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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12.27 늦가을 산사 나들이 ~ 우이동 윗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도선사 (붙임바위, 우이동계곡)
  2. 2019.09.24 서울의 동북쪽 지붕을 거닐다. 수락산 구석구석 나들이 ~~~ (노원골, 수락산보루, 서울둘레길, 동막골, 도선사)

늦가을 산사 나들이 ~ 우이동 윗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도선사 (붙임바위, 우이동계곡)

북한산(삼각산) 도선사



' 늦가을 산사 나들이, 북한산(삼각산) 도선사 '

도선사 18나한상, 포대화상
▲  도선사 18나한상과 포대화상

도선사 마애불입상

도선사 붙임바위

▲  도선사 마애불입상

▲  붙임바위

 



 

늦가을이 한참 깊어가던 10월 끝 무렵의 어느 평화로운 날, 집에서 가까운 북한산(삼각
산) 도선사를 찾았다.
도선사는 지금까지 10회 남짓 인연을 지었던 절로 그곳의 늦가을 풍경과 늙은 마애불이
문득 그리워 간만에 그곳을 찾은 것인데,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도봉동(道峰洞
) 집을 나서 방학4거리에서 노원구 마을버스 15번(월계동 청백1단지↔덕성여대)을 타고
우이동 도선사입구에서 두 발을 내렸다.
우이동은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山) 사이에 자리한 동네로 이들 산을 찾는 산꾼
과 나들이꾼들로 늘 북새통을 이룬다.

우이동(牛耳洞) 109번 시내버스 종점 맞은편에는 도선사행 셔틀버스 정류장이 있다. 도
선사까지 걸어가기에는 다소 거리(약 2.3km)가 있고, 이날은 도선사가 목적이라 버스를
기다리는 행렬에 흔쾌히 동참했다. 하여 10분 정도 기다리니 셔틀버스가 기지개를 켜고
내 앞에 나타나 활짝 입을 벌린다.
이 노선은 우이동(109번 종점 맞은편)에서 도선광장까지 운행하는데, 평일에는 30~40분
간격으로 다니며 휴일에는 증차 운행한다. (석가탄신일은 거의 10분 내외 간격, 입석은
안됨) 차비는 무료이나 굳이 내고 싶다면 승차장에 있는 돈통에 알아서 넣으면 되며 신
도와 절에 볼일 또는 예불을 보러 가는 사람만 가려서 받는다. (산꾼들은 거의 받지 않
음)
버스는 각박한 오르막의 연속인 도선사 길(삼양로173길)을 5~6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다
가 도선광장에 이르러 바퀴를 멈추었다. 우이동에서 도선사를 잇는 신작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닦아준 것으로 그 길로 인해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도선사는 서울 동북부를 대
표하는 고찰(古刹)로 크게 흥하게 된다.

도선광장(마음의 광장)에는 우리나라 최대급의 옥외(屋外) 석불좌상으로 꼽히는 미소석
가불이 이름 그대로 미소를 흩날리고 있다. 그를 중심으로 그 옆에 셔틀 정류장과 주차
장이 있고, 북쪽에는 백운대탐방지원센터와 백운대로 가는 산길이 있으며, 서쪽에는 안
양암과 도선다원이 있고, 그 남쪽에 도선사로 가는 길이 있다.
도선광장에서 도선사 경내까지는 도보 5분 거리로 길은 느긋한 수준이며 천왕문이 제일
먼저 마중을 나와 중생을 검문한다.



 

♠  도선사(道詵寺) 입문

▲  천왕문(天王門)의 뒷모습

맞배지붕을 지닌 천왕문(사천왕문)은 도선사의 정문으로 1987년 11월에 지어졌다. 봉황문(鳳
凰門)이라 불리기도 하며,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 다문천왕,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의 보금자리로 그들은 이곳을 지나는 중생들을 검문하느라 여념들이 없다. 그들의
수고로움이 있기에 오늘도 도선사와 북한산(삼각산)은 평화롭다.


▲  천왕문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해발 300m)
정면에 보이는 진달래능선 너머로 강북구와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지역과
불암산, 아차산, 멀리 남양주 지역의 뫼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왜열도에서 건너온 검은 피부의 청동지장보살상

천왕문을 지나 조금 들어가면 청동지장보살상이 모습을 비춘다. 그는 도선사와 자매결연을 맺
은 왜열도 진언종(眞言宗)의 본사, 고야산 안양원(高野 山 安養院)에서 1983년 11월 15일 청담
대종사 열반재 때 증정한 것인데, 주변 나라와 분쟁이나 일삼으며 툭하면 평화를 깨려고 드는
왜열도 원숭이들의 시커먼 마음을 보여주듯 피부가 아주 검다.


▲  가을 단풍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도선사 경내

경내 직전에 이르면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직진하면 주차장과 도선사 경내로 바
로 이어지며, 오른쪽은 종각과 청담대사비, 청담대종사 사리탑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왼쪽은
북한산(삼각산) 산길로 여기서 해발 260m 정도 오르면 북한산성(北漢山城) 용암문에 이른다.
나는 오른쪽 길로 들어서 청담대종사 사리탑을 둘러하고 경내로 들어섰다.


▲  시원스런 추녀 곡선을 지닌 종각(鐘閣, 범종각)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아리를 머금은 사물<범종(梵鐘)과 목어(木魚),
법고(法鼓), 운판(雲版)>의 보금자리로 여기서 북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청담대종사의 사리탑과 그의 비석을 만날 수 있다.

▲  수수한 모습의 청담대종사 석상

▲  귀부가 꽤 인상적인 청담대사비


▲  화려한 수작(秀作)을 자랑하는 청담대종사(靑潭大宗師) 사리탑과
그의 뒤를 받쳐주는 조그만 삼천(三千)지장보살상


도선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20세기 큰 승려의 하나로 추앙받는 청담대종사<1902~
1971, 청담당 순호대종사(靑潭堂 淳浩大宗師)>이다.

그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이름은 이순호(李淳浩)이다. 3.1운동에도 참여했으며 금강산 마하연
에서 수행했던 승려 박포명을 만나 불교와 강렬한 인연을 맺게 된다.
'왜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찬 줄 아느냐? 마음이 뜨겁다고 생각하고 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의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법문이 청담을 불교의 세계로 고스란히 인도한 것이다.

1924년 왜열도로 건너가 송운사(松雲寺)에서 행자생활을 했으나 왜열도 불교의 좋지 않은 점<
승려가 마누라를 두고 가정을 꾸림>에 크게 경악하여 바로 본토로 돌아와 고성 옥천사(玉泉寺
)에서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 개운사(開運寺)
불교전수상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하고, 바로 만공(滿空)의 문하에 들어가 수행을 했다.
1928년 조선불교학인대회를 통해 왜정(倭政)에 저항하는 불교에 앞장섰고, 1947년 봉암사(鳳
巖寺) 결사를 통해 왜정의 농간으로 망가진 이 땅의 불교를 정화하고 철저히 계율을 지키며
오로지 참선에 정진하자는 불교정화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허나 청담의 개혁에 발끈한 승려들(대부분 대처승)의 태클도 만만치 않아 그 길은 순탄치 않
았다. 다행히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帶妻僧)에 대해 절에서 나가라며 불교의 개혁을 지지했
고 성철(性徹), 자운 등 깨어있는 승려들도 앞다투어 그의 개혁에 동참했다.

1960년 11월 대법원이 비구승(比丘僧)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상한 판결을 내리자 청담은 비
밀리에 6명의 비구로 이루어진 순교단을 결성, 판결 다음날 대법원청사에서 할복을 감행했다.
이 행위는 여론을 비구승 쪽으로 돌리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1961년 박정희 군사 정권이 들
어서자 '불교 정화는 비구와 대처승 간의 싸움이 아니라 국민사상 개조 운동'이라며 군부를
설득해 1962년 4월 비구승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통합종단이 출범하게 되었다.

1966년 11월 초대 종정(宗正)인 효봉(曉峰)의 뒤를 이어서 청담이 제2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불교 근대화의 발판을 위해 내세운 역경(譯經), 도제양성, 포교 등 3대 지표를 포함하여
의식의 현대화, 군승제(軍僧制) 촉구, 신도 조직 강화, 석가탄신일 공휴일 제정, 불교회관 건
립 등 6개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또한 포교의 활성화를 위해 절에서 매주 1회씩 정기법회를
개최하는 것과 불교방송국 및 승가대학 설립을 목표로 세웠다.
그 목표를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1971년 11월 15일, 69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그의 다비
식(茶毘式)에는 무려 20,000여 명의 사부대중이 모여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으며, 1972년
도선사 경내 동쪽 산자락에 자리를 닦고 그의 사리탑과 비석, 석상을 세웠다.

청담의 사리탑은 20세기 후반 제일의 승탑<부도(浮屠)>이라 내세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
주 찬란하고 장엄한 모습이며, 승탑 뒤로 무려 3,000기의 조그만 지장보살을 갖춘 커다란 벽
을 둘러 가히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만큼 청담대사를 향한 도선사와 후학들의 지극정성이 대
단하다. <청담대사의 승탑은 고성 옥천사(☞ 관련글 보러가기)에도 있음>
사리탑 구역은 3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일 밑에 청담의 석상을 두었고, 중간에는 청담대
사비, 윗쪽에는 사리탑을 두었다. 바로 이 구역을 닦으면서 오래된 청동범종과 청동숟가락 5
점, 청동젓가락 1짝, 청동국자 2점, 왜열도에서 건너온 동경(銅鏡, 봉래문경), 상평통보 등
고려 말과 조선 중기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들 유물을 통해 절 건물이 이 자리에 오래 눌러앉았음을 보여주며, 그들 모두 서울 지방유
형문화재 259호
('도선사 청동종 및 일괄유물')로 지정되어 청담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종각에서 경내로 이어지는 호젓한 길

▲  도선사 호국참회원(護國懺悔院)

청담대종사 사리탑을 둘러보고 경내로 들어서니 호국참회원이라 불리는 커다란 팔작지붕 건물
이 마중을 한다.
호국참회원은 지상 3층, 지하 1층의 1,000평 규모로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1968년 11월
청담대종사가 우리나라 불교의 중흥과 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은 호국참회불교를 제창하며 지은
것으로 1977년 증축을 했으며 단양 구인사(救仁寺)의 건물 스타일과 많이 비슷하다. 아무래도
이곳이 첩첩한 산중이고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이라 추가로 건물을 올리기 어려워 이런 식의 건
물을 다진 것이다.
1층에는 공양간이 들어있고, 2층은 어린이회, 학생회, 도서실, 수련원 등이 있으며, 3층은 대
법당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이 깃들여져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도선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자 북한산 3대 봉우리의 하나인 만경대(萬景臺) 밑에 자리한 도선
사는 862년에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이곳 산세가 1,000년 뒤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佛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 예견하
고 절을 지은 뒤, 큰 암석을 주장자(柱杖子)로 갈라 마애불을 새겼다고 한다. 그 연유로 사찰
이름을 도선사라 했다는 것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이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
이며, 그 마애불 조차도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이미 판명이 났다.
다만 청담대종사 사리탑 자리에서 고려 말과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어 적어도 고려 한복판부
터 절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그곳이 경내의 중심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어찌된 영문인지 오랫동안 일기장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숙종(肅宗) 시절 북한
산성을 수리했을 때 승병(僧兵)들이 이 절에서 보초 임무를 선 기록이 있다. 1863년 안동김씨
의 실세인 김좌근(金左根)이 돈을 대어 칠성각을 지었고, 1887년 동호 임준(東湖 任準)이 7층
석탑을 세우고 그 안에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1903년 혜명(慧明)이 고종의 명으로 대웅전을 중건하고 신중도와 지장도 등 14점의 탱화를 봉
안했으며(이때 불상 2기를 개금하고 1기를 개채함) 1904년 국가기원도량으로 지정을 받았다.
1961년 청담이 주지로 주석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절을 크게 불려나갔
으며, 1963년 도선암을 도선사로 격을 높였고, 1968년에 절과 속세를 이어주는 도로가 닦여지
면서 접근성이 한층 좋아졌다.
2001년 청담대종사를 기리고자 청담기념관을 세웠고, 2002년 그 안에 유물관을 두어 청담대종
사의 유물과 절의 문화유산을 전시/보관하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호국참회원, 명부전, 삼성각, 적묵당, 천불전, 요사채 등 10여 동
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마애불입상과 목아미타불 대세지보살상, 석독성상, '청동종 및
일괄 유물(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9호)',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유
형문화재 396호
) 등 지방문화재 5점을 품고 있다.
그 외에 오래된 보리수와 19세기 말에 조성된 지장시왕도, 괘불도, 묘법연화경, 7층석탑, 마
애사리탑 등의 비지정 문화유산도 여럿 지니고 있으며, 청담대종사 사리탑과 청담대사비, 18
나한상과 포대화상, 진신사리탑 등의 조촐한 볼거리도 간직하고 있다.
절의 부설 기구로는 금천구 시흥동(始興洞)에 있는 혜명보육원과 실달학원, 청담종합중고교
등이 있으며, '도선법보'등의 정기 간행물을 내놓고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제대로 박힌 고즈넉한 산사로 신작로가 경내까지 뚫려있어 실감이 덜하겠
지만 북한산(삼각산) 서울 구역에 자리한 고찰(古刹) 중 문수사(文殊寺), 일선사(一禪寺) 다
음으로 높은 320~330m 지점에 자리해 있다. 그만큼 이곳은 깊은 산골이다.
만경대와 인수봉(仁壽峯) 그늘에 자리하여 위치도 좋으며,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산꾼과 답사꾼의 왕래도 빈번하다. 또한 마애불입상이 영험하다고 소문이 자자하여 기도 수요
도 상당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264 (삼양로173길504, ☎ 02-993-3161~63)
* 도선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도선사의 오랜 자랑, 마애불입상



 

♠  도선사 둘러보기 (호국참회원, 삼성각 등)

▲  도선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아주 아름다운 말이 있다. 호국참회원 1층 공양간이 마침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밥과 국 냄새가 나의 후각을 어지럽히니 이곳 공양(供養) 인심이나 확인할
겸, 1그릇 들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급한 것도 없다.
도선사 공양밥은 다른 절과 비슷한 비빔밥 스타일로 하얀 밥과 김치 등의 나물, 고추장을 먹
을 만큼 담고 별도의 그릇에 미역국을 담아 즐겁게 공양에 임하면 된다. 누구든 무료로 공양
을 할 수 있으며 보통 17시까지 밥을 제공한다. (시간은 상황에 따라 변경 가능) 미역국은 비
록 고기나 해산물은 들어있지 않으나 국물이 진국이다.

어찌하다보니 그릇이 터질 정도로 밥과 나물을 담았는데 이것을 과연 다 먹을 수 있을까? 걱
정이 들었다. 허나 그것은 기우였다. 순간 시장기가 강림하여 거뜬하게 빈 그릇으로 만든 것
이다.
그렇게 공양을 마치고 옆 칸으로 넘어가 내가 먹은 그릇과 수저를 설겆이하고 물 1모금 섭취
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도선사 관람은 이제부터이다.

◀ 청담심지(靑潭心地)
청담대종사가 머물렀던 백운정사 옆에
있던 것으로 2002년에 현 자리로
옮겼다.

◀  돌로 다진 천불전(千佛殿)
종무소(宗務所)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건물로 이름 그대로 조그만 천불이
봉안되어 있다.


▲  배불뚝이 포대화상(布袋和尙)
그의 배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하여 그의 배는 좀처럼 마를 날이 없다.
사람들이 얼마나 문질렀는지 배가 아주 검은 피부가 다 되었으며, 그의
허공에는 조그만 등이 대롱대롱 달려 가을 바람을 즐긴다.

          ◀  도선사 보리수(菩提樹)
명부전 앞에는 불교에서 가장 애지중지하는 나
무인 보리수가 있다. 부처가 보리수 밑에서 깨
달음을 얻었다는 사연 때문이다.
이 나무는 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어느 승려
가 멀리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과연 그
럴까?) 보리수는 염주나무, 각수(覺樹), 성수(
聖樹)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며, 사진이 너무
흐릿하게 나온 것이 다소 아쉽다. (내 역량이
그것 밖에 안되니 어쩔 수 없음...)


▲  청기와를 눌러쓴 명부전(冥府殿)

보리수 그늘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
王), 저승의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지금은 명부전이 자리
를 잡고 있으나 이곳은 원래 청담대종사가 머물렀던 백운정사(白雲精舍) 자리이다.

▲  온화한 표정의 금동지장보살상과
19세기에 그려진 지장시왕탱

▲  죽은 이를 심판하는 저승의 10왕과
시왕탱 (지장보살상 좌측)

▲  저승의 10왕과 시왕탱 (지장보살상 우측)

▲  명부전 앞에 자리한 윤장대(輪藏臺)


▲  도선사 대웅전(大雄殿)과 국화전시장

청기와를 지닌 대웅전은 도선사의 중심 건물인 법당(法堂)이다. 절 초창기 시절부터 있었다고
하나 신뢰도는 떨어지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대웅전이라 석가여래상이 중심으로 있어야 되지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거느려 아미타3존상을 이루고 있다. 또한 대웅전
현판은 강창회(姜昶會, 1789~?)가 12살에 썼다고 전한다.

내가 갔을 당시 대웅전 뜨락에는 노란 국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뜨락 허공에는 연등이 가득
매달려 국화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경내를 둘러싼 단풍과 더불어 늦가을의 멋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이곳은 매년 11월 경내에서 이렇게 가을 국화전시를 하고 있으며, 석가탄신
일에는 이곳에서 산사음악회와 공연, 법회가 열리는 경내의 광장과 같은 곳이다.


▲  금빛찬란한 대웅전 아미타3존상과 금동후불탱
대웅전 천정에는 하얀 연등이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며 보랏빛 색깔을
연출해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대웅전 앞을 곱게 수식하고 있는
노란 국화들

▲  연등이 하늘을 가린 대웅전 뜨락
(삼성각에서 바라본 모습)


▲  호국참회원 대법당에 봉안된 목아미타불, 대세지보살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91호


호국참회원 3층에 자리한 대법당에는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아미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아
미타불을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가지고 있는 점이 참 이채로운데 그렇다고 도선사가 아미타불
도량을 칭하지도 않는다. (도선사는 '호국참회도량'을 칭하고 있음)

대법당 불단에 들어앉아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미타3존상은 크기가 아주 조그만하여 동자승
처럼 귀엽기 그지 없다. 이들 중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
으며, 관세음보살은 근래 새로 지은 것이다.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 뱃속에서는 고맙게도 그들의 조성시기가 적힌 발원문(發願文)이 나
왔는데, 1740년에 여기서 가까운 도봉산 원통암(圓通庵, 원통사)에서 조성하여 북한산 진관암
(津寬庵, 진관사)에 봉안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하여 18세기 서울 지역 보살상과 아미타불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주며 그 발원문 덕에 지방문화재의 감투까지 받게 되었다. 그리고 아
미타불 이름 앞에 '목(木)'이 붙은 것은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으로 이후 개금을 하여 현재 모
습이 되었다.

북한산(삼각산) 반대편에 있던 이들이 어찌하여 도선사까지 흘러들어왔는지는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다. 다만 1933년 도선사에서 만든 사찰재산대장에 아미타불, 약사불, 관세음보살이 등
장하는데, 그들이 아미타3존상인지는 불투명하며(관세음보살은 입상으로 나와있음) 1960년대
에 촬영된 사진에는 아미타불 옆에 관세음보살이 있는데, 그 역시 진관사에서 넘어왔다고 한
다.
이후 그의 보관(寶冠)이 일부 손상되어 새 관세음보살을 만들어 붙였으며, 기존 관세음보살은
청담기념관 수장고에 넣어버렸다. (그 관세음보살상이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6호인 석조관음
보살좌상임)
아미타3존상 뒤에는 금동으로 치장된 후불탱과 닫집이 듬직하게 자리하여 그들을 반짝반짝 윤
기를 내준다.


▲  연병장처럼 넓은 호국참회원 대법당
중생들의 지원을 받아 달아놓은 조그만 금동원불이 벽을 가득 도배하고 있다.
이곳은 공간이 넓어서 강당 및 행사장의 역할도 도맡고 있다.

▲  대웅전 옆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석 독성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92호

대웅전 뜨락에서 마애불입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 치성광여래)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중 독성상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어깨가 딱 벌어지고 체격 또한 단단해 아주 늠름해보이는 이 독성상은 돌로 빚은 것으로 지장
보살처럼 푸른 대머리를 지니고 있다. 시선은 약간 아래로 하고 있으며 무슨 걱정이 있는지
표정이 썩 밝아보이지는 않는다. 몸에 걸친 붉은 가사(袈裟)를 묶은 고리매듭이 왼쪽 어깨에
있으며, 오른손은 바닥에 대고 왼손을 왼쪽 다리를 세운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아줌마 자세처
럼 앉아있다.

그는 원래 마애불입상 주변에 있던 독성각(獨聖閣)에 있었으나 이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으
며, 1962년에 청담이 불교정화운동으로 도선사에 있던 산신각과 칠성각, 용왕당 등 토속신앙
적인 건물을 모두 부시면서 그 건물에 봉안된 산신과 칠성을 모두 독성각에 집어넣고 삼성각
으로 이름을 갈았다.
1992년 독성상의 몸을 새롭게 채색을 했는데, 이때 그의 뱃속에서 1876년에 개분(改紛)했음을
알려주는 '독성나반존자 개분 봉안축원문'이 튀어나왔다. 하여 빠르면 18세기에 조성된 것으
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에 흔치 않은 돌로 만든 독성상이자 그 시절 독성상 연구에 좋은 자료
로 평가를 받는다. (대부분의 독성상은 나무로 만들었음)

▲  삼성각 산신탱과 산신상

▲  삼성각 칠성탱과 석가3존상

▲  삼성각 밑에 자리한 반야굴(般若窟)
쌍용그룹을 세운 김성곤이 돈을 대어 지은
것으로 11면관세음보살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  반야굴을 장식하고 있는 보살들
가운데가 11면 관세음보살, 좌우가
문수보살, 보현보살



 

♠  도선사 마무리

▲  도선사 마애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호

경내 뒤쪽이자 도선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높이 20m 정도 되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로 그곳에 도선사의 오랜 명물이자 든든한 밥줄인 마애불입상이 짙게 깃들여져 있다. 도선
사에서는 도선대사가 직접 새겼다고 홍보를 하고 있으나(도선이 손으로 바위를 갈라서 만들었
다고 함;) 조사 결과 고려 때 유행했던 마애불 계통을 이어받은 조선 중기 석불로 크게 보고
있다.

돋음새김으로 짜여진 이 석불은 높이 8.43m(머리 부분 2.15m, 어깨 너비 2.88m)의 장대한 규
모로 오랫동안 산골 구석에서 외롭게 지내다가 19세기 후반, 안동김씨의 후원으로 나라의 기
도도량으로 지정되면서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이후 도선사가 '영험한 마애불'로 적극 홍
보하면서 찾는 수요가 나날이 늘어났고, 365일 사람들의 발길이 마를 날이 없다. 완전 서울판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가 된 것이다.

이 마애불은 얼굴도 몸통도 모두 두툼하다. 그를 보호하고자 검은 피부의 청동 보호각을 씌워
놓았는데, 그로 인해 얼굴 부분은 거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머리 위에 간단하게 비와 눈을
막을 수 있는 덮개 정도만 설치했으면 좋았을 것을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의 보호각을 씌워놓
아 마치 갇힌 듯한 답답한 모습을 만들어버린 것이 다소 아쉽다.

마애불의 머리는 소발(素髮)로 낮게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솟아있다. 가늘게 뜬 두 눈
은 음각으로 처리해 눈과 주변 살이 두꺼워 보이며, 코는 넓직하고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큰 얼굴에 비해 입은 작으며 수염이 살짝 표현되어 있고, 얼굴과 몸통이 딱 붙어있어
목은 아예 없는 것 같다.
몸통에는 옷주름이 이리저리 그어져 율동을 보이고 있으며, 그의 정체는 관세음보살 누님으로
여겨진다. 그 앞에는 넓게 공간을 닦아 예불 공간으로 삼았고, 주변에 1887년에 동호 임준이
지은 7층석탑이 날씬한 모습으로 자리해 뜨거운 예불 현장을 지켜본다.

도선사에서는 마애불 자체를 석불전(石佛殿)으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 적지
않은 수입을 거둬들이고 있다. 비록 팔공산(八公山) 갓바위만큼은 아니더라도 매일 들어오는
재물이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오늘도 중생들의 소망을 접수하랴. 도선사 곳간을 채워주랴.
마애불의 고생이 참으로 크다. 부디 그렇게 벌어들인 돈, 관세음보살 누님의 뜻에 따라 어려
운 중생을 위해, 속세를 위해 모두 내놓기를 바란다. (자고로 종교는 돈과 정치에 너무 욕심
을 부리면 안됨)


▲  평화의 진신보탑(眞身寶塔) (9층석탑)

마애불을 둘러보고 밑으로 내려가면 평화의 진신보탑과 일심광명각 등이 있는 공간이 나온다.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을 닮은 평화의 진신석탑이 이곳의 중심 역할을 하
고 있는데,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파리와 개미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
를 자랑하고 있어 월정사8각9층석탑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 하다.


▲  일심광명각(一心光明閣)
반야굴 위에 무지개로 화현(化現)했다는 청담대종사를 위해 만든 공간이다.

▲  일심광명각 내부

▲  평화의 불과 괘불(掛佛)

도선사가 호국참회도량을 칭하다보니 평화를 강조하는 석탑과 불까지 갖추고 있다. 짜투리 공
간을 활용하여 경내의 눈요깃감도 조금 늘릴 겸, 평화를 염원하는 도선사의 마음을 살짝 담은
것인데, 평화의 불 뒤에는 근래 장만한 괘불이 걸려있어 활활 타오르는 불을 지켜보고 있다.


▲  포대화상과 18나한상, 그리고 그들을 보듬은 늦가을 풍경

경내 제일 뒤쪽(진신보탑 뒤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18나한상과 포대화상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들은 일심광명각과 비슷한 사연으로 조성된 것으로 돌 하나에 나한 1명씩 배치해 다
소 여유로운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데, 다들 자유롭고 제각각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포대화상이 그의 치명적인 매력인 똥배를 쑥 내밀고 돈통을 쥐어들며 해
맑은 표정으로 서있어 마치 18나한의 두목 같다.

평화로운 그들 뒤로 늦가을 누님이 질러놓은 고운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속세(俗世)에서 오
염되고 상처 받은 두 안구를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붉게 물든 단풍잎부터 연두색, 녹색, 노란
잎까지 대자연이 물들인 색채들이 너무 곱다. 하여 제아무리 천재 화가라 한들 대자연의 색채
를 감히 흉내내지는 못할 것이다.

▲  윗쪽에 자리한 나한상들

▲  밑쪽에 자리한 나한상들

18나한상까지 모두 둘러보고 잠시 잊었던 청담기념관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호국참회원 밑에
자리해 있는데, 문은 이미 굳게 닫힌 상태였다. 알고보니 개방시간은 16시까지이다. (그때가
17시가 넘었음)
이럴줄 알았으면 미리 그곳을 살펴보고 경내를 둘러보는 것인데 그만 방심을 하고 말았다. 이
렇게 중요한 것을 놓쳐버려 다음에 또 와야 되는 구실을 만들고 말았으나 다행히도 집에서 가
까운 곳이라 언제든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이후 청담기념관도 모두 둘러보았음)


▲  늦가을이 산에 불을 놓았다. 알록달록 타오르는 늦가을 풍경
(도선사 주변)

마음 같아서는 북한산성 용암문까지 훌쩍 올라가고 싶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더 이상의 욕
심을 부리지 않고 우이동으로 얌전히 내려갔다.
내려갈 때는 금지된 곳으로 묶은 우이동계곡의 안부를 확인하고자 셔틀버스에 의지하지 않고
걸어서 내려갔는데, 도선광장에서 조금 내려가니 커다란 바위가 잠시 보고 가라며 발목을 붙
잡는다. 바로 붙임바위이다.


▲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든 붙임바위

도선사까지 신작로가 닦이기 전에는 사람들이 붙임바위에서 많이들 쉬어갔다. 물론 지금도 쉼
터의 역할은 녹슬지 않았다. 산꾼들과 문명의 이기(利器)를 거부하며 두 다리로 오가는 사람
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바위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바위에 조그만 돌을 붙이고 소망을 들
이밀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하여 바위의 배는 물론 옆구리와 주름선 등 돌
이 안착하기 좋은 자리에는 마구 돌을 갖다 붙였다. 심지어는 그의 피부에 상처를 내고 돌을
얹는 사람도 있었다. 하여 돌을 붙이는 바위란 뜻의 '붙임바위'라 불리게 되었고, 이곳 고개
는 '배바위고개'가 되었다.

바위를 딱 봐도 크고 준수하게 생겼으며, 도선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보니 자연스레 주목을 받
은 것이며, 저런 바위는 굳이 절이 아니더라도 산악신앙(山岳信仰)의 대상으로 늘 추앙을 받
기 마련이다. 하여 사람들의 부질없는 소원풀이 도구가 되었고, 옆구리에 신작로가 뚫리면서
5분이 멀다하고 차량들이 소음과 매연을 쏟아붓고 지나가니 그의 고통이 말이 아닐 것이다.
허나 대자연의 넉넉한 마음처럼 딱히 싫은 내색 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도선사의 이정표 역할
을 한다.
지금도 그의 주름과 피부 곳곳에는 사람들이 붙여놓은 돌이 적지 않다. 그만큼 사람들이 속세
의 팍팍한 삶을 그에게 푸는 것이다.


▲  늦가을에 잠긴 도선사 길 (붙임바위 주변)

▲  금지된 계곡, 우이동계곡 (청담폭포, 적취병 주변)

도선사 신작로(청담로, 삼양로173길) 옆에는 우이동계곡(도선사계곡)이 졸졸 흐르고 있다. 북
한산(삼각산) 동부 지역의 이름난 계곡의 하나로 도선사 윗쪽에서 발원하여 속세를 향해 흘러
가는데, 백운천(白雲川)이라 불리기도 하며, 우이동으로 내려가 우이천으로 간판을 갈고 도봉
구와 강북구, 노원구와 성북구의 경계를 이루며 중랑천(中浪川)으로 내려간다.

조선 초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격하게 찬양을 받았던 우이동계곡은 양반사대부의 피서지로
인기가 높았다. 하여 수재정(水哉亭)과 재간정(在澗亭), 겸산루(兼山樓) 등 그들이 지은 정자
와 별장이 계곡 주변에 즐비했으며, (지금은 다 사라짐) 그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여럿 전하고
있다.
이곳을 즐겨찾던 사람 중 이계 홍양호(耳溪 洪良浩, 1724~1802)가 있는데, 그는 여기서 9곳의
괜찮은 명소를 뽑아 '우이동구곡(九曲)'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 식구들은 대략 이렇다. <그의
'우이동구곡기(牛耳洞九曲記)'에 실려있음>
제1곡은 '만경폭(萬景瀑)'이란 폭포로 도선사 밑에 있다. 조현명(趙顯命, 1690~1752)과 이주
진(李周鎭, 1692~1749), 그의 아들인 이은(李殷, 1722~1781) 등이 남긴 바위글씨가 전하고 있
으며, 제2곡은 적취병(積翠屛), 제3곡은 찬운봉(瓚雲峯), 제4곡은 커다란 바위인 진의강(振衣
岡), 제5곡은 옥경대(玉鏡臺), 제6곡은 월영담(月影潭), 제7곡은 회영암(淮纓巖), 제8곡은 명
옥탄(鳴玉灘), 그리고 제9곡은 재간정(在澗亭)이다.

왜정 때는 서울 근교 벚꽃 명소로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봄꽃놀이를 하러 왔다. 이때만 되
면 경성역(서울역)에서 임시 관광열차를 편성하여 우이동 부근인 창동역(倉洞驛)까지 운행했
는데, 창동역부터 여기까지는 걸어서 이동했다.
이처럼 서울 사람들과 귀족들의 눈과 마음을 시리게 해주었던 우이동계곡은 1970년대 이후 상
수원 보호구역이 되면서 계곡 전체가 금지된 계곡으로 꽁꽁 묶여 있다. 하여 우이동9곡 식구
들 상당수는 접근이 통제되어 제대로 더듬기가 어렵게 되었고, 그저 계곡 옆 신작로에서 바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2021년에 9곡 명소와 가까운 곳에 관련 안내문과 조망대를 설치
했으나 만경폭과 적취병 등은 너무 거리가 있어서 제대로 보기가 힘듬)
비록 사람들에게는 다소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그 덕에 인간들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이렇게 청정하고 때 묻지 않은 구석을 자랑하게 되었다. 선녀 누님도 놀러올 것 같은 계곡이
저 밑에 간드러지게 유혹을 하지만 괜시리 잘못 발을 들였다가 벌금형의 고통을 받을 수 있다.

붙임바위 주변 계곡에는 청담폭포와 적취병이 있는데,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벼랑
과 바위들이 늦가을 단풍과 어우러져 일품 수채화를 자아내고 있었다.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바라보듯 해야 되는 아쉬움이 있으나 굳이 접근 통제의 경고를 무시하면서까지 대자연의
작품에 옥의 티가 되고 싶지는 않다.

붙임바위를 끝으로 도선사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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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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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동북쪽 지붕을 거닐다. 수락산 구석구석 나들이 ~~~ (노원골, 수락산보루, 서울둘레길, 동막골, 도선사)



~~~~~  서울의 동북쪽 지붕, 수락산 여름 나들이
~~~~~
(수락산보루, 도선사, 동막골)

   
서울둘레길 수락산 동막골 구간

▲ 수락산보루
◀ 서울둘레길 동막골 구간
▶ 동막골 숲길
▼ 도선사 석삼존불상

   

 


 

서울의 동북쪽 지붕을 이루고 있는 수락산(水落山, 638m)은 상계1동에 살던 10대~20대 시
절 나의 뒷동산이다. 지금은 바로 옆 동네인 도봉동(道峰洞)에서 도봉산(道峯山, 720m)의
그늘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수락산이 뻔히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 종종 그의 품을 찾
곤 한다. 그곳에는 계곡과 명소, 오래된 절 등 구수한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수락산 서울 구역에 남아있는 미답처(未踏處)를 일부라도 지우고자 아직 발자국
을 남기지 못한 수락산 보루터와 서울둘레길 수락산 구간 일부, 그리고 오래된 석불을 간
직한 도선사를 찾았다.


 

♠  수락산 노원골과 수락산보루터

▲  노원골 (노원골약수터 주변)

이번 수락산 나들이는 수락산의 주요 기점의 하나인 노원골에서 시작했다. 상계1동에 살 적에
노원골과 인근 수락골(벽운동계곡)을 많이 이용했는데, 물을 뜨러 갈 때는 보통 노원골을 선
호했다. 수락골은 제대로된 샘터를 만나려면 상당히 올라가야 했지만 수락골은 조금만 올라가
도 샘터가 무수히 나왔기 때문이다.

노원골은 수락산을 장식하는 주요 계곡으로 노원골 북쪽 능선과 남쪽 능선 사이에서 발원(發
源)하여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다. 허나 계곡 밑까지 주거지가 형성되면서 수락산과 속세
의 경계선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한 채, 중랑천으로 넘겨지고 있다. 이는 인근 수락골도 마찬
가지로 서울에 있는 많은 계곡의 잔인한 현실이기도 하다. 겨울 제국(帝國)이 씌운 얼음은 소
쩍새가 울 때면 알아서 녹기 마련이지만 인간이 씌운 복개천의 굴레는 좀처럼 벗기기가 힘들
다.

노원골이 수락골보다 골짜기는 작아도 바위와 반석이 많고, 계곡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숲이
짙으며, 수심도 얕아 아이들 물놀이 장소로도 아주 좋다. 게다가 경관 또한 아름다워 예로부
터 지역 피서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아왔다. 작지만 매우 야무진 계곡이었던 것이다. 특히 노
원골약수터 주변은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반석이 넓게 깔려있다.
허나 여름 제국이 무더위로 천하를 너무 쥐어짜면서 계곡을 불리던 냇물은 거의 말라버렸다.
제아무리 잘생긴 바위도, 아름다운 계곡 풍경도 다 물이 있어야 빛을 발하기 마련이거늘, 물
이 별로 없으니 바위와 반석도 일개 돌덩어리 밖에는 되지 않는다. 심술쟁이 여름 제국이 이
멋드러진 계곡을 무더위란 폭격으로 그야말로 쑥대밭을 만든 것이다.

노원골 기점에서 8~9분 정도 오르면 노원골약수터가 모습을 비춘다. 한때 수락산에서 잘나가
던 약수터였으나 약수터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후, 완전 죽은 샘터
가 되었다. 물이 마지막으로 용솟음친지 꽤 되었는지 물기 조차 더듬기가 어렵다. 상계1동 시
절에 이곳 물도 참 많이 마셨는데, 이렇게 맥없이 끊기고 말았다.


▲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
이곳을 오가던 사람들이 소망을 넣으며 하나, 둘 쌓은 돌무더기가 어느덧
큰 돌탑으로 성장했다. 소박한 중생들의 소망을 먹고 자란 돌탑이라
그 모습 또한 소박하기 그지 없다.
 

노원골약수터에서 남쪽 산길을 오르면 노원골 남쪽 능선과 수락산보루로 이어진다. 경사는 그
리 각박하지는 않은데, 그 길을 1분 오르면 왼쪽(동쪽)으로 빠지는 샛길이 있다. 그 길로 접
어들면 바로 조그만 샘터가 하나 있었다. 한때 나의 즐겨찾기 약수터였으나 노원골약수터처럼
숨통이 끊어져 참 애석하기 그지 없다.
인간의 탐욕과 개발의 칼질이 춤추는 속세의 악한 기운이 어느덧 이곳까지 구렁이 담 넘듯 들
어와 수락산을 위협하고 있던 것이다.

여기서 조금 올라가면 운동 시설을 갖춘 약수터가 나오고, 길은 좀 각박해진다. 하지만 그만
큼 능선으로 가는 길도 빨라, 상계1동 시절에 이 산길을 자주 오르곤 했다. 잠깐의 고통을 감
내하면 완만한 능선길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드디어 노원골 남
쪽 능선에 이르고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귀임봉은 동쪽으로 가면 되고, 수락산보루
는 서쪽으로 서서히 내려가면 된다.


▲  노원골약수터 남쪽 산길에서 바라본 수락산 산줄기
가운데 왼쪽 봉우리가 수락산 정상이다. 같은 수락산이지만 노원골은
수락산 정상과 거리가 제법 멀다.

▲  수락산보루(堡壘)터 - 사적 455호

노원골 남쪽 능선이 귀임봉을 거쳐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상계동 아파트단지를 바로 앞에 두고
마지막 용솟음을 치는 봉우리에 고구려(高句麗)가 남긴 작은 점, 수락산보루가 살짝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수락산에서 가장 서남쪽이자 시내와 가장 가까운 봉우리로 수락산 영역에서 가장 전방
에 자리해 있다. 높이는 192.5m로 수락산의 제일 막내 봉우리이지만 수락산 산줄기와 이어진
동북쪽과 북쪽을 제외하면 모두 평지라 조망이 썩 일품이다. 그래서 봉우리에 올라서면 남쪽
과 동남쪽으로 불암산(佛巖山)과 노원구 일대, 멀리 중랑구와 봉화산(烽火山)이 시야에 들어
오고, 서쪽으로 옛 마들평야를 회색빛으로 물들인 상계동(上溪洞) 아파트단지와 도봉구, 강북
구, 북한산(삼각산), 도봉산이 시야에 잡힌다.
이처럼 위치가 휼륭하니 옛 사람들이 그냥 둘리는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거의 전쟁을 잊고
살지만 옛날, 특히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에는 전쟁이 빈번했다. 그때는 이런 봉우리가 천금
보다 비싼 법이라 일찍이 고구려는 이곳에 보루를 심어 서울 지역을 지켰다.

만주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서울 강북을 점유한 것은 고구려의 위대한 정복군주인 광개토태왕(
廣開土太王, 재위 392~413) 시절이다. 그는 재위 초반에 백제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서울 강
북과 경기도 이북을 점령했는데, 백제(百濟) 또한 산동반도(山東半島)를 비롯한 중원대륙의
넓은 해안 지역과 왜열도(倭列島)를 점유한 무시못할 나라라 더 이상 남하를 못하고 한강을
두고 대치했다. 대신 말발굽을 서쪽과 북쪽, 동쪽으로 돌려 신나게 영토 확장을 벌였다.

광개토태왕의 뒤를 이은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보호국인 북연(北燕)을 완전히
접수하고 라이벌인 북위(北魏)를 위협하며 황하 유역과 내몽골 지역인 지두우(地豆于)까지 영
역을 넓혔다. 그리고 숙적인 백제를 공격하고자 아차산성(阿且山城) 주변에 보루를 주렁주렁
닦고 바로 한강 너머로 보이는 백제의 국도(國都), 한산<漢山, 위례성(慰禮城) 서울 송파/강
동 지역>을 수시로 염탐하며 때를 찾다가, 드디어 475년 한강을 건너 한산을 점령, 백제 개로
왕(蓋鹵王)을 처단하고 한산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리고 경기 남부와 충북, 경북 포항(浦項
)까지 거침없이 내달렸다.


▲  봉긋 솟은 봉우리에 자리한 수락산보루

서울과 한강 유역을 장악한 고구려는 이 지역을 다스리고 백제와 신라(新羅)의 공격에 대비하
고자 전략적 요충지인 서울과 경기 북부에 많은 성과 보루를 구축하거나 백제가 쓰던 것을 수
리하여 사용했다. 여기서 보루란 성보다 작은 요새로 돌과 목책으로 구축했는데, 작은 것은
수십 명, 큰 것은 수백 명이 주둔하며 산성(山城) 못지 않은 시설을 갖추기도 했다.

보루는 주로 서울 동쪽 산줄기에 주렁주렁 달렸는데, 한강과 가까운 구의동 홍련봉(紅蓮峰)을
시작으로 아차산과 용마산(龍馬山), 망우산(忘憂山), 봉화산 산줄기에 크고 작은 보루를 닦아
아차산성(阿且山城)을 보조했다. 그리고 수락산에도 보루를 설치해 북쪽(사패산)과 남쪽 아차
산을 연결했다. 수락산보루에서 남쪽을 보면 봉화산이, 서북쪽으로 사패산을 품은 도봉산이
바라보여 이곳에 보루를 둔 고구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북쪽으로 사패산(賜牌山), 의정부 천보산(天寶山), 양주 불곡산(佛谷山), 도락산(道樂
山), 독바위(양주시 옥정동)에 보루를 설치했는데, 아차산부터 천보산까지는 중랑천과 3번 국
도를 쭉 따라가고 있어 이들이 당시 주요 교통로였음을 귀뜀해준다. 양주 이북은 보루는 거의
없고, 연천 호로고루(瓠蘆古壘)와 은대리성, 당포성, 포천 반월성(半月城) 등의 온갖 성곽을
지어 경계망을 촘촘히 했다.

허나 그렇게 강성했던 고구려는 6세기 이후, 백제와 신라, 중원대륙의 여러 나라, 돌궐(突厥)
등의 도전을 받게 되면서 많은 땅을 잃고 만다. 551년 경에는 백제와 신라에 의해 한강 유역
을 상실하게 되었고, 아차산성까지 신라에 떨어지면서 결국 경기 북부로 물러나게 된다. 백제
의 뒷통수까지 치며 서울 지역을 장악한 신라는 고구려 보루 상당수를 내버렸고, 불곡산보루
등 일부만 수리해서 쓴 것으로 보이나 끝내는 모두 버려지게 된다.
아무리 인간이 만든 대단한 건축물이라 해도 사람의 손때가 식은 것은 그리 오래 못간다. 결
국 세월의 장대한 흐름과 대자연의 태클 앞에 모래성처럼 녹아내리고 말았다.


▲  대머리처럼 허전한 수락산보루터 (그 너머로 귀임봉이 보인다)

수락산보루는 장수태왕 시절인 5세기 중/후반에서 6세기 초에 구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보루
가 둥지를 튼 봉우리 정상부는 평탄하며, 북쪽과 동서쪽은 조금 급경사를 이루고 있고, 남쪽
은 완만한 경사이다.
이 보루는 상계동에 있다고 해서 상계동보루라 불리기도 했는데, 요즘은 수락산보루로 널리
불린다. 이곳은 6세기 중반 이후 버려져 터만 남아오다가 왜정(倭政) 때 발견되었으며, 왜정
이 1942년에 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상계동 성터가 2개소로 나와있어 이곳이 그중 하
나로 여겨진다.

보루는 봉우리 정상부에서 3~4m 아래로 빙돌아가며 돌을 쌓았는데, 전체 둘레는 약 150m 정도
이며, 북쪽 부분이 약간 찌그러진 타원형이다. 그리고 집수시설로 보이는 함몰 부분이 2곳이
있다.
보루의 밑도리만 간신히 남아 흙에 묻히고 잡초와 섞여졌으며, 보루의 존재가 잊혀진 채, 오
랜 세월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히면서 석축은 흩어지거나 가루가 되었다. 심지어 정상부에 체
육시설까지 들어서면서 간신히 남은 보루의 흔적마저 숨기가 바빴다.
그러다가 1990년대 말 이후, 아차산과 용마산, 망우산에서 많은 보루가 발견되었고, 봉화산과
수락산, 사패산, 불곡산 등 땅속에 잠자던 보루들이 대거 밖으로 나오면서 수락산보루도 다시
금 빛을 보게 되었다. 게다가 고구려앓이가 전국적인 유행을 타면서 아차산성과 아차산~용마
산 보루는 고구려의 장대한 유적이자 남한의 대표 고구려 흔적으로 단단히 덕을 보게 되었다.

수락산보루를 발굴조사하면서 많은 고구려 토기와 성돌, 보루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조사가
끝나자 이들을 모두 흙으로 덮고 그 위에 나무와 풀을 심어 가려놓았다.


▲  서쪽에서 바라본 수락산보루터

그렇다면 보루의 왕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워낙 단단히 녹아내려 그 모습을 상상하기는 좀
무리가 있지만 근래 복원된 아차산4보루를 참고로 하여 그 모습을 크게 축소하면 대충 그림은
그려질 것이다. 봉우리가 작고 보루의 둘레도 고작 150m 내외라고 하니 그냥 이 땅에 흔한 봉
수대 규모 정도로 보면 될 듯 싶다. 거기에 군사들이 머물 공간과 무기 창고, 보루를 보호할
목책 정도 갖추고 있었을 것이며, 규모가 작기 때문에 50명 내외가 머물며 수비한 것으로 여
겨진다.

보루가 우뚝 서있던 봉우리 정상은 풀만 좀 돋아 있다. 거기에 누런 흙바닥마저 황량히 드러
나고 있어 대머리처럼 허전하기까지 하다. 그 주변은 여름 제국의 기운을 먹고 자란 수풀과
들꽃이 짙게 우거져 고구려의 흔적을 가리고 있어 안내문이 아니면 이곳이 정녕 보루가 있던
곳인지 조차 햇갈린다. 그만큼 자연에 쏙 동화되어 버린 것이다.


▲  수풀로 가득한 수락산보루터 남쪽
숲 너머로 상계동과 노원구 지역, 봉화산이 바라보인다


수락산보루는 2004년 10월에 아차산과 용마산, 망우산 보루와 더불어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
란 이름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 묶음에 들어간 보루는 총 17기인데, 수락산은 아차산과
거리가 제법 있음에도 그 묶음에 넣어버렸다. 차라리 이곳은 별도로 사적으로 지정하거나 서
울 지방기념물로 삼아 관리하는 것이 좋을 듯 싶은데, 굳이 먼 거리를 무릅쓰고 한 덩어리로
모은 것이 궁금하다. 만주와 요동(遼東), 북한을 제외한 이 땅에 흔치 않은 고구려 유적이니
너무 짜게 굴지 말고 후하게 등급을 매겨 관리했으면 좋겠다.


▲  수락산보루터에서 바라본 귀임봉과 수락산 산줄기

▲  수락산보루터에서 바라본 불암산(507m)의 위엄

수락산보루를 지닌 봉우리의 이름은 아직 없다. 보루터가 있으니 편하게 보루봉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봉우리지만 그 옛날 고구려가 남긴 한 줄기 점 때문에 비록
아차산만큼은 아니더라도 조촐하게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아직 이름을 지니지 못한 봉우리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우리의 자랑스런 고구려
가 백제를 뚫고 이곳을 차지해 보루를 씌우고 남방을 경영했던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니더냐~!
내가 서식하는 근처에 비록 완전하지는 못해도 이런 고구려 유적이 있다는 것이 참 반갑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산 105-1


 

♠  수락산 서울둘레길과 동막골

▲  수락산보루에서 온곡초교로 내려가는 숲길

수락산보루와 이렇게 첫 인연을 짓고 온곡초교 방면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은 계단이 닦
여져 있으나 경사가 속세를 닮은 듯, 조금 가파르다. 허나 소나무가 하늘과 속세(俗世)를 가
릴 정도로 삼삼하게 우거져 솔내음의 향도 진하며, 그늘의 깊이도 크다. 숲 너머로 보람아파
트를 비롯한 상계동의 회색빛 아파트들이 가까이 바라보여 도심 속 산길을 거니는 기분을 진
하게 선사하는데, 산길 중간에 그 유명한 서울둘레길과 만난다.

서울둘레길은 서울시가 야심차게 닦은 둘레길로 서울 주위를 1바퀴 도는 길이다. 총 8개의 코
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거리는 157km에 이르는데, 그 1코스가 도봉산역에서 시작해 수락산
과 불암산 허리를 지나 화랑대역에서 끝을 맺는 길로 거리는 14.3km이다. 2개의 산을 들락거
려야되서 서울시에서는 난이도를 상급으로 책정해 사람들을 괜히 긴장을 타게 만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섭거나 걱정할 수준은 절대 아니다. 다만 산 구간이 길어서 상급으로 책정된
것이다. 길도 잘 닦여져 있고,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나 거닐 수 있는 대중적인 둘레길이니
너무 겁은 먹지 말자~!
또한 도봉산역 동쪽인 창포원 관리사무소 앞과 불암산 우회코스 갈림길, 그리고 화랑대역(6호
선) 4번 출구 앞 공원에 서울둘레길 스탬프가 있으니 완주를 하거나 그곳을 지나가면 기념 도
장을 찍고 가기 바란다.


▲  잘 닦여진 수락산 서울둘레길 (수락산보루 부근)

수락산보루에서 동막골 도선사까지는 서울둘레길을 타기로 했다. 귀임봉과 학림사(鶴林寺)를
경유해서 가는 것이 조금은 빠르겠지만, 수락산 허리에 깔아놓은 서울둘레길 1코스도 엄연한
미답처이므로 미답처를 하나라도 더 지울 겸, 느긋한 둘레길을 이용했다.
수락산보루 주변과 상계3동 일부 구간은 끊긴 길을 잇고자 새로 길을 뚫거나 나무로 길을 내
었고, 시내가 잘 보이는 곳에는 조망대를 설치하여 두 눈까지 호강을 시켜준다. 게다가 숲도
짙어 시원한 산바람이 적당히 땀까지 털어준다.


▲  수락산 서울둘레길 (학림사 부근)

▲  석천(石泉)약수터
학림사 동남쪽 계곡에 묻힌 석천약수는 바위 밑에서 물이 나오는 샘터이다.
하여 이름도 석천이다. 아직은 적합 판정을 유지하고 있어 마음껏
마셔도 되며, 졸고 있는 컵을 깨워 실타래처럼 답답하게 나오는
샘물을 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구멍이 뻥뚫린 듯 시원해진다.

▲  석천약수터 부근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노원구 지역

▲  수락산 서울둘레길 동막골 서쪽 구간
서울 시내가 바로 지척임에도 마치 지방의 깊은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  수락산 동막골

수락산 남쪽에 자리한 동막골은 수락산의 주요 골짜기이다. 이곳 동막골은 골짜기가 깊고 숲
이 무성해 일찌감치 유원지로 개발이 되었다. 그래서 동막골유원지라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수락산 보호를 위해 행락 시설은 거의 철거되고 나무를 짙게 깔았으며, 골짜기에 도선사와 송
암사, 도안사 등 많은 절이 둥지를 틀어 계곡 중류까지 포장길이 닦여져 있다.

동막골은 경관이 아름답고 자연 환경이 잘 남아있는 현장으로 2010년에 노원구청이 저수량 4
만8천톤 규모의 저수지를 계곡에 만들려고 생난리를 치다가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된 바
가 있다. 서울시도 그 사업에 타당성이 없다고 노원구에 공문을 보낸 터라 다행히 전시행정의
부질없는 삽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2014년에 서울시 보건환경연구원에서 동막골과 북악산(백악산) 삼청동천(삼청공원), 북
악산 백사실계곡(백사골), 인왕산 백운동천(白雲洞天)의 생태계 조사를 벌였는데, 모두 1급수
를 유지하고 있음이 나타났다.
특히 동막골에서는 북방산개구리와 좀주름다슬기 등 도시에서는 만나기 힘든 수중 동물이 크
게 무리 지어 살고 있었다. 비록 이곳이 수락산의 주요 길목이라 산꾼과 나들이 수요가 높아
때는 많이 벗겨지긴 했으나 아직 청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  동막골 도선사입구

▲  도선사를 알리는 표석

동막골에서 울창한 숲길을 따라 윗쪽으로 가면 도선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한다. 여기
서 그의 안내를 받아 동쪽 길로 가면 얼마 안가 '수락산 유아숲 체험장'이 모습을 비춘다.


▲  수락산 유아숲 체험장

수락산 유아숲은 서울시가 동막골에 조성한 이름 그대로 어린이를 위한 숲체험장이다. 유아를
둔 가족과 유치원, 어린이집의 소풍 장소로 수풀과 꽃을 심은 초화원을 비롯해 올챙이숲속교
실, 모험놀이마당, 교구놀이마당, 모래놀이터, 계곡물놀이마당, 숲속휴게소 등을 갖추고 있으
며, 먹거리를 가져와 섭취하는 것은 괜찮으나 밥 짓는 등의 취사행위는 절대로 안된다.
유아숲 체험장도 좋지만 동막골이 골도 깊고 숲도 짙으므로 넓게 범위를 잡아 산림욕장을 닦
는 것은 어떨까 싶다. 마침 서울에는 호암산(虎巖山) 외에는 마땅한 산림욕장도 없고 자연휴
양림도 없다.
자연휴양림은 서울 땅에서는 좀 무리가 있고 숲이 넓은 이런 곳에 제대로 된 산림욕장을 닦고
자연보호를 더 엄격히 하여 도심 속의 신선한 청량제로 가꾸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귀여운 개구리가 인상적인 수락산 유아숲 체험장 안내도

▲  유아의 꿈을 먹고 자란 들꽃들의
조그만 세상, 초화원

▲  유아숲 놀이터와 쉼터


▲  동막골계곡에 자리한 계곡물놀이마당 ▼


▲  도선사로 인도하는 숲길


 

♠  동막골에 둥지를 튼 조촐한 산사, 오래된 석불을 후광으로
삼아 절을 꾸리는 수락산 도선사(導善寺)

수락산 동막골에는 수락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절들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
역사가 짧은 절집으로 그중 도선사가 동막골 상류 구석에 살짝 둥지를 틀었다.

도선사하면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도선사(道詵寺)를 떠올릴 것이다. 도선대사의
이름을 딴 북한산 도선사는 서울 뿐 아니라 천하에도 널리 알려진 오래된 절이기 때문이다.
허나 수락산 도선사는 이름은 같지만 한자는 완전 다르다. 이름을 풀이하면 선함으로 인도하
는 뜻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가 짧고 인지도도 매우 적다.
내가 현대 사찰인 도선사를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석불을 보기 위함이다. 솔
직히 그거 때문에 온 거지 그것도 없었다면 아마 영원히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도선사에 오래된 석불이 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문화유산을 간직한 20세기 절들 상당수가 속
세에 배타적인 기질(외지인 경계, 사진 촬영 금지 등)이 짙어 사전에 어떤 곳인지 인터넷에서
살펴보았다. 아주 적게나마 도선사 관련 데이터들이 나왔는데, 절을 찾은 이들이 담은 석불
사진도 제법 나왔다. 그래서 속세에 그리 경계적인 곳은 아니라 판단되어 출동한 것이다.

같은 동막골에 있음에도 산꾼과 피서객으로 분주한 유아숲 체험장과 동막골 산길과 달리 이곳
은 꽤 한적하다. 수락산이 부는 산바람 소리가 그야말로 전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소리를
깨고 혜성처럼 나타난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도선사에서 기르는 멍멍이들이다. 덩치도 쥐방
울만한 것들이 나를 보자 세상이 꺼지도록 짖어대는데, 그 소리가 귀신마저 도망치게 할 정도
로 매서웠다.
내가 도둑질하러 온 것도 아니고, 영 좋지 않은 사람도 아니건만, 단지 저들에게 익숙치 않다
는 이유로 단순한 저것들의 견제를 받으니 참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그래서 주차장 옆에 보이는 종무소(宗務所)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으니 아무도 없어 간신히 개
들의 견제를 뚫으며 계곡(동막골) 다리를 건너 경내로 진입했다. 다행히 주지승이 나와 그들
을 제지하니 그것들도 이내 멍멍~ 개소리를 멈추고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경계를 푼다. 승려는
절에 잘 왔다면서 쭉 둘러보라고 하길래, 석불을 보러 왔다고 솔직히 털어놓으니 마음껏 사진
에 담아가라고 그런다. 그런데로 인심도 있는 셈이다. 이렇게라도 해야 도선사의 인지도가 조
금은 올라가는 것을 그는 안 것이다.


▲  도선사 요사(寮舍)와 2층으로 이루어진 뒷쪽 법당

도선사는 이 땅에 흔치 않은 조동종(曹洞宗) 소속으로 1920년경 청운대선사(靑雲大禪師)가 여
기서 수행을 하다가 세운 절이다. 이곳에는 원래 조그만 석굴이 있었다고 하며, 많은 승려와
사람들이 찾아와 불도를 닦거나 산신에게 기도를 올린 곳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도선사는 산
신기도도량을 칭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는 볼품 없는 모습이었으나 현주지인 대은(大隱)이 30년간 꾸준히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모습으로 불렸으며, 2005년에는 천하에서 가장 큰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을 봉안
하여 크게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경내에는 2층 법당을 비롯해 산신각과 범종각, 천고루, 요사, 종무소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
며, 2층 대웅전에는 절의 꿀단지이자 유일한 문화유산인 석3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어 절의 듬
직한 후광 역할을 한다. 이제 100년 남짓 된 현대 사찰이라 딱히 내세울 것도 없고, 인근 학
림사와 흥국사(興國寺), 동막골에 묻힌 여러 절 등 쟁쟁한 절이 많다보니 이런 오래된 불상이
라도 하나 옆구리에 끼고 있어야 그나마 경쟁이 된다. 비록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이곳의 새
로운 명물이라고 하나 석3존불상에 비하면 아직 한참이나 경력이 짧다.

보이는 것이 그야말로 하늘과 숲이 전부일 정도로 첩첩한 산주름 속에 깊숙히 묻혀있으며, 찾
는 이도 별로 없어 고적한 산사의 멋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도선사 윗쪽 계곡과 주
변 숲은 자연생태가 매우 양호하여 서울시에서 2008년 12월에 '수락산 야생동물,식물 보호구
역'으로 지정했다. (서울시 고시 제2009-496호) 하여 절 윗쪽 숲과 계곡은 출입이 통제되었고
그 덕에 도선사는 청정한 환경 속에서 법등(法燈)을 유지하고 있다.

▲  다양한 손짓의 관세음보살상 3자매

▲  큰 북과 운판을 지닌 천고각(天鼓閣)

▲  커다란 석축 위에 세워진 6각형 범종각
석축 밑도리에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이 새겨져 있다.

▲  인조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신각(山神閣)
어엿하게 기와집으로 만들지 않고 특이하게
인조 암벽으로 산신각을 꾸몄다.


▲  2005년에 조성된 청동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天眼觀世音菩薩)상

경내 남쪽에는 도선사의 새로운 명물로 등극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자리해 있다. 이름도 허
벌나게 긴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란 무려 1,000개의 손과 눈을 지닌 관세음보살로 이 땅의 천
수천안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그만큼 도선사에서 모든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존재
인 것이다.
인자함이 깃든 관세음보살의 큰 얼굴 위에는 그의 조그만 얼굴이 가득 달려있고, 그 위에 부
처의 작은 머리가 있다. 이들 얼굴은 1,000개의 눈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리고 보살상 뒷쪽에
는 손과 팔이 수두룩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중 두 손이 지팡이와 극으로 보이는 무기를 들
고 있다. 그를 반짝반짝 빛내주는 광배(光背)는 금색과 검은색이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는데,
광배 아랫쪽은 마치 칼로 싹둑 자른 듯, 생략되어 있고, 윗쪽은 봉긋 솟아있어 보주형을 이룬
다. 그가 앉은 연꽃 대좌(臺座)는 검은색을 띄고 있으며, 그 밑에 돌로 만든 큰 기단을 두고
팔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


▲  꽃을 든 남자의 새로운 버전? 꽃을 든 산신상 (산신각 내부)

붉은 옷을 입은 수염 지긋한 산신이 포근한 표정을 지으며, 왼손에 꽃을 들고 호랑이 등에 앉
아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산신상과 산신도(산신탱)을 봐왔지만 저런 색다른 산신은 처음이다.
절을 찾은 여심(女心)을 위한 도선사의 배려이자 마켓팅은 아닐까? 뭔가 크게 개성적이고 독
특해야 눈에 띄는 법이니 말이다.

 ◀  지붕만 한옥, 나머지는 양옥인 2층 법당
요사 뒷쪽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법당은 경내
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1층은 극락전(極樂殿,
큰법당) 및 영가(靈駕)들을 위한 납골당(納骨
堂)으로 쓰이고 있는데, 요즘 많은 절에서 납
골당을 운영하여 수익을 내고 있다.

2층은 대웅전(大雄殿)으로 석삼존불상과 금동석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원래는 석3존불
이 대웅전의 중심이었으나 새로 금동석가불을 만들면서 조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기분이다. 그
래도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석3존불이 보이니 금동석가불보다 가장 먼저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


  도선사 석삼존불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1호

대웅전 서쪽 불단에 자리한 석3존불상은 도선사의 듬직한 후광이자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도
선사에서는 그들을 '천년의 미소'라 하여 격하게 띄워주고 있는데, 고된 세월에 지쳐 얼마나
울었을까? 얼굴이 거의 지워져 미소 여부는 알 수 없다.

이들은 돌로 다진 석불(石佛)로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속사정이야 알 수는 없지
만 어찌어찌하여 이곳까지 흘러들어와 도선사의 보물로 묻어가고 있다. 그들이 앉은 복련(伏
蓮)대좌는 도선사에서 마련한 것이고, 그들 뒤로 돌로 다져진 후불탱이 병풍처럼 자리하고 있
으며, 그 주변을 인조 암벽으로 둘러 석굴 분위기를 자아낸다.

  석3존불상의 본존불(가운데 석불)

  석3존불상의 향우측 협시상

석3존불 중앙에 자리한 석불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는데,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
頂相)이 두툼히 솟아있고, 동그란 얼굴은 마멸이 심해 눈썹과 코 정도만 확인이 가능하다. 목
은 매우 두꺼우며, 옷은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식이고, 어깨와 무릎에는 넓은 띠
주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아랫도리는 부처상의 흔한 앉은 자세인 결가부좌(結跏趺坐)로 보
이나 너무 축약되었다.

가운데 석불 왼쪽(향우측 협시상)에 자리한 보살상은 머리에 원통형 보관(寶冠)을 쓰고 두 손
은 다리 위에 대고 화염보주(火炎寶柱) 같은 물건을 들고 있으며, 양 어깨 위에는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눈과 코, 눈썹 정도 확인이 가능하나 너무 지워진 상태이며, 허리가
너무 짧고 아랫도리가 낮아, 마치 윗도리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석3존불상의 향좌측 협시상

  2층 대웅전 내부

오른쪽 보살상(향좌측 협시상)은 머리가 날라가 없어진 것을 석고로 대충 만들어 붙였다. 그
래서 옆 석불과 달리 눈과 코, 입이 그런데로 달려있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고, 몸통 정
면은 통견식으로 법의(法衣)를 입은 듯 하며, 양쪽 어깨에는 옷주름이 있으나 뒷면에는 편단
우견식으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두 손은 무릎 위에 대소 선정인(禪定印) 비슷
한 제스쳐를 취하고 있다.

이들 석불은 너무 간결하게 표현되어 덩치도 매우 작으며, 얼굴도 거의 지워지고 훼손도 심하
다. 게다가 신체 비례도 너무 떨어져 근래 대충 만든 석불이나 장난감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
나 그들은 전체적으로 양감이 있고 안정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어 고려 석불의 전통을 계승
한 고려 말~조선 초기 석불로 보고 있다. 특히 이 시대에 조성된 석불이 별로 없어 2009년 3
월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대웅전 금동석가3존불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이들은 근래 조성된 것
으로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이 어엿하게 3존불을 이루고 있다.
석3존불보다 더 화려하고 덩치도 있지만 고색
을 밝히는 나의 두 눈에는 오로지 석불만 보일
뿐, 저들에게 간 시선의 양은 별로 되지 않는
다.


  도선사를 뒤로하며 (사진을 클릭하면 도선사 홈페이지가 번쩍 뜸)

도선사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가 다 되어간다. 이날 수락산에서 목적한 곳과 모두 인연을 지
었으니 더 이상 욕심 부릴 것도, 미련 둘 것도 없다. 이것으로 충분히 보람찬 하루를 보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한여름에 벌인 수락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그렇다고 수락산과의 인연이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산153-1 (덕릉로145길 103 ☎ 02-936-0419)
* 도선사 홈페이지는 윗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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