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0.09.15 노산군(단종)이 유배살이를 했던 단종애사의 애틋한 현장, 영월 청령포 (청령포 관음송)
  2. 2018.06.12 단종애사의 슬픈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고즈넉한 비구니 절집, 낙산 숭인동 청룡사 ~~~ (동망봉) 2
  3. 2016.07.20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미인을 닮은 아름다운 폭포, 삼척 미인폭포 (여래사, 통리협곡)

노산군(단종)이 유배살이를 했던 단종애사의 애틋한 현장, 영월 청령포 (청령포 관음송)

 


' 단종애사의 현장, 영월 청령포 '

▲  서강 너머에서 바라본 청령포


 

 

봄이 천하만물의 격한 지지를 받으며 겨울 토벌에 여념이 없던 3월의 끝 무렵에 친한 후배
와 강원도 내륙 지역을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홍천(洪川)의 여러 벽지 명소를 찍고 평창(平昌)을 거쳐 영월(
寧越) 땅으로 들어섰다. 이날 최종 목적지는 충북 단양(丹陽)으로 갈 길은 아직 멀지만 일
몰까지는 아직 여유가 넘치고 오랜만에 들어온 곳이라 그냥 지나치기는 섭하다. 하여 읍내
직전에 있는 선돌을 보려고 했으나 실수로 놓쳐버려 이미 2번이나 인연을 지었던 청령포를
복습하기로 했다.

청령포는 영월읍내와 무척 가까운 곳으로 주차장에 이르니 16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주차장
은 거의 만땅이다. 간신히 자리를 잡아 차량을 잠재우고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해 유료
(有料)의 땅, 청령포로 들어선다.


 

♠  하늘이 빚은 천연 감옥, 청령포(淸泠浦, 명승 50호)

▲  청령포 나룻터와 서강 너머로 보이는 청령포

입장료를 내고 서강(西江) 강변으로 내려가면 청령포 나룻터(선착장)가 나온다. 청령포는 창
살도 필요 없는 궁벽한 곳이라 섬이 아닌 육지임에도 무조건 배를 타고 건너야 된다. 나룻배
는 2척이 다니고 있는데, 평일은 보통 1척, 주말과 휴일은 2척을 굴리며, 정해진 출발 시간이
없이 사람이 어느 정도 차면 시동을 걸고 느릿느릿 청령포로 이동한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 배를 돌리기가 무섭게 맞은편 강변에 닿는다. 소요시간은 길게 늘려봐
야 3~4분 정도로 배멀미가 나올 틈도 없으며, 수면이 잔잔하고 중간 부분을 제외하면 수심도
얕다. 허나 온갖 어이없는 재해와 재난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라 너무 방
심은 하지 말자.


▲  청령포와 속세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 청령포 나룻배

▲  나룻배에서 바라본 청령포 나룻터(선착장)

청령포에 대한 설래임을 간직한 나그네를 태운 배는 180도 돌리기가 무섭게 청령포 강변에 닿
는다. 청령포 강변은 인공(人工)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산 강변으로 돌이 무지 많으며, 배를
타고 내리는 시설도 따로 없어 그냥 강변 모래벌에서 타거나 내리면 된다.


▲  별 꾸밈없이 자연 그대로 놓아둔 청령포 강변

▲  소나무숲에 묻힌 청령포
청령포의 핵심이자 상징인 단종 유배처가 저 송림에 묻혀있다.


청령포 강변에는 돌이 무지 많다. 그런 돌밭을 지나면 소나무숲이 나오는데, 그 숲속에 단종
애사의 쓰라린 현장, 단종 유배처가 깃들여져 있다.
강변에는 탐방로가 따로 닦여져 있지 않으며, 울퉁불퉁한 돌밭을 알아서 통과해 소나무숲에
안기도록 되어있다. 대신 소나무숲에는 단종어소와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까지 나무데크 탐
방로를 닦아두었다.

청령포는 유독 소나무가 많다. 이곳이 솔내음이 그윽한 공간이 된 것은 단종이 유배된 인연으
로 오랫동안 금표(禁標) 구역에 묶였기 때문이다. 금표란 왕릉이나 왕족 묘역, 제왕(帝王)이
내린 땅, 나무 보호와 국가 시설 보호를 위한 금지된 땅으로 이곳에는 허가된 사람 외에는 함
부로 출입할 수 없었고, 나무 벌채도 일절 금지된다.

청령포 소나무숲은 이곳에서 가장 늙은 나무인 관음송을 시작으로 점차 숲을 이룬 것으로 여
겨지며 수십 년에서 100~400년 묵은 소나무들이 삼삼하게 우거져 하늘을 가리고 단종의 유배
처를 소중하게 품고 있다. 그럼 여기서 청령포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소나무숲에 감싸인 단종어소

청령포는 단종애사(哀史)의 주요 현장이자 장릉(莊陵)과 더불어 영월에 왔다면 꼭 들려야 되
는 영월의 대표 명소이다. 이곳이 크게 유명세를 탄 것은 소년왕 단종의 유배지란 점과 하늘
의 감옥 같은 척박한 지형, 그리고 270도나 크게 굽이쳐 흐르는 서강의 환상적인 모습 때문일
것이다.
서강은 형제인 동강(東江)과 속히 합세해 한강을 따라 보다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만 칼처
럼 솟은 산의 낙원인 강원도의 지형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장대한 세월 동안 오로지 굴곡 노
선 직선화를 위해 청령포 뒷쪽을 열심히 쪼아댔지만 지형이 단단하여 아직까지 성과가 없다.
하지만 직선화를 향한 굳은 집념은 여전하여 지금도 직선화 프로젝트를 놓지 않고 있다.

청령포의 주인공인 단종은 조선 6대 군주로 1441년 7월 23일,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
后) 권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휘(諱, 제왕의 이름)는 홍위(弘暐)로 1448년에 왕세손(王
世孫)에 책봉되었으며,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윤상(尹祥)에게 학문을 배웠다.
1450년 세종(世宗)이 승하하고 그의 첫 아들인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단종은 자연히 왕세자(
王世子)가 되었으며, 문종이 늘 병을 달고 살다가 재위 2년 만인 1452년 5월 18일, 승하하자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철부지 어린 왕자가 왕위에 오르니 왕을 둘러싼 권력 구도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초반
에는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은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이 단종을 보필하며 주도
권을 잡았는데, 세종의 아들이자 문종의 아우 일부가 능력도 좋고 야망이 크니 은근히 위협이
되었다. 그중에서 안평대군(安平大君)은 문무(文武)가 뛰어나고 다재다능했는데, 김종서와 뜻
이 통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견제하며, 의정부(議政府) 중심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를 추진했다.
그들의 견제에 위기를 느낀 수양은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홍달손(弘達孫) 등을 수하에
두고 기회를 엿보다가 1453년 10월, 불시에 김종서 집을 습격해 김종서를 죽이고, 왕명을 빙
자해 신하들을 모두 소환해 황보인과 조극관(趙克寬) 등을 때려죽였다. 이 사건이 그 이름 돋
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은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정권과 병권을 움켜쥐었고, 정인지(
鄭麟趾)와 한확(韓確) 등 자신의 측근을 정승에 앉혔다. 또한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해 왕의 이름으로 받기도 했다.
그렇게 수양의 위세가 강해지며 어린 왕 단종을 은근히 정신적으로 압박하자 의지할 데도 없
고 정신적 두려움에 염통이 쪼그라들던 단종은 결국 1455년 6일 11일, 큰숙부 수양에게 양위
의 뜻을 전하고 친히 대보(大寶)를 넘겼다. 이렇게 해서라도 숙부의 칼날을 피하고 목숨을 부
지하고자 함이었다. 하여 수양은 조선 제7대 군주인 세조(世祖)가 되었고, 단종은 상왕(上王)
으로 물러앉아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가만두질 않는다고 했던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잔뜩 반감
을 품은 박팽년(朴彭年)과 성삼문(成三問), 김문기(金文起) 등 많은 사대부(士大夫)들은 세조
와 그의 측근을 몰아내고 단종 복위를 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다가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이 오자 세조는 그들에게 연회를 베풀기로 했는데, 그때 칼
을 들고 제왕 뒤에 서서 호위하는 운검(雲劍)의 역할을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成勝)이 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세조를 처단하기로 한 것이다. 허나 뭔가 찜찜했던 세조는 운검을 세우지
않으면서 그 좋은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이후 적당한 기회는 오지 않았고, 단종 복위에 가담한 김질(金質)은 초조하다 못해 염통이 검
게 타들어가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밀고를 해버렸다. 이렇게 일어난 것이 그 유명한 사
육신(死六臣) 사건이다.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河緯地) 등의 단종 복위 추진에 뚜껑이 제대로 뒤집힌 세조는 그들을
고문하고 용산 새남터로 보내 사지를 절단 내어 죽였다. 그리고 단종은 사육신 등과 밀모를
했다고 여겨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유배처를 꼼꼼히 물색하다가 육지 속의 작은 섬과도
같은 이곳 청령포로 유배를 보낸 것이다.
하여 1457년 6월 22일 노산군으로 격하된 단종은 강제로 유배길에 올랐고 영도교(永渡橋, 청
계7가와 청계8가 사이)까지 따라온 부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와 단장의 이별을 나누었다.
이때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 어득해(魚得海)가 50명의 군사를 대동해 노산군을 호종했으
며, 영월까지는 6일이 걸려 6월 28일 청령포에 도착했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머물 기와집이 급하게 마련되었다. 그는 그 집에 머물며 책을 읽거나 노산
대에 올라 서울과 왕비를 그리워했으며, 관음송 가지에 걸터앉아 쉬기도 했다. 그렇게 하늘이
내린 자연산 감옥, 청령포에서 우울하게 생활하다가 그해 가을 홍수로 청령포 상당수가 물에
잠기게 되자 영월 객사(客舍)인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청령포 생활은 끝을 맺
는다.
허나 순흥(順興, 영주시 순흥면)으로 유배된 그의 또 다른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부
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된통 걸리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세조는 다
시 한번 뚜껑이 열리게 된다. '노산군을 저리 두면 계속 역모가 생길 것이다' 생각한 세조는
결국 후환을 제거하고자 조카에게 사약을 보내는 비정함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유시(酉時), 숙부가 보낸 쓰디쓴 사약을 들이키고 진한
피를 토하며 힘없이 쓰러지니 그때 그의 나이 불과 16세였다.

청령포는 북과 동, 남쪽 등 전체의 ¾이 서강에 감싸여 있고, 북쪽은 급하게 솟아나 낭떠러지
를 이룬다. 서쪽은 비록 땅과 붙어있긴 하나 육육봉(六六峰)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에 막혀
있어 어지간한 독종이 아닌 이상은 넘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다. 자연히 외부와 단절된 상태
로 고적하게 살아야 했으며, 첩첩한 산주름 속에 단단히 묻힌 외로운 곳이다보니 온갖 산짐승
들이 가득해 해가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을 정도였다.

그가 청령포에 있을 때,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거의 밤마다 몰래 찾아와 단종을 위로했
고, 생육신(生六臣)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원호(元昊)는 청령포와 가까운 제천시 송학면에 관
란정(觀瀾亭)을 짓고 매일같이 단종에게 진상할 음식과 서신을 표주박에 담아 서강에 띄워보
냈다. 그것을 청령포에 있던 단종이 받아보았고, 단종이 다시 떠내려보내면 이상하게도 강을
역류하여 관란정으로 갔다고 전한다.

때묻지 않은 강과 칼처럼 솟은 산, 삼삼하게 우거진 소나무, 거기에 역사까지 어우러진 아름
다운 명소로 수십~수백 년 묵은 소나무 덕에 4계절 내내 솔내음이 가득하며, 비록 단종에게
청령포는 지옥보다 더한 곳이겠지만 오늘날 나그네들에게는 잠시나마 정처 없는 마음을 내던
지고 싶은 아름다운 명소이다. 이런 곳에 오면 사진기도 흥분하여 작품들이 마구 나오며, 영
월의 대표 꿀단지이자 단종을 상징하는 명소로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

청령포 일대는 국가 명승 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영월10경 중 제2경으로 찬양을 받고 있다.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 68 (청령포로 133, ☎ 033-374-1317)


 

♠  청령포 둘러보기

▲  단종어소(端宗御所) 기와집

청령포 소나무숲에 들어서면 왼쪽(남쪽)에 돌담에 둘러싸인 단종어소가 있다. 이곳은 단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공간으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단종이 머물던 팔작지붕 기와집
이 있고, 동쪽에 궁녀와 시녀가 살던 초가 1동(행랑채)이 있다.
단종이 사라지자 화마(火魔)도 크게 뚜껑이 열렸는지 슬그머니 태워먹으면서 아련하게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00년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참고하여 그럴싸하게 재현했다.

기와집과 행랑채 초가에는 단종과 궁녀, 시녀, 아전을 재현한 밀납인형이 있으며, 가구와 책
장, 이불, 장독대 등을 갖다놓아 당시의 모습을 최대한 묻어나게 했다.


▲  방 3개, 부엌, 창고로 이루어진 5칸짜리 초가 행랑채
시녀와 궁녀들은 여기서 생활했는데, 한 방에 2명씩 6명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방 옆에는 부뚜막 연기가 슬쩍 피어오를 것 같은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음식물과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광)가 있다.

▲  초가 행랑채와 돌담, 그리고 삼삼하게 우거진 소나무숲

▲  깨끗하게 정리된 시녀의 작은 방

▲  속 빈 강정처럼 놓여진 장독대

▲  바느질하는 침모(針母)의 모습
단종을 위해 침침한 눈을 극복하며
옷 수선에 여념이 없다.

▲  부뚜막으로 이루어진 부엌
나이든 시녀가 단종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단종이 비록 강원도 산골로 쫓겨났지만 전직 제왕에다가 왕족이니 그의 생활공간은 관청 건물
못지 않은 규모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 바로 그의 공간인 것이다.

단종은 햇살이 잘들어오는 남쪽 방에 푸른 도포를 입고 책을 읽는 잘생긴 도련님처럼 재현되
었는데, 바로 옆방에는 어소를 관리하고 단종의 시중을 드는 아전이 바짝 엎드려 단종에게 인
사를 올리고 있고 그 곁에는 다기(茶器)를 머금은 조그만 상이 있다.


▲  기와집 내부, 단종의 방

▲  책을 보며 시름을 달래는 단종

▲  시녀가 생활하던 기와집 방


▲  단종이 지은 어제시(御製詩)
단종의 한과 상처 받은 어린 마음이 잘 나타나 있어 나그네의 옷깃을 잠시
여미게 한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해매니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물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

어소 기와집 옆에는 비석을 품은 1칸짜리 비각(碑閣)이 있다. 그 안에는 1763년에 영조(英祖)
의 명으로 세운 유지비가 있는데, 이는 터만 아련하게 남은 단종어소의 위치를 알리고자 세운
것으로 비석의 높이는 162cm이다.
하얀 피부의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웠는데, 그 앞면에
비석의 이름이 된 '단묘재본부시유지비'라 쓰여있고, 뒷면에 '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
秋 涕敬書令原營竪石 地名 淸泠浦'라 쓰여있어 조성 시기와 이곳 지명을 알려준다.
여기서 황명(皇明)은 조선이 쓸개까지 내주며 엄청나게 굽신거리고 떠받들던 명나라이고, 숭
정은 명나라 마지막 제왕인 의종(毅宗)의 연호로 숭정 무진은 1628년이다. 그때를 기준으로
계미(癸未)년이 3번이 지난 해의 가을에 세우니 그때가 1763년 가을이다. (조선의 군주와 위
정자, 선비 상당수는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명에 대한 아주 꼴사나운 사대주의를 일삼으며
명을 그리워하고 나라의 국력을 개판으로 만듬)
'涕敬書令原營竪石'은 원주감영에 영을 내려 슬픔과 공경으로 세웠다는 뜻이며, '지명 청령포
'는 말 그대로 이곳의 지명이 청령포임을 뜻한다.

오랫동안 홀로 단종어소터를 지키며 소나무 그늘에 있다가 2000년에 비석 주변에 어소가 복원
되면서 어소 뜨락에 있게 되었다. 물론 비석의 위치는 그대로이다.


▲  비각에 소중히 담긴 단묘재본부시유지비

▲  햇님도 맥을 못출 정도로 무성함을 자랑하는 청령포 소나무숲
아직 대낮임에도 숲속은 벌써부터 어두컴컴하다.

청령포 한복판에는 관음송이라 불리는 장대한
소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는 청령포 소
나무의 시조로 다른 소나무들보다 하늘과 더욱
맞닿아있어 그의 위치와 위엄을 실감케 한다.

관음송의 높이는 30m, 가슴높이 둘레 5.19m로
1.6m 높이에서 줄기가 2갈래로 갈린다. 다른
소나무에 비해 줄기 피부가 유난히 붉고 줄기
중간에 잔가지가 없이 매끈하게 자란 제법 아
름다운 소나무로 단종이 이 나무 줄기에 걸터
앉아 시름을 달랬다고 전한다.
지금이야 아주 큰 나무가 되어 오를 엄두도 솟
지 않지만 당시 관음송의 나이를 60~80년 정도
로 추정하고 있으니 줄기가 갈라지는 곳까지는
능히 올랐을 것이다.
나무의 나이는 약 600여 살로 보고 있으며, 그
의 이름은 관세음보살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고 해서
관(觀), 그의 슬픈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음(
音)을 붙여 관음송이라 했다고 한다. 이 이름
은 후대에 단종을 섬기던 영월 주민들이 지어
낸 것으로 보인다.

▲  청령포 관음송(觀音松)
- 천연기념물 349호

나라에 큰 일이 터질 때마다 나무의 피부가 검게 변해 나라의 변고를 알려주었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 어쩌면 단종의 혼이 깃든 나무로 여기고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  단종의 손때가 담긴 망향탑(望鄕塔)

관음송에서 북쪽 벼랑으로 가는 길이 2갈래 있다. 왼쪽으로 가면 망향탑, 오른쪽은 노산대로
북쪽 벼랑은 한 줄기로 이어져 있어 어느 곳을 먼저 오르던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서강이 크게 굽이쳐 흐르는 곳에 천연의 감옥인 청령포가 빚어져 있고 3면이 죄다 강에 막혀
있는데 그중 북쪽은 각박하게 벼랑이 형성되어 있어 나름 절경을 자아내며, 여기서 바라보는
경치 맛이 아주 일품이다. 물론 단종에게는 이 모든 것이 지옥처럼 보였겠지만 우리 같은 나
그네들에게는 하루 머물고 싶은 천연의 명소이다.

노산대와 육육봉 사이 벼랑 위에 돌로 쌓여진 조그만 돌탑이 있다. 세상에서는 그를 망향탑이
라 부르는데, 단종이 청령포 생활을 했을 때, 궁궐과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이곳에 오를 때마
다 여기저기 흩어진 잡석을 주워 쌓았다고 한다. 청령포에서 대략 1달 가량 머물렀고 딱히 할
것도 없는 처지이니 이곳을 찾는 횟수가 꽤 많았음을 망향탑이 보여준다. 돌탑을 이루는 돌
가운데, 묵은 때가 담긴 돌은 단종의 손길이 닿았던 것으로 보이며, 하얀 피부의 돌은 근래에
얹혀진 것이다. 현재는 문화유산 보호 철책을 둘러 탑을 보호하고 있다.

과연 단종이 직접 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청령포에 남긴 유일한 흔적으로 그의 착잡한
마음을 가늠케 한다.


▲  망향탑과 노산대(소나무가 우거진 벼랑), 그리고 서강

▲  망향탑 서쪽 막다른 곳

망향탑 서쪽은 길이 막혀있다. 아주 가늘게 육육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통행이 금지
되어 있고, 양쪽이 거의 벼랑이라 오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산길 북쪽은 서강이 오랜 세월
을 두고 깎은 거의 수직 각도의 벼랑이며, 남쪽은 수직 정도는 아니지만 각박하긴 마찬가지이
다.

이곳에 전설을 남긴 단종도 이 가느다란 산길을 보며 도망칠 생각이 굴뚝 같았을 것이다. 허
나 그게 녹록치 않음을 알고 있고, 군사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으며,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편하게 자란 그가 이런 산을 넘는 것도 무척이나 어렵다.


▲  망향탑에서 바라본 서강
단종의 구슬픈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서강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청령포 곁을 보듬으며 유유히 자신의 갈 길을 간다. 하긴 서강이 그의
사연을 굳이 알 필요가 없다.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부질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노산대(魯山臺)

▲  금표비에서 바라본 노산대(魯山臺)

망향탑 동쪽에 각박하게 생긴 층암절벽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 노산대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이곳은 단종이 저녁 노을이 질 때나 마음이 갑갑할 때 친히 올라 시름을 달래던 곳이라 전하
며, 그 연유로 노산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망향탑 못지 않게 각박한 벼랑 위에 자리해 있는데, 지금이야 탐방로가 잘 닦여져 있어 접근
하기가 쉽지만 탐방로가 없다면 결코 쉽게 오르지 못할 언덕이다. 관음송과 금표비 북쪽에 자
리하며, 여기서 바라보는 서강과 주변 풍경이 제법 일품이다.


▲  금표비와 관음송 주변 소나무숲

▲  청령포 금표비(禁標碑)

노산대를 내려와서 나룻터로 가다보면 소나무숲 그늘에 고색의 때가 잔뜩 묻어난 금표비를 만
나게 된다.
이 비석은 단종이 유배된 청령포에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나무 벌채를 금하고자 1726년에 세
운 것으로 앞면에는 한문으로 '청령포 금표'라 쓰여 있고, 뒤면에 '동서 300척, 남북으로 490
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 또한 금지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를 통해 단종 시
절에도 그런 제약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측면에 '숭정(崇禎) 99년'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1726년임을 알게 해준다.
비석은 30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세월의 거친 손때로 피부가 잔뜩 헝클어져 있다. 혹 단종의
사연에 비석이 크게 운 것은 아닐까?

청령포 산책은 '나룻터 → 단종어소 → 관음송 → 망향탑 → 노산대 → 금표비 → 나룻터' 순
으로 했는데, 그 반대로 해도 무관하며, 이들은 청령포의 주요 구성원들이니 꼭 살펴보기 바
란다.


▲  금표비 주변 소나무숲

▲  배를 타고 다시 속세로 나오다 (청령포 강변)

금표비를 둘러보고 강변으로 나오니 어느덧 17시 반이 되었다. 청령포의 빼어난 경치에 잠시
눈 호강을 누린 관광객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대기하고 있는 배에 올라탄다. 이 배가 오늘의
마지막 배는 아니며, 관람시간이 18시까지라 청령포에 단 1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운행한다.

배를 타고 잠시만에 청령포 나룻터에 도착, 졸고 있는 차량을 깨워 영월의 이웃 고을인 충북
단양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하여 청령포 나들이는 막을 고하며, 끝으로 단종에게 사약을 전달했던 금부도사(禁府
都事) 왕방연(王邦衍)이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지은 시를 소개한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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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애사의 슬픈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고즈넉한 비구니 절집, 낙산 숭인동 청룡사 ~~~ (동망봉)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낙산 청룡사 '


▲  바깥에서 바라본 청룡사 우화루(雨花樓)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초파일에는 꼭 '석가탄신일 사찰 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을 들먹이며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을 중심으로 절 나들이를 벌이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자냐? 그것도 아니다. 허
나 언제부터인가 설레는 날의 하나가 되었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이번에는 어
느 절을 접수할까? 열심히 연구에 몰두했다.
허나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20세기 사찰 상당수는 인연을
지은 상태라 미답의 절은 거의 씨가 말랐다. 그래서 선택의 폭은 많이 좁아진 상태. 그렇
다고 서울 밖으로 나가기도 귀찮아서 옛날에 갔던 사찰 중, 볼거리가 많거나 급격히 소장
지정문화재가 늘어난 절을 선택하여 제일 먼저 낙산 청룡사를 찾았다


하지만 전날 지나친 과음과 새벽 귀가로 인해 15시에 비로소 두 눈이 떠졌다. 퇴근본능에
충실하며 자꾸 기울어만 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부랴부랴 길을 재촉하여 청룡사 밑에 자리
한 창신역에 이르니 시간은 벌써 16시가 넘어버렸다.


 

♠  낙산 청룡사 입문 (정업원터 비각)

▲  정업원(淨業院)터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호

창신역(6호선)에서 청룡사로 가다보면 경내 직전에 철책이 둘러진 비각(碑閣)이 마중을 한다.
청룡사의 일원인 그 비각은 한많은 인생을 살았던 조선 비운의 왕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
씨의 넋을 위로하고자 세운 정업원터 비각(정업원구기)이다. 그렇다면 정업원은 무엇을 하던
집이었을까?

정업원이란 제왕의 왕후나 후궁, 궁녀가 궁궐을 나와 살거나, 귀족 여인들이 비구니로 출가하
여 살던 곳이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의종(毅宗, 재위 1146~1170) 때
처음 등장한 것으로 봐서 고려 초나 중기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보통 제왕이 죽으면 그
의 후궁(後宮)과 궁녀는 출가하여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고, 왕족과 귀족 같은 경우 남편이 죽
으면 아내가 출가하여 머물기도 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개경(開京)에 있던 정업원을 서울로 가져왔다. 정업원 위치에
대해서는 창경궁(昌慶宮) 서쪽 설과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설이 있어 정확한 자리는 아리
송한 실정인데 동망봉 설은 정순왕후 송씨 때문에 잘못 전해진 것으로 영조가 1771년에 세운
정업원 비석이 그 설을 크게 부추겼다. (그 비석은 정업원이 없어진 지 160여 년 후에 세워짐)

정업원에 살던 비구니는 대부분 높은 계급의 여인이었고 주지는 보통 후궁이나 공주(옹주) 등
의 왕족이 담당했다. 그러다보니 왕실에서도 각별히 신경을 써서 노비와 별사전(別賜田, 제왕
이 특별히 내린 전답), 분수료(焚修料, 향불을 피우고 도를 닦는데 드는 비용)를 두둑히 지원
했다. 허나 유생들의 정업원 폐지 건의가 끊이지 않아 1448년 일시 폐지되기도 했으나 1457년
다시 문을 열었으며, 연산군(燕山君) 시절 다시 폐지되어 그곳에 독서당(讀書堂)이 들어섰다.
하지만 독서당이 옥수동(玉水洞)으로 이전되면서 비어있는 공간이 되었고, 그 공간을 손질하
여 1550년 다시 정업원으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유생들이 폐지하라며 아주 징하게도 징징거렸고 이에 왕실은 후궁들의 별처라 우기며
인수궁(仁壽宮)이란 간판까지 내걸었으나 유생들의 생떼 같은 반발을 감당하지 못하고 1612년
에 완전 폐지해버렸다. 그때 그곳에 살던 비구니는 모두 성밖 절로 쫓겨났다.

청룡사와 정업원하면 떠오르는 여인은 앞서 언급한 단종의 왕후, 정순왕후 송씨(1440~1521)이
다. 단종(端宗, 1442~1457)이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떨려나고 끝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
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강제 유배를 떠나자 왕후 역시 강제로 궁궐을 떠나야 했다. 그때 그들
의 나이는 불과 10대 중반, 송씨는 시녀 5명을 데리고 청룡사에 들어왔고, 단종 역시 같은 날
궁을 나와 여기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단종과 인근 영도교(永渡橋)에서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절로 돌아와 머리를 깎
고 비구니가 되니 이때 허경(虛鏡)이란 법명을 받았다.
이후 매일 동쪽(영월이 동쪽 방향임)에 자리한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안녕을 기원했으며, 단
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동쪽을 향해 크게 통곡을 하니 그 소리가 아랫마을까지 들렸
다고 한다.

세조(世祖)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조카며느리인 그에게 영빈정동(英嬪貞洞, 영빈전)이란
집을 내리고 식량을 주었으나 송씨는 그 일체를 거절하고 청룡사, 또는 그 인근에 묻혀 살면
서 자체적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는 자주동천(자지동천)에서 자줏물로 염색을 들여 그걸 팔았
는데, 염색을 할 때마다 빨간 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자주동천(자지동천)이 되었음>
또한 그를 동정하던 백성들이 끼니 때마다 푸성귀 등의 먹거리를 갖다 주었는데 그 행렬이 매
우 길었다고 하며, 조정에서 이를 못하게 막자 여인들이 몰래 지금의 동묘(東廟) 인근에서 장
터를 열어 송씨를 도우니 세상에서는 그 장터를 '여인시장'이라 불렀다.

송씨는 16세에 강제 죽음을 당한 남편 단종과 달리 무려 81년이나 살았다. 그에게는 참 지옥
같은 삶이었으리라. 1521년에 기나긴 삶의 끈을 간신히 놓았으나 그의 집안 역시 역적으로 몰
려 풍비박산이 난 상태라 마땅히 묻힐 데가 없었다. 그래서 단종의 누님인 경혜공주(敬惠公主
)의 시댁 집안인 해주정씨 집안에 묻혔다. 그곳이 바로 사릉(思陵)이다.


▲  정업원터<정업원 구기(舊基)> 비석을 머금은 비각
너무 철통같이 머금고 있어 비석의 존재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햇살조차도
감히 발을 들이지 못할 저 안에 들어있을 비석은 얼마나 답답할까?

▲  영조가 비석을 세우면서 친히 남긴 현판

1771년 영조(英祖) 임금은 창덕궁에 들렸다가 정순왕후의 슬픈 사연을 듣고 이곳을 찾아 비석
을 세웠다.
1칸짜리 비각이 비석을 꽉 조이듯 머금고 있어 그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정업원 옛터(구기)에
서 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란 내용이 쓰여 있으며, 비각 앞 현판에는 '前峯後巖
於千萬年(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리라)' 쓰여 있으니 이는 영조의 친필이다. 그밖에 동망봉
(東望峰)이란 바위글씨도 남겼으나 왜정 때 채석장이 들어서면서 강제로 가루가 되었다.

이 비석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원래 '정업원구기'였으나 이름을 쉽게 한다며 단순하게 '정
업원터'로 갈았다. 허나 정업원은 이곳에 있지도 않았다. 송씨로 인해 엉뚱하게 이곳으로 엮
이게 된 것이다.


▲  담장 사이에 자리한 청룡사 일주문(一柱門)

청룡사는 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해 있다. 옛날이야 주변이 죄다 숲과 밭두렁이었지만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위치로 20세기 이후 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춤을 추면서 이제는 완전히 도
시 속에 외로운 공간이 되었다. 절 남쪽과 동쪽은 창신동(昌信洞)과 숭인동(崇仁洞), 보문동
(普門洞) 주택가가, 서쪽과 북쪽에는 아파트가 높이 들어서 절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절 뒷쪽 언덕에 약간의 숲이 남아있긴 하나 산사(山寺)의 풍경은 와르르 녹아내려 근
처의 안양암(安養庵)처럼 속세에 완전 포위된 모습이다.

청룡사 일주문은 이곳의 정문으로 경내 바로 앞에 자리한다. 절 규모가 작고 주변이 싹 주거
지라 다른 산사와 달리 멀리 일주문을 내보내지 못했다. 문 좌우로 기와돌담을 둘러 절과 속
세의 경계를 가르고 있는데 '삼각산(三角山) 청룡사' 현판을 내걸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그런데 이곳은 엄연히 낙산 자락이고 북한산(삼각산)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니 '낙
산 청룡사'를 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낙산(낙타산)이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
)이라 그리 칭하기가 썩 내키지 않은 모양이다. 게다가 북한산 남쪽 줄기가 여기까지 이르고
있으니 삼각산을 칭하는 것도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다.


▲  약간 빛바랜 모습의 우화루 현판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경내 한복판이다. 정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있고, 오른쪽에는
선방(禪房)으로 쓰이는 심검당이, 왼쪽에는 요사(寮舍), 일주문 옆구리에는 법회와 강의 장소
로 쓰이는 2층 규모의 우화루가 경내를 가리며 앉아있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청룡사의 역사에 대해 잠시 풀어보도록 하자.

청룡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고려가 한참 후백제(後
百濟)와 다투던 922년 태조 왕건(王建)이 칙령(勅令)을 내려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이 들어선
위치가 한양(漢陽, 서울)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되는 산등성이라 청룡사라 했으며, 비구니
혜원(慧圓)을 초대 주지로 삼으면서 창건 초기부터 비구니 절로 시작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에 따르면 도선대사(道詵大師)가 태조의 아버지인 왕융(王隆)에게 고
려 건국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이씨 왕조가 일어날 한양의 지기(地氣)를 억누를 필요가 있다며
개경 주변에 절 10개와 천하에 3,800개의 비보사찰을 세우도록 일렀다고 한다. 그래서 태조가
그 유언에 따라 절을 세우니 청룡사는 바로 그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허나 고려 초기 창건설을 입증할만한 유물과 기록이 없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하며, 그나
마 가장 오래된 존재가 17세기에 조성된 석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식구이다. 게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서야 신뢰할만한 내력들이 쏙쏙 등장하고 있어 고려 중/후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
이 크다.

어쨌든 문을 연 이후, 1036년 만선(萬善)이 1차 중창을 했으며, 1158년 회정(懷正)이 2차 중
창을 벌였는데 부근의 보문사(普門寺)가 문을 연 이후, 처음으로 세워진 절이라 하여 '새절
승방'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3세기 중반, 무려 40년 가까이 이어진 몽골과의 전쟁으로 절이 제대로 황폐화되자 1299년 지
환(知幻)이 중창했다고 한다.

공민왕(恭愍王)의 왕후인 혜비(惠妃) 이씨가 말년을 보냈고, 태조 이성계의 딸로 1398년 왕자
의 난으로 남편<흥안군 이제(興安君 李濟)>과 두 동생<세자 이방석(李芳碩), 무안대군 이방번
(撫安大君 李芳蕃)>을 몽땅 잃은 경순공주(慶順公主)가 출가해 머물렀으며, 단종의 왕후인 정
순왕후 송씨도 이곳에 의지하는 등, 뒷전으로 밀려난 왕실 여인의 안식처 역할을 했다.
또한 1405년 태종(太宗)이 무학대사에게 명해 절을 중창케 했고, 1771년 영조가 직접 비석을
내리고 절 이름을 잠시 정업원으로 바꾸는 등, 왕실의 지원과 관심도 넉넉했다.

1512년에 법공(法空)이 중창하고 1624년 예순(禮順)이 중창을 했으며, 1813년 화재로 소실되
었으나 이듬해 묘담(妙潭)과 수인(守仁)이 다시 일으켜 세웠다.
1823년 순조(純祖)의 왕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깊은 병에 걸리자 그의 아비인 김조순(金
祖淳)이 청룡사를 찾아 기도를 올렸다. 기도의 효과인지 어의(御醫)의 노력인지는 몰라도 병
세가 호전되자 김조순은 너무 기뻐 절 이름을 다시 청룡사로 갈게 했다. 1853년에는 그의 아
들 김좌근(金左根)이 중창을 하는 등, 나라를 말아먹은 안동김씨 패거리의 원찰(願刹) 역할까
지 도맡으며 제대로 배를 불렸다.

1902년에 정기(正基)와 창수(昌洙)가 중창했고, 1918년과 1932년에는 상근(詳根)이 중창했으
며, 윤호(輪浩)가 1954년부터 1960년까지 대부분의 건물을 새로 손질하였다. 그리고 1973년
다시금 중창을 크게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  명부전 석조지장보살3존상

▲  지장시왕도

인근 보문사와 함께 서울에 대표적인 비구니(여승) 도량으로 대웅전과 우화루, 명부전, 산령
각, 심검당 등 8~9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2014년에 국가 보물로 지
정된 석조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일괄을 비롯해 지방문화재인 지장시왕도, 칠성도, 현왕도,
감로도, 가사도, 신중도, 석 삼불상, 독성도, 산신도, 정업원터 등 지정문화재 11점을 간직하
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대웅전, 명부전, 산령각에 분포해 있으며, 구한말에 제작된 가사도(袈裟圖,
울 지방유형문화재 205호
)와 철원 심원사(深源寺)에서 넘어온 석 삼불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7호
)은 심검당에 들어있다. (이들의 위치는 바뀔 수 있으며, 나는 그들을 만나지 못했음)
도시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산사의 내음은 누리기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도시 속의 조그만 오
아시스 같은 존재로 비구니 고찰의 향기를 잔잔하게 불어주며, 비록 지금의 건물은 1950년대
이후 것들이라 겉으로 우러나오는 고색의 내음은 맡기 힘드나 건물 안에 오래된 불상과 불화
들이 앞다투어 고색의 향기를 불어주고 있다. 그러니 겉모습만 살피지 말고 반드시 대웅전과
명부전, 산령각, 심검당 안에도 들어가 그들을 살펴보기 바란다. 그래야 청룡사의 진정한 깊
이를 누릴 수 있다. 즉 꿀단지의 단지만 보려고 하지 말고 그 안에 담긴 꿀을 보란 이야기다.

흥겨운 초파일 분위기에 맛있는 절밥과 먹거리를 기대하고 왔건만 예상 밖으로 절은 무척 썰
렁했다. 오색 연등의 물결과 관불의식의 현장이 없었다면 오늘이 초파일인지 모를 정도로 말
이다.
아무리 시간이 16시가 넘었어도 아직은 사람이 넘칠 시간인데 생각 밖으로 사람도 너무 없고,
심검당 주변을 아무리 기웃거려도 절밥이나 먹거리를 주는 분위기도 없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먹거리를 챙기지 못한 초파일 절로 쓰라리게 기억에 남게 되었다. <이곳 이후에 간 절에서는
국수와 떡을 얻어먹었음>

※ 낙산 청룡사 찾아가기 (2018년 5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창신역 3번 출구를 나와서 도로(동망봉길)를 따라 도보 3분
* 지하철 1/6호선 동묘앞역(10번 출구)이나 1/4호선 동대문역(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청룡사(보문파크뷰자이아파트)에서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17-1 (동망산길 65, ☎ 02-763-4031)


▲  청룡사 심검당(尋劍堂)
절 뜨락의 하늘을 차지해버린 초파일 오색 연등의 위엄 앞에 심검당은
지붕이 거의 지워지는 굴욕(?)을 당했다.


 

♠  청룡사 명부전, 산령각

▲  청룡사 제일의 보물을 품은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하며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명부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졌다. 정면 3칸
,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장보살과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이 봉안되
어 있는데, 지장보살3존상을 비롯해 시왕상과 귀왕(2점), 판관(2점), 사자(2점), 동자상(1점),
장군상(2점)은 국가 보물로 지정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들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이들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청룡사 석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로 2014년 3월 지
방유형문화재에서 보물 1821호로 계급이 높아짐)


▲  명부전 석조지장보살3존상 - 보물 1821호

명부전에는 파란색 승려 머리를 한 지장보살이 조촐히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다. 돌을 빚어서
금색 옷을 입힌 것으로 그 좌우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합장인(合掌
印)을 선보이며 서 있다.

지장보살상의 높이는 92cm로 얼굴이 거의 네모난 편인데 이는 승일(勝一)이 만든 작품에서 많
이 나타난다. 머리가 좀 크다보니 신체비례가 그리 맞아보이지 않으며 몸에는 얇아보이는 법
의(法衣)를 걸쳤다. 달랑 2가지 색이 전부인 지장보살과 달리 밝은 색채의 옷을 입은 도명존
자와 무독귀왕은 조금 경직된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하며(문화재청 홈페이지에 그렇게 나옴),
시왕 같은 경우 각자의 스타일을 지니며 충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지장보살3존상과 주위에 배열된 시왕상과 그의 식구들(지장탱, 시왕탱 등의 그림은 제외)은
17세기에 승일이 중심이 되어 조성된 것으로 이들은 건강 상태도 좋고 처음 봉안된 절과 불상
을 만든 승려, 시주자 이름이 적힌 발원문(發願文)이 전하고 있어 17세기 불교 조각을 이해하
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어준다. 즉 그 발원문 때문에 이들이 보물로 승진된 것이라 보면 된다.
조성 관련 절대 기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 기록 덕분에 국보나 보물로 오른
건물이나 불상, 탱화, 조각품이 적지 않다.

조성 관련 글자를 넣어둔 그 당시 절의 작은 배려가 그들을 무척 돋보이게 하였으며, 현재 우
리들에게 적지 않은 그 시절의 상황을 속삭여주는 시간적 유물이다.


▲  색채감이 돋보이는 좌측 시왕상 5점과 동자, 판관(判官), 시왕탱
이들은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시왕탱과 일부 동자상 제외) 다들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며 명부전 내부를 화사하게 수식한다.

▲  우측 시왕상 5점과 동자, 판관, 시왕탱

▲  우측과 좌측 가장자리에 자리한 판관과 사자, 금강역사상, 장군도


▲  산령각(山靈閣, 산신각)

대웅전 뒷쪽 높은 곳에는 산신을 봉안한 산령각이 조용히 자리해 있다. 달랑 1칸에 불과한 맞
배지붕 건물로 그 안에 100년 이상 묵은 산신도와 독성도가 깃들여져 있다.


▲  산령각 산신도(왼쪽)와 독성도(오른쪽)

▲  청룡사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1호

산신도와 독성도는 유리 액자에 담겨져 있어 반사되는 빛으로 인해 온전히 사진에 담기는 것
을 허락치 않았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내 모습도 조금 반사되어 나와 다소 쑥쓰럽다.

산신도는 1902년 4월에 조성되어 봉안된 것으로 금어 두흠(金魚 斗欽)이 그렸으며 비구니 충
근(忠根)이 시주를 했다. 그림 중앙에는 주인공인 산신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동자와 긴
꼬랑지를 살랑거리는 호랑이가 배치되어 있다. 그외에 산신의 활동무대인 산과 소나무 등이
있어 산신도의 기본적인 모습은 갖추었으며, 그림 우측 밑에 조성 관련 내용이 적혀있다.


▲  청룡사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0호

독성도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 할배를 담은 것으로 산신도와 비슷
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독성을 비롯해 동자와 천태산 등이 그려져 있으며 그 앞에는 하얀 피부의 조그만 독성상이 유
리막 안에 담겨져 있다.


 

♠  청룡사의 보물 창고, 대웅전(大雄殿)

▲  연등을 뜨락에 늘어트린 대웅전

청룡사의 중심인 대웅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
이다. 안에는 석가3존불을 비롯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지장시왕도와 칠성도, 현왕도, 감로도,
신중도 등이 담겨져 있다.


▲  초파일 행사의 백미,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간만의 외출에 신이 났을까? 그의 표정이 무척 해맑아보인다. 허나 손님도 없고
햇님도 무심하게 기울고 있으니 조금 있으면 다시 어두컴컴한 곳으로 들어가
1년을 기다려야 된다. 그에게 그 1년은 마치 1,000년과 같으리라...

▲  청룡사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2호

칠성도는 칠성 식구를 담은 그림이다. 1868년에 조성된 것으로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
심으로 칠성원군(七星元君) 등이 빼곡히 담겨져 있어 정신이 없다. 산신도와 독성도는 참 단
촐한데 반해 칠성도는 식구들이 너무 많다. 그만큼 칠성 식구들에게 바라는 것이 많다는 이야
기겠지..


▲  영가단(靈駕壇)에 가려진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4호

감로도는 1898년에 그려진 것으로 중생들에게 감로(甘露)와 같은 법문을 베풀어 해탈(解脫)시
킨다는 의도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보통 영가(靈駕, 죽은 사람)를 위한 그림으로 쓰이며 그림
을 보면 대도시마냥 참 복잡하기 그지 없는데, 전체적인 내용은 부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目
連尊者)가 아귀도(餓鬼道)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고자 부처에게 그 방법
을 묻고 답을 듣는 것이다.
그림은 보통 3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상단에는 아미타3존블을 비롯한 7명의 여래(如來)와 지
옥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그려져 있고, 중간에는 지옥의 고통
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절차를 그린 반승(飯僧) 장면과 천도의 대상인 아귀(餓鬼)가 공양을 받
들어 먹는 장면을 그렸다. 그리고 하단에는 지옥과 현실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다양하게 묘
사되었다.


▲  청룡사 현왕도(現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3호

붉은 색채의 현왕도는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저승의 시왕(10왕) 가운데 가장 힘이 센
염라대왕(閻羅大王)을 다룬 그림이다. 그는 현왕(現王)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사람이 숨을 거
두고 3일 뒤에 영혼을 천도하는 의식을 할 때 사용된다. 그러니까 죽은 이의 내세와 극락왕생
을 위한 그림이다.

현왕탱은 현왕신앙이 유명하던 조선 후기에 많이 나타나며, 현왕을 비롯하여 판관과 사자 등
저승의 식구들과 그에게 심판을 받는 영가가 그려져 있다.
나도 언젠가 그의 면전에서 저럴 날이 있겠지. 나는 그에게 과연 어떤 말을 듣게 될까? 솔직
히 그리 착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 이득과 명예를 위해 뛸 뿐이다. 이 거지 같은 세
상에서 착하고 순하게 사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니까..


▲  청룡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1호

지장시왕도는 원래 명부전에 있었으나 내가 갔을 때는 대웅전에 머물러 있었다. 1868년에 그
려진 것으로 푸른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지닌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를 비롯하
여 시왕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빈틈 없이 자리해 있다. 그러니까 앞서 명부전의 구성 요소
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한 지장3존상은 노란 광배 안에 들어있어 저승의 특별한 존재임을 알려
준다.

이것으로 대웅전에 깃든 오래된 그림은 모두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법당의 필수 그림인
신중도(神衆圖)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나를 피해 이웃 심검당으로 마실을 간 모양이다. 그
리하여 청룡사에 깃든 문화유산 3점(신중도, 가사도, 석 삼불상)과 인연을 짓지 못했다. 아무
래도 다시 또 오라는 청룡사의 뜻인 모양인데 다행히 괘불(掛佛)이나 복장유물처럼 그리 만나
기 어려운 존재들은 아니다.


▲ 대웅전 금동석가3존불과 석가후불탱
20세기 후반에 새로 만든 3존불로 가운데 석가불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고
그 좌우로 수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해 석가3존불을 이루고 있다.

▲  경내 뒷쪽 언덕에 자리한 하얀 피부의 약사불(藥師佛)

대웅전 뜨락에서 요사 옆으로 난 길을 가면 정업원터 비각 윗쪽이다. 여기서 오른쪽 길을 오
르면 그 길의 끝에 근래 지어진 약사여래불이 환한 표정으로 맞이한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숲이 약간 우거져 있는데, 그 현장에 터를 닦고
중앙에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을 만든 다음 약사여래불을 앉혔다. 주변에는 녹음(綠陰)이
잠긴 나무들이 있고, 북쪽과 동쪽 너머는 속인(俗人)들의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도시 속에
갇힌 청룡사의 현실을 말해준다.


▲  약사불에서 바라본 숭인동과 동망봉
바로 밑에 보이는 기와집은 산령각과 대웅전, 심검당이다.


약사불 주변에서는 아주 손바닥만한 천하가 조망되고 있는데 청룡사 경내와 숭인동, 숲이 우
거진 동망봉이 그 작은 천하를 이루고 있다.
동망봉은 정순왕후가 단종이 숨진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짓고 남편의 극락왕생
을 빌던 곳으로 동쪽을 애타게 바라본 곳이라 하여 동망봉이라 불린다. 그곳에는 숭인근린공
원이 닦여져 있는데, 이렇듯 청룡사와 동망봉, 낙산 동쪽에는 정순왕후의 흔적과 애환이 진하
게 깃들여져 있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이렇게 하여 초파일 청룡사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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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미인을 닮은 아름다운 폭포, 삼척 미인폭포 (여래사, 통리협곡)



' 백두대간에 숨겨진 아름다운 비경,

삼척 미인폭포(美人瀑布) '

▲  미인폭포


예전 설날 연휴에 삼척(三陟) 미인폭포를 찾은 적이 있었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태백 일대에 쏟아진 지독한 눈폭탄으로 눈이 첩첩산중으로 쌓여 폭포까지 내려가지도 못
하고 폭포 남쪽 여래사에서 휴전선 너머의 북한 땅을 대하듯 바라봐야 했다.
'폭포가 바로 저 앞인데.. 7~8분만 내려가면 폭포인데..' 얼마나 서운했던지. 하지만 무
심한 폭설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폭포로 가는 길이 썩 좋은 편도 아니고 그렇다
고 겨울 산행에 걸맞는 장비도 갖추지 못한 터라 자칫 무모하게 굴었다가는 몸만 상한다.
하여 절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일단 만족하고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을 기약하며 억지로
두 발을 돌렸다. (☞ 미인폭포 겨울 여행기 보러가기)

그 이후 미인폭포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으며 애타게 기회를 엿보던 중, 드디어 기
회가 찾아왔다. 멀리 남동임해(南東臨海)지역의 아는 이들이 6월 끝 무렵에 단체로 그곳
으로 여행을 간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하여 그들에게 연락을 취해 폭포 인근 통리3거
리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다시금 찾아온 미인폭포와의 인연, 그 인연의 줄을 꽉 잡으며 아침 일찍 정동진(正東津)
으로 떠나는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싣고 거의 3시간 50분을 달려 고원의 도시 태백(太白
)의 관문, 태백역에 두 발을 내렸다. 그런 다음 태백역전에 있는 태백시외터미널에서 물
흐르듯 자주 있는 태백시내버스 4번을 타고 통리(通里)로 넘어갔는데, 아직 시간이 넉넉
하여 오랜만에 통리역을 만나보기로 했다.


 

♠  통리역에서 여래사까지

▲  영동선 통리역(通里驛) 왕년의 모습 (2012년 6월)

한때 통리의 관문이었던 통리역은 1940년 8월에 문을 열었다. 이 땅에서 2번째로 높은 곳에 자
리한 철도역으로 비록 역사(驛舍)의 규모는 작으나 태백 지역의 수많은 석탄과 화물을 취급했
고, 청량리와 동대구, 부전, 강릉으로 가는 열차가 꼬박꼬박 바퀴를 멈추었던 역이다. (새마을
호와 무궁화호 일부는 통과함)
특히 통리역에서 심포, 흥전, 나한정을 거쳐 도계로 내려가는 길은 우리나라 철길 가운데 가장
험난한 코스로 흥전과 나한정 사이에 스위치백(Switch-back) 구간을 두어 열차가 5분 정도 뒷
걸음질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통리역은 해발 680m, 통리재 밑에 자리한 도계역(삼척 도계읍)은 약 240m로 무려 440m의 해발
차이가 난다. 그러다보니 완전 하늘과 땅을 오가는 기분이다. 승객들이야 이 재미난 풍경에 신
이 나겠지만 열차와 그것을 움직이는 기관사는 그야말로 진땀을 뺀다. 조금만 실수를 해도 큰
사고로 이어지는 난코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두대간의 눈칫밥을 줄이고자 1999년 12월 철
도 개량 사업에 들어갔는데, 워낙 큰 공사라 무려 12년 7개월의 대공사 끝에 2012년 6월 27일
솔안터널(16.7km)이 개통되었다. 개량사업의 99%는 바로 이 터널이다.

솔안터널은 동백산역에서 도계역으로 이어지는 이 땅 최대의 땅굴로 동백산~도계 구간 운행시
간이 36분에서 16분으로 20분이나 단축되었고, 운행거리는 19.6km에서 17.8km로, 선로 용량은
1일 30회에서 35회로 증대되어 열차 여객 및 물류 수송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 개량 사업으
로 겨우 '강릉~영주' 완행 무궁화호 열차가 1회 멈추던 동백산역은 크게 덕을 보아 통리역 열
차가 거의 그대로 동백산역에 정차하게 되었다.
허나 양지가 있으면 반드시 음지도 있는 법이라 통리역은 그 반대로 개량 사업의 철저한 음지
가 되었다. 솔안터널 개통과 함께 통리역을 거치던 여객열차는 더 이상 이곳으로 바퀴를 굴리
지 않고 동백산역에서 바로 터널로 빠지기 때문이다. 하여 통리역의 여객 업무는 모두 동백산
역에 넘어갔고, 통리역은 간이 화물역으로 존재감이 크게 하락하였다.

통리역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여객 열차가 들어오지 않으니 열차가 들어올 때마다 타고 내
리던 사람들로 잠시나마 시끌벅적하던 풍경은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통
리 상권도 크게 위축되었다.


▲  통리재 정상인 통리3거리

현역에서 물러나 한가한 신세가 된 통리역을 오랜만에 둘러보고 통리3거리로 이동했다. 여기서
일행들에게 연락을 취해 도착을 알리고 차분히 기다렸다.

통리3거리는 통리재(송이재) 정상으로 해발 720m이다. 여기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도계와 삼척,
동해로 이어지며, 동쪽으로 가면 미인폭포와 너와집으로 유명한 신리(新里), 벽지 계곡의 진수
를 보여주는 동활계곡과 가곡천을 거쳐 동대해(東大海)가 있는 호산으로 이어진다.
하늘 아래 첫 동네다보니 구름과 안개가 가득 끼어 고개 밑 세상은 보이질 않는다. 게다가 아
무리 여름의 한복판이라고 해도 태백 지역은 여름 제국(帝國)이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한다. 그
날 서울은 거의 30도에 이르렀는데 태백은 고작 20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만큼 이곳은 첩첩
한 고산지대이다.

통리3거리에서 멀뚱히 기다린지 거의 20분 만에 남쪽 사람들을 태운 관광버스가 내 앞에 그 육
중한 바퀴를 멈추었다. 반가운 마음을 내비추며 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미인폭포 입구에 도착
했다. (통리3거리에서 미인폭포 입구까지 약 800m)
미인폭포 입구에서 여래사 사적비까지 차량들이 안심하게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닦여져 있으나
대형버스가 들어가기에는 많이 버겹다. 그래서 모두 입구에서 내려 걸어갔다.


▲  여래사로 인도하는 숲길

여래사로 가는 숲길은 늘씬하게 솟은 키다리 나무로 가득하다. 백두대간의 힘찬 기운을 무럭무
럭 먹고 자란 탓일까? 울창한 숲을 이루며 하늘을 가린 숲의 기세에 눈에 뵈는 게 없다는 여름
제국도 꼬랑지를 내리고 슬금슬금 피해간다.
숲이 베푼 선선한 바람과 숲내음은 사람들의 안구와 마음을 제대로 정화시켜주며, 길의 경사도
그렇게 각박하지 않아 그리 힘든 것은 없다.

       ◀  혜성사 사적비(慧聲寺 史蹟碑)
숲길을 6~7분 오르면 때깔이 고운 혜성사 사적
비가 마중을 한다. 혜성사는 여래사의 예전 이
름으로 바로 여기까지 차량 진입이 가능하다.
사적비 앞에는 차량이 쉴 수 있는 주차장이 있
는데, 요즘 미인폭포 나들이 수요가 제법 늘어
나면서 관리비 명목으로 주차비를 받고 있다.
(이제는 입장료까지 받고 있음)


▲  사적비(주차장)에서 여래사로 내려가는 산길

지금이야 산길에 이렇다할 방해물이 없지만 2012년 초까지만 해도 짧게 목책이 둘러져 있었다.
절과 폭포로 내려가는 길도 오로지 여기 하나 뿐이고 길 양쪽 또한 각박한 내리막이라 목책을
꽁꽁 닫아걸면 넘어가기도 힘들다.
목책을 설치한 큰 이유는 미인폭포 관람객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폭포를 가려면 무조건 절
을 거쳐가야 되는데 절에서는 기도에 방해가 된다며 관람객들을 차갑게 대해 늘 말썽이 많았
고, 길목에 목책까지 닦아놓아 관람객의 통행까지 방해했다.
이렇게 안좋은 배경을 안고 태어난 목책은 2012년 봄에 새로 부임한 주지승이 절과 폭포를 찾
는 중생의 발걸음을 막는 것이 아니라며 싹 철거하여 예전보다는 깨끗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여래사로 내려가는 산길

사적비에서 여래사까지는 급한 벼랑을 동반한 내리막길의 숨가쁜 연속이다. 매우 가파른 경사
라 길이 지그재그로 정신없이 이어져 사람들의 혼을 다 빼놓으며, 길 옆은 거의 50~60도의 낭
떠러지이다. 특히 길이 구부러지는 부분은 거의 70~80도의 천길 낭떠러지로 동쪽 굽이 부분은
그나마 통리협곡이 가까이에 보여 덜 아찔하지만 서쪽 굽이 부분은 영동선(嶺東線) 열차도 울
고 넘었던 통리재를 비롯하여 통리재 아랫 세상(삼척시 도계읍 심포리, 흥전리)이 까마득하게
보여 염통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다.
자칫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정말 보이지 않는 저 고개 밑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야말로 하늘
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격이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더욱 조심에 조심을 기해 내려가야 된다.


▲  서쪽 굽이 부분 - 숲 너머로 통리재가 보인다.

▲  사적비와 여래사 중간 부분 산길
관광객들을 위한 안전시설은 거의 없다. 돌다리도 두들겨 패고 건너는 심정으로
조심 조심 발을 움직이는 수 밖에는~~

▲  여래사 남쪽에 놓인 철다리

그렇게 간을 쫄깃쫄깃 구워가며 내려가니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여래사가 드디어 그 모습을 비
비추고 절 남쪽 계곡에 놓인 철다리를 건너면 여래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  하늘의 감옥 같은 통리협곡에 둥지를 틀어 미인폭포의 후광을
단단히 보고 있는 고적한 절집, 여래사(如來寺)

▲  통리협곡에 둥지를 튼 여래사 (겨울 설경)

통리협곡 동쪽 비좁은 곳에 둥지를 닦은 여래사는 1960년 4월에 창건된 조촐한 산사(山寺)이다.
원래 이름은 혜성사(慧聲寺)로 근래에 이름을 갈았으며 가파른 통리재로 이어지는 서쪽을 빼고
는 동/남/북쪽이 완전히 산으로 막힌 하늘의 감옥 같은 곳이다.
처음에는 조그만 기도처로 시작했으나 미인폭포의 덕을 제대로 본 탓인지 신도가 꾸준히 늘어
나 대웅전과 삼성각 등 무려 6~7동의 건물을 갖추며 제법 발전을 보였다. 하지만 터가 협소하
고 경사가 하나같이 급한 곳이라 그런 지형의 눈치 때문에 건물 크기는 모두 작으며, 산자락을
깎지 않는 이상은 경내를 넓힐 수도 새롭게 건물을 놓을 공간도 적당치 않다.

철다리를 건너 요사의 좁은 옆구리를 지나면 경내 서쪽을 이루고 있는 요사(寮舍) 한복판에 이
르게 된다. 'ㄱ'자 모양의 요사와 '一' 모양의 요사가 바로 붙어있어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보
이는데, 이들 건물은 승려와 신도의 생활공간으로 그들 사이에 좁은 뜨락이 있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요사와 절지킴이 누렁이

좁은 산자락을 비집고 간신히 터를 다진 경내 동쪽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
여 삼성각(三聖閣)과 산령각(山靈閣), 범종각(梵鍾閣) 등이 일제히 폭포가 있는 북쪽을 바라보
고 있다. 다들 조촐한 모습으로 건물 현판은 한문이 아닌 한글로 쓰인 것이 눈길을 끌며 건물
앞 뜨락은 매우 가늘고 좁다.


▲  단청이 고운 여래사 대웅전 (겨울에 찍은 사진)

▲  대웅전 옆에 자리한 범종각
범종을 비롯하여 목어(木魚)와 바깥에 매달린 법고(法鼓, 북) 등을 갖추고 있다.

▲  여의주를 머금은 목어의 위엄
미인폭포에 단단히 눈이 먼 것일까? 아니면
폭포 전설에 나오는 미인을 꿈꾸는 것일까?
눈동자가 부었다.

◀  범종각에 안긴 범종(梵鍾)
범종 피부의 여래사의 옛 이름인 혜성사가
쓰여 있다. 저 종을 심산유곡인 이곳까지
어떻게 운반해왔을까?


▲  1칸짜리 삼성각
삼성각은 보통 산신과 칠성,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이나 이곳은 산신과 칠성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독성은 어디로 마실을 갔으려나..?)

▲  삼성각에 봉안된 산신탱(山神幀)과 칠성탱(七星幀)

왼쪽 산신탱에는 흰 수염의 산신 할배를 비롯하여 호랑이와 동자(童子) 등 산신 식구들이 그려
져 있다. 산신 왼쪽(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에는 그의 거처인 산이 흑백으로 그려져 있어
칼라와 흑백 사진을 원근감에 맞쳐 겹쳐놓은 듯 하다.
빨간색 투성이인 오른쪽 칠성탱은 선의 미가 물씬 묻어나 여래사 탱화 중에 단연 돋보인다. 이
들은 모두 20세기 후반 것으로 시간이 100년 이상 흐르면 20세기 후반 불화 양식으로 우리나라
미술사 관련 서적에 소개될 지도 모르니 미리 눈도장을 찍어두자.


▲  경내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한 산령각(山靈閣)

▲  산령각에 봉안된 존재들 (산신과 단종 임금)

산령각은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이미 삼성각에 산신상과 산신탱이 있건만 따로 산령각을 만
들어 별도의 산신상과 산신탱을 봉안하고 있다. 그러니까 산신상/산신탱이 각각 2개씩 있는 것
이다. 왜 그렇게 산신으로 도배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절이 첩첩한 산주름에 묻혀있다보니 산
신에게 더욱 잘보이려는 의도로 그리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산신탱은 매우 오래된 듯, 꽤 빛이 바래 보이는데 적어도 50~60년 이상은 묵은 듯 싶으며, 그
옆에는 어느 선비가 백마에 탄 곤룡포(袞龍袍)를 입은 제왕에게 무언가를 바치고 있는 그림이
눈길을 끈다. 절에 왠 선비와 왕의 그림일까? 그것은 단종(端宗)과 충신 추익한(秋益漢)의 일
화를 머금은 그림이다.

단종(1441~1457)은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世祖)>에게 강제로 왕위에서 떨려난 불운
의 어린 군주로 계속되는 단종 복위 운동으로 인하여 결국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
(寧越) 청령포로 유배를 오게 되었다.
벼슬에서 물러나 영월에서 한가로운 인생을 보내고 있던 추익한은 그 소식을 듣고 자주 단종을
찾아와 문안 인사를 올렸다. 단종이 시(詩)를 좋아하니 그와 함께 시를 지으며 그와 놀아주었
고, 산에서 딴 산머루나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진상하는 등 온갖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추익한은 산에서 단종에게 줄 머루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단종이 곤룡포를 휘
날리며 백마를 타고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난데없는 그의 등장에 '이게 뭔일이지..? 유배
가 풀렸나?'
적지 않게 놀랬으나 그래도 반가운 마음에 산머루를 쓱 바치며 '전하 어디로 가십
니까?'
물었다. 그러자 단종은 '태백산에 가는 길입니다. 산머루는 처소에 갖다 두세요' 하고
는 말을 타고 사라졌다.

추익한은 '이거 내가 귀신에 홀렸나? 잘못 본 거 아닐까?' 여기다가 문득 조짐이 좋지 않아 단
종이 머물던 영월읍내 관풍헌(觀風軒)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가보니 글쎄 단종은 사약을 마시
고 이미 죽어있던 것이 아닌가 (그때가 1457년 10월 26일) 그 참담한 광경에 충격을 받은 추익
한은 크게 곡소리를 내며 결국 자살하고 만다.

단종은 이승을 떠나자 태백산으로 들어가 그곳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강제로 숨
을 거둔 단종에 대한 강원도 남부 지역 백성들의 눈물 어린 동정심은 그를 천하 제일의 성산(
聖山)인 태백산의 산신으로 만들어 길이길이 받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강원도 삼척과 정선,
영월 지역의 많은 사찰에는 단종과 추익한이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을 봉안하고
있으며, 이 지역 서낭당이나 당집에서도 그 그림을 봉안하며 단종을 신으로 받든다.


▲  범종각 옆에 있는 샘터

여래사에 2번이나 발을 들였지만 샘터는 처음 본다. 그새 새로 만든 것일까? 그건 아니다. 예
전 겨울에 왔을 때는 눈에 완전히 묻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샘터는 미인폭포 계곡에서 끌어올린 맑은 물로 맛이 시원하고 달달하다.


▲  옛날 시골 부엌처럼 정겹기 그지 없는 여래사 부엌

옛날 시골 부엌을 재현한 듯 꽤나 정겨운 모습이다. 이제는 희미한 추억이 되버린 나의 단양(
丹陽) 외가 시골집도 저랬었지. 장작으로 불을 떼는 부뚜막과 쇠솥을 보니 모락모락 연기가 피
어오르는 쌀밥과 누룽지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래도 완전한 옛날 방식을 고집할 수는 없었는지
현대의 이기(利器)인 가스통과 가스레인지도 들여와 부뚜막과 함께 취사를 해결한다. 부뚜막은
여전히 나무로 불을 떼며, 식수는 미인폭포 계곡에서 파이프를 연결하여 가져온다.


▲  여래사 북쪽에 병풍처럼 들어선 미인폭포 서쪽 석벽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위대한 작품 앞에 그저 탄성만 연거푸 나올 뿐이다.
하늘을 이고 있는 석벽에는 세월이 달아놓은 주름선이 첩첩이 그어져 있다.


여래사는 인적도 거의 없는 궁색한 산간벽지로 수행하기는 참 좋은 곳이다. 삼척 땅의 가장 외
진 곳이자 숨겨진 비경인 미인폭포가 절의 듬직한 후광이 되어주고 있고, 통리협곡 안에 아슬
아슬하게 들어앉은 탓에 경치도 아주 뛰어나다. 절집의 본분인 기도와 참선을 위해 이곳을 선
택한 것도 있겠지만 폭포와 자연의 덕을 톡톡히 보려는 의도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미인폭포는 시간이 지나면 언제든지 관광지로 몸값을 올릴 수 있는 곳이라 그 앞에 미리 자리
를 맡아놓으면 관광객들은 싫든 좋든 절을 거쳐야 된다. 그러다보면 절을 찾는 발길은 미인폭
포 인기에 정비례하여 늘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수입은 늘어날 것이고 그 수입을
바탕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한 것이다. 게다가 절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사적비까지 길을 내
어 폭포에 대한 접근성도 조금 좋아졌다. 절이 아니었으면 폭포 입구에서 실타래처럼 가느다란
산길을 쩔쩔매며 이동해야 했을 것이다. 

절을 기준으로 서남쪽 벼랑에는 등잔바위, 범바위 등이 있고, 예전에는 보석의 일종인 자마노(
紫瑪瑙)란 붉은 돌이 나왔다고 한다. 또한 천연기념물인 수달도 가끔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이 한적하고 청정한 벽지라는 뜻이다.


 

♠  삼척의 비경이자 통리협곡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폭포, 미인폭포

▲  여래사에서 바라본 미인폭포

통리협곡 동쪽 구석에는 백두대간의 비경인 미인폭포가 수줍은 듯 숨어있다. 여래사에서 폭포
까지는 대략 300m 거리로 폭포 양쪽으로 붉은 피부의 협곡 석벽이 대장관을 이룬다.
대자연이 오봉산(五峯山)과 백병산(白屛山) 골짜기가 만나는 곳에 협곡과 함께 빚어놓은 대작
품, 미인폭포는 높이가 50m에 이른다. 지역 이름을 따서 심포폭포()라고도 하며, 삼척
시내로 흘러가는 오십천(五十川)의 최상류이기도 하다. 암벽을 타고 내려와 산산히 부서지는
폭포수는 물안개를 이루며 오색영롱한 무지개를 자아낸다.

미인폭포를 품으며 병풍처럼 들어선 통리협곡은 일명 한국의 그랜드캐년(Grandcanyon)이라 일
컬어진다. 이 협곡은 중생대 백악기(白堊紀. 1.4억년 전~6500만년 전) 시절에 퇴적된 역암층으
로 신생대 초기에 심한 단층작용 속에서 강물에 침식돼 270m 깊이로 패여 내려갔다고 한다. 석
벽이 전체적으로 붉은색을 띠고 있는데, 이은 퇴적암이 건조한 기후에서 공기 중에 노출된 채
산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로 굵은 자갈로 된 역암과 모래로 이루어진 사암(砂巖), 진흙
이 굳은 이암(泥巖)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발 600m 내외로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안개와 구름의 희롱이 잦은데, 이때 폭포 경치가 더욱
신비하게 보인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일몰 전과 일출 전에 폭포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면 풍년, 찬바람이 불면 흉작을 예측했다고 한다.

미인폭포는 통리협곡과 한데 어우러져 장쾌하고 남성적인 멋을 진하게 우려내고 있다. 물론 폭
포의 이름처럼 여성적인 아름다움도 간직하고 있다. 폭포가 여성적인 이름인 미인을 칭하고 있
는 것이 참 이채로운데, 이렇게 어여쁜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미인과 관련된 전설을 안고 있
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이렇게 절경인 곳에는 옛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달아놓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여러
개씩은 서려 있기 마련이다. 폭포 위쪽 동네인 구사리(九士里)에는 옛날부터 미인이 많이 나와
미인폭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그 인근에 미인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어쨌든 미인폭포에 얽힌 전설은 여럿이 전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주 먼 옛날, 폭포 윗쪽 동네에서 태어난 미인이 혼인을 했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재
가를 했는데, 재가를 한지 얼마 안되어 새 남편마저 죽었다. 아무래도 남편을 잡아먹는 기구한
팔자인가 보다. 그래서 신세를 너무 비관한 나머지 폭포에 뛰어내려 죽었다고 한다. 또한 다른
전설에는 남편이 죽자, 재혼할 남자를 찾았지만, 예전 남편만한 사람을 찾지 못해 신세를 비관
하고 폭포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미인폭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의 내용을 보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는 이야기이다. 폭포나 수심이 깊은 못에서 신세 한탄
으로 뛰어내린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미인이 아닌 그 반대의 여인이 뛰어내렸다
면 사정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과 반대의 뜻인 추녀폭포가 되었을까? 아니면 폭포도 자존심
이 상해 그 자리를 접었을까.?

그리고 또 다른 전설로는 구사리 혹은 심포리에 살던 어느 부부가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
이가 시작부터 너무 이쁘게 생겼다고 한다. 부부는 그런 딸 때문에 신세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염려가 되어 생후 3일만에 땅에 생매장시켰다는 것이다. 그러자 폭포 속에서 용마(龍馬)가 튀
어나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니 아마도 여자 아이가 용마로 환생하거나 그 아이가 장차 탈 용
마가 너무 열받아서 하늘로 날라갔던 모양이다.
폭포수가 미끄러지듯 내려와 산산히 부셔지는 석벽을 험풍암(驗豊岩)이라고 부르는데, 미인이
뛰어내릴 때 이를 지켜보던 동자승이 돌이 되었다는 동자석(童子石)이 암벽 꼭대기에 서 있다.
그 동자승은 미인의 자살을 막지 않고 멀뚱히 구경했다는 이유로 하늘에서 벌을 받은 듯 싶다.


▲  통리협곡의 붉은 석벽 (미인폭포 서쪽 석벽)

마지막으로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런 전설도 있다.
옛날 이곳에는 미인이 하나 살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날 이 땅에 흔하고 흔한 된장녀 타입으로
눈이 쓸데없이 높아 왠만한 남자들이 청혼을 해도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그렇게 꿈꾸던 이상형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많이도 흘러갔다. 청정한 물을 쏟아내는 폭포와
더불어 살았으니 시간 관념도 잊은 듯 싶으며, 미모에 대한 지나친 자만감에 자신의 모습도 살
피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다가 일기가 화창했던 어느 날, 드디어 이상형의 남자가 폭포를 지나갔다. 이에 미인은 그
에게 청혼을 했는데, 남자는 크게 발작하며 확실하진 않지만 이 정도의 말을 했던 모양이다 '
할머니! 지금 저한테 농담하는거죠?'
그 말에 미인은 '엥 이게 뭔소리인가?' 싶어 폭포수에 자
신을 비추어 보았는데, 글쎄 그 속에는 남자가 했던 말 그대로의 모습이 비춰진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크게 발작한 미인은 치마폭을 뒤집어 쓰고 폭포에 뛰어내려 죽었다고 하며, 그래서
인지 폭포의 모습이 여인이 치마를 뒤집어 쓰고 뛰어내리는 모습과도 닮았다고 한다. (그렇게
까지 보이지는 않았음)
미인이 자신의 주제 파악도 못하고 그렇게 골로 간 이후, 백산(통리 남쪽) 말구리재에서 그녀
의 배필이 될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허나 미인이 죽었다는 소식에 그 또한 발작하여 신
기(도계 북쪽 동네)에서 말과 함께 죽었다고 하며, 미인이 뛰어내릴 때 동자승이 그 모습을 구
경하다가 돌이 되었다고 한다.

▲  하얀 명주를 가늘게 늘어뜨린 듯한 미인폭포
여름 제국의 심술로 초여름 가뭄이 극심이라 폭포수의 수량이 썩 많지가 않다.


여래사 요사 북쪽에 폭포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그 문을 열고 산길을 7~8분 정도 두근거리
는 마음을 다독이며 내려가면 꿈에도 그리던 미인폭포 앞에 이르게 된다. 폭포로 인도하는 산
길은 매우 가는 편으로 마치 미인의 얇은 팔이나 다리를 더듬는 것 같다. 그 길을 한 발짝 내
려갈 수록 미인폭포는 점차 가깝게 다가오면서 그 아름다우면서 장엄한 모습을 드러낸다. 여래
사에서 보는 폭포와 그곳으로 내려가는 산길에서 바라보는 폭포, 그리고 바로 앞에서 보는 폭
포의 모습은 확연히 틀리게 다가오며, 폭포의 규모가 자못 장대하다보니 그 앞에 흩어진 사람
들이 개미보다 더 작게 보인다.

▲  바로 앞에서 바라본 미인폭포의 위엄

높은 벼랑에 절벽이 뚫리고 성난 물줄기가 천길 아래로 떨어져 흰 비단을 드리웠다. 폭포는 직
각을 이루며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중간에 한굽이 쉬었다가 쏟아지는 형태로 수량이
적다보니 폭포수 소리가 미녀의 목소리처럼 작기만 하다.
폭포수는 폭포 앞 못에 모이는데, 그 못의 수심이 매우 얕아 어린이들이 물놀이하기에 좋으며,
신경통에 좋다는 물맞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폭포 아랫도리 암벽에 앉아서 위에서 쉴새 없
이 쏟아지는 물을 맞으면 되니 정말 피서의 성지가 따로 없다. 미인의 기운이 담긴 폭포수로
얼굴을 씻으면 피부가 좋아진다고 하는데, 손만 씻었지 얼굴까지는 씻지 못했다.

못에 잠긴 폭포수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속세를 향해 먼 길을 떠난다. 통리협곡이라 불리는 계
곡을 타고 오십천에 합류해 동해바다로 흐르는 것이다. 계곡에는 특이한 돌들이 많이 눈에 띄
는데, 큰 암석에는 다양한 조그만 돌들이 화석처럼 박혀있다. 그 모습이 마치 콘크리트에 박힌
조그만 돌처럼 보이며, 이들은 아득한 중생대 백악기 시절의 온갖 사연을 안고 형성된 것으로
백두대간 지질학 연구에 쏠쏠한 단서를 제공한다.

폭포 앞에 이르니 시원한 물줄기와 번뇌도 싹 털어갈 정도로 청정한 산바람, 그리고 그렇게나
소망하던 폭포 앞에 내가 서있다는 현실에 정말 그곳을 떠나기가 싫었다. 폭포 앞에 작게 움막
을 짓고 아주 잠깐 속세를 등지며 폭포를 벗삼아 살고 싶은 마음도 굴뚝처럼 솟는다. 허나 이
렇게 되면 미인폭포가 나 때문에 이름을 바꿔야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미남폭포는 그렇고
추남폭포로 말이다. 그러면 폭포도 발끈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아닐까? 절이 싫으면 중
이 떠나듯이 말이다.

이곳은 통리협곡의 막다른 곳이라 마치 세상의 숨겨진 끝이나 막다른 구석에 들어선 기분이다.
여기서는 오로지 여래사를 거쳐 밖으로 나가거나 계곡을 따라 아득한 북쪽으로 내려가야 된다.


▲  폭포 밑에 마련된 조그만 못 - 수심도 얕고 돌도 매우 곱다.

▲  성나게 쏟아지는 미인폭포의 윗부분

▲  청정한 폭포수로 붉은 피부가
더욱 윤기나게 보인다.

▲  폭포 서쪽 계곡 (통리협곡)


▲  미인폭포를 등지고 다시 속세로 나가다

폭포에서 한 20분 정도 머물다가 다음 일정을 위해 아쉽지만 그곳과 작별을 고했다. 힘들게 찾
아온 폭포라 쉽게 등지기가 싫어 끝까지 남다가 내가 마지막으로 철수를 했다.

폭포 관람은 수염이 지긋한 산사나이 모습의 여래사 주지승이 직접 해주었는데 그는 2012년 초
에 이곳으로 부임했다. 일행들이 모두 절로 올라오자 요사로 들어와 차 1잔 마시고 가라며 녹
차와 여러 차를 제공했다. 허나 일행 상당수가 절을 나선 상태라 차를 마신 이는 10명 정도로
요사 안으로 들어가니 온갖 가재도구와 노트북까지 있을 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는 인
터넷까지 버젓히 들어와 고적한 산사에 속세의 소식을 전해주니 이 땅이 정말 인터넷 강국임을
실감케 하며, 요사 내부는 시원하여 한여름에도 선풍기를 틀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주지승이 제공한 차는 시중에서 파는 티백으로 폭포 계곡에서 끌어들인 물을 끓여 티백을 담아
우린다. 순수한 물로 우리다보니 맛도 조금은 다른 것 같다. 그렇게 차를 마시고 주지승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잠시나마 정들었던 여래사를 떠난다. 주지승도 많이 서운했던지 다음에 꼭
찾아오라며 당부를 건넨다. 

예전 겨울에 이루지 못한 미인폭포 관람을 통쾌하게 이루었지만 아직 동자석과 등잔바위, 폭포
동쪽 너머에 있는 구사리 미륵바위 등 못본 것이 참으로 많다. 그들의 정확한 위치도 모를 뿐
더러 주지승에게 문의하니 그 역시 모른다고 한다. 아마도 다음에 또 발걸음을 하라는 미인폭
포의 지극한 뜻이 아닐까 싶다.
여래사에서 사적비까지는 길이 지그재그이고 경사가 있어 내려갈 때와 달리 좀 힘들다. 사적비
까지 올라와 녹음(綠陰)이 깃들여진 숲길을 걸으며 폭포 입구로 나왔다. 입구로 나오니 우리를
태울 관광버스가 낮잠 한숨 자고 기지개를 켜며 우리를 맞는다.

그렇게 사람들을 태운 버스는 태백시내로 넘어갔다. 황지교4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조금 가다가
오른쪽으로 들어가니 그곳에 우리가 점심을 먹을 식당이 있었다. 식당 이름은 아쉽게도 잊어먹
었는데 돌솥밥이 일품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모두 돌솥으로 예약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밑반찬이 미리 맛있는 향을 풍기며 대기하고 있었고, 고기부터 생선, 강원도
산 채소까지 찬이 정말 많았다. 돌솥밥도 괜찮았지만 반찬이 더 맛있어 더 달라고 주문을 했으
나 리필로 돌아온 것은 채소 종류 뿐, 골고루 오지는 못했다.
아침부터 굶주려 폭동 직전에 있던 배를 이렇게 달래니 뱃속도 즐겁다며 쾌재를 외친다. 그렇
게 점심을 마치고 후식으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태백의 선선한 기운을 누리다가 다음 행선지
로 길을 떠났다.
 
이렇게 하여 삼척 미인폭포 초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본글의 분량
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삼척 미인폭포 찾아가기 (2016년 7월 기준)
① 철도 이용 (태백역이나 동백산역 하차)
* 청량리역과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에서 정동진행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태백역 하차. (평
  일은 1일 6회, 주말과 휴일은 1일 7회 운행)
* 부전역, 태화강역, 경주역, 동대구역, 안동역, 영주역에서 정동진행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동백산역 하차
② 시외버스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종합버스터미널(노포역)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대구 북부정류장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14회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성남, 부천, 수원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4~6회 운행
* 원주, 제천에서 태백으로 가는 직행버스가 1일 10여 회 운행
* 강릉과 동해, 삼척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떠나며, 통리에서 내리면 된다.
  (통리에서 미인폭포 입구까지 도보 20분)
③ 현지교통
* 태백역전에 있는 태백시외터미널에서 구사리행 시내버스(1일 1회, 6:35분 출발)나 호산행 완
  행버스(1일 4회/ 8:30, 13시, 15:45, 19시)를 타고 미인폭포(여래사) 입구 하차, 운전사에게
  내려달라고 요청하면 된다. 미인폭포 입구에서
* 태백역이나 동백산역에서 택시를 타고 여래사 사적비(주차장)까지 들어갈 수 있다.
④ 승용차 (여래사 사적비 앞에 주차공간이 있음, 대형버스 접근 불가)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고한 → 황지교4거리에서 좌회
  전 → 통리건널목에서 우회전(철길 건널목 건넘) → 통리3거리에서 우회전 → 미인폭포 입구
  에서 좌회전 → 여래사 주차장
* 동해고속도로 → 동해나들목에서 삼척 방면 7번 국도 → 단봉3거리에서 태백 방면 38번 국도
  → 도계 → 통리재 → 통리3거리에서 좌회전 → 미인폭포 입구에서 좌회전 → 여래사 주차장

★ 삼척 미인폭포 관람정보 (2016년 7월 기준)
* 입장료 : 1인당 1,000원 (산길 보수를 명목으로 입장료를 받고 있음)
* 주차비 : 4시간에 1,000원 (대형은 2,000원)
* 비가 많이 내리거나 폭설이 내릴 때는 가지 않는 것이 좋다. 그만큼 험준한 곳이다.
* 미인폭포 소재지 :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심포리
* 여래사 소재지 :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구사리 218-2 (문의재로 77-162 ☎ 033-552-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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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7월 1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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