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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운악산 현등사


' 한여름 산사 나들이, 가평 운악산 현등사 '

현등사 함허당득통탑 및 석등

▲  현등사 함허당득통탑 및 석등

만월보전에서 바라본 현등사 경내 현등사 하판리 지진탑

▲  만월보전에서 바라본 현등사 경내

▲  하판리 지진탑

 


여름이 제국(帝國)의 기틀을 폭풍처럼 다지던 6월의 끝 무렵, 가평 현등사를 찾았다. 그곳
은 10여 년 전 이맘때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는데, 문득 그곳이 격하게 당겨 그를 보러 훌
쩍 출동한 것이다.
둥근 해가 하늘 높이 걸린 12시쯤 집을 나서 전철을 타고 도농역(경의중앙선)에서 두 발을
내렸다. 현등사는 가평 광역좌석 1330-44번(현등사,현리↔청량리)이 광역 기본요금으로 다
니고 있는데, 그 거리가 제법 길고(청량리에서 약 64km) 배차간격도 60~120분에 이르러 금
쪽같은 환승할인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다. 하여 버스어플을 활용해 무리없이 버스를 잡았다.
(청량리역과 상봉역, 구리역, 평내호평역, 마석역, 대성리역에서도 환승이 가능함)

1330-44번 버스(1330-4번은 현리까지 운행)는 금곡, 평내, 마석, 대성리, 청평, 현리를 두
루 구경시켜주며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현등사(운악산입구) 종점에 나를 고스란히 내려
놓는다.


♠  현등사(懸燈寺) 입문 (현등사계곡)

▲  삼충단(三忠壇) - 가평군 향토문화재

현등사입구 종점에서 현등사까지는 넉넉잡아 4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절까지 1차선 크기의
포장길이 닦여져 있어 차량 접근이 가능하며, 일부 구간을 빼면 경사도 완만하다. 게다가 삼
충단과 백년폭포, 무우폭포 등의 조촐한 볼거리가 있고 현등사계곡(현등사골)이 절까지 동행
을 해주니 가는 길도 그리 심심치가 않다. 또한 숲이 매우 짙어 숲내음도 그윽하니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머리와 마음이 제대로 맑아지는 기분이다.

길 시작부터 식당들이 무리를 지으며 도토리묵과 두부음식, 산채비빔밥 등으로 나그네를 유혹
하나 평일이라 유혹의 정도는 얕다. 그런 식당촌을 지나 숲길로 들어서니 일주문과 삼충단이
나란히 마중을 나온다.

▲  삼충단 내부(삼충단 추모비)

▲  한글 현판을 내건 현등사 일주문(一柱門)

일주문 앞에 자리한 삼충단은 조병세(趙秉世, 1827~1905)와 민영환(閔泳煥, 1861~1905), 최익
현(崔益鉉, 1833~1907) 등 애국지사 3명의 제단이다. 이중 조병세는 가평(加平)출신이며, 민
영환은 현등사를 여러 번 찾았던 인물로 그들의 충혼을 기리고자 내시부지사(內侍府知事) 나
세환(羅世煥)과 첨지(僉知) 김두환(金斗煥), 현등사 주지 정금명(丁錦明) 등 가평 유지들이
뜻을 모아 1910년에 세웠다.
허나 1931년 이후 왜정(倭政)이 없앴으며, 반백년이 흐른 1988년에 지역 유지 39명이 삼충단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추모비를 세웠고, 2005년 현재 위치로 옮겨 매년 그들을 추모한다.

기와돌담에 둘러진 삼충단은 소박한 모습으로 조병세와 민영환, 최익현 추모비와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을 지니고 있으며, 제단 동쪽에 문짝이 없는 문을 내어 나그네를 맞이한다.


▲  현등사 숲길
현등사까지는 쭉 이런 길이다. 경사가 조금 흥분기를 보이는 부분도 있으나
두 다리만 멀쩡하면 삼척동자도 거뜬히 오를 수 있으며, 오색연등이
다른 길로 빠지지 않도록 절까지 오롯이 인도한다.

▲  위쪽에서 바라본 백년폭포(百年瀑布)
운악산이 빚은 현등사계곡은 백년폭포를 미끄럼틀 삼아 너른 세상으로
길을 재촉한다.


일주문을 지나 10분 정도 오르면 백년폭포 안내문이 나온다. 100년을 두고 변함없이 흐른다고
해서 또는 영원히 흐른다고 해서 백년폭포란 좋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45도 경사를 지닌
20m 높이의 폭포로 현등사 숲길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하여 그를 보려면 계곡으로 내
려가야 된다.
폭포 윗도리는 접근성은 괜찮으나 폭포 앞쪽은 길도 좋지 않은데다 접근을 통제하고 있으며,
민영환이 백년폭포에서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나라를 걱정했다고 전한다.


▲  민영환 암각서(바위글씨)가 깃든 민영환바위

백년폭포에서 조금 오르면 민영환바위라 불리는 너른 반석이 마중을 한다. 현등사를 찾은 민
영환은 여기서 하늘을 바라보며 나라 걱정에 잠겼다고 전하는데, 자꾸 우울하게만 흘러가던
나라 꼬라지에 무척 힘들어 하다가 을사늑약(1905년) 직후 자결을 하고 만다.
1906년 나세환 등 12명이 그의 넋을 기리고자 그가 탄식했던 곳에 '민영환' 바위글씨를 새겼
으며, 그로 인해 민영환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바위 한복판에 '민영환' 3자가 깃들여져 있는데, 10여 년 전에는 바로 찾았으나 이번에는 눈
동자를 아무리 굴려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이제 겨우 120년 묵은 글씨인데, 벌써
세월이 잡아갔나?? 싶어 어리둥절했지만 근래 비가 많이 내려서 계곡물이 민영환바위를 완전
히 덮을 정도로 흘러 바위 피부가 탁해져 그랬던 것이다. 글씨는 어디에도 가지 않고 계류 속
에 숨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  층층이 주름진 현등사계곡 (불이문 직전)

▲  불이문에서 운악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서쪽 숲길

▲  현등사 불이문(不二門)


민영환바위에서 조금 오르면 불이문이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휘날리며 현등사에 다 왔음을 알
린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현등사를 원한다면 불이문으로, 운악산(雲岳山) 정상(
936m)을 원하면 서쪽 숲길로 가면 된다. 여기서 운악산 정상까지는 1시간 30~40분 정도 걸리
며, 중간에 운악산의 일품 폭포로 꼽히는 무지개폭포가 있다.
마음 같아서는 운악산 정상도 찍고 싶었지만 오늘의 주메뉴는 현등사라 욕심을 흔쾌히 버리고
불이문으로 방향을 잡았다.


▲  불이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길
높이 펼쳐진 저 계단길의 끝에 현등사가 있다.

▲  하판리 지진탑(下板里 地鎭塔) - 경기도 문화유산자료

불이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길 중간에 지진탑이 있다. 그는 키 1.88m의 난쟁이 석탑으로
보조국사 지눌이 현등사를 중창하면서 절 자리의 땅 기운을 누르고자 세웠다고 한다. 그 연유
로 지진탑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며, '보조국사탑'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2개의 바닥돌과 1층 지붕돌, 2~3층 탑신(塔身), 머리장식이 남아있는데, 세월이 앗아간 부분
이 많아 원래 모습은 파악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의 제자리가 이곳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
래서 '현등사 지진탑' 대신 지역 이름을 딴 '하판리 지진탑'이란 이름을 지닌 듯 싶다.
탑의 바닥 받침돌은 2장의 돌이 서로 어긋나 있으며, 앞에 바닥돌 1개가 따로 있다. 지붕돌은
처마마다 평평하고 끝이 급하게 올라가 있으며, 지붕돌 1층과 2층은 4단, 3층은 3단의 지붕돌
받침이 있다. 탑신은 기둥 모양의 장식이 있고 각 면에 석가여래상이 작게 새겨져 있으며, 탑
머리장식은 받침돌만 남아있는데, 가운데에 쇠기둥을 끼웠던 5cm 크기의 구멍이 있다.

과연 보조국사가 세웠는지는 운악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탑의 모양새로 보아 고려 때 조
성된 것으로 보이며, 땅의 기운을 잡고자 세웠다는 사연 때문에 사람들이 소망을 내밀며 던진
온갖 동전들이 지붕돌과 탑 아랫도리, 탑 주변에 수북하다. (500원짜리 동전도 많음) 나보다
훨씬 돈이 많은 탑이라 그가 부러울 따름인데, 탑에 무심히 던져진 동전을 저리 방치할 것이
아니라 싹 수거하여 부디 좋은 일(불우이웃돕기, 학생 장학금 지원 등)에 썼으면 좋겠다.


▲  동전 부자인 하판리 지진탑의 위엄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
탑 곳곳에 보이는 동그란 존재들이 모두 동전이다.

▲  현등사 3층석탑 -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계단을 올라 현등사 경내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3층석탑이 마중을 한다. 그는 3.7m의 잘생긴
탑으로 높은 바닥돌과 2중 기단, 3층 탑신, 머리장식을 지니고 있는데, 아랫 기단은 불상의
대좌(臺座)처럼 하대석(下臺石)과 중대석(中臺石), 상대석(上臺石)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
하대석에는 장식문이 있는 연화문과 장방형의 액이 있다. 그리고 중대석에는 대나무형의 원주
로 된 우주(隅柱)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지붕돌 밑에는 원주가 있고, 2층은 4단, 3층은 3단의 지붕돌받침이 있으며, 머리장식은 복발
주, 연주문주, 보륜주, 보주(寶珠) 등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 탑은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인도 승려 마라하미를 위해 세웠다고 전하는데, 그것이 맞다
면 이 땅에서 가장 늙은 석탑이 된다. 그렇다면 국가 지정문화재의 최고 등급인 국보는 100%
따놓은 것이지. 허나 아쉽게도 신빙성은 1도 없으며 1470년에 세종의 8남인 영응대군 이염(永
膺大君 李琰, 1434~1467)의 부인 송씨가 옛날부터 내려오던 탑을 손질해 부처의 진신사리와
사리함을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470년에 봉안된 사리는 1979년 도굴을 당해 사라졌는데, 삼성문화재단에서 입수해 가지고 있
던 것을 현등사에서 다시 찾아왔다.

그럼 여기서 잠시 현등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현등사의 중심, 보광전과 극락전

▲  현등사 보광전(普光殿)

운악산(936m)은 가평군과 포천시에 걸쳐 있는 수려한 뫼로 경기도 5악(관악산, 감악산, 개성
송악산, 화악산, 운악산)의 일원이다. 산세가 아름다워 경기도의 소금강(小金剛)이라 격하게
칭송을 받고 있으며, 그 동쪽 산자락 470m 고지에 현등사가 포근하게 둥지를 틀고 있다.

현등사는 신라 법흥왕(재위 514~540) 시절, 인도 승려 마라하미(마라가미, 摩羅訶彌)가 석가
여래의 진신사리와 대장경(大藏經)을 들고 신라를 찾자 법흥왕이 그를 위해 540년에 창건했다
고 전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전하지 않으며 절이 안긴 산 이름을 운악산이라 했다고 하는데, 그 시절
포천과 가평 지역은 엄연한 고구려(高句麗)의 영역이었다. 하여 남의 땅에 절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엄청 선을 넘은 것이 된다. 또한 법흥왕 창건설을 입증할 유물과 기록도 전혀 없는 실정
이다.
어쨌든 창건 이후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898년 도선대사(道詵大師)가 중창하
여 운악사(雲岳寺)라 했다고 한다. 그는 왕건(王建)이 세울 나라(고려)가 개경(開京)에 도읍
을 할 것을 알고 송악산(松嶽山) 밑에 약사여래를 내세운 절을 3개나 지었다. 하지만 완공 뒤
에 지세를 살피니 동쪽이 영 허전하여 이를 채워줄 곳을 찾다가 운악산에 이르러 옛 절터를
발견하고 중창했다는 것이다. 허나 아쉽게도 이 역시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다.

이후 다시 폐허로 있다가 1210년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했다고 한다. 그는 도봉산 원통암
(圓通庵)에 머물러 있었는데, 3주 동안 밤마다 동쪽에서 수상한 빛이 보여 그 빛을 추적해 운
악산까지 들어오니 잡초가 우거진 곳에 관음당이 있었고, 그 옆에는 불을 밝히고 있는 석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는 등불이 보이는 꿈을 계속 꾸어 마음 속에 계속 담아두던 중, 운악산
에 이르자 절터 옥등에 불이 밝혀져 있어 이곳이 나라의 길지임을 알고 중창했다고 함) 그 연
유로 절 이름을 현등사라 했다는 것이다.
하여 보조국사가 이때쯤 창건하거나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창건된 것을 중창한 것으로 여겨
진다.

1411년 함허대사(涵虛大師)가 북한산(삼각산)에서 금강산으로 가다가 길을 잃었는데, 운악산
서쪽 능선에서 하얀 사슴을 만났다. 사슴은 그를 인도하다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사라진 자리
를 살펴보니 현등사 절터가 있었다. 고려 중기에 중창된 절이 또 세월에게 잡혀가 터만 남은
것이다.
함허는 이곳에 온 인연으로 절을 중창해 머물렀으며 경내 보합태화루(保合太和樓)에서 '현정
론'과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를 저술했다. 그리고 1447년 세종(世宗)이 현등사에 있던
함허의 상수제자 신미(信眉)에게 명해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케
했다.
15세기 후반 세종의 아들인 평원대군과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의 원찰(願刹)이 되어 그들의
위패가 봉안되었고, 1470년에는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가 부처의 진신사리와 사리함을 기증하
는 등, 조선 후기까지 왕실의 원찰로 많은 지원을 받았다.

1811년 화재로 승당과 관음전이 소실되고 불상과 위실(位室), 청심당(淸心堂), 양로방(養老房
)만 겨우 남았는데, 이듬해에 구암(龜巖), 취윤(就允), 원빈(圓彬)이 요사채와 동서 누각. 극
락보전. 삼보방(三寶房) 등을 지었으며, 1825년에 삼보방을 중건하고 1826년 위실각을 새로
지었다.
삼장(三藏, 경/률/논)에 능했던 화담당 경화(華潭堂 敬和, 1786~1848)가 말년에 이곳에 머물
렀는데, 그의 승탑(僧塔)이 경내 주변에 있으나 그의 존재를 몰라 놓치고 말았다.

1891년 상궁(尙宮) 하씨의 지원을 받아 중수했으며, 1893년에 호운(浩雲)과 우화(雨華)가 석
축을 보수했고, 1916년에 금명(錦明)이 중수했다. 허나 6·25전쟁 때 무심한 총탄이 마구 날
라와 건물 대부분이 잿더미가 된 것을 1961년 성암(省庵)이 중수했다.
1984년 극락전을 중수했고, 1987년 보광전과 지장전, 삼성각을 세웠으며, 이후로도 꾸준하게
건물을 짓거나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보광전, 지장전, 삼성각, 영산보전, 만월보전, 적멸보궁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인 동종을 위시해 3층석탑, 목조
아미타좌상, 청동지장보살좌상, 수월관음도 등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다. 그 외에
화담당경화탑 등의 조선 후기 부도탑과 탱화가 여럿 전하고 있어 고색의 향기도 풍년을 이룬
다.
또한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임진왜란 전에 조선 조정에 진상한 금병풍(金
屛風)도 가지고 있었는데, 6.25때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 그 금병풍이 어찌하여 현등사까지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을 일으킨 작자가 진상한 선물이라 궁궐에 두기가 찝찝해
왕실과 인연이 있던 이곳으로 보낸 듯 싶다.


* 현등사 소재지 :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 산163 (현등사길 34, ☎ 031-585-0707)


▲  보광전의 뒷모습

보광전은 'ㄷ' 구조를 지닌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큰 집이다. 비록 보광전을 칭하고
있지만 옆구리에는 '관음전'과 '보합태화루' 현판을, 뒷쪽에는 '대자대비전'이란 현판을 내걸
고 있으며, 예불 공간 외에 선방(禪房)과 요사(寮舍), 종무소(宗務所)의 역할까지 하고 있어
보광전이란 한 지붕 아래 여러 가족과 성격이 담겨져 있는 복합적인 집이다.

이곳에는 3층석탑에서 나온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비롯하여 지장시왕도와 동종 등 문화유산
이 많이 들어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그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
이다. 현등사 문화유산의 대부분은 보광전과 극락전, 지장전, 삼성각에 담겨져 있다.


▲  보광전 진신사리보탑

보광전에는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옥피부를 지닌 3층탑이 있다. 건물 안에 이렇게
작은 탑이 있는 것이 참 이채로운데, 그는 3층석탑 뱃속에 있던 진신사리와 사리장엄구를 봉
안하고자 근래 장만한 것이다.
사리장엄구는 수정사리병과 은으로 된 원통형 사리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통형 사리기에는
'성화(成化) 6년(1470년) 원당(願堂)인 현등사 탑을 고치고 사리 5매를 봉안했으며, 대시주는
대방부인 송씨(세종의 아들인 영응대군의 부인)와 그의 딸 길안현주 이억천, 절충장군 중추부
첨지사 구수영(영응대군의 사위)이다'
쓰여 있어 왕실에서 발원하여 탑을 중수했음을 고맙게
도 알려주고 있다.

이들 사리와 사리장엄구는 1979년 불의의 도굴을 당해 사라졌는데, 삼성문화재단에서 입수해
가지고 있다가 2006년에 겨우 되찾아왔다. 석가여래의 사리가 신앙의 대상이라 원래 신앙의
목적대로 봉안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서로 뜻이 통해 이루어진 일이다.


▲  진신사리보탑에 깃든 석가여래 사리의 위엄

진신사리보탑 1층에 석가여래의 진신사리가 들어있다. 사리가 워낙 작아서 그 앞에 확대경을
설치해 친견을 적극 돕고 있는데, 작고 동그란 구슬 같은 존재가 진신사리이다. 근래에는 석
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절이 너무 늘어났으나 현등사처럼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
부터 머금은 절은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진정한 진품을 만난 듯, 경외심과 호기심이 가득
일어나 한참이나 그들에게 열중했다.


▲  보광전 지장시왕도 - 경기도 문화유산자료

현등사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늙은 지장시왕도가 2개 있다. 보광전에 깃든 이 시왕도는 그
림 한복판에 흰색의 큰 원을 두고 그 안에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
자(道明尊者)를 두었는데,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사이 위쪽 공간에 작은 석가여래를 배치했다.
좌우에는 권속을 4단으로 두고, 동자와 판관, 사자, 옥졸, 장군 등이 대칭적으로 묘사되어 있
으며, 아랫단 중앙에는 홀을 든 판관과 본존을 향해 무릎을 꿇은 문관형 판관(判官)이 있다.
이들 위에는 8폭 병풍이 있는데, 본존 쪽 양쪽 끝을 접어서 원근감을 표현하고 있으며, 병풍
뒤쪽으로 지장보살의 머리 위까지 구름문양이 표현되어 있다.

화기(畵記) 부분이 사라져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1759년 아미타회상도와 함께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진다.


▲  보광전 신중도 -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신중도는 법당과 절의 중요한 건물의 지킴이 탱화로 가로 122cm, 세로 123cm 크기이다. 화면
을 2등분했는데, 존상(尊像)의 크기를 비슷하게 그렸으며, 오른쪽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
釋天)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월천자(日月天子)와 동자상을 배치했다. 왼쪽 상단에는 투구를 쓴
위태천(韋太天)이 있는데,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코에 비해 눈과 입이 작다.

화기가 고맙게도 잘 남아있어 관허당 설훈과 용봉당 경천이 1790년에 지장암에서 조성하여 극
락전에 봉안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설훈과 경천은 현등사 청동지장보살좌상을 만든 승려이
다. 하여 같은 승려에 의해 보살상과 탱화가 제작된 아주 흔치 않은 예라 18세기 말 불교미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  현등사 석등 중수기(重修記)
1893년 7월 석등을 중수하면서 남긴 중수기이다. (현재 석등은 파괴되어 없음)

▲  현등사 동종 - 국가 보물

보광전 한쪽에는 검은 피부의 작은 동종이 걸려 있다. (동종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그는
높이 73.5cm의 아담한 종으로 현등사에서 유일하게 국가 문화유산의 지위를 지닌 비싼 존재이
다.
원래는 현등사를 관리하던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에 있던 것으로 왜정(倭政) 때 넘어온 것으
로 전하는데, 그 연유는 딱히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덕분에 현등사는 보물이 하나 늘었으며
덤으로 그의 은은한 종소리를 매일 들을 수 있는 혜택까지 누리게 되었다.

종신(鐘身)을 여러 개의 구획선으로 나누고 그 안에 연잎무늬, 당초무늬, 파도무늬 등을 새겨
장식성을 강조했는데, 2마리의 용이 서로 등을 맞대어 몸을 꼰 용뉴는 안정감을 주며, 두 발
을 힘차게 내딛어 천판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서 역동감이 보인다. 그리고 둥근 곡면을 이루는
천판에서부터 종의 입으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그 폭을 넓힌 종의 형태도 아름답다.

이 종은 고려 말 개성 연복사(演福寺) 종에서 비롯된 중원대륙 스타일의 종 양식을 따르고 있
다. 종의 중심부를 3개의 융기선(隆起線)으로 구획하고 천판에서 종의 입 사이에 다양한 무늬
를 넣었는데, 작은 마름모꼴의 연곽에 구슬 모양의 연꽃봉우리와 천판의 내림연꽃이 중앙을
향해 보상화문처럼 말려든 형태, 그 위로 표현된 구슬무늬, 종복에 크게 자리잡은 역동적인
연화당초무늬, 하대에 표현된 물거품이 일렁이는 파도무늬 등의 장식 문양은 1469년에 조성된
봉선사 동종과 흥천사(興天寺) 동종, 1491년에 만든 합천 해인사(海印寺) 동종 등 조선 전기
의 왕실 발원 범종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종의 배 부분에는 해서체로 주종기를 돋음새김
했는데, 주종기는 1619년에 천보(天寶)가 짓고
새겼으며, 종을 만든 연유와 종 제작에 사용된
재료의 양과 무게, 발원하는 내용, 참여한 사
람 등이 소상히 쓰여 있다.

종을 만든 이는 주종기를 새긴 '천보'로 보고
있으며, 그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활동했던 인
물로 알려져 있다.

▲  옆에서 바라본 현등사 동종


▲  보광전 백의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경기도 유형문화유산)

하얀 옷을 걸친 고운 모습의 백의관세음보살 뒤로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걸려있다. 비단
에 그려진 세로 174.5㎝, 가로 210.5㎝ 크기의 탱화로 2011년 보존 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관
음원문(觀音願文)'을 통해 탱화의 숨겨진 정보를 알게 되었다.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가 일찍 승하한 아들 헌종(憲宗, 재위 1831~1849)의 극락왕생과 며느
리 2명의 수명장수를 빌고자 1850년 상궁들을 현등사로 보내 탱화를 조성하고 불상을 중수했
는데, 원문에는 '해수관음탱'이라 나와있어 '해수관음(海水觀音)'이 조선 말 관세음보살 누님
의 별칭으로 많이 쓰였음을 알려준다.

이곳 관음도는 화면 구성과 도상에서 매우 이색적이다. 암좌(巖座)에 왼쪽 무릎을 세우고 편
안히 앉아있는 관세음보살 옆에 괴석과 정병이 있고, 정병에 꽂혀있는 버들가지에 관음조(觀
音鳥) 2마리가 있다. 정병은 편병(扁甁) 형태로 몸통에는 팔괘가 태극 문양 둘레로 있는데,
19세기 수월관음도에 다양한 형태의 정병이 나타나나 이런 모습은 희귀하다. 특히 정병의 긴
목에는 '관심수(觀心水)'란 명문이 있는데, 이는 관세음보살의 마음이 담긴 깨끗한 물을 뜻할
것이다.
화면은 수파 위를 가로지르며 걸쳐있는 구름으로 상단과 하단을 나누고 있으며, 구름 위에는
사천왕이 일렬로 자리해 있는데. 사천왕이 관음도에 출현하는 예는 거의 없다. 그림 상단에는
관세음보살을 둘러싸고 있는 대원광 바깥으로 백의관세음 형상을 한 화신(化身)들이 있으니
이들은 중생 구제를 위해 여러 방편으로 현신하는 관세음을 상징한다.
화면 밑에는 바다의 물결 위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합장하고 있으며, 화면 좌우로 특이하게
도 사해(四海) 용왕이 등장해 화염보주와 홀, 용뿔 등을 들고 있다. 용왕들은 선재동자보다
더 크게 그려졌으며, 선재의 천의 표현 또한 색다르다.

퇴은당 유경과 송암당 태원, 월하당 세원, 창엽 등이 제작했으며, 그들은 1861년 북한산(삼각
산) 화계사(華溪寺) 탱화 조성에도 참여한 바 있다.


▲  붉은 피부의 현등사 다라니경판 (조선 초기)
3층석탑 뱃속에 있던 것으로 사리장엄구와 함께 도난을 당했다가
2006년에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다.

▲  현등사 석조(石槽)

보광전 옆에는 운악산이 베푼 옥계수를 가득 머금은 네모난 석조가 있다. 그의 피부에는 검은
때가 자욱하여 조선 후기에 마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깊은 산골에 묻힌 산사에 왔으니 샘물을
한번 마셔야 되겠지. 갈증도 속시원히 단죄할 겸 말이다.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목구멍에 들이키니 갈증과 더위, 몸 속에 체증이 싹 가시는 기분이다.


▲  현등사 극락전(極樂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이곳의 법당이자 아미타불의 공간이다.

▲  극락전 목조아미타좌상 -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아미타회상도 -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극락전의 주인인 목조아미타좌상은 나무로 다져 금동 피부를 입힌 것으로 높이는 138cm이다.
조금은 무뚝뚝한 표정을 지닌 그는 얼굴을 약간 앞으로 내밀며 구부정한 자세를 보이고 있는
데, 그 뒤에 걸린 아미타회상도 밑부분 화기에 1759년에 아미타불을 개금(改金)하고 오관 등
9명의 화원이 아미타회상도를 조성했다는 내용이 있어 그 이전(17세기에서 18세기 초)에 조성
되었음을 알려준다.

빛깔이 고운 아미타회상도는 비단에 진채색으로 그린 것으로 가로 298cm, 세로 265cm 크기이
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그림 한복판 대좌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고, 그 좌우로 보
살과 사천왕, 십대제자, 성중들을 배치했다.


▲  '소원대'로 살아가고 있는 견고한 돌덩어리

소원대는 바닥에 누워있는 동그란 돌덩어리이다. 그의 윗도리에는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예
전에는 석등(또는 옥등)을 받치고 있었다. 허나 그 석등은 전쟁으로 사라지고 이렇게 바닥돌
만 남았으며 지금은 중생들에게 소원 성취에 대한 희망고문과 절의 재정을 늘려주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소원대에 올라서 석가여래를 향해 합장반배를 하고 소원을 들이밀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
나 그것은 장담할 수 없다.


♠  현등사 마무리

▲  현등사 지장전(地藏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을 비롯한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의 거처이다.

▲  지장전 청동지장보살좌상 -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지장시왕도 - 경기도 문화유산자료


지장전의 주인인 지장보살좌상은 청동으로 다져 도금을 입힌 것으로 18세기 말에 관허당 설훈
과 용봉당 경천이 조성했다. (이들은 앞서 신중도를 조성했음)
키 64.5m의 작은 보살상으로 동그란 얼굴과 눈 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가 반쯤 뜬 눈, 화형의
귀거리를 단 늘어진 귀, 삼각형의 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입을 표현했다. 지장보살 좌우로는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자리해 있고, 그들 뒤로 색채가 고운 지장시왕도(문화재청 지정 명칭
은 '지장십왕도')가 든든하게 자리한다.

지장시왕도는 가로 212.5cm, 세로 151cm 크기로 지장보살이 가운데 대좌에 반가좌(半跏坐)로
앉아있으며, 발은 분홍색의 연꽃 봉오리가 받쳐들고 있다. 2중으로 된 원형광배를 두르고 오
른손을 어깨 높이만큼 들었으며, 왼손은 무릎까지 내려 옷자락을 잡고 있다.
지장보살 밑에는 석장을 쥐고 있는 도명존자와 합장인을 선보이는 무독귀왕을 중심으로 5존(
尊)씩 시왕을 배치했으며, 시왕 우측에는 판관과 우두, 마두, 선악동자 등이 있다.

지금은 지장전에 있으나 원래는 극락전 불단 좌우에 신중도와 함께 있던 것으로 화기 부분이
날라가 버렸지만 '사찰소장물품표'에는 아미타회상도와 같은 1759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  대군위실(大君位室) 현판

▲  평원대군(平原大君) 부부
선가(仙駕)위패

지장전에는 세종의 아들인 평원대군 정덕공(靖
德公. 1427~1445)과 강녕(江寧府夫人) 홍씨 부
부, 그리고 예종의 2째 아들인 제안대군과 상
산부부인(商山府夫人) 김씨, 승평부부인(昇平
府夫人) 박씨의 선가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평안대군은 성품이 겸손하고 학문에도 뛰어났
으며, 우애와 효행이 깊어 세종의 아낌을 받았
으나 18세에 천연두(두창)로 그만 죽고 만다.
그의 죽음으로 세종은 크게 충격을 먹어 숭불
(崇佛)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된다.

▲  제안대군(齊安大君) 부부 선가 위패

홍씨 부인은 일찍 간 남편과 달리 40년을 더 살아서 1483년 5월에 죽었으나 자식이 없어 제안
대군을 평원대군 부부의 가계를 잇게 했다. 하여 제안대군 부부의 선가 위패도 있는 것이다.
대군위실은 평원대군과 제안대군 내외의 위패가 봉안된 곳을 뜻하는데, 지금도 계속 향화(香
火)를 받고 있으며, 세종 시절 그들을 봉안한 인연으로 현등사는 오랫동안 왕실의 원찰로 두
고두고 꿀을 섭취하게 된다.

▲  현등사 삼성각(三聖閣)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산신
, 독성(나반존자), 칠성의 공간이다.

▲  삼성각 산신도(山神圖)
늙은 칠성도, 독성도와 달리 매우 젊은
탱화로 근래 조성되었다.


▲  삼성각 독성도(獨聖圖) - 경기도 문화유산자료

독성도는 비단에 진채색으로 그려진 것으로 가로 139.5㎝, 세로 117.5㎝ 크기이다. 동그란 두
광(頭光)을 지닌 독성 할배가 천태산(天台山)을 배경으로 소나무 밑에서 지팡이를 잡고 왼쪽
다리를 세워 팔을 기대어 앉아있는데, 그 주위로 기암절벽과 모란, 새가 있다. 화면 왼쪽 중
간에는 향로와 필통이 있고, 밑에 기암절벽 사이로 3단 폭포가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민화<
속화(俗畵)>에 보이는 소재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림 밑 화기를 통해 1875년 장상궁 등이 시주하여 북한산(삼각산) 화계사에서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탱화 조성에 참여한 승려는 나와있지 않으며 무슨 연유로 이곳까지 넘어왔
는지도 알 수 없다.


▲  삼성각 칠성도(七星圖. 칠성탱화도) - 경기도 문화유산자료

칠성 식구를 가득 머금은 칠성도는 가로 182㎝, 세로 203㎝ 크기의 탱화이다. 본존인 치성광
여래(熾盛光如來)가 뿔달린 하얀 소가 이끄는 이륜거(二輪車)에 닦여진 팔각연화좌에 결가부
좌로 있는데, 2중으로 된 원형광배를 둘렀고, 정수리의 정상계주에서 나온 광명이 옆으로 길
게 과운문을 이루고 있으며 그 양 끝에 각각 여래좌상 3구씩 타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
며 발목에는 연꽃모양의 장식이 표현되었다.
본존의 두광 위에는 보개가 있는데, 이를 정점으로 노인성, 태일성(太一星), 합장한 칠여래
등의 두광을 잇는 선이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다. 그 내부의 치성광삼존도 삼각형 구도로
일광보살, 월광보살은 각각 해와 달의 표식이 있는 보관을 쓰고 연꽃가지와 연꽃을 들었다.
아래부터 삼태육성과 동자승 모습으로 합장하는 칠성, 각자 이름이 씌어진 관을 쓰고 홀을 든
이십팔숙 등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중 남극노인성은 이마가 튀어나오고 정수리가 솟아나게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이 탱화는 1861년 북한산(삼각산) 화계사에서 조성된 것으로 독성도와 함께 이곳으로 넘어왔
는데, 그 연유는 분명치 않다.


▲  영산보전(靈山寶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용마루에 치미(雉尾)가 뿔처럼 달려있다.
근래 장만한 건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8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  영산보전 금동석가여래삼존상과
무독귀왕, 도명존자, 석가후불탱

▲  색채가 돋보이는 영산보전 18나한상


▲  중층으로 지어진 만월보전(滿月寶殿)

2층 구조를 지닌 만월보전은 영산보전과 함께 근래 지어진 건물로 3층 구조를 지닌 화순 쌍봉
사(雙峯寺, ☞ 관련글 보기) 대웅전과 비슷해 그것을 모델로 삼아 지은 듯 싶다. 건물 안에는
석조약사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지녔다.


▲  만월보전의 주인장인 잘생긴 석조약사삼존상

▲  적멸보궁으로 인도하는 오르막길

만월보전과 영산보전 옆으로 적멸보궁으로 인도하는 길이 손을 내밀고 있다. 예전에 왔을 때
는 삼성각이 경내 끝이었으나 그새 경내 뒷산까지 경내를 확장해 건물을 여러 채 달아놓았다.
적멸보궁 길 옆에는 기와를 쌓아 다진 돌담이 쭉 이어져 있는데,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낮은 높이이다. 1굽이를 지나면 길은 오른쪽으로 확 꺾이면서 바위를 다진 돌길이 나오고 그
길의 끝에 적멸보궁이 자리한다.


▲  밑에서 바라본 적멸보궁(寂滅寶宮)

경내 뒤쪽 언덕에 자리한 적멸보궁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다. 맞배지붕을 지닌
1칸짜리 건물로 3층석탑 뱃속에 있다가 도난을 당해 2006년에 돌아온 진신사리와 사리장엄구
를 두고자 근래 닦은 것인데, 현재는 적멸보궁만 있으나 그 뒤쪽에 사리와 사리장엄구를 머금
을 보탑을 만들 계획이다.

▲  적멸보궁 내부

▲  적멸보궁에서 바라본 운악산 산줄기

적멸보궁은 석가여래의 사리를 머금은 공간이라 불상을 따로 두지 않는다. 이곳은 대좌에 연
꽃무늬가 있는 금동함을 두었는데, 저 안에 진신사리가 들어있는 듯 싶으며, 그 뒤로 창을 내
었는데, 창 너머 수풀이 무성한 곳에 진신보탑을 닦을 계획이다.


▲  함허당득통탑 및 석등(懸燈寺涵虛堂得通塔 및 石燈)
-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현등사 경내 서쪽 숲속에 함허당득통탑과 석등이 있다. 경내만 신경쓰다 보면 지나치기가 매
우 쉬운데, 득통탑과 석등 또한 이곳에서 중요한 보물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서쪽 숲속에
있으나 경내 서쪽으로 난 큰 길로 가면 되며, 길가에 있어서 탑과 석등이 어떻게 생겼는지만
안다면 찾는 것은 매우 쉽다.

함허당득통탑은 현등사를 중건한 함허대사(함허조사)의 사리탑이다. 높이 2.6m의 잘생긴 팔각
원당형 탑으로 1433년 그가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입적하자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孝
寧大君)이 세종의 명으로 그의 사리를 수습해 현등사에 탑을 만들었다.
조선 초기 부도탑 양식을 잘 보여주는 그는 3단의 8각형 기단을 닦고 그 위에 옥주형 탑신을
두었는데, 그 피부에 '함허당득통'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탑의 주인을 알려주고 있으며, 지
붕돌은 8각 지붕이고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 보주 등의 머리장식을 두었다.

탑 앞에는 함허가 세종의 왕사(王師)임을 알려주고자 작은 석등을 두었다. 키 1.2m로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만큼이나 작은데, 양주 회암사(檜巖寺)의 3대 조사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석등 피부에 '함허(涵虛)'가 새겨져 있다고 하나 마멸이 심해 확인은 어렵다.

함허당의 사리탑은 이곳 외에도 문경 봉암사, 강화도 정수사(淨水寺, ☞ 관련글 보기), 황해
도 연봉사 등에도 있는데, 이는 함허의 사리를 나누어 그와 인연이 있던 곳에 보낸 것이며,
그중에서 현등사의 부도탑이 으뜸의 품격을 지녔다.

▲  옆에서 바라본 함허당득통탑과 석등

▲  '함허당득통' 문신을 지닌 득통탑의
옥주형 탑신


▲  무우폭포(舞雩瀑布)

함허당득통탑을 끝으로 현등사 관람을 마무리 지었다. 화담당경화탑 등을 놓치긴 했으나 그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해 그런 것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현등사와 인연이 또 닿을지 장담을 할
수 없으나 솔직히 안봐도 상관은 없으며, 나중에 또 인연이 온다면 그때 보면 될 것이다.

절을 나와 숲길을 내려가니 무우폭포 안내문이 발길을 붙잡는다. 앞서 현등사로 올라갈 때 놓
친 것으로 여기서 숲길을 버리고 현등사계곡으로 내려가 계곡의 속살로 들어서니 그 안에 층
층히 주름진 무우폭포가 물줄기를 실타래처럼 시원스레 뽑아내고 있었다.

폭포 이름인 무우(舞雩)는 안개처럼 뿌옇게 내리는 비나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을 뜻한다. 하
여 그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기도 하며, 폭포에서 물보라가 이는 모습이 안개비처럼 보여서
또는 자연을 벗삼는 즐거움을 뜻하는 무우귀영(舞雩歸詠)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뚜렷한 정답
은 없다. 그만큼 폭포 풍경이 곱기 때문에 승려나 현등사를 찾은 선비나 왕족이 그렇게 이름
을 지었을 것이다.
폭포의 높이는 20m 남짓으로 거의 3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폭포 밑에는 못(담)이 형성되어
폭포를 타고 내려온 물이 잠시 쉬어간다. 숲에 푹 묻혀있어 무더위도 슬슬 눈치를 보며 피서
의 성지(聖地)로 아주 적당하다.

이날 과제인 현등사 답사를 싹 마쳤기 때문에 이제는 마음이 여유롭다. 게다가 날씨도 덥고
폭포 주변 풍경도 좋아 그냥 가기는 매우 섭해 길을 잠시 멈추고 못(소)에 나의 꼬질꼬질한
두 발을 담구며 망중한을 즐겼다. 그리고 부근 반석에 벌러덩 누워 잠깐 잠을 청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초여름에 찾아간 가평 현등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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