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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9.27 고즈넉한 한옥마을 속으로, 북촌한옥마을 구석구석 나들이 ~~ (북촌문화센터, 가회동 이준구가옥, 북촌4~7경, 맹사성집터)
  2. 2017.02.21 북촌한옥마을에서 만난 원조 한류 명소, 계동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고즈넉한 한옥마을 속으로, 북촌한옥마을 구석구석 나들이 ~~ (북촌문화센터, 가회동 이준구가옥, 북촌4~7경, 맹사성집터)

 


'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북촌 나들이 '

▲  북촌5경 골목길


 

♠  조선 후기 한옥을 개조하여 북촌을 안내하는 공간으로
새로 태어난 북촌문화센터 - 등록문화재 229호

▲  북촌문화센터 대문과 바깥채

여름 제국이 조금씩 숙성되어가던 6월의 첫 무렵에 후배 여인네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
촌(北村, 북촌한옥마을)을 찾았다. 이번에 찾아간 북촌 명소들은 이미 여러 번씩 기봤던 곳들
로 복습 차원에서 또 찾게 되었다. 북촌과 인연을 지은 횟수도 벌써 60회가 넘어 이제는 지겨
울 법도 하지만 그곳에 퐁당퐁당 빠진 상태라 뒤돌아서면 또 가고 싶어진다.

이번 북촌 산책의 시작은 북촌문화센터<3호선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3~4분>로 북촌 초행
이라면 이곳부터 인연을 짓고 북촌 나들이에 임하기 바란다.
북촌문화센터로 쓰이는 기와집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양반가로 고종(高宗) 시절 민씨 세도
가(勢道家)의 하나이자 왜정 때 탁지부(度支部) 재무관(財務官)을 지낸 민형기의 집이다. 한
때 '계동마님댁'으로 장안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집 구조는 안채와 바깥채, 앞행랑채, 뒷행랑채, 사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계동마님이
사라진 이후 크게 쇠락하고 만다. 그러다가 2002년에 서울시에서 북촌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
로 매입하여 기존 한옥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말끔히 몸단장을 시켜 그해 10월 북촌을 안
내하는 북촌문화센터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대문을 들어서면 'ㄷ'자형 안채와 'ㄱ'형 행랑채가 나오고, 중문을 지나면 'ㄱ'자
형 안행랑채(별당)가 나온다. 안채는 안방과 부엌을 개조하여 서울시청 한옥조성과 사무실과
한옥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상담하는 상담실을 두었으며, 회의실과 주민들의 사랑방을 갖추고
있다.

뒷행랑채는 전부 터서 북촌홍보전시관으로 삼아 북촌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여러 자료로 다
루고 있는데, 영상물도 준비하여 북촌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하는 한편, 북촌안내책자와 지도도
여기서 얻을 수 있다. 이곳을 지나면 집의 뒷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에 2칸 규모의 아담한 정
자가 있다. 원래 사당이었던 것을 정자로 개조하여 두 다리를 쉬어가는 쉼터로 삼았으며, 서
울 도심에서는 흔치 않은 이색 공간으로 다른 건물과 달리 기단(基壇)이 높아 예전에 사당이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 한다.
정자를 지나면 안행랑채라 불리는 별당(別堂)이 나오는데, 이곳은 온갖 공예와 예절과 다도(
茶道), 전통주 만들기, 민화(속화) 그리기 등 다양한 전통문화 강좌를 연다. (자세한 것은 북
촌문화센터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05 (계동길 37 ☎ 02-2133-1371)
* 북촌문화센터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대문을 들어서면 중문과 'ㄷ'자형 안채가 나온다.

▲  중문과 안채 서쪽

▲  안채 동쪽 (회의실과 사랑방)


▲  중문과 짧은 담장
중문 담장은 다른 담장과 이어지지 않고 안채 가운데 기둥에서 끝을 맺는다.

▲  북촌홍보전시관으로 탈바꿈한 뒷행랑채
북촌의 역사와 현재, 한옥의 구조에 대한 관련 자료들이 하얀 벽을
조촐하게 채운다.

▲  뒤쪽에 자리한 2칸짜리 정자
원래 사당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누구나 발을 멈추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정자 뒤쪽에는 외부로 나가는 문이 있는데 늘 닫혀있다.

▲  안행랑채(별당)와 뒷간(왼쪽)

▲  대청마루로 쓰이는 안행랑채 동쪽

정자 동쪽에 자리한 안행랑채는 툇마루를 갖추고 있는데, 여기선 다양한 전통문화를 배울 수
있다. 그 곁에는 뒷간이 있는데, 겉은 한옥이지만 속은 현대식 시설로 무장하고 있어 화장실
걱정은 안해도 된다. 그들 뒤로 현대식 건물들이 이곳을 굽어보고 있으니 과거와 현재가 서로
를 조금씩 인정하며 보듬어주는 북촌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  북촌4경 주변

▲  가회동 김형태 가옥(嘉會洞 金炯泰 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30호

안국역(3호선) 2번 출구에서 북촌의 주요 간선로인 북촌로를 따라 감사원(監査院) 방면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가회동성당을 지나서 검은 피부의 문화재 안내판이 '잠시 나좀 보고 가소'
발길을 잡는다. 그 안내문 바로 윗쪽에 기와집이 있는데, 그 집이 안내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가회동 김형태 가옥이다.

이 집은 19세기 후반 또는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사랑채와 안채,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
다. 안채는 문간채를 포함하여 'ㄷ'자 모양, 문간채는 'ㅡ'모양, 사랑채는 'ㄹ'자 모습으로
팔작지붕의 5량가 가구(樑架 架構)의 기와집이다. 비록 집은 다르지만 이 자리에서 명성황후
(明成皇后) 민씨가 태어났다고 전하며, 집 동쪽은 북촌로와 살을 마주 대고 있는데, 석축이
높게 닦여져 있다. 이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집 동쪽 부분이 잘려나가 그렇게 된 것이다.

현재 김형태란 사람이 소유하고 있으며, 문화
재청에서 그의 이름을 붙여 문화재 명칭으로
삼았다.
엄연히 사람이 사는 집이라 내부 관람은 거의
어렵고, 그냥 바깥에서 얌전히 바라보는 것으
로 만족해야 된다.
또한 집을 보면 19세기 후반 집이 아닌 최근
에 지어진 것처럼 너무 화사한데, 이는 2011
년 후반에 종로구청의 지원을 받아 해체/보수
했기 때문이다. 보수도 좋지만 그로 인해 고
색의 내음은 죄다 증발해버렸다. 오히려 지방
문화재 등급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16-8
(북촌로 67-4)

▲  굳게 입을 봉한 김형태 가옥 대문

 

재동초교와 김형태가옥 중간에는 돈미약국이
있다. (북촌한옥마을 입구 마을버스 정류장)
여기서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안쪽으로 인
도하는 '북촌로11길' 골목길이 있는데, 북촌
나들이에서 그 길은 꼭 둘러보기 바란다.
이곳에는 북촌4경과 5경, 6경, 7경, 8경, 이
준구 가옥, 북촌동양문화박물관 등 북촌의 주
요 꿀단지들이 숨겨져 있고 북촌의 다른 부분
의 비해 한옥의 밀도가 아주 높다.

이곳은 북촌이 뜨던 초창기부터 관광객과 나
들이객들의 발길이 많았고 지금도 늘 미터지
지는데, 안국역에서 가장 빠르게 삼청동길을
이어주는 길이기도 하며, 나도 북촌에서 처음
거닐던 곳이 바로 이 북촌로11길 주변이었다.

▲  북촌로11길에 있는 오래된 회화나무

 

돈미약국에서 북촌로11길을 3분 정도 가면 하늘 높이 솟은 회화나무(회나무)가 마중을 한다.
그는 200년 정도 묵은 이곳의 정자나무로 높이는 약 20m 정도 되는데, 나이가 지긋함에도 그
흔한 보호수 등급도 받지를 못했다. 게다가 그는 집 뜨락이나 조금은 독립적인 공간이 아닌
집과 집 사이에 비좁은 틈에서 샛방살이처럼 지내고 있어 숨이나 제대로 쉴련지 뿌리나 기둥
이 마음껏 자랄 수나 있을련지 걱정이 들 정도이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계속 직진하면 북촌5/6/7경으로 이어지고, 왼쪽 좁은 길로 가
면 북촌4경으로 이어진다. 북촌5/6/7경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지만 4경은 발길도 적고 한
적한 편이다.
북촌4경은 가회동 31번지 언덕으로 그곳 골목길은 매우 좁다. 허나 지대가 조금 높아 북촌5/
6/7경과 가회동 일대 한옥들의 지붕이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은 그런데로 괜찮으며, 특히 지
방문화재로 지정된 이준구 가옥(북촌6경 동쪽)의 모습을 유일하게 살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4경 골목은 북쪽으로 향했다가 동쪽으로 90도 휘어지고(여기서 직진하면 막다른 골목) 남쪽으
로 다시 90도 휘어져 회화나무와 북촌5경 남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4경으로 들어가는 입구
에서 4경 골목길로 들어가지 않고 서쪽으로 조금 경사가 각박한 고개를 넘어가면 북촌로5나길
로 이어지는데. 그 고갯길 남쪽에는 높다란 석축과 철책이 둘러져 있다. 그 철책 너머가 바로
정독 도서관이다.


▲  북촌4경 입구에서 삼청동길, 북촌로5나길로 넘어가는 고개
(왼쪽 축대와 푸른 철책 너머가 바로 정독도서관)

▲  북촌로11다길 주변 기와집들 ①

▲  북촌로11다길 주변 기와집들 ②

▲  북촌4경 골목길 (가회동 31번지 주변)
이곳에서 오른쪽 담장 너머로 펼쳐진 한옥의 끝없는 물결을 조용히 살펴보자.
(북촌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므로 정숙과 청결을 지키기 바람)

▲  북촌4경에서 바라본 북촌 가회동 한옥들 ①
과거와 현재가 각각 2/3, 1/3씩 사진 화면을 채운다

▲  북촌4경에서 바라본 북촌 가회동 한옥들 ②
여기도 완전 한옥 투성이이다. 그런데 저 멀리 보이는 푸른 지붕은 무엇일까?

▲  푸른 지붕의 주인공, 이준구(李俊九) 가옥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2호

북촌6경 동쪽 언덕 위에 푸른 지붕의 집이 있다. 한옥의 고풍스런 물결이 넝실거리는 북촌의
한복판에 뜬금없이 이질적인 양옥이 있어 두 눈과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는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이준구 가옥이다.

이 가옥은 1938년에 지어진 2층 양옥으로 집을 짓는데 쓰인 재료는 매우 비싼 것을 사용했다.
개성(開城) 송학에서 신돌(화강암)을 들여와 지었으며, 프랑스산 기와로 푸른색의 뾰족 지붕
을 입혔다. 딱 봐도 상류층의 냄새가 역하게 풍기는 서양식 부잣집 가옥으로 이 정도의 집을
지을 정도면 꽤나 돈을 주무르던 사람일 것이다. 그의 대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
지만 제발 친일 관련 졸부가 아니기를 바란다.

집을 둘러싼 벽은 벽돌식으로 모양을 냈고, 출입문은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의 아치형으로 만
들었다. 그리고 여러 곳에 격자무늬 창을 내었고, 높이 굴뚝을 내어 멀리서 보면 오래된 성당
처럼 보이기도 하며, 뜨락에는 정원수와 석탑을 세워 집을 수식한다.
현재 이준구란 사람이 소유하고 있어 문화재 지정 명칭도 그의 이름을 넣었으며, 이 집 주변
에 여러 채의 건물을 두었다. 또한 건물을 포함한 대지가 넓고, 밑에는 차고(車庫)까지 두고
있는데, 집 대문은 졸부의 폐쇄성이 드러난 듯, 거의 작은 성문(城門) 만하다. 또한 언덕 위
에 자리하여 북촌 한옥들을 바라보고 있어 자리도 매우 좋다. 단 개인 집이다보니 내부 관람
은 거의 불가능하며, 앞서 둘러본 김형태 가옥은 길가에서도 대충 보이긴 하지만 이곳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북촌4경 장소가 아니면 집을 보기도 힘들다. 또한 북촌 금싸라기 땅에 있어
집값도 거의 수십 억을 호가할 것이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이 집은 조금은 세련되고 양호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2호라는 괜찮은 등
급을 지녔다. 지정번호가 1호 다음인 2호로 인지도와 상징성도 꽤 큰 편인데, 굳이 이 집이 2
호로 지정될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정 번호는 가치별로 매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일
련번호로 숫자에는 별 의미는 없지만 그만큼 가치를 일찍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무슨 기준으로 그리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집은 2호란 숫자가 어울리지는 않아 보인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31-1 (북촌로11가길 49)


▲  북촌4경 동쪽 골목길


 

♠  북촌5,6,7경, 북촌로5나길 주변

▲  북촌5경

북촌5경과 6경은 같은 골목길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5경은 밑에서 6경이 있는 윗쪽을 바라보
는 것이고, 6경은 윗쪽(이준구 가옥 서쪽)에서 5경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는 것이다. 5/6/7경
구역은 북촌에서 한옥이 제일 많고 또한 한옥 비율이 가장 높은 곳으로 이 주변은 죄다 한옥
이다.

5/6경은 북촌이 속세에 널리 알려진 초창기 시절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았던 곳으로 옛 골목길
과 한옥의 경관이 잘 남아있어 북촌에서 꼭 발자국을 남겨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
다는 이곳의 제일가는 명소이다. 천하의 사람을 싹 모아놓은 듯, 늘 관광객들로 미어터져 사
람이 없는 한산한 풍경을 찍는 것은 거의 어렵다.


▲  북촌6경

북촌5경의 반대가 북촌6경이다. 5경에서는 언덕진 골목길을 중심으로 6경 주변 한옥만 보였지
만 6경은 5경보다 조금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이 조금은 좋다. 골목길을 사이로 양쪽에
자리한 한옥 지붕 사이로 천하 최대의 대도시 서울 도심의 전경이 펼쳐지며, 처마 끝 사이로
보이는 도심의 전경은 이곳의 백미로 북촌 관련 자료에 꼭 등장하는 유명 명소이다.


▲  북촌6경에서 이준구 가옥으로 이어지는 골목

▲  이준구 가옥 앞에서 바라본 북촌6경
이준구 가옥은 성곽처럼 높다란 석축 위에 숨겨져 있는데, 석축에는 담쟁이덩굴을
비롯한 온갖 덩굴들이 서로 협동심을 발휘하며 완전한 녹색 벽으로 만들었다.

▲  이준구 가옥에서 북촌5경으로 내려가는 골목길

▲  북촌7경 골목길 (가회동 31번지)
북촌7경은 북촌5,6경의 골목길보다 조금은 좁은 소박한 골목으로 마치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어놀던 동네 골목길을 떠오르게 한다.

▲  북촌7경 골목길 (위에서 바라본 모습)

▲  대나무를 지닌 북촌7경의 어느 기와집
대문 옆에 조촐하게 보금자리를 닦은 대나무들이 인상적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비록
크기는 작지만 이렇게 대나무밭을 보다니 두 눈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  북촌동양문화박물관 앞에 심어진 맹사성(孟思誠) 집터

조선 초기에 황희(黃喜)와 더불어 청백리(淸白吏)를 다투었던 맹사성(1360~1438)의 집이 동양
문화박물관 서쪽에 있었다. 그는 신창(新昌)맹씨로 고향은 아산이며, 자는 자명(自明)과 성지
(誠之), 호는 동포(東浦), 고불(古佛)로 고려시대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을 지낸 맹희도(盟
希道)의 아들이다. 또한 고려의 마지막 보루 최영(崔瑩)의 손서(孫婿)이기도 하다.

1386년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해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이 되었으며, 전의시승(典
儀寺丞), 기거랑(起居郎), 사인(舍人) 등을 지내고 수원판관(水原判官)을 거쳐 내사사인(內史
舍人)이 되었다.

조선으로 강제로 하늘이 바뀐 후,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되었고, 정종(正宗) 때 간의우산기상
시(諫議右散騎常侍). 태종 때에 좌사간의대부(左司諫議大夫), 동부대언(同副代言), 이조참의(
吏曹參議)를 지냈으며, 1407년에는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어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
에 가는 세자(양녕대군)의 시종관(侍從官)으로 따라갔다.
1408년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태종의 사위인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의 죄를
묻고자 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잡아 족친 사건이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태종은 크게 뚜껑이
폭발하여 맹사성을 죽이려고 했으나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죽음은 간신히 면하고 파면당했
다.

1411년 다시 기용되어 판충주목사(判忠州牧使)가 되었는데, 마침 예조(禮曹)에서 그가 음률(
音律)에 정통해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는 작업에 필요하다며 서울로 부를 것을 건의했으
며, 하륜(河崙)도 음악에 정통한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해 악공을 가르치도록 건의했다.

1416년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고, 이듬해에 생원시(生員試)에 시관(試官)이 되어 100명을
뽑았으며, 그해 부친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청했으나 태종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역마(驛馬
)와 약을 내리며 호조판서로 삼았다. 허나 그래도 사직을 원하자 왕은 그의 고향을 고려해 충
청도 관찰사(觀察使)를 제소하여 부친을 봉양하게 했다.

1419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고, 1421년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역임하였으며,
1427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우의정을 지낼 때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 감관사(監館事)
가 되어 태종실록을 감수했다.
실록이 완성되자 세종(世宗)이 한번 읽어보고 싶다고 청했다. 허나 그는 '전하께서 실록을 보
시고 그 내용을 고친다면 후대 왕들이 이를 본받게 되니 사관(史官)들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뢰니 세종은 할 수 없이 고집을 꺾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432년 좌의정(左議政)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은퇴했다. 허나 나라에 중요
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를 찾아 자문을 구했다.

맹사성은 성격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그리 엄하진 않았다고 한다.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
도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서 맞아들였으며, 윗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가 돌아갈 때
도 공손하게 배웅하고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집으로 들어왔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늙은 부친을 위해 벼슬을 사직하려고 했고, 청백하고 검소한 것은 타
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살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식량은 녹봉으로 받는
쌀로 때웠으며, 고향인 아산에 내려갈 때나 외출을 할 때는 소를 타고 다녔는데, 의복도 남루
하여 그를 몰라보고 함부로 대했다는 일화가 여럿 전해온다. 그럴 때는 맹사성은 그저 웃으며
'맹고불(자신을 일컫는 말)이 소를 타고 고향에 가오' 그러며 지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으며,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는 과단성이 있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그저 평범한 골목 같은 북촌로11다길 주변
이렇게 하여 초여름에 벌인 북촌 산책은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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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9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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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한옥마을에서 만난 원조 한류 명소, 계동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 서울 도심의 꿀단지, 북촌 둘러보기 '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중앙고등학교 본관
▲  중앙고등학교 본관


 

봄이 한참 무르익은 5월의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와 북촌(北村, 북촌한옥마을)을 찾았다.
북촌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로 2010년부터 퐁당퐁당 빠진 이래 매년 여러 번 발걸음을
하고 있다. 이미 그곳의 적지 않은 명소와 골목길, 박물관 등과 인연을 지어 이제는 지
겨울 법도 하겠지만 자꾸 손과 발, 마음이 가는 곳이 또한 북촌이다. 게다가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땡기면 언제든지 1시간 이내로 접근할 수 있다. 자고로 좋은 곳
은 1번이 아닌 두고두고 가는 것이 진리라고 했다.

이번 북촌 산책은 한류 명소로 인기가 대단했던 계동(桂洞) 중앙고등학교를 찾았다. 그
곳 외에도 여러 명소와 다시 인연을 지었으나 본글에서는 중앙고교 일대와 그 옆구리에
자리한 창덕궁 신선원전만 다루도록 하겠다.

참고로 북촌은 청계천 이북이자 창덕궁(昌德宮)과 경복궁(景福宮) 사이 동네를 일컫는다.
(요즘은 범위가 축소되어 안국역 이북, 창덕궁과 경복궁 중간 동네를 일컬음) 만약 자신
이 북촌 초보라면 제일 먼저 북촌문화센터(☎ 02-2133-1371)로 달려가자. 거기서 북촌의
기본 지식과 안내 자료를 쥐어들고 북촌 산책을 시작하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정독도서관 입구와 재동초교 앞에도 북촌관광안내소가 있음)


 

♠  오래된 근대 건축물을 간직한 독립운동의 현장이자
북촌 속의 한류관광지 -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

▲  중앙고등학교 본관 - 사적 281호

북촌의 주요 간선 골목길인 계동길의 북쪽 끝에는 서울 도심권 명문학교의 하나이자 오랜 역사
를 자랑하는 중앙고등학교(중앙중고교)가 자리해 있다.
보통 본인의 답사기에는 학교나 도서관이 거의 나오질 않는다. 설령 나온다고 해도 그 안에 오
래되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볼거리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이며, 그 볼거리만 중점적으로 다룰 뿐
학교 부분은 간략하게 처리하거나 쿨하게 빼버린다. 허나 중앙고등학교는 사정이 좀 다르다.

이곳은 무려 100년 이상 숙성된 오래된 학교로 왜정(倭政)과 1940~1970년대에 많은 유명인사를
배출했던 현장이다. 또한 사적으로 지정된 근대 건축물을 3개씩이나 간직하고 있고, 비록 지금
은 없지만 인문학박물관이란 박물관까지 보유하고 있었으며, 창덕궁의 통제구역인 신선원전(新
璿源殿)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21세기 이후 전파를 타고 한류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북촌에서 통과의례로 거쳐야 되는 명소의 하나가 되었다.

계동길의 북쪽 끝인 중앙고 교문(校門)은 언덕이다. 여기서 서쪽으로 인왕산을 가리고 선 높은
고개를 넘으면 북촌로로 이어지며, 그 중간에 북촌3경이 있는 가회동11번지로 이어지는 조그만
골목길이 왼쪽으로 가늘게 손을 내밀고 있다. 동쪽에도 시야를 가릴 정도로 높은 고개가 버티
고 있는데, 그 고개를 넘으면 원서동(苑西洞)과 창덕궁길로 이어진다. 
 
교문 안쪽에는 500년 묵은 큼직한 은행나무가 각박한 언덕길에 그늘을 드리워준다. 나무 옆에
는 1941년에 지어진 수위실이 있으며, 언덕진 길을 오르면 중앙고등학교 본관이 수면 위로 서
서히 떠오르는 해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짧은 오르막을 다 오르면 정면에 본관, 서쪽에는 원파도서관, 동쪽 높은 곳에는 강당이 있다.
보통 교문을 들어서면 학교 건물 사이로 운동장이 있기 마련이나 여기는 흙먼지가 이는 운동
장 대신 콘크리트를 깐 넓은 공간이 본관 앞에 닦여져 있다. 그리고 그 공간 복판에 동그랗게
자리를 다져 주변에 얕게 난간석을 둘렀으며, 안에는 잔디를 깔아 그 핵심부에 학교를 일으켜
세운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의 동상을 세웠다.
또한 본관의 모습이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본관과 많이도 닮았고, 본관 주변 풍경은 여기가
고등학교가 아닌 고려대나 서양의 명문 대학교에 들어선 기분을 진하게 들게 만든다.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고등학교의 모습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겉모습이 이러니 누가 여길 고
등학교라고 보겠는가? 그냥 사진만 보면 오래된 대학교로 봐도 이상할 것은 없다.

본관을 지나면 뒤에 고색이 깊은 서관과 동관이 있으며, 북쪽을 가린 신관(新館)을 지나면
조 잔디를 깐 축구장 겸 운동장이 나타난다. 운동장 북쪽에 보이는 건물은 중앙중학교이며 운
동장 동쪽 아래에 신선원전이 뉘여져 있다.

* 중앙고등학교의 역사
북촌 동북쪽 끝에 자리한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6월 1일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가 세운 기호
학교(畿湖學校)에서 비롯되었다.
1910년 9월 흥사단(興士團)에서 운영하던 융희(隆熙)학교와 통합되었는데, 그때 교장은 서유견
문(西遊見聞)으로 유명한 유길준(兪吉濬) 그 사람이었다. 이후 기호학회는 호남, 교남, 서북
등 여러 학회와 통합해 중앙학회로 간판을 바꾸고 학교 이름 또한 중앙학교로 갈았으며, 1915
년 4월 인촌 김성수가 이를 인수했다.

1916년 우리나라 최초로 보트를 도입하여 수상스포츠인 조정부를 설치했으며, 1917년 웅원(雄
遠, 높은 이상), 웅견(雄堅, 굳은 의지), 성신(誠信, 성실한 행동)을 학교의 교훈(校訓)으로
삼아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교목(校牧)은 잣나무, 교화(校花)는 무궁화꽃이며,
1917년 12월 김성수의 백부(伯父)인 김기중(金祺中)이 교사(校舍)를 지으면서 현재 자리로 학
교를 이전했다. 김기중은 김성수만큼이나 중앙고에서 비중이 큰 인물이다.

1919년에는 교장 송진우(宋鎭禹)와 김성수가 숙직실에서 3.1운동을 계획했으며, 백두산을 상징
하는 백산(白山)으로 학교 이름을 바꾸려고 했으나 왜정의 방해로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중
앙고보)로 개명했다. 그리고 그해 4월 고등학교 인가를 받아 굵직하게 본관과 서관, 동관을 세
웠고, 1926년에는 6.10만세 운동을 벌였으며,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하였다.
1934년 12월 원인이 아리송한 화재가 일어나 본관이 속절없이 무너지자 그 남쪽에 다시 본관을
만들어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다. 이 본관이 바로 지금의 본관 건물이다. 1941년에는 창립 30
주년 기념으로 대강당과 수위실을 세웠다.

1938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중앙중학교로 간판을 바꾸었으며, 1939년에 왜정이 무궁화 모표를
폐지하라고 하자 월계관으로 모표를 바꿨다. 1940년에는 당시 중앙고보 역사 교사인 최복현이
4학년 학생 5명과 민족정기 고취와 독립을 목적으로 '5인 독서회'를 조직했는데, 1941년 한 학
생의 연락 편지가 왜경(倭警)에 발각되어 최복현과 관련 학생 모두 함흥교도소로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을 '중앙고보 5인 독서회' 사건이라고 한다.
그때 최복현은 재판정에서 '내 수업을 듣고 학생들이 항일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나를 처벌
하고 학생들은 풀어달라'
호소하여 학생들은 3달 뒤 풀려나고 최선생은 2년 후 석방되었다.


1946년 9월, 6년제 중학교로 변경되고, 1950년 4월 대한교육법으로 4년제로 변경되면서 3년제
고등학교를 병설했다. 그래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이 꾸리게 되었다. 1960년 4.19시절에는
학교 학생들이 4.19시위에 동참했으며, 1964년에는 고려중앙학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1966년 신관을 짓고 김성수의 동상을 세웠으며, 1973년 신선원전과 인접한 운동장 동쪽에 축대
를 쌓아 운동장을 넓혔다. 1981년 학교 본관과 동관, 서관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문화유산
을 보유한 학교가 되었고, 1986년 6월 7일 교우의 날을 정해 행사를 거행했다.

1992년 2월 원파기념관을 세웠고, 2008년 6월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인문학박물관을 개관하면
서 이 땅의 고등학교 가운데 최초로 박물관을 소유한 학교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없음)
또한 주변 나라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요란하게 전파를 타면서 왜열도
와 중원대륙 사람들이 구름처럼 찾아와 북촌 속 한류 관광지로 존재감을 크게 살찌웠다. 솔직
히 그 이전에는 동네 사람들이 가끔 산책이나 마실을 가는 정도에 불과했었다. 이처럼 학교가
관광지로 유명해지자 교문 앞 문방구와 가게들은 앞다투어 한류스타의 사진과 브로마이드를 판
매하며 적지 않게 재미를 보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팔고 있음)
 
※ 중앙고등학교 찾아가기 (2017년 2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3-1번 출구),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1번을 타
  고 중앙중고에서 하차
* 안국역 3번 출구를 나와서 현대사옥(현대빌딩) 서쪽 골목인 계동길을 따라 도보 12분

★ 중앙고등학교 관람정보
* 평일은 학교 수업으로 개방을 하지 않으며, 토요일과 일요일, 공휴일에만 문을 열어두고 있
  다. (매월 2,4주 토요일은 9시~18시까지 / 1,3,5주 토요일은 13시~18시까지 / 일요일, 공휴
  일은 9시~18시)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1 (창덕궁길 164, ☎ 02-742-1321~2)
* 중앙고등학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1966년에 세워진 친일파 김성수 동상
이렇게 보니 정말 고려대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다.

◀  교문 옆에 자라난 오래된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512호

교문 옆에는 푸른 옷을 걸친 커다란 은행나무
가 살포시 뿌리를 내렸다. 그는 높이 20m, 가
슴둘레 3.1m로 무려 500여 년을 헤아리는 지긋
한 나이를 가지고 있다.

이 나무는 지역의 수호신으로 오랫동안 숭상을
받아와 매년 가을에 오곡백과(五穀百果)를 차
려 당제(堂祭)를 지냈으며, 중앙고등학교가 들
어선 이후에는 학생들 등교길에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그들을 응원한다. 또한 1987년 천안 독
립기념관 개관을 기념하고자 이 나무를 삼목이
식하기도 했다.


▲  6.10만세 기념비

본관 뜨락 서쪽에는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6.10만세 기념비가 3.1운동 책원비가 있는 동
쪽을 바라보고 있다.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이 붕어(崩御)하자 중앙고보 학생을 중심으로
격문(檄文) 3만장을 인쇄해 주변 학교에 뿌렸다. 그리고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에 황
제의 대여(大輿)가 단성사(團成社)를 지나자 중앙고보생 이선호의 선창으로 수천 명의 학생들
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 1,000매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뿌려 이른바 6.10만세운동의 분
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이 기념비는 6.10만세운동의 67주년이 되는 1983년 6월 10일 중앙고등학교 동우회와 동아일보
사가 합심하여 세웠다.


▲  3.1운동 책원비(策源碑)

본관 뜨락 동쪽에도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3.1운동 책원비가 6.10만세 기념비가 있는 서
쪽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다.

3.1운동 발생 2달 전인 1919년 1월 왜열도 동경(東京) 유학생인 송계백(宋繼白. 1896~1920)이
중앙학교 숙직실에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이곳 교사인 현상윤(玄相允, 1893~1950)에게 사각모에
담긴 비단에 쓰여진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건네며, 동경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살짝 알렸다.
현상윤은 그것을 교장 송진우와 김성수에게 급히 보여주었는데, 그것을 본 그들은 크게 감동을
받고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그래서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작성하고 3.1운
동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를 기념하고자 1973년 6월 1일 동아일보사에서 세웠다.


▲  원파도서관 (옛 인문학박물관)

본관 서쪽에는 본관을 약간 닮은 서구식 건물인 원파도서관이 있다. '원파'는 학교를 크게 일
으킨 원파 김기중의 호로 이곳에는 2008년 6월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개원한 인문학박물관이
야심차게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인문학(人文學) 자료들을 풍부하게 머금고 있던 착한 박물관이
었으나 이 땅의 인문학이 몰락했음을 상징하듯, 결국 10년도 못채우고 문을 닫고 말았다. (나
는 다행히 2010년과 2011년에 2번 관람을 했음)

인간은 일반적인 동물과 달리 정신적 수양도 어느 정도 닦아야 된다. 그래서 인문학(철학, 역
사, 윤리, 문학 등)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 땅의 꼬라지는 어떠한가? 인간의 말초신경
이나 건드리며 백성들의 단순화를 꾀하는 이 나라의 우민화정책, 그리고 그 정책에 춤을 추는
썩어빠진 방송과 언론들, 독서와 교양 지식을 멀리하며 오로지 돈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이 시
대의 사람들, 여유를 부리기 어려울 정도로 팍팍해진 백성들의 경제 사정, 인문학으로는 입에
풀칠 조차 하지 힘든 현실에서 인문학은 점점 바닥을 향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 나라의 위정자와 졸부들이 바라는 세상일 것이다. 그래야 그들 입맛대로 대대
손손 금수저를 물며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  중앙고등학교 본관의 뒷모습
마치 유럽 중세시대 건축물이나 요새처럼 보인다.


고려대 본관과 많이 빼어닮은 중앙고 본관은 콘크리트 철근의 2층 석조 건물로 1935년에 삽을
떠서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다. 원래 본관은 동관과 서관 사이에 있었으나 1934년 화재로 무
너지자 현 위치에 더 크고 화려하게 다시 지은 것이다.

왜정 때 건축가인 박동진이 서구 학교의 건물을 모델로 삼아 설계하고 건축한 길다란 'H'형태
의 건축물로 지붕 부분을 포함하면 가히 3층 규모인데, 그 시절 이 땅의 사람들이 세운 큰 건
물의 하나이기도 했다.
건물 중앙에는 4층의 중앙탑을 높이 세워 본관의 위엄을 드높였고, 벽면은 돌을 질서있게 쌓아
올렸다. 하여 그 모습이 오래되고 전통이 있는 서양 학교나 중세시대 건축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거기에 담쟁이덩굴까지 걸치고 있으니 고색과 중후한 멋까지 마음껏 드러낸다.
학교가 이렇게 크고 잘나갔으니 왜정 때 이곳에 다닌 학생들의 자부심은 자못 대단했을 것이다.
비록 왜인의 눈치를 보며 살던 우울한 시기이나 여기서만큼은 왜인들도 오히려 부러운 눈빛으
로 학교를 바라봤을 것이다.

현재 1층 중앙은 학교 행정공간으로 나머지는 교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근대 초기 양식으로 만
들어진 민족 교육의 현장이자 민간학교의 건물로 유서가 아주 깊다. 또한 왜정과 대한민국 초
기에 이름 꽤나 알려진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현장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널린 학교 건물보다 더욱 정감이 가며, 저 건물에 들어가면 절로 책을 펴고 공부에
임할 정도로 면학분위기도 진하게 나온다. 나도 이곳에 들어와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사는 곳
이 엉뚱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하긴 이곳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워낙 타고난 돌머리라 얼마
나 효과가 있었을지는 미지수이다.


▲  본관 뒤쪽에 자리한 빛바랜 종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중앙고보 시절부터 수업시간과 점심시간, 수업 종료 시간마다 땡땡땡~~♬ 종소리를 내며 학생
과 교사들을 분주하게 만들었던 종, 허나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난 이곳의 옛 유물로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왕년에는 몸을 흔들며 학교를 움직이는 큰 손이었건만, 이제는 종소리를 울릴 일도 없으니 그
의 피부에는 그저 하얀 먼지만 가득하다. 가끔 관광객들이 호기심 삼아 그를 흔들어 주변의 적
막을 살짝 깨뜨리곤 한다. (나도 몇 번 쳐봤음~) 그렇게 울려 퍼진 종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늘
비슷한 목소리다. (그렇다고 요란하게 치지는 말자~~~!)
사람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은퇴하여 뒤로 나앉은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 없다.


▲  왕년을 생각하며 우수에 잠긴 종
종의 청동색 피부에는 무심한 세월의 먼지로 가득하다. 하긴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으랴? 그저 장대한 세월에 아주 잠깐씩 몸을 담굴 뿐이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요. 천하만물의 운명이다.

▲  본관 뒤쪽에 나란히 자리한 서관과 동관
쌍둥이 형제처럼 서로 닮은 모습이다.

▲  중앙고등학교 서관(西館) - 사적 282호

중앙고 서관은 1921년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2층 붉은 벽돌집이다. (지붕을 포함하면 3층) 'T'
자형 구조로 본관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뾰족한 아치형 창틀, 가파른 고딕식 지붕, 그리
고 화강암과 붉은 벽돌을 엇물려 지어 20세기 초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붉은 피부의 벽돌이 고색의 향기를 더욱 우려내고 있으며, 여기서는 조선 소년군 창설과 6.10
만세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 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재는 교실로 쓰이고 있다.


▲  중앙고등학교 동관(東館) - 사적 283호

서관과 마주하고 있는 동관은 1923년 10월에 지어진 2층 붉은 벽돌 건물이다. (지붕 포함하면 3
층) 건물 구조와 전체적인 모습은 서관과 비슷하며 여전히 교실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선비의 모습으로 조성된 김기중(金祺中) 동상

동관과 서관 사이에는 원래 본관이 있었다. 허나 1934년 화재를 만나 건물이 주저앉으면서 남
쪽으로 자리를 옮겨 더 크고 화려하게 지었다.
본관의 강제 이전으로 비게 된 공간에는 소나무를 심어 조촐히 정원을 닦았는데 그 한쪽에 원
파() 김기중(1859~1933)의 동상이 자리해 있다. 그는 김성수와 더불어 중앙학교를 일으킨
인물로 김성수의 바로 큰아버지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양복스타일의 김성수 동상과 달리 전형
적인 선비 스타일로 동상을 지어 그를 기린다.

김기중은 1886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1904년 용담(潭, 전북 진안) 군수()를 지내기도
했다. 1906년 정3품에 올랐으나 멸망의 끝으로 향하는 나라꼴에 한숨을 쉬며 민중계몽을 교육
사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여 1908년 재산을 털어 영신(永新)학교를 세웠고, 왜열도로 직접
건너가 그곳의 교육 제도를 살폈으며, 조카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그리고 1921
년 다시 재산을 털어 지금의 자리에 교사를 만들면서 중앙학교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1932년 아우 김경중(金暻)과 보성전문(고려대)을 인수하고 민립대학을 꿈꾸던 김성수에게 운
영을 넘겼으며, 그 이듬해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마 10년을 더 살았다면 조카의 비
열한 친일 행위에 분개하며 피를 토하고 죽었을 지도 모르겠다. 결국 조카가 큰아버지의 민족
교육 사업에 똥칠을 했으니 말이다.


▲  창립30주년기념관 (대강당)
본관 동쪽 높은 곳에 자리한 대강당은 1941년 11월, 창립30주년 기념으로 지어졌다.

▲  단촐하게 생긴 삼일기념관(三一記念館)

대강당 뒤쪽에는 삼일기념관이라 불리는 기와집이 있다. 무슨 사연이 있을 듯 싶은데 그에 대
한 마땅한 안내문이 없어 많은 이들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이다. 허나 여기가 바로 1919년 당시
중앙학교 숙직실 자리로 처음으로 3.1운동을 계획하고 논의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기념관 뒤로 담장과 울창한 수목이 보이는데, 담장 너머는 동궐(東闕)이라 불리는 창덕궁이다.


▲  여기도 친일파와 독재 딸랑이의 흔적이??
서정주(徐廷柱, 1915~2000)의 '국화옆에서' 시비(詩碑)


20세기에 이름난 현대 시인의 하나이자 우리 말이 지닌 표현력의 극한을 보여준 것으로 칭송받
는 미당 서정주, 그는 전북 고창 출신으로 인촌 김성수의 대농장을 관리하던 중간 관리인(마름
)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로 올라와 역시 김성수가 손을 대고 있던 중앙고보에 보결생(補缺生
)으로 들어왔으나 광주학생운동 참여로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에 들어갔으며, 죽을 때까지 많은 시집을 내었다. 허나
1943년부터 비열하게 친일 행위(왜정을 찬양하는 시를 작성)에 몸을 담기 시작했으며, 이승만
과 박정희, 전두환에게 두루두루 아부를 떨며 독재를 찬양했다. 또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죄를
반성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 합리화에 열을 올렸던 속 좁은 작자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를 비롯하여 친일 떨거지들의 문학 작품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적지 않게 실린다는
것과 그들을 기리는 문학 행사와 기념관이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 꼬라지가 된
것은 그들의 후학과 그들을 옹호하는 작자들이 문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
다. 이는 식민사관(植民史觀) 계열이 장악하고 있는 역사 분야도 비슷하다. 역사 청산을 제대
로 하지 못한 후유증이 아직도 이 나라의 곳곳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  신관 뒤쪽에 있는 백릉 채만식(白菱 蔡萬植, 1902~1950) 문학비

채만식은 중앙고보 13회 교우로 소설가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지겹도
록 나오는 단골로 1929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수십 편의 걸쭉한 소설을 남겼다.


 

♠  중앙고 철책 너머로 바라본 창덕궁 신선원전(新璿源殿)
- 사적 122호

▲  신선원전

중앙고에 왔다면 꼭 살펴봐야 되는 곳이 있다. 바로 창덕궁의 숨겨진 속살, 신선원전이다. 그
렇다고 신선원전이 중앙고 안에 들어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만약 그들이 교정에 있었다면
중앙고가 지금의 자리에 속시원히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중앙고를 둘러보고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면 인조잔디가 펼쳐진 운동장이 나온다. 운동장 북쪽
에는 중앙중학교가 있고, 그 뒤에 삼삼하게 우거진 산이 있는데, 이는 성북동(城北洞)으로 넘
어가는 와룡공원 고개로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의 동쪽이다. 운동장 서쪽은 가회동 주택가로
막혀있고 동쪽은 숲이 보이긴 해도 철책이 높이 쳐져 있다.
본관 주변의 착시현상을 간파하고 서관과 동관을 거쳐 이곳까지 들어온 사람들(대부분의 관광
객들은 착시현상에 빠져 본관 주변만 맴돌다 나감)은 운동장만 보고는 '이제 다 봤다. 가자~'
발걸음을 돌린다.
운동장 동쪽에 철책이 있고 마땅한 안내문도 없으니 비록 밑에 수상한 기와집이 널려있어도 그
냥 통과하는 것이다. 허나 그런 생각은 중대한 수정이 필요하다. 그 철책 너머가 바로 창덕궁
의 비공개 구역이자 어진(御眞)을 봉안했던 신선원전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다른 궁궐과 달리 유난히 통제구역이 많았던 창덕궁이 마음을 고쳐먹고 21세기 이후 후
원(後苑) 대부분과 낙선재(樂善齋)를 쿨하게 공개하고 있지만 아직도 숨겨진 부분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 신선원전은 지금까지도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며 공개를 꺼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
곳의 존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후원 숲속에서 조용히 속살을 가린 채, 숨바꼭질을 즐기는 신선원전은 중앙고 운동장에서만큼
은 자존심을 곱게 접으며 그 속살을 일정 부분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운동장이 그곳보다 지
대(地臺)가 높기 때문이다. 다만 철책을 통해서 봐야 된다는 한계점이 있다.

중앙고는 창덕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중앙고가 창덕궁 궁역(宮域)보다 지대가 좀
높긴 하지만 담장이 있는 곳만큼은 교내보다 높으며, 민가(民家)의 담장도 아닌 지체높은 궁궐
의 담장이라 감히 건드릴 수는 없다. 허나 운동장만큼은 사정이 달라 운동장이 신선원전과 궁
궐 담장보다 더 높은 곳에 들어앉아 있다. 상황이 이리 된 것은 1973년 운동장을 넓히고자 축
대를 높이 다졌기 때문이다. 하여 신선원전이 운동장 눈 밑에 있게 된 것이다. 철조망을 높이
친 것은 자칫 월담을 하거나 공이 넘어가 그곳의 적막을 깨뜨리는 것을 막고자 함이다.

일개 학교 운동장이 궁궐 사당보다 높이 떠있다는 것이 다소 신선하고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아
무리 국제적인 호구짓을 일삼다가 쪽박을 찬 옛 제국의 잔재물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해야 했
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허나 학교 입장에서는 여기말고는 운동장을 다질 땅이 없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어찌보면 패망한 제국의 비애(悲哀)이기도 하다.

▲  비공개로 사람의 손때마저 희미해진 신선원전

신선원전 자리에는 원래 대보단(大報壇)이 있었다. 조선은 명(明)나라의 충직한 제후국(諸侯國
)이라 명이 망하자 옛 명의 황제를 기리고 그들의 은혜를 갚는다는 꼴사나는 이유로 숙종(肅宗)
시절에 지금의 자리에 대보단을 만든 것이다.
대보단에는 명태조 주원장(朱元璋),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신종(神宗), 그리고 명을 완전히
말아먹은 마지막 군주, 의종(毅宗)의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국가 재정을 축내며 제사를 지냈다.

창덕궁에 선원전(璿源殿)이 지어진 것은 1656년이다. 이때 경덕궁(敬德宮, 경희궁)에 있던 경
화당(景華堂)을 인정전(仁政殿) 서쪽으로 옮겨 제왕의 어진을 봉안하여 선원전으로 삼았는데,
<이를 구(舊)선원전이라 부름> 1921년 왜정이 대보단을 부시고 덕수궁에 있던 선원전을 이곳으
로 옮겼으며, 구선원전과 덕수궁 선원전에 있던 어진과 관련 유물도 거의 옮겨와 신선원전이라
하였다. (이전의 선원전과 구분하고자 그리 이름을 지음)

이곳에는 태조에서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제왕 12명의 어진 48본을 봉안했으며, 어진을 걸
어두던 12개 감실(龕室)은 1900년대 의궤도설(儀軌圖說)과 일치해 왕실의 전통적인 법식을 충
실히 따랐음을 보여준다. 어진은 6.25가 터지자 서둘러 부산(釜山)으로 옮겼지만 대부분 관리
소홀로 화마(火魔)의 먹이가 되었으며, 제례에 쓰이던 의장물 상당수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남아있던 노부
(鹵簿, 제왕이 나들이할 때 갖추던 의장물) 등 대부분의 유물은 2002년 국
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용상(龍床)과 오봉도(五峯圖), 모란이 그려진 병풍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들 유물은 19~20세기 궁중 미술의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감실과 당가(唐
家), 용상 등 가구와 시설물은 주칠(朱漆)이 아닌 황색(黃色)으로 칠했다.

신선원전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사당이란 점 때문에 여전히 비공개로 일관하고 있다. 하여 이
곳에서는 인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사람의 손때마저 보이질 않는다. 오늘도 변함없이 고
요하기만 한 신선원전, 이곳이 과연 시끌벅적한 서울 도심 한복판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
다. 거기에 사당이라 그런지 종묘(宗廟)에서 느낄 수 있는 엄숙함도 적지 않게 배여나온다. 다
행히 늦게나마 이곳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이곳을 2년 동안 조사하여
'최후의 진전(眞殿) 창덕궁 신선원전'이란 도록을 발간하기도 했다.

신선원전은 의효전(
懿孝殿)과 재실(齋室), 수직사(守直舍), 몽답정(夢踏亭), 괘궁정(掛弓亭),
진설청(眞說廳) 등을 부속 건물로 거느리고 있으며 이들은 신선원전 권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창덕궁 후원에서 신선원전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으며, 원서동 구석 빨래터에 있는 외삼문(外
三門)은 이곳의 정문이나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 창덕궁 신선원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 (창덕궁5길 22-4)


▲  신선원전 남쪽에 자리한 의효전(懿孝殿)

신선원전 남쪽에 자리한 의효전은 원래 덕수궁(경운궁)에 있었다. 1904년 순종의 왕비인 순명
효황후(純明孝皇后)의 혼전(魂殿)으로 쓰인 적이 있으며 1921년 덕수궁 선원전을 이곳으로 옮
길 때 덩달아 같이 이전되었다.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의효전 옆에는 몽답정(夢踏亭)과 몽답지(夢踏池)란 작은 연못이 있
다. 몽답정은 훈련도감(訓鍊都監)의 훈련대장(訓鍊大將) 김성응(金聖應, 1699~1764)이 지은 것
으로 영조(또는 숙종)가 꿈속에서 이 정자를 찾았다고 하여, 꿈에서 발걸음을 했다는 뜻의 몽
답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정조도 몽답정을 자주 찾았다고 하며, 창덕궁과 창경궁의 도
면인 동궐도(東闕圖)에는 나와있지 않아 원래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닌 듯 싶다.


▲  덥수룩한 머리를 지닌 괘궁정(掛弓亭)

신선원전 권역에서 그나마 제일 가깝게 마주할 수 있는 존재가 괘궁정이다. 이곳은 담장이 운
동장 축대 밑으로 막 내려가는 비탈진 곳에 있으며, 중앙고 축구부 휴게실로 내려가는 계단에
서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다.

괘궁정은 1849년(헌종 18년)에 지어진 것으로 훈련도감(訓鍊都監) 북영(北營)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정자의 이름인 괘궁(掛弓)은 활을 걸어둔다는 뜻으로 왕실에서 종
묘만큼이나 애지중지했던 대보단 바로 옆에 활쏘기 연습을 하는 정자를 만든 것이 조금 납득이
가질 않는다.
게다가 정자의 모습을 보면 일반 병사들이 연습을 했다기보다는 훈련대장 등 상위 등급의 무인
(武人)들이 활 연습을 하거나 군영(軍營)을 바라보는 용도로 사용했을 듯 싶다.
북영의 군사들은 제왕의 호위를 담당하며 왕이 궁궐을 옮길 때 그 본부를 같이 옮기는데, 창덕
궁에 머무를 경우, 궁궐에서 다소 구석인 대보단 인근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괘궁정은 달랑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로 돌로 축대를 만들고 그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워 정자
를 지었다. 오랫동안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는지 지붕 머리가 꽤 덥수룩하다. 자연이 지붕
에 심어놓은 푸른 잡초가 기와를 뚫고 자라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정자도 먼지만 가득하니 언
제 사람이 마지막으로 들어왔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언제 문을 두드릴지
모를 화마에 대비하여 소화기가 한쪽에 있다는 것이다.

비록 운동장 철조망을 통해 신선원전 일대를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보듯 구경하며 사진에
담았지만 언젠가는 쿨하게 공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때가 되면 까치발처럼 힘들게 구경해야
되는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하여 북촌 중앙고 나들이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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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2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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