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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8.14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관악산에서 제일 맵시가 좋은 계곡, 과천 문원계곡 둘러보기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4
  2. 2013.02.13 한겨울 산사 나들이 ~ 영조 임금의 효심이 깃든 파주 고령산 보광사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관악산에서 제일 맵시가 좋은 계곡, 과천 문원계곡 둘러보기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 관악산 문원계곡 여름 나들이 '


▲  문원하폭포

▲  관악산 일명사지

▲  보광사 문원리3층석탑



 

여름이 한참 깊어가던 7월 초에 일행들과 관악산(冠岳山, 632m) 문원계곡을 찾았다. 예전
에는 관악산의 품에 자주 안기곤 했으나 그에 대한 마음이 시들시들해졌는지 기껏 가봐야
그의 외곽만 겉돌 뿐, 그곳 정상<연주대(戀主臺)>을 오른지도 어언 10년이 넘어가 버렸다.
연주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간만에 관악산과 인연을 짓고자 여름에 걸맞은 정처를 물색하다
가 과천(果川)에 있는 문원계곡을 찾기로 했다. 이곳은 관악산에 몇 남지 않은 미답처(未
踏處)이자 대표적인 피서의 성지(聖地)로 관악산 뒷통수에 자리해 있는데, 문원폭포와 문
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등의 명소가 숨겨져 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1시에 정부과천청사역(4호선)에서 일행을 만나 관악산의
품으로 들어선다. 넓게 깔린 교육원로를 가다보면 국사편찬위원회가 나오는데, 그곳을 지
나면 오른쪽에 2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비좁은 길이 나온다. 그 길이 문원계곡으로 인도하
는 길로(이정표가 있음) 길 양쪽에는 철책이 둘러져 답답함을 안겨준다.
그런 길을 4분 정도 들어가면 산림초소가 나오면서 비로소 관악산 산길이 펼쳐진다. 여기
서 서쪽으로 가면 백운사(용운암)란 절이 나오고, 직진하면 바위에 새겨진 승려 얼굴상이
, 동북쪽으로 가면 문원계곡 산길이다.


▲  관악산 문원계곡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
두 행정관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짓눌려 좁고 각박한 길이 되어버렸다.
관악산 탐방객을 위해 길을 조금 트여주면 좋으련만..


 

♠  문원계곡(文原溪谷) 입문

▲  문원계곡의 생매장 현장

문원계곡은 관악산을 수식하고 있는 주요 계곡의 하나이다. 관악산에는 바로 근처에 있는 자
하동천(紫霞洞天) 계곡을 비롯해 관악산계곡(서울대 서쪽), 관음사계곡(남현동), 삼성천계곡
(안양예술공원)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단조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반해 문원계곡은
아기자기한 변화도 좀 보이고 있고, 높이도 제법 되는 자연산 폭포를 2개나 간직하고 있다.

정부과천청사역에서 문원계곡으로 가는 길목에는 식당이나 가게가 전혀 없다. 그들 사이에는
지체높은 정부청사와 여러 공공기관이 단단하게 자리하여 그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막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번잡하지 않아서 좋음) 그러니 먹거리를 사거나 간단하게 요기를 하려면
정부과천청사역 10번이나 11번 출구로 나가거나 KT과천지사 정류장에서 내리기 바란다. 그곳
이 과천의 중심지로 식당과 가게가 많다.

문원계곡은 관악산 남쪽에서 발원하여 정부청사 서쪽으로 흐르는데, 옛 기술표준원 북쪽에서
그만 강제 생매장을 당한다. 강제로 지하에 묻히는 계곡의 한이 얼마나 깊은지 물소리가 귀신
을 쫓아낼 정도로 우렁찬데 아무리 공공기관이라도 계곡이 그리 크지도 않거늘, 계곡에 대한
부족한 배려가 참 아쉽다. 허나 다행히 생매장 구간은 짧아서 옛 기술표준원을 지나면 교육원
로 남쪽에서 다시 햇살을 본다. (기술표준원은 충북혁신도시로 이전되었음)

산림초소를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문원
계곡 하류가 나온다. 생매장 직전인 이곳에 폭
포 2개가 연달아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는데 이
들은 자연산이 아닌 지형을 이용하여 다듬은
인공폭포이니 속지 말자. 문원계곡의 알짜배기
폭포는 여기서 더 들어가야 된다.

▲  인공(人工)이 가해진 문원계곡 하류 폭포

 


▲  각세도의 성지(聖地), 신계 이선평(晨鷄 李善枰)의 묘역

인공폭포를 지나면 산길 오른쪽으로 소나무 그늘에 묻힌 무덤과 안내문이 손짓을 한다. 전혀
정보가 없는 무덤이라 안내문을 기웃거리니 각세도(覺世道)를 세운 이선평의 묘역이다. 각세
도에서는 그를 도조(道祖)로, 그의 묘는 성묘(聖墓)라 추앙하며 애지중지하고 있다.

이선평(1882~1956)은 황해도 문화군(文化郡) 태산촌(泰山村)에서 태어났다. 조선 2대 군주인
정종(定宗)의 16대손으로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에 정진했는데, 평양 근교에서 '천하대보 정
진무외(天下大寶 正眞無外)'라는 글귀가 하늘에 나타난 것을 보고 각세(覺世)의 진리를 깨달
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향 인근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가 10여 년 동안 도를 닦으면서 의술과
복점(卜占), 풍수지리서를 익혔다고 한다.

수도를 마치고 잠시 세상으로 내려와 군의(軍醫)가 되기도 했으나 1907년 군대해산으로 실업
자가 되자 다시 수도를 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 1913년 비봉산(飛鳳山)에 들어가 1,000일 기도
에 돌입했다.
기도를 벌인지 488일째 정오에 남쪽 하늘에서 황금색으로 쓰인 각세도 3자가 나타났다. 그리
고 다음날에는 서쪽 하늘에 '원각천지 무궁조화 해탈사멸 영귀영계(圓覺天地 無窮造化 解脫死
滅 永歸靈界)'란 16자의 주문이 나타났다고 하며 그 이후 초하루부터 매일 1자씩 하늘에서 글
씨를 받아 30계명과 도기(道旗), 각세훈사(覺世訓詞) 등을 얻었다고 한다. 그렇게 1,000일을
채우고 속세로 내려와 자신이 깨달은 것을 가르치니 그것이 각세도의 시작이다.

왜정(倭政) 말기에는 신도가 3만에 이르렀고, 해방 이후에는 10만까지 늘어났으며, 이선평은
문원계곡 하류에 세심정(洗心亭)이란 초막을 지으며 포교를 벌이다가 마땅한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1956년에 세상을 떴다. 그래서 후계자를 둘러싸고 분열이 일어나 여러 갈래로 갈라지
게 된다. (이선평과 각세도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하겠음)

이선평의 묘는 1976년부터 2년 동안 성역화 사업을 벌였으며,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망주석(
望柱石) 1쌍, 묘비, 봉분(封墳)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존재를 대충 덤으
로 챙기고 서둘러 문원계곡으로 들어섰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문원계곡 산길

▲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 문원계곡 중류
한여름에는 피서의 성지로 추앙을 받으며, 피서객들의 욕탕이 되버린다.

▲  문원계곡 바위 산길 - 보호 난간이 등산객의 발길을 지켜준다.

문원계곡 산길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느긋하다. 산길과 계곡과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
다가 바위 산길(이선평 묘역과 문원하폭포 중간)에서 잠시 멀어지는데 바위 벼랑 밑으로 아득
하게 계곡이 보인다.


▲  바위 산길에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숲 너머로 과천 시내와 청계산(淸溪山)이 두 눈에 들어온다.

▲  문원계곡을 건너는 나무 다리
바위 산길을 지나면 잠시 멀어진 계곡과 다시금 가까워진다. 그 상태는
문원폭포까지 쭉 이어져 서로의 끈끈한 정을 과시한다.

▲  나무다리 주변 문원계곡 중류


 

♠  문원계곡의 꿀단지, 문원하폭포와 문원폭포

▲  관악산 제일의 폭포, 문원하폭포(文原下瀑布)

산림초소에서 천천히 30분 정도 오르면 계곡 상류에 걸린 문원하폭포(이하 하폭포)가 마중을
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를 문원폭포로 알고 있었으나 이는 답이 아니었다. 그 문원폭포는 여
기서 더 올라가야 되며, 그 폭포 밑에 있다고 해서 문원하폭포라 불린다. 허나 외모는 문원폭
포보다 하폭포가 훨씬 잘났다. 그래서 문원폭포보다는 하폭포가 이곳의 중심 폭포이자 관악산
제일의 폭포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 차라리 하폭포를 문원폭포라 하고, 문원폭포를 문원상
폭포나 윗폭포로 칭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하폭포는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명주 자락을 늘어뜨린 듯 하얀 물보라를 쏟아내는데, 위에
서 바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거의 20도 정도로 구부러졌다가 다시 바위
를 타고 힘차게 내려온다. 폭포의 높이는 약 20m 정도로 폭포 밑에는 물놀이 하기에 좋게 얕
은 수심의 못이 형성되어 있으며, 폭포 남쪽에 산길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폭포가 있는
바위는 안전을 위하여 하얀 금줄을 쳐놓았으나 어기는 산꾼이 적지 않다.

관악산은 산세와 바위는 참 일품이지만 문원계곡과 관악산 제일의 경승지로 추앙받던 자하동
천을 빼면 계곡도 평범하고 폭포도 거의 없다. 그나마 문원계곡이 좀 아기자기한 편이고, 그
곳에 빚어진 하폭포와 문원폭포가 관악산에서 제일 화끈하게 폭포의 패기를 보여준다.


▲  위에서 바라본 하폭포

▲  반석으로 이루어진 하폭포 윗쪽

하폭포 옆구리를 통해 폭포 위쪽으로 오르면 계곡을 둘러싸고 넓게 펼쳐진 반석이 나온다. 문
원계곡을 찾은 산꾼들이 많이 쉬어가는 쉼터로 여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으로
난 마당바위를 오르면 일명사지와 연주암으로 이어지고,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문원폭포
가 나온다. 그리고 서북쪽 길로 오르면 육봉과 팔부능선으로 이어지는데 정상(연주대)이 목적
이라면 북쪽 마당바위로 오르면 된다.


▲  하폭포 윗쪽에 자리한 마당바위

▲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 정경백(鄭景伯) 바위

마당바위 꼭대기에는 큰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걸터 앉아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살짝 밀면 당
장이라도 때굴때굴 굴러떨어질 것 같은 기세인데, 그의 피부에는 한자로 큼지막하게 '정경백'
이라 쓰여 있다. 바로 그 바위글씨 때문에 '정경백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정
경백은 사람 이름으로 뭐하던 양반인지는 모르겠으나 글씨의 폼을 보니 구한말이나 왜정 때
새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을 찾은 정경백은 문원계곡의 뛰어난 절경에 퐁당퐁당 빠지면서 마당바위 피부가 아닌 이
바위에 이름 3자를 낙서로 남겼다. 인명사전이나 인터넷 검색에도 그의 정보가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면 그저 평범한 선비거나 글 좀 아는 백성인 듯 싶으며, 바위에 이름을 남긴 인연으로
비록 그의 정체는 몰라도 그의 이름은 바위와 함께 지금까지 남게 되었고, 관악산의 주요 바
위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관악산에 널린 바위 가운데 사람 이름을 취한 바위는 이
것이 유일하다.


▲  정경백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과천과 의왕시내, 청계산, 광교산)

  하폭포에서 문원폭포로 인도하는 산길

   ◀  그늘에 숨겨진 문원폭포(文原瀑布)
하폭포에서 계곡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면 그
늘에 묻힌 문원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폭
포는 위성지도에도 나올 정도로 그 위용을 속
세에 드러내고 있지만 문원폭포는 숲 그늘 속
에서 수줍게 물보라를 피운다.
폭포의 높이는 10m 정도로 하폭포에 비해 볼
품도 많이 떨어지고 물소리도 차분하다. 거의
90도 각을 이룬 윗부분을 빼면 경사도 거의
40~50도 정도로 물이 미끄럼을 타듯 부드럽게
내려와 착지를 한다.
폭포 옆에는 벼랑이 있는데 그 벼랑 밑에 비
와 눈을 피할 정도로 움푹 들어간 공간이 있
다.
거의 석모도 보문사(普門寺)의 눈썹바위와 좀
비슷한 모습으로 그곳에 태극기를 비롯해 기
도나 굿에 사용하는 물건과 그것을 보관하는
공간이 있어 굿이나 기도터로 몰래 쓰이고 있
음을 알려준다.


▲  시원찮게 떨어지는 문원폭포 윗도리

▲  문원폭포 옆 기도처
깎아지른 벼랑 밑도리에 움푹 들어간 예사롭지 않은 공간이 있어 기도나 굿터로
암암리에 쓰이고 있다. 아마도 이곳의 지기(地氣)가 높거나 지형상의 이유로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승려와 참선하는 사람들의 수행 공간이나
산악신앙의 현장으로 바쁘게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문원폭포 아랫 계곡 (왼쪽은 폭포 옆
기도터로 인도하는 길)


 

♠  하늘과 가까운 곳에 숨겨진 옛 절터, 관악산 일명사지(逸名寺址)
- 경기도 지방기념물 191호

▲  동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육봉일명사지)

▲  서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

하폭포에서 마당바위를 지나 각박한 산길을 6~7분 정도 오르면 긴 석축이 나온다. 그 석축이
바로 옛 일명사터로 석축 앞에 관련 안내문이 서 있어 등산객들의 관심을 호소한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일명사터는 육봉(六峰) 밑에 있다고 해서 육봉일명사터라 불리기도 한
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육봉일명사지') 절터의 면적은 400평 정도 되는데, 이곳에 대한
정보가 남아있는 것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의 비밀을 캐려는 집념으로 1999년 절
터를 뒤집은 결과 연꽃잎이 새겨진 연화문대석(蓮花紋臺石) 2점과 석탑(石塔)의 잔재 1기, 우
물 2곳이 나왔고, 조선시대 암막새기와 조각 20여 점이 나왔다. 또한 범어(梵語)가 새겨진 기
와와 무늬가 없는 조그만 기와 등 신라 후기 기와도 여럿 나와 신라 후기에 법등(法燈)을 켰
음을 짐작케 한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절터의 입을 강제로 열면서 그동안 밝혀진 사실을 정리하면,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다가 고려 중기나 후기에 망한 것으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4세기 후반에 다시
중창되어 그런데로 절을 꾸리다가 17세기 후반에 완전 문을 닫고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재정 악화와 주변 사찰과의 경쟁 등이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 무리한 조세와 공납(貢納), 고적한 곳에 위치한 지리적 불리함 등으로> 만약 산사태 등의 자
연재해로 망했다면 절터가 좀 온전하지 못해야 되는데 절터는 너무 선명하다.

절터에는 건물터와 석축, 연화문대석이 있는데, 절이 망한지 꽤 되었음에도 절터가 원형을 잃
지않고 잘 남아있어 관악산 불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관악산에는 이곳 외에도 연
주암의 전신(前身)으로 여겨지는 관악사(冠岳寺)터가 있으며, 관악산과 삼성산은 신라 후기부
터 절이 많이 생겨나 북한산(삼각산)과 더불어 수도권 불교의 성지로 일컬어진다. 특히 연화
문대석은 관악산에 남아있는 옛 석조물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칭송받고 있어
일명사도 왕년에 꽤 잘나갔음을 가늠케 한다.
그 잘나가던 절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가늠할 수 없는 전설이 되었고, 건물을 받쳐들던 주춧돌
만 앙상하게 남아 하늘을 받들고 있으니 참 인생무상이 아닐 수 없다. 일명사는 스스로를 태
우며 그 위대한 진리인 인생무상 4자를 우리에게 진하게 일깨워 주고 있다. 허나 그러면 뭐하
나. 인간은 동물과 신(神) 사이에 어정쩡하게 들어앉은 존재라 그것을 죽기 전에나 깨달으니
말이다.

일명사터는 하폭포에서 연주암 가는 길목에 있어 찾기는 쉽다. 연화문대석 2기는 절터 한복판
에 박혀있어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하며, 석탑의 잔재와 우물은 절터 인근 수풀에 묻혀 있다.
석탑은 고려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산11


▲  일명사터 석축

▲  여름 햇살을 즐기고 있는 일명사터 중앙 건물터
다른 건물터와 달리 규모가 크고 절터 중앙에 자리해 있어 절의 중심 건물인
법당(法堂)으로 여겨진다.

▲  일명사터 동쪽 건물터
조그만 건물이 여럿 뿌리를 내렸던 곳으로 산신각(山神閣)이나 명부전(冥府殿),
요사채 자리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

▲  화석처럼 박힌 연화문대석 형제
이들은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석불 대좌(臺座)의
일부로 여겨진다. 관악산의 몇 안되는 옛 석조물 가운데 가장 정교하게
새겨진 것으로 천하에 짧게나마 주목을 받았다.

▲  절터 북쪽 석축과 돌다리

절터 북쪽과 동쪽에는 조그만 물줄기를 두어 산에서 내려온 시냇물을 아래로 흘러보낸다. 이
렇게 배수 시설까지 갖추어 식수를 해결하고 언제 문을 두드릴지 모를 화마(火魔)의 공습에도
대비를 했는데, 석축 북쪽에는 통돌을 깔아 조그만 돌다리까지 두었다.

일명사터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내려갔다. 기분 같아서는 오랜만에 연주암까지 오
르고 싶었지만 거까지 가려면 1시간 이상 각박한 산길을 올라야 되고, 날씨도 무지 덥다. 하
여 쿨하게 포기하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오늘 인연도 아님에도 억지로 인연을 짓는 것은 그렇
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문원계곡 하류인 산림초소로 내려와서 바로 속세로 향가지 않고 근처에 있는 마애승용군을 찾
았다. 그곳은 산림초소와 매우 가까운데, 이정표가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고 있어 찾기는 쉽다.
오르는 길도 그리 힘든 편은 아니라서 2분 정도 수고하면 바위 2개와 소나무가 마중을 나오는
데, 소나무 서쪽 바위에 '용운암 마애승용군'이 자리해 있다.


▲  바위에 새겨진 용운암 마애승용군(磨崖僧容群) - 과천시 향토유적 4호

이름도 참 생소한 마애승용군(이하 승용군)은 과연 무엇일까? 여기서 승용(僧容)은 승려의 얼
굴을 뜻한다. 그러니 쉽게 풀이하면 바위에 새겨진 승려 얼굴상이 된다. 승용군 앞에 붙은 용
운암은 부근에 자리한 절 이름으로 예전에는 승용군 주변에 있었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홍촌(洪村) 마애승용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산 밑에 홍촌이란 마을이 있어서 유래된 것이
다.

보통 불상이나 보살 등을 바위에 새겨 마애불(磨崖佛)로 삼지만 그들 대신 승려의 얼굴을 새
긴 경우는 천하에서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 바위 윗도리에 얼굴 3구가 새겨져 있고, 밑도리에
2구가 간결하게 스며들었는데, 얼굴이 하나 같이 동자승처럼 밝고 귀여운 표정이다. 3명은 정
면을, 2명은 측면(側面)상을 하고 있으며,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불상도 아닌 승려 얼굴을 새겼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해답은 없다. 승려
를 귀족처럼 받들던 고려 때 관악산의 이름 있는 승려를 기리고자 얼굴을 새겼을 가능성도 있
으나 이 역시 부질없는 추측일 뿐이다. 참고로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관악산 서쪽 자락인 안
양예술공원에 마애종(磨崖鍾)이 새겨져 있는데, 범종과 이를 치는 승려가 조각되어 있다. 이
역시 이 땅의 하나 밖에 없는 존재로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새겨진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관악산에만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존재가 1종류도 아닌 2종류가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롭
다.


▲  바위 윗도리를 장식하고 있는 승려 얼굴상 3구
가운데와 오른쪽 승려는 정면을 보고 있고, 왼쪽 승려는 옆을 보이고 있다. 눈썹과
살짝 감긴 눈, 코, 입, 귀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표정이 하나같이 앳된
동자승이나 원숭이처럼 해맑기 그지 없다.

▲  바위 밑도리를 장식하고 있는 승려 얼굴상 2구
귀마개나 이어폰을 낀 것 같은 왼쪽 승려는 정면을, 오른쪽 승려는 옆을 보고 있다.
승려 얼굴 상 외에도 정체가 아리송한 문양들이 여럿 새겨져 있다.

▲  승용군 바위 뒤에 깨알처럼 새겨진 글씨들
이곳에서 예불을 올린 사람들이 남긴 것으로 근래까지 불공 장소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오래된 마애미륵불이 있다.


 

♠  법등의 역사는 짧지만 문화유산 3점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과천 보광사(普光寺)

▲  보광사의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

관악산 문원계곡을 뒤로하고 속세로 나오다가 과천중앙고 서쪽에 자리한 보광사에 잠시 발을
들였다.
교육원3거리에서 교육원로를 따라 6~7분 정도 걸으면 길 왼쪽(남쪽)에 보광사를 알리는 이정
표가 손짓을 하는데 그의 손짓에 맞춰 다리를 건너면 바로 보광사가 모습을 비춘다.

이 땅의 흔한 절 이름의 하나인 보광사, 서울과 수도권에만 우이동(牛耳洞) 보광사, 파주 보
광사(☞ 관련글 보러가기), 남양주 보광사, 그리고 이곳까지 60년 이상 묵은 절만 쳐도 최소
4곳이 넘는다.

관악산 남쪽 자락이자 정부과천청사를 바라보고 선 과천 보광사는 1946년에 창건되었다. 이때
법당 6칸과 요사 1동이 닦았는데 현재의 가람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이룩된 것으로 2001년
에 극락보전을 새로 지어 법당으로 삼았고, 삼성각과 명부전, 설법전 등을 세워 지금에 이른
다.
법등(法燈)이 켜진 역사는 고작 70년 남짓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싹트지도 못했다. 허나 인
근 문원동 절터에서 오래된 3층석탑과 석조보살입상을 업어와 마땅히 내세울 것이 없는 이곳
의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았고, 1993년에는 조선 후기 불상까지 새로 영입하면서 매우 짧
은 법등에 비해 오래된 문화유산을 3개나 간직하게 되었다. 비록 보광사와 관련이 없는 것들
이지만 바로 그들 때문에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현대에 지어진 그저 그
런 사찰의 하나로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절의 규모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크기로 북쪽을 바라보고 선 극락보전을 비롯하
여 명부전과 설법전, 삼성각, 요사, 범종각 등 6~7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설법전(說法殿)
과 요사(寮舍) 같은 경우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밑에도 공간을 만들어 2층을 이루고 있다.

▲  2002년에 지어진 보광사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칠성, 독성의 보금자리이다.

▲  보광사 설법전

◀  관악산이 베푼 물로 늘 만조를 이루는
보광사 샘터과 이끼 옷을 살짝 걸친
석조(石槽)


▲  보광사 경내 동부 <3층석탑과 명부전(冥府殿), 석조보살입상>

▲  보광사 문원리 3층석탑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39호

툇마루를 간직한 주지실 앞에 조그만 3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은 관문동 절터(어딘지는 모르
겠음)에서 가져온 것으로 하얀 피부를 지닌 커다란 바닥돌 위에 얹혀져 있는데 2중의 기단(基
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인 보주(寶珠)로 마무리를 한 맵시 좋은 탑이다.
이중 바닥돌은 시멘트로 지은 것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1층 탑신에는 2중으로 새겨진 자물쇠가 새겨져 있으며, 지붕돌 밑에는 얇게 만든 3단의 받침
이 있고, 지붕돌의 처마 끝은 살짝 올려져 약간 경쾌감을 준다. 기단과 지붕돌의 모습을 통해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탑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시흥 문원리 3층석탑'이다. 허나 과천은 어엿한 시(市)로 시
흥군에서 분리된지도 30년이 넘었고, 그 문원리도 문원동이 되었건만 명칭은 아직도 30여 년
전에 머물러 있다. 그 쾌쾌묵은 이름을 현실에 맞게 다듬어 '보광사 3층석탑'이나 '과천 문원
동 3층석탑'으로 갈아야 될 것인데 말이다. 국가지정문화재는 그래도 시대와 지역에 맞게 이
름이 많이 바뀌고 있으나 지방문화재는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다.


▲  문원리사지 석조보살입상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77호

명부전 앞에는 오래된 석조보살입상이 서 있다. 이 석불은 문원동 15-166번지에서 가져온 것
으로 높이 1.7m 정도 되는 돌에 얇게 선각으로 새기고 그 위에 둥근 갓을 씌우는 선에서 아주
간단히 처리했다. 허나 세월의 태클로 그 선각도 희미해져 자세히 안보면 석불인지 다른 석상
(石像)인지 햇갈릴 정도이다.

갓으로 머리가 가려진 얼굴은 둥근 편으로 눈썹과 눈, 입, 코를 새겼으나 거의 표정이 지워진
상태이고 목은 짧지만 두껍다. 돌을 제대로 깎지 않고 그냥 선각만 했기 때문이다. 왼손은 가
슴에 대어 연꽃 봉오리를 잡고 있고, 오른손은 밑으로 내리고 있는데, 옷은 양쪽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見)의 법의(法衣)이다.
많이 부실해 보이는 이 석불은 납작한 얼굴과 짧은 어깨, 간략화된 옷주름 등 도식화된 모습
을 통해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보광사 목조여래좌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62호

극락보전 불단(佛壇)에는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그중 아미타불(阿彌陀佛)로 삼고 있
는 불상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여래좌상이다. 그 좌우에 자리한 존재들은 대세지보살(大
勢至菩薩)과 관음보살로 2001년에 조성되었다.

포근한 표정을 지으며 중생의 하례를 받고 있는 목조여래좌상은 나무로 만들어서 금칠을 입힌
것으로 원래는 양평 용문사(龍門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있었다고 한다. 6.25가 터지자 어
느 신도가 여주(驪州)로 피신시켰고, 그렇게 개인이 가지고 있다가 1993년 이곳에 기증하여
보광사의 보물을 하나 더 늘려주었다.

불상의 얼굴은 크고 둥근 편인데, 눈썹이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지그시 뜨며 북쪽을 바라
본다. 코는 작고 오똑하며, 붉은 입술 위에 검은 수염이 살짝 그려져 있다. 얼굴이 크다보니
볼살도 많아 보이며, 두 귀는 거의 어깨에 닿는다. 저리 귀가 크니 중생의 민원은 하나도 누
락됨이 없이 잘 들어줄 것이다. (민원도 잘 처리해주는지는 모르겠음)
머리는 나발로 두툼하게 무견정상이 솟아 있으며,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다. 가슴과 배 사
이에는 연꽃이 새겨진 허리띠가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따로 만들었는데, 가운데
손가락과 약지 손가락을 구부렸다. 불상의 양식을 보아 조선 초기 또는 조선 초기 양식을 간
직한 조선 중기 불상으로 여겨진다.

* 보광사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산126-21 (교육원로 41, ☎ 02-502-2262)


▲  극락보전 앞에서 바라본 관악산
절은 작지만 관악산을 앞뜰로 품고 있어 앞뜰 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보광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반이 넘었다. 칼퇴근의 달인 햇님도 뉘엿뉘엿 그만의
공간으로 꽁무니를 빼고, 장대한 관악산도 어둠의 커텐 속으로 사라질 채비를 한다. 이렇게
하여 관악산 문원계곡 여름 나들이는 저물어가는 햇님처럼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관악산 보광사, 문원계곡(문원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찾아가기 (2018년 7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정부과천청사역 6번 출구를 나오면 정부청사입구 교육원3거리이다. 여기서 국
  가공무원인재개발원으로 인도하는 교육원로를 6~7분 가면 왼쪽에 보광사가 있으며, 15분 정
  도 가면 오른쪽에 관악산 문원계곡으로 인도하는 조그만 길이 나온다. 여기서 마애승용군까
  지는 6~7분, 문원하폭포까지는 35~40분, 일명사터와 문원폭포는 40~45분 정도 걸린다.
* 441, 502, 540, 541, 542, 1-1, 9, 9-3, 11-1, 11-2, 11-3, 11-5, 103, 777, 3030번 시내버
  스를 타고 정부과천청사나 과천주공2,3단지 하차
* 문원계곡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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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산사 나들이 ~ 영조 임금의 효심이 깃든 파주 고령산 보광사


' 한겨울 산사 나들이 ~ 파주 보광사(普光寺)'

▲  보광사 목어


겨울의 제국이 강추위로 천하를 부들부들 떨게 만들던 겨울의 한복판에 파주(坡州)에 있는 보
광사를 찾았다. 이곳은 어린 시절에 2~3번 가본 인연이 있는 곳으로 구파발역에서 파주시내버
스 333번(금촌↔구파발)을 타고 보광사로 들어간다.

보광사에 가려면 고양시(高陽市) 벽제동과 파주시 광탄면(廣灘面) 동부 지역을 잇는 고갯길인
됫박고개를 넘어야 되는데 고개가 제법 패기가 있다. 이 고개는 조선 21대 군주인 영조(英祖)
와 인연이 아주 깊은데, 그는 소녕원(昭寧園,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 묘역)과 소녕원의 원찰
인 보광사를 자주 찾았다. 그때마다 이 고개를 싫든 좋든 넘어야했지.
고개가 제법 험준하여 다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지라 뚜껑이 열린 영조는 '고개를 더 파서
낮추라!'고 명했다. 그 연유로 '더 파기 고개'가 되었다가 나중에 됫박처럼 가파르다 하여 됫
박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4발 수레로 편하게 넘을 수 있다지만 그 수레들도 이 고갯
길만큼은 조심스레 바퀴를 굴리며 몸을 사린다.

버스에서 내리니 보광사 일주문(一柱門)이 여기까지 나와 중생을 맞는다. 문 좌측에는 고령산
에서 발원한 계곡이 숨을 죽여 흘러가고, 일주문을 들어서면 주막과 찻집이 주를 이루는 조그
만 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이곳은 절 밑에 터를 닦은 이른바 사하촌(寺下村)으로 보광사와 고
령산을 후광(後光)으로 삼아 밥장사를 하는데, 보리밥이 꽤 유명하다.

부처의 세계를 코앞에 둔 속세의 마지막 유혹이라고나 할까? 찻집과 주막의 유혹을 벗어나 10
분 오르면 보광사의 산문이 나타난다.


  보광사 일주문을 들어서다

▲  '고령산보광사'라 쓰인 보광사 일주문(一柱門)

대부분의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주문은 절의 정문이다. 보광사의 일주문은 1999년에 지어진
것으로 문이라고는 하지만 문을 여닫는 문짝이 없어 절을 찾은 중생이나, 산을 찾은 등산객, 부
자와 서민 등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반갑게 맞이한다. 일주문처럼 넓은 포용력을 지니며 살리
라 다짐을 하건만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  보광사의 옆구리를 거쳐 속세로 흐르는 고령산 계곡
얼음 밑으로 숨죽여 흘러가는 계곡, 소쩍새가 울 때면 움츠려든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켤 것이다.

▲  겨울의 정령에 사로잡힌 보광사 가는 길
겨울의 제국 치하에 들어간 나무들은 잔뜩 몸을 움츠리며 봄의 해방군을 기다린다.

▲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

일주문을 지나 8분 정도 오르면 흙담장에 가린 보광사의 모습이 나타나면서 길이 2갈래로 갈라
진다. 길 오른쪽에는 윗 사진처럼 계곡 위에 걸린 돌다리를 건너 흙길과 계단을 거쳐 경내로 들
어가는 길과 경내까지 뚫린 수레길을 이용하여 가는 것이 있다. 어느 길을 이용하든 경내로 통
하지만 돌다리 코스가 운치가 있으며, 수레길이 없던 옛날에는 저 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섰다.

절을 받치고 있는 석축(石築)은 마치 산성(山城)처럼 3중으로 계단식으로 쌓여져 있으며, 그 위
에 담장을 두르고 넓게 터를 닦아 절을 일구었다. 만세루 남쪽은 석축을 1단으로 높게 쌓았다.


▲  보광사 설법전(說法殿)

갈림길에서 2분 정도 오르면 길 왼쪽에 설법전이란 길쭉한 건물이 있다. 이곳에는 찻집인 도솔
천(兜率天)과 종무소(宗務所)가 있으며, 여러 법회(法會)와 강좌가 열린다. 그리고 도솔천에서
는 다양한 전통차와 온갖 불교용품을 판매하고 있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곳에서 일다경(一
茶頃)의 여유를 누리고 싶다.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명당자리, 영조 임금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조선왕실의 원찰로 번영을 누린 ~ 고령산 보광사(古靈山 普光寺)

▲  겨울 햇살의 드넓은 손길이 구석구석 보듬고 있는 보광사

보광사는 서울과 가까운 고령산(621m) 서쪽 자락에 아늑히 안긴 산사(山寺)로 절 이름인 보광(
普光)은 넓은 광명(光明)을 뜻한다고 한다. 그렇게 좋은 뜻을 가지고 있으니 그 이름을 지닌 오
랜 절집만 서울 주변에 4곳(서울 우이동, 파주, 과천, 남양주)이나 된다. 그중에서도 이곳이 가
장 오래되고 제대로 남아있다.

보광사는 신라가 망해가던 894년(진성여왕 7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왕명에 따라 비보(裨補
) 사찰로 창건했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창건 이후 1215년 원진국사(元眞國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며, 법민대사(法敏大師)가 불보살(佛菩薩) 5위를 봉안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1388년에
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창을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22년에 설미(雪眉), 덕인(德仁)이 중건하고 1634년 범종을 만들었다.
그 범종이 보광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숭정7년명동종이다. 1667년에는 지간(智侃), 석련(石
蓮)이 대웅전과 관음전을 중수했다.

보광사가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누린 것은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시절이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소생으로 그녀의 무덤인 소녕원(昭寧園)이 보광사 서쪽 영장리에
있다. 그런 인연으로 영조는 보광사를 소녕원의 원찰(願刹)로 삼아 많은 지원을 내렸으며, 그때
대웅보전과 관음전을 중수하고 절에서 가장 큰 건물인 만세루를 세웠다. 또한 소녕원에 참배하
러 갈 때는 보광사에 꼭 들렸다.
이렇게 원찰로서의 지위와 번영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쭉 이어져 1863년에 왕실의 지원에 힘입
어 나한전, 큰방, 수구암을 짓고,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석가3존불, 16나한상 등을 조성했으며,
1864년에는 관음전과 별당을 세우고, 1869년에 절을 중수했다. 1901년에는 상궁(尙宮) 천씨의
시주로 대웅전과 만세루를 중수하여 절의 면모를 크게 하였다.

이렇게 잘 나가던 보광사는 1950년 6.25전쟁으로 대웅전과 별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
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 이후 꾸준한 중창불사로 관음전을 새로 짓고 만세루를 해체하여 복원했
으며, 1981년에 석불전이라 불리는 거대한 대불(大佛)을 세웠다. 2003년에는 납골당(納骨堂) 사
업에도 손을 뻗쳐 경내 북쪽에 영각전을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고색의 기운이 진한 경내에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원통전, 어각실, 응진전, 산신각, 지장전,
만세루, 수구암, 설법전, 영각전 등 10여 동의 건물이 가득 들어차 있으며, 대부분이 서향(西向
)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북쪽을 제외하고 경내 주변을 토담으로 빙 둘러 속세와 부처의 세계의
경계를 가른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인 대웅보전과 숭정7년명동종, 목조보살입상(지방유형문화재 248
호)을 간직하고 있으며, 지장탱화와 나한탱화등 19세기에 그려진 불화가 다수 있다. 만세루와
어각실, 응진전도 18~19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며, 어실각 옆에는 영조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무럭
무럭 자라고 있다. 또한 수구암(守口庵)과 영묘암(靈妙庵), 도솔암(兜率庵) 등 부속암자 3곳을
가까이에 거느리고 있다.

서울에서 가깝지만 깊은 산중에 안겨있어 고요함과 고즈넉함이 중생의 마음을 편하게 인도하며,
산새의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의 소리, 그리고 풍경소리와 목탁소리가 전부인 산사이다. 또한 절
을 알처럼 품은 고령산은 숲이 울창하고 봄과 가을에는 꽃과 단풍의 화려한 향연으로 이름을 날
려 휴일에는 많은 등산객이 찾아온다. 고령산을 오르려면 보광사를 거쳐가야 되기에 그날만큼
은 중생들로 경내는 시끌벅적하다.

▲  대웅보전을 옆에서 가린 요사채

▲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응진전 우측의 장독대들

※ 파주 보광사 찾아가기 (2013년 2월 기준)
* 3호선 구파발역(1,2번 출구)이나 삼송역(3호선, 8번 출구)에서 파주시내버스 333번을 타고 보
  광사 하차, 버스는 20~4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까지 수레 접근 가능)
① 서울 → 문산 방면 1번 국도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우회전 → 고양동에서 광탄
   방면으로 좌회전 → 벽제3거리에서 우회전 → 보광사입구 → 보광사
② 수도권외곽고속도로 → 통일로나들목에서 문산 방면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우회
   전 → 고양동에서 광탄방면으로 좌회전 → 벽제3거리에서 우회전 → 보광사입구 → 보광사

★ 보광사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으며, 경내와 일주문 부근에 주차장이 있다.
* 보광사 템플스테이(Temple stay)는 부정기적으로 열린다. 개인은 1박 2일, 단체와 어린이는 2
  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되며, 자세한 것은 보광사 홈페이지를 참조한다. 참가 신청은 홈페이지
  에서 하거나 전화로 하면 된다.
*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13 (☎ 031-948-7700~1)
* 보광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꾹 누른다.


▲  대웅보전 뜰에서 바라본 고령산

▲  범종각(梵鍾閣)

경내로 들어서면 대웅보전을 가리고 선 요사 서쪽에 단촐한 모습의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 옆에
는 문화재안내판이 멀뚱히 서 있는데, 범종각에 걸린 종이 숭정7년명동종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은 범종각의 종이 그것인줄 안다. 허나 종을 잘 살펴보면 고색의
때도 거의 없을뿐더러 중간중간 한글이 보여 근래에 새로 만든 종임을 알 수 있다. 원래의 종은
최근까지 이곳에 있다가 건강을 이유로 대웅전으로 옮겼다.
범종각은 대웅전에 있던 숭정7년명동종를 위해 1990년에 지어졌으며, 만세루에 있던 목어(木魚)
도 이곳으로 잠시 옮겼으나 다시 원위치시켰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응진전(應眞殿)과 산신각(山神閣), 3층석탑

대웅전 우측 석축 위에는 단촐한 모습의 전각 2개가 오붓하게 자리해 있다. 우측에 자리한 응진
전은 1863년에 중건된 것으로 원래 이름은 나한전(羅漢殿)이었다. 내부에는 1863년에 조성된 것
으로 보이는 석가3존불과 16나한상이 있으며, 나한탱화는 1877년에 금곡영환(金谷永煥), 한봉창
엽(漢峯瑲曄) 등의 화승이 그렸다. 응진전 곁에 자리한 1칸짜리 산신각은 1893년에 중건된 것으
로 근래에 만든 산신상과 산신탱이 있다.
그들 앞에는 맵시가 돋보이는 3층석탑이 서 있는데, 원래는 대웅전 뜨락에 있었다.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원통전(圓通殿)

대웅전 좌측에는 관음보살을 봉안한 원통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
물로 이곳에는 예전에 쌍세전(雙世殿)이 있었으나 1994년에 부시고 새롭게 원통전을 지었다.
새로 지은 것이다보니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알고보니 보광사의 불화(佛畵) 가운데 가장 오
래된 지장탱화(地藏幀畵)가 들어있었다. 순간의 방심으로 놓친 그 그림은 1802년 승려 경욱(慶
郁)이 그린 것으로 원래는 부속암자인 수구암에 있었다고 하며, 지장탱화와 나란히 있는 삼장탱
화(三藏幀畵)는 1898년에 제작된 것으로 경선응석(慶船應釋), 금화기동(錦華機同), 용담규선(龍
潭奎禪)이 그렸다.


▲  원통전 앞에 자리한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원통전과 마찬가지로 1994년에 지어졌다. 지장보살과 도명존자(道明尊者), 시왕상(十
王像)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의 존상(尊像)과 그림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중 장군탱화는 1872년
에 제작된 오래된 그림이다. 지장전에 있던 존상과 그림은 원래는 쌍세전에 있었다.

◀  어실각(御室閣)과 향나무

원통전 뒤쪽에는 조그만 1칸짜리 어실각이 있다.
이 건물은 1740년에 보광사를 소녕원의 원찰로
삼으면서 세운 것이라 전하며, 굳게 닫힌 내부
에는 숙빈최씨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건물 옆에는 겨울의 제국에도 아랑곳 않고 푸르
름을 간직한 10m 정도의 향나무가 자라고 있는
데, 이는 영조가 심은 것이라 한다. 세월을 양
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자란 향나무에는 영조의
혼이 깃들여 있는 건지 늘 어실각에 시원한 그
늘을 드리운다.


▲  왕실의 어보(御寶)처럼 특별하게 보이는 어실각
영조에 어미에 대한 그리움과 효를 읽을 수 있다.

▲  어실각 뒤쪽으로 끝없이 이어진 토담
흙으로 만든 토담의 모습이 너무 정겹다. 절과 속세의 경계선으로 그어진
토담 너머로 소나무가 속세의 악한 기운과 냄새로부터 절을 지킨다.


  안팎으로 다양한 볼거리와 보물을 간직한 보광사의 보물창고
대웅보전(大雄寶殿)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83호

경내 중앙에는 보광사의 법당(法堂)인 대웅보전(대웅전)이 만세루를 마주보고 있다. 만세루 다
음으로 규모가 큰 건물로 기와부터 기둥까지 고색의 내음이 진하게 묻어나 있다. 법당으로서의
품격과 위엄이 돋보이는 보광사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원래는 창건 시절부터 있었다고 하나 지금의 건물은 1740년에 중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대웅전은 만세루보다 1단계 높은 석축 위에서 서쪽을 바라고 있다. 건물을 받치는 석축은 자연
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이용했으며, 돌마다 기나긴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져 고색의 향기를
강하게 풍긴다. 건물의 벽은 흙벽이 아닌 나무벽으로 되어 있고, 좌우측벽에는 다른 절에서는
보기 힘든 5개의 색다른 벽화가 눈길을 단단히 붙잡는다. 이들 벽화는 1740년에 건물을 중건하
면서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불단에는 조선 후기 불상인 삼세불을 중심으로 한 5존불이
있으며, 1898년에 그려진 석가모니후불탱화를 비롯한 6개의 불화와 숭정7년명동종, 금고(金鼓)
등 오랜 보물이 깃들여져 있다. 그야말로 보광사의 보물창고인 셈이다.


▲  대웅보전 우측벽화

왼쪽에는 하얀 옷을 입은 백의관음보살이 물결이 출렁이는 바다 위에서 배를 움직이고 있는데,
중생을 이끌며 거친 파도를 헤치고 극락으로 가는 모습을 담은 것 같다. 오른쪽에는 상아가 탐
나보이는 거대한 코끼리와 등에 올라탄 승려가 담겨져 있는데, 코끼리는 부처의 법을 상징한다
고 한다.


▲  대웅보전 좌측벽화

▲  좌측벽화의 좌측 그림
창을 들고 옷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 사천왕의 하나인 광목천왕(廣目天王) 같다.
부처를 지키는 성스러운 존재로 팔에 주름진 근육이 그의 힘을 느끼게 한다.
허나 그의 표정은 천왕(天王)으로서의 위엄과 무서움보다는 귀엽다는
인상을 지을 수 없게 한다.

▲  좌측벽화 가운데의 그림
개와 비슷하게 생겼으면서 이상하게 생긴 커다란 동물과 동자(童子)로
보이는 승려가 그려져 있다.

▲  좌측벽화 우측 그림
갑옷 비슷한 것을 갖춰 입고 비파 같은 것을 연주하는 모습이
사천왕의 일종인 다문천왕(多聞天王) 같다.

▲  대웅전 우측 출입문 위에 걸린 '고령산보광사상축서(上祝序)' 현판

대웅전 우측 출입문 창방에는 낡은 현판이 걸려있다. 이것은 '고령산보광사 상축서(古靈山普光
寺 上祝書)'로 1869년 왕실의 시주로 절을 중수한 것을 기리고자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성상(聖上)은 고종, 왕비전하(王妃殿下) 민씨는 명성황후(明成皇后), 대원위(大院位)는 흥선대
원군(興宣大院君)으로 고종(高宗)의 가족이 보광사 중수에 크게 신경쓰고 지원했음을 보여준다.
현판에는 그들의 은혜로 절을 중수하여 그들의 성수무강(聖壽無疆)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
다.


▲  대웅전 불단(佛壇)에 모셔진 5존불

대웅전 불단에는 흔히 있는 3존불이 아닌 5존불이 봉안되어 눈길을 끈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
우에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앉아 있으며, 이들 불상은 이른바 삼
세불(三世佛)이다. 그들 좌우로 현란한 보관(寶冠)을 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서 있는데, 이
들은 마땅히 둘 장소가 없어서 삼존불 옆에 배치하여 졸지에 5존불이 된 것이다. 그들 모두 지
그시 눈을 감으며 은은하게 미소를 드리운 포근한 표정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저보다 편안한 표정이 어디에 있을까?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이들은 1215년 원진국사가 절을 중창할 때 조성했다고 한다. 허
나 저들은 엄연히 조선 후기 불상이다. 그들 뒤로는 석가가 설법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후불탱화
가 걸려있는데, 1898년에 예운상규(禮芸尙奎), 경선응석(慶船應釋), 금화기동(錦華機同), 용담
규선(龍潭奎禪) 등의 화승이 그렸다. 후불탱에 깃들여진 빛바랜 고운 색채는 그림의 중후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신중탱화와 감로탱화, 칠성탱화, 독성탱화, 현왕탱화 등 5점의 불화(佛畵)
가 대웅전 내부 벽을 화려하게 수식하여 불화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이들 모두 후불탱화와 마찬
가지로 1898년에 제작된 것이다.

▲  독성탱화(獨聖幀畵)
지팡이를 쥐어들고 앉아있는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의 모습이다. 무슨 근심거리가 있는
것일까? 그의 표정에 우수(憂愁)가
서려 보인다.

▲  신중탱화(神衆幀畵)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고 그림에 한가득
그려진 신들의 모습이다. 저들은 원래 인도의
토속신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  칠성탱화(七星幀畵)
칠성신앙은 우리의 고유 민간신앙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칠성(북극성)은
산신, 독성과 달리 부처에 준하는 대접을 받으며 치성광여래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여백이 없어 복잡한 신중탱화와 달리 이 그림은 눈이 편할 정도로 간결하다.

▲  현왕탱화(現王幀畵)

저승의 주인인 염라대왕(閻羅大王)이 심판을 하는 장면을 담았다. 여기서 현왕은 염라대왕을 지
칭하며, 대왕 주변으로 판관과 명부(冥府, 저승)의 여러 관리들이 구름처럼 모여있다. 대왕 앞
에 무릎끓고 앉아 있는 이는 이승에서 막 저승으로 들어온 사람인 모양이다. 그는 대왕에게 어
떤 판결을 받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  불단 우측에 있는 숭정7년명동종(崇禎七年銘銅鍾)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58호

단 우측에는 보광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숭정7년명동종이 놓여져 있다. (종의 위치는 바
뀔 수 있음) 이 종은 대웅전에서 계속 생활했으나 1990년 범종각을 지어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
다. 그러다가 근래에 종의 건강과 보호를 위해 다시 대웅전으로 옮기고 새 종을 만들어 범종각
을 지키게 했다.

이 종은 높이가 98.5cm로 범종각에 흔히 달려있는 범종(2~3m)보다 훨씬 작다. 종이 이렇게 작으
니 도난의 위험이 늘 도사리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범종으로 종 꼭대기에 2마
리의 용이 서로 뒤엉켜 종을 달리 위한 고리를 형성했다. 종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띠가 둘러져
있고, 그 가운데에 3줄의 띠가 둘러져 있어 종을 상하로 구분한다. 위쪽 부분에는 네모난 유곽(
乳廓) 4개와 보살입상(菩薩立像)이 4구가 있고, 아래쪽에는 파도무늬와 용이 종을 장식한다. 아
래 띠와 가운데 끼 사이에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는데 범종을 만든 시기와 제작자의 이름, 그리
고 보광사의 연혁이 길게 적혀 있다.
명문(銘文)에 따르면 이 종은 숭정7년에 제작되었다. 숭정7년은 1634년(인조 11년)으로 숭정은
명나라 황제인 의종(毅宗, 1611~1644)의 연호이다. 종의 이름은 바로 제작시기인 숭정7년에서
따온 것이다. 범종 불사에는 신관(信寬)이 화주를 맡았고, 설봉천보(雪峯天寶)와 3명의 승려가
범종을 조성했는데, 설봉천보는 1619년(광해군 11년)에 봉선사(奉先寺)의 대종(보물 397호)를
만들기도 했다.

대웅전 한쪽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조그만 종을 치고 싶다. 종을 치면 그는 졸음에서 깨어나
은은한 종소리를 건물 내에 잔잔히 울리겠지, 허나 문화재로 지정된 귀한 존재이자 보광사에 소
중한 보물로 괜히 그를 건드리다가는 된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 된다. 그냥 보는 것으로 만족
하는 것이 쌍방에 이롭다.

사진에는 없지만 불단 좌측에는 조그만 금고(金鼓)가 있다. 가운데에 태극마크를 그리고 가장자
리에 꽃무늬가 있으며, 전면에 '大皇帝陛下萬萬歲(대황제폐하만만세)'란 명문이 있어 고종이나
순종 시절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황실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영조의 친필이라 전하는 대웅보전 현판의 위엄
빛바랜 하얀 현판에 쓰인 대웅보전의 4글자 마치 글씨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필체의 힘이 넘쳐 흐른다.

▲  푸른 하늘을 바다로 삼으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베푸는
대웅전 풍경물고기


  보광사 마무리

▲  승방의 역할을 겸하는 만세루(萬歲樓)의 후면(後面)

대웅보전과 마주보고 있는 만세루는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승방이 딸린 독특한 'T'구조를 하
고 있다. 이 건물은 원래 누각으로 1740년경에 영조의 지원으로 절을 중수할 때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건물은 높은 석축을 발판으로 삼아 자리해 있다. 1913년과 1914년에 대한제국 상궁(
尙宮)의 시주로 중수를 했는데, 그때 만세루 옆으로 툇마루가 딸린 승방을 만들어 지금의 구조
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정면 9칸의 규모로 '염불당중수시시주안부록(念佛堂重修時施主案付
祿)'이라 쓰인 현판이 있어 한때는 염불당(念佛堂)이란 이름을 지녔음을 알 수 있으며, 누마루
정면에 걸린 '고령산보광사'란 현판은 영조의 친필로 전해진다.


▲  만세루의 정면
누마루 정면에 영조가 썼다는 '고령산보광사' 현판이 있으며, 좌측 가장자리에
만세루란 현판이 걸려있다. 툇마루와 난간까지 갖춘 모습이 제법 품격을 갖춘
양반가를 보는 듯하다.


▲  만세루 목어(木魚)의 위엄
용을 꿈꾸는 목어가 입에 여의주로 보이는 동그란 것을 물고 하늘을 거닌다.
크게 부릅뜬 두 눈과 이글거리는 듯한 지느러미, 살랑거리는 꼬리 등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그를 덥썩 붙잡고 하늘을 날고 싶어진다.

▲  만세루 우측에서 속세로 나가는 문
수겹의 줄무늬가 쳐진 토담 사이로 속세로 안내하는 기와문이 있다.

▲  오색영롱한 연등이 대롱대롱 중생을 맞이하는 문 바깥 부분

▲  경내 서쪽을 빈틈없이 에워싼 토담
2중의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닦아 절을 지었다.
천리장성처럼 끝없이 펼쳐진 토담의 물결 앞에 절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 등의 악귀도 두 손을 들고 물러갈 것이다.

▲  납골당으로 쓰이는 영각전(靈覺殿)

경내에서 개울 건너 북쪽에는 2003년에 만든 영각전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은 납골당으로 서쪽
에 납골당으로 들어가는 지하도가 있으며, 위의 건물은 영가(靈駕, 죽은 이들)들을 위한 49재나
천도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인다. 내부 중앙에는 아미타불과 아미타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으
며, 외벽에는 고려불화(高麗佛畵)에 그려진 관음보살이 수려하게 그려져 있다.
* 납골당 문의는 보광사 영각전(☎ 031-948-4440)


▲  지하 납골당으로 들어가는 문 위쪽에 걸린 그림

관음보살이 영가를 배에 가득 태우고 넝실거리는 바다를 건너 극락으로 인도하는 장면이다. 판
옥선(板屋船) 비슷하게 생긴 큰 배에는 극락으로 가려는 이들로 가득하며, 배의 정원이 가득 차
서 따로 조그만 배 2척을 마련했다. 푸른 용과 붉은 용이 관음보살과 영가들을 지키며 극락으로
배를 이끈다. 출렁이는 물결이 마치 하늘로 치솟는 바위 산을 보는 듯 하다.


▲  석불전(石佛殿)

영각전 동쪽 높은 곳에 거대한 석불이 속세를 굽어보고 있다. 절에서는 이 석불(石佛)을 석불전
이라 부르는데, 그렇다고 건물은 아니다. 순천 금둔사(金屯寺, ☞ 관련글 보러가기)의 불보전처
럼 석불과 예를 올리는 공간을 통틀어 전(殿)이란 칭호를 준 것 뿐이다.

이 불상은 예전에는 나라를 지키는 호국대불(護國大佛)이라 불렀다. 1980년 1월 대웅보전 보살
상의 복장(腹臟) 유물이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다행히 진신사리만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를 봉안하고자 1980년대 거액의 어음 사기 사건으로 악명이 높은 장영자의 시주로 경내에서
가장 높은 이곳에 터를 닦고 석불을 세웠다. 그리고 6.25전쟁 때 절 부근이 치열했던 격전지였
으므로 그때 죽어간 이들을 위로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호국대불이라 불리게 되었다.

석불의 복장에는 보살상에서 나온 진신사리 11과와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각종 보석, 법화경과
아미타경,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발원문(發願文)이 봉안되어 있으며, 불상의 높이는 대략 15m에
이른다.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잔잔히 미소를 드리운 석불은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서 있으며, 주변에
석등 2기가 그의 광명을 밝힌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경내가 두 눈에 훤히 들어
온다.


▲  석불전에서 바라본 경내 서쪽 (설법전 구역)

▲  절을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나오다.

석불전을 끝으로 정말 오랜만에 찾은 보광사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둘러본 시간은 대략 1시
간 정도로 그냥 경내를 나오지 않고 다시 대웅전과 만세루를 찾아 거기서 조금 다리를 쉬었다가
속세로 아쉬운 발길을 떼었다. 고요하고 평안한 절을 뒤로하고 속세로 나올 때는 마치 돌아오지
못할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의 처절한 기분이다. 아비규환의 속세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루하루가
전쟁이기 때문이다. 속세는 언제쯤이나 극락처럼 평안해질까? 과연 그것이 가능이나 할까? 
이렇게 하여 한겨울 보광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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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2월 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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