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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9.15 짙푸른 숲과 조촐한 계곡을 간직한 도심 속의 싱그러운 쉼터, 북악산 삼청공원 ~~~ (말바위, 영무정, 한양도성. 삼청동길)
  2. 2016.02.27 서울 도심의 꿀단지를 거닐다. 북촌 겨울 산책 (고희동가옥, 삼청동길, 따스한 차1잔)

짙푸른 숲과 조촐한 계곡을 간직한 도심 속의 싱그러운 쉼터, 북악산 삼청공원 ~~~ (말바위, 영무정, 한양도성. 삼청동길)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 나들이
(삼청공원, 말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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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숲이 무성한 서울 도심의 든든한 허파, 삼청공원(三淸公園)

▲  감사원 서쪽에 있는 삼청공원 후문

여름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6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촌(北村)을 찾
았다. 북촌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계속 북쪽으로 가니 어느덧 북촌과 북악산(백악산)의 경계인
삼청공원까지 발길이 가게 되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오랜만에 공원이나 1바퀴 둘러보고자
공원 정문을 통해 그의 품으로 들어섰다.

북악산 동남쪽 자락에 넓게 누운 삼청공원은 서울 도심의 북쪽 끝으로 조선시대에도 한양도성(
都城)의 북쪽 끝을 담당했다. 예나 지금이나 싱그러운 나무가 바다를 이루던 명승지로 서울 사
람들의 오랜 나들이 명소였으며, 봄꽃이 만연할 때는 사대부 여인들이 봄꽃놀이를 즐기던 현장
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 학자인 성현(成俔, 1439~1504)은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도성
안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으로 삼청동 골짜기를 꼽았으니 그곳이 바로 삼청공원으로 '산이
높고 나무가 빽빽한데 바위 골짜기가 깊숙하다'
라며 이곳을 표현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 표현은 유효한데, 공원 일대에는 북악산의 명물인 소나무를 비롯해 노간주
나무, 붉나무, 팥배나무, 쪽동백나무, 신갈나무, 때죽나무, 진달래 등 갖은 나무들이 숲을 이
루고 있으며, 골짜기가 깊고 멋드러진 바위가 여럿 포진해 있다.

이렇게 서울 사람들의 오랜 산책 명소이자 피서지였지만 공원에 서린 옛 흔적은 북악산 주능선
에 붙어있는 숙정문(肅靖門)과 한양도성 밖에는 없다. 이들은 도성 수비용이니 풍류와는 관련
이 없고 기껏해봐야 관리들이 말을 타고 올라와 시를 지었다는 자연산 바위, 말바위 정도가 있
다. <공원 바깥까지 확대한다면 '삼청동문(三淸洞門)' 바위글씨를 비롯한 여러 바위글씨와 유
길준(兪吉濬)이 유폐되어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작성했던 취운정(翠雲亭)터 정도가 있음>

왜정(倭政) 시절인 1934년 3월, 삼청골 일대를 삼림공원으로 삼아 관리하기 시작했으며, 1940
년 3월, 총독부고시 208호에 따라 도시계획공원의 하나가 되었다. 당시 왜정은 도시계획공원
140개를 발표했는데 삼청공원이 그 1호로 당시 공원 면적은 약 432,000㎡였으며, 소나무를 비
롯한 온갖 나무들로 울림(鬱林)을 이룬 이곳에 산책로와 정자, 의자, 풀장 등을 설치했다.

1945년 이후에는 정몽주 시조비 등의 시비(詩碑), 영무정, 어린이놀이터, 운동시설 등을 계속
해서 설치했고 산책로와 계곡을 정비했으며 삼청동길과 계곡(삼청골) 사이에 나무데크길을 닦
았다. 그리고 근래에 후문 부근에 숲속도서관을 짓는 등, 자연에 크게 반(反)하지 않는 범위에
서 얌전하게 손질을 했다.
공원 손질이 얌전했던 이유는 공원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잔뜩 포진해 있어 천박한 개발
의 칼날을 뚝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하여 자연에 쏙 묻힌 싱그러운 공간으로 도심 속에 남게
된 것이다. 다만 시내 확장과 군부대로 공원 면적은 5만㎡가 줄어 현재는 약 388,109㎡이다.

삼청공원은 도심의 핵심인 광화문(光化門)과 종로에서도 무척이나 가깝다. 게다가 공원과 살을
맞댄 북촌과 삼청동길의 인기가 계속 하늘을 찌르면서 찾는 이도 많이 늘어났다. 숲이 매우 짙
어서 그늘도 꽤 깊으며 조촐하게 자연산 계곡까지 갖추어 북악산 서북쪽 자락에 묻힌 백사실계
곡(백석동천, ☞ 관련글 보러가기)과 더불어 도심 속 피서지로 인기를 더하고 있다.
 비록 천하에 이름 꽤나 있는 계곡 앞에 명함조차 내밀기 쑥쓰러운 수준이지만 도심 속에서 발
을 담구며 간단하게 피서를 누릴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대단하다. 공원을 가로질
러 도심으로 향하는 삼청골은 삼청천(三淸川)이라 불리며 청계천 상류의 하나를 이룬다.

시내에서 공원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삼청동(三淸洞) 마을버스 종점에서 들어가는 것과 감사원
서쪽의 후문으로 가는 길이 가장 일반적이다. 북촌에서 들어간다면 후문을 이용하면 되며, 삼
청동길로 접근하거나 마을버스를 이용한다면 삼청동 마을버스 종점에서 들어가면 편하다. 또한
2009년에 공원에서 말바위로 오르는 산길이 뚫리면서 북악산 주능선과 숙정문은 물론 그 너머
성북동(城北洞) 지역까지 바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특히나 이 길이 지나가는 북악산 동남
쪽 자락은 오랫동안 속인(俗人)들의 접근을 허용치 않았던 금지된 곳으로 산길이 닦이면서 이
곳을 잠궜던 자물쇠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공원 서쪽에는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시작된 삼청동길이 마을버스 종점을 지나면서 구불구불 또
아리를 튼 2차선 산악도로의 모습을 보이며 삼청터널을 거쳐 성북동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박
정희 정권 시절 성북동에 서식하던 권력 실세들이 그들의 교통 편의와 땅값 상승, 청와대와 정
부기관에서 삼청각/대원각 등 고급요정으로의 접근 편의를 위해 낸 것으로 당시에는 차량이 많
지 않아 조촐하게 2차선으로 만들었다.
 허나 시간이 흘러 차량들이 쓸데없이 늘어나면서 도로와 터널을 넓혀야될 지경에 이르렀지만
개발제한구역이라 그것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2차선으로 마냥 두고 있는 것이다.

삼청터널과 터널로 이어지는 길(삼청공원~삼청터널 북쪽, 삼청각 구간)은 뚜벅이들의 배려 따
위는 안중에도 없는
오로지 차량을 위한 길이니 괜히 도보로 가는 일이 없기 바라며 삼청동에
서 숙정문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이 길은 오랫동안 통제구역으로 묻혀 속세의 뇌리 속에
잊혀진 상태이다.

※ 삼청공원 찾아가기 (2017년 8월 기준)
* 지하철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을 타
  고 삼청동 종점 하차. 이 버스는 삼청동에서 정독도서관입구, 동십자각, 광화문, 시청, 남대
  문을 거쳐 서울역(서울역전우체국 북쪽)까지 운행한다.
* 지하철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감사원 하차(또는 도보 15
  분), 감사원에서 서쪽(삼청동)으로 내려가면 막다른 3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들어
  가면 공원이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삼청동길)
*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삼청동길을 따라 25분 정도 걷거나 동십자각 북쪽 법련사 정류장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 이용
* 삼청공원 숲속도서관 이용시간 : 10시~18시 (여름은 20시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문의 ☎
  02-734-3900)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1 일대 (북촌로 134-1)


▲  삼청공원 후문 안쪽

공원 후문을 들어서면 수목원 같은 삼청공원의 고운 속살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수목원 같지만
속살을 깊이 들어가면 수목원 분위기는 울림으로 변화하고 산내음과 솔내음이 청정한 기운을
볶아내면서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준다.


▲  숲터널을 이룬 삼청공원 산책로 ▼


▲  시인 김경린(金璟麟, 1918~2003)의 '차창'이 담긴 시비(詩碑)

차창(車窓)
나는 수족관에 온 한마리의 어족
미끄러지는 바깥 세계가 뿜는 향수로
안경은 차웁다

우리나라 현대 시인의 하나인 김경린이 2003년 세상을 뜨자 그의 후학들이
그가 살았던 삼청동에 그의 대표작, 차창을 담은 시비를 세웠다.

▲  동심이 깃든 삼청공원 어린이놀이터
어린이들의 안전과 그들의 흙놀이 공간을 위해 흙으로 놀이터를 닦았다. 나도
어렸을 때 흙장난 참 많이 했었지. 그때는 흙으로 많은 세상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내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도 아리송하다.

▲  삼청공원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옛 약수터
오른쪽에 보이는 네모난 구멍에서 약수가 콸콸 쏟아져 나왔으나
이제는 목구멍이 막힌 죽은 샘터가 되었다.

▲  삼청공원 약수터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담는 약수터로 근래 부적합 판정을 받아 찾는 이가 많이 줄었다.
약수터 맞은편 의자에는 1996년 10월 문화체육부에서 세운 근대 소설가 염상섭
(廉想涉, 1897~1963)의 앉아있는 동상이 있었으나 2014년에 치워버렸다.
(염상섭의 생가터가 이곳 부근이라 동상을 세웠음)


▲  비둘기도 이곳 경관에 반해 뒤뚱뒤뚱 산책을 즐긴다.

▲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그의 어머니의 시조비

정몽주와 그의 어머니의 시조가 담긴 정몽주 시조비는 이곳에서 그나마 오래된 볼거리로 1973
년에 세워진 것이다. 포은(圃隱)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을 덜 초라하게 해준 3은(三隱)의 하
나로 그의 시조비가 떡하니 있어 이곳과 무슨 관련이 있겠구나 싶지만 실상은 서로 아무런 관
련이 없다.

시조비 오른쪽을 장식하고 있는 시조는 백로가(白鷺歌)로 정몽주의 어머니가 간신과 역신(逆臣
) 등 질이 안좋은 무리와 어울리지 말 것을 훈계하고자 지은 시라고 한다. 허나 조선 영조 때
간행된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작자 미상이라 나와있고 조선 말 학자인 이희령(李希齡)이 지
은 약파만록(藥坡漫錄)에는 연산군 시절에 김정구(金鼎九)가 지은 시라고 나와있어 작자에 대
해서는 아직도 말들이 많다.

시조비 왼쪽에는 정몽주가 지은 그 유명한 단심가(丹心歌)가 쓰여 있다. 이 시는 이성계(李成
桂) 패거리가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우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인 이방원(李芳
遠, 후에 조선 태종)이 정몽주를 살짝 찾아와 그 유명한 하여가(何如歌)를 들이밀며 그의 의중
을 물었다.
 허나 정몽주는 그 이름도 높은 단심가로 답을 하며 고려에 대한 일편단심을 강하게 내비췄다.
결국 안되겠다 여긴 이방원은 부하 조영규(趙英珪)를 보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를 잔인
하게 처단하고 만다. 고려의 마지막 보루인 최영(崔瑩)과 정몽주를 잃은 고려는 더 이상 지탱
하지 못하고 결국 이성계 패거리에 의해 강제로 휘장을 내리게 된다.



백로가(白鷺歌)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빗을 새오나니
창파(滄波)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하여가(何如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영무정의 4계절' 시비
영무정 보존회에서 2008년 10월에 세운 시비이다.


영무정 시비에서 북쪽을 보면 초록색 철책이 빙 둘러진 후미진 공간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속살에는 조그만 폭포가 동천(洞天)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고 그 밑에 물이 담겨진 욕조처
럼 생긴 통이 있으며, 그 옆에 조그만 정자가 있으니 그곳이 바로 삼청공원의 숨겨진 명물, 영
무정이다.

이곳은 서울에 거의 남지 않은 노천 목욕탕으로 1960년경에 동네 사람들이 목욕터로 만든 곳이
다. 폭포 밑에 3명 정도 들어갈 크기의 욕조를 만들었는데 물이 매우 맑고 차다고 한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사람 여럿이 욕조에 몸을 담구거나 (물론 옷은 입었음) 주변에 앉아 대
화를 하고 있어서 안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특히 아저씨와 노공(老公)>의 오랜 목욕터이나 문제는 시민들이 거니는 공원에서
벌거벗고 목욕과 냉수마찰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계속 논란이 불거지자 종로구청에서
이곳을 없애려고 삽을 들었으나 영무정보존회에서 쌍수 들고 반대하여 철거는 하지 못했다. 또
한 방송에도 여러 번 등장해 그 이름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철거하기에 좀 애매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여 종로구청은 기존에 있던 펜스를 치우고 초록색 철책을 둘렀으며, 벌거벗고 씻지
말라는 경고문을 붙이는 선에서 영무정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허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늦은 밤에 몰래 벗고 씻는 이들도 아직 있을 듯 싶으며 구석진 곳이
라 둘만의 조용한 대화(?)를 원하는 이들이 찾기에 좋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이자 내 어린 시절 뒷동산이었던 남산(
南山)의 여러 약수터에는 이런 노천 목욕탕이 거의 딸려있었다. 약수터와 운동시설 옆에 담장
등을 둘러 벗고 씻는 공간을 둔 것이다. 나도 어린 시절 남산 그늘에 살았을 적에 부친을 따라
남산의 모 약수터에서 냉수마찰을 한 적이 있다. 냉수마찰을 해야 감기가 안걸린다는 말에 깜
빡 속아서 말이다.

영무정이 법에는 다소 저촉은 되지만 동네 사람들의 쉼터이자 피서지로 차가운 물이 모였다는
욕조에 들어가 피서를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단 물놀이에 적당한 가벼운 옷차림(속옷바
람은 안됨)으로 통에 들어가길 바라며, 삼청골 오염을 방지하고자 비누 사용과 음식물 취사행
위를 금하고 있으니 그냥 몸만 시원하게 담구고 오자.


▲  삼청공원 윗쪽 산책로 (영무정 북쪽)
집으로 살짝 가져와 혼자서만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다.

▲  구부러진 삼청공원 윗쪽 산책로

▲  삼청공원 산책로는 경사가 별로 없어 누구든 마음 편히
거닐 수 있는 착한 오솔길이다.

▲  오랜 가뭄으로 목이 타버린 삼청골
물은 온데간데 없고 흙과 돌만 어지럽게 흩어져 초여름 가뭄의
심각함을 드러낸다.


 

♠  삼청공원의 새로운 산길, 북악산 말바위 산길

▲  말바위 산길 입구

삼청공원 윗쪽에는 북악산 말바위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2008년에 닦기 시작하여 2009년에
완성되어 세상에 선보인 산길로 말바위조망대까지 600m 정도 이어져 있으며, 그곳까지는 가볍
게 10~15분 정도 걸린다. (중간에 갈림길이 있음, 거기서 왼쪽으로 가면 소나무 숲길, 직진하
면 말바위임)

말바위조망대에서 성곽을 따라 서쪽(숙정문 방향)으로 조금 가면 성곽 밖으로 나가는 나무데크
길이 있는데 그 길로 내려가면 바로 성북동으로 북악하늘길 제3코스와 만난다. 여기서 왼쪽(서
쪽)으로 가면 삼청각과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북악하늘길2/3코스로 이어지고, 오른쪽(동쪽)으로
가면 와룡공원<여기서 성북동 종점이나 성균관대, 감사원 방면으로 내려가면 됨>으로 이어진다.
 또한 성곽길을 더 가면 말바위안내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숙정문을 거쳐 북악산 정상과 창의문
(彰義門, 자하문)으로 넘어갈 수 있어 코스 또한 다양하다. 그러니 취향에 따라 코스를 잡으면
된다.
허나 숙정문과 북악산(백악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성곽길은 9시부터 16시(동절기는 10
~15시)까지만 출입이 가능하다. (신분증을 지참하여 출입증을 작성해야 됨)

삼청공원에서 말바위로 오르는 산길이 생기기 전에는 거기서 성북동/북악산 방면으로 가는 정
식적인 길이 없었다. 삼청터널이 있지만 거긴 오직 차량 전용이며, 걸어서 간다면 와룡고개로
우회해서 가야했다. 지도에서 보는 거리는 매우 가깝지만 걸어서 가는 체감거리는 이론과 다르
게 꽤 각박했던 것이다.
 허나 말바위 산길이 생김으로써 비록 산을 넘어야되는 부담은 있지만 서로의 거리가 꽤 줄어
들었고 반대로 성북동(삼청각)에서도 삼청공원과 도심 도보 접근이 수월해졌다.

출입절차를 밟아야 되는 말바위안내소에서 창의문으로 이어지는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말바위
등산로와 성곽 밖 북악하늘길은 언제든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 (단 군사시설이 여럿 있으
므로 그곳은 들어가거나 촬영하지 말 것)
 이렇게 삼청동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뚫렸다니 참 세상이 많이 변하긴 변한 모양이
다. 국가의 예민한 곳으로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하고 먼산 쳐다보듯 해야 했던, 잘못
들어갔다가는 정말 총 맞을 것 같던 그곳이 말이다. 이제 도성 남쪽인 북악산 남쪽만 개방되면
북악산은 거의 완전히 해방이 된다. 하지만 그곳에는 청와대와 여러 예민한 시설이 있으니 당
장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  말바위 입구에 세워진 건강 돌탑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돌탑이든 우선 건강하고 봐야 된다.
건강이 없다면 바닷가의 힘없는 모래성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  소나무가 운치를 우려내는 말바위 산길

북악산은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시절부터 소나무가 유명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특별
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하여 산이 온통 솔내음의 향기가 진동했다. 허나 왜정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 다른 나무의 유입 등으로 소나무가 많이 줄어 지금은 주능선 주변과 고지대에
주로 남아있다. 삼청공원이나 와룡고개 등 속세와 가까운 곳은 소나무가 거의 없고 속세와 어
느 정도 거리를 둔 고지대에서 소나무들이 이슬을 먹으며 자라고 있다.

북악산 일대는 오랫동안 금지된 산으로 묶여있다 보니 나무와 식물이 마음 놓고 뿌리를 내리면
서 숲이 매우 울창하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는데 삼청공원 일대에서는 직
박구리와 박새, 멧비둘기, 오색딱따구리, 꿩, 노랑지빠귀, 다람쥐, 청솔모 등이 살고 있다.


▲  삼청공원과 말바위 사이에 조성된 쉼터
말바위 등산로는 흙길과 나무로 만든 계단길이 적당히 섞여 있다.

▲  한양도성 (말바위 방향) - 사적 10호

삼청공원에서 말바위 등산로를 15분 정도 오르면 한양도성(한양성곽)의 여장이 나타난다. 여장
이란 성곽을 수비하고자 두툼하게 돌벽을 쌓고, 중간에 여러 개의 구멍을 낸 수비시설인데, 이
곳이 성내(城內)이다 보니 여장 안쪽에 있게 된 것이다. 여장 너머는 성밖으로 바로 성북동이
다.


▲  한양도성 (삼청공원 방향)
서울을 지키던 성곽도 부끄러움을 타는 것일까? 몸에 걸친 담쟁이덩굴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성곽은 1974년 이후에 복원한 거라 일부 검은 주근깨가 낀 것을 빼고는
대부분 하얀 피부를 자랑한다.

▲  말바위로 오르는 각박한 계단길 (왼쪽에 보이는 길로 가면 말바위 조망대)

한양도성과 만나는 곳에서 성곽을 따라 서쪽으로 3분 정도 가면 각박한 각도의 계단길이 나타
난다. (동쪽은 군사시설로 길이 막혀 있음) 그 계단을 오르면 바로 말바위인데 계단길 중간에
왼쪽으로 통하는 나무길이 있으며 그 길로 들어서면 말바위 조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  북악산 말바위조망대와 말바위

▲  도심을 향해 들어앉은 말바위 조망대

말바위 밑에 자리한 말바위 조망대(전망데크)는 커다란 바위 위에 나무로 만든 조망대로 도심
이 있는 남쪽을 향하고 있다. 천하 굴지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밑에 두고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북악산 정상(342m)이나 그 동쪽 봉우리인 청운대(293m), 인왕산(338m)보다 키
가 낮아 시야에 들어오는 범위도 사대문(四大門) 안쪽으로 좁다. 하여 이곳이 그리 높다는 생
각도 들지 않는다.
 허나 삼청공원을 비롯해 북악산 남쪽 자락과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그리고 그 안쪽에
둥지를 튼 도심이 속시원히 바라보며 그런데로 후한 점수를 줄만하다. 낮은 높이치고는 제법
선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북악산 정상과 남쪽 자락
북악산 너머로 인왕산과 서촌<웃대, 경복궁 서쪽 동네> 일대가 바라보인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①
바로 정면에 서울의 남주작인 남산이 바라보인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②
삼청공원과 삼청동, 경복궁 주변 일대가 바라보인다.

▲  북악산의 오랜 명소, 말바위

말바위는 촛대바위와 더불어 북악산에 이름난 바위이다. 이곳까지 삼청공원의 영역에 들어가는
데, 북악산의 오랜 명소로 조선시대에 문인(文人)과 관료들이 말을 타고 이곳으로 올라와 시문
을 짓거나 바람을 쐬며 많이들 쉬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을 타고 올라왔다는 뜻에서 말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며, 다른 이야기로는 북악산의 산줄기가 동쪽으로 좌청룡(左靑龍)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그 끝에 자리한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 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니까 말
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 것이다. (바위가 말처럼 생기지도 않았음)

말바위 옆에는 소나무 1그루가 바위 쪽으로 가지를 뻗어 바위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서
로의 끈끈한 정을 자랑한다.


▲  말바위의 옆모습

1968년 1.21사건 이후 말바위는 금지된 바위가 되어 속세에서 잠시 그 모습이 지워졌다가 2007
년 4월 다시 공개가 되었다. 그때 말바위에서 북악산 정상을 거쳐 창의문까지 제한적으로 개방
되었으며, 말바위는 24시간 언제든 발을 들일 수 있는 자유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  말바위에서 바라본 북악산 주능선 (북악산 정상에서 숙정문 구간)

▲  도성 밖으로 인도하는 말바위 나무다리와 한양도성 성곽길
탐방객 유의사항 현수막이 걸린 나무다리를 내려가면 도성 밖 성북동이다.
 

말바위와 말바위안내소 중간에는 성밖으로 나가는 나무다리가 있다. 무지 귀한 몸인 성곽 여장
을 부시고 내려가는 길을 낼 수가 없기에 부득이 성곽 위에 나무 다리를 다져 성밖으로 통하는
길을 냈다.
다리 북쪽에는 조망대를 설치하여 도심 속의 전원 마을인 성북동을 굽어보게 했는데, 삼청각과
길상사(吉祥寺), 북악산 북쪽 능선과 김신조투르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괜찮다. 여기서
다리를 내려가면 성곽 북쪽 자락길로 삼청각(三淸閣)과 숙정문안내소, 북정마을, 와룡공원, 김
신조루트(북악하늘길) 방면으로 이어지며, 성곽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북악산 주능선의 동
쪽 관문인 말바위안내소가 마중한다.


▲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 주능선

▲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바라본 삼청각과 북악산 북쪽 능선
삼청각 뒷쪽에는 2009년에 개방된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이 숨겨져 있다.

▲  성북동 서부 - 북악산의 두 능선에 막힌 궁벽한 곳이지만 그곳에
자리한 집들은 궁벽과는 거리가 먼 크고 호화로운 집들 투성이다.
빈부격차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현장이라
눈도 그리 즐겁지가 않다.

▲  성북동 일대
성북동은 북악산 주능선과 북쪽 능선(북악산길이 지나가는 능선) 사이에 포근히 터를
닦은 도심 속의 전원마을이자 완사명월형(浣絲明月形)의 명당 자리로 유명하다.
그러다보니 시커먼 졸부들이 가득 기어들어와 속칭 이 땅의 0.1%가 사는
비싼 동네가 되어버렸다.

▲  성북동 너머로 성북구 삼선동, 돈암동 지역이 바라보인다.

▲  다시 삼청공원으로 (말바위 산길 입구)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성밖으로 넘어가 와룡공원을 거쳐 시내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도
늦었고 귀찮기도 하여 왔던 길을 다시 재방송하여 삼청공원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시조비를 거쳐 삼청동길로 나오니 길 동쪽으로 북악산이 베푼 삼청골이 착한 풍경을 도
처에 빚으며 도로와 나란히 흘러간다. 허나 오랜 가뭄으로 비리비리한 모습을 보이니 보는 내
가 답답할 따름이다.


▲  가뭄에 타들어가는 가련한 삼청골 (삼청동길 동쪽 계곡)

▲  삼청동길과 삼청골 사이에 만든 뚜벅이용 나무데크길

▲  삼청동길 나무데크길의 남쪽 종점

서울 도심의 거의 흔치 않은 계곡인 삼청골(삼청천)은 공원 남쪽에 있는 삼청테니스장에서 어
두컴컴한 지하로 흘러간다. 개발의 칼질에 강제로 생매장을 당한 것이다. 이 물줄기는 삼청동
길을 따라 경복궁(景福宮) 동쪽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가는데 옛날 경복궁 주변 사진을 보면
경복궁 동쪽과 북촌 주거지 사이로 하천이 하나 보이니 그가 바로 삼청천이다.

삼청공원을 벗어나 2분 정도 가면 삼청동 종점(종로구 마을버스 11번 종점)이 나온다. 삼청동
과 도심을 이어주는 마을버스의 쉼터로 이곳도 엄연한 도심이라 경복궁과 광화문은 물론 시청
까지 걸어가도 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다.

우리는 지친 몸을 마을버스에 담아 시내로 나왔다. 어차피 종점이라 100% 앉아가는 것은 가능
하다. 이렇게 하여 초여름에 찾아간 북악산 삼청공원, 말바위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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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꿀단지를 거닐다. 북촌 겨울 산책 (고희동가옥, 삼청동길, 따스한 차1잔)

 


' 북촌 겨울 나들이 '

▲  기기국 번사창


 


겨울 제국이 차디찬 위엄으로 천하를 꽁꽁 얼리던 연말에 후배 여인네와 북촌(北村)을 찾았
다. 유난히도 매서운 한파였지만 옷만 두둑히 챙겨 입으면 낮에는 햇님의 보우에 힘입어 그
런데로 다닐만하다. 날씨가 춥다고 마냥 집에 박혀있는 것도 그리 좋지는 못하지. 당당하게
겨울 제국에 대항하며 바깥 바람을 많이 쐬야 건강에도 좋고 추위에도 잘 적응이 된다.

서울 도심 속에 자리한 북촌(북촌한옥마을)은 부암동(付岩洞)과 성북동(城北洞), 북한산(삼
각산), 북악산(백악산)과 더불어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이다. 매년 적어도 10번 이상 발걸음
을 하는 편인데, 그렇다고 그곳에 나만의 꿀단지를 숨겨놓은 것은 아니다. 북촌한옥마을 자
체가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나 마찬가지이니 따로 나만의 꿀단지를 숨길 필요는 없겠지. 다
만 북촌을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 꿀단지의 질도 틀려지며, 아는 것이 없으면 아무리 꿀단지
라도 빈 단지가 되고 만다.
북촌 답사의 갑(甲)은 본인이 늘 강조하지만, 단순히 사진 찍기 좋은 북촌8경이나 정독도서
관, 삼청동길 등의 유명 장소와 맛집, 까페만 찾아다니는 것이 아닌 골목 곳곳에 숨겨진 한
옥과 박물관, 공방, 문화유산, 그리고 북촌을 거쳐간 옛 사람들과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
의 삶과 향기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한옥과 삶터를 지나치게 건드리거나 뒤집지는 말자. 적당하게
선을 지키며 보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북촌은 껍데기만 남은 민속마을이 아닌 사람들이 살
며 삶을 꾸리는 살아있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살던 집
원서동 고희동 가옥(高羲東 家屋) - 등록문화재 84호

▲  붉은 벽돌담에 둘러싸인 고희동 가옥 외경

창덕궁길이 2갈래로 갈리는 원서동 빨래터 정류장에 붉은 피부의 벽돌 담장으로 둘러싸인 한옥
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곳이 바로 2012년 11월에 개방된 고희동 가옥이다. 우리나라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고희동, 그는 누구일까?

고희동은 제주 고씨 집안으로 호는 춘곡(春谷)이다. 1886년 3월 11일 서울 수표동(水標洞)에서
구한말에 군수(郡守)를 지낸 고영철(高永喆)의 3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대부(士大夫)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891년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1899년 한성법어학교(
漢城法語學校)에 입학하여 4년 동안 프랑스어를 배웠다. 바로 그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서양화
를 처음 접했고,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04년 궁내부(宮內府) 주사로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프랑스어 통역과 문서 번역 등
을 담당했다. 1905년에는 궁내부 외사과 주사(主事)가 되었고, 전주 조경단(肇慶壇) 공사를 담
당한 공로로 6품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906년 궁내부주사 판임관(判任官) 4등으로 승서되었고,
1907년에는 자신의 소질을 개발하고자 그 시절 그림으로 명성을 날렸던 안중식(安中植)과 조석
진(趙錫晉)을 찾아가 그림을 배웠다.
허나 당시 미술계는 동양화 일색이었다. 그런 동양화에 금세 진절머리가 난 고희동은 서양화를
배우기로 작정하고 장례원(掌禮院) 예식관 주임관 4등을 지내던 1909년에 황실의 지원을 받아
왜열도 동경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해 이 땅의 사람으로는 최초로 서양화를 배웠다.
당시로는 생소한 서양화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그는 6년 동안 그림 수업을 마치고 귀국해 신미
술 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래서 졸업 작품으로 '자매','정자관을 쓴 자화상(현재
동경예술대학에 있음)'을 출품했고, 이때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 그를 '서양화가의 효시'라고
소개하면서 이 땅 최초의 서양화가로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또한 조선물산공진회에서 '가야금
을 타는 미인'을 출품했고, 중앙고보와 보성고보, 중동고보, 휘문고보 등 서울 장안에서 꽤 잘
나가던 중등학교의 미술선생으로 초빙되어 학생들을 가르켰다.

1918년에는 스승인 조석진, 안중식과 서화협회 창립총회를 개최했고, 바로 그해에 지금의 집을
설계하여 만들었다. 1919년에는 서울에 있던 왜인 화가와 연합해 고려화회(高麗畵會)를 발족하
여 고문이 되었고, 1921년에는 중앙고보에서 제1회 서화협회전을 개최해 자신의 서양화를 천하
에 선보였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어느 뜰에서'란 그림으로 입선했고,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
람회 유채수채화 부문에서 4등을 차지했다. 1936년에는 동아일보의 조선화단 칼럼과 제15회 협
전(協展)을 기고했으며, 1940년 중원대륙 북경(北京)에서 조선미술관이 개최한 '십대가산수풍경
화전'에 출품해 개인전을 가졌다. 1941년에는 조선예술상을 수상했으며, 해방이 되자 조선문화
건설중앙협의회 산하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조선미술협회 회장
도 겸했다.

1946년 10월에는 덕수궁 석조전(石造殿)에서 열린 '해방기념 문화축전 미술전'에 출품했고, 동
화화랑에서 조선미술협회 제1회 회원작품전을 개최했다. 1947년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으로 천거되었고, 미국 국무부의 초청으로 미국을 1바퀴 둘러보고 왔다.
1948년에는 제1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1949년 문교부 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그해 정부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을 창설했는데, 1959년까지 국전 심사위원 및 초
대작가로 활동했다.

1952년에는 민주국민당 상임위원이 되어 정계에도 발을 들이기 시작했고, 1954년에 예술원의 종
신회원 겸 초대회장을 지냈다. 1955년부터는 민주당의 고문이 되었고, 1956년 국립박물관 국보
전 선정위원이 되었는데, 고희동 외에도 그의 열성제자로 간송미술관을 세웠던 간송 전형필(澗
松 全鎣弼)과 서양화가로 유명한 배렴이 그 위원에 선정되었다.
1957년 홍익대 명예교수가 되어 중앙공보관에서 '화필 50년 기념전'을 가졌고, 1960년 민주당의
공천으로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다. 1962년 부인 조씨가 별세하자 실의에 빠진 나머지 천주
교에 귀의했고, 1965년 10월 22일, 79세의 나이로 영원히 붓을 놓고 만다.

고희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새로운 조형 방법을 가르친 현대미술의 선구자이다. 화단
을 조직하고 이끌었으며, 1925년 이후에는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전향해 서양화적 수법을 동양화
에 가미했다. 또한 휘문고보 재직시 제자였던 간송 전형필에게 문화유산 수호를 권해 그의 길을
인도한 등불 같은 존재였으며, 그를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높은 명성에 비해
그만의 그림 화법을 이루지 못했고, 많은 그림도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세상은 그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생생히 기억은 하지만 정작 그의 그림을 별로 모르는 실정이다.
 
* 고희동 가옥
1918년에 고희동이 직접 설계하여 지은 것으로 대지 540㎡, 연면적 250㎡ 규모의 ㄱ자형 구조를
이룬 4동의 단층 기와집이다. 서양과 왜열도 주거문화의 장점을 반영하여 지었으며 이후에 사랑
채 겸 화실(畵室)을 추가로 증축했다.

고희동은 여기서 41년을 머물며 많은 제자를 길렀고, 여러 그림을 그려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사교성이 풍부하고 술을 매우 좋아했는데, 그의 사랑방은 늘 손님들로 북적였다. 벗들이 안주 1
그릇씩 가져오면 주량대로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일기회(一器會)를 1주에 1번씩 열었다고 하며,
종종 흥취에 젖으면 즉석에서 벗들과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또한 한시(漢詩)에도 관심을 가져
한시 창작 모임에도 참가했다.

그의 집을 들락거리던 그의 벗으로는 1907년 같이 그림 공부를 했던 이도영(李道榮), 1918년 서
화협회를 함께 조직했으며 간송의 스승인 오세창(吳世昌), 그리고 노수현(盧壽鉉)과 이용우(李
用雨), 변관식(卞寬植), 이상범(李象範) 등 이름만 들어도 거진 알 것 같은 현대화가들이 주류
를 이룬다. 그 시절 문학가의 모임 장소가 성북동(城北洞)에 있는 이태준(李泰俊)의 수연산방(
壽硯山房)이었다면, 미술가의 모임 장소는 바로 이곳이었다.

고희동이 세상을 뜬 이후, 속세의 계속되는 무관심으로 폐가처럼 변해갔고, 2002년에는 한샘이
란 회사가 원서동에 사무실과 연구소를 두면서 주차장을 만든다며 이 집을 매입해 완전히 밀어
버리려고 했다. 그 회사의 부질없는 야욕 앞에 현대미술의 산실이 사라질 절대절명의 위기가 다
가온 것이다. 다행히도 내셔널트러스트 등 시민단체가 강하게 나서면서 한샘의 야욕은 보기 좋
게 좌절되었다. 그래서 구사일생으로 가루가 되는 꼴은 면했다.
이후 서울시가 인수하여 쓰러지기 직전인 집을 보수해 비공개로 두다가 2012년 11월 비로소 속
세에 개방했으며, 그 기념으로 2013년 1월 중순까지 '춘곡 고희동의 집을 열다'란 테마로 오픈
기념 특별전을 열기도 했다.

북촌의 새로운 명소이자 현대미술의 성지(聖地)로 북촌의 기라성 같은 명소들의 염통을 쫄깃하
게 만들 정도로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어 시간이 더 지나면 북촌의 주요 성지가 될 것으
로 기대된다.

※ 고희동 가옥 찾아가기 (2016년 2월 기준)
*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1번을 타고 빨래터에서 내린다. 허나 거리
  가 그리 멀지 않으므로 가볍게 걸어가는 것
  도 괜찮다.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14분
* 창덕궁 돈화문에서 돌담길을 따라 도보 10분
* 관람시간 : 10시~16시까지 (매주 수~일요일
  에 무료 개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6
 (☎ 02-2148-4165)

 

◀  활짝 열린 고희동 가옥 대문


▲  고희동 가옥

복원된 고희동 가옥은 전체적인 모습은 한옥이지만 왜식과 서양식이 혼합된 개량 한옥의 일종이
다. 활짝 열린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뜨락과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가옥이 나타나는데, 가옥 내
부에는 사무실을 비롯하여 사랑채와 화실, 2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옥 북쪽 부분은
통제구역이다.
왜식으로 이루어진 현관에서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고 준비된 실내화로 갈아신고 안으로 들어서
면 된다.


▲  뜨락 서쪽에 자리한 대나무의 위엄
겨울 제국의 압제로 푸른 기운을 찾기 힘든 시절이지만 대나무밭만큼은
겨울도 어쩌지를 못하는 모양이다. 제국에 저항하며 독야청청을
유지하는 대나무의 위엄 앞에 잠시 엄동설한을 잊어본다.

▲  뜨락에 놓인 동그란 나무 의자와
길쭉한 돌덩이

▲  가옥을 복원하면서 갖다둔 돌확으로
고희동 일가와는 관련이 없다.

▲  화실 방향 복도 (중간 문이 사무실)

▲  전시실 방향 복도


▲  예술 문인가의 향기가 느껴지는 사랑방
왜정 때 미술가의 모임 장소로 절찬리에 쓰였던 현장으로 고희동이 쓰던
물품과 가옥을 복원하면서 장식용으로 갖다둔 물품이 섞여 있다.

▲  문방사우가 갖춰진 탁자에 걸쭉하게 그려진 난초 수묵화
저들은 고희동과는 관련이 없다. 사랑방의 분위기와 고희동의 문향(文香)을
더해주고자 복원 이후에 갖다둔 장식품이다.

▲  옷걸이에 걸린 하얀 저고리 - 옷의 때깔이 무지 깨끗해 고희동의
체취가 담긴 옷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디까지나 장식용~~

             ▲  고희동 가옥 화실
사랑방과 이웃한 화실은 고희동의 여러 그림이
앞다투어 눈을 뜬 곳이다. 하지만 그의 화실과
관련된 기록이나 사진이 없어 그가 활동했던 왜
정 때와 1950~60년대 화실 스타일을 참조해 어
림짐작으로 재현했다.

 


◀  사랑채와 화실 복도


▲  전시실에 진열된 고희동 관련 문서들

가옥 서쪽 부분에는 2개의 전시실이 있다. 좌측에 자리한 전시실은 고희동과 관련된 문서와 사
진, 신문 등이 진열되어 있는데, 문서 중에는 복제품이 여럿 있다. 그리고 우측 전시실은 고희
동과 그의 벗들이 그린 그림이 있는데, 대부분이 복제품이라 아쉬움을 준다. 진품은 구우일모(
九牛一毛)처럼 섞여있지만, 어느 것이 진품인지 설명문에 표시가 없어 관계자도 아리송할 정도
이다.


▲  위에 있는 문서는 1905년 고희동을 9품 종사랑(從仕郞) 궁내부 주사로
임명한다는 고종황제의 칙령(勅令)이다. (복제품)
밑에 있는 것은 그의 동경미술학교 졸업장(1915년 졸업)이다. (복제품)

▲  고희동의 빛바랜 사진과 1901년 한성법어학교 재학 시절에
학업 우수로 받은 상장 (이것도 역시 복제품)

▲  고희동과 그의 가족 사진들
윗줄 가장 왼쪽 사진은 그의 부모 사진이며, 중간줄 왼쪽은 왕년의 그의 사진이다.
그 오른쪽은 간송 전형필 집에서 찍은 것으로 부채를 든 이가 간송이다.
오른쪽 그림들은 고희동이 그린 그림이다.

▲  한국 근대화단의 개척자란 이름으로 실린 고희동 (미술 1964년 6월호)
밑에는 왜정 때 이 땅의 화가들이 조직한 미술단체인 서화협회(書畵協會)에서
발간한 서화협회회보

▲  고희동 관련 신문기사와 사진들

윗줄 왼쪽은 춘곡의 개인전 소식을 알리는 매일신보 1940년 11월 5일 기사이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것은 고희동의 화필생애50년을 기념하는 작품전시회 목록(복사본). 그 오른쪽은 1940년에
서울부민관에서 찍은 개인전 기념사진이다. (사진에 상허 이태준도 있음)
아랫줄 왼쪽은 1957년 3월 30일 동아일보에 실린 춘곡의 변(辯)이란 신문기사로 '춘곡'이란 호
는 이름 희동에서 동(東)을 의미하는 춘(春)과 양곡(暘谷)이란 고문자에서 곡을 따서 지었다.
그리고 그 오른쪽은 양화 수입의 선구자라며 고희동을 소개한 1940년 1월 6일 동아일보 기사


▲  왼쪽부터 한국인물화전 팜플렛과 고희동을 소개한 한국현대미술사
서적(동양편 1976년, 서양편 1977년), 오른쪽은 '현대미술 100년
춘곡 고희동'이란 제목으로 그를 소개한 한국일보 신문기사

▲  자신의 모습을 담은 고희동의 그림들 (복제품)

◀  고희동 가옥의 뒷모습
붉은 벽돌 굴뚝이 모락모락 연기를 내뿜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며 우수에 젖어있다.


▲  삼청동(三淸洞)에서 만난 어느 갤러리

북촌에는 다양한 테마의 박물관과 전시관, 공방이 있어 북촌 나들이의 꿀맛을 더해주는데, 공예
품이나 장식물을 만들고 판매하는 갤러리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지나가는 길목에 만난 갤러
리(윗 사진)도 그 중 하나로 한국금융연수원 남쪽 언덕배기에 있다.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온갖
공예품을 전시/판매하고 있으며, 가격이 좀 야박하다. 굳이 구매가 아니더라도 북촌이나 인사동
에 이런 공간이 즐비하므로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  갤러리에서 만난 이쁜 공예품들


 

♠  구한말에 지어진 무기 창고 ~ 기기국 번사창(機器局 飜沙廠)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1호

경복궁 동십자각(東十字閣)에서 삼청동길을 따라 쭉 가다보면 한국금융연수원이 나온다. 이곳은
북촌 명소가 아닌 한국은행 소속의 연수원이라 많은 나들이객들은 '삼청동에 왠 연수원?' 고개
를 갸우뚱하며 지나갈 뿐이다. 허나 그 안에 조선 후기 무기 공장 겸 창고인 기기국 번사창(이
하 번사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생뚱맞은 한국금융연수원이 조금은 달리 보일 것이다.

번사창은 연수원 내부 북쪽에 있는데, 이곳을 보려면 연수원 정문 경비실에서 관람 허가를 받아
야 된다. 너무 이른 시간이거나 18시(겨울에는 17시) 이후가 아니면 거의 통과시켜주니 관람에
는 별 문제는 없다. 상황에 따라 번사창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안으로 들어서면 연수원 북쪽에
벽돌로 꼼꼼하게 무장된 번사창 건물이 듬직한 모습으로 답사객을 맞이한다.

건물 주위에는 공원용 의자가 넉넉하게 놓여져 있으며, 번사창 바로 북쪽에 화장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또한 번사창 남쪽 연수원 건물 바깥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는데 커피가 공짜이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음)
이곳에 들어온 연수생이나 직원, 기타 업무로 찾은 이들을 위해 공짜로 한 것인데, 시중 자판기
보다 종류도 다양하다. 그래서 종류별로 뽑아 마시며, 추위를 녹였지. 근데 상황에 따라 커피를
뽑지 못하도록 매정하게 잠궈 두는 경우도 있다.

그럼 번사창은 어떤 곳일까?
이곳은 격동의 시절인 구한말, 근대식 무기를 만들고자 세운 기기국(機器局) 소속의 무기 공장
겸 창고이다. 1883년 5월에 착공하여 1884년 6월에 준공된 것으로 1984년 해체 보수공사를 벌일
때 이응익이 쓴 상량문(上樑文)이 나와 건물의 탄생 시기와 성격을 알려주었다.
상량문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무기를 저장코자 터전을 반석 위에 정하고 쇠를 부어 흙과 합쳐
건물을 지으니 이를 번사창이라 하였다. ~~~ 칼과 창 등 정예한 무기를 제조/수선/보관하는 건
물은 기예의 으뜸가는 수준으로 지어져야 한다'

건물 이름인 번사(飜沙)는 '흙으로 만든 거푸집에 금속 용액을 부어 주조한 용기에 화약을 넣고
폭발시킬 때 천하가 진동하는 소리가 나고 빛은 대낮처럼 밝다'
는 뜻이다. 근대식 무기가 화약
무기 중심이니 딱 그에 걸맞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창(廠)은 공장을 뜻한다.

1876년 어거지성의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으로 단단히 털린 조선 조정은 신식 무기를 만들고자
기기국이란 관청을 세웠으나 정작 무기 공장은 1884년에야 만들었다. 부국강병을 향한 조선의
꿈이 대단했는지, 기기국과 번사창의 위치를 삼청동 명당(明堂)에 세웠음을 상량문에서 밝혔다.
허나 조선은 시작부터 끝까지 일부 시절을 제외하면 늘 약소국을 면치 면했던 나라라 부국강병
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곧이어 터진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으로 일시 중단되었고,
이후 어지러운 국내 사정으로 제대로 그 빛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결국 1910년을 끝으로 기기국
의 역할은 강제로 마감되고 만다.

번사창은 장대석(長臺石)과 사괴석(四塊石)으로 기단을 다지고 바로 그 위에 검은색과 회색 벽
돌로 사방을 꽁꽁 둘렀는데, 이는 청나라 건축과 서양 건축을 적당히 섞어서 지은 청나라 양식
의 기와집이다. 이렇게 지어진 것은 1881년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우고자 조선 조정에서 파견
한 영선사(領選使) 출신이 공사를 지휘,감독했기 때문이다.
1883년 번사창을 지을 때 종사관(從事官) 김명균(金明均)이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청나라 장인
4명을 잡아와 5월부터 건물 공사에 들어갔는데, 영선사를 이끈 김윤식(金允植)을 비롯하여 박정
양(朴定陽), 윤태준(尹泰駿) 등이 감독을 했고, 김명균이 상해 험취소(驗取所)에서 무기 제조
기기를 구입해서 들어왔다. 그런데 정작 건물 준공이 늦어지자 인부들을 독려했으며, 이때 모래
뒤치는 곳, 쇠붙이 불리는 곳, 목양(木樣) 만드는 곳, 철모자 만드는 곳, 고방(庫房) 등을 만들
었다.

지붕은 맞배지붕을 띄고 있으며, 기존 조선의 건물과는 다른 청나라식 건물이라 조금은 이국적
이다. 허나 아무래도 보안이 필요한 무기고(武器庫)이다 보니 내부가 잘 보이지 않도록 저렇게
짓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건물의 길이는 33m, 폭 8.5m, 연면적은 217.58㎡에 이른다.

건물 정면 중앙에는 홍예 다리처럼 아치를 튼 붉은색 문을 내었고, 우측 부분에 조그만 문을 두
고 붉은색 벽돌로 띠를 넣었다. 내부 환기를 위해 5개의 창을 냈는데, 창문은 녹색이다. 측면에
는 문을 1개, 창문을 2개 냈으며, 지붕에는 무기 제조 및 수리로 인해 발생하는 열을 배출하고
자 조그만 창틀을 냈고 그 위를 맞배지붕으로 마무리 지었다.

번사창 자리는 조선 초기부터 철저히 군사용으로 쓰인 곳으로 군기시(軍器寺)의 창고인 별창(別
倉)이 있었다. 군기시 관청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창(北倉)이라 불렸으며, 화약무기를 제조했기
때문에 화약고(火藥庫) 터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개화기(開化期)에 기기국에 통합되어 이
일대는 기기국 소속이 되었으며, 500여 년 이상 군사용으로 쓰인 이곳의 전통은 군대해산 이후
1910년에 끊기고 만다.
주인을 잃어버린 기기국 관청은 왜정에 의해 죄다 사라지고 겨우 번사창 하나만 목숨을 건졌는
데, 왜정은 조선의 관아 건물을 모두 밀어버리거나 어정쩡하게 1~2개만 남겨 망국(亡國)을 철저
하게 우롱하였다. 그 이후 기기국 자리에 엉뚱하게 한국금융연수원이 들어섰고, 번사창은 그 뜨
락의 장식물이 되어 망국의 한을 간직한 채, 북촌의 숨겨진 명소가 되었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생각이지만 한국금융연수원을 외곽으로 쿨하게 옮기고 북촌과 삼청동을 위한
문화/쉼터 공간으로 닦았으면 좋겠다. 경복궁 건춘문(建春門) 동쪽에 있던 국군수도병원도 이전
되어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이 들어왔는데, 은행 연수원이 북촌 핵심에 굳이 있을 필요는 없
다. 청와대나 국무총리공관, 주변 군사시설 등 국가에 예민한 시설은 어쩔 수 없지만 연수원만
큼은 꼭 옮겨 북촌과 시민에게 돌려주었으면 좋겠다. 연수원은 유동인구가 많은 이런 곳보다는
한적한 외곽이 딱 제격이다.

※ 기기국 번사창 찾아가기 (2016년 2월 기준)
* 지하철 1,4호선 서울역(2번 출구), 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을 타고 금융연수원에서 내리면 바로 한국금융연수원 정문이다.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4번 출구)에서 광화문과 삼청동길을 따라 도보 25분
* 공개시간 : 9시 이후부터 18시 이전(겨울은 그보다 일찍), 연수원 사정으로 개방이 안되는 경
  우도 종종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28-1 (삼청로 118)

▲  우측에서 바라본 번사창

▲  좌측에서 바라본 번사창


▲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북막골

겨울 제국에 저항하며 북촌을 이리저리 둘러보니 그새 햇님은 커텐을 치고 사라졌고, 달님이 검
게 탄 천하를 갸날프게 비추고 있었다. 그렇다고 시간이 꽤나 늦은 것도 아니다. 이제 6시인 걸.
제아무리 태양계에서 제일 크다는 햇님이라 할 지라도 겨울 제국의 위엄 앞에서는 맥도 못추는
모양이다.
본글에 언급한 명소 외에도 여러 곳을 덧붙여 둘러봤지만 상당수는 이미 지겹게 가본 곳이라 제
대로 사진을 남긴 고희동 가옥과 번사창만 다루었다. 본글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고희동가옥이
며, 번사창은 조연, 나머지는 엑스트라로 보면 된다.

세상이 검게 타들어가니 햇님의 눈치에 잠시 움츠려들던 추위가 다시 고개를 든다. 게다가 모락
모락 저녁밥이 그리운 시간이라 시장기도 추위와 앞다투어 나를 괴롭힌다. 삼청동을 비롯한 북
촌 일대에는 북촌의 오랜 전통만큼이나 괜찮은 식당이 꽤 많은데, 이번에는 안가본 곳을 가기로
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북악골도 아닌 북막골, 삼청동길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자
리한 식당으로 입구에 식당을 알리는 이정표가 요란하게 서 있다.
북막골은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어 발을 감싼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고 툇마루를 거쳐 안으로 들
어가서 방에서 식사를 해야 된다. 보온을 따스하게 했는지 방이 매우 따스하며, 천정에는 대들
보를 비롯해 한옥의 선이 우아하게 빛나 있고, 방에는 여러가지 전통 장식물이 달려있어 밥이
나올 때까지의 무료한 시간을 조금 달래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시간은 바로 밥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방에 앉아 메뉴판을 보니 떡국, 전골, 보쌈, 막국수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가격은 시중보다
조금 얹혀진 편. (삼청동과 인사동은 괜찮은 식당은 많지만 가격이 좀 있음) 떡국 가운데 겨울
별미라는 굴떡국(한시적 메뉴임)이 있길래 그것을 함 먹어보기로 했지. 어렸을 때는 굴과 담을
쌓고 살았지만 요즘은 그냥 퍼먹을 정도로 좋아한다.
잠시 뒤 밑반찬이 차려지고 떡국이 나오는데, 국물도 제법 숙성이 되어있었고 굴과 떡, 김, 파
가 어우러져 괜찮은 떡국을 자아내고 있었다. 밑반찬 가운데는 물김치(나박김치)가 있는데, 맛
이 시원해서 좋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나니 방의 온기와 배부른 뒤에 찾아오는 식곤증이 나를 희롱한다. 추운 곳에
서 오래 있다가 따스한 곳에 들어앉아 뜨끈한 것을 먹으니 졸려서 정신을 못차리겠다.


▲  북막골에서 먹은 굴떡국의 위엄

▲  북막골 툇마루에 있는 달덩이 같은 하얀 백자

▲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집에서 먹은 십전대보탕과 팥죽

저녁을 배불리 먹었으니 후식으로 차 1잔의 여유를 누려야 되겠지. 더군다나 북촌에 왔으니 차
생각은 더욱 간절하다. 
삼청동에는 맛집도 많지만 닭의 털처럼 찻집/까페도 많이 있다. 허나 북촌의 성격을 망각한 장
사치와 행정당국의 그릇된 생각으로 한옥 찻집이 줄어들고, 서구 스타일의 거의 획일적인 까페
와 양식당, 가게가 늘어나고 있다. 물론 적당히 있으면 상관은 없다. 무엇이든 적당하면 참 좋
은데, 그 바람은 북촌 곳곳을 들쑤시고 있으며, 삼청동길은 북촌인지 서구의 어느 구석인지 햇
갈릴 정도로 변해버려 뜻 있는 이들은 많이 안타까워한다.
일반 대중들이야 삼청동길이 이상하게 변하든 말던 이런 모습도 좋다고 찬양을 하겠지만 상술로
인해 지나치게 상업/서구화 되어 북촌의 성격과 개성에 크게 도전하는 것은 썩 좋지가 않다.

삼청동길이 서울 도심 이상이나 요란하게 변하고 있음에도 한결같은 모습을 지닌 찻집이 하나
있다. 이곳의 터줏대감 찻집인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이다. 찻집 이름치고는 너무나 긴 편
인데, 첫째로 잘하는 집도 아닌 둘째를 칭한 것이 참 이채롭다. 그렇다면 첫째로 잘하는 집도
있어야 되는데, 그 집은 아직 없는거 같다.
첫째를 칭하지 않고 둘째를 칭하는 것을 보면 좀 겸손해 보이기도 하고, 1등을 향해 열심히 장
사를 하겠다는 의지로도 보이며, 자칭 서울 2위라는 우월의식과 자부심도 느껴지기도 한다. 어
쨌든 이름부터가 확 눈에 띄는 이 집은 현란한 분위기의 까페와 달리 1960~70년대 빵집이나 다
방 같은 소박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찻집 내부도 그렇고, 의자와 탁자도 그렇지. 3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찻집으로 20대는 물론 중장년층도 많이 찾는다. 삼청동의 다른 까페/찻집은 거의
20~30대 위주인데 반해 여기는 전 연령층을 소화한다.

30여 년을 이어온 집에 걸맞게 손님도 많아 평일과 휴일 저녁에는 자리 잡기가 힘들다. 찻집 관
계자도 알아서 손님들이 와서 매출을 올려주니 조금은 배부른 모습이고, 내부를 조금 늘렸다고
는 해도 좁은 것은 마찬가지. 삼청동을 숱하게 들락거린 나도 이번에 처음 방문한다. 이곳을 몰
라서가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별로라서 그리 내키지가 않았고 늘 사람들로 가득하니 들
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동지(冬至)도 코앞에 다가오고 해서 문을 두드리니
다행히 자리가 하나 있어서 덥썩 물었다.

이 집은 십전대보탕과 녹각대보탕, 팥죽이 유명한데, 슬슬 건강을 생각할 때라 나는 십전대보탕
(十全大補湯)을, 여인네는 팥죽을 먹었다. 둘다 가격은 6~7천원선, 십전대보탕은 밤과 죽을 비
롯해 온갖 한약제가 뒤섞여 있는데, 차가 아닌 거의 한약이다. 찻집에서 먹는 한약, 이거 먹고
몸 좀 좋아졌으려나 모르겠네. 팥죽은 설탕을 많이 넣었는지 너무 달콤하기 그지 없다.

이렇게 하여 북촌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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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2월 1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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