관을 크게 살찌운 이들을 위한 '근
현대사 자료기증 감사비'가 한쪽에 닦여져 있어 그들을 두고두고 기리고 있다.

▲  현역에서 물러나 한가로운 여생을
보내는 연자방아

▲  나무 그늘 밑에 모인 비석들


▲  서로를 보듬고 있는 조그만 비석과 석인(石人)
늦가을에 버려진 낙엽처럼 존재의 가치를 상실한 채, 뜨락의 일부가 되버린
그들의 초췌한 모습에 쓸쓸함만이 감돈다.

▲  초가3간 수복주택(收復住宅)

수복주택은 6.25전쟁 이후 미국군이 양구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지어준 초가이다. 나왕목으로
지었다는 특징 외에는 일반 초가와 크게 다를 것은 없으며, 수복(양구 지역은 1953년 이전까
지 북한 치하였음) 이후에 지었다고 해서 '수복주택'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허나 새마을운동 이후 대부분 사라지고 이곳으로 이전된 2채만 겨우 살아남아 수복주택의 존
재를 아련히 전해주고 있으며, 현재는 전통공예체험 장소로 쓰이고 있다.


▲  근현대사 자료기증 감사비 (김형석 교수)
그들의 크나큰 공로가 있기에 이 첩첩한 산골에 근현대사박물관이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  양구 선사박물관의 상징, 가오작리 선돌

선사박물관 앞에는 이곳의 상징으로 꼽히는 가오작리 선돌이 있다. 바닥에 평퍼짐한 돌을 깔
고 그 위에 세운 3m의 선돌로 아랫도리는 다소 볼록하여 풍만해 보인다. 중간에는 폭이 다소
넓어졌다가 위로 갈수록 일정하게 줄어들면서 세모로 머리 부분을 마무리 지었는데, 한반도의
배꼽을 칭하는 양구의 토박이 선돌이라 그럴까? 몸매가 한반도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의 얼굴에는 동그란 두 눈과 눈썹, 세모난 코, 살짝 구부러진 입 등이 앙증맞게 새겨져 있
어 정말 깜찍하기 그지 없다. 하여 나는 그를 '선사시대의 미소'라 칭하며 내 마음 바구니에
계속 넣어두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입과 눈은 원래부터 있던 것은 아니다. 가오작리에 있던 시절, 동네 사람이나 군
인이 심심풀이로 새긴 것으로 비록 수작(秀作)은 아니나 그렇다고 졸작도 아니어서 어색함이
없이 잘 새겨 놓았다. 예전(2008년)에 비해 눈썹과 코가 진하게 표현되어 그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그도 내가 올 것을 알았는지 미리 얼굴을 다듬은 모양
이다.
그래도 어여쁜 누님처럼 긍정이 느껴지는 눈과 미소가 드리워진 입술은 여전하여 이곳을 찾은
이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선사한다.

원래는 근현대사박물관과 가오작리 선돌만 보고 바로 빠지려고 하였으나 앞에서 선사박물관이
진하게 아른거리니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애써 무시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입장료도 무료이고 시간도 아직 넉넉하니 잠깐 발을 들인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간만에 발을 들인 선사박물관도 근현대사박물관만큼이나 많이 달라져 있었는데, 마음 같아서
는 그 박물관과 뒤쪽에 있는 고인돌공원도 싹 다루고 싶으나 내용이 너무 길어지므로 본글에
서는 쿨하게 생략한다. (예전에 갔던 ☞ 양구 선사박물관 글 보러가기)

*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하리 510 (금강산로 439-51, 54 ☎
  033-480-2677)
*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양구 선사박물관



 

♠  양구 속의 조그만 섬, 소한민국이라 불리는 한반도섬

▲  들판이 되버린 파로호 인공습지 (희망의 다리 부근)

양구 근현대사박물관과 선사박물관 세트를 둘러보고 잠시 잊었던 파로호 인공습지를 마저 거
닐었다. 습지라고는 하지만 오랜 가뭄에 지쳐 물은 사라지고 잡초만 무성한 황량한 들판이 되
버리면서 습지란 이름을 무색하게 만든다. 정말 때를 잘못 맞춰서 온 것이다.
그런 가련한 습지를 왼쪽에 끼고 북쪽으로 가면 한반도섬이 나온다. 양구가 한반도의 정중앙
임을 강조하고자 한반도를 축소 재현하여 띄워놓은 섬으로 소한민국을 칭하고 있다. 하지만
가뭄의 악영향으로 섬의 자격을 상실한 채, 그야말로 두툼히 솟은 언덕 신세가 되버렸다. 이
곳 매력은 물에 떠있는 한반도섬 자체의 모습인데 섬은 커녕 잡초 속에 두툼히 솟은 한반도
언덕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  가뭄에게 빼앗긴 습지에도 봄은 오는가? (한반도섬 남쪽)

▲  사막처럼 되버린 인공습지 (한반도섬 동남쪽)
이곳은 잡초도 포기했나보다. 거의 맨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  인공습지 강변(뱃길나루터)에
장식용으로 놓인 옛날 배

▲  알 모양으로 생긴 소한민국 조형물


한반도섬이나 지형이 갑자기 유명세를 탄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그때 영월(寧越)에서 3면
이 강으로 둘러싸인 한반도 모양의 지형이 발견되어 크게 주목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후 옥
천(沃川) 등 여러 곳에서 대자연이 빚은 비슷한 지형이 발견되어 한반도지형이란 이름을 지니
게 되었다.
한반도와 비슷하게 생겨먹은 자연산 지형이 천하 곳곳에 숨겨져 있어 참 신비롭기 그지 없는
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양구는 아예 한반도섬을 만들어 띄워놓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자칫
우리의 강역과 활동무대를 한반도로 국한시키는 모양새로 비춰지기도 한다. 우리는 원래 만주
와 동북3성, 연해주, 산동반도, 중원대륙 화북(華北)과 서해바다 지역, 왜열도, 유구(오키나
와) 지역까지 다스렸던 잘나갔던 민족이다.
허나 잘난 조상보다는 제삿밥도 아까운 못난 조상이 더 많아 그 넓은 땅이 모두 갈라지고 흩
어졌으며, 민족은 분열되어 겨우 좁은 한반도만 추스린 딱한 신세가 되었다. 그 한반도도 남
북으로 갈라져 남북분단의 비애를 겪고 있으며, 개양아치 같은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고
통을 받고 있다.
다음에 한반도형 섬을 닦는다면 중원대륙과 일찍이 떨어져나간 왜열도는 빼더라도 대마도(對
馬島)와 동북3성, 만주를 포함하여 통 크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한반도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중심이자 일부이지 모두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양구 속의 섬, 한반도섬을 이어주는 나무데크 다리
다리 높이는 4m 정도 된다. 원래대로라면 물이 2~3m 정도는 차있어야 되는데
50cm는 커녕 물기조차도 없다.

▲  억새가 춤을 추는 한반도섬 동쪽 (양구읍내 방향)
황량한 들판을 보니 마치 드넓은 대륙이나 초원을 거니는 기분이다. 한반도섬에서
옛 조선이나 고구려 같은 대륙의 기분을 느낄 줄이야. 역시 우리에게는
이런 좁은 땅보다는 넓은 대륙이 딱 어울린다.

▲  물이 없는 다리를 건너는 기분은 사람이 없는 도심 번화가를
걷는 기분일 것이다. (서쪽에서 바라본 나무데크 다리)

▲  한반도섬 동쪽에 닦여진 푸른 독도와 울릉도

▲  울릉도의 모습
한반도섬 주변에는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가 두툼하게 닦여져 있다.
(울릉도와 독도는 접근 불가, 제주도는 접근 가능)

▲  그늘이 별로 없는 한반도섬 산책로

한반도섬은 나무와 수풀로 가득한 녹색의 섬이다. 산책로가 잘 닦여져 있고 다리를 쉬어갈 수
있는 쉼터도 갖추어져 있으며, 섬 복판에는 공군에서 지원받은 비행기 1대가 자리하여 조촐하
게 눈요깃감이 되어준다. 그리고 섬 서부에는 짚와이어(짚라인)가 있다. (짚라인은 서천 건너
편 산에서 타면 됨)

바깥에서 한반도섬으로 인도하는 길은 섬 북쪽과 동쪽, 남쪽에 있으며, 남쪽 다리는 제주도로
상징되는 섬을 경유한다. 그 외에 짚라인을 이용해 공중을 가르며 짜릿하게 들어서는 방법이
있다. (짚라인은 유료임)


▲  한반도섬 옆구리를 흐르는 양구서천
물은 섬 서쪽 서천에서만 겨우 흐르고 있었다. 물이 더 차야만 섬 주변과
인공습지를 촉촉이 어루만져줄 것인데 서천 하나로도 벅차다.

▲  양구서천과 그 너머로 보이는
공수리, 동수리 지역

▲  한반도섬의 하늘을 지키는
RF-4C 정찰기


한반도섬 한복판에는 현역에서 물러난 정찰기 1대가 매달려 있다. 미국 맥도널 더글라스사에
서 F-4C전투기를 기반으로 만든 비무장 항공정찰형 모델로 1962년 개발에 착수해 1963년 5월
에 최초로 비행을 했는데, 이 땅에는 1989년 12월 18일 3대가 수입되었고, 1990년까지 18대를
더 도입하여 항공정찰용의 역할을 수행했다.
허나 RF-16전력화에 따라 2014년 6월 30일 퇴역을 했고, 공군의 협조를 받아 이곳에 두어 한
반도섬의 조촐한 볼거리이자 휴전선을 머리에 인 양구의 현실을 일깨워주는 안보용 볼거리로
삼고 있다.


▲  한반도섬 짚라인(짚와이어)
서천 건너 산에서 짚라인을 타고 바로 이곳에 착륙을 한다.

▲  한반도섬 남쪽 끝에서 바라본 인공습지
다음에는 어설픈 섬이 아닌 완전한 한반도섬을 만나고 싶다.

▲  한반도섬에서 바라본 울릉도(오른쪽 섬)와 나무데크 다리

▲  파로호 인공습지와 한반도섬을 뒤로 하며

한반도섬을 1바퀴 둘러보고 남쪽 다리를 통해 동수리로 건너가려고 했으나 마침 다리 보수공
사로 통행이 금지되어 있었다. 하여 할 수 없이 건너왔던 동쪽 다리를 통해 육지로 넘어왔다.
한반도섬은 이렇게 볼일이 끝나 다시 읍내로 나가야되는데, 까마득하게 보이는 읍내를 보니
정말 멀리 오긴 했다. (양구터미널까지 약 3km) 도보 외에는 딱히 길이 없어 파워 도보로 양
구 읍내와의 간격을 좁혀나갔다.

방산면에 있는 다음 행선지로 가고자 읍내로 들어섰으나 오후 더위에 몸이 제대로 지쳐서 귀
차니즘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오늘 이 정도로 충분하다 여기고 마음을 곱게 접고 철수할까 했
으나 그때 방산면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눈 앞에 나타난다. 하여 약해진 마음을 다 잡으며 그
차에 몸을 실었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막을 고하며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한반도섬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고대리 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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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배꼽 속에 숨겨진 순박한 폭포, 양구 팔랑폭포 (팔랑계곡)

 


' 한반도의 한복판, 강원도 양구 나들이
팔랑폭포 (팔랑계곡) '
팔랑폭포
▲  팔랑폭포 팔랑소

 

 

 


 

겨울 제국(帝國)의 한복판인 12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강원도의 첩첩한 산골이자 한반
도의 배꼽을 자처하는 양구(楊口) 고을을 찾았다.

간만에 인연을 지은 양구에 이르러 제일 먼저 읍내 북쪽에 자리한 양구선사박물관과 파
로호 습지를 둘러보았다. 그런 다음 다시 읍내로 나와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하다가 동면
에 있는 팔랑폭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양구시외터미널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차 시간을 점검하니 고맙게도 10분 뒤에 팔랑리로
가는 버스가 있고, 더 고마운 것은 그 버스가 팔랑폭포 앞까지 들어가는 차였다. (폭포
앞 경유 팔랑1리 목장까지는 1일 4회 운행)

드디어 팔랑리로 가는 군내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와 활짝 입을 연다. 그곳까지 버스비가
생각 외로 높았지만 나에게 꿩 대신 닭을 고를 권한은 없는지라 그 돈을 내고 승차했다.
게다가 폭포 앞까지 들어가주는 버스라 나에게는 좋은 셈, 다만 그 거리만큼 구간 요금
이 다소 증가했다.

버스는 10명의 사람을 싣고 읍내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구불구불 국도를 따라 동
면 지역으로 넘어갔다. 그날은 오전부터 약하게 비가 내렸는데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더
니만 충분히 쉬었는지 다시 비를 대지에 떨구며 양구의 산하를 촉촉히 어루만진다.
근심 어린 눈으로 차창 밖을 지켜보는 동안 버스는 남면(南面)을 지나 후곡약수터 입구
를 거쳐 30분 만에 동면 중심지인 임당리에 이른다. 여기서 여러 군부대를 지나 팔랑리
종점에서 해안분지(해안펀치볼)로 가는 길(453번 지방도)을 버리고 동남쪽 산골로 방향
을 틀어 3분 정도 올라가더니 뚝 멈춰선다. 여기가 바로 팔랑폭포 앞이었다.

운전사는 왜 하필이면 비오는 날에 왔냐며 한마디 건넨다. 그래서 적당한 답을 주니 폭
포는 높이가 낮고 볼품이 없다며 잘못 왔다고 그런다. 허나 그것은 내가 판단할 일이라
답은 안하고 대신 나가는 차 시간을 물어보니 약 20분 뒤(14:20분)에 있고 그 다음은 3
시간 뒤(17:40)에 있다고 한다. 허나 팔랑리(곰취 정류장)로 나오면 40분 간격으로 차
가 있으니 나와서 탈 것을 권했다.
고마움을 표하며 차에서 내리려고 하니 운전사가 비맞고 댕기지 말라며 자신이 쓰던 우
산을 흔쾌히 건네주었다. 아직까지 서려있는 시골의 넉넉한 인심에 무한 감동을 먹으며
운전사에게 깊이 감사를 표했다.

차에서 내리니 바로 팔랑정(八郞亭)이란 4각형 정자와 기품이 보이는 소나무가 나를 반
긴다. 여기서 조금만 가면 되겠구나 싶어 발을 떼기가 무섭게 우렁찬 물소리가 나의 귀
를 때려댄다. '아니 벌써 폭포인가? 이러면 재미없는데' 싶어서 소나무 아래 쪽을 살펴
보니 그 안쪽 계곡에 팔랑폭포가 숨어서 울고 있었다.


 

♠  오래된 소나무와 암벽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 경승지
~ 팔랑폭포(八郞瀑布)

팔랑폭포가 있는 팔랑리는 임당리와 더불어 동면의 중심격 마을이다. 조선시대에 함경도에 살
던 이학장()이란 도사()가 남쪽으로 내려와 팔랑리에 터를 일구고 살았는데, 그에게
는 유방이 무려 넷이나 달린 아내가 있었다. 그들은 4명의 쌍둥이를 낳았고, 몇 년 뒤 다시 네
쌍둥이를 낳았다고 하며, 이들 여덟 쌍둥이는 휼륭하게 성장하여 벼슬까지 했다. 그런 연유로
팔랑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팔랑의 랑(郞)은 사내를 뜻함)

팔랑1리 구석진 곳에 둥지를 툰 팔랑폭포는 폭포치고는 높이가 별로 높지는 않다. 허나 수량이
풍부하고 암벽 사이로 옥계수를 장쾌하게 쏟아내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시원스레 해준다.
폭포 아래로 옥계수가 모이고 모여 이루어진 팔랑소(八郞沼)는 신선(神仙) 형님과 선녀 누님이
놀다간 곳이라 전하며 그에 걸맞게 청정함을 유감없이 뽐낸다. 사방은 암벽으로 둘러싸여 신비
로운 분위기까지 더한다.
그런 폭포와 팔랑소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선 소나무는 무려 300년의 세월을 먹은 오래된 나무
로 높이 18m, 밑동 둘레가 3.2m에 이른다. 이곳을 찾은 시인묵객들이 걸음을 멈춰 나무에 고된
몸을 기대며 시를 지었다고 전하며,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신목(神木)이나 당산나무, 당산 할머
니라 부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애지중지하고 있다.

폭포를 빚어낸 계곡은 팔랑계곡이라 불리며, 양구 곰취축제의 현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2015
년부터는 양구읍내 레포츠공원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어 다소 한가해졌다.
양구 지역의 대표적인 명소로 한적한 산주름 속에 은둔해 있어 여름에는 피서객으로 홍수를 이
루며, 잠시 속세를 등지며 폭포를 벗삼아 지내고 싶은 곳이다.


▲  좌우로 볼록한 팔랑정(八郞亭)
정자라기보다는 조촐한 동네 사랑방 같다. 추녀에는 특이하게 풍경이 달려있어
은은한 풍경소리를 자아낸다.

▲  폭포를 바라보며 서 있는 수려한 소나무
팔랑폭포의 영원한 동반자로 300년의 장대한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한 그루의
의연하고 아름다운 소나무로 자라났다.

  폭포 쪽에서 바라본 소나무
신령이 깃들여진 듯, 그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윗쪽에서 바라본 팔랑폭포와 팔랑소
겨울 제국이 폭포를 시샘하여 씌워놓은
얼음이 일부 남아있다.


▲  겨울비의 희롱을 받으며 장쾌하게 쏟아지는 팔랑폭포
폭포로의 접근은 안전상 통제되어 있다. 물론 요령껏 들어가면 되겠지만 겨울에는
다소 위험하므로 안전한 곳에서 폭포를 감상하기 바란다. 괜히 내려가봐야
폭포를 괴롭히고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

▲  소나무 부근에서 바라본 팔랑소
성하(盛夏)에 한복판에 왔더라면 그대로 풍덩했을지도 모른다. 소(沼)가 다소
움푹한 곳에 들어있어 폭포 위에 있는 다리나 아래쪽 다리에서는 완전히
보이지 않으며,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만 온전하게 바라보인다.

▲  폭포 윗쪽에서 바라본 팔랑소
이곳은 혹 하늘로의 승천을 꿈꾸던 용이 열심히 몸을 풀던 곳은 아닐까?

▲  겨울에 잠긴 폭포 위쪽 계곡
얼어 붙은 채 한없이 잠들어 있던 저 계곡도 소쩍새가 울때 쯤이면
기지개를 켤 것이다.

▲  폭포 아래쪽 계곡
봄을 숨죽여 잉태하며 제국의 시련을 견디고 있는 앙상한 나무들이
계곡을 거울 삼아 초췌해진 그들의 매무새를 바라본다.

▲  저 암벽 안쪽에 팔랑폭포가 숨어 있다.

▲  황량함과 적막함만이 감싸고 도는 팔랑계곡 산책로

▲  겨울 휴식에 잠긴 팔랑1리의 산야(山野)
그들이 혹 달콤한 잠에서 깰까봐 발자국 소리를 최대한 죽여가며 속세로 나온다.
아직 15시 밖에 안된 시간이지만 흐린 날씨로 인해 마치 해질녘 모습 같다.


※ 팔랑폭포 찾아가기 (2016년 6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양구행 직행버스가 2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춘천과 홍천에서 양구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양구터미널을 나와서 길 건너 오른쪽에 군내버스 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팔랑리 방면 군내버
  스가 4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그중에서 폭포를 경유하여 목장(팔랑1리)까지 가는 버스가 1
  일 4회 있다. (양구 기점 출발 8시50분, 13시30분, 16시50분, 19시30분)
* 목장행을 탔을 경우 팔랑폭포에서 내리면 바로 폭포이며, 팔랑리와 해안행 버스를 탔을 경우
  는 곰취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도보 20분
* 승용차편 (폭포 부근에 주차장 있음)
① 서울 → 서울양양고속도로 → 동홍천나들목을 나와서 인제 방면 → 신남교차로에서 신남 방
   면 → 신남3거리에서 좌회전 → 용하3거리에서 우회전 → 가오작리 → 동면 → 팔랑리 →
   팔랑폭포

* 폭포 주변에 민박집과 펜션이 여러 채 있다.
*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동면 팔랑1리


 


겨울비가 오는 촉촉한 날의 문을 두드린 팔랑폭포, 안개가 아련하게 폭포와 소나무 주변
을 감싸고 있으니 오늘이 아마도 신선과 선녀의 폭포 방문 날인 모양이다. 맑은 날과 휴
일에는 인간들로 가득해 오기가 그러니 비가 오고 한가로운 평일을 골라 이곳을 살짝 다
녀가는 모양이다. 나도 그들 틈에 끼어 놀고 싶은 마음 가득하지만 인간이 어찌 눈에 보
이지도 않는 그들과 놀 수 있겠는가?
겨울 제국에 무한으로 잠긴 채, 내년에 다가올 봄을 잉태한 폭포와 계곡, 팔랑리의 풍경
을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나온다. 시간과 여건이 된다면 부근에 있는 팔랑민속관과 독
립지사 동창률(董昌律) 선생의 묘역도 가보고 싶었으나 비도 계속 오고 슬슬 저물어 갈
시간이라 쿨하게 발을 돌렸다.

폭포에서 팔랑리 곰취 정류장까지는 1.3km 정도로 걷기에는 그리 무리는 없다. 종점 주
변은 민가와 키 작은 2~3층 건물이 여럿 형성되어 있고 마을 주변에는 군부대가 가득해
이곳이 어쩔 수 없는 전방 임을 느끼게 한다. 어여 이북(以北)을 회복해야 외로운 전방
신세를 면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 이북도 속히 찾아야 되고 주변 나라에 빼앗긴 그 엄청
난 실지(失地)도 모두 회복하여 우리의 경계를 다시 정해야 되거늘, 이북은 커녕 바다
건너 대마도(對馬島)도 못건지고 있으니 참으로 기약이 없다.

팔랑리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다시 양구읍내로 돌아오니 시간은 어느덧 16시, 햇님도 퇴
근 직전이라 더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없어서 미련 없이 시외터미널에서 춘천행 직행버
스를 타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한반도의 정중앙 양구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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