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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7.29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간직한 아름다운 휴양림, 대전 장태산자연휴양림 (형제산, 형제바위)
  2. 2015.09.09 호남의 소금강, 순창 강천산 (강천사, 구름다리, 강천산계곡, 구장군폭포)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간직한 아름다운 휴양림, 대전 장태산자연휴양림 (형제산, 형제바위)



' 대전의 숨겨진 보석, 장태산 자연휴양림 '


▲  장태산 자연휴양림 메타세콰이어숲길


 

한밭이라 불렸던 대전(大田)은 이 땅의 6번째 대도시이다. 너무 빡빡하게 도시화가 이루
어진 서울과는 달리 변두리 태반은 자연 공간으로 남아있는데, 분지 지형인 탓에 계족산
(鷄足山), 식장산(食藏山), 보문산, 장태산, 빈계산 등 쟁쟁한 뫼에 감싸여 있다. 그 뫼
의 품에는 교통이 불편한 산골마을이 아직도 많이 있으며, 만인산(萬仞山)과 장태산에는
천하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꿀리지 않는 높은 수준의 자연휴양림이 2개씩이나 있어 여기
가 대도시 대전이 맞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그런 대전의 자연휴양림 중 장태산에는 다른 휴양림에는 없는 메타세콰이어 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하여 그들의 매력에 단단히 녹아들었고 1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그곳으로
미련없이 길을 떠났다.

아침 일찍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대전역에 두 발을 내
렸다. 여기서 쉴 겨를도 없이 대전시내버스 급행1번(원내동↔대전역)을 타고 도마시장으
로 넘어가 30여 분 정도 억지로 시간을 죽이다가 장태산 골짜기로 들어가는 천하 유일의
노선, 대전시내버스 22번(서부터미널↔장안동)에 몸을 싣는다. (지금은 '기성동-장안동'
으로 노선이 크게 단축되어 대전 시내에 들어오지도 않음)

나를 담은 버스는 대전의 주요 간선로인 계백로를 달리다가 가수원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수원동 시내를 지나니 회색빛 건물만 보이던 차창 밖 풍경은 180도 돌변해 시
골로 바뀌었고, 흑석동(기성동) 이후 첩첩한 산골로 들어서면서 강원도 산골로 순간이동
을 당한 기분이었다. 대도시에서 접한 깊은 산골의 맛은 그윽하고 신선했던 것이다.

그렇게 산골을 파고 드니 장태산의 물을 먹고 자란 장안저수지가 그림 같은 모습을 드러
낸다. 저수지를 지나면 깎아지른 좁은 협곡으로 들어서게 되고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이
마중을 나와 휴양림이 지척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한 굽이를 지나면 휴양림 정
류장에 이르고, 정류장 바로 동쪽에 휴양림 정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버스는 이곳에 나를 뱉어내고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긴 채, 장안동 안쪽으로 총총히 사라
졌다. 장태산의 막다른 산골에 누워있는 장안동은 북쪽으로만 길이 있을 뿐, 나머지 3면
은 싹 산으로 막힌 궁벽한 곳으로 대전에서 가장 깊은 산골이다.


▲  산중에 자리한 장안저수지
겨울 제국이 호수의 아름다움을 시샘했는지 두꺼운 얼음으로 꽁꽁 봉해버렸다.
허나 겨울이 저물고 소쩍새가 울면 호수는 거추장스러운 얼음을 박차고
활짝 기지개를 켤 것이다.

▲ 장태산 자연휴양림 정문 직전 메타세콰이어길
이곳은 휴양림 이전부터 메타세콰이어가 숲길을 이루어 휴양림의 대한 첫인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한다.


 

♠  전국 최초의 민간 휴양림이자 전국에서 유일하게 메타세콰이어 숲을
지닌 아름다운 휴양림, 장태산 자연휴양림 입문

▲  장태산 자연휴양림 정문

대전 서남쪽 변두리에 자리한 장태산(長泰山, 374m)의 북쪽 자락이자 형제산(302m) 서쪽 품에
는 대전의 싱그러운 보석인 장태산자연휴양림이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이곳은 송파 임창봉(1922~2002) 선생이 1972년부터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곳으로 24만 평에
2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휴양림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다가 1991년 5월 전국 최초의 민간
휴양림으로 세상에 문을 열면서 메타세콰이어를 잔뜩 심어 휴양림을 값지게 꾸몄으며, 1992년
부터 공익사업으로 운영해 오다가 2002년 2월에 대전시에 운영권을 넘겼다. 대전시는 이를 인
수하여 새롭게 손질, 2006년 4월 25일 시립 자연휴양림으로 다시 빗장을 열었다.

휴양림 주변은 가파른 산에 꽁꽁 감싸여 있고 계곡(매노천)이 그 한복판을 지나 경관이 매우
수려하다. 특히 메타세콰이어숲을 지닌 천하 유일의 휴양림으로 이곳에 심어진 메타세콰이어
만 약 6,240그루에 이른다.
대전8경의 일원이자 대전의 대표 관광지 12선의 하나로 격하게 추앙받고 있으며, 이제는 대전
을 넘어 천하 굴지의 휴양림으로 그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휴양림 면적은 약 815,855㎡, 하루 이용 가능 인원은 6,000명 정도이며, 숲속의집, 산림문화
휴양관, 숲속수련장 등의 숙박시설과 숲속어드벤처, 삼림욕장, 생태연못 등을 갖추고 있다.
또한 2003년 4월 미국 과학교사인 카슨이 이끼도룡뇽을 발견했는데 그 넓은 아시아에서 유일
하게 이곳에서만 서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만큼 휴양림의 자연환경이 우수하고 청정하다
는 뜻으로 휴양림에서는 그들을 귀엽게 포장해 이곳의 캐릭터로 삼았다. (이끼도룡뇽은 대전
주변에서만 발견된다고 함)

▲  장태산 자연휴양림 표석의 위엄

▲  휴양림의 젖줄, 장태산계곡(매노천)


▲ 장태산 자연휴양림의 아버지, 송파 임창봉 선생의 흉상(胸像)
송파는 충남 논산(論山) 출신으로 대전에서 건설업을 하면서 이곳에 넓게 숲을 닦았다.
그에게 이곳을 인수받은 대전시는 4년 동안 손질하여 2006년 4월 재개장하였고 숲을
조성한 송파의 업적과 뜻을 기리고자 그가 닦았던 메타세콰이어 숲길에
그의 흉상을 조성해 그를 기린다.

▲  장태산 자연휴양림의 자랑이자 꿀단지, 메타세콰이어 숲길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솟은 메타세콰이어의 높이는 30~40m로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모습이 마치 나무들의 사열식을 받는 기분이다.

▲  계곡(매노천)과 잘 어우러진 메타세콰이어 숲길

▲  메타세콰이어 숲길 (관리사무소 방면)

▲  얼어붙은 생태연못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연못 중간에 생태 탐방로가 닦여져 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생태연못

▲  생태연못 부근에 단아하게 들어앉은 녹수정(綠樹亭)

휴양림 관리사무소를 지나면 이곳의 명물이라는 숲속어드벤처가 나온다. 메타세콰이어 윗도리
와 비슷한 높이로 고가(高架) 식으로 설치된 탐방로로 이를 '숲체험 스카이웨이'라 부르며 그
길의 끝에 철골로 이루어진 스카이타워가 설치되어 있다. 그 타워에 오르면 휴양림 일대와 메
타세콰이어의 꼭대기 부분이 훤히 두 눈에 잡히는데 탐방로의 폭이 좁고, 그 밑이 아찔한 높
이라 통행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마치 낭떠러지 위의 낙락장송(落落長松)처럼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메타세콰이어 윗도리를 보
다 가까이서 살펴보라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지만 숲과 그다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하여 잘
가꾸어진 휴양림의 옥의 티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자연 탐방이라고 하지만 이처럼 싱그
러운 자연 공간에 메타세콰이어가 부담을 가질 정도의 인공물을 굳이 지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 숲속 어드벤처 이용 시간 : 3~6월, 9~10월은 9시~18시 (7~8월 9~19시, 11~2월 9~17시)
- 폭설과 폭우, 안전점검 등으로 이용시간은 변경될 수 있음


▲  메타세콰이어숲을 가로지르는 숲속어드벤처 숲체험 스카이웨이

▲  숲체험 스카이웨이 정문

▲  숲체험 스카이웨이


▲  아찔한 높이의 숲체험 스카이웨이

▲  스카이타워를 향해 달려가는 숲체험 스카이웨이
난간 밖은 그야말로 천길 허공이라 염통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다. 어린이는 반드시
어른과 동반해야 뒷탈이 없으며, 탐방로에서 절대로 장난을 치면 안된다.

▲  마치 커다란 주차장 건물 같은 스카이타워

타워 꼭대기로 오르는 길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구조이다. 길의 폭도 좁고, 길도 오로지 하나
이며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허공의 아찔함은 더해만 간다. 만약 타워에서 사고가 생기거나 고
소공포증으로 발이 얼어붙을 경우 정말 난감하게 된다. 자연휴양림에 썩 어울리지 않는 옥의
티 같은 존재. 나중에 휴양림을 손질할 일이 있다면 스카이웨이와 함께 싹 밀어버렸으면 좋겠
다.


▲  스카이웨이 부근에서 바라본 형제산 능선 (저기까지 올라갔음)


 

♠  장태산 자연휴양림 형제봉 주변

▲  생태연못에서 산림문화휴양관으로 인도하는 메타세콰이어숲길 (1)

생태연못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오르면 휴양림 숙소로 쓰이는 산림문화휴
양관과 숲속수련장으로 이어진다. 메타세콰이어가 얼마나 많은지 이 구간에도 아낌없이 포진
하여 눈과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진다.


▲  생태연못에서 산림문화휴양관으로 인도하는 메타세콰이어숲길 (2)

▲  숲속수련장 매점 앞 메타세콰이어 숲길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 매점으로 관리사무소 1층에도 식당 겸 매점이 있다.

▲  숲속수련장

▲  산림문화휴양관


▲  숲속수련장에서 형제산 능선으로 인도하는 메타세콰이어 숲길

휴양림에서 그를 품고 있는 형제산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크게 3가지가 있다. 그중 숲속수련
장에서 오르는 길이 가장 느긋하며, 메타세콰이어도 우거져 있어 풍치가 좋다. 지름길을 원한
다면 생태연못에서 형제바위를 거쳐 가는 길이 있으나 경사가 좀 각박하며, 휴양림 가장 안쪽
에 자리한 숲속의집에서 오르는 길은 경사는 느긋하나 코스가 길다.


▲  숲속수련장에서 형제산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
숲속수련장에서 암석식물원을 거쳐 형제산으로 오르는 길은 다소 지그재그이다.
세상살이처럼 각박한 경사의 압박을 줄이고자 그렇게 길을 닦은 것이다.

▲  형제산으로 오르는 길 (1)
끝없이 펼쳐진 저 산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  형제산으로 오르는 길 (2)

▲  형제산으로 오르는 길 (3)

▲  드디어 도착한 형제산 능선, 그곳에 자리한 8층석탑

형제산 능선에 이르니 뜬금없이 석탑 1기가 마중을 한다. 이곳에 왠 석탑인가 싶어서 살펴보
니 두툼한 바닥돌 위에 얕게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8층의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얹혔다.
탑은 특이하게도 8층 짝수를 이루고 있는데, 7층이 아닐까 싶어서 세어보았으나 아무리 봐도
8층이다. (1층을 기단부로 친다면 7층으로 봐도 됨)
탑의 소상한 사연은 알지 못하나 송파 임창봉 선생이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아니면 마
땅히 세울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1~4층 탑신에는 꽃무늬가 진하게 새겨져 있으며 기존의 석
탑과는 다른 독특한 양식으로 지금은 별볼일 없지만 10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면 20세기 이형
(異形) 탑의 하나로 크게 대서특필될지도 모른다.


▲  형제산 남쪽 봉우리에 자리한 장태루(長泰樓)

형제산 남쪽 봉우리에는 8각형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전망대 역할을 하는 그는 장태산의 이름
을 따서 장태루란 간판을 내걸고 있는데 정(亭)이 아닌 루(樓)를 칭하고 있는 점이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루'급은 아닌데 말이다. 그에 걸맞게 '장태정'으로 이름을 갈았으면 좋겠다.


▲  장태루에서 바라본 장안저수지와 형제산 북쪽

▲  장태루에서 바라본 동쪽 안평산

▲  형제산 정상

▲  형제산 정상에서 바라본 남쪽 (장태산 방면)
이렇게 보니 정말 강원도나 함경도 산골에 파묻힌 기분이다.


형제산(302m)은 장태산휴양림의 지붕으로 휴양림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이다. 정상에 오
르면 장안저수지와 장태산 정상 등이 시야에 잡히나 주변이 온통 높은 산들 투성이라 조망의
범위는 그리 넓지 못하다.


 

♠  장태산 자연휴양림 마무리

▲  세모처럼 솟아난 형제산 붙임바위

형제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온갖 막돌이 신세를 지고 있는 붙임바위가 나온다. 지나
가는 사람들이 소망을 담아 붙이거나 심심풀이로 붙인 돌들이 더덕더덕 붙어있어 붙임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휴양림이며 북쪽으로 내려가면 형제산의
제일 북쪽 봉우리이자 장안저수지를 호수로 품고 있는 팔마정으로 이어진다.
팔마정은 중간에 출렁다리를 건너야 되는데, 그곳까지 가보고 싶었으나 산길에 덜 녹은 눈과
얼음이 가득하여 몸도 사릴 겸, 욕심을 곱게 접어 하늘로 날려보내고 휴양림으로 내려갔다.
겨울 산행에는 그저 안전이 최고지. 팔마정은 아쉽지만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이란 인연에 맡
기면 된다.


▲  형제바위 조망대

정상에서 휴양림으로 조금 내려가면 깎아지른 벼랑 위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걸친 형제바위 조
망대가 나온다. 이곳은 형제바위 윗쪽으로 여기에 올라서면 바로 밑으로 장태산자연휴양림 전
체가 조금의 숨김도 없이 속시원하게 펼쳐진다. 휴양림 전체를 사진에 담고 싶다면 꼭 이곳을
찾기 바란다.


▲  형제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휴양림과 장태산의 첩첩한 산줄기

▲  장태산 산골에 깊게 묻힌 장안동 안쪽

▲  형제바위 (바위는 접근 불가)
형제산을 비롯한 장태산의 명물바위로 그의 모습이 마치 형제처럼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라 하여 형제바위라 불린다. 그를 제대로 보려면
밑에서 봐야 되나 수목의 방해가 적지 않다.

▲  형제바위에서 휴양림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산길

▲  승려 머리 석불과 2기의 석등

산을 내려오니 승려 머리를 지닌 석불(또는 승
려상)이 나를 맞는다.
이곳에 왠 석불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살펴
보니 두 손으로 동자승 하나를 안고 있고, 벌
거벗은 다른 동자승은 그의 오른팔을 붙잡고
있다. 즉 아기를 안고 있는 어미와 같은 인자
한 모습이다.
기존의 석불 양식과는 많이 다르지만 휴양림을
지은 송파 임창봉 선생이 세운 것으로 여겨지
며 석불 좌우에는 무궁화가 새겨진 석등 2기가
그의 주변을 밝혀준다.

▲  동자승을 안고 있는 석불의
감동적인 모습


▲  야생화원
석불 가까운 곳에 야생화의 보금자리인 야생화원이 있다. 허나 혹독한
겨울 제국에서 영혼까지 털린 상태라 화원에는 황량함만이 가득하다.

▲  야생화원 내부

야생화원을 끝으로 진지하게 진행된 장태산자연휴양림 산책은 마무리가 되었다. 비록 휴양림
의 깊숙한 부분과 그를 품은 장태산까지는 살피지 못했지만 휴양림의 어지간한 부분은 다 살
폈으니 그리 아쉬움은 없다. 게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현장은 한번에 몽땅 보거나 한번만 오고
말 것이 아니라 다음에 또 오게끔 약간의 아쉬움을 남겨야 다시 인연이 생길 것이다.
봄이나 늦가을에 오면 아름다움에 젖은 휴양림의 진면목을 제대로 누릴 수 있건만 한겨울에
인연이 닿아 이렇게 다소 아쉬운 나들이가 되었다. 허나 겨울에 잠긴 휴양림의 모습도 제법
아름다웠다. 겨울도 이런데 봄과 늦가을은 오죽하랴.

휴양림 정류장으로 나오니 시간은 벌써 15시가 되었다. 마침 버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 정
류장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장태산휴양림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대전 22번 버스가 다가
와 활짝 입을 벌린다. 평일이라 장안동과 휴양림 수요는 거의 없어 한산한 상태로 속세로 나
왔다.
이렇게 하여 장태산자연휴양림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 대전 장태산자연휴양림 찾아가기 (2018년 7월 기준)
* 대전역(대전역 동광장, 역전시장, 목척교)과 1호선 중앙로역(6번 출구), 1호선 서대전네거
  리역(3번 출구), 도마시장, 가수원시장에서 대전시내버스 200번을 타고 흑석네거리나 기성
  농협 하차 → 흑석
  네거리나 기성농협에서 장안동으로 가는 22번 시내버스(30~50분 간격)로 환승
* 숲속의집과 산림문화휴양관에서 1박을 머물 수 있다. 그 외에 야영장도 있으며 자세한 정보
  (이용료)는 아래 장태산자연휴양림 홈페이지를 참조한다.
* 소재지 : 대전광역시 서구 장안동 산46 (장안로 461 ☎ 042-270-7883)
* 장태산자연휴양림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숲속의집과 산림문화휴양관, 야영장
  이용 정보와 이용료, 숲체험 프로그램 정보가 있음)


▲  꿈 속의 별천지 같은 장태산자연휴양림을 뒤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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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7월 1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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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소금강, 순창 강천산 (강천사, 구름다리, 강천산계곡, 구장군폭포)

 


' 호남의 소금강, 순창 강천산(剛泉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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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다리 전망대에서 바라본 강천산

천우폭포 숲길 구장군폭포

▲  천우폭포 숲길

▲  구장군폭포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절정을 누리던 8월 한복판에 호남의 소금강(小金剛)으로 격하게 찬양
받는 순창 강천산을 찾았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7시에 떠나는 전주(全州)행 직행버스를 타고 근 3시간을 달려 호남의 오
랜 중심지인 전주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잠시 숨 좀 고르다가 순창(淳昌)으로 가는 직행버스
로 다시 1시간을 내달려 고추장의 고장인 순창에 이른다.

순창에서 11시 반에 강천산(강천사)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기다리니 시간이 다되도록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이거 무단 결행이 아닌가 걱정이 들던 찰라, 버스는 딱 시간에 맞추어 슬그머
니 타는 곳으로 들어와 입을 벌린다. 그 버스를 타고 다시 10분을 11시 40분에 강천산 종점에
도착했다.


♠  강천산(剛泉山) 들어서기

▲  강천산 관광안내소 내부의 강천산 모형도

순창읍에서 강천산으로 가는 중에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비가 조금씩 창밖에 한줄기 낙서를 휘
갈기고 있었다. 그날 기상청 날씨예보에서는 비가 온다는 내용이 없었는데 하늘이 그걸 비웃듯
선전포고도 없이 대지를 적시고 있는 것이다. 비에 대항할 장비를 하나도 갖추지 못했는데, 이
거 어찌해야 되나 난감해 하던 중, 버스는 강천산 종점에 도착해 바퀴를 접었다.

비는 그렇게 많이 오는 건 아니었지만 우산이 필요할 정도로 꾸준히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우
선 제2주차장 부근에 있는 강천산 관광안내소로 피신해 비가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관광안내소에는 강천산을 축소한 모형도를 비롯해 순창군 관광안내도와 관광정보, 고추장과 여
러 특산품 정보 등을 담고 있다.

순창의 제일 명소인 강천산(583,7m)은 순창 서쪽에 자리한 명산으로 산세가 수려하고 숲이 무성
하며, 폭포와 잘생긴 바위가 많아 호남의 소금강으로 일컬어진다. 1981년 1월 7일 이 땅에서 최
초로 군립공원(군청에서 지정한 공원)으로 지정된 현장이기도 하며, 강천산(왕자봉)을 비롯하여
광덕산(565m), 산성산(연대봉, 603m) 등의 봉우리를 지니고 있다. 또한 서쪽으로 담양 금성산성
과 이어져 있다.
강천산의 주요 명소로는 강천사와 삼인대, 병풍바위, 구장군폭포, 약수폭포, 천우폭포, 구름다
리, 용소 등이 있으며, 내장산, 백암산(白巖山)과 함께 가을 단풍명소로 이름 높다. 관광객 상
당수는 걷기에 별 부담이 없는 강천산계곡길을 이용해 구장군폭포나 구름다리까지 다녀오며, 넉
넉잡아 3시간 정도 걸린다.

관광안내소에서 20분 정도를 머물다가 약간의 기대를 품으며 바깥에 나가보았다. 허나 전혀 나
아진 것은 없었다. 마침 점심시간이고 하니 우선 점심밥을 먹으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관광안내소 서쪽에 펼쳐진 상가촌에는 여느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식당과 기념품점, 민박집이 즐
비하다. 어느 식당이 좋을까 재고 있는데, 평일이라 그런지 마땅한 호객행위는 없었고, 다만 완
도식당 1곳만 방황하는 나를 향해 적극적으로 호객을 한다. 그 식당 주인할매가 먹고 가라고 자
꾸 손짓을 하니 마지못해 그곳에 들어가 자리를 폈다.

평일 점심시간이라 손님은 하나도 없었고, 그건 다른 식당도 비슷했다. 내가 추천 메뉴를 물으
니 주인할매는 산채비빔밥을 권했다. 산에 왔으니 산채 나물이 들어간 비빔밥이 제일 무난하겠
지. 혼자 먹기에도 별 부담이 없고, 음식 메뉴 가운데 가격도 제일 낮으니 말이다. 허나 그 가
격은 무려 7,000원... 그래서 그걸 달라고 주문을 하니 10분 뒤에 잘 차려진 산채비빔밥과 갖은
반찬들이 내 앞에 펼쳐진다.


▲  완도식당에서 먹은 산채비빔밥의 위엄

여러 산채나물이 버무러진 산채비빔밥을 중심으로 6가지의 정갈한 반찬과 된장국이 나왔다. 반
찬도 죄다 풀이며, 된장국에는 감자와 두부, 파만 들어있다. 주인할머니는 더 먹으라며 공기밥
1그릇을 살짝 건넨다.
시장기가 폭발하여 비빔밥과 반찬, 된장국을 싹싹 긁어먹었다. 그렇게 기분좋게 점심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다행히 빗방울도 조금은 줄어들어 그대로 강천산으로 밀고 들어갔다.


▲  강천산계곡 (공원관리소 직전)

가촌과 제1주차장을 지나니 반갑지 않은 존재가 나그네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본다. 바
로 입장료를 징수하는 공원관리소 매표소이다. 처음에는 1,000원 내외로 생각했는데, 확인해 보
니 무려 3,000원.. 학생과 군인은 2,000원씩이나 한다. 강천산이 우리나라 최초의 군립공원(郡
立公園, 1981년에 지정됨)이긴 하나 군립공원의 입장료 치고는 너무 비싼 감이 든다. 허나 입장
료를 깎을만한 마땅한 명분이 없어 3,000원의 거금을 내고 매표소를 통과했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은 지리산(智異山), 최초의 도립공원은 금오산(金烏山)임>


▲  병풍바위와 병풍폭포 (왼쪽이 중심 폭포임)
비록 두 폭포의 물줄기와 높이는 현저히 다르지만 나란히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똑같다.


공원관리소에서 씁쓸한 마음을 삼키며 안으로 들어서니 놀라운 풍경 하나가 나의 두 발을 묶는
다. 바로 병풍바위와 병풍폭포이다.
병풍바위는 그 바위 밑을 지나는 그 어떤 사람도 깨끗해진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데, 이는 강천
사에서 지어낸 말인 듯 싶다. 강천사를 목전에 둔 지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속세(俗世)의 번
뇌를 벗어던지고 들어와 해탈(解脫)을 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그런 병풍바위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아래로 쏟아지고 있는데, 이를 병풍폭포라고 한다. 폭포는
2줄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의 커다란 폭포가 중심폭포로 높이 40m, 물폭은 15m이다. 1분당
쏟아지는 낙수량은 5톤이라고 한다. 그 동쪽에는 가느다란 물줄기의 폭포가 있는데, 높이 30m,
물폭 5m이다. 이들은 겉으로 보면 자연산 같지만 아쉽게도 인공폭포로 2003년에 지어졌다, 그렇
다고 바위까지 인공은 아니며, 그냥 물줄기만 낸 것이다. 서쪽 폭포의 물줄기를 자세히 보면 자
연산 폭포가 아님을 눈치챌 수 있다.
한 덩어리로 어우러진 폭포와 바위의 위엄, 멋드러진 풍경 앞에 앞서의 아쉬운 마음은 싹 가시
고 말았다. 구장군폭포 만큼은 아니지만 장쾌하게 쏟아지는 물줄기에 약간의 더운 기운도 목을
붙잡고 줄행랑을 친다.

강천산은 폭포의 성지(聖地) 답게 폭포가 무지 많다. 병풍폭포를 시작으로 천우폭포, 약수폭포,
용머리폭포, 구장군폭포, 비룡폭포 등이 마치 꽃잎이 여기저기 날아가 앉은 듯 경승을 한층 돋
구고 있으며, 이중 구장군폭포가 단연 으뜸이다.

참고로 병풍폭포에서 산림욕장 데크산책로가 시작된다. 계곡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닌 산자락 숲
길로 계곡길과 적절히 거리를 두고 있으며, 전망대와 황우제골, 팔각정을 거쳐 구름다리 남쪽까
지 이어진다. 또한 강천산계곡길은 웰빙산책로로 삼아 공원관리소에서 구장군폭포까지 마음 편
히 맨발로 걸을 수 있게끔 흙길을 잘 다졌다.


▲  강천산계곡 (병풍바위와 용소 사이)
보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는 계곡물이 경쾌하게 졸졸졸~♪ 노래를 부르며
큰 세상으로 흘러간다.

▲  녹색의 진한 물결 강천산계곡 탐방로

▲  계곡에 뿌리를 내린 조그만 돌탑들
중생들의 조촐한 소망이 깃들여진 돌탑들이 계곡 물결 위에 뿌리를 내렸다.
겉으로 보면 물결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지만 겉보기와 달리 견고하여
거의 바위처럼 굳어버렸다. 돌탑을 쌓은 이들의 소망이 굳게 이루어진 것일까?

▲  길가에서 만난 작은 폭포
가파른 바위에 한줄기 길을 내고 내려오는 조그만 폭포
속세에서 그에게 지어준 이름은 아직 없는 모양이다.

▲  무명의 폭포를 지나고 ~ 신록이 가득한 산길
저 풍경을 집으로 고이 훔쳐와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현실은 그러지를 못한다. 그냥 여기서 실컷 누리고 가야 된다.

▲  현대사의 쓰라린 현장 회문산지구 전적비

원앙사육장 동쪽에는 회문산지구전적비가 초라하게 자리를 지킨다. 이 비석은 1954년 회문산에
머물던 북한군의 잔당, 빨치산을 토벌한 기념으로 세운 전적비로 현대사의 가슴 쓰린 현장이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도망치지 못한 북한군 잔당 1만 명은 지리산을 비롯해 험준한
산에 들어가 항쟁을 벌였다. 특히 지리산 일대에 머물던 빨치산이 지독하여 1953년 7월 휴전 이
후에도 그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는 계속되었으며, 1956년 7월 비로소 토벌이 마무리 되었다.
그 기나긴 시간 지리산과 빨치산 은거지 주변에 살던 많은 양민들이 원통한 넋이 되었으며, 거
창 양민학살사건을 비롯한 여러 학살사건이 일어나 세상을 경악하게 했다. 그들 가운데 빨치산
에 적극 가담하고 도운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협박에 못이겨 국군과 빨치산 양쪽의 눈치를 보
던 순진한 백성들이었다.

전적비가 다소 외진 곳에 있어 지나치기가 쉽다. 상쾌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만나는 씁쓸한 현장
이긴 하지만 우리가 영원히 짊어지고 가야되는 그러나 다시는 재방송되서는 안되는 이 땅의 역
사이다.


♠  강천산 천우폭포(天雨瀑布)

병풍바위에서 15분 정도 올라가면 송음암이란 기암절벽이 나온다. 그 울퉁불퉁한 피부에 물줄기
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는데 이를 천우폭포라고 부른다. 겉으로 보면 자연산처럼 보이지만 병
풍폭포와 마찬가지로 바위에 물줄기를 낸 인공폭포로 하늘에서 비가 오면 자연히 폭포가 이루어
진다는 뜻에서 천우폭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폭포 앞에는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솟은 메타세콰어어 숲길이 짧게 숲길을 이루고 있으며, 폭포
와 계곡이 어우러져 선경(仙境)의 극치를 진하게 우려내니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다. 나 역시 이곳 풍경에 제대로 퐁당퐁당 빠져버렸다.
나무 그늘에는 폭포를 구경할 수 있도록 벤치가 여러 개 베풀어져 있으며, 강천산 명소 가운데
구장군폭포와 더불어 단연 으뜸으로 치고 싶은 곳이다.

  천우폭포 앞 메타세콰이어 숲길

여름이 이쁘게 채색을 들인 아름다운 메타세콰
이어 숲길, 늘씬한 자태로 쭉쭉 솟아나 하늘을
가린 숲길은 나그네의 마음을 다시금 들었다가
놓는다.
나무가 불어준 산내음에 속세의 번뇌를 저만치
날려 보내며 계속 길을 재촉한다. 허나 번뇌가
너무 무거워 인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해탈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  천우폭포 앞 녹음이 깃든 숲길
자연과 여름이 앞다투어 깃들여진 탓인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  푸른 물감이 첨가된 듯한 용소(龍沼, 아랫용소)

강천산에는 용소라 불리는 담(潭)이 2개가 있는데, 여기는 아랫용소이다. 구름다리 부근에 있는
윗용소에는 숫용이, 이 용소에는 암용이 살았는데 세상이 혼란해지면 서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 있다.
물이 워낙 청정하여 밑바닥이 거의 다 보이지만 겉보기와 달리 수심이 깊어 옛날 사람들이 수심
을 재고자 명주실을 내리니 딱 한 타래가 들어갔다고 한다. 그만큼 깊다. 괜히 안전 장비 없이
푸른 색의 유혹되어 무책임하게 풍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  강천사의 일주문(一柱門)인 강천문(剛泉門)

용소를 조금 지나면 강천문이라 불리는 맞배지붕 문이 중생을 맞는다. 이 문은 강천사의 일주문
으로 다른 절의 일주문보다 규모가 좀 있으며, 절의 이름 대신 강천문이라 쓰인 현판을 내걸었
다. 즉 강천사의 일주문이란 뜻이다.


♠  강천산 품에 포근히 안긴 작은 고찰 ~ 강천사(剛泉寺)

일주문을 들어서면 수해(樹海)에 가려 보이지 않던 강천사의 조촐한 산문이 조금씩 모습을 비추
기 시작한다. 2층짜리 누각을 비롯하여 현대식으로 지어진 해우소(解憂所)와 세심당, 염화실 등
이 차례대로 나타나며, 그 다음에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이 이곳의 오랜 보물인 5층석탑과 나란
히 나타난다.

강천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강천사는 강천산 유일의 절집으로 887년 도선국사(道詵
國師)가 창건했다고 하나 근거는 없다. 1316년 덕현(德賢)이 중창하면서 5층석탑을 세웠다고 하
며, 강천산이란 이름은 이 절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1482년 신말주(申末舟, 1439~?)의 부인 설씨가 '강천사모연문(募緣文)'을 작성했는데, 바로 그
해 설씨 부인의 지원으로 중창되었다고 한다. 신말주는 세조 때 공신(功臣)인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으로 1470년 순창으로 내려와 살았다고 하며, 모연문에 따르면 옛날에 신령(信靈)이 광덕산
가운데서 명승지를 골라 그곳에 초암(草庵)을 짓고 지낸 것에서 강천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세월이 계곡처럼 흘러 절이 폐허의 지경에 이르자 중조(中照)가 서원을 내어 시주를 모아
중창했는데, 부근에 부도(浮屠)가 있으므로 절 이름을 임시로 부도암(浮屠庵)으로 갈았으며, 이
때 절은 비록 소소한 규모지만 청정한 수도처로서 유명했다고 한다. 허나 절이 다시 쇠락에 빠
지자, 증조가 신말주의 부인인 설씨의 지원을 받아 중창을 했다.

임진왜란 시절에 파괴되어 1604년 소요(逍遙)대사가 중창했으며, 1760년(영조 36년)에 출판된 '
옥천군지'에는 당시 절의 부속암자로 명적암, 용대암, 연대암, 왕주암, 적지암 등 5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나와있어 지금과 달리 왕년에 꽤나 잘나갔음을 보여준다.
1855년 금용(金容)이 중창했으며, 6.25전쟁으로 완전히 쑥대밭이 된 것을 김장엽 주지가 1959년
첨성각을 짓고, 1977년 관음전, 1978년 보광전을 새로 지었다. 1992년 보광전을 대웅전으로 이
름을 갈았고, 이후 계속 불사를 벌여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런데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심우당과 염화실, 세심당 등 6~8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5층석탑과 모과나무가 있다. 그외에 파괴된 석등과 석주의 일부가 대웅전 뜨락에 있으며,
용소 근처에 조선시대 부도 4기가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혀 산골이 깊고 물이 맑으며, 병풍처럼 들어선 숲이 고요한 바다를 이루
고 있어 그야말로 금강산이 부럽지 않은 곳이다. 비록 옛날의 영화는 거진 다 사라지고 말았지
만 새소리와 솔바람, 산바람 소리가 전부인 그야말로 고적하고 호젓한 산사로 심술쟁이 번뇌가
따라오다가 졸도를 할 정도로, 산새도 넘어오다 날개가 마비될 정도로 깊은 산골에 묻혀 있다.

강천사는 대웅전과 그 뜨락만 둘러보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승려들의 생활공간이고, 절이 조그
만하기 때문에 대웅전 뜨락에서도 계곡길과 나란히 한 담장 너머에서도 훤히 바라보인다.

▲  경내 동쪽에 새로 지은 2층 문루

▲  염화실과 세심당


▲  강천사 약수터

산사에 꼭 하나씩은 있는 약수터, 강천사도 예외는 아니다. 강천산이 베푼 청정한 옥계수가 쉼
없이 쏟아져 나와 나그네의 목마름을 해소해준다. 빨간 바가지에 가득 담아 한 모금의 신세를
지니 몸 속에 낀 속세의 때가 싹 가신 듯 목구멍이 즐겁다며 쾌재를 부른다.


▲  대웅전 뜨락에 놓인 아픈 상처들 (부도탑)

풀이 곱게 입혀지고 아름드리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대웅전 뜨락에는 5층석탑과 근래에 심은
석등(石燈) 외에 석주와 6.25때 파괴되어 일부만 남은 부도와 석등 등이 초췌하게 자리를 지킨
다. 왼쪽은 조그만 부도탑으로 여겨지는데, 지붕돌과 상륜부(相輪部), 바닥돌과 탑신(塔身)의
일부만 간신히 남아있으며, 바닥돌 위에 잎이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가 섬세하게 남아 초라해진
자신을 위로한다.
그 동쪽에는 석주(石柱)로 보이는 기둥이 서로의 고된 몸을 기대고 있고, 그 곁에 맷돌처럼 보
이는 동그란 돌이 놓여져 있는데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  대웅전과 대웅전 뜨락 (5층석탑)

강천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61년에 지어졌다. 불
단에는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후불탱화와 지장시왕탱, 산신탱, 칠성탱, 신중탱 등의 탱
화가 걸려있어 칠성각과 산신각 등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강천사5층석탑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92호

대웅전 뜨락에는 보기에도 정말 안쓰러운 5층석탑이 보호철책에 둘러싸여 상처투성이의 고단한
몸을 지탱하고 있다.
이 탑은 강천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1316년에 덕현
이 세웠다고 한다. 1중의 기단 위에 5층
의 탑신을 세웠는데, 1층과 2층, 3층 옥개석(屋蓋石)이 크게 깨져나갔고, 4층과 5층 탑신도 그
리 성하지가 못하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세월의 장대한 흐름과 자연의 괴롭힘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6.25 때문이다. 그 전쟁은 이 땅의 민중 뿐만 아니라 문화유산까지도 불구를 만든 것
이다.

탑신에는 양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옥개석에 높은 3단의 층급받침이 있고 1층에 비해 2층 이상
이 급격히 줄어드는 점에서 신라 석탑 양식을 기본으로 부분적으로 백제 석탑 양식이 반영된 고
려 석탑으로 추정된다. 상륜부는 노반(露盤)이 사라진 채, 복발과 보륜(寶輪)이 남아있다.

대웅전 바로 앞에는 명문이 새겨진 괘불대가 3개 있는데, 그중 하나에 '乾隆八歲十五(건륭8세15
)'라고 되어 있어 1700년대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선방(禪房)으로 쓰이는 심우당(尋牛堂)
대웅전 서쪽 높다란 곳에 터를 닦고 자리한 심
우당은 선방이다. 심우당이란 이름은 선종(禪宗)
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이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10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되었다.


▲  삼인대(三印臺)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7호

강천사 남쪽 계곡 너머에 삼인대 비석을 품은 1칸짜리 기와집이 있다. 계곡 건너에 자리한 탓에
그의 존재와 사연을 모르는 무심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무심히 지나
가기 일쑤인데, 삼인대에 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燕山君)이 폐위되고 그의 아우인 중종이 익선관(翼善冠)
을 쓴 채 왕위에 올랐다. 박원종(朴元宗)을 비롯한 반정파(反正派)들은 반정에 반대한 신수근(
愼守勤)을 죽이고, 왕을 협박하여 그의 딸이자 중종의 왕비인 신씨<단경왕후(端敬王后)>를 폐위
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여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를 왕비로 맞이하게 했다.

1515년 장경왕후가 후사도 없이 세상을 뜨자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
현감 유옥(柳沃) 등 3명이 비밀리에 강천산에 모여 당시로써는 큰일 날 소리인 신씨의 복위(復
位)를 주장하며, 각자의 관인(官印)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上疏)를 올리기로 결
의를 했다. 그때 그들이 관인을 걸고 맹세한 곳을 3개의 관인을 걸던 곳이라 하여 삼인대라 부
르게 되었다. 허나 그들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조선의 여제(女帝)로 악명을 떨친 문
정왕후(文定王后) 윤씨가 비어있는 국모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1744년 홍여통(洪汝通), 윤행겸(尹行謙), 유춘항(遊春恒) 등 순창 선비들이 삼인대의 사연
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웠고, 대학자 이재(李縡, 1680∼1746)가 비문(碑文)을, 민우수(閔遇洙,
1694∼1756)가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유척기(兪拓基, 1691∼1767)가 전서(篆書)를 썼다. 비각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1칸으로 비석의 높이는 157cm, 너비 80cm, 두께 23cm이다.

삼인대는 1963년부터 여러 차례 보수를 했으며, 1978년 삼인대 비석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여
옆에 검은 피부의 비석을 만들었다. 또한 1994년 지역 사람들에 의해 '삼인문화선양회'가 결성
되어 1995년부터 매년 8월 삼인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  삼인대 절의탑(節義塔)
삼인대 3인방의 절의를 기리고자 근래에 쌓은 탑으로 탑 꼭대기에 하얀 돌을 심어
그 피부에 절의탑이라 새겼다.

▲  비각 안에 소중히 담긴 삼인대 비석

▲  '삼인대비'로 시작되는 비석의 좌측
글씨가 근래 새겨진 듯 매우 또렷하고 정정한 모습이다.

▲  강천사 모과나무 - 전북 지방기념물 97호

삼인대입구에는 강천사의 또 다른 오랜 보물인 모과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300년 정도 묵은 것
으로 높이 20m, 둘레 3.1m의 노거수(老巨樹)이다. 강천사 승려가 심은 것으로 여겨지며, 관상용
으로 인기가 좋아 5월에 홍색 꽃을 피운다. 또한 9월에는 황색의 열매가 피어 속세에 모과를 제
공한다.

나무를 살피니 녹음(綠陰)에 젖은 잎파리만 보일 뿐, 열매는 어디 숨었는지 눈에 들어오질 않는
다. 나무 주변으로 붉은 백일홍이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그의 주변을 화사하게 맴돈다.


♠  강천산 구름다리와 구장군폭포

▲  윗용소
이곳에는 숫용이 살았는데, 세상이 혼란해지면 아랫용소에 암용과 함께
서로 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전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전설)


강천산의 중심 길이자 공원관리소부터 줄곧 하나의 길로 이어진 강천산계곡길이 윗용소에 이르
면 2갈래로 갈린다. 물론 그 이전에도 숲속데크산책로다 대나무숲길이다 해서 갈림길이 여럿 있
었지만 방향을 두고 그리 갈등은 없었는데, 여기서는 갈등이 생긴다. 이유는 여기서 용소를 건
너 직진하면 구장군폭포이고, 오른쪽 까마득한 계단길을 오르면 전망대와 구름다리로 이어지는
데, 구장군폭포와 구름다리를 모두 보고 싶기 때문이다.

푸른 물감이 흐드러진 듯, 순수함을 자랑하는 윗용소는 강천사 밑의 용소와 구별하기 위해 그렇
게 부른다. 상류에서 내려온 물이 암반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와 용소를 이루며, 여기서 잠시
비를 피하고자 20분 정도 머물렀다.

비가 어느 정도 가늘어지자 먼저 구름다리로 가기로 했다. 구름다리와 전망대까지는 0.2km라고
하지만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급해 체감거리는 0.5km 정도 되는 듯 싶다. 계단을 힘겹게
오르니 그 언덕 정상부에 마치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누각처럼 전망대가 보이고, 그 전망대로
오르니 천하일품의 조망(眺望)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 조망 앞에 조금 전의 고단함과 날씨에
대한 서운함이 싹 가셔버린다.


▲  구름다리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 구름다리와 강천산계곡

구름다리 동쪽 전망대에 발을 딛으면 주황색이 칠해진 강천산의 명물 구름다리와 장군봉, 강천
산계곡 상류가 두 눈에 바라보인다. 비록 첩첩산중이라 보이는 범위는 좁지만 강천산계곡을 둘
러싼 여러 봉우리가 비슷한 높이에서 바라보이고, 녹음에 젖은 강천산의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실감나게 둘러볼 수 있다.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바로 구름다리와 이어지고, 동쪽으로 가면 강천산계곡으로 이어진다.
허나 여기까지 왔으니 구름다리의 아찔함과 그 위엄을 체험해봐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  강천산 구름다리

▲  구름다리를 건너다 - 남해대교의 축소판을 보는 듯 하다.

▲  밑에서 올려다본 구름다리의 아찔함

강천산의 인공적 명물인 구름다리는 강천산계곡 상류 협곡에 설치되어 있다. 길이 75m, 높이 50
m로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다리가 조금씩 꿈틀거려 나그네의 염통을 제대로 오므라들게 만든다.
게다가 아래를 바라보면 아찔한 현기증에 눈을 감게 만들어 다리를 건너지 않고 꼬랑지를 내리
는 사람도 적지 않다.

다리의 길이가 75m라고 하나 실제 체감거리는 능히 100m를 넘는다. 짧은 거리를 믿고 다리를 건
너니 정말 그 아찔함에 나도 모르게 두려운 마음이 생겨난다. 다리 바닥에는 4개의 작은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 있는데, 그 구멍을 통해 아래가 훤히 보인다. 밑을 보면 현기증이 날 것 같
으니 천상 눈은 다리 건너편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쫄깃해진 염통을 부여잡고 양쪽 난간을 잡아
걸음을 빨리 했다.
분명 건너편이 가까이에 보이는데도 쉽사리 와 닿지가 않는다. 75m가 이렇게 길었단 말인가..?
두려운 마음이 그 거리마저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리 위에서 사진이라도 담았어야 했는데, 다리
의 아찔함에 그럴 여유를 부리지 못하고 건너 버렸다.

건너편으로 넘어가 내려가는 길을 찾았으나 지도를 잘못 봐서 올라가는 길만 있는 것으로 착각
했다. 여기서 700m 정도 오르면 신선봉(425m)이 나오는데, 나의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다. 게다
가 비까지 조금씩 내리고 있어 산을 오를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 잡고 다리를
다시 건너 동쪽으로 돌아왔다. 본의 아니게 다리를 왕복한 셈이다.

동쪽 전망대로 돌아와 동쪽으로 나 있는 내리막길을 거쳐 계곡으로 내려왔다. 계곡에는 비를 피
할 수 있는 조그만 쉼터가 있는데, 여기서 구름다리의 위엄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마치 구름 위
에 떠 있는 듯한 다리, 마침 용감한 나그네 1명이 다리에서 계곡 상류를 향해 사진을 찍고 있었
다. 그 광경을 보며 그저 다리를 건너는데 급급했던 내 자신이 조금은 씁쓸해진다.


▲  구장군폭포로 인도하는 오솔길

구름다리 밑에서 계곡 오솔길을 따라 10분 정도 가면 산수정이란 정자와 구장군폭포가 나온다.
이 구간은 앞서의 길과는 약간은 틀리다. 계곡을 3번 정도 건너야 되는데, 지금까지는 모두 다
리가 있었지만 이 구간은 다리와 함께 두 다리에 물을 묻히며 직접 계곡을 건너는 구간도 마련
되어 있다. 다리에 물을 묻히지 않고 편하게 가고 싶다면 다리를 건너면 되고, 강천산계곡길의
특징인 맨발 산책이나 계곡물을 원하면 다리 옆에 마련된 길로 물살을 헤치며 건너면 된다. 직
접 건너는 구간은 통행에 별무리가 없도록 바닥을 잘 다졌기 때문에 안심해도 된다.


▲  구장군폭포 곁에 세워진 산수정(山水亭)
구장군폭포의 명쾌한 물줄기를 보며 쉴 수 있는 정자로 근래에 지어졌다.

▲  수직으로 가파른 벼랑에 물길을 낸 구장군폭포(九將軍瀑布)

강천산계곡 산책로의 종점이라 할 수 있는 구장군폭포는 강천산의 얼굴이자 백미(白眉)이다. 강
천산에 왔다면 꼭 봐야 되는 경승지로 이곳을 눈에 넣지 않고는 강천산에 갔다고 우길 수 없다.
폭포 물줄기가 2개로 이루어져 있어(서쪽에 깎아지른 벼랑인 거북바위에도 여러 물줄기가 있음)
둘 다 구장군폭포로 생각하기 쉽지만 진품은 오른쪽 폭포이다. 왼쪽 폭포는 근래에 물줄기를 낸
인공폭포로 겉으로 보면 거의 자연산처럼 보인다.

구장군폭포는 높이가 무려 120m에 이르는 3단 폭포로 제일 윗부분은 수직으로 거의 70m 가까이
떨어져 장관을 이룬다. 그렇게 급하게 낙수(落水)한 물은 조금은 완만한 2단과 3단 부분을 거쳐
아래로 떨어지는데, 이들 물이 옹기종기 모인 담을 용소라고 하며, 이곳에 모인 물은 청랭한 산
공기를 싣고 속세로 흘러간다.

폭포 맞은편에는 산수정과 여러 벤치를 두어 폭포를 구경하며 두 다리를 쉬도록 배려했고, 용소
앞에는 보다 가까이에서 폭포를 구경하도록 나무도 조망대를 만들었다. 폭포 부근에는 남근석과
사랑 관련 조각품들이 있는 공원, 강천제2호수, 수좌굴이란 자연굴이 있다. 강천제2호수는 강천
산계곡 상류에 만든 산중호수로 호수 주변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며, 강천제1호수는 강천산 입
구에 있는 강천호를 일컫는다.

구장군폭포에서 느긋한 산책로는 끝을 맺으나 그 길이 산길로 바뀌는 것일 뿐, 완전히 끝난 것
은 아니다. 여기서 계곡을 따라 15분 정도 가면 비룡폭포가 나오며, 연대암터를 지나면 금성산
성(金城山城, 사적 353호) 동문(東門)에 이른다.


▲  구장군폭포 용소

▲  구장군폭포 (오른쪽이 진품)

▲  구장군폭포 서쪽 벼랑 (거북바위)

구장군폭포는 말그대로 9명 장군의 폭포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때는 삼한(三韓)시대, 마한(馬韓) 장수 9명이 전쟁에서 패해 이곳으로 쫓겨왔다. 그들은 여기서
자결을 하여 치욕을 씻고자 했으나, 그중 1명이 '자살을 할 바에는 차라리 1명의 적이라도 더
죽이는 것이 좋지 않겠소?'
제안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장수들은 다들 힘을 얻어 다시 전장으로 나가 승리를 거뒀다고 하며, 그래서 구장
군폭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이야 뭐 어쨌든 이 폭포는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고
돌아온 장수마냥 위엄이 상당하며, 폭포와 그를 껴안은 거북바위의 위용 또한 대단하여, 아무리
만물의 영장을 칭하며 설치는 인간을 보기 좋게 주눅들게 만든다. 인간이 아무리 대단하다 설친
들, 대자연의 작품 앞에는 그저 조그만 개미에 불과하다.


▲  구장군폭포 부근에 마련된 공원과 돌탑

▲  실로 거대한 거북바위의 위엄

구장군폭포를 둘러보고 잠깐 쉬려고 자리를 물색했는데, 산수정과 공원 벤치들은 죄다 관광객들
이 점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적이 드문 강천제2호수 밑으로 가서 의자에 벌러덩 누우며, 잠시
휴식 시간을 갖는다. 다리도 지치고 했으니
말이다. 잠까진 들지 않아 꿈나라까진 가지 않았지
만 강천산 자체가 꿈속에서나 나올 법한 세계이니 굳이 따로 꿈나라를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1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다가 강천산과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고 가기 싫은 속세로 힘 없는 발걸
음을 옮긴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비룡폭포나 금성산성, 강천산 정상까지 흔쾌히 가고 싶었지만
그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구장군폭포까지였다. 강천산을 찾는 사람들 상당수는 강천산에
중심 산길인 강천산계곡길을 따라 구장군폭포까지만 보고 다시 내려간다. 구름다리를 빼고는 경
사가 급하거나 힘든 구간이 없어 그냥 계곡만 졸졸 따라가면 되며,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도
충분하다. 그래서 강천산계곡길을 맨발산책로라 부르기도 한다.
내려갈 때는 신발을 벗고 강천사까지 맨발로 걸었는데, 발에 크게 위해가 되는 곳은 없다. 계곡
에 여러 차례 발을 담구며, 흙과 부드러운 스킨쉽을 즐기니 내려가는 길은 그저 즐겁기만 하다.

강천산 상가촌으로 내려가니 마침 속세로 나가는 직행버스가 요란하게 심장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걸 놓치면 꼼짝없이 40분 이상을 기다려야 되기 때문에 서둘러 뛰어가 그 버스를 타고 순창읍
으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호남의 호금강, 강천산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애타게 고대하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강천산 찾아가기 (2015년 8월 기준)
* 서울 강남센트럴시티에서 순창행 고속버스가 1일 5회 떠난다. (9:30~16:10)
* 광주에서 순창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다니며, 이중 10회가 강천사까지 들어간다.
* 전주에서 순창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다니며, 이중 2회가 강천사까지 들어간다.
* 순창터미널에서 강천사(강천산)행 직행버스가 1일 10회, 군내버스는 10여 회 다닌다. 직행버
  스는 강천산 상가촌(관광버스주차장)까지 들어가나 군내버스는 강천산입구만 스쳐 지나가며,
  강천산입구에서 강천산 상가촌까지 도보 10분 거리이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호남고속도로 → 전주나들목 → 전주시내 우회도로와 27번 국도 경유 → 순창고교 교차로에
   서 우회전 → 팔덕 → 강천산입구 → 강천산
② 88올림픽고속도로 → 순창나들목 → 순창읍 → 팔덕 → 강천산입구 → 강천산

★ 강천산 관람정보 (2015년 8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3,000원 / 초,중,고생 2,000원 / 군인,전의경 1,500원 (30명 이상 단체는 500
  원 할인)
* 강천산 주요 등산코스 (여기서 매표소는 강천산 관리사무소 매표소)
① 신선봉 코스(5km, 3시간) : 매표소 → 강천사 → 구름다리 → 신선봉 → 강천사 → 매표소
② 산성산 코스(9.2km, 4시간) : 매표소 → 강천사 → 구장군폭포 → 운대봉 → 산성산 → 송낙
바위 → 강천사 → 매표소
③ 광덕산 코스(11.2km, 5시간) : 매표소 → 금강계곡 → 황우제골 → 광덕산 → 시루봉 → 금
성산성 동문 → 강천사 → 매표소
④ 강천산 코스(5.2km, 3시간) : 매표소 → 깃대봉 → 갈우봉 → 강천산(왕자봉) → 강천사 →
매표소
⑤ 옥호봉 코스(8.7km, 4시간) : 매표소 → 강천사 → 구장군폭포 → 장군봉 → 광덕산 → 금강
계곡 → 옥호봉 → 매표소
⑥ 종주 코스(12km, 7시간) : 매표소 → 깃대봉 → 강천산(왕자봉) → 형제봉 → 송낙바위 →
금성산성 동문 → 광덕산 → 옥호봉 → 매표소
⑦ 강천산계곡(맨발산책로, 5km, 2시간) : 매표소 → 강천사 → 구름다리 → 구장군폭포 → 강
천사 → 강천산매표소
* 강천산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강천산 관리사무소 ☎ 063-650-1672)
* 강천사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996 (☎ 063-652-5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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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8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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