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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2.21 북촌한옥마을에서 만난 원조 한류 명소, 계동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2. 2013.01.21 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 북촌한옥마을 산책 (계동길, 원서동 일대)

북촌한옥마을에서 만난 원조 한류 명소, 계동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 서울 도심의 꿀단지, 북촌 둘러보기 '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중앙고등학교 본관
▲  중앙고등학교 본관


 

봄이 한참 무르익은 5월의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와 북촌(北村, 북촌한옥마을)을 찾았다.
북촌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로 2010년부터 퐁당퐁당 빠진 이래 매년 여러 번 발걸음을
하고 있다. 이미 그곳의 적지 않은 명소와 골목길, 박물관 등과 인연을 지어 이제는 지
겨울 법도 하겠지만 자꾸 손과 발, 마음이 가는 곳이 또한 북촌이다. 게다가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땡기면 언제든지 1시간 이내로 접근할 수 있다. 자고로 좋은 곳
은 1번이 아닌 두고두고 가는 것이 진리라고 했다.

이번 북촌 산책은 한류 명소로 인기가 대단했던 계동(桂洞) 중앙고등학교를 찾았다. 그
곳 외에도 여러 명소와 다시 인연을 지었으나 본글에서는 중앙고교 일대와 그 옆구리에
자리한 창덕궁 신선원전만 다루도록 하겠다.

참고로 북촌은 청계천 이북이자 창덕궁(昌德宮)과 경복궁(景福宮) 사이 동네를 일컫는다.
(요즘은 범위가 축소되어 안국역 이북, 창덕궁과 경복궁 중간 동네를 일컬음) 만약 자신
이 북촌 초보라면 제일 먼저 북촌문화센터(☎ 02-2133-1371)로 달려가자. 거기서 북촌의
기본 지식과 안내 자료를 쥐어들고 북촌 산책을 시작하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정독도서관 입구와 재동초교 앞에도 북촌관광안내소가 있음)


 

♠  오래된 근대 건축물을 간직한 독립운동의 현장이자
북촌 속의 한류관광지 -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

▲  중앙고등학교 본관 - 사적 281호

북촌의 주요 간선 골목길인 계동길의 북쪽 끝에는 서울 도심권 명문학교의 하나이자 오랜 역사
를 자랑하는 중앙고등학교(중앙중고교)가 자리해 있다.
보통 본인의 답사기에는 학교나 도서관이 거의 나오질 않는다. 설령 나온다고 해도 그 안에 오
래되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볼거리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이며, 그 볼거리만 중점적으로 다룰 뿐
학교 부분은 간략하게 처리하거나 쿨하게 빼버린다. 허나 중앙고등학교는 사정이 좀 다르다.

이곳은 무려 100년 이상 숙성된 오래된 학교로 왜정(倭政)과 1940~1970년대에 많은 유명인사를
배출했던 현장이다. 또한 사적으로 지정된 근대 건축물을 3개씩이나 간직하고 있고, 비록 지금
은 없지만 인문학박물관이란 박물관까지 보유하고 있었으며, 창덕궁의 통제구역인 신선원전(新
璿源殿)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21세기 이후 전파를 타고 한류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북촌에서 통과의례로 거쳐야 되는 명소의 하나가 되었다.

계동길의 북쪽 끝인 중앙고 교문(校門)은 언덕이다. 여기서 서쪽으로 인왕산을 가리고 선 높은
고개를 넘으면 북촌로로 이어지며, 그 중간에 북촌3경이 있는 가회동11번지로 이어지는 조그만
골목길이 왼쪽으로 가늘게 손을 내밀고 있다. 동쪽에도 시야를 가릴 정도로 높은 고개가 버티
고 있는데, 그 고개를 넘으면 원서동(苑西洞)과 창덕궁길로 이어진다. 
 
교문 안쪽에는 500년 묵은 큼직한 은행나무가 각박한 언덕길에 그늘을 드리워준다. 나무 옆에
는 1941년에 지어진 수위실이 있으며, 언덕진 길을 오르면 중앙고등학교 본관이 수면 위로 서
서히 떠오르는 해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짧은 오르막을 다 오르면 정면에 본관, 서쪽에는 원파도서관, 동쪽 높은 곳에는 강당이 있다.
보통 교문을 들어서면 학교 건물 사이로 운동장이 있기 마련이나 여기는 흙먼지가 이는 운동
장 대신 콘크리트를 깐 넓은 공간이 본관 앞에 닦여져 있다. 그리고 그 공간 복판에 동그랗게
자리를 다져 주변에 얕게 난간석을 둘렀으며, 안에는 잔디를 깔아 그 핵심부에 학교를 일으켜
세운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의 동상을 세웠다.
또한 본관의 모습이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본관과 많이도 닮았고, 본관 주변 풍경은 여기가
고등학교가 아닌 고려대나 서양의 명문 대학교에 들어선 기분을 진하게 들게 만든다.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고등학교의 모습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겉모습이 이러니 누가 여길 고
등학교라고 보겠는가? 그냥 사진만 보면 오래된 대학교로 봐도 이상할 것은 없다.

본관을 지나면 뒤에 고색이 깊은 서관과 동관이 있으며, 북쪽을 가린 신관(新館)을 지나면
조 잔디를 깐 축구장 겸 운동장이 나타난다. 운동장 북쪽에 보이는 건물은 중앙중학교이며 운
동장 동쪽 아래에 신선원전이 뉘여져 있다.

* 중앙고등학교의 역사
북촌 동북쪽 끝에 자리한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6월 1일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가 세운 기호
학교(畿湖學校)에서 비롯되었다.
1910년 9월 흥사단(興士團)에서 운영하던 융희(隆熙)학교와 통합되었는데, 그때 교장은 서유견
문(西遊見聞)으로 유명한 유길준(兪吉濬) 그 사람이었다. 이후 기호학회는 호남, 교남, 서북
등 여러 학회와 통합해 중앙학회로 간판을 바꾸고 학교 이름 또한 중앙학교로 갈았으며, 1915
년 4월 인촌 김성수가 이를 인수했다.

1916년 우리나라 최초로 보트를 도입하여 수상스포츠인 조정부를 설치했으며, 1917년 웅원(雄
遠, 높은 이상), 웅견(雄堅, 굳은 의지), 성신(誠信, 성실한 행동)을 학교의 교훈(校訓)으로
삼아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교목(校牧)은 잣나무, 교화(校花)는 무궁화꽃이며,
1917년 12월 김성수의 백부(伯父)인 김기중(金祺中)이 교사(校舍)를 지으면서 현재 자리로 학
교를 이전했다. 김기중은 김성수만큼이나 중앙고에서 비중이 큰 인물이다.

1919년에는 교장 송진우(宋鎭禹)와 김성수가 숙직실에서 3.1운동을 계획했으며, 백두산을 상징
하는 백산(白山)으로 학교 이름을 바꾸려고 했으나 왜정의 방해로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중
앙고보)로 개명했다. 그리고 그해 4월 고등학교 인가를 받아 굵직하게 본관과 서관, 동관을 세
웠고, 1926년에는 6.10만세 운동을 벌였으며,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하였다.
1934년 12월 원인이 아리송한 화재가 일어나 본관이 속절없이 무너지자 그 남쪽에 다시 본관을
만들어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다. 이 본관이 바로 지금의 본관 건물이다. 1941년에는 창립 30
주년 기념으로 대강당과 수위실을 세웠다.

1938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중앙중학교로 간판을 바꾸었으며, 1939년에 왜정이 무궁화 모표를
폐지하라고 하자 월계관으로 모표를 바꿨다. 1940년에는 당시 중앙고보 역사 교사인 최복현이
4학년 학생 5명과 민족정기 고취와 독립을 목적으로 '5인 독서회'를 조직했는데, 1941년 한 학
생의 연락 편지가 왜경(倭警)에 발각되어 최복현과 관련 학생 모두 함흥교도소로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을 '중앙고보 5인 독서회' 사건이라고 한다.
그때 최복현은 재판정에서 '내 수업을 듣고 학생들이 항일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나를 처벌
하고 학생들은 풀어달라'
호소하여 학생들은 3달 뒤 풀려나고 최선생은 2년 후 석방되었다.


1946년 9월, 6년제 중학교로 변경되고, 1950년 4월 대한교육법으로 4년제로 변경되면서 3년제
고등학교를 병설했다. 그래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이 꾸리게 되었다. 1960년 4.19시절에는
학교 학생들이 4.19시위에 동참했으며, 1964년에는 고려중앙학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1966년 신관을 짓고 김성수의 동상을 세웠으며, 1973년 신선원전과 인접한 운동장 동쪽에 축대
를 쌓아 운동장을 넓혔다. 1981년 학교 본관과 동관, 서관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문화유산
을 보유한 학교가 되었고, 1986년 6월 7일 교우의 날을 정해 행사를 거행했다.

1992년 2월 원파기념관을 세웠고, 2008년 6월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인문학박물관을 개관하면
서 이 땅의 고등학교 가운데 최초로 박물관을 소유한 학교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없음)
또한 주변 나라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요란하게 전파를 타면서 왜열도
와 중원대륙 사람들이 구름처럼 찾아와 북촌 속 한류 관광지로 존재감을 크게 살찌웠다. 솔직
히 그 이전에는 동네 사람들이 가끔 산책이나 마실을 가는 정도에 불과했었다. 이처럼 학교가
관광지로 유명해지자 교문 앞 문방구와 가게들은 앞다투어 한류스타의 사진과 브로마이드를 판
매하며 적지 않게 재미를 보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팔고 있음)
 
※ 중앙고등학교 찾아가기 (2017년 2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3-1번 출구),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1번을 타
  고 중앙중고에서 하차
* 안국역 3번 출구를 나와서 현대사옥(현대빌딩) 서쪽 골목인 계동길을 따라 도보 12분

★ 중앙고등학교 관람정보
* 평일은 학교 수업으로 개방을 하지 않으며, 토요일과 일요일, 공휴일에만 문을 열어두고 있
  다. (매월 2,4주 토요일은 9시~18시까지 / 1,3,5주 토요일은 13시~18시까지 / 일요일, 공휴
  일은 9시~18시)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1 (창덕궁길 164, ☎ 02-742-1321~2)
* 중앙고등학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1966년에 세워진 친일파 김성수 동상
이렇게 보니 정말 고려대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다.

◀  교문 옆에 자라난 오래된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512호

교문 옆에는 푸른 옷을 걸친 커다란 은행나무
가 살포시 뿌리를 내렸다. 그는 높이 20m, 가
슴둘레 3.1m로 무려 500여 년을 헤아리는 지긋
한 나이를 가지고 있다.

이 나무는 지역의 수호신으로 오랫동안 숭상을
받아와 매년 가을에 오곡백과(五穀百果)를 차
려 당제(堂祭)를 지냈으며, 중앙고등학교가 들
어선 이후에는 학생들 등교길에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그들을 응원한다. 또한 1987년 천안 독
립기념관 개관을 기념하고자 이 나무를 삼목이
식하기도 했다.


▲  6.10만세 기념비

본관 뜨락 서쪽에는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6.10만세 기념비가 3.1운동 책원비가 있는 동
쪽을 바라보고 있다.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이 붕어(崩御)하자 중앙고보 학생을 중심으로
격문(檄文) 3만장을 인쇄해 주변 학교에 뿌렸다. 그리고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에 황
제의 대여(大輿)가 단성사(團成社)를 지나자 중앙고보생 이선호의 선창으로 수천 명의 학생들
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 1,000매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뿌려 이른바 6.10만세운동의 분
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이 기념비는 6.10만세운동의 67주년이 되는 1983년 6월 10일 중앙고등학교 동우회와 동아일보
사가 합심하여 세웠다.


▲  3.1운동 책원비(策源碑)

본관 뜨락 동쪽에도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3.1운동 책원비가 6.10만세 기념비가 있는 서
쪽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다.

3.1운동 발생 2달 전인 1919년 1월 왜열도 동경(東京) 유학생인 송계백(宋繼白. 1896~1920)이
중앙학교 숙직실에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이곳 교사인 현상윤(玄相允, 1893~1950)에게 사각모에
담긴 비단에 쓰여진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건네며, 동경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살짝 알렸다.
현상윤은 그것을 교장 송진우와 김성수에게 급히 보여주었는데, 그것을 본 그들은 크게 감동을
받고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그래서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작성하고 3.1운
동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를 기념하고자 1973년 6월 1일 동아일보사에서 세웠다.


▲  원파도서관 (옛 인문학박물관)

본관 서쪽에는 본관을 약간 닮은 서구식 건물인 원파도서관이 있다. '원파'는 학교를 크게 일
으킨 원파 김기중의 호로 이곳에는 2008년 6월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개원한 인문학박물관이
야심차게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인문학(人文學) 자료들을 풍부하게 머금고 있던 착한 박물관이
었으나 이 땅의 인문학이 몰락했음을 상징하듯, 결국 10년도 못채우고 문을 닫고 말았다. (나
는 다행히 2010년과 2011년에 2번 관람을 했음)

인간은 일반적인 동물과 달리 정신적 수양도 어느 정도 닦아야 된다. 그래서 인문학(철학, 역
사, 윤리, 문학 등)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 땅의 꼬라지는 어떠한가? 인간의 말초신경
이나 건드리며 백성들의 단순화를 꾀하는 이 나라의 우민화정책, 그리고 그 정책에 춤을 추는
썩어빠진 방송과 언론들, 독서와 교양 지식을 멀리하며 오로지 돈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이 시
대의 사람들, 여유를 부리기 어려울 정도로 팍팍해진 백성들의 경제 사정, 인문학으로는 입에
풀칠 조차 하지 힘든 현실에서 인문학은 점점 바닥을 향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 나라의 위정자와 졸부들이 바라는 세상일 것이다. 그래야 그들 입맛대로 대대
손손 금수저를 물며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  중앙고등학교 본관의 뒷모습
마치 유럽 중세시대 건축물이나 요새처럼 보인다.


고려대 본관과 많이 빼어닮은 중앙고 본관은 콘크리트 철근의 2층 석조 건물로 1935년에 삽을
떠서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다. 원래 본관은 동관과 서관 사이에 있었으나 1934년 화재로 무
너지자 현 위치에 더 크고 화려하게 다시 지은 것이다.

왜정 때 건축가인 박동진이 서구 학교의 건물을 모델로 삼아 설계하고 건축한 길다란 'H'형태
의 건축물로 지붕 부분을 포함하면 가히 3층 규모인데, 그 시절 이 땅의 사람들이 세운 큰 건
물의 하나이기도 했다.
건물 중앙에는 4층의 중앙탑을 높이 세워 본관의 위엄을 드높였고, 벽면은 돌을 질서있게 쌓아
올렸다. 하여 그 모습이 오래되고 전통이 있는 서양 학교나 중세시대 건축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거기에 담쟁이덩굴까지 걸치고 있으니 고색과 중후한 멋까지 마음껏 드러낸다.
학교가 이렇게 크고 잘나갔으니 왜정 때 이곳에 다닌 학생들의 자부심은 자못 대단했을 것이다.
비록 왜인의 눈치를 보며 살던 우울한 시기이나 여기서만큼은 왜인들도 오히려 부러운 눈빛으
로 학교를 바라봤을 것이다.

현재 1층 중앙은 학교 행정공간으로 나머지는 교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근대 초기 양식으로 만
들어진 민족 교육의 현장이자 민간학교의 건물로 유서가 아주 깊다. 또한 왜정과 대한민국 초
기에 이름 꽤나 알려진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현장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널린 학교 건물보다 더욱 정감이 가며, 저 건물에 들어가면 절로 책을 펴고 공부에
임할 정도로 면학분위기도 진하게 나온다. 나도 이곳에 들어와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사는 곳
이 엉뚱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하긴 이곳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워낙 타고난 돌머리라 얼마
나 효과가 있었을지는 미지수이다.


▲  본관 뒤쪽에 자리한 빛바랜 종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중앙고보 시절부터 수업시간과 점심시간, 수업 종료 시간마다 땡땡땡~~♬ 종소리를 내며 학생
과 교사들을 분주하게 만들었던 종, 허나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난 이곳의 옛 유물로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왕년에는 몸을 흔들며 학교를 움직이는 큰 손이었건만, 이제는 종소리를 울릴 일도 없으니 그
의 피부에는 그저 하얀 먼지만 가득하다. 가끔 관광객들이 호기심 삼아 그를 흔들어 주변의 적
막을 살짝 깨뜨리곤 한다. (나도 몇 번 쳐봤음~) 그렇게 울려 퍼진 종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늘
비슷한 목소리다. (그렇다고 요란하게 치지는 말자~~~!)
사람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은퇴하여 뒤로 나앉은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 없다.


▲  왕년을 생각하며 우수에 잠긴 종
종의 청동색 피부에는 무심한 세월의 먼지로 가득하다. 하긴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으랴? 그저 장대한 세월에 아주 잠깐씩 몸을 담굴 뿐이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요. 천하만물의 운명이다.

▲  본관 뒤쪽에 나란히 자리한 서관과 동관
쌍둥이 형제처럼 서로 닮은 모습이다.

▲  중앙고등학교 서관(西館) - 사적 282호

중앙고 서관은 1921년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2층 붉은 벽돌집이다. (지붕을 포함하면 3층) 'T'
자형 구조로 본관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뾰족한 아치형 창틀, 가파른 고딕식 지붕, 그리
고 화강암과 붉은 벽돌을 엇물려 지어 20세기 초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붉은 피부의 벽돌이 고색의 향기를 더욱 우려내고 있으며, 여기서는 조선 소년군 창설과 6.10
만세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 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재는 교실로 쓰이고 있다.


▲  중앙고등학교 동관(東館) - 사적 283호

서관과 마주하고 있는 동관은 1923년 10월에 지어진 2층 붉은 벽돌 건물이다. (지붕 포함하면 3
층) 건물 구조와 전체적인 모습은 서관과 비슷하며 여전히 교실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선비의 모습으로 조성된 김기중(金祺中) 동상

동관과 서관 사이에는 원래 본관이 있었다. 허나 1934년 화재를 만나 건물이 주저앉으면서 남
쪽으로 자리를 옮겨 더 크고 화려하게 지었다.
본관의 강제 이전으로 비게 된 공간에는 소나무를 심어 조촐히 정원을 닦았는데 그 한쪽에 원
파() 김기중(1859~1933)의 동상이 자리해 있다. 그는 김성수와 더불어 중앙학교를 일으킨
인물로 김성수의 바로 큰아버지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양복스타일의 김성수 동상과 달리 전형
적인 선비 스타일로 동상을 지어 그를 기린다.

김기중은 1886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1904년 용담(潭, 전북 진안) 군수()를 지내기도
했다. 1906년 정3품에 올랐으나 멸망의 끝으로 향하는 나라꼴에 한숨을 쉬며 민중계몽을 교육
사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여 1908년 재산을 털어 영신(永新)학교를 세웠고, 왜열도로 직접
건너가 그곳의 교육 제도를 살폈으며, 조카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그리고 1921
년 다시 재산을 털어 지금의 자리에 교사를 만들면서 중앙학교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1932년 아우 김경중(金暻)과 보성전문(고려대)을 인수하고 민립대학을 꿈꾸던 김성수에게 운
영을 넘겼으며, 그 이듬해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마 10년을 더 살았다면 조카의 비
열한 친일 행위에 분개하며 피를 토하고 죽었을 지도 모르겠다. 결국 조카가 큰아버지의 민족
교육 사업에 똥칠을 했으니 말이다.


▲  창립30주년기념관 (대강당)
본관 동쪽 높은 곳에 자리한 대강당은 1941년 11월, 창립30주년 기념으로 지어졌다.

▲  단촐하게 생긴 삼일기념관(三一記念館)

대강당 뒤쪽에는 삼일기념관이라 불리는 기와집이 있다. 무슨 사연이 있을 듯 싶은데 그에 대
한 마땅한 안내문이 없어 많은 이들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이다. 허나 여기가 바로 1919년 당시
중앙학교 숙직실 자리로 처음으로 3.1운동을 계획하고 논의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기념관 뒤로 담장과 울창한 수목이 보이는데, 담장 너머는 동궐(東闕)이라 불리는 창덕궁이다.


▲  여기도 친일파와 독재 딸랑이의 흔적이??
서정주(徐廷柱, 1915~2000)의 '국화옆에서' 시비(詩碑)


20세기에 이름난 현대 시인의 하나이자 우리 말이 지닌 표현력의 극한을 보여준 것으로 칭송받
는 미당 서정주, 그는 전북 고창 출신으로 인촌 김성수의 대농장을 관리하던 중간 관리인(마름
)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로 올라와 역시 김성수가 손을 대고 있던 중앙고보에 보결생(補缺生
)으로 들어왔으나 광주학생운동 참여로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에 들어갔으며, 죽을 때까지 많은 시집을 내었다. 허나
1943년부터 비열하게 친일 행위(왜정을 찬양하는 시를 작성)에 몸을 담기 시작했으며, 이승만
과 박정희, 전두환에게 두루두루 아부를 떨며 독재를 찬양했다. 또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죄를
반성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 합리화에 열을 올렸던 속 좁은 작자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를 비롯하여 친일 떨거지들의 문학 작품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적지 않게 실린다는
것과 그들을 기리는 문학 행사와 기념관이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 꼬라지가 된
것은 그들의 후학과 그들을 옹호하는 작자들이 문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
다. 이는 식민사관(植民史觀) 계열이 장악하고 있는 역사 분야도 비슷하다. 역사 청산을 제대
로 하지 못한 후유증이 아직도 이 나라의 곳곳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  신관 뒤쪽에 있는 백릉 채만식(白菱 蔡萬植, 1902~1950) 문학비

채만식은 중앙고보 13회 교우로 소설가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지겹도
록 나오는 단골로 1929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수십 편의 걸쭉한 소설을 남겼다.


 

♠  중앙고 철책 너머로 바라본 창덕궁 신선원전(新璿源殿)
- 사적 122호

▲  신선원전

중앙고에 왔다면 꼭 살펴봐야 되는 곳이 있다. 바로 창덕궁의 숨겨진 속살, 신선원전이다. 그
렇다고 신선원전이 중앙고 안에 들어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만약 그들이 교정에 있었다면
중앙고가 지금의 자리에 속시원히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중앙고를 둘러보고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면 인조잔디가 펼쳐진 운동장이 나온다. 운동장 북쪽
에는 중앙중학교가 있고, 그 뒤에 삼삼하게 우거진 산이 있는데, 이는 성북동(城北洞)으로 넘
어가는 와룡공원 고개로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의 동쪽이다. 운동장 서쪽은 가회동 주택가로
막혀있고 동쪽은 숲이 보이긴 해도 철책이 높이 쳐져 있다.
본관 주변의 착시현상을 간파하고 서관과 동관을 거쳐 이곳까지 들어온 사람들(대부분의 관광
객들은 착시현상에 빠져 본관 주변만 맴돌다 나감)은 운동장만 보고는 '이제 다 봤다. 가자~'
발걸음을 돌린다.
운동장 동쪽에 철책이 있고 마땅한 안내문도 없으니 비록 밑에 수상한 기와집이 널려있어도 그
냥 통과하는 것이다. 허나 그런 생각은 중대한 수정이 필요하다. 그 철책 너머가 바로 창덕궁
의 비공개 구역이자 어진(御眞)을 봉안했던 신선원전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다른 궁궐과 달리 유난히 통제구역이 많았던 창덕궁이 마음을 고쳐먹고 21세기 이후 후
원(後苑) 대부분과 낙선재(樂善齋)를 쿨하게 공개하고 있지만 아직도 숨겨진 부분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 신선원전은 지금까지도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며 공개를 꺼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
곳의 존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후원 숲속에서 조용히 속살을 가린 채, 숨바꼭질을 즐기는 신선원전은 중앙고 운동장에서만큼
은 자존심을 곱게 접으며 그 속살을 일정 부분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운동장이 그곳보다 지
대(地臺)가 높기 때문이다. 다만 철책을 통해서 봐야 된다는 한계점이 있다.

중앙고는 창덕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중앙고가 창덕궁 궁역(宮域)보다 지대가 좀
높긴 하지만 담장이 있는 곳만큼은 교내보다 높으며, 민가(民家)의 담장도 아닌 지체높은 궁궐
의 담장이라 감히 건드릴 수는 없다. 허나 운동장만큼은 사정이 달라 운동장이 신선원전과 궁
궐 담장보다 더 높은 곳에 들어앉아 있다. 상황이 이리 된 것은 1973년 운동장을 넓히고자 축
대를 높이 다졌기 때문이다. 하여 신선원전이 운동장 눈 밑에 있게 된 것이다. 철조망을 높이
친 것은 자칫 월담을 하거나 공이 넘어가 그곳의 적막을 깨뜨리는 것을 막고자 함이다.

일개 학교 운동장이 궁궐 사당보다 높이 떠있다는 것이 다소 신선하고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아
무리 국제적인 호구짓을 일삼다가 쪽박을 찬 옛 제국의 잔재물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해야 했
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허나 학교 입장에서는 여기말고는 운동장을 다질 땅이 없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어찌보면 패망한 제국의 비애(悲哀)이기도 하다.

▲  비공개로 사람의 손때마저 희미해진 신선원전

신선원전 자리에는 원래 대보단(大報壇)이 있었다. 조선은 명(明)나라의 충직한 제후국(諸侯國
)이라 명이 망하자 옛 명의 황제를 기리고 그들의 은혜를 갚는다는 꼴사나는 이유로 숙종(肅宗)
시절에 지금의 자리에 대보단을 만든 것이다.
대보단에는 명태조 주원장(朱元璋),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신종(神宗), 그리고 명을 완전히
말아먹은 마지막 군주, 의종(毅宗)의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국가 재정을 축내며 제사를 지냈다.

창덕궁에 선원전(璿源殿)이 지어진 것은 1656년이다. 이때 경덕궁(敬德宮, 경희궁)에 있던 경
화당(景華堂)을 인정전(仁政殿) 서쪽으로 옮겨 제왕의 어진을 봉안하여 선원전으로 삼았는데,
<이를 구(舊)선원전이라 부름> 1921년 왜정이 대보단을 부시고 덕수궁에 있던 선원전을 이곳으
로 옮겼으며, 구선원전과 덕수궁 선원전에 있던 어진과 관련 유물도 거의 옮겨와 신선원전이라
하였다. (이전의 선원전과 구분하고자 그리 이름을 지음)

이곳에는 태조에서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제왕 12명의 어진 48본을 봉안했으며, 어진을 걸
어두던 12개 감실(龕室)은 1900년대 의궤도설(儀軌圖說)과 일치해 왕실의 전통적인 법식을 충
실히 따랐음을 보여준다. 어진은 6.25가 터지자 서둘러 부산(釜山)으로 옮겼지만 대부분 관리
소홀로 화마(火魔)의 먹이가 되었으며, 제례에 쓰이던 의장물 상당수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남아있던 노부
(鹵簿, 제왕이 나들이할 때 갖추던 의장물) 등 대부분의 유물은 2002년 국
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용상(龍床)과 오봉도(五峯圖), 모란이 그려진 병풍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들 유물은 19~20세기 궁중 미술의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감실과 당가(唐
家), 용상 등 가구와 시설물은 주칠(朱漆)이 아닌 황색(黃色)으로 칠했다.

신선원전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사당이란 점 때문에 여전히 비공개로 일관하고 있다. 하여 이
곳에서는 인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사람의 손때마저 보이질 않는다. 오늘도 변함없이 고
요하기만 한 신선원전, 이곳이 과연 시끌벅적한 서울 도심 한복판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
다. 거기에 사당이라 그런지 종묘(宗廟)에서 느낄 수 있는 엄숙함도 적지 않게 배여나온다. 다
행히 늦게나마 이곳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이곳을 2년 동안 조사하여
'최후의 진전(眞殿) 창덕궁 신선원전'이란 도록을 발간하기도 했다.

신선원전은 의효전(
懿孝殿)과 재실(齋室), 수직사(守直舍), 몽답정(夢踏亭), 괘궁정(掛弓亭),
진설청(眞說廳) 등을 부속 건물로 거느리고 있으며 이들은 신선원전 권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창덕궁 후원에서 신선원전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으며, 원서동 구석 빨래터에 있는 외삼문(外
三門)은 이곳의 정문이나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 창덕궁 신선원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 (창덕궁5길 22-4)


▲  신선원전 남쪽에 자리한 의효전(懿孝殿)

신선원전 남쪽에 자리한 의효전은 원래 덕수궁(경운궁)에 있었다. 1904년 순종의 왕비인 순명
효황후(純明孝皇后)의 혼전(魂殿)으로 쓰인 적이 있으며 1921년 덕수궁 선원전을 이곳으로 옮
길 때 덩달아 같이 이전되었다.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의효전 옆에는 몽답정(夢踏亭)과 몽답지(夢踏池)란 작은 연못이 있
다. 몽답정은 훈련도감(訓鍊都監)의 훈련대장(訓鍊大將) 김성응(金聖應, 1699~1764)이 지은 것
으로 영조(또는 숙종)가 꿈속에서 이 정자를 찾았다고 하여, 꿈에서 발걸음을 했다는 뜻의 몽
답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정조도 몽답정을 자주 찾았다고 하며, 창덕궁과 창경궁의 도
면인 동궐도(東闕圖)에는 나와있지 않아 원래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닌 듯 싶다.


▲  덥수룩한 머리를 지닌 괘궁정(掛弓亭)

신선원전 권역에서 그나마 제일 가깝게 마주할 수 있는 존재가 괘궁정이다. 이곳은 담장이 운
동장 축대 밑으로 막 내려가는 비탈진 곳에 있으며, 중앙고 축구부 휴게실로 내려가는 계단에
서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다.

괘궁정은 1849년(헌종 18년)에 지어진 것으로 훈련도감(訓鍊都監) 북영(北營)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정자의 이름인 괘궁(掛弓)은 활을 걸어둔다는 뜻으로 왕실에서 종
묘만큼이나 애지중지했던 대보단 바로 옆에 활쏘기 연습을 하는 정자를 만든 것이 조금 납득이
가질 않는다.
게다가 정자의 모습을 보면 일반 병사들이 연습을 했다기보다는 훈련대장 등 상위 등급의 무인
(武人)들이 활 연습을 하거나 군영(軍營)을 바라보는 용도로 사용했을 듯 싶다.
북영의 군사들은 제왕의 호위를 담당하며 왕이 궁궐을 옮길 때 그 본부를 같이 옮기는데, 창덕
궁에 머무를 경우, 궁궐에서 다소 구석인 대보단 인근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괘궁정은 달랑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로 돌로 축대를 만들고 그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워 정자
를 지었다. 오랫동안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는지 지붕 머리가 꽤 덥수룩하다. 자연이 지붕
에 심어놓은 푸른 잡초가 기와를 뚫고 자라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정자도 먼지만 가득하니 언
제 사람이 마지막으로 들어왔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언제 문을 두드릴지
모를 화마에 대비하여 소화기가 한쪽에 있다는 것이다.

비록 운동장 철조망을 통해 신선원전 일대를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보듯 구경하며 사진에
담았지만 언젠가는 쿨하게 공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때가 되면 까치발처럼 힘들게 구경해야
되는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하여 북촌 중앙고 나들이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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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 북촌한옥마을 산책 (계동길, 원서동 일대)

 


' 현재와 과거가 나란히 공존하는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 북촌(北村) 산책 (계동길, 원서동 일대)'

▲  북촌6경 골목길


북촌(北村)은 서울 도성(都城)의 북쪽 지역으로 경복궁(景福宮)과 창덕궁(昌德宮) 사이를 일
컫는다. 이 지역은 가회동(嘉會洞)을 중심으로 삼청동(三淸洞). 계동(桂洞), 안국동(安國洞)
, 재동(齋洞), 소격동(昭格洞), 팔판동(八判洞), 원서동 등에 걸쳐있으며, 경복궁 서쪽은 따
로 서촌(西村)이라 불렀다. <청계천 남쪽을 남촌(南村)이라 불림>

북촌 지역은 조선시대 때 왕족과 사대부(士大夫)를 비롯하여 돈 꽤나 주무르던 부자들이 주류
를 이루며 살던 오늘날의 강남(江南) 같은 곳이다. 조선 초기부터 형성되었지만 조선 초/중기
시절에 한옥은 남아있는 것이 없고, 조선 후기(19세기~20세기 초반) 한옥을 시작으로 왜정(倭
政) 시절에 지어진 개량 한옥과 해방 이후의 한옥에 이르기까지 약 1,200여 채의 한옥이 진하
게 남아있는 그야말로 거대한 한옥박물관이다.
이곳에 서린 한옥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은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이 살던 안국동 윤
보선가이며, 그외에 한옥들은 대부분 일반 여염집 규모로 작다.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가 마당
을 둘러싼 'ㄷ','ㅁ' 구조이다.

북촌 한옥은 민속촌과 달리 사람들이 직접 거주하고 있어 대부분 내부 관람이 어려운 함정이
존재한다. 특히 지정문화재로 지정된 한옥은 북촌문화센터를 비롯하여 박물관과 공방(工房),
예술/문화공간, 찻집과 음식점, 숙박업소로 쓰이는 한옥만 흔쾌히 개방을 하고 있으며, 북촌
문화센터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부분 개방이나 조건개방(숙박업소나 입장료를 내고 들어
가는 전시공간)이 많고 그런 집들도 전체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북촌은 높다란 빌딩과 콘크리트 일색의 밋밋한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여 크게 돋보이며,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宮闕)과 함께 도심 속의 박힌 보석과 같은 소중한 곳이다. 한옥과
근대 건물, 현대식 건물이 서로 시간을 초월하며 얼굴을 맞대고 공존하고 있으며, 빛의 속도
로 빠르게만 변해가는 서울에서 시간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발을 멈춘 듯, 옛 모습을 많
이 지키고 있는 도심 속의 이색 공간이다. 이 시대를 사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무작정 앞만 보고 뛰느라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북촌은 바로 그런 여
유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북촌도 나날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조선이 망하고 왜인들이 남산 주변과 명동을 중심으로 한 청계천 남쪽에 대거 말뚝을 박으며
시내를 개발하면서 서울의 중심으로 번화했으나, 서울 토박이와 조선 백성들이 주로 살던 청
계천 이북은 근대 건축물(중앙중고 건물, 천도교중앙대교당, 화신백화점 등.)이 몇개 지어진
것 외에는 개발이 별로 없어 남촌에 비해 낙후되었다.
게다가 왜정 이후 서울의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북촌 구석구석에 조그만 한옥을 수없이 깔
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으며, 지배층과 부자들의 동네에서 점차 서민들의 동
네로 변화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한옥이 왜정과 해방 이후에 지어짐)
해방 이후 북촌은 도심 한복판에 있음에도 그 뒷전으로 밀려나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1990년
대까지 마땅한 개발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나날이 쇠퇴해갔다.

그러던 북촌은 2000년 이후 서울시의 홍보와 뜻있는 이들의 노력,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도
심 속의 관광지로 급부상하게 되면서 줄어만 가던 한옥의 개체수가 다시 늘어가기 시작했다.
북촌이 다시 서울의 꿀단지로 떠오르자 북촌 주민들도 자신의 한옥을 개량하거나 손질하였고
양옥으로 지어진 건물도 다시 한옥으로 고치는 등 북촌의 이미지를 바꾸는데 갖은 힘을 아끼
지 않았다. 거기에 종로구청과 서울시청도 북촌 가꾸기 사업을 벌여 흔쾌히 도와주고 있으니
나날이 관광객들이 폭주해 평일에도 국내/해외 관광객들로 북촌 골목길은 시장통을 이룬다.
특히나 북촌8경을 비롯한 북촌의 주요 명소들은 항시 사람들로 미어터진다. 게다가 북악산을
등지고 앞에 청계천이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세이고 도심의 한복판임에도 고즈넉하고
차분한 분위기 때문에 졸부들과 공장(工匠)과 예술가 등이 앞다투어 들어오면서 누워있던 북
촌 땅값이 끝없이 치솟고 있다.

한옥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길을 걸으며 사진을 찍는 것은 북촌의 제일 가는 운치로 꼽힌다.
허나 곳곳에 숨겨진 다양한 테마의 박물관과 문화/전시/체험공간, 문화유산들 거기에 맛집을
찾아다니는 재미는 북촌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북촌에 둥지를 튼 박물관은 약 10여 곳 정도로 대부분 규모가 작은 사립박물관이다. 그
러다보니 입장료는 시중보다 상당히 얄미운 수준이다.(성인 기준으로 2,000~6,000원선, 입장
료는 2~3년 간격으로 계속 오르고 있으니 해당 홈페이지나 전화로 문의 요망)

북촌 답사의 기점은 3호선 안국역(2/3번 출구)로 잡는 것이 좋다. 북촌 초보라면 북촌문화센
터로 일단 달려가 북촌안내책자를 손에 쥐고 북촌에 대한 기초 지식을 읽은 다음에 나들이에
임하기 바란다. 그리고 정독도서관 입구와 재동초교에 북촌관광안내소가 있으니 거기서 지도
와 안내책자를 얻어도 된다.
북촌 골목길이 워낙 미로처럼 얽히고 설켜있어 헤매기가 딱 좋으며, 박물관과 알려지지 않은
명소들이 대부분 골목 속에서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다. 관광객 대부분은 북촌8경이라 불리는
사진 찍기 좋은 곳과 정독도서관 주변, 북촌을 가르는 주요 도로인 가회로와 삼청동길, 계동
길, 북촌길 일대에만 새까맣게 몰려있는데 북촌의 매력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큰 골목길과
작은 골목길을 가리지 않고 구석구석 돌며 숨겨진 명소를 숨바꼭질하는 것이다. 그들을 찾으
며 술래에서 벗어난 그 기분은 정말 형용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성북동, 부암동(付岩洞)만큼이나 나의 마음을 앗아간 북촌을 지금까지 수십 번이나 들락거렸
지만 아직도 미답지가 여럿 있다. 북촌이 서울에서 가장 작은 지방자치구역인 중구보다 훨씬
작은데도 말이다. 남들은 '그렇게 다녔으면 북촌을 다 둘러봤겠구나~' 말을 꺼내지만 여태까
지도 개척하지 못한 골목길과 명소가 적지 않게 존재한다.
지금도 계속 북촌의 숨겨진 속살을 찾고 있는데, 새로운 곳을 발견하면 '이런 곳이 있었구나.
왜 이제서야 알게 된 걸까?' 정말 내심 놀란다. 겉은 작지만 신대륙 이상으로 신세계와 보물
을 품은 꿀단지가 바로 북촌이다.

북촌에는 밤하늘을 장식하는 별처럼 한옥이 많지만 민속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된 고택(古宅)
처럼 완전한 전통 한옥은 그리 많지 없다. 거의 대부분 왜정 이후에 지어졌고 시대와 편의에
맞게 개량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두고 안좋게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시대가 지나면 한옥도 바뀌는 법이다. 특
히나 이곳 한옥은 민속촌에 있는 전시용 한옥과 달리 사람들이 살고 있고 숙박시설로도 쓰이
므로 편의에 맞게 변화할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 꺼림칙한 재래식 화장실을 쓰고, 부엌 부뚜
막에서 밥을 지으며, 나무와 숯으로 불을 뗀다면 불편해서 어떻게 살고 머물겠는가? 다 시대
에 맞게 변하는 것이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20~21세기 한옥 양식이라 하여 건축사나 미술사
에서 한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다.


♠  조선 후기 한옥을 개량하여 북촌을 안내하는 공간으로
거듭난 북촌문화센터 - 등록문화재 229호

▲  북촌문화센터 대문과 바깥채

북촌문화센터로 쓰이는 기와집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양반가로 고종 때 민씨 세도가(勢道家)
의 하나이자 왜정 때 탁지부(度支部) 재무관(財務官)을 지낸 민형기의 집이다. 한때 '계동마님
댁'으로 장안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집 구조는 안채와 바깥채, 앞행랑채, 뒷행랑채, 사당(祠堂)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계동마
님이 사라진 이후 크게 쇠락하고 만다. 그러다가 2002년에 서울시에서 북촌 가꾸기 사업의 일환
으로 매입하여 기존 한옥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말끔히 몸단장을 시켜 그해 10월 북촌을 안
내하는 북촌문화센터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대문을 들어서면 'ㄷ'자형 안채와 'ㄱ'형 행랑채가 나오고, 중문을 지나면 'ㄱ'자형
안행랑채(별당)가 나온다. 안채는 안방과 부엌을 개조하여 서울시청 한옥문화과 사무실과 한옥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상담하는 수선 상담실을 두었으며, 회의실과 주민들의 사랑방(舍廊房)을
갖추고 있다.

뒷행랑채는 전부 터서 북촌홍보전시관으로 삼아 북촌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여러가지 자료로
다루고 있는데, 영상물도 준비하여 북촌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하는 한편, 북촌안내책자와 지도도
여기서 얻을 수 있다. 이곳을 지나면 집의 뒷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에 2칸 규모의 아담한 정자
가 있다. 원래 사당이었던 것을 정자로 개조하여 두 다리를 쉬어가는 쉼터로 삼았는데, 서울 도
심에서는 흔치 않은 이색 공간으로 다른 건물과 달리 기단(基壇)이 높아 예전에 사당이 있었음
을 짐작케 한다.
정자를 지나면 안행랑채라 불리는 별당(別堂)이 나오는데, 이곳은 온갖 공예와 예절과 다도(茶
道), 전통주 만들기, 민화 그리기 등 다양한 전통문화 강좌를 연다. (자세한 것은 북촌문화센터
홈페이지 참조)

※ 북촌한옥센터 찾아가기 (2013년 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를 나와서 현대사옥 못미쳐 골목길로 좌회전하면 된다. 안국역
  에서 도보 3분 (입장료 없음)
* 관람시간은 9시 ~ 18시 (토,일은 17시까지)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05 (☎ 02-3707-8388, 8270)
* 북촌문화센터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대문을 들어서면 중문과 'ㄷ'자형 안채가 나온다.

▲  안채 서쪽 (한옥문화과 사무실)

▲  안채 동쪽 (안방과 사랑방)


▲  중문과 짧은 담장
중문 담장은 다른 담장과 이어지지 않고 안채 가운데 기둥에서 끝을 맺는다.

▲  북촌홍보전시관으로 탈바꿈한 뒷행랑채
북촌의 역사와 현재, 한옥의 구조에 대한 관련 자료들이 하얀 벽을 조촐하게 채운다.

▲  뒤쪽에 자리한 2칸 규모의 정자
원래 사당이었던 곳으로 지금은 누구나 발을 멈추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정자 뒤쪽에는 외부로 나가는 문이 있는데 늘 닫혀있다.

▲  안행랑채(별당)와 뒷간(왼쪽)

정자 동쪽에 자리한 안행랑채는 툇마루를 갖추고 있는데, 여기서는 다양한 전통문화를 배울 수
있다. (강좌는 보통 3개월 과정으로 진행되며, 여기 외에도 안채와 사랑방에서도 강좌가 열림)
그 곁에는 뒷간이 있는데, 겉은 한옥이지만 속은 현대식 시설로 무장하고 있어 괜한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그들 뒤로 현대식 건물들이 이곳을 굽어보고 있으니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인정하며
공존하는 북촌의 현재를 잘 보여준다.


♠  관상감관천대, 계동길 주변

▲  현대사옥 그늘에 가려진 관상감 관천대(觀象監 觀天臺) - 사적 296호

안국역에서 창덕궁 쪽으로 가다보면 하늘 높이 솟은 육중한 건물, 현대사옥을 만나게 된다. 그
앞에는 현대사옥에 짓눌려 초췌해 보이는 고색의 때가 낀 석조 건축물이 자리해 있다. 바로 조
선시대에 천문(天門)과 기상을 관측하던 관천대(觀天臺)이다.

관천대란 돌로 만든 시설로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은 물론 일식과 월식, 비와 눈 등의 기상현상
을 눈으로 살피던 관상감의 관측시설이다. 관천대는 우리나라에 딱 2개가 남아있는데, 하나는
창경궁(昌慶宮)에 있는 관천대(보물 851호)로 조선 숙종(肅宗) 때 만들어졌고, 다른 하나는 바
로 이곳 관천대로 세종(世宗) 때 조성되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들을 구별하기 위해 관천대의
원로인 이곳을 관상감 관천대라 부른다.

이 관천대는 1434년(세종 16년) 경에 설치되었다고 하며, 현대사옥 동쪽 부분과 그 동쪽에 있는
언덕(원서공원)에 있었다. 높이가 4.2m, 가로 2.8m, 세로 2.5m 크기로 대(臺) 위에 돌난간이 둘
러져 있고 그 안에 화강석대()가 놓여 있으며, 여기에 소간의(小簡儀)와 해시계 등의
천문기기를 올려 하늘의 표정을 살폈다. 소간의를 올려 놓는 곳이라 하여 소간의대(小簡儀臺)라
불리기도 하며, 별을 관측하는 곳이라 하여 첨성대(瞻星臺)란 애칭도 가지고 있다. 가만 보면
우리나라 옛 천문시설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지는 첨성대와도 조금은 닮아 보이기도 한다.

원래는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으나 오래 전에 사라졌으며, 현대사옥 자리에 휘문고보
(휘문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그 교정으로 옮겼다. 이후 1978년 학교가 강남으로 건너감에 따라
1983년 지금의 현대사옥이 들어서게 되었으며, 1984년 지금의 자리에 해체 복원되었다.

관천대를 복원할 당시, 원래 있던 자리와 땅의 높이를 맞추고자 평지에 2단의 석축을 쌓아 대를
만들고 그 위에 올렸으며, 석축 동쪽에는 관천대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허나 그래봐야 고작 3
층 높이 밖에는 되지 않으며, 바로 뒤에 현대사옥이 버티고 서 있으니 마치 해와 달의 격차를
보는 듯 하다. 원래 자리에 두기 힘들다면 차라리 원서공원이나 고층 빌딩의 눈치가 적은 곳으
로 옮기면 좋으련만..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한 천문시설의 잊혀진 원로로 현대사옥의 그늘에 가려져 천문관들이 바쁘
게 왔다갔다하며 천문을 살피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
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 없다.

참고로 현대사옥 자리에는 관상감과 휘문고등학교 외에 경우궁<景祐宮,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
(綏嬪朴氏)의 사당>이 사옥 북쪽에, 남쪽에는 계동궁<桂洞宮,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인 이재원(李
載元)의 집>이 있었으며, 경우궁과 계동궁은 갑신정변 때 개화당 패거리가 고종과 왕족을 호위
하며 잠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206-2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1분)


▲  큼직한 돌들이 모여 이루어진 관천대, 돌에는 오랜 세월의 떼가
아낌없이 깃들여져 있어 중후한 멋을 선보인다.

▲  굳게 입을 봉한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고택

사업가이자 교육가, 언론인으로 우리나라 2대 부통령(副統領)을 지낸 인촌 김성수(1891~1955)가
살던 집으로 1919년 2.8독립선언을 위해 독립지사들이 왜정의 감시를 피해 모인 장소이자, 민주
화운동을 위해 지식인들이 모여 결의를 다진 현장이기도 하다. 현재는 인촌기념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내부 관람은 거의 불가능하다.
고택 내부를 꼭 보고 싶다면 억지로 대문을 열거나 월담을 하지 말고 바로 동쪽 언덕에 자리한
대동세무고등학교로 달려가 서쪽 담장 너머로 내려다보기 바란다.

◀  공방 겸 찻집을 겸한 봉산재(奉山齋, 봉산아
트센터)
북촌문화센터에서 중앙고교로 이어진 계동길 중
간에 자리한 봉산재는 2007년 10월에 문을 열었
다. 나성숙 교수가 옻칠, 황칠을 하는 공방(工
房)으로 전시실과 찻집도 겸하고 있어 전통차 1
잔의 여유를 누 수 있다. 차의 가격은 5~6천원
선, 봉산재 홈페이지는 옆 사진을 클릭한다.
* 서울 종로구 계동 73-6 (개방시간 10시~18시
/ 매주 월요일, 명절 휴관 / ☎ 02-766-6649)


▲  북촌게스트하우스로 변신한 계동 배렴(裵濂) 가옥 - 등록문화재 85호

봉산재 뒤에는 북촌한옥체험관(북촌게스트하우스)이 있는데, 동양화의 거목으로 명성을 날린 배
렴(裵濂, 1911~1968)이 살던 기와집이다.
왜정 때 지어진 것으로 3동의 건물이 'ㅁ'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배렴이 사라진 이후 SH공사가
인수하여 외국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통체험을 겯드린 숙박업소로 변신했다. 북촌게스트
하우스 관련 정보는 윗 사진을 클릭한다.
* 서울 종로구 계동 72 (☎ 02-743-8531)


▲  이가(李家) 문화체험원
다도(茶道)와 예절을 비롯하여 전통 음식을 만드는 문화체험공간이다.
이곳은 왜인(倭人)들에게 인기가 높아서 그들의 한국문화체험과
학습을 위한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하였다.

* 서울 종로구 계동 50-1 (☎ 02-762-4900)
* 개방시간 10시 30분 ~ 20시 (1,3째주 일요일은 쉼)

▲  지금은 죽어버린 석정보름우물터

이가문화체험관 부근에 '석정보름우물'이라 불리는 동그란 우물이 하나 있다. 겉으로 보면 근래
에 만든 것처럼 보이고 안내문도 하나 없어 사연을 모르는 속인들은 무심히 지나치기 일쑤지만
오래 전부터 계동 지역의 식수를 담당하던 동네 우물이자 서울 땅에 몇 남지 않은 우물로 가치
가 높다.

이 우물은 보름마다 물이 차올라 15일 동안을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진다는 뜻에서 석정보름우
물이라 불리며, 예전에는 우물 위에 슬레이트로 만든 지붕을 만들어 그를 보호했으나 도심이라
물이 마르고 오염되어 결국 우물은 문을 닫고 말았다. 그 이후 1987년 돌과 시멘트로 우물을 복
원하면서 지금은 '석정보름우물터'라 불린다. 이제는 물도 나오지 않는 그저 형색만 갖춘 죽은
우물이지만 북촌의 소중한 옛 역사의 한쪽을 장식하는 소중한 존재이다.

18세기 후반, 청나라에서 온 천주교(天主敎) 신부 주문모(周文謨, 1752~1801)가 계동에 숨어살
면서 영업(?)을 했을 때, 이 우물에서 퍼온 물로 영세를 주었다고 전
한다.

◀  석정보름우물터와 나란히 있는 유심사
(惟心社)터 표석
유심사는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중앙학교
(중앙중고교) 학생들에게 3.1독립정신을
심어주고 일깨워주던 곳이다.


▲  고풍스런 분위기의 락고재(樂古齋) 한옥체험관 정문

재동초등학교 뒤쪽에 락고재라 불리는 제법 규모가 있는 한옥이 있다. 이곳의 이름인 '락고(樂
古)'는 '옛것을 누리는 맑고 편안한 마음이 절로 드는 곳','옛 선비의 풍류를 즐긴다'는 풍류적
인 뜻이 담겨져 있으며,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130년 묵은 오래된 집으로 진단학회(震檀學會)가
잠시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근래에 이르러 인간문화재 정영진 옹(翁)이 개조하여 전통체험 및 숙박을 할 수 있는 한옥체험
관으로 거듭났으며, 외국인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곳은 방마다 화장실
이 따로 설치되어 편의를 도모했고, 전통 음식과 국악 등의 다양한 문화체험은 물론 천기토로
만든 장작 찜질방까지 갖추고 있다. (단 숙박비가 비쌈 20~25만원선) 특히 집을 에워싼 담장은
전통 토담으로 정겹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진하게 우려내 문을 열고 들어가 머물고 싶은 충동
을 절로 일으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218 (☎ 02-742-3410)
* 락고재 홈페이지는 위와 밑에 있는 락고재 사진을 클릭한다.

▲  락고재 뒤쪽

▲  옻칠공방 칠원(漆院, 한국옻칠연구소)

칠원은 서울 지방무형문화재 1호 칠장(漆匠)의 기능보유자인 신중현씨가 운영하고 있다. 옻칠이
란 목기(木器)의 수명을 늘리고 아름다움을 더하고자 옻나무에서 채취한 나무액을 목기(木器)에
칠하는 것으로 이런 목기를 칠기(漆器)라고 한다. 옻칠에는 고무질이 있어 방수에 효과가 있으
며, 잘 썩지 않는다. 또한 옻칠은 오래될 수록 단단해지고 습기와 벌레를 방지하는 효과도 있다.

칠원은 오래된 한옥을 매입하여 목조를 개보수했으며, 옻칠 작품이 앞뜨락과 툇마루, 공방 곳곳
에 전시되어 있다. 옻칠과 관련된 유물 300여 점과, 국내 작가들의 옻칠 공예품 200여 점, 옻칠
화 3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옻칠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한다.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계동 25 (☎ 02-764-5775)
* 개방시간 : 10시 ~ 18시 (월요일 휴관) / 칠원 홈페이지는 아래 칠원 내부 사진을 클릭한다.

▲  옻칠공방 칠원 내부

▲  옻칠공방에서 만난 고양이 조각품
묘공(猫公)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귀여운 모습으로 꼬랑지가 방망이처럼
유난히 길고 굵직하다.

▲  골목 구석에 자리한 심화숙 한지공방

▲  심화숙 한지공방 내부

심화숙 한지공방은 우리의 전통 종이인 한지(韓紙)로 다양한 공예품을 만드는 공방이다. 한지에
그림을 그리는 지화 공예와 색색의 종이를 붙여 그림을 만드는 한지 회화, 종이실로 직물을 짜
는 한지 섬유 공예, 종이를 여러 가지 문양으로 잘라 기물에 붙이는 전지 공예 등 다양한 공예
가 적용된 가구와 옷, 모자, 항아리, 생활용품을 전시/판매하며, 공방 체험도 가능하다.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계동 32-10 (☎ 02-394-6534)
* 개방시간 : 10시 ~ 17시 (월요일 휴관)


▲  중앙중고 동남쪽의 작은 골목길 ▼
북촌의 조그만 골목길을 거니는 것은 북촌의 백미와 보석을 캐는 것과 같다.
큰길이나 사람들이 많은 길만 다니지 말고 반드시 작은 골목길도
둘러보기 바란다.


♠  창덕궁과 맞닿은 북촌의 동쪽 끝, 원서동과 창덕궁길 주변

▲  북촌 주택가와 창덕궁의 경계선인 창덕궁 돌담길 (창덕궁길)

▲  시골 읍내 같은 원서동과 창덕궁길

창덕궁길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에서 창덕궁 돌담길을 따라 원서동으로 이어지는 북
촌의 주요 간선로이자 북촌의 동쪽 경계선이기도 하다. 창덕궁과 속세를 구분짓는 높다란 돌담
과 나란히 이어진 길로 동쪽은 궁궐 돌담, 서쪽은 백성들의 주거지로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
다. 그래서 덕수궁(德壽宮)이나 경복궁, 창경궁 돌담길보다는 다소 운치가 떨어진다. 돌담길은
요금문을 지나서부터 집들로 인해 돌담과 조금 멀어지게 되며 빨래터에서 다시 만나게 되나 거
기서 길은 끝나버린다.

북촌의 동쪽 변두리이자 창덕궁길이 지나는 원서동(苑西洞)은 창덕궁 후원(後苑) 서쪽에 있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조선 때는 원동<苑洞, 원동(園洞)>이라 불렸다고 한다. 또한 왜정 때 창
경궁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키고 그 서쪽에 있다는 뜻으로 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  창덕궁 요금문(曜金門)

돈화문에서 창덕궁돌담길을 따라 원서동 쪽으로 들어가면 창덕궁과 바깥을 이어주는 조그만 궁
문(宮門), 요금문이 모습을 비춘다. 문 앞에는 어린이 놀이터와 속인들의 집이 있고 쓰레기봉지
도 가까이에 널려있어 다소 어수선해 보인다. 돌담길 일부 구간은 이렇게 민가들이 돌담과 무책
임하게 붙어 있는데, 돌담길 주변 정화가 무척 절실해 보인다.

요금문은 창덕궁 서쪽에 뚫린 3개의 문의 하나로 후원과 매우 가깝다. 이 문은 궁녀와 내관, 상
궁(尙宮) 등이 드나들던 통로로 상궁과 내관이 죽으면 그들의 시신을 이 문을 통해 내보냈다.
창덕궁이 지어진 태종(太宗) 때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처음에는 문의 이름이 없었다. 그러
다가 성종(成宗)이 서거정(徐居正)에게 문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했는데, 서거정이 '요금문'
이란 이름을 올리면서 그것이 문의 이름이 되었다.

그저 평범해 보여 지나치기 쉬운 이 문에는 2개의 옛 이야기가 서려 있다.
1623년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갈고 반란을 일으킨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이 된 얼떨떨
하고 통이 작은 인조(仁祖), 그는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보기 좋게 당
한 이후, 그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고 살았는데, 그 후유증을 달래고자 창덕궁 후원에 경치 좋
은 곳을 골라 정자를 지으려고 했다.
허나 신하들이 쌍수를 들고 반대하자 몰래 공사를 진행시켰다. 매년 12월에는 요금문을 통해 얼
음을 궁내(宮內)로 운반했는데, 그 문이 마침 후원과 가깝고 숲이 무성해 인적이 드물었다. 그
래서 내관에게 몰래 일러 문을 닫는 시기를 늦추게 하면서 공사에 쓰일 나무와 돌을 몰래 궁으
로 들여와 정자를 지었다. 이를 발견한 신하들은 상소문(上疏文)을 올려 중단할 것을 청했으나
인조는 '유념하여 채택해 사용하겠다'고만 할 뿐, 끝내는 정자를 완성시켰으니, 과연 부국강병(
富國强兵)에는 관심은 없고 허울뿐인 대의명분에 휩싸여 나라를 망친 임금다웠다.

또 하나는 숙종 때에 일이다. 조선을 통틀어 민중부터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전폭적인 사랑을 받
았던 인현왕후(仁顯王后), 그녀가 숙종(肅宗)에게 폐위되었을 때, 흰 옥교(玉轎)에 실려 이 문
을 통해 추방되었다. 이때 많은 관료들과 선비, 백성들이 옥교를 따라오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후 인현왕후를 다시 복위시킬 때 이 문을 통해 창덕궁으로 들어왔다.

현재 요금문은 굳게 닫혀져 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열릴 일은 없을 것이다. 창덕궁으로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고 무조건 돈화문으로 들어가야 되기 때문이다.

◀  요금문 현판의 위엄
요금문은 입장료, 요금을 뜻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빛나다와 일월(日月), 오성(五星)을
뜻한다고 한다.


▲  수레 1대 다닐 정도로 좁은 원서동 골목길

▲  궁중음식연구원
조선왕조 궁중음식(중요무형문화재 38호)을 연구하고 전수하는 곳으로 1971년에
설립되었다. 이곳은 궁중음식으로 유명한 황혜성, 한복려 선생 모녀가 운영하고 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34 (☎ 02-3673-1122~3)
* 궁중음식연구원 홈페이지는 위의 사진을 클릭한다.

▲  창덕궁 후원 물이 졸졸 흐르는 빨래터

창덕궁돌담과 이어진 원서동 북쪽 끝에 창덕궁 후원 물이 속세로 나오는 공간이 있다. 담장 밑
에 수구(水口)를 뚫어 후원(後苑)의 물을 쏟아내고 있는데, 도심 속 청정지대인 후원에서 나온
물이라 제법 차고 깨끗하다. 수구 앞에는 발을 들일 수 있는 약간의 공간이 있는데, 이곳을 빨
래터라고 부른다. 말그대로 동네 아낙들이 빨래를 하던 공간이다.

담장 안쪽은 태조(太祖)와 제왕들의 어진(御眞)을 봉안하던 신선원전(新璿源殿)이 있다. 창덕궁
가장 서쪽 구석에 자리한 신선원전은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비공개구역으로 남아있는데, 중앙
중고교 운동장에서 철조망 너머로 그곳을 굽어볼 수 있다. 운동장 축대 바로 밑이 바로 신선원
전이기 때문이다. 그곳 주변을 흐르는 계곡이 바로 빨래터로 흐르는 것이다.

이곳이 빨래터가 된 것은 옛날 궁녀들이 이 물에 세수나 빨래를 할 때, 쌀겨나 조두를 많이 사
용했는데, 그것을 쓰면 물이 뿌연 색을 띄었다. 이런 물에서 빨래를 하면 때가 잘 진다고 하여
장안 아낙들이 몰려와 빨래를 하면서 빨래터가 된 것이다. 궁궐 내를 흐르는 계곡이나 금천(禁
川)이 바깥으로 흘러가는 통로는 여럿 있지만 이곳은 숲이 우거진 후미진 곳이고, 담장 너머로
바로 민가들이 있기 때문에 여염집 처자들이 빨래를 하기에는 제격이다. 게다가 궁궐에서 나온
물이니 그 물로 가족들의 옷을 빨았다는 긍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을 통해 세상 구경을 나온 계곡은 창덕궁길을 따라 청계천으로 흐르는데, 도시화란 이유로
죄다 콘크리트로 생매장을 당했다. 그들의 속살을 속시원히 드러내면 좋으련만 정녕 어둠의 경
로로 흐르게 하는 것이 최선인 것일까?


▲  강제로 어둠의 경로로 흘러야 되는 빨래터 물의 비애

▲  굳게 닫힌 창덕궁 신선원전 외삼문(外三門)

▲  원서동 백홍범(白鴻範) 가옥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3호

빨래터를 지나 돌담길의 막다른 곳에 이르면 높다란 담장과 굳게 닫힌 문으로 일관하는 한옥이
있다. 그 집이 바로 지방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백홍범 가옥이다. 이 집은 원래 안채의 별채로 '
ㄱ'자 모양을 띄고 있는데, 안채 자리에는 근래에 지은 양옥이 있으며, 동남쪽에 작은 방 1채가
있다.
1910년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조선 황실(皇室)에서 은퇴한 상궁들이 주로 기거했으
며, 그 유명한 장희빈(張禧嬪)의 집도 이곳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창덕궁 돌담을 따라 이곳까지 들어왔지만 여기서 더 이상 길은 열리지 않아 왔던 길로 다시 되
돌아나가야 된다. 창덕궁에 단단히 막히고 길도 좁은 빨래터 일대는 도심 속의 외로운 벽지 같
은 곳이다.

* 백홍범 가옥, 빨래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9-5

* 창덕궁 돈화문에서 돌담길을 따라 도보 12분 거리
*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종로구마을버스 01번을 타고 빨래터(고희동 가옥)에서 내리면 된다. 허
  나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걸어가기를 권한다.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17분 거리이다.


▲  고희동(高羲東) 가옥 - 등록문화재 84호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1886~1965)이 왜국 유학을 마치고 1918년에 돌아와 직접 설
계하여 만든 한옥이다. 대지 540㎡, 연면적 250㎡ 규모의 ㄱ자형 구조를 이룬 4동의 단층집으로
서양 주거문화와 왜열도 주거 문화의 장점을 취해 한옥에 적용했는데, 그는 이곳에 41년을 살면
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그림을 그렸다. 또한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의 휘문고보 미술 스승
으로 그에게 문화유산 수호를 권하며 그의 길을 인도한 등불 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고희동이 세상을 뜬 이후, 2002년 절대절명의 위기가 다가왔다. '한샘'이란 회사가 원서동에 사
무실과 연구소를 만들면서 주차장을 만들고자 이 집을 매입하여 싹 밀어버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에 내셔널트러스트 등 시민단체가 강하게 발벗고 나서자 한샘의 야욕은 보기 좋게 좌절되었다.
이후 서울시가 인수하여 낡은 집을 보수했으며, 2012년 11월부터 속세에 개방되어 2013년 1월
15일까지 오픈 기념 특별전(춘곡 고희동의 집을 열다)을 조촐하게 열었다.


* 관람시간 : 10시 ~ 16시까지 (매주 수~일요일에 개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6 (☎ 02-2148-4165)


▲  비원손칼국수에서 먹은 칼국수와 만두

북촌에는 그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먹을거리와 맛집도 풍부하다. 특히 삼청동에는 청와대나 국무
총리공관 등의 고위 관료들이 단골로 찾는 식당들이 많다보니 다른 곳보다 맛의 질과 가격이 높
은 편이다. 거기에 찻집과 까페도 즐비하니, 구경 잘하고, 거기에 1끼 잘 먹고, 차 1잔의 여유
까지 누릴 수 있다.

현대사옥 뒤쪽 북촌1경 부근에 자리한 비원손칼국수는 칼국수 전문 식당이다. 잘 우려낸 국물에
국수사리와 파 등을 넣은 것으로 국수도 괜찮지만 국물 맛이 단연 일품이다. 반찬은 부추와 김
치 2종류로 칼국수의 찬으로는 적당하나 별도 메뉴인 만두는 높은 가격에 비해 양도 적고 맛도
시중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평범한 맛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원(秘苑)이란 말도 왜정이 창덕
궁 후원을 깎아내리고자 쓴 말인데 그걸 식당 이름으로 쓰고 있으니 이 또한 함정이면 함정이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이름을 바꾸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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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1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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