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0.03.08 이 땅의 마지막 옛날 주막을 찾아서 ~~ 예천 삼강나루 삼강주막
  2. 2016.01.23 천원짜리 지폐에도 나왔던 우리나라 서원의 영원한 성지, 안동 도산서원
  3. 2012.12.18 우리나라 서원의 떠오르는 성지 ~ 달성 도동서원 (다람재, 이노정) 1

이 땅의 마지막 옛날 주막을 찾아서 ~~ 예천 삼강나루 삼강주막

 


~~~ 예천 삼강주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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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힘겹게 겨울 제국을 몰아내며 천하 해방에 열을 올리던 3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이틀 일정으로 강원도 내륙과 충북 동부, 경북 서북부 지역을 돌았다.
강원도 홍천과 평창, 영월 지역을 둘러보고 충북 땅으로 넘어가 내 시골인 단양(丹陽) 외
가쪽 친척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사촌들과 늘어지게 회포를 풀었다. 오랜만에 찾은 시골
이지만 다음 날도 갈 길이 멀기에 나머지 회포는 불투명한 미래로 넘기고 아침 10시에 콩
볶듯 길을 나섰다.

간만에 단양에 왔으니 단양 명소는 1곳 가줘야 서운함이 덜하겠지? 하여 단양팔경의 일원
인 사인암(舍人岩)을 둘러보고 바로 경북 땅으로 넘어갔다. 사인암에서 방곡을 거쳐 남쪽
으로 내려가면 바로 경북 문경(聞慶)으로 이어진다.

경북으로 갈아타면서 어디를 갈까 궁리를 하다가 한때 천하의 주목을 격하게 받았던 삼강
주막을 가기로 했다. 그밖에 예천 명봉사(鳴鳳寺)와 문경 김룡사(金龍寺) 등도 뜨겁게 거
론이 되기는 했으나 이미 절을 여럿 들린 터라 바로 삼강주막으로 총알처럼 이동했다.
(강원도와 단양 사인암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  이 땅에 마지막 옛날 주막, 이제는 예천 제일의 꿀단지로 부상한
삼강주막(三江酒幕) - 경북 지방민속문화재 134호

낙동강(洛東江)과 내성천(乃城川), 금천 3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예천 삼강(三江)포구에 이 땅
의 마지막 전통 주막으로 추앙받고 있는 삼강주막이 있다. 지붕과 집이 온통 누런 피부로 이
루어진 초가(초가집)로 싸리나무 담장으로 둘러진 초가가 진짜 삼강주막이며, 나머지는 예천
군에서 이곳을 관광지로 격하게 띄울 때 새로 닦아놓은 것들이다.

삼강포구(삼강나루)는 안동과 의성, 청송, 군위, 영천, 대구, 경주, 울산 등 경북 내륙과 경
남 동부 지역에서 서울로 갈 때 거의 거쳐가야 된다. 그러다보니 일찌감치 교통 요충지로 성
장하여 상인과 나그네들을 위한 숙박시설과 장터가 발전했다. 청운(淸雲)의 꿈을 가지고 과거
를 보러가는 영남 선비들도 적지않게 삼강나루의 신세를 졌으며, 양반과 선비, 상인(보부상),
뱃사공, 농사꾼 등 다양한 계층이 자리를 비비며 국밥과 술을 먹고, 주막 방에서 같이 자고,
배를 타던 현장이다. 삼강주막은 바로 그런 삼강나루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지어진
주막의 하나이다.

삼강주막은 1900년 경에 지어진 이 땅의 흔한 초가이다. 물론 그 건물이 있기 전부터 주막은
쭉 있었다. 주막의 규모는 조그만 초가 1동이 전부로 방 2개와 툇마루 1개, 부엌을 갖춘 집약
적 평면구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변소는 바깥에 따로 설치했다. 겉으로 보면 그저 흔
한 초가이지만 이 땅에 유일한 옛 주막으로 어마어마한 희소성을 지니고 있어 건축사 자료로
도 아주 휼륭한 존재이다.

삼강나루를 거쳐간 사람들은 이곳에서 밥을 먹거나 하룻밤 머물면서 주막의 가치를 반질반질
하게 해주었고, 마르지 않고 쏟아지는 손님들로 주막 주인은 삽으로 돈을 쓸어담을 정도로 번
영을 누렸다. 또한 삼강나루에 있던 장터와 다른 주막들도 다 같이 번영을 누리며 경북 북부
제일의 교통 요충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큰 홍수로 삼강나루는 큰 피해를 입었는데 그때 다른 주막과 건물은 죄
다 떠내려가고 오로지 이 주막만 살아남아 이곳의 유일한 주막으로 독점을 누렸다.

1940년대 후반, 삼강주막의 마지막 주모(酒母)라 불리는 유옥연 할머니(1917~2005)는 이 주막
을 인수했다. 그때 그의 나이 30대, 1940년에 남편을 여윈 그녀는 2남2녀를 키우고자 주막 경
영에 뛰어든 것이다.
이곳이 교통 요충지라 목이 좋고 음식 솜씨도 뛰어나 강에 다리가 놓이기 이전까지는 그런데
로 먹고 살았다. 허나 시대가 격하게 흘러 1980년대에 다리(삼강교)가 생기자 사람들의 발길
은 95% 이상 끊기게 된다.
그러다보니 주막과 동고동락하던 나룻배는 망했고, 주막 역시 경영에 영원한 빨간불이 켜지면
서 크게 궁색한 처지가 된다. 기껏해야 동네 단골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녀는 그의 전
부가 담긴 주막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주막은 곧 그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업
종을 전환하기에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이 땅의 마지막 주모로 60여 년을 살다가 2005년
10월에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면서 그때서야 강제로 주막을 놓게 된다.

주인이 가고 없는 주막은 자연히 폐가로 버려져 쓰러지기 직전까지 갔으나 이곳의 가치를 뒤
늦게 깨달은 예천군에서 2007년에 이곳을 인수해 예전 모습으로 복원했다. 그리고 주막을 운
영할 주모를 공개적으로 선별해 인근 마을에 사는 권씨 할머니가 주모로 뽑혀 유옥연 할머니
의 뒤를 이었으나 군청과 마을과의 갈등으로 지금은 예천군에서 삼강마을에 위탁을 맡겨 마을
에서 공동 운영한다.

옛 주막은 아직 쓸만하지만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귀한 몸이고, 건물이 협소해 주막으로 활용
하지 않고 그냥 문화유산 관람용으로 두었다. 주막 뒷쪽에는 500년 묵은 회화나무가 예나 지
금이나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주막 주변에 초가(1930년대 홍수로 사라진 사공과 보부상숙
소도 재현함)와 원두막을 잔뜩 지어 주막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래서 주막 음식은 새 집에 들
어가서 먹어야 된다.
주막 앞에는 누런 흙이 곱게 입혀진 뜨락이 펼쳐져 있고, 그 앞에 조촐하게 돌담길이 재현되
어 정겨움을 더한다. 이는 예천군에서 삼강주막을 관광지로 키우면서 달아놓은 것이다. 그만
큼 이곳에 대한 기대가 큰 것이다. 열렬한 홍보와 투자 끝에 이제는 회룡포(回龍浦)와 더불어
예천 제일의 명소로 우뚝 섰으며, 하루 방문객 수는 주말 기준 최대 300~400명 정도 된다.
하지만 너무 겉모습과 상업주의에 열중한 나머지 주막의 구수한 맛이 변질되어 '옛날 주막 분
위기가 안난다','너무 돈장사가 아닌가?','완전 민속촌을 재현했다' 등의 쓴소리도 적지 않게
나온다. 어떤 신문은 이곳에 있는 청량음료 자판기를 두고 날카로운 지적을 쏟아내기도 했다.

허나 이곳에서 파는 음식은 맛도 그런데로 괜찮고, 가격도 적당하다고 본다. 또한 두부와 도
토리묵, 막걸리, 칼국수 등은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들어서 판매하며, 주말에 찾을 경우 엄청
나게 밀려드는 사람들로 좀 어수선하기는 해도 옛 주막을 바탕으로 소소하게 전통의 장을 만
든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원래부터 주막이었고, 주막 주변은 장터였기 때문이다. 게다
가 주막 남쪽에 자리한 삼강마을은 삼강주막마을로 이름을 바꾸고 전통체험과 농촌체험, 민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삼강주막을 중심으로 매년 9~10월에 3일 일정으로 '삼강주막 나루터 축제'를 벌이고 있
는데, 막걸리 마시기, 막걸리와 전통음식 전시/판매, 공연과 가요제, 민속놀이 체험, 예천군
특산물장터, 사진/그림 전시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 삼강주막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166-1 (삼강리길 27 ☎ 055-655-3132)
* 삼강주막마을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삼강주막 동쪽에 재현된 누런 돌담길
푸른 대나무까지 머금고 있으니 그 풍경이 참 정겹기 그지 없다.
이 돌담길은 삼강주막을 관광지로 꾸미면서 닦여진 것이다.

▲  온통 누런색으로 이루어진 삼강주막 관광지

▲  초가 원두막 2채와 삼강주막(오른쪽 초가)

주모 할매가 방이나 부엌에서 튀어나와 '술 한잔 들고 가이소~!','국밥 1그릇 들고 가이소~!'
할 것 같은 삼강주막, 옛 주모가 가고 없는 삼강주막은 이제 현역에서 물러나 옆에 재현된 후
배 초가들에게 그 짐을 넘겼다.
솔직히 기존 주막을 손질하여 그 방이나 툇마루, 마당에 놓인 상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강바
람을 벗삼아 술 1사발, 국밥 1그릇을 섭취해야 진정한 옛 주막 멋이 날 것인데, 지방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 보임)로 지정된 귀한 몸이라 그것까지는 싫었던 모양이
다. 그러다보니 툇마루와 주막 방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고, 오로지 부엌만 들어갈 수 있어 완
전 금지된 주막이 되어 버렸다.

허나 오래된 기와집과 초가 가운데 식당이나 민박, 전통체험 공간으로 활용되는 집들이 적지
않다. 삼강주막은 길어봐야 100여 년 정도 되었고, 근래 손질을 하여 거의 새집처럼 되었기
때문에 한가하게 눈요깃감으로 둘 것이 아니라 주막 체험용으로 좀 바쁘게 굴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만 집이 좁기 때문에 보조용 초가를 여럿 두어 수용 공간을 늘리고, 음식 조리는
보조용 초가나 조리 공간을 두어 처리하면 될 것이다.

▲  옆에서 바라본 삼강주막과 회화나무

▲  낙동강 둑에서 바라본 삼강주막


▲  구수한 모습의 삼강주막 툇마루
삼강나루가 잘나가던 시절에는 저 좁은 툇마루와 방은 늘 빈자리가 없었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이유로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금지된 공간이 되었다.

▲  삼강주막 부엌
연기에 그을린 검은 때가 삼강주막의 왕년의 위엄을 살짝 귀뜀해준다.
밥과 국을 끓이던 쇠솥은 무심하게 내려앉은 먼지의 눈치를 보며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벽화처럼 자리한 삼강주막의 백미, 외상결재장부

삼강주막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것이 있다. 바로 부엌과 바깥 흙벽에 새겨진 외상결재장부이
다. 장부라고 해서 종이에 쓰인 것은 아니며, 그 흔한 한글과 한자, 숫자도 없다. 세로와 가
로로 그어진 줄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여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수수께끼의 추상화나
문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이들은 옛 주모인 유옥연 할매의 작품으로 그는 글자를 모르던 까막눈이라 자신만의 전용 글
자를 만들어 이렇게 외상장부를 작성했다. 예나 지금이나 단골 외상 손님은 늘 있는 법이라
그들의 편의를 위해 벽에 그만의 표시법으로 장부를 만들어 손님을 관리했으며, 외상을 했을
경우 세로로 줄을 긋고, 외상값을 치룬 경우에는 가로로 줄을 그었다. 줄은 불쏘시개를 이용
해 흙벽에 그었다. 허나 세로줄만 있고 가로줄이 없는 것도 적지 않아 외상값을 다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글자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주모 할매의 깊은 뜻과 철학, 외상 손
님에 대한 넉넉한 마음이 깃들여져 있다.


▲  부엌에 빼곡히 새겨진 외상결재장부 ▼


▲  주막 밖에 차려진 재래식 변소
삼강주막은 건물이 작기 때문에 싸리나무 담장 밖에 따로 변소를 두었다.
현재 변소는 무늬만 남은 상태~~ 변을 보려면 주막 외곽에 설치된
현대식 변소를 이용하기 바란다.

▲  주막 밖에 덩그러니 놓인 들돌

변소 뒷쪽에는 '들돌'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커다란 돌이 놓여져 있다. 처음에는 그냥 돌로
여겼으나 옆에 있는 들돌의 유래 안내문을 보니 180도 달라 보인다.
들돌이란 일종의 성인식 도구로 옛날 농촌의 남자 아이들이 성장하여 농부(어른)로 인정을 받
는 의례에서 생겨났다. 즉 10대 중반에 저 돌을 들어야 진정한 어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돌의 무게는 10~20kg 정도 될 것 같은데, 성인식 도구치고는 좀 무겁고 거친 것 같다. 하지만
어찌하랴?? 농촌에서 살려면 힘을 써야 되는 일이 1~2가지가 아니니 말이다.
또한 삼강나루는 사람과 물류의 왕래가 빈번했는데, 그에 따라 물건을 나를 인력이 많이 필요
했다. 그래서 이 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품값을 정했다고 한다. 돌을 완벽하게 들면 좀
많이 받고, 못들면 그냥 아웃, 중간 정도 들면 중간 정도 품삯을 받았다. 이 돌은 삼강주막과
더불어 이곳에 전하던 오래된 유물로 겉보기와 달리 역사적 값어치가 충분하다.


▲  삼강주막의 오랜 벗, 회화나무 - 예천군 보호수 11-27-12-23호

강주막 뒷쪽에는 커다란 회화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삼강주막의 오랜 터줏대감
이자 이곳의 듬직한 정자나무인 그는 약 500년 정도 묵은 것으로<197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
시 추정 나이가 약 450년> 높이는 20m 정도 되며, 그 북쪽에는 낙동강 둑방길과 낙동강이 있
다.


▲  강바람만 가득한 낙동강 삼강나루터 (오른쪽 다리가 삼강교)

강주막 뒷쪽 둑방을 오르면 잃어버린 땅(북한, 요동반도, 만주, 연해주, 왜열도 등)을 제외
한 이 땅에서 가장 긴 강, 낙동강이 도도한 물결을 드러낸다. 이곳이 바로 삼강주막의 든든한
밥줄이자 경북 북부 제일의 교통 요충지인 삼강나루터로 문경에서 내려온 주흘산맥(主屹山脈)
과 안동에서 온 학가산맥(鶴駕山脈), 그리고 멀리 대구에서 올라온 팔공산맥(八公山脈)의 끝
자락이 만나며,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하나가 되는 곳이다. 그래서 지명도 3개의 물줄기가
만난다는 뜻의 '삼강'이 되었다.

예로부터 수륙교통의 요충지이자 경상도에서 서울과 중부지방으로 이동할 때 거쳐가던 길목으
로 이곳을 지나 문경새재를 넘어 북쪽으로 올라갔다. 또한 소금배가 이곳까지 올라와 교류를
했고, 서울과 대구(大邱)를 잇는 군사도로의 역할도 했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는 그런데로 성
황을 이루었다. 나룻배는 2척을 굴렸는데, 큰 배는 주로 가축과 화물을, 작은 배는 사람을 수
송했으며, 장날에는 밀려드는 수요로 최대 30회 이상을 운행했다.
허나 현대화의 거친 물결과 어미도 몰라보는 개발의 칼질이 이곳까지 불어닥치면서 1980년대
나룻배를 대체할 삼강교가 강 위에 놓이게 된다. 그로 인해 나룻배는 밥줄이 끊겨 사라지고
삼강나루의 영광 또한 신기루처럼 사라졌으며 겨우 삼강주막만 남아 나룻터를 지켰던 것이다.

2007년 이후 쓰러진 삼강주막이 복원되고, 이곳 일대가 예천군의 야심 속에 관광지로 부상하
면서 2013년에 체험학습용으로 나룻배 1척을 장만해 나룻터에 띄워놓았다. 하지만 내가 찾았
을 때는 배는 움직이기는 커녕 늦은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도 봄이 천하를 완전히 해방
시킨 이후에 움직일 모양이다.

▲  삼강나루를 한방에 보내버린 삼강교

▲  낙동강 둑방길과 낙동강 물줄기


▲  삼강주막 옆에 재현된 보부상과 사공 숙소 초가집

삼강주막 서쪽에는 누런 피부의 초가들이 즐비하여 자칫 삼강주막의 오랜 일원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현실은 근래에 닦아놓은 것들로 삼강주막을 너무 말끔히 손질을 한 탓에 기존 주
막과 새 초가가 서로 비슷한 모습과 피부를 지니게 되어 서로 구별이 가질 않는다.

새 초가 가운데 보부상 숙소와 사공 숙소라 불리는 초가가 있다. 원래 1900년대에 지어진 숙
소가 있었으나 1934년 대홍수 때 다 떠내려가고 사라진 것을 2008년에 마을 노인들의 증언과
고증을 바탕으로 삼강주막과 비슷한 구조로 지었다. 허나 이곳에는 더 이상 보부상과 사공이
없어 그 이름과 달리 현역에서 물러난 삼강주막의 역할을 대신하여 밥과 술을 먹는 길손들이
이용한다.


▲  주막으로 쓰이는 조그만 초가 (방 안에서 음식 섭취 가능)

▲  내부가 비어있는 초가 창고

삼강주막을 둘러보니 어느덧 13시가 넘었다. 점심도 아직 들지 못한 상태이고 그 유명한 삼강
주막에 발을 들였으니 주막 밥은 한번 먹어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하여 파전과 두부, 도토리묵, 잔치국수, 소고기국밥을 두루두루 시켰다. 다만 차량을 가
져왔기 때문에 아쉽지만 막걸리 등의 곡차(穀茶)는 섭취하지 않았다.

이곳이 주막이긴 하지만 사극처럼 시골 아낙네들이 옛 복장을 입고 머리를 딴 주모가 밥이나
술상을 갖다주는 것은 기대하지 말자. 그런 주모는 이제 없기 때문이다. 주막 초가들 한쪽에
음식을 조리하는 건물이 있는데, 거기서 음식을 주문하고 계산을 해야 되며, 음식이 나오면
음식이 든 쟁반을 들고 적당한 곳에 앉아 먹으면 된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아 길게 줄을 서
야 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우리는 음식을 들고 비어있는 초가로 들어가 즐거운 점심 시간을 가졌다. 곡차가 없어 아쉽긴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것들이라 음식 맛도 그런데로 괜찮았고, 가격도 시중과 거의
비슷하거나 저렴한 편이다. 시장한 점심 기운을 잠재우고자 열심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놀리니
많아보였던 음식들은 이내 바닥을 드러내고, 반찬으로 나온 김치와 송송(깍두기)도 밥도둑이
따로 없어 그것 마저 동이 났다. 역시 금강산은 식후경(食後景)이다.


▲  삼강주막에서 먹은 음식의 위엄
두부와 도토리묵, 파전, 잔치국수, 소고기국밥


아직 해가 중천이라 다음 답사지를 물색하다가 속리산(俗離山) 동쪽에 숨겨진 폭포를 찾기로
하고 인절미를 약간 구입해 다시 길을 떠났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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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짜리 지폐에도 나왔던 우리나라 서원의 영원한 성지, 안동 도산서원

 


' 우리나라 서원의 영원한 성지,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 '
도산서원 현액
▲  전교당에 걸린 도산서원 현액 - 한호(韓濩, 한석봉)의 글씨이다.


 

여름 제국(帝國)이 봄을 몰아내고 한참 성하(盛夏)의 기반을 닦던 6월 한복판에 우리나라
서원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는 안동 도산서원을 찾았다.

아침 일찍 부산에서 동대구행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에서 팔공산 은해사(銀海寺)로 넘어갈
요량이었으나 변덕이 발동하면서 안동(安東)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경북 한복판에 자
리한 안동으로 올라갔다.
처음에는 안동 제일의 고찰, 봉정사(鳳停寺)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도산서원 가는 67번
시내버스가 막 기지개를 켜고 있길래 다시 변덕을 발휘하여 그곳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안동 외곽으로 가는 안동시내버스 대부분은 안동역(교보생명)에서 출발하는데 도산서원으
로 가는 버스는 지독한 유명세와 달리 겨우 1일 5회 다닐 뿐이다. 때마침 그 시간과도 맞
아 떨어지니 아무래도 오늘은 그곳과 인연이 있는 듯 하다.

어쨌든 67번 버스를 타고 거의 50분을 달려 도산서원에 도착했다. 서원 입구에는 여느 관
광지와 마찬가지로 조촐하게 가게와 식당이 터를 닦고 있는데, 평일이라 무척이나 한가하
다. 여기서 서원까지는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산책로를 6분 정도 걸으면 되며, 매표소에서
소정의 입장권을 구입해야 된다. 즉 유료의 땅이다.


▲  녹음에 젖은 도산서원 산책로


 

♠  도산서원 가는 길

▲  낙동강을 가르는 키 작은 다리
다리의 길이는 길지만 그 높이는 수면에 닿을 정도로 작다. 안동호의 수량이
넘치거나 폭우가 내리면 꼼짝없이 통제의 비운을 맞으며 다리 주변은
물속에 잠긴다. 저 다리를 건너면 시사단이 있는 의촌리이다.


도산서원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중간에 낙동강(落東江)을 옆구리에 낀다. 허나 강물은 저 밑에
흐르고 소나무가 운치를 머금은 산책로는 언덕 높이 둘러져 있으니 보기와 달리 그리 가깝지는
않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안동의 지도를 크게 바꿔놓은 안동댐의 영향이 크다. 댐이 들어서
면서 도산면과 예안면의 많은 땅이 희생되었고, 그 수몰지를 발판으로 안동호(安東湖)가 들어섰
으니, 서원 앞은 안동호의 상류가 된다. 다행히 도산서원은 높은 곳에 터를 잡아 강제 이주를
면했으나 서원으로 가는 길과 강 주변 풍경은 약간의 변화를 겪어야 했다.


▲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서원으로 가는 길목에는 조망이 일품인 천광운영대가 있다. 이곳은 3글자로 간단히 운영대(雲影
臺)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퇴계 이황이 '빛과 구름 그림자가 같이 돌고 돈다<天光雲影共徘徊
>'
는 주자(朱子)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에서 따온 이름이다. 퇴계는 그가 세운 도산서당
을 엄숙한 학습의 장으로 꾸미면서 하늘의 묘용(妙用)을 깊이 생각하고 자연의 심오한 뜻을 깨
우치는 장소로 삼았다.

이곳에 올라서면 낙동강을 비롯하여 산에 둘러싸인 강 건너 지역(의촌리)이 훤히 두 눈에 바라
보이며, 바로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이다.


▲  천연대(天淵臺)

도산서원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 강변 낭떠러지에 천연대가 있다. 이곳은 퇴계 선생
이 심성수양을 위해 산책을 즐기던 장소라고 한다. 천연대란 이름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하늘
에는 새가 날고 물에는 물고기가 뛰어 논다<연비려천 어약우연(鳶飛戾天 魚躍于淵)>'
에서 인용
했다고 하며, 천광운영대와 달리 소나무가 벼랑까지 뿌리를 내려 운치를 머금게 한다.


▲  강 건너로 보이는 시사단(試士壇)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33호

천연대와 운영대를 비롯하여 강과 접한 부분에서 낙동강 건너를 바라보면 잡초가 무성한 들판에
유독 동그랗게 솟은 높다란 언덕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꼭대기에는 기와를 얹힌 비각(碑閣)
이 있는데, 그가 바로 시사단이다.

시사단은 1792년(정조 16년) 정조(正祖) 임금이 퇴계의 학덕을 기리고자 각신<閣臣, 규장각(奎
章閣) 관리> 이만수(李晩秀)를 보내 도산서원 앞에서 과거시험의 하나인 별시(別試)를 치르게
했는데, 이를 기념하고자 비석을 세운 것이다. 비문(碑文)은 당시 재상(宰相)으로 있던 채제공
(蔡濟恭)이 썼다.

원래는 강가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안전을 장담못하게 되면서 1976년 높이 10m, 반경 10m의
동그란 언덕을 쌓고 그 위로 옮겼다. 지금은 안동호의 수량이 적어 들판의 인공 언덕으로 있지
만 만수(滿水) 때는 주변이 물로 채워져 하나의 조금만 섬을 이루며, 서원에서 강에 놓인 키 작
은 다리를 건너면 시사단으로 접근할 수 있다.


▲  녹음에 잠긴 늙은 느티나무
서원 유생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쉼터를 제공하던 정자나무로 지금은
관람/답사객들에게 그늘과 쉼터를 베푼다.

▲  열정(洌井)

느티나무 옆에는 우물정(井)자를 고스란히 닮은 '井' 모양의 우물이 있다. 우물의 이름은 열정
으로 이는 역경(易經)에 나오는 '정괘(井卦)','정렬한천식(井洌寒泉食)'의 우물의 뜻을 취하여
붙인 것이다. 도산서당 시절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식수로 사용되었으며, 물이 맑고
맛이 좋았다고 한다.

이 우물은 식수의 역할 외에도 다음의 숭고한 뜻도 담고 있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가도 따라가
지 못하고, 물을 길어도 줄지 않으며, 오가는 사람 모두가 즐겨 길어 마시는 것과 같이 사람들
은 주인 없는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두레박으로 길어 마시듯 자신의 노력으로 인격과 지식을 쌓
아 누구나 즐겨 마실 수 있는 샘물처럼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라'


현재 우물 안에는 물이 담겨져 있어 살아있긴 하다. 허나 우물의 보존 때문인지 아니면 죽은 우
물에 그냥 물만 형식적으로 넣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물을 속세로 끌어올릴 도구가 없어 거의 그
림의 떡 같은 우물이 되어버렸다. 현재 우물의 역할은 옆에 있는 현대식 수도시설이 대신 한다.


▲  조그만 한옥마을 같은 도산서원

* 우리나라 서원의 성지(聖地), 도산서원(陶山書院) - 사적 170호
우리나라 서원의 대명사이자 옛 1,000원권의 배경(현 1,000원권에는 계상서당이 나옴)인 도산서
원은 동방의 주자(朱子)로 추앙을 받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이 세운 도산서당(陶山
書堂)에서 비롯되었다.

퇴계는 1549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와 2칸짜리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고 독서
에 열중하며, 제자를 가르쳤다. 허나 제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반해 서당 건물은 이를
받쳐주지 못해 같이 지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더 넓은 새로운 서당을 짓기로 결심하고 제자들
과 주변을 물색하다가 현재 서원 자리를 발견하고 환호를 질렀다.
이곳은 그리 높지 않은 산자락인데다가, 밑에 강물이 흐르는 산수가 잘 어울리는 곳이었던 것이
다. 게다가 좌우 산자락도 적당히 감싸 안은 듯한 지형이라 산속에 궁색하게 박힌 계상서당과는
다르게 아늑하면서도 앞이 탁 트였다. 다만 장차 안동호가 들어설 것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너무
아래가 아닌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으니 이때가 1557년이다.

이렇게 터가 정해지자 서당을 짓기 위해 평소 인연이 있던 용수사(龍壽寺) 승려 법연(法蓮)에게
건축을 의뢰했다. 마침 퇴계는 공조판서(工曹判書)의 벼슬을 받아 서울로 올라왔는데, 설계도인
'옥사도자(屋舍圖子)'를 직접 그려 법연에게 보내 공사를 맡겼다.
허나 공사 과정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공사 중간에 법연이 입적(入寂)하면서 서둘러 같은 절
승려인 정일(淨一)에게 책임을 맡겼으며, 재정적인 어려움과 설계 변경으로 터를 잡은지 3년 만
인 1560년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서당 건축을 승려에게 맡긴 것은 살림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고 한다.
서당이 완성되자 퇴계는 벼슬을 그만두고 그곳으로 내려와 도산서당이라 이름 짓고 제자들을 열
심히 길렀다.

1570년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1572년 서당 뒤쪽에 상덕사(尙德祠)를 지어 그의 위패를 봉안했고
, 1574년 유림(儒林)들의 호응과 지원을 받아 서당 위쪽에 서원을 지었다. 그래서 서당과 서원
은 같은 곳에 있게 된 것이며, (이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도산서원이라 부름) 1575년 조정으로
부터 도산서원이란 사액(賜額)을 받았다. 전교당에 걸린 사액 현판은 조정에서 내려보낸 것으로
석봉 한호(石峯 韓濩)가 쓴 것이다.
서원은 1576년 최종 완공되어 퇴계의 위패를 봉안했으며, 영남지역 유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
였다.

임진왜란 때는 다행히 화를 면했으며, 1615년 퇴계의 제자인 월천 조목(月川 趙穆)을 배향했고,
1792년 정조 임금이 규장각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를 내리면서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열었다.
그 기념으로 1796년 강 건너편에 시사단을 지었다. 그리고 1819년 장서를 보관하는 동광명실을
지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야심작 서원철폐령 때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로 그 건재를 과
시했으며, 1930년에는 서광명실(西光明室)을 중건했고, 1969년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복원/정리
사업이 진행되어 1970년 유물전시관인 옥진각을 세웠다. 2003년에는 장판각(藏板閣)에 담겨있던
목판 2,790장을 인근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넘겼다.

우리나라 서원의 성지로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은 몰라도 도산서원은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 3살짜리 어린애도 다 안다는 퇴계 이황과 인연이 깊은 곳이고 한때 1,000원권의 배
경지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선비와 양반문화의 고장 안동에서 하회마을, 봉정사와 더불어 꼭 들
려야 직성이 풀린다는 안동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낙동강이 서원 바로 아래까지 들어오며,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제대로 승경(勝景)을 이룬다.

서원의 구조는 농운정사와 역락재 등 학생들의 기숙사와 도산서당이 앞에 포진해 있고, 중간에
는 교육 공간인 전교당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이 있다. 제일 뒤쪽에는 퇴계의 위패를 모신 상덕
사가 있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띈다. 또한 가장 밑에 있는 역락재에서 전교당, 상덕사
로 올라갈 수록 그 중요성만큼이나 지형이 높아진다.

서원의 건물 중 전교당, 상덕사와 삼문은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 도산서원 찾아가기 (2016년 1월 기준)
① 안동까지 철도 이용
* 서울 청량리역에서 안동행 열차(원주, 제천, 영주 경유)가 1일 7회 떠난다.
* 부산 부전역(태화강, 경주 경유)과 동대구역에서 안동행 열차가 1일 3회 떠난다.
* 안동역 서쪽 교보생명(옛 시외터미널앞)에서 도산서원을 경유하는 안동시내버스 67번이 1일 5
  회 운행한다. (안동 출발 9:40, 10:50, 13:10, 13:50, 16:10)
* 67번 시내버스는 노선이 복잡하다. 반드시 서원 경유를 확인바라며, 차를 놓치거나 시간이 맞
  지 않으면 온혜리 방면 67번 버스(1일 17회, 반드시 행선지 요망)를 타고 도산서원3거리에서
  도보 25분
② 안동까지 버스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안동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안동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고양, 부천, 성남, 수원, 인천, 원주, 대전(복합), 청주, 제천에서 안동행 직행버스 이용
* 동대구에서 안동행 고속버스가 20~30분 간격, 대구북부에서 안동행 직행버스가 10~30분 간격
  으로 떠난다.
* 부산, 울산, 구미, 창원(마산), 포항에서 안동행 직행버스 이용
* 안동터미널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시내버스(0, 0-1, 1, 11, 46, 80번 등)를 타고 안동역(교보
  생명, 옛 안동터미널)에서 도산서원 경유 67번 시내버스로 환승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 중앙고속도로 → 서안동나들목 → 안동시내 → 청량산 방면 35번 국도 → 도산서원3거리에서
  우회전 → 도산서원 주차장

※ 도산서원 관람정보 (2016년 1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1,500원 (30인 이상 단체 1,300원) / 청소년,군인 700원 (단체 600원) / 어린
  이 600원 (단체 500원)
* 주차비 : 소형차 2,000원 / 대형차 4,000원
* 관람시간 : 9시~18시 (겨울에는 17시까지)
*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 054-840-6576, 6599)
* 도산서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도산서원 전교당


 

♠  도산서원 둘러보기 (1) 역락서재, 도산서당

▲  역락서재(亦樂書齋) 외부

서원 앞쪽에 배치된 역락서재(역락재)는 도산서당과 비슷한 시기인 15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다.
서원 제일 아래쪽에 위치하며, 담장에 둘러져 거의 독립된 공간으로 자리한다.
역락서재는 서당 학생들의 기숙사로 퇴계의 제자인 정사성(鄭士誠)이 입학할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서 기증했다. 온돌방의 서쪽 반 칸을 비워 아궁이를 설치했으며, 현판은 퇴계의 친필이다.
한때 학생들로 시끌거렸을 역락재,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하여 문화유산의 귀한 몸이 되면서 어
느 누구도 방에 들어가 옛날처럼 숙식을 할 수 없다. 아무도 없는 빈 방에는 먼지만 흐르는 세
월만큼이나 쌓여간다.


▲  농운정사(隴雲精舍)

농운정사는 도산서당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학생들의 기숙사이다. 퇴계가 직접 설계를
했고 용수사 승려인 법련이 세운 것으로 독특하게도 '工'자 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제자들
에게 열심히 공부할 것을 권장하는 뜻에서 그리 지은 것이라고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말리지 않겠으나 저들 가운데 퇴계의 뜻을 이어받아 진정 나라와 백성
에 헌신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다. 대부분 썩어빠진 성리학(性理學)에 빠져 뜬구름 같은
사상이나 논하고 앉았고, 권력과 부에 몰두한 나머지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으며, 명나라에 지극
한 사대(事大)를 벌이고 부국강병을 내팽겨쳐 끝내 나라를 망쳐놓은 이들이 많은 수를 차지할
것이다. 또한 유생이 된 양반들은 먹고 살 걱정은 없으니 서원에 처박혀 평생 공부만 하며 헛된
사상이나 논하다 세상을 마친 이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농운정사의 농은 '隴(땅이름 롱)' 대신에 '膿(고름 농)'을 쓰기도 한다.

▲  농운정사 동편 시습재

▲  농운정사 서편 관란헌

농운정사의 동편 마루는 시습재(時習齋)라 하여 학습의 공간으로 삼았고, 서편 마루는 관란헌(
觀瀾軒)이라 하여 휴식의 공간으로 삼았다.


▲  서원의 핵심부로 안내하는 중앙 계단길

▲  도산서당(陶山書堂)

서원 동쪽에 자리한 도산서당은 도산서원의 모태가 되는 곳으로 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깊은
건물이다. 
1557년 용수사 승려 법련과 정일에게 짓게 하여 1560년에 완성되었으며, 퇴계가 직접 설계를 했
다고 전한다. 퇴계는 여기서 제자들과 같이 먹고 자며 그들을 가르쳤는데, 그가 세상을 뜨자 제
자와 유생들의 발의로 서당 뒤쪽에 서원을 지어 퇴계의 위패를 봉안했고,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으면서 지금의 도산서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서원이 서당과 붙어있어 따로 보기도 하지만 엄
연한 서원의 일원이다.

서당 건물은 '一' 형태로 3칸 크기이며, 부엌과 온돌방,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부엌 반
칸과 마루 1칸을 더 달고, 건물 면에 퇴를 놓아 내었다. 덧지붕을 달고 마루를 길게 했으며, 방
은 완락재(玩樂齋),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했는데, 이는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지
니지 못해 바위에 깃들어 조그만 효험을 바란다'
는 뜻, 즉 쉽게 말하면 공부에 자신이 별로 없
으니 바위에 기원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툇마루가 넓어서 마루에 앉거나 신발을 벗고 마루에 들어가 쉴 수 있으며, 단 방에는 들어가면
안된다. 건물이 소박하여 서원 시절의 지어진 건물보다 은근히 정감이 쏟아진다.


▲  몽천(蒙泉)

서당 앞에 있는 몽천은 네모난 우물로 서당 및 서원 사람들의 식수원이다. 우물 이름은 몽천에
는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 간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데, 이는 역경(易經)의 몽괘(蒙卦)
에서 의미를 따서 붙였다. 서원 밖에 열천과 마찬가지로 물은 고여 있지만 먹을 수는 없다.

도산서원은 건물부터 우물, 나무, 강변에 이르기까지 제자의 올바른 길을 바라며 걱정하는 스승
퇴계의 지극하고도 따스한 마음이 듬뿍 함유되어 있어 답사객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실제로
그는 제자를 무척 잘 챙겨주었고 손수 어루만져 주었다고 한다. 자고로 이런 스승이 많아야 세
상이 밝아지는 법인데 오늘날에도 그런 스승은 가뭄에 콩 나듯 하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  도산서당의 마루인 암서헌
오랜 세월의 때가 곱게 깔려 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보내온 금송(錦松)
 이 나무는 박정희가 청와대 집무실 앞에 심은
 것으로 1970년 12월 이곳을 방문했을 때 손수
 옮겨 심었다.


▲  낙동강 바람만이 잠시 스치고 지나는 도산서당 뜨락

▲  도산서당 앞에 자리한 연못 - 정우당(淨友塘)

도산서당 앞에 네모난 연못 정우당은 연꽃의 보금자리이다. 퇴계는 연꽃을 꽃 중의 군자라고 칭
송하며 그들의 터전을 만들었는데, 진흙탕에 뿌리를 내려 물을 깨끗히 보듬고, 속은 비고, 줄기
는 곧아 남을 의식하지 않는 청정한 연꽃처럼 되기를 제자들에게 주문하고 있다.


▲  연잎 그늘에 의지해 햇살을 피하고 있는 아름다운 수련(睡蓮)

▲  매화나무 <매화원(梅花園)>
퇴계는 서당 옆에 매화나무를 심어 매화원으로 꾸몄다.
매화는 선비들이 좋아하는 4군자의 하나이다.

▲  절우사(節友社)
도산서당 동쪽에는 냇물이 흐르는데 그 건너편에 '절우사'라 불리는 공간이 있다.
이곳은 퇴계가 매화, 대나무, 국화, 소나무 등을 심어 가꾸던 서당의
조촐한 정원으로 지금 있는 나무들은 근래에 식재된 것이다.


 

♠  도산서원 둘러보기 (2) 전교당 주변

▲  전교당의 정문인 진도문(進道門)

도산서당에서 서원 중앙에 나 있는 계단길을 오르면 활짝 열린 진도문이 나온다. 서당과 서원을
잇는 공간으로 양 영역을 구분 짓는 역할을 하며, 문을 들어서면 서원의 핵심인 전교당이 모습
을 비춘다.


▲  전교당에서 굽어본 진도문의 뒷모습

▲  진도문에서 내려다본 서원 중앙 계단

▲  진도문 우측의 서광명실(西光明室)

서광명실은 동광명실의 역할을 분담하고자 1930년에 지은 누각식 건물이다. 이곳에는 유학자의
여러 문집과 근래에 낸 책을 비롯하여 왜국(倭國) 유학자 손시교쿠수이(村士玉水)가 쓴 퇴계서
초(退溪書抄)가 있어 퇴계의 학문이 왜열도 유학에 큰 영향을 던졌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보
관된 서적들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있다.


▲  진도문 좌측의 동광명실(東光明室)

동광명실은 원래 광명실이라 불렸다. 그러다가 진도문 우측에 또다른 광명실을 만들면서 이를
구분하고자 편의상 동/서광명실이라 부른다.
이 건물은 서원에 소장된 서적을 보관하고 열람하는 공간으로 지금의 도서관으로 보면 된다. 서
광명실과 마찬가지로 누각식 건물이며, 현판은 퇴계의 친필이다. 건물을 누각식으로 지은 것은
습한 기운으로부터 서적을 보호하기 위함으로 이는 고구려(高句麗)가 만든 국제적인 건축 양식
'부경'과 비슷하다.

지금의 동광명실은 1819년에 지어진 것으로 조선 역대 제왕의 내사서적(內賜書籍)과 퇴계가 보
던 수택본(手澤本)을 보관했다. 이곳의 서적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가 있다.


▲  동광명실에 걸린 북
근래에 새로 달아놓은 북으로 수업시간과 여러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  동재(東齋) = 박약재(博約齋)
도산서원 학생의 기숙사로 박약은 학문을 넓게 배워 예로 행하라는 뜻이다.
건너편으로 서재를 바라보고 있는데, 서재 역시 기숙사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동재에 머무는 학생이 서재 학생보다 더 선배라는 점.

▲  서재(西齋) = 홍의재(弘毅齋)
도산서원 학생의 기숙사로 홍의(弘毅)란 선비는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되니, 그 책임은 무겁고 도학의 길은 멀다는 뜻이다.

▲  알맹이가 빈 장판각(藏板閣)

전교당 좌측에 자리한 장판각은 서원에서 낸 서적의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벽체 사방을 나무
판벽으로 만들고 바닥은 우물천정을 깔아 습기의 침입에 대비했다. 바닥도 지면에서 띄우고 전
면 위쪽에는 살창을 내어 통풍을 배려했다.
이곳에는 퇴계의 문집(文集)과 유묵(遺墨), 선조어필(宣祖御筆), 병서(屛書) 등 2,790장의 판각
이 있었으나 보존을 위해 광명실 서책과 함께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넘겼다. 현재는 판각이 있던
텅 빈 서장(書欌)만이 남아 옛날을 그리워 한다.


▲  도산서원 전교당(典敎堂) - 보물 210호

도산서원은 서당을 포함하여 몽땅 사적 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허나 서원의 중심 건물인 전교
당과 상덕사는 별도로 분리하여 보물의 지위를 안겨주었다.
전교당은 서원의 교육 공간으로 원장실과 강당(講堂)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진도문을 들어서면
나그네의 기가 바로 오므라들게끔 건물을 받치는 기단(基壇)을 높여 위엄의 정도를 높였다. 성
리학 숭배자들은 짝수 칸을 싫어한다고 하던데 이를 무시하고 정면 4칸, 측면 2칸의 짝수 칸으
로 지었다.
건물 정면 3칸은 문짝을 달지 않은 개방된 마루로 뒷면과 측면은 각 칸 마다 2짝의 여닫이 창호
를 달았으며, 문이 굳게 닫힌 서쪽 1칸은 원장의 거실로 한존재(閑存齋)라 불린다.

이 건물은 1574년에 지어졌으며, 1969년 보수했다. 전교당 정면의 도산서원 현판은 1575년 조선
조정이 도산서원을 서원으로 인정하면서 내린 것으로 글씨로 유명한 한석봉(韓石峯)의 글씨이며,
정조 임금의 사제문(賜祭文)을 비롯한 다양한 현판이 내부를 수식한다. 개방된 마루는 앉아서
쉴 수 있으나, 신발을 벗고 내부로 들어가는 건 삼가해주기 바란다.

▲  한존재 현판

▲  전교당 현판


 

♠  도산서원 둘러보기 (3) 나머지 부분

▲  상덕사 삼문(尙德祠 三門) - 보물 211호

전교당 뒤쪽에는 퇴계와 월천 조목의 위패가 봉안된 상덕사가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고
뒤쪽에 위치한 이곳은 서원의 사당으로 사당은 보통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으나 이곳만큼은 팔작
지붕으로 차별화를 두었다. 앞면 반칸은 퇴칸으로 개방하고 퇴칸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으며, 나
머지 1칸 반은 앞면에만 문을 달았다. 앞면을 제외한 3면은 벽으로 두르고 내부는 하나의 통간(
通間)으로 만들었다.
상덕사는 사당이다 보니 제사일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 굳게 입을 봉하며 좀처럼 열릴 줄을 모
르는 고색이 자욱한 태극마크의 삼문 앞에 곱게 발을 돌릴 수 밖에는 없다.

삼문은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내삼문(內三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상덕사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계단 때문에 문 안쪽과 높낮이의 차이가 생기자 앞면 기둥을 1단 낮은 자리에 세
웠다. 그래서 기단 아래까지 기둥이 내려오는 특이한 형태를 띄는 것이다.


▲  전사청(典祀廳)

상덕사 서쪽 담장 너머에 자리한 전사청은 상덕사 제사 때 쓰일 제수(祭需) 음식을 만들고 보관
하는 공간으로 2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 건물(상덕사와 가까운)을 주청(酒廳)으로 하
고 서쪽 건물은 제사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로 삼았다. 사진에 보이는 방(문이 열려있
는 공간)은 제수를 준비하는 유사(儒士)가 목욕재계하고 하룻밤 지내는 곳이며, 마루에서 제상
을 보관했다.


▲  고직사(庫直舍)

전교당 서쪽에 자리한 고직사는 서원 관리인의 숙사로 서원 관리 및 학생들 식사와 상덕사 제사
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관리인은 주로 일반 백성이나 노비가 맡았는데, 여염집과 비슷한 모습으
로 남북으로 긴 'ㅁ'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방 7칸과 창고, 부엌 등 21칸 규모이다.
서원 경내에는 고직사가 2개 있는데, 전교당 서쪽의 고직사를 상고직사(上庫直舍), 농운정사 뒤
쪽 고직사를 하고직사(下庫直舍)라 구분하기도 한다.

부엌은 별도의 공간을 두지 않고 전사청과 연결되는 동쪽 통로와 하고직사로 통하는 남쪽 통로
옆에 각각 배치시킨 점이 주목을 끈다.

▲  고직사의 빛바랜 부엌들

먼지로 덮힌 솥뚜껑을 열면 모락모락 연기를 풍기는 기름진 쌀밥이 나올까? 하지만 현실은 밥은
커녕 먼지 밖에 없다. 아궁이도 불에 태울 땔감이 없어 멀뚱멀뚱 입만 열고 있다. 저녁 연기를
풍기던 왕년을 그리는 그들의 모습 앞에 막연히 초고속으로 변하는 사회에 매정함이 보인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솥뚜껑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참으로 쓸쓸해 보인다.

▲  고직사의 창고들
쌀과 여러 물품을 보관하던 공간으로 습기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바닥을 땅에서
약간 띄워 놓았다. 현역에서 물러나 굳게 입을 봉한 창고에는
헤아리기 힘든 고색의 때가 잔뜩 묻혀있다.

▲  옥진각에서 상고직사로 올라가는 계단

▲  퇴계의 유품과 서원의 보물이 담긴 옥진각(玉振閣)

역락서재 옆에 자리한 옥진각은 퇴계의 유품과 서원의 보물이 담긴 유물전시관으로 1970년에 지
어졌다. 외부는 한옥으로 내부는 현대식으로 되어 있는데, 건물의 이름인 옥진은 '집대성 금성
옥진(集大成 金聲玉振)의 줄임말이다.
이곳에는 퇴계가 생전에 쓰던 베자리와 베게, 안석(案席)을 비롯하여 백자타호(白磁唾壺), 투호
(投壺), 매화가 새겨진 매화벼루, 옥으로 된 서진(書鎭), 벼루집, 서궤(書櫃), 노년 시절에 짚
고 다닌 청려장(靑藜杖)이란 지팡이, 꽃무늬를 조각한 매화 등이 있으며, 퇴계가 설계하고 제자
이덕홍(李德弘)이 만든 혼천의(渾天儀)가 있어 퇴계가 과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음을 알려준
다. 옥진각 내부는 아쉽게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그곳 유물 관련 사진이 일절 없다. 몰래라도
담으려고 했는데 눈치가 너무 심해서...


▲  도산서원을 뒤로 하며

서원은 유학과 관련된 존재라 절에 비해 재미와 볼거리, 화려함이 많이 떨어진다. 듣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나는 유학의 중심지로 오늘날의 사립 상급학교라고 보면 될 듯 싶다.
향교를 나온 유생들은 학문과 출세를 위해 서원에 진학했고, 서원에서 학문을 갈고 닦아 성균관
(成均館)으로 진학하거나 과거에 응시했다. 또한 서원에 눌러앉아 공부를 하거나, 휼륭한 스승
을 찾아 이 서원, 저 서원 돌아다니는 철새도 적지 않았다. 허나 서원은 엄연한 양반의 공간이
다. 유학을 기본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 조정에서는 유학의 보급과 백성들 교화를 위해 서원에
서적과 노비, 토지, 자금을 두둑히 지원해 주었고, 서원 공사에 백성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하
지만 서원에 죽치고 앉는 유생의 수가 늘고 그 머릿수가 느는 만큼 경비는 늘어난다. 그만큼 국
가의 지원도 늘어나야 되는데, 이 모두 백성들의 세금으로 충당하는 것이다.

서원 유생들은 군역의 의무도 없고, 납세의 의무도 없으니 그저 공부한다는 구실로 서원에 죽치
고 앉으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지나치게 유학 이론에 목숨 걸며 이론 논쟁이나 하고 앉았고,
시간이 지날 수록 백성을 위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공간이 아닌 백성을 등처먹고 그들 위에 군림
하며, 쓸데없는 이념 논쟁이나 일삼는 밥버러지 공간이 되었다. 심지어 화양서원(華陽書院) 등
은 큰 조직을 이루며, 관아에 지원을 요구하고 대놓고 백성들을 갈취했다.
그렇게 민폐를 끼치며 독버섯처럼 성장한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정리사업에 보기 좋게 철퇴
를 맞고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47개만 간신히 살아남게 된 것이다.
나는 서원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재미도 없고, 철저히 유학과 관련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관심
이 적은만큼이나 아는 것도 적다. 그래서 서원에는 잘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꿩 대신 닭으로 찾아갔던 도산서원에서 버스 시간 관계로 거의 2시간을 머물러 있었다. 도산서
당 툇마루에 앉아 쉬기도 했고, 전사청 마루에 벌러덩 누워 잠을 청하기도 했으며, 천연대 벤치
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도산서원 초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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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서원의 떠오르는 성지 ~ 달성 도동서원 (다람재, 이노정)

 


♠  대구 현풍(玄風) 나들이 ~ 도동서원, 이노정 ♠
도동서원 담장
▲  도동서원 담장
 


여름의 제국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7월 중순, 경북의 중심지인 대구(大邱)를 찾았다. 대구에서
현풍(玄風) 지역 투어를 같이 할 여인네와는 북부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하여 동서울터미널에서
구미행 직행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바로 대구 북부로 가는 차편이 없음)
피서객들로 미어터지는 동서울터미널에서 강원도와 충청도, 전라도, 경주 방면 버스는 대기시
간이 무지 긴데 반해 구미행 버스는 무척이나 한산하다.

피서차량으로 여름 몸살을 앓는 중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하여
구미까지는 무려 4시간이나 걸렸다. 구미에 발을 내리기가 무섭게 대구 북부행 직행버스를 잡
아타고 오후 2시에 북부정류장에 도착했다. 그곳에 이르니 만나기로 한 여인네는 그의 4발 수
레를 끌고 일찌감치 나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의 차에 오르니 현풍에서 왔다는 그의 친구도
같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셋이서 현풍 나들이를 떠나게 되었지~~

아직 다들 점심을 못먹은 터라 현풍 직전 달성1차공단에서 그들의 단골 식당에 들어가 간단하
게 뼈다귀해장국을 먹었다. 그렇게 점심을 채우고 그의 친구가 만든 과자를 후식으로 배의 나
머지 공간까지 꾸역꾸역 채우니 포만감의 행복에 쓰러질 지경이다.

잠시 현풍터미널에서 들려 부산으로 가는 직행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1번째 답사지인 도동서원
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 여인네는 고향이 달성군 구지면이라 현풍과 구지 일대를 훤하게 꿰고
있어 나들이에 그리 불편은 없었다.

현풍에서 도동서원까지는 성하리와 자모리를 거쳐 낙동강변을 따라가다가 대니산(戴尼山, 408
m) 북쪽에 둘러진 험한 고갯길 다람재를 넘어야 된다. 다람쥐가 연상되는 다람재는 그 귀여운
이름과 걸맞지 않게 강원도의 고갯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험준하기 그지 없어 눈이 오
면 아예 통행이 불가능하다.
구불구불의 극치를 누리며 힘겹게 고개를 오르니 드디어 전망이 확트인 고개 마루에 이른다.
고개 정상에는 고개를 오르느라 지친 나그네와 수레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조촐하게 공
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선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을 비롯하여 도동서원 주변과 강 건너로
고령군 개진면이 시원스레 두 눈에 다가와 조망도 괜찮다. 이런 평화로운 풍경에 마음까지 여
유로워지는 이런 곳에 서면 멋드러지게 시(詩) 한 수 읊어야 폼이 나겠지만 그럴 실력이 되지
못해 그냥 쉽게 감탄사만 연발했다.


▲  다람재 정상에 세워진 6각형 정자
정자에 오르면 낙동강을 비롯하여 도동리, 강 건너의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
오사리, 옥산리 지역이 시원스레 시야에 들어온다.

▲  다람재에서 굽어본 천하 (1)
강 왼쪽은 도동서원이 있는 도동리로 기와가 씌워진 도동서원이 희미하게 보인다.
강 오른쪽은 고령군 개진면이다.

▲  다람재에서 굽어본 천하 (2)
장마로 누런빛을 드러낸 낙동강 너머의 비옥한 평야는 고령군 개진면 옥산리

▲  뭉글뭉글한 다람재 표석
도동서원을 찾는 답사객이 늘자 대구시에서는 서원으로 가는 길목의 하나인 다람재를
정비하고 고갯 마루에 다람재 표석과 정자를 갖춘 아담한 쉼터를
만들어 그들의 발길을 배려했다.

▲  김굉필(金宏弼)의 시 한 수가 담긴 표석

 <
길가의 소나무(路傍松)>
  一老蒼髥任路塵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 있어
勞勞迎送往來賓  괴로이도 오가는 길손 맞고 보내네
    歲寒與汝同心事  찬 겨울에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
  經過人中見幾人  지나가는 사람 중에 몇이나 보았는가


다람재에서 비록 보이는 범위는 좁지만 눈 아래로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며 대니산과 낙동강이
제공헌 선선한 기운을 즐기다가 구비구비 고갯길을 내려와 도동서원을 찾았다. 서원 주차장에
이르니 잔뜩 인상을 찌푸리던 먹구름이 조금씩 빗방울을 뿌려 천하를 적히기 시작한다.
서원을 둘러보기 전에 잠시 도동서원의 내력을 흔쾌히 짚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서원 건축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지는 서원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한 도동서원(道東書院) - 사적 488호
(강당과 사당, 담장은 보물 350호)

▲  다람쥐와 서화 무늬
자모에서 도동으로 넘어오는 다람재란 고개 이름이 이 다람쥐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하늘을 향해 꼬랑지를 흔들며 열심히 올라가는
모습은 조정으로의 출세를 염원하는 유생들의 욕심이 담겨진 것이다.


대구의 대표적인 서원인 도동서원은 앞에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뒤로는 나지막한 대니산을
배경으로 삼아 자리해 있다. 이 서원은 1568년 조선5현(朝鮮五賢)의 하나로 꼽히는 한훤당 김굉
필(寒暄堂 金宏弼, 1454~150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유림(儒林)에서 현풍 동쪽 비슬산(琵
瑟山) 자락에 세웠다. 여기서 조선5현이란 정여창(鄭汝昌), 이황(李滉), 조광조(趙光祖), 김굉
필, 이언적(李彦迪)을 일컫는다. 1573년 쌍계서원(雙溪書院)으로 정식으로 사액(賜額)되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파괴되었다.

1605년 김굉필의 외증손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유생들의 후원을 받아 김굉필의 무덤 밑인
지금의 자리에 서원을 재건하고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이라 했다. 김굉필의 명성 탓인지 유생
들이 보낸 후원금이 상당하여 제법 많은 돈이 남았다고 하며, 정구는 그 돈을 다른데 쓰지 않고
죄다 서원을 꾸미는 데 쏟아부었다고 한다. (차라리 왜란 이후 어렵게 살던 백성들을 도왔으면
좋지 않았을까?)

1607년 공자(孔子)의 도가 동쪽에 이르렀다는 뜻에서 도동서원으로 사액되면서 동네 이름도 도
동(道東)으로 강제로 변경되었다. 1871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도 운좋게 비켜
가면서 조선 중기 서원 양식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달성군이 경상북도 시절에는 도동서원이 경북 제일 남쪽 끝으머리에 자리한 탓에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서원을 이루는 건물도 거의 폐가처럼 변해갔고, 용머리와 여러가지 조각들이 도난
당하고 훼손되기가 바뻤던 것이다. 그러다가 1996년 대구에 강제로 편입된 이후, 비로소 제대로
관리가 이루어지면서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곳은 산지형(山地形) 서원의 배치형태로 진입공간과 강학공간, 제향공간으로 나눠져 있다. 진
입공간에는 수월루와 외삼문이 있고, 공부를 하는 강학공간에는 강당과 동재, 서재, 장판각이
있으며, 서원에서 제일 뒤쪽이자 가장 높다란 곳에 제향공간인 사당이 자리한다.

도동서원은 달성군(達城郡)의 이름난 명소로 필수 답사지로 손꼽힌다. 비록 안동 도산서원(陶山
書院)이나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명성까지는 아니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고 시간이 흐
를수록 찾는 이도 정비례로 늘어나 우리나라 서원의 새로운 성지(聖地)로 부각되고 있다. 이곳
이 세상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다른 서원과 차별화된 매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선 서원 주변을 두르는 흙담장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담장으
로 유명하며, 강당은 기단이 높고, 용머리와 다람쥐 등의 동물상, 서화(瑞花) 등이 조각되어 건
물의 품격을 드높인다. 게다가 강당으로 들어서는 환주문(煥主門)은 특이한 구조로 눈길을 잡아
맨다. 이들 담장과 강당은 서원에서 따로 분리하여 보물 350호로 지정되었다.

서원 앞에는 김굉필나무라 불리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아름드리 그늘을 드리워주며, 신도비와 사
적비 등이 자리한다. 유물전시관에는 왕이 서원에 내린 서책과 제기(祭器), 경현록(景賢錄) 목
판 등이 전시되어 있으나 거의 문을 열지 않는다.

그윽하고 정겹기 그지없는 도동서원, 400년 묵은 오랜 은행나무가 선사한 그늘로 마음이 시원하
며, 선비의 낭낭한 글읽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서원 내부, 다른 서원과 차별을 둔 다양한 볼
거리로 눈과 마음이 즐거운 곳이다.

※ 도동서원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600, 655, 달성5번 시내버스를 타고 현풍터미널 하차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급행좌석 4번을 타고 유가치안센터 하차
* 대구서부정류장에서 현풍 경유 창녕, 의령 방면 직행버스 이용
* 현풍터미널과 유가치안센터, 구지에서 달성4번(1일 7회 운행)을 타고 도동 종점 하차, 버스에
  서 내리면 바로 도동서원이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이정표가 잘 갖추어져 있어 찾기는 쉬움)
① 구마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 현풍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구지 → 수라리 → 도
   동서원
② 구마고속도로 → 달성나들목 → 논공카톨릭병원 → 현풍외곽도로 → 현풍3교 지나서 우회전
   → 자모 → 다람재 → 도동서원

★ 도동서원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관람시간 : 9시 ~ 18시 (겨울은 17시)
* 사당은 향사(享祀)를 지내는 매년 음력 2월 중정일과 8월 중정일에만 공개된다.
* 유물전시관은 평소에는 문이 잠겨져 있다. 사전에 문의하기 바란다.
* 도동서원 뒷산에 김굉필의 묘소가 있다.
* 도동서원 문화관광해설사가 2월부터 11월까지 매일 근무하고 있다. 근무시간은 10시~18시까지
  이며 설과 추석연휴에는 근무하지 않는다. 해설을 원하면 도동서원 관광안내소를 찾는다.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 (구지서로 726) <☎ 053-617-7620>


▲  김굉필나무라 불리는 은행나무 - 대구 보호구 3-9호

도동서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존재가 바로 김굉필나무라 불리는 커다란 은행나무이
다. 나무의 덩치가 얼마나 거대한지 그의 앞에서는 그저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위대한 자연
의 힘과 400년의 세월이 그를 산만한 덩치로 만든 것이다.
이 나무는 서원의 수문장 역할을 하는 존재로 1607년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있던 한강 정구가
서원이 사액된 기념으로 손수 심은 것이라 전하나 확실하진 않으며, 서원에 배향된 김굉필을 기
리고자 조선 후기에 서원 관계자들이 김굉필나무라 이름을 붙인 것이지 절대 김굉필이 심은 나
무가 아니다.

400년의 지긋한 나이에도 변함없이 울창한 모습을 간직한 은행나무의 자태와 웅장함에 그저 감
탄사 밖에는 쏟아지지 않는다. 천연기념물이나 적어도 지방기념물로 삼아도 정말 손색이 없어
보이는데, 나무의 품격에 걸맞지 않게 아직까지 보호수(保護樹) 등급에 머물러 있다. 먹구름의
영향으로 나무 사진이 다소 흐리게 나왔지만 여름의 제국이 사라지고 가을이 오면 가을에 물든
아름다운 그를 보게 될 것이다.


▲  노쇠한 나무의 가지를 받치는 기둥들

아무리 울창하고 거대한 모습을 지녀도 400년의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400년의 노구를
지탱하기 힘들어 기둥을 여러 개 세워 지구의 중력에 힘겹게 저항하고 있다. 나무의 동쪽 줄기
는 이미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역시나 세월보다 무거운
것은 천하에 아무것도 없다. 손으로 만질 수 없을 따름이지 세월의 무게는 무한대(∞)이기 때문
이다, 옛날에는 동네 애들이 땅에 내려앉은 가지를 타고 나무에 올라가 놀았다고 한다.


▲  서원의 정문인 수월루(水月樓)

수수한 모습을 지닌 수월루는 서원의 정문이자 외삼문(外三門)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누각이다. 누각에 오르면 은행나무 너머로 낙동강의 풍광이 속시원하게 다가온다. 이곳은
유생들이 공부로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며 바람을 쐬는 쉼터 및 교육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누
각으로 들어서는 계단이 2명 정도가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데, 이는 세상의 번잡함을 멀리하고
서원에 지나치게 사람이 많은 것을 경계하며, 정말로 학문에 정진할 소수정예만을 받아들이겠다
는 서원의 의지로 보인다.

수월루란 이름은 누각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밤하늘을 비추는 달이 바라보여 지어진
풍류적인 이름이다. 강과 달을 바라보며 시를 짓고 헛제사밥을 차려 음식과 곡차를 끼며 달놀이
를 즐기던 현장으로 선비들의 해학적이고 고풍스런 풍류가 와 닿는 공간이다. 지금은 노쇠한 수
월루의 보존을 위해 누각 출입이 통제되어 그들의 풍류를 따라하지 못함이 애석할 따름이다.

◀  수월루에서 강당으로 들어서는 환주문(煥主
門)
수월루를 지나면 강당으로 향하는 조그만 계단
과 함께 환주문이 나온다.
환주문은 주인을 부르는 문이란 뜻으로 주인의
식을 가지고 들어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
다. 이곳의 계단도 수월루의 계단처럼 폭이 좁
고, 문의 높이도 낮아 부득이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가야 된다. 이는 옛 사람들의 키가 작아서
가 아니라 서원에 들어온 이들에게 자신을 낮추
고 서원에 배향된 김굉필과 서원에 있는 덕망있
는 이들에게 머리를 숙여 예의를 표하란 뜻에서
문의 높이를 일부로 낮게 만든 것이다.
머리가 부딪쳐 혹여나 문이 손상되지 않도록 머
리를 푹 숙여 문을 들어서니 마음가짐이 절로
숙연해진다.

여닫이 문을 고정시키는 정지석(현판이 걸린 평
방의 양쪽 모서리)에는 아름다운 꽃무늬가 새겨
져 있으니 살펴보기 바란다.

▲  도동서원 서재<西齋, 거의재(居義齋)>

▲  도동서원 동재<(東齋), 거인재(居仁齋)>

환주문을 들어서면 강학공간인 강당이 정면에 나타난다. 그 좌우로 서원 유생들의 숙소인 조그
만 서재와 동재가 서로 마주보며 자리해 있는데, 서재는 의로움이 산다는 뜻에서 거의재, 동재
는 인자함이 사는 뜻에서 거인재라 불린다. 서원의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구름처럼 몰려
왔을 유생들의 고무신이 가득했을 섬돌에는 먼지만이 자욱하여 세월의 무상함을 드러낸다. 아무
도 없는 방문에 귀를 대면 학문의 어려움에 넋두리를 떨던 그들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올 것만
같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는 어려운 것이다.


▲  강당 앞뜨락에 머리를 내민 거북이
화마(火魔) 등의 나쁜 기운을 막고자 만든 것으로 보인다.

▲  강당 우측에 자리한 장판각(藏板閣)
서원의 소중한 보물인 경현록(景賢錄)이 있었으나 지금은 유물전시관에 가 있다.

▲  도동서원의 강당인 중정당(中正堂) - 보물 350호

고색의 때가 만연한 서원의 강당(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로 1.5m의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하여 웅장함과 품격이 더욱 돋보인다. 건물 좌측과 우측 방은 온돌방이고
가운데 3칸은 개방된 대청마루로 유생들이 유학의 도를 배우며 토론하던 장이다.
건물의 모습은 여느 한옥과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이 건물의 매력은 바로 기단부에 있다. 기
단을 이루는 돌은 일정한 법칙이 없이 제멋대로의 모습으로 자유분방하게 늘어서 눈길을 끈다.
그런 기단에는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 4개가 삐죽 나와 있으며, 다람쥐 모양의 동
물상과 서화(瑞花)무늬 2쌍이 조각되어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이들 무늬는 모두 나름대로
의 뜻을 담고 있으니, 기단을 유심히 살펴 괜한 보물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  삐죽 고개를 내민 용머리

멀뚱한 표정으로 기단 밖으로 고개를 내민 4마리의 용은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화마(火
魔)의 피해를 막고자 만든 것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들 용머리는 겉으로 보기에
는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여러 차례 도난을 당했던 아픔의 과거를 간직하여 듣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저 중에서 1~2개만 진품이고 나머지는 모조품이
라고 한다. 모조품의 진품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유물전시관이나 대구에 있는 모박물관
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  해학적인 표정의 용머리 ~ 용머리의 눈이 마치 누군가에게 단단히
얻어터진 듯, 밤탱이가 된 것처럼 보여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  강당 내부에 걸린 2개의 현판

▲  강당 좌측에 있는 굴뚝
연기를 모락모락 뿜어내던 왕년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그의 모습에 쓸쓸함이 비쳐진다.

▲  사당으로 들어서는 내삼문(內三門)

강당 뒤에는 서원의 중심인 사당이 있다. 김굉필이 배향된 사당으로 들어서려면 내삼문을 지나
야 되는데 제향일을 제외하고는 입을 굳게 봉한 채,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  도동서원의 백미, 담장 - 보물 350호

고색이 가득 깃들여진 담장은 자연석을 정렬시킨 바닥돌 위에 자연막돌을 쌓고 그 위에 암키와
를 5단으로 놓아 그 사이에 진흙층을 쌓아 거의 1m 간격으로 수막새를 엇갈리게 끼웠다. 담장에
암키와와 수막새를 사용한 것은 음양(陰陽)의 조화를 통해 담장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장식효과
를 살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밋밋한 모습의 다른 서원의 담장과 달리 정겹고 아름다운 모습
으로 우리나라의 오래된 담장 중에서 최초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흙과 돌, 기와를 적절히 이용했으며 수막새를 달아놓은 매력적인 담장으로 나중에 한옥을 짓고
산다면 저런 담장을 만들어 집을 두르고 싶다. 서원과 외부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담장에 미적
(美的)인 부분이 크게 배려되어 밤손님조차도 담을 아껴줄 것 같다. 담에 쓰인 흙에는 오랜 세
월의 누런 때가 가득 끼여 담장에 대한 눈길을 단단히 붙들어 맨다.


♠  김굉필과 정여창 두 노인이 말년을 보내며, 석별의 정을 나누던 곳
이노정(二老亭)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30호

▲  이노정 전경 (정자를 가린 건물은 정자를 관리하는 노부부의 집)

▲  담장 너머로 바라본 이노정

▲  곁에서 바라본 이노정

도동서원을 둘러보고 구지(창리)를 거쳐 내리에 있는 이노정을 찾았다. 모정에서 이노정을 알리
는 갈색 이정표를 따라 조그만 농로로 들어서면 막다른 곳에 녹음이 짙은 숲을 병풍으로 두르며
부뚜막 연기가 뿜어 나올 것 같은 정겨운 풍경의 기와집, 이노정이 나온다.
세상과 거리를 두며 강가에 홀로 자리한 외로운 기와집인 이곳까지는 현대의 이기(利器)는 전혀
들어오지 못하고 전통 방식으로 초롱불로 어두운 밤을 밝히며 장작을 뗄 것 같은 분위기가 엄습
한다. 허나 안으로 들어가보면 티비에 냉장고까지 현대의 이기는 이미 여기까지 손을 썼다. 이
곳은 도동서원처럼 낙동강변에 자리해 있는데 그곳과는 달리 강이 바라보이는 높다란 곳에 터를
잡았다.
 
고색창연해 보이는 이노정은 다른 말로 제일강정(第一江亭)이라고도 하며, 김굉필과 정여창(鄭
汝昌)이 말년을 보낸 곳이라 전한다.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화를 당한 그들이 시골(김굉필은 도
동서원이 있는 도동리, 정여창은 함양)로 내려와 살다가 1504년 이곳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들은 정자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팔자 좋게 지내다가 연산군(燕山君)이 훈구파(勳舊派)와 건
방진 사림계열 유생들을 때려잡고자 일을 벌린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로 석별의 정을 나누
었고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처단되었다. 정자의 이름인 이노(二老)는 김굉필과 정여창 두 노인
네를 지칭한 것으로 그 당시 그들의 나이는 50대 중반이었다.

도동에 머물던 김굉필은 배를 타고 10km 떨어진 이곳을 자주 왕래했다고 하며 그들이 사라진 이
후 정자는 그들을 추모하는 이들이 관리하였다. 1885년 영남 유림에서 중수를 했고, 1904년에도
수리를 하였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정자의 두 이름(이노정, 제일강정)이 새
겨진 현판과 그들이 지은 유악양(遊岳陽, 악양을 거닐다)이란 시가 걸려있다.

이곳은 우물마루를 둔 정자 건축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평면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천정에는
우물정(井) 모양의 통풍구를 두어 산바람과 강바람이 서로 어우러지게 하여 한여름에도 더위를
잊을 정도로 시원하다. 정자 주변으로는 얕은 담장을 둘렀으며 정자 밖에 뒷간을 두었다.

현재 이노정은 어느 노부부가 관리하고 있다. 그들은 정자 앞에 딸린 조그만 기와집에 살고 있
는데, 드문드문 오긴 하지만 정자를 찾은 답사객에게 정자 내부를 둘러볼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다. 우리가 갔을 때는 처음에는 조금 경계의 눈빛을 보냈는데,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표정을
바로 하고는 구경하고 가라며 내부로 안내해 주었다.

그들은 이노정에서도 가끔 잠을 자고 생활을 하는지, 정자 내부는 모기장이 쳐져있고, 여러 생
활용품이 널려 있는 등 다소 어수선해 보인다. 비록 세상물정 모르고 공자와 성리학 사상만 들
쑤시던 지배층의 전유물이긴 하지만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 살고자 했던 그들의 마음가짐이 보
이는 정자로 두 노인네가 술 한잔 걸치며 시를 짓고 달놀이를 즐길 때 그들의 노비는 강에 돌을
던지며 신세 한탄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비록 벼슬을 박탈당하고 시골에 숨어 사는 처지긴 하
나 잘나가는 집안의 양반이자 조선의 중심계층인 선비이며, 그들을 추종하는 제자들이 많기 때
문에 먹고 사는 문제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  중후한 멋이 엿보이는 이노정 현판

▲  제일강산(第一江山) 현판


▲  정자 밖에 자리한 뒷간 - 하얀 털의 견공(犬公)이 처음 본 우리에게
경계의 메세지를 보낸다.

▲  정자 담장 밖으로 장맛비로 불어난 낙동강이 보인다.
강 건너로 보이는 곳은 고령군 우곡면이다.

▲  온돌방을 지피던 아궁이의 흔적

▲  아마존의 깊은 늪지대처럼 다가서기가 두려운 이노정 앞 낙동강 늪지대
홍수가 심할 때는 저 늪지대는 물론이고 정자 앞까지 강물이 넝실거린다.


※ 이노정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대구서부정류장에서 현풍 경유 이방, 의령 방면 직행버스를 타고 모정(내리) 하차 (1일 20회
  남짓 운행)
* 현풍터미널에서 이방, 신반, 의령 방면 직행버스 또는 달성7번 시내버스(1일 6회)를 타고 모
  정(내리) 하차
* 모정에서 대암리, 의령 방면으로 2분 정도 걸으면 이노정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거기서
  5분 정도 들어가면 이노정이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이노정까지 차량 접근 가능, 단 길이 좁으므로 정자를 둘러보고 차를 돌
  려 나갈 때 주의 요망)
① 구마/중부내륙고속도로 → 현풍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구지 → 모정 → 이노정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내리 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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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12월 1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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