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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7.21 서해바다에 떠있는 아름다운 섬의 무리들 ~ 군산 고군산군도, 선유도 나들이 (장자도, 비응항)
  2. 2012.12.07 근대문화유산의 떠오르는 성지 ~ 군산 나들이 (왜식 사찰 동국사, 은적사, 발산초교...)

서해바다에 떠있는 아름다운 섬의 무리들 ~ 군산 고군산군도, 선유도 나들이 (장자도, 비응항)

 

' 군산 선유도,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 나들이 '

▲  고군산군도

 


봄이 나날이 흥해감과 동시에 여름이 천하를 훔칠 기회를 엿보던 4월 끝 무렵에 군산 선유
도를 찾았다. 이곳은 마음 속 바구니에 담아두며 인연이 닿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
디어 그 인연이 닿았다.

아침 해가 떠오르기가 무섭게 집을 나서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군산으로 가
는 일반고속버스를 탔다. 버스는 2시간 40분 동안 열심히 바퀴를 굴려 군산 도심에 자리한
군산고속터미널에 나를 내려준다.

선유도 유람선이 출발하는 비응항까지는 10시 반까지 가야 된다. 남쪽에서 온 일행은 이미
도착한 상태, 군산시내에서 비응항은 시내버스 5개 노선이 운행하고 있는데, 노선 수를 봐
서는 제법 많이 다닐 것으로 보인다. 허나 그것은 치명적인 함정. 그들은 각각 1~2시간 간
격으로 운행하고 있어 인구 28만을 지닌 도시의 시내버스치고는 다소  절망적인 수준이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시외/고속터미널을 경유하는 4개 노선의 버스 시간을 전날 확인해 두
었는데, 그새 시간표가 바뀌었는지 정보 오류인지 차가 좀처럼 오질 않는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지 뱃시간은 다가오지, 초조함으로 제대로 쫄깃해진 염통을 부여잡으며
일단 군산시내버스 상당수가 종점으로 삼는 군산대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군산대 후문에서
내렸다. 그런 다음 서둘러 택시를 낚아 비응도로 이동했다. 시내에서 바로 택시로 가도 되
지만 그럴 경우 막대한 요금 앞에 뒷목을 잡을 수 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택시는 나의 조급한 마음을 헤아린 듯, 비응도까지 새만금북로로 시원하게 질주했는데, 15
km 거리를 13분에 주파하는 위엄을 보인다. 허나 요금은 14,000원 약간 넘게 나와 늘 돈에
쪼들려 사는 나의 마음을 무척 쓰라리게 만들었지. 고군산군도와 선유도 때문에 이곳에 왔
는데, 그곳을 못본다면 애써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어지고 만다. 그래서 부득이 무리를 하
고 말았다.

비응도(飛鷹島)에 이르니 시간은 오히려 20분의 여유가 있다. 그래서 월명유람선 선착장까
지 안가고 비응항에서 내려 걸어갔는데, 상춘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선착장에서 일행들을
만나 10시 30분에 출발하는 유람선에 몸을 실었다.


♠  고군산군도 해상 유람 (비응도→선유도)

▲  만선의 꿈을 꾸는 어선들의 보금자리 ~ 비응항(飛鷹港)

고군산군도 유람선인 월명유람선은 비응항(비응도항)을 출발하여 횡경도와 방축도, 명도, 대장
도, 장자도 등을 차례대로 지나 선유도에 배를 대고 잠시 머물다가(1시간 정도 머무는 B코스와
4~5시간을 머무는 C코스가 있음) 다시 비응도로 돌아오는 코스로 비응도에서 선유도까지 약 1시
간, 나오는데 40~50분 정도 걸린다.
비응도에서 방축도와 명도를 경유하여 선유도까지 보통 30~31km 정도 되며, 고군산군도가 한반
도와 좀 떨어져 있긴 하지만 비응도와 오식도(筽篒島)가 섬에서 한반도의 일원이 되면서 서로의
거리가 많이 좁혀졌다. 그 이전에는 군산시내에 위치한 군산항에서 배를 타야 했는데, 꼬박 2시
간 이상 걸렸다. (지금은 1시간) 배를 대는 곳은 오로지 선유도 한곳으로 나머지 섬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나가며, 다른 섬에 발을 들이고 싶은 경우 군산여객선터미널이나 선유도에서 일
반 여객선을 이용해야 된다.
 
유람선은 2층으로 이루어진 배로 1층과 2층 모두 관광객들로 만원을 이룬다. 2층에는 간식과 음
료수, 술을 파는 매점을 비롯해 넓은 노래방 홀까지 갖추고 있는데, 배가 움직이는 내내 중/장
년층 단체객들이 노래방을 점거하며 노래를 부르고 신나게 춤판과 술판까지 벌인다. 일반 여객
선도 아닌 유람선이라 그러려니 해도 너무 지나치면 안하는 것만 못하다고 조금은 눈살을 찌푸
리게 한다. 게다가 그렇게 넋을 놓고 놀다가 만약 사고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하는지 정말 대책
이 안보인다. 물론 배가 움직이는 동안 심한 요동으로 인해 속이 울렁거리거나 현기증이 일어나
거나 심하면 멀미까지 하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오가는 시간도 지루하니 그렇게라도 신나게 몸
을 움직이면 그런 것을 잠시나마 떨쳐버릴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어느 정도 선은 지켰으면 좋
겠다. (지켜서 손해볼 것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탄 배는 10시 반에 출발하는 것으로 승선이 지연되어 거의 10시 40분에 뱃고동을 울리며
미끄러지듯 비응항을 출발했다. 그렇게 한반도를 뒤로하며 고군산군도로 느릿느릿 다가선다.
우리는 2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파도로 인해 배가 좀 요동을 치면서 자연히 속에서 불편한
신호가 왔다. 오랜만에 배를 탄 것도 있겠지만 속이 계속 울렁거려 미칠 것 같다. 그래도 계속
참으며 자리를 지키다가 결국 자리를 뜨고 1층으로 내려온다. 배를 타면서 속이 말썽을 부릴 때
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선창으로 나가 바닷바람을 쐬는 것이 매우 좋지. 1층으로 내려오니 2
층보다는 요동이 적어 불편한 속이 조금 진정이 되었고, 바깥으로 나가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다
내음에 심취하니 그나마 남아있던 불편함도 거의 가신다. 게다가 사진기를 꺼내 바다와 가까이
다가오는 고군산군도를 열심히 담으니 정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  비응도를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한반도에서 멀게만 느껴졌던
고군산군도가 그 모습을 서서히 비춘다.

▲  서해바다란 넓은 도화지에 대자연 형님이 점을 여럿 찍으니 그 점이
바로 서해바다의 꽃인 고군산군도이다.

▲  길게 드러누운 횡경도(橫境島)

고군산군도에 이르면 가장 먼저 횡경도가 마중한다. 새만금방조제가 생기기 이전에는 야미도(夜
味島)가 가장 먼저였지만 그곳이 방조제로 인해 육지와 끈끈하게 연결되면서 이제는 횡경도가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횡경도는 동서로 길쭉한 64.4만㎡의 조그만 섬으로 소횡경도를 거느리고 있다. 사람이 살지 않
는 무인도로 낚시터로 유명해 낚시꾼들의 출입이 잦으며, 이 섬에 들어가려면 선유도나 야미도
에서 어선을 빌려타야 된다. 섬 중앙에는 할배바위(장자할배바위)란 바위가 있는데, 상투에 갓
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형상처럼 생겼고, 소횡경도에는 거북이가 목을 뺀 듯한 모습의 거북바
위와 등대가 있다.


▲  보다 가까워진 횡경도(왼쪽)와 소횡경도(오른쪽)

▲  등대가 있는 소횡경도 서쪽 부분 <왼쪽 벼랑이 거북바위>

▲  서남쪽에서 본 소횡경도와 횡경도
속세에서 잠시 나란 존재를 지우고 싶을 때 살짝 찾아와 아무도 모르게
며칠 정도 머물고 싶다. 아니면 내가 중심이 되는 나만의 나라를
이곳에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안될꺼야..)
 

▲  횡경도 해역에서 바라본 야미도와 신시도(新侍島)

▲  횡경도 해역에서 바라본 선유도와 관리도

▲  고군산군도의 방파제인 방축도(防築島)

횡경도를 지나면 방축도란 섬이 나타난다. 이 섬은 선유도 북쪽에 자리하여 고군산군도의 자연
산 방파제의 역할을 하는데, 그런 연유로 방축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유인도로 신라 후기에 바다의 제왕 장보고(張保皐)가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동아시
아의 드넓은 바다를 엄하게 호령하던 시절, 당나라 상인들이 신라에 가다가 표류하여 이곳에 들
어와 정착했다고 전한다. 허나 마을 뒷산에 7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어 이미 청동기시대(靑銅器時
代)부터 이 좁은 섬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섬 주변은 암석이 많고, 수심이 얕아서 조류가 거세고 파도가 강하다. 허나 낚시 장소로는 제격
이라 많은 낚시꾼들이 찾아오며 농어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그리고 해변에는 독립문바위와 시
루떡바위, 책바위 등 대자연이 빚은 여러 바위들이 포진해 섬의 아름다움을 더욱 수식해준다.


▲  방축도와 외부를 이어주는 방축도 포구
저 섬에도 잠시 두 발을 들였으면 좋으련만 이렇게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  방축도 해역에서 바라본 횡경도

▲  방축도 서부


▲  방축도의 명물 독립문바위가 중앙에 보인다.

방축도 서쪽 해안에 자리한 독립문바위는 조그만 돌다리나 고가도로처럼 생긴 참으로 기묘한 바
위이다. 서울의 독립문(獨立門)처럼 생겼다하여 독립문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북문바
위라 불리기도 한다. 바위 서쪽에도 산을 갖춘 섬 같은 땅이 보이는데, 겉으로 보면 별도의 섬
처럼 보이지만 엄연한 방축도의 일부로 그 사이가 가늘게 이어져있다.


▲  말도(末島)와 명도(明島), 방축도의 서부
푸른 산과 바다 밖에는 안보이는 말그대로 망망대해(茫茫大海)의 고적한 섬이다.


우리를 태운 유람선은 방축도에서 남쪽으로 꺾는다. 그래서 명도와 말도는 이렇게 아주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밝은 섬이란 뜻의 명도는 달과 해가 합쳐진 것처럼 물이 맑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사람들
이 살고 있는 아주 조촐한 섬으로 낚시터로 명성이 높으며, 섬의 야트막한 산에는 수십 가지의
각종 약초가 자라나 약산(藥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말도는 고군산군도의 종점이자 끝으로 가장 서쪽에 자리한다. 끝섬이라 불리기도 하며, 한반도
에서 고군산군도를 왕래하는 여객선의 종점으로 1909년에 지은 말도등대가 서해바다와 군산을
찾는 배들의 밤길을 밝혀준다.
이 섬은 조선 중기부터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며, 심씨 성을 가진 판서(判書)가 귀양을 와서 밭
을 일구고 살면서 인구가 늘었다고 한다. 그가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로 소환된 이후, 섬 사람들
은 그의 공덕을 기리고자 영신당(靈神堂)을 지어 매년 11월에 제를 지냈으나 기독교가 이 섬을
휩쓸면서 당제(堂祭)는 끊기고 말았다.


▲  끝없는 서해바다 - 저 수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속인(俗人)들이
그렇게나 동경하던 극락이나 유토피아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해가 뜨고 지는 사이에 잠시 머무는 그만의 비밀 공간이 있는지도 모른다.

▲  관리도<串里島, 곶리도>

대장도 서쪽에 자리한 관리도는 곶리도라고도 한다. (어차피 한자는 같음) 원래 이름은 꽂지섬
이었다고 하는데, 섬의 모습이 전쟁에 출진한 장군들이 적의 몸에 화살을 쏘아 꽂아대는 모습이
라 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섬의 지형이 마치 꼬챙이처럼 생겼다
고 하여 꼭지도라고 부르다가 꼬챙이를 뜻하는 관(串)을 붙여 관리도(곶리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 섬에는 완전무장한 장군의 모습 같은 투구봉, 말을 탄 무인의 모습을 한 질망봉, 승려로 이
루어진 승군(僧軍)의 모습을 한 중바위(중바우), 시루떡 모양의 시루봉 등이 있으며, 갖가지 바
위들이 섬을 수식하여 눈을 심심치 않게 한다. 섬 사람들은 대부분 전복을 양식하거나 고기잡이
로 생계를 꾸린다.

▲  관리도 해역에서 바라본 횡경도

▲  관리도 해역에서 본 선유도와 장자도


▲  장자도 서쪽에 홀로 떠있는 등대 - 등대 너머로 방축도의 동부와
동서로 길쭉한 횡경도가 보인다.

▲  대장도(大長島, 왼쪽 섬)와 장자도(오른쪽 섬)

선유도 바로 서쪽에 자리한 대장도는 남쪽으로 장자도와 이어져 있다. 이 섬은 옛날에 어떤 사
람이 섬을 1바퀴 둘러보고는 미래에 크고 긴 다리가 생길 것이라 말을 하고 섬을 떠났는데, 한
반도와의 연륙을 애타게 꿈꾸던 섬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며 섬 이름을 크고 긴 다리를 뜻하
는 대장도로 갈았다고 한다.
과연 그의 예언대로일까 대장도를 잇는 현수교(懸垂橋)가 생겨나 장자도는 물론 선유도까지 걸
어서 이동이 가능해졌고, 새만금방조제의 등장으로 고군산군도의 동쪽을 이루던 신시도와 야미
도 등이 연륙되었으며, 한반도에서 선유도를 붙들어 맬 다리 공사를 진행중이라 그것이 완성되
면 선유도는 물론 대장도까지 4발 수레로 오갈 수 있게 된다. 그리되면 그야말로 크고 긴 다리
가 생기는 셈이다.

섬 동쪽에는 고군산군도에서 꽤나 이름난 장자할매바위가 있는데, 그 모습이 아이를 등에 업은
형상으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 (바위는 못봤음)
조선시대(또는 고려시대)에 대장도에 살던 선비 부부가 있다. 남편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서울
로 과거를 보러 나갔는데, 부인은 몇달 동안 한결같이 장자봉에 올라 남편의 과거 급제를 기원
했다. 허나 남편은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때를 한참이나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애가 탄 부인은
매일 아이를 업고 장자봉에 올라 남편을 실은 배가 오기를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남편이 돌아왔다. 허나 과거 급제로 금의환향(錦衣還鄕)을 한 것이 아
니라 육지에서 첩실과 그를 통해 얻은 아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육지에 오랫동안 머물며 소실
까지 맞을 정도면 선비의 집안은 제법 형편이 되었던 모양이다.

남편의 일탈에 크게 뚜껑이 열린 부인은 눈물을 떨구며 뒤로 돌아서는 순간 등에 업힌 아이도
덩달아 발끈했는지 힘을 주었는데, 그 바람에 그들은 즉석에서 돌로 변했다고 한다. 한편 아내
와 아이가 그렇게 사라지자 남편은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며 횡경도에 들어가 그 벌로 돌이
되니 그 돌이 장자할배바위라고 한다.
이 전설은 대장도나 주변 섬에 살던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지만 순간의 실수로 어긋나버린 이
곳에 살던 어느 부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은 것이 아닐까 싶다. 굳이 과거를 보러 간 것이
아니라도 육지에 일이 있어 나간 남편이 첩을 데리고 오면서 그들의 가정은 파탄이 났고 이에
발끈한 부인은 아이와 함께 장자할매바위에서 투신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아내와 자식이
죽자 발작한 남편도 횡경도에서 자살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이후 사랑하는 이와 이 바위에서 사랑을 약속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믿거나 말거나 속설
이 전해오며, 월명유람선은 대장도 뒷쪽으로 가기도 하고 선유도 사이인 앞쪽으로 가기도 하여
뒷쪽으로 가는 경우에는 이 바위를 만날 수 없다. 그날 운에 맡기는 수 밖에는...

그리고 대장도 남쪽에 자리한 장자도는 선유8경의 하나인 장자어화(壯子漁火)의 현장이다. 한때
멸치포구로 유명했고, 고군산군도 제일의 어항(漁港)으로 많은 배들이 심야에 장자도 앞바다에
서 고기를 잡느라 불야성(不夜城)을 이루었는데, 그 배에서 비치는 불빛이 아름다운 풍경을 자
아내 '장자어화'가 된 것이다.

장자도는 옛날에 힘이 센 장사가 나왔다고 하여 유래되었다는 설과 가재미와 장재미를 합쳐 장
자도라 했다는 설이 공존한다. 이곳 포구는 자연이 빚은 대피항으로 유명해 예전에는 고군산군
도와 서해바다에서 가장 잘나가는 섬이었다. 섬의 모습은 말 앞에 놓은 커다란 구유처럼 장자봉
이 우뚝 솟은 형국으로 서 있고, 그 앞에 선유도가 맥을 감싸안고 있어 큰 인재가 많이 나오는
지형이라고 하며, 북쪽의 대장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거의 한몸이 되었는데, 서해를 바라보는 사
자바위(사자봉)를 장자도를 지키는 바위로 여기고 있다.
섬 동쪽에는 장자대교를 통해 선유도와 이어져 있다. (차량 통행은 어려움)


▲  대장도 사자바위(사자봉)
사자나 고양이, 개가 땅바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 같다. 오른쪽 봉우리에
머리에 해당되는 조형물만 갖다 붙인다면 영락없이 그 모습인데 말이다.

▲  다른 각도에서 본 대장도 사자바위(사자봉)

▲  선유도 인어등대


▲  장자도 해역에서 본 관리도와 말도, 방축도

▲  장자도와 선유도를 잇는 장자대교


♠  고군산군도의 중심지, 선유도(仙遊島)

▲  선유도선착장에서 바라본 선유대교(무녀도와 선유도를 이어줌)

고군산군도를 1시간 정도 배회한 유람선은 이 군도(群島)의 중심지이자 유일하게 상륙하는 선유
도로 들어와 선유도항(선유도여객터미널)에 고된 몸을 기댄다. 이윽고 여기서 1시간 정도 머무
니 반드시 출발시간을 지켜달라는 안내방송이 강하게 나온다. 오랜 뱃길에 심신이 지치거나 고
군산군도의 매력에 눈과 마음이 지나치게 호식(好食)을 누린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나오면서 썰
렁했던 선유도항은 잠시나마 활기를 누린다.


▲  선유도항에 몸을 기댄 월명유람선

선유도는 고군산군도의 중심 섬으로 예전에는 군산도(群山島)라 불렸다. 섬 북쪽에 있는 봉우리
의 형태가 마치 2명의 신선(神仙)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여 후대에 신
선이 머무는 섬이란 뜻의 선유도란 고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섬의 면적은 2.13㎢로 5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원래는 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것을
바다가 실어다준 흙과 모래로 하나의 섬이 되었다. 고려 때는 송(宋)나라와 동남아의 여러 제국
(諸國)을 오가는 중간 기항지로 관청을 두어 그들의 편의와 상거래를 관리했고, 조선 초기에 수
군기지인 군산진(群山鎭)을 두어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파견했다. 군산진은 조선 세종(世宗
) 때 지금의 군산시내로 이전되면서, 군산이란 이름도 같이 따라갔는데, 선유도와 주변 섬들은
옛 군산이 있던 곳이라 하여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597년에는 천하의 영원한 해신(海神),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진도 울돌목에서 불과 13척의 형
편없는 전력으로 서해바다로 진출하려는 왜선 330여 척을 맞아 분전 끝에 31척을 격파하고 92척
을 사용 불능으로 만들었으며, 18,000여 명의 왜군을 물고기 밥으로 만든 이른바 명량대첩(鳴梁
大捷)의 위업을 이루었는데, (아군의 피해는 왜군의 1%도 안될 정도로 매우 가벼운 수준, 이순
신이 탄 대장선에서 2명 전사, 3명 부상 / 다른 배도 비슷한 수준) 그 대첩을 치르고 잠시 몸을
추스리고자 선유도까지 올라왔다. (1597년 9월 21일)
그는 선유도에 이르자 몸살로 고생을 했으며, 거기에 태풍까지 몰려와 12일 정도 머물렀다. 그
리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완도 고금도(古今島)에 주둔하며 원균(元均)이 말아먹은 조선 수군
을 빛나게 재건했다.

선유도에는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선유8경이 있다.
1. 선유도 해변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아름다움, 선유낙조(仙遊落照)
2. 가늘고 긴 선유도해수욕장의 명사십리(明沙十里)
3, 선유도로 유배를 온 충신들이 매일같이 올라 임금을 그리워했다는 망주봉(望主峰), 특히 여
   름에 큰 비가 오면 망주봉에서 일시적으로 7~8개의 물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지니 이것을 망주
   폭포(望主瀑布)라고 한다.
4, 선유도 모래사장을 위에서 바라보면 마치 내려 앉는 기러기처럼 생겼다 하여 평사낙안(平沙
   落雁)
5. 무녀도(巫女島)에 속한 3개의 무인도가 풍기는 아름다운 모습, 삼도귀범(三道歸帆)
6. 장자어화 (자세한 것은 앞의 장자도 부분 참조)
7. 신시도에 있는 월영봉(月影峰, 199m)의 가을 단풍이 매우 곱다고 하여 월영단풍(月影丹楓)
8. 방축도와 말도 등 12개 섬이 마치 투구를 쓴 군사들이 도열한 모습과 같다고 하여 무산12봉(
   巫山十二峰)


선유도는 명사십리로 유명한 선유도해수욕장을 비롯하여 망주봉, 옥돌해수욕장, 몽돌해수욕장,
수군절제사 선정비(善政碑) 등의 명소가 있으며, 선사시대의 아련한 흔적인 패총(貝塚, 조개더
미)도 있다. 또한 섬마을답게 오룡묘제, 장생제, 수신제 등의 마을 제사와 풍습이 있었으나 지
금은 모두 사라져 아쉬움을 건네며, 주변 섬과는 다리로 이어져 있는데, 동쪽으로 무녀도, 서쪽
으로는 장자도, 대장도와 이어져 있어 배가 아닌 두 다리나 자전거로 둘러볼 수 있다.

한반도와 선유도를 이어주는 나루터는 2곳으로 선유대교 북쪽에 자리한 선유도항이 가장 크다.
여기서는 월명유람선을 비롯하여 군산을 오가는 여객선이 운행하며, 망주봉 동쪽 선유3구 선착
장에서는 야미도에서 출발한 새만금유람선이 오간다. 허나 선유도를 한반도에 단단히 붙들고자
현재 연륙교를 짓고 있어 그것이 완성되면 선유도까지 편히 수레로 오갈 수 있게 되며, 그때가
되면 군산에서 시내버스와 시외버스가 들어와 교통이 보다 좋아질 것이다.
허나 그로 인해 오랫동안 한반도와 고군산군도를 이어주던 해상교통의 희생은 어쩔 도리가 없어
군산을 오가는 여객선과 유람선의 노선 조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  선유도항 주변

선유도와 한반도를 이어주는 교통의 중심지, 선유도항은 여객선표를 구입하는 매표소를 비롯하
여 식당 몇 곳이 전부이다. 선유1구 마을과 선유2구 마을의 중간 지점이기 때문이다.
길가에는 골프장에서 많이 보이는 카트(Cart) 수십 대가 대기를 타면서 하얀 물결을 이루는데,
이들은 선유도와 무녀도에서 숙박업소나 식당을 하는 이들이 가지고 온 것으로 배를 타고 들어
온 관광객들에게 이거 타고 섬 1바퀴 돌라며 강하게 유혹의 메세지를 건넨다. 이곳에서 주어진
시간은 달랑 1시간, 아무리 선유도가 작다고 해도 그 시간 동안 두 다리에 의지해 돌아다닐 수
있는 범위는 좁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많이들 카트에 올라타는데, 대부분 4인승에서 8인승이
다. 카트는 대부분 카트 주인이 직접 운전하지만, 키를 맡겨 돌고 싶은 곳을 돌라고 하는 경우
도 있다. 물론 돈을 더 줘야 된다. 카트 승차비는 카트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보통 5천원 정도
한다.

우리 일행도 카트의 신세를 많이 졌는데, 나도 일행에 끼어 8인승 카트에 올라탔다. 카트 주인
은 식당/펜션을 하는 아줌마로 선유도해수욕장을 비롯한 선유도 북부를 1바퀴 구경시켜주었다.
코스는 선유도항 → 선유도해수욕장 → 망주봉 주변 1바퀴 → 선유3구 선착장 → 선유도해수욕
장 → 선유도항으로 딱 1시간에 맞는 코스였다. 길의 폭은 선유도항 주변을 빼고는 카트 2대가
교행하기에 적당할 정도로 좁았다.
선유도를 돌면서 선유도해수욕장이나 중간에 내려서 발자국을 남길 시간은 없었고, 오로지 카트
만 타고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몽돌해수욕장과 옥돌해수욕장, 장자도와 무녀도도 가고 싶었
지만 시간이 없으니 그건 어렵다. 배가 떠나면 한반도로 나가기가 힘들어진다.


▲  선유도항 주변 갯벌

▲  부드러운 곡선의 선유도해수욕장

선유도항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고군산군도의 아름다운 입술인 선유도해수욕장이 누워있다. 명
사십리(明沙十里)란 걸쭉한 별명까지 지닌 이곳은 약 1.5km의 백사장으로 10리는 커녕 5리도 안
되는 길이다. 서해에 있는 다른 해변과 마찬가지로 수심이 매우 얕아 바다로 100m를 나가도 겨
우 허리에 닿을까 말까 하며, 해가 그만의 공간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붉게 타오르는 낙조가
대장관을 이루어 선유8경의 하나인 선유낙조의 현장으로 명성이 높다.

물이 빠졌을 때는 팽나무가 자라고 있는 모래톱 끝까지 갈 수 있으며, 둑방 건너편에 긴 자갈밭
이 펼쳐져 선유도해수욕장의 아름다움을 진하게 수식시킨다. 바다낚시와 갯벌체험, 모터보트,
바나나보트 등을 탈 수 있고, 샤워장과 뒷간, 방갈로, 파출소와 보건소, 숙박시설 등이 주변에
있어 여름 피서지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  여유로운 풍경의 선유도해수욕장 - 바다 건너로 진하게 보이는 산은
장자도의 지붕인 장자봉이다.


▲  선유도해수욕장 북쪽

▲  선유도해수욕장에서 선유3구로 가는 길

▲  바위산인 망주봉
(望主峰, 152m)

선유도해수욕장 동북쪽에 자리한 망주봉은 선유도해수욕장과 더불어 선유도의 소중한 꿀단지이
다. 2개로 이루어진 바위 봉우리로 조선시대에 이곳으로 귀양 온 충신들이 매일 같이 올라 서울
에 있는 군주를 그리워했다고 하여 주군을 바라본다는 뜻의 망주봉이 되었다.
평소에는 그저 조용한 바위 봉우리지만 비가 많이 쏟아지면 산으로 떨어진 빗물이 암벽을 타고
약 7~8개의 물줄기를 이루며 아래로 떨어진다. 그 모습이 폭포와 같아서 망주폭포(望主瀑布)라
고 부른다. 그러니까 비가 많이 올 때만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폭포인 셈이다.


▲  선유도항에서 바라본 망주봉의 위엄


♠  고군산군도 마무리

▲  선유도를 떠나다

선유도를 항아리 겉돌 듯 둘러보고 유람선으로 돌아왔다. 떠날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짧은
자유시간을 이용해 선유도 곳곳으로 흩어진 상춘객들도 일제히 돌아와 선착장 주변은 다시 북새
통을 이룬다. 이번에도 늦게 온 몇몇 사람들 때문에 지정 시간보다 15분 정도 늦게 선유도를 출
발했다.

우리는 선유도로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2층에 자리를 잡았는데, 한반도로 돌아가는 길은 대략
50분 정도 걸린다. 선유도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약간의 너울로 배가 조금 들썩였으나 이미 몸
에 익숙해진 터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피곤이 물결처럼 밀려와 나를 희롱하니 슬슬 졸리
기 시작한다. 허나 이제 언제 올지 모를 고군산군도와의 작별이 너무 아쉬워 갑판으로 나가 점
점 멀어져가는 선유도를 비롯한 고군산군도의 뒷모습을 열심히 사진에 담았다. 시원하게 느껴졌
던 바닷바람도 이제는 차갑게 다가온다.


▲  선유도 선유3구 선착장 - 야미도에서 오는 새만금유람선이 주로 이용한다.

▲  조금씩 작아지며 흐릿한 점이 되어가는 고군산군도의 식구들

▲  새만금방조제로 한반도의 일원이 된 신시도(新侍島)

선유도를 가리고 선 신시도는 새만금방조제가 섬 동부를 지나가면서 한반도의 어엿한 일원이 되
었다.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면적이 4.25㎢에 이르며, 삼국시대 초반에 가락국(駕洛國
)에서 건너온 김해김씨 일가가 청어를 잡기 위해 제일 먼저 들어와 살았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
은 없다.
신라 후기에는 천하의 대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이 옥구 자천대(紫泉臺)에 머물러 있다가 신시도
에 우뚝 솟은 월영산(月影山, 당시에는 이름이 없었음)을 보고 천하 명산(名山)이라고 크게 칭
송했다. 그리고 그곳이 급히 땡겼는지 풍선(風船)을 타고 신시도로 건너가 그 봉우리에 단을 쌓
고 거처를 세워 산 이름을 월영봉(199m)이라 했다.
그는 여기서 매일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글을 읽는 소리가 어찌나 낭랑하던지 바다 건너 당나
라 상해(上海)까지 들렸다고 전한다. 물론 글 읽는 소리가 바다 건너 대륙에서까지 들렸다는 것
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이나 그가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것은 사실인 듯 싶다.

신시도의 기둥인 월영봉은 선유8경의 하나인 월영단풍의 현장으로 단풍에 물든 월영봉의 자태가
마치 1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신시도란 이름은 왜정 때 지어진 것으로 새만금방조제가 지나
는 동쪽 대각산(187m)에 전망대가 세워져 있고, 그 전망대를 통해 대각산으로 올라가 고군산군
도와 새만금 일원을 두 눈에 조망할 수 있다.


▲  유람선이 남긴 하얀 물보라 자국 ▼

유람선은 푸른 도화지에 물보라를 튀기면서 요란하게 지나간 자국을 남긴다. 허나 그 자국은 이
내 일체의 흔적도 없이 지워지고 다시 원래의 푸른 도화지로 되돌아간다. 나를 비롯해 배에 탄
사람들 모두 선유도를 비롯한 고군산군도에 열심히 다녀간 흔적을 남겼지만 결국은 사진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이다.


▲  야미도(夜味島)와 신시도 사이 해역 - 그 사이로 바다의 만리장성이라
자화자찬하는 새만금방조제가 희미하게 보인다.

▲  야미도와 횡경도 사이에 외롭게 뜬 조그만 바위섬, 계도(鷄島, 닭섬)
이렇게 봐서는 닭처럼 생겼는지 꿩처럼 생겼는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  새만금방조제에 붙어있는 야미도

야미도는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한반도와 가까운 섬으로 군산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제일 처음 들
렸던 곳이다. 지금은 새만금방조제로 한반도의 일원이 되면서 신시도와 함께 편히 수레로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섬은 밤나무가 많아 밤섬이라 불렸는데, 왜정(倭政)이 이 섬 이름을 지을 때 밤나무를 뜻하
는 율(栗)을 안쓰고 무식하게도 밤을 깜깜한 밤으로 해석해서 야(夜)을 썼다. 그리고 밤은 맛있
다고 하여 맛있다는 뜻의 미(味)를 붙여 본래 섬과는 맞지도 않은 엉터리 이름인 야미도란 이름
을 지니게 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섬 이름을 뜯어고쳐야 되지 않을까?)
섬 서쪽은 고군산군도가 점점이 떠 있는 서해바다, 오른쪽은 새만금방조제에 갇혀버린 새만금호
로 근래에 일출/일몰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선유도를 출발하여 근 50분 만에 비응항으로 귀항했다. 배가 항구에 몸을 대기가 무섭게 상춘객
들이 우루루 육지로 몰려나오고 선착장에서 애타게 다음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들의 빈 공
간을 채워주면서 배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바로 선유도로 뜰 준비를 한다.
우리는 관광버스에 올라타 새만금북로 주변에 있는 해물탕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지루할 정도
로 긴 새만금방조제를 넘어 부안 내소사(來蘇寺)로 넘어갔다.

아쉽지만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고군산군도 선유도 찾아가기 (2014년 7월 기준)
ⓘ 군산까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군산행 고속버스가 15~2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군산행 직행버스가 60~9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부천, 성남, 수원, 오산, 천안, 청주, 대전(복합), 익산, 광주, 목포, 대구(서부
  ), 부산(노포동), 창원(마산)에서 군산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평택역, 천안역, 대천역, 익산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군산역
  하차 (거의 1시간 간격으로 운행)
② 군산시내에서 배타는 곳까지
* 연안여객터미널 : 군산역과 군산시외고속터미널에서 7, 85번 시내버스 이용 (2노선 모두 1시
  간 간격으로 운행하며, 군산역에서 7번은 매시 25분, 85번은 매시 40분에 출발)
* 비응항(월명유람선) : 군산역에서 7, 85번 시내버스를 타거나 군산시외터미널에서 7, 8, 85번
  시내버스를 타고 비응항 종점 하차 (91번은 시외터미널 남쪽 팔마광장에서 승차)
③ 선박편
* 비응항 월명유람선(☎ 063-445-2240)에서 선유도행 유람선이 운항한다. 코스는 3시간짜리 B코
  스(2만원)와 6~7시간짜리 C코스(3만원)가 있으며, 유람선 출항시간과 요금, 전화예약은
  ☞ 월명유람선 홈페이지 참조
* 군산연안여객터미널(☎ 063-462-4000)에서 선유도행 여객선이 1일 3~4회 다닌다. 주말과 피서
  철에는 대폭 증회하며, 자세한 출발시간표와 요금 문의는 위의 월명유람선 홈페이지 참조
* 야미도 새만금유람선 선착장(063-464-1919)에서 선유도행 유람선이 1일 3~4회 다닌다. 코스는
  선유도에서 1시간 정도 머무는 B코스와 3~4시간 머무는 C코스가 있다.
  운항시간과 요금, 예약은 ☞ 새만금유람선 홈페이지 참조
④ 배타는 곳까지 승용차 (주차장 있음)
* 서해안고속도로(동군산나들목) / 호남고속도로(전주나들목) → 전주~군산 21번 국도 → 새만
  금북로 → 비응항(월명유람선)
* 서해안고속도로(동군산나들목) / 호남고속도로(전주나들목) → 전주~군산 21번 국도 → 새만
  금북로 → 옥녀교차로 우회전 → 구 해양경찰서 4거리 우회전 → 대왕제지3거리 좌회전 → 연
  안여객선터미널
* 서해안고속도로(동군산나들목) / 호남고속도로(전주나들목) → 전주~군산 21번 국도 → 새만
  금북로 → 신시도입구3거리 좌회전 → 새만금방조제 → 야미도 새만금유람선

* 선유도해수욕장은 7월 초/중순에 개장하여 8월 하순까지 해수욕 손님을 맞는다.
* 선유도와 고군산군도 관련 자세한 정보는 ☞ 군산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참조 (월명유람선과
  새만금유람선 홈페이지를 참조해도 된다)
* 선유도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군 옥도면 선유도리 (문의 ☎ 063-454-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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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7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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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유산의 떠오르는 성지 ~ 군산 나들이 (왜식 사찰 동국사, 은적사, 발산초교...)

 


♠ 근대 문화유산의 성지 ~ 전북 군산(群山) 나들이 ♠
군산 은적사
▲  군산 은적사


무더위와 장마로 천하를 주름잡은 여름의 제국과 여름으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가을
이 팽팽히 맞서던 9월 하순에 인구 40만을 꿈꾸며 열심히 꿈틀거리는 서해안의 주요 항구
도시 군산을 찾았다.
집(도봉동)에서 온양온천역까지는 매우 저렴하지만 그만큼 굼벵이인 1호선 전철을 이용했
고(3시간 소요), 온양온천에서 군산까지는 값은 비싸지만 조금은 빠르고 안락한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했다.

장항선(長項線, 천안~장항) 직선화와 익산 연장으로 군산 도심에 자리한 군산역은 화물만
을 다루는 화물역으로 바뀌고, 금강하구둑 남쪽 시내 외곽에 새롭게 군산역을 세워 군산(
群山)을 찾은 손님들을 맞이한다.

군산역은 시내 변두리에 자리한 터라 역 건물 외에는 허허벌판이다. 역 앞에는 택시와 시
내버스 몇몇만이 졸고 있을 뿐, 열차의 기적소리가 무안할 정도로 정적만이 감돈다. 30분
을 기다려 시내로 나가는 군산시내버스를 타고 제일 먼저 동국사를 찾았다.


♠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왜식(倭式) 사찰이자 어둠의 시절
이 땅에 침투한 왜식 불교의 쓰라린 화석 - 동국사(東國寺)


▲  동국사 대웅전(大雄殿) - 등록문화재 64호

군산 도심인 금광동에는 특이한 모습의 절집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나라 유일의 왜식(倭式) 사
찰인 동국사이다. 이곳은 마치 왜열도의 오사까나 나라, 교토(京都)의 어느 절집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물씬 풍기게 하는데, 그럼 어찌하여 왜식 절집이 군산 한복판에 건방지게 박혀 있는 것
일까?

때는 19세기 후반, 왜국(倭國)은 호남평야(湖南平野)에 군침을 질질 흘리며 그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군산을 개항할 것을 대한제국(大韓帝國)에 요청했다. 그들의 징징거림에 마지못해 군산을
개방하자 왜인들이 밀물처럼 들어오게 되는데 이때 왜식 불교도 덩달아 들어와 절과 포교원을
세웠다. 동국사는 바로 그 시류를 타고 1909년 왜인 승려 내전불관(內田佛觀)이 왜인 일조통(一
條通)의 집을 빌려 만든 포교소에서 시작된다.
1913년 승려 우치다(內田)가 군산 왜인들의 지원을 받아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겨 금강선사(錦
江禪寺)라 이름 짓고 본당(本堂)과 고리(庫裡)를 만드니 그것이 지금의 동국사 대웅전이다. 이
절은 왜국 조동종(曹洞宗) 소속이었다.

왜열도에 불교가 들어간 것은 6세기 중엽으로 백제(百濟)의 중흥을 꿈꾸며 동분서주하던 성왕(
聖王, 523~554)이 속방(屬邦)인 왜열도를 교화시키고 백제와 왜의 일체를 견고히 하고자 불교를
보냈다. 많은 백제 승려와 건축공들이 왜로 건너가 불교를 전파하고, 백제의 주요 건축양식이던
하앙식(下昻式) 건물의 절을 많이 지었는데, 그것이 점차 왜국 건축양식의 중심이 되었다.
허나 세월이 흘러 19세기 이후 왜가 조선을 월등히 앞서게 되면서 상황은 뒤바뀌게 된다. 1876
년 군사력으로 어거지성의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성사시킨 왜국은 유리한 입장에서 조선에
활발히 진출을 벌이는데, 그 과정에서 왜국 불교까지 들어와 조선 불교를 위협하며, 왜식 사찰
까지 들어서게 된 것이다.

1913년 본당을 세운 이후, 1919년 범종과 범종각을 만들었고 1921년에 대문 돌기둥을 만들었다.
1932년 개축을 벌였으며, 1945년까지 왜인이 관리했으나, 해방 이후 그들의 땅으로 쫓겨나고 미
군정(美軍政)에 몰수되었다가 우리나라 정부에 넘어갔다.
1955년 전북종무원에서 매입하여 대웅전으로 삼았으며, 1970년 승려 남곡이 동국사로 이름을 갈
았다. 여기서 동국은 '해동대한민국(海東大韓民國)'의 약자로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에 이 절을
증여해 현재 선운사(禪雲寺)의 말사(末寺)로 있다.

왜정(倭政) 때 지어진 왜식 절은 해방과 더불어 죄다 박살이 났으나 이곳만은 운이 좋게도 살아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며 우리나라 유일의 왜식 사찰이자 어둠의 시절을 상징하는 뼈아픈
역사의 흔적으로 남게 되었다. 근래에 들어 군산시에서는 군산시내에 흩어진 근대문화유산을 정
비하고 야무지게 홍보하면서 동국사는 군산 지역 근대문화유산의 성지(聖地)이자 군산에서 꼭
가봐야 되는 주요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혹자(或者)는 그런 것을 뭐하러 남기냐 반문하겠지만 엄연히 이 땅을 거쳐간 역사의 흔적이다.
무작정 밀어버릴 것이 아니라 가치가 있는 것은 보존하여 후대의 경계로 삼고 문화유산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동국사 하나 밀어버린다고 왜정 35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국사는 왜식 건물인 대웅전(요사 포함)과 범종각 그리고 근래에 지어진 1층 건물이 전부이다.
대웅전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좌측으로 요사(寮舍)와 이어져 완전히 하나의 커다란 건물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한 건물 안에 대웅전과 요사가 모두 들어있는 셈이다.

대웅전 본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정방형 단층팔작지붕 건물로 왜국 에도시대(江戶時代) 건
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우리나라 절집과 달리 단청(丹靑)이 없어 밋밋하고 소박한 느낌을 선사
하며, 건물 꼭대기의 용마루는 우리나라 건물과 달리 일직선을 이룬다. 건물의 거의 절반 이상
을 차지하고 있는 지붕은 그 높이가 상당하여 비례도 안맞아 보이고, 다소 육중해 보인다. 건물
의 아랫도리가 저 지붕을 받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  요사로 쓰이는 대웅전의 좌측 부분

대웅전과 이어진 요사는 본전과 달리 지붕이 2겹으로 되어 있다. 본전과 요사 사이로 움푹 들어
간 부분에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건물의 전체적인 모습은 거의 '工' 구조이다.

▲  대웅전의 뒷부분

▲  대웅전의 좌측 요사의 뒷부분

▲  대웅전 본전과 요사를 잇는 복도

▲  대웅전 본전 내부


▲  왜식 건물의 방 구조를 여실히 보여주는 종무소(宗務所)

▲  동국사 소조석가여래3존상 - 보물 1718호

대웅전 불단(佛壇)에는 동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석가3존불이 유리에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은 나무로 틀을 짜고 진흙으로 빚어서 만든 소조불(塑造佛)로 원래는 김제 금산사 대장전(
大藏殿)에 있었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이곳으로 넘어왔는데, 그 사유는 분명치가 않다.

1650년(효종 1년)에 조성된 조선 중기 불상으로 금동(金銅)의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가섭존
자(迦葉尊者)와 아난존자(阿難尊者)가 협시(夾侍)해 있다. 보통은 관음보살(觀音普薩)이나 보현
보살(普賢菩薩) 등의 보살이 그를 협시하는데 반해 여기는 그의 제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
는 것이 특징이다.
환한 표정의 살며시 미소를 머금은 석가불은 통견의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으며,
그들 뒤로 고운 빛깔의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또한 그들 배에서 나온 복장(腹臟)유
물은 한지 다발과 사용하지 않은 한지(韓紙), 묵서 발원문, 묘법연화경과 보협인경 목판본 등의
전적(傳籍)류, 은제 후령통, 직물류, 곡식과 약초류 등 373점으로 불상 조성 당시의 상황을 밝
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이들은 불상과 한 덩어리로 보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리 유쾌하지 못한 시절에 지어진 왜식 절집, 그리고 거기서 만난 조선 중기 불상, 마치 우리
나라에서 빼돌린 불상을 봉안한 왜국에 어느 절집 같은 기분이다. 다행히도 우리 땅이라 망정이
지 실제 왜열도였다면 부아가 치밀어 유리를 박살냈을지도 모른다.

▲  대웅전 앞에 자리를 튼 귀여운 동자 모습의 보살상들 (지장보살로 여겨짐)

 ◀  왜식으로 지어진 조그만 범종각(梵鍾閣)
동국사 경내 맨우측에는 1919년에 지어진 범종
각이 있다. 네모난 석대(石臺)를 만들고 그 위
에 자리한 범종각에는 같은 시기에 왜국 교토에
서 조성된 쥐꼬리만한 범종이 걸려있다.
우리나라의 범종각과 달리 그 모습이 작고 범종
도 장난감만해 풍채가 좋은 우리나라 종과는 확
연한 차이를 보인다.


▲  범종각에 걸린 작은 범종

범종의 주요 부분인 유곽의 유두(乳頭)가 우리나라와 달리 25개나 된다. 종 피부에는 왜왕(倭王
)을 찬양하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종이 작아서 부처의 메세지가 속세에 제대로 울려퍼
질련지 모르겠다. 범종보다는 거의 장난감종이나 식사시간을 알릴 때 치는 종으로 더 적당해 보
인다.

▲  범종각을 둘러싼 조그만 보살상 36기

범종각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싼 석조보살상은 1917년에 조성된 것으로 그 모습이 정말로 제각각
이다. 왼쪽 사진의 보살은 마치 몸이라도 푸는 듯한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이국
적인 그들의 모습에 눈길이 좀처럼 떼어질 줄을 모른다.

※ 동국사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군산행 고속버스가 15~20분 간격으로 떠나며, 동서울터
  미널에서 50~90분 간격, 남부터미널에서는 1일 3회 떠난다.
* 용산역,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대천역에서 장항선 열차가 거의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부천, 성남, 수원, 천안, 대전(동부/유성), 청주, 전주, 익산, 광주, 대구(서부)
  , 부산(동부)에서 군산행 직행버스 이용
* 군산역과 군산시외/고속터미널 앞, 터미널 남쪽 팔마광장에서 명산4거리(대학로) 경유 군산대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명산4거리 하차, 버스는 자주 다닌다.
* 명산4거리에서 도보 2분. 이정표가 명산4거리와 절입구에 있어 찾기는 쉽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절 주변 골목에 주차 요망)
① 서해안고속도로 → 동군산나들목 → 대야교차로에서 21번 외곽국도로 우회전 → 군산대교차
   로에서 대학로로 우회전 → 명산4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바로 나오는 4거리에서 동국사길로 좌
   회전 → 동국사
② 서해안고속도로 → 군산나들목을 나와 군산 방면으로 직진 → 미원동4거리에서 우회전 → 명
   산4거리 직진하여 바로 나오는 4거리에서 동국사길로 좌회전 → 동국사
*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시 금광동 135-1 (☎ 063-462-5366)
* 동국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동국사 뒤쪽에 병풍처럼 둘러진 대나무밭
산바람이 불면서 대나무의 향연이 그윽히 울려 펴진다.


♠  군산시내에 자리한 아늑한 산사 ~ 설림산 은적사(雪琳山 隱寂寺)

▲  슬슬 가을을 준비하는 은적사 외곽의 나무들

군산시내 서남쪽에는 설림산(115.8m)이란 조그만 산이 누워있다. 그 산의 남쪽 자락에는 군산에
서 가장 큰 절인 은적사가 조용히 또아리를 틀어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보듬는다. 절의 이름
인 은적(隱寂)은 해탈을 위해 은거하며 수도에 정진한다는 뜻으로 지금은 시가지에 둘러싸여 은
적이란 이름이 조금은 무색해진 것 같다.

은적사는 613년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허나 그 당시 군산은 엄연한 백
제 땅으로 당시 백제를 다스리던 군주는 무왕(武王)이었다. 그 시절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는 정
말로 험악하기 그지 없었지. 상황이 그러한데 아무리 원광이 신라에 이름난 승려라 할지라도 적
국에 절을 세우는 건 어림도 없었을 것이며, 백제 또한 적국의 승려가 설치는 것을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원광국사의 창건설은 신빙성이 없다.

그리고 7세기 중반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하나 있다. 그 설에 의하면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해 백
제를 공격하던 660년 여름,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은 13만 대군을 이끌고 금강 하류인 설
림산 부근 천방산(千房山) 아래에 상륙했다. 그런데 안개가 자욱하여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해
지자 산에 올라 안개를 치워주면 이 산에 천사(千寺)를 지어 바치겠다며 산신에게 기도를 올렸
다. 그랬더니만 감쪽같이 안개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을 지을 자리를 물색했으나 워낙 지세가 협소하여 부득이 주춧돌 1,000개를 여러 곳에
놓고 1개의 절만 지어 천방사(千房寺)라 했다고 한다. 그것이 은적사의 전신(前身)이라는 것이
다. 허나 당나라군이 백제를 접수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힘겹게 전쟁을 벌이고 있던 때에 무슨
여력으로 절을 짓겠는가? 이 역시 가능성이 없다. 결론은 창건 시기는 모른다는 것.

어쨌든 창건 이후 952년(광종 3년)에 정진(靜眞)국사가 중건했고, 1373년(공민왕 22)에 나옹(奈
翁)대사가 중수했다고 한다. 그 이후 1781년에 보경(寶鏡)선사가 중수했으며, 1937년과 1947년
에 중수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절의 내력 가운데 그나마 조선 이후만 신뢰도가 높을 뿐, 그 이
전은 증거물이 전혀 없다.

▲  은적사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은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구분짓은
문으로 문 밖은 소룡동 주택가이다.

▲  은적사 극락전(極樂殿)
대웅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큰 건물로
2000년에 세워졌다.


▲  은적사 지장전(地藏殿)
명부전을 부시고 만든 2층 건물로 그 모습이
금산사 미륵전(彌勒殿)의 축소판 같다.


▲  은적사 천왕문(天王門)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일주문을
지나면 주차장과 함께 모습을 비춘다.


1980년까지 태고종(太古宗) 소속으로 있다가 그 이후 조계종(曹溪宗)으로 전환했다. 1989년 삼
성각이 불타서 없어지고, 1991년 은적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지방문화재인 산신각(山神閣
)이 방화로 사라지는 불행을 겪었다. 1993년에는 명부전(冥府殿)을 부시고 그 자리에 2층의 지
장전을 세우는 한편 조선 중기에 지어졌다고 하는 대웅전을 해체하여 지금처럼 몸집을 늘렸다.
1994년 성우가 주지로 부임하면서 계속 불사를 벌여 200평에 불과하던 경내가 무려 4,000평으로
확장되었다.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극락전, 범종각, 화엄회, 교육관 등 8~9동의 건물이
경내를 메우고 있으며, 대부분 1980년대 이후 건물이라 고색의 흔적은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죄
다 씻겨가 버렸다.
대웅전 뜨락에는 석가탑(釋迦塔)을 빼어닮은 하얀 피부의 3층석탑이 가을 햇살을 즐긴다. 이곳
에는 예전에 선종암(善宗庵)에서 가져온 오래된 3층석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디로 마실을 갔
는지 보이질 않는다. 설마 그 낡은 탑이 이 탑으로 둔갑된 것은 아니겠지? 선종암은 설림산 북
쪽에 있던 암자로 왜정 때 상수도 수원지 공사로 절이 파괴되면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장전 옆에는 교육관과 2층 규모의 어린이집이 있는데, 어린이집은 종무소(宗務所)도 겸하고
있으며, 경내 뜨락에는 잔디가 곱게 깔려 깨끗하고 정갈한 분위기를 풍긴다. 일주문 옆에는 조
그만 찻집이 있어 잠시 발을 멈추고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도 누릴 수 있다.

▲  은적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 팽나무
나이가 약 260년으로 나무의 높이가 20m,
둘레가 2.5m에 이른다. 3m 지점에서
가지가 3개가 갈라져 장관을 이룬다.
군산시 보호수 9-2-21-2호

▲  대웅전 뜨락의 지장보살상(地藏菩薩)
왼손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지팡이 대신
약사여래의 약합(藥盒) 같은 무엇인가가
조심스레 들려져 있다.


은적사에 있는 오래된 흔적으로는 나이 260년을 헤아린 거대한 팽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가 그
나마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다. 조선 중기에 세워졌다는 대웅전은 1980년에 새로 지었으
니 고색의 기운은 애당초 말라버렸고, 그 대웅전에는 이곳의 유일한 지정문화재인 석가여래3존
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것도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닌 김제 금산사(金山寺) 인근 절에서 20
세기 초반 경에 가져온 것이다.
이 불상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夾侍)한 3존불로 1629년(인조
6년)에 조성된 것이다. 현재는 금동으로 도금을 했으며, 개금(改金)할 때 '다라니경' 등의 복장
물(腹臟物)이 나왔다고 하나 현재는 없다.


▲  은적사 대웅전(大雄殿)과 3층석탑
대웅전은 1980년에 중수한 것으로 원래 건물은 조선 중종 때 중창된 것이라 전한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3존불를 비롯하여 1991년에 불타버린
산신각에서 옮겨온 칠성탱(七星幀)과 산신탱(山神幀), 독성상(獨聖像) 등이
봉안되어 있다.

▲  은적사 석가여래3존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84호
조선 중기 불상으로 화려한 닫집과 고운 색깔의 후불탱화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찬란함의 극치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  대웅전 우측 부분의 불화들
왼쪽부터 산신탱. 칠성탱, 독성상(獨聖像)

▲  대웅전 좌측 부분의 불화들
신중도(神衆圖)와 영산회상도


▲  대웅전 좌측 언덕에 지어진 거대한 석불입상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을 취하며 지그시 군산시내를 굽어본다.

군산시내에서 나름 오래된 터줏대감 사찰이지만 동국사에 크게 밀려 외지 관광객은 그리 없다.
관광 수요를 부를 만한 매력도 거의 없고, 보물도 빈약하니 그런 것이다. 게다가 주택가가 절
밑에까지 밀려와 은적이란 이름도 조금 무색하다. 허나 자리가 좋아 학의 품에 안긴 알처럼 포
근하고 아늑함이 밀려오는 도시 속에 조촐한 오아사스 같은 곳이다.
 
※ 은적사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군산역과 군산시외/고속터미널에서 소룡4거리 경유 군산대, 비응도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은
  적사(1,2,4,5,7,8,85번)나 월명여중(3,7,50,60,80번 계열 시내버스)에서 내려 도보 10분. 소
  룡초교 뒤에 절이 있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에 주차장 있음)
① 서해안고속도로 → 동군산나들목 → 대야교차로에서 21번 외곽국도로 우회전 → 공항교차로
   에서 산북로로 우회전 → 소룡4거리 직진 → 은적사입구에서 설림3길로 우회전 → 은적사
*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시 소룡동 1332 (☎ 063-466-4526~8)


♠  왜정의 수탈과 착취의 쓰라린 흔적 ~
발산초등학교에서 만난 문화유산들

군산시내에 있는 은적사와 동국사를 둘러보고 개정면 발산리에 있는 발산초등학교를 찾았다. 이
곳에는 발산리 석등과 5층석탑을 비롯하여 문화유산 30여 점이 깃들여 있어 군산의 조촐한 보물
창고이자 노천박물관 같은 곳이다.

이곳에 이토록 많은 문화유산이 서린 것은 학교 교장이나 선생이 수집하거나 옛 절터가 있어서
가 아니다. 바로 왜정 때 이곳에 대농장을 꾸리며 조선인을 착취한 어느 왜인 지주가 악착같이
수집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던 대한제국 시절, 호남평야(湖南平野)에 잔뜩 눈독을 들인 왜
국은 평야와 가까운 군산을 개항할 것을 대한제국에 요구했다. 개항이 이루어지자 많은 왜인들
이 군산에 몰려와 말뚝을 박았는데, 그중에 시마다니(嶋谷) 야소야(이후 시마다니)도 있었다.

시마다니는 야마구찌(山口)현 구카군 출신으로 주조업(酒造業)으로 어느 정도 돈을 주무르고 있
었다. 군산이 개항되자 호남평야에서 술의 원료인 쌀을 저렴하게 공급 받고자 군산으로 건너와
70,000원의 자금을 쏟아부어 임피면과 개정면 지역의 땅을 사들여 1903년 12월, 486정보의 농장
을 지었다. 그리고 지금의 발산초등학교에 대저택을 지었는데, 1910년 이후 전북과 전남, 충남
에서 적당한 문화유산을 빼돌려 저택의 정원을 채웠다. 또한 동산문화재에도 검은 마음을 품어
막대한 문화유산을 빼돌렸으며, 그것을 안심하게 보관하고자 3층 규모의 거대한 콘크리트 금고
를 만들었다.

군산 지역 농민을 가득 쥐어짜며 부귀영화를 누리던 시마다니, 그러나 1945년 그들이 신으로 받
들던 왜왕이 미국에게 살려달라고 구차하게 꼬랑지를 내리면서 왜국은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38도 이남을 장악한 미국은 조선에 거주하는 왜인들에게 1946년 봄까지 무조건 그들 나라로 꺼
질 것을 명했다. 또한 1인당 가지고 갈 수 있는 돈은 1,000엔으로 한정시켰다. 상황이 이러자
조선에서 떵떵거리고 살던 왜인들은 그야말로 쪽박을 차게 생겼다. 그동안 긁어모은 것이 얼만
데 고작 1,000엔이란 말인가? (왜열도에 살던 조선인은 귀국 희망자에 한해 1,000원까지 소지하
고 귀국할 수 있었음) 시마다니 역시 꼴통이 터질 정도로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여기서 벌어
들인 막대한 재산을 포기하고 가는 것은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껏 생각한 것이 한국에 귀화 요청, 귀화를 허락해달라며 미군정에 징징거렸으나 결국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방 2개만을 간신히 지닌 채 1946년 봄, 부산에서 마지막 귀국선을 타고 꼬
랑지를 축내린 늙은 개처럼 통쾌히 추방되고 만다. 결국은 재산의 5%도 건지지 못한 채, 개쫓겨
나듯 돌아감 셈이다. 그 이후 그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시마다니의 농장과 문화유산은 미군정이 모두 몰수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넘겼다. 동산문화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겼으며, 그의 집은 때려부시고 1947년 그 자리에 발산초등학교를 세웠다.
허나 정원을 수식하던 문화유산은 태반이 고향을 알지 못해 돌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눌러앉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이들을 정성껏 보호하고 관리하여 보존상태가 좋으며 어린이들의
살아있는 역사, 문화유산 공부에도 크게 활용되고 있다.

왜정 때 왜인 농장에서 소작농(小作農)으로 일하던 농민들은 왜인 지주에서 생산량의 무려 50~
70%를 지세(地稅)로 뜯겨 늘 굶주림에 허덕였다. 쌀과 돈을 꾸더라도 그 이자가 엄청나 갚느라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  이곳에 말뚝을 박은 욕심꾸러기 왜인의 부질없는 욕심의 현장
개정면 구 일본인농장 창고(금고) - 등록문화재 182호

조촐하게 꾸며진 시골학교인 발산초등학교는 석조문화유산 말고도 관심을 끄는 건물이 하나 있
다. 바로 시마다니가 귀중품을 보관하던 3층짜리 창고가 그것이다. 다소 흉물스럽게 남아있는
이 건물은 밤에는 정말 귀신들이 나와 잔치를 벌일 정도로 음침해 보인다.

이 창고는 지하 1층, 지상 2층의 3층 건물로 외벽은 그 당시 흔했던 벽돌 대신 콘크리트 몰탈의
거푸집 공법으로 만들어 내부의 각 층을 구분하는 나무 마루바닥을 만들었다. 그리고 외부로 난
창에는 쇠창살을 달고 철문으로 2중의 방범장치를 만들었다. 또한 출입문에는 커다란 미국제 금
고문을 달았다. 이렇게 무식하게 큰 금고까지 둘 정도면 시마다니의 재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상상이 갈 것이다,
그렇게나 떵떵거리며 지역 주민들을 쥐어짜던 그는 1945년 왜국의 패망으로 애지중지하던 보물
과 재산을 챙기지도 못하고 거지꼴로 추방되었으니 결국 지나친 욕심이 그런 화를 부른 것이리
라. 그 이후 6.25 때는 군산을 점령한 북한군이 군산 지역 우익인사들을 이곳에 가두고 괴롭히
기도 했다.

시마다니는 통쾌하게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과 흔적은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진하게 남아 어둠의
시절의 쓰라린 단면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악명 높은 이름은 이곳을 찾은 이들로부터 두고두고
회자되며 손가락질을 받고 있으니 자신의 이름 4자는 참 제대로 떨치고 간 셈이다. 이 금고와
발산초교, 이곳의 문화유산이 있는 이상은 그의 이름은 영원히 묻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  초등학교 뒤쪽에 공원처럼 꾸며진 석조문화유산의 보금자리
시마다니 창고와 달리 잠시 발을 쉬고 싶은 아늑한 쉼터이다.


▲  어느 사대부(士大夫)의 무덤을 지켰을 양석(羊石)과 망주석(望柱石),
그리고 다양한 모습의 문인석(文人石)과 귀부(龜趺), 이수(螭首)를 갖춘 비석들

발산초등학교 뜨락을 가득 메운 저들의 고향은 대부분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시마다니가 마구잡
이로 빼돌리면서 자신의 고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자신이 어디서 왔는
지를 망각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며 처지가 비슷한 여러 석물과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 초등학
교의 뒤뜰을 가득 메운다. 적어도 어디서 가져왔는지 기록이라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것이
나라 잃은 문화유산의 얄미운 운명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  사대부의 무덤에서 가져온 다양한 형태의 장명등(長明燈)들, 그들 사이로
군계일학(群鷄一鶴)인 발산리 석등의 위엄이 단연 돋보인다.

▲  발산리 석등(鉢山里 石燈) - 보물 234호

발산초등학교의 문화유산 중 단연 으뜸은 발산리 석등이 아닐까 싶다. 신라 후기 혹은 고려 초
기에 조성된 아름다운 석등으로 건강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특히 기둥에 하늘을 향해 힘차게 비
상(飛上)하는 용이 진하게 새겨져 있는데, 마치 번개가 내리치는 구름 속을 헤엄치는 용을 보는
듯 하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형태의 석등은 오로지 이것이 유일하여 그만큼 가치가 상당한 보물
이다.
원래는 전주 부근인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봉림사(鳳林寺)터에 있던 것을 시마다니의 눈에 찍혀
이곳에 끌려오게 된 것이다. 아무리 미술에 문외한이라 해도 저렇게 섬세하고 수려한 석등에 혹
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석등을 받치는 바닥돌과 하대석(下臺石)은 같은 돌로 이루어져 있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동그
란 하대를 두었는데, 아래로 잎을 펼친 복련(伏蓮)이 8개로 새겨져 있다. 석등의 기둥인 간석(
竿石)은 원통형으로 아래서 위까지 용무늬가 실감나게 새겨져 있다. 화사석을 받치는 상대석(上
臺石)은 8각으로 8개의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으며, 석등의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4각의 네 모서
리를 둥글게 다듬어서 8각을 이루게 했는데, 창 사이로 특이하게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화사석의 지붕돌은 8각으로 모서리 선이 선명하며, 지붕돌의 위쪽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장식 받침대를 두었으나 보주(寶珠) 등의 머리장식은 없다.

화사석의 사천왕상이나 지붕돌의 양식 등은 보아 신라 후기 양식을 띄고 있지만 받침부분의 기
둥이 4각으로 변하고 화사석 역시 4각을 닮은 8각으로 이루어져 있어 8각에서 4각으로 변하는
중간단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석등의 조성 시기는 빠르면 신라 후기 늦어도 고려
초기로 여겨지며, 높이는 2.5m이다.


▲  발산리석등의 화사석(火舍石)
화사석 창 사이로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보존상태는 그런데로
괜찮지만 저렇게 봐서는 어느 천왕인지는 쉽사리 구별이 가질 않는다.

◀  발산리석등의 기둥(간석)과 하대석

아래로 향해 늘어진 복련의 잎은 마치 고무신을
나란히 얹어놓은 듯 하다. 기둥에는 거대한 용
이 기둥을 휘감으며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 섬세
하게 표현되었다

▲  맵시가 일품인 발산리5층석탑 - 보물 276호

발산초등학교의 석조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키가 큰 발산리5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탑
신(塔身)을 얹힌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이다. 원래는 앞의 석등과 더불어 봉림사터에 있던 것
을 석등과 함께 이곳으로 끌려왔다. 5층석탑이긴 하지만 5층 부분은 없어지고 지금은 4층만 남
아 있으며, 탑 위의 상륜부(相輪部)는 후에 만든 것이다. 탑이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고 맵시가
고우며, 고려 탑의 아름다움을 진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  6각부도(왼쪽)와 2층과 3층 탑신을 상실한 3층석탑(가운데)
그리고 키 작은 부도(오른쪽)

◀ 발산리6각부도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85호
흡사 삿갓을 쓴 나그네같은 이 6각부도는 시마
다니가 소재를 알 수 없는 절터에서 가져온 것
이다.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부
도는 우리나라에 거의 없는 6각형 부도로 균형
잡힌 몸매에 조각 수법도 대단하다. 우리나라에
6각형 불교 조형물이 등장한 것은 고려 중기로
송나라의 6각형 석물을 보고 따라한 것이 그 시
초이다.

바닥돌 위에 6각의 하대석이 있고 그 위에 6각
의 중대석을 두었다. 6각의 탑신에는 2개의 문
비를 새겼으며, 탑신 지붕에는 기와를 선명하게
조각했다. 탑의 높이는 1.7m로 작고 단촐하지만
고려 부도(浮屠)의 아름다움이 깃들여진 것으로
그 가치가 높다.

※ 발산초등학교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군산시외/고속터미널 남쪽 팔마광장5거리 농협앞에서 개정, 대야 방면 21, 22, 23, 30번 계열
  시내버스를 타고 발산육교에서 하차, 여기서 건너편으로 길을 건너 개정면사무소 방면으로 7
  분 정도 걸으면 발산초교이다. (이정표가 있으므로 찾기는 쉬움)
* 군산역에서 발산초교까지는 7km 거리로 가까우나 바로 가는 시내버스가 없다. 버스로 갈 경우
  시내로 나가는 버스 아무거나 잡아타고 군산시청이나 시외터미널에서 개정, 발산 방면 시내버
  스로 환승해야 된다. 허나 군산역에서 택시로 가면 10분 이내에 도착한다.
* 익산역이나 익산터미널, 원광대병원에서 20번 시내버스를 타고 대야4거리에서 21, 22, 23, 30
  번 계열 시내버스로 환승하여 발산 하차 / 대야에서 86, 87번 버스를 탔을 경우에는 발산초교
  (개정면사무소)에서 내린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는 개정면사무소나 학교 주변에 하면 됨)
① 서해안고속도로 → 동군산나들목을 나와서 대야 방면으로 우회전 → 대야 → 발산초교 입구
   에서 우회전 → 발산초교
* 발산초등학교는 늘 개방되어 있다. (개방 시간은 아침부터 저녁 8~9시까지)
*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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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12월 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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