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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4.08 정읍 봄맞이 나들이 <정읍피향정, 함벽루, 무성서원, 성황산, 한정, 송정, 동진강>
  2. 2016.09.26 부산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뒷산을 거닐다 ~~~ 배산 (배산성터, 진달래밭)

정읍 봄맞이 나들이 <정읍피향정, 함벽루, 무성서원, 성황산, 한정, 송정, 동진강>

정읍 피향정, 무성서원


 
' 정읍 봄맞이 나들이 (피향정, 무성서원) '

피향정 하연지

▲  피향정 하연지

무성서원 태산사 칠보 성황산 숲길

▲  무성서원 태산사

▲  칠보 성황산 숲길

 


 

차디찬 겨울 제국과 봄의 마지막 경계선인 3월의 한복판에 간만에 전북 정읍(井邑)을 찾
았다.
아침 일찍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정읍으로 가는 일
반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정읍까지 들어가지 않고 그 이전인 태인(泰仁)에서 내렸다.
태인면과 칠보면의 여러 미답처를 그날의 메뉴로 정했는데, 태인터미널 뒤쪽으로 이동하
니 피향정이 하연지란 너른 못을 내밀며 마중을 나온다.
(서울에서 태인 경유 정읍으로 가는 일반고속버스가 1일 3회 운행함)



 

♠  호남 제일의 정자로 오랫동안 칭송을 받았던
피향정(披香亭) - 보물 289호

▲  서쪽에서 바라본 피향정

태인면 중심지(태창리)에 위치한 태인터미널 뒤쪽에는 아침 햇살을 머금은 피향정과 하연지(
태창지)가 나란히 자리해 단아하고 고즈넉한 모습을 풍기고 있다.
예로부터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으로 명성이 높았던 피향정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
붕 정자이다. 신라 말에 그 유명한 최치원(崔致遠)이 세웠다고 전하고 있는데, 그는 헌안왕(
憲安王) 때 태산군수(泰山郡守, 태산은 태인의 옛 이름이라고 함)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넉
넉히 베풀었다. 허나 그가 세운 것도 확실치가 않으며,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도 알 수 없다.

조선 광해군(光海君) 시절, 태인현감인 이지굉(李志宏)이 중건했으며, 현종 때 현감 박숭고(
朴崇古)가 증축했고, 1716년 현감 유근(柳近)이 전라감사와 호조(戶曹)의 도움을 받아 변산(
邊山)에서 나무를 베어와 현재의 규모로 중건했다. 그래서 작은 정자였던 피향정이 누각 수준
으로 커진 것이다. 허나 그에 걸맞게 루(樓)를 칭하지 않고 계속 정(亭)을 고집하고 있어 칭
호와 겉모습이 완전 따로 논다. (1974년에 단청을 새로 했음)

땅바닥에 낮게 석축을 다지고 1.42m 높이의 화강암 돌기둥 28개를 세운 다음, 그 위에 누마루
건물을 올렸는데, 정면과 뒷면 가운데 칸에 통행 편의를 위해 돌계단을 늘어뜨렸으며, 누각에
어울리도록 건물 4면이 모두 뚫려있다. 난간은 짧은 기둥으로 촘촘히 둘렀고, 건물 천장은 지
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나 천장 일부를 가리고자 건물 좌우 사이를 우물 천장으로
꾸몄으며, 이곳에 퐁당퐁당 빠진 현감과 관리, 선비들이 남긴 글을 머금은 현판이 가득 걸려
있어 호남제일의 정자, 피향정의 오랜 명성을 귀띔해준다.

조선 중기 목조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누각 앞뒤로 연꽃이 심어진 상연지(上蓮池)
와 하연지(下蓮池)가 있어 피향정을 아름답게 수식했으나 왜정 때 상연지가 강제 매립되면서
하연지만 남아있다. 연못에 연꽃이 그윽하게 피어나면 그 향기가 주위에 가득했는데, 거기서
피향정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 피향정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102-2 (태산로 2951)


▲  동쪽에서 바라본 피향정과 돌계단

▲  누각 바깥에 걸린 피향정 현판의 위엄

▲  누각 내부에 숨어있는 또 다른
피향정 현판

▲  누각 기능에 충실하게 지어진
피향정 내부

▲  검은 피부의 피향정 중수기


▲  피향정 동쪽에 길게 늘어선 비석들

이들 비석은 옛 태인 고을 현감과 전라도관찰사의 선정비(善政碑) 및 불망비(不忘碑)로 주변
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집합시켰다. 모두 19기로 지붕돌을 지닌 비석과 대머리 비석,
그리고 장대한 세월에게 정통으로 맞아 몸통이 날라간 가련한 비석들까지 다양한 모습과 사연
들을 간직하고 있는데, 선정비를 받을 자격이 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저 비석들에게
한번 묻고 싶다. 아마도 상당수 비석들은 고개를 떨구겠지.


▲  피향정 서쪽에 닦여진 하연지(태창지)
하연지는 피향정의 상큼한 꿀단지로 연꽃의 보금자리이다. 연못 복판에
동그란 섬을 띄워놓아 운치를 극대화시켰다.

▲  육지와 하연지 섬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돌다리와
섬의 주인장인 함벽루(涵碧樓)


피향정 서쪽에는 누렇게 뜬 잡초 같은 것으로 가득한 너른 공간이 있다. 바로 하연지(태창지)
이다. 누런 잡초들은 모두 연꽃으로 지금은 비록 우울한 모습들을 하고 있지만 여름이 되면
연못 수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통 연꽃밭이 되어버린다. 원래 상연지와 하연지 2개의 연
못이 있어 피향정을 앞다투어 수식했으나 고약한 감성의 왜정이 상연지를 밀어버리면서 하연
지만 남게 되었다.

하연지 복판(정확히는 연못 북부)에는 동그란 작은 섬을 띄워놓았는데, 바로 그 섬에 함벽루
가 둥지를 틀어 섬의 주인 노릇을 한다. 그는 20세기에 지어진 6각형 정자로 1971년에 중수했
으며, 생김새는 완전한 정자(亭子)임에도 그 모습과 다르게 누각을 칭하고 있다. 하여 함벽루
보다는 '함벽정'이 맞다고 본다. 피향정은 나중에 증축되어 누각처럼 되었으나 여전히 '정'을
고집하고 있고, 함벽루는 정자 스타일임에도 누각을 칭하고 있으니 이곳만큼은 모든 것을 반
대로 보는 모양이다.
육지와 함벽루가 있는 섬은 돌다리가 짧게 이어져 있으며, 함벽루 내부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연꽃이 한참인 한여름에 와야 하연지의 진풍경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 것인데, 엉뚱하게도 3
월에 인연을 지어 연못 풍경이 참 황량하기가 그지 없다. 피향정에서 즐기는 연꽃의 향연은
정읍9경 중 제6경으로 꼽히며, 전주(全州) 덕진공원과 더불어 전북 제일로 찬양을 받는다.


▲  지붕돌을 지닌 함벽루 중수기념비(오른쪽 비석)

1971년에 함벽루를 중수한 기념으로 그해 8월에 장만한 비석이다. 그들 좌우로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훨씬 작은 석인(石人, 동자석으로 여겨짐) 2기가 홀(忽)을 들고 서 있는데, 세월
을 너무 좋지 않게 탔는지 머리를 비롯한 윗도리가 완전히 아작이 나버렸다. 저들은 부근에서
수습된 것으로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다.


▲  6각형 정자 모습의 함벽루
'함벽루'라 쓰고 '함벽정'이라 읽으면 딱 맞는다.

▲  서쪽에서 바라본 하연지와 함벽루 (비수기에 잠긴 하연지)

▲  태인이로비(泰仁移路碑)

하연지 서쪽 끝에는 '태인이로비'란 키다리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1871년 태인현감 김인근(
金寅根)이 길을 이곳으로 이설하고 세운 것으로 높이 210cm, 두께 45cm인데, 길을 옮긴 것을
기리고자 세운 옛 비석은 여기서 처음 본다.


▲  남쪽에서 바라본 하연지와 함벽루 섬 (오른쪽에 돌다리가 있음)

피향정은 이미 대학생 시절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다. 그때는 겨울이 시작되던 11월 말이었지.
이번에는 겨울과 봄의 마지막 경계선에 왔으나 황량한 풍경은 11월 말과 비슷하다. 어쩌면 그
때와 비슷한 상황에 왔을까? 다음에 또 이곳과 인연을 짓는다면 무조건 여름에 찾고 싶다. 그
래야 피향정의 자랑인 연꽃의 향연을 제대로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피향정 다음 답사지는 칠보(七寶)에 있는 무성서원이다. 태인에서 칠보까지는 약 8km 거리로
가까운 편이나 정작 시내버스는 하루에 7~8회가 고작이다. 게다가 시간도 맞지 않아서 1시간
이나 기다려야 했지. 하여 그 시간을 때우고자 달이 지구 주위를 돌 듯 하연지를 2바퀴나 돌
았다. (하연지 둘레가 약 480m 정도임)
그렇게 돌고도 시간이 남아 터미널에서 억지로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정읍시내버스 91번(신태
인터미널↔칠보) 소형 차량(카운티)이 나타나 반갑게 입을 벌린다.
버스는 겨우 나 하나만을 담고 칠보로 이동했는데, 칠보면 중심지(시산리)까지 15분 정도 걸
렸다. 신태인에서 태인, 칠보 구간은 이동 수요가 좀 있는 줄 알았더만 평일 학생 수요를 빼
면 지지리도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소형 차량으로 가뭄에 콩나는 수준으로 다니는 것이다.

전북의 서남부를 이루고 있는 정읍시는 태인면과 북면까지는 평지(평야)이고 동부 지역인 칠
보, 산외, 산내 지역은 첩첩한 산골이다. 즉 태인을 경계로 정읍은 평지와 산악 지대, 2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  최치원을 기리는 오래된 서원, 무성서원(武城書院)
- 사적 166호

▲  무성서원의 외경 (왼쪽 2층 누각이 현가루)

칠보면 중심지(시산리)에서 바로 남쪽에 흐르는 동진강(東津江)을 건너면 무성리이다. 무성리
를 이루고 있는 마을 중 무성서원을 간직한 곳이 바로 원촌(원촌마을)으로 그곳은 무성서원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오래된 마을이다. 하여 양반과 선비들이 지어놓은 정자(10개가 있음)와
한옥, 제각(祭閣) 등이 많이 전하고 있으며, 서원도 무성서원 외에 용계서원도 지니고 있다.
게다가 향토문화사료관 등의 문화공간도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며,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歌
詞)로 유명한 상춘곡(賞春曲)의 산실로도 유명하다.
이렇게 유서가 깊고 볼거리도 넉넉하나 내 침침한 두 눈에는 오로지 무성서원 밖에는 보이지
않아 무성서원과 서원 뒷산인 성황산에 몇몇 명소만 둘러보고 철수했다.

원촌마을 안쪽에 자리한 무성서원은 전북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신라 후기에 최치원이
태산군수를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는데, 이에 감동을 먹은 지역 사람들이 그의 생사당(生祠堂)
을 세워 태산사(泰山祠)라 했다. 생사당이란 살아있는 사람에게 제를 지내는 사당으로 그에
대한 존경심이 매우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최치원이 태수로 거쳐갔던 태산고을이 과연 이곳
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음)

그렇게 시작된 태산사는 고려 말에 철거되어 사라졌으며, 1483년에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
학당(鄕學堂) 자리에 다시 지어졌다. 그곳이 현재 무성서원 자리이다.
1549년 신잠(申潛)의 생사당을 경내에 추가했으며, 1630년에는 정극인, 안세림(安世琳), 정언
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默)이 추가되었고, 1675년에는 김관(金灌)이 추가되어 총 7명의 사당
이 되었다. 최치원의 생사당으로 시작된 태산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에 유명 인사들까지
기리는 공간으로 확장된 것이다.

1696년 태산사와 신잠의 사당을 통합했고, 조정에 상주하여 '무성(武城)'이란 사액을 받아 무
성서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흥선대원군의 서슬 퍼런 서원 정리 사업 때도 살아남았으며, 면
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이 1906년 6월 토왜(討倭)를 외치며 의병을 조직했던 병오창의(丙午倡
義)의 현장이기도 하다.

서원을 이루고 있는 건물은 사당(태산사)과 현가루, 명륜당(강당), 동재(강수재), 비각 등이
있으며, 1486년 이후 제작된 봉심안, 강안, 심원록, 원규(院規) 등의 귀중한 서원 자료가 보
존되어 있다.

* 무성서원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원촌1길 44-12)


▲  뾰족한 붉은 살을 지닌 무성서원 홍살문
차디찬 인상의 홍살문을 지나면 서원 관리사무소와 주차장이 나오고 바로
서원 정문인 현가루가 마중을 한다.


▲  맞배지붕 비각과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 오른쪽 비석)

무성서원하면 대표적인 사건이 '병오창의'가 아닐까 싶다.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년)에 분
개한 최익현은 1906년(병오년) 2월 제자인 임병찬(林秉瓚)과 정읍으로 넘어와 창의를 준비했
다. 하여 그해 6월 4일 이곳 무성서원에서 유생들에게 강회(講會)를 펼치며 토왜(討倭)에 동
참할 것을 호소하여 의병을 조직하니 이것이 그 유명한 병오창의이다.
그 소식을 들은 왜군은 조선인 진위대를 파견해 시비를 걸자 최익현은 동족간의 싸움은 절대
로 안됀다며 의병을 해산했고 핵심 인물 13명이 너무 쉽게 오라를 받으면서 그의 창의는 허무
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최익현의 병오창의를 기리고자 정읍 지역 유림들이 1992년 12월 10일 병오창의기적비를
세웠다.


▲  강수재(講修齋)

병오창의기적비를 바라보고 있는 강수재는 무성서원의 동재(東齋)로 유생들의 기숙 공간이다.
원래 고사(庫舍)였던 것을 무성서원 간판을 내건 이후, 강수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서재(西
齋)인 흥학재(興學齋)도 있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없다.
현 건물은 1887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쳤으며 온돌방과 마루를 갖추고 있다.


▲  서원의 정문인 현가루(絃歌樓)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2층 누각으로 정문 역할 외에도 시를 짓고
음악 등의 여흥을 즐기는 공간으로도 쓰였다. (누각의 이름인 '현가'는
거문고 등의 악기와 노래를 뜻함)

◀  무성서원의 역사를 더욱 살찌우고
있는 현가루 앞 비석들

          ◀  신용희(申瑢熙) 불망비
통정대부(通政大夫) 신용희의 공적을 기리고자
1925년에 세웠다. (서원 중수에 공적이 있음)
무성서원에는 맞배지붕 비각 4개, 비석 15기가
전하고 있어 서원의 내력을 풍성하게 돕고 있
는데, 이들 대부분은 서원 중수를 돕거나 서원
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 태인현감 등의 관리와
양반사대부의 공덕비이다. (불망비도 공덕비의
일원임)


▲  무성서원 강당<명륜당(明倫堂)>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으로 공부를 하거나 시국을 논의하던 학업
공간이다. 1825년 화재를 만나 1828년에 중건했으며, 마루가 3칸, 방이 2칸 규모로 더울 때는
마루에서 교육을 했고, 추울 때는 마루 좌우에 있는 온돌방에서 교육을 했다.


▲  비각에 갇혀있는 서호순(徐灝淳) 불망비
강당(명륜당) 재건을 도운 태인현감 서호순의 공을 기리고자 1849년에
세운 것으로 비석의 높이는 1.23m, 폭 0.36m이다.

▲  서원 뒷쪽에 높이 자라나 1급 그늘을 선사하는 늙은 나무들
(오른쪽에 보이는 지붕은 태산사)

▲  태산사로 인도하는 내삼문(內三門)
태극마크가 그려진 가운데 문은 제향일에만 열린다. (제왕 등의 아주 높은
사람이나 사당 주인공의 혼령만 이용할 수 있는 특별한 문)

▲  무성서원의 모태이자 상징, 태산사(泰山祠)

무성서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태산사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맞배지
붕 집으로 최치원과 신잠을 비롯한 7명이 봉안되어 있는데, 기존 태산사가 고려 말에 파괴되
자 1483년 현 자리에 중건했다. 현 건물은 1844년에 지어진 것으로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문에는 태극마크가 문짝 하나당 2개씩 앙증맞게 그려져 있는데, 제향일을 제외하면 늘 굳게
닫혀있어 내부 관람은 어렵다. 제향은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과 8월 중정일 등 1년에 2번
열렸으나 지금은 2월 중정일에만 지낸다.


▲  서쪽에서 바라본 태산사



 

♠  성황산(城隍山)에서 만난 소소한 명소들

▲  필양사(泌陽祠)

무성서원은 오랜 명성에 비해 조촐한 규모라 관람이 생각 외로 일찍 마무리가 되었다. 피향정
에 비해 대단한 시간 도둑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시간은 약 13시, 무성서원 이후의 정처(定處)를 딱히 정해두지 않아서 어디를 갈까 궁리
하며 원촌마을을 거닐고 있으니 맞배지붕 사당이 잠깐 보고 가라며 애타게 손짓을 보낸다. 고
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무슨 물건인가 살펴보니 춘우정 김영상(春雨亭 金
永相, 1836~1911)의 사당인 필양사이다.

김영상은 도강김씨 집안으로 정읍시 정우면 산북리에서 태어났다. 16살에 선조들이 살던 이곳
원촌으로 이사를 했으며, 유학을 익히고 지역의 여러 인사들과 교류를 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 터지자 의병활동에 참여했고 최익현의 병오창의에도 가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1910년 이후 왜정은 이 땅의 선비와 사대부(士大夫)를 회유하고자 돈과 작위(爵位)를 마구 뿌
렸는데, 그에게도 돈의 유혹이 뿌려졌다. 허나 그는 이를 거절하며 왜정이 내민 사령서(辭令
書)에 적힌 자신의 이름 3자까지 찢어버렸다. 이에 뚜껑이 뒤집힌 속 좁은 왜군은 불경죄(不
敬罪)를 물어 군산감옥으로 잡아갔다.
군산으로 이송 도중, 만경강(萬頃江) 사챙이 나루터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을 시도했으나
눈치 없는 왜군이 이를 구출해 실패했으며, 군산감옥에 투옥되자 단식에 들어가 겨우 8일만인
1911년 5월 9일 10시경, 7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은 그에게 독립유공 대통령 포상을 올려 그의 충절을 기렸으며, 1991년 8
월 15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가로 추서되었다.
필양사는 지역 유림들이 1945년에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국가
보훈부 현충시설(관리번호 51-1-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3년 5월에 수해로 지붕이 무너
지자 복구했다. 그리고 2010년 김영상 순절 100주년을 맞이해 필양사 앞에 '애국지사 춘우정
김영상 선생 순국추모비'를 세웠으며, 사당 뒷쪽에는 대나무가 무성하여 경건한 분위기를 자
아낸다.

필양사를 보고 다시 길을 재촉하니 원촌마을의 뒷동산인 성황산(城隍山)으로 인도하는 숲길이
유혹의 손길을 보낸다. 마을과 맞닿은 산 동쪽 자락에는 원촌마을 선비와 양반들이 조선 후기
와 20세기에 뿌려놓은 정자와 제각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시간도 아직 널널하고 딱히 정처도
정하지 못해 그 유혹에 푹 빠져보기로 했다.
기왕 산에 두 발을 들였으니 비록 높이는 낮지만 그 정상에 올라 천하를 한번 굽어봐야 되겠
지. 하여 정상으로 발을 움직였으나 대자연의 괴롭힘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나무들이
계속해서 길을 막는다. 몇 번을 넘었으나 이제는 더 큰 나무가 드러누워 길을 가로막는다. 얼
핏 보면 큰 태풍이 얼마 전에 다녀간 듯 보이나 이때는 태풍과 관련이 없는 3월이다. 아무래
도 작년 여름부터 쓰러진 나무들을 정읍시청 철밥통들이 제대로 치우지 않고 방치한 듯 싶다.
쓰러진 나무로 길이 엉망진창이라 계속 오르는 것은 무리가 있고 올라갈 기분도 급 저하되어
정상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산자락에 깃든 여러 정자와 기와집을 둘러보았다.


▲  한정(閒亭) - 정읍시 향토유적 1호

이름이 달랑 1자인 한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조선 중종(中宗) 시절 한
정 김약회(閒亭 金若晦)가 사화(士禍)로 시끄러운 조정이 싫어서 고향으로 내려와 지은 것으
로 자신의 호를 따서 '한정'이라 했다. 여기서 한(閒)은 한가함과 고요함을 뜻하는데, 그 이
름 그대로 주변이 고요 속에 잠겨있어 내 발자국 소리, 사진 소리가 미안할 정도이다.

김약회가 세상을 떠난 이후 전라도 유림들이 모여 학문을 나누던 현장으로 쓰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파괴되어 사라졌으며, 320여 년이 지난 1920년에 후손 김환정이 재건했다. 그러
니까 현재 한정은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것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1칸씩 딸려있으며, 전면과 좌우로 툇마루를 갖춘 전형적인 누정
(樓亭) 건축물이다. 


▲  시산사로 인도하는 계단길

▲  시산사(侍山祠)

이곳은 무성서원에서 병오창의를 일으킨 최익현의 사당으로 1907년에 세워졌다. 첫 이름은 태
산사(台山祠)로 왜정의 태클로 철거되었으며, 1975년에 다시 세워 시산사라 하였다. 이때 국
헌 김기술(菊軒 金箕述, 1849~1929)과 화개헌 김직술(和介軒 金直述)이 추가로 배향되었는데,
김직술은 최익현과 함께 병오창의를 일으킨 인물이다.


▲  송정(松亭)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33호

소나무 정자를 뜻하는 송정은 앞서 '한정'처럼 이름이 달랑 1글자이다. 1글자의 이름을 지닌
정자나 누각이 이 땅에 흔치가 않은데, 이곳 성황산에는 무려 2개 이상이나 있다. 아마도 이
곳에는 단순하면서도 무언가 강렬한 의미의 1글자를 선호했던 양반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곳은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 사건을 비롯하여 광해군의 정치에 쓸데없이 불만을 품은 지
역 선비들이 낙향하여 시를 읊으며 팔자 좋게 놀던 곳이다. 세상에서는 그들을 7광(狂)과 10
현(賢)이라 불렀는데, 7광은 김대림(金大林), 김응빈(金應賓), 김감(金勘), 송치중(宋致中),
송민고(宋民古), 이상형(李尙馨), 이탁(李鐸)이며, 10현은 김응빈,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
탁을 포함해 김관(金灌), 김정(金鼎), 김급(金汲), 김우직(金友直), 양몽우(梁夢禹)이다.

정자는 한복판에 온돌방이 있고, 마루가 방을 둘러싼 구조로 부근 숲속에 10현이 봉안된 영모
당(永慕堂)이 있다. 영모당은 1898년에 지어진 것으로 송정영당(影堂)이라 불리기도 한다.

* 송정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310 (원촌1길 12-3)

▲  파란 현판에 도도하게 쓰인
송정 두 글자의 위엄

▲  산 밑에 있는 후송정(後松亭)


후송정은 송정 밑 바위에 자리해 있다. 화개헌 김직술이 쓰러지기 직전인 송정을 대신하고자
10현의 후손 42명의 지원을 받아 1899년에 세운 것으로 처음에는 송정의 10현을 추모하는 뜻
에서 십송정(十松亭)이라 했으나 1985년 현재의 정자를 지으면서 후송정으로 이름을 갈았다.

정자의 이름인 후송은 논어에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짐을 안다)'의 의미로 절개가 높은 선비의 고결한 뜻을 뜻한
다. 예전에는 정자 밑으로 개울이 흘렀으나 지금은 길이 들어서 예전과 풍경이 다소 달라졌다.


▲  산외면과 칠보면, 태인면의 산하를 두루 적시며 서해로
흘러가는 동진강


후송정을 끝으로 무성서원 후식용으로 둘러본 성황산 더듬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들 외에도
안가본 제각과 정자가 여럿 있으나 썩 내키지가 않아 적당히 둘러보고 나왔다. 그래도 한정,
시산사, 필양사, 송정, 후송정, 영모당(사진은 없음)을 둘러봤으나 거의 70% 이상 본 것이나
다름이 없다.

원촌마을을 뒤로 하며 서해를 향해 흘러가는 동진강을 건너 칠보면 중심지(시산리)로 나왔다.
여기서 정읍시내버스 91번을 타고 신태인읍으로 나와서 신태인역으로 이동하니 11시 이후부터
잔뜩 인상을 쓰던 하늘이 기어코 빗방울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오후 늦게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우산을 준비해 갔으나 비가 생각 외로 꽤 길게 내렸다. (저녁 늦게까지) 시간도 이제
15시 정도인데 벌써 날씨가 이러하니 어디로 가야되나 그야말로 갈팡질팡에 빠져버렸다.

신태인역에 이르니 마침 서울 용산행 무궁화호 열차가 막 기적소리를 울리며 들어온다. 콩을
볶듯 급히 표를 사들고 열차에 올랐는데, 좌석이 모두 매진되어 오랜만에 입석으로 갔다. 그
를 타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을 하면서 비가 그치길 염원했으나 비는 나를 졸래졸래 따라와 가
는 곳마다 비를 뿌린다.

이후 내용은 생략~~ 본글은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


▲  내장산(內藏山)에서 발원하여 칠보에서 동진강과
합쳐지는 칠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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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뒷산을 거닐다 ~~~ 배산 (배산성터, 진달래밭)



' 부산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뒷동산, 배산 '

부산 배산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이자 우리나라 2번째 대도시로 콧대로 높은 부산(釜山) 도심 한복
판에 배산(盃山, 254m)이란 조그만 산이 솟아있다.
이 산은 연제구 연산동과 수영구 망미동(望美洞) 사이에 자리해 있는데 남쪽으로 금련산
(金蓮山)과 바짝 이어져 있다. 허나 그 사이로 연산로와 주택가가 비집고 들어오면서 그
들의 각별한 사이를 끊어버려 졸지에 시가지에 포위된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하긴 배산
뿐이겠는가?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는 개발의 칼질로 강제로 섬이 되어버린 가련한 작
은 산들이 적지 않다.

산의 모양이 마치 술잔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이라 하여 배산이라 불리며, 254m의 높이로
대도시 도심 속에 박힌 뫼치고는 제법 높아 보인다. 허나 부산은 백양산(白羊山)과 승학
산, 시약산, 황령산 등 400~600m급 산들이 도심 속에 무수히 포진해 있어 254m 정도로는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서울에 서식하고 있는 내가 부산 사람들도 잘 모르는 배산을 주목한 것은 이미 오래전에
일이다. 배산 서북쪽 자락에 연산동고분군(連山洞古墳群)을 2006년에 간 적이 있기 때문
이다. 그 후로 오랫동안 새까맣게 잊고 살다가 다시금 배산 생각이 간절해졌다. 하여 인
연을 엿보다가 봄이 한참 기지개를 켜던 4월, 광안동에 사는 선배와 해운대(海雲臺), 송
정(松亭) 20리 해안산책(☞ 관련글 보러가기)을 즐기고 남은 시간을 이용해 배산을 찾았
다.

송정에서 부산시내버스 141번(송정↔당감동)을 타고 배산역(3호선)에서 하차하여 무작정
배산이 보이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워낙 인지도가 낮은 동네 뒷산이라 이정표가 거의 없
어 여러 골목을 들쑤신 끝에 드디어 연산병원 부근에서 산길을 찾아 배산의 품으로 들어
섰다.

배산에는 무척이나 오래된 배산성(盃山城, 부산 지방기념물 4호)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성은 삼국시대 초반에 동래(東萊) 지역에 둥지를 튼 거칠산국(居漆山國) 때 축성된 것으
로 여겨져 그 나라의 조촐한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거칠산국은 1세기 후반까지 숨을 쉬다가 신라 탈해왕(脫解王) 때 신라에게 병합되었으며
얼마 뒤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이 접수하여 가야(伽倻)의 일부가 되었다. 그 이후 가
락국 제왕(帝王)이 보낸 관리나 지역 세력이 배산에 머물며 이곳을 다스리다가 법흥왕(
法興王) 시절 다시 신라 땅이 되었다.
배산 서북쪽 자락에는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고분인 연산동고분군(부산 지방기념물 2호)
이 있는데 이들은 배산성을 토대로 이 지역을 다스렸던 지배층의 무덤으로 짐작된다.

배산성은 산 정상을 둘러싸고 만든 테뫼식으로 산 허리 부분과 정상에 축성되었으며, 쌍
가락지 모양의
2중성으로 흙으로 다져진 토성(土城)이었다. 허나 신라 중기 이후 버려지
면서 억겁의 세월과 대자연의 집요한 괴롭힘으로 웅장했을 토성은 쏴르르 녹아내리고 토
성 기초 부분만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산 일대에서 가야~신
라시대 그릇 조각과 기와조각이 많이 발견되어 옛날 이곳의 상황을
희미하게 전해준다.

배산에는 이렇게 배산성터와 연산동고분군 외에 거칠산국 사람들이 썼다고 전하는 우물
터가 있다. 이 우물터는 근래에 정비되었으나 우리는 아쉽게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해 가
지 못했다.
그 외에 겸호대
(謙戶臺)란 명소가 있었는데 김겸호란 선인(仙人)이 노닐었다 하여 붙여
진 이름이라 전하며, 고려 말에 정추(鄭樞, 1333~1382)가 동래현령(東萊縣令)을 지냈을
때 그곳에서 지은 시가 있는데, 그 위치가 막연히 배산 위라고만 할 뿐,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하지만 그가 지었다는 겸호대 시는 우리 곁에 잘 살아
남아있으니 내용은 이렇다.

謙孝濯濯似蓮花
胸呑八荒氣凌霞
回首肯羨萬戶邑
翩翩來徒神仙家

겸효의 밝은 빛은 연화를 닮고
가슴으로 품은 기품 속세를 떠났구나
고개를 돌리니 만호읍이 바로 거긴데
휘적휘적 신선가를 오간다

지금은 주거지가 되버린 배산 동북쪽 밑 부산광역시립 연산도서관 자리에는 거울바위가
있었다. 바위의 이름 그대로 아마도 거울처럼 생긴 모양이다. 옛날에 어느 문둥병 환자
가 거울바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경악하여 그 바위를 내리쳤다고 하며, 어느 여인을
사모하던 남자가 그 바위에 비친 자신의 못생긴 얼굴에 발작하여 돌로 쳐서 깨뜨렸다고
한다. 그래서 바위는 흔적도 없이 한 토막 전설이 되어버렸다.


 

♠  배산 둘러보기

▲  배산으로 올라가는 길 (배산 정상 아래쪽)

배산의 경사는 정상 주변은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가파르지만 그 외에는 완만하다. 지금은 시민
들이 자유롭게 들락거리며 산책을 즐기는 평등한 공간이 되었지만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 수염
태워먹던 시절에는 거칠산국의 지배층이 머물던 중심지였고, 신라나 가야의 일원으로 있던 시
절에는 지방 세력이나 관리, 군인들이 철통같이 머물던 차별된 공간이었다.
허나 배산의 존재의 이유가 하락함에 따라 평범한 뒷동산으로 버려지게 되었고 그렇게 세월의
저편으로 묻혀지게 되었다. 게다가 부근의 황령산, 금정산, 장산 등 쟁쟁한 산에 가려져 지역
사람들이 주로 찾는 동네 명소로 부산 내에서도 인지도가 미약하다.
그나마 2006년, 3호선 배
산역의 등장으로 배산의 존재감이 조금씩 부각되었을 뿐이다.

산은 작지만 시가지 한가운데에 봉긋 솟아있어 이곳에 오르면 수영구와 연제구, 동래구, 해운
대구, 부산진구 일대가 시야에 거침없이 박혀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누린다. 그야말로 조망(
眺望) 하나는 일품이다.


▲  배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천하 (1)
수영구(水營區) 지역과 광안리, 해운대 앞바다

▲  배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천하 (2)
배산 남쪽 봉우리와 금련산 사이에 비집고 들어선 연산3,6동과 망미1동 지역

▲  배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천하 (3) 연산2,4,6동과 부산진구 지역

▲  배산 동쪽 바위 봉우리
저 바위 봉우리 밑에 오래된 우물터가 있다.

▲  배산의 정상(254.9m)
이곳은 배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현장이다. 거칠산국과 신라, 가야 시절에는
지역 지배층들이 제사나 주요 의식을 지냈던 곳으로 여겨지는데, 봉우리
주변으로 배산성터 흔적이 얇게 남아있으나 확인하기는 어렵다.
연산병원에서 여기까지는 넉넉잡아 30분 정도 걸렸다.

▲  정상 부근에 솟아난 돌탑
산악신앙(山岳信仰)의 애듯한 현장으로 중생들이 소망을 담아 쌓은
다양한 돌들이 차곡차곡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  배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1) 연제구와 동래구 일대
자라의 목처럼 삐죽 나온 북쪽 산자락 끝에 연산동고분군이 안겨져 있다.
저곳까지 배산의 영역이며, 연제구와 동래구 시가지 너머로 부산의
영원한 진산(鎭山), 금정산(金井山)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배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2) 동래구와 해운대구 서부

▲  배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3) 연산동 동부와 해운대구 서부
반여동과 재송동 너머로 부산 동부의 으뜸 산, 장산(萇山, 634m)이 바라보인다.


▲  순백의 미학(美學)을 지닌 벚꽃으로 하얗게 타오르고 있는 배산 봉우리
(봉우리 꼭대기가 배산 정상)

▲  진달래로 가득한 연산4동으로 내려가는 길

배산 서쪽 자락에는 분홍 피부를 지닌 진달래꽃이 가득 피어있다. 이곳은 부산 진달래꽃의 성
지(聖地)로 아무렇게나 생긴 바위들도 많이 포진해 있어 고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도심 한
복판에서 이런 풍경을 만나기도 힘든 터라 갑자기 먼 지방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매년 4월만 되면 배산 일대에 진달래가 연분홍 향연을 펼쳐보이지만 아직까지 그들을 주인공으
로 하는 지역 축제나 행사는 없는 모양이다. 연제구청에서 한번 추진해보면 좋을 듯 싶은데 말
이다.


▲  배산 서쪽 자락 소나무숲과 하얀 바위들

우리는 배산 정상에서 서쪽 능선을 거쳐 연산동고분군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허나 통제되는 길
이 여럿 있었고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엉뚱하게도 연산4동 혜원정사 쪽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혜원정사는 배산 서쪽 골짜기에 자리한 절로 법등(法燈)의 역사는 짧다. 그 주변으로 천지암과
감천사 등의 조그만 절들이 들어서 있는데, 분위기가 산골에 들어온 듯 꽤 시골스럽다.
혜원정사를 지나면 연산4동 주택가가 펼쳐지며, 10분을 내려가니 연일시장이 나온다. 연산동고
분군은 이미 옛날에 인연을 지은 터라 딱히 미련은 없어 바로 광안동으로 복귀하여 그날의 나
들이를 마무리 하였다.

배산이 더 이상 개발의 칼질에 다치지 않고 지금 모습 그대로 부산 사람들 곁에 있어주길 고대
하며 보잘것 없는 본글을 마친다. ~~


※ 배산 찾아가기 (2016년 9월 기준)
* 배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럿 있으나 여기서는 연산4동 혜원정사와 연산6동 연산병원 코스만
  소개한다.
* 지하철 3호선 배산역 6번 출구를 나와서 1분 정도 가면 부산은행 연미지점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 골목길(연수로213길)로 들어서 3~4분 쭉 들어가면 남양아파트로 아파트 입구에서 왼
  쪽으로 빠지면 바로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길(배산북로)로 3분 오르면 연산병원
  입구로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연미주택 뒷쪽으로 산길이 있다.
* 지하철 1,3호선 연산동역 8번 출구를 나와서 9분 정도 가면 연산터널 바로 직전에 혜원정사
  와 연산동고분군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그 지시에 따라 오른쪽 골목길(고분로68번길)로
  들어서면 고분군으로 오르는 산길과 혜원정사로 이어진다. (연산동고분군은 연산터널 윗쪽
  에 있음)
* 배산성 소재지 -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산 38-6번지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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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9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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