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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1.31 늦겨울 산사 나들이, 강화도 마니산 정수사 (정수사 법당, 사기리분청사기요지, 사기리탱자나무, 이건창생가)
  2. 2019.07.07 민통선에 묶여있는 강화도 옆구리의 커다란 섬, 교동도 여름 나들이 ~~ (교동읍성, 교동향교, 성전약수, 화개사, 강화나들길 9코스)
  3. 2018.06.25 북한 개성 땅이 아련히 바라보이는 강화도의 북녘을 거닐다 ~~~ (연미정, 월곶돈대, 강화나들길, 강화평화전망대, 예성강)
  4. 2012.08.29 한여름의 강화도 나들이 (봉천산 주변, 강화읍내)

늦겨울 산사 나들이, 강화도 마니산 정수사 (정수사 법당, 사기리분청사기요지, 사기리탱자나무, 이건창생가)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 (마니산 정수사, 사기리 탱자나무, 이건창생가)



'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 '
(마니산 정수사, 사기리 지역)

정수사 법당

▲  정수사 법당(대웅보전)

사기리 탱자나무 이건창생가

▲  사기리 탱자나무

▲  이건창 생가

 



 

차디찬 겨울의 한복판인 2월 끝 무렵의 어느 덜 추운 날, 오랜만에 강화도(江華島)를 찾
았다.
강화도(강화군)는 늘 구미가 당기는 곳이라 그곳의 적당한 메뉴를 고르던 중, 마니산 정
수사에 딱 눈이 멈춰섰다. 그곳은 이미 2번이나 인연을 지은 곳이지만 무심한 세월이 훔
쳐간 아련한 옛 추억도 잠시 곱씹을 겸 흔쾌히 그곳을 택했다. 자고로 좋은 곳은 두고두
고 찾아가는 법이다.

오전 늦게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70여km 떨어진 강화도의 동남쪽 중심지, 온수리(길
상면 중심지)에 이르니 어느덧 14시이다. 여기서 정수사까지는 강화군내버스 3번(강화터
미널↔온수리, 1일 9회)이 다니고 있는데, '늦어도 40~50분 기다리면 되겠지' 싶어 방심
을 했으나 정류장에 달린 시간표를 보니 글쎄 1시간 30분 뒤에나 차가 있는 것이다.
방심의 대가치고는 오지게 긴 시간이라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어찌 보
면 덤으로 생긴 그 시간에 늦은 점심이나 섭취하고자 적당한 식당을 찾다가 가격도 착하
고 찬도 넉넉한 뷔페식 기사식당을 발견, 그곳에서 즐겁게 배를 채웠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도 시간이 남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온수리 성공회성당(聖公會聖堂)
을 짧게 둘러보고 정류장으로 돌아와 나머지 시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강화군내버스
3번이 다가와 활짝 입을 벌린다.
버스는 서남쪽으로 10여 분을 달려 정수사입구에 나를 내려놓는다.



 

♠  늙은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마니산 정수사(淨水寺)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①

정수사입구에서 정수사까지는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따라 15~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작은 포장길이 닦여져 있는데, 길 좌우로 겨울에 몽땅 털린 나무
들이 초췌한 몰골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눈이 내린 지 벌써 여러 날 되었지만, 길가에는 새하
얀 눈이 조금씩 남아 아직까지 겨울 제국(帝國)의 치하임을 강하게 일깨운다.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②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③

▲  정수사 직전 'S'라인 고갯길
저 고갯길의 끝에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아담한 산사, 정수사가 고색의
숨결을 물씬 풍기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천하의 성산(聖山)으로 오랫동안 추앙을 받는 마니산<摩尼山, 마리산, 해밯 469m> 동쪽 자락
에는 3칸짜리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정수사가 포근히 안겨져 있다.

정수사는 639년에 회정선사(懷政禪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마니산 참성단(塹星壇)을
참배하고 동쪽으로 내려가다가 앞이 확 트인 괜찮은 곳을 발견하고는 불제자들이 선정삼매(禪
定三昧)를 정수<精修, 정세하게 학문을 닦음>할 곳이라 격찬하며 그곳에 절을 지어 정수사(精
修寺)라 했다고 한다. (이름은 같지만 한자는 틀림)
허나 아쉽게도 이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며 '정수사 산령각 중건기(重建記
, 1903년)'와 '강도지(江都誌)'에도 창건시기를 알 수 없다고 나와있어 639년 창건설에 크게
회의감을 들게 한다. 하여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고려 전기나 몽골(원나라)과의 전쟁으로
강화도가 임시 국도(國都)가 되었던 13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423년에 법당을 새로 지었고, 1426년 함허기화(涵虛己和, 함허대사)가 절을 중창했는데, 법
당 서쪽에서 깨끗한 물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맑은 물을 뜻하는 정수사(淨水寺)로 이름을
갈았다. (이름은 그대로 두고 한자와 뜻만 갈아치움)
1688년 절을 중수하여 상량문(上樑文)을 남겼으며<1957년에 발견됨> 1848년 비구니 법진(法眞
)과 만흥(萬興) 등이 화주(化主)가 되어 법당을 중수했다. 이때 부화주(副化主) 승려 20여 명
, 목수 165명, 지역 주민 305명이 자원하여 중창불사에 참여했다.

1878년 비구니 계흔(戒欣)이 제자 성수 등과 불상을 개금(改金)하고 후불탱과 칠성탱, 독성탱
, 산신도 등을 새로 그려 봉안했는데, 금어<金魚, 그림을 그리는 승려> 용계 서익(龍係 瑞翌)
과 대허 체훈(大虛 體訓) 등이 탱화를 조성했으며 1883년 화주 근훈(根訓)이 절을 수리했다.
1888년 비구니 정일(淨一)이 수좌 연오(演梧)와 함께 시주금을 모아 관세음보살상 1위와 후불
탱 1점을 만들어 봉안했다. 정일은 여러 절과 마을을 꾸준히 돌면서 돈을 모아 1903년 산령각
을 중건하고 1905년에 법당을 수리했으며 1916년에는 불상을 개금하고 여러 불화를 봉안했다.
그 시절 정수사에 머물며 그의 불사를 목격했던 이건승(李健昇) 거사는
'뜻을 한가지로 한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겠는가. 이 절의 스님을 보니 남자가 여자에
미치지 못하고 사대부가 여승에 미치지 못하고 국가가 사찰에 미치지 못함을 깨달았다!'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쓰기도 했다.


1937년 주지 김선영이 본산<전등사(傳燈寺)> 주지 김정섭과 상의해 대웅전(법당)을 나라의 보
호 건물로 추천했으며, 1942년에 쓰여진 '전등본말사지'에는 대웅전(12칸) 외에 산신각(2칸),
대방(14칸), 노전(6칸), 요사(16칸) 등이 있어 지금보다 건물이 더 풍요로웠음을 알려준다.
6.25 때는 다행히 별 피해는 없었으나 건물들이 고된 세월에 체해 나날이 퇴락하자 1957년에
법당을 중수했으며, 1974년에 소실된 삼성각을 다시 지었다. 이후 여러 건물을 짓거나 새로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오백나한전, 요사, 종무소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법당과 향토유적인 함허대사 승탑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 19세기에 조성된 탱화들이 여럿 있고 오백나한전에는 고려 때 것으로
전하는 건칠지장보살상이 있다.
또한 절 주변에는 상사화(相思花, 꽃무릇)가 자라고 있는데 보통 붉은 상사화를 생각하기 쉬
우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노란색 상사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노란 상사화는 이 땅에서도 매
우 희귀한 존재로 8월 중순에서 9월 초 사이에 10여 일 정도 반짝 꽃잎을 펼쳐 보인다.

정수사는 함허동천(涵虛洞天)과 함께 마니산(마리산)의 동쪽 기점으로 바로 북쪽 능선을 넘으
면 함허동천이다. 참성단까지는 40~50분 정도 걸리며 중간에 벼랑처럼 이어진 아찔한 바위 능
선을 지나야 된다. 비록 길이 괜찮게 닦여져 사고의 위험은 예전보다 덜하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야된다.

* 정수사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467-3 (해안남로1258번길 142 ☎ 032-
  937-3611)
* 정수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정수사 법당(法堂) - 보물 161호

경내 중심에 자리한 법당(대웅보전)은 정수사의 얼굴이자 상징으로 1423년에 지어졌다. 이 땅
의 늙은 법당 중 유일하게 툇마루를 지닌 개성파 법당이자 이 땅에 별로 남지 않은 조선 초기
사찰 건축물로 그 가치가 백두산 꼭대기만큼이나 높다. (법당 덕분에 정수사의 이름값이 크게
올라갔음)

이 법당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측면이 3칸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툇마루를 덧붙이면서 측면이 조금 넓어졌는데 1688년 절을 중수했을 때 닦여진 것으로 여겨진
다. (1688~1689년 법당을 중수하면서 중수 관련 기록을 법당 안에 넣어둠)
절이 한참 어려웠던 시절에는 가운데 칸은 법당으로, 좌우 칸은 승려들 거처로 사용했다고 하
며, 육중한 지붕을 지탱하고자 기둥 꼭대기에 공포를 단 주심포(柱心包) 양식으로 앞/뒷면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니 이는 후대에 툇마루(퇴칸)를 설치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후면 공포
는 조선 초기 양식임)

건물 천정은 사주(四周)의 귀를 약간씩 접은 우물천정이며 여러 번의 중수를 겪으면서 건물이
조금 변형되긴 했으나 대체로 조선 초기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불단(佛壇)에는 아미타3존
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주위로 아미타후불탱, 칠성탱, 지장시왕도 등의 탱화들이 가득 널려있
다.


▲  옆에서 바라본 정수사 법당

▲  위에서 바라본 법당과 그의 풍만한 맞배지붕

정수사의 존재감을 크게 올려준 법당은 툇마루 앞과 옆구리에 놓인 섬돌에 신발을 벗어두고
들어가면 된다. 가운데(어칸) 문과 좌우 칸 문에는 창살이 곱게 입혀져 있는데 가운데 칸 문
에는 꽃과 꽃병이 묘사되어 있어 화사함을 더해준다.


▲  법당 가운데 문짝에 피어난 꽃창살
아름다운 꽃들이 마치 화석처럼 굳어져 문짝에 달려있는 것 같다.

▲  법당을 크게 돋보이게 만든 툇마루 (옆에서 바라본 모습)

▲  법당 아미타3존상과 지장보살, 관세음보살상
아미타3존상 뒤로 1878년에 제작된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고 3존상
좌우로 근래 덧붙인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3존상의 옆구리를 가득 채워준다.

▲  법당 칠성탱(七星幀)
1878년에 조성된 것으로 치성광여래 등의 7여래와 일광보살 등 칠성(七星)의
주요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있다.

▲  법당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지장탱)

칠성탱과 더불어 1878년에 조성된 것으로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지장보살 두광(頭光) 좌우에 자리한 식구들은 특이하게도 동물 얼굴을 하고 있
는데, 지장보살 앞쪽에 선 왼쪽 동자는 등에 함을 지고 있고, 그 오른쪽 동자는 지장보살이
들어야 될 석장(錫杖)을 대신 들고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이런 식의 지장탱화는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


▲  무려 1,000원을 구석에 머금은 법당 현왕탱(現王幀)

현왕탱은 관련 화기(畵記)가 없어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1851년 정도로 여겨
진다. 그러니 법당을 수식하고 있는 탱화 중 가장 늙은 존재가 된다.
현왕(現王)이란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존재로 죽은 지 3일 뒤에 심판을 진행한다고 하며 그의
판결 여부에 따라 극락이나 지옥행이 결정된다고 한다. 그는 착하게 산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
니 가급적 선하게 살아야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음.
내가 아직 명부(저승)를 가본 적이 없으니;;>


▲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법당 뜨락 좌측에는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지닌 오백나한전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름 그
대로 500명의 나한(羅漢)을 머금은 건물로 근래 지어진 것인데 나한 외에 고려 때 것으로 여
겨지는 건칠(乾漆)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보살상은 바다 건너 개성 땅에서 왔다고 하며 나는 법당만 생각했지 그의 존재를 알지 못
해 지나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오라는 정수사의 뜻인 모양이다. 하지
만 이곳은 이미 3번이나 인연을 지었고 아직도 지우지 못한 미답처가 천하에 수두룩해 일부러
또 찾을 생각은 별로 없다.


▲  겨울 휴업에 들어간 법당 옆 샘터
정수사의 뜻(맑은 물이 나오는 절)과 한자를 바꾸게 만든 샘터로 하얀 피부의
거북상을 짓고 그 주위를 기와돌담으로 둘러 애지중지하고 있다. 허나
겨울 제국이 물을 꽁꽁 앗아가면서 그 맑다는 샘물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과 독
성, 칠성 외에 용왕(龍王)까지 봉안되어 있어 사성각(四聖閣)이란 이름이 더 어울려 보인다.
불에 타서 쓰러진 것을 1974년에 다시 세웠으며, 내부에 담긴 산신과 독성, 칠성, 용왕탱은
그 이후에 조성된 것이다.


▲  정수사에서 바라본 천하
마니산의 벌어진 동쪽 틈 사이로 서해바다와 동검도(東檢島)가 진하게 바라보이고
그들 너머로 강화도를 거느린 인천(仁川) 본토가 흐릿하게 시야에 닿는다.


경내 서쪽에는 가건물로 이루어진 매점 겸 종무소(宗務所)가 있다. 10여 년 전 겨울에 왔을
때는 부엌을 갖춘 셀프식 찻집으로 있었는데, 절 신도와 답사꾼, 산꾼까지 누구든 들어와 차
1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도록 찻잔과 전통차 티백, 주전자, 물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용료는
없었으며 대신 직접 물을 끓여서 차를 타 마시고 사용했던 찻잔은 씽크대에서 씻으면 된다.
그때 같이 왔던 사람과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며 1시간 정도 머물렀던 기억이 정말 엊
그제 같은데 그 추억은 흩어진 나날의 일부가 되었고 찻집 또한 성격이 변해 더 이상 중생들
에게 무료로 차 1잔의 여유를 주지 않는다. (대신 차와 커피를 팔고 있음)

정수사의 다소 야박해진 인심과 왕년의 추억을 같이 되새기며 더 볼거리가 없나 두리번거리니
그때다 싶어 '함허대사 승탑'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나 나의 허전한 마음을 건드린다.
'정수사에 그런 존재가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정표의 지시에 따라 오백나한전 뒤쪽
으로 가니 눈과 진흙으로 얼룩진 산길이 나오고 그 길을 조금 오르니 언덕배기에 조촐하게 생
긴 부도탑이 나를 맞이한다. 그가 바로 마니산 동쪽 자락에 진하게 흔적을 남겼던 함허대사의
승탑(부도)이다.


▲  함허대사 승탑(涵虛大師 僧塔) - 강화군 향토유적 19호

승탑의 주인인 함허대사(1376~1433)는 조선 초기 승려로 고려 때 아주 잘나갔던 충주유씨 집
안이다. (충주 출신임) 전객시사(典客寺事)를 지냈던 유청(劉聽)의 아들로 어머니는 방씨이며
법호는 득통(得通), 무준(無準), 법명(法名)은 기화(己和), 당호는 함허이다.

1396년 관악산 의상암(義湘庵, 어딘지 모름)에서 출가를 했으며 1397년 양주 회암사(檜巖寺)
에서 무학대사(無學大師)에게 법요(法要)를 듣고 여러 곳을 다니다가 1404년 회암사로 돌아와
수도에 정진했다.
1406년 공덕산 대승사(大乘寺)에서 4년 동안 '반야경(般若經)'을 설법했고, 1410년 개성 천마
산 관음굴에서 선을 크게 진작시켰다. 1411년 절을 중수해 승속(僧俗)들을 지도했으며, 1414
년 황해도 평산(平山)의 자모산 연봉사(烟峯寺)로 자리를 옮겨 작은 방을 함허당(涵虛堂)이라
이름 짓고 '금강경오가 해설의(金剛經五家 解說誼)'를 가르쳤다.

1420년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그곳 사찰에 봉안된 옛 고승과 불상, 보살상에게 공양을 하
며 지내던 중, 영감암(靈鑑庵)에 있는 나옹(懶翁)의 진영(眞影)에 제사를 지내고 깜박 잠이
들었다. 그때 꿈에서 어느 신승(神僧)이 나타나 '기화'란 이름과 '득통'이란 호를 지어주었는
데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자신의 법명과 법호(法號)로 삼았다.
1421년 세종(世宗)의 청으로 개성 대자사(大慈寺)에 머물면서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의 명
복을 빌어주었고, 1424년 길상산(吉祥山)과 운악산(雲岳山), 공덕산(功德山) 등을 돌아다니며
설법과 수도에 힘썼다. 그리고 1426년 정수사를 중수해 머물렀으며, 1431년 문경 봉암사(鳳巖
寺)를 중수하여 머물다가 1433년 입적하니 나이는 57세였다.

그의 사리는 그와 인연이 깊은 가평 현등사(懸燈寺), 문경 봉암사, 황해도 현봉사, 인봉사(어
딘지 모름), 정수사에 분배되었는데 정수사는 경내 뒤쪽에 그의 승탑을 만들어 두고두고 중창
자를 기리고 있다.

함허는 무학대사의 법을 이은 선가(禪家)이지만 교종(敎宗)에 대해서도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교학적인 경향도 크게 지니고 있다. 그의 현정론(顯正論)을 통해 그의 선사상(禪思想)에는 현
실생활과 일상적인 생활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유학자들이 불교 배척을 주
창하면서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고 비판한 것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의 유,불,도 삼교일치론은 송나라 계숭(契嵩)이 지은 '보교편(輔敎編)'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불교가 배척당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주장되었다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

그의 열성 제자로는 문수(文秀), 학미(學眉), 달명(達明), 지생(智生), 해수(海修), 도연(道
然), 윤오(允悟) 등이 있으며, '원각경소(圓覺經疏)' 3권, '금강경오가해설의' 2권 1책, '윤
관(綸貫)' 1권,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 1권 등의 저서가 있다. (그 외에 반야참문 1권
도 있으나 전하지 않음)

함허의 넋이 담긴 승탑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넓게 바닥돌을 깔고 그 한복판에 기단(
基壇)을 다진 다음 탑과 머리장식을 올렸다. 옥개석(屋蓋石)은 6각형이지만 신라 후기~고려
초기 승탑의 기본 형태였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탑의 높이는 156
cm, 바닥돌까지 포함하면 164cm 정도이다. 기단부에는 연꽃 장식이 새겨져 있으며 탑은 작지
만 나름 단단하고 균형 잡힌 모습이다.



 

♠  사기리(沙器里)에서 만난 오래된 명소들

▲  사기리 분청사기요지(粉靑沙器窯址) - 강화군 향토유적 18호

함허대사 승탑을 끝으로 정수사 관람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여기서 바로 북쪽에 있는 함
허동천으로 넘어가 사기리 탱자나무와 이건창 생가로 나갈 생각이었으나 함허동천과 가까운
곳임에도 마땅한 길이 없었고 함허대사 승탑 옆으로 그곳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확신이
서질 않아서 쿨하게 그 길을 포기하고 미련 없이 정수사입구로 나왔다.

차들이 수시로 쌩쌩 지나가는 해안남로를 따라 함허동천입구와 탱자나무까지 가야 했는데 다
행히 뚜벅이를 위한 보도를 길 양쪽 사이드에 닦아놓아 차들의 눈치에서 다소 자유로워졌다. 
정수사입구에서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8분 정도 가니 식당과 펜션들로 즐비한 함허동천 입구
이고 다시 6분 정도 북진하니 '사기리 분청사기요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좀 보고 가라며 발
길을 붙잡는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못 이기는 척 그 이정표를 따라 야산
을 조금 오르니 분청사기요지가 폐허의 미학(美學)을 풍기며 바짝 누워있다. (도로에서도 그
존재가 보임)


 ▲  가마터 한복판에 수습된 분청사기 파편과 가마터를 이루던 석재들

이곳은 고려 말~조선 초에 한참 유행했던 분청사기를 만들던 14~15세기 가마터(요지)이다. 가
마터의 모습이 모두 파악되지는 못했으나 지금까지 발견된 규모로 보아 40mx80m 정도로 여겨
지며 깨진 분청사기 파편과 분청사기를 구울 때 쓰였던 굽받침, 가마 벽체로 여겨지는 여러
돌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지금은 비록 폐허의 공간으로 보잘 것은 없지만 이 가마터로 인해 마니산 동쪽 지역이 사기리
가 되었다. 즉 사기그릇을 만들던 동네란 뜻으로 왕년에는 가마터로 제법 바쁘게 살았음을 귀
뜀해준다.

* 분청사기요지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224


▲  사기리 탱자나무 - 천연기념물 79호

분청사기요지를 나와서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3분 정도 가면 이건창생가 정류장 남쪽 들판에
키 작은 나무 하나가 진하게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사기리의 오랜 명물인 탱자나무로 그 앞
까지 도보길을 닦아놓아 관람객의 편의를 배려했다.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마음 놓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북방 한계선으로 늙은 탱자나무 2그루가
전하고 있다. 하나는 갑곶돈대(甲串墩臺)에, 다른 하나는 이곳 사기리로 그중 갑곶돈대(갑곶
진)가 더 북쪽이라 우리나라 탱자나무의 북쪽 끝은 갑곶진이 된다. 나무에 가시가 많아서 성
곽이나 요새에 방어용으로 많이 심기도 하는데 갑곶진 탱자나무는 바로 그 역할로 심어졌다.

사기리 탱자나무는 4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키는 3.8m이다. 2.8m 높이에서 3갈래로 갈라져 마
치 용트림 모습을 하고 있는데 고된 세월에 지친 그를 위해 기둥을 여러 개 깔아 가지를 받쳐
들고 있으나 여전히 정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탱자나무는 보통 4월에 3~5cm 정도의 하얀 꽃이 피며 가을이 되면 열매가 맺으면서 노랗게 변
한다.

* 사기리 탱자나무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135-10

▲  정면에서 바라본 탱자나무

▲  서쪽에서 바라본 탱자나무

▲  동쪽에서 바라본 탱자나무

▲  탱자나무에서 바라본 길상산과
사기리, 선두리 들판


▲  이건창 생가(李建昌 生家) - 인천 지방기념물 30호

사기리 탱자나무 길 건너 북쪽에는 정겹게 토담을 두룬 초가(草家)가 하나 있다. 그 집이 조
선 후기 학자인 이건창의 생가로 'ㄱ' 모습의 9칸 안채와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닦고 3량 가구로 지은 한옥 구조의 초가이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마니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이건창이 강화도에서 말년을 보냈던 19세
기 말로 여겨지며 현재 집은 1996년 강화군에서 복원한 것이다. 안채는 명미당(明美堂)이라
불리는데 천정에 걸린 명미당 현판은 이건창과 친분이 있던 매천 황현(梅泉 黃玹)이 쓴 것이
다. 그렇다면 이건창은 누구일까?

이건창(1852~1898)은 전주 이씨 출신으로 나중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이상학(李象學
)의 아들이다. 아명(兒名)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 鳳藻), 호는 영재(寧齋)로 이곳이
그의 생가로 나와있어 여기서 태어난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원래는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인 이시원(李是遠)이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낼 때 거기서 태어났으며, 선대(先代)
부터 개성에서 계속 살아왔다. 그러니 '이건창 생가'가 아닌 '이건창 가옥'이나 '이건창 고택
','명미당'으로 이름을 갈아야 맞다.
할아버지에게 충의와 문학을 바탕으로 한 가학(家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5살에 문장을 구
사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나 신동 소리를 많이 들었다.

1866년 불과 14세의 나이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응시해 4등인 병과(丙科)로 급제했으나 나
이가 너무 어려 계속 대기발령 상태로 있다가 18세에 비로소 홍문관직(弘文館織)에 등용되었
다.
187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그곳 연경(燕京)에서 황각(黃珏), 장가
양(張家驤), 서보(徐郙) 등과 교유를 했다.

1875년 충청우도(忠淸右道)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도를 암행(暗行)했는데, 충청감사 조병식(趙
秉式)의 비행이 적지 않아 그의 비행을 낱낱이 캐다가 오히려 모함을 받아 벽동(碧潼)으로 유
배를 당했다. 다행히 1년 뒤에 풀려났으나 워낙 강직하고 고집이 있으며 불의를 못 보는 성격
이라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학문이나 닦으려고 했다.
허나 고종이 그의 명성을 듣고
'내가 그대를 아니 전과 같이 잘해달라'
는 친서를 보내며 출사를 권해 1880년 경기도 암행어
사가 되었다. 그는 경기도를 돌면서 관리들의 비리를 파헤치고 흉년으로 고생하는 농민들을
찾아다니며 구휼에 힘썼다. 특히 세금을 감면해주어 백성들로부터 널리 찬양을 받았으며 그를
기리는 선정비(善政碑)가 도처에 세워졌다.

▲  이건창 생가 대문 (문간채)

▲  어설프게 복원된 우물

1884년 모친상과 부친상을 연이어 당해 무려 6년이나 상을 치렀으며 1890년 복귀하여 한성부
소윤(漢城府小尹)이 되었다.
그 시절 왜인(倭人)과 청국(淸國) 잡것들이 서울과 인천 지역에서 가옥과 토지를 마구 사들이
고 있었는데 무능했던 조선 조정은 이를 방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이건창은 다시 팔을
걷어부치고 백성들의 집과 토지를 오랑캐들에게 팔아먹지 못하도록 법을 마련해야 된다고 건
의했다.
그러자 이홍장(李鴻章)의 부하이자 청나라 공사(公使)인 당소의(唐紹儀)가 그 내용을 듣고 발
끈하여 공문을 보내
'청국 사람과의 가옥이나 토지 매도를 금한다는 조항이 조약상에 없는데 왜 금지 조치를 하시
오?'
항의했다. 이에 그는
'우리가 우리 백성에게 금지시키는 건데 조약이 무슨 상관이오?'
답을 했다.
더욱 발끈한 당소의는 이홍장의 항의를 빙자하여 조선 조정에 압력을 가해 금지령을 포기하게
하였다. 허나 그는 꾀를 부려 오랑캐에게 부동산을 판 사람을 다른 죄목으로 다스려 가중처벌
을 가하니 백성들은 부동산을 그들에게 팔아먹을 수가 없었고 청나라 애들도 자연히 부동산
매입이 여의치 못해 포기했다.

1891년 승지(承旨)가 되었으나 1892년 상소 사건으로 전남 보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
다. 그리고 이듬해 함흥부(咸興府)의 난민들을 다스리고자 안핵사(按覈使)로 파견, 함경도관
찰사의 죄상을 가려내 그를 파면시키며 백성들의 가려움을 긁어주었다.
그 소식을 들은 고종은 지방관(地方官)으로 파견되는 관리들에게
'그대가 가서 잘못을 하면 이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
겁을 줄 정도였다. 그만큼 공무를 수행
하는 그의 태도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各部)의 협판(協辦), 특진관(特進
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흔쾌히 거절했으며, 1896년 황해도 해주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이 또
한 거절하고 버티다가 오히려 고군산도(古群山島, 고군산군도)로 유배형을 당했다. 허나 2개
월 후 특지(特旨)로 풀려났고 제2의 고향과 같은 강화도로 넘어가 학문을 하며 유유자적하다
가 1898년 44살의 한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매천 황현이 쓴 명미당 현판의 위엄
- 글씨가 아주 큼직하다.

▲  먼지만 가득한 안채 부엌


이건창은 글씨를 아주 잘 썼는데 송나라 때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의 글씨를 많이 참조
했다. 구한말 학자인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이 우리나라 역대 문장가를 추숭(追崇)할 때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라 하여 9명을 선정했는데, 그 끝에 고른 이가 바로 이건창이었다.
또한 정제두(鄭齊斗)가 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풍을 세운 강화학파(江華學
派)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성품이 곧아 병인양요(1866년) 때 자결한 할아버지의 유지를 따라
쇄국주의를 고집했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 당의통략(黨議通略) 등이 있는데 당의통략은 파당과 문벌을 초
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다룬 책으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부모상으로 강화도에 머물던 시절에 저술한 것으로 워낙 내용이 좋아서 왜정(倭政)이 그 서적
을 바탕으로 조선은 당파싸움을 일삼다 망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비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
다. 즉 조선시대 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해석을 이미 조선 사람이 내린 것이라 우
기며 그것을 기정사실화 시킨 것이다.


▲  소박한 모습의 명미당(안채)

▲  명미당(안채) 마루
마루는 실내화가 준비되어 있어 들어갈 수 있으며 운이 좋으면 양쪽 방도
들어갈 수 있다. (보통은 잠겨있음)

▲  마루 구석에 있는 빛바랜 뒤주
이건창은 저 뒤주에 담긴 쌀의 힘으로 6년에 걸친 부모상도 치르고
당의통략도 저술하고 양명학도 연구했을 것이다.

▲  이건창 생가 측백나무 - 강화군 보호수 180호

이건창 생가 앞에는 약 350년 묵은 측백나무가 솟아있다. 길 건너편 탱자나무와 비슷한 시기
에 식재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높이 10m, 둘레는 1.8m로 이건창도 그의 그늘 맛을 보며 학문
을 연구하고 여러 서적을 작성했을 것이다.


▲  이시원(李是遠)묘

이건창 생가 옆에는 토담을 사이에 두고 무덤 2기가 자리해 있는데 그중 밑에 있는 무덤이 이
건창의 할아버지인 이시원(1790~1866)의 유택(幽宅)이다.
이시원의 자는 자직(子直), 호는 사기(沙磯)로 개성유수를 비롯한 여러 관직을 지냈는데 1866
년 병인양요가 터지고 강화도가 프랑스 양이(洋夷)들에게 어이없이 함락되자 아우 이지원과
함께 죽어서 귀신이 되어 적을 물리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을 하고 말았다. 그 충
절로 나중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정(忠正)이란 시호를 받게 되었다.

이시원 묘는 원래 길상면 길직리에 있었으나 1985년 그의 부인인 청송심씨와 함께 손자가 살
았던 이곳으로 옮겨져 합장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봉분(封墳), 호석(護石), 상석(床石), 비석
까지 싹 새롭게 갈면서 완전 최근에 닦여진 새 무덤이 되어버렸다. 적어도 비석 정도는 옛 것
을 그냥 썼으면 조금이나마 고색의 기운이 있었을텐데 그 점이 아쉽다.

이건창 생가를 둘러보니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그날 목적한 곳을 모두 소화하여 더 이상 욕
심도 없고 일몰이 지척이라 더 이상 둘러보기도 어렵다. 하여 그 정도로 만족하며 생가 관리
인에게 인사를 건네고 정류장으로 나가 곧 들어선 강화군내버스 3번(강화터미널↔화도, 온수
리)을 타고 강화읍으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이건창 생가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167-3 (해안남로1114번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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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에 묶여있는 강화도 옆구리의 커다란 섬, 교동도 여름 나들이 ~~ (교동읍성, 교동향교, 성전약수, 화개사, 강화나들길 9코스)

 


~~~~~  강화 교동도 나들이
~~~~~

▲  화개산 숲길

▲  교동향교

▲  교동읍성

 


 

강화도(江華島)와 황해도 사이에는 교동도란 커다란 섬이 떠있다. 예전에는 강화도 창후
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으나 2014년 7월,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1969년에 연륙된
강화도와 더불어 한반도의 어엿한 일원이 되었다. 육지(김포시)와 강화도(강화군), 강화
도와 교동도 등 바다에 놓인 다리를 2개나 건너야 되나 섬을 잇는 다리가 생김으로써 더
이상 날씨와 바다의 눈치 없이 차량으로 마음 편히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오랜 세월 목말라오던 교동도와 흔쾌히 인연을 짓고자 여름의 어
느 평화로운 날 아침, 길을 떠났다.
서울 서부와 일산신도시, 김포(金浦), 강화대교를 지나 오전 11시 반에 강화터미널에 도
착했다. 교동도 버스 시간까지는 아직 40~50분 정도 남아있어 환승시간도 연장할 겸, 강
화읍내로 나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여럿 구입하며 시간을 때웠
다. 무더운 날씨긴 했으나 바다에 감싸인 섬이라 여름 제국의 열기(熱氣)는 그리 거세진
않았다.

드디어 교동도(喬桐島)의 새로운 빛이자 발로 등장한 강화군내버스 18번(강화터미널↔월
선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허나 버스는 벌써부터 초만원이다. 다리 개통으로 물이 잔
뜩 오른 교동도 나들이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교동도까지 서서가야 되는가?' 우울한 마음 가득했으나 나에게는 꿩 대신 닭을 잡을 권
리는 없었다. 버스 아니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씩 사람이 빠져 다리 이전
인 인화리에서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교동대교 직전에는 인화리 검문소가 매의 눈으로 섬을 찾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다
리가 뚫리긴 했어도 교동도는 여전히 예민한 민통선이자 이 땅 최전방의 하나로 마치 군
사정권 시절로 강제 되감기를 당한 듯, 검문도 조금 까칠하다.
검문소에 이르면 군인아저씨의 통제에 따라 승객들은 버스에서 내려 검문소에 마련된 문
서에 이름과 연락처를 쓰고 신분증 검사를 받는다. 여럿이 온 경우에는 1명만 내려 작성
하면 되나, 상황에 따라 모두 검사를 받을 수 있으니 신분증은 꼭 지참해야 뒷탈이 없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다.
개인 차량으로 왔을 경우, 차에서 내려 신분증 검사와 이름, 연락처 등을 적고 통행증을
받는다. 통행증은 섬에서 나올 때 반환하면 된다.

승객이 많은 탓에 검문 시간이 길어져 버스는 약 7~8분 정도 그 육중한 바퀴를 멈추었다.
마치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국경선에서 출국수속을 밟는 기분이랄까?? 그 까칠한 절차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탑승하자 잠시 늘어졌던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수
평선 너머의 숨겨진 별천지로 인도할 것 같은 교동대교로 들어선다.

교동대교는 강화도 양사면 인화리와 교동면 봉소리를 잇는 3.44km의 연륙교로 2008년 9월
에 짓기 시작했다. 원래 2012년 개통 예정이었으나 바다 갯벌에 설치된 기초 말뚝이 2011
년 중순 손상되면서 공사 기간이 다소 늘어났다. 2014년 6월 20일 임시 개통을 했고, 10
일 뒤인 7월 1일 정식 개통되어 교동도의 새로운 관문이 되었다.
공사비는 총 904억 원이 소요되었으며, 다리 밑은 서해바다와 검은 갯벌이고, 바다 북쪽
은 바로 황해도(黃海道)로 북한 땅과 가장 가까운 바다 다리가 바로 교동대교가 되겠다.


 

♠  교동도 입문 (교동읍성)

▲  푸르게 익어가는 교동평야 (평야 너머로 보이는 섬이 석모도)

교동대교를 건넌 버스는 봉소리와 고구저수지, 교동도의 중심인 대룡리, 교동향교가 있는 읍
내리(邑內里)를 거처 섬 동쪽에 자리한 월선포에서 바퀴를 접는다. 월선포는 교동도의 옛 관
문으로 2014년 6월까지 강화도 창후리를 잇는 뱃편이 운행했다.

※ 교동도(喬桐島)는 어떤 곳인가?
교동도는 약 47.1㎢(또는 46.9㎢)의 넓은 섬으로 논 25.89㎢, 밭 2.57㎢, 임야 11.45㎢를 지
니고 있다. 다른 섬에 비해 유독 논이 넓은 편이라 마치 육지의 너른 평야를 보는 듯 한데 이
들 논을 교동평야(喬桐平野)라 부른다. 섬에 이렇게 너른 논이 있게 된 것은 고려 말부터 자
급자족을 위해 간척사업과 경지 개척을 꾸준히 벌인 탓이다. 게다가 해발 10m 이하의 땅이 섬
의 약 ⅔를 이루고 있어 경지 개척에도 매우 용이했다.
조선과 왜정(倭政)을 거쳐 현대까지 계속 땅을 다지고 수리시설을 개량하는 등 농업에 전념했
으며, 화개산 북쪽에는 섬 호수치고는 꽤 넓은 고구저수지가 있어 교동평야의 많은 농경지를
적셔주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농업에 집중한 결과, 자급자족을 넘어 다른 지역까지 농산물을 내놓고 있으
며, 교동도 쌀은 질이 좋기로 명성이 높다. 어느 통계를 보니 교동도에서 1년간 생산된 쌀로
교동도 사람들이 약 58년, 강화군민이 약 4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그만큼 땅이 비
옥하다. 그래서 옛날부터 섬에 부자가 많았으며, 육지 사람들에 비해 전혀 아쉬울 것이 없어
교동민국이란 말도 생겨났다. 쌀 외에 보리와 콩, 감자, 인삼, 밤, 대추, 버섯 등의 농산/임
산물도 풍부하게 나온다.

섬 동쪽에 솟은 화개산(260m)은 섬의 지붕이며, 화개산 외에는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100m 이
하의 구릉들이 여럿 솟아있다. 해안선은 서해안치고는 단조로우나, 죄다 갯벌이다. 게다가 간
만의 차가 커서 선박 출입도 썩 편하지 못하다. 월선포 등의 항구가 있으나 조그만 수준이며,
겨울에는 해안의 유빙(流氷)과 북한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으로 강화도보다 좀 춥다.

교동도 동쪽에는 그를 거느리는 강화도가 자리해 있고, 남쪽에는 역시 강화도에 속한 석모도(
席毛島)가 있다. 그리고 서쪽은 황해도 연안군(延安郡), 북쪽은 황해도 배천군(白川郡)으로
모두 북한이다. 황해도 땅은 섬에서 불과 2~3km 거리에 불과해 섬 북쪽 해안과 화개산에서 뻔
히 바라보인다. 그 땅도 우리 땅이 분명하건만 그곳에는 북한이란 이상한 나라가 들어서 이렇
게 가까운 거리임에도 70년 이상 건너가질 못하고 있다.

교동도는 북방한계선(NLL)의 동쪽 시작점으로 강화도와 교동도 북쪽 바다는 남한과 북한의 완
충지대인 중립구역이다. 교동도 일대는 민통선으로 지금은 그나마 덜해지긴 했지만 출입이 썩
자유롭지 못했으며, 농업 외에는 개발이 어려워 1970~80년대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남북분단의 비극이 교동도의 시간까지 막아버린 것이다.

지금은 하나의 섬으로 되어있지만 호랑이가 담배맛을 알기 이전에는 개화산과 율두산, 수정산
을 중심으로 3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교동평야에는 조수가 흘렀다고 하며, 대자연의
위대한 힘으로 이들 섬은 점차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석모도 상주산 사이의 바다가
육지화되어 사람들이 내왕했다가 1578년에 다시 바다가 되어 간조 때 외에는 왕래하지 못했다
는 기록이 있어 후빙기(後氷期) 이후 해면 변동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교동도는 고구려 때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景德王) 시절에 교동(喬
桐)으로 이름이 갈렸다. 이때 혈구진(穴口縣, 강화도)에 속했는데, 고려 명종(明宗) 때 감무
(監務)를 두어 섬을 통치하게 하면서 강화도에서 분리되었다.
고려의 끝 무렵인 우왕(禑王, 재위 1374~1388) 시절에는 피폐된 수군을 재건하고 정신없이 날
뛰는 왜구(倭寇)를 때려잡고자 전라도에서 바다에 익숙한 어부와 바닷가 사람들을 징발했다.
그들에게 경작지를 주는 조건으로 강화도와 교동도로 이주시켜 수군 훈련을 시켰는데, 이때
최무선(崔茂宣)이 개발한 화약을 이용해 화포(火砲) 훈련까지 병행했으며, 최무선은 단련된
그들을 데리고 1380년 금강 하류인 진포에서 왜구 500척을 때려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것이
진포대첩(鎭浦大捷)이다.

1395년에는 만호(萬戶)와 지현(知縣)을 두었고, 이후 교동현으로 삼아 현감을 파견했다. 1629
년 경기수영(京畿水營)을 교동도로 이전하면서 강화도에 버금가는 부(府)로 승격되고 수군절
도사(水軍節度使) 겸 교동부사를 두었으며, 1633년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교동에 두면서
경기도와 충청도, 황해도의 바다를 관리했다.
1777년 교동부를 현으로 낮추었다가 1779년 삼도통어사를 강화로 옮기면서 교동부 겸 방어사(
防禦使)로 승격되었으며, 1789년 삼도통어영이 다시 교동으로 돌아왔다. 1866년에도 이와 비
슷한 일이 있었고, 1884년 해방영(海防營)에 통어사가 이속되면서 부사 겸 통어사로 격이 조
정되었다.
1895년 행정개편으로 강화에 일시 통합되었으나 1896년 교동군으로 분리되었으며, 1914년 강
화군에 편입되어 개화면과 수정면 2개 면을 두다가 1934년 교동면으로 통합되었다.

해방 당시 인구가 8,600명이었으나 6.25이후 실향민들이 북한과 가까운 이곳으로 대거 넘어오
면서 1965년에 12,443명에 달하기도 했다. 허나 민통선이라 개발도 거의 안되고 점차 낙후되
면서 인구가 감소해 현재는 3,000명대까지 떨어졌다.
6.25이전에는 4개의 정기연락선이 강화도와 황해도를 이어주었으나 6.25이후 강화도 외에 모
두 길이 끊기면서 외로운 섬이 되었다. 게다가 민통선이라 방문도 좀 까다롭고 교동도의 이
름 3자가 천하에 그리 알려지지 못해 실향민 외에 외지인의 방문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교
동대교가 닦이면서 섬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었고, 관광객과 답사/등산/낚시 수요가 늘면
서 차량의 왕래가 폭증했다. 다리로 인해 섬은 서서히 물이 오른 것이다.

교동도에는 등산 명소로 부상하고 있는 화개산을 비롯해 교동향교, 교동읍성, 화개사, 연산군
유배지, 대룡시장 등의 명소가 있으며, 강화도 둘레길인 강화나들길 가운데 2개 코스가 섬에
닦여져 교동도에 새로운 악세사리가 되고 있다. 또한 지엄한 민통선이라 개발도 오랫동안 피
해가면서 1960~80년대 농촌마을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염원이 없어 그야말로 청정한 곳
이다.
 
섬까지 강화군내버스가 들어오지만 섬의 동부인 화개산 주변 봉소리, 대룡리, 읍내리 지역만
운행할 뿐, 그외 지역은 대룡시장에서 마을버스를 타거나 택시, 도보, 개인 차량을 이용해야
된다.
교동도의 중심은 대룡리로 면사무소가 있으며, 조그만 대룡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섬 서부로
갈때는 이곳에서 들어가면 된다.
육지와는 가깝지만 은근히 진입이 까칠한 곳이라 고려와 조선 때 유배지로 널리 쓰였으며 서
해바다와 예성강(禮成江), 한강이 만나는 지리적 위치로 군사적 요충지이자 교역지로 바쁘게
살아갔다.


▲  교동읍성(喬桐邑城) - 인천 지방기념물 23호

교동도에서 가장 먼저 문을 두드린 곳은 교동도의 옛 중심지인 교동읍성이다. 화개사입구 정
류장에서 남쪽으로 난 시골길을 조금 들어가면 장대한 세월에 형편없이 짓눌린 교동읍성과 남
문이 그 초췌한 모습을 비춘다.

교동읍성은 교동도에 경기수영이 설치된 1629년에 축성되었다. 성의 둘레는 약 430m로 동문과
남문, 북문 등 3개의 성문을 두었으며 모두 옹성(甕城)을 둘렀다.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
문은 유량루(庾亮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불렸는데, 1753년 여장을 고쳐 쌓았고, 1884
년에 남문을 수리했다. 바로 이 읍성(邑城) 안에 경기수영과 삼도통어영, 교동 고을의 관아가
있었다.

왜정 때 관리소홀과 왜정의 악의적인 훼손으로 동문과 북문은 쥐도새도 모르게 녹아 없어졌으
며, 성곽 역시 거의 앉은뱅이가 되었다. 남문은 다행히 모습은 건졌으나 1921년 폭풍우로 붕
괴된 것을 1975년에 해체,복원했으며 현재 남문과 그 좌우 성벽, 화개사입구에서 남문으로 넘
어가는 길목 등 약 300m 정도만 헝클어진 모습으로 남아있다. 제 아무리 장대했을 읍성도 결
국 세월과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모래성에 불과했던 것이다.


▲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린 교동읍성 남문(南門)

바다를 바라보고 선 남문은 문루를 상실한 채, 홍예문과 성벽, 옹성 일부만 남아있다. (최근
에 문루가 복원됨)
문 주변은 하얀 피부의 성돌이 상당수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 상당수는 1975년에 복원하면서
새로 끼어 맞춘 것이다. 그 좌우에는 고색의 때로 얼룩진 성돌이 가득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  남문 서쪽 성곽과 옹성의 흔적

▲  돌담처럼 낮아진 남문 동쪽 성곽


▲  남문 앞에 웅크리고 앉은 비석의 귀부(龜趺)

남문 앞에는 비석의 일부인 조그만 귀부가 누워있다. 거북 머리와 비석을 꽂던 비좌(碑座)만
남아있는데, 정작 알맹이인 빗돌이 없어 무엇을 머금던 비석이었는지는 귀신도 모른다. 아마
도 왜정 때 저 지경이 된 듯 싶은데, 교동읍성 축성/보수 관련 내용을 담은 비석으로 여겨진
다. (정답은 없음)
하지만 귀부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으니 아무리 여기서 답을 내놓은들, 한낱 부질없는 메아리
에 불과하다.


▲  귀부의 뒷모습
귀엽게 표현된 꼬랑지가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 같다.

▲  풍년예감~! 남문 앞에 펼쳐진 교동평야

▲  남문 안쪽

교동읍성 남문 동쪽에는 교동부 관아터와 황룡우물,  연산군(燕山君) 유배지 등의 명소가 있
다. 나는 이들의 존재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남문 주변만 둘러보고 미련 없이 교동향교로 넘
어가고 말았다.
허나 늘 변명이긴 하지만 다음이란 것이 있으니 그리 아쉽지는 않다. 어차피 서울과 가까운
곳이라 나중에 다시 인연을 지으면 된다.

* 교동읍성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577일원

▲  성문에 새겨진 남루(南樓) 글씨
성문의 성격과 이름을 말해준다.

▲  삼도(三道)~~ 문(門)이라 새겨진 글씨
여기서 삼도는 삼도통어영을 뜻한다.


▲  금지된 남문 안쪽 성벽
한때 잘나갔던 교동읍성은 이제 무너지는 것을 걱정해야 될 처지가 되었다.
읍성 보호를 위해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니 절대로 성벽을 오르지 말자~

▲  교동읍성의 아련한 흔적 (화개사입구에서 남문으로 넘어가는 길목)

▲  화개사입구 정류장에서 바라본 화개산(華蓋山)의 위엄


 

♠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로 꼽히는 교동향교(喬桐鄕校)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8호

▲  교동향교 입구에 자리한 읍내리 비석군(碑石群)

교동읍성을 둘러보고 화개산 남쪽 자락에 안긴 교동향교를 찾았다. 화개사입구 정류장에서 교
동향교와 화개사를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화개산 쪽으로 1분 정도 들어가면 오래된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인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면 화개산과 화개사, 오른쪽으로 가면 교
동향교이다.

3거리에 무리를 지어 둥지를 튼 이들 비석은 총 40기로 '읍내리 비석군'이란 이름으로 살아가
고 있다. 이들은 읍내리 교동양조장 앞 비석거리에 있었는데, 1970년대에 교동도의 옛 역사를
정립한다는 뜻에서 옛 교동도의 관문인 남산포길로 옮겼다가 1991년 강화군과 교동향교 유림
들이 지금의 위치로 모두 집합시켰다.

비석 대부분이 교동도를 다스린 교동부사와 삼도통어사, 방어사(防禦使)의 선정비(善政碑)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이다. 즉 그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인 것이다. 그들 중에 정말로 비
석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선정을 베풀고 큰 업적을 남긴 관리도 있겠으나 공덕이 쥐뿔도 없음
에도 강제로 세우게 한 것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돈
을 뜯어가 자신의 배때기를 불린 관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비석의 주인공이 과분에 넘치는 선정비를 누리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곳의 역사를
조금씩 머금은 교동도의 소중한 일기장으로 그들을 통해 누가 언제 이곳을 다스리고 거쳐갔는
지를 귀뜀해준다.

조선 중기와 후기, 20세기 초반에 걸쳐 지어진 비석들로 그중 앞줄에 자리한 3기는 특이하게
가로로 누워있는데, 이들은 거사대(去思臺)라 불리는 비석이다.


▲  교동향교 홍살문

비석군에서 교동향교로 가다보면 향교의 정문인 홍살문이 마중을 한다. 홍살문은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차가운 모습으로 궁궐과 관아, 향교, 왕릉 입구에 주로 세우는데 문 바로 옆에는 무
조건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下馬碑)가 우두커니 서 있고, 그 옆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
다. 문 앞에 바리케이드 같은 것이 쳐져 있고, 차량 출입금지를 알리는 현대판 하마비가 곁에
서 있어 차를 타고 온 이들은 주차장에서 무조건 내려서 걸어가야 된다. 그러니 하마비의 '마
(馬)'만 달라졌을 뿐, 비석의 기능은 여전히 유효하다.


▲  지엄함이 여전한 하마비의 위엄

보통 하마비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 있으나 이곳은 '수령변장하마비(守
令邊將下馬碑)'라 쓰여 있다. 즉 수령과 변장, 그리고 그 밑은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홍살문과 하마비는 거의 빈껍데기가 되었으나 이곳 하마비의 위엄은 여전하
여 그 앞에서 차를 두고 걸어가야 된다.


▲  교동향교 외경

화개산 남쪽에 터를 닦은 교동향교는 고려 중기인 1127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원래는 화
개산 북쪽 자락에 있었다고 하며, 이 땅에 지어진 최초의 향교(鄕校)로 널리 알려져 있다.

향교란 나라에서 각 고을에 세운 중등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에는 서당을 졸업한 학생들이 진
학하여 공부를 했다.
1286년에 유학제거(儒學提擧)로 있던 회헌 안향(晦軒 安珦)이 몽골(원나라)에 갔다가 공자(孔
子)의 초상화를 들고 귀국했는데, 배를 타고 개경(開京, 개성)으로 오다가 개경 바로 밑에 자
리한 교동도에 잠시 들려 교동향교에 그 초상화를 봉안했다고 한다. 고려 제일의 국립 교육기
관으로 지금의 서울대와 같은 국자감(國子監)까지 제치고 지역 향교에 불과한 이곳에 가장 먼
저 공자상이 봉안될 정도라면 교동향교가 당시 꽤 잘나갔던 모양이다.
그 이후 각 고을에 공자와 맹자, 최치원(崔致遠) 등 중원대륙과 신라, 고려의 주요 유교 성현
(聖賢)의 위패를 봉안한 문묘(文廟)가 설치되었다. 그러니 이 땅 최초의 향교이자 유교 성현
을 봉안한 최초의 향교란 타이틀까지 지니게 되었다. 향교 문묘는 바로 대성전으로 이때부터
교육과 제사 2가지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1741년에 지부(知府) 조호신(趙虎臣)이 읍성 북쪽인 지금의 자리로 향교를 옮겼으며, 1966년
에 수리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대성전과 명륜당, 동/서무, 동/서재, 제기고, 내삼문,
외삼문 등의 건물이 있으며, 향교 바깥에는 성전약수란 유명한 약수가 있다. 향교 건물은 모
두 18세기 이후 것들로 고려의 흔적은 싹 사라졌으며, 안향이 가져왔다는 공자 초상화도 전설
속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방의 중등교육을 담당하던 향교는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서서히 교육 기능을 잃
게 되며, 오로지 제사 기능만 남아 거의 빈껍데기가 되어버렸다.


▲  계단을 늘어뜨린 교동향교 외삼문(外三門)

향교는 조선시대에 전 고을에 설치되었다. 그러다보니 옛 고을 중심지에는 꼭 향교가 남아있
기 마련이다. 허나 향교는 고리타분한 유교의 공간이라 건물의 모습도 비슷비슷하고, 볼거리
가 풍부한 절과 달리 두 눈이 호강할만한 볼거리도 별로 없으며, 향교 상당수가 속세(俗世)에
폐쇄적인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어 내부 관람도 그리 쉽지가 않다. 또한 향교의 존재감도 너무
없어 나들이/답사 수요도 별로 없는 실정이다.

허나 교동향교만큼은 사정이 180도 다르다. 처음에는 관람객도 거의 없는 썰렁한 향교를 생각
했으나 정작 와보니 글쎄 관람객들로 북적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관람객이 많은 향교는
난생 처음이라 생소한 풍경에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교동대교 개통으로 교동도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나 향교 또한 그 덕을 제대로 본 탓이지만 화개산, 교동읍성과 더불어 섬의 주요
명소이자 교동도를 소개하는 정보에도 교동향교가 크게 다뤄지고 있어 교동도에 왔다면 꼭 들
려야 되는 필수 명소로 등극을 했다.
또한 향교가 화개산 산길의 기점인 화개사와 매우 가깝고 교동읍성과 강화나들길이 지척에 있
어 위치도 좋다. 게다가 문화유산해설사도 머물고 있어 향교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으니
교동도에 왔다면 1번 꼭 들려보도록 하자.

향교는 사방을 돌담으로 둘렀다. 남쪽에 바깥과 이어지는 외삼문을 냈는데, 문 앞에는 3줄로
이루어진 돌계단이 펼쳐져 있다. 외삼문을 이루는 3개의 문 가운데 오로지 동쪽 문만 열려있
어 그 문을 통해 향교로 들어서면 된다.


▲  교동향교 명륜당(明倫堂)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명륜당이 정면을 막고 선다. 명륜당은 공자왈~맹자왈~! 공부를 하던
교육 공간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교육 기능은 이제 없어졌으니 명륜
당 또한 한가로운 신세가 되어 섬돌에 신발이 가득했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 한다.

명륜당 좌우에는 향교 학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다른 향교와 달리 특이하게도 '
ㄱ'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재는 향교 사무실로 쓰이고 있으며, 툇마루가 서재보다 넓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동재 옆에는 방을 따스하게 보듬던 온돌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을 긴장시키
던 굴뚝이 서 있는데, 그를 손질하면서 너무 시멘트로 떡칠을 한 점이 다소 아쉽다.

▲  서재(西齋)

▲  동재(東齋)

▲  무늬만 남은 동재 굴뚝

▲  굳게 닫힌 내삼문(內三門)


▲  명륜당 뒷쪽에 비뚤게 자리한 노룡암(老龍巖)

명륜당 뒷쪽에는 노룡암이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가 기울어진 모습으로 서있다. 그의 피부
를 가만히 살펴보면 조그만 글씨들이 깨알같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원래 축대에 쓰
인 돌로 교동고을 동헌터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다. 돌의 상태상 반듯하게 세우기가 애매하
여 저리 비뚤어진 모습으로 세운 것 같다. 어차피 이 나라도 단단히 비뚤어져있으니 돌 하나
비뚤어지게 세운다고 문제될 것은 없다. 글씨만 알아보면 되니까 말이다.

노룡암은 교동고을 관아인 동헌(東軒) 북쪽 뜨락 층계 밑에 있었다. 그러니까 뜨락 석축의 일
원으로 있던 것이다. 층계 위에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는데, 그중 오래된 소나무가 있고, 그
밑에 축대가 있었다. 1717년에 충무공 이순신의 5대손인 충민공(忠愍公) 이봉상(李鳳祥, 1676
~1728)이 그 축대에 늙은 용의 바위란 뜻에 '노룡암' 3자를 새겼는데, 1773년에 이봉상의 손
자인 이달해(李達海)가 이를 기리고자 석축 밑에 글을 새겼다.
1820년 통어사 이규서(李奎書)가 '호거암장군쇄풍(虎距巖將軍灑風)' 7자를 새겼는데, 이는 '
호거암장군이 풍기를 깨끗히 했다'는 뜻이며, 여기서 호거암장군은 이봉상이다. 1831년 봄에
석대로 쌓아있던 것을 1987년 교동향교로 옮겼다.

노룡암 뒷쪽 높은 곳에는 담장을 두른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으로 가려면 내삼문을 거쳐야 되
는데, 내삼문은 향사일(享祀日) 외에는 좀처럼 열리지 않으므로 제기고로 우회해서 들어가면
된다. 제기고는 말그대로 제사 도구를 간직한 창고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
다.


▲  제사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  향교의 중심, 대성전(大成殿)

향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향교의 중심 건물인 대성전이 자리해 있다. 남쪽을 바라보
고 있는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동이족 출신인 문선왕(文宣王) 공자
를 비롯해 증자(曾子), 안자(顔子), 맹자(孟子), 자사(子思) 등 초기 유교를 정립한 5명이 봉
안되어 있다.
청록색 피부를 지닌 대성전 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 그 안에는 공자 등 5인의 위패와 위패를
간직한 상(床), 제사 도구 등이 들어있다. 그 앞뜨락 좌우에는 설총(薛聰)과 최치원, 정몽주,
이이(李珥) 등 신라와 고려, 조선의 유학자 20인을 봉안한 동무(東憮)와 서무(西憮)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들은 대성전의 보조 공간이다보니 대성전보다 볼품이 많이 떨어진다.

▲  한쪽 문이 열린 서무

▲  동무 (그 옆에 제기고와 명륜당으로
내려가는 문이 있다)


▲  향교 서쪽에 있는 성전약수(成殿藥水)

교동향교에 왔다면 꼭 맛봐야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대성전 서쪽 담너머에 있는 성전약수이
다. 이 땅에 많은 향교를 가보았지만 무려 약수터까지 갖춘 향교는 이곳이 처음이다.

성전약수는 교동도 제일의 약수로 위장병과 피부병, 아토피에 효험이 있다고 전한다. 게다가
향교 유생들이 이 약수 덕분에 과거에 많이 붙고 문성(文成)을 이룬 이가 많았다고 한다. 허
나 물은 평범한 맛을 지닌 약수로 특별한 것은 없으며, 과연 효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향
교를 수식하는 오랜 명물이자 꿀단지로 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대성전 밑에서 물이 발
원하여 성전약수라 불리니 그야말로 향교 스타일의 약수터 이름이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148 (교동남로 229-49 ☎ 032-932-9457)
* 향교 관리소에 문화유산해설사가 있다. 근무시간은 9~18시(겨울은 17시)로 휴일에는 향교에
  늘 머물러 있으며, 아침 시간과 오후 늦은 시간, 그리고 평일에 왔을 경우 관리소를 찾거나
  위의 연락처로 연락을 하면 향교 해설을 들을 수 있다.


▲  가늘게 쏟아지는 성전약수

▲  향교에 왠 하트 모양이??
성전약수 주변에 돌을 모아서 쌓은 하트 모양의 조형물이 있다. 사랑이란 말을
꺼내면 당장이라도 회초리를 1대 맞을 것 같은 그런 공간에서 이런 뜻밖에
존재를 보게 될 줄이야..? 속세를 향한 교동향교의 수줍은 마음은 아닐까?

▲  서쪽에서 바라본 교동향교
향교 서쪽에는 성전약수와 화장실, 관리소, 화개사로 통하는 숲길이 있다.


 

♠  화개산 남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
교동도 화개사(華蓋寺)

▲  교동향교에서 화개사로 이어지는 숲길 (교동다을새길)

교동향교 서쪽에는 화개사로 통하는 울창한 숲길이 있다. 이 숲길은 도보길 유행에 따라 강화
군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강화나들길의 일원인 강화나들길 9코스(교동다을새길)의 일원이다.

교동도에는 강화나들길 9코스와 10코스 등 2개의 길이 닦여져 있는데, 9코스는 월선포에서 교
동향교~화개사~화개산 정상~석천당~대룡시장~남산포~교동읍성~동진포를 거쳐 다시 월선포로
돌아오는 16km의 코스로 화개산 주변을 1바퀴 돈다. 그리고 강화나들길 10코스(교동도 머르메
가는길)는 대룡리에서 난정저수지~수정산~금정굴~애기봉~죽산포~머르메~양갑리마을회관~미곡
처리장을 경유하여 대룡리로 돌아오는 17.2km의 코스로 교동도 서쪽을 돈다. 이들은 교동도의
명물만 골라서 짜놓은 알짜배기 탐방로라 나중에 꼭 거닐고 싶다.

교동향교에서 화개사로 가는 숲길은 선녀(仙女) 누님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림 같
은 흙길이다. 나무가 촘촘해 제아무리 뜨거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어림도 없다. 그 길을 2분
정도 가면 화개사로 오르는 포장길이 나타나며, 여기서 오르막길을 6분 오르면 교동도에서 가
장 오래된 절인 화개사가 빼꼼 모습을 비춘다.


▲  교동향교~화개사 숲길 (교동다을새길)

▲  조촐한 화개사 경내 (눈에 보이는 것이 거의 전부임)

화개산 남쪽 자락에 자리한 화개사는 숲에 감싸인 조그만 산사(山寺)이다. 서울 조계사(曹溪
寺)의 말사(末寺)로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화개산 산신도 모를 정도이나 고려 후기에 목은 이
색(牧隱 李穡, 1328~1396)이 이곳에서 독서를 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있어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진사대부의 핵심인 이색이 찾았을 정도라면 지
금과는 달리 제법 이름이 있던 절임이 분명하다.

조선 후기까지 딱히 전해오는 사적(事蹟)은 없으나 1690년대에 이형상(李衡祥)이 지은 '강도
지(江都誌)'에 절 이름이 나와있고,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이 쓴 가람고(伽藍考)에 화정
사(火鼎寺)라는 이름으로 나와있어, 조선 중/후기에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했던 모양
이다.
왜정 때는 전등사(傳燈寺)의 말사가 되었으며, 1915년 절이 붕괴된 것을 1928년에 정운(晶雲)
이 중건했다. 1937년 이후 재정 문제로 문을 닫은 적이 있었고, 1967년 화재로 무너진 것을
이듬해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요사(寮舍)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근래에 다시 지어진 탓에
고색의 내음은 진작에 말라버렸다. 지정문화재는 하나도 없으나 조선시대 승탑 1기가 있고,
200년 묵은 장대한 소나무가 서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조금이나마 속삭여준다.

화개산으로 오르는 기점의 하나로 강화나들길 9코스가 이곳을 지나가며, 정상까진 넉넉잡아
30분 정도 걸린다. 산 중턱에 위치하여 서해바다와 석모도가 바라보이며, '절간같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고적한 산사의 멋을 누릴 수 있다.


▲  화개사 승탑(僧塔)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초췌한 모습의 승탑(부도탑) 하나가 마중을 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무척 초라해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로 겉모습과 달리 무척
값비싼 존재이다. 그러니 꼭 살펴보고 가자.
이 승탑은 언제 지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탑의 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것으로 여겨지며
, 동그란 탑신(塔身)과 지붕돌, 두툼히 솟은 머리장식이 전부인 간결한 모습이다. 탑 밑에는
돌과 흙으로 대충 네모나게 바닥돌을 닦았는데, 근래 닦여진 것이라 아마도 제자리는 아닌 듯
싶다.


▲  화개사에서 바라본 서해바다와 석모도

▲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소나무 - 강화군 보호수 4-9-73호

근래 지어진 여염집 모습의 대웅전 앞에는 자태가 아름다운 소나무가 웅장하게 서있다. 나이
가 약 210년 정도로 높이 14m, 둘레 1.6m의 휼륭한 덩치를 지녔는데 나무가 드리운 시원한 그
늘이 조그만 경내를 거의 커버하고 있어 휼륭한 정자나무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의 그늘 앞
에서는 여름 제국도 슬쩍 비켜간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489-1 (교동남로 229-9, ☎ 032-932-4140)


▲  문무정(文武井)터

화개사를 둘러보고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을 조금 오르면 문무정터가 나온다. 지금이야 외마
디 전설이 되어 바람결에 사라졌지만 이곳에는 원래 동쪽에 문정(文井), 서쪽에 무정(武井)
등 2개의 샘물이 있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문정에 물이 많으면 문관(文官)이 많이 배출되고, 무정에 물
이 많으면 무관(武官)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샘물의 물빛이 바다 건너
송가도(석모도 북부)까지 비추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곳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졌다고 한다
. 그래서 이를 해결하고자 절치부심하던 중, 노승(老僧)이 알려준 방법에 따라 소금으로 우물
을 메우니 비로소 진정이 되었다고 한다.
송가도 사람들은 그 노승이 너무 고마워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는데, 현재는 남아있지 않으
며, 우물은 나중에 하나로 합쳐졌다가 메워졌다. 이후 교동도에서 문관과 무관 배출이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과연 문무정이 교동도 사람들의 문/무과 급제에 크게 영향을 주었는지는
확인할 길은 없으나 앞서 교동향교 성전약수와 더불어 이곳 사람들이 입신양명을 기원하고 이
를 상징하던 곳으로 보면 될 듯 싶다.


▲  정상을 향한 열망 ~ 화개산 산길 (문무정 이후)

▲  돌로 수북한 화개산 돌너덜길

섬 사람들의 출세 욕심이 담긴 문무정을 지나 화개산 정상으로 향했다. 자연이 닦아놓은 느긋
한 산길이 계속 이어져 그리 힘들지는 않는데, 삼삼하게 우거진 나무 사이로 서해바다와 석모
도 등의 섬이 바라보인다.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화개산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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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6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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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개성 땅이 아련히 바라보이는 강화도의 북녘을 거닐다 ~~~ (연미정, 월곶돈대, 강화나들길, 강화평화전망대, 예성강)

 


'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 '
(북한 땅이 바라보이는 연미정, 강화 평화전망대)

▲  강화 연미정

▲  월곶돈대

▲  강화평화전망대 망배단


 


강추위를 앞세우며 천하를 꽁꽁 얼리던 무심한 겨울 제국, 그 제국의 유일한 꿀연휴인 설날이 다가왔다.

이번 연휴는 다행히도 제국(帝國)의 기운이 다소 누그러들어 길을 떠나기에는 좋았다.
여 처음에는 경기도 동부로 가려고 했으나 갑자기 강화도 연미정이 격하게 땡겨 서쪽으로
쿨하게 방향을 돌렸다.

연미정은 강화도(江華島) 동북쪽 끝에 매달린 오랜 명소로 금지된 바다 너머로 역시나 금
지된 땅 북한이 바라보인다. 참으로 순진했던 어린 시절에는 내가 장성할 때쯤 되면 반드
시 통일이 될거라 기대를 했었지.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통일은 커녕 점점 절망적으로 변
해간다. 분단이 된지 벌써 70년이 넘었건만 이 상태로는 서울과 가까운 개성(開城)DMZ
에 갇혀 고통받고 있는 철원의 후고구려(後高句麗) 도성도 어림 없을 것이다.
그러니 비록 간의 기별도 가지 않겠지만 북녘이 바라보이는 전방을 찾아 멀리서나마 그곳
을 바라보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것이 이 땅의 개같은 현실이다.

아침 일찍 합정역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김포좌석버스 3000(강화터미널신촌로터리)
잡아탔다. 이 노선은 강화도의 오랜 발로 강화도가 연륙되기 이전부터 시외직행버스로 운
행해 왔으나 2010년 봄에 좌석(광역)버스로 전환되어 보다 저렴하게 강화도를 찾을 수 있
게 되었다.
허나 설날 연휴를 맞이하여 강화도를 찾는 나들이 수요가 폭증하여 마송(통진)부터 강화
읍내까지 허벌나게 막힌다. 인간의 이기(利己)4발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기어
가기를 반복, 강화도와 한반도를 이어주는 강화해협(江華海峽)을 겨우 건너 강화도의 관
문인 강화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에 이르러 연미정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찾았으나 그는 간발의 차이로 이미 떠나고
없는 상태, 교통체증으로 일정이 벌써부터 틀어져 버렸다. 하여 잠시 멘붕(혼란)에 빠졌
으나 곧 극복하고 마침 점심 때라 밥을 먼저 먹기로 했다.
그래서 읍내로 들어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강화군청에서 내려 예전에 갔던 밥집을 찾았다.
허나 그 밥집은 설날 연휴를 이유로 빗장을 닫아 걸은 상태였다. 그래서 다시 멘붕된 마
음을 부여잡으며 부근에 적당한 집을 찾다가 군청 서쪽에 '흥부네집'이란 고기집이 장사
를 하고 있어 꿩 대신 닭을 고를 여유도 없이 그곳에 들어가 불고기버섯전골을 먹었다.


▲  잘 차려져 나온 불고기버섯전골과 반찬들

▲  밥도둑, 불고기버섯전골의 위엄

전골을 주문하니 김치와 멸치볶음, 게장 등으로 이루어진 밑반찬 7가지가 차려진다.
다음 불고기버섯전골이 나타나 푹푹 끓여대니 보글보글 익으면서 멋지게 숙성이 되었다.
전골에는 소고기, 당면, 여러 채소들이 육수에 버무려져 있는데 한참 시장한 상태라 목
구멍에 제멋대로 들어갈 정도로 퍼먹었고 밥도 무려 2공기나 먹었다. 그야말로 밥 도둑
이 따로 없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점심을 먹고 후식 커피를 뽑아 먹으며 밖으로 나왔다. 오늘 계획대로
연미정을 가야되나? 아니면 다른 데로 갈까? 궁리하다가 후배가 북한 땅이 보고 싶다며
택시를 타고 연미정에 가자고 그런다. 아무리 세상에 관심이 없고 지리, 역사와 철저히
담을 쌓은 후배지만 역시나 이 땅의 어쩔 수 없는 백성인가 보다.
하여 거리에서 놀고 있는 택시를 붙잡아 강화읍내 북쪽을 가로지르며 연미정으로 이동했
. 소요시간은 약 10분 정도. 그곳에 이르니 인적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예상을 뒤엎고
나들이객들이 제법 있었다.


 

♠  연미정을 품으며 강화해협을 지키는 조선 후기 해안 요새
월곶돈대(月串墩臺) - 사적 452호(강화외성)

▲  월곶돈대 조해루(朝海樓)

강화도의 동북쪽 끝으머리인 월곶리(月串里) 해변에 연미정을 품은 월곶돈대가 의연한 모습으
로 자리해 있다.
이곳은 강화해협과 한강(아리수)이 만나는 요충지로 동쪽 강화해협 너머로는 김포 문수산(
殊山), 북쪽 바다 너머로는 금지된 땅으로 묶인 개성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월곶돈대는 강화외성(江華外城)의 일원으로 17세기 이후에 축성되었다. 그렇다면 강화외성의
정체는 무엇일까?
때는 13세기의 한복판, 사기급의 전투력으로 주변 나라를 닥치는데로 때려잡던 깡패 나라,
()가 고려를 잡고자 1232년부터 7차례가 넘게 공격을 해왔다. 당시 고려 조정을 주름잡던
최씨정권의 2대 실력자 최우<崔瑀, 최이(崔怡)>1233년 개경(開京)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읍
을 옮겨 강도(江都)로 삼았는데, 그해부터 강화도 방어를 위해 백성을 동원해 내성(內城,
재 강화읍성)과 중성(中城)을 쌓고 강화해협에 23km의 긴 외성을 방패로 둘렀다. 외성은 적북
돈대에서 월곶리, 갑곶, 광성보를 거쳐 초지진까지 이어지며 흙으로 쌓았다. 허나 몽고에 두
손을 들던 1270년 이후 모두 버려져 앉은뱅이가 되고 만다.

조선 15대 군주 광해군(光海君)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강화도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했다.
1618년 버려진 외성을 흙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다. 허나 병자호란(1636~1637)으로 강화도
가 청나라에게 털리자 외성 상당수가 손상을 입었고 숙종(肅宗) 시절에 돌을 이용해 다시 쌓
았다. 이때 곳곳에 돈대(墩臺)를 설치하니, 월곶돈대도 바로 그때 탄생했다.
영조(英祖) 때 강화유수 김시혁(金始爀)은 비가 오면 성의 흙이 흘러내린다고 건의하여 1743
년부터 1년 동안 벽돌을 이용해 다시 손질했다.

강화외성은 문루(門樓) 6, 암문(暗門) 6, 수문(水門) 17개를 두었으며, 외성 뿐만 아니라
강화도 해변에 5개의 진, 7개의 보, 53개의 돈대를 빼곡히 설치해 섬 전체를 그야말로 요새화
하였다. 이중 돈대는 진, 보를 돕는 조그만 요새로 20명 정도의 병력이 머물렀다.

월곶돈대는 연미정 주변에 동그렇게 성을 두룬 형태로 이곳에 올라서면 한강과 강화해협,
성 남쪽 해변, 김포 문수산, 유도 등이 바라보여 여기가 보통 자리가 아님을 귀띔해준다.
리고 남쪽 해변으로 성을 내려뜨리며 조해루란 성문을 두었는데, 그가 강화외성의 주요 문루
이다.
허나 구한말 이후 강화도의 요새들은 방어의 성격이 상실되어 버려지게 되었고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조해루는 사라졌다. 겨우 연미정을 품은 돈대 중심부만 남아있었으나 그마저
도 북한 땅이 바라보이는 예민한 위치로 인해 오랫동안 통제구역으로 묶여있었다.
이미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 암 걸리던 시절이 되버린 2006, 그런 사실도 모르고 이곳을 찾
은 적이 있었는데 연미정을 만나려면 최소 1주 전에 관할 군부대를 찾아가 출입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만큼 까다로운 곳이었다. 그러다가 2008년 금지된 땅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고, 쓰러진 조해루를 복원해 지금에 이른다.
현재 강화외성은 국가 사적 45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월곶돈대는 그 일원으로 묶여 사적의 지
위를 누리고 있다. 또한 강화도의 야심작 강화나들길 1코스인 '심도(沁都) 역사문화길(강화터
미널~연미정~갑곶돈대, 18km)'이 이곳을 지나간다. 여기서 심도란 강화도의 고려 때 이름이다.


▲  밑에서 바라본 월곶돈대와 조해루를 잇는 성곽
(중간에 보이는 비석이 황형장군 택지비)


조해루는 월곶돈대의 성문이다. 닫혀진 문을 나서면 바로 파도가 일렁이는 강화해협인데 바다
를 통해 들어오는 적을 막고자 바닷가에 성문을 둔 것이다.
장대한 세월이 감쪽같이 훔쳐갔던 조해루는 2011년 말에 복원되었으며 성문과 문루, 남쪽 성
벽 일부가 다시 지어졌다. 문루를 포함한 전체 높이는 13m, 면적 45.56로 문루를 감싸고 있
는 여장은 이곳에서 나온 오래된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성문과 남쪽 성벽은 새 성돌로 꾸며
져 서로 어색한 세월의 조화를 이룬다. 원래는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성벽이 이어져야 되지만
아직 그럴 여건까지는 되지 못한다.


▲  윗쪽에서 바라본 조해루와 월곶리

▲  장무공 황형장군 택지비(莊武公 黃衡將軍 宅地碑)

월곶돈대를 오르다보면 때깔이 좋은 비석 하나가 발길을 잡는다. 바로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
던 장무공 황형장군의 택지비이다.

황형(1459~1520)은 창원황씨로 자는 언평(彦平)이다. 1480년 무과(武科)와 진현시(進賢試)
급제, 상서원(尙瑞院) 판관이 되어 내승(內乘)을 겸임했으며, 1486년 무과중시에 장원해 함경
도 혜산진(惠山鎭)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되었다.
15104, 부산포(釜山浦)와 제포(薺浦, 진해), 염포(鹽浦, 울산 염포)에 거주하던 왜인들
이 조선 조정에 불만을 품고 조선의 속방인 대마도(對馬島) 세력과 연합해 폭동을 일으킨 삼
포왜란(三浦倭亂)이 터지자 전라좌도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제포의 왜인을 때려잡았다. (
마도까지 쫓아가서 정벌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그 공으로 경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되었으며, 왕이 연미정 일대를 하사했다.

1512년 두만강 건너의 여진족이 조선에 거역하며 소란을 피우자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그들
을 정벌했고, 이어 평안도와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북녘 변방을 지키다가 공조판서(工曹判書)
를 끝으로 관직에서 사퇴, 연미정이 있던 이곳에 자리를 잡고 말년을 보냈다.
1520년 그가 숨을 거두자 중종(中宗)은 크게 애통해하며 '장무공'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연미
정 주변 3만 평의 땅을 그의 자손들에게 하사했다. 그의 묘는 서남쪽으로 1.5km 떨어진 학무
산 자락에 있으며, 장무사(莊武祠)에 배향되어 매년 음력 101일 자정, 제향을 올리고 있다.

연미정 주변에는 대나무가 있었는데, 황형이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올 때 가져 손수 가져와 심
은 것이라고 전한다. (안내문에는 대마도를 정벌하고 돌아올 때 가져왔다고 나옴) 또한 그는
소나무도 잔뜩 심었는데 임진왜란 때 그 나무로 수군 함선을 만들기도 했으며, 1597년 정유재
란이 터지자 선조(宣祖)가 잠시 이곳에 온 적이 있었는데, 소나무를 이용해 성책과 집을 만들
어 사람들은 황형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고 전한다. 미래를 대비하여 나무를 심은 것인지 아
니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월곶돈대 남쪽 성벽에서 바라본 강화해협과 김포 문수산

강화도는 북한과 겨우 짧은 해협을 사이에 둔 가까운 곳이라 해변에는 철조망이 휴전선마냥
길게 둘러져 있다. 남북분단이 선사한 강화외성의 현대판 버전이라고나 할까? 어서 이 땅이
통일이 되어 옥의 티 같은 저 산물을 싹 걷어냈으면 좋겠다.


▲  연미정을 품은 월곶돈대

▲  월곶돈대 암문(暗門)
돈대로 인도하는 유일한 문이다.

▲  월곶돈대 암문 안쪽
암문 바깥쪽은 동그란 홍예로, 안쪽은
네모나게 문을 지었다.


 

♠ 강화10경의 하나로 오랫동안 찬양을 받았던 경승지이자 월곶돈대의 얼굴
연미정(燕尾亭)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4호

월곶돈대 정상에는 이곳의 얼굴이자 나를 여기로 소환한 연미정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한강과 강화해협이 쿨하게 만나는 현장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한 줄기는 바로 서해로,
른 줄기는 강화해협을 이루며 남쪽으로 흐르니 그 모습이 마치 제비 꼬리와 같다하여 연미정
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연미정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귀신도 모르나 고려 23대 군주인 고종(高宗)이 구재(九齋)의 학
생들을 여기에 모아놓고 공부를 시켰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고려 중기에 뿌리를 내린 것으
로 짐작된다.
이후 폐허가 된 것을 조선 중종이 다시 지어 황형에게 하사했다고 전하며, 황형은 이 일대에
집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그 인연으로 현재 연미정은 그의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이 조선의 외교 정책에 격하게 불만을 품으며 압록강
을 건너 황해도까지 침공하자 이에 염통이 쫄깃해진 조선은 급하게 강화를 요구했다. 그래서
바로 이곳 연미정에서 후금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후 병자호란(1636~1637) 때 후금(後金)
서 청()으로 나라 간판을 바꾼 청나라군이 강화도를 점령하면서 정자 상당수가 파손되었다.

1744년 강화유수 김시혁이 월곶돈대를 손질하면서 연미정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1891년 조동
(趙東冕)이 다시 중수했으며, 1931년 유군성(劉君星)이 보수했다. 허나 6.25전쟁으로 서남
쪽 모서리 기둥이 세 동강이 나는 등, 무거운 상처를 입은 것을 중수했으며 이때 세 동강 난
기둥은 붙여서 다시 세웠다.
1976년 강화도 국방유적을 복원하면서 현재와 같이 재생되었는데, 처음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하던 베이지색으로 기둥을 떡칠했으나 이후 색을 제거해 자연스런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서남쪽을 바라보고 선 연미정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 10개의 기둥을 돌기
둥 위에 얹힌 민도리집이다. 월곶돈대 꼭대기에 서 있어 자연히 장대(將臺)의 역할을 했으며,
정자 뒷쪽에는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병풍을 이루고 있다.

지금이야 앞바다가 금지된 바다로 묶여 오가는 배도 없는 실정이지만, 구한말까지만 해도 서
해바다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배는 연미정 밑에서 만조를 기다렸다가 한강으로 들어갔다. 그러
니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고려와 상업이 한참 성장하던 조선 후기, 연미정 주변은 대단했을 것
이다. 특히 썰물 때 물이 빠져나가는 흐름이 보일 정도로 물살이 세기로 유명하며 여기서 즐
기는 달맞이는 강화10경의 하나로 추앙을 받기도 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곳이건만 남북분단이라는 가혹한 시련이 그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고, 그마
저도 철저히 금지된 곳으로 묶여 오랫동안 외롭게 남아있다가 2008년에 비로소 해방되어 자유
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달맞이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주변 해변은 여전히 금
지된 곳으로 묶여 있어 출입이 어렵다. 이 땅이 통일되는 그때 나머지도 그 빗장이 열릴 것이
.


▲  연미정과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

연미정 뒷쪽에는 겨울 제국에서 영혼까지 털린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있다. 이들은 약 510
년 묵은 것들로 2000년에 강화군 보호수 4-9-58호, 4-9-59호로 지정되었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00)
그들은 높이 약 22m, 둘레 4.5m4.2m로 그 장대한 나이를 거슬러 가면 황형이 이곳에 머물
던 시절과 거의 비슷하다. 그러니 그가 심었던 나무가 아닐까 싶다. 연미정과 월곶돈대를 쭉
지켜온 살아있는 증인으로 연미정의 풍치를 더욱 살찌워주는 역할도 했다. 비록 겨울이라 감
흥은 덜해도 늦봄이나 여름, 늦가을에 왔다면 한층 아름다웠을 것이다.

▲  연미정의 뒷모습

▲  연미정 현판의 위엄


▲  연미정 부근의 조그만 비석
비석 피부에는 '고 공신 장무공 황형 택(故 功臣 莊武公 黃衡宅)' 이라 쓰여 있다.
즉 황형이 이곳에 살던 것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세운 비석이다.

▲  연미정 부근에 놓인 주춧돌 3개
옛 연미정의 주춧돌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받쳐들 존재를 상실한 채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고적한 월곶돈대 내부 (연미정 남쪽)

▲  북한을 향하고 있는 월곶돈대 (연미정 동북쪽)

▲  월곶돈대 서북쪽과 월곶리 해변

▲  텅 비어있는 월곶돈대 포대
옛날에는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의 빈 자리만 허전하게 남아있다.

▲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김포 문수산
강화해협 너머로 보이는 곳은 다행히도 출입이 가능한 김포 지역이다.

▲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한강과 유도(留島, 가운데 섬)

안개로 흐릿한 한강에 조촐하게 떠있는 섬이 유도이다. 오랫동안 민통선에 묶인 금지된 섬으
로 옛날에 섬이 떠내려오다가 여기에 머물렀다고 해서 머무루섬이라 불렸다.
남북분단으로 인간의 발길이 끊긴 그곳에는 저어새를 비롯한 철새와 야생 동식물이 살아가고
있으며, 2008년 야생동식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북한 개성 땅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바다 안개가 아주 극성이었다. 그래서 시야는 절망 수준, 그렇게 보고
싶었던 북한 땅은 한 치도 보이질 않는다. 날씨가 좋아야 바다 너머 지역이 바라보이는데 이
땅에 내려진 저주, 남북분단의 아픔을 애써 지우고 싶었는지 하늘이 안개로 바다 너머 땅을
잠시 지운 모양이다.
차라리 저 너머는 그냥 망망대해였으면 좋으련만 그러면 아쉽지나 않지. 문제는 그 너머가 금
지된 땅이라는 것. 요즘은 달나라는 물론 우주도 가는 세상이라는데, 저 너머 땅은 그 우주보
다도 가기가 힘들다.


▲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월곶리 검문소와 월곶리 지역
월곶리 검문소는 신분증이 없으면 통과하기 힘든 전방의 까다로운 검문소 중
하나이다. 그러니 저곳을 지날 때는 꼭 신분증을 지참해야 뒷탈이 없다.


※ 연미정, 월곶돈대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강화읍(강화터미널)까지
* 신촌로터리(2호선 신촌역 1번 출구), 홍대입구역(2호선/경의중앙선/공항전철) 중앙차로 정
  류장, 합정역(2/6호선)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3000번 좌석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 하차
* 5호선 송정역(1,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88, 3000번을 타고 강화터미널 하차
* 부평역(서울1호선/인천1호선) 정류장, 부평구청역(서울7호선/인천1호선, 1번 출구 밖),
  1호선 경인교대입구역(1번 출구)에서 김포 90번 이용
* 인천2호선 마전역(1번 출구)에서 70, 700-1, 90번 이용
* 3호선 백석역(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96번 이용

현지교통
* 강화터미널에서 강화군내버스 10번을 타고 연미정 하차 (113회 운행)
승용차 (연미정 밑에 주차장 있음)
* 서울 -> 김포한강로/강화 방면 48번 국도 -> 통진 -> 강화대교 -> 강화읍 수협4거리에서 우
  회전 -> 연미정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242


 

♠  남북분단이 빚은 서글픈 산물, 강화평화전망대(제적봉 평화전망대)

▲  강화도 최북단에 자리한 강화평화전망대

연미정을 둘러보니 어느덧 14시가 넘었다.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가 그렇게 소원하던 북한 땅
을 하늘의 방해로 살피지 못한 아쉬움이 컸던지 강화평화전망대가 머리 속에 떠오른다. 그래
서 그곳을 가기로 했지. 허나 군내버스로 가려면 강화읍내에서 강제 환승을 해야 되고 더군다
나 연미정은 버스가 별로 없어 가기가 좀 우울하다. 그래서 후배의 쿨한 지원에 힘입어 택시
를 소환하여 가기로 했다.

연미정 주차장에 있는 콜택시 번호로 택시를 부르니 10분 뒤 택시가 나타나 입을 벌린다.
것을 잡아타고 강화도의 북쪽 들판을 신나게 가로질러 당산리검문소에 이른다. 당산리(堂山里
)와 평화전망대가 있는 철산리는 엄연한 민통선 구역이라 검문이 좀 까다로우며 반드시 신분
증이 있어야 출입이 가능하다. (신분증만 있으면 통과됨)
설연휴로 통일전망대를 찾은 차량의 행렬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었는데 우리 차례가 되자 택
시 운전사는 동네 사람을 태우고 간다며 군인에게 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군인은 검문도 하지
않고 쿨하게 통과시켜주었다. 일반 차량은 신분증 검사를 철저히 하지만 택시는 지역 사람들
을 주로 태우고 다니는지라 그렇게 해주는 모양이다. 어쨌든 신선한 충격을 간직하며 당산리
와 철산리를 지나 강화평화전망대 주차장에 도착했다. 택시 요금은 16천원 정도 나왔다.


▲  강화평화전망대 입구 (왼쪽이 평화전망대, 오른쪽은 인화리,
교동도 방면)

▲  강화평화전망대의 옆모습

강화도 최북단인 제적봉(制赤峰) 정상에 강화제적봉 평화전망대(강화평화전망대)가 웅크리고
있다. 제적봉이란 '붉은 것을 제압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붉은 것은 북한을 일컫는다.

원래 제적봉은 김포(金浦) 애기봉에게 씌우려던 반공 스타일의 봉우리 이름이었다. 1966년 공
정식 제6대 해병대사령관이 그렇게 하려고 했으나 때마침 박정희 전대통령이 애기봉을 방문해
그곳에 서린 애기 전설을 전해듣고는 애기봉으로 할 것을 지시하여 그 이름을 지키게 되었다.
그래서 강화와 김포 지역 전방의 여러 봉우리를 상대로 제적봉 후보감을 물색하다가 해병대가
있는 철산리 언덕을 제적봉으로 삼았다. 이를 기리고자 그의 측근인 김종필이 '제적봉' 비석
글씨를 남기며 명명식(命名式)을 거행했다.

이후 40여 년 뒤, 제적봉에 강화평화전망대를 지어 200895일 문을 열었다. 그 역시 북
한 이 바라보이는 적당한 곳에 세우는 통일전망대의 일종으로 가장 최근에 지어진 통일전망대
이다. 허나 아무리 그런 전망대에서 통일을 염원하며 북녘을 뚫어지라 바라본들, 그림의 떡이
. 분단의 한은 더해가기만 한다. 이건 어찌된 것이 통일은 커녕 분단만 더욱 고착화되고 있
으니 말이다. 그러니 남북분단이 빚은 서글픈 산물이라고나 할까? 그리 유쾌한 현장은 아니다.

여기는 다른 전망대와 달리 바다를 앞에 두고 있고<고성(高城) 통일전망대는 바다를 옆에 끼
고 있음>, 그 바다 너머로 북녘을 바라볼 수 있는데 북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바로 가까이
에서 구경할 수 있는 전망대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북한 땅까지 불과 2.3km에 불과하기 때문
이다. 그래서 실제로 바다 너머 그들의 모습이 간간히 보인다. 국경을 지키는 군인, 농사를
짓는 마을 사람들, 학교에 가는 학생 등, 허나 그것도 날씨가 좋고 운이 좋아야 보이는 것이
지 보통은 보기 힘들다.

바다 너머 지역은 황해북도 개성 지역으로 날씨가 좋으면 예성강(禮成江) 포구도 시야에 잡힌
. 허나 우리가 갔을 당시는 안개가 지독해 북한 땅은 아주 흐릿하게 시야에 잡혔다. 그래서
전망대에 전시된 북녘 촬영 사진으로 그 아쉬움을 대신할 수 밖에 없었다.

전망대의 규모는 지하 1, 지상 4층으로 지하층은 군부대 전용시설이 있어 출입이 어렵고, 1
층에는 통일염원소와 휴게실, 식당, 기념품 매장이, 2층은 전시관과 전망대, 3층은 북한땅 조
망대와 옥외전망대가 있다.
바깥에는 망배단이 설치되어 실향민들의 한을 어루만지고 있으며, 군부대에서 기증받은 오래
된 전차와 제적봉 비석, 임진왜란 초기인 15928월에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이 황해도
연백에서 왜군을 크게 때려잡은 것을 기리고자 세운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 등이 자리를 채
우고 있다.
연성대첩비는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모정리에 있으나 거기서 넘어온 실향민들이 강화도에 정
착하면서 양사면 연화리에 편강렬(片康烈) 의사 충렬비와 함께 세워 기리던 것을 20098
19일 이곳으로 옮겼다.

▲  1966년에 지어진 제적봉 비석
제적봉 3자는 김종필의 친필이다.

▲  편강렬 의사 충렬비(왼쪽)와
연성대첩비


▲  전망대 1층 통일염원소

통일염원소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남북통
일을 염원하며 한 글자씩 남긴 종이가 한 공간
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토록 이 땅의 민중들은 통일을 바라고 있지
만 이 땅과 북한의 더러운 권력층 작자들은 이
를 크게 바라지 않는다. 말로만 통일, 통일을
외칠 뿐, 뒤에서는 서로를 이용하며 그들의 권
력유지와 욕심 채우기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통일염원소에 글을 남긴들 딱히
소용이 없다. 결국은 모두 쓰레기통으로 가게
되니 말이다.

 

◀  통일염원소를 가득 메운 민중들의
메아리


▲  2014년 여름과 가을에 이곳에서 담은 북녘 땅 사진

▲  3층 북한땅 조망실(건물 내부)에서 바라본 북한 개성 땅 ①
여기서 북한 땅까지는 겨우 2.3km이다. 날이 좋으면 저 너머가 훤히
두 눈에 들어올텐데 안개의 방해로 겨우 해안만 시야에 들어온다.

▲  3층 북한땅 조망실(건물 내부)에서 바라본 북한 개성 땅 ②

▲  3층 북한땅 조망실에 있는 개성 지역 조감도
밑부분 빨간 표시가 있는 곳이 강화평화전망대이다.

▲  북한에서 제작된 개성, 김포, 강화도 지역 지도

▲  2층에 전시된 6.25전쟁의 상징물, 녹슨 철모

▲  3층 옥외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흐릿하게 다가오는 개성 땅 ①

▲  3층 옥외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흐릿하게 다가오는 개성 땅 ②

▲  3층 옥외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흐릿하게 다가오는 개성 땅 ③

▲  3층 옥외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 (서북쪽 방향)
바다 안개 너머로 개성 땅과 예성강이 있다. 벽란도(碧瀾渡)를 품은 그 예성강이라..?
말로만 듣던 그 현장이 가까이에 있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설렌다.

▲  3층 옥외전망대에 설치된 500원짜리 망원경
안개를 뚫고 북녘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500원을 넣어 잠든 망원경의 혼을 불러 모은다.
망원경의 시력이 더 좋은 탓에 맨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날씨가
받쳐주지 못해 바다 너머 땅도 썩 신통치 않게 보인다.

▲  북녘 실향민(失鄕民)을 위한 망배단(望拜壇)
망배단은 통일전망대의 필수 요소로 이곳에서 제사를 올리거나 북쪽에 둔
가족을 향해 인사를 하는 실향민들이 적지 않다.

▲  망배단에서 바라본 북녘 개성 땅
실향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강과 임진강이 합동으로 쏟아놓은
바닷물은 유유히 서해로 흘러갈 뿐이다.

▲  강화평화전망대의 귀염둥이(?) 전차
1971년 미국에서 생산된 전차로 길이 7.94m, 높이 3.12m, 폭 3.2m, 무게 23톤이다.
해병대에서 사용한 상륙돌격장갑차로 1975년부터 절찬리에 쓰였다가 2004년 국산
장갑차에게 자리를 넘기고 은퇴, 이곳에서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노후를 보낸다.


이렇게 강화평화전망대를 둘러보고 매점에서 간단하게 간식을 사먹었다. 이곳은 북한 땅이 바
라보인다는 이유로 입장료도 비싸고, 간식이나 음식도 바깥보다 조금 더해진 가격을 받아먹는
. 민간도 아니고 강화군청에서 운영하는 공영인데 적당히좀 먹었으면 좋겠다. 솔직히 통일
전망대 같은 것이 뭐 그리 자랑이란 말인가? 이 땅의 우울한 산물이거늘. 나중에 정말 통일이
된다면 우후죽순 들어선 통일전망대부터 싹 정리하고 상징적인 몇 개만 남겨 분단의 기념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평화전망대 입구로 나와서 강화읍내로 가는 강화군내버스 2번을 잡아타고 읍내로 나왔다.
님은 벌써 칼퇴근을 하여 천하는 어둑어둑해진 상태, 이럴 때는 그저 얌전하게 집으로 돌아가
는 것이 진리이다. 이렇게 하여 설연휴 강화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강화평화전망대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 강화읍까지 교통편은 앞의 연미정 참조
* 강화터미널에서 강화군내버스 1(19), 26(16)을 타고 평화전망대 하차, 도보
  5
* 승용차 (반드시 신분증 지참 요망) : 서울 김포한강로/강화 방면 48번 국도 통진
  강화대교 강화읍 송해3거리 당산리검문소 (검문을 거쳐 출입통제증을 받아야 됨)
  강화평화전망대

★ 강화평화전망대 관람정보 (2018년 6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2,500(20인 이상 단체 2,200) / 청소년과 군인 1,700(20인 이상 단
  1,500) / 어린이 1,000(20인 이상 단체 800) / 유아와 노인은 무료
* 관람시간 : 9~18(12~2월은 17시까지) 연중무휴, 주차비 없음
* 전망대 해설시간 : 1011, 1220, 13, 14, 15, 16
* 민통선 구역이라 자전거와 오토바이, 도보 접근은 불가하다. (무조건 군내버스나 관광버스,
  승용차, 택시로 가야 됨), 그리고 신분증은 반드시 지참하기 바란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11-12 (전망대로 797 ☎ 032-930-7062)
* 강화평화전망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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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강화도 나들이 (봉천산 주변, 강화읍내)

 


' 강화도 역사기행 (봉천산 주변, 강화읍내) '
강화 장정리5층석탑
▲  강화 장정리 5층석탑


강화군 하점면에 자리한 봉천산(奉天山, 291m)은 이름 그대로 하늘에 제를 올리던 곳이다. 산
정상에 고려 때 축조되어 제천의식을 거행하던 봉천대(奉天臺)가 남아있으며, 그 주변에 하음
산성(河陰山城)이 희미하게 남아 바다를 굽어본다. 산 남쪽에는 고려의 불교유산인 장정리5층
석탑과 석조여래좌상이 숨쉬고 있으며, 하음봉씨(河陰奉氏)의 시조설화가 전해지고 있어 하음
봉씨들이 특별히 옆구리에 끼며 의지하는 정신적인 고향이기도 하다.

이번에 봉천산에서 문을 두드린 곳은 장정리5층석탑과 석조여래좌상이다. 논두렁 연꽃의 현장
인 선원사(禪源寺, ☞ 관련글 보러가기)를 둘러보고 해가 떨어질 때까지 약간 여유가 있어 강
화읍내와 가까운 그곳을 찾은 것이다. 봉천대까지 오르고 싶었지만 날이 짙게 드리워져 더 이
상 욕심을 부릴 수 없었다.

강화터미널에서 하점면 방면으로 가는 강화군내버스를 타고 하점우체국에서 내리니 석탑과 석
불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마중을 한다. 그의 안내로 골목길을 들어서면 바로 하점성당이 나
오고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석탑을 원한다면 왼쪽 길로 600m를 가면 되고 석불을 원한
다면 오른쪽 길로 900m를 가면 된다. 서로 가까운 위치에 자리해 있지만 각각 가는 길이 달라
서 어느 한곳을 먼저 보고 다시 이곳으로 나와 다른 곳을 가야 되는 까다로운 구조이다. 우선
은 거리가 먼 석불부터 보기로 했는데, 성당 기준으로 왕복 1.8km에 이른다.

석불까진 이정표가 친절히 베풀어져 있고 수레가 편히 바퀴를 굴리게끔 조그만 길이 포장되어
있어 찾는데 그리 어려운 것은 없다. 고요함에 잠긴 잔골마을을 지나면 산내음이 가득 깃들여
진 봉천산의 품으로 들어서게 되고, 끝이 없어 보이는 길을 정신 없이 따라가면 그 길의 끝에
주차장이 나오면서 왼편에 담에 둘러싸인 기와집이 나온다. 바로 장정리 석조여래좌상의 보금
자리이다.


♠  하음봉씨에서 시조를 키운 할머니를 위해 만들었다는 고려시대 불상
장정리 석조여래입상(長井里 石造如來立像)
- 보물 615호

▲  석상각(石像閣) 안에 봉안된 석조여래입상

봉천산 밑에 자리한 장정리 석조여래입상(예전에는 봉천산 석조여래입상, 하점면 석조여래입상
이라 불림)은 석상각(石像閣)이란 맞배지붕 보호각 안에 소중히 담겨져 있다. 보호각은 하음봉
씨 집안에서 만든 것으로 보호각의 뒷면은 벽으로 막혀있고, 3면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못하
게 붉은 창살로 주변을 단단히 둘렀다. 외딴 곳에 자리해 관리가 어려운 석불의 보호를 위해 보
호각을 지었지만 철장에 갇혀 자유를 그리며 날개짓을 하는 새처럼, 좀 답답하게 다가온다. 최
소 앞쪽은 트게 해주어 그의 면전에 향을 피우고 예불을 올리게 배려가 필요해 보인다.

석상각을 지키는 돌담은 사람 키 정도의 높이로 정갈하게 쌓여져 있으며, 남쪽에 석불로 다가서
는 조그만 문이 있다. 돌담에 둘러싸인 석상각은 불상의 보금자리라기 보다는 당집 분위기가 진
하게 풍겨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중생들에게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나' 착각에 들게 만든다.

▲  둥글게 차려진 돌담 안에 석상각이 있다.

▲  맞배지붕의 석상각


▲  석불의 머리 부분

이 석불은 두꺼운 화강암 판석(板石)에 돋음새김으로 새겨진 것으로 얼핏보면 바위에 진하게 새
겨진 마애불(磨崖佛)로도 보인다. 높이는 2.8m이다.
민머리 스타일의 머리 위쪽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하게 솟아 있다. 홍예처럼 살
짝 구부러진 눈썹 밑에 살며시 뜬 눈은 오랜 세월 힙겹게 살아온 듯, 다소 흐리멍텅해 보인다.
세모 모양의 코는 불상의 코를 노린 어리석은 속인(俗人)들의 의해 평탄하게 깎아져 흔적만 남
아 세월의 상처를 여실히 드러낸다. 입술은 굳게 다물고 있는데 전체적인 인상은 조금 인상을
지은 표정 같다.
두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진 않았으나 중생들의 울부짖음을 듣기 위함일까? 토끼처럼 길다. 목에
는 삼도가 획 그어져 있으며, 얼굴 뒤로 2줄의 동그란 두광(頭光)이 그를 빛나게 수식한다.

불상의 어깨는 좀 좁은 편으로 다소 움츠려 든
모습이며, 어깨를 감싼 옷은 두껍게 표현되어
마치 추운 겨울을 인내하는 불상으로 보인다.
U자형의 옷주름은 가슴에서 무릎 부분까지 흘러
내리는데, 간략하게 처리했으며, 오른손은 허리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왼손은 가
슴 앞에 대고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다. 불상 주
위로 2줄의 신광(身光)으로 몸을 환하게 꾸미며
, 2줄 사이로 드문드문 둥근 구슬을 새겨 넣었
다. 광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있다.

평판적이고 선으로 조각된 경향이 강한 불상으
로 단순화, 생략화 되는 점은 시대가 내려가는
것을 말해준다고 한다. 도드라진 얼굴과 짧은
목, 움츠린 어깨, 형식적인 옷주름은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장정리 석조여래입상은 하음봉씨 집안과 인연이 깊다. 전설에 따르면 하음봉씨 시조인 봉우(奉
佑)의 5대손인 봉천우(奉天佑)가 정승에 오르면서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자 봉은사(奉恩寺)를 짓
고, 시조 봉우를 거둬서 기른 할머니를 위해 그들 집안의 성지(聖地)인 봉천산에 5층석탑과 이
석불을 만들어 매년 제를 올렸다고 전한다.

※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찾아가기 (2012년 8월 기준)
* 5호선 송정역(1번 출구), 9호선 염창역(2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강화행 88번 시내버스
  와 3000번 좌석버스 이용
* 2호선 신촌역(1번 출구는 현대백화점 가변 정류장, 4번 출구는 신촌역 가변 정류장), 2호선/
  공항철도 홍대입구역(2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3000번 좌석버스 이용
* 인천터미널(인천1호선 인천터미널역 1번 출구)에서 70, 700, 800번 버스 이용 (800번이 제일
  빠름)
* 1호선 동암역(2번 출구)에서 700번 버스, 1호선/인천1호선 부평역과 부평시장역(인천 1호선,
  2번 출구)에서 90번 시내버스 이용
* 일산 대화역(3호선/1,3번 출구 중간)과 마두역(3호선) 중앙차로 정류장, 백석역(3호선) 중앙
  차로 정류장에서 96번 시내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이나 강화군청 하차
* 강화터미널 내부와 강화군청에서 강화군내버스 1, 23번을 타고 석조여래입상에서 하차, 도보
  7~8분, 강화 1번은 60~120분 간격으로 다니며, 시간이 안맞으면 하점면 경유 창후리, 외포리
  방면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하점우체국에서 내리면 된다.
* 승용차로 갈 경우 (석불까지 이정표가 잘 되어있으며, 차량 접근 가능)

① 서울 → 김포 → 강화대교 → 강화읍내 → 강화지석묘 →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② 서울, 인천 → 양곡 → 초지대교 건너서 우회전 → 해안도로 → 강화역사관 → 강화읍내 →
   강화지석묘 →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122


▲  석불을 보고 나오는 길에 바라본 고려산(高麗山)


♠  이름없는 절터를 홀로 지키는 고독한 석탑
강화 장정리 5층석탑
- 보물 10호

석조여래입상을 둘러보고 다시 하점성당으로 나와 석탑을 알리는 우측길로 들어가면 녹음이 깃
들여진 길 끝자락에 장정리5층석탑(예전에는 하점면5층석탑이라 불렸음)이라 불리며 살아가는
조촐한 석탑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솔내음이 자욱한 소나무 숲속에 홀로 자리한 고독한 탑으로 산새의 노래소리와 바람의 소리만이
탑 주변에 서린 적막을 조심스레 건드릴 뿐이다. 앞의 석불과 마찬가지로 봉천산에 안긴 소중한
보물로 탑 아래까지 조그만 포장길이 놓여 있고, 작은 주차장과 화장실이 준비되어 답사객의 편
의를 제공한다.

이름도 없고 흔적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절터를 홀로 지키는 이 탑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
로 하음봉씨 집안에서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자 세웠다는 봉은사(奉恩寺)가 있었다고 전하나 확
인할 길은 없다. 탑 주변에는 주춧돌만 약간 있을 뿐, 절터의 규모와 가람(伽藍) 구조는 알 수
없다. 탑의 이름은 탑이 있는 장정리의 이름을 막연히 딴 것이다.


▲  고독을 즐기는 장정리 5층석탑
별 꾸밈이 없는 조촐한 모습에 은근히 정감이 간다.


탑은 1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형태로 오랫동안 무너져 있던 것을 1960
년에 수습하여 다시 세웠다. 허나 옥개석의 귀퉁이가 많이 깨졌고, 3층과 4층은 탑신이 없어지
고 옥개석(屋蓋石)만 남아있으며, 5층과 머리장식은 아예 형체도 없이 사라진 상태라 보는 이의
마음을 안스럽게 한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세월의 무정한 장난이 탑을 그 지경으로 만
든 것이다. 역시 인간이 만든 것은 그들 앞에선 일개 장난감도 되지 못한다.
1층 탑신은 2개의 돌을 다듬어서 맞춘 것이며, 2층 탑신은 1층에 비해 크기가 지나치게 줄어 비
례감을 크게 떨어뜨린다. 옥개석의 추녀는 탑이 무너지면서 깨져버려 추녀마루의 치켜오른 정도
를 알 수 없다.

탑에 별다른 장식이 없어 볼품은 좀 떨어지지만 수수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없어지고 훼손된 부
분이 많고 전체적인 균형이 많이 떨어지며 육중한 느낌을 주어 보물 10호란 자리가 과분해 보이
기도 한다. 그리고 탑의 모습이 보물 5호의 지위에서 지방문화재로 떨어진 안양(安養)에 있는
중초사지(中初寺址) 3층석탑과도 좀 비슷해 보인다.

※ 장정리5층석탑 찾아가기 (2012년 8월 기준)
* 교통편은 앞의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참조
* 승용차로 갈 경우 (장정리에서 석탑까지 이정표가 잘 되어있으며, 차량 접근 가능)
① 서울 → 김포 → 강화읍내 → 강화지석묘 → 하점우체국 우회전 → 장정리5층석탑
② 서울, 인천 → 양곡 → 초지대교 건너서 우회전 → 해안도로 → 강화역사관 → 강화읍내 →
   강화지석묘 → 하점우체국 우회전 → 장정리5층석탑

* 석탑에서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봉천산 정상이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193


♠  고려의 대몽(對蒙)항쟁 의지가 굳게 담겨진 38년 강도(江都)의 중심지
강화 고려궁터(高麗宮址) -
사적 133호

▲  잡초만 가득한 고려궁터

▲  고려궁터 외규장각(外奎章閣)

강화도의 서울인 강화읍내 북쪽 야트막한 산자락에 옛 고려궁터가 읍내를 바라보고 있다. 13세
기 중반, 천하의 패자를 꿈꾸며 주변 나라를 거침없이 사냥한 몽골(몽고)은 고려에게 자신들의
천하(天下)에 들어올 것을 요구한다. 안그래도 몽고가 시덥지 않던 고려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
했다.
그러다가 1231년 몽고사신 저고여 일행이 압록강(鴨綠江) 부근에서 피살된 사건으로 몽고는 고
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고려 vs 몽고의 38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시작되었다.
 
고려의 실권자이자 최씨정권의 2번 째 우두머리인 최우(崔瑀, 최충헌의 장자)는 몽고와 전쟁을
선언하고 1232년 6월, 고종(高宗)에게 강화도로의 천도를 상주(上奏)한다. 그래서 왕실과 관리
들, 백성들 모두 반강제로 끌고가 개경(開京)을 버리고 급히 강화도로 천도하게 된다.

최우는 이 기회에 강화도를 임시가 아닌 새로운 도읍으로 삼을 생각으로 강화도를 강도(江都)라
하였으며, 그 규모를 개경에 걸맞게 하고자 백성들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강도 건설을
추진하였다. 우선 내성(內城)을 쌓고 그 안에 궁궐과 사찰, 사직단(社稷壇), 태묘(太廟, 종묘)
등을 큰 규모로 건립하여 1234년 궁궐이 완성되었다.
궁궐의 정문은 개경 궁궐과 마찬가지로 승평문(昇平門)이라 하고, 양쪽으로 누각(樓閣) 형태의
문 2개를 달았으며, 동쪽에 광화문(光化門)을 두고, 궁궐 뒤쪽 산을 송악산(松嶽山)이라 했다.
그리고 내성(內城)이 완공되자, 곧바로 외성(外城)을 축성했다.

전쟁이 예상외로 길어지자 1259년 비상용으로 마니산 부근에 흥왕이궁(興王離宮)을 세우고 정족
산(鼎足山)과 선원사 부근에 행궁(行宮)을 지었으며, 부처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은 생각에 선원
사(禪源寺)를 건립하고 한국 불교문화의 정수인 '8만대장경'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허나 그정도
로 몽고의 파상적인 공격을 잠재울 순 없었다.

고종의 뒤를 이어 재위에 오른 원종(元宗)은 더 이상 전쟁이 무모하다고 판단하여 1270년 몽고
와 화의(和議)를 맺고 38년에 걸친 전쟁을 종결시킨다. 화의를 맺은 후에도 몽고는 40년씩이나
자신들에게 대항한 고려의 저력이 두려운지 개경으로 완전히 환도(還都)할 것과 강화도의 궁궐
을 모조리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30여 년 동안 정들었던 강도의 왕궁이 모두 철거되면
서 강도 시대는 그 끝을 맺는다. 허나 적군에 의해 강제로 불탄 것이 아닌 비록 몽고의 요구에
따른 것이긴 해도 고려 정부가 자체적으로 허문 것이니 험한 꼴을 무수히 당했던 조선시대보다
는 그나마 낫다.

고려궁터가 아비지옥의 치욕스러운 꼴을 당한 것은 동아시아의 호구국가나 다름없던 약소국 조
선시대에 일이다. 그것도 외침(外侵)으로 1번도 아닌 2번씩이나 말이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
反正)으로 재위에 오른 무능한 인조와 그를 옹립한 서인패거리는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이
곳에 행궁을 지었다. 허나 전쟁준비도 행궁 짓는 선에서 끝난지라 정작 병자호란(1636~1637년)
때 강화도를 공격한 청나라군에 의해 죄다 잿더미가 되고 만다. 그 이후 그 자리에 강화부 관청
이 들어섰고, 1782년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세워 국가의 주요 서적 350권을 보관하였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강화도를 공격한 프랑스 패거리가 아주 손쉽게 강화부를
점령하면서 외규장각에 있던 직지심경(直指心經) 등의 서적 대부분이 털렸으며, 그것도 모자라
외규장각과 관청 건물 대부분을 불질러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왕실 관련 보물 99점과 서적
5,000권이 어이없이 한줌의 재로 사라지고 만다.


1976년 강화도 전적지 정화사업에 따라 정비되었으며 개경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넓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고려궁터는 그 일부인 지금의 궁터와 당시 기단(基壇), 돌계단 등이 남아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땅 속에 묻혀 당장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궁터 남쪽에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강화부 관청 2동(명위헌, 이방청)과 강화동종(銅鍾), 근래에 복원된 외규장각 등이 대머리처럼
허전한 궁터를 듬성듬성 덮어준다.

※ 고려궁터 찾아가기 (2012년 8월 기준)
* 강화도까지의 교통편은 앞의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참조
* 일산신도시(대화역, 마두역, 백석역)나 김포(고촌, 김포시내, 마송)에서 오는 96번 시내버스
  를 타거나 인천터미널과 동암역(검암역 입구, 검단)에서 700번을 탈 경우 강화군청에서 내려
  왼쪽으로 가면 고려궁터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 강화터미널에서 읍내로 들어가는 군내버스(하점면, 송해면, 외포리 방면 버스)를 타고 강화군
  청에서 하차, 또는 도보로 이동 (강화터미널에서 고려궁터입구까지는 도보 15분, 궁터입구에
  서 고려궁터까지는 도보 7분
* 승용차로 갈 경우
① 서울 → 김포 → 강화대교 → 강화읍내 → 고려궁터
② 서울, 인천 → 양곡 → 초지대교 건너서 우회전 → 해안도로 → 강화역사관 → 강화읍내 →
   고려궁터

★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900원(30인 이상 단체 700원) / 청소년 이하 600원 (30인 이상 단체 500원)
* 고려궁터 앞에 주차장이 있으며, 주차비는 공짜
* 관람시간 : 9시 ~ 18시 (겨울은 17시)
* 고려궁터 주변 관광지 - 김상용 순절비, 용흥궁(龍興宮), 강화 성공회성당, 왕자샘, 강
  화산성 북문/서문/남문, 석수문, 연무당터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1(북문길 42) <☎ 032-930-7078~9>


▲  고려궁터의 정문 승평문(昇平門)

승평문은 옛 고려궁터의 정문으로 개경에 있던 궁궐의 정문 이름을 따왔다. 비록 개경의 그것에
는 훨씬 못미치지만 삼문(三門)으로 다시 태어난 승평문은 마치 제왕이 아래를 바라보듯 작지만
위엄있는 모습으로 우리를 굽어 본다. 계단을 오를 때는 계단의 좌측 부분을 이용하기 바란다.


▲  강화유수부(江華留守府)의 동헌(東軒)인 명위헌(明威軒)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5호

승평문을 들어서면 길이 2갈래로 갈라지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길쭉한 모습의 명위헌이
나온다.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고려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강화도를 다스
리던 강화유수(留守)가 집무를 보던 곳으로 건물의 크기를 통해 강화고을의 규모와 위치가 생각
외로 상당했음을 가늠케 한다.

이 건물은 1638년(인조 15년)에 세워졌으며, 1769년에 유수 황경원(黃景源)이 동헌 이름을 현윤
관(顯允館)이라 했다. 1866년 병인양요로 피해를 입어 다시 지었으며, 1976년 고려궁터를 정비
하면서 건물의 기둥을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하는 베이지색으로 모조리 떡칠을 했으나, 그 이후
원래의 색깔로 다시 칠했다.

높다랗게 걸려있는 '명위헌(明威軒)'과 '이관당(以寬堂)' 현판은 18세기 초반의 문장가 윤순(尹
淳)이 쓴 것으로 마치 글씨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으며, 건물의 장대한 규모는 답사객을 압
도하기에 충분하다.


▲  명위헌 중앙 부분
강화유수가 이방(吏房)을 비롯한 여러 하급 관리들을 소환해 고을의 일을
논하는 모습을 재현했다.

▲  명위헌 우측 부분 - 강화유수가 공무(公務)를 보던 방이다.
▲  병인년의 쓰라린 상처를 간직한 외규장각(外奎章閣)
잔디만 무성히 입혀진 황량한 옛 궁터를 외규장각이 보듬고 있다.
 저 건물도 없었다면 그 허전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1753년 강화유수 신사(申思)는 객사 동쪽에 내책고(內冊庫)를 세워 강화부의 서적을 보관했다.
허나 보관할 책은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늘어나고 그 수용능력이 한계점에 이르자 1782년 정조의
왕명에 따라 연초헌(燕超軒)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외규장각을 세워 직지심경을 비롯한 강화도
일대에 전하는 주요 서적과 선원록(璿源錄)을 비롯한 왕실의 주요 서적 및 보물<어필(御筆), 옥
인(玉印), 의궤(儀軌)..)을 옮겨와 보관하였다.
 
1866년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 패거리는 이곳에 있던 서적 297권과 여러 보물들을 말끔히 약탈
하고 외규장각을 비롯한 강화부 소속 관청을 모조리 불질렀는데, 그 과정에서 왕실 관련 보물
99점과 서적 5,000권이 무정하게도 한줌의 재로 변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은 것은 2003년
에 새로 지었다.

이곳에 있던 직지심경(直指心經)을 비롯한 서적과 보물은 대부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가 있
다. 1990년대 후반, 김영삼 정권은 고속전철을 만드려는 욕심에 프랑스제 고속전철을 도입하기
로 했는데, 프랑스는 그 대가로 직지심경을 비롯한 병인년에 약탈한 보물을 돌려주기로 약속을
하였다. 허나 신뢰가 안가는 야만족속들이다 보니 겨우‘휘경원소감의궤(徽慶園少監儀軌)’1권
만을
돌려주었을 뿐 아직까지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병인양요 당시 강제로 유출된 보물들은 팔자에도 없는 타국살이를 하며 고향을 그리워할텐데 그
들의 귀국이 과연 언제가 될련지는 장담을 할 수 없다. 그것을 돌려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라
를 부강하게 만들어 프랑스를 아주 통쾌하고 짜릿하게 밟아버리는 것이다. 그때 프랑스의 베르
사유궁전과 개선문, 에펠탑을 말끔히 불지르거나 부셔버리고, 박물관과 온갖 사원도 싹 털어버
리면 좋을텐데, 그만 위치가 안좋아 강대국에 둘러싸여 눈치만 보는 조그만 나라의 더러운 처지
다보니 그 꿈도 참 먼 세상의 이야기 같다. 유감스럽지만 내 세대에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국가간의 약속인 만큼 직지심경이라도 우선 고스란히 돌려주면 좋겠구먼, 역시 프랑스 야만족들
은 매가 약인 것일까? 시대를 잘 타 강대국이 되어 세계 곳곳에 민폐를 끼치며 실컷 해먹었으면
이제는 그 잘못을 뉘우치고 베푸는 모습도 보이기 바란다. 너무 과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곳을 프랑스 떨거지들은 모르는 모양이다.


 ▲  강화부종각(江華府鐘閣)


▲  강화동종(江華銅鍾) - 보물 11-8호

궁터 서쪽에는 강화동종(銅鍾)의 보금자리인 종
각(鐘閣)이 있다. 빛바랜 다이어리처럼 소중히
담겨진 이 종은 1711년(숙종 37년) 강화유수 윤
지완(尹趾完)의 시주로 주조된 것으로 사인비구
(思印比丘)가 만든 8개의 동종 중에서 가장 오
래된 것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승려로 손재주가 매우 뛰어
나 장인으로도 크게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는
천하에 8개의 동종을 남겼는데. 강화동종을 비
롯하여 서울 화계사(華溪寺) 동종, 홍천 수타사
(壽陀寺) 동종, 포항 보경사(寶鏡寺) 동종
 등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 종은 불교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목적
과 달리 강화읍성 성문의 개폐(開閉)를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강화동종은 18세기까지 절찬리에 쓰였던 고려 범종의 양식에서 새로운 조선 후기 양식으로 변화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로띠를 종의 중앙부분에 두른 특이한 형태로 종의 위, 아래를 구
분하였다. 종의 윗부분에는 4개의 유곽(乳廓)을 만들고, 그 안에 연꽃으로 표현된 9개의 유두(
乳頭)를 두었다. 종의 아랫부분에는 긴 문장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그 명문에는 종과
관련된 주요 내용들이 상세히 적혀 있다.

강화읍성이 아비규환이 되었던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패거리들은 이 종까지 군침을 흘리며 물고
가려고 했다.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아마
도 무거운 탓에 가져가기가 힘들어서 그런 것 같다. 종의 무게는 무려 4톤(3,912kg) 높이는 198
cm, 지름은 138cm로 조선 후기 동종에서 가장 크다. 이 종과 종각은 처음에 남문(南門) 부근에
있던 것을 김상용 순절비 부근으로 옮겼다가 1977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종의 건강상태는 양호하여 종을 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은은한 종소리에 내 귀와 마음을 맡
겼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타종은 통제되어 있다. 종각으로 들어가는 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조차 없다.

문화재청의 지정 명칭은 '사인비구 제작 동종 - 강화동종'으로 현재는 하점면 강화지석묘 서쪽
에 있는 강화역사박물관에 가 있다.


▲  강화유수부 이방청(吏房廳)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6호

종각 남쪽에 자리한 이방청은 법과 군무(軍務)를 제외한 대부분의 행정 업무를 처리하던 관청이
다. 1654년(효종 5년) 강화유수 정세규(鄭世規)가 세웠으며, 1783년(정조 7년) 강화유수 김노진
(金魯鎭)이 청사 내부를 보수하고 건물 이름을 괘홀당(掛忽堂)이라 하였다. 왜정 이후 1972년까
지 강화군 등기소로 쓰이다가 1974년 기와를 손질 했으며, 1977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ㄷ' 형태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온돌방 8칸, 마루방 12칸, 부엌 1칸 등 총 21칸의 커다란 집
이다.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서 잠시 아픈 다리를 쉬게할 수 있다. 건물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으
며. 그저 텅 빈 방만이 즐비할 뿐. 적막만이 한없이 감돈다. 거기에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서서
히 어둠이 잠기니 거의 폐가처럼 음산함까지 느낄 정도이다.


▲  김상용 순절비(金尙容 殉節碑) - 인천 지방기념물 35호

읍내에서 고려궁터로 가는 길목에 비각 하나가 '잠깐 나좀 보고 가소' 하며 발걸음을 붙잡는다.
앞서 고려궁터에는 40년 몽고 전쟁의 휴유증과 병인양요의 아픈 상처가 있다면 이 비석에는 병
자호란(丙子胡亂)의 가슴 쓰린 상처가 담겨져 있다.

비석의 주인공인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은 안동 김씨로 자는 경택(). 호는 선원()
이다. 1590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검열관(檢閱官)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시절에는 권율(
權慄) 장군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1598년 승지(承旨)가 되어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 황제에게 굽신거렸으며, 서인(西
人)의 주요 멤버로 대사성(大司成)을 비롯, 여러 외직을 거쳤다. 1623년 서인패거리가 광해군(
光海君)에게 반기를 들며 반란을 일으킨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해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
한 자리를 얻었으며, 예조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627년에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었다.
1630년 나이가 70에 이르러 조정에 사직을 청했으나 인조는 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우의
정(右議政)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그는 빈궁(嬪宮)과 원손(元孫)을 호종하여 급히
강화도로 도망쳤다. 허나 1637년 1월 청나라군이 강화해협을 건너 손쉽게 강화성을 점령해버리
자 그 분함을 삼키지 못하고 남문 문루(門樓)에 화약을 잔뜩 쌓아 불을 질러 자살하고 말았다.

병자호란은 어리석게도 국제정세를 무시하며 청나라(후금)를 배척하고, 임진왜란 때 원군이랍시
고 민폐나 잔뜩 끼친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하며 지극한 사대(事大)로 영원
한 명나라의 그늘로 남고자 했던 어리석은 조선 지배층이 일으킨 큰 화이다. '명나라 만세, 후
금 꺼져!!'
를 외쳤으면 후금의 공격에 철저하게 대비라도 해야 되건만 성리학(性理學)에 목숨걸
며 국방을 게을리한 무능한 조선 지배층에게는 그딴 개념도 없었던 것이다. 김상용도 그런 정책
을 지지한 서인 패거리의 일원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음을 죽기
전에 깨닫기나 했을까..?
그 당시로는 흔치 않게 76년씩이나 살았던 인물로 포로가 되기 싫어 자살을 택한 탓에 죽어서도
충신의 대접을 받았다. 인조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선원면에 그의 사당을
세워 그의 충절을 기렸다. (선원면이란 이름은 그의 호에서 유래됨)

비각에는 현재 비석이 2기가 있는데 왼쪽에 구름무늬가 새겨진 비석이 1700년에 당시 강화유수
였던 김창집(金昌集, 김상용의 종증손)이 세운 것이다. 허나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비석의 건
강이 악화되자 1834년에 7대손인 김매순(金邁淳)이 지붕돌을 얹힌 새 비석을 세우고 옛 비석을
비각 밑에 묻었으며, 1976년 고려궁터 진입로 공사로 비각을 옮길 때 우연히 발견되어 부부처럼
나란히 세워놓게 된 것이다.

~~ 이리하여 강화도 역사기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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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8월 2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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