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추천맛집'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04.08 법정스님과 길상화의 고운 넋이 깃들여진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 ~ 성북동 길상사
  2. 2012.10.26 늦가을이 아름다운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성북동 나들이

법정스님과 길상화의 고운 넋이 깃들여진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 ~ 성북동 길상사


' 성북동 길상사 나들이 '

▲  길상사의 명물, 관음보살상


봄과 여름의 경계인 5월의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와 성북동 길상사를 찾았다. 간송미술관과
더불어 성북동(城北洞)의 대명사이자 꿀단지로 자리잡은 길상사는 2007년부터 문턱이 닳도
록 찾은 절이건만, 그곳에 제대로 퐁당퐁당 빠졌는지 성북동의 여러 명소와 더불어 자꾸만
손과 발이 가는 곳이다. 나는 묵은 내가 나는 오래된 절집을 좋아하는지라 역사가 짧은 절
은 어지간해서는 관심을 잘 주지 않는데, 길상사는 그 예외인 것이다. 매년 5~7번 정도 발
걸음을 하여 어언 30회가 넘게 찾았다.


길상사는 성북동 북쪽 구석에 자리해 있는데, 성북초교에서 선잠로를 따라 12분 정도 가면 길
상사가 뚜렷히 모습을 비춘다. 그 12분의 짧은 구간은 졸부들의 으리으리한 금입택(金入宅)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현장이다. 보기만 해도 주눅이 잔뜩 들고 마음 마저 편치 않게 만든다.
졸부들의 폐쇄성과 이 땅에서 나날이 심각해져 가는 빈부격차를 보여주듯이 담장은 높고 요새
같으며, 대문은 충차(衝車, 공성무기의 하나)로도 어림 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보인다. 그것으
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방범장치가 겹겹이 설치되어 지나가는 나그네를 불편하게 응시한다.

저택과 고급빌라 뜨락에는 담장 밖으로 손을 내민 나무들로 삼삼한 숲길만큼이나 푸르름이 가
득하다. 도심과 가까움에도 분위기도 차분하여 산책 코스로도 아주 좋지. 그래서 나는 서울에
서 늦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창덕궁 후원, 부암동과 더불어 성북동을 1순위로 꼽는다.
비록 나처럼 없는 사람들이 오기에는 조금 꺼림칙한 곳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주눅들 필요까지
는 없다. 제아무리 저택이라 한들 대자연 앞에선 모두 모래성만도 못한 하찮은 존재기 때문이
다. 괜히 기죽지 말고 당당히 가슴을 피며 산책을 즐기면 그만이다.
또한 성북동은 예로부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자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성북동이 우
리나라의 0.1%가 산다며 우스개 소리가 나올 정도로 졸부들의 소굴이 된 것도 바로 명당의 기
운을 누리고자 함이다. 그러니 명당의 기운을 졸부들이 다 가져가게 두지 말고 성북동을 거닐
면서 그 기운을 조금이나마 챙겨가기 바란다.


♠  길상화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넋이 깃들여진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
~ 성북동 길상사(吉詳寺)

▲  지장전에서 바라본 경내 - 절이 거의 숲을 이루다보니 나무에 가려
건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연등까지 가세해 그들의
숨바꼭질을 더욱 부추긴다.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사인 길상사는 졸부들의 저택과 고급 빌라가 홍수를 이루
는 성북동 북쪽에 자리해 있다. 비록 주택가에 터를 닦았지만 이곳이 북한산(北漢山, 삼각산)
남쪽 자락에 해당되어 '북한산(삼각산) 길상사'를 칭하고 있으며, 나무가 무성하고 계곡이 경내
를 가로질러 첩첩한 산골에 묻힌 산사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자연과 인공이 같이 어우러진
사찰 풍경도 제법 아름답고 도심에 있음에도 북악산 백사골만큼이나 공기도 청정하다. 경내는
고요하고 아늑해 중생의 마음을 다독거려주고,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이채로운 볼거리가 두
눈을 호강시킨다.

길상사는 내가 좋아하는 고색의 내음이 서린 절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화유산이 깃든 절도 아니
다. 역사는 겨우 16년, 절로 태어난 것은 18년으로 나보다 한참 나이가 적다. 이곳이 법등(法燈
)이 켜진 시간에 비해 유명세를 두드러지게 탄 것은 군사정권 시절 권력실세들이 들락거리던 고
급요정에서 누구나 의지할 수 있는 절로 거듭난 전대미문의 현장이며, 무소유(無所有)의 저자이
자 불교계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법정(法頂)이 가꾼 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급요정을 기증
한 김영한(길상화)의 이야기는 속인(俗人)들의 마음에 적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참고로 법정은 2010년 3월 11일 13시 52분께 78세의 나이로 길상사에서 입적했으며, 다음날 순
천 송광사(松廣寺)로 운구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입적을 애도했다.


▲  창건주 김영한(길상화)의 영정 (극락전 내부 우측에 있음)

* 길상사의 창건주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의 생애와 고급요정에서 절로 탈바꿈된 길상사의
탄생 과정
길상사의 전신은 성북동 서쪽에 있는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고급요정으로 악명을 떨쳤던 대
원각(大元閣)이다. 권력층과 부자들이 찾아와 기생을 끼고 놀던 요정으로 이곳을 세운 사람이
바로 김영한이다.

김영한은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이 일찍이 풍비박산이 났다. 그래서 16세에 궁중아악과 가
무(歌舞)를 가르치던 하규일(河圭一, 1867~1937)의 문하로 들어가 진향(眞香)이란 이름으로 기
생이 되었다. 그는 왜열도를 여행하다가 문학가로 유명한 백석(白石, 1912~1995)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당시 그는 조선일보 기자로 그녀를 자야(子夜)라 불렀다. 그들은 혼인을
약속했으나 백석의 부모가 쌍수를 들고 반대해 결국 이별하고 만다.

오기가 생긴 그는 악착같이 돈을 벌고 공부에 전념하여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으
며, 몇 편의 수필과 '내 사랑 백석','하규일 선생 약전' 등을 썼다. 또한 예전 기생을 했던 경
력을 바탕으로 고급 식당을 차리고자 도심과 가까운 곳을 물색하다가 계곡이 흐르는 지금의 길
상사 자리를 사들여 청암장(靑岩莊)이란 한식당을 냈다. <성북동에 서린 명당의 기운도 염두에
뒀을 것이다>
잠시 다른 사람에게 운영을 맡기기도 했으나 이후 대원각으로 이름이 갈아 자신이 직접 챙겼고
군사정권 시절에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정권 실력자와 졸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면서 삼청
각, 청운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고급 요정으로 명성을 날린다.

대원각 단골들이 정/재계에서 죄다 잘나가는 작자들이라 포크레인으로 돈을 쓸어담을 정도로 대
박 수입을 자랑했던 김영한, 허나 그는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돈과 명예를 위해 악착
같이 살았던 그였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서서히 깨달았고 그 와중에 법
정의 '무소유'를 읽고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친견해 여러 법문을 들었고, 결국 모든 것을 내놓기로 결심, 1987년 법정에게 절집
으로 써달라며 대원각을 통채로 기증했다. 허나 갑작스런 거액의 기증에 법정은 크게 펄펄 뛰며
거절했다. 당시 대원각의 면적은 7천여 평, 시가는 무려 1,000억원을 헤아렸다.

김영한은 그에 굴하지 않고 8년 동안 끈질기게 기증의 뜻을 보였고, 결국 1995년 법정은 그곳을
받아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넘겼다. 송광사는 대원각을 대법사(大法寺)로 이름을 고치고 송광
사의 말사(末寺)로 삼았으며, 1997년 송광사의 옛 이름인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그해 12월 14
일 개원법회를 열었다.
법회에는 천주교의 고(故)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시민, 불자 4,000여명이 구름처
럼 참석했는데, 법정의 이끌림에 대중 앞에 선 그는 자신의 부질없는 삶을 이렇게 드러내며 대
중의 심금을 진하게 울렸다.
'저는 죄가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쪽에 보이는 팔각정을 보면서)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요정시절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상사의 창건주가 된 김영한은 법정으로부터 길상화(吉祥花)란 법명과 함께 염주를 받
았으며, 옛 사랑인 백석을 기리고자 2억 원을 내놓아 백석문학상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불교에 귀의하며 말년을 지내던 그는 1999년 11월 14일 83세의 나이로 외로운 삶을 마감
했다.
그가 죽기 하루 전날, 절에 들어와 목욕재계하고 예불을 올리며, 길상헌에서 인생의 마지막 밤
을 보냈는데, 당시 길상사 주지 청학(靑鶴)에게
'내가 죽으면 눈이 내릴 때 절 마당에 뿌려주세요'
유언을 했다.


▲  길상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법정스님의 영정

중생의 오열 속에 그의 육신은 산산히 화장(火葬)되고 유골은 49재 이후 유언에 따라 첫눈이 절
을 하얀 수채화로 채색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그 자리에는 조촐하게 공덕비를
세워 그를 기리며, 매년 음력 10월 7일에 기제(忌祭)를 올린다. 또한 절은 그의 뜻을 받들어 대
중에 널리 문을 열었고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해마다 30여 명의 중고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김영한은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였지만, 돈을 신으로 받들며 사람 무시를 예사로 여기는 우리
나라 졸부들과 달리 모든 것을 내버리고 빈털털이가 되어 인생을 마무리했다. 공수래 공수거의
진리를 일찍 깨달은 것이다. 그는 자손도 남기지 못했고 한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지
10여 년이 넘었지만, 그의 눈물 어린 사연과 함께 아름다운 넋과 마음은 여전히 그의 유작(遺作)
이라 할 수 있는 길상사에 고이 깃들여져 속세에 오염되고 상처받은 중생의 메마른 마음에 감동
의 싹과 눈물을 틔우게 한다.
또한 그가 속세에 준 커다란 선물(길상사) 덕분에 졸부들로 진흙탕이 된 성북동 부촌(성북길 북
쪽) 한복판에 진흙탕에 피어난 한송이 연꽃처럼 중생들이 편안히 찾아와 안길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길상사가 아니었다면 이곳은 걸어다니거나 행색이 초라한 행자를 이상히 여겨 경
찰에 신고를 하는 요지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  길상화 공덕비

▲  김영한(길상화)이 숨을 거둔 길상헌

* 길상사의 현재
길상사의 불전(佛殿)은 지장전을 제외하고 기존 요정시절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
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설법전, 종무소, 범종각, 길상선원, 유마선방, 침묵의집, 진영각
, 등 2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오래된 절이 아니다 보니 문화유산은 딱히 없으나 오
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보호수의 지위를 누리며 뜨락에 그늘을 드리운다.

또한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根本道場)으로 매년 5월에 법회와 길상음악회를 연
다. 법회 때는 고(故) 법정이 자주 법회를 주관했으며, 그를 보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었다. 길상음악회는 다양한 테마의 음악을 선보이는 자선음악회로 여기서 나오는 수입은 어려운
이들을 위해 쓴다.

휴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넓은 경내에 빈 공간이 없을 지경이며, 평일에도 적지 않게들
찾아와 길상사의 높은 인기를 보여주는데, 그 방문객 수는 서울 굴지의 고찰인 조계사, 봉은사
(奉恩寺), 도선사(道詵寺), 진관사(津寬寺) 정도는 될 것이다.

* 속인(俗人)들을 위한 다양한 참선 프로그램
1. 길상선원(吉詳禪院) - 상설 시민선방으로 길상사에서 하는 1박 2일 선수련회에 3회 이상 참
여하거나 3박 4일 여름 특별 선수련회 참여자, 또는 다른 절의 선수련회에 참여한 뒤 길상사 1
2일 선수련회에 1회 참여한 사람에 한해 방부<房付, 선방에 안거(安居)를 청하거나 승려가 다
른 절에 가서 잠시 있기를 청하는 것>가 가능하다.
기존 이용자는 매월 25~31일까지, 신규 이용자는 매월 1~3일에 방부를 들일 수 있다. 방부가 승
인된 사람은 일정액의 방부비를 내고 이용하며, 한달에 5일 이상은 출석해야 된다. 선원 출입시
간은 매 정시에서 10분 사이이다.

2. 침묵의집 - 길상사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침묵의집은 '침묵의집에서 침묵을, 침묵 속에
서 고요함을, 고요함 속에서 평화를'
이란 테마로 누구나 자유롭게 명상과 좌선을 할 수 있는 공
간이다. 이용시간은 오전 10시부터 17시까지이며, 일요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만 이용이 가능하
다. (특별행사가 있는 날은 거의 이용 불가)

3. 템플스테이(Temple Stay) - 1달에 2번 열리는 주말선수련회는 수련형 템플스테이로 1박 2일
일정으로 이루어진다. 사찰예절과 경내 탐방, 예불습의, 발우공양, 참선, 108배, 차담, 자유포
행 등을 하며, 108배가 가능한 사람만 참여할 수 있다. 참가비는 5만원이다. (기타 여름선수련
회와 2~4시간 일정으로 이루어지는 템플라이프도 있음)
자세한 정보는 길상사 홈페이지 참조 (아래 사진들을 클릭바람)

▲  2012년 11월에 지은 길상보탑

▲  설법전

※ 길상사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초교 하차, 내
  린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성북초교3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왼쪽 선잠로를
  따라 들어간다. (이정표가 갈림길마다 설치되어 있어 찾기는 쉬움)
* 길상사 셔틀버스가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 동원마트(6번 출구를 나와서 50m 직진)에서 1일 8
  회 운행한다. 출발시간은 8:30, 9:20, 9:40, 10시, 12시, 13시, 15시, 16:30분이다.
* 매년 음력 10월 7일에는 길상화 기제가 열린다.
* 매년 음력 1월 26일에는 법정의 추모 법회가 열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323 (☎ 02-3672-5945)
* 길상사 홈페이지는 위의 길상보탑과 설법전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길상사 일주문, 설법전

▲  길상사 일주문(一柱門)

속세에서 길상사로 들어서려면 '三角山 吉詳寺(삼각산 길상사)'라 쓰인 중층 구조의 일주문(정
문)을 들어서야 된다. 이 문은 2000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되었으며, 정문을 들어서면 초록
의 싱그러운 아름다움이 풍기는 길상사 내부가 펼쳐진다.


▲  생전 처음 본 일주문 천정 그림 (봉황일까? 극락조일까?)

일주문은 경내로 들어서려면 꼭 거쳐야되는 문이기에 별 생각 없이 드나들었는데, 생각해보니
문 천정을 한번도 못봤다. 천정에 무엇이 있겠나 싶어 별다른 기대 없이 고개를 90도 올려보았
는데, 글쎄 그곳에는 소용돌이치는 구름 무늬 사이로 하얀색의 긴 꼬랑지를 가진 새 2마리가 장
엄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난데없는 그림의 등장에 나의 눈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곳에 그려진 새를 거의 봉황과 비슷하다. 그래서 봉황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곳이 절이다보
니 딱히 봉황을 키울 이유는 없어 보인다. 만약 봉황이 아니라면 불교에서 많이 키우는 극락조
<極樂鳥, 가릉빈가>가 아닐까 싶으며, 그림이 꽤 수작(秀作)이라 어떻게 저런 곳에 교묘하게 숨
어 지나가는 중생의 머리통을 보고 있었는지 정말 등잔 위/아래가 어두웠다.


▲  정랑(해우소) 부근에 자리한 소각장
축문(祝文)을 비롯한 여러 문서를 불태우는 곳으로
그의 상반신 피부가 검게 그을려져 있다.

▲  일주문을 들어서 설법전 방면으로 바라본 모습

      ◀  길상사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
일주문에서 오른쪽 길을 오르면 설법전 앞에 늘
씬한 모습의 관음보살상이 자리해 있다. 길상사
를 상징하는 명물로 꽤나 명성이 높은 존재인데,
그 흔한 관음보살처럼 생기지 않아 고개를 갸우
뚱하게 만든다.

이 관음보살은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대좌(臺座)
로 삼아 소박하고 늘씬한 모습으로 곧게 서 있
으며,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긴 했지만 유럽
왕이 쓰던 왕관과 비슷한 모습이다. 머리결은
목 뒤쪽까지 내려왔으며, 얼굴은 자애로운 성모
(聖母)의 얼굴인데, 거의 천주교 성모 마리아와
비슷하다. 오른손은 번쩍 들어 시무외인(施無畏
印)을 취했고, 왼손에는 보관과 더불어 관음보
살의 필수 요소인 감로수가 든 정병(政柄)을 들
고 있으며, 손 아래쪽은 아무런 조각이 없다.

그렇다면 길상사는 왜 관음보살상을 그 흔한 모습으로 만들지 않고 낯선 모습으로 한 것일까?
이 보살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우리나라 조각계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최종태씨가 만든 것이다.
그러다보니 순수한 관음보살로 만들지 않고 성모 마리아를 적지 않게 섞어 보살이 아닌 거의 불
모(佛母)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길상사만의 독특한 서양식 관음보살상이 생겨난 것이다.
2000년 4월 28일에 이곳에 봉안되었으며, 높이는 1.8m이다. 비록 불상의 면모는 떨어지나 불교
와 천주교가 서로 돕고 교류하여 이루어낸 상징물로 그 가치는 크며, 대좌에는 다음의 메세지가
적혀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
서 벗어나지이다. 나무관세음보살'


▲  관음보살상 맞은편에 자리한 샘터

산사(山寺)에는 어김없이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완전한 산사는 아니지만 길상사도 나름 산사의
분위기가 자욱한지라 인근 계곡물을 끌어와 범종각 밑에 조촐하게 샘터를 냈다. 길상사를 찾은
중생의 목마름을 쿨하게 해소해주는 고마운 샘터로 졸고 있는 나무 바가지를 깨워 물을 담아 목
구멍에 넣으니 몸과 마음 속에 낀 떼와 번뇌가 말끔히 씻겨 내려간 듯, 속이 시원하다. 샘터 위
쪽에는 바로 범종각(梵鍾閣)이 자리해 있다.


▲  설법전, 관음보살상 앞뜨락 (겨울 풍경)

▲  오색구름을 이룬 연등 위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이곳에는 길상화가 시주하여 만든 범종이
있었으나 지금의 종은 2009년 9월에
다시 만든 것이다.

▲  관음보살 옆에 조그만 석불(마애불)
커다란 돌에 새겨진 추상화 같은 선각마애상
(線刻磨崖像)이 꽤 이채롭다. 이 불상은
예전에 극락전 좌측에 있었다.


▲  길상사 느티나무 (사진 가운데 나무) - 서울시 보호수 8-6호

관음보살상 주변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있다. 나누는 기쁨 동쪽에 자리한 느티나무와
더불어 길상사 이전부터 이 자리를 지키던 터줏대감으로 마르지 않는 샘인 세월을 양분으로 삼
아 제법 어엿하게 성장했다. 후배 나무들과 함께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여름의 제국도
그의 기세 앞에선 고개를 숙인다.
그의 나이는 170여 년(안내문에는 165년이라 나옴), 높이는 12m, 둘레는 2.5m이다.


▲  길쭉한 모습의 설법전(說法殿)

길상사 좌측 높은 곳에는 서쪽을 바라보고 선 설법전이 자리해 있다. 설법전은 일종의 강당(講
堂)으로 교육과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기존 요정 건물을 개조한 탓에 불전의 이
미지보다는 거대한 한옥 민박집이나 강당 같은 이미지가 강해 보인다.
깔끔하게 정비된 설법전 내부는 연병장처럼 매우 넓고 깨끗하며, 금동석가불좌상이 제일 앞쪽에
봉안되어 있는데, 중생의 시주로 하나씩 올린 수백 개의 조그만 옥불(玉佛)이 석가불을 석굴처
럼 동그랗게 에워싸 대장관을 이룬다. 이들은 인도에서 가져온 옥으로 만들었다.


▲  깔끔하고 넓은 설법전 내부

▲  미소를 한가득 품은 금동석가불좌상과 조그만 옥불의 대물결

볼살이 푸짐한 석가불의 표정이 너무나 환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두근거린다.
그의 모든 것이 산듯하게 금동으로 장엄되어있으며, 이 불상은
2000년 8월에 조성되었다.

▲  설법전 앞뜨락을 가득 메운 하얀 연등의 물결
소복을 입은 듯한 하얀 연등은 망자(亡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연등이다.

▲  설법전 남쪽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성북동 동부와 동선동(東仙洞), 낙산(駱山)이 바라보인다. 조망은 썩 좋은 편은 아님~~

▲  바람 속 향기 (2012년 버전)

설법전 남쪽에 자리한 바람속 향기 쉼터는 이름 그대로 바람에 번뇌를 흩날리며 일다경(一茶頃)
의 향기를 누리는 공간으로 길다방 커피와 음료수 자판기가 있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2012년
11월에 만든 길상보탑(吉祥寶塔)이 자리해 있으며, 쉼터는 그 모습 그대로 정랑 서쪽으로 밀려
났다.
길상보탑은 4사자 7층석탑으로 길상화와 법정의 높은 뜻을 기리고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
가 함께 한 종교간 교류의 의미를 널리 전하고자 영안모자 회장이 탑을 무상으로 지어준 것으로
길상사의 유일한 석탑이다. 탑 안에는 복장봉안품이 들어있으며, 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극락전(법당) 대신 경내 동쪽 구석에 세웠다. 그렇다고 극락전 뜨락이 좁은
편도 아닌데, 장차 다른 탑을 염두에 두고 그리 했는지도 모르겠다.


♠  길상사 극락전(極樂殿) 주변

▲  길상사 극락전

길상사의 법당인 극락전은 옛 대원각의 중심 건물로 'ㄷ'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방이 꽤 많은데, 가운데 칸에는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했고, 그 우측 칸
에 길상화와 법정, 절에 의탁한 망자들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좌측 칸은 중생들이 예
불을 올리거나 쉬어가는 쉼터로 방이 꽤 넓다. 여기서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속세를 잠시 잊으며
쉬는 재미가 꽤 쏠쏠한데, 미닫이씩 방문을 조금 열고 밖을 바라보면 마치 집 주인이나 마님이
된 기분이다.
극락전 앞뜰을 가득 메워 하늘을 가린 고운 빛깔의 연등은 속세와 천상 세계(혹은 부처의 세계)
를 가르는 구름처럼 신비롭기만 하다.


▲  극락전 금동아미타3존불

극락전 중앙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은 길상사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1997년 11
월에 조성되어 12월에 봉안되었다. 길상사의 창건을 지켜본 불상으로 인자함이 가득 깃들여진
표정으로 중생을 맞는다. 그 오른쪽에는 육환장(六環杖) 지팡이를 든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서
있으며, 왼쪽에는 보관을 쓴 관음보살이 나란히 자리해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두 협시불 역시
자애로운 표정은 아미타불 못지 않으며, 그들 뒤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금니후불탱화가 있다.


▲  극락전 뜨락에 자라난 느티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호
60년 정도 묵은 느티나무로 대원각 초창기나 그 이전에 싹을 틔운 것으로 여겨진다.

하늘을 가린 연등의 위엄이 대단해 극락전 좌측 칸에서 사진에 담았다.

▲  극락전 우측의 돌문
궁궐이나 고급 한옥에서 볼 수 있는 품격 높은 돌문으로 옛 요정시절의
화려하면서도 어두웠던 시절을 아련히 전해준다.

▲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자 봄의 절정을 누리는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5호

나누는 기쁨 동쪽에는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인 느티나무가 둥지를 틀었다. 이 나무는 나
이가 무려 270년에 이르며 높이 12m, 둘레는 3.2m에 이른다.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어엿하게 성
장하여 삼삼한 숲속에 들어선 기분을 선사한다.


▲  길상사 지장전(地藏殿)

경내 서쪽에는 '나누는 기쁨'이란 찻집과 지장전이 자리해 있다. 설법전과 극락전 등이 기존 요
정 건물을 손질한 건물인데 반해 지장전은 새롭게 지은 것으로 2004년 10월 17일에 상량식(上樑
式)을 가져 2005년 5월 8일에 완성을 보았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우람한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은 밥을 먹는
공양간인 선열당(禪悅堂), 2층은 도서관, 3층은 지장전이다. 건물 앞에는 보름달을 닮은 동그란
연못이 놓여져 있고 주위로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으며, 건물 뒤에는 주차장이 있다.


▲  지장전 지장보살상

지장전 불단에는 선운사(禪雲寺) 도솔암의 지장보살상을 모델로 삼아 만든 지장보살이 밝은 미
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염라대왕이 그를 협시(夾侍)하고 있으
며, 붉은 색의 지장후불탱화가 그들의 든든한 후광이 되어준다.

◀  아미타불 염불이 하루 종일 잔잔히 울리는
지장전의 숨겨진 복도 (영가들의 공간)

지장보살 불단과 그 앞에 펼쳐진 공간이 지장전
의 전부는 아니다. 불단 좌우로 보이는 문을 들
어서면 불단 뒤쪽에 숨겨진 복도가 마치 보물이
묻힌 비밀의 석실(石室)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죽은 이들, 즉 영가(靈駕)들의 공간으로
그들의 이름이 적힌 위패가 빼곡히 자리를 채운
다. 물론 이들도 돈을 받고 해주는 것이다.
동쪽 벽에는 고운 색채로 치장된 석가3존불 벽
화가 그려져 있는데, 복도의 폭이 조금 좁다보
니 꽤 장엄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
의 심금을 자극시키며 잔잔히 흘러 나오는 아미
타불 염불(念佛)은 엄숙한 분위기를 유도해 나
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지장전 영가들의 공간에 그려진 벽화
황홀한 색채를 자아내는 벽화에 석가불과 아리따운 모습의 관음보살이 그려져 있다.
월출산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후불벽화나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의
후불관음탱화, 세계 최고의 불화로 손꼽히는 고려불화처럼
현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  지장전 뜨락과 연못
장차 다가올 여름의 향연을 준비하는 연(蓮)들이 막바지 와신상담 중이다.


♠  길상사 마무리

▲  계곡 건너 숲속에 묻힌 길상헌(吉詳軒)
고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요정 시절에는 길상화와 요정 식구들이 생활했다.
김영한이 마지막 밤을 지내며 인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며, 건물 주위를
돌담으로 둘러싸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알려준다.


경내 우측(일주문을 들어서는 기준으로 왼쪽)은 좌측과 달리 자연의 비중이 높은 공간이다. 나
무가 무성하게 숲을 이루고 있으며, 북한산 남쪽 줄기(정릉 뒤쪽 산줄기)에서 발원한 계곡은 길
상사 서쪽을 가로질러 성북천(城北川)으로 흘러간다. 언덕에는 조그만 집들이 가득한데, 이들은
옛 요정의 흔적으로 지금은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제법 풍치가 깃들여진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3개 있는데, 먼저 다리를 건너면 길상헌이, 그 다
음 다리를 건너면 길상화의 공덕비를 만나게 되며. 그 다음 다리는 나무그늘과 조그만 집들로
이어진다. 그리고 극락전 뒤쪽에는 침묵의집, 길상선원, 유마선방 등이 빼곡히 자리를 메운다.


▲  길상화 공덕비로 인도하는 나무 다리

▲  창건주 길상화(김영한) 공덕비

길상화 공덕비는 창건주 길상화를 기리고자 그의 2주기인 2001년에 세운 것이다. 비석을 칭하고
있지만 앞서의 관음보살상처럼 기존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며, 비석 머리에는 사발 2개를 포개
놓은 듯한 장식물이 눈길을 끈다.
길상화가 1999년 11월 숨을 거두자 그의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한겨울에 이곳에서 그의 유
골을 뿌렸다.

나도 나중에 졸부들 못지 않은 부자가 된다면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말년에 모든 것을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대해 '그렇다'는 대답은 자신이 없다. 그보다는 우선 돈좀
왕창 벌어 정승처럼 써보고 싶다. 부자가 되야 길상화를 따라하지 지금 같은 서민 신세에 그렇
게 따라하면 큰일난다. 뱁새가 괜히 황새를 따라하다가는 가랭이가 절단나는 법이다.

◀  길상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

이 계곡은 정릉 뒷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약간의 인공이 더해졌을뿐, 자
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길상동천(吉詳
洞天)을 칭해도 손색이 없는 수려한 풍경이다.
김영한은 바로 이 계곡에 매료되어 이곳에 대원
각을 세웠다고 한다.

계곡 바위는 신선의 세계에서 몰래 슬쩍한 듯
멋드러진 모습을 자랑한다. 비록 작지만 폭포가
2개나 있는데, 물줄기가 실타래처럼 가늘어 속
세의 삶처럼 너무 답답하기만 하다.


▲  경내 서쪽 언덕에 터를 닦은 집들
요정 시절 접대 공간으로 지금은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  숲속의 오솔길 같은 경내 서쪽 산책로 ▼

경내 서쪽에는 자연의 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산책로가 그림처럼 펼쳐져 번뇌의 염통을 잠시나마
쫄깃하게 만든다. 보통은 절로 들어가는 길이 멋드러진 경우<월정사 전나무 숲길, 내소사 전나
무숲길>는 많으나 이곳처럼 경내에 어여쁜 길을 둔 경우는 그리 흔치는 않다. 자연이 어우러진
이 산책로야말로 길상사의 자랑거리이자 얼굴이다,


▲  진영각<眞影閣, 예전 행지실(行持室)>

경내 가장 서쪽에 자리한 진영각은 법정의 진영을 봉안한 건물로 그의 손때가 묻힌 저서와 유품
들이 전시되어있다.
원래 이곳은 고참 승려의 생활공간인 행지실이었다. 그러다가 2013년에 법정의 진영각으로 삼아
속세에 공개했으며, 저번 3월 7일 그의 3주기를 맞이하여 김호석 화백이 그린 진영을 봉안했다.
길상사를 야무지게 키운 인물이고 현대 불교의 한획을 그은 고승이니 그를 기리는 공간은 당연
있어야 될 것이다. 그래야 법정의 정통을 이었다는 자부심도 드높이고 법정을 좋아하는 팬들의
성원에도 보답하며 그들의 추모를 길이길이 이어갈 수 있다.
그런데 뭔가 좀 허전하다. 길상사하면 법정과 더불어 진하게 생각나는 인물. 길상화를 위한 건
물이 없는 것이다. 절은 법정이 키웠어도 절을 탄생시킨 1등 주역은 길상화인데, 그를 위한 건
물도 있어야 되지 않을까? 길상화 공덕비로는 많이 부족해 보인다. 그의 영정과 유품을 전시해
법정과 더불어 두고두고 기렸으면 좋으련만, 너무 법정만 띄우지 말고 길상화도 그와 동등한 비
율로 띄워주기 바란다.


▲  길상선원(吉祥禪院)
길상선원은 시민들을 위한 참선 공간으로 선원장(禪院長) 승려의 지도로
참선이 이루어지는 좌선방(坐禪房)이다.

▲  여염집 분위기의 적묵당(寂默堂)
신행단체 법회장소 및 석가탄신일 연등작업과 여러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전에는 유마선방(維摩禪房)이라 불렸으나 2012년에 적묵당으로 간판을 갈았다.

▲  적묵당 앞에 동그란 연못
물이 태산처럼 고인 연못에는 개구리의 운동장인 연잎이 장차 여름의 향연을 꿈꾼다.

▲  침묵(沈默)의 집

침묵의집은 중생들이 자유롭게 참선/명상을 하며 쉬어가는 열린 공간이다. 오전 10시부터 17시
(일요일은 16~17시)까지 이용할 수 있으며, 최대 인원은 8명 정도이다.

◀  침묵의집에 걸린 불화
불화 앞 탁자에는 송광사 목조3존불감의
모조품이 자리를 지킨다.


▲  길상사에서 누린 일다경의 여유 (매실차와 오미자차)

길상사 관람을 마무리하고 지장전 옆에 자리한 '나누는 기쁨' 찻집(길상사 찻집)에서 기분 좋게
차 1잔의 여유를 누렸다. 예전과 달리 리필이 안된다고 하여 많이 달라고 했더니 곱상하게 생긴
찻잔 대신 키다리 음료수 컵에 가득 담아 내준다. 보통 찻잔의 2배 이상의 양을 담아준 것이다.
차에는 잣 2~3덩어리를 조각배처럼 띄워주어 차의 맛을 높여주며, 차와 커피의 가격은 2,000~
4,000원 선으로 인사동이나 삼청동에 비해 절반에서 1/3 정도 저렴하다.

전통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긴 시간이 거의 30분 정도이다. 차의 솔솔한 향기와 차와 함께 즐긴
담소의 재미에 길상사 기둥이 썩어 문드러지고 해가 뉘엿뉘엿 꽁무니를 숨긴 것도 모르고 머물
렀던 것이다. 그야말로 찻값 본전을 제대로 뽑은 셈이다.


▲  성북동 돼지갈비집에서 먹은 돼지갈비의 위엄

속세로 나오니 어느덧 모락모락 저녁밥이 그리운 시간이다. 그래서 성북동 맛집에서 먹을 수 있
는 음식을 두고 궁리하다가 성북동 돼지갈비집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말그대로 돼지갈비를 겯드린 백반을 내놓는 식당으로 3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원래 택시기사가 많이 찾던 기사식당이나 성북동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져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늘어나자 그 후광을 단단히 받았다. 바로 옆에는 같은 메뉴를 다루는 쌍다리식당이 있어 경쟁이
대단하며, 돼지고기와 갈비백반은 1인 6~7천원으로 가격도 괜찮다. 밑반찬은 상추와 김치, 마늘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맑은 조개국이 백미로 국물이 시원하다.
한때 손님의 폭풍 증가로 배때기가 부른 나머지 불친절이 대단했다고 하나, 내가 갔을 때는 나
름 친절을 보였다. 허나 식후 커피는 무료 제공에서 100원으로 바뀌었는데, 왠만한 집은 동전이
없다고 하면 흔쾌히 제공하나 여기는 잘 안준다. 그거 원가가 얼마나 한다고 참..

길상화의 숭고한 뜻과 법정의 무소유 정신, 중생구제를 향해 고행도 서슴치 않았던 부처와 관음
보살 누님의 고귀한 뜻에 따라 세상이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오로지 중생을 위해 헌신하며, 세
속과 겉멋에 물들지 않는 순수의 불교 도량이자 도심 속의 극락, 길상사로 남기를 고대하며 이
만 본글의 펜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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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이 아름다운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성북동 나들이

 


'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성북동(城北洞) 나들이 '

▲  최순우 옛집


싱그러운 5월을 맞이하여 후배 여인네와 나의 시내 단골 답사지인 성북동(城北洞)을 찾았다.
성북동은 2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1년에 여러 번씩 들어가는 동네인데, 그렇게 질리도록 갔
음에도 돌아서면 또 가고 싶은 곳이 성북동이다. <부암동(付岩洞)과 북촌(北村)도 마찬가지>

성북동을 거론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성북동의 지형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
완사
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明堂)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완사명월형이란 밝은 달빛 아래에
비단을 펼쳐놓은 형세로 그 명당의 기운을 받고자 돈 꽤나 주무르는 온갖 졸부(간송 전형필
은 제외)들이 몰려와 고래등 같은 집을 짓고 서식하면서 자연히 부자 동네를 형성하게 되었
다. 수레가 없으면 정말 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교통이 좋지 않고 걸어다니기에는 숨이 턱까
지 오르는 산동네인 성북동에 말이다. 게다가 동쪽을 빼고는 모두 산으로 막힌 궁색한 지형
이다.
졸부들이 그런 수고로움을 마다하고 성북동을 선호하게 된 것은 명당의 기운을 받고자 하는
그들의 부질없는 욕심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니 땅값만 천정부지로 치솟아 서민들은 들어갈
공간도 없다. 그래서 어떤 이는 우리나라의 1%가 아닌 0.1%가 사는 동네라고 꼬집기도 한다.

우리 같은 서민들이 오기에는 은근히 꺼림칙한 곳이 분명하지만 아름답고 의미가 있는 명소
들이 많아 그 거부감을 감수하고 발걸음을 한다. 아무리 졸부들의 집이 크고 대문이 성문처
럼 두터워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선 일개 모래성에 불과하며, 나는 명소를 보고자 오는
것이지 졸부들의 하찮은 저택 따위를 보러 온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들러리일 뿐이다. 그러니 괜히 기죽지 말고 어깨와 가슴을 당당히 피고 관광객/답사객의 신
분으로 성북동을 둘러보자. 이곳에 서린 명당의 기운도 누리면서 말이다.

본글에서는 성북동을 거쳐간 2명의 위인,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과 혜곡 최순우의 최순우 옛
집, 그리고 조선시대 국가제단이던 선잠단터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들은 부촌과는 거리가
있는 곳에 위치해 있어 심적 부담은 크게 안가져도 된다.


♠  만해 한용운 선생이 독립을 염원하며 말년을 보낸 곳
심우
장(尋牛莊) - 서울 지방기념물 7호

간송미술관에서 삼청터널 방면 2차선 길을 10분 정도 가면 성북동 종점(1111, 2112번 종점) 못
미쳐에 심우장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그 이정표를 따라 달동네 언덕을 150m정도 오르면 오
른쪽에 문화유적 안내판이 있는 심우장이 답사객을 맞이한다. 심우장 주변은 달동네 집들로 가
득하여 대궐 같은 집으로 도배가 되어 성북로 북쪽과는 완전 대조를 보인다. 같은 성북동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크다니? 세상의 불공평함에 정말 치가 떨린다.


1933년에 지어진 심우장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조촐한 크기의 팔작지붕 건물로 고작 80년 밖
에 되지 않았고, 근래에 손질을 한 탓에 고색의 내음은 별로 없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에는 만
해가 심은 향나무가 어엿하게 성장하여 주인을 대신해 집을 지키고 있다. 심우장은 만해의 기념
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만해의 사상과 업적을 연구하고 기리는 만해사상연구소가 소유하고 있다.

~~ 1.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의 생애 ~~
만해는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洪城郡)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유천(裕天)이며, 호(號)는 만해로 7살에 홍성읍 남문리로 이사를 갔다.
위대한 인물은 떡잎부터 확연히 다르다고 하더니만 어려서부터 천재, 신동이란 말을 많이 들었
고, 무슨 책이든 한번 보면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14세에 전영주의 3째 딸인 전정숙(全貞淑)과 혼인했으며, 16세
에 뜻을 품고 집을 나와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서 잠시 고용(雇傭)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2
년 뒤에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설악산이 몹내 그리웠는지 다시 길을 떠나 백담사(百潭寺)에 들어
갔다. 그리고 스승인 김연곡(金連谷)의 권유로 머리를 깎고 출가를 했는데, 스승은 그에게 만화
(萬化)라는 이름을 주었으며, 법명을 용운(龍雲)이라 하고 호를 만해라 했다.
 
1908년에는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1명으로 원흥사(
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
하고, 왜국을 시찰하고 왔으며, 191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갔다가 1913년에 귀국, 불교학원의 선
생이 되었다. 바로 그해에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여,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해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했고, 1919년에 천도교의 손병희(孫秉熙), 최인(崔麟) 등이
몰래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고 긴밀히 연락을 취해 천도교(天道敎) 혼자서 할 것이 아
니라 각계 인사를 모아 거족적으로 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민족대표 33인이 형성되었고 삼
일운동이 일어나던 그날 오후 2시에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에 서명을 하고 낭독을 했다.
그 이후 왜경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했는데, 사식(私食)과 변호인을 거부했으며, 감옥에서
'독립의 서(書)'를 작성하여 독립선언서와 쌍벽을 이루기도 했다.

47세에 설악산으로 들어가 그 이름도 유명한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해 왜국에 저항하
는 저항문학에 앞장서고,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
城支會長)이 되었다. 1931년에는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해 청
년운동을 강화했으며, 같은 해에 여러 뜻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했다.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했고, 1937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
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이후 왜정에 배타적인 자세를 꾸준히 유지하며 불교 개혁과 문학
활동을 계속하다가 광복을 겨우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그
때 그의 나이 65세였다.


▲  만해 한용운 선생 영정

~~ 2. 만해 한용운과 심우장 ~~
만해는 3.1운동으로 3년간 옥고(獄苦)를 치르고 도심과 가까운 성북동에 셋방을 얻어 빈곤하게
살았다. 만해를 평소 존경하던 승려 김벽산(金碧山)이 어느 날 찾아와
'성북동 송림(松林) 속에 구입한 52평의 땅이 있습니다. 그 땅을 선생님께 드릴테니 그곳에 집
을 짓고 사십시요'
하면서 지금의 심우장 자리를 주었다. 허나 땅만 있지 집을 지을 자금이 없
어 집을 짓지 못했다.
그래서 만해의 부인이 친일파로 악명이 대단한 조선일보의 방응모 사장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
에게 도움을 청해 금융조합에서 대출을 받아 1933년 지금의 건물을 지었다. 건물의 면적은 약
18평으로 조촐한 크기이다.

이 건물의 특징은 그 흔한 남향(南向)이 아닌 북향(北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
쪽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있으므로(정확히는 서남쪽이다) 이를 불쾌하게 여겨 북쪽을 바
라보게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그의 굳센 독립 의지를 엿볼 수 있으며, 심우장이란 이름은 선
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이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10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되었다.

만해가 세상을 뜨자 그의 외동딸인 한영숙씨가 살았는데, 유감스럽게도 심우장 건너편에 일본대
사관저가 뜬금없이 들어서면서 이웃 동네인 명륜동(明倫洞)으로 이사를 가 버렸다. 역시 부녀간
의 질긴 피는 속이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사는 갔지만 여전히 한영숙씨 소유로 되어있음) 그런
데 어찌하여 심우장 부근에 일본대사관저가 들어섰는지는 심히 의문이다. 왜국이 싫어서 기껏
북향으로 집을 지었는데, 친일행위로 말썽이 많은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그런 것까지 배려를
하지 않고 방관한 모양이다.

이후 만해사상연구소가 이곳을 지켰으며, 만해의 기념관으로 탈바꿈하여 그의 글씨와 저서, 여
러 문서를 전시하고 있다. 또한 2004년 이후 성북구청에서 말끔히 손질하여 심우장 내부를 공개
했다. (내부 관람 가능,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됨)


▲  일창 유치웅(一滄 兪致雄, 1901~1988) 선생이 쓴 심우장 현판의 위엄

▲  만해가 머물던 방, 주인이 가고 없는 방에는 그의 숨결이 진하게 배인
여러 유품과 글씨들, 그리고 그의 초상화가 빈 방을 지킨다.

▲  심우장 뒷뜨락
현역에서 물러난 굴뚝이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옛 시절을 회상하며 우수에 젖어있다.


▲  심우장 부엌
이제는 보기 힘든 정겨운 부뚜막 가마솥 안에 잘 숙성된 누룽지가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허나 막상 열어보면 누룽지 대신 무상한 세월이 입힌 먼지만이 털털 날린다.

▲  만해의 숨결이 고스란히 묻어난 그의 글씨들 - 마저절위(磨杵絶韋)
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었다는 4자성어로 쉬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라는 뜻이다.

▲  만해(卍海)의 호가 적힌 전대법륜(轉大法輪)

▲  남국(南國)의 국화꽃 채 피지 않고 강호에
노는 꿈이 누대에 머물렀네. 기러기 그림자가
산하에 인간의 형상처럼 비추고 가이 없는 가
을나무 사이로 달이 뜨네~~

▲  양 언덕이 고요하여 일마다 한가하네. 은자
(隱者)가 자연에 도취되어 쉽게 돌아가지 못하
는구나. 산사에 미풍일고 해는 트는 듯 한데 헤
일 수 없는 짙은 가을 향기 선의를 때리누나~~


▲  만해의 온갖 저서와 관련 서적, 심우장과 그의 안내문이 있는 가운데 방

▲  심우장과 한용운의 말년을 묵묵히 지켜본 산증인들 (왼쪽은 향나무, 오른쪽은 소나무)

심우장 뜨락에는 그늘을 드리우는 오래된 나무 2그루가 자라고 있다. 왼쪽 사진의 나무는 향나
무로 수령(樹齡)이 80년이며, 성북구에서 지정한 아름다운 나무 46호이다. 오른쪽 나무는 소나
무로 수령이 90년,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1호이다. 향나무는 만해가 직접 심었다고 하며, 소
나무는 심우장이 있기 전부터 살아오던 터줏대감으로 서로 아름다움을 견주며 심우장을 수식하
는 아름다운 정원수가 되었다.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만해를 지켜보던 자연의 산물로 그의 벗이 되기
도 하고, 때로는 문학 소재가 되기도 했으며, 여름의 제국(帝國)에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겨울의 제국에는 추운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주던 그야말로 만해를 위해 모든 것을 베풀던 존재
였다. 만해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이들 나무는 여전히 살아 남아 그의 집을 지키며 이곳을 찾은
나그네에게 당시의 상황을 아련히 속삭인다.


※ 심우장 찾아가기 (2012년 10월 현재)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종점 하차,
  버스가 올라온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길 오른쪽에 심우장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 심우장은 아침 9시부터 18시(겨울은 17시 정도)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입장료는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22-1


♠  시민들이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 우리나라 고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최순우(崔淳雨) 옛집 -
등록문화재 268호

한성대입구역(4호선) 5번 출구를 나와서 성북동 방면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왼쪽 골목에 빌라와
주택 사이로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기와집 하나가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 집이 바로 우리나라
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1916~1984)이 말년을 보냈던 집이다.

이곳은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성북동의 샛별로 속세에 이름을 날린지
는 이제 5~6년 정도이고 내가 여기에 처음 온 것은 2008년이다. 아직은 간송미술관이나 길상사
등 성북동의 이름 꽤나 굵은 선배 명소에 비해 인지도는 낮지만 짧은 시간 동안 크게 부상하여
이제는 성북동의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최순우 옛집은 자칫 개발의 칼질 앞에 이슬로 사라질 뻔했던 것을 뜻있는 시민들이 발벗고
나서 개인마다 1평씩 구입하여 지킨 문화유산으로 매우 의미가 깊다. 시민들이 지키고 가꾼 시
민문화유산 1호로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문화유산기금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 집에 살았던 최순우는 1916년 4월 27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희순
(熙淳)으로 개성 송도(松都)고보를 나와 1943년 개성박물관에 입사했다. 그는 당시 개성박물관
장인 고유섭(高裕燮)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면서 고미술에 뜻을 굳혔다고 한다.

194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관과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을 지냈으며, 1950년
6.25가 터지자 한강인도교 폭파로 인해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북한군에게 잡히고 만다. 서울을
접수한 북한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당시는 북단장(北壇莊)과 보화각(葆華閣)이라 불림>에
있던 문화유산에 군침을 흘리고 박물관에서 일했던 최순우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을 불러 그것
을 모두 포장해 지정된 곳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최순우와 손재형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이 힘들여 수집한 문화유산의 북송만은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기가 막힌 눈속임작전을 감행했는데, 마침 감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奇)씨란 사람
은 어벙벙한 작자였다.

그들은 기씨에게 왜국(倭國) 판화로 된 춘화(春畵, 미성년자 관람불가급 그림)를 보여주고, 보
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쩔게 만들었다. 또한 문화유산 선
별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 이건 아니
라고 다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와라, 목수가 없다 등으로 자꾸 태클을 걸고 손재형은 일
부러 생다리에 붕대를 매면서 다리가 아프다고 연극까지 하면서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포장되
어 상자에 담긴 것은 하나도 없었다.

3달이 다되가도록 아무런 진척이 없자 뚜껑이 열린 북한당국은 사람을 보내 그들을 추궁하게 했
다. 허나 그때 우리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공격하여 점령하면서 북한군은 서둘러 줄행랑을 쳤다.
그들의 재치와 하늘의 보살핌으로 간송미술관의 유물은 모두 북송을 면할 수 있었다. 그 인연으
로 간송 전형필과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

6.25 이후 서울대와 고려대, 홍익대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으며, 1967년 이후 문화재위원회 위원
과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한국미술사학회 대표를 역임하고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어
박물관을 크게 발전시켰다. 1981년 홍익대 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4년
12월 16일 성북동 자택(지금의 최순우 옛집)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는 고미술 외에 현대미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우리나라 박물관사에 큰 업적을 끼쳤다. 주요논
문으로 '단원 김홍도 재세연대고(檀園金弘道 在世年代攷)','겸재 정선론','한국의 불화(佛畵)',
'혜원 신윤복론','이조(李朝)의 화가들' 등이 있고 저서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는 '무량수전(無
量壽殿)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와 '한국미술사'가 있다.


▲  안채 거실에 걸린 최순우 왕년의 사진과 그의 일대기가 적힌 안내문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경기도 지방 한옥 양식을 띄고 있다. 'ㄱ'자의 본채
와 'ㄴ'자의 사랑채, 행랑채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ㅁ'자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본채 뜨락에
는 닫혀진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우물이 있다. 최순우는 1976년에 이 집을 구입해 1984
년 숨을 거둘 때까지 살던 곳으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그가 사라진 이후, 개발의 칼질이 슬슬 압박을 가해오면서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태로운 신세
가 되고 만다. 이 집을 밀어버리고 빌라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뜻있는 사람들이 시민운동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를 창단해 그 집을 매입하면서 개
발의 무자비한 칼질은 그들에 의기(意氣) 앞에 보기 좋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허나 주인이 사라진 옛집은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그래서 내셔널트러스트는 2003년부터 2004년
까지 돈을 모아 복원하고 뜨락을 꾸미면서 그 집에 '시민문화유산1호'란 별칭을 주었다. 우리나
라 최초로 민간에서 문화유산을 구입해 지킨 유서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현재 안채는 전시 공간과 최순우기념관으로 쓰이고 있고, 동쪽 행랑채는 사무실, 서쪽 행랑채는
회의실과 휴식공간으로 꾸몄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은 전통식으로 아기자기하게 손질하여 나무
와 풀, 꽃이 뜰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으며, 안채 앞뜰 중앙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그늘을 드
리운다. 뒷뜨락과 모서리 공간에는 기증을 받거나 수습해온 동자상과 문인석, 맷돌, 석구(石臼)
등 다양한 석물을 배치해 간송미술관의 뜨락을 꿈꾼다. 구석마다 그들이 자리를 채우니 넓고 알
찬 느낌을 선사한다. 게다가 뒤뜰에 야외도서관을 두어 최순우가 쓴 글과 여러 서적, 그와 관련
된 서적들을 읽으며 독서의 여유도 누릴 수 있으며, 뒷뜰 뒤쪽에는 높은 담벼락으로 그늘이 가
득해 시원하다. 아무리 여름 제국(帝國)의 강렬한 햇살도 여기서는 고개를 숙이고 만다.

안채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어 사무실에 허가를 구하면 들어가게 해주며, 툇마루에 앉아 한
옥의 미와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며 쉬어갈 수 있는 도심 속의 새로운 오아시스이다. 또
한 주말과 휴일에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회 등의 이벤트가 열려 어린이와 학생, 가족단위 나들이
객들이 많이 찾는 대중적인 명소이자 살아있는 한옥 공간으로 위엄을 날리고 있다.
 
길상사의 창건주인 길상화(김영한)가 자신이 일군 고급요정을 절로 바꾸어 속세에게 선물했듯이
이 집 또한 최순우와 그의 집을 지키던 뜻 깊은 이들이 속세에 남긴 소중한 선물이자 작품이다.
또한 2006년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당당히 누리고 있다.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잠시 길을 멈춰 최순우 선생의 체취를 느끼며 툇마루
에 걸터앉아 잔잔한 불어오는 바람을 디저트로 삼으며 한옥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며 쉬어가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 최순우 옛집 찾아가기 (2012년 10월 현재)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구마을버스 03번을 타
  고 홍익중고 하차, 또는 5번 출구로 나와서 도보 10분, 길가에 최순우 옛집을 알리는 이정표
  가 있어 찾기는 쉽다
* 관람기간 : 4월 ~ 11월
* 관람요일 : 매주 화요일 ~ 토요일 (축제기간에는 일요일도 개방)
* 관람시간 : 10시 ~ 16시 (15시 30분까지 입장 가능 / 축제기간에는 17시까지 개방)
* 관람료 : 공짜 / 20인 이상 단체는 사전 예약 요망
* 옛집 내부에서는 음식 섭취 행위는 통제하고 있으며, 관리사무실에서 간단하게 전통차를 판매
  한다. (가격은 그리 착하지는 않은 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 (☎ 02-3675-3401~2)
* 건물 면적 - 대지 395.042㎡, 건평 101.92㎡, 한옥 2동
* 내셔널트러스트 최순우 옛집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밋밋하게 솟은 빌라와 주택들 사이에 고풍스럽게 들어앉은
최순우 옛집의 위엄 - 개발의 칼날도 고개를 숙인 현장이기도 하다.

▲  굳게 닫힌 최순우 옛집 대문
대문 현판이 복잡한 한문대신 한글로
쓰여져 매우 친숙하게 다가온다.

▲  안채 앞뜰에 높이 솟아 옛집에
한줄기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


▲  최순우 옛집 관리사무실로 쓰이는 동쪽 행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나는 내것이 아름답다' 등의 최순우 저서와
전통차를 판매한다.


▲  소나무 옆에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최순우와 이전 주인 일가의 식수를 제공했던 네모난 우물,
허나 지금은 뚜껑이 닫힌 채 겉모습만 남아있다.

▲  수풀 사이에 고개를 내민 조그만 동자상
최순우 옛집을 복원하면서 우리나라 어딘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  여러 석물과 방석, 여러 서적들이 놓인 뒷뜨락 남쪽(야외도서관)
돌의자에 놓인 책은 마음껏 볼 수 있으며, 돌의자나 안채 뒷쪽 툇마루에
걸터앉아 독서에 임하면 된다.

▲  조그만 맷돌과 빗물을 머금은 석구(石臼, 돌통)

▲  돌이 박힌 뒷뜨락 돌길과 장승 2기

돌길이 우리네 인생처럼 너무 짧다.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끝나기 때문이다. 그 앞에는 재미있
게 생긴 장승 2기가 돌길을 지킨다.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얼굴을 보
고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발길을 돌릴 것이다.


▲  탁자가 중심이 된 뒷뜨락 북쪽

둥그런 탁자 주변에는 머리에 방석을 쓴 키 작은 돌의자 7개가 둘러져 있다. 저들은 독서와 이
야기꽃을 피우는 공간으로 탁자에는 최순우 옛집과 내셔널트러스트 관련 자료가 놓여져 있다.
탁자 주변에는 장독대와 조그만 돌통이 있는데, 장독대에는 무언가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으리
라 생각하겠지만 저들은 속이 빈 장식용이다.


▲  옛집의 서쪽 모서리를 지키는 2기의 조그만 문인석(文人石)
저들의 표정에 부질없는 세월의 고된 모습이 묻어난 듯 하다.

▲  시민들의 조촐한 휴식 공간 안채 뒤쪽 툇마루

▲  최순우 선생의 기품과 학식이 고스란히
묻어난 안채 내부 - 복원하는 과정에서
꾸며진 부분도 적지 않다.

▲  주말 오후에는 어린이와 학생, 가족단위
손님들로 툇마루가 무너질 지경이다.


▲  마루에 놓인 함지박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도장과 조그만 자기들
혜곡의 손떼가 묻어난 그의 유품들이다.

◀  최순우 옛집의 뒷통수 (안채 서쪽 담장길)
흙으로 만든 토담과 시냇물의 징검다리처럼 박
석(薄石)이 박힌 정겨운 담장길, 담장 너머가
자연의 공간이거나 한옥이었다면 그 운치는 곱
배기가 되었을텐데, 빌라와 슬레이트 지붕이 그
자리를 대신하니 그나마 우러난 정겨움과 운치
도 절반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지우개가 있다
면 담장 밖 풍경을 싹싹 지우고 싶을 뿐이다.


  양잠(養蠶)의 번성을 기원하던 조선시대 제단의 흔적
선잠단지(先蠶壇址) -
사적 83호

▲  선잠단터 표석과 누런 잔디

성북초등학교 3거리 동쪽 모퉁이에 조선시대 주요 제단이었던 선잠단이 있다. 지금은 잔디로 뒤
덮인 옛 제단터와 표석, 근래에 세운 홍살문, 그리고 무성하게 자라난 뽕나무만이 이곳이 신성
한 장소였음을 보여줄 뿐, 장엄했던 제단의 흔적은 사라졌다. 마침 우리가 갔을 당시는 선잠제
례가 열렸던 날이 선잠단이 간만에 빗장을 열어 처음으로 내부에 들어갔다.

선잠단은 누에를 관장하는 잠신(蠶神)인 서릉씨(西陵氏)에게 양잠의 번성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
내던 제단으로 그 제례를 선잠례(先蠶禮)라고 한다. 선잠례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어 조선 개국
이후, 8년 정도 중단되었다가 1400년(정종 2년) 3월 초사일(初四日)부터 다시 행해졌다.

세종은 각 도에 괜찮은 땅을 골라 뽕나무를 심고, 잠실(蠶室)을 지어 누에를 키우게 했으며 중
종(中宗)은 각 도의 분산된 잠실을 지금의 서울 송파구(잠실)와 서초구(잠원동) 일대로 집합시
켰다.
<서울 잠원동 한신신반포16차아파트 부근 도로변에 그 당시 재배하던 수령(樹齡) 400년의
뽕나무 1그루가 유일하게 남아있으나 오래 전에 숨을 거두어 지금은 몸뚱이만 남았음>

1471년 성종은 선잠례를 지내기 위한 장소로 동소문(東小門, 혜화문) 밖 지금의 자리에 선잠단
을 세웠는데. 단을 쌓은 방법은 사직단(社稷壇)과 비슷하나 남쪽으로 한 단(段) 낮은 댓돌이 있
고, 그 앞쪽 끝에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어 궁궐 잠실(蠶室)에서 키우는 누에에게 먹였다. 1477
년에는 창덕궁 후원에 채상단(採桑壇)을 만들어 누에치기를 장려하는 차원에서 왕비가 직접 누
에를 길러 실을 뽑는 이른바 친잠례(親蠶禮)를 지냈다.

선잠례는 매년 3월 초사일(初四日)에 지내는데 신하를 보내 제례를 주관했으며, 풍악을 울리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일조의 제례악(祭禮樂)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의식은 순종 시
절까지 이어져 오다가 1908년 7월(순종 융희 원년), '칙령(勅令) 제50호 <향사리정(享祀
釐整)에
관한 건>'에 의해 국가에서 관리하는 사당과 제단을 정리하면서 선잠단과 선농단(先農壇, 서울
제기동)의 신위(神位)는 모두 사직단(社稷壇)으로 옮겨지고 선잠단은 그 몸뚱이만 남게 되었다.
허나 왜정 때 왜인(倭人)들이 사직단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하던 선잠단을 말끔히 파괴시켰고,
그 터마저 민간에 팔아 먹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뒤늦게 조선의 문화재를 조사하면서 1939
년 그 터를 보물 17호로 지정해 앞과 뒤가 전혀 안맞는 행동을 보였다,

해방 이후, 터만 황량하게 남아 오던 것을 1960년대에 약 4만원의 돈을 들여 제단터를 정비하고
표석을 세웠으며, 그 이후 성북구청에서 선잠단 주변 528평을 매입해 홍살문을 세우고 뽕나무를
무성하게 심었다. 특히 이곳 뽕나무는 나이가 60~7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
무로 지정되어 그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낸다.

성북구는 매년 5월 초,중순에 열리는 성북구의 주요 축제, 아리랑축제에 맞춰 선잠제(先蠶祭)를
거행한다. 제례가 열리는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문은 굳게 닫혀있으며, 내부로 들어가고 싶다면
성북구청 문화체육과에 문의한다.

참고로 선잠단터 북서쪽인 성북초교 뒤쪽에는 농업을 관리하는 별인 영성(靈星)에게 제를 지내
던 조선시대 제단인 영성단(靈星壇)이 있었다. 이 역시 1908년에 순종의 칙령에 따라 선잠단과
더불어 폐쇄되었다.


▲  선잠단 홍살문과 간만에 빗장을 연 정문
나라에서 신성시 하던 제단은 사라지고 홍살문의 위엄은 녹아내린지 오래지만
근래에 다시 솟아난 홍살문은 예전의 위엄을 내보이고자 애써 안간힘을 쓴다.

▲  뽕나무가 무성한 선잠단터 내부

▲  선잠단터 표석에서 바라본 모습

간송미술관과 가까워 그곳을 찾을 때마다 후식으로 꼭 둘러보는 선잠단터. 역사의 뒤안길로 초
라하게 사라진 이곳에는 그저 쓸쓸함만이 가득하다. 무성하게 우거진 뽕나무는 이곳의 허전함을
조금이나마 덮어준다.
 
※ 선잠단터 찾아가기 (2012년 10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초교 하차,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2분 걸으면 성북초교3거리가 나오는데, 길 건너 홍살문이 있는
  곳이 선잠단터이다, 도로변에 있어서 홍살문이 어떻게 생겼는지만 안다면 찾기는 매우 쉽다.
* 선잠제례는 매년 5월 초/중순에 아리랑축제 기간에 열리며 자세한 일정은 성북구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여기를 클릭)를 참조한다. 문의는 ☎ 02-920-3048
* 선잠단터는 선잠제례 때만 공개한다. (가끔 랜덤으로 공개되는 경우도 있음) 관람을 원할 경
  우에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02-920-3413)에 문의하면 되며, 인근 선잠단 지킴이가 와서 문을
  열어 주거나 상황에 따라서는 월담(?)도 허가해준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64-1


▲  성북동집에서 먹은 칼국수와 만두 ▼

간송미술관에서 심우장으로 가는 길목에 '성북동집'이란 조그만 식당이 있다. 마치 시골이나 시
장의 어느 식당처럼 조촐한 인테리어로 자칫 지나치기는 쉽지만 여러 길손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정도로 칼국수와 만두가 일품이다.
이곳은 성북동의 주요 맛집의 하나로 칼국수는 양이 좀 많아 만두를 겯드릴 경우 하나만 주문하
여 나눠먹어도 된다. 반찬은 김치와 열무김치가 전부이며, 칼국수와 만두의 가격은 7,000~8,000
원 선으로 성북동에서는 그런데로 저렴한 편에 속한다.

♣ 성북동 추천 명소와 맛집
* 추천 명소 - 선잠단터, 이종석별장, 수연산방<壽硯山房, 이태준가(家)>, 심우장(尋牛莊), 삼
  청각, 길상사(吉祥寺), 최순우 옛집,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북악산 산행(숙정문,
  백악마루, 촛대바위), 와룡공원, 정법사, 한국가구박물관, 성락원(城樂園, 관람 거의 불가),
  최사영 고택(십주원, 관람 불가)
* 맛집
- 성북동집(만두와 만두국, 02-747-6234), 쌍다리식당(돼지불고기 백반, 02-743-0325),
  성북동돼지갈비집(돼지불고기 백반, 02-764-2420), 금왕돈까스(02-763-9366), 서울돈까스(02-
  766-9370), 성북동메밀수제비/누룽지백숙(02-764-0707), 수연산방(찻집, 02-764-1736)


* 성북동 관련 본인 작성 기행문들

① 간송미술관 ☞ 보러 가기  
② 길상사 ☞ 보러 가기
③ 삼청각 ☞ 보러 가기
④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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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10월 19일부터
 
* 글을 보셨다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바로 밑에 있는 네모 박스 안에 View on을 흔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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