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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3.01 서울 도심의 한복판을 거닐다 ~~ 견지동 우정총국, 인사동거리, 종로 나들이
  2. 2016.02.06 서울 도심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을 거닐다 ~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돌담길, 송시열집터, 북묘터)

서울 도심의 한복판을 거닐다 ~~ 견지동 우정총국, 인사동거리, 종로 나들이

 


' 서울 도심의 한복판을 거닐다 '
(우정총국, 인사동 주변)

▲  우정총국 회화나무의 겨울 풍경


 

♠  우리나라 근대우편의 발상지이자 갑신정변의 쓰라린 현장
우정총국(郵政總局) - 사적 213호

▲  우정총국 (체신기념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조계사(曹溪寺) 바로 옆에는 우리나라 근대 우편의 발상지로 추앙
받는 우정총국이 있다. 이곳은 1884년에 일어난 그 유명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현장으로 초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물론 관련 수험서에도 지겹도록 나오는 갑신정변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우정총국은 겉으로 보면 고색(古色)의 기운이 썩 와닿지가 않는다. 나도 처음에는 우정국(郵
政局)이 설치된 1884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었지. 허나 겉보기와 달리 제법 오래된 건축
물로 원래는 조선 초기에 세워진 전의감(典醫監)이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7세기 초에
재건되었으며, 1629년에 왜국(倭國)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이후 서양 제국(諸國)과 외교를 맺으면서 근대적인 우편제도
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하여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의 건의로 1884년 4월 22일 우정총
국이 설치되었는데, 바로 전의감으로 쓰이던 현재의 건물을 손질하여 사용했으며, 홍영식이
초대 우정총판(郵政總辦)에 임명되었다.

1884년 5월 5월, 왜국(일본)과 영국, 미국 공관(公館)에 우정총국 설립을 알리고 왜국과 홍콩
우정국과 우편물 교환약정을 맺었다. 6월 8일에는 우정총국 신설에 따른 조직 편성 내용을 고
종(高宗)에게 보고하고 직원 모집에 들어가 7월 1일 왜인(倭人) 2명을 고용했으며, 10월 9일
에는 이상재(李商在)와 남궁억(南宮億), 신낙균(申樂均) 등 14명을 채용하고, 10월 21일에는
성익영(成翊永)을 우정총국 사사(司事)로 임명했다.
10월 29일에는 각종 우정 규칙과 장정에 대해 왕이 재가를 하였고, 11월 17일에 업무 분장과
입직(入直) 절차를 정했으며, 11월 18일에 5문과 10문, 2종의 우표를 발행하여 서울과 인천(
仁川) 간의 우정 업무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이 땅에서 본격적인 근대 우편이 시작되었다. 당
시 우정총국은 옆에 있는 회화나무에 날마다 국기(태극기)를 걸었는데, 그 높이가 2장(丈, 6
m) 남짓이었다고 하며, 그것이 우리나라 국기 게양의 효시로 전한다.

우편 업무가 시작되자 이를 기념하고자 12월 4일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가지기로 했다. 바로
이때 홍영식과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開化黨) 인물들은 큰일을 벌이기로 작정하고 몰래
준비에 착수했다. 그럼 여기서 별로 유쾌하진 못하지만 긴박하게 흘러갔던 갑신정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사족이긴 하지만 내가 제일로 싫어하는 국사 분야가 근/현대사이다.


▲  우정총국 앞 도로변에 있는 전의감터 표석
우정총국은 원래 전의감 건물이었다.

※ 갑신정변의 배경
1876년 이후, 조선 사회의 개혁과 서양 문물의 수용을 실현하고자 박규수(朴珪壽)와 오경석(
吳慶錫) 등에게 개화사상(開化思想)을 배운 사대부(士大夫)의 젊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개화
파(開化派)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개화파는 실현 방법을 두고 김홍집(金弘集), 어윤중(魚允中) 중심의 온건개화파와 김
옥균 중심의 급진개화파로 나눠졌는데, 온건파(사대당)는 청나라에 의존하면서 천천히 개혁을
하자는 반면, 급진개화파(개화당)는 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조속한 개혁을 꿈꾸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고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소환한 청나라군이 서울에 들어와
군란을 진압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군란으로 크게 혼쭐이 난 명성황후의 민
씨 패거리는 청나라에 크게 의지하며 권력을 유지하느라 급급했고, 개화파에 정치적인 압박을
가하면서, 그들을 통해 개혁을 이루려던 개화파의 노선은 중대한 수정을 요하게 되었다. 하여
개혁 외에 민씨 패거리 타도까지 계획에 넣었다.

그렇게 청나라와 민씨의 눈치를 살피며 기회를 엿보던 중 1884년 봄, 베트남을 둘러싸고 프랑
스가 청나라에 시비를 걸면서 8월에 전쟁이 터졌다. 프랑스에게 밀리던 청나라는 조선에 보낸
군사 3,000명 중 절반을 빼내 전쟁에 투입했는데, 급진개화파는 이것을 기회로 삼은 것이다.
하여 그해 9월 17일(음력) 김옥균은 박영효 집에서 정변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고, 민씨 패거
리를 때려잡아 권력을 장악하여 그들의 뜻을 펼치기로 했다. 그리고 홍영식을 설득해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거사일로 삼는 한편, 왜국 사관학교를 나온 신식 군대 중 자신들이 통솔하는
군인들을 동원하기로 했으며, 청나라군의 반격과 개혁 정책에 필요한 군사와 재정을 확보하고
자 왜국에게 도움을 요구했다.
왜국 역시 그들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1도 없었다. 그들을 통해 청나라와 민씨 패거리를 몰
아내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높일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국 공사(公使) 다케조에 신
이치로(竹添進一郞, 이하 다케조에)는 군사 지원과 차관을 흔쾌히 약속했다.


※ 갑신정변의 시작 (첫날)
드디어 우정국 개설 축하연이 벌어질 12월 4일(음력 10월 17일)의 서광이 밝아왔다. 홍영식이
주축이 된 축하연은 오후 늦게 시작되었는데, 왜국과 미국 공사/영사와 수행원, 개화당 인물
과 사대당 주요 인물이 자리에 참석했으며, 서재필을 비롯한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다른 개화
당 인물과 군사들은 우정국 밖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6시 정도가 되자 개화당은 우정국 옆집에 불을 질러 거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원래는 안
동별궁에 화약을 터뜨려 불을 지르려고 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애궂은 옆집에 불을 질렀
다.
갑작스런 불길에 염통이 쫄깃해진 민영익(閔泳翊)이 서둘러 밖으로 나오다가 서재필(徐載弼)
이 이끄는 군사들의 칼을 받아 쓰러졌다. 그 광경에 혼비백산한 참석자들은 서둘러 도망쳤고
그 혼란을 틈타 김옥균과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서재필이 급히 경복궁(景福宮)에
들어가 고종을 알현하고 변고가 생겼으니 서둘러 피신할 것을 청했다.
전후사정을 모르던 얼떨떨한 고종은 얼굴이 새파래져 왕후를 비롯한 왕실 가족과 수행원을 콩
볶듯이 대동하여 그들을 따라 경우궁<景祐宮, 현대사옥 북쪽으로 순조의 후궁인 수빈박씨(綏
嬪朴氏)의 사당>으로 이전했다. 개화당이 경우궁을 택한 것은 그곳이 좁아서 수비하기가 쉽고
, 창덕궁과 가깝기 때문이다.

거사 소식을 들은 왜국공사 다케조에는 군사 200명을 끌고 경우궁으로 달려가 왕을 호위했으
며, 개화당도 50여 명의 수하 군사들로 왕을 호위했다.

※ 갑신정변의 절정 (둘째 날)
고종을 차지해 명분을 얻은 개화당은 12월 5일(음력 10월 18일), 고종의 재가를 받아 자신들
을 중심으로 한 새정부 조직과 구성원을 발표했다. 김옥균은 혜상공국당상(惠商公局堂上) 및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고, 홍영식은 좌우영사(左右營使) 겸 우의정(右議政), 서광범은 협판
교섭사무(協辦交涉事務), 서재필은 전영정령관(前營正領官), 박영효는 전후영사(前後營使),
이재원(李載元, 1831~1891)은 좌의정(左議政), 이재완(李載完, 1855~1922)은 병조판서(兵曹判
書), 윤웅렬(尹雄烈)은 형조판서(刑曹判書), 김윤식(金允植)을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이중에 윤웅렬, 박영효, 이재완은 친일 짓거리로 뒷끝이 영 좋지 않은 작자들임>
그리고 사대당 인물들을 왕명을 구실로 경우궁으로 소환해 단죄했는데, 좌찬성(左贊成) 민태
호(民台鎬)를 비롯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조영하(趙寧夏), 해방총관(海防總管) 민영목
(民泳穆), 좌영사(左營使) 이조연(李祖淵), 후영사(後營使) 윤태준(尹泰駿), 전영사(前營使)
한규직(韓圭稷), 내관 유재현(柳載賢) 등을 처단했다.

경우궁이 왕실 사당이다보니 머물기에는 너무 불편했다. 게다가 날씨도 춥고, 음식도 여의치
않아 경우궁 남쪽에 있는 계동궁(桂洞宮)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계동궁은 이번 거사에서 좌의
정으로 추천된 왕실 종친이자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인 이재원의 집이다. 허나 명성황후와 조대
비(趙大妃)의 요구로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  전의감터 표석과 나란히 자리한 도화서(圖畵署)터 표석
고려 때 도화원(圖畵院)을 계승한 관청으로 그림으로 이름 꽤나
날린 인물들이 거의 이곳을 거쳐갔다.


※ 갑신정변 3일 천하의 마지막 날 (세째 날)
12월 6일(음력 10월 18일)이 밝아오자, 개화당은 14개 조항의 정령(政令)을 공포하니 그 내용
은 다음과 같다.
① 흥선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여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③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고 간리(奸吏)를 근절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재정 충실
을 도모할 것,
④ 내시부(內侍府)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등용할 것,
⑤ 전후 간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⑥ 각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면제할 것,
⑦ 규장각(奎章閣)을 폐지할 것,
⑧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⑩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시킬 것,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 대장
은 왕세자(王世子)로 할 것,
⑫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재정 관청은 금지할 것,
⑬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 집행할 것,
⑭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參贊)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
하도록 할 것, 

여기까지는 고종과 왕후, 왕대비의 거처 불편 호소로 거처를 좀 옮겼을 뿐, 개화당의 뜻대로
순탄하게 진행된 듯 싶었다. 허나 하늘은 개화당을 버려 그들에게 큰 시련을 내리니 바로 창
덕궁으로 들아간 명성황후가 동대문 부근에 머물던 청나라 장수 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원세개는 오후 3시경,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의 좌우영(左右營) 군사와 함께 창
덕궁으로 들어가 고종을 호위한 왜군과 개화당 군사를 공격했다. 쪽수로 밀어부친 청군의 공
격에 왜군과 개화당 군사는 속수무책으로 털리고, 고종과 개화당은 연경당(延慶堂)으로 피했
다. 허나 거기도 여의치 못해 후원 북쪽 북장문(北墻門)을 통해 북묘(北廟)로 피신했다.

청군의 공격에 염통이 콩알만해진 왜국공사는 북장문을 나오자마자 개화당과의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이끌고 줄행랑을 쳤다. 이에 개화당이 강력히 항의를 했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전세는 기울었기 때문이다.
하여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거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왜국 공사와 나란히
왜국공사관(운현궁 서쪽 경운동에 있었음)으로 도망쳤으며, 홍영식과 박영교(朴泳敎)를 비롯
한 군사 7명은 고종을 따라 북묘로 갔다. 허나 청군이 북묘를 접수하면서 홍영식과 박영교 일
행, 군사 7명은 모두 살해되고 만다. 이리하여 갑신정변 삼일천하(三日天下)는 아주 허무하게
막을 고하게 되고, 고종은 그날 밤, 창경궁 동쪽에 머물던 오조유(吳兆有)의 청나라 군영으로
들어가 하루를 머물렀다.

※ 갑신정변 이후
12월 7일(음력 10월 19일), 고종은 하도감(下都監)에 있던 원세계의 군영으로 이동했다. 왜국
공사는 목을 붙잡고 왜군과 서울 거주 왜인(倭人)을 데리고 인천으로 달려가 귀국선에 올랐으
며,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과 생도 10여 명도 그들을 따라 왜국으로 튀었다.

개화당의 정변에 단단히 고생을 한 고종은 개화당이 발표한 인사개편을 취소하고 심순택(沈舜
澤)을 좌의정으로, 김홍집을 우의정, 조병호(趙秉浩)를 교섭통상사무독판(交涉通商事務督辦)
으로 삼았으며, 다음날인 12월 8일 교서(敎書)를 내려 개화당의 3일 천하 기간에 내려진 전교
를 모두 거두고, 이때에 행해진 모든 것을 무효화시켰다. 또한 정변이 터진 우정총국을 없애
고, 통리군국아문(統理軍國衙門)을 의정부에 합쳤으며, 정변으로 인한 인심수습책으로 1882년
이후 멀리 유배를 보낸 죄인들을 모두 방면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원세계의 군영에 머물던 고종은 12월 10일, 7일간의 숨가쁘던 방황을 마치고 창덕궁으로 이어
(移御)했다.

정변 이후, 왜국은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군인이 적지 않게 죽었다며 배상금을 요구
했다. 하여 1885년 1월 9일, 조선 조정은 유감을 표하고 배상금 10만 원을 지불했다. 또한 공
사관 수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했으며, 4월 18일에는 조선과 청
나라에게 청군과 왜군이 모두 철수할 것을 제의, 조선에 변란이 생겨 군사를 보낼 때, 파병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을 내용으로 하는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추가로 맺었다. 이 조약으로 왜국
은 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에 대한 파병 권한을 갖게 되었다.

개화당(급진개화파)의 새로운 나라를 향한 개혁 의지는 정말 높이 살만하다. 그 꿈을 실현하
고자 정변을 일으켜 처음에는 패기가 넘치고도 남음이 있으나 그들은 국내에서의 지지기반이
빈약했고, 독자적인 힘이 아닌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렸다는 한계점이 있다. 게다가 서울에 주
둔해 있던 청나라군 1,500명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했으며, 정변이 조금은 꼼꼼하지가 못했
다. 결국 섣부른 행동에 개혁도 못해보고, 뭐하나 국익에 제대로 도움도 주지 못했으며, 안그
래도 동아시아 대표 호구로 비리비리했던 조선을 더욱 호구로 만들어 청나라와 왜국의 영향력
만 키워버린 꼴이 되었다.
설령 정변이 성공했더라도 국내 지지기반 미약과 왜국의 힘을 빌렸다는 한계점에 부딪쳐 제대
로 개혁이나 되었을지 모르겠으며, 조선에서의 왜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발끈한 청나라와
개화당을 싫어했던 명성황후가 손을 잡아 청일전쟁이 10년 일찍 발발했을 가능성도 크다.

어찌되었던 우울했던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현장으로 지금은 언제 그런 소동이 있었
냐는 듯, 서울 도심의 명소가 되어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  UPU위임장, 여권 (복사본)
1897년 제5차 만국우편연합총회에 파견된 민상호(閔商鎬, 1870~1933)에게 고종이 내린
위임장과 여권이다. 민상호는 1910년 이후 왜정에 협력한 친일 버러지이다.


※ 갑신정변 이후 우정총국
야심차게 문을 연 우정총국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해 12월 8일(음력 10월 21일) 폐쇄되고 말
았다. 이후 오랫동안 버려져 있다가 1895년 이후에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가 들어왔으며
1904년에는 보안회(保安會)가 이곳에서 왜국을 규탄하는 대중집회를 열기도 했다.
1906년 중동학교(中東學校)가 설립되면서 한어학교 건물을 빌려 썼으며, 1908년에는 그 건물
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다. 허나 1914년 재정악화로 건물이 처분되는 지경에 이르자 조계사
서쪽 수송공원 자리로 이전했고, 이 건물은 왜인이 사들였다.

1945년 이후 국가 소유가 되어 그런데로 원형을 유지하다가 1956년 체신부에서 관리하게 되었
으며, 1970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1972년 건물을 중수하여
체신기념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후 1987년 5월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여 내부에 우정
자료를 전시했는데, 그로 인해 건물이 다소 변형되어 19세기 모습을 온전하게 유지하지 못하
고 있다.
그리고 매년 봄 연등회(燃燈會)가 오면 조계사가 우정총국 뒤쪽 공원과 옆구리에 연등과 장엄
등을 1달 정도 닦아놓아 환상적인 야경을 선보인다.

* 우정총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39-7(우정국로 59, ☎ 02-734-8369)


▲  우정총국 회화나무

우정총국 옆에는 나이가 지긋한 회화나무가 우정국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다. 이 나무는 전
의감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약 400년 정도 묵었다고 한다. 그러니 우정국 건물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벗인 셈이다. 아마도 전의감에서 정자나무 용으로 심은 것으로 보이며, 이 건물을
거쳐간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봤다. 특히 갑신정변 때는 권력과 야망에 대한 인간들의 부질없
는 행동에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이렇듯 역사적인 현장에 있는 나무이나 아직 그 흔한 보호
수 등급도 얻지를 못했다.

체신기념관으로 거듭난 우정총국 내부에는 우정(郵政) 관련 문서와 자료들이 있다. 허나 대부
분은 진짜가 아닌 모조품이라 은근히 허탈하게 만드는데, 이들의 진품과 원본 상당수는 천안(
天安)에 있는 우정박물관에 있다.


▲  경성, 제국, 매일, 황성신문 허가신청서 및 허가서
1898년에 작성된 신문 허가 신청서와 허가서 (복사본)

▲  서울 지역 우정집신분전구역도(郵征集信分傳區域圖)
1884년 서울시내 우표 판매 설치도 및 집배 구역도

▲  대한제국 시절 우편물의 무게와 규격을 확인하던 저울과 자

▲  1900년에 제정된 국내외 우편 요금표 (복제본)

▲  주본안(奏本案) - 1903년 우정국 고급직원 임용과 승진에 관해
고종에게 재가를 요청한 문서 (복사본)

▲  우정규칙적요(郵征規則摘要)
1884년에 제작된 우정국 우편물 취급에 관한 기본 법규 (역시 복제품)

▲  대한제국 시절 우정국 우체부 아저씨의 모습과 의복
처음에는 하얀 두루마기 옷이었다가 차차 활동에 적합한 근대식 옷으로 변화했다.

▲  체신기념관으로 거듭난 우정총국 내부

▲  1972년 중수 기념으로 세운 우정총국 중수 기념비

▲  우정총국 뒤쪽에 닦여진 공원과 편지봉투 모양의 낙서장
그리고 화사하게 익어간 붉은 단풍나무


 

♠  인사동(仁寺洞)에서 만난 숨겨진 명소들

▲  경운동 민병옥 가옥(慶雲洞 閔丙玉 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5호

서울 도심의 대표 전통거리로 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인사동에는 오래된 명소들이 많이 깃들
여져 있다. 그들 상당수는 장대한 세월과 개발의 칼질에 사라지고 그들의 추억을 쫓는 표석만
아련히 있을 뿐이며, 제대로 남은 것은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경운동 민병옥가옥, 승동교회 등
얼마 되지 않는다. 허나 사라진 명소건, 살아있는 명소건 모두 조선 중/후기에서 20세기에 걸
쳐진 것들로 둘러보면 다 살이 되고 지식이 된다.

천도교(天道敎)의 중심지인 수운회관과 천도교 중앙대교당 남쪽에는 전통 돌담에 둘러싸인 고
즈넉한 한옥이 있다. 그 집이 인사동 주변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한옥인 경운동 민병옥 가옥
이다.
이 집은 왜정 때 친일파 사업가로 더러운 이름을 남긴 민영휘(閔泳徽, 1852~1935)가 1930년대
에 지은 것이다. 그 작자는 아들인 민대식(閔大植, 1882~?)과 민병옥에게 같은 꼴의 기와집 2
채를 지어주었는데, 이들 집을 이 땅 최초의 근대 건축가인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이 직
접 설계했다. 민병옥 가옥 주변에 있던 민대식 집은 주인이 바뀌면서 월계동(月溪洞)으로 넘
어가 예안이씨 재실인 각심재(恪心齋)로 살고 있다.

박길룡은 한옥 개량에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전통 한옥에서 채광이 잘 되지 않는 안방과 불편
한 동선을 해소하고자 사랑방과 안방, 문간방을 하나로 이어주는 독특한 모양의 'H'모습의 평
면 집을 설계해 이 집을 지었다. 안방과 주요 방들은 전면에 두어 채광과 전망을 고려했고,
대청을 1칸 규모로 줄인 대신 화려한 응접실을 두었다. 현관과 화장실, 욕실은 후면에 두었으
며, 서양 건축물처럼 모두 복도로 연결시켰다.

왜정 시절 전통 한옥과 서양식 고급 주거 양식이 혼합된 개량 한옥으로 친일 행적으로 막대한
부를 챙긴 친일 버러지와 그런 아비를 만나 평생 호의호식한 금수저 작자들의 집이란 점이 꽤
거슬린다. 하지만 사람이 미운 것이지 집까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얼굴에 철면피를 깔며 밥
맛 없이 구는 친일매국 후손들을 싸그리 잡아 족칠 생각을 해야지 괜히 집까지 구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민가다헌'이란 한정식당으로 바쁘게 살았으나 다시 찾아가보니 그 식당은 사라지고
텅 비어있었다. (2018년 11월 기준) 열려있던 대문은 굳게 잠겨져 그저 담장 밖에서 까치발로
바라보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민병옥이 죽고 그 자손인 '민익두'가 차지해 '민익두가'란 이름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
나, '경운동 민병옥 가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소유자가 오래전에 갈렸음에도 그 이름은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다. 그러니 이 집을 떠난 친일파 아들의 이름은 그만 쓰고 소유자의 이
름으로 명칭을 바꿔야 될 것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은 보통 그 소유자의 이름을 붙임)


▲  굳게 닫힌 대문과 담장 너머로 보이는 민병옥 가옥

▲  민병옥 가옥 현관 (옛 민가다헌 시절)

작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가옥 정원에는 여러 나무와 식물이 심어져 있고, 동자석(童子石)과
수석, 여러 석물들이 놓여져 정원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우리 전통식과 서양식, 왜식
이 적절히 섞인 정원으로 동쪽 담장에는 대나무가 늘씬한 모습으로 늘어서 있어 눈길을 끈다.

참고로 민병옥 가옥과 천도교 중앙대교당에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친일파로 추잡한 이름을
남긴 박영효의 집이 있었다. 1880년 서대문 밖에 공사관을 차린 왜국은 임오군란 이후 그의
집을 사들여 여기로 이전했으며, 갑신정변 때 불타버리자 1885년에 남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66-7 (인사동10길 23-9)


▲  충훈부(忠勳府)터 표석

인사동 북쪽 안국동4거리에는 공신과 왕족들에게 상을 내리고 그들을 관리하던 충훈부란 관청
이 있었다. 처음에는 공신도감(功臣都監), 충훈사(忠勳司)라 불렸으나 1459년에 충훈부로 이
름을 고쳤으며, 표훈원(表勳院)이라 불리기도 했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훈장 수여와 제조를 담당했으며, 을사조약 때 조병세(趙秉世)가 조약 파기
와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요구하다가 자결한 애환의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 이후에는 왜정
이 친일매국노와 왜정에 협조한 조선 황족들에게 훈장을 무더기로 만들어 뿌리면서 업무가 마
비되기도 했다.
충훈부는 6.25시절에 크게 파괴되었으며, 이후 보신각(普信閣)을 복원할 때 이곳의 기와 일부
를 임시방편으로 사용했다. 즉 보신각 재건에 충훈부가 희생된 것이다.


▲  죽동궁(竹洞宮)터 (태화빌딩 부근)

죽동궁은 순조(純祖, 재위 1800~1831)가 장녀인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1832) 부부를 위해
지어준 것이다.
명온공주는 1823년 김현근(金賢根)에게 시집을 갔는데 남편에게는 공교롭게도 무시무시한 정
신병이 있었다. 그 병을 고치고자 날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했으며, 무당들은 대나무칼을 흔
들며 굿을 했다고 전한다. 대나무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죽도궁(竹刀宮)이라 불렸
으며, 공주는 남편의 정신병과 선천적인 병약 체질로 22살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만다.

철종(哲宗) 이후 죽동궁은 민씨 패거리에게 넘어가 민영익(閔泳翊)이 집으로 삼았다. 그는 갑
신정변 때 우정국에서 서재필이 이끄는 군사들에게 난도질을 당해 쓰러졌으나 용케도 숨은 끊
어지지 않았고, 인근에 살던 묄렌도로프가 구조하여 알렌을 불러 치료하면서 저승의 문턱에서
간신히 돌아온 행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1886년 국왕폐위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청나라로 망명했으며, 귀국을 거부하고 청나라 상해(上
海)에서 많은 돈을 벌며 떵떵거리고 살다가 1914년에 죽었다. 한편 민씨 일가는 민영익이 아
들도 없고 귀국도 하지 않자 민준식(閔俊植)을 그의 양자로 삼았는데, 민영익은 청나라에서
부인을 만들어 늦게 아들 민정식(閔庭植)을 두었다.
민영익이 죽자, 양자(養子)와 친자 간의 진흙탕 튀기는 재산싸움이 일어나 장안의 이목을 끌
기도 했으며, 결국 1924년 앞서 민병옥 가옥을 지었던 민영휘에게 넘어갔다. 허나 가산은 거
덜나고 집과 살림살이는 모두 경매 처분되었으며, 죽동궁은 철거되어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지
고 말았다.


▲  순화궁(順和宮)터 (태화빌딩 부근)

죽동궁터 표석 옆에는 헌종(憲宗)의 후궁인 경빈(慶嬪)김씨의 거처이자 사당인 순화궁터 표석
이 고개를 들고 있다.
경빈김씨는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07년 6월 세상을 떴는데, 이완용(李完用)의 형 이윤
용(李允用, 1854~1939)이 반송방(盤松坊, 서대문 서쪽)에 있던 자신의 땅과 순화궁 땅을 교환
하여 이곳을 차지했다. (순화궁은 반송방으로 이전됨)

이준용은 동생인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던 더러운 매국노로 1911년 3월 동생에게 이 집을 넘겼
다. 이완용은 그 집에 2년 가량 있다가 옥인동(玉仁洞)에 징그럽게 큰 저택을 마련해 옮기고
이곳은 세를 주었는데, 태화관(太華館)이란 요리집이 들어와 장사를 했고, 장안 기생의 본거
지인 명월관(明月館)의 지점이 되었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이 이곳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그해 5월 명월관 본점이 불타
자 이곳이 자연스럽게 본관이 되었다. 1921년 전세 계약이 만료되면서 돈의동 옛 장춘관 자리
로 이전했으며, 이완용은 그 집을 남감리회 선교본부에게 비싸게 팔아먹었다.
1939년 기존 건물을 부시고 새로 지었으나 1980년 도심 재개발계획으로 무심히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는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이 새로 뿌리를 내렸다.


▲  태화빌딩 앞에 자리한 3.1독립선언유적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민족대표 33인이 명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었다.
흔히 태화관으로 알고 있는데, 명월관이 맞는 표현이다.

▲  태화빌딩 로비에 걸린 민족대표 33인 명월관 3.1독립선언도
상상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3.1운동과 관련된 자료로 많이 등장하여
무척 낯이 익다.

▲  유리 안에 갇힌 서울의 중심점 표석

태화빌딩 동쪽에는 하나로빌딩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 1층 로비에는 흥미를 끄는 석물 2개가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는데, 바로 서울의 중심점 표석(표지석)과 하마석이다. 서울을 거의 꿰
고 산다는 나도 그들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고, 건물 안에 이런 것들이 숨어있을 줄은 상
상도 못했는데 그 상상을 보기 좋게 깨버린 것이다. (석물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서울 중심점 표석은 1896년에 세워졌다. 말 그대로 서울의 중심점을 알리는 표지석으로 1395
년에 한양으로 천도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도성(都城)의 중심을 알리는 지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1896년 건국의 번지 중심 지점이라 하여 지금의 표석을 세웠다.
가운데에 굵직하게 생긴 네모난 표석을 세우고, 그 주위로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정도의 낮
은 돌기둥 4개를 세웠는데, 원래는 주변에 있었으나 빌딩 지하로 가져왔으며 다시 1층으로 옮
겨 햇볕을 보게 했다. 또한 유리막 안에 넣어 그들의 신변을 지킨다.

중심점 표석 옆에는 2단으로 된 돌계단이 있는데, 이는 옛 순화궁의 유일한 유물로 말을 타고
내릴 때 쓰던 하마석(下馬石)이다. 그 역시 주변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빌딩 지하로 수습했고,
1층으로 옮겨 표지석과 나란히 두었다.

이들을 빌딩 안에 계속 두는 것보다는 바깥으로 옮겨 바람이라도 쐬게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원래 밖에 있던 존재인만큼 답답하게 실내에 두지 말고 밖으로 보내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말이다. 또한 도난과 건강이 우려된다면 유리막을 씌우거나 조그만 보호용 건물을 세우는 것
도 괜찮을 것이며, 100년 이상 된 서울의 유일한 중심 표지석인만큼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제
대로 관리를 해야 될 것이다.

* 서울중심점 표석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94-4(인사동5길 25, 하나로빌딩 1층)


▲  옛 순화궁의 유일한 유물인 하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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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을 거닐다 ~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돌담길, 송시열집터, 북묘터)

 


' 창덕궁 후원 뒷길, 명륜동(明倫洞) 겨울 나들이 '

▲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 ~
창덕궁(昌德宮)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  층층이 이어진 후원 돌담

북촌의 지붕이라 할 수 있는 감사원(監査院)로터리에서 동쪽 길로 들어서면 고려사이버대학교와
중앙중고교 후문이 나온다. 이들을 지나면 길이 서서히 경사를 이루기 시작하는데, 기와가 얹혀
진 창덕궁 후원 돌담이 오른쪽으로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며 펼쳐져 있다.
이 돌담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란히 제 갈 길을 가는데, 그 사이에 소
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들이 경계선 역할을 하며, 동쪽으로 갈수록 돌담의 해발 높이도 높아진
다. 또한 담 너머로 삼삼한 숲의 후원이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며, 도심의 속된 기운을 정화한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입구를 지나면 길이 얼핏 끊긴 듯 보여 '과연 넘어가는 길이 있을까?' 주
저하게 된다. 허나 그런 걱정은 곱게 접어 후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버리고 계속 길을 재
촉하길 바란다. 이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비밀의 숲길(산책로), 창덕궁 후원 뒷길(후
원 뒷길, 후원 돌담길)이다.


▲  후원 뒷길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부근)

▲  북악산(백악산)의 물을 받아들이는 후원 돌담 수구문(水口門)

▲  새롭게 손질된 돌담 - 오래된 돌담 사이에서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넓은 길이 끝나는 곳에 너른 공터가 펼쳐져 있는데, 여기서 정면에 보이는 계단을 올라 오른쪽
으로 가면 나머지 후원 돌담길이 펼쳐지고 (직선으로 가도 상관 없음) 왼쪽으로 가면 옥류정과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이다.

이곳 돌담길은 야트막한 고개로 흙길이라 상태라 조금 울퉁불퉁하다. 돌담 바로 옆구리로 돌담
을 어루만지며 갈 수 있는데, 그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바로 내리막 길이 펼쳐지고, 돌담 너
머로 도심의 허파인 창덕궁 후원이 살짝 속살을 비춘다. 숲 너머 동쪽에는 성균관대(成均館大)
건물이 진하게 보이는데, 그 길을 내려가면 돌담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성균관대 서쪽 부분인 법
학관과 주차장, 대운동장에 이르게 된다.

후원(後苑) 뒷길은 중앙중고 후문을 기준으로 성대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까지 1리 남짓 거리다.
바로 감사원에서 성북동(城北洞)으로 넘어가는 와룡고개 밑부분으로 도심에서 그리 흔치 않은
조촐한 오솔길이다. 겨울이 깊어가는 시점에 와서 그렇지 봄이 무르익은 4월 이후나, 여름의 한
복판, 늦가을의 한복판에 왔더라면 걸쭉하게 그려진 수채화 속의 주인공처럼 아름다운 산길이다.
 
내가 후원 뒷길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2011년 말, 그 이전에는 이런 숲길이 있다는 것도 몰랐
다. 후원 북부에 워낙 통제구역이 많다 보니 와룡고개와 후원 사이 무성한 숲에는 국가의 예민
한 시설들이 숨겨져 있어서 출입이 금지된 것으로 알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호기심이 강한 나
도 그 공간은 애써 들어갈 생각을 못했는데, 알고 보니 언제든 안길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에
내심 놀라고 말았다. 허나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나 외에도 많을 것이다.
한때 비원(秘苑)이라 놀림 받았던 창덕궁 후원은 3살짜리 어린 애도 다 아는 대중적인 명소이지
만 후원 뒷길은 아는 이가 거의 없다. 서울 도심을 두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고갯길, 와룡고개도
사람과 차량의 통행은 많지만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


▲  후원 뒷길 고개 - 여기서는 돌담을 손으로 더듬으며 갈 수 있다.
이곳은 후원의 가장 최북단이자 제일 높은 곳이기도 하다.

▲  성균관대 쪽으로 급격히 내려가는 후원 돌담

창덕궁의 보이지 않는 뒤쪽을 가리며 숨겨진 후원 돌담은 근래에 보수를 하여 무너지거나 낡은
부분은 새로 만들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후원 북쪽 구역은 후원 특별 관람 때 들어갈 수 있
는 비싼 구역으로 대운동장 주차장에서 후원의 북쪽을 장식하는 태극정(太極亭) 구역이 보이고,
후원 북문인 북문(북장문)도 볼 수 있다. (북문과 태극정 주변 숲은 통행 불가)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에 이르면 사각사각 밟고 지나간 흙길은 밋밋한 시멘트 길로 바뀌며, 후원
돌담과도 바다 너머의 섬을 보듯 멀어져 간다. 게다가 주차장부터 학교 돌담이나 철책이 생기면
서 둘 사이에 깊숙한 틈이 생기는데, 이는 성대가 교내를 넓히면서 후원 돌담보다 높게 또는 비
슷한 높이로 터를 다지는 바람에 그리 된 것이다. 비슷한 높이인 경우에는 후원 돌담에 접근하
지 못하도록 돌담의 북쪽 언덕을 끊어 멀리서만 보게끔 했으며, 둘 사이에 생긴 틈은 마치 휴전
선이나 성곽(城郭) 주위에 두룬 해자를 보는 듯 하다.


▲  성균관대 쪽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후원 뒷길

▲  가파른 길을 내려가면 평탄한 길이 부드럽게 펼쳐진다.

▲  궁궐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후원 돌담

▲  성대 법학관 앞 후원 뒷길

▲  후원 돌담과 성대 돌담, 그 사이에 생긴 틈
사람이 다가서기 힘든 틈 속에는 낙엽이 가득 널려 그들의 마지막 세상을 열어간다.

▲  후원 담장 너머로 애타게 바라보이는 후원 태극정(太極亭)
태극정 부근에 소요정(逍遙亭)과 옥류천(玉流川)이 있다.

▲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北墻門)

후원 북문(북장문)은 후원 북쪽에서 유일하게 속세로 통하는 문으로 보통 궁궐의 문은 암문(暗
門)이라 할지라도 팔작지붕을 얹혀 문의 형식을 갖추는데 반해, 이곳은 담장 중간에 여닫는 문
짝을 만든 것이 고작이다.

북장문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막바지 현장으로, 정변 3일 째(양력 1884년 12월 6일), 창덕궁
에서 고종을 호위하며 머물던 개화당(開化黨)과 왜군은 명성황후가 소환한 청군의 공격에 후원
을 거쳐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왜국공사는 꼬랑지를 내리며 군사를 이끌고 급히 후원 뒷
길을 거쳐 도망쳤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들을 따랐다. 단 홍영식
과 박영교, 그들을 따르는 군인 7명은 고종을 호위하며 북묘로 들어갔다.

※ 창덕궁 후원 뒷길 찾아가기 (2016년 1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3-1, 8번 출구)이나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2번
  을 타고 감사원 하차, 고려사이버대학교 쪽으로 쭉 들어간다. 안국역에서 도보 20분
* 성대입구(명륜3가) 정류장에서 성균관대 교내를 거쳐 법학관과 대운동장 쪽으로 가도 된다.
* 후원 돌담은 굳이 넘으면 안되며, 북장문 주변 돌담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명륜동/와룡동


 

♠  명륜동(明倫洞)에서 만난 조촐한 명소들

▲  흥덕사(興德寺)터 표석과 북묘(北廟) 하마비(下馬碑)

명륜동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에서 북서쪽으로 난 '성균관로 17길'을 따라가면 하마비와 함께 흥
덕사터를 알리는 표석이 나란히 반긴다.

내 정보에는 전혀 없는 명륜동 흥덕사는 1401년(태종 1년) 태조 이성계가 옛집 일대를 회사해서
만든 절이다. 세종 때 불교를 선교(禪敎)와 교종(敎宗)으로 통폐합할 때, 교종의 도회소(都會所)
로 삼으면서 크게 성장했으며, 왕실의 사찰로 법등(法燈)을 두툼하게 유지했으나 연산군(燕山君)
시절 폐사되어 그 흔적을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 있던 불상과 유물은 인근 절로 흩어졌으나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하며, 조선 효종 때 송
시열이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그가 살았던 동네란 뜻에 송동(宋洞)이라 불리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명성황후가 충주(忠州)로 줄행랑을 치면서 답답한 마음에 도중에
서 만난 이씨 무녀(巫女)에게 환궁 시기를 물었다고 한다. 과연 무녀의 말대로 그 시기에 환궁
을 하게 되자 황후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에게 바라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이에 무녀는 머리
를 조아리며 관우(關羽) 사당을 지어줄 것을 청했고, 그 이듬해 1883년 이곳에 사당을 지어주면
서 방향을 따져 북묘라 하였다. 그가 관우 사당을 요청한 걸 보면 아마도 관우를 중심 신으로
받들었던 모양이다.

관우는 중원대륙의 오래된 허접 소설, 삼국지(三國志)에 주요 인물로 촉나라를 세운 유비(劉備)
의 의제이다. 의형과 의제(장비)를 따라 사내들간의 돈덕한 의리를 남기며, 대륙을 누빈 인물이
나 220년 손권(孫權)의 수하인 여몽, 육손에게 보기 좋게 패해 그가 지키던 형주(荊州) 지역을
모두 잃고 그 자신은 손권에게 처단되고 만다.
이후 관우 신앙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점차 유교에 버금갈 정도로 대륙의 주요 민간신앙
으로 흥행했는데, 그 신앙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조선이 명나라에 원군을 요
구하자 명은 수만의 허접 군사를 보내 갖은 민폐를 아끼지 않았는데, 명나라 군사 중에는 관우
열성 신자가 많았다. 특히 진인(陳寅)이란 장수는 그 신앙이 매우 두터웠으며, 1598년 울산성(
蔚山城)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서울 남대문 밖에 집을 짓고(아마도 선조 임금이 집을 내려준 듯
) 쉬고 있었다. 그때 거처에 관우 사당을 지으니 그 사당이 이 땅 최초의 관우 사당, 남묘(南廟
)가 되겠다.

왜란이 끝나자 명나라 군주, 신종(神宗)은 관우의 혼이 도와 전쟁이 끝난 거라고 격하게 우기면
서 금 4,000냥을 보내 남대문 밖에 관우 사당을 지어달라고 했다. 이제 조선 조정은 그곳에 이
미 사당이 있으니 다른 곳이 좋겠다며 장소를 급히 물색하다가 동대문 밖에 세우게 되니, 이것
이 국립 관우 사당 1호이자 지하철 역에도 있는 그 유명한 동묘(東廟)이다.
17세기 이후 전국 주요 고을에 관우 사당이 지어졌으며, 관우신앙이 민간에도 널리 퍼지면서 민
간신앙의 하나로 조촐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  북묘 하마비

1883년에 명성황후가 지은 북묘는 그 이듬해인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마무리하는 현장이
되면서 크게 이름을 남겼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일을 벌인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당은 왜군과 협조
하여 고종(高宗)과 왕실을 호위하며 창덕궁(昌德宮)에 들어갔으나 청나라군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후원 북장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일이 그르쳤음을 깨달은 김옥균과 박영효, 서
재필(徐載弼) 등은 왜군을 따라 북촌을 거쳐 왜국 공사관(公使館)으로 36계를 치고, 그들과 작
별한 홍영식(洪英植)과 박영교(朴泳敎)는 군사 7명과 고종을 호위하며 북묘에 들어갔으나, 곧
들이닥친 청나라군에게 살해되면서 갑신정변은 막을 내린다.
이후 고종은 1887년, 갑신정변 당시 허벌나게 고생했던 일을 떠올리며 민영환(閔泳煥)에게 글씨
를 쓰게 하여 북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것이 북묘비(北廟碑)로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북묘는 1902년 관왕묘(關王廟)에서 관제묘(關帝廟)로 다른 관우사당보다 격이 높아졌다. 하지만
1908년 순종(純宗)의 칙령으로 국립 사당과 제단을 정리하면서 동묘에 싹 통합시켰고, 왜정 때
비어있는 북묘 건물과 토지를 민간에 팔면서 이곳에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과 동광학교(東
光學校)가 들어섰다.
불교중앙학림은 1917년 북묘터에 불교전수학교를 세웠으며, 바로 동쪽에는 수송동(壽松洞)에서
옮겨온 보성고등학교가 뿌리를 내렸다. 1930년 불교전수학교는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인가되었으
며, 1946년 동국대로 이름을 갈아 남산(南山) 북쪽으로 이사를 갔다. 그 빈 자리에는 조양보육
대학이 들어섰고, 1963년에 문을 연 은석초등학교(현재 서울 장안동에 있음)도 그 자리의 일부
를 쓰다가 모두 다른 데로 가면서 현재는 주택가와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 들어섰다.

옛 북묘터를 유일하게 지키고 있는 하마비는 왕릉이나 궁궐, 사당, 향교, 서원 앞에 세우는 비
석으로 그의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있다. 이는 높고 낮은 사람 모
조리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북묘가 있던 시절에야 지엄한 하마비의 명령이 통했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발로 뻥차고 괴롭혀도 하소연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국가나 서울시에서 관
리하는 지정문화재도 아니니 찬밥 신세는 더하다.
왕년의 시절을 생각하며 우수에 젖은 그 옆에 역시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흥덕사터를 알리는 표
석이 있어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집터에 새겨진 증주벽립(曾朱壁立) 바위글씨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7호

북묘 하마비에서 주택가로 2분 정도 들어가면 길 왼쪽 바위에 또렷하게 새겨진 '증주벽립(曾朱
壁立)' 4자의 바위글씨를 만나게 된다. 이 바위글씨는 송시열이 새긴 것으로 그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 집이 꽤나 넓었는지 동쪽은 북묘 하마비를 넘어 서울과학고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바위에 새겨진 증주벽립이란 '증자(曾子)와 주자(朱子)의 뜻에 따라 높은 절벽이 온갖 비바람에
꿋꿋이 버티듯 의로운 나의 길을 가겠다'
는 아주 의연한 뜻으로 4자의 글씨가 근래에 새겨진 듯
필체가 너무나 선명하고 패기가 넘쳐 흐른다. 그의 바위글씨는 이것 말고도 동쪽에 있는 서울과
학고등학교 교정에 '금고일반(今古一般,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과 '영반(詠盤, 올라앉아
시를 지은 바위)' 등 2개가 더 있다.
송시열이 간 이후, 증주벽립 바위글씨 주변은 송시열이 살았던 동네란 뜻의 송동(宋洞)이라 불
렸으며, 골짜기가 깊고 꽃나무가 많아 숙정문(肅靖門) 남쪽과 더불어 도성 봄꽃놀이 장소로 인
기를 누렸는데, 앵두꽃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1883년에는 이곳에 북묘가 들어섰으며, 왜정 때는 불교전수학교와 보성고등학교가 뿌리를 내렸
다. 이후 여러 학교를 거쳐 주택가로 변하면서 아름다웠던 정취는 죄다 한 토막 전설처럼 사라
지고, 글씨가 새겨진 바위 주변은 물론 그 머리까지 개념 없이 집들이 들어차 보기에도 정말 딱
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명세기 유서가 깊은 바위인데.. 1960년대 이후 무자비하게 자행
된 개발의 칼질이 이 바위에 보기도 흉한 콘크리트 칼을 씌워 죄인 아닌 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콘크리트 칼을 강제로 뒤집어 쓴 바위글씨와 문화유산이 서울에 꽤 있음..)
지금은 힘들겠지만 혹여 나중에 서울시나 종로구에서 바위 주변 집들을 모두 매입해 부시고 바
위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개발의 칼질로 다친 부분을 치료한 다음, 주변에 앵두나무를 심고
소박하게 공원(공원 이름은 '송시열공원'이나 '송동공원'이 좋을 듯)으로 닦았으면 좋겠다. 허
나 아마 안될꺼야. 왜 이곳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대한민국이니까.. 만약 지방문화재로 지정되
지 못했다면 저 글씨도 진작에 돌가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원래 '우암구기각자증주벽립(尤庵舊基刻字曾朱壁立)'이었으나 이
름이 무지 어렵다하여 '우암 송시열 집터'로 가볍게 명칭이 바뀌었다.


▲  가까이서 본 증주벽립 바위글씨

※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참으로 기나긴 인생
송시열은 이율곡(李栗谷)의 학풍을 계승한 노론(老論)의 우두머리로 17세기에 조선의 정치와 사
상을 주름잡던 조선 최대의 유학자였다.

그의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 호는 우암(), 화양동주()로 1607년 충
북 옥천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유학과 사상에 쓸데없이 타고
난 재능을 보였으며, 이후 논산 노성으로 집을 옮겨 김장생(金長生)의 배움을 받았다.

1633년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경릉참봉()이 되었으나 바로 그만뒀으며, 1635
년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의 스승이 되어 1년 동안 그를 가르켰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인조(仁祖)를 호종하여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불이나게 도망쳤
으며, 1637년 1월 인조가 송파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淸太宗) 앞에 항복하자 열받은 나머
지 고향으로 내려갔다.

1649년 봉림이 왕위에 오르자 예전 스승과 제자의 인연으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청나라에 우호
적이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다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허나 김자점이 파직되
면서 다시 관직으로 돌아왔으나 김자점이 홧김에 조선이 청나라 정벌을 준비한다고 청나라 조정
을 들쑤시는 바람에 그와 관련된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청나라의 압박으로 떨려난다.
그래서 낙향하여 후진을 기르다가 1658년 다시 관직에 나가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며, 우
리나라의 마지막 대외정벌 프로젝트이자 효종의 야망인 청나라 정벌 계획인 북벌(北伐)을 도왔
으나 아쉽게도 이듬해 왕이 승하하면서 북벌 프로젝트는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

현종(顯宗) 시절,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 자의대비()>의 복상문제(
)가 발생하자 기년설(: 만1년)을 주장하며 3년 설을 주장한 남인(南人)을 쫓아내 권력을
잡았다. 이렇게 서인(西人)의 우두머리가 되어 좌참찬(左參贊)이 되었으나, 효종의 장지(葬地)
를 잘못 옮겼다는 비난을 받고 다시 낙향을 했고, 1668년 다시 돌아와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
정(左議政) 허적()과의 다툼으로 또 사직했다. 1671년 다시 우의정으로 복귀하고 이듬해 좌
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다시 자의대비(장렬왕후)의 복상문제가 거론되어 대공설
(: 9개월)을 주장했다. 허나 이번에는 남인(南人)이 주장한 기년설(만1년)이 채택되면서
또 떨려나 평안도 덕원(德源)을 시작으로 여러 곳을 유배투어를 했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떨려나자 중추부영사()가 되었으며, 1683년에
벼슬을 사직하여 봉조하(奉朝賀, 특별 명예직)가 되었다. 이후 남인에 대해 과격한 처벌을 주장
한 김석주(金錫胄)를 지지하여 비난을 많이 받았고, 그 사건으로 아끼던 제자 윤증(尹拯)과 감
정싸움이 격해지면서 서인은 윤증의 소론(少論) 패거리와 송시열의 노론(老論)패거리로 분열되
었다.

이후 관직에서 은퇴하여 속리산 화양동(華陽洞)에 팔자좋게 집을 짓고 제자를 기르다가 1689년
숙종이 희빈장씨(禧嬪長氏)의 소생(후에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를 쌍수 들고 반대
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로 떨려났다. 그리고 국문 때문에 서울로 소환되던 중, 정읍
(井邑)에서 숙종이 내린 쓰디쓴 사약을 1사발 쭉 들이키고 82세의 나이로 강제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고향인 충북 옥천을 시작으로 충남 논산, 서울 명륜동, 대전 가양동, 속리산 화양동에 집
을 짓고 살았으며, 유교(성리학, 주자학)의 새로운 역사를 쓴 인물로 제자가 참 많았다. 그래서
송자(宋子)로 추앙을 받았으며, 그를 배향한 서원이 전국에 즐비하다. 저서로는 송자대전(宋子
大全), 우암집(尤庵集), 송서습유(),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 등 방대하며, 그의 제자들이 정리하여 세상에 공개했다.

죽음에 임해서 제자들에게 명나라 군주 신종과 의종(毅宗)을 제사지내는 사당을 만들 것을 유언
했는데, 그래서 생긴 것이 그 악명 높은 만동묘(萬東廟)이다. 그가 이런 허무맹랑한 유언을 남
긴 것은 우리의 사촌 민족인 만주족(여진족)의 청나라에 대한 강한 반감도 있겠지만 성리학의
영향으로 사대부와 유생들을 중심으로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꼴통 사대주의(事大主義)가 팽배했
고, 거기에 임진왜란 이후 재조지은(再造之恩)까지 가세하여 명나라의 대한 존재가 경외의 수준
으로 커진 탓이다. 동아시아의 약소국이자 호구 국가였던 신라(新羅)도 당나라에 저렇게까지 하
지는 않았는데, 조선은 명나라를 아버지 이상으로 떠받들었던 것이다.
명이 망하고 구한말까지(심지어 왜정 때까지도) 명의 마지막 군주, 의종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두고두고 우려먹었으며,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명의 재건을 간절히 바라던 지배층의 문구가 많이
등장한다. 게다가 조선 왕실도 명나라 군주의 사당인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매년 제사를 지
내니 참 할말을 없게 한다. 명이 백제와 고구려, 또는 백제와 부여국(夫餘國)처럼 조선의 조상
나라라면 이해라도 하지만 둘은 전혀 관련도 없다.
어쨌든 정도전(鄭道傳)과 율곡 이이(李珥), 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와 중농학파(重農學派) 계
열 등 몇몇 깨어있는 이들을 제외한 조선 지배층의 우둔함은 결국 부국강병을 멀리하고 민생을
외면했으며, 쓸데없이 유교 교리만 앞세워 헛소리만 떠드니 발전은 커녕 점점 퇴보하여 결국은
섬나라 왜국에까지 밀렸다. (조선 중기부터 밀렸다고 보면 됨) 그래서 결국은 아시아의 진정한
호구 국가가 되었으니, 그 휴유증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굴레처럼 남아있으며, 약소국의 비애
를 두고두고 누리게 만든다. 기분 같아서는 저 증주벽립 바위글씨를 깨부시고 싶지만 저 글씨가
무슨 잘못이 있으랴? 게다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나보다 높은 신분의 존재이니 감
히 해꼬지는 어렵다

※ 송시열집터, 북묘 하마비 찾아가기 (2016년 1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3번 출구), 4호선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8번을
  타고 국민생활관 하차, 또는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7번을 타도 된다. 국
  민생활관 정류장에서 내려서 왼쪽(종로 08번 하차 기준, 종로07번은 오른쪽임)으로 올림픽기
  념국민생활관 서쪽 담장길(성균관로17길)을 따라 2분 정도 가면 북묘 하마비이며, 여기서 왼
  쪽으로 2분 더 들어가면 송시열집터 증주벽립 바위글씨가 나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1가 5-99 (성균관로17길 37)


▲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정문 곁에 있는 송시열집터 표석
송시열 집이 쓸데없이 넓었던 모양이다. 증주벽립에서 여기까지 200m나 되니 말이다.
아니면 표석의 위치가 어긋나있을 수도~~ (위치가 틀린 옛터 표석도 은근히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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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1월 2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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