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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11.03 옛 무덤일까? 탑일까? 깊은 산골에 숨겨진 신비의 돌무더기, 산청 구형왕릉~왕산 늦가을 나들이 (왕산사지, 유의태약수터)
  2. 2012.09.24 지리산에 포근히 감싸인 고을 ~ 산청 역사기행 (문익점 목면시배유지, 남명조식유적)

옛 무덤일까? 탑일까? 깊은 산골에 숨겨진 신비의 돌무더기, 산청 구형왕릉~왕산 늦가을 나들이 (왕산사지, 유의태약수터)

 


~~~~~ 산청 가을 나들이 ~~~~~
(전 구형왕릉, 왕산사지, 유의태약수터)

▲  전 구형왕릉


 

늦가을이 절정을 이루던 10월의 끝 무렵에 지리산 동쪽에 넓게 누운 경남 산청(山淸)을 찾
았다.
아침 일찍 부산서부터미널에서 진주(晋州)행 직행버스를 타고 냉정분기점까지 줄기차게 이
어진 교통체증을 뚫으며 1시간 50분 만에 진주시외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바로 산청으
로 가는 직행버스를 잡아타고 40분 정도를 달려 9시 40분에 산청터미널에 이르렀다.
산청터미널에서 구형왕릉이 있는 화계리로 가는 군내버스가 10시에 있는데 마침 시간이 딱
맞아 떨어진다.
쌀쌀한 아침 기운에 여남은 졸음을 털어내고 있으니 화계리행 군내버스가 타는 곳에 쑥 머
리를 들이민다. 차에 오르니 거의 노인들 뿐이고, 젋은층은 정말 손에 꼽을 지경이다.

10시가 되자 군내버스는 강인한 심장 소리를 내며 산청터미널을 출발했다. 마침 읍내 주변
은 오리무중(五里霧中)처럼 안개가 자욱했는데, 금서면(今西面) 중심지(매촌리)를 지나 고
개를 오르니 특리(特里)에 이르러 안개에서 완전히 벗어나 광명을 되찾았다. 즉 안개 위로
올라온 것이다.
거의 흔치 않게 경험한 안개 위에 세상은 구름이 거의 없는 푸르른 가을 하늘이 눈 시리게
펼쳐져 있고, 내가 왔던 안개 밑 세상은 여전히 두터운 안개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졸
지에 환경이 달라지니 속세에서 천상(天上) 세계로 승천(昇天)이나 해탈(解脫)을 한 듯한
묘한 기분이 교차한다.

산청군에서 야심차게 닦은 산청한방테마공원을 지나 다시 뱀꼬리 같은 험준한 고개를 넘으
니 구형왕릉을 알리는 이정표와 함께 덕양전이 나온다. 여기서 노인 3명과 같이 내려 늦가
을이 내려앉은 덕양전을 찾았다.


 

  가락국 구형왕(仇衡王)을 봉안한 사당 ~ 덕양전(德讓殿)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50호

▲  홍살문과 굳게 입을 닫은 외삼문(外三門)

구형왕릉 입구에 자리한 덕양전은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의 마지막 군주인 구형왕 내외를
봉안한 사당이다.

구형왕은 신라에 항복하고 구형왕릉 남쪽 왕산사 자리에 있었다는 수로왕(首露王)의 별궁, 수
정궁(水晶宮)에서 5년 정도를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이후 후손들이 사당을 만들
어 제사를 지냈으나 여러 번 중단되었다고 하며, 1798년에 왕릉 밑에 사당을 새로 짓고 다시
제향(祭享)을 올렸다. 1898년 덕양전으로 이름을 갈았는데 이는 구형왕의 다른 이름이라는 양
왕(讓王)에서 따온 이름으로 그의 덕을 기린다는 뜻이다.
그 이후 1930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1991년 문화재 정비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
게 되었다.

덕양전은 1,200평 규모로 영정각(影幀閣)과 안향각(安香閣), 연신문(延神門), 추모재(追募齋)
, 정숙당(靜肅堂), 해산루(海山樓), 동재(東齋), 서재(西齋) 등을 갖추고 있으며, 덕양전 본
전(本殿)에 봉안된 구형왕 내외의 영정은 1798년 왕산사터에서 발견된 목함(木函) 속에 있었
다고 한다. 그 안에는 영정 외에도 왕산사기(王山寺記)도 들어있었다고 하는데 영정은 그때
발견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정체가 아리송한 돌무더기를 구형왕릉으로 둔갑시키는 과정에
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옛 가야의 쓸쓸한 성지(聖地)인 덕양전은 추모재(왕산재)가 있는 경내 우측 부분만 출입이 가
능하다. (공개 범위는 변경될 수 있음) 본전과 안향각, 서재 등 덕양전의 핵심인 해산루 안쪽
은 제향 때를 제외하고는 문을 굳게 닫아건다. 허나 담장이 낮아 밖에서도 거의다 보이며 옛
가락국의 성역인만큼 출입통제 안내문을 거스르면서까지 억지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덕양전의 매력은 바로 담장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당은 기와를 얹힌 담장을 둘렀으나 이곳은
아산 외암리마을의 돌담처럼 그냥 돌만 쌓은 형태이다. 돌담의 높이는 1.5m 내외로 돌을 차곡
차곡 쌓아 마치 조그만 성곽(城郭)처럼 보이며, 기와를 얹힌 부분이 없고, 높이도 성인 키보
다 좀 작은 높이를 유지하여 동네 돌담처럼 수수한 모습이 그저 정겹기만 하다. 또한 구형왕
릉의 곡장(담장)도 이곳의 돌담과 비슷한 모습인데 덕양전은 그 왕릉의 사당인만큼 그곳의 담
장을 본떠서 만든 듯 싶다.

제향은 매년 봄 음력 3월 16일과 가을 음력 9월 16일에 춘추향례(春秋享禮)를, 음력 초하룻날
과 보름날에 삭망향례(朔望享禮)를 지내며, 제례 때는 산청 지역 주요 인사들과 후손들, 유림
(儒林), 기관단체장 등 수백 명의 사람들이 참석한다.
* 덕양전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370 (동의보감로 995)


▲  덕양전 추모재(왕산재)로 들어가는 삼문(三門)

늦가을 아침 햇살이 살포시 어루만지고 있는 덕양전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존재는 홍살문이다.
보기만 해도 정덜미가 뚝 떨어질 것 같은 차디찬 인상의 소유자, 홍살문은 관청과 향교 등 국
가 기관과 사당, 향교(鄕校), 서원(書院) 등 양반과 관련이 깊은 장소에 세우는 것으로 이곳
을 찾은 이에게 예의와 엄숙을 요구한다.

홍살문을 지나면 외삼문이 나오는데, 향례 때를 제외하고 늘 문이 닫혀있다. 문에 새겨진 큼
직한 태극마크는 사당의 엄숙함을 더욱 진하게 해준다.


▲  왕산재<(王山齋), 추모재(追募齋)>
덕양전을 관리하는 후손들이 머물거나 모임을 하는 공간이다.

▲  덕양전 사적비를 품은 비각(碑閣)

▲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자리한 해산루

▲  해산루 담장 너머에 자리한 서재(西齋)

▲  해산루 돌담 너머에서 본 내삼문과 그
주변 (내삼문 뒤쪽에 덕양전 본전)


▲  외삼문 돌담 너머로 본 해산루 주변
해산루는 외삼문, 내삼문과 달리 문이 활짝 열려있다. 하긴 내부로 들어가는 문을
죄다 통제해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게 했으니 해산루까지 문을 닫아 걸 필요는
없을 것이다.

▲  고색의 때로 자욱한 하마비(下馬碑)

하마비는 하마 서식지가 아닌 말에서 내리란 뜻(下馬)의 비석으로 보통은 홍살문 곁에 두지만
이곳은 다소 거리를 두며 자리해 있다. 덕양전 주차장에서 화계리로 나가는 길가에 빛바랜 모
습으로 있어 자칫 지나치기가 쉽다.

오랜 세월의 때가 가득 낀 하마비는 관청과 향교, 궁궐, 서원, 사당, 왕릉이나 사대부의 묘역
입구에 세우며, 이 앞은 무조건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


▲  알록달록 옷을 걸쳐입은 덕양전 동쪽 돌담
지체 높은 사당의 돌담보다는 일반 민가의 돌담 같은 정겨운 모습이다. 이렇게 보면
누가 사당의 돌담으로 보겠는가? 담장 높이도 성인 키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라
평소에는 공개하지 않는 콧대 높은 덕양전 내부가 속시원히 바라보인다.

▲  망경루(望京樓)

덕양전 동쪽에 구형왕릉으로 인도하는 2차선 길(구형왕릉로)이 닦여져 있다. 그 길을 5분 정
도 가면 길 서쪽 계곡에 2층 누각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곳은 망경루란 누락으로 조
선 태조가 고려의 충신인 민안부(閔安富)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라고 한다. 누각의 이
름인 망경(望京)은 서울을 바라본다.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민안부의 서울은 당연 고려의 국도
(國都)인 개경(開京, 개성)이 된다.

민안부는 본관이 여흥(驪興, 여주). 자는 영숙(榮叔), 호는 농은(農隱)이다. 학문이 매우 뛰
어나 일찌기 관직에 진출해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1392) 때 예의판서(禮儀判書)까지 올랐
으나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 이에 반발하여 고려의 유신 70여
명과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세상은 그를 포함한 72명을 두문
동 72현(賢)이라 부른다.

조선 태조(이성계)는 그에게 벼슬을 내려 나올 것을 권했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두문동을 나
와 산청 대포리(大浦里)에 은둔하면서 매월 첫날과 보름에 개경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고려
를 그리워했다. 또한 자손들에게도 조선 조정의 벼슬을 하지 말 것을 경계했으며, 현감(縣監)
에 등용된 아들을 사직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누각은 근래에 손질된 것으로 매년 음력 4월 초파일에 유림에서 조직한 '한계회'에서
제를 지낸다고 한다.

망국(亡國)의 제왕이 묻혔다는 왕릉으로 가는 길목에 이렇게 망국의 충신을 위한 누각이 있으
니 참으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일부러 망국 제왕의 능 밑에 지은 것이 아닐까 싶지만 당시
구형왕릉은 정체가 아리송하던 시절이므로 그건 아닌 듯 싶다. 비록 서로의 신분은 달라도 망
국을 강제로 겪었고, 그 한을 달래는 부분에서는 서로가 공통되니 이 골짜기는 망국을 그리는
이들의 조촐한 공간인 셈이다.

▲  김유신이 화살을 쐈다는 장소에 세워진
사대비(射臺碑)

▲  비각 안에 담긴 가락국 유적비(遺蹟碑)

망경루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돌로 다진 단(壇) 위에 심어진 비석이 마중을 한다. 비석 피부
에는 '신라 태대각간 순충장렬 흥무왕 김유신 사대비(新羅 太大角干 純忠壯烈 興武王 金庾信
射臺碑)'라 쓰여 있는데, 김유신이 여기서 활쏘기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이를
기리고자 단을 닦고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임)


▲  늦가을이 곱게 봉숭아물을 들인 구형왕릉 가는 길
길을 가다가 갑자기 신선 형님이나 선녀(仙女) 누님이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까..?


 

  가락국의 마지막 군주, 구형왕의 능으로 전해오는 신비의 돌무덤
전 구형왕릉(傳 仇衡王陵) - 사적 214호

덕양전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왕산 북쪽 골짜기에 '전 구형왕릉(이하 구형왕릉, 석총)'이
라 전하는 거대한 돌무덤이 신비로움과 수수께끼를 고요히 품은 채 웅크리고 있다. 산청의 대
표적인 명소로 주변의 빼어난 풍광 때문인지 나 같은 범인(凡人)들이 감히 발을 들이는 것이
뭐할 정도로 더욱 신비롭게 다가온다.

이 무덤은 일반적인 흙무덤이 아닌 돌로 쌓은 이른바 석총(石塚)이다. 이 땅에서 석총의 대표
적인 존재로 고구려의 장군총(將軍塚)이 있는데, 그건 덩치로 보아 고구려의 태왕(太王) 무덤
이 확실하다.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의 왕릉으로 보고 있음> 하지만 이곳 석총은
여전히 정체가 아리송하다. 그래서 구형왕릉이란 이름 앞에 전(傳)을 붙인 것이다. 즉 구형왕
릉으로 아련히 전해오는 존재란 뜻이다.

석총의 형태는 경사진 언덕에 돌로 쌓은 기단식 석단(石壇) 형태로 동쪽으로 뻗어있는 경사면
에 잡석으로 앞면을 7단 쌓고, 정상은 봉분(封墳)처럼 타원의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전체 높
이는 7.15m 정도로 어떤 이는 산청의 피라미드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자연 경사를 활용하여 만
든 것이라 평지에 만든 계단식 돌무덤<장군총이나 서울 석촌동고분군>과는 차이가 있다.
석총 중간 부분에는 네모난 구멍이 하나 있는데, 이는 폭 40cm, 깊이 68cm의 감실(龕室)로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려진 것이 없다. 처음에는 내부로 들
어가는 문으로 생각했지만, 깊이가 1m도 안되니 그것도 아니다. 만약 불교와 관련된 돌탑이라
면 불상을 봉안한 공간이겠지만 그런 증거도 마땅치가 않다. 예전부터 구형왕릉에 가게 되면
반드시 저 구멍을 살펴보겠노라 다짐했으나, 석총으로 올라가는 양 사이드에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장이 있어 그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사람도 없으니 그 경고를 무
시하고 올라가도 되겠지만 이는 문화유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석총 주위에는 돌로 쌓은 키 작은 돌담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데, 돌담의 모습은 아까 덕양전
의 돌담과 비슷하여 덕양전이 1930년 그 자리에 터를 닦을 때, 이곳의 돌담을 따라 만들었음
을 알 수 있다.
석총 앞은 경사가 좀 기울어져 있는데 경사면 앞 평지에 비석과 장명등, 문인석(文人石)과 무
인석(武人石) 1쌍을 두어 석총을 지키게 했다. 이들은 모두 근래에 심은 것으로 석총과는 시
대 차이가 상당하다. 무엇을 모델로 삼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기존의 문인석, 무인석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훤칠한 키의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며, 문인석은 너무 나이가 지긋해 보
인다. 그리고 세월에 지쳤는지 조금은 경직된 표정이다.
석총 북쪽 계곡에는 돌로 터를 다지고 능을 관리하고 제기(祭器)를 관리하는 재실(齋室) 2동
을 만들었고, 근래에 주차장과 무덤으로 건너가는 홍예다리를 가설하고 주변을 정비했다.

▲  구형왕릉 우측 석인(石人)
왼쪽이 문인석, 오른쪽이 무인석이다.

▲  구형왕릉 좌측 석인의 뒷모습

◀  구형왕릉 비석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쓰여 있다.
여기서 양왕릉은 구형왕릉의 다른 이름이다.

이 석총의 정체에 대해서는 왕릉이란 설과 석탑이란 설이 있다. 탑으로 보는 설은 안동(安東)
과 의성 지역에 비슷한 모습의 탑이 있어서 그런 것이고, 근처에 왕산사란 절이 있어서 석탑
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탑의 모습은 이 땅의 흔한 스타일이 아닌 이형(異形) 스타일일 것이다.
그리고 구형왕릉이나 왕릉(신라 왕릉으로 구전됨)으로 보는 것은 오래 전부터 구전이나 기록
을 통해 왕릉으로 전해오고 있어서 그렇다. 지금은 왕릉 쪽에 무게가 크게 쏠리고 있으나 불
교 석탑의 견해도 만만치 않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산음현(山陰縣) 부분에 '현 서쪽 10리, 왕
산 산중에 돌로 쌓은 언덕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상에서는 왕릉으로 전한다'
는 기록이 있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던 옛날부터 왕릉으로 구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이곳이 구형왕릉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홍의영(洪儀永, 1750~1815)의 '왕산심
릉기(王山尋陵記)'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서는 무덤 서쪽에 왕산사란 절이 있고 그 절에서 전
하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쓰여있다고 했으며, 산사기권(山寺記券)에도 그렇게 나와있
다. 또한 산청현읍지(山淸縣邑誌)에는 무오년(戊午年, 1798년)에 구형왕릉을 수리하고 사당을
세워 수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허나 이들도 딱히 신뢰도는 떨어진다. 경주에 있는 많은 신
라 무덤들이 신라 왕족 후손들(박씨, 석씨, 김씨)에 의해 대충 '신라 어느 왕'의 능으로 둔갑
되었듯이 구형왕릉 역시 후손(김해김씨)에 의해 둔갑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석총의 조성시기는 구형왕릉이 맞다면 6세기 중반이 될 것이고, 만약 탑이라면 그 이후가 될
것이다. 이곳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구형왕이 세상을 뜨자
'나라도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에 묻히겠는가? 차라리 돌로 덮어달라' 유언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따르던 신하와 군사들은 시신을 매장하고 그 위에 산에서 뒹굴던 잡석을 하나씩
얹혀서 지금의 석총이 되었다고 한다.

아직 이곳은 구체적인 발굴작업이나 학술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는데, 하루 빨리 발굴조사가 이
루어져 그 속을 속시원히 들추었으면 좋겠다. 왕릉이라면 조촐하게 석실(石室) 같은 것이 있
을 것이고 거기서 괜찮은 단서나 당시 유물이 앞다투어 나올 지도 모른다. 옛날 제왕이나 귀
족의 무덤은 보물단지라 불릴 만큼 유물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  신비한 기운에 감싸인 듯한 구형왕릉

그럼 이곳에 묻혔다는 구형왕(?~537년)은 누구일까? 구형왕을 살피기 전에 일단 가락국을 포
함한 가야(伽倻)에 대해 아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자웅을 겨루던 삼국시대에 당당한 일원임에도 삼국(三國)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가야, 당연히 사국(四國)시대라고 불려야 되지만 가야는 늘 외면을 받고 있다.
가야는 변한(弁韓)을 이루던 12개 나라의 일원인 구야국(狗倻國, 경남 김해)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김수로(金首露)가 지역 촌장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가락국(駕洛國)을 건국했
다. 그 가락국(금관가야)의 건국 시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나 개황록(開皇曆)에 따르면 서기
42년이라고 한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아니다.

가락국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변한을 통합했으며, 점령한 곳에는 왕족이나 귀족을 보내 그
곳의 왕이나 관리로 삼거나, 항복한 세력의 군장에게
통치권을 부여했다. 이렇게 해서 소위
말하는 13가야를 이루게 되었다. (예전에는 6가야라고 했음)
13개(혹은 그 이상)의 연맹국가(聯盟國家)로 구성된 가야는 경남 대부분을 차지하고, 경북 성
주(星州)와 상주, 문경<고령가야(古寧伽倻)>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북쪽에 있는 신라(新
羅)와 자주 충돌했는데, 초기에는 가야가 우위를 차지했으며, 서로는 마한(馬韓)과 백제와 다
투었다. 또한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열도(倭列島)로 진출, 곳곳을 개척하여 속령(屬領)으로
삼았으며, 이때 건너간 가야인 중 유력한 사람이 왜왕(倭王)이 되어 가야의 명을 받았다.
특히 철이 많이 생산되어 철생산국으로 막대한 부를 모았는데, 그 철을 바탕으로 강력한 기마
군단을 만들어 주변 나라를 벌벌 떨게 했다.

이렇게 부강하던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리 제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지 못
한 한계점이 있었다. 이들 삼국은 중앙집권체제를 통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고 부국강병을
추구하며 영토 확장에 매진했으나, 가야는 각 연맹국가가 따로국밥처럼 놀아 단결이 쉽게 되
지 못했던 것이다. 가락국과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盟主) 노릇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맹주일 뿐, 다른 연맹국가를 제어할 정도는 아니었으며, 같은 가야라도 이익 관계에 따라 서
로 치고 박고 싸우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3세기 초반에 안라국(安羅國)이 일으킨 포
상팔국(浦上八國) 전쟁이다.
가락국이 주변 나라와의 해상교역권을 송두리째 차지하며 혼자서만 배를 불리자 안라국 등 경
남 남부 해안 지역에 있던 8개의 나라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가락국을 공격했다. 가락국은 서
둘러 신라에 구원을 청했으나, 8국 연합군의 수군이 신라 땅인 울산까지 치고 들어가 그 기세
를 떨치니 가락국은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  계곡 위에 닦여진 홍예다리
홍예다리는 근래에 만든 것으로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자아낸다.


4세기 후반, 가락국은 왜열도의 군사를 징발해 약 2만의 군사로 신라 왕경(王京, 경주)을 공
격했다. 신라 내물왕(奈勿王)은 급히 고구려에 살려달라 요청을 했고, 고구려의 태왕인 광개
토태왕(廣開土太王)은 친히 기병 5만을 이끌고 서라벌로 달려가 가야군을 격파했다.
이때 고구려의 기마군과 가야의 기마군이 처음으로 격전을 벌였는데, 둘 다 같은 철갑기병(鐵
甲騎兵)에 철갑옷을 갖췄지만 승자는 고구려였다. 가야의 철갑은 판갑(板甲)으로 방어력은 끝
내주지만 너무 무거워 기동력이 떨어진데 반해 고구려 철갑은 환갑(環甲)으로 방어력은 좀 떨
어지지만 가벼워서 기동력이 좋다. 게다가 고구려군이 전쟁경험도 풍부하니 어찌 가야가 당해
내겠는가.

고구려군은 줄행랑치는 가야군을 쫓아 가야를 풍비박산을 내었고 바다를 건너 왜열도까지 공
격해 쓸어버렸다고 전한다. 그 과정에서 가야연맹국은 큰 혼란에 빠졌고, 이후 소리 없이 쇠
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런 마당에 백제와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좌우에서 가야를 압박하
니 하나로 뭉치지 못해 따로 노는 가야연맹은 더욱 힘들어 질 수 밖에 없다. 

가야에게 너무나 가혹했던 6세기가 도래하고, 521년 구형왕이 가락국 10대 제왕이 되었다. 가
락국이 42년에 세워졌다고 쳐도 480년 동안 왕은 겨우 9명이었다는 소리가 된다. 그렇다면 이
들의 평균 재위 기간은 50~55년이라는 소리인데, 이게 말이 될까? 이는 기록의 실수로 중간에
누락된 제왕이 제법 많을 것이다. 세상에 전하는 왕은 구형왕 포함 10명 뿐이니 후세에서 이
를 잘못 계산한 것이다.

구형왕은 구충왕(仇衝王), 구해왕(仇亥王), 양왕(讓王)이라고도 하는데, 왕비는 분질수이질(
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이다. 그는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노종(奴宗), 2남은 무
덕(武德), 3남은 무력(武力)이다.

신라 법흥왕(法興王)은 가락국 왕자(또는 왕족)에게 화친의 의미로 신라 왕족 여인을 시집보
냈다. 허나 구형왕은 시집 온 신라 왕녀에게 가야 옷을 입혔고, 이를 들은 법흥왕은 괜한 것
도 아닌데도 뚜껑이 폭발하여 532년 사다함(斯多含)을 시켜 가락국을 공격케 했다.
가야연맹의 오랜 맹주로 위엄을 떨쳤던 가락국은 신라군에게 형편없이 깨지고, 결국 국고(國
庫)의 보물을 들고 신하를 대동하여 신라에 항복하고 만다. 이렇게 하여 500년 역사의 가락국
은 532년 그 문을 닫게 되고, 가야의 맹주는 대가야(大伽倻)로 넘어가게 된다. 또한 가락국을
방패 삼아 간신히 나라를 꾸리던 다른 가야연맹국도 차례대로 무너져 561년 안라국(경남 함안
), 562년 대가야의 멸망을 끝으로 가야연맹은 역사에서 영원히 퇴장한다.


▲  늦가을이 깃든 재실 주변
이곳을 지나던 늦가을도 구형왕릉의 신비로움에 반한 것일까?
잠시 길을 멈추고 곱게 작품을 남겼다.


구형왕이 항복하자 신라 조정은 상등(上等)의 벼슬을 내리고 가락국 땅을 식읍(食邑)으로 주
어 심심치 않게 사례를 했다. 또한 구형왕 일가를 신라 진골(眞骨) 귀족으로 대우했다. 허나
왕은 가락국에 있지 않고, 바로 길을 떠나 수로왕의 별궁이라고 전하는 수정궁(水晶宮)에 들
어와 은둔했다고 한다. 수정궁은 구형왕릉 남쪽 왕산사터라고 전한다. 반면 그의 아들은 김해
에 남거나 신라 조정에 출사했다.
그가 김해를 떠나 산청 산골로 들어간 것은 나라를 말아먹은 죄책감에 고개를 들기 힘들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수정궁이 대가야 서쪽이고, 백제 땅과도 가까워 이들의 도움을 받아 후
일을 도모하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여기서 5년을 머물다가 한많은 삶을 마감했다.

구형왕의 3째 아들인 김무력(金武力)은 신라 조정에 출사해 많은 무공(武功)을 세웠으며, 나
중에 벼슬이 상위 등급인 각간(角干)까지 올랐다. 그의 아들인 김서현(金舒玄)은 신라 왕족인
만명(萬明)과 혼인했으며, 그 역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그 유명한 김유
신으로 그도 숱한 전공을 세우고, 왕족인 김춘추(金春秋)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면서 군권
을 장악했다. 그가 죽자 왕족이 아님에도 왕으로 추존되었으니 신라에서 그의 위치가 어떠했
는지를 가늠케 해준다. 그의 시호는 흥무왕(興武王)이다.
그를 통해 가야계 김씨들의 세력이 왕성해졌으나 그가 세상을 뜬 이후, 그 세력도 많이 약해
졌으며, 김유신의 자손들도 별로 두드러지는 인물이 없었다.


▲  홍살문 앞에서 바라본 건너편 남쪽 재실(호릉각)

구형왕릉은 새도 들어오기 힘든 심산유곡(深山幽谷)으로 숲이 울창하고 계곡이 졸졸 흘러 한
여름에도 시원하다. 산청에서 띄워주는 명소로 휴일에는 사람이 좀 오지만 평일에는 사람 구
경 하기가 힘들어 새소리와 산바람의 소리만이 이곳에 내려앉은 정적을 살짝 깨뜨린다.
자연을 벗삼아 사색을 즐기기에 아주 좋은 곳으로 왕산 등산로의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여기
서 유의태약수터나 망경대를 통해 왕산으로 오를 수 있다.

홍살문에서 구형왕릉으로 갈 때는 정면 돌다리를 건너 호릉각을 거치거나 홍살문을 지나 삼문
을 거쳐도 된다. 어차피 거리는 둘 다 비슷하다. 다리 건너에 돌로 터를 다져 석축을 3단으로
쌓고 재실인 호릉각을 지었는데, 그곳에 서린 늦가을 풍경이 가히 숨이 막히고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저곳에 들어가면 나도 단풍마냥 알록달록 물드는 것은 아닐까?

▲  왕릉으로써의 애써 위엄을 보이려는
붉은 피부의 홍살문

▲  왕릉 앞에 세워진 삼문(三門)

▲  제사 물품을 보관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호릉각(護陵閣, 남쪽 재실)

▲  호릉각과 북쪽 재실을 이어주는 문


▲  왕릉의 우측 돌담
돌담과 왕릉 뒤쪽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이젠 나이가 상당하여
돌담과 왕릉에 발을 올리기만 해도 스르륵 무너질 것 같다.

▲  약간 우측에서 올려다본 구형왕릉
가을 볕이 살포시 내려앉은 구형왕릉, 워낙 비밀이 많은 곳이다 보니
왕릉을 이루고 있는 돌들도 모두 범상치 않게 다가온다.

▲  북쪽 재실에서 바라본 돌다리와 홍살문

※ 전 구형왕릉 찾아가기 (2018년 10월 기준)
① 산청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산청행 직행버스가 1일 8회 떠난다.
*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산청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진주에서 산청행 직행버스가 10~20분 간격으로 운행
② 현지교통
* 산청터미널에서 화계리행 군내버스가 1일 9회 정도 있으며, 화산마을(덕양전)에서 하차하여
  도보 20분
③ 승용차 (주차비 없으며, 덕양전에도 주차장 있음)
* 대전~통영고속도로 → 산청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매촌3거리에서 우회전 → 덕양전에서
  좌회전 → 구형왕릉
* 구형왕릉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


 

  늦가을에 젖은 왕산(王山) <왕산사지, 유의태약수터>

▲  살짝 구부러진 왕산 포장길 (구형왕릉로)

왕산(923m)은 산청군 금서면에 자리한 높은 산이다. 왕산이란 이름은 구형왕릉에서 유래되었
다고 하며, 태왕산(太王山)이라고도 한다. 왕이 오른 고개란 뜻의 왕등재를 비롯하여 관련된
이름이 여럿 전해오며, 특히 고령토(高嶺土) 산지로 예로부터 명성이 높아 특리와 향양리, 방
곡리에 가마터 유적지가 있다.
왕산에는 전 구형왕릉과 왕산사터, 유의태약수터 등의 명소가 있으며, 능선과 정상 주변은 봄
에는 철쭉이, 가을에는 억새가 장관을 이룬다.

구형왕릉에서 유의태약수터까지 가는 길은 2갈래이다. 하나는 산길이고 다른 하나는 포장길을
인데, 서로 떨어진 듯 보이지만 결국 하나로 만난다. 포장길은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
게끔 산 중턱을 지나 자혜리로 이어진다.
산길은 돌이 많고 계곡을 옆에 낀 헝클어진 길이지만 거의 직선이다. 포장길은 잘 닦여진 길
이라 발의 무리는 별로 없지만 험준한 왕산의 눈치 때문에 2배 이상으로 빙빙 둘러가야 된다.
그리고 기왕 산에 왔으니 가을 낙엽이 귀를 접고 누운 산길이 더 호젓할 것이다.

가을이 떠나려는 산길에는 장차 밀려올 겨울을 원망하며 땅으로 곤두박질 친 낙엽들이 가득하
다. 점차 차가워지는 가을산을 따스히 덮어주며 흙으로 들어갈 그 순간을 기다리는 낙엽의 마
지막 여정.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마지막에는 결국 한줌의 흙이 되고 만다. 시작과 중
간은 크게 다를지언정 그 종점은 모두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허무한 모양이다.


햇볕 한점 들어오기 힘든 무성한 산길을 10여 분 오르면 구형왕릉에서 갈라진 포장길과 다시
만난다. 왕산과 유의태약수터를 띄우고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콘크리트로 밀어버렸지만 그
냥 흙길이거나 오솔길 같은 길이었으면 더 운치가 있었을텐데 그 점이 아쉽다.
포장길에는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거대한 자연산 카페트를 이루고 있고, 마치 산불이 일어나
듯 알록달록 타오른 나무들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광속과 같은 시간을 원망한다. 아
름답게 다가오는 늦가을 풍경에 가히 숨이 막히고 눈이 멀 지경이다. 인간의 한낱 언어나 단
어로 늦가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건방질 정도로 말이다.


▲  낙엽이 가득 깔린 왕산 포장길

평일이라 그런지 이 서정적인 길에 사람은 나 하나 뿐이다. 구형왕릉은 그래도 나들이객들이
여럿 보였지만 그 이상은 차도 사람도 보이질 않는다. 자연의 소리만이 살며시 귀를 간지럽히
는 이 좋은 길을 비록 잠시긴 하지만 내가 완전 무료 전세를 낸 것이다. 소원 같아서는 이 길
을 내 소유로 만들거나 집으로 살짝 가져와 두고두고 거닐고 싶지만, 그저 헛된 망상일 뿐이
다. 그저 오늘만이라도 이곳의 주인공이 된 양 누구의 눈치 없이 마음 편히 둘러보고 사라지
는 것이 최선일 뿐이다.

아무도 없는 길이지만 자연과 벗삼으며 자연 속에 녹아들며 걸으니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아
니 그런 것을 느낄 겨를도 없다. 포장길과 산길이 만난 곳에서 유의태약수터 입구까지 20분
거리이지만 무엇에 홀린 듯, 그렇게 걷고 보니 금세 약수터 입구이다. 이런 길은 정말 몇 시
간을 걸어도 질리지 않을 것이다.


▲  유의태약수터 입구를 코앞에 두고

▲  유의태약수터로 가는 산길 (왕산사터 주변)

유의태약수터 입구에서 왼쪽으로 난 산길로 접어들면 초반에는 조촐하게 깔린 계단길이 펼쳐
진다. 경사는 자연의 넉넉한 마음처럼 여유로우니 힘든 것은 별로 없다. 계단길을 오르면 돌
이 박힌 정겨운 풍경의 산길이 펼쳐지는데, 그 길의 끝에 유의태약수터가 있다.
그곳으로 가는 중간에는 구형왕과 관련되어 있다는 왕산사터가 있으니 유의태약수터의 후식으
로 삼아 둘러보기 바란다.


▲  왕산사터(王山寺址) - 경남 지방기념물 164호

구형왕릉에서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왕산 북서쪽 자락에 왕산사터가 숨어있다. 이곳은 유
의태약수터 바로 밑으로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니 찾기는 쉽다.
예전에는 이곳이 절터긴 하지만 정체가 확실치 않아 이름 앞에 아련히 전한다는 뜻에 전(傳)
을 붙였으나 이제는 완전히 확증이 가는지 과감하게 전을 빼버리고 그냥 안내문과 관련자료에
모두 왕산사지라 표현했다.

이곳에 있던 왕산사는 언제 지어지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망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전하
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승려 탄영(坦暎)이 쓴 왕산사기가 절터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산양현(山陽縣, 산청) 서쪽 모퉁이 방문산(方文山)의 동쪽 산록에 산이 있는데, 왕산이라고
부른다. 산 위에 왕대(王臺)가 있고, 아래에 왕릉이 있어 왕산이라고 한다. 능묘를 수호하였
기 때문에 왕사(王寺)라고 하였는데, 절은 원래 왕산의 정궁(正宮)이었다. 능은 가락국 10대
왕인 구형왕이 자리잡았던 현궁(玄宮)이었다'

즉 구형왕릉을 관리하고 지키던 원찰(願刹)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곳에는 구형왕이 말년을
보냈다는 수정궁이 있었다고 하는데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세웠다고 전하는 궁으로 거의
별궁 수준으로 여겨진다. 그 수정궁이 구형왕이 죽은 이후에 왕산사로 전환되었다고 하며 궁
자리가 넓어서 수정궁 건물을 그대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이곳이 왕대암(王臺庵)으로 나오
며, 1755년에 제작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왕대암이 폐사되고 왕산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어 왕산사는 적어도 16~17세기까지 법등(法燈)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왕대암은 왕
산사의 다른 이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793년에는 왕산사에서 오랜 세월 전해오던 나무상자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서 구형왕 내외의
초상화와 옷, 활, 왕산사기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유물은 덕양전에 있는데, 아마도 발
견되었다기보다는 구형왕릉 둔갑 프로젝트 차원에서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구형왕릉은 불
교 탑으로도 강하게 의심을 받고 있어 그것이 맞다면 왕산사와 관련된 탑으로 보인다.

근래에는 가야문화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벌려 건물터 6개와 문터로 추정되는 흔적, 계단 흔
적, 비석 받침과 부도 등을 건졌으며, 산청군에서 2007년과 2009년에 발굴작업을 벌여 수많은
기와조각과 그릇 조각을 꺼냈다. 다만 구형왕과 관련된 가야 유물은 나오지 않아 이곳에 씌워
진 구형왕 관련 이야기에 다소 회의감을 들게 한다.

현재 절터는 대자연이 잡초와 나무로 따스하게 보듬어주어 그 허전함을 덮어주고 있으며, 주
춧돌과 석물은 잡초에 묻혀있다. 왕산사가 아무리 크고 대단하다 한들, 자연 앞에서는 그저
장난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곳을 가득 채웠을 왕산사 왕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기록이 없으
니 누구도 알 수 없다. 단순히 건물터나 주춧돌 등으로 그 모습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발휘해 이곳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도 괜찮
을 것이다. 절의 건축물이야 뭐 기와집일 것이니 그것을 참조하여 상상을 펼쳐보이면 된다.
어차피 정답은 없으니 말이다.

인적이 없는 고요한 절터를 둘러보며 부도(승탑)를 찾다가 갑자기 맷돼지가 생각이 난다. 요
즘 그들의 개체수가 쓸데없이 늘어나 산에 자주 출몰한다고 하는데, 이곳은 지리산과 가깝고
숲이 무성한 데다가 워낙 외진 곳이라 자칫 멧돼지가 나타날 수도 있다. 자연의 소리만 들리
는 이런 곳에서 그를 만난다면 참 대책이 없을 것이다. 갑자기 다가오는 그 오싹한 기분에 절
터 답사를 팽개치고 부랴부랴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  숲의 일부가 되버린 왕산사터 산중턱 부분

▲  왕산사터 주춧돌
절터를 가득 메운 잡초와 나무들이 계속 자라서 나중에 왕산사 시절
건물을 그런데로 재현해주지는 않을까?

▲  왕산사터 서쪽 부분

▲  산중턱에 남은 왕산사터 석축


▲  유의태(柳義泰)약수터

왕산사터에서 3분 정도 더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유의태약수터라 불리는 약수터가 마중을 한
다. 왕산에 왔다면 구형왕릉, 왕산사터와 더불어 꼭 둘러봐야 되는 명소로 허준(許浚)을 주인
공으로 한 동의보감에 등장하는 그의 스승 유의태의 이름을 딴 것이 이채롭다.
약수터로 인도하는 길은 근래에 박석을 깔아 정비했으며, 약수터 역시 그냥 길가에 물이 솟은
평범한 샘터이던 것을 마치 오래된 유적처럼 손질했다.

이곳이 유의태약수터란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동의보감에 등장하는 유의태가 약수와 치료에
사용했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샘터에는 자연이 베푼 옥계수가 가득 솟고 있는데, 물을 한 바
가지 떠서 들이키니 몸 속의 체증이 싹 가신 듯 목구멍이 즐겁다고 쾌재를 부르짖는다. 그렇
다고 물이 오색(五色)약수나 방동약수처럼 쓴 맛도 아니다. 그냥 일반 샘터에서 마실 수 있는
그런 물이다. 다만 유의태약수 어쩌구 하니까 심리 때문인지 맛이 조금은 달콤하고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 물을 마시면 정말 병이 싹 나을 것 같은 기분도 교차한다.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는 동의보감 소설에 나오는 가공의 인물이다. 그의 모델은 18세기에 산
청 지역에서 활약했던 유이태(柳爾泰, 또는 柳以泰 1652~1715)라고 한다. 그러니까 허준 시절
보다 약 100년 뒤에 인물이 된다.
그는 거창유씨로 호는 신연당(), 원학산인(). 인서(西), 자는 백원()이
며, 거창(居昌) 위천 서마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소에는 '泰' 한자를 썼고 의서에는 '
泰'를 사용하여 이름 한자 2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외가가 있는 산청 생초면으로 넘어와 그곳에서 의술활동을 펼쳤다. 이때 그가 진
료에 사용한 물이 바로 이 약수라는 것이다.
1706년 전국적으로 천연두(天然痘)와 마진(痲疹, 홍역)이 유행하여 많은 생명을 앗아가자 마
진경험방()을 토대로 하여 의학서적인 마진편(痲疹篇)을 썼다. 이 책은 1931년 활
자본으로 출간되었다.
숙종(肅宗) 때 어의(御醫)가 되었으며, 안산군수로 발령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고향으로 내려
와 백성들을 치료했다. 의술이 뛰어나 허준과 중원대륙의 명의 판작()에 비유되기도 했으
며, 실험단방(), 인서문견록(西)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후 소설 동의보감에서는 허준이 산청에 잠시 머물던 시절, 이 지역 명의였던 유이태를 이름
만 약간 바꿔 유의태로 삼아 그의 스승으로 둔갑시켰다. 그러니 유의태란 인물은 실존 인물이
아닌 것이다. 다만 산청군청과 몇몇 사람들이 유의태가 실존 인물로 정말 허준의 스승이었다
고 주장을 해 눈길을 끈다. 유의태는 1516년 산청군 신안면 상정마을 출신으로 서자(庶子)였
다고 하며, 산청 지역 제일의 명의로 활동하면서 허준을 제자로 삼아 많은 것을 전수했다는
것이다. 임종에 임할 때 허준에게 자신의 몸뚱이를 해부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 해부의학(解剖
醫學)의 효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유의태는 왕산의 자생 약초에 이 약수터의 물로 탕액을 만들었다고 하며. 자신이 고치지
못한 병에 이 물을 이용해 낫게 했다는 설화가 있다고 한다. 그는 이 약수를 위암을 다스리는
물이라고 했으며, 위장병과 피부병 등 불치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전해져 인근에서 인기가
높다. 과연 효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유의태가 과연 동의보감에서만 나오는 인물인지 아니면 정말 숨을 쉬던 인물인지는 알 수 없
다. 현재로써는 유이태를 모델로 한 가상인물이란 설이 지배적이다.

* 약수터입구까지 차량 접근 가능, 구형왕릉에서 도보 약 30분

* 왕산사터, 유의태약수터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1외


▲  성큼 다가선 유의태약수터

▲  샘터 위에 약수터의 이름이 점잖게
쓰여 있다.

▲  콸콸 솟아지는 약수


▲  왕산을 뒤로 하며

약수터에서 물이 닳도록 마시니 배가 부르다. 여기서 동쪽 산길을 오르면 망경대와 왕산 정상
으로 이어지는데, 거기까지는 답사 계획에 없으므로 쿨하게 하산하기로 했다. 이때 해는 중천
에 떠서 점심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내려갈 때는 중간에 새는 거 없이 포장길로 구형왕릉까지 내려갔다. 내려가는 동안에도 사람
이나 차량을 하나도 구경을 못했다. 이렇게 운치 그윽한 길을 홀로 걸으니 기분 또한 색다르
며 늦가을의 향연에 잠긴 나무들은 낙엽을 휘날리며 떠나는 나를 전별한다. 다음에 인연이 된
다면 꼭 다시 찾아와 왕산 정상까지 오르고 싶다.


▲  잠시 낙엽에서 해방되다.

▲  포장길(구형왕릉로)이 크게 구부러진 곳에서 바라본 천하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와 함양군 유림면 지역

▲  구형왕릉에서 덕양전으로 내려가는 길
나무들이 서로 불을 지르고 있다.

포장길을 거의 2/3 내려온 지점에서 길이 크게 구부러지는데, 여기서 화계리와 유림면 지역이
두 눈에 조망된다. 그 구간을 지나면 구형왕릉이 나온다.

잠시나마 정들었던 왕산과 다음을 막연히 기약하며, 덕양전을 지나 화계리 마을로 나왔다. 화
계리는 금서면에서 2번째로 큰 마을로 경호중학교와 보건지소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북쪽에
있는 임천교를 건너면 바로 함양군 유림면의 중심지로 임천을 사이에 두고 산청과 함양(咸陽)
행정 경계가 맞대고 있는 것이다.

눈이 시리도록 깨끗한 은빛 물결에 임천을 건너 유림면사무소앞 유림3거리에서 함양읍으로 가
는 군내버스를 타고 함양읍내로 나갔다. 화계리에서 산청읍으로 가는 것보다는 유림에서 함양
읍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더 많이 다니는데, 서울이나 인천에서 온다면 함양을 거쳐 이곳 유림
3거리에서 왕산 나들이를 시작하는 것도 괜찮다. 덕양전까지는 도보 15분 정도면 도착하고 여
기서 50분 정도를 더하면 거뜬히 유의태약수터까지 간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구형왕릉, 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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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10월 1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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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포근히 감싸인 고을 ~ 산청 역사기행 (문익점 목면시배유지, 남명조식유적)

 


' 지리산에 안긴 고을, 산청(山淸) 나들이 '
세심정에서 바라본 덕산마을
▲  세심정에서 바라본 덕산마을과 덕천강
시내 뒤쪽으로 보이는 산에 남명 조식 선생의 무덤이 있다.


가을이 슬슬 그 절정을 준비하던 10월 초, 지리산 동쪽에 안긴 산청(山淸)을 찾았다. 서울남부
터미널에서 진주로 가는 직행버스에 나를 실어 딱 3시간 15분 만에 산청과 진주 중간에 자리한
원지에 이른다. 원지(院旨)는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의 하나로 육중한 등산 배낭을 맨 등산객들
이 많이 내린다. 나도 지리산에 떡 안기고 싶은 마음 굴뚝 같으나 이미 갈 곳이 정해진 몸이라
마음 만 등산객들 배낭에 몰래 달아 지리산으로 보낸다.
원지에서 경호강을 건너면 단성면소재지가 있는 사월리가 나오는데 단성 시내를 벗어나면 산청
에 주요 명소인 목면시배유지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  문익점이 붓통에 목화를 숨기고 들어와 하얀 목화를 이 땅에 널리
보급시킨 목화의 성지(聖地) ~ 산청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地)
- 사적 108호

몽고에 사신으로 간 문익점(文益漸)이 붓통 속에 목화씨를 넣어 가지고 고향에서 목화를 재배한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여 3살배기도 줄줄 외울 정도이다. 그의 목화재배는 이 땅의 의류복식사(
衣類服飾史)에 크나큰 혁명을 일으켰으며, 갈포나 삼베로 추운 겨울을 나야했던 당시 대부분의
백성들에게 따뜻한 무명옷과 그에 따른 수명 연장을 선물로 안겼다.

문익점(1329~1398)은 남평문씨로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1329년에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
양마을에서 문숙선(文淑宣)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그는 이곡(李穀) 선생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1360년(공민왕 9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김해부사
록(金海府司錄), 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거쳐 1363년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계품사(啓稟使)
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몽고(원나라)에 갔다.

이때 몽고왕인 순제(順帝)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던 고려 여인 기황후(奇皇后)는 최유(崔濡),
김용(金鏞) 등과 공모해 눈에 가시같은 공민왕(恭愍王)을 제거하고 몽고에 머물던 충선왕(忠宣
王)의 아들인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그들은 문익점에게 동조하길 권했으나
거절했다고 하며, 1364년 기황후가 덕흥군을 앞세워 고려를 공격하나 최영(崔瑩)에게 보기 좋게
깨진다.


▲  문인으로써의 패기가 돋보이는 문익점 선생의 영정
영정 앞에 하얀 덩어리는 바로 목화씨를 품고 있는 목화솜이다.

고려에게 패한 기황후는 뚜껑이 폭발한 나머지 문익점을 교지국(交趾國, 베트남)과 운남(雲南)
으로 귀양을 보냈다. 거기서 2년 가량 머물다가 1366년 귀양에서 풀려났는데, 탐스럽게 열린 목
화에 입맛을 다시며 몰래 가지고 갈 방법을 연구했다. 당시 목화는 외국으로 반출이 금지된 금
수품(禁輸品)으로 잘못 걸리면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허나 밭을 지키는 노인의 제지를 뿌리치
고 목화씨를 몇 송이 따서 붓통에 넣어 귀국길에 오른다. 몽고 입장에서는 그는 얄미운 산업스
파이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문익점을 크게 추앙하는 과정에서 부풀려진 이야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태조 7년 6월 13일자 기록에는 '길가의 목면나무를 보고 씨 10여 개를 따서 주
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되어있으며, 태종 1년 윤 3월 1일자에는 '목면 종자 두어 개를 얻어
싸가지고 왔다~~'란 구절이 있다. 그러니까 가져온 씨앗 수만 다를 뿐, 붓통에 감추어 귀국했다
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어쨌든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고향인 산청으로 내려와 장인인 정천익(鄭天翼)과 고향마을인 배
양마을에서 목화를 재배했다. 허나 씨앗만 가져왔지 재배기술을 알지 못해 겨우 1그루만 살았다
고 하며 3년 동안 열심히 재배에 기울여 드디어 재배에 성공했다. 또한 고려에 머물던 몽고 승
려 홍원(弘願)을 달달볶아 목화씨를 빼서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방법을 터득해 마을 주
민에게 가르쳤고, 10년도 안되어 전국으로 보급되었다. 이렇게 해서 백성들의 의복은 삼베옷에
서 따뜻한 무명으로 대폭 업그레이드 된다.

1375년(우왕 1년) 목화 보급의 공으로 전의주부(典儀注簿)가 되었으며, 1389년(창왕 1년) 좌간
의대부를 지냈다. 허나 이색(李穡) 등과 함께 이성계 패거리가 추진하려는 사전(私田) 개혁을
반대했다가 조준의 탄핵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고려가 망하자 문을 닫아걸고 세상에
나가지 않았으며 왕이 친히 사람을 보내 벼슬을 권해도 거절했다. 그러다가 1398년 69세의 나이
로 고려 충신의 한사람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 이후 1440년 세종은 그에게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를 추증했고 충선공(忠宣公)이라 시호를
내려 그를 기렸다.

목화의 가공법은 그의 손자인 문래의 창안이라고도 하고 장인인 정천익이 만들었다는 설이 있으
나 확실한 것은 아니며, 목화의 전래와 재배, 가공 등에 관한 내용이 '목면화기(木棉花記)'에
실려 있다.


▲  목화기념관 좌측에 자리한 재실(齋室)

이곳 목면시배유지는 사위와 장인인 문익점과 정천익이 힘들여 심고 가꾼 아름다운 현장으로 바
로 인근에 문익점의 고향 배양마을은 우리나라 목화의 성지답게 700년 넘게 목화를 재배하며 문
익점의 숭고한 뜻을 기린다. 그래서 세상은 이곳을 우리나라 최초의 목화 재배지로 추앙하고 있
으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가 목화를 가져오기 훨씬 이전인 삼국시대부터 목화와 그 비슷한
것을 재배하고 그 옷을 만들어 입었던 것이다. 하지만 널리 보급은 안된 듯 싶으며, 왕족과 귀
족, 부자들만 주로 입다가 문익점을 통해 전국으로 퍼진 것이다. 그러니까 시배지(始培地)가 아
닌 목화를 널리 퍼트린 목화의 성지로 보면 될 듯 싶다.

예전에는 문익점 선생의 효자비(孝子碑)와 함께 단성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길가에 있었으나 그
주변을 정화하여 목화전시관을 만들었다. 전시관을 세우고 정화사업을 벌인 것까지는 좋으나 그
걸 구실로 소정의 입장료까지 받아먹고 있다.
전시관은 2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전시실은 면화의 역사와 물레, 무명이 되기까지
의 과정을 담았고, 제2전시실은 무명으로 만든 우리 고유 의상이 전시되어 있다. 허나 높은(?)
입장료에 비해 솔직히 볼게 없고 썰렁하기 그지없다. 매표소는 전시관 내부에 자리해 있으며,
목면시배지만 보려고 해도 무조건 돈을 내야된다. 야외에는 목면시배지를 비롯하여 효자비와 사
적비, 재실 등이 있으며 동물을 기르는 사육장이 한켠에 자리해 있다.

※ 산청 목면시배유지 찾아가기 (2012년 9월 기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원지 경유 진주행 직행버스가 2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원지에서 묵곡으
  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배양에서 내리면 바로 목면시배유지이다. 또는 원지에서 대원사/중
  산리 방면 직행버스(30분 간격)를 타고 단성에서 내려 버스가 가는 방향으로 13분 도보
  (또는 원지에서 35분 도보나 택시 이용)
* 부산서부터미널과 진주에서 대원사, 중산리행 직행버스를 타고 단성에서 하차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 단성나들목을 나와서 바로 우회전하면 목면시배유지이다.
② 진주 → 산청방면 3번 국도 → 원지 → 다리를 건너 단성 시내로 진입 → 단성나들목 입구에
   서 직진 → 목면시배유지


▲  삼우당문익점선생 목화시배사적비

★ 목면시배유지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1,000원(20인 이상 단체 800
  원), 군인/청소년 600원, 어린이 500원
* 관람시간은 9시부터 18시까지
*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06-1 (목화로 887) <☎ 055-973-2445>


▲  목면시배유지 정문

좌/우문이 시원스레 뚫린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늘씬한 크기의 목화시배사적비가 나그네를
반긴다. 정문의 가운데 문은 제사나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은 늘 닫아건다.
사적비와 눈인사를 나누고 왼쪽으로 길을 꺾으면 바로 목화전시관이 나온다. 목면시배유지는 전
시관의 바깥부분을 꼭 거쳐가야 되는데, 전시관 정문에는 별로 반갑지도 않은 매표소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며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보니 울며 겨자먹고 토하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치르고 안으로 들어선다.

전시관에서 다루는 것들 태반은 목화와 관련된 것들로 디오라마와 복제품이 주를 이루며 오래된
유물은 없다. 다만 목화를 실제로 본적이 없는 나를 비롯한 나그네들에게 목화에 대한 여러 정
보와 경험을 제공한다. 허나 그 외에는 그리 내세울 것은 없다.


▲  목화 뿌리

▲  목화에서 무명을 빼는 모습

▲  그치말기

▲  베짜기
목화에서 실을 뽑아 무명옷이 만들어지기까지도 많은 과정과 숙성을 거친다.
우리 옛 여인의 고운 손길과 정성을 거쳐 태어난 무명옷은 옛 사람들을
겨울 제국의 핍박으로부터 따뜻하게 보호해 주었다.

▲  디오라마로 다시 태어난 옛 사람들
단란한 한 가족을 보듯 다들 무명옷을 걸치고 나란히 기념촬영에 임한다.

▲  재실 툇마루를 가득 뒤덮은 목화솜
하얀 덩어리가 무엇인가 했더만 바로 목화솜이다. 저들 솜은 인공이 아닌
자연산으로 목화씨를 품으며 가지에 주렁주렁 달린다. 문익점이 몽고에
머물 때 목화밭에 펼쳐진 목화에 군침을 흘리며 가져온
그의 심정이 십분이해가 간다.

▲  우리나라 목화의 성지 ~ 목면시배유지
문익점의 뜻을 받들며 오늘날도 꾸준히 목화를 재배한다.

▲  목화씨앗을 잉태하며 복스럽게 열린 목화솜

숭고한 자연이 인간에게 베풀어준 선물, 목화를 처음으로 보고 만져본다. 목화솜에 대한 첫인상
은 놀라움과 신기함의 연속으로 인공솜과 같은 하얀 솜이 자연 생성된다는 것에 자연 앞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정도이다. 실제 솜처럼 촉감도 좋고 무척 따뜻하며, 그 모습이 마치 눈송이가 가
지에 걸린 듯 하다. 목화에는 조그만 가시가 있으므로 솜을 만지거나 딸 때 주의하기 바란다.


▲  삼우당효자비(三憂堂 孝子碑)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52호


▲  비각 안에 놓여진 효자비
큼지막한 글씨로 효자리(
孝子里)로 쓰여있다.
(문화재청 사진 참조)

목면시배유지 좌측을 담에 둘러쌓인 조그만 비
각(碑閣)이 있다. 바로 문익점의 효행을 기리고
자 세운 효자비이다.
그는 목화를 가지고 돌아온 후, 어머니가 세상
을 떠나자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
묘살이를 하였다. 그 당시 남부지방은 왜구(倭
寇)의 노략질이 극심하여 다들 피난가기가 바뻤
는데, 유독 그만은 어미의 무덤을 바짝 지켰다.
마침 왜구가 이곳에 들이닥쳤는데, 아무리 미개
한 왜구패거리라도 그의 효행에는 적지 않게 감
동을 먹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에
'효자를 해치지 말라'는 표식을 세우고 돌아갔
는데, 그때부터 이 지역이 평안해졌다고 한다.
그후 1383년 고려 정부는 그의 효행을 기리고자
효자비를 내렸으며, 마을 이름을 효자리(孝子里
)라 하였다. 비각은 1563년에 씌운 것이다.

비각 안에 자리한 비석은 낮은 사각 받침돌 위
로 비신(碑身)을 세운 모습으로, 비신의 윗변은
살짝 둥글게 다듬었다.
 


♠  조선 후기 서원, 상해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의 현판으로 가득한
배산서원(培山書院)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51호

목면시배유지를 둘러보고 다시 단성으로 발길을 돌리면 문익점 선생의 고향인 배양마을이 나온
다. 마을의 북쪽 산자락으로 붉은 색의 홍살문과 함께 고색이 깃들인 기와집들이 떼거지로 눈에
들어오는데, 그곳이 바로 배산서원이다. 목면시배유지와 지척이고 문익점 선생의 고향이라 그를
배향(配享)한 서원으로 오해하기 쉽겠으나 실상은 다르다.

이 서원은 부근 신안면에 있는 도천서원(道川書院)이 조선 정부로부터 사액(賜額)을 받자 그곳
에 배향된 청향당 이원(淸香堂 李源)과 죽각 이광우(竹閣 李光友)를 따로 모시고자 1771년(영조
47년)에 지은 것이다.
처음 이름은 덕연사(德淵祠)로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철거되었으며, 1919년 합천
이씨의 대표인 진암 이병헌(眞菴 李炳憲)이 유교의 복원을 위해 서원 복원을 제의하여 문묘(文
廟)와 도동사(道東祠), 강당(講堂)을 짓고 이름을 배산서당(培山書堂)이라 했다. 이때 중국 곡
부(曲阜)의 연성공부(衍聖公府)의 협조를 얻어 그곳에서 공자(孔子)의 진영(眞影)을 가져와 문
묘에 배향했다.
도동사에는 청량당 이원과 친분이 있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죽각(
竹閣)을 배향하고 있다. 특히 강당에는 중국에 유명한 변법자강(變法自强) 운동가이자 공양학자
(公洋學者)인 강유위(康有爲)의 자필로 된 배산서당 현판(縣板)이 있고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
政府)의 주요 인물인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과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營), 우천 조완구(藕
泉 趙琬九). 백암 박은식(白岩 朴殷植) 선생의 배산서당 낙성축문(落成祝文)이 현판으로 남아있
어 보기와 달리 꽤 유서가 깊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5량가구조(五樑架構造)이며 왜정 때 지어진 제법 휼륭
한 한옥 건축으로 손꼽힌다. 문묘는 각각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익공식(翼拱式)이며 서당으로
지어질 당시 유교의 부흥을 염원한 유림(儒林)의 소망으로 1개도 아닌 2개의 사당(祠堂)을 갖추
어 이곳만의 큰 특징을 보여준다. 매년 봄 3월 상해일(上亥日)에 유림들이 춘향(春享)을 올린다.

※ 배산서원 찾아가기 (2012년 9월 기준)
* 단성까지 교통편은 앞에 목면시배유지를 참조.
* 단성정류장에서 목면시배유지 방면으로 12분 가량 걸으면 단성나들목 입구 못미쳐 길 오른쪽
  으로 배양마을이 있는데, 그 뒤쪽 산자락에 있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서원 앞 도로에 주차하면 됨)
①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 단성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배양마을(배산서원)
② 진주 → 산청방면 3번국도 → 원지 → 다리를 건너 단성 시내로 진입 → 배양마을(배산서원)
* 관람시간은 보통 9시부터 17시까지이다.
*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544-3


▲  공자왈 맹자왈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배산서원의 강당(講堂)

가까이 다가갈수록 고색은 있지만 낡고 허름한 서원의 모습이 커다랗게 다가선다. 엄숙을 요구
하는 홍살문을 지나 태극마크가 새겨진 솟을대문 앞에 이른다. 서원 문은 분명 잠겨있겠지 싶어
대문을 밀어보니 삐그덕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활짝 정도는 아니지만 1명이 들어갈 정도로
문틈이 생기면서 문 뒤에 가려진 서원의 속살이 가을햇살에 비춰 나에게 다가온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은 교육 공간인 강당이다. 강당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백범 김구 등의 상해임
시정부의 주요 인물들이 남긴 낙성축문이 현판으로 소중히 남아있으며, 중국의 변법자강 운동가
인 강유위가 쓴 '배산서당'의 현판이 걸려있어 서원에 대한 상해임시정부 지사들과 중국유학자
들의 지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허나 지금은 잠시 들린 가을 바람만이 맴돌 뿐, 정적만이 감싸고
돈다. 섬돌은 신발이 가득 놓였던 옛 시절을 그리워한 채, 먼지에 뒤덮여 세월을 원망하며, 툇
마루 역시 먼지와 한몸이 된지 오래다. 강당 앞뜰에는 운치가 서린 소나무가 강당의 허전함을
약간이나마 달래준다.

▲  서원 중간에 자리한 도동사(道東祠)

▲  서원 꼭대기에 자리한 문묘(文廟)

강당 옆구리로 뒤로 가면 문묘와 도동사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올라 삼문(
三門)을 지나면 맞배지붕의 도동사(道東祠)가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나그네를 맞는다. 도동사는
청량당 이원과 친분이 있던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선생의 죽각(竹閣)을 배향하고 있으며, 늘
굳게 닫혀 강당과 달리 폐쇄적인 인상을 자아낸다.

도동사 옆구리로 뒤쪽으로 가면 문묘로 가는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문묘가 서원 경내와 배양마을을 굽어보며 자리한다. 서원에서 제일 중요한 건
물로 중국에서 보낸 공자의 진영이 들어있다. 서원은 유교의 학당이라 공자나 맹자 등의 성현을
봉안한 건물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그래서 보통 서원이나 향교 제일 높은 곳 또는 제일 뒤쪽에
그들의 공간이 있는 것이다.
문묘는 도동사와 비슷한 크기이며, 그 뒤로 푸른 대나무들이 가득하여 왜정 시절 서원을 세우고
유교의 부흥과 나라의 광복을 열망한 유학자와 애국지사들의 청청한 정신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듯 하다.

이렇게 하여 단성 일대의 주요 명소 2곳을 둘러보았다. 목면시배유지만 생각하고 온 터라 배산
서원의 존재는 미처 생각치도 못했지. 의외의 수확물을 거두고 단성에서 덕산으로 들어가는 직
행버스를 타고 지리산 동쪽 자락에 안긴 덕산으로 이동했다.

덕산은 시천면의 중심지답게 마을이 제법 형성되어 있다. 터미널 남쪽으로 넓직한 시장이 형성
되어 나온 온갖 물품들이 선보이고 있으며, 시내 남쪽에는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이 넓은 세
상을 향해 조용히 자신의 갈 길을 재촉한다.

내가 덕산을 찾은 것은 산청을 빛낸 대학자 남명 조식의 유적지를 보고자 함이다. 덕산 서쪽인
원리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고, 동쪽 사리에는 산천재와 별묘, 그의 묘소가 자리해 있다. 
(이들은 '산청 조식 유적'이란 이름으로 사적 305호로 지정됨)


♠  남명 조식을 기리고자 세운 덕천서원(德川書院)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89호

▲  덕천서원의 본당인 경의당(敬義堂)

▲  수업재(修業齋)

▲  진덕재(眞德齋)

덕산에서 중산리 방면으로 1km 정도 가면 길 오른쪽에 남명 조식을 배향한 덕천서원이 나온다.
이 서원은 그의 학덕을 기리고자 1576년에 유림들이 세운 것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2년
다시 지었다.
1609년 조선 정부는 조식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고 덕천서원이란 사액(賜額)을 내리면서
서원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래서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과 더불어
삼산서원(三山書院, 산자 돌림의 3개의 서원)의 하나로 정조 때 영상을 지낸 채제공(蔡濟恭)이
이곳 원장을 지내는 등, 적지 않은 명성을 누렸다. 허나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사업으
로 문을 닫았으며, 지금의 서원은 1926년에 재건된 것이다.


▲  덕천서원 은행나무

서원 앞에는 차디찬 인상의 붉은 홍살문이 이곳
을 찾은 이들에게 엄숙을 요구하고, 홍살문과
서원으로 들어서는 외삼문(外三門) 사이에는 가
을옷을 걸친 은행나무가 하늘 높이 솟아 위엄을
부린다. 유교와 관련된 서원과 향교에는 꼭 은
행나무가 있기 마련인데 이는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강연을 했다는 행단(杏壇)을 상징한다.
가을도 남명의 학식을 흠모했는지 서원 앞에 아
름다운 작품을 빚어놓아 그 마음을 표현한다.
장대한 세월과 서원 사람들의 보살핌을 든든한
양분으로 삼으며 어엿하게 자란 이 나무는 나이
가 무려 400년에 이르러 거의 서원의 역사가 담
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살문 건너편에는 단아한 모습의 이름도 어여
쁜 조그만 정자,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서원
건립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주역의 '성인세심(
聖人洗心)'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취성정(醉醒
亭), 풍영정(風詠亭) 등의 풍류적인 이름도 가
지고 있으며, 서원 유생들의 휴식처로 바로 밑
에는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이 흐른다.

지금은 정자 앞에 2차선 도로가 놓여져 서원과 별개인 듯 보이나 실은 서원의 엄연한 일부이다.
마음을 씻고 닦는다는 정자의 이름처럼 유생들은 정자에서 시를 지으며 지리산에서 불어오는 시
원한 바람에 번잡한 마음을 맡겼을 것이다. 산에 걸쳐진 달을 벗삼아 곡차(穀茶) 1잔 즐기고 머
리를 식혔을 세심정은 정자 앞으로 뚫린 신작로로 수레들이 1분이 멀다하고 굉음을 뿜으며 지나
가니 옛날의 운치는 아쉽게도 많이 사라졌다. 아무리 도로를 뚫더라도 그런 것은 좀 감안하여
강 건너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 것이 참 아쉽다. 정자에선 수풀 사이로 덕천강이 바라
보이며, 덕산 시내와 주변 풍경이 아낌없이 두 눈에 다가온다.


▲  덕천서원 유생들의 휴식처, 세심정

▲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듯한
세심정 현판의 위엄

▲  서원 홍살문과 외삼문 ~ 이곳 홍살문에는
태극마크가 달려있지 않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진 덕천서원 내부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
는 서원의 본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고, 우측에는 수업재가 좌측으로 진덕재가 자리해 있다.
수업재와 진덕재는 서원 유생들의 숙식공간으로 잘나가던 옛 시절에는 섬돌에 그들의 신발이 가
득 널렸을 것이고, 방에는 그들의 온기로 가득했겠지만 지금은 먼지가 입혀진 섬돌과 툇마루가
옛날을 그리워할 뿐이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뒷전으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참으로 쓸
쓸해 보인다.

남명의 학문은 크게 경(敬)와 의(義)로 집약되는데, 이는 주역의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 경은 내적 수양을 통해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여 근본을 세우는 것이고, 의는 경
을 근본으로 하여 제반사를 대처함에 있어 과단성있게 실천하는 것)에서 따온 것으로 서원의 본
당도 거기서 이름을 취해 경의당이라 했다.
이 건물은 유생들의 학습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 모서리로 날
씬한 기둥 4개를 설치하여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아마도 배흘림 기둥인듯 하다. 유생들의 창랑
한 글 읽는 소리로 떠들썩했을 경의당에는 바람의 소리만이 내 귀에 작게 속삭일 뿐이다.

▲  경의당 천정에 달린 현판

▲  서원 제일 끝에 자리한 숭덕사(崇德祠)

경의당 옆구리를 통해 뒤쪽으로 가면 내삼문이 나오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남명을 배향(配享)
한 사당, 숭덕사가 의연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선다. 서원 제일 뒤쪽에 자리한 숭덕사는 서원에
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이곳의 존재의 이유가 바로 남명을 배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숭덕사 양쪽 벽에는 절의 불전(佛殿)처럼 벽화가 그려져 있어 눈길을 잡아맨다. 우측 벽에는 호
랑이가 나무 아래서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좌측 벽에는 푸른 용이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 담겨져
있는데, 용은 아마도 조정에 진출하여 출세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듯 하며, 호랑이 역시 비
슷한 의미를 지닌 듯 하다. 입을 벌려 으르렁거리고 있다지만, 그다지 무서운 모습은 아니며 마
치 고양이가 열심히 야옹거리는 모습처럼 귀엽게 다가온다.

▲  숭덕사 우측 벽에 그려진 호랑이

▲  숭덕사 좌측 벽에 그려진 푸른 용

※ 덕천서원 찾아가기 (2012년 9월 기준)
* 원지까지는 앞에 산청 목면시배유지 참조, 원지에서 중산리/대원사행 직행버스를 타고 덕산에
  서 하차
*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덕산행(중산리/대원사 방면) 직행버스가 1일 7회 떠나며, 진주에서는 중
  산리/대원사행 직행버스가 30분 간격으로 다닌다. 덕산에서 하차하여 중산리 방면으로 도보
  12분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서원 앞 길가에 주차)
① 대전~통영 고속도로 → 단성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중산리 방면 20번 국도 → 덕산 → 원
   리교를 건너 직진 → 덕천서원 
② 진주 → 산청 방면 3번 국도 → 원지에서 중산리 방면 → 덕산 → 원리교를 건너 직진 → 덕
   천서원

★ 덕천서원 관람정보
* 관람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대략 9시부터 18시까지이다.
* 지리산둘레길 9코스(덕산~위태,상촌)가 덕천서원 동쪽 천평교를 지나간다.
*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 222-3


♠  남명 조식 묘소 (산청 조식 유적) - 사적 305호

▲  남명 묘역으로 오르는 길 ~ 남명 선생의 드높은 의기(義氣)를 상징하듯
소나무가 울창하다. 그들이 선사하는 솔내음에 정신이 싹 맑아지는 것 같다.

덕천서원을 둘러보고 다시 덕산으로 나와 단성 방면으로 2km 정도 가면 남명의 묘소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의 안내로 잘 닦여진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남명의 묘역이 모습을
비춘다.
묘역은 특이하게도 산비탈에 높다랗게 석축(石築)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닦아 무덤을 쓴 형태로
마치 돌로 쌓은 조그만 성곽을 보는 듯 하다. 무덤 주변에는 얕게 돌담을 둘렀는데, 그 모습이
현무암으로 묘역을 두른 제주도의 무덤을 보는 듯 하다.


▲  남명 묘역으로 가는 도중에 바라본 지리산의 동쪽 줄기 ~
저 산은 지리산이 아닌 구곡봉(961m)이다. 산 아래로 덕산 시내가 포근히 다가온다.

▲  성처럼 쌓여진 석축 위에 자리를 닦은 남명의 묘역

석축 위에 마련된 묘역에는 남명과 그의 숙부인(淑夫人) 은진송씨의 묘소가 있다. 숙부인의 무
덤은 묘역 아랫쪽에 있으며, 가장 위쪽에 남명의 유택(幽宅)이 자리한다. 묘자리는 남명이 직접
정한 것으로 전해지며, 대곡 성운(大谷 成運)이 지은 묘갈명(墓碣銘)가 있다.
무덤의 봉분(封墳)은 일반 백성의 무덤처럼 조그만하며, 무덤 주변을 장식한 석물도 망주석(望
柱石) 2기와 비석, 상석(床石) 등 기본적인 것이 전부로 매우 검소한 모습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 남명 선생의 일생을 짚어보도록 하자.

남명 조식(南冥 曺植)은 창녕 조씨로 1501년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
다. 아버지는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지낸 조언형(曺彦亨)이고 어머니는 인천 이씨(인주
이씨)이다.
조식의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으로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랐으며, 아버지가 벼슬길에 나가
자 그의 임지를 따라 다니며 공부를 했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림파(士林派)가 대거
숙청을 당하고 그의 숙부까지 이에 연류되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는 잘못된 정치의 폐단에 회
의를 느낀다.

30살에 처가가 있는 김해로 내려가 신어산 아래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힘쓰면서 제자
를 길렀다. 48살에 고향인 합천으로 돌아와 뇌룡정(雷龍亭)과 계부당을 짓고 제자를 가르쳤으며,
사림파를 이끄는 지도자로 크게 명성을 얻었다. 조정에선 그에게 벼슬을 주었으나 나가지 않았
고, 55살에 단성소(丹城疏)를 올려 조정의 잘못을 지적했다. 그리고 1561년 산청 덕산으로 들어
와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후진을 양성했다.

그의 교육철학은 개인의 자질에 따라 가르치며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하여 그것을 자기 것
으로 만드는 것을 중시했다. 또한 기존의 고리타분한 유학자와 달리 학문의 실천과 학문과 삶이
일치되야 함을 강조했으며, 제자들에게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학, 궁마(弓馬) 등 다
양한 학문을 가르치고 또한 열심히 배울 것을 권했다.
선조(宣祖) 임금은 그에게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흔쾌히 거절했으며, 68세에 무진봉사(戊辰
封事)를 올려 정치의 폐단과 이를 개혁할 대안을 제시했다. 그렇게 한평생 선비의 삶을 지키며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다가 71세인 1572년 2월 8일 산천재에서 조용히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부고를 들은 선조는 크게 애통해하며 자신을 소자(小子)라 칭하고 그에게 '인자한 나라의
큰 어른'이라 칭하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제문(賜祭文)을 내렸다. 그리고 광해군(光海君)은
그에게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남명의 학문은 경(敬)과 의(義)로 집약되며, 백성들의 삶을 살피는 위민정치를 강조하였다. 그
의 문하에서는 정말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는데, 정탁(鄭琢)과 정구(鄭逑), 김우옹(金宇顒) 등
은 남명의 학덕을 계승하여 그들만의 학파를 이루어 사림의 중심세력이 되었으며, 곽재우(郭再
祐), 정인홍(鄭仁弘), 김면(金沔) 등 50여명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니 이는
남명의 정신을 충실히 이어받은 결과이다. 그의 학문과 정신이 유학의 중심이 되면 참 좋으련만
조선의 위정자와 유학자들은 전혀 그러지를 못했고 그저 쓰잘데기 없는 괘변 논쟁이나 일삼으며
나라와 백성, 국방을 소홀히하다 결국 나라를 말아먹고 만다.


▲  묘역 아랫쪽에 자리한 숙부인 은진송씨의 묘역

▲  남명 묘역 밑에 서 있는 비석들
이들은 모두 남명 선생을 기리는 비석들이다.

▲  남명 묘역 좌측 밑에 담장이 둘러진 공터
가 있다. 상석이 누워있는 것으로 보아
제사 공간인 듯 싶다.


▲  조촐한 모습의 남명 선생의 무덤
무덤 곁에 귀부와 지붕돌을 갖춘 비석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며,
망주석은 540년 세월의 때로 꽤 얼룩해졌다.

▲  남명 선생 무덤 뒤쪽에서 바라본 천하
저 아래로 사리마을과 시천~단성간 우회국도(지리산대로)가 보인다.

◀  남명 선생 무덤 앞에 세워진 묘비
무거운 빗돌을 받쳐든 귀부는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표정에 웃음이
만연하다.


♠  남명기념관

▲  남명기념관

▲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남명 선생 신도비(神道碑)

▲  기념관 우측으로 정겹고 아늑한
돌담길이 늘어져 있다.

남명 묘역을 둘러보고 아까와 달리 조그만 산길을 타고 내려가면 담장으로 몸을 두룬 남명기념
관이 나온다. 이 기념관은 그의 유물을 보존하고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탄생 500주년(
2001년)에 설립이 추진되어 2004년에 문을 열었다.
남명 선생과 관련된 유물들을 한 자리에 모았으며, 그의 서책과 유품, 덕천서원과 산천재 관련
서적들이 아낌없이 진열되어 있다, 여기서는 전시 유물 중 극히 일부만 소개한다.
* 관람시간 : 10시 ~ 18시 (매주 월요일 쉬며, 관람료 없음)


▲  남명 선생이 늘 달고 다녔다는 성성자(惺惺子) 방울

남명은 2개로 된 작은 쇠방울을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는데 그 이름을 성성자라 했다. 여기서 성
(惺)은 깨닫는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방울소리가 날 때마다 자신을 일깨우고 학문
에 전념했다고 한다. 저 성성자는 근래 복원된 것이다.


▲  남명 선생이 역시 늘 지니고 다닌 경의검(敬義劍)
칼에는 그의 사상인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가 새겨져 있다.
저 칼도 근래에 복원된 것이다.

▲  남명 선생의 철학이 담긴 신명사도(神明舍圖)

신명사도는 마음의 작용을 마치 제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이치에 비유하여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림에서 성곽의 안쪽은 사람의 마음이고, 바깥쪽은 외부세계를 의미하며, 신체
내외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나타낸다.
남명은 사람의 마음과 마음 바깥의 경계를 굳은 성곽으로 나타낸 것은 신체 외부에서 마음으로
들어오는 사사로운 욕심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된다는 굳은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신명사도의 내용을 생활화하려고 했으며, 그가 합천에서 지은 뇌룡전은 신명사도에 따라 지은
것이다.


▲  사성현유상병풍(四聖賢遺像屛風)
남명 선생이 직접 그린 병풍으로 공자(孔子), 주렴계(周濂溪), 정명도(程明道),
주자(朱子)의 유상병풍이다.

▲  광해군이 남명의 제자인 정인홍(鄭仁弘)을
 영의정으로 삼는다는 교지(敎旨)
 여기서 만력 46년은 1618년으로 명나라 신종
(神宗)의 연호이다.

▲  남명기념관 가운데에 자리한
남명 선생의 영정
선비의 지조와 스승의 인품이 느껴지는 그의
영정은 상상에 의지하여 그려진 것이다.

▲  덕천원생록(德川院生錄)
덕천서원을 찾은 원생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  남명 선생의 상소문과 여러 문서를 정리하여 담은 서적들


♠  남명 조식의 별묘(別廟)와 산천재(山天齋) - 사적 305호

남명기념관 좌측에는 남명 선생의 별묘가 있다. 별묘는 집안 조상에게 제를 올리는 가묘(家廟)로
창녕조씨 문중에서 해마다 제례를 올린다.


▲  남명 선생과 그의 정경부인, 숙부인의 위패가 모셔진 여재실(如在室)

▲  남명기념관과 별묘 정문인 성성문

▲  선조가 남명의 죽음에 크게 애통해하며
보낸 사제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담은
비석으로 산천재 입구에 있다.


▲  산천재(山天齋)

남명기념관 남쪽 국도 너머에 자리한 산천재는 남명이 1561년에 이곳에 들어와 지은 것으로 정
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이다. 규모는 두 눈에 쏙 넣어도 부담이 없을 정도
로 조촐하다.
남명은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며 열심히 후학을 양성했는데, 여기서 무려 100여 명의 인재가 배
출되었다. 그들은 남명의 학풍을 계승하여 사림의 중심을 이루었고, 곽재우 등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다.

건물 주변에는 붉은 소나무를 비롯하여 여러 수목이 운치를 자아내며, 건물 앞에는 덕천강이 유
유자적 흐른다. 건물 기와에서 1576년과 1597년에 만든 것들이 보여 1576년과 보수를 하고 임진
왜란 때 불탄 것을 1597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  산천재 좌측에 있는 건물로 제자들이
머물던 숙소이다.

▲  남명 선생의 문집이 보관된
장판각(藏板閣)

산천재 좌측에는 아담한 건물 2채가 있는데, 앞쪽은 제자들의 숙소이다. 그 뒤로는 정면과 측면
이 1칸인 손바닥만한 건물이 있는데, 남명 선생의 문집이 보관된 장판각이다. 그의 문집은 1604
년 해인사에서 처음 간행되었으며, 여러 차례 업데이트를 거쳤다.
이곳에 보관된 문집은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64호로 보관을 위해 굳게 입을 봉했다. 허나 문집
상당수는 아마도 남명기념관에 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보관하는게 더 도난의 위험이 적기 때문
이다. 이렇게 하여 문익점과 남명 조식을 테마로 한 산청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 산청 조식 유적(산천재, 남명기념관, 남명 묘소) 찾아가기 (2012년 9월 기준)
* 덕산까지 교통편과 차량 접근법은 앞에 덕천서원 참조, 원지에서 덕산행 직행버스를 타고 들
  어갈 때 사리에서 내리면 바로 산천재, 남명기념관이 있으며, 묘소는 기념관 우측으로 올라가
  는 산길이 있다.

★ 관람정보
* 관람료는 없으며 남명기념관 외에는 휴관이 없다.
* 매년 10월에는 남명기념관을 중심으로 남명선비문화축제가 열린다. 축제기간은 2일 정도로 남
  명 제례와 의병출정식, 전국한시백일장, 학생풍물경연대회, 학생백일장, 선비체험, 민속놀이
  경연대회, 마당극, 국악 공연 등이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 남명선비문화축제 문의는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 055-748-9147~8 (☞ 홈페이지 가기)>
* 지리산둘레길 8코스(운리~덕산)가 산천재와 남명기념관을 지나간다.
* 산천재, 남명기념관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72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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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9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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