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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11.30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홍제천 늦가을 산책 (세검정, 석파정별당, 석파랑, 홍지문 탕춘대성,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2
  2. 2018.04.24 상큼한 경승지를 많이도 간직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둘러보기 ~~~ (세검정, 석파랑, 석파정별당, 홍지문,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3. 2013.04.26 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종로구 부암동 산책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홍제천 늦가을 산책 (세검정, 석파정별당, 석파랑, 홍지문 탕춘대성,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부암동 늦가을 산책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늦가을 나들이 '

홍지문과 탕춘대성

▲  홍지문과 탕춘대성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세검정

▲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세검정

 



 

종로구 북부에 자리한 부암동(付岩洞)은 북한산(삼각산)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에 포
근히 감싸인 산골 분지이다. 전원(田園) 분위기가 진하여 여기가 과연 서울 한복판이 맞
는지 심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자연과 어우러진 늙은 경승지(세검정, 홍지문. 백
석동천 등)는 물론 미술관 등의 문화공간(환기미술관, 서울미술관, 자하미술관 등)도 풍
부하여 나들이의 깊이와 재미를 더해준다.
바로 그런 매력 때문에 한참 전인 20대의 한복판에 부암동과 백석동천(백사실계곡)에 퐁
당퐁당 빠져버렸고, 이후 1년도 거르지 않고 매년 여러 번씩 발걸음을 하여 나의 마음을
비추고 있다.

사계절 가운데 가장 처절하게 아름답다는 늦가을이 서서히 희미해져 가던 11월 한복판에
어느 볕 좋은 날, 늦가을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과 자연산 망막에 하나라도 더 담고자 간
만에 부암동을 찾았다. 이때가 지나면 가을 단풍은 90% 이상 지게 된다. 하여 후회가 없
도록 열심히 늦가을의 바퀴자국을 남겨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늦가을 풍경은 4계절 가운데 으뜸이다.



 

♠  서인 패거리들이 반역(인조반정)을 꿈꾸며 칼을 씻던 곳, 도성 밖
경승지이자 서울 시민들의 소풍/피서지로 인기를 누렸던
세검정(洗劍亭) - 서울 지방기념물 4호

신영동3거리에서 상명대, 홍은동 방면으로 5분 정도 걸으면 큰 바위에 걸터앉아 홍제천(弘濟
川)을 바라보고 선 단아한 모습의 세검정이 마중을 나온다.

세검정은 팔작지붕을 지닌 'T'자형 정자로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다소 말들이 많다. 연산군이
1506년에 탕춘대(蕩春臺)를 조성하면서 그 부속 정자로 세웠다는 설도 있고, 숙종(肅宗) 시절
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하던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허나 둘
다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로 연산군 때 세워진 탕춘대 부속 정자가 세검정의 전신(前
身)이 아닐까 싶다.

세검정의 세검(洗劍)은 칼을 씻는다는 뜻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통치에 쓸데없이 불
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같은 것들이 여기서 광
해군 폐위를 모의하고 그 결의를 다지고자 칼을 물에 씻었다고 한다. (혹은 칼을 갈고 날을
세웠다고 함)
그들은 역촌동(驛村洞)에 별서를 짓고 살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을 앞세워 창의문(彰義門
)을 뚫고 도성(都城)을 침범, 창덕궁(昌德宮)을 점령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군주
로 옹립한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저지른다. 이렇게 정권을 빼앗은 서인 일당은 반역을
모의하고 칼을 씻었던(또는 갈았던) 현장을 길이길이 추억하고자 정자 이름을 세검정이라 했
다고 전한다.

1748년 정자를 일부 수리했으며, 1941년 화재를 만나 겨우 주춧돌 하나만 남아있던 것을 1977
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세검정은 '세검정터'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4호로 지정되어 있음)

▲  옆에서 바라본 세검정

▲  세검정의 뒷모습

세검정은 주변 풍경과 조화를 꾀하며 지어진 정자로 규모는 작지만 홍제천과 차일암 등의 잘
생긴 바위들 그리고 북한산(삼각산)의 시원스런 숲이 서로 어우러진 그림 같은 현장이다. 그
러다보니 도성 밖 경승지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도 이곳을 찾아와 세검정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또한 질 좋은 바위들이 많아
서 덕수궁(경운궁) 석조전(石造殿) 기초공사 때 이곳 화강암을 뜯어와 조성했다.

구한말(舊韓末) 이후에는 양반과 귀족들 외에 일반 백성들도 나들이로 많이 찾아왔으며, 서울
시내의 여러 신식 학교들도 이곳을 소풍지로 삼았다. 특히 1899년 5월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
) 여학생들이 여기로 소풍을 나왔는데 그것이 이 땅 최초의 여학생 소풍으로 당시 '조선 그리
스도인 화보'에는 그때의 사연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정동 이화학당 여학도들이 1년 동안을 애쓰고 공부하다가 봄빛을 따라 창의문 밖으로 화류(
花柳) 구경 갔더라 하니 우리가 매우 치하하는 것은 여학도의 화류는 500년에 처음이라..'

왜정(倭政) 이후, 서울 시민들의 소풍 및 피서지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세검정 주변 신영동
과 홍지동은 자두와 능금 명산지로 유명하여 여름만 되면 그들의 달달한 향기가 동네에 진동
했다. 지금으로서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을 세검정이 지녔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세검정은 1970년대 이후 모진 변화를 강요 받게 된다. 천박한 개발의 칼
질이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부암동과 신영동 지역에 들이닥친 것이다.
한적했던 동네에 집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면서 그들이 내뱉은 생활폐수로 세검정을 윤기 나
게 했던 홍제천은 악취가 진동하는 저주받은 하천으로 전락하였고, 능금과 자두가 자라던 곳
도 주택 개발에 밀려나 자취를 감추었으며, 세검정 옆을 지나는 도로(세검정로)가 확장되면서
운치가 적지 않게 깎여나갔다.

현재 세검정은 뒷통수를 지나는 차량들의 소음과 매연, 그리고 아직도 덜 걸러진 홍제천의 쾌
쾌한 냄새로 매일 고통을 받고 있다. 홍제천이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비린
내는 여전하며 하천 너머로 주택들이 가득해 옛날의 운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긴 서울 땅
에서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거나 고립된 경승지가 어디 한둘이랴. 너무 사람과 개발만
생각하여 일을 저지르다보니 옛 경승지와 자연을 전혀 배려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  세검정의 오랜 단짝, 차일암(遮日巖)

세검정 밑에는 하얀 피부의 넓직한 반석이 누워있는데, 이 바위가 조선 때 사초를 깨끗히 세
초(洗草)했던 차일암이다.
세초란 사초(史草) 등에 적힌 글씨를 물로 빡빡 씻겨 지우고 그 종이를 다시 쓰는 것으로 그
것을 마치면 뒷풀이로 세초연(洗草宴)을 벌였다. 사초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모태
가 되는 데이터로 제왕이 죽으면 바로 사초를 정리하여 실록을 편찬했다.

차일암은 세검정을 수식하며 서울 장안의 이름난 경승지이자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었다. 무더
운 날씨에 벌러덩 누워 한잠 청하고 싶을 정도로 잘생긴 바위로 근래에 여기서 세검1교 밑도
리로 징검다리가 놓였는데, 그 다리를 통해 홍제천 산책로를 따라 홍지문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다.


▲  늦가을이 잔잔히 깃든 세검정 산책로

▲  세검정 동쪽 홍제천 산책로
빌라 너머로 보이는 산자락에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  세검정 동쪽 산책로(세검정성당 건너편)에서 바라본 세검정
세검정 너머로 상명대와 탕춘대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 세검정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168-6 (세검정로 244)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한옥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호

▲  석파랑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

세검정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상명대입구인 세검정교차로이다. 여기서 서남쪽 길 건너편으
로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고래등 기와집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그 집이 석파정별당을 품고
있는 석파랑(石坡廊)이란 고급 한정식당이다.

지금은 비록 식당이지만 원래는 서예가이자 문화유산에 조예가 깊었던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
馨, 1903~1981)이 살았던 곳이다.
그는 6.25시절 서울을 점령한 북한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담긴 문화유산을 죄다 빼돌리
려고 하자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와 함께 뛰어난 재치로 문화유산의 강제 북송을 막아냈으
며 <자세한 내용은 ☞ 간송미술관 글 참조> 왜열도로 넘어간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세한도(阮
堂歲寒圖, 국보 180호)를 천신만고 끝에 품에 안고 온 인물로도 유명하다.

소전의 집은 새로 지은 것이 아닌 조선 후기 한옥을 옮겨온 것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옥인동(玉仁洞) 집을 1958년에 매입하여 가져왔다. 이때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이자 바로 근처에 자리한 석파정(石坡亭)에서 별당까지 떼어와 집
뒤쪽에 두었다. 또한 운현궁(雲峴宮)과 덕수궁(경운궁)에서도 돌담과 한옥을 사들였으니 그의
재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당시로는 그리 흔치 않았던 서양개 세퍼드를 여러 마리나 키우
고 있었다고 함)
소전이 1981년 세상을 뜨자 집은 다른 이에게 넘어가 비싼 한정식당으로 바뀌었으며, 석파정
의 이름을 따서 석파랑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오랫동안 손님 외에는 내부 접근이 어려웠으나
2000년대 이후 해방되어 마음 편히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이곳은 부암동의 주요 명
소로 성장하여 사진쟁이와 답사객의 발길이 나날이 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개인이
운영하는 식당이기 때문에 답사와 출사를 한답시고 별당 등 건물 내부로 마구 들어가서는 안
된다.


▲  석파랑 본채 북쪽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ㄱ'자 형태로 3개의 방으로 이루어
져 있다. 가운데 큰 방이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며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외벽은 벽돌로 도배해
속살을 가리고 가운데에 동그란 창을 냈다. 이는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소전에게 별당을 빼앗긴(?) 석파정은 오랫동안 비공개로 일관하다가 2012년 겨울에 비로소 공
개되었다. (서울미술관 개장으로 개방됨)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법칙에 따라 별
당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서로 소유자가 달라서 이 또한 쉽지가 않을 것
이다. <석파정은 서울미술관 소유, 석파정에서 떨어져 나온 별당은 석파랑 소유>


▲  석파정 별당 쪽마루와 섬돌
대청방 문을 살며시 열면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섬돌에 신발들이 가득 있는 것을 보니 가운데 방에서 사람들이
한정식을 먹고 있는 모양이다.


석파정 별당은 현재 식당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결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대원군의 별
장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의 밥먹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 없이 깨끗하게
보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뭐 봐줄 만은 하겠다. (아직 방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음)
별당으로 다가서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으로 접근하거나 석파랑 전용 주차장에서 스톤힐로 이
어지는 돌계단을 타고 들어가면 된다.


▲  150년 이상 묵은 석파랑 감나무 (가운데 나무)

별당 옆에 조성된 돌계단과 돌문, 성곽처럼 다져진 석축은 석파랑에서 스톤힐이란 건물을 지
으면서 닦은 것들이다. 스톤힐(Stone hill)은 이탈리아 음식과 술을 취급하는 식당으로 석파
랑 주인의 딸이 운영하고 있는데, 전통과 고풍스런 멋이 깃든 석파랑과 180도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그 옆구리에는 홍지동 산신당이 있다.
돌의 언덕을 뜻하는 '스톤힐'에 걸맞게 하얀 돌로 그 길목을 꾸민 것이 참 이색적이다. 하지
만 소나무가 무성한 주변 풍경과는 썩 어울려 보이지 않으며 스톤힐을 만들면서 석파정 별당
의 석축까지 진하게 다져놓아 마치 성곽 위에 집처럼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  활짝 열린 석파랑 대문(정문)
이곳에서 밥을 먹지 않더라도 사진쟁이와 답사객들에게 석파정 별당과 뜨락을
흔쾌히 개방하고 있다. 허나 예전에는 비싼 밥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에게만 입을 벌리던 차가운 문이었다.

▲  경복궁에서 가져온 만세문(萬歲門)

석파랑 본채는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청나라식 호
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뜨락에 세워진 만세문은 고종(高宗)이 황제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자
1898년 경복궁에 세운 것으로 궁궐 건축물의 고품격이 고스란히 배여 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뜨락에는 곳곳에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으며 조그만 절구통과 다
양한 석물, 꽃, 나무 등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  석파랑의 중심인 본채
최대 50명까지 밥 손님 수용이 가능하며, 석파랑의 값비싼 한정식을
지어내는 부엌이 이곳에 들어있다.

▲  석파랑 본채 뒤쪽에 숨겨진 붉은 장독대들
저들 속살에는 무엇이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을까? 한번 들춰보고 싶다.
한정식당이니 고추장이나 김치, 간장 같은 것이 들어있을 것이다.

▲  석파랑 뒤쪽에 자리한 홍지동(弘智洞) 산신당

석파랑 뒤쪽이자 스톤힐 옆에는 붉은 피부 벽에 푸른 기와를 지닌 조그만 집이 있다. 얼핏보
면 창고처럼 보여 그냥 지나쳐도 아쉬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문 위에 걸린 '산신당' 현판이
보여주듯 홍지동의 안녕을 오랫동안 지켜주던 산신당이다.

세검정 주변 동네(신영동, 홍지동, 부암동)에는 4개의 산신당이 전하고 있다. 그중 석파랑 뒤
쪽 산신당은 홍지동을 담당하고 있는데, 매년 음력 8월 1일 동네 사람들이 산신제를 지낸다.
특이한 것은 나머지 산신당도 같은 날 제를 지낸다는 것이다. 굳게 닫힌 당집 안에는 산신 부
부가 그려진 그림이 봉안되어 있으며, 오로지 제사날과 일부 날(청소하는 날 정도)에만 잠깐
씩 열어두고 있어 평소에는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다.

산신당 주변은 나무와 풀만 있었으나 주변 땅을 소유하고 있는 석파랑이 산신당 바로 옆에 스
톤힐을 지으면서 보기가 좀 딱하게 되었다. 한때는 동네 성지(聖地)나 다름 없던 산신당의 존
재감이 크게 하락한 지금의 세태를 보여주듯이 말이다. 허나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
다고 스톤힐 덕분에 계단이 닦이면서 접근성 하나는 좋아졌다.

* 석파정별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2 (자하문로 309, 석파랑 ☎ 02-395-
  2500)


▲  세월 속으로 사라진 부침바위를 추억하는 표석

부침(붙임)바위는 부암동의 지명 유래가 된 유명한 바위이다. 바위 피부에 난 구멍에 돌을 대
고 비비면서 소원을 빌거나 바위에 붙인 돌에서 손을 떼었을 때 그 돌이 척 붙으면 아들을 낳
거나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로 한때 북새통을 이루
었다.

옛날부터 뿌리 깊게 박힌 아들 선호 사상이 빚어낸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애듯한 현장으로 바
위 높이는 2m 정도 되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잘 남아있었으나 개발의 칼질에 무참히 난도
질을 당해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바위터에 표석을 세워 그가 있던 자리임을
아련하게 전해줄 따름이며, 세검정교차로 공원에 그를 추억하는 표석을 세웠다. 허나 아무리
그런다고 강제로 사라진 그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서울 땅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잘생긴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도
시화의 거친 물결과 인간의 욕심으로 많은 바위가 세월의 저 편으로 강제로 사라지고 말았으
니 실로 안따깝기 그지없다.



 

♠  한양도성과 북한산을 이어주며 도성의 수비력을 높였던 탕춘대성
(蕩春臺城)과 홍지문(弘智門)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


▲  홍지문과 오간대수문

석파랑을 둘러보고 홍은동(弘恩洞)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이란 성문과 탕춘대성이라
불리는 성곽이 마중을 나온다. (석파랑 옆 세검정교차로에서 훤히 바라보임)

홍지문을 거느린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이어주던 산성(山城)으로 연산군이
세검정 부근에 지은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
고 해서 서성(西城)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겹성이란 별칭도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이 만약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년 신완(
申琬)이 성곽 축조를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도성 보수가 마
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짓고자 1715년 홍제천에 홍지문을 먼저 닦
았다. 그런 다음 1718년 8월 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10월 6일에 일
단 공사를 멈추었다가 1719년 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되
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북쪽에서 시작하여 인왕산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선
을 거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로 원래는 북한산성까지 이
으려고 했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하여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능선,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싹 취소
되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의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
에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그래서 홍
지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는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
대능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잘 남아있다.


▲  홍지문의 당당한 앞 모습
홍지문은 더 이상 서울 수비의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문화유산과 관광지의 의무와 성격만 지니고 있으며,
문은 24시간 열어두고 있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홍제천 협곡에 지어진 것으로 탕춘대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탕춘대능
선에 있는 암문은 제외)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한북문(漢北門)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는
데, 200년 이상 별탈 없이 살아왔으나 1921년 1월에 지붕에 쌓인 세월의 장대한 무게를 감당
하지 못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에는 홍제천의 물을 흘려
보내는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까지 홍수로 모두 떠내려가면서 터만 겨우 남아오다가 1977년
7월 복원되었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원할
때 새로 맞춘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있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
해 문루와 오간대수문을 금지 구역으로 삼았으며, 오간대수문에서 탕춘대능선 방향 성곽 300m
정도가 통제되어 탕춘대능선을 가려면 홍지동 주택가나 옥천암 주변으로 돌아가야 된다. 그리
고 문 남쪽으로 세검정로가 지나고 있어 성곽이 잠깐 단절되어 있으나 그 길을 넘으면 성곽은
다시 소소하게 율동을 부리며 인왕산으로 뻗어간다.
성문 앞뒤로 나무가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닦여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오간대수문 바로 밑
홍제천 변에 산책로가 닦여져 오간대수문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다. 또한 문을 경계로 성 안
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이다.


▲  홍지문의 뒷모습

   ◀  홍지문 천정에 그려진 와운문(渦雲紋)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
하다.

▲  홍체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오간대수문의
북쪽 홍예문들

▲  오간대수문 북쪽 끝 홍예문


오간대수문 윗도리는 금지된 다리라 두 발을 들일 수 없지만 아랫도리는 근래 홍제천 산책로
가 닦이면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살펴보는 오간대수문의 속살, 비록 하천에서 약간
비린내가 풍기긴 했으나 그 정도 냄새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임)

홍예문 위쪽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물이 흐르는 수문이다 보니 물을 관장하는
용을 수호용으로 넣은 듯싶다. 5개의 수문 중, 북쪽 기준으로 1,2,5번째 문은 바닥에 돌이 입
혀져 있고, 3,4번째 문은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내려 홍제천이 흥분하는
경우에는 5개 문이 모두 수문이 되버린다.

* 홍지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하얀 피부를 지닌 거대한 고려시대 마애불
옥천암(玉泉庵)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0호

 홍제천 남쪽에서 바라본 옥천암 (왼쪽은 마애보살좌상,
오른쪽이 옥천암)

홍지문에서 한강을 향해 열심히 길을 재촉하는 홍제천을 따라 서쪽으로 7분 정도를 가면 홍제
천변 커다란 바위에 깃들여진 하얀 피부의 커다란 불상이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바로 이곳의
명물이자 상서로운 관세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이다.

문화재청은 그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지역 사람들은 '보도각 백불(普渡
閣 白佛)'로 많이 부르고 있다. (나도 그 명칭이 버릇이 되었음) 여기서 보도각(普渡閣)은 하
얀 마애불과 바위를 보듬은 보호각의 명칭으로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또
한 홍제천변에 있어서 옛날부터 '해수관음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강제로 하얀 피부
가 된 19세기 이후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과 '백불' 등의 별칭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백
불'은 구한말에 양이(洋夷)들이 그를 보고 'White Buddha'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애불 옆에는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암자인 옥천암이 둥지를 틀었으며,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홍제천에 걸린 보도교(普渡橋)란 유연한 곡선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다리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작은 문이 있는데, 바로 옥천암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 다리 끝에 달린 흥미로
운 현장으로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도각 백불(마애불)이, 오른쪽 언덕에 옥천암이 자리
한다.


 보도각에 깃든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으며 홍제천 바람을 쐬고 있는 이 마애불은 서울에 전하는
늙은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서울에서 딱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 마애불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안암동에 보타사(寶唾寺)란 절이 있는데, 그곳에 옥천암 백불과 비
슷하게 생긴 하얀 피부의 마애불이 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조성 시기도 비슷한 고려 후기로
여기서 가까운 승가사(僧伽寺)의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개성
(開城)에 있는 관음굴 석조보살반가상과 비교되는 고려 말 불상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존재
로 평가되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서울로 천도하고 그를 찾아와 예불을 올렸다고 전하며 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가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는 성현(成俔, 1439~
1504)이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옥천암 백불을 부처바위를 뜻하는 불암(佛巖)으로 기재
했다. 그것이 이곳에 대한 첫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장군이 여기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
데, 어리석은 왜군은 백불을 그만 조선군으로 잘못 알고 조총을 정신없이 쏘아댔다. 그렇게
탄환을 다 소비한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그들을 완전히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홍제천의 물결을 따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백불을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띄우고자 근처
에서 일어났던 권율 장군의 왜군 토벌전을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까
지 찾아와 아들의 천복(天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호분(胡粉,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으로 불상을 하얗게 도배를 하면서 이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백불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얀 피부가 되면서 마애불은 다소 젊어 보이게 되었으나 대신 문화유산의 큰 매력인
고색의 기운이 다소 꺾여 그리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는다.

 보도교에서 바라본 보도각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보도교 끝에 자리한 맞배지붕 일주문


백불의 높이는 5m 정도로 그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예로부터 영험이 깊은 석불로 명성이 높았
다. 그 앞에 닦여진 공간에는 그의 영험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특히 입시철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백불에게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리는데, 생긴 모습부터
가 예사롭지가 않다.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와 비슷하게 돌(또는 동전)을 바위에 붙이
거나 위로 던져서 바위 위에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매달린 작은 돌과 동전
이 적지 않다. (동전은 계속 수거하고 있어 요즘은 별로 안보임) 그래서 불상이 이곳에 깃들
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소박한 현장으로 쓰였을 것이다.

보도각 앞에는 홍제천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둘러져 있었으나 2016년 이후 그 돌담을 밀면
서 정면이 확 트였다. 키 작은 난간이 돌담 대신 둘러져 있으며 난간 앞에는 나무데크로 지어
진 홍제천 산책로가 닦여져 있고, 그 앞 홍제천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반석들이 가득하다.
한때 서울 근교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비린내 풍기는 하천으로 떨
어지면서 그 반석이 다소 아깝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속세를 상징하는 그런 하천을 걱정스럽
게 굽어보며 중생을 걱정하는 불상의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따뜻한 모습 같다.

그의 몸은 모두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주황색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모두
하얀색이었으나 이후 금색으로 칠했고, 2016년 이후 주황색으로 바뀌었음) 오른손에 걸린 팔
찌, 삼도(三道) 아래로 커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寶冠),
그리고 귀에 건 귀걸이까지 정말 관세음보살 누님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그의 얼굴은 거
의 포근한 인상으로 중생들의 소원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다 들어줄 것만 같다.


▲  보도각과 붙임바위의 뒷모습

▲  마애보살좌상의 잘생긴 얼굴과 윗도리

홍제천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두 눈은 '一'자 모습으로 지그시 떠 있고, 긴 머리카락은 어깨
까지 닿는다. 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불상의 몸을 덮고
있는 옷 주름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데 왼
팔이 너무 길어 보이며 앉아있는 모습치고는 아랫도리가 좀 넓게 표현되어 신체 균형이 다소
맞지 않는다.

백불 앞에는 중생들이 정성스레 기도를 올리며 소망을 슬쩍 내밀고 있었다. 그들의 갖은 소망
을 접수하느라 힘도 제법 들텐데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한결 같은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
하며 소망 하나라도 누락될까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 정성이 부디 백불과 하늘을 감동시켜 나를 포함한 중생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
지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  백불 옆에 자리한 옥천암

백불 동쪽에는 그를 후광으로 삼은 옥천암이 자리하고 있다. 백불이 관세음보살이라 자연히
관음도량을 칭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3대 관음도량으로 양양 홍련암(紅蓮庵), 남해 보리
암(菩提庵), 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를 꼽는다. 허나 옥천암도 관음도량으로서의 자부심
이 대단한지 비공식적으로 자신들을 포함시켜 4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우기기도 한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약효가 있다는 샘물(혹시 탄산약수가 아닐까?)이
있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하며, 그 연유로 옥처럼 맑은 샘물을 뜻하는 옥천암을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약수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오래전에 사라졌고, 절 앞을 흐르
는 홍제천 또한 세월에 고되게 대이면서 그런 모습은 이제 전설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 절은 언제 지어졌는지 전해오는 것은 없다. 다만 인근에 조선 초기까지 잘나갔던 장의사(
藏義寺, 세검정초교 일대에 있었음)가 있어 백불을 관리하는 부속 암자로 지어진 듯 싶으며,
세검정 맞은편에는 혜철선사(惠哲禪師)가 1396년에 태조 이성계의 도움으로 세웠다는 소림사
(小林寺)가 있는데, 그 절의 부속암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두 부질없는 메아리이다.

이곳의 사적(事績)이 본격적인 등장하는 것은 1868년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
淨觀)이 관음전(觀音殿)을 세워 천일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
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 6칸과 요사(寮舍) 3칸을 고쳤
다.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수리했으며, 이후 삼성각, 요사 등을 추가로 갖추었
으나 1987년 삼성각이 소실되고 1988년 법당인 수덕전(修德殿)을 지으면서 삼성각의 기능은
수덕전에 통합되었다. 1989년에 종각을 만들고 1990년 설법전(說法殿)을 지어 요사의 기능도
겸하게 했으며, 1996년에 홍제천에 보도교란 다리를 닦고, 1998년에 일주문을 지었다.

북한산(삼각산)의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으며 홍제천변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경내 확장이
좀 어렵다. 바로 동쪽에는 주택가가 붙어있고 뒤쪽(북쪽)과 서쪽은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 자락이기 때문이다.

옥천암은 내부까지 들어가지 않고 백불을 보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지금까지 적지 않게
인연을 지었던 곳이고 경내는 백불 외에는 딱히 나를 흥분시킬 존재도 없기 때문이다.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을 끝으로 늦가을에 벌인 부암동 늦가을 만행(漫行)은 흩어진 나날의 일
부가 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옥천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동 8 (홍지문길 1-38 ☎ 02-395-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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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큼한 경승지를 많이도 간직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둘러보기 ~~~ (세검정, 석파랑, 석파정별당, 홍지문,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부암동 산책 '

▲  인왕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


 

하늘 높이 솟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그리고 인왕산(仁王山) 사이로 움푹하
게 들어간 분지(盆地)가 있다. 그곳에는 수려한 경치를 지닌 부암동(付岩洞)이 포근히 안
겨져 있는데서울 도심과는 고작 고개(자하문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라 '
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의구심을 던질 정도로 도심과는 생판 다른 전원(田園) 분위기
를 지니고 있다.

부암동은 3개의 뫼 사이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세검정로와 자하문로를 중심으로 가늘게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을 뿐, 6층을 넘는 건물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대부분 정원이 딸린
주택이거나 빌라들이며, 밭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특히 산자락에 터전을 일군 집들은 지
방의 시골 마을이나 산골 읍내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진하게 선사한다.
도심이 바로 코 앞임에도 이런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지정학적 위치로 오랜 세월 개발제
한에 묶인 탓이다.
이렇듯 도심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와 그곳에 깃든 아름다운 풍경으로 조선 초부터 양반사
대부와 왕족들의 별장 및 피서지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 자연에 동화되어 살고 싶었던 그
들의 팔자 좋은 바램은 부암동 곳곳에 그림 같은 경승지와 흔적을 빚어놓았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부암동에는 오래된 볼거리가 풍부해 옛 것과 자연에 목말라하는 나그네를 유
혹한다. 북악산 북쪽 백사골(백사실)에는 옛 별서(別墅) 유적인 백석동천(白石洞天)이 숨
겨져 있고, 백사골 상류에는 도심 속 두메산골로 통하는 뒷골마을(능금마을)이 강원도 산
간의 분위기를 선사하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현장이자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
없는 야망이 서린 무계정사터,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구한말에 지어진 반
계 윤웅렬 별장, 인왕산 자락의 경승지인 청계동천(淸溪洞天), 석파정의 별당과 순정효황
후의 집이 하나로 묶여진 석파랑 등이 있다.
그 외에 응선사 산신도(山神圖), 성불사 금동보현보살좌상 등의 불교문화유산이 있고,
울미술관, 환기미술관, 자하미술관 등의 미술관, 산모퉁이 등 분위기를 내세운 까페와 찻
, 온갖 식당들로 즐비하다.

부암동 북쪽으로 흘러가는 홍제천(弘濟川)1970년대까지 서울 시민들의 소풍, 피서지로
각광을 받던 곳으로 세검정, 장의사(藏義寺)터 당간지주(幢竿支柱), 춘원 이광수(春園 李
光洙)의 별장터, 탕춘대성과 홍지문이 있다. 또한 서쪽으로 조금 확장하면 옥천암과 그곳
에 깃든 하얀 피부의 마애보살좌상이 있다.
서울 장안에서 4대문 안을 제외하고 문화유적과 볼거리가 많이 산재한 동네로 넉넉잡아 5
~6시간 정도면 상당수의 명소를 둘러볼 수 있다. 물론 그 이상의 시간을 던져 더 많은 곳
을 더 여유롭게 둘러보는 것도 좋다.

부암동은 나의 즐겨찾기의 1곳으로 그곳에 퐁당퐁당 빠진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봄의 한
복판을 맞이하여 다시 부암동으로 들어가 홍제천을 따라 여러 명소를 흔쾌히 사진에 담았
고 그 명소를 요리하여 이렇게 글로 다시 내놓는다.


 

♠  도성 밖 경승지이자 시민들의 소풍/피서지로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던,
허나 개발의 칼질로 이제는 이름만 남은, 세검정
(洗劍亭)
-
서울 지방기념물 4

신영동3거리에서 홍은동 방면으로 5분 정도 걸으면 멋드러진 바위에 걸터앉아 홍제천을 바라
보고 선 단아한 모습의 세검정이 마중을 한다.

세검정은 팔작지붕을 지닌 'T'자형 정자로 연산군이 1506년 탕춘대(蕩春臺)를 조성하면서 좌
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워 옆으로 긴 누각을 세우니 그것이 세검정의 시작이
라고 한다. 물론 그때는 세검정이라 불리지 않았다.
세검정의 세검(洗劍)은 칼을 씻는다는 뜻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통치에 쓸데없이 불
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같은 것들이 여기서 광
해군의 폐위를 모의하고 그 결의를 다지고자 칼을 물에 씻었다고 한다
그들은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을 앞세워 자하문(창의문)을 뚫
고 도성(都城)을 침범, 창덕궁(昌德宮)을 점령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군주로 옹
립한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저지른다. 이렇게 정권을 빼앗은 서인 일당은 반역을 모의
하고 칼을 씻었던 현장을 길이길이 추억하고자 정자 이름을 세검정이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숙종(肅宗) 시절,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하던 군사들의 휴식처로 다시 세웠다고 하며 영
조 시절인 1748년 총융청(摠戎廳)이 탕춘대 자리로 이전되면서 현재의 세검정이 지어졌다. (
이때 새로 정자를 지었다고 함)
이후 이곳은 자하문 밖(자문 밖) 경승지로 명성을 누렸는데 1749년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이 벗 25명과 여기서 봄놀이를 가졌으며, 1790년 정조 임금이 연융대(鍊戎臺)에서 활쏘기 시
험을 참관하고 세검정에 들렸다가 정자에 걸린 영조의 어제시(御製詩) 현판을 보고 시를 남기
니 내용은 이렇다.

군사 정돈하는 뜻으로 이 정자에 임어(臨御)하니
북한산 높은 하늘에 뿔피리 소리도 맑구나
사랑스럽다 근원이 있는 샘물은 매우 힘차서
시원한 물 한줄기에 온 산이 쩡쩡 울리네

1791년 여름,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이곳을 다녀가 세검정의 명물인 물구경을 했다. 1941
화재를 만나 겨우 주춧돌 하나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 겸재 정선(謙齋 鄭敾)'세검정도'
참조하여 복원했다. <세검정은 '세검정터'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4로 지정되어 있음>

▲  옆에서 바라본 세검정

▲  세검정의 뒷모습

세검정은 규모는 작지만 홍제천과 차일암, 북한산(삼각산)의 시원스런 숲이 서로 어우러진 그
림 같은 현장이다. 또한 질 좋은 바위들이 많아 덕수궁(경운궁) 석조전(石造殿) 기초공사 때
이곳 화강암을 채취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19세기 말 이후에는 양반과 귀족 외에 일반 백성들도 나들이로 많이 찾아왔으며, 서울 시내의
여러 신식 학교들도 이곳으로 소풍을 왔다. 특히 18995월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 여학생
들이 여기로 소풍을 왔는데 그것이 이 땅 최초의 여학생 소풍으로 당시 '조선 그리스도인 화
'에는 그때의 사연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정동 이화학당 여학도들이 1년 동안을 애쓰고 공부하다가 봄빛을 따라 창의문(자하문) 밖으
로 화류(花柳) 구경 갔더라 하니 우리가 매우 치하하는 것은 여학도의 화류는 500년에 처음이
..'

왜정(倭政) 이후, 시민들의 소풍 및 피서지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세검정 주변 신영동과 홍
지동은 자두와 능금 명산지로 유명하여 여름만 되면 그들의 달달한 향기가 온 동네에 진동했
. 지금으로서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을 세검정이 지녔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세검정은 1970년 이후 모진 변화를 강요 받게 된다. 천박한 개발의 칼질
이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부암동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하여 한적했던 동네에 집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면서 그들이 내뱉은 생활폐수로 세검정을 윤
기 나게 했던 홍제천은 악취가 진동하는 저주받은 하천으로 전락했고, 능금과 자두가 자라던
곳도 주택 개발에 밀려나 자취를 감추었으며, 세검정 옆을 지나는 도로(세검정로)가 확장되면
서 운치가 적지 않게 깎여나갔다.

현재 세검정은 그 뒷통수를 지나는 차량들의 소음과 매연, 그리고 아직도 덜 걸러진 홍제천의
쾌쾌한 냄새로 매일 고통을 받고 있다. 홍제천이 예전보다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비린
내는 여전하며 하천 너머로 주택들이 가득해 옛날의 운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긴 서울 땅
에서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거나 고립된 경승지가 어디 한둘이랴. 너무 사람과 개발만
생각하여 일을 저지르다보니 옛 경승지와 자연을 전혀 배려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  세검정의 오랜 단짝, 차일암(遮日巖)

세검정 밑에는 하얀 피부의 넓적한 반석(磐石)이 누워있는데 이 바위가 조선시대에 사초를 깨
끗히 세초(洗草)했던 차일암이다.
세초란 조선왕조실록의 모태가 되는 사초(史草)를 실록(實錄)으로 편찬한 다음, 사초에 적힌
글씨를 물로 씻겨 지우고 그 종이를 다시 쓰는 것이다. 그것을 마치면 뒷풀이로 세초연(洗草
)을 가졌는데 이때 바위에 햇빛을 가리는 천막인 차일(遮日)을 치며 잔치를 했다. 하여 차
일암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차일암에는 차일 기둥을 세우고자 파놓은 구멍들이 있으며 오랫동안 세검정을 수식하며 서울
장안의 이름난 경승지이자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었다. 무더운 날씨에 벌러덩 누워 한잠 청하
고 싶을 정도로 잘생긴 바위이나 주변 환경이 고약하게 변한 탓에 이제는 그러기가 곤란해졌
. 비록 인간들이 주변에 씌워놓은온갖 굴레들은 어쩌지 못해도 홍제천의 수질만큼은 더 깨
끗하게 거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도 여전히 어려운 모양이다.

세검정에서 홍제천을 따라 동쪽으로 200m 남짓의 산책로가 닦여져 있으며, 그 길의 끝에는 간
단하게 몸을 풀 수 있는 운동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근래 세검정 밑에서 세검1교 밑도
리로 징검다리가 놓였는데, 그 다리를 통해 홍제천 옆 산책로를 따라 홍지문 방면으로 이동할
수 있다. 다만 물이 아직 깨끗하지 않으니 손이나 발은 담구지 말자.


▲  늦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세검정 산책로

▲  세검정 동쪽 홍제천 산책로
빌라 너머로 보이는 산자락에 부암동의 꿀단지, 백사실계곡(백사골)이 숨겨져 있다.


세검정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를 타고 세검정(상명대)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번을 타고 세검정(상명대)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168-6 (세검정로 244)

         ◀  탕춘대(蕩春臺)터 표석
탕춘대는 1506년 연산군이 세운 누대(樓臺)
홍제천 바위에 자리했다. (표석은 그 위치가
아님) 이후 영조 시절에 여기서 군사를 훈련시
키면서 연융대(鍊戎臺)로 이름이 갈렸다.
(세검정 동쪽 길가)

         ◀  탕춘대 한지마을터 표석
조선 때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造紙
) 소속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다. (세검정초
교 정류장 부근)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기와집,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

세검정을 둘러보고 서쪽으로 조금 가면 상명대입구인 세검정교차로이다. 여기서 서남쪽 길 건
너편으로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고래등 기와집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 집이 석파정 별당
을 품고 있는 석파랑(石坡廊)이란 고급 한정식당이다.

지금은 비록 식당이지만 원래는 서예가이자 문화유산에 조예가 깊었던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
, 1903~1981)의 별서였다.
그는 1945년 왜열도로 건너가 왜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가 가지고 있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의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를 천신만고 끝에 받아온 인물로 유명하며, 6.25시절 서울을 점령
한 북한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담긴 문화유산을 죄다 빼돌리려고 하자 혜곡 최순우(
谷 崔淳雨)와 함께 뛰어난 재치로 문화유산의 강제 북송을 막아내기도 했다.

소전은 금수저 출신(전남 진도 대지주의 아들임)으로 1963년 이곳에 별서를 지었다. 집을 새
로 짓지 않고 도심에 있던 김옥균(金玉均) 가옥, 박영효(朴泳孝) 가옥, 이완용(李完用) 별장,
기생 나합(羅閤) 양씨의 집 등의 한옥을 구입하여 그 자재로 집을 지었다. 또한 태평로 확장
으로 덕수궁(경운궁)의 동쪽 돌담이 철거되었을 때 이를 모두 매입해 석파랑 돌담과 정원 축
대를 쌓을 때 사용했는데 자그마치 트럭 30대 분이었다고 한다. (운현궁 돌담도 사들였음)

그의 별서는 1969년 완성을 보았으며, 1958년에 매입한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옥인
(玉仁洞) 집을 별서 북쪽에 두고, 같은 해에 흥선대원군의 별장, 석파정(石坡亭)에서 가져
온 별당은 뒤쪽에 두었다. 또한 당시로는 그리 흔치 않던 서양개 세퍼드를 여러 마리나 키우
고 있었다고 하니 그의 재력이 엄청났음을 보여준다,

자기의 별서를 조그만 한옥 전시장으로 꾸민 소전은 1981년 세상을 떴고 그의 후손이 가지고
있다가 1993년 주인이 바뀌면서 비싼 한정식당으로 바뀌었다. 석파정 별당의 이름을 따서 석
파랑이란 간판을 내걸었으며 오랫동안 손님 외에는 내부 접근이 어려웠으나 2000년대 이후 빗
장이 열려 마음 편히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이곳은 부암동의 주요 명소로 크게 존
재감을 드러내어 사진쟁이와 답사객의 발길이 늘고 있다. 허나 이곳은 엄연히 개인 식당이기
때문에 별당을 비롯한 건물 내부는 마구 들어가서는 안되며, 18시나 일몰 이후에는 식당 영업
을 위해 관람을 가급적 피해주기 바란다.


▲  석파랑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자 형태로 3개의 방으로 이루어
져 있다. 가운데 큰 방이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며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외벽은 벽돌로 도배해
속살을 가리고 가운데에 동그란 창을 냈다. 이는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소전에게 별당을 빼앗긴(?) 석파정은 오랫동안 비공개로 일관하다가 2012년 겨울에 비로소 공
개되었다. (서울미술관 개장으로 개방됨)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법칙에 따라 별
당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마땅하나 서로 떨어진지 60년이 넘은 상태고 서로 소유자가
다르다보니 이 또한 쉽지가 않다. <석파정은 서울미술관 소유, 석파정에서 떨어져 나온 별당
은 석파랑 소유임>


▲  석파정 별당 쪽마루와 섬돌
대청방 문을 살며시 열면 그 안에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섬돌에 신발들이 있는 것을 보니 가운데 방에서 사람들이 한정식을
먹고 있는 모양이다.


석파정 별당은 현재 식당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결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대원군의 별
장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 밥먹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 없이 깨끗하게 보
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뭐 봐줄 만은 하겠다. (아직 방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음)
별당으로 다가서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에서 접근하거나 석파랑 전용 주차장에서 스톤힐로 이
어지는 돌계단을 타고 들어가면 된다.


▲  석파랑 본채 동쪽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과 스톤힐 정문

별당 옆에 조성된 돌계단과 돌문, 성곽처럼 다져진 석축은 석파랑에서 스톤힐이란 건물을 지
으면서 닦은 것들이다. 스톤힐(Stone hill)은 이탈리안 음식과 와인을 취급하는 식당으로 전
통과 고풍스런 멋이 깃든 석파랑과 완전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데, 그 옆에 빨간 피부
를 지닌 홍지동 산신각이 있다.
돌의 언덕을 뜻하는 '스톤힐'에 걸맞게 하얀 돌로 그 길목을 꾸민 것이 참 이색적이다. 하지
만 소나무가 무성한 주변 풍경과는 그리 어울려 보이지 않으며, 스톤힐을 만들면서 석파정 별
당의 석축까지 진하게 다져놓아 마치 성곽 위에 집처럼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  150년 이상 묵은 석파랑 감나무 (가운데 나무)

▲  활짝 열린 석파랑 대문(정문)
지금은 모두에게 개방된 착한 문이지만 예전에는 비싼 밥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에게만 입을 벌리는 차가운 문이었다.

▲  경복궁에서 가져온 만세문(萬歲門)

석파랑 본채는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청나라식 
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뜨락에 세워진 만세문은 고종(高宗)이 황제 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
1898년 경복궁에 세운 것인데 심술 고약한 왜정이 이를 매각하자 소전이 매입하여 옮겨놓
은 것이다.
비록 제자리는 잃었지만 소전 덕분에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궁궐 건축물의 고품격이 고
스란히 배여있다. 그리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뜨락에는 곳곳에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
으며 조그만 절구통과 다양한 석물, , 나무 등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  석파랑의 중심인 본채
최대 50명까지 밥 손님 수용이 가능하며, 석파랑의 값비싼 한정식을 지어내는
부엌이 이곳에 들어있다.


※ 석파정 별당(석파랑)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
  내버스를 타고 상명대입구(세검정교회) 하차 (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에서 1711, 7016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시내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도보 2~
  3
* 석파랑 홈페이지는 위의 석파랑 본채 사진을 클릭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 (자하문로 309, 석파랑 ☎ 02-395-2500)


▲  하림각 건너편 길가에 자리한 부침바위터(付岩址)

부침(붙임)바위는 부암동의 지명 유래가 된 유명한 바위이다. 바위 피부에 난 구멍에 돌을 대
고 비비면서 소원을 빌거나 바위에 붙인 돌에서 손을 떼었을 때 그 돌이 척 붙으면 아들을 낳
거나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와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옛날부터 뿌리 깊게 박힌 아들 선호 사상이 빚어낸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애뜻한 현장으로 바
위 높이는 2m 정도 되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잘 남아있었으나 개발의 칼질에 무참히 난도
질을 당해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바위터에 표석을 세워 그가 있던 자리임을 아련하
게 전해줄 따름이며, 세검정교차로 공원에 그를 추억하는 표석을 세웠다. 허나 아무리 그런다
고 강제로 사라진 그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서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잘생긴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도시화
의 거친 물결과 인간의 욕심으로 많은 바위가 세월의 저 편으로 강제로 사라지고 말았다.
런 바위 가운데 여기서 가까운 응암동(鷹岩洞) 백련산(白蓮山) 자락에는 매 모양의 잘생긴 매
바위가 있었는데 땅값을 노린 집주인이 무식하게 파괴해버렸다.


 

♠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며 도성의 수비력을 높였던
탕춘대성과 홍지문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


▲  고된 세월의 때와 하얀 피부가 공존하는 홍지문

석파랑을 둘러보고 홍은동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이란 성문과 탕춘대성이라 불리는 성
곽이 마중을 나온다. (석파랑 옆 세검정교차로에서 훤히 바라보임)

홍지문을 거느린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산성(山城)으로 연산군이 세검
정 부근에 지은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고 해
서 서성(西)으로도 불리며, 겹성이란 별칭도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이 만약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년에
(申琬)이 성곽 축조를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도성 보수가
마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세우려고 1715년 홍제천에 홍지문을 먼저
닦았다. 그런 다음 17188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106일에
일단 공사를 멈추었다가 1719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
되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선을 거
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로 원래는 북한산성까지 이으려고
했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해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능선, 북악산(
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싹 취소되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에
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하여 홍지
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대능
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남아있다. (여장은 홍지문과 남쪽 성곽 일부에만 남아있음)


▲  홍제천의 물을 하염없이 흘려보내는 오간대수문 (동쪽 모습)
북한산과 북악산에서 발원한 홍제천은 저 문을 통해 한강으로 흘러간다. 마치 냇물 위에
5개의 무지개를 보듯, 유연하게 구부러진 홍예의 곡선이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탕춘대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암문은 제외)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
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한북문(漢北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200년 이상 별탈없이 지내온 홍지문은 19211, 지붕에 쌓인 세월의 장대한 무게를 감당하
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
지 홍수로 싹 떠내려가면서 터만 아련하게 남아오다가 19777월 복원되었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원할 때 새로 맞춘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난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
해 문루와 오간대수문은 금지 구역이 되었으며, 오간대수문에서 탕춘대능선 쪽 성곽 200m 정도
구간도 통제되어 탕춘대능선을 가려면 홍지동 주택가나 옥천암 주변으로 돌아가야 된다. 또한
문 남쪽은 세검정로가 지나고 있어 성곽이 아주 잠깐 단절되어 있다. 허나 그 길을 넘으면 성
곽은 다시 소소하게 율동을 부리며 인왕산으로 뻗어간다.
성문 앞뒤로 나무가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닦여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오간대수문 바로 밑
홍제천 북쪽에 최근에 산책로가 닦여져 오간대수문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다. 이 산책로는 세
검정과 옥천암까지 이어진다. 또한 문을 경계로 성 안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弘恩洞)이다.


 홍지문의 야경 (홍지문의 앞 모습)
홍지문은 더 이상 서울 수비의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문화유산과 관광지의 의무와 성격만 지니고 있으며,
문은 24시간 열어두고 있다.

 홍지문 천정을 장식하고 있는 고운
빛깔의 와운문(渦雲紋)

▲  홍체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오간대수문의
북쪽 홍예문들

   

오간대수문 윗도리는 금지된 다리라 발을 들일 수 없지만 아랫도리는 홍제천 산책로가 닦이면
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살펴보는 오간대수문의 속살, 비록 하천에서 약간 비린내가
풍기긴 했으나 그 정도 냄새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임)

홍예문 위쪽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물이 흐르는 수문이라 물을 관장하는 용을
수호용으로 넣은 듯 싶다. 5개의 수문 중, 북쪽 기준으로 1,2,5번째 문은 바닥에 돌이 입혀져
있고, 3,4번째 문은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내려 홍제천이 흥분한 경우에
5개 문이 모두 수문이 되버린다.

※ 홍지문 찾아가기 (2018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18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북한산 끝자락 홍제천변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고려 후기에
조성된 거대한 하얀 마애불을 간직한 홍은동 옥천암(玉泉庵)


 홍제천 남쪽에서 바라본 옥천암 (왼쪽은 마애보살좌상,
오른쪽이 옥천암)

홍지문에서 한강을 향해 열심히 길을 재촉하는 홍제천을 따라 서쪽으로 7분 정도 가다보면 하
얀 암반이 일품인 하천 건너로 하얀 피부의 커다란 마애불상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가 바로
이곳의 명물이자 상서로운 관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다.
문화재청은 그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지역 사람들은 '보도각백불'로 많
이 부르고 있다. (나도 그 명칭이 버릇이 되었음) 여기서 보도각(普渡閣)은 하얀 마애불과 바
위를 보듬은 보호각의 명칭으로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홍
제천변에 있어 옛날부터 '해수관음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강제로 하얀 피부가 된 19
세기 이후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 '백불' 등의 별칭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백불'은 구한
말에 양이(洋夷)들이 그를 보고 'White Buddha'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견
해도 있다.

마애불 옆에는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암자 옥천암이 둥지를 틀었으며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홍
제천에 걸린 보도교(普渡橋)란 유연한 곡선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시멘트가 아닌 홍예 돌다
리였으면 운치가 정말 진국이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다리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조촐
한 문이 있는데, 그가 옥천암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 다리 끝에 달린 흥미로운 현장
으로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도각 백불(마애불), 오른쪽 언덕에 옥천암이 있다.

▲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0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으며 홍제천 바람을 쐬고 있는 이 마애불은 서울에 전하는
8개의 오랜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달랑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 마애불의 일원으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안암동에 보타사(寶唾寺)란 절이 있는데 그곳에 옥천암 백불과 비슷
하게 생긴 하얀 피부의 마애불이 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조성 시기도 비슷하여 고려 후기에
같은 사람이나 지역 세력가가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여기서 가까운 승가사(僧伽寺)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개성(開城)에 있는 관음굴 석조보살반
가상과 비교되는 고려 말 불상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존재로 평가받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서울로 천도하자 그를 찾아와 예불을 올렸다고 전하며 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가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는 성현(成俔, 1439~
1504)이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옥천암 백불을 부처바위를 뜻하는 불암(佛巖)으로 기재
했다. 그것이 이곳에 대한 첫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장군이 여기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
데 어리석은 왜군들은 백불을 그만 조선군으로 잘못 알고 조총을 정신없이 쏘아댔다. 그렇게
탄환을 다 소비한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그들을 보기좋게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홍제천의 물결을 따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백불을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띄우고자 근처
에서 일어났던 권율의 왜군 토벌전을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
찾아와 아들의 천복(天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호분(
,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
으로 불상을 하얗게 도배를 하면서 이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백불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얀 피부가 되면서 마애불은 다소 젊어 보이게 되었으나 대신
문화유산의 큰 매력인 고색의 기운이 다소 꺾여 그리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는다.


▲  보도각과 붙임바위의 옆모습

백불의 높이는 5m로 그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인해 예로부터 영험이 깊은 석불로 명성이 높았
. 그 앞에 닦여진 공간에는 그의 영험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특히 입시철에는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백불에게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리는데, 생긴 모습부터
가 예사롭지가 않다.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와 비슷하게 돌(또는 동전)을 바위에 붙이
거나 위로 던져서 바위 위에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매달린 작은 돌과 동전
이 적지 않다. (절에서 동전을 계속 수거하고 있어 요즘은 별로 안보임) 그래서 불상이 이곳
에 깃들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소박한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보도각 앞에는 홍제천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둘러져 있었으나 2016년 이후 그 돌담을 밀면
서 정면이 확 트였다. 키 작은 난간이 돌담 대신 둘러져 있으며 난간 바로 앞에는 나무로 다
진 홍제천 산책로가 닦여져 있고, 그 앞 홍제천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반석들이 가득하다.
한때 도심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비린내 풍기는 하천으로 떨어지면
서 그 반석이 다소 아깝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속세(俗世)를 상징하는 그런 하천을 걱정스럽
게 굽어보며 중생을 걱정하는 불상의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따뜻한 모습 같다.

그의 몸은 모두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주황색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금
색으로 되어있다가 2016년 이후 주황색으로 갈았음) 오른손에 걸린 팔찌, 삼도(三道) 아래로
커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寶冠), 그리고 귀에 건 귀걸이
까지 정말 관음보살 누님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그의 얼굴은 거의 포근한 인상으로 중생
들의 소원과 고충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다 들어줄 것만 같다. (현실은 하나도 안들어주었음)


▲  마애보살좌상의 잘생긴 얼굴과 윗도리

홍제천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 모습으로 지그시 떠 있으며, 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닿는다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불상의 몸을 덮고 있는
옷 주름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 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데 왼
팔이 너무 길어보이며 앉아있는 모습치고는 아랫도리가 좀 넓게 표현되어 신체 균형이 좀 맞
지 않는다.

백불 앞에는 중생들이 정성스레 기도를 올리며 고민거리를 슬쩍 내밀고 있었다. 그들의 갖은
소망을 들어주느라 보통 귀찮은 것이 아닐텐데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한결 같은 표정으
로 그들을 맞이해 고충 하나라도 누락될까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얼마
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 정성이 부디 백불과 하늘을 감동시켜 나를 포함한 중생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  조그만 기와문을 지나면 조촐한 옥천암 경내가 펼쳐진다.

백불 동쪽에는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은 옥천암이 자리해 있다. 백불이 관음보살이다보니 자
연히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이 땅의 3대 관음도량으로 양양 홍련암(紅蓮庵)
, 남해 보리암(菩提庵), 강화 보문사(普門寺)를 꼽는다. 허나 옥천암도 관음도량으로서의 자
부심이 대단하여 비공식적으로 자신들을 포함시켜 4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우기기도 한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약효가 있다는 샘물(혹시 탄산약수가 아닐까?)
있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하며, 그 연유로 옥처럼 맑은 샘물, 옥천암을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약수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오래전에 사라졌고, 절 앞을 흐르는 홍제천
또한 세월에 고되게 대이면서 그런 모습은 이제 전설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 절은 언제 지어졌는지 전해오는 것이 없다. 다만 인근에 조선 초기까지 잘나갔던 장의사(
藏義寺, 세검정초교에 있었음)와 사현사(沙峴寺) 등의 쟁쟁한 절들이 있어 백불을 관리하는
부속 암자로 지어진 듯 싶으며, 세검정 맞은편에는 혜철선사(惠哲禪師)1396년에 태조의 도
움으로 세웠다는 소림사(小林寺)가 있는데, 그 절의 부속암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두 부
질없는 메아리이다.

이곳의 본격적인 사적(事績)이 등장하는 것은 1868년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
淨觀)이 관음전(觀音殿)을 세워 천일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
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 6칸과 요사(寮舍) 3칸을 고쳤
.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수리했으며, 이후 삼성각, 요사 등을 추가로 갖추었
으나 1987년 삼성각이 소실되고 1988년에 법당인 수덕전(修德殿)이 지어지면서 삼성각의 기능
은 수덕전에 통합되었다. 1989년에 종각을 만들었고 1990년 설법전(說法殿)을 지어 요사의 기
능도 겸하게 했으며, 1996에 홍제천에 보도교란 다리를 놓고 1998년에 일주문을 지었다.

북한산의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으며 홍제천변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사세확장이 좀 어렵다.
바로 동쪽에는 주택가가 있고 뒤에는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 자락이기 때문
이다. 그래서 경내가 무지 답답하다. 또한 백불 외에는 오래된 유산이 없고 주택가와 접해 있
어 고색과 산사의 내음이 크게 말라버렸다.

▲  요사의 기능도 겸하고 있는 설법전
옥천암 뜨락에도 변함없이 늦가을이 찾아와
이렇게 고운 작품을 남겼다.

▲  옥천암의 법당인 수덕전(修德殿)
수덕전과 설법전은 그 사이에 조그만 벽돌집
을 만들어 거의 하나로 이어져 있다.


▲  수덕전 아미타여래좌상

옥천암은 관음도량이라 보도각 백불이 중심 불상이나 법당에는 따로 아미타불(아미타여래좌상
)을 봉안했다. 불단에는 아미타불 홀로 있으며, 그 흔한 협시불(夾侍佛)은 없다. 불상 주위로
석가후불탱화와 지장탱화, 신중탱화, 칠성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 등의 불화가 수덕전 내부
를 진하게 수식하고 있는데, 그중 독성탱화가 1954년에 제작된 것으로 백불을 제외하고 제일
오래되었다.


▲  왜식(倭式)으로 지어진 옥천암 5층석탑
5층석탑은 예전에 수덕전 정면 우측에 있었으나 담장 쪽으로 옮겨졌다. 날씬하게
솟은 석탑의 탑신(塔身)에는 조그만 구멍이 무수히 뚫려있어 내부가 보인다.


▲  수덕전 우측에 세워진 키 작은 석등과 3층석탑
사람 키보다 작은 석탑은 2,3층 탑신이 없어지고 지붕돌만 남아있는데 조금 오래되어
보인다. 예전(2010년 이전)에는 그가 없었으나 근래에 주변에서 가져온 모양이다.
(탑의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음)

◀  석가탄신일을 맞아 간만에 외출을 나온 옥
천암 괘불(掛佛)의 위엄
청아한 색채로 그려진 이 괘불은 근래에 조성
된 것이다. 이전 시대의 괘불보다 키와 덩치는
작지만 담길 것은 모두 담겨져 있다.
초파일을 맞이하여 간만에 화려한 외출을 나와
중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상다리가 아작날 정도
로 차려진 제물에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옥천암을 끝으로 부암동 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워낙에 많이 찾았던 곳이라 마치
우리 동네처럼 친근한 곳이다. (부암동은 나를
기억이나 해줄까?)

▲  홍제천에 걸린 보도교와 징검다리

▲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옥천암(보도각 백불)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18번 버스를 타고 유원하나아파트 하차 도보 2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8 (홍지문길 1-38 ☎ 02-395-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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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종로구 부암동 산책

 


' 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종로구 부암동(付岩洞) '

▲  인왕산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북악산


하늘 높이 솟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北岳山), 그리고 인왕산(仁王山) 사이로 움푹 들
어간 분지(盆地)가 있다. 그곳에는 수려한 경치를 지닌 부암동이 포근히 감싸여 있는데 서
울 도심과 고작 고개(자하문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임에도 '이곳이 정녕 서울
이 맞더냐~?' 고개가 갸우뚱할 정도로 도심과는 생판 다른 전원(田園) 풍경을 간직하고 있
다.

부암동은 서울의 심장부인 종로구의 일부로 아늑한 전원 분위기와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경
승지가 즐비해 북촌(北村), 성북동(城北洞)과 더불어 두고두고 나의 마음을 앗아가는 곳이
다. 부암동의 주요 경승지로는 북악산 백사골(백사실, 백석동천)을 비롯해 세검정(洗劍亭),
홍지문(弘智門), 석파정, 무계정사터, 반계 윤웅렬별장, 능금마을, 북악산, 청계동천 바위

글씨 등이 있으며, 석파정을 옆구리에 낀 서울미술관을 위시하여 환기미술관, 자하미술관,
유금와당박물관 등 미술관과 박물관도 풍부해 문화의 향기도 진하기 그지 없다.

본글에서는 부암동 명소의 일부인 석파정 별당과 무계정사터(무계동 바위글씨), 청계동천,
반계윤웅렬 별장 등을 소개한다.
☞ 북악산 백사골(백사실) 보러가기
부암동 명소 (장의사지 당간지주/세검정/홍지문 등) 보러가기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의 옛 사랑방 -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호

상명대입구 4거리에 이르면 4거리 서남쪽에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고래등 기와집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집은 석파랑(石坡廊)이란 고급 한정식당으로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소전 손
재형(素筌 孫在馨, 1903~1981) 선생이 살던 곳이다.

소전은 6.25 시절, 서울을 접수한 북한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담긴 문화유산을 죄다 빼돌
리려고 하자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와 함께 뛰어난 재치로 그곳의 문화유산을 지켜냈으며,
<자세한 내용은 ☞ 간송미술관 답사기 참조> 왜열도로 넘어간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세한도(阮
堂歲寒圖, 국보 180호)를 천신만고 끝에 품에 안고 온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 집은 원래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집으로 인왕
산 동쪽인 옥인동(玉仁洞)에 있었다. 그러다가 소전이 1958년에 매입하여 이곳으로 옮겨 거처로
삼았으며, 그 기세를 몰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의 별당까지 떼어와
집 뒤쪽에 두었다. 이렇게 잘나가던 기와집을 하나도 아닌 2채나 누릴 정도면 소전도 꽤 부자였
음을 알 수 있다. (당시로는 흔치 않던 서양개 세퍼드를 여러 마리나 키우고 있었다고 함)
소전이 1981년 세상을 뜨자 이들 집은 모두 다른 이에게 넘어가 한정식당으로 변했으며, 석파정
의 이름을 따서 석파랑이란 간판을 달았다.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ㄱ'자 형태로 방이 모두 3개이다. 가
운데 큰 방은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다. 그리고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진하게 자아내고 있으며, 외벽은 벽돌로 도배해 내부
를 가리고 가운데에 동그란 창을 냈다. 이는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소전에게 별당을 빼앗긴(?) 석파정은 오랫동안 비공개로 일관하다가 2012년 겨울에 비로소 공개
되었다.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진리에 따라 별당을 원자리로 돌려놓는 것도 괜찮
을 듯 싶은데, 서로 소유자가 다르다보니 이 또한 쉽지가 않을 것이다.


▲  적막에 사로잠긴 석파정 별당
저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면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  석파랑 정원 (오른쪽 계단 너머에 석파정 별당이 있음)

석파정 별당은 현재 식당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던 대원군의 별장
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의 밥먹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이 없이 깨끗하게 보
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뭐 봐줄 만은 하겠다.
별당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석파랑 주차장에서 들어가는 길이 있
는데, 주차장 쪽으로 가는 것이 더 접근이 쉽고 빠르다.


▲  150년 묵은 감나무가 무럭무럭 익어가는 석파랑

▲  경복궁에서 가져온 만세문(萬歲門)

석파랑 한옥은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청나라식 호벽
이 그대로 남아있다. 뜰에 세워진 만세문은 고종(高宗)이 황제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자 1898년
에 경복궁에 세운 것으로 궁궐 건축물의 품격이 고스란히 배여있는 문이다.
또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에는 곳곳에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으며, 조그만 절구를
비롯한 다양한 석물과 나무. 꽃 등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석파랑은 고급 한정식당이라 가격이 매우 얄미운 수준이다. 점심 상차림은 55,000원에서 11만원
대, 저녁은 95,000원에서 15만 5천원이나 한다. 그것도 10% 부과되는 부가가치세(VAT)와 서비스
비(Service Charge)는 제외이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우리 같은 서민들에게는 정말 특별한 날이
아니면 가기 힘든 아득한 곳이지만 졸부들에게는 그저 가뿐한 장소다. 이 땅에서는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님이 많고 봐야 된다. 돈이 사람을 평가하는 더러운 세상이니 말이다. 아
직 이곳의 밥은 먹어보진 못했지만 돈을 몇 달치 모아서라도 한번은 먹어보고 싶다.


※ 석파정 별당(석파랑)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번, 1711번, 7016번, 7018번, 7022번, 7212번 시내
  버스를 타고 상명대입구 하차 (1,2호선 시청역 4/7번 출구에서 1711, 7016번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3번 출구)에서 110번, 153, 8153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도보
  2~3분
* 지하철 3호선 녹번역(4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 석파랑 홈페이지는 위의 석파정 만세문 사진을 클릭한다.
* 석파랑 영업시간 : 12시~15시, 18시~22시 (설날, 추석연휴는 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 (석파랑 ☎ 02-395-2500)


▲  하림각 건너편 길가에 자리한 부침바위터(付岩址)

부암동의 지명유래가 된 부침(붙임)바위는 바위 피부 곳곳에 난 구멍에 돌을 대고 비비면서 소
원을 빌면 아들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부터 뿌리 깊던 아들 선호 사상이 빚어낸
민간 신앙의 현장으로 아들을 원하는 서울 장안의 아낙네들로 늘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바위의 높이는 2m 정도 되었다고 하며, 자하문고개를 넘어온 개발의 칼질이 이곳의 명물인 부침
바위를 산산조각 내면서 이제는 그의 어떠한 흔적도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다만 근래에 세운
바위터 표석이 이곳에 예전 그가 있었음을 아련하게 전할 따름이다.

서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멋드러진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과 인간들의 속물 근성 앞에 많은 바위가 희생을 당했다. 그 바위 가운데 여기서
가까운 응암동(鷹岩洞) 백련산(白蓮山) 자락에는 매 모양의 잘생긴 매바위가 있었는데, 땅값을
노린 집주인이 무식하게 파괴해 버렸다.


♠  야망의 사나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없는 꿈이 깃든 현장
화려한 별장은 온데간데 없고 무계동 바위글씨만 아련히 남은
안평대군 이용 집터(무계정사터)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2호

▲  무계동(武溪洞) 바위글씨

석파랑에서 석파정을 품고 있는 서울미술관을 지나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창의로5가길을 들어서면
현진건 집터 표석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 골목길을 들어서 왼쪽으로 20~30도 각도를 바라보면
커다란 나무를 간직한 기와집이 보이는데, 그 집 뜨락 동쪽에 '무계동' 바위글씨가 새겨진 검은
피부의 커다란 고개가 들고 있다. 거기가 바로 한 토막 전설이 되버린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
사의 옛터이다.


※ 안평대군의 생애(1418~1453)
안평대군은 세종(世宗)의 3번째 아들로 세종이 왕위에 오르던 1418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이용
(李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으로 그의
호에서 보이듯 꽤나 낭만적인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문(詩文)과 그림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칭송을 받았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무예에도 꽤 일가견이 있었다. 이렇게 문무(文武)를 두루두루 겸비한 인재로 세종의 18명 아들
가운데서 가장 능력이 좋았다.

1428년에는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29년 좌부대언 정연(鄭淵)의 딸과 혼인했다. 그리고 1430
년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공부를 했으며, 1438년에는 두만강(豆滿江) 6진으로 파견되어 두만
강 이북의 여진족을 정벌했다.

세종이 붕어(崩御)한 이후, 맏형인 문종(文宗)의 신임으로 황표정사
(黃票政事 - 왕자들이 추천
한 인물 가운데 왕이 그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던 인사제도)
를 장악, 자신의 측근을 요직에 앉혀
조정에서 꽤나 영향력을 행사했다. 1452년 문종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단종(端宗)이 즉위하
자,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과 손을 잡고 수양대군을 견제하며 세력을 꾸준히 키워
나갔다.

그는 창의문 북쪽에 별장을 지었는데, 이곳은 자신의 2째 큰아버지이자 세종의 2째 형인 효령대
군(孝寧大君)의 별장이 잠시 있던 곳이다. 안평대군은 이곳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의 계곡을 닮
았다고 하여 무계동(武溪洞)이라 이름 짓고, 별장 이름을 무계정사<武溪精舍, 또는 무이정사(武
夷精舍)>라 했다.
그리고 힘깨나 쓰는 장정을 모집해 숙식을 제공하며 자신의 사병을 꾸준히 키워나가는 한편 용
산에 담담정(淡淡亭)이란 정자를 지어 문인(文仁)들과 교류를 하며 자신의 야망을 키워갔다.

하지만 2째 형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이후, 크게 존재를 드러내면서
단종을 설득해 안평대군의 꿀단지던 황표정사를 폐지시켰다. 이는 안평대군에 대한 심각한 도전
이자 대권에 대한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위기를 느낀 안평은 함경도에 있던 이징옥(李澄
玉)에게 무기를 지원받아 무력을 앞세워 잠시나마 황표정사를 회복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이는 그
의 명을 단축시킨 꼴 밖에는 되지 않았다.

동생의 무력도전에 발끈한 수양은 1453년 10월 그 유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순식간
에 김종서, 황보인 등을 처단했다. 방심하고 있던 안평은 꼼짝없이 포박되어 반역의 죄를 뒤집
어 쓰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는데, 수양은 썩 안심이 되질 않았던지 곧 강화도 서쪽인 교동도(喬
桐島)로 추방했으며,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사약 한사발을 보냈다.
안평은 형이 보낸 사약을 쭈욱 들이키며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그리고 형에게 방심했던 자신의
어리석움을 한탄하며 이내 피를 토하고 쓰러지니 그의 나이 불과 35살이었다.

역사에서 쓰라리게 퇴장을 당한 안평대군은 18세기 중반까지 복관(復官)되지 못했으며, 영조 23
년(1747년)에 이르러서야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건의로 복관되면서 죽은 지 300년 만에 편하
게 눈을 감게 되었다. 그의 시호는 장소(章昭)이며 무덤의 위치는 전해오지 않는다.

그가 이승을 뜬 이후, 그의 야망이 깃든 무계정사는 파괴되었으며, 권력을 향한 그의 강인한 정
열이 느껴지는 무계동 바위글씨만 쓸쓸히 바위에 남아 이곳이 무계정사였음을 속삭일 뿐이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호를 따서 비해당(匪懈堂)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여름철에는 많은 문인들
이 찾아와 경치를 즐겼다. 또한 정사 앞에는 기린교(麒麟橋)라는 다리가 있었다.

※ 문예가(文藝家)로써의 안평대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 서화, 거문고에 두루 능했던 안평대군, 그는 무이정사와 담
담정을 짓고 문인들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며, 궁중에 소장된 서화(書畵)와 자신이 수집한 중원
대륙의 서화들을 연구하거나 소개하는 등, 당시 문학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체를 사용했는데, 이를 나름대로 조선식의 필법으로 발
전시켰다. 또한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은 그의 글씨를 보고 조맹부의 글씨보다 더 휼륭하다고
칭송하며 그의 글씨를 서로 받아가려고 굽신거렸다고 한다.

한편 무계정사에 머물던 어느 날, 꿈 속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냥 기억 속에 두
기가 너무 아까워 그와 친분이 있던 안견(安堅)에게 그 꿈의 내용을 설명하여 그리게 하니, 그
그림이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왜국에 가 있으며, 2009
년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때 잠시 귀국한 인연으로 몽유도원도가 그려진 현장인 무계정사
터를 찾는 답사객의 수가 잠시나마 늘기도 했다.
또한 여러 문인들의 글을 정리하여 시화첩(詩畵帖)을 만들기도 하였고, 1452년에는 경자자(庚子
字)를 개주(改鑄)해 만든 임신자(壬申字)의 자모(字母)를 쓰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글씨로는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는 세종대왕 신도비(神道碑), 수원에 있는 청천부원군 심
온묘의 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자신의 아우인 임영대군묘표(臨瀛大君墓表, 의왕시 소재) 등
의 비문이 전한다.

'武溪洞' 바위글씨 곁에 자리한 낡은 기와집은 무계정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집으로 구한말이나
왜정 때 지어진 것이다. 2005년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때는 쥐방울 만한 견공(犬
公) 2마리가 바위와 집을 철통같이 지켜 그들의 눈치를 살살 보며 바위글씨를 봐야 했다. 허나
이제는 그들도 안평대군의 부질없는 꿈을 따라 추억 속으로 사라졌고, 현재는 종로구청에서 관
리하고 있다.

2007년 이후 이곳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무계정사터'에서
'안평대군 이용 집터'로 변경되었
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철문이 굳게 잠겨있어 관람을 애타게 원할 경우 문에 달린 종로구청 문
화관광과로 연락을 하거나 철문의 헝클어진 틈을 요령껏 뚫고 들어가면 된다.


※ 무계정사터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버스로 부암동주민센터 하차
  창의문로5가길을 따라 도보 5~6분, 현진건집터 표석만 찾으면 금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19-4


▲  현진건집터에서 바라본 무계정사터
붉게 물든 아름드리 나무가 자리한 곳에 기와집과 무계동 바위글씨가 있다.
공터 남쪽 구석에는 은단천이라 불리는 샘터가 있으나 수질은 장담 못한다.

▲  이제는 표석으로만 남은 현진건 집터

빙허 현진건(憑虛 玄鎭健, 1900~1943)은 소설 '운수좋은 날'로 유명한 소설가이다. 예전에는 그
의 초라한 집이 좀 남아있었으나 개념도 밥말아먹은 개발의 칼질에 무침히 짓밟혀 지금은 표석
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래도 명세기 현대문학의 중추적인 인물의 집인데, 지방문화재나 등록
문화재로 삼아 보존하거나 평창(平昌) 봉평의 이효석(李孝石) 생가처럼 문학 테마 관광지로 특
성화시키면 정말 꿀단지가 되었을 것을 무작정 개발만 내세우는 작금의 현실이 그저 딱할 따름
이다.


▲  청계동천(靑溪洞天) 바위글씨

무계정사의 흔적을 둘러보고 현진건집터 표석으로 나와 인왕산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전원
분위기가 물씬 감도는 부암동, 그런 부암동에 핏줄처럼 얽힌 골목길은 마치 시골길을 거니는 즐
거운 기분이다. 동네가 산지에 있다보니 오르막길이 꽤 많지만 그렇게 죽을 정도는 아니다. 게
다가 인왕산과 북악산이 청정한 기운을 베푸니 도시의 탁한 기운도 거의 없어 머리도 맑아진다.

현진건집터와 윤웅렬별장 사이에는 피부를 드러낸 바위들이 여럿 있는데, 청계동천이란 바위글
씨를 품은 바위가 있어 이곳도 동천(洞天)의 칭호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바위글씨는 작고 얇은 모습으로 옛 사람들이
이곳 절경에 반해 낙서를 남긴 것이다. 지금이
야 계곡 대부분이 주택 개발로 생매장을 당해
실감이 썩 나지 않겠지만 반계 윤웅렬 별장 뒤
쪽에 얇게 흐르는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의 상류
이다.

청계동천 바위 주변은 개인 땅이라 바위 주변을
철책으로 꽁꽁 둘렀다. 그래서 바위 앞까지는
접근이 어려우나 바로 길가에 있기 때문에 관람
과 촬영에는 그리 지장은 없다.

▲  확대해서 본 청계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  서울 지역 근대 한옥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
반계 윤웅렬 별장(磻溪 尹雄烈 別莊)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2호

▲  윤웅렬별장 문간채 (안쪽 대문)

청계동천에서 1분 정도 오르면 반계 윤웅렬별장(이하 별장)이라 불리는 한옥이 나온다. 이곳은
인왕산의 품에 포근히 안긴 그림 같은 기와집으로 1906년에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이 지은
별장이다.

윤웅렬은 해평(海平) 윤씨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1856년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감영중군(忠
淸監營中軍)과 공주중군(公州中軍), 북청병마우후토포사(北靑兵馬虞侯討捕使)를 거쳐 1878년 통
리기무아문참사(統理機務衙門參事)와 남양부사를 지냈다.
1880년 수신사(修信使)의 일행으로 왜국(倭國)을 둘러보고 왔으며, 1882년 별기군(別技軍)이 창
설되자 훈련원 하도감(下都監)의 신병대장의 영관(令官)이 되었으나 곧바로 터진 임오군란(壬午
軍亂)으로 왜국으로 줄행랑을 쳤다가 곧 귀국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면서 김옥균(金玉均)에 의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
었으나, 3일 천하로 허무하게 막을 내리면서 화순 능주로 유배를 갔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
革) 때 군부대신(軍部大臣)으로 있으면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청나
라 상해(上海)로 도망쳤으며, 몇 년 뒤 다시 컴백해 법무대신을 지냈다. 1910년 이후에는 왜정
의 남작(男爵) 작위를 받는 등 좋지 않은 뒷끝을 보이다가 1911년 인생을 마감했다.

참고로 윤웅렬의 아들 가운데 그 유명한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있다. 그는 개화파 지식
인의 하나로 여러 선각자들과 함께 독립협회와 신민회(新民會) 등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민
중 계몽에 앞장섰다. 1910년 이후 안창호(安昌浩)가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을 지내면서
민족 교육에 헌신했으며, 1911년 105인 사건으로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허나 이후 친일파로
갈아타면서 부친과 더불어 쌍으로 구린 뒷끝을 보였다.

윤웅렬의 별장은 처음에는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윤웅렬이 골로 가면서 3
째 아들인 윤치창(尹致昌)이 상속을 받았는데, 1930년대에 한옥으로 안채와 사랑채, 광채, 문간
채를 추가로 지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별장 안채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좌우에 있으며, 안방 앞에는 2칸 부엌이 있고
, 건넌방 앞에는 작은 누마루가 있다. 안채 왼쪽에 광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있는데, 'ㄱ'모양의
사랑채 한쪽 끝에 윤웅렬 시절부터 전해오던 서양식 2층 벽돌건물이 있다.
사랑채와 2층 건물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앞에 인왕산이 베푼 조그만 계곡이 흘러간다.
그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의 상류로 계곡에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나무를 심어 경관을 아름답
게 꾸몄다. 사랑채 지붕에는 옥상 테라스를 돋보이게 만들어 경관을 감상하는 전망대로 삼았다.

사랑채와 광채는 변형이 심해 원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우며, 한양도성(都城) 밖 부암동에 세
워진 별서(별장)의 하나로 외국 건축 양식이 상류층 주택에 적용된 사례로 주목된다. 또한 안채
는 서울 지역 근대 한옥의 변화가 잘 반영되어 있다.

윤치창 이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봉산서원이라 불리는 미술공간으로 쓰였으며, 이때는 대문(
문간채) 앞 뜨락에 비너스상과 집채만한 큰 바위가 있어 특이한 모습을 보였는데, 2011년에 어
느 졸부가 이곳을 사들이면서 싹 정비해 그들을 내버렸다. 이때 대문을 새로 만들고 담장을 추
가했으며, 집도 새집처럼 산뜻하게 손질했는데, 보수공사 기간에 공사 관계자의 흔쾌한 허가로
2층 테라스를 비롯하여 별장 내부를 구석구석 관람하는 행운을 누렸다.
부암동이 요즘 인기를 누리면서 찾는 이가 쓸데없이 늘긴 했지만 여기까지는 거의 오지 않는다.
설령 용케 왔다고 해도 속사정을 알지 못하니 그저 담장만 찍고 돌아갈 뿐이다.

별장 보수공사는 2011년 12월에 끝났으며, 이후로는 소유자의 뜻에 따라 절대로 속살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그 이전에 본 것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내 바램이긴 하지만 이 괜찮은 한
옥을 집주인 일가만 야속하게 누리지 말고 다수가 좀 누렸으면 좋겠다. 그냥 누리면 좀 미안하
니 요즘 인기를 더하고 있는 한옥체험장(한옥 민박, 게스트하우스)으로 개방하면 어떨까?
북촌과 전주한옥마을, 경주 양동민속마을, 안동의 몇몇 기와집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한옥 체험/
숙박 장사를 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곳 집 크기는 북촌의 왠만한 한옥과 비슷하거나 조금
큰 편이며, 뜨락도 넓고, 바로 옆이 인왕산 숲이라 공기도 매우 상쾌하다. 도심이긴 하지만 깊
숙한 산골 마을에 들어온 듯, 전원 분위기가 그윽하며, 집에 딸린 방이 많고 한옥의 흔치 않은
2층 테라스까지 두고 있으니 소문만 잘나면 어지간한 한옥 숙박집 이상의 인기를 얻을 것이다.
게다가 도심과 가깝고 교통도 괜찮으며, 정류장에서 도보 10분이니 접근성도 그만하면 딱이다.


▲  서쪽 담장 너머로 바라본 윤웅렬별장의 뒷모습

▲  2011년 후반에 새로 지은 바깥 대문
예전에는 그냥 뻥 뚫린 공간이었다
.

▲  안채 옆에 있는 또 다른 문
원래 있는 문으로 늘 굳게 닫혀있다.

▲  윤웅렬별장 앞길 (대문과 담장은 2011년
보수 때 새로 했음)

▲  겨울잠에 잠긴 별장 연못
물과 연꽃, 물고기가 넘쳐날 그때를 꿈꾼다.


▲  윤웅렬 별장의 숨겨진 아름다움 (사랑채 뒤쪽 계곡) ▼

별장 뒤쪽에는 이곳만의 숨겨진 비경이 있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절경이 수줍은 듯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조그만 계곡이 없는 듯 흘러가는데, 이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이다. 계곡 양쪽에는 돌
로 높게 석축을 쌓았으며, 위쪽에는 2단으로 석축(石築)을 둘렀다. 석축 위에는 단풍나무를 비
롯한 여러 나무들이 앞다투어 작품이 되면서 늦가을의 정취를 진하게 우려낸다. 지나가던 가을
도 이 별장에 단단히 눈독을 들였는지 뒤쪽으로 슬며시 들어와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빚은 것
이다.


▲  사랑채 뒤쪽 계곡의 막다른 곳 (바위와 폭포)

계곡의 막다른 곳에는 푸른 이끼를 뒤집어 쓴 바위가 있다. 이끼가 가득하다는 것은 이곳이 그
만큼 청정하다는 것을 강하게 의미한다. 인왕산에서 흘러온 계곡이 이 바위에서 아담하게 폭포
를 자아내며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폭포의 높이는 2m 정도로 물줄기가 바위 전체를 타고 흐르
는 것이 아닌 한쪽 구석에 답답한 줄기로 흘러간다. 바위 위쪽 주변에는 석축을 쌓고 계단을 만
들었는데, 붉게 타오른 낙엽이 수북히 쌓여 마치 산불이 일어난 듯 하다.


▲  푸른 이끼의 청정한 안식처인 바위와 폭포

▲  폭포 밑에 모인 인왕산 계곡물

티끌 없이 맑은 계곡물이 폭포 밑에 마련된 조그만 담(潭)에 옹기종기 모여 기나긴 여행을 준비
한다. 여기서 숨을 돌리고 길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 힘드니 그 아쉬움은 정말 대단하겠지. 그
런 못에 낙엽들도 몰려와 그들 생애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주변 나무들은 조그만 못에 비
친 자신을 바라보며 막바지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  바위 위쪽 부분 (석축과 돌계단)
비록 짧지만 한세상 폼나게 살다 쓸쓸히 대지로 떨어진 이쁜 빛깔의 낙엽이
수북히 쌓여 아름다운 선경(仙境)의 불빛을 이룬다.

▲  불의 화신일까..? 붉게 물이 오른 단풍잎

▲  2층 테라스를 갖춘 사랑채와 2층 벽돌집

비경의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랑채는 별장 내부를 꽁꽁 가리고 있다. 사랑채 지붕
위에는 특이하게 옥상 테라스를 두어 작지만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으며, 사랑채 바로 옆에
는 붉은 피부의 서양식 2층 벽돌집을 두어 옥상으로 연결하는 계단을 두었다.
벽돌집에는 각 층마다 큼직한 방이 있어 사랑채의 보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옥상 테라스와 벽
돌집은 이곳만의 진한 매력이자 서울에 있는 근/현대 한옥 중에서도 유일한 케이스이다.


▲  측면에서 바라본 2층 벽돌집과 사랑채
붉은 벽돌로 치장한 벽돌집에 중후한 멋이 엿보인다.

▲  별장 안쪽으로 들어가는 통로 - 왼쪽이 사랑채, 오른쪽이 문간채이다.

▲  2층 벽돌집과 안으로 들어가는 문

▲  사랑채 지붕 2층 테라스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별장 안채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남쪽 산자락
정말 시리도록 아름다운 늦가을 풍경이다.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별장 뒤쪽 (서쪽)

사랑채 지붕으로 올라가려면 2층 벽돌집을 거쳐야 된다. 실내화로 갈아신어 계단을 타고 2층으
로 올라가 문을 열면 나무로 지어진 2층 테라스로 전망용으로 지어지긴 했으나 시야에 들어오는
범위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매우 좁아 별장 일대와 남쪽 산자락이 고작이다. 하지만 산자락에
나무가 무성해 눈이 그리 심심치는 않으며, 이곳에 올라 인왕산에서 잔잔히 다가오는 선선한 바
람을 맞으면 속세에서 오염된 머리와 마음이 싹 가시는 듯 하다.

별장 서쪽 언덕에는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구석에 소나무 등의 나무를 심었는데, 나무가 제법
다 자란 티를 내며 별장에 작게나마 그늘을 드리워준다. 게다가 커다란 바위도 한쪽에 자리잡고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숫키와가 얹혀진 담장이 집을 넓게 둘러싸며 속세와 경계를 이룬다.


▲  텅 비어있는 벽돌집 2층

※ 반계 윤웅렬 별장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교통편은 앞의 무계정사 참조, 무계정사 입구 현진건집터에서 큰 골목길로 직진하면 된다.
* 개인 소유라 내부 관람은 어렵다. 관계자의 허가를 받드시 받기 바란다.
* 여기서 인왕산의 품으로 6분 정도 들어가면 자하미술관(02-395-3222)이 있으며, 미술관 직전
  에서 부암약수터를 거쳐 인왕산으로 올라가도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48


▲  부암동 나들이를 마치고 자하손만두에서 먹은 떡만두국
색이 입혀진 만두가 나그네의 입맛과 시각을 제대로 자극시킨다.

부암동을 둘러보니 슬슬 어둠이 내려오면서 시장기가 감돈다. 답사와 등산에서 먹는 재미만큼이
쏠쏠한 것은 없지. 마침 자하문고개까지 올라온 터라 자하문길과 북악산길이 만나는 고개 중턱
에 자리한 자하손만두를 찾았다.
이 만두집은 서울식 만두를 파는 곳으로 서울에서 만두로 꽤 유명한 집이다. 다양한 색과 모양
을 지닌 만두는 입안에서 살살 녹기가 바쁘며, 만두집이라 만두와 떡국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2층 양옥으로 이루어진 이 집은 뜨락에도 상을 놓고 손님을 맞는데, 휴일 저녁이라 자리가 거의
없다. 우리는 편수와 떡만두국을 먹었는데, 가격이 몹시나 얄미운 수준이다. 편수는 11,000원,
만두국은 무려 12,000원이나 한다. 내가 먹은 만두국 가운데 가장 허벌나게 비싸다. 그렇다고
나같은 장정이 먹기에도 썩 넉넉한 양도 아님. 만두를 겯드린 식사를 하려면 2인 기준으로 3~4
만원대는 잡아야 된다.

반찬은 김치와 송송(깍두기)이 전부이며, 식사를 마치면 후식으로 잘 익은 수정과를 준다. (지
금도 주는 지는 모르겠음) 고개 중턱에 자리한 탓에 자리만 잘 잡으면 인왕산과 부암동을 바라
보며 식사를 할 수 있으며, 산자락이라 밤공기가 좀 차다.


▲  편수의 위엄
편수는 소고기와 표고버섯, 오이 등이 들어간 만두로 그 모양이 참 이쁘다.
저들의 모습은 소중한 무엇인가를 꼭꼭 품고 있는 모습 같은데, 그 껍질을
벗기면 잘 버무려진 편수의 내용물이 수줍은 듯 속살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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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4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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