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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1.06 한가을에 찾아간 산사 나들이, 화성 비봉산 봉림사
  2. 2016.12.26 경북 의성 늦가을 나들이 ~~~ (문소루, 구봉산, 금성산고분군, 조문국 경덕왕릉...) 2

한가을에 찾아간 산사 나들이, 화성 비봉산 봉림사

 


' 가을 산사 나들이 ~ 화성 봉림사 (당성) '

▲  비봉산 봉림사


 

가을이 한참 숙성되어가던 10월의 한복판에 화성시 서부에 자리한 봉림사를 찾았다. 수원
역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갈증에 지친 목구멍을 달랠 겸 커피 음료를 섭취하며 갈만한 곳
을 물색하다가 아직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는 남양(南陽) 봉림사를 그날의 메뉴로 정했
다.
수원역(수원역 환승센터)에서 봉림사까지는 수원 400-4번(광교웰빙타운↔마도면 바이오단
지입구)을 타면 되는데 그 버스를 잡아타고 40분 정도를 달려 봉림사입구에 두 발을 내린
다. 예전에는 남양/사강/서신 방면 아무 시내버스나 타고 북양1통에서 40여 분 발품을 팔
아야 했으나 근래에 봉림사입구까지 가는 버스편이 생겨 접근성은 좀 좋아졌다. (단 배차
간격이 좀 긴 것이 함정)

봉림사입구에서 일주문 바로 밑까지는 온갖 공장들로 즐비해 꽤나 어수선한 모습이다. 공
장 굴뚝에는 수시로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을 찔러대고, 온갖 소음이 우리의 두 귀를 연신
때려댄다. 게다가 대형차들이 수시로 들락거려 길바닥은 늘 헝클어진 모습이다. 지금까지
300곳이 넘는 오래된 절을 찾았지만 여기처럼 공장 지대를 한참이나 지나야 되는 절은 처
음이다.


 

♠  봉림사(鳳林寺) 둘러보기


▲  봉림사 일주문(一柱門)


▲  껍데기만 남은 천왕문(天王門)

어미도 몰라본다는 세월의 모진 풍파와 개발의 무자비한 칼질로 아비규환처럼 변해버린 북양
동 바닥을 가로질러 비봉산(飛鳳山)의 품으로 들어선다. 거의 끝이 보이지 않던 공장의 행렬,
이러다가 공장이 절까지 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지만 다행히 일주문의 위엄 앞에 개발
의 칼질은 푹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애미, 애비도 못알아본다는 이 땅의 천박한 개발주의라
고 해도 양심은 있는지 오래된 절과 그곳을 품은 산까지는 완전히 건드리지는 못했다.
공장과 시가지에 밀려 잔뜩 기가 죽었던 비봉산도 일주문의 응원에 가슴을 피며 호젓한 숲길
을 그려내 보이고 산사(山寺)로 인도하는 산길 분위기도 서서히 회복하면서 일주문 앞까지 펼
쳐진 혼란한 풍경에 제대로 놀란 중생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절의 정문이자 속세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일주문에는 '비봉산 봉림사'란 현판이 있어 이곳의
이름을 알려준다. 바로 옆에 도로가 나 있어 굳이 문의 아랫도리를 지날 필요는 없겠지만 그
래도 절에 왔으니 그의 체면도 세워줄 겸, 문의 밑도리를 지나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얼마 안가서 천왕문이 마중을 한다. 천왕문은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
의 거처로 일주문을 지나온 중생을 검문하는 곳인데, 이곳에 있어야 될 사천왕은 어디로 마실
을 갔는지 보이질 않고 문 안은 텅 비어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절을 들락거렸지만 이렇게 비
어있는 천왕문은 처음이다. 시작부터가 참 이상했던 봉림사. 허나 다행히 사천왕은 멀리 가지
않고 범종루 밑으로 자리를 옮겨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  숲터널을 이루고 있는 봉림사 숲길
숲에서 갑자기 선녀가 튀어나와 나를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호젓한 숲길이다.

▲  경내를 가리고 선 범종루(梵鍾樓)와 금강역사(金剛力士)상

숲길을 지나면 그 길의 끝에 2층 범종루가 계단을 늘어뜨리며 우리를 마중한다. 범종루 앞에
는 우람한 체격에 성난 표정을 지은 금강역사 4기가 자리하여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우리를 쫄
게 만드는데, 우측 뒷쪽의 금강역사는 무려 바위까지 들며 위협을 한다.
아무래도 개발의 칼질이 일주문 바로 앞까지 밀고 들어와 절을 위협하니 절 입장에서도 그리
마음이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두 눈을 부릅뜨며 성난 표정을 지은 저들을 경내 앞에
내세워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며 더 이상 선을 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 같다.

▲  범종루 1층에 자리한 사천왕들

금강역사의 검문을 거쳐 범종루의 밑도리를 들어서면 사천왕의 검문을 받게 된다. 이들은 원
래 천왕문에 있다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금강역사와 함께 든든하게 절을 지키고 있는데 성
난 포즈의 금강역사와 달리 사천왕의 얼굴은 귀엽기만 하다. 이들의 공간을 따로 사천왕각(四
天王閣)이라 부르며, 그들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매우 조촐한 크기의 봉림사 경내가 펼쳐진다.


▲  봉림사 3층석탑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법당인 극락전, 왼쪽에는 요사와 선방으로 쓰이는 봉향각, 오른
쪽에는 3층석탑과 1708년에 지어진 'ㄴ'자 건물을 부시고 다시 지은 설법전이 자리한다. 바로
가까이에 자리한 3층석탑은 극락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
사리 6과를 봉안하고자 1979년에 세운 것으로 신라 석탑의 백미(白眉)로 통하는 석가탑(釋迦
塔)과 많이도 닮았다.
그럼 여기서 잠시 봉림사의 내력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종무소의
역할까지 도맡고 있는 봉향각(奉香閣)

▲  설법전(說法殿)
1883년에 조성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경기도의 중심 도시인 수원(水原)을 서쪽과 남쪽으로 감싸고 있는 화성시(華城市)의 주요 시
가지이자 화성시청을 품고 있는 남양 동쪽 비봉산 자락에 봉림사가 고즈넉하게 안겨져 있다.

이 절은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 시절,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잦은
침공을 부처의 힘을 빌려 물리치려는 심보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이곳은 신라의 당항
성(黨項城) 지역으로 고구려와 백제와도 가까워 그들과의 싸움이 늘 그치지가 않았다. 특히
당항성은 신라가 당나라와 교역을 하던 무역항으로 이곳이 끊기면 신라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기 때문에 악으로 깡으로 이곳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절을 창건할 때 궁궐에서 기르던 봉황이 이곳으로 날라와 숲에 앉았다고 하여 봉황의 숲이란
뜻에서 봉림사라 불리게 되었으며, 절을 품은 산도 봉황이 날라왔다는 뜻의 비봉산이라 불리
게 되었다. 허나 신라 중기(7세기)에 창건되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역사 기록이나 유적이 전
혀 없어 과연 그때 지어졌는지는 심히 회의적이다. 다만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서 지정(至正)
22년(1362년)이란 묵서명(墨書名)이 발견되어 최소 14세기 이전부터 절이 있었음을 보여주니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신라 후기나 고려 초/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본격적인 사적(事蹟)이 등장하는 것은 조선 중기이다. 1621년 안모(安暮)와 자현(慈賢)
이 대웅전과 망양루(望洋樓), 봉향각, 범종각을 개축했다고 전하며, 1708년 요사를 중건했다.
그리고 1883년과 1887년 아미타후불탱을 비롯해 지장시왕탱, 신중탱, 칠성탱을 새로 조성했고,
1978년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새로 개금하는 과정에서 복장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중 사
리 6과를 담고자 뜨락에 3층석탑을 세우고, 나머지 유물은 신변보호를 위해 용주사(龍珠寺)
효행박물관으로 보냈다.
1988년 삼성각을 새로 짓고, 1992년 요사채와 봉향각, 범종각을 개축했으며, 1990년대 후반에
주지로 부임한 성무(性無)가 도로와 주차장을 깔고 가람을 정비하여 지금에 이른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물인 극락
전과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탱화 여럿이 전하고 있다. 법당(法堂)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봉향
각과 설법전, 삼성각, 천왕문 7~8동의 건물이 경내를 메우고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불상을
간직한 오래된 절이라 처음에는 어느 정도 덩치가 있는 절인줄 알았으나 정작 와보니 생각보
다 매우 작은 절이라 다시 한번 놀랬다.
허나 절이 아담하여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으며, 비록 절 밑까지 속세의 기운이
밀어닥쳤지만 일주문과 천왕문, 비봉산의 가호로 경내 주변은 무성한 숲을 이루며 한적한 산
사의 분위기를 마음껏 드러낸다. 허나 산을 조금만 벗어나면 공장과 시가지 등 속세의 기운이
이빨을 드러내니 졸지에 속세에 갇힌 외로운 처지가 되어버렸다.

*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북양리642 (주석로80번길 139, ☎ 031-356-9117)


▲  봉림사의 법당인 극락전(極樂殿)

범종루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북향(北向)을 하고 있는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
붕 집이다. 화강암으로 높이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조촐하고 묵직하게 들어앉은 극락전은 조
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예전에는 대웅전(大雄殿)이라 불렸으나 아미타불(阿彌陀佛) 거처에
걸맞게 극락전으로 이름을 갈았다.
불단에는 봉림사의 제일 가는 꿀단지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1883년에 제작
된 아미타후불탱과 지장시왕탱 등이 그를 수식한다. 특히 지장시왕탱은 19세기 후반에 경기도
에서 활약했던 대허체훈(大虛體訓)과 수일(守一), 태삼(台三)이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  봉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가운데 불상) - 보물 980호

극락전 불단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한 3존불이 저마다 미소 경쟁을 벌이며, 온화한 표정으
로 중생을 맞이한다. 아미타불 좌우에 자리한 지장보살상과 관음보살상은 아미타불의 허전한
옆구리를 달래고자 근래에 붙여놓은 협시(夾侍) 보살상이며, 그들 뒤에 든든하게 자리한 아미
타후불탱은 1883년에 제작된 것이다.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1978년에 불상에 다시 금칠을 했을
때, 그의 뱃속에서 수많은 복장유물이 쏟아져 나와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때 지정(至正) 22
년(1362년)이라 쓰인 묵서명이 나와 최소한 1362년 이전에 조성되었음을 귀뜀해주며, 1583년
에 새로 개금(改金)을 했음이 밝혀졌다.
이 불상은 높이 88.5cm, 무릎 폭 78cm의 작지만 단아한 모습으로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이 두툼하게 솟아있으며, 살짝 구부러진 눈썹 사이로 백호가 박혀 있다. 얼굴은 단아하고 온
화한 표정을 머금고 있는데, 코는 작지만 오똑하게 솟았고, 붉고 조그만 입술 위에는 수염이
살짝 그어져 있다. 두 귀는 중생의 민원을 하나도 빠짐없이 접수하려는 듯, 어깨까지 늘어져
있고 굵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몸에 걸친 옷은 통견(通肩) 스타일로 가슴 부분은 U자형으로 처리되어 있고, 옷은 띠매듭 대
신 3줄의 옷주름으로 처리했다. 고려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뱃속에서
나온 유물은 전적(典籍) 8종과 사리병, 섬유류, 종자류, 각종 구슬, 부적 등으로 이들은 '봉
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전적일괄'이란 어려운 이름으로 보물 1095호로 지정되었다. 이들
가운데 사리와 법화경(法華經)을 제외하고 모두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가 있다.

아미타불 좌우에는 가히 1,000기는 넘을 듯한 조그만 금동불이 빼곡히 자리해 일제히 금빛을
발산하고 있는데, 이들은 중생의 돈을 받아 만든 원불(願佛)이다.

▲  조그만 연못과 다리를 갖춘 샘터

▲  봉림사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칠성탱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달랑 1칸에 불과한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
로 1988년에 지어졌다.
남쪽을 바라보는 곳에는 산신탱과 독성탱이, 서해바다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칠성탱이
자리해 있는데, 칠성탱은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19세기 후반 경기도에서 활약한 혜산축연의
작품으로 나름 가치가 높다. 그림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두고 그 좌우로 월광보살(月光菩薩)과
일광보살(日光菩薩),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배치했는데, 붉은 색과 청색이 잘 대조를 보이고
있으며, 19세기 후반 경기도 불화 양식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  산신탱과 독성탱
산신과 호랑이, 동자, 소나무, 주름진 산이 표현된 산신탱은 1984년에,
편하게 앉은 독성 할배와 동자, 천태산(天台山)이 그려진 독성탱은
1991년에 조성되었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경내

우리는 삼성각에 들어가 염치불구하고 10분 정도 쉬었다. 건물이 매우 작아서 장정 2명이 들
어가 앉으니 완전 꽉찬다. 여기서 세월과 세상, 근심을 잠시 잊으며 없는 듯 쉬고 있다가 밖
으로 나와 봉향각 툇마루에도 걸터앉아 산사의 고적함을 즐겨본다.

햇님도 슬슬 퇴근할 때가 되었는지 찬 기운이 조금씩 엄습해온다. 우리가 있어야 될 곳은 이
런 절간이 아닌 아비규환의 속세이기에 억지로 발을 떼며 경내를 나왔다.
절에는 하얀 털의 멍멍이 3마리가 절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를 일주문까지 배
웅을 해주고 숲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일부러 배웅해준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몰라도 늘
번잡한 일주문 밑과 달리 절은 고적하기 그지 없으니 그도 사람이 그리웠나보다. 그만큼 봉림
사는 한적한 절간이었다.


▲  봉림사를 뒤로하며, 하얀 털의 멍멍이가 일주문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  신라의 대외무역항인 옛 당항성, 화성 당성(唐城)
- 사적 217호

봉림사에서 남양, 마도, 사강을 지나 서신 방면으로 조금 가면 당성<唐城, '黨城'이라 쓰기도
함>이란 오래된 산성(山城)을 만날 수 있다. (당성이 봉림사와 가까워 편의상 봉림사 글에 통
합했음, 당성은 몇 년 전 3월 말에 갔었음)

당성은 옛 당항성<唐項城, 또는 黨項城>으로 전해지는 곳으로 당성이란 이름은 모를지언정 당
항성 3글자는 아마 지겹도록 들어봤을 것이다.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허벌나게 등장했던, 그것
도 주관식 문제의 단골로 필수로 외워야 했던 그 이름이다. 그 당항성이 바로 화성시에 있는
당성이다.

당성은 서해바다를 향해 약간 튀어나온 남양반도(南陽半島) 서남쪽 구봉산(九峯山)에 위치한
다. 산 정상부와 동쪽 계곡, 서남쪽 능선에 걸쳐 성벽을 쌓았으며, 지금은 간척으로 많이 메
워졌지만 예전에는 산 서쪽까지 서해바다가 넝실거렸다.
백제가 처음 당항성을 지었으며, 5세기 후반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점령하여 당성군(唐城
郡)이라 했다. 그러다가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장악하여 당항성으로 이름을 갈았
다.
신라는 한강 유역과 당항성을 점령하면서 서해바다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중원(中原)대륙으로
바로 이어지는 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고구려나 백제를 거치거나 직접 남해바
다를 돌아서 가야 했으니 자연히 대륙과의 교류는 더딜 수 밖에 없었다.

당항성은 대륙을 이어주던 신라의 대외무역항으로 이곳을 통해 중원 왕조와 교류를 했다. 그
런 중요성 때문에 신라는 이곳을 꿀단지처럼 애지중지했다. 문무왕(文武王) 이전까지 이곳만
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고구려, 백제와 매우 가까운 곳이라 그들은 자주 이곳을 공
격했고 빼앗긴 적도 1~2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라는 국력마저 딸려 그들을 상대하기 벅찼으
나 그런 위험을 감수하며 악으로 깡으로 이곳을 사수했다.

당나라를 비롯한 중원대륙으로 가는 신라 사신과 상인, 승려는 대부분 이곳을 거쳤으며, 나중
에 무열왕(武烈王)이 되는 김춘추(金春秋)도 백제에 대해 복수의 개거품을 잔뜩 물며 이곳을
통해 대륙으로 넘어가 당태종(唐太宗)에게 아부를 떨었다. 결국 나중에 저지르게 되는 고구려
와 백제 멸망의 발판을 당항성을 통해 닦은 셈이다.
문무왕 이후 백제가 거닐던 서해(西海)와 서남해를 장악하게 되었지만 698년 이후 신라 이북
에 발해(渤海)가 들어서 대륙과의 육로가 끊기면서 당항성의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을 몰랐다.
경덕왕(景德王) 때는 당항성 지역을 당은군(唐恩郡)이라 고쳐 부르며 당나라에 잘보이고자 애
를 썼다. 그리고 신라 후기에는 창궐하는 해적을 막고자 당성진(唐城鎭)을 두었다.

신라가 망하면서 500년 가까이 번영을 누리던 당항성은 풍비박산이 났다. 무역항과 대외교류
의 기능이 거의 사라져 해안기지의 기능으로 크게 축소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성을 수리한
흔적이 있어 방어용으로 조선 중기까지 쓰였음을 보여주나 그 이후 제대로 버려지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쇠퇴하고 만다.

당성은 산 정상을 에워싼 테뫼식과 계곡을 포함한 포곡식(包谷式)이 혼합되었다. 백제는 테뫼
식 성을 만들었는데, 테뫼식 성의 둘레는 약 360m 정도로 기단(基壇) 바깥쪽을 보축(補築)하
여 성벽을 견고하게 했으며, 성 남서쪽 높은 곳에 축조된 흔적이 남아있다. 6세기 이후 신라
가 차지하면서 협소한 산성을 넓히고자 포곡식 성을 쌓아 복합적인 구조를 지니게 된 것이다.
현재의 성은 신라 때 것으로 그 평면은 장방형(長方形)을 이루고 있다. 포곡식 성의 둘레는
약 1.1km로 예전에는 당성의 내성(內城)으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신라 후기 유물이 출토되면서
신라 말에 설치된 당성진 성곽으로 여기고 있다.

현재 동문(東門)터와 남문터, 북문터, 우물터, 건물터가 있으며, 서쪽 성곽 정상부에 조선 때
지어진 망해루(望海樓)로 여겨지는 건물 주춧돌이 있다. 성벽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대체
로 잘 남아있으며, 성벽의 높이는 2~5m 정도이다. 여장 등의 방어시설은 녹아 사라졌고, 성의
지형은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다.
당성을 품은 구봉산은 남양반도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산으로 동쪽을 제외하고는 산이 없어
조망이 매우 좋다. 게다가 바다가 지척이라 대륙으로 가는 관문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  당성으로 가는 숲길

당성 입구인 신흥사 정류장에서 7~8분 정도를 오르면 당성을 지키는 관리소가 나온다. 관리소
동쪽에는 건물터와 성터에서 수습된 돌들이 조그만 보금자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서쪽에 지
붕돌과 이수(螭首)를 갖춘 당성사적비가
우람한 모습으로 속인을 맞는다.


▲  당성 관리소 동쪽에 모인 옛 당성의 성돌들

신라 제일의 무역항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 참말로 엊그제 같은데 세월과 자연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해 성 안에 모든 것은 주저앉고 성벽과 건물을 이루던 돌은 잔해가 되어 산 곳곳
에서 이리저리 흩어져 당당히 성벽의 일부로 살아가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당항성의 내력이 적힌 당성 사적비(史蹟碑)

▲  당성 은행나무 숲길

당성사적비를 지나면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 숲길이 나그네의 마음을 부여 잡는다. 만추(晩
秋) 때 왔더라면 황금색 은행잎이 흩날리는 그림 같은 현장이겠지만 겨울 제국이 모든 것을
공출해 가면서 앙상히 뼈만 드러낸 채, 봄의 해방군을 기다린다. 봄이 바로 앞까지 온 것 같
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제국의 잔당들이 설치고 있으니 은행나무들도 마음 놓고 은행잎을 틔우
지 못한다. 어여 얼어붙은 뿌리에 완연한 봄이 내려와 메마른 가지에 살이 붙었으면 좋겠다.
(이때가 3월 초였음)
폐허가 되버린 옛 성에서의 허전함을 달래주는 숲길로 늦봄이나 가을에 거닐고 싶은 길이다.

숲길을 지나면 길이 2갈래로 갈린다.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상관은 없으며, 넉넉잡
아 30분 정도면 충분히 1바퀴를 돈다. 가파른 구간이 별로 없고, 성 남쪽에서는 궁평항과 제
부도(濟扶島),
서신 앞바다가, 서쪽에서는 땅으로 매립된 서신 서부 지역과 대부도(大阜島)가
시야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그림처럼 박힌 섬들의 파노라마를 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바다도
겨우 보일 정도이다.

성곽 외에는 장대한 세월에 죄다 휩쓸려 내려가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야말로 폐허의 현장이
다. 중간중간 옛 건물터와 주춧돌, 성돌의 무더기가 눈에 띄며, 은행나무 숲길 끝에는 출토된
기와조각을 차곡차곡 올려 만든 돌탑이 눈길을 끈다.


▲  출토된 기와조각으로 이루어진 돌탑
메마른 수풀을 이불로 삼아 늦겨울을 견디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소복을
걸친 헝클어진 머리의 처녀귀신 누님처럼 보인다.

▲  기와 돌탑 주변의 건물터
건물이 녹아내린 흔적을 자연이 수풀로 보듬으면서 자연의 일부로 녹아들었다.

▲  소나무가 우거진 남쪽 성곽

▲  솔내음이 가득 깃들여진 남쪽 성곽

▲  남문터
성문의 흔적은 없고, 성곽이 끊어진 움푹 패인 부분이 옛날 이곳에
성문이 있었음을 아련히 전해줄 따름이다.

▲  남문터 동쪽 성곽

▲  남문터 서쪽 성곽

▲  서남쪽 성곽

▲  서남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서신면 서부 지역과 대부도)
바다가 산 아래 마을까지 넝실거렸으나 거의 육지로 바뀌면서 바다는 저 멀리
밀려나고 말았다. 산 너머로 대부도가 아련히 얼굴을 내민다.

▲  서쪽 성곽 정상부에 자리한 망해루터 주춧돌
당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이곳에 서해바다를 바라보던 망해루가 있었다.
망해루는 조선 후기에 녹아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누각 주춧돌과
성돌이 한데 고여 커다란 돌무더기를 이룬다.

▲  서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서신면 서부)

▲  성곽이 잠시 끊어진 북문터
북쪽을 바라봤을 북문과 문루의 모습이 대충 머리 속에 그려진다.

▲  힘차게 뻗은 동북쪽 성곽

▲  동북쪽 성곽 부근의 건물터

건물 주춧돌과 성돌이 모여 거대한 돌의 나라를 이룬다. 건물터와 성문터에 작게 안내문을 두
어 답사객의 이해를 도왔다면 무척 좋았을 것을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상당히 아쉽다.
저런 식의 건물 유적은 겉으로만 보면 버려진 돌의 의미 없는 공간으로 비춰져 지나치기가 쉽
다.


▲  동남쪽 성곽 (1)

▲  동남쪽 성곽 (2)

보잘 것 없는 돌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이루며 거대한 산성을 일구었다. 수석에 끼지도 못하는
저들 자체는 보잘 것이 없지만 그것이 뭉치고 모이면서 하늘까지도 겁을 먹게 만든 요새를 이
루어낸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당성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 당성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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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늦가을 나들이 ~~~ (문소루, 구봉산, 금성산고분군, 조문국 경덕왕릉...)

 

 

' 경북 의성 늦가을 나들이 '

▲  늦가을이 살짝 거쳐간 문소루 가는 길


 

가을이 한참 천하를 곱게 수놓던 10월 끝 무렵에 경북 한복판에 자리한 의성(義城) 고
을을 찾았다.

마침 같은 날, 아는 이들이 주왕산(周王山)으로 여행을 가는지라 그 길목인 안동까지 태
워줄 것을 부탁했다. 그들은 내 부탁을 흔쾌히 받아주었고, 아침 7시에 삼송역(3호선)에
서 함께 남쪽으로 출발했다.
지옥 같은 서울 근교의 교통 체증을 간신히 뚫고 영동고속도로에 진입, 여주휴게소에 잠
시 바퀴를 멈추고 교통 정체로 인해 놀란 몸과 차량을 달래며 김밥과 우동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웠다. 이후로는 신나게 가속도를 붙이면서 11시가 좀 넘어 안동의 주요 관문인
안동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소 아쉽지만 그들과 작별을 고하면서 나는 남쪽(의성)
, 그들은 동쪽(주왕산)으로 제 갈 길로 흩어졌다. 각자의 목적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안동터미널에 홀로 남겨진 나는 남쪽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30분을 달려 의성터미널
에 두 발을 내렸다. 의성은
1996년 이후 2번째 인연인데,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것은 없는
듯 싶다. 이곳에서는 이미 정처(定處)를 정해둔 상태이므로 그곳에 그냥 가기만 하면 된
다. 다만 그날의 종점인 부산(釜山)까지 가는 시간을 고려해 조금은 서둘러야 된다.

의성터미널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산이 하나 보인다. 그 산을 구봉산이라 하는데 바로 그
곳에 첫 답사지인 문소루가 있다.


 

♠  의성읍의 소중한 명소, 문소루(聞韶樓)와 구봉산(九峰山)

▲  낙엽이 깔린 문소루 가는 길

의성읍내 서쪽에는 이 땅의 흔한 이름의 하천인 남대천(南大川)이 흐르고 있다. 남대천 서쪽에
는 남북으로 길쭉한 산줄기가 병풍처럼 자리해 있는데 이 산줄기가 의성읍의 든든한 진산(鎭山)
이자 쉼터이며 산림욕장으로 쓰이는 구봉산(211.4m)이다.

구봉산은 말 그대로 9개 봉우리의 산으로 원래는 구성산(九成山)이었으나 왜정(倭政) 때 구봉산
으로 바뀌었다. 산 정상에는 봉의정(鳳儀亭)이란 정자가 천하를 굽어보고 있고 구봉산 제3봉 아
래쪽에는 조선 중기 때 효자(孝子)인 오천송(吳千松)을 기리고자 숙종(肅宗) 시절에 지어진 소
원정(溯源亭)이 있다. 또한 산 북쪽에는 영남의 이름난 누각이었던 문소루가 자리해 있어 산의
경관을 돋구며, 근래에는 유아숲체험원이 부근(원당리)에 조성되어 꽤 알찬 체험시설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30여 점의 차별화된 체험시설을 갖추고 있음)

읍내에서 남대천을 건너면 구봉산과 문소루로 올라가는 길이 나타난다. 거의 읍내 사람들만 산
책과 운동 삼아 찾는 숨겨진 지역 명소라 주말 한낮임에도 인적이 없다. 고요함만이 가득한 그
길에 요란하게 발자국 소리를 내며 정적을 잠시 깨뜨려 본다.
구봉산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아름다움을 처절히 선보이며 한편으로는 우수에 잠겨 있다. 좀
있으면 자비가 없다는 겨울 제국(帝國)의 압정(壓政)이 펼쳐질테니 어느 누가 좋아들 하겠는가?
나무들은 아직 단풍과 울긋불긋 타오른 잎을 붙들고 있으나, 절반 이상은 이미 땅바닥에 떨어져
쓸쓸한 이름, 낙엽이 되었다. 길바닥에는 낙엽들이 가득 깔려 붉은 카페트를 이루며 나를 맞이
한다. 나 역시 늦가을의 단상 앞에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  길바닥을 메운 낙엽들
바람이 스르륵 빗자루질을 할 때마다 낙엽들은 힘없이 이리저리 날려간다.

▲  은행잎이 가득 입혀진 문소루 가는 길 (문소루 직전)

낙엽을 사각사각 밟으며 한굽이를 오르니 이번에는 은행나무 길이 나타난다. 길바닥에는 은행나
무가 겨울의 도래를 원망하며 훌훌 털어버린 은행잎이 두툼하게 깔려있다. 워낙 두텁게 쌓인 탓
에 콘크리트 길바닥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라 마치 노란 카페트를 깔거나 노란 물감을 입힌
것처럼 보인다. 가벼운 낙엽과 달리 바람의 빗자루질에도 거의 동요하질 않으며, 길이 푹신푹신
해서 그냥 벌러덩 드러눕고 싶은 마음도 조금씩 솟아난다.


▲  은행잎이 노란 카페트를 이룬 문소루 가는 길
아무리 레드(red) 카펫이 부와 명예의 상징이라 해도
자연이 베푼 자연산 노란 카펫만 할까..?

▲  단풍나무 밑에 서서 읍내를 바라보고 있는 문소루 중건 기념비(紀念碑)

▲  의성읍내를 굽어보는 문소루(聞韶樓)

아름다운 문소루에 비 피해 오르니 해가 저문다
풀빛의 푸르름은 역로(驛路)에 닿았고
화사한 복숭아 꽃은 인가(人家)를 덮는다.
봄의 시름은 술처럼 진하고
살아가는 재미는 점점 깁처럼 얇아간다.
애끓는 강남의 길손 변방의 당나귀는 또 서울로 간다.

* 고려 후기 포은 정몽주(鄭夢周)가 문소루에 올라 지은 시
 

구봉산의 제9봉에는 의성의 명물인 문소루가 의성 고을을 굽어보며 자리해 있다. 문소루는 원래
의성고을 관아에 딸린 누각으로 관아 서북쪽에 있었으며, 문소(聞韶)란 이름은 신라 후기 때 의
성 고을의 이름이다. (고려 초에 의성으로 이름이 갈림)
고려 중기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며, 고려 고종(高宗) 때까지 있
다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의성현령(縣令) 이원제(李元濟)가 중건했고
1657년(효종 8년)에 불에 탔다가 1694년 의성현감 황응일(黃應一)이 다시 지었다.

이곳은 관리들의 향연 장소로 이용되었던 공간으로 왕년에는 영남4대루의 하나로 명성을 떨치기
도 했다. 여기서 4대 누각이란 진주(晋州)의 촉석루(矗石樓),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 안
동(安東)의 영호루
(), 그리고 이곳 문소루로 영남 지역에서 꽤나 이름이 있는 누각들이다.
그 누각 가운데 문소루가 제일 나이가 많다고 한다.
허나 그런 명성이 있음에도 가장 굴곡진 인생을 가진 비운의 누각으로 6.25전쟁 때 폭격으로 그
만 파괴되고 말았는데, 그때 정몽주와 상촌 김자수(桑村 子粹, 1351~1413), 김지대(金之岱,
1190~1266) 등 여러 문인들의 시가 담긴 현판(懸板)과 이지원(李止遠, ?~1866)의 문소루 중건기
문(重建記文)도 모조리 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의성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뒤늦게나
마 1981년 1월 중건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83년 9월 옛 모습을 가급적 되살리며 복원되었
다. 허나 원래 자리에는 이미 건물이 가득 들어차버려 읍내가 훤히 바라보이는 구봉산 제9봉에
새 둥지를 틀었다.

문소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이곳에 올라서면 의성읍내가 두 눈에 바라보
인다. 풍류를 안다면 술 1병 들고와 눈 아래 펼쳐진 조그만 천하를 바라보며 시 짓기 놀이를 하
거나 달놀이를 즐기며 명상에 잠기고 싶은 그런 곳이다.
비록 옛 건물이 아닌 근래에 자리를 옮겨 복원했다는 한계점이 있고, 오랜 명성이 바닥으로 추
락된지 오래지만 의성의 명물이자 군민들의 성원으로 다시 태어난 의미 깊은 곳으로 의성 제일
의 명소로 자라날 싹수가 충분한 곳이다. 혹시 아는가? 나중에 영호루와 촉석루를 능가하는 유
명 인사가 될지도 말이다. 그때에 대비해 미리 얼굴을 비추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시원스런 팔작지붕의 문소루

▲  글씨의 패기가 느껴지는 문소루 현판


▲  문소루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시(詩) 현판들

▲  '소소구성봉황래의(簫韶九成鳳凰來儀)' 현판
서경(書經) 익직편(益稷篇)에 나오는 구절로 '순임금이 음악을 9번 연주하니
봉황이 와서 춤을 추었다'는 내용이다.

▲  속세와 문소루 내부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 -
신발을 벗고 들어오기 바란다.

▲  문소루에서 바라본 천하 (1) - 의성읍내

▲  문소루에서 바라본 천하 (2) - 의성읍내 원당리와 후죽리

▲  구봉산 능선길

문소루에서 1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바로 읍내로 나갈까 했으나 늦가을에 잠긴
구봉산 산길이 너무 고와서 잠깐의 시간을 던져 구봉산 능선을 더듬기로 했다.

구봉산은 남대천 서쪽에 병풍처럼 자리한 산으로 서쪽은 완만하고 읍내와 남대천이 보이는 동쪽
은 경사가 60도 이상으로 급하여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잘못 발을 놀렸다가는 바로 남대천으
로 곤두박질 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능선 산길이 완전 읍내를 굽어보는 산성(山城)이
나 요새를 걷는 기분이다.
구봉산 북쪽 문소루에서 구봉산 정상까지는 대략 2km이다. 그 부근에 소원정과 봉의정, 소원석
등의 조촐한 명소가 있으나 거기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넉넉치 못해 중간에서 내려가기로 했다.


▲  늦가을의 막바지 스케치 현장 ~ 구봉산 능선길
능선길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한다. 마치 인간의 인생처럼...

▲  구봉산 능선 오르막길 - 인생이 늘 저렇게 상승곡선이면 얼마나 좋을꼬~~

▲  만추(晩秋)가 깃들여진 구봉산 능선
내리막길 - 인생의 내리막길이 저렇게
화려하고 곱다면 자주 해볼 만할텐데.

▲  능선길에서 만난 당산나무
여기서 저 계단을 오르면 정상으로 이어지고
왼쪽 내려가는 길로 가면 남대천이다.


▲  남대천으로 내려가는 좁은 산길
왼쪽은 남대천과 맞닿은 낭떠러지이므로 주의 깊게 움직이기 바란다.

▲  낭떠러지 산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면 남대천에 이른다.
물길을 막은 저 보(洑) 밑의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구봉공원이다.

▲  남대천 징검다리
여기서는 실수로 물에 빠져도 생명에 지장은 없다. 수심이 매우 얕기 때문이다.

▲  구봉공원에서 바라본 징검다리와 구봉산 산줄기
남대천과 만나는 구봉산 동쪽은 거의 낭떠러지라 오를 수 있는 길이 거의 없다.
저런 곳에 산성(山城)이나 방어시설을 만든다면 정말 요새가 따로 없겠지.

▲  의성읍내로 가다가 만난 늦가을의 서정 -
은행나무의 빛깔이 너무 매혹적이다.

※ 문소루, 구봉산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① 의성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의성행 직행버스가 1일 3회, 동서울터미널에서 1일 6회 떠난다.
* 서울 청량리역과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1일 2회 떠난다.
* 대구 북부정류장에서 의성행 직행버스가 1일 10여 회 떠난다.
* 인천, 대전(복합), 구미, 영천, 부산(동부)에서 의성행 직행버스 이용
* 동대구역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1일 1회, 부전역과 해운대역, 태화강역, 경주역, 영천역에서 1
  일 3회 운행
* 의성역과 의성터미널에서 왼쪽(북쪽)으로 가면 북원4거리이다. 여기서 왼쪽(서쪽)으로 꺾어서
  중앙선 굴다리를 지나면 왼쪽 산 정상에 문소루가 보이며, 의성교를 건너 100m 정도 가면 문
  소루와 구봉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② 승용차 이용시 (문소루까지 차량 접근 가능, 주차는 문소루 주변에)
* 중앙고속도로 → 의성나들목을 나와서 의성 방면으로 우회전 → 원당3거리에서 우회전 → 의
  성군새마을회관과 현대자동차 의성지점을 지나면 바로 오른쪽에 문소루로 오르는 오르막길이
  나온다 → 문소루

* 문소루 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원당리87


 

♠  옛 조문국(召文國)의 영화로움을 숨죽여 간직한
의성 금성산고분군(金城山古墳群) - 경북 지방기념물 128호

문소루와 구봉산을 둘러보고 의성터미널에서 탑리(塔里)로 가는 군내버스를 탔다. 탑리 직전에
자리한 고개를 넘으면 오른쪽(서쪽)으로 큰 무덤들이 즐비한 벌판이 펼쳐지니 그곳이 금성산고
분군이다. (탑리 방면 28번 국도변에 있음)

금성산고분군은 탑리 북쪽인 대리리(大里里)와 초전리에 옹기종기 모인 고분들로 약 200여 기의
옛 무덤이 산재해 있다. 이들은 의성 금성면(탑리) 지역에 있었던 조문국(召文國)의 것으로 그
나라의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이다. 이들 무덤 사이로 신라 무덤도 다수 섞여 있다.
조문국은 한자 발음에 따라 '소문국'이라고도 하는데, 진한(辰韓)의 일원으로 탑리를 중심으로
둥지를 틀었던 손바닥만한 나라이다. 영역은 의성 남부(길게 잡으면 의성 북/중부까지)와 군위
일부에 불과했으며, 진한연맹이 하나둘 신라에게 먹히는 와중에도 용케 버텨오다가 185년<신라
벌휴왕(伐休王) 2년>에 결국 복속되고 만다.
그 이후 신라 조정에서 관리를 보내 다스리거나 항복한 조문국 왕족이나 귀족에게 이곳을 통치
하게 했을 것이고 이 땅을 발판으로 삼아 상주의 사벌국(沙伐國)과 인근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야금야금 점령했다.

조문국에 대한 정보는 이것 외에는 딱히 알려진 것이 없으며, 그의 거의 유일한 흔적이라 할 수
있는 금성산고분군은 1960년부터 최근까지 국립중앙박물관과 경희대, 경북대 박물관에서 발굴조
사를 벌였다. 그 결과 앞트기식무덤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변형된 돌무
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신라토기의 일종으로 의성
지역에서 주로 나오는 '의성양식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금동관(金銅冠)과 금동관 장식
품, 금동제귀걸이 등의 장신구와 철제 무기류, 마구류(馬具類) 등이 있다. 이들 유물은 대구에
있는 국립대구박물관과 경북대박물관, 2012년에 문을 연 의성조문국박물관에 분산되어 있다.


▲  드넓게 펼쳐진 금성산고분군의 위엄 ▼

금성산고분군이 지금처럼 깔끔히 정비된 것은 근래에 일이다. 겨우 경덕왕릉이라 불리는 1호분
만 봉분(封墳)을 갖추고 있었을 뿐, 나머지는 그냥 경작지로 쓰였다. 그러다가 고분을 발굴하
고 그 무덤을 복원하는 한편, 주변을 말끔히 밀고 정비하면서 일종의 고분공원으로 거듭난 것
이다.

고분의 모습은 흙으로 만든 봉토분(封土墳)으로 다른 고분과 별로 다를 것은 없다. 조문국의 수
수께끼를 한 움큼 간직한 큼지막한 고분들이 듬성듬성 또 다른 언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
에 조그만 민묘(民墓)들이 수줍은 듯 들어앉았다. 고분은 당연히 옛 조문국이나 신라 귀족들의
무덤이고, 민묘는 20세기 이후 조성된 인근 백성들의 무덤이니 서로의 신분과 시공(時空)을 초
월하며 한 공간에 어색하게 자리한 것이다.
물론 민묘는 고분군 보호와 정비를 위해 다른 데로 옮기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연고가 없는 경우
함부로 이장(移葬)하기도 어렵다. 또한 어차피 같은 무덤이고 모습도 비슷하니 조문국의 무덤과
신라의 무덤, 그리고 현대의 무덤을 비교할 겸, 그냥 두어 고분군의 일원으로 삼는 것도 괜찮다
여겨진다.

손으로 더듬고 싶은 두툼하고 요염하게 솟아난 고분들 사이로 산책로가 나 있는데, 이들 고분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천천히 둘러보면 대략 1시간 정도 걸린다. 또한 이곳의 상징은 경덕왕릉
이라 불리는 1호분으로 이곳 무덤 가운데 유일하게 석물을 갖췄으며, 국도 변에는 문익점 면작
기념비도 있으니 같이 둘러보면 된다.


▲  말을 달리며 화살을 쏘는 조문국 무인상(武人像)
조문국의 무인이 정말 저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발굴된 무기와 마구류를
토대로 가야나 고구려의 무인을 모방하여 재현한 듯 싶다.

▲  금성산고분군 한쪽에 들어앉은 조그만 민묘들
비록 무덤의 크기와 시대는 틀리지만 저들도 어엿한 금성산고분군의 일원이다.
조문국부터 신라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초월한 다양한 시대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는 생생한 현장이니 말이다.

▲  국도변에 누운 43호 고분

▲  40호 고분

▲  35호 고분

◀  국도변에 굵직하게 솟은 조문국사적지
(召文國史蹟地) 표석의 위엄
표석에 쓰여진 글씨체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  33,34,36,37호 고분

▲  민묘와 옛 고분의 공존

▲  20호 고분

▲  25호 고분

▲  5호 고분

▲  19호 고분


▲  금성산고분군의 서쪽 부분

▲  고분 북쪽에 남아있는 민가
나무 외에는 민가와 고분의 마땅한 경계선이 없어 거의 금성산고분군의 일부처럼 보인다.
저 집도 고분군의 범위가 확대되면 다른 곳으로 강제 이전될 수도 있다.

▲  나란히 솟아난 고분 3형제

▲  금성산고분군의 상징, 조문국 경덕왕릉(景德王陵)

금성산고분군은 그냥 몇호분이란 이름을 달고 있지만, 이곳 1호분은 특별히 경덕왕릉이란 이름
을 달고 있다. 게다가 석물까지 갖추고 있으니 특별한 존재임은 분명하다. 열심히 발품을 팔게
만드는 너른 금성산고분군의 서남쪽 가장자리에 자리한 무덤으로 이곳의 주인이라고 전하는 경
덕왕(景德王)은 조문국 군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 숙종 때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쓴 그의 문집(文集)을 통해 옛날부터 막연히 경덕왕릉이
란 이름으로 살아오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나 경덕왕의 존재와 경덕왕릉의 진위여부는 여전
히 수수께끼이다.

왕릉의 둘레는 74m, 높이 8m로 능 앞에는 근래에 만든 1.6m 높이의 비석과 상석(床石), 멀뚱한
표정의 문인석(文人石) 1쌍, 장명등(長明燈) 1쌍이 세워져 있다.


▲  조촐한 모습의 조문국 경덕왕릉

허목의 문집에는 경덕왕릉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실려있다.
옛날 이곳에 살던 농부가 외밭을 마련하고자 야트막한 언덕을 갈았다. 밭을 일구던 농부는 우연
히 큼직한 구멍을 발견했는데,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의 구멍이었다.
그는 이상하게 여겨 일손을 멈추고 구멍 안으로 들어가 보았는데, 그 안에는 돌로 만든 석실(石
室)이 있고, 그 둘레에는 금칠(金漆)이 되어 있었으며, 석실 안에는 금칠을 한 소상(塑像)이 있
으니 그 머리에는 금관이 씌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금관을 본 농부는 '이게 웬떡이냐~!!' 욕심이 솟아나 그 금관을 벗기려고 했다. 허나 그의 손이
금관에 닿자 자석처럼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의성현령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옛 조문국의 경덕왕이다. 나의 능이 황폐해져서 농부의 외밭이 될 지경에 이르렀으니 속
히 능을 복원토록 하라'
그리고는 능의 위치를 알려주고 사라졌다.

날이 밝자 현령은 사람들을 이끌고 노인이 일러준 곳으로 찾아갔다. 그곳에는 밭이 되기 직전인
고분이 있었다. 이에 현령은 왕릉을 조성했다고 하며, 지금 있는 고분이 바로 그때 조성한 경덕
왕릉이란 것이다. 그런데 석실 안에 들어가 금관에 손을 댄 농부는 어찌되었는지는 나와있지 않
으니 그게 궁금할 따름이다. 아마도 며칠을 빌고 빌어서 간신히 손을 떼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그 농부가 봤다는 금관과 금칠이 과연 존재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리고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이곳은 오극겸(吳克謙)이란 농부의 외밭이었다고 한다. 그는 외밭에
원두막을 짓고 밭을 지켰는데, 어느 날 꿈에 조복(朝服)을 입고 금관을 쓴 백발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문국의 경덕왕이다. 너가 지은 원두막이 나의 능 위에 있으니 속히 철거하도록 해라'
그렇게 말하고는 농부의 등에 1줄의 글을 쓰고는 사라졌다. 농부는 깜짝놀라 잠에서 깨어나보니
등짝에 노인이 쓴 글이 그대로 쓰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농부는 너무 신기하여 당장 의성 관아로 달라가 현령에게 꿈의 내용을 말한 뒤, 고을 유지들과
봉분을 만들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들 전설을 통해 오랜 세월 지하에 묻혀있다가 조선시대에 경작이나 농경지 개척을 통해 발견
되어 고을 현감과 지역 사람들이 능을 복원하고 제향까지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제향은 1470년
경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1945년 이후 지역 사람들이 살짝 지내오다가 '경덕왕릉보존회'가 결
성되어 매년 음력 3월에 군수와 군민들이 춘계향사(春季享祀)를 지낸다.

▲  조문국 경덕왕릉 능비

▲  두 손으로 홀(忽)을 들고 선 긴 수염의
문인석과 장명등


▲  경덕왕릉의 동쪽 피부면
무덤 동쪽 피부에 얕게 패인 부분이 있는데 저것이 혹 농부가 발견했다는
그 구멍이 아닐까 싶다.

▲  3호분

경덕왕릉 부근에 자리한 3호분은 높이가 3m, 밑지름이 14.3m~10.7m 내외이다. 여기서 돌무지덧
널무덤, 덧널무덤, 유사돌무지덧널무덤 등 3기가 조성되어 있었으며, 돌무지덧널무덤에서 금귀
걸이와 은허리띠, 삼엽문대도 등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신라 유물로 덧널무덤에서는 많은 양의
토기와 철기류가 나왔다.


▲  6호분

6호분은 북쪽 높이 2.5m, 남쪽 높이가 4m이다. 이 고분 안에서는 적석목관(積石木棺)의 제1묘
곽과 장방형의 토광인 제2묘곽이 들어있다.
제1묘곽에서는 금제세환귀걸이, 은제과대장식, 은제교구 등의 장신구와 T자형 장병무기와 철모,
철촉, 소화두대도 등이 나왔고, 장경호와 고배(高杯), 고배뚜껑 등의 토기류와 11cm나 되는 대
퇴골편이 나왔다. 그리고 제2묘곽에서는 홍색과 갈색의 유리구슬과 장경호(長頸壺), 유개호(有
蓋壺), 고배 등의 토기류가 다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  문익점 면작기념비(綿作紀念碑)
기념비 뒤로 보이는 동그란 지붕이 금성산고분군 방문자센터이다.


28번 국도변 소나무 사이에 문익점 면작기념비가 서 있다. 이곳에 왔다면 금성산고분군과 경덕
왕릉과 더불어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봐야 될 존재로 비록 110여 년 밖에 묵지 않았지만 문익
점이 목화 재배에 성공했던 의미 깊은 곳으로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석이다.

삼우당 문익점(三憂堂 文益漸, 1329~1398)은 고려 후기에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우리 의
류사(衣類史)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국사책은 물론 역사 수험서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유명 인
사이다. 허나 우리나라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목화솜이 있었다.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는 아마
도 기존보다 더 품질이 좋은 목화로 여겨지며, 그 목화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에 널리 퍼트렸다.
하여 그 점을 너무 부각시키다보니 '목화씨=문익점'이란 공식이 자연스레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원나라(몽골)에 사신으로 갔다가 역모에 연루되어 3년 만에 귀국했다. 돌아오는 길에 귀양
살이를 했던 금주(錦州)에서 목화씨 5개를 붓대 속에 숨겨와 고향인 산청(山淸)에서 장인인 정
천익(鄭天益)과 함께 목화 재배에 성공했다. 그곳이 바로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 있는 면작시배
지(綿作始培地, ☞ 관련글 보러가기)이다.
이후 그는 안찰사(按察使)가 되어 경상도를 돌다가 의성 금성면 일대가 목화씨를 가져온 원나라
금주와 토질이 비슷함을 발견하고 금성면 제오리(堤梧里)에 목화씨를 심어 성공했다. 마침 의성
현감이 그의 손자인 문승로(文承魯)라 그를 시켜 목화를 파종했다고 한다. (또는 조선 태종 때
문익점의 손자 문승로가 의성현감으로 부임하여 파종했다고 함)

이후 문익점의 목화면작을 기념하기 위해 1909년 지역 주민들이 목화밭인 원전(元田)에 기념비
를 세웠다. 그 비석이 바로 윗 사진의 면작기념비이다. 1935년 왜인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
며, 유서 깊은 원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경지 정리로 흔적조차 더듬기 어렵게 되었다.
1991년 김우현 경북도지사의 지시로 면작기념비 주변을 정리하여 지금에 이른다.

금성산고분군을 둘러보고 탑리의 지명 유래가 된 탑리5층석탑을 간만에 보려고 했다. 하지만 시
간도 여의치 않고 영천으로 가는 버스 시간을 몰라서 일단 탑리터미널로 갔다.
터미널로 가니 마침 영천행 직행버스가 올 시간이다. 여기서 외지로 나가는 시외버스가 너무 부
실하고 그걸 1대 놓치면 꼼짝없이 몇 시간 이상을 죽치고 기다려야 되기 때문에 꿩 대신 닭을
고를 여유는 없었다. 하여 바로 표를 끊고 5분 뒤에 머리를 들이민 영천(永川)행 직행버스를 타
고 의성과의 짧은 인연을 정리했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의성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  문익점 면작기념비(왼쪽이 1909년에 만들어진 것, 오른쪽은 1991년 것)

※ 의성 금성산고분군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① 탑리까지
* 서울 청량리역에서 8시 25분에 출발하는 부전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양평, 원주, 제천, 단
  양, 영주, 안동경유)
* 부산 부전역에서 7시20분에 출발하는 청량리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해운대, 태화강, 경주,
  영천 경유)
* 동대구역에서 16시 30분에 출발하는 정동진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하양, 북영천 경유)
* 대구 북부정류장에서 탑리, 의성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부산 동부터미널(노포동)에서는 1일
  2회 떠난다.
* 영천과 안동에서 탑리행 직행버스 이용 (1일 2회 운행)
② 현지교통
* 의성터미널(의성역) 밖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탑리 방면 군내버스(30~70분 간격)를 타고 금성
  산고분군에서 하차
* 탑리터미널 부근 대리3리 군내버스 정류장과 탑리역 정류장에서 의성 방면 군내버스(20~70분
  간격)를 타고 금성산고분군 하차. (탑리터미널에서 도보 35분, 탑리역에서 도보 25분)
③ 승용차편 (주차장 있음)
* 중앙고속도로 → 군위나들목을 나와서 군위읍 방면 5번 국도 → 동부4거리에서 우회전 → 청
  로교에서 좌회전 → 탑리 우회도로 → 금성산고분군
* 입장료와 주차비는 공짜
* 금성산고분군 서쪽 초전리에 금성산고분군과 조문국의 모든 것을 담은 조문국박물관이 있다.
  도보로 20분(차로 3~4분) 거리로 가까우니 같이 둘러보길 권한다.(☞ 박물관 홈페이지 보기)
* 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351외 (고분전시관 ☎ 054-834-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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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12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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