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애사'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0.09.15 노산군(단종)이 유배살이를 했던 단종애사의 애틋한 현장, 영월 청령포 (청령포 관음송)
  2. 2018.06.12 단종애사의 슬픈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고즈넉한 비구니 절집, 낙산 숭인동 청룡사 ~~~ (동망봉) 2
  3. 2017.11.07 대학로의 포근한 뒷동산이자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 산책 ~~ (한양도성, 낙산공원, 자주동천, 삼군부총무당)

노산군(단종)이 유배살이를 했던 단종애사의 애틋한 현장, 영월 청령포 (청령포 관음송)

 


' 단종애사의 현장, 영월 청령포 '

▲  서강 너머에서 바라본 청령포


 

 

봄이 천하만물의 격한 지지를 받으며 겨울 토벌에 여념이 없던 3월의 끝 무렵에 친한 후배
와 강원도 내륙 지역을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홍천(洪川)의 여러 벽지 명소를 찍고 평창(平昌)을 거쳐 영월(
寧越) 땅으로 들어섰다. 이날 최종 목적지는 충북 단양(丹陽)으로 갈 길은 아직 멀지만 일
몰까지는 아직 여유가 넘치고 오랜만에 들어온 곳이라 그냥 지나치기는 섭하다. 하여 읍내
직전에 있는 선돌을 보려고 했으나 실수로 놓쳐버려 이미 2번이나 인연을 지었던 청령포를
복습하기로 했다.

청령포는 영월읍내와 무척 가까운 곳으로 주차장에 이르니 16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주차장
은 거의 만땅이다. 간신히 자리를 잡아 차량을 잠재우고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해 유료
(有料)의 땅, 청령포로 들어선다.


 

♠  하늘이 빚은 천연 감옥, 청령포(淸泠浦, 명승 50호)

▲  청령포 나룻터와 서강 너머로 보이는 청령포

입장료를 내고 서강(西江) 강변으로 내려가면 청령포 나룻터(선착장)가 나온다. 청령포는 창
살도 필요 없는 궁벽한 곳이라 섬이 아닌 육지임에도 무조건 배를 타고 건너야 된다. 나룻배
는 2척이 다니고 있는데, 평일은 보통 1척, 주말과 휴일은 2척을 굴리며, 정해진 출발 시간이
없이 사람이 어느 정도 차면 시동을 걸고 느릿느릿 청령포로 이동한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 배를 돌리기가 무섭게 맞은편 강변에 닿는다. 소요시간은 길게 늘려봐
야 3~4분 정도로 배멀미가 나올 틈도 없으며, 수면이 잔잔하고 중간 부분을 제외하면 수심도
얕다. 허나 온갖 어이없는 재해와 재난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라 너무 방
심은 하지 말자.


▲  청령포와 속세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 청령포 나룻배

▲  나룻배에서 바라본 청령포 나룻터(선착장)

청령포에 대한 설래임을 간직한 나그네를 태운 배는 180도 돌리기가 무섭게 청령포 강변에 닿
는다. 청령포 강변은 인공(人工)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산 강변으로 돌이 무지 많으며, 배를
타고 내리는 시설도 따로 없어 그냥 강변 모래벌에서 타거나 내리면 된다.


▲  별 꾸밈없이 자연 그대로 놓아둔 청령포 강변

▲  소나무숲에 묻힌 청령포
청령포의 핵심이자 상징인 단종 유배처가 저 송림에 묻혀있다.


청령포 강변에는 돌이 무지 많다. 그런 돌밭을 지나면 소나무숲이 나오는데, 그 숲속에 단종
애사의 쓰라린 현장, 단종 유배처가 깃들여져 있다.
강변에는 탐방로가 따로 닦여져 있지 않으며, 울퉁불퉁한 돌밭을 알아서 통과해 소나무숲에
안기도록 되어있다. 대신 소나무숲에는 단종어소와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까지 나무데크 탐
방로를 닦아두었다.

청령포는 유독 소나무가 많다. 이곳이 솔내음이 그윽한 공간이 된 것은 단종이 유배된 인연으
로 오랫동안 금표(禁標) 구역에 묶였기 때문이다. 금표란 왕릉이나 왕족 묘역, 제왕(帝王)이
내린 땅, 나무 보호와 국가 시설 보호를 위한 금지된 땅으로 이곳에는 허가된 사람 외에는 함
부로 출입할 수 없었고, 나무 벌채도 일절 금지된다.

청령포 소나무숲은 이곳에서 가장 늙은 나무인 관음송을 시작으로 점차 숲을 이룬 것으로 여
겨지며 수십 년에서 100~400년 묵은 소나무들이 삼삼하게 우거져 하늘을 가리고 단종의 유배
처를 소중하게 품고 있다. 그럼 여기서 청령포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소나무숲에 감싸인 단종어소

청령포는 단종애사(哀史)의 주요 현장이자 장릉(莊陵)과 더불어 영월에 왔다면 꼭 들려야 되
는 영월의 대표 명소이다. 이곳이 크게 유명세를 탄 것은 소년왕 단종의 유배지란 점과 하늘
의 감옥 같은 척박한 지형, 그리고 270도나 크게 굽이쳐 흐르는 서강의 환상적인 모습 때문일
것이다.
서강은 형제인 동강(東江)과 속히 합세해 한강을 따라 보다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만 칼처
럼 솟은 산의 낙원인 강원도의 지형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장대한 세월 동안 오로지 굴곡 노
선 직선화를 위해 청령포 뒷쪽을 열심히 쪼아댔지만 지형이 단단하여 아직까지 성과가 없다.
하지만 직선화를 향한 굳은 집념은 여전하여 지금도 직선화 프로젝트를 놓지 않고 있다.

청령포의 주인공인 단종은 조선 6대 군주로 1441년 7월 23일,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
后) 권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휘(諱, 제왕의 이름)는 홍위(弘暐)로 1448년에 왕세손(王
世孫)에 책봉되었으며,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윤상(尹祥)에게 학문을 배웠다.
1450년 세종(世宗)이 승하하고 그의 첫 아들인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단종은 자연히 왕세자(
王世子)가 되었으며, 문종이 늘 병을 달고 살다가 재위 2년 만인 1452년 5월 18일, 승하하자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철부지 어린 왕자가 왕위에 오르니 왕을 둘러싼 권력 구도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초반
에는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은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이 단종을 보필하며 주도
권을 잡았는데, 세종의 아들이자 문종의 아우 일부가 능력도 좋고 야망이 크니 은근히 위협이
되었다. 그중에서 안평대군(安平大君)은 문무(文武)가 뛰어나고 다재다능했는데, 김종서와 뜻
이 통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견제하며, 의정부(議政府) 중심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를 추진했다.
그들의 견제에 위기를 느낀 수양은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홍달손(弘達孫) 등을 수하에
두고 기회를 엿보다가 1453년 10월, 불시에 김종서 집을 습격해 김종서를 죽이고, 왕명을 빙
자해 신하들을 모두 소환해 황보인과 조극관(趙克寬) 등을 때려죽였다. 이 사건이 그 이름 돋
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은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정권과 병권을 움켜쥐었고, 정인지(
鄭麟趾)와 한확(韓確) 등 자신의 측근을 정승에 앉혔다. 또한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해 왕의 이름으로 받기도 했다.
그렇게 수양의 위세가 강해지며 어린 왕 단종을 은근히 정신적으로 압박하자 의지할 데도 없
고 정신적 두려움에 염통이 쪼그라들던 단종은 결국 1455년 6일 11일, 큰숙부 수양에게 양위
의 뜻을 전하고 친히 대보(大寶)를 넘겼다. 이렇게 해서라도 숙부의 칼날을 피하고 목숨을 부
지하고자 함이었다. 하여 수양은 조선 제7대 군주인 세조(世祖)가 되었고, 단종은 상왕(上王)
으로 물러앉아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가만두질 않는다고 했던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잔뜩 반감
을 품은 박팽년(朴彭年)과 성삼문(成三問), 김문기(金文起) 등 많은 사대부(士大夫)들은 세조
와 그의 측근을 몰아내고 단종 복위를 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다가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이 오자 세조는 그들에게 연회를 베풀기로 했는데, 그때 칼
을 들고 제왕 뒤에 서서 호위하는 운검(雲劍)의 역할을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成勝)이 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세조를 처단하기로 한 것이다. 허나 뭔가 찜찜했던 세조는 운검을 세우지
않으면서 그 좋은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이후 적당한 기회는 오지 않았고, 단종 복위에 가담한 김질(金質)은 초조하다 못해 염통이 검
게 타들어가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밀고를 해버렸다. 이렇게 일어난 것이 그 유명한 사
육신(死六臣) 사건이다.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河緯地) 등의 단종 복위 추진에 뚜껑이 제대로 뒤집힌 세조는 그들을
고문하고 용산 새남터로 보내 사지를 절단 내어 죽였다. 그리고 단종은 사육신 등과 밀모를
했다고 여겨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유배처를 꼼꼼히 물색하다가 육지 속의 작은 섬과도
같은 이곳 청령포로 유배를 보낸 것이다.
하여 1457년 6월 22일 노산군으로 격하된 단종은 강제로 유배길에 올랐고 영도교(永渡橋, 청
계7가와 청계8가 사이)까지 따라온 부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와 단장의 이별을 나누었다.
이때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 어득해(魚得海)가 50명의 군사를 대동해 노산군을 호종했으
며, 영월까지는 6일이 걸려 6월 28일 청령포에 도착했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머물 기와집이 급하게 마련되었다. 그는 그 집에 머물며 책을 읽거나 노산
대에 올라 서울과 왕비를 그리워했으며, 관음송 가지에 걸터앉아 쉬기도 했다. 그렇게 하늘이
내린 자연산 감옥, 청령포에서 우울하게 생활하다가 그해 가을 홍수로 청령포 상당수가 물에
잠기게 되자 영월 객사(客舍)인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청령포 생활은 끝을 맺
는다.
허나 순흥(順興, 영주시 순흥면)으로 유배된 그의 또 다른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부
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된통 걸리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세조는 다
시 한번 뚜껑이 열리게 된다. '노산군을 저리 두면 계속 역모가 생길 것이다' 생각한 세조는
결국 후환을 제거하고자 조카에게 사약을 보내는 비정함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유시(酉時), 숙부가 보낸 쓰디쓴 사약을 들이키고 진한
피를 토하며 힘없이 쓰러지니 그때 그의 나이 불과 16세였다.

청령포는 북과 동, 남쪽 등 전체의 ¾이 서강에 감싸여 있고, 북쪽은 급하게 솟아나 낭떠러지
를 이룬다. 서쪽은 비록 땅과 붙어있긴 하나 육육봉(六六峰)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에 막혀
있어 어지간한 독종이 아닌 이상은 넘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다. 자연히 외부와 단절된 상태
로 고적하게 살아야 했으며, 첩첩한 산주름 속에 단단히 묻힌 외로운 곳이다보니 온갖 산짐승
들이 가득해 해가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을 정도였다.

그가 청령포에 있을 때,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거의 밤마다 몰래 찾아와 단종을 위로했
고, 생육신(生六臣)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원호(元昊)는 청령포와 가까운 제천시 송학면에 관
란정(觀瀾亭)을 짓고 매일같이 단종에게 진상할 음식과 서신을 표주박에 담아 서강에 띄워보
냈다. 그것을 청령포에 있던 단종이 받아보았고, 단종이 다시 떠내려보내면 이상하게도 강을
역류하여 관란정으로 갔다고 전한다.

때묻지 않은 강과 칼처럼 솟은 산, 삼삼하게 우거진 소나무, 거기에 역사까지 어우러진 아름
다운 명소로 수십~수백 년 묵은 소나무 덕에 4계절 내내 솔내음이 가득하며, 비록 단종에게
청령포는 지옥보다 더한 곳이겠지만 오늘날 나그네들에게는 잠시나마 정처 없는 마음을 내던
지고 싶은 아름다운 명소이다. 이런 곳에 오면 사진기도 흥분하여 작품들이 마구 나오며, 영
월의 대표 꿀단지이자 단종을 상징하는 명소로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

청령포 일대는 국가 명승 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영월10경 중 제2경으로 찬양을 받고 있다.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 68 (청령포로 133, ☎ 033-374-1317)


 

♠  청령포 둘러보기

▲  단종어소(端宗御所) 기와집

청령포 소나무숲에 들어서면 왼쪽(남쪽)에 돌담에 둘러싸인 단종어소가 있다. 이곳은 단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공간으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단종이 머물던 팔작지붕 기와집
이 있고, 동쪽에 궁녀와 시녀가 살던 초가 1동(행랑채)이 있다.
단종이 사라지자 화마(火魔)도 크게 뚜껑이 열렸는지 슬그머니 태워먹으면서 아련하게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00년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참고하여 그럴싸하게 재현했다.

기와집과 행랑채 초가에는 단종과 궁녀, 시녀, 아전을 재현한 밀납인형이 있으며, 가구와 책
장, 이불, 장독대 등을 갖다놓아 당시의 모습을 최대한 묻어나게 했다.


▲  방 3개, 부엌, 창고로 이루어진 5칸짜리 초가 행랑채
시녀와 궁녀들은 여기서 생활했는데, 한 방에 2명씩 6명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방 옆에는 부뚜막 연기가 슬쩍 피어오를 것 같은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음식물과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광)가 있다.

▲  초가 행랑채와 돌담, 그리고 삼삼하게 우거진 소나무숲

▲  깨끗하게 정리된 시녀의 작은 방

▲  속 빈 강정처럼 놓여진 장독대

▲  바느질하는 침모(針母)의 모습
단종을 위해 침침한 눈을 극복하며
옷 수선에 여념이 없다.

▲  부뚜막으로 이루어진 부엌
나이든 시녀가 단종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단종이 비록 강원도 산골로 쫓겨났지만 전직 제왕에다가 왕족이니 그의 생활공간은 관청 건물
못지 않은 규모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 바로 그의 공간인 것이다.

단종은 햇살이 잘들어오는 남쪽 방에 푸른 도포를 입고 책을 읽는 잘생긴 도련님처럼 재현되
었는데, 바로 옆방에는 어소를 관리하고 단종의 시중을 드는 아전이 바짝 엎드려 단종에게 인
사를 올리고 있고 그 곁에는 다기(茶器)를 머금은 조그만 상이 있다.


▲  기와집 내부, 단종의 방

▲  책을 보며 시름을 달래는 단종

▲  시녀가 생활하던 기와집 방


▲  단종이 지은 어제시(御製詩)
단종의 한과 상처 받은 어린 마음이 잘 나타나 있어 나그네의 옷깃을 잠시
여미게 한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해매니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물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

어소 기와집 옆에는 비석을 품은 1칸짜리 비각(碑閣)이 있다. 그 안에는 1763년에 영조(英祖)
의 명으로 세운 유지비가 있는데, 이는 터만 아련하게 남은 단종어소의 위치를 알리고자 세운
것으로 비석의 높이는 162cm이다.
하얀 피부의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웠는데, 그 앞면에
비석의 이름이 된 '단묘재본부시유지비'라 쓰여있고, 뒷면에 '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
秋 涕敬書令原營竪石 地名 淸泠浦'라 쓰여있어 조성 시기와 이곳 지명을 알려준다.
여기서 황명(皇明)은 조선이 쓸개까지 내주며 엄청나게 굽신거리고 떠받들던 명나라이고, 숭
정은 명나라 마지막 제왕인 의종(毅宗)의 연호로 숭정 무진은 1628년이다. 그때를 기준으로
계미(癸未)년이 3번이 지난 해의 가을에 세우니 그때가 1763년 가을이다. (조선의 군주와 위
정자, 선비 상당수는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명에 대한 아주 꼴사나운 사대주의를 일삼으며
명을 그리워하고 나라의 국력을 개판으로 만듬)
'涕敬書令原營竪石'은 원주감영에 영을 내려 슬픔과 공경으로 세웠다는 뜻이며, '지명 청령포
'는 말 그대로 이곳의 지명이 청령포임을 뜻한다.

오랫동안 홀로 단종어소터를 지키며 소나무 그늘에 있다가 2000년에 비석 주변에 어소가 복원
되면서 어소 뜨락에 있게 되었다. 물론 비석의 위치는 그대로이다.


▲  비각에 소중히 담긴 단묘재본부시유지비

▲  햇님도 맥을 못출 정도로 무성함을 자랑하는 청령포 소나무숲
아직 대낮임에도 숲속은 벌써부터 어두컴컴하다.

청령포 한복판에는 관음송이라 불리는 장대한
소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는 청령포 소
나무의 시조로 다른 소나무들보다 하늘과 더욱
맞닿아있어 그의 위치와 위엄을 실감케 한다.

관음송의 높이는 30m, 가슴높이 둘레 5.19m로
1.6m 높이에서 줄기가 2갈래로 갈린다. 다른
소나무에 비해 줄기 피부가 유난히 붉고 줄기
중간에 잔가지가 없이 매끈하게 자란 제법 아
름다운 소나무로 단종이 이 나무 줄기에 걸터
앉아 시름을 달랬다고 전한다.
지금이야 아주 큰 나무가 되어 오를 엄두도 솟
지 않지만 당시 관음송의 나이를 60~80년 정도
로 추정하고 있으니 줄기가 갈라지는 곳까지는
능히 올랐을 것이다.
나무의 나이는 약 600여 살로 보고 있으며, 그
의 이름은 관세음보살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고 해서
관(觀), 그의 슬픈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음(
音)을 붙여 관음송이라 했다고 한다. 이 이름
은 후대에 단종을 섬기던 영월 주민들이 지어
낸 것으로 보인다.

▲  청령포 관음송(觀音松)
- 천연기념물 349호

나라에 큰 일이 터질 때마다 나무의 피부가 검게 변해 나라의 변고를 알려주었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 어쩌면 단종의 혼이 깃든 나무로 여기고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  단종의 손때가 담긴 망향탑(望鄕塔)

관음송에서 북쪽 벼랑으로 가는 길이 2갈래 있다. 왼쪽으로 가면 망향탑, 오른쪽은 노산대로
북쪽 벼랑은 한 줄기로 이어져 있어 어느 곳을 먼저 오르던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서강이 크게 굽이쳐 흐르는 곳에 천연의 감옥인 청령포가 빚어져 있고 3면이 죄다 강에 막혀
있는데 그중 북쪽은 각박하게 벼랑이 형성되어 있어 나름 절경을 자아내며, 여기서 바라보는
경치 맛이 아주 일품이다. 물론 단종에게는 이 모든 것이 지옥처럼 보였겠지만 우리 같은 나
그네들에게는 하루 머물고 싶은 천연의 명소이다.

노산대와 육육봉 사이 벼랑 위에 돌로 쌓여진 조그만 돌탑이 있다. 세상에서는 그를 망향탑이
라 부르는데, 단종이 청령포 생활을 했을 때, 궁궐과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이곳에 오를 때마
다 여기저기 흩어진 잡석을 주워 쌓았다고 한다. 청령포에서 대략 1달 가량 머물렀고 딱히 할
것도 없는 처지이니 이곳을 찾는 횟수가 꽤 많았음을 망향탑이 보여준다. 돌탑을 이루는 돌
가운데, 묵은 때가 담긴 돌은 단종의 손길이 닿았던 것으로 보이며, 하얀 피부의 돌은 근래에
얹혀진 것이다. 현재는 문화유산 보호 철책을 둘러 탑을 보호하고 있다.

과연 단종이 직접 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청령포에 남긴 유일한 흔적으로 그의 착잡한
마음을 가늠케 한다.


▲  망향탑과 노산대(소나무가 우거진 벼랑), 그리고 서강

▲  망향탑 서쪽 막다른 곳

망향탑 서쪽은 길이 막혀있다. 아주 가늘게 육육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통행이 금지
되어 있고, 양쪽이 거의 벼랑이라 오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산길 북쪽은 서강이 오랜 세월
을 두고 깎은 거의 수직 각도의 벼랑이며, 남쪽은 수직 정도는 아니지만 각박하긴 마찬가지이
다.

이곳에 전설을 남긴 단종도 이 가느다란 산길을 보며 도망칠 생각이 굴뚝 같았을 것이다. 허
나 그게 녹록치 않음을 알고 있고, 군사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으며,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편하게 자란 그가 이런 산을 넘는 것도 무척이나 어렵다.


▲  망향탑에서 바라본 서강
단종의 구슬픈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서강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청령포 곁을 보듬으며 유유히 자신의 갈 길을 간다. 하긴 서강이 그의
사연을 굳이 알 필요가 없다.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부질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노산대(魯山臺)

▲  금표비에서 바라본 노산대(魯山臺)

망향탑 동쪽에 각박하게 생긴 층암절벽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 노산대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이곳은 단종이 저녁 노을이 질 때나 마음이 갑갑할 때 친히 올라 시름을 달래던 곳이라 전하
며, 그 연유로 노산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망향탑 못지 않게 각박한 벼랑 위에 자리해 있는데, 지금이야 탐방로가 잘 닦여져 있어 접근
하기가 쉽지만 탐방로가 없다면 결코 쉽게 오르지 못할 언덕이다. 관음송과 금표비 북쪽에 자
리하며, 여기서 바라보는 서강과 주변 풍경이 제법 일품이다.


▲  금표비와 관음송 주변 소나무숲

▲  청령포 금표비(禁標碑)

노산대를 내려와서 나룻터로 가다보면 소나무숲 그늘에 고색의 때가 잔뜩 묻어난 금표비를 만
나게 된다.
이 비석은 단종이 유배된 청령포에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나무 벌채를 금하고자 1726년에 세
운 것으로 앞면에는 한문으로 '청령포 금표'라 쓰여 있고, 뒤면에 '동서 300척, 남북으로 490
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 또한 금지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를 통해 단종 시
절에도 그런 제약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측면에 '숭정(崇禎) 99년'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1726년임을 알게 해준다.
비석은 30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세월의 거친 손때로 피부가 잔뜩 헝클어져 있다. 혹 단종의
사연에 비석이 크게 운 것은 아닐까?

청령포 산책은 '나룻터 → 단종어소 → 관음송 → 망향탑 → 노산대 → 금표비 → 나룻터' 순
으로 했는데, 그 반대로 해도 무관하며, 이들은 청령포의 주요 구성원들이니 꼭 살펴보기 바
란다.


▲  금표비 주변 소나무숲

▲  배를 타고 다시 속세로 나오다 (청령포 강변)

금표비를 둘러보고 강변으로 나오니 어느덧 17시 반이 되었다. 청령포의 빼어난 경치에 잠시
눈 호강을 누린 관광객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대기하고 있는 배에 올라탄다. 이 배가 오늘의
마지막 배는 아니며, 관람시간이 18시까지라 청령포에 단 1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운행한다.

배를 타고 잠시만에 청령포 나룻터에 도착, 졸고 있는 차량을 깨워 영월의 이웃 고을인 충북
단양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하여 청령포 나들이는 막을 고하며, 끝으로 단종에게 사약을 전달했던 금부도사(禁府
都事) 왕방연(王邦衍)이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지은 시를 소개한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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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애사의 슬픈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고즈넉한 비구니 절집, 낙산 숭인동 청룡사 ~~~ (동망봉)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낙산 청룡사 '


▲  바깥에서 바라본 청룡사 우화루(雨花樓)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초파일에는 꼭 '석가탄신일 사찰 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을 들먹이며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을 중심으로 절 나들이를 벌이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자냐? 그것도 아니다. 허
나 언제부터인가 설레는 날의 하나가 되었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이번에는 어
느 절을 접수할까? 열심히 연구에 몰두했다.
허나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20세기 사찰 상당수는 인연을
지은 상태라 미답의 절은 거의 씨가 말랐다. 그래서 선택의 폭은 많이 좁아진 상태. 그렇
다고 서울 밖으로 나가기도 귀찮아서 옛날에 갔던 사찰 중, 볼거리가 많거나 급격히 소장
지정문화재가 늘어난 절을 선택하여 제일 먼저 낙산 청룡사를 찾았다


하지만 전날 지나친 과음과 새벽 귀가로 인해 15시에 비로소 두 눈이 떠졌다. 퇴근본능에
충실하며 자꾸 기울어만 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부랴부랴 길을 재촉하여 청룡사 밑에 자리
한 창신역에 이르니 시간은 벌써 16시가 넘어버렸다.


 

♠  낙산 청룡사 입문 (정업원터 비각)

▲  정업원(淨業院)터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호

창신역(6호선)에서 청룡사로 가다보면 경내 직전에 철책이 둘러진 비각(碑閣)이 마중을 한다.
청룡사의 일원인 그 비각은 한많은 인생을 살았던 조선 비운의 왕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
씨의 넋을 위로하고자 세운 정업원터 비각(정업원구기)이다. 그렇다면 정업원은 무엇을 하던
집이었을까?

정업원이란 제왕의 왕후나 후궁, 궁녀가 궁궐을 나와 살거나, 귀족 여인들이 비구니로 출가하
여 살던 곳이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의종(毅宗, 재위 1146~1170) 때
처음 등장한 것으로 봐서 고려 초나 중기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보통 제왕이 죽으면 그
의 후궁(後宮)과 궁녀는 출가하여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고, 왕족과 귀족 같은 경우 남편이 죽
으면 아내가 출가하여 머물기도 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개경(開京)에 있던 정업원을 서울로 가져왔다. 정업원 위치에
대해서는 창경궁(昌慶宮) 서쪽 설과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설이 있어 정확한 자리는 아리
송한 실정인데 동망봉 설은 정순왕후 송씨 때문에 잘못 전해진 것으로 영조가 1771년에 세운
정업원 비석이 그 설을 크게 부추겼다. (그 비석은 정업원이 없어진 지 160여 년 후에 세워짐)

정업원에 살던 비구니는 대부분 높은 계급의 여인이었고 주지는 보통 후궁이나 공주(옹주) 등
의 왕족이 담당했다. 그러다보니 왕실에서도 각별히 신경을 써서 노비와 별사전(別賜田, 제왕
이 특별히 내린 전답), 분수료(焚修料, 향불을 피우고 도를 닦는데 드는 비용)를 두둑히 지원
했다. 허나 유생들의 정업원 폐지 건의가 끊이지 않아 1448년 일시 폐지되기도 했으나 1457년
다시 문을 열었으며, 연산군(燕山君) 시절 다시 폐지되어 그곳에 독서당(讀書堂)이 들어섰다.
하지만 독서당이 옥수동(玉水洞)으로 이전되면서 비어있는 공간이 되었고, 그 공간을 손질하
여 1550년 다시 정업원으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유생들이 폐지하라며 아주 징하게도 징징거렸고 이에 왕실은 후궁들의 별처라 우기며
인수궁(仁壽宮)이란 간판까지 내걸었으나 유생들의 생떼 같은 반발을 감당하지 못하고 1612년
에 완전 폐지해버렸다. 그때 그곳에 살던 비구니는 모두 성밖 절로 쫓겨났다.

청룡사와 정업원하면 떠오르는 여인은 앞서 언급한 단종의 왕후, 정순왕후 송씨(1440~1521)이
다. 단종(端宗, 1442~1457)이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떨려나고 끝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
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강제 유배를 떠나자 왕후 역시 강제로 궁궐을 떠나야 했다. 그때 그들
의 나이는 불과 10대 중반, 송씨는 시녀 5명을 데리고 청룡사에 들어왔고, 단종 역시 같은 날
궁을 나와 여기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단종과 인근 영도교(永渡橋)에서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절로 돌아와 머리를 깎
고 비구니가 되니 이때 허경(虛鏡)이란 법명을 받았다.
이후 매일 동쪽(영월이 동쪽 방향임)에 자리한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안녕을 기원했으며, 단
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동쪽을 향해 크게 통곡을 하니 그 소리가 아랫마을까지 들렸
다고 한다.

세조(世祖)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조카며느리인 그에게 영빈정동(英嬪貞洞, 영빈전)이란
집을 내리고 식량을 주었으나 송씨는 그 일체를 거절하고 청룡사, 또는 그 인근에 묻혀 살면
서 자체적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는 자주동천(자지동천)에서 자줏물로 염색을 들여 그걸 팔았
는데, 염색을 할 때마다 빨간 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자주동천(자지동천)이 되었음>
또한 그를 동정하던 백성들이 끼니 때마다 푸성귀 등의 먹거리를 갖다 주었는데 그 행렬이 매
우 길었다고 하며, 조정에서 이를 못하게 막자 여인들이 몰래 지금의 동묘(東廟) 인근에서 장
터를 열어 송씨를 도우니 세상에서는 그 장터를 '여인시장'이라 불렀다.

송씨는 16세에 강제 죽음을 당한 남편 단종과 달리 무려 81년이나 살았다. 그에게는 참 지옥
같은 삶이었으리라. 1521년에 기나긴 삶의 끈을 간신히 놓았으나 그의 집안 역시 역적으로 몰
려 풍비박산이 난 상태라 마땅히 묻힐 데가 없었다. 그래서 단종의 누님인 경혜공주(敬惠公主
)의 시댁 집안인 해주정씨 집안에 묻혔다. 그곳이 바로 사릉(思陵)이다.


▲  정업원터<정업원 구기(舊基)> 비석을 머금은 비각
너무 철통같이 머금고 있어 비석의 존재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햇살조차도
감히 발을 들이지 못할 저 안에 들어있을 비석은 얼마나 답답할까?

▲  영조가 비석을 세우면서 친히 남긴 현판

1771년 영조(英祖) 임금은 창덕궁에 들렸다가 정순왕후의 슬픈 사연을 듣고 이곳을 찾아 비석
을 세웠다.
1칸짜리 비각이 비석을 꽉 조이듯 머금고 있어 그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정업원 옛터(구기)에
서 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란 내용이 쓰여 있으며, 비각 앞 현판에는 '前峯後巖
於千萬年(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리라)' 쓰여 있으니 이는 영조의 친필이다. 그밖에 동망봉
(東望峰)이란 바위글씨도 남겼으나 왜정 때 채석장이 들어서면서 강제로 가루가 되었다.

이 비석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원래 '정업원구기'였으나 이름을 쉽게 한다며 단순하게 '정
업원터'로 갈았다. 허나 정업원은 이곳에 있지도 않았다. 송씨로 인해 엉뚱하게 이곳으로 엮
이게 된 것이다.


▲  담장 사이에 자리한 청룡사 일주문(一柱門)

청룡사는 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해 있다. 옛날이야 주변이 죄다 숲과 밭두렁이었지만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위치로 20세기 이후 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춤을 추면서 이제는 완전히 도
시 속에 외로운 공간이 되었다. 절 남쪽과 동쪽은 창신동(昌信洞)과 숭인동(崇仁洞), 보문동
(普門洞) 주택가가, 서쪽과 북쪽에는 아파트가 높이 들어서 절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절 뒷쪽 언덕에 약간의 숲이 남아있긴 하나 산사(山寺)의 풍경은 와르르 녹아내려 근
처의 안양암(安養庵)처럼 속세에 완전 포위된 모습이다.

청룡사 일주문은 이곳의 정문으로 경내 바로 앞에 자리한다. 절 규모가 작고 주변이 싹 주거
지라 다른 산사와 달리 멀리 일주문을 내보내지 못했다. 문 좌우로 기와돌담을 둘러 절과 속
세의 경계를 가르고 있는데 '삼각산(三角山) 청룡사' 현판을 내걸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그런데 이곳은 엄연히 낙산 자락이고 북한산(삼각산)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니 '낙
산 청룡사'를 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낙산(낙타산)이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
)이라 그리 칭하기가 썩 내키지 않은 모양이다. 게다가 북한산 남쪽 줄기가 여기까지 이르고
있으니 삼각산을 칭하는 것도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다.


▲  약간 빛바랜 모습의 우화루 현판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경내 한복판이다. 정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있고, 오른쪽에는
선방(禪房)으로 쓰이는 심검당이, 왼쪽에는 요사(寮舍), 일주문 옆구리에는 법회와 강의 장소
로 쓰이는 2층 규모의 우화루가 경내를 가리며 앉아있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청룡사의 역사에 대해 잠시 풀어보도록 하자.

청룡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고려가 한참 후백제(後
百濟)와 다투던 922년 태조 왕건(王建)이 칙령(勅令)을 내려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이 들어선
위치가 한양(漢陽, 서울)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되는 산등성이라 청룡사라 했으며, 비구니
혜원(慧圓)을 초대 주지로 삼으면서 창건 초기부터 비구니 절로 시작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에 따르면 도선대사(道詵大師)가 태조의 아버지인 왕융(王隆)에게 고
려 건국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이씨 왕조가 일어날 한양의 지기(地氣)를 억누를 필요가 있다며
개경 주변에 절 10개와 천하에 3,800개의 비보사찰을 세우도록 일렀다고 한다. 그래서 태조가
그 유언에 따라 절을 세우니 청룡사는 바로 그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허나 고려 초기 창건설을 입증할만한 유물과 기록이 없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하며, 그나
마 가장 오래된 존재가 17세기에 조성된 석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식구이다. 게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서야 신뢰할만한 내력들이 쏙쏙 등장하고 있어 고려 중/후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
이 크다.

어쨌든 문을 연 이후, 1036년 만선(萬善)이 1차 중창을 했으며, 1158년 회정(懷正)이 2차 중
창을 벌였는데 부근의 보문사(普門寺)가 문을 연 이후, 처음으로 세워진 절이라 하여 '새절
승방'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3세기 중반, 무려 40년 가까이 이어진 몽골과의 전쟁으로 절이 제대로 황폐화되자 1299년 지
환(知幻)이 중창했다고 한다.

공민왕(恭愍王)의 왕후인 혜비(惠妃) 이씨가 말년을 보냈고, 태조 이성계의 딸로 1398년 왕자
의 난으로 남편<흥안군 이제(興安君 李濟)>과 두 동생<세자 이방석(李芳碩), 무안대군 이방번
(撫安大君 李芳蕃)>을 몽땅 잃은 경순공주(慶順公主)가 출가해 머물렀으며, 단종의 왕후인 정
순왕후 송씨도 이곳에 의지하는 등, 뒷전으로 밀려난 왕실 여인의 안식처 역할을 했다.
또한 1405년 태종(太宗)이 무학대사에게 명해 절을 중창케 했고, 1771년 영조가 직접 비석을
내리고 절 이름을 잠시 정업원으로 바꾸는 등, 왕실의 지원과 관심도 넉넉했다.

1512년에 법공(法空)이 중창하고 1624년 예순(禮順)이 중창을 했으며, 1813년 화재로 소실되
었으나 이듬해 묘담(妙潭)과 수인(守仁)이 다시 일으켜 세웠다.
1823년 순조(純祖)의 왕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깊은 병에 걸리자 그의 아비인 김조순(金
祖淳)이 청룡사를 찾아 기도를 올렸다. 기도의 효과인지 어의(御醫)의 노력인지는 몰라도 병
세가 호전되자 김조순은 너무 기뻐 절 이름을 다시 청룡사로 갈게 했다. 1853년에는 그의 아
들 김좌근(金左根)이 중창을 하는 등, 나라를 말아먹은 안동김씨 패거리의 원찰(願刹) 역할까
지 도맡으며 제대로 배를 불렸다.

1902년에 정기(正基)와 창수(昌洙)가 중창했고, 1918년과 1932년에는 상근(詳根)이 중창했으
며, 윤호(輪浩)가 1954년부터 1960년까지 대부분의 건물을 새로 손질하였다. 그리고 1973년
다시금 중창을 크게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  명부전 석조지장보살3존상

▲  지장시왕도

인근 보문사와 함께 서울에 대표적인 비구니(여승) 도량으로 대웅전과 우화루, 명부전, 산령
각, 심검당 등 8~9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2014년에 국가 보물로 지
정된 석조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일괄을 비롯해 지방문화재인 지장시왕도, 칠성도, 현왕도,
감로도, 가사도, 신중도, 석 삼불상, 독성도, 산신도, 정업원터 등 지정문화재 11점을 간직하
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대웅전, 명부전, 산령각에 분포해 있으며, 구한말에 제작된 가사도(袈裟圖,
울 지방유형문화재 205호
)와 철원 심원사(深源寺)에서 넘어온 석 삼불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7호
)은 심검당에 들어있다. (이들의 위치는 바뀔 수 있으며, 나는 그들을 만나지 못했음)
도시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산사의 내음은 누리기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도시 속의 조그만 오
아시스 같은 존재로 비구니 고찰의 향기를 잔잔하게 불어주며, 비록 지금의 건물은 1950년대
이후 것들이라 겉으로 우러나오는 고색의 내음은 맡기 힘드나 건물 안에 오래된 불상과 불화
들이 앞다투어 고색의 향기를 불어주고 있다. 그러니 겉모습만 살피지 말고 반드시 대웅전과
명부전, 산령각, 심검당 안에도 들어가 그들을 살펴보기 바란다. 그래야 청룡사의 진정한 깊
이를 누릴 수 있다. 즉 꿀단지의 단지만 보려고 하지 말고 그 안에 담긴 꿀을 보란 이야기다.

흥겨운 초파일 분위기에 맛있는 절밥과 먹거리를 기대하고 왔건만 예상 밖으로 절은 무척 썰
렁했다. 오색 연등의 물결과 관불의식의 현장이 없었다면 오늘이 초파일인지 모를 정도로 말
이다.
아무리 시간이 16시가 넘었어도 아직은 사람이 넘칠 시간인데 생각 밖으로 사람도 너무 없고,
심검당 주변을 아무리 기웃거려도 절밥이나 먹거리를 주는 분위기도 없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먹거리를 챙기지 못한 초파일 절로 쓰라리게 기억에 남게 되었다. <이곳 이후에 간 절에서는
국수와 떡을 얻어먹었음>

※ 낙산 청룡사 찾아가기 (2018년 5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창신역 3번 출구를 나와서 도로(동망봉길)를 따라 도보 3분
* 지하철 1/6호선 동묘앞역(10번 출구)이나 1/4호선 동대문역(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청룡사(보문파크뷰자이아파트)에서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17-1 (동망산길 65, ☎ 02-763-4031)


▲  청룡사 심검당(尋劍堂)
절 뜨락의 하늘을 차지해버린 초파일 오색 연등의 위엄 앞에 심검당은
지붕이 거의 지워지는 굴욕(?)을 당했다.


 

♠  청룡사 명부전, 산령각

▲  청룡사 제일의 보물을 품은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하며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명부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졌다. 정면 3칸
,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장보살과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이 봉안되
어 있는데, 지장보살3존상을 비롯해 시왕상과 귀왕(2점), 판관(2점), 사자(2점), 동자상(1점),
장군상(2점)은 국가 보물로 지정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들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이들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청룡사 석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로 2014년 3월 지
방유형문화재에서 보물 1821호로 계급이 높아짐)


▲  명부전 석조지장보살3존상 - 보물 1821호

명부전에는 파란색 승려 머리를 한 지장보살이 조촐히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다. 돌을 빚어서
금색 옷을 입힌 것으로 그 좌우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합장인(合掌
印)을 선보이며 서 있다.

지장보살상의 높이는 92cm로 얼굴이 거의 네모난 편인데 이는 승일(勝一)이 만든 작품에서 많
이 나타난다. 머리가 좀 크다보니 신체비례가 그리 맞아보이지 않으며 몸에는 얇아보이는 법
의(法衣)를 걸쳤다. 달랑 2가지 색이 전부인 지장보살과 달리 밝은 색채의 옷을 입은 도명존
자와 무독귀왕은 조금 경직된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하며(문화재청 홈페이지에 그렇게 나옴),
시왕 같은 경우 각자의 스타일을 지니며 충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지장보살3존상과 주위에 배열된 시왕상과 그의 식구들(지장탱, 시왕탱 등의 그림은 제외)은
17세기에 승일이 중심이 되어 조성된 것으로 이들은 건강 상태도 좋고 처음 봉안된 절과 불상
을 만든 승려, 시주자 이름이 적힌 발원문(發願文)이 전하고 있어 17세기 불교 조각을 이해하
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어준다. 즉 그 발원문 때문에 이들이 보물로 승진된 것이라 보면 된다.
조성 관련 절대 기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 기록 덕분에 국보나 보물로 오른
건물이나 불상, 탱화, 조각품이 적지 않다.

조성 관련 글자를 넣어둔 그 당시 절의 작은 배려가 그들을 무척 돋보이게 하였으며, 현재 우
리들에게 적지 않은 그 시절의 상황을 속삭여주는 시간적 유물이다.


▲  색채감이 돋보이는 좌측 시왕상 5점과 동자, 판관(判官), 시왕탱
이들은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시왕탱과 일부 동자상 제외) 다들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며 명부전 내부를 화사하게 수식한다.

▲  우측 시왕상 5점과 동자, 판관, 시왕탱

▲  우측과 좌측 가장자리에 자리한 판관과 사자, 금강역사상, 장군도


▲  산령각(山靈閣, 산신각)

대웅전 뒷쪽 높은 곳에는 산신을 봉안한 산령각이 조용히 자리해 있다. 달랑 1칸에 불과한 맞
배지붕 건물로 그 안에 100년 이상 묵은 산신도와 독성도가 깃들여져 있다.


▲  산령각 산신도(왼쪽)와 독성도(오른쪽)

▲  청룡사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1호

산신도와 독성도는 유리 액자에 담겨져 있어 반사되는 빛으로 인해 온전히 사진에 담기는 것
을 허락치 않았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내 모습도 조금 반사되어 나와 다소 쑥쓰럽다.

산신도는 1902년 4월에 조성되어 봉안된 것으로 금어 두흠(金魚 斗欽)이 그렸으며 비구니 충
근(忠根)이 시주를 했다. 그림 중앙에는 주인공인 산신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동자와 긴
꼬랑지를 살랑거리는 호랑이가 배치되어 있다. 그외에 산신의 활동무대인 산과 소나무 등이
있어 산신도의 기본적인 모습은 갖추었으며, 그림 우측 밑에 조성 관련 내용이 적혀있다.


▲  청룡사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0호

독성도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 할배를 담은 것으로 산신도와 비슷
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독성을 비롯해 동자와 천태산 등이 그려져 있으며 그 앞에는 하얀 피부의 조그만 독성상이 유
리막 안에 담겨져 있다.


 

♠  청룡사의 보물 창고, 대웅전(大雄殿)

▲  연등을 뜨락에 늘어트린 대웅전

청룡사의 중심인 대웅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
이다. 안에는 석가3존불을 비롯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지장시왕도와 칠성도, 현왕도, 감로도,
신중도 등이 담겨져 있다.


▲  초파일 행사의 백미,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간만의 외출에 신이 났을까? 그의 표정이 무척 해맑아보인다. 허나 손님도 없고
햇님도 무심하게 기울고 있으니 조금 있으면 다시 어두컴컴한 곳으로 들어가
1년을 기다려야 된다. 그에게 그 1년은 마치 1,000년과 같으리라...

▲  청룡사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2호

칠성도는 칠성 식구를 담은 그림이다. 1868년에 조성된 것으로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
심으로 칠성원군(七星元君) 등이 빼곡히 담겨져 있어 정신이 없다. 산신도와 독성도는 참 단
촐한데 반해 칠성도는 식구들이 너무 많다. 그만큼 칠성 식구들에게 바라는 것이 많다는 이야
기겠지..


▲  영가단(靈駕壇)에 가려진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4호

감로도는 1898년에 그려진 것으로 중생들에게 감로(甘露)와 같은 법문을 베풀어 해탈(解脫)시
킨다는 의도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보통 영가(靈駕, 죽은 사람)를 위한 그림으로 쓰이며 그림
을 보면 대도시마냥 참 복잡하기 그지 없는데, 전체적인 내용은 부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目
連尊者)가 아귀도(餓鬼道)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고자 부처에게 그 방법
을 묻고 답을 듣는 것이다.
그림은 보통 3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상단에는 아미타3존블을 비롯한 7명의 여래(如來)와 지
옥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그려져 있고, 중간에는 지옥의 고통
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절차를 그린 반승(飯僧) 장면과 천도의 대상인 아귀(餓鬼)가 공양을 받
들어 먹는 장면을 그렸다. 그리고 하단에는 지옥과 현실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다양하게 묘
사되었다.


▲  청룡사 현왕도(現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3호

붉은 색채의 현왕도는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저승의 시왕(10왕) 가운데 가장 힘이 센
염라대왕(閻羅大王)을 다룬 그림이다. 그는 현왕(現王)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사람이 숨을 거
두고 3일 뒤에 영혼을 천도하는 의식을 할 때 사용된다. 그러니까 죽은 이의 내세와 극락왕생
을 위한 그림이다.

현왕탱은 현왕신앙이 유명하던 조선 후기에 많이 나타나며, 현왕을 비롯하여 판관과 사자 등
저승의 식구들과 그에게 심판을 받는 영가가 그려져 있다.
나도 언젠가 그의 면전에서 저럴 날이 있겠지. 나는 그에게 과연 어떤 말을 듣게 될까? 솔직
히 그리 착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 이득과 명예를 위해 뛸 뿐이다. 이 거지 같은 세
상에서 착하고 순하게 사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니까..


▲  청룡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1호

지장시왕도는 원래 명부전에 있었으나 내가 갔을 때는 대웅전에 머물러 있었다. 1868년에 그
려진 것으로 푸른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지닌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를 비롯하
여 시왕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빈틈 없이 자리해 있다. 그러니까 앞서 명부전의 구성 요소
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한 지장3존상은 노란 광배 안에 들어있어 저승의 특별한 존재임을 알려
준다.

이것으로 대웅전에 깃든 오래된 그림은 모두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법당의 필수 그림인
신중도(神衆圖)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나를 피해 이웃 심검당으로 마실을 간 모양이다. 그
리하여 청룡사에 깃든 문화유산 3점(신중도, 가사도, 석 삼불상)과 인연을 짓지 못했다. 아무
래도 다시 또 오라는 청룡사의 뜻인 모양인데 다행히 괘불(掛佛)이나 복장유물처럼 그리 만나
기 어려운 존재들은 아니다.


▲ 대웅전 금동석가3존불과 석가후불탱
20세기 후반에 새로 만든 3존불로 가운데 석가불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고
그 좌우로 수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해 석가3존불을 이루고 있다.

▲  경내 뒷쪽 언덕에 자리한 하얀 피부의 약사불(藥師佛)

대웅전 뜨락에서 요사 옆으로 난 길을 가면 정업원터 비각 윗쪽이다. 여기서 오른쪽 길을 오
르면 그 길의 끝에 근래 지어진 약사여래불이 환한 표정으로 맞이한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숲이 약간 우거져 있는데, 그 현장에 터를 닦고
중앙에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을 만든 다음 약사여래불을 앉혔다. 주변에는 녹음(綠陰)이
잠긴 나무들이 있고, 북쪽과 동쪽 너머는 속인(俗人)들의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도시 속에
갇힌 청룡사의 현실을 말해준다.


▲  약사불에서 바라본 숭인동과 동망봉
바로 밑에 보이는 기와집은 산령각과 대웅전, 심검당이다.


약사불 주변에서는 아주 손바닥만한 천하가 조망되고 있는데 청룡사 경내와 숭인동, 숲이 우
거진 동망봉이 그 작은 천하를 이루고 있다.
동망봉은 정순왕후가 단종이 숨진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짓고 남편의 극락왕생
을 빌던 곳으로 동쪽을 애타게 바라본 곳이라 하여 동망봉이라 불린다. 그곳에는 숭인근린공
원이 닦여져 있는데, 이렇듯 청룡사와 동망봉, 낙산 동쪽에는 정순왕후의 흔적과 애환이 진하
게 깃들여져 있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이렇게 하여 초파일 청룡사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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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의 포근한 뒷동산이자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 산책 ~~ (한양도성, 낙산공원, 자주동천, 삼군부총무당)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좌청룡, 낙산 나들이 '
(한양도성, 낙산공원, 비우당, 삼군부총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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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공원 한양도성 (낙산에서 동대문 방향)

▲  자지동천(자주동천) 바위글씨

▲  삼군부총무당


 

♠  한양도성(漢陽都城) 혜화문(동소문)에서 낙산공원 구간

▲  혜화문에서 낙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5월의 첫 무렵, 일행들과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을 찾았다.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혜화동로터리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동소문고개가 막
꺾이기 직전에 한양도성과 낙산으로 이어지는 탐방로가 손을 내민다.

이 탐방로는 낙산을 넘어 동대문(東大門)까지 이어지는 2.3km의 도보길로 2012년에 모두 개통
되었다. (동소문 주변이 마지막으로 개통됨) 처음부터 각박한 경사로 사람들을 맞이하는데 그
것도 잠시일 뿐, 길은 서서히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완만해진다. 삼선동(三仙洞) 주택가 뒤쪽
을 지나지만 낙산 정상까지 녹지대를 완충지대로 삼아 속세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산책
의 기분을 진하게 선사해주며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수준도 높아진다.

동대문에서 낙산공원으로 오르는 성곽 탐방로는 성곽길과 성곽 바깥길 2가지가 있어 골라가는
재미가 있다. 허나 동소문에서 오르는 길은 아직까진 바깥길만 완전하게 나 있다. 동소문고개
에서 성 안쪽을 보면 나무가 좀 무성해 보이는데 그곳에 카톨릭대 성신교정이 넓게 자리를 깔
고 앉은 터라 낙산공원~동소문 성곽길은 그 중간인 제2전망광장까지만 닦였을 뿐, 거기서 카
톨릭대 담장에 사정없이 가로막혔다.
자세한 속사정이야 낸들 모르겠지만 시민들을 위해 성곽길을 흔쾌히 개방하고 성곽이 끊긴 동
소문고개에는 카톨릭대 교내(혜화동성당)로 내려가는 길을 내면 될 것이다. 물론 끊어진 양쪽
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성곽 모양의 구름다리를 놓는 것이 훨씬 좋겠지만 끊긴 거리가 길고 그
높이마저 상당하며 고갯길 도로(동소문로, 창경궁로)의 교통량이 어마어마해 꽤 난공사가 예
상된다.

동소문고개를 기준으로 15분 정도 오르면 성 안으로 인도하는 암문(暗門)이 나온다. 그 문을
들어서면 낙산공원 놀이광장으로 거기서 2분을 더 가면 낙산의 정상인 낙산공원 마을버스 종
점에 이르게 된다.


▲  주거지(장수마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펼쳐진 성곽 바깥 탐방로

▲  낙산에서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내려가는 한양도성
낙산 북부에서는 어디서든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 산줄기가 시원히 바라보인다.


동소문~낙산 구간의 한양도성은 대체로 잘 남아 있다. 허나 600년이 넘는 장대한 세월을 먹었
고, 왜정과 6.25전쟁으로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기면서 새 성돌로 치유된 부분이 많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때가 자욱한 검은 성돌과 하얀 피부의 성돌이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하지
만 둘 사이의 어떠한 갈등도 없이 오랜 세월을 뛰어넘는 강인한 협동심으로 하나의 성곽을 이
루고 있으니 참 든든해 보인다. 그럼 여기서 한양도성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조선의 수도를 지켰던 서울<한양(漢陽)>의 갑옷, 한양도성 - 사적 10호
1388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란 그 유명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몸담았던 고려 왕조를
엎어버리고 조선이란 아주 비리비리한 왕조를 세운 이성계(李成桂), 세상에서는 그를 조선 태
조라고 부른다.
그는 1394년 남경(南京)이라 불리던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의 도성 천도 프로젝트
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이며 국방을 강화하여 버릇 없이 까부는 명나라를 혼내주
려고 했던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다.
1395년까지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시가지를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
에 들어갔는데 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4산(內四山)인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 길이는 59,500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 작
은 수준이며,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천하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
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
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에 다시 79,400명을 콩볶듯이 동원,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도성 축조는 마무리
가 되었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싹 다지기로 하고 1422년
1월, 32만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하여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으니 무려 3.2배의 인부들이 동원된 조선 최대의 공사였으며 완전 인원빨로 밀어
붙어 불과 38일만에 마무리되었다.
허나 아무리 현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이지만 농번기를 피하려고 늦겨울에 무리하게 작업을 벌
였고 공사의 강도가 높아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다. (공사가 끝나고 귀가 도중 죽은
사람들도 꽤 되었음) 그들의 적지않은 희생과 고통으로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 치성(雉城)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한 도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케 했는데 성곽을 워낙 단단히
지은 탓에 20세기까지 스스로 붕괴된 적이 없으며,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되거나 전쟁 폭격을 받은 것은 제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하여
도성은 왜군에게 아주 허무하게 무혈점령되고 만다. 그런 꼬라지를 막고자 온갖 욕을 들어가
며 단단하게 다졌건만 오늘날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소위 윗대가리들의 무능으로 눈을 뜨고
적군이 도성 안에 들어오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치열한 전쟁이 없어서 성곽과 성문
은 별 피해가 없었다. (한양도성 왈 '내가 이럴려고 단단하게 지어진건가? 자괴감 들어' ;;)

1704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신하들의 격한 반대를 물리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했는데, 그 안에 행궁(行
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갖춘 조그만 도시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탕춘대성
(蕩春臺城)을 쌓아 도성의 수비력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서울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드러내던 한양도성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1899년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사람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콜
브란은 고종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며 전차(
電車)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하여 그 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
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
문의 양쪽 성벽이 싹둑 잘리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나갔다. 허나
그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
제는 1905년 이후이다.

왜국(倭國)은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그 소속으로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해괴
한 기관을 만들어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1910년 이후 서소문<소의문(昭義門)>과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동소문<혜화문(惠化門)>을 밀어버렸고 적지 않은 성곽까지 덤으로 밀면서
망국(亡國)의 서울을 욕보인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
발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
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겨우 살아남
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손질하기 시작하여 광희문과 숙정문을
복원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
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
이 가능하며<인왕산 정상 주변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에는 못감, 월요일이 휴일인 경우에는 그
다음날 문을 닫음> 성곽이 사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에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바뀌었다. 허나 서울성곽이란 이름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며 한양성곽이라 불리기도
한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한양을 쌈싸먹던 성곽이니 서울성곽, 한양성곽이라 불러
도 크게 상관은 없을 것이다. (본글에서는 한양도성으로 통일함)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며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데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글쎄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
이 쌓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
에 성곽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았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우리나라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 대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  거의 85도로 서 있는 한양도성의 위엄

옛 한양도성은 두터운 성곽을 지니고 있기에 늘 든든했을 것이다. 그렇게 민초들을 닥달하여
쌓은 단단한 성이건만 그 보람도 없이 무능하고 부패한 지배권력층 때문에 제대로 된 수성전
하나 치르지도 못하고 적에게 떨어지는 수난을 여러 차례나 겪어야 했다. (임진왜란, 이괄의
날, 병자호란...) 성곽은 도시와 백성을 지키고자 있는 것이지 그냥 멀뚱히 서 있는 병풍이
아니다.


▲  낙산 바깥 탐방로에서 바라본 천하 (삼선동과 돈암동, 성북동, 북한산)


 

♠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 낙산(駱山)에 둥지를 튼
~ 낙산공원

▲  낙산공원 남쪽에 자리한 낙산정(駱山亭)

서울 도심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누운 낙산은 해발 125m의 나지막한 산이다. 낙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양이 낙타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산의 이름인 낙(駱)은 낙타를 뜻한다.
또한 3글자로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 모두 낙타를 상징한
다. 그 이름을 간편하게 줄인 것이 낙산이며 조선시대에 궁궐에 우유를 조달하던 관청인 유우
소(乳牛所)가 낙산 기슭에 있어 타락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낙산은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의 하나로 도성의 동쪽을 맡고 있다. 여기서 내사산
이란 한양의 주산(主山)이자 북쪽에 있는 북악산<백악산(342m)>, 서쪽의 인왕산(338m), 남쪽
의 남산(南山, 262m), 그리고 동쪽의 낙산을 이르는데 문제는 그 가운데 낙산이 가장 부실하
게 생겼다는 것이다.

낙산과 멀리감치 마주보고 있는 인왕산은 산세는 좀 작아보이나 꽤나 야무지고 험준하여 예로
부터 호랑이들의 소굴로 유명했다. 북악산 역시 인왕산 못지 않으며, 남산은 그들보다는 세는
약해도 덩치는 좀 있다. 반면 낙산은 그들보다 높이나 덩치에 있어서 형편없이 떨어져 그냥
뒷동산 수준의 언덕이다. 낙산의 그런 부실한 기운을 북돋아주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일
환으로 동대문의 이름을 흥인문(興仁門)에 지(之) 1글자를 추가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한
것도 바로 그 이유이다.
낙산이 그렇게 염려되면 글자로 장난칠 것이 아니라 도성을 동쪽으로 좀 확장하면 어떨까 싶
지만 낙산 동쪽은 신설동 방향으로 조금 뻗은 동망봉(東望峰)을 빼고는 거의 평지이다. 그러
니 별 수 없이 낙산에 성곽을 얹힌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고려보다 스케일이 비교도 안될 정
도로 작기 때문에 도성을 크게 구축하지 않았다. <고려의 황도(皇都)인 개경(開京)보다 훨씬
작음>

낙산은 야트막한 산으로 숲이 무성하고 잘생긴 바위와 약수터가 많았다. 게다가 도성 내부가
훤히 보일 정도로 조망도 일품이라 도성 주변 경승지로 꼽혀 왕족과 양반들이 낙산에 정자나
별장, 거처를 지어 머물렀다. 효종(孝宗)의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석양루(夕陽樓, 지
금의 이화장 정문 앞에 있었음)를 지었고, 이심원(李心源, 1722~1770)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을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과 백림정(柏林亭) 등이 있었다. 이들은 양반과 시인묵객들이 자
주 발걸음을 했던 낙산의 이름난 명소였다.
또한 조선 후기 한옥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던 이화장(梨花莊)과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유
명한 이수광(李睟光)의 초가인 비우당(庇雨堂), 낙산의 유방이라 불리던 이화동약수와 신대약
수 등의 약수터, 우물이 나란히 5개가 있었다는 5형제우물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의 애환
이 서린 자지동천(자주동천)과 동망봉, 도성 5대 명승지의 하나로 기이한 바위가 많았던 쌍계
동(雙溪洞, 이화장 주변) 계곡이 있었다.
그 외에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는 나무만 있다고 하는 홍수동(紅樹洞, 홍숫골), 동
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 등이 낙산에 앞다투어 안겨져 있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낙산이었
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낙산에 안겨있던 수많은 명소들은 20세기 이후 어둠의 시절과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녹아 없어졌고, 서울의 인구가 폭증함에 따라 낙산과 동망봉 일대에 빼곡히 아파트와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옛날의 운치와 정취는 다 말라버렸다. 달동네인 이화마을도 바로 그런
시류를 타고 낙산 남쪽에 살짝 둥지를 튼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낙산의 허리를 가르
는 한양도성과 이화장, 자지동천 바위글씨, 그리고 근래 복원된 비우당이 고작이다. 그 외에
조선 왕실의 원찰(願刹)이던 청룡사(靑龍寺), 고려 때 지어진 비구니 절 보문사(普門寺), 구
한말에 세워진 안양암(安養庵)과 지장암(地藏庵) 등의 절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낙산 중턱에 자리를 피며 산의 미관을 적지않게 말아먹던 시민아파트가 노후화됨에 따라 1990
년대 이후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에 따라 이들 아파트와 주변 주거지를 싹 밀어버
리고 정상 주변과 서쪽 일대 61,000여 평을 다져 낙산공원을 만들었다.
공원은 1999년 12월 30일 삽을 뜨기 시작하여 2002년 6월 완성을 보았는데, 운동시설과 휴게
소, 낙산전시관, 중앙광장과 놀이광장, 전망광장 등 3개의 광장을 갖추는 한편, 소나무 등 8
만 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비록 왕년의 손톱 때만큼은 못되어도 도심 속의 포근한 휴식 공간
이자 답사/나들이 장소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하여 서울의 '몽마르뜨 언덕'이란 별명까
지 얻게 되었다. (낙산공원 면적은 201.779
㎡)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은 동대문에서 동소문까지의 2.3km 구간으로 성곽이 잘 남아있다. 1999
년 이후 산업화의 칼질에 오랫동안 고통받은 낙산을 조금씩 위로하면서 성곽도 보수를 벌였는
데 동대문 북쪽 구간을 복원하고, 성곽과 성밖에 탐방로를 만들었다. 성곽 내부 탐방로는 동
소문에서 카톨릭대 성심교정 사이 약 700m을 제외하고 모두 길이 나있고, 성밖은 동소문에서
동대문까지 모든 구간이 이어져있다.

낙산은 대학로와 무척이나 가깝고 혜화역(4호선)과 한성대입구역(4호선), 동대문역(1,4호선),
창신역(6호선)과도 또한 가깝다. 심지어 낙산공원 정상까지 마을버스가 들어오는 등 교통과
접근성은 매우 착하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뒷동산처럼 야트막하여 누구나 쉽게 안길 수 있고
조망도 일품이다. 특히 서울의 야경(夜景)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포인트라 인기가 더하다.

낙산에 간다면 동소문이나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낙산공원에서
가까운 명소로 이화장과 이화마을, 자지동천(자주동천)과 비우당, 동망봉, 삼군부총무당 등이
있으니 한 덩어리로 같이 보면 제법 알찬 나들이가 될 것이며, 여기서 욕심을 더 부려 청룡사
, 보문사, 안양암, 대학로 주변의 명소들까지 둘러본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 낙산공원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 교차로(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도보 20분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4번 출구에서 성곽 탐방로를 따라 도보 15분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
  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낙산공원 종점 하차
*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탐방로는 24시간 개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산2-10 일대 (낙산길 41. 낙산공원 관리소 ☎ 02-743-
  7985~6)


▲  낙산 정상부 ① - 낙산공원 마크와 성바깥 산책로

▲  낙산 정상부 ② - 놀이광장 주변

▲  낙산 정상에서 제2전망광장으로 이어지는 성곽길


 

♠  낙산 주변에 숨겨진 명소들

▲  복원된 3칸 초가, 비우당(庇雨堂)

낙산 정상(종로구 마을버스 03번 종점)에서 창신동 방향(동쪽)으로 500m 정도 내려가면 쌍용
아파트2단지 입구라는 정류장이 나온다. (낙산에서 마을버스로 두 정거장) 정류장 남쪽 비탈
에 나무가 우거진 조그만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으로 들어서면 원각사(圓覺寺) 직전에 3칸짜
리 초가가 마중을 한다. 그가 낙산을 수식하는 명소의 하나인 비우당이다. 그럼 이곳에는 비
우당만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비우당 바로 뒤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에 자지동천 바
위글씨와 샘이 있다.

우리가 갔을 당시에는 가는 날이 보수하는 날이라고 지붕을 수리하고 파란 천으로 꽁꽁 덮고
있었다. 지붕을 감싼 천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날을 잘못 찾아온 것을 어찌하리? 어차피 집에
서도 가까운 곳이니 아쉬우면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도 상관은 없다. 그렇다면 비우당은 어
떤 곳인데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일까?

비우당이란 이름은 '비를 가리는 집(우울하게 말하면 간신히 비나 가리는 집)'이란 뜻으로 중
고등학교 국사책과 온갖 국사 관련 수험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주인공,
지봉 이수광<芝峯 李晬光, 1563~1628>이 어린 시절과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그의 호인 지봉
은 낙산 동쪽의 한 줄기인 지봉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이 집은 이수광이 지은 것이 아닌 문화유씨 집안이던 유관(柳寬. 1346~1433)의 집이었다.
그는 낙산 동쪽, 현 자리에서 약간 서남쪽인 쌍용2차아파트 자리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맹사
성(孟思誠), 황희(黃喜) 못지 않은 강력한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다. 집을 짓긴 했지
만 재상(宰相)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낡아빠진 초가였고, 지붕에 계속 빗물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았다고 한다. 그때 그는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어찌 견딜까??' 남 걱정도 참 팔자인 유명한 농담을 남기니 그 말이 '유재
상의 우산'이란 뜻의 유상수산(柳相手傘)이다.

유관이 죽자 외손인 전주이씨 집안에게 상속되었는데, 그 집안에서 태어났던 이수광이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없어진 것을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로 잠시 관직을 버렸을 때, 홀연히 다시 찾은 것이다.
그는 다시 집을 짓고 유관의 일화를 바탕으로 집의 이름을 비우당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머물며 지봉유설을 비롯한 다양한 서적을 작성했는데,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를 통해
집과 관련된 사연을 적었다. 또한 집 주변의 8곳의 경치를 '비우당 8경(八景)'이라 정하고 시
를 지으니 다음과 같다.

1. 동지세류(東池細柳) - 동대문 밖에 있던 동지(東池)란 연못에 핀 버들이 봄바람에 버들개
지를 날리고 꾀꼬리가 노래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동지는 현재 없음)
2. 북령소송(北嶺疏松) - 북악산의 산마루가 낮에도 어둑한데 푸른 솔그림자가 집에 드리운
것을 보고 동량으로 쓰이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3. 타락청운(駝酪晴雲) - 아침마다 누운 채 낙산의 구름을 마주하면서 한가한 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4. 아차모우(峨嵯暮雨) - 아차산에서부터 벌판을 지나 불어오는 저녁비를 노래했다.
5. 전계세족(前溪洗足) - 비가 오면 개울에 나가 발을 씻고 개울가 바위(자지동천)에 드러눕
다. (현재 낙산에는 계곡이 전멸함)
6. 후포채지(後圃菜芝) - 지봉과 상산(商山, 낙산의 동쪽 줄기의 하나)의 이름에 맞추어 상산
사호(商山四皓)처럼 살고 싶다.
7. 암동심화(巖洞尋花) - 복사꽃 핀 골짜기에서 나비를 따라 꽃을 찾아가는 풍류를 말하다.
8. 산정대월(山亭待月) - 맑은 달밤 정자에 올라 술잔을 잡은 흠취를 말했다.


조선 중기에 뛰어난 문신이자 학자로 실학(實學)의 시조격인 인물이며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
으로 정국을 이끈 그가 바람처럼 사라진 이후 집은 고된 세월에 지쳐 쓰러졌고, 그가 노래한
비우당8경도 개발의 칼질에 재현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서울시에
서 뒤늦게나마 비우당 표석을 세웠고, 원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앉으면서 2011년에 그 부근
인 자지동천 앞에 비우당을 복원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비우당은 툇마루를 갖춘 초가 3칸으로 부엌을 가지고 있다. 초가 주위로 싸리나무로 얇게 담
장을 둘러 옛 초가의 정취도 조금은 풍기는데 사립문이 열려있는 경우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
면 된다. 허나 무심히 닫혀있더라도 담장이 낮아서 안으로 넘어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굳이 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바깥에서 거의 다 보이지만 비우당 뒤쪽에 있는 자지동천의
흔적(샘터와 바위글씨)이 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담장 밖에서도 보이기는 보임) 비우당
은 복원된지 10년도 안된 아주 따끈따끈한 초가라 고색의 내음 따위는 기대할 수 없지만 자지
동천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  서울시장 조순이 1995년에 세운 비우당 옛터 비석

▲  비우당 동쪽 부분 (굳게 닫힌 사립문과 비우당터 비석)
초가 뒤쪽으로 자지동천 표석과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  자지동천(紫芝洞泉, 자주동천) 표석

▲  비우당 뒷쪽 굴뚝과 자지동천

그럼 이름도 참 거시기한 자지동천(자주동천)은 어떤 사연이 깃든 곳일까?
이곳은 낙산 동쪽에 자리한 오래된 샘터로 조선 6대 군주인 단종(端宗)의 부인, 정순왕후(定
順王后) 송씨(1440~1521)의 슬픈 사연이 서린 현장이다.

정순왕후는 여산송씨 집안으로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1454년 단종의 왕비가 되었으며 바
로 이듬해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넘기면서 단종은 상왕(上王), 송씨
는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가 되었다. 허나 1457년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
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생애 마지막 강제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송씨는 영도교(永渡橋,
청계8가)까지 울면서 따라와 마지막 이별을 나누게 된다.
그들이 영영 이별한 다리라는 뜻에서 영이별교, 영이별다리라 불렸고, 그것이 영도교로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단종이 떠나면서 송씨 역시 강제로 궁궐을 나와 낙산 청룡사(靑龍寺)에 몸을 의탁했다. 청룡
사는 은퇴한 왕실 상궁(尙宮)과 승하한 제왕의 후궁들이 말년을 보내던 곳으로 그들을 위한
정업원(淨業院)이 설치되어 있었다. 송씨도 그곳에 머물렀으나 세조(世祖)가 마땅히 지원을
해주지 않아서 생활이 상당히 어려웠다.
그래서 절과 가까운 자지동샘으로 와서 비단을 빨아 자주색 물감을 들여 바위 위에 널어 말렸
으며, 그 비단으로 댕기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서울 장안이나 동묘 주변에 열렸던
여인시장에 팔아 생계를 꾸렸다. 그때 여기서 비단을 물들이거나 빨래를 할 때 샘물도 그녀의
처지에 피눈물을 흘렸는지 저절로 붉은 색으로 염색이 되었다고 하며, 세상에서는 송씨의 그
런 애환을 위로하고자 함인지, 자주색으로 물들인 샘을 자지동천(자주동천), 자주우물이라 부
르고 바위는 자주바위라 불렀다. 또한 샘터 일대를 자지동(紫芝洞, 자주동), 자줏골, 자주동
이라 불렀다.
이렇게 보면 이름은 많은 것 같지만 정식 이름은 자지동천, 자지동이며 여기서 자지는 거시기
한 그것이 아니라 뿌리가 자주색을 띠는 풀인 지초(芝草)를 말한다. 지금이야 샘이 있는 바위
윗쪽에 잡초만 자라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 지초가 무성히 자라고 그 바위 틈으로 맑은 물이
흘렀다고 전한다.

옛 기록에도 이곳 이름은 그렇게 거시기하게 나오지만 이 땅의 정서상 상당히 예민한 단어인
지라 당당히 쓰기에는 좀 쑥쓰러운 감이 있어 요즘은 자주동천, 자주동샘으로 희석해서 많이
부른다. 비록 단어는 거시기해도 뜻은 그렇지가 않거늘 마치 홍길동(洪吉童)이 아버지를 아버
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자지동천은 자주바위 밑에 파인 'U'자 모양의 돌우물로 왜정 때까지 물이 나왔다고 한다. 허
나 왜정 이후 개발의 칼질로 낙산의 계곡과 물이 씨가 마르면서 죽은 샘물이 되었다. 송씨를
비롯하여 낙산 동쪽에 살던 여인들이 빨래나 염색/식수용으로 사용하던 샘물로 옛날의 정취는
95% 이상 증발되고 겨우 일부만 남아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샘터를 밑도리에 둔 자주바위 피부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 쓰인 바위글씨가 있다. 자
지(紫芝) 2글자는 좀 퇴색되긴 했으나 두 눈으로 살피는데 그리 어려움은 없으며, 동천(洞泉)
2자는 꽤 선명하여 글씨에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글씨를 쓴 이는 누군지는 전해오는 바는 없
으나 조선 후기에 단종과 정순왕후를 추모하는 선비가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  흔적만 남아있는 자지동천 샘터(자주동샘)

▲  자지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글씨에 검은색을 입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글씨의 크기는
세로 72cm, 가로 185cm이다.

▲  자지동천 거북바위

자주바위 윗쪽에는 거북이를 조금 닮은 듯한 커다란 바위가 있다. 하여 바위 이름도 거북바위
인데 그에게도 정순왕후의 한이 담겨져 있다.
정업원에서 먼저 간 남편(단종)을 생각하며 눈물로 잠을 이루던 어느 날, 단종이 거북이를 타
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이상히 여기며 아침 일찍 비단을 빨러 자지동샘에 왔는데 어
제까지만 해도 없던 이 거북바위가 불쑥 나타났다고 한다.
물론 바위가 갑자기 불쑥 나타날 리는 없다. 허나 그런 꿈을 꾼 이후, 빨래를 널고 잠시 쉬면
서 바위를 살펴보니 꿈의 영향인지 거북과 비슷하게 생긴 것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 사연을
동네 아낙들과 승려들에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그 이야기가 새끼에 새끼를 치면서 그런 전
설로 변해간 것이다.

※ 비우당, 자지동천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
  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쌍용아파트2단지 입구에서 하차, 도로 남쪽 밑에 나무가
  무성한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 아랫쪽에 있다.
* 낙산공원(낙산 정상)에서 창신역 방면으로 도보 7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9-471 (낙산공원 관리소 ☎ 02-743-7985~6)


▲  삼군부총무당(三軍府總武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호

낙산 동북쪽이자 한성대 바로 서쪽에는 삼선공원(삼선상상어린이공원)이 있다. 그 안에는 고
색이 창연한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하나 숨겨져 있으니 그가 삼군부총무당이다.

삼군부(三軍府)는 국방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1865년에 흥선대원군이 신설했다. 비변사(
備邊司)를 의정부에 통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군령 최고 기관으로 무부(武府)라 불리기도 했
는데 광화문 남쪽 예조(禮曹) 자리에 훈국(訓局)의 신영(新營), 남영(南營), 마병소(馬兵所)
및 오영(五營)의 주사서(晝仕所)를 합쳐 삼군부라 칭했으며, 1867년 4월에 완전한 조직을 갖
추었다.
의정부(議政府)와 대등한 지위를 누리며 군무(軍務)와 군비 강화를 비롯한 숙위 문제와 변방
관리를 맡았으나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에게 크게 꺾이면서 1880년 12월 폐지되고 만다.

삼군부총무당은 삼군부가 한참 자리를 잡던 1868년에 현재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 세워진 것
으로 삼군부의 중심 건물이다. 양쪽으로 덕의당(德義堂)과 청헌당(淸憲堂)을 거느렸으며, 삼
군부가 폐지된 이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관청으로 쓰였다가 갑오개혁(甲午改革) 이
후에는 시위대(侍衛隊) 청사로 쓰였고, 1910년부터 1926년까지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 사령
부로 사용되었다.
허나 순종(純宗)이 1926년 붕어한 이후, 보병대는 폐지되었고, 1930년 왜정(倭政)이 쓸데없이
심술을 부리면서 삼군부의 중심인 총무당을 지금의 자리로 내쫓았다. 또한 덕의당은 부셔버렸
으며, 청헌당(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호)만 홀로 남아있던 것을 1967년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로 보내버렸다.

▲  삼군부총무당의 뒷모습

▲  위에서 본 모습

총무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길쭉한 팔작지붕 건물로 중앙 3칸은 대청이고 양 옆구리에 1
칸짜리 온돌방이 있으며 그 옆에는 광이 있다. 조선이 이 땅을 거쳐간 가장 최근의 나라이지
만 왜정의 심술이 극심해 제대로 남은 관아 건물이 별로 없으며 서울 같은 경우는 총무당과
청헌당이 유일하다. 설령 남기더라도 생색내기용으로 거의 1~2동만 남기는 수준으로 망국의
관청을 완전 고자 수준으로 만들었다. (삼군부 같은 경우는 1동만 자리를 지키게 했음)
뒷끝이 쿨해야 서로가 좋거늘, 왜는 섬나라 사람의 비좁은 본성 때문에 그러지를 못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두고두고 반감만 잔뜩 샀던 것이다.

총무당 주변은 1970년대 이후 동네 주민을 위한 공원이 조성되었고, 어린이놀이터를 더 확장
하여 완전한 어린이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이제와서 총무당을 제자리로 돌리기는 좀 힘들겠지만 따로 놀고 있는 청헌당과는 다시 하나로
이어줘야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니까 청헌당이 이곳으로 오던지 아니면 총무당이 육사로
가던지 해서 둘을 같이 있게 해주면 보기도 좋을 것 같다. 덕의당은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복
원을 해서 옆구리에 붙여주면 될 것이다. 비록 망국의 관청이긴 하나 한때 조선의 군정(軍政)
을 관장했던 현장으로 이렇게 동네 구석 어린이공원에 분산되어 처박혀있는 것도 한편으로는
좀 딱해 보이기도 한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삼선공원
삼군부총무당을 끝으로 낙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삼군부총무당(삼선공원)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3번 출구를 나와서 1분 가면 삼선교로4길(삼군부총무당을 알리
  는 어두운 색깔의 이정표가 있음)이 나온다. 그 길로 들어서 8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과 장
  수마을 표석이 나오면서 좌우로 갈리는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성곽과 반대 방향인 왼쪽
  으로 2분 가면 삼선공원이 나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1가 1-13,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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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10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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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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