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암'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03.08 이 땅의 마지막 옛날 주막을 찾아서 ~~ 예천 삼강나루 삼강주막
  2. 2017.08.28 대자연이 빚은 단양8경의 으뜸 명승지, 단양 사인암 ~~~ (북상리 시골, 청련암, 남조천)

이 땅의 마지막 옛날 주막을 찾아서 ~~ 예천 삼강나루 삼강주막

 


~~~ 예천 삼강주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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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힘겹게 겨울 제국을 몰아내며 천하 해방에 열을 올리던 3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이틀 일정으로 강원도 내륙과 충북 동부, 경북 서북부 지역을 돌았다.
강원도 홍천과 평창, 영월 지역을 둘러보고 충북 땅으로 넘어가 내 시골인 단양(丹陽) 외
가쪽 친척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사촌들과 늘어지게 회포를 풀었다. 오랜만에 찾은 시골
이지만 다음 날도 갈 길이 멀기에 나머지 회포는 불투명한 미래로 넘기고 아침 10시에 콩
볶듯 길을 나섰다.

간만에 단양에 왔으니 단양 명소는 1곳 가줘야 서운함이 덜하겠지? 하여 단양팔경의 일원
인 사인암(舍人岩)을 둘러보고 바로 경북 땅으로 넘어갔다. 사인암에서 방곡을 거쳐 남쪽
으로 내려가면 바로 경북 문경(聞慶)으로 이어진다.

경북으로 갈아타면서 어디를 갈까 궁리를 하다가 한때 천하의 주목을 격하게 받았던 삼강
주막을 가기로 했다. 그밖에 예천 명봉사(鳴鳳寺)와 문경 김룡사(金龍寺) 등도 뜨겁게 거
론이 되기는 했으나 이미 절을 여럿 들린 터라 바로 삼강주막으로 총알처럼 이동했다.
(강원도와 단양 사인암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  이 땅에 마지막 옛날 주막, 이제는 예천 제일의 꿀단지로 부상한
삼강주막(三江酒幕) - 경북 지방민속문화재 134호

낙동강(洛東江)과 내성천(乃城川), 금천 3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예천 삼강(三江)포구에 이 땅
의 마지막 전통 주막으로 추앙받고 있는 삼강주막이 있다. 지붕과 집이 온통 누런 피부로 이
루어진 초가(초가집)로 싸리나무 담장으로 둘러진 초가가 진짜 삼강주막이며, 나머지는 예천
군에서 이곳을 관광지로 격하게 띄울 때 새로 닦아놓은 것들이다.

삼강포구(삼강나루)는 안동과 의성, 청송, 군위, 영천, 대구, 경주, 울산 등 경북 내륙과 경
남 동부 지역에서 서울로 갈 때 거의 거쳐가야 된다. 그러다보니 일찌감치 교통 요충지로 성
장하여 상인과 나그네들을 위한 숙박시설과 장터가 발전했다. 청운(淸雲)의 꿈을 가지고 과거
를 보러가는 영남 선비들도 적지않게 삼강나루의 신세를 졌으며, 양반과 선비, 상인(보부상),
뱃사공, 농사꾼 등 다양한 계층이 자리를 비비며 국밥과 술을 먹고, 주막 방에서 같이 자고,
배를 타던 현장이다. 삼강주막은 바로 그런 삼강나루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지어진
주막의 하나이다.

삼강주막은 1900년 경에 지어진 이 땅의 흔한 초가이다. 물론 그 건물이 있기 전부터 주막은
쭉 있었다. 주막의 규모는 조그만 초가 1동이 전부로 방 2개와 툇마루 1개, 부엌을 갖춘 집약
적 평면구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변소는 바깥에 따로 설치했다. 겉으로 보면 그저 흔
한 초가이지만 이 땅에 유일한 옛 주막으로 어마어마한 희소성을 지니고 있어 건축사 자료로
도 아주 휼륭한 존재이다.

삼강나루를 거쳐간 사람들은 이곳에서 밥을 먹거나 하룻밤 머물면서 주막의 가치를 반질반질
하게 해주었고, 마르지 않고 쏟아지는 손님들로 주막 주인은 삽으로 돈을 쓸어담을 정도로 번
영을 누렸다. 또한 삼강나루에 있던 장터와 다른 주막들도 다 같이 번영을 누리며 경북 북부
제일의 교통 요충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큰 홍수로 삼강나루는 큰 피해를 입었는데 그때 다른 주막과 건물은 죄
다 떠내려가고 오로지 이 주막만 살아남아 이곳의 유일한 주막으로 독점을 누렸다.

1940년대 후반, 삼강주막의 마지막 주모(酒母)라 불리는 유옥연 할머니(1917~2005)는 이 주막
을 인수했다. 그때 그의 나이 30대, 1940년에 남편을 여윈 그녀는 2남2녀를 키우고자 주막 경
영에 뛰어든 것이다.
이곳이 교통 요충지라 목이 좋고 음식 솜씨도 뛰어나 강에 다리가 놓이기 이전까지는 그런데
로 먹고 살았다. 허나 시대가 격하게 흘러 1980년대에 다리(삼강교)가 생기자 사람들의 발길
은 95% 이상 끊기게 된다.
그러다보니 주막과 동고동락하던 나룻배는 망했고, 주막 역시 경영에 영원한 빨간불이 켜지면
서 크게 궁색한 처지가 된다. 기껏해야 동네 단골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녀는 그의 전
부가 담긴 주막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주막은 곧 그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업
종을 전환하기에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이 땅의 마지막 주모로 60여 년을 살다가 2005년
10월에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면서 그때서야 강제로 주막을 놓게 된다.

주인이 가고 없는 주막은 자연히 폐가로 버려져 쓰러지기 직전까지 갔으나 이곳의 가치를 뒤
늦게 깨달은 예천군에서 2007년에 이곳을 인수해 예전 모습으로 복원했다. 그리고 주막을 운
영할 주모를 공개적으로 선별해 인근 마을에 사는 권씨 할머니가 주모로 뽑혀 유옥연 할머니
의 뒤를 이었으나 군청과 마을과의 갈등으로 지금은 예천군에서 삼강마을에 위탁을 맡겨 마을
에서 공동 운영한다.

옛 주막은 아직 쓸만하지만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귀한 몸이고, 건물이 협소해 주막으로 활용
하지 않고 그냥 문화유산 관람용으로 두었다. 주막 뒷쪽에는 500년 묵은 회화나무가 예나 지
금이나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주막 주변에 초가(1930년대 홍수로 사라진 사공과 보부상숙
소도 재현함)와 원두막을 잔뜩 지어 주막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래서 주막 음식은 새 집에 들
어가서 먹어야 된다.
주막 앞에는 누런 흙이 곱게 입혀진 뜨락이 펼쳐져 있고, 그 앞에 조촐하게 돌담길이 재현되
어 정겨움을 더한다. 이는 예천군에서 삼강주막을 관광지로 키우면서 달아놓은 것이다. 그만
큼 이곳에 대한 기대가 큰 것이다. 열렬한 홍보와 투자 끝에 이제는 회룡포(回龍浦)와 더불어
예천 제일의 명소로 우뚝 섰으며, 하루 방문객 수는 주말 기준 최대 300~400명 정도 된다.
하지만 너무 겉모습과 상업주의에 열중한 나머지 주막의 구수한 맛이 변질되어 '옛날 주막 분
위기가 안난다','너무 돈장사가 아닌가?','완전 민속촌을 재현했다' 등의 쓴소리도 적지 않게
나온다. 어떤 신문은 이곳에 있는 청량음료 자판기를 두고 날카로운 지적을 쏟아내기도 했다.

허나 이곳에서 파는 음식은 맛도 그런데로 괜찮고, 가격도 적당하다고 본다. 또한 두부와 도
토리묵, 막걸리, 칼국수 등은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들어서 판매하며, 주말에 찾을 경우 엄청
나게 밀려드는 사람들로 좀 어수선하기는 해도 옛 주막을 바탕으로 소소하게 전통의 장을 만
든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원래부터 주막이었고, 주막 주변은 장터였기 때문이다. 게다
가 주막 남쪽에 자리한 삼강마을은 삼강주막마을로 이름을 바꾸고 전통체험과 농촌체험, 민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삼강주막을 중심으로 매년 9~10월에 3일 일정으로 '삼강주막 나루터 축제'를 벌이고 있
는데, 막걸리 마시기, 막걸리와 전통음식 전시/판매, 공연과 가요제, 민속놀이 체험, 예천군
특산물장터, 사진/그림 전시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 삼강주막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166-1 (삼강리길 27 ☎ 055-655-3132)
* 삼강주막마을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삼강주막 동쪽에 재현된 누런 돌담길
푸른 대나무까지 머금고 있으니 그 풍경이 참 정겹기 그지 없다.
이 돌담길은 삼강주막을 관광지로 꾸미면서 닦여진 것이다.

▲  온통 누런색으로 이루어진 삼강주막 관광지

▲  초가 원두막 2채와 삼강주막(오른쪽 초가)

주모 할매가 방이나 부엌에서 튀어나와 '술 한잔 들고 가이소~!','국밥 1그릇 들고 가이소~!'
할 것 같은 삼강주막, 옛 주모가 가고 없는 삼강주막은 이제 현역에서 물러나 옆에 재현된 후
배 초가들에게 그 짐을 넘겼다.
솔직히 기존 주막을 손질하여 그 방이나 툇마루, 마당에 놓인 상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강바
람을 벗삼아 술 1사발, 국밥 1그릇을 섭취해야 진정한 옛 주막 멋이 날 것인데, 지방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 보임)로 지정된 귀한 몸이라 그것까지는 싫었던 모양이
다. 그러다보니 툇마루와 주막 방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고, 오로지 부엌만 들어갈 수 있어 완
전 금지된 주막이 되어 버렸다.

허나 오래된 기와집과 초가 가운데 식당이나 민박, 전통체험 공간으로 활용되는 집들이 적지
않다. 삼강주막은 길어봐야 100여 년 정도 되었고, 근래 손질을 하여 거의 새집처럼 되었기
때문에 한가하게 눈요깃감으로 둘 것이 아니라 주막 체험용으로 좀 바쁘게 굴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만 집이 좁기 때문에 보조용 초가를 여럿 두어 수용 공간을 늘리고, 음식 조리는
보조용 초가나 조리 공간을 두어 처리하면 될 것이다.

▲  옆에서 바라본 삼강주막과 회화나무

▲  낙동강 둑에서 바라본 삼강주막


▲  구수한 모습의 삼강주막 툇마루
삼강나루가 잘나가던 시절에는 저 좁은 툇마루와 방은 늘 빈자리가 없었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이유로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금지된 공간이 되었다.

▲  삼강주막 부엌
연기에 그을린 검은 때가 삼강주막의 왕년의 위엄을 살짝 귀뜀해준다.
밥과 국을 끓이던 쇠솥은 무심하게 내려앉은 먼지의 눈치를 보며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벽화처럼 자리한 삼강주막의 백미, 외상결재장부

삼강주막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것이 있다. 바로 부엌과 바깥 흙벽에 새겨진 외상결재장부이
다. 장부라고 해서 종이에 쓰인 것은 아니며, 그 흔한 한글과 한자, 숫자도 없다. 세로와 가
로로 그어진 줄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여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수수께끼의 추상화나
문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이들은 옛 주모인 유옥연 할매의 작품으로 그는 글자를 모르던 까막눈이라 자신만의 전용 글
자를 만들어 이렇게 외상장부를 작성했다. 예나 지금이나 단골 외상 손님은 늘 있는 법이라
그들의 편의를 위해 벽에 그만의 표시법으로 장부를 만들어 손님을 관리했으며, 외상을 했을
경우 세로로 줄을 긋고, 외상값을 치룬 경우에는 가로로 줄을 그었다. 줄은 불쏘시개를 이용
해 흙벽에 그었다. 허나 세로줄만 있고 가로줄이 없는 것도 적지 않아 외상값을 다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글자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주모 할매의 깊은 뜻과 철학, 외상 손
님에 대한 넉넉한 마음이 깃들여져 있다.


▲  부엌에 빼곡히 새겨진 외상결재장부 ▼


▲  주막 밖에 차려진 재래식 변소
삼강주막은 건물이 작기 때문에 싸리나무 담장 밖에 따로 변소를 두었다.
현재 변소는 무늬만 남은 상태~~ 변을 보려면 주막 외곽에 설치된
현대식 변소를 이용하기 바란다.

▲  주막 밖에 덩그러니 놓인 들돌

변소 뒷쪽에는 '들돌'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커다란 돌이 놓여져 있다. 처음에는 그냥 돌로
여겼으나 옆에 있는 들돌의 유래 안내문을 보니 180도 달라 보인다.
들돌이란 일종의 성인식 도구로 옛날 농촌의 남자 아이들이 성장하여 농부(어른)로 인정을 받
는 의례에서 생겨났다. 즉 10대 중반에 저 돌을 들어야 진정한 어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돌의 무게는 10~20kg 정도 될 것 같은데, 성인식 도구치고는 좀 무겁고 거친 것 같다. 하지만
어찌하랴?? 농촌에서 살려면 힘을 써야 되는 일이 1~2가지가 아니니 말이다.
또한 삼강나루는 사람과 물류의 왕래가 빈번했는데, 그에 따라 물건을 나를 인력이 많이 필요
했다. 그래서 이 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품값을 정했다고 한다. 돌을 완벽하게 들면 좀
많이 받고, 못들면 그냥 아웃, 중간 정도 들면 중간 정도 품삯을 받았다. 이 돌은 삼강주막과
더불어 이곳에 전하던 오래된 유물로 겉보기와 달리 역사적 값어치가 충분하다.


▲  삼강주막의 오랜 벗, 회화나무 - 예천군 보호수 11-27-12-23호

강주막 뒷쪽에는 커다란 회화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삼강주막의 오랜 터줏대감
이자 이곳의 듬직한 정자나무인 그는 약 500년 정도 묵은 것으로<197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
시 추정 나이가 약 450년> 높이는 20m 정도 되며, 그 북쪽에는 낙동강 둑방길과 낙동강이 있
다.


▲  강바람만 가득한 낙동강 삼강나루터 (오른쪽 다리가 삼강교)

강주막 뒷쪽 둑방을 오르면 잃어버린 땅(북한, 요동반도, 만주, 연해주, 왜열도 등)을 제외
한 이 땅에서 가장 긴 강, 낙동강이 도도한 물결을 드러낸다. 이곳이 바로 삼강주막의 든든한
밥줄이자 경북 북부 제일의 교통 요충지인 삼강나루터로 문경에서 내려온 주흘산맥(主屹山脈)
과 안동에서 온 학가산맥(鶴駕山脈), 그리고 멀리 대구에서 올라온 팔공산맥(八公山脈)의 끝
자락이 만나며,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하나가 되는 곳이다. 그래서 지명도 3개의 물줄기가
만난다는 뜻의 '삼강'이 되었다.

예로부터 수륙교통의 요충지이자 경상도에서 서울과 중부지방으로 이동할 때 거쳐가던 길목으
로 이곳을 지나 문경새재를 넘어 북쪽으로 올라갔다. 또한 소금배가 이곳까지 올라와 교류를
했고, 서울과 대구(大邱)를 잇는 군사도로의 역할도 했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는 그런데로 성
황을 이루었다. 나룻배는 2척을 굴렸는데, 큰 배는 주로 가축과 화물을, 작은 배는 사람을 수
송했으며, 장날에는 밀려드는 수요로 최대 30회 이상을 운행했다.
허나 현대화의 거친 물결과 어미도 몰라보는 개발의 칼질이 이곳까지 불어닥치면서 1980년대
나룻배를 대체할 삼강교가 강 위에 놓이게 된다. 그로 인해 나룻배는 밥줄이 끊겨 사라지고
삼강나루의 영광 또한 신기루처럼 사라졌으며 겨우 삼강주막만 남아 나룻터를 지켰던 것이다.

2007년 이후 쓰러진 삼강주막이 복원되고, 이곳 일대가 예천군의 야심 속에 관광지로 부상하
면서 2013년에 체험학습용으로 나룻배 1척을 장만해 나룻터에 띄워놓았다. 하지만 내가 찾았
을 때는 배는 움직이기는 커녕 늦은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도 봄이 천하를 완전히 해방
시킨 이후에 움직일 모양이다.

▲  삼강나루를 한방에 보내버린 삼강교

▲  낙동강 둑방길과 낙동강 물줄기


▲  삼강주막 옆에 재현된 보부상과 사공 숙소 초가집

삼강주막 서쪽에는 누런 피부의 초가들이 즐비하여 자칫 삼강주막의 오랜 일원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현실은 근래에 닦아놓은 것들로 삼강주막을 너무 말끔히 손질을 한 탓에 기존 주
막과 새 초가가 서로 비슷한 모습과 피부를 지니게 되어 서로 구별이 가질 않는다.

새 초가 가운데 보부상 숙소와 사공 숙소라 불리는 초가가 있다. 원래 1900년대에 지어진 숙
소가 있었으나 1934년 대홍수 때 다 떠내려가고 사라진 것을 2008년에 마을 노인들의 증언과
고증을 바탕으로 삼강주막과 비슷한 구조로 지었다. 허나 이곳에는 더 이상 보부상과 사공이
없어 그 이름과 달리 현역에서 물러난 삼강주막의 역할을 대신하여 밥과 술을 먹는 길손들이
이용한다.


▲  주막으로 쓰이는 조그만 초가 (방 안에서 음식 섭취 가능)

▲  내부가 비어있는 초가 창고

삼강주막을 둘러보니 어느덧 13시가 넘었다. 점심도 아직 들지 못한 상태이고 그 유명한 삼강
주막에 발을 들였으니 주막 밥은 한번 먹어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하여 파전과 두부, 도토리묵, 잔치국수, 소고기국밥을 두루두루 시켰다. 다만 차량을 가
져왔기 때문에 아쉽지만 막걸리 등의 곡차(穀茶)는 섭취하지 않았다.

이곳이 주막이긴 하지만 사극처럼 시골 아낙네들이 옛 복장을 입고 머리를 딴 주모가 밥이나
술상을 갖다주는 것은 기대하지 말자. 그런 주모는 이제 없기 때문이다. 주막 초가들 한쪽에
음식을 조리하는 건물이 있는데, 거기서 음식을 주문하고 계산을 해야 되며, 음식이 나오면
음식이 든 쟁반을 들고 적당한 곳에 앉아 먹으면 된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아 길게 줄을 서
야 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우리는 음식을 들고 비어있는 초가로 들어가 즐거운 점심 시간을 가졌다. 곡차가 없어 아쉽긴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것들이라 음식 맛도 그런데로 괜찮았고, 가격도 시중과 거의
비슷하거나 저렴한 편이다. 시장한 점심 기운을 잠재우고자 열심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놀리니
많아보였던 음식들은 이내 바닥을 드러내고, 반찬으로 나온 김치와 송송(깍두기)도 밥도둑이
따로 없어 그것 마저 동이 났다. 역시 금강산은 식후경(食後景)이다.


▲  삼강주막에서 먹은 음식의 위엄
두부와 도토리묵, 파전, 잔치국수, 소고기국밥


아직 해가 중천이라 다음 답사지를 물색하다가 속리산(俗離山) 동쪽에 숨겨진 폭포를 찾기로
하고 인절미를 약간 구입해 다시 길을 떠났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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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2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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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이 빚은 단양8경의 으뜸 명승지, 단양 사인암 ~~~ (북상리 시골, 청련암, 남조천)



' 단양 사인암 나들이 '



 

봄이 겨울 제국을 몰아내며 오랜 추위에 지친 천하를 진정시키던 3월 끝 무렵, 친한 후배
와 오랜만에 1박2일 장거리 여행을 나섰다.
렌트카를 이용하여 토요일 아침 8시에 서울을 출발, 백두대간 골짜기에 숨겨진 홍천(洪川
)의 삼봉약수(三峰藥水, ☞ 관련글 보러가기)를 찾아가 몸에 좋다는 탄산약수를 배터지게
섭취했다. 그런 다음 영월(寧越)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저녁 늦게 단양(丹陽)으로 넘어
갔다.

단양은 충북 동쪽 끝에 뉘어진 산간 고을로 나의 외가 동네(단성면 북하리)이다. 서울 다
음으로 오래 머문 곳으로<다 합쳐봐야 1년도 안됨> 지금은 다들 서울과 인천, 경기도, 원
주 등지로 나가고 모친의 작은아버지(나에게는 삼촌뻘~) 가족만 북하리 남쪽인 북상리(北
上里)에 머물며 터전을 지키고 있다. 바로 그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영월읍에서 제천(提川)을 거쳐 가라는 네비양의 안내를 쿨하게 무시하고 남한강을 따라서
고씨동굴, 영춘면, 향산리, 단양읍을 거쳐 저녁 10시가 넘어서 북상리 친척집에 도착했다.
그들의 환대를 받으며 삼겹살로 늦은 저녁을 들고 새벽 4시까지 코가 비뚤어지도록 곡차(
穀茶, 술)를 기울이며 간만에 회포를 풀었다.
곡차의 기운이 몸 속에 진하게 퍼져 이거 아침에 일어날 수나 있겠나 걱정이 들었지만 아
침 9시가 되자 스르륵 잠이 깼다. 천근만근 무거운 두 눈을 비비며 세수를 하고 아침밥을
든 다음 10시쯤 그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그곳에 머문 시간은 고작 12시간 남짓, 간
만에 온 것치고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허나 같이 간 후배 때문에 더 머물기도 그랬고 그날 경북의 여러 곳을 둘러보고 올라가야
되서 다음 인연을 격하게 고대하며 단양 친척집을 떠났다.

단양에서 경북으로 가려면 손쉽게 죽령터널(중앙고속도로)을 통하거나 아니면 사인암, 방
곡리를 거쳐 문경으로 넘어가야 된다. 우리는 쉬운 길 대신 미답로인 문경 방면 고갯길을
택했는데 그 길목에 단양8경의 으뜸인 사인암이 요염하게 버티고 있다.
사인암은 예전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었고 이번에는 경북 지역에 크게 비중을 두었으므로
단양은 하룻밤 머무는 선에서 딱 선을 그으려고 했다. 허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
지나친다고 창밖에서 자꾸 손짓하는 사인암을 애써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나 잘생긴
사인암을 훌쩍 지나치는 것도 마음에 좀 걸리고 요즘 같은 난세(?)에 다음을 흔쾌히 기약
할 수가 없어 그곳에서 잠시 바퀴를 멈추고 그의 품으로 들어섰다.


 

♠  단양8경의 으뜸이자 운선9곡(雲仙九曲)의 아름다운 입술
사인암(舍人岩) -
명승 47호

단양8경(丹陽八景)이란 단양의 이름난 경승지 8곳을 일컫는다. 조선 명종(明宗) 시절, 퇴계 이
황(退溪 李滉)이 단양군수(丹陽郡守)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는 단양의 명승지 8곳을 뽑아서
단양8경으로 묶으면서 명나라의 소상8경(瀟湘八景)보다 더 아름답다고 침이 마르도록 찬양을
했다. 그 단양8경을 이루고 있는 식구로는 도담삼봉(島潭三峯)과 석문(石門), 구담봉(龜潭峯),
옥순봉(玉荀峯),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사인암 등으로 그중 도담3봉과 석문을 제외하고 모
두 옛 단양의 중심지였던 단성(丹城) 주변에 몰려있다. (8곳 중, 5곳만 가봤음)

사인암은 단양8경의 으뜸으로 꼽히는 현장으로 하늘을 향해 곧게 솟은 70m 높이의 기암절벽(奇
巖絶壁)이 사인암의 핵심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절벽에 상하 좌우로 균형 있게 줄이 그어
져 있어 마치 천연의 바둑판을 보는 듯 한데 하늘나라의 신선 형님들이 인간들이 자고 있을 때
살포시 내려와 이 절벽을 바로 눕혀 내기바둑을 한판 두고, 하늘로 올라갈 때는 인간들이 감히
손을 대지 못하게끔 하늘을 향해 세워두고 가는 모양이다.
절벽 꼭대기에는 낙락장송(落落長松)을 닮은 노송(老松)들이 사인암의 운치를 가득 수식하는데,
어찌 저런 척박한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혹 바둑판이 비와 눈에
젖을까봐 신선이 심어둔 작은 우산은 아닐까?

이곳은 단양 출신인 고려 후기 대학자, 역동 우탁(易東 禹倬, 1263~1342)이 사인(舍人) 벼슬에
있었을 때 휴양했던 곳이라 전한다. 우탁은 단양우씨 집안으로 원나라에서 들어온 정주학(程朱
學) 서적을 처음으로 터득한 인물인데,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 임제광(林齊光)이 우탁이 머무
른 것을 기리고자 그의 벼슬 이름을 따서 사인암이라 했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인 김홍도(金弘道)도 이곳을 다녀가 멋지게 그림으로 남겼고, 많은 시인묵
객들이 찾아와 시문을 짓거나 그림을 그리며 이곳의 절경을 즐겼다.

사인암은 남조천(南造川)을 따라 이어진 운선9곡의 하나로 유리처럼 맑은 남조천의 물이 이곳
을 굽이쳐 흘러 안그래도 절경인 경치에 더욱 윤기를 북돋는다. 사인암 옆에는 고려 때 지어졌
다는 청련암(靑蓮庵)이란 조그만 암자가 터를 닦았으며, 사인암 입구에는 1977년 6월 지방 유
림에서 세운 역동우탁기적비(易東禹倬紀績碑)가 서 있다.

예전에는 상선암, 중선암 등에 밀려 좀 한적했으나 서서히 단양의 꿀단지로 부상하면서 주변에
음식점과 민박, 펜션 등이 많이 생겨났으며, 시골 북하리와 10여 리 거리로 가까워 외가 친척
들도 자주 놀러왔던 곳이다. 시골과도 꽤 가까운 곳이 분명하건만 시골을 자주 찾았던 어렸을
적에는 이상하게도 좀처럼 인연이 닿지 않았고 (상선암과 중선암, 하선암도 못가봤음) 다 장성
한 이후에야 겨우 인연이 닿아 이렇게 2번 인연을 지었다.


▲  사인암 앞을 굽이쳐 흐르는 남조천
남한강을 향해 격하게 흐르던 남조천의 물줄기도 이곳만큼은 서행하여
사인암의 절경을 즐긴다.

▲  남조천에 조성된 타원형 모양의 섬
사인암과 조금 떨어진 남조천 한쪽에 흙과 돌로 대(臺)을 쌓고 역동우탁기적비와
운치가 깊은 소나무3그루를 심었다. 남조천 물줄기 틈에 자리해 있어
사인암 속의 조그만 섬을 이루고 있다.

▲  역동우탁기적비 주변에서 바라본 남조천과 사인암

▲  남조천에 사뿐히 걸린 구름다리

▲  우탁의 시를 머금은 커다란 표석

▶ 춘산에 눈 녹인 바람 ◀
춘산(春山)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듸 업다
져근 덧 비러다가 마리 우희 불니고져
귀 밋태 해묵은 셔리랄 녹여볼가 하노라

☞ 봄 산에 쌓인 눈을 녹인 바람이 잠깐 불고 어디론가 간 곳이 없다.
잠시 동안 (그 봄바람을)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고 싶구나.
귀밑에 여러 해 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봄 바람을 이용해 자신의 젊음을 되찾고 싶은 우탁 할배의 부질없는 꿈을 담은 시,
나이를 먹는 것 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그래서 노인들이 좋아하는 폭포가
'미대륙에 있는 나이아가라'폭포라고??)

▲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사인암
그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사인암의 모습도 조금씩 달리 보인다.

▲  바로 건너편에서 바라본 사인암의 위엄

예전 사인암을 찾았을 때(친척들과 같이 갔음)는 정작 사인암 건너편은 가지 않았다. 그 건너
편에서 바로 정면으로 그를 대하니 정말 대자연 형님의 위대한 작품성이 느껴진다. 마치 바둑
판을 하늘로 향해 곧게 세운 듯한 모습, 절벽 꼭대기에 소나무들이 운치를 뽐내며 절벽의 우산
이 되어주는 모습 등 그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선보이며 1폭의 그림 같은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대단하다 설친들 저런 작품은 감히 흉내내지 못할 것이다.


▲  사인암 건너편에서 바라본 청련암


 

♠  사인암에 안긴 조그만 절집, 보기와 달리 깊은 역사를 지닌
청련암(靑蓮庵)


▲  사립문이 활짝 열린 청련암

사인암 옆구리에는 청련암이란 조그만 절집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런 곳에 왠 절이 있나? 싶
을 정도로 좀 쌩뚱맞기도 한데 얼핏보면 근래 지어진 절로 생각하기 쉬우나 현실은 제법 오래
된 절이다.

청련암은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의 말사(末寺)로 1373년(공민왕 22년)에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허나 신빙성은 그리 없어 보이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710년에 중창하
여 청련암이라 했다고 한다.
원래는 여기서 가까운 대강면 황정리 산28번지에 있었는데, 그 부근에 있었다는 대흥사(大興寺
)의 말사로 있었다. 허나 그 대흥사는 19세기 후반 의병(義兵)과 왜군과의 싸움에서 파괴되었
고, 1954년 소백산 공비토벌 작전으로 황정리 일대에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지자 청련암도 부
득이 방을 빼야 되서 절의 대들보와 기둥을 들고 사인암 옆에 새롭게 터를 닦았다.

청련암은 두 눈에 쏙 넣어도 부담이 없는 조촐한 암자로 법당인 극락전과 옛 법당, 삼성각, 요
사 등이 전부이다. 2013년 4월 새 극락전을 만들어 법당으로 삼았으며, 옛날의 유물로는 18세
기에 조성된 목조보살좌상이 있다.
사인암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 있어 사인암에 온 사람들은 무조건 절에 발을 들이기 마
련이다. 절을 거쳐야만 사인암의 뒷통수로 올라갈 수 있으며, 사인암과 청련암이 완전히 한 덩
어리가 되어 생사고락을 같이한다. 사인암 방문객이 늘면 자연히 절을 찾는 발길도 정비례할
수 밖에 없으니 정말 자리 하나는 잘 잡았다. (당시 주지승의 혜안이 참 놀라울 따름!) 사인암
이 건재하는 동안은 청련암은 결코 법등(法燈)이 마를 날이 없을 테니 말이다.


▲  청련암 경내와 사인암의 옆구리

▲  청련암 극락보전(極樂寶殿)

경내로 들어서면 옛 법당 직전에 극락보전이 산듯한 모습으로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2013년 4월에 지어진 아주 따끈따끈한 새 건물
로 경내 제일의 보물인 목조보살좌상을 품고 있다. 하지만 건물 내부를 살피지 않고 그냥 지나
쳐버려 목조보살좌상을 친견하지 못했다. 그냥 옛 법당에 계속 있는 줄 알았음


▲  예전에 담은 청련암 목조보살좌상(木彫菩薩坐像)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309호

청련암 목조보살좌상은 원래 청련암 법당에 봉안되었던 아미타3존불의 구성원인 대세지보살상
(大勢至菩薩像)이다. 1954년 이곳으로 절을 옮기는 과정에서 그만 본존불(本尊佛)을 잃어버렸
으며,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은 엉뚱하게 제천 원각사로 넘어가고 대세지보살상만 간신히 수
습하여 가져왔다. 그래서 협시불이 본존불로 출세하여 불단 중앙에 홀로 봉안된 것이다. 또한
그의 뱃속에서는 여러 복장(腹臟)유물이 나왔으나 근래 도난당하고 말았다.
불상에 입혀진 도금을 벗기고 새로 개금(改金)을 했을 때 목불(木佛)의 형태를 확인했으며 은
행나무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청련암의 옛 유물로 18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 시절 충청도 지역 불상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보살상의 모습을 보면 마치 어린 동자가 관음보살의 탈을 쓰고 대신 앉아있는 것 같다. 동자와
같은 귀여움과 해맑은 미소가 진하게 드리워진 그의 표정은 너무 밝아 보는 이의 눈을 눈부시
게 하니 사인암과 청련암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도 그의 표정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그냥 돌아갈 것이다.


▲  석불좌상과 옛 법당

극락전으로 쓰인 옛 법당은 법당의 품격과는 좀 거리가 있는 여염집 모습으로 새로운 극락보전
이 지어지자 법당에서 물러나 평범한 신세가 되었다. 현재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목조
보살좌상은 새 극락보전으로 옮겨 청련암 중심 불상의 업무를 계속 수행한다. (이들 불상의 위
치는 절의 사정상 바뀔 수도 있음)
옛 법당 앞에는 조그만 석불좌상이 자리해 있는데, 원래 새 극락보전 자리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  옛 법당에 봉안된 석가3존불

▲  옛 법당에서 바라본 청련암 경내


▲  물이 넘치는 연꽃무늬 석조(石槽)
사인암이 중생들에게 베푼 소중한 옥계수로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몸과 마음이 시원해진다.

▲  우탁의 탄로가(嘆老歌)를 머금은 표석

한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우탁은 늙음을 탄식하는 시를 여럿 남겼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탄로가이다. 아무리 발버
둥을 치며 피부와 건강에 힘써도 세월은 자꾸만 흐르고 자신도 강제로 늙어만 가니 정말 무서
운 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30대의 끝 무렵을 달리고 있지만 탄로가의 시 앞에 무책임하게 나이나 처묵처묵하고 있는
내 모습에 정말 열불이 난다. 물론 나이는 강제로 먹는 것이니 거절을 해도 소용은 없다. 아직
까지는 젊다고 자부를 하지만 빛의 속도로 내달리는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 신선 세계의
하루는 인간 세상의 몇십~몇백년이라고 하는데 그 세계가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 같다.


▲  탄로가 표석에서 바라본 남조천과 구름다리
단양은 소백산맥에 묻힌 산골이라 봄과 여름은 늦게 오고 겨울은 일찍 온다.
날은 조금씩 따스함이 더해지고 있으나 비록 힘은 잃었지만 아직까지는
겨울 제국의 세력이 적지 않게 남아있어 아직까지 제국의 눈치를 본다.
허나 곧 소쩍새가 울 때면 지긋지긋한 겨울을 완전히 떨쳐내며
다들 기지개를 켤 것이다.

▲  사인암의 뒷통수로 오르는 계단길

어떻게 경사도 꽤 각박한 사인암 뒷통수에 감히 건물을 올릴 생각을 했을까? 청련암 주지승의
기발한 생각<사인암 입장에서는 좀 고달프겠지만>으로 궁색한 자리를 극복하여 좁게나마 터를
다지고 삼성각을 지어 속세를 향해 계단을 늘어뜨렸다. 이로 인해 사인암이 삼성각을 업고 있
는 모습이 되었다.
삼성각으로 인도하는 계단은 보기와 달리 상당히 거칠고 고르지가 못해 오르락내리락 할 때 주
의가 필요하다. 예전에는 삼성각 뒤쪽을 통해 사인암 정상으로 오를 수 있었으나 사인암의 건
강과 안전 문제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니 애써 오르지 않도록 하며 사인암에 왔다면 삼성각에
꼭 올라가보도록 하자. 이곳을 지나쳤다면 사인암의 거의 절반을 놓친거나 다름이 없다.


▲  사인암 뒤쪽 바위 틈에 둥지를 튼 푸른 머리의 삼성각(三聖閣)
이 건물은 예전 칠성각(七星閣)으로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이 봉안되어 있다.

▲  삼성각 중앙에 자리한 칠성탱과 석가불

▲  삼성각 독성탱

◀  삼성각 산신탱


▲  삼성각 우측 바위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바위글씨 '퇴장(退藏)'

사인암의 명성이 멀리 우주 밖까지 전해진 것일까? 너무 유별나게 휘갈겨진 글씨가 바위 피부
에 새겨져 있어 그 정체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허나 그는 외계인의 글씨가 아닌 한
자의 일종인 전서체(篆書體)로 쓰인 '退藏(퇴장, 스스로 물러나 숨는다)'이란 글씨로 조선 전
기에 판교종사<判敎宗師, 불교 교종(敎宗)의 우두머리>를 지낸 운수의 낙관으로 추정될 뿐 확
실한 것은 없다.


▲  삼성각 맞은편 낭떠러지 위에 중생들이 쌓아올린 조그만 돌탑들이
그들의 소망을 머금으며 조촐하게 보금자리를 이룬다. 이곳은
막다른 바위로 바로 밑이 벼랑이니 조심하기 바란다.


▲  삼성각 북쪽 벼랑

▲  삼성각에서 바라본 계단 밑부분과 청련암

이렇게 1시간 동안 사인암과 청련암 세트를 둘러보고 정든 단양 땅에서 퇴장하여 경북 문경 땅
으로 넘어갔다. 처음에는 예천 명봉사(鳴鳳寺)에 가려고 했으나 전날부터 여러 곳의 절을 들린
상태라 후배는 다른 데로 가자고 정색을 한다. (절을 좋아하는 후배임)
그래서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가 천하의 마지막 주막으로 명성이 높은 예천 삼강주막(三江酒幕)
을 둘러보고 속리산 동쪽 자락에 안긴 여러 폭포를 탐방하기로 했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흔쾌히 소개하도록 하겠다.


※ 단양 사인암 찾아가기 (2017년 8월 기준)

① 단양까지
* 동서울터미널에서 단양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 청량리역에서 단양행 열차가 1일 8~9회 떠난다. (양평, 원주 경유)
* 안산, 원주, 청주, 영주, 안동, 대구(북부)에서 단양행 직행버스 이용
* 부산 부전역, 태화강역, 경주역, 영천역,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중앙선 무궁화호 열차 이용
* 대전역, 오송역, 청주역에서 영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1일 2회 운행)

② 현지 교통

* 단양시외터미널 건너편이나 부근 고수대교 종점, 단양역 입구(단양역3거리 북쪽)에서 사인암
  방면 군내버스 이용 (1일 14회 운행, 대강 경유)

③ 승용차 (주차장 있음)

* 중앙고속도로 → 단양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장림4거리에서 좌회전 → 사인암(청련암)


* 사인암 소재지 -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인암리 산27 (청련암 ☎ 043-422-1330)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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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7년 8월 7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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