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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0.11.03 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논산 불명산 쌍계사 (송불암 미륵불)
  3. 2020.06.01 북한산둘레길3구간 흰구름길~삼성암 늦봄 나들이 (빨래골에서 구름전망대, 화계사까지) 2
  4. 2019.08.25 연꽃의 달달한 향연 속으로 ~ 서울연꽃축제의 성지,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5. 2016.08.12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서울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문화대축제)
  6. 2015.10.15 주인을 구하고 숨진 의로운 개의 넋이 서린, 임실 오수 의견비 (오수리석불, 해월암)
  7. 2014.12.07 관봉 정상에 우뚝 자리한 거대한 석불,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

한강변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두뭇개승방이라 불렸던 옥수동 미타사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옥수동 미타사
~~~~~

▲  미타사 느티나무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비
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들 이상만큼 그날을 즐기고 산 지도 어느덧 10여 년, 초파
일에 대한 설레감은 다른 날보다 높아 며칠 전부터 초파일 코스를 짜느라 부산하다.
그날만큼은 굳이 멀리 나가지 않고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품은 현대 사
찰(20세기 이후)을 대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이제는 서울에서 미답(未踏) 절이 거의
고갈 상태에 이르렀다. 다행히 이때를 대비하여 남겨두었던 미답의 고찰(古刹)이 여럿
있는데, 그중 2개를 이번에 꺼냈다. (나머지는 이후에 모두 꺼냈음)

드디어 초파일 오전 10시, 도봉동 집을 나서 제일 먼저 불암산 학도암(鶴到庵)을 찾았
다. 학도암은 여러 번 인연이 있던 절로 그곳에 깃든 조선 후기 문화유산을 간만에 친
견하고 점심공양에 후식(수박, 떡, 커피)까지 두둑히 챙겨 먹으며 학도암의 후한 초파
일 인심을 체험했다.
13시 정도에 보문동(普門洞) 미타사로 자리를 옮겨 그곳의 문화유산을 모두 사진에 담
고 공양간에서 공양까지 하였다. 이곳 초파일 인심도 학도암에 못지 않았는데, 초파일
절투어에서 먹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은 없다
그렇게 미타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벌써 16시를 가르킨다. 왜 이렇게 초파일 해는 짧을
까? 퇴근 본능에 너무 충실한 햇님을 원망하며 지하철을 타고 부랴부랴 옥수동 미타사
로 넘어갔다. 이곳은 3호선과 경의중앙선(문산↔용문,지평)이 만나는 옥수역 북쪽으로
바로 한강 변이다. 학창 시절에 옥수동 북쪽 금호동(金湖洞)에 잠시 서식한 적이 있었
고, 옥수동도 적지 않게 들락거렸지만 그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불과 몇 년 전에 일이
다. 그만큼 등잔 밑이 매우 어두웠다.


▲  초파일의 향연 속으로 ~~~ 미타사 정문을 들어서다.


 

♠  1지붕 9가족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비구니 절집
옥수동 미타사(玉水洞 彌陀寺)

▲  청기와를 눌러쓴 천불전(千佛殿)

미타사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미타유치원과 주차장이 마중을 한다. 미타사는 아직 그 흔한 일
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했는데, 노란 피부의 유치원 버스들이 옹기종기 모인 주차장을 지나
면 미타사의 법당(法堂)인 천불전이 우람한 모습을 비춘다.

천불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큰 집이다. 1988년 9월에 지
어진 미타사의 야심작으로 머리에는 푸른 빛을 도도하게 드러낸 청기와가 듬뿍 입혀져 건물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으며, 불단(佛壇)에는 장대한 모습의 석가여래상을 위시해 조그만 금동불
1,000상이 금빛 물결을 일으키며 두 눈을 부시게 만든다.


▲  화려함이 가득 묻어난 붉은 닫집과 천불전 석가여래상의 위엄

▲  미타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4-6, 4-7호

천불전 북쪽에는 천불전보다 더 장대한 모습의 느티나무 2그루가 천불전과 관음암에 짙게 그
늘을 드리우고 있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자라난 그들은 1982년 10월 20일
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때 추정 나이가 약 200년이라고 하니 그새 40년이 더해
져 240년 정도 된다. 경내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미타사 승려가 심은 것으로 여겨지며, 서로
나이도 비슷하고 생김새 또한 거의 비슷한데, 이들의 높이는 20m, 나무둘레는 320cm, 325cm이
며, 경내에서 2번째로 오래된 존재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미타사의 내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  미타사 용운암(龍雲庵)

옥수역 북쪽에 자리한 미타사는 앞에는 한강이 흐르고 뒤에는 산이 감싸고 도는 전형적인 배
산임수(背山臨水) 자리이다. 미타사는 그 뒷산을 종남산(終南山)이라 칭하고 있는데 원래 이
름은 금호산(金湖山, 응봉)이며, 경내 동쪽에는 달맞이봉이 있다. 지금은 강변도로와 중앙선
철도로 인해 한강과 조금 떨어지긴 하였으나 예전에는 바로 앞이 한강이었다.

옥수동 미타사는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로 888년에 비구니 대원(大願)이 매주골(금호동
)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은 없는 실정이며, 1115년 봉적(奉寂)
과 만보(萬寶) 두 비구니가 종남산 남쪽, 즉 현재의 위치로 옮겨 극락전을 세워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내세웠다. 이때 미타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하니 어쩌면 그 시절에 창건된 것이 아닐
까 여겨진다. 또한 창건주와 1115년 중건 승려 모두 비구니라 시작부터 비구니 절이었음을 알
려준다.

조선 때는 서울 근교 4개 승방(비구니 절)의 하나로 꼽혔는데, 두모포(豆毛浦)에 있다고 하여
두뭇개승방이라 불렸다. (두모포는 동호대교 북단에 있던 포구임)
1827년 환신(幻信)이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세웠으며, 1862년에는 인허(印虛)가 조대비<趙大
妃. 신정왕후(神貞王后)>와 조진관(趙鎭寬, 1739~1808)의 시주를 받아 극락전을 중창하고 요
사를 수리했다고 한다. 허나 그 시절 조진관은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1808년에 죽었기
때문) 하여 아마도 그의 후손이 시주를 하거나 기록의 오류인 듯 싶다.
1873년에는 성흔(性欣)이 법당과 요사를 중수했으며, 1928년에 선담(仙曇)이 7층석탑을 세웠
다. 그리고 1933년에 돈형과 이경화가 산신각을 중수하고 안성훈이 무량수전을 수리했다.

한참 잘나갔던 시절에는 9동 66칸이 있었다고 하나, 20세기 중반 이후 극락전 주변을 제외하
고 여러 암자로 쪼개졌다. 하여 용운암과 금수암(金水庵), 칠성암(七星庵, 칠성각), 토굴암(
土窟庵), 금보암(金寶庵), 관음암(觀音庵), 대승암(大乘庵), 정수암(淨水庵) 등 8개의 암자가
미타사의 상당수를 이루고 있으며, 미타사 본진을 포함하여 1지붕 9가족의 독특한 모습을 지
니게 되었다.
이들은 각자 법당과 생활공간을 갖추고 있으며, 암자를 포함해 건물은 20여 동 정도로 기와집
과 현대식 주택이 두루 섞여있는데, 극락전이 여기서 가장 늙은 집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2017년 10월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
유형문화재 417호
)이 있는데, 이 땅에 딱 2개 밖에 없는 윤왕좌(輪王坐) 보살상으로 고려 말
이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오랫동안 숨바꼭질을 벌여 아는 이가 거의 없었으나
2016년 초에 대한불교조계종이 전통사찰 전수조사를 벌이면서 비로소 발견되었다.
그가 순수 미타사 토박이인지 중간에 다른 곳에서 넘어왔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1862년에 개금을 했고 그 사실을 비구 영선(永善)이 증명한다는 발원문(發願文)이 있어 19세
기 중반부터 미타사에 있던 것은 확실하며, 현재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다. (금동관음보
살좌상은 친견하기 매우 어려움)
그 외에 19세기 말에 조성된 탱화가 적지 않게 전하고 있는데, 1883년에 제작된 칠성탱이 가
장 늙었으며(금수암에 있음), 1887년에 학허(鶴虛)가 그린 아미타후불탱, 현왕탱, 감로탱, 신
중탱, 지장탱, 1900년에 보암(寶庵)이 그린 신중탱과 아미타후불탱이 있다. 20세기 초에 그려
진 탱화가 더 있으며, 극락전과 금수암, 칠성암, 대승암에 흩어져 있어 알아서 숨바꼭질을 벌
여야 된다. (극락전에 많이 들어있음) 그리고 경내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한 대승암에는 1884
년에 제작된 희귀한 형태의 관음탱이 있으며, 앞서 천불전 앞에 24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전하고 있다.

지금은 실감이 덜하겠지만 옛날에는 절 앞에 한강물이 넝실거리던 두모포가 있고, 절 옆구리
와 뒤쪽에는 금호산과 달맞이봉의 푸른 산줄기와 바위가 펼쳐진 기가 막힌 경승지였다. 이승
만 전 대통령이 자주 찾았던 곳이기도 하며, 도심과 매우 가까운 탓에 개발의 칼질이 절 주변
에 가해지면서 그 착했던 풍경은 이제 전설 속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하철3호선과 동호대교가 육중한 덩치를 내밀며 절의 서쪽 시야를 완전히 앗아갔고, 그로 인
해 절은 다리 그늘에 들어앉은 처지가 되었다. 또한 옥수현대아파트가 경내 동쪽에 주렁주렁
뿌리를 내려 경내를 굽어보면서 동호대교와 아파트 사이에 끼어있는 도시에 완전히 갇힌 고적
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절 주변에는 아직 숲과 형제바위 등의 자연산 바위가 조금은
남아있어 산사(山寺)의 기운은 조금이나마 뿜고는 있다.

▲  연등을 두룬 용운암 대웅전(大雄殿)

▲  미타사 극락전과 종무소 바깥 모습


▲  미타사 극락전(極樂殿)

극락전은 미타사의 중심 공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천불전과 함께 법
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종무소(宗務所)와 독성전, 요사를 주변에 갖추고 있으며 1862
년에 중창된 이후 여러 번 수리를 거쳤다.
극락전 안에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제작된 탱화가 여럿 깃들여져 있어 고색의 기운을
더하고 있으며, 건물 앞에는 1928년에 선담이 세운 7층석탑이 날렵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는데,
왜정(倭政) 때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건물을 받치고 있는 석축 기
단(基壇)에는 검은 때가 적지 않아 100년 이상 묵었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  극락전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극락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그는 서방정토가 있다
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그의 거처 또한 서쪽을 향하고 있다.
금동 피부를 지닌 아미타불은 현란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
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고 있는데, 그들 뒤로 고색이 다소 깃든 아미타후
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다. 이 후불탱은 1887년에 학허가 그렸다.


▲  극락전 우측에 걸린 현왕탱(賢王幀, 왼쪽 탱화 / 1887년에 '학허'가 그림)

▲  극락전 좌측을 장식하고 있는 지장탱(왼쪽)과 신중탱(오른쪽)
이들 그림은 아미타후불탱과 마찬가지로 1887년에 학허가 그렸다.

▲  극락전 옆구리에 자리한 독성전(獨聖殿)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의 보금자리로 달랑
1칸에 불과한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독성탱과 산신탱이 담겨져 있어
산신각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근래 조성된 독성탱과 독성상
독성상이 유리막에 꽁꽁 감싸인 탓에 독성상은
안나오고 내 모습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런 민망할 때가...ㅠㅠ

▲  산신 가족이 담겨진 산신탱
흰 수염에 붉은 옷을 입은 산신 할배가
호랑이와 동자를 대동하며 단란한
모습을 보여준다.


▲  곱게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그리고 짜릿한 돈맛을 원하는 깨알같은 보시함


극락전 앞에는 초파일 행사의 백미(白眉)인 관불(관정)의식의 현장이 닦여져 있었다. 초파일
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금빛 피부의 아기부처가 즐거움에 잠긴 얼굴로 오른손을
치켜들며 서 있고 그 주위를 꽃으로 치장해 조촐하게 꽃동산으로 꾸몄다. 사람들은 항아리에
마련된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를 살짝 냉수마찰을 시키며 나름의 소망을 들이밀고 그
앞에는 보시함이 깨알처럼 자리해 초파일 특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러니 재주는 아기
부처가 부리고 돈은 절이 가져가는 것이다.


▲  미타사의 빛바랜 일기장, 1930년 중수기(重修記)
1930년(불기 2957년)에 미타사를 중수하면서 작성된 중수기이다. 중수한 사연과
중수에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돈을 낸 이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  미타사 나머지 부분 (대승암)

▲  느티나무 옆에 자리한 현대 주택 스타일의 관음암

미타사의 구조는 대략 이렇다. 정문을 들어서면 천불전이 나오고, 그 맞은편에 용운암과 극락
전이 별도의 담과 집을 두르고 있다. 천불전을 지나면 동네 골목길 같은 길이 펼쳐지고 그 좌
우로 양옥과 기와집이 늘어서 있는데, 관음전을 시작으로 금보암, 칠성암 등이 차례대로 문을
열고 있으며, 그 길의 끝에 대승암이 위치한다.


▲  관음암에 펼쳐진 관불의식의 현장
통통한 아기부처가 떨어지는 햇님을 원망하며 관불의식을 애타게 원하고 있다.

▲  금보암
미타사에서 가장 늙은 보물인 윤왕좌 금동관음보살좌상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를 보고자 금보암 법당을 기웃거리며 새가슴마냥 슬쩍슬쩍 살펴봤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

▲  대승암 (오른쪽 건물은 칠성암)

미타사 골목 끝에는 대승암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막다른 곳으
로 2층 주택과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무량수전을 갖추고 있는데, 발길을 돌릴까 하다가 이곳은
분위기가 어떤가 궁금하여 한번 들어가 보았다.
무량수전 주변을 대충 둘러보고 '별거 없구나~!' 싶어 나가려고 하니 갑자기 주택에서 나이가
지긋한 노(老) 비구니가 나와 구경 잘했냐며 말을 건넨다. 하여 그렇다고 답을 하니 자연히
서로 말이 이어져 이야기꽃이 주렁주렁 피어날 분위기였다. 그래서 초파일 행사를 위해 무량
수전 뜨락에 깔아놓은 의자에 앉아서 일종의 선문답(禪問答)을 하게 되었다.

그는 70대 중반의 비구니로 원래 천주교였다가 20대에 출가를 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법명(
法名)을 묻지 못했음> 금보암의 어른 승려로 미타사와 대승암, 미타사에 깃든 오래된 탱화들,
그리고 불교 관련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기에 여러 법문까지 겯들여서 말이다. 대화 내
용은 벌써부터 퇴화된 머리의 한계상 1/3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궁금한 것을 마구 쏟아
내었고, 그는 그런데로 그것을 잘 담아주었다.
마침 목이 말라서 물을 청하니 그는 '허허허~! 우리 절 거덜내러 왔어여?' 웃으면서 생수 1병
을 공양간 냉장고에서 꺼내주었다. 그리고는 방금 맞춘 거라며 절편이 두둑히 담긴 비닐 1봉
지와 음료수 1병까지 건네주었다. 미타사는 16시 끝 무렵에 도착한 탓에 초파일 인심을 확인
하기 어려웠는데 이렇게 금보암에서 그런데로 괜찮은 인심을 받았다.


▲  대승암 무량수전 앞에 차려진 관불의식의 현장
앞서 극락전, 관음전과 달리 코끼리 등 위에 아기부처의 자리를 마련했다.


금보암은 경내 구석에 위치해 있고 시간도 17시 이후라 그곳까지 들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
다. 대부분 천불전이나 관음암 정도에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물론 초파일 아침부터 오후 3~4
시까지는 그런데로 사람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저녁이 코 앞이니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
도 따분하여 하품을 쏟아낸다.

비구니와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벌써 17시 40분이다. 초파일이 저물어감을 매우 아쉬워
하며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은 이제 어찌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 내일부터 인부를 고용해 모
조리 철거한다고 하며, 이들 연등은 절 창고에 나누어 보관한다고 한다.
그렇게 선문답을 마치고 무량수전 내부를 잠깐 둘러봐도 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안에 찍을
것들이 많다며 다 찍고 가라고 그런다.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승암 무량수전

▲  화려한 모습의 무량수전 닫집과 풍만하고 후박하게 생긴 아미타불

무량수전 내부는 노비구니가 이른 데로 정말 볼거리가 많았다. 붉은 지붕의 닫집은 내원궁(內
院宮) 현판을 내밀고 있고, 그 밑에 얼굴 살이 많고 목이 두꺼운 아미타불이 후덕한 표정으로
불단에 앉아 있다.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색채감 넘치는 아미타후불탱이 마치 칼라TV에 나온
만화와 같은 모습으로 생생히 자리해 있고, 불단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온갖 과일들로 불단이
무너질 지경이다.
닫집 지붕 앞에는 극락조(極樂鳥)로 여겨지는 새와 천녀(天女)가 날개를 펄럭이고 있고, 꽃을
비롯한 온갖 무늬들이 그려진 우물천정이 곱게 무량수전의 하늘을 수놓고 있다. 이들 모두 근
래 조성된 것들이라 다들 맨들맨들한데, 여기서 불단 우측 벽과 좌측 벽을 꼭 살펴보자. 그러
면 대승암의 오래된 탱화 2점이 시야에 흔쾌히 아른거릴 것이다.


▲  대승암 관음탱
관세음보살은 그림의 주인공답게 푸른 두광(頭光)과 노란색 신광(身光)을
갖추고 있고, 관세음보살을 향하고 있는 양쪽 협시들은 푸른 두광만을
갖추고 있다.
 

불단 좌측 벽에는 관음탱이 걸려있다. 백의(白衣)를 입은 관세음보살 누님을 중심으로 지장보
살<또는 선재동자(善財童子)>과 용왕으로 보이는 존재를 좌우에 두었다. 이 탱화는 고맙게도
밑에 붉은 화기(畵記)를 두어 조성시기를 알려주고 있는데, 광서(光緖) 10년(1884년) 9월, 북
한산(삼각산) 내원암에서 조성하여 수월도량공화불사(水月道場空花佛事)에 점안봉안하고 종남
산 미타사로 옮겼다. (이후 내용은 너무 흐리게 나와서 내용 파악이 불가함)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에 관세음보살의 협시(夾侍)로 나타나는 선재동자(또는 지장보살)와
용왕을 3존도 구도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19세기에 잠깐 나타나는 이 땅에 흔치 않은 구도
의 관음탱으로 지방문화재 자격이 충분하다. 하여 비구니에게 이를 이야기하니 문화재 지정도
좋으나 대신 관리가 더 까다로워진다며 아직은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 없다고 한다.
요즘 서울의 많은 절에서 19세기는 물론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화, 불상까지도 앞다투어 지
방문화재 신청을 하고 있는 추세인데, 미타사는 그런 것에는 딱히 관심은 없는 모양이다.


▲  대승암 칠성탱

불단 우측 벽에는 8폭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칠성탱이 있다.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앞
서 관음탱처럼 아주 특이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쪽 중앙에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와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싹 몰아넣은 치성광삼존도가 있고, 나머지 7폭에
는 칠성원군(七星元君, 북두칠성)을 하나씩 담았다. 지금까지 많은 칠성탱(칠성도)를 만났지
만 이렇게 생긴 것은 처음 본다.

이렇게 무량수전 내부를 살피니 벌써 18시가 되었다. 그 비구니는 법회(法會) 때 입는 복장을
갖추고 저녁예불을 위해 무량수전으로 들어왔는데, 저녁예불을 구경하고 가라고 그런다. 그래
서 잠시 예불에 참관했다가 슬쩍 그곳을 나왔다. 나중에 다시 인연이 되면 그때 여러 좋은 법
문을 청해볼 생각이다.


▲  칠성암(칠성각)

대승암을 나와 그 밑에 있는 칠성암도 잠시 들렸다. 칠성암 법당에서도 한참 저녁예불이 이루
어지고 있었는데, 대승암과 달리 아줌마 신도들이 제법 자리를 채웠다.

칠성암에는 1899년에 제작된 현왕탱과 신중탱이 있으나 친견은 하지 못했으며, 형제바위와 접
한 곳에는 산신각을 두었다. 형제바위는 넓직한 바위로 예로부터 치성 및 기도처로 널리 쓰였
다.


▲  호화로운 칠성암 법당 내부
법당 닫집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현판이 걸려있고, 닫집을 받치는 기둥에는
금색이 칠해져 있어 호화로움의 격을 제대로 높여준다.


칠성암을 끝으로 미타사 관람을 흔쾌히 마무리를 지었다. 미타사 본진을 비롯하여 용운암, 관
음암, 금보암, 대승암, 칠성암 등 5개의 암자만 살펴보았고, 나머지 토굴암과 정수암, 금수암
은 모두 통과했다. 그들은 딱히 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보암의 희귀한 보살상을 친견하지
못해 매우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기대도 별로 하지 않았다. 아직은 그를 볼 인연이 아니기 때
문이다. 그래도 별로 기대하지도 않고 들렸던 대승암에서 뜻밖에 좋은 경험을 했으니 미타사
와의 첫 인연은 그런데로 괜찮았다.

이렇게 하여 옥수동 미타사 초파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래도 그날 목적한 곳을
모두 가보았고, 그곳에 깃든 문화유산과 초파일 인심까지 마음껏 누렸으니 비록 해가 짧아 아
쉽긴 하지만 미련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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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논산 불명산 쌍계사 (송불암 미륵불)

 


' 여름맞이 산사 나들이 ~ 논산 쌍계사, 송불암 '

▲  쌍계사 대웅전

▲  쌍계사의 자랑, 대웅전 꽃창살

▲  송불암 미륵불


 

여름이 봄을 몰아내고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의 첫 무렵, 오랜만에 충남 논산(論山)을
찾았다.
논산으로 멀리 발걸음을 한 것은 그곳 쌍계사의 꽃창살이 그렇게나 아름답고 유명하다 하
여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자 함이다. 그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겠지?
다행히 쌍계사입구까지는 시내버스가 1일 10여 회 오가고 있어 접근편도 벽지치고 양호하
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영등포역에서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담아 논산역으로 보냈다.
논산까지는 3시간 정도가 걸렸는데, 버스 시간에 아직 여유가 있어 논산역 동쪽에 자리한
논산시내버스 종점(덕성여객)으로 이동해 차를 기다렸다. 논산시내버스는 일부 외곽 지선
을 제외하고 모두 여기서 출발한다. 
 
세월이 무지 빠르다고 하는데 정작 무엇을 기다리는 시간은 반대로 느린 것 같다. 잡생각
을 머리 속에 마구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억지로 시간을 죽이니 어느덧 출발시간이다.
그래서 타는 곳으로 나가니 쌍계사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405번(논산역↔임화리)이 다가와
활짝 입을 벌린다.
그 버스를 잡아타고 논산시내를 가로질러 은진미륵(恩津彌勒)으로 유명한 관촉사(灌燭寺),
사육신(死六臣)의 하나인 성삼문(成三問)묘소<이곳에는 그의 다리 한쪽이 묻혀있다고 함>
를 지나 쌍계사입구인 중산리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부터 쌍계사까지 잘 닦여진 2차
선 도로(중산길)를 따라 30분 정도 걸어 들어가야 된다.


▲  중산리에서 쌍계사로 인도하는 중산길


 

♠  쌍계사(雙磎寺) 입문

▲  강병흠과 평택임씨 정려비(旌閭碑)

중산리에서 쌍계사로 가는 길은 인적도 거의 없는 고적한 길이다. 집도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
낼 뿐, 거의 산과 밭으로 이루어진 자연 지대로 살며시 스쳐가는 산바람 소리, 가끔씩 지나가
는 차량 소리가 이곳 소리의 전부이다. 그런 길을 혼자 유유자적 거니니 마치 그 길을 통째로
전세를 낸 듯한 즐거운 기분이 가득 들고 걷는 길도 그리 지루하지가 않다.

그런 길을 약 1km 정도 가면 길 왼쪽에 돌로 만든 특이한 비각(碑閣)과 그 안에 담긴 매끈한
피부의 비석이 잠깐 나좀 보고 가라며 하소연을 한다. 하여 잠시 길을 멈추고 살펴보니 강병
흠(姜抦欽)과 평택임씨(平澤林氏) 부부의 정려비이다.

비석의 주인공인 강병흠은 진주강씨로 구한말과 20세기 초반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첨지중
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를 지냈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대단하기로 명성이 높았다. 어느
한겨울에 부모가 잉어를 먹고 싶다고 투정을 부리자 저수지의 두꺼운 얼음을 깨서 잉어를 잡
은 적이 있으며, 아버지가 병으로 드러눕자 밤낮으로 약을 달이며 병간호를 했는데, 꿈속에서
친할머니가 나타나 아버지의 병에는 산삼이 최고라며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하여 다음날 그
곳에 가보니 정말 산삼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몇 년 뒤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였으며, 결국 그가 사
망하자 무려 6년씩이나 시묘살이를 했는데, 불효에 대한 자책감으로 옷자락에 항상 돌을 담고
다녔다. 하여 사람들은 그를 포석효자(包石孝子)라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강병흠의 부인인 평택임씨도 대단한 열녀(烈女)라 시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했고, 남편이 죽자
자결을 했다. 그래서 그들 부부의 효행과 열행(烈行)
을 기리고자 1922년에 정려비를 세웠다.

처음에는 1칸짜리 기와 정려각을 씌웠으나 건물이 낡자 1993년에 지금의 석조물을 세우고 내
부에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김용제(金容濟)가 짓고, 이종성(李鍾聲)이 글씨를 썼으며, 비문
에는 '孝子僉知中樞府事 姜抦欽 閭配, 烈女 淑夫人 平澤林氏之閭(효자 첨지중추부사 강병흠
정려, 열녀 숙부인 평택임씨지여)'라 쓰여 있다.

           ◀  열녀 해주오씨 비석
강병흠 부부의 정려비에서 잠깐 옷깃을 여미고
다시 길을 재촉하면 얼마 안가 고색의 때를 절
반 정도 탄 해주오씨 열녀비가 모습을 비춘다.
비석 주인공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비
석의 상태로 보아 19세기 인물로 여겨지며, 앞
서 평택임씨 못지 않은 열녀였던 모양이다.

           ◀  영명각(靈明閣) 입구
쌍계사 주차장을 지나 3분 정도 오르면 늘씬한
숲길과 함께 영명각을 알리는 표석이 마중한다.
영명각은 1975년에 농업진흥공사가 금강(錦江)
유역 300핵타르의 개답(開畓) 공사를 벌이면서
무연고 무덤 유골 3,000기를 수습해 봉안한 납
골당이다.
이후 건물을 확장하여 논산시민의 납골당(논산
시 공설봉안당)으로 바쁘게 살고 있다.


▲  쌍계사 밑에 자리한 그림 같은 호수, 절골소류지(沼溜地)

영명각입구 맞은편에는 너른 호수인 절골소류지가 있다. 작봉산(불명산)이 베푼 청정한 물이
쌍계사를 끼고 졸졸졸~♪ 흐르다가 이곳에 모여 대장정을 준비하는데, 삼삼한 숲에 둘러싸인
소류지의 자태는 정말 아름답기 그지 없다.


▲  영명각 입구에서 쌍계사로 인도하는 숲길
하늘을 가릴 정도로 무성한 숲, 그 숲이 베푸는 숲내음과 그늘, 거기에 옆에
붙은 소류지까지, 이곳만큼은 여름 제국도 눈치를 보며 비켜간다.

▲  쌍계사 부도(浮屠)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80호

길을 거닐다보면 왼쪽 언덕에 옹기종기 모인 부도(승탑)의 무리를 만나게 된다. 부도는 모
두 9기로 원래는 절 주변에 흩어져 있었는데, 20세기 후반에 이곳으로 모두 집합시켰다.
고색의 내음을 깊게 내뿜고 있는 그들은 석종형(石鐘形) 6기, 옥개석(屋蓋石)을 갖춘 탑 3기
로 이루어져 있다. 석종형은 높이 150cm 내외로 4각 또는 6각의 바닥돌을 깔고 그 위의 기단
(基壇)과 석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바닥돌과 기단에는 연꽃무늬 장식을 새겨 맨돌
의 식상함을 덜어준다.
옥개석 부도는 높이 130cm 내외로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대좌를 받치는 바닥돌은 4
각 또는 6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중/하대로 구분된 기단부(基壇部)에는 연꽃무늬 연주문과
화문(花紋)이 새겨져 있고, 탑 꼭대기에는 구슬 장식이
얹혀져 있다.

이들 부도 중 2기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翠峰堂 慧燦大師之屠(취봉당 혜천대사 부도)','梅
憲~~之塔(매현 ~~의 탑)' 정도의 글씨만 확인이 가능하다. 나머지 글씨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크게 흐트러져 알 수가 없으며, 부도의 조성시기는 조선 중~후기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쌍계사 부도

▲  쌍계사 중건비(重建碑)

부도의 보금자리 한쪽에는 중건비라 불리는 비석이 미운 오리새끼 마냥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는 1739년에 쌍계사를 중수하면서 세운 것으로 높이 156cm, 너비 78cm이며, 땅바닥에 자연석
을 깔아 비석을 세울 수 있도록 홈을 파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운 다음에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이다.
쌍계사의 내력을 머금은 절의 일기장으로 비석 앞면에 절의 내력을, 뒷면에는 시주자의 이름
이 새겨져 있으며, 김낙증(金樂曾)이 찬(撰)을 하고, 이화중(李華重)이 글씨를, 김낙조(金樂
祖)가 글을 새겼다.


▲  쌍계사 봉황루(鳳凰樓)

숲길을 지나면 주차장과 봉황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숲에 감싸인 주차장 좌우로 2개의 조그만
계곡이 소류지로 흘러가고 있는데, 바로 여기서 쌍계사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즉 2개의 계곡
이 만나는 절이란 뜻이다.

주차장을 굽어보는 봉황루는 쌍계사의 정문이다. 이곳은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아직 장만
하지 못해서 소류지 숲길이 그 역할을 대신하며 속세(俗世)와 절의 경계를 가르고 있는데, 제
아무리 천하의 독종, 번뇌라 한들 삼삼한 숲과 소류지의 경계를 뚫고 절까지 침투하기는 힘들
것이다. 허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 또한 번뇌라 아무리 던져본들 그 자리를 맴돌아 결국
소류지 밑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이 절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봉황루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누각이다. 정문 외에 조
촐하게 강당(講堂) 역할까지 하고 있는데, 근래 손질을 했는지 딱히 고색의 내음이 느껴지지
않는다. 1층에는 경내로 인도하는 돌계단을 늘어뜨렸으며 그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마치 해
가 떠오르듯 솟아오른다.
2층에는 북과 '쌍계사 봉황루 등루부운(登樓賦韻)'이란 시가 적힌 현판이 있는데, 이 시는 5
언율시(五言律詩)로 어느 노승(老僧)이 1779년에 이곳을 찾아 지은 것이다. 이를 통해 적어도
18세기에는 봉황루가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그럼 여기서 잠시 쌍계사의 내력을 짚어보도
록 하자.


▲  봉황루의 뒷모습
봉황루 등루부운(登樓賦韻) - 1779년 어느 노승이 지음

고루에 나홀로 누워                  高樓我獨臥
마음은 하늘을 찾아 날아오르네       心適上飛天
산봉우리들 사이에 흰 구름이 머물고  衆峀雲留白
여러 시내에 달 그림자 비치네        群溪月影輝
석등은 불실을 밝게 비추고           夕燈明佛室
아침 비는 선문을 어둡게 하네        朝雨暗仙扉
날마다 금모래 연못을 감상하니       日賞金沙池
몸은 세속으로 돌아감을 잊네         身忘俗諦歸

▲  봉황루 2층에 있는 태극마크 북

▲  경내 북쪽 석축 위에 닦여진 돌탑들

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논산 쌍계사는 작봉산(鵲峰山, 419m) 북쪽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동/서/남이 모두 작봉산 산줄기
에 막혀있고, 오로지 북쪽만 뚫려있기 때문이다.
쌍계사를 품은 산의 이름은 '작봉산'으로 '불명산(佛明山)'이란 이름까지 지니고 있는데, 이
는 산의 옛 이름이 불명산이기 때문이다. 하여 쌍계사는 절에 어울리게 '불명산 쌍계사'를 칭
하고 있다.

쌍계사는 10세기 후반에 이곳에서 가까운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세운 혜명대사(慧命大師)가 창
건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믿을 바가 못되며, 창건자와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
중(五里霧中)을 헤매고 있다. 다만 고려 후기 서화가였던 행촌 이암(杏村 李嵒, 1297~1364)이
발원하여 중건했다는 내용이 중건비에 적혀있어 이때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 끝 무렵에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절의 연기(緣起)를 썼다고 전하며, 초창기 절 이름
은 백암사(白庵寺) 또는 백암(白庵)이었다.

왕년에는 500~600여 칸의 건물이 있을 정도로 호서(湖西) 제일의 대가람(大伽藍)을 자랑했는
데, 극락전을 비롯해 선원(禪院), 관음전, 동당(東堂), 서당(西堂), 명월당, 백설당, 장경각
등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허나 그렇게 잘나갔던 쌍계사는 조선시대를 거치면
서 크게 야위어 갔고, 여러 번의 화재로 1716년에 대웅전 등을 중창했으나 1736년 다시 화재
가 찾아와 1739년에 중건을 하고 중건비를 세웠다.
조선 후기와 왜정(倭政) 때는 그런데로 절을 유지했으며, 6.25 시절에는 다행히 총탄이 비켜
가 별 피해는 없었다. 이후 별다른 큰 불사(佛事) 없이 지금에 이른다.

절은 지형을 이용해 넓게 터를 다졌는데, 북쪽과 서쪽, 동쪽에 석축과 돌담을 쌓고, 북쪽 가
운데에 봉황루를 내어 정문으로 삼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봉황루, 나
한전, 칠성각, 명부전, 요사 등 8~9동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뜨락이 매우 넓은 것이 특징
이다. 한때는 그 뜨락에도 건물이 가득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모두 사라지면서 수풀
만 무성하게 된 것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과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지방문화재인 부도
가 있으며, 계룡산 갑사(甲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머물고 있는 월인석보(月印釋譜) 판각
이 원래 이곳에 있던 것으로 여기서 만들었다고 전한다.

쌍계사에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많이 서려 있다. 그 전설을 모두 다루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므로 그중 일부만 끄집어 보도록 하겠다.

① 창건설화 - 먼 옛날, 하늘의 상제(上帝)가 이 땅에 절을 하나 짓고자 자신의 아들을 내려
보냈다. 아들은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우기로 하고 천하에 진귀한 나무를 구해와서 주변 경치
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절을 세웠다.
② 하마비(下馬碑) 전설 - 때는 고려 후기 어느 날, 쌍계사 주지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승
려 1명이 나타나
'그곳에 쫓기는 승려가 찾아 올 것이니 잘 대접하시오. 허나 임금 왕(王) 자의 성을 가진 사
람이 말을 타고 들어오면 큰일이 날 것입니다!'
이후 세상이 더 혼란해지면서 많은 승려가 난을 피해 쌍계사로 들어오니 주지는 그들을 모두
맞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산을 뒤흔들 듯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탄 군사가 절을 향해 달
려오고 있던 것이다. 절에 있던 사람들이 불안에 떨자 주지는 목탁을 치며 불경을 외기 시작
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 모두 독경을 외웠는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절로 치닫던 말들이
절 앞에서 서로 뒤엉키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말을 탄 군사들은 말들의 때아닌 발작 증세
에 모두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후에도 똑같은 일이 계속 생기자 어느 누구도 말을 타고 절에 들어갈 생각을 못했다. 또한
말이 때거지로 죽은 곳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를 세웠는데, 세월이 지나자 엉뚱하게
도 죄 지은 사람의 죄를 풀어주는 영험이 있는 비석으로 둔갑되어 불공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
다.

* 쌍계사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 3 (중산길 192 ☎ 041-741-2251)


▲  봉황루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위엄


 

♠  쌍계사 둘러보기

▲  쌍계사 연리근(連理根)

논산 쌍계사는 솔직히 대웅전만 알았지 나머지는 아는 것이 없었다. 절의 역사도 제법 오래되
고 보물로 지정된 장대한 대웅전도 있으니 절 규모도 어느 정도 될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정
작 경내로 들어서니 내 생각과는 완전 다른 허전한 모습의 쌍계사가 나를 맞이했다.

봉황루를 들어서면 바로 정면으로 대웅전이 보이는데, 바로 코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거리
도 제법 떨어져 있다. 봉황루와 대웅전 사이에는 뜨락이 넓게 펼쳐져 있으나 그냥 뜨락만 있
을 뿐, 연리근 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옛날에는 그 자리에 건물이 가득 있었겠지만 다 사라
지고 빈 자리만 남은 것이다. 뜨락 서쪽에는 오래된 연리근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동쪽에
는 조그만 요사와 선방이 자리한다. 그리고 건물 상당수는 대웅전 좌우와 뒷쪽에 띄엄띄엄 떨
어져 있다.
이렇게 경내에 놀고 있는 땅이 많으니 요란하게 중창불사를 벌일 만도 한데 아직은 그럴 생각
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뜨락이 너무 허전하니 조촐하게 건물 몇 개라도 세워 그 공허함을
달랬으면 좋겠다. 세상에 이렇게나 넓은 법당(法堂) 뜨락도 처음 보고, 경내 중심에 이렇게
공터가 넓은 절도 처음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쌍계사 연리근

대웅전 뜨락 서쪽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연리근은 겉으로 보면 1그루 같지만 엄연한 2그루의
느티나무(괴목나무)이다. 이들은 서로 뿌리가 만나 이렇게 하나의 나무처럼 되었는데,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 줄기가 서로 겹치면 연리목(連理木), 가지가 하나가 되면 연리지(連理枝)라고
부른다.

이 연리근은 수백 년(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음) 묵은 장대한 나무로 쌍계사의 오랜 내력을 알
려주는 소중한 산증인이다. 나무의 덩치가 대단하여 그늘 또한 넓기 그지 없는데, 나무 밑에
는 쉼터가 조성되어 있으며, 그늘의 질감과 솔솔 불어오는 산바람으로 이곳만큼은 무더위를
잊어도 좋다.


▲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오른쪽 맞배지붕 건물)
선방은 종무소(宗務所)의 역할도 겸하고 있으며, 그 앞에 조그만 건물은
찻집으로 전통차를 무료로 제공한다. (일부는 유료)

▲  동그란 석조(石槽)
작봉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것일까? 석조에는 그가 베푼 옥계수로 작은
바다를 이룬다. 목마름을 단죄하고자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입에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하다며 쾌재를 외친다.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좌측에는 명부전과 나한전, 칠성각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명부전은 20세기 초에 지어
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
王), 도명존자(道明尊者), 저승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는
데, 보통 절 건물은 가운데 문은 닫고 좌/우측 문을 열어두어 통행하게 하나 여기는 그 반대
로 가운데 문을 이용토록 했다.


▲  명부전 중심에 앉아있는 온후한 표정의 지장보살상과
무독귀왕(왼쪽), 도명존자(오른쪽)

▲  명부전 식구들
저승의 10왕과 판관(判官), 금강역사(金剛力士), 동자(童子) 등


▲  나한전(羅漢殿)
20세기 초에 지어진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  나한전 석가여래상과 석가후불탱

▲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조그만
16나한(十六羅漢)들

  ◀  나한전의 젊은 버전, 칠성각(七星閣)
경내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칠성(七
星)을 비롯해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
자)이 봉안되어 있다.

▲  칠성각 내부 - 왼쪽부터 산신탱과
칠성탱, 독성탱

▲  칠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
(왼쪽 나무가 연리근, 오른쪽 건물이 요사)


▲  석조관세음보살상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최근에 장만한 관세음보살상이 자리를 폈다. 관세음보살의 얼굴이
풍만하고 복스러운 것이 마치 중년 비구니 같은데, 비가 내려도 얼굴 부분은 절대로 젖지 않
는다고 한다. 하여 절에서 신비한 관세음보살상이라며 크게 치켜세우고 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참 어려운 현상 같은데, 그게 계속 되는 것을 보면 단순한 석조보살상은 아닌 모양이다.

관세음보살상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寶冠)이 씌워져 있으며, 얇아보이는 옷을 걸치며 가슴 주
위로 여러 장식을 둘렀는데, 앉아있는 대좌(臺座)에는 연꽃 무늬가 가득하다.


▲  관세음보살상에서 바라본 쌍계사 경내

▲  쌍계사 대웅전 - 보물 408호

쌍계사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것, 바로 이곳 법당인 대웅전이다. 바깥만 볼 것이 아니라 안에
도 말끔히 살펴보자. 그래야 저승에 가서도 염라대왕 형님에게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
만큼 쌍계사에서 대웅전의 비중은 막대하며 '대웅전은 곧 논산 쌍계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
다.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웅전은 법당에 걸맞게 경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솔직히 너무 일
방적으로 큼) 이상하리만큼 경내에 노는 공터가 많아 참 허전하기 그지 없는데, 그 허전함과
절의 조촐함을 대웅전이 제대로 커버를 해줄 만큼 든든한 모습이라 사진에 나오는 사람과 대
웅전을 비교하면 크게 실감이 날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살짝 치켜진 추녀마루의 선이 참 곱다. 마
치 큰 새가 날개짓을 하는 모습 같은데, 지붕이 건물 2층과 맞먹을 정도로 육중하기 그지 없
어 건물 밑도리가 그 큰 지붕을 어떻게 받쳐들까? 쓸데없는 걱정이 들 정도이다. 평방(平枋)
위에는 촘촘히 박힌 공포가 그 지붕을 받들고 있는데, 안쪽은 5출목(出目), 밖은 4출목이다.
이처럼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심어놓은 양식을 다포(多包)양식이라고 한다.

대웅전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작봉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절이 세워진 고려 때부터 있었을
것이다. 화재로 무너진 것을 1716년에 중창했고 화재로 또 전소된 것을 1739년에 다시 지었다.

건물 기둥은 굵고 희귀한 나무를 사용했는데, 그중 가운데 좌측 2번 째 기둥이 칡덩굴나무로
되어있다. 이 기둥은 윤달이 들은 해(4년에 1번, 2016년, 2020년, 2024년~)에 몸으로 안고 돌
면 죽을 때 고통을 면하게 된다고 한다.
1번을 안고 돌면 하루를 앓다가 가고, 2번을 안으면 2일, 3번 돌면 3일이라고 하는데, 유난히
3을 좋아하는 이 땅의 사람들의 습성상 3일은 앓고 가야 서운하지 않는다며 보통 3번을 안고
간다고 한다.
또한 염라대왕이 논산 쌍계사 출신인지 '자네 논산 쌍계사 다녀왔는가?' 물어본다고 한다. 그
러니 만약을 대비하여 쌍계사를 꼭 챙겨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대웅전 문짝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창살무늬

쌍계사하면 대웅전 꽃창살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을 다녀간 답사쟁이들은 하나 같이 꽃창살
을 쌍계사 제일로 찬양하기 때문이다. 나도 꽃창살의 풍문을 듣고 이곳에 온 것인데, 직접 그
들을 보니 그 말이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꽃창살의 갑(甲)으로 칭송받는 부안 내소사(來蘇寺
) 대웅보전의 염통까지 제대로 쫄깃하게 할 정도로 말이다.
회오리 모양과 바람개비 모양의 꽃잎 문양이 문짝마다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꽃잎 사이로 나
뭇잎 문양까지 달려 있어 실제 꽃잎이 달려있는 듯하다. 물론 자연산 보다는 좀 못해도 진짜
꽃들도 시샘을 보낼 정도로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  대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 보물 1,851호

대웅전 불단에는 장대한 모습의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이 각자 스타일에 맞는 후불탱을 뒤에 걸
치며 후덕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대웅전이 크니 집 주인인 석가여래와 그의 협시불(夾侍佛)
까지 덩달아 장대하여 대웅전과 꽃창살에 놀란 눈과 가슴을 더욱 놀라게 만든다.

이들은 흙으로 빚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조각승 원오(元悟)가 수조각승을 맡아 신현(信玄)과
청허(淸虛), 신일(神釰), 희춘(希春) 등 4명과 함께 1605년에 조성했다. 그때 쌍계사는 무려
2층짜리 건물을 세우고 그 안에 저들을 봉안한 것으로 보이는데, 석가여래 좌우로 약사여래(
藥師如來)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자리해 3불을 이루고 있다.
앙련(仰蓮)과 복련(앙련의 반대)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로 장엄하게 앉아있는데,
석가여래는 오른손을 무릎 밑으로 내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으며, 커다란 덩치
에 비해 손과 팔은 작아 보인다. 옷은 양쪽 어깨를 덮고 있지만 오른쪽이 더 진하며, 이를 변
형 편단우견(偏袒右肩)이라고 부른다. 가슴에는 수평의 승각기가 보이며, 법의(法衣) 자락도
규칙적인 간격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고, 좌우 불상도 크기만 약간 작을 뿐, 대체로 석가여
래를 따라하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은 편삼을 입고 그 위에 법의를 걸쳤다는 것이다.

이들 뱃속에서는 아주 고맙게도 발원문(發願文) 등 복장유물 4점이 나왔는데, 발원문에 통해
1605년이라는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 제작에 참여한 승려 이름을 알게 되었다. 분명한 제작
시기와 함께 조각승 원오의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어 충남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5
년 3월 국가 보물로 승진되었다.


▲  대웅전 천정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대웅전에 발을 들였다면 고개를 들어 천정을 보기 바란다. 온갖 기묘한 조화로 이루어진 천정
이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두 눈을 어느 정도 정화를 시켜줄 것이다.
천정에는 커다란 들보와 섬세하게 짜여진 공포, 용머리, 닫집, 25개의 네모로 이루어진 우물
천정(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불 천정에 우물천정 하나씩 있음), 극락조<極樂鳥, 가릉빈가
(迦陵頻伽)> 등이 정신없이 짜여져 있다. 들보와 공포에는 단청이 곱게 칠해져 있고, 용은 동
쪽 들보에 몸을 대고 불단을 굽어본다. 불상 위에는 붉은 기와집의 닫집과 천개(天蓋)가 있는
데, 마치 조그만 궁궐을 보는 듯 하며, 하얀 극락조가 날개를 퍼득이며 천정을 날고 있다. 그
야말로 휘황찬란이라 사람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  우물천정과 두툼한 들보, 그 들보에 몸을 기댄 용, 그리고
칠보궁(七寶宮)이란 현판을 내건 붉은 기와집의 닫집

▲  극락조가 날아다니는 천정 (들보와 닫집, 보개, 우물천정)
이곳이야말로 불국토(佛國土)의 축소판이 아닐까?

▲  대웅전 천정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불법(佛法)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을
빼곡히 담은 그림으로 법당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  대웅전 앞에 놓인 헝클어진 석재들
석탑의 일부로 여겨지는 연꽃무늬 석재와
맷돌의 일부가 나란히 놓여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었다.


▲  이렇게 큰 뜨락을 본 적이 있는가? 대웅전에서 바라본 뜨락과 봉황루

박석이 깔린 길이 봉황루에서 대웅전 앞까지 정연하게 펼쳐져 있다. 지금은 이렇게 허전한 공
간으로 있지만 혹시 아는가? 나중에 조그만 도시처럼 번잡한 공간이 될지도? 허나 너무 복잡
한 모습보다는 이렇게 여백의 미가 넘치는 모습이 더 좋아 보인다.


▲  쌍계사를 뒤로하며 소류지에 버려둔 번뇌와 다시 만나다 ~~

겉모습은 작지만 대웅전 하나로도 알맹이가 큰 쌍계사를 1시간 30분 정도 둘러보았다. 대웅전
내부를 뚫어지라 살펴보았고, 이곳에 서린 문화유산은 불상의 복장유물을 제외하면 모두 눈에
넣었다. 또 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잠깐이나마 그곳에 정이 들었는지 속세로
나가는 길에도 여러 번씩 뒤를 돌아보았다.

쌍계사에서 중산리로 나와 가게 문에 부착된 버스 시간을 보니 20분 뒤에 온다고 그런다. 딱
히 할 것도 없어서 정류장 주변을 서성이며 안그래도 빠른 시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시내
로 나가는 시내버스가 나타나 활짝 입을 연다. 하여 그 버스를 잡아타고 다시 논산역으로 나
왔다.

아직 일몰까지 여유가 넘쳐서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하다가 우리나라 서원의 주요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돈암서원(遁岩書院)을 가보기로 했다. 허나 서원은 격하게 땡기지는 않아서 다른
곳을 물색하다가 연산에 자리한 송불암 미륵불로 장소를 바꿨다. 서원보다는 절이 볼 것도 많
고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논산시내에서 송불암이 있는 연산(連山)까지는 시내버스와 시외직행버스가 제법 다닌다. 대전
으로 가는 주요 길목인데다가 구한말까지는 충청도의 주요 고을(연산현)이었기 때문이다.

논산역에서 연산, 계룡시 방면으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303번을 타고 1번 국도를 신나게 달려
연산에 진입, 연산 남쪽인 연산구4거리에서 내렸다. 여기서 우회국도 개설로 많이 한가해진
옛 1번 국도 2차선 도로(황룡재로)를 따라 동쪽(계룡 방면)으로 6~7분 정도 가면 송불암 입구
이고, 거기서 송불암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송불암이 모습을 비
춘다.


 

♠  오래된 미륵불과 소나무를 간직한 조그만 절
~ 논산 송불암(松佛庵)

▲  송불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송불암은 옛 절터에 지어진 작은 비구니 절로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이곳에 서린 오래된 미
륵불을 보고자 함이다.

송불암에 있던 옛 절은 미륵불을 통해 고려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보다 동쪽으로
50m 떨어진 산자락에 있었다고 하며, 절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미륵불과 주춧돌만 아련히 남아오다가 1946년에 인근 신양리에 살던 동상태의 어머
니가 2칸짜리 집을 짓고 절로 삼아 미륵불을 관리했다. 이것이 현재 송불암의 시작이다.
이후 1970년에 승려 경연이 절을 물려받아 주지승이 되었는데, 미륵불 바로 옆에 소나무가 석
불과 조화를 이루며 지붕처럼 퍼져 있다고 하여 송불암이라 하였다.

송불암에는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가 한토막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 어느 날, 법력이 높은 노승(老僧)이 기도를 마치고 걸망을 짊어지며 천하를 돌아다
니다가 연산 고을 인근 황룡산에 올라 땅을 살펴보니 절을 지으면 크게 될만한 명당(明堂) 자
리였다. 하여 그곳을 점찍어두며 주변을 보니 광산김씨가 중심이 된 부자 마을이 있었고, 마
을 외딴 자리에 집이 있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니 광산김씨 청년이 나와 무
슨 일이냐고 물었다.
노승은
'황룡산에 명당 자리가 있다기에 여기서 불법(佛法)을 전할까 하오'

답을 하니 청년은
'이곳은 유생이 많아서 불교를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하였다. 그러자 노승은
'그러면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풀막을 짓고 도를 깨우쳐 볼까 하오'
그러니 청년이
'그러면 무엇을 먹고 입으며 혼자 쓸쓸히 어떻게 살려고 하시오?'
물었다. 노승은
'원래 중은 풀뿌리, 나무열매로 양식을 삼고, 송락과 초목으로 의복을 대신하며, 법당이 없으
면 바위굴을 불당으로 삼소. 그러니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겠소?'
노승
의 시원스런 답에 청년은 감동을 먹고 오늘 날도 저물었으니 일단 하룻밤 자고 가라며 호
의를 베풀었다.

이렇게 청년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노승은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 청년의
어머니를 보게 되었는데, 얼굴을 보니 3일 뒤에 죽을 상이 아닌가? 이걸 청년에게 말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궁리하다가 한숨을 쉬며 그에게 전해주었다.
'덕분에 잘 쉬었소. 대접에 대한 보답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하니 부디 화를 내지 마시오.
아까 당신의 아머니를 잠깐 뵈었는데, 3일 후 아침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실 것이오. 그러면
인근 범바위골에 묘를 쓰되 황금돌을 절대 건드리지 마시오. 그곳이 괜찮은 명당자리요'
그 말을 들은 청년은 갑자기 뚜껑이 뒤집혀
'뭐라고? 이 땡중이 미쳤나? 빨리 꺼져!!'
성을 내며 노승을 쫓아냈다.

그런데 과연 3일 후 아침, 청년의 어머니는 죽고 말았다. 이에 청년은 크게 놀라 통곡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노승이 한 말을 상기시켜 보았다. 범바위골에 묻으라는 말이 생각나 그곳에 묘
자리를 정하고, 땅을 파니 황금돌이 나왔는데, 돌을 건드리지 말라는 말까지는 기억이 안나서
그만 그 돌을 들어내고 말았다.
그러자 그 속에서 수많은 벌이 앵~ 나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 땅에 흔치 않던 벌명당이었
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살던 벌들은 노승 때문에 보금자리를 빼앗기게 되었고, 벌의 우두
머리가
'그 땡중 때문에 우리 터전을 빼앗겼다. 빨리 그 작자를 단죄하러 가자~~!'
잔뜩 이를 갈고 무더기로 날라다니며 노승을 찾아 다니다가 인근을 지나던 그를 발견하고 집
중 폭격을 가해 말그대로 벌집을 만들어 죽였다.

이후 노승의 저주가 씌워진 탓인지 연산마을에는 10년 홍수, 10년 가뭄, 10년 전염병으로 완
전 몹쓸 땅이 되버렸다. 마을의 실세이던 광산김씨 집안에서 회의를 열어 상황이 이리 된 것
은 우리들 때문에 노승이 벌에 쏘여 죽은 것이라 규정하고 그의 넋을 위로할 겸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조성했다. 그랬더니 재앙은 멈추고 마을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고 한다.
또한 미륵불 곁에 소나무 1그루가 홀연히 자라나 그를 향해 가지를 뻗으면서 위로 자라지 않
고 아래로만 자라니 사람들은 그 소나무가 노승의 후신이라 여기며 기도를 올렸고 소원을 성
취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여기서 출가하여 크게 된 승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전
한다.

물론 전설을 다 믿으면 이는 순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전설을 통해 마을의 평안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절을 세웠음을 알 수 있으며, 딱히 뒷끝이 없는 다른 벌명당 전설과 달리 승려의 말
을 지키지 않다가 명당의 기운은 커녕 오히려 마을이 풍비박산이 나자 그 승려를 위로하고자
절을 세워 간신히 마을의 안녕을 되찾았다는 내용이 이채롭다. 일종의 승려 말을 들으면 자다
가도 떡이 나오니 승려와 절, 불상을 잘 대접하라는 옛 석불사의 뜻이 아닐까?

▲  개구리의 조촐한 운동장, 동그란 연못

▲  대웅전 앞 연꽃 석조

송불암은 대웅전과 요사, 선방 등 4~5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비구니 절이라 경내는 깔끔하
고 정갈하며, 경내 동쪽에 창건 설화에 나오는 소나무와 이곳의 후광이자 든든한 밥줄인 미륵
불이 자리해 있다.

▲  2000년에 새로 지어진 대웅전

▲  대웅전 서쪽에 자리한 요사


▲  미륵불과 소나무가 있는 경내 동쪽

▲  송불암 미륵불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83호

송불암 미륵불은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높이는 4.25m, 둘레 1m로 머리에는 네모난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얼굴은 넉넉한 인상으로
눈과 눈썹, 코, 입이 모두 완연하게 남아있으며, 두 귀는 목까지 늘어져 있고, 목에는 삼도(
三道)가 그어져 있다.
몸통에는 법의(法衣)를 걸쳤는데, 얇은 새김으로 새겨진 옷주름선은 발목까지 내려왔으며, 왼
손은 가슴에 대고 있고, 오른손은 몸 옆에 붙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것 같다. 그가 서 있는 대좌(臺座)에는 연화무늬가 있고, 옷자락 밑으로 석불의 발과 발가락
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석불 옆에는 창건설화에 나오는 소나무가 누워있다. 정말 노승의 넋이 담긴 것인지 하늘로 곧
게 자라지 못하고 석불을 향해 아래로만 자라나 끝내는 석불의 하늘을 가린 것이다. 그 모습
이 마치 석불의 불력(佛力)이나 매력에 끌린 듯 그를 덮고 있었는데, 소나무가 갈수록 오버(?
)를 하면서 석불이 마치 소나무를 이고 있는 모습처럼 보이자 2000년에 지금의 자리로 석불을
옮기고 소나무를 싹둑 정리했다.


▲  송불암 소나무 - 논산시 보호수

미륵불과 더불어 송불암의 오랜 명물인 소나무는 미륵불 앞에 마치 절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
을 하고 있다. 그의 미륵불에 대한 마음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석불에게 큰 부담을 주었던 존
재이기도 한데. 2000년에 미륵불을 현 자리로 옮기고 소나무를 크게 손질하여 얌전하게 만들
었다.
나무의 나이는 약 270년으로 그 적지 않은 나이에 비해 높이는 낮다. 다만 아랫쪽으로만 성장
을 하여 지금처럼 처진 소나무가 되버린 것이다.


▲  소나무 그늘에 있는 석탑

소나무 그늘과 석불 주변에는 세월에 지쳐 쓰러진 주춧돌과 석탑의 잔재가 남아있다. 이들은
미륵불과 더불어 옛 석불사의 유물로 석탑은 2기가 있는데, 윗 사진의 탑은 아랫도리만 간신
히 남아있으며, 그 주위에 버려진 주춧돌과 자잘한 돌들이 모여 있어 서로를 의지한다.


▲  석불 옆에 자리한 조그만 석탑
몇층인지는 모르겠으나 탑신의 일부와 옥개석이 이리저리 깨진 채 남아있다.
그 위로 동그란 돌이 마치 공기돌처럼 놓여있다.

▲  미륵불 주변에 흩어진 주춧돌들 ▲
이들은 미륵불을 보호하던 건물의 주춧돌로 거의 정사각형 모양의 보호각이
미륵불을 품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석불의 높이가 4m가 넘으니 그 건물
또한 장대했을 것이나 임진왜란 이후 사라지고 간신히 주춧돌만 남아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허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  미륵불의 뒷모습과 소나무
미륵불 뒷모습은 딱히 손질을 하지 않아 울퉁불퉁하다.

▲  미륵불의 귀여운 발과 연꽃무늬 대좌
발가락이 상식 밖으로 지나치게 커서 그 모습이 마치 손에 낀 장갑이나
글러브 같다.

▲  송불암과 논산을 뒤로하며~~~

송불암을 30분 정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어느덧 17시, 더 이상 갈 곳도, 마음을
줄 곳도 없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여름 맞이 논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 송불암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 36-3 (황룡재로 92-18 ☎ 041-733-6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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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0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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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둘레길3구간 흰구름길~삼성암 늦봄 나들이 (빨래골에서 구름전망대, 화계사까지)

 


' 북한산 늦봄 나들이 (빨래골, 삼성암, 흰구름길) '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과 도봉산

▲  삼성암(삼성사)

▲  빨래골 숲길


 

북한산(삼각산, 836m)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으
로 나의 오랜 즐겨찾기의 하나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그의 품을
드나들면서 그가 품고 있는 수많은 명소를 섭렵했지만, 아직도 미답처(未踏處)가 무수히
남아있어 나를 무척 애를 태우게 한다.
미답처 식구 중에는 북한산 동쪽 자락(수유/우이지구)에 안긴 삼성암과 빨래골도 포함되
어 있는데, 이들을 뼛속 깊이 새겨두었다가 5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길을 나섰다.

빨래골은 도봉동 집에서도 무척 가까운 곳이라 여유롭게 15시에 길을 나섰다. 수유역(수
유리)으로 이동하여 강북구 마을버스 03번(빨래골↔수유역)에 나를 담아 수유1동 구석에
자리한 빨래골 종점으로 보냈다.


▲  북한산(삼각산)의 싱그러운 품으로 인도하는 관문, 빨래골공원지킴터
여기서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과 만난다.


 

♠  북한산 빨래골

▲  봄가뭄으로 부실한 모습을 비추는 빨래골 (수유리 빨래터)

빨래골은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에 묻힌 조그만 골짜기이다. 작은 냇가 같은 모습으로 딱
히 유별난 구석은 없으며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을 거닐 때 아주 잠깐 스쳤을 뿐, 제대로 살
펴본 적은 없었다. 그저 골짜기 이름을 통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동네 아낙네
들이 빨래를 하던 곳으로만 막연히 알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곳이 왜 빨래골이 되었을까?

북한산 동쪽 밑에 자리한 수유동(水踰洞)은 북한산 계곡 물이 많아 '무너미'라 불렸다. 무너
미란 저수지 물이 나태하게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한쪽 둑을 조금 낮추어 물이 넘치면 자연히
흐르게끔 만든 것으로 물이 풍부하다보니 일찌감치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마을이 이제는 서
울 동북부 부도심이자 강북구(江北區)의 중심지로 어엿하게 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유동(
수유리) 아낙들이 여기서 빨래를 해서 빨래골이 된 것일까? 물론 그들도 빨래를 하긴 했으나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니다.

조선 왕궁에는 궁궐의 허드렛일을 처리하던 무수리들이 많았다. 그들은 제왕(帝王) 내외와 왕
족들, 궁궐에서 일하는 환관(내시)과 상궁(尙宮), 궁녀, 군사의 옷을 개천(청계천)이나 인근
산골에서 빨았는데, 궁궐 식구들이 많다보니 하루에 나오는 빨래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들 빨
래 중에는 속옷 등의 예민한 옷이나 특별히 다뤄야 되는 빨랫감도 많아 청계천에서 같이 처리
하기가 그랬다. 하여 그런 것들은 특별히 이곳 빨래골에서 처리를 했다. 그래서 '빨래골'이라
불리게 된 것이며, 지역 이름을 따서 '수유리 빨래터'라 부르기도 했다.
여기서 그나마 가까운 궁궐인 창경궁(昌慶宮)까지는 약 7km 거리인데, 계곡 물이 풍부하고 매
우 구석진 한적한 곳이라 이곳을 고른 것 같다. 어쨌든 무수리들은 무거운 빨랫감을 짊어지고
동소문(東小門, 혜화문)을 나와 단장의 미아리고개(또는 아리랑고개)를 넘어 여기까지 낑낑대
고 올라왔다.
그들은 빨래를 마치면 잠시 달콤한 휴식을 취하며 궁궐에서 누리기 힘든 자유를 만끽했고, 한
여름에는 조촐히 물놀이도 즐겼을 것이다. 비록 궁궐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은 고단하지만 휴
양도 누릴 수 있으니 일종의 휴가나 마찬가지라 무수리들의 선호도 대단했을 것이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들의 휴식시설도 있었다고 전하며, 환궁(還宮)이 여의치 않은 경우
인근 화계사(華溪寺)에서 숙박 신세를 지기도 했다.

* 빨래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1일대


▲  윗쪽에서 바라본 빨래골

▲  2004년에 심어진 빨래골 표석
이곳 빨래골은 궁궐 무수리 뿐 아니라 지역 아낙들의 즐겨찾기 빨래터였다.

▲  녹음(綠陰)이 짙은 삼성암 숲길
속세의 번뇌와 먼지를 털기에는 좋은 길이다. 잔잔히 불어오는 산바람에 번뇌를
실어 멀리 날려보내고 싶으나 그 번뇌가 너무 무거워 결국 내가 내려가는
길목에 매복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삼성암 일주문(一柱門)

빨래골 숲길을 오르면 삼성암으로 인도하는 잘 닦여진 오르막길이 나온다. 경사는 그리 각박
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더위로 인해 조금은 지친다.
자존심을 곱게 접고 그 언덕길을 조금 오르면 삼성암의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한다. 오르막길
에서 봐서 그런지 한층 웅장해보이는데,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는 일주문 현판에는 '삼각산 삼
성암'이 아닌 '삼각산 삼성사'라 쓰여있다. 근래 암(庵)에서 사(寺)로 격을 높이면서 삼성사
를 칭하고는 있으나 속세에서도, 절에서도 삼성암이란 이름을 많이 쓴다. (심지어 삼성암 홈
페이지에도 삼성암이라 나옴)


▲  8각형으로 이루어진 만월당 현종종사탑(滿月堂 玄宗宗師塔)

일주문을 지나 한 굽이 오르면 숲속에 때깔이 고운 부도<浮屠, 승탑(僧塔)> 2기와 비석이 뜨
겁게 눈길을 보낸다. 그들 중 8각형으로 이루어진 맵시가 고운 탑은 '만월당 현종종사'의 사
리가 담긴 승탑으로 만월당은 20세기 후반, 삼성암 주지로 있으면서 절을 크게 일으킨 승려이
다. 그러다보니 그의 제자와 신도들이 크게 정성을 기울여 아름다운 승탑을 지었다.

◀  보광당 중현대선사비(寶光堂 重玄大禪師碑)
중현대선사(박중현)는 왜정 후기에 삼성암
대방을 지은 승려이다.

◀  본공당 성학대선사탑(本空堂 性學大禪師塔)
본공당은 1961년 이후 만월당을 도와
여러 건물을 지은 승려이다.


▲  활짝 열린 삼성암 정문


 

♠  북한산 동쪽 자락에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 독성도량을 칭하고 있는
삼성암(三聖庵, 삼성사)

▲  삼성암 외경

삼성암은 빨래골 상류 숲속에 묻힌 조그만 산사로 1872년에 고상진(高商鎭) 거사가 창건했다
고 전한다. 원래 삼성암 자리에는 천태굴이란 조그만 굴이 있었는데, 북한산(삼각산)에 숨겨
진 기도처로 많은 승려가 수도를 했다고 전한다. (천태굴이란 이름은 삼성암이 독성도량을 칭
한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임)

19세기 후반, 서울에 살던 박선묵은 16세에 불교에 귀의했다. 그는 1870년 봄, 고상진, 유성
종 등 7명과 이곳 천태굴에 들어와 3일 동안 독성기도를 올리고 돌아오다가 '이곳의 지세가
절을 지으면 딱 좋은 터요!'
절을 지을 것을 제안, 2년 동안 준비하여 1872년 봄, 여러 칸의
건물을 짓고 작은 절이란 뜻에 '소난야(小蘭若)'라 하였다. 이후 주변 산지를 조금씩 매입했
고 1881년에 독성각을 장만해 절 이름을 삼성암으로 갈면서 본격적으로 독성도량을 칭했다.

1936년 봄, 한동운(韓東雲)이 신도 김용태의 지원으로 칠성각을 다시 짓고, 돌다리와 계단을
닦았으며, 요사를 수리하고 기와를 바꾸는 등 절의 규모가 한층 커졌다. 허나 1942년 7월 폭
우의 희롱에 잔뜩 흥분한 뒷산이 산사태를 일으켜 절을 덮치면서 그만 폐허가 되고 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화계사 주지 박회경(朴會鏡)이 중창의 뜻을 밝혔고, 삼성암 승려 박중현
(보광당), 김성섭 등과 함께 쓰러진 절을 일으켜 세웠다. 이때 김용태가 목재를 지원했고, 인
근의 여러 절이 흔쾌히 도움을 주어 1943년 3월 대방 등 12칸을 세웠으며, 그 기념으로 승려
김태흡(金泰洽)이 '화계사삼성암중건기'를 지었다. 그리고 그해 7월 독성각을 다시 세웠다.
현재의 가람은 1961년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본공당, 세민(世敏), 현종(만월당) 등이 계속해
서 규모를 불렸다. 세민은 주지가 되자 대웅전을 고치고 범종루를 지었으며, 현종이 그 마무
리를 지어 지금의 삼성암을 이루게 되었다. 근래에 '사(寺)'로 격을 높였으나 여전히 삼성암
으로 많이 불린다.

삼성암은 초창기부터 독성도량을 칭했다. 그래서 중부 지역의 이름난 독성 기도도량을 자처하
고 있고 그 명성을 누리고 있는데, 독성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져 독성기도를 하러 많은 이들
이 온다. 아직 절의 내력도 짧고 문화유산도 빈약하니 독성도량을 내세워 절의 존재를 천하에
홍보하는 것이다. 나 역시 삼성암의 이름 3자만 아련히 듣고 있었을 뿐, 관심도 보이지 않다
가 그런데로 묵은 절임을 알고 뒤늦게 살짝 찾아온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독성각, 명부전, 칠성각, 요사 등 8~9동 정도의 건물이 있
으며, 겉보기와 달리 건물도 제법 있고, 면적도 넓다. 소장 문화유산은 아직 없으나 1908년에
조성된 산신탱과 철원(鐵原) 심원사에서 넘어온 조그만 아미타불, 그리고 상궁윤씨의 헌답기
념비 등이 절의 100년 내력을 살짝 귀뜀해준다.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지만 숲속에 짙게 감싸여 있어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기분이며, 사람
들의 발길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서 고적한 산사의 멋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바람에 잠을
깬 풍경물고기의 풍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말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1동 산164-5 (인수봉로23길 235 ☎ 02-988-9300, 1996)
* 삼성암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청기와를 눌러쓴 삼성암 명부전(冥府殿)

활짝 열린 정문을 들어서 온갖 봄꽃이 미소 짓는 오르막 길을 오르면 청기와를 지닌 2층 명부
전이 나온다. 2층이긴 하지만 1층은 종무소(宗務所) 등으로 쓰이고 있어 2층이 진짜 명부전인
데, 원래 이름은 지장전(地藏殿)이었다. 그 뒷쪽에는 요사, 선방(禪房) 등이 자리해 있고, 옆
에는 범종각이 있다.


▲  범종을 비롯한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이 담겨져 있다.

▲  북한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샘터

▲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 영월각(소법당)


▲  탐스럽게 익은 불두화(佛頭花)의 위엄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약간은 통통해 보이는 관세음보살 누님이 어진 표정으로 정병(政柄)을
쥐어들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  청기와로 단장된 대웅전(大雄殿)

명부전에서 1단 더 오르면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나온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머리에 푸른 청기와를 입혀 고급지게 꾸몄으며, 내부에는 아미타3존불과 철원 심원사(深
源寺)에서 넘어온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그곳 천불전(千佛殿)에 봉안된 천불(千
佛)의 하나였으나 6.25전쟁으로 심원사가 파괴되자 승려들이 부랴부랴 그것을 챙기고 이곳으
로 넘어왔고, 그 불상을 아미타불로 삼아 대웅전의 중심 불상으로 삼은 것이다. 현재 서울에
는 심원사에서 넘어왔다는 불상과 보살상이 여럿 있어 심원사가 왕년에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허나 그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온 나는 그만 대웅전 내부를 살피지 않고 지나쳤다. 모두 근래
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불상과 불화만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웅전은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남쪽에는 삼성암의 자랑
인 독성각이 있고, 북쪽에는 칠성각과 관세음보살상, 헌답기념비 등이 있다.


▲  오색 연등이 하늘을 가린 대웅전 뜨락
곧 다가올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일찌감치 오색 연등으로 대웅전 뜨락을 곱게
수놓았다. 하늘을 훔친 연등의 위엄으로 대웅전 머리는 가려져 마치
자욱한 하얀 안개로 산 윗부분이 가려진 것 같다.


▲  바위 위에 자리한 '상궁 청신녀(淸信女) 윤씨 실상행(實相行)
헌답기념비(獻畓紀念碑)'
약간 검은 피부로 이루어진 조그만 비석으로 구한말에 상궁 윤씨가 전답을
시주한 것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그 전답은 삼성암의 살을
찌우는데 크게 보탬이 되었다.

▲  산신각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좌측 안쪽에는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산신(山神)과 칠성의 보금자리로 '칠성각' 현판
외에 주원영 거사가 쓴 '영모각(靈母閣)' 현판도 내밀고 있는데, 여기서 '영모(靈母)'는 산신
할매의 다른 표현 같다.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그 역시 청기와를 지니고 있는데, 19세기 말
에 지어진 것으로 1936년에 수리한 것을 근래에 산뜻하게 청기와를 입혔다.
건물 바로 뒷쪽에는 벼랑이 바짝 붙어있어 산사태에 다소 취약해 보이는데, 1984년 여름 장마
의 희롱으로 산사태가 일어나 적지 않은 흙과 물이 거세게 칠성각을 향해 밀려왔다. 붕괴 직
전에 놓였으나 뿌리채 뽑혀 떠내려오던 소나무 1그루가 마치 문어가 감싸듯 그 줄기와 뿌리가
칠성각을 감싸 무너지지 않게 지켜준 이변이 발생했다. 우연인지 칠성/산신의 가호인지는 모
르겠으나 어쨌든 산신각은 위기를 모면했고, 절에서는 그 소나무를 치우고 3일 동안 산신 기
도를 올렸다.


▲  등장 인물이 많은 칠성탱 (왜정 때 그려짐)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고색이 느껴지는 산신탱은 1908년 석옹 철유(石翁 喆裕)가 출초(出草, 초안을 그림)하고 두흠
(斗欽)과 윤오(允旿) 등이 참여해 구산동 수국사(守國寺)에서 그린 것으로 나중에 삼성암으로
넘어왔다.
붉은 옷을 입고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산신은 호랑이에 기대 앉아있는데, 꼬랑지를 살랑살랑
거리는 호랑이가 고양이처럼 귀엽기만 하다. 산신의 왼손에는 잘생긴 부채가 있고, 그들 뒤에
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그려져 있다. 심원사에서 넘어온 아미타불을 제외하면 경내에서 가
장 늙은 보물로 아직 그 흔한 지정문화재 등급은 얻지 못했다.


▲  벼랑 위에 자리한 독성각(獨聖閣)

대웅전 우측 벼랑 위에는 삼성암의 얼굴이자 후광(後光)인 독성각이 걸려 있다. 보통 절에서
산신각이나 산신이 봉안된 삼성각(三聖閣)이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기 마련이나 삼성각
은 독성도량답게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거처인 독성각을 가장 하늘 가까이에 두어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

독성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로 그 역시 청기와를 쓰고 있
다. 1881년에 처음 지어졌다고 전하며, 1942년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이듬해 7월에 다시 지었
다. 현재 건물은 근래 손질된 것으로 지형적인 탓에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정면에 유리창을
내어 비록 좁지만 경내를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들어앉은 위치가 경사가 각박하고 자리가 협
소해 지그재그로 돌계단을 내었는데, 비록 그 거리는 짧으나 계단이 우중층하니 주의가 좀 필
요하다.


▲  독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옆구리

▲  목각으로 이루어진 독성탱

독성각에는 나무로 조각되어 곱게 채색을 입힌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그림 가운데에 두광(
頭光)을 갖춘 독성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동자가 서 있으며, 독성 좌우에는 늙은 큰 소나
무가 있고, 뒷쪽에는 독성의 활동 무대인 천태산(天台山)이 주름진 선을 이루고 있다.

독성각이 19세기 후반부터 있던 것으로 보아 그와 연배가 비슷한 독성탱이 있었을 것이나 지
금 독성탱은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여물지 못했다. 삼성암은 독성을 주
인으로 삼아 독성도량을 칭하고 있으며, 중부 지방 제일의 독성 도량을 자처하고 있지만 역시
나 아는 사람만 찾을 뿐이다. 나도 이곳에 오기 얼마 전에야 겨우 그 사실을 접했다.

독성탱 앞에는 중생들의 소망이 담긴 조그만 원등(願燈)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장관을 이루는데,
이들이 강인한 협동심으로 몸을 불사르며 독성각 내부를 환히 밝힌다.


▲  마치 자수를 놓은 듯, 꽃잎과 새 등이 그려진 독성각 우물천정

▲  삼성암을 뒤로하며... (일주문 부근)


 

♠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  삼성암 일주문 밑에 자리한 세심천 약수터

그날의 목적지인 삼성암을 둘러보고 뿌듯한 마음을 품으며 절을 나왔다. 다음 인연이 언제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그때가 되면 이번에 놓친 대웅전의 조그만 아미타불을 꼭 친견하고
싶다. 
절을 뒤로 하며 일주문에 이르니 부근에 세심천약수터가 있다. 산에 왔다면 뫼가 베푼 약수는
꼭 마셔봐야 그 산의 맛과 마음을 아는 법,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들이킨다. 허
나 봄가뭄으로 물이 답답하게 나와 조그만 바가지를 채우는데 꽤 인내를 요했다. 삼성암은 그
래도 물이 넉넉했는데, 이곳은 그렇지가 못하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오랫동안 동네 사람들의 몸
풀기 장소로 쓰였던 듯 싶다.


▲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약수터를 나와 빨래골로 내려가지 않고 화계사로 질러가는 산길로 방향을 잡았다. 숲에 묻힌
그 길을 정신없이 내려가면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북한산둘레길이 모
습을 비춘다.
북한산둘레길은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山), 사패산(賜牌山)의 밑도리를 지나는 21개
구간, 71.5km의 장대한 산길인데, 삼성암 입구와 빨래골을 지나는 길은 그 둘레길의 일원인
흰구름길이다. 이름도 참 어여쁜 흰구름길(북한산둘레길 3구간)은 이준열사묘역입구에서 북한
산(삼각산)과 속세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북한산생태숲(성북생태체험관)에 이르는 4.1km의 산
길로 구름을 만날 것 같은 길 이름과는 달리 현실은 해발 100~150m를 왔다갔다하는 구름도 만
질 수 없는 얕은 높이이다. 그러니 괜히 이름에 속지 말자~~!

흰구름길은 북쪽으로 순례길(북한산둘레길 2구간), 서남쪽으로는 솔샘길(둘레길 4구간)과 이
어지며, 그리 각박한 경사가 없는 정말 착한 산길이다. 별로 힘들지 않은 코스라 마실 삼아
가다보면 길게 잡아도 1시간 20분 내외면 완주할 수 있는데, 이 구간에는 화계사(☞ 관련글
보기)와 본원정사(☞ 관련글 보기), 삼성암 등의 오래된 절과 냉골, 빨래골 등의 계곡, 조병
옥(趙炳玉, 1894~1960)박사묘, 구름전망대 등의 명소가 있어 무작정 앞사람의 뒷통수만 보며
산길만 걸을 것이 아니라 이들을 여럿 겯드려서 거닐면 정말 영양가 높은 둘레길 산책이 될
것이다.

흰구름길 구간에는 냉골(화계사와 본원정사 중간)이란 깊은 골짜기가 있다. 도로가 냉골 윗쪽
에 자리한 영락교회기도원까지 닦여져 있어 차량들도 마음 편히 바퀴를 굴릴 수 있는데, 냉골
공원 지킴터에서 칼바위능선으로 조금 오르면 현대사의 주요 인물인 유석(維石) 조병옥박사의
묘소가 있다.

또한 화계사 남쪽 산자락에는 속세를 향해 고
개를 든 3층짜리 전망대가 있다.
이 전망대는 둘레길의 이름을 따서 구름전망
대라 부르는데, 그렇다고 구름까지 닿는 높이
는 아니다. 전망대 꼭대기까지는 계단이 빙글
빙글 늘어져 있으며, 20m 내외의 높이인 전망
대 꼭대기에 올라서면 강북구와 도봉구, 성북
구, 노원구를 비롯해 북한산(삼각산) 동쪽의
주요 봉우리와 도봉산, 수락산(水落山), 불암
산(佛巖山) 등이 거침없이 들어와 조망이 제
법 일품이다.


◀  나무로 지어진 구름전망대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동쪽 자락과 도봉산(오른쪽 산줄기)

녹색 물결이 일렁이는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 그 너머로 이 산의 대표 봉우리인 백운대(
白雲臺, 북한산 꼭대기)와 인수봉(仁壽峯)을 비롯해 북한산 동쪽 봉우리 능선이 흔쾌히 시야
에 들어온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우이동, 도봉구, 노원구 지역)
정면 왼쪽에 보이는 산이 도봉산, 오른쪽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쌍문동, 도봉구, 노원구 지역)
정면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 그 오른쪽이 불암산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미아동, 월곡동, 성북구 지역)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미아동, 길음동, 월곡동, 성북구 지역)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잘 닦여진 흰구름길 (화계사 남쪽)

▲  화계사 직전 (흰구름길과 만나는 구간)

간만에 찾은 흰구름길은 화계사까지만 거닐었다. 햇님의 퇴근 시간도 슬슬 임박했고 종종 왔
던 곳이라 그렇게까지 무리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멀리 가고 요란하게 간다 한
들 그 일정의 끝은 언제나 집이다.
이렇게 하여 삼성암을 겯드린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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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5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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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달달한 향연 속으로 ~ 서울연꽃축제의 성지,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
(서울연꽃문화축제)

▲  연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 대웅전 뜨락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패기를 부리는 7~8월에는 하늘 아래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린다.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괜찮은 연꽃축제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봉원사에서 열리는 '서울연꽃문화축제'이다. <조계사에서도 연꽃축제가 열림>
벌써 1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연꽃축제로 2012년 이후 매년 인연을 짓고 있는데, 여름
이 왔으니 친(親) 여름파인 연꽃을 구경해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
을 것이다. 그만큼 여름 제국을 대표하는 꽃이 바로 연꽃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연꽃 축제날이 다가왔다. 경복궁역(3호선)에서 후배 여인네를 만나 서울
시내버스 272번(면목4동↔남가좌동)을 타고 이대부고(봉원동)에서 하차, 다시 7024번으로
환승하여 봉원사 종점에 두 발을 내렸다.
보기만해도 숨이 막히는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그것을 통쾌하게 비웃듯 종점 주변
은 완전 자연에 감싸인 산골 마을이다. 서울이라고 해서 꼭 높은 빌딩과 번잡한 시가지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거늘 서울에 대한 뿌리 깊은 고정관념 때문에 그런 풍경과 완전 대
비되는 곳을 만나면 '왠 뚱딴지 같은 풍경인가?' 눈을 먼저 의심하게 된다.

버스 종점으로 쓰이는 봉원사 주차장에서 봉원사로 이어지는 동북쪽 길을 조금 가면 오른
쪽으로 승탑(僧塔)과 비석이 즐비하게 늘어선 부도전이 잠시 발길을 붙잡는다. 석종형(石
鐘形)부터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승탑들 7~8기와 비석 9기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다들 20세기 것들이라 때깔이 무지 곱다.
그런 부도전을 지나면 봉원사 밑에 자리한 마을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사찰 밑에 자리한
마을을 유식한 말로 사하촌(寺下村)이라 부르는데,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 상당수는 봉원
사 승려의 거처로 대부분 처자 등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승려가 왜 부인과 자식이 있어??' 고개가 갸우뚱 하겠지만 봉원사는 승려의 혼인을 대놓
고 허용하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라 자신만의 가정을 눈치 없이 꾸릴 수가 있으며 그들
은 보통 자신이 일하는 절 밑에 집을 마련하여 절로 출퇴근을 한다. 그러니 이 마을은 봉
원사의 또다른 일원이자 확장판으로 봐도 무리는 없다.

마을은 절 턱 밑까지 펼쳐져 있어 절과 마을이 붙어있으며 나무도 많아 산골마을 같은 분
위기이다. 여기가 이렇게 도심 속의 산골로 남게 된 것은 이곳 일대를 봉원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개발제한구역에도 묶여 있어 개발의 칼질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  승탑과 비석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


 

♠  봉원사 입문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에 이르는데, 조그
만 구멍가게를 지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조금은 빛바랜 하얀 비석이 애타게 눈
길을 구걸한다. 허나 구석에 자리한 탓에 봉원사가 있는 정면만 죽어라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그는 '조낭자 희정 유애비'로 비석에 얽힌 사연은 대략 이러하다.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이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남편이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1년에 1~2번
정도만 그녀를 찾을 정도로 소홀히 대했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고독한 외
로움에 묻혀 살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생을 살
고 싶지 않다는 유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기
증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 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신(碑身)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
하고 자살했다고 적어놓아 자신의 직무유기(?)를 적지않게 부정하고 있다. 물론 희정이 기생
시절부터 자주 신세 한탄을 하는 등 부정적인 모습도 있었으나 남편의 부족했던 애정이 그녀
를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멀뚱히 서 있는데, 이는 비석을 씌우던 비각(碑閣)의 주
춧돌로 그 비각은 6.25전쟁 때 파괴되었다고 전한다.


▲  봉원사 느티나무 ① - 서울시 보호수 13-3호

유애비를 지나면 바로 경내 직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오르막길에 있다보니 풍
채가 자못 대단해보여 나그네를 적지 않게 주눅을 들게 하는데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40년이 고스란히 더해져 약 340~350년의 지긋한 나이를 먹었다. 높
이는 18m, 둘레 4.3m로 주변에 넓게 그늘을 드리워 무더위의 패기를 단죄한다.


▲  봉원사 느티나무 ② - 서울시 보호수 13-1호

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연거푸 마중을 나온다. 앞서에서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주는 역할인지 촘촘한 간격으로 나무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지만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했다. 하
여 이들 나무가 자연히 일주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더 숙성되어 약 440~45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앞 나무보다 키는 좀 작지만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찻집이 있는데, 다양한 전통차와 불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을 판매한다.

▲  좌측 16나한상

▲  우측 16나한상

연못 윗쪽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상(羅漢像)이 있다. 이들은 2001년 6월에 봉안된 것
으로 나한상 북쪽에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담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
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
는 서울에 이름난 고찰(古刹)인 봉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봉원사는 태고종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금의 연
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
이 전혀 없는 실정이며, 그나마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져 도선의 창건설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
愚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크게 중창하면서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
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
스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니 그 이름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과 담을 쌓았던 삼은(三隱)의 하나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
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잘못된 기록인 듯 싶다.
1396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3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승하한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해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자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으며, 1748년 영조(英祖)가 현재 절 자리를 하사하며 절을 옮
길 것을 명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얌전히 절을 이전했다. 이에 영조가 친히 '봉원사
' 친필 현판을 내렸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원래 자리에는 1764년에 영조의 후
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수경원(綏慶園)>이 들어앉았다.
(수경원은 20세기 후반, 서오릉으로 이전되어 정자각과 약간의 석물만 남아있음)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는데, 이는 영조 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수경원의 원찰 역할까지 자연스레 맡게 되면서 굶어 죽을 일
은 없게 되었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봉원사에 설치되었
으며, 1856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그의 현판 2개가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동인
(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
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했고, 땅을 더 확보하여 경내를 넓혔으며, 1945년에는 해
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다.
1950년 천하의 비극인 6.25가 터졌다. 초반에는 절이 무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그
해 9월 말, 무심한 총탄의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
물들의 유물이 화마(火魔)의 덧없는 먹이가 되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대웅전과
몇몇 건물, 조선 후기 탱화들은 많이 살아남았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에 공덕동(孔德洞
)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하여 충당했
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
사에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
한 지정문화재였던 대웅전을 홀랑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
임한 주지 혜경이 신도들과 함께 쓰러진 대웅전을 1994년에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
을 보았다.
2009년에는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으며, 2011년 전통사찰의 지위를 받았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 극락전, 만월전, 미륵
전, 칠성각, 운수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
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3호)와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 반야암 목조관음보살좌
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9호), 반야암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0호), 반야
암 석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1호) 등 지방문화재 5점이 있다. 그들 중 범종만 속
시원하게 관람이 가능하다.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 기능 보유자 만봉이 주석하고 있고, 중요무형문
화재 50호
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그 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
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이 좋게 그늘을 드리워 절의 오랜
내력을 묵묵히 속삭인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선보인다. 2019년을 기준으로 벌써 17회를 맞
이했는데, 서울 최초의 연꽃축제로 '서울연꽃문화축제'라 불린다. 허나 봉원사 연꽃축제라 간
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이곳이 다른 연꽃축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못이나 논두렁에 연
꽃을 닦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를 동원해 연꽃을 심어 경내에 배치했다.
축제날에는 연꽃의 향연 외에 전통차와 떡 제공, 국수 공양, 산사음악회, 영산재 등이 열리며
연꽃은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8월 중/하순까지 경내에 선보인다.

서울 도심에서 매우 가까운 절로 숲이 무성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접근
성 또한 착해 언제든지 안길 수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26 (봉원사길 120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붉은 연꽃의 요염한 자태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

▲  서울연꽃문화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밀림을
이룬다. 천하의 연꽃을 싹 소환한 것일까? 수련(睡蓮)을 제외한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
을 견주며 연꽃축제의 열기를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달군다. 어여쁜 꽃잎을 펼쳐보인 연꽃들
은 정처없는 중생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피며,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싹 정화시켜준다.


▲  삼삼하게 우거진 연꽃 밀림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활짝 미소를 머금은 홍련

▲  서로 키와 아름다움을 견주는 홍련들
 

▲  연잎 속에서 숨바꼭질을 즐기는 홍련들

▲  붉게 물든 홍련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 누님이 저 연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두근두근...


▲  대방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과 삼천불전

▲  하얀 피부와 연분홍 피부가 적절히 섞인 청초한 연꽃

▲  웃음 짓는 홍련 - 하루살이보다 못한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연밥을 드러낸 홍련

▲  잘 익은 홍련의 요염함

▲  다양한 인상의 홍련들

▲  오늘도 방긋 웃는 연잎들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① 연꽃 밀림 너머로 보이는 대방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②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③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④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⑤


▲  대웅전 우측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
대웅전 바로 앞에도, 계단에도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  봉원사 대방<(大房) =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봉원사 주지였던 영월은 6.25 때 파괴된 절 건물을 다시 짓고자 궁리를 하였는데
마침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흔적을 산산조각 내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
놓았다. 하여 아소정 본채를 구입하여 도화주 김운파 등과 1966년에 축소/변형하여 대방으로
삼았다. 내부는 절 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주더라도 외형은 원래 모습으로 했으면 좋으련만 당
시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그리 하지 못한 점이 참 아쉽다.
비록 아소정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한 채, 또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남
은 아소정의 흔적으로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그 시절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로
대원군 할배의 독한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기존 크기에서 축소했
다는 것이 저 정도이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아미타불(阿彌陀佛)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 공간,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간
으로 두루 쓰인다. 범패와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
어나와 이곳이 영산재의 성지임을 실감케 한다.
대방 불단에는 아기처럼 매우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는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원래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6.25때 심원사가 파괴되면서 그곳에
많은 불상과 보살상이 전국에 흩어졌는데 그때 업어온 것으로 보이며, 예로부터 영험이 있다
고 전해져 불상에 대한 기도 수요가 적지 않다.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쓴 현판을 비롯해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
에 있음) 등이 건물 외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운강 석봉이 쓴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추사의 청나라 스승인 옹방강(翁方鋼)의
현판 ~ 무량수각(無量壽閣)

추사체(秋史體)를 일군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문
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란 글씨
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고 없지
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대방 앞에 놓인 연꽃무늬 석조물
범상치 않아 보이는 석물이다. 조선 후기
것으로 여겨지나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봉원사 대웅전(大雄殿)과 삼천불전 주변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자리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
면서 조금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중반 건축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의 지위
를 누리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
은 화계사(華溪寺, ☞ 관련글 보러가기) 대웅전,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과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
가를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로 홀
라당 태워먹고 말았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하여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잿더미가 되었으니 6.25 시절의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컸다. 봉원사가 축적했던 많은 보물들이 또 부질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후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으켜 세웠지만 떠나간 지방문
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


▲  봉원사 범종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범종이 하나 깃들여져 있다. (찾기는 매우 쉬움) 그는 예산 덕산(德山)
에 있던 가야사(伽倻寺)의 것으로 1760년에 조성되었다. 여기서 가야사는 흥선대원군의 명당(
明堂) 욕심으로 파괴된 그 절이다.
종 높이는 84.5cm, 입지름 61cm으로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동종 중의 규모가 큰 편에 속하며,
전체적으로 짙은 검은색이 감돌고 있다. 또한 종형도 천판에서 시작된 외선(外線)이 종신(鐘
身) 2/4부분까지 완만한 곡선으로 올라가다가 3/4부분에서 종구까지 완만하게 떨어지고 있다.

편평한 천판(天板) 위에 음통을 갖추지 않는 2마리의 용의 용뉴를 표현했으며, 그 아래 종신
은 2줄의 횡선을 이용하여 종신을 크게 3부분으로 구획하였는데, 그 가운데 상단에만 다양한
도안을 장엄하였다.
천판 아래에는 내부에 '옴'자가 새겨지고 외곽에 돌기를 표현한 원권(原權)의 범자 8개가 부
조되었다. 그 아래에는 사다리꼴 형태인 연곽 4개가 있는데, 사선문으로 연곽대를 구획하고,
그 안에는 연뢰(蓮蕾) 9개를 표현했다. 그리고 연곽 사이에 빈 공간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
는 보살입상 2구가 배치되어 있으며, 그 옆에 '준제진언(準提眞言)'을 간략하게 표기했다.

종 피부에는 종의 탄생시기와 봉안처 외에 덕산과 예산, 대전(회덕, 진잠), 천안, 결성, 옥천
지역 사람들의 후원을 받았고, 사장(私匠)인 이만돌(李萬乭), 신덕필(申德必), 최종취(崔宗就
) 등 3인이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종의 상태가 양호하고 경상도 이씨 일파의 대표적 장인인 이만돌이 만든 작품 양식을 살펴볼
수 있으며, 명문을 통해 종의 자세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어 18세기 후분 동종의 양식과 사장
에 대한 계보, 활동을 연구하는제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지르고 그 자리에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전했는데, 그 과
정에서 범종만 겨우 살아남았다. 그 종은 서울로 올라와 봉원사에 안착하면서 서울살이를 하
고 있는데, 언제부터 이곳에 말뚝을 박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43년 승려 안진호가 작성
한 '봉원사지' 제9절 제3항에 봉원사의 재산으로 기재되어있어 늦어도 20세기 초에 들어온 것
으로 여겨지며, 대원군이 왕실 원찰의 하나인 이곳에 넘겼을 가능성도 있으나 범종이 묵비권
을 행사하고 있으니 알 도리가 없다.

과연 가야사 자리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라를 제대로 말아먹고 그 휴유증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으니 명당의 치명
적인 함정이라고나 할까..?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이 3존불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대웅전 산신탱
이 산신은 돈이 좀 있는지 앳된 동자와 동녀를 4명씩이나 거느리고 있고
호랑이는 귀여운 것이 토실토실하여 귀티가 넘쳐 보인다.
(다른 산신탱은 동자가 1~2명 정도임)

▲  대웅전 천정을 바라보는 여유 ~ 용이 새겨진 천정보개(寶蓋)
저들이 있는 한 대웅전은 더 이상 화마의 덧없는 반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하기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  대웅전 계단 좌우에 배치된 해태상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
에 귀여운 해태상까지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
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
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에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  물이 졸졸 쏟아져 나오는 수각(水閣)


▲  봉원사 삼천불전(三千佛殿)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머금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짜리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
싼 우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졌으며,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
동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완성을 보았다. 무려 9년
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멀리 알래스카
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
물의 특징인데, 절을 크게 돋보이게 할 겸,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화마로 떠나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 대웅전의 희생으
로 태어난 것이 바로 삼천불전이 되겠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큰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
를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두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생의 돈을 받아 지은 원불(願佛)이다. 그 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
靈駕)들을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구겨 넣을 수 있
다.

▲  봉원사 3층석탑(진신사리탑)

▲  이동인이 이곳에 머물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절에 필수 요소인 석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다. 허나 봉원사는 풍수지리 때문인지
오랫동안 탑이 없는 허전함을 안겨주었지. 그러다가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마사(寺)를 방문했는데, 그곳 대승정
(大僧正)인 그나니사라가 부처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도 어엿한 진신사리 보유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사리는 가져왔으나 정작 탑을 세우지 못해 애 태우다가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후 신도들의 지
원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우게 되었다.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천
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음
껏 뽐낸다.


▲  3층석탑에서 바라본 연꽃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

삼천불전 앞에는 연꽃축제의 일원인 산사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산사라고 늘 고적(적막)만
고집해야 될 이유는 없지, 1년에 며칠 정도(절 축제나 석가탄신일)는 산사음악회로 떠들썩하
게 즐기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고 사찰 홍보와 영업에도 도움이 된다.
봉원사 산사음악회는 이곳의 자랑인 영산재와 범패, 그리고 다양한 전통공연과 퓨전음악, 서
양음악, 초청 가수 공연 등이 준비되어 있으며, 보통 전통 공연을 처음에 내밀고, 초청 가수
(대부분 트로트) 공연을 제일 뒤에 내민다.

3층석탑 옆에는 떡과 전통차를 제공하는 공간이 있는데, 18시 이전에 마감을 하여 서둘러 가
야 떡과 전통차를 먹을 수 있다. (무료로 제공하나 상황에 따라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있음)
그리고 17시(또는 18시)부터 1시간 정도 삼천불전 지하층 공양간에서 국수 공양을 제공한다.
연꽃축제 기간 외에도 평일과 일요일에도 제공하니 시간이 맞거든 한 숟가락 들며 이곳의 인
심을 확인해보자. (공양은 상황에 따라 제공되지 않을 수 있으며, 비빔밥 공양을 제공하는 경
우도 있음)
우리는 국수 1그릇과 떡, 전통차를 무한정 즐기고 산사음악회도 전부는 아니지만 1/3 정도 구
경을 했다. 이렇게 사찰 축제를 이용해 전통공연과 서양음악 공연 등 문화생활을 무료로 즐겨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봉원사 마무리

▲  봉원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칠성(치성광여래)이 아닌 하얀 피부의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을 무
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고색이 짙은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는 약사여래
상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 조성된 칠성탱이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와 호법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 가족이 담긴 산신탱 등이 있다.


▲  칠성각 약사여래좌상
붉은색의 약합(藥盒)을 쥐어들며 흐릿한 눈빛을 보내는 그 뒤에 칠성탱이 걸려있다.
보통 존상과 탱화는 일치하기 마련인데, 여기는 서로가 따로 놀고 있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08년 8
월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
(국어연구학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인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
를 열어 봉원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해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
석을 세워 그날을 기리고 있다.


▲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과 극락전 사이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두툼한 맞배지붕 건물로 지
장보살과 저승의 10왕(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이 중 지장보살
상과 시왕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며, 10왕 끝에는 패기가 짙은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자리해 명부의 식구들을 지킨다.

명부전에 왔다면 지장보살과 시왕상도 좋지만 명부전 현판은 꼭 눈에 넣도록 하자. 조선 태조
때 삼봉(三峯) 정도전이 쓴 것이라 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맞다면 무려 620년을 묵은 경내
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 된다. 하지만 내 눈으로 봐서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진 않는다. 비록
현판 구석에 '정도전 필(鄭道傳 筆)' 4글자가 아주 작게 쓰여있긴 하나 옛 사람들은 이름보다
는 '호'나 '자'를 우선적으로 썼던지라 역시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봉원사가 태조의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고, 그의 어진까지 봉안했던 절이니 그를 도와
새 나라를 연 정도전도 봉원사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온 기념으로 한 글
자 남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현판이 세월을 너무 타자 필사(筆寫)를 해 새 것으로 교체
했는데, 그가 쓴 것을 강조하고자 실수로 이름만 덩그러니 썼던 모양이다.
그리고 원래 봉원사 것이 아닌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에 설치된 명부전의 현판이라
는 이야기도 있다. 태종이 정릉을 외곽으로 추방하면서 명부전을 때려부셨고, 그 현판이 여기
저기 떠돌다가 봉원사로 흘러들어와 이곳 명부전의 현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명부전은 정도전의 글씨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꼭 있다고 기둥에 달
린 주련 4개는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다. 조선을 세우고 명나라
(요동)를 정벌하여 보다 큰 나라를 꿈꾸었던 나라의 창업 공신과 그 조선을 말아먹고 왜정에
빌붙은 작자의 흔적이 한 자리에 공존하고 있는 점이 참 이채로운데, 광복 이후 친일파를 제
대로 단죄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점점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더러운 현실이 매국
노의 고약한 흔적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속히 이들을 뜯어
내 장작으로 쓰거나 내버리기 바란다.


▲  명부전 지장보살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녹색 승려머리의 지장보살과 좌우에 봉안된 10왕(十王)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름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들이다.

▲  정도전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의 위엄
왼쪽 구석 위쪽에 '정도전 필' 4자가 쓰여 있다.

▲  명부전 옆구리에서 만난 아리따운 홍련들

▲  봉원사 미륵전(彌勒殿)

칠성각 뒷쪽에 자리한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
습이다. 그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
아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내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먹고사는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며, 그 인등으로 인하여
인등각이라 불리기도 한다.
미륵전 앞에는 날씬한 몸매의 7층석탑이 서 있는데 왜정(倭政) 이후에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
식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모르겠다.


▲  미륵전 미륵불입상

부처가 사라지고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이 땅은 점점 아비규환 그 이상으
로 흘러가고 있는데 중생의 고통을 나몰라라하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륵불이 한없이 밉기만
하다. 그렇게 나오기가 싫으면 다른 이를 보내 구제해 주던가 해야지. 꼭 56.7억년 후에 나타
나야 되는가? 미리 땡겨서 나오는 센스 좀 보여주기를.. 자꾸 숨어있는 것도 미륵불의 직무유
기이다.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니다. 아미타불과 박정희 전대통령 내외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우측에는 자
애수란 이쁜 이름을 지닌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나이는 150~200년 정
도 된 것으로 여겨지나 왜 자애수라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극락전에 그늘을 제공하는
것 때문은 아닌 듯 싶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는 만월전(滿月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자 외진 숲속에 만월전이 있다. 이 건물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데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그의 곁에 둔 것이 특징이다. 1904년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독성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내가 갔을 당시는 애석하게도 문이 잠겨 있어 내부는 살피지 못
했다. (만월전은 올 때마다 문이 잠겨 있었음)


▲  삼천불전 앞 산사음악회 무대에서 펼쳐진 즉석 그림 전시회
봉원사 화승이 무대에서 즉석으로 그린 그림을 삼천불전 앞에 펼쳐보이고 있다.
그림에 담겨진 붉은 꽃은 이곳 축제의 주인공인 연꽃이다.


연꽃축제 현장을 몇 바퀴나 돌면서 부지런히 사진에 담느라 정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연
꽃이 그야말로 시간 도둑인 셈이다. 허나 그런 어여쁜 도둑은 봐줄 만하다.
그 사이 세상은 낮에서 밤으로 바뀌고 시커먼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지면서 여름 제국의 혹독
한 기운도 조금은 꺾였다. 햇님이 커튼을 치자 음악회가 열리는 삼천불전 앞은 그 어둠을 몰
아내고지 일제히 조명을 틀었고, 산사음악회는 점점 숙성이 되어 분위기는 더욱 솟아오른다.

마음 같아서는 음악회를 끝까지 관람하고 싶지만 저녁밥이 그리울 시간이라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버렸다. 그러니 아무리 음악회가 신명이 나도 그저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봉원사에서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연꽃축제의 주인공인 연꽃을 실컷 눈에 넣었으니 그리 아쉽지
는 않다. 하여 꿈에도 잊지 못할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뒤로 하며 그곳을 나왔다.

이렇게 하여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내년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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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서울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문화대축제)

 


'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서울 봉원사 연꽃 나들이 '

▲  봉원사 대웅전 뜨락


 

여름의 제국(帝國)이 한참 패기를 부리는 7~8월에는 하늘 아래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린
다.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괜찮은 연꽃축제가 하나 있으니 바
로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하고 있는 '서울연꽃문화대축제'가 그것이다. <그냥 축제도 아니
고 무려 대축제.. 이곳 외에도 조계사(曹溪寺)에서도 연꽃축제가 열림>
벌써 10년이 넘게 축제가 열리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신통치 않아 서울 사람들도
많이 모르는 실정이다. 주말에는 답사꾼, 사진꾼, 산꾼 등이 좀 몰리긴 하지만 평일은 피
서철임에도 한산한 편이라 보다 적극적인 홍보가 절실해 보인다.

7월 한복판에 봉원사 연꽃 축제 소식을 접하고 연꽃에 대해 입맛을 다시며 흔쾌히 축제를
기다렸다. 그 축제는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적이 있지만 여름이 왔으니 친(親)여름파
인 연꽃의 향연을 1번은 꼭 봐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
큼 여름을 대표하는 꽃이 바로 연꽃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축제일이 다가오자 후배 여인네와 함께 그곳의 문을 두드렸다. 서대문역
(5호선)에서 봉원사 턱 밑까지 올라가는 7024번 시내버스를 타고 8분 정도를 달려 봉원사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보기만해도 숨통이 질리는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그것을 통쾌하게 비웃듯 종점 주
변은 완전 자연에 감싸인 산골 마을이다. 서울이라고 해서 꼭 높은 빌딩과 번잡한 시가지
, 꼬리를 무는 차량들의 정체와 사람들의 엄청난 물결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거늘 서울
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그런 풍경과 대비되는 곳을 만나면 '왠 뚱딴지 같은 풍경인가?'
눈을 먼저 의심하게 된다.

버스가 육중한 바퀴를 접고 쉬는 곳은 봉원사 주차장으로 그 북쪽에 숲속한방랜드 숯가마
찜질방이 있다. 여기서 봉원사로 이어지는 동북쪽 길을 조금 가면 오른쪽에 승탑(僧塔)과
비석이 즐비하게 늘어선 부도전이 잠시 발길을 붙잡는다. 이곳에는 석종형(石鐘形)부터 8
각원당형(八角圓堂形)까지 다양한 모습의 승탑 7~8기가 비석 9기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있
는데, 다들 20세기 것들이라 때깔이 무지 곱다.
그런 부도전을 지나면 봉원사 밑에 자리한 마을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사찰 밑에 자리한
마을을 유식한 말로 사하촌(寺下村)이라 부르는데,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 상당수는 봉원
사 승려의 거처로 대부분 처자 등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승려가 왜 부인과 자식이 있어??' 고개가 갸우뚱 하겠지만 봉원사는 승려의 혼인을 대놓
고 허용하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라 자신만의 가정을 눈치 없이 꾸릴 수가 있으며 그들
은 보통 자신이 일하는 절 밑에 집을 마련하여 절로 출퇴근을 한다. 그러니 이 마을은 봉
원사의 또다른 일원이자 확장판으로 봐도 상관은 없다.
마을은 절 바로 밑까지 펼쳐져 있어 절과 마을이 거의 붙어있으며 나무도 제법 많아 마치
벽지 산골 같은 분위기이다. 이곳이 이렇게 도심 속의 산골로 남게 된 것은 이 일대를 봉
원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개발제한구역에도 묶여 있어 개발의 칼질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
문이다.


▲  봉원사 종점에서 봉원사로 인도하는 길

▲  승탑과 비석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


 

♠  봉원사 입문 (유애비, 보호수 느티나무)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에 이르는데, 조그
만 구멍가게를 지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하얀 피부의 조그만 비석이 애타게 눈길
을 보낸다. 허나 구석에 자리한 탓에 봉원사가 있는 정면만 죽어라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
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왠 비석인가 싶어 기웃거리니 비신(碑身)에 쓰인 내용 그대로 조낭자 희정 유애비이다. '조낭
자 희정~~'이란 문구를 통해 '조희정'이란 여인을 기리는 비석임을 알 수 있는데, 보통 행적이
나 절에 시주한 것을 기리는 비석이 아닌 슬픔을 남긴다는 뜻의 유애비(遺哀碑)를 칭하는 것을
보니 뭔가 애처로운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과연 이 비석에는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 인근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
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이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
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남편이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1년에 1~2
번 정도만 그녀를 찾을 정도로 소홀히 대했다고 한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고독한 외로움에 묻혀 살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
생을 살고 싶지 않다는 유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만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기
증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 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
신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
했다고 적어놓아 자신의 직무유기(?)를 부정하고 있다. 물론 희정이 기생 시절부터 신세 한탄
을 자주하는 등 부정적인 모습도 있었으나 남편의 지극히 부족했던 관심과 애정이 그녀를 죽음
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멀뚱히 자리해 있는데, 이는 비석을 씌우던 비각(碑閣)의
주춧돌로 비각은 오래 전에(6.25전쟁 때 파괴되었다고 함) 녹아 없어졌다.


▲  봉원사 회화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7호
봉원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5그루가 있는데, 가장 먼저 마중하는 것이
바로 이 회화나무이다. 이 나무도 구석에 있어 진짜 지나치기가 쉽다.
나무의 높이는 18m, 둘레는 3m이며, 2000년 12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80년이라고 한다. (지금은 190여 년)


▲  봉원사 느티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3호

유애비와 회화나무를 지나면 바로 경내 직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오르막길에 있
다보니 풍채가 자못 대단해보여 나그네를 적지 않게 주눅을 들게 하는데, 보호수로 지정될 당
시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40년이 고스란히 더해져 약 340~350년의 지긋한 나이를 먹
었다. 높이는 18m, 둘레 4.3m로 뒤에 있는 느티나무보다 늘씬하고 키가 크며 주변에 넓게 그늘
을 드리워 무더위의 패기를 잠재운다.


▲  봉원사 느티나무 (2) - 서울시 보호수 13-1호

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연거푸 마중을 나온다. 앞서 나무에서도 완
전히 털어내지 못한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주는 역할인지 촘촘한 간격으로 나무
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 장안에서 규모가 제법 있는 절이지만 아직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
했다. 그러니 이들 나무가 자연히 일주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더 숙성되어 약 440~45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앞 나무보다 키가 좀 작지만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다원(茶園)이란 찻집이 있는데, 다양한 전통차를 팔고 있으며, 불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
도 판매한다.

               ◀  봉원사 연못
네모난 연못에 동그란 섬을 심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
하는 것 같다. 연못에 홀로 떠 있는 섬에는 조
그만 소나무가 운치를 가득 우려낸다.

       ◀  연못 옆에 자리한 비각(碑閣)
봉원사에 크게 재정을 지원했던 전성기(全星基)
의 송덕비(頌德碑)가 담겨져 있다.
비석도 모자른지 대웅전 옆에 그의 제사까지 지
내는 전씨영각까지 두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지원이 꽤 상당했던 모양이다.


 

♠  봉원사 16나한상, 범종각 주변

▲  하얀 연꽃의 수수한 자태

연못 윗쪽 라인에는 연꽃을 심은 수조를 배치해 연꽃의 조촐한 향연을 선보인다. 붉은색과 흰
색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연분홍 연꽃부터 한참 물이 오른 홍련(紅蓮)과 백련(白蓮)까지 늦
여름에 나타나는 수련(睡蓮)을 빼고는 거의 다 모여 있다. 어여쁜 잎을 펼쳐보이며 부처와 대
자연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연꽃들은 정처없는 중생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핀다.


▲  무슨 근심이 있는지 입을 오므린 홍련
저 홍련에서 심청(沈淸) 누님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  16나한상 동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1967년에 목수인 이광규가 세웠다. 건물 이름
그대로 범종이 담겨져 있으며. 종 밑에는 단지
를 묻었는데, 이는 소리의 공명정도를 길게 하
고자 함이라 한다.

▲  좌측 16나한상

▲  우측 16나한상

16나한상은 부처의 열성제자인 16명의 나한(羅漢)으로 2001년 6월에 봉안했다. 나한상 북쪽에
는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담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
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서울 연꽃축제의 성지 ~~ 봉원사(奉元寺)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
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는
서울에 이름난 고찰(古刹)의 하나인 봉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봉원사는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
금의 연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이 전혀 없는 실정이고, 그나마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
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져 도선국사 창건설은 거의 신뢰성이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
愚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크게 중창하면서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
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니 그 이름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
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을 멀리했던 삼은(三隱)의 하나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잘못된 기록인 듯 싶다.
1396년(태조 4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3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붕어(崩
御)한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여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자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으며, 1748년 영조(英祖)가 현재 절 자리를 하사하며 절을 옮
길 것을 명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절을 이전하니 그 기념으로 영조가 친히 '봉원사'
란 친필 현판을 하사했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원래 자리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 수경원(綏慶園)을 1764년에 조성했다.
이 수경원은 20세기 후반,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전되어 지금은 정자각과 약간의 석물만 제자
리를 지키고 있다.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영조 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
로 지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수경원의 원찰 역할까지 자연스레 맡게 되면서 굶어
죽을 일은 없게 되었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1856
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2개의 현판이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동인(
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영
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는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되어 창립총회를 열리기도 했다.

▲  봉원사 염불당(대방)

▲  봉원사 대웅전

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했고, 땅을 더 확보하여 가람(伽藍)을 넓혔다. 1945년에는
해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으며, 1950년 6.25가 터지자 초반에는
절이 무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9월 말, 무심한 총탄과 폭탄이 무수히 날라와 광복
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물들의 유물까지 덩달아 화마(火魔)의
먹이가 되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대웅전과 몇몇 건물만 간신히 살아남았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에 공덕동(孔德洞)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하여 충당했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사에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한
지정문화재였던 대웅전을 홀라당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임
한 주지 혜경이 신도들과 함께 1994년 쓰러진 대웅전을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을 보
았다.
2009년에는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고, 2011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 극락전, 만월전, 미륵
전, 칠성각, 운수각, 전씨영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빼곡히 자리를 메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3호),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
), 반야암 목조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9호), 반야암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
방유형문화재 370호
), 반야암 석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1호) 등 지방문화재 5점이
있다. 이들은 2014년 여름 이후에 지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48호
인 단청장(丹靑匠) 기능 보유자 만봉이 주석하고 있고, 중요무형문화재 50호인 영산재(靈山齋)
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그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
된 탱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이 좋게 그늘을 드리운다.

봉원사는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곳으로 숲속에 묻힌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이다. 서울
4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고찰이기도 하며, 접근성과 교통도 그런데로 착한 편이라 속세에서 잠
시 나를 지우고 싶으나 멀리 가기가 힘들 때 언제든 찾아와 안기고 싶은 곳이다. 절을 둘러싼
숲이 무성해 깊은 산골에 들어온 듯한 즐거운 기분을 선사하며 공기 또한 맑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선보인다. 2016년을 기준으로 벌써 14회를 맞
이했는데, 서울 최초의 연꽃축제로 '서울연꽃문화대축제'라 불린다. 허나 봉원사 연꽃축제라
간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이곳이 다른 연꽃축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못이나 논두렁에
연꽃밭을 닦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를 동원해 연꽃을 심어 경내에 배치했다.
축제기간 동안에는 연꽃의 향연 외에도 전통차 시음, 산사음악회, 영산재 등이 열리며, 연꽃은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8월 중/하순까지 경내에 선보인다.

절에서 안산으로 조금 오르다보면 봉원사의 숨은 명물인 관음바위가 있고, 안산 정상까지 올라
가면 동쪽 정상부에 서울 지방기념물 13호로 지정된 무악산 동봉수대(東烽燧臺)가 있다. 봉수
대는 근래에 복원된 것으로 정상에서 홍제동, 독립문 방면으로 내려가면 되며, 안산 둘레에는
도심의 아름다운 숲길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안산자락길(7.4km)이 아주 편안하게 닦여져 둘레
길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다.

※ 봉원사 찾아가기 (2016년 8월 기준)
* 서울역버스환승센터(1,4호선 9-1번 출구),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2호선 신촌역(4번 출
  구)에서 7024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원사 하차
* 경복궁역(3호선) 1번 출구를 나와서 사직동주민센터에서 272, 606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대부
  고(봉원동)에서 하차, 봉원사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거나 GS25시 앞에서 7024번 버스로
  환승한다.
* 매년 여름(7월 말~8월 초)에는 서울연꽃문화대축제가 열린다. 영산재를 비롯해 산사음악회와
  각종 공연, 불화 전시 등의 이벤트가 열린다. (2016년에는 7월 30일 딱 하루만 축제를 했음)
* 봉원사 승려는 거의 출퇴근을 한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일몰 직후에 퇴근을 하는데, 퇴근
  이후에는 모든 건물을 잠궈두며 경비인이 절을 지킨다. (연꽃축제 기간에는 대웅전은 늦게까
  지 문을 열어둠)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의 즐거운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

▲  서울연꽃문화대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숲을 이
룬다. 천하의 연꽃을 모두 소환한 것일까?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과 맵시를 견주며 물결
을 이루니 연꽃축제의 열기를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만든다. 속세에서 아무리 오염되고 상처받
은 안구와 마음이라도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보면 금세 정화가 될 것이다.


▲  삼삼하게 우거진 푸른 연잎들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활짝 미소를 머금은 홍련들

▲  출렁이는 연꽃 밀림 너머로 보이는 대방

▲  서로 키와 아름다움을 견주는 홍련들

▲  홍련을 희롱하는 잠자리
연꽃 봉오리 속에 그만의 꿀단지가 숨겨진 것은 아닐까?
 

▲  방긋 연잎 속에서 숨바꼭질을 즐기는 홍련들

▲  수조에 몸을 담군 연꽃 무리들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대방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과 삼천불전

▲  두툼하게 살이 오른 홍련

▲  방긋 웃는 홍련 - 하루살이보다 못한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연밥을 드러내 보인 백련

▲  대웅전 우측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
대웅전 바로 앞에도, 계단에도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  봉원사 대방<(大房) =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孔德洞) 동도공고
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당시 봉원사 주지인 영월이 6.25로 파괴된 절 건물을 다시 짓고자 궁리를 하던 중,
마침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흔적을 산산조각 내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놓
았다. 하여 아소정 본채를 구입하여 도화주 김운파 등과 1966년에 축소/변형하여 세우고 대방
으로 삼았다. 그래도 명세기 대원군의 별장 건물인데 내부는 절 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주더라
도 외형은 원래 모습으로 했으면 좋으련만 당시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그리 하지 못한 점이 참
아쉽다.
비록 아소정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한 채, 또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남
은 아소정의 흔적으로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그 시절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로
대원군 할배의 독한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기존 크기에서 축소했
다는 것이 저 정도이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아미타불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들의 숙식,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
간으로 범패(梵唄)와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어나와
이곳이 영산재의 성지임을 실감케 한다.
대방 불단에는 아기처럼 매우 조그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는 17~18세기
에 조성된 것으로 원래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던 것으로 예로부터 영험이 깃들여져 있다고
전한다.

건물 내부는 딱히 방을 가르는 벽이 없어 하나의 거대한 방을 이르고 있으며, 추사 김정희(金
正喜)가 쓴 현판을 비롯하여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에 있음) 등이
외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운강 석봉이 쓴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추사의 청나라 스승인 옹방강(翁方鋼)의
현판 ~ 무량수각(無量壽閣)

추사체(秋史體)의 주인공인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
문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란 글
씨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고 없
지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봉원사 대웅전(大雄殿)과 삼천불전 주변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조
금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중반 건축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은 화계
사(華溪寺) 대웅전과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
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
로 홀라당 태워먹고 말았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하여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재가 되었으니 6.25 시절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크
다 할 것이다. 봉원사가 축적했던 많은 보물들이 그렇게 또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건물이 쓰러지자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으켜 세웠
지만 떠나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인간문화재인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이 하나 깃들여져 있다. (종의 위치는
바뀔 수 있음) 이는 흥선대원군이 부질없는 명당(明堂) 욕심에 예산 덕산(德山)에 있던 가야사
(伽倻寺)로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전할 때 그 절을 강제로 불을 질렀는데, 그때 타
지 않고 남아서 이곳에 가져온 거라고 한다.
과연 가야사 자리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라를 제대로 말아먹었으니 명당의 숨겨진 함정이라고나 할까..?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이 3존불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대웅전 천정을 바라보는 여유 ~ 용이 새겨진 금빛찬란한 천정보개(寶蓋)
저들이 있는 한 대웅전은 더 이상 화마의 덧없는 반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하기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  대웅전 계단 좌우에 자리한 해태상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
에 귀여운 해태상을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
앞에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다.

▲  운수각(雲水閣)과 영안각(靈晏閣)

▲  영안각과 전씨영각(靈閣)

대웅전 좌측에는 조그만 건물 3동이 연이어 자리해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운수
각으로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이며, 그 옆에 조금은 낡아보이는 맞배지붕 건물은 일정기간 혼백
을 봉안하는 영안각으로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겉 나이는
거의 100년은 되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좌측에 있는 1칸짜리 건물은 전씨영각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절에 넘긴 전성기 부
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매년 기일(忌日)마다 절에서 제사를 지내주고 있는데, 이렇게 사
당까지 지어 제삿밥까지 직접 챙겨줄 정도면 시주한 재산이 꽤 되었던 모양이다. 절이나 속세
나 돈 앞에서는 역시나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절에서는 그들을 부처 시절의 급고독장자로 비
유까지 하며 찬양을 하니 말이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이글거리는 두광(頭光)을 지닌 관음보살이
용선을 타고 있다.

▲  9마리의 용조각
수각(샘터) 옆 바위에 놓인 특이한 조각품으로
9마리의 용이 모여 작전 회의를 하는 것 같다
.


▲  봉원사 수각(水閣, 샘터)
대자연이 내린 옥계수로 연꽃 석조(石槽)는 늘 마를 날이 없다.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연꽃보다 샘터가 더 반갑지. 메마른 목에 한줄기 빛이 되어주니 말이다.

▲  봉원사 삼천불전(三千佛殿)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머금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짜리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싼
우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
동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지금의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완성을 보았다. 무
려 9년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미국 알래
스카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물의 특징인데, 절을 크게 돋보이게 할 겸,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
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화마로 떠나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 대웅전의 희생
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삼천불전이 되겠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큰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
를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
생의 돈을 받아 만든 원불(願佛)이다. 그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靈駕
)들을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구겨 넣을 수 있다.


▲  삼천불전의 주인장인 비로사나불과 좌우에 가득 널린
조그만 3천불의 위엄

▲  삼천불전 좌측에 자리한 윤장대(輪藏臺)
윤장대를 돌리면 불교 경전을 다 이해하고
더불어 소원까지 성취된다고 한다.

▲  저보다 정신이 없는 그림이 또 있을까?
100명이 넘는 호법신들이 빼곡히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  화려하기 그지없는 삼천불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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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원사 3층석탑(진신사리탑)

절에 필수 요소인 석탑은 보통 법당(금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다. 허나 봉원사는 풍수지리 때
문인지 오랫동안 탑이 없는 허전함을 안겨주었지. 그러다가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
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마사(寺)를 방문했는데, 그곳 대
승정(大僧正)인 그나니사라가 부처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도 진신사리 보유 사찰
의 하나가 되었다.
사리는 가져왔으나 정작 탑을 세우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후 신도들의 지
원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우게 된 것이다.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
천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
음껏 뽐낸다.

▲  삼천불전에서 바라본 천하
숲 너머로 좁게나마 신촌과 서대문구,
마포구 지역이 바라보인다.

▲  이동인이 이곳에 머물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
저 수인(手印)은 무슨 제스쳐일까?


▲  삼천불전 서쪽에 자리한 느티나무 (3) - 서울시 보호수 13-2호
봉원사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로 높이 21.5m, 둘레는 4.4m이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1972년) 추정 나이가 430년이라고 하니 그 사이 40년이 얹혀져
470여 년의 장대한 나이를 지니게 되었다.

▲  삼천불전 주변에서 만난 연분홍 연꽃


 

♠  봉원사 마무리

▲  봉원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의 건물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칠성
(치성광여래)이 아닌 하얗게 피부를 다듬은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
을 무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고색이 짙은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는 약사여래상
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 제작된 칠성탱이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
상도(八相圖)와 호법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山神) 가족이 담긴 산신탱 등이 있다.


▲  칠성각에 봉안된 약사여래좌상
붉은색의 약합(藥盒)을 쥐어들며 흐릿한 눈빛을 보내는 그 뒤에 칠성탱이 걸려있다.
보통 존상과 탱화는 일치하기 마련인데, 여기는 서로가 따로 논다.

▲  칠성각 우측 - 산신탱과 팔상도 4폭이
걸려있다.

▲  칠성각 좌측 - 신중탱과 팔상도의
나머지 4폭이 자리해 있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08년 8
월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
(국어연구학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였던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
를 열어 봉원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하여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
석을 세워 그날을 기린다.


▲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 뒷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하고 있다. 명부전 현판은 조선 태조 때 정도전이 친히 쓴 것이라고 하는데, 현판을 보니
그렇게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게 맞는다면 거의 620년을 묵은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
래된 보물이 된다.

명부전은 정도전의 현판으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다고 기둥에 달린 주련 4
개가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라고 한다. 1945년 이후 친일파를 제
대로 척결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나날이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 매국노의 흔
적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속히 이들을 뜯어내 장작으로 쓰기
바란다.


▲  명부전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녹색 승려머리의 지장보살과 좌우에 봉안된 10왕(十王)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름 가
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다. 10왕 끝에는 당찬 패기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서 있어 명부(저승)
식구들을 지킨다.


▲  명부전 옆구리에 둥지를 튼 연꽃 무리들 (거의 연잎만 있음)

▲  봉원사 미륵전(彌勒殿)

칠성각 뒷쪽에 있는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습이
다. 건물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아서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내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먹고
사는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데, 인등으로 인해 인등각이
라 불리기도 한다.


▲  미륵전 미륵불입상

부처가 사라지고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이 땅은 점점 아비규환 그 이상으
로 흘러가는데 중생의 고통을 나몰라하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륵불(彌勒佛)이 그저 밉기만 하
다. 그렇게 나오기 싫으면 다른 이를 보내 구제해 주던가. 꼭 56.7억년 후에 나타나야 되는가?
미리 땡겨서 나오는 센스좀 보여주기를.. 자꾸 숨어있는 것도 미륵불의 직무유기이다.

◀  미륵전 앞에 세워진 날씬한 7층석탑
왜정 이후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식으로 언제
무슨 이유로 세웠는지는 모르겠다.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닌데, 건물 우측에는 자애수란 이쁜 이름을 지닌 아
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는 150~200년 정도 된 것으로 여겨지며, 왜 자애수라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극락전에 그늘을 제공하는 것 때문은 아닌 듯 싶다.


▲  극락전 아미타불과 문수,보현보살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만월전(滿月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자 외진 숲속에 만월전이 있다. 이 건물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데,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그의 곁에 둔 것이 특징이다. 1904년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독성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가 갔을 당시는 애석하게도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내부는 살
피지 못했다.


▲  내려가는 길에 만난 아리따운 홍련

▲  삼천불전의 숨겨진 부분 - 절 주차장

봉원사에 조촐히 닦여진 연꽃 세상을 구경하며 그들의 향기에 취해 1시간 30분 정도 머물렀다.
연꽃이 완전 시간 도둑인 셈이다.
연꽃이 앗아간 나의 마음을 간신히 되찾아 절을 나올 때는 아직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 삼천불
전 서쪽으로 내려갔다. 경내에서 볼 때는 1층(아래 공양간을 합치면 2층)이지만 그 밑에 숨바
꼭질을 하는 공간이 있어 삼천불전은 거의 4층 규모이다. 물론 지형을 이용하여 지었기 때문에
저런 모습이 나온 것이다.

삼천불전 서쪽에는 주차장이 있는데, 이곳도 봉원사 주차장이다. 그 주차장을 지나니 봉원사의
숨겨진 나머지 보호수 1그루(느티나무)가 모습을 드러낸다.


▲  봉원사 느티나무 (4) - 서울시 보호수 13-5호

이 느티나무는 민가 옆에 비스듬히 자리해 있다. 하늘을 향한 높이는 23m, 둘레는 3m로 보호수
로 지정된 1981년 당시 추정 나이가 15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180여 년으로 보면 된다. 나무가
특이하게 절을 향해 45도 정도 고개를 숙이고 있어 절을 향한 일편단심을 보여준다.

이 나무를 끝으로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다음에 또 이곳과 인연을 짓
는다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아미타괘불도와 반야암(봉원사의 부속 암자)에 깃든 지방문화재
불상들을 꼭 두 눈에 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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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구하고 숨진 의로운 개의 넋이 서린, 임실 오수 의견비 (오수리석불, 해월암)

 


' 의견(義犬)의 고장, 임실 오수 나들이 '
오수 의견비
▲  오수 사람들의 자랑, 오수 의견비


 

울 제국이 한참 위세를 부리며 천하를 핍박하던 1월 한복판에 전북 중심부에 자리한 전주
(全州)와 임실(任實)을 찾았다.

전라도의 오랜 중심지인 전주에서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오후에 임실 땅으로 넘어가 의견의
고장인 오수를 찾았다.
임실군에 속한 오수는 임실읍과 남원시(南原市) 사이에 둥지를 튼 고을로 17번 국도와 전라
선(全羅線) 열차가 고을 한복판을 관통해 교통은 제법 괜찮은 편이다.

오수에는 이곳의 자랑인 의견비가 있으며, 오수지구대 앞에는 오래된 망루가 있다. 또한 오
수 시내 서쪽을 흐르는 오수천(獒樹川) 서쪽 너머에는 오수리석불과 해월암 등의 이름 없는
명소가 숨겨져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다. 의견비를 중심으로 2시간 정도 발품을 팔면 오수에
서린 4곳의 명소를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  주인을 구하고 숨진 의로운 견공(犬公)의 넋이 서린
오수 의견비(義犬碑) - 전북 지방민속문화재자료 1호

오수터미널에서 남쪽으로 4분 정도 뚜벅거리면 왜정 때 지어진 오수망루가 나온다. 망루 부근에
의견비를 알리는 커다란 갈색 이정표가 있는데, 그의 안내를 받아 오른쪽 골목(오수3길)을 들어
서면 의견비를 품은 원동산공원(圓東山公園)이 모습을 비춘다.

의견비는 자신을 기르던 주인을 구하고 숨진 개를 기리고자 세운 비석이다. 주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 개의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여 모르는 이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땅에는 오수 외
에도 밀양(密陽)과 구미(龜尾, ☞ 관련글 보러가기) 등 많은 지역에서 전해오고 있으며 다른 나
라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아 인간들 마음에 잔잔한 감동의 쓰나미를 선사한다.
개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여 그 주인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지기도 한다. 오수 의견비는 그런 의견을 위해 후대 사람들이 세
운 비석으로 이 땅에 전해오는 의견 관련 유적의 대명사라 할 수 있겠다.

이 땅의 의견 설화의 대표격인 오수 의견 설화는 고려 무신정권 때 활약했던 최자(滋, 1188~
1260
)의 보한집(補閑集)과 조선 초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소상히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견 설화는 등장 인물의 이름과 장소만 다를 뿐, 줄거리
는 비슷하다.

때는 신라 후기인 9~10세기 경, 거령현(居寧縣, 임실군 지사면)에 김개인(金盖仁)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애지중지 기르던 개가 있었는데 어딜 가든 항상 그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김개인은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 집으로 오다가 그만 길가에 퍽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마침 부근에서 산불이 일어났다. 산불은 삽시간에 그가 벌러덩 자는 곳까지 번져왔는
데, 개는 어떻게든 주인을 깨우고자 안간힘을 썼으나 그는 꿈나라에 깊숙히 들어가 좀처럼 깨어
나지를 못했다. 하여 개는 가까운 냇가로 달려가 몸에 물을 적시고 불에 뿌리는 형식으로 진화
작업에 들어갔다. 그야말로 온몸을 던져 화마(火魔)로부터 주인을 구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닌
것이다.

개는 간신히 불을 진압하여 주인을 구하는데 성공했으나 너무 체력을 소비한 나머지 쓰러져 결
국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간신히 꿈나라에서 나온 주인은 자기 옆에
쓰러져 있던 개를 보고 상황 파악을 하게 되었고, 그런 개를 껴안으며 목놓아 울었다.
나중에 그는 노래를 지어 개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친히 무덤을 만들어주고 그 옆에 자신의 지
팡이를 꽂았다. 그런데 지팡이에 그 개의 혼이라도 깃들여져 있는지 그것이 나무가 되어 무럭무
럭 자라나니 이 나무를 큰 개를 상징하는 오(獒)를 붙여 '오수(獒樹)'라 하였고, 그것이 이곳의
지명이 되었다.

그 이후, 오수 사람들은 의견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워 이를 동네의 긍지로 삼으니 지금도 그 자
랑은 여전하다. 비석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형편없이 마멸된 것을 1955년 4월 8일에
지금의 비석으로 새로 갈았으며, 비석에 비각을 씌우고, 주변을 정리하여 원동산공원을 닦았다.


▲  의견상과 나이 500년이 넘은 커다란 느티나무 (임실군 보호수 9-11-3호)
의견상에 늘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는 느티나무로 높이가 무려 18m에 이른다.
허나 혹독한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벌거숭이의 몸으로
제국의 시련을 견딘다.

▲  글씨의 폼이 예사롭지 않은 원동산공원 정문

의견비를 품은 원동산공원은 조그만 공원으로 오수 사람들의 포근한 휴식처이다. 정문을 들어서
면 정면으로 의견비를 간직한 비각이 보인다. 그 비각까지는 돌이 박힌 돌길이 펼쳐져 있고, 그
주변으로 여러 나무들이 공원을 아름답게 수식한다.

비각에 들어있는 의견비는 1955년에 새로 만든 것으로 비각 좌측에는 나이 500년의 오랜 느티나
무가 의견비와 의견상의 우산/양산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공원에 있는 나무 중, 제일 오래된
것으로 어쩌면 의견의 주인이 심은 나무의 후예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주인의 혼이라도 서린 듯,
언제나 비석과 의견상을 지켜주는 느티나무로 서로를 보듬은 정겨운 풍경이다.

의견비 동북쪽에는 의견의 형상이 마치 위대한 인물의 동상처럼 세워져 있는데, 예전에 왔을 때
는 그의 목에 꽃목걸이가 걸려져 있었다. 허나 지금은 겨울이라서 목걸이는 없는 상태, 이처럼
오수는 의견의 고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를 소재로 한 보신탕으로도 유명하여 나그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기도 한다. 한쪽에서는 의견비와 동상을 만들어 의견을 기리지만 다른
쪽에서는 개를 잡아 보신탕을 끓여먹는 것이다. 어쩌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미묘한 현장이기도
하지만 의견은 어디까지나 의견이고 보신탕은 어디까지나 보신탕일 뿐이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
는 쓸데없는 생각이나 비난은 없었으면 한다.

▲  공원 구석에 있는 비석군(碑石群)

▲  오수고적기실비(獒樹古蹟記實碑, 오른쪽)
, 오수의견비 문화재 표석(왼쪽)


▲  의견비각(義犬碑閣)에 담긴 의견비

▲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의견상

의견을 기리는 비석이나 무덤은 있어도 동상까지 갖춘 곳은 천하에서 오수가 거의 유일할 것이
다. 그만큼 동네 사람들의 긍지와 사랑이 대단한 것이다. 물론 사람 입장에서 보면 말이다. 개
의 입장에서는 이런 것을 과연 어찌 생각하고 있을까?


※ 오수 의견비 찾아가기 (2015년 10월 기준)
* 용산역,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익산역, 순천역, 여수엑스포역에서 전라선 무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오수역 하차
* 동서울터미널에서 오수 경유 남원행 직행버스가 1일 3회 떠난다.
* 전주, 남원에서 오수 방면 직행버스 이용 (1시간에 3~5회 운행)
* 오수터미널을 나와서 오수시장 방면 남쪽으로 4분 정도 걸으면 의견비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
  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1분 들어가면 의견비가 있는 원동산공원이다.
* 오수역에서 택시를 이용하거나 도보 20분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는 주변 길가에 하면 됨)
① 순천완주고속도로 → 오수나들목을 나와서 오수, 남원 방면 → 남악교차로에서 우회전 → 오
   수 시내, 오수 지구대에서 좌회전 → 하나로마트에서 바로 우회전 → 오수 의견비
* 소재지 -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322


♠  오수 지역 명소 둘러보기

▲  임실 오수망루(獒樹望樓) - 등록문화재 188호

수 시내 한복판인 오수지구대(치안센터) 앞에는 고색의 때가 흠뻑 묻어난 붉은 피부의 돌탑이
있다. 그가 바로 이곳을 지키던 오수망루이다.

오수망루는 왜정(倭政) 말기인 194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붉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높이는
12m, 하부 지름이 2.4m로 이 땅에 남아있는 망루 가운데 가장 높다. 그의 역할은 마을을 지키며
통제하고 비상 상황 또는 야간 통행금지를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축조 방식은 벽돌을 원통형으로 쌓아 꼭대기에 6각형의 망대(望臺)를 두었으며, 6각의 각 면에
는 구멍을 내어 사방을 살펴볼 수 있게 했다. 망대에는 사이렌을 울리던 스피커 2개가 남아 있
으며, 망루 내부에는 지름 65cm로 벽을 따라 철제 계단이 놓여 있고, 망루 1층에는 작은 문이
있다.

2005년 국가 지정 등록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면서 현재는 망루 내부롤 들어갈 수 없다. 얼핏
보면 공장의 굴뚝이나 교도소의 망루와도 비슷해 보이는데, 왜정부터 근래까지 오수 고을을 지
키고 통제하던 존재로 역사성과 건축학적 가치까지 지녔으며, 망루가 걸친 벽돌마다 70년 세월
의 때가 가득해 중후한 멋을 선사한다. 문화재 지정명칭은 '임실오수망루'이나 '오수망루'로 불
러도 무관하다.
* 오수망루 소재지 -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348-6


▲  오수리 석불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86호

오수의견비를 둘러보고 공원 정문에서 왼쪽으로 2분 정도 가면 오수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오
수천(獒樹川) 둑방길이 나온다. 둑방길에서 오른쪽(북쪽)으로 2분 가면 하천 위에 걸린 월교란
다리가 나오는데, 그 다리를 건너면 길은 좌우로 갈린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해월암로 이
어지고, 왼쪽으로 가면 바로 관월마을인데, 그 마을로 들어서 산이 있는 서쪽으로 계속 비집고
들어가면 산림과 접한 마을 서쪽 끝으머리에 '도석사'란 조그만 절과 뾰족하게 솟은 석불이 손
짓한다. 그가 바로 관월마을의 수호신 오수리 석불이다.


▲  멀리서 본 오수리 석불

동쪽으로 관월마을과 오수 시내를 굽어보며 서 있는 오수리석불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여
겨지며, 미륵불(彌勒佛)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불상과 관련된 기록이 전혀 없어 자세한 것은 알
지 못하며, 다만 믿거나 말거나 재미있는 전설이 한 토막 아련하게 전해온다.

대략 300년 전 마을 아낙네가 마을 뒷산에서 집채만한 바위가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저것좀 보소!!' 큰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바위는 뻘쭘하여 그 자리에 멈춰 섰는
데, 그 바위가 바로 오수리 석불이라는 것이다. 그 전설을 통해 아마도 산사태나 홍수로 떠밀려
왔음을 짐작해 볼 수 있겠는데, 불상 주변에는 절터로 보이는 흔적이 없으므로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었던 듯 싶다. (근처 해월암에서 넘어 왔을 가능성도 있음)
하지만 불상이 입을 굳게 봉하며 비밀을 말해주려 하질 않으니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어
쨌든 산에서 내려온 석불을 받아들인 마을 사람들은 그를 정성껏 모셨는데, 만약 그가 마을 앞
까지 내려왔다면 마을이 더욱 번창하고 자손들이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오수리 석불은 하나의 돌로 된 불상으로 아랫 부분이 땅속에 묻혀있어 맨땅 위에 서 있다. 석불
의 높이는 3.5m로 대체로 완만한 타원형이며, 얼굴은 거의 무표정해 보인다. 눈은 지그시 떠 있
고, 코는 볼록하며 입은 굳게 다물어져 미소는 보이지 않고 볼에는 살이 많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하게 솟아있고, 두 귀는 중생의 작은 소리하나 놓치
지 않으려는 듯 어깨까지 크게 늘어져 있다.

몸에 걸쳐진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두 손은 옷 안에 들어있으며, 볼록하게 표현된 소매
자락은 법의와 함께 밑으로 내려져 있다. 얼굴과 몸 뒤쪽에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등의 광
배(光背)가 새겨져 있는데, 화염무늬가 세심하게 수놓여 있다.


오늘도 묵묵히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그의 가호 덕분인지 관월마을과 오수는 그다지 큰 사
고는 없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불상 양식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오랜 세월을 뛰어넘은 정정한 모
습으로 마을 사람들의 친근한 벗이자 정신적인 지주로 그들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석불 옆에는 그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현대 사찰 도석사가 자리해 있다.
* 오수리석불 소재지 -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550-1


▲  해월암(海月庵)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24호
해월암에서 가장 연세가 지긋한 건물로 대웅전과 달리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건물 좌측칸에는 해월암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귀뜀해준다.
 

수에서 관월교를 건너면 길이 2갈래로 갈린다. 왼쪽은 앞에서 언급한 오수리석불이 있는 관월
마을이고, 오른쪽 길은 산으로 올라가는데, 그 산길의 끝에 조그만 암자 해월암이 어미 품에 안
긴 알처럼 포근히 터를 닦았다.

오수 시내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해월암은 고려 후기인 1352년(공민왕 1년)에 해경(海
境)과 월산(月山) 두 승려가 창건했다고 하며, 1396년(조선 태조 4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절의 이름인 해월은 해경과 월산의 이름 첫 자를 딴 것
이라고 한다.

창건 이후 1556년(명종 11년)에 남원부사(南原府使)가 중건했다고 하며, 1747년에 중수가 있었
다. 1858년(철종 9년)에도 중건이 있었고, 1915년 봉인(奉仁)이 불상을 만들어 봉안하면서 절을
손질하였다. 1990년 주지 정현이 대웅전을 새로 지어 지금의 면모를 갖추었다.


▲  해월암 가는 길목에 자리한 청기와 누각
오수 사람들의 납량 피서지로 이곳에 오르면 조그만 오수 시내가 두 눈에 들어온다.


손바닥처럼 조그만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산신각과 오래된 요사, 그리고 본
연당(本然堂)이라 불리는 새 요사 등 4~5동의 건물이 있다. 이중 대웅전 뒤에 자리한 옛 요사가
해월암의 유일한 옛 흔적으로 그가 '해월암'이란 이름으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옛 요사는 부엌을 갖춘 방 3개짜리 기와집으로 불전(佛殿)이라기 보다는 양
반가의 기와집이나 별당(別堂), 경치가 좋은 곳에 짓는 조그만 기와집 비슷한 모습이다.

옛 요사를 가리고 선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556년에 처음 지어졌다
고 한다. 1915년에 중수하고 1990년에 새로 지었는데, 내부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이 협시한 목조(木彫) 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이들은 1352년 창건 당시의
불상이라고 우기고 있으나 신빙성은 없어 보인다. 불상이 있는 수미단(須彌壇)은 수려하기 그지
없으며, 건물 내외부에 그려진 단청은 절의 왜소함을 능히 덮을 정도로 화려하다.
또한 1915년에 쓰여진 '해월암중수기'와 '제해월암(題海月庵)' 현판이 있는데, 제해월암은 해월
암에 대한 시문(詩文)이다. 대웅전 앞에는 석등 1쌍이 서 있으며, 그 좌측에 새 요사인 본연당
이 방금 지어진 산듯한 모습으로 승려와 신도의 숙식을 책임진다.

▲  하얀 눈기와를 지닌 해월암 대웅전

▲  해월암 본연당

대웅전을 기준으로 우측 높은 곳에 산신각이 경내를 굽어본다. 산신각(山神閣)은 정면 1칸, 측
면 1칸의 조촐한 크기로 우리에게 친숙한 산신(山神)을 비롯하여 칠성탱(七星幀)을 머금고 있다.

해월암은 오수 지역의 유일한 옛 절로 나무가 무성하여 산속 깊숙히 들어온 기분이다. 속세와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고, 속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아 찾는 이는 동네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
윽한 산중암자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적막에 잠긴 절에 지나가던 산바람이 졸고 있던 대웅전
추녀의 풍경물고기를 깨워 겨울잠에 든 절을 살포시 깨운다.
답사객의 발길이 거의 없는 탓인지 본연당에서 나온 승려가 약간 경계를 품으며 무슨 용건으로
왔냐고 묻는다. 그래서 답을 주니 그제서야 표정을 바로 고치고서는 잘 구경하라며 안으로 들어
간다. 경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대웅전 앞 뜨락은 겨울 제국이 보낸 눈이 한가득 쌓여있었
고, 날씨가 조금은 풀린 탓에 눈들도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조금씩 철수하고 있었다.

▲  경내를 굽어보는 칠성각

▲  산신각에서 바라본 해월암 경내


▲  해월암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길

해월암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7시. 겨울 제국의 쫓겨 햇님도 서둘러 퇴근을 재촉하고 어두
운 기운은 다시 세상을 훔치려 든다. 이리하여 의견의 고장 임실 오수 나들이는 대단원의 마침
표를 찍는다.

* 해월암 소재지 -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대명리 715 (☎ 063-642-6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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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봉 정상에 우뚝 자리한 거대한 석불,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

 


' 팔공산(八公山) 갓바위 '
팔공산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
▲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의 위엄

 


겨울의 제국(帝國)이 가을을 몰아내며 천하를 거의 접수하던 11월 끝 주말에 소원을 들어주기
로 명성이 자자한 팔공산 갓바위를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강남고속터미널에서 대구행 일반고속버스를 타고 약 3시간 30분을 달려 서대구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경산시내버스 708번을 타고 대구(大邱) 시내를 동서로 가르며
1시간 정도를 달려 경산시 하양읍(河陽邑)에 도착, 다시 갓바위로 올라가는 경산시내버스 803
번(경산역,중산동↔갓바위)을 타고 약 40분을 달려 비로소 갓바위 종점에 이르렀다.

갓바위 종점은 해발 600m 고지로 선본사 바로 밑이다. 시내버스는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지만
일반 수레들은 약 1km 밑에 닦여진 주차장에서 바퀴를 멈춰야 된다. 물론 종점까지 진입도 가
능하나 수레를 세울 공간이 여의치 않다.
이 땅의 주요 불교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 받는 갓바위와 가까운 곳이라 아랫 세상과 공기
부터가 확연히 틀리다. 청정한 기운이 감돌아 잡다한 번뇌에 유린당한 나의 머리와 마음을 깨
끗하게 정화시켜준다. 물론 속세로 나가면 정화된 번뇌는 다시금 나를 범할 것이다.

갓바위 종점에서 길은 2갈래로 갈라진다. 왼쪽 길은 갓바위, 오른쪽은 선본사로 통하는데, 선
본사는 종점 바로 윗쪽이라 접근은 편하다. 그곳은 갓바위를 보고 내려올 때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무척이나 보고싶은 갓바위로 길을 잡는다. 여기서 갓바위까지 공식적인 거리는 800m이나
체감거리는 그 2배 이상으로 넉넉잡아 30분 정도 걸린다. 게다가 산길이 좀 가파르고 계단 또
한 많아 오르기가 썩 만만치는 않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갓바위를 향한 중생(衆生)들의 발길
을 막지는 못한다.

갓바위를 향해 20분 정도 오르다 보면 칠성각과 요사가 있는 갓바위 하단(下段)에 이른다. 갓
바위를 비롯하여 선본사에서 갓바위로 오르는 길목에 건물들은 모두 선본사 소속인데, 그중에
서 아래쪽에 있는 요사와 칠성각 구역은 하단이라 부르며, 하단과 갓바위 중간의 대웅전 구역
은 중단(中段), 갓바위를 상단이라 부른다. 이들 하단과 중단은 갓바위를 관리하고 그를 찾아
온 중생들의 편의를 위해 조성되었다. 그리고 선본사 경내와 갓바위 일대를 구분 짓고자 편의
상 선본사는 '본절', 갓바위 일대는 '웃절'이라 부른다. 쉽게 풀이하면 선본사는 본점(本店),
갓바위는 일종의 지점(支店)이 된다. 하지만 본점보다는 지점이 훨씬 사람이 많으며 그로 인
하여 지점의 규모는 본점을 훨씬 능가한다.


▲  갓바위로 오르는 산길 (계단길 이전)

◀  갓바위로 오르는 계단길
오색영롱한 연등이 갓바위까지 대롱대롱
이어져 중생들이 그릇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인도한다.


♠  갓바위 하단 (칠성각, 요사)

▲  'ㄱ' 모습의 요사

갓바위 종점에서 20분 정도 오르면 갓바위 하단에 이른다. 오르는 길은 처음에는 경사가 완만하
지만 중간에 계단길로 돌변하면서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조금 급해진다. 허나 바람이 불면 날아
갈 정도의 허약 체질이 아닌 이상은 누구든 오를 수 있으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갓바위 하단은 1973년에 조성된 것으로 가파른 산자락에 터를 닦아 요사(寮舍)와 칠성각(七星閣
)을 지었다. 요사는 그런 경사에 지어진 탓에 3층이 되었으며, 칠성각과 맞닿은 제일 위층에는
공양간이 있는데, 갓바위를 찾은 중생에게 공양(供養)을 제공한다. 굳이 공양이 아니더라도 두
다리를 쉬며 이야기꽃도 피울 수 있는 휴식처의 역할도 하고 있으며, 갓바위 수요가 많은 탓에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시간은 변동될 수 있음)까지 언제든지 공양을 할 수 있다. (초파일과 대
학입시철, 기타 행사일에는 보통 새벽 1시까지 공양 가능)


▲  3가지의 이름과 용도를 지닌 칠성각(七星閣)

공양간 맞은편 높다란 기단(基壇) 위에는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은 1973년에 지어진 것
으로 1990년에 중수했다.
칠성각이라고 하지만 그건 건물 가운데인 어칸에만 해당되며, 건물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은 산신각(山神閣), 우측은 용왕각(龍王閣)이다. 건물은 하나인데, 각 칸마다 건물의 이름
을 달리한 특이한 구조이다. 허나 칠성(七星)이 그 건물의 중심이기 때문에 칠성각으로 불린다.

칠성각은 칠성신(七星神)이 그려진 칠성탱화(幀畵)가, 산신각에는 산신탱화와 산신상, 용왕각은
바다를 지키는 용왕의 탱화와 용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바다와 멀리 떨어진 산사(山寺)가 별로
연관도 없어보이는 용왕을 위한 공간을 둔 것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1802년 4월 초파일에 제작
된 200년 묵은 신중탱화(神衆幀畵)가 용왕탱 옆에 걸려있으나 건물 접근이 불가하여 보기가 힘
들며, 건물 밑에 촛불이 가득한 곳은 수각(水閣)이라 부른다.
칠성각 좌우로 돌로 만든 12지신상이 건물을 지키고 있고, 각기 모습이 다른 석등이 자리해 있
다. 예전에는 건물에 들어가 예불을 올렸지만 찾는 사람에 비해 건물이 너무 좁아 건물 접근을
통제하고 공양간 사이 뜨락에 넓게 예불 장소를 마련해 예불의 편의를 제공했다.
(매월 초순 음력 1~8일에만 삼성각을 개방함)

▲  칠성각 우측 계단에 늘어선 12지신상

▲  갓바위 하단에서 갓바위로
오르는 계단길


초를 피우는 공간에는 약 1,000개의 초가 앞다투어 자신을 불사르고 있고, 향을 피우는 공간에
는 향을 꽂을 공간이 없을 정도로 무수한 향이 연기를 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초와 향이 가득
한 것은 석가탄신일 외에는 정말 처음 본다. 향은 공짜로 이용할 수 있지만, 초는 기도비를 내
야 된다. 물론 그냥 가져가도 된다. 하지만 적지 않게 눈치가 보인다. 시주금은 정해진 것은 없
지만, 많으면 많을 수록 절에서 기뻐할 것이다. 실제로 갓바위에서 일하는 신도 아줌마들이 기
도비를 많이 내라고 종용한다는 내용이 선본사 홈페이지에 올라와 시끄러운 적도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점심시간을 지나 13시이다. 시장한 배를 달래고자 공양간에 발을 들이니 많은 이
들이 공양을 하고 있었고, 공양간 한쪽 구석에는 등산객과 참배객 등이 삼삼오오 앉아 쉬고 있
었다. 공양줄도 길어서 2분 정도 지나야 비로소 공양밥을 가져올 수 있었다. 갓바위를 든든한
후광으로 삼아 수입도 짭짤하므로 공양밥도 제법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밥을 보고 그야말
로 경악을 하고 말았다. 겨우 밥에 씨레기국, 그리고 아주 잘게 썰은 시어빠진 무김치가 전부였
기 때문이다. 예전에 경기도 이천 영월암(映月庵, ☞ 관련글 보러가기)에서 먹은 저녁공양은 반
찬이 무려 10가지에 이르렀고, 다른 절집들도 그런데로 괜찮게 나왔는데, 돈을 그야말로 삽으로
쓸어담는 곳에서 그들의 소중한 손님인 중생들에게 제공하는 공양은 그들만도 훨씬 못한 것이다.
그 돈은 다 어디에 쓰이는지 공양 예산이 기껏해야 얼마나 된다고 중생에게 쓰기가 아까운 것일
까? 그렇다고 상다리가 아작날 정도의 진수성찬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나
와야지 달랑 시어빠진 무김치는 뭐라 말인가..? 평소에도 공양밥이 저 지경으로 나오는지? 아니
면 그날의 메뉴가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공양밥에 대한 보다 세심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다
고 여겨진다. 그것이 바로 갓바위부처의 뜻일 것이다.

하지만 공양이 저 따위로 나온다고 해서 나에게 꿩 대신 닭을 고를 여유는 없었다. 우선은 시장
한 배를 달래줘야 되니 그거라도 말끔히 먹어치웠다.

이곳은 공양을 마치면 자신이 먹은 그릇과 쟁반, 수저는 씻어야된다. 씻는 곳에도 버젓히 불전
함이 놓여져 애타게 돈을 원한다. 설거지를 하고 그릇과 쟁반, 수저 자리에 놓고 갓바위로 다시
길을 재촉한다.


♠  갓바위 중단 (대웅전, 3층석탑)

▲  갓바위 대웅전(大雄殿)

하단에서 계단을 5분 정도 오르면 가파른 산자락에 터를 닦은 중단에 이른다. 이곳은 해발 750m
고지로 웃절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이 있는데,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2층 규모의 맞배지
붕 건물로 윗층은 대웅전, 아랫층은 갓바위를 관리하는 사무실이 있다.
이들 모두 근래에 조성되었으며, 조망(眺望)이 일품이라 선본사를 비롯하여 그곳을 둘러싼 산줄
기와 봉우리가 거침없이 바라보여 눈과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대웅전 뜰에는 석가탑을 닮은 3층석탑이 서 있으며, 높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천상세계의 석탑
처럼 장엄하게 다가온다. 대웅전에는 자비로운 모습의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文殊
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한 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앞 3층석탑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  하단에서 중단 가는 길목에 자리한 애자모지장굴

대웅전으로 오르기 직전 오른쪽 바위에 조그만 굴이 있는데, 이를 애자모지장굴이라 그런다. 굴
안에는 유난히도 동자상이 많은데, 굴의 이름도 그렇고, 동자상도 그렇고, 아마도 어린 나이에
죽은 넋들을 달래는 공간인 듯 싶다.
동자상 외에도 다보탑과 부처상, 지장보살상, 금동불 등이 중간중간 자리를 채우고 있으며, 이
들은 모두 중생들이 손수 갖다놓은 것으로 굴 바로 앞에 저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불전함이 옥의 티처럼 놓여져 있다.


▲  대웅전 뒤쪽에서 바라본 능성재 산줄기
능성재에서 서쪽으로 가면 팔공산과 동화사로 이어지며, 동쪽은
은해사(銀海寺)와 백흥암(百興庵)으로 이어진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선본사 남쪽 산줄기

▲  중단에서 갓바위로 오르는 도중에 잠시 뒤를 돌아보다.

저 아래 까마득하게 보이는 절이 바로 선본사이다. 내가 저기서 여기까지 올라왔다니 거리는 고
작 800m 남짓인데, 정말 땅에서 하늘로 오른 것처럼 지극히 멀어 보인다. 갓바위는 수레가 오를
수 없기 대문에 저 밑에서 갓바위까지 케이블을 연결하여 물건을 실어 나른다.


♠  소원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자자한 신라 후기 불상, 약사불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지는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 - 보물 431호

중단에서 5분 정도 오르면 관봉(冠峰, 852m) 정상인 갓바위이다. 선본사에서는 이곳을 상단이라
부르는데, 매서운 산바람이 석불을 희롱하는 800m 고지임에도 영험한 갓바위부처를 친견하러 구
름처럼 모여든 중생들로 갓바위의 열기는 태양처럼 뜨겁다. 이곳은 하늘과도 가깝고 주변이 모
두 눈 밑에 펼쳐진 산봉우리라 마치 수미산(須彌山) 정상의 부처의 세계나 하늘 세계에 들어선
기분이며, 아랫 세상과는 차원이 틀린 청정한 기운이 갓바위 주변을 진하게 맴돈다. 거의 신성
하고 거룩한 성지(聖地) 같은 갓바위부처는 근엄한 표정으로 힘들게 올라온 중생을 맞는다.

중생이 그들의 소망을 들이밀며 켜놓은 촛불은 주변의 산하(山河)를 능히 태우고도 남을 정도로
막대하며, 향의 냄새는 관봉 주변을 가득 맴돈다. 촛불에서 녹아 내린 촛농은 하루 몇 가마에 이
를 정도이고. 하루 동안 소비되는 향은 가히 천하 최대급이다. 휴일에는 수천 명이 찾아와 예를
올리며, 평일에는 적어도 수백 명이 다녀간다. 특히 대학입시철에는 자식의 대학 급제를 소망하
고자 수능일 한달 전부터 수험생 부모들이 몰려들어 관봉이 무너질 지경이며, 4월 초파일에도 발
디딜 틈이 없다.
상황이 이러니 이곳에 뿌려지는 시주금과 기도금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성수기에는 최대 억단위
의 돈이 움직일 것이고, 비수기에도 최저 수백만 원이 갓바위 주변 불전함에 들어갈 것이다. 갓
바위를 배경으로 그렇게 돈을 쓸어담는 선본사가 중생들에게 제공하는 공양음식은 왜 저 모양인
지 그 많은 돈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사뭇 궁금할 따름이다.

지금은 갓바위부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불상은 신라 후기
에 만들어진 이래 계속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인근 사람들이나 찾아올 정도로 인지도는 낮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 팔공산 북쪽에서 제2석굴암이 발견되면서 팔공산 일대에 불교문화유산을
본격적으로 뒤적거리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1962년 갓바위부처가 발견되었는데, 그 당시 동
아일보를 비롯한 각종 신문들이 갓바위 발견을 특필로 다루었다.
그후 선본사에서 갓바위를 적극적으로 영험있는 석불로 홍보하면서 그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
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지금처럼 성지화 된 것은 길어봐야 60년도 되지 않는다.

갓바위부처의 문화재청 지정 이름은 관봉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이다. 갓바위란 이름은
불상이 머리 위에 쓰고 있는 넓적한 돌덩이가 갓을 닮아서 유래된 것으로 관봉이란 이름은 갓바
위가 있는 봉우리란 뜻이다. 여기서 관(冠)은 모자, 갓을 뜻한다. 그가 둥지를 튼 관봉은 팔공
산(八公山)의 동남쪽 봉우리로 대구와 경산의 경계선이다. 높이가 852m(어떤 자료에는 851m)에
이르며, 산 정상에 자리하여 조망 하나는 끝내준다.

갓바위의 정체는 약사불(藥師佛)이다. 그의 왼손에 약사불의 필수품인 약합(藥盒)이 들려져 있
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본사는 갓바위를 내세워 약사도량(藥師道場)임을 내세운다. 허나 불상의
정체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미륵불(彌勒佛),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무슨 대수랴? 갓바위는 그런 쓰잘데기 없는 소모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중생들의 소망
을 접수하고 처리하는 데에 바쁘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선본사의 주장에 따르면 7세기 중반이라고 한다.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수제
자인 의현대사(義玄大師)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자 638년(선덕여왕 7년)에 조성했다는 것이다.
의현은 직접 불상을 제작했는데, 밤에는 학이 와서 그를 따스히 감싸주고, 낮에는 식량을 가져
와 먹여 살렸다는 거짓말이 전설로 전해온다. 허나 불상의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신라 후기인
8~9세기 석불로 보고 있다. 허나 그 장대한 세월에 비해 건강 상태는 제법 양호하여 나이에 비
해 많이 젊어보인다.

석불의 높이는 4m로 관봉에 있는 바위를 다듬어서 만든 것이다. 머리부터 그가 앉아있는 대좌(
臺座)까지 모두 하나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광배(光背)는 따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뒤
쪽에 병풍처럼 선 바위가 자연스럽게 광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광배를 만들지 않았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큼직하다. 바로 그 위에 두께 15cm 정도의
얇은 돌이 모자처럼 얹혀져 있다. 물론 그 돌과 몸통은 하나의 돌이다. 얼굴은 미소는 전혀 찾
아볼 수 없는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보다 더 근엄하다. 위엄이 강하게 배여난 그 앞에
서는 감히 시선 조차 나누는 것도 두려울 정도로 나도 모르게 머리가 조아려진다.
얼굴의 양쪽 볼은 두툼하게 살이 있어 풍만해 보이며, 입술은 굳게 다물어 근엄함을 더욱 올려
준다. 눈은 살짝 감고 있고, 눈썹은 무지개처럼 곡선이 졌다. 그런 눈썹 사이로 둥그런 백호(白
毫)가 있다. 두 귀는 중생의 소원을 빠짐없이 듣기 위해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게 그어져 있다.

그의 어깨는 반듯하고 당당하며,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고
있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 비슷한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이 수인은 석굴암 본존불과 비
슷하다. 왼손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왼쪽 발 부근에 손바닥을 위로 향하며 조그만 약합을 들
고 있다.
불상이 입은 옷은 통견(通肩)인데 두 팔을 거쳐 두 무릎을 덮고 대좌 아래로 흘러내렸으며, 가
슴 앞에는 속옷의 일종인 승가리(僧伽梨) 혹은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보인다. 불상 뒷면에는
옷의 표현이 없고 그냥 평면이다. 그가 앉은 대좌는 불상에 비해 작다.

거의 성지나 다름이 없는 갓바위, 허나 찾아오는 길이 쉽지가 않다. 험한 산을 올라야 되고, 그
길 또한 속세살이처럼 가파르다. 갓바위 주변은 바위가 많고 낭떠러지가 많아 늘 산악사고가 도
사렸다. 또한 예전에는 불상 바로 앞에 마련된 공간에서 예를 올렸는데, 그 공간이 매우 좁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석불 전방에 80평의 넓은 공간을 닦았으며, 바닥에 돌을 깔고 주위에 난간을
둘렀다. 그리고 선본사에서 갓바위로 오르는 길을 정비하여 예전보다 많이 넓어졌으며, 계단과
철제 난간을 많이 보완했다. 그래서 예전에 비해 접근하기가 조금은 쉬워졌다.

석불 앞에 넓게 예불 공간을 마련하면서 석불 주변은 출입이 통제되어 그의 앞까지 다가설 수가
없게 되었다. 예불 장소와 석불 사이에는 초와 향을 피우는 장소가 좌우로 길게 마련되어 있으
며, 초를 팔고 그곳을 통제하는 신도 아줌마가 늘 자리를 지킨다. 불상 좌측 바위에는 중생이
붙여놓은 동전이 가득하며, 그 맞은편에 갓바위 주변을 관리하는 절 건물이 있다. 불상 우측에
는 청색을 띈 조그만 동종(銅鍾)이 있으며, 대구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다.


▲  갓바위부처 좌측 바위
중생이 붙여놓은 무수한 동전이 바위 여기저기에 자석처럼 붙어있다.

▲  갓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선본사 북쪽 산줄기와 남쪽 산줄기 사이로 갓바위지구(경산 쪽)가 보인다.


갓바위를 보러 멀리서 왔으니 인사는 해야겠지, 그래서 향을 피우고 초에 불을 심어 거기에 소
박한 소망을 하나 붙여 인사를 올린다. 이렇게 하면 소망이 접수되는 것일까? 지성으로 기도를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그 지성에 정도가 궁금하다. 정말 108배나 3,000배를 해야
소원이 접수가 되는 것인가? 그것도 아리송하다. 주변을 보니 방석을 펴고 염불을 외며 온종일
절을 올리는 이들이 많다.

초는 갓바위 좌측 건물에 있는데, 시주금을 내고 가져 가라고 쓰여 있다. 나는 가난한 중생이라
그냥 가져와서 사용했다. 설마 소망도 돈을 낸 만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아무리 영험하다고 해도 예불을 하고 싶지 않다. 부처가 언제부터 돈장사를 했단 말인가?
부디 소망이 처리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기도로 뜨거운 성스러운 현장 갓바위를 떠났다. 그가
정말 명성대로 무병장수를 비롯한 소원 하나는 꼭 들어주는지는 알 수 없다. 소망이 이루어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절반만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예 안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 소원
은 이루어지지 않았음ㅠㅠ) 하지만 그들의 소망을 모두 처리하는 것은 갓바위 부처에게도 은근
히 부담이 될 것이다. 괜히 선본사에서 요란하게 홍보한 탓에 갓바위만 피곤하게 된 것은 아닐
까 싶다.

참고로 믿거나 말거나 설화를 더 덧붙이자면 갓바위 밑동네인 와촌에 가뭄이 들면 팔공산 관봉(
갓바위)에 불을 지르고 새까맣게 태운다. 그러면 용이 갓바위를 씻고자 비를 내린다고 한다. 또
한 갓바위(양)와 불굴사(음)를 같은 날에 찾아 예불을 하면 소원성취를 한다고 한다. 왜냐면 풍
수지리적으로 갓바위는 팔공산의 양의 기운을 품고 있고, 불굴사(佛窟寺) 자리는 팔공산의 음의
기운을 품고 있는 요지라서 그렇다고 한다.


▲  갓바위를 뒤로하고 선본사로 내려가다.


♠  갓바위를 후광으로 든든하게 절을 꾸리는 오랜 절집
약사도량을 표방하는 ~ 팔공산 선본사(禪本寺)

갓바위 종점과 지척인 선본사는 팔공산에 둥지를 튼 오랜 절집의 하나이다. 조계종(曹溪宗) 소
속으로 갓바위를 든든한 밥줄로 삼아 절을 꾸리고 있는데, 갓바위로 올라가는 길목에 여러 건물
들은 모두 선본사 소속이며, 갓바위 역시 이곳에서 관리하고 있다. 선본사란 절 자체는 작지만
그 범위는 상당하며, 갓바위 지구와 구별하기 위해 선본사를 본절(본점), 갓바위를 웃절(지점)
이라 부른다. 허나 지점이 더 손님이 많고 수입이 훨씬 많다. 그리고 건물의 규모도 본점을 능
가한다. 그에 비해 본점은 인적이 드물다. 그래서 본점보다는 지점에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
고 있는 실정이다.

선본사는 신라 소지왕(炤知王) 13년인 491년에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세웠다고 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증거를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극달화상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으며, 그 시절에는 신라에 고구려 불교가 전파되긴 했으나 서출지(書出池)의 전설처럼 고구려
불교는 한참 축출되던 시기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어찌 신라의 영역인 이곳에 절이 세워질 수
있겠는가? 참고로 산 너머의 대구 제일의 고찰 동화사(桐華寺)도 극달화상이 창건했다고 우기고
있다.

그럼 언제 창건되었을까? 경내와 주변에 흩어진 여러 석조유물(불상 대좌와 석등, 극락전 뒤쪽
의 오래된 석축)과 절 남쪽 노적봉에 있는 3층석탑을 통해 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3층석탑은 8세기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비록 절과 떨어져있지만 이곳과 관련이 있는 유
물로 여겨진다. 석조유물 역시 8~9세기 것으로 보이며, 절을 세운 극달이란 인물은 신라 후기에
활동했던 승려로 짐작된다.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는 내력이 남아있지 않으며, 17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사적이 보인다.
우선 1614년에 수청(秀廳)이 절을 중수했다. 1766년 기성화상(箕成和尙)이 중건했으며, 1802년
(순조 2년)에 일암당(日庵堂)이 국성(國成) 등과 함께 신중탱화를 조성했다. 그 탱화는 현재 갓
바위 칠성각에 있다. 그 이후 1820년과 1877년에 중수했으며, 1970년 이후 갓바위 부근에 불전
을 조성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산신각과 요사, 선방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갓바위 지
구(웃절)에는 8~9동의 불전이 있다. 소장문화유산은 관봉 꼭대기의 갓바위부처(관봉석조여래좌
상)와 노적봉 부근의 3층석탑(경북지방유형문화재 115호)이 있으며, 불상의 대좌와 석등의 좌대
(座臺) 등 신라 후기 석조 유물이 여러 점 존재한다.

갓바위를 관리하는 본절이지만 오히려 갓바위의 그늘에 제대로 가려 경내는 썰렁하다. 허나 고
요하고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를 제대로 누릴 수 있으며, 사람들로 늘 북적거려 기도를 올리는
것도 쉽지 않은 갓바위와 달리 마음 편히 예불을 올릴 수 있다.

※ 갓바위, 선본사 찾아가기 (2014년 12월 기준)
① 하양 경유
* 대구 1호선 안심역(4번 출구)에서 55, 508, 518, 555, 708, 808, 814, 818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양터미널이나 하양초교 하차, 길 건너에서 갓바위행 803번 시내버스(30분 간격) 이용
* 동대구역에서 708번(역 맞은편 정류장) / 814, 818번(역 바로 앞) 시내버스를 타고 하양에서 
  803번으로 환승
* 갓바위 종점에서 선본사는 바로 보이며, 갓바위까지 걸어서 30분 소요
② 경산시내 경유
* 대구 2호선 영남대역(4번 출구)과 경산역(경부선)에서 803번 시내버스 이용
③ 대구 갓바위 경유
* 대구 1,2호선 반월당역(2,13번 출구), 대구역(대구역전우체국) 맞은편, 동대구역(북쪽 지하도
  정류장), 1호선 아양교역(2번 출구)에서 401번 시내버스를 타고 갓바위 종점 하차, 갓바위까
  지 등산 1시간 소요
* 주말과 휴일에는 401번 축소판 노선인 팔공2번 시내버스(갓바위↔아양교역↔동대구역 북쪽 지
  하도 정류장)가 추가 운행된다. (평일과 겨울에는 운행안함)
④ 승용차로 가는 경우
* 경부고속도로 → 경산나들목을 나와서 하양 방면 → 금락4거리에서 우회전 → 동서교차로에서
  와촌 방면(한사들길) 좌회전 → 동강교차로에서 갓바위 방면 좌회전 → 신한교차로에서 우회
  전 → 갓바위 주차장
* 포항대구고속도로 → 청통와촌나들목을 나와서 하양방면 → 동강교차로에서 우회전 → 신한교
  차로에서 우회전 → 갓바위 주차장
* 대구시내 → 영천방면 4번 국도 → 동서교차로에서 와촌 방면(한사들길) 좌회전 → 동강교차
  로에서 좌회전 → 신한교차로에서 우회전 → 갓바위 주차장

★ 갓바위, 선본사 관람정보 (2014년 11월 기준)
* 갓바위 지구(경산)에 넓은 주차장이 있다. (주차비 있음)
* 갓바위까지 걷는 시간을 줄이고 싶다면 경산 쪽을 추천한다.
* 매년 10월에는 선본사와 갓바위 주차장 일대에서 '갓바위 소원성취 축제'가 열린다. 소원기원
  제와 산사음악회, 다례봉행, 법회, 민속놀이와 전통체험, 다례봉행, 승무공연, 연등만들기 등
  의 프로그램이 있으며, 보통 3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 선본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587
 (선본사 종무소 ☎ 053-851-1868, 중단 종무소 ☎ 053-853-9877, 갓바위 ☎ 053-851-1869)

* 선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아래서 바라본 선본사 선정루(禪定樓)

경내로 들어서려면 선정루의 아랫도리를 지나야
된다.
이 건물은 가파른 언덕에 지은 것으로 자연히 3
층을 이루고 있는데, 아래층에는 부처의 경호원
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있으며, 건물 위쪽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세지가 담긴 사물(四
物, 범종, 운판, 법고, 목어)의 보금자리로 종
각의 역할을 한다. 이 건물은 1988년에 지어졌
으며, 그 이전에는 계단만 덩그러니 있었다.

▲  선정루의 측면

 


▲  청기와가 입혀진 선본사 극락전(極樂殿)

선정루를 올라서면 극락전 앞뜰이다. 좌우로 종무소와 공양간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극락전
좌측에는 조촐한 모습의 산신각이 있다.

극락전은 선본사의 법당으로 1985년에 지어졌다. 불단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 아미타불
(阿彌陀佛)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로 대동하고 앉아 있으며, 뒤쪽에 후불탱화가 든든하
게 자리해 있다. 후불탱화 외에 신중탱화와 관음보살도, 문수보살도와 보현보살도 등이 내부를
수식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1987년에 제작되었다. 다른 불전과 달리 푸른 기와가 입혀져 있
어 단연 돋보인다.

▲  종무소(宗務所)

▲  공양간을 갖춘 선방(禪房)


▲  갓바위와 달리 자애로운 모습의 극락전 아미타3존불

▲  극락전 계단 우측의 석등 아랫도리

▲  극락전 계단 좌측의 석등 아랫도리

극락전 계단 좌우에 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석등의 아랫도리가 있다. 윗도리는 장대한 세월의 거
친 흐름 속에 휩쓸려 사라지고 간신히 좌대(座臺)라 불리는 아랫도리만 간신히 남아 신라 석등
의 아름다움과 선본사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기단에는 연꽃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연꽃의 향기가 아련히 풍기는 듯 하다.


▲  단촐한 모습의 산신각(山神閣)

극락전 좌측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단촐한 크기의 산신각이 있다. 예전에는 산령각(山靈閣)
이라 불렸으며 지금의 건물은 1985년에 새로 지었다. 내부에는 산신탱과 독성탱이 나란히 자리
를 지키고 있으며, 건물 왼쪽 벽화에는 조선 철종(哲宗) 때 효성이 지극했던 도효자(都孝子)가
어머니가 원하는 홍시를 구하고자 호랑이를 타고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니 살펴보기 바란다.


▲  산신탱(왼쪽)과 독성탱(오른쪽)

▲  저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서로를 등진 석불과 동자상,
이제는 제발 화해를 하고 서로를 챙겨주면 좋지 않을까?


선본사는 갓바위와 달리 관람이 금방 마무리되었다. 종점으로 나오니 속세로 나가는 803번 시내
버스가 막 중생을 태우고 있었다. 다음 차를 탈까하다가 선본사에 더 이상의 미련이 없어 그 차
를 타고 아비규환의 속세로 내려갔다.
갓바위로 들어올 때와 달리 하양을 지나 경산역에서 내렸으며, 경산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무궁
화호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갓바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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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11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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