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성곽'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7.11.07 대학로의 포근한 뒷동산이자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 산책 ~~ (한양도성, 낙산공원, 자주동천, 삼군부총무당)
  2. 2017.09.15 짙푸른 숲과 조촐한 계곡을 간직한 도심 속의 싱그러운 쉼터, 북악산 삼청공원 ~~~ (말바위, 영무정, 한양도성. 삼청동길)
  3. 2016.12.07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서촌의 끝자락을 더듬다 ~~~ (인왕산 한양도성, 딜쿠샤, 행촌동은행나무, 홍난파가옥 등)
  4. 2014.10.06 서울 도심의 좌청룡을 거닐다 ~ 낙산 가을산책 (이화마을, 낙산공원, 한양도성)

대학로의 포근한 뒷동산이자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 산책 ~~ (한양도성, 낙산공원, 자주동천, 삼군부총무당)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좌청룡, 낙산 나들이 '
(한양도성, 낙산공원, 비우당, 삼군부총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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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공원 한양도성 (낙산에서 동대문 방향)

▲  자지동천(자주동천) 바위글씨

▲  삼군부총무당


 

♠  한양도성(漢陽都城) 혜화문(동소문)에서 낙산공원 구간

▲  혜화문에서 낙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5월의 첫 무렵, 일행들과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을 찾았다.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혜화동로터리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동소문고개가 막
꺾이기 직전에 한양도성과 낙산으로 이어지는 탐방로가 손을 내민다.

이 탐방로는 낙산을 넘어 동대문(東大門)까지 이어지는 2.3km의 도보길로 2012년에 모두 개통
되었다. (동소문 주변이 마지막으로 개통됨) 처음부터 각박한 경사로 사람들을 맞이하는데 그
것도 잠시일 뿐, 길은 서서히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완만해진다. 삼선동(三仙洞) 주택가 뒤쪽
을 지나지만 낙산 정상까지 녹지대를 완충지대로 삼아 속세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산책
의 기분을 진하게 선사해주며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수준도 높아진다.

동대문에서 낙산공원으로 오르는 성곽 탐방로는 성곽길과 성곽 바깥길 2가지가 있어 골라가는
재미가 있다. 허나 동소문에서 오르는 길은 아직까진 바깥길만 완전하게 나 있다. 동소문고개
에서 성 안쪽을 보면 나무가 좀 무성해 보이는데 그곳에 카톨릭대 성신교정이 넓게 자리를 깔
고 앉은 터라 낙산공원~동소문 성곽길은 그 중간인 제2전망광장까지만 닦였을 뿐, 거기서 카
톨릭대 담장에 사정없이 가로막혔다.
자세한 속사정이야 낸들 모르겠지만 시민들을 위해 성곽길을 흔쾌히 개방하고 성곽이 끊긴 동
소문고개에는 카톨릭대 교내(혜화동성당)로 내려가는 길을 내면 될 것이다. 물론 끊어진 양쪽
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성곽 모양의 구름다리를 놓는 것이 훨씬 좋겠지만 끊긴 거리가 길고 그
높이마저 상당하며 고갯길 도로(동소문로, 창경궁로)의 교통량이 어마어마해 꽤 난공사가 예
상된다.

동소문고개를 기준으로 15분 정도 오르면 성 안으로 인도하는 암문(暗門)이 나온다. 그 문을
들어서면 낙산공원 놀이광장으로 거기서 2분을 더 가면 낙산의 정상인 낙산공원 마을버스 종
점에 이르게 된다.


▲  주거지(장수마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펼쳐진 성곽 바깥 탐방로

▲  낙산에서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내려가는 한양도성
낙산 북부에서는 어디서든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 산줄기가 시원히 바라보인다.


동소문~낙산 구간의 한양도성은 대체로 잘 남아 있다. 허나 600년이 넘는 장대한 세월을 먹었
고, 왜정과 6.25전쟁으로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기면서 새 성돌로 치유된 부분이 많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때가 자욱한 검은 성돌과 하얀 피부의 성돌이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하지
만 둘 사이의 어떠한 갈등도 없이 오랜 세월을 뛰어넘는 강인한 협동심으로 하나의 성곽을 이
루고 있으니 참 든든해 보인다. 그럼 여기서 한양도성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조선의 수도를 지켰던 서울<한양(漢陽)>의 갑옷, 한양도성 - 사적 10호
1388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란 그 유명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몸담았던 고려 왕조를
엎어버리고 조선이란 아주 비리비리한 왕조를 세운 이성계(李成桂), 세상에서는 그를 조선 태
조라고 부른다.
그는 1394년 남경(南京)이라 불리던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의 도성 천도 프로젝트
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이며 국방을 강화하여 버릇 없이 까부는 명나라를 혼내주
려고 했던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다.
1395년까지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시가지를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
에 들어갔는데 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4산(內四山)인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 길이는 59,500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 작
은 수준이며,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천하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
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
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에 다시 79,400명을 콩볶듯이 동원,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도성 축조는 마무리
가 되었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싹 다지기로 하고 1422년
1월, 32만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하여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으니 무려 3.2배의 인부들이 동원된 조선 최대의 공사였으며 완전 인원빨로 밀어
붙어 불과 38일만에 마무리되었다.
허나 아무리 현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이지만 농번기를 피하려고 늦겨울에 무리하게 작업을 벌
였고 공사의 강도가 높아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다. (공사가 끝나고 귀가 도중 죽은
사람들도 꽤 되었음) 그들의 적지않은 희생과 고통으로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 치성(雉城)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한 도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케 했는데 성곽을 워낙 단단히
지은 탓에 20세기까지 스스로 붕괴된 적이 없으며,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되거나 전쟁 폭격을 받은 것은 제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하여
도성은 왜군에게 아주 허무하게 무혈점령되고 만다. 그런 꼬라지를 막고자 온갖 욕을 들어가
며 단단하게 다졌건만 오늘날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소위 윗대가리들의 무능으로 눈을 뜨고
적군이 도성 안에 들어오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치열한 전쟁이 없어서 성곽과 성문
은 별 피해가 없었다. (한양도성 왈 '내가 이럴려고 단단하게 지어진건가? 자괴감 들어' ;;)

1704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신하들의 격한 반대를 물리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했는데, 그 안에 행궁(行
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갖춘 조그만 도시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탕춘대성
(蕩春臺城)을 쌓아 도성의 수비력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서울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드러내던 한양도성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1899년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사람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콜
브란은 고종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며 전차(
電車)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하여 그 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
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
문의 양쪽 성벽이 싹둑 잘리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나갔다. 허나
그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
제는 1905년 이후이다.

왜국(倭國)은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그 소속으로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해괴
한 기관을 만들어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1910년 이후 서소문<소의문(昭義門)>과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동소문<혜화문(惠化門)>을 밀어버렸고 적지 않은 성곽까지 덤으로 밀면서
망국(亡國)의 서울을 욕보인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
발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
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겨우 살아남
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손질하기 시작하여 광희문과 숙정문을
복원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
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
이 가능하며<인왕산 정상 주변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에는 못감, 월요일이 휴일인 경우에는 그
다음날 문을 닫음> 성곽이 사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에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바뀌었다. 허나 서울성곽이란 이름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며 한양성곽이라 불리기도
한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한양을 쌈싸먹던 성곽이니 서울성곽, 한양성곽이라 불러
도 크게 상관은 없을 것이다. (본글에서는 한양도성으로 통일함)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며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데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글쎄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
이 쌓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
에 성곽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았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우리나라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 대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  거의 85도로 서 있는 한양도성의 위엄

옛 한양도성은 두터운 성곽을 지니고 있기에 늘 든든했을 것이다. 그렇게 민초들을 닥달하여
쌓은 단단한 성이건만 그 보람도 없이 무능하고 부패한 지배권력층 때문에 제대로 된 수성전
하나 치르지도 못하고 적에게 떨어지는 수난을 여러 차례나 겪어야 했다. (임진왜란, 이괄의
날, 병자호란...) 성곽은 도시와 백성을 지키고자 있는 것이지 그냥 멀뚱히 서 있는 병풍이
아니다.


▲  낙산 바깥 탐방로에서 바라본 천하 (삼선동과 돈암동, 성북동, 북한산)


 

♠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 낙산(駱山)에 둥지를 튼
~ 낙산공원

▲  낙산공원 남쪽에 자리한 낙산정(駱山亭)

서울 도심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누운 낙산은 해발 125m의 나지막한 산이다. 낙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양이 낙타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산의 이름인 낙(駱)은 낙타를 뜻한다.
또한 3글자로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 모두 낙타를 상징한
다. 그 이름을 간편하게 줄인 것이 낙산이며 조선시대에 궁궐에 우유를 조달하던 관청인 유우
소(乳牛所)가 낙산 기슭에 있어 타락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낙산은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의 하나로 도성의 동쪽을 맡고 있다. 여기서 내사산
이란 한양의 주산(主山)이자 북쪽에 있는 북악산<백악산(342m)>, 서쪽의 인왕산(338m), 남쪽
의 남산(南山, 262m), 그리고 동쪽의 낙산을 이르는데 문제는 그 가운데 낙산이 가장 부실하
게 생겼다는 것이다.

낙산과 멀리감치 마주보고 있는 인왕산은 산세는 좀 작아보이나 꽤나 야무지고 험준하여 예로
부터 호랑이들의 소굴로 유명했다. 북악산 역시 인왕산 못지 않으며, 남산은 그들보다는 세는
약해도 덩치는 좀 있다. 반면 낙산은 그들보다 높이나 덩치에 있어서 형편없이 떨어져 그냥
뒷동산 수준의 언덕이다. 낙산의 그런 부실한 기운을 북돋아주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일
환으로 동대문의 이름을 흥인문(興仁門)에 지(之) 1글자를 추가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한
것도 바로 그 이유이다.
낙산이 그렇게 염려되면 글자로 장난칠 것이 아니라 도성을 동쪽으로 좀 확장하면 어떨까 싶
지만 낙산 동쪽은 신설동 방향으로 조금 뻗은 동망봉(東望峰)을 빼고는 거의 평지이다. 그러
니 별 수 없이 낙산에 성곽을 얹힌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고려보다 스케일이 비교도 안될 정
도로 작기 때문에 도성을 크게 구축하지 않았다. <고려의 황도(皇都)인 개경(開京)보다 훨씬
작음>

낙산은 야트막한 산으로 숲이 무성하고 잘생긴 바위와 약수터가 많았다. 게다가 도성 내부가
훤히 보일 정도로 조망도 일품이라 도성 주변 경승지로 꼽혀 왕족과 양반들이 낙산에 정자나
별장, 거처를 지어 머물렀다. 효종(孝宗)의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석양루(夕陽樓, 지
금의 이화장 정문 앞에 있었음)를 지었고, 이심원(李心源, 1722~1770)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을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과 백림정(柏林亭) 등이 있었다. 이들은 양반과 시인묵객들이 자
주 발걸음을 했던 낙산의 이름난 명소였다.
또한 조선 후기 한옥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던 이화장(梨花莊)과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유
명한 이수광(李睟光)의 초가인 비우당(庇雨堂), 낙산의 유방이라 불리던 이화동약수와 신대약
수 등의 약수터, 우물이 나란히 5개가 있었다는 5형제우물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의 애환
이 서린 자지동천(자주동천)과 동망봉, 도성 5대 명승지의 하나로 기이한 바위가 많았던 쌍계
동(雙溪洞, 이화장 주변) 계곡이 있었다.
그 외에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는 나무만 있다고 하는 홍수동(紅樹洞, 홍숫골), 동
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 등이 낙산에 앞다투어 안겨져 있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낙산이었
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낙산에 안겨있던 수많은 명소들은 20세기 이후 어둠의 시절과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녹아 없어졌고, 서울의 인구가 폭증함에 따라 낙산과 동망봉 일대에 빼곡히 아파트와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옛날의 운치와 정취는 다 말라버렸다. 달동네인 이화마을도 바로 그런
시류를 타고 낙산 남쪽에 살짝 둥지를 튼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낙산의 허리를 가르
는 한양도성과 이화장, 자지동천 바위글씨, 그리고 근래 복원된 비우당이 고작이다. 그 외에
조선 왕실의 원찰(願刹)이던 청룡사(靑龍寺), 고려 때 지어진 비구니 절 보문사(普門寺), 구
한말에 세워진 안양암(安養庵)과 지장암(地藏庵) 등의 절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낙산 중턱에 자리를 피며 산의 미관을 적지않게 말아먹던 시민아파트가 노후화됨에 따라 1990
년대 이후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에 따라 이들 아파트와 주변 주거지를 싹 밀어버
리고 정상 주변과 서쪽 일대 61,000여 평을 다져 낙산공원을 만들었다.
공원은 1999년 12월 30일 삽을 뜨기 시작하여 2002년 6월 완성을 보았는데, 운동시설과 휴게
소, 낙산전시관, 중앙광장과 놀이광장, 전망광장 등 3개의 광장을 갖추는 한편, 소나무 등 8
만 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비록 왕년의 손톱 때만큼은 못되어도 도심 속의 포근한 휴식 공간
이자 답사/나들이 장소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하여 서울의 '몽마르뜨 언덕'이란 별명까
지 얻게 되었다. (낙산공원 면적은 201.779
㎡)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은 동대문에서 동소문까지의 2.3km 구간으로 성곽이 잘 남아있다. 1999
년 이후 산업화의 칼질에 오랫동안 고통받은 낙산을 조금씩 위로하면서 성곽도 보수를 벌였는
데 동대문 북쪽 구간을 복원하고, 성곽과 성밖에 탐방로를 만들었다. 성곽 내부 탐방로는 동
소문에서 카톨릭대 성심교정 사이 약 700m을 제외하고 모두 길이 나있고, 성밖은 동소문에서
동대문까지 모든 구간이 이어져있다.

낙산은 대학로와 무척이나 가깝고 혜화역(4호선)과 한성대입구역(4호선), 동대문역(1,4호선),
창신역(6호선)과도 또한 가깝다. 심지어 낙산공원 정상까지 마을버스가 들어오는 등 교통과
접근성은 매우 착하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뒷동산처럼 야트막하여 누구나 쉽게 안길 수 있고
조망도 일품이다. 특히 서울의 야경(夜景)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포인트라 인기가 더하다.

낙산에 간다면 동소문이나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낙산공원에서
가까운 명소로 이화장과 이화마을, 자지동천(자주동천)과 비우당, 동망봉, 삼군부총무당 등이
있으니 한 덩어리로 같이 보면 제법 알찬 나들이가 될 것이며, 여기서 욕심을 더 부려 청룡사
, 보문사, 안양암, 대학로 주변의 명소들까지 둘러본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 낙산공원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 교차로(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도보 20분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4번 출구에서 성곽 탐방로를 따라 도보 15분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
  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낙산공원 종점 하차
*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탐방로는 24시간 개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산2-10 일대 (낙산길 41. 낙산공원 관리소 ☎ 02-743-
  7985~6)


▲  낙산 정상부 ① - 낙산공원 마크와 성바깥 산책로

▲  낙산 정상부 ② - 놀이광장 주변

▲  낙산 정상에서 제2전망광장으로 이어지는 성곽길


 

♠  낙산 주변에 숨겨진 명소들

▲  복원된 3칸 초가, 비우당(庇雨堂)

낙산 정상(종로구 마을버스 03번 종점)에서 창신동 방향(동쪽)으로 500m 정도 내려가면 쌍용
아파트2단지 입구라는 정류장이 나온다. (낙산에서 마을버스로 두 정거장) 정류장 남쪽 비탈
에 나무가 우거진 조그만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으로 들어서면 원각사(圓覺寺) 직전에 3칸짜
리 초가가 마중을 한다. 그가 낙산을 수식하는 명소의 하나인 비우당이다. 그럼 이곳에는 비
우당만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비우당 바로 뒤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에 자지동천 바
위글씨와 샘이 있다.

우리가 갔을 당시에는 가는 날이 보수하는 날이라고 지붕을 수리하고 파란 천으로 꽁꽁 덮고
있었다. 지붕을 감싼 천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날을 잘못 찾아온 것을 어찌하리? 어차피 집에
서도 가까운 곳이니 아쉬우면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도 상관은 없다. 그렇다면 비우당은 어
떤 곳인데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일까?

비우당이란 이름은 '비를 가리는 집(우울하게 말하면 간신히 비나 가리는 집)'이란 뜻으로 중
고등학교 국사책과 온갖 국사 관련 수험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주인공,
지봉 이수광<芝峯 李晬光, 1563~1628>이 어린 시절과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그의 호인 지봉
은 낙산 동쪽의 한 줄기인 지봉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이 집은 이수광이 지은 것이 아닌 문화유씨 집안이던 유관(柳寬. 1346~1433)의 집이었다.
그는 낙산 동쪽, 현 자리에서 약간 서남쪽인 쌍용2차아파트 자리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맹사
성(孟思誠), 황희(黃喜) 못지 않은 강력한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다. 집을 짓긴 했지
만 재상(宰相)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낡아빠진 초가였고, 지붕에 계속 빗물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았다고 한다. 그때 그는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어찌 견딜까??' 남 걱정도 참 팔자인 유명한 농담을 남기니 그 말이 '유재
상의 우산'이란 뜻의 유상수산(柳相手傘)이다.

유관이 죽자 외손인 전주이씨 집안에게 상속되었는데, 그 집안에서 태어났던 이수광이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없어진 것을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로 잠시 관직을 버렸을 때, 홀연히 다시 찾은 것이다.
그는 다시 집을 짓고 유관의 일화를 바탕으로 집의 이름을 비우당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머물며 지봉유설을 비롯한 다양한 서적을 작성했는데,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를 통해
집과 관련된 사연을 적었다. 또한 집 주변의 8곳의 경치를 '비우당 8경(八景)'이라 정하고 시
를 지으니 다음과 같다.

1. 동지세류(東池細柳) - 동대문 밖에 있던 동지(東池)란 연못에 핀 버들이 봄바람에 버들개
지를 날리고 꾀꼬리가 노래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동지는 현재 없음)
2. 북령소송(北嶺疏松) - 북악산의 산마루가 낮에도 어둑한데 푸른 솔그림자가 집에 드리운
것을 보고 동량으로 쓰이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3. 타락청운(駝酪晴雲) - 아침마다 누운 채 낙산의 구름을 마주하면서 한가한 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4. 아차모우(峨嵯暮雨) - 아차산에서부터 벌판을 지나 불어오는 저녁비를 노래했다.
5. 전계세족(前溪洗足) - 비가 오면 개울에 나가 발을 씻고 개울가 바위(자지동천)에 드러눕
다. (현재 낙산에는 계곡이 전멸함)
6. 후포채지(後圃菜芝) - 지봉과 상산(商山, 낙산의 동쪽 줄기의 하나)의 이름에 맞추어 상산
사호(商山四皓)처럼 살고 싶다.
7. 암동심화(巖洞尋花) - 복사꽃 핀 골짜기에서 나비를 따라 꽃을 찾아가는 풍류를 말하다.
8. 산정대월(山亭待月) - 맑은 달밤 정자에 올라 술잔을 잡은 흠취를 말했다.


조선 중기에 뛰어난 문신이자 학자로 실학(實學)의 시조격인 인물이며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
으로 정국을 이끈 그가 바람처럼 사라진 이후 집은 고된 세월에 지쳐 쓰러졌고, 그가 노래한
비우당8경도 개발의 칼질에 재현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서울시에
서 뒤늦게나마 비우당 표석을 세웠고, 원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앉으면서 2011년에 그 부근
인 자지동천 앞에 비우당을 복원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비우당은 툇마루를 갖춘 초가 3칸으로 부엌을 가지고 있다. 초가 주위로 싸리나무로 얇게 담
장을 둘러 옛 초가의 정취도 조금은 풍기는데 사립문이 열려있는 경우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
면 된다. 허나 무심히 닫혀있더라도 담장이 낮아서 안으로 넘어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굳이 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바깥에서 거의 다 보이지만 비우당 뒤쪽에 있는 자지동천의
흔적(샘터와 바위글씨)이 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담장 밖에서도 보이기는 보임) 비우당
은 복원된지 10년도 안된 아주 따끈따끈한 초가라 고색의 내음 따위는 기대할 수 없지만 자지
동천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  서울시장 조순이 1995년에 세운 비우당 옛터 비석

▲  비우당 동쪽 부분 (굳게 닫힌 사립문과 비우당터 비석)
초가 뒤쪽으로 자지동천 표석과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  자지동천(紫芝洞泉, 자주동천) 표석

▲  비우당 뒷쪽 굴뚝과 자지동천

그럼 이름도 참 거시기한 자지동천(자주동천)은 어떤 사연이 깃든 곳일까?
이곳은 낙산 동쪽에 자리한 오래된 샘터로 조선 6대 군주인 단종(端宗)의 부인, 정순왕후(定
順王后) 송씨(1440~1521)의 슬픈 사연이 서린 현장이다.

정순왕후는 여산송씨 집안으로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1454년 단종의 왕비가 되었으며 바
로 이듬해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넘기면서 단종은 상왕(上王), 송씨
는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가 되었다. 허나 1457년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
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생애 마지막 강제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송씨는 영도교(永渡橋,
청계8가)까지 울면서 따라와 마지막 이별을 나누게 된다.
그들이 영영 이별한 다리라는 뜻에서 영이별교, 영이별다리라 불렸고, 그것이 영도교로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단종이 떠나면서 송씨 역시 강제로 궁궐을 나와 낙산 청룡사(靑龍寺)에 몸을 의탁했다. 청룡
사는 은퇴한 왕실 상궁(尙宮)과 승하한 제왕의 후궁들이 말년을 보내던 곳으로 그들을 위한
정업원(淨業院)이 설치되어 있었다. 송씨도 그곳에 머물렀으나 세조(世祖)가 마땅히 지원을
해주지 않아서 생활이 상당히 어려웠다.
그래서 절과 가까운 자지동샘으로 와서 비단을 빨아 자주색 물감을 들여 바위 위에 널어 말렸
으며, 그 비단으로 댕기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서울 장안이나 동묘 주변에 열렸던
여인시장에 팔아 생계를 꾸렸다. 그때 여기서 비단을 물들이거나 빨래를 할 때 샘물도 그녀의
처지에 피눈물을 흘렸는지 저절로 붉은 색으로 염색이 되었다고 하며, 세상에서는 송씨의 그
런 애환을 위로하고자 함인지, 자주색으로 물들인 샘을 자지동천(자주동천), 자주우물이라 부
르고 바위는 자주바위라 불렀다. 또한 샘터 일대를 자지동(紫芝洞, 자주동), 자줏골, 자주동
이라 불렀다.
이렇게 보면 이름은 많은 것 같지만 정식 이름은 자지동천, 자지동이며 여기서 자지는 거시기
한 그것이 아니라 뿌리가 자주색을 띠는 풀인 지초(芝草)를 말한다. 지금이야 샘이 있는 바위
윗쪽에 잡초만 자라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 지초가 무성히 자라고 그 바위 틈으로 맑은 물이
흘렀다고 전한다.

옛 기록에도 이곳 이름은 그렇게 거시기하게 나오지만 이 땅의 정서상 상당히 예민한 단어인
지라 당당히 쓰기에는 좀 쑥쓰러운 감이 있어 요즘은 자주동천, 자주동샘으로 희석해서 많이
부른다. 비록 단어는 거시기해도 뜻은 그렇지가 않거늘 마치 홍길동(洪吉童)이 아버지를 아버
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자지동천은 자주바위 밑에 파인 'U'자 모양의 돌우물로 왜정 때까지 물이 나왔다고 한다. 허
나 왜정 이후 개발의 칼질로 낙산의 계곡과 물이 씨가 마르면서 죽은 샘물이 되었다. 송씨를
비롯하여 낙산 동쪽에 살던 여인들이 빨래나 염색/식수용으로 사용하던 샘물로 옛날의 정취는
95% 이상 증발되고 겨우 일부만 남아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샘터를 밑도리에 둔 자주바위 피부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 쓰인 바위글씨가 있다. 자
지(紫芝) 2글자는 좀 퇴색되긴 했으나 두 눈으로 살피는데 그리 어려움은 없으며, 동천(洞泉)
2자는 꽤 선명하여 글씨에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글씨를 쓴 이는 누군지는 전해오는 바는 없
으나 조선 후기에 단종과 정순왕후를 추모하는 선비가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  흔적만 남아있는 자지동천 샘터(자주동샘)

▲  자지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글씨에 검은색을 입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글씨의 크기는
세로 72cm, 가로 185cm이다.

▲  자지동천 거북바위

자주바위 윗쪽에는 거북이를 조금 닮은 듯한 커다란 바위가 있다. 하여 바위 이름도 거북바위
인데 그에게도 정순왕후의 한이 담겨져 있다.
정업원에서 먼저 간 남편(단종)을 생각하며 눈물로 잠을 이루던 어느 날, 단종이 거북이를 타
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이상히 여기며 아침 일찍 비단을 빨러 자지동샘에 왔는데 어
제까지만 해도 없던 이 거북바위가 불쑥 나타났다고 한다.
물론 바위가 갑자기 불쑥 나타날 리는 없다. 허나 그런 꿈을 꾼 이후, 빨래를 널고 잠시 쉬면
서 바위를 살펴보니 꿈의 영향인지 거북과 비슷하게 생긴 것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 사연을
동네 아낙들과 승려들에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그 이야기가 새끼에 새끼를 치면서 그런 전
설로 변해간 것이다.

※ 비우당, 자지동천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
  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쌍용아파트2단지 입구에서 하차, 도로 남쪽 밑에 나무가
  무성한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 아랫쪽에 있다.
* 낙산공원(낙산 정상)에서 창신역 방면으로 도보 7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9-471 (낙산공원 관리소 ☎ 02-743-7985~6)


▲  삼군부총무당(三軍府總武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호

낙산 동북쪽이자 한성대 바로 서쪽에는 삼선공원(삼선상상어린이공원)이 있다. 그 안에는 고
색이 창연한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하나 숨겨져 있으니 그가 삼군부총무당이다.

삼군부(三軍府)는 국방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1865년에 흥선대원군이 신설했다. 비변사(
備邊司)를 의정부에 통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군령 최고 기관으로 무부(武府)라 불리기도 했
는데 광화문 남쪽 예조(禮曹) 자리에 훈국(訓局)의 신영(新營), 남영(南營), 마병소(馬兵所)
및 오영(五營)의 주사서(晝仕所)를 합쳐 삼군부라 칭했으며, 1867년 4월에 완전한 조직을 갖
추었다.
의정부(議政府)와 대등한 지위를 누리며 군무(軍務)와 군비 강화를 비롯한 숙위 문제와 변방
관리를 맡았으나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에게 크게 꺾이면서 1880년 12월 폐지되고 만다.

삼군부총무당은 삼군부가 한참 자리를 잡던 1868년에 현재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 세워진 것
으로 삼군부의 중심 건물이다. 양쪽으로 덕의당(德義堂)과 청헌당(淸憲堂)을 거느렸으며, 삼
군부가 폐지된 이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관청으로 쓰였다가 갑오개혁(甲午改革) 이
후에는 시위대(侍衛隊) 청사로 쓰였고, 1910년부터 1926년까지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 사령
부로 사용되었다.
허나 순종(純宗)이 1926년 붕어한 이후, 보병대는 폐지되었고, 1930년 왜정(倭政)이 쓸데없이
심술을 부리면서 삼군부의 중심인 총무당을 지금의 자리로 내쫓았다. 또한 덕의당은 부셔버렸
으며, 청헌당(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호)만 홀로 남아있던 것을 1967년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로 보내버렸다.

▲  삼군부총무당의 뒷모습

▲  위에서 본 모습

총무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길쭉한 팔작지붕 건물로 중앙 3칸은 대청이고 양 옆구리에 1
칸짜리 온돌방이 있으며 그 옆에는 광이 있다. 조선이 이 땅을 거쳐간 가장 최근의 나라이지
만 왜정의 심술이 극심해 제대로 남은 관아 건물이 별로 없으며 서울 같은 경우는 총무당과
청헌당이 유일하다. 설령 남기더라도 생색내기용으로 거의 1~2동만 남기는 수준으로 망국의
관청을 완전 고자 수준으로 만들었다. (삼군부 같은 경우는 1동만 자리를 지키게 했음)
뒷끝이 쿨해야 서로가 좋거늘, 왜는 섬나라 사람의 비좁은 본성 때문에 그러지를 못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두고두고 반감만 잔뜩 샀던 것이다.

총무당 주변은 1970년대 이후 동네 주민을 위한 공원이 조성되었고, 어린이놀이터를 더 확장
하여 완전한 어린이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이제와서 총무당을 제자리로 돌리기는 좀 힘들겠지만 따로 놀고 있는 청헌당과는 다시 하나로
이어줘야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니까 청헌당이 이곳으로 오던지 아니면 총무당이 육사로
가던지 해서 둘을 같이 있게 해주면 보기도 좋을 것 같다. 덕의당은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복
원을 해서 옆구리에 붙여주면 될 것이다. 비록 망국의 관청이긴 하나 한때 조선의 군정(軍政)
을 관장했던 현장으로 이렇게 동네 구석 어린이공원에 분산되어 처박혀있는 것도 한편으로는
좀 딱해 보이기도 한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삼선공원
삼군부총무당을 끝으로 낙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삼군부총무당(삼선공원)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3번 출구를 나와서 1분 가면 삼선교로4길(삼군부총무당을 알리
  는 어두운 색깔의 이정표가 있음)이 나온다. 그 길로 들어서 8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과 장
  수마을 표석이 나오면서 좌우로 갈리는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성곽과 반대 방향인 왼쪽
  으로 2분 가면 삼선공원이 나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1가 1-13,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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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10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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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숲과 조촐한 계곡을 간직한 도심 속의 싱그러운 쉼터, 북악산 삼청공원 ~~~ (말바위, 영무정, 한양도성. 삼청동길)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 나들이
(삼청공원, 말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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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숲이 무성한 서울 도심의 든든한 허파, 삼청공원(三淸公園)

▲  감사원 서쪽에 있는 삼청공원 후문

여름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6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촌(北村)을 찾
았다. 북촌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계속 북쪽으로 가니 어느덧 북촌과 북악산(백악산)의 경계인
삼청공원까지 발길이 가게 되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오랜만에 공원이나 1바퀴 둘러보고자
공원 정문을 통해 그의 품으로 들어섰다.

북악산 동남쪽 자락에 넓게 누운 삼청공원은 서울 도심의 북쪽 끝으로 조선시대에도 한양도성(
都城)의 북쪽 끝을 담당했다. 예나 지금이나 싱그러운 나무가 바다를 이루던 명승지로 서울 사
람들의 오랜 나들이 명소였으며, 봄꽃이 만연할 때는 사대부 여인들이 봄꽃놀이를 즐기던 현장
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 학자인 성현(成俔, 1439~1504)은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도성
안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으로 삼청동 골짜기를 꼽았으니 그곳이 바로 삼청공원으로 '산이
높고 나무가 빽빽한데 바위 골짜기가 깊숙하다'
라며 이곳을 표현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 표현은 유효한데, 공원 일대에는 북악산의 명물인 소나무를 비롯해 노간주
나무, 붉나무, 팥배나무, 쪽동백나무, 신갈나무, 때죽나무, 진달래 등 갖은 나무들이 숲을 이
루고 있으며, 골짜기가 깊고 멋드러진 바위가 여럿 포진해 있다.

이렇게 서울 사람들의 오랜 산책 명소이자 피서지였지만 공원에 서린 옛 흔적은 북악산 주능선
에 붙어있는 숙정문(肅靖門)과 한양도성 밖에는 없다. 이들은 도성 수비용이니 풍류와는 관련
이 없고 기껏해봐야 관리들이 말을 타고 올라와 시를 지었다는 자연산 바위, 말바위 정도가 있
다. <공원 바깥까지 확대한다면 '삼청동문(三淸洞門)' 바위글씨를 비롯한 여러 바위글씨와 유
길준(兪吉濬)이 유폐되어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작성했던 취운정(翠雲亭)터 정도가 있음>

왜정(倭政) 시절인 1934년 3월, 삼청골 일대를 삼림공원으로 삼아 관리하기 시작했으며, 1940
년 3월, 총독부고시 208호에 따라 도시계획공원의 하나가 되었다. 당시 왜정은 도시계획공원
140개를 발표했는데 삼청공원이 그 1호로 당시 공원 면적은 약 432,000㎡였으며, 소나무를 비
롯한 온갖 나무들로 울림(鬱林)을 이룬 이곳에 산책로와 정자, 의자, 풀장 등을 설치했다.

1945년 이후에는 정몽주 시조비 등의 시비(詩碑), 영무정, 어린이놀이터, 운동시설 등을 계속
해서 설치했고 산책로와 계곡을 정비했으며 삼청동길과 계곡(삼청골) 사이에 나무데크길을 닦
았다. 그리고 근래에 후문 부근에 숲속도서관을 짓는 등, 자연에 크게 반(反)하지 않는 범위에
서 얌전하게 손질을 했다.
공원 손질이 얌전했던 이유는 공원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잔뜩 포진해 있어 천박한 개발
의 칼날을 뚝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하여 자연에 쏙 묻힌 싱그러운 공간으로 도심 속에 남게
된 것이다. 다만 시내 확장과 군부대로 공원 면적은 5만㎡가 줄어 현재는 약 388,109㎡이다.

삼청공원은 도심의 핵심인 광화문(光化門)과 종로에서도 무척이나 가깝다. 게다가 공원과 살을
맞댄 북촌과 삼청동길의 인기가 계속 하늘을 찌르면서 찾는 이도 많이 늘어났다. 숲이 매우 짙
어서 그늘도 꽤 깊으며 조촐하게 자연산 계곡까지 갖추어 북악산 서북쪽 자락에 묻힌 백사실계
곡(백석동천, ☞ 관련글 보러가기)과 더불어 도심 속 피서지로 인기를 더하고 있다.
 비록 천하에 이름 꽤나 있는 계곡 앞에 명함조차 내밀기 쑥쓰러운 수준이지만 도심 속에서 발
을 담구며 간단하게 피서를 누릴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대단하다. 공원을 가로질
러 도심으로 향하는 삼청골은 삼청천(三淸川)이라 불리며 청계천 상류의 하나를 이룬다.

시내에서 공원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삼청동(三淸洞) 마을버스 종점에서 들어가는 것과 감사원
서쪽의 후문으로 가는 길이 가장 일반적이다. 북촌에서 들어간다면 후문을 이용하면 되며, 삼
청동길로 접근하거나 마을버스를 이용한다면 삼청동 마을버스 종점에서 들어가면 편하다. 또한
2009년에 공원에서 말바위로 오르는 산길이 뚫리면서 북악산 주능선과 숙정문은 물론 그 너머
성북동(城北洞) 지역까지 바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특히나 이 길이 지나가는 북악산 동남
쪽 자락은 오랫동안 속인(俗人)들의 접근을 허용치 않았던 금지된 곳으로 산길이 닦이면서 이
곳을 잠궜던 자물쇠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공원 서쪽에는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시작된 삼청동길이 마을버스 종점을 지나면서 구불구불 또
아리를 튼 2차선 산악도로의 모습을 보이며 삼청터널을 거쳐 성북동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박
정희 정권 시절 성북동에 서식하던 권력 실세들이 그들의 교통 편의와 땅값 상승, 청와대와 정
부기관에서 삼청각/대원각 등 고급요정으로의 접근 편의를 위해 낸 것으로 당시에는 차량이 많
지 않아 조촐하게 2차선으로 만들었다.
 허나 시간이 흘러 차량들이 쓸데없이 늘어나면서 도로와 터널을 넓혀야될 지경에 이르렀지만
개발제한구역이라 그것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2차선으로 마냥 두고 있는 것이다.

삼청터널과 터널로 이어지는 길(삼청공원~삼청터널 북쪽, 삼청각 구간)은 뚜벅이들의 배려 따
위는 안중에도 없는
오로지 차량을 위한 길이니 괜히 도보로 가는 일이 없기 바라며 삼청동에
서 숙정문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이 길은 오랫동안 통제구역으로 묻혀 속세의 뇌리 속에
잊혀진 상태이다.

※ 삼청공원 찾아가기 (2017년 8월 기준)
* 지하철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을 타
  고 삼청동 종점 하차. 이 버스는 삼청동에서 정독도서관입구, 동십자각, 광화문, 시청, 남대
  문을 거쳐 서울역(서울역전우체국 북쪽)까지 운행한다.
* 지하철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감사원 하차(또는 도보 15
  분), 감사원에서 서쪽(삼청동)으로 내려가면 막다른 3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들어
  가면 공원이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삼청동길)
*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삼청동길을 따라 25분 정도 걷거나 동십자각 북쪽 법련사 정류장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 이용
* 삼청공원 숲속도서관 이용시간 : 10시~18시 (여름은 20시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문의 ☎
  02-734-3900)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1 일대 (북촌로 134-1)


▲  삼청공원 후문 안쪽

공원 후문을 들어서면 수목원 같은 삼청공원의 고운 속살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수목원 같지만
속살을 깊이 들어가면 수목원 분위기는 울림으로 변화하고 산내음과 솔내음이 청정한 기운을
볶아내면서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준다.


▲  숲터널을 이룬 삼청공원 산책로 ▼


▲  시인 김경린(金璟麟, 1918~2003)의 '차창'이 담긴 시비(詩碑)

차창(車窓)
나는 수족관에 온 한마리의 어족
미끄러지는 바깥 세계가 뿜는 향수로
안경은 차웁다

우리나라 현대 시인의 하나인 김경린이 2003년 세상을 뜨자 그의 후학들이
그가 살았던 삼청동에 그의 대표작, 차창을 담은 시비를 세웠다.

▲  동심이 깃든 삼청공원 어린이놀이터
어린이들의 안전과 그들의 흙놀이 공간을 위해 흙으로 놀이터를 닦았다. 나도
어렸을 때 흙장난 참 많이 했었지. 그때는 흙으로 많은 세상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내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도 아리송하다.

▲  삼청공원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옛 약수터
오른쪽에 보이는 네모난 구멍에서 약수가 콸콸 쏟아져 나왔으나
이제는 목구멍이 막힌 죽은 샘터가 되었다.

▲  삼청공원 약수터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담는 약수터로 근래 부적합 판정을 받아 찾는 이가 많이 줄었다.
약수터 맞은편 의자에는 1996년 10월 문화체육부에서 세운 근대 소설가 염상섭
(廉想涉, 1897~1963)의 앉아있는 동상이 있었으나 2014년에 치워버렸다.
(염상섭의 생가터가 이곳 부근이라 동상을 세웠음)


▲  비둘기도 이곳 경관에 반해 뒤뚱뒤뚱 산책을 즐긴다.

▲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그의 어머니의 시조비

정몽주와 그의 어머니의 시조가 담긴 정몽주 시조비는 이곳에서 그나마 오래된 볼거리로 1973
년에 세워진 것이다. 포은(圃隱)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을 덜 초라하게 해준 3은(三隱)의 하
나로 그의 시조비가 떡하니 있어 이곳과 무슨 관련이 있겠구나 싶지만 실상은 서로 아무런 관
련이 없다.

시조비 오른쪽을 장식하고 있는 시조는 백로가(白鷺歌)로 정몽주의 어머니가 간신과 역신(逆臣
) 등 질이 안좋은 무리와 어울리지 말 것을 훈계하고자 지은 시라고 한다. 허나 조선 영조 때
간행된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작자 미상이라 나와있고 조선 말 학자인 이희령(李希齡)이 지
은 약파만록(藥坡漫錄)에는 연산군 시절에 김정구(金鼎九)가 지은 시라고 나와있어 작자에 대
해서는 아직도 말들이 많다.

시조비 왼쪽에는 정몽주가 지은 그 유명한 단심가(丹心歌)가 쓰여 있다. 이 시는 이성계(李成
桂) 패거리가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우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인 이방원(李芳
遠, 후에 조선 태종)이 정몽주를 살짝 찾아와 그 유명한 하여가(何如歌)를 들이밀며 그의 의중
을 물었다.
 허나 정몽주는 그 이름도 높은 단심가로 답을 하며 고려에 대한 일편단심을 강하게 내비췄다.
결국 안되겠다 여긴 이방원은 부하 조영규(趙英珪)를 보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를 잔인
하게 처단하고 만다. 고려의 마지막 보루인 최영(崔瑩)과 정몽주를 잃은 고려는 더 이상 지탱
하지 못하고 결국 이성계 패거리에 의해 강제로 휘장을 내리게 된다.



백로가(白鷺歌)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빗을 새오나니
창파(滄波)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하여가(何如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영무정의 4계절' 시비
영무정 보존회에서 2008년 10월에 세운 시비이다.


영무정 시비에서 북쪽을 보면 초록색 철책이 빙 둘러진 후미진 공간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속살에는 조그만 폭포가 동천(洞天)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고 그 밑에 물이 담겨진 욕조처
럼 생긴 통이 있으며, 그 옆에 조그만 정자가 있으니 그곳이 바로 삼청공원의 숨겨진 명물, 영
무정이다.

이곳은 서울에 거의 남지 않은 노천 목욕탕으로 1960년경에 동네 사람들이 목욕터로 만든 곳이
다. 폭포 밑에 3명 정도 들어갈 크기의 욕조를 만들었는데 물이 매우 맑고 차다고 한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사람 여럿이 욕조에 몸을 담구거나 (물론 옷은 입었음) 주변에 앉아 대
화를 하고 있어서 안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특히 아저씨와 노공(老公)>의 오랜 목욕터이나 문제는 시민들이 거니는 공원에서
벌거벗고 목욕과 냉수마찰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계속 논란이 불거지자 종로구청에서
이곳을 없애려고 삽을 들었으나 영무정보존회에서 쌍수 들고 반대하여 철거는 하지 못했다. 또
한 방송에도 여러 번 등장해 그 이름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철거하기에 좀 애매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여 종로구청은 기존에 있던 펜스를 치우고 초록색 철책을 둘렀으며, 벌거벗고 씻지
말라는 경고문을 붙이는 선에서 영무정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허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늦은 밤에 몰래 벗고 씻는 이들도 아직 있을 듯 싶으며 구석진 곳이
라 둘만의 조용한 대화(?)를 원하는 이들이 찾기에 좋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이자 내 어린 시절 뒷동산이었던 남산(
南山)의 여러 약수터에는 이런 노천 목욕탕이 거의 딸려있었다. 약수터와 운동시설 옆에 담장
등을 둘러 벗고 씻는 공간을 둔 것이다. 나도 어린 시절 남산 그늘에 살았을 적에 부친을 따라
남산의 모 약수터에서 냉수마찰을 한 적이 있다. 냉수마찰을 해야 감기가 안걸린다는 말에 깜
빡 속아서 말이다.

영무정이 법에는 다소 저촉은 되지만 동네 사람들의 쉼터이자 피서지로 차가운 물이 모였다는
욕조에 들어가 피서를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단 물놀이에 적당한 가벼운 옷차림(속옷바
람은 안됨)으로 통에 들어가길 바라며, 삼청골 오염을 방지하고자 비누 사용과 음식물 취사행
위를 금하고 있으니 그냥 몸만 시원하게 담구고 오자.


▲  삼청공원 윗쪽 산책로 (영무정 북쪽)
집으로 살짝 가져와 혼자서만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다.

▲  구부러진 삼청공원 윗쪽 산책로

▲  삼청공원 산책로는 경사가 별로 없어 누구든 마음 편히
거닐 수 있는 착한 오솔길이다.

▲  오랜 가뭄으로 목이 타버린 삼청골
물은 온데간데 없고 흙과 돌만 어지럽게 흩어져 초여름 가뭄의
심각함을 드러낸다.


 

♠  삼청공원의 새로운 산길, 북악산 말바위 산길

▲  말바위 산길 입구

삼청공원 윗쪽에는 북악산 말바위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2008년에 닦기 시작하여 2009년에
완성되어 세상에 선보인 산길로 말바위조망대까지 600m 정도 이어져 있으며, 그곳까지는 가볍
게 10~15분 정도 걸린다. (중간에 갈림길이 있음, 거기서 왼쪽으로 가면 소나무 숲길, 직진하
면 말바위임)

말바위조망대에서 성곽을 따라 서쪽(숙정문 방향)으로 조금 가면 성곽 밖으로 나가는 나무데크
길이 있는데 그 길로 내려가면 바로 성북동으로 북악하늘길 제3코스와 만난다. 여기서 왼쪽(서
쪽)으로 가면 삼청각과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북악하늘길2/3코스로 이어지고, 오른쪽(동쪽)으로
가면 와룡공원<여기서 성북동 종점이나 성균관대, 감사원 방면으로 내려가면 됨>으로 이어진다.
 또한 성곽길을 더 가면 말바위안내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숙정문을 거쳐 북악산 정상과 창의문
(彰義門, 자하문)으로 넘어갈 수 있어 코스 또한 다양하다. 그러니 취향에 따라 코스를 잡으면
된다.
허나 숙정문과 북악산(백악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성곽길은 9시부터 16시(동절기는 10
~15시)까지만 출입이 가능하다. (신분증을 지참하여 출입증을 작성해야 됨)

삼청공원에서 말바위로 오르는 산길이 생기기 전에는 거기서 성북동/북악산 방면으로 가는 정
식적인 길이 없었다. 삼청터널이 있지만 거긴 오직 차량 전용이며, 걸어서 간다면 와룡고개로
우회해서 가야했다. 지도에서 보는 거리는 매우 가깝지만 걸어서 가는 체감거리는 이론과 다르
게 꽤 각박했던 것이다.
 허나 말바위 산길이 생김으로써 비록 산을 넘어야되는 부담은 있지만 서로의 거리가 꽤 줄어
들었고 반대로 성북동(삼청각)에서도 삼청공원과 도심 도보 접근이 수월해졌다.

출입절차를 밟아야 되는 말바위안내소에서 창의문으로 이어지는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말바위
등산로와 성곽 밖 북악하늘길은 언제든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 (단 군사시설이 여럿 있으
므로 그곳은 들어가거나 촬영하지 말 것)
 이렇게 삼청동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뚫렸다니 참 세상이 많이 변하긴 변한 모양이
다. 국가의 예민한 곳으로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하고 먼산 쳐다보듯 해야 했던, 잘못
들어갔다가는 정말 총 맞을 것 같던 그곳이 말이다. 이제 도성 남쪽인 북악산 남쪽만 개방되면
북악산은 거의 완전히 해방이 된다. 하지만 그곳에는 청와대와 여러 예민한 시설이 있으니 당
장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  말바위 입구에 세워진 건강 돌탑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돌탑이든 우선 건강하고 봐야 된다.
건강이 없다면 바닷가의 힘없는 모래성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  소나무가 운치를 우려내는 말바위 산길

북악산은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시절부터 소나무가 유명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특별
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하여 산이 온통 솔내음의 향기가 진동했다. 허나 왜정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 다른 나무의 유입 등으로 소나무가 많이 줄어 지금은 주능선 주변과 고지대에
주로 남아있다. 삼청공원이나 와룡고개 등 속세와 가까운 곳은 소나무가 거의 없고 속세와 어
느 정도 거리를 둔 고지대에서 소나무들이 이슬을 먹으며 자라고 있다.

북악산 일대는 오랫동안 금지된 산으로 묶여있다 보니 나무와 식물이 마음 놓고 뿌리를 내리면
서 숲이 매우 울창하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는데 삼청공원 일대에서는 직
박구리와 박새, 멧비둘기, 오색딱따구리, 꿩, 노랑지빠귀, 다람쥐, 청솔모 등이 살고 있다.


▲  삼청공원과 말바위 사이에 조성된 쉼터
말바위 등산로는 흙길과 나무로 만든 계단길이 적당히 섞여 있다.

▲  한양도성 (말바위 방향) - 사적 10호

삼청공원에서 말바위 등산로를 15분 정도 오르면 한양도성(한양성곽)의 여장이 나타난다. 여장
이란 성곽을 수비하고자 두툼하게 돌벽을 쌓고, 중간에 여러 개의 구멍을 낸 수비시설인데, 이
곳이 성내(城內)이다 보니 여장 안쪽에 있게 된 것이다. 여장 너머는 성밖으로 바로 성북동이
다.


▲  한양도성 (삼청공원 방향)
서울을 지키던 성곽도 부끄러움을 타는 것일까? 몸에 걸친 담쟁이덩굴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성곽은 1974년 이후에 복원한 거라 일부 검은 주근깨가 낀 것을 빼고는
대부분 하얀 피부를 자랑한다.

▲  말바위로 오르는 각박한 계단길 (왼쪽에 보이는 길로 가면 말바위 조망대)

한양도성과 만나는 곳에서 성곽을 따라 서쪽으로 3분 정도 가면 각박한 각도의 계단길이 나타
난다. (동쪽은 군사시설로 길이 막혀 있음) 그 계단을 오르면 바로 말바위인데 계단길 중간에
왼쪽으로 통하는 나무길이 있으며 그 길로 들어서면 말바위 조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  북악산 말바위조망대와 말바위

▲  도심을 향해 들어앉은 말바위 조망대

말바위 밑에 자리한 말바위 조망대(전망데크)는 커다란 바위 위에 나무로 만든 조망대로 도심
이 있는 남쪽을 향하고 있다. 천하 굴지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밑에 두고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북악산 정상(342m)이나 그 동쪽 봉우리인 청운대(293m), 인왕산(338m)보다 키
가 낮아 시야에 들어오는 범위도 사대문(四大門) 안쪽으로 좁다. 하여 이곳이 그리 높다는 생
각도 들지 않는다.
 허나 삼청공원을 비롯해 북악산 남쪽 자락과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그리고 그 안쪽에
둥지를 튼 도심이 속시원히 바라보며 그런데로 후한 점수를 줄만하다. 낮은 높이치고는 제법
선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북악산 정상과 남쪽 자락
북악산 너머로 인왕산과 서촌<웃대, 경복궁 서쪽 동네> 일대가 바라보인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①
바로 정면에 서울의 남주작인 남산이 바라보인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②
삼청공원과 삼청동, 경복궁 주변 일대가 바라보인다.

▲  북악산의 오랜 명소, 말바위

말바위는 촛대바위와 더불어 북악산에 이름난 바위이다. 이곳까지 삼청공원의 영역에 들어가는
데, 북악산의 오랜 명소로 조선시대에 문인(文人)과 관료들이 말을 타고 이곳으로 올라와 시문
을 짓거나 바람을 쐬며 많이들 쉬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을 타고 올라왔다는 뜻에서 말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며, 다른 이야기로는 북악산의 산줄기가 동쪽으로 좌청룡(左靑龍)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그 끝에 자리한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 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니까 말
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 것이다. (바위가 말처럼 생기지도 않았음)

말바위 옆에는 소나무 1그루가 바위 쪽으로 가지를 뻗어 바위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서
로의 끈끈한 정을 자랑한다.


▲  말바위의 옆모습

1968년 1.21사건 이후 말바위는 금지된 바위가 되어 속세에서 잠시 그 모습이 지워졌다가 2007
년 4월 다시 공개가 되었다. 그때 말바위에서 북악산 정상을 거쳐 창의문까지 제한적으로 개방
되었으며, 말바위는 24시간 언제든 발을 들일 수 있는 자유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  말바위에서 바라본 북악산 주능선 (북악산 정상에서 숙정문 구간)

▲  도성 밖으로 인도하는 말바위 나무다리와 한양도성 성곽길
탐방객 유의사항 현수막이 걸린 나무다리를 내려가면 도성 밖 성북동이다.
 

말바위와 말바위안내소 중간에는 성밖으로 나가는 나무다리가 있다. 무지 귀한 몸인 성곽 여장
을 부시고 내려가는 길을 낼 수가 없기에 부득이 성곽 위에 나무 다리를 다져 성밖으로 통하는
길을 냈다.
다리 북쪽에는 조망대를 설치하여 도심 속의 전원 마을인 성북동을 굽어보게 했는데, 삼청각과
길상사(吉祥寺), 북악산 북쪽 능선과 김신조투르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괜찮다. 여기서
다리를 내려가면 성곽 북쪽 자락길로 삼청각(三淸閣)과 숙정문안내소, 북정마을, 와룡공원, 김
신조루트(북악하늘길) 방면으로 이어지며, 성곽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북악산 주능선의 동
쪽 관문인 말바위안내소가 마중한다.


▲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 주능선

▲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바라본 삼청각과 북악산 북쪽 능선
삼청각 뒷쪽에는 2009년에 개방된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이 숨겨져 있다.

▲  성북동 서부 - 북악산의 두 능선에 막힌 궁벽한 곳이지만 그곳에
자리한 집들은 궁벽과는 거리가 먼 크고 호화로운 집들 투성이다.
빈부격차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현장이라
눈도 그리 즐겁지가 않다.

▲  성북동 일대
성북동은 북악산 주능선과 북쪽 능선(북악산길이 지나가는 능선) 사이에 포근히 터를
닦은 도심 속의 전원마을이자 완사명월형(浣絲明月形)의 명당 자리로 유명하다.
그러다보니 시커먼 졸부들이 가득 기어들어와 속칭 이 땅의 0.1%가 사는
비싼 동네가 되어버렸다.

▲  성북동 너머로 성북구 삼선동, 돈암동 지역이 바라보인다.

▲  다시 삼청공원으로 (말바위 산길 입구)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성밖으로 넘어가 와룡공원을 거쳐 시내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도
늦었고 귀찮기도 하여 왔던 길을 다시 재방송하여 삼청공원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시조비를 거쳐 삼청동길로 나오니 길 동쪽으로 북악산이 베푼 삼청골이 착한 풍경을 도
처에 빚으며 도로와 나란히 흘러간다. 허나 오랜 가뭄으로 비리비리한 모습을 보이니 보는 내
가 답답할 따름이다.


▲  가뭄에 타들어가는 가련한 삼청골 (삼청동길 동쪽 계곡)

▲  삼청동길과 삼청골 사이에 만든 뚜벅이용 나무데크길

▲  삼청동길 나무데크길의 남쪽 종점

서울 도심의 거의 흔치 않은 계곡인 삼청골(삼청천)은 공원 남쪽에 있는 삼청테니스장에서 어
두컴컴한 지하로 흘러간다. 개발의 칼질에 강제로 생매장을 당한 것이다. 이 물줄기는 삼청동
길을 따라 경복궁(景福宮) 동쪽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가는데 옛날 경복궁 주변 사진을 보면
경복궁 동쪽과 북촌 주거지 사이로 하천이 하나 보이니 그가 바로 삼청천이다.

삼청공원을 벗어나 2분 정도 가면 삼청동 종점(종로구 마을버스 11번 종점)이 나온다. 삼청동
과 도심을 이어주는 마을버스의 쉼터로 이곳도 엄연한 도심이라 경복궁과 광화문은 물론 시청
까지 걸어가도 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다.

우리는 지친 몸을 마을버스에 담아 시내로 나왔다. 어차피 종점이라 100% 앉아가는 것은 가능
하다. 이렇게 하여 초여름에 찾아간 북악산 삼청공원, 말바위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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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서촌의 끝자락을 더듬다 ~~~ (인왕산 한양도성, 딜쿠샤, 행촌동은행나무, 홍난파가옥 등)

 


' 서촌의 끝자락을 거닐다. (사직동, 행촌동, 송월동 지역) '

▲  한양도성 (인왕산 남쪽 기점 ~ 사직터널 구간)


 

♠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 인왕산 남쪽 기점~사직터널 구간

▲  무악동과 행촌동 뒤쪽으로 울퉁불퉁 흐르는 한양도성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2번 출구)에서 독립문초등학교와 무악현대아파트를 지나 가파른 오르막
길(통일로18나길)을 지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S'라인 비슷한 굽이길이 나
온다. 그 길을 지나면 한양도성과 만나는 해발 130m의 고개 정상이다. 이곳이
인왕산(仁王山)
남쪽 기점으로 북쪽으로 각박하게 펼쳐진 성곽길을 따라 올라가면 인왕산 정상이고, 남쪽으로
펼쳐진 성곽길을 내려가면 사직터널 위쪽과 교남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성곽이나 인왕산에
관심이 전혀 없다면 고갯길을 그대로 넘어가자. 그러면 도심 속의 산악도로인 인왕산길이 마중
을 나올 것이다.

인왕산 남쪽 기점에서 만난 한양도성은 북쪽으로 인왕산 주능선을 따라 정상(338m, 또는 340m)
을 거쳐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으로 이어지며, 성곽은 온전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인
왕산 정상에서 한 갈래의 성곽이 조심스럽게 북쪽으로 내려가는데, 그 성곽은 탕춘대성
(蕩春臺
城)으로 홍제천(弘濟川)에 자리한 홍지문(弘智門)
을 거쳐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이어진다.
또한 이곳 남쪽은 인왕산의 완만한 줄기를 타고 사직터널까지 1리 정도 이어지는데, 그 줄기는
경희궁(慶熙宮) 옆구리까지 이어진다. 허나 성곽은 사직터널 위쪽에서 그만 끊기며, 그 이남은
집들이 가득 들어차 성곽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나마 월암근린공원에서 잠시 근래에 복원된
성곽이 펼쳐지긴 하지만 그것도 얼마 흐르지 못하고 끊기고 만다. 이후로 한참 가야 나오는 남
대문에서 간의 기별도 안갈 정도로 성곽이 나오고 남산 백범광장에 들어서야 그나마 속 편하게
성곽이 가슴을 핀다.
끊어진 남대문과 월암근린공원 사이에 있던 서대문<西大門, 돈의문(敦義門)>과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
義門)>은 고약한 왜정(倭政)의 의해 모두 사라져 정확한 자리조차 아리송한 실정이다.
그럼 여기서 서울 도심의 든든한 갑주였던 한양도성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1388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란 그 유명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몸담던 고려 왕조를 싹
갈아엎고 조선이란 비리비리한 왕조를 세운 이성계(李成桂), 그는 1394년 남경(南京)이라 불리
던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의 도성 천도 프로젝트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
가로 명망이 높던 정도전(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는데,
1395년까지 경복궁,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시가지 등을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
에 들어갔다.
한양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인 북악산(北
岳山, 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 길
이는 59,500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는 작은 수준
이며,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천하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
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집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 다시 79,400명을 콩볶듯이 동원,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도성 축조는 마무리 되었다.


▲  한양도성 산책로
두툼하게 만든 여장 너머로 성밖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시키기로 마음
을 먹었다. 하여 1422년 1월, 무려 32만 2천명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하여 보수 작업
에 들어갔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하니 보수 작업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
지를 가늠케 해주며, 이때 동원 규모는 가히 조선 최대였다.
허나 아무리 현군(賢君)으로 추앙받는 세종이라지만 공사를 너무 닥달했는지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으며, 그 공사 결과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곳, 곡
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한 도성이 되었다. 그리고 1426년 수성금화도
감(修城禁火都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케 했는데, 성곽을 워낙 단단히 지은 탓에 20세기까지 스
스로 붕괴된 적이 없으며,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되거나 전쟁 폭격을
받은 것은 제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하여
도성은 왜군에게 아주 허무하게 무혈점령되고 만다. 그런 꼬라지를 막아보고자 온갖 욕을 들어
가며 단단하게 지었건만 오늘날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소위 윗대가리들의 무능으로 눈을 뜨
고 적군이 도성 안에 들어오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치열한 수성전(守城戰)이 없어서
성곽과 성문은 피해가 없었다.

1704년(숙종 30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
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 했는데, 그 안에 행
궁(行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갖춘 조그만 도시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탕춘
대성(蕩春臺城)을 쌓아 도성의 수비력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한양(서울)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드러내던 한양도
성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1899년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사람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콜
브란은 고종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거둥하라며 전차(電
車)의 필요성을 건의,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凉里)까지 이
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문의 양쪽 성
벽을 싹둑 자르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겨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나갔
다. 허나 그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제는 1905년 이후이다.


▲  한양도성과 주택가 사이를 가르는 행촌동 인왕산로1길 (경희궁 방향)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왜국은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그 소속으로 1908년 '
성벽처리위원회'라는 해괴한 기관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1910년 이
후 서소문<소의문(昭義門)>과 서대문<돈의문(敦義門)>은 물론 동소문<혜화문(惠化門)>까지 밀
어버리면서 망국(亡國)의 서울을 욕보인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
발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
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겨우 남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손질하기 시작하여 광희문과 숙정문을
복원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
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
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 (인왕산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은 못감) 다만 성곽이 사라진 부분<사직터널 윗쪽~월
암근린공원, 서울시교육청~남대문, 남대문~남산육교, 장충단고개~옛 타워호텔 남쪽, 장충체육
관 고개~광희문, 광희문~동대문, 동소문고개~성북쉼터>
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
칭이 바뀌었다. 허나 서울성곽이란 이름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며, 한양성곽이라 불리기도 한
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한양을 둘러싸던 성곽이니 서울성곽, 한양성곽이라 불러도
크게 상관은 없다. (본글에서는 한양도성으로 통일함)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
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며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데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글쎄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이 쌓여져 있었다.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 쌓인 자리에 성
곽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
았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이 땅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대
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  한양도성 밖 행촌동 인왕산로1길 (인왕산 방향)

인왕산 남쪽 기점에서 남으로 1리 가면 사직터널 윗쪽(사직동)에 이른다. 그 중간에는 성 밖으
로 나가는 조그만 암문(暗門)이 나오는데, 이는 동네 주민들의 통행을 위해 만든 것이다. 여기
서 성밖은 교남동(행촌동) 산동네 주택가, 안쪽은 성곽길과 인왕산 숲이다.

인왕산에서 힘차게 내려온 한양도성은 한국사회과학자료원 남쪽(송월1길)에서 잠시 그 길이 끊
기고 만다. 성곽이 있어야 될 자리에는 집들이 우후죽순 들어차 달릴 공간 조차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서울시에서 도성을 완전히 복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하니 철저히 고증하여 그 주변
에 첩첩이 들어찬 집들을 밀어내고 (물론 보상과 이주는 넉넉히) 복원을 했으면 좋겠다.

※ 한양도성 인왕산 남쪽 ~ 행촌동 구간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2번이나 3-1번 출구를 나오면 무악현대아파트로 가는 도로가 나온다.
  그 길로 들어서 무악현대아파트 직전에 윗쪽으로 오르는 계단길이 나오는데 그 계단을 올라
  무악어린이집에서 왼쪽으로 가면 1굽이 지난 곳에 오른쪽 오르막길이 있다. 그 길로 오르면
  한양도성이 보이면서 인왕산 남쪽 기점에 이른다. (독립문역에서 도보 15분)
* 사직단 버스정류장<연세대, 무악재 방면 정류장 : 171, 272, 606, 706, 7025번 시내버스 정
  차 / 광화문 방면 정류장 : 171, 272, 601, 606, 700, 707, 7025, 9703번 정차> 바로 서쪽에
  돌담을 옆구리에 낀 인왕산길이 있다. 그 길을 3분 정도 가면 단군성전이 나오는데, 여기서
  광화문아트홀 방면 왼쪽 길(인왕산로1길)로 4분 가면 한양도성이 나온다.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3번 출구)이나 3호선 독립문역(3번 출구를 나와서 행촌의원 앞에 정
  류장이 있음)에서 한국사회과학자료원에서 내리면 바로 한양도성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행촌동, 교남동


▲  은행나무가 가로수를 이루고 있는 송월1길 (왼쪽이 한양도성)


 

♠  서촌(西村)의 끝자락 행촌동(杏村洞)에서 만난 숨겨진 명소들

▲  행촌동 은행나무 (늦가을 사진) - 서울시 보호수 1-10호

사직터널 윗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의 끝을 잡은 행촌동은 조금은 빛바랜 산동네이다. 그렇다
고 옛날 달동네처럼 주황색 기와를 지닌 허름한 집들이 즐비한 그런 곳은 아니다. 온갖 빌라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찬 서울의 흔한 동네로 그 주택가 속에 행촌동 은행나무와 권율장군의 집
터, 그리고 딜쿠샤란 명소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딜쿠샤 곁에 자리한 행촌동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420년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행촌동의 오
랜 터줏대감이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덧없는 양분과 동네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높이 23m, 둘레 6.8m에 이르는 큰 나무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
이 이곳까지 미치면서 그의 보금자리는 크게 좁아졌고, 이렇게 주택 사이에 비좁게 자리해 마
치 강제 샛방살이로 비쳐질 정도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건강은 양호하며, 자신의 둥지를 침범한 건방진 인간들을 미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우수한 품질의 그늘과 은행잎을 선사해 넉넉한 마음을 드러낸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이자 이곳에 살았던 권율이 손수 심었다고 전하며, 주인은 오래 전
에 갔지만 그의 사연을 끈질기게 붙잡으며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이 나무 때문에
동네 이름이 행촌동(은행나무 마을)이 된 것이다. 참고로 은행나무는 태반이 사람이 심은 것이
며 자연적으로 싹을 내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서울 장안에서 오래된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꼽으라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와 성균관(문묘)
은행나무(대성전 은행나무 포함), 당산동 은행나무 그리고 이곳 은행나무를 내세우고 싶다.


▲  은행나무 밑에 누운 권율(權慄) 장군 집터 표석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권율(1537~1599)의 집터로 인근 필운동(弼雲洞) 배화여고에도 그의 집이
있었다. 필운동 집은 그의 사위이자 오성과 한음으로 격하게 유명한 오성 이항복(李恒福)에게
물려주었으니 그 집이 바로 필운대(弼雲臺)이다. (현재 필운대란 바위글씨가 남아있음)
그렇다면 임진왜란의 영웅, 권율(權慄)은 누구일까?

권율은 안동 권씨로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과 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
이다. 1582년 식년시 문과(式年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쟁에서 크
게 활약한 것으로 보아 무예도 제법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와 전적(典籍)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使)와 예조정랑(禮曹
正郞), 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을 지냈으며, 1591년 평안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으나 업
무상 과실로 파면되었다.
허나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급히 경기도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달려갔
으며 전라도 순찰사(巡察使) 이광(李珖)과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군사 4만을 모아 서울로 올라오자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었다.
이광과 곽영은 수원과 용인에 각각 진을 치고 주변에 있는 왜군을 토벌하려고 했다. 이에 권율
은 주변에 조금씩 흩어진 적들을 치지 말고 임진강(臨津江)에서 그들의 서진(西進)을 막아 군
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다음, 적의 빈틈을 노리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냈다. 허나 뇌에 주름이 가득한 이광은 그 말을 무시, 오로지 머릿 수에 의지
해 용인에 있는 왜군을 공격했다.

이광의 군사는 4만(왜국은 10만이라고 주장함)에 이르나 태반이 칼과 창도 제대로 못잡는 오합
지졸이었다. 그에 반해 용인에 머물던 왜군은 왜열도에서 나름 알아주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
坂安治)로 수백 명의 정예 기병으로 저항을 했다.
허나 조선군은 그 수백에 불과한 왜군에게 완전히 박살이 나고 싸움에 서툴렀던 선봉장 이시지
(李詩之)와 백광언(白光彦)이 전사하는 등,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했다. 허나 권율은 이를 직감
하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휘하 군사를 잃지 않고 광주로 물러나 후일을 도모했다.

1592년 가을, 전라도 남원으로 내려가 1,000명의 군사를 모집해 동복현감(同福縣監, 전남 화순
동복면)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전주(全州)로 진출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
의 왜군을 막았다. 초반에 황진이 조총에 맞아 부상을 입으면서 군사의 사기가 잠시 떨어졌으
나 권율이 군사를 독려하여 왜군을 격퇴하고 승리를 거뒀다. 그렇게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
으며, 그 공으로 전라도 감사(監事)로 승진되었다.
1592년 12월, 서울 수복을 위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천안 직산(稷山)에서 머물렀는데, 체찰사
(體察使) 정철(鄭澈)이 그 많은 인원을 먹일 군량이 없으니 돌아가서 관내를 지키는 것이 좋겠
다고 편지를 보냈다. 허나 행재소(行在所)에서 북상하라는 명이 떨어지면서 곧바로 군을 이끌
고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 들어가 진을 쳤다.

한편 권율이 독성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왜장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과 차단될 것
이 두려워 서울에 있던 군사를 이끌고 독산성을 선제 공격했다. 허나 권율은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만 할 뿐이라 왜군의 피해는 나날이 늘어갔다.
뚜껑이 열린 우키타는 사람을 보내 독산성의 약점을 탐지한 결과 물이 부족하다는 정보를 입수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로 성 밑에 큰 못을 파니 과연 성 안에 물이 마르면서
조선군의 식수에 비상이 걸렸다.
허나 권율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범한 인물답게 명쾌한 꾀를 낸 것이다. 그래서 동이 트는 이
른 아침에 왜군이 잘보이는 곳에 말을 세워놓고 쌀을 부어 말을 씻기는 시늉을 벌였다. 그것을
본 단순한 왜군은 성 안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 거짓임을 알고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 바로
그때를 이용해 공격을 가하자 발작한 우키타는 영책(營柵)을 불지르고 서울로 줄행랑을 쳤고,
정예 기병 1,000명을 미리 보내 퇴로를 차단하고 왜군 수천을 죽였다.

1593년 1월, 서울 수복을 위해 조경(趙儆)을 보내 근교에 마땅한 곳을 물색하다가 행주산성(幸
州山城)으로 들어가 목책(木柵)을 쳤다. 그곳은 서울과도 가깝고, 한강을 끼고 있으며, 조망도
좋고, 인근에 여러 요새와 함께 연합 작전을 펴기에 아주 좋은 위치였다. 허나 석성(石城)이
아닌 야트막한 토성(土城)이라 수비전에는 썩 유리한 편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서둘러 목책을
엮었다.
목책이 완성되자 독산성에 병력 일부를 남기고 모두 불러들였으며, 별도로 4,000명을 뽑아 전
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를 시흥 호암산(虎巖山, ☞ 관련글 보러가기)으로 보내 후방
을 돕도록 했다. 그때 처영(處英)이 이끄는 승병(僧兵) 1,000명이 행주산성에 합류했다.

권율은 소수의 군사를 보내 서울을 공격했고, 고양 혜음령(惠陰嶺)에서 왜군에게 박살난 명나
라군을 도와 그들의 전멸을 막아주었다. 이렇게 권율의 활약에 적지않게 염통이 쪼그라든 왜군
은 그가 있는 행주산성을 쓸어버리기로 마음 먹고, 앞서 독산과 인근의 군사를 싹 긁어모아 무려 3만의 대군으로 1593년 2월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그때 행주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승병을 합해서 겨우 약 2,800명, 그외에는 군사들을 도우러 성
에 들어온 밥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아낙네들과 지역 사람들이 있었다.

왜군은 7부대로 나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행주산성이 견고한 성이 되지 못하다보니 여
러번 위기가 있었으나 권율의 뛰어난 통솔력과 군사와 백성들의 강인한 협동심으로 다들 일당
백의 위엄을 드러내며 적들을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다. 또한 화차(火車)와 비격진천
뢰(飛擊震天雷)란 신식 무기가 열심히 나래를 펼쳐 왜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밥할머니의 행주치마 부대는 치마로 돌을 나르고 군사들의 밥을 나르는 등, 서로가 단결하니
왜군은 결국 1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수천 명의 전사자 시신을 불태우며 도망쳤다.
이 싸움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니 권율과 조경, 처영, 조선군과 승군, 밥할머
니의 아낙네들, 지역 사람들이 빚어낸 대작품이었다.

이후 파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薲)과 함께 후방을 지켰으며, 전라도
로 내려갔다가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都元帥)로 승진해 경상도에 주둔했다. 1596
년에 도망친 병사를 즉결처분한 것으로 잠시 해직되기도 했으나 바로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임
명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와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성에서 크게 패한 우키타가 서울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밥버러지 명나라군과 함께 왜군이 머무는 울산성(蔚山城)
을 공격했다. 허나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부실하여 겁에 질려 도망치는 바람에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순천으로 자리를 옮겨 순천 예교(曳橋)에 머물던 왜군을 공격했으나 역시나 병든 닭
새끼 같은 명나라군의 비협조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7월 장대한 인생
을 마감하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선조(宣祖)는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했으며,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삼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봉해 그의 공을 기렸다.

권율은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명장으로 바다에 이순신(李舜臣)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鄭起龍)과 곽재우(郭再祐), 그리고 권율이 있었다. 비록 초창기 용인 싸움에서 어리버리한 상
관들 때문에 졌고, 정유재란 때는 밥버러지 명나라군 때문에 적지 않은 고생을 했지만 그외에
는 모두 대승을 거두었다. 특히 행주대첩은 적은 군사로 10배 이상의 왜군을 물리친 우리 전쟁
사의 길이 빛나는 장쾌한 대첩이다. 그의 활약과 공훈에 대해서는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
란 책이 1권 전하고 있다. 그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있으나 인근이 유원지화되어 늘 시
끄러우니 편하게 잠이나 주무실지는 모르겠다.


▲  근대 건축물인 딜쿠샤(Dilkusha)

행촌동 은행나무 서쪽에는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2층 건물이 자리해 있다. 딱 봐도 20세기 초
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로 지금은 원형을 조금 잃었지만, 한참이나 후배인 건물들 사이에서 의
연함을 잃지 않으며 중후한 멋을 드러낸다.

이 건물은 '딜쿠샤'란 이름의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붉은 벽돌집이다. 1923년 미국 사
람 알버트 테일러(Albert Taylor)가 금광과 언론 특파원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지은 고래등 집
으로 여기서 딜쿠샤는 '이상향', '행복한 마음','희망의 궁전'을 뜻하는 인도 힌두어이다.

테일러는 금광엔지니어이자 UPI통신사 프리랜서 특파원으로 이 땅에 들어왔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천하에 널리 알린 인물로 유명하며, 독립운동가들과 자주 어울리고 그들을 흔쾌히 도와
주었다. 그러다보니 왜정은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계속 감시를 하다가 1942년 독립운동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6개월간 감옥살이를 시켰다가 가족과 함께 추방시키고, 딜쿠샤는 왜정이 몰
수해 민간에 팔아먹었다. 그렇게 강제로 이 땅을 떠난 그는 1948년 미국에서 숨을 거두었고 그
의 유해는 이 땅으로 다시 건너와 서울 합정동(合井洞)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딜쿠샤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존재와 사연을 망각한 채, 그저 왜정 때 지어진 근대 건
축물의 하나로 조용히 살아왔다. 사람들이 각 방마다 들어와 살면서 원형도 조금씩 깎여나갔고,
집도 낡아 개발의 칼질로부터 위협을 받을 정도였으나 다행히 2006년 알버트의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가 64년만에 이 땅을 방문하면서 베일에 가려진 건물의 비밀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되
었다. 브루스는 바로 이 집에서 이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딜쿠샤의 사연이 알려지자 그에 대한 시선과 팔자는 180도 달라졌으며, 2008년에는 서울시에서
브루스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해 그의 부친을 기렸다.


▲  딜쿠샤의 어수선한 뒷모습

알버트 테일러의 사연을 머금은 유서 깊은 건물이지만 아직 그 흔한 지방문화재나 등록문화재
의 지위도 얻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만약 딜쿠샤의 사연이 계속 묻혀있었다면 분명 개발
의 칼질이 이 건물을 진작에 난도질했을 것이다. 우울하지만 그것이 이 땅의 천박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이곳을 거쳐갔고 또한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어 원형도 조금 잃었고 다소 어수
선한 분위기긴 하지만 상당수는 원형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또한 유서가 깃든 곳인만큼 지
정문화재로 삼아 보호를 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행히 서울시가 이 건물의 복원과 개방 및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으며, 2016년 가을에 미국에 있는 테일러의 손녀에게 테일러의 유품
300점을 전해받아 테일러 전시전을 열 계획이다. 그리고 건물을 튼실히 손질하여 3.1운동 100
주년이 되는 2019년 3월 1일 속세에 개방할 예정이라고 하니 그때를 기다려보자.

※ 행촌동 은행나무, 딜쿠샤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3번 출구)을 나와서 독립문역4거리에서 남쪽으로 길을 건너 사직터널
  방면으로 가면, 터널 직전에 터널 위로 올라가는 '사직로2길' 골목길이 나온다. 그 골목을
  오르면 3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딜쿠샤와 은행나무가 있다.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4번 출구)을 나와서 3분 정도 직진하면 정동4거리이다. 여기서 왼쪽(
  송월로) 길로 5분 정도 들어서면 한양도성이 나오면서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월암근린공
  원 방면(송월1길)으로 들어서 홍난파가옥을 지나 계속 직진하면 은행나무와 딜쿠샤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89 (사직로2길 17)


 

♠  1930년대에 지어진 근대 가옥으로 친일파 홍난파가 말년을 보낸 곳
홍파동 홍난파 가옥(紅把洞 洪蘭坡 家屋) - 등록문화재 90호

행촌동 은행나무와 딜쿠샤에서 '송월1길' 골목길을 타고 남쪽으로 3분 가면 길 왼쪽 높은 곳에
붉은 피부의 벽돌과 지붕, 그리고 담쟁이덩굴까지 멋지게 두룬 별장 같은 아담한 주택이 두 눈
을 부여 잡는다. 그 집이 바로 홍파동 홍난파 가옥이다.

이 집은 지상 1층, 지하 1층으로 지하라고는 하지만 가파른 경사에 자리한 탓에 서쪽과 남쪽이
바깥에 노출되어 햇볕을 보고 있으므로 거의 2층이나 다름이 없다. 이곳에는 원래 구한말에 양
기탁(梁起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도와 항왜
(抗倭) 언론을 주도했던 영국 사람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년, 한
국 이름은 배설(裵說)>의 집이 있었다.
배설은 1909년 5월, 37세의 짧은 나이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떴는데, 그에게 원한이 깊던 왜국
은 쪼잔한 마음을 드러내며 그의 집을 강제로 밀어버렸다. 다만 토지는 몰수하지 않고 그의 부
인인 '메리 모드 베델'(Mary Maud Bethell)이 계속 가지고 있다가 1920년대 이후 매각한 것으
로 전한다.

1920년대 후반, 이 일대가 여러 지번으로 분할되었는데, 송월동과 홍파동 지역에는 독일 양이(
洋夷)들이 많이 서식해 그들의 주택이 많이 들어섰다. 홍난파 가옥도 바로 그 과정에서 1930년
대에 태어났다. 허나 그 집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뀌어 집 자신도 정신이 없을 정도였는데, '불
놀이'를 쓴 시인으로 친일 행적이 요란한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부인, 최선복의 이름이
먼저 올라와있다.
그 다음에 들어온 사람은 홍어길(洪魚吉)로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의 조카딸인 신수옥에게
장가들어 여기서 보금자리를 폈다. 그는 배화여학교 선생으로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했으며, 철
학박사로 서울에 철학연구사를 세웠던 한치진(韓稚振, 1901~?)이 다음 타자로 들어와 잠시 머
물렀다. 그는 1944년 왜정의 패망을 예견하는 시국답을 논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살기도
했다.
바로 그 다음에 들어온 이가 홍난파로 1935년 이 집을 사들여 말년을 보냈다. 그 연유로 홍난
파 가옥(홍난파의 집)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  골목에서 바라본 홍난파 가옥

예전에는 집 앞에 마당이 있었으나 담장을 허물고 조그만 야외무대를 닦았으며, 1968년 4월 10
일에 난파기념사업회에서 세운 홍난파의 흉상이 옛 마당을 지킨다. 이 흉상은 김경승이 조각하
고, 김충현이 글씨를 썼으며, 윤석중이 흉상 기단(基壇)에 글을 새겼다. 또한 골목 쪽에는 담
장과 대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담장 일부만 남았으며, 1층 현관을 통하여 가옥 내부로 들어서면
된다. 현재는 종로구청에서 관리한다.

집 지붕은 다른 서양인 선교사의 집보다 경사가 가파르고, 거실에는 양옥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벽난로가 있다. 현관과 이어지는 복도를 사이로 서쪽에 거실을, 동쪽에 침실을 두었으며, 거실
밑에는 지하실을 두어 공간을 알뜰하게 활용하던 서양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2007년에 홍난파 기념관 및 소공연장으로 손질하고자 보수 공사를 벌여 1층에 있던 침실 2개를
하나로 합쳤으며, 음향시설 등을 달아 50명 규모의 공연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유품과 자
료를 전시하여 기념관의 역할을 하도록 했고, 지하에는 시청각실을 만들었다.

      ◀  홍난파의 그 잘난 흉상(胸像)
이 땅의 현대 음악을 발전시키고 꾸려나간 업
적만 본다면 동상도 아깝지 않겠으나 말년에
보인 추잡스런 친일 행적을 생각하면 흉상은
커녕 기념비도 아깝다. 그 더러운 면판이 달린
흉상은 좀 치워버리고 기념비만 두는 선에서
끝냈으면 좋겠다. 그 이상은 그에게는 과분하
다.

우리 귀에 무척 익은 홍난파, 그 자는 누구일까?
홍난파(洪蘭坡, 1898~1941)는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시 남양(南陽)에서 태어났다. 본명
은 홍영후(洪永厚)로 난파는 일종의 호가 되며, 본관은 남양홍씨이다. 왜정 때 매우 잘나갔던
음악가이자 우리 현대 음악의 중추적인 존재로 '봉선화','성불사(成佛寺)의 밤','옛 동산에 올
라' 등으로 유명하다.

5살에 서울로 올라와 1912년 YMCA 중학부에 들어갔으며, 음악에 자꾸 손과 마음이 가면서 내면
에 숨겨진 자신의 소질을 알게 된다. 그래서 1913년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전문학교인 조선정악
전습소(朝鮮正 樂傳習所)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1년 동안 김인식(金仁湜)에게 바이올린을 배웠
으며, 1918년 창가 '야구전'을 작곡, 발표하고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음악학교에 진학, 음악과
문학, 미술을 배우며 문예의 꿈을 키웠다. 그러다가 1919년 유학생들이 벌인 독립운동에 가담
하면서 학업을 그만두고 귀국했다.

귀국하여 경성양악대 제1회 연주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린 연주
자란 기록을 세웠다. 대한매일신보 기자로도 잠깐 일하다가 1920년 '처녀혼'이란 첫 작품을 냈
는데, 봉선화는 처녀혼 첫머리에 나오는 애수(哀愁)라는 곡명으로 발표된 것이다.
1922년에는 서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해 음악 교육에 나섰으며,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음
악 잡지인 '음악계(音樂界)'를 창간했다. 그리고 1926년 다시 왜열도로 넘어가 동경고등음악학
교를 졸업하고 동경신교향악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1929년 '조선음악백곡집'과 '조선동요백곡집'을 발표하고 1933년에는 '조선가요창작곡집' 등의
작품을 냈으며, 현제명(玄濟明)과 함께 '봄노래'를 발표했다. 그 외에 바이올린독주곡인 '애수
의 조선','동양풍의 무곡','로망스' 등이 있고, '관현악곡 즉흥곡','관현반주 붙은 즉흥곡','
명작합창곡집','특선가요선집' 등을 냈는데, 그는 우리나라 선율의 요소를 작곡에 반영해 서정
적인 분위기를 그려내고자 했다. 그의 의도는 그의 평론에서도 잘 나타나며, 1930년대 이후 우
리나라 현대 음악 창작의 패턴을 정립한 음악가로 널리 찬양을 받았다.

1931년 바이올린을 더 배우고자 미국으로 넘어가 셔우드(Sherwood)음악대학을 다녔으며, 1933
년 졸업 기념으로 독주회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리고 경성보육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
악을 가르치고, 1936년 경성방송 현악단 지휘자 및 빅터레코드의 양악부장을 지냈으며, 이영세
(李永世)와 난파트리오를 조직해 실내악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1938년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면서 '음악만필'을 냈으며, '백마강의 추억' 등 14곡의 가요를 나소운(羅素雲)이
란 예명으로 발표했다.

이렇게 우리나라 현대 음악 발전에 크게 공헌을 하며, 주옥같은 작품으로 민중의 마음을 달랬
던 그였지만 그의 말년은 그 초심을 잃으며 추악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친일파로 노선을 바꾸
며 민중의 뒷통수를 제대로 쳤던 것이다.
1937년 독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 회원이라는 이유로 검거된 이후, 그해 4월 조선총독부 학무
국(學務局)에서 결성한 친일 단체인 '조선문예회'에 가입하여 왜정 정책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내선일체를 강조하였고 '지나사변(支那事變)과
음악','희망의 아침' 등 친일 성향의 악취나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끊임없이 왜정을 찬양했다.
허나 다행히도 하늘이 보우하사 변절한지 4년 만인 1941년 8월 30일 43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가 마지막 4년 동안 보여준 속절없는 친일 행적은 20~30대 시절에 일구어낸 온갖 업적과 공
로에 제대로 똥칠을 하기에 충분했다. 50년도 채우지 못한 그 짧은 인생, 무슨 영달을 더 누려
보겠다고 그 추잡함을 보였던 것일까? 그것만 아니었다면 참 착했을 것을 심히 좋지 않은 뒷끝
을 보이고 말았다.
왜정 시절 이 땅의 나약한 지식인들의 끝없는 변절과 방황, 그도 결국 그 재능과 인격 때문에
나락의 길인지도 모르고 바로 앞에 놓인 꿀에 속아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던 것이다. 그래도 다
행히 해방 이전에 한참 나이로 자체 폐기가 되었으니 나라와 민중을 배신하고 친일을 벌인 그
대가는 톡톡히 받은 것으로 보면 될까? 그렇게 홍난파에게 실망한 대중을 위로해 본다. 내 학
창시절에 봉선화부터해서 그의 노래가 음악책과 문학책에 지겹도록 실려 참 머리 아프게 했는
데, 그의 친일 행적은 나의 마음까지도 심히 아프게 만든다.

그런데 홍난파 가옥에서 다루고 있는 그의 일생과 그곳에서 배부하는 홍난파 자료, 그리고 홍
난파 흉상 기둥에는 친일 행적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오로지 찬양 일색이다. 심지어는 '우리
는 홍난파 선생님에게 신세를 너무 많이 졌습니다~~ 홍난파 선생님은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이
며 우리는 홍난파 선생님의 후손입니다'
라는 식의 암을 유발하는 해괴망측한 구절도 있다.
종로구청의 실수인지 아니면 난파기념사업회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으나 지나친 찬양은 오히려
역겨움과 정신건강 해악만 가져올 뿐이다. 홍난파가 어떤 인물인지는 내가 직접 겪어보질 않아
서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그도 개념이 있다면 후학들의 이런 말장난에 지하에서 눈물을 머금을
것이다. 기릴 것은 기리고 깔 것은 과감히 까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홍난파의 후학들이 세운 난파기념사업회는 1968년 난파음악상을 제정해 매년마다 적당한 음악
인을 골라 상을 주고 있다. 상을 받은 이는 정경화, 정명훈, 금난새, 조수미 등 이름 3자만 들
어도 거의 알법한 인물인데, 2013년에 일대 이변이 생겼다. 수상자로 선정된 작곡가 류재준씨
가 수상을 거부했던 것이다. 거부 사유는 친일파의 이름으로 된 상을 받기 싫다는 것이다. 그
의 업적은 인정하나 실수 또한 거대하다며 그의 친일행적을 꼬집은 것이다.
그의 개념찬 행동에 천하 사람들은 많은 찬사를 보냈고, 난파기념사업회는 그냥 음악가로서의
홍난파를 기리고 상을 줄 뿐이라며 말도 안되는 변명만 늘어놓다가 오히려 욕만 죽어라 얻어먹
었다.

근래에 들어 민족문화연구소는 홍난파 가옥의 이름을 변경하자며, 이곳에 살았던 여러 인물의
삶과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공간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안내문을 수정하고 가옥 내부의
공간 구성을 바꾸는 방안을 종로구에 제시했다. 비록 홍난파가 이곳에 쓸데없이 오래 살긴 했
어도 그 작자를 너무 치켜세우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니 홍난파 유물은 크게 줄이거나 갖다버
리고 독립운동을 했던 한치진과 홍어길을 기리는 공간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홍난파도 음악에 공이 적지 않으니 쥐꼬리만큼 기려주자. 또한 집 이름은 지역 이름만 따
서 '홍파동 가옥' 또는 '홍파동 근대 가옥'으로 바꾸는 것이 적당해보인다.

가옥 내부를 둘러보려고 현관을 기웃거렸으나 이미 관람시간은 끝난 상태. 그래서 다음을 기약
하며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 홍난파 가옥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4번 출구)에서 직진하면 정동4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송월길로
  들어서 5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이 보이면서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송월1길로 진
  입하여 월암근린공원을 지나면 그 공원의 끝에 홍난파가옥이 있다.

★ 홍난파 가옥 관람정보 (2016년 12월 기준)

* 관람시간 : 평일 11시부터 17시까지 (11~3월은 16시까지) / 주말, 공휴일은 휴관
* 관람비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2-16 (송월1길 38) (☎ 070-8112-7901)


▲  홍난파 가옥 1층 거실
이곳의 백미인 붉은 벽난로를 비롯해 홍난파의 흉상과 의자, 피아노, 바이올린 등이
놓여져 나라를 배신한 그의 음향(音香)을 느끼게 한다.

▲  홍난파 찬양 공간으로 변질된 가옥 1층 동쪽 (옛 침실 공간)
홍난파의 유품과 음악 문서들, 그리고 그의 일생과 음악을 정리한 내용들이
벽을 가득 채운다. 이 공간은 소공연장으로 쓰이기도 한다.

▲  월암근린공원에 다시 세워진 한양도성
헌돌과 새돌이 어색한 조화로 보이며 다시 성곽을 이루었다. 장대한 시간이 흐르면
하얀 피부의 돌도 밑에 깔린 어른 돌처럼 고색이 짙어질 것이다.


홍난파가옥 남쪽에는 월암근린공원이 자리해 있다. 여기서 남대문(숭례문)과 사직터널 윗쪽에
서 끊긴 한양도성이 짧게나마 모습을 비추는데 그 성곽 밑에 월암(月巖)근린공원이 넓게 자리
를 닦았다.

이곳 성곽은 근래에 복원된 탓에 피부가 온통 하얗고, 성곽 밑도리에 고색의 때를 머금은 성돌
이 일부 끼어있을 뿐이다. 그래서 오래된 도성(都城)의 무게감보다는 대충 얹힌 촬영세트장이
나 모조품처럼 가볍게 보인다.
상황이 이리 우울하게 된 것은 왜정이 사직터널부터 남대문 사이에 성곽을 아주 철저하게 뭉개
버렸기 때문이다. 성곽이 가고 없는 자리에는 집과 건물이 가득 들어찼는데, 도성 복원 계획으
로 이 일대를 밀어버리면서 땅 속에 묻힌 성돌이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고, 성곽을 복원하면
서 그들을 끄집어내 성돌의 역할을 부여했다. 그리고 숨통이 크게 트인 성곽 서쪽에는 공원을
닦아 휴식처로 삼았는데, 월암이란 이름은 인근에 숨겨진 '월암동(月巖洞)' 바위글씨에서 비롯
되었다.
성곽 안쪽에는 서울기상관측소와 서울복지재단, 서울시 교육청이 자리해 있으며, 그 동쪽에는
경희궁(慶熙宮)이 오욕의 세월을 견디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곽 북쪽은 주택들이 첩첩하게 들어차 재개발을 하지 않는 이상은 복원이 거의 어렵다. 사직
터널까지 200m 정도만 다시 이으면 되는데, 현실의 벽 앞에 어림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남쪽
또한 건물과 도로 등으로 손을 대기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 허나 도성 복원 계획은 끊어진 성
곽이 모두 이어지는 그 순간까지 끈기를 가지고 추진된다고 하니 내 생애 언젠가는 반드시 복
원이 마무리 될 것이라 믿는다.


▲  복원된 성곽 북쪽 끝(서울기상관측소)에 성곽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  서울기상관측소 남쪽 성곽길 (북쪽에서 본 모습)
재현된 성곽의 길이가 매우 짧기 때문에 저 길의 끝은 아직 막혀있다.
그래서 다시 돌아나와야 된다. 일종의 똥개훈련~~

▲  서울시 교육청 옆 성곽길 (남쪽에서 본 모습)

▲  서울시 교육청 서쪽 성곽
서울시 교육청 서쪽 성곽은 성벽은 완성이 되었으나 아직 여장은 달지 못했다.
경원선과 경의선 철마가 우리의 잃어버린 북쪽 대륙으로 달리고 싶듯이
한양도성은 끊어진 구간을 넘어 다시금 서울 도심을 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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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12월 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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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좌청룡을 거닐다 ~ 낙산 가을산책 (이화마을, 낙산공원, 한양도성)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좌청룡, 낙산(駱山) '
(한양도성, 이화마을, 낙산공원)

▲  낙산공원 한양도성 바깥길 (낙산에서 동소문 방향)


가을이 여름 제국(帝國)의 잔여 세력을 힘겹게 몰아내며 천하를 진정시키던 9월 끝무렵에
서울의 좌청룡인 낙산을 찾았다. 서울 땅을 거진 꿰고 사는 본인이지만 정작 낙산은 아직
까지 발자국도 남기지 못한 채, 미답처로 쭉 남아있었다.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건만 인
연은 정말 지지리도 없던 곳이었지. 그러다가 이번에 억지로 인연을 갖다 붙여 낙산의 품
을 찾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영원한 보물 1호, 동대문<東大門,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일행을 만나 낙산
의 남쪽 관문이나 다름없는 동대문성곽공원을 찾았다. 이번 낙산 투어는 이곳에서 시작된
다. (본글에서 한양도성과 한양성곽은 같은 곳임)

 


♠  동대문성곽공원 (한양도성)

▲  동대문 쇼핑타운을 굽어보는 동대문성곽공원

동대문성곽공원은 이대병원을 밀어내고 동대문 북쪽에서 잠시 끊긴 한양성곽(漢陽城郭)을 복원
하면서 만든 공원이다. (이대병원은 양천구 목동으로 이사감) 성 안쪽이자 하얀색의 병원 건물
이 있던 그 자리에는 푸른 잔디를 곱게 입혔고, 갖은 들꽃들이 미소를 지으며 나그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그리고 공원 중앙에는 네모난 정자를 지어 나그네의 조촐한 쉼터가 되어준다.

공원 북쪽에는 성곽을 따라 낙산으로 올라가는 한양성곽길이 여장과 함께 펼쳐져 있으며, 흥인
지문4거리(로터리)와 맞닿은 성곽 남쪽에는 동대문교회가 있었으나 공원 확장을 위해 2014년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교회 부속 건물만 일부 남아 있음)

근래에 조성된 공원이라 성곽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지만 도심 속의 소중한 쉼터로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그 가치는 돋보이며, 낙산의 남쪽 관문으로 이곳을 기점으로 낙산 나들이를 벌이
는 것도 괜찮다. 또한 공원 북쪽에는 서울디자인지원센터가 있는데, 그 안(1~3층)에 2014년 7월
31일에 개관된 한양도성박물관이 담겨져 있어 볼거리를 더해준다.
이곳은 문을 연지 얼마 안된 아주 따끈따끈한 박물관으로 서울 도심의 갑옷이던 한양도성의 모
든 것을 담고 있는데, 1915년 왜정에 의해 가루가 되버린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의 유일한 흔
적인 돈의문 현판(1749년에 제작됨)이 100년 만에 처음 외출을 했다. 그밖에 동대문 추녀와 지
붕에 달던 용머리와 잡상(雜像) 8점, 한양도성을 돌며 촬영한 순성(巡城) 체험 3면 영상 등이
있으며, 박물관 개관 기념으로 9월 14일까지 남산 회현동(會峴洞)과 남산도서관 주변에서 발굴
된 유물과 성돌, 발굴 성과를 다룬 '남산에서 찾은 한양도성' 특별전을 열었다.

★ 한양도성박물관 관람정보 (2014년 10월 기준)
* 관람요금 없음
* 관람시간 : 평일 9시~21시 / 토요일과 일요일, 휴일 9시~19시 (겨울은 18시까지)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를 나오면 흥인지문4거리이다. 여기서 성곽이 보이는 동
  북쪽(10번 출구는 동쪽)으로 건너가면 동대문성곽공원으로 공원 북쪽에 박물관을 머금은 서울
  디자인지원센터가 있다. (박물관은 내부 1~3층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70-6 (율곡로 208, ☎ 02-2152-5800)


▲  동대문성곽공원 정자(亭子)
공원을 조성하면서 지은 1칸짜리 조촐한 정자로 이름은 아직 없다.
그 흔한 이름 현판도 없음..

▲  낙산으로 인도하는 한양도성길 (동대문성곽공원 북쪽) ▼

※ 조선의 수도를 지키던 한양(漢陽)의 듬직한 갑옷, 한양도성(漢陽都城) - 사적 10호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국도(國都)를 개경(開京)에서 남경(南京)이던 한양으
로 천도했다. 그의 최측근인 정도전(鄭道傳)은 도성축조계획을 세우고 우선 경복궁과 종묘(宗廟
), 사직단(社稷壇)을 1395년까지 완성한 다음, 1396년 1월 도성 축성에 들어갔다.

한양성곽 코스는 정도전이 모두 짰으며, 수도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이라 불
리는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모두 끼고 돌게 했다. 성곽의 길이는 총 59,500자
(18.2km)로 고려의 국도인 개경보다는 형편없이 작은 수준이며, 평지에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세웠다.
도성 축성을 위해 전국에 징발령(徵發令)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
을 완공했고, 농사철에는 축성을 잠시 접고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도록 했다. 농사를 지
어야 뜯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기가 무섭게 8월에 79,400명을 징발
하여 다시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만들어 도성 축조
는 일단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린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하기로 결정
했다. 그래서 1422년 1월 전국에 약 32만 2천명을 동원하고 기술자 2,200명을 소환해 보수 공사
를 벌였다. 그 당시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하니 성곽 보수 공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가늠케 해주며, 이때 동원 규모는 조선 최대였다.
허나 아무리 현군(賢君)이라 추앙을 받는 세종이지만 꽤나 공사를 닥달했던 모양이다. 공사 중
에 사망한 인부가 872명에 달했으며, 그렇게 피와 땀을 바쳐 완성시킨 성곽이 지금의 한양도성
이다.

세종 때 피나는 업그레이드 작업으로 도성은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추게 되었으며,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
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하게 했다. 이때 워낙 성곽을 단단하게 다져나서 20세기까지 붕괴된 적
도 없고,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된 것은 제외)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쪼잔한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평양(平壤)으로 서둘러 줄행랑
을 쳤다. 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이 앞장서서 도망치니 누가 도성을 방어하겠는가? 그래서 왜군은
손바닥에 침 한번 뱉는 정도로 손쉽게 도성을 점령했다. 아무리 도성을 단단하게 만든 들 무능
한 집권층 앞에서는 그 성곽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허나 수성전(守城戰)이 없던 탓에 성곽과
성문은 피해가 없었다.

1704년(숙종 30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
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 했는데, 그 안에 행
궁(行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쌓아 도성의 수비력
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한양을 에워싸며 위엄을 드러낸 한양성곽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
던 1899년 이후 적지 않은 수난을 당하게 된다.

1899년 조선황실은 미국(米國) 사람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을 하여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
들었다. 콜브란은 고종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잠든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가시라며
전차(電車)의 필요성을 주청했다. 그래서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경유하여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동대문과 서대
문 양쪽 성벽을 싹둑 자르면서 성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를 만들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랐다. 그
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백성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
제는 1905년 이후이다.

을사조약(乙巳條約) 이후 왜국(倭國)이 서울에 설치한 통감부(統監府)는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
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한양성곽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이때 서소문<소의문(昭義門)>이 사라졌으
며, 1910년 이후 서울 시가지 개발과 도로 확충을 이유로 성벽 곳곳을 잘랐다. 그래서 서대문<
돈의문(敦義門)>과 동소문<혜화문(惠化門)>이 사라지고, 동소문이 있던 고개는 그 고개마저 깎
여 도로가 생겼다. (현재 혜화동로터리에서 돈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또한 어둠의 시절이 끝나기가 무섭게 6.25가 터지면서 왜정(倭政) 때 이상만큼이나 무거운 상처
를 입었으니, 이때까지 제대로 살아남은 성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
하문) 등이며, 남소문<(南小門, 광희문(光熙門)>과 숙정문은 홍예문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성
벽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남산, 낙산, 장충동, 성북동 등 산 중턱만 남았고, 시가지 쪽은
대부분 녹아버렸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안고 쓰러진 성곽을 뒤늦게나마 1975년 복원사업을 벌여 광희문과 숙정문
을 복원하고, 남아있던 성곽 10.5km를 수리했다. 이후 형체도 없이 사라진 동소문을 다시 일으
켜 세우고, 사라진 부분의 성곽을 조금씩 복원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회복하고 있다. 또한
근래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긴 탐방로를 만들어 인기가 대단한데, 북악산 주변
과 인왕산 정상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지 출입이 가능하다. 다만 성곽이 사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사직터널 윗쪽~월암근린공원, 서울시 교육청~남대문, 남대문~남산육
교, 장충체육관~광희문, 광희문~동대문, 동소문~성북동 서울과학고 북쪽)

예전에는 한양도성을 서울성곽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한양도성, 한양성곽이라 부른다. 허나 서울
성곽이라 불러도 별 무리는 없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서울이란 이름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설화
한토막이 전해온다.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국도로 삼고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
데 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이 쌓여져
있던 것이다. 그래서 태조는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에 성
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에 따라 성곽을 쌓
았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이 땅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대
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몽골의 서울은 울란바토르' 이런 식으로 말이다.


▲  낙산에서 동대문으로 내려가는 한양도성 (이화마을 남쪽)

▲  이화마을 남쪽을 지나는 한양도성

▲  이화마을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창신동(昌信洞)과 숭인동(崇仁洞), 신설동을 비롯하여
멀리 아차산(阿且山) 능선과 남한산성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낙산에 둥지를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벽화 및 달동네의
성지(聖地)로 크게 유명세를 타고 있는 ~ 이화(梨花)마을

▲  이화마을 옆구리로 흘러가는 한양도성

서울에 있는 마을 가운데 가장 세상에 많이 알려진 마을은 어딜까?? 아마도 북촌한옥마을(북촌)
과 이곳 이화마을이 아닐까 싶다.
이화마을은 낙산 남쪽에 둥지를 튼 도심 속의 달동네로 행정 구역은 서울 종로구 이화동(梨花洞
)이다. 조선시대에는 살구나무가 많이 자라던 한양도성의 외곽으로 마을이라고 해서 시골마을이
나 산골 마을은 아니다. 그냥 낙산 남쪽 자락의 이화동 달동네를 이화마을('이화동 벽화마을'이
라 불리기도 함)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마을은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향기가 깊게 서린 산동네(달동네)로 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서
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1960~70년대에 조성된 달동네의 하나이다. 주황색 기와의 조
그만 집과 판자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거대한 산동네를 이루었는데, 그곳에서 서민들은 미래에
대한 꿈을 조금씩 싹틔우며 힘겹게 서울살이를 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제법 비중을 이루며 형성되던 달동네는 199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로 강제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동네 구조가 바뀌고 달동네의 초췌한 집 대신 아파트와 빌라, 단독주택 등
이 그 자리를 채워나간 것이다. 이화마을 역시 이런 세월의 변화는 감히 거스를 수가 없어 주황
색 기와집은 많이 사라진 상태이나 지붕 색깔과 집 외형만 조금 바뀌었을 뿐, 동네 구조와 가옥
구조, 주민들의 삶은 거의 그대로라 달동네의 모습은 아직 여전하다.

어린 시절을 달동네(금호동, 약수동)에서 어렵게 살았던 본인인지라 이곳에 들어서니 정감이 참
많이 간다. 그 시절 온갖 추억을 소환하는 빛바랜 일기장 같은 곳, 이곳을 거닐면 나의 어린 시
절의 모습, 또는 옛 친구를 만나는 것은 아닐까? 마음까지 두근거린다. 달동네를 누비며 위엄을
날리던 어린 시절, 그때 나의 꿈은 얼마나 실현이 되었을까? 당시의 순수함은 얼마나 남아있을
까? 지금 나는 어떠한가? 등등 어렸을 때를 바탕 삼아 잠시 나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게 만드는
거울 같은 곳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급하게만 변해가는 세상도, 빛의 속도로 흘러가는 세월의 거친 흐름도 이곳만
큼은 고삐를 늦추며 천천히 흘러간다. 1960~80년대 고향을 떠나 서울에 힘겹게 둥지를 튼 이들
의 초심이 서린 곳이라 세월도 이곳에선 자신의 초심을 되새기는 모양이다. 숨이 막힐 정도로
번잡한 도심이 바로 밑이지만 이곳만큼은 그런 도심을 비웃듯 조용하고 아늑하다.


▲  이화마을에서 바라본 남산과 서울타워

이화마을이 속세에 이름 4자를 드러낸 것은 바로 마을을 수놓고 있는 그림 때문이다. 2006년 서
울시에서 'Art in City 2006'이란 프로젝트를 위해 구성된 '공공미술추진위원회'에서 소외된 지
역의 시각적인 환경을 개선하고자 적당한 곳을 물색하다가 이화마을을 점찍고 '낙산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래서 70여명의 작가들이 찾아와 집과 담장, 계단에 그림을 그리고 조형물을 설치했
는데, '남의 집 벽에 뭐하는 것이야?' 반감을 가지던 동네 주민들과 호흡을 같이하고자 동네의
역사와 동네 주민들의 옛 기억, 풍물, 희망을 수집하고 정리해 그림에 반영했다. 그렇게 하여
우울한 흑백 분위기에 이화마을은 그림을 품은 색채감 돋는 벽화마을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저 하얀색과 회색, 주황색 기와가 전부이던 우중층한 동네에 알록달록 색깔을 머금은 그림을
입혀놓으니 동네가 확 달라보이고 동네 사람들의 표정도 희망 어린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림이 그려진 마을로 사람들의 입과 인터넷, 언론을 통해 속세에 널리 알려지면서 이곳을 찾는
외지인의 발길도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늘어났고, 외국인 관광객까지 불이 나게 찾아오면서 이제
는 서울의 이름난 명소로 크게 자리를 잡았다.
또한 이곳을 시작으로 벽화마을이 크게 유행을 타면서 달동네나 시골마을을 대상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벽화를 머금은 마을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에는 이곳 외에도 인왕산(仁王山) 북쪽
에 누운 개미마을이란 달동네가 있는데, 그곳도 벽화마을로 한참 유명세를 타고 있고, 근래에
는 성내동(城內洞) 주택가에 강풀만화거리가 조성되어 벽화마을의 유행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러니 이화마을은 전국에 벽화란 불을 지핀 벽화마을의 성지인 셈이다.

마을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가파른 산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어 오르락내리락이 여간 힘들지 않
다. 게다가 벽화도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어 대포처럼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숨을 헐떡이며 그
림과 숨바꼭질을 벌이는 사진쟁이들이 쉽게 눈에 띈다.
이렇게 관광객과 사진쟁이의 방문이 늘다보니 자연히 동네 사람들과도 조금씩 마찰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실제 예로 2012년에 어느 유명 가수가 마을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을 보겠다며 사람
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우자 동네 사람들이 그 그림을 지운 일이 있었고, 마을 분위기를 사진에
담는다면서 남의 집을 침범하거나 골목길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등의 민폐가 종종 발생한다. 사
람들은 오로지 벽화와 마을 풍경을 사진에 담는 것에만 혈안이 되있을 뿐, 이화마을이란 동네와
그곳에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의 애환과 삶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것이다. 어
찌보면 현대판 민속마을인 셈이다. 게다가 관광객이 늘어나도 동네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수익은
거의 없다. 관광객을 수입으로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한 탓이다. (겨우 동네 구멍가게와 찻집/까
페, 장식품을 파는 가게가 몇 있을 뿐임)

단순히 이화마을을 목적으로 오는 것보다는 낙산(낙산공원) 나들이의 일부로 살펴보는 것을 권
하는 바이다. 벽화와 달동네 풍경 외에는 딱히 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벽화와 마을을
목적으로 왔다면 은근히 허기질 수 있으니, 이화마을을 품은 낙산 일대를 더 둘러보는 것이 좋
을 것이다. 낙산 자체도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니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이화장을 비롯해 낙산에
안긴 여러 명소와 한 덩어리로 둘러보길 바라며, 이화마을 자체가 달동네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으므로 달동네를 겪었던 사람들에게는 당시의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좋은 타임머신이 될 것
이다.

이화마을은 현재 재개발지역에 들어있다. 다행히 마을을 뒤덮은 벽화가 유명세를 타면서 개발의
칼질도 고개를 숙였지만 벽화가 언제까지 방패가 되어줄 수는 없다. 개발을 하더라도 마을 사람
들과 벽화의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최적의 답안을 찾아 서로가 좋은 방향으로 개발을 했으면 좋
겠는데, 많은 것들이 잘못된 이 나라에서 그런 것이 과연 통할지는 모르겠다.


▲  이화마을의 새로운 명물, 이화마루 텃밭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낙산으로 가다보면 성곽 쪽에 이화마루 텃밭이란 작은 공원이 나타
난다. 도심 속에 왠 텃밭?? 집이 다닥다닥 여유도 없이 들어찬 이런 곳에 조촐하게나마 밭이 있
다니 참으로 신선하다.

이화마루 텃밭은 이화마을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지대에 자리한 공간으로 작은 밭과 평상, 의
자, 정자나무 4그루, 상자텃밭이 전부인  조그만 공원이다. 이곳은 원래 집 2채가 있었는데, 철
거되어 짜투리 땅으로 버려져 있었다. 그런 잉여 공간이 이렇게 참신한 공간으로 거듭났으니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2012년 6월 건국대 건축학부 동아리인 'FAS(외부공간) 프로젝트 그룹'에서 건축계의 최대 관심
사인 '녹색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텃밭'과 '주민의 커뮤니티 공간'을 주제로 선정했다. 그들
은 서울의 달동네나 낙후 지역에 텃밭과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기로 하고 장소를 물색했는데, 그
결과 주민들의 반응이 제일 좋았던 이화마을을 선정했다.
마침 동네 정상부에 짜투리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공간이 바로 이곳으로 집 2채가 철거되어 버려
져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텃밭을 닦기로 했으나 문제는 집의 잔재를 비롯한 쓰레기가 무려 35
톤에 이른다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팀원들은 스스로 돈을 모아 150만원의 처리 비용
을 마련했지만 그들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팀장은 방법을 찾다가 작년 폭설로 동주민
센터에 3,000여 개의 삽이 지원되었다는 것을 듣고 제안서를 작성해 이화동주민센터를 찾았다.

허나 주민센터 공무원들은 그들의 제안서에 '대학생들이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어요?' 부정적
인 반응을 보였다. 허나 다행히 설득이 되어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다음 날 작업에 들어갔고, 종로구청에서도 흔쾌히 도와주었다. 또한 환경미화원과 동네 주민들
도 나와 그들의 프로젝트를 거들었다. 팀원들은 아침 8시부터 모두 나와 12시간 넘게 쓰레기를
치웠고, 그로 인해 처음 2주를 예상했던 작업 기간은 3달로 크게 늘어났다.

쓰레기를 치운 이후 팀원들은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허나 그 프로젝트가 팀원과 종
로구청, 마을 주민과 함께 하는 것이다보니 의견 조율이 쉽지 않았다. 팀원들은 전체적인 공간
구성과 조화를 더 우선시했지만 구청은 텃밭을 우선시 했다. 또한 마을 주민들의 의견도 엇갈려
어려움이 있었으나 점차 주민들의 지지와 협조를 얻어내 주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진행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해 9월, 텃밭과 주민들의 소중한 공원으로 완전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팀원들은 이곳이 이화마을의 꼭대기라하여 '이화마루'란 이름을 붙였고, 마땅한 쉼터와 나무가
없던 마을에 소중한 오아시스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촐한 갤러리도 조
성되어 문화공간의 역할도 종종 겸하고 있다.


▲  이화마루 부근에 있는 흑백 벽화
벽화 속에 또다른 달동네가 담겨져 있다.

▲  이화마루 동쪽에 있는 성곽 암문(暗門)
성 내외를 이어주는 문으로 동대문과 낙산공원 사이에 2곳이 있다.

▲  이화마을 언덕 골목길 - 어린 시절 저런 골목길을 많이도 뛰어다녔는데
이제는 나이가 적지 않게 누적되다보니 저런 길을 오르는 것도 힘들다.

▲  어린 시절 소꿉친구가 뛰어나올 것 같은 이화마을의 막다른 골목길

▲  하트 풍선을 든 토끼와 곰탱이의 표정이 썩 밝아보이진 않는다.
온갖 경쟁과 세상살이에서 어쩔 수 없이 적(경쟁자)과 공존해야 되는
우리의 불편한 자화상은 아닐까...?

▲  이화마을의 백미(白眉), 꽃계단

이화마을 중간 부분에 있는 꽃계단은 흔히 볼 수 있는 달동네 계단이다. 숨을 헐떡이게 만드는
그 밋밋한 계단에 어여쁜 꽃잎을 그려놓으면서 이제는 이화마을의 상징과 같은 귀한 존재가 되
었다. 마을에 널린 다른 벽화는 크게 눈에 들어오진 않지만 이 꽃계단만큼은 정말 인상이 깊다.
마을을 찾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대부분 기념 촬영에 임하느라 부산한데 비록 사람들이 유화로
그린 그림이지만 자연산 꽃잎에 못지 않게 화사하다. 그들의 방긋~♪ 웃는 모습에 속세에서 오
염되고 상처받은 마음마저 싹 정화되는 듯 하다.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 상당수 우울한 환경이지만 꽃계단 꽃잎의 응원에 힘입어 다들 귀하게
되기를 기원하며 모두가 잘사는 복지국가가 되기를 염원해본다.

※ 이화마을 찾아가기 (2014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4거리(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 있는 동대문성곽공원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12분 정도 오르면 이화마루 텃밭이 나온다. 이곳을 중심으로 성곽 안쪽 동네가 이화마을이며,
  여기서 서쪽(대학로 방향) 골목길로 내려가면 다양한 벽화들이 고개를 내민다.
* 서울시내버스 102, 107, 108, 301, 7025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화동(이화장) 하차, 동대문 방
  면(동쪽)으로 조금 가면 산쪽으로 난 율곡로19길이 나온다. 그 길을 올라가면 이화마을이다.
* 이화마을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남의 집에 불쑥 들어가 사진을 찍거나 크게 떠드는 등의
  민폐는 삼가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9,10번지 (율곡로19길, 낙산성곽서길)


♠  좌청룡(左靑龍)을 타고 서울 도심을 굽어보다 ~ 낙산(駱山)
(낙산공원, 한양도성 산책로)

▲  낙산공원 남쪽에 자리한 낙산정(駱山亭)

서울 도심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는 낙산은 해발 125m의 나지막한 산이다. 낙산이란 이름
은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산 이름인 낙(駱)은 낙타를 뜻한다.
또한 3글자로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 모두 낙타를 상징하며,
그 이름을 간편하게 줄인 것이 낙산이다. 또한 조선시대에 궁궐에 우유를 조달하던 관청인 유우
소(乳牛所)가 낙산 기슭에 있어 타락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낙산은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의 하나로 도성(都城)의 동쪽을 맡고 있다. 여
기서 내4산이란 한양의 주산(主山)이자 북쪽에 자리한 북악산<北岳山, 백악산(342m)>과 서쪽에
인왕산(仁王山, 338m), 남쪽에 남산(南山, 262m), 그리고 동쪽에 낙산을 이르는데, 문제는 그들
중에 낙산이 가장 부실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낙산과 멀리감치 마주보고 있는 인왕산은 산세는
좀 작아보이지만 꽤나 알차고 험준하여 예로부터 호랑이의 소굴로 유명했다. 북악산 역시 인왕
산 못지 않은 위엄을 가지고 있으며, 남산은 그들보다는 세는 약해도 덩치는 좀 있다. 허나 낙
산은 그들보다 높이나 덩치 모든 면에서 형편없이 떨어져 그냥 뒷동산 같은 언덕이다. 옛 사람
들이 신봉했던 풍수지리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 착한 산은 아니다.
그래서 한양을 서울로 삼은 조선은 낙산의 그런 부실한 기운을 북돋아주고자 낙산 남쪽에 있는
동대문의 이름인 흥인문(興仁門)에 지(之) 1글자를 추가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한 것이다.

낙산이 그렇게 염려되면 도성을 동쪽으로 좀 확장하면 어떨까 싶지만 낙산 동쪽은 보문동 방향
으로 조금 뻗은 동망봉(東望峰)을 빼고는 거의 평지이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낙산에 성곽을 얹
힌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고려보다 스케일이 비교도 안될 정도로 작기 때문에 도성을 크게 구
축하진 못했다. <고려의 황도(皇都)인 개경(開京)의 절반도 안되는 크기임>

낙산은 야트막한 산으로 숲이 무성하고 잘생긴 바위와 약수터가 많았다. 게다가 도성 내부가 훤
히 다 보일 정도로 조망도 일품이라 도성 주변 경승지로 꼽혀 왕족과 양반들이 앞다투어 낙산에
정자와 별장, 거처를 짓고 살았다. 효종(孝宗)의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석양루(夕陽樓,
지금의 이화장 정문 앞에 있었음)를 지었고, 조선 후기 문인 이심원(李心源, 1722~1770)이 지은
일옹정(一翁亭)을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과 백림정(柏林亭) 등이 있었다. 이들은 양반과 시인
묵객들이 자주 발걸음을 하던 낙산의 이름난 명소였다.
또한 조선 후기 한옥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던 이화장(梨花莊)과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유명한 이수광(李睟光)이 살았던 비우당(庇雨堂), 낙산의 유방이라 불리던 이화동약수와 신대약
수 등의 약수터, 우물이 나란히 5개가 있었다는 5형제우물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의 애환이 서린 자지동천(紫芝洞天, 자주동천)과 동망봉, 도성 5대 명승지의 하나로 기이한 바
위가 많았던 쌍계동(雙溪洞, 이화장 주변) 계곡이 있었으며,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
는 나무만 있다고 하는 홍수동(紅樹洞, 홍숫골), 동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 등이 낙산에 앞
다투어 안겨져 있었다.

이렇듯 낙산에 안겨있던 명소들은 20세기 이후 어둠의 시절과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녹
아 없어졌고, 서울의 인구가 폭증함에 따라 낙산과 동망봉 일대에 빼곡히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옛날의 운치와 정취는 다 말라버렸다. 이화마을도 바로 그런 시류를 타고 낙산 남쪽에 둥지를
튼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낙산의 허리를 가르는 한양도성과 이화장, 자지동천 바위글씨,
그리고 근래 복원된 비우당이 고작이다. 그외에 조선 왕실의 원찰(願刹)이던 청룡사(靑龍寺),
고려 때 지어진 비구니절 보문사(普門寺), 구한말에 세워진 안양암(安養庵)과 지장암(地藏庵)
등의 절이 있다.

낙산 정상에 깔고 앉아 산의 미관을 크게 망치던 낙산시민아파트가 노후화되면서 1990년대 이후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에 따라 이들 아파트와 주변 주거지를 밀어버리고 정상 주변
과 서쪽 일대 61,000여 평을 다져 낙산공원을 닦았다. 공원은 1999년 12월 30일 삽을 뜨기 시작
해 2002년 6월 완공되었는데, 다양한 운동시설과 쉼터 등의 편익시설, 낙산전시관, 중앙광장과
놀이마당, 3개의 전망광장, 산책로와 역사탐방로를 갖추고, 소나무를 비롯한 15만 그루의 식물
을 심어 비록 왕년의 손톱때만큼은 못되어도 도심 속의 포근한 휴식처이자 답사/나들이/데이트
장소의 성지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공원 면적 201,779㎥)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은 동대문에서 동소문<東小門, 혜화문(惠化門)>까지의 2.3km 구간으로 성
곽이 잘 남아있다. 1999년 이후 산업화의 칼질에 무책임하게 희생된 낙산을 조금씩 되살리면서
성곽도 보수를 벌여 동대문 북쪽 구간을 복원하고, 성곽과 성밖에 탐방로를 만들었다. 성곽 내
부 탐방로는 동소문에서 카톨릭대 성심교정 사이 약 1리 구간을 제외하고 모두 길이 나있고, 성
밖은 동소문에서 동대문까지 전구간 이어져있다.

낙산은 대학로와 무척 가깝고, 혜화역(4호선)과 한성대입구역(4호선), 동대문역(1,4호선), 창신
역(6호선)과도 가깝다. 심지어 낙산공원 정상까지 마을버스가 올라가는 등 교통과 접근성은 매
우 착하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뒷동산처럼 야트막하여 누구나 쉽게 안길 수 있고, 동쪽을 제외
하고는 주변이 거의 평지라 조망도 그런데로 일품이다. (도심과 북쪽 방향의 조망이 좋음) 특히
서울 도심의 야경(夜景)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포인트라 인기가 대단하다.

낙산에 간다면 동소문이나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낙산공원에 이르
러 성곽길이 지루하다면 서쪽으로 대학로(마로니에공원) 방면으로 내려가도 되고, 동쪽으로 창
신동 방면으로 내려가도 된다. 낙산공원에서 가까운 명소로 이화장과 이화마을, 자지동천(자주
동천), 비우당, 삼군부총무당 등의 명소가 있으며, 여기서 욕심을 더 부린다면 거리가 조금 있
지만 동망봉, 청룡사, 보문사, 안양암, 대학로 주변 명소까지 겯드린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
가 될 것이다.

※ 낙산공원 찾아가기 (2014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4거리(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도보 20분
* 한성대입구역(4호선) 4번 출구에서 성곽 탐방로를 따라 도보 20분 (4번 출구를 나와서 2~3분
  정도 가면 한양성곽과 탐방로가 나옴)
* 혜화역(4호선) 2번 출구에서 마로니에공원 북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낙산공원을 알리는 이정표
  가 나온다. 도보 10분
*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에서 종로03번 마을
  버스를 타고 낙산공원 종점 하차 (창신역 2번 출구에서 낙산공원까지 도보 16분)
*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탐방로는 24시간 개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산2-10 일대 (중부공원녹지사업소 ☎ 02-743-7985~6)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1)
바로 앞에 혜화동(惠化洞)을 비롯해 명륜동과 성북동(城北洞), 북악산과 북한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2)
혜화동과 서울대병원, 창경궁, 창덕궁,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안산(鞍山) 등이 바라보인다.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3) - 혜화동과 원남동, 종로 지역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4) - 종로와 중구, 남산

대학로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선 낙산정은 2002년에 지어진 조촐한 정자이다. 비록 고색의 내
음은 익지도 않았지만 4대문 안 서울 도심은 물론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남산 등 서울의 내
4산이 모두 바라보여 조망도 제법 일품이다.


▲  낙산공원 종로03번 마을버스 종점

빈틈없이 이어진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이 여기서 잠시나마 끊긴다. 그 사이로 마을버스가 귀여
운 뒷태를 선보이며 바퀴를 멈추고 쉬고 있다. 이곳은 예전 낙산아파트가 있던 곳으로 저 길로
나가면 창신동과 비우당, 숭인동 방면으로 이어진다.


▲  낙산공원 정상부 (놀이마당 주변)

▲  낙산공원 놀이마당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혜화동과 종로구 일대)

▲  낙산공원 마크와 동소문 방면 성곽 바깥 탐방로

▲  낙산에서 동소문 방면 한양도성과 성곽 바깥 탐방로

▲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흘러가는 한양도성 (1)
혜화동과 명륜동, 성북동, 북악산 줄기와 북한산이 바라보인다.

▲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흘러가는 한양도성 (2)
삼선동과 돈암동, 성북동이 바라보인다. (덤으로 북한산까지)


▲  성바깥 탐방로에서 바라본 삼선동과 돈암동, 한성대(오른쪽 건물들)
낙산공원에서 동소문 구간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본글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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