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생태공원'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2.07.09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이자 서울의 동쪽 지붕, 아차산 초여름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5보루, 아차산1보루)
  2. 2021.02.07 서울의 상큼한 동쪽 지붕, 아차산~서울둘레길 나들이 (상부암 석보살입상,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온달샘석탑)
  3. 2019.02.03 새해 해돋이 명소이자 우리나라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4. 2017.04.21 서울의 아늑한 옆산, 아차산에 올라 장대했던 고구려를 추억하다~~~ (홍련봉보루, 아차산성, 서울둘레길, 아차산보루)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이자 서울의 동쪽 지붕, 아차산 초여름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5보루, 아차산1보루)

아차산 여름맞이 나들이 (아차산성, 아차산5보루, 아차산1보루)


    
' 아차산 여름맞이 나들이 '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  아차산성
◀  아차산1보루
▶  아차산3층석탑

아차산3층석탑

 



아차산(峨嵯山, 285m)은 내 즐겨찾기의 하나로 낮과 저녁(야간 등산)을 가리지 않고 무수
히 안겼던 친숙한 뫼이다. 특히 듣기만 해도 가슴이 꽤 벅차오르는 세 글자. 고구려(高句
麗, 고구리)의 영광스러운 흔적이 풍부히 깃든 현장으로 북쪽 미수복지(북한, 만주, 요동
, 요서, 연해주, 산동반도 등)를 제외한 이 땅의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의 성지(聖地)이기
도 하다.

아차산은 용마산(龍馬山, 348m)과 망우산(忘憂山, 282m), 홍련봉(紅蓮峰), 시루봉을 식구
로 거느리고 있는데, 그들의 품을 무려 100회가 넘게 구석구석 더듬었으나 미답처(未踏處
)들이 일부 깨알처럼 남아 나를 참지 못하게 한다. 하여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그 미답처
들을 여럿 잡고자 여름이 한참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 한복판에 다시 아차산을 찾았다.



 

♠  아차산 남쪽 끝에 자리한 싱그러운 생태공간
~ 아차산생태공원

▲  아차산생태공원 동쪽 연못 (습지원)

아차산의 신세대 명소인 아차산생태공원은 도심 속의 싱그러운 생태공원으로 홍련봉과 더불어
아차산의 남쪽 끝을 잡고 있다.

이곳은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1996~2001년) 계획에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29.5억원
의 사업비가 투입되었다. 2000년부터 토지 보상과 설계 용역, 공사 다지기를 거쳐 2001년 12
월 31일 만남의 광장이 우선 준공되었으며, 2002년 3월 29일에 생태공원이 완성되었다.
공원 면적은 23,450㎡로 생태공원(자생식물원, 나비정원, 습지원, 생태자료실)과 만남의광장,
소나무숲, 생태관찰로, 관상용 논, 재배용 밭,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야유회장(4개소), 운
동장과 여러 운동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상, 인어공주상 등도 갖추어 공
원의 풍치를 돋구고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다양한 생태체험학습 프로그램(조류탐험교실, 곤충교실, 식물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공원이 닦여진 이후 고라니와 꿩, 해오라기, 쇠박새는 물론 멸종위기종인
맹꽁이까지 종종 관찰되고 있다. 심지어 서울 땅에서 처음으로 금개구리까지 목격되어 이곳의
생태계가 적지 않게 살아났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저 무늬만 생태공원이 아닌 진정한 생태공
원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
공원에는 쉼터가 넉넉히 베풀어져 있으며, 숲이 짙고 그늘의 질이 우수해 잠시 망중한에 잠기
기에 좋다.

* 아차산생태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370 (영화사로 145 ☎ 02-450-1655)
* 아차산생태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생태공원 위쪽을 장식하고 있는 관상용 논

아차산생태공원의 백미(白眉)이자 아름다운 거울이라 할 수 있는 습지원(연못)은 그 이름 그
대로 습지식물의 삶터이다.
연못 한복판에 나무로 만든 다리가 걸쳐져 있어 시각의 농간으로 2개의 연못으로 보일 수 있
지만 실제는 하나로 주변 나무와 봄꽃, 지나가는 햇님과 달님, 구름까지 연못을 거울로 삼아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고 동쪽 못에는 서양 동화의 단골 모델인 인어공주상이
고운 맵시를 드러내며 연못의 운치를 한껏 띄운다.


▲  인어공주가 살고 있는 습지원 동쪽 연못

▲  습지원의 구수한 양념, 인어공주상
인어공주와 분수대 사이로 일곱 색깔 무지개가 반짝 모습을 비추었다.


인어공주는 윗도리는 여자 사람, 아랫도리는 물고기로 서양 동화에서 나오는 상상의 존재이다
. 잘빠진 몸매와 아름다운 가슴을 모두 드러낸 채, 바위에 걸터앉아 두툼한 꼬랑지를 흔드는
모습이 은근 매혹적이라 정처가 없는 나의 두 눈이 자꾸 그에게로 쏠린다.
그는 습지원을 닦으면서 갖다둔 조각품일 뿐, 아차산과는 관련이 없으며, 이곳이 어린이의 생
태학습 체험장의 역할을 하고 있어 순수함의 비중이 아직까지는 높을 그들의 눈높이와 공간의
성격을 배려하여 배치하였다.

그런데 평소에는 만나기 힘든 반가운 손님이 인어공주상과 분수대 사이에 반짝 왕림을 하였다
. 바로 일곱 색깔 무지개이다. 언제부터인가 1년에 1번 볼까 말까 한 존재가 되어버린 무지개
, 올해 들어 처음으로 보는 무지개로 갑작스런 그의 등장은 이번 아차산 미답처 사냥에서 큰
성과를 거둘 것이라는 하늘의 게시이자 복선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날 계획한 미답처는 모두
인연을 지었음)


▲  무거운 동전은 이곳으로?? 연못에 동전을 버리는 공간
인어공주 누님이 바라보는 방향에 동전을 받아먹는 동그란 돌통이 있다. 그곳에
동전이 들어가면 행운이 온다나 뭐라나? 그렇게 모인 동전은 광진구청에서
수거하여 불우이웃돕기에 쓴다고 한다. (과연??)


▲  분수가 한참 나래를 펼치고 있는 습지원 서쪽 못

▲  생태공원 동쪽 산책로 (생태자료실 동쪽)

아차산생태공원 북쪽에는 소나무숲이 닦여져 있다.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으
로 이곳 역시 생태공원의 일원인데, 아차산성과 아차산 주능선으로 갈려면 이곳을 거쳐 가면
된다.
소나무가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솔
솔 불어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
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퐁당퐁당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내
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



 

♠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흔적이 고루고루 깃든 삼국시대 산성 유적
아차산성(阿且山城) - 사적 234호

▲  아차산성 서벽 ①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여 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덥수룩
하게 자라난 수풀에 거의 묻혀있던 것을 2013년 이후 성곽을 둘러싼 나무와 수풀을 꾸준히 밀
어내면서 북쪽과 남쪽 성벽도 무리 없이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아무리 꾸준히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
드니 역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기(1~2세기 경)에 국도(國都)
인 위례성 주변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상당히 늙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많았으나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阿且山城)를 정식 명칭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아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차산성 외에 장
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4세기 후반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끔히 장악하면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과 같은 기지가 되었다. 위례성으로 여겨지는 서
울 강동/송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무
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고 고구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의 라이벌이기
도 했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같이 고구려를 치자고 요구했다.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그 사건을 구실로 3만의 군사를 휘몰아 한성<漢城,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
라 부름>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을 이용해 성문과 도성을 불태웠으며, 개로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치던 중, 자신의 장수였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이들은 개로
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했는데, 왕을 잡고자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투항 사실을 알리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은 왕에게 절을 하더니 바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 온갖 육두문자를 요란하게 내뱉은 다음 포박하여 고구려에게
넘겼다.
그렇게 고구려의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으로 끌려와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왜열도와 중
원대륙(서토)의 무수한 영토를 거느리며 천하의 바다를 장악했던 백제의 도읍 위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서 영구히 지워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 때문에 후손들
이 위례성을 찾느라 오랜 세월 진땀을 뺀 것이다.


▲  아차산성 서벽 ②

한강 유역을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과 중랑천, 서울 동부 지역, 구리 지
역을 효과적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조그만 보루(堡壘)를 주렁주렁 달아
놓았다. 이곳에 설치된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여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이들 보루는 북쪽으로 봉화산(烽火山)과 수락산(水落山), 사패산(賜牌山), 불곡산, 양주, 연
천 지역까지 이어지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독특
한 요새라는 점이다. 그만큼 이 지역의 중요성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溫達)이 이곳에서 쳐들어온 신라군과 싸우다
가 전사했다고 전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해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
(北漢山城)이라 불리기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결국 점령하지 못
했다.
허나 8세기 이후 아차산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버려지기 시작했고, 세월과 자연에 의
해 그 견고하던 산성이 헝클어지면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  아차산성 서벽 ③ 장대터

산성의 둘레는 약 1,038m(길게 잡으면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성이
다. 아차산 남쪽 자락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는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
水口)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 등이 남아
있다.
장대(장대터)는 전시에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였다고 하
며, 커다란 왕개벚꽃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
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략 이곳임이 밝
혀졌다.
그래도 아직 건드리지 못한 숨겨진 부분이 많아 애태우던 중,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예
산을 지원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를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았는데,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장식인 '연화문와
당'이 나왔고 (인근 홍련봉 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벽에서는 신
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
이 나왔다. 또한 망대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왔으며, 신
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한산성이 이
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관련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조사하지 못
한 부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속시원히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
기가 쏟아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헝클어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
에 철책을 둘러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 유일하게 접
근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는데<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
부터 서울시와 광진구, 워커힐이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떡밥이 꾸준히 나오고는 있으나
아직까지도 빗장은 열리지 못했다.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으며, 워커힐 쪽에서 산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으나 통제되어 있어 대놓고 들어가
기는 그렇다. 하여 아차산성 내부를 정당하게 둘러보고 싶다면 광진구청에서 운영하는 아차산
역사문화해설(역사문화투어)을 이용해보는 것도 괜찮다.
(문의 광진구청 문화체육과 ☎ 02-450-7593)
내가 아차산을 무수히 오갔으나 아직까지 아차산성의 속살은 들어가지 못했다. 아차산성 내부
가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롭게 둘러볼 때를 기다리고 있으나 그 해방이 참으로 힘들다. 마치
이 땅의 민주화가 힘들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  아차산성 서벽 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아차산성 서벽을 지나면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낙타고개와 아차산 주능선으로 이
어지며, 동쪽은 아차산성 북벽 앞과 우미내계곡, 고구려 대장간마을로 이어진다.
여기서 아차산 동쪽 구역(구리시 아천동)으로 넘어가 우미내계곡과 아차산 큰바위얼굴, 석실
고분(石室古墳), 아차산3층석탑, 범굴사(대성암), 아차산2보루터를 둘러보고 아차산6보루터를
거쳐 서울과 구리의 경계선인 아차산 주능선으로 들어섰다. (아차산 구리 구역은 별도의 글에
서 다루도록 하겠음)



 

♠  아차산 주능선 더듬기 (아차산6보루, 5보루, 1보루)

▲  아차산6보루터 - 사적 455호

범굴사(대성암)에서 뒤쪽 너른 바위를 올라 아차산2보루터를 지나면 주능선 바로 직전에 6보
루가 마중을 한다.

언덕처럼 봉긋 솟은 터가 바로 6보루터로 2005년에 아차산3보루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사람이
우연히 발견했다. 허나 아직까지 속시원한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생김새가 보
루터 비슷하게 생겨서 아차산6보루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6보루의 추정 둘레는 약 80m 정도로 여기서 나온 불씨는 흙을 덮어 보존하고 있다. 아차산 주
능선의 바로 동쪽으로 아차산의 옛 과거를 적지 않게 간직하고 있으리라 여겨지며, 속히 발굴
조사를 벌여 6보루의 정체성을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비롯하여 구의동(九宜洞), 자양동(紫陽洞),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 봉화
산, 사패산, 천보산, 양주 불곡산, 연천 지역까지 많은 보루를 설치했는데, 이들 보루 중, 그
나마 상태가 괜찮은 아차산 보루 6곳, 용마산 보루 7곳, 망우산 보루 1곳, 홍련봉 보루 2곳,
시루봉보루, 수락산 보루 1곳을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란 이름으로 묶어 국가 사적 455호
지정했다.


▲  소나무가 운치를 자아내는 아차산 주능선길

아차산6보루와 간만에 인연을 짓고 아차산의 하늘길인 아차산 주능선으로 진입했다. 천하 둘
레길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서울둘레길(157km)도 신세를 지는 능선길로 서울둘레길 2
코스(용마,아차산코스 12.4km)가 지나간다. 여기서 남쪽으로 향하면 아차산5보루터가 깃든 두
툼한 언덕이 마중을 한다.


▲  아차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터는 해발 267m 봉우리에 둥지를 튼 보루로 둘레 158m, 내부 면적은 1,818㎡ 정도
이다. 봉우리를 활용하여 보루를 다졌는데, 보루 성벽은 거친 세월의 강물 속에 죄다 휩쓸려
사라지고 겨우 흔적 일부만 있는 형편이다.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남아있으나 보존을 위
해 흙으로 덮었으며, 보루를 잡아먹은 봉우리는 예전보다 다소 살이 두툼해진 상태이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주능선 산길이 보루 복판을 가로질러 흘러갔으나 보루임이 밝
혀진 이후에는 그의 건강을 위해 서쪽에 우회길을 닦았다. 다른 보루와 달리 신라 후기 토기
가 여럿 출토되었고, 봉우리 모습이 마치 신라 스타일의 고분과도 비슷해 이를 두고 신라(新
羅)가 기존의 고구려 보루를 밀어버리고 무덤을 만든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허나 신라는
산능선에 무덤을 잘쓰지 않는 편이라 이 역시 설에 불과하다.
(아차산5보루는 현재 문화유산 보호로 접근이 통제되어 있음)


▲  아차산5보루 정상을 장식하고 있는 돌탑

이곳을 스쳐간 산꾼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을 이루고 있
는 돌 대부분은 헝클어진 5보루 성돌로 그 성돌이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인 돌탑으로 다
시 태어났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돌고 도는 모양이다.


▲  아차산5보루터에서 바라본 천하 ①
푸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리시와 남양주시(도농, 금곡, 덕소), 서울 강동구,
하남시가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5보루터에서 바라본 천하 ②
아차산 남쪽 자락과 한강, 강동구, 하남시 지역

▲  아차산5보루터에서 바라본 천하 ③
아차산 남쪽 자락과 광진구, 강동구, 송파구, 강남구, 성남시 지역

▲  아차산5보루 남쪽 부분

▲  아차산5보루에서 바라본 아차산1보루 (가운데 봉우리)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에서 능선길을 조금 내려가면 두툼히 살이 오른 아차산1보루가 나온다. 이곳이 넘
버원 1보루가 된 것은 아주 단순하다. 남쪽을 기준으로 발견된 순서대로 나열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목책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용마산~망
우산 주능선을 이어주는 요새였으며, 동쪽과 남쪽,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
히게 좋다.
특히 5보루와 남쪽 아차산 해맞이광장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난 해돋이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
으며, 1월 1일만 되면 해맞이광장과 함께 새해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아주 북새통을 이루
어 발을 디딜 공간 조차 없을 지경이다.

이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봤을 1보루는 장대한 세월의 매서운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
힘 앞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그 터만 겨우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줄 따름이다.


▲  아차산1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해질녘에 서울시내

▲  아차산 해맞이광장 주변

아차산1보루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아차산 해맞이광장이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묵은 1,000
년이 지고 새로운 1,000년이 도래하던 2000년 1월 1일 아침 7시, 광진구청이 이곳에서 새천년
해맞이 행사를 가졌는데, 그것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우고 해맞이 광장으로 삼았다.
여기서는 지는 해는 물론, 뜨는 해도 맞이할 수 있으며, 광진구가 야심차게 닦은 서울의 주요
해돋이 성지로 매년 1월 1일 아침마다 해맞이 축제가 성황리에 열린다.


▲  아차산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광진구와 송파구, 강남구, 대모산과 관악산 등


아차산 해맞이광장을 벗어나 무덤 갈림길에 이르니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햇님의 근무 시간
이 나날이 연장되면서 아직도 대낮과 같은 상태이나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아차산의 여러 미
답처(온달샘 석탑, 석실고분, 아차산3층석탑)와 쿨하게 계산을 끝낸 상태라 내려가는 발걸음
이 아주 가벼웠다. 비로소 그들과의 술래 신세를 면했기 때문이다.

무덤 갈림길에서 남쪽으로 직진하여 너른 바위 위에 들어앉아 황색 지붕을 휘날리는 고구려정
을 둘러보고, 친수계곡과 동의초교를 거쳐 어린이대공원후문(아차산역)으로 내려왔다.

이렇게 하여 아차산 6월 나들이는 다음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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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6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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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상큼한 동쪽 지붕, 아차산~서울둘레길 나들이 (상부암 석보살입상,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온달샘석탑)

아차산 봄나들이 (상부암 석보살입상,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온달샘석탑, 우미내계곡)



'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봄나들이 '


▲  아차산 생태공원 소나무숲

▲  아차산성

▲  온달샘 석탑


 

♠  한강변에 숨겨진 오래된 석불, 상부암 석보살입상(上浮庵 石菩薩立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0호

▲  상부암 석불의 거처인 상부관음전(上浮觀音殿)

도권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성지(聖地)이자 야간 등산의 성지로 추앙받는 아차산(峨嵯山,
295m)은 내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1~2달에 1번꼴로 안기고 있다. 그렇게나 자주 안기는 아차
산이지만 며칠도 안가서 아차산 앓이가 도져 그곳에 깃든 미답지(未踏地)를 1개라도 지울 겸
그의 품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바로 산으로 들어가지 않고 광장동 구석에 숨겨진 오래된
석불을 먼저 찾았다.

키다리 아파트와 오피스텔로 즐비한 광장동(廣壯洞) 동쪽 구석 한강변에 늙은 석불 하나가 조
용히 숨어있다. 없는 듯 자리한 그에게 세상이 달아준 이름은 '상부암 석보살입상' 8자. (예
전에는 '상부암 석불입상' 7자였음) 아파트와 오피스텔 등 빌딩으로 가득하여 여유 공간도 없
을 것 같은 곳에 1칸짜리 기와집을 지닌 고색의 석불이 숨어 있었으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
담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

석불 이름에 '상부암(上浮庵)' 3자가 들어가 있어 '상부암'이란 암자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허나 그런 절은 없으며 그 석불이 떠내려왔다는
뜻에는 지역 사람들이 '상부암'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니 석불 자체가 그냥 상부암이란
노천 암자이다. 
현재는 옆에 있는 광장노인정에서 '상부관음전'이란 맞배지붕 기와집을 씌우고 주변을 정비하
여 석불을 지키고 있다.

▲  상부암 석불로 인도하는 길
(광장노인정 옆)

▲  잔디와 봄꽃이 잔잔히 입혀진
상부암 석불 뜨락과 쉼터


상부암 석불은 쉽게 눈에 띄지도 않는 광장동 100번지 막다른 곳에 숨겨져 있다. 서쪽과 남쪽
은 키다리 빌딩에 막혀 있고, 북쪽은 벼랑으로 막혀있는데, 그 위에 광나루역과 구리시를 잇
는 아차산로가 닦여져 차량들의 굉음이 종일 귀를 때려댄다. 그나마 한강이 있는 동쪽이 조금
시야가 트여있지만 그마저도 강변북로 아차산대교가 시야를 절반 이상 가리고 있어 그야말로
개발의 산물에 포위된 궁색한 처지가 되버렸다.
바로 그런 장소에 있으니 그 존재가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서울에 대
해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본인 역시 그의 존재를 안 것은 불과 몇 년 전. 그와의 숨바꼭질에
서 이제서야 술래를 면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석불은 언제 생겼을까?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670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
)가 광나루를 건너는 사람들과 주민들의 안녕을 빌고자 세웠다고 전한다. 허나 석불의 나이를
측정해보니 대략 후삼국시대나 고려 초(9세기 후반~10세기 초)로 가늠되어 의상대사 설은 신
뢰성이 없다. 다만 옛날에 큰 홍수로 한강을 타고 이곳까지 떠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
으며, 그로 인해 상부암이란 이름을 달게 되었다. 솔직히 홍수로 불상이나 석불이 떠내려가
새로운 곳에 안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니 떠내려왔다는 설은 그나마 신뢰가 간다.

이곳에 새로 자리를 잡은 석불은 오랜 세월 광나루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지역 사람들의 보호
와 정성이 대단했다. 원래는 지금보다 밑에 있었으나 빌딩이 들어서면서 1989년 현재 자리로
이전되었으며, 이때 석축을 쌓고 터를 다져서 그의 거처와 조촐한 쉼터를 닦았다.
또한 언제부터인가 호분(胡粉, 조개껍데기를 태워 만든 것으로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
됨)이 두텁게 발라져 하얀 피부의 백불(白佛)로 있었는데, 근래 호분이 벗겨지면서 마치 번데
기에서 벗어난 듯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수백 년 묵은 석불로 짐작을 하고 그를
살펴봤는데 무려 하나의 1,000년을 지낸 아주 늙은 석불이었다.


▲  날씬한 몸매의 상부암 석보살입상

석불은 키가 큰 늘씬한 몸매로 얼굴과 머리가 좀 지나치게 크다. 머리 꼭대기에는 무견정상(
無見頂相, 육계)이 두텁게 솟아 있으며, 머리칼 부분이 너무 넓다. 좁은 이마 밑에는 구부러
진 눈썹과 살짝 뜬 눈, 코가 무늬만 남아있으며, 다물어진 입술에는 조금이나마 미소가 피어
있다. 얼굴 살은 조금 있어 보이며, 두 귀는 길쭉하여 중생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목은 좀 두터워보이며, 목 부분이 절단되어 있던 것을 다시 붙였다. 윗도리는 짧지만 잘록한
허리선이 인상적이고, 밑도리는 두 다리를 분명하게 나타내어 양감이 뚜렷하다. 몸에 걸친 법
의(法衣)는 양팔을 돌아 계단식 옷주름을 보이며, 가슴 앞에서 'U'자형을 이루다가 다리 사이
로 내려와서 다시 'U'자형의 주름을 이루는 이른바 우전왕(優塡王)식 착의법을 하고 있다. 이
는 신라 후기와 후삼국시대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수법으로 이를 통해 그 시절 조성되었음
을 대놓고 귀뜀해준다. 또한 석불이 딛고 선 대좌(臺座) 역시 그 시절 연화문(蓮花紋)과 유사
한 것으로 여겨진다.
부분적으로 손상된 부분이 있으나 상태는 거의 괜찮으며, 서울 땅에서 거의 유일한 후삼국시
대 석불로 그 희소가치가 인정되어 뒤늦게 지방문화재의 감투를 쓰게 되었다.

석불은 반듯하게 서서 동쪽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다. 아무래도 그가 한강에서 떠내려왔으니
원래 있었던 동쪽 어딘가를 바라보라는 뜻에서
그렇게 방향을 잡은 것 같다.
건물 또한 그를 따라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건
물 이름은 '상부관음전'으로 지역 사람들이 그
를 관세음보살로 애지중지하고 있음을 보여준
다.

석불 뒷쪽은 벽으로 막혀있고, 나머지 3면 또
한 붉은 창살이 배치되어 마치 갇혀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의 보호도 좋지만 너무 가둬놓은
인상이라 정면 만이라도 창살을 제거하여 중생
들과 보다 가까이 해주었으면 좋겠다.


◀  옆에서 바라본 상부암 석불


▲  희미하게 천 년의 미소를 던지는 상부암 석불의 얼굴
신체 비례는 그리 맞지는 않는다. 머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  상부관음전 현판의 위엄

▲  상부암 석불 부근에 자리한 석불좌상

석불이 홀로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지역 사람들이 별도의 석불좌상을 옆에 갖다두었다.
그의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으나 몸통과 그의 대좌에 고색의 때가 조금 깃들여진 것으로 보
아서 20세기 초나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가 잘려 없어진 것을 새로 만들어서 붙였는데, 몸통과 너무 이질적인 모습이라 서로가 익
숙치가 않다. 그의 표정은 나이 지긋한 노공(老公)이 싱글벙글 웃는 듯 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100


▲  녹음이 짙은 워커힐로 (아차산생태공원 방향)

상부암 석보살입상을 둘러보고 아차산으로 넘어가고자 워커힐아파트를 통해 워커힐로로 올라
갔다.
2차선 크기의 워커힐로는 서울 장안의 주요 벚꽃 명소로 4월이 되면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
이 순백(純白)의 봄 향연을 펼친다. 길 주변은 나무로 가득해 거의 숲길을 이루고 있으며 그
길을 따라 서쪽으로 5~6분 가면 아차산생태공원이 아름다운 연못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  아차산 숲이 그늘을 드리우는 워커힐로


 

♠  아차산 남쪽 끝에 그림처럼 자리한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  아차산생태공원 연못 (습지원)

아차산의 신세대 명소인 아차산생태공원은 도심 속의 싱그러운 생태공원으로 홍련봉(紅蓮峰)
과 더불어 아차산의 남쪽 끝을 잡고 있다.

이곳은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1996~2001년) 계획에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29.5억원
의 사업비가 투입되었다. 2000년부터 토지 보상과 설계 용역, 공사 다지기를 거쳐 2001년 12
월 31일 만남의 광장이 우선 준공되었으며, 2002년 3월 29일 생태공원이 완성되었다.
공원 면적은 23,450㎡로 생태공원(자생식물원, 나비정원, 습지원)과 만남의 광장, 황톳길과
지압보도, 소나무숲, 생태자료실, 생태관찰로와 자생관찰로, 관상용 논, 재배용 밭, 아차산성
과 보루터에서 발견된 고구려 흔적과 유물을 머금고 있는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을 갖추고 있
으며,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상, 인어공주상 등도 갖추어 공원의 풍치를 돋구고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다양한 생태체험학습 프로그램(조류탐험교실과 곤충교실, 식물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공원을 닦은 이후 고라니와 꿩, 해오라기, 쇠박새는 물론 멸종위기종인 맹
꽁이까지 종종 관찰되고 있다. 심지어 서울 땅에서 처음으로 금개구리까지 목격되어 이곳의
생태계가 적지 않게 살아났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저 무늬만 생태공원이 아닌 진정한 생태공
원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

공원에는 의자와 쉼터가 넉넉히 베풀어져 있으며, 숲이 짙고 그늘의 질이 우수해 잠시 시름과
더위를 잊기에 좋다. 또한 아차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이곳을 기점으로 삼아 등산
/답사에 임하면 편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370 (영화사로 145 ☎ 02-450-1192)
* 아차산생태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습지원 사진을 클릭한다.


▲  동쪽에서 바라본 습지원(濕地園)

아차산생태공원의 백미(白眉)이자 아름다운 거울인 습지원(연못)은 그 이름 그대로 습지식물
의 삶터이다. 연못 한복판에 나무로 다진 다리가 걸쳐져 있어 시각의 농간으로 2개의 연못으
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는 1개로 주변 나무와 봄꽃, 지나가는 달과 구름까지 연못을 거울로
삼아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고 동쪽 못에는 동화의 단골 모델인 인어공주상이
고운 맵시를 드러내며 연못의 운치를 한껏 띄운다.

▲  습지원 동쪽 못

▲  습지원 서쪽 못


▲  습지원의 구수한 양념, 인어공주 누님상

인어공주는 윗도리는 여자 사람, 아랫도리는 물고기로 서양 동화에서 나오는 상상의 존재이다.
잘빠진 몸매와 아름다운 가슴을 모두 드러낸 채, 바위에 걸터앉아 두툼한 꼬랑지를 흔드는 모
습이 은근 매혹적이라 정처가 없는 내 침침한 두 눈이 자꾸 그에게로 쏠린다. 비록 하얀 피부
가 전부이나 실감나게 색을 입힌다면 지금보다 감동이 더 할 것이다.
그는 습지원을 닦으면서 갖다둔 조각품일 뿐, 아차산과는 관련이 없으며, 이곳이 어린이의 생
태학습 체험장의 역할을 하고 있어 순수함의 비중이 아직까지는 높을 그들의 눈높이와 공간의
성격을 배려하여 배치했다.


▲  무거운 동전은 이곳으로?? 연못에 동전을 버리는 공간
인어공주 누님이 바라보는 방향에 동전을 받아먹는 동그란 돌통이 있다. 그곳에
동전이 들어가면 행운이 온다나 뭐라나? 그렇게 모인 동전은 광진구청에서
수거하여 불우이웃돕기에 쓴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  생태공원 동쪽 산책로 (생태자료실 동쪽)

▲  아직은 잡초만 무성한 습지원 서쪽 나비정원

▲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아차산 생태자료실 서쪽에는 아차산의 고구려 유물과 유적을 다룬 역사문화홍보관이 자리하고
있다. 아차산은 좁게는 서울과 구리 지역, 넓게는 미수복지를 제외한 이 땅에서 가장 많은 고
구려 유적을 품은 현장이라 고구려가 아차산에 새겨놓은 영광스런 현장들을 집대성하고 이곳
의 역사적 중요성을 천하에 널리 알릴 공간이 절실했다. 하여 광진구에서 1.45억원의 돈을 들
여 2009년 5월에 조촐하게 그 공간을 마련했다.

아차산성을 비롯해 아차산과 용마산, 홍련봉 일대 보루 유적과 이들이 뱉은 유물 일부를 전시
, 소개하고 있으며, 비록 생태공원에 얹혀있는 미약한 신세이나 아차산과 광대했던 고구려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지대하여 장차 크게 될 싹수를 가지고 있다. 미수복지(북한, 만주, 요동,
연해주, 대마도, 왜열도 등)를 제외한 이 땅에서 고구려를 전문으로 다루는 박물관이나 공간
이 매우 부족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홍보관 내부에는 문화유산해설사가 머물고 있으며, 고구려 귀족의 복장을 입는 체험코너도 있
다. 아직까지는 전시 유물이 꽤 빈약하고, 아차산 일대로 국한된 점은 어쩔 수 없으나 4~5세
기 고구려 강역도가 너무 작게 나와있어 이 땅에 뿌리깊게 박힌 쓰레기 같은 식민사관의 잔재
가 여전함에 씁쓸함을 금할 길이 없다.

아차산성과 보루 유적이 목적이되 초행길이라면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을 우선 둘러보고 답사
에 임하는 것도 좋다. 홍보관이 작기 때문에 아무리 길어봐야 10~20분 내외면 충분하다. (해
설시간은 제외) 그리고 아직까지 금지된 구역으로 묶인 아차산성 내부를 둘러보고 싶다면 이
곳에 문의를 해보기 바란다.

*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관람정보 : 9시~18시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없음)


▲  광진구의 역사와 아차산의 고구려 유적을 머금은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내부


▲  홍련봉(紅蓮峰) 1,2보루 조감도

아차산 남쪽 끝에 자리한 홍련봉(125m) 정상에는 2개의 보루가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5~6세
기에 조성된 것으로 한강과 가까워 아차산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가마터
와 저수시설, 배수시설 등이 나왔다. 몇 년에 걸쳐 계속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
이곳에 묻힌 이야기 보따리는 다 풀리지 않았다.


▲  홍련봉과 아차산, 용마산 보루에서 나온 고구려 토기와 기와조각 ①

아차산을 점령한 신라는 산성과 보루를 손질하여 계속 사용했다. 하지만 신라 후기 이후 사용
가치가 사라져 모두 버려지게 되었으며, 그렇게 인간의 손때가 사라지면서 대자연의 의해 헝
클어지고 분해되어 끝내 자연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20세기 이후, 1,000년 동안 잠들어있던 그 흔적들이 다시 햇살을 보면서 많은 유물을 토해냈
지만 성한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죄다 깨진 상태이다. 하지만 저들의 깨져버린 역사 퍼즐을
푸는 것이 바로 우리가 꼼꼼히 처리해야 될 숙제이다.


▲  홍련봉과 아차산, 용마산 보루에서 나온 고구려 토기와 기와조각 ②

▲  상큼하게 닦여진 자생식물원 산책로

▲  파릇파릇 새싹이 꿈틀거리는 자생식물원

▲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부부상

아차산성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전사했다고 전하는 온달 장군이다.
그래서 만남의 광장 한쪽에 갑옷을 입고 칼집을 높이 들어올린 온달(溫達)과 아리따운 자태의
평강공주(平岡公主)상을 만들어 이곳의 상징적 장식물로 두고두고 기리고 있다.

평강공주는 고구려 25대 군주인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의 딸이며, 온달은 그의 사위인
데, 공주의 휼륭한 내조에 힘입어 온달은 1급 장수로 성장해 많은 공을 세웠다.
신라가 고구려를 북쪽으로 몰아세우며 드디어 한강 하류까지 건드리자 온달은 '죽령(竹嶺) 이
북을 되찾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굳은 다짐을 꺼내 보이며 남쪽으로 달려가 한강
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인 아차산성을 지켰다. 허나 신라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성은 함락
되고 온달 자신은 끝내 전사하고 만다.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해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죽령 이북을 회복하지 못
한 한 때문인지 아무리 힘센 장정이 들어도 관이 꿈쩍도 하지 않자 평강공주가 급히 달려와
관을 어루만지며 달래니 그제서야 관이 움직였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물론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허나 신라 따위에게 한강 유역과 강원
도, 충북 지역의 많은 땅을 잃고 거기에 고구려의 1급 장수인 온달까지 죽어나갈 정도였으니
이에 대한 고구려의 치욕감이 상당했음을 온달의 설화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며, 온달의
부하들이 온달의 한을 풀기 전(죽령 이북 회복)에는 절대로 관을 운구할 수 없다고 거부한 것
을 우회하여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단양 온달산성에서 전사했다는 설도 있음)


▲  아차산성 남쪽으로 이어지는 자생식물원 북쪽 산책로

▲  그늘로 가득한 자생식물원 북쪽 산책로

▲  아차산 소나무숲 입구

아차산생태공원 북쪽에는 소나무숲이 닦여져 있다.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으
로 이곳 역시 생태공원의 일원인데, 아차산성과 아차산주능선으로 가려면 이 길로 가는 것이
빠르다. (아차산생태공원과 광나루역 기준임)
소나무숲이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솔솔 불어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퐁당퐁당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
내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의 한복판

▲  아차산성으로 이어지는 아차산 소나무숲 동쪽 산길


♠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흔적이 골고루 깃든 삼국시대 산성 유적
아차산성(阿且山城) - 사적 234호


▲  아차산성 서벽 ①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여 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덥수
룩하게 자라난 수풀에 거의 묻혀있던 것을 2013년 이후 성곽을 둘러싼 나무와 수풀을 꾸준히
밀어내면서 북쪽과 남쪽 성벽도 무리 없이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아무리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드니 역
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1~2세기 경)에 국도(國都)인
위례성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자 닦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상당히 늙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많았으나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阿且山城)를 정식 명칭으로 삼았다. 하여 아
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달리 산성은 예전 한자로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아차
산성이란 이름 외에도 장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 등의 별칭도 전하고 있다.

4세기 후반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
끔히 장악하면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과 같은 기지가 되었다. 위례성
으로 여겨지는 서울 강동/송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무
리하게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고 고구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 자신의 라이
벌인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같이 고구려를 치자고 들쑤셨다. <동성왕(東城王) 시절에 북
위와 산동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다가 북위의 수십 만 기병을 크게 때려잡은 적이 있음>
이에 뚜껑이 열린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3만의 군사를 휘몰아 한성<漢城, 위례
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라 부름>을 공격하게 된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을 이용하여 성문과 도성을 불태웠으며, 개로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
을 가다가 자신의 장수였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그들은 개로
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한 장수로 왕을 잡고자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투항 사실을 알리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은 왕에게 절을 하더니 바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는 온갖 육두문자를 요란하게 내뱉은 다음 포박하여 고구려에
넘겼다.

고구려의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으로 끌려와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를 비롯해 왜열도와 중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영토를 거느렸던 백제의 도읍 위
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서 영구히 지워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위례성을 찾느라 오랫동안 진땀을 뺀 것이다.


▲  아차산성 서벽 ②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과 중랑천, 서울 동부, 구리
지역을 효과적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아차~용마~망우산에 닦인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해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현재 17기가 발견됨) 이들 보루는 북쪽으로 봉화산(烽火山)과 수락산(水落山), 사패산(賜牌
山), 불곡산, 양주, 연천 지역까지 이어지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
견되는 고구려의 독특한 요새라는 점이다. 그만큼 이 지역의 중요성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이 이곳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해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불리기
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결국 점령하지 못했다.
허나 8세기 이후 아차산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버려지기 시작했고 세월과 자연에 의
해 그 견고하던 산성이 헝클어지면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  아차산성 구조와 관련 사진들

산성의 둘레는 약 1,038m(길게 잡으면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성이
다. 아차산 남쪽 자락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는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
水口)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이 남아있으
며, 장대(장대터)는 전시에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였다.
또한 커다란 왕개벚꽃나무가 장대터 주변에 자라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묵은 것으
로 여겨진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
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략 이곳임이 밝
혀졌다.
허나 아직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 많아 애태우던 중,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예산을 지원
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
를 대상으로 발굴조사
를 벌였다.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았는데,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장식인
'연화문와당'이 나왔고 (인근 홍련봉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벽
에서는 신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이 나왔다. 또한 망대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
왔으며, 신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
한산성이 이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관련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조사하지 못
한 부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속시원히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
기가 쏟아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헝클어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
에 철책을 둘러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 유일하게 접근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는데<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부터
서울시와 광진구청이 워커힐과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아직까지
도 감감무 소식이다.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으며, 산성을 가리고 앉은 수풀을 싹 밀어버려 예전보다 단정한 모습이 되었으나 대자
연의 위대한 힘으로 금세 수풀이 자라나 성벽을 가리려고 드니 그나마 서벽만 제대로 눈에 넣
을 수 있다.
다만 겨울 제국(帝國) 시절에는 겨울이 수풀을 알아서 털어가기 때문에 북벽과 남벽을 그나마
제대로 살필 수 있으며, 1년에 딱 1번 아차산성의 속살이 강제로 해방되는 날이 있다. 바로 1
월 1일 아침으로 그렇다고 정식 개방되는 것은 아니다. 허나 몰지각한 산꾼들이 그 해돋이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철책을 넘어 들어가니 그때 살짝 묻어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물론 정당한
방법은 아니나 그때는 아차산 일대가 수만 명에 달하는 해돋이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어 단속
반도 거의 손을 못쓴다. 어차피 산성에 해코지만 안하면 된다.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  아차산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부분
이곳에서는 산성을 지휘하는 장대(將臺)터가 발견되었다.

▲  아차산성 서벽 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  낙타고개 부근에서 바라본 한강과 암사대교

아차산성 서쪽 옆구리를 지나면 낙타고개가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성과 1보루로 이어지는 능
선 사이에 쑥 들어가 있는데, 그 모습이 낙타의 목이나 등부분의 굽은 모양처럼 생겨서 낙타
고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직진하면 아차산 주능선과 아차산 정상, 대성암(범굴사)으로 이어지며, 서쪽
은 친수계곡과 영화사(永華寺) 방면. 동쪽은 구리시 아천동으로 대장간마을과 온달샘 석탑으
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줄기차게 들락거렸던 아차산 주능선이나 친수계곡 대신 관심을 1번도
주지 않았던 동쪽 길로 내려갔다.


 

♠  아차산 마무리

▲  너럭바위 전망대

낙타고개 동쪽 길은 구리시 지역으로 아차산에 묻혀있던 미답처였다. 지금까지는 경험하지 못
한 신세계에 발을 들인 듯,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려가니 동쪽을 향해 가슴을 활짝 연 너럭
바위가 마중을 한다.
너럭바위는 산비탈에 드러누운 넓직한 바위로 그 윗도리에 전망대를 닦아 좁게나마 천하를 굽
어보게 배려했다. 비록 보이는 범위는 한강과 강동구, 구리시, 하남 미사지구 등이 전부이지
만 낮은 높이 치고는 조망은 괜찮은 편이며, 한강 바람과 산바람이 어우러져 시원하기 그지
없다.


▲  너럭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한강을 중심으로 하여 구리시(아천동, 토평동), 강동구 고덕동과 강일동,
하남시 미사강변지구 등이 바라보인다.

▲  온달샘

너럭바위에서 북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숲에 묻힌 온달샘이 나온다. 온달장군이 물을 마셨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과연 그의 손때가 탄 샘터인지는 증명할 방법은 없다. 어
차피 먼저 이름을 쓰는 사람이나 지역이 임자이다.

천하가 봄가뭄으로 심한 갈증을 겪고 있던 때라 샘터의 수량도 그리 시원치는 못하다. 그래도
이곳까지 왔으니 온달 형님이 1,500년 전에 마셨다는 물 맛은 봐야 되겠지. 비록 그때 물맛과
지금 물맛이 같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답답하게 쏟아지는
물을 받아 들이키니 갈증이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온달샘 주변에는 이곳을 기반으로 한 온달체육회가 닦은 운동시설이 있으며, 샘터 옆에는 우
미내계곡 상류가 예전에 내린 비를 아껴가며 적은 물을 흘려보내고 있고, 그 건너에 납작하게
엎드린 늙은 석탑 하나가 슬그머니 눈길을 주니 그가 바로 온달샘 석탑이다.


▲  고된 세월에 녹초가 되버린 온달샘 석탑

온달샘 계곡 건너편 바위 밑에 있는 온달샘 석탑은 바닥돌과 기단석(基壇石), 지붕돌(옥개석)
2개가 전부인 초췌한 몰골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의 끊임없는 괴롭힘에 모든
것이 산산조각나 겨우 일부만 남아 흩어져 있던 것을 구리시와 구리문화원이 있는 석재를 수
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일으켜 세웠다.

유실된 부분이 태반이라 탑의 원래 형태를 상상하기는 어려우나 기단석도 그렇고 지붕돌도 작
은 것으로 보아 난쟁이 반바지 접은 정도의 작은 탑이었던 같다.
바닥돌의 양식<높은 사분원(四分圓)과 낮은 각형(角形) 괴임>과 기단석의 수법으로 보아 신라
탑의 전통을 이은 고려 탑으로 여겨지며, 탑 주변에 건물터 주춧돌과 석재가 흩어져 있어 이
곳에 조그만 절집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절 역시 어느 세월에게 잡혀갔는지 알 도리가 없
으며, 탑은 온달샘 옆에 있다고 하여 온달샘 석탑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원래
이름은 아니겠지만 현재로써는 모든 것이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니 어쩔 수가 없다.

* 온달샘 석탑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49-1

▲  뒷쪽에서 바라본 온달샘 석탑

▲  온달샘 옆구리를 흐르는 계곡


▲  온달샘 석탑 주변 (우미내계곡)

▲  두꺼비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워커힐 골프장, 강동구 지역)

▲  두꺼비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구리 아천동과 토평동, 한강, 강동구 지역)


온달샘에서 대장간마을로 이어지는 동쪽으로 내려가면 두꺼비바위가 마중을 한다. 아차산은
흙과 화강암이 어우러진 산이라 잘생긴 바위들이 많은데, 온달샘과 우미내계곡 주변에는 너럭
바위와 두꺼비바위, 큰바위얼굴, 석실고분이 있는 넓직한 바위(아직 이름이 없음) 등이 잔뜩
포진해 있어 아차산의 매력을 크게 수식해준다.

두꺼비바위에도 조망대를 닦아 천하를 바라보게 했는데, 앞서 너럭바위보다 해발이 좀 곳이라
그곳과 거의 비슷한 분량으로 바라보인다. 여기서 조금 쉬다가 잘닦여진 계단길을 통해 대장
간마을로 내려갔다.


▲  대장간마을에서 두꺼비바위, 온달샘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길

▲  하얀 피부의 반석이 짙게 깔린 큰바위얼굴 밑 우미내계곡

두꺼비바위에서 대장간마을로 내려가는 중간에 아주 큰 벼랑이 있는데, 그곳에 '태왕사신기'
촬영 시절(2007년)에 배용준이 발견했다는 '큰바위얼굴'이 있다. 그 벼랑이 잘보이는 곳에 조
망대를 두었는데, 나는 엉뚱한 것을 그 얼굴로 오인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사진에
담았다. 허나 나중에 알고 보니 아니었다고;;; 아무래도 다시 찾아오라는 아차산의 깊은 뜻인
가 보다.

큰바위얼굴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우미내계곡이 나오고, '태왕사신기'와 '선덕여왕' 촬영지로
유명한 고구려 테마공간인 대장간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허나 시간이 늦은 상태라 쿨하게 다
음으로 몽땅 넘기고 나의 제자리로 길을 재촉했다. 어차피 나의 즐겨찾기 산이니 가까운 시일
에 또 발걸음을 하면 된다.
이렇게 하여 아차산 봄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나를 환송하는 온갖 무리의 장승들 (대장간마을에서 우미내마을 방향)
장승의 표정이 너무 익살스러워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 등의
나쁜 악귀들도 그들의 얼굴 앞에 자신의 본분도 내버리며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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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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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해돋이 명소이자 우리나라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 고구려 유적의 성지, 서울 아차산 '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5보루)

▲  아차산 산줄기

▲  아차산3보루

▲  아차산4보루

 


 

아차산은 해발 295.7m의 뫼로 용마산과 망우산을 거느리고 있다. 서울 강북 지역의 동남
쪽 벽으로(동북쪽 벽은 수락산, 불암산 산줄기) 서울 광진구, 중랑구, 경기도 구리시(九
里市)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예전에는 중랑구 봉화산(烽火山)까지 아차산의 영역이었
다. (봉화산에 있는 봉수대를 '아차산 봉수대'라 부름)

아차산은 음은 같지만 한자 표기만 해도 무려 4개(阿嵯, 峨嵯, 阿且. 峩嵯)씩이나 되는데,
삼국시대에는 아차(阿且), 아단(阿旦)이라 불렸으며, 고려 때 지금 널리 쓰이는 '아차(峨
嵯)'란 이름이 나타난다. ('峩嵯'도 이때 나타남)
아단(旦)이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우고 이름을 단(旦)이라 고치자 제
왕의 이름을 피하는 법칙에 따라 '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
으며, 조선 때는 악계산(嶽溪山), 남쪽을 향해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南行山)이란
별칭도 있었다.


겉으로 보면 수도권에 널린 흔한 산처럼 보이지만 천하가 서울 도심의 주산(主山)인 북악
산<北岳山, 백악산 342m>보다 더 키가 작은 이 산을 격하게 주목하고 있다. 바로 고구려(
高句麗)의 영광스런 역사가 두텁게 깃든 거룩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특히 차디찬 북방(北
方)을 제외한 남한 영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몰린 유일한 곳으로 그 값어치는 남다르다.

양아치 같은 강대국에 둘러싸여 고통받고 있는 우리나라는 안그래도 좁은 땅 남북으로 갈
라져 70년 이상 무의미한 소모전만 벌이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너른 대륙과 바다를 경영
했던 고구려와 발해(渤海), 백제, 옛 조선(고조선), 금(金)에 대한 향수와 아쉬움은 실로
크다. (저 잃어버린 방대한 옛 땅을 언제나 되찾을꼬??)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차산은 인지도가 낮은 동네 산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 아차산 일
대에 큰 산불이 났는데, 이를 진화하는 과정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정체 불명
의 돌무지와 산봉우리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인 구덩이가 여럿 발견되었다. 알고보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아차산 장성(長城)과 보루들이었다.
아차산장성은 아차산에서 용마산, 망우산까지 이어지던 성으로 돌성과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차산 주능선을 반달 모양으로 좌우 2겹으로 감싼 형태로 조성되었는데, 중랑천
을 건너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인 배봉산(拜峰山, 해발 110m)까지 이어졌다는 설이 있으며,
백제의 첫 도읍으로 서울 한강 이북 어딘가에 있었다는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흔적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들로 인해 아차산에 대한 호기심이 커진 구리시는 1994년 아차산 일대를 조사하여 15개
의 보루를 발견했고, 1997년 이후, 아차산4보루를 비롯해 땅 속에 잠긴 보루와 유물을 끄
집어냈는데, 이들이 거의 고구려 것으로 밝혀지면서 고구려 유적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남
한에 한줄기 단비를 선사했다.

보루의 무더기 출현에 힘입어 아차산 일대가 고구려 유적의 성지로 격하게 떠오르자 서울
광진구(廣津區)와 경기도 구리시가 이곳을 둘러싸고 서로 고구려의 도시임을 자처하며 경
쟁을 벌였고, 서울의 새로운 꿀단지로 부상하면서 등산/답사 수요가 크게 늘었다. 게다가
완만한 산세로 야간 등산(야등) 수요까지 늘어나면서 야등의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받게
되었다.
이처럼 든든한 후광인 고구려 유적과 완만하게 아름다운 산세, 그리고 일품 조망(眺望)으
로 관악산과 수락산(水落山)의 염통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 아차산, 하지만 만약 고구려
유적이 없었다면 아차산은 그저 그런 평범한 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
면 사람이나 산이나 때와 조건을 정말 잘 만나야 된다. 만약 그가 이북이나 만주 같은 곳
에 누워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꿀단지는 되진 못했을 것이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과 아차산성(阿且山城)

▲  아차산 표석과 사슴 모형등 (친수계곡 입구)

아차산과의 첫 인연은 1991년 중학교 시절이었다. 이후 20년 동안 인연이 없다가 2011년 야간
등산으로 2~3번을 찾았고, 2014년 여름 이후, 주말과 평일 야간 등산으로 발길이 무척 잦아졌
다가 2017년부터 다시 줄고 있다. (2018년에는 1~2번 정도 찾음)
북한산(삼각산), 호암산(虎巖山)과 더불어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라 아무리 많이 가도 질리
기는 커녕 반갑기만 하다. 그 아차산에 퐁당퐁당 빠진 이유는 그곳에 서린 고구려의 흔적 때
문이 아닐까 싶다. (그 다음은 빼어난 절경과 완만한 산세, 일품 조망)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2시, 아차산역(5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아차산으로 인도하
는 골목길을 쫓았다. 언덕길을 10여 분 오르면 동의초교(영화사입구)가 나오는데, 그곳을 지
나면 친수계곡 입구(고구려정 방면 산길)이며, 워커힐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아차산생태공원
이 모습을 비춘다. 우리는 여기서 소나무숲길을 통해 아차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참고로 아차
산생태공원 남쪽에는 아차산 보루의 남쪽 끝인 홍련봉 보루 유적이 있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 입구

아차산생태공원 북쪽에는 소나무숲이 닦여져 있다.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으
로 이곳 역시 생태공원의 일원인데 아차산성과 아차산 주능선으로 가려면 이 길로 가는 것이
빠르다. (생태공원과 광나루역 기준임)
소나무가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솔
솔 불어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
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무책임하게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
내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 (1)

▲  아차산 소나무숲길 (2)
소나무가 삼삼하여 제아무리 뜨거운 햇살이라도 이곳만큼은 힘을 못쓴다.

▲  소나무숲길에서 아차산성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길

▲  아차산의 얼굴, 아차산성 - 사적 234호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여 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덥수룩
하게 자라난 수풀에 거의 묻혀있던 것을 성곽을 둘러싼 나무와 수풀을 꾸준히 쳐내면서 서쪽
과 남쪽 성벽도 무리 없이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아무리 꾸준히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
드니 역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기(1~2세기 경)에 국도(國都)
인 위례성 주변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고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상당히
오래 묵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많았으나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로 선을 그으면서 아차산성(阿且山城)을 정식
명칭으로 삼았다.
하여 아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달리 산성은 예전 한자로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아차란 이름 외에 장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이란 별칭도 있었다.

4세기 후반.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
끔히 장악하면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과 같은 곳이 되었다. 위례성으
로 여겨지는 서울 강동/송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
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무
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고 고구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 자신의 라이벌
이기도 했던 북위(北魏)에게 사신을 보내 같이 고구려를 도모하자고 요구했다. <백제는 동성
왕(東城王) 시절에 산동반도를 둘러싸고 북위와 크게 경쟁을 벌여 북위의 수십 만 기병을 보
기좋게 묵사발을 만들기도 했음>
허나 그 소식을 들은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크게 발끈하여 3만의 군사를 휘몰
아 한성<漢城,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라 부름>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을 이용하여 한성 성문과 도성을 불태웠으며, 개로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치던 중, 자신의 장수였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이들
은 개로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했는데, 왕을 잡고자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투항 사실을 알리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은 왕에게 절을 하더니 바
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 온갖 육두문자를 요란하게 내뱉은 다음 포박해 고구려에
넘겼다.

고구려의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에서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왜열도와 중원대륙의 무수
한 영토를 거느렸던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서 영구히 지워
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으로 조선 이후 지금까지 위례성을 찾느라 그야말로 진
땀을 빼고 있는 것이다.


▲  아차산성 서벽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 중랑천, 서울 동부, 구리 지
역을 효과적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조그만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이곳에 설치된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여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이들 보루
는 북쪽으로 봉화산(烽火山)과 수락산, 사패산(賜牌山), 불곡산, 양주, 연천 지역까지 이어지
고 있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독특한 요새라는 점
이다. 그만큼 이 지역의 중요성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溫達)이 이곳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
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하여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불리기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결국 점령하지 못했다.
허나 8세기 이후 아차산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버려지기 시작했고, 장대한 세월과 자
연에 의해 그 견고하던 산성이 헝클어지면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  아차산성 안내문의 내용들

산성의 둘레는 약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 성이다. 아차산 남쪽 자락
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는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水口)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이 남아있다. 장대(장대터)는 전시에
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 공간으로 쓰였다고 하며, 커다란 왕개벚꽃나무가 자라
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
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략 이곳임이 밝
혀졌다.
그래도 아직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 많아 애태우던 중,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예산을 지
원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
를 대상으로 발굴조
사를 벌였다.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았는데,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장식
인 '연화문와당'이 나왔고 (인근 홍련봉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
벽에서는 신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이 나왔다. 또한 망대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
왔으며, 신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
한산성이 이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2018년 7월에는 망대터 일대에서 건물터 10동과 백제와 고구려, 신라, 고려 초기 토기와 기와
등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깨진 구리거울 조각과 모형 철제마(鐵製馬), 철촉 등의 철기류도
나와 삼국시대 때 산성 안에서 이루어진 제사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 남
벽 일대에서 사다리꼴 형태의 집수시설과 목간, 씨앗 등이 나왔고, 집수시설 위에 닦여진 배
수로에는 부여 부소산성 출토품과 비슷한 대형 철촉이 나옴)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조사하지 못한 부
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싹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에 철책을
둘러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의 거의 유일하게 접근
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다. <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부터 서울시와 워커힐이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아
직까지도 감감무 소식이다.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으며, 산성을 가리고 앉은 수풀을 싹 밀어버려 예전보다 단정한 모습이 되었으나 대자
연의 위대한 힘으로 금세 수풀이 자라나 성벽을 가리려고 드니 그나마 서벽만 제대로 눈에 넣
을 수 있다.
다만 겨울 제국(帝國) 시절에는 겨울이 수풀을 알아서 털어가기 때문에 북벽과 남벽을 그나마
제대로 살필 수 있다.

아차산성 내부를 정당하게 둘러보고 싶다면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아차산 생태공원에 있음)'
을 찾거나 '한강문화재연구원'에 도움을 청해보자. 나도 아직 아차산성 내로 들어간 적이 없
다. 그곳이 민주화(?)되기를 몇 년째 손꼽아 기다리고 있지만 그 민주화란 것이 참으로 힘들
다. 마치 이 땅의 민주화가 힘들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워커힐로 177)


▲  아차산성 서벽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  아차산성 북벽 - 철책과 자연에 꽁꽁 감싸여 들어갈 틈이 없다.

▲  아차산성과 고구려정 사이에 자리한 낙타고개

아차산성 서쪽 옆구리를 지나면 낙타고개가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성이 있는 남쪽 봉우리와 1
루로 이어지는 능선 사이에 쑥 들어가 있는데, 그 모습이 낙타의 목이나 등부분의 굽은 모양처
럼 생겼다 해서 낙타고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직진하면 보루가 주렁주렁 달린 아차/용마산 주능선으로 이어지며, 서쪽은 친
수계곡, 동쪽은 구리시 아천동이다.



♠  아차산 주능선 더듬기

▲  무덤 갈림길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까지는 야간 등산에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길이 잘 닦여져 있다.
그 길을 조금 가면 석축 위에 둥지를 튼 조그만 무덤이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린
다. 아차산 정상과 주능선, 보루가 목적이면 왼쪽 계단길을, 대성암(범굴사)과 구리 지역을
원한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  무덤 갈림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무덤 갈림길에서 주능선을 오르면서 뒤와 옆을 살짝 돌아보는 여유를 누려보자. 그러면 아주
기가 막힌 조망이 두 눈으로 바로 달려올 것이다. 아차산이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 주
변이 거의 평지라 일품 조망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장쾌한 조망은 아차산 정상을 지나 용마산
산줄기까지 이어지는데, 이 일품 조망 때문에 고구려가 보루를 잔뜩 달아 군사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구와 송파(잠실), 강남, 대모산 지역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2)
아차산성이 있는 아차산 남쪽 봉우리와 강동, 송파 지역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3)
한강과 구리, 암사대교, 강동구, 하남시 지역

▲  광진구 해맞이광장 비석

무덤갈림길과 1보루 사이에 해맞이광장이 조촐하게 터를 닦았다. 이곳은 묵은 1,000년이 지고
새로운 1,000년이 도래한 2000년 1월 1일 아침 7시, 광진구청에서 하늘과 가까운 이곳에서 새
천년 해맞이 행사를 가지며 그것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우고 해맞이 광장으로 삼은 것이다. 여
기서는 지는 해는 물론 뜨는 해도 맞이할 수 있으며, 광진구가 야심차게 닦은 서울의 주요 해
돋이 성지로 매년 1월 1일 아침마다 해맞이 행사가 절찬리에 열린다. (그때는 산이 무너질 정
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정신이 하나도 없음)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해맞이광장을 지나면 두툼히 살이 오른 아차산1보루터가 모습을 비춘다. 이곳이 넘버원 1보루
가 된 것은 별 이유 없다. 남쪽을 기준으로 발견된 순서대로 나열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나무 목책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는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 정상 사
이를 이어주는 요새였으며, 동쪽과 남쪽,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특히 5보루와 남쪽 해맞이광장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난 해돋이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1
월 1일만 되면 사람들로 완전 북새통을 이룬다.

이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봤을 1보루는 장대한 세월의 매서운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
힘 앞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그 터만 겨우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줄 따름이다.
5보루와 함께 보루의 구체적인 생김새는 아직 파악되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축성 양식과 복원
된 4보루를 흔쾌히 참고해 보루의 모습과 거기서 머물던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
려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폐허의 현장이고, 그들의 모습을 남긴 뚜렷한 사진
이나 기록도 없으니까 말이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비롯하여 홍련봉, 구의동, 자양동,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 봉화산, 사패
산, 천보산, 양주 불곡산, 연천 지역까지 많은 보루를 설치하여 아차산성 등의 주요 성을 보
조하며 주변 지역을 지켰는데, 이들 보루 중,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아차산 보루 6곳, 용마산
보루 7곳, 망우산 3곳, 수락산 1곳, 홍련봉 2곳을 '아차산 일대 보루군'으로 한 덩어리로 묶
어 국가 사적 455호로 삼았다.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 성동구, 동대문구 지역)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아차산5보루

▲  아차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터는 해발 267m 봉우리에 둥지를 튼 보루로 둘레 158m, 내부 면적은 1,818㎡ 정도
이다. 봉우리를 활용하여 보루를 다졌는데, 보루 성벽은 죄다 사라지고 겨우 흔적 일부만 남
아있는 상태이다.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남아있으나 보존을 위해 흙으로 덮었으며, 보루
를 잡아먹은 봉우리는 예전보다 다소 살이 두툼해진 상태이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주능선 산길이 보루 복판을 가로질러 흘러갔으나 보루임이 밝
혀진 이후에는 그의 건강을 위해 서쪽에 우회길을 내었다. 다른 보루와 달리 신라 후기 토기
가 여럿 출토되었고, 봉우리 모습이 마치 신라 스타일의 고분과도 비슷해 이를 두고 신라(新
羅)가 기존의 고구려 보루를 밀어버리고 무덤을 쓴 것으로 보는 견해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
러고보니 정말 신라 무덤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나 신라는 산능선에 무덤을 잘쓰지 않는 편이
라 이 역시 설에 불과하다.

5보루터는 쿨하게 개방되어 있다. 길이 봉우리 남북으로 닦여져 있으며, 그 봉우리에 올라서
면 1보루를 비롯해 아차산 능선과 한강,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 광진구, 강남구, 대모산, 구
리시, 남양주시 서부 지역, 하남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잡혀 왜 이곳에 보루를 쌓았는지 십분
이해가 된다.


▲  아차산5보루 남쪽 부분

▲  아차산5보루터 돌탑에서 바라본 천하
푸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리시와 남양주시(도농, 금곡, 덕소), 서울 강동구,
하남시가 사이좋게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5보루를 지나 계속 주능선을 고집하면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로 지정된 키 작은 소나무를 만
나게 된다.
아차산이 광진구의 소중한 꿀단지라 광진구가 그에게 들이는 정성은 참 대단하다. 그만큼 기
대하는 것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정성의 하나로 2009년 가을, 아차산에 있는 소나무
중 괜찮은 것을 골라 아차산의 새로운 명물로 키우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바로 이 나무가 그
대상이 되어 명품소나무 1호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바위 틈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천하를 굽어보고 있는데, 가지는 굴곡이 자연스러
우며, 피부가 붉고 아름다워 단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나무의 나이는 40~50년 남짓으로
여겨지며, 나무 곁에 천하를 굽어보게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조망대에서 바라본 용마산, 아차산 북쪽 줄기

▲  아차산 명품소나무 2호

명품소나무 1호를 지나면 바로 명품소나무 2호가 나온다. 이 나무는 밑둥부터 여러 가지로 솟
아 올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모습이 마치 중원대륙과 만주를 제패하던 고구려의 기상을 담
았다하여 명품소나무 2호로 지정되었다. 그 역시 1호 나무와 함께 광진구청의 보살핌을 받으
며 아차산의 차세대 명물을 꿈꾼다.


▲  명품소나무2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능선길

▲  아차산의 정상인 아차산3보루 유적 - 사적 455호

명품소나무 2호에서 6보루 입구를 지나면 아차산3보루가 있는 너른 봉우리가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해발 295.7m(296m)이다.

3보루는 아차산에 깃든 보루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성벽 둘레는 약 450m, 내부 면
적은 약 6,500㎡로 여겨지며, 정상부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어 아차산 일대 보루 중 가장 규
모가 크다. 2005년 보루 일부를 들추면서 배수로와 건물터, 기단, 성벽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디딜방아의 불씨로 여겨지는 존재가 나와 이곳이 아차산 식량 창고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하지만 겨우 보루터의 일부만 조사된 상태라 하루 속히 나머지를 모두 들춰야만 이곳에 정확
한 기능과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허전한 모습의 아차산3보루

3보루터를 품은 봉우리는 마치 대머리처럼 황량한 모습이다. 봉우리 외곽은 나무가 무성한데
반해 봉우리 일대는 땅에 바짝 붙은 잡초와 탈모된 흔적 마냥 풀이 벗겨진 흙색 길, 그리고
잘려진 나무 밑둥이 대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  아차산3보루터 봉우리 정상
정상 주변 나무는 보루터 보호를 위해 대부분 밀어버렸다.

▲  아차산3보루터 봉우리
이곳에 있었을 3보루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 상상의 나래를 한번
살찌워보자. 이것이 바로 아차산이 우리에게 주는 숙제이다.

▲  아차산3보루 돌탑
이곳을 스쳐간 사람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을
이루고 있는 돌의 상당수는 3보루 성돌과 이곳에 있던 건물터
주춧돌로 여겨진다.

▲  아차산3보루 남쪽 끝
남쪽 끝부분은 경사가 조금 각박하다.

▲  아차산3보루 북쪽 끝
계단을 이루고 있는 돌은 보루터의 일부이다.


아차산3보루에서 북쪽으로 10분 정도 더 가면 아차산4보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글의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4보루 이후부터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아차산4보루 - 사적 455호

▲  아차산4보루 내부

▲  아차산4보루 저수시설터

* 아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광장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 2019년부터 본인 답사기에서 교통정보와 관람정보는 제공하지 않는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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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월 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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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아늑한 옆산, 아차산에 올라 장대했던 고구려를 추억하다~~~ (홍련봉보루, 아차산성, 서울둘레길, 아차산보루)

 


'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성) '

▲  아차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아차산5보루

▲  아차산성

 


 

아차산은 해발 287m(또는 285m)로 용마산과 망우산을 거느린 큰 산줄기이다. 서울 강북의
동남쪽 벽으로<동북쪽 벽은 수락산과 불암산> 서울 광진구와 중랑구, 경기도 구리시의 경
계를 이루고 있으며, 예전에는 중랑구 봉화산(烽火山)까지 아차산의 영역이었다. <봉화산
에 있는 봉수대를 '아차산 봉수대'라 부름>

아차산은 음은 같지만 한자 표기만 해도 무려 4개(阿嵯, 峨嵯, 阿且. 峩嵯)씩이나 되는데,
삼국시대에는 아차(阿且), 아단(阿旦)이라 불렸으며, 고려 때 이르러 지금 널리 쓰이는 '
아차(峨嵯)'란 이름이 나타난다. ('峩嵯'도 이때 나타남)
아단(旦)이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우고 이름을 단(旦)으로 고치자 제
왕의 이름을 피하는 법칙에 따라 '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갈았다는 이야기가 있
으며 조선 때는 악계산(嶽溪山), 남쪽을 향해 솟은 산이라 하여 남행산(南行山)이란 별칭
까지 있었다.


겉으로 보면 수도권에 널린 흔하고 흔한 산이지만 천하가 서울의 북현무(北玄武) 북악산<
北岳山, 백악산 342m>보다 키가 더 작은 이 산을 주목하고 있다. 바로 고구려의 영광스러
운 역사가 진하게 배여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과 만주, 요동, 요서(遼西) 등 차디찬 북
(北方)을 제외한 남한 영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몰려있는 유일한 현장으로 그 값어치는 실
로 대단하다.
천박한 오랑캐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여 안그래도 좁아터진 땅,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채, 70
여 년 넘게 아옹다옹거리며 살아온 우리에게 너른 대륙과 바다를 다스렸던 고구려(高句麗
)와 발해(渤海), 백제(百濟), 옛 조선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너무 크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차산은 거의 동네 뒷산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 큰 산불이 터졌는
데, 이를 진화하는 과정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이상한 돌무지와 산봉우리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인 구덩이들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들을 들춰보니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아차산 장성(長城)과 보루들이었다.
아차산장성은 아차산에서 용마산, 망우산까지 이어진 장대한 성으로 돌성과 토성(土城)으
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차산 주능선을 반달 모양으로 좌우 2겹으로 감싼 형태로 조성되었
는데, 중랑천을 건너 서울시립대 뒷산인 배봉산(拜峰山, 해발 110m)까지 이어졌다는 학설
도 있으며, 백제의 첫 도읍으로 한강 이북 어딘가에 있었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흔
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들의 발견으로 아차산에 대한 호기심이 격하게 솟은 구리시(구리문화원)는 1994년 아차
산 일대를 조사하여 15개의 보루를 발견했고, 1997년 이후 아차산4보루를 비롯해 땅 속에
잠긴 보루와 유물을 끄집어냈는데, 이들이 거의 고구려 것으로 밝혀지면서 고구려 유적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남한에 한줄기 단비를 선사했다.

보루의 무더기 출현에 힘입어 아차산 일대가 고구려 유적의 꿀단지로 격하게 떠오르자 서
울 광진구(廣津區)와 경기도 구리시가 이곳을 둘러싸고 서로 고구려의 도시임을 자처하며
오랫동안 쓸데없는 소모전을 벌이기도 했고, 아차산의 존재감이 나날이 커짐에 따라 등산
과 답사 수요까지 계속 상승 곡선을 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완만한 산세와 일품 조망으로
야간 등산(야등) 수요까지 늘어나 서울 야등의 성지(聖地)로 추앙받고 있으며, 천하 둘레
길의 성지인 서울둘레길 2코스(용마·아차산코스)도 이곳에 숟가락을 얹히며 남북으로 흘
러간다.

이처럼 든든한 후광인 고구려 유적과 완만하고 아름다운 산세 덕에 관악산(冠岳山), 수락
산(水落山) 등 쟁쟁한 뫼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아차산, 하지만 만약 고구려 유적이 없
었다면 아차산은 그저 그런 평범한 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람도
그렇고 산도 그렇고 때와 장소를 정말 잘 만나야 된다.


 

♠  고구려를 품은 꿀단지, 아차산 입문

▲  친수계곡 입구에 자리한 아차산 표석과 사슴 모형등

계절의 여왕으로 추앙받는 5월의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아차산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가운
데에 걸려있던 14시, 아차산역(5호선)에서 길을 시작하여 음료수와 떡, 과자 등을 사들고 아차
산으로 인도하는 골목길을 쫓았다.

아차산은 1991년 중학교 시절에 처음 인연을 지었다. 이후 20년 동안 인연이 없다가 2011년 야
간 등산으로 여러 번 찾았고, 2014년 여름 이후 야간과 낮 산행으로 발길이 무척 잦아졌다. 내
가 좋아하는 뫼의 하나다보니 아무리 많이 가도 질리기는 커녕 집에 온 듯, 반갑기만 하다. 그
아차산에 퐁당퐁당 빠진 큰 이유는 그곳에 서린 고구려의 흔적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다음
은 빼어난 절경과 완만한 산세)

아차산 남쪽 밑에 자리한 아차산 생태공원에서 잠시 발을 멈추어 속세에서 사온 먹거리를 섭취
하고 잠시 아차산을 등지며 남쪽에 솟은 홍련봉을 오른다. 그 언덕은 구의2동 주택가와 아차산
공원 사이에 자리한 조그만 뫼로 아차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는데, 그 정상에는 아차산 보
루의 최남단인 홍련봉 보루(堡壘) 유적이 깃들여져 있다.


▲  홍련봉 보루 입구 (아차산 만남의 광장 맞은편)
홍련봉 코스는 딱 1보루까지만 길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야 된다. (1보루 이후는 길이 막힘)


▲  한참 조사를 받고 있는 홍련봉(紅蓮峰) 2보루 - 사적 455호

해발 60m 정도의 홍련봉 정상은 급한 경사와 달리 넓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은 장대한
기골을 지닌 아차산과 연결되어 있고, 동쪽과 서쪽, 남쪽은 평지라 조망도 나름 괜찮다. 또한
지척에 보이는 한강 너머로 강동, 송파 지역이 흔쾌히 두 눈에 들어오니 이런 곳에 산성이나
보루를 구축하면 제법 아름다운 요새가 된다.
하여 이곳에 일찌감치 매료된 옛 사람들은 보루를 3개씩이나 닦았는데 정상 북서쪽(북보루, 2
보루)과 남동쪽(남보루, 1보루)에 10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보루를 세웠으며, 홍련봉 남쪽 작
은 봉우리에도 보루 유적이 있다. 허나 그 유적은 정립회관 체육시설과 군사시설로 이미 아작
난 상태이다.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우리가 갔을 당시 2보루는 한참 발굴조사를 받느라 여념이 없었다.
2004년 이후 여러 차례 조사를 벌였지만 아직도 다 캐내지 못한 옛날 이야기 보따리를 끄집어
내려는 학자들의 불굴의 집념은 계속 되고 있었다. 그래서 보루 주변은 접근이 통제된 상태라
그 통제에 순응하며 금줄 너머로 그 뜨거운 현장을 지켜보았다.
발굴로 인해 강제로 흙색 속살을 드러내며 황량한 몰골이 되었지만 발굴이 끝나면 다시 자연의
옷과 돌을 입혀 보루를 산듯하게 복원할 계획이다.

2보루는 둘레 약 190m의 타원형 모양으로 남북 폭이 최대 85m, 동서 42m이다. 정상 일대를 평
탄하게 다듬고 조촐하게 보루를 쌓았는데 북서쪽에서 약 40m까지는 보루 주위의 토루(土壘)와
비슷한 높이로 흙이 깎여져있고 남동쪽 부분은 토루보다 2m가 낮다.


▲  홍련봉(紅蓮峰) 1보루 - 사적 455호

2보루에서 동쪽 숲길을 100m 가면 1보루가 나온다. 여긴 발굴조사가 끝났는지 2보루와 달리 인
적이 없어 한적했는데, 넓직한 푸른 덮개로 보루의 속살을 가리고 있었다.
이 보루는 서쪽 2보루와 비슷한 모습으로 둘레가 약 150m에 이르는 타원형이다. 폭은 최대 57m
, 최소 36m 정도이며, 남한 최초로 고구려 연꽃무늬 와당이 발견되어 아차산 보루의 중심 역할
을 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발굴 휴유증을 보듬고자 덮개를 뒤집어쓰며 곤히 잠든 보루를 건들
기가 그래서 굳이 그의 등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홍련봉 보루는 아차산보루와 달리 오래전에 확인이 된 유적으로 1942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성터로 나와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속세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버
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1994년 구리문화원이 아차산 일대를 뒤집으며 문화유적 정밀지표 조사
를 벌였고, 이곳이 고구려 보루로 크게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하여 2004년 고려대 매장문화재
연구소에서 홍련봉1보루의 속살을 털면서 고구려의 신성한 유적임이 밝혀진 것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홍련봉 보루의 신상을 털어보면 대략 이렇다. 아차산보루와 비슷한 5~6세기에
고구려가 쌓은 것으로 보루 안에 온돌을 갖춘 건물과 물을 보관하는 저수시설, 물을 밖으로 내
보내는 배수시설, 토기와 기와를 생산하던 조그만 가마터가 있었다. 북쪽 평탄지에는 저수시설
이 나왔는데, 바닥에 목재를 깔았던 흔적이 있으며, 흙을 파서 찰흙을 입힌 뒤 석축으로 벽면
을 쌓았다. 2005년에 확인된 가마터 흔적에서는 온돌 3기가 나왔고, 온돌을 폐기한 후 모래를
섞은 흙을 다져 가마터 시설을 조성한 흔적이 나왔다.
또한 보루 내부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완벽한 배수시설 구조가 나왔으며, 보루 밖에는 'ㄴ'자로
판 후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도로 시설이 나왔고, 2013년 여름 이후에는 마른 해자의 흔적까지
쏟아져 나오면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했다. 이는 남한에서 최초로 확인된 고구려 해자였던 것
이다. 해자란 방어력을 높이고자 성곽 주위에 두룬 물줄기로 북서쪽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에
서 드러났는데 규모는 길이 204m, 폭 1.5~2m, 깊이 0.6~2.5m, 단면 형태는 'U'자형과 'V'자형
이다.
이들은 흙을 파서 내,외벽을 이루고 있는데, 외벽 일부에는 배수로가 설치된 구간을 석축으로
쌓거나 따로 배수시설을 연결했으며 동/서쪽 내벽은 석축 성벽이다.

그리고 고구려 토기와 연꽃무늬 와당(기와), 철제 깃대, 철촉, 삽날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토기 중 '官瓮(관옹)'이 새겨진 붉은 토기와 '庚子(경자)'가 새겨진 토기가 있었다.
여기서 경자는 520년(또는 460년)을 뜻하며, 이를 통해 보루가 바쁘게 움직이던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여러 유물과 시설이 발견되면서 비슷한 시설 흔적이 나왔던 아차산3보루와 더불어 아차
산의 군수물자를 책임지던 병참기지(兵站基地)로 여겨지며, 연꽃무늬 와당을 통해 아차산 보루
의 중심지였음을 귀뜀해준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곳이 아차산의 중요한 목구멍이 되었을까? 아마도 한강이 가까운 탓이 아닐
까 싶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시절 고구려는 중원대륙 진출에 대한 몸풀기로 아리수(阿利
水, 한강) 이북을 점령했고, 장수태왕(長壽太王) 말엽인 475년에는 한강을 건너 경북 중부까지
장악했다.
한강은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요충지로 그 강을 통해 아차산을 비롯한 남쪽 후방으로 물자를 수
송했을 것은 뻔한 이치이니 강과 가깝고 아차산과 바로 이어지는 홍련봉과 인근 구의동(정립회
관), 자양동에 보루를 쌓아 아차산의 병참기지로 삼은 것이다.

허나 6세기 중반 신라가 백제의 뒷통수를 후려치며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그 기세로 아차산까
지 공격하자 고구려군은 강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털리고 말았다. 이는 온달(溫達)장군의 설화
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신라는 이곳을 활용하여 한강과 서울 지역을 수비하고 고구려를 견
제했으나 8세기 이후 군사기지로서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완전히 버려지게 된다.
그렇게 사람의 손길이 끊어진 보루는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완전히 헝클어졌고, 대자연의 힘
에 의해 아차산의 일부로 완전히 녹아버렸다. 그 억겁의 세월동안 자연에 강제로 묻히며 한이
단단히 쌓였을 홍련봉보루, 이제 그 한을 풀고 이곳에 묻힌 이야기 보따리(특히 고구려)를 모
두 풀어주기를 염원해본다.

홍련봉 보루는 '아차산 홍련봉 보루 유적'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21호의 지위를 누리
고 있었으나 사적 455호로 지정된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 홍련봉 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 4-13


▲  홍련봉 1보루 밑에서 바라본 천하
숲 너머로 바로 보이는 아파트가 워커힐아파트이다.

▲  홍련봉 보루 조감도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  아차산 소나무숲 입구

홍련봉 보루를 둘러보고 다시 내려와 아차산으로 인도하는 소나무숲으로 들어섰다. 아차산성으
로 가려면 이곳을 거쳐가는 것이 제일 빠르기 때문이다.

이 소나무숲은 아차산생태공원의 일원으로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이다. 소나무
가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달달한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살
포시 다가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무책임하게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내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의 한복판


 

♠  삼국시대 주요 격전지였던 아차산성(阿且山城) - 사적 234호

▲  아차산성 서벽 (1)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덥수룩하
게 자라난 나무와 수풀로 오랫동안 고통 받아오던 것을 2013년 이후 성곽 주변을 꾸준히 다듬
으면서 북쪽과 남쪽 성벽도 그런데로 확인이 가능하다.
허나 아무리 꾸준히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
드니 역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기(1~2세기 경)에 국도(國都)
인 위례성 주변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귀신도 지릴
정도로 상당히 오래 묵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阿且山城)를 정식 명칭으로 삼으
면서 한자 논쟁은 그런데로 종결이 되었으나 아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달리 그
산성은 예전 한자로 따로 노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아차'란 이름 외에도 장한성(長
漢城), 광장성(廣壯城)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니 한자 이름도 그렇고 별칭까지 참 복잡하다.
그만큼 이곳은 역사적으로도 꽤 복잡했던 곳이다.

4세기 후반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 광개토대왕(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끔히 장악하면
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이 되었다. 위례성으로 여겨지는 서울 강동/송
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고구
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 자신의 라이벌<동성왕(東城王) 시절에 산동반도에서 북위의
대군을 크게 때려잡은 사건이 있었음>이기도 했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같이 치
자고 들쑤시는 일이 발생했다. (북위는 백제의 요구를 거절함)
이에 뚜껑이 열린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3만의 군사를 휘몰아 한성<漢城, 위례
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라 부름>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으로 성문과 도성(都城)을 불태웠고, 개로왕은 급히 도성을 버리고 줄행
랑을 치던 중, 자신의 장수인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허나 이들
은 개로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한 상태로 그를 잡고자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런 사실을 알 턱이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이 왕에게 절을 하면서 바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 온갖 육두문자를 내뱉은 다음 포박하여 고구려에 바쳤다.

그렇게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으로 끌려와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바다 건너 왜열도와 중
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영토를 거느렸던 백제의 도읍 위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
서 영구히 지워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 때문에 이 땅의 학자들이 위례성을 찾느
라 오랫동안 진땀을 뺐던 것이다. (장수태왕 큰형님 너무 나빠여~~!)


▲  아차산성 서벽 (2)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과 중랑천, 구리 지역을 효과적
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조그만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이곳에 설치된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여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현재 17기
가 발견됨) 이들 보루는 북쪽으로 봉화산과 수락산, 사패산(賜牌山), 불곡산, 양주, 연천 지역
까지 이어지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독특한 요새라
는 점이다. 이는 오랜 라이벌인 백제를 크게 의식하고 경계하고 있었음을 뜻하며 그만큼 백제
는 고구려의 강력한 적이었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이 이곳에 쳐들어온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
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해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불
리기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대륙을 다스렸던 고구려가 사라지고(668년) 신라가 황해도와 강원도 지역을 간신히 장악하면서
아차산은 전방 신세에서 벗어났다. 즉 좁아터진 신라 땅의 한복판이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
차산은 할 일이 크게 줄어들어 한가한 신세가 되었고, 결국 산성과 보루는 완전히 버려지게 되
었다. (신라 말에 모두 버려진 것으로 여겨짐) 보루는 대자연과 세월의 의해 모두 아작이 났지
만 아차산성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며 그 자리를 지켜왔다.


▲  아차산성 구조와 관련 사진들

산성의 둘레는 약 1,038m(길게 잡으면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성이다.
아차산 남쪽 자락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으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水口)
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이 있다. 장대(장
대터)는 전쟁시에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였다고 하며, 커
다란 왕개벚꽃나무 1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
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충 이곳임이 밝
혀졌다.
그리고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
를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는데,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
았다.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인 '연화문와당'이 나왔고 (홍련봉 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
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벽에서는 신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이 나왔다. 또한 망대(望臺)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
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왔으며, 신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한산성이 이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관련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모두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기가 쏟아
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헝클어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
에 철책을 둘러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 유일하게 접
근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는데<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
부터 서울시와 워커힐이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감감
무 소식이다.
<2017년 광진구청장이 신년사에서 아차산성을 복원 정비하고 4계절 힐링공간을 위한 아차산 문
화벨트 조성사업을 마무리해 아차산둘레길과 연계한 문화탐방 명소로 만들겠다고 언급했음>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다. 다만 1년에 딱 1번 아차산성의 속살이 강제로 해방되는<인터넷 용어로 민주화가 되
는> 날이 있는데, 바로 1월 1일 아침, 아차산 해맞이 행사 때이다. 그렇다고 정식 개방되는 것
은 아니다. 그때만 되면 산꾼들이 해돋이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산성으로 마구 넘어 들어가는데
그 행렬에 살짝 묻어 들어가면 된다. 물론 정당한 방법은 아니나 그때만큼은 아차산 일대가 수
만 명에 달하는 해돋이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니 단속반도 거의 손을 못쓴다. 어차피 산성에 해
꼬지만 안하면 된다.

아차산성 내부를 정당하게 둘러보고 싶다면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아차산 생태공원에 있음)'
에 문의하거나 '한강문화재연구원'에 도움을 청해보자. 나도 아직 아차산성의 속살로 들어간
적이 없다. 그곳이 속칭 민주화되기를 몇 년째 기다리고는 있지만 그 민주화라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 마치 이 땅의 민주화가 힘들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 아차산성 찾아가기 (2017년 4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구의역(1번 출구)에서 광진구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영화사입구 하차, 동쪽으로
  펼쳐진 '영화사로'를 따라 10분 정도 가면 아차산생태공원 만남의광장이며, 여기서 소나무숲
  산길로 들어서 10분 정도 오르면 된다.
*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1번 출구)에서 아차산생태공원까지 도보 15분 (길이 좀 복잡함)
* 지하철 5호선 아차산역(2번 출구)에서 아차산생태공원까지 도보 17분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워커힐로 177)


▲  아차산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부분
저곳에서는 산성을 지휘하는 장대터가 발견되었다.


▲  아차산성 서벽 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  낙타고개

아차산성 서쪽 옆구리를 지나면 낙타고개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성이 있는 남쪽 봉우
리와 1보루로 이어지는 능선 사이에 쑥 들어가 있는데, 그 모습이 낙타의 목이나 등 부분의 굽
은 모양처럼 생겼다 해서 낙타고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그대로 직진하면 아차산 주능선이며, 서쪽은 친수계곡과 영화사, 동쪽은 온달
샘석탑과 대장간마을, 우미내계곡으로 이어진다.


▲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달려가는 숲길

▲  무덤 갈림길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까지는 야간 등산에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산길이 잘 닦여져 있다.
그 길을 조금 가면 석축으로 자리를 다지고 들어앉은 조그만 무덤이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갈린다. (누구 무덤인지는 모르겠으나 위치 하나는 좋아 보임)
아차산 정상과 주능선, 보루가 목적이면 왼쪽 계단길을, 범굴사(대성암)와 아차산3층석탑을 원
한다면 오른쪽 길로 간다.


 

♠  아차산 주능선 더듬기 (아차산1보루, 5보루)

▲  해맞이광장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구와 송파(잠실), 강남, 대모산, 관악산 지역


무덤 갈림길에서 주능선을 오르면서 뒤와 옆을 살짝 돌아보는 여유를 누려보자. 그러면 허벌나
게 기가 막힌 조망이 두 눈으로 바로 달려올 것이다. 아차산이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 주
변이 거의 평지라 하늘 밑에 펼쳐진 천하를 훤히 굽어볼 수 있다. 이런 장쾌한 조망은 아차산
정상을 지나 용마산까지 이어지는데, 이 일품 조망 때문에 고구려가 보루를 잔뜩 달아 군사기
지로 삼았고 신라 또한 이곳을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  해맞이광장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2)
광진구, 강동, 송파, 남한산성, 대모산 지역

▲  광진구 해맞이광장 비석

무덤갈림길과 1보루 사이에 해맞이광장이 조촐하게 터를 닦았다. 이곳은 묵은 1,000년이 지고
새로운 1,000년이 도래하던 2000년 1월 1일 아침 7시, 광진구청에서 하늘과 가까운 이곳에서
새천년 해맞이 행사를 치른 것을 기리고자 돌을 쌓아 비석을 세우고 해맞이 광장으로 삼은 것
이다. 여기서는 지는 해는 물론 뜨는 해도 맞이할 수 있으며, 광진구가 야심차게 닦은 서울의
주요 해돋이 성지로 매년 1월 1일 아침마다 '아차산 해맞이축제'가 절찬리에 열린다.


▲  해맞이광장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 성동, 송파, 강남, 대모산, 관악산 지역


▲  해맞이광장에서 바라본 천하 (2)
강동구와 하남시, 남한산성과 검단산(黔丹山)

▲  해맞이광장에서 바라본 천하 (3)
'S' 라인을 보여주고 있는 한강과 구리, 강동구, 하남시, 남양주시 와부읍 지역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해맞이광장을 지나면 두툼히 살이 오른 아차산1보루터가 나온다. 이곳이 넘버원 1보루가 된 것
은 별 이유 없다. 남쪽을 기준으로 발견된 순서대로 나열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나무 난간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하면서 자유로운 공간이 되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 정상을 이
어주는 요새였으며, 동과 남,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특히 5보루
와 남쪽 해맞이광장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난 해돋이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어 1월 1일만 되면
사람들로 봉우리가 무너질 지경이다.

보루의 구체적인 생김새는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축성 양식과 복원된 아차산4보
루를 흔쾌히 참고하여 보루의 모습과 거기서 머물던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산의 일부로 흡수된 폐허의 현장이고 그들의 생전의 모
습을 담은 사진이나 기록도 없으니까 말이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비롯하여 홍련봉, 구의동, 자양동,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 봉화산, 사패
산, 천보산, 불곡산, 연천 지역까지 많은 보루를 설치하여 아차산성 등의 주요 성을 보조하며
주변 지역을 지켰는데, 이들 보루 중,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아차산 보루 6곳, 용마산 보루 7
곳, 망우산 3곳, 수락산 1곳, 홍련봉 2곳을 '아차산 일대 보루군'으로 묶어 사적 455호로 지정
했다.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 성동구, 동대문구 지역)

▲  아차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터는 해발 267m 봉우리에 둥지를 튼 보루로 둘레 158m, 내부 면적은 1,818㎡ 정도
이다. 봉우리를 활용하여 보루를 다졌는데 보루에 씌웠던 성벽은 거친 세월의 흐름 속에 죄다
휩쓸려 사라지고 겨우 흔적 일부만 있는 형편이다.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남아있으나 보
존을 위해 흙으로 덮었으며, 보루를 잡아먹은 봉우리는 예전보다 살이 두툼해진 상태이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주능선 산길이 보루 복판을 가로질러 흘러갔으나 보루임이 밝
혀진 이후에는 그의 건강을 위해 서쪽에 우회길을 닦았다. 다른 보루와 달리 신라 후기 토기가
여럿 출토되었고, 봉우리 모습이 마치 신라 스타일의 고분과도 비슷해 이를 두고 신라가 고구
려 보루를 밀어버리고 무덤을 만든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고보니 정말 신라 고분처럼
생겼다. 허나 신라는 산능선에 무덤을 잘쓰지 않는 편이라 이 역시 설에 불과하다.

5보루터는 쿨하게 개방되어 있다. 길이 봉우리 남북으로 닦여져 있으며, 그 봉우리에 올라서면
1보루를 비롯해 아차산 능선과 한강,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 광진구, 강남구, 대모산, 구리시,
남양주시(도농, 덕소 지역), 하남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잡혀 왜 이곳에 보루를 쌓았는지 십분
이해가 간다.


▲  아차산5보루 정상에 닦여진 돌탑

이곳을 스쳐간 산꾼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을 이루고 있
는 돌 대부분은 헝클어진 5보루 성돌로 여겨지며, 그 성돌이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인 돌
탑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돌고 도는 모양이다.


▲  아차산5보루 남쪽 부분

▲  아차산5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1)
사진 중앙에 보이는 곳이 태왕사신기 촬영지로 조성된 고구려대장간 마을이다.

▲  아차산5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2)
푸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리시와 남양주시(도농, 덕소), 서울 강동구,
하남시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5보루를 지나 계속 주능선을 고집하면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로 지정된 키 작은 소나무를 만나
게 된다.
아차산이 광진구의 소중한 꿀단지라 광진구가 그에게 들이는 정성은 참 대단하다. 그만큼 기대
하는 것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정성의 하나로 2009년 가을, 아차산에 있는 소나무 중
괜찮은 것을 골라 아차산의 새로운 명물로 키우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바로 이 나무가 그 대상
이 되어 명품소나무 1호란 그럴싸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바위 틈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천하를 굽어보고 있는데, 가지는 굴곡이 자연스러
우며, 피부가 붉고 아름다워 단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그의 나이는 40~50년 남짓으로 여
겨지며 나무 곁에는 천하를 굽어보게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에서 바라본 광진, 성동, 동대문구 지역
오른쪽 구석에 남산서울타워도 보인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에서 바라본 용마산, 아차산 산줄기

▲  아차산 명품소나무 2호

명품소나무 1호를 지나면 바로 명품소나무 2호가 나온다. 이 나무는 밑둥부터 여러 가지로 솟
아올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모습이 마치 고구려의 기상을 닮았다하여 명품소나무 2호의 감
투를 받았다. 그 역시 1호 나무와 함께 광진구청의 보살핌을 받으며 아차산의 차세대 명물을
꿈꾼다. (명품소나무 3호는 아직 없음)


▲  명품소나무2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  아차산 마무리

▲  아차산6보루

명품소나무 2호와 아차산3보루 사이에 아차산보루의 막내라 할 수 있는 6보루가 언덕처럼 봉긋
이 자리해 있다.
언덕처럼 솟은 터가 바로 6보루터로 2005년 3보루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사람이 우연히 발견했
다. 허나 아직까지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생김새가 보루터 비슷하게 생겨서 아
차산6보루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추정 둘레는 약 80m 정도로 이곳에서 나왔던 옛 불씨는 흙을
덮어 보존하고 있다. 아차산 주능선 바로 동쪽으로 적지 않은 아차산의 과거를 간직하고 있으
리라 여겨지며 속히 조사를 벌여 6보루의 정체성을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  아차산6보루 부근에서 바라본 5보루

▲  아차산6보루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1)
가운데 보이는 산자락에 아차산성이 누워있고, 그 너머로 한강과 강동,
송파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아차산6보루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2)
강동구와 하남시 지역

아차산의 품에 들어설 때 처음에는 아차산 정상까지 가려고 했다. 허나 그 힘찬 발걸음은 6보
루에서 뚝 멈추고 말았다. 일몰 시간도 지척인데다가 다들 힘들다고 하소연을 했기 때문이다.
하여 아쉽지만 주능선은 이쯤에서 놓아두고 동쪽으로 내려가 범굴사(대성암)을 경유하여 무덤
갈림길로 돌아왔다.


▲  범굴사 부근에서 바라본 한강과 강동, 구리, 하남 지역

▲  범굴사 부근에서 바라본 강동, 송파 지역

▲  크고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고구려정(高句麗亭)

무덤 갈림길에서 낙타고개 방면으로 내려가면 서쪽에 붉은 기와를 지닌 2층 고구려정이 손짓을
한다.
아차산에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닌 고구려정은 팔각정 모습으로 이곳에는 원래 1984년에 지어
진 콘크리트 팔각정이 있었다. 허나 노후로 정자 전체가 기울어지는 현상이 발생하자 2008년 1
월에 철거했으며, 고구려 유적의 성지에 걸맞게 고구려 스타일로 다시 짓기로 하고 2009년 2월
착공하여 그해 7월 완성을 보면서 정자 이름을 고구려정이라 하였다.
정자에 쓰인 목재는 300년 이상 묵은 금강송을 사용했는데, 기와는 고구려 왕궁인 평양 안학궁
(安鶴宮)과 홍련봉보루에서 출토된 기와의 붉은 색상과 문양을, 단청 문양과 현무, 주작 그림
은 쌍영총(雙楹塚)과 강서(江西)중묘 등 고구려 고분 벽화를 참고해 남한 최초로 고구려 건축
양식을 재현한 의미 깊은 현장이다.

고구려정은 바위 위에 곧게 자리해 고구려가 늘 응시하던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정자 밑에
넓게 닦여진 넓적바위는 예로부터 기가 왕성한 장소로 알려져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정자 내부는 마루로 이루어져 1층에서 신발을 벗고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되는데 솔솔 불어오
는 산바람에 번뇌를 휘날리며 독서를 하게끔 도서함이 갖추어져 있다. (독서는 자유이나 책을
가져가는 것은 안됨)

▲  야외 도서관을 꿈꾸는 고구려정 도서함

▲  천정에 그려진 주작(朱雀)의 위엄


▲  천정에 장엄하게 그려진 현무(玄武)와 연꽃무늬의 위엄

▲  고구려정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구 구의/자양/성수동 지역과
송파, 강남 지역)

▲  주름진 하얀 피부를 지닌 거대한 넓적바위
아차산 동쪽 자락인 우미내계곡 북쪽에도 이런 비슷한 바위가 누워있다.

▲  밑에서 바라본 고구려정

고구려정에서 잠시 다리를 쉬었다가 정자 밑으로 펼쳐진 넓적바위를 타고 내려갔다. 바위 자체
가 산길로 쓰이고 있는데, 미끄러운 면이 별로 없어 산행에는 크게 불편은 없다. 다만 비/눈이
오거나 얼음이 언 경우에는 바위도 흥분기를 보이니 각별히 주의해야 된다.

아차산공원(동의초교 동쪽)으로 내려오니 어느덧 19시, 그렇게 높이 올라간 것은 아니지만 하
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을 갔다왔더니 시장기도 강하게 요동을 친다. 그래서 어린이대공원
후문 부근에서 뜨끈한 갈비탕에 파전, 거기에 곡차(穀茶) 여러 잔을 겯드리며 황제처럼 저녁을
먹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아차산 나들이는 흐릿한 과거의 일부가 되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어린이대공원 후문 부근 식당에서 먹은 갈비탕과 파전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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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4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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