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7.12.08 무서운 이름을 지녔지만 아늑한 분위기를 지닌 고색의 절집, 김제 모악산 귀신사
  2. 2016.03.27 서해바다와 새만금을 품은 고즈넉한 바닷가 절집, 김제 망해사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무서운 이름을 지녔지만 아늑한 분위기를 지닌 고색의 절집, 김제 모악산 귀신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 김제 모악산 귀신사 '

귀신사 대적광전
▲  귀신사 대적광전

귀신사 3층석탑

귀신사 승탑(부도)

▲  귀신사 3층석탑

▲  귀신사 승탑(부도)


 

겨울 제국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인 3월의 첫 무렵에 전북 전주와 김제 지역을 찾았다.
날 전주(全州)에서 친한 후배의 여동생이 시집을 가게되서 그의 요청에 따라 하객 입장으
로 가게 된 것인데 그렇다고 그 여동생과 아는 사이도 아니다. 아무리 후배의 피붙이라고
해도 엄연히 모르는 사람이라 여러 날을 두고 궁리하다가 의리상 가주기로 했다.

서울이 본거지인 신부측에서는 하객 수송을 위해 관광버스 2대를 대절했다. 1대는 가족과
친척들을, 다른 1대는 친척 이외에 사람들을 태웠는데, 8시 반에 발산역(5호선)에서 출발
한다고 하여 아침 일찍 길을 서둘렀다. 허나 일부가 늦게 오면서 9시가 좀 지나서야 버스
는 두툼한 바퀴를 움직였다.
신부 예식 시간은 13시로 교통 정체가 없는 이상은 3시간 내외면 충분히 전주에 도달한다.
다행히 별다른 정체는 없어서 정안휴게소 휴식을 포함하여 3시간 20분 정도 걸렸으며,
배 집안에서 마련한 떡과 귤, 과자, 음료수로 아침을 때웠다.

전주 혼인식장(전주역 부근)에 이르니 주말이라 꽤 북새통이다. 아직 시간이 있어 푸짐하
게 나온다는 점심을 잔뜩 기대하며 시간을 억지로 흘려보내다가 시간이 되자 준비한 축의
금을 내고 혼인식을 관람했다. 허나 나의 돌머리 속에는 혼인식은 온데간데 없고 온통 점
심 생각 뿐이었다.
드디어 지루한(?) 예식이 끝나자 윗층 피로연(披露宴) 장소로 이동했다. 점심은 뷔페식으
로 찬이 매우 풍성해 나의 마음을 너무 기쁘게 했는데, 뷔페의 기본 메뉴인 밥, 고기,
, 나물, 채소류를 비롯해 온갖 초밥과 튀김, , 탕과 국수류(설렁탕과 우동, 잔치국수
), 다양한 디저트, 식혜와 맥주 등 먹을거리가 잔뜩 깔려 있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원없이 먹고 싶었으나, 위 용량이 한정되어 있다는 불편한 진실 앞에 주어
진 위의 공간을 적절히 활용하여 여러 먹거리르 섭취했고, 저녁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배가 채워지자 두 손에 꽉 쥐고 있던 수저를 비로소 놓아주었다. (결국 다음날 아침에 탈
이 났음 ㅠㅠ)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덧 14시 반이 넘었다. 후배는 15시에 하객을 태우고 귀경한다며 어
여 타라고 했으나 오랜만에 전주까지 온 거 그냥 올라가면 좀 섭하다. 이미 정처(定處)
정해둔 상태라 아쉽지만 여기서 그들과 작별을 고하며 단독 행동에 들어갔다.


 

♠  이름도 무시무시한 귀신사를 찾아서

▲  청도리에서 귀신사로 가는 마을길

전주에서 정해둔 정처는 전주시내 남쪽에 있는 남고산성(南固山城)과 금산사(金山寺)로 넘어
가는 길목에 자리한 김제 귀신사이다. 마음 같아서는 다 보고 싶지만 해도 얼마 남지 않았고
서로 거리도 멀어 무조건 하나를 택해야 된다.
후배 가족과 작별하고 전주역 정류장에 발을 멈출 때까지만 해도 전주에 왔으니 전주의 명소
를 보는 것이 어울릴 듯 싶어 남고산성에 크게 무게를 두었었다. 허나 시간이 벌써 16시 직전
이라 지금 열심히 가더라도 그곳에서 강제로 일몰을 맞게 된다. 땅꺼미가 짙어지면 야간 렌즈
나 삼각대가 없는 이상은 사진 담기도 어려워진다. 그래서 남고산성을 내버리고 전주시내에서
좀 떨어져 있지만 많이 걸을 필요가 없는 귀신사에 무게를 100% 얹혔다. (전주 경계에서 겨우
2km 거리임)

전주역에서 귀신사를 가려면 전주시내버스 79(전주역금산사)을 타면 된다. 배차간격은 거
25분 정도로 전주시외터미널과 전주고속터미널, 전주한옥마을, 풍남문, 효자동, 삼천동을
거쳐 강원도에 버금가는 고개를 하나 넘으면 행정구역은 전주에서 김제로 갈리면서 귀신사가
있는 청도리(淸道里)에 이른다.

모악산(母岳山) 북서쪽 자락에 안긴 청도리는 조선시대 때 관리와 나그네들의 숙식을 제공하
던 국립 숙박시설, 청도원(淸道院)이 있던 곳이라 하여 청도원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
은 절 밑에 형성된 마을인 사하촌(寺下村)으로 절은 바로 마을 북쪽에 자리해 있으며 오래 걸
을 것도 없이 청도리 버스정류장에서 도보 4~5분이면 충분히 닿는다.

청도리에서 귀신사로 가는 길은 크게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청도리 정류장에서 농가와 경작지
사이로 난 마을길(청도5)을 따라 가는 것이고, 다른 것은 청도리 정류장에서 북쪽으로 180m
떨어진 귀신사입구에서 서쪽 길(청도6)로 방향을 튼다. (전주에서 넘어온 경우는 우회전,
김제는 좌회전) 후자의 경우는 차량을 위해 포장도로가 닦여져 있으며 나는 버스로 왔기 때문
에 정류장과 바로 이어진 마을길을 이용했다.
이제는 흩어진 전설이 되버린 충북 단양(丹陽)의 외가집을 가는 기분처럼 시골 분위기가 그윽
하게 깔린 마을길은 아직 겨울 제국의 치하라 황량하기 그지 없지만 봄의 기운이 슬며시 들어
와 조금씩 녹색 기운을 뿌리며 아직은 거대한 겨울 제국에 대항한다.


▲  귀신사 경내로 인도하는 아랫 돌계단

마을길 끝에는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진 헝클어진 돌계단이 언덕에 기대어 있다. 그 계
단을 오르면 경내 주차장에 이르는데 돌계단 밑에는 2개의 돌기둥이 우두커니 서 있다.
속세의 민가는 이 계단 앞에서 끝이 나면서 자연히 속세와 절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는데
속세의 일부가 되버린 계단 앞은 원래 귀신사의 영역이었다. 옛날에는 경내 외곽에서 중심으
로 인도하는 계단이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절이 참 작구나 싶겠지만 귀신사의 왕년의 위엄을
잘 보여주는 존재로 세월의 줄기찬 태클에 조금은 비뚤어진 모습을 하게 되었다. 허나 지금의
모습도 그리 싫지는 않다. 고색의 때가 잔뜩 묻어나 있고, 계단의 기능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괜히 복원한답시고 딱딱 맞춘다면 그 모습도 꽤 어색할 것 같다.


▲  귀신사 경내로 인도하는 윗 돌계단

아랫 돌계단을 올라 주차장을 지나면 윗 돌계단이 나온다. 아랫 계단과 달리 질서정연한 모습
으로 고색의 기운이 넘치는 그 계단 너머는 귀신사의 중심으로 주요 건물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귀신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2번째 돌계단에서 바라본 청도리(청도원) 마을과 모악산

전북 서부의 주요 명산(名山)으로 추앙받는 모악산(794m) 북서쪽 자락에 귀신사(歸信寺)가 포
근하게 자리를 닦았다. 포근한 분위기와 달리 절 이름은 천하에서 가장 후덜덜한 이름으로 사
연을 모르는 이들은 다들 그 귀신(鬼神)인줄 알고 놀라워하거나 오금을 지려한다. 혹자(或者)
는 귀신이 나오는 절로, 다른 혹자는 귀신을 모신 사당 성격의 절로 여기기도 한다. 허나 이
름을 이루고 있는 한자는 그 귀신이 아닌 믿음이 돌아온다는 뜻의 귀신(歸信)이니 괜히 겁을
먹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귀신사의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백제 후기 창건설<법왕(法王, 재위 599~600) 시절로 여겨짐>
과 신라 중기 의상대사(義湘大師) 창건설이 있다.
백제 후기 창건설은 17세기에 활약한 자수무경(子秀無竟, 1664~1737)이 쓴 '무경집(無竟集)'
에 백제의 원당(願堂)으로 창건되었다고 나오며, 경내 뒤쪽에 자리한 석수(石獸)는 백제 왕실
의 자복사찰(資福寺刹)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란 견해가 있다. 게다가 인근에 백제 후기 사
찰인 금산사가 있어 비슷한 시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열어두고 있다.
그리고 신라 중기 창건설은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것인데 당시 이름은 국신사(國信寺.
또는 國神寺)였다고 한다. 허나 정작 백제 때 유물은 없으며, 3층석탑이 창건 당시(6~7세기)
에 것이라고 우기고는 있으나 탑의 양식을 보아 고려 때 것으로 여겨진다. 그 외에 탑과 석등
, 주춧돌 일부가 신라 후기 것이다. 또한 최치원(崔致遠, 857~?)이 이곳에 머물며 당나라 법
장화상의 일대기를 적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신라 후기(8
기 이후)에 법등(法燈)을 켠 것으로 여겨진다.

1120년대에는 원명국사(圓明國師 1090-1141)가 절을 중창했는데, 그 시절에는 구순사(口脣寺
또는 狗脣寺)로 불렸다고 한다. 이는 절 주변이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구순혈형(狗脣穴形)
지형이라 하여 유래된 것이라고 하는데 확실한 것은 없다.
고려 후기인 1376년 왜구(倭寇) 패거리 300명이 귀신사에 들어앉아 갖은 민폐를 부리며 머물
렀는데 이를 병마사(兵馬使) 유실(柳實)이 격퇴했다. 이를 통해 수백 명이 머물 정도로 건물
이 즐비했던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왕년에는 부속 암자만 8개에 이르렀다고 하며,
적광전은 2층 규모였다고 하니 금산사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허나 조선으로 천하가 바뀌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란 장애물 앞에 절은 심히 좌절을 겪게 된
. 생육신(生六臣)의 하나인 김시습(金時習)이 이곳을 방문해 지은 '귀신사허(歸信寺墟)'
시문에 '~~탑은 무너지고 비석은 끊어져 있다'는 내용이 있어 절의 우울한 상태를 알 수 있으
, 시문 제목에 귀신사란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이름이 바뀌었
음을 알려준다.

임진왜란 시절에는 승병(僧兵)을 양성했다고 전하며 정유재란(1597) 때 절이 모두 파괴되어
쓰러진 것을 1601년 이곳을 지나던 염화, 신허가 전각을 여럿 지어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1624년 승려 덕기가 대대적인 중창을 벌였는데, 이때 옛터가 아닌 새로운 곳에 중창을 했다고
한다. 하여 3층석탑과 석수가 있는 경내 북쪽 언덕이 옛터의 중심지로 여겨진다. 대적광전에
있는 소조비로자나3존불을 비롯하여 미륵보전, 시왕전, 천왕문 등이 이때 세워졌으며, 귀신사
가 남긴 가장 오래된 문서인 상량문(上樑文)1633년에 작성되었는데 이를 통해 덕기의 중창
불사가 1633년에 일단락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승려 도헌(道軒)이 나한전이 없음을 안타
깝게 여겨 나한전(羅漢殿)을 짓고, 나한전의 주요 식구 25위를 봉안했다.

1657년 비바람으로 전각이 퇴락하자 1657년 대웅전 등을 중수했으며, 1707년과 1715년에 두감
이 대웅전과 팔상전을 새로 짓고 1716년에 팔상전에 불상을 봉안했다. 1873년에는 춘봉(春峰)
이 중창했으며, 1884년 명부전을 중수하고 1914년에 명부전 기와를 개수했다. 그리고 1927
에 명부전, 1934년에 대적광전을 수리했으며, 2005년에 대적광전을 해체/수리했다.

▲  귀신사 3층석탑

▲  대적광전 소조비로자나3존불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명부전과 영산전, 요사 등 약 7~8동의 건물이 있
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과 소조비로자나3존불을 비롯해 3층석탑,
, 승탑(부도) 등의 지방문화재가 있다. 특히 부도는 경내에서 300m나 떨어진 마을 남쪽 밭
두렁에 홀로 있어 귀신사의 영역이 이곳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며, 경내 서쪽에는 신라 후기부
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를 망라한 석탑과 석등의 부재(部材), 건물의 주춧돌 등이
널부러져 있고 경내 직전의 돌계단 2개도 세월에 제법 숙성된 것이다.

모악산 북서쪽 자락에 안겨 있지만 마을 바로 뒤쪽에 자리해 있어 산사(山寺)의 기운은 조금
떨어진다. 허나 옛터인 경내 북쪽 언덕에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조금은 무시무시한 이름
과 달리 고즈넉하고 조촐한 분위기로 외형만 지나치게 추구하는 상당수의 큰 절집과 달리 은
근히 정감이 간다. 또한 비구니 사찰이라 경내가 정갈하고 깔끔하기 그지 없다.

지금은 금산사보다 별볼일 없는 신세이지만 왕년에는 금산사보다 훨씬 잘나갔던 귀신사, 이곳
도 제대로된 학술/발굴조사를 벌여 경내 북쪽과 청도리 마을, 경작지 일대에 잠들어있는 귀신
사의 숨겨진 과거를 싹 들추었으면 좋겠다.

김제 귀신사 찾아가기 (201711월 기준)
대중교통 (전주 경유)
* 용산역, 영등포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순천역, 여수엑스포역에서 전라선
  열차를 타고 전주역 하차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1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는
  30분 간격으로 떠나며,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다닌다.
* 인천, 고양(화정, 백석), 의정부, 안양, 부천, 성남, 수원, 용인, 평택, 천안, 청주, 대전
  (복합, 유성, 대전청사), 군산, 남원, 광주, 목포, 순천, 대구(서부, 동대구), 경주, 포항,
  울산, 부산(사상, 노포동), 창원(마산), 진주에서 전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전주역 광장과 전주시외터미널, 전주고속터미널에서 전주시내버스 79번을 타고 청도리 하차
  , 도보 5
대중교통 (김제 경유)
* 용산역,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광주송정역, 나주역, 목포역에서 호남선 열
  차를 타고 김제역 하차 <고속전철(KTX, SRT) 이용시 익산역이나 정읍역에서 무궁화호나 새
  마을호, 누리로 열차로 환승>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김제행 고속버스가 17, 동서울터미널에서 김제
  행 직행버스가 16회 떠난다.
* 인천, 성남, 대구(서부)에서 김제행 직행버스 이용
* 김제역(역전치안센터 건너편)과 김제시외/고속터미널 건너편에서 금산사를 거쳐 청도리로
  가는 김제시내버스 5번이 16회 있다. (김제역 기준 6:40, 8:18, 12:13, 14:33, 15:33,
  17:18) 차 시간이 맞지 않으면 금산사로 가는 5, 5-1번 시내버스(120여 회 운행)를 타고
  금산사에서 전주 79번 버스로 환승하기 바란다.
승용차 (경내 밑에 주차장 있음)
* 호남고속도로 금산사나들목을 나와서 금산사 방면 712번 지방도 성암4거리에서 좌회
  월평4거리에서 좌회전 팥정이4거리에서 좌회전 백오동3거리에서 좌회전
  도리(귀신사입구) 귀신사

* 입장료와 주차비 없음
*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81 (청도640, ☎ 063-548-0917)


 

♠  귀신사 대적광전, 명부전 주변

▲  선방(禪房)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요사(寮舍)

귀신사 경내로 들어서면 흙이 잔잔히 입혀진 뜨락이 펼쳐지면서 바로 정면에 대적광전이 진하
게 모습을 드러낸다. 뜨락 오른쪽에는 요사(선방)가 있고, 왼쪽에는 석탑과 석등의 부재,
돌을 수습한 공간과 영산전이 있으며, 대적광전 좌측에는 명부전과 석수, 3층석탑으로 인도
는 계단이 있다.

요사는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승려의 생활공간이다. 그 북쪽에는 장독대가
식을 숙성시키며 질서정연하게 들어서 있는데 잘익은 김치나 고추장 생각을 참 간절하게 만
. 저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살짝 뚜껑을 열어 속살을 들춰내고 싶다.
그리고 요사 남쪽에는 견공(犬公)의 보금자리가 있는데, 하얀 털의 백구이다. 처음에는 조용
있더니만 그들을 넌지시 바라보니 은근히 멍멍거리며 구박을 준다. 나는 밤손님이나 화마(
火魔)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분 나쁘게 생긴 편도 아닌데 왜 그리 눈치를 주는 걸까? 마음 같
아서는
확 몸보신용으로 때려잡고 싶지만 나는 이곳을 잠깐 스쳐 지나가는 존재라 그냥 눈감
아주었다
. 마침 요사에서 비구니가 나와 그들을 다독거리니 그제서야 꼬랑지를 내리고 눈을
내린다
.

◀  숙성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귀신사 장독대들


▲  귀신사 영산전(靈山殿)

대적광전 우측에 자리한 영산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주심포 양식의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
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건물이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그의 1급 제자인 아난존자(阿難尊者)와 가섭존자(迦葉尊者)가 양쪽에 자리
해 있으며, 그 좌우로 각각 8명씩 16명의 나한이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각각 1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그들 끝에는 인왕상(仁王像)이 금강역사 못지 않은 위엄 넘치는 포즈로 혹여
문을 두드릴지 모를 악의 기운을 경계한다.


▲  영산전 석가불과 아난/가섭존자

▲  16나한의 우측 나한(羅漢)과 인왕상

▲  16나한의 좌측 나한(羅漢)과 인왕상

    장식용으로 놓인 동그란 석조(石槽)
보름달을 닮은 이쁘장한 석조에는 물이 한가득
담겨져 있다. 절에 왔으면 물 한모금 마셔줘야
되지만 떠마실 바가지도 없고, 수질도 세속화된
종교 마냥 탁해보여 마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여 이곳에선 물을 마시지 못했으니 이런걸 보
고 그림의 떡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  경내 서쪽에 수습된 석탑과 석등 잔재, 건물 주춧돌 무리들

영산전 뜨락에는 석탑과 석등의 잔재, 건물 주춧돌 등이 덩어리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신라 후기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넓은 시대를 아우른 것들로 귀신사의 잃어버린 영화를 잘 보
여주는 유물들이다.
세월의 흐름이 귀신사에게는 꽤나 거칠었는지 숱하게 파괴되고 중창됨을 겪으면서 기존의 많은
건물과 석물들이 가루가 되어 저렇게 암담한 신세가 되었다. 이들 피부에는 고된 세월의 때가
역력하며 깨진 탑재를 모아 한쪽에 엉성하게 석탑을 엮어 놓았다.

▲  길다란 주춧돌에 피어난 1송이 연꽃무늬

▲  우리나라처럼 두 동강이 난 돌덩이
(무엇에 쓰던 물건인고?)

 ◀ 조각난 탑재를 모아서 엮은 소소한 석탑
탑 옥개석에는 중생들이 소망을 담아 심어놓은
조그만 돌탑들이 무럭무럭 뿌리를 내렸다.


▲  귀신사 대적광전(大寂光殿) - 보물 826

귀신사의 법당인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의 거처로 정면 5,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 건물과 그 안에 담겨진 소조비로자나3불좌상은 귀신사의 왜소함
을 능히 커버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값어치가 높다.
경내의 다른 건물과 달리 단청이 입혀져 있지 않아 수수하면서도 좀 이질적인 모습을 보여주
고 있는데 '귀신사 중수기'에 따르면 원래 2층이었다고 하며, 17세기 초에 1층으로 다시 지었
다고 한다. 2층 이상의 불전(佛殿)은 그리 흔치가 않은 것인데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다 수염
을 태워먹던 시절부터 2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귀신사가 결코 예사롭지 않은 절임을 느끼
게 한다.

정면 가운데 칸(어칸)이 좌우 칸보다 조금 넓은 형태로 이는 조선 후기 건축물에서 많이 나오
는 모습이다. 가운데 칸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했고, 나머지는 어칸보다 좀 작게 해서 창문처
럼 한 것이 특징이다. 정면 3칸 문에는 빗살무늬 창호를 달았고 오른쪽과 왼쪽 끝 칸은 벽으
로 만든 것 또한 그만의 특징이다. 기둥 지붕에는 공포 덩어리가 장식되어 있는데 기둥과 기
둥 사이에도 1개씩을 짜놓아 다포(多包) 양식임을 알 수 있으며, 공포도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아 나무의 원초적인 빛깔을 간직하고 있다.

건물 내부의 가구(架構)는 천정을 높이고자 고주(高柱)의 몸 중간에 보를 꽂아 그 끝이 평주(
平柱) 위에 얹히게 했고, 그 보 위에 다시 보를 얹어 고주 위에 얹혔다. 이는 봉안된 불상이
크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불상 머리 옆에 보가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는 원래 2
(중층)이었던 것을 1층으로 다시 지을 때 고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1823년과 1934
에 중수를 벌였으며, 2005년 해체/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17세기에는 이 건물과 비슷한 구조의 다포계 맞배지붕 불전이 많이 지어졌는데, 논산 쌍계사(
雙磎寺) 대웅전, 고창 선운사(禪雲寺) 대웅보전, 경주 기림사(祇林寺) 대적광전이 대표적이다.
귀신사 대적광전은 이들보다 규모는 좀 작지만 내부에 고식이 남아있고 전면을 벽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  소조비로자나3존좌상(塑造毘盧舍那尊坐像) - 보물 1516

귀신사에 왔다면 이곳의 꽃이자 꿀단지인 대적광전 내부는 꼭 둘러봐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조그만 불상이겠지 싶어 건물 좌측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으나
내 머릿 속에 그려진 조그만 불상은 온데간데 없고 허벌나게 큰 불상이 하나도 아닌 3개씩이
나 나란히 대좌(臺座)에 앉아 나를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위엄에 제대로 놀라 입이 벌어지더니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는다. 겉으로 보인 귀신사
의 모습이 아무리 초라하다 한들 이들 앞에서는 그런 생각도 보기좋게 36계를 치고 만다.

이들 불상은 흙으로 빚어 도금을 입힌 소조불로 합장인(合掌印) 비슷한 제스쳐의 지권인(智拳
)을 취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한 약사여래(藥師如來)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배치했다. 그들은 건물이 터질 정도로 대단한 위엄을 간직하고 있어 왠
만한 강심장도 뒷걸음을 치게 만드는데 이런 큰 불상이 17~18세기에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이런 큰 불상이 유행처럼 생겨난 것은 억불숭유로 쇠퇴를 걷던 불교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
직하여 나라를 지키자 조정에서는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정책을 다소 바꾸게 된다. 하여 차별
과 탄압을 줄여주었고 주요 요새(남한산성, 북한산성, 무주 적상산성, 부산 금정산성)에 절을
지어 승병들을 배치했다. 또한 왕실과 사대부가 왕실과 집안의 안녕을 위해 시주를 넉넉히 하
면서 많은 불사가 벌어졌는데, 불교 입장에서는 쇠퇴한 불교를 중흥시키는 안성맞춤의 시기가
온 것이다. 그러니 중흥에 대한 자신감이 이런 큰 불상으로 표현된 것이며, 왕실과 사대부의
비위도 맞추고자 왕실의 안녕을 비는 제스쳐도 많이 취했다. 그래서 유난히 조선 후기에는 왕
과 왕비, 세자, 대왕대비의 복을 비는 문구가 많이 등장한다.

웅대한 덩치에 비해 얼굴에는 나름 인자한 표정이 깃들여져 그들에 놀란 중생을 진정시킨다.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이며, 무지개처럼 구부러진 눈썹 밑으로 두 눈은 살며시 뜨고 있다.
코는 오똑하게 솟았고, 붉은 입술은 조그만하지만 엷게 미소를 피우고 있다. 입술 주변에는
검은 수염이 칠해져 있고, 볼살은 매우 두툼하다. 양쪽에 달린 두 귀는 중생의 소망을 모두
접수하는 안테나가 되어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허리가 긴 장신형(長身形)으로 품격 높은 불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 쥐고 왼쪽 검지 끝을 오른쪽 검지 1째 마디에
뻗은 지권인의 특이한 표현은 명나라 비로자나불에서 많이 나타나는 수인(手印)이라고 한다.
또한 허리가 긴 장신형도 명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라고 하며 이렇게 명나라 양식을 양분으로
하여 조선 후기 불상의 또다른 종류를 이루었다.

이들 불상은 귀신사가 쓰러진 몸을 한참 일으키던 1624년에서 1633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1633년에 작성된 상량문에는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와있으며 자수무경의 기
록에는 1624년에 중건된 것으로 나와 그 사이가 맞을 것이다. 불상 뒤에는 각자 그에게 걸맞
은 후불탱화가 걸려있는데, 이들은 1983년에 주지 유견성(柳見星)이 그린 것이다.

▲  소조비로자나3존좌상의 본존불인
비로자나불

▲  금색 피부의 화려한 문양을 지닌 전패
(殿牌)와 종이학을 담은 유리통

▲  대적광전 신중탱(神衆幀)

▲  대적광전 산신탱(山神幀)

         ◀  대적광전 독성탱(獨聖幀)
대적광전에는 법당의 청정함을 위해 필수로 배
치하는 신중탱을 비롯하여 산신 가족을 머금은
산신탱, 독성(나반존자) 할배를 담은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경내에는 아직 산신과 독성을 위한 보금자리가
따로 없다보니 이렇게 법당에서 샛방살이를 하
고 있는 것이다. 그림의 조성시기는 화기(畵記
)가 없어 알 수 없으나 19세기 후반이나 20
기 초반으로 여겨진다.


▲  귀신사 명부전(冥府殿)

대적광전과 요사 뒤쪽에는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
선 후기에 세워져 여러 차례 수리를 했으나 지금의 건물은 근래에 새롭게 지은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비롯해 도명존자(道明尊者)와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
)의 주요 식구들과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봉안되어 있다.

◀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저승의 시왕들


 

♠  귀신사의 옛터를 지키고 있는 유물들

▲  귀신사의 옛 중심지였던 북쪽 언덕 (석탑과 석수)

대적광전과 명부전 뒤쪽에는 북쪽 언덕으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다. 그 계단을 오르면 귀신사
의 옛터를 지키고 있는 3층석탑과 석수를 만날 수 있는데 이곳에 왔다면 대적광전 내부와 더
불어 이곳 유물도 꼭 살펴봐야 뒷탈이 없다. 그만큼 이곳에서 중요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전 귀신사의 중심은 바로 이곳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잿더미가 된 귀
신사는 1624년부터 1633년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중창을 벌였는데 그때 새 자리에 중창을 했
. 그 새로운 자리는 현재 대적광전과 명부전이 있는 언덕 남쪽이며, 이전 자리는 바로 이곳
북쪽 언덕이다. 아직까지는 옛터에 이렇다할 학술/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옛터의 자세한
것은 그리 알려진 것은 없으며 석탑과 석수, 사적비 등이 옛터를 지키고 있다. (언덕 북쪽은
대나무가 무성하며, 동쪽은 민가와 경작지가 있음)

옛터 식구의 대표격인 석탑은 화강암으로 다진 4.5m 높이의 조촐한 탑으로 절에서는 창건 당
시인 백제 후기 또는 7세기 중반 탑으로 우기고 있으나 확인 결과 고려 때 탑으로 판명이 났
. 현재 이 땅에 남아있는 삼국시대 탑은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 부여 정림사지(
林寺址) 5층석탑, 경주 분황사(芬皇寺) 석탑 등 3기가 고작이다. (고구려와 부여는 석탑이 아
예 없음)
백제 탑의 상징인 정림사지 5층석탑을 많이 닮은 고려 탑으로 1층 탑신(塔身) 이후 급격하게
줄어드는 체감율은 미륵사지 석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 때는 유난히 옛 백제
땅인 충남, 전라도 지역에 정림사지 탑을 닮은 백제 탑의 후예가 많이 등장하는데 백제를 그
리워하는 지역 백성들의 마음과 지역 색채가 강했던 고려 석탑, 불상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이 탑은 바닥돌 위에 여러 개의 돌을 맞추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3층 탑신을 올렸다. 탑신
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했고,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처마가 평행을 이루다가 귀퉁이에
서 아주 살짝 들려져 있다. 1층 탑신은 매우 크지만 2층부터 확 줄어드는 모습이며, 탑 꼭대
기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네모난 받침돌인 노반(露盤)이 남아있다.


▲  귀신사 석탑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62


▲  귀신사 석수(石獸)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64

3층석탑 옆에는 석수라 불리는 독특한 모양의 돌조각이 하나 있다. 웅크리고 앉은 사자의 등
짝에 묘하게 생긴 날씬한 돌기둥이 혹처럼 솟아 하늘을 받들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끝부분이
참 낯이 있다. 이 돌기둥은 바로 남근석(男根石)으로 불교의 상징 동물의 하나인 사자(獅子)
와 남근 숭배<또는 성기(性器) 신앙>가 어우러진 아주 기묘한 석물로 이 땅에서는 오로지 이
곳에서만 있는 희소성 100%의 물건이다.

사자상은 머리를 치켜들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오랜 세월의 태클로 좀 헝클어지긴 했지만
알아보는데는 아직 지장은 없다. 그의 등에 곧게 서 있는 남근석은 2단으로 되어있는데, 아랫
부분은 윗부분보다 굵으며 대나무 같이 엷은 마디를 두었다. 그리고 윗부분은 아랫부분보다
굵기가 절반 정도 얇으며, 그 끝부분은 남근의 끝부분과 비슷하게 조각했다.

이 석수는 천하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희귀 석물로 왜 귀신사에 이런 것을 두었는지는 2
지 설이 있다. 하나는 풍수지리상 이곳이 구순혈(狗脣穴)이란 좋지 않은 형상이라 하여 그 터
를 누르고자 세웠다는 것이며, 다른 설은 백제 왕실의 내원사찰(內願寺刹)로 남근을 갖춘 사
자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참고로 남근석을 둔 절은 백제의 내원사찰 뿐이라고 한다. 하여 이
석수를 근거로 귀신사가 백제 후기에 창건되었다는 설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것.
석수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백제나 신라가 아닌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돌사자의 길이는 158cm, 높이 62cm, 남근석은 아랫부분의 높이 72cm, 윗부
분은 40cm이다.

석수란 이름은 돌로 만든 동물상이란 뜻이다. 단순히 남근석만 있다면 남근석이라 부르면 되
겠지만 사자까지 있으니 이들을 어우른 마땅한 이름이 없어 부르기 쉽게 '석수'라 칭한듯 싶
.

▲  귀엽게 앉아있는 석수

▲  석탑 주변에 놓인 옛터의 주춧돌


▲  귀신사 사적비(事蹟碑)
귀신사의 내력을 담은 비석으로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옛터 뒤쪽에는 대나무가
무성해 산바람이 한바탕 지나갈 때마다 사각사각 하모니 소리를 들려준다.

▲  귀신사 앞 해탈교 (귀신사입구 방면)

귀신사의 오랜 보물을 품고 있는 경내 북쪽 언덕을 둘러보고 다시 경내로 내려왔다. 이리하여
귀신사를 다 둘러본 것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그건 함정이다. 아직 못본 것이 하나 있기 때문
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마을 남쪽 경작지 한복판에 홀로 떨어진 승탑(부도)이다.
기왕 여기까지 먼 발걸음을 했으니 다음에 안와도 될 정도로 싹 다 봐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경내 경비실을 찾아 부도의 위치를 물으니 마을 남쪽 경작지에 있다고 그런다. 그래서 이번에
는 마을길 대신 찻길을 통해 해탈교를 건너 전주~금산사 지방도로 나가 남쪽으로 걸어갔다.
경내에서 부도까지는 기껏해야 1리 남짓이며, 경내 북쪽 언덕에서 보이는 범위 안에 들어있다.
게다가 도로에서도 바라보이니 부도가 어떻게 생겼는지만 안다면 찾기는 매우 쉽다.


▲  귀신사 승탑(부도)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63

▲  북쪽에서 바라본 부도

▲  남쪽에서 지켜본 부도

귀신사 부도는 경내에서 0.3km 정도 떨어진 마을 서남쪽 경작지 한복판에 고적하게 자리해 있
.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탑신과 지붕돌은 팔각을 취하고 있으며, 누구의 넋이 서린 승탑(
僧塔)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다만 경내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왕년의 귀신사가 이곳
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는 유물로 우리가 옛 조선과 고구려, 백제, 발해의 옛 땅과 영광을 생각
하듯 귀신사 승려들도 이 부도와 옛터를 통해 귀신사의 영광을 뼈저리게 생각할 것이다.

부도의 높이는 2.5m로 기단부와 탑신, 머리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비례가 별로 맞지가
않고 모습도 소박하다. 기둥처럼 길쭉한 기단 가운데 받침돌은 여러 겹의 연꽃을 두른 윗받침
돌을 받치고 있고, 그 위에 탑신의 몸돌과 귀퉁이가 치켜 올려진 지붕돌을 얹혔다. 그리고 그
위를 동그란 공 모양의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여기서 절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면 귀신사가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오며 적어도 부도까지가 귀
신사의 영역이었으니 청도리 마을 상당수는 절의 영역이 된다. 그렇게나 잘 나가던 귀신사가
쇠퇴하면서 경내 중심을 제외한 부분이 모두 속세로 떨어져 나가 청도리 마을을 이루게 된 것
이다.

부도를 끝으로 귀신사 관람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서울로 갈 때는 전주가 아닌 김제(金堤)
를 거쳐가고 싶은데 이곳이 김제 땅임에도 김제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가뭄에 콩 나듯 다니고
오히려 전주시내버스가 더 많이 다닌다.
하여 별로 기대하지 않고 청도리 정류장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김제로 나가는 시간을 물어보니
왠걸 15분 뒤에 버스가 있다고 그런다. 내가 운과 복이 참 지지리도 없는 인간인데 이때만큼
은 용케도 운이 좀 맞아 떨어졌다. 평소에도 그렇게 운이 좀 맞으면 얼마나 좋을꼬? 차 시간
이야 안맞으면 전주로 나가면 그만이 아니던가?

정류장에 들어가 15분의 시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김제시내버스 5번이 슬그머니 들어온다.
이 버스는 청도리 마을회관 앞에서 잠시 바퀴를 접고 쉬다가 출발시간이 되면 외마디 부릉소
리를 남기고 김제로 나간다.
시내로 갈 때는 금산사를 거쳐서 가는데 폭주하는 전주버스와 달리 김제버스는 너무 기어가서
김제역까지 금산사와 원평 대기시간을 포함하여 45분 정도 걸렸다. 그렇게 지루하게 달려 도
착한 김제역에서 서울로 향하는 열차에 고된 몸을 싣고 도돌이표처럼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귀신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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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바다와 새만금을 품은 고즈넉한 바닷가 절집, 김제 망해사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 서해바다와 새만금을 품은 고즈넉한 절집, 김제 망해사 '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  새만금바람길



제국(帝國)의 부흥을 노리는 겨울의 잔여 세력과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봄이 팽
팽히 맞서던 3월의 어느 날, 호남의 곡창지대인 전북 김제(金堤)를 찾았다.

해가 아직 솟지도 않은 새벽 5시, 아침에 차디찬 공기를 가르며 집을 나섰다. 좌석은 불편
하지만 매우 저렴한 1호선 전철에 몸을 싣고 천안역까지 쭉 내려간 다음, 바로 목포(木浦)
행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10시 30분 정도에 김제역에 도착했다.

김제에 이르니 불청객 하나가 나의 미간을 잠시 찌푸려지게 했다. 바로 비이다. 비록 가랑
비 수준이라 애교로 넘길 만 했지만 나들이에 비가 오는 것만큼 짜증나는 것은 없다. 그날
기상청 정보에는 새벽에 비가 그치고 차차 맑아진다고 했으나 아직도 비가 오고 있으니 역
시나 기상청의 날씨 적중률은 아무도 못말린다.
비가 속히 그치길 고대하며 거전리로 가는 김제시내버스 19번을 타고 50여 분을 달려 망해
사에 발을 내리니 하늘도 그새 지쳤는지 더 이상 비를 내리지 않았다. 대신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나를 노려본다.


 

♠  망해사 입문 (곽경렬 묘소, 망해사 부도)

▲  망해사로 인도하는 소나무 숲길

망해사 입구에서 절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오르막길을 오르니 푸른 소나무들이 숲길을 이루며
운치를 진하게 드러낸다. 망해사는 절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는 일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하
여 숲길이 자연히 일주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나무가 베푼 솔내음이 바다내음과 어우러져 속세에서 염치없이 따라온 번뇌를 싹 털어가니 잠
시나마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다. 허나 번뇌가 해보다 무거워 멀리 가지는 못하고 절 입구에 우
두커니 매달려 기다리고 있고, 사람들도 절을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속세(俗世)의 야성
을 되찾으니 해탈(解脫)은 정녕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소나무 숲길을 5분 정도 들어가니 길 바로 왼쪽에 애국지사 곽경렬(郭京烈)의 묘역이 나의 발길
을 멈추게 한다. 여기서 처음 들어보는 이름, 곽경렬, 그는 과연 누구일까?


▲  곽경렬 선생 묘역

곽경렬(郭京烈, 1901~1968)은 현풍곽씨로 김제 진봉면에서 태어났다. 봉수(奉守)란 이름도 가지
고 있으며, 1915년 박상진()과 채기중() 등이 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
)을 통합해 대구(大邱)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자 불과 14세에 어린
나이로 가담해 독립 활동에 뛰어들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조달해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여러 혁명 기지를 확보하여
폭동을 일으켜 왜정(倭政)을 몰아낼 생각을 했다. 허나 친일 부호(富豪)들이 협조를 해주지 않
고 자신의 뱃대기만 불리자 친일 부호 처단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이에 곽경렬은 유장렬(
), 한훈() 등과 친일 반역자를 처리하는 행형부(行刑部)의 요원이 되어 전남 지역 친
일 부호를 여럿 처단했으며, 오성()의 헌병 분견소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했다.
1916년 왜경의 추격으로 잠시 만주로 넘어갔다가 다시 들어와 활동했으며, 1918년 친일파로 방
향을 바꾼 밥버러지 이종국()의 밀고로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드러나면서 다시 은신했다.
1919년에는 전북 옥구군 대야면에서 김영순의 지원을 받아 27원을 상해임시정부로 보냈으며, 계
속해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다가 1924년 왜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1926년 전주지방
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1929년 4월 1일 전주감옥에서 출소했으나 왜정의 잔인한 고문에 몸이 상하여 더 이상 독립활동
을 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은거하고 말았다. 마음에서는 늘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으나 몸이 만신
창이가 되었으니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후로는 조용히 지내다가 1968년 67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1982년 이 땅의 정부는 그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어 뒤
늦게나마 그의 애국 정신을 기렸다. 또한 지원금을 보내 무덤에 상석(床石)과 비석(碑石), 망주
석(望柱石)을 갖추게 했으며, 봉분(封墳)에 호석(護石)을 둘렀다.

그의 묘역은 망해사로 가는 길목에 있으므로 그냥 지나치지 말고 잠시 발길을 멈추고 무덤 앞에
옷깃을 여미는 예를 보이기 바란다. 바로 길가에 있으니 시간도 크게 잡아먹지 않는다. 다만 무
덤 주변에 마땅한 안내문도 없고, 그냥 '애국지사 곽경렬 선생 묘소'임을 알리는 표석이 전부라
자세한 사연을 알지 못하여 지나치기가 쉽다.

▲  곽경렬 선생 묘소를 알리는 표석

▲  뒤에서 본 곽경렬 묘소

곽경렬 묘소 아랫쪽 산비탈에는 누런 옷을 입은 무덤들이 즐비하다. 이곳은 망해사의 사하촌(寺
下村)인 명동마을의 공동묘지로 절로 가는 길목에 이렇게 백성들의 무덤이 1~2기도 아니고 무더
기를 이루는 광경은 거의 본 적이 없는데, 소나무 그늘 밑에 옹기종기 둥지를 튼 묘역이 은근
포근해 보이기도 한다.

곽경렬 묘소를 둘러보고 다시 2분 정도 길을 재촉하면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망해사에 이르게 되는데, 망해사를 외면하고 그냥 직진하면 새만금바람길이 펼쳐진다. 이
바람길은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진봉면사무소에서 망해사를 거쳐 거전리로 이어지며, 생
각치도 못하게 보랏빛처럼 등장한 바람길에 군침이 가득 돌았지만 망해사를 목표로 하고 왔으니
일단 그곳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  고색의 때를 간직한 망해사 부도(浮屠) 4기

바람길과 갈리는 3거리에서 망해사로 내려가면 길 왼쪽에 제일 먼저 고색의 기운이 넘치는 부도
4기를 만나게 된다.
이 부도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가운데가 볼록한 석종형(石鐘形)부도이다. 마치 대추처럼
생긴 것이 크기도 조촐하여 참 귀여운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은 청심당(淸心堂), 만화당(
萬化堂), 심월당(心月堂), 덕유당(德有堂) 등 망해사에서 활동했던 승려의 승탑(僧塔)이다. 이
중 1기는 너무 작아 포도알처럼 보이며, 나머지는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부도의 형태는 땅바닥
에 자연석을 활용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대추 모양의 탑신을 얹힌 다음, 모자처럼 생긴 지붕
돌을 올렸다.

▲  가까이서 본 부도 - 모자를 쓴 사람의 얼굴이나 허수아비 얼굴처럼 보인다.


▲  해우소 부근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새만금)
날씨가 흐리고 바다 안개가 자욱해 시야가 속세처럼 좋지 못하다.

▲  바닷가 사찰, 망해사 경내에 이르다.

부도군을 지나면 볼일을 보며 근심을 터는 해우소(解憂所)가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철난간 너
머로 물줄기가 보이는데, 그가 바로 서해바다이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바다 안개가 오
리무중(五里霧中)을 이루고 있어 시야가 완전 꽝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망해사의 내력을 살펴
보도록 하자.

※ 속세를 등지고 서해 바닷가에 자리한 고찰, 김제 망해사(望海寺)
우리나라에는 오래된 절이 별처럼 많이 흩어져 있다. 허나 바닷가에 자리한 절은 정말 손에 꼽
을 정도인데, 서해바다 같은 경우에는 이곳 망해사가 유일하다. 물론 안면도(安眠島)에 있는 안
면암(安眠庵, ☞ 관련글 보러가기)도 바닷가에 있지만 내력이 무지 짧아 고찰에 끼지 못한다.
그외에 남해바다에는 여수 향일암(向日庵)이 있고, 동대해(東大海)에는 양양 낙산사(洛山寺)와
홍련암(紅蓮庵), 휴휴암(休休庵), 동해 감추사(甘湫寺), 부산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 등이 있
다.

망해사란 절 이름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이곳은 642년(의자왕 원년) 부설(浮雪)이 창건
했다고 전한다. (다른 자료에는 671년이라고 나옴) 허나 안타깝게도 신뢰도는 떨어지며, 754년
(경덕왕 23년)에 당나라 승려인 통장(通藏)법사<또는 중도법사(中道法師), 도장(道藏)법사>가
세웠다는 설도 있으나, 이름만 서로 다를 뿐 같은 인물로 여겨는 설도 있다. 허나 이 역시 확실
한 것은 아니다.

고려 때에는 1073년(문종 27년)에 심월(心月)대사가, 1371년에는 지각(知覺)선사가 중창했다고
하며, 조선으로 들어와서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절이 무너져 바다에 가라앉았다고 한
다. 그러다가 1624년 경(또는 1589년 경)에 김제 출신 고승인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절을 일으
켜 세웠다. 이때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악서전(낙서전)이 지어졌다.

진묵대사는 해인사(海印寺)의 8만대장경을 모두 암송했다는 이야기부터 물고기를 끓인 죽을 먹
고 대변을 보면서 그들을 환생시킨 이야기까지 정말 많은 이적(異蹟)과 재치를 남긴 고승으로
유명한데, 이곳에도 그의 설화가 하나 전해온다.
진묵이 망해사에고 머물 때, 바닷가에서 굴을 따서 먹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놀라서 '왜
승려가 육식을 하시오?'
그러자 진묵이 '이것은 굴이 아니고 석화(石花)요' 답했다고 한다. 참
고로 굴을 석화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어원이 진묵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만화(萬化, 1850~1919)와 심월(心月)이 절을 중창하고 불도를 닦았으며, 1915년
에 계산(桂山)이 중창했다. 1933년에는 주지 김정희가 악서전을 중수하고 보광명전(普光明殿)과
칠성각을 신축했으며, 1977년에 요사와 망해대를 짓고, 악서전, 보광명전을 중수했다.
1984년에는 기존의 보광명전과 칠성각을 부시고, 그 자리에 대웅전(大雄殿)을 지었는데, 나중에
극락전으로 이름을 갈았다. 1986년에는 악서전을 해체 복원하였고, 1989년에 범종각을 지었으며,
1991년에 극락전을 중수했다.

그리 넓지 않은 조촐한 크기의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악서전과 삼성각, 종
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요사를 빼고는 모두 바다가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이 이곳의 특징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팽나무와 악서전이 있으며, 이들 모두 조선 중기 것이다.
(이전 시대 유물은 없음) 또한 절 이름의 유래에 대해선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바닷가에 있
어 섬들을 바라볼 수 있고, 서해 일몰을 구경할 수 있는 경승지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
다. (창건 시절부터 망해사로 불린 듯 함)

바닷가 언덕에 자리해 있어 파도 소리가 번뇌에 잠긴 정신을 깨워주며, 파도 소리와 풍경 소리,
발자국 소리가 전부인 고요한 절이다. 게다가 높이는 바다에 닿을 정도로 낮지만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조금은 서려있다. 또한 이곳에서 보는 저녁 일몰은 번뇌가 녹아버릴 정도로 대장관이
며, 바다에 점처럼 그려진 섬들까지 이곳의 풍경을 한몫 거들고 있으니 조물주(造物主)도 시샘
을 할 지경이다.
허나 1990년대부터 시작된 새만금 사업으로 망해사 앞바다는 크게 수정될 위기에 처했다. 새만
금 개발 계획을 보면 절 앞바다를 메워 거의 강처럼 만든다고 한다. 그리되면 바닷가 절이 아
닌 강가의 절이 되며 수평선 너머로 펼쳐진 너른 바다를 더 이상 못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절 풍경도 크게 손상될 것이고,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의 절의 이름마저 무색하게 된다. 인간들
의 무분별한 개발에 망해사의 경관은 물론이고 군산(群山)에서 김제 앞바다를 거쳐 부안(扶安)
에 이르는 바다와 갯뻘 대부분이 강제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망해사를 중심으로 서해바다를 향해 솟은 야트막한 산자락에 새만금바람길이 조성되었다. 절을
둘러보고 후식으로 바람길을 따라 서쪽인 심포항이나 동쪽인 진봉면사무소 방면으로 걷는 것도
괜찮다. 망해사가 거의 중간이고 길도 험하지 않아 1시간 반 정도면 충분히 서쪽 끝과 동쪽 끝
에 닿는다. 바다가 늘 옆에 있어 바다내음과 산내음에 마음마저 즐거워지는 길이다.

※ 김제 망해사 찾아가기 (2016년 3월 기준)
① 김제까지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광주역, 광주송정역, 목포역에서 호남선 열차
  를 타고 김제역 하차 (고속전철은 정차 안함)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김제행 고속버스가 1일 4회 떠나며, 동서울터미널에서
  김제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떠난다.
* 인천, 성남, 전주, 익산, 군산에서 김제행 직행버스 이용 (군산에서 올 경우에는 만경에서 내
  리면 편함)
② 현지 교통
* 김제역(김제역3거리 북쪽, 김제역1승강장)과 김제시외고속터미널 앞에서 김제시내버스 18, 19
  번을 타고 망해사 하차. 두 노선 합쳐서 1일 20회 운행(주말, 휴일에는 14회)하며 만경정류장
  을 경유한다.
* 망해사 정류장에서 망해사까지 도보 7~8분
③ 승용차 (경내에 주차장 있음, 주차비는 공짜)
* 서해안고속도로 → 서김제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만경3거리 직진 → 만경4거리 좌회전 →
  진봉 → 망해사입구에서 우회전 → 망해사 (경내까지 진입 가능)

*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004 (심포10길 94 ☎ 063-545-4356)

▲  망해사 악서전

▲  망해사 삼성각


 

♠  조촐한 망해사 둘러보기

▲  망해사 팽나무 - 전북 지방기념물 114호

경내에는 오래된 팽나무가 2그루 있다. 그중 하나가 요사 앞에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데, 조선
인조(또는 선조 때인 1589년) 때 진묵대사가 악서전을 짓고 그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나이는 대략 400년 정도가 된다. 나무의 높이는 17m, 가지 길이 동서 16.7m, 남북 17m이
며, 다른 팽나무는 악서전 옆에 있는 것으로 높이 21m, 가지 길이 동서 24.8m, 남북 22m이다.

이들 나무는 중창 기념으로 심은 것도 되지만 수시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봄마다 문을 두드리
는 황사 바람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절이 바닷가에 있어 일몰도 배부르게 볼 수 있고 경
관도 아름답지만 대신 바람과 태풍에는 무지 취약하기 때문이다.

팽나무는 겨울 제국에게 모든 걸 털리고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채, 제국의 혹독한 시련을 말없
이 견디고 있다. 이제 봄도 상륙했으니 조만간 겨울의 망령에서 완전히 해방이 될 것이다.

▲  망해사 요사(寮舍)

▲  팽나무 쪽에서 본 요사

팽나무 부근에 자리한 요사는 1997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ㄱ'자 건물이다. 요사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공양간과 종무소(宗務所)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바다를 향한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은 1989년에 세워진 것으로 너른 바다에 은은한 종소리를 울려 보낸다. 요즘은 새만금 사
업으로 인해 잔뜩 격앙된 서해바다와 갯벌 식구, 사업을 찬성 또는 반대하는 사람들을 달래주느
라 종을 33번 쳐도 모자를 듯 싶다. 종은 계속 바다에 종소리를 실어보내고 싶건만 그 바다가
없어지면 얼마나 허전할 것인가..?


▲  망해사 극락전(極樂殿)

바다가 있는 북쪽을 굽어보는 극락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원래는 대웅전이었다. 1984년에 보광명
전과 칠성각을 부시고 그 자리에 만든 것으로 1991년에 중수했으며, 이후 극락전으로 이름을 갈
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3존불
이 봉안되어 극락전의 이름값을 하고 있으며, 지장보살과 지장시왕탱, 아미타후불탱, 진묵대사
의 초상 등이 건물 내부를 수식한다.


▲  망해사 악서전(樂西殿)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28호

극락전 옆에는 담장을 두른 공간이 있는데, 그 안에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악서전(낙서전)이 있
다. 악서전 옆에는 오래된 팽나무가 하늘 높이 자라나 악서전을 바다 바람으로부터 지켜준다.

이 건물은 1624년(또는 1589년)에 진묵대사가 지은 것으로 전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ㄱ'자
형 팔작지붕 건물로 기둥 위에 공포를 얹힌 주심포(柱心包) 식이다. 4개의 주련이 걸려있으며,
단청(丹靑)이 칠해져 있으나 색이 많이 바랜 상태이다. 1933년과 1977년에 수리를 했으며, 1986
년에 해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내부에는 절을 거쳐간 승려들의 진영(眞影)과 석가3존불이
봉안된 불단이 있으며, 그 뒤에는 아미타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걸려있다.

악서전(발음에 따라 낙서전)이란 이름은 서해바다를 즐긴다는 뜻으로 자연 속에 있기를 좋아했
던 팔자 좋은 사대부(士大夫)의 집 이름 같다. 처음에는 승려의 거처 및 법당의 역할을 겸했으
나, 지금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수행처로 쓰여 일반인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그래서 키는 작
지만 토담을 주위로 둘렀고 사립문은 늘 닫혀있다.
기둥의 모양은 불규칙하고 자연의 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했으며, 건물 크기는 작지만 평온한 분
위기를 간직하여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허나 그 충동을 억제하고 담
장 너머에서 열나게 사진에 담는 선에서 악서전에 대한 욕구를 잠재웠다.


▲  낙서전과 팽나무, 범종각

▲  범종각 옆 샘터
망해사의 샘물이 치솟던 곳으로 범종각 옆에 땅을 파고 돌로 단단하게 석축을 엮어
샘터로 내려가는 계단을 마련했다. 현재는 겉모습만 남은 죽은 샘터로
우물 안에는 물이 가득 고여있으나 마실 수는 없다.
(절에서는 삼성각 부근에 별도의 물탱크를 두어 식수를 해결함)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삼성각이 둥지를 트며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이 건물은 제일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극락전 위쪽에 터를 다지고 계단을 내었다.
삼성각에는 산신탱과 독성탱, 칠성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이들은 원래 칠성각에 있었으나 철거
되면서 오랫동안 극락전에 얹혀 살았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불화(佛畵)같은 이미지의 칠성탱

◀  여인처럼 다소곳이 앉아있는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그려진 독성탱


▲  망해사 뜨락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절에 들어왔을 때보다는 시야가 조금은 좋아졌지만 바다 건너는 여전히 안개에 감싸여 있다. 뜨
락과 해안 사이에는 텃밭을 닦아 여러 채소를 기르고 있으며, 바다 쪽에는 철책이 금줄처럼 둘
러져 있어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일반인 출입 통제 구역임)


 

♠  새만금바람길 산책 (심포항, 거전리)

▲  새만금바람길 (망해사 부근)

해사를 25분 정도 둘러보고 새만금바람길로 이동했다. 새만금바람길은 진봉면사무소에서 진봉
방조제, 전선포, 망해사, 두곡서원 뒤쪽, 심포항, 봉화산봉수대를 거쳐 거전리로 이어지는 10km
의 산책로이다. 요즘 산이나 특정 지역을 도는 둘레길이 크게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 이 바람길
역시 상큼하게 등장한 도보길 유행에 따라 김제시청에서 야심차게 닦은 것이다.

진봉방조제와 심포항 부분을 제외하고는 바닷가에 솟은 야트막한 산줄기의 산길이며, 길을 손질
하고 이정표를 설치했다. 그리고 새만금의 이름을 따서 새만금바람길이라 했으니 그 흔한 둘레
길 대신 바람길을 칭한 것이 이채롭다.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낯선 까닭에 사람들의 발길은 별로
없으나 차차 김제 지역의 꿀단지가 될 것이라 믿는다. 그럴 싹수가 충분히 보이기 때문이다.
 
바람길 거리가 10km라 좀 길어보이지만 산길의 소나무가 무성하고 서해바다도 바로 옆에 바라보
여 산내음과 바다내음에 마음이 상쾌해진다. 그런 길에 열중하여 걷다 보면 정말 거리가 모자를
정도이다. 소요시간은 2~3시간 정도로 약간 가파른 구간이 몇 있을 뿐, 그외에는 그냥 이 땅에
흔한 둘레길 수준이다.


▲  망해사 전망대

망해사는 바람길의 중간 정도로 나는 심포항 쪽으로 이동했다. 보도블록이 깔린 바람길로 접어
들면 곽경렬 선생의 추모비가 나오고, 그 비석을 지나면 흙길로 변신한다. 흙의 촉촉한 기운을
느끼며 걷다보면 곧 망해사전망대가 마중을 나온다.
이 전망대는 3층 규모로 꼭대기에 올라서면 새만금 개발로 혼돈한 서해바다가 두 눈에 바라보인
다. 그리 부담없이 지어진 전망대라 딱히 다른 시설은 없으며, 전망대에 올라 잠시 천하를 조망
(眺望)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면 솔내음이 진동하는 소나무 숲길이 펼쳐진다.


▲  소나무 너머로 보이는 서해바다

▲  모습을 드러낸 심포항(深浦港)

망해사에서 바람길을 따라 1.5km 정도 가면 심포항이 모습을 드러낸다. 심포항은 진봉면 심포리
(深浦里) 바닷가에 둥지를 튼 어촌으로 만경강(萬頃江) 최하류에 자리해 있다.
심포항은 한때 100여 척이 넘는 어선이 드나들던 큰 어항(漁港)으로 갯벌이 넓게 펼쳐져 조개의
집산지 및 체험 장소로 명성이 높았다. 허나 새만금 공사와 연안 어업의 쇠퇴로 인해 왕년의 모
습은 크게 꺾인 상태이며, 수천만 평을 자랑하던 갯벌은 새만금 개발 앞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
고, 포구 앞바다는 거의 담수호(淡水湖) 수준이 되었다.
그래도 아직은 어촌의 분위기가 남아있어 조개류나 생선 등을 구입할 수 있으며, 조개구이와 해
물칼국수, 해산류를 파는 식당과 민박 등의 숙박업소도 여럿 자리해 있다. 또한 심포항은 일몰(
日沒)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전국적인 일몰 명승지로 유명하다.


▲  한가로운 심포항 동쪽 부분

▲  바닷가에 몸을 기대며 단잠에 빠진 어선들
새만금 개발이 완료되면 저 어선들의 미래는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  심포항 중간 부분

▲  심포항 서쪽 부분

심포항은 주말 오후임에도 한가롭기 그지없다. 어항이 동서로 긴 편인데, 핵심은 바로 서쪽 부
분이다. 이곳에는 식당과 조그만 어시장이 형성되어 있는데, 인적이 드문 동쪽 부분과 달리 사
람들이 제법 몰려있었다. 식당에도 사람들이 절반 정도 차 있는 상태였고, 상인들과 가격을 흥
정하는 사람도 눈에 띈다.

심포항에서 바람길은 봉화산 산자락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길을 잘못 들었다. 괜히 바람길을
고집하다가 바람맞을까 염려되어 여기서 쿨하게 바람길을 접고 버스가 다니는 지평선로로 나왔
다. 심포항에서 지평선로 안하3거리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이다.
아직은 버스 시간이 있어서 거전리 방향으로 더 걷다가 거전리 입구인 길곤마을에서 길을 멈추
고 버스정류장에 들어가서 쉬었다.


▲  푸른 싹이 돋아난 김제평야의 위엄(거전리 방향)
올해 처음으로 본 푸른 싹들이다.

▲  풍년을 미리 예감하는 김제평야 (내륙 방향)

버스정류장에서 호남평야(湖南平野)의 일부인 김제평야를 보니 정말 넓기는 넓다. 지평선 너머
까지 끝없이 펼쳐져 마치 대륙의 농경지를 보는 듯 하다. 아직은 겨울 제국에서 해방되지 못한
평야 바깥 세상과 달리 평야에는 푸른 싹이 돋아나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것이 올해 처음으
로 본 푸른 새싹이었다.
이제 봄이 턱밑까지 오긴 했구나 실감을 하고 있으려니 남쪽에서 날아온 한 무리의 철새들이 오
랜 비행에 지쳤는지 우루루 평야에 착륙한다. 그리고 잠시 쉬더니 북쪽으로 힘찬 날개짓을 하며
길을 떠났다. 나도 북쪽으로 가야되는데 흔쾌히 태우고 가면 안될까?
손짓을 했지만 내가 저들보다 무거우니 현실은 불가능하다. 괜히 화물 초과 수송으로 저들에게
항공법 위반 벌금을 물리면 나로써도 면목이 없을 뿐이다.

그렇게 버스를 기다리니 거전리에서 맨몸으로 나오는 김제시내버스 19번이 다가온다. 버스에 올
라 만경까지 간다고 하니 같은 행정 구역에 가까운 거리임에도 구간 요금을 징수한다. 허나 나
에게 꿩 대신 닭을 고를 권한은 없었다. 그 버스가 아니면 걸어가거나 지나가는 차량을 잡아타
야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만경(萬頃)에서 익산(益山)으로 넘어갈 요량이었으나 버스가 너무 기어가서 만경까지
무려 23분씩이나 걸렸다. 그래서 간만에 차이로 익산시내버스 15번(원광대↔만경)을 놓치고 말
았지. 운행 시간을 너무 널널하게 짠 느림보 김제버스 때문에 결국 만경에서 1시간 강제 체류를
하게 되었다.
1시간에 긴 시간을 억지로 흘려보내며 익산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지만 시간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늦어진 터라 이후 일정을 다음으로 넘기고 익산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내 제
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봄맞이 김제 망해사 나들이는 약간의 여운을 남기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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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드립니다. 다만 다음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글은 간격 늘어짐이 없이 정상적으
   로 나오고 있으니 블로그글을 보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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