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암'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3.03.05 서울의 상큼한 남쪽 지붕, 삼성산~호암산~목골산 <관악산호수공원, 성주암, 서울둘레길5코스, 독산자락길>
  2. 2016.11.05 늦가을 경주 나들이 ~~~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벽도산,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서울의 상큼한 남쪽 지붕, 삼성산~호암산~목골산 <관악산호수공원, 성주암, 서울둘레길5코스, 독산자락길>

삼성산, 호암산, 목골산 초여름 나들이



' 삼성산, 호암산, 목골산 초여름 나들이 '

호암산
▲  호암산

삼성산 성주암 호암산 북쪽 능선길

▲  삼성산 성주암

▲  호암산 북쪽 능선길

 



 

여름 제국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던 6월의 끝 무렵, 내 즐겨찾기 뫼의 하나인 호암산(虎
巖山, 393m)을 찾았다.
툭하면 찾아오는 호암산 앓이도 잠시 해소하고 호암산과 삼성산(三聖山)에 아직까지 살
아남아 내 속을 긁는 몇 남지 않은 미답처들도 싹 정리하고자 찾은 것으로 햇님의 고개
가 서서히 꺾이던 15시에 서울대 정류장에서 길을 시작했다.
(산행시간 약 3시간, 산행거리 약 9~10km)



 

♠  관악산호수공원과 삼성산 성주암(聖主庵)

▲  삼성산과 관악산으로 인도하는 신림로 숲길

삼성산과 관악산(冠岳山, 632m)의 주요 북쪽 기점인 서울대 정류장에서 짙은 숲에 감싸인 도
로를 따라 15분 정도 가면 관악산호수공원이 잘빠진 호수와 자하정, 귀여운 석구상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오로지 성주암 등의 미답처(未踏處)에 정신이 팔려 그냥 넘어가려고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
게를 그냥 못 지나친다고 못이긴 척 잠시 발을 들였는데, 이곳은 서울대에서 관악산, 삼성산
으로 오를 때 꼭 거쳐가는 곳으로 바쁘면 돌아가라는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잠깐 들린다고
큰일 날 것은 없다.


▲  관악산 호수공원의 귀염둥이, 석구상(石狗像)
관악산 호수공원을 조성하면서 장만한 것으로 호암산 한우물 부근에 있는
석구상을 축소, 재현했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실물보다는 이곳
석구상이 훨씬 귀엽게 다가온다.

▲  관악산 호수공원의 이름값을 하는 호수

지금은 상큼한 호수공원으로 있지만 예전에는 계곡물을 이용한 수영장이 있었다. 그 수영장은
문을 닫았으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흉물스럽게 있던 것을 1996년 12월부터 거의 1년에 걸쳐 손
질을 하여 1997년 12월 자연과 어우러진 호수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공원에는 그 이름값을 하는 호수와 자하정, 석구상(1997년 11월 제작됨), 나무다리 2개, 분수
대, 쉼터 등이 있으며, 소나무 외 18종 9,180주, 초화류 수련 등 3,190본을 심어 아름답게 다
듬었다. 이렇게 싱그러운 공간이건만 바람직하지 않게도 옥의 티가 하나 있어 심히 불편함을
준다. 바로 왜정(倭政)과 독재 세력에 철저히 빌붙어 영혼을 팔고 부귀영달을 누렸던 서정주(
1915~2000)의 시비(詩碑)가 있다는 것이다.

서정주는 관악구 남현동(南峴洞)에서 30년이나 서식하여 관악구와도 인연이 깊다. 게다가 20
세기 주요 시인으로 쓸데없이 꼽히다보니 관악구청이 그의 그릇된 점을 살피지도 않고 문학적
업적만 내세우며 이렇게 개념도 없이 시비를 세운 것이다. 또한 서울시는 그보다 한술 더 떠
그의 남현동 2층 양옥을 인수해 내부 손질을 거쳐 그의 유품과 문학작품을 취급하는 기념관으
로 세상에 내놓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오히려 때려 부시고 연못을 파야 될 판에<예로부터 역적(逆賊)의 집은 말끔히 부시고 그 자리
에 연못을 팠음> 관악구와 서울시가 앞장을 서서 그의 흔적을 붙잡아 찬양하고 있으니 행정관
청 철밥통들의 역사의식과 개념들이 이렇게도 없다. <관악구는 낙성대(落星垈)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도난을 당하자 이것도 쉬쉬하여 크게 욕을 먹은 화려한 전력이 있음>


▲  오늘도 평화로운 호수

호수는 거의 생태연못 수준으로 수초(水草)가 많고 오리와 물고기들이 유유자적 거닐고 있어
평화롭고 고요한 풍경, 그 자체이다. 세상이 시끄럽든 말든 여기서는 그저 다른 세상의 이야
기 같다. 섬 복판에는 동그란 섬까지 띄워놓아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숲 너머로 서울대 농업
생명과학대학 건물이 고개를 내밀며 이곳의 경치를 시샘한다.

    ◀  연못에 두둥실 띄워진 동그란 섬
섬에는 소나무 1그루가 바깥 세상을 거부하며
고고하게 솟아있다. 인간의 손길이 거의 미치
지 않는 곳이라 마음껏 나래를 펼치며 그 섬의
주인 노릇을 한다.

◀  호수공원의 화려한 입술, 자하정(紫霞亭)
1997년에 지어진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로 살
짝 들려진 처마의 선이 꽤 경쾌하고 아름답다.


▲  북서쪽에서 바라본 자하정과 호수, 그리고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  호수를 순찰하는 압공(鴨公, 오리)의 위엄
오늘도 저들이 있기에 호수는 평안하다.

▲  성주암을 알리는 표석
관악산 호수공원을 둘러보고 성주암으로 이동했다. 공원에서 성주암까지 10분
거리로 관악산119산악구조대를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성주암이 활짝 모습을 비춘다.

▲  성주암 대웅전(大雄殿)

삼성산 북쪽 끝자락이자 돌산 동쪽에 성주암(聖住庵)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원
효대사(元曉大師)가 677년에 창건했다고 하는데, 그가 절을 짓고 머물렀다고 해서 성주암이라
했다고 전한다. 즉 원효대사를 성스러운 존재로 높인 것이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
은 아쉽게도 없는 실정이다.

14세기에 각진국사(覺眞國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는데 태정원년<泰定 元年, 원나라(몽골) 태
정제의 연호, 1324년>이라 쓰인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때 창건되거나 중창된 것으로 여겨진
다. 그것이 성주암에서 나온 것 중 가장 늙은 유물이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삼막사(三幕寺), 안흥사<安興
寺, 염불사>, 망일사<望日寺, 망월암>와 더불어 관악산의 4개 사찰로 나오며 성주사(聖住寺)
로 기록되어 있다. (삼성산을 관악산의 일원으로 보기도 함) 또한 조선 후기에 제작된 '시흥
읍지(始興邑誌)'에는 삼막사, 호압사(虎壓寺), 염불사(念佛寺)와 함께 4개 절의 하나로 나와
있어 삼성산 일대에서 제법 인지도가 있던 절임을 알려준다.
1883년 금화형기가 만든 현왕탱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으며 오래된 석탑도 1기 있었으나 왜정
(倭政) 때 왜인이 빼돌렸다.

1897년 만월(滿月)이 폐허가 된 절터에 작은 암자를 지어 법등(法燈)을 다시 켰고 1966년 혜
담(慧潭)이 중창을 했다. 1971년 화강석을 이용해 대방(大房)을 지었고 1981년 종연(宗演)이
3년에 걸쳐 대웅전을 지었으나 1997년 10월 화재로 대웅전 등 목조 건물이 모두 날라가고 말
았다. 이때 서울과 경기도의 40여 사찰이 불의의 방화를 당했다.
이후 주지 재홍(才弘)의 지도 아래 승려와 신도들이 임시 천막을 치고 3년에 걸쳐 불사(佛事)
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으며, 2006년 12월 관악구 전통사찰로 지정을 받았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대방 등 4~5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늙은 유물은 커녕 고색도 다
말라버려 오랜 역사를 무색하게 한다. 절은 북/서/남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오로지 동쪽만 확
트여있어 관악산이 훤히 바라보이며 마치 알둥지처럼 자리 또한 포근하다. 게다가 절이 암자
에 걸맞게 아담하여 두 눈에 쏙 넣고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으며 대방 뒤쪽으로 돌산과 호암
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다.

* 성주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198 (신림로 15-250, ☎ 02-877-7180)

▲  성주암 대방(大房)
종무소와 선방, 요사(寮舍), 공양간의 역할을
하는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그 뒤쪽에
호암산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있다.

▲  11면 관세음보살상
큰 얼굴 하나에 작은 얼굴 10개 등, 11개의
얼굴을 지닌 관세음보살이 정병(政柄)을
쥐어들며 관악산을 지그시 바라본다.


▲  대웅전 석가3존상과 화려한 닫집
마침 유가족들이 49재 중이라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깥에서 살짝 담았다.

▲  성주암에서 바라본 관악산의 위엄
성주암은 관악산 조망에 아주 최적화된 곳이다. 바로 정면에 관악산이
마치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으니 말이다.

▲  대웅전 뒤쪽 바위에 주렁주렁 달린 칠성탱과 산신탱, 약사여래상

성주암은 다른 절과 달리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머금은 그 흔한
삼성각(三聖閣)이나 산신각 등의 건물이 없고, 대신 대웅전 뒤쪽의 그늘진 암벽을 활용해 칠
성탱과 산신탱을 두어 노천 삼성각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바위 피부를 무작정 깎아서 만든 것은 아니며 별도의 돌판에 그들을 새겨 벼랑 앞에
두었다. 그리고 산신탱 위쪽 벼랑에는 석조(石造) 약사여래좌상을 두었는데 그가 경내에서 가
장 높은 곳을 장식하고 있다.

▲  하얀 피부의 석조 칠성탱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피부가 매끈하다.

▲  산신 가족이 담긴 석조 산신탱(밑)과
석조 약사여래좌상(위쪽)


▲  5층석탑과 마니차

성주암은 바로 눈에 보이는 대웅전 주변이 전부가 아니다. 대웅전 뒤쪽 벼랑에 칠성탱과 산신
탱 등이 있으며, 대방 뒤쪽으로 가면 8각으로 다듬은 참한 모습의 석탑과 그를 반원(半圓) 모
양으로 둘러싼 마니차가 있기 때문이다.

5층석탑은 성주암의 유일한 탑으로 8각의 바닥돌과 연꽃무늬와 팔부중상(八部衆像) 등이 새겨
진 기단석(基壇石) 위에 8각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그 위를 보륜(寶輪) 등의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탑 뒤에는 '마니차'란 동그란 돌덩어리가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그는 티벳불교에서 전래된 것
으로 윤장대(輪藏臺)와 비슷한 것인데, 손으로 저것을 돌리며 염불을 하거나 소망을 빌면 경
전을 모두 이해한 것과 같다고 하며 소망도 같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옛날에는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이 많다보니 저런 것을 이용해 영업을 한 것이다.


▲  티벳 글자가 새겨진 마니차

마니차 밑에 있는 검은 피부의 돌판에는 1997년 이후 절 중창에 도움을 준 이들의 이름이 빼
곡히 적혀있다. 저들이 있기에 성주암이 다시 일어선 것이다. 그러니 너무 외형 확장과 재물
에 욕심내지 말고 오직 사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여 속세(俗世)를 위해 사는 아름다운 절이
되기를 바라면서 성주암과의 첫 인연을 정리한다.



 

♠  호암산과 서울둘레길5코스 거닐기

▲  성주암에서 호암산으로 인도하는 산길

5층석탑을 지나면 돌산, 호암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손짓을 한다. 그 길을 오르면 돌산 북쪽
으로 천하 둘레길의 대표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서울둘레길5코스(사당역↔석수역,
13.5km)와 관악산둘레길 2구간(서울대 정류장↔국제산장아파트, 4.7km)과 만난다.
둘레길 대신 하늘과 가까운 곳을 원한다면 호암산과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서남쪽 산길을 이용
하면 되며 관악산둘레길 2구간이 장군봉 북쪽까지 동행을 한다. (둘레길의 위치상 삼성산둘레
길이 맞지만 관악산둘레길을 칭하고 있음)

나는 산봉우리 대신 성주암과 호암산 북쪽 능선 등의 미답처 개척을 위해 왔으므로 호압사로
빠르게 이어지는 서울둘레길5코스를 택해 길을 재촉했다.


▲  솔내음이 오각을 간지럽히는 돌산 북쪽 산길

▲  서울둘레길5코스 약수사 윗쪽 구간

돌산 북쪽에서 호압사까지 서울둘레길5코스 구간은 느긋한 길의 연속이다. 오르락과 내리락이
반복되지만 호압사 직전 구간을 빼면 그 기복은 별로 없으며 관악산 산림쉼터, 약수사(藥水寺
), 삼성산성지 등의 조촐한 명소들이 연이어 포진해있어 가는 길이 심심치 않다.


▲  관악산 산림쉼터 (약수사 윗쪽~삼성산성지 구간)

잣나무와 메타세콰이아, 단풍나무를 빽빽히 심고 그 짙은 그늘에 쉼터를 닦았다. 숲 그늘에는
의자와 평상 등을 넉넉히 깔아 잠시 쉬어가거나 낮잠, 독서, 간식 섭취에 아주 좋으며 숲속도
서함도 비치하여 독서의 여유도 누리게끔 했다.


▲  관악산 산림쉼터 앞을 지나는 서울둘레길5코스

▲  삼성산성지 동쪽을 지나는 서울둘레길5코스 ①

▲  삼성산성지 동쪽을 지나는 서울둘레길5코스 ②
오로지 정면에 보이는 먹이를 향해 질주하는 맹수처럼 삼성산성지는 쿨하게
통과했다. 어차피 적지 않게 인연을 지은 곳이다.

▲  수풀을 앙증맞게 다져놓은 서울둘레길5코스 (삼성산성지~호압사 구간)

▲  호암산 밑에 이르다 (사진에 보이는 산이 호암산 정상)

삼성산성지에서 10여 분 정도 오르면 호압사 분기점에 이른다. 이곳에는 넓게 쉼터가 닦여져
있는데, 남쪽으로 각박하게 이어진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호암산 정상에 이르며 호압사는
쉼터 서쪽에 펼쳐져 있다.
호암산에 가면 보통 호압사를 끼고 가는지라 이곳 분기점은 아주 낯이 익다. 여기서 보통 호
압사와 서울둘레길5코스 석수역 방향인 서쪽, 삼성산성지와 서울둘레길5코스 서울대 방향인
동쪽, 정상과 한우물 방향인 남쪽으로만 주로 갔지 북쪽 길은 단 1번도 가지를 않았다. 아무
래도 동/서/남쪽으로 호압사와 한우물, 석구상, 호암산 잣나무산림욕장, 서울둘레길5코스 등
호암산의 알짜배기 명소들과 잘생긴 바위들, 일품 조망들이 펼쳐져 있고, 삼성산과도 이어지
므로 버릇처럼 자꾸 가던 쪽으로만 간 것이다. 반면 북쪽은 딱히 흥미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북쪽을 개척하고자 찾은 것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독산자락길)과 목달산

▲  호압사분기점 북쪽 헬기장

호암산 북쪽 능선은 시흥동과 독산동(禿山洞), 난곡 사이로 펼쳐진 긴 산줄기이다. 북쪽으로
독산자연공원까지 이어져 금천구(衿川區)의 북쪽 지붕이자 관악구(冠岳區)의 서쪽 지붕을 이
루는데, 선우공원 주변은 따로 목달산이라 불리며, 그 산줄기를 따라 '독산자락길'이 호압사
분기점에서 독산고교(독산자연공원)까지 이어진다.
 
처음에는 독산고교까지 욕심을 냈으나 산길이 생각 밖으로 너무 길었다. '아니 이렇게나 긴
산줄기였나?' 크게 놀라며 1시간이나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그곳 남쪽인 쌍용아파트에서 길을
접고 철수했다. 몸도 지쳤고 햇님의 퇴근시간도 임박했기 때문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①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②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은 북쪽을 향해 천천히 내려앉는다. 그러다보니 길도 완만하
고 숲도 삼삼해 여름 햇살도 눈치를 보며 내려앉는다. 정면만 본다면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을 거니는 기분이나 좌우로 시가지가 진하게 바라보여 그 감흥을 50% 이상 떨어트린다. 이
는 1960년대 이후 서울이 나날이 비대해짐에 따라 개발의 칼질이 호암산과 목골산의 살을 마
구 후벼 팠기 때문이다.
다행히 늦게나마 도시공원과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이 정도라도 남게 된 것이지 그것도
아니었으면 아마도 호암산 북쪽 능선의 대부분은 절단이 났을 것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③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④

▲  독산자락길(호암산 북쪽 능선길) 시흥4동과 난향동 경계 구간
이쪽에 이르면 시흥4동과 난향동(난곡) 주택가가 능선 좌우로 너무 깊게 들어와
산세 폭이 200m 내외로 확 좁혀진다. 허나 이곳을 지나면 목골산이
나오면서 다시 산세가 넓어진다.

▲  목골산 남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①

목골산(163m)은 호암산의 북쪽 끝이자 삼성산의 서북쪽 끝으머리를 잡고 있는 뫼이다. 독산동
과 시흥4동, 난곡(난향동, 난곡동, 미성동)에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 자락에는 선우공원이 넓
게 자리해 있다.
서쪽과 남쪽은 경사가 조금 있으나 북쪽과 동쪽은 완만하며 선우공원을 중심으로 미성동둘레
길이 별도로 닦여져 있다. 이 둘레길은 독산고교 뒤쪽에서 시작해 정심초교 뒤쪽 → 관악구
민방위교육장 → 목골산 북쪽 자락 → 선우공원 동부 → 영산홍동산을 거쳐 독산고교로 이어
지는 3.4km의 순환형 길이다.


▲  목골산 남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②

▲  목골산에서 만난 이정표 의자
이정표 역할을 하는 의자는 처음 본다. (동네 사람들이 만든 것임)

▲  잠시 하늘로 솟구치는 목골산 능선길

▲  목골산 미성동둘레길

▲  목골산 영산홍동산

선우공원 북쪽에 영산홍이 잔뜩 깃든 영산홍동산이 있다. 영산홍은 4~5월에 홍자색(紅紫色)
꽃을 피우는데 내가 갔던 때는 6월 말이라 영산홍은 커녕 그 떨어진 잎도 없었다. 이는 영산
홍의 잘못이 아닌 철을 맞추지 못하고 찾아온 나의 불찰이다. 다음에 영산홍 철에 다시 한번
찾아와 이곳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맛보고 싶다.


▲  목골산을 내려가며

영산홍동산을 내려가니 쌍용아파트가 나온다. 여기서 북쪽 산이 독산자연공원이나 시간도 이
미 18시가 넘었고 몸도 지친 터라 쿨하게 길을 접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성주암부터 해서 적
지않은 미답지를 지웠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히 보람을 느낀다.
이렇게 하여 초여름 삼성산~호암산~목골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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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2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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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경주 나들이 ~~~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벽도산,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 늦가을 경주 나들이 '

▲ 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하늘 아래 세상을 평정한 가을이 천하를 곱게 물들이며 한참 전성기를 일구던 10월 막바지
에 신라 서라벌의 향기가 지독하게도 배여있는 경주(慶州)를 찾았다.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아침 일찍 동서울종합터미널을 찾았으나 경주 관광객 폭주로
9시 이후에나 승차가 가능하다고 그런다. (첫차는 7시) 그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구미(龜尾)행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경주로 갈 때 자리가 여의치 않으면 보통
구미를 거쳐 간다. 비록 갈아타야되는 번거로움은 있으나 구미행은 휴일에도 자리가 꽤 널
널한 편이고 경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환승 장소로도 제격이다.
구미에 이르자 바로 포항행 직행버스로 환승, 다시 1시간 30분을 달린 끝에 12시에 경주터
미널에 도착했다.

경주에 이르니 벌써부터 나들이 손님들로 터미널 주변은 북새통을 이룬다. 허나 그들이 가
는 곳은 거의 정해져 있다고 보면 된다. 나는 불국사나 석굴암, 대릉원, 분황사지 등 경주
의 기본적인 곳은 거의 질리도록 가본 터라 속세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을 주로 찾는 편
이다.
그렇게 경주에 수많은 문화유적과 명승지에 발자국(헤아려보니 대략 120곳이 넘음)을 남겼
지만 '신라(新羅)', 그 조그만 나라가 무려 1천 년씩이나 쓸데없이 오래 있다보니 그 중심
지였던 경주에는 아직도 갈 곳들이 차고 넘쳐난다. 정말 한 골목, 한 굽이를 돌 때마다 볼
거리가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오는 곳이 바로 경주인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볼거리와 찬란한 역사가 깃들여진 경주는 굳이 나쁘게 이르자면 내게는 꽤
부담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볼거리가 지나치게 많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보려면 적지 않은
지식을 필요로 하니 차라리 눈을 감고 지나가고 싶을 정도이다.

이번에 문을 두드린 곳은 시내 서쪽인 효현동(孝峴洞)이란 변두리 동네로 그곳에 안긴 3층
석탑과 법흥왕릉, 그리고 남쪽 벽도산에 있는 율동(두대리) 마애불이 이번 목적지이다. 이
들은 거의 인지도가 없어 찾는 이도 뜸하다.
경주고속터미널에서 아화로 가는 경주좌석버스 300-1번을 타고 태종무열왕릉과 효현고개를
넘어 효현교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대천<大川, 고현천> 옆으로 난 조그만 농로(외외
길)로 들어섰다.
갈대가 살랑살랑 춤을 추는 대천, 늦가을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효현동 들판이 속세(俗世)
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를 흔쾌히 정화시켜준다. 4발 차량이 이따금 지나칠 뿐, 사람
의 모습은 거의 보이질 않는다. 그런 시골길을 15분 정도 가면 효현동3층석탑을 알리는 갈
색 이정표가 마중하고, 그의 안내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외외마을이 나오는데, 탑은 마을
서남쪽에 자리해 있다.


▲ 경주의 서쪽 산하를 차례차례 적시며 형산강(兄山江)으로
흘러가는 대천(고현천)


▲ 효현동 시골길(외외길)
인적도 없는 호젓한 시골길을 거닐으니 마치 아비규환의 속세를 벗어난 기분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해탈감이라고나 할까? 비록 잠시뿐이지만...


▲ 늦가을에 슬며시 물들어 가는 효현동 시골길(외외길)
이런 시골까지 문명의 이기(利器)를 전해주는 전봇대 너머로 흐릿하게
눈에 들어오는 산은 남산(南山, 금오산)이다.


 

♠ 소나무를 우산으로 삼으며 옛터를 홀로 지키는
효현동3층석탑 - 보물 67호

효현동 외외마을 서남쪽 멋드러진 소나무 밑에 자리한 효현동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전형적인 신라 후기 석탑이다. 기단 사방(四方)에는 기둥 모양의 조
각을 두었고, 탑신은 각 층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조각을 새겼으며, 지붕돌 네 귀퉁이는 살
짝 치켜진 것이 마치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지붕돌의 밑면 받침은 4단으로 되어있고, 각 부
분의 조각이 가늘게나마 있어 9세기 정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탑이 있는 자리는 법흥왕이 불도를 닦았다는 애공사(哀公寺)의 옛터로 전한다. 하지만 이를 입
증할 절터의 흔적은 나오지 않아 그마저도 희박하며, 절의 위치와 관련된 기록도 없는 실정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애공사터로 포장된 것은 조선 후기에 경주김씨에서 현재 법흥왕
릉을 그들 조상의 하나인 법흥왕의 능으로 삼으면서 탑이 있던 자리를 애공사터라 우겼기 때문
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법흥왕을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나왔는데, 마침
탑도 있고, 비록 북쪽은 아니지만 서쪽에 이름 모를 고분이 있으니 적당히 끼워 맞춘 것이다.

▲ 효현동3층석탑의 앞부분

▲ 효현동3층석탑의 뒷부분


▲ 효현동3층석탑과 이웃한 우사(牛舍)

이 탑은 기둥 조각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밋밋한 모습으로 두 눈에 넣어 보기에
도 별 부담이 없다. 오히려 화려함에 찌든 비슷한 시대의 탑들보다도 더 정감이 가는 것 같다.

마땅한 절터도 아닌 잡초 위에 뿌리를 내린 그는 자신의 내력과 정체를 꽁꽁 숨긴 채, 좀처럼
해답을 주려고 하질 않는다. 그의 속사정을 모르는 속인(俗人)들은 동네 이름을 따서 효현동(
효현리)3층석탑이란 이름을 주었으며, 경주김씨는 그를 애공사탑으로 삼아 조상묘를 찾았다는
뿌듯함에 빠져있다.

탑 옆에는 우공(牛公)들이 사는 우사가 있다. 그들의 음매~♪ 소리로 주변이 좀 시끄럽긴 해도
아무 것도 없는 공터에 홀로 외롭게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을 것이다. 우사 주인이나 우공들
이 탑에 해꼬지를 하지 않는 이상 서로 어우러 사는 모습도 괜찮아 보인다.

* 효현동3층석탑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419-1


▲ 효현동 시골길 (법흥왕릉 가는 길)

▲ 가을 수확의 기쁨을 누리며 내년 풍년을 위해
기나긴 휴가에 들어간 효현동 들판

▲ 법흥왕릉 입구
갈색 이정표가 있기 전에는 키 작은 표석이 이정표의 역할을 대신했다.
표석에는 한자로 '법흥왕릉 입구'라 쓰여있다.

▲ 법흥왕릉으로 인도하는 숲길에서 바라본 효현동 들판과
벽도산(율동 마애불을 간직한 산)


 

♠ 법흥왕의 능으로 살아가고 있는 신라 중기 고분
신라 법흥왕릉(法興王陵) - 사적 176호

효현동 서쪽 산자락에 법흥왕릉이라 불리는 오래된 신라 무덤이 말없이 누워있다. 능의 높이는
2m, 지름 14m로 신라 왕릉 중에서 작은 편에 속하는데, 봉분 앞에는 근래 지어진 상석(床石)이
하나 놓여져 무덤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능의 주인이라는 신라 법흥왕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부터 중,고등학교 국사책, 온갖 수험서에
이르기까지 지겹도록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인물로 불교를 공인하고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을
정벌했으며, 연호를 쓰는 등, 신라에서 제법 업적이 있는 군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업적에 비해 능의 규모가 상당히 초라하여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고개를 갸
우뚱하기 마련이다. 물론 신문왕릉(神文王陵, 신문왕릉 또한 주인이 정확하지 않음) 이전에는
딱히 석물을 두지 않았고, 비석도 무열왕릉(武烈王陵)부터 등장하기 때문에 장식이 없는 건 당
연하다 하겠으나 봉분의 크기가 인간적으로 너무 작다. (왕릉의 보호 구역은 72,816㎡)
봉분 주변에는 드문드문 자연석이 노출되어 있어 무열왕릉처럼 봉토 밑에 호석(護石)을 둔 것
으로 여겨지며, 능 주변으로 소나무 숲이 무성하여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특히 기이한 모습의
소나무가 여럿 있어 신비로움을 안겨준다.

일단 이 무덤은 신라 중기 고분이다. 법흥왕릉이란 이름으로 살고는 있지만 이는 조선 후기부
터이다. 그 이전에는 경주 땅에 널리고 널린 신라 고분의 하나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법흥왕의 능이란 증거가 있는가? 딱히 적당한 증거도 없다. 삼국사기에는 법흥왕을 애공사 북
쪽 봉우리에 장사를 지냈다고 나오는데, 애공사가 어딘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18세기 이후, 신라 왕가의 후손인 경주김씨와 경주석씨, 경주박씨들이 한참 조상묘 찾기
사업을 벌이면서 어디에 있다는 짧은 기록에 의지해 경주 땅을 들쑤셨는데, 대충 그럴싸한 곳
을 조상묘로 때려 삼았다. 법흥왕릉 역시 그중의 하나이다.

법흥왕릉을 찾아 나선 후손들은 효현동3층석탑을 발견했고, 덩달아 서쪽 숲속에 잠긴 이 무덤
을 발견하게 된다. 석탑은 이곳에 절이 있었으니 당연히 있었을 것이고, 북쪽도 아니지만 서
쪽에 옛 무덤이 있으니 탑 자리를 애공사라 여기면 법흥왕릉이라 우겨도 될 듯 싶었다. 또한
주변에 다른 고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여 3층석탑 자리를 애공사터로 때려 삼고 이 무덤을
법흥왕릉으로 삼은 것이다. 이리하여 이름 없는 옛 무덤은 '법흥왕릉'이란 엉뚱한 이름표를 달
게 된 것이다.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 예전에는 이름 앞에 막연히 전하고 있다는 뜻에 '전(傳)'을 붙여 '전 법
흥왕릉'이라 했으나 요즘은 아예 '경주 법흥왕릉(문화재청 지정 명칭)'이라 부른다. 진짜 법흥
왕릉이 나타날 때까지는 법흥왕릉이란 이름으로 꼼짝없이 살아가야 되는 것이다.

왕릉이 시내에서도 좀 떨어진 외진 곳이라 찾는 이도 적다. 법흥왕이란 인물은 워낙 유명하지
만 그의 능은 반비례로 인지도가 낮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신변의 위험도 늘 도사리고 있어
1966년과 1968년에 도굴을 당한 적이 있으며, 2005년에도 도굴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지금의
봉분은 1968년 도굴 이후에 복원한 것이다.


▲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법흥왕릉

▲ 동쪽에서 바라본 법흥왕릉

▲ 서쪽에서 바라본 법흥왕릉


▲ 손으로 더듬거리고 싶은 법흥왕릉의 뒷태


※ 불교를 공인하고 신라 전성기의 토대를 닦은 법흥왕(法興王. ?~540 / 재위 514~540)

법흥왕의 이름은 김원종(金)으로 지증왕(智證王, 437~514 / 재위 500~514)의 아들이다. 키
가 7척(1척은 22~33cm)에 이르며, 성품이 온후해 주변 사람을 아꼈다. 그의 모후(母后)는 연제
부인() 박씨이며, 부인은 보도부인() 박씨이다.

514년 가을, 지증왕이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그 뒤를 이어 신라 23대 군주로 즉위했다.
부왕에게 '지증(智證)'이란 시호(諡號)를 올리니 신라의 시호는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516년 정월, 내을신궁(奈乙神宮)에 제를 지냈는데, 용이 양산 우물에 나타났다.

517년 4월,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설치하고 518년 2월 주산성(主山城)을 쌓았다.

520년 정월, 신라 최초로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의 관복(官服)
을 주색(朱色), 자색(紫色) 순으로 제정했다.

521년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522년 3월 가락국<금관가야, 金官伽倻>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다. 그래서 이찬 비조부
()의 누이동생을 보내 혼인에 응했다.

524년 9월, 왕이 남부지역 개척지를 순행(巡行)했는데, 가락국 왕이 찾아와 회견을 했다.

528년, 양나라에서 수입한 불교가 널리 백성들에게 퍼지자 불교를 공인하려 했다. 허나 귀족들
이 반대하여 난항에 부딪치자 이차돈(異次頓)과 짜고 그 유명한 이차돈 순교 사건을 일으켜 귀
족들을 단단히 겁에 질리게 만들고 불교 공인을 선포했다. 이 사건으로 왕권은 한층 강화된다.

529년, 살생을 금하는 명을 내렸다.

531년 3월, 제방을 보수했고, 상대등(上大等) 벼슬을 만들어 국사를 총리(總理)하게 했다.

532년, 가락국이 신라에서 시집 보낸 비조부의 누이에게 가야옷을 입혔다는 엉뚱한 구실을 내
세워 사다함(斯多含)을 보내 가락국을 멸망시켰다. 신라의 파상적인 공격 앞에 가락국의 마지
막 왕 구해왕(仇亥王)이 나라의 국고(國庫)와 보물을 바치고 항복하니 이들을 예우로 맞이하고
상등(上等)의 작위를 내려 본국(김해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내렸다. 그의 3번째 아들 김무력
(金武力)에게는 각간(角干)이란 벼슬을 내렸는데, 그의 손자가 바로 김유신(金庾信)이다.
<가락국 땅에는 금관군(金官郡)을 설치함>

535년, 건원(建元)이란 연호(年號)를 쓰니 이는 신라 최초의 독자적인 연호이다.

536년 정월, 관리들이 외직(外職)에 나갈 때 가족을 대동하고 가는 것을 허락했다.

540년 7월, 왕이 승하하자 시호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냈다.

법흥왕은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하며, 애공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에게는
왕위를 이을 왕자가 없어 그의 동생인 갈문왕(葛文王) 김입종(金立宗)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신라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진흥왕(眞興王)이다.
김입종은 조카인 법흥왕의 딸과 혼인하여 진흥왕을 낳았으니 왕족들의 족내혼(族內婚)이 성행
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신라 최초로 율령을 반포했으며, 이차돈을 통해 불교를 공인했다. 그리고 가락국을 정벌
해 낙동강 하류로 진출했고, 외직에 나가는 관리에게 가족 동행을 허가하였으니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으로 왕권이 한층 강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보통 가족은 인질로 왕경(王京)에 두고
가야했음>


▲ 법흥왕릉의 앞모습

▲ 왕릉 부근에서 발견된 돌
그냥 이곳에 널부러진 돌은 아닌 듯 하며, 무열왕릉처럼 봉토 밑에
호석 시설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 법흥왕릉과 속세를 이어주는 소나무 숲길
왕릉은 작지만 그곳으로 통하는 숲길은 왕릉의 품격과 옛 무덤의
신비로움까지 품을 수 있도록 잘 가꾸어져 있다.


※ 법흥왕릉, 효현동3층석탑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① 경주까지 버스 이용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경주행 고속버스가 5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성남, 부천, 수원, 춘천, 청주, 세종시에서 경주행 직행/고속버스 이용
* 대구(북부, 서부, 동부, 동대구), 부산(노포동, 사상), 울산, 포항, 창원(마산), 전주, 광주
, 진주, 순천, 강릉, 동해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철도 이용
* 서울역과 광명역, 천안아산역, 오송역, 대전역에서 신경주역 경유 부산행 고속전철 이용
* 청량리역, 원주역, 영주역, 동대구역, 부전역, 태화강역에서 경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③ 현지교통
* 경주고속터미널(경주시외터미널에서 도보 2분)과 경주역(성동시장)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
, 300-1, 304번을 타고 효현교 하차. 효현동 방면 외외길을 따라 들어간다. 효현동3층석탑까
지는 도보 20분, 법흥왕릉은 도보 25분
* 신경주역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번을 타고 효현다리 하차
④ 승용차 (법흥왕릉, 효현동3층석탑까지 접근 가능)
* 경부고속도로 → 건천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건천읍에서 경주방면 4번 국도 → 광명3거
리에서 경주대 방면 → 와상교를 건너 외외길로 우회전 → 효현동(법흥왕릉, 3층석탑)

★ 법흥왕릉, 효현동3층석탑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주차장은 따로 없으므로 길가나 빈 공간에 알아서 주차
* 법흥왕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63


 


법흥왕릉을 끝으로 효현동에 대한 볼일은 끝났다. 왕릉 주변 잔디밭에 앉아 속세에서 사온 간
단한 먹거리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그날의 마지막 답사지인 율동(두대리) 마애불로 길을 재촉
했다. 그곳은 이미 오래 전에 가본 기억이 있지만 너무 빛바랜 옛날이라 여기까지 온 김에 오
랜만에 친견하기로 했다.
여기서 율동(栗洞) 마애불로 갈려면 우선 효현교로 다시 나가야 된다. 효현교를 건너 8분 정도
가면 율동인데,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 옛 율동역이 있던 중앙선(서울↔경주) 철로와 경부고속
도로의 아랫도리, 그리고 두대마을을 차례로 지나 벽도산의 품으로 20분 정도 파고 들면 깊은
산골에 박힌 율동 마애불이 모습을 비춘다. 마애불까지는 이정표가 잘 되어있고 길도 잘 닦여
져 있어 방황할 염려는 없다.


▲ 옛 율동역을 지나는 중앙선 철로 (경주 방면)
경주와 건천 사이에 있던 율동역(栗洞驛)은 오래 전에 녹아 없어지고 그 흔적만 아련히
남아있다. 서울 청량리역을 비롯하여 포항과 동대구, 부전, 강릉으로 가는 열차가
외마디 기적소리를 남기며 이곳을 스쳐간다.
(중앙선 옆으로 보이는 차량들의 행렬은 국가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

▲ 옛 율동역을 지나는 중앙선 철로 (영천 방면)

▲ 녹음이 우거진 율동 마애불 가는 길
마애불 아래까지 길이 닦이고 주차장이 깔려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배려했다.


마애불 주차장을 지나 산길을 오르면 율동 마애불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근래에 터를
닦은 성주암(聖主庵)이란 조그만 암자가 나온다. 산신각(山神閣)과 심우실이라 불리는 기와집
이 전부로 산신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인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 심우실(尋牛室)이라 불리는 성주암의 중심 건물
심우실은 'ㄱ'모양의 기와집으로 법당(法堂) 겸 요사(寮舍)의 역할을 한다.
허나 불전(佛殿)의 품격과는 거리가 먼 여염집 분위기로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 절 뒤쪽에 자리한 율동 마애불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다


 

♠ 신라 후기에 조성된 수려한 마애불(磨崖佛)이자 벽도산의 오랜 은인(隱人)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두대리 마애석불)
- 물 122호

▲ 율동 마애불 - 마치 환영(幻影)처럼 그 모습을 은은하게 비춘다.

경주 벽도산(碧桃山, 424m) 동쪽 자락에는 벽도산의 은인(隱人),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이하
율동 마애불)이 조용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 마애불은 소금강산(小金剛山)에 안긴 굴불사지(掘佛寺址) 4면석불(보물 121호)의 양식을 그
대로 계승한 신라 후기 석불로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에 세
우고, 좌우에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협시(夾侍)로 세웠다.

가운데에 자리한 아미타불은 높이 2.5m로 머리가 상당히 커 보인다. 다른 부분은 얕음새김으로
처리했지만 머리는 돋음새김으로 크게 돋게 새겼기 때문이다. 머리에는 육계<무견정상(無見頂
相)>가 두툼히 솟아 있는데, 이는 굴불사지 석불과 비슷하다. 얼굴은 볼이 풍만하게 돋았고 미
소가 은연히 드리워져 있으며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어 그의 정체가 아미타불임을 알 수 있다. 발은 앞으로 내밀지 않고 옆으로 반듯하게
벌리고 있으며, 어깨는 당당한 편이고 왼쪽 어깨를 옷으로 덮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을 취하고 있다.

◀ 측면에서 바라본 율동 마애불

아미타불 왼쪽의 관음보살은 아미타불보다 덩치가 작다. 2m 남짓의 키로 움푹 들어간 허리선과
풍만하게 튀어나온 엉덩이가 눈길을 끄는 날씬한 몸매를 지니고 있다. 몸매의 굴곡이 진하게
드러나 있으며, 발은 옆으로 벌리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 위로 올려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왼손에는 정병<政柄, 혹은 보병(寶甁)>을 들고 있어 그가 관음보살 누님임을 알 수 있
다. 게다가 몸매도 영락없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조그
만 얼굴은 두 눈이 형체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상태는 별로 안좋다.

아미타불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은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경례를 하는 듯한 모습이며, 전체적인
형태는 관음보살과 비슷하다. 키는 2m 남짓으로 얼굴 부분이 다소 마멸된 것 외에는 건강 상태
는 괜찮다. 이들 불상은 머리 뒤로 두툼하게 표현된 동그란 두광(頭光)을 가지고 있으며, 두광
에 표현된 당초(唐草)무늬 등이 지긋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섬세하게 남아있다. 몸 뒤에는 신
광(身光)이 얇게 표현되어 그들을 빛나게 한다.

이들은 굴불사지 석불과 기본적으로 같지만, 풍만함이나 발의 모양, 옷주름 모양 등이 달라 조
성시기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 도드라지게 새겨진 아미타불의 얼굴

율동 마애불 부근에는 '벽도산석불입상'과 '천창산(天倉山)선각마애불' 등이 있어 율동 마애불
을 중심으로 벽도산 일대도 조촐하게 불국토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전에 왔을
때는 인근 능선에서 벽도산 석불입상을 본 듯 한데 기억이 벌써부터 희미하다. 율동 마애불은
인지도가 낮아 속인들의 발길은 적지만 경주 답사 경력이 어느 정도 되는 이들은 왠만큼은 아
는 곳이다.

마애불 앞에 3배의 예를 올리며 살짝 약소하게나마 소망을 들이밀어 본다. 신라 석공(石工)들
의 체취가 담긴, 비록 그들은 사라지고 윤회(輪廻) 사상에 따라 지금은 다른 존재로 살고들 있
겠지만 석불 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며 중생을 맞는다. 불상 주변에는
푸른 이끼가 피어 있지만 마애불의 위엄 앞에 더는 어쩌지 못하고 적정한 간격으로 그들과 동
거를 한다.
바위가 서쪽을 향하고 있고, 불상을 둘러싼 광배(光背)가 바위에 일정한 홈을 파준 탓에 장대
한 세월이 흐르고 자연의 집요한 괴롭힘 앞에서도 당당하게 건강을 누리며 살고 있음이 참 다
행이라 하겠다.

율동 마애불을 끝으로 소소하게 즐긴 늦가을 경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 경주고속터미널(경주시외터미널에서 도보 2분)과 경주역(성동시장)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
, 300-1, 304번을 타고 율동 두대마을입구에서 하차.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두대길을 따라 도
보 25분
* 신경주역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번을 타고 율동 두대마을 하차
* 승용차로 가는 경우 (마애불까지 접근 가능)
① 경부고속도로 → 건천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건천읍에서 경주방면 4번 국도 → 광명3거
리에서 직진 → 율동에서 마애불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 → 율동 마애불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율동 산60-1 (두대안길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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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11월 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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