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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8.14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관악산에서 제일 맵시가 좋은 계곡, 과천 문원계곡 둘러보기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4
  2. 2016.05.15 하늘과 가까운 서울의 북쪽 지붕, 도봉산 (천축사, 마당바위, 만장봉, 포대능선)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관악산에서 제일 맵시가 좋은 계곡, 과천 문원계곡 둘러보기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 관악산 문원계곡 여름 나들이 '


▲  문원하폭포

▲  관악산 일명사지

▲  보광사 문원리3층석탑



 

여름이 한참 깊어가던 7월 초에 일행들과 관악산(冠岳山, 632m) 문원계곡을 찾았다. 예전
에는 관악산의 품에 자주 안기곤 했으나 그에 대한 마음이 시들시들해졌는지 기껏 가봐야
그의 외곽만 겉돌 뿐, 그곳 정상<연주대(戀主臺)>을 오른지도 어언 10년이 넘어가 버렸다.
연주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간만에 관악산과 인연을 짓고자 여름에 걸맞은 정처를 물색하다
가 과천(果川)에 있는 문원계곡을 찾기로 했다. 이곳은 관악산에 몇 남지 않은 미답처(未
踏處)이자 대표적인 피서의 성지(聖地)로 관악산 뒷통수에 자리해 있는데, 문원폭포와 문
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등의 명소가 숨겨져 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1시에 정부과천청사역(4호선)에서 일행을 만나 관악산의
품으로 들어선다. 넓게 깔린 교육원로를 가다보면 국사편찬위원회가 나오는데, 그곳을 지
나면 오른쪽에 2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비좁은 길이 나온다. 그 길이 문원계곡으로 인도하
는 길로(이정표가 있음) 길 양쪽에는 철책이 둘러져 답답함을 안겨준다.
그런 길을 4분 정도 들어가면 산림초소가 나오면서 비로소 관악산 산길이 펼쳐진다. 여기
서 서쪽으로 가면 백운사(용운암)란 절이 나오고, 직진하면 바위에 새겨진 승려 얼굴상이
, 동북쪽으로 가면 문원계곡 산길이다.


▲  관악산 문원계곡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
두 행정관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짓눌려 좁고 각박한 길이 되어버렸다.
관악산 탐방객을 위해 길을 조금 트여주면 좋으련만..


 

♠  문원계곡(文原溪谷) 입문

▲  문원계곡의 생매장 현장

문원계곡은 관악산을 수식하고 있는 주요 계곡의 하나이다. 관악산에는 바로 근처에 있는 자
하동천(紫霞洞天) 계곡을 비롯해 관악산계곡(서울대 서쪽), 관음사계곡(남현동), 삼성천계곡
(안양예술공원)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단조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반해 문원계곡은
아기자기한 변화도 좀 보이고 있고, 높이도 제법 되는 자연산 폭포를 2개나 간직하고 있다.

정부과천청사역에서 문원계곡으로 가는 길목에는 식당이나 가게가 전혀 없다. 그들 사이에는
지체높은 정부청사와 여러 공공기관이 단단하게 자리하여 그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막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번잡하지 않아서 좋음) 그러니 먹거리를 사거나 간단하게 요기를 하려면
정부과천청사역 10번이나 11번 출구로 나가거나 KT과천지사 정류장에서 내리기 바란다. 그곳
이 과천의 중심지로 식당과 가게가 많다.

문원계곡은 관악산 남쪽에서 발원하여 정부청사 서쪽으로 흐르는데, 옛 기술표준원 북쪽에서
그만 강제 생매장을 당한다. 강제로 지하에 묻히는 계곡의 한이 얼마나 깊은지 물소리가 귀신
을 쫓아낼 정도로 우렁찬데 아무리 공공기관이라도 계곡이 그리 크지도 않거늘, 계곡에 대한
부족한 배려가 참 아쉽다. 허나 다행히 생매장 구간은 짧아서 옛 기술표준원을 지나면 교육원
로 남쪽에서 다시 햇살을 본다. (기술표준원은 충북혁신도시로 이전되었음)

산림초소를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문원
계곡 하류가 나온다. 생매장 직전인 이곳에 폭
포 2개가 연달아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는데 이
들은 자연산이 아닌 지형을 이용하여 다듬은
인공폭포이니 속지 말자. 문원계곡의 알짜배기
폭포는 여기서 더 들어가야 된다.

▲  인공(人工)이 가해진 문원계곡 하류 폭포

 


▲  각세도의 성지(聖地), 신계 이선평(晨鷄 李善枰)의 묘역

인공폭포를 지나면 산길 오른쪽으로 소나무 그늘에 묻힌 무덤과 안내문이 손짓을 한다. 전혀
정보가 없는 무덤이라 안내문을 기웃거리니 각세도(覺世道)를 세운 이선평의 묘역이다. 각세
도에서는 그를 도조(道祖)로, 그의 묘는 성묘(聖墓)라 추앙하며 애지중지하고 있다.

이선평(1882~1956)은 황해도 문화군(文化郡) 태산촌(泰山村)에서 태어났다. 조선 2대 군주인
정종(定宗)의 16대손으로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에 정진했는데, 평양 근교에서 '천하대보 정
진무외(天下大寶 正眞無外)'라는 글귀가 하늘에 나타난 것을 보고 각세(覺世)의 진리를 깨달
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향 인근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가 10여 년 동안 도를 닦으면서 의술과
복점(卜占), 풍수지리서를 익혔다고 한다.

수도를 마치고 잠시 세상으로 내려와 군의(軍醫)가 되기도 했으나 1907년 군대해산으로 실업
자가 되자 다시 수도를 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 1913년 비봉산(飛鳳山)에 들어가 1,000일 기도
에 돌입했다.
기도를 벌인지 488일째 정오에 남쪽 하늘에서 황금색으로 쓰인 각세도 3자가 나타났다. 그리
고 다음날에는 서쪽 하늘에 '원각천지 무궁조화 해탈사멸 영귀영계(圓覺天地 無窮造化 解脫死
滅 永歸靈界)'란 16자의 주문이 나타났다고 하며 그 이후 초하루부터 매일 1자씩 하늘에서 글
씨를 받아 30계명과 도기(道旗), 각세훈사(覺世訓詞) 등을 얻었다고 한다. 그렇게 1,000일을
채우고 속세로 내려와 자신이 깨달은 것을 가르치니 그것이 각세도의 시작이다.

왜정(倭政) 말기에는 신도가 3만에 이르렀고, 해방 이후에는 10만까지 늘어났으며, 이선평은
문원계곡 하류에 세심정(洗心亭)이란 초막을 지으며 포교를 벌이다가 마땅한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1956년에 세상을 떴다. 그래서 후계자를 둘러싸고 분열이 일어나 여러 갈래로 갈라지
게 된다. (이선평과 각세도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하겠음)

이선평의 묘는 1976년부터 2년 동안 성역화 사업을 벌였으며,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망주석(
望柱石) 1쌍, 묘비, 봉분(封墳)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존재를 대충 덤으
로 챙기고 서둘러 문원계곡으로 들어섰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문원계곡 산길

▲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 문원계곡 중류
한여름에는 피서의 성지로 추앙을 받으며, 피서객들의 욕탕이 되버린다.

▲  문원계곡 바위 산길 - 보호 난간이 등산객의 발길을 지켜준다.

문원계곡 산길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느긋하다. 산길과 계곡과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
다가 바위 산길(이선평 묘역과 문원하폭포 중간)에서 잠시 멀어지는데 바위 벼랑 밑으로 아득
하게 계곡이 보인다.


▲  바위 산길에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숲 너머로 과천 시내와 청계산(淸溪山)이 두 눈에 들어온다.

▲  문원계곡을 건너는 나무 다리
바위 산길을 지나면 잠시 멀어진 계곡과 다시금 가까워진다. 그 상태는
문원폭포까지 쭉 이어져 서로의 끈끈한 정을 과시한다.

▲  나무다리 주변 문원계곡 중류


 

♠  문원계곡의 꿀단지, 문원하폭포와 문원폭포

▲  관악산 제일의 폭포, 문원하폭포(文原下瀑布)

산림초소에서 천천히 30분 정도 오르면 계곡 상류에 걸린 문원하폭포(이하 하폭포)가 마중을
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를 문원폭포로 알고 있었으나 이는 답이 아니었다. 그 문원폭포는 여
기서 더 올라가야 되며, 그 폭포 밑에 있다고 해서 문원하폭포라 불린다. 허나 외모는 문원폭
포보다 하폭포가 훨씬 잘났다. 그래서 문원폭포보다는 하폭포가 이곳의 중심 폭포이자 관악산
제일의 폭포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 차라리 하폭포를 문원폭포라 하고, 문원폭포를 문원상
폭포나 윗폭포로 칭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하폭포는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명주 자락을 늘어뜨린 듯 하얀 물보라를 쏟아내는데, 위에
서 바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거의 20도 정도로 구부러졌다가 다시 바위
를 타고 힘차게 내려온다. 폭포의 높이는 약 20m 정도로 폭포 밑에는 물놀이 하기에 좋게 얕
은 수심의 못이 형성되어 있으며, 폭포 남쪽에 산길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폭포가 있는
바위는 안전을 위하여 하얀 금줄을 쳐놓았으나 어기는 산꾼이 적지 않다.

관악산은 산세와 바위는 참 일품이지만 문원계곡과 관악산 제일의 경승지로 추앙받던 자하동
천을 빼면 계곡도 평범하고 폭포도 거의 없다. 그나마 문원계곡이 좀 아기자기한 편이고, 그
곳에 빚어진 하폭포와 문원폭포가 관악산에서 제일 화끈하게 폭포의 패기를 보여준다.


▲  위에서 바라본 하폭포

▲  반석으로 이루어진 하폭포 윗쪽

하폭포 옆구리를 통해 폭포 위쪽으로 오르면 계곡을 둘러싸고 넓게 펼쳐진 반석이 나온다. 문
원계곡을 찾은 산꾼들이 많이 쉬어가는 쉼터로 여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으로
난 마당바위를 오르면 일명사지와 연주암으로 이어지고,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문원폭포
가 나온다. 그리고 서북쪽 길로 오르면 육봉과 팔부능선으로 이어지는데 정상(연주대)이 목적
이라면 북쪽 마당바위로 오르면 된다.


▲  하폭포 윗쪽에 자리한 마당바위

▲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 정경백(鄭景伯) 바위

마당바위 꼭대기에는 큰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걸터 앉아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살짝 밀면 당
장이라도 때굴때굴 굴러떨어질 것 같은 기세인데, 그의 피부에는 한자로 큼지막하게 '정경백'
이라 쓰여 있다. 바로 그 바위글씨 때문에 '정경백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정
경백은 사람 이름으로 뭐하던 양반인지는 모르겠으나 글씨의 폼을 보니 구한말이나 왜정 때
새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을 찾은 정경백은 문원계곡의 뛰어난 절경에 퐁당퐁당 빠지면서 마당바위 피부가 아닌 이
바위에 이름 3자를 낙서로 남겼다. 인명사전이나 인터넷 검색에도 그의 정보가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면 그저 평범한 선비거나 글 좀 아는 백성인 듯 싶으며, 바위에 이름을 남긴 인연으로
비록 그의 정체는 몰라도 그의 이름은 바위와 함께 지금까지 남게 되었고, 관악산의 주요 바
위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관악산에 널린 바위 가운데 사람 이름을 취한 바위는 이
것이 유일하다.


▲  정경백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과천과 의왕시내, 청계산, 광교산)

  하폭포에서 문원폭포로 인도하는 산길

   ◀  그늘에 숨겨진 문원폭포(文原瀑布)
하폭포에서 계곡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면 그
늘에 묻힌 문원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폭
포는 위성지도에도 나올 정도로 그 위용을 속
세에 드러내고 있지만 문원폭포는 숲 그늘 속
에서 수줍게 물보라를 피운다.
폭포의 높이는 10m 정도로 하폭포에 비해 볼
품도 많이 떨어지고 물소리도 차분하다. 거의
90도 각을 이룬 윗부분을 빼면 경사도 거의
40~50도 정도로 물이 미끄럼을 타듯 부드럽게
내려와 착지를 한다.
폭포 옆에는 벼랑이 있는데 그 벼랑 밑에 비
와 눈을 피할 정도로 움푹 들어간 공간이 있
다.
거의 석모도 보문사(普門寺)의 눈썹바위와 좀
비슷한 모습으로 그곳에 태극기를 비롯해 기
도나 굿에 사용하는 물건과 그것을 보관하는
공간이 있어 굿이나 기도터로 몰래 쓰이고 있
음을 알려준다.


▲  시원찮게 떨어지는 문원폭포 윗도리

▲  문원폭포 옆 기도처
깎아지른 벼랑 밑도리에 움푹 들어간 예사롭지 않은 공간이 있어 기도나 굿터로
암암리에 쓰이고 있다. 아마도 이곳의 지기(地氣)가 높거나 지형상의 이유로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승려와 참선하는 사람들의 수행 공간이나
산악신앙의 현장으로 바쁘게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문원폭포 아랫 계곡 (왼쪽은 폭포 옆
기도터로 인도하는 길)


 

♠  하늘과 가까운 곳에 숨겨진 옛 절터, 관악산 일명사지(逸名寺址)
- 경기도 지방기념물 191호

▲  동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육봉일명사지)

▲  서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

하폭포에서 마당바위를 지나 각박한 산길을 6~7분 정도 오르면 긴 석축이 나온다. 그 석축이
바로 옛 일명사터로 석축 앞에 관련 안내문이 서 있어 등산객들의 관심을 호소한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일명사터는 육봉(六峰) 밑에 있다고 해서 육봉일명사터라 불리기도 한
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육봉일명사지') 절터의 면적은 400평 정도 되는데, 이곳에 대한
정보가 남아있는 것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의 비밀을 캐려는 집념으로 1999년 절
터를 뒤집은 결과 연꽃잎이 새겨진 연화문대석(蓮花紋臺石) 2점과 석탑(石塔)의 잔재 1기, 우
물 2곳이 나왔고, 조선시대 암막새기와 조각 20여 점이 나왔다. 또한 범어(梵語)가 새겨진 기
와와 무늬가 없는 조그만 기와 등 신라 후기 기와도 여럿 나와 신라 후기에 법등(法燈)을 켰
음을 짐작케 한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절터의 입을 강제로 열면서 그동안 밝혀진 사실을 정리하면,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다가 고려 중기나 후기에 망한 것으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4세기 후반에 다시
중창되어 그런데로 절을 꾸리다가 17세기 후반에 완전 문을 닫고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재정 악화와 주변 사찰과의 경쟁 등이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 무리한 조세와 공납(貢納), 고적한 곳에 위치한 지리적 불리함 등으로> 만약 산사태 등의 자
연재해로 망했다면 절터가 좀 온전하지 못해야 되는데 절터는 너무 선명하다.

절터에는 건물터와 석축, 연화문대석이 있는데, 절이 망한지 꽤 되었음에도 절터가 원형을 잃
지않고 잘 남아있어 관악산 불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관악산에는 이곳 외에도 연
주암의 전신(前身)으로 여겨지는 관악사(冠岳寺)터가 있으며, 관악산과 삼성산은 신라 후기부
터 절이 많이 생겨나 북한산(삼각산)과 더불어 수도권 불교의 성지로 일컬어진다. 특히 연화
문대석은 관악산에 남아있는 옛 석조물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칭송받고 있어
일명사도 왕년에 꽤 잘나갔음을 가늠케 한다.
그 잘나가던 절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가늠할 수 없는 전설이 되었고, 건물을 받쳐들던 주춧돌
만 앙상하게 남아 하늘을 받들고 있으니 참 인생무상이 아닐 수 없다. 일명사는 스스로를 태
우며 그 위대한 진리인 인생무상 4자를 우리에게 진하게 일깨워 주고 있다. 허나 그러면 뭐하
나. 인간은 동물과 신(神) 사이에 어정쩡하게 들어앉은 존재라 그것을 죽기 전에나 깨달으니
말이다.

일명사터는 하폭포에서 연주암 가는 길목에 있어 찾기는 쉽다. 연화문대석 2기는 절터 한복판
에 박혀있어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하며, 석탑의 잔재와 우물은 절터 인근 수풀에 묻혀 있다.
석탑은 고려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산11


▲  일명사터 석축

▲  여름 햇살을 즐기고 있는 일명사터 중앙 건물터
다른 건물터와 달리 규모가 크고 절터 중앙에 자리해 있어 절의 중심 건물인
법당(法堂)으로 여겨진다.

▲  일명사터 동쪽 건물터
조그만 건물이 여럿 뿌리를 내렸던 곳으로 산신각(山神閣)이나 명부전(冥府殿),
요사채 자리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

▲  화석처럼 박힌 연화문대석 형제
이들은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석불 대좌(臺座)의
일부로 여겨진다. 관악산의 몇 안되는 옛 석조물 가운데 가장 정교하게
새겨진 것으로 천하에 짧게나마 주목을 받았다.

▲  절터 북쪽 석축과 돌다리

절터 북쪽과 동쪽에는 조그만 물줄기를 두어 산에서 내려온 시냇물을 아래로 흘러보낸다. 이
렇게 배수 시설까지 갖추어 식수를 해결하고 언제 문을 두드릴지 모를 화마(火魔)의 공습에도
대비를 했는데, 석축 북쪽에는 통돌을 깔아 조그만 돌다리까지 두었다.

일명사터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내려갔다. 기분 같아서는 오랜만에 연주암까지 오
르고 싶었지만 거까지 가려면 1시간 이상 각박한 산길을 올라야 되고, 날씨도 무지 덥다. 하
여 쿨하게 포기하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오늘 인연도 아님에도 억지로 인연을 짓는 것은 그렇
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문원계곡 하류인 산림초소로 내려와서 바로 속세로 향가지 않고 근처에 있는 마애승용군을 찾
았다. 그곳은 산림초소와 매우 가까운데, 이정표가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고 있어 찾기는 쉽다.
오르는 길도 그리 힘든 편은 아니라서 2분 정도 수고하면 바위 2개와 소나무가 마중을 나오는
데, 소나무 서쪽 바위에 '용운암 마애승용군'이 자리해 있다.


▲  바위에 새겨진 용운암 마애승용군(磨崖僧容群) - 과천시 향토유적 4호

이름도 참 생소한 마애승용군(이하 승용군)은 과연 무엇일까? 여기서 승용(僧容)은 승려의 얼
굴을 뜻한다. 그러니 쉽게 풀이하면 바위에 새겨진 승려 얼굴상이 된다. 승용군 앞에 붙은 용
운암은 부근에 자리한 절 이름으로 예전에는 승용군 주변에 있었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홍촌(洪村) 마애승용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산 밑에 홍촌이란 마을이 있어서 유래된 것이
다.

보통 불상이나 보살 등을 바위에 새겨 마애불(磨崖佛)로 삼지만 그들 대신 승려의 얼굴을 새
긴 경우는 천하에서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 바위 윗도리에 얼굴 3구가 새겨져 있고, 밑도리에
2구가 간결하게 스며들었는데, 얼굴이 하나 같이 동자승처럼 밝고 귀여운 표정이다. 3명은 정
면을, 2명은 측면(側面)상을 하고 있으며,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불상도 아닌 승려 얼굴을 새겼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해답은 없다. 승려
를 귀족처럼 받들던 고려 때 관악산의 이름 있는 승려를 기리고자 얼굴을 새겼을 가능성도 있
으나 이 역시 부질없는 추측일 뿐이다. 참고로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관악산 서쪽 자락인 안
양예술공원에 마애종(磨崖鍾)이 새겨져 있는데, 범종과 이를 치는 승려가 조각되어 있다. 이
역시 이 땅의 하나 밖에 없는 존재로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새겨진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관악산에만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존재가 1종류도 아닌 2종류가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롭
다.


▲  바위 윗도리를 장식하고 있는 승려 얼굴상 3구
가운데와 오른쪽 승려는 정면을 보고 있고, 왼쪽 승려는 옆을 보이고 있다. 눈썹과
살짝 감긴 눈, 코, 입, 귀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표정이 하나같이 앳된
동자승이나 원숭이처럼 해맑기 그지 없다.

▲  바위 밑도리를 장식하고 있는 승려 얼굴상 2구
귀마개나 이어폰을 낀 것 같은 왼쪽 승려는 정면을, 오른쪽 승려는 옆을 보고 있다.
승려 얼굴 상 외에도 정체가 아리송한 문양들이 여럿 새겨져 있다.

▲  승용군 바위 뒤에 깨알처럼 새겨진 글씨들
이곳에서 예불을 올린 사람들이 남긴 것으로 근래까지 불공 장소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오래된 마애미륵불이 있다.


 

♠  법등의 역사는 짧지만 문화유산 3점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과천 보광사(普光寺)

▲  보광사의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

관악산 문원계곡을 뒤로하고 속세로 나오다가 과천중앙고 서쪽에 자리한 보광사에 잠시 발을
들였다.
교육원3거리에서 교육원로를 따라 6~7분 정도 걸으면 길 왼쪽(남쪽)에 보광사를 알리는 이정
표가 손짓을 하는데 그의 손짓에 맞춰 다리를 건너면 바로 보광사가 모습을 비춘다.

이 땅의 흔한 절 이름의 하나인 보광사, 서울과 수도권에만 우이동(牛耳洞) 보광사, 파주 보
광사(☞ 관련글 보러가기), 남양주 보광사, 그리고 이곳까지 60년 이상 묵은 절만 쳐도 최소
4곳이 넘는다.

관악산 남쪽 자락이자 정부과천청사를 바라보고 선 과천 보광사는 1946년에 창건되었다. 이때
법당 6칸과 요사 1동이 닦았는데 현재의 가람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이룩된 것으로 2001년
에 극락보전을 새로 지어 법당으로 삼았고, 삼성각과 명부전, 설법전 등을 세워 지금에 이른
다.
법등(法燈)이 켜진 역사는 고작 70년 남짓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싹트지도 못했다. 허나 인
근 문원동 절터에서 오래된 3층석탑과 석조보살입상을 업어와 마땅히 내세울 것이 없는 이곳
의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았고, 1993년에는 조선 후기 불상까지 새로 영입하면서 매우 짧
은 법등에 비해 오래된 문화유산을 3개나 간직하게 되었다. 비록 보광사와 관련이 없는 것들
이지만 바로 그들 때문에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현대에 지어진 그저 그
런 사찰의 하나로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절의 규모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크기로 북쪽을 바라보고 선 극락보전을 비롯하
여 명부전과 설법전, 삼성각, 요사, 범종각 등 6~7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설법전(說法殿)
과 요사(寮舍) 같은 경우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밑에도 공간을 만들어 2층을 이루고 있다.

▲  2002년에 지어진 보광사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칠성, 독성의 보금자리이다.

▲  보광사 설법전

◀  관악산이 베푼 물로 늘 만조를 이루는
보광사 샘터과 이끼 옷을 살짝 걸친
석조(石槽)


▲  보광사 경내 동부 <3층석탑과 명부전(冥府殿), 석조보살입상>

▲  보광사 문원리 3층석탑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39호

툇마루를 간직한 주지실 앞에 조그만 3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은 관문동 절터(어딘지는 모르
겠음)에서 가져온 것으로 하얀 피부를 지닌 커다란 바닥돌 위에 얹혀져 있는데 2중의 기단(基
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인 보주(寶珠)로 마무리를 한 맵시 좋은 탑이다.
이중 바닥돌은 시멘트로 지은 것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1층 탑신에는 2중으로 새겨진 자물쇠가 새겨져 있으며, 지붕돌 밑에는 얇게 만든 3단의 받침
이 있고, 지붕돌의 처마 끝은 살짝 올려져 약간 경쾌감을 준다. 기단과 지붕돌의 모습을 통해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탑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시흥 문원리 3층석탑'이다. 허나 과천은 어엿한 시(市)로 시
흥군에서 분리된지도 30년이 넘었고, 그 문원리도 문원동이 되었건만 명칭은 아직도 30여 년
전에 머물러 있다. 그 쾌쾌묵은 이름을 현실에 맞게 다듬어 '보광사 3층석탑'이나 '과천 문원
동 3층석탑'으로 갈아야 될 것인데 말이다. 국가지정문화재는 그래도 시대와 지역에 맞게 이
름이 많이 바뀌고 있으나 지방문화재는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다.


▲  문원리사지 석조보살입상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77호

명부전 앞에는 오래된 석조보살입상이 서 있다. 이 석불은 문원동 15-166번지에서 가져온 것
으로 높이 1.7m 정도 되는 돌에 얇게 선각으로 새기고 그 위에 둥근 갓을 씌우는 선에서 아주
간단히 처리했다. 허나 세월의 태클로 그 선각도 희미해져 자세히 안보면 석불인지 다른 석상
(石像)인지 햇갈릴 정도이다.

갓으로 머리가 가려진 얼굴은 둥근 편으로 눈썹과 눈, 입, 코를 새겼으나 거의 표정이 지워진
상태이고 목은 짧지만 두껍다. 돌을 제대로 깎지 않고 그냥 선각만 했기 때문이다. 왼손은 가
슴에 대어 연꽃 봉오리를 잡고 있고, 오른손은 밑으로 내리고 있는데, 옷은 양쪽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見)의 법의(法衣)이다.
많이 부실해 보이는 이 석불은 납작한 얼굴과 짧은 어깨, 간략화된 옷주름 등 도식화된 모습
을 통해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보광사 목조여래좌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62호

극락보전 불단(佛壇)에는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그중 아미타불(阿彌陀佛)로 삼고 있
는 불상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여래좌상이다. 그 좌우에 자리한 존재들은 대세지보살(大
勢至菩薩)과 관음보살로 2001년에 조성되었다.

포근한 표정을 지으며 중생의 하례를 받고 있는 목조여래좌상은 나무로 만들어서 금칠을 입힌
것으로 원래는 양평 용문사(龍門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있었다고 한다. 6.25가 터지자 어
느 신도가 여주(驪州)로 피신시켰고, 그렇게 개인이 가지고 있다가 1993년 이곳에 기증하여
보광사의 보물을 하나 더 늘려주었다.

불상의 얼굴은 크고 둥근 편인데, 눈썹이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지그시 뜨며 북쪽을 바라
본다. 코는 작고 오똑하며, 붉은 입술 위에 검은 수염이 살짝 그려져 있다. 얼굴이 크다보니
볼살도 많아 보이며, 두 귀는 거의 어깨에 닿는다. 저리 귀가 크니 중생의 민원은 하나도 누
락됨이 없이 잘 들어줄 것이다. (민원도 잘 처리해주는지는 모르겠음)
머리는 나발로 두툼하게 무견정상이 솟아 있으며,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다. 가슴과 배 사
이에는 연꽃이 새겨진 허리띠가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따로 만들었는데, 가운데
손가락과 약지 손가락을 구부렸다. 불상의 양식을 보아 조선 초기 또는 조선 초기 양식을 간
직한 조선 중기 불상으로 여겨진다.

* 보광사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산126-21 (교육원로 41, ☎ 02-502-2262)


▲  극락보전 앞에서 바라본 관악산
절은 작지만 관악산을 앞뜰로 품고 있어 앞뜰 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보광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반이 넘었다. 칼퇴근의 달인 햇님도 뉘엿뉘엿 그만의
공간으로 꽁무니를 빼고, 장대한 관악산도 어둠의 커텐 속으로 사라질 채비를 한다. 이렇게
하여 관악산 문원계곡 여름 나들이는 저물어가는 햇님처럼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관악산 보광사, 문원계곡(문원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찾아가기 (2018년 7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정부과천청사역 6번 출구를 나오면 정부청사입구 교육원3거리이다. 여기서 국
  가공무원인재개발원으로 인도하는 교육원로를 6~7분 가면 왼쪽에 보광사가 있으며, 15분 정
  도 가면 오른쪽에 관악산 문원계곡으로 인도하는 조그만 길이 나온다. 여기서 마애승용군까
  지는 6~7분, 문원하폭포까지는 35~40분, 일명사터와 문원폭포는 40~45분 정도 걸린다.
* 441, 502, 540, 541, 542, 1-1, 9, 9-3, 11-1, 11-2, 11-3, 11-5, 103, 777, 3030번 시내버
  스를 타고 정부과천청사나 과천주공2,3단지 하차
* 문원계곡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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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가까운 서울의 북쪽 지붕, 도봉산 (천축사, 마당바위, 만장봉, 포대능선)

 


' 도봉산 봄나들이 (천축사, 마당바위, 포대능선) '

▲  도봉산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스마트폰으로 보실 경우 꼭 PC버전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컴퓨터 모니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를 권함)


 

 

봄이 막바지 전성기를 누리던 5월 첫 무렵에 이웃 동네 방학동(放鶴洞)에 사는 후배와 우
리 동네 뒷산이자 서울 북쪽 지붕인 도봉산(道峯山, 740m)을 찾았다.
도봉산은 집에서도 잘 보이는 꽤나 가까운 존재임에도 북한산<北漢山, 삼각산(三角山)>에
오랫동안 마음이 기울면서 많이도 소홀했던 곳이다. 하여 도봉산에 안긴 천축사와 미답지
여러 곳을 지울 겸, 도봉산의 섭섭한 마음도 풀어줄 겸해서 간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3시에 집을 나서 서울시내버스 142번(도봉산↔방배동)을 타고 불
과 네 정거장 거리인 도봉산 종점에 발을 내린다. 거기서 대기하고 있던 후배와 파도처럼
몰려드는 등산객 인파 속으로 들어가 푸르름이 가득한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선다.

도봉산에서 제일 처음 찾은 곳은 천축사로 도봉산 종점에서 1시간 올라가야 된다. 광륜사
와 지금은 황량한 터로 변해버린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지나면 길은 크게 2갈래로 갈리는
데, 여기서 직진하여 20분 정도 가면 도봉산장(도봉산대피소)이다. 이곳에서 산장을 끼고
북쪽 길로 가면 포대능선과 만월암이고, 서쪽에 조그만 폭포가 있는 가파른 길로 15분 정
도 가면 천축사이다.
자존심을 곱게 접어 하늘로 날려보내고 산과 자연에 순응하며 묵묵히 산길을 걷다보면 나
올 것 같지 않던 천축사가 금세 돌기둥 정문을 꺼내 보이며 반갑게 맞이한다.


▲  조촐한 천축사 정문
절이 가파른 산자락에 있어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둘 공간이 없다.
그래서 저렇게 조촐하게 정문을 만들어 일주문으로 삼았다.


 

♠  천축사 입문

▲  불단을 가득 메운 불상<청동보살군상(靑銅菩薩群像)>의 대파노라마

정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청동불상들의 장대한 물결이 두 눈을 놀라게 한다. 거의 4~5단으로
이루어진 불단에 청동으로 지어진 석가불을 비롯하여 관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불, 약사여래
등 다양한 불(佛)과 보살(菩薩)을 집합시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생의 시주로 지어진 일종의
원불(願佛)로 근래에 조성된 것이다.
천축사에 새로운 명물로 그들을 대충 헤아려봐도 108불은 넘어 보이는데, 100기가 넘는 불상이
일제히 앞쪽을 바라보니 이건 관객들 앞에 서 있는 연극배우처럼 무안이 들 정도이다. 하여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서둘러 옆으로 피했다.


▲  슬슬 모습을 비춘 천축사 경내 (대웅전)

청동보살입상에서 1굽이를 돌면 서쪽 건너편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가 바라보인다. 경내 뒷
쪽에 바라보이는 바위 봉우리는 도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萬丈峯)으로 이곳의 든든한 후
광(後光)이 되어준다.
굽이친 곳에서 경내까지는 약 100m 거리로 산길 중간에는 등산객들이 잠시 두 다리를 쉴 수 있
도록 쉼터가 마련되어 있으며,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담장 끝에 자리한 네모난 석조(石槽)
가 모습을 비춘다. 석조에는 도봉산이 베푼 옥계수(玉溪水)로 가득한데 맑고 깨끗한 약수로 속
세에 이름이 나있다. 여기서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물을 담아 목구멍에 투하하니 몸
속에 낀 속세의 때가 싹 가신 듯 목구멍이 시원하다고 쾌재를 외친다.


▲  담장 끝에 자리한 천축사 석조
조그만 돌통에 대자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물이 늘 가득하다.

▲  고된 세월이 느껴지는 오래된 부도(浮屠)

석조 맞은편에는 고색의 때가 자욱한 부도가 완전한 모습이 아닌 옥개석(屋蓋石)과 중대석(中臺
石), 하대석(下臺石) 등 일부가 수습되어 있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부도로 연꽃잎을 비
롯하여 사자와 코끼리 등 동물이 새겨져 있으며, 조각 수법이 수려하여 천축사의 왕년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그의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어 모르겠으나 조선시대 부도로 보이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천축사의 무관심 앞에 형편없이 깨지고 씻겨내려간 고된 모습으로 경내로 들어서는 길목을 지키
고 있다.

※ 도봉산 천축사(天竺寺)의 내력
도봉산 만장봉 동쪽 자락에 자리한 천축사는 673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인근 의상대(義湘臺)에서 수도를 하다가, 빼어난 산세에 감탄해 제자를 시켜 암자를 짓고
맑은 샘물이 나온다는 뜻에 옥천암(玉泉庵)이라 이름 지으니 그것이 천축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허나 당시 도봉산은 좁아터진 신라의 서북쪽 변방 지역으로 당나라와 한강 이북을 둘러싸고 한
참 전쟁을 벌이던 시절이다.
왕경(王京, 경주)에서도 멀고 전쟁으로 시끄러운 변경에 원효(元曉)와 더불어 신라 불교의 1인
자인 의상이 굳이 찾아와 절을 세울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또한 그는 문무왕의 허가를 받아
그 유명한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 이전까지 주로 왕경에 머물며 화엄종(華嚴宗) 보급과 귀족
불교 발전에 힘쓰고 있었다.

천축사의 내력이 본격적으로 가슴을 펴는 것은 조선 태조 때이다. 의상의 창건설과 달리 신라와
고려 때 흔적이 전혀 없고, 고려 명종(明宗, 재위 1170~1197) 때 영국사(寧國寺, 도봉서원 자리
에 있었음)의 부속암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 역시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니 조선 태
조 시절이나 빠르면 고려 후기에 창건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1398년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왕자의 난으로 단단히 뿔이 나 왕위를 2째 아들인 정종(定宗)에
게 던져버리고 함흥(咸興)으로 가버렸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인 도봉산 밑을 지날 때 만장봉 천
축사 주변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피어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을 찾아가 봉우리는 하얗고 꽃
은 삼문에 떨어져 길이 붉다는 시구(詩句)를 읊고 절에서 하룻밤 머물렀다고 전한다.
이후 함흥에서 돌아올 때 이곳에 들려 100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절을 중수케 했는데, 고려 후
기에 인도에서 건너온 지공(指空)이 나옹화상(懶翁和尙)과 이곳에 들려 '천축국(天竺國) 영축산
(靈鷲山)의 일부가 완연히 이곳에 있구나'
격찬한 일을 승려에게 듣고, 옥천암에서 천축사로 이
름을 갈게 했다.

1474년(또는 1470년)에는 성종(成宗)의 명으로 절을 중창하고, 명종 시절에는 문정왕후(文定王
后)가 화류용상(樺榴龍床)을 내려 불좌(佛座)로 삼게 했다고 한다. 이후 300년 가까이 적당한
자국을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절이 망한 듯 싶으며, 1812년에 경학(敬學)이 중창
하여 다시 일으켜 세웠다.

1816년에는 김연화(金蓮花)가 불량답(佛糧沓) 15두락을 시주해 살림이 많이 좋아졌으며, 1862년
에 상공(相公) 김흥근(金興根), 판서(判書) 김보근(金輔根), 참판(參判) 이장오 등이 불량을 희
사했다. 1863년에는 주지 긍순(肯順)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을 조성하고, 1895년에 화주 성
암응부(星巖應夫)가 명성황후(明成皇后) 및 상궁(尙宮) 박씨 등의 시주로 후불탱, 신중탱, 지장
탱을 조성했다. 허나 관리 소홀로 불화 대부분이 도난을 당했다.

1911년 화주 보허축전(寶虛竺典)이 관음탱과 신중탱을 봉안하고, 1931년에 주지 김용태(金瑢泰)
가 천축사로 가는 산길을 확장했으며, 1936년에 현재와 비슷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한
때 천하 제일의 참선수행도량으로 명성이 높던 무문관(無門關)을 이 시기에 만들었다. 1959년에
는 주지 용태가 불사를 벌이고,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대웅전과 독성각, 산신각을 중수했으며,
요사와 공양간을 신축해 예전 천축사의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도봉산에 몇 안되는 비구니(比丘尼) 사찰로 관음도량(觀音道場)으로 명성이 자자하며, 고승들의
참선 수행공간인 무문관을 경내 북쪽에 두어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꾸려가고 있으나 수행의 난이
도가 아주 최상급이라 도전하는 이가 드물어 그 맥이 거의 끊겼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통전과 산신각, 독성각, 무문관, 범종각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
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비로자나삼신불도와 비로자나삼신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3호),
목조석가3존불, 목조불단(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6호), 마애사리탑(서울지방문화재자료 65호)
등 지방문화재 5점이 있고, 오래된 부도와 천축사 편액 등이 전한다. 화류목조용상이라 불리는
목조불단은 문정왕후가 내렸다고 전하는데, 이것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며, 건물은 모
두 새로 지은 것이라 고색의 내음은 거의 없는 것이 아쉽다.

절이 각박한 산자락에 자리해 있어 그곳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둥지를 틀었으며, 이미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채운 터라 사세 확장도 쉽지가 않다. 그래도 첩첩한 산골의 산사치고는 그런데로
넓은 편이다. 게다가 경내 주변은 숲이 무성하며, 속세와도 멀리 거리를 둔 산중 사찰이라 제아
무리 번뇌라 해도 감히 추격하지 못한다.
서울 도심과도 무척이나 가깝고, 1시간 정도의 등산으로 접근이 가능한 곳이어서 잠시 속세에서
나를 지우고 싶거나, 마음을 싹둑 정리하고 싶을 때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와 안기고 싶은 절집
이다. 산바람도 솔솔 부니 한여름에도 시원하며, 시원한 샘물이 1년 내내 흘러나와 한모금 마시
면 정말 오장육부가 정화되는 것 같다.
또한 산신각이나 대웅전 앞에서 도봉구와 노원구, 수락산 등이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도 그런데
로 괜찮다. 

※ 도봉산 천축사 찾아가기 (2016년 5월 기준)
* 지하철 1,7호선 도봉산역 1번 출구에서 도보 1시간 30분 (도봉산역 1번 출구 → 도봉산 141번
  종점 → 광륜사 → 도봉서원 → 도봉산장 → 천축사)
* 서울시내버스 141번(도봉산↔염곡동), 142번(도봉산↔방배동), 1127번(도봉산↔수유리), 1128
  번(도봉산↔길음역)을 타고 도봉산 종점에서 내리면 걷는 거리를 10분 정도 줄일 수 있다.
* 천축사 정기 법회가 있는 날에는 도봉산 주차장에서 도봉서원까지 셔틀차량이 운행된다. 여름
  에는 6시 30분부터 10시까지(겨울에는 7시부터) 운행되며, 도봉서원부터 걸어가야 된다. 깊은
  골짜기에 있기 때문에 차량은 아예 접근이 불가능하다.
* 누구든 점심공양이 가능하다. 대웅전 남쪽에 있는 공양간에서 공양에 임하면 된다. (겨울에는
  안주는 경우도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9 (☎ 02-954-1474)
* 천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천축사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  연등의 붉은 물결 앞에 윗도리가 사라진 독성각(獨聖閣)

곧 다가올 석가탄신일 준비로 부산한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대웅전 앞이다. 산자락에 자리한 천
축사는 대웅전 구역과 북쪽 무문관 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웅전 구역에는 독성각과 산신각
, 원통전, 석굴이 있다.

대웅전 남쪽에 자리한 독성각은 허공을 가득 메운 연분홍 연등으로 윗도리가 보이질 않는다. 마
치 구름이나 안개에 가려 아랫도리만 보이는 산처럼 말이다. 윗도리를 보려면 산신각으로 오르
는 계단에서 봐야 된다.
이 건물은 달랑 1칸짜리의 조촐한 팔작지붕 건물로 현공(玄公)이 지은 것이다. 내부에는 2002년
에 조성된 독성탱과 석고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다.


▲  색채가 무지 고운 독성탱(獨聖幀)과 석고독성상
독성탱은 주지 선응이 화주가 되어 금어(金魚) 권성준이 제작했다.

▲  연등에 가려 아랫도리만 보이는 산신각(山神閣)

독성각 옆에는 높이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산신각을 두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건물
로 독성각과 마찬가지로 달랑 1칸짜리이다. 단 지붕은 맞배지붕을 취하고 있으며, 2003년에 현
공이 보수했다.
산신각 내부에는 1979년에 주지 지형(知亨)이 화주가 되어 금어 조정우가 그린 산신탱이 있다.


▲  산신각 산신탱
호랑이가 2마리가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그들의 두 눈에는 광채가 초롱초롱 빛나
어두운 밤에 본다면 정말 염통이 쫄깃해질 것 같다. 호랑이 사이로 지긋한
하얀 수염의 산신 할배가 앉아있는데, 앉아 있는 폼이 다른 산신탱과는
다르다. 그외에 동자 3명을 배치했으며, 소나무와 산도 묘사되어 있어
산신탱에 있어야 될 요소들은 모두 갖추었다.

▲  원통전(圓通殿)

대웅전 우측 위쪽에 자리한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경내에서 그나
마 가장 오래된 건물로 어여쁜 누님의 모습을 한 관음보살(觀音菩薩)이 봉안되어 있다. 후불탱
화로는 천수천안(千手天眼)관음탱과 칠성탱(七星幀)을 봉안했는데, 천수천안관음탱은 1980년에
주지 지형과 금어 조정우가 만든 것이며, 칠성탱은 1979년에 금어 김용회가 제작한 것이다.


▲  원통전 불단에 봉안된 관음보살좌상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후불탱화의 모습이 꽤 인상적이다.


 

♠  천축사 대웅전 주변

▲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석굴 <옥천석굴(玉石窟庵)>

원통전 좌측이자 대웅전 뒤쪽에는 장대한 바위가 있으니 그 바위 밑에 옥천석굴이라 불리는 시
원한 석굴(石窟)이 있다. 천축사의 예전 이름인 옥천암의 유래가 된 옥천(玉泉)이 여기서 용솟
음치고 있는데, 불공 때 공양하는 용도로만(천축사 승려들도 이 물을 마실 듯) 쓰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꽁꽁 봉해둔다. 

석굴 내부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하여 일종의 약사전(藥師殿)으로 삼았으며, 좌우에 조그
만 감실(龕室)을 파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두었다. 속설(俗說)에는 태
조 이성계가 여기서 기도를 드렸다고 하며, 그 전설을 통해 천축사를 거쳐갔던 승려들이 수도를
했던 오래된 굴임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약사불을 안치하고 내부를 손질한 건 근래이다.


▲  석굴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
입술이 유난히 붉은 약사여래좌상이 약합(藥盒)을 쥐어들고 속세를 걱정한다.
약사여래의 머리 뒤쪽에는 3줄의 두광(頭光)을 그어 그를 빛나게 수식하며
그가 앉아있는 대좌(臺座)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새겨져 있다.
불상 오른쪽에 붉은 바가지가 있는 부분이 바로 옥천이다.

▲  약사여래좌상 좌우 암벽에 감실을 파고 들어앉은 조그만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저 두 보살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  경내 북쪽에 자리한 무문관(無門關)

대웅전 북쪽에는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아련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각(梵鍾閣)과 원초적 생리
를 해결하는 해우소가 있다. 그리고 굳게 닫힌 기와문이 더 이상의 진행을 막는데, 그 문 너머
로 절집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3층짜리 신식 건물이 눈을 심히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 건물이 천
축사의 상징물인 무문관이다.

무문관은 수행을 위한 건물로 1964년에 주지 정영이 지었다. 건물의 이름인 무문(門無)은 깨달
음을 얻는 데 있어 길도 문도 없다는 뜻으로 부처의 설산 6년 고행(苦行)을 본받아 4년 또는 6
년 동안 면벽(面壁), 즉 벽만 바라보고 수행을 하는 고난의 길을 걸어야 된다. 방문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일체 금지되며, 한번 발을 들이면 무조건 4년이나 6년을 채워야 된다. 게다가 수행
중에 먹는 음식도 창구를 통해 받아야 되는 등, 수행의 규범이 매우 엄격하다. 그야말로 그 기
간 동안은 '나 죽었소' 하며 인간적인 삶을 포기해야 된다.
그러다보니 수행을 통과한 승려 수가 매우 적다. 1965년과 1979년에 100여 명이 도전했으나 겨
우 4명만 통과한 것이다. 워낙 가시밭보다 더한 곳이라 도전자가 가뭄에 콩나듯 하여 시민선원
으로 활용하기도 했으나 호응이 없어서 결국 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2010년 11월 지금의 건물을
지어 다시 문을 열었다.
허나 도전자가 거의 없는 실정이라 새 건물을 그냥 놀려두기도 그래서 속세에 개방해 시민선방
과 절의 쏠쏠한 수입원인 템플스테이(Temple stay)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앞서 언급한 화
류수목조용상(樺榴樹木彫龍床, 목조불단)과 천축사 편액이 있다.


▲  대웅전(大雄殿) 목조석가3존불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7호

경내 중앙에 자리한 대웅전은 2층짜리 건물로 꽤 우람한 모습이다. 대웅전은 원래 1812년에 지
어졌다고 하며, 'ㄷ'자 팔작지붕인 것을 현공이 200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만든 것이다.
1층은 5칸 규모의 종무소(宗務所)와 쉼터, 요사채로 쓰이며, 2층에 대웅전을 두었는데, 정면 5
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화려한 닫집을 지닌 불단에는 목조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미륵보살, 제
화갈라보살(提華褐羅菩薩)로 이루어져 있는데, 푸근한 표정과 살짝 머금은 미소로 여기까지 힘
들게 올라온 중생을 맞이하고 있다.
처음에는 오래 숙성되지 않은 3존불로 여기고 무시했으나 근래 석가불 뱃속에서는 이른바 복장(
腹臟) 유물이 나와 그들의 신상정보를 알게 되었다. 복장유물은 불상의 중수 사실을 담은 2장의
발원문과 경전, 다라니 등으로 이들을 통해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573~1618>
시절에 조성되어 북한산 노적사(露積寺)에 봉안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니 원래부터 천축사 불
상은 아니었다.
1713년 발원문에는 진열(進悅)과 영희(靈熙), 태원(太元), 처림(處林), 청휘(淸徽) 등이 불상을
개금, 중수하여 민지사<閔漬寺, 북한산 서암사(西岩寺)>로 옮겼으며, 1730년 발원문에는 황금을
시주받아 개금불사했다. 이후 돈암동 흥천사(興天寺)로 거처를 옮겼다가 20세기 중반 정도에 천
축사로 흘러들어와 이곳의 보물을 하나 늘려주었다.

이들 3존불은 그리 크지 않은 중간 규모의 불상으로 조선 중기(16세기 후반~17세기 초) 불상 양
식(또렷하고 균형 잡힌 이목구비, 안정된 인상, 팽팽하고 풍만한 신체의 질감, 간략화되고 형식
화된 천의 표현)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복장유물을 통해 조성시기와 중수에 참여한 승려 등이
밝혀져 바로 그 점 때문에 2013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요즘은 불상이나 불화 조
성시기를 알려주는 내용만 나오면 거의 무조건 지정문화재로 삼는 추세이다. 옛 사람들의 그런
작은 배려가 불상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것이다. (발원문 하나에 보물이냐 지방문화재냐, 그
냥 비지정문화재냐가 갈리는 세상임)

▲  대웅전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과 지장탱

▲  2004년에 제작된 신중탱(神衆幀)


▲  천축사 비로자나3신불도(毘盧舍那三神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2호

목조석가3존불 좌측에 고색의 기운이 자욱한 불화는 비로자나삼신불도이다. 등장 인물이 복잡한
불화(佛畵)는 언제봐도 참 어렵고 난해하여 정말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림에 나오는 인물과 그
성격, 그림의 특성까지 다 파악하려면 그야말로 암이 걸릴 정도이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그렸
을까? 세상의 복잡함을 상징하고자 함일까..?

그림 중앙에는 그림의 주인공인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있고, 왼쪽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
오른쪽에는 석가불이 자리해 있다. 이들이 삼불도의 중심인 삼불로 녹색을 띈 두광(頭光)과 살
색의 신광(身光)을 표현해 장엄함과 신비로움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목리문(木理紋, 나무결 무
늬)이 표현된 불단 위의 연화좌(蓮花座)에 앉아 있다.
삼불 주변에는 제일 위에 4명의 보살을 두었고, 좌우에 시방제불, 그 밑에 보살 2명과 범천(梵
天)과 제석천(帝釋天)을 삼불 사이에 넣었다. 비로자나불 무릎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가
섭(迦葉)과 아난(阿難)이 있고, 그림 하단의 8명 보살은 모두 동그란 두광과 모서리가 둥근 네
모난 신광을 가지고 있다. 지장보살을 제외한 모든 보살은 비슷한 모습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
으며, 각기 각자의 물건을 들고 있다.

조선 후기에 흔한 삼신불도이지만 독특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19세기 중엽부터 서울과 경
기도 지역에서 크게 활약했던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碩)이 편수(片手)를 맡아 환감(幻鑑). 혜조
(慧照). 경림(璟林). 탄인(呑仁). 창오(昌悟) 등이 합심하여 제작하였다.


▲  꽃창살과 용머리 장식으로 무척 현란한
천축사 대웅전 앞부분

경선당은 천축사 삼신불도처럼 전통적인 화법으
로 작품을 그리면서 간혹 도상을 나름대로 변화
시켜 새로운 도상을 창출했으며, 갸름한 얼굴과
지극히 작은 이목구비의 얼굴, 꽃무늬가 새겨진
대의, 적색, 녹색, 청색의 색조, 목리문의 표현
등 응석 불화의 양식적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
다.

그림 오른쪽 밑에는 '臣尙宮己酉生朴氏  尙宮己
酉生金氏等○○奉爲 王妃殿下辛亥生閔氏 玉體恒
安聖壽萬歲'란 명문이 있어 기유년생 상궁(尙宮
) 박씨와 기유년생 상궁 김씨 등이 왕비전하(명
성황후)의 옥체가 항상 편안하고 성수만세 하기
를 기원하고자 시주한 불화임을 귀뜀해 준다.
그림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잘 유지되고 있으나
그림 상당이 그을음 등으로 채색이 좀 어두워져
있고, 화폭 상단 오른쪽이 일부 찢겨져 나갔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천하 (도봉구와 노원구 지역)
천축사가 속세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천축사와 작별을 고하다 ~~ (대웅전)

금지된 곳인 무문관을 제외한 경내 곳곳을 40분 정도 둘러본 것 같다. 2개의 10년 전인 초등학
교 6학년 시절, 이곳에 처음 발을 들였는데, (그래봐야 지금까지 2번 가봤음) 그때는 보호수로
지정된 오래된 보리수(菩提樹)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아련히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나무는 세
월의 고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새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천축사를 뒤로 하고 포대능선으로 가고자 다시 길을 재촉했다.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 도봉산의
주능선과 자운봉, 만장봉도 같이 보고자 하는 의도로 올라갔지만 그 길은 파란만장했다.


 

♠  도봉산의 지붕 거닐기

▲  마당바위와 그 너머로 펼쳐진 서울의 산하

천축사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마당처럼 넓은 바위가 하얀 피부를 드러낸다. 그 바위가 마당바위
로 바위에 올라서면 도봉산 산줄기는 물론 서울 북부 지역이 두 눈에 훤히 달려와 조망이 가히
천하 일품이다.
이곳은 길이 3갈래로 갈리는 요충지로 만장봉과 포대능선으로 오르는 길, 관음암(觀音庵)과 오
봉으로 가는 길, 그리고 문사동계곡으로 내려가는 길로 나눠진다. 우리의 목적지는 포대능선이
므로 제일 힘든 만장봉 길을 택했다.


▲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도봉산 남쪽 줄기와 우이암(관음바위)
대자연이 초록 물결과 푸른 물결, 하얀 물결을 일으키며 신선의 경지를 자아낸다.
아무리 천재화가가 붓을 휘날린들 저 모습 그대로는 재현하기 힘들 것이다.

▲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북부 지역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 이런 소중한 허파가 있다는 것은 대자연이 내린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두고두고 잘 아껴야 하건만 우리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마당바위에서 각박한 산길을 20분 정도 개미처럼 오르면 자운봉고개에 이른다. 고개 주변에 도
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萬丈峯)과 선인봉(仙人峰)이 있는데, 죄다 바위 봉우리라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그래도 올라갈 사람은 기를 쓰고 올라감)
자운봉고개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니 여기서 남쪽 능선을 따라가면 칼바위와 오봉, 우이암으로
이어지며, 북쪽은 포대능선을 거쳐 사패산과 의정부(議政府)로 통한다.

 

▲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진 만장봉의 위엄

▲  도봉산의 머리, 자운봉의 위엄

자운봉(740m)은 도봉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도봉산의 실질적인 정상이다. 험준한
외모 탓에 그 역시 금지된 봉우리로 묶여있는데, 역시나 통행금지 안내문을 무시하고 봉우리로
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도봉산의 정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운봉과 만장봉은 오르지 않고 (남북통일 될 때까지 오래 살아야 되니까) 자운봉고개에
서 포대능선으로 진입했다. 마치 학이나 용의 등에 올라탄 듯, 능선 양쪽으로 천하가 눈 아래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니 조망 또한 천하 일품이다. 수락산과 오봉 등 주변의 기라성 같은 산들도
알아서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다가오니 도봉산도 참 큰 산이긴 큰 산인 모양이다.

포대능선은 처음에는 길이 착하다. 그러다가 10분 정도 가면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왼
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북쪽으로 이어지는 것은 같다. 허나 오른쪽 길이 진정한 포대능
선의 위엄으로 Y처럼 생겼다고 하여 속칭 와이계곡이라 불리며 왼쪽 길은 와이계곡 우회길이다.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오봉과 여성봉, 양주 장흥면 지역

와이계곡 길은 산길인지 지옥의 길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극악의 수준이다. 산길에 박힌 철
난간과 철봉이 아니면 거의 지나기가 힘든 구간으로 그들에 의지해 조금씩 움직이는데, 완전 손
에 땀을 쥐게 하며, 다리 밑은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라 간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다. 

산길의 경사도 갑자기 몇십 척을 쑥 내려가더니 다시 몇십 척을 쑥 올라가는 미친 형식으로 높
이의 차도 심하다. 산길의 거리는 고작 1리도 안되지만 그 구간을 지나 다락능선 입구까지 거의
3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도봉산을 그래도 만만하게 봤건만 이런 미친 구간이 있다니..?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그 구간을 꿈 속에서 다시 탈까 두렵기만 하다. 이 구간을 가기 싫다면 앞서 갈
림길에서 왼쪽으로 우회하면 된다.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북단과 의정부 남부
건너편에 보이는 장대한 산은 한때 나의 단골 산이던 수락산(水落山, 637m)이다.
우리가 그 수락산보다 더 높이 떠 있다.

▲  포대능선에서 만난 멋드러진 소나무, 그 너머로 보이는 서울 북부 지역
(우리 동네 도봉동도 훤히 보임)

▲  포대능선 716m 봉우리
봉우리 주변에는 초소와 포대(砲臺) 등 추억이 되버린 군사 시설이 여럿 남아있다.
포대능선이란 이름도 바로 능선에 있던 포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속세처럼 험난했던 와이계곡을 통과해 716m 봉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지치고 놀란 두 다리를
쉬며 눈 밑에 펼쳐진 천하를 가슴 가득히 굽어본다.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를 비롯한 서울 북부
지역과 경기도 의정부시, 양주시 장흥면과 율정/고읍지구가 훤히 눈에 박혀 속세로부터 오염되
고 상처받은 마음과 눈을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속세를 내려다보니 자연이 빚은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
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거만한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
머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
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  북쪽으로 힘차게 내닫는 포대능선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포대능선은 회룡골재를 거쳐 사패산까지 이어진다.


포대능선 716m 봉우리(다락능선 입구)에서 도봉산역 방향으로 내려갔다. 우리가 있어야 될 곳은
이런 산중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려고 들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다.
중간에 자운봉 동쪽 밑에 자리한 조그만 암자 만월암(滿月庵)에 들려 그곳에 깃든 조선 후기 석
불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1호)을 친견하고, 다시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하여 도봉산 종점으
로 내려왔다. (만월암과 그 이후에 둘러본 곳은 생략) 그런 다음 순두부와 파전, 동동주로 간단
히 저녁 뒷풀이를 하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도봉산이 내 제자리와 매우 가까우니 그것 하나는 너무 좋다. 금방 돌아와서 지친 몸을 뉘울 수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하여 5월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내가 도봉산 곁에 계속 머무는 동안
그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지고 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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