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바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7.09.27 목포의 오랜 상징을 거닐다. 유달산~갓바위 나들이 (노적봉, 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2. 2014.12.07 관봉 정상에 우뚝 자리한 거대한 석불,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

목포의 오랜 상징을 거닐다. 유달산~갓바위 나들이 (노적봉, 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 호남선의 종점, 목포 늦여름 나들이 '

   

▲ 유달산 노적봉
◀ 달성사에서 바라본 목포시내

▶ 갓바위입구 포구
▼ 갓바위

   



늦여름과 초가을의 팽팽한 경계선인 9월 첫 무렵에 예향(藝鄕)의 고을이자 전남 제일의 항구도
시인 목포(木浦)를 찾았다.
목포는 무려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그곳과는 이상하게도 인연이 잘 닿지가 않았다. 하여 이번
에 억지로 인연을 갖다붙여 목포행 무궁화호 첫 열차에 속세에 찌든 몸을 담고 느림의 미학(美
學)을 음미하며 거의 5시간을 달려 호남선(湖南線)의 오랜 종점, 목포역에 이르렀다.
목포에서의 정처는 이미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되는데 이번에 문을 두드린 곳
은 유달산 동부와 달성사, 그리고 갓바위이다.


 

♠  유달산(儒達山) 겉돌기

▲  노적봉(유달산입구)에서 유달산으로 인도하는 계단

목포역에서 시내를 가로질러 노적봉길을 따라 10여 분 걸으면 유달산의 관문인 노적봉 주차장(
유달산입구)이다. 속세에서 유달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중심 관문으로 이곳 외에도 어민동산과
조각공원, 목포시사 등에도 산길이 있으나 관광객들은 보통 노적봉에서 오른다. 이곳에 너른
주차장이 있고 접근성도 괜찮기 때문이다.

유달산(228.3m)은 목포의 상징이자 꿀단지로 시내 서쪽에 들어앉아 서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노령산맥(蘆嶺山脈)의 실질적인 종점으로 호남의 개골(皆骨)로 일컬어졌으며 영혼이 거쳐가는
산이라 하여 영달산(靈達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영혼이 나중에 선비를 뜻하는 한자로 바뀌
어 유달산으로 간판을 바꾼 것이다.
산세는 그리 크지 않아 노적봉에서 정상까지 넉넉잡아 30~40분 정도면 충분하며 유달산의 정상
인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삼등바위, 고래바위, 투구바위, 노적봉 등 20개가 넘는 개성파 바위
들이 앞다투어 산을 멋지게 수식하고 있다. 이들은 목포8경의 으뜸인 유산기암(儒山奇巖)의 현
장으로 지금은 목포9경으로 재편되어 '유달산풍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유달산의 품에는 대학루와 달선각, 소요정, 낙조대 등의 정자가 있고, 조각공원과 특정자생식
물원, 노적봉예술공원, 목포시사, 달성사, 오포대(午砲臺) 등의 명소가 있으며, 2.7km의 유달
산 일주도로(유달로)와 뚜벅이를 위한 유달산 둘레길이 둘러져 있다. 또한 산자락에는 왕자귀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천하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서식하고 있다.

산에 왔다면 정상은 한번 가주는 것이 산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정상에 오르면 목포시내를 비
롯하여 서해바다와 점점이 찍힌 크고 작은 섬들이 앞다투어 두 눈에 들어와 조망(眺望)이 천하
일품이다. 게다가 사방(四方)이 확 트여있어 일출과 일몰을 모두 구경할 수 있다.
이곳 정상은 한참 20대의 중반을 달리고 있던 2002년 초, 심야열차로 목포에 내려와 새벽에 검
은 도화지 속을 가르며 올라간 추억이 있다. 그때 일등바위에 걸터앉아 불끈 솟아오르는 해돋
이를 보며 목이 터져라 환호를 질렀었지~! (허나 지금은 우울이 파도를 치는 30대 후반 ㅠㅠ)
노적봉에서 정상까지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밤에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이렇게 오랜만에 찾은 유달산이지만 이번에는 뫼 깊숙히 안기지 않고 노적봉과 목포시사, 달성
사 등 유달산의 겉만 돌고 철수했다.


▲  노적봉예술공원 미술관 야외공연장

노적봉 주차장 서쪽에는 노적봉예술공원이 자리해 있다. 주차장에서 보이는 공원은 3층 꼭대기
로 야외공연장으로 쓰이며 공연장 옆에 '노적봉예술공원'이라 쓰인 건물로 들어가 내려가면 미
술관과 홍보관이 나온다.
이곳은 2009년 7월에 문을 연 목포 종합 홍보관 겸 미술관으로 지상 2층과 옥상(3층)으로 이루
어져 있다. 1층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작품과 목포 지역 서화가의 작품을 다루는 미술관으로
, 2층은 목포의 역사와 지리, 문화, 예술 등을 다루고 있으며, 3층 옥상은 야외공연장으로 쓰
이고 있다. 허나 이곳은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곳이라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넘기고 유달
산으로 등을 돌렸다.

★ 노적봉 예술공원 미술관 관람정보 (2017년 9월 기준)
* 관람시간 : 9시~18시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없음)
*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대의동2가 1-4 (유달로 116, ☎ 061-270-8300)


▲  노적봉(露積峯)

노적봉 주차장(유달산입구) 뒤쪽에 노적봉이라 불리는 울퉁불퉁한 큰 바위가 있다. 속세(俗世)
에서 유달산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그는 대자연이 빚은 해발 60m의 바위로 남해바다의 영
원한 해신(海神),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뛰어난 전략과 숨결이 서린 현장이다.

때는 1597년 겨울, 그 유명한 명량대첩(鳴梁大捷)으로 적선 133척을 격파하고 왜군 1만여 명을
물고기 간식으로 만든 이순신은 목포 앞바다에 뜬 고하도(高下島)에 주둔하며 남해로 진출할
준비를 했다.
왜군들은 언제 이순신이 나타나 자신들의 목을 칠지 전전긍긍하며 수시로 조선 수군의 동태를
살폈는데, 이순신은 바다가 잘 보이는 노적봉에 이엉(볏짚)을 덮어 마치 군량미가 산처럼 쌓여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하고, 새벽에는 바닷물에 백토를 풀어 쌀뜨물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을 눈
뜬 장님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왜군은 그의 계략에 제대로 속아 쫄깃해진 염통을 부여잡고 도
망을 쳤으니 그 연유로 세상에서는 이 바위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유달산의 상징이자 이순신의 손길이 담긴 노적봉은 매우 거친 바위라 오르는 것이 통제되어 있
다. 바위 주변에는 산책로가 둘러져 있어 방향마다 달리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맨
살을 완전히 드러내기가 부끄러웠는지 얇게나마 푸른 덩굴 옷을 걸치고 있다. 근래에는 노적봉
큰바위 얼굴이라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바위 꼭대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 얼굴과도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이를 두고 이순신 장군이 호령하고 있는 모습이라 말하기도 한다.
또한 노적봉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에도 좋다고 하여 인근 다산목과 함께 소원을 비는 현장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  가까이서 바라본 노적봉 (바위 정상이 사람 얼굴과
좀 비슷하게 생겼음)

▲  동쪽에서 바라본 노적봉

▲  북쪽에서 바라본 노적봉


▲  노적봉 동쪽에 심어진 옛 목포MBC 표석
1980년 5.18 시절 방송매체들이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며 5.18을 폭동으로,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는 보도를 내보내자 분노한 목포 시민들이 방송국에 불을 지르고 5.18
탄압을 규탄했던 현대사의 쓰라린 현장이다. 그 현장이던 목포MBC는 다른 곳으로
둥지를 옮겼고 저렇게 표석 하나를 남겨 놓아 당시의 상황을 아련히 전한다.


▲  새천년 시민의 종

노적봉 뒤쪽으로 가면 커다란 종각(鐘閣)이 있다. 그 안에는 2000년 10월에 조성된 커다란 종,
새천년 시민의 종이 담겨져 있다.
2000년에 새로운 천 년을 맞이하여 목포시에서 6억 원을 들여 만든 종으로 옛날에 정오 12시를
알렸던 오포대(午砲臺) 자리에 세웠다. 종은 1998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2000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는데 서울대 정밀기계설계 공동연구소에서 제작 설계를 하고, 김응현 선생이 종에 글씨를
새겼으며 종각의 현판인 '시민종각(市民鐘閣)'은 전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남겼다.
보통 종은 33번을 치기 마련이나 이 종은 희망찬 21세기의 염원을 담아 만든 것이라 하여 특별
하게 21번을 친다.


▲  노적봉에서 시내로 내려가는 계단길
이 계단을 내려가면 옛 목포 일본영사관(사적 289호)이 나온다.

▲  온갖 거시기한 상상을 유발시키는 노적봉 다산목(多産木) 아랫도리


▲  노적봉 다산목

노적봉 남쪽에는 유달산의 새로운 명물로 등극
한 다산목이란 나무가 있다. 이들 나무는 팽나
무로 나무 줄기는 뼈만 앙상한 다리 같은 모습
인데 그들이 갈라져 가랭이를 벌리고 있는 듯
한 부분은 여인의 은밀한 부분과 비슷하게 생
겨 먹어 온갖 예민한(?) 생각들을 불러일으킨
다.

이 나무는 1900년대 초반에 발견된 것으로 여
한목(한스러운 여인나무)이라 불렸다고 한다.
나이는 150년 정도로 1910년경에 어미나무(여
한목)의 뿌리에서 새끼나무가 자라나자 그를
다산목이라 했다.
인근 주민들만 알고 지내던 숨겨진 존재로 이
들 나무를 보면 아이를 많이 낳는다고 하여 노
적봉 주변 동네의 출산율이 목포의 다른 동네
보다 높았다고 전한다. 아무래도 자연의 경이
로움이 느껴질 정도로 걸작이다보니 보기만해
도 밤일(?) 생각이 간절하고 힘 또한 불끈 솟
는 모양이다.

동네 사람들의 아주 비밀스러운 성기/기자신앙(性器/箕子信仰)의 대상물로 오랫동안 숨바꼭질
을 해왔지만 2000년 10월 새천년 시민의 종을 만들고자 노적봉 주변의 수풀을 손질하는 과정에
서 발견되어 속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목포시청에서 그 나무를 여자나무(여인나무)
라고 부르다가 동네 설화에 따라 다산목으로 이름을 바꾸고 유달산의 명물로 키우고 있다.


▲  노적봉에서 바라본 목포시내

▲  유달산 주위를 도는 드라이브 둘레길, 유달로

▲  점점 멀어져가는 노적봉 (유달로에서 바라본 노적봉)

▲  목포시사로 인도하는 계단길
나무가 적절하게 고개를 숙이며 조촐하게 숲길을 이룬다.

▲  돌담에 둘러싸인 목포시사(木浦詩社) - 전남 지방기념물 21호

노적봉에서 유달산 밑도리를 따라 흘러가는 둘레길을 쫓아 조각공원 방면으로 가다보면 숲속에
고즈넉하게 들어앉은 목포시사가 마중을 나온다.

유달산 동쪽 자락에 안긴 목포시사는 1907년 대학자로 칭송받는 정만조(鄭萬朝)가 세웠다. 시
사(詩社)란 선비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으로 지금으로 따지면 문학 동호회 모임터이
다. 1890년 허석제, 여규향 등 지역 문인들이 세운 유산정에서 비롯된 목포시사는 망국의 한
과 우국충정을 토로하던 문학결사 단체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시에 뜻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받아들였으나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은 절대로 받지 않았다.
지금도 시사의 성격은 전혀 녹슬지 않았으며, 매년 봄과 가을에 한시(漢詩) 백일장을 열고 있
다. 그때가 되면 전국에서 100~200명 이상의 문인들이 찾아와 서로의 필력을 겨루며 한시의 명
맥을 이어가고 있다.


시사를 이루고 있는 건물은 2동으로 앞에 있는
건물이 시사 본당(本堂)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본당에는 정만조의 문집과 구한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온갖 서적과 한시 현판, 백일장 입
선작, 문인들의 원고가 소장되어 있으며 뒷쪽
건물은 시사 관리인의 거처이다.


  목포시사 본당



 

♠  유달산 자락에 안긴 100년 묵은 산사(山寺)
목포 달성사(達聖寺)

▲  달성사 (왼쪽부터 범종각, 명부전, 극락보전, 관음전)

목포시사에서 다시 둘레길을 따라 북쪽으로 2~3분 가면 달성사 이정표가 마중을 나온다. 그의
안내에 따라 산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유달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다진 달성사가 모습을 비춘다.

달성사는 목포 지역 유일의 오래된 사찰로 1913년 4월 석가탄신일에 노대련 선사(盧大蓮 禪師)
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에 창건되어 대원사(大願寺)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근
거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1913년 창건 이후 법등(法燈)을 켠지 이제 100여 년이 되었지만 그 짧은 역사도 제대로 정리하
지 못해 많은 내력이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의 절은 2000년대 초반에 손질된 것으로 고색의 내
음은 싹도 틔우지 못했지만 다행히 다른 곳에서 오래된 불상 2개를 업어와 든든한 밥줄로 삼고
있다. 내가 여기에 온 것도 바로 그 불상을 보기 위함으로 그들이 만약에 없었다면 이곳에 영
원히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위시하여 명부전과 삼성각, 요사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산자
락에 크게 2단으로 석축을 다져 1단에는 3층석탑과 요사, 범종각을 두고, 2단에는 극락보전과
명부전, 관음전을 두었다. 그리고 극락보전 뒤쪽에 높이 터를 구축해 삼성각을 세웠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아미타3존불좌상과 목조지장보살반가상 등이 있
으며, 이곳에 있는 우물은 유달산 뿐 아니라 목포에서도 흔치 않은 샘터로 유명하다. 또한 목
포8경의 하나인 달사모종(達寺暮鐘)의 현장으로 이곳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는 목포 시내의 번
뇌를 잠재운다.


▲  달성사로 올라가는 계단길

▲  경내 밑에 자리한 이형(二形) 석탑
정확한 조성시기는 모르겠으나 때깔이 좀 낀 것으로 봐서는 20세기 초나 중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3층탑 같기도 하고 2층탑 같기도 하고, 보면 볼수록
참 답이 없는 탑인데 아랫층을 기단으로 본다면 2층이 되겠고, 탑신으로
본다면 3층이 되기 때문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경쾌하게 들려져
살짝 날개짓을 벌이는 것 같다.

▲  경내로 오르는 계단

▲  앞서 이형 석탑 윗도리와 똑같이 생긴
2층 탑신이 계단 옆에 놓여져 있다.

▲  관음전(觀音殿, 2층)과 요사, 공양간(1층)
관음전 밑도리를 활용하여 요사와
공양간을 두었다.

▲  극락보전(極樂寶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처음에는 대웅전을 칭했으나 본존불과의
형편성을 고려해 극락보전으로 바뀌었다.


▲  달성사 목조아미타3존불좌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28호

극락보전에는 눈을 가늘게 뜨며 포근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
의 이름을 대웅전(大雄殿)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인 극락보전으로 바꾼 것도 바로 이
들 때문이다.

그들은 1678년 강진 만덕산 백련사(白蓮寺)에서 조성된 목불(木佛)로 이들을 조성하면서 남긴
조성발원문(14cmX25cm)에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다.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나를 취하
며 앉아있는 아미타불의 옷은 통견의로 U자형의 옷주름이 물결을 이루고 있으며 1자형의 띠줄
과 연화형 승각기, 우측 어깨의 반단, U자형 군의자락 등이 특징이다. 그의 좌우에는 현란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로 앉아있는데 표정이 좀 무거
워 보이며 17세기 전남 지역의 몇 안되는 목불의 하나로 손꼽힌다.

◀ 극락보전 뒷쪽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과
그 앞에 솟은 대련선사창공비(大連禪師彰功碑)

삼성각은 산신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
금자리로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다.
그 밑에 밋밋하게 솟은 비석은 절을 세운 노대
련 선사를 기리고자 세운 창공비(彰功碑)이다.

         ◀ 달성사 우물 <옥정(玉井)>
극락보전 뒷쪽에는 정(井)과 샵(#) 모양의 진
수를 보여주는 우물이 누워있다. 여기선 그를
옥정이라 하여 애지중지하고 있는데 노대련이
100일 기도 중에 굴착을 하니 기도의 영험인지
30척 바위 속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유달산의 흔치 않은 우물로 물맛이 좋기로 소
문이 자자하며, 여름에는 물이 차고 부정한 사
람이 물을 길으면 일시에 마른다고 한다. (내
가 갔을 때는 물 구경도 못했음)

  종무소(宗務所) 겸 요사(寮舍)

  명부전(冥府殿)

  명부전 10왕상 (우측)

  명부전 10왕상 (좌측)


  달성사 목조지장보살반가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29호

극락보전 옆에는 지장보살과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이 있다. 다
른 건물은 다 지나치더라도 극락보전과 명부전 내부는 꼭 살펴보도록 하자. 바로 달성사의 보
물이 담겨져 있기 때문으로 특히 명부전의 목조지장보살반가상은 이 땅에 흔치 않은 반가상(半
跏像)으로 매우 희소성이 높다.

푸른색의 승려 머리를 선보이며 동자처럼 해맑
은 표정을 지은 지장보살상은 1565년 나주 웅
점사<熊岾寺, 현재 운흥사(雲興寺)>에서 조성
된 것으로 조성 관련 내용이 조성발원문(13cmX
143cm)에 소상히 나와있다.
극락보전의 목조아미타3존불처럼 낯선 이곳으
로 흘러들어왔는데, 언제 무슨 경로로 왔는지
는 전하는 것이 없다.

이 불상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밝은 표정 속에
는 눈썹과 가늘게 뜬 눈, 오똑한 코, 붉은 입
술이 담겨져 있으며,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島
)가 획 그어져 있다.
왼쪽 다리는 가부좌(跏趺坐)를 취하고 있고 오
른쪽 다리는 밑으로 내리고 있는데, 이런 형태
의 불상은 17세기 이전에는 오로지 이것 밖에
없다고 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우 사실적
으로 묘사되었으며 지방문화재가 아닌 국가 보
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인다.

그가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그를 위해 근래에 특별한 제작된 것으로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살짝 앉아보고 싶을 정도 탐이 난다. 그의 좌우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
明尊者)가 밝은 색채를 띄며 서 있다.


▲  달성사에서 바라본 목포시내

경내를 둘러보고 종무소 툇마루에 앉아 불만에 잠긴 두 다리를 쉬었다. 툇마루에 식당에서 많
이 볼 수 있는 커피 자판기가 있는데 무려 공짜이다. (지금은 없으며 종무소에서 승려가 전통
차를 달여서 제공해줌, 단 그가 종무소 방에 머물고 있을 때에 한함) 그래서 2잔이나 뽑아 마
셨지.
속세에 대한 근심을 잠시 바람에 날리며 툇마루에 앉아있으니 종무소에서 일하던 여인네가 다
가와 말을 건넨다. 그는 나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였는데 어디서 오셨나면서 과자와 녹차를 권
한다. 뜻밖에 호의에 고마움을 표하며 과자와 녹차를 마셨고 배고픈 마음에 과자를 더 청하니
초코과자를 더 건네준다. 그렇게 간식을 섭취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아쉽지만 작별을
고하고 절을 떠났다.

달성사에 대해서는 운좋게 오래된 불상을 업어온 20세기 초반 사찰, 1번 오면 그만인 그런 정
도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절의 호의에 또 오고 싶은 긍정적인 사찰로 인식이 돌변했다. 그래서
얼마 전 봄에도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려 승려에게 차를 여러 잔 대접 받으며 차담(茶啖)을 주고
받았다.

※ 유달산 찾아가기 (2017년 9월 기준)
① 목포까지
* 용산역, 영등포역, 수서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오송역, 서대전역, 익산역, 광주송정역
  에서 목포행 각종 열차 이용
* 서울 강남센트럴시티에서 목포행 고속버스가 40~6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 목포행 직행버
  스가 1일 5회 떠난다.
* 고양(백석), 성남, 수원, 안산, 인천, 천안, 세종, 전주, 광주, 여수, 부산(사상), 창원(마
  산)에서 목포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목포역에서 유달산입구(노적봉)까지 도보 12분, 달성사는 약 25분
* 목포종합터미널에서 물 흐르듯 자주 다니는 목포역, 삼학도, 해양대 방면 시내/좌석버스를
  타고 목포역 정류장에서 도보 이동, 또는 노선 굴곡이 심한 2, 60번 시내버스를 타고 목포
  YMCA나 유달산우체국에서 하차하여 도보 이동 (60번은 연산동으로 크게 돌아감)

③ 승용차
* 서해안고속도로 → 죽림나들목에서 고하대로 직진 → 삽진고가교 → 북항교차로에서 좌회전
  → 해양대학로 → 유달로 → 달성사입구 → 유달산주차장, 노적봉

★ 유달산 관람정보 (2017년 9월 기준)
* 입장료는 공짜, 주차비는 경차 30분에 500원, 중형은 500원, 대형은 1,000원
* 유달산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죽교동 (☎ 노적봉 관광안내소 061-270-8411)
* 달성사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죽교동 317-1 (유달로 173 ☎ 061-244-1489)


 

♠  대자연이 빚은 기묘한 작품, 갓바위 - 천연기념물 500호

  갓바위 입구 포구

유달산과의 짧은 인연을 쿨하게 마무리짓고 갓바위로 가고자 시내로 나왔다. 뱃속을 달래고자
목포역 부근으로 내려와 마땅한 식당을 물색하다가 다양한 종류의 순두부찌개를 내놓는 '수가
정'이란 식당에 눈에 들어와 소고기 순두부찌개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곳은 10여 가지의 순
두부찌개를 취급하는데 찌개와 돌솥밥이 같이 나온다. 돌솥에 담긴 밥에 뜨거운 물을 넣어 푹
우린 다음 순두부와 같이 냠냠하는 것으로 그런데로 숟가락을 들만하다.

그렇게 시장한 배를 배불리 달래고 목포역에서 목포시내버스 15번을 타고 남항과 하당 사이에
자리한 갓바위로 이동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앞에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이곳도 엄연한 목포 도심이건만 시골
어촌 풍경이 여전히 진하다. 목포만(木浦灣) 너머로 영산강하구둑을 비롯하여 지역 발전과 돈
을 향한 집념의 연기를 내뿜는 대불공단 공장들이 바다 건너로 보이고 바다와 포구에는 갖은
어선들이 조각배처럼 수면 위를 장식하고 있어 평화로운 어촌 풍경을 자아낸다.

버스정류장에서 갓바위로 인도하는 산책로를 들어서면 중간에 갓바위 뒷통수로 오르는 입암산(
立巖山) 산길이 있으며, 직진을 고수하면 나무로 다진 해안산책로(보행교)가 나온다. 이 산책
로는 갓바위를 두 다리로 편하게 구경할 수 있게끔 2008년 4월 10일에 설치된 298m의 길로 동
쪽은 하당신도시 달맞이공원과 이어진다.
밀물 때는 바닷물을 따라 1m 정도 육지쪽으로 올라왔다가 썰물이 지면 바닷물을 따라 내려가는
산책로로 바다를 따라 조금씩 모습을 달리 한다. 보행교에는 야간 조명을 설치하여 통행 편의
는 물론 갓바위의 환상적인 야경까지 선사하고 있다.


  갓바위 입구 앞바다(목포만) - 바다 건너는 대불공단

▲  갓바위와 이웃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신안(新安) 해저 유물을 비롯하여 바다에서 발견된 온갖 묵은 보물들이
담긴 이 땅 최초의 해양박물관이다.

  갓바위 해안산책로(보행교) - 갓바위 서쪽 보행교


  서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서남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입암산 남쪽 바닷가 벼랑에 자리한 갓바위는 대자연이 긴 세월을 두고 빚은 심오한 작품이다. 아직 작품은 완성되지 않았고 지금도 계속 자연의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굼벵이 속도로 손질
되고 있어 몇백 년 이후에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자아낼 것이다.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갓바위는 갓을 쓰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갓바위란 단순한 이름
을 지니게 되었다. 보면 볼수록 놀라움만 더하게 하는 그는 2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왼
쪽(서쪽) 바위는 모자가 달린 외투나 옷을 껴입은 모습처럼 보여 사오정 시리즈로 유명한 귀머
거리 사오정과 비슷해 보이며 오른쪽(동쪽) 바위는 갓보다는 철모를 쓰고 있는 군인 같다.
예전에는 갓처럼 보였겠지만 그만큼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모자 달린 옷이나 철모처럼 서서히
변했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시멘트가 떨어져 나간 듯한 모습이라 사람들이 건드린 것은 아닐
까 싶지만 저게 모두 순수 자연 현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
겠는가.

갓바위가 이런 요상한 형태가 된 것은 이곳이 바닷물과 담수가 만나는 곳으로 암석 표면에 파
도가 치거나 안개가 끼면 소금기를 머금은 물에 젖었다가 마르기를 되풀이한다. 그 와중에 수
분에 들어있던 실리카 성분이 침전되면서 용해된 부분은 조직이 이완되고 강도가 낮아져 모자
모양의 경질부와 아랫쪽이 움푹 패인 벌집 모양의 풍화혈(風化穴)이 형성된 것이다. 파도와 해
류, 바다 바람에 의해 바위가 변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현장으로 다른 풍화혈에서는
찾기 힘든 희귀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삿갓이 동남쪽을 향한 것은 햇볕의 영향 때문이라는 설
도 있다.

이곳을 물든 저녁 노을과 갓바위와 해안 벼랑에서 반사되는 노을빛이 무척 아름다워 예로부터
목포8경의 하나인 입암반조(笠岩返照)로 꼽혔으며 파도와 바닷바람에 의해 바위가 이렇게도 성
형이 될 수 있음을 실감나게 하는 현장으로 2009년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지금은
목포9경의 일원임)


  정면에서 바라본 갓바위의 위엄

이렇게 개성이 넘치는 바위에는 옛 사람들이 그럴싸하게 붙여놓은 전설 보따리가 꼭 담겨져 있
기 마련이다. 목포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갓바위 역시 그 예외는 아닌데 그들이 붙여놓은 전설
은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가 수염을 태워먹던 어느 옛날,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청년이 있었
다. 그는 소금을 팔아서 생계를 꾸렸는데 살림살이는 늘 궁핍했으나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매
우 지극하여 동네 사람들의 칭찬이 마를 날이 없었다.
소금 장사로는 생계가 어려워 부잣집에 머슴으로 들어갔으나 주인이 돈은 주지도 않고 부려먹
기만 하는지라 1달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집에 와보니 심상치 않은 기운이 있어 방문을 열어
보니 글쎄 아버지의 손과 발이 이미 식어있는 것이 아닌가. 청년이 집을 비운 사이 그는 숨줄
을 놓은 것이었다.
청년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양지바른 곳에 묘자리를 잡고 관을 모시고 가던 중, 그만
실수로 관을 바다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어떻게 빠뜨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전설은 그냥 그렇
게만 나와있음) 청년은 다시 한번 불효를 통회(痛悔)하며 울부짖다가 하늘을 바라보고 살 수
없다고 자책하며 평생 갓을 쓰고 관이 빠진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다. 이후 그곳에 2개의 바위
가 불쑥 올라왔는데 사람들은 큰 바위를 아버지 바위, 작은 바위를 아들바위라 불렀다.

다른 전설로는 부처가 나한(羅漢)을 이끌고 영산강을 건너 이곳에서 잠시 쉬었는데, 그때 모르
고 놓고 간 삿갓이 바위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갓바위 대신 중바위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앞 전설이 효도를 소재로 한 것이라면 뒷 전설은 불교를 소재로 한 것으로 효행사상을 장려하
고자 갓바위를 이용한 선비들과 이곳에 오지도 않은 부처와 나한을 내세워 바위를 포교의 소재
물로 삼은 승려들의 투철한 영업 정신이 교차된 현장이다.

바위가 해변 벼랑에 있다보니 육지에서는 그의 뒷통수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천상 배를
타고 봐야 했었지. 바로 그런 고충을 해결하고자 2008년 4월 갓바위 주위에 해안보행교를 만들
어 두 다리로 언제든 갓바위를 만날 수 있게 배려했으며 조명시설까지 설치해 야경까지 덤으로
제공한다.


  갓바위에서 바라본 목포만과 영산강하구둑

▲  동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 바다에 돌출된 모자 끝부분을 손으로 만지면
가루처럼 뚝 부러질 것만 같다. 정말 만져보고 싶은데 위치가 저러니
이렇게 바라보는 선에서 그 미련을 접어야 된다.

▲  아랫도리가 긁힌 갓바위 동쪽 벼랑 (윗쪽은 입암산 전망대)
이들도 갓바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저 모양이 되었다. 마치 사람들이
도구를 이용해 긁은 모습처럼 말이다.


  갓바위 바로 앞 보행교

  갓바위 동쪽에 둥지를 튼 하당신도시

  동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주변

  갓바위 뒷통수에 펼쳐진 입암산 산길

  입암산에서 바라본 목포만과 영산강하구둑

갓바위 뒤쪽은 해안 언덕으로 목포자연사박물관 뒷쪽에 누운 입암산의 일부이다. 그 언덕에는
산책로가 닦여져 있는데 갓바위 뒷통수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해조음을 듣고 자라난 나무들이
숲을 이루며 우거져 있고 그 산을 넘으면 하당 달맞이공원으로 이어진다. 갓바위에 왔다면 바
다와 바위만 볼 것이 아니라 입암산 산길도 한번 거닐기 바란다.
이처럼 갓바위는 산과 바위, 바다, 3박자가 깔끔하게 어우러진 경승지이자 유달산과 자웅을 겨
루는 목포 제일의 명소이다.

갓바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 찬란했던 햇님의 기운도 슬슬 망조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땅꺼
미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목포에서의 볼일도 그런데로 다 마쳤으니 이제 제자리로 돌아와
야 되겠지. 마음 같아서는 하루를 더 머물며 인근 지역까지 살펴보고 싶지만 그럴 준비까지는
갖추지 못했다. 하여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여기서 가까운 목포종합버스터미널로 이동하여 수
원행 마지막 고속버스에 몸을 실으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9월 초 목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목포 갓바위 찾아가기 (2017년 9월 기준)
* 목포역 건너편에서 목포시내버스 15번을 타고 중바위(갓바위) 하차
* 목포종합버스터미널 남쪽 상동입구 정류장에서 목포시내버스 112번을 타고 우미파크빌5차에
  서 하차, 여기서 해안산책로나 달맞이공원을 거쳐 갓바위까지 도보 10분
* 목포종합버스터미널 남쪽 상동입구나 서쪽 버스터미널 후문 정류장에서 900번(900번A) 좌석
  버스를 타고 갓바위터널 하차, 갓바위터널을 거쳐 갓바위까지 도보 15분

* 갓바위 해안산책로(보행교) 통행가능시간
- 하절기 5시~24시 (동절기는 23시까지)
- 태풍과 호우, 폭설, 안개 등의 기상악화 시에는 접근 통제

* 갓바위 서쪽에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061-270-2000, ☞ 홈페이지 보기), 목포자연사박
  물관(☎ 061-270-8367, ☞ 홈페이지), 목포생활도자박물관(☎ 061-270-8480, ☞ 홈페이지),
  남농기념관(☎ 061-276-0313), 목포문학관(☎ 061-270-8400, ☞ 홈페이지 보기), 목포문화예
  술회관(☎ 061-270-8484, 홈페이지 보기) 등의 박물관과 전시/예술공간이 몰려있다. 이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갓바위문화타운’이라 부르는데, 갓바위와 이들 몇 개를 같이 묶어서
  본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특히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이 땅 최초의 해양
  문화재 박물관으로 신안 서해바다에서 발견된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 갓바위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용해동 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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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9월 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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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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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봉 정상에 우뚝 자리한 거대한 석불,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

 


' 팔공산(八公山) 갓바위 '
팔공산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
▲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의 위엄

 


겨울의 제국(帝國)이 가을을 몰아내며 천하를 거의 접수하던 11월 끝 주말에 소원을 들어주기
로 명성이 자자한 팔공산 갓바위를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강남고속터미널에서 대구행 일반고속버스를 타고 약 3시간 30분을 달려 서대구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경산시내버스 708번을 타고 대구(大邱) 시내를 동서로 가르며
1시간 정도를 달려 경산시 하양읍(河陽邑)에 도착, 다시 갓바위로 올라가는 경산시내버스 803
번(경산역,중산동↔갓바위)을 타고 약 40분을 달려 비로소 갓바위 종점에 이르렀다.

갓바위 종점은 해발 600m 고지로 선본사 바로 밑이다. 시내버스는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지만
일반 수레들은 약 1km 밑에 닦여진 주차장에서 바퀴를 멈춰야 된다. 물론 종점까지 진입도 가
능하나 수레를 세울 공간이 여의치 않다.
이 땅의 주요 불교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 받는 갓바위와 가까운 곳이라 아랫 세상과 공기
부터가 확연히 틀리다. 청정한 기운이 감돌아 잡다한 번뇌에 유린당한 나의 머리와 마음을 깨
끗하게 정화시켜준다. 물론 속세로 나가면 정화된 번뇌는 다시금 나를 범할 것이다.

갓바위 종점에서 길은 2갈래로 갈라진다. 왼쪽 길은 갓바위, 오른쪽은 선본사로 통하는데, 선
본사는 종점 바로 윗쪽이라 접근은 편하다. 그곳은 갓바위를 보고 내려올 때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무척이나 보고싶은 갓바위로 길을 잡는다. 여기서 갓바위까지 공식적인 거리는 800m이나
체감거리는 그 2배 이상으로 넉넉잡아 30분 정도 걸린다. 게다가 산길이 좀 가파르고 계단 또
한 많아 오르기가 썩 만만치는 않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갓바위를 향한 중생(衆生)들의 발길
을 막지는 못한다.

갓바위를 향해 20분 정도 오르다 보면 칠성각과 요사가 있는 갓바위 하단(下段)에 이른다. 갓
바위를 비롯하여 선본사에서 갓바위로 오르는 길목에 건물들은 모두 선본사 소속인데, 그중에
서 아래쪽에 있는 요사와 칠성각 구역은 하단이라 부르며, 하단과 갓바위 중간의 대웅전 구역
은 중단(中段), 갓바위를 상단이라 부른다. 이들 하단과 중단은 갓바위를 관리하고 그를 찾아
온 중생들의 편의를 위해 조성되었다. 그리고 선본사 경내와 갓바위 일대를 구분 짓고자 편의
상 선본사는 '본절', 갓바위 일대는 '웃절'이라 부른다. 쉽게 풀이하면 선본사는 본점(本店),
갓바위는 일종의 지점(支店)이 된다. 하지만 본점보다는 지점이 훨씬 사람이 많으며 그로 인
하여 지점의 규모는 본점을 훨씬 능가한다.


▲  갓바위로 오르는 산길 (계단길 이전)

◀  갓바위로 오르는 계단길
오색영롱한 연등이 갓바위까지 대롱대롱
이어져 중생들이 그릇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인도한다.


♠  갓바위 하단 (칠성각, 요사)

▲  'ㄱ' 모습의 요사

갓바위 종점에서 20분 정도 오르면 갓바위 하단에 이른다. 오르는 길은 처음에는 경사가 완만하
지만 중간에 계단길로 돌변하면서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조금 급해진다. 허나 바람이 불면 날아
갈 정도의 허약 체질이 아닌 이상은 누구든 오를 수 있으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갓바위 하단은 1973년에 조성된 것으로 가파른 산자락에 터를 닦아 요사(寮舍)와 칠성각(七星閣
)을 지었다. 요사는 그런 경사에 지어진 탓에 3층이 되었으며, 칠성각과 맞닿은 제일 위층에는
공양간이 있는데, 갓바위를 찾은 중생에게 공양(供養)을 제공한다. 굳이 공양이 아니더라도 두
다리를 쉬며 이야기꽃도 피울 수 있는 휴식처의 역할도 하고 있으며, 갓바위 수요가 많은 탓에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시간은 변동될 수 있음)까지 언제든지 공양을 할 수 있다. (초파일과 대
학입시철, 기타 행사일에는 보통 새벽 1시까지 공양 가능)


▲  3가지의 이름과 용도를 지닌 칠성각(七星閣)

공양간 맞은편 높다란 기단(基壇) 위에는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은 1973년에 지어진 것
으로 1990년에 중수했다.
칠성각이라고 하지만 그건 건물 가운데인 어칸에만 해당되며, 건물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은 산신각(山神閣), 우측은 용왕각(龍王閣)이다. 건물은 하나인데, 각 칸마다 건물의 이름
을 달리한 특이한 구조이다. 허나 칠성(七星)이 그 건물의 중심이기 때문에 칠성각으로 불린다.

칠성각은 칠성신(七星神)이 그려진 칠성탱화(幀畵)가, 산신각에는 산신탱화와 산신상, 용왕각은
바다를 지키는 용왕의 탱화와 용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바다와 멀리 떨어진 산사(山寺)가 별로
연관도 없어보이는 용왕을 위한 공간을 둔 것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1802년 4월 초파일에 제작
된 200년 묵은 신중탱화(神衆幀畵)가 용왕탱 옆에 걸려있으나 건물 접근이 불가하여 보기가 힘
들며, 건물 밑에 촛불이 가득한 곳은 수각(水閣)이라 부른다.
칠성각 좌우로 돌로 만든 12지신상이 건물을 지키고 있고, 각기 모습이 다른 석등이 자리해 있
다. 예전에는 건물에 들어가 예불을 올렸지만 찾는 사람에 비해 건물이 너무 좁아 건물 접근을
통제하고 공양간 사이 뜨락에 넓게 예불 장소를 마련해 예불의 편의를 제공했다.
(매월 초순 음력 1~8일에만 삼성각을 개방함)

▲  칠성각 우측 계단에 늘어선 12지신상

▲  갓바위 하단에서 갓바위로
오르는 계단길


초를 피우는 공간에는 약 1,000개의 초가 앞다투어 자신을 불사르고 있고, 향을 피우는 공간에
는 향을 꽂을 공간이 없을 정도로 무수한 향이 연기를 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초와 향이 가득
한 것은 석가탄신일 외에는 정말 처음 본다. 향은 공짜로 이용할 수 있지만, 초는 기도비를 내
야 된다. 물론 그냥 가져가도 된다. 하지만 적지 않게 눈치가 보인다. 시주금은 정해진 것은 없
지만, 많으면 많을 수록 절에서 기뻐할 것이다. 실제로 갓바위에서 일하는 신도 아줌마들이 기
도비를 많이 내라고 종용한다는 내용이 선본사 홈페이지에 올라와 시끄러운 적도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점심시간을 지나 13시이다. 시장한 배를 달래고자 공양간에 발을 들이니 많은 이
들이 공양을 하고 있었고, 공양간 한쪽 구석에는 등산객과 참배객 등이 삼삼오오 앉아 쉬고 있
었다. 공양줄도 길어서 2분 정도 지나야 비로소 공양밥을 가져올 수 있었다. 갓바위를 든든한
후광으로 삼아 수입도 짭짤하므로 공양밥도 제법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밥을 보고 그야말
로 경악을 하고 말았다. 겨우 밥에 씨레기국, 그리고 아주 잘게 썰은 시어빠진 무김치가 전부였
기 때문이다. 예전에 경기도 이천 영월암(映月庵, ☞ 관련글 보러가기)에서 먹은 저녁공양은 반
찬이 무려 10가지에 이르렀고, 다른 절집들도 그런데로 괜찮게 나왔는데, 돈을 그야말로 삽으로
쓸어담는 곳에서 그들의 소중한 손님인 중생들에게 제공하는 공양은 그들만도 훨씬 못한 것이다.
그 돈은 다 어디에 쓰이는지 공양 예산이 기껏해야 얼마나 된다고 중생에게 쓰기가 아까운 것일
까? 그렇다고 상다리가 아작날 정도의 진수성찬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나
와야지 달랑 시어빠진 무김치는 뭐라 말인가..? 평소에도 공양밥이 저 지경으로 나오는지? 아니
면 그날의 메뉴가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공양밥에 대한 보다 세심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다
고 여겨진다. 그것이 바로 갓바위부처의 뜻일 것이다.

하지만 공양이 저 따위로 나온다고 해서 나에게 꿩 대신 닭을 고를 여유는 없었다. 우선은 시장
한 배를 달래줘야 되니 그거라도 말끔히 먹어치웠다.

이곳은 공양을 마치면 자신이 먹은 그릇과 쟁반, 수저는 씻어야된다. 씻는 곳에도 버젓히 불전
함이 놓여져 애타게 돈을 원한다. 설거지를 하고 그릇과 쟁반, 수저 자리에 놓고 갓바위로 다시
길을 재촉한다.


♠  갓바위 중단 (대웅전, 3층석탑)

▲  갓바위 대웅전(大雄殿)

하단에서 계단을 5분 정도 오르면 가파른 산자락에 터를 닦은 중단에 이른다. 이곳은 해발 750m
고지로 웃절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이 있는데,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2층 규모의 맞배지
붕 건물로 윗층은 대웅전, 아랫층은 갓바위를 관리하는 사무실이 있다.
이들 모두 근래에 조성되었으며, 조망(眺望)이 일품이라 선본사를 비롯하여 그곳을 둘러싼 산줄
기와 봉우리가 거침없이 바라보여 눈과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대웅전 뜰에는 석가탑을 닮은 3층석탑이 서 있으며, 높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천상세계의 석탑
처럼 장엄하게 다가온다. 대웅전에는 자비로운 모습의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文殊
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한 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앞 3층석탑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  하단에서 중단 가는 길목에 자리한 애자모지장굴

대웅전으로 오르기 직전 오른쪽 바위에 조그만 굴이 있는데, 이를 애자모지장굴이라 그런다. 굴
안에는 유난히도 동자상이 많은데, 굴의 이름도 그렇고, 동자상도 그렇고, 아마도 어린 나이에
죽은 넋들을 달래는 공간인 듯 싶다.
동자상 외에도 다보탑과 부처상, 지장보살상, 금동불 등이 중간중간 자리를 채우고 있으며, 이
들은 모두 중생들이 손수 갖다놓은 것으로 굴 바로 앞에 저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불전함이 옥의 티처럼 놓여져 있다.


▲  대웅전 뒤쪽에서 바라본 능성재 산줄기
능성재에서 서쪽으로 가면 팔공산과 동화사로 이어지며, 동쪽은
은해사(銀海寺)와 백흥암(百興庵)으로 이어진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선본사 남쪽 산줄기

▲  중단에서 갓바위로 오르는 도중에 잠시 뒤를 돌아보다.

저 아래 까마득하게 보이는 절이 바로 선본사이다. 내가 저기서 여기까지 올라왔다니 거리는 고
작 800m 남짓인데, 정말 땅에서 하늘로 오른 것처럼 지극히 멀어 보인다. 갓바위는 수레가 오를
수 없기 대문에 저 밑에서 갓바위까지 케이블을 연결하여 물건을 실어 나른다.


♠  소원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자자한 신라 후기 불상, 약사불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지는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 - 보물 431호

중단에서 5분 정도 오르면 관봉(冠峰, 852m) 정상인 갓바위이다. 선본사에서는 이곳을 상단이라
부르는데, 매서운 산바람이 석불을 희롱하는 800m 고지임에도 영험한 갓바위부처를 친견하러 구
름처럼 모여든 중생들로 갓바위의 열기는 태양처럼 뜨겁다. 이곳은 하늘과도 가깝고 주변이 모
두 눈 밑에 펼쳐진 산봉우리라 마치 수미산(須彌山) 정상의 부처의 세계나 하늘 세계에 들어선
기분이며, 아랫 세상과는 차원이 틀린 청정한 기운이 갓바위 주변을 진하게 맴돈다. 거의 신성
하고 거룩한 성지(聖地) 같은 갓바위부처는 근엄한 표정으로 힘들게 올라온 중생을 맞는다.

중생이 그들의 소망을 들이밀며 켜놓은 촛불은 주변의 산하(山河)를 능히 태우고도 남을 정도로
막대하며, 향의 냄새는 관봉 주변을 가득 맴돈다. 촛불에서 녹아 내린 촛농은 하루 몇 가마에 이
를 정도이고. 하루 동안 소비되는 향은 가히 천하 최대급이다. 휴일에는 수천 명이 찾아와 예를
올리며, 평일에는 적어도 수백 명이 다녀간다. 특히 대학입시철에는 자식의 대학 급제를 소망하
고자 수능일 한달 전부터 수험생 부모들이 몰려들어 관봉이 무너질 지경이며, 4월 초파일에도 발
디딜 틈이 없다.
상황이 이러니 이곳에 뿌려지는 시주금과 기도금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성수기에는 최대 억단위
의 돈이 움직일 것이고, 비수기에도 최저 수백만 원이 갓바위 주변 불전함에 들어갈 것이다. 갓
바위를 배경으로 그렇게 돈을 쓸어담는 선본사가 중생들에게 제공하는 공양음식은 왜 저 모양인
지 그 많은 돈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사뭇 궁금할 따름이다.

지금은 갓바위부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불상은 신라 후기
에 만들어진 이래 계속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인근 사람들이나 찾아올 정도로 인지도는 낮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 팔공산 북쪽에서 제2석굴암이 발견되면서 팔공산 일대에 불교문화유산을
본격적으로 뒤적거리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1962년 갓바위부처가 발견되었는데, 그 당시 동
아일보를 비롯한 각종 신문들이 갓바위 발견을 특필로 다루었다.
그후 선본사에서 갓바위를 적극적으로 영험있는 석불로 홍보하면서 그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
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지금처럼 성지화 된 것은 길어봐야 60년도 되지 않는다.

갓바위부처의 문화재청 지정 이름은 관봉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이다. 갓바위란 이름은
불상이 머리 위에 쓰고 있는 넓적한 돌덩이가 갓을 닮아서 유래된 것으로 관봉이란 이름은 갓바
위가 있는 봉우리란 뜻이다. 여기서 관(冠)은 모자, 갓을 뜻한다. 그가 둥지를 튼 관봉은 팔공
산(八公山)의 동남쪽 봉우리로 대구와 경산의 경계선이다. 높이가 852m(어떤 자료에는 851m)에
이르며, 산 정상에 자리하여 조망 하나는 끝내준다.

갓바위의 정체는 약사불(藥師佛)이다. 그의 왼손에 약사불의 필수품인 약합(藥盒)이 들려져 있
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본사는 갓바위를 내세워 약사도량(藥師道場)임을 내세운다. 허나 불상의
정체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미륵불(彌勒佛),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무슨 대수랴? 갓바위는 그런 쓰잘데기 없는 소모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중생들의 소망
을 접수하고 처리하는 데에 바쁘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선본사의 주장에 따르면 7세기 중반이라고 한다.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수제
자인 의현대사(義玄大師)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자 638년(선덕여왕 7년)에 조성했다는 것이다.
의현은 직접 불상을 제작했는데, 밤에는 학이 와서 그를 따스히 감싸주고, 낮에는 식량을 가져
와 먹여 살렸다는 거짓말이 전설로 전해온다. 허나 불상의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신라 후기인
8~9세기 석불로 보고 있다. 허나 그 장대한 세월에 비해 건강 상태는 제법 양호하여 나이에 비
해 많이 젊어보인다.

석불의 높이는 4m로 관봉에 있는 바위를 다듬어서 만든 것이다. 머리부터 그가 앉아있는 대좌(
臺座)까지 모두 하나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광배(光背)는 따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뒤
쪽에 병풍처럼 선 바위가 자연스럽게 광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광배를 만들지 않았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큼직하다. 바로 그 위에 두께 15cm 정도의
얇은 돌이 모자처럼 얹혀져 있다. 물론 그 돌과 몸통은 하나의 돌이다. 얼굴은 미소는 전혀 찾
아볼 수 없는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보다 더 근엄하다. 위엄이 강하게 배여난 그 앞에
서는 감히 시선 조차 나누는 것도 두려울 정도로 나도 모르게 머리가 조아려진다.
얼굴의 양쪽 볼은 두툼하게 살이 있어 풍만해 보이며, 입술은 굳게 다물어 근엄함을 더욱 올려
준다. 눈은 살짝 감고 있고, 눈썹은 무지개처럼 곡선이 졌다. 그런 눈썹 사이로 둥그런 백호(白
毫)가 있다. 두 귀는 중생의 소원을 빠짐없이 듣기 위해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게 그어져 있다.

그의 어깨는 반듯하고 당당하며,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고
있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 비슷한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이 수인은 석굴암 본존불과 비
슷하다. 왼손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왼쪽 발 부근에 손바닥을 위로 향하며 조그만 약합을 들
고 있다.
불상이 입은 옷은 통견(通肩)인데 두 팔을 거쳐 두 무릎을 덮고 대좌 아래로 흘러내렸으며, 가
슴 앞에는 속옷의 일종인 승가리(僧伽梨) 혹은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보인다. 불상 뒷면에는
옷의 표현이 없고 그냥 평면이다. 그가 앉은 대좌는 불상에 비해 작다.

거의 성지나 다름이 없는 갓바위, 허나 찾아오는 길이 쉽지가 않다. 험한 산을 올라야 되고, 그
길 또한 속세살이처럼 가파르다. 갓바위 주변은 바위가 많고 낭떠러지가 많아 늘 산악사고가 도
사렸다. 또한 예전에는 불상 바로 앞에 마련된 공간에서 예를 올렸는데, 그 공간이 매우 좁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석불 전방에 80평의 넓은 공간을 닦았으며, 바닥에 돌을 깔고 주위에 난간을
둘렀다. 그리고 선본사에서 갓바위로 오르는 길을 정비하여 예전보다 많이 넓어졌으며, 계단과
철제 난간을 많이 보완했다. 그래서 예전에 비해 접근하기가 조금은 쉬워졌다.

석불 앞에 넓게 예불 공간을 마련하면서 석불 주변은 출입이 통제되어 그의 앞까지 다가설 수가
없게 되었다. 예불 장소와 석불 사이에는 초와 향을 피우는 장소가 좌우로 길게 마련되어 있으
며, 초를 팔고 그곳을 통제하는 신도 아줌마가 늘 자리를 지킨다. 불상 좌측 바위에는 중생이
붙여놓은 동전이 가득하며, 그 맞은편에 갓바위 주변을 관리하는 절 건물이 있다. 불상 우측에
는 청색을 띈 조그만 동종(銅鍾)이 있으며, 대구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다.


▲  갓바위부처 좌측 바위
중생이 붙여놓은 무수한 동전이 바위 여기저기에 자석처럼 붙어있다.

▲  갓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선본사 북쪽 산줄기와 남쪽 산줄기 사이로 갓바위지구(경산 쪽)가 보인다.


갓바위를 보러 멀리서 왔으니 인사는 해야겠지, 그래서 향을 피우고 초에 불을 심어 거기에 소
박한 소망을 하나 붙여 인사를 올린다. 이렇게 하면 소망이 접수되는 것일까? 지성으로 기도를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그 지성에 정도가 궁금하다. 정말 108배나 3,000배를 해야
소원이 접수가 되는 것인가? 그것도 아리송하다. 주변을 보니 방석을 펴고 염불을 외며 온종일
절을 올리는 이들이 많다.

초는 갓바위 좌측 건물에 있는데, 시주금을 내고 가져 가라고 쓰여 있다. 나는 가난한 중생이라
그냥 가져와서 사용했다. 설마 소망도 돈을 낸 만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아무리 영험하다고 해도 예불을 하고 싶지 않다. 부처가 언제부터 돈장사를 했단 말인가?
부디 소망이 처리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기도로 뜨거운 성스러운 현장 갓바위를 떠났다. 그가
정말 명성대로 무병장수를 비롯한 소원 하나는 꼭 들어주는지는 알 수 없다. 소망이 이루어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절반만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예 안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 소원
은 이루어지지 않았음ㅠㅠ) 하지만 그들의 소망을 모두 처리하는 것은 갓바위 부처에게도 은근
히 부담이 될 것이다. 괜히 선본사에서 요란하게 홍보한 탓에 갓바위만 피곤하게 된 것은 아닐
까 싶다.

참고로 믿거나 말거나 설화를 더 덧붙이자면 갓바위 밑동네인 와촌에 가뭄이 들면 팔공산 관봉(
갓바위)에 불을 지르고 새까맣게 태운다. 그러면 용이 갓바위를 씻고자 비를 내린다고 한다. 또
한 갓바위(양)와 불굴사(음)를 같은 날에 찾아 예불을 하면 소원성취를 한다고 한다. 왜냐면 풍
수지리적으로 갓바위는 팔공산의 양의 기운을 품고 있고, 불굴사(佛窟寺) 자리는 팔공산의 음의
기운을 품고 있는 요지라서 그렇다고 한다.


▲  갓바위를 뒤로하고 선본사로 내려가다.


♠  갓바위를 후광으로 든든하게 절을 꾸리는 오랜 절집
약사도량을 표방하는 ~ 팔공산 선본사(禪本寺)

갓바위 종점과 지척인 선본사는 팔공산에 둥지를 튼 오랜 절집의 하나이다. 조계종(曹溪宗) 소
속으로 갓바위를 든든한 밥줄로 삼아 절을 꾸리고 있는데, 갓바위로 올라가는 길목에 여러 건물
들은 모두 선본사 소속이며, 갓바위 역시 이곳에서 관리하고 있다. 선본사란 절 자체는 작지만
그 범위는 상당하며, 갓바위 지구와 구별하기 위해 선본사를 본절(본점), 갓바위를 웃절(지점)
이라 부른다. 허나 지점이 더 손님이 많고 수입이 훨씬 많다. 그리고 건물의 규모도 본점을 능
가한다. 그에 비해 본점은 인적이 드물다. 그래서 본점보다는 지점에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
고 있는 실정이다.

선본사는 신라 소지왕(炤知王) 13년인 491년에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세웠다고 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증거를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극달화상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으며, 그 시절에는 신라에 고구려 불교가 전파되긴 했으나 서출지(書出池)의 전설처럼 고구려
불교는 한참 축출되던 시기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어찌 신라의 영역인 이곳에 절이 세워질 수
있겠는가? 참고로 산 너머의 대구 제일의 고찰 동화사(桐華寺)도 극달화상이 창건했다고 우기고
있다.

그럼 언제 창건되었을까? 경내와 주변에 흩어진 여러 석조유물(불상 대좌와 석등, 극락전 뒤쪽
의 오래된 석축)과 절 남쪽 노적봉에 있는 3층석탑을 통해 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3층석탑은 8세기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비록 절과 떨어져있지만 이곳과 관련이 있는 유
물로 여겨진다. 석조유물 역시 8~9세기 것으로 보이며, 절을 세운 극달이란 인물은 신라 후기에
활동했던 승려로 짐작된다.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는 내력이 남아있지 않으며, 17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사적이 보인다.
우선 1614년에 수청(秀廳)이 절을 중수했다. 1766년 기성화상(箕成和尙)이 중건했으며, 1802년
(순조 2년)에 일암당(日庵堂)이 국성(國成) 등과 함께 신중탱화를 조성했다. 그 탱화는 현재 갓
바위 칠성각에 있다. 그 이후 1820년과 1877년에 중수했으며, 1970년 이후 갓바위 부근에 불전
을 조성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산신각과 요사, 선방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갓바위 지
구(웃절)에는 8~9동의 불전이 있다. 소장문화유산은 관봉 꼭대기의 갓바위부처(관봉석조여래좌
상)와 노적봉 부근의 3층석탑(경북지방유형문화재 115호)이 있으며, 불상의 대좌와 석등의 좌대
(座臺) 등 신라 후기 석조 유물이 여러 점 존재한다.

갓바위를 관리하는 본절이지만 오히려 갓바위의 그늘에 제대로 가려 경내는 썰렁하다. 허나 고
요하고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를 제대로 누릴 수 있으며, 사람들로 늘 북적거려 기도를 올리는
것도 쉽지 않은 갓바위와 달리 마음 편히 예불을 올릴 수 있다.

※ 갓바위, 선본사 찾아가기 (2014년 12월 기준)
① 하양 경유
* 대구 1호선 안심역(4번 출구)에서 55, 508, 518, 555, 708, 808, 814, 818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양터미널이나 하양초교 하차, 길 건너에서 갓바위행 803번 시내버스(30분 간격) 이용
* 동대구역에서 708번(역 맞은편 정류장) / 814, 818번(역 바로 앞) 시내버스를 타고 하양에서 
  803번으로 환승
* 갓바위 종점에서 선본사는 바로 보이며, 갓바위까지 걸어서 30분 소요
② 경산시내 경유
* 대구 2호선 영남대역(4번 출구)과 경산역(경부선)에서 803번 시내버스 이용
③ 대구 갓바위 경유
* 대구 1,2호선 반월당역(2,13번 출구), 대구역(대구역전우체국) 맞은편, 동대구역(북쪽 지하도
  정류장), 1호선 아양교역(2번 출구)에서 401번 시내버스를 타고 갓바위 종점 하차, 갓바위까
  지 등산 1시간 소요
* 주말과 휴일에는 401번 축소판 노선인 팔공2번 시내버스(갓바위↔아양교역↔동대구역 북쪽 지
  하도 정류장)가 추가 운행된다. (평일과 겨울에는 운행안함)
④ 승용차로 가는 경우
* 경부고속도로 → 경산나들목을 나와서 하양 방면 → 금락4거리에서 우회전 → 동서교차로에서
  와촌 방면(한사들길) 좌회전 → 동강교차로에서 갓바위 방면 좌회전 → 신한교차로에서 우회
  전 → 갓바위 주차장
* 포항대구고속도로 → 청통와촌나들목을 나와서 하양방면 → 동강교차로에서 우회전 → 신한교
  차로에서 우회전 → 갓바위 주차장
* 대구시내 → 영천방면 4번 국도 → 동서교차로에서 와촌 방면(한사들길) 좌회전 → 동강교차
  로에서 좌회전 → 신한교차로에서 우회전 → 갓바위 주차장

★ 갓바위, 선본사 관람정보 (2014년 11월 기준)
* 갓바위 지구(경산)에 넓은 주차장이 있다. (주차비 있음)
* 갓바위까지 걷는 시간을 줄이고 싶다면 경산 쪽을 추천한다.
* 매년 10월에는 선본사와 갓바위 주차장 일대에서 '갓바위 소원성취 축제'가 열린다. 소원기원
  제와 산사음악회, 다례봉행, 법회, 민속놀이와 전통체험, 다례봉행, 승무공연, 연등만들기 등
  의 프로그램이 있으며, 보통 3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 선본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587
 (선본사 종무소 ☎ 053-851-1868, 중단 종무소 ☎ 053-853-9877, 갓바위 ☎ 053-851-1869)

* 선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아래서 바라본 선본사 선정루(禪定樓)

경내로 들어서려면 선정루의 아랫도리를 지나야
된다.
이 건물은 가파른 언덕에 지은 것으로 자연히 3
층을 이루고 있는데, 아래층에는 부처의 경호원
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있으며, 건물 위쪽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세지가 담긴 사물(四
物, 범종, 운판, 법고, 목어)의 보금자리로 종
각의 역할을 한다. 이 건물은 1988년에 지어졌
으며, 그 이전에는 계단만 덩그러니 있었다.

▲  선정루의 측면

 


▲  청기와가 입혀진 선본사 극락전(極樂殿)

선정루를 올라서면 극락전 앞뜰이다. 좌우로 종무소와 공양간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극락전
좌측에는 조촐한 모습의 산신각이 있다.

극락전은 선본사의 법당으로 1985년에 지어졌다. 불단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 아미타불
(阿彌陀佛)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로 대동하고 앉아 있으며, 뒤쪽에 후불탱화가 든든하
게 자리해 있다. 후불탱화 외에 신중탱화와 관음보살도, 문수보살도와 보현보살도 등이 내부를
수식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1987년에 제작되었다. 다른 불전과 달리 푸른 기와가 입혀져 있
어 단연 돋보인다.

▲  종무소(宗務所)

▲  공양간을 갖춘 선방(禪房)


▲  갓바위와 달리 자애로운 모습의 극락전 아미타3존불

▲  극락전 계단 우측의 석등 아랫도리

▲  극락전 계단 좌측의 석등 아랫도리

극락전 계단 좌우에 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석등의 아랫도리가 있다. 윗도리는 장대한 세월의 거
친 흐름 속에 휩쓸려 사라지고 간신히 좌대(座臺)라 불리는 아랫도리만 간신히 남아 신라 석등
의 아름다움과 선본사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기단에는 연꽃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연꽃의 향기가 아련히 풍기는 듯 하다.


▲  단촐한 모습의 산신각(山神閣)

극락전 좌측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단촐한 크기의 산신각이 있다. 예전에는 산령각(山靈閣)
이라 불렸으며 지금의 건물은 1985년에 새로 지었다. 내부에는 산신탱과 독성탱이 나란히 자리
를 지키고 있으며, 건물 왼쪽 벽화에는 조선 철종(哲宗) 때 효성이 지극했던 도효자(都孝子)가
어머니가 원하는 홍시를 구하고자 호랑이를 타고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니 살펴보기 바란다.


▲  산신탱(왼쪽)과 독성탱(오른쪽)

▲  저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서로를 등진 석불과 동자상,
이제는 제발 화해를 하고 서로를 챙겨주면 좋지 않을까?


선본사는 갓바위와 달리 관람이 금방 마무리되었다. 종점으로 나오니 속세로 나가는 803번 시내
버스가 막 중생을 태우고 있었다. 다음 차를 탈까하다가 선본사에 더 이상의 미련이 없어 그 차
를 타고 아비규환의 속세로 내려갔다.
갓바위로 들어올 때와 달리 하양을 지나 경산역에서 내렸으며, 경산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무궁
화호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갓바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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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11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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