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난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9.10.16 초가을에 가면 딱 좋은 곳 ~ 꽃무릇(상사화)의 대표 성지, 영광 불갑사 (수다라성보박물관)
  2. 2019.01.05 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 나주 지역 제일의 고찰,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 석장승, 나주곰탕 1그릇)

초가을에 가면 딱 좋은 곳 ~ 꽃무릇(상사화)의 대표 성지, 영광 불갑사 (수다라성보박물관)

 


' 가을맞이 산사 나들이 ~ 꽃무릇의 성지, 영광 불갑사 '

▲  눈과 코, 입이 달린 불갑사 굴뚝

▲  대웅전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  불갑산 산길


 

상사화(相思花)는 꽃무릇이라 불리기도 한다. <열반에 드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피안화
(彼岸花)라 불리기도 함> 그들은 8~9월이 절정기로 상사화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
는 영광 불갑사에서는 매년 9월 한복판에 상사화 축제를 벌인다. 비록 축제는 과거완료형
이 되었고 시간 또한 이미 10월 초를 가르키고 있지만, 아직까지 상사화가 남아있을 것이
란 순진한 생각에 불갑사로 콩 볶듯 길을 떠났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영광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담
았다. 자리는 널널하여 편하게 이동을 했는데 거의 3시간 40분을 내달려 영광읍내에 자리
한 영광터미널에 도착했다. 전남 영광(靈光)은 2006년 가을 이후 10여 년 만에 방문이다.
영광터미널에서 잠시 숨 좀 돌렸다가 불갑사행 군내버스를 잡아타고 다시 20분 정도를 달
려 불갑사 종점에 두 발을 내린다. 이제 비로소 꽃무릇의 성지로 추앙받는 불갑사에 발을
들인 것이다.


 

♠  불갑사 입문

▲  불갑사 주차장 느티나무 - 전남 보호수 15-18-6-8호

버스가 얌전히 바퀴를 접은 불갑사 주차장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
다. 이 나무는 2004년 12월에 보호수의 지위를 받았는데, 당시 추정 나이가 65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10여 년이 더해져 660~670년 정도 된다. (어디까지나 추정 나이임)
아무리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과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무럭무럭 자라나 지금은 높이 25m
, 둘레 5.9m의 장대한 나무로 성장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불갑사를 찾은 사람들의 정자나
무와 이정표 역할을 하였고, 지금도 그 역할은 여전한데, 문명의 이기(利器)인 차량들도 앞다
투어 그의 포근한 그늘 속에 들어가 가을 단잠을 즐긴다.

주차장을 지나면 육중하게 생긴 일주문이 마중
을 한다. 보통 문 정면에는 절 이름을 알리는
현판을 내걸기 마련이나 이곳은 뒷쪽에 걸어두
어 문을 꺼꾸로 세운 듯한 모습이다.
일주문을 중심으로 잘 꾸며진 공원이 넓게 자
리해 있는데, 이 일대를 '불갑사 관광지'라 부
른다. 이곳에는 산책로와 연못, 진달래동산,
오토캠핑장, 영광산림박물관 등이 있으며, 나
는 오로지 불갑사와 상사화만 바라보고 온 터
라 모두 쿨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  불갑사 일주문(一柱門)


▲  불갑산 호랑이상의 위엄

일주문을 지나 조금 들어서면 왼쪽에 위엄 돋는 모습에 불갑산 호랑이상이 있다. 지금이야 호
랑이와 마주칠 일이 없으니 돌에 새겨진 공룡 화석을 보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오랫동
안 이 땅을 주름잡던 무서운 맹수였다. 호환(虎患)을 제일 두려워할 정도로 옛 사람들에게 공
포의 대상이었으나 20세기 초반 왜정(倭政)에 의해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동물원에서나 겨우
구경할 수 있다.

불갑산에도 호랑이가 살았었는데, 1908년 2월 덫고개에서 어느 농부가 호랑이 1마리를 잡았다.
그때는 호랑이 사냥으로 먹고 살던 사냥꾼과 농사꾼이 많았던 시절로 잡은 호랑이를 어찌 처
리할까 궁리하던 중, 왜인(倭人) '하라구찌'가 찾아와 자기에게 넘기라며 200원을 주었다. 당
시 200원은 무려 논 50마지기(1만 평) 가격이었다.
호랑이를 매입한 하라구찌는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의 시마쓰 제작소에서 표본 박제를 했으며, 그것을 들고 목포로 건너와 살다가 나중에 목포 유달초교에 기증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기증
을 했는지, 1945년 패망으로 강제 귀국을 하게 되자 일종의 떨이로 넘긴 것인지는 모르겠음)
그 박제는 아직도 유달초교에 간직되어 있으며, 북한과 만주 등의 실지(失地)를 제외한 이 땅
(남한)에서 잡힌 호랑이 중 유일하게 박제 표본으로 남은 것으로 호랑이에게는 억울하겠지만
우리에게는 무척 귀한 자료이다.
이후 영광군에서 '포획 100년 만에 귀향'이라는 주제로 유달초교와 국립생물자원관 척추동물
연구과의 도움으로 모형을 제작해 2009년 4월 이곳에 갖다두어 불갑산의 새로운 명물로 삼았
다.

호랑이상 뒷쪽에는 호랑이굴이 재현되어 있는데, 가짜 돌로 만든 모형굴이라 허접하기가 그지
없으며, 호랑이상은 그럴싸하게 지어져 있어 어두울 때 보면 자칫 염통이 쫄깃해질 수 있다.


▲  불갑산 호랑이상과 호랑이굴(뒷쪽)

▲  산뜻하게 닦여진 불갑사 가는 길 (불갑사 관광지)

▲  푸른 잎만 남은 진달래동산

▲  불갑사 해탈교

불갑사 관광지와 불갑사의 경계를 이루는 해탈교를 건너면 꿈에 그리던 상사화 군락지가 나온
다. 상사화의 마지막 향연을 기대했건만, 정작 나를 맞이한 것은 검게 떡이 되버린 시들시들
해진 상사화였다. 이것이 정녕 8~9월 동안 천하를 홀렸던 그 상사화가 맞단 말인가?


▲  잔치가 끝나버린 상사화 군락지

나의 계산은 틀렸다. 적어도 9월 말까지는 왔어야 상사화의 끝물이라도 볼 수 있는데 너무 늦
게 왔다. 여기서 불갑사 경내까지 죄다 뒤적거려도 멀쩡한 상사화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얄미운 세월이 그들의 젊음을 죄다 앗아갔기 때문이다.
불과 며칠 사이에 젊음이 사라진 상사화의 말로는 어떻게 저리 비참할 수가 있지? 되물을 정
도였다. 솔직히 검게 타듯 시들어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꽃에 매달린 푸른 잎과 나
무가 더 아름답게 보일 정도였으니 상사화의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보다도 못한 것 같다.
단지 그 2달을 위해 그들은 용을 썼던 모양이다. 세상에 그 무엇이든 전성기가 지나면 그 이
후의 모습은 참 우울하기 그지 없지. 그래서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  내년을 기약하며 잔뜩 웅크린 상사화(꽃무릇) 군락지
향연이 끝난 상사화의 쓸쓸한 말로, 허나 그것이 절대 끝은 아니다. 꽃은 비록 졌지만
그 꽃을 피우는 숙주(뿌리, 줄기)는 그대로 남아 내년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  숲속에 묻힌 상사화 군락지

▲  상사화 군락지 산책로 - 상사화 전성기 때 한번 거닐어보고 싶다.

상사화는 서로를 애타게 생각하는 꽃이란 뜻이다. 잎이 진 후에 꽃이 피고 꽃이 진 후에 잎이
나기 때문에 잎과 꽃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한다. 그래서 상사화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
다고 한다. 또한 그럴싸한 전설 한 토막이 덧붙여져 전해오는데 내용은 대략 이렇다.

불갑산 호랑이가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어흥거리던 옛날, 효성이 지극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
의 부모는 금슬 좋기로 이름난 부부였는데,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절에 들어와 100일 동안 탑돌이 불공을 올렸다.
그녀를 본 큰스님 수발승은 마음에 불이 나면서 그만 연모의 정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승려
의 신분이고 수줍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를 표현하지 못하고 몰래 그를 보면서 끙끙 마음을
앓았다. 여인은 그런 것도 모르고 100일 불공을 마치자 미련 없이 속세로 돌아갔고, 승려는
더 이상 그를 못보게 되자 그리움이 더욱 사무쳐 결국 상사병(相思病)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 봄, 승려의 사리가 안긴 부도 주변에 잎이 진 후 꽃이 피어났는데, 마치 그 승
려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꽃 이름을 상사화라 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전설로 그
만큼 꽃이 아름답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런 슬프고도 혹독한 전설을 붙인 모양이다.


▲  불갑사 가는길 (상사화 군락지 옆)

상사화 군락지를 지나면 석축 위에 오롯하게 자리한 승탑군(부도군)이 마중을 한다. 비석 4기
와 조그만 승탑 6기가 조촐히 승탑군을 이루고 있는데, 승탑들은 고려 말부터 조선, 20세기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원래 절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34년에 이곳으로 집합시켰다.

이들 승탑은 회명당 처묵(晦明堂 處墨), 청봉당(晴峰堂), 서산(西山), 설두(雪竇), 설제(雪醍
), 각진국사의 승탑으로 이중 각진국사 자운탑은 1355년에 조성된 것이라 전한다. 비석 중에
는 '정3품 통정대부 김상기(金商基) 공덕송비(功德頌碑)'가 있는데, 영광 출신으로 정3품 벼
슬까지 지낸 김상기가 1939년 대웅전과 종루를 세우는데 시주를 하여 그를 기리고자 세웠다.
승탑군을 지나면 담장을 두른 불갑사 경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 여기서 잠시 불갑
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불갑사 승탑(僧塔)군

불갑산(516m) 서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불갑사는 상사화로도 유명하지만 자칭 백제 최
초의 사찰이라는 자부심을 진하게 간직하고 있다.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384년, 그 시절 백제는 천하 제일의 해양대국으로 바다를 건너 왜
열도를 비롯해 중원대륙의 산동(山東) 등 대륙의 여러 해안 지역을 장악하면서 세력을 과시하
고 있었다. 바로 그때 인도 승려인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의 위엄을 듣고 동진(東晉)을
경유하여 들어온 것이다.

마라난타는 바다를 건너 영광 법성포(法聖浦)에 상륙했다고 전하는데, 그곳과 가까운 불갑산
자락에 절을 세우니 백제 최초의 절이자, 첫째 가는 절이라 하여 불갑사라 했다고 전한다. 하
지만 증거가 불충분하다. (관련 기록도 없고 유물도 없는 실정임)
마라난타 창건설이 신빙성이 떨어지자 따로 내세운 것이 백제 문주왕(文周王, 재위 475~477)
창건설이다. 이때 행은(幸恩)이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무왕(武王) 시절인 640년에 창건되었다
는 설도 덧붙여 전하고 있다. (불갑산 남쪽 너머에 자리한 함평 용천사는 600년에 행은이 창
건했다고 함) 허나 아쉽게도 이 역시 증거가 부실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창건 이후, 8세기 중반에 행사존자(行思尊者)가 중창을 했다고 하는데, 행사존자는 마라난타
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아마도 창건 시기를 부풀리면서 나온 실수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신라 후기나 행은이 활동했다고 전하는 7세기(무왕 시절)가 그나마 적당한 창건 시기가 아닐
까 여겨지며, 백제 후기에 살짝 창건되었다가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는
백제 부흥군과 이를 막으려는 신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파괴된 것을 중건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 후기에 각진국사(覺眞國師, 1270~1355)가 머물면서 절을 크게 불리니 전각이 100여 칸,
요사(寮舍) 400칸, 부속 암자가 31개에 이르렀다고 하며, 승려 수는 수백 명을 헤아렸다고 한
다. 또한 누각의 기둥 높이는 90척, 사전(寺田)은 10리 밖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그 규모가 가히 대단했다. <각진은 순천 송광사(松廣寺) 16국사의 하나임>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전일암(錢日庵)을 제외하고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며, 법릉(法
稜)이 전일암을 터전으로 삼아 급한데로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1634년 해릉이 중
창했으나 사세가 점점 어려워져 규모 또한 축소되었다.
1802년 득성(得成)이 중창을 했고, 1869년 설두대사(雪竇大師)가 크게 중창을 벌이면서 그동
안 잃어버린 토지를 많이 회복하였다. 1879년에 중창을 했으며, 1938년 설제가 중수를 했고,
1984년에 다시 중수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만세루, 일광당, 설선당, 명부전, 조사전, 칠성각,
팔상전, 천왕문, 백운당, 향로전 등 20여 동에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왕년에는 부속암자
가 31개나 되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일암, 해불암(海佛庵), 불영대(佛影臺), 수도암(修道庵),
무각선원(無覺禪院) 등 5개만 남아 있다. 특히 전일암은 정유재란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존재
로 법릉이 이곳에 머물며 불갑사를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왜열도로 끌려가 고생
을 무지했던 강항(姜沆)이 종종 찾아와 참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대웅전과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불복장전적 등 국가 보물 3점과 천연기념
물로 지정된 참식나무 자생북한지, 사천왕상과 대웅전 삼세불회도, 팔상전 영산회상도, 지장
시왕도, 동종(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11호), 고적급위시답병록(전남 지방문화재자료 205호).
만세루 등 지방문화재 여러 점을 지니고 있다. 그 외에 일광당과 명부전, 괘불지주, 팔상전,
각진국사자운탑비, 업경대, 대법고, 승탑군 등 수많은 비지정문화재가 있으며, 수다라 성보박
물관을 경내에 지어 절의 오랜 보물을 담아두었다.

불갑사는 고창 선운사(禪雲寺), 함평 용천사(龍泉寺)와 더불어 상사화(꽃무릇)의 3대 성지로
꼽힌다. 절 주변에 상사화를 가득 심어 8~9월에는 상사화의 향기가 경내를 뒤덮으며, 9월에는
상사화축제가 열려 절의 존재감을 천하에 널리 드러낸다.
영광 지역에서 가장 큰 절이고 영광의 주요 명승지라 답사/나들이 수요가 적지 않으며, 불갑
산이란 명산(名山)까지 끼고 있어 산꾼 수요도 대단하다. 깊은 산골에 자리해 있어 산사(山寺
)의 내음을 뿜어내고 있으며, 문화유산도 풍부해 고색의 진한 내음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게
다가 상사화와 참식나무 등 진귀한 꽃과 나무도 절을 수식해 자연의 내음까지 덩달아 누릴 수
있다.

기왕 불갑사를 찾는다면 상사화의 향연이 펼쳐지는 8~9월을 추천한다. 물론 다른 때도 상관없
다. 절에서 불갑산 정상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리며, 남쪽에 자리한 모악산(母岳山, 348m)을 넘
어 함평 용천사로 넘어가도 된다.

* 불갑사 소재지 :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8 (불갑산로450 ☎ 061-352-8097)
* 불갑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불갑사 경내 모형도 (수다라 성보박물관)


 

♠  불갑사의 보물 창고, 수다라(修多羅) 성보박물관

▲  불갑사 금강문(金剛門)

경내 앞에 이르니 맞배지붕 금강문이 마중을 한다. 보통 문 이름이 쓰인 현판을 정면에 내걸
기 마련이나 특이하게 '불갑사' 현판을 앞에 내밀고 금강문 현판을 문 안쪽에 수줍은 듯 걸어
두었다. 문 좌우에는 돌담을 둘러 경내를 가렸으며, 계단을 오르면 금강문의 주인인 금강역사
(金剛力士)가 정면을 바라보며 중생을 검문한다.
문을 들어서 계단을 1단계 더 오르면 정면에 천왕문이 계단을 늘어뜨리고 있고, 왼쪽에는 명
경당(明鏡堂), 오른쪽에는 수다라성보박물관이 손짓을 한다. 박물관의 존재는 전혀 몰랐던 터
라 여기서 잠시 불갑사를 잊고 보랏빛처럼 다가선 성보박물관을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  수다라 성보박물관
박물관 앞에는 비석을 잃어버린 연꽃무늬 비좌(碑座)가 누워있다.


21세기 이후 많은 고찰(古刹)들이 성보박물관이란 자체 박물관을 지어 절의 보물을 보관/전시
하고 있다. 불갑사 역시 그 유행에 흔쾌히 합류하여 'ㄱ'자 구조의 성보박물관을 하나 장만해
세상에 내놓았다.
불갑사의 오랜 보물을 머금은 보물 창고로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타서 내부를
둘러보면 되며 관람시간은 9시~17시까지다.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없음) 무슨 박물관이
이렇게 볼거리가 많은지 사진에 담고 하느라 30분 정도 인적이 없는 박물관 내부를 신나게 누
볐다.

▲  다양한 모습을 지닌 16나한상과 인왕상(仁王像)

석가불3존좌상과 그들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상,
그리고 그들을 지키는 인왕상. 제석(帝釋), 범
천(梵天) 등은 지금은 없어진 나한전(羅漢殿)
에 있었다.
그 나한전이 퇴락하자 그것을 부시고 팔상전으
로 자리를 옮겼으며, 지금은 이렇게 성보박물
관에 안착했다.
이들은 1706년 도인 옥잠의 발원시주로 조성된
것으로 당시 유명한 화승(畵僧)인 색난과 그의
제자 초변, 영선 등 10명의 화승과 함께 만들
었으며, 석가불3존좌상의 얼굴이 둥글고 넓적
하여 포근한 이미지를 보이고 있다.

▲  16나한을 거느린 석가불3존좌상
(석가불과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


▲  팔상전 영산회상도(아랫 그림)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07호

팔상전(八相殿) 후불탱화였던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는 석가여래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
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편히 뉘어져 있는데, 1777년 영광 지역에서
유명했던 비현, 복찬, 쾌윤 등 금어(金魚) 3명과 편수 12명이 참여하여 만들었다.


▲  두 눈이 인상적인 대웅전 용마루 보탑(寶塔)

불갑사의 왕년의 위엄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대웅전 용마루 중앙에 무려 용의 얼굴을 지닌 보
탑을 달았다. 현재는 용마루에서 떨어져 나와 성보박물관에 머물고 있는데 익살스럽게 표현된
용머리 위에 기와집 모양의 탑신(塔身)과 4각 지붕을 두었고, 다시 그 위에 둥근 머리 장식을
두었다.
이 보탑은 점토를 구워서 만든 것으로 그 피부에 '甲申 五月','盡○手 陟敏(척민)'이란 명문
이 새겨져 있어 1764년 5월, '척민'이 대웅전을 중수하면서 만든 것임을 귀뜀해 준다. 이렇게
용머리 보탑을 용마루에 둔 것은 대웅전의 위엄을 높이려는 의도로 볼 수 있으며, 지붕에 보
탑 등의 장엄물을 두는 것은 주로 동남아와 중원대륙 남쪽 사원에서 많이 나타나는 양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흔치 않은 유물이다.


▲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08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를 담은 그림이다. 지장보살 좌우와 밑에 도명
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시왕, 범천, 제석천, 사천왕을 두고 그 밑부분에 판관
(判官) 등을 배치했으며, 윗쪽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미륵보살, 대세지보살,
제화갈라보살 등 보살 6명을 집합시켰다.
보통 지장시왕도에는 다른 보살까지 무더기로 그려진 예는 거의 없는데, 그림의 색채가 밝고
선명하여 그저 어둡고 무서울 것만 같은 저승 식구들에 대한 이미지를 화사하게 비추고 있다. 가늘고 섬세한 필법과 안정적인 화면 구성 등을 보이고 있으며, 밑부분이 조금 헝클어진 것
외에는 건강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이 그림은 1777년에 비현, 복찬, 쾌윤 등 9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그들은 순천 선암사(仙巖
寺)를 중심으로 많은 불화(佛畵)를 남겼다.


▲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06호

삼세불회도(삼세불탱)란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삼세불(석가불, 약사불, 아미타불)을 담
은 그림으로 원래 대웅전에 있었다. 불갑사의 대표적인 불화로 꼽히고 있는 그림으로 1762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지며, 비단 바탕에 아주 현란하게 채색되어 꽤 밝은 색채를 보인다.
그림 윗쪽에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춘 석가여래를 비롯해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배치해 삼세불을 이루었으며, 3세불 좌우와 밑부분에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미륵보살, 지장보살 등 8명의 보살을 배치했다. 그리고 네 모
서리에 사천왕을 하나씩 넣었고, 3세불 윗쪽에 분신불(分身佛) 2명과 10대 제자, 천중(天衆)
2구를 넣어 그림을 고루고루 채웠다.


▲  칠성탱(七星幀)

칠성탱은 1892년에 영광읍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만든 탱화이다. 두광과 넓직한 신광
을 두룬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그림 윗쪽에 조그만 동자를, 중간에는 칠여래(七如來), 밑에
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배치했으며, 색채가 화사하여 선명한 기운을 전해준다.


▲  검은 피부의 조그만 철불좌상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불갑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다. 귀여운 동자승을
모델로 한 듯 덩치는 매우 작지만 고졸한 미소만큼은 잃지 않았다.

▲  오래된 법고(法鼓)
법고는 사물(四物)의 하나로 1885년에 통나무로 제작되었다. 원래 대웅전에 있었으며,
길이 85cm, 직경 75cm 규모로 이제 겨우 130살로 한참 북소리를 낼 나이지만
일찌감치 새 법고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현역에서 물러났다.

▲  귀여움이 묻어난 6명의 동자상

곱게 색이 입혀진 동자상은 조선 후기에 나무로 제작된 것이다. 당시 불갑사 동자승을 모델로
했는지 하나 같이 귀엽기 그지 없는데, 원래는 명부전 시왕상 옆에 있었으나 다 없어지고 이
들 6개만 남아 성보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몸에 걸친 옷과 손에 든 물건, 얼굴, 머리 스타일, 덩치, 키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각각의 모
습으로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들의 해맑은 표정이 보는 이로 하여금 한 줄기 웃
음을 머금게 한다.


▲  푸른 피부의 목어(木魚)
용머리에 물고기 몸통을 섞은 듯한 모습으로 앞서 법고와 더불어 사물의 일원이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지금은 박물관 유물로 너무 편하게 살아가고 있다.

▲  가마(연) 같은 모습의 불감(佛龕)
불감은 호신불을 휴대하고자 만든 것으로 가로 83cm, 세로 61cm, 높이 88cm이다.
다른 불감과 달리 여닫는 문이 없으며, 연(가마)의 형태를 취한 점이
이채롭다. (조선 후기 유물)

▲  업경대(業鏡臺)

업경대는 사람이 죽어서 저승(명부)에 이르렀을 때 얼마나 착하게 살았나 죄업을 비춰준다는
거울이다. 그 거울을 보면 자신의 나쁜 짓이 모두 비춰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거울 보
기가 좀 겁이 난다.
이들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아주 순한 표정을 지은 사자 암수 1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자
대좌 위에 업경을 받치는 간주(竿柱)를 세우고, 그 위에 업경과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화염무
늬를 두어 나쁜 짓에 대한 경각심을 주지시켰다. (나쁜 짓을 많이 하면 뜨거운 불구덩이 지옥
으로 간다는 식으로) 대좌까지 완전히 갖춘 업경대로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으며, 불갑사가 내
세우는 휼륭한 보물로 조각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  불갑사를 거쳐갔던 옛 승려들의 진영(眞影)
18세기 후반~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진영(영정) 5점이 남아있다.
(누구의 진영인지는 모르겠음)

▲  조선 후기에 지어진 불연(佛輦)

불연은 불상과 보살상, 영가의 초상화나 위패를 운반하는 가마이다. 보통 절 문 밖까지 연을
메고 나가 대상물을 싣고 다시 절로 가져왔으며, 4명이 가마채를 들거나 끈으로 매어 운반했
다. 불연의 모습이 제왕과 왕족들이 사용하던 가마와 많이 비슷해 그 축소판을 보는 듯 하다.


▲  소통(疏筒)과 가사함(袈裟函)

소통(왼쪽)은 법회나 여러 불교 의식 때 신도들이 소망을 적어서 낭독한 후, 그 종이를 말아
넣어두던 통이다. 가로 23cm, 세로 16cm, 높이 88cm로 조선 후기에 제작되었으며, 통 밑에는
난간을 두룬 수미단(須彌壇) 모양의 대좌를 두어 소통의 품격을 드높였다.

가사함(오른쪽)은 승려의 가사(袈裟)를 보관하던 목함으로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별
도의 가사함을 둔 것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고 하며, 그 형태가 독특하다. (조선 후기에 제
작됨)


▲  불갑사 불복장전적(佛腹臟典籍) - 보물 1470호

불갑사에는 사천왕상과 석가불3존상 및 16나한상, 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몸 속에서 나온
오래된 서적들, 이른바 복장 전적(典籍)이 매우 많다. 자그마치 193종 259책의 분량으로 불갑
사의 장대한 내력을 더욱 꾸며주는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인데, 이들은 '불갑사 불복장전적'
이란 이름으로 국가 보물 14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천왕상 몸 속에서 나온 것은 판본 33종 46책, 낙장본(落張本) 16종 20책 등, 총 49종 66책
으로 완주 화암사(花巖寺)에서 발행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1441년)','지장보살본원경(1453년
)' 등이 있으며, 임진왜란 이전 판본이 대부분이라 모두 보물의 지위를 얻었다.

석가불3존상과 16나한상 몸 속에서 나온 것은 76종 84책으로 '백운화상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절
(1378년)','선종영가집(1381년)','천노금강경(1387)','묘벙연화경언해(1463년)' 등 고려 후기
와 조선 초기 판본이 많이 나왔다. 이들 역시 보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 뱃속에서 나온 것은 68종 97책이다. 고려 후기 판본인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과 '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1464)' 등 조선 초기 서적이 대부분이라 모두 보물의
지위를 얻었다.

▲  묘법연화경 - 1382년 작

▲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 1382년 작

▲  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 - 1464년 작

▲  법집별행녹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
要幷入私記) - 14세기 후반

▲ 지국천왕(持國天王) 탱화

↖  증장천왕(增長天王) 탱화

◀  다문천왕(多聞天王) 탱화


불갑사는 사천왕상을 배려하여 그들의 후불탱
까지 남겼다. 아마도 사천왕의 수호력이 길이
길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그리 한 것
이 아닐까 싶은데, 1904년에 조성하여 천왕문
내부의 사천왕상 뒷쪽에 배치했다. 허나 지금
은 성보박물관으로 탱화를 모두 옮겼으며, 사
천왕상만 천왕문에 남아있다.


 

♠  불갑사 경내 둘러보기

▲  천왕문(天王門)

성보박물관에서 계단 하나를 오르면 천왕문이다. 이 문은 부처와 절을 지키는 사천왕의 보금
자리로 이들 사천왕은 원래 고창 흥덕에 있던 연기사(烟起寺)터에서 가져온 것이다.

때는 1870년 어느 날, 불갑사에 머물던 설두대사 봉기(奉琪)의 꿈에 사천왕이 나타났다. 그들
은 비를 쫄딱 맞은 처량한 모습을 보여주며 지붕 좀 씌워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들을 소수
문해보니 이미 망해버린 고창 연기사터에 버려져 있었다.
그래서 배 4척을 끌고 가서 그들을 데리고 오니 영광 사람들의 환호가 대단했다고 하며 경내
에 사천왕의 집(천왕문)을 지어주자 그들의 가호 덕분인지 여러 번 화재를 모면했다고 한다.
허나 굳이 사천왕의 현몽이 아니더라도 설두는 연기사터 사천왕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
다. 아직 불갑사는 사천왕도 갖추지 못했고, 연기사터 사천왕이 잘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에
굳이 새로 만드는 것보다는 버려진 그들을 구제도 할 겸, 데리고 와 불갑사의 사천왕으로 삼
은 것이다.
또한 불갑사에서는 이들 사천왕을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 뱃속에 오래된 귀중한 서
적(49종 66책)을 복장 유물로 넣어두기도 했고, 1904년에는 사천왕후불탱까지 제작하여 그들
뒷쪽에 걸어두었다. 보통 복장유물은 불상이나 보살상 뱃속에 넣어두기 마련인데 말이다.

▲  천왕문 사천왕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159호

▲  대웅전을 가리고 앉은 만세루(萬歲樓) - 전남 지방문화재자료 166호

천왕문을 지나면 만세루가 정면을 가리며 우뚝 자리해 있다. 그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맞배
지붕 건물로 1층 부분 높이를 낮게 해서 건물 옆구리로 돌아가 법당을 친견토록 했다. 이는
경내를 외부로부터 보이지 않게끔 하려는 조선 후기 사찰의 특징이다.
만세루는 강당(講堂) 및 행사 공간으로 왕년에는 정면 7칸, 기둥 높이는 무려 90척에 이르렀
다고 한다. 90척이면 1척에 23cm로 계산해도 20.7m라는 소리인데, 그만큼 불갑사가 잘나갔다
는 뜻이다. 허나 정유재란 때 파괴되었고, 수 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아담하
게 굳어졌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만세루
만세루 현판이 앞이 아닌 뒷쪽에 걸려 있다.
불갑사는 은근 뒷쪽을 좋아하는 듯~~

▲  대웅전 뜨락 우측의 일광당(一光堂)
1620년에 중건된 건물로 원래 선방이었으나
지금은 승려의 거처로 쓰인다.


▲  설선당 - 거의 'ㅁ' 구조의 건물로 선방(禪房)과 요사(寮舍),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템플스테이 숙소로도 쓰임)

▲  불갑사의 목구멍, 세심정(洗心亭)

산사에는 늘 목을 축여주는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불갑사 역시 불갑산이 베푼 옥계수를 끌어
와 샘터(약수터)를 갖추었는데, 샘터 위에 기와 지붕을 얹히고 마음을 씻는다는 뜻에 '세심정
'이라 이름 지었다. 샘터를 뜻하는 정(井) 대신 정(亭)을 칭한 점이 이채로운데, 네모난 석조
에는 불갑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늘 물이 가득해 가뭄에도 별 끄떡이 없다고 한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갈증으로 활활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진화 작업을 하
니 속세의 때가 싹 가신 듯, 속이 시원해진다. 그렇게 2~3모금을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발이
떼어졌다. 물 맛이 괜찮은 것을 보니 불갑사의 인심도 그런데로 괜찮은 모양이다.

▲  갈증을 씻겨주는 세심정 샘터

▲  무량수전(無量壽殿)
아미타불의 거처로 근래에 지어졌다.


▲  무량수전 옆구리에 자리한 5층석탑

불갑사의 유일한 석탑이지만 대웅전 앞에 두지 않고 경내 외곽인 무량수전 옆에 마치 숨바꼭
질 하듯 숨겨두었다. 그의 모습이 백제(百濟) 탑의 상징인 부여 정림사(定林寺)터 5층석탑을
닮았는데, 옛 백제 땅의 중심인 충청도와 전라도에는 백제 멸망 이후, 정림사 탑을 닮은 석탑
이 많이 등장했다.
지금도 정림사 탑의 후예는 계속 지어지고 있으니 아직도 백제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 모
양이다. 하긴 백제는 정말 그리워할 가치가 있는 나라이다. 식민 사관 쓰레기들과 잘못된 역
사 지식을 가진 작자들에 의해 형편없이 왜곡되고 저평가되서 그렇지, 천하 제일의 해양 대국
으로 왜열도를 비롯한 동북아를 호령했었고 700년 동안 꾸려온 찬란한 문화와 유물을 후세에
넘겼던 팔방미인의 나라였다. (반면 조선과 왜정은 정말로 잊고 싶음)


▲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 시왕 등 저승(명부) 식구들의 보금자리이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대웅전 바로 좌측에 있었으나 1936년 승려 만암이 지금 자리로
약간 후퇴시켰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장보살 좌우에는 1654년에 조성된 시왕상이 자리해
있는데,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들이 꽤 느긋해 보인다. 그들 모두 시왕이라는 같은 간판을 달
고 있지만 다른 옷과 얼굴, 포즈를 지니고 있어 각자 개성이 넘치며, 시왕상과 지장보살3존상
뱃속에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서적 68종 97책이 쏟아져 나와 성보박물관에 담아두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명부전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十王像)

▲  칠성각(七星閣, 왼쪽)과 팔상전(八相殿, 오른쪽)

대웅전 뒷쪽에는 조사전(祖師殿)과 칠성각, 팔상전이 쌍둥이꼴 모습으로 나란히 자리를 지키
고 있다.
조사전은 불갑사를 거쳐간 주요 승려들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오래 숙성된 진영은 모두
성보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칠성각은 칠성 식구를 담은 칠성탱을 중심으로 산신(山神) 식
구가 담긴 산신탱, 독성(獨聖) 식구들이 담긴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팔상전은 1822년에
중건된 것으로 석가여래와 16나한, 1702년에 그려진 팔상도(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8개의 그림
)가 봉안되어 있다. 특히 팔상전 석가불과 16나한 뱃속에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서적 76
종 84책이 쏟아져 나와 불갑사의 고색의 품질을 더욱 끌어올려주었다.


 

♠  불갑사 대웅전(大雄殿) - 보물 830호

▲  불갑사의 중심, 대웅전

서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팔작지붕 건물이다. 18세기 이전
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기와에서 '건륭(乾隆) 29년'이란 글씨가 발견되어 1764년에 수리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9년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지붕 용마루에는 도깨비 얼굴의 보주를 얹혔는데, 현재 성보박물관에 있는 용마루 보탑이 바
로 이곳에서 위엄을 뽐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를 촘촘히 배치한 다포(多包) 양식으로 건물
가운데 칸 좌우 기둥 위에 용머리 조각을 두었으며, 문짝에는 연꽃과 국화 무늬 꽃창살을 달
아놓아 꽃창살의 상징인 부안 내소사(來蘇寺) 대웅전의 흑백 꽃창살과 자웅을 겨룬다. 그리고
건물 내부 모서리 공포 부분에도 용머리를 두었고 천정은 우물 천정으로 학과 까치가 그려진
벽화가 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사찰 건축물로 건물은 비록 작지만 안과 밖이 화려하기 그지 없으며, 시
대적인 특성과 용마루에 보탑 등의 장식을 다는 등, 다른 곳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독특한 개
성을 보여준 점이 참작되어 보물의 지위를 얻었다.

▲  옆에서 바라본 대웅전

▲  법당 수호용으로 걸어둔 신중탱


▲  대웅전의 낮고도 아름다운 하늘, 우물천정

▲  학과 잠자는 까치, 나무 등이 그려진 벽화

대웅전 내부에는 여러 벽화가 전하고 있다. 너무 불교 일색으로 도배하기가 뭐했는지 선비들
과 절의 주요 고객인 여자 신도들이 좋아할만한 것을 그려놓았는데, 마치 수묵담채화를 벽에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 하다.
이들 그림은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어느 화승(畵僧)이 그림 작업을 하면서 절대로 훔쳐
보지 말 것을 당부하며 문을 걸어잠궜다. 하지만 사람이란 궁금하면 오금이 저리는 법, 어느
성미 급한 승려가 몰래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러자 화승은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하며, 그 피
가 까치가 되어 날라갔다고 한다.
이런 비슷한 전설을 가진 절이 강진 무위사(無爲寺), 부안 내소사(來蘇寺), 무주 안국사(安國
寺) 등에 전하는데, 그림을 그린 승려가 모두 파랑새로 변해 사라진데 반해 여기서는 죽어서
까치가 되어 사라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워낙 잘 그려진 그림이라 절에서 그럴싸한 전설을 덧
붙여 그림 수식용으로 삼은 것이다.


▲  출입문에서 바라본 대웅전 목조석가여래3불좌상과 닫집

▲  가까이서 본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 보물 1377호

대웅전 불단에는 쌍둥이처럼 생긴 목조석가여래삼불이 대좌(臺座)를 갖추며 앉아있다. 건물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반하여, 삼불과 불단은 남쪽을 향하고 있어 서로 따로 노는 모습이다.
이런 유형은 영주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과 대전 고산사(高山寺) 등이 있는데, 고려~조선
불교 건축물에서는 거의 흔치 않은 구조로 주목을 끈다. 허나 원래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건물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가 1869년 지금처럼 방향을 틀었다고 전하며,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다.

이들 삼세불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약사불과 아미타불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심 불상인 석가불
이 단연 덩치가 크다. 좌우 협시불은 석가불의 ¾ 정도 크기로 다들 듬직하게 생긴 신체에 무
릎도 넓어 안정되어 보인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솟아 있고, 얼굴은 살이
좀 붙어있어 네모난 모습이며, 작은 입에는 나름 미소가 깃들여져 있다. 눈썹은 살짝 구부러
져 있고, 눈은 살며시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귀는 중생의 민원을 빠짐없이 들으려는 듯 어
깨까지 축 늘어졌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몸에 걸친 옷은 양쪽 어깨를 덮고 가슴 윗쪽을
드러내고 있다. 옷주름은 다리 위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수인(手印)은 항마촉지
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석가불만 다른 수인을 취함)

이들은 1635년 무염(無染)을 비롯한 승일, 도우, 성수 등 10명의 화승이 만든 것으로 불상 뱃
속에서 관련 조성기가 나와 조성 시기와 만든 사람을 고맙게도 밝혀주고 있다. 무염은 호남과
충청도, 강원도에서 활약한 승려로 이들 3세불이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다. 그래서
무염의 작품과 경향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어주어 보물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만약 조성기가 없었다면 아직도 지방문화재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조성기는 중요한
존재이다. 그가 있냐 없냐에 따라서 몸값과 등급이 크게 달라진다.


▲  현란하기 그지 없는 대웅전의 하늘
(우물천정, 공포, 용머리 장식, 불상 그림과 연꽃무늬 등)

▲  장대한 세월 앞에 형편없이 쪼그라든
각진국사자운탑비(覺眞國師 紫雲塔碑)


대웅전 옆에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제대로 털린 비석이 하나 있다. 그는 불갑사를 크
게 일으킨 각진국사의 행장(行狀)이 적힌 자운탑비로 그의 명성의 반비례로 비석 상태는 참
우울하기 그지 없다. 귀부(龜趺)의 용머리는 절반 이상 날라간 상태이고, 발가락 또한 죄다
뜯겨져 나갔으며, 행장이 적혔을 빗돌은 죄다 날라가 겨우 일부만 남았다.
불갑사가 절의 큰 은인이나 다름이 없는 그의 탑비를 일부러 푸대접할리는 없을터, 그만큼 불
갑사의 인생이 파란만장했음을 이 비석이 몸소 보여주는 것 같다.

각진국사 복구(復丘, 1270~1355)는 경남 고성 출신으로 10살에 천영(天英)에게 출가를 했다. 천영이 죽자, 도영(道英)의 제자가 되었으며, 21살에 승과(僧科)에 급제하여 충주 정토사(淨
土寺), 강진 월남사(月南寺)에 머물렀다. 1320년 조계사 13세 사주(社主)가 되어 선풍을 날렸
으며, 장성 백양사(白羊寺)를 크게 중창하고, 말년에는 불갑사에 머물며 절을 크게 불렀다.
1350년과 1352년 왕사(王師)에 임명되었고, 공민왕(恭愍王)으로부터 각엄존자(覺儼尊者)라는
호를 받았으며, 1355년 입적하자 각진국사(覺眞國師)라는 시호를 내려 그를 기렸다.


▲  불갑사 참식나무 자생북한지대 - 천연기념물 112호

불갑사 남쪽 산자락에는 참식나무 자생지가 있다. 녹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와 왜열
도, 중원대륙, 대만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곳 자생지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바로 이 땅에서 가
장 북쪽 자생지(自生地)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마음편히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최북단이 이
곳이다.

참식나무 자생지 안내문은 경내 바로 뒷쪽(남쪽)에 있지만 그들의 보금자리는 한참을 더 올라
가야 나온다. 나는 시간을 이유로 거기까진 가지 않았는데, 이 나무에도 믿거나 말거나 전설
이 하나 전해온다. 아마도 인도 승려 마라난타 창건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불갑사에서 지었을
것이다.

백제 때 불갑사 승려인 정운이 머나먼 인도로 유학길을 떠났다. 거기서 불교 공부를 하던 중,
인도 공주와 친해져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이를 안 인도왕이 이래서는 안된다면서
승려를 추방시켰다. 정운과 강제 이별을 하게 된 공주는 너무 슬퍼하며 두 사람이 늘 만나던
곳에 자라던 나무의 열매를 따서 일종의 사랑의 증표로 주었고, 승려는 그것을 가져와 불갑사
뒷쪽에 심으니 그것이 자라서 참식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  그림 같은 호수 불갑사제

불갑사에서 3분 정도 오르면 불갑산 계곡물을 모아서 만든 불갑사제가 나온다. 절 바로 윗쪽
으로 불갑산이 베푼 계곡이 졸졸졸~♪ 흐르다가 이곳에 모여 끝없는 대장정을 준비한다. 장차
다가올 늦가을의 향연을 준비하는 나무들과 알을 품은 어미새처럼 푸근하기 그지없는 불갑산
산줄기는 호수 수면에 비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몸단장에 여념들이 없고, 삼삼한 숲에
둘러싸인 호수의 자태는 첩첩한 산중에 묻힌 비밀의 호수처럼 신비롭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  불갑사제 호수 산책로

▲  녹음이 짙은 불갑산 산길 (불갑산 정상 방면)

호수 주변 숲에도 상사화가 넓게 자리를 닦고 있었다. 허나 이곳 역시 검게 떡이 된 상태. 정
상인 상사화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늘 상사화 구경은 완전 틀렸구나~~! 가는 날이 완전 문
닫는 날이었으니 말이다.


▲  불갑산 산길 (불갑사제 주변)
해불암입구 갈림길까지만 조금 올라갔다가 불갑사로 쿨하게 철수했다.

▲  불갑사 관광지에 자리한 연지(蓮池)와 정자

기분 같아서는 해불암과 불갑산 정상, 그리고 함평 용천사까지 싹 인연을 짓고 싶지만, 시간
도 넉넉치 못하고 오늘 너무 무리를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아서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
로 쿨하게 넘겼다. (용천사는 나중에 인연을 지었음)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한 언젠가 또 인연을 짓지 않겠는가? 게다가 상사화라는 아름다운 무
기도 있으니 10년 안에 꼭 찾아오리라 다짐을 하고 나의 제자리로 발길을 돌렸다.

이렇게 하여 영광 불갑사 나들이는 다소 아쉬움을 남기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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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9월 2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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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 나주 지역 제일의 고찰,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 석장승, 나주곰탕 1그릇)

 


' 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나주 불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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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회사 석장승
◀ 원진국사 부도
▶ 불회사 진여문과 사천왕문
▼ 불회사 대웅전

불회사 진여문, 사천왕문
   

 


 

겨울 제국이 천하만물의 격한 미움을 받으며 세력 확장에 열을 올리던 12월 첫 무렵에 따
뜻한 남쪽 땅인 전남을 찾았다. 그 전남에서 내가 격하게 반응을 보인 곳은 나주(羅州)의
유서 깊은 고찰 불회사이다. (불회사를 목적지로 정함)

오랜만에 햇님보다 일찍 부지런을 떨며 새벽의 차디찬 기운을 뚫고 한강을 건너 영등포역
으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호남의 중심지인 광주(光州)로 가는 첫 열차를 타고 5시간 가까
이를 달려 광주역에 두 발을 내리니 겨울 제국에게 점령된 북쪽과 달리 가을의 따스한 기
운이 나를 맞이한다.

광주역에서 불회사까지는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접근성도 영 좋지가 않다. 예전에는
광주역을 비롯한 광주 도심부에서 불회사입구까지 바로 가는 나주시내버스가 있었으나 이
제는 남평에서 무조건 환승을 해야된다. (남평에서도 40~50분 정도 들어가야 됨)


 

♠  불회사 입문 (석장승, 원진국사부도)

▲  불회사 일주문(一柱門)

불회사입구에 이르니 웅장한 모습의 일주문이 마중을 나왔다. 문 현판에는 '초전성지 덕룡산
불회사(初傳聖地 德龍山 佛會寺)' 10글자가 쓰여있는데, 여기서 초전성지란 '불교가 처음 전
해진 성지'란 뜻이다. 이는 백제에 불교를 전한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366년에 창
건했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 땅 최초의 절이란 자부심을 담은 것이다. 허나 그 창건설은
그저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며, 실제 그가 불교를 들고 백제를 찾은 것은 384년이다.


▲  일주문 부근에 자리한 도암선사부도(道巖禪師浮屠)와 하얀 승탑

일주문을 지나면 가장 먼저 승탑(부도) 2기와 비석 1기, 그리고 속세와 그들을 이어주는 돌다
리를 만나게 된다. 승탑은 돌다리보다 1단 높은 곳에 나란히 자리해 있는데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진 왼쪽 승탑이 도암선사의 승탑이다.

도암선사(1805~1883)는 장성 백양사(白羊寺)를 중창했던 승려로 성은 차씨이다. 1817년 백양
사 심옥(心沃)에게 출가하여 1827년 인월(印月)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하루에 1끼
만 먹으면서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한편 전국의 이름난 승려를 찾아가 불경을 익혔다.
1840년 화월(華月)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이때부터 백양사에 머물며 후학들을 지도하고 계율
을 엄히 지키도록 했으며, 백양사 뒷쪽 백학봉 밑에 자리한 석실(石室)에 들어가 10여 년 동
안 불도를 닦고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천진암(天眞庵)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883년에 78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그가 이승을 뜨자 잠깐 인연이 있던 불회사에 탑을 만들어 사리를 봉안했는데, 승탑과 관련된
어떠한 안내문도 없어 무심히 지나치기가 쉽다. 그 옆에는 한참이나 후배인 하얀 피부의 승탑
이 서있고, 그 앞에 하얀 승탑의 주인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  고색의 때로 자욱한 도암선사 승탑(부도)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승탑으로 검은 주근깨가 여기저기 피어났다.

▲  불회사 숲길 (일주문과 주차장 사이)

▲  그림처럼 펼쳐진 불회사 숲길 (석장승 직전)

불회사 숲길은 자연의 향이 그윽한 아리따운 숲길이다. 사찰 숲길의 갑(甲)으로 칭송받는 곡
성 태안사(泰安寺) 숲길과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전나무 숲길을 바짝 긴장시킬 정도로 아름
답기 그지 없는데, 300~400년 묵은 비자나무와 측백나무, 전나무, 삼나무 등이 무성해 온갖
내음을 누릴 수 있다. 특히 대웅전 뒷쪽에는 춘백(春栢)이 삼삼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5월에
연두빛으로 막 피어날 때 바라보는 대웅전과 그 뒷산의 모습은 놓치기 아까운 봄 풍경으로 꼽
힌다.
게다가 단풍이 늦게 들고 늦게 지기 때문에 11월 후반까지 단풍의 향연을 즐길 수 있고, 단풍
색깔이 광주 인근에서 가장 곱다고 한다. 허나 그 좋은 시기가 싹 지나간 시점이라 단풍은 거
의 다 지고 간신히 나뭇가지에 붙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초췌한 단풍잎만 남아있을 뿐이라
안그래도 늦가을이다 연말이다해서 우울해진 나의 정처없는 마음을 더욱 우울의 끝으로 밀어
넣는다. (불회사 비자나무 숲은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됨)


▲  불회사 석장승 - 국가 민속문화재 11호

랫 주차장에서 3~4분 정도 가면 불회사의 오랜 상징이자 지킴이인 석장승 1쌍이 마중을 한
다.
장승은 예로부터 부정한 기운을 막는 존재로 마을이나 절 입구에 세웠다. 지킴이 역할 외에도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는데, 청동기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선돌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불회사 석장승은 절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는데, 절 수호와 절의 경계를 알리는 기능을 담
당했다. 그러니까 석장승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불회사의 영역이 시작되는 것이다. 길 양쪽에
1기씩 자리해 서로를 바라보고 있으며, 돌난간을 두룬 네모난 보금자리에 퉁방울 눈으로 뻣뻣
하게 서 있다. 서쪽 장승은 남자(이하 남장승), 오른쪽 장승은 여자(이하 여장승)로 초보자가
봐도 누가 남자고 여자인지 쉽게 구분이 간다.

남장승(키 315cm, 몸둘레 170cm)은 여장승보다 키가 크며, 동그란 큰 눈은 왕방울처럼 부라리
고 있고, 세모난 코는 주먹처럼 크다. 입은 일자로 그어져 있고, 입 밑에는 수염이 약간 묘사
되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불상의 무견정상(無見頂相)처럼 두툼히 솟아 있다. 몸통에는 그의
이름을 알리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5자가 쓰여 있고, 얼굴 표정은 약간 인상을 쓰고 있
지만 그리 싫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절을 지키는 수호신의 얼굴치고는 좀 귀엽다.

그의 동반자인 여장승(키 180cm, 몸둘레 162cm)은 인심 좋은 아지매를 보듯 표정이 매우 부드
럽다. 두 눈은 남장승 못지 않은 왕방울로 눈 위에는 살짝 구부러진 눈썹과 광장처럼 넓은 이
마가 있으며, 코는 남장승 못지 않게 크다. 입은 아래로 살짝 구부러져 엷은 미소까지 띄우고
있으며, 몸통에는 그의 이름을 알리는 '주장군(周將軍)' 3글자가 쓰여 있는데 원래 이름은 상
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다. 남장승에 비해 키는 작으나 다정한 표정이며, 둘다 귀엽고 익살스
러운 포스로 무서움은 커녕 즐거움을 준다.


아무리 굳은 얼굴이거나 인상을 쓴 얼굴도 그
들을 보면 절로 주름이 풀어질 것이다. 그리고
절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표정에 넋이 나가 본연의 임무를 깜빡 잊고 돌
아갈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진리가 아닐까?
이들 석장승은 서쪽 산너머에 있는 운흥사(雲
興寺) 석장승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1719년 전
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장승을 숭배하
는 민간신앙과 불교신앙이 혼합된 존재이자 이
땅에 몇 안되는 사찰 장승으로 가치가 높다.

▲  여장승을 늘 살피는 남장승

▲  남장승을 바라보는 여장승

▲  남장승의 뒷모습과 여장승


  연리지(連理枝)라 불리는 느티나무(가운데 나무) -
나주시 보호수 15-4-12-6호


석장승을 지나면 왼쪽 숲에 불회사의 또다른 명물인 연리지가 나온다.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나무로 두 나무가 서로 맞닿아 엉켜있는 모습이 마치 남녀가 예민한(?) 짓거리를 하는 모습처
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절 주변에서 그런 연리지가 종종 목격되어 그것도 참 흥미로운
데 여색을 멀리하며 불도에 정진해야 되는 승려의 한이 모여 나무로 표출된 모양이다.

연리지는 가뭄에 콩 날 정도로 희귀한 나무라 나라의 경사나 부모에 대한 효성, 화목한 부부
등을 상징하며, 그의 수종(樹種)은 느티나무이다. 높이는 30m에 이르러 하늘을 가릴 정도이고
둘레는 1.5m로 키에 비해 꽤 늘씬하다. 나이는 약 600년으로 짐작된다.


▲  불회사 사적비와 소나무

연리지를 지나면 불회사의 장대한 역사를 머금은 사적비(事蹟碑)가 나온다. 듬직하게 생긴 귀
부(龜趺)와 글씨가 빼곡히 담겨진 검은 피부의 빗돌,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무기 2마리가
생동나게 새겨진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성된지 얼마 안되어 윤기가 주르르 흐른다. 그런 사적비 옆에는 하늘을 향해 곧게 자란 소나무가 주변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  원진국사부도로 오르는 산길

▲  진여문 부근의 승탑들

사적비를 지나면 불회사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에 덕룡산으로 오르는 산길이 나온다. 원진국사
부도를 보고자 한다면 그 산길을 꼭 오르기 바란다. 조그만 계곡을 건너서 대나무숲으로 들어
서면 좌우로 갈라진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부도(승탑)가 나온다.
나는 사적비 뒷쪽 산길을 몰랐던 터라 진여문까지 갔음에도 부도를 알리는 길이 없어 그냥 지
나칠까 했었다. 허나 부도와의 술래잡기는 끝내야겠다 싶어서 길도 없고 경사도 각박한 진여
문 남쪽 산자락을 무대포 정신으로 올라가서 끝내 술래 신세를 면했다.

진여문 남쪽에는 승탑(僧塔) 2기가 초췌한 모습으로 중생들의 눈길을 호소한다. 오른쪽 승탑
은 탑신(塔身)이 온전히 남아있고, 6각형 머릿돌에는 중생들이 올려놓은 돌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그 위에는 돌기둥이 서 있는데, 피부색이 전혀 틀려 승탑의 일원은 아니었던 듯 싶다.
탑의 밑도리는 돌에 묻혀 윗도리만 간신히 고개를 내민다.
왼쪽 승탑은 거친 세월의 흐름을 과민하게 탔는지 머릿돌과 바닥돌만 간신히 남은 처량한 신
세이다. 이들 승탑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탑의 주인은 알 수 없다.

▲  머릿돌과 바닥돌만 남은 가련한 승탑

▲  불회사 원진국사부도(圓眞國師浮屠)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25호

경내 남쪽 산자락에 원진국사부도가 살짝 터를 닦고 있다. 원진국사 승형(承逈, 1171~1221)은
능엄선(楞嚴禪)의 주창자로 성은 신씨, 고향은 경북 상주(尙州)이다. 3살 때 고아가 되어 숙
부인 시어사(侍御史) 신광한(申光漢)에게 양육되었으며, 13세에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출
가하여 김제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1197년 스승인 동순(洞純)이 입적하자 승과(僧科)를 포기하고 수도에 정진했으며, 명종(明宗)
이 그의 소문을 듣고 특별히 불러 초선(初選)을 치르게 했다. 이후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에
들어가 지눌(知訥)에게 법요(法要)를 받고 오대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예불한 뒤 크
게 감응을 얻었으며, 춘천 청평사(淸平寺)에서 이자현(李資玄)의 유적을 찾다가 '수릉엄경(首
楞嚴經)은 마음의 본바탕을 밝히는 지름길'
이란 이자현의 문수원기(文殊院記)에 크게 감명을
받아 능엄경을 열심히 연구했다. 그 인연으로 불법(佛法)을 알릴 때 능엄경을 으뜸으로 삼겠
다고 발원했으며, 이후 이 땅의 선종(禪宗)에서 크게 숭상을 받게 되었다.

1210년 연법사(演法寺) 법회의 법주(法主)가 되어 선풍(禪風)을 떨쳤고, 1213년에 삼중대사(
三重大師), 1214년에 선사(禪師)가 되었으며, 이듬해 대선사(大禪師)가 되어 포항 보경사(寶
鏡寺)에 머물렀다. 1220년에는 희종(熙宗)의 4째 아들인 경지(鏡智)의 스승이 되었고, 1221년
능엄경을 설법한 뒤, 팔공산 염불사(念佛寺)로 자리를 옮겨 승려치고는 젊은 50세에 입적했다.

고종(高宗)은 그에게 원진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보경사에 그의 승탑을 세웠으나 사리의 일부
를 가져와 잠깐 인연이 있던 불회사에도 승탑을 두었다. 탑신 밑도리에 연우(延祐, 원나라 인
종의 연호) 4년 5월에 세웠다는 글씨가 있어 1318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탑신 앞
쪽에는 해서체(楷書體)로 '圓眞國師 通照之塔(원진국사 통조지탑)'이라 쓰여있어 탑의 이름과
주인까지 소상히 알려준다.

높이 1.7m의 조촐한 모습으로 조각 기법이 형식화되어 딱히 섬세한 면은 없으며, 탑신과 지붕
돌이 8각이고 그 밑도리는 동그란 전형적인 8각원당형 승탑이다. 또한 탑신에 탑의 주인공과
탑 이름, 조성 연대가 쓰여있어 고려 후기 승탑 양식을 연구하는데 아주 소중한 자료가 되어
준다. 바로 이 점이 이 승탑의 강한 매력이다.


▲  승탑의 주인과 탑 이름이 희미하게 쓰여있다. (원진국사 통조지탑)


 

♠  불회사 진여문, 대웅전 주변

▲  한몸으로 이루어진 진여문(眞如門)과 사천왕문(四天王門)

원진국사부도와의 숨바꼭질을 승리로 마무리 짓고 경내를 코앞에 둔 진여문으로 향했다. 진여
문은 하나로 이어진 사천왕문과 함께 1990년대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계곡 위에 홍예 돌다리
를 걸치고 그 위에 복도식 건물을 씌웠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한 지붕을 이고 있는 사천왕문
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은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그들의 목상(木像) 대
신에 그림 4개가 자리를 대신한다.
사천왕문은 원진국사부도가 있는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사천왕의 검문을 거치면 비로소 불
회사 경내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부처의 모임터를 뜻하는 불회사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  홍예 돌다리를 갖춘 진여문

▲  사천왕문 사천왕도

▲  2층으로 이루어진 대양루(大陽樓)

▲  대양루의 1층을 차지하고 있는
천수전(千手殿)

불회사는 덕룡산 북쪽 자락 숲속에 포근히 터를 닦은 오래된 절이다. 경내 앞쪽(남쪽)에는 계
곡이 흐르고, 뒷쪽(북쪽)으로 산을 베게 삼아 누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으로 사방이 덕
룡산의 첩첩한 산줄기에 감싸인 고적한 곳이다. 절 입구에서 절까지 속세의 민가(民家)도 거
의 없으며, 절 부근에는 적당한 마을도 없다.

이 절은 366년(또는 384년)에 인도 승려인 마라난타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366년이면 고구려(
高句麗)에 불교가 전해지기 무려 6년 전이고, 백제는 18년 전이 된다. (가야는 제외) 불회사
가 366년 창건설을 자신 있게 우기는 것은 1978년 큰법당 기와 불사 때 발견된 '호좌(호남 좌
도) 남평 덕룡산 불호사(불회사의 옛 이름) 대법당 중건 상량문(上樑文)'
에 366년<동진(東晉)
태화 원년>에 창건되었다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연유로 이 땅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
해진 초전성지(初傳聖地) 임을 일주문을 통해 아주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다.
불회사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 땅의 불교사를 다시 정리해야 되겠지만 굳이 그리할 필요는 없
을 것 같다. 마라난타의 366년(384년) 창건설은 어느 기록에도 없고, 백제 유물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가야의 불교 전래설도 외면받고 있는 마당에 불회사의 366년 창건설은 어디 주목이
나 받겠는가?

창건 이후, 656년에 희연조사(熙演祖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며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道詵國
師)가 중창을 하고, 1264년에 원진국사가 크게 중창을 벌였다고 한다. 그런데 원진은 앞서 그
의 승탑에서 밝혔듯이 1171년에 태어나 1221년에 세상을 떴다. 그런데 뜬금없이 1264년이라니
? 원진이 입적한지 53년 뒤에 홀연히 부활하여 절을 중창했단 말인가?? 허나 경내 주변에 그
의 승탑이 있으니 원진이 절을 손질한 것은 맞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창건했을 지도 모르겠
다.

1798년 화재로 절 전체가 소실되자 주지인 지명(知明)이 1799년에 중건을 했으며, 절의 원래
이름은 부처를 지킨다는 뜻의 불호사(佛護寺)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큰법
당에서 나온 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808년 경에 불회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하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 절을 크게 손질하여 기존의 가람
(伽藍)배치 외에 동쪽에 진여각과 요사채, 대양루 등을 건립하여 절의 몸집을 더욱 늘렸다.

절을 수식하는 전설 가운데 호랑이와 도승의 이야기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 후기에 참의(參議) 벼슬을 지낸 조한용(이하 승려)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불
사이군(不事二君)을 외치며 벼슬을 그만두고 승려가 되었다. 표주박 하나와 누더기 1벌로 천
하를 떠돌던 그는 불회사에 이르자 쇠락한 절의 모습에 발끈하여 절 중창을 계획하고 주변 마
을로 탁발을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탁발을 하고 절로 돌아오다가 난데없이 호랑이를 만났다. 그런데 호랑
이는 그를 보자 입을 크게 벌리고 눈물을 흘려 애원하는 것이 아닌가. 호랑이의 출현에 염통
이 적지않게 쫄깃해졌던 그는 용기를 내어 입을 살펴보니 글쎄 목에 비녀가 걸려있던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사람을 잡아먹지 말아라. 그것을 약속하면 내 비녀를 뽑아주마' 그러자 호랑
이가 '알았어. 앞으로 사람은 해치지 않을테니 비녀 좀 뽑아줘!' 그래서 비녀를 뽑아주니 호
랑이는 고마움을 표하고 사라졌다.

그해 겨울, 호랑이가 그를 찾아왔다 '야 나와봐! 아주 좋은 거 가져왔어!' 그가 나와보니 호
랑이가 어디서 아리따운 여인네를 물어다 마당에 놓고 간 것이 아닌가. 호랑이가 앞서 은혜를
갚고자 참 기특한 일을 하였지만 이미 출가한 몸이라 대놓고 흑심을 품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혼절한 여인을 외면하기도 그래서 일단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알고보니 안동(安東) 만석꾼
김상 공(이하 김공)의 외동딸이었다.
여인이 기력을 회복하자 남장을 시켜 안동으로 데려가니 김공은 너무 기뻐 크게 보답할 길을
알려달라고 했다. 이에 불회사 복원에 필요한 시주를 청하니 김공이 쾌히 승락하자, 승려는
가지고 온 걸망을 꺼내 쌀을 담아 달라고 했다. 걸망이 너무 작아서 이거 얼마나 들어가겠는
가 싶어 김공의 부인은 우려했으나 아무리 부어도 끝없이 들어가는 쌀을 보며, 크게 놀라 아
예 곳간을 열테니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고 했다.
이에 승려는 신통력으로 공양미를 절로 보냈다고 하며, 그때 쌀을 보관한 곳이 인근 화순 중
장터라고 한다.

김공이 준 쌀로 불회사 대웅전을 지으며, 좋은 날을 택해 상량식을 올리려고 했으나 일이 너
무 장대하여 그 시간을 맞추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뒷산 봉우리에 올라가 '호법 선신중이
시여! 부처의 대작불사가 해가 짧아 원만히 회향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피를 드리워 주소서
'
기도를 올리니 해가 잠시 길을 멈추면서 제시간에 상량식을 마쳤다고 한다.
이후 그가 기도를 한 자리에 암자를 세우고 해를 멈추게 한 곳이라 하여 일봉암(日奉庵)이라
했으나 6.25 때 파괴되어 샘터만 남았다.

그 승려는 말년에 건너편에 남암(南庵)이란 암자를 짓고 머물렀는데 아침과 저녁마다 까만 새
가 날라와 뒷편에 있는 잣나무 가지에 앉아 승려와 대화를 했다고 하며, 그 나무를 흑조수(黑
鳥樹)라 불렀다고 한다. 그 나무는 남암터에 2그루가 있었으나 태풍으로 하나가 쓰러지고 지
금은 1그루만 남아있다. (현재 부속 암자는 모두 사라진 상태)

비자나무와 측백나무 등에 싱그럽게 둘러싸인 경내에는 대웅전과 영산전, 명부전, 대양루, 심
검당, 사운당, 천왕문, 진여문, 불국원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과 건칠비로자나불좌상, 민속문화재인 석장승, 지방문화재
인 원진국사부도, 소조보살입상 등이 있고, 그외에 도암선사부도와 조선 후기 승탑, 연리지,
괘불지주 등이 있어 고색의 내음도 숲내음 만큼이나 진하다.

※ 나주 불회사 찾아가기 (2018년 12월 기준)
* 광주 전남대후문과 산수5거리, 조선대, 광주1호선 남광주역(3번 출구), 백운광장, 인성고(
  효천역)에서 나주시내버스 999, 999-1번을 타고 남평정류장에서 하차 → 중장터, 도동 방면
  으로 가는 나주 200번으로 환승하여 불회사 하차 (1일 10회 운행)
* 나주터미널과 영산포터미널에서 나주 403번을 타고 불회사 하차 (1일 13회 운행)
* 승용차 (석장승과 일주문 사이에 주차장이 있으며, 경내에도 있음)
① 광주 → 남평읍내 → 도래마을 → 다도 → 불회사입구 우회전 → 불회사
② 광주 → 칠구재터널 → 도곡온천입구 → 도암면 → 운주사입구 → 중장터 우회전 → 불회
   사입구 → 불회사

* 불회사 입장료는 없음
* 불회사는 산사힐링체험(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7~8월에 열리는 관음대참회 수련
  회, 매월 3째주 토요일에 1박 2일로 열리는 주말산사문화체험, 녹차(비로다)만들기 체험 등
  이 있으며, 자세한 일정과 가격은 불회사 홈페이지를 참조하거나 전화로 문의한다.
* 소재지 :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마산리 999 (다도로 1224-142 ☎ 061-337-3440)
* 불회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불회사 경내와 부드러운 곡선의 덕룡산

▲  대웅전 주변 (대웅전 우측에 극락전, 삼성각 등이 있음)

사천왕문을 지나면 1990년대 후반에 지어진 2층 대양루가 나타난다. 대양(大陽)이란 큰 햇님
으로 부처의 법을 상징하는데, 1층은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통로와 종무소(宗務所), 차 1잔과
공양물품을 판매하는 비로다경실이 있다. 여기서 비로다(榧露茶)는 불회사에서 생산되는 녹차
(綠茶)로 절 주변 비자나무 밑에서 이슬을 머금고 자란 찻잎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비로다는 오랜 역사를 가진 불회사의 살아있는 전통으로 절에서 창건주로 우기고 있는 마라난
타가 불회사를 세우고 재배한 차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을 바탕으
로 이 땅에서 처음으로 차가 재배된 곳이라고 주장까지 하나 실제 재배 시작 시기는 조선시대
> 불회사 녹차로 인해 이곳의 예전 지명은 다소(茶所)였으며, 다도면(茶道面)이란 이름도 바
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2층은 대양루 대신 천수전이란 별도의 간판을 달고 있는데, 천수관음보살(千手觀音菩薩)을 봉
안하고 있으며, 온갖 새와 토끼, 물고기, 소나무, 과일 등을 담은 그림이 평방(平枋) 등에 그
려져 있다. 보통 사찰의 벽화나 그림은 부처를 찬양하고 불교와 관련된 내용을 담기 마련이나
천수전은 그 규칙을 와장창 깨고 민화(民畵)나 사대부들이 그리는 그림처럼 치장되어 있다.


▲  불회사 대웅전 - 보물 1310호

대양루 밑도리를 통해 안쪽으로 들어서면 3단의 기단 위에 높직하게 들어앉아 남쪽을 바라보
는 대웅전 앞에 이른다.
불회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추녀를 살짝 들어올
린 모습이 마치 새가 날개짓을 하듯 경쾌하기 그지 없는데 상량문을 통해 1799년에 중건되었
음이 밝혀졌다.

건물 정면에 달린 문짝은 4분합의 빗살문으로 두터운 통판자로 짜서 창살무늬, 불상, 새와 꽃
등이 꽃살문을 이루며 장식되어 있었으나, 6.25 시절에 공비들이 그들의 소굴을 덮기 위해 모
두 약탈해 갔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초석(礎石)은 덤벙주초로 비교적 큰 편이며, 그 위에 세
운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준다.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놓고, 전/후면의 각 주칸에는 외3출목, 내4출목 공포를 2조씩, 양
측면에는 1조씩 배치했으며, 내부에는 화려한 연꽃봉오리형으로 마무리 지었다. 특히 용 4마
리를 건물 안팎으로 치장하여 법당의 장엄함을 드높였는데, 정면 어칸(가운데 칸)에 2마리의
용머리가 있고, 그 꼬리는 건물 내부 대들보 밑에서 살랑살랑 흔들거리고 있다. 또한 천정 중
앙 대들보에도 용 2마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건물 양측면 중앙에는 건물 내부로 2개의 충량(衝樑)을 걸어 그 머리를 용머리로 장식하여 큰
대들보에 걸쳤는데 이런 결구법은 조선 중기 이후에 많이 나타난다. 내부 천정은 빗천정과 우
물천정을 같이 했는데, 빗천정에는 물고기, 연꽃무늬 등을 조각하여 달았다.


▲  옆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위엄

▲  새와 연꽃 등이 그려진 아름다운 우물 천정과 대들보에 고개를 대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용 2마리


건물 내부와 바깥에 용 장식을 달고 연꽃봉오리 등을 장식한 기법은 부안 내소사(來蘇寺) 대
웅보전에도 나타나고 있어 같은 장인이나 그 후학들이 만들었음을 짐작케 하며, 조선 후기 건
립 당시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어서 2001년 4월에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호에서 보물로 지
위가 높아졌다.


▲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용의 살랑거리는 꼬리와 붉게 채색된 천정

▲  대웅전 비로자나3존불
가운데 본존불이 불회사 건칠비로자나불좌상 - 보물 1545호
좌우 협시불은 불회사 소조보살입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67호


불회사의 상큼한 보물 창고인 대웅전 내부에는 석가불 대신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중심으
로 한 비로자나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의 중심인 비로자나불은 종이로 만들어 금칠을
입힌 이 땅에 흔치 않은 건칠불(乾漆佛)로 고려 후기 불상 양식을 계승한 조선 초기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붉은 연화좌(蓮花座) 위에 앉아 그의 전용 수인(手印)인 지권인(智拳印)을 취하
고 있으며, 머리는 검은색 나발로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 있다. 두 귀는 어깨까
지 축 늘어져 중생의 조그만 하소연까지 듣고자 애쓰고 있고, 얼굴은 약간 굳은 듯한 표정이
지만 입가에서는 엷게 미소가 퍼지고 있다.
그의 좌우에 선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상은 흙으로 빚어서 만든 조선 초기
보살상으로 15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본존불과 마찬가지로 잘 만들어진 우수한
작품으로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불상/보살상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  불회사 마무리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좌우에는 온갖 군소 건물들이 학의 날개처럼 펼쳐져 있는데, 좌측 바로 옆에는 명부전
이 둥지를 틀고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을 비롯한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는데, 1402년에 세워져 1799년에 중수되었으며,
근래 손질을 했는지 고색의 기운이 대웅전 보다는 못해 보인다.


▲  후덕한 표정을 지으며 육환장(六環杖)을 쥐고 있는 명부전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밝은 색채의 10왕을 비롯한 저승의 식구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다.

▲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바로 좌측에는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세기
에 중건되었는데, 예전 이름은 칠성각(七星閣)이었다. 산신(山神)과 칠성(七星)을 비롯해 용
왕(龍王)까지 봉안하고 있으며, 그들을 담은 탱화는 모두 근래에 새로 제작되었다.

▲  용을 타고 짙푸른 바다를 질주하는
용왕의 모습이 담긴 용왕탱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나한전(羅漢殿)
석가불과 그의 열성 제자인 16나한 그리고 고려 때 절을 크게
일으킨
원진국사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예전 이름은 영산전)

▲  나한전 석가불과 16나한상

▲  원진국사의 진영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물로 아미타불과 영가
(靈駕)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공양간과 요사(寮舍)로 쓰이는 사운당
1층은 공양간, 2층은 요사이다.


▲  어처구니를 상실한 옛 맷돌
불회사 승려와 중생들의 공양밥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맷돌, 이제는 절의
찬란했던 역사를 머금은 화석이 되어 대양루 부근에 조용히 누워있다.
어처구니가 불이 나게 돌아가던 왕년의 시절을 애타게 그리워하겠지.

▲  진여문 부근 숲길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불회사를 열심히 둘러보고 대양루 부근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기
분 같아서는 속세(俗世)에서 나란 존재를 잠시 지우며 이곳에서 며칠 머물고 싶지만 내가 있
어야 될 곳이 아니기에 다시 속세로 아쉬운 발걸음을 땐다.
절을 둘러싼 비자나무와 춘백, 소나무의 청정한 내음을 배불리 들어마시며 결코 지루하지 않
는 숲길을 뚜벅뚜벅 걸으니 어느새 연리지와 석장승이 나타나 배웅을 한다. 그들을 지나치기
가 싫어 앞서 지겹게 봤음에도 다시 사진에 담느라 약간의 시간을 흘려보냈고, 다시 길을 재
촉하니 주차장과 도암선사부도, 일주문이 나타난다.


▲  불회사 숲길과 단장의 이별을 하다.
나중에 또 인연을 지을 수 있을까? 그때는 덕룡산과 운흥사(雲興寺) 석장승까지
모두 살펴보고 싶다.

▲  불회사 숲길 (주차장 부근)

불회사입구 정류장에서 다시 두 다리를 쉬며 버스를 기다렸다. 목포로 가야 되기 때문에 나주
시내(영산포, 나주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오면 정말 대환영인데 20분 정도 기다리니 남평으로
가는 나주 200번이 나타나 입을 벌린다. 남평으로 나가면 나주시내로 가는 시내버스가 수시로
있어 그것을 잡아타고 첩첩한 덕룡산 골짜기에서 탈출했다.
남평으로 나와 영산포로 가는 999번 시내버스로 환승하여 나주시내 북부에 자리한 나주터미널
에 두 발을 내렸다.

아직 점심도 제대로 때우지 못한 상태라 나주곰탕이나 한 뚝배기 들고자 터미널 서쪽 금성관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나주곰탕 골목을 찾았다. 이곳은 예전에 2~3번 와본 적이 있는데, 어
느 집으로 갈까 궁리하다가 7년 전에 들렸던 곰탕집으로 들어갔다.


▲  잘 차려져 나온 나주곰탕의 위엄

내가 곰탕집을 찾은 시간은 15시대라 손님은 거의 없었다. 송송(깍두기)과 김치, 양파, 고추
장 등의 밑반찬을 거느린 곰탕이 내 앞에 차려지자 시장기가 왕성하게 솟구쳐 곰탕과 밑반찬
들은 이내 밑바닥을 드러낸다. 그래도 성이 차질 않아서 국물과 밥을 더 청하여 아주 든든하
게 배를 채웠다.

그렇게 늦은 점심을 먹고 부근에 있는 나주목문화관과 정수루를 오랜만에 둘러보고 목포로 넘
어갔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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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12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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