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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山寺) ~ 북한산 금선사(金仙寺)'

금선사 수월관음보살좌상
▲ 금선사 목정굴 수월관음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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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선사는 북한산 비봉(碑峰) 아래에 아늑하게 안긴 조그만 절이다. 2005년 초파일 전날에 처음
찾은 이후, 지금까지 3번 정도 발걸음을 하였는데, 올해도 봄이 무르익던 4월 하순, 일행 몇 명
을 이끌고 다시금 금선사의 산문을 찾았다.
금선사 아래인 이북5도청까지는 서울시내버스 0212번(옥수동↔구기동)이 다니고 있어 접근은 편
하다.

종점에서 금선사 매표소까지는 고급주택단지를 지나쳐야 되는데, 으리으리한 대가집들이 우리의
목을 단단히 조르듯,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힌다.
아름다운 북한산의 몸을 파헤치며 만들어진 부유층의 고급빌라들, 깨끗했을 계곡은 그들이 내뱉
은 온갖 더러운 것들로 폐수화 되었고, 지금도 계속 그의 몸을 파고들며 빌라들이 들어서는 현
실을 바라보며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데 자연에게 이렇게 몹쓸 짓을 자행하는가?' 인간의 하나
로써 한없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래도 옛 사람들은 자연을 최대한 존중하며 그에 반(反)하지 않게 살았고, 집과 별장 또한 그
러한 테두리 안에서 지었거늘, 오늘날 인간은 자연보다 더 위대하다는 자만에 빠져, 자연파괴를
다반사처럼 일삼으니 이러다 언젠가는 자연의 무시무시한 보복을 받을 것이다.

목정굴을 약 300m 앞둔 곳에는 예전 입장료를 징수하던 매표소가 있다.
2006년까지만 해도 울며
겨자먹고 토하는 심정으로 소정의 돈을 내야했으나 2007년부터는 입장료가 폐지되어 더 이상 매
표소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다.


♠ 산내음으로 가득한 ~ 금선사 가는 길


▲ 목정굴 입구

옛 매표소를 지나 100m정도 오르면 목정굴 입구가 나온다.
목정굴을 알리는 돌기둥(표석) 우측으로 목정굴의 내력이 적힌 안내문이 있다. 예전에는 글
씨가 지워져 있거나 깨져 있어 읽는 것 자체가 심히 괴로웠으나, 근래 새롭게 단장되어 눈의
부담이 상당히 줄었다.

표석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면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고, 그 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
면 근래에 세운 기와문이 나온다. (사진은 2007년 것이라 문은 없음)
문의 모습이 마치 양반가의 별서(별장)를 찾은 듯한 분위기를 진하게 선사하니다소어색하
고 생뚱맞다.

◀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 돌탑
금선사(목정굴)를 찾은 중생들이 수십 년에걸쳐
하나씩 하나씩 정성스레 쌓아올린돌탑이다.

가지각색으로 생긴 저 돌에는 돌을 쌓은 이들의
소박한 소망들이 담겨져있을 것이다.

2005년 사월초파일에 왔을 때는 돌탑 꼭대기에 조
그마한 금동불이 앉아 있었으나,거처를 옮겼는지
지금은 그 빈자리만이 쓸쓸히 남았다.


▲ 커다란 바위에 조성된 석굴 ~ 목정굴

목정굴로 통하는 돌계단의 끝에 이르면 3면이 바위로 둘러쌓인 막다른 곳이 나온다.
전쟁 때 저런 곳에 몰려 적의 공격을 받으면정말로 아작나기 딱 좋은 지형으로 정면에보이
는 잘 생긴 바위에 '목정굴'이라 불리는석굴(石窟)이 들어앉아 있다.

이 곳은 조선 23대 군주인 순조(純祖)의 탄생 설화가 서려있는 곳으로 우기(雨期)로 수량이
많을때는 목정굴 왼쪽바위로거대한 폭포가 형성되어아래로 흘러 간다고 한다.


▲ 목정굴 가는 길 - 목정굴에서 바라본 모습

◀ 우기 때만특별히 볼 수 있다는 목정굴의폭포수
(금선사 홈페이지 참조)


♠ 금선사 목정굴 ~ 기도성지(祈禱聖地)로 유명한 석굴


▲ 목정굴 수월관음보살(水月觀音菩薩)

기도처로 유명한 목정굴 내부에는 수월관음보살이 다소곳하게 앉아 환한 미소로우리를 맞이
한다.
여자들도 시샘할 정도로 정말 아리땁게 생긴 수월관음은 왼손으로 술병처럼 생긴 정병
(淨甁)
들고 있다.

동굴 내부는 시원하여 여름의 제국 시절에 오면 정말로 피서가 따로 없으며, 겨울에는 관음보
살의 따뜻한 체온이 동굴 내부에 가득 서린 탓인지, 추운 몸을 녹이기에는 그만이다.

동굴 천정에서는 물줄기가 뚝뚝 떨어지며, 석굴 구
석으로 흐르는 계곡물과 그들이 내는 졸졸졸음악
소리가 시원스럽다.

석불 앞에는 예불을 드릴 수 있도록 넓은 기도처가
마련되어 있고 불단에는 배와꽃 등의제물이바쳐
져 중생들로부터의 인기가 여전함을 보여 준다.

석불 왼쪽으로는 금선사로 오르는 계단 길이있는데
물이 흘러 길이 미끄럽고 어두우므로오르락내리락
할 때 각별히 조심하기 바란다.
잘못하면 넘어지거나 암벽에 머리가 쾅 부딪칠 수
있으므로..


◀ 금선사 경내로 통하는 목정굴 계단


▲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목정굴 수월관음보살 ~


* 목정굴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순조 탄생 설화 ~

목정굴은 자연동굴을 석굴로 개조한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국사(國師)인 무학대사(無學大師)
가 기도를 드린 곳으로 전하며, 오랫동안 승려와 신도들의 참선, 기도처로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 조선 23대 군주인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곳으로 유명하다.

조선 22대 군주인 정조(正祖, 재위 1776 ~ 1800)는 장자(長子)인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잃고
서른이 넘도록 대통을 이을 아들을 얻지 못해 늘 고심하고 있었다.

1788년경, 대구 파계사(把溪寺)에 있던 승려 용파(龍波)가 상경하여 정조를 알현하면서 불교
계의 폐단을 시정해 줄 것을 건의했다고 한다.

그러자 정조는 불교 개혁을 약속하면서 대신 왕자의탄생을 기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아들을 얻지 못하니 이 참에 부처님의 힘을 빌려보고자했던 것이다.

그래서 용파는 임금의 부탁으로 금선사에 머물던 '농산'이란 승려와기도에 들어갔다. 그들은
같은 곳에서 기도를 드리지 않고, 농산은 목정굴에서, 용파는 수락산 동쪽내원암(內院庵, 남
양주시 청학리)에서 따로 300일 이상 기도를 드렸다.

기도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용파는 선정(禪定)에 들어 살펴보니 왕자의 몸을 받아 태어날 사
람이 농산 스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농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는 왕자로 환생하기로 마음 먹고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綏嬪 朴氏)의 꿈에 나타나 왕자
로 환생하겠다는 뜻을 밝히고는 기도를 마치고 열반(숨을 거둠)에 들었다고 한다.
이때 왕실에 무기명 서찰 하나가 올라왔는데 그 서찰에는 "경술(庚戌) 6월 18일 세자탄강(世
子誕降)"이라 적혀 있었다고 하며 바로 그 날 조선 23대 군주인 순조가 힘찬 울음소리를내며
세상에 태어났다.

순조가 태어나던 날, 도성(都城)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瑞氣)가 궁궐에 닿아 수빈
박씨의 산실(産室)을 휘감았다고 하는데, 정조는 사람을 보내 그 서기가 일어난 곳을 찾아보
니 바로 이 곳 목정굴이었다.

굴 안을 살펴보니 좌선(坐禪) 한 채, 죽어 있는 '농산'의 시신을 발견했는데, 서기는 그의정
수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어쨌든 농산이 죽어 자신의 아들로 환생한 것을 알게 된 정조는 크게 기뻐하며 막대한 재정을
하사하여 보잘 것 없던 금선사를 크게 중창(重創)케 했으며, 그 때부터 지금까지 순조의탄신
제(誕辰祭)를 지내고 있다.

이 전설대로 농산이 정말로 순조로 환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정조의 득남을 위해 농
산이 너무 무리하게 기도를 드리다가 과로사(?)로 입적한 것이 아닐까여겨진다.
그런 것을 금선사 측에서는 '왕자로 환생했다'고 말을 바꿨을 테지, 하지만 순조 탄생을애타
게 기원한 것은 사실이며 그러인해 순조가 제위에 오른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조선왕실의
막대한 지원을 받으며 융성을 누렸다.
또한 수락산 내원암 사적기(史蹟記)에는 농산, 용파 두 승려가 주고 받은 서신의 내용이 남아
있다고 한다.

조선 초부터 기도처로 널리 애용된 목정굴,하지만 처음에는 그냥 석굴만 있었을 뿐, 불상은
없었다.그러다가 1996년 석굴을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하였고, 이 때 아리따운 석불과 계단
등이 만들어졌다.

앙련(仰蓮)으로 뒤덮힌 대좌(臺座) 위에 어여쁘게 생긴 관음보살이 감로수(甘露水)가 들어있
는 정병을 왼손에 들며 그렇게 앉아 있다.
정병의 크기가 다른 관음보살의 그것보다는 대체로좀 큰 것 같다. 그의 정병을 보니 왜 자꾸
주막의술병이 생각이 나는 건지, 정말 저게 술병은 아닐까? 설마그럴리는 없겠지. 보살이
왜 술을 마셔..??
하지만 그의 얼굴은 술에 약간 취한 듯, 졸리운표정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혹 아무도 없는
석굴에서 혼자 외로움을 달래고자 함일까?

아무도 없는 그 석굴에 내가 들어오니, 그는 반가운 나머지 "자~~ 자네들도 한잔 하게. 안주
로 앞에있는 배를 먹게나" 하면서 우리에게 정병을 건내려는 듯한 모습, 서울에서 만난 수
많은 관음보살 중에 목정굴의 주인이 단연 으뜸이다. 나를 흠뻑 반하게 만든 비너스와같은
수월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절 경내로 올라선다.


▲ 비슷한 눈높이에서 바라본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석굴 왼쪽 계단으로 올라서니 커다란 바위의 정상(목정굴의 옥상)이 나온다.
여기서는 구기동을 비롯한 부암동, 인왕산 일대가 한눈에 바라다 보인다.


♠ 비봉 아래에 숨어 있는 아늑한 산사 ~ 북한산 금선사(金仙寺)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순수비(巡狩碑)가 1500년 동안 세워져 있던 비봉(碑峰),그봉우리 아
래로 조용한 분위기를 간직한 아늑한 산사, 금선사가 숨어 있다.
금선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종로1가에 있는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이곳은 여러가
지 영험담(靈驗談)이 전해지고 있는 기도처로 유명한데, 대표적인 것으로 앞에 목정굴에서 다
루었던 순조 탄생 설화가 있다.

이 절은 무학대사가 이태조(李太祖)의 부탁으로 새 왕조의도읍지를 정하고자 북한산 일대를
살펴보던 중, 지금의 절 자리에 북한산의 강인한 정기가 서려 있는것을 발견하고 이는 부처
님이 이 곳에 계시어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으로 여겨절을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 금선(金仙)
은 부처의 별칭 중 하나이다.

물론 이들 설화는 모두 믿으면 곤란하겠지만,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은 확실한 것같다.
창건 이후,기도도량으로 이름을 떨치면서 한양도성의 많은 양반사대부와 왕족, 상궁(尙宮)들
이 자주 찾았다고 하며, 순조의 탄생을 기원하던 인연으로 조선왕실의 막대한 재정적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왜정 때는 관리소홀로 거의 풍비박산 지경에 이르렀으나, 1949년 승려 도공(道空)이 중건하여
지금의 면모를갖추게 되었고, 1996년 목정굴을 손질하면서 수월관음보살을 모셨다.
절의 초창기 영역은 목정굴과 옛 대웅전이 있던 반야전(般若殿) 일대였다. 그러다가 계곡을
따라 위쪽으로 조금씩 넓혀나가 지금의 규모를 갖추었다.

금선사의 법당은 대웅전(大雄殿)이었으나 2006년에 철거하여 지금은 대적광전이 그 역할을 대
신하고 있으며 연화당과 삼성각, 반야전, 적묵당 등의 건물이있다, 2007년부터는 절을 새롭
게꾸미느라 여념이 없어 경내가 약간은 어수선하다.
소장 문화재로는 서울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신중탱화가 있다.

서울 도심에서 불과 10리 거리도 안되는 산사, 이 곳은 그리 유명한곳이 아니라서 찾아오는
사람은 별로 많지는 않다, 근래 이리저리 공사판을 벌여나서 약간정신이 없을 수는 있지만
서울 도심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름대로 조용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손색은 없다. 잠깐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이 곳을 찾아와세상사의 온갖 번뇌들을 잠시
나마 잊으며 잃어버렸던 자기 자신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 금선사 찾아가기 (2008년 7월 기준)
- 지하철 1,3,5호선 종로3가역(1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3번 출
구)에서서울시내버스 0212번을 타고 이북5도청 종점에서 하차, 도보 20분
- 목정굴 아래 옛 매표소까지 차량 진입이 가능하나, 길이 좁고 주차공간이 협소하다. 주차는
이북5도청 주차장을 이용하기 바란다.
- 법회날에는 금선사 차량이 구기터널입구 파출소에서 옛 매표소까지 20~30분 간격으로 운행
한다. (운행시간 9시 반 ~ 11시까지, 자세한 것은 금선사에 문의)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구기동 196-2 (☎ 02-395-9911)
* 금선사 홈페이지는
이 곳을 클릭하거나 위에 삼성각 사진을 클릭바람

♠ 놓치면 아까운 금선사 관람포인트
- 금선사 목정굴과 수월관음보살좌상
- 금선사 대적광전 내 좌측에 있는 신중탱화 (신중탱화 보관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금선사 둘러보기 (1) ~ 반야전, 연화당, 적묵당


▲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와 공덕비

금선사 경내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석종형 부도 1기와 공덕비를 만나게 된다.
부도는 절을 크게 일으켜 세운 대원각의 탑이며, 그 우측으로 절을 일으켜 세운 1등 공신, 대
시주(大施主) 민영택 여사의 공덕비가 세워져 그들의 오랜 공덕을 기리고 있다.


▲ 2007년에 새로 지은 반야전(般若殿)

옛 대웅전 자리 우측에 자리한 반야전은
금선사 건물 중 제일 막내이다.
대웅전은 금선사에서 제일 오래된 불전
이었으나, 2006년 후반에 철거하고 그
우측으로 2층 규모의 반야전을 올려 세
웠다.

이 건물은 교육, 법회, 생활공간, 공양
(供養) 등의 다용도로 사용하며, 4월 말
에 갔을 당시에는 한참 연등으로 주변을
치장하고 있었다.

금선사는 평평한 곳이 아닌 비탈진 산자락에 둥지를 튼 탓에 사세 확장이 용이하지 못하다.
그래서 단양의 구인사(救仁寺)처럼 산 윗쪽으로 사세를 넓혀갔는데, 그마저도 이제 한계에 이
르러 기존의 대웅전을 철거하고커다란 건물을 세워 그 부족분을 채우고 있다.

▶ 옛 대웅전 자리 우측에 솟아난
처진소나무

소나무가 불력(佛力)을 받아서일까? 하
늘로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옆으로 휘어
져 버렸다.


▲ 윗층과 아랫층의 이름과 용도가 다른 연화당(蓮華堂)


반야전을 지나면 적묵당 건너편으로 2004년에 지어진 2층 규모의 연화당(미타전)이 있다.
계곡 위에 걸쳐진 나무다리(2개로 기억남)를 건너면 연화당으로 다가설 수가 있는데, 1층은
죽은 이들의 유골과 위패를 모신 납골당으로 연화당이라 불리며, 현재 600여기의 유골을 모셨
다고 한다.
2층은 아미타불을 모신 미타전(彌陀殿)으로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2004년에 그려진 아미타후
불탱화가 있다.

◀ 연화당(1층)에 모셔진 아미타여래불
연화당 가운데 부분에는 조촐하게 아미타
불을 모신 공간을 마련하여 죽은 이들의
극락왕생을 돕고 있다.

공간의 좌우 벽에는 조그만 금동불이 빼곡
히 들어앉아 그야말로 금빛찬란의 풍경을
연출한다.


▲ 적묵당(寂默堂)

운치가 서린 소나무 뒤에 들어앉은 건물로 연화당 맞은편에 있다.
금선사 승려들의 생활공간으로 저렇게 보면 1층 건물로 보이지만 실상은 3층이다. 건물 아래
로 땅을 파서 벽돌로 지은 1층과 2층이 있으며, 사진에 나오는 건물은 3층 부분으로 주지승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데 흔히 적묵당은 3층 부분을 일컫는다.


♠ 금선사 둘러보기 (2) ~ 삼성각


▲ 삼성각(三聖閣)

대적광전 좌측에 자리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얹힌 건물로 조촐하고 아담한 모습
이 전혀 눈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
경내에서 제일 높은 곳에 들어앉아 아래를 굽어보고 있으며, 건물 안에는 우리의 토속 신으로
불교의 일원이 된 독성(獨聖), 산신(山神), 칠성신(七星神) 등의 삼성(三聖)이 모셔져 있다.
인도의 불교가 우리나라로 넘어오면서 한국 특유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
례라 하겠다.


▲ 독성도(獨聖圖)


▲ 칠성도(七星圖)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
자)이 소나무 아래에 앉아 있고, 그 오른쪽으
로 앳된 얼굴의 동자(童子)가열심히 차를 달
이고 있다.

삼성각 중앙에 모셔진 칠성신으로 가운데에 두
광(頭光)을 지닌 부처님이 앉아 있다.

◀ 산신도(山神圖)
흰 수염과 눈썹이 지긋한 산신이
하얀 우선(羽扇)을 들고 앉아 있
고, 그 주변으로 호랑이가 긴 꼬
랑지를 높이 치켜들며 용맹을 과
시한다.
동자는 산신의 후식거리로 보이
는 과일을 두 손으로 받들며 꼿
꼿히 시립(侍立)해 있다.

◀ 삼성각 풍경물고기
고즈넉한 산사의 정적을 조용히
깨뜨려 주는 풍경물고기. 허공을
바다로 삼고시원한 산바람을 파
도로 삼은 물고기는 마치신이라
도 난 듯, 부산히 몸을 움직이고
, 그가 맨바닥에 떨어질라 꽉
붙들어 맨 바람방울(풍경)도 덩
달아 춤을 추며, 그윽한 풍경소
리를 아낌없이 베풀어 준다.


▲ 큰 바위 밑에 자리한 약수터

삼성각 좌측 부근으로 멋드러진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위 위로는 비봉으로 통하는 등산로가 놓여져 있고, 아래 턱처럼 쑥 들어간 부분에는 북한산
이 베풀어준 옥수(玉水)가 졸졸졸 나오는 약수터가 자리해 있다.

약수터 옆으로 조그만 불상과 함께 중생들의 소망이 담겨진 돌탑과 동전들이 어지러히 놓여져
있으며, 비와 눈, 바람을 피하기에는 아주 제격인 곳이다.
절이나 산에 오면 꼭 그 곳의 물 맛을 보기 마련이다. 금선사의 물맛은 한참 몸단장에 열을
올리는 금선사와 달리 예나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 하다.

약수터 부근에는 전에 산신각으로 쓰던 슬레이트 지붕의 벽돌집이 있으나 지금은 비어 있다.


♠ 금선사 둘러보기 (3) ~ 대적광전(大寂光殿)과 신중탱화

삼성각 우측으로 금선사의 법당인 대적광전이 자리해 있다.
2005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으며, 앞뜰에는 묵은 김치가 가득 담겼을
장독대가 곳곳에 심어져 묵은 김치로 끓인 김치찌게 생각을 간절히 나게 만든다.

대적광전 앞뜰에선 금선사 경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옛 대웅전에 있던 몇몇 불상과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신중탱화 등이 있으며, 2005년에 만든 지름 74cm, 폭 14cm의 금고(金鼓)가
있다.


▲ 대적광전 불단(佛壇)

불단에는 대적광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으며 그 좌
측으로 노사나불(盧舍那佛)이, 우측으로 석가모니불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우리들을
지그시 바라본다.
그들 뒤로 든든히 자리잡은 후불탱화는 2005년에 그려진 것이다.

◀ 금선사 신중탱화(神衆幀畵)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1호


대적광전 좌측 벽으로 금선사에서 제일 오래된
보물인 신중탱화가 걸려있다.

원래는 대웅전 우측 벽에 있었으나 건물을 철거
하면서 이 곳으로 옮겼다.
신중탱화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의 무리를
그린 것으로조선 후기에 널리 그려진 불화(佛
畵)의 일종이다.
이들은 원래 인도 지역의 토속신이었으나 나중
에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었으며, 지금은부처
와 경전 등을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의 역할
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수호의범위가 점차
확대되어나라를 보호하거나 사람들의 재앙을
막는 역할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금선사의 신중탱화는 고종 24년(1887년)에 그려진 것으로 탱화 한쪽 구석에 신중탱(神衆幀)이
라는 명문이 쓰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림 아래 부분으로 흰 얼굴의 위태천신(韋太天神)이 그려져 있고, 그 주변으로 팔부중(八部
衆) 외에산신, 호법신장(護法神將)등이 늘어서 있다.
현재 그림은 보존을 위해 표구 안에 들어있으며 서울 지역에 대표적인 신중도로 2002년에 서
울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6년이 넘도록 이렇다할 안내문 하나 마련되어 있지 않으며, 탱화 역시 대적광전 좌측
구석에 걸려있어 자칫 지나치기가 쉬워, 문화재청과 금선사의세심한 배려가 절실하다.


♠ 금선사를 뒤로하며 만난 2개의 석상(石像)들


▲ 홀을 쥐어들고 있는 동자석(童子石)


▲ 정체가 아리송한 동자석 옆 석상


금선사를 둘러보고 목정굴 대신 비봉으로 통하는 등산로를 통해 속세로 발길을 재촉했다.
내려가는 길목에도 아까전 목정굴 입구처럼 1칸 크기의 한옥 대문을 만날 수 있는데 정말
산문(山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문이다. 차라리 조촐하게 일주문이나 천왕문 같은 것
을 세우는 것이 더 적당치 않을까?

문을 지나 1분 정도 내려서면 등산로 옆으로 동자석(童子石) 1기와 근석(根石)처럼 생긴
돌 1기가 '오랜만에 나좀 보고 가소~~'하며 나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선다.

두 손으로 홀을 꽉 쥐어든 동자석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키는 말그대로 아이 키
와 비슷하다.
동자석이 어째서 절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을까? 자세한 사연은 알지 못하나 아마도 절
수호의 의미로 세우거나 왕실에서 세워준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뭔가특별한 의미가담
겨져 있는 건 분명하다. 그 주변으로는 중생들이 정성스레 쌓은 돌탑들로 가득하여 그의
높은 인기를 보여 준다.

동자석 건너편에는 석인이라 하기에는 전혀 모양이 안나고 장승이라 하기에도 상당히 거시
기한, 정체가 묘연한 돌덩어리가 서 있다.
자세히 바라보면 남근과도 약간 비슷한것 같은데 혹 남근석(男根石)의 일종은 아닐까?

돌 주변으로는 다 쓰러진 돌탑 몇 기 만이 그의 말벗이 되어 줄뿐, 썰렁하기 그지없으니
아마도 바로 옆 동자석에 비해 인기가 턱없이모자른 모양이다.

이렇게 하여 금선사 답사는 다음을 기약하며 대단원의막을 고한다.~~


* 답사, 촬영 일시 - 2007년 2월 25일 / 2008년 4월 26일
* 작성 시작일 - 2008년 6월 11일
* 작성 완료일 - 2008년 7월 9일
* 숙성기간 ~ 2008년 7월 9일 ~ 7월 24일
* 공개일 - 2008년 7월 24일부터
* 2007년에 작성된 금선사 후기를 참조하여 썼음
* 최종 업데이트 - 2008년 1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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