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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4.08 늦겨울 산사 나들이 ~ 안양 삼성산 염불사, 비봉산 망해암 <안양예술공원,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늦겨울 산사 나들이 ~ 안양 삼성산 염불사, 비봉산 망해암 <안양예술공원,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안양 삼성산 염불사, 망해암



' 늦겨울 산사 나들이 '
(안양 삼성산 염불사, 망해암)

삼성산 염불사

▲  삼성산 염불사(염불암)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염불사에서 바라본 천하 (비봉산, 안양시내, 수리산)

▲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  염불사에서 바라본 안양 지역
(비봉산, 수리산)

 



 

천하를 놓지 않으려는 욕심꾸러기 겨울 제국과 차디찬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봄
이 팽팽히 맞붙던 3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안양(安養)에 있는 염불사와 망해암을 찾았
다.

삼성산(三聖山, 480m) 남쪽 자락에 자리한 염불사를 가려면 안양 제일의 명소로 추앙을 받
는 안양예술공원을 거쳐야 된다. 예술공원을 가르며 안쪽으로 들어서면 염불사로 인도하는
포장길(예술공원로245번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20~25분 정도 묵묵히 오르면 염불사가 활
짝 모습을 비춘다.


▲  소나무 그늘 밑에 앉아 삼성천을 굽어보는 안양정(安養亭)
<안양사입구 동쪽에 자리함>

▲  염불사로 인도하는 숲길(예술공원로245번길)
봄의 해방군이 거의 문턱까지 이르렀지만 삼성산 숲은 여전히 겨울 속을 방황한다.
허나 소쩍새가 울 때면 저들도 겨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활짝 기지개를
켤 것이다.



 

♠  삼성산 남쪽 자락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절벽을 병풍처럼
두르며 안양을 굽어보고 있는 ~ 삼성산 염불사(念佛寺)

삼성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깃든 염불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삼성산에서 삼막사(三幕
寺, ☞ 관련글 보기) 다음으로 큰 절이다. 오랫동안 삼막사의 부속 암자로 있으면서 염불암(
念佛庵)이라 불렸으나 근래에 그 그늘에서 벗어나 '암(庵)'에서 '사(寺)'로 칭호를 높였다.

절의 이름은 신라 중기에 의상(義湘)과 원효(元曉), 윤필(潤筆)이 이곳에 있던 토굴(土窟)에
서 불도를 닦으며 염불을 올렸다고 해서 유래된 것이라 전한다. 윤필이 이곳에 절을 짓고 수
도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하고 있으나 다들 신빙성이 없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
다.
또한 926년(또는 936년)에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를 치고자 삼성산 옆을 지나다가
안양사 창건설화(☞ 관련글 보기)에도 등장하는 능정(能正)이 삼성산 자락에서 좌선(坐禪)에
들어있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염불사의 전신(前身)인 안흥사(安興寺)를 세웠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하고 있다.
하지만 고려 때 유물이 전혀 없고 안양사(安養寺) 창건 설화와도 상당수 비슷해 이 역시 신빙
성은 떨어진다. 1407년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고자 왕명으로 관악산의 여러 절과 함께
중창했다고 전하는데, 경내에 500년 묵은 보리수나무가 있어 이때쯤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
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적이 없다가 1857년에 이르러 청허(淸虛)와 도인(道人)이 칠성각을 세
웠다. 1904년과 1927년에 중수했으며, 1930년에는 세심루(洗心樓)를 세우고, 1932년에 산신각
, 1941년에 대웅전과 칠성각을 중수했다. 그리고 1964년에 미륵불을 세우고, 1992년에 대웅전
을 옮겨 크게 중창했으며, 2000년에 나한전을, 2008년에 석조관음보살상을 지었다.

석축을 높게 다져 크고 작은 건물을 심었는데, 칠성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20세기에 지어진
것들이라 겉에서 풍기는 고색의 내음은 거의 없다. 소장문화유산은 비록 지정문화재는 없으나
500년 묵은 보리수와 19세기에 조성된 승탑(부도) 3기, 바위에 새겨진 마애승탑(磨崖僧塔, 마
애부도) 2기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마애부도는 못봤음)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나한전, 염불전, 칠성각, 영산전, 산신각 등 약 10동
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뒷쪽에는 소나무가 솟은 멋드러진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데,
그 벼랑에도 조그만 건물과 미륵불을 주렁주렁 달아놓아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그렇다고 요
란하게 벼랑을 밀어버린 것은 아니며 약간의 손질만 가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안양예술공원에서 삼막사, 삼성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황금 길목이라 자연히 절을 둘러보는 수
요도 제법 되는 편이며, 벼랑에 닦여진 산신각과 칠성각에서 바라보는 삼성산과 안양시내 풍
경은 두 안구와 마음을 시원하게 어루만져준다.

* 염불사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41-52 (예술공원로245번길 150, ☎ 031-
  471-2300)

▲  옛 대웅전 자리에 세워진 염불전(念佛殿)

▲  염불전 앞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  요사(寮舍) 앞뜨락과 질서정연하게 들어선 장독대들(왼쪽)
장독대에는 어떤 먹거리들이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을까? 살짝 뚜껑을
열어 그 속살을 들춰보고 싶다.

▲  염불사 대웅전(大雄殿)

돌계단을 타고 경내로 들어서면 남쪽을 굽어보는 대웅전과 염불전이 제일 먼저 모습을 비춘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는 그 우측 염불전 자리에 있
었는데, 1992년에 주지 성수화상이 의상과 원효, 윤필 3명의 고승이 수도를 했던 터로 여겨진
다는 현재 자리로 옮겨 크게 지었다.
현재 염불사의 사세를 보여주듯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지붕을 받치며 촘촘히 박혀있는 공포
는 그 아름다운 섬세함에 감탄이 새어 나오게 한다. 건물 주변으로 하얀 피부의 난간석을 둘
렀으며, 계단 앞에는 석사자 2기를 배치해 혹시 모를 화마(火魔)의 공습에 대비했다.

대웅전 내부에는 금빛 찬란한 석가여래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제
스처를 취한 석가여래 좌우로 수려한 자태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시
립(侍立)해 있는데, 이들은 1992년에 은행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며, 그들 뒤에는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대웅전 좌측 석조관세음보살상

대웅전 좌측에는 2008년에 새로 지은 석조관세음보살상이 있다. 파리도 능히 미끄러질 정도로
매끈한 하얀 피부를 지닌 그의 좌측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긴 지팡이를 쥐어든 지장보살(地
藏菩薩)이 관세음보살보다 훨씬 낮은 연화대(蓮花臺)에 서 있고, 우측에는 산신(山神)이 의자
에 앉아 있다. 그들 뒤에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병풍처럼 들러져 있는데, 벼랑 윗쪽 소나무
사이로 독성각이 아찔하게 버티고 있다.


▲  대웅전 앞 3층석탑

대웅전 앞뜰에는 독특한 모습을 지닌 새하얀 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8각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조그만 기단을 깔고, 그 위로 부처가 새겨진 8각의 탑신(塔身)을 얹
힌 다음 보주(寶珠)로 마무리를 했는데, 그가 있기 전에는 경내에 그 흔한 탑조차 없었다.

        ◀  염불사 보리수(菩提樹)
탑 옆에는 염불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인 보리
수가 자라고 있다.
보리수의 원래 이름은 '보디 브리크샤(Bodhivr
iksa)'로 부처가 붓다가야 보리사에 있는 보리
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불교에서
매우 애지중지하는 나무이다. 무화과와 흡사한
뽕나무과 상록수로 인도대륙 힌두교에서도 신
성시 여기는 나무이기도 하다.

보리수는 우리나라에는 그리 많지 않은 나무로
아무리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미심장한
나무라고 해도 겨울 제국 앞에서는 예외가 없
다. 제국의 시련을 겪어야 되기 때문이다. 나
무를 감싸던 푸른 잎들은 모두 녹아 없어졌고,
가지만 앙상하게 드러내며 봄의 해방군을 간절
히 염원한다.

이 나무는 15세기에 이곳에서 수도하던 승려가 심었다고 전하며, 이를 통해 적어도 조선 초기
에 염불사가 숨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람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500년의 장대한 나이를
먹었지만 높이 12m, 둘레 1.2m로 비슷한 나이의 다른 나무에 비해 체격은 조그만 편이며, 
양시 보호수 5-2호
의 작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나한전(羅漢殿)
염불전 뒤쪽에는 1990년대에 지어진 나한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2000년에 조성된 500나한과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  염불사 산신각(山神閣)

대웅전과 나한전 뒤쪽에는 기암괴석으로 그윽한 높은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염불사의
든든한 후광이자 절을 더욱 장엄하게 꾸며주는 그 벼랑에는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 영산전,
미륵불 등이 군데군데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미륵불과 칠성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마치 천
하가 내 발 밑에 펼쳐진 듯, 천하 일품을 자랑한다.

대웅전 뒷쪽 나무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제일 먼저 절벽 사이 좁은 공간에 들어앉은 산신
각을 만나게 된다. 경내를 굽어보는 산신각은 1칸에 불과한 조촐한 맞배지붕 집으로 조선 후
기부터 전해오던 것을 1932년에 중수했다. 지붕은 목조이나 건물 벽은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부에는 1970년대 후반에 그려진 산신도가 걸려 있다.
이곳에 서면 경내는 물론이고 삼성산 남쪽 산줄기인 비봉산(295m)과 안양을 서쪽에서 보듬은
수리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삼성산 남쪽 산자락과 비봉산, 안양시내, 수리산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산신 가족이 담겨진 산신탱

▲  독성각(獨聖閣)

산신각에서 동쪽으로 난 조그만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벼랑 위에 조마조마하게 버티고 앉
은 독성각이 나온다. 석조관세음보살상 바로 뒷쪽 벼랑으로 경내에서 가장 궁색하고 위험한
곳에 자리해 있는데, 그 많은 자리 가운데 굳이 이곳에 힘들게 독성각을 닦았는지 의문이다.
독실한 불심(佛心)이 낳은 결과일까? 아니면 경내의 명물로 키우려는 욕심의 산물일까?

독성각은 산신각과 거의 쌍둥이꼴 모습으로 1칸짜리 맞배지붕 집이다. 지붕은 목조로 이루어
져 있고 벽은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건물 바로 앞이 천길 낭떠러지라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
다. 비록 난간이 둘러져 있긴 해도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으며 촘촘하지 못하기 때문
이다.

산신각과 비슷한 시기에 중건된 것으로 여겨지
며, 건물 내부에는 근래에 그려진 독성탱이 걸
려있다.
독성탱에는 독성(獨聖) 할배와 동자, 사슴, 소
나무, 그의 본거지인 천태산(天台山)이 담겨져
있다.

   ◀  독성 가족의 단란함이 깃든 독성탱

산신각을 지나면 절벽에 등을 대며 남쪽을 바
라보고 선 석조미륵불이 모습을 비춘다. 1960
년에 주지인 기석화상의 꿈속에 미륵불이 나타
나 이마를 쓱쓱 어루만지며
'마애석불을 만들어 널리 중생을 구제하라'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당시 기석은 낡고 퇴락한 염불암을 다시 일으
킬 궁리를 했었는데, 미륵불의 현신에 용기를
얻고 1964년부터 5년간 공을 들여 석불을 완성
하고 공덕비를 세웠다.
미륵불은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 위에 서 있으
며, 전체적으로 풍만한 느낌을 던진다. 머리에
는 2중으로 된 보관(寶冠)을 썼고, 얼굴은 다
소 경직되어 보이며, 입가에는 넌지시 미소가
드리워져 중생을 살짝 위로한다.
오른손으로 시무외인, 왼손으로 여원인을 취하
며 안양 시내를 굽어보는 미륵불 옆에는 산신
각과 쌍둥이 꼴인 영산전이 있다.

▲  염불사 석조미륵불

미륵불에서 더 올라가면 그 계단의 끝에 칠성
각이 수비병처럼 자리해 경내를 굽어본다.
칠성각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겉보기와 다르게 1857년에 지어져 염불사에서
가장 늙은 집이다.
벼랑 사이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앉았으나 산신
각과 독성각보다는 조금은 여유로워 정면 2칸,
측면 1칸의 구조를 지녔으며, 내부에는 1979년
에 제작된 칠성탱이 있다.

▲  벼랑 위에 자리한 칠성각(七星閣)


▲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펼쳐진 칠성각 칠성탱

▲  칠성각에서 바라본 천하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이라 앞서 산신각보다 조망의 품질이
조금은 높아졌다. (그래봐야 보이는 범위는 비슷함)

▲  19세기에 조성된 염불사 부도(승탑)들

영산전에서 대웅전으로 내려가는 계단 대신 서쪽 산길로 내려가면 나한전 서쪽에 자리한 부도
<浮屠, 승탑(僧塔)> 3형제를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 부도로 왼쪽부터 도일당(道日堂), 인봉당(印奉堂), 서영
당(西影堂) 탑인데, 원래는 절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싹 집합시킨 것이다. 그들
모두 1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탑신 피부에 탑 주인과 조성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조
성 시기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단 도일당은 조성 시기 부분이 마멸됨)

▲  도일당탑

▲  인봉당탑

◀  서영당탑에 깨알처럼 새겨진
글씨들

왼쪽에 자리한 도일당탑은 높이 167cm로 바닥돌은 없다. 장대한 세월의 무심한 장난으로 탑이
두 동강이 난 것을 다시 붙였는데, 중간에 난 금이 그 흔적이다. 탑 중앙에는 얇게 홈을 파서
깨알처럼 글씨를 넣었으나 마멸이 심하며 탑 꼭대기에는 동그란 보주(寶珠)를 두었다.

중앙에 있는 인봉당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늘씬한 자태에 탑신을 올리고 반구형 보주로 마
무리를 지은 탑으로 높이 143cm, 조성 시기는 1816년이다. 도일당탑처럼 탑 앞쪽을 다듬어 글
씨를 넣었는데, 글씨가 아직은 선명하여 한자를 조금 안다면 알아보는데 그리 무리는 없다.
그리고 오른쪽에 자리한 서영당탑은 1810년에 조성된 것으로 바닥돌이 탑의 거의 2/3를 차지
할 정도로 무척 크고 견고하다. 자연석을 가져와서 조금 손질을 가해 바닥돌로 깔고 탑과 반
구형 보주를 올렸는데, 옆에 있는 승탑과 비슷한 모습이다.

이들은 19세기 초반 염불사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알려주는 존재이자 경내에서 보리수 다음으
로 오래된 존재로 이들 외에도 경내 부근에 바위에 새겨진 19세기 마애승탑 2기가 있으나 인
연이 닿지 못해 만나지 못했다. (그때는 그들의 존재를 전혀 몰랐음)


▲  염불사를 뒤로하며



 

♠  삼성산 남쪽 비봉산 자락에 높이 들어앉은 고즈넉한 산사
일몰 풍경과 조망이 일품인 망해암(望海庵)

▲  망해암으로 인도하는 비봉산 숲길(임곡로)

안양예술공원 남쪽에는 삼성산과 관악산의 남쪽 산줄기인 비봉산(295m)이 누워있다. 그 서쪽
자락 가파른 곳에는 망해암이란 고찰(古刹)이 안양시내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그곳에 늙
은 석불 하나가 깃들여져 있고 조망과 일몰이 천하일품이라는 풍문을 익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곳과는 계속 인연이 닿지 않았고, 어느 3월 첫 무렵에 이르러 억지로 인
연을 붙여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그곳을 찾았다. (삼성산 염불사와 같은 날에 간 것은 아니나
같은 지역에 있고 서로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어서 편의상 본글에 넣었음)

안양역(1호선)에서 안양마을버스 3-1번을 타고 비산1동 임곡주공아파트 종점에서 내렸다. 여
기서부터 두 다리에 의지해 오르막길(임곡로)을 올라가야 되는데, 처음에는 아파트와 학교,
주택들이 좌우에 펼쳐져 있으나, 5~6분 정도 오르면 싱그러운 비봉산 숲길이 펼쳐져 속세의
번뇌를 털어준다.
차량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절까지 포장길이 닦여져 있는데, 구불구불한 숲길을 20여
분 오르면 해발 200m 고지에 들어앉은 망해암이 활짝 모습을 비춘다. 임곡주공아파트 종점에
서 도보 30분 정도 걸리며, 안양예술공원에서도 망해암까지 산길이 이어져 있다.


▲  일몰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망해암 종무소(宗務所)
가파른 지형을 이용해서 만든 2층 건물로 윗층에서 바라보는 조망과
일몰 맛이 아주 좋다. (윗층 바깥 통로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음)

▲  한 지붕 두 가족, 2층 건물
윗층은 천불전(千佛殿), 아랫층은 지장전

▲  지장전(地藏殿) 석조지장보살좌상
큰 바위를 다듬어 그의 거처를 닦았다.


망해암은 북쪽으로 안양예술공원과 삼성산이 보이고, 완전히 확 트인 서쪽으로 안양시내와 수
리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날씨가 정말 좋으면 수리산 너머로 서해바다까지 시야에 들어오는데
, 서해바다가 강제로 땅으로 매립되면서 바다를 볼 기회는 많이 줄었다. 어쨌든 바다까지 보
이는 매력 때문에 절의 이름도 바다를 바라보는 절이란 뜻에 망해암이 되었으며, 여기서 바라
보는 조망과 일몰, 안양 야경(夜景)이 아주 진국이라 안양9경의 제4경이자 으뜸으로 오랫동안
찬양을 받고 있다.

이곳은 조계종 소속으로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이다. 신라 중기에 원효대사(元曉
大師)가 창건했다고 내세우고 있으나 신빙성은 전혀 없으며, 경내에 고려 초/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늙은 석조여래입상이 전하고 있어 신라 후기나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407년 서울을 위협하는 관악산의 산천기맥(山川氣脈)을 싹 누르고자 관악산과 삼성산 주변의
절을 중창했는데, 이때 중건의 혜택을 받았다고 전하며, 1803년에 헌경왕후(獻敬王后) 홍씨(
혜경궁홍씨)의 지원으로 중창했다. 그리고 1863년 대연화상이 증수했으며, 이후 6.25때 파괴
된 것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용화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천불전, 지장전, 종무소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고려 때 지어진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그는 용화전에 들
어있는데, 그의 보개에 1479년에 조성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그때 지어진 것으로 봤으나
석불의 감정 결과 고려 전기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여 보개에 쓰여진 내용은 석불 중수나 석
불 보개를 씌운 시기로 보인다.
안양과 삼성산 일대에서 꽤 늙은 석불이고, 그와 관련된 글씨를 품고 있음에도 그 흔한 지방
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했다가 2022년 5월에 비로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망해암과 관련해서 재미난 전설이 하나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을 대략 이렇다. 조선 세종 시절
, 남부지방에서 조세를 싣고 서울로 향하던 배가 인천 월미도(月尾島) 부근을 지나다가 거센
풍랑으로 침몰 위기에 빠졌다. 선원들은 크게 당황하며 우왕좌왕하던 그때 뱃머리에서 난데없
이 승려가 나타나 혼란에 빠진 선원들을 진정시켰고, 그 사이 풍랑은 멈추었다.
선원들은 승려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어느 절에서 왔는지를 물었고, 승려는 관악산 망해암에서
왔다고 답을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들은 서울에 도착해 조세 수송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그 승려에게 답례를 하고자 망해암
을 찾았다. 허나 승려는 없고 그와 비슷하게 생긴 석불만 법당에 덩그러니 있는 것이다. 하여
그들은 깨달은 바가 있어 나라에 상소를 올려 이 사실을 고하니 이를 가상히 여긴 세종이 매
년 공양미 1섬씩을 석불에게 보냈으며, 조선 후기까지 계속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이를 통해 배로 조세나 쌀을 나르던 선원이나 관리가 절에 시주를 하며 뱃길의 안녕을 기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여기서 인천 앞 서해바다까지 바라보이니 기원을 하기에도 딱 좋다.
그들의 건의로 나라에서도 조세 수송의 안전을 위해 공양미를 보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을
픽션이란 양념을 적당히 넣어 전설로 다듬은 것이다.

* 망해암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55-1 (임곡로245, ☎ 031-443-5559)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건물로
산신, 독성, 칠성이 봉안되어 있다.

▲  석불입상의 거처인 용화전(龍華殿)
용화전 밑에는 2층 건물을 두어 요사,
선방 등으로 사용한다.


▲  용화전에 봉안된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383호

용화전에 소중히 깃든 석조여래입상은 망해암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자 이곳의 대표 보물이다.
이렇게 보면 어깨와 얼굴, 보개(寶蓋)만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저것은 불단 때문에 가슴 아래가
강제로 가려진 것일 뿐, 나머지 부분은 잘 남아있다. 하여 불단 옆에서 봐야 그의 가려진 옆
구리와 아랫도리 모두 확인할 수 있다.
(2021년 6월에 건물 마루에 오랫동안 가려진 밑도리를 들춰내 그의 다리와 발, 대좌 일부를
새로 확인했음)

이 석불은 높이 3.4m로 보개 밑에 '성화(成化) 15년 4월'이라 쓰여있어 1479년 4월에 석불을
중수하거나 보개를 씌웠음을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예전에는 그때 조성된 석불로 봤으나
평가 결과 고려 초/중기 것으로 나와 안양과 삼성산 일대에서 제일 오래된 석불로 꼽힌다.
육계(무견정상)가 솟은 머리에는 둥근 모습의 보개가 씌워져 있으며, 머리와 보개는 검은색을
칠했으나 지금은 많이 지워졌다. 상호와 신체는 하얀색으로 분을 칠했으며, 나발을 갖춘 머리
는 다소 마모되었다.
머리 정면 중앙에는 계주가 있으며,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듯한 두 눈은 반쯤 떠서 아래를 보
고 있고, 입과 코는 두툼하다. 양쪽 귀는 매우 크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으로 두껍
게 처리했다. 왼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엄지과 검지를 맞대고 있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다리로
내렸다. 20세기 이후 조금 변형되긴 했으니 상태는 괜찮은 편으로 조성 관련 명문이 새겨진
탓에 고려와 조선 초기 석불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앞서 망해암 전설에서 선원을 구한 승려의 화신으로 나오며, 조정에서도 공양미를 보내 그를
챙겨줄 정도로 그가 있기에 망해암도 이렇게 무탈하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망해암에 왔다면
이 석불도 꼭 챙겨보기 바란다. 그를 놓치면 망해암의 50%를 놓친 것과 다름이 없다.

▲  옆에서 바라본 석조여래입상의 위엄
불단에 가려 보이지 않던 부분이 싹 모습을 비춘다. 약간의 변형과
세월을 탄 흔적이 좀 있으나 건강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  용화전 지킴이, 신중탱(神衆幀)

▲  망해암에서 바라본 안양시내와 수리산


▲  오늘도 해는 진다. 망해암에서 바라본 일몰

천하를 따사롭게 대피던 햇님은 퇴근시간이 다가오면서 그만의 공간으로 가고자 슬슬 휘장을
거두고, 진하게 보이던 안양시내도 그만큼 흐릿하게 다가온다. 그 틈을 타서 달님이 주관하는
어둠이 내려앉으니 사람도, 도시도, 산도 어둠을 몰아내고자 불빛을 여기저기서 발산하고 검
게 익은 안양의 산하는 그것을 얼굴에 바른다.
하여 여기서 바라보는 일몰과 조망 외에도 안양의 야경도 정말 일품인데, 이날 야경까지는 생
각이 없고 날씨도 추우므로 야경은 언제가 될지 모를 막연한 미래로 내던지고 안양예술공원으
로 쿨하게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삼성산 염불사, 망해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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