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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9.04 서울 도심에 이런 두멧골이?? 북악산 산주름 속에 깃든 백사실계곡, 부암동 능금마을, 평창동 소나무 (백사실약수터)
  2. 2017.08.16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숲과 계곡, 폭포, 옛 별서 유적이 어우러진 ~~ 부암동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3. 2014.08.21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축제)
  4. 2013.08.04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 (백석동천, 백사골)
  5. 2012.08.13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별천지 ~ 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서울 도심에 이런 두멧골이?? 북악산 산주름 속에 깃든 백사실계곡, 부암동 능금마을, 평창동 소나무 (백사실약수터)

 


'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을 거닐다 '
(부암동 능금마을, 백사실계곡, 북악산 북쪽 자락)


▲  부암동 능금마을(뒷골마을)

▲  은덕사에서 바라본 부암동

▲  평창동 소나무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극성이던 8월의 첫 무렵, 일행들과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
을 찾았다.
북악산 북쪽 자락(부암동, 평창동 지역)에는 나의 오랜 즐겨찾기 명소인 백석동천(白石洞
天, 백사실계곡)을 비롯해 능금마을(뒷골마을), 평창동(平倉洞) 소나무 등의 명소가 깃들
여져 있는데 여름 제국의 핍박도 피할 겸, 간만에 그들을 복습할 생각으로 북악산의 품을
찾은 것이다.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弘濟川)을 건너 백석동천의 북쪽 관문인 현통사(玄通寺)와
백사폭포로 접근했다. 그곳을 지나면 백사골(백사실)의 속살로 들어서게 되는데 백사폭포
와 계곡 곳곳에 자리를 피고 피서 삼매에 빠진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띈다.
숲속에 진하게 묻힌 백석동천 중심부에 이르면 이곳의 상징인 별서(別墅)터가 있고, 그곳
을 지나 은행나무와 소나무숲을 지나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여기
서 동쪽 산길로 들어서면 잘생긴 반석과 바위들이 늘어선 백사골 상류가 나타난다.

백석동천은 백사골, 백사실, 백사실계곡 등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데, 정식 이름은 백사실
(백사실계곡)으로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줄여 표현한 이름이다. 백석동천은 백사골의 엄
연한 일부로 백사폭포에서 백석동천 바위글씨와 백사골 상류 외나무다리 직전까지를 주로
일컫는다.


 

♠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로 가는 산길)

▲  백석동천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외나무다리

백사골 상류의 너른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도 정
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길쭉한 통나무 2개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다리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
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서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요
는 없을 것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외나무다리

사람도 많고, 차량도 많고, 빌딩도 많고, 돌아다니는 돈도 많고, 그저 복잡하고 각박하게 보
이는 서울 도심 지척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신기할 따름이다. 백사골은 그 존
재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
계 같다.
백사폭포에서 시작된 백석동천은 이 외나무다리에서 사실상 끝이 나며 백사골은 능금마을 안
쪽까지 이어진다.


▲  백사골 상류의 평화로운 풍경
푸른 옷을 걸친 큰 나무가 하늘이 두려웠는지 아니면 겸손함 때문인지
곧게 자라나지 않고 허리를 푹 숙이고 있다.

▲  백사골 냇물이 잠시 쉬어가는 조그만 못

백사골에는 푸른 이끼 옷을 입은 바위들이 참 많다. 이끼가 마음 놓고 자라고 있다는 것은 여
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무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힘들지, 백사골의 이런 청정함과 순수함이 앞으로도 영원했으면 좋겠다.


▲  온갖 채소와 과일이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백사골 밭두렁

▲  남쪽에서 본 백사골 밭두렁

백사골 밭두렁은 여러 채소와 과일이 자라나고 있다. 비닐하우스와 밭을 지키는 원두막 같은
것도 있어 마치 산간지방의 깊은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라 백석동천에서 여러 번 놀
란 가슴을 또 놀라게 만든다.


▲  백사골 산길에서 만난 연분홍 코스모스의 위엄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정처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마구 들쑤시는 코스모스들~ 코스모스가 가을
꽃의 상징이다 보니 6~8월에 왠 코스모스가 피나 싶겠지만, 성질 급한 코스모스는 이미 6월부
터 꽃망울을 피운다. 그러니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  완전 시골 둑방길을 거니는 기분 ~ 능금마을 백사골 둑방길

계곡 너머로 2012년에 지어진 커다란 농원용 비닐하우스가 있다. 도심에 있는 잇점을 살려서
요즘 잘나가는 허브 식물이나 과일 농장, 채소 농장, 농사 체험 현장 등으로 꾸리면 괜찮을
듯 싶다. 아무리 도심 속이라고 해도 이곳이 농촌인 것은 변함이 없다.


▲  능금마을에서 백석동천으로 내려가는 둑방길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두메산골마을
부암동 능금마을(뒷골마을)


▲  능금마을

부암동(付岩洞) 능금마을(뒷골마을)은 백사골 상류이자 북악산 북쪽 자락에 둥지를 튼 두멧골
이다. 행정구역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으로 주소는 분명 서울 종로구가 맞는데 분위기는
번잡한 도심을 제대로 비웃듯 첩첩한 산주름 속에 박힌 외딴 산골마을이라 그야말로 서울 도
심 속의 산골마을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능금나무가 많아 능금나무골, 능금마을이라 불렸는데, 뒷골마을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이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뒷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북악산 앞쪽인 청
와대 일대를 앞골이라 불렀다. 예전에는 뒷골마을로 많이 불려 나도 입버릇처럼 그렇게 부르
고 있으나 요즘에는 능금마을로 크게 부르고 있으며, 마을에는 약 10여 가구에 50~60명 정도
의 주민이 살고 있다.

마을의 지형은 백사골이 흐르는 북쪽은 내리막이고, 서쪽과 남쪽, 동쪽은 모두 산으로 막혀있
다. 창의문(자하문)에서 넘어오는 유일한 포장길인 남쪽 골목길(백석동2길)은 속세살이처럼
각박한 고개를 넘어야 되는데, 지형이 이렇다보니 시내보다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며, 아랫
세상보다는 조금은 춥다.

마을 중앙부에는 창의문으로 나가는 골목길(백석동2길)의 종점이 있다. 그 종점이 마을 사람
들의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으로 여기서 더 이상 차량은 들어갈 수 없다. 게다가
궁벽한 곳이다보니 쓰레기도 1주에 이틀 정도만 수거하러 온다.
주차장 북쪽에는 슬레이트 지붕 여러 채와 2층짜리 빌라 1동, 비닐하우스가 여럿 있으며, 동
쪽으로 백사골을 따라 여러 가옥과 밭, 과수원이 펼쳐져 있다. 북악산이 베푼 백사골은 마을
을 동쪽에서 북쪽으로 가로지르며 백석동천과 홍제천으로 흘러간다.

시내에서 마을로 들어가려면 백사골을 거치거나 창의문(자하문)에서 북악산 허리에 둘러진 부
암동 산복길(백석동길)을 이용해야 된다. 세검정초교에서 접근할 경우는 마을까지 30여 분 걸
리며, 창의문에서 갈 때는 산복길(백석동길)을 따라 20여 분 걸어야 되는데 중간에 고개를 하
나 넘어야 된다. 차량으로 갈 경우에는 창의문에서 부암동 산복길을 타거나 북악산길로 접근
하면 되며, 그 흔한 대중교통의 혜택도 미치지 않는 시내 속 벽지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농사를 짓거나 시내로 출퇴근을 한다. 서울에서 공기가 1등급으로 맑고
청정한 계곡물이 흐르니 조촐하게 밭농사나 과수원을 하기에 적당하다. 백사골의 깨끗한 물을
먹고 자란 농작물(오이나 배추, 상추 등)은 밭과 비닐하우스에서 주민들의 갖은 정성을 거쳐
시내로 팔려 나간다.

이곳이 인구 1,000만을 지닌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 도심에 있음에도 개발의 칼질을 굴복시
키며 두메산골로 남을 수 있던 것은 푸른 기와집과 국무총리공관, 수방사 군부대를 비롯한 국
가의 예민한 장소를 품은 북악산 자락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북악산 주변은 개발제한구역
및 군사보호구역으로 상당수 묶여있다. 게다가 인왕산(仁王山)과 더불어 조선시대부터 서울을
지키는 전략적인 곳으로 군부대가 주변에 있으며, 북악산(백악산) 한양도성 능선을 따라 철책
과 초소가 줄지어 있다. 상황이 이러니 천박한 개발의 칼질도 무릎을 끓은 것이다.
북악산 북쪽 자락에 안긴 부암동과 성북동(城北洞)에 키다리 건물이 없는 것도, 녹지 비율이
두드러지게 높은 것도, 전원(田園) 분위기를 물씬 간직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북
악산과 인왕산의 성격이 180도 확 달라지거나 예민한 국가 시설들을 다른 데로 이전하지 않는
이상은 능금마을은 서울 도심 속의 두멧골로 영원히 남을 것이며, 쭉 그리 되기를 염원해 본
다.
물론 마을 사람들이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집 보수나 신축 등은 어느 정도 보장해줘야 될 것
이며, 북악산 나들이나 답사/출사를 이유로 그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동은 삼가해야 될 것이
다. 어차피 도심 속의 두멧골이란 상징성 외에는 명소라 할 만한 것은 없다. 그냥 지방 시골
에 널린 시골마을과 비슷하며 백석동천과 부암동 답사의 후식용으로 삼으면 적당하다.


▲  능금마을 북쪽 구역 (빌라 뒷쪽)

능금마을은 여러 번 와봤지만 딱히 명승지까지는 아니라서 제대로 둘러본 적은 없다. 하여 이
번에 제대로 마을의 속살을 살펴보기로 했다. 숨겨진 속살을 발견하고 보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은 없다.

주차장에서 빌라가 보이는 북쪽 골목길을 오르면 조금은 낡아보이는 산동네 기와집과 번듯하
게 지은 2층 빌라가 나란히 나타나 마을의 어제와 오늘을 대변하는 듯 하다. 작지만 빌라까지
들어섰고 근래에 새로 몸단장을 한 주택이 여럿 있을 정도면 개발 제한도 어느 정도 풀린 모
양이다.
빌라의 옆구리를 지나면 그나마 포장된 길은 끝나고 흙길로 변신하는데, 마치 백두대간 깊숙
한 곳에 숨겨진 화전민(火田民) 마을에 들어선 기분이며 밭두렁과 수풀이 우거진 그 길의 끝
에는 전원주택처럼 생긴 아담한 집이 있다.

다시 주차장으로 나와서 백사골을 따라 이어진 동쪽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 길도 좁다보니 자
전거나 오토바이 등만 겨우 바퀴를 굴릴 수 있는데, 동쪽 골목길은 세월을 먹은 집들이 여럿
있으며, 밭과 과수원이 제법 펼쳐져 목가적(牧歌的)인 풍경을 연출한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는 전원주택 스타일의 정원 넓은 집이 있다.

동쪽 골목길 중간에는 북악산길로 이어지는 샛길이 있다. 따로 이정표는 없지만 조금은 가파
르게 동쪽으로 이어진 길이 바로 그 길이다.

* 능금마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산50~69


▲  경작물이 무성하게 익어가는 동쪽 골목길

▲  백사골과 나란히 한 능금마을 동쪽 골목길
문명의 혜택이 전혀 들어오지 못할 것 같은 이 산골에도 전기와 전화는
모두 들어온다.

▲  능금마을 동쪽 골목길 밭두렁

▲  경작물이 익어가는 동쪽 골목길


▲  부암동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각박한 고갯길
길의 경사가 각박해 내려가기는 쉬워도 오르는 건 조금 힘들다. (그래도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음)


 

♠  백사실약수터와 여러 돌탑들

▲  외나무다리 주변에 펼쳐진 하얀 피부의 반석
저 반석을 내려가면 계곡 오른쪽으로 백사실약수터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온다.


능금마을을 둘러보고 다시 백석동천으로 내려가 외나무다리를 지나면 윗 사진의 넓은 반석이
나온다. 반석(磐石)을 지나면 바로 계곡 건너로 넘어가는 부분이 있는데 그곳을 건너면 백사
실약수터를 알리는 조그만 이정표가 조용히 손짓한다.
백석동천(백사실)을 15년 넘게 들락거렸지만 백사실약수터는 한참의 세월이 흐른 이후에야 인
연을 지은 곳이다. 별서터와 바위글씨들, 능금마을이 전부인줄 알고 등잔 밑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탓으로 무슨 일이든 방심은 정말 금물이다.


▲  백사골 돌탑

백사실약수터로 인도하는 산길을 30초 정도 가면 산등성이에 수북하게 쌓인 돌탑이 마중을 한
다. 이곳을 지나던 중생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은 돌탑으로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악신
앙(山岳信仰)의 현장이다.
백석동천 별서터가 지배층의 산물이라면 이 탑은 백성들의 한 줄기 희망과 애환이 만들어낸
산물로 별서터는 터만 남은 채, 성장이 멈추었지만 이 탑은 지금도 지나가는 이들에 의해 조
금씩 성장하고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돌탑 가족들 (얼핏 보면 3기처럼 보이나 4기임)

▲  옆에서 본 돌탑 가족

백석동천에서 백사실약수터로 오르는 산길에는 돌탑이 유난히도 많다. 앞 돌탑에서 3분 정도
가면 돌탑 4기를 만나게 되는데, (조금 후미진 곳에 있음) 이중 1기는 나머지 3기를 다 합쳐
도 한참이나 모자를 정도로 유별나게 크다.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으나 앞 돌탑과
달리 규칙적인 모습이고 그리 묵은 티가 보이지 않아 근래에 백사실 수식용으로 닦여진 것으
로 보인다.

돌탑을 만들려면 서로 비슷한 덩치로 만들 것이지 하나만 지나치게 크고 나머지는 완전 쥐꼬
리만한 크기라 마치 어미와 꼬마 3형제를 보는 듯 하다. 꼬마 탑도 어엿한 돌탑을 이루는 어
미탑처럼 장차 큰 탑으로 성장하길 기대해본다.


▲  백사실약수터로 오르는 적막한 산길

▲  소나무 산길 (백사실약수터 방향)
길을 가다가 뜬금없이 산신이나 신선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선녀 누님이
갑자기 나타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첩첩한 산주름의 산길이다.

▲  백사실약수터와 북악산길로 인도하는 산길

백사실약수터는 백사골의 거의 유일한 약수터이자 백사골의 오랜 은자(隱者)로 능금마을 뒷쪽
(북쪽)에 숨겨져 있다. 북악산이 속세에 베푼 소중한 샘터로 백사골의 청정한 기운을 머금은
탓인지 수질도 청정하고 맛도 좀 달콤한 기분이다.
벽돌을 다진 약수터 주변은 산뜻하게 정비되어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의자와 간단한 운동시설
이 닦여져 있다. 약수터 뒷쪽에는 나무 기둥 난간이 둘러진 공간이 있는데, 그 안에 여러 식
물이 담겨져 있어 마치 신선의 묘약(妙藥)이나 신선초(神仙草)가 자라는 듯한 기분이다. 그리
고 약수터 동남쪽으로 산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길이 마중을 한다.


▲  백사실약수터 인근 바위에 심어진 조촐한 돌탑
이 돌탑도 앞에 돌탑 가족과 마찬가지로 근래에 조성된 것 같다. 그 모습이
산이나 계곡에 널린 일반적인 산악신앙의 돌탑이 아닌 조그만
봉수대(烽燧臺)처럼 보인다.


 

♠  북악산 백사실 동쪽 능선

▲  백사실 동쪽 능선길

백사실 동쪽 능선은 북악산길에서 시작되어 백사실약수터, 은덕사를 지나 북쪽으로 KT기지국,
평창동조망점까지 내려가듯 이어진다. 백사실의 동쪽 지붕으로 중간중간에 현통사와 백사골(
백석동천), 평창동으로 내려가는 산길을 늘어뜨렸으며, 소나무를 비롯한 갖은 나무들이 삼삼
하게 우거져 있다.
백사골에 왔다면 별서터와 계곡만 살피지 말고 백사실약수터와 1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 백사
골 동쪽 능선도 한번 거닐기 바란다.


▲  소나무가 우거진 동쪽 능선에 걸터앉은 은덕사(恩德寺)

백사실 동쪽 능선을 걷다 보면 왼쪽에 건물 하나가 손짓한다. 소나무숲을 병풍으로 삼아 서쪽
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은덕사란 조그만 절로 건물 1동이 전부이다. 그러다보니 하나의 건물
에 법당(法堂)과 요사(寮舍), 종무소의 역할까지 싹 담겨져 있는데, 절집에 흔한 기와집이 아
닌 별장이나 전원주택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법당 앞에는 잔디가 입혀진 뜨락이 있으며, 이곳에서 가꾸는 여러 농작물이 한참 숙성의 과정
을 밟고 있다. 또한 절 앞에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는 꼭 가보도록 하자. 여기서 보는 조망
맛이 그런데로 일품이다.


▲  은덕사 앞 바위에서 굽어본 부암동

은덕사 앞 바위에 올라서면 산주름에 묻힌 부암동 북부와 홍지동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다
만 자하문터널과 하림각이 있는 부암동 남부는 백사실 서쪽 능선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저 너머에 멋드러진 바위를 여럿 품고 있는 산은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우리나라
호랑이의 성지(聖地)였던 인왕산으로 나와 비슷한 위치에서 바라보인다. 그리고 바로 밑에 보
이는 기와집들은 백사폭포 위에 자리한 현통사로 백사폭포의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두 귀를 멍하게 한다. 은덕사 바위에서 현통사로 바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는데, 경사가
다소 각박하므로 조심해야 된다.


▲  솔내음이 진동하는 백사실 동쪽 능선길

▲  평창동 조망점 바위

백사실 동쪽 능선의 북쪽 끝에는 KT기지국이 있다. 그곳에 이르기 전에 오른쪽으로 산길이 하
나 나있는데, 바위가 그 길의 끝을 장식하고 있다. (더 이상 내려가는 길도 없음)
이 바위는 딱히 이름은 없으나 백사골에 있는 안내도에는 단순히 조망점이라고 나온다. 북쪽
을 바라보고 선 이 바위에 올라서면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남쪽 산줄기가 시야에 들어오는
데 본글에서는 평창동이 보이는 곳이란 뜻에서 평창동 조망점이라 칭하도록 하겠다.


▲  평창동 조망점에서 바라본 천하 - 왜 이리 옥의 때가 많은지..?

평창동 조망점에서 훤히 바라보이는 평창동은 성북동(城北洞)과 한남동(漢南洞), 장충동(奬忠
洞)과 더불어 서울의 대표적인 부자 동네이다. 강남이 부자라고는 하지만 이들 동네 앞에서는
감히 이름도 꺼내지 못하는 그들의 후배에 불과하다.
평창동은 북한산과 북악산 사이에 자리한 산악 지대로 나름 명당(明堂) 자리로 명성이 자자하
다. 게다가 경관도 수려하여 해방 이후 돈 꽤나 만지던 이들이 조금씩 들어와 살더니만 이제
는 완전 졸부들의 씁쓸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물론 서민들도 적지 않게 살고 있음)

성북동이 우리나라의 0.1% 부자들이 산다고 하지만 평창동도 그에 못지 않다. 완전 산동네로
차량이 없으면 왕래도 힘든 곳이지만 명당의 기운과 수려한 경승지의 덕을 보고자 졸부들이
가득 밀려와 북한산을 건방지게 압박했다. 그래서 산자락 곳곳에 무식하게 큰 저택과 빌라를
짓고 자연을 훼손하면서 북한산 남쪽 경관은 적지않게 손상되고 말았다. 다행히 평창동 윗쪽
이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으로 꽁꽁 묶여있어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북한산성 밑까지 졸부
들이 싹 밀어버릴 뻔했다.

조망점에서 보이는 천하는 정말 1폭의 그림이 분명한데, 옥의 티가 너무 많다. 내게 저 장면
을 손질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졸부들의 집을 지우개로 다 지우고 그들로 파괴된 숲과 계곡
을 그려 자연의 모습으로 채색하고 싶다.


 

♠  평창동에 숨겨진 오래된 소나무

▲  평창동 소나무 밑 오솔길 (평창동 방향)

평창동 조망점에서 다시 은덕사 쪽으로 나오면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이 있다. 여기서 직진(남
쪽)하면 백사실 동쪽 능선을 쭉 타게 되고, 오른쪽(서쪽)은 현통사, 왼쪽(동쪽)은 평창동으로
이어진다. 나는 평창동 소나무를 보고자 평창동 방향을 택했다.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2분 정도 내려가면 평탄한 곳이 나타나면서 1차선 크기의 비포장 오솔길
이 펼쳐진다. 이 길은 묘각사 입구까지 이어지는데, 햇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삼삼한 숲속
에 포장도 씌우지 않은 흙길이라 그냥 지나치기 아쉬울 정도로 매우 정겹기만 하다. 그 길 오
른쪽에는 3~4m 높이로 닦인 석축이 길게 이어져 있어 옛 산성(山城)이나 건물터 유적이 아닐
까 싶은 기대감을 안긴다. 허나 그 석축은 산성도 아니고 옛 건물터 등의 문화유적도 아니다.
자세한 사연까지는 모르겠지만 군부대나 체육 시설을 만들면서 넓게 땅을 다지고 석축을 쌓은
것으로 지금은 배드민턴장과 쉼터가 있어 동네 주민들의 조촐한 쉼터 역할을 한다. 바로 저곳
에 오래된 소나무가 깃들여져 있다.


▲  평창동 소나무 밑 오솔길 (백사실 능선, 은덕사 방향)

평창동 소나무를 보고자 석축 서쪽 끝에서 접근을 시도했으나 철책의 위엄 앞에 돌아서고 말
았다. 석축 밑 오솔길을 거닐면 중간에 그 소나무가 보이나 주변 나무들이 시선을 방해해 제
대로 사진에 담을 수가 없다.
석축 윗부분이 사유지라 출입이 통제된 것이라 여겨 살짝 들어갈 길을 찾던 중, 석축 동쪽 끝
에서 그곳으로 인도하는 길이 슬쩍 손을 내민다. 서쪽 끝과 달리 방해물도 없어 그 길을 오르
니 숲에 둘러싸인 제법 너른 터가 나온다. 


▲  석축 윗쪽에 넓게 닦여진 배드민턴장

▲  평창동 소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7호

북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평창동 소나무는 280년 정도 묵은 늙은 나무이다. 그의 신상이 적
힌 안내문에는 보호수 지정일 기준으로 230년이라고 나와있는데, 그가 보호수로 지정된 것은
1968년 7월 3일이다. 그 이후 50여 년이 무심하게 흘렀으니 약 280~290년 정도로 보면 된다.
무한리필로 쏟아지는 세월을 든든한 양분으로 삼아 높이 13m, 둘레 2.24m의 어엿하고 기품 넘
치는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생김새가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정2품송(正二品松)과 좀 비슷
하여 그리 낯설지는 않은 모습이다.

서울에서 100년 이상 묵은 나무 중, 소나무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보호수나 문화재로 지정
된 것은 이곳과 여기서 가까운 석파정(石坡亭) 소나무 정도이다. 그중에서도 평창동 소나무가
나이가 제일 많아 서울에서 가장 늙은 소나무라 봐도 무리는 없다.
이 나무를 누가 심었고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전해오는 것은 없지만 백사실로 가는 길목에 자
리해 있어 그곳을 찾거나 백사실에 머물던 사람이 심은 것이 아닐까 싶다.


▲  서쪽에서 바라본 평창동 소나무의 위엄

하늘에 대한 경외심 때문일까?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40도 정도 고개를 숙였다. 벼도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이 나무 역시 나이를 먹으면서 그렇게 고개를 꺾은 모양이다. 그만큼 숙성될
수록 겸손을 차리라는 대자연 형님의 심오한 뜻이 담긴 것은 아닐까 싶다. 자연물은 그 뜻을
받들고 잘 지키는데,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며 온갖 민폐를 아끼지
않는 인간들은 왜 단순한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인간은 신이 아닌 늘 애매한 존
재로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고개를 수그린 소나무의 자태가 곧게 서있는 모습보다는 기품과 운치가 더 진해
보이는 것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일 줄 모르는 사람보다는 자신을 낮추며 겸손을
보이는 사람이 더 값어치가 있어 보인다.
평창동 소나무를 끝으로 한여름 북악산 북쪽 자락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평창동 소나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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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20년 8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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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숲과 계곡, 폭포, 옛 별서 유적이 어우러진 ~~ 부암동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 서울 도심 속의 아름다운 별천지,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늦가을 나들이 '



늦가을이 거의 저물어가던 11월 끝 무렵에 후배 여인네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백사골)을 찾았다. <본글에서 '백사실=백사골'임>

백사실은 서울 장안에서 가장 흠모하는 곳의 하나로 2005년 5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
시키며 처음 발을 들인 이래 매년 6~7회 이상 발걸음을 하고 있다. 그렇게나 많이 찾았으
면<지금까지 80번은 넘게 찾은 듯> 정말 지겹고도 남음이 있을텐데 그에게 제대로 중독된
것일까? 돌아서기가 무섭게 또 들어가고 싶은 곳이다.
 
우선 도심 속의 전원 마을, 부암동(付岩洞)의 여러 명소(☞ 관련글 보러가기)를 둘러보고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弘濟川) 다리를 건너 '세검정로 6다길' 골목으로 들어섰다.
백사실의 눈부신 인기를 보여주듯 그를 알리는 이정표가 자주 비춰주니 길치들도 조금 마
음을 놓고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백사실로 들어가는 골목이 조금 복잡함)
골목길 끝에 자리한 빌라 옆으로 높게 펼쳐진 계단을 오르면 혜문사입구인데 여기서 오른
쪽으로 야트막한 길을 넘으면 바로 백사실의 남쪽 정문인 현통사와 백사폭포(동령폭포)가
모습을 비춘다.


▲  혜문사입구 골목길에서 바라본 서울의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산악 분지(盆地)이다.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골로 넘어가는 산길
저곳을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백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두근두근 백석동천(백사실)의 속살로 들어서다.

▲  현통사 밑에 자리한 백사폭포(白沙瀑布, 동령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현통사(玄通寺) 대문 밑에 새하얀 반
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그의 매끄러운 피부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 백사폭포가 수줍은 모습으로 별천지를 꿈꾸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
시 들었다 놓는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수려한 멋은 별로 없다. 그냥 수수하게 생
긴 폭포로 하얀 반석(盤石)과 썩 어우러져 제법 수려한 멋을 풍기면서 백사골에 대한 첫 인상
을 긍정적으로 인도한다.
서울 도심에 거의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로 나름 가치가 높으며, 만약 설악산이나 주왕산(周王
山) 등 1급 폭포가 즐비한 산에 붙어있었다면 그리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
람이나 폭포나 때와 장소를 잘 만나야 된다.
백사폭포란 이름은 내가 백사골의 이름을 따서 멋대로 갖다붙인 것인데, 원래 이름은 동령폭포
라고 한다. 하지만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에 자신의 이름마저 계곡에 떠내려보내면서 그의 이름
은 아득히 잊혀지고 말았다.


▲  백사폭포와 하얀 반석

늦가을이라 폭포수가 가늘고 누런 낙엽이 짙게 깔려있지만 비가 많이 오면 폭포수도 제법 패기
를 보인다. 한여름에는 동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이 되어주며, 여름 제국(帝國)에
대항하고자 찾아온 피서객들이 돗자리를 피며 한숨 자거나 쉬는 등, 도심 속의 조촐한 꿀피서
지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  낙엽은 물론 가을까지 무심히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아랫 못

겨울 제국의 시련을 견뎌내고자 백사골 나무들이 속절없이 털어낸 낙엽들은 폭포 주변에 수북
히 쌓여있다. 이들 낙엽은 폭포 밑에서 마지막 정모를 즐기며 올해도 변함없이 도래한 겨울을
원망한다. 몇몇 낙엽은 한이 맺혔는지 폭포 중간에 철썩 달라붙어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가고 싶겠지만 매정한 자연은 그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으며 그렇게 발버
둥을 치다가 결국 힘이 다해 떠내려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런 낙엽의 발악을 보면서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실감한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 냇물은 큰 세상을 꿈꾸며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 담(潭)에서
큰 세상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준비한다. 다시는 오지 못할 그리운 고향, 북악산(백악산)의 그
리움을 털어내며 길을 재촉한 그들은 다리 밑 조그만 폭포를 통해 아랫 못으로 흘러가며 여기
서 다시금 바위를 타고 홍제천으로, 한강으로, 다시 서해바다로 종점없는 여행을 떠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늦가을의 절정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열심
히 매뭇새를 다듬는다. 저들의 처절한 아름다움 뒤에는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잔잔
한 수면에는 낙엽들이 두둥실 떠 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며 백사골에 머문 늦가을도 낙엽
을 데리고 계곡을 통해 저 밑으로 쿨하게 흘러간다.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골 밑에 둥지를 튼 현통사는 조그만 현대 사찰로 20세기 후반 큰 승려의 하나로 추앙을 받
는 일붕(一鵬)이 머물렀던 절이다. 백사골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거의 없는데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만들만한 구석도 없기 때문
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과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지닌 불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덩어리로 몰려있는
데, 대웅전은 서남쪽을, 나머지는 남쪽과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

인적도 거의 없는 적막한 산사에 백사골 산바람이 살며시 들어와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
짝 희롱하고 그 희롱에 놀란 풍경은 그윽한 풍경소리를 풍기며 주변의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  늦가을이 깃들여진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 속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자연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대자연이 그린 아름다운 작품, 백사골(백사실계곡) - 별서터 서쪽

간만에 백사골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으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청정한 내음
과 솔내음이 두루 나래를 펼치는 백사골 숲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1폭의 담채
화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몸살이 날 지경인데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
들 이곳의 풍경을 완전히 표현하는 것은 힘들 것이며,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
는 것은 어쩌면 백사골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저 탄성만 연거푸 지르며 조용히 백사골에 묻혀간다.
 
숲에 깃든 순결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길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 땅에서는 보기 어려운 도롱뇽, 가
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
점 사라지고 이제 이곳이 그들의 몇 안되는 낙원이 된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
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하
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저런 무성한 이
끼를 만나는 것은 보기가 정말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서울 도심의 별천지처럼 청정함을 여
실히 간직하고 있다.


▲  별서터 북쪽 계곡에 드러누운 바위들
오른쪽 하얀 바위에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만들 때
돌을 떼던 흔적이다.


▲  별서터 연못 옆을 지나는 백사골 (별서터 징검다리)

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직전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나 돌다리를 건너면 바로
사랑채터와 연못이 있는 백석동천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계곡에 둑
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린데 둑 바로 위에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별서 주
인이 돌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 직전 갈림길(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곳)에서 뒤쪽(서남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눈여겨 살펴보자. 그 언덕 정상에 커다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면 글씨가 화석처럼 박혀있는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중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별서터(연못터 주
변) 바로 서남쪽 산자락이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숲에 거의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
람들은 그의 존재감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들이 강제로 벌거벗는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그나
마 쉽게 눈동자에 들어오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마저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닦고 그 안에 '月巖' 바위글씨를
를 다졌는데, 백사실의 존재를 처음으로 언급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정되
나 확실한 것은 없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습은 가히 명필 중의 명필
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늦가을과 겨울을 제외하면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하기가 어렵다. 백
사골의 경치를 즐기러 온 선비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확트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
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굳이 이광여가 아니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
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으며 잔을 걸치고 싶다.


 

♠  북악산(백악산)에 숨겨진 비밀의 옛 별서 유적,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전경

한양도성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나서면 여기가 정녕 서
울일까?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
암동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감싸인 분지로 서
울의 일부라기보다 산간 마을이나 산골에 묻힌 조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이다. 도심이 바로 지
척임에도 도심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지형 탓도 있지만 나라의 예민한 곳이 동
네 주변에 많아 개발의 천박한 칼질을 잠재웠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도성 밖 경승지로 꼽혔던 부암동은 양반과 왕족의 별서(別墅, 별장) 및 피서지
로 인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로 형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완전히 털려 강제로 사라진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없는 야망이 깃든 무계정사(武溪精舍),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
(石坡亭), 인조반정(1623년)과 관련이 깊은 세검정(洗劍亭), 연산군(燕山君)이 사냥과 여가의
장소로 닦았던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했던 그들의 메아리를 아련히 전해준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인 백사골(백사실)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의 별장이 있었다 하여 백사실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다고 하며, 백사골
과 별서터를 하나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북악산(백악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북악산의 바위 명소란 뜻인데, 그만큼 하얀 바위와 반석이 많고 경치가 고왔다. 그리고 동천<
洞天, 동학(洞壑)이라고도 함>은 양반과 선비들이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붙어주는 경승지의 명
예로운 칭호이다.

이곳은 백석동천 외에 백사실(계곡), 백사골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며, 백석정(亭), 백석실(
室)이란 옛 이름도 있다. (백석정은 19세기에 주로 쓰였음) 옛 이름을 제외하고 어느 이름을
쓰던 그건 각자의 취향이나 백사실, 백사실계곡, 백석동천으로 많이 불리며 백사골은 백사실계
곡을 줄여서 표현한 이름이다. (나는 백사골이라 많이 부름)

▲  연못 한쪽에 자리한 정자터

▲  사랑채터

백석동천 별서는 1830년경에 지어진(또는 중건된) 것으로 여겨지는 600평 규모의 별서이다. 누
가 지었는지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으나 백석동천과 관련된 최초 기록인 월암 이광여(1720~
1783)의 이참봉집(李參奉集)에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이 조
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
이 있어 현재의 별서 이전(17~18세기)부터 조그만 집이 이미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2012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이곳을 매입하여 별장으로 삼았음이 밝혀지면서
백사실의 비밀이 다소 벗겨졌다. 추사의 문집인 '완당전집(阮堂全集) 권9'에 '선인이 살던 백
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나의 북서(北墅, 북쪽 별서)에 백석정 옛터가 있다'
등의 내용이 있
고 그곳과 관련된 시가 여럿 발견되어 추사가 백석정 자리를 구입하여 크고 아름답게 다시 지
었음이 밝혀졌다. 하여 지금까지 전해오던 1830년 창건설(또는 중건설)의 주인공이 바로 추사
로 여겨진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해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안채는 4
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에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
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마 주춧돌과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 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전쟁 때 정자가 파괴되고 그 휴유증으로 연못
마저 그 기능이 상실되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장의 흔적, 바
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석동천의 옛 정취를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끝없이 몰아넣던 백석동천은 2006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 사람들만 찾
던 그들만의 숨겨진 명소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한 채, 조용히 잠들어 있
던 그는 2005년 문화재청으로부터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이 땅의 휼륭한 전통 정원'
으로 아름답게 평가를 받으면서 무명 수준에서 바로
적 462호
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변변한 안내문과 이정표조차도 없었으며,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내문과 이
정표가 설치되었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싹 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
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  사랑채에서 바라본 연못

▲  사랑채와 안채터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꿀단지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
거니와 여름의 녹음(綠陰), 늦가을 단풍, 겨울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모두 아름다
운 경승지이다. 숲이 매우 삼삼하여 강렬한 햇살도 고개를 숙이며, 나무가 베푼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아 백사골의 졸졸졸~♪ 교향곡을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나, 독서를 하거나, 돗자리를 피고 낮잠을 청하면 정말 극락이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터를 둘러보며 옛 사람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으
로 살았을까? 그려보면서 그들의 생활과 마음을 조금이나마 체험해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2006년 이후 이곳의 존재감이 널리 퍼져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이 늘어나면서 고적했던
분위기는 조금 떨어진 것 같다. (평일은 그래도 한적함) 게다가 정신줄을 놓은 사람까지 불순
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돌에 낙서를 하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계곡을 뒤집거나, 수목을 괴
롭히는 행위가 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이 절실해 보인다. 아직은 괜찮다고 해도 지키는 사람도
제대로 없는 첩첩한 산골이라 방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2013년 종로구청에서 별서터를 복원하겠다며 뇌에 주름 잡힌 소리를 일삼아 크게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 개소리는 쏙 들어갔지만 어설프게 복원하려 들지 말고 제발 지금의
모습 그대로 두길 바란다. 비록 폐허의 상태여도 현재 모습이 더 운치가 진하며 옛터 위에 상
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가 있다. 끝으로 개인적인 욕심이지만 이런 곳은 대중적인 명소로
너무 노출되는 것보다는 소수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남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미 그러기에는 그의 존재감이 한라산 꼭대기에 붙어있을 정도로 커버렸다.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찾아가기 (2017년 7월 기준)
* 백사실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
  장 쉽고 가까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이며, 하림각은 경사가 각박하고, 창의문은 거리가 길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AW컨벤션센터) 길 건너편에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다. 그 길(백석동길
   )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면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
   내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자하문터널 방면)으로 가면 백석동천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 → 신영교를 건너 백석동천 이정표를 따라 '세검정로
   6다길'로 쭉 올라감 → 혜문사입구 → 현통사 → 백사골(백석동천)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4호
   선 길음역(6,7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3번 시내버스 이용 → 세검정초교 하차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서쪽(부암동 방향)으로 조금 가면 창의문앞 교차로이
   다. 여기서 오른쪽 길(북악산길 방향)로 꺾어서 백석동길 골목(부암동 산복길)으로 진입해
   산모퉁이와 지하우스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직진하여 계속 들어가면<왼쪽 길
   로 가도 됨> 그 길의 끝에 뒷골마을(능금마을)이 있다.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가
   면 바로 백석동천이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
  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 산25일대


 

♠  백석동천 사랑채터

▲  사랑채터 언덕 밑 (백석동천 안내문)

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검은 피부의 백석동천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안내문 너머로 사랑채터가 있는 언덕과 그곳으로 인도하는 돌계단이 오롯하게 있는데, 장대한
세월의 태클로 계단 돌이 좀 헝클어져 있으나 경사가 완만하여 계단의 역할은 그리 녹슬지 않
았다. 반면 연못 쪽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을 계단처럼 얹혀놓았는데 높이
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다소 진땀을 빼야 된다.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ㄱ' 구조의 5량집 사랑채를 두었는데, 아쉽게도 생전의 사진
도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영구히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건물터와 주춧돌은 잘 남아있
으며 2010년 발굴조사로 새롭게 드러난 흔적까지 더해 산듯하게 정비했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누마루로 주춧돌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선 별서 주
인이 연못을 바라보며 독서를 하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이 오면 여기서 곡차와 산해
진미를 대접하거나 시 1수 주고 받았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름) 사랑
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이 남아있다.


▲  선명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

▲  석축 위에 세워진 사랑채터 누마루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바로 옆에서 바라본 사랑채터

▲  사랑채터 옆에 자리한 네모난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 때 발견된 것으로 연못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낙엽과
잡석만 가득 널려 황폐의 극치를 보여준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이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잡초와 낙엽이 서로 보듬어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
리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고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완전히 생매장을 당했다. 그
러다가 2010년 이곳이 서울시와 문화재청의 조사 대상이 되면서 옥의 티 같은 배드민턴장을 밀
어버렸으며,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습했다. 이후 2011년 3월 문
화유산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묻었다.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담의 흔적이 여럿 남아있으며, 비록 기와를 지닌 사랑채와
안채는 세월이란 용광로에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채의 기품과 분위기를 흐릿
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터 일대
이곳에 있었을 건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백석동천 별서터의 운치를 말아먹을 수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헝클어진 남쪽 돌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를 이어주는 서쪽 돌계단


▲  사랑채 뒷쪽 석축과 돌담

사랑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
서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된다. 석축 윗쪽에는 별서의 경계를 가르던 돌담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상당수 허물어지고 지금은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북쪽까
지 돌담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사랑채 뒷쪽 돌담장의 흔적

▲  사랑채와 안채터에서 끄집어낸 기와조각과
그릇 파편


 

♠  물 대신 낙엽과 잡초로 가득한 연못과 정자터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

사랑채터에서 바라보이는 연못은 물고기가 수영하고 연꽃이 떠있는 물 대신 나무들이 미련없이
떨군 낙엽들이 가득 연못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막 보금자리가 되었다. 세월의 자비 없는 흐름
은 연못의 구성원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옛날에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보름달처럼 둥그런 연못을 채웠으며, 지나가던 햇님과 달님이
그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무들도 연못을 거울 삼아 매무새를 다듬었다. 허나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던 이곳까지 총탄을 휘날려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기능이 상실되어 껍데기만 남았다.


▲  연못에 들어가서 바라본 사랑채터와 동쪽 돌계단

비록 살아있는 연못은 아니지만 비가 많이 오면 물이 가득히 고여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
찾기도 한다. 연못이 넓기 때문에 이때만큼은 조그만 조각배를 하나 띄워놓고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였다면 단단한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겼을
지도 모른다.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연못, 허나 저 연못에도 자연의 생명력
은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나고 있다. 게다가 빗물이 모이면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런데로
연못티를 풍긴다. 잡초로 덥수룩한 연못의 여름 모습도 나름대로 초록의 아름다움을 띄고 있으
며 늦가을에는 낙엽이 한가득 공간을 채우면서 누런 연못이 된다.

연못의 둘레는 약 100m 정도로 그 주변은 나무가 무성하여 짙은 그늘이 연못을 덮어주고 있으
며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울창한 삼림은 이곳을 찾
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은 그
다지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허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마음으로 그 허전함을 달래주고 싶구나. 그
렇다고 정자를 복원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시를 읊거나 벗들과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
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아는 사람이면 기생들도 불러 정자 안에서 얼씨구~ 춤과 노래, 시를
즐겼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몸살이 날 정도로 부러울 뿐이다. 이래서 무슨 수를 쓰든
권력층이 되야 되고 부자가 되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과 상상으로만 끝나버린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키가 약 20m에 이르는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나이는 대략
150~200년 정도로 여겨진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또는 매입 기념으로 심었을지도 모
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원
을 꾸민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마당쇠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
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쯤이나 올련지...?


▲  백석동천 별서터 전경

▲  연못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늦가을)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

백석동천 별서터 계곡 윗쪽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물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허나
통제의 줄이 느슨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히 여름에는 피서객들로 정신
이 없어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우회하여 백사골 상류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는데, 2012년에 주변 산길
을 정비하고 산불방제 장비를 갖춘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을 심어 소소한 볼거리를 선사하
고 있다. 허나 솟대 돌탑은 백사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이다.
돌탑을 지나면 소나무숲과 처절한 아름다움을 보이며 늦가을에 잠긴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
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부암동 주택가
방면)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별서터 입구에 세워진 오리 솟대 돌탑
예로부터 오리 등의 새는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중간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소도(蘇塗)에서 비롯된 솟대 꼭대기에 오리 모양을 달아두어
하늘과의 연락을 꾀했다.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층 돕고 있는 호젓한 은행나무숲길

▲  아직도 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 바위글씨

은행나무숲에서 오른쪽 산길로 가면 '白石洞天'이란 문신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동천(洞天)이란 신선이 머물 정도로 경관이 아름다운 경승지에 붙여진 이름으로 아무 산천에나
주어지는 이름이 아니다. <백석동천의 유래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음>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백석동천 바위글씨는 누가 언제 썼는지 북악산 귀신도 모른다. 아
마도 월암 바위글씨와 비슷한 시기가 아닐 듯 싶은데 글씨가 정말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
다. 옛 사람들은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저렇게 낙서를 남기는 습성이 있었는데, 백사골 역시
그들의 낙서가 1개도 아닌 2개나 깃들여져 있으니 그만큼 이곳 풍경이 그들의 마음을 통 크게
훔쳐갔기 때문이다.


▲  백사골의 그림 같은 숲길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외나무다리 방향)

 새하얀 반석들이 가득 펼쳐진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동쪽)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뒷골마을(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길을 조금 가면 잠시 떨어졌던 백사
골 냇물이 나타난다.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과 푸른 이끼 옷을 입은 바위까지 줄줄이 이어지면
서 탄사를 자아내게 하는데, 비록 설악산이나 금강산 등 쟁쟁한 큰 산의 계곡만은 못해도 서울
도심에 저런 계곡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꿀단지나 다름이 없다.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을 탄압(?)하는 현장이 되고 시민들이 소풍과 나들이로
이곳에 들어와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
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백사골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는 외나무다리

백사골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나타나 깊은 산골의 고적
하고도 정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2개의 목재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도
로 좁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하지만 다리 길이도 짧고 다
리 밑 수심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
울 필요는 없다.

사람도 많고, 차량도 많고, 키다리 빌딩도 많고, 복잡하고 각박하기만 한 서울 도심 속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백사골은 그 존재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
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만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계 같다.


▲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 방면)
모든 것을 내버린 나무들이 하늘이 두려운지 아니면 벌써 노년에 들어선 건지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허리를 90도 가까이 숙였다.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 직전)

외나무다리를 지나면서 길은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1~2m 정도로 폭이 좁아진다. 계곡 오른쪽에
는 생뚱맞게도 비닐하우스와 밭, 과수원이 펼쳐져 두 눈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들을 지
나면 집들이 나오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분명 이곳은 서울 도심 종로구가 분명
한데 풍경은 완전히 강원도 두멧골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에 벌인 부암동 백사실(백석동천)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 이후 내용은
분량상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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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축제)

 

 

' 서울 봉원사(奉元寺) 연꽃 나들이  '

▲  봉원사에서 만난 연꽃의 위엄

 


여름의 제국(帝國)이 한참 패기를 부리는 7~8월에는 연꽃을 주인공으로 한 연꽃축제가 천
하 곳곳에서 열린다.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아직 인지도는 낮
지만 연꽃축제를 하나 가지고 있으니, 바로 2003년부터 봉원사에서 열리고 있는 서울연꽃
문화대축제이다.

무더위가 한참 물이 오르던 7월 끝 무렵에 봉원사 연꽃 소식을 접했다. 여름이 왔으니 친
여름파인 연꽃의 향연은 한번은 봐줘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하여 번
잡한 주말을 피해 평일 중에 날을 잡아 후배 여인네와 봉원사를 찾았다.
오후 2시에 서대문역(5호선)에서 그를 만나 봉원사 턱밑까지 올라가는 7024번 시내버스를
타고 안산(鞍山) 자락에 묻힌 봉원사 종점에 발을 내린다.

보기만해도 숨통이 질리는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그것을 통쾌하게 비웃듯 종점 주
변은 완전 자연에 감싸인 산골마을이다. 아무리 인구 1,000만의 서울이라고 해서 높은 건
물과 번잡한 거리, 무수한 인파들만 있는 것은 아닐진데, 서울에 대한 뿌리깊은 고정관념
때문일까? 서울 장안에서 그런 풍경과 대비되는 곳을 만나면 다들 왠 뚱딴지 같은 풍경인
가 눈부터 의심한다.
버스가 바퀴를 접고 쉬는 봉원사 주차장은 북쪽에 숲속한방랜드 찜질방이 자리해 있고 봉
원사로 가는 길목에는 민가들이 조촐하게 사하촌(寺下村)을 이룬다. 이 마을은 봉원사 승
려들이 주류를 이루며 살고 있는데 대부분 가족과 함께 산다. 이는 봉원사가 혼인을 허용
하는 태고종(太古宗)의 중심지라 그런 것인데 다들 별도의 집과 거처를 가지고 있어 절의
필수 요소인 요사와 선방 등 승려의 숙식공간은 매우 적다. 그러다보니 경내 밑까지 승려
들의 집이 형성되어 절과 마을의 경계가 참 애매모호하며, 집들 사이로 나무가 많아 첩첩
한 산주름 속에 묻힌 산골마을 같은 분위기가 물씬 묻어난다. (봉원사 주변은 개발제한구
역임)

종점에서 봉원사를 향해 몇걸음 가다보면 오른쪽에 승탑(僧塔)과 비석들이 즐비하게 늘어
선 부도전을 만나게 된다. 승탑<부도(浮屠)>은 승려의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석종형(石鐘
形) 승탑과 8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승탑 7~8기가 있다. 비석
은 대략 9기로 다들 왜정(倭政) 이후에 만든 것이라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때깔이 무지
곱다.


▲  승탑과 비석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


♠  봉원사 입문 (조낭자 희정 유애비, 보호수 느티나무)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인데. 조그만 구멍가
게를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하얀 피부의 조그만 비석이 눈길을 보낸다. 허나 구
석에 서 있어 정면만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호기심이 많은 본인인지라 왠 비석인가 싶어 기웃거리니 비신(碑身)에 쓰인 내용 그대로 조낭자
희정 유애비이다. '조낭자 희정~~'이란 문구를 통해 조희정이란 여인과 관련된 비석임을 알 수
있는데, 보통 행적이나 절에 공헌한 것을 기리는 비석이 아닌 슬픔을 전한다는 뜻의 유애비(遺
哀碑)를 칭하는 것이 뭔가 애처로운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과연 이 비석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 인근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
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그 생활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남편은 사업
에 바빠 1년에 1~2번 정도만 그녀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살
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는 유
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만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시주
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신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했다
고 나와있다. 허나 실질적인 이유는 그녀의 순탄치 못했던 인생과 남편의 애정 부족이 아닐까
싶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놓여져 있는데, 이들은 비석을 씌우던 비각의 주춧돌로 비
각은 오래 전에(아마도 6.25 때 파괴된 듯) 사라지고 비석만 멀뚱히 남아있다.


▲  봉원사로 올라가는 길 (유애비 주변)

▲  봉원사 회화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7호
봉원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무려 5그루나 있는데, 가장 먼저 마중하는 것이
바로 이 회화나무이다. 나무의 높이는 18m, 둘레는 3m이며, 2000년 12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80년이라고 한다. (지금은 190여 년)

▲  봉원사 느티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3호

유애비와 회화나무를 차례대로 지나 경내 직전에 이르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중생을 맞는다. 오
르막길에 있다보니 인간의 불안전한 눈의 착시로 풍채가 더욱 대단해 보이는데, 보호수 지정 당
시 추정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약 40년이 더해져 약 340~350살 정도 되었다. 높이는
18m, 둘레는 4.3m로 뒤에 있는 느티나무보다 늘씬하고 키도 크며 주변에 넓게 그늘을 드리워 무
더위의 패기를 잠재운다.


▲  봉원사 느티나무 (2) - 서울시 보호수 13-1호

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또 나타나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준다.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발을 딛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지만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갖추지 못했고, 절과
마을의 경계도 조금은 애매하며 이들 나무가 일주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나이가 더 들었다고 한다. 보호수로 지정된 시기가 1972년으
로 약 440~450년 정도 묵었으며, 그보다 키가 좀 작고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다원(茶園)이란 찻집이 있는데, 갖은 전통차와 식혜를 팔고 있으며, 불
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도 판매한다.

               ◀  봉원사 연못
네모난 연못에 동그란 섬을 심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
하고 있다. 연못에 홀로 떠 있는 섬에는 조그만
소나무가 운치를 가득 자아낸다.

      ◀  연못 옆에 자리한 비각(碑閣)
비각에는 평생 모은 재산을 절에 시주한 전성기
(全星基)를 기리는 송덕비(頌德碑)가 들어있다.
비석도 모자른지 대웅전 옆에 그의 제사까지 지
내는 전씨영각까지 둔 것을 보면 시주액이 어마
어마했던 모양이다. (역시 돈이 최고!!)


♠  봉원사 16나한상, 범종각 주변

▲  연못 북쪽에서 만난 연분홍 연꽃의 자태

연못 윗쪽 라인에는 연꽃을 심은 통을 배치해 연꽃의 조촐한 향연을 선보인다. 붉은색과 흰색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연분홍 연꽃부터 한참 물이 오른 홍련(紅蓮)까지 늦여름에 나타나는 수련
(睡蓮)을 빼고는 거의 다 있다. 이쁜 꽃잎을 펼쳐보이며 부처의 마음을 표현하는 연꽃들은 정처
없는 중생들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핀다.


▲  활짝 개인 연분홍 연꽃의 위엄

▲  평범한 물통 속에 뿌리를 내린 연꽃들

 ◀  16나한상 동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1967년에 목수인 이광규가 세웠다. 중생구제를
염원하는 부처의 애듯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이
들어 있으며. 종 밑에는 단지를 묻었는데, 이는
소리의 공명 정도를 길게 하고자 함이다.

▲  좌측 16나한상

▲  우측 16나한상

16나한상은 부처의 열성제자인 16명의 나한(羅漢)으로 2001년 6월에 봉안했다. 나한상 북쪽에는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소상히 적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봉원사 경내

※ 도심과 가까운 포근한 산사이자 서울 연꽃축제의 성지(聖地) ~ 봉원사(奉元寺)
서울 도심에서 서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
왕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
서울 장안에 이름난 고찰(古刹) 봉원사가 포근히 터를 닦았다.

봉원사는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
금의 연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은 전혀 없고 그나마 조선 초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가장 오래
된 것이라 하니 창건 시기에 대한 신뢰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愚
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
고 전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
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했는데, 그 내용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을 멀리한 삼은(三隱)의 1명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조선 건국 이전에 그리했거나(그래도 한
때 가까웠던 사이이니) 또는 잘못된 기록이 아닐까 싶다.
1396년(태조 4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삼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세상을
뜬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여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면서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다. 이후 1748년 영조(英祖)가 절을 옮기라며 지금의 땅을 하사
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절을 이전했고, 그 기념으로 영조가 친히 봉원사란 친필 현판
을 하사했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기존 자리에는 그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
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수경원(綏慶園)>을 만들었다.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이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
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또한 수경원이 연세대에 들어선 이후 그곳의 원찰(願刹) 역
할까지 도맡게 되면서 법등(法燈)이 꺼질 일은 거의 없게 된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1856
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2개의 현판이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였던 이동인(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는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되어 창립총회를 열기도 했다.

▲  봉원사 염불당(대방)

▲  봉원사 대웅전

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벌였고 땅을 더 확보하여 가람(伽藍)을 넓혔다. 1945년에는
해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으며, 6.25가 터지자 초반에는 절이 무
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9월 28일 무심한 총탄과 폭탄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물들의 유물이 덩달아 화마(火魔)의 먹이가 되어 한줌의 재
가 되고 만다. (그나마 대웅전과 몇몇 건물은 살아남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 공덕동(孔德洞) 동
도공고(현 서울디자인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
하여 충당했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매국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사에 헐값으로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무리를 하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한 지
정문화재인 대웅전을 홀라당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임한 주
지 혜경이 신도의 지원을 모아 1994년 대웅전을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을 보았다.
2009년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
고, 2011년에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대방), 극락전, 만월전, 미륵전,
칠성각, 운수각, 전씨영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빼곡히 자리를 메우고 있으며, 대웅
전이 화재로 지방문화재의 지위가 박탈되면서 지정유형문화재는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하나
도 없는 실정이다. 허나 중요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의 기능 보유자인 만봉이 주석하
고 있고, 중요무형문화재 50호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후학을 기르고 있어
영산재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그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
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
이 좋게 그늘을 드리운다.

이 절은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서울 4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고찰이다. 접근성과
교통도 모두 착한 수준으로 도시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거나 속세에 유린된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 언제든 찾아와 안기고 싶은 곳이다. 절을 둘러싼 숲이 무성해 첩첩한 산골에 들어선 듯
한 즐거운 기분을 선사하며, 공기 또한 청정하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1주 동안 펼쳐보이며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서울 장안 유일의 연꽃축제로 그 이름하여 '서울연꽃문화대축제'라 부른다. 허나 '봉원사 연꽃
축제'라 간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대웅전 뜨락을 비롯해 절 전체가 연
꽃 향연의 장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는데, 다른 연꽃축제와 달리 연꽃을 연못이나 논두렁에 가꾸
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에 심어 경내에 배치한다.

절에서 안산으로 오르다보면 봉원사의 또다른 명물인 관음바위가 있고, 안산 정상에는 서울 지
방기념물 13호
로 지정된 무악산 동봉수대(東烽燧臺)가 있다. 봉수대는 1994년에 복원된 것으로
정상에서 연희동이나 홍제동, 독립문, 서대문역(천연동) 방면으로 내려가면 된다.

※ 봉원사 찾아가기 (2014년 8월 기준)
* 서울역(1,4호선 9-1번 출구),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2호선 신촌역(3/4번 출구)에서 7024
  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원사 하차
* 3호선 경복궁역(1번 출구)을 나와 적선동 정류장에서 272, 606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대부고(
  봉원동) 하차, 봉원사길로 10분 정도 걸어가거나 GS25시 앞(봉원동4거리)에서 7024번 버스로
  환승한다.
* 매년 한여름(7월 말~8월 말 사이)에 '서울연꽃문화대축제'가 열린다. 축제 시작일과 마지막날,
  주말에는 영산재를 비롯해 각종 공연, 불화 전시 등 다양한 볼거리가 열리며 굳이 축제기간이
  아니더라도 7~8월 내내 연꽃을 선보인다. (☞ 2014년은 8월 17일부터 23일까지 열림)
* 봉원사 승려는 거의 출퇴근을 한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일몰 직후에 퇴근하는데, 퇴근 이
  후에는 모든 건물을 잠궈두며 경비인 서넛이 절을 지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의 즐거운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

▲  연꽃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숲을 이
룬다. 천하의 연꽃을 모두 소환한 것일까?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과 맵시를 견주며 물결
을 이루니 연꽃축제의 열기를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만든다. 속세에서 아무리 오염되고 상처받
은 안구와 마음이라도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보면 금세 정화가 될 것이다.


▲  삼삼하게 우거진 푸른 연잎들 -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여인의 앵두 입술보다 더 진한 홍련 -
'어서 꽃잎을 펼쳐보여야 될텐데!!' 허나 몸은 그의 마음처럼 잘 따라주질 않는다.

▲  활짝 핀 홍련

▲  대방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

▲  대웅전 뜨락 연꽃축제장 사이에 놓인 길 -
마치 연꽃 논두렁길을 걷는 기분이다. 허나 축제가 끝나고 수조가 모두
사라지면 원래의 모습(대웅전 뜨락)으로 돌아간다.

▲  이제 막 피어난 홍련과 전성기를 누리고 너덜너덜해진 홍련

▲  활짝 웃는 백련과 심기가 편찮은 홍련

▲  인당수(印塘水)에 몸을 던진 심청이 저 연꽃에서 환생하는 것일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콩닥콩닥..

▲  미소가 아름다운 백련

▲  연을 담은 수조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방긋 웃는 홍련 - 하루살이보다 못한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서쪽에서 본 연꽃축제장

▲  대웅전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 -
대웅전 바로 앞에도, 계단에도 죄다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  봉원사 대방<(大房) =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 동도공고(현 서울디
자인고)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6.25로 파괴된 대방을 다시 짓고자 궁리하던 중, 이병도의 친일매국패거리들이 대원
군의 흔적을 부시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놓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여 당시 봉원사 주지 영월
은 아소정 본채를 구입, 그 목재로 도화주 김운파와 함께 1966년 대방을 재건했다.
그래도 아소정의 유일한 흔적인데, 내부는 좀 절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하더라도 외형은 원래 모
습을 유지했으면 좋으련만 당시 인식 부족으로 기존보다 축소/변형한 점이 몹시 아쉽다. 비록
왕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하고 적지않게 모습이 바뀌었지만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대원군 시절의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로 대원군 할배의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
에서 삼천불전 다음으로 큰 건물로 그것도 기존 크기에서 축소했다고 하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
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아미타불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들의 숙식,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
간으로 범패(梵唄)를 비롯한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
어나와 영산재의 성지임을 실감케 한다. 또한 주불(主佛)로 매우 조그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는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철원 심원사(深源寺)에서 옮겨온 것이며, 예
로부터 영험이 깃들여져 있다고 전한다.

건물 내부는 딱히 방을 가르는 벽이 없어 하나의 거대한 방을 이르고 있는데, 추사 김정희(金正
喜)가 쓴 현판을 비롯하여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에 있음) 등이 외
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대방에 걸린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대방 앞에 놓인 연꽃무늬 석조물

추사체(秋史體)의 주인공인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
문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란 글씨
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고 없지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봉원사 대웅전(大雄殿)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조
금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중반 건축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로 지정되었는데,
1990년대 초반까지 서울에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은 화계사(華溪寺) 대웅전과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로
홀라당 말아먹었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해 내부에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검은 가루가 되었으니 6.25시절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크다 할 것이다. 봉원사
가 축적한 많은 보물들이 그렇게 또 사라진 것이다.
건물이 쓰러지자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재건은 했지만 떠나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가
매우 화려하다.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종이 하나 있다. (종의 위치는 바뀔 수 있음) 이는 흥선대원군이 부질없
는 명당(明堂) 욕심에 예산 덕산(德山)에 있던 가야사(伽倻寺)를 강제로 불지르게 하고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그 자리로 이전했는데, 그때 타지 않고 남은 종을 이곳으로 가져온 것이
라고 한다.
가야사터 자리가 명당은 명당이라 그의 아들이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
라를 말아먹었으니 거참 명당의 숨겨진 가시라고나 할까..?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이 3존불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대웅전 좌측을 꾸며주는 신중탱을 비롯한 여러 탱화들

▲  대웅전 우측을 꾸미는 극락9품도와 현왕도 등의 여러 탱화들

▲  대웅전 천정을 바라보는 여유 ~ 용이 새겨진 금빛찬란한 천정보개(寶蓋)
저들이 있는 한 대웅전은 더 이상 화마(火魔)의 덧없는 반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하기에 나름이지만 말이다.

    ◀  대웅전 계단 좌우에 배치된 해태상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
에 귀여운 해태상을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
에 넘어가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
다.


▲  대웅전 우측 계단에 진열된 연꽃들

▲  운수각(雲水閣)

▲  영안각(靈晏閣)

대웅전 좌측에는 조그만 건물 3동이 연이어 자리해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운수각
으로 고참 승려의 생활 공간이며, 그 옆에 조금은 낡아보이는 맞배지붕 건물은 일정기간 동안
혼백(魂魄)을 봉안하는 영안각으로 아미타불을 봉안했다.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겉 연
령은 100년은 되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좌측에 있는 1칸 건물은 전씨영각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절에 시주한 전성기 부부
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기일(忌日)에 절에서 제를 지낸다. 역시 절이나 속세나 돈 앞에서는 어
쩔 수 없는 모양이다. 봉원사에서는 그들을 부처 시절의 급고독장자로 비유까지 하고 있으니 말
이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이글거리는 두광(頭光)을 지닌 관음보살이
용선을 타고 있다.

▲  9마리의 용조각
수각(샘터) 옆 바위에 놓인 특이한 조각품으로
9마리의 용이 모여 작전 회의를 하는 것 같다
.


▲  봉원사 수각(水閣, 샘터)
대자연이 내린 옥계수로 연꽃 석조(石槽)는 늘 마를 날이 없다.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연꽃보다 샘터가 더 반갑지. 메마른 목에 한줄기 빛이 되어주니 말이다.


♠  봉원사 삼천불전(三千佛殿)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의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싼 우
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고,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동
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지금의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간신히 완성을 보았
다. 무려 9년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알래
스카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물의 특징인데,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떠나보내는 어이없는 비극을 겪었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를
중심으로 좌우에 애기같은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두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생의 시주로 만든 원불(願佛)이다. 그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靈
駕)를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넣을 수 있다.


▲  삼천불전의 주인장인 비로사나불의 위엄

▲  삼천불전 내부 우측

▲  삼천불전 내부 좌측


▲  괘불(掛佛) 제작 현장

16세기부터 전국에 번지기 시작한 괘불은 석가탄신일과 영산재 등 불교의 주요 행사 때 거는 큰
불화이다. 그러다보니 아무 때나 만날 수 없는 비싼 몸으로 200곳이 넘는 고찰을 기웃거린 나도
겨우 10번 남짓 친견했다. 마침 삼천불전 내부에서 괘불 제작을 하고 있어 잠시 지켜보았는데,
그림이 얼마나 큰지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아이처럼 보일 정도이다. 처음으로 보는 괘불 제작
현장, 저들의 갖은 정성에 의해 불교미술사의 한 획을 그을지도 모를 괘불은 그렇게 눈을 뜬다.


▲  봉원사 3층석탑(진신사리탑)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
마사(寺)를 방문했다. 그때 그곳 대승정인 그나니사라가 부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
도 어엿한 진신사리 보유 사찰의 하나가 되었는데, 그 사리를 봉안하고자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
후에 신도들의 지원을 받아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웠다. 법당 앞에 탑을 세우는
원칙에 따라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천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음껏 드러낸다.

▲  3층석탑 옆에 세워진 석가모니
진신사리탑비

▲  조선후기 선각자인 이동인이 이곳에 있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  삼천불전 앞에 배치한 연꽃들

▲  이동인 손가락 조형물 주변에 피어난 연꽃의 분홍물결~~


♠  봉원사 마무리

▲  봉원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의 건물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칠성(
치성광여래)이 아닌 하얗게 피부를 다듬은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을
무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빛이 바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는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칠성탱이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
와 신들의 무리가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山神)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등이
있다.


▲  칠성각에 봉안된 약사여래좌상
붉은색의 약합(藥盒)을 쥐어들며 흐릿한 눈빛을 보내는 그 뒤에 칠성탱이 걸려있다.
보통 존상과 탱화는 일치하기 마련
인데, 여기는 서로가 따로 논다.

▲  칠성각 우측 - 산신탱과 팔상도의
4폭이 걸려있다.

▲  칠성각 좌측 - 신중탱과 팔상도의
나머지 4폭이 걸려있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다. 1908년 8월 주시경
(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국어연구학
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였던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를 열어 봉원
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하여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석을 세워 그날을 기억을 기린다.


▲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 뒷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하고 있다. 명부전 현판은 조선 태조 때 정도전(鄭道傳)이 친히 쓴 것이라고 하는데, 현판
을 보니 고색의 기운은 그리 짙어보이진 않는다. 허나 만약 정도전이 쓴 것이 맞다면 거의 620
년을 묵은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 된다.

명부전은 정도전의 현판으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다고 기둥에 달린 주련 4개
가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라고 한다. 1945년 이후 친일파를 제대
로 척결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나날이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 매국노의 흔적
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속히 이들을 뜯어내 장작으로 쓰기 바
란다.


▲  명부전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녹색 승려머리의 지장보살과 좌우에 봉안된 저승의 10왕(十王)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
름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다. 10왕 끝에는 당찬 패기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서 있어 저승의
식구들을 지킨다.

▲  지장보살 좌우에 늘어선 저승의 10왕과 여러 영가들의 영정
인간은 죽으면 저승으로 내려가 10왕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특히 염라대왕(閻羅大王)의
입김이 커서 그에게 심판을 받는 7주에 염라대왕에게 잘 보이려는 뜻에서 49재를 지낸다.
물론 49재를 지낸다고 해서 무조건 극락으로 빠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  봉원사 미륵전(彌勒殿)

칠성각 뒷쪽에 있는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습이
다. 건물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아서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내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이용한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데, 인등으로 인해 인등각이라 불
리기도 한다.


▲  미륵전 미륵불입상

부처가 사라지고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이 땅은 점점 아비규환 이상으로 흘
러가고 있는데, 중생의 고통을 나몰라하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륵불이 그저 밉기만 하다. 그렇
게 나오기 싫으면 다른 이를 보내 구제해 주던가. 꼭 56.7억년을 채워야 되는가? 미리 땡겨서
나오는 센스좀 보여주기를.. 자꾸 숨어있는 것도 미륵불의 엄연한 직무유기이다.

◀  미륵전 앞에 세워진 날씬한 7층석탑
왜정 이후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식으로 언제
무슨 이유로 세웠는지는 모르겠다.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닌데, 건물 우측에는 자애수란 이쁜 이름을 지닌 아
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는 150~200년 정도 된 것으로 여겨지며, 왜 자애수라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극락전에 그늘을 제공하는 것 때문은 아닌 듯 싶다.

▲  극락전 아미타불과 문수,보현보살

▲  만월전(滿月殿)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외진 숲속에 만월전이 있다. 이 건물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데,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그의 곁에 둔 것이 특징이다. 1904년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독
성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가 갔을 당시는 애석하게도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내부
는 살피지 못했다.


▲  내려가는 길에 만난 어여쁜 홍련

▲  봉원사를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힘없는 발걸음을 하다

봉원사에 펼쳐진 연꽃 세상을 구경하며 그들의 향기에 취해 1시간 30분 정도 머물렀다. 연꽃이
완전 시간 도둑인 셈이다.
속세로 나온 우리는 저녁을 먹고자 삼청동(三淸洞)으로 이동했다. 바로 삼청동으로 간 것은 아
니고 나의 즐겨찾기 명소인 북악산 백석동천(白石洞天, 백사실/백사골 ☞ 관련글 보러가기)에
들어가 잠시 여름 제국의 기운이 늦춰지길 기다렸다가 삼청동으로 이동했다.


▲  우물집에서 먹은 뚝배기불고기와 반찬의 위엄

삼청동은 맛집의 성지(聖地)답게 온갖 식당과 찻집/까페가 즐비하다. 게다가 청와대나 국무총리
공관 등의 국가 시설이 많아 고위 공무원과 상류층들이 자주 찾아 맛도 괜찮은 편이다. 다만 가
격이 썩 착하지 않은 것은 큰 함정.
이번에는 기존에 갔던 식당들은 모두 제쳐두고 새로운 집을 개척하기로 했다. 그래서 발견한 집
이 삼청동 가장 북쪽 구석에 자리한 우물집이다. 이곳은 삼청공원과도 가깝고, 삼청동 마을버스
종점에서 칠보사(七寶寺) 방면으로 도보 1분 거리로 2층 양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물집은 냉면과 한우고기로 유명한 식당인데, 한우고기는 너무 비싸서 우리 같은 서민이 먹기
에는 겁이 나고, 그렇다고 냉면을 먹자니 뭔가 허전하여 우리는 뚝배기불고기를 주문했다. 면보
다는 밥이 배를 채우는 데 좋기 때문이다. 냉면은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허전하다. 그래서 만두
같은 부식물을 시키게 되고 그것이 자금난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집은 냉면과 뚝배기불고기의 가격이 7,000원선(지금은 다를 수 있음)으로 다른 식당보다 가
격이 좀 착하다. 서울 장안 유명 냉면집의 냉면은 거의 8천원~1만원대, 뚝배기불고기도 6~8천원
대니 말이다.

냉면 전문집에서 뚝배기불고기를 시킨 탓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밥을 기다리니 제일 먼저
반찬이 깔린다. 그런데 반찬이 생각 외로 푸짐한 것에 놀라고 말았다. 무려 6가지나 되기 때문
이다. 게다가 특이하게 상추와 고추, 쌈장까지 나오며, 특히 감자조림이 맛있어서 1번 더 리필
을 했다.
반찬이 나오고 얼마 뒤 본메뉴인 뚝배기불고기와 쌀밥이 차려진다. 뚝배기불고기는 내 입맛에는
그런데로 괜찮았는데, 상추에 쌈장을 듬쁙 바르고 고기와 밥을 담아 입에 쏙 넣으니 목구멍이
정신을 못차린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인사동으로 넘어와 전통찻집에서 차 1잔의 여유를 즐기다
가 저녁 늦게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연꽃의 찰라와 같은 인생처럼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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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 (백석동천, 백사골)

 


' 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백사골) '


여름이 한참 흥이 오르던 7월 첫주에 후배들과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백사골)을 찾았다.
백사골은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이자 서울에서 가장 흠모하는 곳으로 정처 없는 내 마
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곳이다. 2005년 5월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며 처음 발을 들인 이
래 매년 3~4번 정도 발걸음을 이으면서 그곳에 대한 변치 않은 마음을 비추었다.

지하철 경복궁역(3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1711번 시내버스(국민대↔공덕역)를 타고 세검정
초교에서 내려 홍제천(弘濟川) 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 편의점 옆으로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오는데 그의 지시에 따라 주택가 골목(세검정로6다길)을 비집고 들어가
면 빌라 옆으로 긴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바로 혜문사입구인데, 여기서 오른쪽
으로 꺾어 산동네 골목길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백사골의 남쪽 관문인 백사폭포
와 현통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  혜문사입구에서 바라본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골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
저 고개를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뽀얀 피부의 백사폭포가 나타난다.


♠  서울 도심 속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 작지만 멋드러진 하얀 반석이
일품인 백사폭포(白沙瀑布)

▲  피서의 성지(聖地) 자격이 충분한 백사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문짝에 그려진 현통사 일주문(一柱門) 밑에는
하얗고 뽀얀 피부를 지닌 반석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 매끄러운 바위면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 백사폭포가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며 별천지를 꿈꾸
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시 흔든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이곳은 서울 도심에선 정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로 그 가치는 단연 높다. 만약 쟁쟁한 폭포들
이 많은 설악산(雪嶽山)이나 순창 강천산(剛泉山) 같은 곳에 있었다면 어찌되었을까? 아마도 그
저 그런 폭포로 주목도 못받았을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자리 운도 중요하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장쾌한 편은 아니다. 수수하고 조촐한 모습
이지만 나름대로 수려한 멋을 풍기며 백사골에 대한 첫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인도하며 그곳에
대한 기대감까지 크게 드높인다.
폭포를 빚은 너른 바위는 돗자리를 피고 한숨 청하고 싶은 잘생긴 반석(盤石)으로 청정한 계곡
물이 끊임없이 바위를 타고 내려와 수채화를 자아낸다. 특히 비가 많이 와서 계곡의 수량이 많
을 때는 시원한 멋도 풍기는데, 폭포수 소리가 천하를 뒤흔들 정도로 패기가 넘쳐 귀신도 놀라
도망치게 만든다.

백사골이 무명이던 시절에는 동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이나 동네 사람들의 피서지
로 주로 쓰였으나 속세에 강제로 알려지면서 폭포 주변에 자리를 피고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
하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  옆에서 본 백사폭포 - 거의 50도 각도로 이루어진 바위 미끄럼틀을 타고
백사골 냇물은 속세로 흘러간다.
 

▲  백사골의 냇물과 낙엽을 속절없이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서쪽 못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 냇물은 큰 세상을 꿈꾸며 졸졸졸~♪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못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다리 서쪽에 있는 못에서 심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고향
을 등지고 큰 세상을 향한 장대한 여정을 떠난다. 한번 폭포를 내려왔으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기에 오로지 앞만 보고 흘러갈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아랫폭포를 타고 홍제천으로 내려가 한
강(漢江)으로, 다시 서해바다로 종점이 없는 여행을 떠난다.

늦가을이 되면 겨울 제국(帝國)의 핍박으로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낙엽들이 폭포를 타고 속세로
내려가거나 그 주변에서 저항하며 고향으로의 컴백을 꿈꾼다. 허나 자연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
는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밑으로 흘러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런 낙엽의 발
악을 보면서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여름의 절정을 누리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저들의 푸른 아름다움 뒤에는 늦가을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있고, 그 뒤
에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겨울 제국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  급하게 흘러가는 백사골 하류 (아랫폭포)

서쪽 못은 폭포 못보다 조금 넓은 편인데, 그곳에 모인 물은 주택가가 있는 서쪽으로 거의 30~
40도 경사를 이룬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아주 빠르게 내려간다. 각박한 경사를 이룬 바위를
타고 흐르니 폭포로 봐도 무관할 것이다. 폭포의 길이는 150m 남짓으로 강수량이 많아 수량이
많으면 그 흐르는 소리가 멀리서까지 귀를 때린다.

폭포가 흐르는 바위는 넓게 반석을 이루며 제법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데, 폭포 주변을 가득 메
운 주택들만 없었다면 설악산이나 금강산(金剛山) 못지 않은 풍경을 자랑했을 것이다.


▲  주택들 사이를 흐르며 볼품없는 꼴이 되버린 백사골의 그늘

▲  백사골의 생매장 현장 ~ 자하주택 북쪽(세검정로6길)

서울 제일의 경승지인 백사골은 자하주택 북쪽에서 어두컴컴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한다. 지하에
묻힌 백사골은 약 150m 정도 흐르다가 홍제천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자연이 빚은 얼큰한 작
품이 이런 수모를 당한 것은 개발의 난도질 때문으로 나무와 계곡만 있던 이곳까지 주택들이 마
구잡이로 들어와 백사골 아랫폭포의 목까지 조르고 있다.

차라리 주택가를 들이밀지 말고 서울 제일의 피서지로 명성이 높았던 인근 세검정(洗劍亭)과 함
께 장안 제일의 명승지로 가꾸었다면 더욱 빛을 발했을텐데, 개발의 난도질은 그런 여유도 주지
않고 백사폭포 밑까지 올라온 것이다. 다행히 난도질은 폭포 앞에서 멈추었지만 나중에 반드시
계곡 주변 집을 밀어버리고 2012년 여름에 복원된 인왕산 수성동(水聲洞) 계곡처럼 옛 모습을
되살렸으면 좋겠다. 적어도 백사폭포에서 홍제천 합류지점까지 말이다.
이 땅에서 자행되는 개발의 칼질은 너무나 천박하다. 그 칼질에 목숨이 다한 명소가 어디 한둘
이랴.?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폭포를 굽어보는 현통사(玄通寺)는 근래에 지어진 조그만 산사(山寺)로 정확한 내력(來歷)
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로 추앙받는 일붕(一鵬)이 머물렀던 절로 백사골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1~2번이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할만한 매력도 없기 때문이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
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
덩어리로 몰려있다. 대웅전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남쪽을 향한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골의 시원한 산바람은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유발시켜 경내에 깃들여진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  백사골의 속살로 들어서다

▲  소나무가 마중하는 백사골 산길

현통사를 지나면 제일 먼저 솔내음이 그윽한 소나무 숲이 반긴다. 마치 속세를 뒤로 하고 신선
의 세계에 입산한 듯, 아랫세상과 공기부터가 확연히 틀리다. 그것도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말
이다. 시원하고 청명한 산바람에 속세(俗世)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머리와 마음이 말끔히 정화
되는 것 같다.


▲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의 끝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고,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나그네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졸졸졸 흘러가는 청정한 백사골(백사실계곡) <현통사와 별서터 중간>

▲  백사골 중류 (별서터 직전)
사진 정면에 보이는 큰 바위에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만들 때
돌을 떼던 흔적이다.

백사골에 발을 들이면 한폭의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곳의 풍경을 완벽히 표현한다는 것은 힘들 것
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이곳을 대자연에 대한 명예
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감히 말자랑, 글자랑을 하지 않고 그저 탄성만 연거푸 지
르며, 조용히 백사골을 거닌다.

숲에 깃들여진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길
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운 도롱
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서울 관내에서
는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사라져 가고 이곳은 이제 그들의 몇 남지 않은 낙원이 되었다. 만약 그
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동물과 신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 자
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순결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무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처럼 청정함과 순수함
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백사골은 백사실, 백사실계곡으로 널리 불리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상관은 없다. (본글에서는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 혼용했음) 이곳의 정식 지명은 백사실로 거기에 계곡을 붙여 백사실계곡
이라 불리기도 한다.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의 다른 이름이며,(나는 입버릇처럼 백사골이라 부름)
백석동천은 백사골의 일부로 백사폭포와 별서터, 백석동천 바위글씨 주변을 일컫는다.


▲  백석동천 별서터 갈림길

▲  연못 곁을 지나는 백사골 중류 (징검다리)

백석동천 이정표와 자연보호 안내문이 있는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백
석동천의 중심인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둑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나이 꽤나 묵은 나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별서 주인이 돌
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별서터로 인도하는 조촐한 돌다리 - 19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계곡에 콘크리트 둑을 쌓으면서 지금의 높이로 조정되었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를 코 앞에 두고 오른쪽 산자락 윗부분을 뚫어지라 살펴보면 언덕 정상에 커다
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잘 살펴보면 글씨
같은 것이 어렴풋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가운데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백석동천 별
서터(연못터 주변)의 바로 서쪽에 자리해 있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숲에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모른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
리다보면 우연히 눈에 들어오기라도 하겠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나마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월암은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만들어 그 안에 월암(月巖
)을 새겼다. 이 바위글씨는 18세기에 백사골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바 있는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정되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
습은 가히 명필 중에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한잔 걸치러 이곳에 놀러온
양반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광
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
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
으며 함께 잔을 걸치고 싶다.


♠  북악산에 숨겨진 비밀의 별천지, 북악산 백석동천(北岳山 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옛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지나서면
여기가 서울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힌 수려한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삼각산)에
안긴 분지(盆地)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는 지방이나 고산지대의 소읍(小邑) 같은 분위기이다.
이곳은 녹지 비율이 서울에서 매우 높은 편이며, 백사골 등의 깨끗한 계곡이 살아 숨쉰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명성이 높았던 부암동은 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장 및 피서지로 인
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武溪精舍)를 비롯하
여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서울 제일의 피서지였던 세검정(洗劍亭), 연산군(燕山
君)이 만든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
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 백사실 계곡(백사골)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하여 백사실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으며, 조선 후기부터 백사실과 별서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르고 있다.
그 이름은 하얀 피부의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붙여진 것으로 동천(洞天)이란 칭호는 경관
이 아름다운 곳에 부여되는 명예로운 이름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돌담의 흔적

▲  사랑채터

백석동천 별서는 19세기 초반(1830년 경)에 지어진 600평 규모의 별서(별장의 일원)이다. 누가
만들고 이곳의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
채, 그리고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별서 주변에는 나무와 온갖 화초(花草)를 심
어 별서를 최대한 꾸몄을 것이다.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에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
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마 주
춧돌과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때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도 무거운 상처를 입으
면서 그 휴유증으로 연못의 기능을 잃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
장의 일부 흔적, 바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석동천의 옛 정취를 아련히 전하며, 이 정도의 별서
을 짓고 소유할 정도면 상당한 재력을 지닌 양반이었을 것이다.

백석동천과 관련된 옛 기록으로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 1720~1783)의 이
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 그 책에는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
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이 있어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정자나 별장 비슷한 것이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허씨의 모정을 그의 후손들이 별서로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하며, 19세기에
상당한 재력이 있는 사대부가 이 일대를 차지해 별서를 지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끝없이 내몰던 백석동천은 2005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부암동, 신영동)
사람들만 찾아오던 동네 사람들의 숨겨진 피서지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아무리 숨어있어도 휼륭한 재주나 좋은 명소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처럼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2005년에 이르러 문화재청에서 이곳을 두고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우리나라의 휼륭한 전통 정원임을 인정하면서 비지정의 서러움에서
벗어나 바로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에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
동안 안내문이나 변변한 이정표조차도 없다가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내문과 이정표를 설치했
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발굴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건졌다.

▲  연못에 세워진 정자터

▲  백사골 중류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
와 여름과 가을, 겨울의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절경지이다. 그중에서
늦봄과 여름에는 도심 속의 조촐한 피서의 성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부산하다.
이곳은 숲이 매우 무성하여 강렬한 여름의 햇빛도 굴복시키며 나무가 베풀어준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골의 졸졸졸~♪ 음악소리를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며 독서를 하거나 낮
잠을 청하면 정말 극락이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유적을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가 되어 신선처럼 살고자 했던 그들(주로 지배층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
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을 배워보고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꽤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의 발길이 나날이 쓸데없이 증가하면서 정신줄을 놓은 사람들까지 불순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돌에 흉물같은 낙서를 남기거나, 쓰레기를 버리고, 계곡을 뒤집고, 수목을 괴롭히는
등의 천박한 짓이 늘고 있어 이곳의 건강도 적지 않게 위협을 받고 있다. 아직은 멀쩡하다고 해
도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고 외딴 곳에 있으니 언제 더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바
램인데 이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의 아는 사람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나의
곁에 남았으면 좋겠는데, 이미 그 선은 넘은 듯 싶다. 또한 2013년에 이르러 종로구청에서 별서
를 복원한다며 설치고 있는데, 괜히 복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비
록 폐허가 되긴 했지만 지금 모습이 더 운치가 강하고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수
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복원을 한다면 이건 그냥 두는 것만 못하다.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백사골) 찾아가기 (2013년 8월 기준)
* 백사실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에서 들어가는 것이며, 하림각은 골목길 경사가 무지 급해
  오르지도 전에 맥이 빠진다. 그리고 창의문은 많이 걸어가야 된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과 자하문터널입구 정류장 사이에 백석동길이란 골목길이 있다. (백석
   동천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음) 그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오르면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내
   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좀 가면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음)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 다리를 건너면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
   표가 있다. 그 이정표를 따라 쭉 오른다. (구기터널이나 정릉 방면에서 오는 경우는 육교를
   건너 길 건너편으로 이동한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2호선
   신촌역(6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시내버스 이용 /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
   스 이용 / 4호선 길음역(7번 출구)에서 153번 버스 이용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북쪽(부암동 방면)으로 가면 창의문3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북악산길로 가는 2차선 길로 가지 말고 왼쪽 골목길(백석동길)로 들어서
   면 부암동 산복길이다. 이 길을 쭉 올라 산모퉁이까페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서 초소를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그 길의 끝에는 능금마을(뒷골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가면 백사실이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백사골까지 접근도 힘들고 주차 장소도 마땅치 않다. 대중교통이 진리이다.

★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백사골) 관람정보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개구리 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
  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백사골 일대는 의자를 제외하고 어떠한 편의시설도 없다. 약수터는 능금마을 뒷쪽 산자락에
  하나 있다. (백사실약수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일대


♠  백석동천 사랑채터

▲  사랑채터가 자리한 언덕 (계곡 건너에서 바라본 모습)

▲  윤곽이 진하게 남은 사랑채터
이곳에 있었을 사랑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어디까지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이곳의 운치를 깨뜨릴 수 있다.


길이 여러 갈래로 갈리는 백석동천 별서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이 나
온다. 세월의 태클로 다소 헝클어져 있지만 경사가 완만하여 계단으로서의 역할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그리고 연못 쪽에도 돌계단이 하나 있는데, 다듬은 돌을 계단처럼 얹혀놓은 수수한 모
습이지만 높이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오르기 힘들다.

계단 끝 언덕에는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과 석축의 윤곽이 진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가 있다. 연
못이 잘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지어진 'ㄱ' 구조의 사랑채로 아쉽게도 생전의 뚜렷한 사진조차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남아
있으며, 2010년 발굴조사 이후 새롭게 드러난 흔적을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산듯하게 정비했다.


▲  2중으로 쌓은 석축 위에 심어진 사랑채터의 높다란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하여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서쪽 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계단

연못쪽으로 돌출된 사랑채 서쪽 부분은 주춧돌의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은
별서 주인의 생활공간으로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穀茶)를 대접하여 1잔씩 주고 받았을 것이다. 사랑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과 석축이 남아있는데, 별서 주인의 서재(書齋)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본 사랑채터

▲  동쪽에서 바라본 사랑채터

▲  사랑채터 옆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석조유구(遺構)로 연못(또는 우물터)으로 여겨진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스란히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푸른 잡초가 따스히 보듬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고 한다. 이후
그 자리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는데,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강제로 생매장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별서터의 건강을 위협하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대를
발굴하면서 갈아 없앴으며, 지하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
습했다. 이후 발굴을 정리하고 2011년 3월에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묻었으며, 한쪽 구석
에는 이곳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햇살을 된 주춧돌과 기와조각, 여러 돌조각을 한데 수습해 조그
만 돌탑을 이룬다. 그리고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


▲  안채터 북쪽 구석 (평창동과 조망점으로 넘어가는 산길)
조그만 시냇물이 백사골로 흐르고 있으며, 예전에 약수터가 있었으나
오래전에 폐쇄되었다.

▲  사랑채 뒤쪽 석축과 돌담

사랑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서
산사태 등을 막고자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된다. 석축 윗쪽에는 별서의 경계를 가르
던 돌담이 길게 이어져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허물어지고 지금은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동쪽까지 돌담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헝클어진 채 남아있는 돌담의 흔적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세월의 용광로에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
채의 기품과 분위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방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詩想)에 잠겼을 별서의 주인을 머리 속에 그려보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  대자연에 의해 잠시 연못의 기능을 회복한 연못

백석동천 별서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못은 둘레가 약 100m 정도 되는 보름달처럼 큰 못이
다. 별서 주인은 자신의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장안에 솜씨 좋은 기술자를 불러 별서를 만들
고 사대부의 지위를 이용해 인근 백성을 동원하여 연못을 파고 돌과 나무를 나르게 했을 것이다.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둥그런 연못을 수시로 채웠으며, 정자터 부근에 계곡 물을 끌여들이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물이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서쪽에 수로를 파 계속 물갈이가 되도록 유도
했다.
연못과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지나가던 해와 달도 그 연못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을 것이요.
주변 나무와 꽃들도 연못을 거울로 삼아 매무새를 다듬고, 별서 주인은 벗을 불러 곡차와 차 1
잔의 여유를 누리며 상팔자를 누렸을 것이다.

그들이 팔자 좋게 놀던 시절(19세기 초/중반)은 천하가 한참 아비규환에 젖어있던 시기로 백성
들의 삶은 매우 퍽퍽했다. 민초(民草)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의 가혹한 세
금삥과 상당수 양반들의 수탈에 털려 궁색하게 살아가고 있건만 별서 주인은 다른 나라 이야기
마냥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당시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안동김씨나 풍양조씨
일가이거나 그들과 가깝던 자가 아닐까 싶음..)

별서의 주인이 골로 간 이후, 풍류의 현장이던 이곳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고, 천하를 쑥대밭으
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게 묻힌 이곳까지 총탄을 선사해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강제로
고자가 되었다. 그 이후 연못에는 물과 물고기, 연꽃 대신 잡초와 잡석만 무성하게 되었고, 늦
가을에는 나무들이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털어낸 낙엽들이 가득 연못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
막 보금자리가 된다.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연못의 구성원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  정자터 남쪽에서 본 연못과 별서터 일대

▲  동쪽 언덕에서 바라본 연못과 별서터

세월의 무상함을 진하게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백석동천 연못은 비록 그 기능은
잃었지만 자연의 생명력이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고 있다. 여름의 제국 시절이나 비가 많이
오는 경우 연못에 물이 담겨 비록 예전만큼의 위엄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찾기
도 한다. 그러니까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이지는 못하고 하늘이 내린 비에 의지해 연못의 티를
되찾는 것이다. 마침 우리가 오기 며칠 전부터 비가 많이 내려 연못에는 물이 가득했다.

수면 위에는 물을 먹고 자란 풀들이 무성하게 돋아나 초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마치
늪지대 같은 분위기라 다가서기가 좀 껄끄럽다. 연못에 물이 많이 고이긴 했으나 서쪽에 뚫어놓
은 수로로 물이 빠져나갈 정도의 수량은 아니며 물의 깊이도 겨우 성인 무릎에 닿을 정도이다.
이곳에 담긴 물은 자연에 의해 해산될 때까지 머문다.
연못이 넓기 때문에 물만 더 채운다면 조그만 조각배를 띄워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나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난쟁이었다면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겼을 지도 모른다.

연못을 비롯한 별서터 일대는 나무가 울창하여 한여름에도 뜨거운 햇볕이 마음 놓고 내려오기가
힘들다. 서울 도심 속에 별천지이자 보석과 같은 곳으로 처음 왔을 때 이곳에서 받은 감동이 슬
슬 되살아난다.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의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삼삼한 삼림
은 이곳을 찾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의 정도는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 허나 지금은 저렇게 허
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그 허전함을 달래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정자를 복원
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연못
에 심어진 기둥 중 4개는 높이가 약 2m이며, 나머지 2개는 돌계단 옆에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곡차를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안다면 기생들을 불러 정자 안에서 팔자 늘어지게 놀았
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부러울 뿐.. 이래서 사람들은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
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일 뿐, 상상으로만 끝나기 때문이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높이가 대략 20m 되는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가 약 150~200
년 정도 되었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기념으로 심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
원을 꾸민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마당쇠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
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를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
에 한풀이를 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나 올련지...?


▲  연못 우측 수로에 놓은 소박한 돌다리
길쭉한 통돌 2개를 놓는 선에서 간단하게 다리를 마무리지었다.
다리가 놓인 수로는 연못에 물을 빼는 역할을 했다.


▲  연못과 별서터에서 수습한 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쉼터
가운데 길다란 돌에 간식거리를 두고 양쪽 석재에 모여 앉아 간식이나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많이 그랬음~ 그렇다고 저기서 취사행위까지는 하지 말 것~~

▲  연못/정자터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

서터 윗쪽 계곡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
물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하여 예전처
럼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기는 그렇다. 계곡의
통제로 산길로 조금 우회해서 가야된다.
2012년에 별서터 주변 산길을 손질하면서 산불
방제 장비를 둔 붉은 색의 구제함을 두었고 이
곳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돌탑과 오리 솟대를
세워 조촐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산길을 오르면 소나무 숲이 나오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부암동 주택가 방면)으로 가
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  오리 모양이 달린 솟대와 그를 품은 돌탑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몫 돕고 있는 소나무숲

▲  백석동천 바위글씨를 간직한 집채만한 바위

▲  너무나 뚜렷한 백석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소나무숲에서 부암동 주택가로 통하는 서쪽 산길로 접어들면 '白石洞天' 4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동천(洞天)은 신선이 머물 정도로 경관이 수려한 산천에 붙여지는 이름으
로 비슷한 말로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이 백석동천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하
얀 피부의 바위와 암반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이 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월암과 비슷한 시
기가 아닐 듯 싶은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기를 꿈꾸었
던 선비와 사대부들은 경관이 뛰어난 경승지에는 저렇게 기념 낙서를 남겼는데, 백사골 역시 그
런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의 풍경이 그들을 애타게 감동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거창 수승대(搜勝臺)의 귀연암(龜淵岩,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지나치게 낙서로 도배가 된 것
도 그리 보기는 좋지 않다. 어느 것이든 적당한 것이 좋다.


▲  녹음(綠陰)에 물든 백사골의 호젓한 숲길 ▼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하리라.. 비록 짧은 거리이지만
알록달록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넓적한 하얀 바위가 파노라마를 이루는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길을 조금 가면 백사골 상류가 나온다. 하얀 피
부의 넓은 반석과 이끼가 낀 까무잡잡한 바위들이 줄줄이 쏟아지면서 탄사를 자아내게 하며, 때
묻지 않은 청정한 냇물이 바위를 타고 흘러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낸다.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의 탄압현장이 되고, 시민들도 이곳에 들어와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백사골은 능금마을 뒷쪽에서 시작하여 백석동천을 가로질러 홍제천으로 흐른다. 그리고 윗 사진
의 바위부터 백사폭포까지를 백석동천 구역으로 보면 되는데, 그 상류에는 더 이상 괜찮은 바위
나 옛 사람들의 흔적은 나오지 않는다.


▲  백사골 상류 - 이 부분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계곡을 건너 산길로 들어서면 백사골 동쪽 능선과
백사실약수터로 이어진다.

▲  능금마을로 가는 백사골 상류 외나무다리 (오른쪽이 경작지)

백석동천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만든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도 정
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2개의 나무 목재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갈 정도로 좁다.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하지만 다리의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도 매
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요는 없다.
여기서 오른쪽(서쪽)에는 여러 농작물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밭두렁과 비닐하우스 등
이 펼쳐져 있어 도심 속의 생소한 풍경 앞에 두 눈을 잠시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리를 지나서는 길이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2m 미만으로 폭이 좁아진다. 그런 길을 계속 고집
하면 계곡 너머로 집들이 보이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본글은 여기서 끝~~ 능금마을 부분은 추후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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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7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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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별천지 ~ 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비밀의 별천지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

▲  백석동천 별서 유적


가을이 한참 여물어가던 10월 중순에 북악산 백석동천(백사골, 백사실)을 찾았다. 이곳은
서울 장안에서 내가 가장 흠모하는 곳으로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곳이기도 하다.
2005년 5월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처음 찾은 이래 매년 3~5차례 정도 발걸음을
하며 그에 대한 변함없는 마음을 비춘다.

백사골의 품으로 들어가고자 수유리에서 서울시내버스 153번(우이동↔보라매공원)을 타고
세검정초교에서 내린다. 거기서 홍제천(弘濟川) 다리를 건너면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
표가 나오는데, 그의 지시로 주택가 골목(세검정로6다길)을 비집고 들어가면 빌라 옆으로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바로 혜문사 입구인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 산동네
골목길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백석동천(백사골)의 남쪽 관문인 현통사와 백사폭
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골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
저 고개를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백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서울 도심 속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 작지만 멋드러진 하얀 반석이
인상적인 백사폭포(白沙瀑布)
.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에 오금을 저리게 하는 현통사 대문 밑에 때깔이
고운 하얀 반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매끄러운 바위면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
랜 세월 빚어놓은 대작품, 백사폭포(백석폭포라 불러도 무관할 듯)가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
며 별천지를 꿈꾸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시 흔든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이곳을 찾았
던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의 시냇물은 큰 세
상을 꿈꾸며 졸졸졸~♪ 폭포를 타고 살며시 내
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못에서 기나긴 여정을
준비한다. 어쩌면 다시는 오지 못할 그리운 고
향, 북악산의 그리움을 털어내며 길을 재촉한
그들은 홍제천을 따라 한강으로, 다시 서해바다
로 종점 없는 여행을 떠난다.

폭포에는 물을 타고 흘러온 누런 낙엽이 가득하
다. 늦가을을 지나 장차 천하를 지배할 겨울 제
국의 시련을 견뎌내고자 나무가 털어낸 낙엽들
은 폭포에 모여 인생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긴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겨울을 원망하는 그들
의 모습은 인생무상이 허언이 아님을 상기시킨
다.


▲  가을과 낙엽을 속세로 무심히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서쪽 못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장쾌한 편은 아니다. 수수하고 조촐한 모습
이지만 나름대로 수려한 멋을 풍기며 백사골에 대한 첫 이미지를 매우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그
곳에 대한 기대감까지 크게 불러일으켜 심장을 더욱 두근거리게 만든다.
폭포를 빚은 하얀 피부의 너른 바위는 돗자리를 피고 한숨 청하고 싶은 잘생긴 반석(盤石)으로
청정한 계곡물이 끊임없이 바위를 타고 내려와 1폭의 수채화를 자아낸다. 특히 비가 많이 와서
계곡의 수량이 많을 때는 시원한 멋도 풍기는데,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폭포수 소리가 천
하를 뒤흔들 정도로 패기가 넘쳐 귀신도 놀라 도망치게 만든다.

예전 여름에는 동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 및 동네 주민들의 비밀 피서지였으나 백
사골이 속세에 무심히 알려지면서 폭포 주변에서 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
며 여름 제국에 대항하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잘생긴 폭포와 반석, 시원
한 산바람까지 갖춘 이곳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여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백사폭포를 거친 계류는 다리 아래에 조그만 폭포를 통해 밑의 못으로 흘러가며 여기서 다시금
바위를 타고 본격적인 세상나들이를 시작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늦가을의
절정을 닮아가는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며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저들의 처
절한 아름다움 뒤에는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야욕을 드러낸다. 잔잔한 수면에는 낙엽들이 둥실
둥실 떠 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며, 백사골에 머문 늦가을은 낙엽을 데리고 계곡을 통해 저
밑으로 그렇게 흘러간다.


▲  급하게 내려가는 백사골 아랫폭포
서쪽 못에서 경사진 바위를 타고 급하게 내려간 백사골은 주택가 사이를
지나 자하주택 북쪽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홍제천으로 흐른다.
.
▲  백사폭포 위쪽에서 굽어본 폭포 주변

백사폭포를 굽어보는 현통사(玄通寺)는 근래에 지어진 조그만 산사(山寺)로 정확한 내력(來歷)
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의 하나인 일붕(一鵬)이 머물기도 했던 절로 백사골을 오갈 때마
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딱 1번이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유혹할 만한 매력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골의 시원한 산바람이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유발시키면서 경내에 깃들여진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
雄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
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덩어리로 몰려있다. 대웅전은 서쪽
을 바라보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다.

.
▲  금강역사 마크가 새겨진 현통사 대문
금강역사의 무시무시한 망나니 칼에 선뜻 들어가기가 겁난다.
괜히 문을 들어섰다가 칼에 맞는 것은 아닐까..?

. .

▲  조촐한 모습의 대웅전(大雄殿)

▲  산신각 추녀에 매달린 풍경물고기

돌 대신 시멘트로 기단을 만들어 그 위에 대웅
전과 산신각, 칠성각 등을 올렸다. 앞뜰에는 조
그만 3층석탑과 승려의 사리가 담긴 팔각원당형
(八角圓堂形) 부도 2기가 밋밋한 뜨락을 수식한
다.

백사골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가을 단잠에 기지
개를 키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천하에 흘려 보낸
다. 백사폭포에 앉아 풍경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속세의 더러운 말에 오염된 귀가 말끔히 정화될
지도 모른다.


♠  백사골(백석동천)의 속살로 들어서다

▲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의 끝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고,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나그네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서울 도심이란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청정한 백사골
시원하고 청명한 산바람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정신과 마음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오랜만에 백사골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아가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온갖 내음
들이 나래를 펼치는 백사골의 울창한 숲에 들어서게 된다. 제일 먼저 소나무숲이 솔내음을 풍기
며 이곳을 찾은 중생을 소독시킨다.

백사골에 발을 들이면 한폭의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곳의 풍경을 완벽히 표현한다는 것은 힘
들 것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백사골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감히 글자랑을 하지 않고 그저 탄성만
연거푸 지르며, 조용히 백사골을 거닌다.

숲에 깃들여진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길
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조차 어려운
도롱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사라져 가고 이곳은 이제 그들의 마지막 낙원이 되었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
진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 자
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무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보기가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마치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처럼 청
정함과 순수함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  자연이 아름답게 채색한 이곳의 풍광은 정말 집으로 살짝 훔쳐와
혼자서만 두고두고 보고 싶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유적을 코 앞에 두고 오른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면 언덕 정상에 커다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커다란 바위 하나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잘 살펴보
면 글씨 같은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가운데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백석동천 별
서터(연못터 주변) 바로 서쪽 산자락에 자리해 있지만 그를 알리는 마땅한 이정표도 없고 숲에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모른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다보면 쉽게 시야에 들어오기라도 하겠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나마도 잘 눈에 띄
지 않는다.

월암은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만들어 그 안에 월암(月巖
)을 새겼다. 이 바위글씨는 18세기에 백사골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바 있는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정되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
습은 가히 명필 중에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한잔 걸치러 이곳에 놀러온
선비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광
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
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
으며 함께 잔을 걸치고 싶다.


▲  연못 서쪽을 지나는 백사골 중류 (징검다리)

백석동천 별서터 서쪽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백석동천의 중심인 별서
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둑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오랜 세월을 머금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짙게 그늘을 드리운다.


▲  별서터로 인도하는 돌다리 -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으로
별서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북악산에 숨겨진 옛 정원, 북악산(北岳山)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의 중심인 6각형 정자터와 연못

옛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지나서면
여기가 서울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힌 수려한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에 안긴 분지
(盆地)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는 머나먼 지방이나 산악지대의 소읍(小邑) 같은 분위기이다. 이
곳은 녹지 비율이 서울에서 매우 높은 편이며, 백사골 등의 깨끗한 계곡이 살아 숨쉰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명성이 높았던 부암동은 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장 및 피서지로 인
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武溪精舍)를 비롯하
여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서울 제일의 경승지이자 피서지였던 세검정(洗劍亭),
연산군(燕山君)이 만든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
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 백사실 계곡(백사골)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하여 그의 호를 따서 백사실, 백사골이라 불리지
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은 없으며, 조선 중기부터 백사골과 별서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백
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하얀 피부의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붙여진 것이다. 동천(洞
天)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붙이는 명예로운 이름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사랑채터

▲  사랑채터 북쪽의 안채터

백석동천 별서는 19세기 초반(1830년 경)에 지어진 600평 규모의 별서(별장의 일원)이다. 누가
만들었고 이곳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며,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
, 그리고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별서 주변에는 나무와 온갖 화초(花草)를 심어 별서를
최대한 꾸몄을 것이다.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에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
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폭삭 무너져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
마 주춧돌과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때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도 무거운 상처를 입으
면서 그 휴유증으로 연못의 기능 마저 잃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장의 일부 흔적, 바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석동천의 옛 정취를 아련히 전하며, 이 정도의 별
장을 짓고 소유할 정도면 상당한 재력을 지닌 양반이었을 것이다.

백석동천과 관련된 옛 기록으로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 1720~1783)의 이
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 그 책에는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
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이 있어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별장이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허씨의 모정을 그의 후손들이 별서로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하며, 19세기에
상당한 재력이 있는 사대부가 이 일대를 사들여 머물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끝없이 내몰던 백석동천은 2005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부암동, 신영동)
사람들만 찾아오던 그야말로 동네 사람들의 숨겨진 피서지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
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아무리 은둔(隱遁)해 있어도 휼륭한 재주나 좋은 명
소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처럼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2005년에 이르러 문화재청
에서 이곳에 대해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우리
나라의 휼륭한 전통 정원임을 인정하면서부터 조금씩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2005년 3월 비지정문화재의 서러움에서 벗어나 바로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에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제대로 된 안내문이나 변변한 이정표조차도
없었으며,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내문과 이정표를 설치했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발
굴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
량으로 수습했다.

▲  사랑채에서 바라본 연못

▲  백사골 중류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
와 여름과 가을, 겨울의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에 모두 아름다운 절경지이다. 그중에서
늦봄과 여름에는 도심 속의 조촐한 피서의 성지로 크게 이름을 날리고 있다.
이곳은 숲이 매우 무성하여 무성하여 강렬한 여름의 햇빛도 녹음 속에 녹아내려 시원하며 나무
가 베풀어준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골의 깨끗한 계곡물과 졸졸졸~♪ 음악소리를 들
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나 독서를 하거나 낮잠을 청하면 정말 피서가 따로 없다. 거기에 지
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유적을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가 되어 신선처럼 살아가고자 했던 그들(
주로 지배층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을 배워보고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꽤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이 늘면서 정신줄을 놓은 사람들까지 불순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
돌에 흉물같은 낙서를 남기거나, 쓰레기를 버리고, 계곡을 뒤집고, 수목을 괴롭히는 등의 무개
념짓으로 이곳의 건강도 적지 않게 위협을 받고 있어 대책이 절실하다. 아직은 멀쩡하다고 해도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고 외딴 곳에 있으니 언제 더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바램
인데 이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의 아는 사람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내 곁
에 남았으면 좋겠다. 또한 괜히 별서를 복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비록 폐허가 되긴 했지만 지금 모습이 더 운치가 강하고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 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복원을 한다면 이건 그냥 두는 것만 못하다.

참고로 백석동천은 백사실, 백사실계곡, 백사골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상관은
없다. 정식 명칭은 백사실/백사실계곡으로 이곳 지명이 백사실이며,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달
리 표현한 이름이다. 또한 백석동천은 백사골의 엄연한 일부로 백사폭포에서 백사골 상류 외나
무다리까지를 일컬으며, 외나무다리 윗쪽 계곡과 백사골 동쪽 산줄기는 백석동천의 범위에 들어
가진 않는다.

 북악산 백석동천 찾아가기 (2012년 8월 기준)
* 백석동천으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현통사),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에서 들어가는 것이며, 하림각은 골목길 경사가
  무지 급해 오르지도 전에 맥이 빠진다. 창의문은 많이 걸어가야 되는데, 북악산 등산이나 북
  악산길 산책을 겯드릴 경우 이용하면 편리하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 건너편에 신도수퍼가 있는데 그쪽에 백석동길이 있다. (백석동천을 알
   리는 이정표가 있음) 그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면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좀 가면 신도수퍼와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음)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 다리를 건너면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
   표가 있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2호선 신촌역
   (1,3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버스 이용 / 4호선 수유역, 미아3거리역, 길음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3번 버스 이용 → 세검정초교 하차 (구기터널이나 정릉 방면에서 오는 경우는
   육교를 건너 건너편으로 이동한다. 그러면 바로 남쪽에 홍제천이 있음)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북쪽(부암동 방면)으로 가면 창의문3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북악산길로 인도하는 2차선 찻길로 가지 말고 왼쪽 골목길(산모퉁이 방면
   )로 들어서면 부암동 산복길이다. 이 길을 쭉 올라 산모퉁이까페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진입하여 초소를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왼쪽으로 가도 되나, 오른쪽 길
   을 추천함) 그 길의 끝에는 뒷골마을(능금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
   가면 백석동천이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18,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백사골까지 접근도 힘들고 주차 장소도 마땅치 않다. 대중교통이 진리이다.

★ 북악산 백석동천 관람정보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개구리 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
  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백사골 일대는 의자를 제외하고 어떠한 편의시설도 없다. 약수터는 백사실 동쪽 산줄기 남쪽
  에 하나 숨겨져 있는데, 이곳에 유일한 약수터이다. (백사실약수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일대


♠  별서 주인의 정취가 담긴 ~ 백석동천 사랑채터 주변

▲  사랑채터 서쪽 - 계단 끝 언덕에 사랑채와 안채터가 있다.

▲  윤곽이 진하게 남은 사랑채터
이곳에 있었을 사랑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백석동천 별서터의 운치를 흐트려놓을 수 있다.


길이 여러 갈래로 갈리는 백석동천 별서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이 나
온다. 정면에 보이는 계단은 아랫쪽와 윗쪽 2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세월의 태클로 다소 헝클
어져 있지만 경사가 완만하여 계단으로서의 역할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반면 연못 쪽에서 오르
는 계단은 다듬은 돌만 계단처럼 얹혀놓은 수수한 모습이지만 높이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
리가 짧은 사람은 오르기 힘들다.

계단 끝 언덕에는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과 석축의 윤곽이 진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가 있다. 연
못이 잘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지어진 'ㄱ' 구조의 사랑채로 아쉽게도 생전의 뚜렷한 사진조차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남아있
으나 동쪽 부분이 잡초에 묻혀있던 것을 2010년 발굴조사 이후 새롭게 드러난 흔적을 더해 지금
의 모습으로 산듯하게 정비했다.


▲  2중으로 쌓은 석축 위에 심어진 사랑채터의 높다란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하여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서쪽 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계단

연못쪽으로 돌출된 사랑채 서쪽 부분은 주춧돌의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은
별서 주인의 생활공간으로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穀茶)를 대접하여 1잔씩 주고 받았을 것이다. 사랑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과 석축이 남아있는데, 별서 주인의 서재(書齋)로 여겨진다.


▲  사랑채터 옆에서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석조유구(遺構)로 연못(또는 우물터)으로 여겨진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스란히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푸른 잡초가 따스히 보듬어준다.

.
▲  2010년 발굴조사로 구체적으로 확인된 사랑채터와 안채터

▲  사랑채 뒤쪽 석축과 돌담

▲  돌담의 흔적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고 한다. 이후
그 자리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는데,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강제로 생매장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별서터의 건강을 위협하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대를
발굴하면서 갈아 없앴으며, 지하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
습했다. 이후 발굴을 정리하고 2011년 3월에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다시 땅속에 묻었으며, 한쪽
구석에는 이곳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햇볕을 보게 된 주춧돌과 기와조각, 여러 돌을 한데 수습해
조그만 돌탑을 이룬다. 그리고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옛 산성
(山城)의 잔해처럼 진하게 남아있다.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세월의 용광로에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
채의 기품과 분위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방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詩想)에 잠겼을 별서의 주인을
머리 속에 그려보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  사랑채터 동쪽 부분에서 바라본 연못

▲  남쪽에서 바라본 연못과 별서터

석동천 별서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못은 둘레가 약 100m 정도 되는 보름달처럼 큰 못이다.
별서 주인은 자신의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장안에 솜씨 좋은 목공과 석공 등의 기술자를 불러
거처를 만들고 사대부의 지위를 이용해 인근 백성을 동원하여 연못을 팠을 것이다.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둥그런 연못을 수시로 채웠으며, 정자터 부근에 계곡 물을 끌여들이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물이 팔자좋게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서쪽에 수로를 파 계속 물갈이가 되
도록 유도했다.
연못과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지나가던 해와 달도 그 연못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을 것이요.
주변 나무와 꽃들도 연못을 거울로 삼아 매무새를 다듬고, 별서 주인은 벗을 불러 곡차와 차 1
잔의 여유를 누리며 상팔자를 누렸을 것이다.

그들이 팔자 좋게 놀던 시절은 세상이 한참 아비규환에 젖어있던 시기로 백성들의 삶은 매우 어
려움을 겪고 있었다. 민초(民草)들은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의 가혹한 세금삥과 양반들의 수탈
에 죄다 털려 힘들게 살아가고 있건만 별서 주인은 다른 나라 이야기마냥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
을 것이다.

별서의 주인이 가고 여러 대를 거치면서 풍류의 현장이던 이곳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고, 천하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게 묻힌 이곳까지 총탄을 선사해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강제로 고자가 되었다. 땅을 파고 연못 주변에 두른 석축과 정자의 주춧돌은 이곳이 예전 연못
임을 아련하게 알려줄 뿐이다.

6.25이후 연못은 물고기가 수영하고 연꽃이 살며시 떠있던 물 대신 잡초와 조그만 돌이 그 자리
를 메우고 있고, 늦가을에는 나무들이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싹 털어낸 낙엽들이 가득 연못
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막 보금자리이자 누런 연못이 된다.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연못의 구성원
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세월의 무상함을 진하게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백석동천 연못은 비록 그 기능은
잃었지만 자연의 생명력을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고 있다. 여름의 제국 시절이나 비가 많이
오는 경우 연못에 물이 많이 담겨 비록 예전만큼의 위엄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
찾기도 한다. 그러니까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이지는 못하고 여름의 제국이나 하늘이 내린 비에
의지해 연못의 티를 되찾는 것이다. 마침 우리가 오기 며칠 전부터 비가 많이 내려 연못에는 물
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수면 위에는 물을 먹고 자란 풀들이 무성하게 돋아나 초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그
만 생명체의 또다른 세계를 빚어내고 있다. 마치 늪지대 같은 분위기라 다가서기가 좀 껄끄럽다.
연못에 물이 많이 고였다고는 하나 서쪽에 뚫어놓은 수로로 물이 빠져나갈 정도의 수량은 아니
고 물의 깊이도 겨우 성인 무릎에 닿을 정도이다. 이곳에 담긴 물은 자연에 의해 증발할 때까지
머문다.

연못이 제법 넓기 때문에 물만 더 채운다면 조그만 조각배를 하나 띄워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나 걸리버여행기의 나오는 난쟁이었다면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겼을 지도 모른다.

연못을 비롯한 별서터 일대는 나무가 울창하여 한여름에도 뜨거운 햇볕이 마음 놓고 내려오기가
힘들다. 서울 도심 속에 별천지이자 보석과 같은 곳으로 예전에 이곳에서 받은 감동이 슬슬 되
살아난다.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의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삼삼한 삼림은 이
곳을 찾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
동의 정도는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들, 허나 지금은 저렇게
허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그 허전함을 달래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정자를 복
원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연
못에 심어진 기둥 4개는 높이가 약 2m로 나머지 2개는 돌계단 옆에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곡차를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안다면 기생들을 불러 정자 안에서 팔자 늘어지게 놀았
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부러울 뿐.. 이래서 어떻게든 권력층이나 부자가 되야 되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일 뿐, 상상으로만 끝나버린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높이가 대략 20m에 이르는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가 약 150
~200년 정도 되었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기념으로 심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
원을 꾸민 이 땅의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마당쇠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
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를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
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나 올련지...?


▲  연못 우측 수로에 놓은 소박한 돌다리
길쭉한 통돌 2개로 이루어진 조촐한 돌다리로 다리 밑에 뚫린
수로는 연못의 물을 빼는 역할을 했다.

▲  연못/정자터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

▲  오리 모양이 달린 솟대와 그를 품은 백석동천 돌탑

서터에서 계곡 윗쪽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물들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하여 예
전처럼 계곡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다만 윗쪽(백사실약수터 입구)에서 조금 내려오는 것
은 괜찮다. 계곡의 통제로 산길로 조금 우회해서 가야되는데, 2012년에 별서터 입구 주변 산길
을 손질하고 그 길 좌측에 산불 방제 장비를 둔 붉은 색의 구제함과 돌탑을 만들어 조촐하게 볼
거리를 선사한다.
백석동천 돌탑은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탑으로 이곳 외에도 백사골 동쪽 산자락에 여럿 심
어져 있는데, 이 탑은 윗쪽에 오리가 달린 나무 솟대를 심어 조금 차별화를 두었다.

산길을 오르면 우거진 소나무 숲이 나오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
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부암동 주택가 방면)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몫 돕고 있는 소나무숲길

▲  백석동천 바위글씨를 간직한 집채만한 바위

▲  너무나 뚜렷한 백석동천 바위글씨

소나무숲에서 부암동 주택가로 이어지는 서쪽 산길로 접어들면 '白石洞天' 4자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동천(洞天)은 신선이 머물 정도로 경관이 수려한 산천에 붙여지는 이름으
로 아무 산천에나 부여하는 이름이 아니다. <비슷한 말로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이곳이
백석동천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하얀 피부의 바위와 암반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이 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월암과 비슷한 시
기가 아닐 듯 싶은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기를 꿈꾸었
던 선비와 사대부들은 경관이 기가막힌 경승지에는 저렇게 기념 낙서를 남겼는데, 백사골 역시
그런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의 풍경이 그들을 몹시나 감동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허
나 거창 수승대(搜勝臺)의 귀연암(龜淵岩,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너무 낙서로 도배가 된 것
도 그리 보기는 좋지 않다. 어느 것이든 적당한 것이 좋다.


▲  푸르름이 가득한 백사골의 호젓한 숲길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하리라.. 비록 짧은 거리이지만
알록달록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넓적한 하얀 바위가 파노라마를
이루는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
길을 조금 가면 백사골 상류가 나온다. 하얀 피
부의 넓은 반석들이 줄줄이 나와 탄사를 자아내
게 하며, 때묻지 않은 청정한 냇물이 바위를 타
고 아래로 흘러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낸다. 백사폭포까지 순수함을 지닌
물은 백사아랫폭포부터 속세의 기운을 강제로
받기 시작하면서 점차 속물로 변해간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
을 간직한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하겠는가?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의 탄압
현장이 되고, 시민들도 소풍/나들이로 이곳에
들어와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
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
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
음을 즐겼을 것이다.

백사골(백사실)은 능금마을 뒷쪽에서 시작하여 백석동천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홍제천으로 흐른
다. 그리고 백석동천은 윗 사진의 바위를 지나 외나무다리까지로 백사폭포부터 계곡 상류 외나
무다리까지를 백석동천의 구역으로 보면 된다. 다리를 넘어서는 더 이상 괜찮은 바위가 나오질
않고, 옛 사람들의 흔적도 전혀 나오질 않는다.


▲  백사골 상류 - 이 부분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계곡을 건너 동쪽 산길로 들어서면
백사골 동쪽 능선과 백사실약수터로 이어진다.

▲  백사골 상류 외나무다리

백석동천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만든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한 풍경을
진하게 우려낸다. 2개의 나무 줄기로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갈 정도로 좁다.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될까? 허나 다리의 길이도 짧고, 물의 수심도 얕으며, 다리 아랫
쪽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곳이 있어 굳이 다리의 통행을 두고 싸울 필요는 없다.
여기서 오른쪽(서쪽)에는 비닐하우스와 원두막 비슷한 시설, 그리고 여러 경작물이 무럭무럭 자
라는 밭이 길게 펼쳐져 있어 도심 속의 생소한 풍경에 두 눈이 잠시 방황을 한다.

다리를 지나서는 길이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2m 내외로 폭이 좁아진다. 여러 번 계곡을 건너야
되는데,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많이 쌓였을 때는 통행하기가 힘들다. 그런 길을 계속 고집하면
계곡 너머로 집들이 보이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
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 부암동 능금마을 보러가기)

이렇게 하여 백석동천 가을 나들이는 이렇게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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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8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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