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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6.01 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 고려대에 둘러싸인 도심 속의 고즈넉한 절집, 안암동 개운사
  2. 2017.05.30 고려대 뒤쪽에 묻힌 작고 고즈넉한 절집, 귀티가 넘치는 오래된 보살상과 마애불을 간직한 안암동 보타사 (개운산)

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 고려대에 둘러싸인 도심 속의 고즈넉한 절집, 안암동 개운사


' 도심 속에 자리한 고즈넉한 사찰 ~ 안암동 개운사 '

▲  개운사 대웅전 뜨락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의 아침은 밝아왔다.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초파일 절 투어 코스를 근사하게 닦은 다음, 오전 11시에 길을
나섰다.
이번 초파일에는 서울 동북부 지역(동대문구, 성북구, 노원구)의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현대 사찰 등 여러 곳을 둘러보았는데 초파일의 꿀재미인 공양밥과 후식도 배불리
챙겨먹으며 정신없이 신나게 절투어를 즐기니 어느덧 안암동(安岩洞)에 있는 개운사에 이
르렀다. (먹는 재미 때문에 초파일 절투어를 벌이는 것은 절대로 아님;;;)

개운사는 정말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같은 서울 하늘을 이고 있음에도 인연이 참 지지리
도 없던 절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역사가 짧거나 없는 듯 자리한 것도 아니다. 엄연히 서
울에 이름난 고찰이자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한 절로 일주문부터 사람들로 봐글봐글하다.


 

♠  조선 초기에 창건된 도심 속의 사찰, 우리나라 불교 교육의
중심지로 명성을 날렸던 ~ 개운산 개운사(開運山 開運寺)

개운산<안암산(安岩山)> 남쪽 끝에는 서울의 주요 고찰(古刹)의 하나인 개운사가 고즈넉하게
자리해 있다. 안암동로터리에서 개운사로 이어지는 길(개운사길)은 고려대를 낀 서울의 주요
대학가로 학생과 청춘들로 늘 마를 날이 없는 번잡한 곳이다. 예전에는 개운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城北川)으로 흐르던 개천을 옆에 끼고 있었으나 그 졸졸졸~♪ 소리도 듣지 못하게끔
말끔히 봉인해버렸고, 고려대가 개운산과 개운사 사이를 끊고 건물을 지으면서 겨우 가늘게
개운산을 붙잡고 있다.

고려대와 주택가의 확장으로 절의 북쪽과 서쪽은 고려대에 감싸여있고, 남쪽과 동쪽은 주택들
이 빼곡히 자리를 채웠다. 허나 그 동쪽도 얼마 안간 보타사부터 고려대에 막히니 자연히 3면
이 고려대에 포위된 꼴이다. 게다가 절 주변은 하숙집과 고시원, 식당, 술집, 피시방, 갖은
편의시설이 즐비해 고요함을 추구하는 절과는 너무 맞지가 않다. 완전 절과 밖이 180도 딴 세
상인 것이다.
허나 경내 주변에 나무가 그런데로 무성해 바깥과는 그런데로 다른 색채를 보인다. 그리고 경
내로 들어서면 여기가 대학가의 한복판이 맞는지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도로 나름 고즈넉한 분
위기를 자아내며, 속세의 소음은 절을 둘러싼 나무들과 풍경 물고기가 모두 우걱우걱 씹어먹
는다.

그럼 개운사는 언제 법등(法燈)을 켰을까?
개운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1396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동대문 밖 5리 정도 되는 지금의 고려대 이공대학과 대광아파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영도사(
永導寺)라 했다고 전한다. 허나 창건 이후 400년 가까이 적당한 사적을 남기지 못해 창건 시
기가 썩 개운치가 않다.
과연 무학이 세웠는지는 개운하게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인근에 쟁쟁한 절(보문사, 미타사, 청
룡사, 연화사 등)이 적지 않아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세가 신통치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1779년 절은 강제로 개운산 남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정조(正祖)의 후
궁인 원빈(元嬪) 홍씨<홍국영(洪國榮)의 누이>의 묘역, 명인원(明仁園>을 바로 절 옆에 잡았
기 때문이다. 하여 인파당 축홍(仁波堂 竺洪)은 절을 옮겼다. (또는 1730년에 이전했다고 함)

절 이름이 언제 개운사로 바뀌었는지는 역시나 개운치가 않다. 인파당이 절을 옮기면서 이름
을 갈았다는 설도 있고, 고종(高宗)이 어린 시절 영도사의 도문 처소에서 잠시 양육된 적이
있었는데, 그가 1863년 왕위에 오르자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에서 개운사로 고쳤
다는 설도 있다.
1870년 송담 수훈이 지장탱, 시왕탱, 사자탱 등을 봉안했고, 1873년에 명부전(冥府殿)을 중건
했다. 1880년에 이벽송(李碧松)이 대웅전을 중건했으며, 1883년 불상 2개를 개금하고 감로탱,
팔상도, 신중탱, 산신탱 등을 봉안했다. 그리고 1885년에 아산에서 1712년에 제작된 범종 1구
를 가져왔는데 1935년에 왜정(倭政)이 국방 헌납을 이유로 강탈해 갔다.

1912년 왜정이 사찰령(寺刹令)을 시행하자 봉은사(奉恩寺)의 수반말사(首班末寺)가 되었고 김
현암(金玄庵)이 제1대 주지로 부임했다. 1913년 조선 황실 소유의 산림 4정 6반보를 사찰 소
유로 등록했으며, 1926년 김동봉(金東峰)이 강원(講院)을 개설하면서 불교 개혁 및 교육의 근
원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
1929년에 권범운(權梵雲) 등이 독성전을 중건했고, 1932년 이벽봉(李碧峰)이 노전을 지었으며,
한때 태고종(太古宗) 소속으로 1955년 대처승(帶妻僧) 주최로 전국포교사대회가 열리기도 했
다. 허나 이후 조계종으로 갈아탔고, 조계종 종정(宗正)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총무원(總務院)
간판까지 달았다. 또한 1981년 중앙승가대학을 경내로 이전해 오랫동안 불교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중앙승가대학은 경기도 김포시에 가 있음)

넓은 경내에는 1993년에 새로 지은 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 명부전, 미타전, 종각, 선방, 중
앙승가대학 건물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다. 이중 선방은 수도권에서 제법 큰 규모
를 자랑한다.
허나 절 건물은 죄다 근래에 손질되거나 새로 지어진 것이라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고색(
古色)의 농도는 매우 얇은 실정이다. 하지만 겉과 달리 속은 오래 숙성된 문화유산이 풍부하
여 절의 오랜 내력을 그런데로 가늠케 해준다. 비록 다른 곳에서 가져오긴 했지만 보물로 지
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발원문을 비롯해 지방문화재인 감로도와 신중도, 팔상도, 지장시
왕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일괄 등 보물 1점, 지방문화재 5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1879
년에 제작된 괘불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동쪽에 대원암과 보타사가 있다. 대원암(大圓庵)은 구한말과 왜정 때 활약했던
고승 박한영(朴漢永)이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해 불교계 석학을 배출했던 현장이며, 보타사(普
陀寺)는 옛 칠성암(七星庵)으로 승가대학 숙소로 사용된 것을 절로 바꾼 것이다. 이곳에는 국
가 보물로 지정된 하얀 피부의 마애보살좌상과 고운 자태의 금동보살좌상이 있으니 꼭 둘러보
기 권한다.


▲  개운사 일주문(一柱門) (2014년)

개운사에 이르면 제일 먼저 장대한 모습의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문짝도 없는 열린 모습으로
어느 누구든 가리지 않고 초파일 향연의 장으로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문의 머리인 맞배
지붕이 너무 육중해 문 기둥이 애처롭게 보일 정도이다.
지붕과 평방(平枋) 사이에는 금색으로 쓰여진 개운사 현판이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으며,
문 좌우로 절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돌담이 빙 둘러져 속세의 기운을 경계한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넓게 닦여진 주차장이 펼쳐지는데 그 너머 북쪽 언덕에 선방과 종각, 나무
로 경내를 꽁꽁 가린 개운사가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일주문 안쪽 동쪽에는 비석들이 옹기종
기 모여있으며, 주차장 서쪽에는 중앙승가대학으로 쓰였던 정진관이 있다. (공양간은 정진관
옆 건물에 있음)


▲ 개운사의 20세기 역사를 머금고 있는 비석들
지붕돌을 지닌 비석부터 대머리 비석까지 10여 기의 비석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들은 왜정과 20세기 중/후반에 세워진 공덕비와 기념비로 가장 이른 것은
1931년에 지어진 승려 경허의 공덕비이다.

▲  개운사 석조관음보살입상

주차장을 지나 가운데 계단을 오르면 날씬한 자태의 관음보살입상이 나온다. 이 석불은 20세
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얼굴 주변에 검은 때가 조금 피어있어 약간 고색이 느껴진다.
두 손으로 감로수가 담긴 정병(政柄)을 꼭 쥐어들고 있어 그가 관음보살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에 잠긴 모습으로 대학가로 떠들썩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주변에
는 연등이 가득 매달려 그의 임시 광배(光背) 역할을 한다.

             ◀  개운사 3층석탑
관음보살입상 바로 옆에는 잘생긴 3층석탑 1기
가 자리해 있다.
개운사의 유일한 석탑으로 20세기 후반에 조성
되었는데 반듯한 바닥돌과 2중의 기단(基壇),
3층 탑신(塔身), 머리장식을 두루 갖추어 안정
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보통 탑은 법당 앞에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무
슨 사연인지 경내 외곽에 두었다.


▲  경내로 인도하는 오르막 길 (종각 남쪽)
오색 연등이 허공을 메우며 초파일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  범종(梵鍾)을 품은 종각과 연등으로 뒤덮힌 선방 옆길
일주문과 주차장에서 경내로 들어서려면 반드시 선방 옆구리를 지나야 된다.

▲  2층 규모의 선방(禪房)

선방 옆구리를 오르면 대웅전과 선방, 명부전, 미타전에 감싸인 대웅전 뜨락에 이른다. 뜨락
에는 영가(靈駕)들을 위한 하얀 연등이 추가되어 6색 연등이 하늘과 땅을 가르고 있는데, 뜨
락을 기준으로 남쪽에 대방이라 불리는 선방이 장대한 덩치로 남쪽을 굽어본다.
선방은 1921년에 중창된 것으로 20세기 후반에 지금의 모습으로 크게 지어졌다. 밑층에는 종
무소 등이 들어있으며, 윗층은 선방으로 이 땅에서 가장 큰 선방으로 꼽히는데, 한참 개운사
가 교육과 불교 개혁에 나섰을 때, 선방은 그 공간으로 분주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선방 앞에는 중생들에게 떡과 수박, 커피, 녹차 등을 제공하는 공간을 두어 초파일의 훈훈한
인심을 보여주었다. 이곳에서도 공양밥을 먹으려고 했으나 절 도착 직전(16시)에 그만 마감이
되버려 꿩 대신 닭으로 간단히 떡과 수박을 섭취하였다.


▲  연등이 하늘을 훔친 대웅전 뜨락
연등의 두터운 물결 앞에 그 장대한 대웅전도 눈치를 살살 보며 간신히 그 일부만
드러내 보이니 그 모습이 마치 구름 위에 자리한 하늘 세계의 궁궐 같다.

▲  관불(灌佛) 의식의 현장과 깨알 같은 복전함들

대웅전 계단 앞에는 초파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어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
된 관정대(灌頂臺)에 서서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다른 절의 아기부처상은 그래도 키
가 좀 있으나 여기는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것보다 훨씬 작다.

사람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아줌마 신도의 도움과 권유를 받으며 나무 바가지에 물을 가
득 담아 아기부처의 머리에 물을 껴얹은 관불(관정)의식을 행한다. 날이 날인지라 나도 그 의
식에 동참해 그를 냉수마찰을 시켜주니 물을 맞은 그의 표정이 잠시 환해진 듯 보였다. 하지
만 저녁이 오고 신나던 초파일이 저물면 아기부처는 강제로 어두컴컴한 창고로 돌아가 내년을
고대해야 된다. 이렇게 1년 만에 나온 외출이니 그의 희열(喜悅)은 대단할 수 밖에...


 

♠  개운사의 보물창고, 미타전(彌陀殿)과 대웅전(大雄殿)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미타전

대웅전 뜨락 동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미타전이 자리해 있다. 미타전
의 주인장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로 절의 제일 보물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이 홀로 봉안되어 있다. 그는 원래 명부전에 얹혀 살았으나 1995년 몸 속에서 온갖 진귀한 보
물이 쏟아져 나오자 지금의 미타전을 손질해 그의 전용 공간으로 삼았다.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보물 1649호

서방정토가 있다는 서쪽을 바라보고 앉은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나무를 조각하여 금색으로 도
금을 입힌 것으로 높이 118cm, 무릎 너비는 92cm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근래 조성된 것처럼 젊어 보이나 그런 겉모습과 달리 고려 후기에 조성
된 나이 지긋한 불상으로 개운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특히 1995년에 그의 몸 속에서
발원문을 비롯한 고려시대 문서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면서 그의 오랫동안 숨겨졌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가치도 몇 곱절이나 높아졌다.

우선 불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는 검은색으로 꼽슬인 나발이며, 머리 정상에 무견정상(無
見頂相, 육계)이 두툼히 솟아있다. 이마에는 하얀 백호가 찍혀있고,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
러져 있으며, 눈은 지그시 떠서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작고, 입술은 붉으며, 검은 수염이 얕
게 표현되었는데,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살이 있어 보이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중생
의 고충에 귀만 기울인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손은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나인 하품
중생인(下品中生印)의 변형을 짓고 있으니 이는 화성 봉림사(鳳林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물 980호
) 등 고려 후기 아미타불 수인과 비슷하다.

개운사에서 마련한 목조 대좌(臺座)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데, 체격이 당당해 보이
며,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려 발바닥을 드러낸 이른바 길상좌(吉祥坐)를 취하고 있어 눈
길을 끈다.
불상의 몸을 가린 법의(法衣)는 통견의(通肩衣)로 신라시대 법의보다 두터워 보이며, 옷 주름
은 그럴싸하게 접혀 있다. 양쪽 어깨를 옷으로 가리고 가슴 부분은 드러냈는데, 가슴 밑에 표
현된 승각기는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띠 매듭이 없다. 이런 형태는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
여래좌상과 서산 개심사(開心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1619호), 서울 수국사(守國寺) 목
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1580호, ☞ 관련글 보러가기)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착의법과 주름이
거의 일치한다.
이 불상은 이렇게 단엄(端嚴)한 상호와 세련된 조각 기법, 장중하면서도 균형감 있는 조형 감
각, 긴장감 넘치는 선묘(線描), 보존 상태 양호로 완성도 높은 고려 후기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가 순도 100% 고려 후기 불상임이 밝혀진 것은 바로 그의 몸 속에서 나온 유물들 덕
분이다.


▲  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서 나온 중간대사 원문 (문화재청 사진)

불상 뱃속에서는 3장의 귀중한 발원문(發願文)이 나왔다. 이중 '중간대사 원문(中幹大師 願文
)'은 1274년에 작성된 아미타여래좌상 개금(改金) 발원문으로 문서의 크기는 '54x56cm'이다.
이 문서는 1274년에 아산 축봉사(竺鳳寺)에 있던 본 불상을 개금하면서 남긴 것인데, 이를 통
해 불상의 원래 위치를 알려주고 있으며, 그의 조성 시기는 늦어도 1273~1274년, 이르면 13세
기 초/중반임을 귀뜀해 준다. (1274년 이전에 제작됨)
특히 이 땅에 남아있는 고려 후기 불상 중 가장 오래된 중수원문(重修願文)으로 개심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중수원문(1280년)보다 6년이나 빠르며 13세기 불상이 거의 없는 현실에서 더
욱 가치를 발한다.

그리고 '최춘 원문(崔椿 願文)'은 금불복장조성 발원문으로 '56x55.5cm' 크기이며, '천정 혜
흥 원문(天正 惠興 願文)'은 불상을 개금하면서 작성한 10종의 대원(大願)을 담은 발원문으로
'37x220cm' 크기인데 이들 2장은 1322년에 작성되었다. 현재 중간대사 원문을 비롯한 발원문
3장은 신변 보호를 위해 조계사 옆에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에 가 있으며,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과 발원문 3장은 한 덩어리로 보물 1649호로 지정되었다.

발원문 외에도 전적(典籍)류 28점, 문서 13점도 발견되었다. 불상 뱃속에 나온 유물을 복장유
물(腹臟遺物)이라 부르는데, 1995년 아미타여래좌상이 있던 명부전에 정신 나간 도둑이 들어
와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의 절반 정도를 훔쳐갔으며 아미타여래좌상 뱃속까지 손을 대어 사리
장치가 든 후령통(候鈴筒)까지 가져갔다. 이로 인해 본의 아니게 불상의 뱃속이 강제로 개방
된 것이다. 이때 개방된 뱃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오래된 경판(經板) 15점, 옛 사경(寫經) 7
점, 조선시대 목판본 불서(佛書) 6책, 다라니 8종, 탁본 1점, 족자 1점, 그리고 발원문 3점
등 총 41건 58점이 빛을 보았다. 실로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전적 28점 중 22점은 9세기부터 13세기에 간행된 오래된 경전이고, 나머지 4종 6책은 조선 때
간행된 목판본이다. 오래된 22점 가운데 목판본 도장(道藏)인 '영보경(靈寶經)'과 필사본 '보
살보행경(菩薩本行經)'을 제외하고 모두 대방광불화엄경으로 지금까지 수습된 단일 불상의 복
장유물 가운데 가장 수량이 많다.
이들 유물을 통해 1274년 개금 이후 4번 이상 중수를 벌였음이 밝혀졌으며, 신라 후기부터 고
려시대를 거쳐 조선까지 다양한 시대의 불경과 문서들이 들어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신라 후기와 고려 초에 간행된 불경들은 그 수량이 매우 적은 상태로 그 부족분을
채워줄 수 있는 귀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발원문과 별도로 전적류 21점은 '개운사 목조아미타
여래좌상 복장 전적
'이란 이름으로 보물 1650호로 지정되었다. 이들은 현재 발원문을 따라 불
교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그리고 나머지 16건 33종은 별도로 '개운사 목 아미타불좌상 복장일괄'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
방유형문화재 291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원래 복장유물 전체가 이 등급에 있었으나 2010년
4월에 발원문과 전적 21점을 따로 떼어내 보물로 지정하면서 3개의 다른 이름과 등급을 지니
게 된 것이다. 그만큼 이 불상과 불상 뱃속에서 튀어나온 유물이 유별나고 대단하기 때문이다.
현재 지방문화재 복장 유물은 개운사와 불교중앙박물관에 있으며, 아쉽게도 복장유물 어느 것
도 만나지 못했다. 보존 관리상 개방을 거의 안하기 때문이다.


▲  초파일이 준 고마운 선물, 개운사 괘불(掛佛)

대웅전 뜨락에는 아기부처상 외에도 매우 보기가 힘든 괘불까지 왕림을 하여 나를 무척 들뜨
게 하였다. 그렇다면 괘불이 도대체 무엇이건데 나를 그렇게 기쁘게 했을까?
괘불은 조선 중기부터 등장하는 커다란 불화(佛畵)로 초파일과 절의 주요 행사일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왠만한 운으로도 만나기가 어려우며 그나마 만날 확률이 높은
날이 초파일이다. 내가 평소에도 많은 오래된 절을 돌아다님에도 초파일에 무조건 절 답사에
나서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레어템<raretem, rare(희귀한)+item(물건)의 합성어>인 괘불을
보고자 함이다.
허나 초파일이라고 100% 외출을 하진 않는다. 이번 초파일에 4곳의 절집을 갔지만 겨우 개운
사에서만 괘불을 봤을 뿐이다. 확률로 따지면 1년에 정말 1번 정도 보는 꼴이다. 그러니 괘불
을 만났다면 꼭 복권을 사기 바란다. 레어템 중의 초레어템을 만났으니 말이다. (당첨은 장담
못함)

개운사 괘불은 1879년에 제작된 것으로 석가불과 지장보살, 나한(羅漢) 등이 그려져 있다. 저
녁이 다가옴에 따라 그 큰 그림이 절반 정도 둘둘 말려져 있는데 괘불 밑에는 그의 거처인 길
쭉한 괘불함이 입을 벌리며 그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괘불은 그리 들어가고 싶은
눈치는 아닌 것 같다. 함에 들어가면 긴 시간을 갇혀 지내야되기 때문이다. 괘불 앞에는 중생
이 진상한 과일과 떡이 놓여져 있고 복전함이 무려 2개씩이나 설치되어 적지 않게 옥의 티를
선사한다.


▲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본 괘불의 뒷모습
붉은 색의 문자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  개운사 대웅전

개운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1993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
다. 2006년에 단청 불사를 했으며, 선방 다음으로 큰 건물(정진관 등의 현대식 건물은 제외)
로 뜨락보다 3~4m 정도 높게 석축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다진 탓에 무척 우람해 보인다. 건
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후불탱화, 팔상도 등의 여러 그림이 깃들여져 있는데, 이중 팔상도
와 신중도, 현왕도, 지장시왕도는 지방문화재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그림이 봉안된 위치
는 변경될 수 있음)


▲  대웅전 가운데 칸에서 굽어본 뜨락과 관불의식의 현장
개운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채운 연등이 저 밑에 보이니 마치 오색 구름 위에
올라선 기분이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화
조그만 석가불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그 앞에는 불단이 무너질 정도로 온갖 음식과 과일들이 진상되어 있다.

▲  개운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2호

감로도는 물과 육지에서 방황하는 영혼과 아귀(餓鬼)를 위로하고자 부처의 법을 강론하고 음
식을 베푸는 수륙재(水陸齋)를 위한 그림이다.
신중도 이상만큼이나 등장 인물이 많고 무대가 넓어서 복잡하기 그지 없는데 그림 상단에는 7
명의 여래(如來)와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를 배치했고, 하단에
는 의식 장면과 아귀상, 지옥상, 윤회하는 중생도 등 6도중생이 담겨져 있다. 산수와 구름으
로 적절히 경계를 그었고, 다채로운 모습의 인물들과 적/녹/청/황/백색이 어우러진 색감과 안
정적인 필치(筆致), 충실한 풍속 묘사 등이 돋보인다.

이 그림은 1883년에 조성되었으며, 원래가 영가(靈駕)를 위한 그림이라 그 앞에는 죽은 이들
의 위패와 영정이 가득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개운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3호

대웅전 동쪽 벽에는 법당 수호용으로 걸린 신중도가 걸려있다. 신중도란 불법(佛法)을 수호하
는 신들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많아 그야말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그림 중
앙에는 제석천(帝釋天)과 천룡(天龍) 등이 자리해 있고, 그 주위로 무장을 한 신들이 배치되
어 있는데 1870년에 제작된 것으로 액자 안에 소중히 담겨져 있다.


▲  개운사 팔상도(八相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4호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출생부터 열반까지 8개의 그림으로 정리한 것으로 1883년에 조성되
었다. 그림의 보호를 위해 액자 안에 담겨 있으며, 각 부분에 대한 설명은 쿨하게 생략한다.


▲  개운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5호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저승
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멤버들이 담겨진 것으로 1870년에 제작되었다. 지장보살
밑에는 동자 2명이 그의 육환장(六環杖)과 두건을 들며 서로를 바라본다.


 

♠  개운사 마무리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뜨락 서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지닌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지장보
살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저승의 시왕(10왕), 금강역사(金剛力士) 등이 봉안되
어 있는데, 1995년에 도둑이 침투해 잠시 쑥대밭이 되었던 우울한 현장이기도 하다. 이때 지
장보살상과 시왕상의 절반, 그리고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후령통 등이 사라졌다.
이후 지장보살상과 없어진 시왕상 등을 다시 만들어 채웠고 뱃속이 열린 아미타여래좌상을 미
타전으로 옮겼으며, 뱃속 유물은 불교중앙박물관으로 가져가 정밀 연구를 벌여 그 정체를 밝
혔다.


▲ 지장보살상과 지장후불탱(지장시왕도)
1995년 이후에 새로 만든 지장보살상 뒤쪽에는 고색이 물오른 지장후불탱이 걸려있다.
이 그림은 19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명부전 식구를 그림에 옮겨 놓은 것이다.

▲  모습도 제각각인 시왕상과 시왕탱
시왕상 뒷쪽에 걸린 시왕탱 4점은 1870년에 제작된 것이다.

▲  개운사만의 특별한 초파일 이벤트, 부처되기 포토존
저 앞에 앉아 포즈를 취해보자. 그러면 누구든 부처가 된다. (물론 무늬만~~~) 광배
부분을 더 그럴싸하게 만들었으면 실감이 좀 컸을 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삼성각(三聖閣)

명부전에서 북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삼성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아 있는데, 특이하게도 각 칸마다 다른 이름의 현
판을 내걸고 있다. 가운데 칸은 칠성(七星, 치성광여래)의 공간인 금륜전(金輪殿)으로 특별히
전(殿)으로 대우했으며, 서쪽은 산신(山神)의 공간인 산령각(山靈閣), 동쪽은 독성(獨聖, 나
반존자)의 공간으로 그가 몸을 일으킨 천태산(天台山)의 이름을 따서 천태각(天台閣)이라 했
다. 허나 각 칸마다 이름만 달리 했을 뿐, 하나의 삼성각으로 봐도 무관하다.

이 건물은 1929년에 중건했는데, 처음에는 독성각(獨聖閣)이라 불렸으며, 이후 산신과 칠성이
추가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  독성상과 독성탱
독성탱은 1930년에 제작된 것으로 붉은 계통의 옷을 입은 독성 할배와 문관(文官),
승려, 천태산, 소나무, 폭포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림 앞에는 머리가 유난히도
큰 독성 할배상이 지팡이를 들고 앉아있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돋보이는 산신상과 산신탱

그림에 윤기가 나는 것을 보니 아마도 20세기 후반에 제작된 듯 싶다. 그림 중앙에는 붉은 옷
을 입은 산신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고, 그 좌우로 귀엽기 그지 없는 모습의 호랑이
와 동자가 있으며, 그들 뒤로 산과 소나무, 폭포 등이 그려져 산신탱의 기본 요소는 모두 갖
추고 있다. 그리고 산신탱 앞에는 호랑이를 탄 산신 할배상이 별도로 닦여져 있다.


▲  그림만 홀로 있는 칠성탱

칠성탱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 칠성
불(七星佛), 칠원성군(七元星君), 노인성(老人星), 삼성(三星) 등 칠성의 주요 식구들이 복잡
하게 담겨져 있다.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이 땅의 토속 신앙으로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어엿하게 불교의 일원이 되면서 그를 봉안하지 않은 절이 거의 없을 정
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아무래도 인간의 수명을 관리하는 존재다보니)

삼성각을 끝으로 약 1시간 반 가량 이루어진 개운사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곳에 깃든 문
화유산은 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을 제외하고 모두 눈과 사진에 담았고, 거기에 생각치도 못
했던 괘불까지 친견하면서 당초 계획했던 볼거리를 100% 초과 달성했다.
이렇게 개운사를 배부르게 둘러보고 동쪽에 자리한 보타사로 이동했다. 주차장 동쪽으로 나있
는 문을 이용해 3분 정도 들어가면 그 골목길의 끝에 보타사 정문이 나온다. 아쉽지만 본글은
여기서 끝~~~ 보타사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안암동 개운사 찾아가기 (2018년 5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안암역 2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면 바로 안암역교차로이다. 교차
  로에서 북쪽 길(개운사길)로 3~4분 정도 가면 일주문이 나오며 그 문을 들어서면 개운사 경
  내이다.
* 서울시내버스 273, 1111, 2115번을 타고 안암역에서 하차하여 도보 5분 (2115번 서경대 방
  향은 개운사입구에서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산4-11 (개운사길 73 ☎ 02-926-4069
* 개운사 홈페이지는 아래 연등길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개운사를 뒤로하며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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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5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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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뒤쪽에 묻힌 작고 고즈넉한 절집, 귀티가 넘치는 오래된 보살상과 마애불을 간직한 안암동 보타사 (개운산)


' 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 서울 개운산 보타사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의 아침은 밝아왔다. 설레는 마음
을 진정시키며 서울 장안을 중심으로 절 투어 코스를 아름답게 짠 다음, 초파일 오전 길
을 나섰다.

우선 청량리 뒷쪽 회기동(回基洞)에 자리한 연화사(蓮華寺)와 월계동(月溪洞)에 있는 기
원사(祈願寺, ☞ 관련글 보러가기)를 찾아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탱화를 말끔히 챙겨보
고 초파일의 꿀재미인 공양밥과 떡도 든든히 챙겨 먹었다. (너무 배불리 먹어서 며칠 동
안 밥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음) 그런 다음 안암동 개운사(開運寺)로 이동하여 그곳을
둘러보고 그 부근에 자리한 보타사로 넘어갔다.

보타사는 개운사에서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구석진 숲속에 묻혀 있는데 나와 같은 서
울 하늘 밑에 있음에도 10여 년 전에 딱 1번 가본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이번에 억지로
인연을 갖다 붙여 그곳을 다시 찾았다. <그곳에 깃든 마애보살좌상과 금동보살좌상이 국
가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도 인연을 다시 이어붙이는데 크게 한몫했음>

개운사 주차장 동문을 나와 주택가를 지나면 그 골목길의 끝에 보타사 정문이 나오고 그
문을 들어서면 대원암이 가장 먼저 마중을 한다.


▲  활짝 열린 보타사 정문


 

♠  개운사의 부속 암자로 석전 박한영과 탄허가 주석했던 유서 깊은 현장
~ 안암동 대원암(大圓庵)

보타사 정문을 들어서면 양반가 기와집처럼 생긴 한옥이 제일 먼저 모습을 비춘다. 이곳이 초
행이라면 이것이 보타사인가 싶어 마음이 설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함정이며, 그의 정체
는 개운사의 부속암자인 대원암이다.
보타사를 가리고 앉은 대원암은 큰 기와집 1동이 거의 전부인 아주 단촐한 절로 암자(庵子)란
이름에 가장 충실한 규모를 하고 있는데, 그 옆에는 중앙승가대학 동문회 건물이 우뚝 자리하
여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대원암은 1845년 지봉선사(智峰禪師)가 창건했다. 그는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법명(法名
)은 우기(祐祈)이며, 효성이 깊고 인품이 넉넉했다고 한다. 북한산(삼각산) 도선사(道詵寺)에
서 인파당 축홍(仁波堂 竺洪)에게 사사하여 그의 법을 이어갔으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도 친분이 있어 그에게 판서(判書)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바로 그 연유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지봉판서라 불렀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개운사의 그늘에 가려진 암자이지만 20세기 큰 승려로 추앙 받는 석전 박한
<石顚 朴漢永, 법명은 정호, 영호>과 탄허(呑虛)가 주석하여 불교 교육과 역경사업을 벌였던
유서 깊은 현장이다.
박한영(1870~1948)은 근세 한국 불교 3대 강백(講伯)의 하나로 불교와 유교, 노장사상, 한시(
漢詩), 서법(書法) 등 이른바 유불선(儒佛仙)에 통달했던 당대 제일의 석학이다. 그 시절 제일
가는 지식인으로 손꼽혔던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조차도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것이 없
는데, 석전 선생한테는 물어볼 것이 있다'
며 그에게 만큼은 한 수 접어주었다. 고수가 고수를
알아본 것이다.

석전은 전북 완주(完州) 출신으로 19세에 전주 인근 위봉사(威鳳寺)에서 출가를 했다. 스승인
금산에게 '정호(鼎鎬)'란 법명을 받았으며, 26세에 순창 구암사에 들어가 설유의 법통을 받고
법명을 영호(暎湖)라 했다.
27세부터 법주사(法住寺)와 해인사(海印寺), 범어사(梵魚寺)에 들어가 강의를 했고, 선운사(禪
雲寺)의 큰 승려인 백파(白波)의 선맥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그의 호를 따 '석전'이라 했다. 석
전은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백파에게 우정의 뜻으로 선물한 호이다.

1910년 이후, 만해 한용운(韓龍雲)과 이 땅의 불교를 지키고자 노력을 기울였고,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조선 불교를 왜열도 조동종(曹洞宗)에 통합하려는 만행을 저지르려고 하자
이를 막았다. 1913년에는 불교잡지인 '해동불교(海東佛敎)'를 창간해 왜정(倭政)의 조선불교
왜식화(倭式化)를 강하게 비판하고 왜의 대한제국(大韓帝國) 강제 합방을 규탄했으며, 불교의
혁신을 강조했다. 그리고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큰 활약을
보였다.

1926년 대원암에 들어와 이곳의 조실(祖室)로 지내면서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해 불교 교육에 나
섰다. 그러자 승려 뿐 아니라 많은 문학가와 지식인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그의 가르침을 받았
는데, 그중에는 신석정(辛夕汀), 조지훈(趙芝薰), 뒷끝이 영 좋지 못했던 서정주(徐廷柱)와 이
광수(李光洙) 등이 있었다.
그중 왜정과 독재정권에 심하게 아부를 떨어 주옥 같은 작품을 무색케 하였던 서정주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서울중앙고보(중앙중고교)와 고창고보에서 퇴학을 당하여 방황하고 있었는데
그를 중앙불교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로 데려와 제자로 기른 이가 바로 석전이었다. 그 인연
으로 둘은 각별한 사이가 되었고 서정주는 그를 '내 뼈와 살을 데워준 스승~'이라 찬양하며 평
생 은혜를 갚지 못함을 아쉬워 했다고 한다. 하여 석전이 남긴 한시 130수를 한글로 번역해 그
원고를 가지고 있다가 2006년에 비로소 공개되었다. <석전은 서정주의 친일짓거리와 친독재행
위를 보며 지하에서 피눈물을 바가지로 흘렸을 것이다>

또한 그의 문하에는 20세기 중/후반 이 땅의 불교계를 이끈 운허와 지관 등 이름 높은 승려들
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우리나라 불교 학승(學僧)의 대부분이 그의 배움을 이어갈 만큼 불교계
의 큰 줄기를 형성했다.

1945년 이후, 조선불교 중앙총무원회 제1대 교정을 지냈고 1946년까지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
을 지냈다. 이후 정읍 내장사(內藏寺)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48년 열반에 들었다.
그는 많은 한시와 수필을 남겼는데, 최남선이 그의 작품을 '석전시초(石顚詩抄)','석림수필(石
林隨筆)','석림초(石林抄)' 등 9권의 책으로 정리했으며 수필도 500여 편이 남아있다.

▲  대원암 어칸(가운데 칸)과 현판

▲  조그만 석불과 탄허 역경(譯經) 기념비
(가운데), 그리고 석전 박한영 기념비


대원암을 거쳐간 2명의 큰 승려 중 마지막인 탄허(1913~1983)는 전북 만경(김제) 출신으로 원
래 이름은 김금택(金金宅)이다. 법명은 택성()이며, 최익현(崔益鉉)의 제자인 이극종에게
한학을 배워 도학에도 능했다.
15살에 도(道)에 대한 답을 얻고자 고승 한암(漢岩, 1876~1951)과 서신문답을 주고받았고, 그
인연으로 하여 1934년 한암이 머물던 오대산 상원사(上院寺)를 찾아가 출가하여 그의 열성 제
자가 되었다.

이후 월정사 조실과 연수원장을 지냈으며, 1964년부터 1971년까지 동국대 대학선원 원장을 지
냈고 1967년 조계종 중앙역경원 초대원장이 되어 대원암에 머물며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큰
임무를 완수하기도 했다.
그는 동양철학에도 해박하여 왜열도와 대만에서 화엄학 등을 강의했으며, 대만대학교에서 비교
종교에 대한 특강으로 세계적인 석학으로 찬양을 받았다. 말년에는 월정사(月精寺)에서 지내다
가 1983년 70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으며, 나라에서는 그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  숲속에 자리한 보타사와 주차장

대원암을 지나면 삼삼하게 닦여진 숲이 펼쳐진다. 이곳은 안암동(安岩洞) 주택가 바로 옆으로
녹음이 짙은 나무들로 완전 그늘을 이루고 있어 마치 첩첩한 산속의 암자나 신선의 산중(山中)
거처를 찾은 기분이다. 개운사에서 아주 잠깐 이동했을 뿐인데 주변 풍경화는 이렇게나 180도
달라졌다.

햇살도 거의 들어오기 힘든 그 숲속에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고 그 너머로 석
축을 쌓고 터를 다진 보타사가 마치 별장 같은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연등이나 보물 지정 경
축 현수막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과연 절집인지 고개 조차 갸우뚱했을 것이다.
주차장 옆에는 키도 제각각인 중창 송덕비와 사적비 등 비석 4기가 서 있고 그 옆에 아기자기
하게 꾸며진 반원(半圓) 모양의 작은 연못이 장차 다가올 연꽃의 향연을 숨죽여 준비한다.

▲  보타사 송덕비와 사적비

▲  계단 끝에 자리한 일주문

주차장에서 보타사로 인도하는 계단에는 고운 연등이 길게 드리워져 초파일 분위기를 한층 고
조시키고 있다. 그 계단을 올라서면 보타사 현판을 머금은 일주문(一柱門)이 중생을 맞이하는
데, 일주문이라고 하지만 그냥 주택 대문에 기와 지붕을 얹힌 모습이다.


▲  숲속 막다른 곳에 자리한 보타사


 

♠  개운산(開運山)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 겉은 작아도
보물급 문화유산을 2점이나 품은 실속파 절집 ~ 안암동 보타사(普陀寺)

▲  보타사 대웅전(大雄殿)

개운사 동쪽 그늘진 곳에 비구니 절인 보타사가 살포시 자리해 있다. 대원암과 더불어 개운사
의 부속 사찰로 경내가 숲에 완전히 감싸여 있어 바깥에서는 거의 보이질 않으며 나무들이 무
성해 속세의 온갖 기운과 소음을 거의 털어버린다. 그러다보니 늘 번잡한 안암동 대학가가 지
척임에도 고적하고 아늑한 산사(山寺)의 분위기가 진해 그야말로 매우 조용하다는 뜻의 '절간
답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보타사는 개운산(안암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서남쪽을 제외하면 모두가 막혀버린 궁
색한 곳으로 경내 동쪽과 남쪽은 고려대로 막혀있고, 북쪽은 벼랑으로 완전히 막혀 있으며 그
벼랑 윗쪽에 개운산의 남쪽 허리를 가르는 북악산로가 흘러가 차량의 소음이 조금씩 전해진다.
그리고 서쪽에는 고려대 안암학사가 있다.

이 절은 원래 20세기 중반 불교전문강원과 중앙승가대학의 기숙사로 출발했다. 허나 1911년 2
월 경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마애보살좌상 옆에 맞배지붕 건물이 보인다. 하여 개운사나 대원
암에서 마애불 관리를 위해 닦은 조그만 건물이 이전부터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기숙사 건물을 손질해 칠성암(七星庵)이란 간판을 내걸었고 1980년대에 보타사로 이름을
갈아 마애불과 금동보살좌상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으며 절을 꾸리고 있다.

처음에는 개운사의 부속 암자로 조용히 묻혀 지냈고, 마애불 또한 부근 사람만 찾아올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하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란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결국 세상에 그 모습
을 드러내게 된다.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가 서울에 숨겨진 문화유산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그
가 발견되었고, 단순히 오래된 존재로만 구전되어 오던 상태였으나 조사 결과 고려 후기에 조
성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듬해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고, 2014년에는 국가 보물로 흔쾌히
승진까지 했다. 또한 요사에 봉안된 금동보살좌상은 이 땅에 흔치 않은 유희좌(遊戱坐) 스타일
로 그도 서울 지방문화재로 있다가 2014년 3월 보물로 승진되어 같은 해에 무려 보물급 문화재
를 2개나 거느리게 되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요사, 선방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마애보살좌상과 금동보살좌
상 등의 빵빵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절이 매우 소소한 모습이라 눈에 별 부담 없이 살
필 수 있으며 숲에 묻힌 벼랑 밑도리로 깊은 산중에 들어선 기분을 들게 하여 이곳이 서울 한
복판임을 순간 잊게 한다. (현재 새 건물을 짓느라 경내가 좀 어수선함)


▲  대웅전 앞에 차려진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일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마애불과 벼랑이 있고, 오른쪽에는 새로 지은 선방(禪房), 왼쪽에는
대웅전과 요사가 자리해 있다.

대웅전 앞에는 초파일을 맞이하여 오랜만에 외출 나온 아기부처가 화사하게 꾸며진 꽃밭 가운
데에 서 있다. 바로 중생들에게 관불의식을 받고자 함이다. 하지만 절을 찾은 중생이 별로 없
다보니 관불 수요도 저조하여 거의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좀 있으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에
봉인되어 1년을 갇혀 지내야 되는데 저녁이 다가옴에 따라 사람들 발길도 줄어드니 아기부처와
돈을 좋아하는 불전함의 마음은 그저 타들어갈 뿐이다. 그들에게 초파일 해는 너무 짧다.
 
아기부처상 앞에는 파라솔을 지닌 동그란 탁자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누구든 먹을 수 있도
록 떡(절편)과 수박이 놓여져 절의 훈훈한 초파일 인심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들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비구니들이 바로 채워놓아 먹거리가 마르지를 않는다. 나도 떡과 수박을 수없이 집어
먹으며 이른 저녁 배를 채웠다.


▲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대웅전 석가불

보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불단(佛壇)에는 금색 찬란한 석가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근래에 조성되어 피부가 아
주 탱탱하며, 변색된 부분이 없는 순 100% 금동색으로 그의 광배(光背)는 마치 이글이글 타오
르는 모습 같다.
볼살이 많아 보이는 그의 온후한 표정에는 미소가 깃들여져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그
뒤에는 그 흔한 후불탱을 두지 않고 환하게 창문을 내어 마애보살좌상이 보이게끔 하였다. 그
러니까 마애불이 일종의 후불탱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불상 앞에는 중생들이 진상한 과일과 꽃, 쌀로 상에 금이 갈 지경이며, 건물 좌측 벽에는 석가
의 설법 장면을 담은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와 법당 수호용인 신중도(神衆圖)가 걸려있다. 이
들은 20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피지 못했다.


▲  온갖 호법신(護法神)들이 그려진 신중도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위태천(韋太天) 등 온갖 호법신들이
복잡하게 담겨져 그야말로 정신을 다 빼놓는다.

▲  후불탱의 황금 자리를 버리고 옆으로 비켜 선 영산회상도

◀  경내 좌측에 자리한 선방과 쉼터
선방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전통 찻집이나
여염집 한옥 같은 분위기이다. 그 앞에는
탁자와 의자를 두어 녹차 등을
제공하고 있었다.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8호

대웅전 뒷쪽 벼랑에는 보타사의 2대 꿀단지의 하나인 마애보살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마애불(
磨崖佛)이 고된 몸을 기댄 화강암 벼랑은 거의 80~85도 각도로 그 윗쪽에는 암벽이 눈썹바위
마냥 앞으로 짙게 튀어나와 자연산 모자나 보개(寶蓋)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 그 윗쪽에는
개운산의 남쪽 허리를 가르는 2차선 북악산로가 닦여져 있어 차량 소리가 가늘게 들려온다.

이 마애불은 오랫동안 개운산의 은자(隱者)로 이곳에 살짝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에 의해 강제로 발견되었다. 어떤 자료에는 발굴했다고도 하는데 그는 이미 바
깥에 노출된 상태였으므로 발견이 맞을 것이다. 서울 굴지의 오래된 절인 개운사가 바로 지척
이고 그 그늘에 조그만 것도 아닌 커다란 마애불이 수백 년을 숨어왔으니 그의 숨바꼭질 실력
은 참으로 대단하다.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발견된 이듬해(1993년)에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89호로 지정
되었으며, 2014년 3월 경내에 있는 금동보살좌상이 보물로 지정되자 그 여세를 몰아 그해 7월
보물로 승진되었다.

마애불의 높이는 대략 5m, 폭은 4.3m로 감정 결과 고려 후기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그 생
김새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는 홍은동 옥천암(玉泉庵) 마애보살좌상(보도각 백불)을 너무나
닮았다. 보관(寶冠)은 좀 틀리지만 얼굴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하얀 피부까지 옥천암의 그것과
다소 비슷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옥천암 마애불 역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같은 사람이 조성하거나 모방하여 만들
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며, 고려 후기 서울 변두리에서 아주 잠깐 나타났던 마애불 형식으로 진
정한 서울 스타일의 고려 마애불이다. 놀라운 것은 이런 마애불은 천하에서 서울에 딱 2곳 뿐
이라는 것이다.


▲  옆에서 바라본 마애보살좌상

마애불의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좌우로 관대(冠帶)가 나와있고
그 밑에 보관 장식이 늘어져 있다. 오른쪽 관대 밑에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긴 장식이 눈에
띈다. 하얀 얼굴은 약간 볼살이 있어 보이는데,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그 눈썹 사이에
백호가 찍혀 있으며, 검은 두 눈은 지그시 뜨고 있다. 코와 입은 좀 작은 편이며, 입술은 붉은
색이나 빛이 좀 바래있고 귀는 보관 장식에 가려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왼쪽 가슴을 가로지르는 스
카프 형태의 천의(天衣)가 밖으로 흘러나오도록 표현되어 있다. 왼쪽 팔은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표현되어 괴물 팔처럼 보이는데, 팔찌를 낀 왼손은 무릎 밑까지 내려와 있으며, 엄지와 3
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그리고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올려 엄지와 2번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옷 주름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고, 두 다리는 포개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으며 두 발은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마애보살좌상 옆에 새겨진 원패(圓牌)

마애불 어깨쪽 좌우에는 네모나게 구멍이 파여 있다. 이는 자연산 구멍이 아니라 불상을 지켜
주던 목조 건물이나 보호각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마애불에 대한 기록
이 부실하여 언제 지어지고 어떤 모습을 취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부족한 상상력을
꺼내본다면 옥천암 마애보살좌상(보도각 백불)처럼 앞으로 조금 튀어나온 형태가 아닐까 싶다.
마애불은 바로 그것을 갑옷으로 삼아 온전하게 남았고, 건물은 장대한 역사의 거친 흐름 속에
형편없이 녹아버려 이렇게 상처 만이 남았다.

불상 왼손 쪽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네모난 공간이 있는데, 이를 원패라고 부른다. 이 원패는
마애불 제작 당시<또는 조선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데, '南無金剛會上佛菩薩(나무금강회
상불보살)'이라 쓰여 있다. 원패란 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적어 불단 앞에 놓는 것으로 마애불
옆에 새겨진 점이 꽤 이채롭다.

현재 마애불은 하얀 피부의 백불이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하얗게 호분(胡粉, 여
자들이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하던 것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듬)이 칠해진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며 그로 인해 몇몇 부분은 확인이 어렵게 되었다. 참고로 그의 친척뻘인 옥천암 마
애보살좌상은 19세기에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가 호분을 칠했다고
전한다.

하나같이 거대하고 개성이 강한 수많은 석불과 마애불이 등장했던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마애불
로 그가 아무리 장대하다 한들, 초파일을 맞이하여 허공을 가득 수놓은 연등의 물결 앞에선 별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연등이 그 앞에 진하게 아른거려 제 모습을 담기가 어려웠다.

마애불의 밑도리와 팔에는 중생들이 무심히 얹혀놓은 동전들이 수북한데 가히 1만원은 넘을 것
이다. 저 돈이야 다 뻔한 데로 가겠지만 부디 속세의 어두운 구석을 위해 쓰기를 바란다. 그게
마애불의 지극한 뜻이자 그의 존재의 이유이다.


▲  마애보살좌상의 얼굴과 자연이 그에게 씌워준 자연산 돌모자
어깨 옆에 파인 홈은 지금은 전설이 되버린 보호각의 아련한 흔적이다.

▲  마애보살좌상의 아랫도리
오른쪽 발은 발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했으며, 왼쪽 발은 오른쪽 발에 가려져 있다.

▲  보타사 요사(선방)

대웅전 옆에는 여염집 모습의 요사가 자리해 있다. 선방과 종무소(宗務所)의 역할까지 도맡고
있는 건물로 예전에는 중앙승가대학 숙소로 사용되었는데, 저 안에 보타사의 나머지 꿀단지가
들어있으니 꼭 들어가보자. 다행히 절 사람들은 그것을 보여주는데 다소 호의적인 편이라 사진
촬영에도 흔쾌히 협조를 해준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면 종무소 공간이 나오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조그만
금동불이 봉안된 불단이 나올 것이다. 그 불상은 포즈도 참 특이한데, 그가 바로 마애보살좌상
과 더불어 보타사의 2대 꿀단지의 하나인 금동보살좌상이다. <현재 기존 건물을 부시고 새 건
물을 짓고 있음, 금동보살좌상의 거처도 임시로 변경된 상태, 친견 가능 여부는 절에 문의 요
망>


▲  유리막에 봉안된 금동보살좌상과 붉은 색채의 후불탱

▲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 보물 1818호

요사 불단에 봉안된 금동보살좌상은 이 땅에 흔한 불상이나 보살 스타일이 아니다. 오른쪽 다
리는 의자에 올려 무릎을 세웠고, 왼쪽 다리는 밑으로 내린 모습이기 때문이다. 딱 보면 아줌
마 스타일의 착석 방법과도 비슷한데, 불상(보살상)의 이런 포즈를 유희좌(遊戱座)라고 한다.

유희좌는 9세기 이후 북송(北宋)시대부터 생겨났으며, 이 땅에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중기
에 가뭄에 콩 나듯 조금씩 생겨났다. 그러다보니 매우 귀한 실정이라 그 가치는 대단할 수 밖
에 없다. 바로 그것이 현대 사찰 보타사에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보살상이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제자리가 어디였는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며, 보살상 또한 굳게 입을 다물며 진술을 거절한다. 아마도 이리저리 떠돌아다
니다가 중앙승가대학으로 흘러들어와 기숙사 불단에 봉안되었고, 이렇게 보타사의 마르지 않는
꿀샘이 되어 우리 앞에 자리해 있는 것이다.

앞서 마애보살좌상이 좀 남성적이라면 이 보살상은 여성적이다. 고품격과 미색(美色)이 느껴지
는 그의 정체는 딱 봐도 관음보살(觀音菩薩) 누님인데, 덩치는 조그만하고 머리에는 황제의 금
관을 유린시킬 정도로 장엄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칼이 조금 나와있다.
얼굴은 아리따운 여인네처럼 곱기 그지 없어 은근히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카메라도 그를 보
고 흥분을 했는지 셔터가 마구마구 눌러진다. 불상은 보통 당시 귀족이나 특정 인물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조성한 경우가 적지 않아서 아마도 이쁘장하게 생긴 젊은 귀족이나 중년층 여인을
모델로 삼은 듯 싶다.
그의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지그시 떠 있으며 코는 작고, 입술은 작지만 어여쁜 모
습이다. 볼에는 살이 조금 있어 보이며, 가슴에는 온갖 장식물을 달고 있다. 어깨에는 천의(天
衣)를 걸치고 있고 그 한 자락을 수직으로 늘어뜨렸는데, 이는 조선 초기 보살상에서 조금 등
장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그가 앉아있는 연화좌(蓮花座)는 보타사에서 마련한 것이라 오래된
것은 절대 아니다.


▲  유리막의 눈치를 피하고자 옆에서 담은
금동보살좌상의 위엄~~!


보살상의 예사롭지 않은 모습과 조그만 불상이 많이 등장하는 조선 초기 금동상 중에서 그나마
모가 큰 점으로 보아 조선 초 왕실이나 귀족에서 발원하여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비
록 고향은 잃었지만 건강 상태는 양호하며, 조선 초기 귀족적인 보살상의 형식을 보여주는 대
표적인 케이스이자 조선시대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2006년에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 216호
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3월 보물로 특진되었다.
이처럼 귀한 몸이니 보타사에서 유리막을 설치해 그에게 손도 되지 못하게끔 했는데, 어찌보면
유리 감옥에 갇혀있는 듯 답답하게 보이기도 한다. 허나 어찌하랴?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사처
럼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걸 바로 필요악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절 사람들이 별 거부감 없이 속세에 쿨하게 공개를 하고 있고 사진 촬영에도 호의적이
니 그것으로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보살상 뒤에는 붉은 색채로 이루어진 후불탱이 그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고, 불단 바닥도 순 빨
간색이라 주변이 너무 화사하다.


▲  금동보살좌상 보물지정서의 위엄
난생 처음으로 본 문화재 지정서, 문화재청이 금동보살좌상에게 달아준 일종의
훈장이다. 허나 그의 희소 가치를 본다면 저 정도 종이 문서와 보물 등급도
너무 부족해 보인다.

▲  연등의 배웅을 받으며 보타사를 떠나다 ~~

보타사를 정신없이 둘러보니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인근 개운사에서 18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고적한 이곳까지 울려 퍼진다. 그만큼 서로는 가까운 거리이다. 이제 햇님이 퇴근하고 어둠의
커텐이 내려오면 우두커니 하늘을 가리던 연등도 제몸을 불살라 어둠을 몰아내고 연등의 이름
값을 할 것이다.

정말 벌처럼 날라가 콩을 볶듯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초파일 하루, 많은 절을 답사하면서 공양
밥과 다양한 먹거리, 문화유산, 괘불(掛佛), 초파일 분위기를 마음껏 누렸다. 이날만큼은 왜이
리 해가 짧은지 퇴근 본능이 발동한 햇님을 계속 중천에 붙잡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목적한 바를 거의 이루며 하루를 정말 야무지고 알차게 보내 마음은 뿌듯하다. 이리하
여 보타사를 끝으로 초파일 절투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안암동 보타사 찾아가기 (2017년 5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안암역 2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면 바로 안암역교차로이다. 교차
  로에서 동쪽(북쪽) 길(개운사길)로 3~4분 가면 개운사 일주문인데 그 앞에 보타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그의 안내를 따라 가면 된다. 안암역에서 도보 10분
* 서울시내버스 273, 1111, 2115번을 타고 안암역에서 하차하여 도보 10분. (2115번 서경대 방
  향은 개운사입구에서 하차, 중랑차고지 방향은 안암역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8
(개운사길 60-46 ☎ 02-923-4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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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5월 1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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