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3.07.26 충신의 매운 얼이여, 용인 능골에 넓게 자리한 정몽주선생묘 <저헌 이석형묘, 충렬서원>
  2. 2017.09.15 짙푸른 숲과 조촐한 계곡을 간직한 도심 속의 싱그러운 쉼터, 북악산 삼청공원 ~~~ (말바위, 영무정, 한양도성. 삼청동길)

충신의 매운 얼이여, 용인 능골에 넓게 자리한 정몽주선생묘 <저헌 이석형묘, 충렬서원>

용인 정몽주선생묘



' 용인 정몽주선생묘 여름 나들이 '

   

▲  정몽주 선생묘
◀ 저헌 이석형묘
▶ 정몽주 묘역 영모재
▼ 충렬서원

   

 



 

여름 제국이 절정에 치닫던 7월의 끝 무렵. 용인 능골에 자리한 정몽주선생묘를 찾았다. 이곳
은 학창시절부터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곳으로 계속해서 미루고 있다가 이번에 비로소 인연을
지었다. 도봉동(道峰洞) 누옥에서 거리가 제법 되지만 서울에서는 그런데로 가까운 곳으로 교
통편도 양호하여 넉넉잡아 3시간 이내면 충분히 접근이 가능하다.



 

♠  정몽주선생묘 입문

▲  정몽주 선생묘를 알리는 표석

능원초교(정몽주선생 묘역입구) 정류장에서 바로 동쪽에 있는 능원초교입구4거리로 나와서 4
거리를 건너 남쪽으로 가면 오산천에 걸린 포은교가 마중을 한다. 그 다리를 건너 5~6분 정도
가면 왼쪽(동쪽)에 정몽주 묘소를 알리는 커다란 표석이 누워있는데, 여기서 왼쪽 길로 들어
서면 정몽주 신도비를 시작으로 그의 드넓은 묘역이 장대하게 펼쳐져 거의 왕릉을 연상케 한
다.


▲  정몽주 신도비(神道碑)

정몽주 묘역 대파노라마의 시작인 정몽주 신도비는 묘역과 함께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지형
상의 이유도 있지만 정몽주가 그렇게나 지키고자 했던 고려의 옛 국도(國都), 개경(開京)이
서쪽에 있어 후손들이 그의 심정을 헤아리고자 그렇게 배치를 한 것이다.

팔작지붕 비각 안에 담긴 신도비는 정몽주가 강제로 세상을 뜬지 300여 년이 지난 1699년에
세워졌다. 송시열(宋時烈)이 찬을 하고, 김수증(金壽增)이 글을 썼으며, 영의정 김수항(金壽
恒)이 전액(篆額)을 썼는데, 비석의 높이는 388cm, 비신(碑身)의 높이는 238cm이다. 비석이
나이를 예민하게 타다 보니 비신 뒷쪽의 글씨 상태가 영 고르지가 못하며, 비신 앞쪽에는
'皇
明 高麗守門下侍中 益陽郡 忠義伯 圃隱鄭先生 神道碑銘幷序<황명 고려수문하시중 익양군 충의
백 포은정선생 신도비명병서>'
라 쓰여 있다.
여기서 황명(皇明)은 명나라로 정몽주가 죽던 시기는 명나라 초기이다. 그냥 '고려 수문하시
중(守門下侍中)~~'으로 시작하면 정말 깔끔하겠지만 비석 제작 당시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지나친 사대주의(事大主義)가 만연했던 시절이고, 그 꼴통 사대주의자들이 신도비를 담
당하면서 비석에도 명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것이다.

우리의 장대한 역사와 강역을 아주 크게 말아먹은 우리의 최대 흑역사 조선, 그런 검은 시대
에 걸맞게 조선 위정자와 유학자들에게는 명에 대한 사대주의 풍조가 아주 지독했으며, 그런
풍조는 무려 왜정 때까지 이어졌다.


▲  연안이씨 비각공원

정몽주 신도비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고운 피부의 비석들이 즐비한 연안이씨(延安李氏) 비각
공원이 나온다. 이들은 정몽주 묘역을 품고 있는 문수산(文秀山) 자락에 흩어진 연안이씨 선
조들의 묘비와 신도비의 내용을 번역하여 세운 것으로 10여 기의 비석이 공원을 이루고 있는
데, 그 끝에는 저헌 이석형의 신도비가 비각에 감싸인 채 장대한 세월을 머금고 있다.

그런데 이곳은 분명 정몽주의 영일(迎日) 정씨 묘역이 분명한데, 엉뚱하게도 연안이씨 집안의
비석이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 집안을 일으켜 세운 이석형의 묘가
정몽주 묘와 성씨를 초월하며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꽤 신선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이석형이 정몽주의 증손녀에게 장가를 든 인연 때문이다.
이후 영일정씨와 연안이씨 집안은 한집안처럼 가깝게 지냈고 두 집안의 무덤이 정몽주 묘역
주변에 서로 어울리며 자리해 있었다. 그러다가 왜정(倭政) 때 토지 소유권을 두고 다투다가
영일정씨가 승리하면서 연안이씨 무덤은 이석형과 일부 묘소를 제외하고 모두 문수산 남쪽으
로 이장되었다.
그렇다고 600년 넘게 지속된 두 집안의 정이 깨진 것은 아니다. 이석형의 묘는 아직 제자리
에 건재해 있고, 묘역 입구에 비각공원을 두는 등 여전히 허울 없이 지내고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200m 정도 들어가면 이석형의 생가 연못에 세워졌던 계일정(戒溢亭)이 재
현되어 있다. 참고로 그의 생가는 서울 연지동(蓮池洞, 종로5가 북쪽)에 있었다.


▲  저헌 이석형(李石亨) 신도비 - 경기도 지방기념물 171호

정몽주 신도비와 마찬가지로 팔작지붕 비각(碑
閣)에 소중히 감싸인 이석형 신도비는 1624년
에 대리석으로 조성되었다. 원래 이석형묘 앞
에 있었으나 비각을 씌우면서 이곳으로 이전되
었다.
비문(碑文)은 후손인 이정구(李廷龜)가 지었고
신익성(申翊聖)이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金尙
容)이 제자(題字)를 남겼는데, 비석의 높이는
270cm 정도로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와 주름
선이 마치 토성의 띠처럼 생긴 비신(碑身)으로
이루어져 있다.


◀  주름선이 멋드러진 이석형 신도비


▲  홍살문과 정몽주 묘역

▲  왕릉처럼 드넓은 정몽주 묘역의 위엄

정몽주 묘역은 상상 외로 무척 넓었다. 거의 조선 왕릉 수준으로 말이다. 내가 왕릉에 온 것
인지 고려 충신의 묘에 온 것인지 잠시 혼돈에 둘러싸인다. 허나 분명히 정몽주 묘역은 맞다.

그의 묘역이 이렇게 넓어진 것은 조선 조정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다. 비록 조선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아 잔인하게 없애긴 했지만 그만한 충신이 또 없다. 하여 신하들의 철저한 정
몽주 화(化)가 필요했던 터라 필요에 따라 죽였으면서 역시 필요에 따라 그를 띄워주고 묘역
에도 적지 않게 신경을 써준 것이다.
후손들은 조선 조정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씁쓸했을 것이요, 정몽주
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겠지만, 죽은 자는 원래 말이 없는 법이다. 살아있는 자들이 죽은
자를 이리 볶고 저리 볶고 저들 편리에 따라 이용하는 것이다.

정몽주 외에도 고려의 많은 충신, 그리고 고려의 마지막 무신(武臣)인 최영(崔瑩)장군도 있지
만 명성은 아무래도 정몽주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최영은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의 마지막
보루(堡壘)로 일컬어지던 큰 인물이지만 무(武)를 경시하고 유학을 중시하던 조선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정몽주가 훨씬 구미가 당긴다.

정몽주 묘역이 얼마나 드넓은지 묘역을 알리는 표석에서 그의 묘까지는 거리가 약 400m에 이
른다. 게다가 그의 아들과 후손들 묘역이 주변에 잔뜩 포진해 있고, 묘역 서쪽은 싹 밀어버렸
다. 그래서 그만큼 넓어 보이며, 거의 조선 왕릉 뺨칠 정도이다. 이곳의 지명인 능골과 능원
리는 바로 이 묘역 때문에 유래된 이름이다. 얼마나 능처럼 넓으면 지명에 능(陵)이 다 붙었
겠는가.


▲  경모사(敬慕祠, 왼쪽)와 모현당(慕賢堂, 오른쪽)
1980년 묘역 정비 때 새로 지은 것들이다.

▲  영모재(永慕齋)
조선 후기에 지어진 정몽주 묘역의 재실(齋室)이다.

▲  정몽주의 어머니가 지었다는 백로가(白鷺歌) 시비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  단심가(丹心歌) 시비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이방원(李芳遠)이 하여가(何如歌)로 은연중 반란에 협조해 줄 것을 청하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을 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 묘 - 경기도 지방기념물 171호

▲  밑에서 바라본 이석형묘

▲  옆에서 바라본 이석형묘

정몽주 묘역에 들어서면 가운데 언덕에 정몽주묘가 큼지막하게 자리해 있고, 그 남쪽에 증손
녀 내외인 이석형 내외의 묘와 아들인 정종성 내외묘, 북쪽에는 정몽주의 후손들 묘가 잔뜩
무리를 이루고 있다.

이석형(1415~1477)은 연안이씨 집안으로 자는 백옥(伯玉), 호는 저헌(樗軒)이다. 이회림(李懷
林)의 아들로 생모는 박언(朴彦)의 딸이다.
1441년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에 합격했고, 1442년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간원정원(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이듬해 집현전부교리(集賢殿副校理)가 되어 14년
동안 집현전(集賢殿) 학사로 일했으며, 집현전응교(集賢殿應敎)로 있던 1447년 문과 중시(重
試)에 붙어 왕명으로 북한산 진관사(津寬寺, ☞ 관련글 보기)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했다.

1455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가 되었고, 전라도관찰사를 지내던 1456년 6월 단종(端宗)
의 복위를 꾀하던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터지자 사육신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익산
(益山) 동헌(東軒)에 남긴 일로 대간(大諫)의 탄핵을 받았으나 세조(世祖)에게 오히려 칭찬을
들으며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승진되었다.
이어 판공주목사(判公州牧使)와 한성부윤(漢城府尹, 서울시장)이 되었으며, 1460년 세조의 특
명으로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왕의 관서(關西) 지방 순행을 도와 왕으로부터 서도주인(西道主
人)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듬해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1466년 팔도도체찰사(八道都體察使)가 되어 호패법(號牌法)을 조사했고, 1468년 세조가 승하
하자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건너가 왕의 부음을 전했다. 이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고, 1470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승진,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했으며, 1471년
에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필법이 신묘하여 집현전학사로 있을 때 치평요람(治平要覽),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
여했으며, 세조 때는 사서(四書)의 구결(口訣) 작업에 참여해 논어(論語)의 구결을 주관했다.
또한 불우한 백성들을 늘 보살폈으며, 말년에는 서울 연지동 집에 계일정을 지어 시문을 지으
며 자손들을 가르쳤다. 그는 계일(戒溢)정신이라 하여 분에 넘치는 것을 자손들에게 늘 경계
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신선(神仙) 같다며 칭송했다.

남긴 저서로는 대학연의(大學衍義)와 고려사에서 권계(勸戒)를 덧붙인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
輯略) 21권과 저헌집(樗軒集)이 있다. 편저로는 역대병요(歷代兵要), 치평요람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이석헌의 부인은 정몽주의 증손녀로 정보(鄭保)의 딸이다. 1445년 1월 아들인 이혼(李混)을
낳았는데, 산후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딸을 잃은 슬픔에 눈물로
밤을 지새던 정보는 자신이 봐둔 묘자리에 딸을 안
장했는데, 이석형이 죽자 자연히 부인묘에
합장되어 당대의 명사(名士)이자 충신의 대명사인 정몽주 곁에 묻히게 된 것이다. 사연은 그
러한데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속설도 전해온다.

정몽주의 손자인 정보가 죽자, 그가 평소에 봐두던 정몽주묘 남쪽에 안장하기로 했다. 딸인
이석헌의 처(이하 정씨부인)는 그 자리가 매우 신통한 명당 자리임을 알고 자신의 아들과 손
자들을 위해 시댁에 좋은 일을 해주기로 하고, 간밤을 이용해 관을 넣을 자리에 물을 잔뜩 퍼
날라 부었다.
다음날 집안 사람들이 가보니 무덤에 물이 많은지라 그 자리를 버리고 다른 곳에 장지를 마련
해 안장했다. 아무리 명당이라도 물이 나오면 영 좋지 못한 터로 여기기 때문이다. 정보가 안
장된 이후, 친정 가족들에게 버려진 터를 우리 시댁에 주면 안되겠니 청하니 친정은 흔쾌히
그 자리를 주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속설임)

정몽주가 당대 명사이긴 하지만 그 후손들은 딱히 두드러지는 인물은 없었고, 마침 떠오르는
연안이씨 집안의 사위 내외를 정몽주묘 곁에 묻히는 영광을 부여함으로써 양 집안 간의 유대
감을 꾀했다. 하여 그 인연으로 두 집안은 오랜 동안 오순도순 지냈고, 서로의 집안 묘가 두
루 섞인 진풍경을 보인 것이다.
허나 왜정 때 두 집안 간의 무덤 자리를 두고 재판이 벌어졌고, 그 재판에서 영일정씨가 승소
하면서 정몽주묘역 일대는 99% 정씨 집안의 것이 되었다. 그래서 연안이씨는 이석형과 일부
묘를 빼고 대부분 문수산 남쪽으로 옮겼으나 두 집안의 친목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석형묘는 정씨부인과 함께 묻힌 합장묘(合葬墓)로 이곳이 그렇게 기가 막힌 명당 자리라고
한다. 이석형 이후 집안에서 수십 명의 고위 관리가 배출되었고, 현대에 와서도 장관 3명을
배출했다. 그래서 명당에 관심있는 사람과 풍수지리가들이 자주 찾는다. 서쪽을 바라보며 자
리한 묘역은 전방이 확 트여 있고, 뒤쪽에는 문수산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어 문외한인 내가
봐도 착한 명당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 무덤은 영일정씨에서 소유하고 있으며, 연안이씨 정헌공파에서 관리하고 있다.

▲  앞에서 본 이석형묘 (봉분, 상석)

▲  고색의 때깔이 자욱한 이석형 묘표(墓表)

▲  고된 표정의 우측 문인석 2기

▲  좌측 문인석 2기


▲  뒷쪽에서 바라본 이석형묘와 전방 풍경

▲  정몽주묘에서 바라본 이석형묘

▲  이석형묘에서 바라본 정종성(鄭宗誠)과 죽산박씨 묘

원사(院事) 정종성(1374~?)은 정몽주의 맏아들로 고려 후기 9명의 효자 가운데 하나이다. 조
선 조정에서 정몽주 후손 달래기의 일환으로 여러 차례 벼슬을 주었으나 거절했으며, 1437년
에 마지못해 벼슬을 받아 철원부사가 되었다.



 

♠  아 충신의 매운 얼이여..!! 충신의 영원한 성지(聖地)
정몽주선생묘(鄭夢周先生墓) -
경기도 지방기념물 1호

포은 정몽주(1337~1392)는 1337년 경북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자는 달가(達可), 호는 그
유명한 포은(圃隱)이며, 고려 중기에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자 정운관(鄭云瓘)의 아들이다. 생모 이씨가 꿈에서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갑자기
떨어트렸는데, 이에 놀라 깨어난 뒤 바로 그를 낳았다고 하여 정몽란(鄭夢蘭)이라 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빼어났다고 하는데, 어깨 위에 7개의 검은 점이 북두칠성처럼 벌
여져 있었다고 하며, 9살에 생모가 낮잠을 자다가 검은 용이 뜰에 있는 배나무로 올라가는 꿈
에 놀라 급히 나가보니 배나무에 정몽란이 있었다. (위인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설화임) 그래
서 이름을 몽룡(夢龍)으로 바꿨고, 관례를 치른 이후에는 정몽주로 이름을 갈았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문하에 들어가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학문에 정진했는데, 목은은 포
은에 대해 '학문은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 이
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칭찬을 했다.

1357년 감시(監試)에 붙었고, 1360년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과 수찬(修撰
), 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
사관(從事官)으로 따라가 고려의 그늘에 있던 동북 지역(길림성, 흑룡강성, 연해주 지역)의
여진족을 정벌했다.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고, 전농시승(典農寺丞)과 예조정랑(禮曹正郞) 겸
성균박사(成均博士),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냈으며,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과(太常少卿
寶文閣應敎)와 성균직강(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으로 승진했다.

1372년 정몽주를 싫어했던 친원패거리의 의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
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당시 명은 고려를 크게 의식해 의도적으로 많은 무례를 범하면서
양국의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그러다보니 자칫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게다가 가는 길도
험난해 풍랑으로 고생을 했는데, 힘들게 명나라 남경(南京)에 가니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
璋)이 태도를 달리하며 극진히 예우했다.
1376년 이인임(李仁任)의 배명친원(排明親元, 명나라를 멀리하고 원나라와 가깝게 지냄)을 반
대하다가 언양(彦陽, 울산 언양)으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1377년 나날이 극성을 부리는 왜구(倭寇)를 처리하고자 왜열도 규슈(九州)로 건너가 규수 지
역 지방 세력에게 왜구 단속을 요구했다. 이에 규슈 지방 세력은 흔쾌히 협조를 약조했고, 왜
구에게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구출하여 그에게 인계했다. 그렇게 그들을 데리고 귀국하자
정몽주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급부상했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와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 예의판서(禮儀判書), 예문관제학, 전
법판서,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역임했고, 1380년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를 따라 전라도 지역의 왜구를 토벌했다.
이성계는 정몽주와 친분이 두터웠는데, 남원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싹 쓸어버리고 상경하던
중, 전주(全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전주는 그의 선조들이 살던 곳이며, 전주이씨 일족
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는 오목대(梧木臺, ☞ 관련글 보기)에서 이씨 일족을 모아 거하게 잔치를 벌였는데, 여기서
대풍가(大風歌)를 크게 불렀다. 대풍가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정벌하고
고향인 패(沛)로 돌아와 승전 연회에서 부른 시로 이를 통해 자신의 야망을 은근히 드러냈다.
연회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침이 마르도록 칭송을 했지만 정몽주만큼은 그 시의 의도를 파악
하고는 기분이 몹시 불쾌해졌다.
그래서 그 자리를 나와 인근 남고산 만경대(萬景臺)에서 우국시(憂國詩)를 읊으며 착잡한 마
음을 달랬다고 한다. 어쩌면 장차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되는 비극을 이때 예견했을지도 모
른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고, 이듬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
라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를 찾은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
었으며, 1388년 우왕(禑王)과 최영이 요동정벌을 추진하자 이성계를 지지하며 정벌을 반대했
다.
통한스러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조정을 장악한 이성계를 도와 우왕을 폐했고, 1389년
에는 그와 함께 우왕의 아들인 창왕(昌王)까지 폐해 그들을 공민왕(恭愍王)의 후손이 아닌 신
돈(辛旽)의 후손으로 왜곡시키는 일에 동참했다. 또한 이성계와 함께 고려의 마지막 군주인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여 1390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과 수문하시중(守門下
侍中), 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 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 우문
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 등의 다양한 관직과 작위를 받았다.

이토록 이성계와 행동을 같이하며 때로는 백로가의 뜻을 저버리고 이성계 패거리와 까마귀 짓
도 하면서 나름 나라의 개혁을 갈망했으나 이성계의 세력이 나날이 커지자 고려를 뒤엎고 그
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정몽주는 우왕과 창왕의 예를 통해
군주가 별로면 갈아치우는 한이 있더라고 고려란 나라를 유지한 채, 개혁을 하자는 것인데,
이성계 패거리는 '고려는 이제 틀렸다. 다 갈아엎고 새로운 나라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의견
이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함께 해온 이성계를 제거하여 고려 사직을 지키기로 마음을 먹고 기회를 노
렸다.

드디어 1392년 3월 때가 왔다. 공양왕의 세자(世子)인 왕석(王奭)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자 이성계가 그를 마중하러 황주(黃州)로 나갔다. 거기서 사냥을 벌이다가 그만 말에서 떨
어져 크게 다쳤는데, 정몽주는 크게 기뻐하며 대간(大諫)을 움직여 정도전과 조준(趙浚) 등
개경에 있던 이성계 패거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리고 정도전을 잡아 가두고 조
준과 남은(南誾) 등을 귀양 보냈다.
이성계는 아픈 몸을 이끌고 상경하다가 벽란도(碧瀾渡)에서 하룻밤 쉬려고 했는데, 아들인 이
방원이 급히 찾아와 정몽주가 일을 벌이고 있음을 알리며 서둘러 상경하자고 했다. 정몽주에
대한 신뢰가 두텁던 이성계는 무슨 소리냐며 잔소리를 했으나 이방원이 계속 권하는 것이 심
상치가 않아 가마를 타고 서둘러 개경으로 돌아오면서 정몽주의 대사는 그르치게 된다. 이때
그는 3일이나 밥을 먹지 않으며 기회가 사라졌음을 안타까워 했다.

이방원은 형세가 매우 위급하므로 정몽주를 제거하자고 이성계에게 제의했다. 이에 가족들은
한 목소리로
'우리 이씨가 왕실에 충성을 바친 것은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데, 지금 정몽주에게 모함을 받
아 악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후세에 누가 이것을 변명하겠는가'
외치며 정몽주 제거를 모의
했다.
이때 이성계의 형인 이원계(李元桂)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정몽주에게 그 사실을 귀띔해
주자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를 찾아가 상황을 살폈다. 허나 이성계는 평소와 비슷하게 그를
대해주면서 정몽주는 지금 당장은 일을 벌이지 않겠지 싶은 방심을 하고 돌아간다.
이때 이방원이 주안상을 마련하여 그에게 술 1잔을 권했다. 포은은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정
도전과 핵심 패거리만 염두에 두었지 이방원은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설마 저 어린 것이 나
에게 무슨 짓을 하겠는가 싶었을 것이다.

이방원은 어느 정도 술을 주고 받자 지필묵(紙筆墨)을 꺼내 하여가(何如歌)를 선보이며, 그를
시험했다. 허나 시험 결과는 역시나였다. 정몽주는 단심가로 화답을 하며 하여가를 무색케 만
든 것이다. 즉 포은은 이성계 패거리에게 더 이상 협조하지 않고 필요하면 죽음으로써 역모를
막겠다는 것이다.

이방원과 작별한 포은은 별다른 대비도 없이 귀가를 했다. 곧 다가올 저승사자를 눈치채지 못
했던 것이다. 정몽주 제거를 결심한 이방원은 서둘러 수하인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귀가하던
정몽주를 선죽교(善竹橋)에서 철퇴로 때려 죽였다. 그때 포은이 흘린 피가 마르지 않고 다리
에 남아있다고 하는데, 실상은 붉은색을 띠는 돌이지 그의 피가 아니다. (정몽주 띄워주기의
일환으로 윤색된 것임)
정몽주가 잔혹하게 살해되자 이성계는 크게 놀라며 이방원을 꾸짖자 그는 정몽주가 우리를 공
격하는데 어찌 가만 있겠냐며 항변을 했다. 이에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이성계는 왕을 찾
아가 정몽주가 모함했다는 것을 알리고 그를 추종한 이들을 잡아 족치며 정몽주의 목을 개경
십자거리에 매달았다. 그리고 얼마 뒤 이성계는 그의 패거리와 함께 공양왕을 끌어내려 고려
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인 조선을 열었다.

정몽주는 시문에 뛰어나 단심가와 많은 한시를 남겼고,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의 글씨
와 작품들은 후손들이 정리하여 1439년에 간행된 포은집(圃隱集)에 담겨져 있다. 또한 지혜와
용기가 대단했고, 충효와 지조가 대단했으며, 학문을 좋아해 정도전과 함께 원나라에서 들어
온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키고 보급하여 동방성리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의 노력으로 이때
부터 집에서 가묘(家廟) 등을 세워 유교식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생겨났으며, 의창(義倉)을
세우고, 수참(水站)을 설치해 조운(漕運)의 편리를 도모했다.

고려를 지키고자 나름 충신의 매운 얼을 드높였던 포은은 이성계 패거리에게 패해 역적이 되
었고,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면서 아들은 죄다 귀양 신세가 되었다. 그의 무덤 역시 개경
인근 풍덕군(豊德郡)에 대충 썼다.

1400년 조선의 3대 군주가 된 태종(太宗) 이방원은 그동안 뜨거운 맛으로 일관했던 정몽주 일
가에 대한 태조를 180도 달리하며, 후손을 달래주고 정몽주를 띄워주기 시작했다. 비록 자신
들에게 협조하지 않은 것은 괘씸하지만 다 나라를 위한 우국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그를
충신의 대명사로 드높인 것이다.
그래서 1401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했고, 이어서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으로 추봉했으며,
후손의 소망에 따라 묘를 옮길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또한 중종(中宗) 때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을 비롯한 수많은 서원에 배향되면서 대대손손 두둑한
제삿밥을 받으며 영원히 추앙을 받게 된다.

그들 야망에 도움이 안되어 때려죽일 때는 언제고 이제는 살만하니까 진정한 충신이자 성리학
의 시조라며 지나치게 띄워주는 태종의 이중적인 행태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데, 태종
의 입장에서도 솔직히 정몽주 스타일 즉 군주에 대한 일편단심 충신을 열망했던 것이다. 조선
이 오래간다는 보장도 없고, 늘 변수가 도사리고 있기에 정몽주 같은 충신이 나와 나라를 지
키고 망국(亡國)의 초라함을 달래달라는 주문이 담긴 것이다. 고려는 비록 망했지만 정몽주와
그를 포함한 3은(三隱)과 최영 등 많은 충신이 있기에 그 마지막은 외롭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신권(臣權)과 개혁을 강조하며, 자신을 한때 괴롭게 했던 정도전보다는 이미 없어진 정
몽주가 훨씬 이용하기가 좋았다. 그러니 죽은 정몽주를 이용해 그들 입맛에 맞게 요리한 것이
다.

풍덕군에 있던 정몽주묘는 1406년 후손들의 뜻으로 그의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하기로 하고 운
구를 끌고 내려갔는데, 인근 수지 풍덕천(豊德川)에 이르자 명정(銘旌, 죽은 이의 품계, 관직
, 성씨를 기록한 기)이 갑자기 바람에 날라간 것이다. 명정을 쫓아가니 지금의 정몽주묘 자리
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연한 일도 아닌 것 같고, 그곳 자리도 좋아 보여 굳이
영천까지 가지 않고 그 자리에 무덤을 썼다고 전한다.
이후 정몽주의 아들과 손자를 비롯해 후손들이 모두 그의 곁에 묻히면서 이곳은 정몽주 일가
의 묘역이 되었고, 1517년 중종이 정몽주묘 주변 능골 일대를 후손들에게 내리면서 이곳에 완
전히 정착하게 되었다.


▲  이석형묘에서 바라본 정몽주묘

개경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정몽주묘는 거의 조선 왕족 묘에 버금가는 모습이다. 망주
석(望柱石) 1쌍과 상석(床石) 2기, 문인석 2쌍, 석양(石羊) 1쌍, 장명등(長明燈) 1기가 앞에
배치되어 있고, 봉분(封墳) 주위로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봉분 밑에 호석(護石)을 두고 묘
3면에 곡장(曲牆)이란 담장까지 둘러 묘의 품격과 장엄함을 높였다.
원래는 문인석 1쌍과 묘표, 상석, 봉분, 곡장이 전부였으나 1980년 이후 묘역을 크게 정비하
면서 후손들이 더 갖다 붙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때와 하얀 피부의 석물이 어색하게
공존을 하게 되었다.


▲  난간석과 호석까지 갖춘 정몽주묘

▲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 지붕돌이 인상적인 정몽주 묘표
묘표는 1517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신 앞쪽에는 '高麗 守門下侍中 鄭夢周之墓'라
쓰여 있어 고려를 위해 산화한 그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다.

▲  우측 문인석

▲  좌측 문인석

고색의 때가 만연해 문인석 1쌍은 키가 작다. 표정이 나라를 지키지 못한 정몽주의 심정과 표
정을 상징하듯 꽤 우울해 보인다. 반면 그 옆에는 근래에 세운 하얀 피부의 매끈한 문인석이
서 있는데, 키도 크고 표정도 매우 긍정적이다. 마치 정몽주를 없애고 나라를 뒤엎으며 야망
을 실현한 이성계와 이방원의 흐뭇한 표정 같은. 문인석을 세우더라도 좀 근엄한 표정이 좋았
을 것인데, 그 점이 아쉽다.


▲  정몽주묘에서 바라본 작은 천하

▲  북쪽에서 바라본 정몽주묘와 멋드러진 소나무의 위엄

▲  설곡 정보(雪谷 鄭保)와 밀양박씨 내외묘

정몽주묘 북쪽에는 후손들의 무덤이 산기슭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그중에는 정몽주의 손자인
정보의 묘가 있다.
정보는 원사 정종성의 아들로 생몰시기는 전하지 않는데, 경상도 예안(禮安)현감과 사헌부 감
찰을 지냈다. 1456년 사육신 사건이 터지자 그들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포항 연일로 유배되었
으며, 다시 산청(山淸)으로 옮겨져 거기서 어느 해 4월 20일에 생을 마감했다.

봉분은 원래 부부가 따로 썼는데, 1982년 지금의 자리로 묘를 옮기면서 하나로 합쳤으며, 문
인석 2쌍과 묘표에는 고색의 때가 만연하다.

▲  고색의 미가 담긴 설곡 정보 묘표

▲  봉분 옆에 새로 만든 정보의 새 묘표


▲  정충전(鄭忠傳)과 전주이씨 내외묘
정충전은 정몽주의 7세손으로 1606년 식년시(式年試) 2등에 합격해 관직에 진출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가 되었으나
그 외에는 딱히 두드러지는 것은 없다.

▲  선죽교 앞에 세워진 하마비(下馬碑)

작렬하게 내리쬐는 여름 햇살의 핍박에 맞서며 정몽주 묘역을 둘러보고 충렬서원으로 길을 옮
겼다. 묘역으로 갈 때는 포은교를 건너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선죽교란 다리를 통해 오포로로
나왔다. 선죽교는 포은교 서쪽 90m 지점에 있는 다리로 능원초교(정몽주선생묘역입구) 정류장
바로 뒷쪽이다.
선죽교라고 해서 개성에 있는 그곳을 옮기거나 본을 따서 만든 것은 아니며, 그냥 흔한 하천
다리로 정몽주 묘역 입구라서 그에 걸맞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니 복잡한 의미 부여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선죽교 북단에는 검은 주근깨가 자욱한 늙은 하마비가 서 있어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한다. 하
마비란 하마 서식지가 아니라 대소인원(大小人員) 모두 이곳 앞에서는 말에서 내리라는 추상
같은 뜻이다. 보통 궁궐, 관아, 향교, 서원, 왕릉. 사당, 고위 관료의 묘역 입구에 세우는데,
정몽주 묘역도 그에 해당되어 하마비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곳이 정몽주묘와 충렬서원의 중간
지점이라 이곳에 비석을 세운 모양인데, 여기서 묘와 서원이 제법 거리가 되어(묘는 도보 15
분 거리) 다른 곳에서 옮겨왔을 가능성도 있다.

말을 타고 오가는 이들을 귀찮게 했던 하마비, 허나 이제는 하마비의 눈치를 보며 말이나 차
량에서 내릴 필요는 없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의 권위도 이미 상실된 상태이며, 이제는 지
나가는 이들이 제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나도 그의 존재를 여기서
처음 알았다.


▲  능원리 느티나무(용인시 보호수 70호)와 정한영 효자비

▲  정한영 효자비(鄭漢永 孝子碑)

포은교와 충렬서원입구 사이에는 늙은 느티나무와 정한영 효자비가 있다. 이곳 느티나무는 나
이가 약 270년 정도로 1988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그의 높이는 19.5m, 둘레 4.5m로 좌우로
가지가 길게 뻗어 있어 그늘의 면적이 제법 된다. 그 시원한 그늘 밑에 정한영 효자비가 둥지
를 틀었다.

정한영(1862~1947)은 정몽주의 19대 손으로 호는 모은(慕隱)이다. 이곳 능원리 출신으로 성품
이 바르고 효성이 지극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묘 밑인 지금의 자리에 여막(廬幕)을 짓
고 3년 동안이나 그 힘든 시묘살이를 했다. 3년상을 치르는 동안 기름진 음식을 입에 대지 않
았으며, 오로지 미음과 채소로 연명했다. 또한 부모가 준 거라면서 머리는 물론 손/발톱도 전
혀 깎지 않았다.
그 효행을 기리고자 유림에서는 이곳에 효자비를 세웠으며, 비석의 지명(誌銘)은 김세기가 쓰
고, 행장기(行狀記)는 김학열이 썼다.

* 정몽주선생묘와 저헌 이석형묘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산3 (능곡로
  45)



 

♠  정몽주를 배향한 오래된 서원 - 충렬서원(忠烈書院)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호

느티나무와 효자비를 둘러보고 서쪽으로 조금 가면 충렬서원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한다. 그
의 지시를 따라 오른쪽 골목길(충렬로)로 3분 정도 들어가면 그 끝 양지바른 곳에 충렬서원이
자리해 있다.

충렬서원은 1576년 이계(李棨)를 비롯한 지역 유림들이 용인에 잠든 정몽주와 조광조(趙光祖)
를 배향하고자 정몽주와 조광조의 묘역 중간인 죽전(용인 수지구 죽전동)에 세운 것으로 처음
에는 죽전서원(竹田書院)이라 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05년 경기도관찰사 이정구(李廷龜)가 용인현감 정종전(鄭從善) 등
과 협의하여 정몽주묘와 가까운 곳에 서원을 중건했다. 공사는 무려 3년이 걸렸으며, 사우 3
칸과 동/서재 2칸, 문루 3칸을 지어 구색을 맞추었고, 조광조의 위패를 수지구 상현동에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으로 옮기면서 완전히 정몽주를 위한 서원이 되었다.

1609년 광해군은 충렬(忠烈)이란 사액을 내려 이때부터 충렬서원이라 불렸으며, 설곡 정보와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을 추가로 배향했다. 1706년 정몽주의 후손인 정제두(鄭齊斗)와 정
찬조(鄭纘祖) 등이 유림의 협조를 받아 옛터에서 조금 서쪽인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1871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정리 사업으로 철거되었으며, 1911년 유림에서 사우를
복원하고, 1956년 강당(講堂)을 복원했다. 또한 1972년 사당을 전면 보수하고 강당과 내삼문
(內三門)을 중건했으며, 1975년 홍살문과 외삼문(外三門)을 만들었다.

이 서원의 특징이라면 교육보다는 제사의 기능을 더 강조했다는 것이다. 강당을 앞에 두고 사
당을 뒤에 두는 이른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제사를 지낼 때는 강당까지 몽땅 제사와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  차갑게 생긴 붉은 피부의 홍살문

▲  굳게 입을 닫은 외삼문

▲  많이 한가해진 강당

▲  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사당

이곳은 속세에 활짝 문을 열고 있으나 내가 갔을 때는 서원 내부 사정으로 태극마크가 그려진
내삼문은 굳게 입을 닫고 있었다. 하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돌담 밖에서 까치발로 바라보
는 선에서 서원과의 인연을 정리했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 정몽주묘역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충렬서원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118-1 (충렬로 9-19)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3년 7월 12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티스토리(tistory)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3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짙푸른 숲과 조촐한 계곡을 간직한 도심 속의 싱그러운 쉼터, 북악산 삼청공원 ~~~ (말바위, 영무정, 한양도성. 삼청동길)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 나들이
(삼청공원, 말바위)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숲이 무성한 서울 도심의 든든한 허파, 삼청공원(三淸公園)

▲  감사원 서쪽에 있는 삼청공원 후문

여름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6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촌(北村)을 찾
았다. 북촌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계속 북쪽으로 가니 어느덧 북촌과 북악산(백악산)의 경계인
삼청공원까지 발길이 가게 되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오랜만에 공원이나 1바퀴 둘러보고자
공원 정문을 통해 그의 품으로 들어섰다.

북악산 동남쪽 자락에 넓게 누운 삼청공원은 서울 도심의 북쪽 끝으로 조선시대에도 한양도성(
都城)의 북쪽 끝을 담당했다. 예나 지금이나 싱그러운 나무가 바다를 이루던 명승지로 서울 사
람들의 오랜 나들이 명소였으며, 봄꽃이 만연할 때는 사대부 여인들이 봄꽃놀이를 즐기던 현장
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 학자인 성현(成俔, 1439~1504)은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도성
안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으로 삼청동 골짜기를 꼽았으니 그곳이 바로 삼청공원으로 '산이
높고 나무가 빽빽한데 바위 골짜기가 깊숙하다'
라며 이곳을 표현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 표현은 유효한데, 공원 일대에는 북악산의 명물인 소나무를 비롯해 노간주
나무, 붉나무, 팥배나무, 쪽동백나무, 신갈나무, 때죽나무, 진달래 등 갖은 나무들이 숲을 이
루고 있으며, 골짜기가 깊고 멋드러진 바위가 여럿 포진해 있다.

이렇게 서울 사람들의 오랜 산책 명소이자 피서지였지만 공원에 서린 옛 흔적은 북악산 주능선
에 붙어있는 숙정문(肅靖門)과 한양도성 밖에는 없다. 이들은 도성 수비용이니 풍류와는 관련
이 없고 기껏해봐야 관리들이 말을 타고 올라와 시를 지었다는 자연산 바위, 말바위 정도가 있
다. <공원 바깥까지 확대한다면 '삼청동문(三淸洞門)' 바위글씨를 비롯한 여러 바위글씨와 유
길준(兪吉濬)이 유폐되어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작성했던 취운정(翠雲亭)터 정도가 있음>

왜정(倭政) 시절인 1934년 3월, 삼청골 일대를 삼림공원으로 삼아 관리하기 시작했으며, 1940
년 3월, 총독부고시 208호에 따라 도시계획공원의 하나가 되었다. 당시 왜정은 도시계획공원
140개를 발표했는데 삼청공원이 그 1호로 당시 공원 면적은 약 432,000㎡였으며, 소나무를 비
롯한 온갖 나무들로 울림(鬱林)을 이룬 이곳에 산책로와 정자, 의자, 풀장 등을 설치했다.

1945년 이후에는 정몽주 시조비 등의 시비(詩碑), 영무정, 어린이놀이터, 운동시설 등을 계속
해서 설치했고 산책로와 계곡을 정비했으며 삼청동길과 계곡(삼청골) 사이에 나무데크길을 닦
았다. 그리고 근래에 후문 부근에 숲속도서관을 짓는 등, 자연에 크게 반(反)하지 않는 범위에
서 얌전하게 손질을 했다.
공원 손질이 얌전했던 이유는 공원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잔뜩 포진해 있어 천박한 개발
의 칼날을 뚝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하여 자연에 쏙 묻힌 싱그러운 공간으로 도심 속에 남게
된 것이다. 다만 시내 확장과 군부대로 공원 면적은 5만㎡가 줄어 현재는 약 388,109㎡이다.

삼청공원은 도심의 핵심인 광화문(光化門)과 종로에서도 무척이나 가깝다. 게다가 공원과 살을
맞댄 북촌과 삼청동길의 인기가 계속 하늘을 찌르면서 찾는 이도 많이 늘어났다. 숲이 매우 짙
어서 그늘도 꽤 깊으며 조촐하게 자연산 계곡까지 갖추어 북악산 서북쪽 자락에 묻힌 백사실계
곡(백석동천, ☞ 관련글 보러가기)과 더불어 도심 속 피서지로 인기를 더하고 있다.
 비록 천하에 이름 꽤나 있는 계곡 앞에 명함조차 내밀기 쑥쓰러운 수준이지만 도심 속에서 발
을 담구며 간단하게 피서를 누릴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대단하다. 공원을 가로질
러 도심으로 향하는 삼청골은 삼청천(三淸川)이라 불리며 청계천 상류의 하나를 이룬다.

시내에서 공원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삼청동(三淸洞) 마을버스 종점에서 들어가는 것과 감사원
서쪽의 후문으로 가는 길이 가장 일반적이다. 북촌에서 들어간다면 후문을 이용하면 되며, 삼
청동길로 접근하거나 마을버스를 이용한다면 삼청동 마을버스 종점에서 들어가면 편하다. 또한
2009년에 공원에서 말바위로 오르는 산길이 뚫리면서 북악산 주능선과 숙정문은 물론 그 너머
성북동(城北洞) 지역까지 바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특히나 이 길이 지나가는 북악산 동남
쪽 자락은 오랫동안 속인(俗人)들의 접근을 허용치 않았던 금지된 곳으로 산길이 닦이면서 이
곳을 잠궜던 자물쇠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공원 서쪽에는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시작된 삼청동길이 마을버스 종점을 지나면서 구불구불 또
아리를 튼 2차선 산악도로의 모습을 보이며 삼청터널을 거쳐 성북동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박
정희 정권 시절 성북동에 서식하던 권력 실세들이 그들의 교통 편의와 땅값 상승, 청와대와 정
부기관에서 삼청각/대원각 등 고급요정으로의 접근 편의를 위해 낸 것으로 당시에는 차량이 많
지 않아 조촐하게 2차선으로 만들었다.
 허나 시간이 흘러 차량들이 쓸데없이 늘어나면서 도로와 터널을 넓혀야될 지경에 이르렀지만
개발제한구역이라 그것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2차선으로 마냥 두고 있는 것이다.

삼청터널과 터널로 이어지는 길(삼청공원~삼청터널 북쪽, 삼청각 구간)은 뚜벅이들의 배려 따
위는 안중에도 없는
오로지 차량을 위한 길이니 괜히 도보로 가는 일이 없기 바라며 삼청동에
서 숙정문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이 길은 오랫동안 통제구역으로 묻혀 속세의 뇌리 속에
잊혀진 상태이다.

※ 삼청공원 찾아가기 (2017년 8월 기준)
* 지하철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을 타
  고 삼청동 종점 하차. 이 버스는 삼청동에서 정독도서관입구, 동십자각, 광화문, 시청, 남대
  문을 거쳐 서울역(서울역전우체국 북쪽)까지 운행한다.
* 지하철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감사원 하차(또는 도보 15
  분), 감사원에서 서쪽(삼청동)으로 내려가면 막다른 3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들어
  가면 공원이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삼청동길)
*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삼청동길을 따라 25분 정도 걷거나 동십자각 북쪽 법련사 정류장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 이용
* 삼청공원 숲속도서관 이용시간 : 10시~18시 (여름은 20시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문의 ☎
  02-734-3900)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1 일대 (북촌로 134-1)


▲  삼청공원 후문 안쪽

공원 후문을 들어서면 수목원 같은 삼청공원의 고운 속살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수목원 같지만
속살을 깊이 들어가면 수목원 분위기는 울림으로 변화하고 산내음과 솔내음이 청정한 기운을
볶아내면서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준다.


▲  숲터널을 이룬 삼청공원 산책로 ▼


▲  시인 김경린(金璟麟, 1918~2003)의 '차창'이 담긴 시비(詩碑)

차창(車窓)
나는 수족관에 온 한마리의 어족
미끄러지는 바깥 세계가 뿜는 향수로
안경은 차웁다

우리나라 현대 시인의 하나인 김경린이 2003년 세상을 뜨자 그의 후학들이
그가 살았던 삼청동에 그의 대표작, 차창을 담은 시비를 세웠다.

▲  동심이 깃든 삼청공원 어린이놀이터
어린이들의 안전과 그들의 흙놀이 공간을 위해 흙으로 놀이터를 닦았다. 나도
어렸을 때 흙장난 참 많이 했었지. 그때는 흙으로 많은 세상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내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도 아리송하다.

▲  삼청공원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옛 약수터
오른쪽에 보이는 네모난 구멍에서 약수가 콸콸 쏟아져 나왔으나
이제는 목구멍이 막힌 죽은 샘터가 되었다.

▲  삼청공원 약수터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담는 약수터로 근래 부적합 판정을 받아 찾는 이가 많이 줄었다.
약수터 맞은편 의자에는 1996년 10월 문화체육부에서 세운 근대 소설가 염상섭
(廉想涉, 1897~1963)의 앉아있는 동상이 있었으나 2014년에 치워버렸다.
(염상섭의 생가터가 이곳 부근이라 동상을 세웠음)


▲  비둘기도 이곳 경관에 반해 뒤뚱뒤뚱 산책을 즐긴다.

▲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그의 어머니의 시조비

정몽주와 그의 어머니의 시조가 담긴 정몽주 시조비는 이곳에서 그나마 오래된 볼거리로 1973
년에 세워진 것이다. 포은(圃隱)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을 덜 초라하게 해준 3은(三隱)의 하
나로 그의 시조비가 떡하니 있어 이곳과 무슨 관련이 있겠구나 싶지만 실상은 서로 아무런 관
련이 없다.

시조비 오른쪽을 장식하고 있는 시조는 백로가(白鷺歌)로 정몽주의 어머니가 간신과 역신(逆臣
) 등 질이 안좋은 무리와 어울리지 말 것을 훈계하고자 지은 시라고 한다. 허나 조선 영조 때
간행된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작자 미상이라 나와있고 조선 말 학자인 이희령(李希齡)이 지
은 약파만록(藥坡漫錄)에는 연산군 시절에 김정구(金鼎九)가 지은 시라고 나와있어 작자에 대
해서는 아직도 말들이 많다.

시조비 왼쪽에는 정몽주가 지은 그 유명한 단심가(丹心歌)가 쓰여 있다. 이 시는 이성계(李成
桂) 패거리가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우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인 이방원(李芳
遠, 후에 조선 태종)이 정몽주를 살짝 찾아와 그 유명한 하여가(何如歌)를 들이밀며 그의 의중
을 물었다.
 허나 정몽주는 그 이름도 높은 단심가로 답을 하며 고려에 대한 일편단심을 강하게 내비췄다.
결국 안되겠다 여긴 이방원은 부하 조영규(趙英珪)를 보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를 잔인
하게 처단하고 만다. 고려의 마지막 보루인 최영(崔瑩)과 정몽주를 잃은 고려는 더 이상 지탱
하지 못하고 결국 이성계 패거리에 의해 강제로 휘장을 내리게 된다.



백로가(白鷺歌)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빗을 새오나니
창파(滄波)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하여가(何如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영무정의 4계절' 시비
영무정 보존회에서 2008년 10월에 세운 시비이다.


영무정 시비에서 북쪽을 보면 초록색 철책이 빙 둘러진 후미진 공간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속살에는 조그만 폭포가 동천(洞天)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고 그 밑에 물이 담겨진 욕조처
럼 생긴 통이 있으며, 그 옆에 조그만 정자가 있으니 그곳이 바로 삼청공원의 숨겨진 명물, 영
무정이다.

이곳은 서울에 거의 남지 않은 노천 목욕탕으로 1960년경에 동네 사람들이 목욕터로 만든 곳이
다. 폭포 밑에 3명 정도 들어갈 크기의 욕조를 만들었는데 물이 매우 맑고 차다고 한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사람 여럿이 욕조에 몸을 담구거나 (물론 옷은 입었음) 주변에 앉아 대
화를 하고 있어서 안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특히 아저씨와 노공(老公)>의 오랜 목욕터이나 문제는 시민들이 거니는 공원에서
벌거벗고 목욕과 냉수마찰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계속 논란이 불거지자 종로구청에서
이곳을 없애려고 삽을 들었으나 영무정보존회에서 쌍수 들고 반대하여 철거는 하지 못했다. 또
한 방송에도 여러 번 등장해 그 이름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철거하기에 좀 애매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여 종로구청은 기존에 있던 펜스를 치우고 초록색 철책을 둘렀으며, 벌거벗고 씻지
말라는 경고문을 붙이는 선에서 영무정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허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늦은 밤에 몰래 벗고 씻는 이들도 아직 있을 듯 싶으며 구석진 곳이
라 둘만의 조용한 대화(?)를 원하는 이들이 찾기에 좋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이자 내 어린 시절 뒷동산이었던 남산(
南山)의 여러 약수터에는 이런 노천 목욕탕이 거의 딸려있었다. 약수터와 운동시설 옆에 담장
등을 둘러 벗고 씻는 공간을 둔 것이다. 나도 어린 시절 남산 그늘에 살았을 적에 부친을 따라
남산의 모 약수터에서 냉수마찰을 한 적이 있다. 냉수마찰을 해야 감기가 안걸린다는 말에 깜
빡 속아서 말이다.

영무정이 법에는 다소 저촉은 되지만 동네 사람들의 쉼터이자 피서지로 차가운 물이 모였다는
욕조에 들어가 피서를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단 물놀이에 적당한 가벼운 옷차림(속옷바
람은 안됨)으로 통에 들어가길 바라며, 삼청골 오염을 방지하고자 비누 사용과 음식물 취사행
위를 금하고 있으니 그냥 몸만 시원하게 담구고 오자.


▲  삼청공원 윗쪽 산책로 (영무정 북쪽)
집으로 살짝 가져와 혼자서만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다.

▲  구부러진 삼청공원 윗쪽 산책로

▲  삼청공원 산책로는 경사가 별로 없어 누구든 마음 편히
거닐 수 있는 착한 오솔길이다.

▲  오랜 가뭄으로 목이 타버린 삼청골
물은 온데간데 없고 흙과 돌만 어지럽게 흩어져 초여름 가뭄의
심각함을 드러낸다.


 

♠  삼청공원의 새로운 산길, 북악산 말바위 산길

▲  말바위 산길 입구

삼청공원 윗쪽에는 북악산 말바위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2008년에 닦기 시작하여 2009년에
완성되어 세상에 선보인 산길로 말바위조망대까지 600m 정도 이어져 있으며, 그곳까지는 가볍
게 10~15분 정도 걸린다. (중간에 갈림길이 있음, 거기서 왼쪽으로 가면 소나무 숲길, 직진하
면 말바위임)

말바위조망대에서 성곽을 따라 서쪽(숙정문 방향)으로 조금 가면 성곽 밖으로 나가는 나무데크
길이 있는데 그 길로 내려가면 바로 성북동으로 북악하늘길 제3코스와 만난다. 여기서 왼쪽(서
쪽)으로 가면 삼청각과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북악하늘길2/3코스로 이어지고, 오른쪽(동쪽)으로
가면 와룡공원<여기서 성북동 종점이나 성균관대, 감사원 방면으로 내려가면 됨>으로 이어진다.
 또한 성곽길을 더 가면 말바위안내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숙정문을 거쳐 북악산 정상과 창의문
(彰義門, 자하문)으로 넘어갈 수 있어 코스 또한 다양하다. 그러니 취향에 따라 코스를 잡으면
된다.
허나 숙정문과 북악산(백악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성곽길은 9시부터 16시(동절기는 10
~15시)까지만 출입이 가능하다. (신분증을 지참하여 출입증을 작성해야 됨)

삼청공원에서 말바위로 오르는 산길이 생기기 전에는 거기서 성북동/북악산 방면으로 가는 정
식적인 길이 없었다. 삼청터널이 있지만 거긴 오직 차량 전용이며, 걸어서 간다면 와룡고개로
우회해서 가야했다. 지도에서 보는 거리는 매우 가깝지만 걸어서 가는 체감거리는 이론과 다르
게 꽤 각박했던 것이다.
 허나 말바위 산길이 생김으로써 비록 산을 넘어야되는 부담은 있지만 서로의 거리가 꽤 줄어
들었고 반대로 성북동(삼청각)에서도 삼청공원과 도심 도보 접근이 수월해졌다.

출입절차를 밟아야 되는 말바위안내소에서 창의문으로 이어지는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말바위
등산로와 성곽 밖 북악하늘길은 언제든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 (단 군사시설이 여럿 있으
므로 그곳은 들어가거나 촬영하지 말 것)
 이렇게 삼청동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뚫렸다니 참 세상이 많이 변하긴 변한 모양이
다. 국가의 예민한 곳으로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하고 먼산 쳐다보듯 해야 했던, 잘못
들어갔다가는 정말 총 맞을 것 같던 그곳이 말이다. 이제 도성 남쪽인 북악산 남쪽만 개방되면
북악산은 거의 완전히 해방이 된다. 하지만 그곳에는 청와대와 여러 예민한 시설이 있으니 당
장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  말바위 입구에 세워진 건강 돌탑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돌탑이든 우선 건강하고 봐야 된다.
건강이 없다면 바닷가의 힘없는 모래성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  소나무가 운치를 우려내는 말바위 산길

북악산은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시절부터 소나무가 유명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특별
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하여 산이 온통 솔내음의 향기가 진동했다. 허나 왜정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 다른 나무의 유입 등으로 소나무가 많이 줄어 지금은 주능선 주변과 고지대에
주로 남아있다. 삼청공원이나 와룡고개 등 속세와 가까운 곳은 소나무가 거의 없고 속세와 어
느 정도 거리를 둔 고지대에서 소나무들이 이슬을 먹으며 자라고 있다.

북악산 일대는 오랫동안 금지된 산으로 묶여있다 보니 나무와 식물이 마음 놓고 뿌리를 내리면
서 숲이 매우 울창하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는데 삼청공원 일대에서는 직
박구리와 박새, 멧비둘기, 오색딱따구리, 꿩, 노랑지빠귀, 다람쥐, 청솔모 등이 살고 있다.


▲  삼청공원과 말바위 사이에 조성된 쉼터
말바위 등산로는 흙길과 나무로 만든 계단길이 적당히 섞여 있다.

▲  한양도성 (말바위 방향) - 사적 10호

삼청공원에서 말바위 등산로를 15분 정도 오르면 한양도성(한양성곽)의 여장이 나타난다. 여장
이란 성곽을 수비하고자 두툼하게 돌벽을 쌓고, 중간에 여러 개의 구멍을 낸 수비시설인데, 이
곳이 성내(城內)이다 보니 여장 안쪽에 있게 된 것이다. 여장 너머는 성밖으로 바로 성북동이
다.


▲  한양도성 (삼청공원 방향)
서울을 지키던 성곽도 부끄러움을 타는 것일까? 몸에 걸친 담쟁이덩굴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성곽은 1974년 이후에 복원한 거라 일부 검은 주근깨가 낀 것을 빼고는
대부분 하얀 피부를 자랑한다.

▲  말바위로 오르는 각박한 계단길 (왼쪽에 보이는 길로 가면 말바위 조망대)

한양도성과 만나는 곳에서 성곽을 따라 서쪽으로 3분 정도 가면 각박한 각도의 계단길이 나타
난다. (동쪽은 군사시설로 길이 막혀 있음) 그 계단을 오르면 바로 말바위인데 계단길 중간에
왼쪽으로 통하는 나무길이 있으며 그 길로 들어서면 말바위 조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  북악산 말바위조망대와 말바위

▲  도심을 향해 들어앉은 말바위 조망대

말바위 밑에 자리한 말바위 조망대(전망데크)는 커다란 바위 위에 나무로 만든 조망대로 도심
이 있는 남쪽을 향하고 있다. 천하 굴지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밑에 두고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북악산 정상(342m)이나 그 동쪽 봉우리인 청운대(293m), 인왕산(338m)보다 키
가 낮아 시야에 들어오는 범위도 사대문(四大門) 안쪽으로 좁다. 하여 이곳이 그리 높다는 생
각도 들지 않는다.
 허나 삼청공원을 비롯해 북악산 남쪽 자락과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그리고 그 안쪽에
둥지를 튼 도심이 속시원히 바라보며 그런데로 후한 점수를 줄만하다. 낮은 높이치고는 제법
선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북악산 정상과 남쪽 자락
북악산 너머로 인왕산과 서촌<웃대, 경복궁 서쪽 동네> 일대가 바라보인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①
바로 정면에 서울의 남주작인 남산이 바라보인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②
삼청공원과 삼청동, 경복궁 주변 일대가 바라보인다.

▲  북악산의 오랜 명소, 말바위

말바위는 촛대바위와 더불어 북악산에 이름난 바위이다. 이곳까지 삼청공원의 영역에 들어가는
데, 북악산의 오랜 명소로 조선시대에 문인(文人)과 관료들이 말을 타고 이곳으로 올라와 시문
을 짓거나 바람을 쐬며 많이들 쉬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을 타고 올라왔다는 뜻에서 말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며, 다른 이야기로는 북악산의 산줄기가 동쪽으로 좌청룡(左靑龍)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그 끝에 자리한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 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니까 말
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 것이다. (바위가 말처럼 생기지도 않았음)

말바위 옆에는 소나무 1그루가 바위 쪽으로 가지를 뻗어 바위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서
로의 끈끈한 정을 자랑한다.


▲  말바위의 옆모습

1968년 1.21사건 이후 말바위는 금지된 바위가 되어 속세에서 잠시 그 모습이 지워졌다가 2007
년 4월 다시 공개가 되었다. 그때 말바위에서 북악산 정상을 거쳐 창의문까지 제한적으로 개방
되었으며, 말바위는 24시간 언제든 발을 들일 수 있는 자유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  말바위에서 바라본 북악산 주능선 (북악산 정상에서 숙정문 구간)

▲  도성 밖으로 인도하는 말바위 나무다리와 한양도성 성곽길
탐방객 유의사항 현수막이 걸린 나무다리를 내려가면 도성 밖 성북동이다.
 

말바위와 말바위안내소 중간에는 성밖으로 나가는 나무다리가 있다. 무지 귀한 몸인 성곽 여장
을 부시고 내려가는 길을 낼 수가 없기에 부득이 성곽 위에 나무 다리를 다져 성밖으로 통하는
길을 냈다.
다리 북쪽에는 조망대를 설치하여 도심 속의 전원 마을인 성북동을 굽어보게 했는데, 삼청각과
길상사(吉祥寺), 북악산 북쪽 능선과 김신조투르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괜찮다. 여기서
다리를 내려가면 성곽 북쪽 자락길로 삼청각(三淸閣)과 숙정문안내소, 북정마을, 와룡공원, 김
신조루트(북악하늘길) 방면으로 이어지며, 성곽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북악산 주능선의 동
쪽 관문인 말바위안내소가 마중한다.


▲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 주능선

▲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바라본 삼청각과 북악산 북쪽 능선
삼청각 뒷쪽에는 2009년에 개방된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이 숨겨져 있다.

▲  성북동 서부 - 북악산의 두 능선에 막힌 궁벽한 곳이지만 그곳에
자리한 집들은 궁벽과는 거리가 먼 크고 호화로운 집들 투성이다.
빈부격차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현장이라
눈도 그리 즐겁지가 않다.

▲  성북동 일대
성북동은 북악산 주능선과 북쪽 능선(북악산길이 지나가는 능선) 사이에 포근히 터를
닦은 도심 속의 전원마을이자 완사명월형(浣絲明月形)의 명당 자리로 유명하다.
그러다보니 시커먼 졸부들이 가득 기어들어와 속칭 이 땅의 0.1%가 사는
비싼 동네가 되어버렸다.

▲  성북동 너머로 성북구 삼선동, 돈암동 지역이 바라보인다.

▲  다시 삼청공원으로 (말바위 산길 입구)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성밖으로 넘어가 와룡공원을 거쳐 시내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도
늦었고 귀찮기도 하여 왔던 길을 다시 재방송하여 삼청공원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시조비를 거쳐 삼청동길로 나오니 길 동쪽으로 북악산이 베푼 삼청골이 착한 풍경을 도
처에 빚으며 도로와 나란히 흘러간다. 허나 오랜 가뭄으로 비리비리한 모습을 보이니 보는 내
가 답답할 따름이다.


▲  가뭄에 타들어가는 가련한 삼청골 (삼청동길 동쪽 계곡)

▲  삼청동길과 삼청골 사이에 만든 뚜벅이용 나무데크길

▲  삼청동길 나무데크길의 남쪽 종점

서울 도심의 거의 흔치 않은 계곡인 삼청골(삼청천)은 공원 남쪽에 있는 삼청테니스장에서 어
두컴컴한 지하로 흘러간다. 개발의 칼질에 강제로 생매장을 당한 것이다. 이 물줄기는 삼청동
길을 따라 경복궁(景福宮) 동쪽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가는데 옛날 경복궁 주변 사진을 보면
경복궁 동쪽과 북촌 주거지 사이로 하천이 하나 보이니 그가 바로 삼청천이다.

삼청공원을 벗어나 2분 정도 가면 삼청동 종점(종로구 마을버스 11번 종점)이 나온다. 삼청동
과 도심을 이어주는 마을버스의 쉼터로 이곳도 엄연한 도심이라 경복궁과 광화문은 물론 시청
까지 걸어가도 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다.

우리는 지친 몸을 마을버스에 담아 시내로 나왔다. 어차피 종점이라 100% 앉아가는 것은 가능
하다. 이렇게 하여 초여름에 찾아간 북악산 삼청공원, 말바위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
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7년 8월 28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7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