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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1.17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 (양주성 금속비, 용궁사, 소원바위, 백운산둘레길)
  2. 2018.11.07 서울 변두리에 숨겨진 신선한 명소, 궁동 정선옹주묘역~구로올레길 늦가을 산책 (궁동저수지생태공원, 원각사, 지양산) 2
  3. 2018.10.23 군포 수리산, 반월호수에서 가을을 맞이하다 ~~~ (철쭉동산, 수리산산림욕장, 수리산둘레길, 수리사)
  4. 2018.09.15 둘레길의 정석을 거닐다.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마실길~구름정원길 나들이 (백화사, 마실길 느티나무, 화의군 이영묘역, 폭포동계곡)
  5. 2018.04.12 서울 강서구의 지붕을 거닐다. 개화산 둘러보기 ~~~ (능말 은행나무, 풍산심씨 문정공파묘역, 개화산둘레길, 약사사와 석불입상)
  6. 2017.12.15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을 거닐다. 북한산둘레길 옛성길~탕춘대능선~구름정원길 (탕춘대성 암문)
  7. 2017.11.17 우이령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외롭게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양주 오봉산 석굴암 ~~~ (유격광장, 우이령길)
  8. 2017.11.07 대학로의 포근한 뒷동산이자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 산책 ~~ (한양도성, 낙산공원, 자주동천, 삼군부총무당)
  9. 2017.09.27 목포의 오랜 상징을 거닐다. 유달산~갓바위 나들이 (노적봉, 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10. 2017.07.06 정조 임금이 만든 도심 속에 아름다운 호수, 수원 서호 ~~ (서호공원, 항미정)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 (양주성 금속비, 용궁사, 소원바위, 백운산둘레길)

 


'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용궁사) '

용궁사 느티나무

▲  용궁사 느티나무

백운산 정상 백운산 산길

▲  백운산 정상

▲  백운산 산길

 


 

여름이 한참 물이 오르던 7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인천(仁川) 앞바다에 떠있는 영종도를
찾았다.
영종도(永宗島)는 천하 제일의 국제공항으로 찬양을 받는 인천국제공항을 품은 큰 섬으로
공항을 닦고자 영종도와 용유도(龍游島) 사이의 너른 갯뻘을 매립하고 삼목도(三木島) 등
의 여러 섬을 엮으면서 섬이 커졌다. 하여 영종도하면 기존의 영종도 외에 용유도와 삼목
도를 포함해서 일컬으며, 이들을 묶어 영종▪용유도라 부르기도 한다.

영종도에는 백운산이란 뫼와 용궁사란 오래된 절이 있는데 그곳에 살짝 마음이 가서 겸사
겸사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공항전철(서울역↔인천공항2터미널)을 타고
운서역이나 영종역에서 접근하는 것이 제일로 좋지만 운서역과 영종역은 환승할인 무적용
역이라 나 같이 서민들에게는 조금 부담이 된다. (공항전철의 영종도 구간은 수도권 환승
할인이 되지 않음)
그래서 집 앞에 있는 1호선을 쭉 타고 동인천역까지 이동하여 인천좌석버스 307번을 타고
영종도로 들어갔다. 시간도 좀 걸리고 영종도 강제투어가 조금 심하긴 하지만 환승할인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조금 일찍 부지런을 떨면 된다.

영종도에 진입하여 백운산 그늘에 자리한 전소에 두 발을 내렸다. 전소는 영종동행정복지
센터와 초등학교, 고등학교, 우체국, 아파트 등을 갖춘 오래된 마을로 서쪽에는 백운산이
, 동쪽과 남쪽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 평지에 한참 개발의 칼질이 춤을 추고 있음)
백운산 나들이는 바로 이곳 전소에서부터 시작된다.


 

♠  전소마을에서 만난 오래된 비석 무리들

▲  전소마을 비석 무리들

전소에서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서 백운산을 잠시 접어두고 마을 북쪽에 있는 구립하늘어
린이집을 찾았다. 그 앞에는 오래된 비석들이 3열로 각각 4기씩, 총 12기의 비석이 늘어서 있
는데, 이들은 영종도 곳곳에서 수습한 옛 영종진(永宗鎭) 첨사(僉使)의 비석으로 주로 선정비
(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가 주류를 이룬다.
선정비는 첨사의 착한 행정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고, 불망비는 첨사의 덕을 기리고자 세운 것
인데, 백성들이 진심으로 세운 것도 있겠지만 선정은 쥐뿔도 없음에도 첨사가 강제로 세운 것
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저런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돈을 뜯어가
자신의 배때기를 채운 관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종진은 조선시대에 영종도에 설치된 군사 기지로 처음에는 남양부(南陽府, 화성시 남양) 소
속이었다가 1875년 운양호(雲揚號) 사건으로 된통 당하면서 인천부(仁川府)로 넘어갔다. 이후
영종진이 폐지되면서 섬 전체가 부천군(富川郡) 소속이 되었다가 이후 옹진군(甕津郡) 관할로
바뀌었으며, 1989년 인천 중구(中區)에 편입되어 인천의 그늘에 있게 되었다.

이들 비석 중에 제일 우측에 유리막에 감싸인 조그만 철비(鐵碑)가 있는데, 그것이 나를 이곳
으로 오게한 양주성금속비(梁柱星金屬碑)이다. 돌로 만든 비석은 참 많지만 철이나 금속으로
만든 비석은 흔치가 않은 편으로 수도권에서도 철비는 이것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러다보
니 다른 석비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 철비에만 자꾸 눈길이 간다.


▲  비석 무리의 홍일점, 양주성 금속비 - 인천 지방기념물 13호

이 철비는 높이 91cm, 폭 31cm, 두께 3cm로 황동(놋쇠)을 녹여서 만든 것이다.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영종진이 큰 피해를 입자 흥선대원군은 인천부를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시키고 영
종진을 인천부 소속으로 넘겨 양주성을 영종진첨사<첨절제사(僉節制使)>로 파견했다.
양주성은 파괴된 진과 건물을 손질하고 방비를 튼튼히 했으며 전쟁으로 혼란해진 민심을 수습
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떠나게 되자 백성들은 크게 아쉬
워하며 놋그릇을 모아 1877년 9월에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냥 석비(石碑)도 아닌 놋그
릇을 모아 철비를 세울 정도면 양주성의 선정이 제법 대단했던 모양이다.

▲  옆에서 바라본 비석 무리

▲  비석 무리 부근에 자리한 연자방아


▲  속세를 향해 길을 늘어뜨린 용궁사 숲길 ▼

비석 무리를 둘러보고 용궁사로 길을 향했다. 전소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용궁사로 인도하
는 숲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용궁사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오르막길
이긴 해도 경사는 느긋하며, 숲이 매우 삼삼해 햇볕도 들어오기 힘들다.


 

♠  백운산에 안긴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 용궁사(龍宮寺)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15호

백운산(白雲山, 256m)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용궁사는 개발의 칼춤 소리로 요란한 영
종도의 별천지 같은 곳이다. 바로 절 밑에까지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어 온갖 개발 소음이 난
무하지만 용궁사는 백운산의 비호로 그 소음을 거의 모르고 살 정도로 산자락에 푹 묻혀있다.

용궁사는 영종도의 몇 안되는 문화유적으로 670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원효는 그 시절 왕경<王京, 경주(慶州)>에 머물며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상
대로 불교 대중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 원효의 창건설은 속세살이만큼이나 참 부질
없는 소리이며, 그의 창건설을 밝혀줄 기록이나 유물도 전혀 없다.
게다가 절에서는 1,300년 묵었다는 느티나무를 증거로 천년 고찰(古刹)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나무의 나이도 정확한 편이 아니며, 나무가 꼭 절 창건과 관련이 있다는 보장이
없다. 나무를 제외하면 오래된 것이라고 해봐야 요사와 관음전 정도로 19세기 중/후반에 조성
된 것이 고작이다. 또한 창건 이후 19세기까지 이렇다할 내력도 남기지 못해 오랜 내력에 의
구심을 던지게 한다. 다만 백운산 봉수대 관리와 바다 조망을 구담사(舊曇寺) 승려가 담당했
는데 그 구담사가 바로 용궁사의 옛 이름이며, 옥불 전설에는 옛 이름의 하나인 '백운사(白雲
寺)'가 등장해 그것을 통해 적어도 고려나 조선 초에 조촐하게 법등(法燈)을 켰던 것 같다.

절의 사적(事蹟)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중반으로 그것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과의 인연 덕분에 남게 된 것이다. 대원군은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부인 민씨(閔氏)가 불
교 신자라 자연히 절 출입이 잦았다. 하여 서울과 경기도의 여러 절(화계사, 흥천사, 수락산
흥국사, 안성 운수암 등)과 흔쾌히 인연을 맺으며 기도를 하고 여러 승려와 교분을 쌓았는데,
용궁사도 그런 절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 되는 섬인데도 어떻게 인연을 지었는지 이곳을 찾아 기도를 올렸다고 하
며, 1854년에 절을 중창했다. 이때 용궁사로 이름을 갈게 하면서 현판을 써주었는데 이는 관
음전 옥불이 바다 용궁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권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대원군은
고종(高宗)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약 10년 동안 이곳에 머물며 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용궁사와 대원군과의 인연은 요사에 걸린 그의 현판이 모든 것을 대변해주니 창건설은
몰라도 대원군 중창설은 더 이상 왈가왈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원군 이후 딱히 적당한 내력은 없으며, 영종도가 인천에 편입되자 절과 경내에 있는 느티나
무가 인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칠성각, 용황각, 요사채 등 6~7동의 건
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수월관음도 등이 있다. 절 자체는 지방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절과 느티나무 때문
이다. (그것도 아니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음)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로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며 그렇게 깊은 골짜기는 아니지만 절을 둘
러싼 숲이 삼삼하여 바쁘게 변해만 가는 영종도에서 이곳만큼은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다. 숲
이 속세의 소음을 걸러주니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그윽하며, 절이 조촐한 규모라 눈에 쏙 넣
고 살피기에도 별 부담이 없다.
근래에 절에서 백운산 정상을 잇는 산길을 손질하여 백운산 둘레길로 삼았는데 절을 둘러보고
둘레길을 따라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백운산 정상에 이른다. 절만
둘러보고 가면 많이 허전할 것이니 백운산도 같이 겯드린다면 영종도 여로(旅路)를 더욱 알뜰
하게 꾸며줄 것이다.

※ 영종도 용궁사 찾아가기 (2018년 12월 기준)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중구 지선 3번, 4번을 타고 용궁사입구 하차. 이 방법이 제
  일 최적이나 배차간격이 허벌나게 길고 영종역에서 서로 타는 곳이 틀리다.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203번, 598번 시내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598번은 크게 돌
  아가므로 203번이 나음)
* 서울 1호선 동인천역(4번 출구)에서 307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인천 1호선 동막역(3번 출구)에서 304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승용차
①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 금산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교차로에서 우회
   전 → 용궁사입구에서 우회전 → 용궁사 주차장
② 인천대교 → 영종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로 → 전소 → 용궁사입구에
   서 좌회전 → 용궁사 주차장
* 소재지 :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동 667 (운남로 199-1 ☎ 032-746-1361)


▲  용궁사 샘터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샘터가 마중한다. 산사에 으레 있는 샘터이건만 요즘처럼 더울 때
는 보물급 문화유산보다 100배 더 반가운 존재이다. 네모난 석조(石槽)에는 백운산이 내린 약
수가 가득 담겨져 있는데,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해진
다.

▲  용왕의 공간, 용황각(龍皇閣)

▲  용황탱과 관음보살탱화

샘터를 지나면 석축 위에 세워진 용황각이 나온다. 용황각이란 이름은 여기서 처음 만나는데
일반적인 용왕(龍王)을 용황으로 격을 높여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왕을 황제로 높인 것
과 같은 이치~) 아무래도 섬이다보니 바다를 터전으로 삼은 섬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우상인
용왕을 봉안한 것인데 용왕을 용황으로 높여 특별 대접을 하며 주민들의 용왕신앙을 돕고 있
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용황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로 밑에는 약수터가
있는데, 이 샘터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샘터 위에 석축(石築)을 다지고 건물을 세운 터라 주
춧돌의 키가 높으며, 북쪽에 트인 문을 통해 용황각으로 들어서면 된다. (동쪽 문 바깥은 허
공이라 추락 주의 요망)
용황각 불단에는 용황이 담긴 용황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용황의 머리에는 두광(頭光)이 반짝
반짝 윤을 내고 있으며, 용황탱 옆에는 관음보살(觀音菩薩) 누님이 그려진 탱화가 나란히 자
리해 있다.


▲  용궁사 느티나무(할아버지나무) - 인천 지방기념물 9호

요사 앞에는 용궁사의 오랜 자연산 보물이자 이곳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 2그루가 넓게 그늘
을 드리우고 있다.
이들 나무 가운데 요사 동쪽에 자리한 나무는 나이가 무려 1,300년을 헤아린다고 한다. 나무
의 덩치가 참 크긴 하지만 1,300살로는 보이지 않고 훨씬 젊어보이는데, (한 600~700살 정도)
요즘 하도 거품이 많은 세상이라 나이 재측정이 필요해 보인다. 실제 예로 서울에서 가장 오
래된 나무로 손꼽히던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도 나이가 830년을 호가한다고 했지만 2013년
에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면서 다시 나이를 재본 결과 600년 정도 된 것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230년 정도의 적지않은 거품이 끼어있던 셈이다.

요사 동쪽 느티나무는 높이 20m, 나무둘레 5.63m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여기서는 할아버지
나무라 불린다. 그리고 요사 북쪽 느티나무는 할머니나무라 불리는데 덩치는 할아버지나무보
다 작으며, 그 나무보다 후대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할아버지나무는
할머니 나무쪽으로만 늘 가지를 뻗는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옛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
낙네들의 치성 장소로 애용되었는데, 절이 있기 전부터 기자(祈子) 신앙의 현장으로 널리 쓰
인 듯 싶다.
이후 절이 들어서면서 예불을 먼저 올리고 용황각 밑의 약수를 마신 다음 할아버지나무에 기
원을 하는 순서로 변경되었으며,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낳는다고 전한다.

▲  서쪽에서 바라본 느티나무
(할아버지나무)

▲  요사 북쪽에 자리한 느티나무
(할머니나무)


▲  용궁사 요사(寮舍)

두 느티나무 그늘에 자리한 요사는 대원군이 1854년에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관음전과 더불
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승려의 생활공간 및 공양간,
대중방(大衆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건물 동쪽에는 툇마루 2칸을 두었으며, 서쪽을 제외한 나머지는 벽으로 막았다. 정면 가운데
칸에는 용궁사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절 이름을 용궁사로 바꿀 것을 제
안하며 친히 써준 것으로 그의 호인 석파(石坡)가 쓰여있어 대원군과의 진한 인연을 가늠케
한다. 그는 어찌하여 바다 건너 이곳까지 애써 인연을 지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  흥선대원군이 1854년에 남겼다는 '용궁사' 현판의 위엄
용궁사에서 느티나무 다음으로 애지중지하는 존재로 이 현판이 없었다면
대원군 중창설도 자칫 신뢰를 잃을 뻔 했다.

▲  두목 포스가 느껴지는 묘공(猫公)의 위엄

요사에는 용궁사에서 기르는 누런 털의 묘공(고양이)이 있었다. 요사와 할배나무 주변을 순찰
하면서 여름 오후를 보내고 있는데,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니 묘공 특유의 관심 소리를 내며
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하여 잠자리를 잡아서 조공(?)으로 바칠려고 했으나 이곳 잠자리는
눈치가 100단인지 하나도 잡지 못했다. 한때 외갓집이 있는 단양(丹陽) 시골의 잠자리 씨를
거의 마르게 할 정도로 잠자리를 잘 잡았는데, 이젠 나도 늙은 모양이라 오히려 그들에게 희
롱을 당할 판이다.

묘공 하나가 요사 툇마루에 앉아있다가 더운지 아랫 돌에 벌러덩 누워 강렬한 포스를 보이니
마치 두목 포스 같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경내를 지키는 그들이 있기에
용궁사는 오늘도 무탈하다.


▲  대웅보전(大雄寶殿)

용황각 뒤쪽에는 가건물로 된 대웅보전이 있다. 이곳은 관음도량을 칭하는지라 정식 법당(法
堂)은 관음전으로 2000년 이후 합판으로 대웅보전을 지어 새로운 법당으로 삼았으나 건물의
볼품은 많이 떨어진다.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지장보살상, 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우측 부분은 종무소(
宗務所)로 쓰이고 있다.

▲  포근한 인상의 석가3존불

▲  조금은 빛바랜 신중탱(神衆幀)

▲  한참 몸단장 중인 관음전(觀音殿)

▲  관음전 뒤쪽에 자리한 석조관음보살입상

요사 바로 뒤쪽에는 이곳의 법당인 관음전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관음전은 대원군
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요사와 함께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보수공사 중으로 불단에 있던 관음보살상은 칠성각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으며, 김규진(金圭鎭
)이 쓴 주련(柱聯)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관음전에는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玉佛)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사연이 아련하게 전해온
다.
때는 조선 중기(또는 후기)의 어느 평화로운 날, 영종도 월촌에 어부(漁夫) 손씨(또는 윤씨)
가 살고 있었다. 거의 매일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로 입에 풀칠을 하며 살고 있었는데, 그날도
바다로 나가 그물을 치며 대어를 기대했다. 허나 원하는 물고기는 없고 왠 옥불 하나가 걸려
든 것이 아닌가? 이에 어부는 단단히 흥분하여
'물고기는 하나도 없고 왠 이런 게 걸리고 앉았냐!'
투덜거리며 옥불을 바다에 내던지고 다시 그물을 쳤다. 그런데 그물을 건져올리니 아까 옥불
이 또 걸려든 것이다. 그래서 육두문자 요란하게 내뱉고 다시 내던졌으나 이후에도 계속 옥불
만 그물에 걸려든다. 이에 어부는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불상을 백운사(白雲寺, 지
금의 용궁사)에 넘겼다.
그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백운사 앞을 말이나 소를 타고 지나가면 무조건 멈춰서 움직
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절 앞을 지날 때는 말과 소에서 내려서 지나갔으며,
불상의 영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주변에 퍼져 육지에서도 많은 이가 찾아와 불전함이 매일 터
져나갈 정도였다. 또한 불상을 발견하여 절에 넘긴 어부도 이후 풍어(風魚)를 누리면서 부자
가 되었다고 전한다.

19세기 중반 용궁사를 찾은 대원군은 이 사연을 전해듣고 불상이 바다 용궁(龍宮)에서 나왔으
니 절 이름을 용궁사로 고칠 것을 제안하며 현판을 써주었다. 그 현판이 바로 요사에 걸린 그
것이다.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은 인근을 지나다가 침몰한 배에 있던 것이거나 절이 파괴되면서 버려
져 바닷속을 방황한 불상으로 여겨진다. 그 옥불이 있었다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느티
나무 제외)이 되었을 것인데, 왜정(倭政) 때 도난을 당해 지금은 없으며, 새로 만든 조그만
관음보살상이 그 자리를 조금이나마 대신한다.


▲  날렵한 처마선이 인상적인 칠성각(七星閣)

관음전 옆에는 근래에 지어진 석조관음보살입
상과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칠성각은 칠성(七
星)을 봉안한 건물이지만 칠성 외에 산신(山神
)과 독성(獨聖)도 함께 담고 있어 삼성각(三聖
閣)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관음전 중수로 그곳
에 있던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가 이곳의 신
세를 지고 있었음)

칠성각에 봉안된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은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고색의 기운이
제법 역력하다.

▲  다른 산신탱과 달리 꽤 젊어보이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이 담긴 산신탱

▲  독성과 동자가 그려진 독성탱

▲  칠성 가족을 빼곡히 머금은 칠성탱


▲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76호
관음보살상 뒤에는 수월관음도가 후불탱으로 걸려있다. 그 탱화는 1880년에 축연
(竺演)과 종현(宗現)이 그린 것으로 3폭의 비단을 이어서 만들었는데 화폭
규모는 세로 135.5cm, 가로 174.3cm으로 가운데 화폭은 102.2cm, 향좌폭
29.3cm, 향우폭 33.5cm으로 화폭이 제일 넓다.

▲  경내 뒤쪽에 자리한 소원바위

용궁사의 다른 명물로는 소원바위가 있다. 관음전 뒤쪽 산자락에 있는 이 바위(바위라기보다
는 커다란 돌판~)는 소원을 빌면서 바위 위에 작은 돌을 시계 방향으로 돌려 자석에 붙는 듯
한 무거운 느낌이 들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가볍게 돌아가면 꽝~!!) 바위 앞에 하는
요령이 적혀있는데 우선 바위 뒤쪽에 놓인 불상 앞에 조공(돈)을 바치고 (역시나 돈이다~!!)
그런 다음 생년월일과 소원을 말하며 3배를 올리고 돌을 돌리라고 나와있다.
나는 조공을 바치지 않고 (절이 나보다는 경제 사정이 훨씬 좋으니~~) 그냥 소원을 빌고 3배
를 하며 돌을 돌렸다. 기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이 순간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소원이 접수된 모양이다. 하여 다시 한번 해봤는데 역시나 무거웠다. 혹여 접수 대상이 아니
더라도 돌의 무거움은 누구나 같은 것이 아닐까? 아니면 기분상일까? 과연 소원 성취가 이루
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소원이 꼭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를 잠시 들뜨게 한다. (허나
현실은 소원 성취 그딴거 없음~~~)


 

♠  안개 낀 백운산(白雲山)을 오르다.

▲  용궁사에서 백운산으로 오르는 백운산둘레길

용궁사에서 50분 정도를 머물다가 절을 등지며 백운산둘레길에 발을 들였다. 백운산 정상까지
오를까 말까 궁리를 하다가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도 넉넉하고 용궁사와 둘레길만 보고 철수하
기에는 너무 싱거워 흔쾌히 정상까지 가기로 했다.

백운산둘레길은 영종도의 지붕인 백운산 주위를 도는 산길로 4.4km 정도 된다. 시작점은 접근
성이 좋은 용궁사에서 하는 것이 좋은데, 용궁사에서 2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여기서 둘레길과 작별하고 1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대체로
경사는 느긋한 편이다. 수목이 울창하여 햇볕이 들어올 틈이 거의 없으며 산바람도 넉넉히 불
어 땀을 제대로 털어간다. 다만 약수터가 없기 때문에 용궁사에서 물배를 채우거나 물통을 채
워 산행에 임하기 바란다.


▲  쉼터로 조성된 6각형 정자 (용궁사 부근)

▲  둘레길에 왠 연자방아?
1981년 12월에 용궁사 신도가 기증한 연자방아로 왜 아무런 필요도 없는 이곳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절에 두거나 산 밑에 두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  잠시 미친 경사를 보여주는 둘레길

▲  백운산 봉수대(烽燧臺)터

둘레길과 정상 방면 산길이 갈리는 곳에 백운산 봉수대가 있었다. 이 봉수대는 서해바다의 동
태를 살피며 위급시 봉화를 피워 인천 철마산(鐵馬山)과 백운산(白雲山)에 알렸는데, 구담사(
용궁사) 승려(1명 또는 3명)와 봉수지기 2명이 봉수대를 지켰다고 한다.

서해를 지키던 당당한 모습의 봉수대는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사라진지 오래이고 이곳과 정상
으로 가는 길목에 약간의 돌무더기가 남아있다. 여기서는 두께 1cm 정도의 경질와편 등이 나
오고 있어 봉수대의 옛 흔적을 희미하게 더듬을 수 있다.


▲  정상 동쪽에 자리한 헬기장

▲  헬기장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

▲  백운산 정상 전망대

용궁사에서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백운산 정상에 도달한다. 정상
에는 전망대를 두어 조망(眺望)의 나래를 누리게 했는데,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안개가
자욱히 끼어 100m 전방도 보이지를 않는다. 보물급 조망을 기대하고 올라왔건만 서해바다가
빚은 안개의 심술에 그 기대는 산산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전망대에는 인천국제공항과 공항신도시, 용유도(龍游島), 서해바다,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섬
들이 보인다는 전망 안내문과 사진이 있지만 오리무중과 같은 안개가 그 모든 것을 다 앗아가
버려 전망 안내문이 참 무색하게 되었다.

▲  우두커니 서 있는 백운산 정상 표석

▲  백운산 정상 전망대


▲  안개 속에 몸을 가린 백운산 남쪽 봉우리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1)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2)

진한 안개에 털려 정체성을 잃은 정상 전망대를 벗어나 전소 쪽으로 내려갔다. 어차피 보이는
것도 없으니 더 머물러봐야 의미도 없고, 시간도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내려갈 때는 동남쪽 전소 방향으로 내려갔는데 이 길도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안개가 자욱해
도 전방 50m 까지는 보이기 때문에 하산에 별로 무리는 없었다. 야속한 안개를 뚫고 20분 정
도 내려가니 산속에 묻힌 집이 나오고, 군사 훈련시설을 지나니 울퉁불퉁했던 흙길은 끝나고
신작로가 앞에 펼쳐진다.

신작로를 따라 시골스러운 전소마을 서쪽을 지나면 영종자이아파트와 영종국제물류고등학교가
나오고 영종동의 주요 간선도로인 운남로가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영종도 백운산 나들이는 바다 안개를 뒤로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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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변두리에 숨겨진 신선한 명소, 궁동 정선옹주묘역~구로올레길 늦가을 산책 (궁동저수지생태공원, 원각사, 지양산)

 


' 늦가을 서울 궁동 나들이 '
(궁동생태공원, 정선옹주묘역, 구로올레길)

▲  구로올레길 (와룡산~지양산 구간)

궁동생태공원 (궁동저수지생태공원)

▲  정선옹주 묘역

▲  궁동생태공원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산지도 어언 30여 년이 넘었다. 남들보
다 일찍 지리(地理)와 역마살에 두 눈이 뜨면서 10대 시절부터 서울에 온갖 명소를 쑤시
고 다녔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다녔지만 서울에는 아직도 내 손길이 닿지 않은 미답처(
未踏處)가 수두룩해 나의 자존심을 적지 않게 긁어 놓는다.

늦가을이 절정에 치닫던 어느 평화로운 날, 미답처 사냥을 위해 서울 장안 서쪽 끝에 위
치한 궁동을 찾았다. 이곳은 아직 발을 들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신선한 곳이다.
궁동(宮洞)은 구로구(九老區)의 일원으로 동/서/북쪽이 와룡산(臥龍山)과 매봉산의 야트
막한 산줄기에 막혀있고, 남쪽만 뚫려있는 반 분지 지형으로 3면이 산에 감싸여 있어 포
근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거의 농사를 짓던 시골로 지금도 밭두렁
이 적지 않게 펼쳐져 있어 전원(田園) 분위기는 여전하다. 게다가 궁동생태공원, 정선옹
주묘역, 구로올레길 등의 참신한 명소가 숨겨져 있어 이번에 그들을 미답처 목록에서 싹
지우기로 했다.
참고로 궁동은 법정동명으로 행정동명인 수궁동(水宮洞)의 관할구역이다. 수궁동은 온수
동과 궁동을 합친 이름으로 흔히 생각하는 용왕의 수궁과는 관련이 없음을 밝힌다.

햇님이 하늘 한복판에 걸려있던 14시, 오류동역(1호선)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6613번 시
내버스(양천차고지↔대림역)를 타고 궁동의 좁디좁은 골목길을 가로질러 서서울생활과학
고 정류장에 두 발을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니 서울이 무색할 정도의 전원풍경과 함께 이번의 첫 메뉴인 궁동생태공원
이 바로 모습을 드러낸다.


 

♠  농업/낚시용 저수지에서 생태공원으로 새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궁동생태공원(궁동저수지생태공원)

▲  북쪽에서 바라본 궁동생태공원 1구역 (이하 1구역)

궁동 한복판에 자리한 궁동생태공원은 기존의 궁동저수지를 손질한 일종의 호수공원이다. 길
게는 '궁동저수지생태공원'이라 불리며 저수지 중앙에 도로(오리로)가 지나가면서 강제로 2개
구역으로 구분되어 서쪽은 2구역, 동쪽은 1구역이라 불린다.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1구역 동
쪽에 조그만 골목길로 서서울생활과학고에서 회차하는 시내버스와 차량들이 오갔다.

궁동생태공원으로 새로운 삶을 꾸리고 있는 궁동저수지는 1943년에 농업용수 해결을 위해 왜
정(倭政)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들었다. 저수지 자리에는 원래 '벼락구덩이 우물'이라 불리
는 우물이 있었는데, 마치 벼락을 맞아 생긴 듯한 구덩이에서 물이 솟아나 그런 이름을 지니
게 되었다. 허나 궁동 일대 경작지가 종종 물부족에 허덕이자 왜정은 농업용수 해결과 쌀 수
탈을 위해 우물을 밀어버리고 저수지를 만든 것이다.

우물에서 솟던 물이 자연히 저수지를 채워주면서, 저수지는 늘 마를 날이 없었고, 궁동을 비
롯해 이웃 오류동(梧柳洞) 주민들까지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풍수
지리(風水地理)적으로 산을 뒤에 두고 물을 앞에 든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까지
그럭저럭 띄게 되었다. 허나 왜정의 수탈은 나날이 심해갔고, 왜인(倭人)이 저수지를 소유하
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온갖 까칠함을 아끼지 않았다.

해방 이후 저수지는 국유지로 바뀌었으며, 인근 항동저수지와 함께 서울의 주요 낚시터로 인
기를 모았다. 이 땅에서 저수지란 존재가 참 흔한 존재이긴 하지만 정작 서울에서는 인근 항
동(航洞)과 궁동 2곳 밖에는 없었다. 저수지가 넓고 물이 깨끗하여 물놀이 수요가 많았고, 거
기에 연꽃까지 심으면서 한여름에는 연꽃의 화려한 향연까지 펼쳐졌다.

이렇게 서울의 외진 시골로 조용히 묻혀 지내던 궁동은 1970년대 이후 도시화의 물결이 몰아
치면서 많은 변화를 강요 받게 된다. 적지않은 경작지를 밀어내고 연립주택과 온갖 도시형 주
택이 들어서면서 농업 인구와 경작지는 그만큼 줄어들었고, 저수지는 자연히 낚시터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낚시꾼들에게 소정의 이용료를 받고 마을 기금으로 활용했으며,
저수지가 넓다보니 배를 타고 관리했다.

낚시터로 그런데로 밥값을 하던 궁동저수지는 2000년 이후 큰 위기를 맞게 된다. 계속되는 궁
동 지역 개발로 시가지는 궁동저수지 남쪽까지 밀려왔고, 서울~부천간 도로 확충으로 궁동 북
쪽에 도로(신정로)가 뚫리면서, 부일로(1호선 경인선 북쪽 도로)와 그 도로를 잇는 신작로(오
리로)를 추진하게 되었는데, 그 도로가 저수지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저수지의 한복판을 건방
지게 가르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저수지는 2개로 갈라졌고 덩치 또한 반토막이 되었다.
이후 수맥에 문제가 생겨 저수지는 날로 야위어 갔고 수질까지 영 좋지 않게 변하면서 낚시터
로도 더 이상 부리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여 점차 동네 사람들의 근심거리로 변해갔다. 궁동
의 꿀단지이던 저수지가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인해 꿀이 쏙 빠진 깨진 단지가 된 것이다.

천덕꾸러기가 된 저수지를 두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고심하다가 구로구에서 2003년 9월, 저
수지와 주변 일대 10,205㎡를 생태공원으로 조성하기로 하였다. 즉 요즘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생태공원 카드를 내민 것이다. 그래서 39억을 들여 저수지 리모델링을 추진했으나 돈 문제로
공사가 지연되면서 2008년 4월 완성을 보았으니 이렇게 하여 자칫 폐기될 뻔한 위기를 극복하
고 생태공원으로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

저수지 주변에는 25,000여 그루의 꽃과 나무를 심고 2구역 저수지 북쪽에는 3,379㎡의 생태습
지(궁동 생태습지원)를 닦아 생태공원의 풍경을 돕게 했다. 100여 마리의 비단잉어를 풀어 저
수지에 다시 물고기가 살게 했으며, 1구역과 2구역 저수지 위로 목재로 생태 탐방로를 만들었
다. 또한 저수지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 정자(수궁정) 등을 두어 쉼터의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했다.
오리로로 저수지가 동서로 분단된 탓에 조금은 좁아 보이며, 저수지 2구역 서쪽 야산에는 궁
동을 호령했던 정선옹주와 안동권씨 묘역이 자리해 있어 같이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궁동을 넘어 이제는 구로구의 꿀단지로 고개를 든 궁동생태공원은 궁동 산신제를 비롯해 동네
의 여러 행사가 열리는 광장이 되었고, 지역 사람들의 쉼터이자 변변한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
던 구로구의 단비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  저수지를 남북으로 가르는 1구역 생태 탐방로
저수지의 중앙을 빈틈도 없이 관통하는 오리로와 달리 저수지에게도
숨쉴 틈을 주어 생태 탐방로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

▲  쉼터가 놓인 생태 탐방로 중간
부분과 1구역 북쪽

▲  나른한 늦가을 오후를 깨우는
1구역 분수대


저수지 1구역과 2구역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소소하긴 하지만 서로를 이어주
는 수로 4개를 두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도로를 냈을 때 저수지를 배려하여 지금처럼 꽉막힌
둑처럼 공구리치지 말고 밑도리가 뚫린 다리로 놓았다면 저수지가 최악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
이다. 다행히 조그만 수로를 내어
죽어가는 저수지를 위로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  동남쪽에서 바라본 1구역

▲  남쪽에서 바라본 1구역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다. (단 왼쪽에 오리로를 빼고) 갈대와 나무,
꽃, 전봇대, 그리고 푸른 하늘을 거니는 구름과 햇님, 달님도
수면을 거울로 삼아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  궁동생태공원 2구역(이하 2구역)과 생태 탐방로
늦가을과 갈대가 너무 익다 못해 이제는 누렇게 말라가고 있다.


궁동저수지의 원흉인 오리로를 건너 서쪽으로 넘어가면 저수지의 나머지 부분인 2구역이 펼쳐
진다. 2구역은 1구역과 비슷하게 수면 위로 생태 탐방로를 남북으로 내었고, 8각형 정자인 수
궁정을 북쪽에 두어 경관을 돕게 했다. 그리고 1구역보다 갈대가 더 수북하게 자리고 있어 이
곳이 1구역보다 생태공원의 질감이 더 높아 보인다.


▲  서쪽에서 본 2구역과 생태 탐방로

▲  2구역을 장식하고 있는 상큼한 존재들
거북이 등짝에는 토끼가 귀엽게도 서 있다. 저들은 이곳과 전혀 관련은 없지만
이곳 행정동명이 '수궁동(水宮洞)'이다보니 그 이름에 아주 잘 어울리도록
별주부전(鼈主簿傳)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를 갖다 놓은 것 같다.

▲  저수지를 바라보고 선 2구역의 감초, 수궁정(水宮亭)

▲  돌탑과 솟대

솟대는 삼한시대 종교 성역이던 소도(蘇塗)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겁나게 흐른 지금
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대중적인 존재가 되었는데 솟대에는 보통 오리 등의 날짐승을 두어
하늘(신)과 인간을 잇는 중간 역할로 삼았다.
솟대는 그렇다치고, 솟대가 몸을 의지한 돌탑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돌을 차곡차곡 얹혀
서 오리지날 돌탑으로 쌓은 것이 아니라 아주 편하게 돌에다가 시멘트를 발라서 돌탑 형식만
띄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날림 돌탑이 어딨단 말인가? 구로구청의 철밥통 발상이 애
써 꿀단지로 일으킨 궁동생태공원의 옥의 티를 유발시켰다.

* 궁동생태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서 구로구 궁동 42-2, 42-4


 

♠  궁동을 호령했던 옛 주인들의 사후 안식처
정선옹주(貞善翁主) 묘역

▲  정선옹주/안동권씨 묘역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제일 앞쪽이 권세태묘)

궁동생태공원 2구역 서쪽 언덕에는 궁동을 호령했던 정선옹주와 그의 시댁인 안동권씨 일가의
묘역이 넓게 자리를 닦았다. 분명 묘역은 권협(權悏, 1553~1618)을 중심으로 한 안동권씨 묘
역이지만 공주가 묻힌 탓에 세상에는 거의 일방적으로 정선옹주묘역으로 알려져 있다. 제왕의
딸인 옹주의 위엄 앞에 권협 일가의 이름이 묻힌 것으로 권협이나 공주의 남편인 권대임이 아
무리 잘나도 왕실 공주보다 감히 높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묘역에는 모두 6기의 묘(권근중 묘까지 합치면 8기)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권협과 전주최씨 부인의 묘가 1단을 이루고 있고, 그 밑에 권협의 손자인 권대임
(權大任)과 정선옹주의 묘가 2단을 이룬다. 그 아래로 권대임의 부모인 권신중과 전주이씨 묘
(3단), 권대임의 아들 권진과 남양홍씨 숙부인(淑夫人)의 묘(4단), 권진의 장남 권이경의 묘(
5단), 권이경의 장남 권세태의 무덤(6단)이 차례대로 자리한다.
그리고 별도로 권협 묘역 북쪽에는 권대임의 삼촌이 되는 권근중(權謹中) 내외의 묘가 숨겨져
있으며, 이들 무덤은 기본적으로 묘비와 상석(床石), 문인석(文人石) 1쌍, 망주석(望柱石) 1
쌍을 갖추고 있다. (단 권대임/정선옹주묘는 호석에 장명등까지 지니고 있음)

묘역과 생태공원 사이 산자락에는 권대임의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생태공원 솟대 옆에는 권
협의 신도비가 자리해 있어 이곳을 비선거리 또는 비석거리라 불렸다. 권협을 기준으로 6대가
이어져 내려온 묘역으로 묘비와 문인석, 상석, 호석(護石), 장명등, 촛대석 등이 잘 남아있어
조선 중기(16~17세기)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음)

그럼 묘역의 주인공이 되버린 정선옹주(
貞善翁主, 1594~1614)는 누구일까?
정선옹주(이하 옹주)는 조선 14대 군주인 선조(宣祖)의 7녀로 정빈(靜嬪)민씨의 소생이다. 정
빈은 어질고 예를 갖춘 여인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옹주 또한 그런 생모를 닮아서 공손하고 부
녀자의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전한다.
옹주가 권협의 손자인 권대임에게 시집가자 선조는 궁동(궁골)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
하며 그곳에 살도록 했다. 그래서 공주의 위엄에 걸맞게 고래등 기와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집이 궁궐만큼이나 컸다고 하여 동네 이름도 궁골, 궁동(궁마을)이 되었다.

옹주의 집은 궁동생태공원 북쪽인 서서울생활과학고 자리에 있었는데. 학교 정문 안쪽에 궁골
유허비를 세워 옹주의 고래등 저택이 있던 곳임을 살짝 귀뜀해준다. 이 집은 6.25전쟁까지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며, 당시 집의 면적은 700여 평, 집 크기는 50칸이었다고 한다.
허나 6.25로 인해 집은 모두 불타버려 가루가 되었고, 그 자리는 경작지로 쓰였다가 서서울생
활과학고가 들어앉았다. 생각 외로 옹주의 집은 1950년대 초반까지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생
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그림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허나 궁동 토박이들의 증언과 집터에서 쏟아져나온 기왓조각과 도자기, 옹기 파편을 통해 집
이 제법 대단했음을 가늠케 하며, 집의 모습과 구조가 어떠했는지는 아직 조사를 벌이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남양주시 평내동에 있는 궁집(가민속문화재 130호,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 내외의 집)과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허나 그것도 정답은 아니니 각자 취
향에 따라 조선 중기 옹주의 집을 머릿 속에 그려보기 바란다.


▲  정선옹주/안동권씨 묘역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와룡산 자락에 안긴 정선옹주 묘역은 명당(明堂)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질 정도로 아주 대단
한 명당 자리로 우리나라 100대 명당의 으뜸으로 꼽힌다. 궁동을 북쪽으로 감싸는 와룡산을
주산(主山)으로 삼아 동쪽으로 뻗어간 줄기가 좌청룡(左靑龍)을 이루고, 서쪽으로 흐르는 산
줄기가 우백호(右白虎)를 이룬다.
주산에서 좌우로 뻗어내린 산줄기의 정중앙에 고추처럼 생긴 짧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흐르니
그 산줄기 끝에 이들 묘역과 궁동저수지가 자리한다. 이 지형을 풍수지리적으로 금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형이라 부른다. 그냥 닭도 아닌 금닭이 알을 품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지형인가?

허나 한참 뒤에 일이지만 옹주의 집이 전쟁으로 박살이 나고, 그 후손도 딱히 두드러지는 인
물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10%가 부족했던 명당이었듯 싶다. 명당이나 묘자리에 관심이 있
다면 한번 가보기 바란다. 저수지로 인해 그런데로 배산임수를 취하며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전망도 확 트여있어 욕심이 확 날 정도로 자리도 괜찮은 편이다.


▲  고된 세월의 때가 입혀진 권대임(權大任) 신도비

정선옹주 묘역에는 2기의 신도비가 있는데, 그중 북쪽 산자락에 권대임 신도비가 서 있다. 궁
동생태공원과 묘역 중간에 자리해 있어 쉽게 눈에 들어온다.

신도비란 고위 관료와 왕족들만 쓸 수 있던 비싼 비석으로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묘역
동남쪽에 세운다. 이곳도 그 원칙을 지키고 있으며, 네모난 비좌(碑座)에 권대임의 일대기를
담은 비신(碑身)을 세우고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이다.

비석의 주인공인 권대임(1595~1645)은 권협의 손자이자 권신중(權信中)의 아들로 자는 홍보(
弘輔)
이다. 서예를 매우 잘하여 선조 임금에게 자주 칭찬과 상을 받았으며, 1살 연상인 정선
옹주에게 장가들어 길성위(吉城尉)가 되었다. 허나 옹주는 1614년 20살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
을 떠나 19살의 나이에 홀아비가 되고 만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봉헌대부(奉憲大夫)가 되었으며, 1635년 선무공신(
宣武功臣)의 적손(嫡孫) 자격으로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터지자 못
난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간 공적으로 숭덕대부(崇德大夫)로 승진되고 도총관(都摠管)이
되었으며, 1639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자신의 재화를 싹 털어 병자호란 때 포로로 잡
혀간 사람들(특히 노인들)을 데리고 돌아와 칭송이 자자했다.
그가 세상을 뜨자 선무원종공신으로 유록대부(綏祿大夫)를 더해 정1품에 추증되었으며, 신도
비를 세워 그의 행적을 기렸다.


▲  권협(權悏) 신도비

궁동생태공원 솟대 옆에는 묘역의 최고 어른인 권협의 신도비가 있다. 형태는 앞서 권대임 신
도비와 비슷하며, 비석의 피부가 꽤 꺼무잡잡하여 고색의 기운이 진하다.

권협(1553~1618)의 자는 사성(思省), 호는 석당(石塘)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
낸 권상(權常)의 아들이다. 1577년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
文院), 춘추관(春秋館) 등을 거쳐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1589년 전국에 괴
질이 유행하자 함경도로 파견되어 백성을 돌보고 제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염통이 쫄깃해져 좌불안석이 된 선조에게 서울을 끝까지 지킬 것을
강력히 건의했으나 왕은 거절했다. <선조는 그의 충정을 가상히 여겨 자신이 차고 있던 패검(
佩劍)를 하사했다고 함>
1596년 시강관(侍講官)과 응교(應敎)가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이 터지자 급히 명나라로 파견
되어 원병을 청했다. 이때 명나라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정(李楨)은 '당신네 나라 지세를 알
아야 우리가 도울 수 있소'
무리한 부탁을 하자 별수 없이 조선 산천의 형세와 원근을 도면에
그려가며 막힘 없이 설명을 했다.
솔직히 명나라군은 왜군 조총의 밥으로도 아까울 정도의 쓰레기 수준으로 조선에서 온갖 민폐
를 아끼지 않았는데, 선조를 비롯한 상당수의 조선 위정자들은 명나라에 쓸개까지 다 내주며
지나친 사대주의를 일삼아 명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그러다보니 국가의 기밀이나 다름없던
조선의 지도를 명나라에게 그려주는 우를 범하고 만다.

조선 지도를 얻은 명나라 신종(神宗)은 흡족해하며 군사와 군량을 보냈으며, 원군을 끌고 온
공으로 예조참판(禮曹參判),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1604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선무원종공신(宣撫原從功臣)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길창군
(吉昌君)에 봉해져 전라도감사가 되었다. 1607년 예조판서를 거쳐 1609년 종묘(宗廟) 영건을
감수한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으나, 광해군(光海君) 시절에 홍문관(弘文館)의 탄
핵을 받으면서 벼슬을 버리고 집에서 두문불출하다가 1618년 세상을 떴다. 그의 시호는 충정
(忠貞)이다.


▲  두툼하게 솟은 권진(權瑱)과 숙부인 남양홍씨묘 봉분
묘비를 세웠던 자리에 비석은 온데간데 없고 현란한 무늬의 비좌만 멀뚱히 남아있다.

▲  권진 묘역의 뒷모습 (저 밑에 권이경, 권세태묘가 보임)

묘역 가장 앞쪽에 자리한 권세태는 이 묘역의 막내로 권이경의 장남이다. 1659년에 태어났으
며, 1690년 식년시(式年試)에 을과로 붙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권세태의 아버지이자 권진의 아들인 권이경(權以經) 묘가 있는데, 그는 사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그런 아들과 손자묘를 굽어보는 권진은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장
남으로 돈령부봉사(敦寧府奉事)를 지내고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권신중(權信中)과 부인 전주이씨묘

▲  권신중과 전주이씨묘 뒷모습

묘역 3단에 자리한 권신중(1575~1633)은 자가 군집(君執)으로 권협의 아들이자 권대임의 아버
지이다. 부인은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 이정필(李廷弼)의 딸이다.

1605년 증광시(增廣試) 생원과(生員科) 3등 45위로 합격하여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가 되었
고, 이듬해 의정부도사(議政府都事)가 되었다. 이후 형조좌랑(刑曹佐郞)과 강서현령(江西縣令
),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김제군수(金堤郡守). 단양군수(丹陽郡守) 등 여러 내/외직을 거
쳤고, 말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병으로 사양했다. 장남 권대임이 길
성군(吉城君)에 봉해지면서 좌찬성(左贊成)과 우의정(右議政)에 차례로 증직되었고, 이후 길
흥군(吉興君)에 봉해졌다. 그는 총명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말수가 적고 위엄이 대단했다고 전
한다.

권신중은 원칙대로라면 권협묘 밑에 있어야 된다. 허나 며느리인 정선옹주가 일찍 세상을 등
지자 일찍 묘역을 조성했는데, 아무래도 신분이 높은 공주이고, 그런 공주를 맞아들인 아들
권대임이 왕의 사위이기 때문에 권신중이 자리를 양보했다.


▲  권대임과 정선옹주묘

묘역 2단을 이루고 있는 권대임과 정선옹주묘는 같은 묘역임에도 다른 묘와 좀 차별화를 두었
다. 봉분(封墳)만 봉긋 오른 나머지 묘와 달리 봉분 밑에 호석(護石)을 둘렀으며, 장명등(長
明燈)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왕족이다보니 그런 파격적인 옵션을 달게 된 모양이
다. 역시 사람은 돈 많고 신분이 높고 봐야 된다.


▲  권대임과 정선옹주묘 뒷모습과 묘역 전경

▲  정선옹주묘 서쪽 문인석

▲  정선옹주묘 동쪽 문인석


▲  묘역의 어른인 권협과 정경부인 전주최씨묘

▲  뒤에서 바라본 권협 내외 묘

묘역 1단에는 권협 내외의 묘가 자리해 자손들을 굽어본다. 묘 뒤쪽에는 권근중 내외의 묘가
자리해 있는데, 그곳까지는 알지 못해 살피지는 못했다.

구로구에서는 이곳과 궁동생태공원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역사/자연공원으로 삼고자 계획하고
있으며, 묘역을 지정문화재 등급인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고자 서울시와 협의를 했으나 아직
까지 비지정에 머물러 있다. 허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해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조선 중기 묘역
들이니 구로구와 후손들이 잘 나서준다면 지방기념물 자리를 딸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구로
구에는 이곳 외에도 많은 사대부 묘역이 궁동과 천왕동(天旺洞), 고척동(高尺洞), 오류동 일
대에 흩어져 있는데 그중 유순정(柳順汀). 유홍(柳泓) 묘역과 함양여씨 여계(呂稽) 묘역이 지
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궁동생태공원(궁동저수지생태공원), 정선옹주묘역 찾아가기 (2018년 10월 기준)
* 지하철 1,7호선 온수역(8번 출구)에서 6613, 6616, 6716번 시내버스를 타고 서서울생활과학
  고(서울전파관리소)에서 내리면 바로 궁동생태공원이다.
  (6613번은 양천차고지 방향 차를 타야 되며, 6616번은 원각사입구에서 하차, 6613번과 6616
  번은 정진학교와 온수힐스테이트아파트로 크게 돌아가므로 6716번 버스를 타는 것이 빠름)
* 지하철 1호선 오류동역(3번 출구) 북쪽 오류1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6613, 6616번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정네거리역(1번 출구를 나가서 180도 뒷쪽)에서 6716번 시내버스 이용
* 정선옹주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 54-2

 


 

♠  구로구의 지붕, 구로올레길을 거닐다

▲  궁동 서쪽 배밀 밭두렁

정선옹주묘역 서쪽에는 밭두렁이 펼쳐져 있다. 와룡산 산줄기에 동/서/북이 막힌 골짜기로 채
소밭과 비닐하우스가 가득해 갑자기 머나먼 시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골짜기에 일군
경작지의 모양이 마치 뱀과 같아서 또는 뱀이 자주 나타난다고 하여 '배밀'이라 불렸으며, 정
선옹주묘역 남쪽은 '양지말'이라 불렸다.
궁동 배밀은 서울 변두리에 널린 시골의 하나로 회색빛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이런 전원 풍경
은 눈을 맑게 하는 안약과 같은 존재이다. 특히 서울에서 만나는 전원 풍경은 더욱 그러하다.
다행히 천박한 개발의 칼질은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이미 사람과 건물, 차량들로 비대해진 서울에서 이런 시골은 꼭 필요하다. 괜히 성냥갑 아파
트나 잔뜩 짓지 말고 조금은 어수선한 밭두렁이나 반듯이 정비하여 동네 경작지나 주말농장으
로 영원히 남았으면 좋겠다.


▲  원각사로 오르는 언덕길 (원각사 직전)

▲  원각사 직전에서 바라본 궁동

배밀 밭두렁 길을 따라 서북쪽으로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와룡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터를 닦
은 원각사란 조그만 절이 모습을 비춘다. 산자락 숲속에 자리해 있어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그런데로 풍기고 있는데, 옛날에 절이 있던 터로 '절안'이라 불렸으며, 원각사는 바로 그 옛
터에 세운 현대 사찰로 이곳에 있었다는 옛 절에 대해서는 딱히 전해오는 정보가 없다.


▲  원각사 요사(寮舍)와 미륵불입상

원각사(圓覺寺)는 60년도 안된 절이라 고색의 기운은 아직 피지 못했다. 구미가 당길만한 오
래된 보물이나 볼거리가 없어 그냥 지나칠까 했지만 늦가을이 만연하게 깃든 산사의 풍경이
너무 고와서 이번 나들이가 주는 보너스로 생각하고 한번 살펴보기로 했다.

숲속에 자리한 경내에 이르면 넓은 주차장이 먼저 나타나고 그 서쪽 높은 곳에 'ㄱ'모양의 요
사가 있다. 이곳은 종무소(宗務所)도 겸하고 있는데, 그 북쪽에는 하얀 피부의 미륵불이 시무
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며 동쪽을 굽어본다.
미륵불에서 북쪽 오솔길로 가면 6각형 범종각이 있고, 그 길의 끝에 법당(法堂)이 있다. 기와
집으로 이루어져 전통 불전(佛殿) 양식을 취했으나 철과 알루미늄 등으로 집을 크게 불리면서
조금은 어색한 모습이 되었다. 법당 내부에는 석가여래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대동하며 3
존불을 이루고 있고 그 좌우에 지장보살과 칠성탱 등이 자리하고 있다.

* 원각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 1-56 (오리로21가길 146, ☎ 02-2688-5421)

▲  서울을 굽어보는 미륵불입상

▲  6각형으로 빚어진 범종각(梵鍾閣)


▲  늦가을이 살포시 내려앉은 원각사 법당
기존의 조그만 법당을 크게 확장하면서 저런 모습이 되었다.

▲  갖출 것은 다 갖춘 법당 내부 (석가3존불, 지장보살, 칠성탱)

▲  범종각 앞에서 바라본 원각사 요사 주변

범종각 옆에는 와룡산과 구로올레길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 있다. 절이 궁동 구석에 자리해 있
고 속세에 그리 알려진 절이 아니라서 좀 고적하긴 하지만 와룡산과 구로올레길로 마실과 나
들이를 나온 이들이 심심치 않게 지나다녀 고적한 절에 잠깐잠깐씩 활력을 불어놓는다.

범종각 옆 산길을 3분 정도 오르면 바로 산능선인데, 이 능선이 와룡산 능선으로 구로올레길
산림형 2코스가 지나간다. 동시에 서울과 부천(富川)의 경계선 역할도 겸한다.


▲  구로올레길 산림형 2코스 (원각사 뒷쪽)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제주도(濟州島), 그곳에는 담장길을 뜻하는 올레길이 있다. 그 올
레길을 시작으로 도보 산책길이 전국에 급속히 번져나갔는데,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많은 지
역에서 앞다투어 도보길을 내놓고 있다. 서울도 도보길의 성지인 북한산둘레길과 서울둘레길
을 비롯해 관악산둘레길, 강서둘레길, 동작충효길, 강동그린웨이, 아차산둘레길, 안산(鞍山)
자락길, 구로올레길 등이 있다.
도보길의 명칭은 지역마다 다르지만 산을 낀 곳은 상당수 '둘레길'을 칭하고 있으며, '갈맷길
'이나 '산막이길','동작충효길','산꼬라데이길' 등 토속적인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구로올레
길은 그런 도보길 유행에 따라 구로구에서 야심차게 닦은 산책로로 둘레길을 칭하지 않고 제
주도를 따라 올레길이라 했다.

구로올레길은 기존의 산길과 숲길, 골목길, 하천길을 활용하여 도심형 코스 2개. 하천형 코스
3개, 산림형 4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가 찾은 길은 산림형 2코스로 온수역에서 궁동을 감
싸는 와룡산과 지양산 산줄기를 따라 매봉초교에 이르는 4.8km의 산길이다. 구로구의 지붕과
같은 곳으로 이중 와룡산과 지양산 남쪽 구간은 서울~부천의 경계선을 이루기도 하며, 접근은
온수역(5번 출구)과 정진학교, 원각사, 궁동3거리, 신정이펜하우스4단지, 매봉초교에서 하면
편하다.

우리는 2코스 구간 중, 원각사뒷쪽~궁동터널 북쪽 구간을 이용했는데, 이 구간은 전형적인 산
길로 경사도 거의 느긋한 편이며, 상당수가 능선길이다. 해발도 아무리 용을 써봐야 120~130m
정도이고, 숲이 무성하고 공기가 청정해 간단히 몸도 풀 겸, 마실 장소로도 아주 좋다. 허나
산길에 딱히 볼거리는 없으며, 그냥 나무와 꽃, 바위, 숲 너머로 펼쳐지는 조망(서울 구로구
와 부천 작동, 춘의동 지역)이 전부이다. 올레길 이전에는 동네 사람들이나 찾던 그들만의 숨
겨진 공간이었으나 올레길로 포장된 이후 조금씩 세상에 알려져 외지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  차돌바위 쉼터
의자 너머로 보이는 하얀 바위가 차돌바위이다. 그 유래는 모르겠음.

        ◀  작동터널 윗쪽 (수렁고개)
능선길이 상당수를 이루며 흘러가는 산림형 2
코스 구간 가운데 가장 쑥 주저앉은 구간이다.
그래서 여기서만큼은 급한 경사로 내려갔다가
다시 급하게 올라가야 된다.
저 밑에는 작동터널이 뚫려있어 온갖 차량들이
굉음을 부르짖으며. 저 양쪽으로 작동과 궁동3
거리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다.


▲  작동터널 북쪽 (수렁고개)

▲  지양산 국기봉으로 오르는 올레길
겨울 제국의 도래를 앞두고 늦가을 약기운이 다된 나무들은 그동안 걸친 나뭇잎을
떨어트리며 늦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한다. 땅바닥에 떨어진 나뭇잎들은
낙엽이란 우울한 이름을 단 채,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한다.

▲  지양산 국기봉
지양산 남쪽 봉우리에 신성한 태극기를 달고 국기봉이라 하였다.

▲  지양산 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산줄기 너머로 구로구와 양천구 지역이 바라보인다. 시내에서 별로
나오지도 않았는데, 제법 멀리 나온 것 같다.

▲  구로올레길 궁동3거리 북쪽

▲  구로올레길에서 지양산 생태순환길로 갈아탄 궁동터널 북쪽 갈림길

햇님이 뉘엿뉘엿 꽁무니를 빼면서 땅꺼미가 조금씩 약기운이 더해지자 잠시나마 정을 붙인 구
로올레길을 버리고 속세로 철수했다. 기분 같아서는 동쪽 종점인 매봉초교까지 가고 싶었지만
어둠에 잠긴 산길 산책도 썩 좋은 편도 아니고, 더군다나 야간 사진은 제대로 담기도 힘들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올 여운을 충분히 남기며
궁동터널 북쪽 갈림길에서 지양산 생태순환길로
갈아타 신정3지구 푸른마을3단지로 내려갔다.


▲  소나무가 가득한 지양산 생태순환길

▲  푸른마을3단지로 내려가는 지양산 생태순환길

지양산 생태순환길로 접어들어 6~7분 내려가니 어느덧 회색빛 도시가 보이기 시작한다. 시내
에서 고작 바로 옆 산, 그것도 높이가 낮은 산에 오른 것인데 산속을 꽤나 깊이 들어간 기분
이다.

지양산 생태순환길은 양천구(陽川區)에서 닦은 숲길로 신월7동에서 지양산 동쪽 산줄기를 따
라 궁동터널 북쪽 갈림길까지 이어지는 순 100% 산길이다. 이와 별도로 지양산 주능선을 쫓아
서 양천둘레길이 지나가는데 지양산 국기봉에서 매봉초교를 거쳐 계남근린공원까지 구로올레
길과 같은 길을 쓴다. 이 구간은 구로구와 양천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푸른마을3단지로 내려오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칼퇴근의 달인 햇님은 이제 보이지도 않고 달
님이 하늘에 높이 떠 위엄을 부린다. 이렇게 하여
구로올레길을 겯드린 궁동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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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10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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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 수리산, 반월호수에서 가을을 맞이하다 ~~~ (철쭉동산, 수리산산림욕장, 수리산둘레길, 수리사)

 

 

~~~~~  가을맞이 수리산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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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리산 철쭉동산 (5월 군포철쭉축제)

▲  수리산 둘레길

▲  수리산 수리사

 


이 땅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추석) 연휴 끝 무렵에 친한 후배와 군포 수리산(修理山)을
찾았다. 수리산에 대한 사람들의 찬양이 대단하여 얼마나 괜찮은 산인지 직접 확인하고
자 간 것이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14시 무렵, 금정역에서 그를 만나 서울 5623번 버스(군포공
영차고지↔여의도)를 타고 둔전초교에서 군포마을버스 3-1번으로 환승하여 수리산 입구
인 중앙도서관에서 두 발을 내렸다. 수리산 나들이는 여기서부터 막을 연다.


 

♠  수리산(수리산 도립공원) 입문

▲  수리산 산림욕장

수리산은 인구 30만을 지닌 군포시(軍浦市)의 듬직한 진산(鎭山)으로 군포 북서쪽과 안양시(
安養市)의 서남쪽, 안산시(安山市) 동쪽에 넓게 누워있다. 삼성산(三聖山, 480m), 관악산(冠
岳山, 629m)과 더불어 안양권의 이름난 명산(名山)으로 등산/나들이 수요가 상당하며 2009년
에 경기도의 3번째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수리산이란 이름 3자를 들으면 대입 수능시험의 수리영역이나 '수리수리 마수리' 주문이 생각
이 난다. 허나 산 이름은 그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전해오
는데, 산 바위가 마치 독수리처럼 생겨서 수리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고(수암봉 정상에 독수리
의 일종인 검둥수리가 앉아있는 듯한 바위가 있음), 산 남쪽 자락에 안긴 수리사에서 유래되
었다는 설, 그리고 조선시대 때 왕손(이씨)이 수도했다고 하여 수리산(修李山)이라 했다는 설
이 그것이다. 그래서 '修理山'이란 한자 대신 '修李山'이라 하기도 하며, '修理山'으로 바뀐
것은 20세기 중반 때라고 한다.

수리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봉우리는 태을봉(489.2m)이며, 슬기봉(469m)과 관모봉(426m),
수암봉(395m) 등이 수리산을 이루고 있다. 흙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산세가 완만하고 숲이 짙
으며 수리사계곡과 창박골(병목안) 등의 계곡이 흘러 조촐한 피서지를 선사한다.
수리산 동남쪽 자락인 군포 수리동 일대에는 산림욕장이 닦여져 있고, 산 주위로 수리산둘레
길과 수리산임도길 등의 둘레길이 닦여져 수리산의 멋을 더욱 돋구고 있으며, 수리사와 철쭉
동산, 2016년에 문을 연 초막골 생태공원 등의 명소가 있다. 특히 철쭉동산은 군포시의 야심
작으로 산자락에 넓게 철쭉밭을 닦아놓았는데 매년 5월 군포철쭉축제가 거하게 열려 사방을
온통 연분홍 천지로 만든다. 서울 근교에 이렇게 너른 철쭉의 공간이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  윗쪽에서 바라본 수리산 철쭉동산 (5월 군포철쭉축제)

▲  층층히 이어진 수리산 철쭉동산의 위엄 (5월 군포철쭉축제)

▲  수리산 철쭉동산 (5월 군포철쭉축제) ▲

수리산 등산은 수리산역(4호선)이나 철쭉동산, 군포시 중앙도서관, 태을초교, 수리약수터, 명
학역 등에서 시작하면 되며 군포시가 수리산 일대에 걸쳐놓은 둘레길은 총 4코스로 다음과 같
다.
① 수리산둘레길(군포수릿길 1코스) : 산본역~태을초교~노랑바위~임도5거리~감투봉~밤바위~시
민체육공원~산본역 (16km, 5시간 30분 소요)
② 수리산임도길 구름산책길(군포수릿길 2코스) : 중앙도서관~임도5거리~덕고개~행복쉼터~속
달동 마을길  (4.8km, 1시간 40분 소요)
③ 수리산임도길 풍경소리길(군포수릿길 3코스) : 수리산역~철쭉동산~중앙도서관~임도5거리~
수리사 (5km, 1시간 20분 소요)
④ 수리산임도길 바람고개길(군포수릿길 4코스) : 납덕골주차장~수리사방향~임도입구~바람고
개~에덴기도원~납덕골주차장 (5.6km, 1시간 50분 소요)

끝으로 수리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6.25전쟁이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이 부분은
거의 모르고 지나치는 실정인데, 6.25 시절인 1951년 1월, 북한에게 서울을 빼앗기자(1.4후퇴
) 서울을 수복하고자 국군 1사단과 미군 25사단, 터키 여단 1개 대대가 수리산 일대에서 북한
군과 머릿수만 무식하게 많은 중공군 수만 명을 상대로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는 그
해 2월 10일 서울 재탈환에 큰 역할을 했으며, 지형적인 불리함과 막대한 인명피해를 극복하
고 강력한 화력과 항공기 지원, 군사들의 투지에 힘입어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2007년부터 산 일대를 조사하여 국군 유해 4구와 유품 600여 점을 수습, 뒤늦게 국립현
충원에 봉안했다.


▲  수리산의 자랑, 숲길 (수리산 임도길)

수리산을 수식하는 명소의 하나인 수리산 산림욕장은 군포시가 1993년부터 조금씩 조금씩 닦
아놓은 것으로 면적은 159.4ha이다.
상수리나무와 때죽나무 등 활엽수림이 주류를 이루며, 리기다소나무 등 침엽수(針葉樹)가 산
중턱을 장식한다. 군포시내(산본, 수리동)와 바짝 붙어있어 접근성 하나는 매우 착하며, 숲이
매우 삼삼해 산림욕에는 아주 좋다. 또한 피크닉장과 자연학습장도 갖추고 있어 가족 나들이
와 소풍지로도 손색이 없다.

우리는 산림욕장 내부까지 들어가진 않고 항아리 겉돌 듯 입구 주변만 살펴보고 바로 수리산
둘레길에 임했다.
산림욕장 남쪽에서 성불사를 거쳐 임도5거리로 인도하는 수리산둘레길은 차량들이 다녀도 충
분할 정도로 폭이 넓다. 순 흙길로 이루어져 있고 햇살이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숲이 무성하
여 이곳만큼은 무더위와 자외선을 잊어도 좋다. 나무가 베푼 숲내음이 속세에서 오염된 심신
을 어루만져 주며, 산바람이 이따끔 불어와 번뇌와 땀을 단죄한다.

집으로 살짝 훔쳐와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숲길로 성불사 직전 구간을 제외하면 경
사는 거의 느긋하며, 뱀처럼 구불구불한 고개를 넘으면 임도5거리에 이른다.


▲  수리산 임도5거리

임도5거리는 수리산 남쪽 요충지로 숲길이 5갈래로 갈리는 곳이라 하여 속편하게 임도(林道)5
거리를 칭하고 있다. 우리의 목적지인 수리사는 여기서 북서쪽 길을 이용하면 되며, 남쪽 큰
길로 내려가면 덕고개와 갈치저수지 방면으로 이어진다. 5거리에는 쉼터와 조그만 정자가 있
고, 소나무와 온갖 나무들이 앞다투어 그늘을 베풀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임도5거리에서 수리사로 가는 숲길 (수리산임도길 풍경소리길)

임도5거리에서 수리사입구까지는 앞서 길보다는 좁지만 흙길이 진하게 닦여져 있다. 깊은 산
주름 속에 묻힌 산중이라 완전 산과 푸른 숲, 하늘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정녕 수도
권의 주요 도시인 군포시가 맞는지 절로 고개라 갸우뚱할 정도로 마치 강원도 산골로 순간이
동을 당한 기분이다.

자연의 소리가 전부인 숲길로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으며 경사도 꽤 느긋하다. 우리네 인생이
이런 산길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길을 25분 내려가면 수리사입구에 이른다.


▲  수리산이 베푼 조그만 샘터
빨간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늦더위로 타들어가는 몸 속을 진화한다.

▲  수리사로 올라가는 길 (1)

수리사입구에서 수리사까지는 각박한 오르막길을 10분 정도 올라야 된다. 임도5거리에서 여기
까지 내려온 높이 만큼 말이다. 절까지는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포장길이 닦여져
있으며, 길 옆에는 수리사계곡이 수줍은 모습으로 졸졸졸~~♪ 화음을 선보이며 반월저수지(반
월호수)로 흘러간다. 울창한 숲이 길과 계곡의 지붕이 되어 하늘을 가리고 있으며 바로 그 길
의 끝에 수리사가 자리해 있다.

▲  가늘게 흘러가는 수리사계곡

▲  수리사로 올라가는 길 (2)


▲  수리사계곡에서 만난 조그만 자연산 폭포
계곡은 작지만 수리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갖은 바위와 조그만 폭포들이
아기자기한 풍경을 자아낸다.

▲  드디어 도착한 수리사의 정문, 일주문(一柱門)


 

♠  수리산 서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오래된 절집
~ 수리사(修理寺)

수리사는 수리산 서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산사(山寺)로 군포에서 가장 산골 벽지이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제대로 묻힌 비구니 절로 화성시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인데 6세기
중반인 신라 진흥왕(眞興王) 시절에 신라 왕족인 운산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부처를
친견해 반드시 부처가 된다는 기별(記別)을 받고서 여기서 부처를 만났다고 하며, 그 연유로
산 이름을 견불산<見佛山, 또는 불견산(佛見山)>, 절 이름은 수리사라 했다고 한다.
허나 진흥왕 시절 안양/군포 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 지역으로 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신라
가 동맹국인 백제의 뒷통수를 치며 한참 한강 유역과 경기도 지역을 점령하던 시절이다. 게다
가 신라의 불교가 법흥왕(法興王) 때 공인되었다고 하지만 문무왕(文武王) 시절까지 절은 대
부분 왕경(王京, 경주)에만 지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변경이나 다름없는 이곳까지 와서 위험
을 무릅쓰고 절을 지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다만 경내에 오래된 석불 등이 있어 절이 우후죽
순 들어서던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대웅전 등 건물 36동과 12개의 암자(庵子)를 거느린 큰 사찰이었다고 한
다. 허나 이 역시 자료와 유물이 부족해 신빙성은 떨어지며, 절 주변 산세를 보면 그만한 건
물을 짓기에도 벅차 보인다. 비록 그 정도는 아니지만 왕년에는 시흥(始興) 지역(그때는 시흥
고을이었음)에서 그런데로 잘나갔던 모양이며,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이끌고 경남 지역에서 크게 활약을 했던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가 쓰러진 절을 재건하고 이곳에서 수도하며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허나 그는 근거지인 현풍
(玄風)과 의령(宜寧)에서 벼슬을 멀리하고 후학을 길렀던 사람이다. 수리사와는 전혀 관련도
없는 그를 왜 이곳 중창주로 등장을 시켰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아마도 그를 흠모하던 이곳
승려가 장대한 세월에 산산히 흩어진 수리사 내력을 손질하면서 그를 살짝 넣은 것은 아닐까?
20세기에 들어서 경허(鏡虛)가 이곳에 주석하여 머물렀으며, 대선사(大禪師)인 금오(金烏)가
이곳에서 출가했다. 6.25 전쟁으로 절이 파괴된 것을 1955년 청운(靑雲)이 중건했으며, 계속
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산신각, 나한전, 요사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죄다 20세
기 중/후반에 지어진 것이라 고색의 내음은 말라버렸다. 소장문화유산은 하나도 없으며, 오래
된 석불이 하나 전하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간신히 귀뜀해준다.

절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여기서부터 수리사 경내로 문을 들어서던 우
회길을 이용하던 그건 각자 마음이다. 여기서 주차장까지는 경사가 좀 가파르며 그 경사를 오
르면 수리사 표석과 차량들이 평화롭게 쉬는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1단 더 올라가면 요사
(寮舍)이며, 1단 더 오르면 경내의 중심 구역으로 대웅전과 나한전(羅漢殿), 범종각, 약수터
등이 있다.

▲  범종(梵鍾)의 보금자리인 범종각

▲  석가불과 500나한이 봉안된 나한전

▲  나한전 석가3존불
(석가불과 문수,보현보살)

▲  가지각색의 나한전 오백나한들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편강약수 ~ 약수는 어디가고 물통만 있나?

산사에는 늘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리사 역시 그 예외는
아니라서 대웅전 옆구리에 샘터를 두고 이름도 좋은 편강약수라 하였다. 하지만 샘터가 어디
아픈지 물은 막혔고, 대신 철덩어리 물통을 두어 샘터의 역할을 대신하게 했다. 샘터에 놓인
바가지들이 어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속히 샘터와 물줄기를 복구하여 약수터를 되찾기 바란
다.


▲  수리사 대웅전(大雄殿)

이곳의 법당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으로 경내에서 가장 큰 건
물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위엄 있게 들어앉아 남쪽을 굽어보고 있으며, 내부에는 석가
3존불과 여러 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3존불 위로 황금색 닫집이 장엄하게 자리한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닫집

▲  단촐한 모습의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뒷쪽 언덕이자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삼성각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정
면과 측면이 달랑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3명의 성스러운 존재, 산신과 독성(나반존자), 칠성
(치성광여래)이 봉안되어 있다.


▲  산신(山神) 가족이 담긴 산신탱

▲  삼성각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대웅전과 요사 뒷통수가 보이고, 수해(樹海)를 이루는 수리산
남쪽 줄기 너머로 인구 120만을 지닌 경기도의 중심 도시,
수원(水原)이 시야에 들어온다.

▲  수리사의 숙성된 흔적, 파괴된 석불과 석탑 잔재들

삼성각 옆에는 완전하지 못한 석재들이 고색의 때를 가득 머금으며 옹기종기 모여있다. 넓적
한 돌판에는 주름이 여러 겹 그어진 큰 돌이 있는데, 딱 보니 석불의 흔적으로 보인다. 석불
의 얼굴과 아랫도리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죄다 휩쓸려 사라졌고 옷을 걸친 몸통
부분만 남은 것이다. 그 앞에는 석탑의 잔재로 보이는 돌이 놓여져 있으며, 예전 수리사에 5
층석탑이 있었다고 하므로 그 탑의 잔재나 옛 건물의 주춧돌로 보인다.
다들 왕년에는 한 가닥 하던 존재들이나 지금은 초췌한 몰골로 지나간 세월을 원망하니 역시
나 인생은 부질 없는 모양이다. 수리사의 오래된 숙성의 흔적으로 20세기 중반 이후 절을 중
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수습한 것이다.

※ 수리산 수리사 찾아가기 (2018년 9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산본역(2, 3번 출구)에서 군포마을버스 2, 3-1번을 타고 중앙도서관 하차 →
  중앙도서관 정류장에서 수리산임도길(수리산로)을 따라 도보 50~60분
* 지하철 1,4호선 금정역(6번 출구)에서 안양시내버스 15번을 타고 중앙도서관 하차
* 지하철 4호선 대야미역(1번 출구)에서 군포 100-1번<60~80분 간격>, 군포마을버스 1-2번<60
  분 간격>을 타고 납덕골 하차 → 수리사까지 도보 25분
* 지하철 1호선 의왕역 2번 출구 건너편 정류장에서 군포 100-1번 이용
* 승용차 (경내 밑에 주차장 있음)
  ① 군포 → 대야미역 → 갈치저수지 → 덕고개 → 납덕골 → 수리사 
  ② 수원/안산 → 반월동 → 반월호수 → 납덕골 → 수리사
*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329 (속달로 347-181, ☎ 031-438-1823)


 

♠  수리산 마무리 (대야동 시골길, 반월호수)

▲  수리산을 뒤로하며 (수리사입구 남쪽)

수리사를 둘러보고 임도5거리로 다시 나가려고 했으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반월호수로 길
을 잡았다. 수리사입구에서 임도5거리 방면 동쪽 산길 대신 남쪽 길을 쭉 내려가면 되는데 수
리사에서 호수까지 무려 4km를 걸어야 된다.

반월호수 방면 도로(속달로, 둔대로)는 잘 포장되어 있어 걷기는 좋다. 군포시가 서울과 안양
의 배후 도시로 20여 년 동안 크게 성장하여 시가지가 나날이 확장되고 있는데, 이로 인해 겉
으로 보이는 군포는 완전 시가지와 아파트만 있는 도시로 보인다. 허나 시내 서남부에는 산과
논, 밭, 숲이 전부인 시골도 여실히 남아있어 앞만 보고 달려가는 군포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대야동과 속달동 지역으로 이들이 군포의 시골로 남게 된 것은 수리산과 반월호수 덕분
이다. 그들이 이곳을 지킨 든든한 방패인 것이다.


▲  속달동 마을에서 바라본 수리산과 바다처럼 너른 하늘

▲  속달동 시골길(둔대로)

납덕골에서 이르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속달로'를 계속 고집하여 동남쪽으로 가면 갈치저
수지, 덕고개, 대야미 쪽으로 이어지며, 서남쪽 '둔대로'로 가면 반월호수로 이어진다. 둔대
로는 2차선 길에서 이내 조그만 시골길로 변신하여 우리를 인도한다.

가로수인 듯, 아닌 듯, 길가에 자리한 나무들은 슬슬 가을옷을 꺼내들고 있고, 길 주변에 펼
쳐진 논은 푸르게 익어 올해도 변함없이 풍년을 예감하고 있었다. 자고로 이런 시골길과 숲길
은 도시인들에게 청량제이자 꿀 같은 존재로 속세에서 상처받고 오염된 안구와 마음을 정화해
주기에 아주 좋다.


▲  벼들이 푸르게 익어가는 속달동 평야

▲  반월호수 북쪽 개울(반월천)

그림 같은 시골길(둔대로)을 걷느라 시간도, 지루함도 잠시 잊고 있으려니 다리 하나가 나온
다. 다리 밑 반월천에는 나들이객들이 개울 주변에 자리를 피고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어린
이들은 아직까지도 덤벼들고 있는 여름 제국(帝國)의 기운에 맞서고자 개울에 들어가 애궂은
물고기들에게 고통을 주거나 물놀이를 즐긴다. 그런 평화로운 모습을 바라보며 계속 가다보면
영동고속도로가 나오고 그 밑도리를 지나면 반월호수가 펼쳐진다.


▲  서쪽에서 바라본 반월호수(半月湖水, 반월저수지)

▲  북쪽에서 바라본 반월호수

반월저수지는 반월호수라고도 불린다. 안양/안산권의 이름난 호수 관광지로 1957년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조성된 오래된 호수이다. 총 저수량은 118.7만㎥로 만수 면적은 37ha에 이르며, 수리산(집예골, 샘골, 지방바위골)이 베푼 물을 먹고 자라 아주 단단히 물이 올랐다. 수리사
계곡도 바로 이곳으로 내려와 잠시 머문 다음 큰 세상으로 흘러간다.

호수는 농어촌공사 화성,수원지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호수가 산에 빙 둘러싸여 있어 주변
풍경이 제법 아름답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관광지로 손질되어 산책로와 공원이 닦였으며, 식
당과 분위기를 내세운 까페가 많이 들어서 이제는 수리산 못지 않은 군포시의 꿀단지가 되었
다.
호수 주변은 추석 연휴의 끝을 잡은 나들이 수요와 그들이 끌고 온 차량들로 완전히 시장통을
이루었다. 가족 단위 나들이객과 수리산에서 내려온 산꾼, 사진을 찍으려는 사진꾼들, 이곳으
로 밥이나 차, 커피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몰려들어 호수의 몸값을 더욱
높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호수는 특히 저녁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반월낙조(半月落照)라 하여 2004년에 군포
3경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또한 다른 호수도 마찬가지겠지만 새벽 물빛에 슬금 피어오르는 물
안개가 아주 장관이다.

▲  오늘도 평화로운 반월호수

▲  호수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매뭇새를 다듬는 산

◀  푸른 하늘과 구름도 잠시 길을 멈춘
반월호수


▲  호수 곁을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고속전철

호수 바로 서쪽에는 경부고속전철 고속선이 닦여있다. 그러다보니 수시로 고속열차(KTX)가 빛
을 가르며 순식간에 지나가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징하던지 호수가 쩌렁쩌렁 울리고, 귀신까
자빠트릴 정도이다. 호수를 거울로 삼은 존재들이 하늘과 구름, 산, 나무, 꽃에다가 고속전철
까지 참 다양하다.
이곳을 지나는 고속전철은 위로는 서울, 용산, 행신역, 아래로는 대전, 동대구, 포항, 부산,
마산, 진주, 익산, 광주송정, 목포, 여수까지 운행하며, 하루에 수백 차례 지나간다.


▲  호수에서 만난 서양 모화사상의 잔재, 풍차

호수 북쪽에는 산책로와 공원이 닦여져 있다. 그 산책로를 거닐다보면 천천히 바람개비를 돌리
고 있는 이색 정취의 풍차를 만나게 된다. 나무로 축소해서 만든 것으로 나름 어울리는 풍물시
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양 모화사상의 잔재이기도 하여 좀 씁쓸하기도 하다. 이 땅의 민중
과 18세기부터 함께한 물레방아를 두었으면 더 정감이 컸을텐데 말이다.

반월호수는 다 돌지는 못하고 1/4 정도만 돌았다. 시간도 이미 17시가 넘은 상태이고 배도 고
프기 때문이다. 호수는 이 정도면 충분히 본 것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미련을 버리고 군포마을
버스 1-2번을 타고 대야미로 이동, 대야미역에서 4호선 전철을 타고 오늘의 일정을 정리했다.
이렇게 하여 가을맞이 수리산, 반월호수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반월호수 찾아가기 (2018년 9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대야미역 1번 출구 밖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군포마을버스 1-2, 6-1번을 타고
  반월호수(둔터) 하차 <6-1번은 산본역 2,3번 출구 밖 정류장에서도 이용 가능>
* 승용차 (호수 주변에 주차장 있음)
① 안양,군포 → 대야미역 → 둔대초교 → 반월호수
② 안산,화성 → 반월 → 팔곡2교차로 → 반월호수
*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둔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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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8년 9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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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의 정석을 거닐다.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마실길~구름정원길 나들이 (백화사, 마실길 느티나무, 화의군 이영묘역, 폭포동계곡)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마실길~구름정원길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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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실길에서 만난 은행나무숲길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  마실길 느티나무

 


여름이 막 기지개를 켜던 6월의 첫 무렵,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북한산둘레길을 찾았다.
이번 둘레길 산책은 북한산성입구에서 시작하여 내시묘역길, 마실길, 화의군묘역, 구름
정원길 북쪽 구간을 거쳐 불광2동에서 그 끝을 맺었다.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곳이
지만 내 마음을 적지 않게 앗아간 곳 중 하나라 그 마음을 찾으러 다시 그들을 찾은 것
이다. 탐방밀도 1위(1㎢당 5만여 명)로 세계 기네스북에도 당당히 올라있는 북한산(삼각
산) 탐방객의 절반 정도가 둘레길 방문자라고 하니 그의 인기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진관동 구간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 입구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서울에서 가장 작은 초등학교인 북한산초교가 있다.
(거의 시골학교 분위기임)
 

북한산둘레길 10구간인 내시묘역길은 고양시 효자동(孝子洞) 공설묘지에서 진관동 방패교육대
에 이르는 3.5km의 산길이다. 북한천(北漢川)에 걸린 둘레교를 사이로 북쪽은 고양시, 남쪽은
서울 영역으로 평지와 야트막한 산길이 전부인 아주 착한 길이다. 전주이씨 서흥군파묘역, 경
천군 송금비, 경주이씨묘역, 여기소터, 백화사, 중골마을 느티나무 등의 조촐한 명소가 있으
며, 백화사 뒤쪽 산자락에는 천하 최대의 내시묘역이었던 이사문 공파(李似文 公派)의 묘역이
있었다. 바로 그 묘역 때문에 '내시묘역길'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그 묘역의 규모는 약 8,800평으로 45기의 조선 중~후기 무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오래된 묘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전관(承傳官)을 지낸 김충영(金忠英)의 무덤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대단한 곳이 있구나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묘역은 2012년 4월 귀신같이 사
라지고 말았다.

상황이 이리 된 것은 내시의 후손임을 껄끄럽게 여긴 후손들이 묘역을 파서 유골과 부장물을
챙기고 그 일대를 조경개발업자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백화사까지 포장길이 뚫리면서 땅값이
많이 오르자 팔았다고 전하며 후손들은 땅값으로 4억 8천만원을 만졌다고 한다. 유골은 화장
하여 납골당 등에 두었고 유물 또한 후손이 가져갔으나 무덤에 배치된 문인석 등의 무거운 석
물은 버려져 여기저기 흩어졌다. 얼마나 비밀리에 콩 볶듯이 했는지 동네 사람들과 백화사 승
려들도 묘역이 없어진 것을 뒤늦게서야 알았다고 한다.

이 땅 최대의 내시묘역으로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녔던 그곳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이제는
한낱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되었다. 진작에 국가 지정 사적이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했더라면
이런 무덤 대학살(?)은 막을 수 있었을텐데 후손들의 그릇된 생각과 문화재청과 서울시 철밥
통의 직무유기, 그리고 내시묘역에 대한 전반적인 무관심과 저평가가 낳은 비극이다.
이제 내시묘역도 없는 내시묘역길이 되었으니 그 이름도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이는 갈비탕
에 갈비가 빠졌음에도 갈비탕을 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적당하
다고 본다. 하지만 늘 그렇듯 북한산국립공원 철밥통들은 이름 변경도 귀찮다며 계속 수수방
관하고 있다.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에서 백화사 구간)
숲이 워낙 삼삼하여 햇살도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긴다.

▲  경천군 송금비 주변 내시묘역길
길 주변은 경주이씨 경천군파 문중 땅이라 양쪽에 철책과 나무 난간을 둘러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慶川君 李海龍 賜牌地 松禁碑)
- 서울시 지방기념물 35호

한산초교입구에서 내시묘역길을 따라 자연에 묻힌 민가를 여럿 지나면 울창한 숲속에 들어
서게 된다. 마치 자연휴양림에 들어선 듯, 키가 크고 늘씬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이로운
기운을 아낌없이 베풀어 속세에서 오염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그 한 폭의 그림 같은
오솔길을 거닐다보면 조그만 오래된 비석이 활짝 마중을 나오니 그가 바로 경천군 이해룡 사
패지 송금비이다. (줄여서 '경천군 송금비', '경천군 송금물침비'라 불림)

경천군은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서예가 겸 역관(譯官)으로 이름은 이해룡(李海龍)이다. 본관
은 경주(慶州),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으로 해서체(楷書體)를 잘 썼다고 하며 비
슷한 시대를 살았던 한호<韓濩, 한석봉(韓石峯)>에 필적하는 명필로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는 왜어(倭語)에 능숙해 1588년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사자관(寫字官)으로
왜열도에 갔다왔으며 많은 글씨를 그곳에 뿌리고 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역관으로 왜군과의 협상테이블에 참여해 화평교섭을 위해 노력했으
며 1595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가 되었고 1602년에 사섬시주부(簿)가 되었다.
선조(宣祖)는 왜군과의 교섭에서 큰 공로를 세운 것을 치하해 경천군에 봉했으며 지금의 백화
사 동쪽 일대의 땅을 하사했다.

광해군(光海君)은 1614년 사패지(賜牌地, 제왕
이 하사한 땅) 적당한 곳에 송금비를 세워주었
는데, 비문에는 큼지막하게 '慶川君 賜牌定界
內 松禁勿侵碑' 13자가 쓰여 있다. 그 내용은
경천군이 하사받은 땅에서 소나무를 벌목하거
나 무단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으로 뒷면에는
'만력(萬曆) 42년 갑인(甲寅) 10월'이라 쓰여
있어 1614년 10월에 세워졌음을 귀뜀해준다.

비석에 쓰여있는 송금(松禁)은 나라에서 필요
한 목재를 확보하고자 소나무가 많은 산을 선
정해 보호하는 것으로 고려 때 시행되었다.
이곳 송금비는 조선시대 임업 정책인 송금 정
책을 보여주는 산증인으로 400년이 넘는 나이
에도 무탈하게 잘 남아있으며 조선 임업사에서
꽤 중요한 유적이자 천하에서 딱 하나 밖에 없
는 존재로 가치가 높다.
이런 비가 2기가 있다고 하나 현재는 이곳만
전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숨바꼭질
중)

▲  조성시기가 쓰여진 송금비 뒷면

비석이 바라보는 방향을 보면 철책 사이로 잠겨진 문이 보일 것이다. 그 문을 열고 숲으로 살
짝 몸을 숨기면 이곳의 주인인 이해룡의 묘역을 만날 수 있는데 이들 묘역은 경주이씨 묘역이
라 불린다. (문이 늘 잠겨있으나 느슨한 경우가 종종 있어 순수한 의도로 살짝 들어가 살펴보
는 것도 괜찮을 듯 싶음)

고색의 때가 가득해 중후한 멋을 풍기는 비석 주위에는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의자들이 마련
되어 있다. 워낙 숲속이고 평일에는 인적도 드물어 바람의 소리와 새의 노랫소리가 이곳을 이
루는 소리의 전부이다. 둘레길이 닦이면서 비로소 그 존재를 속세에 내보인 존재로 둘레길이
아니었다면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북한산둘레길이 산자락에 숨겨진 많
은 명소를 속세로 꺼내주었음)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찾아가기 (2018년 8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과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중앙차
  로 정류장에서 704, 34번 시내버스를 타고 백화사 하차, 백화사 방면 둘레길을 따라 도보
  15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4번 출구) 롯데몰 정류장에서 704번, 건너편 2번 출구 정류장에서
  34, 8772번(토요일과 휴일에만 운행)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25


▲  경천군 송금비 주변

▲  경천군 송금비에서 백화사로 이어지는 내시묘역길
중간에 의상봉, 용출봉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  내시묘역길 중간에 자리한 백화사(白華寺)

경천군 송금비에서 6~7분 정도 가면 백화사란 조그만 절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중골마을의
동쪽 끝으로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못지나친다고 잠깐 살펴보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도 넉넉하다.

백화사는 1930년경에 지어진 비구니 절로 자세한 내력은 딱히 모르겠다. 조촐한 경내에는 종
무소(宗務所)의 역할을 겸하는 요사(寮舍)와 대웅전(大雄殿), 삼성각(三聖閣) 등 5~6동 정도
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옆에는 아주 도드라지게 새겨진 잘생긴 마애3존불이 있다.


▲  백화사 마애3존불

백화사 마애3존불은 바위 윗부분을 싹둑 다듬고 석가불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문수보살(文
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배치해 석가3존불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1960년대 이후에 조성된 것들로 그 조각수법이 뛰어나고 돋음새김으로 사실감있게 다
듬어 그들이 마치 내 앞에 나타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비록 숙성 기간이 적어 고색의 때
는 끼지도 못했지만 50년 이상 지나면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거뜬히 따
낼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 연꽃대좌(臺座)에 앉은 석가불은 선정인(禪定印)을 선보이며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
아있는데 꽤나 몸을 단련한듯, 어깨와 가슴이 매우 당당하다. 좌우 협시불은 시무외인으로 그
들 나름대로의 제스쳐를 취하고 있고, 3존불 모두 두광(頭光)을 가지고 있어 그들의 광명(光
明)을 표현한다.

* 백화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318-2 (의상봉길 70-7, ☎ 02-381-9103)


▲  백화사 삼성각(三聖閣)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과 산신,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이다. 창건 초기부터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이곳에 큼직한 대웅전이
들어앉아있고 삼성각은 마애불 뒤쪽으로 자리가 옮겨졌다.

▲  경내 남쪽에 자리한 돌탑
경주 첨성대(瞻星臺)와 비슷한 모습으로 가지각색의 돌이 협동심을 보이며
어엿한 돌탑을 이루었다.

▲  중골마을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0호

백화사를 지닌 중골마을은 산에 감싸인 산골마을로 여기소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잡고 있는데 높이 19m, 둘레 4.7m로 추정 나이
는 210년 정도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치가 165년~) 이 일대는 이사문 내시
집안이 살던 곳으로 그 후손이 심은 것으로 보이며 오늘도 마을에 시원한 그늘을 베풀어 자연
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다.


▲  여기소(汝其沼)터 표석

백화사 정류장에서 백화사로 가는 길목 초입에 여기소터 표석이 있다.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아련히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숙종 시절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크게 증축했을 때 지방 관리로 있다가 공사 현장에 파
견된 관리가 있었다.
그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기생은 그를 보고자 먼 길을 마다하고 여기까지 왔으나 공사 관계자
들이 만나지 못하게 했다. 하여 너무 열받은 나머지 이곳에 있던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하며 '너의 그 사람이 잠긴 못'이란 뜻에서 '여기소'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공사가 끝날 것을 뭐가 그리 급해서 섣부른 행동을 했을까? 옛말에도 급하면
돌아가라고 했거늘, 그 속담만 얌전히 지켰으면 해피 엔딩으로 끝났을텐데 말이다. 아마도 꽤
나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이후 기생의 한이 서린 연못은 매립되었고 그 자리에 표석을 두어 여기소의 흔적과 교훈을 아
련히 일깨운다.


▲  내시묘역길 남쪽 구간 (북한산 글램핑장 주변)
내시묘역길도 그렇고 북한산둘레길은 민가와 농장, 경작지, 개인 토지를
이리저리 피해가느라 우리네 인생처럼 굴곡이 좀 크다.

▲  내시묘역길의 남쪽 끝을 잡다 (방패교육대 직전)


 

♠  북한산둘레길 9구간, 마실길

▲  마실길 북쪽 시작점을 지나다~

내시묘역이 없는 내시묘역길은 여기서 마실길로 간판을 바꾸어 달린다. 방패교육대에서 진관
생태다리까지 이어지는 1.5km 구간으로 완전 평지 수준이고 북한산둘레길 구간 중 가장 짧고
편한 길로 살랑살랑 거닐기에 아주 좋다. 하여 마실길이라 불린다.
이 코스에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숲길, 삼천사계곡, 진관사계곡, 숙용심씨묘표, 영산
군묘역, 화의군묘역, 진관동 느티나무 등의 명소가 있어 짧은 거리에 비해 볼거리가 아주 풍
부하며 진관사(津寬寺)와 삼천사(三千寺)도 아주 가까워 답사 코스로 아주 안성맞춤이다.


▲  진관천 옆구리를 지나는 벼랑길 (마실길)

마실길을 들어서면 진관천 벼랑에 닦여진 나무데크길이 나온다. 깎아지른 벼랑에 잔도(棧道)
처럼 길을 낸 것으로 동쪽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벼랑이, 서쪽은 진관천이 삼
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물을 모두 머금으며 창릉천으로 흘러간다.
예전에는 피서의 성지로 여름마다 북새통을 이루었으나 서쪽에 연서로가 닦이면서 풍경이 조
금 깎여지고 지나는 차량의 소음도 적지 않아 요즘에는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중/상류로
많이 넘어갔다.


▲  삐죽 고개를 내민 바위로 약간 구부러진 계곡 벼랑길

▲  식당을 지나 삼천사계곡을 건너는 마실길

진관천 벼랑을 통과한 마실길은 삼천사입구에 이른다.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
(磨崖佛)을 지닌 오래된 절로 그곳이 땡기면 잠시 둘레길을 놓아두고 갔다와도 상관없다. (20
분 정도 걸림)
삼천사입구에서 삼천사계곡 구간에는 농장과 식당이 여럿 있는데 그들을 지나 삼천사계곡을 건
너야 다음 코스로 진행이 된다. 평일에는 썰렁하지만 휴일에는 맛있는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
여 그 유혹을 무시하기가 어렵다. 어찌 식당 앞도 아니고 한복판을 지나가게 했는지는 모르지
만 주변에 마땅한 길이 없어 기존 길을 활용한 모양이다.


▲  마실길 돌탑 구간

삼천사계곡을 건너면 'S'자로 살짝 구부러진 길이 나오고 길 왼편으로 비슷하게 생긴 돌탑 4
형제가 마중을 한다. 이들 돌탑은 둘레길을 닦으면서 수식용으로 지어진 것으로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 둘레길을 아기자기하게 꾸며준다.


▲  나란히 자리한 돌탑 4형제

▲  마실길의 오랜 터줏대감,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1호

돌탑을 지나면 울창한 모습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나그네의 두 눈을 단단히 동여맨다. 동화 속
푸른 언덕이나 초원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나무로 나이가 약 170년에 이른다.
자꾸만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높이 18m, 둘레 4.2m에 큰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위치는 진관동 132-20번지로 북한산둘레길이 생기기 이전에는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해 찾는 이는 거의 없었다. 삼천사와 진관사를 수없이 들락거린 나 조
차도 둘레길의 안내로 2012년 이후에나 그를 만났으니 앞서 경천군 송금비와 더불어 둘레길이
캐준 소중한 보물이다.


▲  느티나무 주변 풍경

▲  은행나무숲길 옆에 닦여진 돌탑들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숲과 돌탑이 나란히 있으니 마치 신성한 어딘가로
들어서는 기분이다.

▲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은행나무숲길 (왼쪽은 늦봄, 오른쪽은 여름)

마실길에서 가장 으뜸인 곳이자 북한산둘레길 서쪽 구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바로 170
년 묵은 느티나무와 그 옆에 자리한 은행나무숲길을 꼽고 싶다. (솔직히 둘레길 주변에서 이
보다 아름다운 풍경은 별로 없었음)
수목원이나 휴양림의 그림 같은 숲속길이나 산책로를 거니는 듯한 즐거운 기분이 드는 곳으로
느티나무 주변을 곱게 손질하고 나무와 꽃을 많이 심어 마실의 기분을 진하게 들게 했다. 게
다가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로 조촐하게 은행나무숲길을 내면서 전남 담양의 명물, 메타세콰
이어 가로수길에 못지 않은 맵시를 자랑한다. 
산책로 주변에는 쉬어갈 수 있는 의자가 여럿 있다. 굳이 의자가 아니더라도 돗자리를 가져와
은행나무 그늘이나 주변에 깔고 간식을 먹으며 수다 몇 송이를 피우면 정말 소풍이 따로 없을
것이다.

은행나무숲길은 북한산둘레길이 지나는 명소 가운데 가장 내 마음을 홀린 곳으로 집으로 훔쳐
와 나 혼자서 두고두고 보고 또 보고 누리고 싶다. 이런 곳에서는 정말 옛 사람들처럼 시 1수
읊어줘야 운치가 나거늘, 시적(詩的) 감각이 떨어지고 인간의 하찮은 말과 언어로 자연의 아
름다움을 표현하고 희롱한다는 것이 실례가 되는 일인듯 싶어 그저 탄성만 질렀다.


▲  봄과 여름, 가을이 앞다투어 머물다 가는 은행나무숲의 위엄
겨울은 그 시샘이 더 높아 아예 은행나무의 옷을 다 벗겨가 버린다.


 

♠  화의군 이영 묘역과 구름정원길

▲  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 묘역 - 서울 지방기념물 24호

은행나무숲에서 진관사계곡을 건너 계단을 오르면 진관사로 인도하는 도로(진관길)가 나온다.
여기서 동쪽은 진관사로, 서쪽은 은평한옥마을로 이어지며 마실길은 바로 서쪽에 있는 3거리
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3거리 서남쪽에 오래된 느티나무 4형제가 있음) 그리고 바로 정
면에 있는 산자락에 무덤들이 여럿 눈에 보일 것인데 그들은 영산군 이전(寧山君 李恮) 묘역
이다. (영산군 묘역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함)

서쪽 3거리에서 은평한옥마을 동부를 가르는 마실길(연서로48길)을 따라가 진관생태다리를 지
나서 동쪽 산자락에 홍살문과 사당이 있다. 그리고 그 뒤로 무덤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화
의군 묘역이다.

화의군(和義君, 1425~?)은 세종의 9번째 아들로 이름은 이영(李瓔), 자는 양지(良之)이며 생
모는 영빈 강씨(令嬪 姜氏)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매우 좋아해 매일 책에 파묻혀 살았다고 하며, 초서(草書)와 예서(禮
書)에 쓸데없이 능했다. 또한 이미 6살에 한시(漢詩)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人生斯世 忠孝爲大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충효가 크다 하니
忠能保國 孝能匡世 
 충성으로 나라를 보전할 수 있고 효도로써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

1433년에 화의군에 봉해졌고 1436년 11살의 어린 나이로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했다. 1441년
에는 사춘기 시절의 호기심 때문인지 이복형인 임영대군(
臨瀛大君)과 함께 여염집 여자를 남
장을 시켜 궁 안으로 납치해 온 적이 있었는데 그만 부왕(父王)인 세종에게 들켜 된통 혼이
났다. 그 벌로 그에게 주어진 화의군의 직첩(職牒)과 과전(科田)이 몰수되었다.
허나 1447년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으며, 얼마 뒤, 남의 기첩(妓妾)을 가로챈 일로 직첩이 또
몰수되었다. 그러다가 맏형(문종)이 재위에 오른 1450년에 다시 환원되었다.

화의군은 누이동생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더불어 훈민정음에 제법 조예가 깊었는데 정음청
(正音廳)에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 프로젝트에 참
여하였고, 평소 친분이 있던 박팽년의 매부 박중손(朴仲孫)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세 아들을
두었다.
1455년 2째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를 밀어내고 재위에 오른 이후, 4째 형인 금성대
군(錦城大君)을 비롯한 60여 명의 무인과 활쏘기 사냥을 나갔다가 대간(臺諫)들로부터 탄핵을
받아 변경으로 귀양 갔다가 그 이듬해 풀려났다. 그리고 성삼문과 박팽년, 유응부(兪應孚) 등
이 단종(端宗) 복위를 꾀하다 걸려들자, 세조는 화의군에게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는가?' 물었는데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잘못하면 자신까지 화를 당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1457년, 순흥(順興, 경북 영주시 순흥면)으로 귀양간 금성대군과 단종 복위를 몰래 꾀하였고
영월로 유배간 단종이 결국 사사(賜死)되자 복위에 가담한 죄로 충청도 금산(錦山)으로 유배
되었다. 이때 그에게 주어진 모든 관직과 왕족의 특권, 재산이 싹 몰수되었으며, 그의 이름과
자손들의 이름은 왕실 종친록(宗親錄)에서 제명되는 치욕을 맞는다.
그가 금산으로 유배된 이후, 그의 인생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다.
① 1460년 단종 복위 사건으로 사사(賜死)되었다는 것, (화의군 묘역 안내문, 화의군파 족보,
   은평문화원에서 편찬한 '은평구의 문화유산')
② 거의 60~70세까지 유배지에서 살다가 와석종신(臥席終身) 했다는 것. (조선왕조실록..)

화의군이 죽은 이후, 그의 세 아들과 자손들은 죄인의 신분으로 고통스럽게 살아오다가 성종
시절에 들어와 세조의 부인이자 화의군의 형수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의 지시로 도성(都
城) 밖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중종 시절에는 화의군의 손자 이윤(李允)의 상언(上言)에 따라
복관(復官)되면서 신분이 회복되는 한편, 종친록에 다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1552년에는 금산에 있던 화의군의 묘소를 현재 위치인 양주(楊州) 땅 신혈리(新穴里, 현 서울
진관동)로 이장했으며, 1736년 영조(英祖)는 그에게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1791년에 영월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만들 때 단종에 대한 충절이 인정되어 그 제단
에 배향되었다.
 
화의군 묘역에는 그의 차자(次子)인
'여성군 번(驪城君 轓)', 3자인 '금난수 식(金蘭守 軾)',
증손자인 '태산군 황(泰山君 凰)'의 묘가 있으며, 묘역 밑에 충경사
(忠景祠)란 사당을 세워
화의군 부부와 그의 생모의 신위(神位)를 봉안했다. 또한 그 주변에는 화의군의 후손들이 살
고 있었는데 은평뉴타운 개발의 칼질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묘역 주변에는 충경사 사당
과 재실(齋室)만 남게 되었다.

화의군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조선 왕족의 하나로 단종 복위운동에도 참여했었고 훈
민정음 프로젝트에도 크게 활약하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던 인물이다. 물론 여자를 너무
밝혀 남의 여자를 마구 건드렸던 진상은 좀 있었지만...
그의 우울했던 인생 만큼이나 그의 묘역 또한 긴 세월을 비지정문화재의 영욕을 간직하며 지
내오다가 2005년 말에서야 뒤늦게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면서 팔자가 조금은 펴졌다.

▲  묘역 서쪽에 자리한 화의군 신도비
(神道碑)

▲  화의군 사당인 충경사와 붉은 피부의
홍살문


충경사 앞에는 성역(聖域)을 표시하는 홍살문이 차가운 인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홍살문
과 충경사의 배치가 일직선으로 되어 있지 않고 조금은 북쪽으로 삐뚤어져 있다. 둘의 방향이
일치해야 좀 안정감있게 보이는데 말이다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 충경사와 홍살문은 1970년 이후에 지어졌으며 사당 남쪽 언덕에 화의군
의 묘역이 자리해 있다.


▲  화의군 묘역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묘역 주변은 잘 익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운치를 자아낸다. 묘역 주변은 묘역 보호를 위
해 사람 키보다 높게 철책을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묘역으로 인도하는 문은 충경사
뒤쪽에 있는데 늘 굳게 잠겨져 있어 철책 너머로 보던가, 중간중간 보이는 허술한 곳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던가 해야된다. 허나 철책 밖에서도 보일 만큼 보이니 괜히 무리는 하지 말자.


▲  서북쪽을 바라보고 선 화의군 묘역

▲  곡장을 병풍처럼 두른 화의군 묘와 그의 아들인 금난수 식의 무덤

화의군묘는 일반 사대부(士大夫)의 무덤처럼 조촐한 크기로 곡장을 봉분(封墳) 뒤쪽에 병풍처
럼 둘러 무덤의 품격을 조금 높였다. 무덤 앞에는 상석(床石)과 묘표, 장명등이 있고 그 양쪽
으로 문인석 1쌍과 근래에 지은 무인석(武人石) 1쌍이 나란히 무덤을 지킨다. 게다가 근래에
봉분 밑도리에 엉뚱하게도 12지신상을 두룬 호석(護石)을 둘러 서로가 너무 어색한 조화를 보
인다.
봉분에 비해 호석을 너무 크게 둘러 근래에 지어진 무덤처럼 요상한 모습이 되었으며, 12지신
상의 모습도 지금 당장이라도 산으로 뛰어갈 것 같은 생동감 있는 모습이라 다들 산만해 보여
오히려 없는 것보다 못한 것 같다. 물론 무덤에 대한 후손들의 지극정성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으나 그 정성이 너무 지나쳐 조선 초기 무덤을 20세기 무덤으로 품격을 떨어뜨렸다.
문화재로 지정된 무덤은 크게 망가지지 않은 이상은 초창기의 모습을 지켜주는 것이 무덤 주
인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무덤을 너무 기존의 모습과 다르게 치장해버리면 무덤 주인이
잠시 마실갔다가 자신의 무덤도 찾지 못하고 헤매지 않겠는가?

※ 화의군 이영 묘역 찾아가기 (2018년 8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 가변차로 정류장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중앙차
  로 정류장에서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푸르지오 521동 정류장에서 하차 (701, 7211번을 타
  는 것이 더 빠름) 정류장 남쪽에 자리한 제각말아파트교차로에서 동쪽 길(연서로48길)을 3
  분 정도 가면 오른쪽(남쪽)에 화의군 묘역이 있다.
* 지하철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701, 704번(구파발역 경유), 가변
  차로 정류장에서 7211번을 타고 푸르지오 521동 정류장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44 (연서로48길 22)


▲  화의군묘역 인근 구름정원길에서 만난 주인 잃은 비좌(碑座)

화의군 묘역 남쪽에 북한산(삼각산)과 조선시대 최대의 공동묘지였던 이말산(莉茉山)을 이어
주는 진관생태다리가 있다. (밑에 터널을 두고 그 위에 산줄기를 만듬) 여기서부터 잠시나마
정들었던 마실길은 막을 내리고 북한산둘레길 8구간인 구름정원길로 이름이 갈린다.

구름정원길은 진관생태다리에서 북한산생태공원 상단까지 4.9km 거리이다. 옛 기자촌터 뒤쪽
으로 구름정원이란 이름이 참 어여쁜데 그 이름 그대로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구름과 조금
이나마 가까워지는 구간으로 평지 일색의 마실길과는 완전 차원이 틀려 마실길에 적응된 몸이
조금 괴로워함을 느낄 것이다.

진관생태다리에서 10분 이상 올라야 비로소 옛 기자촌 뒷쪽 산능선에 이르는데, 길 중간에 주
인을 잃은 비좌와 동자석 등을 여럿 만날 수 있다. 허나 대부분 속인들은 둘레길에 눈이 멀어
그들을 지나치고 만다. 이곳을 비롯하여 이말산과 내시묘역길 주변에는 왕족과 사대부, 상궁,
내시들의 무덤이 즐비하며 이 비좌와 동자석도 그들 무덤에 세워진 것들이다.
그러다가 자연재해로 묘가 사라지고 비석 또한 파괴되어 이렇게 비석의 아랫도리인 비좌만 간
신히 남아 햇볕을 보고 있다. 이 비좌의 주인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분명 주변을 싹 뒤
집어 엎으면 유력한 단서가 나올 듯 싶은데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 이상 비좌와 동자석의 주
인을 찾는 시도는 없을 듯 싶다.


▲  기자촌 지킴터에서 바라본 향로봉

▲  기자촌 지킴터에서 바라본 북한산 서쪽 줄기와 은평구 동부 지역

기자촌지킴터에 이르면 동쪽으로 북한산(삼각산) 향로봉, 남쪽으로 은평구 동부 지역, 서쪽으
로는 개발의 칼질로 거의 허허벌판이 된 옛 기자촌이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기자들의 생활
터전으로 제공했다고 하는 기자촌(記者村)은 서울 지역 달동네의 상징으로 쇠락된 것을 2008
년 이후 모조리 갈아엎었다.
이곳도 은평뉴타운 개발지의 일부로 현재는 근린공원이 닦여져 있다. 기왕 이렇게 밀어버린거
후회가 없게끔 잘 다듬었으면 좋겠고, 진관동 일대에 대한 개발의 난도질도 이곳에서 그만 멈
췄으면 좋겠다.


▲  구름정원길 중간인 폭포동 선림사 주변 계곡

기자촌지킴터에서 약 15분 정도 가면 기자촌 남쪽인 폭포동 선림사(禪林寺)에 이른다. 폭포동
(瀑布洞)이란 이름은 금지된 구역으로 묶인 산 위쪽 바위에 있는 폭포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
소에는 보기 힘들며 비가 많이 온 날과 그 이후에만 잠깐씩 만날 수 있는 특별한 폭포이다. 

이곳은 숲이 삼삼하고 계곡은 작으나 맑은 물이 흐르고 반석과 바위가 많아 피서를 즐기기에
적당한 곳이다. 여기서 아파트가 보이는 서쪽 산길로 내려가면 바로 은평뉴타운의 동남쪽 끝
인 폭포동 힐스테이트아파트이다. 이 아파트는 완전 산속에 묻힌 아파트단지로 교통이 썩 좋
지는 못해 버스를 타려면 도보 10분 거리인 은평경찰서까지 걸어나가야 된다.


▲  하얀 피부의 반석 사이로 물이 졸졸 흐르는 폭포동 계곡

▲  폭포동 계곡에서 만난 어느 문인석과 망주석(望柱石)

이들은 인근 산자락에 있다가 사라진 사대부묘에서 수습된 것으로 여겨진다. 홀(忽)을 쥐어든
문인석은 근심이 있는 표정으로 눈을 살짝 감으며 상념에 잠겨 있고, 오른쪽 망주석에는 꼬랑
지가 긴 세호(혹은 다람쥐)로 보이는 동물이 두드러지게 새겨져 있다.


▲  폭포동에서 불광2동으로 넘어가는 구름정원길 (선림사 뒷쪽)

▲  선림사 남쪽 구름정원길

북한산성입구에서 시작된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선림사 남쪽 불광2동에서 쿨하게 마무리 지
었다. 햇님의 퇴근시간이 임박했고 이른 무더위와 장거리 도보로 적지않게 지쳤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날 목적한 곳을 다 살펴보았으니 나름 뿌듯하며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자주는 아니어도 이렇게 종종 찾을 수 있어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북한산둘레길 산책은 흔쾌히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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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구의 지붕을 거닐다. 개화산 둘러보기 ~~~ (능말 은행나무, 풍산심씨 문정공파묘역, 개화산둘레길, 약사사와 석불입상)



' 서울 강서구의 지붕을 거닐다. 개화산 나들이 (약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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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사사 3층석탑
◀ 풍산심씨 심사손 묘
▶ 약사사 석불입상
▼ 개화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여름이 봄을 밀어내고 천하를 한참 삼키던 6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강서구의 상큼한
뒷동산인 개화산을 찾았다.
개화산은 서울 서쪽 끝에 자리한 산으로 서울 북쪽 끝으머리에 매달린 우리집(도봉동)에
서 꽤 먼 곳이다. 비록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지만 서로가 끝과 끝이라 거리도 거의 40
km,
지하철로 가도 족히 1시간 반은 걸려 그곳에 가기도 전에 지쳐 쓰러질 지경이다. 그
러다보니 개화산을 비롯한 강서/양천 지역은 발이 잘안가게 된다.


개화산(開花山, 128m)은 개화동(開花洞)과 방화동(傍花洞)에 걸쳐있는 뫼로 거의 평지로
이루어진 강서구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산은 작고 야트막하지만 평지 속에 솟아있는 존
재라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일품이며 산세도 느긋하고 숲도 매우 무성하여 풍경도 아
름답다. 산 동북쪽에는 꿩고개라 불리는 치현산(雉峴山)이 이어져있고, 북쪽에는 한강과
5호선 방화차량기지, 서쪽은 김포평야(金浦平野), 남쪽에는 방화동과 김포국제공항이 있
다.

개화산의 첫 이름은 주룡산(駐龍山)이었다고 전한다. 신라 때 주룡(駐龍)이란 도인(道人
)이 살고 있었는데, 매년 9월 9일 친구(또는 동자)들을 데리고 정상에 올라가 술을 마셨
다. 이것을 '9일용산음(九日龍山飮, 9월 9일마다 주룡산에서 술을 마심~)'이라 불렀는데
그가 세상을 뜨자 9월 9일마다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이상한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또
는 그가 죽은 자리에서 꽃이 피어났다고 함)
그래서 그 터에 절을 세우니 그곳이 꽃이 열린다는 뜻의 개화사(開花寺, 현 약사사)이며,
개화사가 있는 산이라 하여 개화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한다. 또한 주룡 설화 외에
도 산의 모습이 꽃이 피는 형국이라 하여 개화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불을 피운다는 뜻의 개화산
(開火山), 봉화뚝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그리고
양천읍지(陽川邑誌)에는 개화산이 코끼리, 개화산과 마주보고 있는 한강 북쪽 행
주산(幸州山, 덕양산)이 사자의 형상으로 이들이 서해바다에서 들어오는 액운을 막고 서
울에서 흘러나가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
(獅象之形)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겉모습은 작지만 속은 알찬 개화산에는 괘 많은 명소가 안겨져 있는데 오래된 석
탑과 석불을 간직한 약사사를 비롯해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미타사 석불입상, 호국충
혼위령비, 방화근린공원, 신선바위, 능말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봉수대터, 봉수대, 상사
마을 은행나무 등이 있으며 약수터도 많이 있었으나 그 수가 계속 줄어 이곳의 제일가는
물이었던 약사사 약수터가 2013년 봄에 숨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또한 산 허리에는 강서둘레길 1코스인 개화산숲길(개화산 둘레길 3.35km)이 닦으면서 조
망이 괜찮은 곳에 전망대(개화산, 아라뱃길, 신선바위)를 설치하여 눈을 심심치 않게 해
준다. 다만 군부대가 정상과 북쪽 자락에 있어 정상에는 발을 들일 수 없다.

본글에서는 능말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를 시작으로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약사사를 살
펴보도록 하겠다.


 

♠  옛 능말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  은행나무(서울시 보호수 16-3호)와 느티나무(서울시 보호수 16-6호)

개화산에 안기기 바로 직전에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존재들이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들은
오래 숙성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형제로 삼정초교 남쪽에 작게 터를 닦은 느티어린이공원(이
하 느티공원)에 자리해 있는데 나는 약사사와 미타사, 풍산심씨 심정공파 묘역, 강서둘레길에
만 눈이 어두웠지 그들 고목(古木)의 존재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번 나들이가 나에게 준 커다란 선물인 이들 나무는 공원 남쪽에 삼삼하게 우거져 공원 전체
에 그늘을 드리우며 무더위를 제대로 긴장 타게 한다. 그들 가운데
몸통이 큰 동쪽 나무 2그
루가 서울시 보호수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서쪽 나무 2그루는 그들의 후손임)
가장 둘레가 큰 나무는 은행나무로 높이 11m, 둘레가 4.44m에 이른다. 그가 보호수로 지정된
시기는 1972년 10월 12일로 그때 추정 나이가 435년이라고 하니 그새 40여 년의 세월이 강제
로 얹혀져 지금은 480년 정도 된다. 그 옆의 느티나무는 여기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존재로
높이 17m, 둘레 3.86m이다. 1974년 4월 20일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때 추정 나이가 480년
이라 지금은 520년 정도 되었다.

이들은 솔직히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이는데, 아직까지 말
단 보호수에 머물러 있다. 우리집과 가까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도 천연기념물로 아무 손
색이 없거늘, 오랫동안 보호수로 있다가 2013년 봄에서야 겨우 지방기념물로 승진된 바 있고,
반면 가치는 좀 떨어져 보이는데 외람되게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나무들도 적지 않아 도대체 무슨 기준인지 의문을 내던지게 한다.
허나 이들이 인간들이 멋대로 정한 잣대에 관심이나 있을까? 보호수이든 천연기념물이든 그런
것은 관심 밖일 것이다. 올해도 무탈히 잎을 피우고 길손들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정자나무로
서의 소소한 역할에 만족하며 살아갈 것이다. 나무는 신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인간이 아니다.

이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에 활약했던 심정(沈貞)이 심은 것으
로 전해진다. 중종(中宗) 시절에 심정 일가가 이곳에 정착해 자연마을을 이루었는데, 심씨의
집성촌(集姓村)으로 심씨마을<또는 심울(沈蔚)이라 했음>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정곡리, 긴동
리와 함께 옛 방화동을 이루던 마을로 인조 시절에 왕의 생부(生父)인
정원군<定遠君, 1632년
인조에 의해 원종(元宗)으로 추존됨>의 능을 양주에서 이곳으로 옮기려다가 터가 좁아서 김포
풍무동으로 옮겼는데 그 연유로
능(陵)이 들어가는 능말(또는 능골, 능리)로 불리게 되었다.

1992년 능말 주변에 개발의 칼질이 가해지면서 마을은 강제로 사라졌고, 주민 대부분은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 자리에는 방화택지지구가 들어서 성냥갑 아파트와 건물이 잔뜩 심어
지면서 전원(田園) 분위기는 많이 녹아내렸으나 다행히 이들 나무는 개발의 칼질도 쏙 피해가
면서 제자리를 지켜 옛 능말의 추억을 아련히 되새기게 해준다. 만약 보호수 등급이 아니었다
면 아무리 몇백 년 묵은 나무라고 해도 진작에 아작이 났을 것이다. 그것이 이 땅의 천박한
개발주의의 현실이다.


▲  느티공원 놀이터에서 바라본 은행나무와 느티나무의 위엄

능말의 정자나무이자 당산나무였던 이들 나무 형제는 낯선 이들로 이루어진 방화지구의 정자
나무가 되었다. 나무는 4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 외에는 거의 그대로지만 주변이 싹
낯설게 변해 나무 자신도 가끔 놀랄 것이다. 이제 그들이 옛 능말의 유일한 흔적인 것이다.
개발의 칼질로 고향을 떠난 이들은 능우회(陵友會)란 모임을 결성했는데, 1992년 10월 17일에
그들의 수구초심(首丘初心)이 담긴 '애향(愛鄕) 능말 옛터' 비석을 나무 그늘에 세워 추억 속
으로 사라진 옛 고향을 그리워한다.

* 느티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 799


▲  개화산약수터

티공원에서 서쪽으로 가면 바로 숲내음이 진동하는 개화산이다. 여기서 북쪽 길로 가면 문
정공파 묘역의 시조(始祖)인 심정 묘역이 나오고, 정면으로 보이는 서쪽 산길을 3분 정도 오
르면 개화산약수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방화역을 나올 때 마신 커피음료가 목구멍에서 채 마르기도 전이지만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
냥 못지나치듯 샘터를 보면 꼭 물을 한모금 마셔야 발길이 떨어진다. 그래서 졸고 있는 파란
바가지를 깨워 물을 담아 마시니 확실히 자연산이 더 좋은 것인지 앞서 마신 음료보다 더 시
원하고 달달하다. 아직 수질은 적합 판정을 받고 있지만 약사사 약수터를 비롯해 개화산에 적
지 않은 약수터가 개발의 칼질에 목이 달아난 상태라 이곳의 미래도 나처럼 장담하기가 어렵
다 부디 다음에 올 때도 이곳의 물을 꼭 마셔야 되는데, 아무쪼록 무탈하기를 기원해 본다.

산길 옆에는 조그만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자연 그대로 두지 않고 계곡 양쪽에 시멘트을 발
라 둑처럼 만들면서 아주 심하게 옥의 티를 선사하고 있다. 그래도 엄연한 산골인데 돌에 걸
터앉아 발을 담굴 수 있게 해줘야 진정한 계곡이 아닐까 싶다.


▲  개화산약수터 주변 오솔길


 

♠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豊山沈氏 文靖公派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7호

▲  심정(沈貞) 묘역

개화산 동쪽 자락에는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이하 문정공파 묘역)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
들 묘역은 심정을 시작으로 그 자손들 50~60여 기의 묘로 이루어져 있는데 1~2곳에 뭉쳐있는
것이 아니라 산자락 곳곳에 흩어져 있다. (주로 방원중교에서 약사사로 올라가는 금낭화로17
길 주변과 삼정초교 서쪽 산자락에 있음)
이들 무덤 중 심정과 심사손, 심사순, 심수경(沈守慶) 묘역과 그에 딸린 석물, 신도비가 지방
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나머지는 아님) 개화산을 주산(主山)으로 한 명당자리로 명
성이 자자하다.


정공파 묘역의 시조는 심정이다. 그를 시작으로 그의 아들과 손자, 후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묻혔기 때문이다. 허나 먼저 묻힌 이는 심정의 아들인 심사손
이다. (심정은 1532년, 심
사손은 1528년에 사망)
심정의 묘역은 문정공파 묘역에서 가장 동쪽에 자리해 있는데, 삼정초교 바로 뒤쪽(서쪽)이다.
이곳에 가려면 느티공원에서 개화산으로 들어서자마자 북쪽 언덕 길로 가면 되는데 심정 쉼터
를 지나 오른쪽을 유심히 보면 샛길이 보인다. 그 길로 들어서면 심정과 심사순의 묘역이 모
습을 드러낸다.

심정(1471~1531)은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으로 아버지는 적개공신(敵愾功臣)
이던 심응(沈膺)이며, 어머니는 서문한(徐文翰)의 딸이다.
1495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고, 1502년 별과(別科)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1503년 수찬(修撰)이 되었다. 1506년 연산군(燕山君)에게 불만을 품은 박원종(朴元宗), 성희
안(成希顔) 등에게 붙어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가했으며,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3
등에 녹훈(錄勳)되고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졌다.

1507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으며, 귀국하여 남
곤(南袞), 김극성(金克成) 등과 짜고 김공저(金公著)와 조광보(趙光輔)를 제거하고자 옥사(獄
事)를 벌이지만 실패했다.
1509년 성천부사(成川府使) 등을 지냈고, 1515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승진했으나 삼사(三司
)의 태클에 물러나고 만다. 1518년 형조판서(刑曹判書) 후보에 올랐으나 조광조(趙光祖)를 중
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공격을 받아 소인(小人)으로 찍혔고 이조판서이던 안당(安瑭)의
거부까지 겹쳐 결국 떨려나고 만다.

이후 심정은 집과 가까운 가양동(加陽洞) 한강변에 자신의 호를 딴 소요정을 짓고 울분을 달
래다가 아들 심사손까지 사림파의 탄핵으로 파직되자 사림패거리에 대한 원망이 아주 머리 끝
까지 치솟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는 일, 그는 머리가
좋고 꾀를 잘 내어 주변으로부터 지혜주머니라 불렸는데, 이때부터 그 주머니가 복수의 칼날
을 위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1519년 조광조가 왕에게 중종반정 공신들의 위훈(偉勳) 삭제를 청하면서 훈구파(勳舊派)를 건
드렸다. 이때 심정도 정국공신 자격을 삭탈당했는데 훈구파는 물론 왕의 후궁들까지 조광조에
게 치를 떨게 된다. 바로 이때다 싶어 중종의 후궁인 경빈박씨(敬嬪朴氏)와 짜고 조씨전국<趙
氏專國 : 조씨(조광조)가 나라를 마음대로 한다>이란 말을 궁중에 퍼트려 왕을 홀리게 했다.
조광조와 조금 거리를 두던 중종은 그 말에 넘어가고, 훈구파의 주요 인물인 남곤, 홍경주(洪
景舟)와 연합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사림패거리를 죄다 아작을 내버렸다. 사림의 핵
심인 조광조와 김식(金湜)은 쓰디쓴 사약을 먹여 영원히 보냄으로써 피맺힌 원한을 아주 속시
원하게 푼 것이다.

이후 남곤과 함께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라 그와 사이좋게 국정을 장악했으며, 1527년 남곤이
죽자 좌의정(左議政) 및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에 올라 이항(李沆), 김극핍(金克愊)을 수하
에 두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세자<나중에 인종(仁宗)>의 인척 관계자이자 라이벌이던
이조판서 김안로(金安老)를 귀양 보내 제거하려고 했다.
허나 경빈박씨의 동궁(세자) 저주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심정이 관련된 사실이 드러나면
서 심정은 일대 위기를 맞게 된다. 김안로는 이때다 싶어 대사헌 김근사(金謹思), 대사간 권
예(權輗)를 구워삶아 심정을 탄핵했으며, 중종의 명으로 평안도 강서군(江西郡)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김안로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심정의 부하인 이항과 김극핍까지 엮어
신묘삼간(辛卯三奸, 1531년)으로 내몰면서 끝내 사약을 마시고 죽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 딱
60이었다.

심정의 시신은 그의 일가 뒷쪽 개화산에 묻혔으며, 1534년 부인이 합장되었다. 이후 김안로가
죽자 문정공(文靖公)이란 시호를 받으니, 그 연유로 그의 묘역이 문정공파 묘역이 된 것이다.
시호는 받았지만 명종(明宗) 이후 권력의 핵심에 서서 훈구파 못지 않게 파행을 일삼은 사림
파에게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기묘사화로 사림파를 제대로 절단낸 경력 때문이다. 그들은 남
곤과 심정을 한데 엮어 곤정(袞貞)이라 부르며 소인배의 대명사로 손가락질했고, 그것은 지금
까지 전해져 심정하면 개혁을 꿈꾸던 사림을 아작낸 기묘사화의 원흉, 지나친 권력의 화신 등
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생각나게 만든다. (나도 그렇음)

심정은 권력욕이 대단하고 자신의 지혜를 과신해 많은 무리수를 두었으며, 끝내 그 무리수로
스스로를 말아먹게 된다. 허나 다행히도 그와 아들 심사순 정도만 권력싸움에 패해 불명예스
럽게 퇴장했을 뿐, 그의 자손들까지 화는 미치지 않았으며, 아들 심사손과 손자 심수경은 많
은 공적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형제간의 우의가 대단해 곤경에 처한 동생 심의(沈義)를 끝까
지 살펴주었으며, 형제와 가족을 잘 챙겨주었다.

심정의 묘역은 부인(하양허씨)과 합장된 봉분(封墳) 1기와 묘비<묘갈(墓碣)>, 상석(床石), 문
인석 2기가 전부인 조촐한 모습으로 신도비는 없으며, 묘갈은 1579년에 세워졌다. 비문은 손
자인 심수경이 짓고, 증손자인 심일취가 글을 썼다.

▲  심정과 부인의 합장묘(合葬墓)

  ◀▲  심정묘를 지키는 문인석(文人石) 2쌍
500년 가까운 고된 세월의 무게를 입고 있지만
별다른 상처 없이 잘 남아있다. 저들이 멀쩡히
무덤을 지키고 있기에 심정묘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16세기 무덤 양식을 잘 보여준다고 해서 지방
문화재로 지정됨)


▲  심사순(沈思順)과 부인 덕수이씨 묘

심정 묘 밑에는 심사순의 묘가 자리해 있다. 심사순(1496~1531)은 심정의 아들로 자는 의중(
宜中), 호는 묵재(默齋)이다. 심정의 맏형인 심원(沈元)이 아들이 없어서 그의 후사로 들어갔
으며, 시를 잘짓고 문장에 아주 뛰어나 17세에 초시(初試)에 장원해 사림패거리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다.

1516년 진사시(進士試)에 붙었고, 1517년 문과 별시(別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승문원(承
文院)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그리고 병조정랑(兵曹正郞), 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530년 산릉(山陵)에 대한 지문(誌文)을 작성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1531년 그 지문의 글이 문
제가 되어 필적을 대조받기도 했다. 그때 심정 일가를 아작내려는 김안로가 이름을 숨기고 글
을 썼다는 이유를 내세워 옥에 가두었고, 자신은 죄가 없다고 목이 터져라 외쳤건만 결국 거
친 심문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그의 묘는 부인과 합장된 조그만 봉분과 묘비(묘갈), 상석, 문인석 1쌍이 전부로 바로 정면이
낭떠러지이다. 그 너머(동쪽)로 삼정초교와 방화1단지 아파트가 보이며, 예전에는 경사진 곳
이었지만 방화지구 개발로 인해 각박한 낭떠러지가 싹둑 잘리게 된 것이다.


▲  심정묘에서 약사사로 올라가는 소나무 숲길

▲  심일취(沈日就)와 부인 광산김씨 묘

방원중학교에서 약사사로 이어지는 길(금낭화로17길) 중간에 심사손의 아들인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의 묘와 신도비가 있는데, 이번에는 모르고 빼먹었다. 하여 본글에서는 다루지 않
는다. (어차피 예전에 다 봤음)

약사사를 알리는 커다란 표석 직전에 문정공파 묘역을 알리는 검은 피부의 문화유산 안내판이
있다. 그 동쪽 산자락에 무덤이 여럿 있는데, 윗쪽에 심일취의 묘가, 밑에는 심사손 묘와 신
도비가 자리한다.

심일취는 심수경의 2번째 아들로 자는 중진(仲進)이다. 1547년에 태어나 1573년 식년시(式年
試)에 3등으로 급제했으며,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지냈으나
딱히 두드러지는 것은 없었다. 다만 문장을 잘 지어 심정과 심사손의 묘갈(墓碣)을 직접 썼으
며, 죽은 이후에는 이조참판(吏曹參判)이 추증되었다.
그의 묘는 상석과 묘갈(묘비), 문인석 1쌍, 망주석(望柱石) 1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서
아래로 내려가면 심사손의 묘가 나온다.

▲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  좌측 문인석과 망주석


▲  심사손<沈思遜, 또는 沈士遜>과 부인 전의이씨 묘

심사손(1493~1528)은 자가 양경(讓卿)으로 15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1517년 대과(
大科)에 급제했고, 승문원(承文院)과 예문관(藝文館)에서 사필(史筆)을 했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거쳐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는데, 이때 군무(軍務)를 익혀 그런데로 문무를
겸비하게 되었다.

1525년 의정부(議政府)에 배치되어 사인(舍人)이 되었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홍
문관 직제학(直提學)을 지내던 중, 압록강(鴨綠江) 너머의 여진족이 저항할 조짐을 보이자 중
종은 그의 품계를 높여 만포진(滿浦鎭)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임명했다. 만포는 평안북도 강
계(江界) 서쪽에 자리한 변방이다.
심사손은 덕과 무력으로 여진족(女眞族)을 달래고 정벌하면서 변경을 안정시키니 군사와 여진
족들은 그를 어르신이라 부르며 복종했으며, 1528년 1월 진중에 땔감이 부족하자 군사를 이끌
고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南滿洲)에서 나무를 벌채하였다. 그때 여진족이 불만을 품고 습격을
하는 통에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후퇴했으나 명줄이 다되었는지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면서
사망하고 만다.

사망 소식을 접한 중종은 명신(名臣)을 잃었다며 크게 슬퍼했고, 며칠 동안이나 제때 수라를
들지 못했다고 하니 그만큼 왕의 신망이 대단했음을 가늠케 한다. 그의 시신은 그해 3월 11일
개화산에 묻혔으며, 문정공파 묘역의 첫 무덤이 되었다.
부인 전의이씨는 남편이 죽자 기절하여 간신히 소생했으며,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것을 한스
럽게 여겼다. 그는 1578년 86세의 나이로 뒤늦게 남편을 따랐다.

심사손의 묘는 봉분 2기, 묘갈(묘비), 상석,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심
정과 심사순도 갖추지 못한 신도비를 갖추고 있어 눈길을 끈다. 심정과 심사순은 권력싸움에
밀려 곱지 않게 죽은 탓에 간신히 문인석 1쌍만 갖추고 끝났지만 심사손은 나름 공적도 크고
왕과 아버지의 후광(後光)도 대단해 신도비까지 두게 된 것이다. 만약 1531년까지 살아있었다
면 그도 무슨 험한 꼴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
허나 그의 묘라고 꼭 무탈한 것은 아니다. 2009년 가을에 도굴을 당했기 때문이다. 문정공파
묘역은 정말 도굴은 모르고 살았건만, 도굴범의 마수가 이곳까지 미칠 줄은 누가 알았으랴.?
이때 무엇이 도굴당했는지 파악된 것은 없다. 무덤 부장품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범인도
아직 잡히지 못해 더욱 분노를 치밀게 만든다.

▲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신도비

▲  좌측 문인석과 망주석

▲  심사손 묘갈

▲  부인 전의이씨 묘갈


          ◀
  심사손 신도비(神道碑)
심사손묘 동남쪽에 자리한 이 신도비는 1580년
에 세워졌다. 신도비는 고위 관리와 왕족들의
무덤에만 세울 수 있는 특별한 존재로 보통 신
도(神道)로 통한다는 묘의 동남쪽에 세운다.
비석 높이는 311cm, 폭 120cm로 비문(碑文)은
영의정 홍섬(洪暹)이 짓고, 여성군 송인(宋寅)
이 썼으며, 행온성도호부사 한준(韓準)이 두전
을 썼다.
네모난 비좌(碑座)에 오랜 세월의 때가 멋지게
낀 비문을 세우고, 그 위에 2마리에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수(螭首)를 두었는데,
이수 조각이 꽤 섬세하고 생동적이다.

※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지하철 5호선 방화역 3번 출구를 나와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방화5단지로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서쪽)으로 가면 약사사로 통하는 길(금낭화로17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들어가면 심
  수경, 심일취, 심사손의 묘역으로 접근할 수 있다.
* 방화역 4번 출구를 나와서 북쪽으로 쭉 가면 방화역교차로 서쪽이다. 여기서 왼쪽(서쪽)으
  로 가면 느티공원이 나오는데, 공원을 가로질러 계속 직진하면 개화산이다. 여기서 오른쪽
  (북쪽)으로 가면 심정묘와 이어지고, 직진(서쪽)하면 약사사길(금낭화로17길)과 만난다.
* 방화역 경유 시내버스 노선 : 651, 654, 672, 6629, 6648, 6712, 강서구 마을버스 07번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 산152-5일대


 

♠  오래된 석불과 석탑을 간직한 개화산의 상징적인 명소
약사사(藥師寺)

▲  약사사를 알리는 표석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을 둘러보고 북쪽으로 가면 약사사를 알리는 커다란 표석이 마중을 나
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왼쪽으로 가면 봉화정과 개화산전망대로, 오른쪽은 약사사, 개
화산전망대로 이어진다. 봉화정과 강서둘레길 1코스 서쪽 구간이 목적이라면 왼쪽 길로 가면
되고 약사사를 거치고 싶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  속세를 향해 활짝 문을 연 약사사 정문

사사 표석에서 2분 정도 가면 개화산의 상징, 약사사가 모습을 비춘다. 개화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이 절은 창건시기가 정확치 않으나 앞서 언급했던 주룡선생과 관련된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신라 때 개화산을 주름잡던 주룡이 세상을 떠나자 매년 9월 9일마다 그가 술을 마셨던 곳에서
이상한 꽃이 피었는데,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것이 개화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설화와
1827년에 송숙옥(宋淑玉)이 작성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와 '양천읍지(陽川邑誌)'를 통해 신
라 때 창건된 것으로 우기고 있으나 신빙성이 있는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다. 개화산약사암중
건기와 양천읍지도 약사사가 알려준 내용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대신 경내에 고려 때 석탑
과 석불이 있어 적어도 고려 중/후기부터 법등(法燈)을 킨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18세기까지는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초기에 제작된 동국여지
승람(東國輿地勝覽)에 개화사로 나와 예전 이름이 개화사였음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임진왜
란 시절 격전지인 행주산성(幸州山城)과 양천(陽川) 고을의 중심지인 가양동이 근방이고, 개
화산은 이들을 이어주는 요충지라 그때 절이 파괴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절의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래를 펴는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1737년 좌의정(左議政) 송인명(
宋寅明, 1689~1746)이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송씨 가문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그는 어린 시
절 매우 가난했는데, 개화사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공부에 열중해 과거에 붙었다.
이후 재상에 오르자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개화사의 덕이라며 절을 중수하고 절 밑에 불량답
(佛糧畓)을 보시했다. 또한 영조(英祖) 시절 그와 가깝게 지내던 이병연
(李秉淵)이 개화사와
송인명과의 끈끈한 사이를 '사천시초(槎川詩抄)'란 시로 표현했다.

봄이 오면 행연(杏淵) 배에 오르지 마오
손님이 오면 어찌 꼭 소악루(小嶽樓, 가양동에 있었음)만 오르려 하나
책을 서너 번 다 읽은 곳이 있다면
개화사(開花寺)에서 등유(燈油)를 써야지.


또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조선 미술의 한 획을 그었던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이병연
의 시를 보고 개화사를 찾아가 그림을 남겼는데, 그는 1740년부터 5년 동안 양천현감으로 있
으면서 개화사와 소악루를 비롯한 양천의 명승지를 아낌없이 화폭에 담아 당시의 정취를 아련
히 알려준다.

1799년 송인명의 후손인 송백옥
(宋伯玉)이 절을 중수하고 중수기를 남겼으며 1827년 절이 퇴
락하자 처사 창선
(昌善)과 청신녀(淸信女) 경자(京子)가 돈을 모아 기존 절터에서 몇 걸음 떨
어진 곳에 새롭게 자리를 파 절을 옮겼고 석불입상을 약사불로 삼으면서 절 이름을 약사암(藥
師庵)으로 갈았다. <이후 약수사(藥水寺), 약사사 등으로 변경됨>
1911년 봉은사(奉恩寺)의 말사(末寺)의 되었고, 1928년 주지 박원표(朴元杓)가 약사전을 새로
지었다. 허나 6.25 때 개화산이 치열한 격전지가 되면서 그나마 세운 건물이 모두 무너졌으며
가건물로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다가 1984년 이후 대웅전과 감로당, 삼성각을 지어 지금에 이
른다.

그리 넓지 않은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위시하여 감로당과 삼성각, 범종각, 공양간
등 5~6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크게 지어진 감로당은 요사와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과 3층석탑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
해주며, 석불은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 기도 수요가 제법 많다. 허나 경내에서 이들 외에는 고
색의 향기는 전혀 없다.
또한 경내 밑에는 개화산의 오랜 명물로 꼽히던 약수터가 있었는데 이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
다고 하여 중생의 인기가 대단했다. 이 약수터 때문에 절의 이름이 한때 약수사가 된 적도 있
을 정도.. 허나 1990년대 이후 계속되는 부적합 판정으로 수요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끝내 부
적합을 극복하지 못하고 2013년 봄에 완전 폐쇄되고 말았다. 석불과 더불어 절의 든든한 양대
밥줄이자 아주 착했던 약수터의 퇴장은 개화산과 절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졌고, 이제는 추억
이나 사진에서나 끄집어 봐야 되는 흐릿한 전설이 되어버렸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약사사는 숲에 둘러싸여 있어 산사의 향기도 그런데로 진하며, 절이 아담
하여 두 눈에 넣고 살피기에도 별 부담이 없다. 또한 방화역에서 절까지 길이 잘 닦여있고 도
보 20분 정도로 접근성도 괜찮으며, 차량으로 경내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절을 둘러보고 개화
산 봉화정과 강서구의 야심작인 강서둘레길 개화산숲길(개화산둘레길)을 겯드린다면 아주 영
양가 만점의 나들이가 될 것이다.

※ 개화산 약사사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① 지하철 5호선 방화역 3번 출구를 나와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방화5단지로터리이다. 여기
   서 오른쪽(서쪽)으로 가면 방원중교 옆으로 약사사로 이어지는 길(금낭화로17길)이 나온다.
   방화역에서 도보 20분
② 방화역 4번 출구를 나와서 북쪽으로 쭉 가면 방화역교차로 서쪽이다. 여기서 왼쪽(서쪽)으
   로 가면 느티공원이 나오는데, 공원을 가로질러 직진하면 개화산이며, 여기서 직진을 하거
   나 오른쪽으로 가서 심정묘 직전에서 왼쪽으로 오르면 약사사로 이어진다. 1번 코스보다는
   5분 정도 빠르다.

* 약사사 공양밥이 꽤 맛이 좋다고 한다. 매일 12~13시에 점심 공양을 제공하며, 일반인도 공
  양이 가능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332-2 (금낭화로 17길 261 ☎ 02-2662-2551)
* 약사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범종각과 삼성각

절 정문을 들어서면 약사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는 3층석탑과 대웅전이 시
선을 주고 있으며, 왼쪽에 약사사 안내문과 매점, 범종각이, 오른쪽에는 주차장과 해우소, 감
로당이 자리한다.

▲  매점과 범종각(梵鍾閣)
범종각에는 1976년에 조성된 범종이 걸려있다.

▲  가건물로 이루어진 공양간


▲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전(佛殿)이긴 하
지만 겉모습은 거의 요사(寮舍)나 여염집 같은 분위기로 가운데 칸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구
조이다. 내부에는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중 칠성탱과 산신탱은 1960
년에 조성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삼성각 바로 옆에 공양간이 있음)

▲  지팡이를 들고 앉아있는 독성상(獨聖像)
산신, 칠성과 달리 그림은 없다.

▲  전륜(轉輪)을 쥐어든 칠성상과 다소
빛이 바랜 칠성탱(七星幀)

◀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상과
산신탱(山神幀)


▲  감로당(甘露堂)

3층석탑을 사이에 두고 삼성각을 바라보고 선 감로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
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요사와 종무소(宗務所)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甘露堂','開
花山 藥師寺' 현판은 승려 석정(石鼎)의 필체이다.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
기에 좋으며, 벽면에는 십우도(十牛圖)와 혜능(慧能) 이야기, 백락천과 도림선사 이야기 등이
그려져 있다.


▲  약사사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호

대웅전 뜨락 한복판에 3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로 약사사가 적어
도 고려 중/후기에 창건되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소중한 보물이다. 탑 높이는 4m로 땅에 바닥
돌을 깔고 1층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머리 장식은 어느 세월이 잡아
갔는지 없어진 것을 근래에 새로 붙여 고색의 때가 만연한 아랫 부분과 전혀 다른 피부색을
보인다.

탑은 길쭉하고 홀쭉한 모습으로 기단이 1층으로 간략화 되었고, 옥개석(屋蓋石)의 밑면 받침
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어 고려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중기 이후 탑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서울에는 오래된 석탑이 많이 있지만 정
작 토박이 옛 탑은 몇 되지 않는다. 토박이 고려 탑은 낙성대(落星垈) 3층석탑과 홍제동(弘濟
洞) 5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음), 그리고 이곳 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왜정(倭政) 이후에
강제로 제자리를 떠나 상경한 것들이다.


▲  약사사 대웅전(大雄殿)

동쪽을 바라보고 앉은 대웅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1988년에 중건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을 청기와로 수를 놓아 웅장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뽐내며 절의 왜소함을
능히 커버한다.


▲  대웅전 앞부분
정면 양쪽 모서리 기둥에는 힘차게 날아오르는 용을 그려놓아 대웅전의 화려함을
더욱 돋군다, 약사사가 더욱 발전하기를 바라는 뜻에게 용을 새겼을 것이다.
허나 중요한 것은 겉면이 아닌 내실이다. 너무 겉치례만 차리지 말고
속세와 중생을 위해 더욱 헌신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  대웅전의 붉은 닫집과 불단을 장식하는 여러 불상과 보살상들

장엄하기 그지 없는 대웅전 불단에는 1기의 석불과 7기의 불상/보살상이 있다. 그 뒤에는 조
그만 금동불이 거대한 병풍을 이루고 있는데, 거의 3천불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다 금동(金
銅) 일색인 곳에 홀로 빛바랜 돌로 이루어진 수수한 모습의 큰 불상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그가 3층석탑 다음으로 경내에서 오래된
존재로 이곳을 먹여살리는 든든한 밥줄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석불, 나머지 금동불은 그를
위한 조연이 된다.
비록 겉은 초라해 보일 지 몰라도 그의 가치는 그들보다 한참이나 높다. 다른 불상은 제쳐두
더라도 3층석탑과 그는 꼭 봐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석불 앞에는 조그만 금동석가불이 그를 후광(後光)으로 삼아 앉아있고, 좌우에는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그 옆에는 큼직한 약사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이 중생을 굽어본다. 금동불은
모두 1995년 이후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것들이다.


▲  약사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호

불단의 많은 불상을 거느리고 있는 대웅전의 주인장, 석불입상은 머리에 쓴 돌갓 밑에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를 통하여 고려 후기, 아무리 늦어도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약사사의 든든한 밥줄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에 일장미륵(一丈彌勒)으로 등장한다. 불상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많으나 가슴 앞에 댄 두 손에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관음보살로 여
겨지기도 하며, 불상의 투박한 모습을 통해 고려와 조선 때 온갖 모습으로 재현된 미륵불(彌
勒佛)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그를 약사불(藥師佛)로 삼으면서 절 이름
을 약사암으로 갈았으며, 현재도 영험한 약사불로 삼아 애지중지한다.

이 석불은 현재 위치 바로 옆에 있었던 건물에 있었는데, 밑도리는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
다가 1974년 그 건물을 부시고 대웅전을 조성하면서 불상 밑에 기단석을 만들어 편의를 제공
했다.
불상의 얼굴은 길고 넓적한데, 표정은 썩 별로이다. 경직된 인상에 두 눈은 너무 크기 때문이
다. 코는 세모로 오똑하나, 코 끝은 크게 닳아진 상태이고, 입은 그 모양만 확인이 가능하다.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의 고충을 듣기에는 별 지장은 없어 보이며, 머리에는
둥근 돌갓을 쓰고 있는데, 지방에 있는 미륵불에서 많이 보이는 모습이다.
어깨가 얼굴에 비해 너무 작고, 옷도 옷주름 몇 가닥이 표현된 것이 전부이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꽃을 든 불상의 이미지를 주며, 밑도리는 앞에 있는 금동석
가불과 불단에 가려져 확인이 어렵다. 그렇다고 실례를 무릅쓰고 확인하기에도 좀 그렇다.
썩 괜찮은 작품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끌리는 존재로 소망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자자해 많
은 이들이 찾아와 소망과 고충을 털어놓는다. 약사사가 지금에 이른 것도 거의 그의 공이다.


▲  후배 금동불을 압도하는 석불입상의 위엄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이 범하는 흔한 오류 중의
하나가 바로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겉모습으로 평가하지 마라.
생긴 건 저래도 꽤나 알찬 불상이다.

▲  약사사 돌담길 - 약사사에서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 개화산 숲길

정말 오랜만에 발걸음을 한 약사사를 둘러보고 범종각 옆 매점 아줌마에게 이곳의 명물인 약
수터의 위치를 문의했다. (이때는 약수가 없어진 것을 몰랐음) 예전에도 와봤지만 그 약수터
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경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그 약수는 2013년 봄에 폐쇄되었다는 답변을 듣고 기운이
싹 빠지는 듯 했다. 안그래도 개발의 칼질에 많은 것을 잃어버린 서울인데 유명한 약수터 하
나가 허무하게 져버리니 천박한 개발의 칼질과 그 칼질을 개념 없이 조정하는 행정관청 밥버
러지들, 개발업자들이 심히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매점 아줌마가 목이 마르면 생수 1병에 500원이니 사먹으라고 그런다. 그래서 가난한 중생이
라 돈이 없다고 둘러대니 물 1컵 먹고 가라며 정수기 물을 제공했다. 약수터가 없으니 절도
천상 정수기 물에 의존하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다.
물을 싹 비우니 아줌마가 더 마시겠냐고 그런다. 그래서 더 달라고 하니 역시 한가득 담아 제
공한다. 그래도 이곳은 물을 주는 인심이 있구나 싶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절을 나와 개화
산숲길을 거쳐 개화산으로 올라갔다. 이후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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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3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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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을 거닐다. 북한산둘레길 옛성길~탕춘대능선~구름정원길 (탕춘대성 암문)



'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구름정원길 가을 나들이 (탕춘대성)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탕춘대성 암문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은평구

▲  구름정원길



 

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9월의 끝 무렵, 친한 후배와 천하 둘레길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는
북한산둘레길을 찾았다.
햇님이 슬슬 고개가 꺾이던 오후 3시, 구기터널에서 길을 시작하여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옛성길로 들어선다. 이 코스는 구기터널3거리에서 탕춘대성 암문, 옛성길전망대를 거쳐 북
한산 생태공원(북한산래미안아파트)까지 이어지는 2.7km의 짧고 굵직한 산길로 구기터널과
독박골에서 오르는 부분이 조금 각박할 뿐, 거기만 오르면 길은 다소 순해진다.

옛성의 주인공이자 이곳의 알맹이인 탕춘대성과 그에 딸린 암문, 옛성길 전망대 등의 명소
가 있으며 거의 능선길이라 조망도 제법 괜찮다. (1시간 정도면 충분히 완주 가능)


 

♠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탕춘대성 암문)

▲  평창동에서 바라본 탕춘대(蕩春臺) 능선

▲  구기동 주택가를 지나는 옛성길 동쪽

구기터널에서 둘레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를 따라 돈냄새가 요란하게 풍기는 고급 주택가를 지
나면 숲속에 묻힌 그늘진 오르막길이 나온다. 여기가 정녕 서울 도심 종로구(鍾路區)가 맞는
지 물음표를 여러 번 내던지게 하는 외딴 산골 풍경으로 아무리 손등을 꼬집어보아도, 두 눈
을 비벼보아도 이곳은 분명 서울 종로구 구기동(舊基洞)이 맞다. 이 첩첩한 산골까지 주택이
마구 밀려와 150m 고지까지 좁게나마 골목길이 깔려 있다.


▲  옛성길 동쪽 시작점

▲  탕춘대성 암문으로 오르는 옛성길 (1)

옛성길 동쪽 시작점에서 탕춘대성 암문까지는 숨가뿐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다행히 둘레길을
잘 닦아놓아 그리 힘든 구석은 없다.
동쪽 시작점에서 암문까지는 약 10분 정도 걸리는데 중간에 쉼터가 있으며, 소나무가 무성하
여 은은한 솔내음에 속세에서 오염된 청각과 마음을 적지 않게 치유해준다.


▲  탕춘대성 암문으로 오르는 옛성길 (2)

▲  탕춘대성 암문(暗門) - 탕춘대성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옛성길의 옛성은 바로 탕춘대성을 뜻한다. 조선 19대 군주인 숙종(肅
宗, 재위 1675~1720)은 혹시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고자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
山城)을 크게 증축하고 그 안에 행궁(行宮)과 관청, 창고, 군사시설, 승병(僧兵)을 위한 사찰
을 가득 지어 조그만 산속 도시를 구축했다.
그리고 부암동(付岩洞)과 평창동 지역에 있는 관청과 창고(선혜청, 조지서 등)를 지키고 한양
도성의 방어력을 드높이고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축성했다. 그
성의 이름은 연산군(燕山君)이 세검정(洗劍亭) 부근에 세운 탕춘대(蕩春臺)에서 비롯되었다.

이 성은 한양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성(西城)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1715년 홍제천에 홍지문(
弘智門)과 오간대수문을 세웠고, 1718~1719년에 인왕산(仁王山) 동북쪽에서 비봉능선 부근까
지 5.1km의 석성을 쌓았다. 이후 북한산성까지 늘리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고, 보현봉에서
형제봉을 거쳐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을 잇는 성곽도 추진했으나 계획에서 끝났다.

한양(서울)의 북쪽을 지키며 별탈없이 지내오던 탕춘대성은 장대한 세월에 짓눌려 여장과 성
벽 곳곳이 망가졌고 1921년 1월에는 홍지문 문루(門樓)가 세월의 무게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
너졌다. 그리고 그해 8월에는 대홍수로 오간대수문까지 떠내려가는 등, 계속 고통을 당해 오
다가 1977년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이 복원되었다.

바깥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탕춘대성 암문은 높이가 2m 정도로 구기터널 고개 윗쪽에 자리
한다. 암문(暗門)은 일종의 비밀 문으로 잡초와 뒤섞여 예전의 면모는 많이 떨어졌지만 문과
성벽은 그런데로 잘 남아있으며, 성돌이 헝클어져 통행이 힘들어진 성곽 길의 짐을 덜어주고
자 그 옆에 산길을 내었다. 성곽에 오르면 홍은동과 홍제동, 불광동 등 은평구와 서대문구의
상당수 지역과 신촌, 안산(鞍山)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암문을 나가면 바로 홍은동(弘恩洞)과 불광동(佛光洞)으로 이어지며 탕춘대성 능선을 따라 남
쪽으로 내려가면 상명대와 세검정, 북쪽으로 올라가면 비봉능선과 북한산성으로 이어진다.
< 탕춘대성은 홍지문과 한 덩어리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로 지정됨, 지정 명칭은 '홍지문
및 탕춘대성
'>

▲  네모나게 다져진 탕춘대성 암문 안쪽

▲  탕춘대성 암문 바깥쪽


▲  고된 세월에 녹초가 되버린 탕춘대성
인간이 만든 것이 아무리 위엄 돋는다 한들 대자연 앞에서는 한낱 모래성에 불과하다.
그나마 복원을 해서 저 정도라도 유지를 하고 있지. 그렇지 않았다면 산의 일부로
영영 묻혔을 것이다.

▲  탕춘대성 암문에서 바라본 천하 (1)
구름이 점점이 떠있는 하늘 아래로 홍은동과 홍제동, 안산, 신촌 지역이
바라보인다.

▲  탕춘대성 암문에서 바라본 천하 (2) - 불광동과 연신내, 은평구 지역

▲  송전탑 너머로 족두리봉과 향로봉, 비봉 등이 시야에 잡힌다.

▲  소나무가 우거진 옛성길 (암문~옛성길전망대 구간)

▲  옛성길에서 바라본 홍은동과 안산, 서대문구 지역

▲  옛성길 전망대

탕춘대성 암문을 지나면 둘레길은 비로소 진정을 되찾는다.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수 차
례 반복될 뿐, 길은 느긋하다. 능선길이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이 두 눈과 마음을 시
원스럽게 다독거려주며, 가까이에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인사를 건넨다. 그런 길을 가볍
게 15분 정도 가면 옛성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옛성길 전망대에 이른다.

이 전망대는 해발 220m 지점에 닦여진 조망터로 북한산의 동남쪽 산줄기와 은평구, 서대문구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옛성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북한산 문수봉과 보현봉, 형제봉,
평창동 지역

▲  옛성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향로봉과 비봉, 승가봉, 나한봉, 문수봉

▲  옛성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불광동 독박골과 족두리봉

인생의 오르막이 있다면 내리막도 반드시 있는 법, 옛성길전망대를 지나면 길은 완전히 내리
막으로 돌변한다. 암문부터 참 온순했던 옛성길은 크게 흥분기를 보여 경사가 좀 각박해지는
데 다행히 내려가는 것이니 망정이지 이 길로 올라왔다면 두 다리가 꽤나 성을 냈을 것이다.
그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구기터널 서쪽인 불광동(佛光洞) 독박골이며, 여기서 큰 길(진
흥로)을 건너 북한산래미안아파트 동쪽으로 가면 북한산 생태공원이 나오는데 여기서 옛성길
은 그 끝을 맺는다.

※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탕춘대성 찾아가기 (2017년 12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구기터널(한국고전번
  역원)이나 독박골(북한산래미안아파트)에서 하차, 7212번을 탔을 경우 구기터널 대신 구기
  동 현대빌라에서 내리면 된다.
* 지하철 3,6호선 불광역(2번 출구)에서 구기터널 방향으로 14분 정도 걸어가면 옛성길과 구
  름정원길이 나온다.
* 지하철 3호선 홍제역(2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11번을 타고 홍은
  동 국민주택 종점 하차, 여기서 5분 정도 오르면 옛성길과 만나며 거기서 오른쪽으로 2분
  정도 가면 탕춘대성 암문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 서대문구 홍은1동 / 은평구 녹번동


 

♠  북한산둘레길 구름정원길

▲  구름정원길 남쪽(불광사) 시작점

북한산둘레길 옛성길은 북한산생태공원에서 구름정원길로 간판을 바꾼다. 구름정원길은 북한
산생태공원에서 하늘전망대, 선림사, 옛 기자촌 뒷쪽을 거쳐 진관생태다리까지 이어지는 5.2
km의 기나긴 산길로 진관동 화의군(和義君)묘역~폭포동 힐스테이트아파트 구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주택가와 아파트 뒷쪽을 지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 반복되며 속세를 옆구리에 끼
고 있어 언제든 속세로 뛰쳐나갈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옛성길에 비해선 깊은 산길의 운치는
좀 떨어진다.

산길 이름인 구름정원길은 별다른 뜻은 없다. 그냥 구름의 정원을 거닐 듯 편안한 길이란 뜻
에서 동심 어린 이름을 갖다 붙인 듯 싶으며, 하늘전망대와 기자촌전망대 등의 조망터가 마련
되어 있다.


▲  구름정원길 (북한산힐스테이트 1차 뒷쪽)

▲  구름정원길에서 바라본 천하 (1)
북한산래미안아파트와 독박골 주변, 옛성길이 흐르는 탕춘대 능선

▲  구름정원길에서 바라본 천하 (2) 불광동과 녹번동, 백련산(白蓮山)

▲  은평구를 앞 뜨락으로 삼은 하늘전망대

구름정원길의 백미(白眉)는 은평구를 품은 하늘전망대와 길쭉하게 나무로 다져진 다리(데크길
)이 아닐까 싶다. 구름정원길 남쪽 시작점에서 10여 분 정도 오르면 서쪽으로 돌출된 하늘전
망대에 이르게 되는데 벼랑 위에 설치된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의 서북부를 이루고 있는 은평
구 일대가 속시원하게 바라보인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불광동과 녹번동, 응암동 지역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불광2동과 은평뉴타운, 앵봉산을
비롯한 은평구 북부 지역

▲  나무 다리에서 바라본 하늘전망대 (사진 가운데 부분)

▲ 산길 한복판에 자리한 소나무 (나무 다리 직전)
하늘전망대 북쪽에서 나무다리까지는 소나무가 삼삼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다.
나무데크길을 내다보니 소나무가 길 한복판에 있게 되었는데, 그를 강제로
손대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둔 센스와 배려가 무척 돋보인다.

▲  길쭉한 나무 다리 (나무데크길)
이곳은 하늘전망대와 더불어 구름정원길의 상징적인 구간으로 소나무숲 보호와
탐방 편의를 위해 나무로 길게 다리를 깔았다.

▲  북쪽에서 바라본 나무 다리 (하늘전망대 방향)

하늘전망대에서 나무 다리를 지나면 족두리봉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동쪽) 산길을 오
르면 북한산(삼각산)의 서남쪽 끝 자락을 잡고 있는 족두리봉으로 이어지며, 왼쪽(서쪽)으로
내려가면 불광동 대호아파트, 북쪽으로 직진하면 구름정원길의 나머지 부분이 마저 펼쳐진다.

여기서 둘레길을 따라 5분 정도 전진하면 이름도 긴 북한산힐스테이트3차아파트 뒷쪽이다. 시
간도 어느덧 18시에 임박했고 햇님은 달님과 업무 교대를 하며 칼퇴근을 준비한다. 마음 같아
서는 불광중교까지는 달려가고 싶었으나 시간도 그렇고, 배도 고프고, 슬슬 지치기도 하여 나
머지 구간은 불투명한 다음으로 넘기고 둘레길 나들이를 접었다. 어차피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언제든 접근이 가능하다. 그러니 너무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무지개와 같은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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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령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외롭게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양주 오봉산 석굴암 ~~~ (유격광장, 우이령길)


' 늦가을 산사 나들이, 양주 오봉산 석굴암 (우이령길) '

▲  오봉산 석굴암


 

늦가을이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수놓던 10월의 한복판에 친한 여인네들과 우이령 석굴
암을 찾았다.

우이령(牛耳嶺)은 서울 우이동(牛耳洞)과 경기도 양주시 교현리(橋峴里)를 잇는 고개로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山) 뒷통수에 자리한다. 이들 산의 경계선이기도 한데 6.
25 시절에는 경기도 북부 피난민들이 이 고개를 넘어 피난길에 올랐으며 전방으로 군병
력과 군수물자를 수송하고자 미군 공병대에서 길을 닦으면서 지금의 우이령길을 이루게
되었다.
6.25 이후에도 지역 사람들이 이용했으나 북한이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진 이른바 1968
년 1,21사태(김신조 공비패거리 사건)로 1969년에 금지된 길로 꽁꽁 묶이고 만다. 그렇
게 서울 근교의 숨겨진 고갯길로 없는 듯 지냈던 우이령은 2009년 7월, 40년 만에 다시
빗장을 열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비추었다.

가슴을 다시 연 우이령은 인간의 발길이 오랫동안 끊긴 탓에 자연환경이 매우 우수했고
온갖 희귀 동식물이 앞다투어 뿌리를 내려 대자연의 휼륭한 보고(寶庫)로 성장했다. 또
한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길을 자아내는 등, 그야말로 감동의 현장이었다.
허나 지구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인간들이 몰려들면 우이령이 망가지는 것은 시간 문제
이므로 철저하게 탐방객 수를 제한하고 탐방에 적지않은 제약을 주어 우이령 보호에 힘
쓰고 있다.

우이령이 개방된 이후, 애타게 갈 기회를 노렸으나 딱히 인연이 없어 하염없이 잊고 살
다가 친한 여인네의 제안에 힘입어 가게 되었다. 예약은 그가 다했으므로 늦지 않게 가
기만 하면 된다.
연신내역(3,6호선)에서 아침 9시, 일행들을 만나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우이령
으로 다가섰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북한산(삼각산)과 노고산을 찾는 등산객과 단풍
행락객들이 폭주하여 송추(북한산, 도봉산, 오봉산) 방면으로 가는 시내버스는 계속 가
축수송의 위엄을 보였다. 거기에 행락객 차량들이 구파발역부터 북한산성입구까지 가득
들어차 불과 12km 거리(연신내~교현리 우이령입구)가 거의 120km로 느껴질 정도였다.
고작 집에서 가까운 우이령을 가는데 이렇게 속세살이처럼 힘이 드니 서울의 인구가 참
쓸데없이 많기는 많다.

어쨌든 등산/행락객의 거센 물결을 뚫고 간신히 우이령입구에 이르니 시간은 벌써 11시.
정류장 편의점에 주저앉아 김밥과 과자, 컵라면으로 벌써부터 지치고 놀랜 몸과 마음,
뱃속을 달래고 우이령의 품으로 들어섰다.


 

♠  석굴암 입문

▲  우이령의 북쪽 관문, 교현탐방지원센터

북한산로 우이령(오봉산 석굴암) 입구에서 8분 정도 들어서면 속세와 우이령의 경계를 구분짓
는 교현탐방지원센터가 마중을 한다. 길 주변에는 군부대 시설이 즐비하여 부푼 마음을 품고
찾아온 나그네에게 적지 않은 긴장감을 준다.

교현탐방지원센터는 우이령의 북쪽 검문소로 여기서 소정의 출입 절차를 밟아야 되는데, 예약
자의 신분증과 예약확인증을 보여주면 된다. 그리고 석굴암 탐방객은 따로 예약할 필요 없이
신분증만 지참하면 된다. 우이령이 비록 개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북악산(백악산) 한양
도성 능선처럼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공간이라 제약이 좀 있다.

교현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본격적인 우이령 탐방이 시작된다. 속인(俗人)들이 이 길을 걷고
자 1969년 이후 40년이나 목마르게 기다렸던 그 금지된 길이 내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가을
도 우이령에 흠뻑 마음을 빼앗겼는지 길을 멈추고 주변을 화사하게 불지른다. 이렇게 늦가을
과 우이령의 만남으로 우이령은 아름다운 비단길로 거듭났다.
우이령길은 시작부터 끝까지 길이 완만하다. 서서히 올라갔다가 다시 서서히 내려가는 느긋한
코스로 각박한 속세살이와는 정반대이다. 게다가 흙길이 잘 닦여져 있고, 주변 풍경이 고와
결코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짧게 느껴져 흔쾌히 왕복을 뛰고 싶은 마음이다.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석굴암입구 유격광장까지는 약 2.3km로 30분 정도 걸린다. 동쪽에는 도
봉산과 오봉이 빚은 우이령계곡이 때묻지 않은 청정함을 간직하며 속세로 흐르는데, 아쉽게도
계곡은 출입금지구역이다. 게다가 길과도 거리를 제법 두고 있어 휴전선 너머 동해바다를 바
라보듯 해야 된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곳을 속세로부터 지키려면 그럴 수 밖에. 앞으로도 계
속 이렇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  늦가을이 온 산천에 알록달록 불을 질렀다.
늦가을의 즐거운 불장난은 11월 이후 겨울 제국에게 모두 진압이 될 것이다.

▲  석굴암입구 유격광장 (유격 표석)

석굴암입구 유격광장은 우이령길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다. 이곳은 군부대의 유격 연병장으로
광장 동쪽에 서 있는 유격 표석이 이곳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갈리는
데 석등을 옆구리에 낀 다리를 건너 북쪽 길을 오르면 석굴암이고, 광장 남쪽으로 난 길로 직
진하면 우이령길 정상이다.

우이령에 왔다면 우이령길만 살피지 말고 석굴암도 둘러보기 바란다. 석굴암이 우이령에서 나
름 꿀단지 같은 곳이라 가는 길이 좀 각박해도 1시간 정도만 투자하면 충분히 둘러보고 나올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우이령을 잠시 버리고 석굴암으로 향했다.


▲  석굴암으로 인도하는 길 (석굴암입구)

▲  유격광장에서 바라본 오봉의 위엄 (왼쪽 바위 봉우리는 '관음봉')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에서는 어디서든 오봉(五峯, 660m)이 바라보인다. 3글자로 오봉산(五峯
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은 도봉산의 뒷쪽으로 5개의 바위 봉우리가 위엄을 뽐내며 속
세를 굽어본다. 이런 멋드러진 봉우리에는 옛 사람들이 붙인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는 법,
내용은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 수염 태워 먹던 시절, 양주 땅에 총각 5명이 살고 있었다. 양주목(楊州
牧) 원님(사또)의 외동딸이 이쁘다고 하여 서로 장가를 들고자 시합을 벌였는데 아마도 원님
이 시합을 붙인 듯 싶다. 시합이란 바로 우이령 서쪽 상장능선에 올라 그곳의 바위를 오봉에
던져 올리는 것, 그들 가운데 누가 이겼는지는 전설을 지은 옛 사람의 생각이 짧아 나오지는
않지만 그들로 인해 오봉이 저렇게 묘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사람 주제에 어찌 저런 봉우리를 만들 수 있을까?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작품
을 가지고 사람이 황당한 전설로 가로채려고 드니 한편으로는 좀 괘씸하기도 하다.

우이령에서 뻔히 보이는 오봉이지만 정작 여기서는 오르지 못한다. 그곳에 가려면 무조건 도
봉산(道峯山)을 거쳐야 되며 우이령과 석굴암에서 오르는 길은 모두 자물쇠로 잠겨져 있다.


▲  석굴암 일주문(一柱門)과 오봉

석굴암입구에서 석굴암까지는 각박한 오르막길이다. 길 주변에는 온갖 유격훈련 시설이 가득
한데 바로 절 밑까지 펼쳐져 있어 군부대 내부를 지나는 기분이다. 이들 훈련장은 1969년 이
후 우이령이 통제되면서 형성된 것으로 지금도 절찬리에 훈련용으로 쓰이고 있다. 몇몇 유격
시설은 개방되어 산꾼들이 도시락이나 간식을 먹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오는데, 수
련장 시설이 아닌 엄연한 군사시설인만큼 그런 것은 삼가하는 것이 옳을 듯 싶다.

훈련 시설을 옆구리에 끼고 10분 정도 오르면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
다. 보통 일주문은 절 이름이 쓰인 현판을 걸지만 이 문은 그런 것도 없다. 그냥 기둥 2개의
평방(平枋), 공포, 팔작지붕이 전부이다.
그런 일주문을 지나면 주지 도일이 조성한 '오봉산 석굴암 토지불사 공덕비(功德碑)'가 나오
고 다시 2분을 고생하면 주차장이 나온다. 이곳은 석축 위에 둥지를 튼 경내 바로 밑인데 여
기서 윤장대를 거쳐 우회하는 길을 오르면 비로소 석굴암 경내에 이르게 된다.

◀ 오봉산 석굴암 토지 불사 공덕비
주지 도일이 땅 2만평을 매입한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다.


▲  경내 밑부분에서 바라본 석굴암
석굴암 뒤쪽으로 관음봉(서쪽 바위 봉우리)과 오봉이 병풍처럼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첩첩한 산골에 묻힌 산중암자, 우이령 개방으로 단단히 덕을 보고 있는
오봉산 석굴암(五峯山 石窟庵)

▲  윤장대 부근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북쪽 산줄기와 상장봉(543m)

흔히 석굴암하면 대부분 경주(慶州) 석굴암을 떠올릴 것이다. 석굴암의 단짝인 불국사(佛國寺
)처럼 말이다. 글을 올릴 때도 지역을 안쓰고 그냥 석굴암이나 불국사라고 쓰면 죄다 경주로
생각하고 살펴본다. 인터넷 용어로 파닥파닥 낚인 것이다. 허나 불국사와 석굴암 그 좋은 이
름을 꼭 경주의 그곳만 써야 된다는 법은 없다. 그들이 이름 특허를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석굴암이란 이름은 석굴을 품었거나 석굴로 이루어진 절로 경주 외에도 석굴암이란 절이 여럿
존재한다. 일단 제2석굴암으로 유명한 군위(軍威) 석굴암이 있고, 도봉산(道峯山)에는 석굴암
이란 절이 무려 3곳이나 존재한다. 의정부 회룡골에 있는 석굴암과 도봉산 만장봉(萬丈峯) 밑
의 석굴암, 그리고 이곳 석굴암이 그것이다. 경주 석굴암이 천하에 널린 석굴암 가운데 가장
인지도가 강해 석굴암의 대명사가 되다보니 다른 석굴암이 제대로 빛을 못본 것이다. 물론 홍
보력 부족과 문화유산이 빈약한 점도 한몫 한다.

이번에 찾은 석굴암은 도봉산 서쪽을 이루는 오봉의 서쪽이자 관음봉(觀音峯) 서남쪽 350m 고
지에 둥지를 틀고 있다. 주변이 온통 수해(樹海)와 산뿐인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외로운 절집
으로 우이령이 통제된 이후 40년 동안은 찾는 이가 별로 없어 더욱 외로웠다. 그렇게 사람과
돈을 몹시나 그리워하다가 우이령의 사슬이 풀린 이후, 방문객이 늘면서 점차 흥하고 있다.
절이 들어앉은 지세는 위로는 도봉이 치닫고 아래로는 삼각산(북한산)이 모여서 마치 여러 별
이 북극성(北極星)을 떠받들고 있는 크고 작은 산세인데 물도 맑고 골이 깊어 속세를 잊고 수
행하기에는 좋은 곳이다. 또한 도봉산은 풍수지리적으로 왕관(王冠)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오
봉은 도봉산을 호위하는 장군기마상(將軍騎馬像)과 같은 모습이라고 한다.

석굴암의 창건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절에서는 신라 중기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
고 우기고 있다. 허나 의상은 화엄종(華嚴宗)과 귀족불교의 발전을 위해 주로 왕경(王京, 경
주)에서 활동하던 짬밥 높은 승려라 당시 고구려(高句麗)와 팽팽하게 접경을 이루던 이곳에
절을 세울 이유도 없었고, 이런 험준한 곳에 개고생을 하며 절을 세울 까닭도 없었다. 의상이
본격적으로 지방에 절을 세운 것은 문무왕 후반대이다. (대표적인 것이 영주 부석사)
또한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이 역시 신뢰도가 없으며 고
려 후기에 나옹화상(奈翁和尙)이 3년 동안 머물며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 또한 믿기가 어
렵다. 경내에 신라/고려 때 유물이나 주춧돌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런 건 하나도 없고,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불과 석조나한상이 그나마 제일 오래된 것이니 말이다. 아마도 도봉산의 만
월암(滿月庵)처럼 조용한 석굴 수행처로 전해오던 것을 조선 초나 중기에 건물을 세워 비로소
절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여러 기록이 보이고 있는데 1443년에 무학대사의 제자인 설암 관익대사가
중수했다고 하며, 이때 석굴에 지장보살과 나한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1455년에는 단종(端宗)
의 왕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여기서 1,000일 기도를 올리고 거금 1만냥을 내려 왕후
의 원찰(願刹)로 삼았다고 하지만 그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미루어보면 이 역시 고개를 좌우
로 흔들 수 밖에 없다.
1652년에는 고암(高庵)이 기와를 보수하고 지장보살상과 나한상에 개금(改金) 불사를 했으며,
1872년에 광운(光雲)이 대웅전과 칠성각을 중수했다고 한다.

1920년 신계월(申桂月)이 주지로 들어와 1943년까지 머물며 강화도 옆 석모도 보문사(普門寺,
관련글 보러가기)에서 온 박동암 선사(朴東庵 禪師)와 수행을 했다. 박동암은 상해임시정
부(上海臨時政府)의 김구 선생을 도운 승려로 계월이 입적하자 석굴암의 주지가 되어 선풍(仙
風)의 기강을 위해 계속 수행했다.

▲  윤장대

▲  석굴암 요사(寮舍)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우이령 주변은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는데 그 여파로 절은 완전 잿
더미가 되고 만다. 다행히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상, 나한상, 수구다라니 목판 등은 현재 나한
전에 있던 좁은 석굴 안에 들어가 화를 면했다.
그렇게 파괴된 석굴암을 멋지게 일으킨 이가 박동암의 열성 제자인 초안당(超安堂) 유성대선
사(1926~1998, 본명 송만석)이다. 그는 현역으로 전쟁에 참전했다가 총상을 입었는데 1954년
5월 의병제대(依病除隊)를 하여 스승인 박동암을 찾았다.
스승은 그에게 석굴암 복원을 간곡히 부탁했고, 그 뜻을 받들고자 바로 그달 26일 어머니 조
병길(조삼매심) 보살과 석굴암을 찾았다. 그들 앞에 펼쳐진 석굴암은 완전 처참한 상태라 석
굴 안에 방치된 불상과 목판을 수습하고 임시 움막을 지어 주변에 널린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
해 화장을 하거나 군에 도움을 청하여 안장(安葬)이 되도록 힘썼다.

1954년 후반에는 지병으로 친정인 교현리에 와있던 윤봉순이 석굴암 부처의 현몽을 받고 석굴
암을 찾아와 불사를 도왔고, 절에서 기도를 올린 신도들의 입소문을 통해 절의 존재가 알려지
면서 불사에 동참하는 신도가 늘어났다. 초안당 역시 낮에는 서울로 나가 탁발을 하고 밤에는
밤을 낮으로 삼아 축대를 쌓고 건물을 짓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래서 1964년 기존 석굴
을 넓혀서 나한전으로 삼아 나한도량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허나 1969년 이후 우이령길이 통제되면서 통행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고, 이는 석굴암의 족
쇄로 작용했다. 게다가 위치도 궁색해 차량 접근도 힘드니 초안당과 신도들은 쌀과 기와, 생
필품을 짊어지며 송추와 고양 효자동에서 10리가 넘는 산길을 일일이 날랐다.

그렇게 힘겨운 고난을 거쳐 1972년 범종각이 완성되었고, 그 와중에 1977년 어머니를 잃는 아
픔도 겪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1979년 요사채를 증축했다. 그리고 1981년 고대하던 전기가
들어오면서 환경은 크게 나아지게 된다. 그 여세로 삼성각과 봉향각을 증축했고 경내 대지도
152평으로 넓혔으며 절로 들어서는 길을 확장하고 나한전을 넓혔다.
1990년대에는 30사단 92연대에 쌍용사를 세워 군대 포교에 나섰고, 오갈데 없는 고아 11명을
수습해 길렀으며 봉선사(奉先寺) 승려를 위해 써달라며 장학기금을 내놓았다. 그리고 어려운
사찰 살림을 쪼개 복지사업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98년 초안당이 72세에 나이로 입적하자 대중들의 오열 속에 다비식이 거행되었는데 사리가
무려 59과가 나왔다고 한다. 그가 간 이후 그가 친자식처럼 키워온 상좌 도일(度一)이 그 뒤
를 이어 주지가 되었으며, 대지 2만평을 매입하여 제2중창불사를 벌이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
추게 되었다. 이때 지하수를 개발하여 목마름을 해소했고 후불탱화와 불상, 다양한 탱화를 조
성했으며, 건물 기와를 무려 청동기와로 교체하고 설법전을 지었다.
그러다가 2009년 석굴암의 오랜 족쇄였던 우이령 통제가 풀리자 탐방객 수는 더욱 늘어 절의
명성은 조금씩 높아져 갔고, 조선 후기 나한상과 석굴로 이루어진 나한전을 내세워 나한도량
(羅漢道場)을 칭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10월에 단풍음악회를 여는 등, 속세에 절 이름 3자를
알리고자 애쓰고 있다.

▲  석굴암 범종각

▲  삼성각과 3층석탑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 나한전, 요사, 설법전 등 7~8동의 크고 작은 건물
이 있으며, 모두 1960년대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라 고색의 내음은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조
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불좌상(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61호, 아쉽게도 친견하지 못함)과 석조
지장보살좌상, 석조나한상 등 지방문화재 3점을 간직하고 있어 그들을 통해 절의 오랜 내력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다.
또한 이곳은 오봉산 자락에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조망이 일품이라 우이령길은 물론
상장봉 등 북한산 북쪽 산줄기가 훤히 바라보여 마음이 시원해지며, 번뇌가 멋모르고 쫓아오
다 졸도할 정도로 깊은 산골이라 풍경소리와 염불 소리, 바람의 소리가 전부인 그야말로 고적
한 절이다.

석굴암은 주말 점심 시간에 중생들에게 공양을 제공하며, 정월대보름에는 오곡밥과 대보름 나
물을, 동짓날에는 팥죽을 주는데 꽤 맛이 좋다고 한다. 그리고 2008년부터 매년 10월마다 단
풍음악제를 여는데 승려 음악가와 절 합창단, 가수, 국악인, 30사단 군악대, 지역 음악가 등
이 출연해 외딴 산사의 분위기를 한층 드높인다. 이때만큼은 고요하던 산사도 우이령길도 꽤
떠들썩해진다.

※ 오봉산 석굴암 찾아가기 (2017년 11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연신내역(3/6호선, 3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 구파발역(1,2번 출구)에서 34,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우이령 오봉산석굴암
  입구에서 하차
* 1,4호선 서울역(4,9-1번 출구), 2호선 을지로입구역(3번 출구), 1호선 종각역(3-1번 출구),
  5호선 서대문역(4번 출구), 3호선 홍제역(2,3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 녹번역(1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704번 시내버스 이용
* 우이령(오봉산석굴암) 입구에서 석굴암까지 도보 1시간. 석굴암 신도와 탐방객은 우이령길
  예약이 필요없으며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신분증 확인을 거쳐 들어가면 된다. 단 우이동(우
  이탐방지원센터)에서 접근할 경우에는 예약을 해야된다.
* 소재지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1 (석굴암길 519 ☎ 031-826-3573)
* 석굴암 홈페이지는 아래 윤장대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불가의 사치품으로 일컬어지는 윤장대(輪藏臺)를 돌려보자

주차장에서 경내로 오르면 조그만 기와집에 담긴 윤장대가 마중한다. 윤장대는 불경(佛經) 등
의 서적을 담아두는 책장이자 불가의 사치품으로 지금이야 많은 절에서 우후죽순 만들어서 보
기가 쉬워져서 그렇지 예천 용문사(龍門寺)의 윤장대를 제외하면 제대로 오래된 것도 없다.
그만큼 희소성이 크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문맹률이 높아(거의 90% 이상) 상당수의 백성들은 불경을 읽지 못했다. 그
러니 이해도 힘들었지. 하여 생각한 것이 윤장대를 활용한 것으로 책장 양쪽에 손잡이를 만들
고 그것을 돌리면 경서를 모두 이해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영업을 했다. 또한 윤장대를 돌리면
서 소망을 들이밀면 소망이 이루진다면서 윤장대에 대한 중생들의 관심을 높였다.


▲  경내 밑부분 (왼쪽의 건물은 설법전)

▲  석굴암 대웅전(大雄殿)

윤장대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가장 먼저 이곳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모습을 비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살짝 들려진 지붕 추녀의 맵시가 인상적이다.
이 건물은 1975년에 초안당이 지은 것으로 높이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워 제법 위엄
이 있어 보인다. 건물 중앙에는 1970년 우봉(又峰)이 쓴 대웅전 편액과 주련 4기가 걸려있으
며 내부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석가3존불을 이루고 있다.


▲  육체미가 넘치는 석굴암 석가모니3존불과 석가모니 후불탱
후불탱은 1998년 회주 초안, 주지 도인, 금어 박갑철이 조성했다.

         ◀  대웅전 신중탱(神衆幀)
부처의 세계를 수호하는 온갖 신들의 무리가
빼곡하게 담긴 탱화로 1991년 금어 김용희가
그렸다. 건물 내부의 기운을 정화하는 역할을
하여 법당에 많이 걸어둔다.


▲  옆에서 바라본 석굴암 대웅전

▲  석굴을 넓혀서 만든 석굴암 나한전(羅漢殿)

대웅전을 지나면 바위 석굴로 이루어진 나한전이 나온다. 이곳은 원래 3명 정도 들어갈 수 있
는 좁은 굴로 석굴암이란 이름도 바로 이 굴에서 비롯되었다.
호랑이가 곶감을 피해 다니던 시절부터 도봉산 동쪽 자락의 만월암이나 북한산 금선사(金仙寺
)의 목정굴(木精窟)처럼 참선 공간으로 쓰였다가 조선시대에 굴 주변에 건물을 짓고 이름도
편하게 석굴암을 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으로 석굴암이 초토화되자 이곳에 서린 석조불좌상과 나한상, 지장보살상 등이 이곳
에 피신을 했으며, 1954년 초안당이 그들을 수습하고 1964년 석굴을 넓혀 나한상의 보금자리
로 삼았다. 이후 도일이 내부를 넓히고 주변을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나한전 석굴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나한상을 중심으로 조그만 나한상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굴이라 그런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좀 따스하다. 또한 석굴 왼쪽에는 조그만
샘이 있는데 1990년대까지 석굴암의 갈증을 해소해주던 유일한 식수원으로 여기서는 용왕샘이
라 부른다.
지금이야 요사 옆에 지하수를 뚫어 물 걱정은 크게 덜었으나 이 샘은 수량이 적어 자주 바닥
을 드러내곤 했다. 특히 부정한 짓을 하거나 고기를 먹은 이들이 손을 대면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샘이 발끈해 그냥 말라붙었다고 한다.


▲  나한전 내부 - 나한 형님들이 나란히 단체 촬영에 임하고 있다.

▲  석조나한상(石造羅漢像)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62-1호

나한전 불단을 가득 메운 나한상들은 색을 입히지 않아 대부분 하얀 피부이다. 일부는 꺼무잡
잡한 피부를 보이기도 하지만 그리 크게 차이는 안난다. 이들 가운데 정중앙에 자리한 나한이
꽤나 독보적인데 그가 이곳의 주인장인 석조나한상이다. 그러다보니 특별히 연꽃무늬가 새겨
진 대좌와 듬직한 광배(光背)까지 두르고 있으며 검은 색의 옷까지 걸쳐 조그만 나한들의 두
목 역할을 한다.

이 나한상은 앉은 키 60cm, 무릎 폭 40cm의 조그만 모습으로 18세기에 한봉당 창엽(漢峰堂 瑲
曄)과 금곡당 영환(金谷堂 永煥) 등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석조불좌
상과 달리 표정이 밝고 인자하며 기품 있는 모습으로 중생을 맞이하고 있는데 광배와 대좌는
1970년대 이후에 붙인 것이고 옷 색깔은 근래에 입혔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멋이 좀 떨어지긴
했다.
참고로 이곳 나한들은 생쌀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공양도 생쌀을 올리고 있는데 1950년
대에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던 3명의 노파가 절 사람들이 게을러 생쌀을 공양한다며 초안당에
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이 기도를 마치고 나한을 보니 글쎄 생쌀이 나한 몸과 입,
무릎에 붙어있었고 생쌀 불기마다 움푹 패인 자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한의 그런 믿거나 말
거나 영험 사건으로 '석굴암 나한이 생쌀을 먹는다~'는 소문이 퍼져 기도객이 몰려들었고 그
덕에 공양쌀과 시주금이 늘어나 요사채와 삼성각을 무난히 올릴 수 있었다. (과연 나한의 소
행이었을까?)


 

♠  오봉산 석굴암 마무리 (삼성각)

▲  석굴암 석조(石槽)
오봉산이 제공한 옥계수가 쉼 없이 쏟아져나와 중생의 목을 축여준다.
내 목구멍 뿐 아니라 내 인생의 갈증도 싹 축여주면 좋으련만~~

▲  하얀 천막이 설치된 설법전 옥상
설법전은 경내를 받쳐든 석축 앞에 엮은 2층 건물로 그 옥상은 단풍음악제를
비롯한 절의 행사장으로 쓰이고 있다.

▲  석굴암 범종각(梵鍾閣)
초안당이 1980년대에 지은 것으로 1984년에 조성된 범종이 봉안되어있다. 저녁 6시가
되면 자고 있던 범종이 깨어나 우이령 일대에 잔잔하게 종소리를 들려준다.

▲  계단 끝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과 3층석탑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삼성각이 천하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1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이름 그대로 3명의 성스러운 존재,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을 머금고 있어야 되지만 독성은 나한전에 따로 봉안하고 여기서는 약사불과 칠성
탱, 산신탱을 봉안하여 3성을 채웠다.
이들 가운데 석조지장보살좌상과 약사탱이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지장보살상 뒤에 있
음에도 지장탱을 안달고 약사탱(1985년에 제작됨)을 단 점이 특이하다. 그들 양쪽 구석에는
1985년에 조성된 산신탱과 칠성탱이 좁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삼성각이란 이름보다는 지장
전을 칭하는 게 더 어울려 보인다. (지장보살이 중심에 있기 때문임)

삼성각 앞 벼랑에는 이곳의 유일한 탑인 3층석
탑이 하얀 맵시를 드러내며 서 있다. 왜 대웅
전 뜨락에 안두고 이런 험한 벼랑에 두었는지
모르겠으나 위치가 위치인지라 조망만큼은 아
주 일품이다.
석굴암에서 제일 조망이 좋은 곳이니 꼭 올라
가 그 멋을 체험하기 바란다.


 

◀  천하를 뜨락으로 삼은 석굴암 3층석탑

▲  산신과 호랑이, 동자가 담겨진 산신탱

▲  색감이 무지 고운 칠성탱


▲  삼성각 내부
석조지장보살좌상과 약사탱의 공간이 꽤 넓어 그들이 삼성각에 중심임을 알 수 있다.
불상 좌우에는 현란한 모습의 옥탑 2기가 자리한다.

▲  석굴암 석조지장보살좌상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62호

약사탱 앞에 자리한 석조지장보살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근래에 도금을 입혀 금빛을
찬란히 드러내고 있는데 불상이 주먹 크기 정도로 매우 작고 마치 얼굴이 겉늙은 동자상에 지
장보살 복장을 입혀놓은 듯하여 귀엽기도 하다. 그는 석조불좌상과 마찬가지로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린 길상좌를 하고 있는데 얼굴은 뭔가 시름에 잠겨있는 표정 같으며, 눈과 코,
입, 귀, 수염이 뚜렷하다.
그는 6.25시절에 석굴에 들어가 화를 피했으며 초안당이 절을 재건했을 때 삼성각을 세우면서
그 건물에 봉안했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우이령과 상장봉 능선의 장쾌한 위엄
아무리 둘러봐도 주변에 보이는 것은 숲과 칼처럼 솟은 산, 그리고 짙은 파랑색의
하늘 뿐이다. 그만큼 이곳은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고적한 곳이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주변
대웅전 앞에는 잠시 발을 멈추고 쉬어갈 수 있도록 쉼터가 닦여져 있다.


석굴암에 발을 들였을 때는 이곳에 문화유산이 있는 것을 몰랐다. 그냥 역사만 좀 오래되었을
뿐, 고색의 향기가 메마른 절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석
불들을 만나보니 의외에 장소에서 오랜 지기를 만난 듯 반가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석굴암
에 대해 미리 살피지 않고 간 나의 실수에 미안함이 가득했다.
요사와 설법전 내부. 석조불좌상 등을 제외하면 경내에 왠만한 것은 다 살펴봤으며 이곳 공양
밥이 맛있다고 하는데 제공 시간을 지나쳐서 먹지 못했다. 우이령이 나와 아주 먼 곳에 있었
다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인연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와 가까운 곳에 있으니 (직선거리로
7km도 안됨) 겨울 제국이 저물고 소쩍새가 우는 봄이 오면 그때 다시 인연을 만들어 우이령과
석굴암의 품에 퐁당 안기고 싶다.

이 일대가 개발의 칼질도 숨을 죽이는 영역이라 그 칼질로부터 다소 자유롭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식 개발의 칼질이 워낙 개념없기로 유명하니 자칫 약을 빨고 우이령 일대를 난도질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곳은 천지가 개벽해도 대자연의 깊은 공간이자 북한산(삼각산)과 도봉
산에서 가장 한적한 곳으로 우리 곁에 남기를 소망할 뿐이다.

이렇게 석굴암을 1시간 정도 둘러보고 다시 유격광장으로 내려와 우이령을 타고 서울 우이동
으로 넘어갔다. 우이령 나머지 부분은 본글에서는 생략하며 아래 별도로 링크된 글을 참조하
기 바란다. (☞ 우이령길 보러가기)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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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11월 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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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의 포근한 뒷동산이자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 산책 ~~ (한양도성, 낙산공원, 자주동천, 삼군부총무당)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좌청룡, 낙산 나들이 '
(한양도성, 낙산공원, 비우당, 삼군부총무당)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낙산공원 한양도성 (낙산에서 동대문 방향)

▲  자지동천(자주동천) 바위글씨

▲  삼군부총무당


 

♠  한양도성(漢陽都城) 혜화문(동소문)에서 낙산공원 구간

▲  혜화문에서 낙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5월의 첫 무렵, 일행들과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을 찾았다.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혜화동로터리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동소문고개가 막
꺾이기 직전에 한양도성과 낙산으로 이어지는 탐방로가 손을 내민다.

이 탐방로는 낙산을 넘어 동대문(東大門)까지 이어지는 2.3km의 도보길로 2012년에 모두 개통
되었다. (동소문 주변이 마지막으로 개통됨) 처음부터 각박한 경사로 사람들을 맞이하는데 그
것도 잠시일 뿐, 길은 서서히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완만해진다. 삼선동(三仙洞) 주택가 뒤쪽
을 지나지만 낙산 정상까지 녹지대를 완충지대로 삼아 속세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산책
의 기분을 진하게 선사해주며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수준도 높아진다.

동대문에서 낙산공원으로 오르는 성곽 탐방로는 성곽길과 성곽 바깥길 2가지가 있어 골라가는
재미가 있다. 허나 동소문에서 오르는 길은 아직까진 바깥길만 완전하게 나 있다. 동소문고개
에서 성 안쪽을 보면 나무가 좀 무성해 보이는데 그곳에 카톨릭대 성신교정이 넓게 자리를 깔
고 앉은 터라 낙산공원~동소문 성곽길은 그 중간인 제2전망광장까지만 닦였을 뿐, 거기서 카
톨릭대 담장에 사정없이 가로막혔다.
자세한 속사정이야 낸들 모르겠지만 시민들을 위해 성곽길을 흔쾌히 개방하고 성곽이 끊긴 동
소문고개에는 카톨릭대 교내(혜화동성당)로 내려가는 길을 내면 될 것이다. 물론 끊어진 양쪽
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성곽 모양의 구름다리를 놓는 것이 훨씬 좋겠지만 끊긴 거리가 길고 그
높이마저 상당하며 고갯길 도로(동소문로, 창경궁로)의 교통량이 어마어마해 꽤 난공사가 예
상된다.

동소문고개를 기준으로 15분 정도 오르면 성 안으로 인도하는 암문(暗門)이 나온다. 그 문을
들어서면 낙산공원 놀이광장으로 거기서 2분을 더 가면 낙산의 정상인 낙산공원 마을버스 종
점에 이르게 된다.


▲  주거지(장수마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펼쳐진 성곽 바깥 탐방로

▲  낙산에서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내려가는 한양도성
낙산 북부에서는 어디서든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 산줄기가 시원히 바라보인다.


동소문~낙산 구간의 한양도성은 대체로 잘 남아 있다. 허나 600년이 넘는 장대한 세월을 먹었
고, 왜정과 6.25전쟁으로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기면서 새 성돌로 치유된 부분이 많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때가 자욱한 검은 성돌과 하얀 피부의 성돌이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하지
만 둘 사이의 어떠한 갈등도 없이 오랜 세월을 뛰어넘는 강인한 협동심으로 하나의 성곽을 이
루고 있으니 참 든든해 보인다. 그럼 여기서 한양도성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조선의 수도를 지켰던 서울<한양(漢陽)>의 갑옷, 한양도성 - 사적 10호
1388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란 그 유명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몸담았던 고려 왕조를
엎어버리고 조선이란 아주 비리비리한 왕조를 세운 이성계(李成桂), 세상에서는 그를 조선 태
조라고 부른다.
그는 1394년 남경(南京)이라 불리던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의 도성 천도 프로젝트
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이며 국방을 강화하여 버릇 없이 까부는 명나라를 혼내주
려고 했던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다.
1395년까지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시가지를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
에 들어갔는데 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4산(內四山)인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 길이는 59,500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 작
은 수준이며,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천하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
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
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에 다시 79,400명을 콩볶듯이 동원,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도성 축조는 마무리
가 되었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싹 다지기로 하고 1422년
1월, 32만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하여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으니 무려 3.2배의 인부들이 동원된 조선 최대의 공사였으며 완전 인원빨로 밀어
붙어 불과 38일만에 마무리되었다.
허나 아무리 현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이지만 농번기를 피하려고 늦겨울에 무리하게 작업을 벌
였고 공사의 강도가 높아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다. (공사가 끝나고 귀가 도중 죽은
사람들도 꽤 되었음) 그들의 적지않은 희생과 고통으로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 치성(雉城)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한 도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케 했는데 성곽을 워낙 단단히
지은 탓에 20세기까지 스스로 붕괴된 적이 없으며,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되거나 전쟁 폭격을 받은 것은 제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하여
도성은 왜군에게 아주 허무하게 무혈점령되고 만다. 그런 꼬라지를 막고자 온갖 욕을 들어가
며 단단하게 다졌건만 오늘날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소위 윗대가리들의 무능으로 눈을 뜨고
적군이 도성 안에 들어오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치열한 전쟁이 없어서 성곽과 성문
은 별 피해가 없었다. (한양도성 왈 '내가 이럴려고 단단하게 지어진건가? 자괴감 들어' ;;)

1704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신하들의 격한 반대를 물리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했는데, 그 안에 행궁(行
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갖춘 조그만 도시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탕춘대성
(蕩春臺城)을 쌓아 도성의 수비력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서울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드러내던 한양도성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1899년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사람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콜
브란은 고종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며 전차(
電車)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하여 그 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
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
문의 양쪽 성벽이 싹둑 잘리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나갔다. 허나
그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
제는 1905년 이후이다.

왜국(倭國)은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그 소속으로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해괴
한 기관을 만들어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1910년 이후 서소문<소의문(昭義門)>과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동소문<혜화문(惠化門)>을 밀어버렸고 적지 않은 성곽까지 덤으로 밀면서
망국(亡國)의 서울을 욕보인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
발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
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겨우 살아남
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손질하기 시작하여 광희문과 숙정문을
복원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
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
이 가능하며<인왕산 정상 주변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에는 못감, 월요일이 휴일인 경우에는 그
다음날 문을 닫음> 성곽이 사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에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바뀌었다. 허나 서울성곽이란 이름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며 한양성곽이라 불리기도
한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한양을 쌈싸먹던 성곽이니 서울성곽, 한양성곽이라 불러
도 크게 상관은 없을 것이다. (본글에서는 한양도성으로 통일함)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며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데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글쎄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
이 쌓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
에 성곽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았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우리나라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 대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  거의 85도로 서 있는 한양도성의 위엄

옛 한양도성은 두터운 성곽을 지니고 있기에 늘 든든했을 것이다. 그렇게 민초들을 닥달하여
쌓은 단단한 성이건만 그 보람도 없이 무능하고 부패한 지배권력층 때문에 제대로 된 수성전
하나 치르지도 못하고 적에게 떨어지는 수난을 여러 차례나 겪어야 했다. (임진왜란, 이괄의
날, 병자호란...) 성곽은 도시와 백성을 지키고자 있는 것이지 그냥 멀뚱히 서 있는 병풍이
아니다.


▲  낙산 바깥 탐방로에서 바라본 천하 (삼선동과 돈암동, 성북동, 북한산)


 

♠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 낙산(駱山)에 둥지를 튼
~ 낙산공원

▲  낙산공원 남쪽에 자리한 낙산정(駱山亭)

서울 도심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누운 낙산은 해발 125m의 나지막한 산이다. 낙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양이 낙타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산의 이름인 낙(駱)은 낙타를 뜻한다.
또한 3글자로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 모두 낙타를 상징한
다. 그 이름을 간편하게 줄인 것이 낙산이며 조선시대에 궁궐에 우유를 조달하던 관청인 유우
소(乳牛所)가 낙산 기슭에 있어 타락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낙산은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의 하나로 도성의 동쪽을 맡고 있다. 여기서 내사산
이란 한양의 주산(主山)이자 북쪽에 있는 북악산<백악산(342m)>, 서쪽의 인왕산(338m), 남쪽
의 남산(南山, 262m), 그리고 동쪽의 낙산을 이르는데 문제는 그 가운데 낙산이 가장 부실하
게 생겼다는 것이다.

낙산과 멀리감치 마주보고 있는 인왕산은 산세는 좀 작아보이나 꽤나 야무지고 험준하여 예로
부터 호랑이들의 소굴로 유명했다. 북악산 역시 인왕산 못지 않으며, 남산은 그들보다는 세는
약해도 덩치는 좀 있다. 반면 낙산은 그들보다 높이나 덩치에 있어서 형편없이 떨어져 그냥
뒷동산 수준의 언덕이다. 낙산의 그런 부실한 기운을 북돋아주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일
환으로 동대문의 이름을 흥인문(興仁門)에 지(之) 1글자를 추가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한
것도 바로 그 이유이다.
낙산이 그렇게 염려되면 글자로 장난칠 것이 아니라 도성을 동쪽으로 좀 확장하면 어떨까 싶
지만 낙산 동쪽은 신설동 방향으로 조금 뻗은 동망봉(東望峰)을 빼고는 거의 평지이다. 그러
니 별 수 없이 낙산에 성곽을 얹힌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고려보다 스케일이 비교도 안될 정
도로 작기 때문에 도성을 크게 구축하지 않았다. <고려의 황도(皇都)인 개경(開京)보다 훨씬
작음>

낙산은 야트막한 산으로 숲이 무성하고 잘생긴 바위와 약수터가 많았다. 게다가 도성 내부가
훤히 보일 정도로 조망도 일품이라 도성 주변 경승지로 꼽혀 왕족과 양반들이 낙산에 정자나
별장, 거처를 지어 머물렀다. 효종(孝宗)의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석양루(夕陽樓, 지
금의 이화장 정문 앞에 있었음)를 지었고, 이심원(李心源, 1722~1770)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을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과 백림정(柏林亭) 등이 있었다. 이들은 양반과 시인묵객들이 자
주 발걸음을 했던 낙산의 이름난 명소였다.
또한 조선 후기 한옥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던 이화장(梨花莊)과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유
명한 이수광(李睟光)의 초가인 비우당(庇雨堂), 낙산의 유방이라 불리던 이화동약수와 신대약
수 등의 약수터, 우물이 나란히 5개가 있었다는 5형제우물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의 애환
이 서린 자지동천(자주동천)과 동망봉, 도성 5대 명승지의 하나로 기이한 바위가 많았던 쌍계
동(雙溪洞, 이화장 주변) 계곡이 있었다.
그 외에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는 나무만 있다고 하는 홍수동(紅樹洞, 홍숫골), 동
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 등이 낙산에 앞다투어 안겨져 있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낙산이었
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낙산에 안겨있던 수많은 명소들은 20세기 이후 어둠의 시절과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녹아 없어졌고, 서울의 인구가 폭증함에 따라 낙산과 동망봉 일대에 빼곡히 아파트와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옛날의 운치와 정취는 다 말라버렸다. 달동네인 이화마을도 바로 그런
시류를 타고 낙산 남쪽에 살짝 둥지를 튼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낙산의 허리를 가르
는 한양도성과 이화장, 자지동천 바위글씨, 그리고 근래 복원된 비우당이 고작이다. 그 외에
조선 왕실의 원찰(願刹)이던 청룡사(靑龍寺), 고려 때 지어진 비구니 절 보문사(普門寺), 구
한말에 세워진 안양암(安養庵)과 지장암(地藏庵) 등의 절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낙산 중턱에 자리를 피며 산의 미관을 적지않게 말아먹던 시민아파트가 노후화됨에 따라 1990
년대 이후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에 따라 이들 아파트와 주변 주거지를 싹 밀어버
리고 정상 주변과 서쪽 일대 61,000여 평을 다져 낙산공원을 만들었다.
공원은 1999년 12월 30일 삽을 뜨기 시작하여 2002년 6월 완성을 보았는데, 운동시설과 휴게
소, 낙산전시관, 중앙광장과 놀이광장, 전망광장 등 3개의 광장을 갖추는 한편, 소나무 등 8
만 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비록 왕년의 손톱 때만큼은 못되어도 도심 속의 포근한 휴식 공간
이자 답사/나들이 장소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하여 서울의 '몽마르뜨 언덕'이란 별명까
지 얻게 되었다. (낙산공원 면적은 201.779
㎡)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은 동대문에서 동소문까지의 2.3km 구간으로 성곽이 잘 남아있다. 1999
년 이후 산업화의 칼질에 오랫동안 고통받은 낙산을 조금씩 위로하면서 성곽도 보수를 벌였는
데 동대문 북쪽 구간을 복원하고, 성곽과 성밖에 탐방로를 만들었다. 성곽 내부 탐방로는 동
소문에서 카톨릭대 성심교정 사이 약 700m을 제외하고 모두 길이 나있고, 성밖은 동소문에서
동대문까지 모든 구간이 이어져있다.

낙산은 대학로와 무척이나 가깝고 혜화역(4호선)과 한성대입구역(4호선), 동대문역(1,4호선),
창신역(6호선)과도 또한 가깝다. 심지어 낙산공원 정상까지 마을버스가 들어오는 등 교통과
접근성은 매우 착하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뒷동산처럼 야트막하여 누구나 쉽게 안길 수 있고
조망도 일품이다. 특히 서울의 야경(夜景)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포인트라 인기가 더하다.

낙산에 간다면 동소문이나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낙산공원에서
가까운 명소로 이화장과 이화마을, 자지동천(자주동천)과 비우당, 동망봉, 삼군부총무당 등이
있으니 한 덩어리로 같이 보면 제법 알찬 나들이가 될 것이며, 여기서 욕심을 더 부려 청룡사
, 보문사, 안양암, 대학로 주변의 명소들까지 둘러본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 낙산공원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 교차로(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도보 20분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4번 출구에서 성곽 탐방로를 따라 도보 15분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
  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낙산공원 종점 하차
*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탐방로는 24시간 개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산2-10 일대 (낙산길 41. 낙산공원 관리소 ☎ 02-743-
  7985~6)


▲  낙산 정상부 ① - 낙산공원 마크와 성바깥 산책로

▲  낙산 정상부 ② - 놀이광장 주변

▲  낙산 정상에서 제2전망광장으로 이어지는 성곽길


 

♠  낙산 주변에 숨겨진 명소들

▲  복원된 3칸 초가, 비우당(庇雨堂)

낙산 정상(종로구 마을버스 03번 종점)에서 창신동 방향(동쪽)으로 500m 정도 내려가면 쌍용
아파트2단지 입구라는 정류장이 나온다. (낙산에서 마을버스로 두 정거장) 정류장 남쪽 비탈
에 나무가 우거진 조그만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으로 들어서면 원각사(圓覺寺) 직전에 3칸짜
리 초가가 마중을 한다. 그가 낙산을 수식하는 명소의 하나인 비우당이다. 그럼 이곳에는 비
우당만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비우당 바로 뒤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에 자지동천 바
위글씨와 샘이 있다.

우리가 갔을 당시에는 가는 날이 보수하는 날이라고 지붕을 수리하고 파란 천으로 꽁꽁 덮고
있었다. 지붕을 감싼 천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날을 잘못 찾아온 것을 어찌하리? 어차피 집에
서도 가까운 곳이니 아쉬우면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도 상관은 없다. 그렇다면 비우당은 어
떤 곳인데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일까?

비우당이란 이름은 '비를 가리는 집(우울하게 말하면 간신히 비나 가리는 집)'이란 뜻으로 중
고등학교 국사책과 온갖 국사 관련 수험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주인공,
지봉 이수광<芝峯 李晬光, 1563~1628>이 어린 시절과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그의 호인 지봉
은 낙산 동쪽의 한 줄기인 지봉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이 집은 이수광이 지은 것이 아닌 문화유씨 집안이던 유관(柳寬. 1346~1433)의 집이었다.
그는 낙산 동쪽, 현 자리에서 약간 서남쪽인 쌍용2차아파트 자리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맹사
성(孟思誠), 황희(黃喜) 못지 않은 강력한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다. 집을 짓긴 했지
만 재상(宰相)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낡아빠진 초가였고, 지붕에 계속 빗물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았다고 한다. 그때 그는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어찌 견딜까??' 남 걱정도 참 팔자인 유명한 농담을 남기니 그 말이 '유재
상의 우산'이란 뜻의 유상수산(柳相手傘)이다.

유관이 죽자 외손인 전주이씨 집안에게 상속되었는데, 그 집안에서 태어났던 이수광이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없어진 것을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로 잠시 관직을 버렸을 때, 홀연히 다시 찾은 것이다.
그는 다시 집을 짓고 유관의 일화를 바탕으로 집의 이름을 비우당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머물며 지봉유설을 비롯한 다양한 서적을 작성했는데,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를 통해
집과 관련된 사연을 적었다. 또한 집 주변의 8곳의 경치를 '비우당 8경(八景)'이라 정하고 시
를 지으니 다음과 같다.

1. 동지세류(東池細柳) - 동대문 밖에 있던 동지(東池)란 연못에 핀 버들이 봄바람에 버들개
지를 날리고 꾀꼬리가 노래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동지는 현재 없음)
2. 북령소송(北嶺疏松) - 북악산의 산마루가 낮에도 어둑한데 푸른 솔그림자가 집에 드리운
것을 보고 동량으로 쓰이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3. 타락청운(駝酪晴雲) - 아침마다 누운 채 낙산의 구름을 마주하면서 한가한 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4. 아차모우(峨嵯暮雨) - 아차산에서부터 벌판을 지나 불어오는 저녁비를 노래했다.
5. 전계세족(前溪洗足) - 비가 오면 개울에 나가 발을 씻고 개울가 바위(자지동천)에 드러눕
다. (현재 낙산에는 계곡이 전멸함)
6. 후포채지(後圃菜芝) - 지봉과 상산(商山, 낙산의 동쪽 줄기의 하나)의 이름에 맞추어 상산
사호(商山四皓)처럼 살고 싶다.
7. 암동심화(巖洞尋花) - 복사꽃 핀 골짜기에서 나비를 따라 꽃을 찾아가는 풍류를 말하다.
8. 산정대월(山亭待月) - 맑은 달밤 정자에 올라 술잔을 잡은 흠취를 말했다.


조선 중기에 뛰어난 문신이자 학자로 실학(實學)의 시조격인 인물이며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
으로 정국을 이끈 그가 바람처럼 사라진 이후 집은 고된 세월에 지쳐 쓰러졌고, 그가 노래한
비우당8경도 개발의 칼질에 재현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서울시에
서 뒤늦게나마 비우당 표석을 세웠고, 원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앉으면서 2011년에 그 부근
인 자지동천 앞에 비우당을 복원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비우당은 툇마루를 갖춘 초가 3칸으로 부엌을 가지고 있다. 초가 주위로 싸리나무로 얇게 담
장을 둘러 옛 초가의 정취도 조금은 풍기는데 사립문이 열려있는 경우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
면 된다. 허나 무심히 닫혀있더라도 담장이 낮아서 안으로 넘어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굳이 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바깥에서 거의 다 보이지만 비우당 뒤쪽에 있는 자지동천의
흔적(샘터와 바위글씨)이 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담장 밖에서도 보이기는 보임) 비우당
은 복원된지 10년도 안된 아주 따끈따끈한 초가라 고색의 내음 따위는 기대할 수 없지만 자지
동천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  서울시장 조순이 1995년에 세운 비우당 옛터 비석

▲  비우당 동쪽 부분 (굳게 닫힌 사립문과 비우당터 비석)
초가 뒤쪽으로 자지동천 표석과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  자지동천(紫芝洞泉, 자주동천) 표석

▲  비우당 뒷쪽 굴뚝과 자지동천

그럼 이름도 참 거시기한 자지동천(자주동천)은 어떤 사연이 깃든 곳일까?
이곳은 낙산 동쪽에 자리한 오래된 샘터로 조선 6대 군주인 단종(端宗)의 부인, 정순왕후(定
順王后) 송씨(1440~1521)의 슬픈 사연이 서린 현장이다.

정순왕후는 여산송씨 집안으로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1454년 단종의 왕비가 되었으며 바
로 이듬해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넘기면서 단종은 상왕(上王), 송씨
는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가 되었다. 허나 1457년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
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생애 마지막 강제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송씨는 영도교(永渡橋,
청계8가)까지 울면서 따라와 마지막 이별을 나누게 된다.
그들이 영영 이별한 다리라는 뜻에서 영이별교, 영이별다리라 불렸고, 그것이 영도교로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단종이 떠나면서 송씨 역시 강제로 궁궐을 나와 낙산 청룡사(靑龍寺)에 몸을 의탁했다. 청룡
사는 은퇴한 왕실 상궁(尙宮)과 승하한 제왕의 후궁들이 말년을 보내던 곳으로 그들을 위한
정업원(淨業院)이 설치되어 있었다. 송씨도 그곳에 머물렀으나 세조(世祖)가 마땅히 지원을
해주지 않아서 생활이 상당히 어려웠다.
그래서 절과 가까운 자지동샘으로 와서 비단을 빨아 자주색 물감을 들여 바위 위에 널어 말렸
으며, 그 비단으로 댕기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서울 장안이나 동묘 주변에 열렸던
여인시장에 팔아 생계를 꾸렸다. 그때 여기서 비단을 물들이거나 빨래를 할 때 샘물도 그녀의
처지에 피눈물을 흘렸는지 저절로 붉은 색으로 염색이 되었다고 하며, 세상에서는 송씨의 그
런 애환을 위로하고자 함인지, 자주색으로 물들인 샘을 자지동천(자주동천), 자주우물이라 부
르고 바위는 자주바위라 불렀다. 또한 샘터 일대를 자지동(紫芝洞, 자주동), 자줏골, 자주동
이라 불렀다.
이렇게 보면 이름은 많은 것 같지만 정식 이름은 자지동천, 자지동이며 여기서 자지는 거시기
한 그것이 아니라 뿌리가 자주색을 띠는 풀인 지초(芝草)를 말한다. 지금이야 샘이 있는 바위
윗쪽에 잡초만 자라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 지초가 무성히 자라고 그 바위 틈으로 맑은 물이
흘렀다고 전한다.

옛 기록에도 이곳 이름은 그렇게 거시기하게 나오지만 이 땅의 정서상 상당히 예민한 단어인
지라 당당히 쓰기에는 좀 쑥쓰러운 감이 있어 요즘은 자주동천, 자주동샘으로 희석해서 많이
부른다. 비록 단어는 거시기해도 뜻은 그렇지가 않거늘 마치 홍길동(洪吉童)이 아버지를 아버
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자지동천은 자주바위 밑에 파인 'U'자 모양의 돌우물로 왜정 때까지 물이 나왔다고 한다. 허
나 왜정 이후 개발의 칼질로 낙산의 계곡과 물이 씨가 마르면서 죽은 샘물이 되었다. 송씨를
비롯하여 낙산 동쪽에 살던 여인들이 빨래나 염색/식수용으로 사용하던 샘물로 옛날의 정취는
95% 이상 증발되고 겨우 일부만 남아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샘터를 밑도리에 둔 자주바위 피부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 쓰인 바위글씨가 있다. 자
지(紫芝) 2글자는 좀 퇴색되긴 했으나 두 눈으로 살피는데 그리 어려움은 없으며, 동천(洞泉)
2자는 꽤 선명하여 글씨에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글씨를 쓴 이는 누군지는 전해오는 바는 없
으나 조선 후기에 단종과 정순왕후를 추모하는 선비가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  흔적만 남아있는 자지동천 샘터(자주동샘)

▲  자지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글씨에 검은색을 입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글씨의 크기는
세로 72cm, 가로 185cm이다.

▲  자지동천 거북바위

자주바위 윗쪽에는 거북이를 조금 닮은 듯한 커다란 바위가 있다. 하여 바위 이름도 거북바위
인데 그에게도 정순왕후의 한이 담겨져 있다.
정업원에서 먼저 간 남편(단종)을 생각하며 눈물로 잠을 이루던 어느 날, 단종이 거북이를 타
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이상히 여기며 아침 일찍 비단을 빨러 자지동샘에 왔는데 어
제까지만 해도 없던 이 거북바위가 불쑥 나타났다고 한다.
물론 바위가 갑자기 불쑥 나타날 리는 없다. 허나 그런 꿈을 꾼 이후, 빨래를 널고 잠시 쉬면
서 바위를 살펴보니 꿈의 영향인지 거북과 비슷하게 생긴 것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 사연을
동네 아낙들과 승려들에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그 이야기가 새끼에 새끼를 치면서 그런 전
설로 변해간 것이다.

※ 비우당, 자지동천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
  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쌍용아파트2단지 입구에서 하차, 도로 남쪽 밑에 나무가
  무성한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 아랫쪽에 있다.
* 낙산공원(낙산 정상)에서 창신역 방면으로 도보 7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9-471 (낙산공원 관리소 ☎ 02-743-7985~6)


▲  삼군부총무당(三軍府總武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호

낙산 동북쪽이자 한성대 바로 서쪽에는 삼선공원(삼선상상어린이공원)이 있다. 그 안에는 고
색이 창연한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하나 숨겨져 있으니 그가 삼군부총무당이다.

삼군부(三軍府)는 국방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1865년에 흥선대원군이 신설했다. 비변사(
備邊司)를 의정부에 통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군령 최고 기관으로 무부(武府)라 불리기도 했
는데 광화문 남쪽 예조(禮曹) 자리에 훈국(訓局)의 신영(新營), 남영(南營), 마병소(馬兵所)
및 오영(五營)의 주사서(晝仕所)를 합쳐 삼군부라 칭했으며, 1867년 4월에 완전한 조직을 갖
추었다.
의정부(議政府)와 대등한 지위를 누리며 군무(軍務)와 군비 강화를 비롯한 숙위 문제와 변방
관리를 맡았으나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에게 크게 꺾이면서 1880년 12월 폐지되고 만다.

삼군부총무당은 삼군부가 한참 자리를 잡던 1868년에 현재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 세워진 것
으로 삼군부의 중심 건물이다. 양쪽으로 덕의당(德義堂)과 청헌당(淸憲堂)을 거느렸으며, 삼
군부가 폐지된 이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관청으로 쓰였다가 갑오개혁(甲午改革) 이
후에는 시위대(侍衛隊) 청사로 쓰였고, 1910년부터 1926년까지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 사령
부로 사용되었다.
허나 순종(純宗)이 1926년 붕어한 이후, 보병대는 폐지되었고, 1930년 왜정(倭政)이 쓸데없이
심술을 부리면서 삼군부의 중심인 총무당을 지금의 자리로 내쫓았다. 또한 덕의당은 부셔버렸
으며, 청헌당(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호)만 홀로 남아있던 것을 1967년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로 보내버렸다.

▲  삼군부총무당의 뒷모습

▲  위에서 본 모습

총무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길쭉한 팔작지붕 건물로 중앙 3칸은 대청이고 양 옆구리에 1
칸짜리 온돌방이 있으며 그 옆에는 광이 있다. 조선이 이 땅을 거쳐간 가장 최근의 나라이지
만 왜정의 심술이 극심해 제대로 남은 관아 건물이 별로 없으며 서울 같은 경우는 총무당과
청헌당이 유일하다. 설령 남기더라도 생색내기용으로 거의 1~2동만 남기는 수준으로 망국의
관청을 완전 고자 수준으로 만들었다. (삼군부 같은 경우는 1동만 자리를 지키게 했음)
뒷끝이 쿨해야 서로가 좋거늘, 왜는 섬나라 사람의 비좁은 본성 때문에 그러지를 못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두고두고 반감만 잔뜩 샀던 것이다.

총무당 주변은 1970년대 이후 동네 주민을 위한 공원이 조성되었고, 어린이놀이터를 더 확장
하여 완전한 어린이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이제와서 총무당을 제자리로 돌리기는 좀 힘들겠지만 따로 놀고 있는 청헌당과는 다시 하나로
이어줘야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니까 청헌당이 이곳으로 오던지 아니면 총무당이 육사로
가던지 해서 둘을 같이 있게 해주면 보기도 좋을 것 같다. 덕의당은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복
원을 해서 옆구리에 붙여주면 될 것이다. 비록 망국의 관청이긴 하나 한때 조선의 군정(軍政)
을 관장했던 현장으로 이렇게 동네 구석 어린이공원에 분산되어 처박혀있는 것도 한편으로는
좀 딱해 보이기도 한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삼선공원
삼군부총무당을 끝으로 낙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삼군부총무당(삼선공원)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3번 출구를 나와서 1분 가면 삼선교로4길(삼군부총무당을 알리
  는 어두운 색깔의 이정표가 있음)이 나온다. 그 길로 들어서 8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과 장
  수마을 표석이 나오면서 좌우로 갈리는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성곽과 반대 방향인 왼쪽
  으로 2분 가면 삼선공원이 나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1가 1-13,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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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오랜 상징을 거닐다. 유달산~갓바위 나들이 (노적봉, 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 호남선의 종점, 목포 늦여름 나들이 '

   

▲ 유달산 노적봉
◀ 달성사에서 바라본 목포시내

▶ 갓바위입구 포구
▼ 갓바위

   



늦여름과 초가을의 팽팽한 경계선인 9월 첫 무렵에 예향(藝鄕)의 고을이자 전남 제일의 항구도
시인 목포(木浦)를 찾았다.
목포는 무려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그곳과는 이상하게도 인연이 잘 닿지가 않았다. 하여 이번
에 억지로 인연을 갖다붙여 목포행 무궁화호 첫 열차에 속세에 찌든 몸을 담고 느림의 미학(美
學)을 음미하며 거의 5시간을 달려 호남선(湖南線)의 오랜 종점, 목포역에 이르렀다.
목포에서의 정처는 이미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되는데 이번에 문을 두드린 곳
은 유달산 동부와 달성사, 그리고 갓바위이다.


 

♠  유달산(儒達山) 겉돌기

▲  노적봉(유달산입구)에서 유달산으로 인도하는 계단

목포역에서 시내를 가로질러 노적봉길을 따라 10여 분 걸으면 유달산의 관문인 노적봉 주차장(
유달산입구)이다. 속세에서 유달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중심 관문으로 이곳 외에도 어민동산과
조각공원, 목포시사 등에도 산길이 있으나 관광객들은 보통 노적봉에서 오른다. 이곳에 너른
주차장이 있고 접근성도 괜찮기 때문이다.

유달산(228.3m)은 목포의 상징이자 꿀단지로 시내 서쪽에 들어앉아 서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노령산맥(蘆嶺山脈)의 실질적인 종점으로 호남의 개골(皆骨)로 일컬어졌으며 영혼이 거쳐가는
산이라 하여 영달산(靈達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영혼이 나중에 선비를 뜻하는 한자로 바뀌
어 유달산으로 간판을 바꾼 것이다.
산세는 그리 크지 않아 노적봉에서 정상까지 넉넉잡아 30~40분 정도면 충분하며 유달산의 정상
인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삼등바위, 고래바위, 투구바위, 노적봉 등 20개가 넘는 개성파 바위
들이 앞다투어 산을 멋지게 수식하고 있다. 이들은 목포8경의 으뜸인 유산기암(儒山奇巖)의 현
장으로 지금은 목포9경으로 재편되어 '유달산풍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유달산의 품에는 대학루와 달선각, 소요정, 낙조대 등의 정자가 있고, 조각공원과 특정자생식
물원, 노적봉예술공원, 목포시사, 달성사, 오포대(午砲臺) 등의 명소가 있으며, 2.7km의 유달
산 일주도로(유달로)와 뚜벅이를 위한 유달산 둘레길이 둘러져 있다. 또한 산자락에는 왕자귀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천하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서식하고 있다.

산에 왔다면 정상은 한번 가주는 것이 산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정상에 오르면 목포시내를 비
롯하여 서해바다와 점점이 찍힌 크고 작은 섬들이 앞다투어 두 눈에 들어와 조망(眺望)이 천하
일품이다. 게다가 사방(四方)이 확 트여있어 일출과 일몰을 모두 구경할 수 있다.
이곳 정상은 한참 20대의 중반을 달리고 있던 2002년 초, 심야열차로 목포에 내려와 새벽에 검
은 도화지 속을 가르며 올라간 추억이 있다. 그때 일등바위에 걸터앉아 불끈 솟아오르는 해돋
이를 보며 목이 터져라 환호를 질렀었지~! (허나 지금은 우울이 파도를 치는 30대 후반 ㅠㅠ)
노적봉에서 정상까지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밤에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이렇게 오랜만에 찾은 유달산이지만 이번에는 뫼 깊숙히 안기지 않고 노적봉과 목포시사, 달성
사 등 유달산의 겉만 돌고 철수했다.


▲  노적봉예술공원 미술관 야외공연장

노적봉 주차장 서쪽에는 노적봉예술공원이 자리해 있다. 주차장에서 보이는 공원은 3층 꼭대기
로 야외공연장으로 쓰이며 공연장 옆에 '노적봉예술공원'이라 쓰인 건물로 들어가 내려가면 미
술관과 홍보관이 나온다.
이곳은 2009년 7월에 문을 연 목포 종합 홍보관 겸 미술관으로 지상 2층과 옥상(3층)으로 이루
어져 있다. 1층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작품과 목포 지역 서화가의 작품을 다루는 미술관으로
, 2층은 목포의 역사와 지리, 문화, 예술 등을 다루고 있으며, 3층 옥상은 야외공연장으로 쓰
이고 있다. 허나 이곳은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곳이라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넘기고 유달
산으로 등을 돌렸다.

★ 노적봉 예술공원 미술관 관람정보 (2017년 9월 기준)
* 관람시간 : 9시~18시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없음)
*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대의동2가 1-4 (유달로 116, ☎ 061-270-8300)


▲  노적봉(露積峯)

노적봉 주차장(유달산입구) 뒤쪽에 노적봉이라 불리는 울퉁불퉁한 큰 바위가 있다. 속세(俗世)
에서 유달산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그는 대자연이 빚은 해발 60m의 바위로 남해바다의 영
원한 해신(海神),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뛰어난 전략과 숨결이 서린 현장이다.

때는 1597년 겨울, 그 유명한 명량대첩(鳴梁大捷)으로 적선 133척을 격파하고 왜군 1만여 명을
물고기 간식으로 만든 이순신은 목포 앞바다에 뜬 고하도(高下島)에 주둔하며 남해로 진출할
준비를 했다.
왜군들은 언제 이순신이 나타나 자신들의 목을 칠지 전전긍긍하며 수시로 조선 수군의 동태를
살폈는데, 이순신은 바다가 잘 보이는 노적봉에 이엉(볏짚)을 덮어 마치 군량미가 산처럼 쌓여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하고, 새벽에는 바닷물에 백토를 풀어 쌀뜨물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을 눈
뜬 장님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왜군은 그의 계략에 제대로 속아 쫄깃해진 염통을 부여잡고 도
망을 쳤으니 그 연유로 세상에서는 이 바위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유달산의 상징이자 이순신의 손길이 담긴 노적봉은 매우 거친 바위라 오르는 것이 통제되어 있
다. 바위 주변에는 산책로가 둘러져 있어 방향마다 달리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맨
살을 완전히 드러내기가 부끄러웠는지 얇게나마 푸른 덩굴 옷을 걸치고 있다. 근래에는 노적봉
큰바위 얼굴이라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바위 꼭대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 얼굴과도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이를 두고 이순신 장군이 호령하고 있는 모습이라 말하기도 한다.
또한 노적봉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에도 좋다고 하여 인근 다산목과 함께 소원을 비는 현장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  가까이서 바라본 노적봉 (바위 정상이 사람 얼굴과
좀 비슷하게 생겼음)

▲  동쪽에서 바라본 노적봉

▲  북쪽에서 바라본 노적봉


▲  노적봉 동쪽에 심어진 옛 목포MBC 표석
1980년 5.18 시절 방송매체들이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며 5.18을 폭동으로,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는 보도를 내보내자 분노한 목포 시민들이 방송국에 불을 지르고 5.18
탄압을 규탄했던 현대사의 쓰라린 현장이다. 그 현장이던 목포MBC는 다른 곳으로
둥지를 옮겼고 저렇게 표석 하나를 남겨 놓아 당시의 상황을 아련히 전한다.


▲  새천년 시민의 종

노적봉 뒤쪽으로 가면 커다란 종각(鐘閣)이 있다. 그 안에는 2000년 10월에 조성된 커다란 종,
새천년 시민의 종이 담겨져 있다.
2000년에 새로운 천 년을 맞이하여 목포시에서 6억 원을 들여 만든 종으로 옛날에 정오 12시를
알렸던 오포대(午砲臺) 자리에 세웠다. 종은 1998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2000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는데 서울대 정밀기계설계 공동연구소에서 제작 설계를 하고, 김응현 선생이 종에 글씨를
새겼으며 종각의 현판인 '시민종각(市民鐘閣)'은 전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남겼다.
보통 종은 33번을 치기 마련이나 이 종은 희망찬 21세기의 염원을 담아 만든 것이라 하여 특별
하게 21번을 친다.


▲  노적봉에서 시내로 내려가는 계단길
이 계단을 내려가면 옛 목포 일본영사관(사적 289호)이 나온다.

▲  온갖 거시기한 상상을 유발시키는 노적봉 다산목(多産木) 아랫도리


▲  노적봉 다산목

노적봉 남쪽에는 유달산의 새로운 명물로 등극
한 다산목이란 나무가 있다. 이들 나무는 팽나
무로 나무 줄기는 뼈만 앙상한 다리 같은 모습
인데 그들이 갈라져 가랭이를 벌리고 있는 듯
한 부분은 여인의 은밀한 부분과 비슷하게 생
겨 먹어 온갖 예민한(?) 생각들을 불러일으킨
다.

이 나무는 1900년대 초반에 발견된 것으로 여
한목(한스러운 여인나무)이라 불렸다고 한다.
나이는 150년 정도로 1910년경에 어미나무(여
한목)의 뿌리에서 새끼나무가 자라나자 그를
다산목이라 했다.
인근 주민들만 알고 지내던 숨겨진 존재로 이
들 나무를 보면 아이를 많이 낳는다고 하여 노
적봉 주변 동네의 출산율이 목포의 다른 동네
보다 높았다고 전한다. 아무래도 자연의 경이
로움이 느껴질 정도로 걸작이다보니 보기만해
도 밤일(?) 생각이 간절하고 힘 또한 불끈 솟
는 모양이다.

동네 사람들의 아주 비밀스러운 성기/기자신앙(性器/箕子信仰)의 대상물로 오랫동안 숨바꼭질
을 해왔지만 2000년 10월 새천년 시민의 종을 만들고자 노적봉 주변의 수풀을 손질하는 과정에
서 발견되어 속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목포시청에서 그 나무를 여자나무(여인나무)
라고 부르다가 동네 설화에 따라 다산목으로 이름을 바꾸고 유달산의 명물로 키우고 있다.


▲  노적봉에서 바라본 목포시내

▲  유달산 주위를 도는 드라이브 둘레길, 유달로

▲  점점 멀어져가는 노적봉 (유달로에서 바라본 노적봉)

▲  목포시사로 인도하는 계단길
나무가 적절하게 고개를 숙이며 조촐하게 숲길을 이룬다.

▲  돌담에 둘러싸인 목포시사(木浦詩社) - 전남 지방기념물 21호

노적봉에서 유달산 밑도리를 따라 흘러가는 둘레길을 쫓아 조각공원 방면으로 가다보면 숲속에
고즈넉하게 들어앉은 목포시사가 마중을 나온다.

유달산 동쪽 자락에 안긴 목포시사는 1907년 대학자로 칭송받는 정만조(鄭萬朝)가 세웠다. 시
사(詩社)란 선비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으로 지금으로 따지면 문학 동호회 모임터이
다. 1890년 허석제, 여규향 등 지역 문인들이 세운 유산정에서 비롯된 목포시사는 망국의 한
과 우국충정을 토로하던 문학결사 단체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시에 뜻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받아들였으나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은 절대로 받지 않았다.
지금도 시사의 성격은 전혀 녹슬지 않았으며, 매년 봄과 가을에 한시(漢詩) 백일장을 열고 있
다. 그때가 되면 전국에서 100~200명 이상의 문인들이 찾아와 서로의 필력을 겨루며 한시의 명
맥을 이어가고 있다.


시사를 이루고 있는 건물은 2동으로 앞에 있는
건물이 시사 본당(本堂)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본당에는 정만조의 문집과 구한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온갖 서적과 한시 현판, 백일장 입
선작, 문인들의 원고가 소장되어 있으며 뒷쪽
건물은 시사 관리인의 거처이다.


  목포시사 본당



 

♠  유달산 자락에 안긴 100년 묵은 산사(山寺)
목포 달성사(達聖寺)

▲  달성사 (왼쪽부터 범종각, 명부전, 극락보전, 관음전)

목포시사에서 다시 둘레길을 따라 북쪽으로 2~3분 가면 달성사 이정표가 마중을 나온다. 그의
안내에 따라 산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유달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다진 달성사가 모습을 비춘다.

달성사는 목포 지역 유일의 오래된 사찰로 1913년 4월 석가탄신일에 노대련 선사(盧大蓮 禪師)
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에 창건되어 대원사(大願寺)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근
거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1913년 창건 이후 법등(法燈)을 켠지 이제 100여 년이 되었지만 그 짧은 역사도 제대로 정리하
지 못해 많은 내력이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의 절은 2000년대 초반에 손질된 것으로 고색의 내
음은 싹도 틔우지 못했지만 다행히 다른 곳에서 오래된 불상 2개를 업어와 든든한 밥줄로 삼고
있다. 내가 여기에 온 것도 바로 그 불상을 보기 위함으로 그들이 만약에 없었다면 이곳에 영
원히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위시하여 명부전과 삼성각, 요사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산자
락에 크게 2단으로 석축을 다져 1단에는 3층석탑과 요사, 범종각을 두고, 2단에는 극락보전과
명부전, 관음전을 두었다. 그리고 극락보전 뒤쪽에 높이 터를 구축해 삼성각을 세웠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아미타3존불좌상과 목조지장보살반가상 등이 있
으며, 이곳에 있는 우물은 유달산 뿐 아니라 목포에서도 흔치 않은 샘터로 유명하다. 또한 목
포8경의 하나인 달사모종(達寺暮鐘)의 현장으로 이곳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는 목포 시내의 번
뇌를 잠재운다.


▲  달성사로 올라가는 계단길

▲  경내 밑에 자리한 이형(二形) 석탑
정확한 조성시기는 모르겠으나 때깔이 좀 낀 것으로 봐서는 20세기 초나 중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3층탑 같기도 하고 2층탑 같기도 하고, 보면 볼수록
참 답이 없는 탑인데 아랫층을 기단으로 본다면 2층이 되겠고, 탑신으로
본다면 3층이 되기 때문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경쾌하게 들려져
살짝 날개짓을 벌이는 것 같다.

▲  경내로 오르는 계단

▲  앞서 이형 석탑 윗도리와 똑같이 생긴
2층 탑신이 계단 옆에 놓여져 있다.

▲  관음전(觀音殿, 2층)과 요사, 공양간(1층)
관음전 밑도리를 활용하여 요사와
공양간을 두었다.

▲  극락보전(極樂寶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처음에는 대웅전을 칭했으나 본존불과의
형편성을 고려해 극락보전으로 바뀌었다.


▲  달성사 목조아미타3존불좌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28호

극락보전에는 눈을 가늘게 뜨며 포근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
의 이름을 대웅전(大雄殿)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인 극락보전으로 바꾼 것도 바로 이
들 때문이다.

그들은 1678년 강진 만덕산 백련사(白蓮寺)에서 조성된 목불(木佛)로 이들을 조성하면서 남긴
조성발원문(14cmX25cm)에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다.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나를 취하
며 앉아있는 아미타불의 옷은 통견의로 U자형의 옷주름이 물결을 이루고 있으며 1자형의 띠줄
과 연화형 승각기, 우측 어깨의 반단, U자형 군의자락 등이 특징이다. 그의 좌우에는 현란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로 앉아있는데 표정이 좀 무거
워 보이며 17세기 전남 지역의 몇 안되는 목불의 하나로 손꼽힌다.

◀ 극락보전 뒷쪽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과
그 앞에 솟은 대련선사창공비(大連禪師彰功碑)

삼성각은 산신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
금자리로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다.
그 밑에 밋밋하게 솟은 비석은 절을 세운 노대
련 선사를 기리고자 세운 창공비(彰功碑)이다.

         ◀ 달성사 우물 <옥정(玉井)>
극락보전 뒷쪽에는 정(井)과 샵(#) 모양의 진
수를 보여주는 우물이 누워있다. 여기선 그를
옥정이라 하여 애지중지하고 있는데 노대련이
100일 기도 중에 굴착을 하니 기도의 영험인지
30척 바위 속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유달산의 흔치 않은 우물로 물맛이 좋기로 소
문이 자자하며, 여름에는 물이 차고 부정한 사
람이 물을 길으면 일시에 마른다고 한다. (내
가 갔을 때는 물 구경도 못했음)

  종무소(宗務所) 겸 요사(寮舍)

  명부전(冥府殿)

  명부전 10왕상 (우측)

  명부전 10왕상 (좌측)


  달성사 목조지장보살반가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29호

극락보전 옆에는 지장보살과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이 있다. 다
른 건물은 다 지나치더라도 극락보전과 명부전 내부는 꼭 살펴보도록 하자. 바로 달성사의 보
물이 담겨져 있기 때문으로 특히 명부전의 목조지장보살반가상은 이 땅에 흔치 않은 반가상(半
跏像)으로 매우 희소성이 높다.

푸른색의 승려 머리를 선보이며 동자처럼 해맑
은 표정을 지은 지장보살상은 1565년 나주 웅
점사<熊岾寺, 현재 운흥사(雲興寺)>에서 조성
된 것으로 조성 관련 내용이 조성발원문(13cmX
143cm)에 소상히 나와있다.
극락보전의 목조아미타3존불처럼 낯선 이곳으
로 흘러들어왔는데, 언제 무슨 경로로 왔는지
는 전하는 것이 없다.

이 불상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밝은 표정 속에
는 눈썹과 가늘게 뜬 눈, 오똑한 코, 붉은 입
술이 담겨져 있으며,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島
)가 획 그어져 있다.
왼쪽 다리는 가부좌(跏趺坐)를 취하고 있고 오
른쪽 다리는 밑으로 내리고 있는데, 이런 형태
의 불상은 17세기 이전에는 오로지 이것 밖에
없다고 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우 사실적
으로 묘사되었으며 지방문화재가 아닌 국가 보
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인다.

그가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그를 위해 근래에 특별한 제작된 것으로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살짝 앉아보고 싶을 정도 탐이 난다. 그의 좌우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
明尊者)가 밝은 색채를 띄며 서 있다.


▲  달성사에서 바라본 목포시내

경내를 둘러보고 종무소 툇마루에 앉아 불만에 잠긴 두 다리를 쉬었다. 툇마루에 식당에서 많
이 볼 수 있는 커피 자판기가 있는데 무려 공짜이다. (지금은 없으며 종무소에서 승려가 전통
차를 달여서 제공해줌, 단 그가 종무소 방에 머물고 있을 때에 한함) 그래서 2잔이나 뽑아 마
셨지.
속세에 대한 근심을 잠시 바람에 날리며 툇마루에 앉아있으니 종무소에서 일하던 여인네가 다
가와 말을 건넨다. 그는 나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였는데 어디서 오셨나면서 과자와 녹차를 권
한다. 뜻밖에 호의에 고마움을 표하며 과자와 녹차를 마셨고 배고픈 마음에 과자를 더 청하니
초코과자를 더 건네준다. 그렇게 간식을 섭취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아쉽지만 작별을
고하고 절을 떠났다.

달성사에 대해서는 운좋게 오래된 불상을 업어온 20세기 초반 사찰, 1번 오면 그만인 그런 정
도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절의 호의에 또 오고 싶은 긍정적인 사찰로 인식이 돌변했다. 그래서
얼마 전 봄에도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려 승려에게 차를 여러 잔 대접 받으며 차담(茶啖)을 주고
받았다.

※ 유달산 찾아가기 (2017년 9월 기준)
① 목포까지
* 용산역, 영등포역, 수서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오송역, 서대전역, 익산역, 광주송정역
  에서 목포행 각종 열차 이용
* 서울 강남센트럴시티에서 목포행 고속버스가 40~6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 목포행 직행버
  스가 1일 5회 떠난다.
* 고양(백석), 성남, 수원, 안산, 인천, 천안, 세종, 전주, 광주, 여수, 부산(사상), 창원(마
  산)에서 목포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목포역에서 유달산입구(노적봉)까지 도보 12분, 달성사는 약 25분
* 목포종합터미널에서 물 흐르듯 자주 다니는 목포역, 삼학도, 해양대 방면 시내/좌석버스를
  타고 목포역 정류장에서 도보 이동, 또는 노선 굴곡이 심한 2, 60번 시내버스를 타고 목포
  YMCA나 유달산우체국에서 하차하여 도보 이동 (60번은 연산동으로 크게 돌아감)

③ 승용차
* 서해안고속도로 → 죽림나들목에서 고하대로 직진 → 삽진고가교 → 북항교차로에서 좌회전
  → 해양대학로 → 유달로 → 달성사입구 → 유달산주차장, 노적봉

★ 유달산 관람정보 (2017년 9월 기준)
* 입장료는 공짜, 주차비는 경차 30분에 500원, 중형은 500원, 대형은 1,000원
* 유달산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죽교동 (☎ 노적봉 관광안내소 061-270-8411)
* 달성사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죽교동 317-1 (유달로 173 ☎ 061-244-1489)


 

♠  대자연이 빚은 기묘한 작품, 갓바위 - 천연기념물 500호

  갓바위 입구 포구

유달산과의 짧은 인연을 쿨하게 마무리짓고 갓바위로 가고자 시내로 나왔다. 뱃속을 달래고자
목포역 부근으로 내려와 마땅한 식당을 물색하다가 다양한 종류의 순두부찌개를 내놓는 '수가
정'이란 식당에 눈에 들어와 소고기 순두부찌개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곳은 10여 가지의 순
두부찌개를 취급하는데 찌개와 돌솥밥이 같이 나온다. 돌솥에 담긴 밥에 뜨거운 물을 넣어 푹
우린 다음 순두부와 같이 냠냠하는 것으로 그런데로 숟가락을 들만하다.

그렇게 시장한 배를 배불리 달래고 목포역에서 목포시내버스 15번을 타고 남항과 하당 사이에
자리한 갓바위로 이동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앞에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이곳도 엄연한 목포 도심이건만 시골
어촌 풍경이 여전히 진하다. 목포만(木浦灣) 너머로 영산강하구둑을 비롯하여 지역 발전과 돈
을 향한 집념의 연기를 내뿜는 대불공단 공장들이 바다 건너로 보이고 바다와 포구에는 갖은
어선들이 조각배처럼 수면 위를 장식하고 있어 평화로운 어촌 풍경을 자아낸다.

버스정류장에서 갓바위로 인도하는 산책로를 들어서면 중간에 갓바위 뒷통수로 오르는 입암산(
立巖山) 산길이 있으며, 직진을 고수하면 나무로 다진 해안산책로(보행교)가 나온다. 이 산책
로는 갓바위를 두 다리로 편하게 구경할 수 있게끔 2008년 4월 10일에 설치된 298m의 길로 동
쪽은 하당신도시 달맞이공원과 이어진다.
밀물 때는 바닷물을 따라 1m 정도 육지쪽으로 올라왔다가 썰물이 지면 바닷물을 따라 내려가는
산책로로 바다를 따라 조금씩 모습을 달리 한다. 보행교에는 야간 조명을 설치하여 통행 편의
는 물론 갓바위의 환상적인 야경까지 선사하고 있다.


  갓바위 입구 앞바다(목포만) - 바다 건너는 대불공단

▲  갓바위와 이웃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신안(新安) 해저 유물을 비롯하여 바다에서 발견된 온갖 묵은 보물들이
담긴 이 땅 최초의 해양박물관이다.

  갓바위 해안산책로(보행교) - 갓바위 서쪽 보행교


  서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서남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입암산 남쪽 바닷가 벼랑에 자리한 갓바위는 대자연이 긴 세월을 두고 빚은 심오한 작품이다. 아직 작품은 완성되지 않았고 지금도 계속 자연의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굼벵이 속도로 손질
되고 있어 몇백 년 이후에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자아낼 것이다.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갓바위는 갓을 쓰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갓바위란 단순한 이름
을 지니게 되었다. 보면 볼수록 놀라움만 더하게 하는 그는 2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왼
쪽(서쪽) 바위는 모자가 달린 외투나 옷을 껴입은 모습처럼 보여 사오정 시리즈로 유명한 귀머
거리 사오정과 비슷해 보이며 오른쪽(동쪽) 바위는 갓보다는 철모를 쓰고 있는 군인 같다.
예전에는 갓처럼 보였겠지만 그만큼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모자 달린 옷이나 철모처럼 서서히
변했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시멘트가 떨어져 나간 듯한 모습이라 사람들이 건드린 것은 아닐
까 싶지만 저게 모두 순수 자연 현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
겠는가.

갓바위가 이런 요상한 형태가 된 것은 이곳이 바닷물과 담수가 만나는 곳으로 암석 표면에 파
도가 치거나 안개가 끼면 소금기를 머금은 물에 젖었다가 마르기를 되풀이한다. 그 와중에 수
분에 들어있던 실리카 성분이 침전되면서 용해된 부분은 조직이 이완되고 강도가 낮아져 모자
모양의 경질부와 아랫쪽이 움푹 패인 벌집 모양의 풍화혈(風化穴)이 형성된 것이다. 파도와 해
류, 바다 바람에 의해 바위가 변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현장으로 다른 풍화혈에서는
찾기 힘든 희귀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삿갓이 동남쪽을 향한 것은 햇볕의 영향 때문이라는 설
도 있다.

이곳을 물든 저녁 노을과 갓바위와 해안 벼랑에서 반사되는 노을빛이 무척 아름다워 예로부터
목포8경의 하나인 입암반조(笠岩返照)로 꼽혔으며 파도와 바닷바람에 의해 바위가 이렇게도 성
형이 될 수 있음을 실감나게 하는 현장으로 2009년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지금은
목포9경의 일원임)


  정면에서 바라본 갓바위의 위엄

이렇게 개성이 넘치는 바위에는 옛 사람들이 그럴싸하게 붙여놓은 전설 보따리가 꼭 담겨져 있
기 마련이다. 목포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갓바위 역시 그 예외는 아닌데 그들이 붙여놓은 전설
은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가 수염을 태워먹던 어느 옛날,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청년이 있었
다. 그는 소금을 팔아서 생계를 꾸렸는데 살림살이는 늘 궁핍했으나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매
우 지극하여 동네 사람들의 칭찬이 마를 날이 없었다.
소금 장사로는 생계가 어려워 부잣집에 머슴으로 들어갔으나 주인이 돈은 주지도 않고 부려먹
기만 하는지라 1달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집에 와보니 심상치 않은 기운이 있어 방문을 열어
보니 글쎄 아버지의 손과 발이 이미 식어있는 것이 아닌가. 청년이 집을 비운 사이 그는 숨줄
을 놓은 것이었다.
청년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양지바른 곳에 묘자리를 잡고 관을 모시고 가던 중, 그만
실수로 관을 바다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어떻게 빠뜨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전설은 그냥 그렇
게만 나와있음) 청년은 다시 한번 불효를 통회(痛悔)하며 울부짖다가 하늘을 바라보고 살 수
없다고 자책하며 평생 갓을 쓰고 관이 빠진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다. 이후 그곳에 2개의 바위
가 불쑥 올라왔는데 사람들은 큰 바위를 아버지 바위, 작은 바위를 아들바위라 불렀다.

다른 전설로는 부처가 나한(羅漢)을 이끌고 영산강을 건너 이곳에서 잠시 쉬었는데, 그때 모르
고 놓고 간 삿갓이 바위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갓바위 대신 중바위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앞 전설이 효도를 소재로 한 것이라면 뒷 전설은 불교를 소재로 한 것으로 효행사상을 장려하
고자 갓바위를 이용한 선비들과 이곳에 오지도 않은 부처와 나한을 내세워 바위를 포교의 소재
물로 삼은 승려들의 투철한 영업 정신이 교차된 현장이다.

바위가 해변 벼랑에 있다보니 육지에서는 그의 뒷통수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천상 배를
타고 봐야 했었지. 바로 그런 고충을 해결하고자 2008년 4월 갓바위 주위에 해안보행교를 만들
어 두 다리로 언제든 갓바위를 만날 수 있게 배려했으며 조명시설까지 설치해 야경까지 덤으로
제공한다.


  갓바위에서 바라본 목포만과 영산강하구둑

▲  동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 바다에 돌출된 모자 끝부분을 손으로 만지면
가루처럼 뚝 부러질 것만 같다. 정말 만져보고 싶은데 위치가 저러니
이렇게 바라보는 선에서 그 미련을 접어야 된다.

▲  아랫도리가 긁힌 갓바위 동쪽 벼랑 (윗쪽은 입암산 전망대)
이들도 갓바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저 모양이 되었다. 마치 사람들이
도구를 이용해 긁은 모습처럼 말이다.


  갓바위 바로 앞 보행교

  갓바위 동쪽에 둥지를 튼 하당신도시

  동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주변

  갓바위 뒷통수에 펼쳐진 입암산 산길

  입암산에서 바라본 목포만과 영산강하구둑

갓바위 뒤쪽은 해안 언덕으로 목포자연사박물관 뒷쪽에 누운 입암산의 일부이다. 그 언덕에는
산책로가 닦여져 있는데 갓바위 뒷통수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해조음을 듣고 자라난 나무들이
숲을 이루며 우거져 있고 그 산을 넘으면 하당 달맞이공원으로 이어진다. 갓바위에 왔다면 바
다와 바위만 볼 것이 아니라 입암산 산길도 한번 거닐기 바란다.
이처럼 갓바위는 산과 바위, 바다, 3박자가 깔끔하게 어우러진 경승지이자 유달산과 자웅을 겨
루는 목포 제일의 명소이다.

갓바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 찬란했던 햇님의 기운도 슬슬 망조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땅꺼
미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목포에서의 볼일도 그런데로 다 마쳤으니 이제 제자리로 돌아와
야 되겠지. 마음 같아서는 하루를 더 머물며 인근 지역까지 살펴보고 싶지만 그럴 준비까지는
갖추지 못했다. 하여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여기서 가까운 목포종합버스터미널로 이동하여 수
원행 마지막 고속버스에 몸을 실으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9월 초 목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목포 갓바위 찾아가기 (2017년 9월 기준)
* 목포역 건너편에서 목포시내버스 15번을 타고 중바위(갓바위) 하차
* 목포종합버스터미널 남쪽 상동입구 정류장에서 목포시내버스 112번을 타고 우미파크빌5차에
  서 하차, 여기서 해안산책로나 달맞이공원을 거쳐 갓바위까지 도보 10분
* 목포종합버스터미널 남쪽 상동입구나 서쪽 버스터미널 후문 정류장에서 900번(900번A) 좌석
  버스를 타고 갓바위터널 하차, 갓바위터널을 거쳐 갓바위까지 도보 15분

* 갓바위 해안산책로(보행교) 통행가능시간
- 하절기 5시~24시 (동절기는 23시까지)
- 태풍과 호우, 폭설, 안개 등의 기상악화 시에는 접근 통제

* 갓바위 서쪽에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061-270-2000, ☞ 홈페이지 보기), 목포자연사박
  물관(☎ 061-270-8367, ☞ 홈페이지), 목포생활도자박물관(☎ 061-270-8480, ☞ 홈페이지),
  남농기념관(☎ 061-276-0313), 목포문학관(☎ 061-270-8400, ☞ 홈페이지 보기), 목포문화예
  술회관(☎ 061-270-8484, 홈페이지 보기) 등의 박물관과 전시/예술공간이 몰려있다. 이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갓바위문화타운’이라 부르는데, 갓바위와 이들 몇 개를 같이 묶어서
  본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특히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이 땅 최초의 해양
  문화재 박물관으로 신안 서해바다에서 발견된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 갓바위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용해동 86-24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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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7년 9월 8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7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정조 임금이 만든 도심 속에 아름다운 호수, 수원 서호 ~~ (서호공원, 항미정)

 



' 도심 속의 그림 같은 호수, 수원 서호 '




 

지겨운 겨울이 저물고 봄이 완연히 내려앉던 4월의 첫 무렵, 수원에 자리한 그림 같은 호
수, 서호를 찾았다. 서호는 경부선 전철이나 열차를 타고 수원을 지날 때 차창 밖으로 본
것이 전부라 나에게는 아직 미답처(未踏處)나 다름이 없었다.

오후 3시, 화서역에서 후배를 만나 수원역 방향(남쪽)으로 조금 들어서니 봄나들이객들로
분주한 서호공원이 모습을 비춘다. <서호공원은 서호 북쪽과 동쪽에 닦여져 있음>


 

♠  수원 도심 속의 호수, 서호<西湖, 축만제(祝萬堤)>
- 경기도 지방기념물 200호

▲  서호 북쪽길 (서호공원)

인구 120만을 지닌 경기도 제일의 큰 도시이자 행정 중심지인 수원(水原), 그 도심 북서쪽에는
물을 가득 머금은 서호가 은빛물결을 글썽이며 정처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뒤흔든다. 경부선 전
철이나 열차를 타고 수원역~화서역 구간을 지날 때 서쪽으로 너른 호수가 보이는데 그곳이 바
로 서호이다.

서호는 1799년 정조 임금이 내탕금(內帑金) 30,000냥을 쏟아부어 여기산 동쪽에 조성했다. 원
래 이름은 축만제로 오래도록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조(正祖)는 1764년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에서 뒤주에 갇혀 강제로 이승을 떠난 아버지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묘역, 현륭원<顯隆園, 현재 융건릉> 곁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마음에 병점
에 있던 수원부(水原府)를 지금의 수원시내로 옮기고 그 유명한 수원 화성(華城)을 구축했다.

화성을 만들면서 자신의 친위 호위부대인 장용위(壯勇衛)를 주둔시켰는데, 장졸들의 급료와 경
비를 충당하고자 화성 주변에 둔전(屯田)을 두어 경작하게 하고 4개의 호수를 만들어 농업용수
로 사용했다. 축만제는 바로 그 호수의 하나로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호란 단순한 별칭을 갖게
되었으며, 서호 주변에 넓게 둔전을 설치한 연유로 서호 서/남쪽 동네 이름이 서둔동(西屯洞)
이 되었다.
그 시절에 닦여진 4개의 호수 중 북쪽에 있는 만석거(萬石渠)가 가장 먼저 조성되었다. 1795년
5,700냥을 들여 축조했는데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지(北池)로도 불리며 현재 수원시 송죽동 만
석공원에 남아있다. 동쪽의 동지(東池)는 화홍문(華虹門) 동쪽 지동(池洞)에 있었으나 오래전
에 말라버려 체취도 남아있지 않으며 현륭원 앞에는 1797년 남지(南池)인 만년제(萬年堤)를 지
었는데, 지금도 남아있다. 그리고 끝으로 서쪽에 서호(축만제)를 지으면서 수원 화성 주변 4개
의 호수는 완성이 되었다. (그들 중 서호가 제일 넒음)

서호는 제방 길이가 1,246척, 높이 8척, 두께 7.5척, 수심 7척, 수문 2개로 이루어 있다. 제방
남쪽에는 제언절목(堤堰節目)에 따라 심은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나무들이 있으며 1803년에 축
만제둔(祝萬堤屯)을 설치해 서호를 보수,관리토록 했다. 이 관청에는 도감관(都監官)과 감관(
監官), 농감(農監) 등을 두어 관수(灌水)와 전장관리를 맡게 하였고, 도조(賭租, 둔전을 대여
하여 받는 돈이나 벼)를 통해 생기는 수입은 화성 축성고(築城庫)에 납입했다고 하니 제방 남
쪽의 경작지는 국둔전(國屯田)으로 쓰인 듯 싶다.
서호가 생김으로서 232섬지기의 경작지가 혜택을 맛보았으며, 어류자원 확보를 위해 잉어 등의
물고기도 풀었는데, 이곳 잉어는 약용(藥用)으로 점차 유명해져 궁중에 진상되기도 하였다. 또
한 명승지로도 이름을 날려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를 천하 일품으로 쳤으며 호수 한복판에 섬
을 띄워놓아 경치를 북돋았다.

1906년 왜(倭)가 이곳에 농사시험장을 설치하면서 조선의 농업 중심지가 되었고, 1945년 이후
에는 농촌진흥청이 들어서 이 물을 이용해 많은 농작물을 연구/개발하니 세계적인 농업학자로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禹長春, 1898~1959)도 이 물의 신세를 졌다.
이처럼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생대 경작지(시험답) 외에도 인근 경작지 30만 평에 물을 공급
했으나 수질 오염과 시가지 개발로 경작지가 줄면서 지금은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생대만 사
용하고 있으며, 호수도 예전에 비해 덩치가 줄어들었다.
서호를 후광(後光)으로 삼던 농촌진흥청은 원래 서호 북쪽(현 농민회관)에 있었으나 서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전주완주혁신도시로 내려갔으며, 호수 남쪽에는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생대
에서 관리하는 경작지가 있어 우리나라 농업 연구/발전의 역할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서호는 농촌진흥청 소유로 인해 오랫동안 속세에 금지된 호수로 있었다. 그러다가 시민들의 개
방 여론에 힘입어 2000년대에 세상을 향해 활짝 문이 열렸다. 2012년에는 서호를 둘러싼 둑방
길에 2.1km 정도의 둘레길을 조성하고 호수 북쪽과 동쪽에 서호공원을, 호수 서북쪽인 여기산
(麗妓山)에 여기산공원을 닦아 시민들에게 선사했다. <여기산에는 우장춘 묘역과 선사유적지,
철새서식지가 있음>

수원 도심에 그림처럼 펼쳐진 서호는 수원, 화성 지역에서 가장 큰 저수지로 지금의 수원을 있
게한 수원의 아버지, 정조 임금이 화성과 더불어 수원에게 남긴 소중한 꿀단지이다. 봄에는 개
나리와 진달래, 벚꽃이 앞다투어 나들이객을 유혹하고 가을에는 오색 단풍이 옛 농촌진흥청과
여기산, 서호 주변을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답게 물들이며 겨울에는 눈꽃이 하얗게 설경을 이
룬다. (수원시가 선정한 눈꽃 명소 중의 하나임)
서호는 현재 '수원 축만제'란 이름으로 경기도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서호 찾아가기 (2017년 6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경부선 화서역 5,6번 출구를 나와서 남쪽(수원역 방면)으로 도보 10분 (항미정
  은 화서역에서 도보 25분)
* 수원역(AK플라자)에서 30, 30-1, 42번 시내버스를 타고 숙지중고교(서호공원)에서 하차, 남
  쪽에 바로 보이는 육교를 건너면 서호(서호공원)이다.
* 서호공원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436-1
* 서호(축만제)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  서호 북쪽에서 바라본 서호와 섬

서호 한복판에는 호수의 경치를 구수하게 해주는 섬이 외롭게 떠 있다. 섬 이름은 따로 없으며
그곳으로 인도하는 배도, 다리도 없어 접근이 불가능한 그야말로 그림의 떡 같은 섬이다. 그는
서호 초창기 때부터 있었으며 근래에 새롭게 손질되었다.


▲  서호 북쪽에서 바라본 서호 동쪽과 화서동(華西洞)

서호공원을 비롯한 서호 주변에는 봄 기운을 누리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눈이 내리고 강추위가 판을 쳤지만 이제는 봄의 따스한 햇살이 천하를 부드럽게 보듬는다.

우리는 서호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았다. 서호가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넓기
는 마찬가지, 2.1km의 서호 둘레길을 도는데 항미정 관람시간과 휴식시간을 포함해 거의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호수에서는 잔잔하게 물보라가 피어오르고 은빛물결이 주름을 이루며 글썽인다. 호수에서 불어
오는 바람도 이제는 시원하게 느껴진다.


▲  물결이 주름진 서호 서쪽 ▼


▲  봄나들이객과 산책객들로 북적거리는 서호공원 (서호 북쪽)


▲  서호천이 서호로 변신하는 현장 (새싹교 주변)

서호를 가득 채운 물은 모두 어디서 왔을까? 하늘에서 떨어진 것일까? 아니면 지하수를 쥐어짜
서 채운 것일까? 그는 수원 북쪽 덕성산에서 발원한 서호천(西湖川)을 막아서 만든 것이다.
서호천은 광교산에서 나온 영화천(만석거를 경유함) 물줄기까지 받아들여 서호에서 단체로 모
임을 가진 다음 항미정 옆 수문을 타고 수원 서부와 화성, 평택 땅을 거쳐 서해바다 아산만으
로 흘러간다.


▲  서호로 길을 재촉하는 서호천 (새싹교에서 바라본 모습)
하천 동쪽에 노란 피부의 개나리가 만개해 봄의 기운을 돕고 있다.

▲  녹색과 붉은색이 입혀진 서호 서쪽길
(왼쪽 볏집은 서호 철새간이탐조대)

서호는 상류에서 따스한 물(13도)이 흘러들어와 겨울에도 잘 얼지 않는다. 그래서 일찍이 철새
들이 눈독을 들이면서 4계절 내내 흰뺨검둥오리, 가무우지, 가창오리, 왜가리 등이 무수히 찾
아온다. 이들은 서호 서쪽 여기산에 둥지를 틀고 서호에서 물고기를 잡아 삶을 꾸린다.

수원 도심 속 철새들의 성지로 그들을 관찰하라는 뜻에서 서쪽길에 볏집으로 벽을 만들고 성인
눈 높이 정도에 조그만 구멍을 내어 그들을 훔쳐볼 수 있게 했는데, 대놓고 살펴보면 철새들도
다소 민망해하거나 경계를 품을 것이니 그런 속임수를 쓴 것이다.


▲  서쪽길에서 바라본 서호 - 물결이 참 잔잔하기도 하다.

▲  서쪽길 개나리 너머로 본 서호와 섬 (가운데 보이는 것이 섬)


 

♠  서호의 풍치를 드높이는 양념과 같은 존재, 항미정(杭尾亭)
- 수원시 향토유적 1호

▲  서호 서남쪽 수문에서 바라본 항미정

서호 서남쪽 언덕에는 항미정이란 조촐한 모습의 정자가 호수를 굽어보고 있다. 'ㄱ'(또는 'ㄴ
') 모양의 납도리집으로 홀처마로 이루어진 43.5㎡의 팔작지붕 건물인데 앞쪽(동쪽)은 뻥 뚫려
있고, 뒤쪽(서쪽)은 벽으로 막혀 있다.

이 정자는 서호 초창기부터 있던 것이 아닌 1831년에 생긴 것으로 당시 화성유수(華城留守) 박
기수(朴綺壽)가 서호에서 풍류를 즐기고자 세웠다. 그는 석양에 비치는 여기산의 그림자를 보
고 팔자 좋게 소식<蘇軾,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읊었는데, 그 과정에서 '서호는 항주(杭州)
의 미목(眉目)같다'고 해서 항주와 미목의 1글자를 취해 항미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서호의 풍치를 아름답게 해주는 양념으로 서호와 함께 오랫동안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근래 개
방되었으며 개방 이전에 농촌진흥청에서 정자 서쪽 언덕을 뒤집고 도서관을 만들어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항미정은 툇마루를 갖추고 있는데, 화서역을 기준으로 서호 둘레길을 1바퀴 돌 경우 이곳이 거
의 중간 지점이 된다. 그러니 여기서 잠시 쉬어 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단 정자 내부로 들어
가면 안됨) 게다가 그늘진 곳이라 땀도 알아서 줄행랑을 칠 정도로 시원하며 정자 주변에는 푸
른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항미정 - 정자로 인도하는 계단을 오르면
바로 항미정이 몸을 내민다.

▲  남쪽에서 바라본 항미정

▲  북쪽에서 바라본 항미정

◀  항미정 현판과 툇마루
정자 내부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그러니
툇마루에 잠시 걸터 앉는 수준으로만
머물기 바란다.


▲  항미정에서 바라본 서호와 버드나무

▲  서호 서남쪽 수문 위에 걸린 다리

▲  서남쪽 수문 다리에서 바라본 남쪽 둑방

서호에 모인 물은 서남쪽 수문(항미정 옆)과 동남쪽 수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간다. 서남쪽 수
문은 매일 일정량의 물을 배출하여 서호천의 바다 행을 돕고 있으며, 동남쪽 수문은 농촌진흥
청(국립식량과학원)과 서울대 농생대 경작지에 물을 제공하는 용도로 쓰여 서남쪽 수문보다는
다소 한가하다.


 

♠  서호 마무리

▲  옛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한 서호 남쪽 둑방

서호를 지키고 선 남쪽 둑방은 서울 풍납토성(風納土城) 만큼이나 높고 두껍다. 서호천과 만석
거에서 내려온 막대한 물을 담아야 되기 때문인데, 둑방 남쪽은 여기보다 지대가 낮은 경작지
라 둑방이 자칫 와해된다면 그 경작지는 물론이고 서둔동과 수원역 주변까지 피해를 받는다.
남쪽 둑방길은 서호 동/서/북쪽길보다 조금 넓은 편으로 다른 길과 달리 비포장 흙길을 유지하
고 있어 정겹기만 하다. 또한 오래된 나무들이 둑방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고색의 풍치까지 더
해준다.


▲  둑방에 자라난 오래된 소나무의 위엄

▲  둑방에 세워진 축만제 비석 - 고색의 때가 묻어난 비석 피부에 새겨진
'축만제' 3자가 꽤 패기가 있어 보인다.

▲  남쪽 둑방에서 바라본 서호와 여기산 (오른쪽에 보이는 산)
서호는 여기산과 호수 주변의 동/식물들, 하늘을 떠다니는 온갖 존재들이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 그들의 커다란 거울이다.

▲  남쪽 둑방길에는 소나무가 여럿 심어져 조촐하게 운치와
그늘을 드리운다.

▲  늘씬하게 잘 빠진 남쪽 둑방길 ▼



▲  둑방 남쪽에 펼쳐진 농촌진흥청(국립식량과학원), 서울대 농생대 경작지
<시험답(試驗畓)> - 서호의 물을 먹고 자라는 시험 경작지로 연구/개발된
다양한 육종(育種)들이 이곳을 거쳐 천하에 보급된다.

▲  남쪽 둑방에서 바라본 서호와 섬

▲  서호 동남쪽에서 바라본 서호와 여기산, 그리고 호수와 마주한
푸른 하늘과 구름의 무리들

▲  갈대가 살랑거리는 서호 동남쪽

▲  서호 동남쪽과 남쪽 둑방

▲  서호 동쪽 산책로

▲  서호 동쪽에서 바라본 서호와 섬

▲  서호 동북쪽 (왼쪽에 보이는 산이 여기산)

▲  서호 동북쪽 산책로

▲  경부선 육교에서 바라본 서호(서호공원)

▲  경부선 육교에서 바라본 경부선과 서호공원

서호를 1바퀴 둘러보니 1시간 30분이 훌쩍 흘렀다. 아직 일몰까지는 여유가 있어 1곳을 더 둘
러보기로 하고 정처를 물색하다가 수원 동북부 우만동에 있는 봉녕사(奉寧寺)가 문득 뇌리 속
에 스쳐 지나가 그곳을 찾기로 했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서 흔쾌히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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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6월 1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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