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회동백인제가옥'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1.01.25 북촌에서 2번째로 큰 고래등 기와집, 가회동 백인제가옥
  2. 2013.05.14 시간도 느릿느릿 걸음을 멈춘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 ~ 북촌한옥마을 산책 (재동, 가회동, 정독도서관..)

북촌에서 2번째로 큰 고래등 기와집, 가회동 백인제가옥

 


' 북촌한옥마을에서 만난 고래등 기와집. 가회동 백인제가옥 '

▲  백인제가옥 안채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도심 한복판에 한옥마을의 성지(聖地)로 추
앙받고 있는 북촌(北村, 북촌한옥마을)이 있다.

북촌은 안국역 이북이자(원래는 청계천 이북임)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로 1,000채가 넘는
한옥들이 널려있으나 정작 속시원히 개방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북촌
제일의 고래등 기와집으로 꼽히는 가회동 백인제가옥이 2015년 11월, 세상을 향해 그 대
문을 활짝 열었다.
북촌한옥마을에서 고래등급 한옥으로써는 사상 최초로 빗장을 연 의미 깊은 현장으로 이
런 좋은 곳은 미리미리 발자국을 찍어 둬야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 법이
다. 하여 고래등 기와집의 좋은 기운도 훔칠 겸, 늦가을 평일을 이용해 그곳을 찾았다.

나는 자유관람으로 30분 동안 예습 차원에서 1바퀴 둘러보고 바로 가이드투어로 50분 동
안 가옥 내부(안채, 사랑채, 별당 내부까지)까지 말끔히 둘러보았다.


▲  있는 자들의 폐쇄적인 공간에서 시민들의 열린 공간으로 새로 거듭난
백인제 가옥 입구 (오른쪽 한옥은 관리사무소로 예전 바깥채)


 

♠  20세기 초반 상류층 고래등 한옥의 결정체
가회동 백인제 가옥(白麟濟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22호

▲  백인제가옥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백인제가옥 입구를 들어서면 한옥으로 된 관리사무소와 공터, 그리고 솟을대문이 차례대로 펼
쳐진다.
관리사무소로 쓰이는 한옥은 원래 가옥 바깥채로 세월의 고된 때를 간직한 채, 우중층하게 있
던 것을 손질하여 사무실과 화장실을 두었다. 바깥채 동쪽에는 차량들을 위한 검은 철제 대문
이 있었고 서쪽은 담장과 골목으로 막혀있었으나 바깥채 동쪽이 다른 이에게 넘어가면서 대문
을 밀어버리고 돌담을 둘렀으며, 대신 서쪽을 뚫어서 가옥 입구로 삼았다.

솟을대문 앞 공터 동쪽에는 쉼터가 조촐히 닦여져 있는데, 가이드투어를 신청했을 경우 지정
시간까지 그 쉼터로 와서 대기하면 된다.


▲  예전 백인제 가옥 바깥채 (2011년)

▲  남남이 되버린 바깥채 동쪽 한옥과 담장

바깥채 동쪽 담장 너머에는 깔끔한 모습의 한옥이 있다. 겉으로 보면 아무런 상관도 없는 현
대 한옥처럼 보이지만 그 집도 엄연한 백인제가옥의 일원으로 그 부분만 따로 분리하여 매각
했다.
현재는 친일 성향을 보이는 롯데 회장 일가가 별장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도심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한옥 별장까지 둔 그것들이 몹시 부러울 따름이다. 백인제가옥의 태생
도 그리 좋지는 못한 편인데 (친일파 한상룡이 지었음) 그 역사는 속일 수가 없는 것인지 친
일 성향 기업이 바로 옆에까지 들어와 북촌의 꿀을 빨고 있었던 것이다.


▲  솟을대문에 걸린 백인제가옥 현판의 위엄

▲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서쪽 부분, 중문간채

가옥이 개방되었다고는 하지만 솟을대문은 여전히 닫혀있었다. 대문도 주인을 닮는다고 졸부
들의 부질없는 자존심이 아직까지 깃들여진 탓일까? 그렇다고 문짝이 사용 불가일 정도로 부
실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쨌든 정면에 보이는 대문이 빳빳하게 닫혀 있으니 처음 온 사람
은 '이거 개방된거 맞어?' 당황할 터, 허나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대문 옆에 난 조그만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되니까.
솟을대문에는 '백인제가옥'이라 쓰인 한글 현판이 높이 걸려있다. 이 현판은 개방 기념으로
달아놓은 것으로 한글로 점잖게 쓰인 점이 이채롭다.

솟을대문을 지닌 건물을 대문간채라고 한다. 대문을 중심으로 5개의 방을 지니고 있는데, 이
들은 궂은 일을 담당하던 아랫 사람들의 생활공간으로 지금은 3개의 방을 활용하여 백인제가
옥의 100년 역사와 이곳을 거쳐간 4명의 인물(한상용, 최선익, 백인제, 최경진)을 다루는 공
간으로 쓰이고 있다. 가옥과 인물에 대한 설명과 사진, 시청각 자료가 있으며, 열린 공간이기
때문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도 된다. 또한 일반 관람시 가옥에서 유일하게 발을 들일 수 있는
방이기도 하다.
그럼 여기서 가옥의 역사와 이곳을 거쳐간 인물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솟을대문 안쪽 모습과 대문간채

① 시작이 좋지 못했던 백인제 가옥, 가옥의 1대 주인, 친일파 한상룡(韓相龍, 1880~1947)
이 가옥을 지은 한상룡은 돈 꽤나 주무르던 친일파 한관수(韓觀洙)의 아들로 인근 재동(齋洞)
에서 태어났다. 그 부친도 더러운 친일파지만 아들도 그 못지 않은 친일파로 악질 친일파로
악명이 대단한 이완용(李完用) 또한 그의 외삼촌이다. 아주 집안과 외가까지 쌍으로 더러운
존재들인 셈이다.

1898년 왜열도로 유학을 가서 그곳의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맺었으며, 1903년에 왜국(倭國)이
친일파 왕족인 이재완(李載完, 흥선대원군의 조카)을 앞세워 한성은행(漢城銀行)을 세울 때,
총무가 되어 실질적인 경영을 맡게 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친일파 집안의 배경이 컸을
것이다.
1908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위원으로 참가해 적지 않은 돈을 쥐기도 했으며, 1923년
한성은행 두취(頭取)로 취임했다. 그리고 친일 유력자 모임인 대정실업친목회 초대 평의장(評
議長)을 지냈으며, 그것도 모자라 데라우치 총독의 동상을 세우고, 안중근(安重根)에게 처단
된 이토 히로부미 기념회와 사이토 마코토 기념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뻔뻔함까지 보였다.
심지어는 1919년 왜정(倭政)에게 조선 사람들 모두 왜식으로 창씨개명을 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1930년대부터 각종 친일 단체에 빠짐없이 얼굴을 비추며 많은 돈을 전쟁에 내놓았으며, 관동
군(關東軍) 사령부의 사무촉탁을 맡기도 했다. 이런 더러운 공로로 왜정에게 많은 훈장을 받
았고, 중추원(中樞院) 참의, 중추원 고문, 칙선 일본 귀족원 의원에 임명되기도 했으며, 1935
년 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하나로 수록되기도 했다.
또한 그의 부인인 이용경도 애국금차회에 참여하는 등 부부가 쌍으로 왜정에 협력했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反民特委)에 넘겨졌으나 이승만의 농간으로 풀려났으며, 1947년 그 더러
운 목숨을 강제로 놓으며 지옥으로 떨어졌다.

한상룡은 가회동 이곳을 점찍어두고 1906년부터 이 일대를 매입했다. 1907년 경성박람회에 압
록강 흑송(黑松)이 소개되자 그 나무를 대량으로 구입해 7년 동안 터를 다지고 공사를 벌여
1913년 7월 완성을 보았다.
당시 서울 장안에서 가장 큰 기와집으로 악명이 자자했는데, 친분이 있는 왜인 사업가와 왜정
관료를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으며, 왜정 총독도 초청하여 술을 대접했다. 또한 미국인 석유
사업가인 록펠러2세도 다녀가는 등, 집의 위세가 대단했다.
허나 한상룡이 은행을 잘못 굴려 적자가 커지자 1928년 6월 한성은행에 집을 넘겼다. 은행 소
유로 바뀌자 천도교 단체가 손병희(孫秉熙) 집과 가까운 이곳을 종종 빌려 지방에서 상경한
교도들의 숙소 및 회합 장소로 사용했다.


▲  중문간채 앞에서 바라본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대문간채 동쪽 방에는 백인제 가옥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담장 너머로 보이는
한옥은 백인제가옥의 잃어버린 부분이다.


가옥의 2대 주인, 개성 출신 부호이자 민족언론인, 최선익(崔善益, 1905~?)
최선익은 개성 출신 부유층으로 불과 19세인 1924년 조선일보사에 주주이자 기자로 언론 활동
을 시작했다. 1932년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했는데, 여운형(呂運亨)을 사
장으로 두고 자신은 부사장을 맡았다.
한성은행에서 매물로 나온 가회동 한옥에 격한 반응을 보이며 1935년 1월 29일 인수했다. 친
일파로 더러운 발자국을 남겼던 1대 주인과 달리 오랜 시간 민족언론인으로 활동했으며 집에
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솟을대문의 위치를 지금처럼 변경하고 필지 정리를 했다.
허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1944년 백인제에게 매각했으며,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
를 알 수 없다.

③ 가옥의 3대 주인, 집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백인제(白麟濟, 1898~?)
백병원 창립자로 유명한 백인제는 왜정 시절 외과 의사의 1인자이다. 1915년 평북 정주의 오
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했으며,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6개월 투옥되면서 퇴학을 당했으나 1921년 복교하여 졸업을 했다. 1921년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수(조교), 총독부의원으로 일하다가 1923년 의사면허증을 받게 된다.

1928년 왜열도 동경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해 바로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명되었고, 1935년 조선의사협회가 조직되자 그 간사로 선임되었다. 1936년에 1년 6
개월간 프랑스와 독일, 미국에 유학을 갔었고, 1941년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를 그만두고 백
외과(현재 백병원)를 세워 병원 원장이 된다.

그는 의술, 특히 외과술이 뛰어나 고위층들이 그의 진료를 받고자 줄을 길게 섰다고 하며, 그
로 인해 적지 않게 돈을 벌어들였다. 그 돈으로 1944년 9월 최선익에게서 이 집을 매입해 자
신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1945년 9월 서울의과대학 외과 주임교수 겸 부속병원장이 되었고, 그해 12월 서울의사회 초대
회장이 되었으며, 1946년 12월 서울대 의과대학 외과주임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다음달 그만두
었다.
1948년 대한외과학회 제3대 회장을 지냈으나, 6.25전쟁 때 미처 피신을 가지 못해 2대 주인,
최선익처럼 북한으로 납치되어 아직까지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그는 이 땅의 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으며, 사냥을 좋아하여 종종 북한산(삼각산)으로 사냥
을 나가 맷돼지나 토끼 등을 뜨락에 던져놓고는 구워먹기도 했다. 장인과 장모를 위해 집 서
쪽에 별채를 지어주기도 했으며, 서재필 박사를 초청해 연회를 열기도 했다.

④ 가옥의 4대 주인, 백인제의 부인인 최경진(崔炅珍, 1908~2011) 그리고 그 이후
백인제가 납북되자 집의 안주인인 최경진이 집 주인이 되었다. 소유기간이 1968년부터라고 하
니 이때부터 실질적인 소유권을 행사한 듯 싶다.
그는 1928년 백인제와 혼인하여 2남 4녀를 두었으며, 백병원의 2대 이사장으로 병원을 재건하
는데 노력했다. 1988년 8월까지 집을 소유하면서 일부만 손댄 것을 제외하면 거의 원형에 가
까운 모습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여 1977년 3월 서울시 지방민속자료(현 지방민속문화재)
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1988년 아들인 백낙훤에게 소유권을 넘겼으며, 2009년 11월 서울시에서 인수하여 서울시 소유
가 되었다. 2012년 혜화동(惠化洞)에 있는 시장 공관(公館)이 한양도성 복원과 유네스코 등재
사업으로 인해 개방이 결정되자 공관 대체 장소로 백인제가옥을 정했다. 허나 문화유산 훼손
과 친일파 한상룡이 매국노 행위를 했던 현장이라며 비난이 쏟아지자 2013년 5월 그 야심을
버렸으며, 이곳을 속세에 열기로 결정하고 2015년 10월 부분 개방을 거쳐 11월 완전 개방되었
다.

⑤ 고래등 한옥의 결정체, 백인제가옥의 구조
북촌이 내려다보이는 가회동 언덕 2,460㎡에 닦여진 이 집은 장대한 규모의 사랑채와 안채를
중심에 두고 대문간채, 중문간채, 별채를 지었으며, 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별당을 두었다.
정원을 넓게 닦고 갖은 화초를 심었으며, 사랑채와 안채를 구별하던 기존의 전통 한옥과 달리
왜식 복도와 다다미방을 두어 서로 연결시켰다. 그래서 굳이 바깥을 나갈 필요가 없이 사랑채
와 안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화장실도 안에 있었음)
또한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했으니 이는 당시로는 생소한 건축 자재로 부를 과시하
고자 함이며, 안채 일부가 2층으로 되어있는 점도 이곳의 특징이다.

20세기 초반 근대 개량한옥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북촌 제일의 한옥인 안국동 윤보선
가(尹潽善家, 사적 438호)와 함께 북촌을 대표하는 한옥으로 윤보선가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
랑한다. (윤보선가는 아직도 비공개임)

끝으로 가옥 이름을 백인제가옥으로 한 것은 별 이유 없다. 백인제와 그의 부인, 자녀들이 60
여 년을 살던 집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상룡의 더러운 이름을 붙일 수
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시작은 영 좋지 않았으나 그 다음 인수한 사람들로 인해 일종의 면죄
부를 받게 되어 북촌 제2의 한옥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100년 이상 묵은 잘 남아있는 근
대한옥이니 지방문화재보다는 국가지정 민속문화재로 승급시켜도 손색은 없다고 본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93-1 (북촌로7길16, ☎ 02-724-0232)


 

♠  백인제가옥 바깥 둘러보기

▲  사랑채 (대청마루와 사랑방)

대문간채에서 붉은 벽돌문을 지나면 바로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지닌 사랑채가 마중한다. 사랑
채는 집 주인과 아들 등 남자들의 생활공간으로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책을 보는 서재의
기능도 같이 했는데, 넓직한 대청으로 이루어진 사랑방은 많은 손님을 치르기에 부족함이 없
는 규모이며, 방의 4면이 마루로 둘러싸인 특이한 구조이다. 사랑 대청은 전통 한옥의 우물마
루 대신 장마루를 깔았으며, 사랑채 내부는 가이드 투어 시에만 진입이 가능하다.

▲  솟을대문에서 사랑채로 이어지는
붉은 벽돌문

▲  동쪽 뜨락에서 바라본 사랑채


▲  바깥에서 바라본 사랑채 대청마루 (왼쪽은 사랑방)
집 안에 둔 물건 상당수는 백인제 가족이 쓴 것이 아닌 시중에서 구입한 것이다.

▲  상류층 한옥의 여유로움이 묻어난 사랑채 뜨락
뜨락의 구석 가장자리에는 온갖 화초를 심어 뜨락을 아름답게 수식했고
뜨락 한복판에는 잔디를 입혀 부잣집 뜨락의 위엄을 보이게 했다.

▲  뜨락 동쪽에 심어진 키 작은 소나무
백인제가 심은 나무로 여겨진다. 주인은 오래전에 가고 없지만
나무만은 잘 살아남아 주인의 빈자리를 보듬는다.

▲  뜨락 구석에 조촐히 닦여진 산책로

뜨락 구석에 약간 높게 터를 다져 박석을 깔고 조촐히 산책로를 내었다. 그 주변에는 여러 화
초와 소나무를 심어 아름다움을 더했으니 봄과 늦가을 풍경이 아름답다. 뜨락이 너무 넓어서
박석 산책로까지 냈을 정도이니 왠만한 졸부집 이상급임을 보여준다.
산책로는 사색의 역할도 한다. 비록 그 거리는 짧으나 생각을 하는데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
다. 집을 지은 한상룡은 이 길을 거닐면서 어찌하면 왜정에 잘보여 부귀영화를 누릴까? 그 생
각을 했을 것이고, 백인제는 어떻게 하면 병원이 잘되고 외과술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 생각
을 했을 것이며, 최경진 여사는 납북(拉北)된 남편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  뜨락 구석 산책로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  단풍나무 밑에 자리한 사랑채 뒷쪽 벽돌문
벽돌문에서 사랑채 굴뚝까지 벽돌담이 있었다. 그렇게하여 안주인의 공간인
안채를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끔 완전 가린 것이다. 허나 돌담은 무너져
흔적만 화석처럼 남아있고, 반쯤 열린 벽돌문만 전하고 있다.

▲  사랑채(왼쪽)와 2층 부분(오른쪽)

백인제가옥에는 특이한 공간이 하나 있다. 바로 사랑채 뒷쪽에 달린 2층 공간이다. 한상룡 시
절에 귀빈 접대용으로 주로 사용했다고 전하는데, 아마도 기생까지 소환해 질탕나게 술마시고
놀았던 모양이다. 얼마나 많은 왜정 고위층과 친일파가 저곳을 들락거렸을까?
현재는 2층 보호와 계단 부실을 이유로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사랑채 위에 덧씌운 2층 부분
집 주인이 살아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금지된 구역이다.

▲  반쯤 열린 사랑채 뒷쪽 벽돌문과
벽돌담의 흔적

▲  툇마루를 갖춘 안채 뒷쪽 부분


▲  백인제가옥의 뒷쪽, 안채 뒷쪽 주변
뜨락 북쪽에 자연 지형을 이용해 나무를 심고 돌을 다져 조촐하게 동산을 자아냈다.

▲  별당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바라본 안채 뒷쪽 부분

▲  안채 서쪽에 있는 부엌

식구도 많고, 부리는 사람도 많고, 거기에 손님도 늘 많았기에 부엌 또한 넓게 닦았다. 안방
쪽으로 부뚜막을 만들어 솥을 달고 장작을 이용해 불을 피웠는데, 이는 음식도 만들고 안채
난방도 고려한 기능이다. 부엌 바닥은 지표면보다 낮고 거의 흙바닥이며, 옆에는 부엌 살림살
이를 담당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찬방(饌房)이 있다. 부엌에서 일하는 아낙들의 거처이기도 하
다.


▲  완전 박제된 부엌처럼 되버린 안채 부엌 내부

왕년에는 부뚜막에서 연기가 꺼질 일이 없었다. 허나 지금은 언제 모락모락 연기를 피웠는지
가물가물할 정도. 더군다나 이제는 사람이 사는 집도 아니고 지체 높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니 더욱 손대기가 그럴 것이다.
이렇게 박제된 모습으로 방치하는 것보다는 가끔은 부뚜막을 깨워서 체험 이벤트를 해보는 것
은 어떨까 싶다. 부뚜막에서 지은 밥과 누룽지, 숭늉, 국 등을 먹어보는 도심 속에서 즐기는
옛 맛 체험 말이다. 아니면 저렴한 가격에 포장 판매하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그만큼 이렇
게 놀려두기가 아깝다는 뜻이다. (영화 '암살'의 촬영장소로 잠시 쓰인 적이 있음)


▲  안채 서쪽에 자리한 별채

별채는 백인제가 그의 장인, 장모를 위해 지은 공간이다. 별도로 대문을 내어 가옥의 서쪽 문
으로 삼았는데, 처가 어른까지 모두 끌어안고 살 정도로 처가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음을 보여
주며, 그들이 모두 떠난 이후, 집은 빈 공간이 되었다가 현재는 남쪽의 'ㄷ'자형 한옥과 함께
운영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대문은 굳게 닫힌 채 무늬만 남아있다.


▲  부연이 쳐진 운영사무실 한옥과 별채(뒷쪽)

▲  안채 정면과 뜨락 (태극무늬 마크가 달린 부분은 사랑채 복도)

안채는 집의 안주인, 즉 가옥 주인 부인의 생활 공간이다. 부인 뿐 아니라 어머니와 며느리,
딸 등 집안 여인들의 공간으로 안채의 중심인 안방은 오로지 집안 남자만 출입이 가능했다.
백인제가 이북으로 강제로 사라지고 그의 부인 최경진이 집 주인이 된 이후, 안채 안방과 대
청이 집의 중심이 되었고 그 영향 때문인지 가이드투어 때도 바로 안채에서 안으로 들어선다.
(사랑채로 들어가지 않음)


▲  흑백과 칼라의 조화, 사랑채와 안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사랑채 복도 바깥 벽

섬세한 무늬가 새겨진 벽 한복판에 태극무늬 마크가 또렷히 새겨져 있다. 그냥 흑백TV 같은
다른 벽무늬 보다는 태극무늬가 새겨진 부분이 마치 칼라TV처럼 더욱 돋보인다.


▲  안채 서남쪽 부분과 늦가을이 곱게 깃든 단풍나무
가을도 이곳의 공개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온 모양이다. 이렇게 곱게 다녀간
흔적을 남겨놓고 갔네. 안채 서남쪽 끝부분에는 집안 사람들이
사용하던 화장실이 있다.

▲  지붕의 추녀 곡선이 아름다운 중문간채 (가운데가 안채로 인도하는 중문)

▲  뚜껑이 닫힌 술 수장고 (중문 안쪽에 있음)
수장고에는 집주인이 애지중지하던 온갖 귀한 술이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동,서양을 망라한 술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괜히
열어보는 일은 없기 바란다. 인생만큼이나 허무한 짓이니까.


 

♠  백인제가옥 내부, 별당 둘러보기

▲  별당으로 인도하는 산책길

가이드투어 시간까지 백인제가옥을 살랑살랑 둘러보고 시간에 맞춰 솟을대문 밑 쉼터로 내려
갔다. 지금까지는 예습 차원에서 가옥 바깥을 자유롭게 둘러보았지만 이제는 급을 높여 심화
학습 및 복습 차원에서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가옥 내부까지 투어를 하게 된다. 투어 시간이
되자 곱게 개량 한복을 차려 입은 아줌마 가이드가 나와서 인사를 하며 안내를 해준다.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벽돌담, 사랑채 뜨락을 둘러보고 가옥 북쪽 돌담을 따라 이어진 약간
오르막의 산책로를 오른다.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나무와 화초가 무성해 산속 별장으로 순간
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왼쪽 나무 너머로 안채와 사랑채 2층 부분이 보이며 오른쪽은 돌담으
로 그 너머로 북촌 일대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별당이 손짓한다.


▲  돌담과 함께 이어진 별당 산책길

▲  돌담 너머로 북촌 북부가 바라보인다. (계동, 가회동 지역)

▲  백인제가옥의 조촐한 피서지, 별당(別堂)

백인제가옥에서 가장 북쪽이자 하늘과 맞닿은 곳에 시원스레 팔작지붕을 휘날리고 있는 별당
이 있다. 누마루 형식으로 이루어진 집으로 1층에는 돌기둥과 계단을 세워 건물의 키를 높였
고 그 2층에 방을 두었는데, 정면에 유리창을 내고, 돌담도 1층 높이 밖에 되지 않아서 정면
이 훤히 트여있다. 북촌 북부는 물론 북악산(백악산)까지 시야에 잡히나 시야의 범위는 그렇
게 넓지는 못하다.
집 주인과 가족은 여기서 휴식을 취하거나 조촐하게 피서를 즐겼으며, 창문만 열면 시원한 바
람이 솔솔 들어오는 피서철 명당으로 백인제는 여기서 온갖 상념을 즐겼다고 전한다.


▲  별당 주변에 둘러진 정겨운 토담

집 주인이 별당에 많은 공을 들였는지 별당의 갑옷인 주변 돌담까지 적지 않은 정성을 들였다.
흙과 자연막돌로 담을 쌓아 그 위에 암키와를 올렸는데, 담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하얀 피부
의 수막새를 엇갈리게 배치해 담장의 아름다움을 고려했다.
담장의 미(美)도 고려하여 아무리 밤손님이라도 저 담장만큼은 아껴줄 것 같다. 비록 무지 오
래된 존재는 아니나 20세기 근대 고래등 한옥의 생활상과 상류층의 팔자 좋던 인생을 보여주
는 현장으로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다행히 시민의 공간으로 해방되었으니 망정이지 계
속 졸부들의 전용 공간으로 남아있었더라면 그 미움은 더했을지도 모른다.


▲  별당 방에 홀로 자리한 병풍 (내용은 모름, 이곳과는 관련 없는 존재)

▲  고래등 기와집 속의 별천지, 별당 누마루

별당 내부는 오로지 가이드 투어 때만 들어갈 수 있다. 즉 아무 때나 갈 수 없는 비싼 구역이
다. 거추장스러운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타 마루를 들어서면 바로 방인데 방 동쪽에는 별
당의 백미인 누마루가 펼쳐져 있다.
누마루는 누각 형태로 이루어진 마루방으로 집 주인은 여기서 손님과 곡차 1잔 하거나 가족들
또는 혼자 휴식을 취했다. 창문을 열어두면 바람이 솔솔 들어와 몸을 간지럽히니 여름 제국(
帝國) 시절에도 이곳만큼은 여름을 잊어도 좋을 정도이다. 또한 가옥 내부에서 조망이 제일
괜찮은 곳으로 담장 너머로 가회동과 계동, 북악산(백악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보이는
범위는 그 뿐이다. 아무리 언덕에 지었다고 해도 높이가 낮기 때문이다.


▲  별당 누마루에서 바라본 북촌 북부 (가회동, 계동)

▲  남쪽에서 바라본 별당과 별당으로 인도하는 날씬한 기와문
집 속에 다른 집이 들어있는 기분이다. 그만큼 이곳은 넓고 크다.

▲  왕비의 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안채 대청

별당을 둘러보고 안채로 이동했다. 안채 역시 실내화로 갈아타 내부로 들어서면 되는데, 마루
로 이루어진 대청은 안주인의 생활공간으로 그가 앉던 평상(平床) 모습의 높은 의자와 탁자,
방석 등이 놓여져 그들의 높은 위치를 보여준다. 허나 이들은 집을 거쳐간 사람들이 쓴 것이
아닌 서울시에서 구한 늙은 생활 유물로 가옥의 품격에 맞추고자 이런 것을 갖다놓은 것이다.
어쨌든 집 규모부터가 으리으리하니 서민 스타일의 내 눈이 전혀 적응을 하지 못한다.


▲  백인제와 최경진의 빛바랜 혼인 사진 (1928년)
가옥에 있는 물건 대부분은 이곳과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이나 이 사진만큼은
이곳을 거쳐간 사람(최경진)이 남기고 간 몇 안되는 진품의 하나이다.

▲  안채 대청과 안방

▲  안채 안방
대청마루 옆에 안주인이 머물던 안방이 있다. 지금은 바깥에서 수집한 생활유물이
안방을 채우고 있어 마치 민속마을 한옥 방을 보는 듯 하다.

▲  안채 윗방
안방 바로 북쪽에 자리한 작은 방으로
안주인의 옷과 살림살이, 귀중품을
보관하던 장과 농, 반닫이 등을 두었다.

  ▲  안채 서남쪽을 이루고 있는 할머니방
대청 (오른쪽이 할머니방)


▲  안채 할머니방
안살림을 며느리에게 물려준 시어미가 생활하는 방이다. 문 앞에 별도의 대청과
복도를 두었으며, 안방에서 복도로 연결은 되지만 중간에 양식문이 있어
안방 영역과는 분리된다. 이곳에 있는 물건 역시 서울시에서 수집한
민속 유물이다.

▲  부엌과 연결되던 안방 서쪽의 조그만 방

▲  안방 서쪽에 숨겨진 다락방 (부엌 바로 윗쪽임)
지금은 허공처럼 비어있지만 왕년에는 부엌에서 쓰던 식재료와 생활도구 등을
잔뜩 머금은 창고였다.

▲  안채 건넌방

안채 건넌방은 며느리가 머물던 공간으로 사랑방과 안방 중간에 자리한다. 시아비가 며느리를
이뻐해주니 시아비의 소환에 언제든 달려갈 수 있도록 그렇게 자리를 잡은 듯 싶고, 바로 남
쪽으로 집주인 아들방과도 이어지니 아들 부부를 가까이에 있게 하려는 배려도 은근 엿보인다.
방 북쪽에는 별당처럼 시원한 누마루를 만들어 조촐한 피서처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바깥 외
출이 쉽지 않았던 며느리를 배려하고자 그렇게 만든 모양이다.

▲  안채 건넌방의 특별함, 누마루
여인들의 공간이라 발을 쳐서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끔 했다. 한여름에 저기서
자는 잠은 그야말로 꿀잠이겠지~!

▲  안채에서 사랑채(사랑방, 작은 사랑방,
사랑 대청마루)를 이어주는 복도
복도 끝에는 수세식 화장실과 욕실이 있는데,
이는 최경진이 설치한 것이다.


▲  건넌방 주변 방에서 만난 고풍스런 가구와 동그란 그림
서울시에서 구입한 생활 유물로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가고 싶다.

 ◀  사랑채 뒷쪽 복도와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사랑채와 안채는 복도로 서로 이어져 있고, 그
복도로 경계를 삼고 있다.
저 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구역인데, 왼쪽에 삐
죽 나온 대각선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2층은 한상룡이 왜정의 고위층을 불러 배때기
늘어지게 놀던 현장으로 이후 다락방으로 쓰이
다가 지금은 금지 구역으로 출입을 금하고 있
다. 계단이 오르락내리락하기에는 다소 위험하
고, 2층 공간이 그리 넓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
다.


▲  사랑채 사랑방

사랑채 사랑방은 집 주인의 거처로 서울시에서 수집한 여러 가구와 병풍 등이 주인이 없는 방
을 채워주고 있다. 서랍이 많이 달린 가구 위에는 이곳을 거쳐간 백인제의 흑백 사진 3점이
놓여져 있어 생전의 잘나갔던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  사랑방에 놓인 백인제의 빛바랜 사진들

▲  고급진 모습의 사랑채 대청
집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가족들과 담소를 나누던 공간이다. 개인적인 친분의
사람부터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여기서 대접을 받았으며,
창 밖으로 사랑채 뜨락이 훤히 바라보여 시야도 좋다.

▲  정면에서 바라본 사랑채 대청 탁자와 의자들

▲  빛바랜 사진 1장

사랑채 대청에는 백인제 가족이 남긴 흑백사진이 하나 놓여져 있다. 백인제가 서재필(徐載弼)
을 집으로 초청해 연회를 열고 사랑채 뜨락에서 기념 촬영을 한 것으로 순 남자들만 있는 가
운데 여자 1명이 사진 중앙에 홍일점이자 옥의티처럼 자리해 눈길을 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은 누구일까? 그는 백인제의 부인인 최경진으로 서재필이 사진 중앙에 있어
야 되지만 사람들의 양보로 부인을 중앙에 앉힌 모양이다. 무릎 밑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긴
머리에 꽃잎으로 보이는 머리 장식을 달고 있는데, 얼굴 또한 괜찮게 생겼다. 남자들 속에 있
어서 다소 부담스러웠던지 시선을 조금 오른쪽으로 향하며 시선 일탈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부인의 왼손 쪽에 앉은 이가 서재필이다. (백인제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음)


▲  중문간채 중문

사랑채를 둘러보고 안채에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안채 뜨락에서 중문까지 나머지 설명을 들
으면서 40여 분에 걸친 가이드투어는 쿨하게 마무리 되었다.
가이드는 관리사무소로 내려갔고, 나는 그냥 사라지기 아쉬워 중문 주변에서 두 발을 멈추었
다. 이렇게 백인제가옥을 최대한 갈 수 있는 범위까지 모두 가본 것이다. 자유관람과 가이드
투어를 포함한 관람시간은 1시간 40분 정도, 서울시는 이곳을 일종의 민속박물관으로 삼으려
고 오래된 생활유물을 수집해 비어있는 방과 부엌에 배치하고 있다. 그들 덕에 방의 허전함은
많이 가셔진 상태. 그들도 없었다면 무척 허전했을 것이다. 특히 안채와 사랑채에는 방이 무
지 많아 숨바꼭질을 벌여도 될 정도이다. 사랑채 지붕 위에 만든 2층 방과 부엌 위에 만든 반
2층짜리 방 등 숨겨진 방도 많으니 말이다.

10여 분 정도 사랑채 뜨락과 솟을대문 주변에 머물다가 다음을 기약하며 쿨하게 고래등 기와
집 대문을 나섰다. 이렇게 하여 백인제 가옥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다음에는 윤보
선가옥도 꼭 개방되어 이렇게 글을 남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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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월 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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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도 느릿느릿 걸음을 멈춘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 ~ 북촌한옥마을 산책 (재동, 가회동, 정독도서관..)

 


'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북촌(北村) 산책
(재동, 가회동, 정독도서관, 안국동 일대)'

▲  북촌문화센터


북촌(北村)은 서울 도성(都城)의 북쪽 지역으로 경복궁(景福宮)과 창덕궁(昌德宮) 사이를 일
컫는다. 이 지역은 가회동(嘉會洞)을 중심으로 삼청동(三淸洞). 계동(桂洞), 안국동(安國洞)
, 재동(齋洞), 소격동(昭格洞), 팔판동(八判洞), 원서동 등에 걸쳐있으며, 경복궁 서쪽은 따
로 서촌(西村)이라 불렀다. <청계천 남쪽은 남촌(南村)이라 불림>

북촌 지역은 조선시대 때 왕족과 사대부(士大夫)를 비롯하여 돈 꽤나 주무르던 부자들이 주류
를 이루며 살던 오늘날의 강남(江南) 같은 곳이다. 조선 초기부터 형성되었지만 조선 초/중기
시절에 한옥은 남아있는 것이 없고, 조선 후기(19세기~20세기 초반) 한옥을 시작으로 왜정(倭
政) 시절에 지어진 개량 한옥과 해방 이후의 한옥에 이르기까지 약 1,200여 채의 한옥이 진하
게 남아있어 그야말로 거대한 한옥박물관을 이룬다.

북촌 한옥은 민속촌과 달리 대부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어 대부분 내부 관람이 어려운 함정
이 존재한다. 관람이 가능한 한옥은 북촌문화센터를 비롯해 공방(工房)과 박물관 등의 문화/
예술공간, 전통체험공간, 숙박업소로 쓰이는 한옥 정도이며, 북촌문화센터와 몇몇 공방과 문
화/예술공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소정의 돈이나 연줄이 필요하다.

북촌은 높다란 빌딩과 콘크리트 일색의 밋밋한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여 크게 돋보이며,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宮闕)과 함께 도심 속의 박힌 보석과 같은 소중한 곳이다. 한옥과
근대 건물, 현대식 건물이 서로 시간을 초월하여 얼굴을 맞대고 공존하고 있으며, 빛의 속도
로 빠르게만 변해가는 서울에서 시간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발을 멈춘 듯, 옛 모습을 많
이 지키고 있는 도심 속의 이색 공간이다. 이 시대를 사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무작정 앞만 보고 뛰느라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북촌은 바로 그런 여
유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북촌도 나날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북촌 답사의 기점은 3호선 안국역(2/3번 출구)로 잡는 것이 좋다. 북촌 초보라면 북촌문화센
터로 일단 달려가 북촌안내책자를 손에 쥐고 북촌에 대한 기초 지식을 읽은 다음에 나들이에
임하기 바란다. 그리고 정독도서관 입구와 재동초교에 북촌관광안내소가 있으니 거기서 지도
와 안내책자를 얻어도 된다.
북촌 골목길이 워낙 복잡해 길치들은 헤매기가 아주 좋으며 관광객 상당수는 북촌8경으로 꼽
히는 사진 찍기 좋은 곳과 정독도서관 주변, 북촌의 주요 도로인 가회로와 삼청동길, 계동길,
북촌길 등 널리 알려진 곳에만 잔뜩 몰려있을 뿐, 별로 알려지지 않은 많은 명소와 미로처럼
얽혀진 조그만 골목길은 사람이 별로 없다. 별처럼 무수히 흩어진 수많은 박물관과 문화유적
/전통체험공간 상당수는 골목 속에서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는데, 이를 놓치고 유명한 곳들만
둘러보는 것은 북촌의 겉만 도는 것과 같다. 본인이 강조하건데 북촌의 매력은 크고 작은 골
목길을 구석구석 돌면서 숨겨진 명소를 찾는 것이다. 그들을 찾으며 술래에서 벗어난 기분은
정말 형용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성북동(城北洞)과 부암동(付岩洞)만큼이나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북촌을 지금까지 수
십 번이나 들락거렸지만 아직도 미답지가 여럿 있다. 북촌이 서울에서 가장 작은 지방자치구
역인 중구보다 훨씬 작은데도 말이다. 남들은 '그렇게 다녔으면 북촌을 다 둘러봤겠네요?'말
을 꺼내지만 여태까지도 개척하지 못한 골목길과 명소가 적지 않다.
지금도 계속 북촌의 숨겨진 속살을 찾고 있는데, 새로운 곳을 발견하면 '이런 곳이 있었구나.
왜 이제서야 알게 된 걸까?' 정말 내심 놀란다. 겉은 작지만 신대륙 이상으로 신세계와 보물
을 품은 꿀단지가 바로 북촌이다.

북촌에는 밤하늘을 장식하는 별처럼 한옥이 많지만 민속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된 고택(古宅)
처럼 완전한 전통 한옥은 그리 많지 없다. 대부분은 왜정 이후에 지어졌고 시대와 편의에 맞
게 개량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두고 안좋게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시대가 지나면 한옥도 바뀌는 법이다. 특
히나 이곳 한옥은 민속촌에 있는 전시용 한옥과 달리 태반이 주거용이며 공방 등의 작업실과
숙박시설로 쓰이는 집도 적지 않다. 그러니 편의에 맞게 변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직까
지 꺼림칙한 재래식 화장실을 쓰고, 부엌 부뚜막에서 밥을 지으며, 나무와 숯으로 불을 뗀다
면 불편해서 어떻게 살고 머물겠는가? 다 시대에 맞게 변하는 것이다. 그렇게 변화한 한옥은
후손들이 알아서 평가해 줄 것이다.

본글에서는 2013년 1월에 올렸던 북촌 글에 이어서 재동과 가회동, 정독도서관 주변 명소 일
부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북촌 계동, 원서동, 창덕궁길 보러보기 (클릭)


♠  재동길 주변 (재동백송, 재동초교)

▲  재동 백송(白松) - 천연기념물 8호

헌법재판소 경내 북쪽에는 하얀 줄기의 큼직한 노송(老松)이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며 자리해 있
다. 바로 소나무의 일종이자 천하에서 매우 희귀한 나무인 백송이다. 백송은 10년에 겨우 50cm
밖에 자라지 않는 느림보 나무로 하얀 피부의 줄기로 인해 백송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 나무는 중원대륙이 고향이나 거기선 오래 전에 이미 씨가 말라버렸으며, 조선시대에 대륙에
서 넘어온 백송 일부가 살아남아 옛 기록이나 화석(化石)으로나 봐야되는 비운을 간신히 면하고
있다.
현재 목숨이 붙어있는 오래된 백송은 재동 백송을 비롯하여 조계사에 있는 '수송동(壽松洞) 백
송', 고양시에 '송포 백송', 이천에 있는 '신대리 백송', 예산 추사고택의 백송이 전부로 그만
큼 희소성이 매우 크다.

우리나라 백송의 으뜸은 경복궁 서쪽의 통의동(通義洞) 백송으로 천연기념물 4호의 지위를 가지
고 있었다. 허나 1990년 9월 가을 폭우의 괴롭힘에 결국 운명을 하고 말았다. 그가 비참하게 세
상을 뜨자(그의 죽은 몸뚱이는 남아있음) 그에게 주어진 천연기념물 지위는 소멸되었으며, 그의
후배인 재동 백송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백송의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재동 백송은 600년 가량 묵은 오래된 나무로 15세기에 명나라를 다녀온 사신이 가져와 심은 것
이다. 높이는 15m, 면적은 230㎡로 줄기가 2갈래로 갈라져 'V'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나무 껍
데기는 비늘처럼 벗겨져 얼룩무늬처럼 보인다. 특히 밑둥 빛깔이 하얗기로 유명하며, 우리나라
에서 제일 큰 백송이기도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백송으로도 꼽히기도 한다.

백송은 그것을 가꾼 사람의 영화(榮華)에 비례해 껍대기 피부가 하예졌다 덜해졌다 한다는 속설
을 가지고 있는데, 재동 백송은 얼마만한 영화를 보아왔길래 저렇게 새하얀 피부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백송이 있는 이곳은 조선 영조 때 풍양조씨의 우두머리인 조상경(趙尙絅)의 집이 있었다. 그는
영조 시절에 판서를 9번이나 했다고 하며, 그의 아들인 조돈(趙暾)은 이조판서(吏曹判書), 조카
는 조고집과 고구마로 유명한 조엄(趙嚴)이다. 그 이후 조대비(趙大妃)로 유명한 신정황후(神貞
皇后)까지 배출하면서 그야말로 안동김씨를 뛰어넘는 세도가가 되었다. 그러니 백송의 뽀얀 피
부는 더욱 더 빛을 발했을 것이다.


▲  약간 옆에서 본 재동 백송의 위엄

▲  박규수 선생 집터 표석

▲  제중원(광혜원)터 표석

풍양조씨의 공간이던 이곳이 언제부턴가 박규수(朴珪壽, 1807~1876)에게 넘어갔는데, 그 시기와
이유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조부(祖父)는 그 유명한 연암 박지원(朴趾源)으로 인근 계동 제
비바위 아래 외진 곳에서 검소하게 살았으며, 박규수는 그 집에서 태어났다.

박규수는 개화파의 선두적인 인물로 평양(平壤)에서 있던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년)을 계기로
서양 문물의 단물을 취하도록 설득하면서 개화와 부국강병을 주장했다. 허나 흥선대원군(興宣大
院君)이 쇄국정책만을 고집하면서 그의 주장은 허공의 메아리로 끝나고 만다. 우둔한 쇄국정책
의 결과 1876년 강화도(江華島)에서 왜국과 그것도 강제적인 불평등조약을 맺게 되는데, 바로
그해 박규수는 병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집에는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개화파 인물을 비롯하여 개화사상에 관심이 많은 젋은 선비들
이 자주 찾아와 삼가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박규수가 세상을 뜨자 집은 친일파로 악명높은 이윤용(李允用, 1854~1939)에게 잠시 넘어갔다.
이윤용은 이완용(李完用)의 형인데, 형제가 쌍으로 비열한 매국노(賣國奴)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리고 그 옆집에는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의 주역인 홍영식(洪英植)이 살았는데,
갑신정변이 그 유명한 3일 천하로 싱겁게 끝을 맺자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은 패주하는 왜국
공사(公使)를 따라 왜국공사관을 거쳐 왜열도로 도망을 치고, 홍영식은 끝까지 남아 고종을 호
위하며 북묘(北廟)까지 따라갔으나 거기서 청나라군에게 살해되고 만다.

갑신정변으로 허벌나게 고생한 고종은 정변의 주역을 역적으로 간주하고 홍영식의 집을 몰수했
다. 그러다다 1885년 알렌에게 하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원인 광혜원<廣惠院, 제중원(濟衆
院)>이 들어섰다. 알렌은 갑신정변이 일어날 때 개화당에게 제일 먼저 난도질을 당해 저승 코
앞까지 갔던 민영익(閔泳翊)을 살린 인물로 그 인연으로 광혜원 원장이 된 것이다.

광혜원(지금의 세브란스병원)은 1887년 을지로2가로 둥지를 옮겼고, 1910년 관립한성고등여학교
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그 학교는 1945년 10월 정동으로 이전되고, 1949년 창덕여중이 들어와
나중에 창덕여중/여고로 분리된다. 허나 그 학교는 강동 개발이 한참이던 1989년 땅값 차익을
두둑히 챙기며 둔촌동(遁村洞)으로 둥지를 옮겼고, 그 자리에는 1993년 경운궁(慶運宮, 덕수궁)
뒤쪽에 있던 헌법재판소가 들어서게 되었다.
참고로 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는 1882년 12월에 세워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
務衙門, 줄여서 외아문(外衙門)이라고 함>이란 긴 이름에 관청이 있었으며, 그 이전에는 명성황
후 집안인 민태호(閔台鎬)의 집이 있었다. 외아문은 1886년 광화문 육조거리로 이전되었다.

백송을 둘러싼 집과 토지의 주인을 계속 바뀌었지만 백송은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이곳을 지키
고 있다. 명나라에서 건너온 백송이지만 이곳 토양에 적응해가며 저렇게 커 간 것이다. 게다가
세도가의 집안을 비롯하여 지배층의 집안이 두루 거쳐갔고,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원인 광혜원,
그리고 사법의 중심지, 헌법재판소까지 앞다투어 그의 그늘을 받았으니 참 대단한 나무가 아닐
수 없다.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를 나오면 헌법재판소이다. 백송은 건물 북쪽에 있음 (정문 관
  리실에 허가를 받고 들어가면 된다. 낮에 가면 왠만하면 다 들여보내줌)
* 재동 백송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 35 (헌법재판소 내)


▲  재동 백송의 후예
재동 백송의 후예를 기르고자 1977년 그의 종자(種字)를 채집하여 문화재청 소속
사릉 전통수목 양묘장에서 발아시켜 30년 동안 관리하다가 2008년 3월 7일
이곳으로 옮겼다. 재동 백송의 유일한 혈손이자 희망과 같은 존재다.

▲  재동 백송 북쪽에 꾸며진 조그만 공원
헌법재판소의 딱딱하고 경직된 분위기를 조금은 풀어주는 공간이다.
공원 서쪽의 전통담장 너머로 기와집이 보이는데, 이들은 북촌 한옥의
제일이라 일컬어지는 윤보선가이다.

▲  11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재동초등학교

가회로와 북촌길이 만나는 곳에 재동초등학교가 자리해 있다. 북촌 사람들이 유년시절을 보내던
초등학교로 1895년 7월 고종이 발표한 칙령(勅令) 145호 29조 '소학교령(小學校令)'에 따라 문
을 열었다. 처음에는 인근 계동에 자리하여 계동소학교라 불렸으며, 그해 9월 지금의 자리로 옮
겨져 재동소학교로 이름을 갈았다. 

1906년 '보통학교령(普通學校令)'의 공포로 4년제 관립 재동보통학교로 개명되고 1910년에 재동
공립보통학교로 변경되었다. 이후 1938년 재동심상소학교, 1941년 재동공립국민학교로, 1946년
재동국민학교(현재는 재동초등학교)가 되었으며, 1969년 11월 인근에 있던 삼청초등학교가 폐교
되어 이곳에 통폐합되기도 했다. 초등학교가 사라지는 것은 그저 시골의 일로만 여겨졌는데, 서
울 도심 한복판에서 그런 현상이 생긴 것이다. 이는 도심공동화(都心空洞化) 현상과 북촌의 쇠
락이 큰 원인이다.
현재는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인 교동초교와 함께 신입생수가 나날이 줄어들어 간신히 2자리
를 채우고 있다. 북촌과 종로구 도심에서는 아무리 쥐어짜도 신입생 수요가 신통치가 않으니 별
수 없이 타 지역으로 눈을 돌려 다양한 특성화 교육을 내걸며 학생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참고로 유진오(兪鎭午), 백두진(白頭眞), 김상만(金相万) 등이 이 학교를 나왔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210 (☎ 02-763-1812)

◀  재동초교 교문 앞에 심어진 진단학회
(震檀學會)터 표석
진단학회는 우리의 역사와 문학, 언어를 연구
하고자 1934년 5월에 설립된 학술단체이다.


▲  가회동 백인제(白麟濟) 가옥 바깥채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22호

▲  철문 너머로 백인제 가옥의 대문이 보인다.

정독도서관 동쪽에 자리한 백인제 가옥은 1874년 한상룡이 지은 집으로 압록강(鴨綠江) 흑송(黑
松)을 가져와 지은 상류 주택이다. 행랑채와 안채,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는
한 동으로 이어진 것이 특징이다.

이곳은 왜정 때 우리나라 외과 의술(醫術)의 1인자였던 백인제(白麟濟)가 1920년대부터 6.25전
쟁 시절 납북되기 이전까지 살던 집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民立) 공익법인 백
병원을 설립했으며, 백병원과 그 계열인 인제대학교(경남 김해)는 바로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
이다.

현재 백인제의 후손들이 집을 소유하고 있으며, 숨이 막힐 듯한 커다란 검은 철제대문을 설치하
여 내부를 꽁꽁 가리고 있다. 물론 내부 관람은 연줄이 없는 이상은 거의 불가능하다.

  ◀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집터 표석
조선 후기 정치가이자 왜정 때 독립운동가로 신
간회(新幹會) 초대회장을 지냈다. 그의 장례는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뤄졌다.


♠  가회동 11번지(북촌3경) 주변
북촌3경 골목길
▲  복촌3경 골목길 (위에서 바라본 모습)

▲  복촌3경 골목길 (밑에서 바라본 모습)

▲  가회민화박물관(가회민화공방)

가회동 11번지에 자리한 북촌3경은 한옥이 밀집된 조그만 골목길이다. 이곳에는 여러 공방과 박
물관이 둥지를 틀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예전에 가봤던 가회민화박물관(가회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백성들의 삶과 소망이 담긴 민화(民畵)와 부적을 테마로 한 박물관이다. 북촌에 뿌
리를 내린 박물관답게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002년에 문을 열었다. 250점의 민화와 750점
의 부적, 150점의 서적, 기타 민속자료 250점 등 1,500여 점의 유물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중에
서 100점 정도만 속세에 공개하고 있다.

박물관이 작고 그에 반해 입장료가 미운 수준이라 처음에는 실망할 수 있으나 그런데로 둘러볼
만하다. 게다가 전시실 서쪽 공간에는 차를 즐기며 쉬어가는 공간이 있으며, 시원한 녹차를 무
한으로 제공한다. 또한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방이라 아무데나 털썩 주저 앉아 안내문이나 책을
읽으며 이야기 꽃도 피울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11-103 (☎ 02-741-0466, Fax 02-741-4766)
* 관람료 : 일반 3,000원 (30인 이상 단체 2,000원) / 고등학생 이하 2,000원
* 관람시간 : 10시 ~ 18시 (매주 월요일 휴관)
*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감사원 방면으로 500m 가면 전통병과교육원과 가회박물관을 알리
  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의 안내로 골목을 1분 정도 들어가면 길 왼쪽에 있다.

* 가회민화박물관 홈페이지는 이곳을 클릭 , 박물관 답사기는 ☞ 이곳을 클릭


▲  가회민화박물관 내부

▲  한상수 자수박물관(刺繡博物館)

북촌3경 북쪽에 자리한 한상수 자수박물관(한상수 자수공방)은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80호인 자
수장(刺繡匠) 기능보유자 한상수 선생이 운영하는 공방 겸 박물관이다. 한상수의 작품을 비롯하
여 조선 후기 자수품(刺繡品)과 복식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체험 학습도 가능하다. 박
물관의 구조는 앞에서 언급한 가회민화박물관과 비슷하며,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 관람에 임
하면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11-32 (☎ 02-744-1545)
* 관람료 : 일반 3,000원 / 고등학생 이하 2,000원 (20인 이상 단체는 20% 할인)
* 관람시간 : 10시 ~ 17시 (매주 월요일 휴관)
* 한상수 자수박물관 홈페이지는 위의 사진을 클릭한다.


♠  옛 경기고등학교에 둥지를 튼 시민과 학생의 지식 쉼터
정독도서관(正讀圖書館) 주변


▲  정독도서관으로 거듭난 화동 구 경기고교 - 등록문화재 2호

감고당길과 북촌길이 만나는 화동(花洞)에 지식의 마르지 않는 샘인 정독도서관이 자리해 있다.
화동은 화개동(花開洞)의 줄임말로 조선 때 과일과 화초(花草)를 관장하고 궁궐에 조달하던 장
원서(掌苑署)란 관청이 있었다.

정독도서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1900년 10월 고종의
칙령(勅令)으로 개교한 관립중학교(官立中學校)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원래는 김옥균과 서재
필(徐載弼)의 집이 나란히 있었으나 갑신정변 이후, 나라에서 몰수했으며, 1900년 관립중학교
부지에 포함되면서 집은 사라졌다. 개교 당시에 건물 정면 삼각지붕 벽면에 태극기를 교차하여
그린 것으로 유명했으며,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06년 관립한성고등학교로 개편되고 왜정 때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으며, 본관 뒤쪽
에 있던 을사5적의 하나인 박제순(朴齊純)의 집을 땅을 바꾸는 조건으로 매입해 평탄작업을 벌
여 기존 3,000평에서 11,000여 평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도서관 건물로 쓰이고 있는 옛 경기고 건물은 1938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강남 개발이 한참이던
1976년 청담동(淸潭洞)으로 둥지를 옮겼다. 서울시의 권고라고는 하지만 학교 입장에서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곳 땅값이 상당하며, 당시 청담동은 매우 저렴했다. 그
래서 쏠쏠하게 땅값 이득을 챙기고 쿨하게 강남으로 넘어간 것이다.
경기고가 떠나자 서울시에서는 그해 1월 옛 건물과 땅을 사들여 1년 간 손질을 거쳐 1977년 1월
4일 서울시립 정독도서관으로 세상에 내놓았으며, 현재 50여 만 권의 서적과 1만 7천여 점의 비
도서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또한 남쪽 건물을 손질하여 서울교육박물관으로 삼았다.

서울에서 어느 정도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은 꼭 거쳐갈 정도로 역사와 유서가 깊은 서울 제일의
도서관으로 단골이 꽤 많으며, 평일과 휴일 가리지 않고 자리 잡기가 힘들 정도다. 나 역시 여
러 번 이곳에 와 공부를 한답시고 책만 펴놓고 꿈나라를 허우적거린 얇은 추억이 있다.
다른 도서관과 달리 정원이 깔끔하고 아름다우며, 나무가 무성해 굳이 공부나 서적 대출이 아니
더라도 산책이나 나들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또한 도서관 동쪽에는 한때나마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종친부의 옛 건물이 있었고, 300년 정도 묵은 회화나무와 본관 뒤에 정체가 묘한 오래된
우물과 여러 석물이 있어 소소하게 고색의 볼거리를 선사한다.
북촌이 서울 관광의 성지의 부상하면서 그 한복판에 박힌 이곳 역시 그 후광을 입어 북촌 나들
이에서 필수로 가야되는 명소가 되었다. 그래서 공부나 책 때문에 오는 사람보다 나들이/출사로
온 사람이 더 많을 정도이며, 우리나라 도서관 가운데 유일하게 관광지화가 되었다. 
관광객들이 많아 공부가 되겠는가 싶겠지만 고즈넉하고 조용한 북촌의 일부라 도서관 분위기도
차분하여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도서관이니만큼 건물 내부와 열람실에서 고성방
가를 자행하거나 공부/독서를 방해하는 행위는 마땅히 삼가해야 될 것이다.

※ 정독도서관 관람정보 (2013년 5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를 나와서 안국동로터리에서 감고당길로 도보 10분
* 시내버스 이용시 안국역(종로경찰서)이나 안국동(조계사)에서 내려서 도보 10분
* 도서관 이용시간 : 평일 9시~22시 / 주말 9시~17시 (1,3주 수요일 휴관)
* 서적 대출은 정독도서관 홈페이지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자료실에 신분증을 들고 찾아가면 대
  출회원증을 발급해준다. 대출 기간은 2주이며, 1회에 한해 연장 가능하다.
* 서적 대출 및 도서관 이용비는 공짜 (서울시 교육청에서 운영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2 (북촌로 5길 48, ☎ 02-2011-5799)
* 정독도서관 홈페이지는 아래나 위의 사진을 클릭한다.


▲  정독도서관 4거리 - 이곳에 북촌관광안내소가 있다.

▲  서울교육박물관

정독도서관 남쪽에 자리한 서울교육박물관(서울교육사료관)은 옛 경기고 건물을 활용한 붉은 벽
돌의 중후한 건물이다.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옛날부터 가깝게는 내 학창시절의 이르기
까지(1980~90년대) 교육 관련 유물과 서적(내 학창시절 초등학교 교과서와 일기, 학용품, 장난
감, 중/고등학교 명찰, 소풍 관련 디오라마 등) 1만 2천여 점과 디오라마와 교육 현장 등이 재
현되어 있다.
특히 특별전시장에는 우리네 학창시절 학교 앞 구멍가게와 문방구, 1990년대 이전 초등학교 교
실 등이 재현되어 아련한 옛 추억으로 인도한다. 먼 시절도 아니고 바로 내 어린 시절이다. 이
렇게 쓰면 내가 나이가 꽤 많은 것처럼 오인하기 쉽지만 난 아직 30대의 한참을 달리고 있는 중
이다. 또한 교복과 모자, 교련복을 입고 기념 촬영을 하는 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북촌에 별처럼 널린 박물관 대부분은 야박한 가격의 입장료를 받아 손이 매우 후들거리는데 반
해 이곳은 시립이라 공짜다. 우리나라 교육 박물관의 성지로 이 땅의 30대 이상은 물론 아이를
둔 사람들도 꼭 들려볼만한 유익하고 영양가 높은 곳이다.

* 관람시간 : 9시~18시 (토요일과 일요일은 17시까지)
* 1,3째 주 수요일과 법정공휴일은 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2 (☎ 02-736-2859)
* 서울교육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어린 시절에 절찬리에 쓰던 장난감들
요즘 애들도 저런거 가지고 노는지?

▲  초등학교 교과서
나도 저런 교과서로 공부했는데..

        ◀  김옥균(金玉均) 집터 표석
갑신정변으로 역적으로 몰렸던 김옥균과 홍영식,
어윤중(魚允中), 서광범(徐光範) 등은 1910년 7
월 시호가 내려지면서 역적의 굴레에서 벗어났
다. 이때 김옥균의 연시예식(延諡禮式)이 옛 집
터이던 한성고등학교에서 열렸는데, 김옥균의
부인인 유씨가 옛 집터를 돌려달라고 청원을 했
으나 거절당했다.


▲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宗親府 敬近堂/玉牒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호

정독도서관 동쪽 구역에 고색이 창연한 기와집 2채가 익랑(翼廊)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들은 종
친부 건물인 경근당과 옥첩당이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가 있음)

종친부(宗親府)는 경복궁 건춘문(建春門) 동쪽(옛 국군서울병원)에 있었는데, 조선 역대 제왕(
帝王)의 어보(御寶)와 영정을 보관하고, 제왕 내외의 의복을 관리하며, 왕족들의 관혼상제와 봉
작(封爵), 벼슬 등의 인사문제, 기타 그들과 관련된 업무를 보던 관청이다. 처음에는 제군부(
)였으나 1433년에 종친부로 이름을 갈았으며, 1864년(고종 1년)에는 종부시(簿)와 합쳐
지고 1894년 종정부()로 개편되었다.
1907년 순종(純宗)의 칙령(勅令)으로 황실과 국가의 주요 문서를 보관하던 규장각(奎章閣)으로
쓰였다가 1910년 이후 왜정은 이곳에 있던 서적들을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으로 옮기고 건물
도 상당수 부셔버리면서 달랑 경근당과 옥첩당만 살아남게 되었다.

이후 이곳에 국군서울병원(기무사)이 들어서면서 통제구역이 되었다가 1981년 경근당과 옥첩당
이 정독도서관으로 강제로 이전되었으며, 그들의 건강을 위해 주위로 얕은 철책을 둘러 속인들
의 출입을 막고 있다. 또한 우물(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3호)은 뚜껑이 닫힌 채 종친부터를 지키
고 있다.
2011년 이후 국군병원은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고,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2013년 11
월 개관 예정)을 짓고 있다. 그래서 31년 동안 도서관에 얹혀살던 종친부 건물을 2012년 후반에
원자리로 옮겼으며, 도서관의 옛 종친부 자리는 현재 대머리처럼 텅 비어있다. 그래도 제자리로
돌아갔으니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개관되면 우물과 같이 있게 될
종친부 건물을 보게 될 것이다.


▲  경근당(敬近堂) -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규모가 크다.

▲  옥첩당(玉牒堂) -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  정독도서관 동쪽에 뿌리를 내린 회화나무
300년 정도 묵은 지긋한 나무로 높이 11m, 둘레
3.6m에 이른다. 이곳을 거처간 건물이나 인물이
한둘이 아니라 정신이 없지만 회화나무만은 그
대로 그 자리를 지키며 이곳에 깃든 이야기 보
따리를 마음껏 풀어준다. 또한 시원한 그늘까지
드리우며 속인들에게 독서를 장려하고자 애쓴다.

서울시 보호수 1-7호


▲  도서관 본관과 2관 사이에 있는 오래된 우물돌

정독도서관 본관(1관)과 2관 사이에는 조금은 생뚱 맞은 외의의 유물이 하나 있다. 도서관을 찾
은 사람들은 그를 죄다 지나치기 일쑤인데, 그는 정독도서관 내부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인 동그
란 우물돌이다.
우물이 있는 이 자리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하나로 그 꼬질꼬질한 이름을 떨친 평제 박제순(
平齊 朴齊純, 1858~1916)의 저택이 있었다. 그는 1900년에 집 정원을 손질하다가 뜻밖에 이 우
물돌을 발견했는데, 의외의 유물이 나온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는지 시 1수를 짓고 돌 피부에
새겼다. 그때 새긴 24자가 진하게 남아있는데, 그 내용을 풀이하면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도 전조(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메어져 흔적이 없고, 다만 돌만 우뚝
하구나. 광무(光武) 4년(1900년) 겨울, 평제(박제순)가 적다'
그때도 우물돌의 낀 고색의 때가 짙어보였는지 막연히 고려 때 우물 같다고 그랬는데, 고려까지
갈 것도 없이 조선 초나 중기에 쓰였던 것 같다. 허나 그에 대한 정보는 박제순의 시 외에는 아
무것도 없으니 그저 딱할 따름이다.


▲  우물 피부에 새겨진 24자의 박제순의 글씨

매국노의 글씨가 자신의 피부에 문신처럼 새겨진 것에 꽤 불쾌했던지 우물의 표정이 다소 일그
러져 보인다. 그렇다고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참고로 박제순의 손자인 박승유(朴勝裕, 1924~1990)는 친조부와 아버지의 매국노 행위를 수치스
럽게 여겨 20살에 몸담고 있던 왜군에서 탈영, 광복군(光復軍)에 들어가 많은 활약을 했다. 그
공로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아 집안의 죄업을 조금이나마 씻었으며, 음악 교수 및 성
악가로도 유명했다.

▲  정체가 묘연한 네모난 돌덩이
어떤 구조물을 받치고 있던 좌대(座臺)로
여겨진다.

▲  디딜방아의 일부로 보이는 확돌
동그랗게 파인 부분에는 겨울의 제국이 내린
얼음이 진을 치고 있다.

우물돌에서 조금 옆으로 가면 2개의 아리송한 돌덩이가 나온다. 하나는 디딜방아의 일부로 여겨
지는 확돌이며, 다른 하나는 네모난 돌덩이이다. 이들 모두 도서관 일대에서 나온 유물로 앞의
우물돌처럼 정체가 묘연해 은근히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참고로 이곳은 조선 세종(世宗) 때 청
백리(淸白吏)로 명성을 날린 맹사성(孟思誠) 집안의 살던 곳으로 맹씨들이 사는 언덕이라 하여
맹동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  서울에서 제일 큰 기와집, 안국동 윤보선가(尹潽善家) - 사적 438호

▲  굳게 입을 봉한 윤보선가 솟을대문의 위엄

안국역 1번 출구를 나와서 바로 나오는 오른쪽 골목길로 쭉 들어가면 커다란 솟을대문과 길다란
담장을 두룬 기와집이 나온다. 이곳이 북촌에서 유일하게 사적으로 지정된 한옥이자 한때 99칸
을 자랑했던 안국동 윤보선가이다. 사적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서울 지방민속자료 27호였다.

이 집은 1870년(고종 6년)에 민씨 일가에서 지은 조선 후기 한옥으로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친일
파로 더러운 이름을 날린 박영효(朴泳孝)가 왜정 때 귀국하여 잠시 머물기도 했다.
1910년경 윤보선의 아버지인 윤치소(尹致昭)가 매입했으며, 윤보선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부터
쭉 살았다. 그는 1960년 4.19혁명으로 대통령이 되면서 청와대가 아닌 이곳에서 국정(國政)을
살폈다.

서울 지역 상류층의 가옥으로 대지가 매우 넓으며, 양반가의 최대 칸수인 99칸을 자랑했으나 바
깥사랑채와 안사랑채, 안채, 대문, 행랑채, 창고만 남았다. 전통 한옥 양식에 청나라 건물 양식
을 더했으며, 서양식 가구를 갖추는 한편, 각 건물마다 현판이 걸려있는데, 진충보국(盡忠報國)
이란 현판은 김옥균이 썼다고 한다. 그리고 사랑채 뒤뜰에는 연못이 있고, 매화(梅花)와 향나무
를 비롯한 다양한 나무가 심어져 근대 조경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정원은 서양식으로 꾸며져
있으며, 실생활에 맞게 개조된 안채와 서양식 채양 등은 근대 한옥의 변화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정당인 한국민주당의 산실 역할을 하였고, 1950년대부터 1970
년대에 이르기까지 야당의 중심지였으며, 민주운동의 본부이자 피난처로 사용된 한국 정치사의
중요한 현장이다. 비록 개인 소유라고 해도 그런 뜻깊은 현장이 철저히 비공개로 일관하고 있어
그저 솟을대문과 담장을 넋빠지게 바라봐야 되니 한편으로는 아쉽기만 하다. 겉으로 보이는 모
습도 참 상당한데, 그 속살을 직접 본다면 정말 고래등 기와집이란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대단
할 것이다. 우리 같은 백성들은 언제 저런 집에 한번 살아보려나? 그곳에 대한 호기심과 빈부격
차의 서러움이 교차하는 현장이다.

참고로 윤보선가는 동쪽으로 재동백송이 있는 헌법재판소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재
동백송에서 담장 너머로나마 그곳에 들어있는 일부 기와집의 머리가 보이며, 서울시에서 이 집
을 매입하여 신익희(申翼熙) 가옥이나 고희동(高羲東) 가옥, 장면(張勉) 총리 가옥처럼 속세에
돌려줄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8-1


▲  윤보선가 (문화재청 사진)

▲  윤보선가 솟을대문 북쪽 담장길
담장 안쪽 나무들이 바깥에 조금씩 손을 내밀고 있다.

◀  윤보선가 솟을대문 남쪽의 옥의 티
대문 옆에 벽을 약간 허물고 수레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  윤보선가 북쪽에 자리한 갤러리 담 (☎ 02-738-2745)
담쟁이덩굴로 외벽의 절반을 치장한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갤러리 현관에는 문인석(文人石) 2기가 나란히 손님들을 맞이한다.

     ◀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터 표석
왜정 때 우리 말을 지키고 연구하고자 1921년에
설립된 조선어학회가 있던 곳이다. 1942년 조선
어학회 사건으로 문을 닫았다가 해방 이후 한글
학회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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