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한옥'에 해당되는 글 1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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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0.06.05 보은 땅에서 만난 고래등 기와집 ~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선병우고가, 선병묵고가 한옥 나들이
  3. 2020.03.31 광주의 남쪽 변두리, 대촌동~칠석동 둘러보기 (괘고정수, 고원희가옥, 고싸움놀이, 칠석동은행나무, 부용정)
  4. 2020.03.01 서울 도심의 한복판을 거닐다 ~~ 견지동 우정총국, 인사동거리, 종로 나들이
  5. 2019.05.05 높은 산에 포근히 감싸인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평창동~홍제천~부암동 나들이 (보현산신각, 박종화가옥, 홍지문, 옥천암, 산모퉁이)
  6. 2019.03.15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성북동에서 즐긴 고즈넉한 한옥 산책 ~~~ (최순우옛집, 수연산방, 한옥에서 즐기는 전통차 1잔)
  7. 2018.04.24 상큼한 경승지를 많이도 간직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둘러보기 ~~~ (세검정, 석파랑, 석파정별당, 홍지문,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8. 2017.11.27 서울 도심의 꿀단지, 서촌 늦가을 산책 ~~~ 옥인동 박노수미술관,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기와집 흔적들
  9. 2017.11.07 대학로의 포근한 뒷동산이자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 산책 ~~ (한양도성, 낙산공원, 자주동천, 삼군부총무당)
  10. 2016.11.25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부암동 늦가을 나들이 (무계원, 안평대군집터...)

북촌에서 2번째로 큰 고래등 기와집, 가회동 백인제가옥

 


' 북촌한옥마을에서 만난 고래등 기와집. 가회동 백인제가옥 '

▲  백인제가옥 안채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도심 한복판에 한옥마을의 성지(聖地)로 추
앙받고 있는 북촌(北村, 북촌한옥마을)이 있다.

북촌은 안국역 이북이자(원래는 청계천 이북임)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로 1,000채가 넘는
한옥들이 널려있으나 정작 속시원히 개방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북촌
제일의 고래등 기와집으로 꼽히는 가회동 백인제가옥이 2015년 11월, 세상을 향해 그 대
문을 활짝 열었다.
북촌한옥마을에서 고래등급 한옥으로써는 사상 최초로 빗장을 연 의미 깊은 현장으로 이
런 좋은 곳은 미리미리 발자국을 찍어 둬야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 법이
다. 하여 고래등 기와집의 좋은 기운도 훔칠 겸, 늦가을 평일을 이용해 그곳을 찾았다.

나는 자유관람으로 30분 동안 예습 차원에서 1바퀴 둘러보고 바로 가이드투어로 50분 동
안 가옥 내부(안채, 사랑채, 별당 내부까지)까지 말끔히 둘러보았다.


▲  있는 자들의 폐쇄적인 공간에서 시민들의 열린 공간으로 새로 거듭난
백인제 가옥 입구 (오른쪽 한옥은 관리사무소로 예전 바깥채)


 

♠  20세기 초반 상류층 고래등 한옥의 결정체
가회동 백인제 가옥(白麟濟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22호

▲  백인제가옥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백인제가옥 입구를 들어서면 한옥으로 된 관리사무소와 공터, 그리고 솟을대문이 차례대로 펼
쳐진다.
관리사무소로 쓰이는 한옥은 원래 가옥 바깥채로 세월의 고된 때를 간직한 채, 우중층하게 있
던 것을 손질하여 사무실과 화장실을 두었다. 바깥채 동쪽에는 차량들을 위한 검은 철제 대문
이 있었고 서쪽은 담장과 골목으로 막혀있었으나 바깥채 동쪽이 다른 이에게 넘어가면서 대문
을 밀어버리고 돌담을 둘렀으며, 대신 서쪽을 뚫어서 가옥 입구로 삼았다.

솟을대문 앞 공터 동쪽에는 쉼터가 조촐히 닦여져 있는데, 가이드투어를 신청했을 경우 지정
시간까지 그 쉼터로 와서 대기하면 된다.


▲  예전 백인제 가옥 바깥채 (2011년)

▲  남남이 되버린 바깥채 동쪽 한옥과 담장

바깥채 동쪽 담장 너머에는 깔끔한 모습의 한옥이 있다. 겉으로 보면 아무런 상관도 없는 현
대 한옥처럼 보이지만 그 집도 엄연한 백인제가옥의 일원으로 그 부분만 따로 분리하여 매각
했다.
현재는 친일 성향을 보이는 롯데 회장 일가가 별장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도심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한옥 별장까지 둔 그것들이 몹시 부러울 따름이다. 백인제가옥의 태생
도 그리 좋지는 못한 편인데 (친일파 한상룡이 지었음) 그 역사는 속일 수가 없는 것인지 친
일 성향 기업이 바로 옆에까지 들어와 북촌의 꿀을 빨고 있었던 것이다.


▲  솟을대문에 걸린 백인제가옥 현판의 위엄

▲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서쪽 부분, 중문간채

가옥이 개방되었다고는 하지만 솟을대문은 여전히 닫혀있었다. 대문도 주인을 닮는다고 졸부
들의 부질없는 자존심이 아직까지 깃들여진 탓일까? 그렇다고 문짝이 사용 불가일 정도로 부
실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쨌든 정면에 보이는 대문이 빳빳하게 닫혀 있으니 처음 온 사람
은 '이거 개방된거 맞어?' 당황할 터, 허나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대문 옆에 난 조그만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되니까.
솟을대문에는 '백인제가옥'이라 쓰인 한글 현판이 높이 걸려있다. 이 현판은 개방 기념으로
달아놓은 것으로 한글로 점잖게 쓰인 점이 이채롭다.

솟을대문을 지닌 건물을 대문간채라고 한다. 대문을 중심으로 5개의 방을 지니고 있는데, 이
들은 궂은 일을 담당하던 아랫 사람들의 생활공간으로 지금은 3개의 방을 활용하여 백인제가
옥의 100년 역사와 이곳을 거쳐간 4명의 인물(한상용, 최선익, 백인제, 최경진)을 다루는 공
간으로 쓰이고 있다. 가옥과 인물에 대한 설명과 사진, 시청각 자료가 있으며, 열린 공간이기
때문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도 된다. 또한 일반 관람시 가옥에서 유일하게 발을 들일 수 있는
방이기도 하다.
그럼 여기서 가옥의 역사와 이곳을 거쳐간 인물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솟을대문 안쪽 모습과 대문간채

① 시작이 좋지 못했던 백인제 가옥, 가옥의 1대 주인, 친일파 한상룡(韓相龍, 1880~1947)
이 가옥을 지은 한상룡은 돈 꽤나 주무르던 친일파 한관수(韓觀洙)의 아들로 인근 재동(齋洞)
에서 태어났다. 그 부친도 더러운 친일파지만 아들도 그 못지 않은 친일파로 악질 친일파로
악명이 대단한 이완용(李完用) 또한 그의 외삼촌이다. 아주 집안과 외가까지 쌍으로 더러운
존재들인 셈이다.

1898년 왜열도로 유학을 가서 그곳의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맺었으며, 1903년에 왜국(倭國)이
친일파 왕족인 이재완(李載完, 흥선대원군의 조카)을 앞세워 한성은행(漢城銀行)을 세울 때,
총무가 되어 실질적인 경영을 맡게 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친일파 집안의 배경이 컸을
것이다.
1908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위원으로 참가해 적지 않은 돈을 쥐기도 했으며, 1923년
한성은행 두취(頭取)로 취임했다. 그리고 친일 유력자 모임인 대정실업친목회 초대 평의장(評
議長)을 지냈으며, 그것도 모자라 데라우치 총독의 동상을 세우고, 안중근(安重根)에게 처단
된 이토 히로부미 기념회와 사이토 마코토 기념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뻔뻔함까지 보였다.
심지어는 1919년 왜정(倭政)에게 조선 사람들 모두 왜식으로 창씨개명을 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1930년대부터 각종 친일 단체에 빠짐없이 얼굴을 비추며 많은 돈을 전쟁에 내놓았으며, 관동
군(關東軍) 사령부의 사무촉탁을 맡기도 했다. 이런 더러운 공로로 왜정에게 많은 훈장을 받
았고, 중추원(中樞院) 참의, 중추원 고문, 칙선 일본 귀족원 의원에 임명되기도 했으며, 1935
년 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하나로 수록되기도 했다.
또한 그의 부인인 이용경도 애국금차회에 참여하는 등 부부가 쌍으로 왜정에 협력했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反民特委)에 넘겨졌으나 이승만의 농간으로 풀려났으며, 1947년 그 더러
운 목숨을 강제로 놓으며 지옥으로 떨어졌다.

한상룡은 가회동 이곳을 점찍어두고 1906년부터 이 일대를 매입했다. 1907년 경성박람회에 압
록강 흑송(黑松)이 소개되자 그 나무를 대량으로 구입해 7년 동안 터를 다지고 공사를 벌여
1913년 7월 완성을 보았다.
당시 서울 장안에서 가장 큰 기와집으로 악명이 자자했는데, 친분이 있는 왜인 사업가와 왜정
관료를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으며, 왜정 총독도 초청하여 술을 대접했다. 또한 미국인 석유
사업가인 록펠러2세도 다녀가는 등, 집의 위세가 대단했다.
허나 한상룡이 은행을 잘못 굴려 적자가 커지자 1928년 6월 한성은행에 집을 넘겼다. 은행 소
유로 바뀌자 천도교 단체가 손병희(孫秉熙) 집과 가까운 이곳을 종종 빌려 지방에서 상경한
교도들의 숙소 및 회합 장소로 사용했다.


▲  중문간채 앞에서 바라본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대문간채 동쪽 방에는 백인제 가옥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담장 너머로 보이는
한옥은 백인제가옥의 잃어버린 부분이다.


가옥의 2대 주인, 개성 출신 부호이자 민족언론인, 최선익(崔善益, 1905~?)
최선익은 개성 출신 부유층으로 불과 19세인 1924년 조선일보사에 주주이자 기자로 언론 활동
을 시작했다. 1932년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했는데, 여운형(呂運亨)을 사
장으로 두고 자신은 부사장을 맡았다.
한성은행에서 매물로 나온 가회동 한옥에 격한 반응을 보이며 1935년 1월 29일 인수했다. 친
일파로 더러운 발자국을 남겼던 1대 주인과 달리 오랜 시간 민족언론인으로 활동했으며 집에
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솟을대문의 위치를 지금처럼 변경하고 필지 정리를 했다.
허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1944년 백인제에게 매각했으며,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
를 알 수 없다.

③ 가옥의 3대 주인, 집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백인제(白麟濟, 1898~?)
백병원 창립자로 유명한 백인제는 왜정 시절 외과 의사의 1인자이다. 1915년 평북 정주의 오
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했으며,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6개월 투옥되면서 퇴학을 당했으나 1921년 복교하여 졸업을 했다. 1921년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수(조교), 총독부의원으로 일하다가 1923년 의사면허증을 받게 된다.

1928년 왜열도 동경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해 바로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명되었고, 1935년 조선의사협회가 조직되자 그 간사로 선임되었다. 1936년에 1년 6
개월간 프랑스와 독일, 미국에 유학을 갔었고, 1941년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를 그만두고 백
외과(현재 백병원)를 세워 병원 원장이 된다.

그는 의술, 특히 외과술이 뛰어나 고위층들이 그의 진료를 받고자 줄을 길게 섰다고 하며, 그
로 인해 적지 않게 돈을 벌어들였다. 그 돈으로 1944년 9월 최선익에게서 이 집을 매입해 자
신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1945년 9월 서울의과대학 외과 주임교수 겸 부속병원장이 되었고, 그해 12월 서울의사회 초대
회장이 되었으며, 1946년 12월 서울대 의과대학 외과주임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다음달 그만두
었다.
1948년 대한외과학회 제3대 회장을 지냈으나, 6.25전쟁 때 미처 피신을 가지 못해 2대 주인,
최선익처럼 북한으로 납치되어 아직까지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그는 이 땅의 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으며, 사냥을 좋아하여 종종 북한산(삼각산)으로 사냥
을 나가 맷돼지나 토끼 등을 뜨락에 던져놓고는 구워먹기도 했다. 장인과 장모를 위해 집 서
쪽에 별채를 지어주기도 했으며, 서재필 박사를 초청해 연회를 열기도 했다.

④ 가옥의 4대 주인, 백인제의 부인인 최경진(崔炅珍, 1908~2011) 그리고 그 이후
백인제가 납북되자 집의 안주인인 최경진이 집 주인이 되었다. 소유기간이 1968년부터라고 하
니 이때부터 실질적인 소유권을 행사한 듯 싶다.
그는 1928년 백인제와 혼인하여 2남 4녀를 두었으며, 백병원의 2대 이사장으로 병원을 재건하
는데 노력했다. 1988년 8월까지 집을 소유하면서 일부만 손댄 것을 제외하면 거의 원형에 가
까운 모습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여 1977년 3월 서울시 지방민속자료(현 지방민속문화재)
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1988년 아들인 백낙훤에게 소유권을 넘겼으며, 2009년 11월 서울시에서 인수하여 서울시 소유
가 되었다. 2012년 혜화동(惠化洞)에 있는 시장 공관(公館)이 한양도성 복원과 유네스코 등재
사업으로 인해 개방이 결정되자 공관 대체 장소로 백인제가옥을 정했다. 허나 문화유산 훼손
과 친일파 한상룡이 매국노 행위를 했던 현장이라며 비난이 쏟아지자 2013년 5월 그 야심을
버렸으며, 이곳을 속세에 열기로 결정하고 2015년 10월 부분 개방을 거쳐 11월 완전 개방되었
다.

⑤ 고래등 한옥의 결정체, 백인제가옥의 구조
북촌이 내려다보이는 가회동 언덕 2,460㎡에 닦여진 이 집은 장대한 규모의 사랑채와 안채를
중심에 두고 대문간채, 중문간채, 별채를 지었으며, 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별당을 두었다.
정원을 넓게 닦고 갖은 화초를 심었으며, 사랑채와 안채를 구별하던 기존의 전통 한옥과 달리
왜식 복도와 다다미방을 두어 서로 연결시켰다. 그래서 굳이 바깥을 나갈 필요가 없이 사랑채
와 안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화장실도 안에 있었음)
또한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했으니 이는 당시로는 생소한 건축 자재로 부를 과시하
고자 함이며, 안채 일부가 2층으로 되어있는 점도 이곳의 특징이다.

20세기 초반 근대 개량한옥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북촌 제일의 한옥인 안국동 윤보선
가(尹潽善家, 사적 438호)와 함께 북촌을 대표하는 한옥으로 윤보선가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
랑한다. (윤보선가는 아직도 비공개임)

끝으로 가옥 이름을 백인제가옥으로 한 것은 별 이유 없다. 백인제와 그의 부인, 자녀들이 60
여 년을 살던 집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상룡의 더러운 이름을 붙일 수
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시작은 영 좋지 않았으나 그 다음 인수한 사람들로 인해 일종의 면죄
부를 받게 되어 북촌 제2의 한옥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100년 이상 묵은 잘 남아있는 근
대한옥이니 지방문화재보다는 국가지정 민속문화재로 승급시켜도 손색은 없다고 본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93-1 (북촌로7길16, ☎ 02-724-0232)


 

♠  백인제가옥 바깥 둘러보기

▲  사랑채 (대청마루와 사랑방)

대문간채에서 붉은 벽돌문을 지나면 바로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지닌 사랑채가 마중한다. 사랑
채는 집 주인과 아들 등 남자들의 생활공간으로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책을 보는 서재의
기능도 같이 했는데, 넓직한 대청으로 이루어진 사랑방은 많은 손님을 치르기에 부족함이 없
는 규모이며, 방의 4면이 마루로 둘러싸인 특이한 구조이다. 사랑 대청은 전통 한옥의 우물마
루 대신 장마루를 깔았으며, 사랑채 내부는 가이드 투어 시에만 진입이 가능하다.

▲  솟을대문에서 사랑채로 이어지는
붉은 벽돌문

▲  동쪽 뜨락에서 바라본 사랑채


▲  바깥에서 바라본 사랑채 대청마루 (왼쪽은 사랑방)
집 안에 둔 물건 상당수는 백인제 가족이 쓴 것이 아닌 시중에서 구입한 것이다.

▲  상류층 한옥의 여유로움이 묻어난 사랑채 뜨락
뜨락의 구석 가장자리에는 온갖 화초를 심어 뜨락을 아름답게 수식했고
뜨락 한복판에는 잔디를 입혀 부잣집 뜨락의 위엄을 보이게 했다.

▲  뜨락 동쪽에 심어진 키 작은 소나무
백인제가 심은 나무로 여겨진다. 주인은 오래전에 가고 없지만
나무만은 잘 살아남아 주인의 빈자리를 보듬는다.

▲  뜨락 구석에 조촐히 닦여진 산책로

뜨락 구석에 약간 높게 터를 다져 박석을 깔고 조촐히 산책로를 내었다. 그 주변에는 여러 화
초와 소나무를 심어 아름다움을 더했으니 봄과 늦가을 풍경이 아름답다. 뜨락이 너무 넓어서
박석 산책로까지 냈을 정도이니 왠만한 졸부집 이상급임을 보여준다.
산책로는 사색의 역할도 한다. 비록 그 거리는 짧으나 생각을 하는데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
다. 집을 지은 한상룡은 이 길을 거닐면서 어찌하면 왜정에 잘보여 부귀영화를 누릴까? 그 생
각을 했을 것이고, 백인제는 어떻게 하면 병원이 잘되고 외과술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 생각
을 했을 것이며, 최경진 여사는 납북(拉北)된 남편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  뜨락 구석 산책로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  단풍나무 밑에 자리한 사랑채 뒷쪽 벽돌문
벽돌문에서 사랑채 굴뚝까지 벽돌담이 있었다. 그렇게하여 안주인의 공간인
안채를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끔 완전 가린 것이다. 허나 돌담은 무너져
흔적만 화석처럼 남아있고, 반쯤 열린 벽돌문만 전하고 있다.

▲  사랑채(왼쪽)와 2층 부분(오른쪽)

백인제가옥에는 특이한 공간이 하나 있다. 바로 사랑채 뒷쪽에 달린 2층 공간이다. 한상룡 시
절에 귀빈 접대용으로 주로 사용했다고 전하는데, 아마도 기생까지 소환해 질탕나게 술마시고
놀았던 모양이다. 얼마나 많은 왜정 고위층과 친일파가 저곳을 들락거렸을까?
현재는 2층 보호와 계단 부실을 이유로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사랑채 위에 덧씌운 2층 부분
집 주인이 살아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금지된 구역이다.

▲  반쯤 열린 사랑채 뒷쪽 벽돌문과
벽돌담의 흔적

▲  툇마루를 갖춘 안채 뒷쪽 부분


▲  백인제가옥의 뒷쪽, 안채 뒷쪽 주변
뜨락 북쪽에 자연 지형을 이용해 나무를 심고 돌을 다져 조촐하게 동산을 자아냈다.

▲  별당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바라본 안채 뒷쪽 부분

▲  안채 서쪽에 있는 부엌

식구도 많고, 부리는 사람도 많고, 거기에 손님도 늘 많았기에 부엌 또한 넓게 닦았다. 안방
쪽으로 부뚜막을 만들어 솥을 달고 장작을 이용해 불을 피웠는데, 이는 음식도 만들고 안채
난방도 고려한 기능이다. 부엌 바닥은 지표면보다 낮고 거의 흙바닥이며, 옆에는 부엌 살림살
이를 담당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찬방(饌房)이 있다. 부엌에서 일하는 아낙들의 거처이기도 하
다.


▲  완전 박제된 부엌처럼 되버린 안채 부엌 내부

왕년에는 부뚜막에서 연기가 꺼질 일이 없었다. 허나 지금은 언제 모락모락 연기를 피웠는지
가물가물할 정도. 더군다나 이제는 사람이 사는 집도 아니고 지체 높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니 더욱 손대기가 그럴 것이다.
이렇게 박제된 모습으로 방치하는 것보다는 가끔은 부뚜막을 깨워서 체험 이벤트를 해보는 것
은 어떨까 싶다. 부뚜막에서 지은 밥과 누룽지, 숭늉, 국 등을 먹어보는 도심 속에서 즐기는
옛 맛 체험 말이다. 아니면 저렴한 가격에 포장 판매하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그만큼 이렇
게 놀려두기가 아깝다는 뜻이다. (영화 '암살'의 촬영장소로 잠시 쓰인 적이 있음)


▲  안채 서쪽에 자리한 별채

별채는 백인제가 그의 장인, 장모를 위해 지은 공간이다. 별도로 대문을 내어 가옥의 서쪽 문
으로 삼았는데, 처가 어른까지 모두 끌어안고 살 정도로 처가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음을 보여
주며, 그들이 모두 떠난 이후, 집은 빈 공간이 되었다가 현재는 남쪽의 'ㄷ'자형 한옥과 함께
운영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대문은 굳게 닫힌 채 무늬만 남아있다.


▲  부연이 쳐진 운영사무실 한옥과 별채(뒷쪽)

▲  안채 정면과 뜨락 (태극무늬 마크가 달린 부분은 사랑채 복도)

안채는 집의 안주인, 즉 가옥 주인 부인의 생활 공간이다. 부인 뿐 아니라 어머니와 며느리,
딸 등 집안 여인들의 공간으로 안채의 중심인 안방은 오로지 집안 남자만 출입이 가능했다.
백인제가 이북으로 강제로 사라지고 그의 부인 최경진이 집 주인이 된 이후, 안채 안방과 대
청이 집의 중심이 되었고 그 영향 때문인지 가이드투어 때도 바로 안채에서 안으로 들어선다.
(사랑채로 들어가지 않음)


▲  흑백과 칼라의 조화, 사랑채와 안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사랑채 복도 바깥 벽

섬세한 무늬가 새겨진 벽 한복판에 태극무늬 마크가 또렷히 새겨져 있다. 그냥 흑백TV 같은
다른 벽무늬 보다는 태극무늬가 새겨진 부분이 마치 칼라TV처럼 더욱 돋보인다.


▲  안채 서남쪽 부분과 늦가을이 곱게 깃든 단풍나무
가을도 이곳의 공개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온 모양이다. 이렇게 곱게 다녀간
흔적을 남겨놓고 갔네. 안채 서남쪽 끝부분에는 집안 사람들이
사용하던 화장실이 있다.

▲  지붕의 추녀 곡선이 아름다운 중문간채 (가운데가 안채로 인도하는 중문)

▲  뚜껑이 닫힌 술 수장고 (중문 안쪽에 있음)
수장고에는 집주인이 애지중지하던 온갖 귀한 술이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동,서양을 망라한 술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괜히
열어보는 일은 없기 바란다. 인생만큼이나 허무한 짓이니까.


 

♠  백인제가옥 내부, 별당 둘러보기

▲  별당으로 인도하는 산책길

가이드투어 시간까지 백인제가옥을 살랑살랑 둘러보고 시간에 맞춰 솟을대문 밑 쉼터로 내려
갔다. 지금까지는 예습 차원에서 가옥 바깥을 자유롭게 둘러보았지만 이제는 급을 높여 심화
학습 및 복습 차원에서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가옥 내부까지 투어를 하게 된다. 투어 시간이
되자 곱게 개량 한복을 차려 입은 아줌마 가이드가 나와서 인사를 하며 안내를 해준다.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벽돌담, 사랑채 뜨락을 둘러보고 가옥 북쪽 돌담을 따라 이어진 약간
오르막의 산책로를 오른다.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나무와 화초가 무성해 산속 별장으로 순간
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왼쪽 나무 너머로 안채와 사랑채 2층 부분이 보이며 오른쪽은 돌담으
로 그 너머로 북촌 일대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별당이 손짓한다.


▲  돌담과 함께 이어진 별당 산책길

▲  돌담 너머로 북촌 북부가 바라보인다. (계동, 가회동 지역)

▲  백인제가옥의 조촐한 피서지, 별당(別堂)

백인제가옥에서 가장 북쪽이자 하늘과 맞닿은 곳에 시원스레 팔작지붕을 휘날리고 있는 별당
이 있다. 누마루 형식으로 이루어진 집으로 1층에는 돌기둥과 계단을 세워 건물의 키를 높였
고 그 2층에 방을 두었는데, 정면에 유리창을 내고, 돌담도 1층 높이 밖에 되지 않아서 정면
이 훤히 트여있다. 북촌 북부는 물론 북악산(백악산)까지 시야에 잡히나 시야의 범위는 그렇
게 넓지는 못하다.
집 주인과 가족은 여기서 휴식을 취하거나 조촐하게 피서를 즐겼으며, 창문만 열면 시원한 바
람이 솔솔 들어오는 피서철 명당으로 백인제는 여기서 온갖 상념을 즐겼다고 전한다.


▲  별당 주변에 둘러진 정겨운 토담

집 주인이 별당에 많은 공을 들였는지 별당의 갑옷인 주변 돌담까지 적지 않은 정성을 들였다.
흙과 자연막돌로 담을 쌓아 그 위에 암키와를 올렸는데, 담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하얀 피부
의 수막새를 엇갈리게 배치해 담장의 아름다움을 고려했다.
담장의 미(美)도 고려하여 아무리 밤손님이라도 저 담장만큼은 아껴줄 것 같다. 비록 무지 오
래된 존재는 아니나 20세기 근대 고래등 한옥의 생활상과 상류층의 팔자 좋던 인생을 보여주
는 현장으로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다행히 시민의 공간으로 해방되었으니 망정이지 계
속 졸부들의 전용 공간으로 남아있었더라면 그 미움은 더했을지도 모른다.


▲  별당 방에 홀로 자리한 병풍 (내용은 모름, 이곳과는 관련 없는 존재)

▲  고래등 기와집 속의 별천지, 별당 누마루

별당 내부는 오로지 가이드 투어 때만 들어갈 수 있다. 즉 아무 때나 갈 수 없는 비싼 구역이
다. 거추장스러운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타 마루를 들어서면 바로 방인데 방 동쪽에는 별
당의 백미인 누마루가 펼쳐져 있다.
누마루는 누각 형태로 이루어진 마루방으로 집 주인은 여기서 손님과 곡차 1잔 하거나 가족들
또는 혼자 휴식을 취했다. 창문을 열어두면 바람이 솔솔 들어와 몸을 간지럽히니 여름 제국(
帝國) 시절에도 이곳만큼은 여름을 잊어도 좋을 정도이다. 또한 가옥 내부에서 조망이 제일
괜찮은 곳으로 담장 너머로 가회동과 계동, 북악산(백악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보이는
범위는 그 뿐이다. 아무리 언덕에 지었다고 해도 높이가 낮기 때문이다.


▲  별당 누마루에서 바라본 북촌 북부 (가회동, 계동)

▲  남쪽에서 바라본 별당과 별당으로 인도하는 날씬한 기와문
집 속에 다른 집이 들어있는 기분이다. 그만큼 이곳은 넓고 크다.

▲  왕비의 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안채 대청

별당을 둘러보고 안채로 이동했다. 안채 역시 실내화로 갈아타 내부로 들어서면 되는데, 마루
로 이루어진 대청은 안주인의 생활공간으로 그가 앉던 평상(平床) 모습의 높은 의자와 탁자,
방석 등이 놓여져 그들의 높은 위치를 보여준다. 허나 이들은 집을 거쳐간 사람들이 쓴 것이
아닌 서울시에서 구한 늙은 생활 유물로 가옥의 품격에 맞추고자 이런 것을 갖다놓은 것이다.
어쨌든 집 규모부터가 으리으리하니 서민 스타일의 내 눈이 전혀 적응을 하지 못한다.


▲  백인제와 최경진의 빛바랜 혼인 사진 (1928년)
가옥에 있는 물건 대부분은 이곳과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이나 이 사진만큼은
이곳을 거쳐간 사람(최경진)이 남기고 간 몇 안되는 진품의 하나이다.

▲  안채 대청과 안방

▲  안채 안방
대청마루 옆에 안주인이 머물던 안방이 있다. 지금은 바깥에서 수집한 생활유물이
안방을 채우고 있어 마치 민속마을 한옥 방을 보는 듯 하다.

▲  안채 윗방
안방 바로 북쪽에 자리한 작은 방으로
안주인의 옷과 살림살이, 귀중품을
보관하던 장과 농, 반닫이 등을 두었다.

  ▲  안채 서남쪽을 이루고 있는 할머니방
대청 (오른쪽이 할머니방)


▲  안채 할머니방
안살림을 며느리에게 물려준 시어미가 생활하는 방이다. 문 앞에 별도의 대청과
복도를 두었으며, 안방에서 복도로 연결은 되지만 중간에 양식문이 있어
안방 영역과는 분리된다. 이곳에 있는 물건 역시 서울시에서 수집한
민속 유물이다.

▲  부엌과 연결되던 안방 서쪽의 조그만 방

▲  안방 서쪽에 숨겨진 다락방 (부엌 바로 윗쪽임)
지금은 허공처럼 비어있지만 왕년에는 부엌에서 쓰던 식재료와 생활도구 등을
잔뜩 머금은 창고였다.

▲  안채 건넌방

안채 건넌방은 며느리가 머물던 공간으로 사랑방과 안방 중간에 자리한다. 시아비가 며느리를
이뻐해주니 시아비의 소환에 언제든 달려갈 수 있도록 그렇게 자리를 잡은 듯 싶고, 바로 남
쪽으로 집주인 아들방과도 이어지니 아들 부부를 가까이에 있게 하려는 배려도 은근 엿보인다.
방 북쪽에는 별당처럼 시원한 누마루를 만들어 조촐한 피서처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바깥 외
출이 쉽지 않았던 며느리를 배려하고자 그렇게 만든 모양이다.

▲  안채 건넌방의 특별함, 누마루
여인들의 공간이라 발을 쳐서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끔 했다. 한여름에 저기서
자는 잠은 그야말로 꿀잠이겠지~!

▲  안채에서 사랑채(사랑방, 작은 사랑방,
사랑 대청마루)를 이어주는 복도
복도 끝에는 수세식 화장실과 욕실이 있는데,
이는 최경진이 설치한 것이다.


▲  건넌방 주변 방에서 만난 고풍스런 가구와 동그란 그림
서울시에서 구입한 생활 유물로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가고 싶다.

 ◀  사랑채 뒷쪽 복도와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사랑채와 안채는 복도로 서로 이어져 있고, 그
복도로 경계를 삼고 있다.
저 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구역인데, 왼쪽에 삐
죽 나온 대각선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2층은 한상룡이 왜정의 고위층을 불러 배때기
늘어지게 놀던 현장으로 이후 다락방으로 쓰이
다가 지금은 금지 구역으로 출입을 금하고 있
다. 계단이 오르락내리락하기에는 다소 위험하
고, 2층 공간이 그리 넓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
다.


▲  사랑채 사랑방

사랑채 사랑방은 집 주인의 거처로 서울시에서 수집한 여러 가구와 병풍 등이 주인이 없는 방
을 채워주고 있다. 서랍이 많이 달린 가구 위에는 이곳을 거쳐간 백인제의 흑백 사진 3점이
놓여져 있어 생전의 잘나갔던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  사랑방에 놓인 백인제의 빛바랜 사진들

▲  고급진 모습의 사랑채 대청
집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가족들과 담소를 나누던 공간이다. 개인적인 친분의
사람부터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여기서 대접을 받았으며,
창 밖으로 사랑채 뜨락이 훤히 바라보여 시야도 좋다.

▲  정면에서 바라본 사랑채 대청 탁자와 의자들

▲  빛바랜 사진 1장

사랑채 대청에는 백인제 가족이 남긴 흑백사진이 하나 놓여져 있다. 백인제가 서재필(徐載弼)
을 집으로 초청해 연회를 열고 사랑채 뜨락에서 기념 촬영을 한 것으로 순 남자들만 있는 가
운데 여자 1명이 사진 중앙에 홍일점이자 옥의티처럼 자리해 눈길을 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은 누구일까? 그는 백인제의 부인인 최경진으로 서재필이 사진 중앙에 있어
야 되지만 사람들의 양보로 부인을 중앙에 앉힌 모양이다. 무릎 밑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긴
머리에 꽃잎으로 보이는 머리 장식을 달고 있는데, 얼굴 또한 괜찮게 생겼다. 남자들 속에 있
어서 다소 부담스러웠던지 시선을 조금 오른쪽으로 향하며 시선 일탈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부인의 왼손 쪽에 앉은 이가 서재필이다. (백인제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음)


▲  중문간채 중문

사랑채를 둘러보고 안채에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안채 뜨락에서 중문까지 나머지 설명을 들
으면서 40여 분에 걸친 가이드투어는 쿨하게 마무리 되었다.
가이드는 관리사무소로 내려갔고, 나는 그냥 사라지기 아쉬워 중문 주변에서 두 발을 멈추었
다. 이렇게 백인제가옥을 최대한 갈 수 있는 범위까지 모두 가본 것이다. 자유관람과 가이드
투어를 포함한 관람시간은 1시간 40분 정도, 서울시는 이곳을 일종의 민속박물관으로 삼으려
고 오래된 생활유물을 수집해 비어있는 방과 부엌에 배치하고 있다. 그들 덕에 방의 허전함은
많이 가셔진 상태. 그들도 없었다면 무척 허전했을 것이다. 특히 안채와 사랑채에는 방이 무
지 많아 숨바꼭질을 벌여도 될 정도이다. 사랑채 지붕 위에 만든 2층 방과 부엌 위에 만든 반
2층짜리 방 등 숨겨진 방도 많으니 말이다.

10여 분 정도 사랑채 뜨락과 솟을대문 주변에 머물다가 다음을 기약하며 쿨하게 고래등 기와
집 대문을 나섰다. 이렇게 하여 백인제 가옥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다음에는 윤보
선가옥도 꼭 개방되어 이렇게 글을 남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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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월 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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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땅에서 만난 고래등 기와집 ~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선병우고가, 선병묵고가 한옥 나들이

 


' 새해맞이 충북 보은 나들이 '

▲  보은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사랑채


 

온갖 아쉬움 속에 묵은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밝았다. 올해는 제발 좋은 일이 많기를
애타게 소망하며 날씨가 최적화된 날을 택해 서울에서 고속/시외버스나 철도로 2시간 내
외 범위에서 새해 첫 답사지를 물색. 고르고 고른 끝에 보은(報恩)의 우당고택이 선정되
었다. 그곳이 그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명당(明堂)이라 하여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
문이다.

차디찬 기운이 가득한 이른 아침, 서울(남부터미널)을 출발하여 청주시내와 미원을 거쳐
보은읍에 이르렀다. 보은 읍내는 마침 5일장이라 장을 보러온 노인들로 활기를 띠었는데
읍내 한복판 중앙4거리에서 관기 방면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15분을 달려 장안3거리
에 두 발을 내린다.

장안3거리<개안리(開安里)>에서 북쪽으로 가면 장안면행정복지센터가 나오는데, 그 맞은
편에 우당고택으로 인도하는 하개교가 있다. 삼가천 위에 걸린 그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가면 선병우고가와 선병묵고가가 있는 개안리 마을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우당고택
이다.


▲  겨울에 잠긴 삼가천 (하개교 주변)
누렇게 뜬 갈대가 겨울 바람에 힘없이 흩날리며 소쩍새가 울 그날을 기다린다.
(왼쪽이 우당고택이 있는 섬, 오른쪽이 장안로와 장안면행정복지센터)


 

♠  20세기 초에 지어진 고래등 기와집, 우당고택<愚堂古宅,
선병국가옥(宣炳國家屋)> - 국가민속문화재 134호

▲  우당고택 사주문(四柱門, 정문)과 돌담길

화개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우당고택 주차장이다. 주차장 한쪽에는 문화유산해설사가 머
무는 조그만 집이 있는데, 거기서 안내 자료를 쥐어들고 바로 남쪽에 자리한 우당고택으로 이
동했다.

고택에 이르니 제일 먼저 북쪽 대문인 사주문이 마중을 한다. 이곳에는 대문이 남북으로 2개
가 있는데, 바깥에서 들어올 때는 무조건 사주문을 거쳐야 된다. 명문 부잣집의 대문답게 문
의 덩치도 크고 품격도 제법 깃들여져 있으며, 이미 세상에 공개된 집이라 낮에는 대문이 늘
열려있어 나들이객과 답사객, 사진꾼, 이곳에서 공부하는 고시생과 그들을 보러온 가족 등등
사람들이 마를 날이 거의 없다.

대문 옆에는 황토와 돌, 기와로 지어진 돌담이 고색의 내음을 물씬 풍기며, 조촐하게 돌담길
을 이룬다. 서쪽 돌담길로 가면 효열각과 고택의 남문인 솟을대문으로 이어지며, 대문을 들어
서면 고래등 기와집으로 유명한 우당고택 내부가 장대하게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우당고택의 역사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우당고택 서쪽 돌담길

▲  정면에서 바라본 북쪽 대문(사주문)

속리산(俗離山)에서 발원한 삼가천(三街川)이 금강으로 흘러가면서 개안리에 조그만 삼각주(
三角洲) 섬을 빚어놓았는데, 바로 그 섬에 20세기 초기 대표적인 근대 한옥으로 손꼽히는 우
당고택(선병국가옥)이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이곳은 보은 땅의 거의 유일한 자연산 섬으로 이 부근은 조선 때 나라에서 운영하던 마장(馬
場)이 있었다. 그래서 마장 안쪽 동네라 하여 '장안','장내'라 불렸으며, 지금도 그 지명은
유효하다.

우당고택을 지은 이는 보성선씨 집안인 우당 선영홍(愚堂 宣永鴻, 1861~1924)과 그의 큰아들
인 남헌 선정훈(南軒 宣政薰)이다. 이들은 원래 전남 고흥(高興) 출신으로 고흥 지역의 제일
가는 부자였다. 풍요로운 재산만큼이나 인심도 후하여 소작농에게 토지를 골고루 나눠주고 적
은 소작료를 받았으며, 어려운 사람들의 세금을 대신 처리해주는 등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인
심을 베풀었다.

선영홍은 아들이 4명 있었는데, 모두 끝이 훈(薰)자 돌림이다. (정훈, 남훈, 준훈, 동훈) 그
는 아들과 손자, 자손의 번창을 위해 천하에 제일가는 명당으로 터전을 옮기고자 이름난 지관
을 섭외하여 명당 자리를 물색했다. 그는 섬에 집을 지어야만 집안이 흥한다는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그에 걸맞는 자리를 찾은 끝에 서울 여의도와 충남 천안, 보은 개안리가 후보 장소로
꼽혔고, 지관인 심씨의 추천과 속리산과 가까운 개안리의 지형에 단단히 반해 1903년 이곳에
터를 닦았다.
이곳 지형은 삼가천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육지 속의 섬으로 그 모습이 마치
연꽃이 물에 뜬 형상이라 하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불린다. 이런 자리는 꽤 좋은 명
당으로 꼽힌다.

1919년 아들 선정훈과 함께 그 섬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자신과 후손들이 길이길이 살 명당
자리라 천하에서 제일 이상적인 집을 짓기로 했는데, 선정훈이 공사를 주도했으며, 그 시절
잘나가던 목공과 기술자를 비롯해 일꾼들까지 후하게 대접했다. 공사 자재에도 돈을 아끼지
않아 질이 좋은 목재와 재료를 사용했으며, 이때 도편수로 참여한 사람이 궁궐 목수로 이름난
'방대문'이었다.
섬의 지형이 모래로 되어있어 따로 배수시설은 닦지 않았으며, 왜식과 서양식이 섞인 개량형
한옥이 한참 주류를 이루던 때라 너무 전통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 시류에 흔쾌히 동참했다.
이렇게 큰 정성을 들여 5년 만인 1924년 집이 완성되니 집의 전체 면적은 3,900평. 집 크기는
99칸을 자랑했으며, 사랑채와 안채, 사당 3구역으로 구성되어 각각 담장을 둘렀다. 특이한 것
은 사랑채와 안채가 '工'구조로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옛날 집에서는 극히 꺼리던 형태
였다. (부수는 것을 뜻한다고 함)
그럼에도 집의 중요한 공간을 '工' 구조로 한 것은 집터가 길하지 않아서 흉택의 평면인 '工'
구조를 택하면 70~80년 이후부터 길하게 된다는 지관의 해석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즉 후손
대에 반전을 노린 것이다.

선정훈은 아버지와 별도로 대동상사(大東商社)를 운영했는데, 고흥의 토산물인 우뭇가사리를
왜열도와 중원대륙에 수출해 큰 돈을 벌었다. 그의 곳간만해도 무려 33칸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재산의 정도를 알만하다.
그들은 오늘날 이 땅에 썩어빠진 위정자와 상류층과 달리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
던 인물이다. 선영홍은 고흥에 대흥사(大興司)란 서숙(書塾)을 세워 인재를 양성했으며, 보은
에도 집 남쪽에 관선정이란 33칸짜리 서당을 세워 한학(漢學)을 교육시키고 우수한 학자를 초
빙해 수백 명의 후학을 길렀다. 또한 보은향교 명륜당(明倫堂)에 서숙을 지어주기도 했으며,
지역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덕행을 베풀었다.

6.25시절 폭격으로 대문 좌우 바깥행랑채와 주변 부속 건물이 파괴되어 사라졌다. 허나 그 외
에 건물은 별탈 없이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그 덕에 20세기 초에 지어진 전통 개량한옥
으로 학술 가치가 대단히 높다. 또한 6.25 때 군부대가 집 동쪽에 주둔을 했는데, 시간이 지
나면서 아예 그곳에 눌러앉았고, 동쪽 토지 2만 평은 그렇게 군부대 땅이 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집을 끼고 흐르는 하천 동쪽 물길을 막아 농토를 개간했으나 1980년
과 1998년 집중호우로 집이 물에 잠겨 돌각담들이 여럿 무너졌고, 집을 지키고자 안산(安山)
의 역할로 심은 소나무 숲까지 쑥대밭이 되는 피해를 입었다. 하여 현재 집 주인인 선민혁이
지역 사람들의 동의를 구해 하천을 현재 모습으로 복원했다. 그 이후로 더 이상 수해를 입지
않았으며, 소나무 숲도 다시 복원해 옛날의 운치를 되찾았다.

선정훈은 집만 물려주면 된다면서 많은 돈을 썼으나 워낙 돈이 많아 결국 아들에게 많이 상속
되었다. (아 부러워라ㅠㅠ) 현재는 선병국의 아들인 선민혁이 집을 지키고 있으며,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선병국가옥'이었으나 근래에 선정훈의 호를 따서 우당고택으로 이름을 갈았다. 

1990년대에 안채에 있는 곳간채를 손질하여 고시원을 열었는데, 최소의 비용만 받고 고시생들
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교육에 아낌없이 돈을 던진 할아버지(선정훈)와 증조부(선
영홍)의 유지를 잇기 위함이다. 또한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문의 별미인 씨간장이 있
는데, 무려 350년 이상 되었다고 전하며, 간장 보존을 위해 특별히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그 씨간장에 매년 새로 담구는 햇간장을 부어 보존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명품 로하스 식품
전'에 출품, 1리터가 500만 원에 팔리면서 유명세를 탔다. 그래서 우당고택(선병국가옥)이 천
하에 크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현재 김정옥 종부(宗婦)가 '선씨 종가 아당골'이란 이름으
로 간장을 판매하고 있으며, 집 안팎에 700여 개의 장독을 두어 씨간장을 숙성/보관하고 있다.

이렇게 전통 한옥과 간장으로 이곳이 크게 떠오르자 보은군에게 2007년에 고택 북쪽에 주차장
을 닦고 대문 앞 소나무숲 주변에 잔디를 입히며 의자와 이정표를 지어주었다. 이곳이 보은의
새로운 꿀로 부상하자 그 꿀에 서둘러 그럴싸하게 단지를 입힌 것이다.

현재 고택 내부는 사랑채와 사주문에서 솟을대문으로 이어지는 통로만 개방되고 있으며, 안채
와 사당, 그밖에 건물은 개방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개방 공간은 변경될 수 있음~~) 고택
바깥에 있는 효열각과 비석, 복원된 관선정은 관람이 가능하며, 안채 곳간채에는 고시생들이
머물고 있는데, 이곳을 거쳐간 고시생이 1,000여명, 사법고시 합격자만 50명을 넘는다고 한다.
시내와 멀리 떨어진 외지이고 적막한 곳이라 고시생의 인기가 대단했으나 최근 관광객의 발길
이 증가하면서 고시생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  행랑채 북쪽에 자리한 장독대의 물결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사당을 품은 담장이 있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고택 내부로 인
도하는 너른 길이 나오는데, 그 왼쪽에 낮게 돌담을 두르고 키 작은 나무와 조촐한 텃밭, 씨
간장을 품은 장독대들의 공간이 있어 정겨운 분위기를 우려낸다. 그 장독대 너머로 행랑채와
안채가 있다.


▲  사주문에서 안채, 사랑채로 인도하는 너른 길
집 내부에 이렇게 넓은 길이 있다니? 집이 정말 넓기는 넓다. 조선과 왜정 때
지어진 어지간한 큰 기와집을 능가하는 규모로 완전 조그만 궁궐 같다.


▲  사당(祠堂)

양반가는 보통 집 내부에 가묘(家廟)라 불리는 사당을 갖추고 있는데, 이곳 역시 예외는 아니
다.
이곳 사당은 3칸 규모의 사당과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재실<齋室, 제수(祭需)채라고도 함>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당과 재실이 복도채로 연결되어 완전 한 몸처럼 되어 있어 자연히 'ㄱ'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제수채와 복도채를 둔 사당은 거의 흔치 않은 케이스로 복도 폭은 1.1m이며, 사당 각
칸 앞에는 시멘트몰탈로 이루어진 디딤돌이 있는데, 이는 건립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사당을
오래도록 보존하고자 그 시절 새로운 건축 재료가 시도되었다.
 
사당 주위는 돌담으로 꽁꽁 둘렀으며, 사당으로 인도하는 솟을삼문은 굳게 잠겨져 있는데, 선
씨 집안의 선조를 봉안한 공간이라 일반에는 공개하지 않는다.

▲  사당의 솟을삼문(三門)

▲  'ㄷ'자로 이루어진 행랑채


▲  안채 북쪽

사당 남쪽에는 안채와 행랑채가 있다. 돌담으로 주변을 빙 둘러 눈으로 하얗게 바래진 지붕과
집 윗도리만 보일 따름인데, 이곳은 선씨 일가의 생활 공간으로 내부 관람은 통제되어 있다.
그러니 그들의 사생활과 재산 보호를 위해서라도 억지로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안채는 사랑채 동쪽에 자리하여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사랑채와 모습과 구조, 규모가 똑같
다. 그러니 괜히 안채를 기웃거려 안좋은 소리 듣지 말고 그냥 사랑채를 보면 된다. 집 모습
은 '工' 구조로 이 땅의 한옥 안채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안채를 받치고 있는 기
단(基壇)은 사랑채보다 1단 낮은 2단짜리 석축으로 가운데 4칸짜리 대청을 끼고 왼쪽이 안방,
오른쪽이 건너방이다. 건물 중앙에 마루가 있고, 무려 9개의 온돌방을 갖추고 있으며, 부엌은
큰살림에 걸맞게 상당히 크고 위에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앞뒤에 달린 툇마루가 복도
역할을 하여 모든 방과 부엌으로 이동할 수 있다.
안채 옆에는 'ㄷ'모양의 중행랑채를 두어 안채를 가리고 있는데, 그 사이로 조그만 안마당을
만들었고, 행랑채 남쪽 끝에 안대문을 두었다. 안대문 밖에는 담이 가로질러 있어서 바깥 대
문에서 안채로 가려면 'ㄹ'자로 꺾어 들어가야 했다.
행랑채 옆에는 쌀과 재물을 보관하던 곳간채가 있는데, 1칸 또는 1칸 반, 2칸 간격으로 있었
다. 허나 세월이 흐르면서 더 이상 쌀과 재물을 보관할 필요가 없게 되자 이들을 손질하여 고
시생들의 숙식 공간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곳이 세상에 널리 알려짐에 따라 관광/답사 수요가
늘면서 고시생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도 속세의 때를 크게 탄 모양이다.


▲  반쯤 열린 사랑채 중문

▲  우당고택의 백미, 사랑채

안채 서쪽에는 고택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사랑채가 있다. 안채와 같은 '工' 구조로 주위를
돌담으로 둘렀는데, 동쪽과 남쪽, 북쪽에 바깥과 사랑채를 이어주는 문을 냈으며, 남쪽에는
넓게 뜨락을 닦았다. 그리고 서쪽과 서남쪽, 동쪽, 북쪽 공터에는 소나무와 갖은 화초를 심어
사랑채 주변을 아름답게 꾸몄다.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2고주 5량가로 3단으로 싹둑 다듬
어진 석축 위에 큼직한 집을 세우고 8각으로 다듬은 화강암 주춧돌로 둥근 바깥 기둥을 받쳐
들고 있다. 집 구조는 안채와 같으며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두고 그 좌우로 온돌방 8개, 창고,
부엌을 두었는데, 앞뒤로 툇마루(퇴칸마루)를 두어 일종의 통로를 두었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둘렀는데, 난간의 모양이 섬세하며, 대청에는 사분합문(四分閤門)을 설치했다. 처마는 부연이
없는 홑처마로 서까래가 길다. 그리고 합작지붕의 박공면과 마루 밑은 붉은 벽돌로 쌓았는데,
이들은 나중에 손을 댄 것이다.

이곳은 일반에 공개된 공간으로 찻집과 전통체험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평일이라 사람이 없
다보니 거의 닫혀있다. (주말에는 북적댄다고 함) 그래서 굳이 내부에는 들어가지 않고 소심
하게 바깥만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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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치 있게 자라난 사랑채 소나무

▲  이제 무늬만 남은 사랑채 서쪽 우물

▲  사랑채 동쪽 부분

▲  사랑채 뒷쪽(북쪽)


▲  사랑채 정면에 걸린 '위선최락(僞善最樂)' 현판의 위엄

사랑채 정면에는 파란 글씨로 쓰여진 '위선최락' 현판이 걸려있다. 글씨가 마치 살아서 율동
을 부리듯 필체의 힘이 대단한데 '위선최락'이란 '선을 베푸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란 뜻
으로 선영홍/선정훈 부자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 좌우명을 말로만 끝내지 않고 평생 실천하고 살았다. 지역 사람들과 전통 유학을
배우고 지키려는 인재들을 위해 많은 재산을 내던진 것이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송덕비와 시
혜비(施惠碑)까지 세워 그들을 기리겠는가?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위인이자 성인군자라 할만
하다.
이런 상류층이 많아야 이 땅도 정말 희망이 있을 것인데 이 땅의 상류층과 권력층들은 어찌된
것이 하나같이 치졸하고 욕심들이 과한지 모르겠다. (특히 친일매국노의 후손들과 친일 패거
리들, 20세기 중/후반 독재정권 패거리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없는 사람들을 등쳐먹고, 백성
들 등골 빼먹고, 공기업과 도시, 나라까지 말아먹는 걸 예사로 여기니 말이다.
허나 그 치졸한 작자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선정훈 부자가 '위선최락'을 실천하고자 많
은 돈을 썼다. 그렇다면 그들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받기만 했을까? 전혀 그
렇지가 않다. 소작농은 소작농대로, 선정훈이 세운 대동상사 사람들은 역시 그들대로 열심히
살며 그를 도왔고, 지역 사람들도 그들 일가에게 호의적이었다. 또한 그들의 지원을 받아 공
부한 인재들은 사회 곳곳에 진출했으니 그들로 인해 선정훈 일가의 이름은 더욱 크게 빛을 발
하는 것이다. 그러니 크게 보면 서로 상부상조하며 살아간 것이다. 선정훈 부자도 그들의 도
움을 크게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 계속 집안이 번영을 하고 있고, 그들의 덕을 받은 사람들도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 반면 이 땅 대부분의 상류/권력층들은 거의 일방적으로 뜯어먹기만 하
지 상부상조할 줄을 모른다. 그러니 대다수의 백성들은 빈곤해지고, 상류/권력층의 배때기는
더욱 짙어만 간다. 그들에게 있어 '위선최락'은 '그게 뭐임? 먹는 거임? 그런 건 빨갱이들이
나 하는 거야!!' 하며 현판을 깨부실 것이다.

사랑채에는 '위선최락' 현판 외에도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도 있었다. 이것은 해남 대흥
사(大興寺)에 있던 추사 김정희의 무량수각 현판을 6.25 이후에 모각한 것으로 사랑채에 당당
히 걸려있었다. 허나 우당고택이 천하에 크게 존재감을 드러낸 이후, 찾는 이가 부쩍 늘었고
그 속에 불온한 무리까지 섞여서 들어오면서 2008년 2월 13일과 14일 사이 도난을 당하고 말
았다. 아직까지 현판의 행방은 오리무중이고, 그의 빈자리는 여전하다.


▲  솟을대문에서 바라본 사랑채 외곽 (담장과 중문, 사랑채)
사랑채 너머로 이곳의 든든한 후광이자 주산(主山)인 옥녀봉(玉女峯)이 바라보인다.

▲  가옥의 남쪽 대문인 솟을대문
사대부 기와집 대문의 품격이 느껴진다. 대문 바깥에는 너른 공터와 텃밭이
있으며, 서남쪽 소나무 숲에는 효열각과 3기의 비석이 서 있다. 대문
주변에는 바깥행랑채와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으나 6.25 전쟁 때
파괴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대문과 돌담만 남아있다.


 

♠  우당고택 바깥쪽

▲  솟을대문 남쪽에 자리한 3기의 비석들

솟을대문 서남쪽에는 시대를 달리한 비석 3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가장 왼쪽에 있는 비석
은 '전승지성공 정훈공덕비(前承旨惺公 政薰功德碑)'로 20세기 중반에 선정훈을 기리고자 세
워진 것이며, 그 비석을 크게 업데이트한 것이 오른쪽 끝에 자리한 큰 비석 '남헌 선정훈 선
생 송덕비(頌德碑)'로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와 이수(螭首)까지 갖춘 당당한 모습이다.

선정훈은 매년 보릿고개가 되면 우리의 북방 영토인 만주에서 좁쌀을 수입해 보은 지역 빈민
들에게 나눠주었고, 지역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생활고로 고생하면 직접 해결해주곤
했다. 광복 이후, 공산당 세력인 남로당에 가입한 주민들이 많았는데, 국군이 그들을 잡아들
여 이유불문 모두 총살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선정훈이
'마을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고, 돈이 필요해 명의를 빌려주고 서명을 한 것 뿐이다!'
라며 주
민 구제에 나섰고 보은군수와 지역 유지, 국군을 설득하여 주민들을 모두 구제했다.
그렇게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공덕을 베푸니 그 은혜에 감동한 지역민들이 송덕비를 세운 것
이다. 처음에는 보은읍내에 있는 동헌(東軒)에 있었으나 근래 이곳으로 이전되었으며, 비문에
는 그의 덕행을 한자 16자로 표현했는데,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학군을 일으키고 가난을 구제하니, 대대로 내려온 덕행이다. 각박한 인심을 순화시키고 경각
심을 일으키니 길이길이 감명되어 마멸되지 않으리라'


▲  관선정 기적비(觀善亭 記蹟碑)

비석 3형제 가운데에 있는 지붕돌 비석은 '관선정 기적비'이다. 남헌 선정훈은 1926년 집 동
쪽에 '착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복을 받는다'는 뜻에 관선정을 지었다. 규모는 33칸으로 이곳
을 서당으로 삼아 왜정에 의해 시들해진 이 땅의 한문학과 유학을 배우고 닦는 공간으로 삼았
는데, 그는 보은향교 명륜당(明倫堂)에도 서숙을 설치해주어 당시 유명한 유학자인 홍치유(洪
致裕)를 초빙해 관선정과 보은향교에서 젊은 후학들을 양성했다.
가르치는 선생과 후학들의 숙식은 물론 생활비까지 두둑히 지원해주니 배우고는 싶으나 가난
앞에서 붓을 꺾어야 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와 시험으로 그들을 가려뽑았다. 무작정 다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곳을 거쳐간 학생 수는 무려 수백 명이 넘었으며, 그 많은 이들
을 선정훈이 다 책임졌다.
이렇게 관선정은 왜정의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이 땅의 전통유학을 교육시켜 민족정신 함양
은 물론 한문학과 전통문화계승 발전에 크게 공헌했는데, 이에 속이 뒤틀린 왜정이 1944년 강
제로 폐쇄시키고 건물까지 부셔버렸다.

관선정에서 수학한 사람들은 1960~70년대 우리나라 한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청명 임창순
(靑溟 任昌淳, 1914~1999)이 그 대표적이다. 그는 14살에 이곳에 들어와 6년 동안 한문학을
배웠다.
이들 관선정 학생들은 1951년 '관선정학우회'를 세워 매년마다 선정훈을 기리는 행사를 가지
고 있으며, 1973년 뜻을 모아 관선정기적비를 세웠다. 비문(碑文)은 왕희지(王羲之)의 필체를
집자(集字)했다.

왜정에 의해 철거된 관선정은 1945년 경북 상주에 다시 지어졌으며, 상주 화북면으로 옮겨져
계속 후학을 기르다가 1951년에 철거되었다.


▲  옛 관선정의 모습과 평면도
관선정은 2개의 공부방, 선생방, 2개의 대청, 부엌, 고지기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선공영홍시혜비(宣公永鴻施惠碑. 선영홍 시혜비)

비석 3형제 부근에는 철로 이루어진 철비(鐵碑)가 있다. 철비는 이 땅에서 그리 흔치 않은 비
석 스타일로 우당고택에서 전혀 생각치도 못한 그를 만나니 생소하면서도 무척 반가웠다.

이 철비는 선영홍을 기리는 시혜비로 시혜비란 은혜를 베푼 것에 대한 고마움의 뜻으로 세운
비석을 뜻한다. 선영홍이 전남 고흥에 살던 시절 자신의 토지를 소작농들에게 골고루 나눠주
고 소작료도 깎아주었다. 또한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이 굶지 않도록 도왔고, 세금을 대신 내
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하여 그의 덕을 입은 고흥 두원, 점암, 남양, 남면 지역 소작
농은 그의 은덕에 감사를 표하고자 십시일반 돈을 모아 1922년 시혜비를 세웠다. 그러니 거의
100년 정도 묵은 소중한 은혜의 증표인 것이다.
왜정 말기에 고약한 왜정이 전쟁 물자로 쓰고자 몰래 빼돌렸으나 다행히도 여수에서 선영홍의
종손인 선민혁이 주민들의 도움으로 발견해 원래 자리로 옮겼다. 허나 도로 확장 사업으로 제
자리를 떠나야될 상황에 이르자 철비를 만든 사람들의 후손들과 협의해 2004년 이곳으로 옮겼
다.

부자가 많은 선행을 베풀어 그 선행에 감동한 지역 사람들이 손수 지은 비석으로 의미가 정말
남다르다. 정말 인간적인 미와 정이 넘치는 비석인 것이다.


▲  비석의 모습을 취한 선공영홍시혜비

▲  돌담에 둘러싸인 선처흠 효열각(宣處欽 孝烈閣)

시혜비 옆에는 돌담을 두룬 공간이 있는데, 그 안에 선처흠 효열각이 담겨져 있다. 이 효열각
은 선영홍의 부모인 선처흠과 경주김씨의 열행을 기리고자 1892년에 명정(命旌)하여 지어진
것으로 편액 우측에는 '효자증조 산대부동몽교관 선처흠지문(孝子贈朝 散大夫童蒙敎官 宣處欽
之門)', 좌측에는 '열녀 선처흠 처금인 경주김씨지문(烈女 宣處欽悽今人 慶州金氏之門)'이라
쓰여 있다.

선처흠(?~1921)은 그의 아버지가 심한 안질로 고생하자 의원을 찾아가 침과 약으로 계속 안질
을 다스렸다. 허나 딱히 차도가 없자 의원이 매고기가 명약이라고 귀뜀을 해주었다. 하여 매
를 잡고자 영마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니 마침 1쌍의 매가 날아와 알아서 잡혀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잡아 부친에게 먹이니 차도가 있었고, 추운 겨울 눈보라를 무릅쓰고 산에 올라
단을 쌓고 7일 동안 기도를 하니 또 다시 매가 알아서 잡혀주어 끝내 안질이 완쾌되었다고 한
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픽션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사건으로 선처흠의 효행은 서울까지 알려
졌다.
선처흠의 부인인 경주김씨도 효성이 지극하고 남편을 잘 따랐는데, 남편이 위독하자 넙적다리
를 베어 먹이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였다고 한다. 이후 남편의 병이 낫자 열녀(烈女)로 명
성이 높아졌다.

그들 부부의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들을 효자와 열녀로 명정하여 효열각을 지어주었으며, 원
래 선처흠이 살던 전남 보성에 있었으나 자손들이 모두 보은으로 들어오면서 1928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효열각 역시 전혀 생각치도 못한 존재라 앞서 시혜비와 함께 우당고택이 나에게 덤
으로 얹혀준 선물이다.

▲  키가 작은 효열각 정문

▲  1칸 크기로 단촐한 효열각


▲  효열각 내부에 걸린 현판
오른쪽은 효자 선처흠, 왼쪽은 열녀 경주김씨의 정려문(旌閭文)이다.

▲  관선정과 간장의 숙성 공간, 장독대

효열각은 우당고택에서 가장 남쪽이다. 여기서 서쪽과 남쪽은 삼가천으로 막혀있으며, 동쪽은
고택의 텃밭이 있어 다시 고택으로 들어오던가 아니면 고택 서쪽 돌담길로 나와야 된다.
돌담길로 들어서면 근래 복원된 관선정과 기와 돌담에 둘러싸인 거대한 장독대의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관선정은 앞서 관선정기적비에서 소상히 다루었는데, 옛날과 달리 새로 지어진
지금은 강당의 역할은 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복원된 의미 정도로 머물러 있다.

관선정 앞에는 장독대들이 넓게 포진해 있는데, 이들은 이곳의 오랜 자랑인 씨간장과 그 간장
을 혼합한 햇간장을 보관하고 있다. 즉 우당고택의 듬직한 꿀단지들인 것이다. 350년째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씨간장에 매년 새로 담근 햇간장을 부어 간장을 생산하고 있는데, 콩 80kg
가마로 만든 메주에 간장이 10L밖에 나오지 않는다. 2009년부터는 문화재청이 밀어주는 '전통
한옥 관광자원 활성화사업'에 일환으로 '전통 장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내놓아 호응을 얻
고 있는데, 바로 전통 간장 덕분에 이곳이 크게 뜬 것이다.

장독대는 각 지역 스타일로 조성하여 지역 별로 모아 두었는데,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 경
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장독대를 재현했으며, 그들은 모두 간장을 품
으며 숙성시키고 있다.

▲  황해도 장독대

▲  평안도 장독대

▲  제주도 장독대

▲  충청도 장독대

▲  관선정 옆 돌담길

▲  관선정 옆 송림에 묻힌 1칸짜리 정자


▲  우당고택 서쪽 돌담길과 돌담에 그려진 자연의 벽화
대자연이 그린 멋드러진 벽화가 황토 돌담의 품격을 드높인다. 그려진 폼을 보니
아마도 그만의 추상화 듯 싶은데, 아무리 천재화가가 모방해본들 자연이
그린 벽화만은 못하다.


서쪽 돌담길을 타고 고택의 시작인 사주문으로 나왔다. 고래등 기와집을 그런데로 1바퀴 둘러
본 셈이다. (통제 구역은 제외)
주차장에 있는 문화유산해설사 사무실을 바라보니 그 안에서 쉬고 있던 해설사 아저씨가 구경
잘 했냐고 물어본다. 그렇다고 답을 하고 몇 가지를 물어보니 날도 추운데, 안으로 들어와 커
피 1잔 하라고 그런다. 내가 그런걸 마다할 이유가 없어 안으로 들어가니 따뜻한 커피 1잔을
제공해준다.
해설사 아저씨는 정년퇴직을 하고 해설사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주말에는 관람객이 많
지만 평일은 썰렁하고 해설 요청 수요도 주말 평일 가리지 않고 거의 없다며 거의 대충 보고
간다고 그런다. 그렇게 그와 오랜 시간 세상 이야기를 주고 받으니 어느덧 햇님의 퇴근시간이
임박해 왔다.
날이 겨울인지라 햇님도 동절기 근무로 일찍 퇴근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갈 곳이 몇 곳 남았
는데, 더 이상 꾸물거려서는 안될 듯 싶어 그에게 선병우/선병묵고가, 상현서원에 대해 물어
보고 작별을 고했다.

* 우당고택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154 (개안길 10-2, ☎ 043-543-7177)


 

♠  개안리에 있는 선씨 일가의 다른 한옥 둘러보기

▲  보은 선병우 고가(宣炳禹 古家)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5호

개안리에는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외에 선병우, 선병묵고가 등 3채의 오래된 한옥이 있다. 이
는 서울 북촌(北村), 전주한옥마을,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등 한옥 밀집 지역과 오래
된 전통 마을을 제외하고는 거의 흔치 않은 케이스로 이들 모두 선정훈 형제가 세운 것이다.
가장 먼저 선영홍/선정훈이 이곳에 자리를 닦았고 1940년대에 선정훈의 형제들도 본거지인 고
흥을 버리고 이곳으로 올라와 선정훈집(우당고택) 북쪽 삼가천 너머에 집을 지은 것이다. 이
들은 20세기 중반 개량 한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선병우고가는 선정훈의 동생인 선준훈(宣俊薰)이 세운 것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중문 등
을 갖춘 당당한 한옥이다. (선병우는 선준훈의 아들) 집주인이 남쪽에서 올라온 탓인지 집의
구조는 남부 지방 가옥 배치와 유사하며, 간실을 넓게 잡은 것이 특징이다. 건축양식은 우당
고택과 너무 비슷한데, 이는 선정훈이 좋은 목수를 보내주어 도와준 탓이다.
비록 우당고택보다는 작아도 커다란 한옥은 분명한지라 집 상당수를 식당으로 쓰고 있다. 식
당 이름은 '복해가든'으로 닭백숙과 돼지고기, 버섯찌개 등을 내놓고 있는데, 집 관람은 딱히
제한은 없으나 개인 집이기 때문에 안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고 대문 밖에만 잠깐 기웃거리고
선병묵고가로 이동했다.

* 선병우고가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142-1 (개안길 15-9, ☎ 043-543-0606)


▲  선병우고가 앞에 자리한 3기의 비석과 넓게 퍼진 큰 소나무

선병우고가 앞에는 청도 운문사(雲門寺)의 처
진소나무처럼 좌우로 넓게 퍼진 큰 소나무가
운치를 지어내고 있다. 그 앞에는 3기의 비석
이 나란히 자리해 있는데, 그들 중 가운데에
자리한 늙은 비석이 이 집을 세운 '국당(菊堂
) 선준훈 추모비'이다.
1940년대에 세워진 것으로 나이에 비해 비석
이 너무 낡자 근래에 기존 비석을 업그레이드
시킨 새로운 비석을 옆에 지어놓았다. 그래서
기존 비석에 비해 때깔이 무지 고우며, 비석
형태는 앞서 '남헌 선정훈 선생 송덕비'와 유
사하다.

▲  소나무 앞에 자리한 3기의 비석들


▲  보은 선병묵 고가(宣炳默 古家)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4호

선병우고가에서 동쪽으로 5분 정도 들어가면 뫼로 막힌 막다른 곳에 선병묵고가가 짧은 고색
의 기운을 드러내며 자리해 있다.

이 집은 선정훈의 동생인 선남훈(또는 선동훈)이 1940년대에 지은 것으로 그의 아들인 선병묵
이 소유하고 있다. 집 주위를 황토색 돌담으로 빙 두르고 그 안에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창
고로 쓰이는 초가 등을 두었는데, 남쪽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에 사랑채가 있고, 중
문을 지나야 안채가 나오는 분산 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담장 서쪽 길에서 바로 사랑마
당과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서쪽 대문을 따로 내었는데, 이는 시대 변화에 따른 변형으
로 보면 된다.

현재는 우당고택(선병국가옥)처럼 집 일부를 고시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속세에 너무 알려
진 우당고택보다 찾는 이도 훨씬 적고 다소 외진 곳이며, 바로 옆에 산이 있어 공부는 정말
잘 될 것 같다.
이곳도 내부는 그런데로 공개되어 있으나(상황에 따라 비공개할 수도 있음) 개인 집이라 깊숙
하게 들어가지는 않고 사랑채까지만 보고 살짝 나왔다.

* 선병묵고가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장내면 개안리 96 (개안길 60)

▲  선병묵 고가 남쪽 대문
대문은 맞배지붕을 취하고 있다.

▲  고가 내부 (남쪽 대문 안쪽)
집 내부에 조촐하게 텃밭을 두었다.

▲  담장 너머로 보이는 사랑채

▲  겨울 제국의 의해 꽁꽁 봉해진 연못


▲  삼가천 둑방길에서 바라본 선병묵고가
검은 피부의 기와집, 하얀 피부의 기와집, 그리고 누런 피부의 초가까지
다양한 집이 망라되어 있다.

▲  삼가천 둑방길에서 바라본 개안리와 옥녀봉

▲  눈에 젖은 삼가천 둑방길

선병묵고가를 둘러보고 아직 햇님 퇴근까지는 시간이 있어 북쪽 서원리에 있는 상현서원(象賢
書院)까지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선병국가옥 입구인 하개교에서 장안로를 따라 1.7km 정도 가면 상현서원인데, 차량의 눈치를
피하고자 장안로 동쪽 건너편, 그러니까 삼가천 둑방길로 걸어갔다. 서원에 다다르면 하천을
건너는 징검다리라도 있을 듯 싶어서였다. 둑방길은 거의 응달이라 눈이 좀 쌓여있었고, 주변
경작지와 삼가천 갈대는 죄다 누렇게 뜬 모습으로 겨울 제국이 속히 지나가기를 염원한다.

한참 둑방길이 잘 이어져 있다가 삼가천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에서 길이 끊기고 말았다. 하천
으로 내려가는 조그만 길은 있지만 눈과 얼음 투성이라 접근이 어려웠고, 괜히 내려가다가 큰
일 날듯 싶어서 자존심을 곱게 접고 되돌아나왔다. 괜히 차량의 눈치를 피한답시고 꾀를 부리
다가 오히려 그 꾀에 당한 셈이다. 그 사이 햇님은 더욱 기울어지고 첩첩한 산속이라 날씨까
지 다시 추워진다.

장안3거리로 다시 나와 군내버스를 타고 보은읍내로 들어서 후식거리로 보은동헌이라도 볼까
했으나 길을 헤매어 결국 우당고택 등 선씨 고택 3채를 보는 선에서 올해 첫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허나 날이 이날 뿐이랴..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숨쉬는 동안은 언제든 보은 땅에 찾아
올 수 있다. 그러니 그리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 부디 선영홍/선정훈 부자 같은 대인배 부유/상류층이 많이 나오기를 염원하며 대단
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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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5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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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남쪽 변두리, 대촌동~칠석동 둘러보기 (괘고정수, 고원희가옥, 고싸움놀이, 칠석동은행나무, 부용정)

 


~~~ 봄맞이 광주 대촌동, 칠석동 나들이 ~~~


▲  칠석동 은행나무


 

울 제국이 드디어 무너지고 봄이 천하 평정에 열을 올리던 3월의 끝 무렵, 남도의 중심
지 광주(光州)를 찾았다. 광주 지인의 초청으로 간만에 가게 되었는데, 그는 자연과 문화
유산에 두루 정통하고 숲과 자연을 강의하는 교수로 꽤 저명한 분이다. 그런 이의 초청을
받았으니 본인 입장에서는 그저 영광스러울 뿐이다.

아침 일찍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여를 총알처럼 달려 광주역에 발을 내린다.
거기서 지인분 부부를 만나 전남대와 중외공원으로 이동하여 남도 매화(梅花)와 산수유를
구경하고 전남대 북쪽에서 남도 정식으로 며칠을 굶어도 끄떡없을 정도로 가득 배를 채웠
다. 그렇게 점심을 먹자 그들은 광주 답사를 시켜주겠다며 내가 희망하는 곳의 하나인 대
촌동으로 흔쾌히 인도해주었다.

대촌동(大村洞)은 광주 남구(南區)의 일원으로 도심과 가깝지만 동네 전체가 전형적인 시
골로 평야 등의 경작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또한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아가던 시절부터
많은 문인들이 집이나 정자를 짓고 살면서 포충사와 괘고정수, 양과동정, 고씨삼강문, 칠
석동 은행나무, 부용정, 고원희가옥 등 고색의 명소를 무수히 간직하고 있다.
이중 제일 먼저 포충사를 찾았는데 이곳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으며, 여기서는
괘고정수와 고씨삼강문, 고원희가옥, 칠석동 은행나무, 부용정 등을 다루도록 하겠다.


 

♠  광산이씨 이선제(李先齊)의 후손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600년 묵은
왕버들, 괘고정수(掛鼓亭樹) - 광주 지방기념물 24호

충사 북쪽 만산마을 입구에는 괘고정수라 불리는 거대한 나무가 있다. 남부 지방은 산수유
와 매화꽃, 벚꽃 등이 이미 만발을 넘어서고 있는데, 나무들은 아직도 다 쓰러져가는 겨울의
눈치를 보며 벌거숭이 모습으로 완연한 봄을 열망한다.
처음에는 느티나무나 은행나무인줄 알았는데 안내문을 보니 왕버들이라고 한다. 버들 중의 왕
이라는 왕버들이 저렇게까지 자랄 수가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잎이 어느 정도 붙으면
나무 구분이 가능하나 한결같이 벌거숭이 상태에서는 일반인들은 이게 느티나무인지 버들인지
구분이 쉽지 않다.

이 왕버들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광주 원산동이 고향인 이선제(1389~1454)가 심었다고 전한다
. 나무의 나이는 550~600년 정도로 여겨지며, 높이는 15.4m, 가슴 높이 둘레가 1.7m, 수관(樹
冠) 너비는 13m 정도이다. 
이선제는 광산이씨 집안으로 자는 가부(家父), 호는 필문(
畢門)이다. 권근(權近)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419년
증광시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1423년 고려사(高麗史)를 개수할 때 사관(
史官)으로서 정도전(鄭道傳) 등이 편찬한 고려사가 당시 이색(李穡), 이인복(李仁復)의 금경
록(金鏡錄)를 바탕으로 작성해 사실과 다른 것이 많음을 지적하며 원전(原典)을 따르자고 주
장했다.
1431년 집현전 부교리로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병조참의
(兵曹參議)와 강원도관찰사, 예조참의 등을 거쳐 1448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이후 정창손(鄭昌孫), 김종서(金宗瑞) 등과 '고려사'를 개찬(改撰)했으며 예문관(藝文
館) 제학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선제는 이 나무를 심으면서 나무가 죽으면 가문도 망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과거에 붙으면 이 나무에 북을 걸고 축하 잔치를 벌였는데, 그 연유로 괘고정
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괘고정이란 정자(亭子)가 있었던 것은 아니며,
그의 이름이 괘고정이다. (나중에 혼란을 막고자 나무를 뜻하는 '樹'를 붙임)


1589년 이선제의 5대손인
이발(李潑)이 정여립(鄭汝立) 사건에 연루되어 본인과 가족들이 처
단되자 나무가 비실비실 말라죽기 시작했다고 하며, 그때 이선제의 관직도 삭탈당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자 이발의 억울함이 밝혀졌고, 나무도 그 한을 풀었는지 이발이 죽고 300
여 년이 흐른 19세기 후반에 다시금 정신을 차리며 살아났다고 전한다. 이렇게 광신이씨 집안
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나무로 그 집안에서 애지중지 관리하고 있으며, 여기서 서북쪽으로 조
금 들어가면 이선제의 부조묘(不祖廟)와 묘역이 있어 이 일대가 이선제 집안의 성지(聖地)나
다름이 없다.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579-3


▲  옆에서 바라본 괘고정수의 위엄

▲  슬슬 기지개를 켜는 원산들
영산강의 지류인 대촌천의 물을 먹으며 올해도 풍년 예감을 꿈꾼다.


 

♠  고경명(高敬命) 집안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운
고씨삼강문(高氏三綱門) - 광주 지방기념물 12호

제봉산(霽俸山, 164m) 서쪽에 자리한 압촌동(鴨村洞)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제대
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한 제봉 고경명(霽俸 高敬命, 1533~1592)이 살던 곳이다. 그의 집터에
는 그 후손이 왜정(倭政) 초기에 지은 기와집(고원희 가옥)이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고경명
일가의 충절을 기리고자 나라에서 세운 고씨삼강문이 자리한다.
또한 마을을 서쪽에 품은 제봉산은 고경명의 호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경명이 어린 시절 뛰어
다니던 산이라 동네와 산 일대에 온통 고경명의 체취가 진동을 한다. 근래에는 고원희 가옥의
일부를 손질해 닦은 광주콩종합센터가 호남 지역 콩의 성지(聖地)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으며,
마을 북쪽에는 광주국제영어마을이 들어서 이 땅의 아주 몹쓸 전염병인 영어 사대주의(事大主
義)에 쓸데없이 일조하고 있다.

압촌제(鴨村堤)를 바라보며 자리한 고씨삼강문은 이 땅에 흔한 정려각의 하나로 고경명과 그
의 일가의 충절을 뼛속 깊이 기리고자 만든 것이다. 1충(忠), 3효(孝), 2열(烈), 1절의(節義)
등 7명의 정려(旌閭)가 봉안되어 있는데, 여기서 1충은 고경명, 3효는 그의 아들인 고종후(高
從厚), 고인후(高因厚), 손자 고부금(高傅金)이며, 2열은 고경명의 딸인 노상룡(盧尙龍)의 부
인, 질부인 고거후(高居厚)의 처 광산정씨(光山鄭氏), 1절은 고경명의 동생인 고경형(高敬兄)
이다.

고경명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북쪽으로 가다가 충남 금산
(錦山)에서 무모한 전술로 의병을 다 말아먹고 전사했다. 그의 맏아들인 고인후는 금산 전투
에서 살아남아 귀향했으며, 1593년 다시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晉州城) 전투에 참여했으나 성
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2째 아들인 고종후는 금산에서 아버지와 함께 전사했으며, 고경명의 손자인 고부금은 효자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2열에 해당되는 고경명의 딸과 고거후의 처 광산정씨는 정유재란(丁酉再
亂) 때 왜군에게 잡히자 자결했으며, 1절에 해당되는 고경형은 진주성 싸움 때 성이 함락되자
조카인 고인후와 함께 남강에 뛰어들었다.

이들이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은 것은 1595년부터로 고경명과 고경형 형제, 고종후/인후 형
제가 제일 먼저 정려되었고, 고경명의 딸이자 노상룡의 처는 1597년, 고부금은 1655년, 고거
후의 처 광산정씨는 1844년에 정려되어 바로 그해에 정려각이 지어졌다.
정려각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방에 홍살을 설치해 내부를 지키고 있고,
앞뒤 2열로 7명의 정려 현판을 달았다. 건물 밖은 돌담을 둘렀고, 바로 옆에는 고씨 집안의
제각(祭閣)인 추원각(追遠閣)이 자리해 그 집안의 자랑이자 보물인 삼강문을 지킨다.

* 고씨삼강문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산14 (압촌길66)

▲  태극마크가 그려진 고씨삼강문 정문

▲  조촐한 모습의 고씨삼강문

▲  고경형의 정려

▲  고부금의 정려

▲  고인후의 정려

▲  고종후의 정려

▲  고경명의 딸이자 노상룡의 처 정려

▲  고거후의 처 광산정씨의 정려


▲  고씨삼강문의 주인으로 추증 관직이 제일 많은 고경명 정려

▲  고씨삼강문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추원각
장흥고씨 집안의 제각(祭閣)이다.

▲  평화로운 전원 분위기의 압촌동 - 고씨삼강문과 고원희가옥, 제봉산,
광주콩종합센터 등의 명소를 간직하고 있는 시골 마을이다.

▲  고원희 가옥(광주 지방문화재자료 8호) 외경

고씨삼강문에서 동쪽으로 2분 남짓 들어가면 그 골목의 끝에 고원희가옥이란 기와집이 소나무
숲을 병풍으로 두르며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 집은 이름 그대로 고원희란 사람의 주택으로 고경명의 옛 집터이기도 하다. 그의 후손들은
계속 이곳에 살았는데, 옛집이 낡아서 무너질 지경에 이르자 1917년에 고원희의 아버지인 고
종석(高琮錫)이 지금의 집을 지으면서 300년 넘게 숙성된 고색의 때는 싹 날라가고 만다. 허
나 사람도 살아야 되니 그건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다. 비록 집은 새로 갈았으나 고경명이
살던 옛 터전을 계속 지키고 있으니 그것으로도 의미는 충분하다.

새집 이전에는 이 지방의 유서 깊은 고택(古宅)답게 건물이 꽤 많았으나 지금은 대문과 사랑
채, 안채, 곳간채, 사당 등이 남아있어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2012년 가옥의 서쪽
부분을 광주광역시와 저절로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 같이 만든 광주콩종합센터에 떼어주면서 면
적이 더 줄었다.

현재 집은 고원희씨 일가가 살고 있다. 결과는 완전 시궁창이나 임진왜란 때 호남 최초의 의
병이란 타이틀을 쥐고 있는 고경명의 후손이지만 왜정과 해방, 현대(現代)라는 임진왜란보다
훨씬 험난한 세월의 흐름을 거치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왜정 때는 집안에서 뜻밖에 친
일파가 나와 형제 간의 다툼이 생겼고 해방 이후에는 우익과 좌익의 대립으로 집안이 쪼개졌
다.
지금까지도 집안은 안정되지 못하여 다른 일가들은 모두 외지로 나가고 고원희 일가만 선조의
터전을 지키고 있다. 가옥 내부를 둘러보려면 그에게 허가를 받아야 되나 우리는 굳이 내부는
들어가지 않았다.

▲  고원희가옥 돌담과 대문

▲  광주콩종합센터에서 바라본 고원희가옥

집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곳간채가 나타난다. 대문 옆에는 차량을 위해 담장을 트고 완전
히 개방된 문을 냈으며, 안마당을 사이에 두며 안채가 있고 그 오른쪽에 부조묘(不祧廟)라 불
리는 사당을 두었다. 현재 가옥은 1917년에 싹 갈았지만 부조묘는 이전 것을 그대로 쓰고 있
어 여기서 그나마 오래된 건물인데, 고경명과 고종후, 고인후를 봉안하고 있다.
여기서 부조묘란 나라의 공이 있는 사람의 신위(神位)를 봉안한 특별한 사당으로 보통 조상의
신위는 4대가 지나면 무조건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된다. 허나 부조묘는 그럴 필요가 없는 불
천지위(不遷之位)의 특권을 누린다. 이런 사당은 제왕의 허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17년에 지어졌음을 알리는 상량문(上樑文)
이 있다. 근데 골 때리는 것은 조성 시기에 대한 표현인데, '숭정기원후 오갑정사 윤이월초
구일(崇 禎紀元後 五甲丁巳 閏二月初 九日)'이라 쓰여있다. 여기서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제왕인 의종<毅宗, 숭정제(崇禎帝)>의 연호이다.
명(明)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를 벌이며 아시아의 호구 약소국으로 온갖 개망신을 당하며 살
아온 조선, 단군(檀君)이 세운 조선(고조선)은 대륙까지 호령했던 큰 나라였으나 1392년에 세
워진 조선은 그 반대였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한 이후, 청나라 제왕의 연호 대신 숭정이란 연호를 계속 우려먹으며 명나
라를 쓸데없이 그리워했는데, 심지어 17세기 중반 명나라의 재건을 꿈꾸며 중원대륙 남부에서
난을 일으키다 청나라에게 개털린 남명(南明)의 제왕 영력(永歷, 1646년부터 시작됨)의 연호
까지 썼다. 물론 청나라에 반감도 명과 남명의 연호를 쓰게 하는데 한몫했다.

고종이 황제 위에 오른 1897년 이후로는 더 이상 숭정이란 이름을 쓰지 않은 줄 알았더만 왜
정 때도 그 쾌쾌묵은 숭정으로 연대(年代)를 표시한 것이다. 개화기 이후 양력(陽曆)이 들어
와 그 아니꼬운 왜왕의 연호 대신 양력이나 육십갑자(六十甲子)로 표시하면 될 것을 어찌하여
그 염병할 명나라 사대주의의 더러운 산물인 숭정 기원후~~~를 써야 했는가..? 집을 새로 지
었다는 고종석도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대주의가 팽배했던 조선 후기의 그 흔한 우둔한 유생
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아니 왜정 때까지 명나라의 썩어빠진 연호를 꼭 써야 했는가? 그것을
들으니 이 집에 대한 정덜미가 싹 떨어지다 못해 칵~ 침이 뱉고 싶어진다.

* 고원희가옥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99 (압촌1길 12)

▲  차량 출입문에서 바라본 가옥 내부

▲  고원희가옥 앞쪽 돌담길과 정자


▲  담장 너머로 바라본 부조묘
고경명과 고종후, 고인후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단청을 곱게 입혀서 그런지 새 건물처럼 보인다.

▲  고원희가옥 뒤쪽 제봉산 소나무숲

고원희가옥 뒤쪽에는 소나무숲이 우거져 솔내음을 진하게 우려내고 있다. 이곳에는 의자와 평
상이 여럿 설치되어 있고 나무 그늘이 햇살을 막아주고 있어 소풍이나 나들이 쉼터로도 아주
좋은 곳인데, 유치원과 초등학생들의 숲/자연 학습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으며, 여기서 산길을
따라 제봉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  바람의 차디찬 소리만이 살포시 적막을 깨뜨리는 소나무숲

▲  고원희가옥 앞쪽에 자리한 연못

▲  광주콩종합센터 정문

고원희가옥 앞쪽에는 근래 지어진 네모난 정자와 키가 큰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다. 정자 옆에
는 동그란 연못이 봄을 품고 있는데, 이 연못은 가옥을 새롭게 갈던 1917년 이후에 판 거라고
한다. 연못이긴 하나 수심이 얕으며, 개구리들이 늦잠을 자고 있는지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서 연못 너머 북쪽을 보면 고원희가옥과는 조금 다른 기와집의 무리와 장독의 행렬이 두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들은 2011년 9월에 결성된 '저절로소비자생활협동조합'에서 광주 남구
청과 고원희 일가의 도움을 받아서 2012년 7월에 문을 연 광주콩종합센터이다. 이곳도 엄연히
고원희가옥에 딸린 토지였는데, 가옥 집주인이 흔쾌히 땅을 제공하여 기존의 기와집을 손질해
콩센터가 들어선 것이다.

이곳은 이름 그대로 콩과 그를 빚어서 만든 장류에 모든 것을 담고 있는데, 장류(된장, 간장)
제조 및 보관/숙성, 판매와 장독대 설치 및 제공, 콩재배와 가공 관련 교육과 훈련,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그 외에 두부만들기, 천연염색체험, 인절미/화전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도 있
어 가족 단위나 교육을 겯드린 어린이 소풍/견학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센터 동쪽에는 요즘에는 보기가 힘든 장독대들이 하나도 아니고 수백 개가 길게 늘어서 정겨
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는데, 다들 콩 장류나 음식들이 담겨져 있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다.
광주콩종합센터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해당 홈페이지로 이동됨)


▲  광주콩종합센터 장독대의 행렬 ▼


 

♠  칠석동(漆石洞)에서 만난 명소들

▲  부용정(芙蓉亭) - 광주 지방문화재자료 13호

대촌동 남쪽에 자리한 칠석동은 옻돌마을이라 불린다. 이 땅에 흔한 시골 마을의 하나로 이곳
에는 무려 3가지의 오래된 명물이 전하고 있다. 그 명물이란 은행나무와 부용정, 고싸움놀이
로 이중 은행나무는 광주에서 가장 늙은 나무이며, 부용정은 광주에서 가장 먼저 향약이 시행
된 곳이다. 그리고 고싸움은 남도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명성이 자자하다.
이들 명소는 하칠석마을에 있는 고싸움놀이테마파크(공원)에 몰려있어 속 편하게 한 덩어리로
둘러보면 되며, 부용정과 은행나무 외에 고싸움놀이와 관련된 고싸움놀이전수관, 고싸움놀이
4D영상체험관 등이 있어 남도 고싸움의 성지(聖地) 역할도 겸한다.


▲  옆에서 본 부용정과 부용정석비

고싸움놀이테마파크(이하 고싸움공원) 동쪽에 자리한 부용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
붕 건물이다. 보통 오래된 정자들이 팔작지붕을 취한데 반해 여기는 맞배지붕을 지녀 정자보
다는 누각이나 당(堂)을 칭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인데, 특이하게도 공포 덩어리가
없는 민도리식으로 12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2단의 석축 위에 자리해 자못 웅장해
보이며, 내부를 가리는 벽이 없어 사방이 뻥 뚫려있다.

이 정자는 1418년에 이 동네 출신인 김문발(金文發, 1359∼1418)이 세웠다. 그는 광산(광주)
김씨로 증참판을 지낸 김거안(金巨安)의 아들이며, 호는 부용이다. 그래서 정자 이름도 부용
정이 되었다.
고려 우왕 때는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를 지냈는데, 전라도에 침투한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돌산만호(突山萬戶)가 되었으며, 조선으로 세상이 바뀌면서 1394년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
使) 김빈길(金賓吉), 만호 김윤검(金允劒) 등과 왜선 3척을 잡은 공으로 태조 이성계에게 활
과 화살, 은기(銀器) 등을 하사 받았다. 1406년에는 전라도수군단련사(全羅道水軍團撫使)로서
왜선 1척을 잡았고, 1407년에는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이추(李推)와 대호군(大護軍) 강원길
(姜元吉)과 함께 요동에서 넘어온 피난민을 압송해 돌려보냈다.
이후 경기수군도절제사와 충청전라도수군도체찰추포사(忠淸全羅道水軍都體察追捕使)를 역임했
으며, 1411년 충청도수군절제사로 승진했으나 병으로 인해 벼슬을 사양했다. 이듬해에는 전라
도수군절제사가 되었고, 1418년 황해도관찰사를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는 고향인 칠석동에서 부용정을 짓고 여씨(呂氏)의 남전향약(南田鄕約)과 주자(朱子)의 백
록동규약(白鹿洞規約)을 참조하여 향약을 만들어 고향의 풍속을 단속했는데, 이는 광주 향약
좌목(鄕約座目)의 유래가 되었다. 즉 광주에서 가장 먼저 향약이 시작된 곳인 셈이다. 고향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는 한편, 이시원(李始元), 노자정(盧自亭) 등과 학문을 논하며 아주 한
가롭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부용정은 김문발이 세상을 뜬 이후에도 이 지역의 이름있는 명소로 남아서 양응정(梁應鼎)과
고경명(高敬命), 이안눌(李安訥), 박제형(朴濟珩) 등 지역의 명사들이 찾아왔다. 그들이 남긴
편액이 무수히 장식되어 있으며, 정자 옆에는 부용정의 내력이 소상히 담긴 부용정석비가 자
리해 있는데, 이는 1984년에 세워진 것이다.
막힘이 하나도 없이 사방이 뚫려 있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마루 형태라 여름 제국 시절에
는 완전 극락과 같은 곳이다. 바람도 솔솔 불어오니 이곳에서 책을 보거나 낮잠을 자거나 바
둑을 두면 정말 꿀맛이 따로 없을 것이다. 다만 겨울 제국 시절에는 지옥이다.

▲  고싸움놀이테마파크(공원) 표석

▲  돌담 안에 담긴 널뛰기


▲  칠석동 은행나무 - 광주 지방기념물 10호

고싸움공원 남쪽에는 앞서 괘고정수를 능가하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자리해 있다. 덩치가 얼마
나 크던지 그의 앞에서는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저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대자
연 형님의 위대한 힘과 철도 녹여 먹을 정도의 장대한 세월이 그를 산만한 덩치로 만든 것이
다.

나무의 나이는 65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예전에는 80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알려졌
다. 그러다가 요즘은 650년 정도로 자리를 잡은 듯 싶다. 이 땅에 널린 은행나무는 다른 나무
와 달리 태반이 사람이 심은 것으로 부용정의 주인인 김문발이 심었다는 이야기가 한 토막 전
해오기 때문이다. 그는 14세기 중반에서 15세기 초반 걸쳐 살던 사람이니 그가 심은 것이 맞
다면 600년~650년 정도가 된다.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는 세월을 수백 년이나 꾸역꾸역 섭취하여 그의 키는 26m에 이르며, 7m
높이에서 가지가 무수히 갈라져 나와 큰 나무의 위엄을 제대로 과시한다. 그의 전체 둘레는
13.3m, 수관의 너비는 동서 30m, 남북 26m로 광주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나무로 꼽힌다.

예로부터 칠석동 옻돌마을 사람들이 서낭나무로 받들어 정월 대보름날 밤에 당산제(堂山祭)를
지낸다. 이 나무는 할머니당산, 그리고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들판에 할아버지 당산이라 불리
는 소나무가 있는데, 보통은 같은 종류의 나무를 노부부나 부부로 삼지만 여기는 서로 다른
나무를 노부부로 삼은 것이 특징이다. 나이와 덩치, 명성이 할머니 당산인 은행나무가 압도적
으로 우세해 할아버지 당산 소나무는 당산제 외에는 관심도 거의 못받는 우울한 실정이다. (
우리도 할아버지 당산은 안갔음)
은행나무는 귀신이 좋아하는 나무의 하나라 옛 사람들은 늙어보이는 나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고려 후기부터 마을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고마운 존재로
이곳 사람들의 은행나무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대보름날 당산제가 끝나면 다음날 16일부터 마을을 동서로 상촌(上村)과 하촌(下村)으로 나누
어 고싸움놀이를 벌인다. 현재 칠석동은 상칠석, 하칠석으로 구분되어 있으니 바로 여기서 비
롯되었다. 이때 고싸움에 쓰이는 고는 제일 먼저 이 나무를 돌아야 된다. 그러니까 칠석동 고
싸움놀이는 은행나무에서 그 서막을 여는 것이다.
이 마을은 전주이씨와 김문발의 광산김씨가 오랫동안 터를 일군 마을로 평야지대에 자리해 있
는데, 풍수지리적으로 이곳은 와우(蝸牛) 형국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소가 매우 사나워 이리
저리 날뛰므로 고삐를 매어두고자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하여 풍수상 부실한 부분을 커
버해주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  꽤나 굵직해진 은행나무 밑도리의 위엄
1그루가 아니라 여러 그루가 한 지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무 앞에는 상석이 놓여져 있으며, 여기서 당산제를 지낸다.

▲  나무에 칭칭 감겨진 금줄

나무가 아직은 정정하다고 해도 늙은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600년 이상의 노구를 지탱하기
힘들어 기둥을 여러 개 세워 지구의 중력에 힘겹게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세월보다 무거운 것은 천하에 아무 것도 없다. 손으로 만질 수가 없을 따름이지 세월의
무게는 무한대(∞)이기 때문이다,


▲  고싸움놀이4D영상체험관에 재현된 고싸움놀이의 위엄

은행나무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고싸움놀이4D영상체험관(이하 영상체험관)에 잠시 발을 들
였다.
이곳은 남도의 명물 고싸움놀이에 대한 온갖 자료와 영상, 디오라마 등을 담고 있는데, 단순
한 보여주기를 떠나 4D영상관과 4D입체게임 등 최첨단의 신선한 아이템을 준비해 민속놀이에
대한 관심이 적은 어린이와 젊은층을 겨낭한 점이 눈에 띈다. 그냥 이 땅에 흔한 박물관이나
체험관처럼 만들면 주목도 못받고 묻힐 우려가 크니 광주시에서 아주 통 크게 체험관을 지른
것이다.
 
영상관에서는 4D영상으로 고싸움 놀이를 아주 실감나게 시청할 수 있으며, 칠석마을 사람들이
이곳 풍수의 허한 부분을 커버하고자 은행나무를 심고 고싸움놀이를 하는 내용도 소상히 나온
다. 영상체험관은 관람, 입장은 공짜이나 영상관만큼은 입장료를 받고 있는데, 시청 시간은
20분 정도이다. (상영시간은 문의 요망)
그리고 4D입체게임은 우리나라 최초의 리얼타임 입체 영상게임으로 2팀으로 나누어 승패를 가
른다. (자세한 것은 안해봐서 모름) 또한 고라이더라는 코너는 고싸움 관련 O,X 퀴즈를 풀어
90점 이상이면 고라이더를 공짜로 태워준다. 고라이더는 고의 제일 높은 부분에 올라타는 것
이다.

2층은 일반적인 전시실로 '고싸움놀이 현장체험' 코너에서는 고싸움놀이를 재현한 거대한 디
오라마가 있으며, 여기서 퍼즐게임을 통해 고싸움에 등장하는 인물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
속의 고싸움 놀이'는 우리의 옛 땅인 왜열도와 중원대륙, 그리고 인도 등 다른 나라의 고싸움
놀이를 집대성했고, '당산제는 어떻게 지내나요?' 코너는 고싸움 캐릭터인 고동이와 고순이와
함께 고싸움놀이 당산제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 외에 '고싸움놀이 노래시설'에서는 고싸움놀이에 등장하는 소리(원음)를 들을 수 있다. 그
렇다면 고싸움 놀이는 무엇일까?

'광주 칠석 고싸움놀이'는 국가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된 남도의 주요 민속놀이로 광주 칠
석동이 그 중심이다. 매년 음력 정월 10일경부터 2월 초하루까지 20일 정도 펼쳐지는데, 은행
나무와 할아버지 당산 소나무에 당산제를 지내는 정월 대보름날이 절정이다.
고싸움의 고는 옷고름, 고맺음, 고풀이란 뜻으로 노끈 한 가닥을 길게 늘여 둥그런 모양으로
맺은 것이다. 그래서 고싸움이란 놀이에서 사용하는 고가 서로 싸움을 벌인다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싸움의 유래에 대해서는 딱히 전하는 기록은 없으며, 믿거나 말거나 속설에 따르면 땅의 거
센 기운을 누르고자 사람들을 동원해 땅을 밟는 놀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매우 가
까운 나주 남평(南平) 지방에서는 1950년대까지 활발하게 놀이를 진행했으며, 장흥과 강진,
영암 지방에서도 줄다리기 이전에 고싸움을 벌인 것으로 보아 줄다리기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
다. 줄다리기와 고싸움은 놀이의 시기가 같고, 칠석의 상촌은 남자, 하촌은 여자를 상징해 여
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여기는 것은 다른 줄다리기나 남녀 성대결 민속 놀이와 비슷하다.
허나 고싸움은 지휘자가 고 위에 올라가 게임을 지휘하며 하루도 아닌 20일 정도 격렬하게 진
행되는 점은 기존 줄다리기와는 다르다.

고싸움놀이의 구성은 상촌인 우대미와 하촌인 아랫대미가 너비 2m 이상의 골목길을 경계선으
로 나뉜다. 편단은 줄을 타고 싸우는 우두머리인 '줄패장', 고를 메는 '몰꾼', 고의 몸과 꼬
리를 잡는 꼬리줄잡이이며, 응원단으로 농악대, 깃발잡이, 횃불잡이 등이 있다.
승부는 상대방의 고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땅에 닿게 함으로써 결정이 나는데 이때 농악과 함
께 기수(旗手)와 횃불이 동원되어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한다. 만약 승부가 나지 않으면 고를
풀어 그 줄로 2월 초하룻날에 줄다리기로 최종 결판을 내기도 한다. 고싸움은 우리나라 민속
놀이 중 가장 패기가 높고 격렬한 남성적인 놀이로 강인한 협동심과 줄패장의 지휘력이 중요
하다. 고 위에 탄 줄패장의 지휘로 이리저리 움직이고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화끈한 민속놀이로 인기를 누렸던 고싸움은 왜정 이후 시들시들해지다가 1945년을 전
후해서 잠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동네에 뜻 있는 이들의 노력으로 다시 재현되었으며,
1969년 10월 대구에서 열린 제10회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고싸움의 위
엄을 천하에 드러냈다.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도 선보여 대단한 관심을 받았으며, 광주
시의 든든한 지원에 힘입어 고싸움의 성지인 칠석동에 고싸움전수회관과 영상체험관, 테마공
원을 만들어 고싸움을 천하에 알리고 보존하는데 힘쓰고 있다.
처음 칠석동에 왔을 때 단순히 은행나무와 부용정만 생각했지 고싸움놀이는 크게 생각을 안했
는데, 이렇게 영상체험관을 살펴보고 본글을 작성하면서 고싸움에 대한 관심에 조금 불이 짚
여졌다. 고싸움놀이는 정월대보름에 주로 열린다고 하니 그때를 노려 고싸움의 실감나는 현장
을 구경하러 가야겠다.

* 고싸움놀이테마공원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 619, 996일대 (☎ 062-607-2340,46)



고싸움놀이 영상체험관을 끝으로 광주 대촌동 투어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때 시간은 16시, 햇

님이 퇴근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지만 오늘 너무 많은 곳을 둘러봐서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질 지경이다. 게다가 투어를 시켜준 이들도 피곤한 상태, 여기서 더 본다면 이건 과식이다.
하여 미련 없이 그들이 사는 봉선동으로 넘어와 커피집에서 커피 1잔의 여유를 누린 다음, 인
근 지하철역인 소태역(광주1호선)에서 그들과 작별을 고하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봄맞이 광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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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한복판을 거닐다 ~~ 견지동 우정총국, 인사동거리, 종로 나들이

 


' 서울 도심의 한복판을 거닐다 '
(우정총국, 인사동 주변)

▲  우정총국 회화나무의 겨울 풍경


 

♠  우리나라 근대우편의 발상지이자 갑신정변의 쓰라린 현장
우정총국(郵政總局) - 사적 213호

▲  우정총국 (체신기념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조계사(曹溪寺) 바로 옆에는 우리나라 근대 우편의 발상지로 추앙
받는 우정총국이 있다. 이곳은 1884년에 일어난 그 유명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현장으로 초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물론 관련 수험서에도 지겹도록 나오는 갑신정변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우정총국은 겉으로 보면 고색(古色)의 기운이 썩 와닿지가 않는다. 나도 처음에는 우정국(郵
政局)이 설치된 1884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었지. 허나 겉보기와 달리 제법 오래된 건축
물로 원래는 조선 초기에 세워진 전의감(典醫監)이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7세기 초에
재건되었으며, 1629년에 왜국(倭國)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이후 서양 제국(諸國)과 외교를 맺으면서 근대적인 우편제도
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하여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의 건의로 1884년 4월 22일 우정총
국이 설치되었는데, 바로 전의감으로 쓰이던 현재의 건물을 손질하여 사용했으며, 홍영식이
초대 우정총판(郵政總辦)에 임명되었다.

1884년 5월 5월, 왜국(일본)과 영국, 미국 공관(公館)에 우정총국 설립을 알리고 왜국과 홍콩
우정국과 우편물 교환약정을 맺었다. 6월 8일에는 우정총국 신설에 따른 조직 편성 내용을 고
종(高宗)에게 보고하고 직원 모집에 들어가 7월 1일 왜인(倭人) 2명을 고용했으며, 10월 9일
에는 이상재(李商在)와 남궁억(南宮億), 신낙균(申樂均) 등 14명을 채용하고, 10월 21일에는
성익영(成翊永)을 우정총국 사사(司事)로 임명했다.
10월 29일에는 각종 우정 규칙과 장정에 대해 왕이 재가를 하였고, 11월 17일에 업무 분장과
입직(入直) 절차를 정했으며, 11월 18일에 5문과 10문, 2종의 우표를 발행하여 서울과 인천(
仁川) 간의 우정 업무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이 땅에서 본격적인 근대 우편이 시작되었다. 당
시 우정총국은 옆에 있는 회화나무에 날마다 국기(태극기)를 걸었는데, 그 높이가 2장(丈, 6
m) 남짓이었다고 하며, 그것이 우리나라 국기 게양의 효시로 전한다.

우편 업무가 시작되자 이를 기념하고자 12월 4일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가지기로 했다. 바로
이때 홍영식과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開化黨) 인물들은 큰일을 벌이기로 작정하고 몰래
준비에 착수했다. 그럼 여기서 별로 유쾌하진 못하지만 긴박하게 흘러갔던 갑신정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사족이긴 하지만 내가 제일로 싫어하는 국사 분야가 근/현대사이다.


▲  우정총국 앞 도로변에 있는 전의감터 표석
우정총국은 원래 전의감 건물이었다.

※ 갑신정변의 배경
1876년 이후, 조선 사회의 개혁과 서양 문물의 수용을 실현하고자 박규수(朴珪壽)와 오경석(
吳慶錫) 등에게 개화사상(開化思想)을 배운 사대부(士大夫)의 젊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개화
파(開化派)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개화파는 실현 방법을 두고 김홍집(金弘集), 어윤중(魚允中) 중심의 온건개화파와 김
옥균 중심의 급진개화파로 나눠졌는데, 온건파(사대당)는 청나라에 의존하면서 천천히 개혁을
하자는 반면, 급진개화파(개화당)는 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조속한 개혁을 꿈꾸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고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소환한 청나라군이 서울에 들어와
군란을 진압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군란으로 크게 혼쭐이 난 명성황후의 민
씨 패거리는 청나라에 크게 의지하며 권력을 유지하느라 급급했고, 개화파에 정치적인 압박을
가하면서, 그들을 통해 개혁을 이루려던 개화파의 노선은 중대한 수정을 요하게 되었다. 하여
개혁 외에 민씨 패거리 타도까지 계획에 넣었다.

그렇게 청나라와 민씨의 눈치를 살피며 기회를 엿보던 중 1884년 봄, 베트남을 둘러싸고 프랑
스가 청나라에 시비를 걸면서 8월에 전쟁이 터졌다. 프랑스에게 밀리던 청나라는 조선에 보낸
군사 3,000명 중 절반을 빼내 전쟁에 투입했는데, 급진개화파는 이것을 기회로 삼은 것이다.
하여 그해 9월 17일(음력) 김옥균은 박영효 집에서 정변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고, 민씨 패거
리를 때려잡아 권력을 장악하여 그들의 뜻을 펼치기로 했다. 그리고 홍영식을 설득해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거사일로 삼는 한편, 왜국 사관학교를 나온 신식 군대 중 자신들이 통솔하는
군인들을 동원하기로 했으며, 청나라군의 반격과 개혁 정책에 필요한 군사와 재정을 확보하고
자 왜국에게 도움을 요구했다.
왜국 역시 그들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1도 없었다. 그들을 통해 청나라와 민씨 패거리를 몰
아내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높일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국 공사(公使) 다케조에 신
이치로(竹添進一郞, 이하 다케조에)는 군사 지원과 차관을 흔쾌히 약속했다.


※ 갑신정변의 시작 (첫날)
드디어 우정국 개설 축하연이 벌어질 12월 4일(음력 10월 17일)의 서광이 밝아왔다. 홍영식이
주축이 된 축하연은 오후 늦게 시작되었는데, 왜국과 미국 공사/영사와 수행원, 개화당 인물
과 사대당 주요 인물이 자리에 참석했으며, 서재필을 비롯한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다른 개화
당 인물과 군사들은 우정국 밖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6시 정도가 되자 개화당은 우정국 옆집에 불을 질러 거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원래는 안
동별궁에 화약을 터뜨려 불을 지르려고 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애궂은 옆집에 불을 질렀
다.
갑작스런 불길에 염통이 쫄깃해진 민영익(閔泳翊)이 서둘러 밖으로 나오다가 서재필(徐載弼)
이 이끄는 군사들의 칼을 받아 쓰러졌다. 그 광경에 혼비백산한 참석자들은 서둘러 도망쳤고
그 혼란을 틈타 김옥균과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서재필이 급히 경복궁(景福宮)에
들어가 고종을 알현하고 변고가 생겼으니 서둘러 피신할 것을 청했다.
전후사정을 모르던 얼떨떨한 고종은 얼굴이 새파래져 왕후를 비롯한 왕실 가족과 수행원을 콩
볶듯이 대동하여 그들을 따라 경우궁<景祐宮, 현대사옥 북쪽으로 순조의 후궁인 수빈박씨(綏
嬪朴氏)의 사당>으로 이전했다. 개화당이 경우궁을 택한 것은 그곳이 좁아서 수비하기가 쉽고
, 창덕궁과 가깝기 때문이다.

거사 소식을 들은 왜국공사 다케조에는 군사 200명을 끌고 경우궁으로 달려가 왕을 호위했으
며, 개화당도 50여 명의 수하 군사들로 왕을 호위했다.

※ 갑신정변의 절정 (둘째 날)
고종을 차지해 명분을 얻은 개화당은 12월 5일(음력 10월 18일), 고종의 재가를 받아 자신들
을 중심으로 한 새정부 조직과 구성원을 발표했다. 김옥균은 혜상공국당상(惠商公局堂上) 및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고, 홍영식은 좌우영사(左右營使) 겸 우의정(右議政), 서광범은 협판
교섭사무(協辦交涉事務), 서재필은 전영정령관(前營正領官), 박영효는 전후영사(前後營使),
이재원(李載元, 1831~1891)은 좌의정(左議政), 이재완(李載完, 1855~1922)은 병조판서(兵曹判
書), 윤웅렬(尹雄烈)은 형조판서(刑曹判書), 김윤식(金允植)을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이중에 윤웅렬, 박영효, 이재완은 친일 짓거리로 뒷끝이 영 좋지 않은 작자들임>
그리고 사대당 인물들을 왕명을 구실로 경우궁으로 소환해 단죄했는데, 좌찬성(左贊成) 민태
호(民台鎬)를 비롯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조영하(趙寧夏), 해방총관(海防總管) 민영목
(民泳穆), 좌영사(左營使) 이조연(李祖淵), 후영사(後營使) 윤태준(尹泰駿), 전영사(前營使)
한규직(韓圭稷), 내관 유재현(柳載賢) 등을 처단했다.

경우궁이 왕실 사당이다보니 머물기에는 너무 불편했다. 게다가 날씨도 춥고, 음식도 여의치
않아 경우궁 남쪽에 있는 계동궁(桂洞宮)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계동궁은 이번 거사에서 좌의
정으로 추천된 왕실 종친이자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인 이재원의 집이다. 허나 명성황후와 조대
비(趙大妃)의 요구로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  전의감터 표석과 나란히 자리한 도화서(圖畵署)터 표석
고려 때 도화원(圖畵院)을 계승한 관청으로 그림으로 이름 꽤나
날린 인물들이 거의 이곳을 거쳐갔다.


※ 갑신정변 3일 천하의 마지막 날 (세째 날)
12월 6일(음력 10월 18일)이 밝아오자, 개화당은 14개 조항의 정령(政令)을 공포하니 그 내용
은 다음과 같다.
① 흥선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여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③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고 간리(奸吏)를 근절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재정 충실
을 도모할 것,
④ 내시부(內侍府)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등용할 것,
⑤ 전후 간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⑥ 각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면제할 것,
⑦ 규장각(奎章閣)을 폐지할 것,
⑧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⑩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시킬 것,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 대장
은 왕세자(王世子)로 할 것,
⑫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재정 관청은 금지할 것,
⑬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 집행할 것,
⑭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參贊)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
하도록 할 것, 

여기까지는 고종과 왕후, 왕대비의 거처 불편 호소로 거처를 좀 옮겼을 뿐, 개화당의 뜻대로
순탄하게 진행된 듯 싶었다. 허나 하늘은 개화당을 버려 그들에게 큰 시련을 내리니 바로 창
덕궁으로 들아간 명성황후가 동대문 부근에 머물던 청나라 장수 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원세개는 오후 3시경,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의 좌우영(左右營) 군사와 함께 창
덕궁으로 들어가 고종을 호위한 왜군과 개화당 군사를 공격했다. 쪽수로 밀어부친 청군의 공
격에 왜군과 개화당 군사는 속수무책으로 털리고, 고종과 개화당은 연경당(延慶堂)으로 피했
다. 허나 거기도 여의치 못해 후원 북쪽 북장문(北墻門)을 통해 북묘(北廟)로 피신했다.

청군의 공격에 염통이 콩알만해진 왜국공사는 북장문을 나오자마자 개화당과의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이끌고 줄행랑을 쳤다. 이에 개화당이 강력히 항의를 했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전세는 기울었기 때문이다.
하여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거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왜국 공사와 나란히
왜국공사관(운현궁 서쪽 경운동에 있었음)으로 도망쳤으며, 홍영식과 박영교(朴泳敎)를 비롯
한 군사 7명은 고종을 따라 북묘로 갔다. 허나 청군이 북묘를 접수하면서 홍영식과 박영교 일
행, 군사 7명은 모두 살해되고 만다. 이리하여 갑신정변 삼일천하(三日天下)는 아주 허무하게
막을 고하게 되고, 고종은 그날 밤, 창경궁 동쪽에 머물던 오조유(吳兆有)의 청나라 군영으로
들어가 하루를 머물렀다.

※ 갑신정변 이후
12월 7일(음력 10월 19일), 고종은 하도감(下都監)에 있던 원세계의 군영으로 이동했다. 왜국
공사는 목을 붙잡고 왜군과 서울 거주 왜인(倭人)을 데리고 인천으로 달려가 귀국선에 올랐으
며,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과 생도 10여 명도 그들을 따라 왜국으로 튀었다.

개화당의 정변에 단단히 고생을 한 고종은 개화당이 발표한 인사개편을 취소하고 심순택(沈舜
澤)을 좌의정으로, 김홍집을 우의정, 조병호(趙秉浩)를 교섭통상사무독판(交涉通商事務督辦)
으로 삼았으며, 다음날인 12월 8일 교서(敎書)를 내려 개화당의 3일 천하 기간에 내려진 전교
를 모두 거두고, 이때에 행해진 모든 것을 무효화시켰다. 또한 정변이 터진 우정총국을 없애
고, 통리군국아문(統理軍國衙門)을 의정부에 합쳤으며, 정변으로 인한 인심수습책으로 1882년
이후 멀리 유배를 보낸 죄인들을 모두 방면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원세계의 군영에 머물던 고종은 12월 10일, 7일간의 숨가쁘던 방황을 마치고 창덕궁으로 이어
(移御)했다.

정변 이후, 왜국은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군인이 적지 않게 죽었다며 배상금을 요구
했다. 하여 1885년 1월 9일, 조선 조정은 유감을 표하고 배상금 10만 원을 지불했다. 또한 공
사관 수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했으며, 4월 18일에는 조선과 청
나라에게 청군과 왜군이 모두 철수할 것을 제의, 조선에 변란이 생겨 군사를 보낼 때, 파병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을 내용으로 하는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추가로 맺었다. 이 조약으로 왜국
은 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에 대한 파병 권한을 갖게 되었다.

개화당(급진개화파)의 새로운 나라를 향한 개혁 의지는 정말 높이 살만하다. 그 꿈을 실현하
고자 정변을 일으켜 처음에는 패기가 넘치고도 남음이 있으나 그들은 국내에서의 지지기반이
빈약했고, 독자적인 힘이 아닌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렸다는 한계점이 있다. 게다가 서울에 주
둔해 있던 청나라군 1,500명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했으며, 정변이 조금은 꼼꼼하지가 못했
다. 결국 섣부른 행동에 개혁도 못해보고, 뭐하나 국익에 제대로 도움도 주지 못했으며, 안그
래도 동아시아 대표 호구로 비리비리했던 조선을 더욱 호구로 만들어 청나라와 왜국의 영향력
만 키워버린 꼴이 되었다.
설령 정변이 성공했더라도 국내 지지기반 미약과 왜국의 힘을 빌렸다는 한계점에 부딪쳐 제대
로 개혁이나 되었을지 모르겠으며, 조선에서의 왜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발끈한 청나라와
개화당을 싫어했던 명성황후가 손을 잡아 청일전쟁이 10년 일찍 발발했을 가능성도 크다.

어찌되었던 우울했던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현장으로 지금은 언제 그런 소동이 있었
냐는 듯, 서울 도심의 명소가 되어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  UPU위임장, 여권 (복사본)
1897년 제5차 만국우편연합총회에 파견된 민상호(閔商鎬, 1870~1933)에게 고종이 내린
위임장과 여권이다. 민상호는 1910년 이후 왜정에 협력한 친일 버러지이다.


※ 갑신정변 이후 우정총국
야심차게 문을 연 우정총국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해 12월 8일(음력 10월 21일) 폐쇄되고 말
았다. 이후 오랫동안 버려져 있다가 1895년 이후에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가 들어왔으며
1904년에는 보안회(保安會)가 이곳에서 왜국을 규탄하는 대중집회를 열기도 했다.
1906년 중동학교(中東學校)가 설립되면서 한어학교 건물을 빌려 썼으며, 1908년에는 그 건물
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다. 허나 1914년 재정악화로 건물이 처분되는 지경에 이르자 조계사
서쪽 수송공원 자리로 이전했고, 이 건물은 왜인이 사들였다.

1945년 이후 국가 소유가 되어 그런데로 원형을 유지하다가 1956년 체신부에서 관리하게 되었
으며, 1970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1972년 건물을 중수하여
체신기념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후 1987년 5월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여 내부에 우정
자료를 전시했는데, 그로 인해 건물이 다소 변형되어 19세기 모습을 온전하게 유지하지 못하
고 있다.
그리고 매년 봄 연등회(燃燈會)가 오면 조계사가 우정총국 뒤쪽 공원과 옆구리에 연등과 장엄
등을 1달 정도 닦아놓아 환상적인 야경을 선보인다.

* 우정총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39-7(우정국로 59, ☎ 02-734-8369)


▲  우정총국 회화나무

우정총국 옆에는 나이가 지긋한 회화나무가 우정국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다. 이 나무는 전
의감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약 400년 정도 묵었다고 한다. 그러니 우정국 건물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벗인 셈이다. 아마도 전의감에서 정자나무 용으로 심은 것으로 보이며, 이 건물을
거쳐간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봤다. 특히 갑신정변 때는 권력과 야망에 대한 인간들의 부질없
는 행동에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이렇듯 역사적인 현장에 있는 나무이나 아직 그 흔한 보호
수 등급도 얻지를 못했다.

체신기념관으로 거듭난 우정총국 내부에는 우정(郵政) 관련 문서와 자료들이 있다. 허나 대부
분은 진짜가 아닌 모조품이라 은근히 허탈하게 만드는데, 이들의 진품과 원본 상당수는 천안(
天安)에 있는 우정박물관에 있다.


▲  경성, 제국, 매일, 황성신문 허가신청서 및 허가서
1898년에 작성된 신문 허가 신청서와 허가서 (복사본)

▲  서울 지역 우정집신분전구역도(郵征集信分傳區域圖)
1884년 서울시내 우표 판매 설치도 및 집배 구역도

▲  대한제국 시절 우편물의 무게와 규격을 확인하던 저울과 자

▲  1900년에 제정된 국내외 우편 요금표 (복제본)

▲  주본안(奏本案) - 1903년 우정국 고급직원 임용과 승진에 관해
고종에게 재가를 요청한 문서 (복사본)

▲  우정규칙적요(郵征規則摘要)
1884년에 제작된 우정국 우편물 취급에 관한 기본 법규 (역시 복제품)

▲  대한제국 시절 우정국 우체부 아저씨의 모습과 의복
처음에는 하얀 두루마기 옷이었다가 차차 활동에 적합한 근대식 옷으로 변화했다.

▲  체신기념관으로 거듭난 우정총국 내부

▲  1972년 중수 기념으로 세운 우정총국 중수 기념비

▲  우정총국 뒤쪽에 닦여진 공원과 편지봉투 모양의 낙서장
그리고 화사하게 익어간 붉은 단풍나무


 

♠  인사동(仁寺洞)에서 만난 숨겨진 명소들

▲  경운동 민병옥 가옥(慶雲洞 閔丙玉 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5호

서울 도심의 대표 전통거리로 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인사동에는 오래된 명소들이 많이 깃들
여져 있다. 그들 상당수는 장대한 세월과 개발의 칼질에 사라지고 그들의 추억을 쫓는 표석만
아련히 있을 뿐이며, 제대로 남은 것은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경운동 민병옥가옥, 승동교회 등
얼마 되지 않는다. 허나 사라진 명소건, 살아있는 명소건 모두 조선 중/후기에서 20세기에 걸
쳐진 것들로 둘러보면 다 살이 되고 지식이 된다.

천도교(天道敎)의 중심지인 수운회관과 천도교 중앙대교당 남쪽에는 전통 돌담에 둘러싸인 고
즈넉한 한옥이 있다. 그 집이 인사동 주변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한옥인 경운동 민병옥 가옥
이다.
이 집은 왜정 때 친일파 사업가로 더러운 이름을 남긴 민영휘(閔泳徽, 1852~1935)가 1930년대
에 지은 것이다. 그 작자는 아들인 민대식(閔大植, 1882~?)과 민병옥에게 같은 꼴의 기와집 2
채를 지어주었는데, 이들 집을 이 땅 최초의 근대 건축가인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이 직
접 설계했다. 민병옥 가옥 주변에 있던 민대식 집은 주인이 바뀌면서 월계동(月溪洞)으로 넘
어가 예안이씨 재실인 각심재(恪心齋)로 살고 있다.

박길룡은 한옥 개량에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전통 한옥에서 채광이 잘 되지 않는 안방과 불편
한 동선을 해소하고자 사랑방과 안방, 문간방을 하나로 이어주는 독특한 모양의 'H'모습의 평
면 집을 설계해 이 집을 지었다. 안방과 주요 방들은 전면에 두어 채광과 전망을 고려했고,
대청을 1칸 규모로 줄인 대신 화려한 응접실을 두었다. 현관과 화장실, 욕실은 후면에 두었으
며, 서양 건축물처럼 모두 복도로 연결시켰다.

왜정 시절 전통 한옥과 서양식 고급 주거 양식이 혼합된 개량 한옥으로 친일 행적으로 막대한
부를 챙긴 친일 버러지와 그런 아비를 만나 평생 호의호식한 금수저 작자들의 집이란 점이 꽤
거슬린다. 하지만 사람이 미운 것이지 집까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얼굴에 철면피를 깔며 밥
맛 없이 구는 친일매국 후손들을 싸그리 잡아 족칠 생각을 해야지 괜히 집까지 구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민가다헌'이란 한정식당으로 바쁘게 살았으나 다시 찾아가보니 그 식당은 사라지고
텅 비어있었다. (2018년 11월 기준) 열려있던 대문은 굳게 잠겨져 그저 담장 밖에서 까치발로
바라보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민병옥이 죽고 그 자손인 '민익두'가 차지해 '민익두가'란 이름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
나, '경운동 민병옥 가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소유자가 오래전에 갈렸음에도 그 이름은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다. 그러니 이 집을 떠난 친일파 아들의 이름은 그만 쓰고 소유자의 이
름으로 명칭을 바꿔야 될 것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은 보통 그 소유자의 이름을 붙임)


▲  굳게 닫힌 대문과 담장 너머로 보이는 민병옥 가옥

▲  민병옥 가옥 현관 (옛 민가다헌 시절)

작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가옥 정원에는 여러 나무와 식물이 심어져 있고, 동자석(童子石)과
수석, 여러 석물들이 놓여져 정원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우리 전통식과 서양식, 왜식
이 적절히 섞인 정원으로 동쪽 담장에는 대나무가 늘씬한 모습으로 늘어서 있어 눈길을 끈다.

참고로 민병옥 가옥과 천도교 중앙대교당에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친일파로 추잡한 이름을
남긴 박영효의 집이 있었다. 1880년 서대문 밖에 공사관을 차린 왜국은 임오군란 이후 그의
집을 사들여 여기로 이전했으며, 갑신정변 때 불타버리자 1885년에 남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66-7 (인사동10길 23-9)


▲  충훈부(忠勳府)터 표석

인사동 북쪽 안국동4거리에는 공신과 왕족들에게 상을 내리고 그들을 관리하던 충훈부란 관청
이 있었다. 처음에는 공신도감(功臣都監), 충훈사(忠勳司)라 불렸으나 1459년에 충훈부로 이
름을 고쳤으며, 표훈원(表勳院)이라 불리기도 했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훈장 수여와 제조를 담당했으며, 을사조약 때 조병세(趙秉世)가 조약 파기
와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요구하다가 자결한 애환의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 이후에는 왜정
이 친일매국노와 왜정에 협조한 조선 황족들에게 훈장을 무더기로 만들어 뿌리면서 업무가 마
비되기도 했다.
충훈부는 6.25시절에 크게 파괴되었으며, 이후 보신각(普信閣)을 복원할 때 이곳의 기와 일부
를 임시방편으로 사용했다. 즉 보신각 재건에 충훈부가 희생된 것이다.


▲  죽동궁(竹洞宮)터 (태화빌딩 부근)

죽동궁은 순조(純祖, 재위 1800~1831)가 장녀인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1832) 부부를 위해
지어준 것이다.
명온공주는 1823년 김현근(金賢根)에게 시집을 갔는데 남편에게는 공교롭게도 무시무시한 정
신병이 있었다. 그 병을 고치고자 날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했으며, 무당들은 대나무칼을 흔
들며 굿을 했다고 전한다. 대나무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죽도궁(竹刀宮)이라 불렸
으며, 공주는 남편의 정신병과 선천적인 병약 체질로 22살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만다.

철종(哲宗) 이후 죽동궁은 민씨 패거리에게 넘어가 민영익(閔泳翊)이 집으로 삼았다. 그는 갑
신정변 때 우정국에서 서재필이 이끄는 군사들에게 난도질을 당해 쓰러졌으나 용케도 숨은 끊
어지지 않았고, 인근에 살던 묄렌도로프가 구조하여 알렌을 불러 치료하면서 저승의 문턱에서
간신히 돌아온 행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1886년 국왕폐위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청나라로 망명했으며, 귀국을 거부하고 청나라 상해(上
海)에서 많은 돈을 벌며 떵떵거리고 살다가 1914년에 죽었다. 한편 민씨 일가는 민영익이 아
들도 없고 귀국도 하지 않자 민준식(閔俊植)을 그의 양자로 삼았는데, 민영익은 청나라에서
부인을 만들어 늦게 아들 민정식(閔庭植)을 두었다.
민영익이 죽자, 양자(養子)와 친자 간의 진흙탕 튀기는 재산싸움이 일어나 장안의 이목을 끌
기도 했으며, 결국 1924년 앞서 민병옥 가옥을 지었던 민영휘에게 넘어갔다. 허나 가산은 거
덜나고 집과 살림살이는 모두 경매 처분되었으며, 죽동궁은 철거되어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지
고 말았다.


▲  순화궁(順和宮)터 (태화빌딩 부근)

죽동궁터 표석 옆에는 헌종(憲宗)의 후궁인 경빈(慶嬪)김씨의 거처이자 사당인 순화궁터 표석
이 고개를 들고 있다.
경빈김씨는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07년 6월 세상을 떴는데, 이완용(李完用)의 형 이윤
용(李允用, 1854~1939)이 반송방(盤松坊, 서대문 서쪽)에 있던 자신의 땅과 순화궁 땅을 교환
하여 이곳을 차지했다. (순화궁은 반송방으로 이전됨)

이준용은 동생인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던 더러운 매국노로 1911년 3월 동생에게 이 집을 넘겼
다. 이완용은 그 집에 2년 가량 있다가 옥인동(玉仁洞)에 징그럽게 큰 저택을 마련해 옮기고
이곳은 세를 주었는데, 태화관(太華館)이란 요리집이 들어와 장사를 했고, 장안 기생의 본거
지인 명월관(明月館)의 지점이 되었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이 이곳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그해 5월 명월관 본점이 불타
자 이곳이 자연스럽게 본관이 되었다. 1921년 전세 계약이 만료되면서 돈의동 옛 장춘관 자리
로 이전했으며, 이완용은 그 집을 남감리회 선교본부에게 비싸게 팔아먹었다.
1939년 기존 건물을 부시고 새로 지었으나 1980년 도심 재개발계획으로 무심히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는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이 새로 뿌리를 내렸다.


▲  태화빌딩 앞에 자리한 3.1독립선언유적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민족대표 33인이 명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었다.
흔히 태화관으로 알고 있는데, 명월관이 맞는 표현이다.

▲  태화빌딩 로비에 걸린 민족대표 33인 명월관 3.1독립선언도
상상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3.1운동과 관련된 자료로 많이 등장하여
무척 낯이 익다.

▲  유리 안에 갇힌 서울의 중심점 표석

태화빌딩 동쪽에는 하나로빌딩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 1층 로비에는 흥미를 끄는 석물 2개가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는데, 바로 서울의 중심점 표석(표지석)과 하마석이다. 서울을 거의 꿰
고 산다는 나도 그들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고, 건물 안에 이런 것들이 숨어있을 줄은 상
상도 못했는데 그 상상을 보기 좋게 깨버린 것이다. (석물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서울 중심점 표석은 1896년에 세워졌다. 말 그대로 서울의 중심점을 알리는 표지석으로 1395
년에 한양으로 천도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도성(都城)의 중심을 알리는 지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1896년 건국의 번지 중심 지점이라 하여 지금의 표석을 세웠다.
가운데에 굵직하게 생긴 네모난 표석을 세우고, 그 주위로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정도의 낮
은 돌기둥 4개를 세웠는데, 원래는 주변에 있었으나 빌딩 지하로 가져왔으며 다시 1층으로 옮
겨 햇볕을 보게 했다. 또한 유리막 안에 넣어 그들의 신변을 지킨다.

중심점 표석 옆에는 2단으로 된 돌계단이 있는데, 이는 옛 순화궁의 유일한 유물로 말을 타고
내릴 때 쓰던 하마석(下馬石)이다. 그 역시 주변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빌딩 지하로 수습했고,
1층으로 옮겨 표지석과 나란히 두었다.

이들을 빌딩 안에 계속 두는 것보다는 바깥으로 옮겨 바람이라도 쐬게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원래 밖에 있던 존재인만큼 답답하게 실내에 두지 말고 밖으로 보내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말이다. 또한 도난과 건강이 우려된다면 유리막을 씌우거나 조그만 보호용 건물을 세우는 것
도 괜찮을 것이며, 100년 이상 된 서울의 유일한 중심 표지석인만큼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제
대로 관리를 해야 될 것이다.

* 서울중심점 표석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94-4(인사동5길 25, 하나로빌딩 1층)


▲  옛 순화궁의 유일한 유물인 하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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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에 포근히 감싸인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평창동~홍제천~부암동 나들이 (보현산신각, 박종화가옥, 홍지문, 옥천암, 산모퉁이)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평창동~부암동 나들이 '


▲  인왕산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부암동


 

가을이 한참 숙성되던 9월의 끝 무렵, 친한 후배와 서울 도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인 평
창동과 부암동을 찾았다.
평창동(平倉洞)하면 으리으리한 저택과 빌라가 먼저 떠올릴 정도로 서울의 대표적인 졸부
동네로 꼽힌다. 인근 성북동과 더불어 이 땅의 0.1%가 산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인
데, 이곳이 졸부의 성지(聖地)가 된 것은 북한산(삼각산)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은 빼어난
절경과 더불어 명당 자리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하여 1950년대 이후 돈 꽤나 주무
르던 졸부들이 마구 몰려와 북한산의 살을 마구잡이로 뜯어내고 할퀴며 자리를 가리지 않
고 그들의 모래성을 세운 것이다.

평창동은 북한산으로 가는 길목이라 산꾼과 나들이객 수요가 많다. 하여 졸부들만의 폐쇄
적인 공간이 되는 참상은 면했다. 허나 10초가 멀다하고 나타나는 고래등 집에 온갖 잡동
사니 생각이 다 일어나 정처 없는 마음을 편치 않게 한다. 허나
그렇다고 너무 주눅은 들
지는 말자~!
제아무리 철옹성 저택이라 한들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모래알 같은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
이다. 그러니 기죽지 말고 당당히 어깨를 피며 졸부들로 고통 받고 있는 평창동을 끌어안
아 보자, 또한 이곳에 서린 명당(明堂)의 기운도 조금씩 챙겨가도록 하자.

우리가
평창동을 찾은 것을 이곳에 서린 명소를 보고자 함이다. 우리 주제에 이런 모래성
을 구입하기는 완전 불가능하니 명소만 쏙 챙겨보고 이옷 동네인 부암동으로 넘어갔다.


 

♠  평창동에서 만난 명소들 (박종화 가옥, 보현산신각)

▲  평창동 박종화 가옥(朴鍾和 家屋) - 등록문화재 89호

평창동의 제일 번화가라 할 수 있는 세검정 새마을금고 주변(서울예술고등학교, 평창동주민센
터 정류장 맞은편)에서 평창11길을 따라 12분 정도 올라가면 평창동에 거의 흔치 않은 기와집
인 박종화 가옥이 마중을 나온다.

돈 냄새가 시끄럽게 진동하는 저택과 빌라 숲속에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이곳은 현대 문학가인
월탄(月灘) 박종화가 살던 집이다. 원래는 악질 친일파인 이기원(李起元, 1880~1937)이 왜정
(倭政) 초기에 동대문 부근인 충신동(忠信洞) 55-5번지에 세운 것으로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
704두<인(人)으로 쓰기도 아깝다>의 1두로 등재되어 있다. 또한 그의 아비인 이봉의도 왜왕에
게 남작(男爵) 작위를 받는 등 부자(父子)가 아주 쌍으로 매국노로 악명을 날렸다.

1937년 6월 이기원이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떨어지자 박종화(이하 월탄)가 이 집을 매입해
분가를 했다. 그러다가 1975년 혜화동과 동대문을 잇는 도로(율곡로)가 뚫리면서 집이 그 대
지에 포함되자 평창동으로 옮겨 원형 그대로 복원을 했다. 그는 세상을 뜨던 1981년까지 이곳
에서 늘 펜을 놓지 않았으며, 그가 간 이후에는 자손들이 살고 있다.

※ 월탄 박종화(1901~1981)의 생애
월탄은 1901년 남대문 밖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높은 벼슬을 누린 부유한 양
반가로 그의 할아버지인 박태윤은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벼슬을 그만두고 백지(白紙)와 장
지 등의 종이를 팔아 크게 돈을 불렸다. 그렇게 번 돈으로 인쇄소와 책방까지 차렸고, 집 사
랑채에 서당을 열어 집안과 지역 젊은이에게 한학과 신학문, 왜어(倭語)를 가르쳤다. 왜어와
신학문 같은 경우는 유능한 왜인을 초빙하여 강사로 삼았다.

월탄은 할아버지한테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배웠고, 15살에 신학문을 배우고 싶다고 청하여
1년 동안 신학문과 왜어를 배워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 휘문중고교)에 3등으로 입학을 했
다. 여기서 홍사용(洪思容), 정백(鄭白) 등의 벗과 교류를 했으며, 무려 17살에 혼인을 했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친구와 함께 탑골공원으로 달려가 만세를 불렀으며, 1920년 학교를
졸업하자 문학동인지 '문우(文友)'를 발간했다. 그리고 1921년에는 '장미촌(薔薇村)' 창간호
의 그의 첫 작품인 '오뇌의 청춘'과 '우윳빛 거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창작의 길에
나선다.
1922년 백조(白潮)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밀실로 돌아가다','만가' 등의 시와 '영원의 승방
몽'을 내놓았고, 1923년에는 조선 세조 때 활약했던 신숙주(申叔舟)의 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목매이는 여자'를 발표해 충신의 길이 얼마나 가시밭 길인지를 표현했다.

1924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첫 시집인 '흑방비곡'을 냈고, 이어 단편소설인 '순대국'과 '여
명','부세' 등을 차례대로 쓰면서 소설가로 변화를 꾀했다. 1936년 '금삼(錦衫)의 피','대춘
부'를 통해 역사 소설을 탁월하게 엮었으며, 1940년 '다정불심(多情佛心)'을 발표해 역사 소
설가로서 재량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1942년에는 수필집 청태집(靑苔集)을 냈으며, 왜정(倭政
)에 협력하는 나약한 지식인들이 늘어나는 세태를 비판하고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왜정과 거
리를 두었다.

1946년에는 동국대 교수와 서울신문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1947년 성균관대 교수와 서울시예
술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우익 진영의 대표자로 1949년 발족된 한국문학가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55년 예술원 회장이 되어 제1회 예술원상을 받았으며, 1966년 제1회 5.16민족상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으로 월탄문학상을 창설, 같은 해 10월에 제1회 월탄문학상을 받았다.

1945년 이후 그의 손에서 태어난 작품은 무진장 많다. 해방과 더불어 냈던 '민족'은 왜정 시
절에 냈던 '여명','전야'와 함께 3부작에 해당하는 작품이었고 1946년에 '홍경래(洪景來)'를,
1947년에는 '청춘승리','논개(論介)'를 냈고, 1954년에 서울신문사 사장을 그만두고 임진왜란
시리즈를 다시 쓰기 시작하여 총 946회를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이후 '황진이(黃眞伊)의 역천(逆天)','벼슬길','여인천하'를 내어 인기를 모았고, 1961년 회
갑 기념으로 '월탄시선(月灘詩選)'을 출간했다. 1962년에는 '자고 가는 저 구름아','제왕3대
'를 연재했고, 1964년 '월탄삼국지(月灘三國誌)'를 한국일보에 4년 동안 연재했다.

1965년에 '아름다운 이 조국'을 중앙일보에, 1966년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부산일보에 연재
했고, 1970년에 수필집인 '한자락 세월을 열고'와 기념 사화집(詞華集)인 '영원히 깃을 치는
산'을 내놓았다. 또한 1969년부터 1977년까지 8년 동안 조선일보에 연재한 '세종대왕'은 우리
나라 신문 소설 가운데 가장 많은 2,456회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말년에는 '화음격음(和
音激音)'과 회고록 '역사는 흐르는데 청산은 말이 없네' 등을 냈다.

1920년대 낭만주의 시인으로 출발했던 그는 1930년대 식민지 현실에서의 이상 추구를 역사소
설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민족의 역사적 주체성과 민족혼을 부각시키는데 크게 주력하
여 역사소설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월탄은 인격적으로도 꽤 대인(大人)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집안일을 하던 하인이 죽자 2일 동
안 글을 멈추고 애통해하며 직접 장례식을 치뤄주었고, 그 가족에게 많은 조위금을 건네 그들
을 위로했다. 또한 많은 문학인들과 교분을 쌓으며 술도 많이 마셨는데, 자제력이 강해 술이
취하면 즉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한 그는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을 세운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의 외종 사촌형으로 간송의 문화 사업에도 크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부유한 환경에서 살던 그였지만 돈 많은 티를 내지 않았고, 솜버선에 한복을 입고 하얀 고무
신을 신고 다녔다. 원고 기일을 한번도 어기지 않은 성실함으로 단골 신문사와 출판사가 많았
으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돈을 뜻하는 '전(錢)에 창을 뜻하는 과(戈)가 2개나 들어있으니 조
심해야 된다'며 물질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광주(光州)에 내려가면 제일 먼저 광주학생운동기념탑을 찾아 묵념을 했고, 인천(仁川) 자유
공원에 갔을 때 동행한 문인들이 맥아더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자 왜 다른 나라 사람 동상에
서 사진을 찍냐며 일행을 나무란 일화는 유명하다.

현대 문학의 산실이었던 박종화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별채, 너른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 누마루를 조수루(釣水樓,
棗樹樓)라 부르며 여기서 '금삼의 피','대춘부','자고가는
저 구름아','세종대왕','아랑의 정조' 등 굵직굵직한 작품을 써내렸다. 그래서 월탄 외에 조
수루주인(釣水樓主人)이란 호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집은 후손들이 살고 있어 내부 관람은 거의 어렵다. 굳게 닫힌 대문 앞에서 자존심을 곱
게 접고 발길을 접어야 했지. 벨을 눌러 간곡하게 관람을 청해도 되겠지만 그럴 의지와 배짱
까지는 없었고, 박종화에 대해서도 딱히 관심이 없다. 붉은 담장 너머로 다는 아니지만 지붕
과 부연이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으니 그 정도로도 족하다.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안으로 들어갈 인연이 생긴다면 그때 자세히 살펴봐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128-1 (평창11길 80)


▲  굳게 잠긴 박종화 가옥 대문

▲  기품이 돋보이는 박종화 가옥 내부 (문화재청 사진)

▲  보현산신각 입구 (입구에 큰 바위가 있음)

박종화 가옥에서 오르막길(평창11길)을 4~5분 정도 오르면 평창동의 지붕인 평창길이 나온다.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평창마을길도 신세를 지고 있는 그 평창길을 따라 서쪽으로 3분 정도
가면 보현산신각을 알리는 안내문과 함께 고래등 같은 큰 바위가 마중을 한다.

덩굴옷을 걸친 그 바위 밑도리에는 기도처로 쓰이던 조그만 굴이 있다. 보현산신각을 보조하
던 공간으로 산신(山神) 할배가 소원을 잘 들어주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무당과 중생들이
찾아와 기도를 올렸다. 지금은 햇살도 들어오기 힘든 지하 아닌 지하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앞
이 확 트인 공간으로 북악산(백악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평창동에 졸부들이 들어와 주
거지가 마구 형성되면서 바위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그 앞에 골목을 내어 시야를 가로 막았다.


▲  고래등 같은 보현산신각 바위의 뒷모습

▲  평창동 보현산신각(普賢山神閣)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3호

큰 바위 옆구리를 지나면 의자가 여럿 설치된 조촐한 그늘 쉼터가 나온다. 그 너머로 조그만
석성(石城) 같은 돌담을 두룬 아주 조그만 기와집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 집이 평창동의
오랜 명소이자 신앙터인 보현산신각이다.

해발 180m 고지 숲속에 자리한 보현산신각은 이 땅에 흔하고 흔한 산신 제당이다. 보현봉 남
쪽 자락에 안겨 있어 '보현산신각'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북한산 산신각'이라 불리기
도 한다. 평창동 주민들이 동제(洞祭)를 지내던 곳으로 인왕산(仁王山)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
난 무속(巫俗) 장소였는데, 지금은 무척 한가해졌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안에 잘나가던
무속인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굿을 벌였다. 굿은 산신각 안에서 하지 않고 산신각 옆이나 입구
에 있는 바위에서 했으며 '산신각(보현산신각)에 올라갔다 왔다'란 말은 그 시절 잘나가던 무
당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 산신각은 원래 남산신각(男山神閣)으로 언제 지어졌는지는 북한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대략 조선 후기로 여겨진다. 지금은 건물 1동이 전부이지만 예전에는 근처에 여산신각(女山神
閣)과 부군당(府君堂), 부군당에 딸린 신목(神木)이 있어 이 일대가 평창동 사람들의 신앙터
로 무척 애지중지되었다. 매년 음력 3월 1일에 동네 노인들이 돈을 모아 이곳에서 유교식으로
당제를 지냈으며, 제물을 집집마다 분배하여 뒷풀이를 했다.
허나 부군당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녹아 없어지고 여산신각도 1974년에 불에 타 없어지면
서 이 산신각에 통합되었다.

산신각은 나무로 만든 맞배지붕 건물로 달랑 1칸 밖에 안되는 매우 조촐한 당집이다. 굳게 잠
긴 내부에는 가로 97cm, 세로 108cm 크기의 여산신도(원래 여산신각에 있었음)가 봉안되어 있
는데, 산신은 청색 도포(道袍)를 입고 관을 썼으며, 왼손에 우선(羽扇)을 들었다. 뒤쪽에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엎드려 있고, 왼편에는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무릎을 꿇고 천도복
숭아 3개를 든 쟁반을 들고 있다.
그런데 보통 산신하면 할배 산신을 받들기 마련이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할매 산신을 주인공으
로 했다. 그래서 그를 위한 산신각과 산신도(山神圖)를 두었으며, 여산신각이 없어지자 이곳
에 통합하여 주인으로 삼았다. 특히 여산신도는 천하의 유일한 유물로 가치가 높은데, 1923년
8월 24일에 김예안당(金禮安堂)이 그렸다는 기록이 있어 그때 기존의 그림을 버리고 새로 그
린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제단 위에는 종이 있는데, 막연히 정유년(丁酉年)이라 새겨져 있어 1897년 또는 1837
년으로 여겨지나 확실한 답은 아니다.

이곳은 흔한 산신각의 하나이지만 여산신을 봉안한 귀중한 신앙 유물로 산신을 받드는 산악신
앙(山岳信仰)과 마을 동제(洞祭)가 어우러진 현장이자 무속 신앙의 현장이다. 그래서 그 가치
를 인정받아 일찌감치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541-1


▲  석축 위에 자리한 보현산신각
산신각과 그곳을 둘러싼 돌담 대문은 동제 외에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여기서는 열려라 참깨를 외쳐도 소용이 없음~~!

▲  보현산신각의 옆면

▲  위에서 바라본 보현산신각

▲  보현산신각 옆 돌담 계단길 - 돌담은 산신각 보호를 위해 근래에 씌운 것으로
돌담 대신 기와를 얹힌 흙담으로 했으면 더 정겹지 않았을까 싶다.


 

♠  홍제천(弘濟川)에서 만난 명소들 (홍지문, 옥천암)

▲  홍지문(弘智門)과 탕춘대성(蕩春臺城)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

평창동에 대한 볼일을 마치고 부암동(付岩洞)으로 넘어오면 세검정교차로(상명대입구)가 나온
다. 여기서 홍은동(弘恩洞)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과 탕춘대성이라 불리는 성곽이 마
중을 나온다. (세검정교차로에서도 훤히 바라보임)

홍지문을 거느린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산성(山城)으로 연산군이
검정 부근에 지은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성(西
城)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겹성이란 별칭도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 임금이 만약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에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줄행랑을 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년에
신완(申琬)이 성곽 축조를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
도성 보수가 마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짓고자 1715년 홍제천에 홍
지문을 먼저 닦았다. 그런 다음 1718년 8월 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10월 6일에 일단 공사를 멈추었다가 1719년 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되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인왕산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
선을 거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이다. 원래는 북한산성까
지 싹 이으려고 했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해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
능선,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모두 취소되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에
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하여 홍지
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는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대
능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남아있다. (여장은 홍지문과 남쪽 성곽 일부에만 남아있음)


▲  서쪽(홍은동)에서 바라본 오간대수문과 홍지문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인왕산과 북한산의 경계가 되는 홍제천 협곡에 지어진 것으로 탕춘대
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암문 제외)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한북문
(漢北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200년 이상 별탈없이 살아온 홍지문은 1921년 1월에 지붕에 쌓인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
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 홍제천의 물을 흘려보내는 오간
대수문(五間大水門)까지 모두 떠내려가면서 터만 아련하게 남아오다가 1977년 7월에 복원되었
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
원할 때 새로 끼어넣은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난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
해 문루와 오간대수문을 금지 구역으로 삼았으며, 오간대수문에서 탕춘대능선 방면 성곽 300m
정도 구간도 통제되어 탕춘대능선을 가려면 홍지동 주택가나 옥천암 뒷쪽에서 접근해야 된다.
문 남쪽은 세검정로가 지나고 있어 성곽이 아주 잠깐 단절되어 있다. 허나 그 길을 넘으면 성
곽은 다시 소소하게 율동을 부리며 인왕산으로 뻗어간다.
성문 앞뒤로 나무가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놓여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오간대수문 바로 밑
에는 최근에 산책로가 닦여져 오간대수문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다. 이 산책로는 세검정과 옥
천암은 물론 멀리 홍제천인공폭포와 사천교, 한강까지 연결된다. 또한 문을 경계로 성 안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이다.


▲  북한산을 향해 힘차게 뻗어가는 탕춘대성 (탕춘대능선 남쪽 끝)

오간대수문 윗도리는 금지된 다리라 발을 들일 수 없지만 아랫도리는 홍제천 산책로가 닦이면
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살펴보는 오간대수문의 속살, 비록 하천에서 약간 비린내가
풍기긴 했으나 그 정도 냄새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임)

홍예문 위쪽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물이 흐르는 수문이라 물을 관장하는 용을
수호용으로 넣은 듯 싶다. 5개의 수문 중, 북쪽 기준으로 1,2,5번째 문은 바닥에 돌이 입혀져
있고, 3,4번째 문은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내려 홍제천이 흥분하는 경우
에는 5개 문이 모두 수문이 되버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홍지문 천정에 그려진 와운문(渦雲紋)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 
하다.


▲  홍제천 건너에서 바라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홍지문에서 홍제천을 따라 서쪽으로 7분 정도 가면 하얀 암반을 앞에 내밀며 큰 바위에 살포
시 깃든 하얀 피부의 커다란 불상이 크게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바로 상서로운 관세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다.
문화재청은 그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지역 사람들은 '보도각 백불'이라
많이 부르고 있다. (나도 그 명칭이 버릇이 되었음) 여기서 보도각(普渡閣)은 하얀 마애불과
바위를 보듬은 보호각의 명칭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또
한 홍제천변에 있어서 옛날부터 '해수관음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강제로 하얀 피부
가 된 19세기 이후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과 '백불' 등의 별칭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백
불'은 구한말에 양이(洋夷)들이 그를 보고 'White Buddha'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애불 옆에는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절, 옥천암이 둥지를 틀었으며,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홍
제천에 걸린 보도교(普渡橋)란 유연한 곡선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시멘트가 아닌 홍예 돌다
리였으면 운치가 참 진국이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다리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조촐한
문이 있는데, 바로 옥천암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 다리 끝에 달린 흥미로운 현장으
로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도각 백불(마애불)이, 오른쪽 언덕에 옥천암이 있다.

▲  보도각에 깃든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0호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으며 홍제천 바람을 쐬고 있는 이 마애불은 서울에 전하는
8개의 오랜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달랑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 마애불로 고려 말에 조
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안암동에 보타사(寶唾寺)란 작은 절이 있는데, 그곳에 옥천암 백불
과 비슷하게 생긴 하얀 피부의 마애불이 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조성 시기도 비슷하여 같은
사람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여기서 가까운 승가사(僧伽寺)의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개성(開城)의 관음굴 석조보살반가상과 비교되는 고
려 말 불상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존재로 평가받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서울로 천도하자 그를 찾아와 예불을 올렸다고 전하며 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가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는 성현(成俔, 1439~
1504)이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옥천암 백불을 부처바위를 뜻하는 불암(佛巖)으로 기재
했다. 그것이 이곳에 대한 첫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장군이 여기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
데 어리석운 왜군은 백불을 그만 조선군으로 잘못 알고 조총을 정신없이 쏘아댔다. 그렇게 탄
환을 다 소비한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그들을 모두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홍제
천의 물결을 따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백불을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띄우고자 근처에서
일어났던 권율 장군의 왜군 토벌전을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까
지 찾아와 아들의 천복(天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호분
(胡粉,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으로 불상 전체를 하얗게 도배하면서 이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백불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얀 피부의 소유자가 되면서 마애불은 다소 젊어 보이게
되었으나 대신 문화유산의 큰 매력인 고색의 기운이 다소 꺾여 그리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
는다.


▲  보도각과 붙임바위의 뒷모습

백불의 높이는 5m로 그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예로부터 영험이 있는 마애불로 명성이 높았다.
그 앞에 닦여진 공간에는 그의 영험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특히 입시철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백불에게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리는데, 생긴 모습부터
가 영 예사롭지가 않다.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와 비슷하게 돌(또는 동전)을 바위에 붙
이거나 위로 던져서 바위 위에 철썩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매달린 작은 돌
과 동전이 적지 않게 보인다. (동전은 옥천암에서 부수입거리로 계속 수거하고 있어서 요즘은
별로 안보임) 그래서 불상이 이곳에 깃들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소박한 현장으로 쓰였을 것
이다.

보도각 앞에는 홍제천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둘러져 있었으나 2016년 이후 그 돌담을 밀면
서 정면이 확 트였다. 키 작은 난간이 돌담 대신 둘러져 있으며 난간 바로 앞에는 나무로 다
져진 홍제천 산책로가 닦여져 있고 그 앞 홍제천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반석들이 가득하다.
한때 시내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비린내 풍기는 하천으로 떨어지면
서 그 반석이 다소 아깝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속세(俗世)를 상징하는 그런 하천을 걱정스럽
게 굽어보며 중생을 걱정하는 불상의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따뜻한 모습 같다.

그의 몸은 온통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주황색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모두
하얀색이었으나 이후 금색으로 갈았고 2016년 이후에 주황색으로 갈았음) 오른손에 걸린 팔찌,
삼도(三道) 아래로 커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寶冠), 그
리고 귀걸이까지 정말 관세음보살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그의 얼굴은 거의 포근한 인상으
로 중생들의 소원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다 들어줄 것만 같다. (현실은 하나도 안들어주
었음)


▲  마애보살좌상의 잘생긴 얼굴과 윗도리

홍제천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一'자 모습으로 지그시 떠 있으며, 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닿는다. 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보살상의 몸을 덮고 있
는 옷 주름은 세세히 묘사되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 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데 왼
팔이 너무 길어보이며 앉아있는 모습치고는 아랫도리가 좀 넓게 표현되어 신체 균형이 좀 맞
지 않아 보인다.

백불 앞에는 중생들이 기도를 올리며 소망을 슬쩍 내밀고 있었다. 그들의 갖은 소망을 접수만
하느라 힘도 제법 들텐데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한결 같은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하며 소
망 하나라도 누락될까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는 모
르지만 그 정성이 백불과 하늘을 감동시켜 나를 포함한 중생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길 간
절히 기원해 본다.


▲  백불 옆에 자리한 옥천암(玉泉庵)

백불 동쪽에는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은 옥천암이 자리해 있다. 백불이 관세음보살이라 자연
히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3대 관음도량으로 양양 홍련암(紅蓮庵
), 남해 보리암(菩提庵), 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를 꼽는다. 허나 옥천암도 관음도량으로
서의 자부심이 대단한지 비공식적으로 자신들을 포함해 4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우기기도 한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약효가 있다는 샘물(혹 탄산약수가 아닐까?
)이 있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하며, 그 연유로 옥처럼 맑은 샘물, 옥천암을 칭하게 되었
다고 전한다. 허나 그 약수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진작에 사라졌고, 절 앞을 흐르는 홍제
천 또한 세월에 고되게 대이면서 그런 모습은 이제 전설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 절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모른다. 다만 인근에 조선 초기까지 잘나갔던 장의사(藏義寺, 세
검정초교에 있었음)와 사현사(沙峴寺) 등의 쟁쟁한 절들이 있어 백불을 관리하는 부속 암자로
지어진 듯 싶으며, 세검정 맞은편에는 혜철선사(惠哲禪師)가 1396년에 태조의 도움으로 세웠
다는 소림사(小林寺)가 있는데, 그 절의 부속암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두 부질없는 답이
다.

이곳의 본격적인 사적(事績)이 등장하는 것은 1868년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
淨觀)이 관음전(觀音殿)을 세워 천일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
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 6칸과 요사(寮舍) 3칸을 고쳤
다.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수리했으며, 이후 삼성각, 요사 등을 추가로 갖추었
으나 1987년 삼성각이 소실되고 1988년에 법당인 수덕전(修德殿)을 지으면서 삼성각의 기능은
수덕전에 통합되었다. 1989년에 종각을 만들고 1990년 설법전(說法殿)을 지어 요사의 기능도
겸하게 했으며, 1996년에 홍제천에 보도교란 다리를 놓고 1998년에 일주문을 달았다.

북한산(삼각산)의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으며 홍제천변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절 확장이 좀
어렵다. 바로 동쪽에는 속세의 주택가가 있고 뒤에는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
) 자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내가 무지 답답하다. 또한 백불 외에는 오래된 문화유산이 없
고 주택가와 접해 있어 산사의 내음은 좀 떨어진다.

* 옥천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동 8 (홍지문길 1-38 ☎ 02-395-4031)


 

♠  부암동 산모퉁이까페

▲  언덕에 자리한 산모퉁이

창의문(자하문)에서 백석동천(백사실계곡),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부암동 산복도로(백석동길)
를 10분 정도 오르면 아담하게 수식된 별장 같은 산모퉁이 까페가 모습을 비춘다. 서울 도심
과 인왕산이 바라보이는 언덕배기에 뿌리를 내린 이 까페는 갤러리를 갖춘 갤러리까페로 2007
년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지로 유명세를 탄 곳이다.

이곳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원래는 인사동(仁寺洞)에 있는 목인박물관 유물의 수장고
이자 작업실이었다. 그러다가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지로 절찬리에 쓰이면서 세상에 주목을 받
았고<그 드라마에서 '최한성'이란 인물의 집으로 나왔음> 시청자들로부터 누구나 찾을 수 있
는 공간으로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면서 목인박물관장은 갤러리를 갖춘 까페로 꾸며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니까 그 드라마의 후광(後光)으로 어두컴컴했던 창고가 새로운 명소이자 돈을
쓸어 담는 꿀단지로 찬란한 변신을 한 것이다.

많은 까페가 서양식 이름을 쓰는데 반해 이곳은 순수한 우리말인 '산모퉁이'를 까페의 이름으
로 삼았다. 그래서 적지 않게 정감이 간다. 산모퉁이란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산모퉁이에 자
리해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  산모퉁이 2층 라운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까페 정원에는 문인석을 비롯하여 아시아의 석인상과 동물 모양의 석상(
石像), 조그만 자동차 모형과 옛날 디자인의 노란색 자동차가 뜨락을 채우고 있다. 지하 1층
은 갤러리로 아시아 곳곳에서 가져온 예술품이 진열되어 있어 조그만 미술관을 이룬다. 물론
여기서도 차를 마실 수 있다.

1층에는 카운터가 있으며, 여기서 차를 주문하면 된다. 1층과 2층은 차를 마시는 라운지로 2
층 옥상에는 조망이 일품인 야외데크가 있어 산 아래 펼쳐진 부암동의 전원 풍경과 창의문 너
머로 펼쳐지는 서울 도심을 바라보며 차 1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특히 햇님이 휘장을 치
고 몸을 숨기는 밤에는 서울의 숨막히는 야경(夜景)을 즐길 수 있으며, 분위기를 강조한 까페
라 청춘남녀의 발길도 빈번하다.

이곳에서 파는 것은 커피류와 홍차, 쿠키, 케익 등으로 유명세 때문인지 시중보다 가격은 조
금 비싸다. 얄미운 수준의 가격이지만 이곳의 명성과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은 물처럼
끊기지가 않는다. (영업시간 11시~22시)


▲  까페 뜨락에 놓인 산모퉁이의 모델, 노란 자동차

까페 앞뜨락에는 이곳에 모델이자 상징인 노란 자동차가 바퀴를 접고 쉬고 있다. 드라마에 나
온 차량으로 까페를 찾은 사람들의 모델이 되어주고 있는데, 저 차량을 보는 순간 우리나라가
아닌 20세기 초반 유럽이나 미대륙의 어느 별장이나 집에 들어선 기분이다. 차 하나의 이렇게
기분이 달라지다니 까페 주인의 미적 감각이 대단하다 여겨진다.


▲  까페 현관에 자리한 2마리의 동물상
호랑이로 보이는 저들의 표정은 너무 익살스럽고 밝은 모습이다. 까페의
수입도 상당할 것이니 그래서 기분이 좋은가 보다.

▲  말 모양의 석상 2기

▲  문인석(文人石) 2기와 조그만 장난감 차

▲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 소품과
촬영 장면을 담은 그림 4장

▲  지하1층 현관에 있는 자태가
고운 호랑이상


▲  산모퉁이에서 일행들과 마신 커피들의 집합

커피에는 거품으로 꽃을 비롯한 다양한 문양을 넣어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 문양이 아름
다워 후루룩 마시기에 아까운 마음도 들지만 우리네 인생살이가 바로 저 거품의 문양처럼 부
질이 없다. 문양이 아름답다 한들 얼마나 가겠는가? 흐트러지면 형편없이 사라지는 것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97-5 (☎ 02-391-4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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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성북동에서 즐긴 고즈넉한 한옥 산책 ~~~ (최순우옛집, 수연산방, 한옥에서 즐기는 전통차 1잔)

 


'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성북동 나들이 '
(최순우 옛집, 수연산방)

▲  수연산방 사철나무

▲  최순우 옛집 뒷뜰에 있는
둥그런 탁자와 의자

▲  최순우 옛집에서 만난 조그만
맷돌과 석구(石臼, 돌통)

 


 

♠  시민들이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 우리나라 고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최순우(崔淳雨) 옛집 -
등록문화재 268호

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10월의 끝 무렵, 후배 여인네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성북동(城北洞
)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2시,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를 만나 5번 출구를 나와서
성북동 방면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가니 왼쪽 골목에 키다리 빌라와 주택
사이로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기와집이 손짓을 보낸다. 그 집이 이 땅의 고미술 연구에 평생을
바친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1916~1984)이 말년을 보냈던 집이다.

이 집에 살았던 최순우는 1916년 4월 27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희
()으로 개성 송도()고보를 나와 1943년 개성박물관에 입사했다. 그는 당시 개성박
물관장인 고유섭()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면서 고미술에 뜻을 굳혔다고 한다.

194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관과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을 지냈으며, 1950
년 6.25가 터지자 이승만 정권의 무책임한 한강인도교 폭파 만행으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 북
한군에게 꼼짝없이 잡히고 만다.
서울을 접수한 북한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당시는 북단장(北壇莊)과 보화각(葆華閣)이라
불림>에 있던 문화유산에 군침을 흘리고 박물관에서 일했던 최순우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을
소환해 그것을 모두 포장하여 지정된 곳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최순우와 손재형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이 힘들여 수집한 문화유산의 북송만은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기가 막힌 눈속임작전을 감행했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감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
(奇)는 아주 어벙벙한 작자였다.

그들은 기씨에게 왜국(倭國) 판화로 된 춘화(春畵, 미성년자 관람불가급의 예민한 그림)를 보
여주고, 보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쩔게 만들었다. 또한
문화유산 선별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 이건 아니라고 다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와라, 목수가 없다 등으로 태클을 걸었고 손재형은 일
부러 생다리에 붕대를 매면서 다리가 아프다고 연극까지 벌여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포장되
어 상자에 담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3달이 넘도록 아무런 진척이 없자 뚜껑이 뒤집힌 북한은 사람을 보내 그들을 추궁하려고 했다.
허나 그때 우리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면서 추궁은 모면하게 되었고, 간송미술관의 유물
은 모두 북송을 면하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간송 전형필과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

6.25 이후 서울대와 고려대, 홍익대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으며, 1967년 이후 문화재위원회 위
원과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한국미술사학회 대표를 역임하고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어 박물관을 크게 발전시켰다. 1981년에는 홍익대 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
며, 1984년 12월 16일 성북동 자택(지금의 최순우 옛집)에서 숙환으로 별세하니 그의 나이 68
세였다.

그는 고미술 외에 현대미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우리나라 박물관사에 큰 업적을 끼쳤다. 주요
논문으로 '단원 김홍도 재세연대고()','겸재 정선론()', 한국
의 불화()','혜원 신윤복론(),'이조(李朝)의 화가들' 등이 있고 저서는 삼척
동자도 다 안다는 '무량수전(無量壽殿)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와 '한국미술사' 등이 있다.


▲  최순우 선생의 왕년의 모습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경기도 지방 한옥 양식을 띄고 있다. 'ㄱ'자의 본
채와 'ㄴ'자의 사랑채, 행랑채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ㅁ'자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본채 뜨
락에는 닫혀진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우물이 있다. 최순우는 1976년에 이 집을 구입해
1984년 생애 마지막 날까지 살았으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그가 사라진 이후, 이 땅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슬슬 압박을 가해오면서 그야말로 풍전등화
의 위태로운 신세가 되고 만다. 이 집을 밀어버리고 빌라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청천
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뜻있는 사람들이 시민운동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를 창단해
개인마다 1평씩 구입하여 절대 사수에 나선 것이다. 그렇게 개발의 칼질은 그들의 의기(義氣)
에 보기 좋게 참교육을 당해 고개를 숙였고, 집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허나 주인이 사라진 옛집은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그래서 내셔널트러스트는 2003년부터 2004
년까지 돈을 모아 복원하고 뜨락을 꾸미면서 그 집에 '시민문화유산1호'란 별칭을 주었다. 우
리나라 최초로 민간에서 문화유산을 구입해 지킨 유서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재단법인
내셔
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문화유산기금에서 관리하고 있음)

현재 안채는 전시 공간과 최순우기념관으로 쓰이고 있고, 동쪽 행랑채는 사무실, 서쪽 행랑채
는 회의실과 휴식공간으로 꾸몄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은 전통식으로 아기자기하게 손질하여
나무와 풀, 꽃이 뜰을 장식하고 있으며, 안채 앞뜰 중앙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
운다.
뒷뜨락과 모서리 공간에는 기증을 받거나 수습해온 동자상과 문인석, 맷돌, 석구(石臼) 등 다
양한 석물을 배치해 간송미술관의 뜨락을 꿈꾼다. 구석마다 그들이 자리를 채우니 넓고 알찬
느낌을 선사한다. 게다가 뒤뜰에 야외도서관을 두어 최순우가 쓴 글과 여러 서적, 그와 관련
된 서적들을 읽으며 독서의 여유도 누릴 수 있으며, 뒷뜰 뒤쪽에는 높은 담벼락으로 그늘이
가득하다.

안채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어 사무실에 허가를 구하면 들어가게 해주며, 쪽마루에 앉아
한옥의 미와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도심 속의 새로운 오아시
스이다. 또한 주말과 휴일에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회 등의 이벤트가 열려 성북동의 대중적인
명소이자 살아있는 한옥 공간으로 위엄을 날리고 있다.

길상사의 창건주인 길상화(김영한)가 자신이 일군 고급 요정을 절로 바꾸어 속세에게 선물했
듯이 이 집 또한 최순우와 그의 집을 지킨 뜻 깊은 이들이 속세에 남긴 소중한 선물이다. 또
한 2006년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성북동의 꿀
단지로 단단히 자리매김하여 대문 문턱이 무너질 정도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나
도 이곳을 2008년부터 거의 10회 이상 찾아 내부 구조를 거의 외울 정도이다.
성북동 초입에 자리해 있어 성북동 답사나 나들이를 계획한다면 한성대입구역을 기점으로 삼
아 이곳을 먼저 둘러보기 바란다. 단 겨울(12~3월)과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으며 관람시간
은 10시부터 16시까지로 짧은 편이다. (15시 30분까지 입장 가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 (☎ 02-3675-3401~2)

* 내셔널트러스트 최순우 옛집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빌라와 주택들 사이에 고풍스럽게 들어앉은 최순우 옛집의 위엄
개발의 칼질을 참교육시킨 유서 깊은 현장이다. 이곳은 그나마 운이 좋았지
속세의 관심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개발로 날라간 옛 집과
문화유산이 적지 않다.

▲  속세를 향해 가슴을 연
최순우 옛집 대문

▲  안채 앞뜰에 높이 솟아 옛집에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


▲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나타나는 안채 앞뜨락

▲  최순우 옛집 관리사무실로 쓰이는 동쪽 행랑
최순우 관련 서적과 전통차를 판매하고 있다.

▲  소나무 옆에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최순우와 이전 주인 일가의 식수를 제공했던 네모난 우물, 허나
지금은 뚜껑이 닫힌 채 겉모습만 남아있다.

▲  여러 석물과 서적들이 놓인 뒷뜨락 남쪽
돌의자에 놓인 책은 마음껏 볼 수 있으며 돌의자나 안채 뒷쪽 쪽마루에
걸터앉아 독서에 임하면 된다.

▲  동쪽 행랑에서 바라본 뒷뜨락

▲  수풀 밑에 누워있는 석구(石臼)

▲  표정이 앳된 조그만 동자상


▲  박석이 입혀진 뒷뜨락 돌길과 장승 2기 (오른쪽 장승은 수풀에 가려짐)

돌길이 우리네 인생처럼 너무나 짧다.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끝나기 때문이다. 그 앞에는 재
밌게 생긴 장승 2기가 돌길을 지키고 있는데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영 좋지않은 기운들
은 장승의 재미난 얼굴을 보고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발길을 돌릴 것이다.


▲  뒷뜨락에 닦여진 둥그런 탁자 (누구든지 앉아서 독서나 대화 가능)

▲  뒷뜨락 장독대
장독대에는 무언가가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저들은 속이 빈 장식용이다.

▲  옛집의 서쪽 모서리를 지키는 2기의 조그만 문인석(文人石)
저들의 표정에 부질없는 세월의 고된 모습이 묻어난 듯 하다.

▲  나그네들의 조촐한 휴식공간
안채 뒷쪽 쪽마루

▲  안채 내부 - 복원 과정에서 꾸며진
부분이 상당수 된다.


▲  최순우 옛집의 뒷통수 (안채 서쪽 담장길)

흙으로 만든 토담과 시냇물의 징검다리처럼 박석(薄石)이 입혀진 정겨운 담장길, 담장 너머가
자연의 공간이거나 한옥이었다면 그 운치는 곱배기가 되었을텐데, 빌라와 슬레이트 지붕이 그
자리를 대신하니 그나마 우러난 정겨움과 운치도 절반 이상으로 뚝 떨어진다. 내게 큰 지우개
가 있다면 담장 밖 풍경을 싹싹 지우고 싶을 뿐이다.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혜곡이 쓰던 도장과 조그만 자기들

▲  마루에 놓인 검은 피부의 커다란 함지박


 

♠  상허 이태준이 살던 기와집, 현재는 전통찻집으로 바쁘게 살고 있는
상허 이태준 가옥(尙虛 李泰俊 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1호

▲  상허 이태준 가옥<수연산방(壽硯山房)> 외경

성북동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지친 머리와 두 다리도 잠시 달랠 겸, 차 1잔의 여유를 즐기
기로 했다. 하여 찾아간 곳은 예전부터 꼭 차를 마시고 싶었던 수연산방이다.
수연산방은 성북구립미술관 서쪽에 자리해 있는데, 전통담장과 나무로 몸을 가린 기와집이다.
성북동의 어엿한 명소이자 굵직한 전통찻집으로 사람들로 늘 미어터져 주말에는 자리를 잡기
가 힘들다.

이곳은 월북작가로 이 땅에서 오랫동안 좋지 않은 대접을 받았던 상허 이태준의 집이다. 그는
성북동에 서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 명당에 욕심이 났는지 29살이던 1933년에 성북동의 배
꼽 부분에 해당되는 바로 이 자리에 땅을 구입해 개량한옥을 지었다. 이런 한옥을 짓고 살 정
도면 어느 정도 재산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여기서 1946년까지 가족과 살았으며,
'달밤','돌다리','황진이' 등 그의 수많은 작품이
여기서 태어났다. 이른바 그의 문학의 산실(産室)인 셈이다.
(어떤 자료에는 1900년대에 지어
진 집으로 나옴)


집의 규모는 대지 약 120평, 건물 면적 23.2평으로 서남향(西南向)을 하고 있다. 건물은 사랑
채와 안채를 합친 본채 하나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조그만 대문을 들어서면 아기자기하게 펼
쳐진 뜨락이 눈길을 단단히 잡아매며, 하늘을 가리고 선 나무와 온갖 화초들로 가득해 산속의
외딴 별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산방 동쪽에는 찻집으로 쓰이는 본채가 있으며, 서쪽에도 기와
집이 있으나 이는 찻집을 확장하면서 새로 지은 것이다. 또한 예전에는 상심루란 건물이 본채
앞에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었다.

죽간서옥(竹澗書屋)이라 불리는 본채는 앞부분은 팔작지붕이고, 뒷부분은 맞배지붕으로 'ㄱ'
자형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중앙 2칸을 대청으로 하고 대청 남쪽에는 1칸 크기의 안방을, 안
방 앞에는 작은 1칸 크기의 누마루가 있다. 그 뒤에 반칸 크기의 부엌을 두었으며, 대청 북쪽
에는 1칸의 건넌방이 있고, 대청과 건넌방 앞에 툇마루가 있으며, 건넌방 뒤에 1칸의 뒷방이
있다.

이태준이 월북하자 그의 남겨진 가족들은 나라의 눈치를 보며 힘들게 살았으며, 1977년에 개
량한옥의 모습을 잘보여주고 있는 점과 사랑채와 안채를 합친 특이한 구조로 인해 서울시 지
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9년에는 그의 외종손녀인 조상명이 이 집을 전통찻집으로 손질하
여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다. 당시 성북동은 지금처럼 제대로 된 찻집이나 까페가 없던 시절
이니 거의 성북동의 전문 전통찻집 1호나 다름이 없다.
찻집의 이름은 이태준의 당호(堂號)인 수연산방으로 삼았는데, 수연산방이란 '오래된 벼루가
있는 산속의 작은 집'이란 뜻이다. 왜정(倭政)까지만 해도 이곳은 산속 같은 변두리라 그 이
름이 딱 어울렸으나 이제는 졸부들의 집이 주변에 널려 주택가 속의 외로운 기와집이 되었다.

수연산방은 고풍스런 분위기와 한옥에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매력으로 속
인들의 입과 입을 통해 찾는 수요가 상당하며, 간송미술관과 길상사, 삼청각, 심우장 등 성북
동의 간판 명소들이 크게 인기를 누리면서 그 후광(後光)을 단단히 봤다. 성북동에서 꼭 가봐
야 직성이 풀리는 전통찻집 겸 한옥으로 명성이 높아졌고, 돈을 삽으로 쓸어담을 정도로 호황
을 누리고 있다.
특히 휴일에는 거의 자리를 잡기가 힘들 정도로 올 때마다 만원이라 여러 번 발길을 돌린 쓰
라린 기억이 있다. 허나 이번에는 운이 좋았는지 사랑채 쪽에 자리가 하나 있어서 거기서 차
를 1잔 마셨다.
이토록 늘어나는 손님을 해결하고자 서쪽에 새로 건물을 지었으나 역시나 역부족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신축이나 증축도 어렵다. 주어진 공간을 다 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본채를 건드리는 것은 말도 안되며, 자칫 잘못 손댔다가는 고풍스런 분위기마저 해칠
수 있다. 괜한 욕심으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말고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 수연
산방 주인이나 손님 모두에게 좋다.

▲  뜨락에 세워진 이태준 문학의 산실 표석

▲  뜨락에 심어진 돌기둥과 석등


* 상허 이태준(1904 ~ ?)의 간략한 삶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호는 상허(尙虛)이다. 그의 아버지는 개화파(開化派)의 지식
인으로 활약했던 이문교(李文敎)로 함경남도 덕원감리서(德源監理署)에서 관리로 있었는데,
수구파에 밀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보니 이태준의 가정형편은 그리 좋은 편이 되지 못했으며, 9살에 어머니까지 별세하면
서 친척집에 얹혀 살게 된다.

그는 책장사를 해가며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당시 그 학교 교사였던 이병기(李秉
岐)의 영향을 받아 고전문학의 소양을 듬뿍 쌓았다. 그 소양은 나중에 소설가로 성장하는 밑
거름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허나 학교의 무슨 비리나 문제가 있었는지 불합
리한 운영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을 당했다.

1925년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가 입선되어 시대일보(時代日報)에 발표를 했고,
1926년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 조오치대학(上智大學) 문과에 진학해 신문과 우유 배달로 힘겹
게 돈을 충당하며 공부를 했으나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결국 중퇴하고 귀국했다.

1929년 개벽사(開闢社)에 들어가 기자로 일했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했으며, 1930
년에 이화여전 음악가 출신인 이순옥과 혼인하여 가정을 꾸린다. 1933년에는 그동안 모은 돈
으로 성북동에 땅을 구입해 꿈에 그리던 한옥을 지으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돌입한다. 그
리고 그해 이효석(李孝石)과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유치진(柳致眞) 등과 친목단체
인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했다.
그 시절 평론가이던 최재서(崔載瑞)는 시는 정지용(鄭芝溶), 산문은 이태준이라 할 정도로 문
장의 달인으로 평가를 받았으며, 순수 문학의 기수, 한국 단편의 완성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순수문예지 '문장(文章)'을 주재하여 수많은 문제작품(問題作品)을 발
표했고, 역량있는 신인들을 발굴해 문단에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1931년 '아무일도 없소(東
光, 1931.7.)'를 시작으로 '불우선생(不遇先生 / 三千里, 1932.4)'과 '꽃나무는 심어놓고(新
東亞, 1933,3)','달밤(中央, 1933.11)','손거부(孫巨富 / 新東亞, 1935.11)','가마귀(朝光,
1936 1936.1),'복덕방(朝光, 1937.3)' 패강냉(浿江冷 / 三千里文學, 1938.1)','농군(文章, 1939.7)', '밤길(文章, 1940·5·6·7합병호)','무연(無緣 / 春秋, 1942.6)','돌다리(國民文
學, 1943.1) 등을 냈다.
1945년 이후 민족의 과거와 현실적 고통을 비교하는 문제의식을 드러낸 '해방전후(解放前後/
文學, 1946.8)'는 그의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묘사적 문장으로 속인들의 호응을 크게 받
았다.

1945년 문화건설중앙협의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
면서 '해방전후'로 조선문학가동맹이 제정한 제1회 해방기념 조선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
다가 1946년 여름 홍명희와 함께 월북(越北)했다.
1946년 10월에는 북한의 조선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다녀왔고,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의 부위원장까지 지냈다. 그리고 6.25시절에는 종군작가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허나 1952년부터 북한당국으로부터 사상검토를 당하고 과거를 추궁받았으며, 1956년 친일혐의
와 우경적인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함흥(咸興)으로 추방당해 콘크리트 블럭 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그의 행적은 전해지는 것이 없어 아마도 소리소문도 없이 처단된 듯 싶다.

그의 1945년 이전 작품은 대체로 시대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을 띄기보다는 구인
회의 성격에 맞는 현실에 초연한 예술지상적 색채를 진하게 나타내고 있다. 인간 세정(世情)
의 섬세한 묘사나 동정적 시선으로 대상과 사건을 바라보는 자세 때문에 단편소설의 서정성(
抒情性)을 높여 예술적 완성도와 깊이를 세워 나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로 평가받는다. 1945년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으로 활동하면서 작품에도 사회주
의적 색채를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북한 종군기자로 전선에 참여하면서 쓴 '고향길(1950)'이나 '첫전투(1949) 등은 생경한
이데올로기를 여과없이 드러냄으로써 왜정 때 쓴 작품에 비해 예술적 완성도가 훨씬 떨어진다.
그런데 그가 월북한 것도 자의적인 것이 아닌 강제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1956년 이후에
숙청으로 사라진 것은 그가 철저한 사회주의적 작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쨌든 엄연한 월북작가라서 우리나라 정부에서 그의 작품을 몽땅 통제하여 그의 이름과 작품
은 생매장을 당했다. 그렇게 어둠 속에 가려진 그의 존재는 1988년 통제에서 풀려나면서 정지
용과 더불어 다시 세상에 드러나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지겹도록 등장할 정도가 되었다.
또한 그의 외종손녀의 노력으로 그의 집은 수연산방이란 이름으로 속세에 널리 알려졌으며 자
연히 그의 이름 3자와 작품도 덩달아 알려지게 되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48 (성북로26길 8 ☎ 02-764-1736)


▲  문이 활짝 열린 수연산방 정문

▲  뚜껑이 닫힌 우물
본채 앞에 사람 키 정도로 땅을 파 석축을 입히고 그 복판에 우물을 팠다.
이태준 일가에게 시원한 물을 선사했던 우물은 오래전에 생명을 다해
지금은 겉모습만 남았다.

▲  문학의 향기와 차의 향기가 뒤섞인 수연산방 본채(죽간서옥)

죽간서옥이라 불리는 본채의 방과 툇마루에는 차 1잔의 여유를 누리는 사람들로 발을 디딜 공
간이 없다. 이곳은 이태준이 있던 시절, 구인회 회원들의 모임 장소로 우리들 귀에 매우 익숙
한 이효석, 정지용도 자주 찾았다. 그들은 여기서 다과나 곡차(穀茶)를 즐기며 서로의 작품을
이야기하고 토론을 했으며, 세상 걱정에 자주 밤을 샜다고 전한다.
죽간서옥은 대나무 숲 사이의 서옥(書屋)을 뜻하며, 건물 안에는 이태준의 손때가 묻은 유물
과 그가 직접 쓴 작품과 서적들이 있다.


▲  빛바랜 수연산방 현판의 위엄 - 이태준의 글씨로 전해진다.
빛바랜 부분이 많아서 수십 년이 아닌 300년은 거뜬히 묵은 현판 같다.

▲  빛이 바랜 죽간서옥 현판 - 이태준 글씨
죽(竹) 글씨 위가 하얗게 바래지면서 마치 대나무에 쌓인 눈을 보는 듯 하다.

▲  본채(죽간서옥) 앞에 놓인 소나무 분재의 위엄

▲  뜨락 중앙에 자리한 사철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4호
수연산방에서 단연 돋보이는 자연물로 아담한 키로 뜨락을 햇볕으로부터 지킨다.
나이가 50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50년이면 이태준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그의 남은 가족이 망중한을 달래고자 심은 듯 싶다.

▲  뜨락을 수식하는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고 있는 벌개미취와 여러 꽃들

▲  본채 내부에 걸린 이태준 가족 사진
슬하의 자녀가 무려 5명이나 된다. (그 시절에는 5~6명은 기본이었으니)
본채에서 차를 마실 때, 방 곳곳에 걸린 사진과 현판, 그의 유품과
서적을 구경할 수 있다.

▲  본채 내부에 걸린 이태준의 친필 현판 (해석은 각자 알아서 ~~)

▲  액자에 소중히 담긴 이태준의 문서

▲  수연산방에서 누린 전통차 (차 이름은 잊어먹었음)

수연산방에서는 본채(사랑채, 안채) 내부나 새로 지은 서쪽 건물과 야외 자리, 그리고 사철나
무 밑에 자리를 잡고 차를 마실 수 있다. 그 자리들이 모두 찼을 때는 본채 툇마루에서 마셔
야 되는데 그 자리라도 앉으면 다행이다. (사랑채 안쪽 자리가 명당으로 미리 예약을 하는 것
이 좋음)
이곳 전통차 가격은 인사동과 비슷하거나 좀 야박한 수준으로 차를 주문하면 유과 등의 먹거
리와 따뜻한 물이 같이 덩달아서 나온다. 양반가의 방처럼 꾸며진 고풍스런 기와집에서 마시
는 전통차라 그런가 맛이 좀 남다른 것 같다. 특히 비오는 날 뚝뚝 대지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빗소리를 노래 삼아 누리는 차 1잔의 여유는 이곳의 백미(白眉)라 할만하다.

차의 향기도 좋고, 찻집 분위기도 아주 그윽하고 좋으니 서로의 긴장된 마음이 열리면서 이야
기꽃이 마구 쏟아진다. 그렇게 여기서 머문 시간은 무려 2시간, 전통찻집이나 까페는 자주 가
는 편이지만 길어봐야 2시간 이하로 머무는데, 여기서는 그 시간을 훨씬 넘긴 것이다. 정말 1
시간 정도 머문 것 같은데, 이곳이 시간 도둑인지 시간을 잡아먹는 블랙홀인지 하루에 1/12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게다가 방에 앉아서 마시는 거라 일어나기 귀찮음이 발생하면 머무는 시
간은 자연히 늘어날 수 있다.
이렇게 잠시나마 차담(茶啖)으로 각박한 속세를 잠시 잊는 것도 괜찮지. 식사를 하는 것이 아
닌 분위기에 취해, 차 향기에 취해, 이야기에 취하며 오래 머무는 공간이 바로 찻집(또는 까
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성북동 가을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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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큼한 경승지를 많이도 간직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둘러보기 ~~~ (세검정, 석파랑, 석파정별당, 홍지문,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부암동 산책 '

▲  인왕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


 

하늘 높이 솟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그리고 인왕산(仁王山) 사이로 움푹하
게 들어간 분지(盆地)가 있다. 그곳에는 수려한 경치를 지닌 부암동(付岩洞)이 포근히 안
겨져 있는데서울 도심과는 고작 고개(자하문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라 '
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의구심을 던질 정도로 도심과는 생판 다른 전원(田園) 분위기
를 지니고 있다.

부암동은 3개의 뫼 사이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세검정로와 자하문로를 중심으로 가늘게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을 뿐, 6층을 넘는 건물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대부분 정원이 딸린
주택이거나 빌라들이며, 밭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특히 산자락에 터전을 일군 집들은 지
방의 시골 마을이나 산골 읍내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진하게 선사한다.
도심이 바로 코 앞임에도 이런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지정학적 위치로 오랜 세월 개발제
한에 묶인 탓이다.
이렇듯 도심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와 그곳에 깃든 아름다운 풍경으로 조선 초부터 양반사
대부와 왕족들의 별장 및 피서지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 자연에 동화되어 살고 싶었던 그
들의 팔자 좋은 바램은 부암동 곳곳에 그림 같은 경승지와 흔적을 빚어놓았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부암동에는 오래된 볼거리가 풍부해 옛 것과 자연에 목말라하는 나그네를 유
혹한다. 북악산 북쪽 백사골(백사실)에는 옛 별서(別墅) 유적인 백석동천(白石洞天)이 숨
겨져 있고, 백사골 상류에는 도심 속 두메산골로 통하는 뒷골마을(능금마을)이 강원도 산
간의 분위기를 선사하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현장이자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
없는 야망이 서린 무계정사터,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구한말에 지어진 반
계 윤웅렬 별장, 인왕산 자락의 경승지인 청계동천(淸溪洞天), 석파정의 별당과 순정효황
후의 집이 하나로 묶여진 석파랑 등이 있다.
그 외에 응선사 산신도(山神圖), 성불사 금동보현보살좌상 등의 불교문화유산이 있고,
울미술관, 환기미술관, 자하미술관 등의 미술관, 산모퉁이 등 분위기를 내세운 까페와 찻
, 온갖 식당들로 즐비하다.

부암동 북쪽으로 흘러가는 홍제천(弘濟川)1970년대까지 서울 시민들의 소풍, 피서지로
각광을 받던 곳으로 세검정, 장의사(藏義寺)터 당간지주(幢竿支柱), 춘원 이광수(春園 李
光洙)의 별장터, 탕춘대성과 홍지문이 있다. 또한 서쪽으로 조금 확장하면 옥천암과 그곳
에 깃든 하얀 피부의 마애보살좌상이 있다.
서울 장안에서 4대문 안을 제외하고 문화유적과 볼거리가 많이 산재한 동네로 넉넉잡아 5
~6시간 정도면 상당수의 명소를 둘러볼 수 있다. 물론 그 이상의 시간을 던져 더 많은 곳
을 더 여유롭게 둘러보는 것도 좋다.

부암동은 나의 즐겨찾기의 1곳으로 그곳에 퐁당퐁당 빠진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봄의 한
복판을 맞이하여 다시 부암동으로 들어가 홍제천을 따라 여러 명소를 흔쾌히 사진에 담았
고 그 명소를 요리하여 이렇게 글로 다시 내놓는다.


 

♠  도성 밖 경승지이자 시민들의 소풍/피서지로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던,
허나 개발의 칼질로 이제는 이름만 남은, 세검정
(洗劍亭)
-
서울 지방기념물 4

신영동3거리에서 홍은동 방면으로 5분 정도 걸으면 멋드러진 바위에 걸터앉아 홍제천을 바라
보고 선 단아한 모습의 세검정이 마중을 한다.

세검정은 팔작지붕을 지닌 'T'자형 정자로 연산군이 1506년 탕춘대(蕩春臺)를 조성하면서 좌
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워 옆으로 긴 누각을 세우니 그것이 세검정의 시작이
라고 한다. 물론 그때는 세검정이라 불리지 않았다.
세검정의 세검(洗劍)은 칼을 씻는다는 뜻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통치에 쓸데없이 불
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같은 것들이 여기서 광
해군의 폐위를 모의하고 그 결의를 다지고자 칼을 물에 씻었다고 한다
그들은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을 앞세워 자하문(창의문)을 뚫
고 도성(都城)을 침범, 창덕궁(昌德宮)을 점령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군주로 옹
립한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저지른다. 이렇게 정권을 빼앗은 서인 일당은 반역을 모의
하고 칼을 씻었던 현장을 길이길이 추억하고자 정자 이름을 세검정이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숙종(肅宗) 시절,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하던 군사들의 휴식처로 다시 세웠다고 하며 영
조 시절인 1748년 총융청(摠戎廳)이 탕춘대 자리로 이전되면서 현재의 세검정이 지어졌다. (
이때 새로 정자를 지었다고 함)
이후 이곳은 자하문 밖(자문 밖) 경승지로 명성을 누렸는데 1749년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이 벗 25명과 여기서 봄놀이를 가졌으며, 1790년 정조 임금이 연융대(鍊戎臺)에서 활쏘기 시
험을 참관하고 세검정에 들렸다가 정자에 걸린 영조의 어제시(御製詩) 현판을 보고 시를 남기
니 내용은 이렇다.

군사 정돈하는 뜻으로 이 정자에 임어(臨御)하니
북한산 높은 하늘에 뿔피리 소리도 맑구나
사랑스럽다 근원이 있는 샘물은 매우 힘차서
시원한 물 한줄기에 온 산이 쩡쩡 울리네

1791년 여름,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이곳을 다녀가 세검정의 명물인 물구경을 했다. 1941
화재를 만나 겨우 주춧돌 하나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 겸재 정선(謙齋 鄭敾)'세검정도'
참조하여 복원했다. <세검정은 '세검정터'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4로 지정되어 있음>

▲  옆에서 바라본 세검정

▲  세검정의 뒷모습

세검정은 규모는 작지만 홍제천과 차일암, 북한산(삼각산)의 시원스런 숲이 서로 어우러진 그
림 같은 현장이다. 또한 질 좋은 바위들이 많아 덕수궁(경운궁) 석조전(石造殿) 기초공사 때
이곳 화강암을 채취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19세기 말 이후에는 양반과 귀족 외에 일반 백성들도 나들이로 많이 찾아왔으며, 서울 시내의
여러 신식 학교들도 이곳으로 소풍을 왔다. 특히 18995월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 여학생
들이 여기로 소풍을 왔는데 그것이 이 땅 최초의 여학생 소풍으로 당시 '조선 그리스도인 화
'에는 그때의 사연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정동 이화학당 여학도들이 1년 동안을 애쓰고 공부하다가 봄빛을 따라 창의문(자하문) 밖으
로 화류(花柳) 구경 갔더라 하니 우리가 매우 치하하는 것은 여학도의 화류는 500년에 처음이
..'

왜정(倭政) 이후, 시민들의 소풍 및 피서지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세검정 주변 신영동과 홍
지동은 자두와 능금 명산지로 유명하여 여름만 되면 그들의 달달한 향기가 온 동네에 진동했
. 지금으로서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을 세검정이 지녔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세검정은 1970년 이후 모진 변화를 강요 받게 된다. 천박한 개발의 칼질
이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부암동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하여 한적했던 동네에 집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면서 그들이 내뱉은 생활폐수로 세검정을 윤
기 나게 했던 홍제천은 악취가 진동하는 저주받은 하천으로 전락했고, 능금과 자두가 자라던
곳도 주택 개발에 밀려나 자취를 감추었으며, 세검정 옆을 지나는 도로(세검정로)가 확장되면
서 운치가 적지 않게 깎여나갔다.

현재 세검정은 그 뒷통수를 지나는 차량들의 소음과 매연, 그리고 아직도 덜 걸러진 홍제천의
쾌쾌한 냄새로 매일 고통을 받고 있다. 홍제천이 예전보다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비린
내는 여전하며 하천 너머로 주택들이 가득해 옛날의 운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긴 서울 땅
에서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거나 고립된 경승지가 어디 한둘이랴. 너무 사람과 개발만
생각하여 일을 저지르다보니 옛 경승지와 자연을 전혀 배려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  세검정의 오랜 단짝, 차일암(遮日巖)

세검정 밑에는 하얀 피부의 넓적한 반석(磐石)이 누워있는데 이 바위가 조선시대에 사초를 깨
끗히 세초(洗草)했던 차일암이다.
세초란 조선왕조실록의 모태가 되는 사초(史草)를 실록(實錄)으로 편찬한 다음, 사초에 적힌
글씨를 물로 씻겨 지우고 그 종이를 다시 쓰는 것이다. 그것을 마치면 뒷풀이로 세초연(洗草
)을 가졌는데 이때 바위에 햇빛을 가리는 천막인 차일(遮日)을 치며 잔치를 했다. 하여 차
일암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차일암에는 차일 기둥을 세우고자 파놓은 구멍들이 있으며 오랫동안 세검정을 수식하며 서울
장안의 이름난 경승지이자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었다. 무더운 날씨에 벌러덩 누워 한잠 청하
고 싶을 정도로 잘생긴 바위이나 주변 환경이 고약하게 변한 탓에 이제는 그러기가 곤란해졌
. 비록 인간들이 주변에 씌워놓은온갖 굴레들은 어쩌지 못해도 홍제천의 수질만큼은 더 깨
끗하게 거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도 여전히 어려운 모양이다.

세검정에서 홍제천을 따라 동쪽으로 200m 남짓의 산책로가 닦여져 있으며, 그 길의 끝에는 간
단하게 몸을 풀 수 있는 운동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근래 세검정 밑에서 세검1교 밑도
리로 징검다리가 놓였는데, 그 다리를 통해 홍제천 옆 산책로를 따라 홍지문 방면으로 이동할
수 있다. 다만 물이 아직 깨끗하지 않으니 손이나 발은 담구지 말자.


▲  늦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세검정 산책로

▲  세검정 동쪽 홍제천 산책로
빌라 너머로 보이는 산자락에 부암동의 꿀단지, 백사실계곡(백사골)이 숨겨져 있다.


세검정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를 타고 세검정(상명대)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번을 타고 세검정(상명대)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168-6 (세검정로 244)

         ◀  탕춘대(蕩春臺)터 표석
탕춘대는 1506년 연산군이 세운 누대(樓臺)
홍제천 바위에 자리했다. (표석은 그 위치가
아님) 이후 영조 시절에 여기서 군사를 훈련시
키면서 연융대(鍊戎臺)로 이름이 갈렸다.
(세검정 동쪽 길가)

         ◀  탕춘대 한지마을터 표석
조선 때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造紙
) 소속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다. (세검정초
교 정류장 부근)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기와집,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

세검정을 둘러보고 서쪽으로 조금 가면 상명대입구인 세검정교차로이다. 여기서 서남쪽 길 건
너편으로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고래등 기와집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 집이 석파정 별당
을 품고 있는 석파랑(石坡廊)이란 고급 한정식당이다.

지금은 비록 식당이지만 원래는 서예가이자 문화유산에 조예가 깊었던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
, 1903~1981)의 별서였다.
그는 1945년 왜열도로 건너가 왜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가 가지고 있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의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를 천신만고 끝에 받아온 인물로 유명하며, 6.25시절 서울을 점령
한 북한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담긴 문화유산을 죄다 빼돌리려고 하자 혜곡 최순우(
谷 崔淳雨)와 함께 뛰어난 재치로 문화유산의 강제 북송을 막아내기도 했다.

소전은 금수저 출신(전남 진도 대지주의 아들임)으로 1963년 이곳에 별서를 지었다. 집을 새
로 짓지 않고 도심에 있던 김옥균(金玉均) 가옥, 박영효(朴泳孝) 가옥, 이완용(李完用) 별장,
기생 나합(羅閤) 양씨의 집 등의 한옥을 구입하여 그 자재로 집을 지었다. 또한 태평로 확장
으로 덕수궁(경운궁)의 동쪽 돌담이 철거되었을 때 이를 모두 매입해 석파랑 돌담과 정원 축
대를 쌓을 때 사용했는데 자그마치 트럭 30대 분이었다고 한다. (운현궁 돌담도 사들였음)

그의 별서는 1969년 완성을 보았으며, 1958년에 매입한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옥인
(玉仁洞) 집을 별서 북쪽에 두고, 같은 해에 흥선대원군의 별장, 석파정(石坡亭)에서 가져
온 별당은 뒤쪽에 두었다. 또한 당시로는 그리 흔치 않던 서양개 세퍼드를 여러 마리나 키우
고 있었다고 하니 그의 재력이 엄청났음을 보여준다,

자기의 별서를 조그만 한옥 전시장으로 꾸민 소전은 1981년 세상을 떴고 그의 후손이 가지고
있다가 1993년 주인이 바뀌면서 비싼 한정식당으로 바뀌었다. 석파정 별당의 이름을 따서 석
파랑이란 간판을 내걸었으며 오랫동안 손님 외에는 내부 접근이 어려웠으나 2000년대 이후 빗
장이 열려 마음 편히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이곳은 부암동의 주요 명소로 크게 존
재감을 드러내어 사진쟁이와 답사객의 발길이 늘고 있다. 허나 이곳은 엄연히 개인 식당이기
때문에 별당을 비롯한 건물 내부는 마구 들어가서는 안되며, 18시나 일몰 이후에는 식당 영업
을 위해 관람을 가급적 피해주기 바란다.


▲  석파랑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자 형태로 3개의 방으로 이루어
져 있다. 가운데 큰 방이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며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외벽은 벽돌로 도배해
속살을 가리고 가운데에 동그란 창을 냈다. 이는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소전에게 별당을 빼앗긴(?) 석파정은 오랫동안 비공개로 일관하다가 2012년 겨울에 비로소 공
개되었다. (서울미술관 개장으로 개방됨)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법칙에 따라 별
당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마땅하나 서로 떨어진지 60년이 넘은 상태고 서로 소유자가
다르다보니 이 또한 쉽지가 않다. <석파정은 서울미술관 소유, 석파정에서 떨어져 나온 별당
은 석파랑 소유임>


▲  석파정 별당 쪽마루와 섬돌
대청방 문을 살며시 열면 그 안에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섬돌에 신발들이 있는 것을 보니 가운데 방에서 사람들이 한정식을
먹고 있는 모양이다.


석파정 별당은 현재 식당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결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대원군의 별
장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 밥먹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 없이 깨끗하게 보
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뭐 봐줄 만은 하겠다. (아직 방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음)
별당으로 다가서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에서 접근하거나 석파랑 전용 주차장에서 스톤힐로 이
어지는 돌계단을 타고 들어가면 된다.


▲  석파랑 본채 동쪽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과 스톤힐 정문

별당 옆에 조성된 돌계단과 돌문, 성곽처럼 다져진 석축은 석파랑에서 스톤힐이란 건물을 지
으면서 닦은 것들이다. 스톤힐(Stone hill)은 이탈리안 음식과 와인을 취급하는 식당으로 전
통과 고풍스런 멋이 깃든 석파랑과 완전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데, 그 옆에 빨간 피부
를 지닌 홍지동 산신각이 있다.
돌의 언덕을 뜻하는 '스톤힐'에 걸맞게 하얀 돌로 그 길목을 꾸민 것이 참 이색적이다. 하지
만 소나무가 무성한 주변 풍경과는 그리 어울려 보이지 않으며, 스톤힐을 만들면서 석파정 별
당의 석축까지 진하게 다져놓아 마치 성곽 위에 집처럼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  150년 이상 묵은 석파랑 감나무 (가운데 나무)

▲  활짝 열린 석파랑 대문(정문)
지금은 모두에게 개방된 착한 문이지만 예전에는 비싼 밥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에게만 입을 벌리는 차가운 문이었다.

▲  경복궁에서 가져온 만세문(萬歲門)

석파랑 본채는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청나라식 
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뜨락에 세워진 만세문은 고종(高宗)이 황제 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
1898년 경복궁에 세운 것인데 심술 고약한 왜정이 이를 매각하자 소전이 매입하여 옮겨놓
은 것이다.
비록 제자리는 잃었지만 소전 덕분에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궁궐 건축물의 고품격이 고
스란히 배여있다. 그리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뜨락에는 곳곳에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
으며 조그만 절구통과 다양한 석물, , 나무 등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  석파랑의 중심인 본채
최대 50명까지 밥 손님 수용이 가능하며, 석파랑의 값비싼 한정식을 지어내는
부엌이 이곳에 들어있다.


※ 석파정 별당(석파랑)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
  내버스를 타고 상명대입구(세검정교회) 하차 (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에서 1711, 7016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시내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도보 2~
  3
* 석파랑 홈페이지는 위의 석파랑 본채 사진을 클릭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 (자하문로 309, 석파랑 ☎ 02-395-2500)


▲  하림각 건너편 길가에 자리한 부침바위터(付岩址)

부침(붙임)바위는 부암동의 지명 유래가 된 유명한 바위이다. 바위 피부에 난 구멍에 돌을 대
고 비비면서 소원을 빌거나 바위에 붙인 돌에서 손을 떼었을 때 그 돌이 척 붙으면 아들을 낳
거나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와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옛날부터 뿌리 깊게 박힌 아들 선호 사상이 빚어낸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애뜻한 현장으로 바
위 높이는 2m 정도 되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잘 남아있었으나 개발의 칼질에 무참히 난도
질을 당해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바위터에 표석을 세워 그가 있던 자리임을 아련하
게 전해줄 따름이며, 세검정교차로 공원에 그를 추억하는 표석을 세웠다. 허나 아무리 그런다
고 강제로 사라진 그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서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잘생긴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도시화
의 거친 물결과 인간의 욕심으로 많은 바위가 세월의 저 편으로 강제로 사라지고 말았다.
런 바위 가운데 여기서 가까운 응암동(鷹岩洞) 백련산(白蓮山) 자락에는 매 모양의 잘생긴 매
바위가 있었는데 땅값을 노린 집주인이 무식하게 파괴해버렸다.


 

♠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며 도성의 수비력을 높였던
탕춘대성과 홍지문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


▲  고된 세월의 때와 하얀 피부가 공존하는 홍지문

석파랑을 둘러보고 홍은동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이란 성문과 탕춘대성이라 불리는 성
곽이 마중을 나온다. (석파랑 옆 세검정교차로에서 훤히 바라보임)

홍지문을 거느린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산성(山城)으로 연산군이 세검
정 부근에 지은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고 해
서 서성(西)으로도 불리며, 겹성이란 별칭도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이 만약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년에
(申琬)이 성곽 축조를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도성 보수가
마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세우려고 1715년 홍제천에 홍지문을 먼저
닦았다. 그런 다음 17188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106일에
일단 공사를 멈추었다가 1719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
되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선을 거
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로 원래는 북한산성까지 이으려고
했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해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능선, 북악산(
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싹 취소되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에
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하여 홍지
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대능
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남아있다. (여장은 홍지문과 남쪽 성곽 일부에만 남아있음)


▲  홍제천의 물을 하염없이 흘려보내는 오간대수문 (동쪽 모습)
북한산과 북악산에서 발원한 홍제천은 저 문을 통해 한강으로 흘러간다. 마치 냇물 위에
5개의 무지개를 보듯, 유연하게 구부러진 홍예의 곡선이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탕춘대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암문은 제외)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
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한북문(漢北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200년 이상 별탈없이 지내온 홍지문은 19211, 지붕에 쌓인 세월의 장대한 무게를 감당하
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
지 홍수로 싹 떠내려가면서 터만 아련하게 남아오다가 19777월 복원되었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원할 때 새로 맞춘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난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
해 문루와 오간대수문은 금지 구역이 되었으며, 오간대수문에서 탕춘대능선 쪽 성곽 200m 정도
구간도 통제되어 탕춘대능선을 가려면 홍지동 주택가나 옥천암 주변으로 돌아가야 된다. 또한
문 남쪽은 세검정로가 지나고 있어 성곽이 아주 잠깐 단절되어 있다. 허나 그 길을 넘으면 성
곽은 다시 소소하게 율동을 부리며 인왕산으로 뻗어간다.
성문 앞뒤로 나무가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닦여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오간대수문 바로 밑
홍제천 북쪽에 최근에 산책로가 닦여져 오간대수문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다. 이 산책로는 세
검정과 옥천암까지 이어진다. 또한 문을 경계로 성 안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弘恩洞)이다.


 홍지문의 야경 (홍지문의 앞 모습)
홍지문은 더 이상 서울 수비의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문화유산과 관광지의 의무와 성격만 지니고 있으며,
문은 24시간 열어두고 있다.

 홍지문 천정을 장식하고 있는 고운
빛깔의 와운문(渦雲紋)

▲  홍체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오간대수문의
북쪽 홍예문들

   

오간대수문 윗도리는 금지된 다리라 발을 들일 수 없지만 아랫도리는 홍제천 산책로가 닦이면
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살펴보는 오간대수문의 속살, 비록 하천에서 약간 비린내가
풍기긴 했으나 그 정도 냄새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임)

홍예문 위쪽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물이 흐르는 수문이라 물을 관장하는 용을
수호용으로 넣은 듯 싶다. 5개의 수문 중, 북쪽 기준으로 1,2,5번째 문은 바닥에 돌이 입혀져
있고, 3,4번째 문은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내려 홍제천이 흥분한 경우에
5개 문이 모두 수문이 되버린다.

※ 홍지문 찾아가기 (2018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18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북한산 끝자락 홍제천변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고려 후기에
조성된 거대한 하얀 마애불을 간직한 홍은동 옥천암(玉泉庵)


 홍제천 남쪽에서 바라본 옥천암 (왼쪽은 마애보살좌상,
오른쪽이 옥천암)

홍지문에서 한강을 향해 열심히 길을 재촉하는 홍제천을 따라 서쪽으로 7분 정도 가다보면 하
얀 암반이 일품인 하천 건너로 하얀 피부의 커다란 마애불상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가 바로
이곳의 명물이자 상서로운 관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다.
문화재청은 그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지역 사람들은 '보도각백불'로 많
이 부르고 있다. (나도 그 명칭이 버릇이 되었음) 여기서 보도각(普渡閣)은 하얀 마애불과 바
위를 보듬은 보호각의 명칭으로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홍
제천변에 있어 옛날부터 '해수관음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강제로 하얀 피부가 된 19
세기 이후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 '백불' 등의 별칭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백불'은 구한
말에 양이(洋夷)들이 그를 보고 'White Buddha'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견
해도 있다.

마애불 옆에는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암자 옥천암이 둥지를 틀었으며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홍
제천에 걸린 보도교(普渡橋)란 유연한 곡선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시멘트가 아닌 홍예 돌다
리였으면 운치가 정말 진국이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다리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조촐
한 문이 있는데, 그가 옥천암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 다리 끝에 달린 흥미로운 현장
으로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도각 백불(마애불), 오른쪽 언덕에 옥천암이 있다.

▲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0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으며 홍제천 바람을 쐬고 있는 이 마애불은 서울에 전하는
8개의 오랜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달랑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 마애불의 일원으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안암동에 보타사(寶唾寺)란 절이 있는데 그곳에 옥천암 백불과 비슷
하게 생긴 하얀 피부의 마애불이 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조성 시기도 비슷하여 고려 후기에
같은 사람이나 지역 세력가가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여기서 가까운 승가사(僧伽寺)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개성(開城)에 있는 관음굴 석조보살반
가상과 비교되는 고려 말 불상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존재로 평가받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서울로 천도하자 그를 찾아와 예불을 올렸다고 전하며 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가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는 성현(成俔, 1439~
1504)이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옥천암 백불을 부처바위를 뜻하는 불암(佛巖)으로 기재
했다. 그것이 이곳에 대한 첫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장군이 여기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
데 어리석은 왜군들은 백불을 그만 조선군으로 잘못 알고 조총을 정신없이 쏘아댔다. 그렇게
탄환을 다 소비한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그들을 보기좋게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홍제천의 물결을 따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백불을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띄우고자 근처
에서 일어났던 권율의 왜군 토벌전을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
찾아와 아들의 천복(天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호분(
,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
으로 불상을 하얗게 도배를 하면서 이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백불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얀 피부가 되면서 마애불은 다소 젊어 보이게 되었으나 대신
문화유산의 큰 매력인 고색의 기운이 다소 꺾여 그리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는다.


▲  보도각과 붙임바위의 옆모습

백불의 높이는 5m로 그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인해 예로부터 영험이 깊은 석불로 명성이 높았
. 그 앞에 닦여진 공간에는 그의 영험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특히 입시철에는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백불에게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리는데, 생긴 모습부터
가 예사롭지가 않다.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와 비슷하게 돌(또는 동전)을 바위에 붙이
거나 위로 던져서 바위 위에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매달린 작은 돌과 동전
이 적지 않다. (절에서 동전을 계속 수거하고 있어 요즘은 별로 안보임) 그래서 불상이 이곳
에 깃들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소박한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보도각 앞에는 홍제천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둘러져 있었으나 2016년 이후 그 돌담을 밀면
서 정면이 확 트였다. 키 작은 난간이 돌담 대신 둘러져 있으며 난간 바로 앞에는 나무로 다
진 홍제천 산책로가 닦여져 있고, 그 앞 홍제천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반석들이 가득하다.
한때 도심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비린내 풍기는 하천으로 떨어지면
서 그 반석이 다소 아깝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속세(俗世)를 상징하는 그런 하천을 걱정스럽
게 굽어보며 중생을 걱정하는 불상의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따뜻한 모습 같다.

그의 몸은 모두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주황색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금
색으로 되어있다가 2016년 이후 주황색으로 갈았음) 오른손에 걸린 팔찌, 삼도(三道) 아래로
커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寶冠), 그리고 귀에 건 귀걸이
까지 정말 관음보살 누님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그의 얼굴은 거의 포근한 인상으로 중생
들의 소원과 고충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다 들어줄 것만 같다. (현실은 하나도 안들어주었음)


▲  마애보살좌상의 잘생긴 얼굴과 윗도리

홍제천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 모습으로 지그시 떠 있으며, 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닿는다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불상의 몸을 덮고 있는
옷 주름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 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데 왼
팔이 너무 길어보이며 앉아있는 모습치고는 아랫도리가 좀 넓게 표현되어 신체 균형이 좀 맞
지 않는다.

백불 앞에는 중생들이 정성스레 기도를 올리며 고민거리를 슬쩍 내밀고 있었다. 그들의 갖은
소망을 들어주느라 보통 귀찮은 것이 아닐텐데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한결 같은 표정으
로 그들을 맞이해 고충 하나라도 누락될까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얼마
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 정성이 부디 백불과 하늘을 감동시켜 나를 포함한 중생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  조그만 기와문을 지나면 조촐한 옥천암 경내가 펼쳐진다.

백불 동쪽에는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은 옥천암이 자리해 있다. 백불이 관음보살이다보니 자
연히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이 땅의 3대 관음도량으로 양양 홍련암(紅蓮庵)
, 남해 보리암(菩提庵), 강화 보문사(普門寺)를 꼽는다. 허나 옥천암도 관음도량으로서의 자
부심이 대단하여 비공식적으로 자신들을 포함시켜 4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우기기도 한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약효가 있다는 샘물(혹시 탄산약수가 아닐까?)
있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하며, 그 연유로 옥처럼 맑은 샘물, 옥천암을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약수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오래전에 사라졌고, 절 앞을 흐르는 홍제천
또한 세월에 고되게 대이면서 그런 모습은 이제 전설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 절은 언제 지어졌는지 전해오는 것이 없다. 다만 인근에 조선 초기까지 잘나갔던 장의사(
藏義寺, 세검정초교에 있었음)와 사현사(沙峴寺) 등의 쟁쟁한 절들이 있어 백불을 관리하는
부속 암자로 지어진 듯 싶으며, 세검정 맞은편에는 혜철선사(惠哲禪師)1396년에 태조의 도
움으로 세웠다는 소림사(小林寺)가 있는데, 그 절의 부속암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두 부
질없는 메아리이다.

이곳의 본격적인 사적(事績)이 등장하는 것은 1868년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
淨觀)이 관음전(觀音殿)을 세워 천일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
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 6칸과 요사(寮舍) 3칸을 고쳤
.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수리했으며, 이후 삼성각, 요사 등을 추가로 갖추었
으나 1987년 삼성각이 소실되고 1988년에 법당인 수덕전(修德殿)이 지어지면서 삼성각의 기능
은 수덕전에 통합되었다. 1989년에 종각을 만들었고 1990년 설법전(說法殿)을 지어 요사의 기
능도 겸하게 했으며, 1996에 홍제천에 보도교란 다리를 놓고 1998년에 일주문을 지었다.

북한산의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으며 홍제천변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사세확장이 좀 어렵다.
바로 동쪽에는 주택가가 있고 뒤에는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 자락이기 때문
이다. 그래서 경내가 무지 답답하다. 또한 백불 외에는 오래된 유산이 없고 주택가와 접해 있
어 고색과 산사의 내음이 크게 말라버렸다.

▲  요사의 기능도 겸하고 있는 설법전
옥천암 뜨락에도 변함없이 늦가을이 찾아와
이렇게 고운 작품을 남겼다.

▲  옥천암의 법당인 수덕전(修德殿)
수덕전과 설법전은 그 사이에 조그만 벽돌집
을 만들어 거의 하나로 이어져 있다.


▲  수덕전 아미타여래좌상

옥천암은 관음도량이라 보도각 백불이 중심 불상이나 법당에는 따로 아미타불(아미타여래좌상
)을 봉안했다. 불단에는 아미타불 홀로 있으며, 그 흔한 협시불(夾侍佛)은 없다. 불상 주위로
석가후불탱화와 지장탱화, 신중탱화, 칠성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 등의 불화가 수덕전 내부
를 진하게 수식하고 있는데, 그중 독성탱화가 1954년에 제작된 것으로 백불을 제외하고 제일
오래되었다.


▲  왜식(倭式)으로 지어진 옥천암 5층석탑
5층석탑은 예전에 수덕전 정면 우측에 있었으나 담장 쪽으로 옮겨졌다. 날씬하게
솟은 석탑의 탑신(塔身)에는 조그만 구멍이 무수히 뚫려있어 내부가 보인다.


▲  수덕전 우측에 세워진 키 작은 석등과 3층석탑
사람 키보다 작은 석탑은 2,3층 탑신이 없어지고 지붕돌만 남아있는데 조금 오래되어
보인다. 예전(2010년 이전)에는 그가 없었으나 근래에 주변에서 가져온 모양이다.
(탑의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음)

◀  석가탄신일을 맞아 간만에 외출을 나온 옥
천암 괘불(掛佛)의 위엄
청아한 색채로 그려진 이 괘불은 근래에 조성
된 것이다. 이전 시대의 괘불보다 키와 덩치는
작지만 담길 것은 모두 담겨져 있다.
초파일을 맞이하여 간만에 화려한 외출을 나와
중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상다리가 아작날 정도
로 차려진 제물에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옥천암을 끝으로 부암동 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워낙에 많이 찾았던 곳이라 마치
우리 동네처럼 친근한 곳이다. (부암동은 나를
기억이나 해줄까?)

▲  홍제천에 걸린 보도교와 징검다리

▲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옥천암(보도각 백불)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18번 버스를 타고 유원하나아파트 하차 도보 2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8 (홍지문길 1-38 ☎ 02-395-4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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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꿀단지, 서촌 늦가을 산책 ~~~ 옥인동 박노수미술관,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기와집 흔적들



' 늦가을 서촌 나들이 '

(박노수미술관과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집)


▲  박노수 가옥(박노수 미술관)의 뒷모습

▲  박노수 가옥 뒷쪽 굴뚝

▲  청운동에서 바라본 북악산


 


▲  옛 청휘각(晴暉閣)터 주변에서 바라본 서촌(西村)

서울 도심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서촌(웃대)은 경복궁(景福宮) 서쪽 동네를 일컫는다. <청계
천 이북이자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는 북촌(北村), 청계천 이남은 남촌(南村), 창덕궁 동부는
동촌(東村)이라 불림>
흔히 서촌이라 불리는 경복궁 서부는 옛날부터 웃대라 불렸으며 원래 서촌은 경희궁(慶熙宮)
과 서대문 주변 지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인왕산 동쪽까지 확장된 것이다. 또한 세종대왕이
통인동에서 태어난 인연(1397년 출생)을 내세워 2011년 이후에는 종로구청과 지역 주민 주도
로 새롭게 '세종마을'을 칭하고 있다.

서촌(웃대)은 왕족부터 양반사대부(士大夫)부터 내시와 상궁(尙宮), 의관(醫官), 역관(譯官)
등의 중인(中人)과 평민 등 다양한 계층이 살았는데 그중 중인 계급이 많이 살았다. 또한 인
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을 병풍으로 두룬 아름다운 절경으로 인해 조선 초부터 도성(都城) 내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런 곳은 늘 귀족들이 군침을 흘리는 법이라 안평대군(安平大君,
세종의 3번째 아들)부터 이항복(李恒福), 정철(鄭澈), 권율(權慄), 김상용(金尙容), 김수항(
金壽恒), 추사 김정희(金正喜)에 이르기까지 많은 귀족들이 집과 별장을 지어 머물렀다.
특히 이곳은 도시와 자연이 경계를 맞닿은 도성의 변두리로 지금과 달리 필운대로와 신교동교
차로만 지나면 완전 자연에 감싸인 한적한 곳이었다. 게다가 궁궐과 육조(六曹) 등의 관청이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워 고위 관리들의 주택, 별서 장소로는 아주 그만이었다.

서촌의 이름난 명소는 겸재 정선(鄭敾)이 그의 노련한 손끝을 통해 그림으로 남겼는데, 그 화
첩이 장동(壯洞)8경첩으로 여기서 장동은 서촌의 일원인 청운동 지역의 옛 이름이다. 조선 후
기에는 중인이던 천수경(千壽慶)이 송석원(松石園)이란 시사(詩社)를 세워 중인들의 문학 공
간으로 키웠으며, 왜정(倭政) 이후에는 윤동주(尹東柱), 이상범(李象範), 박노수(朴魯壽), 이
상(李箱) 등 많은 시인과 화가들이 서촌에 안겨 주옥 같은 작품을 그려냈다.

서촌은 북촌만큼은 아니지만 한옥들이 제법 많이 남아있다. 대략 700여 채의 한옥이 옥인동과
누하동, 사직동, 체부동, 창성동 일대에 흩어져 있는데, 120년 이상 묵은 한옥은 하나도 없고
, 20세기 개량 한옥이 주류를 이루며 박노수 가옥 등의 양옥도 섞여있어 20세기 초/중반 서울
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옥이 많긴 하지만 북촌처럼 정식적으로 한옥마을을 칭하
고 있지는 않다. (비공식적으로 '서촌한옥마을'이라 불리기도 하며, 창성동 일대 한옥을 따로
'창성동 한옥마을'이라 불리기도 함)

조선 후기까지 북촌과 더불어 잘나가는 동네로 이름을 날렸던 서촌이지만 옥인동 일대에 고래
등 저택을 짓고 인왕산의 맑은 공기를 축내던 친일파 윤덕영(尹德榮)과 이완용의 부정 때문인
지 왜정 이후 적지 않게 기울었고 해방 이후 개발제한구역에 묶이면서 거의 시골 읍내처럼 정
체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루면 강산도 변한다는 서울 도심 한복판임에도 북촌과 서촌만큼은 시간도 느릿느릿 양반걸
음을 하거나 뒷걸음을 치는 것이다. 조금만 나가면 21세기 한복판인데 서촌 상당수는 아직 20
세기 한복판에 머물러 있어 서울의 옛 모습을 더듬기에 좋다.
허나 시간이 너무 정체되면 지역 주민들의 삶이 힘들어진다. 북촌도 도심 속의 꿀단지로 화려
하게 재기를 하고 있지만 서촌은 근래까지 낙후된 모습으로 거의 남아있던 것이다. 그러다보
니 한옥 기피증이 생겨나 한옥이 감소하게 되었고 거기에 서울시의 무관심까지 더해져 서촌의
숨겨진 명소들도 은근히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0년 4월 서울시에서 '경복궁 서측
지구단위계획'을 발표하여 한옥 보존과 신축을 장려했고, 북촌으로 단단히 재미를 본 서울시
와 종로구청이 서촌을 새로운 꿀단지로 개발하면서 서촌도 드디어 때를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 새로 지어진 한옥이 나날이 늘고 있고, 종로구청에서 서촌 답사코스를 개발하고 홍보
하는 한편, 새로운 명소를 발굴하고, 기존의 명소를 손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조
금씩 북촌을 추격하고 있다. 특히 수성동계곡 복원(2012년 7월)과 박노수 가옥을 구립 미술관
으로 해방시킨 사건(2013년 9월)은 서촌에 큰 활력을 불어넣는데 충분했다. 게다가 소규모 갤
러리와 공방도 조금씩 둥지를 틀면서 서촌의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서촌에는 수성동계곡과 박노수가옥(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이상범 가옥, 사직단, 황학정(
黃鶴亭), 단군성전, 선희궁(宣禧宮)터, 백호정 바위글씨, 백세청풍 바위글씨, 창성동 한옥단
지, 통의동 백송터, 신익희(申翼熙) 가옥, 백운동천, 송석원터, 청휘각터, 자수궁터, 보안여
관, 필운대, 배화여고 생활관, 체부동(體府洞) 홍종문가옥, 백운동천 바위글씨, 운강대 바위
글씨, 행촌동 은행나무, 딜쿠샤, 홍건희 가옥 등 조선과 근대, 현대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깃
들여져 있으며 갤러리아트가, 대림미술관 등의 온갖 갤러리와 문화공간, 금천교시장(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과 통인시장 등의 전통재래시장이 있다. 특히 금천교시장은 제2의 피마골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먹자골목이 크게 형성되어 있는데, 고깃집과 전집, 횟집, 분식집
등 다양한 식당이 즐비하여 학생과 직장인, 인왕산 등산객, 답사객으로 1주 내내 활기가 넘친
다. (나도 가끔 이용함)

부암동(付岩洞)과 성북동, 북촌과 더불어 나의 마음을 계속 훔치고 있는 서촌은 2011년 늦여
름부터 구석구석 발자국을 남기며 그의 숨겨진 속살을 계속 뒤집고 있다. 별거 없을 것 같은
겉보기와 달리 그 속은 신대륙 이상으로 다양한 보물을 품은 곳이 바로 서촌이다.

서촌 나들이는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나 2, 3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 자하
문로나 사직공원 동쪽(경복궁역 1번 출구)의 필운대로를 중심으로 움직이면 되며, 자하문고개
에 있는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에서 주요 명소를 거쳐 경복궁역으로 내려오는 것도 괜
찮다. 또한 조그만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고, 그 속에 여러 명소와 소소한 볼거리 등
이 숨겨져 있으니 너무 큰 길만 살피지 말고 서촌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골목길도 꼭 거닐어
보자. 그러면 정말 배부르고 알찬 서촌 나들이가 될 것이다. 단 서촌도 엄연히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므로 민폐를 부리지말고 조용히 둘러보기 바란다.


 

♠  친일파 윤덕영이 지은 근대 가옥, 화가 박노수의 삶터로 미술관으로
새롭게 거듭난 박노수 가옥(朴魯壽 家屋)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호

서촌 중심에 자리한 통인시장에서 수성동계곡으로 인도하는 옥인길을 따라가다보면 오른쪽 골
목 속에 서촌의 상큼한 명소로 등극한 박노수 가옥이 손짓을 한다. 이곳은 집 이름 그대로 우
리나라 미술계의 원로이자 현대 화가인 남정 박노수의 집으로 인근 이상범 가옥과 함께 현대
미술의 따끈따끈한 산실이며 2013년 9월 이후 속세에 개방되어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이하
미술관)'으로 새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이야 천하에 공개된 현대 화가의 미술관으로 누구든 돈만 내면 안길 수 있는 명소가 되었
지만 이 집의 태생은 그렇게 곱지는 못했다. 바로 친일매국노로 개추잡한 이름을 날렸던 윤덕
영(尹德榮, 1873~1940)이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윤덕영은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큰아버지로 왜정(倭政)에 적극 협
력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며 배때기에 기름칠했던 1급 매국노이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친일파로 추잡한 뒷끝을 보인 윤치호(尹致昊) 조차도 '이 비열한 매국노
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라며 그의 만행을
꼬집었다.
하지만 사람이기를 포기한 윤덕영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손가락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이권에 개입해 많은 부를 쌓았고, 집과 땅에도 징그럽게 욕심을 부려 송석원(松石園)을
비롯한 옥인동(玉仁洞) 일대를 사들여 고래등 양옥 별장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지었다. 그
리고 그 주변으로 가족과 첩을 수요할 14동의 고래등 한옥을 주렁주렁 지어 완전 그만의 조그
만 세상을 만들어놓았다.
박노수 가옥은 그 14동의 하나로 딸과 사위를 위해 이 땅 최초의 근대 건축가인 박길룡(朴吉
龍)에게 의뢰하여 1937~1938년경에 지어진 것이다.


▲  세상을 향해 활짝 문을 연 박노수 가옥(미술관) 대문

▲  벽돌로 지어진 박노수 가옥 (박노수미술관)

이 가옥은 한옥 양식과 중원대륙 양식, 서양식이 잡탕이 된 이른바 절충식 기법의 집이다. 2
층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벽돌 건물로 반지하층을 가지고 있으며, 붉은 벽돌로 된 1층에는 온
돌방과 마루, 복도, 응접실이 있고, 하얀 피부로 이루어진 2층은 나무 구조로 지어졌는데 계
단을 중심으로 마루로 된 방이 널려있다.
그리고 3개의 벽난로를 설치해 온기가 머물 공간을 확보하고 집 서쪽에 현관을 두었으며, 벽
돌로 포치를 설치하여 집의 운치를 더욱 높였다. 지붕은 서까래를 노출한 단순 박공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2층의 증축 부분을 빼면 거의 원형 그대로 잘 남아있다.

박노수가 매국노의 악취가 진동하는 이 집에 들어온 것은 1973년이다. 왜 이곳을 골랐는지는
모르겠으나 스승인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의 집과도 가깝고, 집의 모습도 중후하고 운치가
진해 예술가의 집 분위기로는 아주 좋아 보인다. 게다가 뜨락도 넓고, 인왕산도 가깝고, 도심
과도 가까우니 시내 왕래가 잦았던 그에게도 딱 적당한 장소였을 것이다.
남정은 이곳을 집과 화실로 삼아 많은 작품을 그려냈으며, 그의 예술적이고 꼼꼼한 손맛이 담
긴 뜨락에는 그가 수집한 수석과 석물, 문화유산을 배치하고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어 자연과
문화, 수석이 어우러진 아주 참한 공간으로 꾸몄다.

왜정 때 박길룡이 설계한 건물로 당시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고 현대 미술화가인
박노수가 40년 가까이 머물며 작품 활동을 벌였던 현장이라 윤덕영이라는 친일파 괴물이 만든
건물임을 무릅쓰고 1991년 5월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그것도 1호라는 그럴싸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바로 그 점이 참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데 1호나 2호, 3호ㅡ 100호 등은 그저 지정된 번호
일 뿐 가치 순위는 아니기 때문에 그리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1호만큼은 신중
해야 된다고 본다. 국보 2호는 몰라도 1호는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1호의 의미는 이 땅에서
는 꽤 각별하기 때문이다. 해방이 된지 70년이 되도록 친일매국노 청산조차(청산은 커녕 그것
들이 더 활개치고 있음) 제대로 되지 못한 이 땅의 거지 같은 현실을 이 가옥이 보여주는 듯
싶어 마음이 참 쓰라리다.

만약 윤덕영의 후손이 염치없이 계속 살고 있었다면 화염병이나 폭탄을 던져 없는 화마(火魔)
라도 억지로 소환해 집과 함께 날려버려야 마땅하겠지만 박노수가 이곳에 살면서 집에 일종의
면죄부가 붙여졌으니 굳이 때려부실 필요는 없을 것이다. 허나 문화재 지정 후순위로 두어 천
천히 지정을 하던가 요즘 개나 소나 지정된다는 등록문화재로 삼는 것이 어땠을까 싶은 아쉬
움도 살짝 든다. 뭐 이렇게 써봤자 허공에 메아리에 불과하지만...


▲  가옥(미술관) 현관 앞 (가옥 서쪽)

★ 남정 박노수(藍丁 朴魯壽, 1927~2013)의 간략한 생애
박노수는 1927년 2월 17일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에서 태어났다. 1940년대에 청전 이상범의
문하로 들어가 그림을 배웠으며, 해방 이후 서울대 회화과에 진학했다.

그의 작품활동은 주로 국전(國展)에서 이루어졌는데 1953년 국무총리상, 1955년에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1957년에는 추천작가를 지냈다. 이후 5.16민족상, 3.1문화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
을 받았고, 이화여대(1956~1962)와 서울대(1962~1982)에서 교수를 지냈다. 이후 서울대 명예
교수가 되었고,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역임했으며, 1995년 자랑스러운 서울
시민 6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왜열도 동경과 스웨덴, 미대륙에 다수의 국제전과 10
여 회의 국내외 개인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화제를 취하면서도 간결한 문필과 강렬한 색감, 대담한 터치 등 독자적
인 화풍을 구축해 전통 속에서 현대적 미감을 구현한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대표작으로
는 '달과 소년'이 있으며, 그의 많은 작품이 이곳에 진열되어 속인들의 정처없는 안구와 마음
을 다독거려준다.

남정은 1973년부터 2011년 말까지 이곳에 살았다. 2011년 죽음이 임박해진 그는 집과 소장품
등 재산의 상당수를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해 11월 11일 자신의 집에서 미술
계 인사와 후배들, 제자들, 종로구청 관계자 등이 모여 기증협약식을 갖고 약속대로 집과 소
장품을 쿨하게 종로구청에 내주었다.
그가 기증한 물건은 그의 그림이 포함된 미술작품 500점, 수석과 여러 석물 379점, 오래된 가
구 66점, 개인 소장품 49점 등, 약 1,000여 점으로 그의 통 큰 기증은 서민의 쪽박까지 빼앗
으려 드는 졸부와 위정자들로 가득한 이 땅에 한줄기 빛과 같은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가 베
푼 대인의 기운은 친일파 집이라는 굴레를 지닌 이 가옥을 180도 달리 보이게 하는데 충분했
다.

종로구청은 남정의 뜻에 따라 기증받은 집을 종로구립 미술관으로 꾸미기로 하고 2012년 10월
에 개관하기로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못해 1년 연기되었다. 그 사이 남정은 그의 소망이던 미
술관 개관을 끝내 지켜보지 못하고 2013년 2월 25일, 86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숨을 놓고 말았
다.
그가 사라진 이후, 유족과 종로구청의 노력에 힘입어 남정의 손때와 예술혼이 서린 그의 집은
드디어 2013년 9월 11일,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 천하에 문을
열었다. 개관 기념전으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모아 '달과 소년전'을 가졌으며, 종로구 최초
의 구립 미술관으로 이곳이야말로 남정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작이자 아름다운 선물이다.

나는 근/현대 미술가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보니 남정이 왜정과 현대를 거쳐간 원로 화가의 하
나로만 알고 있었다. 허나 이번에 그의 깊은 부분까지 파고드니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못
지 않은 대인(大人)으로 그의 이름 3자가 제법 크게 다가온다.


▲  무늬가 살아있는 석조대좌(臺座) (현관 앞)
무엇을 받치던 대좌였길래 무늬가 저렇게 요염한 것일까? 허나 대좌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망연히 뜨락 장식물의 일원이 되었다. 정체성과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만큼
무섭고 한심한 것은 없다.

▲  미술관 개원 기념으로 종로구청장이 남정에게 바친 메세지

▲  야외 전시관을 방불케하는 미술관 남쪽 뜨락

박노수 가옥은 크게 미술관으로 변신한 2층 가옥과 남쪽 뜨락, 그리고 북쪽 벼랑에 설치된 전
망대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 뜨락에는 남정이 수집한 온갖 수석과 문화유산 등이 가득 흩어져 있고, 소나무와 감나무
등 여러 나무와 꽃이 자리해 있어 조촐하게 자연과 문화가 잘 버무려진 야외 전시장을 이루고
있다. 특히 그는 수석 취미가 대단하여 뜨락 안팎으로 수석들이 가득한데 군침이 돌 정도로
잘생긴 돌도 적지 않으며, 그가 도안해서 만든 석조 원탁과 돌의자 6기는 가족과 벗, 제자/후
배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던 정겨운 현장이다.

▲  남정이 만든 석조 원탁과 돌의자 6기

▲  비석의 지붕돌인 가첨석(加檐石)


▲  귀여움과 고색의 때가 묻어난 조그만 호랑이상
어디서 데리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조선 후기 작품으로 여겨진다.

▲  또다른 호랑이상
호랑이를 고양이로 만든 옛 사람들의 손때로 피부가 꺼무잡잡하다.

▲  머리 위에 또다른 머리 장식을 둔 특이한 석등(石燈)
피부가 아직 반질반질하고 머리 장식이 특이한 흔치 않은 석등으로 20세기
초/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음)

▲  향로석(香爐石)과 그 위에 수줍게 놓인 작은 수석

▲  물을 머금은 조그만 돌항아리와 분재들
벌써부터 수면에 떨어진 낙엽들이 인생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돌항아리는 저들의 인생을 마무리 짓는 블랙홀인 모양이다.

▲  늦가을이 깃든 상큼한 남쪽 뜨락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  수석과 잡초, 꽃으로 가득한 가옥 동쪽

     ◀  집 동쪽에 솟아난 늘씬한 소나무
박노수가 심은 나무로 하늘과 가까운 줄기 끝
에 소나무 잎이 덩어리로 몰려있는 모습이 특
이하다. 나무의 높이는 거의 가옥 2층 정도 된
다.

▲  키 작은 태산목(목련목)
양옥란(洋玉蘭)이라고도 하며 박노수가
심었다.

▲  포치가 달린 가옥(미술관) 현관
구한말, 왜정 때 지어진 개인 양옥 가운데
포치가 달린 집은 흔치 않다.


▲  현관 앞에 놓인 커다란 돌확


 

♠  박노수 가옥(미술관) 현관과 전망대 주변

▲  현관을 지키고 있는 목조 동자상
세월이 달아놓은 주름으로 빛이 좀 바래 보이지만 앳된 표정은 변함이 없다.

    ◀ 가옥 현관과 여의륜(如意輪) 현판
지금은 유료의 공간이 되버린 박노수 가옥 내
부는 포치가 달린 현관을 통해 들어서면 된다.현관문에서 신발을 버리고 실내화로 갈아타면
되는데, 반지하층을 제외한 1층과 2층 상당수
의 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미술관 사무실은 1층
에 있다. 또한 '달과 소년'을 비롯한 박노수의
그림은 주로 2층을 장식하고 있으며, 1층은 박
노수의 생애와 그림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
다. (내부 촬영은 통제됨)

현관문에는 한자로 쓰인 여의륜 현판이 걸려있다. 글씨가 꽤 큼지막하고 패기가 넘치는 모습
으로 박노수의 집에 있으니 그의 글씨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다.
현판에 담긴 여의륜이란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세간(世間), 출세간 이익을 더하는 것
을 본뜻으로 하는 보살(菩薩)을 뜻하는 말로 추사가 말년에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서울 봉
원사(奉元寺)와 봉은사(奉恩寺), 팔공산 은해사(銀海寺), 해남 대흥사(大興寺) 등 천하에 유
명한 절을 유람하며 많은 글씨를 남겼다.

현판 우측에는 '승연노인(勝蓮老人)'이란 낙관이 찍혀있는데, 승연노인은 추사의 다른 아호(
雅號)이다. 이 현판을 손에 넣은 박노수는 현관문에 걸어두어 현관부터 미술가의 집 분위기를
진하게 우려냈다.


▲  근대 양옥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2층 벽난로
난방의 기능은 사라지고 이제는 무늬만 남아 한가로운 말년을 보낸다.

▲  2층 목조 다락방
다락방에 설치된 모니터에는 남정의 인터뷰 장면(1970~80년대로 여겨짐)이 나와
그의 생전에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 현관 앞에서 바라본 미술관 정문
조금씩 숨겨진 끼를 드러내며 경쟁자 북촌을 긴장시키는 서촌, 박노수 미술관은
바로 그 서촌의 새로운 활력소이자 허브이다. 평일임에도 제법 많은 이들이
찾아와 짧은 시간에 비해 너무 떠버린 이곳의 높은 인기를 실감케 한다.

▲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친일파 윤덕영의 딸 내외와 박노수 가족의 목을 축여주었던 우물이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그 수맥이 끊기면서 이제는 껍데기만 남았다.

▲  커다란 수석 (현관 앞)
호랑이나 사자, 낙타가 웅크리고 앉아 망중한에 잠겨있는 모습 같다.

▲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과 홀을 쥐어든 조그만 석인(石人)

가옥 북쪽에는 수풀이 우거진 가파른 벼랑이 있다. 예술과 문학의 향이 깃든 가옥답게 대나무
도 삼삼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벼랑에 계단과 석물을 배치한 고즈넉한 산책로를 내
었고, 그 길의 끝에는 무려 전망대까지 두었다. 이 언덕 산책로와 전망대야말로 박노수 미술
관만이 가진 강한 매력이자 백미라 칭할 만하다.

산책로 입구에는 고색이 묻어난 조그만 석인이 홀을 쥐어들며 안내인처럼 자리해 있다. 제자
리를 잃고 방황하는 그를 남정이 데리고 온 것인데 고향을 잃은 충격 때문일까? 석인은 좀처
럼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긴 이곳에 이끌려온 석조 문화유산 모두 제자리를 잃
은 가련한 처지이다. 아마도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속삭임으로 고향을 잃은 동병상련
의 한을 달래지는 않을까?
투박하게 닦여진 돌계단을 오르면 북쪽으로 난 아주 짧은 샛길이 있는데, 대나무로 둘러싸인
그곳에는 돌의자가 놓인 조그만 쉼터가 있다. 그리고 숲길을 마저 오르면 나무로 지어진 전망
대(전망데크)가 나타난다.

이 전망대는 박노수 가옥을 미술관으로 바꿀 때 지은 것으로 예전에는 그냥 나무와 풀만 있었
다. 숲길에는 조그만 돌의자가 여럿 있는데 남정은 이들 의자에 앉아 천하를 바라보며 작품을
구상하거나 온갖 망중한에 잠겼을 것이다.
전망대까지 인도한 숲길은 담장 앞에서 뚝 끊겨버려 적지 않게 달아오른 숲길의 여흥을 깨뜨
려버린다. 지금이야 이렇게 막혔지만 윤덕영이 한참 인왕산의 산소를 축내던 시절에는 바로
옆에 자리한 벽수산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전망대에 서면 가옥의 뒷모습을 비롯해 옥인동 일부와 옛 인경궁(仁慶宮)터인 배화여자대학이
바라보인다. 이곳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나 두 눈에 들어오는 천하의 범위는 우물안 개
구리 수준이다. 그래도 주어진 공간을 최대로 활용해 이런 곳까지 갖추니 정말 알차긴 알차다.

▲  숲길에서 만난 조그만 향로석

▲  숲길에서 만난 장명등


▲  숲길 끝 벼랑에 다리를 걸친 전망대
숲길과 돌의자, 석물은 박노수 시절의 것이고 전망대는 2013년에 단 것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가옥의 뒷모습과 지붕
건물의 모습은 양옥이지만 지붕만큼은 거의 한옥 스타일이다. 윤덕영이 14동의 한옥을
지을 때 자신의 벽수산장을 제외하고 모두 한옥으로 지었으면서 왜 딸의 집만
이렇게 이채로운 모습으로 지어주었을까?

▲  전망대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옥인동과 통인동 지역이 주류를 이루며, 광화문 부근도 조금씩 시야에 들어온다.

▲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굴뚝
지붕에는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굴뚝 5개가 뿔처럼 솟아나 집의 멋스러움을 한층
수식한다. 1층 지붕에는 2개, 2층에는 3개가 달려있는데, 이중 3개는
벽난로용, 나머지는 부엌용이다.

▲  가옥 북쪽 굴뚝과 언덕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왼쪽)

▲  가옥 동쪽에 자리한 장독대와 창고

남정 일가가 사용하던 장독대가 창고 위에 놓여있다. 남정의 작품은 장독대에서 숙성된 여러
음식의 힘이라고 봐도 절대 과언을 아닐 것이다. 허나 그들이 떠난 이후 이제는 인생처럼 공
허한 장독대가 되어 뜨락 장식물의 일원으로 조용히 묻혔다.

※ 옥인동 박노수 가옥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찾아가기 (2017년 11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
  서 종로구 마을버스 09번을 타고 박노수미술관 하차, 도보 1분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1,2번 출구)에서 도보 15분
* 입장료 : 성인(25~64세) 3,000원 (20명 이상 단체 1,800원) / 청소년 1,800원 (단체 1,200
  원) / 어린이 1,200원 (단체 600원) / 종로구민은 50% 할인
* 관람시간 : 10시~18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과 한가위 당일은 휴관)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68-2 (옥인1길 34, ☎ 02-2148-4171)


 

♠  다쓰러져간 매국노 윤덕영의 고래등 기와집

▲  옛 윤덕영 집 돌계단

옥인동 47-133번지 주변은 새 주택과 헌 주택, 달동네 스타일의 집이 공존하는 현장이다. 바
로 그곳에 윤덕영의 기와집이 1채 남아있다.
윤덕영은 서촌(웃대)에서 가장 풍경이 아름다운 송석원과 옥인동 일대를 싹 매입하여 그곳에
자신의 탐욕을 풀어놓았는데 송석원에 큼지막한 서양식 별장을 짓기로 작정하고 프랑스 공사
(公使)를 지낸 민영찬을 통해 건물 설계도를 의뢰했다. 그 설계도를 바탕으로 독일인 감독관
을 고용하여 1914년 집을 짓기 시작해 10여 년의 공사 끝에 완성을 보았다.

그 집은 무려 222평 크기의 프랑스식 건물로 자신의 호를 따서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 하였
다. 또한 송석원에 있다고 해서 '송석원별장'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었다. 산장 주변에는 14동
의 한옥을 지어 가족과 자식, 첩들과 모여 살았는데, 소나무와 사과나무가 무성하던 벽수산장
북쪽에 1고주 7량집의 99칸 기와집을 지어 첩의 거처로 삼았다. 그 집이 바로 이곳이다.

윤덕영이 1940년 골로 간 이후, 그의 자식들이 재산을 말아먹으면서 벽수산장은 왜열도 회사
인 미쓰이에게 넘어가고, 14동의 기와집도 거진 남의 손에 넘어갔다. 6.25 이후 서울의 폭발
적인 인구 증가로 벽수산장 주변에 무허가 집이 난립을 했고, 약간 처지가 괜찮은 이들은 윤
덕영의 한옥을 1칸씩 차지해 서울살이를 했다. 그렇게 서울을 휩쓴 근대화의 회오리로 그의
부질없는 한옥들은 대거 다운당했고, 지금은 박노수 가옥과 이 한옥만 간신히 남게 되었다.

한옥에는 현재 여러 가구가 살고 있는데, 대지를 공동으로 소유하며 각각 별도의 출입구를 두
어 1지붕 여러 가족을 이루고 있다. 매국노의 악취가 코를 찌르는 기와집이 힘겹게 서울살이
를 하는 서민들의 소박한 삶터가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형태가 적지않게 변질되고 수리도 제
대로 받지 못해 20세기 초반 최상류층 고래등 가옥은 이제 거의 쓰러지기 직전의 허름한 몰꼴
이 되었다. 마치 무관지옥으로 개처럼 끌려갔을 윤덕영과 아비의 재산으로 팔자좋게 살다가
가산을 말아먹은 그 자손들처럼 말이다.

비록 빛은 많이 바랬지만 한 시대를 나쁘게 풍미했던 권력자가 살던 현장이라 집에 쓰인 공사
자재는 거의 고급 수준이며, 단풍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한옥 동쪽에는 제법 품격이 돋보이는
석조 계단을 늘어뜨렸다. 지금이야 주택들 사이에 끼어있는 가련한 신세라 골목길 계단 정도
로 실감이 나진 않겠지만 왕년에는 궁궐 계단 못지 않은 위풍을 자랑했다. 게다가 일반 한옥
에서는 보기 힘든 계단의 소맷돌, 장대석 주초, 처마 장식, 장식이 새겨진 벽 등을 갖추고 있
어 예사 한옥이 아님을 귀띔해준다.
그러다보니 버리기는 좀 아까워 서울시에서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을 조성하면서 이 집을 옮
기려고 했는데, 나이에 비해 한옥이 너무 낡아 이전이 불가능하자 부득이 예전 모습 그대로
본을 따서 새롭게 짓는 선에서 끝을 냈다. 그리고 집 이름은 그 더러운 주인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옥인동 윤씨 가옥'이라 하였다. (가옥의 면적은 225.79㎡)

참고로 윤덕영의 아우로 형못지 않던 쓰레기 매국노인 윤택영(尹澤榮, 1866~1935)의 재실(齋
室)도 남산골한옥마을로 옮겨져 한가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  위에서 본 돌계단과 단풍나무

▲  계단 끝에 자리한 옛 윤덕영 집


▲  서민의 삶터가 되버린 옛 윤덕영 집
허름한 모습 속에 아직 고급 기와집의 기품이 남아있다.
 

계단을 오르면 윤덕영 집이 일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북쪽으로 휘어진 계단을 오르면 집
대문인데 서민들의 거처가 되버린 탓에 갖은 생활도구와 가스관, 전깃줄, 편지함으로 주변이
참 어수선하다. 게다가 대문도 굳게 잠겨져 있고, 골목길도 막혀버려 세세한 집 구경은 어려
운 실정이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혹여 나중에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면 이 한옥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 같다.
이미 남산골한옥마을에 본을 따서 지은 집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곳의 집은 엄연히 새 집
이라 고색의 냄새가 없는 이 땅의 흔한 민속촌의 한옥 같은 인상이다. 반면 이곳은 100년 가
량 묵은 한옥이라 겉모습에서 벌써 고색의 향이 피어올라 고택의 기분을 들게 한다.
이곳을 만약 밀게 된다면 모두 가루로 만들지 말고 지붕과 벽, 목재 등을 모두 수습해 남산골
에 있는 윤씨가옥을 다시 손질했으면 좋겠다. 비록 매국노의 잔재라 껄끄럽긴 하지만 '박노수
가옥'도 박노수 화백 덕분에 개과천선하여 아주 새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이 한옥도 서민들의
오랜 삶터로 그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현장이다. 게다가 20세기 초반 상류층 한옥의 형태
를 잘 간직하고 있으니 한옥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옛 윤덕영 집을 끝으로 늦가을 서촌의 일부 더듬기는 막을 내린다. 다른 명소는 별도의 글에
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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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11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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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의 포근한 뒷동산이자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 산책 ~~ (한양도성, 낙산공원, 자주동천, 삼군부총무당)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좌청룡, 낙산 나들이 '
(한양도성, 낙산공원, 비우당, 삼군부총무당)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낙산공원 한양도성 (낙산에서 동대문 방향)

▲  자지동천(자주동천) 바위글씨

▲  삼군부총무당


 

♠  한양도성(漢陽都城) 혜화문(동소문)에서 낙산공원 구간

▲  혜화문에서 낙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5월의 첫 무렵, 일행들과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을 찾았다.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혜화동로터리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동소문고개가 막
꺾이기 직전에 한양도성과 낙산으로 이어지는 탐방로가 손을 내민다.

이 탐방로는 낙산을 넘어 동대문(東大門)까지 이어지는 2.3km의 도보길로 2012년에 모두 개통
되었다. (동소문 주변이 마지막으로 개통됨) 처음부터 각박한 경사로 사람들을 맞이하는데 그
것도 잠시일 뿐, 길은 서서히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완만해진다. 삼선동(三仙洞) 주택가 뒤쪽
을 지나지만 낙산 정상까지 녹지대를 완충지대로 삼아 속세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산책
의 기분을 진하게 선사해주며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수준도 높아진다.

동대문에서 낙산공원으로 오르는 성곽 탐방로는 성곽길과 성곽 바깥길 2가지가 있어 골라가는
재미가 있다. 허나 동소문에서 오르는 길은 아직까진 바깥길만 완전하게 나 있다. 동소문고개
에서 성 안쪽을 보면 나무가 좀 무성해 보이는데 그곳에 카톨릭대 성신교정이 넓게 자리를 깔
고 앉은 터라 낙산공원~동소문 성곽길은 그 중간인 제2전망광장까지만 닦였을 뿐, 거기서 카
톨릭대 담장에 사정없이 가로막혔다.
자세한 속사정이야 낸들 모르겠지만 시민들을 위해 성곽길을 흔쾌히 개방하고 성곽이 끊긴 동
소문고개에는 카톨릭대 교내(혜화동성당)로 내려가는 길을 내면 될 것이다. 물론 끊어진 양쪽
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성곽 모양의 구름다리를 놓는 것이 훨씬 좋겠지만 끊긴 거리가 길고 그
높이마저 상당하며 고갯길 도로(동소문로, 창경궁로)의 교통량이 어마어마해 꽤 난공사가 예
상된다.

동소문고개를 기준으로 15분 정도 오르면 성 안으로 인도하는 암문(暗門)이 나온다. 그 문을
들어서면 낙산공원 놀이광장으로 거기서 2분을 더 가면 낙산의 정상인 낙산공원 마을버스 종
점에 이르게 된다.


▲  주거지(장수마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펼쳐진 성곽 바깥 탐방로

▲  낙산에서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내려가는 한양도성
낙산 북부에서는 어디서든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 산줄기가 시원히 바라보인다.


동소문~낙산 구간의 한양도성은 대체로 잘 남아 있다. 허나 600년이 넘는 장대한 세월을 먹었
고, 왜정과 6.25전쟁으로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기면서 새 성돌로 치유된 부분이 많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때가 자욱한 검은 성돌과 하얀 피부의 성돌이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하지
만 둘 사이의 어떠한 갈등도 없이 오랜 세월을 뛰어넘는 강인한 협동심으로 하나의 성곽을 이
루고 있으니 참 든든해 보인다. 그럼 여기서 한양도성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조선의 수도를 지켰던 서울<한양(漢陽)>의 갑옷, 한양도성 - 사적 10호
1388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란 그 유명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몸담았던 고려 왕조를
엎어버리고 조선이란 아주 비리비리한 왕조를 세운 이성계(李成桂), 세상에서는 그를 조선 태
조라고 부른다.
그는 1394년 남경(南京)이라 불리던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의 도성 천도 프로젝트
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이며 국방을 강화하여 버릇 없이 까부는 명나라를 혼내주
려고 했던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다.
1395년까지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시가지를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
에 들어갔는데 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4산(內四山)인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 길이는 59,500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 작
은 수준이며,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천하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
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
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에 다시 79,400명을 콩볶듯이 동원,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도성 축조는 마무리
가 되었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싹 다지기로 하고 1422년
1월, 32만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하여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으니 무려 3.2배의 인부들이 동원된 조선 최대의 공사였으며 완전 인원빨로 밀어
붙어 불과 38일만에 마무리되었다.
허나 아무리 현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이지만 농번기를 피하려고 늦겨울에 무리하게 작업을 벌
였고 공사의 강도가 높아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다. (공사가 끝나고 귀가 도중 죽은
사람들도 꽤 되었음) 그들의 적지않은 희생과 고통으로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 치성(雉城)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한 도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케 했는데 성곽을 워낙 단단히
지은 탓에 20세기까지 스스로 붕괴된 적이 없으며,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되거나 전쟁 폭격을 받은 것은 제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하여
도성은 왜군에게 아주 허무하게 무혈점령되고 만다. 그런 꼬라지를 막고자 온갖 욕을 들어가
며 단단하게 다졌건만 오늘날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소위 윗대가리들의 무능으로 눈을 뜨고
적군이 도성 안에 들어오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치열한 전쟁이 없어서 성곽과 성문
은 별 피해가 없었다. (한양도성 왈 '내가 이럴려고 단단하게 지어진건가? 자괴감 들어' ;;)

1704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신하들의 격한 반대를 물리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했는데, 그 안에 행궁(行
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갖춘 조그만 도시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탕춘대성
(蕩春臺城)을 쌓아 도성의 수비력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서울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드러내던 한양도성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1899년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사람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콜
브란은 고종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며 전차(
電車)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하여 그 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
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
문의 양쪽 성벽이 싹둑 잘리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나갔다. 허나
그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
제는 1905년 이후이다.

왜국(倭國)은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그 소속으로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해괴
한 기관을 만들어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1910년 이후 서소문<소의문(昭義門)>과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동소문<혜화문(惠化門)>을 밀어버렸고 적지 않은 성곽까지 덤으로 밀면서
망국(亡國)의 서울을 욕보인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
발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
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겨우 살아남
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손질하기 시작하여 광희문과 숙정문을
복원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
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
이 가능하며<인왕산 정상 주변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에는 못감, 월요일이 휴일인 경우에는 그
다음날 문을 닫음> 성곽이 사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에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바뀌었다. 허나 서울성곽이란 이름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며 한양성곽이라 불리기도
한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한양을 쌈싸먹던 성곽이니 서울성곽, 한양성곽이라 불러
도 크게 상관은 없을 것이다. (본글에서는 한양도성으로 통일함)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며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데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글쎄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
이 쌓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
에 성곽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았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우리나라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 대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  거의 85도로 서 있는 한양도성의 위엄

옛 한양도성은 두터운 성곽을 지니고 있기에 늘 든든했을 것이다. 그렇게 민초들을 닥달하여
쌓은 단단한 성이건만 그 보람도 없이 무능하고 부패한 지배권력층 때문에 제대로 된 수성전
하나 치르지도 못하고 적에게 떨어지는 수난을 여러 차례나 겪어야 했다. (임진왜란, 이괄의
날, 병자호란...) 성곽은 도시와 백성을 지키고자 있는 것이지 그냥 멀뚱히 서 있는 병풍이
아니다.


▲  낙산 바깥 탐방로에서 바라본 천하 (삼선동과 돈암동, 성북동, 북한산)


 

♠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 낙산(駱山)에 둥지를 튼
~ 낙산공원

▲  낙산공원 남쪽에 자리한 낙산정(駱山亭)

서울 도심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누운 낙산은 해발 125m의 나지막한 산이다. 낙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양이 낙타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산의 이름인 낙(駱)은 낙타를 뜻한다.
또한 3글자로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 모두 낙타를 상징한
다. 그 이름을 간편하게 줄인 것이 낙산이며 조선시대에 궁궐에 우유를 조달하던 관청인 유우
소(乳牛所)가 낙산 기슭에 있어 타락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낙산은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의 하나로 도성의 동쪽을 맡고 있다. 여기서 내사산
이란 한양의 주산(主山)이자 북쪽에 있는 북악산<백악산(342m)>, 서쪽의 인왕산(338m), 남쪽
의 남산(南山, 262m), 그리고 동쪽의 낙산을 이르는데 문제는 그 가운데 낙산이 가장 부실하
게 생겼다는 것이다.

낙산과 멀리감치 마주보고 있는 인왕산은 산세는 좀 작아보이나 꽤나 야무지고 험준하여 예로
부터 호랑이들의 소굴로 유명했다. 북악산 역시 인왕산 못지 않으며, 남산은 그들보다는 세는
약해도 덩치는 좀 있다. 반면 낙산은 그들보다 높이나 덩치에 있어서 형편없이 떨어져 그냥
뒷동산 수준의 언덕이다. 낙산의 그런 부실한 기운을 북돋아주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일
환으로 동대문의 이름을 흥인문(興仁門)에 지(之) 1글자를 추가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한
것도 바로 그 이유이다.
낙산이 그렇게 염려되면 글자로 장난칠 것이 아니라 도성을 동쪽으로 좀 확장하면 어떨까 싶
지만 낙산 동쪽은 신설동 방향으로 조금 뻗은 동망봉(東望峰)을 빼고는 거의 평지이다. 그러
니 별 수 없이 낙산에 성곽을 얹힌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고려보다 스케일이 비교도 안될 정
도로 작기 때문에 도성을 크게 구축하지 않았다. <고려의 황도(皇都)인 개경(開京)보다 훨씬
작음>

낙산은 야트막한 산으로 숲이 무성하고 잘생긴 바위와 약수터가 많았다. 게다가 도성 내부가
훤히 보일 정도로 조망도 일품이라 도성 주변 경승지로 꼽혀 왕족과 양반들이 낙산에 정자나
별장, 거처를 지어 머물렀다. 효종(孝宗)의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석양루(夕陽樓, 지
금의 이화장 정문 앞에 있었음)를 지었고, 이심원(李心源, 1722~1770)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을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과 백림정(柏林亭) 등이 있었다. 이들은 양반과 시인묵객들이 자
주 발걸음을 했던 낙산의 이름난 명소였다.
또한 조선 후기 한옥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던 이화장(梨花莊)과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유
명한 이수광(李睟光)의 초가인 비우당(庇雨堂), 낙산의 유방이라 불리던 이화동약수와 신대약
수 등의 약수터, 우물이 나란히 5개가 있었다는 5형제우물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의 애환
이 서린 자지동천(자주동천)과 동망봉, 도성 5대 명승지의 하나로 기이한 바위가 많았던 쌍계
동(雙溪洞, 이화장 주변) 계곡이 있었다.
그 외에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는 나무만 있다고 하는 홍수동(紅樹洞, 홍숫골), 동
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 등이 낙산에 앞다투어 안겨져 있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낙산이었
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낙산에 안겨있던 수많은 명소들은 20세기 이후 어둠의 시절과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녹아 없어졌고, 서울의 인구가 폭증함에 따라 낙산과 동망봉 일대에 빼곡히 아파트와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옛날의 운치와 정취는 다 말라버렸다. 달동네인 이화마을도 바로 그런
시류를 타고 낙산 남쪽에 살짝 둥지를 튼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낙산의 허리를 가르
는 한양도성과 이화장, 자지동천 바위글씨, 그리고 근래 복원된 비우당이 고작이다. 그 외에
조선 왕실의 원찰(願刹)이던 청룡사(靑龍寺), 고려 때 지어진 비구니 절 보문사(普門寺), 구
한말에 세워진 안양암(安養庵)과 지장암(地藏庵) 등의 절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낙산 중턱에 자리를 피며 산의 미관을 적지않게 말아먹던 시민아파트가 노후화됨에 따라 1990
년대 이후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에 따라 이들 아파트와 주변 주거지를 싹 밀어버
리고 정상 주변과 서쪽 일대 61,000여 평을 다져 낙산공원을 만들었다.
공원은 1999년 12월 30일 삽을 뜨기 시작하여 2002년 6월 완성을 보았는데, 운동시설과 휴게
소, 낙산전시관, 중앙광장과 놀이광장, 전망광장 등 3개의 광장을 갖추는 한편, 소나무 등 8
만 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비록 왕년의 손톱 때만큼은 못되어도 도심 속의 포근한 휴식 공간
이자 답사/나들이 장소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하여 서울의 '몽마르뜨 언덕'이란 별명까
지 얻게 되었다. (낙산공원 면적은 201.779
㎡)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은 동대문에서 동소문까지의 2.3km 구간으로 성곽이 잘 남아있다. 1999
년 이후 산업화의 칼질에 오랫동안 고통받은 낙산을 조금씩 위로하면서 성곽도 보수를 벌였는
데 동대문 북쪽 구간을 복원하고, 성곽과 성밖에 탐방로를 만들었다. 성곽 내부 탐방로는 동
소문에서 카톨릭대 성심교정 사이 약 700m을 제외하고 모두 길이 나있고, 성밖은 동소문에서
동대문까지 모든 구간이 이어져있다.

낙산은 대학로와 무척이나 가깝고 혜화역(4호선)과 한성대입구역(4호선), 동대문역(1,4호선),
창신역(6호선)과도 또한 가깝다. 심지어 낙산공원 정상까지 마을버스가 들어오는 등 교통과
접근성은 매우 착하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뒷동산처럼 야트막하여 누구나 쉽게 안길 수 있고
조망도 일품이다. 특히 서울의 야경(夜景)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포인트라 인기가 더하다.

낙산에 간다면 동소문이나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낙산공원에서
가까운 명소로 이화장과 이화마을, 자지동천(자주동천)과 비우당, 동망봉, 삼군부총무당 등이
있으니 한 덩어리로 같이 보면 제법 알찬 나들이가 될 것이며, 여기서 욕심을 더 부려 청룡사
, 보문사, 안양암, 대학로 주변의 명소들까지 둘러본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 낙산공원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 교차로(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도보 20분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4번 출구에서 성곽 탐방로를 따라 도보 15분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
  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낙산공원 종점 하차
*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탐방로는 24시간 개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산2-10 일대 (낙산길 41. 낙산공원 관리소 ☎ 02-743-
  7985~6)


▲  낙산 정상부 ① - 낙산공원 마크와 성바깥 산책로

▲  낙산 정상부 ② - 놀이광장 주변

▲  낙산 정상에서 제2전망광장으로 이어지는 성곽길


 

♠  낙산 주변에 숨겨진 명소들

▲  복원된 3칸 초가, 비우당(庇雨堂)

낙산 정상(종로구 마을버스 03번 종점)에서 창신동 방향(동쪽)으로 500m 정도 내려가면 쌍용
아파트2단지 입구라는 정류장이 나온다. (낙산에서 마을버스로 두 정거장) 정류장 남쪽 비탈
에 나무가 우거진 조그만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으로 들어서면 원각사(圓覺寺) 직전에 3칸짜
리 초가가 마중을 한다. 그가 낙산을 수식하는 명소의 하나인 비우당이다. 그럼 이곳에는 비
우당만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비우당 바로 뒤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에 자지동천 바
위글씨와 샘이 있다.

우리가 갔을 당시에는 가는 날이 보수하는 날이라고 지붕을 수리하고 파란 천으로 꽁꽁 덮고
있었다. 지붕을 감싼 천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날을 잘못 찾아온 것을 어찌하리? 어차피 집에
서도 가까운 곳이니 아쉬우면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도 상관은 없다. 그렇다면 비우당은 어
떤 곳인데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일까?

비우당이란 이름은 '비를 가리는 집(우울하게 말하면 간신히 비나 가리는 집)'이란 뜻으로 중
고등학교 국사책과 온갖 국사 관련 수험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주인공,
지봉 이수광<芝峯 李晬光, 1563~1628>이 어린 시절과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그의 호인 지봉
은 낙산 동쪽의 한 줄기인 지봉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이 집은 이수광이 지은 것이 아닌 문화유씨 집안이던 유관(柳寬. 1346~1433)의 집이었다.
그는 낙산 동쪽, 현 자리에서 약간 서남쪽인 쌍용2차아파트 자리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맹사
성(孟思誠), 황희(黃喜) 못지 않은 강력한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다. 집을 짓긴 했지
만 재상(宰相)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낡아빠진 초가였고, 지붕에 계속 빗물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았다고 한다. 그때 그는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어찌 견딜까??' 남 걱정도 참 팔자인 유명한 농담을 남기니 그 말이 '유재
상의 우산'이란 뜻의 유상수산(柳相手傘)이다.

유관이 죽자 외손인 전주이씨 집안에게 상속되었는데, 그 집안에서 태어났던 이수광이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없어진 것을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로 잠시 관직을 버렸을 때, 홀연히 다시 찾은 것이다.
그는 다시 집을 짓고 유관의 일화를 바탕으로 집의 이름을 비우당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머물며 지봉유설을 비롯한 다양한 서적을 작성했는데,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를 통해
집과 관련된 사연을 적었다. 또한 집 주변의 8곳의 경치를 '비우당 8경(八景)'이라 정하고 시
를 지으니 다음과 같다.

1. 동지세류(東池細柳) - 동대문 밖에 있던 동지(東池)란 연못에 핀 버들이 봄바람에 버들개
지를 날리고 꾀꼬리가 노래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동지는 현재 없음)
2. 북령소송(北嶺疏松) - 북악산의 산마루가 낮에도 어둑한데 푸른 솔그림자가 집에 드리운
것을 보고 동량으로 쓰이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3. 타락청운(駝酪晴雲) - 아침마다 누운 채 낙산의 구름을 마주하면서 한가한 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4. 아차모우(峨嵯暮雨) - 아차산에서부터 벌판을 지나 불어오는 저녁비를 노래했다.
5. 전계세족(前溪洗足) - 비가 오면 개울에 나가 발을 씻고 개울가 바위(자지동천)에 드러눕
다. (현재 낙산에는 계곡이 전멸함)
6. 후포채지(後圃菜芝) - 지봉과 상산(商山, 낙산의 동쪽 줄기의 하나)의 이름에 맞추어 상산
사호(商山四皓)처럼 살고 싶다.
7. 암동심화(巖洞尋花) - 복사꽃 핀 골짜기에서 나비를 따라 꽃을 찾아가는 풍류를 말하다.
8. 산정대월(山亭待月) - 맑은 달밤 정자에 올라 술잔을 잡은 흠취를 말했다.


조선 중기에 뛰어난 문신이자 학자로 실학(實學)의 시조격인 인물이며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
으로 정국을 이끈 그가 바람처럼 사라진 이후 집은 고된 세월에 지쳐 쓰러졌고, 그가 노래한
비우당8경도 개발의 칼질에 재현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서울시에
서 뒤늦게나마 비우당 표석을 세웠고, 원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앉으면서 2011년에 그 부근
인 자지동천 앞에 비우당을 복원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비우당은 툇마루를 갖춘 초가 3칸으로 부엌을 가지고 있다. 초가 주위로 싸리나무로 얇게 담
장을 둘러 옛 초가의 정취도 조금은 풍기는데 사립문이 열려있는 경우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
면 된다. 허나 무심히 닫혀있더라도 담장이 낮아서 안으로 넘어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굳이 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바깥에서 거의 다 보이지만 비우당 뒤쪽에 있는 자지동천의
흔적(샘터와 바위글씨)이 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담장 밖에서도 보이기는 보임) 비우당
은 복원된지 10년도 안된 아주 따끈따끈한 초가라 고색의 내음 따위는 기대할 수 없지만 자지
동천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  서울시장 조순이 1995년에 세운 비우당 옛터 비석

▲  비우당 동쪽 부분 (굳게 닫힌 사립문과 비우당터 비석)
초가 뒤쪽으로 자지동천 표석과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  자지동천(紫芝洞泉, 자주동천) 표석

▲  비우당 뒷쪽 굴뚝과 자지동천

그럼 이름도 참 거시기한 자지동천(자주동천)은 어떤 사연이 깃든 곳일까?
이곳은 낙산 동쪽에 자리한 오래된 샘터로 조선 6대 군주인 단종(端宗)의 부인, 정순왕후(定
順王后) 송씨(1440~1521)의 슬픈 사연이 서린 현장이다.

정순왕후는 여산송씨 집안으로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1454년 단종의 왕비가 되었으며 바
로 이듬해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넘기면서 단종은 상왕(上王), 송씨
는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가 되었다. 허나 1457년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
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생애 마지막 강제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송씨는 영도교(永渡橋,
청계8가)까지 울면서 따라와 마지막 이별을 나누게 된다.
그들이 영영 이별한 다리라는 뜻에서 영이별교, 영이별다리라 불렸고, 그것이 영도교로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단종이 떠나면서 송씨 역시 강제로 궁궐을 나와 낙산 청룡사(靑龍寺)에 몸을 의탁했다. 청룡
사는 은퇴한 왕실 상궁(尙宮)과 승하한 제왕의 후궁들이 말년을 보내던 곳으로 그들을 위한
정업원(淨業院)이 설치되어 있었다. 송씨도 그곳에 머물렀으나 세조(世祖)가 마땅히 지원을
해주지 않아서 생활이 상당히 어려웠다.
그래서 절과 가까운 자지동샘으로 와서 비단을 빨아 자주색 물감을 들여 바위 위에 널어 말렸
으며, 그 비단으로 댕기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서울 장안이나 동묘 주변에 열렸던
여인시장에 팔아 생계를 꾸렸다. 그때 여기서 비단을 물들이거나 빨래를 할 때 샘물도 그녀의
처지에 피눈물을 흘렸는지 저절로 붉은 색으로 염색이 되었다고 하며, 세상에서는 송씨의 그
런 애환을 위로하고자 함인지, 자주색으로 물들인 샘을 자지동천(자주동천), 자주우물이라 부
르고 바위는 자주바위라 불렀다. 또한 샘터 일대를 자지동(紫芝洞, 자주동), 자줏골, 자주동
이라 불렀다.
이렇게 보면 이름은 많은 것 같지만 정식 이름은 자지동천, 자지동이며 여기서 자지는 거시기
한 그것이 아니라 뿌리가 자주색을 띠는 풀인 지초(芝草)를 말한다. 지금이야 샘이 있는 바위
윗쪽에 잡초만 자라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 지초가 무성히 자라고 그 바위 틈으로 맑은 물이
흘렀다고 전한다.

옛 기록에도 이곳 이름은 그렇게 거시기하게 나오지만 이 땅의 정서상 상당히 예민한 단어인
지라 당당히 쓰기에는 좀 쑥쓰러운 감이 있어 요즘은 자주동천, 자주동샘으로 희석해서 많이
부른다. 비록 단어는 거시기해도 뜻은 그렇지가 않거늘 마치 홍길동(洪吉童)이 아버지를 아버
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자지동천은 자주바위 밑에 파인 'U'자 모양의 돌우물로 왜정 때까지 물이 나왔다고 한다. 허
나 왜정 이후 개발의 칼질로 낙산의 계곡과 물이 씨가 마르면서 죽은 샘물이 되었다. 송씨를
비롯하여 낙산 동쪽에 살던 여인들이 빨래나 염색/식수용으로 사용하던 샘물로 옛날의 정취는
95% 이상 증발되고 겨우 일부만 남아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샘터를 밑도리에 둔 자주바위 피부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 쓰인 바위글씨가 있다. 자
지(紫芝) 2글자는 좀 퇴색되긴 했으나 두 눈으로 살피는데 그리 어려움은 없으며, 동천(洞泉)
2자는 꽤 선명하여 글씨에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글씨를 쓴 이는 누군지는 전해오는 바는 없
으나 조선 후기에 단종과 정순왕후를 추모하는 선비가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  흔적만 남아있는 자지동천 샘터(자주동샘)

▲  자지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글씨에 검은색을 입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글씨의 크기는
세로 72cm, 가로 185cm이다.

▲  자지동천 거북바위

자주바위 윗쪽에는 거북이를 조금 닮은 듯한 커다란 바위가 있다. 하여 바위 이름도 거북바위
인데 그에게도 정순왕후의 한이 담겨져 있다.
정업원에서 먼저 간 남편(단종)을 생각하며 눈물로 잠을 이루던 어느 날, 단종이 거북이를 타
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이상히 여기며 아침 일찍 비단을 빨러 자지동샘에 왔는데 어
제까지만 해도 없던 이 거북바위가 불쑥 나타났다고 한다.
물론 바위가 갑자기 불쑥 나타날 리는 없다. 허나 그런 꿈을 꾼 이후, 빨래를 널고 잠시 쉬면
서 바위를 살펴보니 꿈의 영향인지 거북과 비슷하게 생긴 것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 사연을
동네 아낙들과 승려들에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그 이야기가 새끼에 새끼를 치면서 그런 전
설로 변해간 것이다.

※ 비우당, 자지동천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
  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쌍용아파트2단지 입구에서 하차, 도로 남쪽 밑에 나무가
  무성한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 아랫쪽에 있다.
* 낙산공원(낙산 정상)에서 창신역 방면으로 도보 7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9-471 (낙산공원 관리소 ☎ 02-743-7985~6)


▲  삼군부총무당(三軍府總武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호

낙산 동북쪽이자 한성대 바로 서쪽에는 삼선공원(삼선상상어린이공원)이 있다. 그 안에는 고
색이 창연한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하나 숨겨져 있으니 그가 삼군부총무당이다.

삼군부(三軍府)는 국방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1865년에 흥선대원군이 신설했다. 비변사(
備邊司)를 의정부에 통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군령 최고 기관으로 무부(武府)라 불리기도 했
는데 광화문 남쪽 예조(禮曹) 자리에 훈국(訓局)의 신영(新營), 남영(南營), 마병소(馬兵所)
및 오영(五營)의 주사서(晝仕所)를 합쳐 삼군부라 칭했으며, 1867년 4월에 완전한 조직을 갖
추었다.
의정부(議政府)와 대등한 지위를 누리며 군무(軍務)와 군비 강화를 비롯한 숙위 문제와 변방
관리를 맡았으나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에게 크게 꺾이면서 1880년 12월 폐지되고 만다.

삼군부총무당은 삼군부가 한참 자리를 잡던 1868년에 현재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 세워진 것
으로 삼군부의 중심 건물이다. 양쪽으로 덕의당(德義堂)과 청헌당(淸憲堂)을 거느렸으며, 삼
군부가 폐지된 이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관청으로 쓰였다가 갑오개혁(甲午改革) 이
후에는 시위대(侍衛隊) 청사로 쓰였고, 1910년부터 1926년까지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 사령
부로 사용되었다.
허나 순종(純宗)이 1926년 붕어한 이후, 보병대는 폐지되었고, 1930년 왜정(倭政)이 쓸데없이
심술을 부리면서 삼군부의 중심인 총무당을 지금의 자리로 내쫓았다. 또한 덕의당은 부셔버렸
으며, 청헌당(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호)만 홀로 남아있던 것을 1967년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로 보내버렸다.

▲  삼군부총무당의 뒷모습

▲  위에서 본 모습

총무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길쭉한 팔작지붕 건물로 중앙 3칸은 대청이고 양 옆구리에 1
칸짜리 온돌방이 있으며 그 옆에는 광이 있다. 조선이 이 땅을 거쳐간 가장 최근의 나라이지
만 왜정의 심술이 극심해 제대로 남은 관아 건물이 별로 없으며 서울 같은 경우는 총무당과
청헌당이 유일하다. 설령 남기더라도 생색내기용으로 거의 1~2동만 남기는 수준으로 망국의
관청을 완전 고자 수준으로 만들었다. (삼군부 같은 경우는 1동만 자리를 지키게 했음)
뒷끝이 쿨해야 서로가 좋거늘, 왜는 섬나라 사람의 비좁은 본성 때문에 그러지를 못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두고두고 반감만 잔뜩 샀던 것이다.

총무당 주변은 1970년대 이후 동네 주민을 위한 공원이 조성되었고, 어린이놀이터를 더 확장
하여 완전한 어린이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이제와서 총무당을 제자리로 돌리기는 좀 힘들겠지만 따로 놀고 있는 청헌당과는 다시 하나로
이어줘야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니까 청헌당이 이곳으로 오던지 아니면 총무당이 육사로
가던지 해서 둘을 같이 있게 해주면 보기도 좋을 것 같다. 덕의당은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복
원을 해서 옆구리에 붙여주면 될 것이다. 비록 망국의 관청이긴 하나 한때 조선의 군정(軍政)
을 관장했던 현장으로 이렇게 동네 구석 어린이공원에 분산되어 처박혀있는 것도 한편으로는
좀 딱해 보이기도 한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삼선공원
삼군부총무당을 끝으로 낙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삼군부총무당(삼선공원)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3번 출구를 나와서 1분 가면 삼선교로4길(삼군부총무당을 알리
  는 어두운 색깔의 이정표가 있음)이 나온다. 그 길로 들어서 8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과 장
  수마을 표석이 나오면서 좌우로 갈리는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성곽과 반대 방향인 왼쪽
  으로 2분 가면 삼선공원이 나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1가 1-13,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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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부암동 늦가을 나들이 (무계원, 안평대군집터...)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늦가을 산책
(인왕산 자락 명소들) '

▲ 인왕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

▲ 반계 윤웅렬 별장의 뒷모습

▲ 부암동 무계원



 

늦가을 누님이 그의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며 천하를 곱게 물들이던 11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후배 여인네와 함께 나의 즐겨찾기 명소인 종로구 부암동을 찾았다.

부암동(付岩洞)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仁王山)에 포근히 감싸인 도
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로 천하 제일의 큰 도시로 콧대가 매우 높은 서울의 심장부에 자
리해 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
도로 매우 번잡한 시내가 연상되는 도심과는 전혀 다른 산골마을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어
서울 도심의 또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이곳은 아름다운 경관과 도심과 가까운 잇점으로 조선 초부터 도성(都城) 밖 경승지로 격
하게 찬양을 받아와 그와 관련된 오래된 명소가 많이 서려있다. 이들 명소와 부암동의 수
려한 풍경에 나는 그만 퐁당퐁당 빠져버렸고 매년 적지 않게 찾아와 그에 대한 마음을 표
현한다.

부암동에는 고색의 명소, 현대 명소, 자연 명소 등 볼거리가 상당하여 본글에서는 인왕산
자락에 안긴 명소 몇몇만 다루도록 하겠다. 참고로 부암동은 붙임바위에서 유래된 이름으
로 법정동명과 행정동명을 겸하고 있으며, 법정동인 신영동(新營洞)과 홍지동(弘智洞) 등
을 관할하고 있다.


 

♠ 부암동의 새로운 문화체험 공간, 고급 요정으로 악명을 떨친 옛 오진암
건물로 새롭게 재생된 ~~~ 무계원
(武溪園)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창의문로5길' 골목길을 2분 정도 들어서면 부암동의 새로운 명소로 격하
게 주목 받고 있는 무계원이 모습을 비춘다.
무계원은 한옥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겉으로 보면 최근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집처럼 보이겠지
만 실상은 100년 이상 묵은 한옥, 오진암을 가져와 지은 것이다. 부암동을 지겹게 들락거린 본
인 역시 그의 존재를 처음 보는데, 그도 그럴 것이 2013년 겨울 이전에는 없던 존재였기 때문
이다.

이 한옥은 서화가(書畵家)로 유명한 송은 이병직(松隱 李秉直, 1896~1973)이 1910년에 지은 고
래등 기와집으로 원래는 종로구 익선동(益善洞, 종로3가 북쪽)에 있었다. 규모는 700평으로 여
기서 그의 많은 글씨와 그림이 탄생했다. 특히 사군자 중 난과 죽을 잘 그렸으며, 서화 감식에
도 매우 밝았다.
1953년 집을 조모씨에게 팔았으며, 조모씨는 이곳을 요정(料亭)으로 손질하여 장사를 했다. 이
집이 바로 이 땅 최초의 요정이자 서울시에 등록된 음식점 1호인 오진암(梧珍庵)인 것이다. 오
진암이란 이름은 뜨락에 큰 오동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오진암을 시작으로 청운각과 대원각, 삼청각 등의 요정이 서울 도심과 성북동(城北洞)에 생겨
났으며, 이들과 함께 1960~80년대 요정 정치의 산실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흔히 서울 3대 요
정으로 삼청각(三淸閣), 대원각, 청운각을 꼽으나 청운각 대신 오진암을 넣기도 한다.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과 논의하여 그 유명한 7.4남북공동성
명을 이끌어 낸 현장이기도 하며, 권력 실세와 고위 관료, 기업인들이 자주 들락거렸는데, 이
름만 대면 이 땅의 사람들이 거의 알만한 사람들이 이곳 단골이었다. 이후락도 오진암의 단골
로 많이 재미를 봤다고 한다.
또한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늘자 당시 미국 등 철없는 양이(洋夷) 언론들은 이 땅의 요정들
이 기생 관광으로 돈을 번다며 꼬집었고, 그때 오진암이 진하게 언급되기도 하였다.
2006년에는 어느 손님이 290만원을 카드로 결제해 유명세를 타기도 했으며, 이곳 음식은 맛이
좋고 정갈한 편으로 접대 아가씨들이 매우 친절했으나 대신 가격이 후덜덜한 수준이라 100만원
이상은 훌쩍 넘어간다. 그래서 서민들은 얼씬도 하지 못한 그야말로 있는 자, 권력층의 폐쇄된
공간이었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급 요정도 대거 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원각
은 절로 탈바꿈해 길상사(吉祥寺, ☞ 관련글 보러가기)가 되었고, 삼청각은 서울시가 인수해
고급 문화공간이 되었다. 청운각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으며, 오진암은 그들보다 더 오래
버티긴 했으나 손님이 줄면서 주인 조모씨는 결국 2010년에 집을 내놓고 말았다.
이곳을 사들인 사업자는 10층짜리 관광호텔을 짓고자 그해 9월 오진암을 밀어버렸는데 오래된
한옥이고, 20세기 중반 요정/풍류문화가 깃든 현장이라 철거 반대 여론도 적지 않았으나 종로
구에서는 개인 집이고 지정문화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집이 가루가 될 때까지 방관하고 말았다.
다행히 늦게나마 철이 든 종로구는 2010년 10월 호텔 사업자와 협의를 벌여 오진암을 다른 곳
으로 이건(移建)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나 마땅한 장소가 없어 철거된 목조 자재를 모아두며 시
간을 허비하다가 2012년 2월 안평대군의 별장인 무계정사터 아랫쪽 지금의 자리를 마련해 복원
하기로 했다.
복원 비용은 종로구와 호텔사업자가 부담했으며, 정부에서 건네준 한옥건축지원금을 포함해 23
억이 소요되었다.

2012년 2월 복원 공사를 벌여 2013년 11월 완성을 보았으며, 오진암에서 옮겨온 목재와 안채의
지붕기와, 서까래 기둥 등이 활용되었고, 특히 종로 청진동(淸進洞)에서 발견된 500년 이상 묵
은 건물 주춧돌로 석축을 쌓아 오진암을 그런데로 재현했다. 또한 뛰어난 장인들이 많이 참여
했고 (주)이건창호에서 한옥 화장실을 지어 기증했다.
공사가 완료되자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곳이 무계정사터의 일부임을 내세워 그곳과 연관지어 한
옥의 이름을 정하자고 요청했다. 하여 고심 끝에 무계원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고, 2014년 3월
20일 세상을 향해 활짝 사립문을 열었다.

무계원은 대지 1,654㎡, 연면적 389㎡로 안채와 행랑채, 사랑채, 연못, 돌담, 대문을 두었는데,
들어앉은 지형상 예전 오진암보다는 작게 재현되었으며, 분실된 예전 건물의 부재가 많아 기둥,
건물벽은 거의 새로운 것으로 채워넣었다. 그러다보니 새 집 냄새가 다소 진한 것이다.

다시 태어난 무계원은 전통문화체험 공간으로 개방해 인문학강좌, 서당체험, 다도교실, 국악공
연, 기획전시 등 다양한 전통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종로구와 안견기념사업회가 2016년
5월 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의 예술혼을 기리고 그 유적 복원을 위하여 '몽유도원
무계정사 문화축제'를 열기로 했다. (저번 10월에는 황제를 위한 콘서트가 매 주말에 열리기도
했음)

부암동의 새로운 명소이자 꿀단지로 원래 자리도 아니고 이전 과정에서 고색의 내음도 거의 시
들었지만, 권력층과 돈 있는 자의 공간이 시민들의 공간으로 거듭난 의미 깊은 현장이며, 인근
무계정사터(안평대군 집터)와 반계 윤웅렬별장, 청계동천 등 숙성된 오랜 명소와 같이 둘러보
면 정말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건물 전체를 전통문화 및 교육 공간으로 쓰는 것보다는 사랑채나 안채 정도는 한옥 체
험 겸 숙박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대문에 걸린 파란색 무계원 현판의 위엄
글씨가 마치 살아서 율동을 부리는 것 같다. '武'자는 꼭 칼질을 하는 것 같고,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로 인도하는 계단이 나온다.

▲ 무계원 행랑채와 전통 굴뚝

▲ 안채에서 바라본 행랑채


▲ 'ㄱ'자 모습의 안채
안채와 행랑채는 모두 'ㄱ' 모습을 취하고 있다. 옛 오진암의 냄새는
거의 없고 근래 새로 지은 한옥 냄새만 가득하다.

▲ 안채 뒷쪽 돌담과 돌로 단단히 다진 석대(石臺)
청진동에서 가져온 조선시대 건물터 석축과 새로 얹힌 하얀 피부의 석축이
어색하게 대비를 이룬다.

▲ 사랑채 통로

▲ 아무도 없는 사랑채 방


▲ 'ㄱ'자 모습으로 이루어진 사랑채 (밑층은 무계원 사무실)

▲ 사랑채 뒷모습과 네모난 굴뚝
굴뚝을 뜨겁게 달구던 연기는 온데간데 없고 차갑게 식어버린 장식용 굴뚝만
멀뚱히 솟아있다.

▲ 무계원 뒷뜨락 (사랑채 동쪽)
건물을 짓고 남은 동쪽 짜투리 공간은 뒷뜨락으로 삼았다. 이곳에는 나무와
조그만 화초 등을 심었으며, 뜨락 끝에는 굳게 잠긴 협문이 있다.

▲ 뒷뜨락에서 바라본 사랑채
새집 냄새가 가득한 무계원은 딱히 오래된 볼거리나 특별한 것이 없어
이 정도로 마무리를 짓고 미련없이 대문을 나섰다.

※ 무계원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부암동주민센터(
무계원) 하차, 버스가 내려간 방향(북서쪽)으로 조금 가면 길 건너편에 부암동주민센터가 있
으며, 그 옆 창의문로5길을 따라 자하미술관 방면으로 도보 2분 (찾기는 쉬움)
* 관람시간 : 9시~18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과 추석 연휴는 쉰다)
* 입장료는 없으며 단체 관람시 사전 예약 요망
* 전통 공연과 전통문화체험, 기획전시, 인문학강연 등이 부정기적으로 열린다. (자세한 일정
은 무계원에 문의)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27 (창의문로5가길 2 ☎ 02-379-7131)
* 무계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연꽃이 한참 와신상담을 벌이고 있는 네모난 석조 연못
사랑채 뒷쪽에 자리해 있는 것으로 오진암 시절부터 있던 연못인지는 모르겠다.


 

♠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없는 야망이 서린 곳
무계정사
(武溪精舍)터(안평대군 이용 집터)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2호

▲ 무계동(武溪洞) 바위글씨

무계원에서 다시 골목길(자하미술관 방면)을 1분 들어서면 '현진건 집터'를 알리는 표석이 마
중을 한다.
그 표석에서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서면서 왼쪽을 계속 주시하면 커다란 나무를 간
직한 기와집이 보이는데, 그 집 옆에 커다란 바위가 고개를 들고 있다. 바로 그 바위에 '무계
동'이란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으니 그곳이 안평대군 이용의 별장인 무계정사터이다.

※ 안평대군의 생애(1418~1453)
안평대군은 세종(世宗)의 3째 아들로 세종이 왕위에 오르던 1418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이용(
李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문(詩文)과 그림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칭송을 받았으며 거문고를 잘타고
무예에도 일가견이 있는 등, 문무(文武)와 예술을 두루 갖춘 팔방미인으로 세종의 18명 아들
중에 가장 능력이 좋았다.
1428년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29년 불과 11살의 나이로 좌부대언 정연(鄭淵)의 딸과 혼인
하고 1430년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유학 공부를 했다. 1438년에는 두만강(豆滿江) 6진으로
파견되어 두만강 이북의 여진족을 정벌하기도 했다.

세종이 승하하자 맏형인 문종(文宗)의 신임으로 황표정사(黃票政事 : 왕자들이 추천한 인물 중
에서 왕이 그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던 인사제도)를 장악하고 측근의 사람을 요직에 앉히는 등,
조정에서 꽤나 영향력을 행사했다. 1452년 조카인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황보인(皇甫仁), 김
종서(金宗瑞)와 손을 잡고 수양대군을 견제하며 자신의 세력을 꾸준히 키워나갔다.

그는 창의문 너머 지금의 자리에 넓게 별장을 지었는데, 그곳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의 계곡을
닮았다 하여 무계동
(武溪洞)이라 이름 짓고, 별장 이름을 무이정사(武夷精舍, 무계정사)라 하
였다. 원래 이곳은 그의 2째 큰아버지이자 세종의 2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터였다.
별장을 짓자 장정을 모아 숙식을 제공하고 훈련을 시키며 자신의 사병을 키워나갔으며 용산에
담담정(淡淡亭)이란 정자를 지어 문인들과 교류를 하며 자신의 야망을 길렀다.
하지만 2째 형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이후, 크게 존재를 드러내면서
단종을 설득해 안평대군 손아귀에 있던 황표정사를 폐지시켰다. 이는 안평에 대한 심각한 도전
이자 대권에 대한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위기를 느낀 안평은 함경도에 있던 이징옥(李澄玉)에게 무기를 지원 받아 무력을 앞세워
잠시 황표정사를 회복시켰으나 이는 그의 명을 단축시키는 꼴 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의 무력
도전에 발끈한 수양은 1453년 10월, 그 유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과 황보인
을 순식간에 처단하고, 방심하고 있던 안평을 포박되어 강화도로 유배보냈다.
허나 수양은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질 않는지 다시 강화도 서쪽에 자리한 교동도(喬桐島)로 쫓
아냈고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세상에서 제일 쓴 약, 사약(死藥)을 보
내 빨리 죽을 것을 재촉했다.

안평은 형이 보낸 사약 사발을 쭈욱 들이키며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그리고 형에게 선수를 당
했던 자신의 어리석움을 한탄하며 이내 피를 와장창 토하고 아무런 미련도 없는 듯, 쓰러지니
그의 나이 불과 35살이었다.
이후 18세기 중반까지 복관(復官)되지 못했으며, 영조 23년(1747년)에 이르러 영의정 김재로(
金在魯)의 건의로 그제서야 복관이 되고 시호를 받았다. 그의 시호는 장소(章昭)이며 무덤의
위치는 전해오지 않는다.

그가 이승을 뜬 이후, 그의 야망이 깃든 무계정사는 완전 쑥대밭이 되었으며 그의 권력을 향한
강인한 정열이 느껴지는
'武溪洞' 3글자만이 쓸쓸히 바위에 남아 이곳이 안평의 집터였음을 아
련하게 전해줄 따름이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호를 따서 비해당(匪懈堂)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여름철에는 많은 문인
들이 찾아와 경치를 즐겼다.

※ 문예가(文藝家)로써의 안평대군
그는 무이정사와 담담정으로 문인들을 초청하여 수시로 연회를 베풀었고, 궁중에 소장된 서화(
書畵)와 자신이 수집한 명나라 서화를 연구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이를 소개하는 등 그 당시 문
학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체를 사용했는데 이를 나름대로 조선식의 필법으로 발
전시켰다. 조선에 온 명(明)나라 사신들은 그의 글씨를 보고는 조맹부의 글씨보다 더 휼륭하다
며 서로 글씨를 받아가려고 아우성을 떨었다.

한편 무계정사에 머물던 어느 평화로운 날, 꿈 속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냥 기
억 속에 두기가 너무 아까워 그와 친분이 있던 안견(安堅)에게 그 꿈의 내용을 설명하여 그리
게 하니 그는 3일 만에 그림을 완성하여 올렸다. 그것이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이다.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바다 건너 왜열도에 가 있으며, 2009년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특별
전 때 잠시 귀국한 인연으로 몽유도원도의 현장인 무계정사터를 찾는 답사객이 잠시나마 늘기
도 했다.
또한 여러 문인들의 글을 정리하여 시화첩(詩畵帖)을 만들기도 하였고, 1452년에는 경자자(庚
子字)를 개주(改鑄)해 만든 임신자(壬申字)의 자모(字母)를 쓰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그
의 글씨로는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는 세종대왕 신도비(神道碑), 수원에 있는 청천부원군
심온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자신의 아우인 임영대군묘표(臨瀛大君墓表) 등의 비문이 있다.


'武溪洞' 바위글씨가 있는 기와집은 무계정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로 예전에는 개인 소유
였으나 현재는 종로구청에서 관리하여 빈 집이 되었다. 집과 바위글씨 주변은 나무들이 여럿
있을 뿐, 거의 방치되고 있는 수준이며, 서남쪽은 너른 공터가 있는데, 그곳은 현진건의 집터
이다.

10여 년 전 무계동을 찾았을 때는 쥐방울만한 견공(犬公) 2마리가 요란을 떨며 바위를 지키는
통에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글씨를 봤었는데, 이제는 그들도 무계정사처럼 희미한 추억이 되어
버렸다.
2007년 이후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무계정사터'에서
'안평대군 이용집터'로 변경되었으며, 집
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굳게 잠겨있어 관람을 애타게 원할 경우 문에 달린 종로구청 문화관광과
연락처로 연락을 하거나 요령껏 넘어가기 바란다.

※ 무계정사터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부암동주민센터(
무계원) 하차, 창의문로5길을 따라 자하미술관 방면으로 도보 5분, 현진건집터 표석만 찾으
면 금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19-4 (창의문로7길 28-4)


▲ 무계동 바위글씨로 인도하는 조그만 골목길
낙엽이 쓸쓸히 내려앉아 만추(晩秋)의 서정을 불러 일으킨다.


▲ 공터가 되버린 현진건 집터
저 뒤쪽 붉게 물든 아름드리 나무가 자리한 곳에 무계동 바위글씨가 있다. 공터
구석에는 은단천(銀丹泉)이라 불리는 샘터가 있으나 수질은 장담 못한다.

▲ 한줄기 신기루가 되어 사라진 '현진건 집터 표석'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은 소설 '운수좋은 날'로 유명한 문인이다. 그는 1930년대에 무계정
사터인 이곳에 조그만 집을 짓고 살았는데, 2000년 이후 개발의 칼질을 당해 사라졌다. 그래도
현대문학의 중추적인 인물의 집인데, 문화유산이나 기념물로 보존하거나 평창(平昌) 봉평의 이
효석(李孝石) 생가처럼 조촐한 문학의 성지(聖地)로 키웠으면 좋았을 것을 위정자들의 철학과
역사의식 부재, 그리고 그들을 등에 업으며 오로지 돈을 위해 마구잡이로 칼질을 일삼는 개발
업자들, 그들이 날뛰는 이 땅의 현실이 그저 딱할 따름이다.


▲ 청계동천(靑溪洞天) 글씨를 지닌 바위

무계정사의 흔적을 둘러보고 인왕산의 품으로 다시 길을 재촉했다. 전원 분위기가 물씬 감도는
부암동, 부암동에 핏줄처럼 얽힌 골목길은 마치 시골길을 거니는 기분이다. 산골에 있어 다소
오르막길이 많긴 하지만 그리 힘든 정도는 아니다.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이 앞다투어 베푼
숲내음에 걷기만 해도 마음이 느긋해지며 온갖 감상을 강하게 불러 일으킨다.

현진건집터와 윤웅렬별장 사이에는 피부를 드러낸 바위들이 여럿 있는데, 청계동천(靑溪洞天)
바위글씨를 품은 바위가 있어 이곳도 한때 동천(洞天)의 칭호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바위
글씨는 작고 얇은 수수한 모습으로 옛 사람들이 이곳 절경에 반해 새겨놓은 것이다. 이름 그대
로 맑고 깨끗한 계곡이 있었다는 뜻인데, 지금은 그 계곡이 사라져 실감이 나지 않지만 윤웅렬
별장 뒤쪽에 가늘게 흐르는 계곡이 이 앞을 흘러갔다. 그러다가 주택을 만들고 길을 내면서 지
하에 생매장된 것이다.

언제 누가 새겼는지는 귀신도 모르나 조선 후기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며, 바위 주변이 개인 소
유 땅이라 주변을 철책으로 꽁꽁 둘렀다. 그래서 바위 코 앞까지는 접근이 어려우나 어차피 길
가에 있고 훤히 다 보이기 때문에 관람에는 그리 지장은 없다.


▲ 청계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한옥, 반계 윤웅렬 별장(磻溪 尹雄烈 別莊)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2호

▲ 윤웅렬별장 문간채 (안쪽 대문)

청계동천에서 1분 정도 오르면 반계 윤웅렬별장(이하 별장)이라 불리는 한옥이 나온다. 이곳은
인왕산 품에 포근히 안긴 그림 같은 기와집으로 1906년 친일파의 하나인 윤웅렬(尹雄烈, 1840
~1911)이 지은 별장이다.

윤웅렬은 해평(海平) 윤씨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1856년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감영중군(
忠淸監營中軍)과 공주중군(公州中軍), 북청병마우후토포사(北靑兵馬虞侯討捕使)를 거쳐 1878년
통리기무아문참사(統理機務衙門參事)과 남양부사를 지냈다.
1880년 수신사(修信使)의 일행으로 왜열도를 시찰하고 왔으며, 1882년 별기군(別技軍)이 창설
되자 훈련원 하도감(下都監)의 신병대장의 영관(令官)이 되었다. 허나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
亂)으로 왜열도로 도망쳤다가 귀국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터지자 김옥균(金玉均)에 의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으
나 3일 천하로 싱겁게 끝나면서 화순 능주로 유배를 갔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군부
대신(軍部大臣)으로 있으면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청나라 상해(上
海)로 줄행랑을 쳤으며, 다시 기들어와 1906년 많은 돈을 들여 부암동에 별장을 짓고 머물렀다.
하지만 1910년 이후 왜국의 남작(男爵) 작위를 받는 등 심히 좋지 않은 뒷끝을 보였다.

윤웅렬의 아들로 그 유명한 이름,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있는데, 그는 개화파 지식인으
로 여러 선각자들과 함께 독립협회와 신민회(新民會)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민중 계몽
에 앞장섰다. 1910년 이후 안창호(安昌浩)가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을 지내면서 민족교
육에 헌신했으나 1911년 105인 사건으로 3년 동안 옥살이를 했으며, 서서히 친일파로 갈아타면
서 부친과 마찬가지로 구린 뒷끝을 보였다.

윤웅렬이 이곳에 별장을 지을 때, 벽돌로 지은 서양식 2층 건물만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
가 골로 가면서 3째 아들 윤치창(尹致昌)이 상속을 받았는데, 1930년대 한옥으로 안채와 사랑
채, 광채, 문간채를 추가로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별장 안채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좌우에 있으며, 안방 앞에는 2칸 부엌이 있
고, 건넌방 앞에는 작은 누마루가 있다. 안채 왼쪽에 광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있는데, 'ㄱ'모
양의 사랑채 한쪽 끝에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이 있다. 사랑채와 2층 건물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앞에 인왕산이 베푼 조그만 계곡이 흘러간다. 그 계곡이 바로 앞서 언급한 청계동
천의 상류로 계곡에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나무를 심어 경관을 아름답게 꾸몄다. 사랑채 지
붕에는 옥상 테라스를 만들어 경관을 감상하는 전망대로 삼았다.
사랑채와 광채는 변형이 심해 원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우며, 한양 도성 밖 부암동에 세워진
별서(별장)의 하나로 외국 건축 양식이 상류층 주택에 적용된 사례로 주목된다. 또한 안채는
서울 지역 근대 한옥의 변화가 잘 반영되어 있다.

윤치창 이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봉산서원이라 불리는 미술공간으로 쓰였으며, 이때는 대문(
문간채) 앞 뜨락에 비너스상도 두고 집채만한 큰 바위도 두면서 특이한 모습을 보였는데, 2010
년 이후 어느 기업 회장이 인수하면서 2011년 가을에 크게 보수를 했다. 이때 대문을 새로 만
들고 담장을 추가했으며 집도 새집처럼 산뜻하게 손질했다.
집 보수공사는 2011년 12월에 끝났으며 이후로는 폐쇄적인 상류층의 습성으로 어지간해서는 속
살 개방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이전에 본 것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내 바램이긴 하
지만 이렇게 괜찮은 한옥을 주인 일가만 누릴 것이 아니라 다수가 좀 누렸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한옥 민박이나 게스트하우스로 개방하는 것은 어떨까? 북촌(北村)과 전주한옥마을, 안동
의 오래된 한옥, 경주 양동민속마을 한옥들이 내/외국인을 상대로 한옥 체험 및 숙박 제공으로
단단히 재미를 보고 있다.
이곳 집 크기도 북촌의 왠만한 한옥과 비슷하거나 조금 크며, 뜨락도 넓고, 바로 옆이 인왕산
숲이라 공기도 청정하다. 도심이긴 하지만 첩첩한 산골에 들어온 듯, 전원 분위기도 진하게 풍
겨 도심 속의 이색적인 분위기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방도 많고 사랑채 위에 테라스까지 갖
춘 매력도 있으니 어지간한 한옥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수도 있다. 교통도 도심에서 무척이
나 가깝고 버스정류장에서 도보 10분이니 그만하면 적당하다.


▲ 서쪽 담장 너머로 바라본 윤웅렬별장의 뒷모습

▲ 윤웅렬별장 앞길 (대문과 담장은
2011년 보수 때 새로 했음)

▲ 안채 옆에 있는 또 다른 문
원래 있던 문으로 늘 굳게 닫혀있다.

▲ 윤웅렬별장 위쪽(서쪽) 돌담

▲ 겨울잠에 잠긴 별장 연못
물과 연꽃, 물고기가 넘쳐날 그때를 꿈꾼다.


▲ 윤웅렬 별장의 숨겨진 아름다움 (사랑채 뒤쪽 계곡)

별장 뒤쪽에는 이곳의 숨겨진 비경이 있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절경이 수줍은 듯 숨바꼭
질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조그만 계곡이 없는 듯 흘러가는데 이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이다. 계곡 양쪽에는 돌
로 높게 석축을 쌓았으며, 위쪽에는 2단으로 석축을 둘렀다. 석축 위에는 단풍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들이 앞다투어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늦가을의 정취를 진하게 우려낸다. 지나던 가을
도 이 별장에 눈독을 들였는지 뒤쪽에 살며시 들어와 고운 작품을 연출한 것이다. 화사하게 타
오른 단풍과 알록달록 물든 나무들이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슬슬 올해를 정리한다. 겨울
제국(帝國)이 도래하면 모든 것을 다 공출당해 숨죽이고 있다가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 되면 다
시 기지개를 켤 것이다.


▲ 사랑채 뒤쪽 계곡의 막다른 곳 (바위와 폭포)

계곡의 막다른 곳에는 푸른 이끼를 뒤집어 쓴 바위가 있다. 이끼가 가득하다는 것은 이곳이 그
만큼 청정하다는 것을 강하게 의미한다. 상류에서 내려온 계곡은 이 바위를 타고 아래로 흘러
가 아담한 폭포를 자아내며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폭포의 높이는 2m 정도로 물줄기가 바위 전
체를 타고 흐르는 것이 아닌 한쪽 구석에 답답한 모습으로 흘러간다. 바위 위쪽 주변에는 석축
을 쌓고 계단을 만들었는데, 붉은 색채의 낙엽이 수북히 쌓여 마치 산불이 일어난 듯 하다.


▲ 푸른 이끼의 청정한 안식처 바위와 폭포, 그리고 인왕산 계곡물

▲ 바위 위쪽 부분 (석축과 돌계단)
비록 짧지만 한 세상 멋지게 살다가 쓸쓸히 대지로 떨어진 이쁜 빛깔의
낙엽들이 수북히 쌓여 아름다운 선경(仙境)의 불빛을 이룬다.

▲ 2층 테라스를 갖춘 사랑채와 2층 벽돌집

비경의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랑채는 별장 내부를 남쪽에서 꽁꽁 가리고 있다. 사
랑채 기와 지붕 위에는 특이하게 옥상 테라스를 두어 작지만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으며 사
랑채 바로 옆에는 서양식으로 만든 2층 붉은 벽돌집을 두어 옥상으로 연결하는 계단을 두었다.
벽돌집에는 각 층마다 큰 방이 있어 사랑채의 보조 역할을 하며, 옥상 테라스와 벽돌집은 이곳
만의 강한 매력이자 서울에 있는 근대 한옥 중에서도 유일하다.

▲ 2층 벽돌집과 안으로 들어가는 문

▲ 사랑채 지붕에 마련된 2층 테라스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별장 안채

사랑채 지붕으로 올라가려면 2층 벽돌집을 거쳐야 된다. 실내화로 갈아신고 계단을 타고 올라
가 문을 열면 나무로 지어진 테라스이다. 전망용으로 지어지긴 했으나 두 눈에 들어오는 범위
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매우 좁다. 비록 별장 일대와 남쪽 산자락이 고작이지만 주변의 풍경
이 고와 눈이 그리 심심치는 않다. 이곳에 올라 인왕산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 속
세에서 마비된 머리와 정신이 싹 가시는 듯 하며, 머리도 맑아져 공부도 잘될 것 같다.

별장 서쪽 언덕에는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구석에 소나무 등의 나무를 심었는데, 나무가 제
법 다 자란 티를 내며 별장에 작게나마 그늘을 드리워준다. 게다가 커다란 바위도 한쪽에 자리
잡고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숫키와가 얹혀진 담장이 집을 넓게 둘러싸며 속세와 경계를 이룬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부암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다른 명소들은 별도의 글에서 흔
쾌히 다루도록 하겠다.

* 반계 윤웅렬 별장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48 (내부 관람은 거의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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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11월 1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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