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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9.10.16 초가을에 가면 딱 좋은 곳 ~ 꽃무릇(상사화)의 대표 성지, 영광 불갑사 (수다라성보박물관)
  4. 2019.08.05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산과 숲,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옛길,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한반도지형, 앉은뱅이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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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8.10.23 군포 수리산, 반월호수에서 가을을 맞이하다 ~~~ (철쭉동산, 수리산산림욕장, 수리산둘레길, 수리사)
  7. 2017.07.06 정조 임금이 만든 도심 속에 아름다운 호수, 수원 서호 ~~ (서호공원, 항미정)
  8. 2016.12.19 겨울의 길목에서 찾아간 무주 적상산 나들이 ~~~ (적상호, 적상산성, 안국사...)
  9. 2013.11.15 늦가을 산사 나들이 ~ 고성 연화산 옥천사 (공룡발자국화석, 연화산 숲길)

도심 속에 깃든 그림 같은 호수, 석촌호수 봄꽃 나들이 (송파나루공원, 삼전도비)

석촌호수 봄꽃 나들이



' 도심 속의 그림 같은 호수, 석촌호수 봄꽃 나들이 '

석촌호수 동호

▲  석촌호수 동호

석촌호수 산책로 삼전도비

▲  석촌호수 산책로

▲  삼전도비

 



 

겨울 제국(帝國)이 드디어 저물고 봄꽃이 나래를 펼치는 4월이 되면(서울 기준) 천하 곳
곳에서 봄꽃을 내건 축제가 산발적으로 열려 사람들의 마음을 한층 들뜨게 한다.
굳이 축제가 아니더라도 '어느 봄꽃은 이곳이 유명하더라' <ex. 개나리는 응봉동의 응봉
산(鷹峯山)과 인왕산이 유명하더라. 수양벚꽃은 국립현충원이 유명하더라!> 식으로 특정
꽃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봄꽃 명소도 적지 않다. 그중에는 잠실 남쪽에 있는 석촌호수가
있으니 그곳은 벚꽃 명소로 오랫동안 명성을 누리고 있다.

석촌호수는 굳이 벚꽃이 아니더라도 서울에 유일한 호수로 장안에 널리 알려진 존재이다.
본인도 그곳을 많이 찾아간 터라 너무 익숙해진 호수가 되어버렸는데, 정작 봄에는 가본
기억이 없어 흐드러지게 핀 벚꽃의 마지막이라도 붙잡고자 그리고 그곳에 깃든 삼전도비
의 안녕도 확인할 겸 서둘러 그곳을 찾았다.
계절의 으뜸으로 칭송받는 늦가을(10~11월)과 봄꽃철(4~5월)은 우리네 인생보다 더 짧게
느껴져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아깝다. 대자연 형님이 천하에 펼쳐낸 그림 중 이때
가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다. 하여 이들을 제대로 즐기지 않는다면 대자연에 대한 결례가
될 것이요. 한번 지나간 봄과 가을은 다시 1년을 기다려야 되기 때문에 이때만큼은 부지
런히 움직여 나의 침침한 두 망막과 사진에 듬뿍 담아놓아야 후회가 없다.



 

♠  석촌호수 입문 (송파나루공원)

▲  석촌호수 서호 (서호 동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잠실 남쪽에 자리한 석촌호수는 서울에 유일한 순 100% 호수공원이자 반(半) 자연산 호수이다.
서울에 이름난 명소의 하나이자 올림픽공원과 더불어 송파구(松坡區)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서
울 사람이라면 꼭 1번 이상은 가봤을 것이라 여겨진다.

지금은 이렇게 커다란 호수로 누워 있지만 그는 원래 한강 물줄기의 일부였다. 광나루~송파나
루(잠실대교 주변) 구간은 한강(漢江, 아리수)이 크게 구부러지는 구간으로 상류에서 떠내려
온 토사들이 잠실(蠶室) 일대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것이 점차 하나의 섬으로 불어나게 되
었고, 그 섬을 중심으로 한강 물줄기에도 변동이 생겼는데, 큰물(홍수)이 지면 사방에 물이
들고, 오직 이곳만 물 위에 떠있듯 보인다하여 섬 이름을 '부리도(浮里島)'라 하였다.
섬이 빚어지면서 물줄기도 강제 변화를 겪게 되니 부리도 남쪽 샛강은 송파강(松坡江), 북쪽
의 샛강을 신천강(新川江)이라 하였다. 부리도와 이들 샛강은 1969년 이후 한강 본류의 공유
수면(公有水面) 매립 공사를 벌이면서 부리도 북쪽 물길을 넓히고 대신 남쪽 샛강을 매립하여
부리도를 육지로 만들었는데, 샛강을 완전 밀어버리지 않고 그 일부를 남겨두니 그것이 지금
의 석촌호수이다. 그리고 1971년 한강 물로 호수를 채우면서 흐르는 물줄기에서 고여있는 담
수호로 성격이 완전히 전환되었다. 하여 반 자연산 호수가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허허벌판에 그저 그런 호수였으나 잠실과 송파 지역에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던 1981
년 호수 주변에 녹지와 산책로를 조성해 이때부터 도시 속의 호수가 되었다. 그리고 성남시와
잠실을 이어주는 송파대로가 호수 가운데를 지나가면서 호수 중앙 부분이 조금 매립되어 동호
, 서호로 나눠지게 되었으나 중앙부에 서로 물줄기가 이어져 있어 서서 남남의 존재는 아니다.
1990년대 초에는 롯데가 서호에 매직아일랜드를 닦으면서 호수가 크게 오염되어 죄없는 물고
기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갔고 악취까지 심하게 나는 등, 흑역사도 적지 않았다.
다행히 2001년부터 송파구가 72억의 재정을 투입하여 호수 살리기에 나서면서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이때 호수 둘레 2.5km 중 1.88km 구간의 호안(湖岸)시설을 없애고 수생식물을 심어
생태호안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한강물 순환체계를 구축하여 생태 호수를 꾀하면서 이제는 송
파구의 소중한 꿀단지로 단단히 자리매김하였다.

허나 매직아일랜드로 호수를 완전 버려놓았던 롯데가 동호 북쪽에 엉뚱하게 제2롯데월드를 지
으면서 다시금 호수의 염통을 건드리고 있다. 호수의 담수량이 전보다 많이 줄고 있는 등, 말
썽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도심 속의 그림 같은 호수이나 한편으로는 인간의 욕심으로 개발 속
에, 도시 속에 갇혀 실험용 동물 같은 애처로운 신세가 되어 버렸다.

▲  석촌호수 서호와 매직아일랜드

석촌호수는 면적 217,850㎡, 담수량 636,000톤, 평균 수심 4~5m, 둘레는 2.5km이다. 물은 매
일 한강에서 가져오고 있으며, 호수 주위로 나무에 둘러싸인 산책로가 잘 닦여져 걷는 길이
그리 지루하지가 않다. 특히 벚꽃나무가 많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4월에는 벚꽃의 향연이 펼
쳐지며, 그들을 내세운 '석촌호수 벚꽃축제'가 상춘객을 유혹한다. 이곳에서 열리는 벚꽃 축
제는 여의도(汝矣島), 국립현충원, 어린이대공원과 더불어 서울에 이름난 벚꽃축제로 꼽힌다.
또한 여름에는 호수에서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과 숲이 베푸는 숲내음이 어우러져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해주며, 비록 물에는 들어갈 수 없지만 시원한 호수 바람이 늘 깃들여져 있
어 피서의 성지로 추앙을 받는다. 그리고 가을에는 알록달록 익어간 단풍이 호수 주변을 붉게
적시며 늦가을의 향연을 펼친다. (눈 쌓인 겨울 설경도 아름다움)

호수는 송파대로를 사이에 두고 편의상 동호와 서호로 나눠져 있는데, 서호에는 롯데월드 소
속의 매직아일랜드가 인공섬으로 띄워져 있으며, 호수 주변에는 송파산대놀이(국가 중요무형
문화재 49호
)와 여러 전통놀이가 펼쳐지는 서울놀이마당, 장미원, 롯데월드, 2010년에 옮겨온
삼전도비가 있다. 그리고 동호 주변에는 송파나루터 표석, 송호정, 까페거리, 제2롯데월드 등
이 있다.

서호 남쪽에 서울 근교의 주요 나루터였던 송파나루가 있어 그 이름을 따라 호수 일대를 '송
파나루공원'이라 부르며, '석촌호수공원'이라 불리기도 한다. 서울만의 지역 명소에서 벗어나
전국적인 명소로, 이제는 국제적인 명소로 성장하여 인근 올림픽공원과 롯데월드와 연계하여
찾아오는 외국인 관광객도 제법 많다.

* 석촌호수 소재지 - ① 서호 :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일대
                    ② 동호 : 서울특별시 송파구 신천동 32일대

▲  석촌호수 서호와 롯데월드(호텔)

▲  서호 서쪽에서 바라본 서호


▲  벚꽃이 터널을 이루는 서호(西湖) 동북쪽 산책로

송파구의 꿀단지 석촌호수(송파나루공원)로 들어가는 길은 꽤 많다. 호수 주변이 모두 열려있
기 때문이다. 나는 송파대로에서 삼전도비 옆을 거쳐 서호 동쪽으로 내려왔는데, 평일 한복판
임에도 산책이나 운동을 나온 지역 주민들, 막바지 벚꽃을 즐기러 나온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
로 가득해 이곳의 높은 인기를 실감케 한다. 도심 속에 그림 같은 호수가 누워져 있으니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은 셈이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든 건물이든 산이든 호수든 자리가 매우
중요하다.
나는 서호 동쪽 산책로에서 바로 동호(東湖)로 접어들어 그곳을 1바퀴 돌고 다시 서호로 넘어
가기로 했다.


▲  송파대로 남쪽 굴다리

석촌호수 가운데 부분에는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송파대로가 넓직한 폭으로 흘러간다. 바로
그 도로 때문에 호수 중앙 북부와 남부가 희생되었고, 형식적으로나마 호수가 동/서로 구분되
었다. 다행히 중앙에는 호수가 서로 만나도록 다리(잠실호수교)를 놓아 그들이 영원히 하나의
호수임을 천하에 어필한다.

굴다리 물길 좌우에는 산책로가 놓여져 서호와 동호를 넘나들 수 있는데, 석촌호수와 송파구
의 과거를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물길과 산책로 경계에는 철책이 놓여져 호수로의
접근을 차단한다. 어차피 호수의 수심도 깊으니 괜히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말자. 그게 사람과
호수 쌍방에게 좋다.


▲  동호 서남쪽 산책로 (오른쪽 높은 곳이 송파대로)

서호에는 매직아일랜드란 인공섬이 호수의 경관과 시야를 크게 방해하여 호수의 체감 면적을
적지 않게 잡아먹고 있다. 허나 동호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어 시야가 확 트여있으며, 호수
의 체감 면적을 늘려주어 보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이것이 진정한 호수의 느낌이다.

호수를 사이에 두고 벚꽃나무 등으로 무장된 산책길이 동화처럼 펼쳐져 있는데, 호수 주위에
는 온갖 건물과 나무들이 호수를 거울로 삼아 봄으로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각자 매뭇새
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허나 벚꽃 끝물 시절에 와서 하얀 꽃잎은 많이 진 상태이고, 산책
로와 호수에는 짧은 인생 폼나게 살다간 벚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인생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
긴다.

▲  팔작지붕을 지닌 송호정(松湖亭)

▲  송호정 주변 숲길

동호 서남쪽 언덕에는 1칸짜리 정자인 송호정이 맵시를 뽐내며 호수를 굽어본다. 호수를 한참
정비하던 1981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호수 주변에 세워진 유일한 전통식 정자이다. 아직은
나이가 어려서 고색의 기운은 여물지 못했으나 호수 바람이 앞다투어 머무는 곳으로 벚꽃비가
정자 주변에 우수수 쏟아져 봄의 정취를 한껏 돋군다.


♠  석촌호수 동호 둘러보기

▲  이름 5자만 아련히 남은 송파나루터 표석

송호정 서쪽에는 옛날 송파나루터를 알리는 표석이 자리해 있다.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그
흔적도 말끔히 사라진 송파나루터<송파진(松坡津)>는 서울 근교의 주요 나루터로 원래 서호
남쪽에 있었는데, 송파와 뚝섬을 이어주던 나루터로 삼남지방(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보통 여기서 배를 타고 뚝섬(자양동)으로 넘어가 서울로 들어갔다.
나루터 주변에는 자연히 마을과 시장이 형성되어 종일 북새통을 이루었고, 송파산대놀이 등의
전통 공연도 생겨나 구경거리도 넉넉했다. 또한 바다에서 한강으로 들어온 바닷배는 여기까지
들어와 닻을 내리고 장사를 했다.

송파나루는 1960년대까지 제 밥값을 하였으나 개발의 칼질로 부리도가 육지화되고 주변 샛강
이 죄다 아작이 나면서 나루터도 산소호흡기에 의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1972년 잠
실대교가 놓이면서 완전이 사라지게 된다. 송파나루터 마을 역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회색
빛 도시로 변하였고, 나루터가 있던 서호 주변도 숲이 무성한 호수 산책로로 모두 색이 바뀌
면서 나루터의 흔적은 다 말라버렸다.
허나 나루터 이름을 공원의 간판으로 삼아 지도와 세상에 남겼으니 그나마 다행이며, 1989년
12월 30일 나루터를 알리는 표석을 세워 세월의 저편으로 강제로 사라진 나루터의 뒤를 늦게
나마 붙잡고 있다.

현재 서호에 있는 매직아일랜드에서만 조그만 오리배를 띄우고 있으며 그 외에는 정식적인 배
는 없다. (매직아일랜드 호반보트에서만 탈 수 있음)


▲  석촌호수 동호 (동호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육지와 도시에 꽁꽁 갇힌 호수라 수면이 늘 잔잔하다. 아무리 세월과 날씨, 사람, 개발의 칼
질이 호수를 희롱해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바다를 향해 열심히 흐르던 강물이 고인 물
로 변하면서 성질도 많이 죽은 모양이다.


▲  동호 서남쪽에서 바라본 동호와 제2롯데월드 주변

▲  서쪽에서 바라본 동호와 남쪽 산책로

▲  호수(동호 남쪽) 산책로의 평화로운 모습
이런 길은 집으로 몰래 가져와 혼자서만 누리고 싶다. 물론 호수까지 말이다.


▲  평일 봄 오후의 여유로움이 묻어난 동호 남쪽 산책로

▲  동남쪽에서 바라본 동호의 위엄
지금도 이렇게 넓은데, 호수를 2개로 나눠먹은 송파대로 개통 이전에는 오죽했을까.

▲  동북쪽에서 바라본 동호
호수 산책로를 한 굽이, 100보 정도 지날 때마다 호수는 조금씩 풍경을 달리한다.

▲  온갖 벚꽃이 아른거리는 동호 동남쪽 산책로
무한 벚꽃에 잠긴 호수의 풍경은 단연 천하 일품이다. 그 벚꽃이 한참일 때
오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 조금만 빨리 올걸;;;

▲  동호 동북쪽에 닦여진 나무데크 쉼터

▲  호수로 물을 흘려보내는 인공폭포


▲  동호 동북쪽 나무데크 쉼터에서 바라본 동호와 호수를 바라보는
높은 건물들 - 현재 석촌호수의 현실이다.


▲  동호 동북쪽에서 바라본 동호와 남쪽 산책로

▲  동호 북쪽 산책로에서 바라본 동호와 오리 가족(사진 왼쪽 아래)

▲  호수를 향해 팔을 내민 벚꽃 (석촌호수 동호)
벚꽃들이 목이 많이 말랐는지 호수를 향해 그 야윈 팔을 내밀었다.


▲  호수 북쪽 나무데크 쉼터에서 바라본 동호 동부

▲  호수 북쪽 나무데크 쉼터에서 바라본 동호 서부와
잠실호수교(송파대로)

▲  잠시 나라를 생각하게 만드는 벚꽃 무늬의 태극기 모형 (동호 까페거리)
태극기도 봄꽃에 신이 난 듯 웃고 있지만 그를 국기로 삼은 이 나라의
현실은 반대로 우울 투성이다.

▲  동호 서북쪽에서 바라본 동호 ①
어느새 저 너른 동호를 모두 돌았다. 풍경과 길이 너무 좋으니 체감 거리도
그만큼 짧게 다가온다.

▲  동호 서북쪽에서 바라본 동호 ②

▲  송파대로 북쪽 굴다리
이렇게 동호를 돌고 석촌호수의 나머지를 돌고자 서호로 넘어갔다.



 

♠  석촌호수 서호

▲  다시 돌아온 서호 산책로

석촌호수 산책로는 호수를 따라 이어진 순환형 길이라 도중에 포기하지 않는다면 처음 시작했
던 현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호수와 봄꽃, 주변 풍경에 취해 소신껏 두 발을 움직이다보
니 어느덧 산책을 시작했던 현장(삼전도비 밑)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앞서 남겨두었던 서호
나머지 부분을 돌고자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서호 동북쪽 산책로

서호는 확 트인 동호와 달리 호수 한복판에 롯데월드의 일원인 매직아일랜드란 인공섬이 들어
앉아 있다. 그래서 시야와 주변 풍경을 은근히 잡아먹으며 서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 마치 경복궁(景福宮) 안에 현대식 높은 빌딩이 들어앉은 것처럼 말이다.
매직아일랜드가 들어서면서 호수가 크게 오염되어 물고기들이 대거 죽어나간 흑역사의 현장이
기도 하며, 다행히 호수는 진정이 되어 물고기와 오리들이 살고는 있지만 롯데월드가 천하에
이름난 테마파크라 놀이기구의 굉음과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로 하루도 조용할 날
이 없다. 반면 동호로 넘어가면 그 반대로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라 같은 호수이지만 서로가
너무나 딴 판이다.


▲  서호 서쪽 부분 (매직아일랜드 호반보트)

▲  서쪽에서 바라본 서호와 매직아일랜드 ①
석촌호수와 매직아일랜드가 서로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불편한 동거를 한다.
그들의 불편한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오리배를 타고
유유자적 뱃놀이를 즐긴다.

▲  서쪽에서 바라본 서호와 매직아일랜드 ②
호수는 거울처럼 잔잔한데, 인간이 억지로 띄워놓은 인공섬에서는 온갖 기계 소리와
그것을 즐기는 인간들의 비명 소리가 요란하게 귀를 때린다.

▲  매직아일랜드의 온갖 소음에도 늘 평화로운 서호 서쪽 산책로

▲  벚꽃이 무성한 서호 남쪽 호숫가

▲  서호 남쪽 산책로 (동호 방향)

▲  석촌호수 장미원

서호 서쪽이자 서울놀이마당 남쪽에는 장미꽃의 보금자리인 장미원이 둥지를 틀고 있다. 장미
는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5~6월)에 번성을 누리는 꽃으로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 봄꽃 1
세대가 지면 그 뒤를 잇고 그가 지면 친 여름파인 연꽃이 9월까지 향연을 펼친다.
아직 봄꽃 1세대가 완전히 저물지 않았고 4월의 한복판이라 장미는 이제 푸른 잎을 보이고 있
을 뿐인데, 이곳에는 32종의 장미가 뿌리를 내리고 있어 앞으로 1달 정도 흐르면 두터운 꽃잎
을 천하에 펼쳐보일 것이다.
서울에는 이곳 외에도 장미의 너른 보금자리를 여럿 닦았는데, 올림픽공원과 중랑천(중랑구
중화동)이 대표적이며 보통 5월 중/하순에 장미축제가 열린다. (석촌호수는 벚꽃축제만 있음)


▲  푸른 신록 속에서 한참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석촌호수 장미원

▲  장미원 동쪽 산책로 (서호 산책로와 장미원 사잇길)



 

♠  그림 같은 호수에 깃들여진 큰 옥의 티, 병자호란(丙子胡亂) 삼전도
굴욕의 상징물인 삼전도비(三田渡碑) -
사적 101호

▲  보호각까지 갖춘 삼전도비

송파대로가 지나가는 석촌호수 서호 동쪽 언덕에 삼전도비라 불리는 큰 비석이 위엄을 부리며
자리해 있다. 그는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못지 않은 병자호란(丙子胡亂) 삼전도 굴욕을
머금은 우울한 존재로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그리 유쾌하지 못한 문화유산이다.
지금은 사방이 훤히 트인 곳에 자리해 있고 무려 보호각까지 두르고 있어 그에 대한 해코지가
많이 줄었지만 석촌동(石村洞) 어린이공원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시절에는 비석에 테러(?)나
해코지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비석을 손상하면 처벌한다는 경고문까지 붙어있었다. 특히
2007년에는 빨간색 페인트로 비석 뒷쪽에 크게 '철거'라고 쓴 사람이 붙잡혔으며, 2008년에는
비석에 불을 지른 사람도 있었다.

나도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저런 것을 뭣하러 국가 사적까지 지정해가며 보호를 하는가 의문
을 품으며 비석을 갈아 없애기를 바랬다. 거기다가 비석 옆에 삼전도 굴욕을 담은 부조비까지
있었으니 그런 마음을 더욱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발버둥을 친다고 삼전
도 굴욕이란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지나간 역사가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될 우리의 역사이며, 비록 비석의 성격은 심히 불쾌
하나 엄연히 조선이 만든 비석이다.
특히 만주 문자와 몽골 문자, 한문 등 3개 문자를 모두 담은 특이한 비석으로 당시 글자를 연
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으며, 비석의 조각이 수려하고 정교하여 조선 후기 대표적인 금
석문(金石文)으로 꼽히고 있다.

비석인데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남원(南原)의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와 더불어 매우 특이
한 케이스이다. 비석의 보존상태와 다듬은 솜씨가 뛰어나 국가 보물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지
만 비석의 성격 때문에 국가 보물로 삼기에는 속이 심히 뒤틀리고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까
워서 어정쩡하게 사적으로 삼은 모양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병자호란과 삼전도비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겠다.


▲  조선 사람들의 오랜 스트레스이자 발암물질이었던 삼전도비

① 만주족(여진족)의 마지막 몸부림과 병자호란 이전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滿洲族)은 우리의 친척 민족으로 예로부터 말갈족(靺鞨族), 여진족(女
眞族) 등이라 불렸다. 말갈이란 이름은 고구려(高句麗) 때 지방 사람들을 일컫던 말로 오늘날
흔히 부르는 촌사람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옛 조선(고조선)과 고구려, 발해(渤海, 원래 이름은 고려)의 일원으로 살았으며, 신라 왕족이
고려에 반발하여 무리를 이끌고 옛 발해 땅으로 넘어가 정착하여 여진족 등 북쪽 세력과 어우
러졌고, 점차 그들을 통합해 힘을 기르면서 1113년 아골타<阿骨打, 신라 왕족의 후손 또는 고
려 사람 금준(今俊)의 후손>가 금(金)을 세웠다. 금이란 이름은 그들의 성인 김(金)에서 따온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금나라는 옛 발해인과 옛 신라인, 고려인, 여진족 등이 어우러진 나라로 150년
동안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위엄을 떨쳤으나 13세기 중반 몽골의 원(元)나라에게 크게 털리
면서 함경도와 요동(遼東), 만주, 연해주 일대에 흩어져 살았다.
이후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서 그들에게 조공을 바치며 세력을 유지하다가 임진왜란 이후 조선
과 명이 완전 지쳐있는 틈을 이용해 세력을 불렸고, 건주좌위(建州佐衛)의 수장 누르하치가
여진족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1616년 스스로 한(칸, 汗)을 칭하며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흥경(興京)에 도읍을 했다. 그가 바로 청태조(淸太祖)이다.

누르하치의 세력이 커지자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요구했다. 당시 조선 군주였던 광해군(光
海君)은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이를 슬기롭게 해결하고자 1619년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군사
를 주어 적당히 싸우는 척 하다가 항복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이에 강홍립은 요동으로 넘어가
대충 싸우다가 항복했다.
또한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과의 양면외교정책을 구사하며 국방을 기르고 있었다. 후금을 나
라로 인정하며 호의를 베푸니 딱히 충돌은 없었다. 허나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에 쩔
어있던 신하들은 그의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었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이른바 재조지
은(再造之恩)을 강조하며 후금을 멀리하라고 귀가 따갑도록 주청했다.
그래도 말이 안통하자 서인(西人) 패거리는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仁祖)>을 앞세워
광해군의 폭정을 바로잡는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이
다.

서울을 점령한 서인 패거리는 광해군을 붙잡아 인목대비<仁穆大妃, 선조의 어린 왕후이자 광
해군의 의붓어머니>가 갇힌 서궁(西宮, 덕수궁)으로 끌고가 대비 앞에 무릎을 끓게 했다. 대
비는 매우 흥분된 표정으로 광해군의 죄 30여 개를 나열하며 꾸짖었는데, 그중에는 명나라에
대한 불경죄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란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서인 패거리의 건의에 따라 광해군의 실용적인 중립외교를 버리
고 명나라를 섬기는 정책으로 외교 방향을 바꿨다. 후금을 치러온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
)에게 요동에서 가까운 철산(鐵山)의 가도(椵島)를 주둔지로 제공하는 등 쓸데없는 지원을 아
끼지 않았던 것이다. 허나 이는 후금을 제대로 자극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후금은 오로지 중원대륙 도모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조선이 배후에서 저리 설쳐대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인조반정 때 논공행상(論功行賞)에 크게 불만을 품
고 1624년에 반란을 일으키다 털린 이괄(李适)의 부하들이 후금으로 넘어가 광해군이 부당하
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며 조선의 군사력이 약하니 속히 치라고 청나라 태종(太宗)을 들쑤셨
다.

드디어 1627년 1월 청나라 태종은 아민(阿敏)에게 군사 3만을 주어 항복한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조선을 공격했다. 그들은 '폐위된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 는 명분을 내걸고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허나 백마산성(白馬山城)에서 임경업(林慶業)의 저항에 발목이 잡히자 그냥 성
을 버리고 남하, 황해도 황주까지 진출하니 인조는 장만(張晩)을 도원수로 삼아 막게 했으나
패배를 거듭하여 개성까지 밀려났다.
이에 크게 쫄은 인조는 강화도로 줄행랑을 쳤으며, 2월 9일 후금은 유해(劉海)를 강화도로 보
내 명나라의 연호를 폐할 것과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하며 항복을 제의했다. 후금의
파상적인 공격에 염통이 쪼그라든 인조는 바로 교섭에 응했고, 양국이 형제국(후금이 형, 조
선이 아우)의 관계를 맺는 정묘조약(丁卯條約)을 맺고는 바로 군사를 돌렸다. 조선은 왕자 대
신 종실인 원창군(原昌君)을 인질로 보냈다.

② 병자호란 발발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명나라 연경(燕京)까지 쳐들어가 크게 세력을 넓혔다. 이윽고 조선에게
군신(君臣)관계로 고칠 것과 황금과 백금 1만 냥, 말 3천 필, 군사 3만을 요구했으나 인조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자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와 마부태(馬夫太)를 보내 다시 군신
관계를 요구하니 후금의 무례에 뚜껑이 뒤집힌 인조는 사신 접견을 거절하고 전국에 비밀리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을 공격할 채비를 한다.

조선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음을 깨달은 용골대는 겁에 질러 서둘러 도망을 쳤는데, 운이 좋
게도 인조가 평안도에 보낸 선전유문을 입수하여 태종에게 보냈다. 인조의 격문에 뚜껑이 핵
폭탄만큼이나 폭발한 태종은 더욱 강도를 높여 조선을 위협했으며, 1636년 4월 황제를 칭하고
나라 이름을 '청(淸)'이라 하였다. 허나 조선은 여전히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으며 오로지 무
시로 일관했다.

청태종은 조선을 제대로 응징하고자 1636년 12월 2일, 청군 7만과 몽골과 요동에서 징발한 몽
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12만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의주부윤(義州富潤) 임경업이
백마산성에서 그들을 막아섰으나 정묘호란 때 그에게 크게 혼쭐이 난 적이 있어 그냥 비켜가
버렸다.
빈수레가 요란하듯, 청을 공격하자며 선전유문까지 뿌린 조선 조정은 정작 전쟁준비와 첩보망
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개판이었다. 그들은 12월 13일이 되서야 임경업과 김자점(金自點)이
보낸 장계를 보고 청군의 침입을 알았던 것이다.

12월 14일 청군이 개성을 넘자 엉덩이에 불이 난 조정은 서둘러 강화도로 줄행랑을 치려고 했
다. 허나 그날 밤 청군 선봉이 영서역(迎曙驛, 서울 불광동)에 이르고, 선봉장 마부태(馬夫太)
는 이미 인왕산 서쪽 홍제원(洪濟院)에 도착해 도성(都城)을 노리고 있었다. 게다가 한강까지
차단시켜 강화도로 가는 길을 미리 막아버렸다.
이에 울상이 된 인조와 신하들은 피난길을 멈추고 다시 환궁하여 속절없이 대책을 논의하다가
평안도 철산부사(鐵山府使)를 지냈던 지여해(地如海)가 자신에게 정병 500명을 주면 홍제원을
공격해 청의 선봉부대를 때려잡겠다고 했다.
허나 나약한 신하들의 반대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최명길(崔鳴吉)이 술과 고기를 싸가지
고 홍제원 청군 진영을 찾아가 시간을 좀 벌기로 했다. 최명길이 청군 선봉장에게 왜 쳐들어
왔냐고 항의하며 그들의 발을 묶는 동안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을 쳤다.


▲  귀부만 남은 비석
귀부 거북의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왜 자신이 그런 굴욕적인 비석이
되어야 했을까? 번민에 잠긴 것은 아닐까? 그의 표정은 오늘날
강대국 틈바구니에 치여 사는 우리의 자화상 같다.


③ 도망치는 인조와 남한산성(南漢山城) 항쟁
12월 14일 인조는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줄행랑을 쳤다. 세자의 말고삐를
잡던 관리가 도망을 치자 세자가 손수 채찍을 잡았을 정도이니 그 꼬라지가 참 말이 아니다.
광희문(光熙門)을 지나자 청군의 침입에 겁을 먹은 서울 백성들의 피난행렬과 뒤범벅이 되었
는데, 인파에 휩쓸리고 엎어지면서 그 곡성은 하늘을 진동했다고 전한다.

저녁 무렵 얼어붙은 송파나루를 건넜는데, 이때 인조를 수행한 사람은 겨우 5~6명, 왕의 체통
은 산산히 구겨졌다. 백성들이 살려달라고 배에 마구 매달리는 것을 매정하게 칼로 내리찍어
백성 여러 명이 죽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얼마나 춥던지 인조의 발에 동상이 걸려 오금동 백
토고개에 이르렀을 때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인조는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아이고 내 오금이야'
주접을 떨었는데, 그런 연유로 오금동(梧琴洞)이란 지명이 생겼다. 간
신히 털방석을 하나 마련하여 수행원이 방석 모서리를 들고 인조를 호종했다고 하니 왕을 잘
못 만난 신하들의 노고에 눈물이 날 정도이다.

12월 15일 자정에 이르자 간신히 남한산성 남문에 이르렀다. 성에 들어오자 훈련대장 신경진(
申景禛)에게 성을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격문(檄文)을 띄워 군사를 모으는 한편, 명나라에
서둘러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구했다. 그리고 영의정 김류(金瑬)의 건의로 야음을 틈타 다시
강화도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산길에 얼음이 얼어 왕이 탄 말이 미끄러져 자빠졌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걸어서 갔으나, 여러 번 얼음길에 꽈당하여 체면이 말이 아니므로 다시 산성으로 돌
아왔다.
12월 16일이 되자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 밑까지 들이닥치고, 1637년 1월 1일 청태종의 본
진이 송파에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대군을 집결시키면서 성은 완전히 고
립되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자 경기도 여러 고을의 수령들은 서둘러 군사를 꾸리고 산성으로 들
어갔다. 이렇게 군사가 모아지면서 성을 지키는 군사는 13,000명으로 늘어났다. 허나 성에서
보유하고 있는 쌀이 14,300석, 장 220항아리로 겨우 50일 정도의 식량 밖에는 없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탓이다.

탄천에 이른 청태종은 군사를 보내 남한산 동쪽 망월봉(望月峰)에서 성 안을 살피게 하면서
성을 공격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두며 포위만 했다. 조선군의 식량 사정을 간파한 것이다.
성 안에 갇혀 몸이 근질근질했던 장수들은 군사를 이끌고 종종 성밖을 나와 주변을 서성이던
청군을 죽여 군의 사기를 올렸으나, 겨우 서너 명에서 수십 명을 죽이는데 불과했다. 이건 어
디까지나 청군이 조선군에게 던진 얄미운 미끼였던 것이다.

이렇게 소규모 전투로 승리에 도취해 있던 인조와 신하들은 40일이 지나자 식량부족으로 매우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못난 왕과 신하들은 그래도 우선 순위로 밥이라도 먹겠지만 군사
들과 내관, 궁녀를 비롯한 소위 아랫 것들은 그러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문을 닫아
걸고 구원군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구원군은 죄다 청군에게 격파 굴욕을 당하면서 그들의 성적
도 시원치 못했다.
① 충청도관찰사 정세규(鄭世規)의 군사는 험천(險川, 성남 분당구 남부)에서 패해 남포현감
이경(李慶)이 전사
②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泳)의 군사는 광주 쌍령에서 패
배, 두 병사(兵使)가 전사
③ 전라병사(全羅兵使) 김준용(金俊龍)은 수원 광교산(光敎山)에서 청나라 장수 액부양고리(
額駙揚古利)를 죽이고 유일하게 대승을 거뒀으나 방심하여 패주
④ 그 외에 평안도관찰사 홍명구(洪命耉)는 강원도 금화(金化)에서 전사, 부원수(副元帥) 신
경원(申景瑗)은 평안도 맹산(孟山) 철옹(鐵甕)에서 생포됨, 도원수(都元帥) 김자점은 토산(兎
山)에서 패주, 강원도관찰사 조정호(趙廷虎)와 함경도관찰사 민성휘(閔聖徽)의 군사도 패배

게다가 명나라 또한 이미 망조가 들어 원군을 보낼 처지가 아니었다. 겨우 등주총병(登州總兵
) 진홍범(陳弘範)을 시켜 수군이라도 보내려고 했으나 바람과 파도로 보내지도 못했다. 그 외
에 전국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나 정홍명(鄭弘溟) 등이 많은 의병을 이끌고 올라갔으나 너무
늦어서 공주(公州)에서 해산했다.


▲  삼전도 굴욕 장면, 수항대에 높이 앉은 청태종의 위엄이 돋보인다.
(석촌동 삼전도비 어린이공원에 있었음)

④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삼전도 굴욕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면서 사방에서 달려오는 구원군을 격파하는 한편, 주변을 노략질하
면서 아주 느긋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남한산성을 지키는 조선군은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성을 넘어 항복하는 병사가 속출했고, 유난히도 징한 추위로 얼어죽는 병사도 적지 않았
다. 
상황이 이토록 최악에 치닫자 좌의정 홍서봉(洪瑞鳳)과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을 청태종에
게 보내 최명길이 작성한 국서를 보내고 화해를 청했으나 청태종은 조선 왕이 직접 자기 군문
에 항복하고 전쟁을 주장한 사람 2~3명을 결박지어 보내라고 답을 보냈다.

그 답에 뚜껑이 뒤집힌 인조는 다시 대책을 강구했으나 항복하자는 주화파(主和派)와 싸우자
는 주전파(主戰派)가 서로 소리를 지르며 논쟁을 벌이니 뾰족한 대책을 없었다. 그러다가 1월
말 강화도가 떨어졌다는 소식이 날라오자 이내 기가 꺾여 항전 45일 만에 성문을 열고 백기를
들고 만다.
항복이 결정되자 김상헌(金尙憲)과 정온(鄭蘊)은 자살하겠다고 난리를 쳤으나 실패했고, 최명
길이 청태종을 찾아가 인조의 항복 문서를 들이밀었다. 허나 청태종은 그동안 조선에게 당한
개무시를 제대로 설욕하고자 다음의 강화조약을 제시했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의 예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명과의 관계를 끊으며, 명에서 받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와 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심양(瀋陽. 청나라 수도)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 황제의 생일)과 정조(正朝), 동지(冬至), 천추(千秋, 황후/황태자의 생일), 경
   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군사를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 1639)부터 일정하게 세폐(歲幣)를 보낼 것


하나 같이 어처구니가 없는 요구들이지만 인조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청의 요구를 받
아들이고 2일 뒤인 1월 30일, 세자와 신하, 수행원 500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을 나왔다. 청
태종은 삼전도에 수항단(受降壇)을 쌓고 그 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대국의 위엄을 부리며
인조를 기다렸다.
그곳으로 안내된 인조는 태종의 요구에 따라 무릎을 꿇고 굴욕적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3
번 절을 하고 절을 할 때마다 3번씩 총 9번 이마를 땅바닥에 박는 것)의 항례(降禮)를 치뤄야
했다. 인조의 머리박기 굴욕에 세자와 신하들은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통곡을 했고, 청나라
장수와 군사들은 통쾌해 했다.

그렇게 삼전도 굴욕을 치른 인조는 서울로 환도했으며,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
와 빈궁(嬪宮),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인질로 삼고, 척화파 인물인 김상헌을 비롯하여 홍익한
(洪翼漢), 윤집(尹集) 등을 데리고 2월 15일 철군했다. 또한 조선 사람을 무수히 포로로 잡아
갔는데, 그 수가 최대 50만이나 된다는 설이 있다. 특히 사대부와 왕실의 여인을 무수히 잡아
가면서 풀어주는 대가로 상당한 돈을 요구했다.
그들이 돈을 치루고 고생 끝에 귀국을 해도 정작 양반사대부들은 쓸데없는 유교 이념을 내세
워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집으로 데려가지 않고 오히려 손가락질하여 심각한 사회문
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인조는 무악재 북쪽 홍제천(弘濟川)에서 목욕을 하면 잃었던 정절을 되찾은 것과 같다
며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고 왕명을 내리기도 했다. 당시 청에 끌려가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
녀(還鄕女)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바람 피운 여자를 쌍스럽게 표현한 '화냥년'의 유래가 되었
다.

이렇게 하여 병자호란은 청의 빛나는 대승리, 조선의 쪽팔리는 대참패로 막을 내렸다. 광해군
이 이런 비극을 피하고자 중립외교로 실리를 취하며 국방을 키웠건만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
대주의에 환장한 지배층과 인조의 그릇된 정책이 이런 화를 자초한 것이다. 조선이 정절처럼
가지고 있던 명에 대한 사대(事大)의 긍지, 그리고 나라의 자존심이 일개 오랑캐로 무시했던
청나라에게 보기 좋게 짓밟힌 것이다.
그 충격은 조선 지배층에게는 실로 엄청났다. 인조도 그렇고 양반사대부와 유생들까지 그 휴
유증에서 오랫동안 허우적거린 것이다. 또한 백성들의 피해도 상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청
나라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

⑤ 삼전도비의 탄생
1639년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라며 글을 지어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인조
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글을 쓸 문인을 찾았
지만 아무도 나서질 않자 간신히 장유(張維)와
와 조희일(趙希逸)을 시켜 지은 글을 보냈다.

허나 태종은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다며 계속
퇴짜를 놓았다. 그래서 인조는 특명으로 이경
석(李景奭)에게 글을 쓰게 했고, 그 글을 보고
흡족한 태종은 이를 비석에 새기라고 지시했다.

▲  삼전도비 귀부의 앞모습

1639년 12월 8일 인조는 공조(工曹)를 시켜 삼전도 수항단터에 높게 제단을 만들어 그 위에
삼전도비를 세웠는데, 글씨는 서예가로 명성이 높던 한성판윤(漢城判尹) 오준(吳竣)이 썼다.
글씨 또한 아무도 쓰지 않으려는 것을 그가 억지로 맡아 쓰게 된 것이다.
오준은 자신의 자랑거리인 글재주를 나라의 치욕스런 비문을 쓰는데 사용된 것을 매우 부끄럽
게 여겼다. 하여 비석이 완성되자 바로 벼슬을 버렸으며, 붓을 부러트려 다시는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런 비문을 써야했던 자신의 오른손까지 돌로 마구 찍어 병신을 만들었
다. 허나 조정 신하들은 비석 제작에 억지로 참여했던 이경석과 오준을 두고두고 우려먹으며
탄핵했다.

비문은 한자와 몽골 문자, 만주 문자 등 3개의 문자로 되어있는데, 비문 뒤쪽의 왼쪽은 몽골
문자 20행, 오른쪽에 만주 문자 20행이 박혀 있으며, 앞쪽에는 칠분해서체 한문으로 쓰여있다.
청나라가 조선을 공격한 이유와 조선이 항복한 경위,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회군(回軍
)한 내용, 침략을 공덕이라 미화한 개소리 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내용은 대략 이렇다.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리니, 만물을 죽이기도 하고 생육(生育)도 한다. 오직 황제(청태종)
만이 이를 본받아 위엄과 은덕을 아울러 핀다.
황제가 동방(조선)을 정벌하니 그 군사가 10만이라 위세가 뇌성벽력처럼 천지를 진동하니 군
사가 범처럼 용맹하고 맹수처럼 날쌔어라. 서번(西蕃)의 궁발(窮髮)과 북락(北落)이 창을 잡
고 앞에 달리니 그 위세가 더욱 찬란하구나. 지극히 인자한 황제는 은혜로운 말씀을 내리니,
10줄의 조서가 밝아 이미 엄숙하고 온화하기 그지없어라.
처음에는 미혹하여 알지 못해 스스로 재앙을 불렀구나. 황제의 밝은 가르침, 마치 자다가 깨
어난 듯,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신민을 이끌고 귀순하도다. 위엄이 두려워서가 아닐세.
오직 덕에 의지함이라. 황제가 착하게 여기어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도다. 화(和)한
안색과 기쁜 웃음으로 무기를 거두었네. 무엇을 예물로 주었는가. 경마(輕馬)와 경구(輕裘)를
주었도다.
도성의 사녀(士女)들이 모두 노래하여 황제의 은덕을 칭송하네. 우리 임금이 돌아옴은 황제의
은덕이라. 황제가 회군하여 우리 백성을 살리도다. 우리의 탕잔(蕩殘)함을 불쌍히 여겨 농사
를 권하니, 국토는 옛날과 같이 되고 조정이 새로워졌네.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얼어붙은
풀뿌리에 다시 봄이 오도다. 한강 가에 우뚝 선 비석에 아로새긴 황제의 아름다운 공덕, 삼한
(三韓)에 영원토록 빛나리라'

비석은 원래 청나라군이 머물렀던 삼전도(송파나루)에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삼전도
비에 이를 갈던 백성들이 비석을 때려눕혀 묻어버리면서 100년 이상 제자리를 알 수 없게 되
었다. (고종의 명으로 땅에 묻었다고도 함)
그러다가 왜정(倭政)이 1913년 고적(古蹟)이란 이름으로 파내서 다시 세웠고, 1956년 치욕적
인 비석이라 하여 다시 때려눕혀 생매장시킨 것을 1963년 홍수로 얄밉게도 모습을 드러내자
사적으로 지정해서 보호했다. 이후 1983년 5월 석촌동 아름어린이공원으로 옮겼는데, 그때 삼
전도 굴욕을 담은 부조비(浮彫碑)을 만들었다.

문화재보호법으로 비석 반경 100m 안에 건물 재건축이 힘들어 민원이 쇄도하자 송파구청에서
2003년 문화재청에 비석의 이전을 요구했다. 재건축 민원 때문인 것도 있지만 집 부근에 치욕
의 산물이 있다는 점도 지역 주민들에게는 꽤나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만약 고구려의 광개토
태왕(廣開土太王)비였다면 그렇게까지 민원을 때렸을까?
비석 이전을 두고 송파구청과 문화재청 등이 오래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의 제자리를 더듬고자
서울학연구소에 의뢰한 결과 석촌호수 서호 북동쪽 수중이 원래 자리임을 확인했다. 하여 그
곳과 가까운 서호 언덕으로 옮기기로 문화재청과 합의를 보았고 2010년 봄, 지금 자리로 이전
되었다.

현재 비석은 2기로 1기는 귀부만 달랑 있는데, 이 비석이 처음 지어진 것이다. 허나 청나라에
서 더 크게 비석을 세울 것을 요구하여 기존 비석은 그냥 두고 옆에 새로 비석을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5.7m, 비신(碑身) 높이는 3.95m, 너비 1.4m이며, 무게는 무려 32톤이나
나간다.


▲  비석의 꼭대기와 이수(螭首) 부분
이수 아래에 쓰인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는 청나라 사람으로 한족
출신인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여의주(如意珠)를 두고 다투는 이무기의
모습이 꽤 생동적이다.


비석의 정식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이다. 허나 그렇게 부르기에는 너무나 열불이 나므로 조
선 사람들은 간단히 '한(汗)의 비'라고 불렀다. 여기서 한은 북방 민족의 우두머리를 뜻한다.
청태종은 큰 나라의 황제가 아닌 일개 북방 오랑캐의 우두머리로 얄잡아 부른 것이다. 1963년
그를 사적으로 지정하면서 지명을 따서 그냥 삼전도비라 불리게 되었다.

수치스러운 비석이라고 마냥 해코지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므로 더욱 보
존에 힘써야 될 것이다. 또한 삼전도비는 우리에게 강하게 경고한다. 말못하는 자신들에게 분
풀이나 저지르지 말고 그런 역사를 거울로 삼아 그런 개망신을 당하지 말라고, 다시는 자신과
같은 비석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고, 더 이상 굴욕의 대상이 아닌 주변 나라를 굴복시키는
주체가 되라고 말이다. 주변 나라가 우리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앞다투어 항복의 예를 올리는
그 순간 귀부의 표정도 씨익~ 밝아질 것이다.

이렇게 하여 4월 석촌호수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삼전도비 귀부의 뒷모습

▲  귀부만 있는 비석의 뒷모습
주저앉은 뒷발과 오그라든 꼬랑지가 귀엽다


* 삼전도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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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논산 불명산 쌍계사 (송불암 미륵불)

 


' 여름맞이 산사 나들이 ~ 논산 쌍계사, 송불암 '

▲  쌍계사 대웅전

▲  쌍계사의 자랑, 대웅전 꽃창살

▲  송불암 미륵불


 

여름이 봄을 몰아내고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의 첫 무렵, 오랜만에 충남 논산(論山)을
찾았다.
논산으로 멀리 발걸음을 한 것은 그곳 쌍계사의 꽃창살이 그렇게나 아름답고 유명하다 하
여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자 함이다. 그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겠지?
다행히 쌍계사입구까지는 시내버스가 1일 10여 회 오가고 있어 접근편도 벽지치고 양호하
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영등포역에서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담아 논산역으로 보냈다.
논산까지는 3시간 정도가 걸렸는데, 버스 시간에 아직 여유가 있어 논산역 동쪽에 자리한
논산시내버스 종점(덕성여객)으로 이동해 차를 기다렸다. 논산시내버스는 일부 외곽 지선
을 제외하고 모두 여기서 출발한다. 
 
세월이 무지 빠르다고 하는데 정작 무엇을 기다리는 시간은 반대로 느린 것 같다. 잡생각
을 머리 속에 마구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억지로 시간을 죽이니 어느덧 출발시간이다.
그래서 타는 곳으로 나가니 쌍계사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405번(논산역↔임화리)이 다가와
활짝 입을 벌린다.
그 버스를 잡아타고 논산시내를 가로질러 은진미륵(恩津彌勒)으로 유명한 관촉사(灌燭寺),
사육신(死六臣)의 하나인 성삼문(成三問)묘소<이곳에는 그의 다리 한쪽이 묻혀있다고 함>
를 지나 쌍계사입구인 중산리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부터 쌍계사까지 잘 닦여진 2차
선 도로(중산길)를 따라 30분 정도 걸어 들어가야 된다.


▲  중산리에서 쌍계사로 인도하는 중산길


 

♠  쌍계사(雙磎寺) 입문

▲  강병흠과 평택임씨 정려비(旌閭碑)

중산리에서 쌍계사로 가는 길은 인적도 거의 없는 고적한 길이다. 집도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
낼 뿐, 거의 산과 밭으로 이루어진 자연 지대로 살며시 스쳐가는 산바람 소리, 가끔씩 지나가
는 차량 소리가 이곳 소리의 전부이다. 그런 길을 혼자 유유자적 거니니 마치 그 길을 통째로
전세를 낸 듯한 즐거운 기분이 가득 들고 걷는 길도 그리 지루하지가 않다.

그런 길을 약 1km 정도 가면 길 왼쪽에 돌로 만든 특이한 비각(碑閣)과 그 안에 담긴 매끈한
피부의 비석이 잠깐 나좀 보고 가라며 하소연을 한다. 하여 잠시 길을 멈추고 살펴보니 강병
흠(姜抦欽)과 평택임씨(平澤林氏) 부부의 정려비이다.

비석의 주인공인 강병흠은 진주강씨로 구한말과 20세기 초반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첨지중
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를 지냈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대단하기로 명성이 높았다. 어느
한겨울에 부모가 잉어를 먹고 싶다고 투정을 부리자 저수지의 두꺼운 얼음을 깨서 잉어를 잡
은 적이 있으며, 아버지가 병으로 드러눕자 밤낮으로 약을 달이며 병간호를 했는데, 꿈속에서
친할머니가 나타나 아버지의 병에는 산삼이 최고라며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하여 다음날 그
곳에 가보니 정말 산삼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몇 년 뒤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였으며, 결국 그가 사
망하자 무려 6년씩이나 시묘살이를 했는데, 불효에 대한 자책감으로 옷자락에 항상 돌을 담고
다녔다. 하여 사람들은 그를 포석효자(包石孝子)라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강병흠의 부인인 평택임씨도 대단한 열녀(烈女)라 시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했고, 남편이 죽자
자결을 했다. 그래서 그들 부부의 효행과 열행(烈行)
을 기리고자 1922년에 정려비를 세웠다.

처음에는 1칸짜리 기와 정려각을 씌웠으나 건물이 낡자 1993년에 지금의 석조물을 세우고 내
부에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김용제(金容濟)가 짓고, 이종성(李鍾聲)이 글씨를 썼으며, 비문
에는 '孝子僉知中樞府事 姜抦欽 閭配, 烈女 淑夫人 平澤林氏之閭(효자 첨지중추부사 강병흠
정려, 열녀 숙부인 평택임씨지여)'라 쓰여 있다.

           ◀  열녀 해주오씨 비석
강병흠 부부의 정려비에서 잠깐 옷깃을 여미고
다시 길을 재촉하면 얼마 안가 고색의 때를 절
반 정도 탄 해주오씨 열녀비가 모습을 비춘다.
비석 주인공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비
석의 상태로 보아 19세기 인물로 여겨지며, 앞
서 평택임씨 못지 않은 열녀였던 모양이다.

           ◀  영명각(靈明閣) 입구
쌍계사 주차장을 지나 3분 정도 오르면 늘씬한
숲길과 함께 영명각을 알리는 표석이 마중한다.
영명각은 1975년에 농업진흥공사가 금강(錦江)
유역 300핵타르의 개답(開畓) 공사를 벌이면서
무연고 무덤 유골 3,000기를 수습해 봉안한 납
골당이다.
이후 건물을 확장하여 논산시민의 납골당(논산
시 공설봉안당)으로 바쁘게 살고 있다.


▲  쌍계사 밑에 자리한 그림 같은 호수, 절골소류지(沼溜地)

영명각입구 맞은편에는 너른 호수인 절골소류지가 있다. 작봉산(불명산)이 베푼 청정한 물이
쌍계사를 끼고 졸졸졸~♪ 흐르다가 이곳에 모여 대장정을 준비하는데, 삼삼한 숲에 둘러싸인
소류지의 자태는 정말 아름답기 그지 없다.


▲  영명각 입구에서 쌍계사로 인도하는 숲길
하늘을 가릴 정도로 무성한 숲, 그 숲이 베푸는 숲내음과 그늘, 거기에 옆에
붙은 소류지까지, 이곳만큼은 여름 제국도 눈치를 보며 비켜간다.

▲  쌍계사 부도(浮屠)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80호

길을 거닐다보면 왼쪽 언덕에 옹기종기 모인 부도(승탑)의 무리를 만나게 된다. 부도는 모
두 9기로 원래는 절 주변에 흩어져 있었는데, 20세기 후반에 이곳으로 모두 집합시켰다.
고색의 내음을 깊게 내뿜고 있는 그들은 석종형(石鐘形) 6기, 옥개석(屋蓋石)을 갖춘 탑 3기
로 이루어져 있다. 석종형은 높이 150cm 내외로 4각 또는 6각의 바닥돌을 깔고 그 위의 기단
(基壇)과 석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바닥돌과 기단에는 연꽃무늬 장식을 새겨 맨돌
의 식상함을 덜어준다.
옥개석 부도는 높이 130cm 내외로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대좌를 받치는 바닥돌은 4
각 또는 6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중/하대로 구분된 기단부(基壇部)에는 연꽃무늬 연주문과
화문(花紋)이 새겨져 있고, 탑 꼭대기에는 구슬 장식이
얹혀져 있다.

이들 부도 중 2기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翠峰堂 慧燦大師之屠(취봉당 혜천대사 부도)','梅
憲~~之塔(매현 ~~의 탑)' 정도의 글씨만 확인이 가능하다. 나머지 글씨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크게 흐트러져 알 수가 없으며, 부도의 조성시기는 조선 중~후기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쌍계사 부도

▲  쌍계사 중건비(重建碑)

부도의 보금자리 한쪽에는 중건비라 불리는 비석이 미운 오리새끼 마냥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는 1739년에 쌍계사를 중수하면서 세운 것으로 높이 156cm, 너비 78cm이며, 땅바닥에 자연석
을 깔아 비석을 세울 수 있도록 홈을 파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운 다음에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이다.
쌍계사의 내력을 머금은 절의 일기장으로 비석 앞면에 절의 내력을, 뒷면에는 시주자의 이름
이 새겨져 있으며, 김낙증(金樂曾)이 찬(撰)을 하고, 이화중(李華重)이 글씨를, 김낙조(金樂
祖)가 글을 새겼다.


▲  쌍계사 봉황루(鳳凰樓)

숲길을 지나면 주차장과 봉황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숲에 감싸인 주차장 좌우로 2개의 조그만
계곡이 소류지로 흘러가고 있는데, 바로 여기서 쌍계사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즉 2개의 계곡
이 만나는 절이란 뜻이다.

주차장을 굽어보는 봉황루는 쌍계사의 정문이다. 이곳은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아직 장만
하지 못해서 소류지 숲길이 그 역할을 대신하며 속세(俗世)와 절의 경계를 가르고 있는데, 제
아무리 천하의 독종, 번뇌라 한들 삼삼한 숲과 소류지의 경계를 뚫고 절까지 침투하기는 힘들
것이다. 허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 또한 번뇌라 아무리 던져본들 그 자리를 맴돌아 결국
소류지 밑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이 절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봉황루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누각이다. 정문 외에 조
촐하게 강당(講堂) 역할까지 하고 있는데, 근래 손질을 했는지 딱히 고색의 내음이 느껴지지
않는다. 1층에는 경내로 인도하는 돌계단을 늘어뜨렸으며 그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마치 해
가 떠오르듯 솟아오른다.
2층에는 북과 '쌍계사 봉황루 등루부운(登樓賦韻)'이란 시가 적힌 현판이 있는데, 이 시는 5
언율시(五言律詩)로 어느 노승(老僧)이 1779년에 이곳을 찾아 지은 것이다. 이를 통해 적어도
18세기에는 봉황루가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그럼 여기서 잠시 쌍계사의 내력을 짚어보도
록 하자.


▲  봉황루의 뒷모습
봉황루 등루부운(登樓賦韻) - 1779년 어느 노승이 지음

고루에 나홀로 누워                  高樓我獨臥
마음은 하늘을 찾아 날아오르네       心適上飛天
산봉우리들 사이에 흰 구름이 머물고  衆峀雲留白
여러 시내에 달 그림자 비치네        群溪月影輝
석등은 불실을 밝게 비추고           夕燈明佛室
아침 비는 선문을 어둡게 하네        朝雨暗仙扉
날마다 금모래 연못을 감상하니       日賞金沙池
몸은 세속으로 돌아감을 잊네         身忘俗諦歸

▲  봉황루 2층에 있는 태극마크 북

▲  경내 북쪽 석축 위에 닦여진 돌탑들

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논산 쌍계사는 작봉산(鵲峰山, 419m) 북쪽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동/서/남이 모두 작봉산 산줄기
에 막혀있고, 오로지 북쪽만 뚫려있기 때문이다.
쌍계사를 품은 산의 이름은 '작봉산'으로 '불명산(佛明山)'이란 이름까지 지니고 있는데, 이
는 산의 옛 이름이 불명산이기 때문이다. 하여 쌍계사는 절에 어울리게 '불명산 쌍계사'를 칭
하고 있다.

쌍계사는 10세기 후반에 이곳에서 가까운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세운 혜명대사(慧命大師)가 창
건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믿을 바가 못되며, 창건자와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
중(五里霧中)을 헤매고 있다. 다만 고려 후기 서화가였던 행촌 이암(杏村 李嵒, 1297~1364)이
발원하여 중건했다는 내용이 중건비에 적혀있어 이때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 끝 무렵에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절의 연기(緣起)를 썼다고 전하며, 초창기 절 이름
은 백암사(白庵寺) 또는 백암(白庵)이었다.

왕년에는 500~600여 칸의 건물이 있을 정도로 호서(湖西) 제일의 대가람(大伽藍)을 자랑했는
데, 극락전을 비롯해 선원(禪院), 관음전, 동당(東堂), 서당(西堂), 명월당, 백설당, 장경각
등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허나 그렇게 잘나갔던 쌍계사는 조선시대를 거치면
서 크게 야위어 갔고, 여러 번의 화재로 1716년에 대웅전 등을 중창했으나 1736년 다시 화재
가 찾아와 1739년에 중건을 하고 중건비를 세웠다.
조선 후기와 왜정(倭政) 때는 그런데로 절을 유지했으며, 6.25 시절에는 다행히 총탄이 비켜
가 별 피해는 없었다. 이후 별다른 큰 불사(佛事) 없이 지금에 이른다.

절은 지형을 이용해 넓게 터를 다졌는데, 북쪽과 서쪽, 동쪽에 석축과 돌담을 쌓고, 북쪽 가
운데에 봉황루를 내어 정문으로 삼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봉황루, 나
한전, 칠성각, 명부전, 요사 등 8~9동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뜨락이 매우 넓은 것이 특징
이다. 한때는 그 뜨락에도 건물이 가득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모두 사라지면서 수풀
만 무성하게 된 것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과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지방문화재인 부도
가 있으며, 계룡산 갑사(甲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머물고 있는 월인석보(月印釋譜) 판각
이 원래 이곳에 있던 것으로 여기서 만들었다고 전한다.

쌍계사에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많이 서려 있다. 그 전설을 모두 다루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므로 그중 일부만 끄집어 보도록 하겠다.

① 창건설화 - 먼 옛날, 하늘의 상제(上帝)가 이 땅에 절을 하나 짓고자 자신의 아들을 내려
보냈다. 아들은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우기로 하고 천하에 진귀한 나무를 구해와서 주변 경치
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절을 세웠다.
② 하마비(下馬碑) 전설 - 때는 고려 후기 어느 날, 쌍계사 주지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승
려 1명이 나타나
'그곳에 쫓기는 승려가 찾아 올 것이니 잘 대접하시오. 허나 임금 왕(王) 자의 성을 가진 사
람이 말을 타고 들어오면 큰일이 날 것입니다!'
이후 세상이 더 혼란해지면서 많은 승려가 난을 피해 쌍계사로 들어오니 주지는 그들을 모두
맞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산을 뒤흔들 듯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탄 군사가 절을 향해 달
려오고 있던 것이다. 절에 있던 사람들이 불안에 떨자 주지는 목탁을 치며 불경을 외기 시작
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 모두 독경을 외웠는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절로 치닫던 말들이
절 앞에서 서로 뒤엉키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말을 탄 군사들은 말들의 때아닌 발작 증세
에 모두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후에도 똑같은 일이 계속 생기자 어느 누구도 말을 타고 절에 들어갈 생각을 못했다. 또한
말이 때거지로 죽은 곳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를 세웠는데, 세월이 지나자 엉뚱하게
도 죄 지은 사람의 죄를 풀어주는 영험이 있는 비석으로 둔갑되어 불공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
다.

* 쌍계사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 3 (중산길 192 ☎ 041-741-2251)


▲  봉황루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위엄


 

♠  쌍계사 둘러보기

▲  쌍계사 연리근(連理根)

논산 쌍계사는 솔직히 대웅전만 알았지 나머지는 아는 것이 없었다. 절의 역사도 제법 오래되
고 보물로 지정된 장대한 대웅전도 있으니 절 규모도 어느 정도 될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정
작 경내로 들어서니 내 생각과는 완전 다른 허전한 모습의 쌍계사가 나를 맞이했다.

봉황루를 들어서면 바로 정면으로 대웅전이 보이는데, 바로 코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거리
도 제법 떨어져 있다. 봉황루와 대웅전 사이에는 뜨락이 넓게 펼쳐져 있으나 그냥 뜨락만 있
을 뿐, 연리근 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옛날에는 그 자리에 건물이 가득 있었겠지만 다 사라
지고 빈 자리만 남은 것이다. 뜨락 서쪽에는 오래된 연리근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동쪽에
는 조그만 요사와 선방이 자리한다. 그리고 건물 상당수는 대웅전 좌우와 뒷쪽에 띄엄띄엄 떨
어져 있다.
이렇게 경내에 놀고 있는 땅이 많으니 요란하게 중창불사를 벌일 만도 한데 아직은 그럴 생각
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뜨락이 너무 허전하니 조촐하게 건물 몇 개라도 세워 그 공허함을
달랬으면 좋겠다. 세상에 이렇게나 넓은 법당(法堂) 뜨락도 처음 보고, 경내 중심에 이렇게
공터가 넓은 절도 처음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쌍계사 연리근

대웅전 뜨락 서쪽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연리근은 겉으로 보면 1그루 같지만 엄연한 2그루의
느티나무(괴목나무)이다. 이들은 서로 뿌리가 만나 이렇게 하나의 나무처럼 되었는데,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 줄기가 서로 겹치면 연리목(連理木), 가지가 하나가 되면 연리지(連理枝)라고
부른다.

이 연리근은 수백 년(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음) 묵은 장대한 나무로 쌍계사의 오랜 내력을 알
려주는 소중한 산증인이다. 나무의 덩치가 대단하여 그늘 또한 넓기 그지 없는데, 나무 밑에
는 쉼터가 조성되어 있으며, 그늘의 질감과 솔솔 불어오는 산바람으로 이곳만큼은 무더위를
잊어도 좋다.


▲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오른쪽 맞배지붕 건물)
선방은 종무소(宗務所)의 역할도 겸하고 있으며, 그 앞에 조그만 건물은
찻집으로 전통차를 무료로 제공한다. (일부는 유료)

▲  동그란 석조(石槽)
작봉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것일까? 석조에는 그가 베푼 옥계수로 작은
바다를 이룬다. 목마름을 단죄하고자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입에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하다며 쾌재를 외친다.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좌측에는 명부전과 나한전, 칠성각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명부전은 20세기 초에 지어
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
王), 도명존자(道明尊者), 저승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는
데, 보통 절 건물은 가운데 문은 닫고 좌/우측 문을 열어두어 통행하게 하나 여기는 그 반대
로 가운데 문을 이용토록 했다.


▲  명부전 중심에 앉아있는 온후한 표정의 지장보살상과
무독귀왕(왼쪽), 도명존자(오른쪽)

▲  명부전 식구들
저승의 10왕과 판관(判官), 금강역사(金剛力士), 동자(童子) 등


▲  나한전(羅漢殿)
20세기 초에 지어진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  나한전 석가여래상과 석가후불탱

▲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조그만
16나한(十六羅漢)들

  ◀  나한전의 젊은 버전, 칠성각(七星閣)
경내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칠성(七
星)을 비롯해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
자)이 봉안되어 있다.

▲  칠성각 내부 - 왼쪽부터 산신탱과
칠성탱, 독성탱

▲  칠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
(왼쪽 나무가 연리근, 오른쪽 건물이 요사)


▲  석조관세음보살상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최근에 장만한 관세음보살상이 자리를 폈다. 관세음보살의 얼굴이
풍만하고 복스러운 것이 마치 중년 비구니 같은데, 비가 내려도 얼굴 부분은 절대로 젖지 않
는다고 한다. 하여 절에서 신비한 관세음보살상이라며 크게 치켜세우고 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참 어려운 현상 같은데, 그게 계속 되는 것을 보면 단순한 석조보살상은 아닌 모양이다.

관세음보살상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寶冠)이 씌워져 있으며, 얇아보이는 옷을 걸치며 가슴 주
위로 여러 장식을 둘렀는데, 앉아있는 대좌(臺座)에는 연꽃 무늬가 가득하다.


▲  관세음보살상에서 바라본 쌍계사 경내

▲  쌍계사 대웅전 - 보물 408호

쌍계사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것, 바로 이곳 법당인 대웅전이다. 바깥만 볼 것이 아니라 안에
도 말끔히 살펴보자. 그래야 저승에 가서도 염라대왕 형님에게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
만큼 쌍계사에서 대웅전의 비중은 막대하며 '대웅전은 곧 논산 쌍계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
다.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웅전은 법당에 걸맞게 경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솔직히 너무 일
방적으로 큼) 이상하리만큼 경내에 노는 공터가 많아 참 허전하기 그지 없는데, 그 허전함과
절의 조촐함을 대웅전이 제대로 커버를 해줄 만큼 든든한 모습이라 사진에 나오는 사람과 대
웅전을 비교하면 크게 실감이 날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살짝 치켜진 추녀마루의 선이 참 곱다. 마
치 큰 새가 날개짓을 하는 모습 같은데, 지붕이 건물 2층과 맞먹을 정도로 육중하기 그지 없
어 건물 밑도리가 그 큰 지붕을 어떻게 받쳐들까? 쓸데없는 걱정이 들 정도이다. 평방(平枋)
위에는 촘촘히 박힌 공포가 그 지붕을 받들고 있는데, 안쪽은 5출목(出目), 밖은 4출목이다.
이처럼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심어놓은 양식을 다포(多包)양식이라고 한다.

대웅전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작봉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절이 세워진 고려 때부터 있었을
것이다. 화재로 무너진 것을 1716년에 중창했고 화재로 또 전소된 것을 1739년에 다시 지었다.

건물 기둥은 굵고 희귀한 나무를 사용했는데, 그중 가운데 좌측 2번 째 기둥이 칡덩굴나무로
되어있다. 이 기둥은 윤달이 들은 해(4년에 1번, 2016년, 2020년, 2024년~)에 몸으로 안고 돌
면 죽을 때 고통을 면하게 된다고 한다.
1번을 안고 돌면 하루를 앓다가 가고, 2번을 안으면 2일, 3번 돌면 3일이라고 하는데, 유난히
3을 좋아하는 이 땅의 사람들의 습성상 3일은 앓고 가야 서운하지 않는다며 보통 3번을 안고
간다고 한다.
또한 염라대왕이 논산 쌍계사 출신인지 '자네 논산 쌍계사 다녀왔는가?' 물어본다고 한다. 그
러니 만약을 대비하여 쌍계사를 꼭 챙겨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대웅전 문짝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창살무늬

쌍계사하면 대웅전 꽃창살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을 다녀간 답사쟁이들은 하나 같이 꽃창살
을 쌍계사 제일로 찬양하기 때문이다. 나도 꽃창살의 풍문을 듣고 이곳에 온 것인데, 직접 그
들을 보니 그 말이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꽃창살의 갑(甲)으로 칭송받는 부안 내소사(來蘇寺
) 대웅보전의 염통까지 제대로 쫄깃하게 할 정도로 말이다.
회오리 모양과 바람개비 모양의 꽃잎 문양이 문짝마다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꽃잎 사이로 나
뭇잎 문양까지 달려 있어 실제 꽃잎이 달려있는 듯하다. 물론 자연산 보다는 좀 못해도 진짜
꽃들도 시샘을 보낼 정도로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  대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 보물 1,851호

대웅전 불단에는 장대한 모습의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이 각자 스타일에 맞는 후불탱을 뒤에 걸
치며 후덕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대웅전이 크니 집 주인인 석가여래와 그의 협시불(夾侍佛)
까지 덩달아 장대하여 대웅전과 꽃창살에 놀란 눈과 가슴을 더욱 놀라게 만든다.

이들은 흙으로 빚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조각승 원오(元悟)가 수조각승을 맡아 신현(信玄)과
청허(淸虛), 신일(神釰), 희춘(希春) 등 4명과 함께 1605년에 조성했다. 그때 쌍계사는 무려
2층짜리 건물을 세우고 그 안에 저들을 봉안한 것으로 보이는데, 석가여래 좌우로 약사여래(
藥師如來)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자리해 3불을 이루고 있다.
앙련(仰蓮)과 복련(앙련의 반대)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로 장엄하게 앉아있는데,
석가여래는 오른손을 무릎 밑으로 내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으며, 커다란 덩치
에 비해 손과 팔은 작아 보인다. 옷은 양쪽 어깨를 덮고 있지만 오른쪽이 더 진하며, 이를 변
형 편단우견(偏袒右肩)이라고 부른다. 가슴에는 수평의 승각기가 보이며, 법의(法衣) 자락도
규칙적인 간격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고, 좌우 불상도 크기만 약간 작을 뿐, 대체로 석가여
래를 따라하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은 편삼을 입고 그 위에 법의를 걸쳤다는 것이다.

이들 뱃속에서는 아주 고맙게도 발원문(發願文) 등 복장유물 4점이 나왔는데, 발원문에 통해
1605년이라는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 제작에 참여한 승려 이름을 알게 되었다. 분명한 제작
시기와 함께 조각승 원오의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어 충남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5
년 3월 국가 보물로 승진되었다.


▲  대웅전 천정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대웅전에 발을 들였다면 고개를 들어 천정을 보기 바란다. 온갖 기묘한 조화로 이루어진 천정
이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두 눈을 어느 정도 정화를 시켜줄 것이다.
천정에는 커다란 들보와 섬세하게 짜여진 공포, 용머리, 닫집, 25개의 네모로 이루어진 우물
천정(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불 천정에 우물천정 하나씩 있음), 극락조<極樂鳥, 가릉빈가
(迦陵頻伽)> 등이 정신없이 짜여져 있다. 들보와 공포에는 단청이 곱게 칠해져 있고, 용은 동
쪽 들보에 몸을 대고 불단을 굽어본다. 불상 위에는 붉은 기와집의 닫집과 천개(天蓋)가 있는
데, 마치 조그만 궁궐을 보는 듯 하며, 하얀 극락조가 날개를 퍼득이며 천정을 날고 있다. 그
야말로 휘황찬란이라 사람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  우물천정과 두툼한 들보, 그 들보에 몸을 기댄 용, 그리고
칠보궁(七寶宮)이란 현판을 내건 붉은 기와집의 닫집

▲  극락조가 날아다니는 천정 (들보와 닫집, 보개, 우물천정)
이곳이야말로 불국토(佛國土)의 축소판이 아닐까?

▲  대웅전 천정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불법(佛法)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을
빼곡히 담은 그림으로 법당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  대웅전 앞에 놓인 헝클어진 석재들
석탑의 일부로 여겨지는 연꽃무늬 석재와
맷돌의 일부가 나란히 놓여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었다.


▲  이렇게 큰 뜨락을 본 적이 있는가? 대웅전에서 바라본 뜨락과 봉황루

박석이 깔린 길이 봉황루에서 대웅전 앞까지 정연하게 펼쳐져 있다. 지금은 이렇게 허전한 공
간으로 있지만 혹시 아는가? 나중에 조그만 도시처럼 번잡한 공간이 될지도? 허나 너무 복잡
한 모습보다는 이렇게 여백의 미가 넘치는 모습이 더 좋아 보인다.


▲  쌍계사를 뒤로하며 소류지에 버려둔 번뇌와 다시 만나다 ~~

겉모습은 작지만 대웅전 하나로도 알맹이가 큰 쌍계사를 1시간 30분 정도 둘러보았다. 대웅전
내부를 뚫어지라 살펴보았고, 이곳에 서린 문화유산은 불상의 복장유물을 제외하면 모두 눈에
넣었다. 또 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잠깐이나마 그곳에 정이 들었는지 속세로
나가는 길에도 여러 번씩 뒤를 돌아보았다.

쌍계사에서 중산리로 나와 가게 문에 부착된 버스 시간을 보니 20분 뒤에 온다고 그런다. 딱
히 할 것도 없어서 정류장 주변을 서성이며 안그래도 빠른 시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시내
로 나가는 시내버스가 나타나 활짝 입을 연다. 하여 그 버스를 잡아타고 다시 논산역으로 나
왔다.

아직 일몰까지 여유가 넘쳐서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하다가 우리나라 서원의 주요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돈암서원(遁岩書院)을 가보기로 했다. 허나 서원은 격하게 땡기지는 않아서 다른
곳을 물색하다가 연산에 자리한 송불암 미륵불로 장소를 바꿨다. 서원보다는 절이 볼 것도 많
고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논산시내에서 송불암이 있는 연산(連山)까지는 시내버스와 시외직행버스가 제법 다닌다. 대전
으로 가는 주요 길목인데다가 구한말까지는 충청도의 주요 고을(연산현)이었기 때문이다.

논산역에서 연산, 계룡시 방면으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303번을 타고 1번 국도를 신나게 달려
연산에 진입, 연산 남쪽인 연산구4거리에서 내렸다. 여기서 우회국도 개설로 많이 한가해진
옛 1번 국도 2차선 도로(황룡재로)를 따라 동쪽(계룡 방면)으로 6~7분 정도 가면 송불암 입구
이고, 거기서 송불암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송불암이 모습을 비
춘다.


 

♠  오래된 미륵불과 소나무를 간직한 조그만 절
~ 논산 송불암(松佛庵)

▲  송불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송불암은 옛 절터에 지어진 작은 비구니 절로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이곳에 서린 오래된 미
륵불을 보고자 함이다.

송불암에 있던 옛 절은 미륵불을 통해 고려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보다 동쪽으로
50m 떨어진 산자락에 있었다고 하며, 절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미륵불과 주춧돌만 아련히 남아오다가 1946년에 인근 신양리에 살던 동상태의 어머
니가 2칸짜리 집을 짓고 절로 삼아 미륵불을 관리했다. 이것이 현재 송불암의 시작이다.
이후 1970년에 승려 경연이 절을 물려받아 주지승이 되었는데, 미륵불 바로 옆에 소나무가 석
불과 조화를 이루며 지붕처럼 퍼져 있다고 하여 송불암이라 하였다.

송불암에는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가 한토막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 어느 날, 법력이 높은 노승(老僧)이 기도를 마치고 걸망을 짊어지며 천하를 돌아다
니다가 연산 고을 인근 황룡산에 올라 땅을 살펴보니 절을 지으면 크게 될만한 명당(明堂) 자
리였다. 하여 그곳을 점찍어두며 주변을 보니 광산김씨가 중심이 된 부자 마을이 있었고, 마
을 외딴 자리에 집이 있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니 광산김씨 청년이 나와 무
슨 일이냐고 물었다.
노승은
'황룡산에 명당 자리가 있다기에 여기서 불법(佛法)을 전할까 하오'

답을 하니 청년은
'이곳은 유생이 많아서 불교를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하였다. 그러자 노승은
'그러면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풀막을 짓고 도를 깨우쳐 볼까 하오'
그러니 청년이
'그러면 무엇을 먹고 입으며 혼자 쓸쓸히 어떻게 살려고 하시오?'
물었다. 노승은
'원래 중은 풀뿌리, 나무열매로 양식을 삼고, 송락과 초목으로 의복을 대신하며, 법당이 없으
면 바위굴을 불당으로 삼소. 그러니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겠소?'
노승
의 시원스런 답에 청년은 감동을 먹고 오늘 날도 저물었으니 일단 하룻밤 자고 가라며 호
의를 베풀었다.

이렇게 청년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노승은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 청년의
어머니를 보게 되었는데, 얼굴을 보니 3일 뒤에 죽을 상이 아닌가? 이걸 청년에게 말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궁리하다가 한숨을 쉬며 그에게 전해주었다.
'덕분에 잘 쉬었소. 대접에 대한 보답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하니 부디 화를 내지 마시오.
아까 당신의 아머니를 잠깐 뵈었는데, 3일 후 아침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실 것이오. 그러면
인근 범바위골에 묘를 쓰되 황금돌을 절대 건드리지 마시오. 그곳이 괜찮은 명당자리요'
그 말을 들은 청년은 갑자기 뚜껑이 뒤집혀
'뭐라고? 이 땡중이 미쳤나? 빨리 꺼져!!'
성을 내며 노승을 쫓아냈다.

그런데 과연 3일 후 아침, 청년의 어머니는 죽고 말았다. 이에 청년은 크게 놀라 통곡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노승이 한 말을 상기시켜 보았다. 범바위골에 묻으라는 말이 생각나 그곳에 묘
자리를 정하고, 땅을 파니 황금돌이 나왔는데, 돌을 건드리지 말라는 말까지는 기억이 안나서
그만 그 돌을 들어내고 말았다.
그러자 그 속에서 수많은 벌이 앵~ 나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 땅에 흔치 않던 벌명당이었
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살던 벌들은 노승 때문에 보금자리를 빼앗기게 되었고, 벌의 우두
머리가
'그 땡중 때문에 우리 터전을 빼앗겼다. 빨리 그 작자를 단죄하러 가자~~!'
잔뜩 이를 갈고 무더기로 날라다니며 노승을 찾아 다니다가 인근을 지나던 그를 발견하고 집
중 폭격을 가해 말그대로 벌집을 만들어 죽였다.

이후 노승의 저주가 씌워진 탓인지 연산마을에는 10년 홍수, 10년 가뭄, 10년 전염병으로 완
전 몹쓸 땅이 되버렸다. 마을의 실세이던 광산김씨 집안에서 회의를 열어 상황이 이리 된 것
은 우리들 때문에 노승이 벌에 쏘여 죽은 것이라 규정하고 그의 넋을 위로할 겸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조성했다. 그랬더니 재앙은 멈추고 마을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고 한다.
또한 미륵불 곁에 소나무 1그루가 홀연히 자라나 그를 향해 가지를 뻗으면서 위로 자라지 않
고 아래로만 자라니 사람들은 그 소나무가 노승의 후신이라 여기며 기도를 올렸고 소원을 성
취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여기서 출가하여 크게 된 승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전
한다.

물론 전설을 다 믿으면 이는 순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전설을 통해 마을의 평안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절을 세웠음을 알 수 있으며, 딱히 뒷끝이 없는 다른 벌명당 전설과 달리 승려의 말
을 지키지 않다가 명당의 기운은 커녕 오히려 마을이 풍비박산이 나자 그 승려를 위로하고자
절을 세워 간신히 마을의 안녕을 되찾았다는 내용이 이채롭다. 일종의 승려 말을 들으면 자다
가도 떡이 나오니 승려와 절, 불상을 잘 대접하라는 옛 석불사의 뜻이 아닐까?

▲  개구리의 조촐한 운동장, 동그란 연못

▲  대웅전 앞 연꽃 석조

송불암은 대웅전과 요사, 선방 등 4~5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비구니 절이라 경내는 깔끔하
고 정갈하며, 경내 동쪽에 창건 설화에 나오는 소나무와 이곳의 후광이자 든든한 밥줄인 미륵
불이 자리해 있다.

▲  2000년에 새로 지어진 대웅전

▲  대웅전 서쪽에 자리한 요사


▲  미륵불과 소나무가 있는 경내 동쪽

▲  송불암 미륵불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83호

송불암 미륵불은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높이는 4.25m, 둘레 1m로 머리에는 네모난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얼굴은 넉넉한 인상으로
눈과 눈썹, 코, 입이 모두 완연하게 남아있으며, 두 귀는 목까지 늘어져 있고, 목에는 삼도(
三道)가 그어져 있다.
몸통에는 법의(法衣)를 걸쳤는데, 얇은 새김으로 새겨진 옷주름선은 발목까지 내려왔으며, 왼
손은 가슴에 대고 있고, 오른손은 몸 옆에 붙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것 같다. 그가 서 있는 대좌(臺座)에는 연화무늬가 있고, 옷자락 밑으로 석불의 발과 발가락
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석불 옆에는 창건설화에 나오는 소나무가 누워있다. 정말 노승의 넋이 담긴 것인지 하늘로 곧
게 자라지 못하고 석불을 향해 아래로만 자라나 끝내는 석불의 하늘을 가린 것이다. 그 모습
이 마치 석불의 불력(佛力)이나 매력에 끌린 듯 그를 덮고 있었는데, 소나무가 갈수록 오버(?
)를 하면서 석불이 마치 소나무를 이고 있는 모습처럼 보이자 2000년에 지금의 자리로 석불을
옮기고 소나무를 싹둑 정리했다.


▲  송불암 소나무 - 논산시 보호수

미륵불과 더불어 송불암의 오랜 명물인 소나무는 미륵불 앞에 마치 절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
을 하고 있다. 그의 미륵불에 대한 마음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석불에게 큰 부담을 주었던 존
재이기도 한데. 2000년에 미륵불을 현 자리로 옮기고 소나무를 크게 손질하여 얌전하게 만들
었다.
나무의 나이는 약 270년으로 그 적지 않은 나이에 비해 높이는 낮다. 다만 아랫쪽으로만 성장
을 하여 지금처럼 처진 소나무가 되버린 것이다.


▲  소나무 그늘에 있는 석탑

소나무 그늘과 석불 주변에는 세월에 지쳐 쓰러진 주춧돌과 석탑의 잔재가 남아있다. 이들은
미륵불과 더불어 옛 석불사의 유물로 석탑은 2기가 있는데, 윗 사진의 탑은 아랫도리만 간신
히 남아있으며, 그 주위에 버려진 주춧돌과 자잘한 돌들이 모여 있어 서로를 의지한다.


▲  석불 옆에 자리한 조그만 석탑
몇층인지는 모르겠으나 탑신의 일부와 옥개석이 이리저리 깨진 채 남아있다.
그 위로 동그란 돌이 마치 공기돌처럼 놓여있다.

▲  미륵불 주변에 흩어진 주춧돌들 ▲
이들은 미륵불을 보호하던 건물의 주춧돌로 거의 정사각형 모양의 보호각이
미륵불을 품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석불의 높이가 4m가 넘으니 그 건물
또한 장대했을 것이나 임진왜란 이후 사라지고 간신히 주춧돌만 남아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허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  미륵불의 뒷모습과 소나무
미륵불 뒷모습은 딱히 손질을 하지 않아 울퉁불퉁하다.

▲  미륵불의 귀여운 발과 연꽃무늬 대좌
발가락이 상식 밖으로 지나치게 커서 그 모습이 마치 손에 낀 장갑이나
글러브 같다.

▲  송불암과 논산을 뒤로하며~~~

송불암을 30분 정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어느덧 17시, 더 이상 갈 곳도, 마음을
줄 곳도 없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여름 맞이 논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 송불암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 36-3 (황룡재로 92-18 ☎ 041-733-6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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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0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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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에 가면 딱 좋은 곳 ~ 꽃무릇(상사화)의 대표 성지, 영광 불갑사 (수다라성보박물관)

 


' 가을맞이 산사 나들이 ~ 꽃무릇의 성지, 영광 불갑사 '

▲  눈과 코, 입이 달린 불갑사 굴뚝

▲  대웅전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  불갑산 산길


 

상사화(相思花)는 꽃무릇이라 불리기도 한다. <열반에 드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피안화
(彼岸花)라 불리기도 함> 그들은 8~9월이 절정기로 상사화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
는 영광 불갑사에서는 매년 9월 한복판에 상사화 축제를 벌인다. 비록 축제는 과거완료형
이 되었고 시간 또한 이미 10월 초를 가르키고 있지만, 아직까지 상사화가 남아있을 것이
란 순진한 생각에 불갑사로 콩 볶듯 길을 떠났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영광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담
았다. 자리는 널널하여 편하게 이동을 했는데 거의 3시간 40분을 내달려 영광읍내에 자리
한 영광터미널에 도착했다. 전남 영광(靈光)은 2006년 가을 이후 10여 년 만에 방문이다.
영광터미널에서 잠시 숨 좀 돌렸다가 불갑사행 군내버스를 잡아타고 다시 20분 정도를 달
려 불갑사 종점에 두 발을 내린다. 이제 비로소 꽃무릇의 성지로 추앙받는 불갑사에 발을
들인 것이다.


 

♠  불갑사 입문

▲  불갑사 주차장 느티나무 - 전남 보호수 15-18-6-8호

버스가 얌전히 바퀴를 접은 불갑사 주차장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
다. 이 나무는 2004년 12월에 보호수의 지위를 받았는데, 당시 추정 나이가 65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10여 년이 더해져 660~670년 정도 된다. (어디까지나 추정 나이임)
아무리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과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무럭무럭 자라나 지금은 높이 25m
, 둘레 5.9m의 장대한 나무로 성장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불갑사를 찾은 사람들의 정자나
무와 이정표 역할을 하였고, 지금도 그 역할은 여전한데, 문명의 이기(利器)인 차량들도 앞다
투어 그의 포근한 그늘 속에 들어가 가을 단잠을 즐긴다.

주차장을 지나면 육중하게 생긴 일주문이 마중
을 한다. 보통 문 정면에는 절 이름을 알리는
현판을 내걸기 마련이나 이곳은 뒷쪽에 걸어두
어 문을 꺼꾸로 세운 듯한 모습이다.
일주문을 중심으로 잘 꾸며진 공원이 넓게 자
리해 있는데, 이 일대를 '불갑사 관광지'라 부
른다. 이곳에는 산책로와 연못, 진달래동산,
오토캠핑장, 영광산림박물관 등이 있으며, 나
는 오로지 불갑사와 상사화만 바라보고 온 터
라 모두 쿨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  불갑사 일주문(一柱門)


▲  불갑산 호랑이상의 위엄

일주문을 지나 조금 들어서면 왼쪽에 위엄 돋는 모습에 불갑산 호랑이상이 있다. 지금이야 호
랑이와 마주칠 일이 없으니 돌에 새겨진 공룡 화석을 보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오랫동
안 이 땅을 주름잡던 무서운 맹수였다. 호환(虎患)을 제일 두려워할 정도로 옛 사람들에게 공
포의 대상이었으나 20세기 초반 왜정(倭政)에 의해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동물원에서나 겨우
구경할 수 있다.

불갑산에도 호랑이가 살았었는데, 1908년 2월 덫고개에서 어느 농부가 호랑이 1마리를 잡았다.
그때는 호랑이 사냥으로 먹고 살던 사냥꾼과 농사꾼이 많았던 시절로 잡은 호랑이를 어찌 처
리할까 궁리하던 중, 왜인(倭人) '하라구찌'가 찾아와 자기에게 넘기라며 200원을 주었다. 당
시 200원은 무려 논 50마지기(1만 평) 가격이었다.
호랑이를 매입한 하라구찌는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의 시마쓰 제작소에서 표본 박제를 했으며, 그것을 들고 목포로 건너와 살다가 나중에 목포 유달초교에 기증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기증
을 했는지, 1945년 패망으로 강제 귀국을 하게 되자 일종의 떨이로 넘긴 것인지는 모르겠음)
그 박제는 아직도 유달초교에 간직되어 있으며, 북한과 만주 등의 실지(失地)를 제외한 이 땅
(남한)에서 잡힌 호랑이 중 유일하게 박제 표본으로 남은 것으로 호랑이에게는 억울하겠지만
우리에게는 무척 귀한 자료이다.
이후 영광군에서 '포획 100년 만에 귀향'이라는 주제로 유달초교와 국립생물자원관 척추동물
연구과의 도움으로 모형을 제작해 2009년 4월 이곳에 갖다두어 불갑산의 새로운 명물로 삼았
다.

호랑이상 뒷쪽에는 호랑이굴이 재현되어 있는데, 가짜 돌로 만든 모형굴이라 허접하기가 그지
없으며, 호랑이상은 그럴싸하게 지어져 있어 어두울 때 보면 자칫 염통이 쫄깃해질 수 있다.


▲  불갑산 호랑이상과 호랑이굴(뒷쪽)

▲  산뜻하게 닦여진 불갑사 가는 길 (불갑사 관광지)

▲  푸른 잎만 남은 진달래동산

▲  불갑사 해탈교

불갑사 관광지와 불갑사의 경계를 이루는 해탈교를 건너면 꿈에 그리던 상사화 군락지가 나온
다. 상사화의 마지막 향연을 기대했건만, 정작 나를 맞이한 것은 검게 떡이 되버린 시들시들
해진 상사화였다. 이것이 정녕 8~9월 동안 천하를 홀렸던 그 상사화가 맞단 말인가?


▲  잔치가 끝나버린 상사화 군락지

나의 계산은 틀렸다. 적어도 9월 말까지는 왔어야 상사화의 끝물이라도 볼 수 있는데 너무 늦
게 왔다. 여기서 불갑사 경내까지 죄다 뒤적거려도 멀쩡한 상사화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얄미운 세월이 그들의 젊음을 죄다 앗아갔기 때문이다.
불과 며칠 사이에 젊음이 사라진 상사화의 말로는 어떻게 저리 비참할 수가 있지? 되물을 정
도였다. 솔직히 검게 타듯 시들어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꽃에 매달린 푸른 잎과 나
무가 더 아름답게 보일 정도였으니 상사화의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보다도 못한 것 같다.
단지 그 2달을 위해 그들은 용을 썼던 모양이다. 세상에 그 무엇이든 전성기가 지나면 그 이
후의 모습은 참 우울하기 그지 없지. 그래서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  내년을 기약하며 잔뜩 웅크린 상사화(꽃무릇) 군락지
향연이 끝난 상사화의 쓸쓸한 말로, 허나 그것이 절대 끝은 아니다. 꽃은 비록 졌지만
그 꽃을 피우는 숙주(뿌리, 줄기)는 그대로 남아 내년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  숲속에 묻힌 상사화 군락지

▲  상사화 군락지 산책로 - 상사화 전성기 때 한번 거닐어보고 싶다.

상사화는 서로를 애타게 생각하는 꽃이란 뜻이다. 잎이 진 후에 꽃이 피고 꽃이 진 후에 잎이
나기 때문에 잎과 꽃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한다. 그래서 상사화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
다고 한다. 또한 그럴싸한 전설 한 토막이 덧붙여져 전해오는데 내용은 대략 이렇다.

불갑산 호랑이가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어흥거리던 옛날, 효성이 지극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
의 부모는 금슬 좋기로 이름난 부부였는데,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절에 들어와 100일 동안 탑돌이 불공을 올렸다.
그녀를 본 큰스님 수발승은 마음에 불이 나면서 그만 연모의 정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승려
의 신분이고 수줍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를 표현하지 못하고 몰래 그를 보면서 끙끙 마음을
앓았다. 여인은 그런 것도 모르고 100일 불공을 마치자 미련 없이 속세로 돌아갔고, 승려는
더 이상 그를 못보게 되자 그리움이 더욱 사무쳐 결국 상사병(相思病)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 봄, 승려의 사리가 안긴 부도 주변에 잎이 진 후 꽃이 피어났는데, 마치 그 승
려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꽃 이름을 상사화라 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전설로 그
만큼 꽃이 아름답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런 슬프고도 혹독한 전설을 붙인 모양이다.


▲  불갑사 가는길 (상사화 군락지 옆)

상사화 군락지를 지나면 석축 위에 오롯하게 자리한 승탑군(부도군)이 마중을 한다. 비석 4기
와 조그만 승탑 6기가 조촐히 승탑군을 이루고 있는데, 승탑들은 고려 말부터 조선, 20세기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원래 절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34년에 이곳으로 집합시켰다.

이들 승탑은 회명당 처묵(晦明堂 處墨), 청봉당(晴峰堂), 서산(西山), 설두(雪竇), 설제(雪醍
), 각진국사의 승탑으로 이중 각진국사 자운탑은 1355년에 조성된 것이라 전한다. 비석 중에
는 '정3품 통정대부 김상기(金商基) 공덕송비(功德頌碑)'가 있는데, 영광 출신으로 정3품 벼
슬까지 지낸 김상기가 1939년 대웅전과 종루를 세우는데 시주를 하여 그를 기리고자 세웠다.
승탑군을 지나면 담장을 두른 불갑사 경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 여기서 잠시 불갑
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불갑사 승탑(僧塔)군

불갑산(516m) 서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불갑사는 상사화로도 유명하지만 자칭 백제 최
초의 사찰이라는 자부심을 진하게 간직하고 있다.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384년, 그 시절 백제는 천하 제일의 해양대국으로 바다를 건너 왜
열도를 비롯해 중원대륙의 산동(山東) 등 대륙의 여러 해안 지역을 장악하면서 세력을 과시하
고 있었다. 바로 그때 인도 승려인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의 위엄을 듣고 동진(東晉)을
경유하여 들어온 것이다.

마라난타는 바다를 건너 영광 법성포(法聖浦)에 상륙했다고 전하는데, 그곳과 가까운 불갑산
자락에 절을 세우니 백제 최초의 절이자, 첫째 가는 절이라 하여 불갑사라 했다고 전한다. 하
지만 증거가 불충분하다. (관련 기록도 없고 유물도 없는 실정임)
마라난타 창건설이 신빙성이 떨어지자 따로 내세운 것이 백제 문주왕(文周王, 재위 475~477)
창건설이다. 이때 행은(幸恩)이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무왕(武王) 시절인 640년에 창건되었다
는 설도 덧붙여 전하고 있다. (불갑산 남쪽 너머에 자리한 함평 용천사는 600년에 행은이 창
건했다고 함) 허나 아쉽게도 이 역시 증거가 부실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창건 이후, 8세기 중반에 행사존자(行思尊者)가 중창을 했다고 하는데, 행사존자는 마라난타
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아마도 창건 시기를 부풀리면서 나온 실수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신라 후기나 행은이 활동했다고 전하는 7세기(무왕 시절)가 그나마 적당한 창건 시기가 아닐
까 여겨지며, 백제 후기에 살짝 창건되었다가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는
백제 부흥군과 이를 막으려는 신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파괴된 것을 중건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 후기에 각진국사(覺眞國師, 1270~1355)가 머물면서 절을 크게 불리니 전각이 100여 칸,
요사(寮舍) 400칸, 부속 암자가 31개에 이르렀다고 하며, 승려 수는 수백 명을 헤아렸다고 한
다. 또한 누각의 기둥 높이는 90척, 사전(寺田)은 10리 밖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그 규모가 가히 대단했다. <각진은 순천 송광사(松廣寺) 16국사의 하나임>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전일암(錢日庵)을 제외하고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며, 법릉(法
稜)이 전일암을 터전으로 삼아 급한데로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1634년 해릉이 중
창했으나 사세가 점점 어려워져 규모 또한 축소되었다.
1802년 득성(得成)이 중창을 했고, 1869년 설두대사(雪竇大師)가 크게 중창을 벌이면서 그동
안 잃어버린 토지를 많이 회복하였다. 1879년에 중창을 했으며, 1938년 설제가 중수를 했고,
1984년에 다시 중수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만세루, 일광당, 설선당, 명부전, 조사전, 칠성각,
팔상전, 천왕문, 백운당, 향로전 등 20여 동에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왕년에는 부속암자
가 31개나 되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일암, 해불암(海佛庵), 불영대(佛影臺), 수도암(修道庵),
무각선원(無覺禪院) 등 5개만 남아 있다. 특히 전일암은 정유재란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존재
로 법릉이 이곳에 머물며 불갑사를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왜열도로 끌려가 고생
을 무지했던 강항(姜沆)이 종종 찾아와 참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대웅전과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불복장전적 등 국가 보물 3점과 천연기념
물로 지정된 참식나무 자생북한지, 사천왕상과 대웅전 삼세불회도, 팔상전 영산회상도, 지장
시왕도, 동종(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11호), 고적급위시답병록(전남 지방문화재자료 205호).
만세루 등 지방문화재 여러 점을 지니고 있다. 그 외에 일광당과 명부전, 괘불지주, 팔상전,
각진국사자운탑비, 업경대, 대법고, 승탑군 등 수많은 비지정문화재가 있으며, 수다라 성보박
물관을 경내에 지어 절의 오랜 보물을 담아두었다.

불갑사는 고창 선운사(禪雲寺), 함평 용천사(龍泉寺)와 더불어 상사화(꽃무릇)의 3대 성지로
꼽힌다. 절 주변에 상사화를 가득 심어 8~9월에는 상사화의 향기가 경내를 뒤덮으며, 9월에는
상사화축제가 열려 절의 존재감을 천하에 널리 드러낸다.
영광 지역에서 가장 큰 절이고 영광의 주요 명승지라 답사/나들이 수요가 적지 않으며, 불갑
산이란 명산(名山)까지 끼고 있어 산꾼 수요도 대단하다. 깊은 산골에 자리해 있어 산사(山寺
)의 내음을 뿜어내고 있으며, 문화유산도 풍부해 고색의 진한 내음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게
다가 상사화와 참식나무 등 진귀한 꽃과 나무도 절을 수식해 자연의 내음까지 덩달아 누릴 수
있다.

기왕 불갑사를 찾는다면 상사화의 향연이 펼쳐지는 8~9월을 추천한다. 물론 다른 때도 상관없
다. 절에서 불갑산 정상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리며, 남쪽에 자리한 모악산(母岳山, 348m)을 넘
어 함평 용천사로 넘어가도 된다.

* 불갑사 소재지 :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8 (불갑산로450 ☎ 061-352-8097)
* 불갑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불갑사 경내 모형도 (수다라 성보박물관)


 

♠  불갑사의 보물 창고, 수다라(修多羅) 성보박물관

▲  불갑사 금강문(金剛門)

경내 앞에 이르니 맞배지붕 금강문이 마중을 한다. 보통 문 이름이 쓰인 현판을 정면에 내걸
기 마련이나 특이하게 '불갑사' 현판을 앞에 내밀고 금강문 현판을 문 안쪽에 수줍은 듯 걸어
두었다. 문 좌우에는 돌담을 둘러 경내를 가렸으며, 계단을 오르면 금강문의 주인인 금강역사
(金剛力士)가 정면을 바라보며 중생을 검문한다.
문을 들어서 계단을 1단계 더 오르면 정면에 천왕문이 계단을 늘어뜨리고 있고, 왼쪽에는 명
경당(明鏡堂), 오른쪽에는 수다라성보박물관이 손짓을 한다. 박물관의 존재는 전혀 몰랐던 터
라 여기서 잠시 불갑사를 잊고 보랏빛처럼 다가선 성보박물관을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  수다라 성보박물관
박물관 앞에는 비석을 잃어버린 연꽃무늬 비좌(碑座)가 누워있다.


21세기 이후 많은 고찰(古刹)들이 성보박물관이란 자체 박물관을 지어 절의 보물을 보관/전시
하고 있다. 불갑사 역시 그 유행에 흔쾌히 합류하여 'ㄱ'자 구조의 성보박물관을 하나 장만해
세상에 내놓았다.
불갑사의 오랜 보물을 머금은 보물 창고로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타서 내부를
둘러보면 되며 관람시간은 9시~17시까지다.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없음) 무슨 박물관이
이렇게 볼거리가 많은지 사진에 담고 하느라 30분 정도 인적이 없는 박물관 내부를 신나게 누
볐다.

▲  다양한 모습을 지닌 16나한상과 인왕상(仁王像)

석가불3존좌상과 그들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상,
그리고 그들을 지키는 인왕상. 제석(帝釋), 범
천(梵天) 등은 지금은 없어진 나한전(羅漢殿)
에 있었다.
그 나한전이 퇴락하자 그것을 부시고 팔상전으
로 자리를 옮겼으며, 지금은 이렇게 성보박물
관에 안착했다.
이들은 1706년 도인 옥잠의 발원시주로 조성된
것으로 당시 유명한 화승(畵僧)인 색난과 그의
제자 초변, 영선 등 10명의 화승과 함께 만들
었으며, 석가불3존좌상의 얼굴이 둥글고 넓적
하여 포근한 이미지를 보이고 있다.

▲  16나한을 거느린 석가불3존좌상
(석가불과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


▲  팔상전 영산회상도(아랫 그림)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07호

팔상전(八相殿) 후불탱화였던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는 석가여래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
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편히 뉘어져 있는데, 1777년 영광 지역에서
유명했던 비현, 복찬, 쾌윤 등 금어(金魚) 3명과 편수 12명이 참여하여 만들었다.


▲  두 눈이 인상적인 대웅전 용마루 보탑(寶塔)

불갑사의 왕년의 위엄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대웅전 용마루 중앙에 무려 용의 얼굴을 지닌 보
탑을 달았다. 현재는 용마루에서 떨어져 나와 성보박물관에 머물고 있는데 익살스럽게 표현된
용머리 위에 기와집 모양의 탑신(塔身)과 4각 지붕을 두었고, 다시 그 위에 둥근 머리 장식을
두었다.
이 보탑은 점토를 구워서 만든 것으로 그 피부에 '甲申 五月','盡○手 陟敏(척민)'이란 명문
이 새겨져 있어 1764년 5월, '척민'이 대웅전을 중수하면서 만든 것임을 귀뜀해 준다. 이렇게
용머리 보탑을 용마루에 둔 것은 대웅전의 위엄을 높이려는 의도로 볼 수 있으며, 지붕에 보
탑 등의 장엄물을 두는 것은 주로 동남아와 중원대륙 남쪽 사원에서 많이 나타나는 양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흔치 않은 유물이다.


▲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08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를 담은 그림이다. 지장보살 좌우와 밑에 도명
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시왕, 범천, 제석천, 사천왕을 두고 그 밑부분에 판관
(判官) 등을 배치했으며, 윗쪽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미륵보살, 대세지보살,
제화갈라보살 등 보살 6명을 집합시켰다.
보통 지장시왕도에는 다른 보살까지 무더기로 그려진 예는 거의 없는데, 그림의 색채가 밝고
선명하여 그저 어둡고 무서울 것만 같은 저승 식구들에 대한 이미지를 화사하게 비추고 있다. 가늘고 섬세한 필법과 안정적인 화면 구성 등을 보이고 있으며, 밑부분이 조금 헝클어진 것
외에는 건강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이 그림은 1777년에 비현, 복찬, 쾌윤 등 9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그들은 순천 선암사(仙巖
寺)를 중심으로 많은 불화(佛畵)를 남겼다.


▲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06호

삼세불회도(삼세불탱)란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삼세불(석가불, 약사불, 아미타불)을 담
은 그림으로 원래 대웅전에 있었다. 불갑사의 대표적인 불화로 꼽히고 있는 그림으로 1762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지며, 비단 바탕에 아주 현란하게 채색되어 꽤 밝은 색채를 보인다.
그림 윗쪽에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춘 석가여래를 비롯해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배치해 삼세불을 이루었으며, 3세불 좌우와 밑부분에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미륵보살, 지장보살 등 8명의 보살을 배치했다. 그리고 네 모
서리에 사천왕을 하나씩 넣었고, 3세불 윗쪽에 분신불(分身佛) 2명과 10대 제자, 천중(天衆)
2구를 넣어 그림을 고루고루 채웠다.


▲  칠성탱(七星幀)

칠성탱은 1892년에 영광읍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만든 탱화이다. 두광과 넓직한 신광
을 두룬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그림 윗쪽에 조그만 동자를, 중간에는 칠여래(七如來), 밑에
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배치했으며, 색채가 화사하여 선명한 기운을 전해준다.


▲  검은 피부의 조그만 철불좌상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불갑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다. 귀여운 동자승을
모델로 한 듯 덩치는 매우 작지만 고졸한 미소만큼은 잃지 않았다.

▲  오래된 법고(法鼓)
법고는 사물(四物)의 하나로 1885년에 통나무로 제작되었다. 원래 대웅전에 있었으며,
길이 85cm, 직경 75cm 규모로 이제 겨우 130살로 한참 북소리를 낼 나이지만
일찌감치 새 법고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현역에서 물러났다.

▲  귀여움이 묻어난 6명의 동자상

곱게 색이 입혀진 동자상은 조선 후기에 나무로 제작된 것이다. 당시 불갑사 동자승을 모델로
했는지 하나 같이 귀엽기 그지 없는데, 원래는 명부전 시왕상 옆에 있었으나 다 없어지고 이
들 6개만 남아 성보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몸에 걸친 옷과 손에 든 물건, 얼굴, 머리 스타일, 덩치, 키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각각의 모
습으로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들의 해맑은 표정이 보는 이로 하여금 한 줄기 웃
음을 머금게 한다.


▲  푸른 피부의 목어(木魚)
용머리에 물고기 몸통을 섞은 듯한 모습으로 앞서 법고와 더불어 사물의 일원이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지금은 박물관 유물로 너무 편하게 살아가고 있다.

▲  가마(연) 같은 모습의 불감(佛龕)
불감은 호신불을 휴대하고자 만든 것으로 가로 83cm, 세로 61cm, 높이 88cm이다.
다른 불감과 달리 여닫는 문이 없으며, 연(가마)의 형태를 취한 점이
이채롭다. (조선 후기 유물)

▲  업경대(業鏡臺)

업경대는 사람이 죽어서 저승(명부)에 이르렀을 때 얼마나 착하게 살았나 죄업을 비춰준다는
거울이다. 그 거울을 보면 자신의 나쁜 짓이 모두 비춰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거울 보
기가 좀 겁이 난다.
이들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아주 순한 표정을 지은 사자 암수 1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자
대좌 위에 업경을 받치는 간주(竿柱)를 세우고, 그 위에 업경과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화염무
늬를 두어 나쁜 짓에 대한 경각심을 주지시켰다. (나쁜 짓을 많이 하면 뜨거운 불구덩이 지옥
으로 간다는 식으로) 대좌까지 완전히 갖춘 업경대로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으며, 불갑사가 내
세우는 휼륭한 보물로 조각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  불갑사를 거쳐갔던 옛 승려들의 진영(眞影)
18세기 후반~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진영(영정) 5점이 남아있다.
(누구의 진영인지는 모르겠음)

▲  조선 후기에 지어진 불연(佛輦)

불연은 불상과 보살상, 영가의 초상화나 위패를 운반하는 가마이다. 보통 절 문 밖까지 연을
메고 나가 대상물을 싣고 다시 절로 가져왔으며, 4명이 가마채를 들거나 끈으로 매어 운반했
다. 불연의 모습이 제왕과 왕족들이 사용하던 가마와 많이 비슷해 그 축소판을 보는 듯 하다.


▲  소통(疏筒)과 가사함(袈裟函)

소통(왼쪽)은 법회나 여러 불교 의식 때 신도들이 소망을 적어서 낭독한 후, 그 종이를 말아
넣어두던 통이다. 가로 23cm, 세로 16cm, 높이 88cm로 조선 후기에 제작되었으며, 통 밑에는
난간을 두룬 수미단(須彌壇) 모양의 대좌를 두어 소통의 품격을 드높였다.

가사함(오른쪽)은 승려의 가사(袈裟)를 보관하던 목함으로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별
도의 가사함을 둔 것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고 하며, 그 형태가 독특하다. (조선 후기에 제
작됨)


▲  불갑사 불복장전적(佛腹臟典籍) - 보물 1470호

불갑사에는 사천왕상과 석가불3존상 및 16나한상, 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몸 속에서 나온
오래된 서적들, 이른바 복장 전적(典籍)이 매우 많다. 자그마치 193종 259책의 분량으로 불갑
사의 장대한 내력을 더욱 꾸며주는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인데, 이들은 '불갑사 불복장전적'
이란 이름으로 국가 보물 14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천왕상 몸 속에서 나온 것은 판본 33종 46책, 낙장본(落張本) 16종 20책 등, 총 49종 66책
으로 완주 화암사(花巖寺)에서 발행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1441년)','지장보살본원경(1453년
)' 등이 있으며, 임진왜란 이전 판본이 대부분이라 모두 보물의 지위를 얻었다.

석가불3존상과 16나한상 몸 속에서 나온 것은 76종 84책으로 '백운화상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절
(1378년)','선종영가집(1381년)','천노금강경(1387)','묘벙연화경언해(1463년)' 등 고려 후기
와 조선 초기 판본이 많이 나왔다. 이들 역시 보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 뱃속에서 나온 것은 68종 97책이다. 고려 후기 판본인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과 '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1464)' 등 조선 초기 서적이 대부분이라 모두 보물의
지위를 얻었다.

▲  묘법연화경 - 1382년 작

▲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 1382년 작

▲  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 - 1464년 작

▲  법집별행녹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
要幷入私記) - 14세기 후반

▲ 지국천왕(持國天王) 탱화

↖  증장천왕(增長天王) 탱화

◀  다문천왕(多聞天王) 탱화


불갑사는 사천왕상을 배려하여 그들의 후불탱
까지 남겼다. 아마도 사천왕의 수호력이 길이
길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그리 한 것
이 아닐까 싶은데, 1904년에 조성하여 천왕문
내부의 사천왕상 뒷쪽에 배치했다. 허나 지금
은 성보박물관으로 탱화를 모두 옮겼으며, 사
천왕상만 천왕문에 남아있다.


 

♠  불갑사 경내 둘러보기

▲  천왕문(天王門)

성보박물관에서 계단 하나를 오르면 천왕문이다. 이 문은 부처와 절을 지키는 사천왕의 보금
자리로 이들 사천왕은 원래 고창 흥덕에 있던 연기사(烟起寺)터에서 가져온 것이다.

때는 1870년 어느 날, 불갑사에 머물던 설두대사 봉기(奉琪)의 꿈에 사천왕이 나타났다. 그들
은 비를 쫄딱 맞은 처량한 모습을 보여주며 지붕 좀 씌워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들을 소수
문해보니 이미 망해버린 고창 연기사터에 버려져 있었다.
그래서 배 4척을 끌고 가서 그들을 데리고 오니 영광 사람들의 환호가 대단했다고 하며 경내
에 사천왕의 집(천왕문)을 지어주자 그들의 가호 덕분인지 여러 번 화재를 모면했다고 한다.
허나 굳이 사천왕의 현몽이 아니더라도 설두는 연기사터 사천왕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
다. 아직 불갑사는 사천왕도 갖추지 못했고, 연기사터 사천왕이 잘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에
굳이 새로 만드는 것보다는 버려진 그들을 구제도 할 겸, 데리고 와 불갑사의 사천왕으로 삼
은 것이다.
또한 불갑사에서는 이들 사천왕을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 뱃속에 오래된 귀중한 서
적(49종 66책)을 복장 유물로 넣어두기도 했고, 1904년에는 사천왕후불탱까지 제작하여 그들
뒷쪽에 걸어두었다. 보통 복장유물은 불상이나 보살상 뱃속에 넣어두기 마련인데 말이다.

▲  천왕문 사천왕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159호

▲  대웅전을 가리고 앉은 만세루(萬歲樓) - 전남 지방문화재자료 166호

천왕문을 지나면 만세루가 정면을 가리며 우뚝 자리해 있다. 그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맞배
지붕 건물로 1층 부분 높이를 낮게 해서 건물 옆구리로 돌아가 법당을 친견토록 했다. 이는
경내를 외부로부터 보이지 않게끔 하려는 조선 후기 사찰의 특징이다.
만세루는 강당(講堂) 및 행사 공간으로 왕년에는 정면 7칸, 기둥 높이는 무려 90척에 이르렀
다고 한다. 90척이면 1척에 23cm로 계산해도 20.7m라는 소리인데, 그만큼 불갑사가 잘나갔다
는 뜻이다. 허나 정유재란 때 파괴되었고, 수 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아담하
게 굳어졌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만세루
만세루 현판이 앞이 아닌 뒷쪽에 걸려 있다.
불갑사는 은근 뒷쪽을 좋아하는 듯~~

▲  대웅전 뜨락 우측의 일광당(一光堂)
1620년에 중건된 건물로 원래 선방이었으나
지금은 승려의 거처로 쓰인다.


▲  설선당 - 거의 'ㅁ' 구조의 건물로 선방(禪房)과 요사(寮舍),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템플스테이 숙소로도 쓰임)

▲  불갑사의 목구멍, 세심정(洗心亭)

산사에는 늘 목을 축여주는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불갑사 역시 불갑산이 베푼 옥계수를 끌어
와 샘터(약수터)를 갖추었는데, 샘터 위에 기와 지붕을 얹히고 마음을 씻는다는 뜻에 '세심정
'이라 이름 지었다. 샘터를 뜻하는 정(井) 대신 정(亭)을 칭한 점이 이채로운데, 네모난 석조
에는 불갑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늘 물이 가득해 가뭄에도 별 끄떡이 없다고 한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갈증으로 활활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진화 작업을 하
니 속세의 때가 싹 가신 듯, 속이 시원해진다. 그렇게 2~3모금을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발이
떼어졌다. 물 맛이 괜찮은 것을 보니 불갑사의 인심도 그런데로 괜찮은 모양이다.

▲  갈증을 씻겨주는 세심정 샘터

▲  무량수전(無量壽殿)
아미타불의 거처로 근래에 지어졌다.


▲  무량수전 옆구리에 자리한 5층석탑

불갑사의 유일한 석탑이지만 대웅전 앞에 두지 않고 경내 외곽인 무량수전 옆에 마치 숨바꼭
질 하듯 숨겨두었다. 그의 모습이 백제(百濟) 탑의 상징인 부여 정림사(定林寺)터 5층석탑을
닮았는데, 옛 백제 땅의 중심인 충청도와 전라도에는 백제 멸망 이후, 정림사 탑을 닮은 석탑
이 많이 등장했다.
지금도 정림사 탑의 후예는 계속 지어지고 있으니 아직도 백제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 모
양이다. 하긴 백제는 정말 그리워할 가치가 있는 나라이다. 식민 사관 쓰레기들과 잘못된 역
사 지식을 가진 작자들에 의해 형편없이 왜곡되고 저평가되서 그렇지, 천하 제일의 해양 대국
으로 왜열도를 비롯한 동북아를 호령했었고 700년 동안 꾸려온 찬란한 문화와 유물을 후세에
넘겼던 팔방미인의 나라였다. (반면 조선과 왜정은 정말로 잊고 싶음)


▲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 시왕 등 저승(명부) 식구들의 보금자리이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대웅전 바로 좌측에 있었으나 1936년 승려 만암이 지금 자리로
약간 후퇴시켰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장보살 좌우에는 1654년에 조성된 시왕상이 자리해
있는데,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들이 꽤 느긋해 보인다. 그들 모두 시왕이라는 같은 간판을 달
고 있지만 다른 옷과 얼굴, 포즈를 지니고 있어 각자 개성이 넘치며, 시왕상과 지장보살3존상
뱃속에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서적 68종 97책이 쏟아져 나와 성보박물관에 담아두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명부전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十王像)

▲  칠성각(七星閣, 왼쪽)과 팔상전(八相殿, 오른쪽)

대웅전 뒷쪽에는 조사전(祖師殿)과 칠성각, 팔상전이 쌍둥이꼴 모습으로 나란히 자리를 지키
고 있다.
조사전은 불갑사를 거쳐간 주요 승려들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오래 숙성된 진영은 모두
성보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칠성각은 칠성 식구를 담은 칠성탱을 중심으로 산신(山神) 식
구가 담긴 산신탱, 독성(獨聖) 식구들이 담긴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팔상전은 1822년에
중건된 것으로 석가여래와 16나한, 1702년에 그려진 팔상도(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8개의 그림
)가 봉안되어 있다. 특히 팔상전 석가불과 16나한 뱃속에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서적 76
종 84책이 쏟아져 나와 불갑사의 고색의 품질을 더욱 끌어올려주었다.


 

♠  불갑사 대웅전(大雄殿) - 보물 830호

▲  불갑사의 중심, 대웅전

서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팔작지붕 건물이다. 18세기 이전
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기와에서 '건륭(乾隆) 29년'이란 글씨가 발견되어 1764년에 수리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9년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지붕 용마루에는 도깨비 얼굴의 보주를 얹혔는데, 현재 성보박물관에 있는 용마루 보탑이 바
로 이곳에서 위엄을 뽐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를 촘촘히 배치한 다포(多包) 양식으로 건물
가운데 칸 좌우 기둥 위에 용머리 조각을 두었으며, 문짝에는 연꽃과 국화 무늬 꽃창살을 달
아놓아 꽃창살의 상징인 부안 내소사(來蘇寺) 대웅전의 흑백 꽃창살과 자웅을 겨룬다. 그리고
건물 내부 모서리 공포 부분에도 용머리를 두었고 천정은 우물 천정으로 학과 까치가 그려진
벽화가 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사찰 건축물로 건물은 비록 작지만 안과 밖이 화려하기 그지 없으며, 시
대적인 특성과 용마루에 보탑 등의 장식을 다는 등, 다른 곳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독특한 개
성을 보여준 점이 참작되어 보물의 지위를 얻었다.

▲  옆에서 바라본 대웅전

▲  법당 수호용으로 걸어둔 신중탱


▲  대웅전의 낮고도 아름다운 하늘, 우물천정

▲  학과 잠자는 까치, 나무 등이 그려진 벽화

대웅전 내부에는 여러 벽화가 전하고 있다. 너무 불교 일색으로 도배하기가 뭐했는지 선비들
과 절의 주요 고객인 여자 신도들이 좋아할만한 것을 그려놓았는데, 마치 수묵담채화를 벽에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 하다.
이들 그림은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어느 화승(畵僧)이 그림 작업을 하면서 절대로 훔쳐
보지 말 것을 당부하며 문을 걸어잠궜다. 하지만 사람이란 궁금하면 오금이 저리는 법, 어느
성미 급한 승려가 몰래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러자 화승은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하며, 그 피
가 까치가 되어 날라갔다고 한다.
이런 비슷한 전설을 가진 절이 강진 무위사(無爲寺), 부안 내소사(來蘇寺), 무주 안국사(安國
寺) 등에 전하는데, 그림을 그린 승려가 모두 파랑새로 변해 사라진데 반해 여기서는 죽어서
까치가 되어 사라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워낙 잘 그려진 그림이라 절에서 그럴싸한 전설을 덧
붙여 그림 수식용으로 삼은 것이다.


▲  출입문에서 바라본 대웅전 목조석가여래3불좌상과 닫집

▲  가까이서 본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 보물 1377호

대웅전 불단에는 쌍둥이처럼 생긴 목조석가여래삼불이 대좌(臺座)를 갖추며 앉아있다. 건물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반하여, 삼불과 불단은 남쪽을 향하고 있어 서로 따로 노는 모습이다.
이런 유형은 영주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과 대전 고산사(高山寺) 등이 있는데, 고려~조선
불교 건축물에서는 거의 흔치 않은 구조로 주목을 끈다. 허나 원래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건물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가 1869년 지금처럼 방향을 틀었다고 전하며,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다.

이들 삼세불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약사불과 아미타불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심 불상인 석가불
이 단연 덩치가 크다. 좌우 협시불은 석가불의 ¾ 정도 크기로 다들 듬직하게 생긴 신체에 무
릎도 넓어 안정되어 보인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솟아 있고, 얼굴은 살이
좀 붙어있어 네모난 모습이며, 작은 입에는 나름 미소가 깃들여져 있다. 눈썹은 살짝 구부러
져 있고, 눈은 살며시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귀는 중생의 민원을 빠짐없이 들으려는 듯 어
깨까지 축 늘어졌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몸에 걸친 옷은 양쪽 어깨를 덮고 가슴 윗쪽을
드러내고 있다. 옷주름은 다리 위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수인(手印)은 항마촉지
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석가불만 다른 수인을 취함)

이들은 1635년 무염(無染)을 비롯한 승일, 도우, 성수 등 10명의 화승이 만든 것으로 불상 뱃
속에서 관련 조성기가 나와 조성 시기와 만든 사람을 고맙게도 밝혀주고 있다. 무염은 호남과
충청도, 강원도에서 활약한 승려로 이들 3세불이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다. 그래서
무염의 작품과 경향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어주어 보물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만약 조성기가 없었다면 아직도 지방문화재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조성기는 중요한
존재이다. 그가 있냐 없냐에 따라서 몸값과 등급이 크게 달라진다.


▲  현란하기 그지 없는 대웅전의 하늘
(우물천정, 공포, 용머리 장식, 불상 그림과 연꽃무늬 등)

▲  장대한 세월 앞에 형편없이 쪼그라든
각진국사자운탑비(覺眞國師 紫雲塔碑)


대웅전 옆에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제대로 털린 비석이 하나 있다. 그는 불갑사를 크
게 일으킨 각진국사의 행장(行狀)이 적힌 자운탑비로 그의 명성의 반비례로 비석 상태는 참
우울하기 그지 없다. 귀부(龜趺)의 용머리는 절반 이상 날라간 상태이고, 발가락 또한 죄다
뜯겨져 나갔으며, 행장이 적혔을 빗돌은 죄다 날라가 겨우 일부만 남았다.
불갑사가 절의 큰 은인이나 다름이 없는 그의 탑비를 일부러 푸대접할리는 없을터, 그만큼 불
갑사의 인생이 파란만장했음을 이 비석이 몸소 보여주는 것 같다.

각진국사 복구(復丘, 1270~1355)는 경남 고성 출신으로 10살에 천영(天英)에게 출가를 했다. 천영이 죽자, 도영(道英)의 제자가 되었으며, 21살에 승과(僧科)에 급제하여 충주 정토사(淨
土寺), 강진 월남사(月南寺)에 머물렀다. 1320년 조계사 13세 사주(社主)가 되어 선풍을 날렸
으며, 장성 백양사(白羊寺)를 크게 중창하고, 말년에는 불갑사에 머물며 절을 크게 불렀다.
1350년과 1352년 왕사(王師)에 임명되었고, 공민왕(恭愍王)으로부터 각엄존자(覺儼尊者)라는
호를 받았으며, 1355년 입적하자 각진국사(覺眞國師)라는 시호를 내려 그를 기렸다.


▲  불갑사 참식나무 자생북한지대 - 천연기념물 112호

불갑사 남쪽 산자락에는 참식나무 자생지가 있다. 녹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와 왜열
도, 중원대륙, 대만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곳 자생지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바로 이 땅에서 가
장 북쪽 자생지(自生地)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마음편히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최북단이 이
곳이다.

참식나무 자생지 안내문은 경내 바로 뒷쪽(남쪽)에 있지만 그들의 보금자리는 한참을 더 올라
가야 나온다. 나는 시간을 이유로 거기까진 가지 않았는데, 이 나무에도 믿거나 말거나 전설
이 하나 전해온다. 아마도 인도 승려 마라난타 창건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불갑사에서 지었을
것이다.

백제 때 불갑사 승려인 정운이 머나먼 인도로 유학길을 떠났다. 거기서 불교 공부를 하던 중,
인도 공주와 친해져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이를 안 인도왕이 이래서는 안된다면서
승려를 추방시켰다. 정운과 강제 이별을 하게 된 공주는 너무 슬퍼하며 두 사람이 늘 만나던
곳에 자라던 나무의 열매를 따서 일종의 사랑의 증표로 주었고, 승려는 그것을 가져와 불갑사
뒷쪽에 심으니 그것이 자라서 참식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  그림 같은 호수 불갑사제

불갑사에서 3분 정도 오르면 불갑산 계곡물을 모아서 만든 불갑사제가 나온다. 절 바로 윗쪽
으로 불갑산이 베푼 계곡이 졸졸졸~♪ 흐르다가 이곳에 모여 끝없는 대장정을 준비한다. 장차
다가올 늦가을의 향연을 준비하는 나무들과 알을 품은 어미새처럼 푸근하기 그지없는 불갑산
산줄기는 호수 수면에 비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몸단장에 여념들이 없고, 삼삼한 숲에
둘러싸인 호수의 자태는 첩첩한 산중에 묻힌 비밀의 호수처럼 신비롭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  불갑사제 호수 산책로

▲  녹음이 짙은 불갑산 산길 (불갑산 정상 방면)

호수 주변 숲에도 상사화가 넓게 자리를 닦고 있었다. 허나 이곳 역시 검게 떡이 된 상태. 정
상인 상사화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늘 상사화 구경은 완전 틀렸구나~~! 가는 날이 완전 문
닫는 날이었으니 말이다.


▲  불갑산 산길 (불갑사제 주변)
해불암입구 갈림길까지만 조금 올라갔다가 불갑사로 쿨하게 철수했다.

▲  불갑사 관광지에 자리한 연지(蓮池)와 정자

기분 같아서는 해불암과 불갑산 정상, 그리고 함평 용천사까지 싹 인연을 짓고 싶지만, 시간
도 넉넉치 못하고 오늘 너무 무리를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아서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
로 쿨하게 넘겼다. (용천사는 나중에 인연을 지었음)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한 언젠가 또 인연을 짓지 않겠는가? 게다가 상사화라는 아름다운 무
기도 있으니 10년 안에 꼭 찾아오리라 다짐을 하고 나의 제자리로 발길을 돌렸다.

이렇게 하여 영광 불갑사 나들이는 다소 아쉬움을 남기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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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9월 2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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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산과 숲,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옛길,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한반도지형, 앉은뱅이약수)

 


' 괴산 산막이옛길 봄나들이 '

▲  등잔봉에서 바라본 신비로운 운해

▲  괴산호

▲  산막이옛길


 

봄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4월의 한복판에 괴산(槐山) 지역 제일의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
는 산막이옛길을 찾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산막이로 가는 그날은 공교롭게도 빗방울이 떨어졌다. 전
날까지는 마음이 싹 정화될 정도로 화창한 날씨였는데, 불과 하루만에 날씨가 안면을 바
꾼 것이다. 하여 비의 대한 불안감을 약간 품은 채,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집결지인 신도
림역(1,2호선)으로 이동했다. 물론 우산은 챙겼다.
신도림역에서 일행들을 만나 관광버스 2대에 나눠 타고 동남쪽으로 길을 향했다. 구름이
당장이라도 비를 투하할 기세로 나를 쫓아왔는데, 안성(安城)을 지날 무렵, 비가 쏟아지
기 시작했다. 버스는 빗속을 가르며 열심히 육중한 바퀴를 굴렸고 서울 출발 2시간 만에
산막이옛길 주차장에 이르렀다.

비가 조금 내리고 있어 우산을 펼치고 산막이옛길 우중(雨中) 산책에 들어갔다. 비는 조
금 내리다가 잠시 그치면서 '이제 날씨가 개인 모양이다' 희망을 주더니만 얼마 가지 않
아서 다시 비가 내린다. 그러기를 수 차례~! 하늘은 그야말로 우리를 희망고문을 시켰다.
나들이와 답사, 등산에서 비가 오는 것만큼 싫은 것도 없다.


 

♠  산막이옛길 입문

▲  산막이옛길의 마스코트
옛날 복장을 한 할머니와 손자 도령, 선비 복장을 한 할아버지와 손녀가 나란히
자리한다. 지팡이를 들고 삿갓을 쓴 할아버지 옆에는 경찰청 마스코트인
포돌이, 포순이 형상이 있다. (사진에는 짤림)


괴산의 새로운 꿀단지로 명성을 누리고 있는 산막이옛길은 괴산호(槐山湖)와 어우러진 아름다
운 경승지이다.
이곳은 원래 연하9곡(煙霞九曲)이라 불리던 명소로 계곡(달천 상류)을 따라 10리 정도의 산길
이 산막이마을까지 이어졌다. 허나 1957년 우리 기술로 지은 최초의 댐, 괴산댐이 마을 북쪽
사은리에 지어지면서 계곡 일대가 강제 수몰되었다. 그래서 산중턱에 새로 길을 내었으니 그
것이 바로 산막이옛길이다. 옛길이란 명칭은 수몰된 산길 윗쪽에 다시 길을 닦았다는 의미에
서 붙여진 것이다.

산막이옛길(이하 옛길)은 3.9km로 괴산호 서쪽에 자리해 있다. 원래는 흙길이었으나 2011년에
천하에 개방되면서 나무데크길을 내었다. 숲과 호수, 산이 어우러진 빼어난 절경에 퐁당퐁당
빠진 사람들이 늘면서 그 존재감이 미치도록 커졌고, 이제는 괴산 제일의 명소로 우뚝 섰다.
호수를 따라 이어진 옛길에는 소나무동산, 노루샘, 호랑이굴, 앉은뱅이약수, 얼음바위골, 괴
산바위, 진달래동산 등의 조촐한 볼거리가 있으며, 유람선이 옛길의 시작점인 차돌바위 나루
터에서 환벽정나루를 거쳐 산막이나루까지 운항한다.

옛길의 종착지인 산막이마을에는 노수신(盧守愼)이 유배 생활을 하였던 적소(謫所)가 있으며,
그곳에는 그의 후손인 노성도(盧性度, 1819~1893)가 세운 수월정(水月亭)이 있다. 그리고 괴
산호가 자연스럽게 빚은 한반도지형에는 환벽정이란 정자가 둥지를 틀었다.

옛길 서쪽에는 국사봉(477m)과 등잔봉, 천장봉, 삼성봉(550m)이 산막이의 지붕을 이루고 있는
데, 옛길에서 등잔봉과 한반도전망대, 진달래능선, 진달래동산을 거쳐 옛길로 내려가도 되고,
(출발점→등잔봉→한반도전망대→산막이마을, 2.9km) 한반도전망대에서 더 욕심을 부려서 천
장봉, 삼성봉을 찍고 '신령참나무'와 '시련과 고난의 소나무'를 거쳐 산막이마을로 내려가도
된다. (출발점→등잔봉→천장봉→산막이마을, 4.4km) 그리고 산을 타기가 귀찮다면 호수를 따
라 이어진 옛길을 이용하면 되며, 그것도 귀찮다면 돈 몇푼 주고 배를 타면 된다.

싱그러운 나무와 풀의 향기, 산에서 낭랑하게 불어오는 산바람과 괴산호에서 불어오는 강바람
에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는 즐거운 곳으로 시간이 넉넉하다면 옛길만 살피지 말고, 등잔봉과
천장봉 등의 산도 같이 겯드리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둘러봐도 길어봐
야 4시간 이내(천장봉을 경유할 경우 5시간 이내)면 충분하다.

*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일대


▲  세모로 솟은 산막이옛길 표석

▲  산막이옛길로 들어서다

궂은 날씨임에도 산막이를 찾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다행히 비가 크게 내리지 않아서 우산
이나 우의, 모자만 걸쳐도 별탈 없이 움직일 수가 있다.
주차장을 출발해 밤, 옥수수 등의 자연산 간식과 지역 특산물을 파는 가게촌을 지나면 본격적
인 산막이옛길 나들이가 시작된다. 소나무가 무성한 소나무동산이 곧 모습을 드러내고 유람선
을 타는 차돌바위 나루터가 걷기의 귀차니즘과 문명의 혜택을 바라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
것을 타면 산막이까지 10분 정도면 간다. (옛길로 걸어갈 경우 1시간 소요) 하지만 우리는 등
잔봉과 천장봉, 삼성봉을 찍고 산막이마을로 내려가 옛길로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그야말
로 산막이옛길 본전 코스로 돌기로 했다.


▲  괴산호 유람선을 타는 차돌바위 나루터
적정인원이 차면 바로 배가 출발한다. (따로 시간표는 없음)

▲  고인돌쉼터
고인돌처럼 생긴 바위가 여럿 널려 있다. 이곳은 옛 사오랑 서당에서
한여름에 야외 학당으로 이용했던 곳이다.

▲  가파르게 이어지는 소나무동산 옛길

▲  솔내음이 코와 마음을 찌르는 소나무동산
40년 묵은 소나무가 넓게 군락(약 1만 평)을 이루고 있다.

▲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산막이옛길의 자연산 거울, 괴산호
나무와 꽃, 산, 구름이 호수에 비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몸단장에 여념이 없다.
산에 둘러싸인 호수의 자태는 첩첩한 산중에 안긴 비밀의 호수처럼 신비롭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  소나무 출렁다리를 타고자 기다리는 사람들

▲  소나무 출렁다리 (1)

소나무동산 남쪽에는 산막이의 명물인 소나무 출렁다리가 있다. 이름 그대로 출렁이고 흔들거
리는 다리로 다리 밑판의 간격이 성인 발 크기 정도로 벌어져 있어 좌우 난간을 잘 붙잡고 밑
판도 잘 챙기며 움직여야 별탈이 없다. 자칫 방심하여 그 틈으로 발이 빠지면 영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게다가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반복되고, 지그재그 형태로 여타 관광지의 그저 그런 흔들다리
와 완전히 차원이 틀린 거의 훈련/유격용 흔들다리 버전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
니 다리가 짧은 사람이나 어린이, 알콜이 좀 들어간 사람은 출렁다리를 피하기 바란다. 보기
와 달리 다소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어 체감 거리를 더욱 늘려준다.


▲  소나무 출렁다리 (2)

▲  소나무 출렁다리 (3)

▲  변덕스런 하늘과 대조적으로 고요함에 잠긴 괴산호


 

♠  산막이옛길의 지붕을 거닐다 (등잔봉, 한반도전망대)

▲  등잔봉으로 올라가는 길

소나무출렁다리를 지나면 오른쪽에 등잔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산길이 나온다. 호수 옛길만 거
닐면 싱거울 수가 있으니 산막이의 지붕인 등잔봉~천장봉 능선을 거니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
다.

등잔봉으로 오르는 길은 세상살이만큼이나 다소 각박하다. 처음에는 경사가 완만하지만 하늘
과 가까워질수록 점차 각박하게 이어져 숨을 제대로 가쁘게 만든다. 그 각박한 산길은 등잔봉
북쪽까지 이어지는데, 그냥 오르는 것도 힘든 마당에 봄비의 희롱으로 산길이 흥분하여 진흙
탕이 되버렸으니 은근히 질퍽이고 미끄럽다. 게다가 산길 밑 경사는 60도 이상으로 아찔하여
더욱 조심을 기해 움직일 수 밖에 없다.


▲  등잔봉으로 오르면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괴산호와 산막이옛길 주변

▲  등잔봉으로 오르는 길

▲  조그만 등잔봉 정상 표석 (해발 450m)

등잔봉은 국사봉과 더불어 산막이의 북쪽 지붕이다. 이곳에 오르면 남쪽으로 천장봉과 삼성봉
이, 동쪽으로는 산막이옛길과 괴산호가 바라보이는데, 비를 가득 품은 비구름이 그 풍경을 모
조리 앗아가버려 보이는 것은 그저 하얀 구름 뿐이다.
궂은 날씨로 인해 내가 기대했던 환하게 펼쳐진 풍경은 아니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구름이 진
하게 그것도 발 밑으로 가득 깔려 있어 고작 해발 450m를 올라왔을 뿐인데, 마치 1,500m이상
봉우리에 올라선 기분이다. 그야말로 3배 이상의 효과라고나 할까? 게다가 천상(天上) 세계의
신선이나 그의 식구가 된 기분까지 교차하니 화창한 날 풍경에 못지 않은 기분이 나를 즐겁게
한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雲海) ①
하늘 세계도 세력 확장을 하는 모양이다. 구름이 해발 400m까지 쑥 내려왔다.
이러다 밑 세상까지 하늘의 침범을 받는 것은 아닐까? 구름이 거대한
하얀 도화지를 이루며 밑 세상을 모두 가져가버렸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 ②
저 하얀 구름을 거닐고 싶다. 물론 신선이나 손오공이 아닌 이상은
위험하겠지..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 ③
운해 너머로 구름에 감싸인 산이 있다. 그 자태가 마치 신선이나 천상 세계의
지체 높은 존재만 접근이 허락되는 신비로운 산처럼 보인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 ④
대자연이 그린 장대한 수묵담채화, 아무리 천재 화가라고 해도 저 그림을
100% 그대로 담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천장봉(437m)
엷은 구름을 걸친 모습이 자못 신비로워보인다. 혹 선녀 누님이
구름을 타고 내려온 것은 아닐까?

▲  한반도전망대에서 희미하게 바라보이는 한반도지형

등잔봉과 천장봉 사이에는 한반도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가 있다. 이곳은 바로 밑에 아득히
바라보이는 괴산호의 걸출한 작품, 한반도지형을 굽어보는 현장으로 괴산호가 빚은 작품이다.
허나 아무리 걸출하면 무엇하나? 자연이 단단히 시샘을 했는지 비구름과 안개로 싹 가려버렸
으니 말이다. 다행히 구름이 조금 틈을 보여 그 사이로 한반도지형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한반도지형이란 말그대로 우리나라가 담겨진 한반도를 닮은 지형으로 영월(寧越)의 한반도지
형이 대표적이다. 그것도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시작으로 천하에 많은 한반도지형이
발굴되어 하나 같이 관광지로 키워지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아주 조그만 축소판
이라 그렇다.
허나 우리는 그 조그만 한반도에서 안주하면 안된다. 그 옛날 선조들이 다스렸던 수많은 실지
(失地, 만주와 요동, 요서, 연해주, 대마도, 왜열도 등)을 되찾아 과거의 광영을 되찾아야 될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때가 오면 한반도지형은 과감히 버리고 그에 걸맞는 지형을 키웠
으면 좋겠다.


 

♠  산막이옛길 마무리

▲  나무 사이로 보이는 괴산호 (고공전망대 주변)

한반도전망대에서 남쪽으로 1굽이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그대로 직진하면 천장봉, 왼
쪽으로 가면 진달래능선인데, 비가 계속 내리고 있고, 산길 상태도 좋지 못해 천장봉과 삼성
봉을 빼고 바로 진달래능선으로 내려가 원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쉽기는 하나 날씨가 계
속 심술을 부리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럴 때는 욕심을 쿨하게 부리고 코스를 좀 줄이
는 것이 좋지.

진달래능선은 천장봉 북쪽에서 옛길로 내려가는 길로 경사가 조금 패기가 있다. 진달래가 무
리를 이루고 있어 진달래능선이라 불리는데, 진흙이 되버린 산길을 정신없이 내려오니 괴산호
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진달래동산이 마중을 한다. 여기서 잠시 떨어졌던 옛길과 만났다.

진달래능선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은 괴산호를 따라 출발점으로, 남쪽은 가까이에
보이는 산막이마을로 이어진다. 이곳에 왔으니 산막이마을도 봐야 당연한 도리이지만 코스 단
축에 따라 주어진 시간도 줄어들어 거기를 경유하기에는 상당히 촉박했다. (마을에서 배를 타
고 돌아가면 충분하나 배까지는 생각을 안했음)
개인적으로 왔다면 모두 보고 가야 직성이 풀리겠지만 단체로 온 것이니 시간을 어길 수는 없
다. 게다가 일행들이 가져온 행동식과 간식을 먹느라 중간중간 눌러 앉은 시간이 너무 많아서
정작 필요한 것을 보는 시간이 많이 줄어버렸다. 하여 노수신적소가 있는 산막이마을을 저 앞
에 두고 단장의 마음으로 길을 돌아서야 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 오라는 산
막이의 지극한 뜻이 아닐까? 그래도 너무 아쉽다.


▲  산막이옛길의 잔잔한 거울, 괴산호

▲  물결을 가르며 달리는 괴산호 유람선
산막이마을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발이다. 마을까지 빠르게 이동하는
교통수단으로 15~20분 정도 걸리며, 인원이 차면 출발한다.

▲  나무데크길로 무장한 산막이옛길

▲  얼음바람골

호수전망대를 지나면 얼음바람골이라 불리는 조촐한 계곡이 나온다. 돌 피부에 푸른 이끼가
가득하여 이곳이 청정한 곳임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데, 이곳은 한여름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한기를 느낄 정도라고 하여 얼음바람골이라 불린다.
그래서일까?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밀양(密陽) 얼음골의 바람처럼 매우 차갑게 느껴졌다.
여름 제국도 염통을 부여잡고 슬금슬금 피해가는 피서의 성지인 셈이다.


▲  산막이옛길의 유일한 샘터, 앉은뱅이약수

옛날에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이 물을 마셨는데 물의 효험을 받아 무려 걸어서 나갔다고 한
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몸에 좋은 무언가가 깃든 물로 명성이 자자
했으며, 수질도 양호하고 1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괴산호의 물을 채워주는
수원(水源)의 하나이기도 하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받아 마시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시원하다. 내 마음
이 마치 앉은뱅이에서 정상 다리로 된 기분..


▲  귀여운 호랑이 형상이 있는 호랑이굴

호랑이굴은 바위에 뚫린 조그만 자연산 동굴로 1968년까지 호랑이(표범)이 살았던 굴이라 전
한다. 그 이후 주인 없는 굴이 되었으며, 호랑이가 살던 것을 기리고자 그 앞에 색채가 진한
모형 호랑이상을 두었으나 예전 호랑이의 매서운 기운은 커녕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처럼 귀엽
기만 하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스한 바람이 나오며, 옛길에는 이곳 외에도 여우비바위굴도 있
는데, 그곳은 산막이를 오가던 사람들이 여우비(여름 소나기)와 한낮 더위를 피하던 곳이다.


▲  연화담(蓮花潭)
이곳에는 예전에 벼를 키우던 논이 있었다. 높은 곳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에 의존해 모를 심었는데, 옛길을 조성하면서 그 자리에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연화담으로 삼았다.


촉박해진 집결시간 때문에 옛길의 많은 명소를 사진에 싹 담지 못하고 겨우 일부만 담는데 그
쳤다.
진달래동산에서 연화담 사이에는 다래숲동굴, 마흔고개, 고공전망대, 괴음정, 괴산바위, 호수
전망대, 얼음바람골, 앉은뱅이약수, 풀과나무의 사랑, 옷벗은 미녀참나무, 여우비바위굴, 매
바위, 호랑이굴, 노루샘 등의 명소가 있는데, 이중 얼음바람골과 앉은뱅이약수, 연화담만 사
진에 담은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둘러보긴 했으나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쳤다.

어쨌든 주차장으로 돌아와 부근 식당에서 버섯소고기전골로 두둑히 배를 채우고, 곡차(穀茶)
도 다수 겯드리며 뒷풀이를 하다가 오후 4시에 잠시나마 정든 산막이옛길을 뒤로하며 다시 서
울로 돌아갔다.
분명 보긴 했으나 많은 것을 놓쳤던 산막이옛길과의 첫 만남, 그야말로 벌처럼 날라가고 돌아
왔던 단체 등산 나들이로 놓친 것이 많은 만큼 아쉬움도 크다. 허나 나중에 다시 인연이 된다
면 그 아쉬움을 모두 풀 것이다. 둘러보지 못한 곳은 잠시 미래에 맡겨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산막이옛길 봄비 산책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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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변두리에 숨겨진 신선한 명소, 궁동 정선옹주묘역~구로올레길 늦가을 산책 (궁동저수지생태공원, 원각사, 지양산)

 


' 늦가을 서울 궁동 나들이 '
(궁동생태공원, 정선옹주묘역, 구로올레길)

▲  구로올레길 (와룡산~지양산 구간)

궁동생태공원 (궁동저수지생태공원)

▲  정선옹주 묘역

▲  궁동생태공원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산지도 어언 30여 년이 넘었다. 남들보
다 일찍 지리(地理)와 역마살에 두 눈이 뜨면서 10대 시절부터 서울에 온갖 명소를 쑤시
고 다녔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다녔지만 서울에는 아직도 내 손길이 닿지 않은 미답처(
未踏處)가 수두룩해 나의 자존심을 적지 않게 긁어 놓는다.

늦가을이 절정에 치닫던 어느 평화로운 날, 미답처 사냥을 위해 서울 장안 서쪽 끝에 위
치한 궁동을 찾았다. 이곳은 아직 발을 들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신선한 곳이다.
궁동(宮洞)은 구로구(九老區)의 일원으로 동/서/북쪽이 와룡산(臥龍山)과 매봉산의 야트
막한 산줄기에 막혀있고, 남쪽만 뚫려있는 반 분지 지형으로 3면이 산에 감싸여 있어 포
근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거의 농사를 짓던 시골로 지금도 밭두렁
이 적지 않게 펼쳐져 있어 전원(田園) 분위기는 여전하다. 게다가 궁동생태공원, 정선옹
주묘역, 구로올레길 등의 참신한 명소가 숨겨져 있어 이번에 그들을 미답처 목록에서 싹
지우기로 했다.
참고로 궁동은 법정동명으로 행정동명인 수궁동(水宮洞)의 관할구역이다. 수궁동은 온수
동과 궁동을 합친 이름으로 흔히 생각하는 용왕의 수궁과는 관련이 없음을 밝힌다.

햇님이 하늘 한복판에 걸려있던 14시, 오류동역(1호선)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6613번 시
내버스(양천차고지↔대림역)를 타고 궁동의 좁디좁은 골목길을 가로질러 서서울생활과학
고 정류장에 두 발을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니 서울이 무색할 정도의 전원풍경과 함께 이번의 첫 메뉴인 궁동생태공원
이 바로 모습을 드러낸다.


 

♠  농업/낚시용 저수지에서 생태공원으로 새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궁동생태공원(궁동저수지생태공원)

▲  북쪽에서 바라본 궁동생태공원 1구역 (이하 1구역)

궁동 한복판에 자리한 궁동생태공원은 기존의 궁동저수지를 손질한 일종의 호수공원이다. 길
게는 '궁동저수지생태공원'이라 불리며 저수지 중앙에 도로(오리로)가 지나가면서 강제로 2개
구역으로 구분되어 서쪽은 2구역, 동쪽은 1구역이라 불린다.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1구역 동
쪽에 조그만 골목길로 서서울생활과학고에서 회차하는 시내버스와 차량들이 오갔다.

궁동생태공원으로 새로운 삶을 꾸리고 있는 궁동저수지는 1943년에 농업용수 해결을 위해 왜
정(倭政)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들었다. 저수지 자리에는 원래 '벼락구덩이 우물'이라 불리
는 우물이 있었는데, 마치 벼락을 맞아 생긴 듯한 구덩이에서 물이 솟아나 그런 이름을 지니
게 되었다. 허나 궁동 일대 경작지가 종종 물부족에 허덕이자 왜정은 농업용수 해결과 쌀 수
탈을 위해 우물을 밀어버리고 저수지를 만든 것이다.

우물에서 솟던 물이 자연히 저수지를 채워주면서, 저수지는 늘 마를 날이 없었고, 궁동을 비
롯해 이웃 오류동(梧柳洞) 주민들까지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풍수
지리(風水地理)적으로 산을 뒤에 두고 물을 앞에 든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까지
그럭저럭 띄게 되었다. 허나 왜정의 수탈은 나날이 심해갔고, 왜인(倭人)이 저수지를 소유하
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온갖 까칠함을 아끼지 않았다.

해방 이후 저수지는 국유지로 바뀌었으며, 인근 항동저수지와 함께 서울의 주요 낚시터로 인
기를 모았다. 이 땅에서 저수지란 존재가 참 흔한 존재이긴 하지만 정작 서울에서는 인근 항
동(航洞)과 궁동 2곳 밖에는 없었다. 저수지가 넓고 물이 깨끗하여 물놀이 수요가 많았고, 거
기에 연꽃까지 심으면서 한여름에는 연꽃의 화려한 향연까지 펼쳐졌다.

이렇게 서울의 외진 시골로 조용히 묻혀 지내던 궁동은 1970년대 이후 도시화의 물결이 몰아
치면서 많은 변화를 강요 받게 된다. 적지않은 경작지를 밀어내고 연립주택과 온갖 도시형 주
택이 들어서면서 농업 인구와 경작지는 그만큼 줄어들었고, 저수지는 자연히 낚시터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낚시꾼들에게 소정의 이용료를 받고 마을 기금으로 활용했으며,
저수지가 넓다보니 배를 타고 관리했다.

낚시터로 그런데로 밥값을 하던 궁동저수지는 2000년 이후 큰 위기를 맞게 된다. 계속되는 궁
동 지역 개발로 시가지는 궁동저수지 남쪽까지 밀려왔고, 서울~부천간 도로 확충으로 궁동 북
쪽에 도로(신정로)가 뚫리면서, 부일로(1호선 경인선 북쪽 도로)와 그 도로를 잇는 신작로(오
리로)를 추진하게 되었는데, 그 도로가 저수지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저수지의 한복판을 건방
지게 가르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저수지는 2개로 갈라졌고 덩치 또한 반토막이 되었다.
이후 수맥에 문제가 생겨 저수지는 날로 야위어 갔고 수질까지 영 좋지 않게 변하면서 낚시터
로도 더 이상 부리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여 점차 동네 사람들의 근심거리로 변해갔다. 궁동
의 꿀단지이던 저수지가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인해 꿀이 쏙 빠진 깨진 단지가 된 것이다.

천덕꾸러기가 된 저수지를 두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고심하다가 구로구에서 2003년 9월, 저
수지와 주변 일대 10,205㎡를 생태공원으로 조성하기로 하였다. 즉 요즘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생태공원 카드를 내민 것이다. 그래서 39억을 들여 저수지 리모델링을 추진했으나 돈 문제로
공사가 지연되면서 2008년 4월 완성을 보았으니 이렇게 하여 자칫 폐기될 뻔한 위기를 극복하
고 생태공원으로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

저수지 주변에는 25,000여 그루의 꽃과 나무를 심고 2구역 저수지 북쪽에는 3,379㎡의 생태습
지(궁동 생태습지원)를 닦아 생태공원의 풍경을 돕게 했다. 100여 마리의 비단잉어를 풀어 저
수지에 다시 물고기가 살게 했으며, 1구역과 2구역 저수지 위로 목재로 생태 탐방로를 만들었
다. 또한 저수지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 정자(수궁정) 등을 두어 쉼터의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했다.
오리로로 저수지가 동서로 분단된 탓에 조금은 좁아 보이며, 저수지 2구역 서쪽 야산에는 궁
동을 호령했던 정선옹주와 안동권씨 묘역이 자리해 있어 같이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궁동을 넘어 이제는 구로구의 꿀단지로 고개를 든 궁동생태공원은 궁동 산신제를 비롯해 동네
의 여러 행사가 열리는 광장이 되었고, 지역 사람들의 쉼터이자 변변한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
던 구로구의 단비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  저수지를 남북으로 가르는 1구역 생태 탐방로
저수지의 중앙을 빈틈도 없이 관통하는 오리로와 달리 저수지에게도
숨쉴 틈을 주어 생태 탐방로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

▲  쉼터가 놓인 생태 탐방로 중간
부분과 1구역 북쪽

▲  나른한 늦가을 오후를 깨우는
1구역 분수대


저수지 1구역과 2구역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소소하긴 하지만 서로를 이어주
는 수로 4개를 두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도로를 냈을 때 저수지를 배려하여 지금처럼 꽉막힌
둑처럼 공구리치지 말고 밑도리가 뚫린 다리로 놓았다면 저수지가 최악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
이다. 다행히 조그만 수로를 내어
죽어가는 저수지를 위로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  동남쪽에서 바라본 1구역

▲  남쪽에서 바라본 1구역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다. (단 왼쪽에 오리로를 빼고) 갈대와 나무,
꽃, 전봇대, 그리고 푸른 하늘을 거니는 구름과 햇님, 달님도
수면을 거울로 삼아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  궁동생태공원 2구역(이하 2구역)과 생태 탐방로
늦가을과 갈대가 너무 익다 못해 이제는 누렇게 말라가고 있다.


궁동저수지의 원흉인 오리로를 건너 서쪽으로 넘어가면 저수지의 나머지 부분인 2구역이 펼쳐
진다. 2구역은 1구역과 비슷하게 수면 위로 생태 탐방로를 남북으로 내었고, 8각형 정자인 수
궁정을 북쪽에 두어 경관을 돕게 했다. 그리고 1구역보다 갈대가 더 수북하게 자리고 있어 이
곳이 1구역보다 생태공원의 질감이 더 높아 보인다.


▲  서쪽에서 본 2구역과 생태 탐방로

▲  2구역을 장식하고 있는 상큼한 존재들
거북이 등짝에는 토끼가 귀엽게도 서 있다. 저들은 이곳과 전혀 관련은 없지만
이곳 행정동명이 '수궁동(水宮洞)'이다보니 그 이름에 아주 잘 어울리도록
별주부전(鼈主簿傳)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를 갖다 놓은 것 같다.

▲  저수지를 바라보고 선 2구역의 감초, 수궁정(水宮亭)

▲  돌탑과 솟대

솟대는 삼한시대 종교 성역이던 소도(蘇塗)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겁나게 흐른 지금
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대중적인 존재가 되었는데 솟대에는 보통 오리 등의 날짐승을 두어
하늘(신)과 인간을 잇는 중간 역할로 삼았다.
솟대는 그렇다치고, 솟대가 몸을 의지한 돌탑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돌을 차곡차곡 얹혀
서 오리지날 돌탑으로 쌓은 것이 아니라 아주 편하게 돌에다가 시멘트를 발라서 돌탑 형식만
띄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날림 돌탑이 어딨단 말인가? 구로구청의 철밥통 발상이 애
써 꿀단지로 일으킨 궁동생태공원의 옥의 티를 유발시켰다.

* 궁동생태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서 구로구 궁동 42-2, 42-4


 

♠  궁동을 호령했던 옛 주인들의 사후 안식처
정선옹주(貞善翁主) 묘역

▲  정선옹주/안동권씨 묘역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제일 앞쪽이 권세태묘)

궁동생태공원 2구역 서쪽 언덕에는 궁동을 호령했던 정선옹주와 그의 시댁인 안동권씨 일가의
묘역이 넓게 자리를 닦았다. 분명 묘역은 권협(權悏, 1553~1618)을 중심으로 한 안동권씨 묘
역이지만 공주가 묻힌 탓에 세상에는 거의 일방적으로 정선옹주묘역으로 알려져 있다. 제왕의
딸인 옹주의 위엄 앞에 권협 일가의 이름이 묻힌 것으로 권협이나 공주의 남편인 권대임이 아
무리 잘나도 왕실 공주보다 감히 높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묘역에는 모두 6기의 묘(권근중 묘까지 합치면 8기)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권협과 전주최씨 부인의 묘가 1단을 이루고 있고, 그 밑에 권협의 손자인 권대임
(權大任)과 정선옹주의 묘가 2단을 이룬다. 그 아래로 권대임의 부모인 권신중과 전주이씨 묘
(3단), 권대임의 아들 권진과 남양홍씨 숙부인(淑夫人)의 묘(4단), 권진의 장남 권이경의 묘(
5단), 권이경의 장남 권세태의 무덤(6단)이 차례대로 자리한다.
그리고 별도로 권협 묘역 북쪽에는 권대임의 삼촌이 되는 권근중(權謹中) 내외의 묘가 숨겨져
있으며, 이들 무덤은 기본적으로 묘비와 상석(床石), 문인석(文人石) 1쌍, 망주석(望柱石) 1
쌍을 갖추고 있다. (단 권대임/정선옹주묘는 호석에 장명등까지 지니고 있음)

묘역과 생태공원 사이 산자락에는 권대임의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생태공원 솟대 옆에는 권
협의 신도비가 자리해 있어 이곳을 비선거리 또는 비석거리라 불렸다. 권협을 기준으로 6대가
이어져 내려온 묘역으로 묘비와 문인석, 상석, 호석(護石), 장명등, 촛대석 등이 잘 남아있어
조선 중기(16~17세기)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음)

그럼 묘역의 주인공이 되버린 정선옹주(
貞善翁主, 1594~1614)는 누구일까?
정선옹주(이하 옹주)는 조선 14대 군주인 선조(宣祖)의 7녀로 정빈(靜嬪)민씨의 소생이다. 정
빈은 어질고 예를 갖춘 여인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옹주 또한 그런 생모를 닮아서 공손하고 부
녀자의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전한다.
옹주가 권협의 손자인 권대임에게 시집가자 선조는 궁동(궁골)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
하며 그곳에 살도록 했다. 그래서 공주의 위엄에 걸맞게 고래등 기와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집이 궁궐만큼이나 컸다고 하여 동네 이름도 궁골, 궁동(궁마을)이 되었다.

옹주의 집은 궁동생태공원 북쪽인 서서울생활과학고 자리에 있었는데. 학교 정문 안쪽에 궁골
유허비를 세워 옹주의 고래등 저택이 있던 곳임을 살짝 귀뜀해준다. 이 집은 6.25전쟁까지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며, 당시 집의 면적은 700여 평, 집 크기는 50칸이었다고 한다.
허나 6.25로 인해 집은 모두 불타버려 가루가 되었고, 그 자리는 경작지로 쓰였다가 서서울생
활과학고가 들어앉았다. 생각 외로 옹주의 집은 1950년대 초반까지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생
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그림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허나 궁동 토박이들의 증언과 집터에서 쏟아져나온 기왓조각과 도자기, 옹기 파편을 통해 집
이 제법 대단했음을 가늠케 하며, 집의 모습과 구조가 어떠했는지는 아직 조사를 벌이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남양주시 평내동에 있는 궁집(가민속문화재 130호,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 내외의 집)과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허나 그것도 정답은 아니니 각자 취
향에 따라 조선 중기 옹주의 집을 머릿 속에 그려보기 바란다.


▲  정선옹주/안동권씨 묘역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와룡산 자락에 안긴 정선옹주 묘역은 명당(明堂)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질 정도로 아주 대단
한 명당 자리로 우리나라 100대 명당의 으뜸으로 꼽힌다. 궁동을 북쪽으로 감싸는 와룡산을
주산(主山)으로 삼아 동쪽으로 뻗어간 줄기가 좌청룡(左靑龍)을 이루고, 서쪽으로 흐르는 산
줄기가 우백호(右白虎)를 이룬다.
주산에서 좌우로 뻗어내린 산줄기의 정중앙에 고추처럼 생긴 짧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흐르니
그 산줄기 끝에 이들 묘역과 궁동저수지가 자리한다. 이 지형을 풍수지리적으로 금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형이라 부른다. 그냥 닭도 아닌 금닭이 알을 품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지형인가?

허나 한참 뒤에 일이지만 옹주의 집이 전쟁으로 박살이 나고, 그 후손도 딱히 두드러지는 인
물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10%가 부족했던 명당이었듯 싶다. 명당이나 묘자리에 관심이 있
다면 한번 가보기 바란다. 저수지로 인해 그런데로 배산임수를 취하며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전망도 확 트여있어 욕심이 확 날 정도로 자리도 괜찮은 편이다.


▲  고된 세월의 때가 입혀진 권대임(權大任) 신도비

정선옹주 묘역에는 2기의 신도비가 있는데, 그중 북쪽 산자락에 권대임 신도비가 서 있다. 궁
동생태공원과 묘역 중간에 자리해 있어 쉽게 눈에 들어온다.

신도비란 고위 관료와 왕족들만 쓸 수 있던 비싼 비석으로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묘역
동남쪽에 세운다. 이곳도 그 원칙을 지키고 있으며, 네모난 비좌(碑座)에 권대임의 일대기를
담은 비신(碑身)을 세우고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이다.

비석의 주인공인 권대임(1595~1645)은 권협의 손자이자 권신중(權信中)의 아들로 자는 홍보(
弘輔)
이다. 서예를 매우 잘하여 선조 임금에게 자주 칭찬과 상을 받았으며, 1살 연상인 정선
옹주에게 장가들어 길성위(吉城尉)가 되었다. 허나 옹주는 1614년 20살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
을 떠나 19살의 나이에 홀아비가 되고 만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봉헌대부(奉憲大夫)가 되었으며, 1635년 선무공신(
宣武功臣)의 적손(嫡孫) 자격으로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터지자 못
난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간 공적으로 숭덕대부(崇德大夫)로 승진되고 도총관(都摠管)이
되었으며, 1639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자신의 재화를 싹 털어 병자호란 때 포로로 잡
혀간 사람들(특히 노인들)을 데리고 돌아와 칭송이 자자했다.
그가 세상을 뜨자 선무원종공신으로 유록대부(綏祿大夫)를 더해 정1품에 추증되었으며, 신도
비를 세워 그의 행적을 기렸다.


▲  권협(權悏) 신도비

궁동생태공원 솟대 옆에는 묘역의 최고 어른인 권협의 신도비가 있다. 형태는 앞서 권대임 신
도비와 비슷하며, 비석의 피부가 꽤 꺼무잡잡하여 고색의 기운이 진하다.

권협(1553~1618)의 자는 사성(思省), 호는 석당(石塘)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
낸 권상(權常)의 아들이다. 1577년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
文院), 춘추관(春秋館) 등을 거쳐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1589년 전국에 괴
질이 유행하자 함경도로 파견되어 백성을 돌보고 제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염통이 쫄깃해져 좌불안석이 된 선조에게 서울을 끝까지 지킬 것을
강력히 건의했으나 왕은 거절했다. <선조는 그의 충정을 가상히 여겨 자신이 차고 있던 패검(
佩劍)를 하사했다고 함>
1596년 시강관(侍講官)과 응교(應敎)가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이 터지자 급히 명나라로 파견
되어 원병을 청했다. 이때 명나라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정(李楨)은 '당신네 나라 지세를 알
아야 우리가 도울 수 있소'
무리한 부탁을 하자 별수 없이 조선 산천의 형세와 원근을 도면에
그려가며 막힘 없이 설명을 했다.
솔직히 명나라군은 왜군 조총의 밥으로도 아까울 정도의 쓰레기 수준으로 조선에서 온갖 민폐
를 아끼지 않았는데, 선조를 비롯한 상당수의 조선 위정자들은 명나라에 쓸개까지 다 내주며
지나친 사대주의를 일삼아 명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그러다보니 국가의 기밀이나 다름없던
조선의 지도를 명나라에게 그려주는 우를 범하고 만다.

조선 지도를 얻은 명나라 신종(神宗)은 흡족해하며 군사와 군량을 보냈으며, 원군을 끌고 온
공으로 예조참판(禮曹參判),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1604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선무원종공신(宣撫原從功臣)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길창군
(吉昌君)에 봉해져 전라도감사가 되었다. 1607년 예조판서를 거쳐 1609년 종묘(宗廟) 영건을
감수한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으나, 광해군(光海君) 시절에 홍문관(弘文館)의 탄
핵을 받으면서 벼슬을 버리고 집에서 두문불출하다가 1618년 세상을 떴다. 그의 시호는 충정
(忠貞)이다.


▲  두툼하게 솟은 권진(權瑱)과 숙부인 남양홍씨묘 봉분
묘비를 세웠던 자리에 비석은 온데간데 없고 현란한 무늬의 비좌만 멀뚱히 남아있다.

▲  권진 묘역의 뒷모습 (저 밑에 권이경, 권세태묘가 보임)

묘역 가장 앞쪽에 자리한 권세태는 이 묘역의 막내로 권이경의 장남이다. 1659년에 태어났으
며, 1690년 식년시(式年試)에 을과로 붙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권세태의 아버지이자 권진의 아들인 권이경(權以經) 묘가 있는데, 그는 사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그런 아들과 손자묘를 굽어보는 권진은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장
남으로 돈령부봉사(敦寧府奉事)를 지내고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권신중(權信中)과 부인 전주이씨묘

▲  권신중과 전주이씨묘 뒷모습

묘역 3단에 자리한 권신중(1575~1633)은 자가 군집(君執)으로 권협의 아들이자 권대임의 아버
지이다. 부인은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 이정필(李廷弼)의 딸이다.

1605년 증광시(增廣試) 생원과(生員科) 3등 45위로 합격하여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가 되었
고, 이듬해 의정부도사(議政府都事)가 되었다. 이후 형조좌랑(刑曹佐郞)과 강서현령(江西縣令
),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김제군수(金堤郡守). 단양군수(丹陽郡守) 등 여러 내/외직을 거
쳤고, 말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병으로 사양했다. 장남 권대임이 길
성군(吉城君)에 봉해지면서 좌찬성(左贊成)과 우의정(右議政)에 차례로 증직되었고, 이후 길
흥군(吉興君)에 봉해졌다. 그는 총명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말수가 적고 위엄이 대단했다고 전
한다.

권신중은 원칙대로라면 권협묘 밑에 있어야 된다. 허나 며느리인 정선옹주가 일찍 세상을 등
지자 일찍 묘역을 조성했는데, 아무래도 신분이 높은 공주이고, 그런 공주를 맞아들인 아들
권대임이 왕의 사위이기 때문에 권신중이 자리를 양보했다.


▲  권대임과 정선옹주묘

묘역 2단을 이루고 있는 권대임과 정선옹주묘는 같은 묘역임에도 다른 묘와 좀 차별화를 두었
다. 봉분(封墳)만 봉긋 오른 나머지 묘와 달리 봉분 밑에 호석(護石)을 둘렀으며, 장명등(長
明燈)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왕족이다보니 그런 파격적인 옵션을 달게 된 모양이
다. 역시 사람은 돈 많고 신분이 높고 봐야 된다.


▲  권대임과 정선옹주묘 뒷모습과 묘역 전경

▲  정선옹주묘 서쪽 문인석

▲  정선옹주묘 동쪽 문인석


▲  묘역의 어른인 권협과 정경부인 전주최씨묘

▲  뒤에서 바라본 권협 내외 묘

묘역 1단에는 권협 내외의 묘가 자리해 자손들을 굽어본다. 묘 뒤쪽에는 권근중 내외의 묘가
자리해 있는데, 그곳까지는 알지 못해 살피지는 못했다.

구로구에서는 이곳과 궁동생태공원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역사/자연공원으로 삼고자 계획하고
있으며, 묘역을 지정문화재 등급인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고자 서울시와 협의를 했으나 아직
까지 비지정에 머물러 있다. 허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해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조선 중기 묘역
들이니 구로구와 후손들이 잘 나서준다면 지방기념물 자리를 딸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구로
구에는 이곳 외에도 많은 사대부 묘역이 궁동과 천왕동(天旺洞), 고척동(高尺洞), 오류동 일
대에 흩어져 있는데 그중 유순정(柳順汀). 유홍(柳泓) 묘역과 함양여씨 여계(呂稽) 묘역이 지
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궁동생태공원(궁동저수지생태공원), 정선옹주묘역 찾아가기 (2018년 10월 기준)
* 지하철 1,7호선 온수역(8번 출구)에서 6613, 6616, 6716번 시내버스를 타고 서서울생활과학
  고(서울전파관리소)에서 내리면 바로 궁동생태공원이다.
  (6613번은 양천차고지 방향 차를 타야 되며, 6616번은 원각사입구에서 하차, 6613번과 6616
  번은 정진학교와 온수힐스테이트아파트로 크게 돌아가므로 6716번 버스를 타는 것이 빠름)
* 지하철 1호선 오류동역(3번 출구) 북쪽 오류1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6613, 6616번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정네거리역(1번 출구를 나가서 180도 뒷쪽)에서 6716번 시내버스 이용
* 정선옹주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 54-2

 


 

♠  구로구의 지붕, 구로올레길을 거닐다

▲  궁동 서쪽 배밀 밭두렁

정선옹주묘역 서쪽에는 밭두렁이 펼쳐져 있다. 와룡산 산줄기에 동/서/북이 막힌 골짜기로 채
소밭과 비닐하우스가 가득해 갑자기 머나먼 시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골짜기에 일군
경작지의 모양이 마치 뱀과 같아서 또는 뱀이 자주 나타난다고 하여 '배밀'이라 불렸으며, 정
선옹주묘역 남쪽은 '양지말'이라 불렸다.
궁동 배밀은 서울 변두리에 널린 시골의 하나로 회색빛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이런 전원 풍경
은 눈을 맑게 하는 안약과 같은 존재이다. 특히 서울에서 만나는 전원 풍경은 더욱 그러하다.
다행히 천박한 개발의 칼질은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이미 사람과 건물, 차량들로 비대해진 서울에서 이런 시골은 꼭 필요하다. 괜히 성냥갑 아파
트나 잔뜩 짓지 말고 조금은 어수선한 밭두렁이나 반듯이 정비하여 동네 경작지나 주말농장으
로 영원히 남았으면 좋겠다.


▲  원각사로 오르는 언덕길 (원각사 직전)

▲  원각사 직전에서 바라본 궁동

배밀 밭두렁 길을 따라 서북쪽으로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와룡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터를 닦
은 원각사란 조그만 절이 모습을 비춘다. 산자락 숲속에 자리해 있어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그런데로 풍기고 있는데, 옛날에 절이 있던 터로 '절안'이라 불렸으며, 원각사는 바로 그 옛
터에 세운 현대 사찰로 이곳에 있었다는 옛 절에 대해서는 딱히 전해오는 정보가 없다.


▲  원각사 요사(寮舍)와 미륵불입상

원각사(圓覺寺)는 60년도 안된 절이라 고색의 기운은 아직 피지 못했다. 구미가 당길만한 오
래된 보물이나 볼거리가 없어 그냥 지나칠까 했지만 늦가을이 만연하게 깃든 산사의 풍경이
너무 고와서 이번 나들이가 주는 보너스로 생각하고 한번 살펴보기로 했다.

숲속에 자리한 경내에 이르면 넓은 주차장이 먼저 나타나고 그 서쪽 높은 곳에 'ㄱ'모양의 요
사가 있다. 이곳은 종무소(宗務所)도 겸하고 있는데, 그 북쪽에는 하얀 피부의 미륵불이 시무
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며 동쪽을 굽어본다.
미륵불에서 북쪽 오솔길로 가면 6각형 범종각이 있고, 그 길의 끝에 법당(法堂)이 있다. 기와
집으로 이루어져 전통 불전(佛殿) 양식을 취했으나 철과 알루미늄 등으로 집을 크게 불리면서
조금은 어색한 모습이 되었다. 법당 내부에는 석가여래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대동하며 3
존불을 이루고 있고 그 좌우에 지장보살과 칠성탱 등이 자리하고 있다.

* 원각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 1-56 (오리로21가길 146, ☎ 02-2688-5421)

▲  서울을 굽어보는 미륵불입상

▲  6각형으로 빚어진 범종각(梵鍾閣)


▲  늦가을이 살포시 내려앉은 원각사 법당
기존의 조그만 법당을 크게 확장하면서 저런 모습이 되었다.

▲  갖출 것은 다 갖춘 법당 내부 (석가3존불, 지장보살, 칠성탱)

▲  범종각 앞에서 바라본 원각사 요사 주변

범종각 옆에는 와룡산과 구로올레길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 있다. 절이 궁동 구석에 자리해 있
고 속세에 그리 알려진 절이 아니라서 좀 고적하긴 하지만 와룡산과 구로올레길로 마실과 나
들이를 나온 이들이 심심치 않게 지나다녀 고적한 절에 잠깐잠깐씩 활력을 불어놓는다.

범종각 옆 산길을 3분 정도 오르면 바로 산능선인데, 이 능선이 와룡산 능선으로 구로올레길
산림형 2코스가 지나간다. 동시에 서울과 부천(富川)의 경계선 역할도 겸한다.


▲  구로올레길 산림형 2코스 (원각사 뒷쪽)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제주도(濟州島), 그곳에는 담장길을 뜻하는 올레길이 있다. 그 올
레길을 시작으로 도보 산책길이 전국에 급속히 번져나갔는데,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많은 지
역에서 앞다투어 도보길을 내놓고 있다. 서울도 도보길의 성지인 북한산둘레길과 서울둘레길
을 비롯해 관악산둘레길, 강서둘레길, 동작충효길, 강동그린웨이, 아차산둘레길, 안산(鞍山)
자락길, 구로올레길 등이 있다.
도보길의 명칭은 지역마다 다르지만 산을 낀 곳은 상당수 '둘레길'을 칭하고 있으며, '갈맷길
'이나 '산막이길','동작충효길','산꼬라데이길' 등 토속적인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구로올레
길은 그런 도보길 유행에 따라 구로구에서 야심차게 닦은 산책로로 둘레길을 칭하지 않고 제
주도를 따라 올레길이라 했다.

구로올레길은 기존의 산길과 숲길, 골목길, 하천길을 활용하여 도심형 코스 2개. 하천형 코스
3개, 산림형 4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가 찾은 길은 산림형 2코스로 온수역에서 궁동을 감
싸는 와룡산과 지양산 산줄기를 따라 매봉초교에 이르는 4.8km의 산길이다. 구로구의 지붕과
같은 곳으로 이중 와룡산과 지양산 남쪽 구간은 서울~부천의 경계선을 이루기도 하며, 접근은
온수역(5번 출구)과 정진학교, 원각사, 궁동3거리, 신정이펜하우스4단지, 매봉초교에서 하면
편하다.

우리는 2코스 구간 중, 원각사뒷쪽~궁동터널 북쪽 구간을 이용했는데, 이 구간은 전형적인 산
길로 경사도 거의 느긋한 편이며, 상당수가 능선길이다. 해발도 아무리 용을 써봐야 120~130m
정도이고, 숲이 무성하고 공기가 청정해 간단히 몸도 풀 겸, 마실 장소로도 아주 좋다. 허나
산길에 딱히 볼거리는 없으며, 그냥 나무와 꽃, 바위, 숲 너머로 펼쳐지는 조망(서울 구로구
와 부천 작동, 춘의동 지역)이 전부이다. 올레길 이전에는 동네 사람들이나 찾던 그들만의 숨
겨진 공간이었으나 올레길로 포장된 이후 조금씩 세상에 알려져 외지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  차돌바위 쉼터
의자 너머로 보이는 하얀 바위가 차돌바위이다. 그 유래는 모르겠음.

        ◀  작동터널 윗쪽 (수렁고개)
능선길이 상당수를 이루며 흘러가는 산림형 2
코스 구간 가운데 가장 쑥 주저앉은 구간이다.
그래서 여기서만큼은 급한 경사로 내려갔다가
다시 급하게 올라가야 된다.
저 밑에는 작동터널이 뚫려있어 온갖 차량들이
굉음을 부르짖으며. 저 양쪽으로 작동과 궁동3
거리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다.


▲  작동터널 북쪽 (수렁고개)

▲  지양산 국기봉으로 오르는 올레길
겨울 제국의 도래를 앞두고 늦가을 약기운이 다된 나무들은 그동안 걸친 나뭇잎을
떨어트리며 늦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한다. 땅바닥에 떨어진 나뭇잎들은
낙엽이란 우울한 이름을 단 채,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한다.

▲  지양산 국기봉
지양산 남쪽 봉우리에 신성한 태극기를 달고 국기봉이라 하였다.

▲  지양산 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산줄기 너머로 구로구와 양천구 지역이 바라보인다. 시내에서 별로
나오지도 않았는데, 제법 멀리 나온 것 같다.

▲  구로올레길 궁동3거리 북쪽

▲  구로올레길에서 지양산 생태순환길로 갈아탄 궁동터널 북쪽 갈림길

햇님이 뉘엿뉘엿 꽁무니를 빼면서 땅꺼미가 조금씩 약기운이 더해지자 잠시나마 정을 붙인 구
로올레길을 버리고 속세로 철수했다. 기분 같아서는 동쪽 종점인 매봉초교까지 가고 싶었지만
어둠에 잠긴 산길 산책도 썩 좋은 편도 아니고, 더군다나 야간 사진은 제대로 담기도 힘들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올 여운을 충분히 남기며
궁동터널 북쪽 갈림길에서 지양산 생태순환길로
갈아타 신정3지구 푸른마을3단지로 내려갔다.


▲  소나무가 가득한 지양산 생태순환길

▲  푸른마을3단지로 내려가는 지양산 생태순환길

지양산 생태순환길로 접어들어 6~7분 내려가니 어느덧 회색빛 도시가 보이기 시작한다. 시내
에서 고작 바로 옆 산, 그것도 높이가 낮은 산에 오른 것인데 산속을 꽤나 깊이 들어간 기분
이다.

지양산 생태순환길은 양천구(陽川區)에서 닦은 숲길로 신월7동에서 지양산 동쪽 산줄기를 따
라 궁동터널 북쪽 갈림길까지 이어지는 순 100% 산길이다. 이와 별도로 지양산 주능선을 쫓아
서 양천둘레길이 지나가는데 지양산 국기봉에서 매봉초교를 거쳐 계남근린공원까지 구로올레
길과 같은 길을 쓴다. 이 구간은 구로구와 양천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푸른마을3단지로 내려오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칼퇴근의 달인 햇님은 이제 보이지도 않고 달
님이 하늘에 높이 떠 위엄을 부린다. 이렇게 하여
구로올레길을 겯드린 궁동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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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10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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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 수리산, 반월호수에서 가을을 맞이하다 ~~~ (철쭉동산, 수리산산림욕장, 수리산둘레길, 수리사)

 

 

~~~~~  가을맞이 수리산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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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리산 철쭉동산 (5월 군포철쭉축제)

▲  수리산 둘레길

▲  수리산 수리사

 


이 땅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추석) 연휴 끝 무렵에 친한 후배와 군포 수리산(修理山)을
찾았다. 수리산에 대한 사람들의 찬양이 대단하여 얼마나 괜찮은 산인지 직접 확인하고
자 간 것이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14시 무렵, 금정역에서 그를 만나 서울 5623번 버스(군포공
영차고지↔여의도)를 타고 둔전초교에서 군포마을버스 3-1번으로 환승하여 수리산 입구
인 중앙도서관에서 두 발을 내렸다. 수리산 나들이는 여기서부터 막을 연다.


 

♠  수리산(수리산 도립공원) 입문

▲  수리산 산림욕장

수리산은 인구 30만을 지닌 군포시(軍浦市)의 듬직한 진산(鎭山)으로 군포 북서쪽과 안양시(
安養市)의 서남쪽, 안산시(安山市) 동쪽에 넓게 누워있다. 삼성산(三聖山, 480m), 관악산(冠
岳山, 629m)과 더불어 안양권의 이름난 명산(名山)으로 등산/나들이 수요가 상당하며 2009년
에 경기도의 3번째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수리산이란 이름 3자를 들으면 대입 수능시험의 수리영역이나 '수리수리 마수리' 주문이 생각
이 난다. 허나 산 이름은 그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전해오
는데, 산 바위가 마치 독수리처럼 생겨서 수리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고(수암봉 정상에 독수리
의 일종인 검둥수리가 앉아있는 듯한 바위가 있음), 산 남쪽 자락에 안긴 수리사에서 유래되
었다는 설, 그리고 조선시대 때 왕손(이씨)이 수도했다고 하여 수리산(修李山)이라 했다는 설
이 그것이다. 그래서 '修理山'이란 한자 대신 '修李山'이라 하기도 하며, '修理山'으로 바뀐
것은 20세기 중반 때라고 한다.

수리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봉우리는 태을봉(489.2m)이며, 슬기봉(469m)과 관모봉(426m),
수암봉(395m) 등이 수리산을 이루고 있다. 흙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산세가 완만하고 숲이 짙
으며 수리사계곡과 창박골(병목안) 등의 계곡이 흘러 조촐한 피서지를 선사한다.
수리산 동남쪽 자락인 군포 수리동 일대에는 산림욕장이 닦여져 있고, 산 주위로 수리산둘레
길과 수리산임도길 등의 둘레길이 닦여져 수리산의 멋을 더욱 돋구고 있으며, 수리사와 철쭉
동산, 2016년에 문을 연 초막골 생태공원 등의 명소가 있다. 특히 철쭉동산은 군포시의 야심
작으로 산자락에 넓게 철쭉밭을 닦아놓았는데 매년 5월 군포철쭉축제가 거하게 열려 사방을
온통 연분홍 천지로 만든다. 서울 근교에 이렇게 너른 철쭉의 공간이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  윗쪽에서 바라본 수리산 철쭉동산 (5월 군포철쭉축제)

▲  층층히 이어진 수리산 철쭉동산의 위엄 (5월 군포철쭉축제)

▲  수리산 철쭉동산 (5월 군포철쭉축제) ▲

수리산 등산은 수리산역(4호선)이나 철쭉동산, 군포시 중앙도서관, 태을초교, 수리약수터, 명
학역 등에서 시작하면 되며 군포시가 수리산 일대에 걸쳐놓은 둘레길은 총 4코스로 다음과 같
다.
① 수리산둘레길(군포수릿길 1코스) : 산본역~태을초교~노랑바위~임도5거리~감투봉~밤바위~시
민체육공원~산본역 (16km, 5시간 30분 소요)
② 수리산임도길 구름산책길(군포수릿길 2코스) : 중앙도서관~임도5거리~덕고개~행복쉼터~속
달동 마을길  (4.8km, 1시간 40분 소요)
③ 수리산임도길 풍경소리길(군포수릿길 3코스) : 수리산역~철쭉동산~중앙도서관~임도5거리~
수리사 (5km, 1시간 20분 소요)
④ 수리산임도길 바람고개길(군포수릿길 4코스) : 납덕골주차장~수리사방향~임도입구~바람고
개~에덴기도원~납덕골주차장 (5.6km, 1시간 50분 소요)

끝으로 수리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6.25전쟁이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이 부분은
거의 모르고 지나치는 실정인데, 6.25 시절인 1951년 1월, 북한에게 서울을 빼앗기자(1.4후퇴
) 서울을 수복하고자 국군 1사단과 미군 25사단, 터키 여단 1개 대대가 수리산 일대에서 북한
군과 머릿수만 무식하게 많은 중공군 수만 명을 상대로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는 그
해 2월 10일 서울 재탈환에 큰 역할을 했으며, 지형적인 불리함과 막대한 인명피해를 극복하
고 강력한 화력과 항공기 지원, 군사들의 투지에 힘입어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2007년부터 산 일대를 조사하여 국군 유해 4구와 유품 600여 점을 수습, 뒤늦게 국립현
충원에 봉안했다.


▲  수리산의 자랑, 숲길 (수리산 임도길)

수리산을 수식하는 명소의 하나인 수리산 산림욕장은 군포시가 1993년부터 조금씩 조금씩 닦
아놓은 것으로 면적은 159.4ha이다.
상수리나무와 때죽나무 등 활엽수림이 주류를 이루며, 리기다소나무 등 침엽수(針葉樹)가 산
중턱을 장식한다. 군포시내(산본, 수리동)와 바짝 붙어있어 접근성 하나는 매우 착하며, 숲이
매우 삼삼해 산림욕에는 아주 좋다. 또한 피크닉장과 자연학습장도 갖추고 있어 가족 나들이
와 소풍지로도 손색이 없다.

우리는 산림욕장 내부까지 들어가진 않고 항아리 겉돌 듯 입구 주변만 살펴보고 바로 수리산
둘레길에 임했다.
산림욕장 남쪽에서 성불사를 거쳐 임도5거리로 인도하는 수리산둘레길은 차량들이 다녀도 충
분할 정도로 폭이 넓다. 순 흙길로 이루어져 있고 햇살이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숲이 무성하
여 이곳만큼은 무더위와 자외선을 잊어도 좋다. 나무가 베푼 숲내음이 속세에서 오염된 심신
을 어루만져 주며, 산바람이 이따끔 불어와 번뇌와 땀을 단죄한다.

집으로 살짝 훔쳐와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숲길로 성불사 직전 구간을 제외하면 경
사는 거의 느긋하며, 뱀처럼 구불구불한 고개를 넘으면 임도5거리에 이른다.


▲  수리산 임도5거리

임도5거리는 수리산 남쪽 요충지로 숲길이 5갈래로 갈리는 곳이라 하여 속편하게 임도(林道)5
거리를 칭하고 있다. 우리의 목적지인 수리사는 여기서 북서쪽 길을 이용하면 되며, 남쪽 큰
길로 내려가면 덕고개와 갈치저수지 방면으로 이어진다. 5거리에는 쉼터와 조그만 정자가 있
고, 소나무와 온갖 나무들이 앞다투어 그늘을 베풀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임도5거리에서 수리사로 가는 숲길 (수리산임도길 풍경소리길)

임도5거리에서 수리사입구까지는 앞서 길보다는 좁지만 흙길이 진하게 닦여져 있다. 깊은 산
주름 속에 묻힌 산중이라 완전 산과 푸른 숲, 하늘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정녕 수도
권의 주요 도시인 군포시가 맞는지 절로 고개라 갸우뚱할 정도로 마치 강원도 산골로 순간이
동을 당한 기분이다.

자연의 소리가 전부인 숲길로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으며 경사도 꽤 느긋하다. 우리네 인생이
이런 산길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길을 25분 내려가면 수리사입구에 이른다.


▲  수리산이 베푼 조그만 샘터
빨간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늦더위로 타들어가는 몸 속을 진화한다.

▲  수리사로 올라가는 길 (1)

수리사입구에서 수리사까지는 각박한 오르막길을 10분 정도 올라야 된다. 임도5거리에서 여기
까지 내려온 높이 만큼 말이다. 절까지는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포장길이 닦여져
있으며, 길 옆에는 수리사계곡이 수줍은 모습으로 졸졸졸~~♪ 화음을 선보이며 반월저수지(반
월호수)로 흘러간다. 울창한 숲이 길과 계곡의 지붕이 되어 하늘을 가리고 있으며 바로 그 길
의 끝에 수리사가 자리해 있다.

▲  가늘게 흘러가는 수리사계곡

▲  수리사로 올라가는 길 (2)


▲  수리사계곡에서 만난 조그만 자연산 폭포
계곡은 작지만 수리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갖은 바위와 조그만 폭포들이
아기자기한 풍경을 자아낸다.

▲  드디어 도착한 수리사의 정문, 일주문(一柱門)


 

♠  수리산 서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오래된 절집
~ 수리사(修理寺)

수리사는 수리산 서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산사(山寺)로 군포에서 가장 산골 벽지이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제대로 묻힌 비구니 절로 화성시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인데 6세기
중반인 신라 진흥왕(眞興王) 시절에 신라 왕족인 운산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부처를
친견해 반드시 부처가 된다는 기별(記別)을 받고서 여기서 부처를 만났다고 하며, 그 연유로
산 이름을 견불산<見佛山, 또는 불견산(佛見山)>, 절 이름은 수리사라 했다고 한다.
허나 진흥왕 시절 안양/군포 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 지역으로 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신라
가 동맹국인 백제의 뒷통수를 치며 한참 한강 유역과 경기도 지역을 점령하던 시절이다. 게다
가 신라의 불교가 법흥왕(法興王) 때 공인되었다고 하지만 문무왕(文武王) 시절까지 절은 대
부분 왕경(王京, 경주)에만 지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변경이나 다름없는 이곳까지 와서 위험
을 무릅쓰고 절을 지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다만 경내에 오래된 석불 등이 있어 절이 우후죽
순 들어서던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대웅전 등 건물 36동과 12개의 암자(庵子)를 거느린 큰 사찰이었다고 한
다. 허나 이 역시 자료와 유물이 부족해 신빙성은 떨어지며, 절 주변 산세를 보면 그만한 건
물을 짓기에도 벅차 보인다. 비록 그 정도는 아니지만 왕년에는 시흥(始興) 지역(그때는 시흥
고을이었음)에서 그런데로 잘나갔던 모양이며,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이끌고 경남 지역에서 크게 활약을 했던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가 쓰러진 절을 재건하고 이곳에서 수도하며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허나 그는 근거지인 현풍
(玄風)과 의령(宜寧)에서 벼슬을 멀리하고 후학을 길렀던 사람이다. 수리사와는 전혀 관련도
없는 그를 왜 이곳 중창주로 등장을 시켰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아마도 그를 흠모하던 이곳
승려가 장대한 세월에 산산히 흩어진 수리사 내력을 손질하면서 그를 살짝 넣은 것은 아닐까?
20세기에 들어서 경허(鏡虛)가 이곳에 주석하여 머물렀으며, 대선사(大禪師)인 금오(金烏)가
이곳에서 출가했다. 6.25 전쟁으로 절이 파괴된 것을 1955년 청운(靑雲)이 중건했으며, 계속
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산신각, 나한전, 요사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죄다 20세
기 중/후반에 지어진 것이라 고색의 내음은 말라버렸다. 소장문화유산은 하나도 없으며, 오래
된 석불이 하나 전하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간신히 귀뜀해준다.

절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여기서부터 수리사 경내로 문을 들어서던 우
회길을 이용하던 그건 각자 마음이다. 여기서 주차장까지는 경사가 좀 가파르며 그 경사를 오
르면 수리사 표석과 차량들이 평화롭게 쉬는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1단 더 올라가면 요사
(寮舍)이며, 1단 더 오르면 경내의 중심 구역으로 대웅전과 나한전(羅漢殿), 범종각, 약수터
등이 있다.

▲  범종(梵鍾)의 보금자리인 범종각

▲  석가불과 500나한이 봉안된 나한전

▲  나한전 석가3존불
(석가불과 문수,보현보살)

▲  가지각색의 나한전 오백나한들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편강약수 ~ 약수는 어디가고 물통만 있나?

산사에는 늘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리사 역시 그 예외는
아니라서 대웅전 옆구리에 샘터를 두고 이름도 좋은 편강약수라 하였다. 하지만 샘터가 어디
아픈지 물은 막혔고, 대신 철덩어리 물통을 두어 샘터의 역할을 대신하게 했다. 샘터에 놓인
바가지들이 어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속히 샘터와 물줄기를 복구하여 약수터를 되찾기 바란
다.


▲  수리사 대웅전(大雄殿)

이곳의 법당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으로 경내에서 가장 큰 건
물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위엄 있게 들어앉아 남쪽을 굽어보고 있으며, 내부에는 석가
3존불과 여러 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3존불 위로 황금색 닫집이 장엄하게 자리한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닫집

▲  단촐한 모습의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뒷쪽 언덕이자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삼성각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정
면과 측면이 달랑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3명의 성스러운 존재, 산신과 독성(나반존자), 칠성
(치성광여래)이 봉안되어 있다.


▲  산신(山神) 가족이 담긴 산신탱

▲  삼성각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대웅전과 요사 뒷통수가 보이고, 수해(樹海)를 이루는 수리산
남쪽 줄기 너머로 인구 120만을 지닌 경기도의 중심 도시,
수원(水原)이 시야에 들어온다.

▲  수리사의 숙성된 흔적, 파괴된 석불과 석탑 잔재들

삼성각 옆에는 완전하지 못한 석재들이 고색의 때를 가득 머금으며 옹기종기 모여있다. 넓적
한 돌판에는 주름이 여러 겹 그어진 큰 돌이 있는데, 딱 보니 석불의 흔적으로 보인다. 석불
의 얼굴과 아랫도리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죄다 휩쓸려 사라졌고 옷을 걸친 몸통
부분만 남은 것이다. 그 앞에는 석탑의 잔재로 보이는 돌이 놓여져 있으며, 예전 수리사에 5
층석탑이 있었다고 하므로 그 탑의 잔재나 옛 건물의 주춧돌로 보인다.
다들 왕년에는 한 가닥 하던 존재들이나 지금은 초췌한 몰골로 지나간 세월을 원망하니 역시
나 인생은 부질 없는 모양이다. 수리사의 오래된 숙성의 흔적으로 20세기 중반 이후 절을 중
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수습한 것이다.

※ 수리산 수리사 찾아가기 (2018년 9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산본역(2, 3번 출구)에서 군포마을버스 2, 3-1번을 타고 중앙도서관 하차 →
  중앙도서관 정류장에서 수리산임도길(수리산로)을 따라 도보 50~60분
* 지하철 1,4호선 금정역(6번 출구)에서 안양시내버스 15번을 타고 중앙도서관 하차
* 지하철 4호선 대야미역(1번 출구)에서 군포 100-1번<60~80분 간격>, 군포마을버스 1-2번<60
  분 간격>을 타고 납덕골 하차 → 수리사까지 도보 25분
* 지하철 1호선 의왕역 2번 출구 건너편 정류장에서 군포 100-1번 이용
* 승용차 (경내 밑에 주차장 있음)
  ① 군포 → 대야미역 → 갈치저수지 → 덕고개 → 납덕골 → 수리사 
  ② 수원/안산 → 반월동 → 반월호수 → 납덕골 → 수리사
*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329 (속달로 347-181, ☎ 031-438-1823)


 

♠  수리산 마무리 (대야동 시골길, 반월호수)

▲  수리산을 뒤로하며 (수리사입구 남쪽)

수리사를 둘러보고 임도5거리로 다시 나가려고 했으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반월호수로 길
을 잡았다. 수리사입구에서 임도5거리 방면 동쪽 산길 대신 남쪽 길을 쭉 내려가면 되는데 수
리사에서 호수까지 무려 4km를 걸어야 된다.

반월호수 방면 도로(속달로, 둔대로)는 잘 포장되어 있어 걷기는 좋다. 군포시가 서울과 안양
의 배후 도시로 20여 년 동안 크게 성장하여 시가지가 나날이 확장되고 있는데, 이로 인해 겉
으로 보이는 군포는 완전 시가지와 아파트만 있는 도시로 보인다. 허나 시내 서남부에는 산과
논, 밭, 숲이 전부인 시골도 여실히 남아있어 앞만 보고 달려가는 군포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대야동과 속달동 지역으로 이들이 군포의 시골로 남게 된 것은 수리산과 반월호수 덕분
이다. 그들이 이곳을 지킨 든든한 방패인 것이다.


▲  속달동 마을에서 바라본 수리산과 바다처럼 너른 하늘

▲  속달동 시골길(둔대로)

납덕골에서 이르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속달로'를 계속 고집하여 동남쪽으로 가면 갈치저
수지, 덕고개, 대야미 쪽으로 이어지며, 서남쪽 '둔대로'로 가면 반월호수로 이어진다. 둔대
로는 2차선 길에서 이내 조그만 시골길로 변신하여 우리를 인도한다.

가로수인 듯, 아닌 듯, 길가에 자리한 나무들은 슬슬 가을옷을 꺼내들고 있고, 길 주변에 펼
쳐진 논은 푸르게 익어 올해도 변함없이 풍년을 예감하고 있었다. 자고로 이런 시골길과 숲길
은 도시인들에게 청량제이자 꿀 같은 존재로 속세에서 상처받고 오염된 안구와 마음을 정화해
주기에 아주 좋다.


▲  벼들이 푸르게 익어가는 속달동 평야

▲  반월호수 북쪽 개울(반월천)

그림 같은 시골길(둔대로)을 걷느라 시간도, 지루함도 잠시 잊고 있으려니 다리 하나가 나온
다. 다리 밑 반월천에는 나들이객들이 개울 주변에 자리를 피고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어린
이들은 아직까지도 덤벼들고 있는 여름 제국(帝國)의 기운에 맞서고자 개울에 들어가 애궂은
물고기들에게 고통을 주거나 물놀이를 즐긴다. 그런 평화로운 모습을 바라보며 계속 가다보면
영동고속도로가 나오고 그 밑도리를 지나면 반월호수가 펼쳐진다.


▲  서쪽에서 바라본 반월호수(半月湖水, 반월저수지)

▲  북쪽에서 바라본 반월호수

반월저수지는 반월호수라고도 불린다. 안양/안산권의 이름난 호수 관광지로 1957년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조성된 오래된 호수이다. 총 저수량은 118.7만㎥로 만수 면적은 37ha에 이르며, 수리산(집예골, 샘골, 지방바위골)이 베푼 물을 먹고 자라 아주 단단히 물이 올랐다. 수리사
계곡도 바로 이곳으로 내려와 잠시 머문 다음 큰 세상으로 흘러간다.

호수는 농어촌공사 화성,수원지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호수가 산에 빙 둘러싸여 있어 주변
풍경이 제법 아름답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관광지로 손질되어 산책로와 공원이 닦였으며, 식
당과 분위기를 내세운 까페가 많이 들어서 이제는 수리산 못지 않은 군포시의 꿀단지가 되었
다.
호수 주변은 추석 연휴의 끝을 잡은 나들이 수요와 그들이 끌고 온 차량들로 완전히 시장통을
이루었다. 가족 단위 나들이객과 수리산에서 내려온 산꾼, 사진을 찍으려는 사진꾼들, 이곳으
로 밥이나 차, 커피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몰려들어 호수의 몸값을 더욱
높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호수는 특히 저녁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반월낙조(半月落照)라 하여 2004년에 군포
3경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또한 다른 호수도 마찬가지겠지만 새벽 물빛에 슬금 피어오르는 물
안개가 아주 장관이다.

▲  오늘도 평화로운 반월호수

▲  호수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매뭇새를 다듬는 산

◀  푸른 하늘과 구름도 잠시 길을 멈춘
반월호수


▲  호수 곁을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고속전철

호수 바로 서쪽에는 경부고속전철 고속선이 닦여있다. 그러다보니 수시로 고속열차(KTX)가 빛
을 가르며 순식간에 지나가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징하던지 호수가 쩌렁쩌렁 울리고, 귀신까
자빠트릴 정도이다. 호수를 거울로 삼은 존재들이 하늘과 구름, 산, 나무, 꽃에다가 고속전철
까지 참 다양하다.
이곳을 지나는 고속전철은 위로는 서울, 용산, 행신역, 아래로는 대전, 동대구, 포항, 부산,
마산, 진주, 익산, 광주송정, 목포, 여수까지 운행하며, 하루에 수백 차례 지나간다.


▲  호수에서 만난 서양 모화사상의 잔재, 풍차

호수 북쪽에는 산책로와 공원이 닦여져 있다. 그 산책로를 거닐다보면 천천히 바람개비를 돌리
고 있는 이색 정취의 풍차를 만나게 된다. 나무로 축소해서 만든 것으로 나름 어울리는 풍물시
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양 모화사상의 잔재이기도 하여 좀 씁쓸하기도 하다. 이 땅의 민중
과 18세기부터 함께한 물레방아를 두었으면 더 정감이 컸을텐데 말이다.

반월호수는 다 돌지는 못하고 1/4 정도만 돌았다. 시간도 이미 17시가 넘은 상태이고 배도 고
프기 때문이다. 호수는 이 정도면 충분히 본 것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미련을 버리고 군포마을
버스 1-2번을 타고 대야미로 이동, 대야미역에서 4호선 전철을 타고 오늘의 일정을 정리했다.
이렇게 하여 가을맞이 수리산, 반월호수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반월호수 찾아가기 (2018년 9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대야미역 1번 출구 밖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군포마을버스 1-2, 6-1번을 타고
  반월호수(둔터) 하차 <6-1번은 산본역 2,3번 출구 밖 정류장에서도 이용 가능>
* 승용차 (호수 주변에 주차장 있음)
① 안양,군포 → 대야미역 → 둔대초교 → 반월호수
② 안산,화성 → 반월 → 팔곡2교차로 → 반월호수
*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둔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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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8년 9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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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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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임금이 만든 도심 속에 아름다운 호수, 수원 서호 ~~ (서호공원, 항미정)

 



' 도심 속의 그림 같은 호수, 수원 서호 '




 

지겨운 겨울이 저물고 봄이 완연히 내려앉던 4월의 첫 무렵, 수원에 자리한 그림 같은 호
수, 서호를 찾았다. 서호는 경부선 전철이나 열차를 타고 수원을 지날 때 차창 밖으로 본
것이 전부라 나에게는 아직 미답처(未踏處)나 다름이 없었다.

오후 3시, 화서역에서 후배를 만나 수원역 방향(남쪽)으로 조금 들어서니 봄나들이객들로
분주한 서호공원이 모습을 비춘다. <서호공원은 서호 북쪽과 동쪽에 닦여져 있음>


 

♠  수원 도심 속의 호수, 서호<西湖, 축만제(祝萬堤)>
- 경기도 지방기념물 200호

▲  서호 북쪽길 (서호공원)

인구 120만을 지닌 경기도 제일의 큰 도시이자 행정 중심지인 수원(水原), 그 도심 북서쪽에는
물을 가득 머금은 서호가 은빛물결을 글썽이며 정처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뒤흔든다. 경부선 전
철이나 열차를 타고 수원역~화서역 구간을 지날 때 서쪽으로 너른 호수가 보이는데 그곳이 바
로 서호이다.

서호는 1799년 정조 임금이 내탕금(內帑金) 30,000냥을 쏟아부어 여기산 동쪽에 조성했다. 원
래 이름은 축만제로 오래도록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조(正祖)는 1764년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에서 뒤주에 갇혀 강제로 이승을 떠난 아버지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묘역, 현륭원<顯隆園, 현재 융건릉> 곁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마음에 병점
에 있던 수원부(水原府)를 지금의 수원시내로 옮기고 그 유명한 수원 화성(華城)을 구축했다.

화성을 만들면서 자신의 친위 호위부대인 장용위(壯勇衛)를 주둔시켰는데, 장졸들의 급료와 경
비를 충당하고자 화성 주변에 둔전(屯田)을 두어 경작하게 하고 4개의 호수를 만들어 농업용수
로 사용했다. 축만제는 바로 그 호수의 하나로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호란 단순한 별칭을 갖게
되었으며, 서호 주변에 넓게 둔전을 설치한 연유로 서호 서/남쪽 동네 이름이 서둔동(西屯洞)
이 되었다.
그 시절에 닦여진 4개의 호수 중 북쪽에 있는 만석거(萬石渠)가 가장 먼저 조성되었다. 1795년
5,700냥을 들여 축조했는데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지(北池)로도 불리며 현재 수원시 송죽동 만
석공원에 남아있다. 동쪽의 동지(東池)는 화홍문(華虹門) 동쪽 지동(池洞)에 있었으나 오래전
에 말라버려 체취도 남아있지 않으며 현륭원 앞에는 1797년 남지(南池)인 만년제(萬年堤)를 지
었는데, 지금도 남아있다. 그리고 끝으로 서쪽에 서호(축만제)를 지으면서 수원 화성 주변 4개
의 호수는 완성이 되었다. (그들 중 서호가 제일 넒음)

서호는 제방 길이가 1,246척, 높이 8척, 두께 7.5척, 수심 7척, 수문 2개로 이루어 있다. 제방
남쪽에는 제언절목(堤堰節目)에 따라 심은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나무들이 있으며 1803년에 축
만제둔(祝萬堤屯)을 설치해 서호를 보수,관리토록 했다. 이 관청에는 도감관(都監官)과 감관(
監官), 농감(農監) 등을 두어 관수(灌水)와 전장관리를 맡게 하였고, 도조(賭租, 둔전을 대여
하여 받는 돈이나 벼)를 통해 생기는 수입은 화성 축성고(築城庫)에 납입했다고 하니 제방 남
쪽의 경작지는 국둔전(國屯田)으로 쓰인 듯 싶다.
서호가 생김으로서 232섬지기의 경작지가 혜택을 맛보았으며, 어류자원 확보를 위해 잉어 등의
물고기도 풀었는데, 이곳 잉어는 약용(藥用)으로 점차 유명해져 궁중에 진상되기도 하였다. 또
한 명승지로도 이름을 날려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를 천하 일품으로 쳤으며 호수 한복판에 섬
을 띄워놓아 경치를 북돋았다.

1906년 왜(倭)가 이곳에 농사시험장을 설치하면서 조선의 농업 중심지가 되었고, 1945년 이후
에는 농촌진흥청이 들어서 이 물을 이용해 많은 농작물을 연구/개발하니 세계적인 농업학자로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禹長春, 1898~1959)도 이 물의 신세를 졌다.
이처럼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생대 경작지(시험답) 외에도 인근 경작지 30만 평에 물을 공급
했으나 수질 오염과 시가지 개발로 경작지가 줄면서 지금은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생대만 사
용하고 있으며, 호수도 예전에 비해 덩치가 줄어들었다.
서호를 후광(後光)으로 삼던 농촌진흥청은 원래 서호 북쪽(현 농민회관)에 있었으나 서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전주완주혁신도시로 내려갔으며, 호수 남쪽에는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생대
에서 관리하는 경작지가 있어 우리나라 농업 연구/발전의 역할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서호는 농촌진흥청 소유로 인해 오랫동안 속세에 금지된 호수로 있었다. 그러다가 시민들의 개
방 여론에 힘입어 2000년대에 세상을 향해 활짝 문이 열렸다. 2012년에는 서호를 둘러싼 둑방
길에 2.1km 정도의 둘레길을 조성하고 호수 북쪽과 동쪽에 서호공원을, 호수 서북쪽인 여기산
(麗妓山)에 여기산공원을 닦아 시민들에게 선사했다. <여기산에는 우장춘 묘역과 선사유적지,
철새서식지가 있음>

수원 도심에 그림처럼 펼쳐진 서호는 수원, 화성 지역에서 가장 큰 저수지로 지금의 수원을 있
게한 수원의 아버지, 정조 임금이 화성과 더불어 수원에게 남긴 소중한 꿀단지이다. 봄에는 개
나리와 진달래, 벚꽃이 앞다투어 나들이객을 유혹하고 가을에는 오색 단풍이 옛 농촌진흥청과
여기산, 서호 주변을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답게 물들이며 겨울에는 눈꽃이 하얗게 설경을 이
룬다. (수원시가 선정한 눈꽃 명소 중의 하나임)
서호는 현재 '수원 축만제'란 이름으로 경기도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서호 찾아가기 (2017년 6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경부선 화서역 5,6번 출구를 나와서 남쪽(수원역 방면)으로 도보 10분 (항미정
  은 화서역에서 도보 25분)
* 수원역(AK플라자)에서 30, 30-1, 42번 시내버스를 타고 숙지중고교(서호공원)에서 하차, 남
  쪽에 바로 보이는 육교를 건너면 서호(서호공원)이다.
* 서호공원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436-1
* 서호(축만제)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  서호 북쪽에서 바라본 서호와 섬

서호 한복판에는 호수의 경치를 구수하게 해주는 섬이 외롭게 떠 있다. 섬 이름은 따로 없으며
그곳으로 인도하는 배도, 다리도 없어 접근이 불가능한 그야말로 그림의 떡 같은 섬이다. 그는
서호 초창기 때부터 있었으며 근래에 새롭게 손질되었다.


▲  서호 북쪽에서 바라본 서호 동쪽과 화서동(華西洞)

서호공원을 비롯한 서호 주변에는 봄 기운을 누리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눈이 내리고 강추위가 판을 쳤지만 이제는 봄의 따스한 햇살이 천하를 부드럽게 보듬는다.

우리는 서호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았다. 서호가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넓기
는 마찬가지, 2.1km의 서호 둘레길을 도는데 항미정 관람시간과 휴식시간을 포함해 거의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호수에서는 잔잔하게 물보라가 피어오르고 은빛물결이 주름을 이루며 글썽인다. 호수에서 불어
오는 바람도 이제는 시원하게 느껴진다.


▲  물결이 주름진 서호 서쪽 ▼


▲  봄나들이객과 산책객들로 북적거리는 서호공원 (서호 북쪽)


▲  서호천이 서호로 변신하는 현장 (새싹교 주변)

서호를 가득 채운 물은 모두 어디서 왔을까? 하늘에서 떨어진 것일까? 아니면 지하수를 쥐어짜
서 채운 것일까? 그는 수원 북쪽 덕성산에서 발원한 서호천(西湖川)을 막아서 만든 것이다.
서호천은 광교산에서 나온 영화천(만석거를 경유함) 물줄기까지 받아들여 서호에서 단체로 모
임을 가진 다음 항미정 옆 수문을 타고 수원 서부와 화성, 평택 땅을 거쳐 서해바다 아산만으
로 흘러간다.


▲  서호로 길을 재촉하는 서호천 (새싹교에서 바라본 모습)
하천 동쪽에 노란 피부의 개나리가 만개해 봄의 기운을 돕고 있다.

▲  녹색과 붉은색이 입혀진 서호 서쪽길
(왼쪽 볏집은 서호 철새간이탐조대)

서호는 상류에서 따스한 물(13도)이 흘러들어와 겨울에도 잘 얼지 않는다. 그래서 일찍이 철새
들이 눈독을 들이면서 4계절 내내 흰뺨검둥오리, 가무우지, 가창오리, 왜가리 등이 무수히 찾
아온다. 이들은 서호 서쪽 여기산에 둥지를 틀고 서호에서 물고기를 잡아 삶을 꾸린다.

수원 도심 속 철새들의 성지로 그들을 관찰하라는 뜻에서 서쪽길에 볏집으로 벽을 만들고 성인
눈 높이 정도에 조그만 구멍을 내어 그들을 훔쳐볼 수 있게 했는데, 대놓고 살펴보면 철새들도
다소 민망해하거나 경계를 품을 것이니 그런 속임수를 쓴 것이다.


▲  서쪽길에서 바라본 서호 - 물결이 참 잔잔하기도 하다.

▲  서쪽길 개나리 너머로 본 서호와 섬 (가운데 보이는 것이 섬)


 

♠  서호의 풍치를 드높이는 양념과 같은 존재, 항미정(杭尾亭)
- 수원시 향토유적 1호

▲  서호 서남쪽 수문에서 바라본 항미정

서호 서남쪽 언덕에는 항미정이란 조촐한 모습의 정자가 호수를 굽어보고 있다. 'ㄱ'(또는 'ㄴ
') 모양의 납도리집으로 홀처마로 이루어진 43.5㎡의 팔작지붕 건물인데 앞쪽(동쪽)은 뻥 뚫려
있고, 뒤쪽(서쪽)은 벽으로 막혀 있다.

이 정자는 서호 초창기부터 있던 것이 아닌 1831년에 생긴 것으로 당시 화성유수(華城留守) 박
기수(朴綺壽)가 서호에서 풍류를 즐기고자 세웠다. 그는 석양에 비치는 여기산의 그림자를 보
고 팔자 좋게 소식<蘇軾,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읊었는데, 그 과정에서 '서호는 항주(杭州)
의 미목(眉目)같다'고 해서 항주와 미목의 1글자를 취해 항미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서호의 풍치를 아름답게 해주는 양념으로 서호와 함께 오랫동안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근래 개
방되었으며 개방 이전에 농촌진흥청에서 정자 서쪽 언덕을 뒤집고 도서관을 만들어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항미정은 툇마루를 갖추고 있는데, 화서역을 기준으로 서호 둘레길을 1바퀴 돌 경우 이곳이 거
의 중간 지점이 된다. 그러니 여기서 잠시 쉬어 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단 정자 내부로 들어
가면 안됨) 게다가 그늘진 곳이라 땀도 알아서 줄행랑을 칠 정도로 시원하며 정자 주변에는 푸
른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항미정 - 정자로 인도하는 계단을 오르면
바로 항미정이 몸을 내민다.

▲  남쪽에서 바라본 항미정

▲  북쪽에서 바라본 항미정

◀  항미정 현판과 툇마루
정자 내부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그러니
툇마루에 잠시 걸터 앉는 수준으로만
머물기 바란다.


▲  항미정에서 바라본 서호와 버드나무

▲  서호 서남쪽 수문 위에 걸린 다리

▲  서남쪽 수문 다리에서 바라본 남쪽 둑방

서호에 모인 물은 서남쪽 수문(항미정 옆)과 동남쪽 수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간다. 서남쪽 수
문은 매일 일정량의 물을 배출하여 서호천의 바다 행을 돕고 있으며, 동남쪽 수문은 농촌진흥
청(국립식량과학원)과 서울대 농생대 경작지에 물을 제공하는 용도로 쓰여 서남쪽 수문보다는
다소 한가하다.


 

♠  서호 마무리

▲  옛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한 서호 남쪽 둑방

서호를 지키고 선 남쪽 둑방은 서울 풍납토성(風納土城) 만큼이나 높고 두껍다. 서호천과 만석
거에서 내려온 막대한 물을 담아야 되기 때문인데, 둑방 남쪽은 여기보다 지대가 낮은 경작지
라 둑방이 자칫 와해된다면 그 경작지는 물론이고 서둔동과 수원역 주변까지 피해를 받는다.
남쪽 둑방길은 서호 동/서/북쪽길보다 조금 넓은 편으로 다른 길과 달리 비포장 흙길을 유지하
고 있어 정겹기만 하다. 또한 오래된 나무들이 둑방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고색의 풍치까지 더
해준다.


▲  둑방에 자라난 오래된 소나무의 위엄

▲  둑방에 세워진 축만제 비석 - 고색의 때가 묻어난 비석 피부에 새겨진
'축만제' 3자가 꽤 패기가 있어 보인다.

▲  남쪽 둑방에서 바라본 서호와 여기산 (오른쪽에 보이는 산)
서호는 여기산과 호수 주변의 동/식물들, 하늘을 떠다니는 온갖 존재들이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 그들의 커다란 거울이다.

▲  남쪽 둑방길에는 소나무가 여럿 심어져 조촐하게 운치와
그늘을 드리운다.

▲  늘씬하게 잘 빠진 남쪽 둑방길 ▼



▲  둑방 남쪽에 펼쳐진 농촌진흥청(국립식량과학원), 서울대 농생대 경작지
<시험답(試驗畓)> - 서호의 물을 먹고 자라는 시험 경작지로 연구/개발된
다양한 육종(育種)들이 이곳을 거쳐 천하에 보급된다.

▲  남쪽 둑방에서 바라본 서호와 섬

▲  서호 동남쪽에서 바라본 서호와 여기산, 그리고 호수와 마주한
푸른 하늘과 구름의 무리들

▲  갈대가 살랑거리는 서호 동남쪽

▲  서호 동남쪽과 남쪽 둑방

▲  서호 동쪽 산책로

▲  서호 동쪽에서 바라본 서호와 섬

▲  서호 동북쪽 (왼쪽에 보이는 산이 여기산)

▲  서호 동북쪽 산책로

▲  경부선 육교에서 바라본 서호(서호공원)

▲  경부선 육교에서 바라본 경부선과 서호공원

서호를 1바퀴 둘러보니 1시간 30분이 훌쩍 흘렀다. 아직 일몰까지는 여유가 있어 1곳을 더 둘
러보기로 하고 정처를 물색하다가 수원 동북부 우만동에 있는 봉녕사(奉寧寺)가 문득 뇌리 속
에 스쳐 지나가 그곳을 찾기로 했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서 흔쾌히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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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7년 6월 1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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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길목에서 찾아간 무주 적상산 나들이 ~~~ (적상호, 적상산성, 안국사...)

 


' 무주 적상산 겨울 나들이 '


▲  적상산 산정에 자리한 적상호

▲  안국사 극락전

▲  적상산사고

 


 

늦가을이 무심히 저물고 겨울이 한참 이빨을 드러내던 11월 마지막 주말에 전북 무주(茂
朱) 땅을 찾았다. 이번에는 멀리 남쪽에서 오는 일행들과 함께 하기로 했는데 서로 본거
지가 극과 극이다보니 무주터미널에서 그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도봉동 집을 나서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대전
행 고속버스를 몸을 실었다. 거의 2시간을 달려 대전(大田)에 도착, 새롭게 몸단장을 벌
인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장수행 직행버스를 타고 다시 50분을 내달려 무주의 관문인 무주
터미널에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10분 정도 대기했다가 남쪽에서 온 본대에 합류했다.

이번 무주 기행의 첫 답사지는 적상산이다. 무주시외터미널에서 동남쪽으로 6분 정도 달
리면
적상산 입구인데, 여기서 적상산으로 인도하는 서쪽 길로 들어서면 북창리(北倉里)
가 나온다. 그 마을을 지나면서 길은 서서히 흥분을 드러내고 강원도나 함경도 고갯길에
버금가는 꼬불꼬불 고갯길로 변신하여 정신을 쏙 빼놓는다.

적상산은 단풍이 매우 곱다고 하는데, 가을이 떠나간 시점이라 단풍 구경은 하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건 겨울 제국(帝國)에 설설 기고 있는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 뿐, 푸른 기운
을 가진 존재는 소나무와 전나무 밖에는 없었다.


 

♠  적상산(赤裳山)의 품으로 들어서다.

▲  적상산의 지도를 크게 바꿔놓은 산정호수, 적상호(赤裳湖)

구절양장(九折羊腸) 같은 적상산 고갯길을 어느 정도 오르면 적상터널이 나온다. 적상산의 콧
대를 피하고자 산 밑에 판 땅굴로 그 터널을 나와 세 굽이를 지나면 푸른 호수인 적상호가 나
오고 길은 비로소 진정을 되찾는다.

적상산 850m 고지에 마치 백두산(白頭山)의 천지(天池)처럼 들어앉은 적상호는 무주양수발전소
상부댐을 만들면서 조성된 인공 호수이다. 여기서 양수발전소(揚水發電所)란 심야에 남는 전기
로 밑(하부댐)에 있는 물을 위쪽 저수지로 올리고, 필요한 시기에 그 물을 떨어트려 전기를 빚
는 수력발전의 일종이다.
이 발전소는 1988년 4월에 착공해 1995년 5월에 완성을 보았는데, 시설용량은 60만kw이며, 적
상호를 담고 있는 상부댐은 높이 60.7m, 길이 287m, 저수량은 372만㎥이다.

수력발전은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멀쩡한 땅을 수장시켜야 되는 단점이 있다. 계곡을 막아 둑을
쌓고 호수를 만들면서 안국사와 적상산사고터는 제자리를 강제로 내줘야했고, 많은 숲이 억지
로 희생당해야 했다. 또한 호수와 발전소 관리를 위해 적상산의 피부를 깎아 구불구불 도로를
내면서 적상산 정상 밑까지 건방지게 차량들이 올라가게 되었다. 그 덕분에 오로지 두 발로 힘
겹게 올라야 했던 적상산 접근이 보다 쉬워졌고, 적상호는 이곳의 또 다른 볼거리로 부각되었
으며, 양수발전을 통해 무주 지역의 전기를 책임지는 중요한 곳이 되었다.

우리의 버스는 적상호를 지나 안국사 방면 서쪽 길을 조금 오르다가 900m 고지 주차장에서 육
중한 바퀴를 접었다. 절까지 버스 접근은 가능하나 차를 돌릴 공간이 없어서 멈춘 것이다. 허
나 그곳까지는 거리도 매우 가깝고 차량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잘 닦여져 있으며
경사 또한 그리 각박하지 않아 어려운 것은 없다. 그 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안국사 일주문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마중을 나온다.


▲  적상호에서 안국사로 올라가는 숲길

▲  안국사의 정문인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은 절의 정문으로 앞에는 '적상산 안국사'라 쓰인 현판이, 뒤에는 '국중제일정토도량(國
中第一淨土道場)'이라 쓰인 현판이 자리해 이곳의 이름과 성격을 말해준다. 절 이름이 쓰인 현
판은 1992년에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이 썼으며, 국중제일정토도량 현판은 1995년 여산 권
갑석(如山 權甲石)이 쓴 것으로 다들 필체에 힘이 넘쳐난다.
절을 옮기면서 새로 만든 현판과 달리 문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는 고색의 기운이 약간 느껴져
문이 좀 오래된 존재임을 살짝 속삭여준다.


▲  일주문의 뒷모습

     ◀  일주문 '국중제일정토도량' 현판
이 현판은 무학대사가 안국사를 두고 '국중(國
中) 제일의 길지(吉地)'라 찬양한 설화를 참조
하여 쓴 것으로 안국(安國)과 정토(淨土)를 꿈
꾸는 안국사의 바램이 담겨져 있다.


▲  적상산성(赤裳山城) - 사적 146호

일주문 바로 옆에는 키 작은 돌담이 길게 꼬리를 물고 이어져있다. 그를 알리는 안내문이 없었
다면 단순히 돌담으로 여겨 넘어가기 쉬울 정도인데, 그는 국가 지정 사적의 지위를 누리고 있
는 적상산의 두툼한 갑옷, 적상산성이다.

적상산성은 적상산 고지대의 분지(盆地)를 둘러싸고 있는 절벽과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전체 길이는 8,143m, 성곽 높이는 거의 1~2m이다. 경사가 각박한 적상산의 정상 주변은
절벽에 둘러싸인 곳이라 그 절벽을 활용하다보니 성곽의 높이는 대부분 낮다. 물론 장대

월의 거친 흐름과 관리 소홀로 인해 무너진 것도 한몫 한다. 현재는 안국사 주변과 서문터 등
일부만 남아있으며, 문은 동/서/남/북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북문과 서문, 남문터만 남았다. 성
내부 면적은 약 214,976㎡에 이른다.

이 산성은 예전에는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축성된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설명을 했다. 하지만
'고려사(高麗史)'를 비롯하여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
輿地勝覽)','여지승람(輿地勝覽)'을 살펴보니 고려 초기인 거란의 2차 침공(1010년) 이전부터
성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바로 거란(요)의 2차 침공 시절, 거란의 군주인 성종(成宗)은 몸소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 고려의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을 힘겹게 점령했다. 고려 군주인 현종(顯宗)은 급히 나
주(羅州)로 몽진을 갔는데, 거란군의 남하를 우려한 인근 백성들이 이곳으로 피신을 온 것이다.
그러니 빠르면 신라 후기, 늦어도 고려 초에 성이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시절에는 최영(崔瑩)장군이 이곳을 지나면서 산성을 보수하여 창고를 세
울 것을 건의했으며, 조선 세종 때는 최윤덕(崔潤德)도 이곳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허나 그들
의 건의는 허공의 메아리로 끝났고, 이후 다시금 주목을 받은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光海君)은 우리의 친척 민족인 여진족의 후금(後金)이 나날이 강성
해지자 압록강과 가까운 묘향산사고(妙香山史庫)에 있던 실록과 선원록(璿源錄)의 안위가 걱정
이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던 중, 순안어사(巡按御史) 최현(崔晛)과 무주현감 이
유경(李有慶)이 바로 적상산을 추천했다.
하여 사관(史官)을 보내 적상산을 살피게 했는데, 적상산이 꽤 괜찮다는 사관의 긍정적인 보고
로 1614년 실록전을 짓고, 1618년 선조실록을 넣으면서 사고(史庫)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세
상에서는 이 사고를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라 부른다.

사고를 수비하고자 헝클어진 적상산성을 손질해 4개의 문을 두었고, 성 안에 호국사(護國寺)를
세워 안국사와 함께 지키도록 했다. 사고 외에도 군기고(軍器庫), 사각(史閣), 대별관(大別館)
등의 시설을 두었다. 허나 1910년 이후 적상산사고는 폐지되었고 산성까지 버려지게 되면서 그
이후는 지금의 모습이 잘 말해준다.

산성을 1바퀴 둘러보는 것이 마땅한 도리겠지만 시간 관계상 안국사 주변의 성곽만 둘러봤다.

▲  적상산성의 이모저모

우리가 찾은 적상산(1034m)은 무주군 적상면에 위치한다. 산의 이름인 적상(赤裳)은 붉은 치마
를 뜻하는데, 산의 모습은 장쾌한 남성적인 모습이지만 이름은 의외로 여성적이다. 이는 산을
이루고 있는 붉은 피부의 바위가 마치 붉은 치마를 입은 것처럼 보여 유래되었다고 하며, 봄의
진달래, 가을의 단풍이 붉은 치마를 두룬 것처럼 보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전한다.

적상산 정상부는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의 주봉(主峯)은 기봉으로 2번째 봉우리인 향
로봉(1025m)과 마주보고 있고, 정상 일대가 토산(土山)이라 숲이 매우 삼삼하다. 산정은 평탄
하지만 산허리까지는 거의 절벽이며, 물이 매우 풍부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요
새로 이용되었다.

산중에는 안국사와 호국사비, 적상산사고터, 적상산성 등의 문화유적을 비롯해 장도바위와 장
군바위, 처마바위, 천일폭포, 송대폭포, 안렴대(按廉臺) 등의 자연 명소가 있으며, 이중 장도
바위는 최영 장군이 적상산을 오르던 중, 바위가 건방지게 길을 막자 장도(長刀)로 내리쳐 길
을 냈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있다.
그리고 안렴대는 고려 초에 거란이 침공했을 때 3도 안렴사(按廉使)가 피난을 왔다고 해서 그
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전하며, 정묘호란 때 안국사 승려 상훈이 혼자서 사고에 있던 조선
왕조실록을 이곳 석굴로 옮겨 잠시 보관하기도 했다.

대자연이 빚은 천연의 요새이자 걸작품인 적상산은 인간의 오만으로 자행되는 개발의 칼질 앞
에 강제로 성형수술을 당하는 시련을 겪는다. 바로 1988년 정상부에 무주양수발전소가 들어선
것이다. 그 발전소로 인하여 호수와 댐이 생기면서 산정의 모습은 크게 변하였고, 호수 주변에
도로를 내고 댐 동북쪽에 적상산휴게소와 전망대까지 마구 닦여지면서 적지 않은 혹을 달게 되
었다.


 

♠  적상산의 오랜 터줏대감, 적상산 사고를 지켰던 수호사찰
~ 적상산 안국사(安國寺)

▲  청하루(淸霞樓) 현판 - 송석 이도익(松石 李都翼)이 1859년에 쓴 것이다.

적상산 정상 남쪽 950m 고지에 자리한 안국사는 금산사(金山寺)의 말사(末寺)로 적상산의 유일
한 고찰(古刹)이다. 적성지(赤城誌)와 적상산안국사기(赤裳山安國寺記)에 따르면 1277년 월인(
月印)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가 산성과 함께 중건했는데, 이때 성 안에
는 고경사(高境寺)와 상원사(上元寺), 중원사(中元寺) 등의 절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 후기 창건설 외에도 조선 태조 때 적상산성을 쌓으면서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어느 것
이 정답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게다가 창건 이후 16세기까지 마땅한 내력도
남기지 못해 창건 시기에 대해 다소 의구심을 품게 한다.

안국사의 내력이 본격적으로 나래를 펴는 것은 16세기 이후이다. 임진왜란 시절에 승병(僧兵)
이 주둔했다고 하며, 1614년 적상산사고를 설치하면서 안국사 승려 덕웅(德雄)이 승병 92명을
모집해 적상산성을 중수하고 사고를 수비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터지자 마침 사고를 지킬 승병이 하나도 없어 안국사 승려 상훈
(尙訓)이 혼자서 사고의 서적을 바리바리 싸들고 안렴대에 있는 석굴로 옮겨 보관하기도 했다.
1643년 적상산을 둘러본 이조판서 이직(李稙)은 산성의 수비가 허술하고 승병이 모두 흩어지고
없으며, 창고에 군량도 없는 등, 수비의 어려운 실정을 보고하고 승군 모집을 위해 사찰 건립
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하여 1643년 왕명으로 호국사(護國寺)를 지어 안국사를 보조하도록 했다. 이때 전라감사 윤명
은(尹鳴殷)이 자신의 녹봉을 털어 공사비로 댔고, 승려 각명(覺明)이 일을 맡았으며 무주현감
심헌(沈憲)이 감독을 했다. 호국사란 이름은 삼장법사(三藏法師)의 경축기도(經祝祈禱)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사고를 이웃한 인연으로 조정(朝廷)에서는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수호한다는 의미로 '
안국사'와 '호국사'란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 절도 그 기대에
부응코자 열심히 사고를 지켰고, 그로 인해 적상산사고는 조선 사고 중 유일하게 전쟁과 화재
를 만나지 않은 사고가 되었다.

1728년에는 괘불을 제작하였고, 1758년에는 감로탱을, 1772년에는 극락전 후불탱을 조성했으며, 1788년에 범종을 봉안해 제법 절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1864년 적상산사고를 방문한 이면광(李
冕光)의 건의로 안국사를 중수했는데 그 기념으로 안국사중수기(重修記) 현판을 남겼다. 그 현
판에
'나라에서 선사 양각(璿史兩閣)을 지어 왕조실록과 왕실의 계보를 비장(秘藏)하고 승병들로 하
여금 수호하게 하였으므로 족히 믿고 근심할 것이 없다. 이 절의 이름을 안국(安國)이라고 붙
인 것과 이 절에 소속된 작은 절을 호국(護國)이라 한 것은 대개 뜻이 있는 것이다. 안국사라
고 이름한 것은 비록 작은 절이기는 하지만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큰일을 하는 절이기
때문이다'
란 구절이 있어 조선 조정의 안국사에 대한 높은 신뢰도와 절의 위상을 가늠케 한다.

1872년에는 사고의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改修)했고, 1902년 사고와 안국사를 크게 중수했다.
이때 안국사는 무주에서 가장 큰 절로 성장했으며, 1910년에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
전과 산신각을 두고 그 앞에 청하루와 승방(僧房)을 세웠다.
1910년 이후 적상산사고가 왜정에 의해 폐쇄되면서 당시 안국사 주지인 친일파 승려 이철허(李
澈虛)가 선원각을 경내로 가져와서 절 건물로 부려먹었다. 1949년 여순(麗順)반란 사건 때 공
비패거리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호국사가 전소되어 비석만 남게 되었으며, 1968년 주지 유정환(
柳正煥)이 선원각을 천불전으로 손질하고 퇴락된 청하루를 철거했다.

1988년이 되자 안국사는 강제로 정든 터전을 버려야 될 상황에 놓이게 된다. 바로 무주양수발
전소 상부댐 건설로 안국사와 적상산사고터가 수몰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마땅한 자
리를 물색하다가 적상산 정상 남쪽에 자리한 호국사터로 결정하고 1991년부터 이전 공사에 들
어가 1993년에 마무리를 지었다.
1994년 범종각을 새로 지었고, 1996년에는 3도(전북, 경북, 경남) 접경지에 위치한 이유를 들
어 대화합의 범종을 조성했다. 그리고 1998년에는 주지 원행이 동양 여러 나라에서 수집한 불
상과 불교 유물을 전시하고자 성보박물관을 만들어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다. 또한 복
지 사업에도 손을 뻗쳐 노인복지시설인 '무우수마을'을 세웠고, 무주와 영동 지역 병원과 자매
결연을 맺어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비록 개발의 칼질에 제자리를 잃기는 했지만 구름이 창문으로 들어와 방문으로 나갈 정도로 하
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도 좋다. 마치 천상(天上) 세계에서 속세를 굽어보는 기분이랄까? 또
한 속세(俗世)와도 길게 거리를 두고 있어 아무리 끈질긴 번뇌(煩惱)라 한들 쫓아오다 졸도할
정도의 첩첩하고 고적한 산골이다. 차량으로 오면 접근은 다소 편하지만 길이 험해 운전에 각
별한 주의가 필요하며, 대중교통으로 갈 경우에는 내창마을에서 2시간 30분 정도 올라야 된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영산회괘불도를 비롯하여 극락전과 호국사비, 목조아미타3
존불상, 범종 등 지방문화재 4점을 간직하고 있다. 그외에 조선 후기 승탑 4기와 선원각을 개
조한 천불전, 1730년에 만든 괘불대(掛佛臺) 등이 있어 고색의 향기는 풍부하며, 법당인 극락
전을 비롯해 삼성각, 지장전, 청하루, 천불전, 성보박물관, 안국선원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경내를 조촐히 메우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넓은 주차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직진을 하면 호국사란 이름의 건물이 나온다.
이 건물은 안국사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옛 가람을 기억하고자 세운 것으로 호국사는 정확히 주
차장 일대에 있었다.
여기서 왼쪽 숲을 살펴보면 조그만 기와집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 집은 호국사의 유일한 흔
적인 호국사비(전북 지방유형문화재 85호)를 머금은 비각이다. 경내를 다 둘러보고 나올 때 보
려고 아껴두었으나 그것이 그만 화근이 되어 깜박 지나치고 말았지. 어느 곳이든 그곳에 서린
볼거리는 다 봐야 직성이 풀리는데, 이렇게 중요한 것을 놓쳤으니 다음에 또 와야 되는 구실을
만들고 말았다. 이렇게 벽지인 곳은 다시는 오지 않아도 서운치 않을 정도로 싹 돌아봐야 되는
데 또 올 생각을 하니 막막하다. 물론 인연이 또 닿으면 알아서 찾아오겠지만 말이다.

주차장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청하루가 자리해 있다. 정
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누각 건물로 수몰된 옛터에 있던 누각을 1992년에 옮긴 것이다.
1층에는 사무실과 불교용품점이 있으며, 정면에 걸린 현판은 송석 이도익이 쓴 명필이다.
그리고 지나치기는 쉽지만 청하루 안에 옛 안국사의 현판이 여럿 있다. 1627년 상훈이 사고의
서적을 옮긴 일화를 4자로 요약한 '석실비장(石室秘藏)'과 '청하루(淸霞樓)','극락전(極樂殿)
','산신각(山神閣)' 등이 있으며, 석실비장은 1902년 절을 중수했을 때 유인철이 상훈의 이야
기를 듣고 쓴 것이다.


▲  안국사 성보박물관

청하루를 들어서면 하늘 높이 자리한 안국사 경내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왼쪽을 보면 성보박
물관이 있는데, 보통 성보박물관하면 그 절의 오래된 문화유산이나 부근 절에서 맡긴 문화유산
을 전시하기 마련이나 이곳은 그와는 관련이 없는 다른 나라의 불교 유물이 주류를 이룬다.

이곳에 담긴 유물은 주지인 원행이 15년 간 여러 불교국가를 여행하면서 수집하거나 기증 받은
것들로 이들을 한데 모아 1998년에 조촐하게 성보박물관을 열었다. 중원대륙과 왜열도, 인도,
티벳, 월남, 라오스, 파키스탄 등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다양한 시대의 불상, 불화, 불
교 유물, 다기류 등 3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어 조그만 세계불교박물관을 이룬다.


▲  성보박물관 중앙에 자리한 철불 - 중원대륙에서 가져온 불상인 듯 하다.
불상은 수입산이지만 그가 앉은 금동대좌는 국산이다.

▲  동양 불교국가에서 가져온 온갖 불상과 불화들 ▼



▲  안국사 범종각(梵鍾閣)

성보박물관 맞은편에 자리한 범종각은 1994년에 원행이 지은 것으로 조선 후기 동종을 비롯하
여 1996년에 만든 대화합의 범종과 운판(雲版)까지 담겨져 있다. 대화합의 범종은 덕유산을 둘
러싼 3도 중생들의 대화합을 바라는 뜻에서 만든 것으로 범종각 현판은 일중(一中)거사가 썼다.

▲  대화합의 범종

▲  안국사 범종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88호

우람한 대화합의 범종과 달리 그 곁에 있는 범종은 매우 조그만하여 눈길이 잠깐 가다가 만다.
보통 사찰의 종은 크기에 상관없이 허공에 달려 있지만 이건 허공은 커녕 땅바닥에 나무 막대
기를 깔고 앉아있어 안그래도 작은 종, 더 작아 보일 수 밖에 없다. 허나 작은 고추가 맵다고
겉모습은 저래도 이래뵈도 안국사의 오랜 보물의 하나이다. 오히려 대화합의 범종보다 더 눈길
을 줘야 되는 존재인 것이다.

이 범종은 1788년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85cm, 구경 78cm의 작은 종이다. 4개의 유곽과 보살상
이 배치되어 있고, 종을 매달던 용뉴는 아예 사라져 바닥에 나무 막대기를 깔아 그를 받치고
있다. 그의 몸통에는 '乾隆五十三年(건륭53년) 戊申三月日(무신 3월일) 赤裳山安國寺大鍾(적상
산 안국사 대종)'과 '改鑄重(개주중)'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어 그의 탄생 시기를 알려준다.


▲  피부가 바랜 오래된 솥

극락전 뜨락에는 그 옛날 안국사 공양간에서 모락모락 밥과 국의 연기를 피어내던 솥이 놓여져
있다. 겉으로 보면 일광욕을 하며 팔자 좋게 보이지만 현대화된 공양간에 밀려 이제는 바깥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역시 범종처럼 나무 막대기에 의지해 자리해 있는데,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피부가 완전 붉게 변했다.
절을 품은 산도 붉은 피부의 바위, 혹은 진달래와 단풍으로 산이 온통 붉다고 하여 적상산인데
솥 역시 완전히 붉게 변했으니 그 역시 적상산의 기운을 받은 모양이다. 안국사의 오랜 유물인
만큼 낡은 피부를 깨끗히 닦아주고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남은 여생 편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바다 건너에서 가져온 외국산 불상보다는 오랜 세월 안국사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나고 이곳의
음식을 책임진 저 솥이 더 가치가 높지 않을까?


 

♠  안국사 극락전 주변

▲  안국사 극락전(極樂殿)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42호  
(앞 계단 오른쪽에 남근석이 있음)

청하루를 지나면 바로 정면에 계단을 늘어뜨리고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극락전과 시선이 마주
친다. 극락전 뜨락에는 빛바랜 솥과 아주 기가 막히게 생긴 남근석이 서 있어 잠시 얼굴을 붉
히게 하는데, 보통 절로 가는 길목이나 외곽에 남근석을 둔 경우는 봤어도 법당 앞에 둔 것은
처음 본다. 절의 승려나 신도의 상당수를 이루었을 여자 신도들이 법당에 들어가면서 무슨 생
각을 했을까~~?? 절에서 아예 파계를 장려하는 듯한 인상이다.
허나 저 돌이 원래부터 안국사에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절을 이곳으로 옮길 때 주변
에서 수습한 것이 아닐까 여겨지는데, 왜 하필이면 법당 앞에 두었는지 그저 어리둥절하다. 성
기신앙의 일원이긴 해도 경내 핵심에 두기에는 좀 거시기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2중으로 구축된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은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
물이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1991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
잘 다듬어진 자연석 축대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썼으며, 정면에는 꽃빗살문을 칸마
다 두었다. 정면과 좌측은 4분합이나 우측은 2분합으로 협칸의 구조가 특이하며 공포를 촘촘히
박은 다포(多包) 양식으로 외부는 3출목(出目)으로 되어있으나 내부는 4출목이다. 그리고 우측
측면을 보면 단청이 채색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재미난 설화가 전한다.


▲  건물 우측에 단청을 하다만 부분이 있다. (사진 중앙 부분)

극락전을 지은 안국사 주지는 단청 불사를 어찌해야 될지 고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얀 도포를 입은 노인이 찾아와 자신이 그리겠다고 하였다. 이에 기뻐한 주지승이 쾌히 승낙
하자 노인은
'내가 100일 동안 단청을 칠할테니 극락전에 하얀 천막을 치고 물 1그릇만 넣어주시오. 그리고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지 마시오!!'
신신당부를 했다.

범상치 않은 노인의 말에 '명심할테니 걱정 마시오!!' 답을 하고는 궁금증을 억지로 죽여가며
불사가 잘 마무리되기를 기도했다. 허나 겨우 하루를 앞둔 99일째가 되자 주지는 궁금해서 도
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딱 하루만 참으면 정말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인데 더 참다가는 제명에
못죽어 사리만 잔뜩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그만 살짝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지.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천막 안에 노인은 온데간데 없고, 하얀 학이 입에 붓을 물고 단청을 하
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크게 놀란 주지의 인기척에 학은 붓을 내던지고 사라졌다. 그
래서 윗사진처럼 건물 우측의 평방과 창방 일부가 단청이 되지 않은 것이며, 그 남아있는 부분
이 딱 하루치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전설은 강진 무위사(無爲寺)와 부안 내소사(來蘇寺)에도 전하고 있다. 모두
일정 기간 동안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하며 단청이나 그림을 그리다가 딱 하루를 앞두고
훔쳐보는 바람에 그림을 그리던 새가 도망가 일부가 채색되지 않았다는 스토리로 말이다. 이런
전설은 일을 맡은 사람의 개인 문제나 절 내부 문제로 도중에 중단된 것을 그럴싸하게 설화로
빚은 것으로 여겨진다.
무위사 같은 경우는 관음조(觀音鳥)가 그렸다고 하는데, 안국사 주지는 학을 좋아했는지 학으
로 대체했으며 예전에는 극락전에 학 그림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채색되지 않은 달랑 하루
거리의 분량을 그냥 두고 있는 것은 그 설화의 증거물로 내세우는 동시에 학으로 상징되는 노
인이 그림을 그려준 절이라며 속세에 요란하게 홍보하려는 일종의 꼼수로 봐야 될 것이다.
어차피 전체도 아닌 일부에 불과하니 그냥 둬도 무리는 없겠지. 그래서 1% 부족한 모습으로 있
게 된 것이다. 안좋은 이유로 단청이 중단된 것을 전화위복으로 삼은 안국사 주지의 지혜가 참
으로 돋보인다.


▲  극락전 불단을 장식한 목조아미타3존불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01호

화려하기 그지없는 극락전 불단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세지보살(勢至
菩薩)이 아미타3존불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나무로 만들어 개금을 한 것으로 불상은 매우 조
그만하지만 나름 미소를 띄우느라 애를 쓴다. 이들 3존불의 중심인 아미타여래는 통견의(通肩
衣)를 입고 있고, 소매자락이 발가락을 덮고 있는데, 높이 67cm, 무릎폭 43.5cm, 어깨폭 30cm
내외이다.

좌측에 자리한 관음보살은 옷주름이 본존불과 비슷하며, 머리에 쓴 보관(寶冠) 밑에 검은 머리
칼을 살짝 표현했는데, 귓바퀴를 1번 감아내려 어깨 위로 흘러내리게 했다. 그의 높이는 63cm,
무릎폭 35.5cm, 어깨폭 26cm 내외이다.
우측에 자리한 세지보살은 관음보살과 손모양이 대칭적이고 불의형(佛衣形) 법의를 입고 있는
데, 대체로 관음보살과 비슷한 모습이다. 높이는 61cm, 무릎폭 36.5cm, 어깨폭 24cm 정도이다.

이들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약간 구부정한 자세와 굵고
짧아진 목, 납작해진 턱과 각진 얼굴, 오똑한 코와 미소, 자연스럽게 처리된 옷주름, 사실적
표현의 손 등으로 볼 때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들 뒤로 화사한 색채
의 후불탱이 병풍처럼 든든히 자리해 있는데 원래는 1772년에 제작된 탱화가 있었으나 관리소
홀로 그만 도난을 당해 1994년에 혜원(慧園)이 그린 아미타후불탱으로 땜빵한 것이다. 법당의
후불탱화면 꽤나 보는 눈이 많아 만지기도 어려울텐데 그것을 극복하고 탱화를 떼어가다니 참
대단한 도둑이 아닐 수 없다. 혹 신이 실수로 가져간 것은 아닐까?

  ◀  극락전 뒷쪽, 괘불이 담긴 길쭉한 상자
극락전 내부에는 1965년에 제작된 신중탱(神衆
幀)과 1995년에 만든 청동금고(靑銅金鼓)가
다. 그리고 불단 뒷쪽으로 가면 길쭉한 나무

자가 눈에 들어올 것인데, 과연 무엇이 들었

래 상자가 저래도 긴 것일까?

그 안에는 바로 18세기에 제작된 영산회괘불도
(靈山會掛佛圖)가 잠들어 있다. 괘불은 석가탄
신일이나 영산재(靈山齋) 등 아주 특별한 날에
만 만날 수 있는 귀한 존재로 평소에는 친견이
불가능하다.
천하에 200곳이 넘는 오래된 절집을 찾아다닌
본인도 괘불을 본 횟수는 겨우 10번도 되지를
않는다. 그만큼 만나기가 힘든 존재로 1년에
고작 한손에 꼽을 정도로 외출을 하며 대부분
의 시간은 괘불함이나 금고 등에 꼼짝없이 갇
혀있어야 된다. 그것이 괘불의 운명이다.

안국사 영산회괘불도는 보물 1267호로 석가가 설법을 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그 주위로 다보
여래(多寶如來)와 문수보살, 보현보살,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등이 자리해 있다. 괘
불의 길이는 10.75m, 폭은 7.2m의 큰 그림으로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발원하고자 만들
었으며, 18세기 중반에 경남 고성 운흥사(雲興寺)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비구 의겸(義謙)을 비
롯해 5명의 승려가 제작했다.
제작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화기(畵記)에 '?? 6년'이란 기록이 있는데, 의겸이 활동하던 시
절에 '?? 6년'이라 하면 1728년(옹정 6년)과 1741년(건륭 6년) 밖에는 없으며, 요즘은 1728년
을 제작 시기로 삼고 있다. 1792년과 1809년 그림을 수리했으며, 운흥사 괘불과 부안 개암사(
開巖寺) 영산회괘불탱과 대체로 비슷하다.

이 괘불은 가뭄 때 밖으로 꺼내 기우제를 올리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있어 가뭄이 심
하면 추가적으로 외출을 시켜주었으나 요즘은 석가탄신일과 특정 행사 때를 제외하고는 외출을
안시켜 준다.
비록 괘불은 못봤지만 괘불이 담긴 괘불함은 극락전에 보관하고 있어 그 함에 기도를 하는 사
람도 많으며, 높이 10m가 넘는 그 큰 그림이 과연 저 안에 다 들어갈까 싶을 정도로 함이 작아
보인다. (괘불함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안국사 천불전(千佛殿)

극락전 우측에는 천불전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은 다른 불전과 달리 조금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이는 원래 적상산사고의 선원각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적상산사고가 버려진 이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선원각을 친일파 주지 이철허가 경내로 가져와서
사찰 건물로 부려먹었으며 나중에 천불전으로 바뀌었다. 조선의 사고 가운데 유일하게 화마(火
魔)의 희롱을 받지 않은 건물로 바로 앞에서 보면 1층으로 보이지만 엄연한 2층 구조이며, 밑
은 창고, 위는 천불전으로 쓰이고 있다. 정면 가운데 칸에 강암 송성용이 쓴 천불전 현판이 걸
려있고 좌우 측면에는 내부에 채광을 공급하는 교창이 있다.

내부에는 1995년에 조성된 석가불과 문수/보현보살을 비롯해 석고로 만든 하얀 피부의 조그만
불상 1,000기가 자리해 장관을 이룬다. 유일하게 남은 사고 건물이지만 변형이 심해 지정문화
재의 지위까지는 얻지 못했다.


◀  안국사 지장전(地藏殿)

극락전 옆에 자리한 지장전은 1992년에 원행이
세운 것으로 목조지장보살좌상과 도명존자(道
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안국사 삼성각(三聖閣)

천불전 뒤쪽이자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는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92년에 원행이 옮겨 세웠으며, 우리 귀에 매우 익은 산신(山神)과 칠
성(七星),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의 보금자리로 그중 칠성을 담은 칠성탱은 1899년 김천 봉
곡사(鳳谷寺)의 부속암자인 극락암(極樂庵)에서 우송 상수(友松 爽洙)가 조성한 것이다. 그가
그린 칠성탱은 무주읍내 북쪽에 있는 북고사(北固寺)에도 있다.


▲  삼성각에 봉안된 칠성탱  (1899년에 우송 상수가 그린 것임)

▲  안국사 부도군(浮屠群)

안국사를 이렇게 둘러보고 호국사비와 천불전 내부를 살피지 못한 아쉬움과 다음 답사지에 대
한 기대를 나란히 품으며 절과의 짧은 인연을 정리한다. 그 2개를 못봤으니 다음에 또 와야되
는 빌미를 만든 것이다.

다음 답사지는 적상산사고인데, 사고로 정신없이 내려가다가 중간에 오른쪽으로 빠지는 산길을
만났다. 일행 몇몇이 그 산길로 들어가길래 '그곳에 뭐가 있나' 싶어 따라 들어가니 그 숲속에
는 안국사의 숨겨진 보물인 승탑(僧塔, 부도) 4기가 푸른 이끼 옷을 걸치며 우리를 맞이한다.

이들 승탑은 석종형(石鐘形) 탑으로 탑신(塔身)에 고맙게도 조성 시기와 탑의 주인이 적혀있다.
모두 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이중 가장 오래된 것은 팔각원당형의 지붕 옥개석을 지닌 청운당
사리탑과 그 옆에 머리 부분이 여의두문(如意頭紋)의 보륜(寶輪)으로 이루어진 청운당 봉골탑(
奉骨塔)으로 1717년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그 옆에 꼭대기에 연화보주를 단 승탑은 보운당(寶雲堂)의 넋이 서린 사정탑(思正塔)으
로 1753년에 조성되었으며, 그 옆의 것은 월인당(月印堂)의 영골탑(靈骨塔)으로 1750년에 세워
졌다.

승탑들이 모두 높이 1.3m 미만의 조그만 탑으로 불교의 쇠퇴기이다 보니 신라나 고려처럼 장엄
한 부도는 기대하기 힘들다. 그나마 승탑 주인의 제자들이 정성을 다해 저 정도로 만든 것이다.
이들은 딱히 이정표가 없어 지나치기 쉬우며, 이들도 원래 수몰지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  호젓한 분위기의 안국사 숲길 (안국사에서 속세 방향)


 

♠  조선 왕실의 보물 창고, 조선 후기 주요 사고(史庫)의 하나였던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 전북 지방기념물 88호

적상호 서쪽 언덕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2층 기와집 2동이 적상호를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근
래에 복원된 적상산사고로 원래는 적상호에 있었다. 양수발전소 건립으로 이들 보금자리가 강
제로 묻히게 되자 사고터 주춧돌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와 선원각과 실록각을 복원했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 광해군 시절, 우리의 옛 땅인 만주에 또아리를 튼 후금(後金)이 나날이 강
성해지면서 북방에 자리한 묘향산사고에 담긴 왕실 서적과 보물의 안위가 크게 위협을 받자 다
른 장소로 실록을 옮겨야 된다는 의견이 나왔다. 마침 순안어사 최현과 무주현감 이유경이 적
상산을 강하게 추천하자 사관을 보내 현지를 살펴보게 했는데, 아주 긍정적인 답을 받았다. 그
래서 즉시 적상산성을 수리하고 1614년 실록전을 세우면서 적상산사고가 탄생했다. 1618년 9월
묘향산에 있던 실록을 이곳으로 옮기기 시작하여 1633년 마무리를 지었다.

1641년에는 선원각을 세워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면서 완전한 사고가 된다. 1636년 병자호란
으로 강화도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의 실록이 손실되자. 이를 보완하고자 적상산 사고에 담긴
실록을 참조하여 작업을 했다. 이때 3도 유생 300명이 동원되었다.
적상산사고를 수호하고자 1643년 왕명으로 호국사를 세워 안국사와 함께 사고 수비에 전념토록
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안국사 승려 상훈이 사고의 서적을 안렴대로 대피시키기도 했다.

1872년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했으며, 1902년에 다시 개수를 벌였으나 1910년 왜정이 적상산
사고에 담긴 모든 서적을 서울로 가져가면서 사고는 방치되고 만다. 선원각은 안국사 주지 이
철허가 경내로 가져가 불당으로 부리면서 살아남았으나 나머지 건물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만큼 완전하게 방치된 것이다.

사고에는 선원각, 실록전을 기본으로 하여 승장청(僧將廳), 군기고, 화약고, 수사당, 문루 등
이 있었으며, 그 흔적만 아련히 전해오다가 1992년 무주양수발전소 건립으로 그 자리마저 빼앗
기게 된다. 하여 지금의 자리로 흔적을 옮겼고, 1997년에 선원각, 1998년에 실록각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적상산사고는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문화재청의 지정 명칭은 '
적상산사고지 유구(遺構)'이다.

선원각과 실록각은 2층식 창고 형태로 지어졌다. 1층은 허공에 떠 있는 형태로 기둥이 2층을
받치고 있으며, 2층이 바로 서고이다. 이는 혹시나 문을 두드릴지 모를 화마의 방문이나 습기
의 침투, 이 땅을 망치고 있는 쥐들의 공격을 막고 서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함이다. 이
런 식의 창고는 고구려(高句麗)의 창고 건물인 부경에서 비롯되었는데, 우리나라는 물론 왜열
도까지 전파된 국제적인 건축 양식이다.

건물 2층에는 조선왕조실록과 사고, 무주 고을에 관한 설명문과 디오라마, 모형도, 유물 등이
담겨져 있는데, 관람을 원할 경우 적상산사고를 관리하는 문화재해설사한테 요청하면 된다. 건
물은 모두 새것이라 고색의 기운이 피어나기에는 아직도 멀었지만 이곳에서 푸른 물결의 적상
호가 바라보여 호수에서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에 마음이 시원해진다.

▲  선원각(璿源閣)

▲  실록각(實錄閣)

▲  실록각 1층 마루

▲  적상산사고 정문

적상산사고를 간단하게 둘러보고 버스에 올라타 적상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무주머루와인동굴
로 이동했다. 이후 내용은 글의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한다.

※ 적상산 (적상산성, 안국사, 적상산사고)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① 무주까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떠난다.
* 대전복합터미널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4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광주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1일 6~7회, 전주에서는 1일 14회 떠난다.
* 영동역(경부선)에서 무주행 군내버스가 1일 12회 운행한다.
② 현지교통
* 무주터미널에서 내창행 군내버스 이용 (1일 2회, 11:40, 16:30분)  내창에서 적상산사고까지
  도보 2시간 10분 (무주터미널에서 안국사까지 택시로 접근 가능)
* 무주터미널에서 적상, 안성, 장계, 안천 방면 군내버스(20~50분 간격)를 타고 사천리(서창탐
  방지원센터 입구)에서 하차. 적상산 안국사까지 등산 약 2시간 20분 소요 (사천리→서창탐방
  지원센터→장도바위→서문터→향로봉→안국사
  <등산 출입 시간(서창탐방지원센터 기준) 4~10월은 4~15시, 11~3월은 5~14시, 그 외에 시간
  은 출입 불가>
③ 승용차 (안국사까지 접근 가능)
* 대전~통영고속도로 → 무주나들목을 나와서 무주방면 우회전 → 무주1교차로에서 우회전 →
  적상산입구에서 우회전 → 북창리 → 적상호 → 적상산 안국사

* 적상산 주차비 : 승용차 2,000~5,000원, 버스 6,000~7,500원 (안국사 주차장은 무료)
* 안국사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산184-1
(☎ 063-322-6162)
* 적상산성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괴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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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산사 나들이 ~ 고성 연화산 옥천사 (공룡발자국화석, 연화산 숲길)

 

' 늦가을 산사 나들이 ~ 고성 연화산 옥천사(玉泉寺) '

  옥천사 대웅전  
옥천사 전나무숲길과 계단

▲ 옥천사 대웅전
옥천사 전나무 숲길과 계단
▶ 옥천사 독성각, 산령각

옥천사 독성각과 산령각


늦가을이 한참 절정을 쏟아내던 10월 끝무렵에 경남 고성(固城) 옥천사를 찾았다. 마산남부터
미널에서 통영행 직행버스를 타고 고성 북쪽 관문인 배둔에서 내려 개천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기다렸다. 차는 거의 1시간 마다 있는데, 마침 20분 뒤에 있다.
차를 기다리기 심심하여 정류장 화단에서 놀고 있는 잠자리를 희롱하며 노닥거렸는데, 화단에
서 놀던 잠자리는 5마리였다. 잡힌 잠자리는 자비를 베풀며 무조건 석방시켰으나 그들은 멀리
가지 않고 주변에서 놀다가 또 내 손에 잡힌다. 그렇게 잡고 풀어주는 것을 반복하여 20여 번
정도 잡았으니 1마리 당 거의 4~5번 나의 거친 손을 거쳐간 셈이다.

드디어 개천행 버스가 정류장에 바퀴를 들이자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잠자리 사냥을 그만두고
버스에 오른다. 버스 승객은 나를 빼고는 모두 노공(老公)들.. 내가 승객의 평균 연령치를 크
게 깎아준 셈이다.
버스는 외마디 부릉 소리를 배둔정류장에 남기며 1007번 지방도를 따라 마암면을 지나 개천면
으로 간다. 연화산의 품으로 바로 들어서는 듯 싶더니 좌연리에서 갑자기 우회전하여 교행 조
차도 불가능한 조그만 시골길을 거침없이 질주한다. 좌연리에서 바로 질러가면 옥천사 입구인
데 생각치도 못한 곳으로 강제 투어를 당하니 나도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버스는 그런 날 외
면하며 봉치리와 용안리 구석구석을 강제 구경을 시켜주고 나서야 다시 1007번 지방도로 복귀,
옥천사3거리에 나를 내려놓는다.


♠  연화산(蓮花山)의 품으로 들어서다

▲  옥천사 입구에서 바라본 연화산(528m)

옥천사3거리에서 다리를 건너면 본격적으로 연화산 나들이가 시작된다. 가을 추수의 기쁨을 누
린 전답과 시골집들, 옥천사 관광객을 겨낭한 찻집과 주막들을 반대 방향으로 흘려 보내며 15분
정도 살랑살랑 걸으면 계곡 건너로 주차장과 숙박촌이 자리한 연화산 집단시설지구가 나타난다.
공룡상이 있는 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들어서면 서쪽 가장자리에 공룡발자국화석이 있으니 그
것도 반드시 살펴보도록 하자.


▲  주차장 다리 앞에 놓인 귀여운 공룡상

▲  방생장(放生場) 비석과 돌탑들

주차장 입구에는 10여 기의 돌탑과 방생장 비석이 자리해 있다. 방생은 살려서 놓아준다는 의미
로 이곳이 계곡 옆이니 여기서 방생의식을 했던 모양인데, 그 비석 피부에는 붉은 글씨로 '崇禎
紀元後 四 辛酉 四月(숭정 기원후 4신유 4월)'이라 쓰여 있어 1861년 4월에 만든 것 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 의종(毅宗)의 연호로 1628년부터 명나라
가 풍비박산이 난 1644년까지 쓰였는데, 명이 사라진 이후에도 조선 조정과 사대부(士大夫)들은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명에 대한 아주 꼴사나운 꼴통 사대주의(事大主義)로 '숭정'이란 연호
는 무려 20세기 초까지 두고두고 우려먹었다. 그리고 '四 辛酉(4신유)'는 1628년 이후 4번째 신
유년이란 뜻으로 계산을 하면 1861년이 된다.


▲  옥천사계곡 공룡발자국 화석지

주차장 서쪽 계곡 암반에는 1억년 전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의 발자국 화석(化石)이 있다. 이들
은 용각류(Sauropoda, 잡식성 공룔) 공룡의 발자국들로 바위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얕게 패인 부
분이 그들의 발자국이다. 그리고 화석이 있는 암반 위쪽에는 중생들이 정성스레 얹힌 돌탑들이
널려 있다.


▲  공룡발자국 화석을 품은 계곡 암반

▲  공룡의 발자국화석
그들의 발자국 하나가 내 얼굴보다 크다. 여기서 뛰어 놀던 그들은 전설처럼
사라지고 그들의 발자국만 남아 아련하게 그 시절을 읊어줄 따름이다.

경남 고성은 스스로 공룡나라를 칭하며 공룡을 고을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고성은 우리나라 최
초로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곳으로 고을 전역에서 발견된 것만 5,000여 개에 달해 미국 콜
로라도, 아르헨티나 서부해안과 더불어 세계3대 공룡발자국 화석 산지(産地)로 손꼽힌다. 게다
가 바닷가에 있는 상족암은 공룡 화석의 성지(聖地)로 고성공룡박물관까지 들어서 있다. 이렇게
공룡의 흔적이 부지기수로 많으니 고성이 공룡나라를 칭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


▲  인간의 상상으로 깜찍하게 포장된 공룡

공룡발자국화석지 옆에는 깜찍한 공룡상이 있다. 그들은 우리와 마주칠 일도 전혀 없는 먼 옛날
의 존재로 가볍게들 생각하고 있지만 만약 인간과 공룡이 공존을 한다면 분명 호환마마 그 이상
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렇게까지 귀엽게 만들지도 않았겠지. <공룡(恐龍)의 공(恐)은 매우
두려워한다는 뜻임>


▲  옥천소류지(沼溜地)

▲  매표소 쪽에서 바라본 옥천소류지

집단시설지구 주차장에서 5분 정도 오르면 옥천사계곡물을 모은 저수지가 나온다. 그의 명칭은
옥천소류지로 연화산이 베푼 계곡물이 옥천사를 끼고 졸졸졸~♪ 흐르다가 이곳에 모여 끝없는
대장정을 준비한다. 늦가을의 절정을 누리며 처절한 아름다움을 비치는 나무들과 알을 품은 어
미새처럼 푸근하기 그지없는 연화산 산줄기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몸단장에
여념이 없고, 삼삼한 숲에 둘러싸인 호수의 자태는 첩첩한 산중에 안긴 비밀의 호수처럼 신비롭
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옥천소류지의 경치에 취한 것도 잠시~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가 내 흥을 깨뜨리며 발길을 막는
다. 바로 옥천사매표소이다. 매표소에는 아저씨 1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입장료를 보니 무려
1,300원(학생은 1,000원)이다. 입장료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고성읍 무량리(우리 집안 고향임)
가 집안 고향이라 들이대면서 슬쩍 대학생 할인 여부를 물으니 고향과 본관이 고성이란 말에 아
저씨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오늘은 평일이고 하니 그냥 들어가라고 그런다. 뜻밖에 호의에 감
사의 뜻을 표하고 별탈없이 매표소를 통과했다.


▲  옥천사 일주문(一柱門)

매표소를 지나면 옥천사 주차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오르면 옥천사의 관문인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이 문은 1984년에 지어진 것으로 현판에는 '연화산 옥천사'라 쓰여 이곳의 정체를
밝혀주며, 문을 들어서면 아름답기 그지 없는 옥천사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  가는 길목에 중생들의 목을 축여주는 샘터도 있다.

옥천사 숲길은 하늘을 가리며 솟아난 늘씬한 나무들로 거대한 수해(樹海)를 이룬다. 숲 밖은 훤
한 대낮이지만 숲 안은 오히려 그늘지게 어두워 따사로운 햇빛마저 우걱우걱 삼켜버린다. 산사(
山寺)로 가는 숲길 치고 아름답지 않은 길은 거의 없겠지만 옥천사 숲길은 그중에서도 천하 으
뜸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움이 깊다. 길을 가다가 선녀 누님이 툭 튀어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나무들이 베푼 선선한 산바람에 번뇌는 날려가지 않으려고 발악을 한다. 허나 결국은 날려간 모
양이다. 마음이 가뿐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멀리 날라가지는 못하고 매표소 밖 소류지에서 물
놀이를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번뇌의 무게가 참 무겁긴 무거운 모양이다.

숲길 중간에는 샘터가 있다. 연화산이 중생들의 갈증을 우려하여 베푼 옥계수로 석조(石槽)에는
늘 물로 가득하다.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마시니 몸 속의 온갖 때가 싹 가신 듯 마음이 시원
하다. 샘터를 지나면 길 왼쪽에 사적비와 부도군이 있으며, 부도군에는 조선 후기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승탑(부도)들이 시간을 초월하며 어깨를 나란히 한다.


▲  옥천사 사적비와 부도군(浮屠群)
옥천사의 내력이 적힌 사적비와 옥천사와 인연이 깊은 승려의 승탑(僧塔)이
숲속에 터를 닦았다.


♠  옥천사 입문 (천왕문, 범종루 주변)

▲  천왕문(天王門)

일주문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절의 2번 째 문인 천왕문이 마중한다. 이 문은 1989년에 만든 것
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문 안에는 천왕문의 주인이자 부처를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이 눈을 부아리고 중생을 검문하며, 문 앞에는 속인(俗人)들이 끌고 온 수레들이
뒷꽁무니를 들이밀며 바퀴를 접고 쉬고 있다.

▲  사천왕(四天王)의 위엄
왼쪽부터 보탑(寶塔)을 들고 선 다문천왕(多聞天王), 비파 연주의 달인 지국천왕(持國天王),
칼의 달인 증장천왕(增長天王), 철쇄(鐵鎖) 비슷한 것을 든 광목천왕(廣目天王)

▲  증장천왕 발에 짓밟힌 악귀(惡鬼)

사천왕은 부처 및 불법을 지키는 경호대장에 걸맞게 대단한 외모과 풍채를 자랑한다. 눈초리가
매섭긴 하지만 쳐다보면 볼 수록 정이 드는 밉지 않은 얼굴이다. 허나 사천왕에 밟힌 악귀들은
사정이 그렇지를 못해 한결같이 인상들이 더러운데 그들 눈빛은 원망과 살기로 가득해 보인다.


▲  붉은 벽돌담에 둘러싸인 비각(碑閣)

        ◀  비각에 안긴 선경비(善敬碑)
천왕문을 들어서면 붉은 벽돌 담장에 둘러싸인
조그만 비각을 만나게 된다. 비각 안에는 지붕
돌을 얹힌 비석이 안겨져 있는데, 이 비는 옥천
사에 시주를 많이 한 어느 사대부를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비문 내용은 '贈 戶曹判書 安公
善敬碑'라 쓰여 있어 나중에 호조판서로 추증(
追贈)된 안씨 성을 가진 사대부가 비석의 주인
임을 알 수 있는데, 비석이 세워진 것은 1922년
이다.

비각 앞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데, 그렇
다고 선경비를 위해 세워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 자리는 원래 제왕의 수복(壽福)을 빌던 축성
전(祝聖殿)이 있던 곳이라 그 앞은 무조건 말에
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를 세운 것이다.


▲  축성전터를 지키는 하마비의 위엄
지체 높은 고관대작(高官大爵) 마저 꼼짝 못하게 만든 하마비 3글자에
자못 위엄이 서려 보인다.

◀  경내를 목전에 둔 전나무 숲길

비각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길 좌우로 늘씬하게
솟은 전나무가 조촐하게 숲길을 이룬다. 비록
10m 남짓의 짧은 거리지만 소소하게 멋을 풍기
며 옥천사의 아름다움을 수식하는데 일조한다.
가을도 반하여 머무는 그 숲길 바닥에는 한 시
절 폼나게 살다간 낙엽들이 깔려 알록달록 카페
트를 이룬다. 귀를 접고 누운 낙엽을 보면서 올
해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실감나게 하니
세월의 자비 없는 조급함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그런 숲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자방루 뜨락이
나온다.


▲  범종각(梵鍾閣)

전나무숲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연병장처럼
넓은 자방루 뜨락이 펼쳐진다. 뜨락 왼쪽에는
범종각이 자리해 있는데, 범종(梵鍾)과 법고(法
鼓), 운판(雲版), 목어(木魚) 등 사물(四物)이
담겨져 있다. 범종 같은 경우는 1776년에 주조
된 대종(大鐘)이 있었으나 현재는 보장각에 있
으며, 1987년 재일교포 박명호가 시주하여 만든
종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박명호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하는데 당
시의 추억을 잊지 못해 거금을 시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물 외에도 조선 때 싸리나무로 만든
큰 구시가 있는데, 이것은 큰 불사나 법회 때
밥이나 물을 담던 커다란 나무 통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옥천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자방루 뜨락 좌측에 자리한 샘터


※ 연화산에 안긴 고성 제일의 고찰, 옥천사(玉泉寺) - 경남 지방기념물 140호
고성 제일의 명산(名山)인 연화산(蓮花山) 북쪽 자락에 고성 사찰의 갑(甲)인 옥천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이 절은 676년(문무왕 15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10년에 걸친 당나
라 유학생활을 마치고 670년에 귀국하여 화엄종(華嚴宗)을 널리 알리고자 영주 부석사(浮石寺)
를 시작으로 좁아 터진 신라(新羅) 땅에 10개의 화엄종 사찰을 지었는데, 옥천사는 그중의 하나
로 세워졌다고 한다. 절의 이름은 지금도 이곳의 명물로 꼽히는 옥천(玉泉)이란 샘에서 유래되
었다고 하며, 과연 의상이 창건했는지는 속시원히 입증할 수는 없지만 최치원(崔致遠)이 하동
쌍계사(雙磎寺)에 남긴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47호)에 '쌍계사는 본래 절
이름을 옥천사라 했으나 근처에 옥천사란 절이 있어 헌강왕(憲康王)이 쌍계사라 제액(題額)을
내렸다'
는 문구가 있어 옥천사가 그 이전부터 숨 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라 말기인 898년에는 창원 봉림사(鳳林寺)를 세운 진경국사(眞鏡國師) 심희(審希)가 낭림선사
(朗林禪師)와 함께 중창을 벌였는데, 이때 크게 가람이 확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때는 964년(광종 15년)에 혜거국사(惠居國師)가 혼응(混應)과 더불어 3번째 중창을 벌였고,
1110년(예종 5년) 혜은(慧隱)이 쇠퇴한 절을 다시 일으키니 이것이 4번째 중창이다. 그리고 예
종 시절에는 묘응(妙應)이 이곳에서 천태종(天台宗)을 강의했다고 한다. 1237년 최씨정권이 대
장경(大藏經) 불사를 위해 진주에 대장도감 분사(大藏都監 分司)를 두었는데, 옥천사 보융대사(
普融大師)가 일연대사(一然大師)와 함께 팔만대장경 교정 작업을 벌였으며, 그 공로로 5번째 중
창이 이루어졌다. 1371년(공민왕 20년) 지운(智雲)과 원오(圓悟)가 6번째 중창을 했다.

1392년 천하가 바뀌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옥천사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했다. 1592
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천사 승려들은 의승군(義僧軍)을 조직하여 왜군(倭軍)과 싸웠으나 1597
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군의 공격으로 절 전체가 파괴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 이후 1640년 학명(學明)이 절 아래 대둔마을에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
타나 웅장한 절터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학명은 이튿날 꿈 속에서 갔던 그
곳을 더듬어 찾으니 글쎄 그때 본 거대한 절터가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자리도
일품이었다. 그래서 친분이 있던 의오(義悟)와 함께 중창불사를 벌이기로 하고 1644년에 우선
동상당(東上堂)이란 초가를 짓고 이듬해 심검당을 세웠다. 허나 재정이 넉넉치 못해 1654년에
겨우 법당을 지었고, 1664년에 정문을 세워 7번째 중창을 마무리 지었다.

1677년 묘욱(妙旭)이 법화회(法華會)를 개설하여 향적전, 만월당을 짓고, 1680년 인근에 청련암
(靑蓮庵)과 백련암(白蓮庵) 등의 암자를 세웠다. 1764년에는 자방루를 짓고 그 앞에 뜨락을 넓
게 닦았는데, 여기서 승병 훈련을 했다. 조선 정부는 승군(僧軍)을 부리고자 바다와 가까운 절
에 의무적으로 승병을 두게 했는데, 영조 시절 옥천사 승군은 3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당시 절 규모는 요사 5동, 산내암자 7개였으며, 물레방아가 12개나 있을 정도로 크게 흥했다.
이때가 8차 중창이었다.

달은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1800년(정조 24년) 나라에 종이를 바치는 어람지 진상사찰(御覽紙
進上寺刹)로 선정되었다. 병역과 각가지 부역(負役)도 힘든데 거기에 종이까지 만들어야 되니
그 부담이 실로 상당했을 것이라 심한 부역을 이기지 못한 승려들이 자꾸 도망을 치면서 절이
크게 기울게 된다. 그래서 1842년 승군의 정원을 170명에서 100명으로 줄이고 종이 물량도 크게
감량해 주었으나 여전히 감당이 되지 않아 1880년에는 겨우 10여 명만 남았다고 한다.
1863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인 신관호(申觀浩)가 절을 방문해 '연화옥천(蓮花玉泉)'
이란 글을 남겼는데, 이때 주지인 농성(聾醒)이 어람지 진상사찰에서 빼줄 것을 호소했다. 그
말이 옳다 여긴 신관호는 바로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리면서 종이 부역에서 해방되었다.

옥천사는 19세기에 진주와 고성 지역 사대부(士大夫)와 여러 관청에서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지배층과 관(官)과 한통속이라 백성들은 생각을 했던 듯 싶다. 백성들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온갖 수탈로 허리가 아작날 지경인데, 옥천사는 종이 부역과 승병 군역이 있을 뿐,
그런데로 지원을 받으며 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862년 진주민란(晉州民亂)이 터지자 농
민들은 절로 몰려와 경내 외곽의 건물과 대종을 파괴했으며, 1888년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났을
때도 농민들이 다시 몰려가 많은 건물에 불을 질렀다. 이에 뚜껑이 열린 용운대사(龍雲大師)가
정면으로 나서
'이 절에는 전하(殿下)의 수복을 비는 축성전이 있소. 더 이상 불을 지르면 당신들을 역적으로
몰아 삼족을 멸할 것이오!!'
호통을 치니 이에 간이 쫄깃해진 농민들은 겁을 먹고 줄행랑을 쳤
다. 그 덕분에 대웅전, 자방루는 온전히 살아남게 된 것이다.

어쨌든 사대부와 관의 지원으로 적묵당과 탐진당을 중수했고, 힘들다고 도망친 승려를 소환하면
서 예전의 명성을 조금씩 되찾기 시작했다. 1890년에는 조정이 전국에 교지(敎旨)를 보내 왕실
을 위해 기도를 올리라고 지시했다. 이에 경상도관찰사이자 진주목사인 박규희(朴珪熙)가 개인
자금을 털어 옥천사에 왕실의 안녕을 비는 건물을 지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흐뭇해하며
축성전이란 사액을 내렸으며, 명부전과 나한전, 칠성각을 끊임없이 중건하면서 이른바 9번째 중
창은 마무리되었다.
이 당시 옥천사 소유 전답은 800여 마지기로 인근 농민들에게 소작(小作)을 주어 5:5 비율로 받
아 매년 1,000석의 수입을 챙겼다. 또한 산을 개간해 560정보를 전답으로 만들었으며, 세곡 수
입을 바탕으로 계속 전답을 불렸고, 승려 수도 나날이 늘어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1911년 왜정(倭政)이 사찰령(寺刹令)을 공포하고 전국 31본산(本山)을 정할 때 옥천사가 그 하
나로 지목되었다. 허나 당시 주지인 서응대사<瑞應大師, 채서응(蔡瑞應)>이 서울 주지회의에 참
석하여, 대본산 지정을 거절했다. 그로 인해 옥천사 승려들의 칭송이 대단했다고 한다. 1920년
경에는 진주에 포교당을 만들어 연화사(蓮花寺)라 하였다.

옥천사는 왜국으로 승려 15명을 유학보내기도 했으며, 이들은 장차 절 주지와 교육계로 진출했
다. 그리고 잠시나마 옥천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고, 상해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는 등 나라의
독립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또한 절은 통도사의 말사(末寺)이지만 워낙 파워가 대단하여 통도사
에서 주지를 파견하지도 못했다. 옥천사 자체에서 중론으로 주지를 선출하여 통도사에 승인을
요구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1950년 농지개혁법이 공포되자 사찰답 800여 지기가 소작인들에게 죄다 넘어갔다. 그
로 인해 절은 졸지에 거지가 되고 운영에 큰 위기를 맞았다. 다른 절은 약간의 불량답(佛糧畓)
이라도 건졌으나 옥천사는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허나 연화산 주변 565ha의 산림을
가지고 있어 빈털털이는 그나마 면했다.

근래에 이르러 청담(淸潭)이 불교정화와 신도 교화운동을 벌이면서 전답을 잃어 방황하던 절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렸으며, 1984년 일주문을, 1987년 사적비, 1999년 유물전시관과 축성전을 지
으면서 지금에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옥천사 칠성각

▲  옥천사 보장각(성보박물관)

경내에는 대웅전과 팔상전, 자방루, 조사전, 유물전시관 등 20동에 가까운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으며, 청련암과 백련암, 연대암 등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외에 고성읍내와 하동에 보광
사, 낙서암 등의 포교원을 운영한다.
소장문화유산으로 보물 495호로 지정된 청동금고(靑銅金鼓)와 보물 1693호인 지장보살도 및 시
왕도 등 국가지정문화재 2점과 대웅전과 자방루, 향로, 대종, 명부전 등 지방문화재 7점을 간직
하여 고색의 짙은 향기와 절의 장대한 역사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또한 절 전체는 경남 지방기
념물 140호
로 지정되었다.

옥천사는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진 연화산의 북쪽 자락에 포근히 안겨있으며, 산세가
완만하고 숲이 울창해 경남 남부의 경승지로 명성이 높다. 특히 알록달록 물감이 완연히 번진
가을은 그 백미이다. 첩첩한 산주름에 묻혀있어 고요하기 그지없으며 풍경소리와 산바람 소리,
산새의 지저귐, 범종 소리가 그 고요를 가끔 깨뜨리는 게 전부이다.

절을 품은 연화산은 복분자딸기와 송이버섯이 유명하며, 우리나라 100대 명산의 하나이다. 연화
산 일대는 경남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연화8경의 절경을 간직하고 있다. 

※ 연화산 옥천사 찾아가기 (2013년 11월 기준)
① 고성, 배둔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고성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서부터미널과 마산남부터미널에서 배둔 경유 고성행 직행버스가 수시로 떠난다.
② 진주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운행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진주행 고속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운행
* 대전동부터미널, 부산서부터미널, 대구서부정류장에서 진주행 직행버스가 이용
③ 고성/배둔/진주에서 옥천사3거리까지 (옥천사3거리에서 도보 35분)
* 고성터미널과 배둔에서 개천행 군내/완행버스(1일 10여 회)를 타고 옥천사3거리 하차
* 진주시외터미널에서 옥천사3거리 경유 배둔, 고성 방면 완행버스가 1일 11회 다닌다.
④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까지 진입 가능)
* 대전~통영고속도로 → 연화산나들목을 나와 우회전 → 영오 → 개천 → 옥천사3거리 → 옥천
  사 주차장

★ 옥천사 관람정보 (2013년 11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1,300원 / 학생,군인 1,000원 (20인 이상 단체 800원) / 어린이 700원 (단체
  600원)
* 옥천사는 휴식형과 체험형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운영한다. 휴식형은 최대 3박4일까지
  머물 수 있으며, 체험형은 매월 2,4주 주말에 1박 2일로 진행된다. 체험형 참가비는 성인 5만
  원, 초중고 4만원이며, 세면도구와 수건, 운동화 등을 지참해야 된다.
  자세한 문의는 옥천사 종무소(☎ 055-672-0100)나 홈페이지 참조
* 옥천사에서 연화산 정상까지 2시간 정도 걸린다.
* 소재지 -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408 (연화산1로 471-9) <☎ 055-672-0100>
* 옥천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옥천사 승군들이 사용한 언월도(偃月刀)


♠  옥천사 둘러보기 (자방루, 대웅전 주변)

▲  옥천사 건물의 갑(甲)인 자방루(慈芳樓)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3호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으로 가려면 자방루의 옆구리를 싫든 좋든 거쳐야 된다. 옥천사의 속살을
속세에 드러내기가 싫었던지 대웅전 주변을 꽁꽁 가리고 있어 바깥에서는 내부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당당한 모습을 지닌 자방루는 1764년에 지어졌다. 1888년 농성이 중건하
고 1984년에 보수를 벌였는데, 이 건물은 승장(僧將)이 승군을 지휘/통제하던 곳으로 최대 340
명까지 담을 수 있다. 훈련 외에는 불교 강의나 행사 장소로 쓰였으며, 너른 앞뜨락에서는 승병
들이 훈련을 하거나 군사 사열을 받았다.

건물 내부에는 1888년에 그려진 비천상(飛天像)과 비룡상(飛龍像)을 비롯해 새 그림 40여 점이
내부를 수식하며, 자방루란 이름은 꽃다운 향기가 점점 불어난다는 뜻으로 불도를 닦는 누각이
란 뜻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보장각 제외)로 옥천사의 오랜 명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  단청으로 화사한 자방루 내부

▲  자방루 대들보에 걸린 현판

자방루는 대웅전 방향만 개방된 형태이고 천왕문 방향은 문을 열고 닫는 형태이다. 내부는 누마
루로 바닥을 짰고 단일부재인 대들보에 기둥이 없는 통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단순하면서도 간
결한 분위기를 준다. 대들보에는 비룡상과 비천상이 그려져 있으며, 문 위쪽에는 화려한 색채의
그림들이 있으니 잘 살펴보도록 하자.
자방루 현판은 영조 시절 이조참판과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조명채(曹命采, 1700~1764)가 옥천
사에 들렸을 때 쓴 것이다.


▲  자방루 옆문에서 만난 사마귀의 위엄
흑자(黑子, 사마귀)공이 옥천사에는 어인 일로 행차했을까? 사마귀의 위엄 돋는
행차 앞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  옥천사 대웅전(大雄殿)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32호

자방루 옆구리를 지나면 대웅전이 바로 모습을 비춘다. 장대한 규모의 자방루와 드넓은 자방루
뜨락에 비해 대웅전 주변은 정말 협소하다. 뜨락 좌우로 적묵당과 탐진당이 꽉차게 들어앉아 있
어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 4동이 뜨락을 빈틈 없이 포위한 형태이다.

높은 기단 위에 높직히 들어앉아 법당(法堂)의 위엄을 드러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옥천사의 중심지이다. 1649년에 중창되었으며, 1677년 묘욱(妙旭)이 개
수하고 1736년 보수를 했으나 건물이 너무 낡아 1864년 용운대사가 새롭게 만들었다. 대웅전 현
판은 영조 시절 동국진체풍(東國眞體風)의 대가인 동화사(桐華寺) 기성대사(箕城大師)의 글씨라
고 전하며, 대웅전 계단 좌우에는 2쌍의 돌기둥인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서 있는데 이는 괘불이
나 깃발을 거는 용도로 조선 후기에 세워졌다. 기단을 이루고 있는 돌에는 푸른 이끼가 자욱히
끼어 중후한 멋을 선보인다.


▲  조선 영조 시절 기성대사가 쓴 대웅전 현판의 위엄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듯 활력이 넘쳐 보인다.

▲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3존불
온후한 표정의 석가불이 수려한 보관(寶冠)을 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하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  대웅전 외벽에 그려진 벽화 ▼
부처나 관음보살 이야기 대신 꽃과 화병, 채소, 붓 등이 그려져 있다.
무슨 사연이 깃들여진 것일까? 절의 주요 고객이던 사대부를 위한 그림일까?

▲  적묵당(寂默堂)
1764년에 세워진 'ㅁ'구조의 건물로 고참
승려들이 머물던 큰방이었다. 현재는 재를
올리거나 공부를  하는 공간으로 쓰이며,
2006년에 해체보수했다.

▲  탐진당(探眞堂)
1754년에 세워진 건물로 신참 승려들이 머물던
방이었다. 지금은 종무소 및 영가(靈駕)를
봉안한 공간으로 쓰인다.


♠  옥천사 둘러보기 (팔상전, 명부전, 조사전 주변)

▲  옥천사 팔상전(八相殿)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팔상전은 부처의 일생을 담은 8폭의 그림을 담은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
건물은 1890년(고종 27년)에 세워진 것으로 8상 탱화는 도난을 방지하고자 보장각에 따로 보관
하고 있으며, 탱화의 사진을 대신 걸어두었다.


▲  옥천사 명부전(冥府殿) - 경남 문화재자료 146호

대웅전 좌측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한 명부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730년에 지어졌으며, 1895년에 중수했다. 명부전 옆에
는 흙과 기와로 빚은 정겨운 옛 굴뚝이 나란히 자리하여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왕년을 그리워
한다.


▲  명부전 불단에는 포근하고 귀여운 인상의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시립(侍立)해 있다.

▲  옥천사 조사전(祖師殿)

경내에서 가장 뒤쪽에 자리한 조사전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절을 창건했다는 의상대사의 진영
(眞影)과 서응대사<瑞應大師, 채서응(蔡瑞應)>, 청담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  조사전 중앙을 장식하는 의상대사의
진영

           ◀  옥천사 나한전(羅漢殿)
대웅전 뒷통수에 자리한 나한전은 16나한(羅漢)
의 거처로 불단에는 정조 시절에 조성된 석가3
존불(석가불,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이 봉안되
어 있다.
나한전은 1895년에 지어진 것으로 16나한 가운
데 9상은 조선 후기 것이고, 7상은 근래에 나한
을 손질하면서 새롭게 붙여 넣었다. 이곳 나한
은 영험이 있다고 전한다.


▲  옥천사 칠성각(七星閣)

조사전 밑에 자리한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
다. 내부에는 1981년에 만든 칠성탱화가 걸려있다.


▲  조촐한 모습의 독성각(獨聖閣)과 산령각(山靈閣)

명부전 뒤에는 눈에 넣어도 적당할 정도로 조그만 모습의 독성각과 산령각이 나란히 자리해 있
다. 이들은 서로 생김새도 비슷하여 마치 쌍둥이 같다.
왼쪽에 자리한 독성각은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1897년에 지어졌으며, 사람 1명이
들어가 앉으면 그냥 꽉 차버린다. 우측 산령각은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역시 1897년에 세워
졌는데, 독성각보다도 작아서 사람이 아예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천상 밖에서 예를 올려야
된다. 두 건물 모두 120년 남짓의 건물이지만 너무 노후해 보여 300년 이상은 되어 보인다.


▲  시원하게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독성도(獨聖圖)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도(山神圖)


▲  옥천각(玉泉閣)

팔상전 뒤쪽에는 옥천각이란 조촐한 건물이 있는데, 바로 그 안 옥천사의 명물인 옥천(玉泉)이
담겨져 있다. 옥천은 물이 솟는 샘터로 절에서는 그를 위해 옥천각이란 수각(水閣)까지 씌웠는
데, 이 샘터는 옥천사 창건시절부터 있었다고 하며, 옥천사란 이름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창건 이후 물과 함께 일정량의 쌀이 흘러나와 그걸로 공양을 했다고 하며, 어느 욕심꾸러기 승
려가 더 많은 쌀을 취하고자 샘을 파헤쳤는데, 샘이 크게 노해 쌀은 커녕 물도 끊겼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승려가 지극정성으로 잘못했다고 기도를 올리며 샘을 달래니 샘도 화를 풀었는지
연꽃 1송이가 활짝 피어나면서 물이 콸콸 솟아나 만병통치의 약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성 지역에 이름난 약수로 왕년에는 샘물에서 목욕을 하는 중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
며, 지금은 목욕은 못하고 물만 떠 마실 수 있다.

산사에서 마시는 샘물은 맛이 다 고만고만하지만 부산 미륵사(彌勒寺)와 고성 옥천사의 물맛은
신선이 마시는 물처럼 뭔가 특별해 보인다. 물을 마셔보니 자연이 내린 특별한 양념이 담긴 듯
맛이 달콤하다. 물을 3번이나 떠 마시고, 가져온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 집에서도 두고두고 마
셨다.


▲  옥천사의 명물, 옥천(玉泉)
둥그렇게 파인 샘에서 연화산이 베푼 옥계수가 쉬지 않고 솟구친다.

▲  청담대사 승탑

▲  청담대사 사리탑비

경내에서 보장각으로 가는 길목에 옥천사에서 출가한 근대 불교의 1인자 청담대사의 승탑과 탑
비가 있다. 옥천사에서도 가장 특별한 존재라 경내에 그의 사후 공간을 만들어 두고두고 그를
기린다.
하얀 피부의 수려한 조각을 자랑하는 승탑에는 그의 사리가 담겨져 있으며, 그 옆에 청담의 일
대기를 담은 탑비가 있다. 입에 보주(寶珠)를 물고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린 귀부에 생동감이 넘
쳐 보인다.


♠  옥천사의 보물이 담긴 보장각(寶藏閣)

경내 북쪽에는 2층 규모의 보장각이 늠름한 모습을 뽐내며 자리해 있다. 보장각은 옥천사의 귀
한 보물을 간직한 꿀단지로 오래된 큰 절에 흔히 있는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이다. 옥천사 제
일의 보물인 청동금고(임자명반자)와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를 비롯하여 청동향로, 신중탱화, 대
종 등의 불화와 고문서, 불상, 여러 불기(佛器) 등 200여 점의 유물이 소중히 담겨져 있다. 이
중 법고(法鼓)와 시왕탱화 등 119점은 '옥천사소장품'이란 이름으로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99호
로 지정되었다.

보장각은 1999년 정부의 지원으로 세워졌으며, 입장료는 없다. (어차피 옥천사 입장료에 포함됨
) 매주 월요일은 문을 걸고 쉬지만 1층 정도는 상황에 따라 요령껏 관람이 가능하다. (2층은 문
이 잠김) 내가 갔을 때는 공교롭게도 박물관의 공통적인 휴일인 월요일이었다. 1층은 다행히 문
이 열려있어 구경은 했지만 2층은 불이 꺼져 있고 전시실 문도 굳게 잠겨져 들어가지도 못했다.
전시실은 사진 촬영이 통제되어 있으나 요령껏 1층 유물을 사진에 담아 보았다. 허나 태반이 흐
리거나 흔들리게 나와서 건질 만한 것은 거의 없다. 그나마 괜찮게 나온 것 일부만 간단히 소개
한다.


▲  1904년에 제작된 모연문(募緣文)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99호

▲  비변사절목(備邊司節目)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99호

▲  옥천사 청동금고(靑銅金鼓) - 보물 495호

옥천사 보장각 1층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임자명반자(壬子銘飯子)라 불리는 청동금고가 아닐까
싶다. 청동금고는 말그대로 청동으로 만든 쇠북으로 1252년(고려 고종 39년)에 제작된 고려 후
기 금고(쇠북)이다. 다른 말로 반자(飯子)라고도 하나 잘 쓰이지는 않는다. 표면지름 55cm, 측
면너비 14cm로 전면에 굵은 융기선(隆起線)으로 4줄의 동심원(同心圓)을 두르고 후면은 비웠다.

금고는 불교의식 때 사용하는 것으로 금고 측면에는 187자에 이르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
데, 첫머리에 '高麗二十三王 環甲之年 壬子四月十二日 在於京師工人家 中鑄成智異山 安養社之飯
子'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1252년 고려 황제인 고종(高宗)의 환갑을 기념하여 만들었음을 알
려준다. 만든 이후 지리산에 있던 안양사(安養社)에 두었는데, 그런 금고가 어찌 옥천사까지 흘
러들어 왔는지는 전하는 바가 없다.
금고 제작자인 공인별장(工人別將) 한중서(韓仲敍)는 내소사범종(來蘇寺梵鍾) 등 여러 점의 유
물을 남긴 인물로 고려 후기에 뛰어났던 장인으로 여겨진다. 귀족과 승려들이 발원한 내용이 기
록되어 있고, 안양사의 사(社)라는 이름에서 고려 말에 유행했던 신앙결사(信仰結社)의 한 형태
로 조성된 작품으로 보인다. 이제는 760년이 넘은 노구(老軀)로 현역에서 은퇴하여 이렇게 박물
관의 한 부분을 장식한다.


▲  옥천사 장대청안목책(將大廳案目冊) - 1857년 작

▲  다라니경목판 - 19세기 작

▲  옥천사 인장(印章)

 ◀  옥천사 향로(香爐)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9호

옥천사 향로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입 안쪽에는 점선으로 '
의령수도사(宜寧修道寺)'란 글씨가 있어 그곳에
서 왔음을 알려주며, 가경(嘉慶) 21년, 즉 1816
년(순조 16년)에 보수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때 향로 받침을 새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 향로는 무늬를 먼저 새긴 다음 은을 입히는
방법으로 문양을 새겼으며, 표충사(表忠寺) 은
입사 향로와 같은 수법을 보여주는 괜찮은 작품
이다.

보장각 1층을 둘러보고 2층으로 올랐다. 2층은 불이 꺼져 있고 전시실 문은 굳게 입을 봉했다.
문 옆에는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0호로 지정된 대종(大鐘)이 있으나 사진에 담지는 않고 괜히
2층까지 설치다가 무슨 소리를 들을 듯 싶어서 꼬랑지를 내리고 바로 철수했다. 대종은 1701년
에 조성된 것이다.

◀  옥천사에서 누린 차1잔의 여유

옥천사를 살피고 가까운 곳에 있는 청련암(靑蓮庵)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핸드폰이 밥기
운이 다되었다며 졸도를 해버렸다. 실신한 핸드폰을 계속 흔들어 깨웠으나 깨기가 무섭게 실신
을 한다. 그래서 청련암종무소에 도움을 청했으나 아무도 없어서 서둘러 옥천사로 내려와 그곳
종무소에 부탁을 넣었지만 충전기가 없다고 그런다. 요즘 무척 잉여로운 몸이라 연락올 때도 거
의 없지만 요즘 세상에 핸드폰이 없으면 그것만큼 허전한 것이 없다.
이거 어찌해야 되나 궁리하다가 문득 보장각 지하층(말이 지하지 지상임)에 있는 찻집을 생각하
고 거기로 갔다. 찻집에는 주인 아줌마와 그의 귀여운 어린 딸이 있었는데, 주인 아지매에게 충
전을 부탁하니 마침 충전기가 있어서 해주겠다고 그런다. 그래서 고마움을 표하고 충전이 되는
(20분 정도) 동안 찻집에서 두 발을 쉬었다. 그런데 그냥 앉아 있으려니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장 저렴한 2,000원짜리 차 1잔을 주문했다. (그때 마신 차 이름은 기억이 안남) 여태까지 찻
집에서 나홀로 차를 마신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 홀로 차 1잔의 여유를 즐기게 된 것이다. 

차(茶)를 주문하니 잠시 뒤 잣이 띄워진 차와 에이스 과자가 담긴 그릇이 앞에 차려진다. 차의
향을 음미하며 산주름에 묻힌 산사에서 오랜만에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린다. 차에는 떡이
찰떡궁합이지만 떡 대신 과자가 나왔으니 다소 조화가 떨어진다. 에이스 과자에는 딱 커피가 어
울리는데 말이다. 에이스는 옛날에 많이 먹었던 과자라 감회가 새롭다.

과자를 먹으며 차를 마시는 동안 30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누구와 같이 왔으면 2시간도 있을
수 있지만 홀로니 더 머물러 있기도 그렇다. 게다가 주인 아줌마는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시간은 17시) 하여 자리를 정리하여 차 계산을 하며, 핸드폰 충전에 고마움을 표하고 밖
으로 나온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될까? 어디긴 내가 있어야 될 아비규환의 속세지~~ 다시 지루한 일상으로 돌
아가야 된다는 생각에 잠시 눈앞에 어둠이 내린다. 허나 안갈 수는 없다. 그게 내 운명인 것을..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하며 늦가을 옥천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닫는다. 다음에 다시 인연
이 된다면 이때 못본 보장각 2층도 살펴보고 청련암 보리수(菩提樹)와 백련암, 연화산 정상까지
말끔히 둘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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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11월 1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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