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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0.22 거닐기 좋은 강동구의 상큼한 북쪽 지붕, 고덕산~서울둘레길3코스 나들이 (양지마을,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강동그린웨이, 양천허씨묘역) 2
  2. 2013.10.25 늦가을도 걸음을 멈춘 아름다운 박물관, 성북동 간송미술관

거닐기 좋은 강동구의 상큼한 북쪽 지붕, 고덕산~서울둘레길3코스 나들이 (양지마을,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강동그린웨이, 양천허씨묘역)

 


' 강동구의 북쪽 지붕, 고덕산 나들이 '

▲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


 

봄이 아쉬움 속에 저물고 여름 제국이 서서히 이빨을 드러내던 5월의 끝 무렵, 강동구(江
東區) 암사동과 고덕동 지역을 찾았다.
선사시대 유적지의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암사동(岩寺洞) 선사유적지(☞ 관련글 보러
가기)을 먼저 둘러보고 양지마을을 거쳐 고덕산으로 이동했다.

양지마을(양지말)은 암사3동에 자리한 시골 마을로 약 90호 정도가 살고 있다. 마을 북쪽
은 고덕산과 이어져 있고 남쪽과 동쪽, 서쪽은 밭과 주말농장 등의 경작지가 펼쳐져 있으
며 암사동 시내와도 거의 200~3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마을 집들은 상당수 전원주택
스타일로 다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과 뜨락을 갖추고 있어 마을에 들어서면 마치 교
외로 나온 듯 즐거운 기분을 안겨준다. 


▲  아리수로에서 바라본 양지마을 주변 전원(田園) 풍경


 

♠  암사3동에서 고덕산까지

▲  도시인의 안구를 제대로 씻겨주는 암사3동 전원 풍경

▲  암사3동 밭두렁

양지마을을 벗어나 시내와 시골의 경계를 이루는 암사동 북쪽 도로(아리수로)를 따라 동쪽으
로 이동했다. 길 남쪽에는 밋밋하게 솟은 키다리 아파트들이 몰려있고, 북쪽은 녹색 물결이
파도를 치는 경작지와 농가들로 시골 풍경을 이루어 서로 180도의 대비를 보인다.


▲  암사정수센터교차로의 전설, 보리밭의 황금 물결 (2012년)

잘익은 보리가 여름 바람에 살랑살랑 몸을 움직인다. 보리밭 남쪽에는 원두막까지 두어 전원
풍경의 패기를 드높였는데, 유감스럽게도 구리암사대교 접속도로 공사로 한 토막의 전설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  고덕산 강동아름숲길에서 바라본 암사동 강동롯데캐슬퍼스트아파트

암사정수센터교차로 동북쪽에 고덕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고덕산(
高德山)은 해발 90m의 작고 낮은 뫼로 강동구의 북쪽 지붕을 이루고 있다. 응봉이라 부르기도
하며, 암사동 선사유적지 동쪽에서 고덕천 서쪽에 이르는 동서로 길쭉한 산줄기로 북쪽은 한
강에 이르고, 남쪽은 암사동과 고덕동 주거지를 보듬고 있다.

아무리 작은 산이라고 해도 오래된 사연은 꼭 있는 법, 이곳은 고려 말 충신인 석탄 이양중(
石灘 李養中)이 숨어 살던 곳이라 전한다. 그는 고려수절신(高麗守節臣)의 하나로 형조참의(
刑曹參議)까지 지냈으나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자 미련없이 벼슬을
내던지고 고덕동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태조는 그를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거절을 당했으며, 친분이 있던 태종 이방원(李芳遠)까지
이곳까지 찾아와 설득을 했으나, 석탄은 평복 차림으로 직접 빚은 술을 대접하며 벼슬을 거절
했다. 하여 태종은 고려에 대해 지조를 지킨 그를 찬양하며 그 높은 덕을 기리고자 그가 살던
동네를 고덕리, 그가 살던 산을 고지봉(高志峰)이라 했다. 그 고지봉이 이후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의 고덕산이 된다. 이후 석탄은 죽어서 고덕동에 묻혔다고 하나 그의 무덤은 어느 귀신이
잡아갔는지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이극배는 고덕산 자락에 묻혔는데, 그의 후손들이 주변에 덩달아 묻히
면서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을 이루었다. 그 묘역의 일원이던 이시무는 고덕산 정상에
흙으로 단을 쌓고 국난평정을 기원했다고 전한다.


▲  강동아름숲길

아리수로와 맞닿은 암사정수사업소 동남쪽 숲을 강동아름숲이라 부른다. 이곳은 주민들이 가
꾸고 복원한 유서 깊은 숲으로 2010년 9월 광화문과 강남 등 서울 곳곳을 물바다로 만든 태풍
곤파스의 공격으로 이곳에 살던 1,000여 그루의 나무가 절단이 나는 사건이 있었다.
하여 강동구는 2012년 4월부터 숲 복원에 들어갔는데, 지역 주민 1,000여 명이 나무 심기에
참여하여 산벗나무 등 1,500그루를 심어 곤파스의 상처를 대부분 지워버렸다.

나무에는 그를 심거나 기증한 시민의 이름과 사연이 깃든 목걸이가 걸려있으며, 조성된지 얼
마되지 않아서 나무들 대부분은 작고 어리다. 허나 100년의 시간이 지나면 삼삼한 숲으로 변
화하여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것이다. 강동아름숲은 이곳 외에도 부근 샘터근린
공원에도 조성되어 있는데, 그곳 역시 곤파스로 피해를 본 것을 시민들 참여로 복원되었다.


▲  쉬지않고 이어지는 고덕산 서쪽 숲길

2000년 이후 도보길이 크게 유행을 타면서 천하 곳곳에 둘레길 같은 도보길이 닦여지고 있다.
강동구도 그 시류에 합류하여 2011년부터 도보길을 닦아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 도보길의 이
름은 바로 강동그린웨이(Green Way), 즉 녹색 길이다.
그런데 순수한 우리 말도 많건만 왜 굳이 꼬부랑 영어로 기분 나쁘게 이름을 삼았는지 모르겠
다. 도보길을 만들어 지역 사람들의 마실을 크게 배려한 것은 좋으나 영어로 이름을 삼은 점
에서 적지 않은 옥의 티를 선사하니 역시 철밥통들의 한계는 어쩔 수 없나 보다.

강동그린웨이는 크게 2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1단계는 고덕산에서 시작해 샘터근린공원, 방
죽공원, 명일공원, 일자산, 둔굴을 거쳐 서하남나들목입구교차로까지 이어지며, 2단계는 서하
남나들목입구교차로에서 강동대로, 서울아산병원, 한강, 암사동유적을 거쳐 고덕산으로 이어
진다. 특히 고덕산에서 일자산을 거쳐 서하남나들목입구까지는 서울시의 야심작, 서울둘레길
3코스(고덕,일자산 코스)와도 겹친다.


▲  암사정수사업소 철조망과 나란히 이어진 고덕산 서쪽 숲길
철조망을 따라 걸으니 군작전지역이나 휴전선을 지키는 군인이 된 기분이다.


 

♠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이극배(李克培)와 그의 후손들이 묻힌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廣州李氏 廣陵府院君派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0호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극배 묘역

고덕산 서쪽 숲길을 거닐다보면 나무 사이로 무덤들이 복병처럼 모습을 비출 것이다. 암사정
수사업소가 보이는 서쪽에는 큰 비석을 머금은 비각도 있는데, 이들은 이극배를 중심으로 한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이다.
무덤은 죄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묘역의 중심인 이극배 묘 앞에는 암사정수사업소가 철
조망을 치고 있어 마치 휴전선을 앞에 둔 무덤처럼 보인다. 그의 무덤 남쪽에는 고위 관료의
무덤만 지닐 수 있던 신도비와 비각이 있는데, 그 앞에 지나치게 짧은 간격으로 철조망이 쳐
져있어 앞 공간이 좁아 보인다.

※ 이극배(李克培, 1422~1495)는 누구인가?

묘역의 주인공, 이극배는 조선 초기 문신으로 광주이씨이다. 자는 겸보(謙甫), 호는 우봉(牛
峰)으로 이집(李集)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 어머니는 노신(盧
信)의 딸이다.

144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진사(進士)가 되었고, 바로 그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
해 5등인 정과(正科)로 급제했다. 그렇게 관직에 진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
었고, 이어 감찰(監察)이 되었으며, 검찰관(檢察官)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왔는
데, 직무를 잘 수행한 공로로 병조(兵曹) 겸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
다.
1455년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르는데 힘을 보탠 공로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錄勳
)되었으며, 1457년 예조참의(禮曹參議) 겸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가선대부(嘉善
大夫)에 직과 광릉군(廣陵君)에 작위까지 받았다.

병조참판(兵曹參判)과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지내다가 1460년 두
만강 북쪽에서 세력을 꾸리던 모련위(毛燐衛)의 우량하(兀良哈)를 정벌하고자 신숙주(申叔舟)
의 종사로 출전해 큰 공을 세웠다.
이 전쟁을 경진년에 벌인 북정(北征)이라 하여 경진북정(庚辰北征)이라 하는데, 우량하의 우
두머리인 아비차(阿比車)가 조선에게 처단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며 두만강 유역을 공격했
다. 이에 뚜껑이 열린 세조는 신숙주를 함길도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로 임명해 8,000명의
군사를 주어 시비를 건 우량하 세력을 때려잡도록 했다.

조선군은 회령(會寧)과 두만강 북쪽 간도 지역으로 진출, 2차에 걸친 정벌 끝에 우량하 세력
의 고위급 인물 90여 명을 죽이고, 군인과 백성 430명을 포로로 잡거나 처단했다. 그리고 900
여 채의 집을 불태우며 정벌을 기분 좋게 마무리 지었다. 이때 간도(間島) 지역을 완전히 접
수하여 12세기 초반, 윤관(尹瓘)장군이 일구었던 동북9성의 옛 땅을 차지했으면 좋으련만 땅
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고 그저 성리학 몰빵에 평화만 추구하던 조선에게 그런 기대는 무리였
다.
물론 조선이 상국(上國)으로 받들던 명나라의 눈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의 영역은
동으로 요동(遼東)이 고작이었고, 압록강 중류 이북부터 두만강 이북까지는 여진족의 땅이었
으므로 여진족 소탕을 구실로 의지만 강했다면 충분히 간도 개척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조선에게 단단히 깨진 우랑하는 살려달라고 빌면서 조공을 바치며 조선의 그늘에 들어왔고 이
를 계기로 조선의 북쪽 변경은 약간이나마 확대되었다. 이때 두만강 안쪽에 있었으나 여진족
의 땅으로 남아있던 무산군(茂山郡) 지역을 점령해 조선의 땅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그곳을
개척하고자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백성을 이주시켜 정착하게 했다.

북정을 마치고 돌아와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으며, 1462년 호조(戶曹)와 공조(工
曹)를 제외한 4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또한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가 되어 평안도의
인심을 살폈으며,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등급이 올라가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리고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책훈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1479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되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승진했고, 1481년부터
2년 동안 큰 기근이 일어나자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백성을 살폈다. 1485년에는 우의정(右議
政)에 오르고 1493년 최고직인 영의정(領議政)을 제수받았으나 노병을 구실로 거절했다. 이후
광릉부원군에 봉해져 최고의 관작을 누리다가 1495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
자 연산군은 익평(翼平)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는 도량이 크고 뜻과 생각이 확고했다. 그리고 경학(經學)을 근본을 삼아 도덕 정치를 실천
했고, 관리로써 필요한 지식과 능력, 처신에 뛰어나 약 50년 간 벼슬을 지내면서 영의정을 제
외한 왠만한 고위직은 두루 거쳤다. 게다가 세종부터 연산군(燕山君)까지 7명의 제왕을 섬겼
으니 그 기록은 황희(黃喜)를 능가한다. 또한 사사로이 손님을 맞거나 선물을 받지 않는 공정
함을 지녔고, 가무(歌舞)는 좋지 않다고 하여 멀리 했으며, 나라의 일을 의논할 때는 대체적
인 것에 힘쓰고 세세한 것은 거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  이극배 신도비를 품고 있는 맞배지붕 비각(碑閣)


▲  이극배 신도비(神道碑)

이극배 묘역 서쪽에 자리한 신도비는 1496년에
세워진 것으로 명필로 명성이 자자했던 예조판
서 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신종호(申從濩,
1456~1497)가 글을 썼다.
장대한 세월이 무심하게 달아놓은 검은 주근깨
가 자욱한 비석 피부에는 그의 일대기가 깨알
같이 적혀있고, 이수(螭首)에 새겨진 구름무늬
와 그 속에서 놀고 있는 용이 매우 정교하게
새겨져 두 눈에 적지 않은 자극을 준다. 거기
에 비문(碑文)의 서체와 정교한 석공기술은 15
세기 후반 비석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여러
가지로 가치가 높다.

원래는 비석만 덩그러니 있었으나 2009년 이후
든든하게 비각을 씌워 그를 지키고 있다.


▲  뱀이 이리저리 또아리를 튼 듯, 섬세하고 복잡한 신도비 이수의 위엄

▲  신도비에서 이극배 묘역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  이극배 묘역

이극배 묘역은 1495년에 조성되었다. 부인인 경주 최씨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으며, 무덤
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를 비롯해 상석(上席),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1쌍과 무인석
(武人石) 1쌍이 묘역을 지킨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체격이 우람하며, 묘비는 특이하게 이극배
의 봉분(封墳) 앞에만 세워져 있다.
그리고 묘역 뒷쪽에는 소나무들이 운치를 자아내고 있어 묘역의 분위기를 크게 북돋는다.


▲  묘역 좌측의 문인석과 무인석

▲  묘역 우측의 문인석과 무인석

묘역을 장엄하게 꾸미는 문인석과 무인석들은 다른 사대부의 석인보다 큰 편으로 이극배의 오
랜 명성을 가늠케 한다. 조선 초기 석인(石人)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이들은 문인석과 무
인석으로 구별은 되고 있지만 둘 다 복장이나 자세가 비슷하여 문인석 2쌍을 배열한 것 같다.
묘역과 가까운 석인은 500년의 장대한 세월에 지쳤는지 표정이 어둡고, 그 옆에 석인은 눈이
크게 충혈되어 재밌는 표정을 보인다. 세월의 검은 때가 점점이 입혀진 것을 빼면 대체로 피
부는 햐얗다.


▲  석인들의 뒷모습

▲  묘역 동쪽에 자리한 후손들의 묘역 (이수겸, 이세충, 이시무 등)

광릉부원군파 묘역 동쪽을 이루고 있는 이극배 후손들의 무덤은 9기 정도 된다. 가장 앞에 선
무덤은 이극배의 아들인 이수겸(李守謙)과 청주한씨 내외의 묘역으로 그는 공조좌랑(工曹佐郞
)을 지냈으나 공적이 즐비한 아비와 달리 딱히 두드러지는 인물은 아니다.

▲  이수겸 묘역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

▲  이세충 묘의 문인석

이수겸과 이세충 형제의 무덤 문인석은 이극배 묘역의 장대한 문인석과 달리 덩치가 매우 작
다. 문인석의 표정은 다소 우울해 보이는데 이수겸 묘 문인석은 관모(官帽)의 윗부분이 부러
졌다.


▲  이수겸 묘역 뒷쪽에 자리한 이세충(李世忠)의 묘
이세충은 이극배의 아들로 크게 벼슬은 못했으며, 나중에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었다.

▲  이시무(李時茂)와 이정립(李廷立) 묘역

이시무(?~1593)는 이극배의 현손으로 이건(李乾)의 아들이다. 자는 군우(君遇)로 1576년 별시
(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벼슬은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으며, 1593년에 병사했
다.

이정립(1556~1595)은 이시무의 아들이자 이수겸의 증손으로 어머니는 왕족인 의원정(義原正)
이억(李億)의 딸이다. 자는 자정(子政), 호는 계은(溪隱)으로 1576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8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1582년 이이의 추천을 받아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경연(經筵)에서 통감강목
(通鑑綱目)을 강의해 속칭 3학사의 하나로 칭송을 받았으며, 바로 그해 사관(史官)이 되고 예
조좌랑과 정언(正言)을 지냈다. 1583년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휴가를 받아 독서에 전념했
다.
이조좌랑 시절에는 호남어사(湖南御使)가 되어 백성을 구휼했고, 1589년에는 기축옥사(己丑獄
事)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어 선조(宣祖) 임금을 호종하다가 황해도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종묘사직(宗廟社稷
)의 위판(位版, 위패) 등이 개성(開城)에 남아있음을 알고 서둘러 선조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선조는 크게 발작하여 빨리 그것을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다.
이정립은 서둘러 개성으로 달려갔으나, 피난민들은 이미 왜군이 개성을 접수했으니 가봐야 소
용없다고 말렸다. 허나 이를 듣지 않고 개성으로 홀연단신으로 들어가 위판을 찾아 평양으로
가져오는 기염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1593년 부친 이시무가 죽자 부친상을 이유로 관직을 잠시 떠났고, 1594년 한성부좌윤(漢城府
佐尹)과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여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다. 1595년 세상을 뜨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산12-4외


▲  광릉부원군파 묘역 사이를 지나는 고덕산 산길
이극배묘역 남쪽에 광릉약수터가 있어 지나는 길손의 목을 축여준다.


 

♠  고덕산 마무리

▲  고덕산 서쪽 봉우리 밑 (계단 너머가 봉우리)

광릉부원군파묘역에서 산길을 마저 오르면 'T'자형으로 갈리는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계단길을 오르면 고덕산 서쪽 봉우리(86.3m)인데, 운동시설이 여럿 있어 이곳까지 올라온 나
그네를 심심치 않게 해준다. 허나 더 이상 길이 없는 막다른 곳으로 북쪽은 한강과 강변도로
가 바로 밑에 보이는 천길낭떠러지이다.


▲  태극기가 펄럭이는 고덕산 서쪽 봉우리(86.3m)

▲  고덕산 서쪽 봉우리에서 바라본 천하 (명당의 욕심은 이곳까지..?)

고덕산에서 그나마 하늘과 가까운 곳이긴 하지만 나무의 방해로 겨우 북쪽만 속시원히 바라보
인다. 차량들의 질주 소리로 정신이 없는 올림픽대로가 바로 밑에 보이며, 한강과 암사대교,
강일동 지역. 구리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고덕산 능선길

고덕산은 광주이씨와 양천허씨 등의 문중 묘역과 사유지가 많다. 게다가 군사구역도 섞여 있
다보니 본의 아니게 속인들의 발길을 주저하게 하는 철조망이 많다. 광릉부원군파 묘역에서
서쪽 봉우리로 오르는 길도 대부분 사유지라 길의 통행을 두고 한때 말썽이 있었으나 광주이
씨 문중은 이극배의 후손답게 광릉부원군파 묘역을 흔쾌히 개방하고 묘역 사이를 가로지르는
산길까지 열어두어 고덕산이 지역 사람들의 포근한 뒷동산이 되도록 배려했다.


▲  가재울에서 한강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만난 전원 풍경

고덕산 서쪽 봉우리에서 능선길을 따라 동쪽으로 15분 정도 가면 높이가 좀 낮아지면서 4거리
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능선길을 따라 고덕산 동쪽과 고덕천으로 이어지며, 오른쪽(남쪽
)은 가재울마을과 고덕동 시내로 나가는 길이다.
그리고 왼쪽은 올림픽대로로 이어지는데, 그 길로 접어들어 1굽이를 넘으니 온갖 채소들이 무
럭무럭 자라고 있는 밭두렁이 진하게 전원풍경을 드러내어 안구를 놀라게 한다. 밭두렁 한쪽
에는 농가도 하나 있는데, 그 주변에 농민 2~3명이 한참 밭을 메고 있었다.

그 밭두렁을 지나 작은 1굽이를 추가로 넘으면 바로 올림픽대로이다. 도로 너머로 한강과 산
책로가 보이나 그곳으로 인도해주는 지하도나 구름다리는 없다. 그러니 뚜벅이로 왔다면 미련
없이 왔던 길로 다시 돌아나가야 되며, 한강이 보고 싶다고 1분에 수백 대씩 지나가는 올림픽
도로를 무단횡단하는 것은 완전 미친 짓이다.

발길을 돌려 나오다가 길 서쪽에 양천허씨묘역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를 손짓한다. 안내문 옆
에 나있는 작은 산길로 들어가면 묘역이 있다고 하는데, 오래된 묘역이긴 하지만 비지정문화
재라 그냥 지나칠까 했으나 고덕산이 준 보너스라 여기고 그 산길을 잡았다. 산길을 50m 정도
들어서니 양천허씨묘역이 나타난다.


▲  양천허씨(陽川許氏)묘역

고덕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양천허씨 묘역은 상우당 허종(尙友堂 許琮, 1434~1494)의 손자인
허순(許淳) 3대의 묘역이다. 묘역이 제법 명당(明堂)자리인 듯 싶은데, 한강이 흐르는 북쪽을
애타게 향하고 있으나 나무들은 그들의 뜻도 모른 채, 앞은 물론이고 묘역 주변을 꽁꽁 둘러
싸 숲 너머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양천허씨는 후삼국시대에 서울 가양동(加陽洞) 지역에 터를 잡고 살던 허선문
(許宣文)을 시조
로 한 집안으로 고려 태조(太祖)를 적극 도운 공으로 고을 이름인 양천<그 당시는 공암(孔巖)
>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이 집안에서는 허종을 비롯하여 허균(許筠), 허준(許浚) 등 삼척동
자도 알만한 유명 인물이 많이 나왔다.


▲  묘역 제일 밑에 자리한 허운(許雲)과 영천이씨 부인의 합장묘(合葬墓)

허순의 아들인 허운의 묘가 묘역 제일 말단에 자리해 있다. 허운은 결성현감(結城縣監, 충남
홍성군 결성면)을 지낸 평범한 인물로 부인 영천이씨와 같이 묻혀 있는데, 무덤 밑에는 근래
에 만든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고, 16세기에 조성된 고색의 기운이 넘치는 묘비와 문인석이
묘역을 지킨다.

▲  표정이 밝아보이는 좌측 문인석

▲  우측 문인석


▲  장대한 세월에 의해 검게 타버린 허운 묘비(묘표)

▲  허순의 정부인이자 전처인 한산이씨의 묘
허순 묘와 허운 묘 사이에 자리한 무덤으로 묘비는 봉분 정면이 아닌 정면에서
다소 우측에 치우쳐져 있다. 부인묘라 그런지 묘비와 상석 외에
다른 석물은 없다. (호석은 근래에 두룬 것임)

▲  허순의 무덤 (제일 앞쪽, 바로 뒤에 무덤이 청송심씨 묘)

허순(許淳, 1485~1546)은 허종의 손자이자 허광(許曠, 1468~1534)의 아들이다. 그의 무덤 뒷
쪽에는 후처인 청송심씨의 무덤을 두었고, 앞에는 전처인 한산이씨의 무덤을 만들어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

양천허씨 제양군공파의 시조인 허순은 정주목사(定州牧使)를 비롯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
事)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부총관(副摠管)을 지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와 제양군(
齊陽君)에 봉해졌다. 묘역의 주인답게 묘역 중앙에 자리해 있으며, 검은 피부의 묘비와 문인
석이 오랜 세월을 말해준다.

▲  약간 인상을 지은 듯한 우측 문인석

▲  우측 문인석과 많이 닮아 보이는
좌측 문인석


▲  묘역 윗쪽에 자리한 허흔(許昕)과 부인 영월엄씨의 묘

허흔(1543~1622)의 묘는 허순 묘역에서 제일 윗쪽에 자리해 있다. 그는 허순의 손자이자 허운
의 아들로 어머니는 이구정(李龜楨)의 딸이다.

1579년 생원(生員)이 되고 1583년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감찰과 형조좌랑, 성균
관직강(成均館直講),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지냈다. 경상도도사(都使) 시절에는 의령
현감(宜寧縣監)인 정인홍(鄭仁弘)이 영송(迎送)에 무례하게 구므로 그 아전을 벌주니 백성들
의 칭송이 대단했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정여립(鄭汝立) 일당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감옥에 갇혔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으며, 임진왜란 때는 평안도도사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절도사(節度使)
가 되어 왕실의 신주(神主)를 지켰다. 이후 정주목사가 되었고, 1615년 죽주부사(竹州府使,
안성 죽산)를 제수받았으나 나이가 칠순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 바로 넘어갔다.

광해군(光海君)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조정의 여론을 휩쓸자 크게 상심하여 벼슬을
버렸으며, 1622년 7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공신에 녹훈되었다가
인조반정 때 공신 명단에서 떨려나기도 했다.

▲  허흔묘 상석 좌우에 자리한 조그만 동자석(童子石)
다른 무덤과 달리 문인석 대신 작은 동자석 1쌍을 두었다. 고된
세월에 많이도 지쳤는지 그들 표정에 주름이 묻어난다.

▲  허종과 허광 숭모비(崇慕碑)

묘역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는 허종과 허광(許曠)의 숭모비가 자손들의 무덤을 바라보
고 있다.
허종과 허광의 묘는 휴전선 북쪽인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대강면 우근리에 있는데, 남한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성묘길이 막혀 가지를 못하자 상의 끝에 그들의 자손이 묻힌 이곳에 2005
년 숭모비를 세웠다. 남북분단의 비극이 빚어낸 안타까운 현실로 이곳은 양천허씨 제양군공파
를 비롯한 허종의 후손들이 애지중지하는 그들의 조촐한 성지가 되었다.

숭모비 정면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 1쌍을 두었는데, 우측 것은 두툼하게 생긴 세호로 보이
는 동물이 새겨져 있고, 좌측 것은 기둥을 휘감은 용을 새겨 선조에 대한 자긍심과 정성을 보
였다. 허나 너무 이질적인 모습이라 쉽사리 적응이 가려 하질 않는다.

허순 3대의 묘역은 호석과 비석을 새로 한 것 외에는 16~17세기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
고 있어 광릉부원군 묘역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 마땅히 지방문화재로 삼아
보호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겨 지는데, 문제는 서울에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는 사대부(士
大夫)와 왕족의 묘역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경쟁이 생겨 어지간해서는 지정
문화재의 명함도 못내밀 정도이다. 게다가 문화재 지정을 환영하지 않는 후손들도 많다고 한
다. (묘역 소유자나 후손 문중, 지역에서 문화재 지정을 신청해야 됨)

* 양천허씨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 산93-2


▲  가재울 마을

양천허씨묘역을 둘러보고 고덕산 등산로와 만나는 고개를 지나면 전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가재울 마을이 나타난다.
가재울(가재골)은 가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가재는 커녕 그들이 머물 시냇물도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비록 푸른 숲과 밭두렁, 농장 등이 펼쳐져 있어도 시냇물은 고덕지구
개발로 말라버려 그것만은 제대로 재현을 못하고 있다.

가재울을 지나 고덕동 시내로 나와 이른 더위에 지친 몸을 달래고자 편의점에서 커피 음료를
사서 원샷으로 들이키니 그나마 좀 몸이 시원해진다. 마음 같아서는 고덕산에 둘러진 서울둘
레길을 따라 더 걷고 싶으나 이미 18시가 넘은 상태라 욕심을 곱게 버리고 나의 제자리로 돌
아갔다.

이렇게 하여 5월에 벌린 강동구 암사동/고덕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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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도 걸음을 멈춘 아름다운 박물관, 성북동 간송미술관

 


' 늦가을도 걸음을 멈춘 우리나라 박물관의 성지,
성북동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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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송미술관 보화각


늦가을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10월 중순이 되면 나의 이목을 강하게 붙잡는 곳이 하나 있다.
그곳이 어디냐? 바로 성북동(城北洞)에 자리한 간송미술관이다. 우리나라 박물관의 오랜 성지
이자 늦가을이 유난히도 아름다운 명소로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닌 1년에 딱 2번,
5월과 10월 중/하순에만 문을 연다. 그외에는 들어가지 못하며, 아무리 열려라 참깨를 외치고
참깨를 집어던져도 안으로 절대 들여보내지 않는다.
 
문이 활짝 열리면 간송미술관은 다양한 테마로 무료 특별전을 여는데, 그 특별전에 대한 문화
인들의 관심은 지독하기 그지 없어 중독성이 매우 강하다. 그 중독에 빠지면 간송미술관 사립
문이 열리는 날만 애타게 기다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보통 10월 초면 신
문을 통해 특별전 소식이 곳곳에 알려지며, 10월 중순이 되면 빗장이 스르륵 열리면서 방방곳
곳에서 문화인들이 몰려와 박물관의 성지를 순례하며 옛것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한다.

본인 역시 간송미술관 특별전을 기다리는 1인으로 올 봄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들어가지 못
했다. 어쨌든 가을 특별전 소식을 접하고 토요일에 후배 여인네와 그곳을 찾았는데, 이번에도
퇴짜맞는거 아닌가 걱정이 들었으나 다행히 운이 따라주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여 정
말 느긋하게 미술관을 관람했다.

간송미술관은 나무가 무성하여 산골에 묻힌 별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속세와 공기부터가 확연
히 틀려 서울 도심에 있음을 무색하게 하며, 청정한 공기는 속세(俗世)에 오염된 마음과 돌처
럼 굳어버린 머리를 정화시켜 아무리 어려운 그림 이름도 쏙쏙 머리에 들어올 것만 같다.

본글에서는 특별전 그림에 대한 언급은 뺀다. 대신 간송미술관의 내력과 간송 전형필의 생애,
뜨락에 있는 여러 석조 문화유산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간송미술관 정문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정문의 동쪽 기둥에는 '澗松美術館'이라 쓰인 명패가 있고
서쪽 기둥에는 간송미술관 스타일로 특별전 제목이 쓰인 하얀 종이가 붙여져 있다.



★☆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선생의 생애 ☆★

어둠의 시절,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후학을 양성하고자 자신을 헌신한 진정한 대인(大人)의
정석, 간송 전형필, 그는 1906년 부자집안인 정선 전씨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와 휘문고보(현 휘문중고)를 거쳐 왜국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남들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대신 가족들은 대부분 명줄이 짧아 20대에 친가족 대
부분
-조부모, 친부모, 양부모<養父母, 송의 종숙부(從叔父)인 전명기(全命基)가 후사가 없어
그의 양자로 들어감>, 친형제-
을 잃었다. 심지어는 보통학교와 대학 졸업 때 그의 양부(종숙부
) 상과 부친상을 나란히 당해 상복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었을 정도다. 이렇게 가족을 죄다 여의
면서 그 집안의 자손은 간송 하나만 남게 되었고, 자연히 일가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 받아 10만
석을 일컫는 조선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


와세다대학교 재학 중, 왜인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속국(屬國) 백성의 한을 한을 뼈저리게 느끼
자 '나는 무엇을 해야 되나?' 번민에 빠졌다. 허나 그 답을 구하지 못해 주변 선배와 스승에게
자문을 구했고, 휘문고보 시절 그의 미술 선생이던 고희동(高羲東)이 이 땅의 문화유산을 지킬
것을 권하면서 그의 권유에 감동해 대책 없이 방치된 이 땅의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희동은 그런 제자를 기특히 여겨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을 소개시켜 주었다. 간송은 그를
스승으로 받들며 서화와 도기/자기, 불교 문화유산 등 골동품 식견을 쌓아갔으며, 위창은 골동
품 거간(居間)인 이순황(李淳璜)을 소개하여 그를 돕게 했다. 그리고 1930년, 24살에 이른 간송
은 이순황과 함께 본격적으로 문화유산 수호 사업에 뛰어든다.

간송은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이순황에게 맡기고, 그곳을 교두보로 수많은 문화유산을
수집했다.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의 고서적, 고려청자 등의 자기류, 혜원풍속도(蕙園風俗圖) 등
의 서화(書畵), 금동여래입상, 금동삼존불감 등의 불상을 있는데로 사들이고, 1934년 북단장과
함께 1만평 규모의 넓은 뜨락을 조성하면서 석탑과 석불 등을 아낌없이 수집했다.
또한 왜인을 상대로 고미술품을 팔아먹던 인사동(仁寺洞)을 수시로 찾아가 많은 것을 구입했으
며, 왜인들이 군침을 흘리던 문화유산은 미리 선수를 치거나 웃돈을 두둑히 얹혀 사들이니 자연
히 골동품상이 그에게 몰려들어 거래를 했다.
그리고 왜국 동경(東京)에 있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갓스비(John Gadsby)가 자기 나라로 귀국하면
서 소유하던 고려청자를 처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직접 만나 고려청자를 죄다 사들이기도
했으며, 총독부 고위층이 소유한 문화유산을 사들이고자 온고당(溫古堂) 주인인 왜인 골동상 신
보기조(新保喜三)의 도움을 받았다.

그 당시 간송과 그를 돕던 이들의 문화유산 수집 에피소드는 정말로 많았는데, 그중에서 겸재(
謙齋) 정선(鄭敾)의 화첩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왜정 때 이순황과 거래하던 골동상 가운데 장형수(張亨修)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방을 돌며
서화를 구입해 수집가들에게 팔았는데, 1933년경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추계리를 지나다가 친일
파로 악명이 높은 송병준(宋秉畯)의 고래등 기와집을 구경했다. 마침 양지면장이자 중앙자동차
주식회사를 운영하던 송병준의 손자 송재구(宋在龜, 이하 집주인)가 말을 타고 귀가하다가 누구
를 찾냐고 물었다.
그래서 '유명한 댁이라고 해서 지나다가 구경 좀 하고 있소!' 답을 하니, 악질 친일파의 손자라
발작을 하며 쫓아낼줄 알았더만 뜻밖에도 친절을 보이며 안으로 들어가자고 그런다. 사랑방에
자리를 잡자 직업을 묻길래 골동품을 수집한다고 하니, 집주인이 흥미를 보이며 오원 장승업(吾
園 張承業)의 산수화 병풍을 비롯해 고려청자 향합(香盒), 불상 등을 보여줬고, 서로 말이 잘
통해 늦게까지 대화를 하다가 푹 자고 가라고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잠을 자다가 늦은 밤, 소변이 급해 사랑방 한쪽에 붙은 변소를 가는데 마침 그 집 머슴이 군불
을 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서 뭉치를 마구 아궁이에 쑤셔넣고 있길래 문득 직업 본능이 발동하
여 확인해보니 땔감 가운데 초록색 비단으로 꾸민 책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그 책을 보니 글쎄
42폭으로 이루어진 겸재 정선의 42화첩(畵帖)이 아닌가? 그 안에 그 유명한 금강산도(金剛山圖)
가 들어있었다. 좀만 늦었으면 그 그림은 영영 되살릴 수 없는 전설이 되었겠지. 그렇게 정선의
화첩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니 장형수의 때를 잘타는 생리 현상에 우리들은 정말 감사해야 될
것이다.

그 화첩을 서둘러 들고 집주인에게 보이며, 방금 전의 일을 말하자 '그런 일이 있었소!~ 그런건
우리집에 흔하오'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불에 타 없어질 뻔했던 것이니 나에게 파시오' 제안
을 하니 집주인이 흔쾌히 응하자 얼마면 되겠냐고 물으니 '생각해서 낼 만큼만 내시오' 그런다.
그래서 20원을 주고 서울로 가져와 이순황에게 팔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순황은 그 그림을 간송에게 보냈고, 장형수는 간송의 인품에 반해 그의 협력자가 되었다.

간송은 문화유산 수집에만 멈추지 않고 왜정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
키고 가꿀 인재를 기르고자 1940년 적자에 허덕이던 보성중학교를 인수했고, 동성학원을 설립하
여 교육 분야에도 아낌없이 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 당시 보성중교를 운영하던 고계학원은 학
교 매입금 16만 5천원 외에 학교의 부채와 학교가 소유한 물건까지 값을 매겨 무리한 가격을 요
구했는데, 간송은 쓴소리 하나 없이 장우식, 윤용섭을 통해 대금을 모두 지불했다. 또한 동성학
원 재단설립에 무려 60만원을 들였는데, 이를 위해 황해도 연백군(延白郡)에 있던 3,000석 지기
땅을 처분했다.

1945년 8월 이후 11개월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지냈는데, 이것이 간송의 유일한 공직생활이었
다. 또한 1950년 이후 고적보존위원회,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했으며 1960년에는 고고
미술동인회를 세워 문화유산 연구와 서적 편찬에 동분서주하였다. 이렇게 평생에 걸쳐 자신의
재산을 내던지며 문화유산과 교육 발전에 헌신했으나 위인(偉人)은 고난 속에 일찍 죽고 간신배
는 배때기에 기름칠하며 아주 지독하게 오래 사는 이 땅의 더러운 법칙에 따라 야속하리만큼 커
다란 시련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1950년 2월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시행하면서 소작농에게 농지를 분배하고 지가증권(地價證券)을
발행하여 땅주인에게 땅값을 치러주기로 하였다. 허나 6.25전쟁으로 지가증권이 모조리 휴지조
각이 되면서 앉아서 농지를 잃어버린 꼴이 되었으며, 전쟁통에 많은 문화유산과 유동자산을 잃
었다.
거기에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북단장 뜨락마저 무심한 총탄과 폭탄으로 파괴되고 만다. 그런 상
황에 전쟁에서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다시 사들이면서 재정 압박은 갈수록 커져만 갔으며, 1959
년 보성중고교 교장 서원출의 방만 경영으로 엄청난 부채가 쌓이자 이를 해결하고자 동분서주하
던 중 그만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신우염(腎盂炎)으
로 1962년 1월 26일, 56세의 한참인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그가 그렇게 세상을 뜬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는 문화포장(文化褒章)과 문화훈장(文化勳章)을
추서(追敍)했으며, 고고미술 동인회 회원과 간송의 아들, 제자, 벗들이 그의 수집품을 정리하여
그의 호를 딴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을 열었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늘상 생각하는 거지만 그가 없었다면 미술관 수장고와 전시실에 있는 문화유
산 대부분은 일찌감치 해외로 빼돌려지거나 행방불명이 되었을 것이다. 1446년에 반포된 한글의
해설서인 훈민정음(訓民正音)도 예외는 아니었겠지. 다행히 하늘의 뜻이 있었는지 그의 품으로
들어갔으며, 그 덕분에 우리는 편안하게 훈민정음을 구경하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가 큰 부자였으니 무량(無量)의 문화유산 수집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수집한 것을 비싸게 팔거나 중개상 노릇을 한 것도 아니며 어떠한 이익 행위도 취하지 않았다.
이 땅의 문화유산을 수집하여 지키고, 그것을 연구하고 가꿀 후학을 양성하고자 거액의 재산을
내던진 것이다. 허나 무리한 지출이 매년 이어지다보니 적지않은 재산을 처분했고 결국 미술관
주변(그래도 꽤나 넒음, 마음 놓고 구경할 수 있는 미술관 보화각 주변은 그 일부에 불과함)
서울 방학동(放鶴洞) 가옥, 그리고 일부 토지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이윤을 포기한 그의 문화사업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의 큰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의 업적과 문화, 사회적 공헌의 가치는 정말로 값지다 할 것이다.

현재 미술관의 문화유산은 국가 소유가 아닌 간송 일가의 소유이다. 돈과 땅처럼 마음대로 행사
할 수 있는 재산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유동자산 대부분을 문화유산으로
바꾼 것이다. 그의 수집품은 국보나 보물, 지방문화재로 수두룩하게 지정되었고, 특별전 때 소
장 문화유산을 공개하면서 그들의 가치는 연일 하늘을 치고 있다. 왜정 때 1만원을 주고 산 그
림이 지금은 수천~수억을 호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바꿔 말하면 간송의 재산은 줄어든 것
이 아니라 숫자가 모자를 정도로 크게 증가된 셈이다. (간송미술관의 소유 문화유산이 어느 정
도 되는지 아직 구체적인 보고서도 없음)
허나 간송이 그것을 노리고 문화유산 수집에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어둠의 시절을 겪으면서
무방비로 방치된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생각만 했었지 수익을 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문화유산 수호와 민족 교육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자손들도 부유층 수준으
로 넉넉히 살고 있으니 궁색해지지 않는 이상은 문화유산을 팔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배때기를 채우고자 서민들을 쥐어짜고 나라를 팔아먹고 갖은 간계를 부리는 이 땅의
졸부와 권력층과 달리 간송은 그 돈을 정말 어디에 써야 되는지, 어떻게 써야 가치가 높은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몸소 실현한 선각자이다. 적어도 사회 지도층(부유층)이라면 간송의 그런
예를 본받고 행동에 옮겨야 진정 지도층이 아닐까? 지금 이 땅에 간송 같은 위인이 없는 것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  간송미술관 보화각 2층

★ 간송미술관의 역사
간송 선생은 자신이 사들인 문화유산의 효율적인 보관과 연구를 위한 터전을 짓고자 서울 장안
에서 적당한 터를 물색했다.
1930년대까지 간송미술관 자리에는 구한말에 조선에 들어와 비료장사로 부자가 된 프랑스 사람
브레상이 별장을 짓고 팔자좋게 살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라로 귀국하고자 별장을 비롯한 인근
숲 1만평을 내놓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간송이 그 땅을 둘러보니 명당(明堂)의 기운이 넘치는
좋은 터였다.
그래서 그 일대를 모두 사들이고 1934년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북단장(北壇莊)을 세웠다. 북단장
이란 이름은 옛 선잠단(先蠶壇) 부근에 있다는 뜻으로 오세창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왜정의 민족말살정책이 갈수록 요란해지자 간송은 근대식 박물관을 짓기로 작정하고 1938년 북
단장 옆에 2층 규모의 보화각을 세웠다. 당시 왜정은 전시체제를 이유로 물자통제를 하고 있었
는데, 그것을 비웃듯 이탈리아에서 대리석을 수입해 계단을 깔고, 진열실 바닥은 쪽나무 판자로
마루를 깔았으며, 오사까에서 화류진열장을 들여왔다. 또한 오세창과 박종화(朴鍾和, 간송의 외
종 사촌형) 등 서화계의 원로와 지식인들을 수시로 초빙해 자문을 구했다.
드디어 1938년 7월 5일 보화각 상량식(上樑式)을 가졌는데, 당시 75세였던 오세창은 너무 감격
스러워 다음의 정초명(定礎銘)을 새겼다.
'때는 무인년 윤 7월 5일 간송 전군의 보화각 상량식이 끝났다. 내가 북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이에 명(銘)을 지어 축하한다. 우뚝 솟아 화려하니, 북곽(北郭, 한양도성)을 굽어본다. 만
품(萬品)이 뒤섞여 새집을 채웠구나, 서화 심히 아름답고, 고동(古董)은 자랑할만, 일가에 모인
것이 천추의 정화로다. 근역(槿域, 우리나라)의 남은 주교(舟橋)로 고구(攷究) 검토할 수 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많은 이의 기대 속에 보화각이 탄생했지만 정작 왜정의 태클로 속세에 공개되지도 못했다. 그러
다가 어느 날,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 부임기간 1936~1942년)가 보화각을 구경하고 싶다
고 연락을 했다. 총독비서인 스즈끼의 청을 받은 김승현 박사가 간송에게 이를 전하니 간송은
마지못해 허락을 했다.
허나 막상 미나미가 보화각에 도착했을 때는 마중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미나미의 표정은
잔뜩 울상이 되었고, 당황한 김승현은 급히 간송에게 달려가 총독이 왔음을 알리니 그제서야 자
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세수를 하고 의관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30분을 기다리게 하고서야 총독을 맞이한 간송은 보화각을 구경시켜주고 응접실에서 홍
차 1잔을 대접해 보냈다고 한다. 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반도와 만주를 쥐어짠 조선총독이 간송
에게는 그야말로 하찮은 대접을 받고서도 그저 기다릴 대로 기다리고 보여주는 대로 보고 조용
히 돌아간 것이다.

해방 이후로도 어수선한 시대가 계속되어 개방을 하지 못하다가 1950년 6.25가 터졌다. 불과 3
일만에 북한군이 서울을 접수하면서 북단장과 보화각 정원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고 보화각이
품은 막대한 문화유산은 북한에 의해 북송(北送)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북한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던 최순우(崔淳雨)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에게 보화각 문화유산
을 죄다 포장해서 지정된 곳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그들은 문화유산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감
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奇)씨에게 왜국 판화로 된 춘화(春畵)를 보여주어 흥분시키게 하고 보
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곯아 떨어지게 만들었다. 또한 그
들이 무식한 것을 이용하여 문화유산 선별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서 이건 아니라고 다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며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서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오시오. 목수가 없소' 등으로 자꾸 태클을 걸었고 손
재형은 일부러 다리에 붕대를 매 뒤뚱뒤뚱 아픈 시늉까지 하면서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포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기가 막힌 지연작전으로 간송미술관의 유물은 모두 북송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북한이 책임자를 보내 추궁하려는 찰라 우리군과 유엔
군이 때마침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화를 면하게 되었다.
허나 1951년 1.4후퇴로 간송이 급히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유물 대부분을 챙기지 못해 상당수는
분실되고 말았다. (분실된 것 중 상당수는 전쟁 이후 다시 사들임)
6.25이후로도 그의 생전에는 공개되지 못했으며, 그가 별세한 후, 그의 아들 전성우가 부친의
유업을 이어받아 유물을 정리하여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을 세우면서 비로소
천하에 공개되었다.

1971년 '겸재(謙齋)전'을 시작으로 매년 봄, 가을에 특별전을 열고 있으며, 그 특별전에 한해
달랑 30일만 공개하여 상당한 아쉬움을 건넨다. 또한 관람객은 폭증하고 있는데, 전시 공간은
여전히 보화각 1동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관람객을 위한 편의시설도 많이 부족하고 미술관 홈페
이지도 아직 갖추지 않아 편함을 가중시킨다. 게다가 관람객이 폭풍처럼 밀려오는 경우에는 2~3
시간 심지어는 4~5시간 이상 줄을 서야 되는 등, 관람객을 위한 배려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부디 입장료를 받아도 상관없으니 미술관의 오랜 명성과 간송의 뜻에 걸맞게 이제라도 전시공간
을 확충하고 관람객 편의 제공과 개선에 많은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 큰 아쉬움은 보화각 주변을 빼고는 관람객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 (통제의 정
도는 나날이 심해지고 있음) 통제 사유는 이 일대가 전씨 일가의 소유로 그 일가의 집이 보화각
을 중심으로 북쪽과 동쪽에 넓게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곳곳에 배치된 상당수의 석조
문화유산과 숨겨진 아름다운 공간을 눈에 넣지 못해 무척이나 섭섭하다. 집 뜨락까진 아니더라
도 일단은 보화각과 가깝고 사생활 침해가 미미한 호랑이상과 괴산 외사리 승탑(僧塔, 보물 579
)까지는 적어도 쿨하게 공개를 해주면 좋겠다. 아니면 2012년 11월에 개방된 부암동 석파정(
石坡亭)처럼 입장료(좀 비싸도 상관은 없음)를 받아도 좋으니 공개 범위를 더욱 넓혀주었으면
좋겠다.

간송미술관은 훈민정음과 동국정운, 청자기린형뚜껑향로,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금동3존불감, 혜
원풍속도 화첩 등 국보 13점과 백자박산형뚜껑향로, 금보(琴譜), 금동여래입상, 문경5층석탑 등
보물 10점, 3층석탑과 석조팔각승탑 등 서울지방문화재 4점을 간직하고 있다.

※ 간송미술관 찾아가기 (2013년 10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03번 마을버스를 타
  고 성북초교 하차, 버스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100m가면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5분 정도 가볍게 걸어가는 것도 괜찮다.
* 미술관 내에 주차시설은 없으며 전시기간 중에는 바로 앞에 있는 성북초교 운동장을 임시로
  개방한다. 하지만 가급적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간송미술관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10시~18시이다. (인원이 많은 경우 관람시간 약간 연장 가능)
* 특별전 기간에는 전시하는 그림과 문화유산를 다룬 도록을 판매한다. 가격은 2만원선, 내용이
  좀 어려운 경향은 있으나, 그런데로 볼만하며 소장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97-1
(☎ 02-762-0442)


♠  간송미술관의 문턱을 들어서다

▲  금지된 곳에 아련히 보이는 호랑이상 (사진 중앙에 있음)

미술관 정문을 들어서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야 미술관의 본관인 보화각에
이르는데, 왼쪽 대신 매서운 기세로 출입금지라 쓰여진 정면의 길을 보면 수풀 너머로 귀여움이
묻어난 석상 2기가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들이 바로 이 땅에 흔치 않은 호랑이상이다. 예전에
는 눈치를 살살보며 저들까지 올라가곤 했는데, 열정이 많이 식었는지 이제는 그것도 귀찮다.


▲  호랑이상의 위엄

요즘은 카메라나 스마트폰이 워낙 잘되어있어서 최대한 줌을 땡기면 그들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래도 직접 앞에까지 가서 보는 게 더 좋음)
그들은 무섭고 소름이 돋는 호랑이보다는 밝은 표정에 앙증맞고 귀여운 고양이 같다. 그들은 간
송 선생의 구원으로 이곳에 들어왔는데, 고향과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다.

호랑이상에서 길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가면 숲속에 가려진 주택이 하나 있다. 간송 일가가 머무
는 집의 하나로 여겨지는데, 좀처럼 접근을 못하게 하니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괜히 몰래 접근
하다가 잠복근무중인 멍멍이에게 호되게 쫓기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하기 바라며, 적어도 호랑이
상까지는 접근을 허가해도 괜찮을 듯 싶은데,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바라보듯 해야 되니
속이 참 쓰릴 정도이다.

▲  무인석(武人石)들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을 지켰을 그들은 간송 선생에 이끌려 지금은 미술관을 지킨다.
칼을 짚고 서 있는 눈맵시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  날렵한 몸매의 3층석탑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塔身)과 노반, 상륜(相輪)을
갖춘 탑으로 그 역시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 탑으로 여겨진다.

▲  애꾸눈 석불좌상

간송 선생의 흉상 좌측 수풀 속에 애꾸눈 석불좌상이 숨어있다. 이 불상은 왼쪽 어깨는 옷으로
가리고 오른쪽 어깨는 훤히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을 취하고 있는데, 얼굴은 상당히 망가져
있으며, 오른쪽 눈은 파열되어 거의 애꾸눈처럼 되었다. 머리 부분도 3도 화상을 입었는지 매우
울퉁불퉁하여 무견정상(無見頂相 = 육계)과 머리 스타일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석불의 조성시기는 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로 여겨지나 자세한 신상정보는 모른다. 그 역시 간
송 선생의 구원으로 이곳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가 앉아있는 네모난 대좌(臺座)에는 불법(佛法)
을 지키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  애꾸눈 석불좌상 대좌에 새겨진 다문천왕(多聞天王)
사천왕의 하나로 북쪽을 수호하는 다문천왕이 3층보탑(寶塔)과 창을 들고 있다.
이 석불을 미술관에 올 때마다 꼭 사진에 담았지만 다문천왕은 이번에 처음 본다.
왜 이제서야 그를 보게 된 것일까...? 그의 얼굴이 몸의 2/3를 차지할 정도로
신체비례가 맞지 않는 것처럼 나의 눈도 그리 잘 맞지 않는 모양이다.


♠  보화각 주변 둘러보기

▲  간송미술관 보화각(葆華閣)

간송미술관이 뜨락은 참 넓지만 건물은 보화각 하나가 전부이다. (그 외에 집들은 간송 일가의
생활공간)
2층 규모의 보화각은 1938년 북단장 옆에 세운 것으로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대리석으로 계단을
깔고, 진열실 바닥은 쪽나무 판자로 마루를 깔았으며, 오사까에서 화류진열장을 들여 내부를 꾸
몄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가인 박길용(朴吉龍, 1898~1943)이 설계한 건물로 의미가 큰데,
이렇게 많은 돈과 정성을 들여 1938년 7월 5일 상량식을 가졌으며, 이때 오세창은 너무 감격하
여 '조선의 보배를 두는 집'이란 뜻에서 보화각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간송미술관 전시실로 쓰이고 있는데, 건물이 워낙 단단하여 크게 손을 보거나
수정을 가한 부분이 없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
관이자 간송의 정신과 체취가 서린 현장으로 요즘 흔한 등록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하여 그 예
우를 해줘야 될 듯 싶은데, 아직 그런 소식까지는 들리지 않는다. 2012년에 방학동에 있는 간송
의 가옥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마당에 말이다.

저 작은 건물에 지금까지 수십만 명이 발걸음을 했고 70년이 넘는 연세에도 끄떡이 없으니 20~
30년만 넘으면 비리비리해지는 오늘날 건물과 견주어 참 대단한 건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간
송의 정성과 혼이 아낌없이 담긴 탓일 것이다.

   ◀  미술관(보화각)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보화각으로 가려면 꽃과 나무, 화분으로 가득한
녹음의 오솔길을 지나야 된다. 이 조그만 오솔
길에는 벽돌이 박혀 있으며, 길 양쪽에는 화분
과 수풀이 가득해 분재(盆栽)시장이나 숲속 산
책로를 거니는 기분이다.
여기가 과연 미술관이 맞을까? 의문이 들 정도
로 말이다. 자연물 사이로 망향(望鄕)의 한을
달래는 온갖 석물이 서로를 보듬고 있고, 다른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볼
거리인 공작의 보금자리(사육장)까지 지니고 있
어 관람객의 눈길을 단단히 잡아맨다. 이는 다
른 미술관에서는 감히 상상 조차 거부하는 특이
하고도 살아있는 특별 전시물(?)로 문화와 자연
이 공존하는 간송미술관 만의 묘한 매력이라 하
겠다.


▲  간송미술관 만의 매력, 공작의 보금자리

▲  사람 구경에 한참 넋이 나간 하얀 공작의 위엄

▲  공작의 보금자리 옆에 놓인 녹아버린 2개의 석물
잘 다듬어진 석대(石臺, 무덤의 혼유석이나 석물로 여겨짐) 위에 타다 만
흔적처럼 일부만이 남은 돌덩어리가 초췌하게 놓여져 있다.

▲  항아리나 함처럼 생긴 조그만 석물

 ▲  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호

오솔길을 장식하고 있는 3층석탑은 바닥돌 위에 2중의 기단(基壇)을 얹히고 그 위에 3층의 탑신
을 세운 형태로 1층의 탑신이 2, 3층보다 크다. 지붕돌 받침이 3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고려 초
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탑 높이는 약 3m이다. 기단부의 상대갑석(上臺甲石)과 하대갑석(下
臺甲石)에 새겨진 연꽃무늬가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탑의 고향은 알지 못하며 탑에 관련된 어떠한 정보도 전해 오지를 않는다. 다만 왜인들이 빼
돌리려 한 것을 간송 선생의 구원을 받았으나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기억상실증에 걸
린 양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미술관 뜰의 장식물이 되었다.

◀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1호

3층석탑 옆에는 듬직하게 생긴 석불 1구가 높은
대좌 위에 앉아 있다. 두 손을 위아래로 잡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어 비로자나불
임을 알 수 있는데, 석불의 전체 높이는 약 3m
정도이다. 그의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로 머
리 꼭대기에는 상투 비슷하게 육계(肉髻 = 無見
頂相)가 솟아 있으며 얼굴은 살이 많아 인심이
후박한 뚱보 아지매 같다.
불상이 앉은 대좌(臺座)에는 연꽃(앙련)이 새겨
져 있고, 대좌 아래 기단(基壇)에는 결가부좌를
한 조그만 석불이 4면에 새겨져 있다, 이들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끝없는 명상에 나래를 누리
고 있는데 그 뒤로 두툼하게 생긴 동그란 두광(
頭光)과 신광(身光)이 눈에 띈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고려 중기로 여겨지며 자세한 정보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 역시 간송 선생
의 구원에 이끌려 이곳에 안착했으며, 평퍼짐한 엉덩이가 인상적인 그의 뒷모습도 풍만스럽다.


▲  대좌 기단에 새겨진 석불 - 선정인의 포즈로 웅크리고 앉아
명상의 나래를 펼친다.

  ▲  주인 잃은 광배(光背)의 비애

광배에 새겨진 꽃무늬들이 마치 살아 숨쉬는 것 같다. 저 광배에 등을 기댔을 석불은 어디로 간
것일까? 광배는 혹여 찾아올지도 모를 자신의 님을 기다리며 오늘도 화사한 무늬를 펼쳐 보인다.
내가 저 앞에 앉으면 나도 광배를 갖춘 부처나 보살이 되는 걸까? 다음에 오면 그 앞에 결가부
좌로 살짝 앉고 싶다. (그러다가 관람객들에게 싸대기 맞는건 아닌지..?)

◀  석조비로사나불 옆에 자리한 석등(石燈)
그 역시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다.


▲  오랜만에 문을 연 보화각 현관

▲  보화각 현관 좌측 석사자

▲  보화각 현관 우측 석사자

보화각 현관 주변에는 제법 무서운 티가 풍기는 3개의 석사자가 미술관을 지킨다. 현관 바로 옆
에 자리한 석사자는 크게 으르렁거리듯 입을 대문만큼 벌리며 관람객들에게 조용히 관람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현관 앞에는 석사자 2개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모습은 비슷하다.

현관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우측 사자는 오른쪽 발로 구슬을 축구공처럼 만지고 있고, 좌
측 사자는 특이하게 그의 새끼와 발을 맞대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발 밑에 새끼 사자가 누워
어미의 발과 맞장구 치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  늦가을도 걸음을 멈춘 보화각 남쪽 산책로

▲  금지된 땅 - 간송미술관 북쪽(서북쪽) 언덕

보화각 북쪽에는 녹음이 짙은 언덕길이 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사색하며 거닐고 싶은 그 언
덕길의 끝에는 간송 일가의 저택이 있으며, 길이 3갈래로 갈린 중턱에는 석조팔각승탑과 석인(
石人)이 있다. 예전에는 중턱까진 접근이 가능했으나 이번에 갔을 때는 바리케이트도 모자라 사
람까지 배치해 감시를 한다. 그래서 간송미술관에 갈 때마다 무조건 사진에 담는 석조팔각승탑(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호
)와 괴산 외사리 승탑(보물 579호)을 사진에 담지 못했다. 저렇게 길
을 막는데 내가 권력층이 아닌 이상 무슨 수로 들어가겠는가..?
금지된 구역에 들어가는 경우 관계자의 허가를 받아야 되나 그것도 쉽지가 않다. 눈치껏 살짝
들어가 사진에 담아도 되지만 통제가 심해지니 이러다가는 저 언덕길도 오르지 못하는 것은 아
닌지 모르겠다.

통제구역과 간송 저택 뜰에는 망향의 한을 간직한 석탑, 불상, 승탑, 문인석 등 다양한 석조문
화유산들이 베일에 가린 채 은둔해 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입장료를 받아도 좋으니 제발
속세에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괜찮은 것들만 추스려 보화각 주변에 끄집어내는 것도 괜
찮을 것이다.

이번에 못본 석조팔각승탑과 괴산 외사리 승탑. 문경5층석탑 등이 궁금하다면 이전에 쓴 간송미
술관 답사기를 쿨하게 참조하기 바란다. (☞ 관련글 보러가기)


▲  내년 봄을 그리며 간송미술관과 작별을 고하다.

이렇게 하여 간송미술관 가을 특별전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미술관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답
사객의 발길은 여전했다. 봄과 가을이 한참이나 머물렀다 가는 도심 속의 별천지 같은 곳, 미술
관을 알록달록 수놓은 늦가을 풍경은 내년 특별전에서도 변치않는 모습으로 문화에 목마른 사람
들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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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10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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