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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5.09 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2. 2019.08.14 기름진 논두렁과 밭두렁을 간직한 서울의 두메산골, 도봉산 무수골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무수골계곡)

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 우이암)'


▲  도봉산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원통사

▲  무수골 숲길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던 4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친한 여인네들과 서울의 영
원한 북쪽 지붕, 도봉산(道峯山)을 찾았다. 도봉산은 내가 살고 있는 도봉동(道峰洞)과
도봉구의 듬직한 뒷산으로 우리집에서도 훤히 보이는 천하의 명산(名山)이다.

둥근 해가 하늘 가운데에 걸린 13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
식집과 마트에서 김밥과 간식을 두둑히 사들고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이번 산행은
무수골에서 시작하여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 문사동계곡을 거쳐 도봉산 종점에서 마
무리를 지었는데, 소요시간은 4시간 정도이다.


▲  너른 암반이 많은 무수골 하류 무수천(無愁川)


 

♠  서울에 숨겨진 별천지이자 아름다운 산골 마을, 무수골

▲  무수골길 (무수골 주말농장 부근)

무수골을 겯드린 도봉산 나들이는 도봉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도봉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도봉역4거리인데, 여기서 도봉산이 바라보이는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바로 무수골로 인
도하는 무수천 둑방길(도봉로169길)이 나온다. 여기서는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과 무
수골에서 시작된 무수천이 만나며 이들은 도봉천으로 합쳐져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무수천 둑방길을 10분 정도 가면 도봉초등학교가 나온다. 여기까지는 단독주택과 빌라가 많은
서울에 흔한 주택가 풍경이나 여기서부터 속인(俗人)들의 집이 크게 줄어들면서 서서히 시골
풍경으로 그림이 바뀐다. 그런 풍경 뒤로 북한산(삼각산) 북쪽 봉우리와 도봉산의 지붕이 바
라보여 뒷배경도 아주 탄탄하며, 무수골 마을버스 종점(도봉08번)을 지나면 완전한 산골 분위
기로 풍경이 변한다.

무수천은 수심이 매우 얕은 하천으로 비가 많이 내릴 때만 잠깐 물이 불어날 뿐, 평소에는 물
이 적은 마른 하천<건천(乾川)>이다. 그러다보니 가뭄 때는 갈증을 너무 심하게 타서 툭하면
맨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2007년 이후, 무수골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벌이면서 무
수골 아랫쪽(도봉초교 주변) 주거 환경이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는데, 이때 무수천을 정비하
여 하천 양쪽에 중랑천과 이어지는 산책로를 내었다. (무수골 주말농장 동쪽까지 이어짐)


▲  세일교 주변 (오른쪽 길은 무수골 북부, 도봉옛길 방면)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포근히 묻힌 무수골은 도봉산에 널린 수많은 골짜기의 하나이다. 허나
그저 숲과 계곡, 바위만 있는 계곡이 아닌 밭두렁과 산골마을, 심지어 논두렁까지 지닌 산골
마을로 좁게는 도봉산과 도봉구, 넓게는 서울의 숨겨진 비경으로 꼽힌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백두산만큼 높은 서울 바닥에 그런 서울을 비웃는 뜻밖의 별천
지가 있다니? 무수골에 발을 들인 나그네는 그곳의 뜻밖에 풍경에 무한 감동을 먹으며 넋을
잃고 만다. 흔히 서울 하면 사람과 차량, 키다리 건물로 즐비한 번잡한 대도시로만 생각하기
일쑤이니 그 감동의 정도는 더욱 클 것이다. 솔직히 서울이라고 해서 꼭 시가지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수골이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산골로 남게 된 것은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에
포함되어 개발의 칼날을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무수(無愁)골이란 이름은 근심이 없는 골짜기란 뜻이다. 바깥 세상은 늘 근심의 연속인데, 이
곳은 근심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극락정토(極樂淨土)다운 이름인가? 그 유
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조선 4대 군주인 세종(世宗)이 이곳에 왔다가 원터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고 '물도 좋고 풍경
이 좋은 이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다!'
찬양하여 무수골이 되었다고 하며, 세종
이 그의 아들인 영해군 이당(李瑭)의 묘역을 둘러보고 원터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며 근심 없는
곳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허나 영해군은 1477년에 죽었고 세종은 1450년에 죽었으니 서
로 시기가 맞지 않으며, 성종이 영해군의 묘역이 완성되자 직접 찾아와 참배하며 근심이 없는
곳이라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근심이 없는 노인네인 무수옹(無愁翁) 이야기도 한토막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때는 조선의 어느 시절, 나랏일로 골치가 아프던 왕은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문을 품으며 이른바 무수인(無愁人)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잘나가는 부자도,
사대부도, 왕족도, 어린이도 몇 가지씩 가지고 있는 것이 걱정이니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수인 자격에 맞는 노인을 찾았다. 그 노인은 아들이 무려 12명으로 모두
장가를 보냈으며, 아들과 며느리의 효성이 지극하여 노인은 만사가 즐거웠다. 하여 주변 사람
들은 그를 무수옹이라 불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은 급히 그를 소환해 이유를 물으니 노인
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은 아직 몸도 멀쩡하고, 마누라가 잘 보살펴주고 있으며, 자식과 며느리가 효도하고, 벗
들도 많고, 자손들도 건강하고, 전하께서 나라도 잘 다스려 주시고, 봄과 여름, 가을, 겨울도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샘이 단단히 난 왕은 그를 시험할 생각으로 구슬을 건네주며 1달 후에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
다. 노인은 왕에게 성대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오다가 한강에서 배를 탔는데, 뒤에 따라오던
사람이 노인에게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여 구슬을 꺼내 보이니 그때 그 사람이
실수인양 팔꿈치를 치는 바람에 구슬이 한강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람은 구슬을 물에 빠트리
게 하려고 왕이 보낸 사람이었다.

구슬을 잃어버린 노인은 구슬을 어떻하나?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식음을 전폐하고 몸저 눕게
되었다. 가족들이 이유를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니 결국 건강까지 극도로
나빠졌다. 걱정이 된 자식들은 잉어를 잡아 푹 고아주려고 했는데, 그 잉어 배에서 구슬이 나
왔다. 알고보니 강에서 잃어버린 그 구슬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너무 기뻐 그동안의 근심을
다 털어버리고 잉어 요리를 폭풍 섭취해 건강을 되찾았고, 1달 뒤, 궁궐에 들어가 구슬을 바
쳤다. 왕이 낸 숙제를 휼륭하게 소화한 것이다.
깜짝 놀란 왕은 그 사연을 듣고 감복했고, 이후 노인은 잘 먹고 잘 살며 쓸데없이 오래 살았
다고 전한다. 이런 무수옹 이야기는 이곳 무수골 뿐 아니라 전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옛
전설의 하나이다.


무수골은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도 있다. 이는 무수골에 묻힌
영해군 이당의 무덤 자리가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인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
形)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춤을 뜻하는 '舞'가 '無'로 바뀜)
또한 영해군이 묻히기 이전에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이 운영하는 대장간이 계곡
에 즐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이라 불리다
가 영해군이 묻힌 이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무수골에 있던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체로 성황당은 무수골 하류(도봉초교 주변)를 일컬으
며 그 이름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버스정류장 이름(도봉역, 성황당)으로도 절찬리에 쓰이고 있
다.

참고로 무수골은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 등으로도 불렸는데, 무수울은 무수골 마을
의 대표 이름으로 조선 때 양주목 해등촌면(海等村面)을 이루던 12개 리의 하나였다. 무수골
은 윗말(무시울), 중간말, 아랫말로 나눠졌으며, 개성이씨가 먼저 터를 닦은 이후, 전주이씨
(영해군의 후손들), 안동김씨, 함열남궁씨, 진주류씨도 이곳에 무덤을 쓴 인연으로 정착하여
오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무수골은 도봉산으로 인도하는 기점의 하나로 굳이 등산이 아니더라도 답사와 나들이, 피서,
농촌 체험 등으로도 안길 수 있는 꿀단지 명소이다. 전주이씨영해군파 묘역을 비롯해 무수골
에 가장 먼저 묻힌 개성이씨의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 묘역, 200여
년 묵은 느티나무, 진주류씨묘역(도봉옛길 중간에 있음), 함열남궁씨 묘역 등의 문화유산이
즐비해 답사지로도 손색이 없으며(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좋음;) 서울시는 무수골 입구에서
윗무수골을 거쳐 자현암까지의 길을 테마 산책길로 지정하여 '무수히 전하길(숲이 좋은 길)
'이란 간판을 달아주었다.
또한 무수골 하류(세일교 동쪽)에는 밭두렁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시민들을 위한 주말농장도
여럿 있어 농촌 체험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무수골 계곡은 물도 깨끗하고 암반도 즐비하며
상류로 갈수록 숲이 짙어져 피서의 성지로도 아주 좋다. 계곡 상류는 '원통사계곡(또는 보문
사계곡)'이라 불리는데, 문사동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
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  무수골의 속살로 인도하는 무수골길 (세일교에서 윗무수골 방향)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윗무수골, 원통사 방향)

무수골주말농장을 지나면 세일교가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무수골 북쪽 마을과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로 이어지고, 세일교를 건너면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북쪽 시작문과 무수골 안쪽, 원통사, 우이암 방면으로 이어진다.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도봉역 방향)

방학동길 북쪽 시작점을 지나면 바로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길 왼쪽
에 돌담이 펼쳐졌다가 절반 정도 들어서면 자리를 바꾸어 오른쪽으로 돌담이 펼쳐지는데, 비
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으며, 나무도 무
성해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한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난향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골
초행이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이
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  봄을 맞이하여 슬슬 기지개를 켜는 윗무수골 남쪽 논두렁

난향별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
온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짙은 숲속에 자리한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첩한 산골에 무려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바깥 세상과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나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큰 편이다. 마
치 강원도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
만 논이 펼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여럿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논두렁이
여럿 있다.
이들 논두렁은 무수골의 오랜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
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이란
이름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  호수처럼 보이는 윗무수골 북쪽 논두렁

윗무수골 논두렁은 여전히 논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아직 모를 심지 않은
상태라 물만 가득해 마치 조그만 호수처럼 보였는데, 보통 5월에 모를 심어서 10월에 수확을
한다.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들이 황금색으로 숙성되
는 9월 이후 논두렁 풍경은 무수골 풍경의 가히 백미(白眉)로 꼽힌다
.


▲  느티나무 주변 윗무수골 (원통사 방면)

200년 이상 묵은 무수골 느티나무 앞에서 느티나무를 바라보는 기준으로 오른쪽(북쪽)에 느티
나무가든 문패를 내건 문을 들어서 직진하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뼈를 묻은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 묘역이 있고, 오른쪽(북쪽)으로 식당을 가로질러 숲속으로 들어가면 영해군의 묘
역(영해군파묘역)이 있다.
그리고 느티나무에서 산꾼 왕래가 빈번한 왼쪽(서남쪽) 길로 가면 자현암과 원통사, 우이암으
로 이어지는데, 하늘을 가리며 쭉쭉 뻗은 나무들이 아름드리 숲길을 이루어 마치 강원도 원시
림을 방불케 한다. 아름다운 숲길 100선까지는 아니더라도 200선에 넣어도 손색이 없는 품질
로 성신여대 난향원 일부가 이곳에 자리해 있어 길 옆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또한 숲의 옆
구리를 흐르는 무수골 계곡은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피서의 성지로 아주 제격이다.


▲  수해(樹海)의 파도 속을 거닐다~~ 윗무수골 숲길

▲  윗무수골에 자리한 자현암(慈賢庵)

햇살도 슬금슬금 피해가는 윗무수골 숲길을 지나면 무수골공원지킴터가 마중을 한다. 여기서
오른쪽 길을 3분 정도 오르면(왼쪽으로 가면 함열남궁씨1묘역과 후손들의 거처) 윗무수골 가
장 윗쪽에 자리한 조그만 비구니 암자 자현암이 나타나며, 그곳부터는 완전한 자연의 공간으
로 바뀐다.


▲  자현암 이후 원통사계곡 산길


 

♠  도봉산의 으뜸 계곡, 원통사계곡(보문사계곡)

▲  숲속에 묻힌 원통사계곡

무수골의 최상류를 이루고 있는 원통사계곡은 보문사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원통사의 다른
이름이 '보문사'라 그런 이름도 지니게 되었는데 그냥 편하게 무수골계곡이라 불러도 상관은
없다.
이곳은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로 원통사 부근에서 발원하여 무수골을 촉촉히 어루만지며 중
랑천으로 흘러간다. 골짜기는 조촐하지만 주름진 바위와 반석, 수심이 얕은 못이 가득해 아기
자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봉산의 마음이 담긴 듯, 물이 맑고 허공을 덮을 정도로 숲
이 삼삼하다.
오랫동안 서울 근교 경승지로 계곡 밑에 왕족과 사대부의 묘역이 즐비하다보니 자연히 그들의
발길이 빈번해 오랫동안 그들의 입과 기록에 오르내리던 현장이며, 무수골공원지킴터에서 계
곡을 거쳐 원통사까지는 약 30분 거리로 처음에는 경사가 느긋하다가 막판에 잠깐 각박해진다.
허나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는 초급 코스이니 그리 걱정은 안해도 된다.


▲  바위와 암반을 가득 품은 원통사계곡

▲  힘차게 쏟아지는 원통사계곡의 위엄

전날까지 비가 적지 않게 내린 탓에 계곡 수량이 매우 풍부했다. 풍부하게 쏟아진 봄비로 간
만에 포식을 즐긴 계곡은 기분이 좋은지 패기가 돋는 물소리를 베풀며 속세를 향해 두둑하게
물을 흘려보낸다. 이게 얼마만에 들어보는 계곡의 당찬 물소리던가.? 산길은 계곡을 따라 이
어지기 때문에 물소리는 늘 우리를 따라다녔다.


▲  원통사계곡과 그를 쫓아가는 산길

▲  원통사계곡의 조촐한 여흥거리, 조그만 폭포와 주름진 벼랑들

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진리에 따라 우리는 잠시 길을 멈추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김밥 등의 간식거리를 섭취했다. 하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서 낭랑한
물소리를 들으며 먹으니 꿀을 두르지 않았음에도 다들 꿀맛 같다.
그렇게 뱃속을 달래고 힘이 넘치는 계곡에 속세에서 딸려온 번뇌를 살짝 맡기니 시름이 잠시
나마 잊혀진 듯 하다. 하지만 그 번뇌는 우리가 내려올 장소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해탈(解脫)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  원통사계곡 상류 부분

▲  경쾌하게 흘러가는 조그만 폭포

▲  원통사계곡에서 바라본 보문능선

▲  계곡 징검다리


▲  원통사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길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 느긋한 산길은 계곡 최상류에 이르면 잠시 매정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
서 계곡과 완전히 떨어지게 되는데, 각박한 산자락에 닦여진 나무데크 계단길을 오르면 우이
동에서 올라온 산길과 만나면서 다시 진정을 되찾으며,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이 서서히 모
습을 드러내 보인다.


▲  하늘의 요새 같은 원통사 (밑에서 바라본 모습)
하늘과 한 발자국 가까워질 때마다 성큼성큼 커져 보이는 원통사, 그 뒤로
원통사의 든든한 후광, 우이암(관음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  원통사 앞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 동북부 지역)

▲  우이암으로 이어지는 원통사 앞 길


 

♠  서울 지역 사찰 중 2번째로 조망이 우수한 높은 산중의 절집,
~ 도봉산 원통사(圓通寺)

도봉산의 제일 남쪽 봉우리인 우이암(관음봉, 542m) 동남쪽 자락 400m 고지에 원통사가 포근
히 둥지를 틀고 있다.
원통사는 서쪽과 북쪽이 산과 바위로 모두 막혀있지만 대신 동쪽과 남쪽은 조망이 훤히 트여
있으며, 흰구름이 손에 잡힐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의 품질만큼은 아주 우수하다.
여기서는 도봉동과 도봉구, 강북구를 비롯해 노원구, 성북구, 중랑구, 광진구, 동대문구, 수
락산과 불암산, 봉화산, 아차산 산줄기, 북한산(삼각산)이 아낌없이 바라보여 속세에서 오염
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서울에는 많은 산사(山寺)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북한산 보현봉 밑 560m 고지에 둥지를
닦은 일선사(一禪寺)가 서울에서 1등으로 조망이 좋은 절이다. 원통사가 도봉구와 동대문구,
중랑구 등 서울 동북부와 한강 이북의 동부 지역 중심으로 보인다면 일선사는 도봉구와 노원
구, 은평구, 강서구, 몇몇 구석진 지역을 제외한 서울의 상당수 지역을 커버하고 있다. 그러
니 조망(眺望) 부분에서는 이곳을 따라올 절집이 없다. 그 다음이 원통사이며, 3위는 호암산(
虎巖山) 남쪽 자락에 안긴 불영암(佛影庵)일 것이다. <불영암은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등
서울 서남부와 광명 지역이 바라보임>
조망은 일품이지만 그만큼 궁벽한 산중이라 가파른 곳에 간신히 자리를 닦고 석축을 쌓아 터
를 다졌으며, 뒷쪽 바위에도 약사전, 삼성각 등의 조그만 건물을 주렁주렁 올렸다. 거북바위
밑에는 샘터가 있는데, 물이 귀할 것 같은 바위 밑임에도 수량이 넉넉하다. 그렇다면 원통사
는 언제 창건되었을까?

원통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864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여 원통사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관련 기록과 유물, 흔적이 전혀 없어 창건 시기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가져다
준다. 또한 1053년 관월대사(觀月大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나 이 역시 신뢰도가 떨어진다. 다
만 1392년에 천은선사(天隱禪師)가 중창했다고 하니 아마도 이때쯤 창건된 것이 아닐까 싶으
며,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현재 나한전으로 쓰이는 조그만 동굴에서 태조 이성계가 기도
를 올렸다고 전한다.
하지만 굳이 이성계가 아니더라도 이런 동굴은 승려나 도를 닦는 이의 수행처로 사용되기 마
련이다. 게다가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형상이라는 우이암(관음봉)이
뒷쪽에 있어 지역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관세음보살의 성지(聖地)로 여겼다. 바로 그들을 후
광(後光)으로 삼아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조촐히 절을 짓고 관세음도량(관음도량)을 뜻하는
원통사를 칭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영조 때 유인(宥牣)이 중수를 했고, 1810년 청화(淸和)가 중수를 했는데, 중창 이후 나
라에 큰 경사가 있자 나라와 산천의 은혜를 갚았다는 뜻에서 보은사(報恩寺)로 이름을 갈았다.
1887년 응허 한규(應虛 漢奎)가 중창했으며, 1928년 자현(慈賢)이 주지로 들어와 퇴락한 절의
중건을 발원하고 설악산에 머물던 춘성(春城)을 청해 1,000일 관음기도를 올려 1929년에 절을
중건했다.
이후 보경 보현(寶鏡 普賢)을 데려와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1931년에 비로소
1,000일 기도가 끝나자 그해 겨울 보응과 함께 다시 만일 염불회를 시작하여 1933년 칠성각을
세우고 1936년 법당 일부와 큰방을 중수했으며, 이때 절 이름을 잠시 보문사(普門寺)로 갈았
다가 원래 이름인 원통사로 돌렸다. 그리고 1988년 약사탱과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 등을 만
들어 봉안했다.

원통사는 양반사대부들이 즐겨 찾던 명소로 인근 방학동(放鶴洞)과 무수골에 별장과 집을 지
어 머물던 그들이 이곳까지 올라와 조망을 즐겼는데, 영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조현명
(趙顯命)과 서명균(徐命均)이 나라 일을 논하며 마음을 가다듬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 석굴에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기도 마지막 날에 꿈 속에서 하늘
나라의 상공(相公, 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이를 기리고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원통보전을 비롯하여 약사전과 삼성각, 정해료, 범종각, 자연산 석굴
을 활용한 나한전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이미 여러 개의 100년이 지났지만 그에 비
해 고색의 기운은 모두 말라버려 지정문화유산은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다만 조선 말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고, 왜정 때 지어진 원통보전과 탱화 여러
점이 전하고 있다. 또한 나한전 석굴은 태조가 기도를 했다는 전설이 깃들여져 있으며, 오랫
동안 승려들의 수행처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앞서 이른 데로 조망 하나는 아주 최상급이라 서울 동북부와 동부 지역이 훤히 시야에
바라보이며, 절 뒷쪽에 자리한 우이암(관음봉)을 들이밀며 관음도량을 내세우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6 (도봉로169길 520 ☎ 02-954-9944)

◀  서울을 굽어보는 범종루(청화대)
매일 새벽 4시와 18시에 은은한 종소리를
서울로 흘려보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가히 일품급이다.

원통사는 산정(山頂)에 자리한 탓에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범종루를
대신 정문으로 내밀고 있는데, 절 남쪽 경계에는 돌담을 둘렀고, 동쪽 경계에는 석축을 2m 높
이로 다져 속세의 기운을 경계한다.
절로 들어서려면 범종루의 밑도리를 지나야 된다. 이 길이 속세와 원통사를 잇는 유일한 길로
범종루는 청화대(淸和臺)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  범종루(청화대)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지역

▲  오색 연등을 늘어뜨린 원통보전(圓通寶殿)

남쪽을 바라보고 선 원통보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
물이다. 1929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나 여러 번 손질을 더하면서 90
년 숙성된 기운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내부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호
법신들의 무리를 머금은 신중탱과 백의관세음보살을 담은 관음탱을 두었는데, 원통전은 관음
전(觀音殿)의 다른 말로 관세음보살 누님이 중심이 되야 맞지만 이곳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삼았다. 대신 관세음보살을 그림으로 1폭, 존상(尊像)으로 1기 등 총 2개를 두어 건물의 이름
값은 조금이나마 하고 있다.


▲  원통보전 내부 (왼쪽부터 백의관세음보살탱,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신중탱)

▲  바위에서 샘솟는 원통사 샘터

▲  자연산 석굴에 자리한 나한전

원통보전에서 약사전을 향해 1단계 올라가면 거북바위 밑에 이곳의 소중한 젖줄인 샘터가 있
다. 산사에는 늘 샘터가 있기 마련이라 꼭 1모금 챙겨 마시는 편인데 바위 밑 산정에 있음에
도 물이 풍부한 편이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목구멍에 들이키니 몸 속이 싹 시원해진다.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하늘이 내린 이슬 맛이 담긴 탓일까? 물맛도 그런대로 괜찮은 기분이다.


 ▲  나한전(羅漢殿) 내부

샘터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약사전, 왼쪽은 바위 밑도리에 묻힌 나한전으로 이어진다. 나한
전 석굴은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했다는 현장이라 우기고는 있으나 신뢰성은 없으며, 오랫동
안 승려들의 기도처로 쓰였던 것을 근래 손질하여 돌로 만든 석가3존불과 보살입상, 나한상(
羅漢像)을 봉안해 나한전으로 삼았다.
석굴 내부는 더위 두 글자를 잠시 잊게 할 정도로 시원하며, 촛불이 어둠을 조금이나마 밀어
내고 있으나 다소 어두운 편이다.


▲  거북바위에 둥지를 튼 약사전(藥師殿)
샘터 뒷쪽에는 거북바위가 있다. 그의 등에는 약사여래의 거처인 1칸짜리 약사전이
둥지를 틀고 있는데, 바로 그 앞 바위 피부에 '상공암' 3자가 새겨져 있다.

▲  밑에서 바라본 약사전

▲  약사전 약사여래좌상과 약사후불탱


▲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상공암(相公岩) 바위글씨

약사전 바로 앞에 깃든 상공암 바위글씨는 직각으로 선 바위 피부에 새겨진 것이 아닌 누워있
는 바위에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서 상공이
란 정승(正承)을 뜻하는 것으로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엎어버리기 이전 원통사에 들어와 기도
를 하다가 그 마지막 날 꿈에 하늘나라 상공이 되어 옥황상제를 알현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기념으로 이곳에 상공암 바위글씨를 남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설은 신뢰하기가 어려우며, 태조(太祖)가 과연 이곳까지 올라와 기도를 올렸는지
는 심히 회의적이다. 다만 도봉산 천축사(天竺寺)와 회룡사(回龍寺)는 이성계와 인연이 깊은
절로 그 절의 설화를 가져와 적당히 빚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 후기에 이곳을 찾았던 사대부
가 그 전설을 전해 듣고 꿈 속에서 하늘나라 상공이 된 태조를 찬양하고자 거북바위 위에 '상
공암' 바위글씨를 새겼다.

75x230cm 크기로 네모나게 외곽 선을 긋고 그 안에 3자를 새겼는데, 서체는 해서체(楷書體)이
며, 마치 꿈틀거리는 듯 필체가 우수하고 투박하다. 원통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절 경내
에 바위글씨가 있는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그 글씨는 선비와 사대부, 왕족들이 즐겨하
던 낙서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원통사에 그들의 왕래가 잦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약사전 앞에서 꺼꾸로 지켜본 상공암 바위글씨
태조의 하늘나라 꿈 전설을 상징하고자 하늘이 잘 바라보이는 이곳에
글씨를 새겼다.

▲  삼성각(三聖閣) 앞에서 바라본 천하
도봉산 동남쪽 자락과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등이 아낌없이 바라보인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과 산신, 독성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 칠성탱 (1988년 작)
치성광여래와 칠성(七星)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정신이 없다.

▲  삼성각 산신탱 (1988년 작)
흰 수염의 산신 할배와 호랑이, 동자 등
산신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삼성각 독성탱 (1988년 작)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
존자)과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원통사가 우이암(관음봉) 바로 밑이긴 하나 이전보다 더 각박해진 산길을 10여 분을 올라가야
된다. 지도상의 거리는 200m 정도라 금방 이를 듯 싶었으나 체감거리는 거의 1km가 넘어 벌써
부터 땀 육수를 제대로 배출했다.
우이암 그늘이라 그런지 올라가는 길목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하나같이 생겨
먹은 것들이 예사롭지가 않아 몇몇 바위는 세상이 달아준 이름도 있을 법도 한데 사람들의 귀
차니즘 때문인지 다들 이름표가 없다. 허나 그것이 무슨 대수랴?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일이지 바위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칼처럼 솟은 우이암의 밑도리를 지나면 우이암을 바라보는 서쪽 봉우리에 이르게 된다. 드디
어 하늘 아래 우이암에 이른 것이다. 허나 우리가 발을 딛은 곳은 정상부가 바위로 이루어진
우이암 서쪽 바위 봉우리일 뿐, 여기서 동쪽으로 보이는 바위 산이 바로 우이암이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의 위엄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기고 위엄도 대단한 순 100% 바위 봉
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났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바람과 비 등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고
, 그것이 지금의 도봉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여 도봉산은 자연히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자운봉, 선인봉, 만장봉, 칼
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岩峰)이 즐비하며,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
이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
불락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단단하게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봉
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지역


봉우리 자체가 거의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내려가는 것 또한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벽
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암벽 타기에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
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우리가 졸지에 암벽 등반을 위해 내려준 선물의 모양새가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해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조촐히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
굴(현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 머물던 승려들이 발견하여 성지로 격하게 추
켜세웠을 것이다.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이니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자 바
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고 관음도량을 칭하고 있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을 중심으로 방학동, 강북구,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
바라보인다.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서려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꾸었다고도 함)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 단체, 뜻있는 이들은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긴 하나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
의 썩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
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영봉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벌써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맞닿은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과 별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동대
문구, 수락산과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 조망과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일부(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와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동과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 민락1,2지구(수락산 너머로
보이는 곳)까지 시야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보다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
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두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도봉산과 수락산부터 점
보다 작게 아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우이암에는 마침 한 무리의 암벽꾼들이 줄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봉우리를 희롱하고 있었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하지만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을 것이다. 내가 저기로 순간
이동을 당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에 아득하게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서 두 다리를 푹 쉬었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솔솔 불어
주는 산바람이 땀과 이른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
리니 두 안구와 마음이 싹 위로받은 것 같다. 하긴 이보다 좋은 정화감은 없지.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라 20분 정도 머물다가 우이암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우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과 서울시내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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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4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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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진 논두렁과 밭두렁을 간직한 서울의 두메산골, 도봉산 무수골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무수골계곡)



' 서울의 두멧골, 도봉산 무수골 '

▲  무수골 논두렁 (초가을)

▲  전주이씨 영해군파묘역

▲  무수골길 (성신여대 난향별원)

 


 

 

♠  서울의 숨겨진 별천지이자 논까지 간직한 상큼한 두멧골,
도봉산 무수골

▲  세일교 주변 (오른쪽 길은 무수골 북부, 도봉옛길 방면)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포근히 묻힌 무수골은 도봉산에 널린 수많은 골짜기의 하나이다. 우리
집에서 매우 가까운 상큼한 곳으로 그저 숲과 계곡, 바위만 있는 계곡이 아닌 밭두렁과 산골
마을, 심지어 논두렁까지 담고 있는 산골마을로 좁게는 도봉산(道峯山)과 도봉구, 넓게는 서
울의 숨겨진 비경으로 꼽힌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백두산만한 서울 바닥에 그런 서울을 비웃는 뜻밖에 별천지가
있었다니? 무수골에 발을 들인 나그네는 그곳의 뜻밖의 모습과 아름다운 풍경에 무한 감동을
먹으며 넋을 잃고 만다. 흔히 서울 하면 수많은 사람과 차량, 키다리 건물이 즐비한 번잡한
회색빛 풍경만 생각하기 일쑤이니 그 감동의 정도는 더욱 클 것이다. 솔직히 서울이라 해서
꼭 시가지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수골이 이렇게 개발의 칼질이 거의 닿지 않은 때 묻
지 않은 시골로 남게 된 것은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에 포함되어 개발의 칼날을 부러뜨렸기 때
문이다.

무수(無愁)골이란 이름은 근심이 없는 골짜기란 뜻이다. 바깥 세상은 늘 근심의 연속인데, 이
곳은 근심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극락정토(極樂淨土)다운 이름인가? 그 유
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조선 4대 군주인 세종(世宗)이 이곳에 왔다가 원터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며 '물도 좋고 풍경
이 좋은 이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다!'
찬양을 하여 무수골이 되었다고 하며, 세
종이 그의 아들인 영해군 이당(李瑭)의 묘역을 들러보고 원터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며 근심 없
는 곳이라 했다고 한다.
허나 영해군은 1477년에 죽었고 세종은 1450년에 붕어(崩御, 제왕의 죽음)했으니 서로 시기가
맞지 않으며, 성종이 영해군 묘역이 완성되자 직접 찾아와 참배하면서 근심이 없는 곳이라 했
다는 이야기도 있다. 거기에 근심 걱정이 없는 노인네인 무수옹(無愁翁) 이야기도 한 토막 덧
붙혀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때는 조선의 어느 시절, 나랏일로 골치가 아프던 왕은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문을 품으며 이른바 무수인(無愁人)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잘나가는 부자도,
사대부(士大夫)도, 왕족도, 어린이도 몇 가지씩 가지고 있는 것이 걱정이니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수인 자격에 맞는 노인을 찾았다. 그 노인은 아들이 12명으로 모두 장가를
보냈으며, 아들과 며느리의 효성이 지극하여 노인은 만사가 즐거웠다. 하여 주변 사람들은 그
를 무수옹이라 불러 부러워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은 급히 그를 소환하여 이유를 물었다.
이에 노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은 아직 몸도 멀쩡하고, 마누라가 잘 보살펴주고 있으며, 자식과 며느리가 효도하고 벗
들도 많고, 자손들도 건강하고, 전하(殿下)께서 나라도 잘 다스려 주시고, 봄과 여름, 가을,
겨울도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샘이 단단히 난 왕은 그를 시험할 생각에 구슬을 건네주며 1달 후에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다.
노인은 왕에게 성대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오다가 한강에서 배를 탔는데, 뒤에 따라오던 사람
이 노인에게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여 구슬을 꺼내보이니 그때 그 사람이 실수
인양 팔꿈치를 치면서 구슬이 한강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람은 구슬을 물에 빠트리게 하려고
왕이 보낸 사람이었다.

구슬을 잃어버린 노인은 구슬을 어떻하나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식음을 전폐하고 몸저 눕게 되
었다. 가족들이 이유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니 결국 건강까지 극도로 나빠졌
다. 걱정이 된 자식들은 잉어를 잡아 요리해주려고 했는데, 그 잉어 배에서 글쎄 구슬이 나온
것이다. 알고보니 강에서 잃어버린 그 구슬이었다. 노인은 너무 기뻐서 그동안의 근심을 흔쾌
히 털어버리고 잉어 요리를 폭풍 흡입하며 이내 건강을 되찾았다.
그리고 1달 후, 궁궐에 들어가 구슬을 바쳤다. 왕이 낸 숙제를 휼륭히 소화한 것이다. 깜짝
놀란 왕은 그 사연을 듣고 무한 감동을 먹었고, 이후 노인은 잘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이런
무수옹 이야기는 무수골 뿐 아니라 전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옛 전설의 하나이다.


무수골은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도 있다. 이는 무수골에 묻힌
영해군의 무덤 자리가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인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形)에
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춤을 뜻하는 '舞'가 '無'로 바뀜)
또한 영해군이 묻히기 이전(15세기 후반 이전)에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이 운영
하는 대장간이 계곡에 즐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이라 불리다가 영해군이 묻힌 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무수골에 있던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
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체로 성황당은 무수골 하류(도봉초교 주변)를 일컬
으며 그 이름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버스정류장 이름(도봉역, 성황당)으로도 절찬리에 쓰이고
있다.

참고로 무수골은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 등으로도 불렸는데, 무수울은 무수골 마을
의 대표 이름으로 조선 때 양주목 해등촌면(海等村面)을 이루던 12개 리의 하나였다. 무수골
은 윗말(무시울), 중간말, 아랫말로 나눠졌으며, 개성이씨가 먼저 터를 닦은 이후, 전주이씨
(영해군 후손들), 안동김씨, 함열남궁씨, 진주류씨도 이곳에 무덤을 쓴 인연으로 정착하여 오
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무수골은 도봉산 산길 기점의 하나로 굳이 등산이 아니더라도 답사와 나들이, 피서, 농촌 체
험 등으로 안길 수 있는 꿀단지이기도 하다.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을 비롯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묻힌 개성이씨 집안인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 묘역, 오래된 느
티나무, 진주류씨묘역(도봉옛길 중간에 있음), 함열남궁씨 묘역 등의 문화유산이 즐비해 답사
지로도 손색이 없으며(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좋음) 서울시는 무수골 입구에서 윗무수골을 거
쳐 자현암까지의 길을 테마 산책길로 지정하여 '무수히 전하길(숲이 좋은 길)'이란 간판을 달
아주었다.
또한 무수골 하류(세일교 동쪽)에는 밭두렁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시민들을 위한 주말농장도
여럿 있어 농촌 체험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무수골 계곡은 물이 깨끗하고 암반도 즐비하며
상류로 갈수록 숲이 짙어져 피서의 성지(聖地)로도 아주 바람직한 곳이다.
이 계곡은 문사동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로 추앙받으
며, 우이암 부근 원통사(圓通寺)에서 시작되어 '원통사계곡(또는 보문사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무수골은 '무수천'이란 간판을 달고 무수골의 만물을 촉촉히 어루만지며 흐르다가 도봉
역 서쪽에서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에 흡수되어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다.

* 무수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도봉초교 주변 무수골 하류 (무수골 상류 방향)
도봉산 산줄기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백운대(836m)와 인수봉 등이 바라보인다.

▲  도봉초교 주변 무수천 (무수골 하류)
무수천 양쪽에 자전거 통행이 가능한 산책로를 내었는데, 무수골 주말농장
동쪽에서 시작되어 도봉역 북쪽을 거쳐 중랑천까지 이어진다.


무수골 나들이는 1호선 도봉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도봉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도봉
역4거리인데, 여기서 도봉산이 바라보이는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바로 무수골로 인도하는 무
수천 둑방길(도봉로169길)이 나온다. 이곳에서는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과 무수골에서
나온 무수천이 만나는데, 이들은 도봉천으로 합쳐져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무수천 둑방길을 따라 7~8분 정도 가면 무수교가 나온다. 이곳까지는 온갖 주택과 빌라가 즐
비한 서울에 흔한 주택가 풍경이나 여기서부터 집들이 크게 줄어들면서 서서히 시골 풍경으로
갈아탄다. 그런 전원 풍경 뒤로 북한산(삼각산) 북쪽 봉우리와 도봉산의 지붕이 바라보여 뒷
배경도 아주 탄탄하다. 이윽고 무수골 마을버스 종점(도봉08번)을 지나면 완전한 전원(田園)
분위기로 그림이 바뀐다.

무수천(무수골)은 수심이 매우 얕은 하천으로 비가 많이 내릴 때만 잠깐 물이 불어날 뿐, 평
소에는 물이 적은 마른 하천<건천(乾川)>이다. 그러다보니 가뭄이 심하면 갈증을 너무 심하게
타서 툭하면 맨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2007년 이후 무수골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벌
이면서 무수골 아랫쪽(도봉초교 주변) 주거 환경이 어느 정도 개선되었는데, 이를 맞추어 도
봉구에서 무수천을 정비하여 깨끗한 우리 동네 가꾸기 사업을 벌였다. 이때 하천 양쪽에 중랑
천과 이어지는 산책로를 닦았다.


▲  하얀 반석들 사이로 가늘게 흘러가는 무수골 하류 (무수천)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放鶴洞)길 북쪽 관문

무수골주말농장을 지나면 세일교가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무수골 북쪽 마을과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로 이어지고, 정면의 세일교를 건너면 북한산
둘레길 방학동길 북쪽 관문과 무수골 안쪽, 원통사, 우이암 방면으로 이어진다.

무수골 북쪽에서 온 도봉옛길은 세일교에서 방학동길로 간판을 바꾸고 남쪽으로 흘러간다. 이
길은 방학동 정의공주(貞懿公主)묘역까지 이어지는 3.1km의 산길로 오르락내리락을 여러 차례
반복해야 되지만 그런데로 무난한 산길이다. 방학동길이란 이름은 방학동을 지나기 때문에 붙
여진 이름이다.


▲  무수골의 속살로 인도하는 성신여대 난향별원 돌담길 (무수골길)

방학동길 북쪽 관문을 지나면 바로 성신여대 난향별원 돌담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길 왼쪽
에 돌담이 펼쳐졌다가 절반 정도 들어서면 자리를 바꾸어 오른쪽으로 돌담이 펼쳐지는데, 비
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으며, 나무도 무
성하여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한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진 것 같은 난향별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
골 초행자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
이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  윗무수골 논두렁과 느티나무

▲  이제 기지개를 켜는 윗무수골 북쪽 논두렁 ▼

난향별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
온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짙은 숲속에 묻힌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
첩한 산골에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속세와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지만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큰 편이다. 강원도
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만 논이 펼
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여럿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2~3개의 논두렁이 있
다.
이들 논두렁은 무수골의 오랜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
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전혀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
이란 이름도 괜히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  윗무수골 남쪽 논두렁

윗무수골 논두렁은 여전히 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보통 5월에 모를 심어 10월에 수
확을 한다.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들이 황금색으로 크게 숙
성되는 9월 이후의 논두렁 풍경은 무수골 풍경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


▲  남쪽과 북쪽 논두렁 - 그들 사이로 길이 지나간다.

▲  무수골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0-3호

논두렁을 지나면 바로 정면 약간 높은 곳에 큰 느티나무가 모습을 비춘다. 넓게 그늘을 드리
우며 무더위의 염통을 긴장시키는 그는 높이 22m, 가슴높이 둘레 3.7m로 1981년 보호수로 지
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15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30여 년이 더해져 약 250살로 여겨진다.
계곡 부근 비옥한 땅에서 자라고 있어 왕성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으며, 가지가 꽤 굵고 묵직
하다. 이곳에 살던 영해군파 후손들이 심어 정자나무나 당산나무 용으로 사용했으며, 전주이
씨 영해군파 후손들이 애지중지 관리하고 있다.


▲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으로 인도하는 길

느티나무 앞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산꾼들이 자주 오가는 서남쪽 길은 자현암(慈賢庵)
과 도봉산(원통사, 우이암) 으로 이어지고, 서북쪽 길은 느티나무가든으로 이어진다. 느티나
무가든은 입구에 문패를 내건 뻥뚫인 문이 있고, 좌우로 철책이 둘러져있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개인 사유지로 오해하기 쉬우나 생긴 것이 그렇게 생겼을 뿐, 들어가도 무방하다. 대중
에게 개방된 식당이고 마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느티나무가든은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으로 백숙과 파전, 도토리묵, 고기류 등을 취급
하고 있는데, 그 식당 앞에서 길은 또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호안공 이등/
의령옹주 묘역으로 인도하는 길이 나오고, 식당을 끼고 북쪽 숲으로 들어가면 영해군파묘역이
나온다.

호안공 이등/의령옹주 묘역은 입구에 녹색 철책과 문이 둘러져 있으나 대낮에는 거의 열려있
다. (밤에는 닫아둠) 그 숲길을 2분 정도 들어서면 호안공의 후손이 사는 붉은 지붕 기와집이
나오는데, 정말 외딴 산골에 묻힌 시골집이다.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
리며 계속 걸음을 옮기니 집 앞을 지키고 선 큰 멍멍이가 무섭게 짖어대며 나를 경계한다.
물론 개는 줄로 묶여 있었지만 가까워질수록 멍멍 소리가 커지니 나도 모르게 염통이 쪼그라
든다. 내가 수상한 짓을 하러 온 것도 아니지만 단순한 개는 무작정 적으로 간주하고 맹렬히
멍멍 공격을 가하니 결국 그 공격에 꼬리를 내리고 뒷걸음을 쳤다.
개의 멍멍 소리에 집에서 사람이 나와서 무슨 일로 왔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이유를 말하면 되
지만 시간도 이미 18시가 다 된 상황이라 들여보내줄 것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인연
이 아닌 듯 싶어 이쯤해서 쿨하게 물러났다. (그 이후 아직까지 인연이 닿지 않고 있음)

참고로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 1379~1457년)은 개성이씨로 태조의 서장녀(序長女)인 의령
옹주(義寧翁主, ?~1466)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1435년 계천군(啓川君)으로, 1444년 봉헌대부
(奉憲大夫)에 봉해졌으며, 이들 무덤은 무수골에 처음 정착한 무덤으로 조선 초기 무덤 양식
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영해군파묘역 밑에 자리한 논두렁

호안공 묘역을 포기하고 느티나무가든 북쪽 숲에 묻힌 영해군파묘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
해군파묘역 밑에는 느티나무가든에서 관리하는 커다란 야외 단체석과 족구장, 논두렁 등이 있
는데, 이들 논두렁도 아직 모를 심지 않아 마치 큰 연못처럼 보인다. 그들 너머로 나무가 삼
삼히 우거져 있고, 그 숲속에 영해군파묘역이 자리해 있다.


▲  영해군파묘역 20m 전

▲  영춘군 이인묘와 신도비로 올라가는 산길

영해군파묘역으로 가다보면 중간에 왼쪽 언덕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있다. (계단처럼 주름진
길이 보일 것임) 그 길로 가면 영춘군 이인묘와 신도비가 나오며, 직진하면 그 산길의 끝에
무리지어 있는 영해군파묘역이 있다.


 

 

♠  조선 초기 무덤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조선 왕족들의 묘역
전주이씨 영해군파묘역(寧海君派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6호

무수골 깊숙한 곳에 자리한 영해군파묘역은 세종의 9째 아들인 영해군과 그의 후손들이 묻힌
왕족 일가의 묘역이다.
무수골은 뒤에 도봉산, 앞에 무수천이 흐르는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착한 명당(明堂)
자리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15세기 초반에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가 가장 먼저 이곳을 닦았
고, 영해군, 진주류씨, 함열남궁씨 순으로 무덤을 썼다. 이중 영해군파묘역이 가장 묘역이 넓
은데(1,630.4㎡)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形)의 명당으로 꼽
힌다. (무수골의 이름도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음)

영해군파묘역은 크게 4구역으로 나뉜다. 묘가 몰려있는 중앙 구역은 묘역의 시조인 영해군 이
(李瑭) 내외를 비롯해 그의 장인어른인 신윤동(申允童), 영춘군의 아들인 강녕군 이기, 이
기의 노비인 김동(금동)의 묘가 있다. 이당 묘역 뒷쪽 산속에는 영춘군의 장남인
완천군(完川
君) 이희(李禧)와 완천군의 3째 아들인 평성수(平城守) 이질(李耋)의 묘가 있고, 동쪽 능선에
는 길안도정 이의의 묘, 묘역 직전 서쪽 능선에는 영해군의 장남인 영춘군 이인의 묘와 신도
비, 부원정 이이(영해군 손자의 아들) 내외의 묘가 있다.

묘역은 영해군을 시작으로 그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 4대가 묻혀있으며, 묘비가 없는 한참 후
손들의 무덤도 여럿 꼽사리로 끼어있다. 묘역은 영춘군 이인이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원종
공신(原從功臣)이 되면서 더 확대되었으며, 특히 중앙 구역 밑에 아주 조그맣게 충노(忠奴)로
포장된 금동의 묘가 있어 눈길을 끈다. 무덤들은 새로 손질된 부분이 거의 없는 16세기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조선 초기 왕족들의 무덤 양식과 석물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  충노 김동(金同)의 묘

묘역 중앙구역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충노 김동(금동)의 묘를 만나게 된다. 이 무덤은 영해군
파묘역의 다른 무덤과 달리 매우 아담한 모습인데, 이는 김동이 노비이기 때문이다. 밋밋하게
솟은 봉분(封墳)은 한 사람이 누우면 딱 적당할 정도로 작고, 풀도 별로 없다. 석물도 네모난
비좌(碑座)를 갖춘 묘비(높이 64cm, 너비 37cm, 두께 13cm)가 전부로 그 역시 꼬마 키보다도
작아 죽어서도 신분 차별을 주었다.
묘비는 비좌 위에 '故 忠奴 金同'이라 쓰인 빗돌을 세워 무덤의 주인을 알렸고, 빗돌 위는 반
원 모양으로 다듬었다. 그리고 그 위에 꽃봉오리 모습의 장식을 달았는데, 마치 위스키병처럼
보인다. (내가 술을 좋아해서 그런가?) 그러면 김동은 누구이고 왜 왕족 묘역 한쪽에 이렇게
무덤까지 있게 된 것일까?

김동은 강녕군(江寧君) 이기의 노비로 원래 이름은 금음동(今音同)이다. 연산군 시절에 흥청(
興淸)에 소속된 세은가이(世隱加伊)가 왕의 총애를 받자 그의 아비인 김숙화(金淑華)가 그 권
세를 믿고 이기의 집과 첩을 빼앗으려고 했다. 이기가 김숙화의 요구를 거절하자 뚜껑이 열린
김숙화는 이기가 노비 금동을 시켜 자신을 욕했다고 왕에게 하소연을 했다. (또는 이기가 노
비 금동과 함께 거친 말을 하며 항의했다고 함)
이에 뚜껑이 폭발한 연산군(燕山君)은 이기의 가족과 장인을 모두 연좌해 잡아들이고 집을 봉
쇄하고 노비까지 모두 압송케 했다. 이때가 연산군의 마지막 해인 1506년이다.

왕은 추관(推官)들에게 명해 낙형(烙刑)을 가하며 이기와 그의 아비인 영춘군 이인을 고문케
했다. 죄가 없는 이기 부자는 억울함을 토로했으나 허공의 메아리로 끝날 뿐, 아무 소용이 없
었다. 그러자 김동은 굳게 마음을 먹으며 '소인이 혼자 한 짓입니다. 나으리는 아무 것도 몰
라요!'
진술을 했다.
그 말을 신뢰하지 않던 왕은 거짓말 말라며 금동에게 6번씩이나 고문을 벌였다. 왕이 듣고 싶
던 말은 바로 이기가 했다고 자백하는 것이었다. 허나 금동은 끝까지 자기 소행이라 주장했고
그의 고집에 지친 왕은 결국 김동의 단독 범죄라 단정하여 그를 처단했다. 그리고 이기 부자
는 장형 100대, 이인은 장형 80대를 때려 유배형에 처했고 이기는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다.
이 사건을 통해 이기와 연산군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김숙화는 이를
악용해 이기의 집과 첩을 빼앗으려 했고, 연산군은 단순히 그의 무고만으로 이기를 잡아들였
으며, 김동이 자신이 벌인 일이라 자백하자 자신이 바라는 답변을 얻고자 더 고문을 가한 것
을 보면 이번에 아예 이기를 족치려고 작정했던 듯 싶다.

목숨을 건진 이기는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고, 김동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묘역 한쪽에 조촐
하게 그의 무덤과 비석을 만들어주었다. 그의 사연을 전해들은 중종(中宗)은 김동을 의노(義
奴)라 칭찬하며 1508년 4월 5일에 동네 어귀에 문려(門閭)를 세워주었고, 김동 가족의 요역(
徭役)을 면해주었다. 그리고 3년 뒤에 다시 명을 내려 집 앞에 정문을 세워 그의 희생을 길이
길이 기렸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그 공로로 김동과 그의 처자식은 면천이 되어 평민이 되었
고, 김씨 성을 하사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노비 김동의 묘가 무려 조선 왕족인 영해군파묘역 속에서 비록 작은 규모
이지만 주인 일가와 나란히 자리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거의 흔치 않은 노비의 묘로 묘비까지
갖춘 것은 아주아주 드문 케이스로 그 가치는 높다. 하긴 자신의 목숨을 던져 주인을 살렸으
니 이 정도 정성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  강녕군 이기(江寧君 李祺)와 그의 전/후처의 묘

김동 묘 옆에는 그의 주인인 강녕군 이기의 묘가 있다. 비록 무덤의 덩치는 김동 묘보다 크지
만 그와 거의 비슷한 높이에 자리해 있어 죽어서도 김동의 은혜를 잊지 않고 늘 함께 하겠다
는 주인의 지극한 마음이 담겨있는 듯 하다.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그리 했을 수도 있음, 속
사정이야 당사자만이 알 것이니)
이기와 그의 전/후처 등 3명이 합장된 무덤으로 왕족의 무덤치고는 매우 작은 모습이다. 호석
(護石)을 두른 네모난 봉분과 비좌와 이수를 갖춘 비석, 상석(床石)이 전부로 그 부친대까지
는 봉분도 크고 문인석과 장명등까지 갖추었지만 이기부터 무덤이 간소하게 변화된다. 그만큼
먼 왕족이 되고 벼슬도 크게 못했기 때문이다.

이기는 영춘군 이인의 차남으로 영해군의 손자가 된다. 부인은 양주조씨인 조방우(趙邦佑)의
딸이며, 후처는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그의 태어난 시기와 사망 시기는 전해오는 것이 없
으며, 연산군 말엽인 1506년에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세은가이의 아비 김숙화가 집을 뺏고자
시비를 걸자 이를 지키는 과정에서 그의 무고로 가족과 노비가 모두 압송되어 이기와 이당 부
자는 고문을 당하게 된다.
다행히 노비 김동이 자신을 불태워 이기의 가족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이기는 장형 100
대를 맞고 먼 곳으로 쫓겨나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다.

중종 때는 이정숙(李正淑) 등과 폐비 신씨(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청했다가 죄를 받은 김정
(金淨)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조광조(趙光祖) 등과 친분을 쌓았다. 허나 1519년 기묘
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 일당이 모두 아작이 나자 그의 일당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죽은 이후 그 흔한 시호도 받지 못했다가 1794년 유림에서 그도 기묘사화 때 화를 받은
이른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하나라며 시호를 내리자는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문경(文景)이
란 시호를 내렸다.


▲  영해군 이당의 부인인 평산신씨(平山申氏)묘

강녕군 이기와 노비 금동의 무덤 윗쪽에는 영해군 이당의 부인인 평산신씨묘가 있다. 평산신
씨는 신윤동의 딸로 영춘군 이인과 길안도정 이의를 낳았으며, 남편의 무덤 옆이 아닌 친정
아비의 무덤 밑, 남편 무덤보다 2단계 밑에 따로 자리한 것이 이채롭다.

무덤은 동그란 봉분과 묘비, 상석 외에 장명등(長明燈)과 문인석(文人石) 2기까지 갖추고 있
으며, 이들 석물에는 500년 세월의 때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우측에는 묘비가 없는 후손 무
덤 2기가 봉긋 솟아있다.

▲  평산신씨묘와 묘비, 장명등

▲  고된 세월에 지쳐보이는 우측 문인석

▲  눈망울이 큰 좌측 문인석

▲  평산신씨묘에서 바라본 이기묘(왼쪽)와
금동묘(오른쪽)


▲  영해군의 장인인 신윤동(申允童)묘

영해군묘와 평산신씨묘 중간에는 영해군의 장인인 신윤동 묘가 자리해 있다. 영해군파묘역 중
간 구역에서 2번째로 높은 곳에 자리해 딸과 손자, 노비 금동의 무덤을 굽어보고 있는데, 사
위와 딸 무덤 사이에 둥지를 튼 점이 특이하다. 게다가 영해군 집안(전주이씨) 묘역에 부인도
아닌 다른 성씨의 인물이 잠들어 있는 점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아무리 장인어른이라고
해도 엄연한 다른 성씨이기 때문이다.
허나 조선 초까지는 집안 묘역에 사위나 장인 등 다른 성씨의 인물이 섞여 있는 경우가 흔했
다. 고려의 마지막 자존심이던 정몽주(鄭夢周) 묘역(용인시 능원리 소재)에도 정몽주의 손녀
사위인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과 그 후손이 묻혀 있고, 조선 10대 군주인 연산군은 부인인
거창신씨 집안의 땅에 묻혀있다.

신윤동은 좌의정에 추증된 신효창(申孝昌)의 손자이자 신자경(申自敬)의 아들이다. 그의 집안
은 왕실과 매우 가까워 세종의 왕자들에게 여럿 시집을 갔는데, 고촌사촌인 제안부부인(濟安
府夫人) 전주최씨(全州崔氏)는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부인이며, 숙
부 신자수(申自守)의 딸은 세종의 5남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에게, 자신의 딸은 세
종의 9남인 영해군 이당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니 집안도 배경도 다들 탄탄하다.
허나 영해군만큼이나 역사에 요란하게 이름을 남기지 못하여 인지도는 영해군파묘역에 와서야
확인이 될 정도로 매우 낮다.

신윤동의 행적에 대해서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서울시장)을 지내고 죽은 이후 의정부 좌
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는 것 등이며, 그의 할아버지인 신효창은 큰아들인 신자근이
아들을 얻지 못하고 일찍 죽자 막내 신자수를 신자근의 후사로 삼으려 했다. 허나 마음을 바
꾸어 신자경의 아들인 신윤동에게 신자근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는데, 신윤동이 사망하자 신효
창에 대한 제사를 누가 맡을 것인가를 두고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어났다는 내용이
전부이다. 또한 신윤동의 행적이 적혀있을 묘비(묘표)도 안타깝게도 마모가 되어 확인이 불가
능한 실정이다.

무덤의 구조는 동그란 봉분과 묘비, 상석, 문인석 2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석 앞면에 '증 의
정부 좌찬성 신윤동지?(贈議政府左贊成申允童之?)'라 쓰여 있다. 끝 자는 훼손되었으나 다른
묘비의 예를 볼 때 묘(墓)가 분명하며 우측에는 묘비가 없는 후손의 무덤 1기가 조용히 자리
한다.


▲  신윤동 묘의 뒷모습

▲  영해군 이당(寧海君 李瑭) 묘

신윤동 묘역 윗쪽에는 영해군파묘역의 시조인 영해군 이당의 묘가 있다. 묘역 중앙 구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들어앉아 장인과 부인, 후손의 묘를 굽어보고 있는 이 무덤은 동그란 봉분과
고색의 내음이 진한 묘비(묘표), 상석, 날씬한 장명등, 문인석 2기로 이루어져 있다.

영해군(1435~1477)은 세종의 9째 아들로 신빈김씨(愼嬪金氏) 소생이다. 처음 이름은 이장(李
璋)이었으나 나중에 이당으로 갈았으며, 성격이 화목하여 다투는 일이 없었다고 전한다. 7살
에 영해군에 책봉되어 소덕대부(昭德大夫)의 품계를 받았으며, 1477년 42세의 나이로 죽자 성
종은 안도공(安悼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400년이 흐른 1872년에 영종정경(領宗正卿)
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신윤동의 딸인 임천군부인(林川君夫人) 신씨로 영춘군 이인과 길안도정 이의 등 2남1
녀를 두었으며, 보통 부인과 같은 봉분에 묻히거나 봉분을 달리해서 나란히 배치한 것이 보통
이나 영해군은 2단 밑에 부인의 묘를 두었다.
영해군묘는 정확히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무덤 뒷쪽 숲속에는 그의 손자인 완천군 이희(
영춘군 이인의 아들), 완천군의 3째 아들이자 영해군의 증손자인 평성수 이질 묘가 있으나 찾
지는 않았다. (그때는 몰랐음)
묘비 앞면에는 '영해군시 안도공당지묘(寧海君諡安悼公瑭之墓)'라 쓰여 무덤의 주인을 소상히
알려주고 있으며, 뒷면에는 그의 생애가 적혀있으나 마멸이 심해 확인하기가 어렵다.


▲  뒷쪽에서 바라본 영해군묘
(그 너머로 신윤동, 부인 평산신씨, 이기의 묘가 있음)

▲  영해군묘 우/좌측 문인석
장대한 세월에 제대로 지쳤는지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다. 좌측 문인석은
세월이 씌워준 검은 때가 가득해 고색의 멋을 제대로 풍긴다. 세월이
달아준 얄미운 훈장이라고나 할까?

▲  길안도정 이의(吉安都正 李義)묘

영해군묘와 신윤동묘에서 동쪽으로 난 산길을 오르면 바로 길안도정 이의의 묘가 모습을 비춘
다. 동그랗게 솟은 봉분에는 이의와 그의 전/후처 등 3명이 잠들어 있는데, 그 앞에는 장대한
세월이 제대로 태워먹어 온통 검은 피부가 되버린 고색의 묘비(묘표)와 새로 세운 묘비, 상석
, 향로석(香爐石), 문인석 2기를 갖추고 있으며, 묘역 앞에 조촐하게 계단이 닦여져 있다.

이의는 영해군의 차남으로 구체적인 생몰시기는 전하는 것이 없다. 그는 여산송씨 집안의 송
자강(宋自剛)의 딸과 청주한씨인 한명회(韓明澮)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으며, 은계군 이말숙
(銀溪君 李末叔, 한씨부인 소생), 시산군 이정숙(詩山君 李正叔, 송씨부인 소생), 청화수 이
창숙(淸化守 李昌叔), 송계군(松溪君), 벽계도정 이종숙(碧溪都正 李終叔), 옥계군(玉溪君)
등의 아들을 두었다. 그중 특히 벽계도정 이종숙은 황진이(黃眞伊)와 가까웠던 인물로 벽계수
(碧溪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의 묘비에는 '증 명선대부 길안도정행 창선대부 길안정(贈 明善大夫 吉安都正行 彰善大夫
吉安正)'이라 쓰여 있으며, 이의의 손자인 이휘(李徽)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퇴한 공으로
그와 그의 아비, 할아버지 등 3대가 추증되었다. 그리고 이의의 아들인 이말숙의 묘비명에는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 이의와 사별했다고 나와있어 이의는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여겨진
다.

▲  이의묘의 옛 묘비와 새 묘비

▲  조각 솜씨가 일품인 옛 묘비의 이수(螭首)


▲  영춘군 이인(永春君 李仁)묘

영해군파묘역 중심 구역을 둘러보고 서쪽 산자락에 있는 영춘군 이인묘를 찾았다. 묘역 서쪽
구역에는 이인 내외와 부원정 이이 내외의 묘, 그리고 이인의 신도비가 있는데, 이 신도비는
이 묘역의 유일한 신도비로 이인의 높은 위치를 알게 해준다.

이인의 묘는 이인과 부인 유씨<유양(柳壤)의 딸>의 봉분을 비롯해 묘비 1기, 상석 2기, 혼유
석 2기, 장명등, 문인석 2기, 망주석(望柱石) 2기는 물론 무려 신도비까지 갖추고 있어, 영해
군파묘역 중의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묘역의 시조는 분명 그의 부친인 영해군이지만 그
부친보다 묘가 더 있어보여 이인묘가 이 묘역의 실질적인 주인공 같은 인상이다. (영춘군 이
인 묘역이라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
특히 이들 묘역의 무덤들은 무덤 필수품인 망주석이 하나도 없는데 반해 이인 묘에는 망주석
이 있으며, 무덤도 동그란 형태가 아닌 앞은 네모, 뒷쪽은 세모로 총 5각형으로 이루어진 특
이한 모습이다. 동그란 봉분과 네모난 봉분(조선 초까지 많이 나타남)은 많이 봤어도 5각형은
처음이라 참 신선하며, 봉분 밑에는 호석을 둘러 단단히 다진 다음 두툼하게 봉분을 쌓았다.

영춘군 이인(1465~1507)은 영해군의 아들로 자는 자정(子靜)이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 이씨(
신윤동의 부인)의 손에서 자라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다고 하며, 10살 때 정의대부(正義大夫
)의 영춘군에 봉해졌고,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를 거쳐 숭헌대부(崇憲大夫)에 올랐다.
1506년 연산군이 총애하던 흥청 소속의 세인가비의 아비 김숙화의 무고로 이인과 이기 부자(
父子)가 압송되어 모진 고문 끝에 이인은 남해로 유배를 갔다. 다행히 중종반정(中宗反正)으
로 풀려나 복권되어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올랐으며, 1507년 4월 27일, 42살에 사망
했다. 하여 그해 8월 임신일에 지금의 자리에 장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목성(穆成)이다.

이인은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대단했는데, 11살에 어머니 신씨가 세상을 뜨자 3년상을 치
렀고, 그 상이 끝나기도 전에 부친 영해군이 사망하자 다시 3년상을 치렀다. 상례를 잘하여
종친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으며, 평상시 생활이 담박하고, 이름난 꽃을 뜨락에 심는 것을 좋
아했다고 한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으며, 중종반정으로 원종공신에 오른 덕에 집안 묘역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  이인 묘비(묘표)
봉분 사이에 묘비 하나를 두었다.

▲  키 작은 장명등

▲  동자승처럼 생긴 우측 문인석

▲  홀을 쥐어든 좌측 문인석 (우측
문인석도 홀을 쥐어들고 있음)


▲  확트인 이인묘 앞부분
영해군이 묻힌 중심 묘역과 길안도정 이의묘는 숲속에 묻혀있어 시야가 좋지 못하다.
(주변에 보이는 건 나무, 위로는 하늘 뿐) 허나 이인묘는 나무의 눈치들이
적어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산줄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이인 내외 묘의 뒷모습
앞은 네모, 뒤는 세모를 취한 독특한 모습으로 5각형을 이루고 있다.

▲  이인묘에서 바라본 수락산(水落山, 638m)의 위엄

▲  이인 신도비(神道碑)

이인묘에는 특별한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신도비이다. 신도비란 무덤 주인의 생애를 기록한
비석으로 고위 관료와 왕족들의 무덤에만 쓸 수 있던 비싼 존재이다. 이인 역시 부모를 잘만
나 모태부터 왕족이기 때문에 신도비를 지녔다. 하지만 그의 아비인 영해군과 아들의 무덤에
는 신도비가 없으니 이는 중종반정으로 원종공신에 봉해진 탓이 아닐까 싶다.

신도비는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무덤 동남쪽에 세우지만 이곳은 서남쪽에 비석을 두었
다. 땅바닥에 네모지게 바닥돌을 깔고,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 대신 연꽃 무늬와 안상이 새
겨진 두툼한 비좌를 얹힌 다음 백일석(白一石)으로 만든 빗돌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가 여
의주를 두고 다투는 모습을 다룬 머리장식인 이수(螭首)로 마무리를 지었다.
비석의 높이는 273cm로 장대한 세월이 강제로 달아준 검은 주근깨가 많이 끼어있지만 그 덕에
중후한 멋과 고색의 미가 크게 돋보인다. 특히 이수에 새겨진 이무기는 비대칭적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 조각수법이 꽤 섬세하여 은근히 탐이 난다.

이 비석은 1509년 9월에 세워진 것으로 당당하고 기품이 넘치는 모습으로 16세기 초를 대표하
는 비석으로 꼽힌다. 도봉산 자락에는 신도비를 갖춘 조선시대 무덤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
도 이 비석은 단연 갑(甲)이며, 17세기에 세워진 임당 정유길(林塘 鄭惟吉) 신도비(서울 사당
동에 있음)의 모델이 되기도 한다.
빗돌에는 이인의 생애가 빼곡히 담겨져 있는데, 아들 이기의 부탁으로 첨지중추부사 남곤(南
袞, 1471∼1527)이 글을 지었고 글씨는 승정원 주서(注書)인 김희수(金希壽, 1475∼1527)가
썼으며, '목성공신도비명(穆成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는 바로 김희수가 쓴 것으로 여겨진
다. 특히 도봉과 노원, 무수골의 옛 지명인 수철동 등 도봉/노원 지역의 옛 이름과 현재 이름
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지역 지명을 최초로 언급한 기록으로 여겨져 지역 연구에도 큰 열쇠
를 제공해준다. 겉모습만 착할 뿐 아니라 빗돌에 새겨진 내용들도 착한 것이다.

지금은 영해군과 그의 후손들 묘역이 '전주이씨 영해군파묘역'이란 이름으로 지방문화재로 지
정되어 있지만 원래는 이 신도비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묘역 전체
로 확장된 것이다.


▲  현란한 조각 솜씨를 드러낸 신도비 이수
소용돌이치듯 흘러가는 구름들 사이로 2마리의 이무기가 재주를 부리며
여의주를 다툰다. 비록 검은 때가 자욱하긴 해도 아직은 정정한
모습을 자랑해 500년 나이를 무색하게 한다.

▲  이인 묘 밑에 자리한 부원정 이이(富原正 李㶊)와 부인 전주유씨 묘역
이이는 영해군 이당의 증손으로 조용히 살다간 사람이다. 이이 부부의 봉분을
비롯해 세월에 검게 그을린 묘비(묘표)와 상석, 향로석 등이 있다.


무수골을 주름잡던 영해군파묘역을 싹 둘러보니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햇님도 퇴근본능에 따
라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너머로 뉘엿뉘엿 저물고 달님과 땅꺼미가 조금씩 드리우기 시작
한다. 오랜만에 찾은 무수골, 개발도 그 칼날을 접은 곳이라 아직 산골과 시골 분위기는 여전
했다.
집에서 도보로 25~30분 정도면 충분히 안길 수 있는 무척이나 가까운 곳이지만 1년에 고작 1~
2번 가는 것이 고작이다. 집 인근에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하여 도봉
산의 숨겨진 비경, 무수골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81-1 (도봉로169라길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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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7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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